작성일 : 2022.05.11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왕하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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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하22장  [430.주와같이길가는것(1-11)] [ 200.'달고 오묘한 그 말씀'(12-20)] [338.내주를가까이하게함은] 


===유다 왕 요시야 ..**요시아..=Q이 고쳐주신다..יֹאשִׁיָּה

1.  요시야가 왕위에 오를 때에 나이가 팔 세라 예루살렘에서 삼십일 년간 다스리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여디다요 보스갓 아다야의 딸이더라

2.  요시야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 그의 조상 다윗의 모든 길로 행하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더라

===율법책을 발견하다

3.  ○요시야 왕 열여덟째 해에 왕이 므술람의 손자 아살리야의 아들 서기관 사반을 여호와의 성전에 보내며 이르되

4.  너는 대제사장 힐기야에게 올라가서 백성이 여호와의 성전에 드린 은 곧 문 지킨 자가 수납한 은을 계산하여

5.  여호와의 성전을 맡은 감독자의 손에 넘겨 그들이 여호와의 성전에 있는 작업자에게 주어 성전에 부숴진 것을 수리하게 하되

6.  곧 목수와 건축자와 미장이에게 주게 하고 또 재목과 다듬은 돌을 사서 그 성전을 수리하게 하라

7.  그러나 그들의 손에 맡긴 은을 회계하지 말지니 이는 그들이 진실하게 행함이니라

8.  ○대제사장 힐기야가 서기관 사반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의 성전에서 율법책을 발견하였노라 하고 힐기야가 그 책을 사반에게 주니 사반이 읽으니라

9.  서기관 사반이 왕에게 돌아가서 보고하여 이르되 왕의 신복들이 성전에서 찾아낸 돈을 쏟아 여호와의 성전을 맡은 감독자의 손에 맡겼나이다 하고

10.  또 서기관 사반이 왕에게 말하여 이르되 제사장 힐기야가 내게 책을 주더이다 하고 사반이 왕의 앞에서 읽으매

11.  왕이 율법책의 말을 듣자 곧 그의 옷을 찢으니라

12.  왕이 제사장 힐기야와 사반의 아들 아히감과 미가야의 아들 악볼과 서기관 사반과 왕의 시종 아사야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13.  너희는 가서 나와 백성과 온 유다를 위하여 이 발견한 책의 말씀에 대하여 여호와께 물으라 우리 조상들이 이 책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며 이 책에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모든 것을 행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내리신 진노가 크도다

14.  ○이에 제사장 힐기야와 또 아히감과 악볼과 사반과 아사야가 여선지 훌다에게로 나아가니 그는 할하스의 손자 디과의 아들로서 예복을 주관하는 살룸의 아내라 예루살렘 둘째 구역에 거주하였더라 그들이 그와 더불어 말하매

15.  훌다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너희는 너희를 내게 보낸 사람에게 말하기를

16.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 곳과 그 주민에게 재앙을 내리되 곧 유다 왕이 읽은 책의 모든 말대로 하리니

17.  이는 이 백성이 나를 버리고 다른 신에게 분향하며 그들의 손의 모든 행위로 나를 격노하게 하였음이라 그러므로 내가 이 곳을 향하여 내린 진노가 꺼지지 아니하리라 하라 하셨느니라

18.  너희를 보내 여호와께 묻게 한 유다 왕에게는 너희가 이렇게 말하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네가 들은 말들에 대하여는

19.  내가 이 곳과 그 주민에게 대하여 빈 터가 되고 저주가 되리라 한 말을 네가 듣고 마음이 부드러워져서 여호와 앞 곧 내 앞에서 겸비하여 옷을 찢고 통곡하였으므로 나도 네 말을 들었노라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20.  그러므로 보라 내가 너로 너의 조상들에게 돌아가서 평안히 묘실로 들어가게 하리니 내가 이 곳에 내리는 모든 재앙을 네 눈이 보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 사자들이 왕에게 보고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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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SB]제22장


1.  Josiah was eight years old when he became king, and he reigned thirty-one years in Jerusalem; and his mother's name [was] Jedidah the daughter of Adaiah of Bozkath.

2.  And he did right in the sight of the LORD and walked in all the way of his father David, nor did he turn aside to the right or to the left.

3.  Now it came about in the eighteenth year of King Josiah that the king sent Shaphan, the son of Azaliah the son of Meshullam the scribe, to the house of the LORD saying,

4.  "Go up to Hilkiah the high priest that he may count the money brought in to the house of the LORD which the doorkeepers have gathered from the people.

5.  "And let them deliver it into the hand of the workmen who have the oversight of the house of the LORD, and let them give it to the workmen who are in the house of the LORD to repair the damages of the house,

6.  to the carpenters and the builders and the masons and for buying timber and hewn stone to repair the house.

7.  "Only no accounting shall be made with them for the money delivered into their hands, for they deal faithfully."

8.  Then Hilkiah the high priest said to Shaphan the scribe, "I have found the book of the law in the house of the LORD." And Hilkiah gave the book to Shaphan who read it.

9.  And Shaphan the scribe came to the king and brought back word to the king and said, "Your servants have emptied out the money that was found in the house, and have delivered it into the hand of the workmen who have the oversight of the house of the LORD."

10.  Moreover, Shaphan the scribe told the king saying, "Hilkiah the priest has given me a book." And Shaphan read it in the presence of the king.

11.  And it came about when the king heard the words of the book of the law, that he tore his clothes.

12.  Then the king commanded Hilkiah the priest, Ahikam the son of Shaphan, Achbor the son of Micaiah, Shaphan the scribe, and Asaiah the king's servant saying,

13.  "Go, inquire of the LORD for me and the people and all Judah concerning the words of this book that has been found, for great is the wrath of the LORD that burns against us, because our fathers have not listened to the words of this book, to do according to all that is written concerning us."

14.  So Hilkiah the priest, Ahikam, Achbor, Shaphan, and Asaiah went to Huldah the prophetess, the wife of Shallum the son of Tikvah, the son of Harhas, keeper of the wardrobe (now she lived in Jerusalem in the Second Quarter); and they spoke to her.

15.  And she said to them, "Thus says the LORD God of Israel, 'Tell the man who sent you to me,

16.  thus says the LORD, "Behold, I bring evil on this place and on its inhabitants, [even] all the words of the book which the king of Judah has read.

17.  "Because they have forsaken Me and have burned incense to other gods that they might provoke Me to anger with all the work of their hands, therefore My wrath burns against this place, and it shall not be quenched." '

18.  "But to the king of Judah who sent you to inquire of the LORD thus shall you say to him, 'Thus says the LORD God of Israel," [Regarding] the words which you have heard,

19.  because your heart was tender and you humbled yourself before the LORD when you heard what I spoke against this place and against its inhabitants that they should become a desolation and a curse, and you have torn your clothes and wept before Me, I truly have heard you, "declares the LORD. 

20.  "Therefore, behold, I will gather you to your fathers, and you shall be gathered to your grave in peace, neither shall your eyes see all the evil which I will bring on this place." '"So they brought back word to the k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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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 22장 (개요)

본장은 선한 왕인 요시야의 통치의 이야기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그의 선은 너무나 극심했던 악행 바로 뒤에 곧 나타났기 때문에 더욱 빛나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그 나라를 개혁하는 명예를 얻었다. 그러나 그는 그 파괴를 막아내는 명예를 얻지는 못했다. 여기에서는, 그의 일반적인 성격(1-2)과 그가 관심을 기울였던 일에 대한 특별한 기록을 보게 된다.

1. 그는 하나님의 전에 관심을 기울이고, 그것을 수리했다(3-7).

2. 하나님의 책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그것을 읽고 깊은 감동을 받았다(8-11).

