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 5장....[535.주예수대문밖에(아5:1-8)] [442.저장미꽃위에이슬(아5:9-16)]
1. 내 누이, 내 신부야 내가 내 동산에 들어와서 나의 몰약과 향 재료를 거두고 나의 꿀송이와 꿀을 먹고 내 포도주와 내 우유를 마셨으니 나의 친구들아 먹으라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아 많이 마시라...누이-신부-사랑-비둘기-동산-온전한 이인 연인을, 그분의 친구들이신 아버지-영을 초청하사 함께 누리시도록 권하시며, 향기 그윽한 꽃밭들오 내려가시어 (그분의 연인과 다른 연인들인)동산들에서 먹이시며 백합화들을 먹이심.
2. ○내가 잘지라도[=옛사람/겉사람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음의 자각..롬6:6] 마음은[=그녀의 새사람, 곧 속사람은 부활의 새 생명 안에서 살아있음을 깨닫고 있음..고후4:16] 깨었는데 나의 사랑하는 자의 소리가 들리는구나 문을 두드려[문 두드리는 그분의 손을 보라-그 음성 들으라!!] 이르기를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야 문을 열어 다오 내 머리에는 이슬이, 내 머리털에는 밤이슬이 가득하였다[=십자가 직전의 겟세마네 고난을 기억/회상케 함] 하는구나 ...이로써, 구주의 연인은 아5:2-6까지 부활 후 십자가를 통하여<"날마다 나는 죽노라..고전15:31"를 적용...날마다 숨쉬는 순간마다, 나는 비록 약하나!!, 날마다 더 주께 가까이!!> 휘장 안에 <온전-순전-완전히 구주와 하나로>살도록 더 분명하게 부름 받고 있음...비록 믿는이가 부활 안에 살아있는 새 창조물로서 승천 안에 사는 체험(아3:6-5:1)을 가진 후라 하더라도 여전히 <남라다, 숨쉬는 매순간마다!!> 십자가의 체험이 필요함을 의미..믿는 우리가 아무리 승천 안에, 곧 우리 영 안에 있을지라도 여전히 옛창조물, 곧 육체를 가지고 있기 때문...따라서, 하늘 장막 지성소 안으로 들어가려면(히8:2, 9:11-12, 24) 반드시 우리 육체를 상징하는 휘장(히10:19-20)이 십자가에 대한 더욱 철저한 체험 통해 완전-온전-철저하게 영원히 찢겨져야 한다.(마27:51)
3. 내가 옷을 벗었으니 어찌 다시 입겠으며 내가 발을 씻었으니 어찌 다시 더럽히랴마는..이것은 [겟세마네와 십자가 죽음 안으로 더 철저히 <날마다!!> 돌아가 경험해야 한다 말씀하시는 구주의, 부르사 일깨우시는 음성, 그 의미에 대한 충분한 체험과 구주 말씀에 대한 참된 교통-전적인 순복, 그 절실한 필요성에 대한 깨달음이 없기 때문에 드는 생각임(아마도..-나 가난 복지 귀한 성에 들어가려고-가 이미 끝났다고 여길 수 있겠으나!!.....구주의 연인은, 나는 십자가 처리를 통해 그녀의 옛사람(옷)의 이전 생활 방식을 이미 벗어버렸는데(엡4:22, 골3:9) 어찌 다시 그것을 입을 수 있겠는가..그것은 사랑하는 분 구주를 다시 십자가에 못박히는 고난을 겪게 함이요, 구주의 구속하는 피로 이미 깨끗하게 된(씻은,,요일1:7) 자신을 더럽힘 아닌가, 그것은 사랑하는 이로 다시 죽음의 고난을 겪게 하는 것이라 생각하여 머뭇거림으로써, 부름을 거절한 이유임..
4. 내 사랑하는 자가 문틈으로 손을 들이밀매 내 마음이 움직여서...구주에 대한 감동과 신뢰, 그 때문에 마음 문을 조금 여는 순간, <그녀를 위해 못박히신> 그분의 못박힌 손이 그 틈으로 들어 와, 그 손을 보게 된 그녀의 속부분들이 움직여 그분을 전 존재로 간절히 바라게 됨.
5. 일어나 내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문을 열 때 몰약이 내 손에서, 몰약의 즙이[=그분의 달콤한 죽음을 귀히 여기며, 비로소!! 자신을 열어 보여드리려 하고 있음] 내 손가락에서 문빗장에 떨어지는구나
6. 내가 내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문을 열었으나 그는 벌써 물러갔네[=임재/현존 놓친 것 같은 송구함+자책+자괴감 엄습!!] 그가 말할 때에 내 혼이 나갔구나 내가 그를 찾아도 못 만났고 불러도 응답이 없었노라...이제 스스로 구주를 찾아 나서고 있는 그녀, 그 어떤 일이 닥치더라도, 그 누구를 만나더라도 상관없이 구주만을 추구하고 있는 그녀, 연인을 보라!!, 그녀의 실패한 느낌이 그 얼마나 깊고 심각한지!!...<양심이 찌르는 바, 내적 정죄감에!!> 마치 죽을 병이 들어 임박한 죽음이 느껴지듯 (때때로 기도조차 할 수 없고, 앞으로 전혀 할 수 없을 것 같은)절박감 = 극한 우울/상실감 상태에 이르러 있음.
7. 성 안을[=내 마음 안의 + 공동체 안의] 순찰하는 자들이 나를 만나매 나를 쳐서 상하게 하였고 성벽을 파수하는 자들이 나의 겉옷을 벗겨 가졌도다...이제 더 치우쳐서 <흡사 불의한 자의> 좌절감, 그 늪 상태로 빠져들고 있음..
8. 예루살렘 딸들아[=어린, 미숙한 믿는 이들] 너희에게 내가 부탁한다 너희가 내 사랑하는 자를 만나거든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다고 하려무나
9. ○여자들 가운데에 어여쁜 자야 너의 사랑하는 자가 남의 사랑하는 자보다 나은 것이 무엇인가 너의 사랑하는 자가 남의 사랑하는 자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기에 이같이 우리에게 부탁하는가...예루살렘 여인들의 질문에 대해, (이하는) 연인이 체득한 바, 구주께서 어떤 분인지를 고백함..
10. ○내 사랑하는 자는 희고도[=눈 부시도록 순수함] 붉어[=생명 충만 + 그 능력 충만] 많은 사람 가운데에 뛰어나구나[=원수와 맞서시며(사59:19), 죄인들을 이끌어 오기 위해(요12:32) 높이 들린 깃발처럼 서 있기에 눈에 확연히 띄는 분..]
11. 머리는 순금 같고[=Q께 속한 권위..고전11:3] 머리털은 고불고불하고[머리채 :: Q께 대한 그분의 복종은 탁월하고도<고불고불> 절대적임<검음>..빌2:5-8.고전15:28)] 까마귀 같이 검구나
12. 눈은 시냇가의 비둘기 같은데 우유로 씻은 듯하고 아름답게도 박혔구나...그분의 정서적 표현들 : 비둘기 같이, 단일/순수하며(고후2:10), 시냇가 (곧 생명수 강)처럼 흐르며, 젖으로 목욕한 (곧 분명/투명하며), 알맞게 자리잡고 있음 (곧 합당한 질서-균형-조화 이룸)
13. 뺨은[=백성에게 맞고 멸시 받는(사50:6, 마27:30) 뺨 가진, 그분의 얼굴은 고난 통과 중에서도] 향기로운[=아름답고 달콤한] 꽃밭 같고 향기로운 풀언덕과도 같고 입술은 [순수/겸손한]백합화 같고 [구속에 근거한, 달콤한 은혜의 말씀을 해방시키시는 바...시45:2, 눅4:22]몰약의 즙이 뚝뚝 떨어지는구나
14. 손은 황옥[녹주석이 박힌..겔1:16, 단10:6]을 물린 황금 노리개 같고[=Q뜻 이룸 위해 결합-실행하는 신성한 능력충만-안정감 있는, 일하시는 손] 몸은[=배.속부분들..빌1:8, 아5:4] 아로새긴 상아에[=죽음을 요구하는 그분의 고난] 청옥을 입힌 듯하구나...하늘에 속한 분명한 이상(청옥, 출24:10)아래에서 이루어짐
15. 다리는[=서 있는 힘] 순금 받침에[=신성한 본성] 세운 화반석[=의로운 위치...대리석의 견고함] 기둥 같고 생김새는[=외모] 레바논[=승천하신 분] 같으며 백향목처럼[=그 탁월함은 비교할 자 없음] 보기 좋고
16. 입은 심히 달콤하니 그 전체가 사랑스럽구나 예루살렘 딸들아 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 나의 친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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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 5장 [현대인의성경]]
1. 남자: 나의 누이, 나의 신부여, 내가 내 동산에 들어와서 향품과 몰약을 거두고 내 꿀을 먹으며 내 포도주와 젖을 마신다오. 예루살렘 여자들: 친구들아, 먹고 마셔라. 연인들아, 사랑에 취할 때까지 마셔라.
2. 여자: 내가 자면서도 마음은 깨어 있으니 내 사랑하는 님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는구나. 3. 남자: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아름다운 비둘기여, 문을 열어 주시오. 내 머리가 이슬에 젖고 내 머리털이 밤안개에 젖었다오.
4. 여자: 내가 옷을 벗었는데 어떻게 다시 입겠습니까? 내가 발을 씻었는데 어떻게 더럽힐 수 있겠습니까?
5. 내 사랑하는 님이 문틈으로 손을 내어밀자 내 가슴이 두근거렸네.
6. 내가 사랑하는 님을 위해 문을 열려고 일어나 문고리를 잡으니 내 손에서 몰약이, 내 손가락에서 향수가 떨어지는구나.