3. 하나님의 사자들에게 관심을 썼다. 그는 그들과 의견을 나누었다(12-14). 그리고 그들에게서 예루살렘 파괴를 경고하는 하나님의 응답을 받았다(15-17). 

그러나 그에게는 은혜를 약속했고(18-20), 그 약속에 힘입어 그는 저 영광스러운 개혁 사업을 착수했다. 그것에 대한 기록은 다음 장에서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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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야의 경건한 통치(왕하 22:1-10)

요시야에 관하여 우리는 여기서 다음의 사실들을 듣고 알게 된다.

Ⅰ. 그는 불과 8세의 어린 나이에 통치하기 시작했다(1절). 

솔로몬은 이렇게 말했다. “네게 화로다! 어린아이가 네 왕인 땅이여!” 영국에도 한때 그런 어린아이였던 왕 에드워드 6세가 있었다. 어린아이였던 요시야는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에게서 아무런 나쁜 영향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일찍부터 그들의 과오를 보았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에게 은총을 베푸사 그들로 하여금 경고를 삼도록 하셨다(겔 18:14 이하 참조).

Ⅱ. 그는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했다”(2절). 

하나님의 은총의 절대성을 보라―아버지는 죄 속에 살다가 멸망 받았으나, 그 아들은 선택된 그릇이 되었다. 은총의 승리를 보라―요시야는 악한 아버지에게서 태어났고 좋은 교육이나 좋은 모범도 받지 않았으며, 그의 주위에 많은 사람이 그에게 아버지의(악한) 발자취를 밟을 것을 조언했고, 거의 아무도 그에게 좋은 의견을 제시해 주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은총이 그를 뛰어난 성도로 만드셨다. 즉 “그를 돌감람나무에서 베어내어 참감람나무에다가 접붙였다”(롬 9:24)고 하겠다. 그 같은 은총이 할 수 없이 어려운 일이란 아무것도 없다. 그는 정직한 길로 행했다. 그리고(처음에는 잘 했으나 그렇지 못했던 그의 선조들 중 어떤 왕들같이)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않았다. 양편에 모두 과오가 놓여있었지만, 하나님은 그를 바른 길로 인도하셨다. 즉 그는 미신이나 불경건에 빠지지 않았다.

Ⅲ. 그는 성전의 수리를 위하여 애썼다. 

이 일은 그가 재위 18년에 했다(3절. 역대하 34장 8절과 비교하라). 역대하 34장 3절에 나타난 대로, 그는 훨씬 전부터 “여호와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개혁사업이 서서히 진행되거나 많은 반대에 부딪칠 것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그가 완전히 실권을 장악하기까지는, 자기가 계획하고 원하는 사업을 실행할 수 없었다. 

어렸을 적에 우리가 불가피하게 잃어버린 시간을 생각하면, 우리가 나이 먹게 되었을 때, 하나님의 사업을 훨씬 더 열성적으로 행해야겠다는 자극을 받게 된다. 

우리가 늦게 시작했다면, 열심히 일할 필요가 있다.

그는 내무장관 사반을 대제사장 힐기야에게 보내어, 이 용도를 위하여 문지기가 수집한 돈을 계산하게 했다(4절). 그들은 요아스가 취했던 방법(12:9)을 택하여 돈을 많이 지출했던 것 같다. 백성들은 한 번에 조금씩 헌금하여, 그 짐을 느낄 수 없을 만큼 가벼웠다. 그리고 그 기부는 자발적이었으므로, 아무런 불평을 사지 않았다. 그는 그렇게 모금된 돈은 성전 수리를 위해 쓰라고 명령했다(5-6절). 그러나 그때 공인(工人)들이(요아스의 시대처럼) 자기들의 임무를 아주 성실히 다했으므로, 그들에게 맡겨진 돈을 “계산해 보지 않았다”(7절). 그리고 분명 이 말은 공인들을 칭찬하는 구절일 것이다. 이렇듯 그들은 정직하다는 명성을 얻었는데, 그들을 고용한 자들은 무슨 칭찬을 받았는지 모르겠다. 사람들은 자기 아버지에게서 돈을 받고도 세어보아야 한다고들 말한다. 그러므로 “공인들에게 맡긴 돈을 계산”해 보았더라도 그것이 잘못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야 남들도 그 공인들의 정직함을 수긍할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Ⅳ. 다행히도 성전을 수리하는 중에 율법책이 발견되어 그것을 왕에게 가져갔다(8, 10절). 

어떤 사람은, 이 책이 모세가 친히 가지고 있던 모세오경의 원본이든가 아니면 친필 사본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단지 퍽 오래되고 신빙성 있는 사본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 책은 모세의 명령에 의해 지성소에 보관되었던 것일 공산이 크다(신 31:24 이하).

1. 이 율법책을 분실한 후 찾아내지 못했었던 것 같다. 아마 그 책의 진가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마치 어떤 사람이 성경을 집어던지듯이) 부주의로 구석진 곳에다가 놓아둔 후 그 사실을 잊게 되어, 결국 그곳에 그대로 있게 되었던 것 같다. 혹은 악의를 지닌 우상숭배적 왕이나 그의 대리인에 의해서 고의적으로 숨겨졌을 것이다. 그들은 그 책을 불사르거나 파괴하고 싶어도 하나님의 섭리나 양심의 가책 때문에 못하고, 다시는 눈에 띄지 않기를 바라면서 묻어버렸을 것이다. 혹은 어떤 사람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그 책을 아끼는 어떤 사람이 조심스럽게 그것을 보관하여, 원수의 손에 들어가지 않게 했다고 보는 것이다. 이 책을 보존하는 데 누가 도구로 쓰였든지, 우리는 그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만일 이것이 그 당시에 존재했던 것 중 인증된 유일한 오경 사본이었고, 그 생명이(이렇게 말할 수 있으리라) 너무나 어려운 고비를 넘겼으나 파멸 직전에 있었다면, 엘리의 법궤 때처럼 모든 선한 백성들의 마음은 그 성스런 보물로 인해 두려워 떨었을 것 같다. 그리고 분명히 우리는 무릎을 꿇고 이 자비로운 섭리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힐기야 “그는 구하지 않았으나”(사 45:1), 그 자비로운 섭리가 그를 통하여 이 책을 찾아내셨기 때문이다. 만일 성경이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었다면, 오늘날에까지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돌보고 계신다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성경에 그만큼 관심을 두고 계신다는 사실을 명백히 보여주는 것이다.

2. 이것이 당시에 유일한 인증된 사본이든 그렇지 않든, 그 속에 들어 있는 내용들은 왕 자신에게나 대제사장에게나 새로운 것이었던 것 같다. 

왕이 그것을 읽고서 자기 옷을 찢었다고 했기 때문이다. 

왕에게 율법의 사본을 쓰라고 했던 명령이나 매 7년마다 그 율법을 백성에게 읽어주라고 했던 명령(신 17:18, 31:10-11)은 오랫동안 준수되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므로 신앙을 보존하는 제도적 방편이 무시되면, 신앙 자체까지도 곧 부패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반면에, 만일 율법책이 분실되었다면, 요시야가 “여호와 보시기에 옳은” 일을 행함에 있어서 기준을 삼아야 될 법칙을 결정하는 일과, 그리고 제사장과 백성들이 그들의 종교 의식을 준수하는 방식을 결정하는 일이 힘들었을 것이다. 내 생각으로는, 백성들은 모두 오늘날 우리들의 법전 요약집과 같은 율법 발췌문을 만들었던 것 같다. 제사장들이 율법책을 자세히 읽고 쓰려는 자들의 곤란을 덜기 위해 그러한 발췌문을 만들어 그들에게 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발췌문은 그들의 종교적 의식을 지도해 주는 일종의 의식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제사장들이 적절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생락했으며, 특히 하나님의 약속이나 경고는(레 26장; 신 28장 등) 그 발췌문에는 생략된 것 같다. 왜냐하면 바로 그러한 내용들이 요시야에게 너무나 큰 감동을 준 율법의 한 부분들이었고, 그러한 것이 그에게 새로운 내용이었다는 것을 주목할 수 있기 때문이다(13절). 성서에서 뽑은 어떠한 요약문, 발췌문, 혹은 선집물(물론 그런 것도 사용될 수는 있다)도 하나님의 지식과 뜻을 성서 자체만큼 실제로 그렇게 충실하게 전하고 보존할 수는 없다.

율법책이 백성들에게 그렇게 희귀하게 되었을 때, 그들이 그렇게 타락했다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오는 비전이 있는 백성은 망하지 않았다. 그들을 타락시키려고 애쓰던 자들은 필경 그들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써서 그들의 손에서 그 책을 빼앗아내려고 했을 것이다. 로마 교회도 성경 사용을 금지시키는 방법 외에는 우상의 사용을 지속시킬 도리가 없었다.

3. 그 율법책이 그렇게 시기 적절한 때에 나타나서, 요시야가 시작한 축복된 개혁 사업을 지도해 주고, 촉진시킬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크신 은혜요, 또 요시야와 그의 백성들에게 좋은 것을 약속해 주는 징조이기도 했다.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율법이 찬미 받고 존경받게 하고, 그들이 성경 지식을 많이 얻을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위해서 자리를 쌓아두고 계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하나의 징표이다. 민중의 언어로 성경을 번역했다는 사실은 로마교회에서 떠나온 저 종교개혁의 영광이요, 장점이요, 기쁨이었다.

그들이 율법책을 발견한 것은, 성전을 수리하고 선한 사업을 하려고 했을 때였다는 사실을 주목할 수 있다. 자기들의 지식에 따라서 의무를 이행하는 자들에게는 그들의 지식도 증가될 것이다. 가진 자는 더욱 가지게 될 것이다. 율법책은 성전 수리에 대한 그들의 모든 수고와 내용에 해당하는 풍성한 보상이었다.

4. 제사장 힐기야는 그것을 발견하고 기뻐 어쩔 줄 몰랐다. 그는 사반에게 “오! 나와 기뻐하자. 내가 율법책을 찾았음이로다. eurhka ― 내가 찾았도다. 내가 찾았도다. 헤아릴 수 없을 값어치의 보물을!”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것을 왕에게로 가져갔다. 그것이야말로 그의 왕관이 지닐 수 있는 가장 값진 보석이다. 왕 앞에서 율법서를 읽으라. 그러면, 그는 “그 조상 다윗의 길로” 행하리라. 그리고 만일 그 왕이 다윗과 같다면, 그는 그 율법책을 사랑하고 환영할 것이다. 그것이 그의 기쁨이요 조언자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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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의 멸망 예언(왕하 22:11-20)

여기에는 성전을 수리하는 것에 대한 기록이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그 선한 사업은 계속 잘 되었을 것이 틀림없다. 

그곳에서 발견된 율법책이 지금도 우리의 마음을 점령하고 있으니, 그것은 다행한 일이다.

그것은 왕의 금고 속에 보관되어 있는 한 권의 고서처럼 그 희귀성 때문에 예찬되지 않고, 왕 앞에서 읽혀졌다. 

성경을 연구하고, 매일 성경과 대화하고, 성경의 빵을 먹고, 성경의 빛에 의지해서 행하는 자가 진실로 성경을 영광되게 하는 자이다. 

명예를 지니고 있는 사람과 사업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것이 최선의 명예요 사업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Ⅰ. 율법을 읽고 요시야가 받은 인상을 살펴보자. 그는 자기 백성의 죄를 부끄러워하고, 하나님의 진노를 두려워하여 자기 옷을 찢었다. 

그는 자기 나라의 형편이 악하다는 생각을 오랫동안 품어 왔다. 그것은 자기 나라 안에서 불경스러운 일과 우상숭배를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 율법을 읽고 났을 때까지는 그렇게 사정이 악한 것인 줄은 미처 몰랐다. 그가 옷을 찢었다는 것은, 하나님께 치욕을 돌린 사실 때문에 자기 마음을 찢는 것을 의미하며, 그가 자기 백성에게 닥칠 멸망을 알았다는 뜻이다.

Ⅱ. 이에 대하여 그가 하나님께 어떻게 했는가를 보자. “가서 여호와께 나를 위하여(하나님의 뜻을) 물어보라”(13절)고 했다.

1. 그가 알기 원했던 것을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이것을 물어보라.”

(1)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가 우리의 죄로 받아야 할 심판을 막고,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려면 어떤 길을 취해야 하는가?” 죄와 하나님의 진노를 깨달으면, 우리는 이 물음을 묻게 된다. 즉 “우리가 어찌해야 구원을 받을 것인가? 무엇을 가지고 우리가 여호와 앞에 나아갈 것인가?” 만일 당신도 그렇게 물어야 한다면, 속히 물어보라. 너무 늦기 전에!

(2) “우리는 무엇을 기대하고, 무엇을 대비해야만 하는가?” 물어보라. 그는 “우리의 열조가 이 책의 말씀을 듣지 않았도다. 만일 이것이 의로운 법이라면 분명히 우리의 열조는 잘못됨이 많았으리라”고 인정했다. 이리하여 “계명은 죄를 드러나게 하고” 밝혀 준다. 율법이라는 거울을 통해서, 그는 자기 백성의 죄가 이전에 생각하고 있던 것보다 더 많고, 더 흉악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여기서 생각하기를, “우리에게 대하여 타오르는 진노가 크도다. 만일 의심할 여지없이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면―분명히 그러한 것 같다― 그는 그의 말씀에 진실하실 것이다―분명히 그러하시다. 그러면 우리는 모두 멸망받게 된다. 내가 그들을 본 대로, 나는 이제껏 율법의 경고가 이렇게 엄혹하고, 그 언약의 저주가 이토록 무서운 것인 줄은 몰랐노라. 이것들이 지금 우리를 고발하고 있다면, 지금은 우리를 돌보아야 할 때로다”라고 했다. 하나님의 진노의 중(重)함을 올바르게 파악하는 자들은, 그의 은혜를 얻으려고 안타까워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어떻게 해야 하나님과 화해할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알려고 애쓰지 않을 수 없다. 치리자들은 자기 백성들의 안부를 물어야 하며, 그들이 내다보고 있는 그 절박한 하나님의 심판을 막을 방법을 강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2. 요시야가 사람을 보내어 이 질문을 했다.

(1) 12절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고, 14절에서 다시 나오는 그의 신하들 중 몇몇 요인들을 보냈다. 그 신탁에 제 일급의 신하들을 참예시킴으로써, 그는 신탁에 대한 존중을 표했다.