7. 내가 사랑하는 님을 위해 문을 열었으나 그는 이미 가고 없었다. 내가 얼마나 님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했던가! 내가 그를 찾아도 만나지 못하였고 그를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8. 야경꾼들이 나를 보자 나를 쳐서 부상을 입히고 성을 지키는 경비병들이 내 웃옷을 벗겨 갔다.
9.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너희에게 부탁한다. 너희가 내 사랑하는 님을 만나거든 내가 사랑때문에 병이 났다고 말해다오.
10. 예루살렘 여자들: 여자 중에 가장 아름다운 미인이여, 네 사랑하는 님이 다른 사람보다 나은 것이 무엇인가? 그가 얼마나 잘났다고 네가 우리에게 이런 부탁을 하는가?
11. 여자: 내 사랑하는 님은 혈색이 좋고 건장하며 뭇 남성 가운데서도 가장 뛰어난 미남자란다.
12. 그의 머리는 순금 같고 그의 머리털은 고불고불하며 까마귀처럼 검고
13. 그의 눈은 시냇가의 비둘기 같아서 우유에 씻은 듯하고 보석이 박힐 듯이 아름다우며
14. 뺨은 향기로운 꽃밭과 향내 나는 풀 언덕 같고 입술은 백합화 같으며 몰약이 뚝뚝 떨어진단다.
15. 그의 팔은 보석이 박힐 황금 지팡이 같고 그의 몸은 청옥을 박은 윤나는 상아 같으며
16. 다리는 정금 받침에 세운 대리석 기둥 같고 외모는 레바논의 백향목처럼 잘생겼으며
17. 그의 입도 달콤하여 모든 것이 사랑스럽기만 하구나. 예루살렘 여자들아, 이 사람이 바로 내 사랑하는 님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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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Torment of Separation
(The Bridegroom)
1 “I have come into my garden, my sister, my [promised] bride; I have gathered my myrrh along with my balsam and spice [from your sweet words]. I have eaten my honeycomb with my honey; I have drunk my wine with my milk. Eat, friends; Drink and drink deeply, O lovers.”
(The Shulammite Bride)
2 “I was asleep, but my heart was awake. A voice [in my dream]! My beloved was knocking: ‘Open to me, my sister, my darling, My dove, my perfect one! For my head is drenched with the [heavy night] dew; My hair [is covered] with the dampness of the night.’
3 “I had taken off my dress, How can I put it on again? I had washed my feet, How could I get them dirty again?
4 “My beloved extended his hand through the opening [of the door], And my feelings were aroused for him.
5 “I arose to open for my beloved; And my hands dripped with myrrh, And my fingers with liquid [sweet-scented] myrrh, On the handles of the bolt.
6 “I opened for my beloved, But my beloved had turned away and was gone. My heart went out to him when he spoke. I searched for him, but I could not find him; I called him, but he did not answer me.
7 “The watchmen who make the rounds in the city found me. They struck me, they wounded me; The guardsmen of the walls took my shawl from me.
8 “I command that you take an oath, O daughters of Jerusalem, If you find my beloved, As to what you tell him—[Say that] I am sick from love [sick from being without him].”
(The Chorus)
9 “What is your beloved more than another beloved, O most beautiful among women? What is your beloved more than another beloved, That you should so command us to take an oath?”
Admiration by the Bride(The Shulammite Bride)
10 “My beloved is exquisitely handsome and ruddy, Outstanding among ten thousand.
11 “His head is like [precious] gold, pure gold; His hair is [curly] like clusters of dates And black as a raven.
12 “His eyes are like doves Beside streams of water, Bathed in milk And reposed in their setting.
13 “His cheeks are like a bed of balsam, Banks of sweet, fragrant herbs. His lips are lilies Dripping sweet-scented myrrh.
14 “His hands are rods of gold Set with beryl; His abdomen is a figure of carved ivory Inlaid with sapphires.
15 “His legs are [strong and steady] pillars of alabaster Set upon pedestals of fine gold. His appearance is like Lebanon, Stately and choice as the cedars.
16 “His mouth is full of sweetness; Yes, he is altogether lovely and desirable. This is my beloved and this is my friend, O daughters of Jerusal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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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 5장 (개요)
본장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자기 교회의 초청에 대한 그리스도의 은혜로운 응락과 그에 대해 그가 베풀어 주신 친절한 방문(1).
2. 자기의 사랑하는 자를 소홀히 대함으로써 저지른 우행에 대한 이 신부의 설명과 그가 물러가심으로써 처하게 된 이 여인의 곤경(2-8).
3. 이 여인이 사랑하는 자의 완벽한 사랑에 대한 예루살렘 여자들의 물음(9)과 이 질문에 대한 이 여인의 상세한 답변(10-16). "믿는 너희에게는 그가 이처럼 보배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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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초청에 대한 그리스도의 응답(아 5:1)
이 말씀은 앞장 마지막에서 "나의 사랑하는 자가 자기 동산에 들어가기를 원하노라"고 교회가 기도한 것에 대한 그리스도의 응답이다. 여기에 그는 와 계시며 이 여인에게 그 사실을 알리고 있다.
우리는 그의 부르심을 듣고 그의 초대를 응락하는 데에 게을리하는 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즉각적으로 우리 기도를 들으시며,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백성의 초대를 얼마나 기꺼이 받아 들이시는지 유의하도록 하자.
우리는 그에게 올라 가기를 부끄러워하나 그는 스스럼없이 자신을 낮추시고 우리에게 오신다.
요청에 어떻게 응답하는지, 또 그 답변은 요청보다 얼마나 더 완벽한 것인지 살펴보자.
Ⅰ. 이 여인은 그를 사랑하기 때문에 "나의 사랑하는 자"라고 부르고(실제로 그는 사랑을 받을 만한 분이셨다) 그를 초대하였다.
그는 이에 답하여 4장에서도 몇 번이나 그랬던 것처럼 이 여인을 자기 "누이요" "신부"라고 부른다. 그리스도를 자기들의 가장 사랑하는 분으로 삼는 자들은 그에게 가장 가깝고 가장 사랑스러운 관계에 있는 자로 인지(認知)받을 것이다.
Ⅱ. 이 여인은 그 동산을 "그의 것"이라고 부르며 그 동산의 아름다운 실과도 "그의 것" 이라고 부르는데 그도 그것을 인정하신다.
그것은 "내 동산"이요 "나의 향재료"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노여워하시게 되셨을 때 그는 그들을 일축하여 모세한테로 보내버리셨던 것이다(저희는 "내 백성"이라. 출 32:7). 그리고 그는 여호화의 정하신 절기를 "저희의 정한 절기"라고 부르셨다(사 1:14).
그러나 이제는 그들이 자신의 마음에 들게 되자 그는 그들을 자기 동산이라고 인정하신다. "비록 하찮은 것이긴 하나 이 동산은 내 소유이다."
성실하게 자기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께 바치고 자기의 전 소유와 자기의 전 소유와 자기가 그에게 해드릴 수 있는 모든 것을 바치는 자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명예의 도장을 찍으실 것이며 그들이 소유하는 모든 것과 자기를 위해 행하는 모든 것에 자기의 표를 해주시면서 "이것은 내 것이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Ⅲ. 이 여인은 그에게 "그의 동산으로 들어오라"고 초청하였는데, 이에 대해 그는 "내가 들어왔다"고 답하신다.
"내가 부르짖을 때에 그는 내가 여기 있다고 말하리라"(사 58:9). 솔로몬이 하나님께서 오셔서 자기가 그를 위해 지은 전을 소유하시도록 기도드렸을 때 그는 정말로 오셨던 것이다. "그의 영광이 그 전에 가득하였고"(대하 7:2) 또 그는 자기 "이름이 거기에 영원히 있도록" 하시기 위하여 그 전을 택하여 성별하셨다는 것을 솔로몬에게 알려 주셨다(16절).
자기 영혼의 문을 그리스도께 활짝 열어놓는 자들은 그리스도께서 기꺼이 들어오시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가 자기 이름을 기록해 두는 곳이면 어디서나 그는 자기 백성과 만나실 것이며 그들을 축복해 주실 것이다(출 20:24).
Ⅳ. 이 여인은 그가 "자기의 아름다운 실과를 잡수시고" 자기 성전에서 드리는 제물을 받으시기를 원하였다. 이 제물은 곧 그의 동산의 실과와 같은 것이었다.
그는 그녀의 소원대로 행하시려 하나 그 실과가 거두어져 있지도 않고 즉시 먹을 수 있도록 준비가 돼있지 않음을 보시고 친히 그것들을 거두신다. 여러 실과가 그의 것이기에 그 준비도 그가 하시는 것이다.
그는 심령이 자기가 들어가 즐길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지 않음을 발견하시나 자기가 그곳에 심어 놓으셨던 은혜로운 속성들을 끄집어 내셔서 작동시키신다.
그가 만약 거두셔서 자기 스스로를 위해 보전시키지 않으신다면 우리 속에 있는 보잘 것 없는 선조차 흘러나가 없어지고 말 것이다.
Ⅴ. 이 여인은 단지 그가 동산의 "실과를 먹는 것"을 바랐으나 그는 그외 딴 것도 많이 가지고 왔으니 그것은 곧 "꿀"과 "포도주"와 "젖"이었다.
이들은 풍부한 영양이 담긴 것이었고 임마누엘의 땅 가나안의 생산품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것을 백성에게 나눠주고 그들과 어울리셨으며 그러한 것을 크게 기뻐하신다.
아니면 우리는 에스더가 자기 남편되는 임금을 위해 "주연"을 준비한 것 같이 이것도 신부가 준비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것은 평범한 식사에 불과하며 더욱이 꿀과 젖은 자연식이다. 그러나 이것이 자상하게 생각하여 미련된 것이므로 그는 자상하게 받으시는 것이다. 그는 불완전성을 간과하시며 꿀과 함께 벌집을 잡수신다.