(2) 여선지자 훌다에게 보내졌다(14절). 예언의 영이 그보다 “더 약한” 질그릇(여자) 속에 담겨지니, 이것은 “헤아릴 수 없는 그 능력이 하나님의 것임”(고후 4:7)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미리암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는 일을 도왔고(미 6:4), 드보라는 그들을 재판했다. 그리고 여기의 훌다는 하나님의 영으로 그들을 훈육했고, 그녀가 부인이라는 점이 그녀의 여선지자 직에 아무런 방해가 되지 않았다. “모든 사람에게 결혼은 귀한 것이다”(히 13:4). 성경책이 희귀했던 때에, 그들에게 선지자들이 있었다는 사실은 예루살렘에 임한 자비였다. 그리고 그후 예언이 멈추어졌을 때에는, 더욱 많은 성경책이 있게 되었다. 하나님은 죄인들이 변명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이 세상을 증인이 없이 버려두신 적이 없다. 예레미야와 스바냐도 이 당시의 선지자였으나, 왕의 사자들은 훌다에게서 신탁을 받고자 했다. 아마도 그녀의 남편이 왕궁에 일자리를 가졌으므로(그는 의상 보관자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다른 어떤 사람에 대해서보다도 더 그녀와 오래 전부터의 깊은 안면이 있었을 것이고, 그리고 그녀의 소명에 보다 큰 확신을 가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다른 사건의 경우에도 그녀에게 의견을 들었었고, 그리고 그녀의 입에서 나온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라는 것을 이미 경험했었을 것이다. 또 그녀는 예루살렘에 거했기 때문에 그들 가까이에 있었다. 그녀는 미스네라고 불리는 곳에 있었고, 그곳은 왕궁 다음가는 제2급 건물이었다. 유대인들은 말하기를, 그녀는 부인네들, 곧 왕궁의 부인들 가운데서 예언했고―그녀 자신도 그들의 일원이었다고 한다― 아마 그 여인네들은 그곳에 방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고 한다. 왕실 구내에 여선지자가 있었고 그들이 그녀를 존경했다는 사실은, 그 궁정의 행복이다.

Ⅲ. 그 질문에 대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응답을 보자. 훌다는 아첨하는 답변을 하지 않았다. 즉 “나의 미천한 섬김을 전하에게 전해 주시오. 이것이 내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에게서 왕을 위하여 받은 메시지라는 것을 전해 주시오”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여선지자의 말투 그대로, 왕 앞에서는 만인이 평등한 위치에 있다는 식으로 말한다. 즉 “네게 나를 보낸 그 사람에게 말하라”고 했다(15절). 비록 제왕들이 우리에게는 신적인 존재들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에게는 인간에 불과하다. 또 그렇게 취급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1. 그녀는 그로 하여금 하나님이 유다와 예루살렘을 위해 준비한 심판이 무엇인지를 알려 준다(16-17절). “나의 진노가 이곳을 향하여 발하여질 것이다”라고 했다. 하나님의 진노의 불꽃이 죄인들을 향하여 타오르고 있는 곳이 바로 지옥이 아니겠는가?

여기서 다음 사실들을 살펴볼 수 있다.

(1) 그 심판의 정도와 존속 기간. 그 불길은 “결코 꺼지지” 않을 것이다. 이미 선고가 공포되었다. 그것을 막으려고 생각하기에는 너무 늦었다. 예루살렘의 불의는 희생제물이나 예물로도 일소되지 않을 것이다. 지옥은 꺼지지 않는 불이다.

(2) 그것은 다음과 관련이 있다.

① 그들의 죄와 관련이 있다. “말하자면 그들은 고의적으로 죄를 범했다. 그리고 고의로 나의 노를 격발시켰다. 그 심판은 그들 자신이 일으킨 불이다. 그들은 나를 격발시키려고 했고, 그래서 마침내 나는 분노케 되었다.”

② 하나님의 경고에 관련되어 있다. “내가 내릴 그 재앙은 유다의 왕이 읽은 그 책의 말씀에 따른 것이다. 그 성경 말씀이 그 재앙을 통해서 성취된다. 그 교훈에 구속(拘束)받기 원치 않는 자들은 그 법칙에 의해서 구속받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러하듯이, 하나님 자신도 회개하지 않는 죄인들에게는 무서운 분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2. 그녀는 하나님께서 요시야를 위해 어떤 자비를 예비해 두었는지를 그에게 알려 준다.

(1) 하나님의 영광과 그의 나라를 위해, 그 왕이 지극히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사실이 지적되었다. “네 마음이 연(軟)하다”고 말했다(19절). 스스로 남과 구별되는 자들은 하나님까지도 구별하신다는 사실을 주목하자. 대부분의 사람들이 완악하게 되고, 그들의 마음이 교만해졌다. 또한 그의 선임자들인 사악한 왕들도 그러했었다. 그러나 요시야의 마음은 부드러웠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감동을 받았고, 그것을 듣고 떨었고, 거기에 복종했다. 그는 그의 열조들과 자기 백성들이 하나님께 돌린 치욕을 생각하고 심히 슬퍼했다. 그는 예루살렘에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을 알았고, 그것을 두려워했다. 그리고 그 심판을 면하려고 애썼다. 이것은 그의 마음이 부드럽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여호와 앞에서 겸비했다.” 그가 옷을 찢었고 하나님 앞에서 울었다는 것은(아마 그의 골방에서) 이 경건한 마음의 발로이다. 그러나 은밀한 것을 보시는 하나님은 그 사건이 “그(하나님)의 앞에서” 있었던 일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들었고, 뜨거운 마음으로 흘리는 그의 눈물을 모두 기억해 두셨던 것이다.

하나님의 진노를 가장 두려워하는 자들은 그 진노를 가장 적게 당할 것이다. “내가 그땅을 황폐케 하리라”고 한 그 말씀들이 요시야에게 깊은 영향을 준 것 같다. 왜냐하면, 그가 “황폐와 저주에” 대한 말씀을 들었을 때, 즉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리실 것이며 그들을 “악에게 내어줄” 것이라는 말씀을 들었을 때(이렇게 되기까지는 아직 황폐되거나 저주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옷을 찢었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는 그 경고를 마음에 깊이 새겼다.

(2) 그가 죽기까지는 재앙이 내리지 않으리라는 유예가 허락되었다(20절). “내가 너로 너의 열조에게로 돌아가게 하겠다”고 하셨다. 당시에도 성도들은 분명히 죽음 저편의 행복에 대한 기대를 가졌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열조에게 돌아간다는 것이 우리가 알고 있듯이 그렇게 자주 약속의 내용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요시야가 그 심판 자체를 막아낼 수는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에게 약속하시기를, 그가 살아서는 그 심판을 보지 않게 하겠다고 하셨다. 그리고(그가 40세가 되기 전에, 곧 한창 때에 죽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만일 그에게 풍성한 보상을 받을 다른 세계가 없었다면, 그런 사실은 그의 뛰어난 경건에 대한 보잘것없는 보상에 불과했을 것이다(히 11:16). 의로운 자가 “화액 전에 취하여 감을 입은 것”은 “평안에 들어가게” 하기 위함이다(사 57:1-2).

여기서 요시야에게 약속된 것은 이것이다. 즉 “너는 평안히 묘실로 들어갈 것이다.” 이것은 그가 죽을 때의 모습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그는 전장에서 살해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죽음의 시기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그가 죽은 것은 바벨론 포로 생활이 시작되기 얼마 전이었다. 포로 생활은 지극히 큰 어려움이었다. 이것과 비교할 때, 다른 모든 어려움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래서 그가 살아서 그 고생을 겪지 않았다는 것은 진실로 그가 평안히 죽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안에서 죽었다. 이 사랑과 은총은 죽음이란 사건이 없는 그런 평화를 보장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그 사랑과 은총은 그를 전장에서 죽지 않게 해 주는 것이 아니라, 그의 죽음의 성질을 변경시킬 수 있으며 그의 죽음 위에 함께 임하는 것이다.


=====호크마===

..열왕기하 22장

1 요시야가 위에 나아갈 때에 나이 팔세라 예루살렘에서 삼십 일년을 치리하니라 그 모친의 이름은 여디다라 보스갓 아다야의 딸이더라

ㅇ요시야가 위(位)에 나아갈 때에 나이 팔세라 - 요시야(Josiah)의 부친 아몬은 24세에 죽었다.(21 : 19, 23). 그러므로 결국 요시야가 태어난 때는 아몬의 16세였던 셈이 된다. 한편 요시야는 유다 최후의 선왕(善王)으로서 31년간 (B.C. 640-609)을 통치하였다. 그는 다윗을 본받아 여호와 신앙에 전념하였는바 죄악으로 더럽혀진 나라를 정화시키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그도 유다를 구원하는 데에는 실패하였으며 그 자신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묻지 않고 성급히 애굽과의 싸움에 참전하여 전사(戰死)하였으니(23 : 29, 30) 애석한 일이 아닐수 없다.

ㅇ그 모친의 이름은 여디다라 - '여디다'는 솔로몬의 다른 이름인 '여디디야'(Je-didiah)의 여성형 이름이며 뜻은 '사랑하는 자'이다(삼하 12 : 24,25). 그러나 정작 '여디다'(Jedidah)에 관해서 알 수 있는 바는 달리 없다.

ㅇ보스갓 아다야의 딸이더라 - 수 15 : 39에 따르면 보스갓(Bozkath)은 라기스와 에글론 사이에 위치해 있음을 알 수 있다. 학자들은 그곳이 오늘날의 '텔 나길라'(Tell Nagila)일 것으로 보고 있으나(Hobbs) 정확하지는 않다. 한편 '아다야'(Adaiah)라는 이름은 '장신구'라는 뜻으로서 포로 시대 이후에 자주 쓰인 이름이다(스 10 : 29, 39; 느 11: 4, 5).

2 요시야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 그 조상 다윗의 모든 길로 행하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더라

ㅇ본절에서는 요시야의 통치의 특성을 보여 주고 있다.

ㅇ그 조상 다윗의 모든 길로행하고 - 그의 경건에 대한 평가는 여호사밧(대하 17 :3) 및 히스기야에 대한 평가와 동등하다(18 : 3). 때문에 후대 사가 (史家)들은 여호사밧, 히스기야, 요시야 이 세 사람을 가리켜 유다의 3대 성군(聖君)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ㅇ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더라 - 이는 곧 요시야가 모든 인간 삶의 유일한 정도(正道)인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생각하며 판단했다는 뜻이다(신 5 : 32;28 : 14). 히스기야와 요시야는 이 점에 있어서도 서로 일치한다(18 : 6).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시야의 선한 행위가 유다에 대한 하나님의 최후 심판을 돌이키지 못했다는 사실(23 : 26, 27)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3 요시야왕 십 팔년에 왕이 므술람의 손자 아살리야의 아들 서기관 사반을 여호와의 전에 보내며 가로되

ㅇ요시야 왕 십 팔 년에 - 열왕기 기자는 요시야의 초기 개혁에 대해서는 생략하고 있다. 즉, 대하 34 : 3-7에 따르면 요시야는 이미 그의 통치 12년에 한 차례 종교 개혁을 단행하여 모든 우상들을 파괴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유다 역사상 가장 철저하고도 대대적인 개혁을 시작한 것은 그의 나이 26세 되던 해인 바로 이 통치 18년째의 일이다. 한편 요시야 왕 18년은 B.C. 621년경이다. 이때는 앗술바니팔 왕의 죽음(B.C.626년)으로 인해 앗수르 제국이 이미 다시 회복할 수 없는 쇠퇴의 길을 걷고 있던 시기이다. 그러므로 요시야는 대외적인면에 신경을 쓰지 아니하고 대내적으로 오로지 종교 개혁에 정신을 쏟을 수 있었을 것이다.

ㅇ서기관 사반 - '사반'이라는 이름의 뜻은'오소리' 이다. 당시 이러한 이름(겔 8 : 11)은 그렇게 희귀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Hobbs). 한편 렘 26 : 24에 보면 사반(Shaphan)의 아들 아히감이 예레미야 선지자를 보호하였다고 하며, 또 사반의 아들 그마랴도 여호야김 왕 시대에 상당한 귀족이었던 것으로 나타나 있다(렘 36 :12,25). 그리고 사반의 손자 아히감은 예루살렘 멸망 이후 바벧론으로 끌려간 포로들 가운데 중요한 인물이었다(렘 40 : 5-41 : 10). 그러므로 사반의 가문(家門)은 비교적 명문 집안이었음을 알 수 있다. 사실 당시 서기관은 여호와의 전에 바치는 세금들을 관리할 정도로 대단한 중책의 위치에 있었으니(4절 ; 12 : 10) 그 가세(家勢)를 짐작할 수 있다. 한편 평행 구절인 대하 34 : 8에 따르면 당시 사반 이외에도 부윤마아세야와 다른 서기관 요아하스의 아들 요아가 함께 활동하였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4 너는 대제사장 힐기야에게 올라가서 백성이 여호와의 전에 드린 은 곧 문 지킨 자가 수납한 은을 계수하여

ㅇ대제사장 힐기야 - 여기에 언급되 힐기야(Hilkiah)가 누구인지에 관해서는 학자들 간에 견해가 다양하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힐기야'란 이름이 여럿 나오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1) 에스라의 족보에 나오는 살룸의 아들 힐기야(스 7 : 1, 2)를 들 수 있는데 그는 대상 6 : 13에 나오는 대제사장들의 명단에도 동일하게 살룸의 아들로 나온다(Rawlinson). 2) 다음으로 베냐민 땅 아나돗(대상 6 : 60) 출신의 선지자 에레미야의 아버지 역시 힐기야이다(렘 1 : 1). 3) 그밖에도 레위 족속 암시의 아들 힐기야(대상 6: 45, 46), 스룹바벧과함께 바벧론 포로에서 귀환한 제사장 힐기야(느 12 : 1, 7)등을 들 수 있다. 그런데 본절에 등장하는 힐기야는 예루살렘 성전을 직접 돌보고 있었다.  그리고 렘 24장을 보면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에 대해 강한 반감을 표현하고 있다. 따라서 본절의 대제사장 힐기야가 예레미야 선지자의 아버지 라는 견해는 받아들일 수 없다(Hobbs).대체적 으로 학자들은 본절의 힐기야가 살룸의 아들 힐기야인 것으로 추정한다(Rawlinson).

ㅇ백성이 여호와의 전에 드린 은 -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원하여 하나님께 바치거나 아니면 율법의 규정(출 30 : 13, 14 ;레 27 : 2-8; 민 18 : 15, 16)에 따라 바쳤던 헌금을 가리킨다. 한편 선왕(先王) 요아스는 이러한 헌금을 모아 성전을 수리하는 데에 사용하였다(12 : 4-16). 본장에서의 요시야의 행위(3-7절) 역시 앞서 요아스의 그 같은 정책을 답습한 것으로 보인다.

ㅇ수납한 은을 계수하여 - 여기서 '계수하여' 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야템'은 '마치다'라는 뜻이다. 즉, 이것은 새로운 용도에 지불할 목적으로 돈을 정리한 것을 가리킨다(Keil & Delitzsch Commen-tary, Vol. , p. 477). 70인역 (LXX)에는 이 단어를 '스프라기손'으로 번역하고 있는데 '인봉하다'(seal) 라는 뜻이다.   탈굼역(The Targums)이나 New English Bible도 동일한 뜻으로 번역하고 있는데 그것은 곧 돈을 자루에 넣어 묶는다는 뜻이다(12 : 10).

5 여호와의 전 역사 감독자의 손에 붙여 저희로 여호와의 전에 있는 공장에게 주어 전의 퇴락한 것을 수리하게 하되

6 곧 목수와 건축자와 미장이에게 주게 하고 또 재목과 다듬은 돌을 사서 그 전을 수리하게 하라 하니라

ㅇ본절에 언급된 성전 수축(修築)작업 과정은 앞서 요아스 당시의 작업 과정과 거의 다를 바 없다. 그러니 이에 관해서는 12 : 11, 12 주석을 참조하라.