"심령은 원하고" 있으므로 육신의 연약함을 묵과하시고 용서하여 주신다. 그리스도께서 부활 후 그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그는 그들과 함께 한 조각의 꿀송이(원어는 벌집)도 드셨다(눅 24:42, 43 , 흠정역), 즉 이 구절이 요구하는 것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는 포도주만 마시지는 않으셨다. 포도주는 어른들, 큰 사람들을 위한 술이지만 그는 포도주와 함께 아이들, 작은 아이들을 위한 음료인 우유도 마셨다. 그것은 그가 젖을 필요로 하는 "거룩한 아이 예수"로 태어나실 것이었기 때문이다.
Ⅵ. 이 여인은 그를 혼자 오라고 초대하였으나 그는 자신이 즐길 음식과 함께 자기 친구들도 데리고 오시며 그들에게 그 음식을 나누어 먹도록 권유하신다.
"많으면 많을수록 더욱 더 즐거운" 것이다. 이토록 풍성한 곳에 나쁜 음식은 없었다. 우리 예수께서 5천 명을 한꺼번에 먹이셨을 때 "그들은 모두 먹고 배가 불렀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가 친히 마시는 "포도주와 젖"을 마시러 오라고 그의 모든 친구들을 초대하시며(사 55:1)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포도주의 연회"로 초청하신다(사 25:6).
인간의 구원이라는 위대한 사업과 풍성한 은혜의 계약을 주 예수님의 잔치이며 동시에 그것은 우리의 잔치도 되어야 한다. 그 초대는 대가를 원치않는, 정중하고 사랑이 넘쳐 흐르는 것이었다. "오! 친구들아! 먹으라."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우리와 함께 잡수시면 그와 더불어 먹게 되는 것은 우리이다(계 3:20). "친구들아! 먹으라." 그리스도의 친구가 되는 이들만 그의 식탁에 영접된다. "그를 자기들의 지배자로 모시려 하지 않는" 그의 원수들은 "그 일에 아무런 몫도, 없으며 분깃도" 없다.
"마시고, 많이 마시라." 그리스도께서는 가난한 영혼들을 위해 풍족한 양식을 그의 복음 안에 만들어 놓으신 것이다. "그는 굶주린 자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려 주신다." 거기에는 모든 자들을 배부르게 할 만큼 충분한 것이 있으며 각자에게도 충분한 것이 있다. "우리는 그 분 안"이나 그의 은혜 속에 "있으면 궁핍을 당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들 자신의 가슴만 의지하다가 궁핍을 당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할 것이다. "네 입을 크게 벌리라.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가득 채워 주실 것이다."
그러나 "술 취하지 말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엡 5:18). 그리스도를 접대하는 자들은 그와 함께 그의 친구들도 환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은 혼인 잔치에 함께 초대를 받으셨다(요 2:2).
그리스도께서는 그가 자기 교회와 혼인하는 날에 그의 모든 친구들도 자기와 함께 기뻐하실 것이며, 그 증거로 자기와 함께 잔치를 즐기게 하실 것이다.
영적이고 성스러운 기쁨에는 과식할 염려가 없다. 거기서 우리는 "풍족히 마시고 하나님의 복락의 강물을 마실 것이며"(시 36:8) "크게 만족할 것이다"(시 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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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은총과 물러가심(아 5:2-8)
이 사랑과 기쁨의 노래에서 우리는 매우 우울한 장면에 접하게 된다. 이 여인이 여기에서 사랑하는 자에게 직접 말하는게 아니라(이전같이 그에게 직접 말하지 않음은 그가 물러갔기 때문이다) 그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이 여인이 자신의 어리석음과 비행에 대해서 언급하는 슬픈 이야기이다.
그의 친절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그릇되이 행동했던 자신의 비행을 말하고 있으며 그로 인해 자신이 받아야 마땅할 책망을 스스로 되뇌이고 있는 것이다.
아마 이 말씀은 하나님을 배반한 솔로몬 자신의 행적과 그 배반 후의 슬픈 결과를 가리키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나님께서 자기 동산에 들어오셔서 그가 건축한 성전을 소유하셨으며 그는 희생 제물을 놓고 하나님과 함께 잔치를 하였었는데(1절), 그 뒤 그는 이렇게 하나님께로부터 이탈해 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이 말씀은 또한 교회나 개개 신자들의 경우에도 적용될 수 있다. 그들은 부주의나 태만심으로 그리스도를 노엽게 만들어 자기들에게서 물러나시게 하는 수가 흔히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다음 사실을 살펴보자.
Ⅰ. 이 신부가 느끼고 있던 언짢음과 그녀를 사로잡은 불안감(2절). "내가 잘지라도 마음은 깨어 있다."
1. 그 행동에는 타락한 면이 나타난다. "나는 잔다."
지혜로운 처녀들은 선잠을 잔다. 그러나 이 여인은 자기 침상 위에서 자고 있다.
영적 질환은 처음에 맞부닥쳐 싸우지 않으면 갈수록 심해져서 지반을 구축하기 쉽다. 이 여인이 "잠을 잤다"는 것은 그녀의 경건한 애정은 냉각되었고 그녀가 자기 의무를 소홀히 하였고 그것에 태만하게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그녀는 자신의 안일에 탐닉하게 되었고 그것을 든든하게 생각하여 경계를 하지 않게 되었다. 좋은 일도 그것이 정도 이상으로 커지면 나쁜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풍부한 여러 계시를 얻었다. 이로 인해 그는 자만심에 차서 "영혼아, 네 평안을 누리라"고 말하려는 위험에 처하여 있었다. 따라서 그에게는 그가 잠자지 못하도록 할 육체의 가시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동산 곧 고뇌의 동산에 들어 가셨을 때 그의 제자들은 잠을 이기지 못하여 그와 함께 깨어있지 못하였다. 진정한 크리스챤이라고 언제나 그 신앙 생활이 생기가 있고 활력이 넘치는 것은 아니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혜는 그 속에 남아 있다. "내 마음은 깨어 있다. 나 자신의 양심은 자고 있는 나를 꾸짖으며 나태 속에 있는 나를 끊임없이 일으켜 세웁니다. 마음으로는 원하고 있습니다. 속 사람을 따라 나는 하나님의 율법을 즐거워하고 있으며 내 마음으로 그것을 섬기고 있나이다. 현재로는 내가 유혹에 압도되고는 있습니다만 나라고 해서 모든 것이 외길만으로 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나는 자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죽은 자의 잠이 아닙니다. 나는 그것에 대항해 싸우고 있습니다. 그것은 깊은 잠도 아닙니다. 나는 이런 언짢은 기분으로는 편안할 수가 없습니다."
(1)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동산에서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 오셨을 때 우리가 잠자고 있었던 사실을 슬픔과 수치로써 반성하지 않으면 안 되며 우리 자신의 영적 졸음이나 심신의 불안에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된다.
(2)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잘못된 것을 슬퍼할 때에라도 우리 안에 작용하고 있는 선한 것, 아직 살아 남아 있는 선을 간과해서는 아니 된다.
"내 마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깨어있다. 그는 내게 있어서 내 자신의 심장처럼 소중하신 분이시며 내 생명이시다. 내가 잘 때에 그는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신다."
Ⅱ. 신부가 이런 언짢음 가운데에 있을 때 그리스도께서 이 여자를 부르시는 소리. "나의 사랑하는 자의 소리가 들리는구나."
이 여인은 그것이 그의 소리라는 것을 알았고 또 곧 알아 채렸다. 이것은 그녀의 마음이 깨어있었다는 증거였다.
이 여인은 소년 사무엘처럼 처음 부를 때에 들었으나 사무엘처럼 사랑을 오인하지는 않았다. 이 여인은 그것이 그리스도의 목소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우리에게 잠에서 깨어나 자기를 들이라고 문을 두드리신다. 그는 말씀과 성령으로써 두드리기도 하시고 환란 고통을 통해 두드리기도 하시며 우리 양심에 의해 두드리기도 하신다. 이것은 분명하게 표현되지는 않았지만 아마 요한계시록 3장 20절에서 언급되는 것 같다. "볼찌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라."
그는 죄인들에게는 자기와 계약을 맺으러 오라고 부르시며 성도들에게는 자기와 교제를 갖자고 부르신다. 그는 자기가 사랑하시는 자들을 부주의 속에 그대로 버려두지 않으실 것이며, 어떤 방법으로든 그들을 깨우시고 책망 하시며 또 억제하실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잊어버리는 때에도 그는 우리를 생각하시며 우리 믿음이 약해지지 않도록 도와 주신다.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부인하였지만 주님께서는 그를 돌아보심으로써 그로 하여금 제 정신이 돌아오도록 해 주셨다.
"나의 누이, 나의 사랑아! 내게 문열어다오"라는 부르심이 얼마나 감동적인가 살펴보자.
1. 그는 문을 열라고 요구할 수 있는 자임에도 불구하고 들어가게 해달라고 애원하고 있다. 그는 쉽게 문을 부술 수 있지만 두드리고 서 계신다.
2. 그는 생각해 낼 수 있는 온갖 친절한 칭호와 사랑스러운 호칭을 이 여인에게 사용하고 있다.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야."
그는 자기를 위해 앉아서 기다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불쾌한 호칭을 붙이거나 그녀의 몰인정을 탓하지 않고, 도리어 어떻게 하면 이 여인에게 대한 자기의 인자한 애정을 변함없이 표현할 수 있을까 하고 궁리한다.
"그는 자기의 인자를 완전히 거두어 가버리지는 않으실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믿음으로써 자기와 혼인한 자들을 자기의 누이로, 사랑으로, 비둘기로, 모든 친근한 자로 간주하실 것이다. 그들은 그의 의로움으로 옷입혀졌으므로 더럽혀지지 않는다.
이러한 생각은 이 여인(교회)으로 하여금 그에게 문을 열어 주고 싶은 생각이 들도록 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생각하면 우리는 가장 자기 부인한다고 하는 경우에 있어서도 우리의 것을 그에게로 들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내게 문열어 다오." 우리는 그런 친구를, 그런 손님을 들어오지 못하도록 할 수 있을까? 그리스도는 우리가 알고 지낼 만한 무한한 가치가 있는 분이며, 그와의 교제로 득볼 수 있는 자는 우리 뿐인데도 그는 풍부한 사랑으로 우리와 어울리기를 매우 바라신다. 우리는 이러한 자와 많은 얘기를 나누며 사귀어야 하지 않겠는가?
3. 그는 자신의 고난을 호소하며 sub forma panperis, 즉 하룻밤 유숙을 원하는 "불쌍한 여행객의 모습"으로서 받아들여 자기를 청하고 있다. "내 머리에는 이슬이, 찬 밤 이슬이 가득하였다. 너와의 해후를 위해 내가 겪어온 난관이 어떤 것인지 생각해 보아라. 따라서 나는 실로 네게서 이와 같은 조그만 친절을 받을 만하다."
그리스도께서 가시관을 쓰셨을 때 가시는 틀림 없이 그의 복되신 머리에서 피를 흘리게 만들었을 것이고 이 때 그의 머리에는 "이슬이 가득하였던" 것이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밤에 아내가 자애로운 남편을 문 밖에 세워두웠을 때 그 남편이 당하는 슬픔처럼, 이렇게 불친절한 대우를 받는 나의 슬픔은 어떠하겠는지 생각해 보아라."
우리는 그의 사랑에 대해 이렇게 갚고 있는 것이 아닐까? 부주의한 영혼은 예수 스리스도를 냉대한다. 그런 냉대는 그에게 있어서 "무척 비 많이 오는 날에 끊임없이 떨어지는 빗방울과 같다."
Ⅲ. 이런 부르심에 응하기를 주저하며 말하는 이 여인의 핑계(3절). "내가 옷을 벗었으니 어찌 다시 입겠느냐?"
이 여인은 반쯤 잠들어 있어서 자기가 사랑하는 자의 음성도 알고 그가 두드리고 있는 것도 알고 있으나 그 마음 속에는 그에게 문열어 주고자 하는 생각이 생기지 않았다. 이 여인은 옷을 벗고 있었으며 다시 옷을 입는 수고는 하지 않으려 하였다. 이 여인은 "자기 발을 씻었던" 후라 다시 발씻을 번거로움도 원하지 않았다. 그녀는 딴 사람을 보내 문을 열게 할 수 없었다(그리스도를 우리 마음에 들어오시도록 하는 일은 우리 자신의 행동과 행위하여야 한다). 그럼에도 이 여인은 손수 가기를 싫어하였다.
이 여인은 "내가 문을 열지 않겠다"고 말하지는 않으나 "내가 어찌 할까?"하고 말한다.
경박한 구실은 신앙 생활에 태만한 자가 곧잘 쓰는 말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문열어 달라고 부르시나 우리는 그럴 마음이 없다고 하거나 그렇게 할 만한 힘이나 시간이 없다고 가장한다. 그리고서는 책임을 면하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는 마치 "추위 때문에 밭을 갈지 않는 게으름뱅이"와 같다. "허리에 띠를 매고" "주님의 오심을 주시"해야만 할 자들이 만약 허리띠를 풀고 옷을 벗고 있다면 그들은 자기들의 이전 결심을 회복하거나 옷을 다시 입은 작업이 어렵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물샐틈 없이 방비하고 있는 것이 가장 상책이다.
구실을 대는 것(눅 14:18)은 그리스도를 경시하는 것(마 22:5)으로 해석된다. 그리스도를 위해 찬바람을 맞거나 따뜻한 침상에서 뛰쳐나오려고 생각지 않는 자들은 그리스도를 멸시하는 자들인 것이다.
Ⅳ.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신의 은총. 이로 인해 그녀는 기꺼이 일어나 그 사랑하는 자에게 문을 열어 주게 되었다.
그는 설득으로 이 여인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게 되자 기다리기에 지친 자로서 문빗장을 따기 위해 "문틈으로 손을 들이 밀었다"(4절).
이것은 그녀의 영혼에 대한 성령의 역사를 암시한다. 즉 성령의 역사에 의해 이 여인의 마지못해 하던 마음이 즐거이 하려는 마음으로 변화된 것이다(시 110:3). 루디아의 개종은 "마음을 여셨다"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으며(행 16:14),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제자들의 마음을 열어 깨닫게 하셨다고 나타나 있다(눅 24:45). "인간 안에 사람의 영을 만드신" 이는 그 심령에 접근하는 모든 수단을 알고 계시며 그 안에 들어가기 위한 길이 어느 것인지 아신다.
그는 편견을 타파하고 자기의 교훈과 율법을 도입시키기 위해 자기 손을 들이밀 수 있는 "문틈"을 능히 발견할 수 있다. 그는 "다윗의 열쇠"(계 3:7)를 가지고 계셔서 그것으로써 심령의 문을 여신다. 그가 마음의 문을 여시는 때에는 열쇠가 자물쇠의 흠에 딱 맞듯이 마음에 꼭 들어맞게 하시며, 마음의 본래적인 성질에 무리한 힘을 가하시는게 아니라 비뚤어진 성품에만 힘을 주어 여시는 것이다.
Ⅴ. 이러한 신의 은총의 방법에 드디어 이 여인의 순응함.
"내 마음이 그에게 동하였다." 선한 역사가 그 애정에 작용하여 그러한 마음(意志)을 얻어냈다. 그리스도께서 두 제자의 "마음을 속에서 뜨겁게" 하셨을 때 그들의 마음이 그랬던 것처럼 "나의 오장육부가 그에게 동하는구나" 이 여인은 그의 "머리가 이슬에 젖어 있었기" 때문에 그 사랑하는 자에게 대한 연민으로 마음이 움직였다.
부드러운 심령과 인정어린 마음으로 인해 영혼은 그리스도의 영접을 위해 준비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대한 그의 사랑은 극히 감동스러운 모양으로 표현된다.
그리스도께서는 연민 가운데에서 우리를 구원하셨는가? 우리도 연민으로 그를 받아 들이자. 또 그의 소유가 되는 자들이 언제라도 곤경에 처해 있을 때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들도 불쌍히 여기고 영접하자.
이 선한 역사가 그녀의 애정에 작용하여 그녀를 일으켜 세우고 그녀로 하여금 자기의 둔함과 게으름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였으니("내가 일어나서 내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문을 열어 주었다." 5절), 그의 은혜가 그녀로 하여금 그 일을 행하고 싶게 만들고 불신앙의 방해를 억눌러 버린 때문이었다.
이것은 그녀 자신의 행동임에 틀림없으나 그가 이 여인 안에서 역사하셔서 이 일을 행하게 하신 것이다. 그리고 이 때에 그녀의 "손에서 몰약이 문빗장에 듣는구나."
이것은 다음 두 가지 중 하나를 의미할 것이다.
1. 이 여인은 문빗장을 벗기기 위하여 빗장에 자기 손을 대었고 그 때에 이 여인은 그 몰약을 발견하였다(본문 말씀은 "문 빗장 위의 몰약이 내 손에 듣는구나"라고도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역주). "문틈으로 자기 손을 들이민" 그가 거기 있었다는 표적으로 이 몰약을 남겼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영혼에 대해 강력히 작용하실 때는 그 안에 복된 단맛을 남기시는데 그것은 영혼에게는 매우 즐거운 것이 된다. 이 몰약으로 그는 빗장이 잘 열리도록 기름칠을 하신 것이다.
우리가 신의 은총으로 믿음이 활발하게 움직이며 의무에 열중할 때는 우리가 기대한 것 이상으로 신의 은총이 한층 더 신속히 그리고 감미롭게 진보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께 문 열어드리기 위해 일어나기만 해도 우리가 염려하던 어려움들이 이상하게 극복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며, 다니엘처럼 "주께서 나로 힘이 나게 하셨사오니 내 주여, 이제 말씀하시옵소서"(단 10:19)라고 말하게 될 것이다.
2. 이 여인이 몰약을 그리로 가져왔다. 춥고 습한데 그토록 오래 서 있던 "자기의 사랑하는 자에게 마음이 동하여" 이 여인은 문을 열어주려고 했을 때 그의 머리에 발라서 힘을 돋우고 그를 위로하며 아마도 그가 감기드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이 몰약을 예비해 가지고 왔을 것이다.
그녀는 그를 맞기에 너무나 다급하여 일상적인 준비를 할 만큼 지체하려 하지 않고 그녀의 기름이 든 옥합에 손을 담그기만 하였으니 이는 그가 맨 처음 들어올 때 재빨리 그의 머리를 기름으로 적셔 주기 위해서였다.
자기 마음의 문 즉 그 "영원한 문"을 열어드리는 자들은 믿음과 은혜의 활발한 움직임으로 그를 맞아들이지 않으면 안 되며 이들로써 그에게 기름을 부어 드려야 한다.
Ⅵ. 이 여인이 가기의 사랑하는 자에게 문을 열어 주었을 때 당하게 되는 슬픈 실망. 이 기사 중 가장 우울한 부분이 여기에 나오는 것이다. "내가 의도하던 대로 나의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문을 열었다. 그러나, 아! 내가 사랑하는 자는 벌써 물러나가 버렸네, 내 사랑하는 자는 가고 없네, 가고 없네."
1. 이 여인은 맨 처음 그가 두드릴 때에 문을 열어 주지 않았다.
그 후에 이 여인이 "이 축복을 상속받고자" 하여 왔을 때는 이미 너무 늦은 때였다. 그리스도는 찾을 만한 때에만 찾아질 것이다. 우리가 만일 우리 시간을 놓치면 배편도 놓치게 될 것이다.
(1)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지체를 그의 거절로써 마땅히 책망하시며 의무 수행에 태만하고 조는 자들에게는 위로의 교류를 유예하신다.