ㅇ전의 퇴락한 것을 수리하게 - 12 : 6에 보면 "요아스 왕 이십 삼 년에 이르도록 제사장들이 오히려 전의 퇴락한 데를 수리하지 아니하였는지라"는 언급이 나온다. 이는 그동안 유다 백성들 모두가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관심, 열정이 식었던 결과이다.   그러나 요아스에 이어 이제 요시야 때에 이르러 성전 수축이 재개된 이후로 얼마 동안은 매년 성전 수리 작업이 시행되었을 것이다.

7 그러나 저희 손에 붙인 은을 회계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 행하는 것이 진실함이었더라

ㅇ회계하지 아니하였으니 - 대하 34 : 12에 따르면 성전 일을 맡은 감독자들은 모두 레위인으로서 전적으로 신뢰받는 인물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더군다나 이들은 12 :15에서와 마찬가지로 진실되게 일하였음 터이니 요시야 로부터 전적으로 신뢰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ㅇ이는 그 행하는 것이 진실함이었더라 - 감독자들의 이 같은 진실됨에는 분명 요시야의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고(自古)로 공의를 행하는 통치자 밑에서 정직한 신하가 배출되는 법이기 때문이다. 실상 다윗 왕이 하나님 앞에서 정직히 행하여 공의를 행할 때(삼하 8 : 15) 정직하고 충성된 신하가 배출되었으며(삼하15 :19-23) 백성들은 태평 성대를 누리었다(삼하7 : 1). 그러므로 가정이나 교회, 국가가 평강 가운데 번영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부모, 교회 지도자, 통치자들이 각각 하나님을 경외하며 정직히 행하는 일에 솔선 수범해야 할 것이다.

8 대제사장 힐기야가 서기관 사반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의 전에서 율법책을 발견하였노라 하고 그 책을 사반에게 주니 사반이 읽으니라

ㅇ내가 여호와의 전에서 율법책을 발견하였노라 - 힐기야가 발견한 이율법책이 어떤것이었는지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에 견해가 다양하다. 1) 신명기서뿐이라는 견해(Ewald). 이견해를 주장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문서 비평가 들이 많은데 이것을 근거로 하여 신명기 후기 저작설을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자기 신학적 틀을 정한뒤 그 틀 속에서 모든 결론을 유추해 내고 있으므로 신빙성이없다. 2) 모세의 계명과 규례집의 한 부분이라는 견해(Thenius). 3)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라는 견해(Bertheau). 4) 그러나 본절에서 '율법 책'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세페르 하토라'는 대개 모세 오경 전부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신 17 : 18;수 1 : 8;8 : 31;24: 26; 느 8 : 1 등).  따라서 일반적으로 요세푸스나 유대인들이 생각하듯이 힐기야가 발견한 율법책은 모세 오경 전부라는 견해가 가장 유력하다(Keil, De Wette).   한편 이 율법책은 신 31 : 26에서 보듯이 언약궤 옆에 비치해 두었던 성전용 율법서로서 제사장들에 의해 수시로 읽혀지던 것이다(신 31 : 12, 26). 그런데 므낫세 당시의 극심한 배교(背敎) 현상(212 : 1-9)에 불안을 느낀 누군가가 이 율법서를 보존하기 위하여 성전 모퉁이에 감추어 두었던 것 같다(Matthew Henry).

9 서기관 사반이 왕에게 돌아가서 복명하여 가로되 왕의 신복들이 전에 있던 돈을  쏟아 여호와의 전 역사 감독자의 손에 붙였나이다 하고

ㅇ서기관 사반이...복명하여 가로되 - 본절은 당시 서기관 사반에게 성전의 재정을 관리하는 것 뿐만 아니라 대제사장과 왕 사이에서 연락하는 매개자(煤介者)의 임무도 있었음을 보여 준다. 3절 주석 참조.

ㅇ왕에게 돌아가서 - 여기서 '돌아가서' 에 해당되는 히브리어 '야쉐브'는 히필형(Hiphil : 사역형 능동)으로서 사반이 중대한 일이나 불가피한 요인 또는 누군가의 명령에 의해서 왕에게 보내졌음을 가리킨다.

ㅇ돈을 쏟아 - '쏟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티쿠'는 '쏟아붓다', '녹이다'라는 뜻의 동사 '나타크'에서 파생된 것으로 자주 금속을 녹이는 것과 연관된다. 그러나 여기서는 비유적인 표현으로서 아마 '분배하다'라는 뜻으로 쓰인 것 같다(Hobbs).

10 또 왕에게 고하여 가로되 제사장 힐기야가 내게 책을 주더이다 하고 왕의 앞에서 읽으매

ㅇ내게 책을 주더이다 - 본절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원문을 보면 무엇보다 '책'(세페르)이라는 단어가 문두에 나와 강조되고 있다. 이것은 성전 수리 일보다 힐기야가 준 책의 중요성을 강조한 표현이라 하겠다.

ㅇ왕의 앞에서 읽으매 - 이처럼 서기관 사반이 율법책을 '읽었다'는 말은 이미 8절에서도 나온다. 그런데 이때 사반이 읽은 내용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우리가 알 길이 없다. 추측컨대 아마도 그는 왕에게 충격을 주는중요한 부분 몇 군데를 읽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왕이 율법책의 말을 듣자 곧 자신의 옷을 찢으며 통회하였기 때문이다(11절). 또 23 : 2과 비교해 볼 때도 이때 만큼은 사반이 책 전체를 읽은 것 같지는 않다.

11 왕이 율법책의 말을 듣자 곧 그 옷을 찢으니라

ㅇ왕이...그 옷을 찢으니라 - 사반이 읽어 준 율법책의 내용은 아마도 이전에 읽은 어떤 책이나 교훈보다도 요시야의 마음에 더 깊은 감명을 주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13절에 비추어 볼 때 사반이 읽은 내용 중에는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멀리 할 경우 하나님의 징계를 당하리라는 말씀(신 28 : 15-68)도 있었던 것같다. 그러므로 요시야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회계하였음에 분명하다. 왜냐하면 여기서 옷을 찢는 것은 하나님을 떠났던 자들이 다시금 돌이켜 마음을 찢고 회개함을 나타내는 상징적 행동이기 때문이다.19 : 1주석 참조

12 왕이 제사장 힐기야와 사반의 아들 아히감과 미가야의 아들 악볼과 서기관 사반과 왕의 시신 이사야에게 명하여 가로되

ㅇ사반의 아들 아히감 - 아히감(Ahi-kam)이란 이름의 뜻은 '내 형제가 일어났다'이다. 그는 여호야김 때에 예레미야 선지자를 보호해 준 사람이며(렘 26 : 24), 예루살렘 멸망후 포로로 끌려간 그다랴의 부친이다(렘 39 : 14;40 : 7). 3절 주석 참조.

ㅇ미가야의 아들 악볼 - '악볼'(Achbor)이란 이름의 뜻은 '들쥐'이다. 앞서 '사반'이란 이름 또한 '오소리'란 뜻이었는바 이처럼 이름의 뜻이 동물을 지칭하는 경우가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선 드물지 않았던 것 같다. 3절 주석 참조. 한편 악볼이 왕의 전권대사(全權大使)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상고토록 세움받았다는 사실 이외에는 그나 그의 아비미가야(Micaiah)에 대하여 알 수 있는 바가 없다. 대신 악볼의 아들 엘라단이 여호야김 왕에 의해 애굽으로 보냄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렘 26 : 22). 한편 병행 구절인 대하 34 : 20에는 악볼이 '미가의 아들 압돈' 으로 되어 있는데 그것은 아마 잘못된 기록일 것이다(Rawlinson Bahr).