(2) 신도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떠남이란 크게 비탄하고 애통해야 할 일이다. 제왕 시편 기자는 어떤 일에 대해서도 그들에게서 하나님이 "그의 얼굴을 숨기시는 일"이나 "자신을 일축"하시거나 "버리시는 일"에 대해 호소할 때보다 더 슬퍼한 적은 결코 없었다.
이 신부는 여기에서 자기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옷을 찢으며 자기 손을 비비꼬면서 "그는 가고 없네, 그는 가고 없네"라고 목놓아 울려는 찰라에 있다.
더욱이나 그녀의 마음을 찢어놓는 것은 이것이 그녀 자신의 탓이란 사실이다. 그녀는 그를 노엽게 하여 물러가게 했던 것이다. 만약 그리스도께서 떠나가시면 그것은 무언가 부당한 대우를 받으시는 까닭이다.
2. 이 경우 그녀가 하는 일은 무엇이며 그녀에게 발생하는 일은 무엇인지 살펴보자.
(1) 이 여인은 여전히 그를 자기가 "사랑하는 자"라고 부른다.
이 여인은 아무리 날이 흐리고 어둡더라도 그와의 관계와 그분 안에서 얻는 자기 이익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단단히 마음을 먹고 있다. 우리들 자신의 실패나 하나님의 철수를 염려하는 때마다 우리의 영적 상태에 대해서는 거의 결론을 내리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약하기 때문이다. 버리신다고 해서 모두가 절망할 일은 아니다.
"주여! 나의 불신앙을 도와 주소서" 하고 말하지 않으면 안 될 때에 라도 "주여! 내가 믿습니다"라고 나는 말하겠다. 그가 나를 떠나더라도 나는 그를 사랑한다. 그는 내 것인 것이다.
(2) 이 여인은 그가 자기를 부르시면서 한 말씀을 기억하며 그 말씀이 자기에게 어떤 감명을 주었는지 회상하고서, 자기가 그 때에 즉각 자기의 확신을 따라 행동하지 못했던 어리석음을 자책하고 있다.
"그가 말할 때에 내 혼이 나갔구나, 그가 내 머리에는 이슬이 가득하다고 말했을 때 그의 말은 내 마음을 움직였었다. 그러나 나는 가만히 누워서 구실만 만들고 그에게 문을 열어 주지 않는 몹쓸 인간이었다."
우리의 확신을 질식시키고 답답하게 만드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눈을 열어 주실 때 지나간 일을 돌이켜 보게 되고 그로써 매우 쓰라림을 느끼는 일이다. 때때로 말씀은 마음에 즉각적으로 효과를 나타내지 않는 수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후에 다시 생각함으로써 마음을 감동케 한다. 그가 이전에 했던 "그 말씀 때문에" 이제 "내 혼이 녹는구나."
(3) 이 여인은 다시 잠자리로 돌아가지 않고 그를 찾으러 나섰다. "나는 그를 찾았다. 나는 그를 불렀다."
이 여인이 그가 처음 부를 때 분기(奮起)했더라면 이런 수고를 줄일 수 있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기회의 활용에 대한 우리 자신의 나태와 부주의로 인하여 많은 일들을 놓치고 아주 많은 곤란을 자초하게 된다.
이 여인이 자기의 사랑하는 자가 물러갔는데도 계속하여 그를 찾은 것은 칭찬할 만하다. 그의 물러감으로 인해 그에게 대한 이 여인의 사모는 더욱 강하게 되고 그를 찾으려는 탐문은 더욱 열렬하게 되었다.
이 여인은 기도로써 그를 부르며 뒤따라 가면서 부르고 그에게 돌아오라고 간구한다. 그녀는 기도할 뿐만 아니라 늘 하던 수단을 사용하기도 한다. 그녀는 이전에 자기가 그를 찾곤 하던, 길에서 그를 찾아 다닌다.
(4) 그러나 이 여인은 여전히 그를 만나지 못하였다. "나는 그를 발견하지 못하였다. 그는 내게 아무런 응답도 주지 않았다."
이 여인은 그의 은총의 증거도, 눈에 보이는 위로도 갖지 못 하였으며 전혀 캄캄한 중에 있었고 자기에게 대한 그의 사랑을 의심하는 가운데 있었다.
그리스도께 대해 참사랑을 품고 있으면서도 저희 기도에 대한 즉각적 응답으로서 그의 미소를 받아 보지 못하는 자들이 있다. 그러나 만약 그가 저희 영혼을 강건하고 강건하게 하여 자기를 계속 찾도록 힘을 주신다면 그는 저들에게 그것에 상당하는 응답을 주시는 셈이다(시 138:3).
사도 바울은 "육체의 가시"를 제거하는 데에 성공할 수는 없었으나 그에 대해 충분한 은혜로 응답을 받았던 것이다.
(5) 이 여인은 행순군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 "그들이 나를 만나매 나를 쳐서 상하게 하였다"(7절).
그들은 이 여인을 윤락녀로 오인하였고(그들이 자기들의 순번을 도는 그러한 밤중에 그녀가 길거리를 배회하고 있었으므로) 따라서 그녀를 때렸던 것이다.
위로받지 못하여 마음둘 곳 없는 성도들은 죄인으로 오해받고 그런 무리로서 비난을 당하며 욕을 본다. 이와 같이 한나가 "그 마음의 괴로워서" 기도하고 있을 때도 우두머리 행순군 중 하나인 엘리가 한나를 무뢰한 벨리알의 한 딸로 생각하고 "네가 언제까지 취하여 있겠느냐?" 고 말하며 그녀를 상하게 하고 쳤던 것이다(삼상 1:14, 15).
시온 왕의 충성스럽고도 사랑하는 신하들인 자들이 시온의 파수군들에 의해 시온왕국의 원수나 치욕거리로 그릇되게 묘사하는 것은 새로운 일이 아니다. 그들은 저희에게 누명을 씌우는 방법 이외에는 저희를 학대하거나 박해할 길이 없었던 것이다.
혹자는 이 말씀을 목회자에게 적용하여 생각한다. 직분으로서는 행순군이면서도 소생한 양심의 소유자들에게 말씀을 오용함며 서툴러서 그렇든, 타인의 슬품을 도외시해서 그렇든지 간에 고통당하는 자들에게 고통을 더하고 "하나님께서도 슬프게 하지 아니한 의인의 마음을 슬프게 만들며"(겔 13:22), 용기를 북돋아줘야만 할 자들에게서 용기를 꺾고, "하나님께서 상하게 하신 자의 슬픔"(시 69:26)을 말하여 그들에게 근심이 되도록 하는 목회자들은 이런 부류에 든다.
그 행순군들은 아주 악한 자들이어서 자기의 사랑하는 자를 찾아 나선 이 여인에게 도움을 줄 수도 없고 주지도 않으려는 자들이었다(3:3). 더구나 그들이 이 여인에게 가혹하고도 무자비한 비난을 퍼부으면서 훼방을 놓고 "그녀를 쳐서 상하게 한 것"은 한층 더 악한 짓이었다.
그들은 "예루살렘 성벽를 파수하는 자들"이면서 마치 그것을 파괴하는 자들과 같이 행동하였다. 그들은 이 여인의 너울(우리 성경에는 웃옷)이 다만 정절에 대한 가식에 불과하고 그 정반대의 것에 대한 은폐물이기도 한 듯 그녀로부터 "그 너울(혹은 웃옷)을" 거칠고 야만스럽게 "벗겨 취하였다."
외모가 모두 훌륭한 데도 불구하고 불공평하게 정죄당하며 위선자로 욕을 먹는 자들은 여기에 나오는 신부처럼 "저희의 웃옷을 벗겨 취해간다"고 호소할 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6) 자기의 탐문을 수행하려는 이 여인에게 파수군들은 학대를 가하였고 이로 인해 그녀는 무력하게 되자 자기 주변 사람들에게 자기의 탐색 작업에 조력해 줄 것을 당부한다(8절).
"예루살렘 여자들아! 나의 모든 친구들과 친지들아! 너희에게 내가 부탁한다. 너희는 나보다 먼저 그를 만날지도 모른다. 만약 너희가 나의 사랑하는 자를 만나면 너희는 그에게 무어라고 말할 건가?" (이렇게 해석하는 이도 있다.) "나를 위해 좋은 말을 해 다오. 그에게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다고 하려무나."
여기에서 다음 사실을 살펴보자.
1) 이 여인의 상태는 어떠했는가? 이 여인은 그의 부재로 병이 날 만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했다.
만약 그가 계시지 않는다면 지독히 병을 앓고 도저히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사랑했다. 해산하는 여인과 같은 아픔으로 그의 돌아옴을 기다렸다. 이 여인은 아합이 그가 몹시 탐내는 나봇의 포도원 때문에 병이 나듯 앓고 있었던 것이다.
이 여인의 병 앓이는 영혼의 건전함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그 병의 경과는 틀림 없이 양호할 것이며 그것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 아니라 삶에 이르는 병일 것이다. 세상에 대한 사랑으로 편안한 것보다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으로 병나는 것이 더욱 낫다.
2) 이런 상황에서 이 여인이 취한 행동. 그녀는 절망에 빠져 들거나 이 병으로 자기는 죽고 말 것이라고 체념하지 않고 자기가 사랑하는 자를 찾으러 사람들을 보냈다.
그녀는 자기 이웃 사람들의 조언을 구하였고 자기를 위해 기도해 줄 것을 부탁하였으며 그들이 자기를 위해 그와 중재해 줄 것을 청하였다. "내가 비록 부주의하였고 어리석었으며 게을러서, 벌떡 일어나 마땅히 그에게 문을 열어주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나는 여전히 그를 사랑하고 있었노라고 그에게 말해 주오. 그는 만사를 다 알고 계시니 그는 내가 사랑하는 줄을 아십니다. 비록 내가 의무의 길에서 모자라는 경우가 한 두 번이 아니지만 나를 그에게 진실한 자로 나타내 주오. 뿐만 아니라, 그가 내게 동정심을 품고 나를 도와 줄 수 있도록 나를 그에게 연민의 대상으로 표현해 주오."
이 여인은 야경군들이 어떻게 학대하였는지를 그에게 말해달라고 부탁하지는 않는다. 그녀는 행순군들이 그 일로 아무리 불의했다고 하더라도 주님께서는 의로우시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녀는 이런 고난도 끈기있게 참고 있다. "그러나 내가 그에게 대한 사랑으로 상처를 입었다고 말해 주오."
은혜로운 영혼은 다른 어떤 괴로움보다 그리스도의 물러 가심으로 인한 고통에 한층 더 민감할 것이다. Langnet amans, non langnet amor─"연인은 초췌해지거나 그의 사랑은 초췌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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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뛰어나심과 그에 대한 교회의 탐구(아 5:9-16)
Ⅰ. 이 여인의 부탁에 답하여 예루살렘의 여자들이 그녀의 사랑하는 자에 대해 묻는다(9절).
여기에서 다음 사실을 살펴 보자.
1. 그들이 이 신부에게 부치는 경애스런 칭호. "너, 여자 중 극히 어여쁜 자야!"
우리 주 예수님은 그의 신부를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예수살렘의 모든 딸들의 눈에도 참으로 사랑스러운 자가 되게 하신다.
교회는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사회이고 성도의 교제도 마찬가지로 가장 훌륭한 교제이며 지성소의 아름다움은 초월적인 미라고 할 수 있다.
성도들은 가장 훌륭한 백성이다. 거룩함은 영혼의 조화이다. 그것은 그것 자체와의 일치이다. 그것은 그것을 적절히 판단할 수 있는 자라면 누구의 눈에든지 돋보인다.
여기에 나오는 예루살렘 여자들처럼 그리스도를 잘 모르는 자들조차 그의 형상을 띄는 자들이 가지는 사랑스런 아름다움을 보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다. 우리는 비록 상이한 의복을 걸치고 있더라도 우리가 어디서 보게 되든지 간에 그의 형상을 사랑해야 한다.
2. 그녀의 사랑하는 자에게 대한 그들의 물음. "너의 사랑하는 자가 남의 사랑하는 자보다 나은 것이 무엇인가? 네가 우리로 하여금 너를 위해서 그를 찾게 하려거든 우리가 그를 보더라도 그인줄 알 수 있도록 그의 특징을 말해다오."
(1) 어떤 이들은 이것을 그토록 야단법석을 떠는 이 여인에 대한 비난으로 해석한다. "어째서 너는 딴 사람들이 자기 사랑을 찾아 다니는 것보다 더 열정적으로 이토록 네 사랑하는 자를 찾으려 하느냐? 왜 너는 딴 사람들이 그에게 대해 친절심을 품고 있는 것보다 더 그에게 집착하려는가?"
신앙 생활에 열성적인 자들은 그것에 무관심한 자들에게 의혹을 품게 한다. 그리고 많은 부주의한 자들이 열심이고 신실한 소수의 사람들을 비웃는다. "그가 딴 사람들보다 그토록 더 매력적인 점은 무엇이냐? 그가 가고 없다면 너는 여자들 중 극히 어여쁜 자이니까 쉽사리 딴 사람을 마찬가지의 정열로 소유할 수 있을 것 아니냐?"
이와 같이 육욕에 찬 마음으로는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아무런 훌륭함도 비상함도 찾아볼 수 없다. 그의 품성이나 직분, 그의 교훈이나 은총 안에서도 계속적인 마음으로는 훌륭하고 비상한 아름다움을 도무지 보지 못하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세상을 아는 지식이나 세상과의 교제보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나 그와의 교제가 하나도 나을 것이 없는 것같이 보일 것이다.
(2) 그러나 딴 사람들은 이것을 오히려 진지한 질문으로 받아들이고 이 질문을 제기하는 자들의 의도를 다음 두 가지로 생각한다.
1) 신부를 위안하기 위하여.
그들은 이 여인이 자기의 신랑에 대해 잠깐 얘기만 하더라도 새로운 심령으로 회복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사랑하는 자의 아름다운 점들을 묘사하는 즐거운 작업보다 이 여인을 더 기쁘게 할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그녀의 슬픔을 이보다 강력하게 전환시킬 수 있는 것도 없을 것이었다.
2) 그들 스스로가 정보를 얻기 위하여.
그들은 그가 훌륭하며 영화로운 분이라는 것을 대체로 알았지만 한층 상세하게 알기를 원하였다. 그들은 무엇이 이 신부로 하여금 그토록 대단한 격정과 관심을 가지고 자기 사랑에 대해서 자기들에게 부탁하도록 감동시켰을까 궁금히 여겼다. 따라서 그들은 그에게는 딴 사랑스러운 자들과 다른 어떤 점이 틀림 없이 있으리라는 결론을 내리고 이 점을 확실히 알고 싶어하였다.
그리스도와 그의 초월적인 완전함에 대해 사람들이 탐문하기 시작하였을 때 그들에게는 모종의 희망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사도들이 이방인의 믿음으로 유대인을 격동시켜 거룩한 경쟁을 붙였듯이(롬 11:14) 때로는 그리스도를 찾는 자의 비상한 열심은 많은 사람을 분기시키는 수단이 된다(고후 9:2; 요 4:10 참조).
Ⅱ. 신부는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 자기의 사랑하는 자를 설명한다.
우리는 항상 그리스도를 찾는 이들에게 교훈을 베풀고 도와 줄 태세가 갖춰져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를 스스로 잘 알고 있는, 경험이 풍부한 크리스챤은 딴 사람들도 그분을 숙지하도록 하기 위해 최선을 다 하지 않으면 안 된다.
1. 이 여인은 전반적으로 그가 비할 데 없이 완전한 분이시며 그 누구도 필적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닌 분임을 그들에게 확신시켜 준다(10절).
"너희는 나의 사랑하는 자를 알지 못하는가? 예루살렘의 딸들이 예루살렘의 면류관이시고 그 면류관을 쓰신 머리가 되시는 그분을 모를 수 있단 말이냐? 만약 모른다면 내가 말해 주마."
(1) 그는 사랑스럽고 귀여운 것이라면 무엇이나 다 자기 안에 지니고 계신다. "나의 사랑하는 자는 희고도 붉다."
이러한 색은 완전한 아름다움을 이루는 색이다. 이것은 그가 성육하셨을 때 그의 몸이 비상히 아름답다는 것을 가리키는 말씀이 아니라(아기 예수께 대해서는 아기 모세가 태어났을 때 그가 "매우 아름다왔다"고 한 그런 표현이 없다. 행 7:20 아니, "그는 모양도 없고 아름다움도 없었다." 사 53:2) 그의 신적 영광을 가리키며 중보자로서의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이 연합됨을 시사한다.
이것은 신적 조명을 받아 영적 사물을 식별하게 되는 자들의 눈에는 참으로 그가 사랑스러운 자로 보이도록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주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다. 그는 거룩한 아기 예수였다. 그것이 그의 아름다움이었다. 만일 우리가 우리에게 계시되신 대로 그의 "지혜로우심"과 "의로우심"과 "성별되심"과 "구원하심"을 바라 본다면 그는 모든 것에서 아름다우신 자로 나타나신다.
우리에게 대한 그의 사랑은 그로 하여금 아름다운 자로 보이게 만든다. 그는 티하나 없는 순결하신 삶으로는 "희고" 죽기까지 당하신 피흘림의 고초로는 "붉으며" 하나님으로서 그의 영광으로는 "희고"(그가 변형되셨을 때는 "그의 의복이 빛과 같이 희었다") "아담"(붉은 흙이란 뜻)의 성질 곧 인성(人性)을 취하셨다는 점으로서는 "붉다." 또한 자기 백성에게 대한 그의 따사로우신 온정으로는 "희고" 그와 자기 백성의 대적들에게 대한 그의 두려우신 모습으로는 붉다. 그의 외양은 매우 행복하면서도 복합적인 성격을 지닌다.
(2) 그는 다른 어떤 자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는 사랑스러움을 갖고 계신다. 그는 "만 사람에게 뛰어난다."
그는 둘도 없는 아름다움을 가지시며 "인간의 자손들보다 더 어여쁘고" 그 어떤 사람보다 모든 사람들보다도 더 아름답다. 그와 같은 자는 없으며 그에게 비교될 자도 없다. 그 외의 모든 것은 "그와 비교하면 잃어버려도 좋은 것이요 오물 같은 것"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다(빌 3:8). "그는 세상 열왕들보다 더 높으시며"(시 89:27) 상계나 하계의 어떤 주권자나 권세자보다 "더욱 뛰어난 이름을 얻으셨다"(빌 2:9; 히 1:4). 그는 "만 사람 중 기수"이다(뛰어난다는 단어는 깃대를 드는 자란 의미도 지닌다). 기는 으레 부대원 중에서 가장 키가 크고 용모가 아름다운 자가 들게 마련이다. 그는 친히 "기호로 섰으며"(사 11:10) 우리는 그 깃발 아래로 모여야 하며 언제든지 그 기호에서 눈을 떼서는 안 된다.
그는 "일만인 중 가장 아름답고" 이만인 중에서 우리에게 가장 적합한 분이시다. 왜 그가 우리의 영혼 속에서 가장 내면 깊숙히 그리고 가장 윗자리를 점유해야 하는 지의 모든 이유는 여기에 있다.
2. 이 여인은 그의 재예(才藝)에 관한 개개의 명세서를 제시하며 그의 능력이나 팔등신 같은 균형미를 숨기지 않고 있다.