ㅇ왕의 시신 이사야 - '아사야'(Asaiah)라는 이름의 뜻은 '여호와께서 세우셨다'이다. 그시신 (侍臣), 곧 왕의 수발을 받드는 신하였다(Bahr).

13 너희는 가서 나와 백성과 온 유다를 위하여 이 발견한 책의 말씀에 대하여 여호와께 물으라 우리 열조가 이 책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며 이 책에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모든 것을 준행치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발하신 진노가 크도다

ㅇ나와 백성과 온유다를 위하여 - 요시야 왕은 율법책의 말씀을 듣고 그말씀을 먼저 자기에게 적용하였다. 11절에서 옷을 찢은 그의 행위가 이것을 잘 보여 준다.실상 신28 : 15-68과 레 26 : 16-19에서 보듯이 하나님의 심판은 왕으로부터 시작하여 온 백성들에게 미친다.  따라서 요시야가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귀기울이고 무릎 끊은 것은 일국(一國)의 최고 통치자로서 마땅한 자세가 아닐수 없다. 한편 여기에서 '온 유다'는 나라와 국민, 땅을 다 포함하는 말로서 '백성'이라는 말과는 약간 의미상 차이가 있다.

ㅇ이 발견한 책의 말씀에 대하여 여호와께 물으라 - 혹자는 본절의 의미를 발견한 책이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인지 또는 진정한 권위를 지니고 있는지 물어보라는 의미인것으로 이해한다(Dunker). 그러나 훌다의 예언 내용에 의거할 때 이러한 질문이 아니었음이 분명하다(16-20절). 대신 본절은 책의 내용, 즉 책에 기록된 심판이 내려질 것인지 물어보라는 의미이다(Keil & Delitzsch, Rawlinson, Von Ger-lach).  다시 말해 이는 레 26 : 16-19 ; 신 28 : 15-68에 기록된 것과 같은 저주가 우리에게 임할것인지에 대하여 물어보라는 의미이다.

ㅇ우리에게 발하신 진노가 크도다 - 여기서 '발하신' 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니체타'는 '노를 발하다'라는 뜻의 동사 '야차트'의 과거 완료형이다.   그러나 히브리어 문법에서 예언이나 본절과 같은 경우에 과거 완료형이 임박한 미래의 일을 나타내는 경우가 종종있다. 따라서 본절은 그 이전 과거에 내린 심판에 대한 언급이 아니라 앞으로 닥칠 임박한 심판에 대한 언급임이 분명하다.   한편 요시야 왕은 출 20 : 5에 나오는 계명의 말씀처럼 자신의 부친이나 조상들의 죄가 자기에게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보았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히스기야의 죄에 대한 심판이 자손에게로 연기된 것(20:19)과 므낫세 때에 내린 유다 멸앙의 예언(21 : 10-15)에 대해 인식했을 것이다.  더군다나 유다 왕들의 반복된 배교 행위로 인하여 축적된 죄의 결과, 이제 멸망의 심판이 불가피하게 되었으므로 그 같은 심판에 대한 요시야의 두려움은 더욱더 심각하였을 것이다.

14 이에 제사장 힐기야와 또 아히감과 악볼과 사반과 아사야가 여선지 훌다에게로 나아가니 저는 할하스의 손자 디과의 아들 예복을 주관하는 살룸의 아내라 예루살렘 둘째 구역에 거하였더라 저희가 더불어 말하매

ㅇ본절에 기록된 정보 이외에 여선지훌다(Huldah)에 관해 알려진 바는 없다. 그리고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여선지자들이 어떤 활동을 했다는 기록도 거의 없는 상태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고대의 여선지로는 미리암(출 15 : 20; 민 26 : 59), 드보라(삿4 : 5), 이사야의 아내(사 8 : 3 KJV를 참고), 노아댜(느 6 : 14) 등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훌다가 예언적 은사를 소유했던 자로서 당시 상당한 명성을 지녔던 것만은 분명하다.한편 요시야의 당시에는 훌다 외에도 예레미야와 스바냐 선지자가 활동을 했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베냐민 땅 아나돗 출신이므로 예루살렘에 있지 않았을 가능성이 많다(Keil, Bahr). 또 그들은 궁전 선지자가 아니어서 요시야의 개혁에 직접 관여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Hobbs). 반면에 훌다는 왕궁에서 예복을 주관하는 공직자인 살룸(Shallum)과 결혼한 것으로 보아 왕의 측근에 있는 선지자였던 것 같다. 그래서 왕의 사자(使者)들은 예레미야나 스바냐를 채지 않고 훌다를 찾아갔을 것이다(Matthew Henry).

ㅇ예루살렘 둘째 구역 - 예루살렘 둘째 구역(미쉬네)이란 왕조 시대에 들어와서 예루살렘 성이 확장될 때 포함된 지역을 가리킨다. 훗날 '미쉬네'는 이곳의 지역명으로 고착된 것 같다(Hobbs). 한편 이 '미쉬네'는 일명 '낮은 지역' 이라고도 불리윙는데 그 까닭은 그지역의 위치가 계곡이었기 때문이다(G. A. Smith).

15 훌다가 저희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너희는 너희를 내게 보낸 사람에게 고하기를

ㅇ너희는 너희를 내게 보낸 사람에게 고하기를 - 여기서 '너희를 내게 보낸사람' 이란 다름아닌 요시야 왕을 가리킨다(12, 13절). 그런데도 그를 가리켜 이렇게 말한 여선지 훌다의 어투는 1장에서 선지자 엘리야가 아하시야의 사자(使者)들에게 했던 어투와 유사하다(1 : 6). 이와같이 훌다가 구약의 전통적인 선지자들의 어투로 말하는 것을 볼 때 그녀는 선지자 엘리사처럼(13 : 14) 왕의 자문을 담당하는 궁전 선지자였던 것 같다(Wilson). 한편 많은 학자들은 본절 이후에 기록된 훌다의 말을 15-17절과 18-20절 두 부분으로 나눈다. 그리하여 첫째 부분은 들어야 할 모든 사람에게 한 말이고 둘째 부분은 특별히 왕에게 한 말이라고한다(Keil & Delitzsch, Bahr).  그러나 전후 문맥 관계에서 볼 때 두 부분은 다 신명기적 심판과 축복에 대한 언급으로서 모두 왕에게 한 말이 라고 보아야 타당하다(Hobbs).

16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 곳과 그 거민에게 재앙을 내리되 곧 유다 왕의 읽은 책의 모든 말대로 하리니

ㅇ내가...재앙을 내리되 - 이러한 본절의 말씀은 21 : 12에서 므낫세 시대에 주어진 심판의 말씀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그러니 그 구절 및 그곳 주석을 참조하라.

ㅇ이곳과 그 거민에게 - 여기서 '이곳'이란 예루살렘을 가리키며 '그 거민'은 예루살렘 백성들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 둘은 궁극적으로 '온 유다'를 의미한다. 한편 예루살렘에 관한 이러한 저주의 말씀은 19 : 31에서 히스기야 시대에 주어진 예루살렘에 관한 축복의 말씀과 서로 상반된다. 그러나 이같은 현상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약속과 긍휼을 무시한 므낫세 왕과 유다 백성들의 패역(悖逆) 때문이지 결코 하나님께서 조변 석개(朝變夕改)하시는 때문은 아니다(21 : 8-15). 이와 관련해서는 해당 부분의 주석을 보다 참조하라.

ㅇ유다 왕의 읽은 책의 모든 말대로 하리니 - 이미 언급한 대로 요시야가 이때 읽은 성경 중에는 신명기가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11절 주석 참조 실상 신 27, 28장에는 하나님의 말씀 순종 여하에 따른 축복과 저주의 언약이 언급되어 있다.