그리스도께 있는 것은 무엇이나 다 사랑스럽다. 여기에서 이 여인이 그의 아름다움에 대하여 제시해 주는 사례는 열 가지로서 우리는 이 말씀을 너무 엄격히 적용할 필요가 없다. 이것을 억지로 비틀어 해석하려 드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에 상처를 내어 피흘리게 만드는 일이며 말씀을 왜곡시키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전체적으로 보아 이 열 가지 비유의 목적은 그가 어느 모로 보더라도 자기의 사업에 적합한 자격을 구비하고 계시며, 우리의 존경과 사랑과 신뢰의 대상이 될 만한 모든 점을 다 자기 안에 갖추고 계신 분임을 나타내는 데에 있다.
그리스도께서 요한에게 나타나신 일(계 1:13 이하)은 본문의 신부가 그에게 대해 묘사하는 표현에 비할 수 있으며 이 양자의 의도는 그를 초월적 영광의 소유자로 나타내는 데에 있다. 즉 위대하시고 은혜로우신 그분이 신도들의 눈에 사랑스런자로 보이게 하고 신도들로 하여금 그의 안에서 행복을 누리도록 하는 것이 바로 이 두 표현의 의도인 것이다.
(1) "그의 머리는 정금 같다."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 이시고"(고전 11:3) 성도들에게는 "전능자가 저희의 금," 곧 저희의 방어자, 저희의 보물이 되실 것이라는 약속을 해 주셨다(욥 22:25). 하물며 "하나님의 신성의 모든 충만하심이 육체로 거하시는"(골 2:9) 그리스도께는 한층 더 그러하지 않겠는가! 그리스도의 머리는 만물에 대한 그의 지고하신 통치권과 자기 교회와 그 모든 구성원에 대한 그의 생생한 영향력을 나타낸다. 이것은 "금"과 같고 또한 "금"이기도 하다. 앞에 나오는 금이란 단어는 원래 의미대로 금의 번쩍거림을 뜻하고 뒤에 나오는 금이란 말은 금의 강함과 굳음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주권은 아름답고 강력하다. 느부갓네살의 군주 정치는 여타의 모든 왕권을 능가하였기 때문에 "금 머리"(단 2:38)에 비유되는데 그리스도의 다스리심도 그와 같은 것이다.
(2) "그의 머리털은 고불고불하고 검구나." 그러나 그의 두 발은 "게달의 장막처럼 검은" 것이 아니다. 게달의 장막에게는 검은 것이 보기에 흉한 것이었고 따라서 교회는 스스로 그것을 피했었다(1:5). 반면에 그의 머리털은 "까마귀처럼 검다." 까마귀에게는 검다는 것이 곧 그의 아름다움이다. 때때로 그리스도의 모발은 "희다"고 표현(계 1:14)되는데, 이는 그의 영원성 곧 그는 "옛적부터 계신 분"임을 의미한다. 그러나 본문에서 "검고 고불고불하다"고 표현한 것은 그가 언제나 젊고 그에게는 쇠함이 없으며 늙게 하는 것이 없음을 상징한다.
신자들의 눈에는 그리스도께 속하는 것은 무엇이나 사랑스럽게 보이는 까닭에 그의 머리털조차도 아름다워 보인다. 그러한 그의 "머리털"이 그가 은혜를 주시기 위해 기다리시는 동안 "밤이슬에 젖고" 그의 "머리에 이슬"이 가득하였다고 하는 것은 유감된 일이 아닐 수 없다(2절).
(3) "그의 눈은 시냇가의 비둘기 같이" 아름답고 맑으며 정결하고 인자하구나. 비둘기들은 시냇물을 좋아하며 거울처럼 그 물속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본다. 그 눈은 깨끗하게 하기 위해 씻겨졌고 희게 하기 위해 젖으로 씻겨졌으며 "아름답게 박혀서" 튀어나오지도 움푹하게 들어가지도 않았구나. 그리스도께서는 "눈이 너무나도 정결하여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는데"(합 1:13) 이는 그 눈이 비둘기 눈인 까닭이다.
여기에서 신부가 "그의 눈"에 대해 말하듯이 모든 신도들은 그리스도의 전지(全知)하심에 대해 즐거움을 가지고 말한다. 그의 눈이 비록 자기 대적들에게는 "불꽃"같아서 공포를 안겨 주지만(계 1:14)그의 친구들에게는 "비둘기 눈"처럼 다정스럽고 위안을 주는 눈이니, 이는 그의 눈이 그들의 성실함에 대한 증인이 되는 까닭이다. "주께서는 모든 것을 아시며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아시나이다." 늘 그리스도의 시선 하에 있는 것처럼 행하는 자들은 복되고 거룩하다.
(4) "그의 뺨"(얼굴의 돌출부)은 정원에서 재배되는 "향기로운 꽃밭 같다." 꽃밭은 정원의 아름다움이며 그 재산이 된다. 또 그의 뺨은 "향기로운 풀 언덕"이나 달콤함의 망대와도 같다. 그리스도의 용안에서 모든 성도들의 눈에 사랑스럽게 비치는 곳은 바로 이 뺨이다. 극히 짧은 시간에 흘낏 쳐다봐서도 사랑스러운 것은 이 뺨이 그의 얼굴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스스로 영혼에게 대해 잠깐만 살펴보시더라도 그것은 그 영혼을 소생시키며 원기를 북돋아 주고 가장 현란한 꽃이나 짙은 향기보다 더욱 향기롭게 된다.
(5) "그의 입술은 백합화 같다." 그러나 백합처럼 흰 게 아니라 백합과도 같이 향기롭고 즐거운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의 입술에서 나오는 말씀"도 성별된 모든 자에게 "꿀이나 꿀송이(벌집)보다 더 달다." "그 입술의 입맞춤" 즉 그의 모든 은혜로운 교제도 향기롭고 즐거운 것이다. "그의 입술에는 은혜가 담겨져 있어서" 그의 말씀을 듣는 이들은 "그의 입에서 나오는 은혜로운 말씀에 놀랐다" "그의 입술"은 "백합화"같고 "몰약의 즙이 뚝뚝 떨어진다."
자연 속의 그 어떤 백합화에서도 몰약이 떨어지지는 않았으며 자연 속에 있는 어떤 사물도 그리스도의 아름다우심과 빼어나심을 완전히 그려 낼 수는 없다. 그러나 비유로써 이것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의 혼합으로 그 영상을 나타낼 수밖에 없다.
(6) "그의 손은" 유명한 보석. 즉 "황옥을 물린 황금 노리개 같다"(14절). 위인들은 손가락에 다이야몬드가 기타 보석을 박은 금반지를 끼고 손장식을 하였다. 그러나 이 여인에게는 "그의 손" 자체가 "금반지처럼" 보였다. 그의 권력에 의한 모든 일기, 그의 손이 하시는 일, 그리고 그의 섭리와 은총이 수행해 내시는 모든 것은 전부가 다 황금처럼 부요하며 "보배로운 줄마노(onyx)와 청옥(sapphire)처럼" 귀중하고, "금반지"가 손가락에 꼭 맞듯이 모두가 다 그 의도대로 목적에 부합하며 "황옥을 물린 반지처럼" 전부가 다 아름답고 매우 어울린다. 자기 백성을 영접하거나 그들에게 선물을 주기 위해 펼치신 그의 손은 이렇게 부요하고 아름답다.
(7) "그의 몸은 아로새긴 상아같다." "그의 심금(원래의 뜻은 내장)은 찬란한 상아 같구나." 원문에서는 그의 배(腹部)라고 되어 있으나 그 보다는 그의 마음이라도 번역하는 게 옳을 듯하다. 4절의 "마음"이란 말에 사용한 단어도 이 단어와 동일하며 하나님께 드리는 말씀(사 63:15; 렘 31:20)에서도 동일한 단어가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말은 그의 배우자에게 자애로운 동정심과 애정을 의미하며 황량하고 버림받은 상태에 처한 그녀에게 대해 그가 품고 있는 사랑을 뜻한다.
그가 품는 이 사랑은 훌륭하게 손질해 놓고 "청옥으로" 화려하게 "입혀 놓은, 아로 새긴 상아" 같다. 그 사람 자체만 해도 강열하고 견고하지만 그 사랑의 사례와 상황은 휘황 찬란하여 측량할 수 없는 그 사랑의 가치에더 더 많은 것을 보낸다."
(8) "그의 다리는 화반석 기둥 같아서" 매우 강인하고 당당하며 아무런 흠이 없어서 그 다리가 놓이는 "정금 받침에" 조금도 치욕이 되지 않는다(15절).
이 표현은 그의 안정성과 견실함을 말해 주고 있다. 그는 자기 발을 놓는 곳이면 그 곳에서 발을 고정시키고 계실 것이다. 그는 자기 어깨 위에 놓인 통치의 모든 무게를 감당하실 수가 있으시며 그의 다리는 결코 쓰러지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우리 하나님, 우리 왕이 그의 성소에서 행차" 하실 때의 위풍당당하심과 장려하심을 나타내는 것이며(시 68:24) 자기 백성에게 대한 그의 모든 섭리가 시종일관하고 공평함을 표현하는 것이다. "여호와의 길은 공평하며" 그 모두가 "자비요 진리"이다. 이들은 하늘이 기둥보다 더욱 오래가는 "화반석 기둥"이다.
(9) "그의 형상"(그의 외양과 풍채)은 저 웅자(雄姿)를 드러낸 레바논 같구나. 그의 아름답고 매혹적인 모습은 저 즐거운 숲이나 공원의 경치 같으며, 높이나 강도에 있어 딴 나무를 능가하며 훌륭하게 쓰이는 "백향목처럼 훌륭하구나." 그리스도는 좋은 분이시다. 우리가 그를 많이 보면 볼수록 우리는 그에게서 더욱 많은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10) "그의 입을 심히 달다." 그의 입은 감미로움 그 자체이다. 그것은 "여러 가지 감미로움"이다(이 단어는 추상 명사임에도 복수형으로 되어 있다). 그의 입은 단 것의 순수한 정수(精髓)이다. 아니 그것은 모든 즐거움의 진수(眞髓)이다(16절).