17 이는 이 백성이 나를 버리고 다른 신에게 분향하며 그 손의 모든 소위로 나의 노를 격발하였음이라 그러므로 나의 이 곳을 향하여 발한 진노가 꺼지지 아니하리라 하라 하셨느니라

ㅇ본절에는 유다 백성이 하나님의 진노를 격발케 한 원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세가지로 언급되어 있다. 1) 하나님을 버림 : 이처럼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을 버렸다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기하고 불순종했다는 뜻이다. 이는 곧 모든 죄악의 첫 발걸음이자 죄악의 근본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떠난 자에게서는 어떠한 의도 기대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한 샘에서 단 물과 쓴 물이 함께 나올 수 없는 이치와 같다(약 3 : 11). 그래서 율법서의 상당 부분(신 12 : 19;29 : 25-28)과 예가서의 많은 부분(삿 10 : 13; 삼상 8 : 8; 렘 1 : 16 등)이 하나님을 저버리는 것에 관해서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2) 우상 숭배에 빠짐 : 즉, 유다 백성들은 바울이 말한 것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꾼 것"(롬 1 : 23)이다. 한편 하나님께서 떠난 자는 이처럼 자연히 우상 숭배에 빠니게 된다. 왜냐하면 인간은 스스로 존재할 수 없고 하나님 안에서 살든지 하나님을 떠나 다른 무엇을 섬기든지 무엇을 꼭 의존해 야만 하는 속성을 지녔기 때문이다.그래서 예수께서는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고 말씀하셨던 것이다(마 6 : 24;눅 16 : 13). 3) 적극적인 범죄 : 유다 백성처럼 이미 하나님의 말씀이 그 마음에 없고 다른 것으로 채워 있는 사람은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기 마련이다(창 4 : 7, 8; 삼상 18 : 10등).   왜냐하면 악인은 항상 독을 머금고 있으면서 (잠 10 : 6,11) 악을 더듬어 찾음으로 더욱더 사악한 길로 스스로를 재촉하기 때문이다(잠 11 : 27).

ㅇ이곳을 향하여 발한 진노가 꺼지지 아니하리라 - 유다에 대한 심판이 연기되기 시작한 것은 8 : 19에서부터이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심판을 연기 하신 것은 당신 백성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과 오래 참으심 에서였다(겔33 : 11;벧후 3 : 9). 우리는 이러한 경우를 요나에 의해 니느웨에 경고와 회개의 메시지가 선포된 사건에서 볼 수 있다(욘 3 : 1-10). 그러나 그 같은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에도 불구하고 유다 백성들은 계속 죄악 가운데서 행하였으니(21 : 1-9) 이제 하나님의 심판이 불가피하게 된 지경에 까지 이르렀고 어떠한 회개에 의해서라도 만회(挽回)할 수 없게 된 것이다(대하 36 : 16).

18 너희를 보내어 여호와께 묻게 한 유다 왕에게는 너희가 이렇게 고하라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들은 말을 의논컨대

ㅇ네가 들은 말을 의논컨대 - 지금까지의 문맥에서만 본다면 여기서 '네가 들은 말'이란 사반이 율법책을 읽을 때 요시야가 들은 말 (11절)을 의미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부분을 19절 서두에 연결시켜 이해한다. 즉, 그들은 '네가 들은 말' 을 19절에 언급된 예루살렘과 그 백성들에 대한 저주(16, 17절)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저주 역시 이미 모세 오경에도 나와 있는 바이니(신 28 : 15-68) 어떤 견해를 취하든 별 무리가 없다.   한편 이처럼 하나님께서 특별히 요시야에게 따로 말씀 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요시야의 태도가 겸비하였고 그가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며 통곡하였기 때문이다(11, 19절).

19 내가 이곳과 그 거민에게 대하여 빈 터가 되고 저주가 되리라 한말을 네가 듣고 마음이 연하여 여호와 앞 곧 내 앞에서 겸비하여 옷을 찢고 통곡하였으므로 나도 네 말을 들었노라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ㅇ내가 이곳과 그 거민에게...저주가 되리라 - 이는 곧 "너희 땅이 오늘과 같이 황무하며 놀램과 저주거리가 되어 거민이 없게 되었나니"(렘 44 : 22)라고 한것과 같은 말이다. 또한 이러한 말은 선지자들이 자주 사용하던 말로서 레 26장과 신 28장에서 인용한 것인 듯하다(렘 4 : 7;18 :16).

ㅇ나도 네 말을 들었노라 - 하나님은 앞서 히스기야에게도 똑같이 "내게 기도하는 것을 내가 들었노라"(19 : 20)고 말씀 하셨다. 이것은 요시야의 간절한 회개의 기도(11절)가 히스기야의 기도처럼 하나님께 상달되었음을 가리킨다. 그 결과 히스기야 때에 그의 경건함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심판이 연기되었던 것(20 : 19)처럼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결정적 심판은 요시야 사후(死後)에 있을 것임이 약속되었다(20절). 이처럼 하나님의 앞에 겸비한 의인이 있음으로써 하나님의 심판받은 소돔과 고모라의 경우와 완전히 대조가 된다(창 18 : 22-32; 19 : 23-28).

20 그러므로 내가 너로 너의 열조에게 돌아가서 평안히 묘실로 들어가게 하리니 내가 이 곳에 내리는 모든 재앙을 네가 눈으로 보지못하리라 하셨느니라 사자들이 왕에게 복명하니라

ㅇ너의 열조에게 돌아가서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 원문을 문자적으로 직역하면 '너희 열조에게로 모으고'가된다. 이러한말은 창 25 : 8에서 보는 바와 같이 침상에서 평안히 죽는 것을 나타낼 때 사용하는 죽음에 대한 전형적인 표현이다(Keil, Hobbs). 그런데 이것은 실제로 요시야가 바르느고와의 전투에서 비참한 죽음을 당한 사실과 일견 모순이 되는 것처럼 보인다(23 : 29).더욱이 본절 바로 뒤에는 '평안히' (베솰롬)라는 부사어가 첨언(添言)되어 있어서 더욱더 모순되어 보인다. 때문에 혹자는 여기서 '평안히'라는 부사어가 왕에게 해당되는 말이라고도 한다(Nicholson). 그러나 애굽과의 전쟁에서 그백성들이 '평안히' 있었다는 말은 맞지 않느다. 따라서 본절의 의미는 다음과 같은 것으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즉, 1 바벧론에 의해 유다가 멸망하는 고난의 때가 요시야 때는 아니라는 것이다. 2 렘 22 : 19에서 보는 바와 같이 요시야는 "예루살렘 문밖에 던지우고 나귀같이 매장함을 당하"지 않을 것이며 왕조의 묘실에 평안히 잠들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Pulpit  Commentary).  실제로 유다의 멸망은  요시야가 죽은 후 3년 뒤인 여호야김 때에 이루어졌으며(24 : 1) 전쟁터에서 죽은 요시야는 신복들에 의해 예루살렘 묘실에 장사(葬事)되었다(23 : 29, 30).

ㅇ네가 눈으로 보지 못하리라 - 창 21 : 16이나 44 : 34에서 보듯이 어떠한 참혹한 상황을 눈으로 보지 않게 되는 것은 참으로 크신 하나님의 축복이라 아니할 수 없다.   히스기야와 마찬가지로(20 : 9-11) 요시야 왕도 그 같은 하나님의 축복으로 인해 이제 자기 백성들의 참람한 상황을 보지 않고 영원한 안식으로 들어 갈 수 있게 되었다.

ㅇ사자들이 왕에게 복명하니라 - 즉, 이말은 힐기야, 아히감, 악볼, 사반, 아사야와  같은 왕의 사자(使者)들(14절)이 훌다의 예언을 요시야 왕에게 전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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