그 입의 말씀은 믿는 자들에게는 매우 달아서 어린 아이들에게 주는 젖과 같이 달고(어린 아이에게는 젖이 기분 좋은 음식이다) 다 자란 이들에게 주는(성인들에게 꿀은 맛이 나는 음식이다) 꿀과 같이 달다(시 119:103). 그 입의 입맞춤은 그의 사랑에 대한 모든 표시로서 그 입맞춤 자체에 초월적 감미로움을 포함하고 있기에 자기들의 "영적 감각을 활동"시키고 있는 자들에게는 커다란 즐거움을 준다. "믿는 너희들에게는 그가 보배로우신 분이다."
3. 이 여인은 믿음과 소망에 대한 충분한 확신을 가지고 결론을 내리며 따라서 자기의 고난을 극복하고 있다.
(1) 여기에는 주 예수의 완전하신 아름다움에 대한 전적인 믿음의 확신이 나온다. "그 전체가 사랑스럽구나. 전체가 아무런 흠하나 없는데 어찌하여 내가 구석구석 세부적으로 언급해야 하나?"
이 여인은 자기가 그에게 대한 세부적 묘사를 함으로써 그를 잘못 대우한다는 사실을 감지하며 자기의 묘사가 그 대상의 위엄이나 장점에는 미쳐 불급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이 전체적인 찬사로써 돌연 끝을 맺는다. "그는" 참으로 "사랑스러우며" 전체적으로 사랑스럽다. 그에게는 사랑스런 것밖에는 아무 것도 없고 그에게 있는 것외에는 아무 것도 사랑스럽지 않다. "그는 온갖 사모와 소원의 대상이다."
그는 사람이 바랄 수 있는 모든 것을 자기 안에 갖고 계신다. 그러므로 이 여인의 모든 소원은 그를 향한 것이며 이 여인은 이토록 주의를 기울여 그를 찾고 그가 없이는 만족히 쉴 수도 없는 것이다. 그토록 사랑스런 그를 누가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2) 여기에는 그에게서 얻은 이익에 대한 이 여인의 전적인 소망의 확신이 나온다. "이는 나의 사랑하는자요 나의 친구이다. 그러므로 내가 이토록 그를 그리워한다고 하여 이상히 여기지 말아라."
이 여인이 얼마나 거룩하고 담대하게 그와의 관계를 주장하며 얼마나 거룩하고도 의기양양하게 사실을 선언하고 있는지 살펴보라. 훌륭함을 달콤하게 하는 것은 그것을 소유한다는 데에 있다. 그리스도를 보되 그를 우리의 것으로서 보지 못한다면 그것은 행복이라기 보다 오히려 고통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토록 아름다운 자를 보며 동시에 그가 우리의 소유임을 보게 된다면 그것은 완전한 민족이 될 것이다.
여기에서 참된 신자의 모습이 부각되고 있다.
1) 그리스도께 전적인 동의를 보내는 자. "그는 내것이요" "나의 주, 나의 하나님"(요 20:28)이시다. 복음의 언약이 갖는 취지에 따라 그는 내것이며 나에게 부여된 모든 관계에서 내 것이고, 내게 모든 것이 되어 주셔서 나의 불쌍한 영혼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채워 주시는 분이시다."
2) 그리스도께로부터 완전한 만족을 얻는 자. 이것은 여기에 뽐내는 듯한 태도로 서술되고 있다. "이분은 내가 택한 자요, 나 자신을 들어바친 분이시다."
나는 그리스도밖에는 아무도 선택하지 않았고 그리스도 이외에는 나 자신을 죄다 들어 바친 분은 없노라. 그는 내 마음이 지향하고 있는 분이시니 그는 나의 가장 사랑하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는 내가 신뢰하는 분이시며 모든 선을 기대하는 자이시니 "그는 나의 친구인 까닭이다."
그리스도를 자기의 사랑하는 자로 삼는 자들은 그를 자기들의 친구로 가지게 될 것이다. 그는 모든 신자들에게 특별한 친구가 되시니 이것은 과거에도 그러하셨고 미래에도 그러하실 것이다. 그는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사랑하신다. 그리고 그를 친구로 삼고 있는 자들은 그를 자랑하고 그에 관해 기쁨으로 말할 만한 이유를 가진다. "딴 사람들은 이 세상에 대한 사랑에 의해 지배받고 세상과의 교제나 세상의 호의 속에서 자기들의 행복을 구하지만 이는 나의 사랑하는 자요 나의 친구이다. 타인들은 자기들 좋은 대로 행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 영혼이 택한 분은 이분이시다. 그는 내 영혼의 안식이요, 내 생명이며, 나의 기쁨이고, 나의 전부다. 그는 내가 함께 살고, 함께 죽고 싶어하는 분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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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신랑의 아름다움
##1-5절, 신랑의 방문
[1절]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내가 내 동산에 들어와서 나의 몰약과 향재료를 거두고 나의 꿀송이와 꿀을 먹고 내 포도주와 내 젖[우유]을 마셨으니 나의 친구들아, 먹으라.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아, 마시고 많이 마시라.
본절은 신랑의 말로서 신부의 말(4:16)에 대한 대답이다. 그는 그의 동산에 들어왔고 그의 몰약과 향재료를 거두었고 그의 꿀송이와 꿀을 먹었고 그의 포도주와 젖을 마셨다고 말한다. 그의 동산은 교회를 가리킨다고 본다. 신랑되신 주께서는 성령으로 교회 속에 즉 성도들 가운데 오셨고 지금 그들 안에 계신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 말했다(고후 13:5).
‘몰약과 향 재료’는 성도들의 선하고 덕스러운 행실을 상징하고 ‘꿀송이와 꿀’은 성도들의 입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진리들을 가리킬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고 맛있는 음식이다(시 19:10; 119:103). ‘포도주와 우유’도 생명과 영양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킬 것이다(사 55:1-3; 계 22:17). 주께서는 속죄의 은혜를 먹는 음식과 마시는 음료수에 비유하셨고(요 6:53-56) 사도 베드로도 하나님의 말씀을 우유에 비유했다(벧전 2:1).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을 다 ‘나의’ 것들이라고 표현한 것은 그것들이 다 주님의 구원의 결과이며 주의 영께서 은혜로 주신 것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신랑은 자신뿐 아니라, 친구들, 사랑하는 자들이 와서 배불리 먹고 마시라고 말한다. 그것은 성도들의 선한 행실과 하나님의 진리의 선포와 고백이 주님께 기쁨과 영광을 돌릴 뿐 아니라, 천사들과 모든 신자들이 그와 함께 크게 기뻐하고 즐거워할 일임을 나타낸다.
[2절] 내가 잘지라도 마음은 깨었는데 나의 사랑하는 자의 소리가 들리는구나. 문을 두드려 이르기를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야, 문 열어 다고. 내 머리에는 이슬이, 내 머리털에는 밤 이슬이 가득하였다 하는구나.
본절 이하의 여러 절들은 신부의 말이다. 신부는 육신적으로 잘지라도 마음은 깨어 있고 그의 사랑하는 자 곧 신랑의 소리를 듣는다고 말한다. 그는 신랑을 얼마나 사모하였던지 잠자면서도 마음은 깨어 있었고 그의 문 두드리며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신랑이 문을 두드리는 것은 주께서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령의 감동으로, 혹은 하나님의 섭리로 깨우치시는 것을 가리킬 것이다.
신랑은 신부를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야”라고 부른다. ‘나의 누이, 나의 사랑’은 친근한 사랑의 대상임을 말하고, ‘나의 비둘기’는 이상적 교회의 온유함과 순결함을 상징한다고 본다(마 10:16). ‘나의 완전한 자’라는 말은,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가 비록 부족투성이일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들로 여기심을 나타낸다. 히브리서 10:14,“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문을 열어 달라’는 신랑의 말은 요한계시록 3:20에 있는 주의 말씀과 비슷하다. 거기에 보면, 주께서 사람의 마음문을 열어 달라고 말씀하신다. 문을 여는 것은 회개와 믿음과 순종을 상징할 것이다.
또 신랑은 자기의 머리에 이슬이, 그의 머리털에 밤 이슬이 가득하다고 말한다. 이것은 주께서 범죄하고 연약해진 성도의 마음 밖에서 그가 회개하기를 오래 기다리심을 상징할 것이다.
[3절] 내가 옷을 벗었으니 어찌 다시 입겠으며 내가 발을 씻었으니 어찌 다시 더럽히랴마는.
사람이 낮에 일할 때는 옷을 입고 주로 발로 뛰지만, 밤에 쉴 때는 옷을 벗고 발을 씻는다. 지금 신부는 밤이 되어 쉬기 위해 옷을 벗었고 발을 씻었다. 비록 사모하는 신랑이 찾아왔으나 일어나 옷을 입고 맞기에 불편함과 번거로움이 있었다. 그는 지금이 신랑을 맞을 적절한 시간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그를 위해 문을 열어주기를 주저한다.
이것은 성도가 육신적 평안이나 안일에 빠져 찾아오신 주님을 맞이하기를 주저하는 것을 상징할 것이다. 우리의 몸은 연약하고 무능하여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주님의 초청에 즉시 응답지 않고 때때로 응답을 지연하거나 주저한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교훈하였다(롬 12:11).
[4절] 나의 사랑하는 자가 문틈으로 손을 들이밀매 내 마음이 동하여서.
‘나의 사랑하는 자’ 곧 신랑이 문틈으로 손을 들이미신다. 그것은 주께서 무디어진 우리의 심령을 찌르듯이, 손을 들이밀듯이, 감동하시고 활동하시는 것을 나타낼 것이다.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손 혹은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표현되신다. 마태복음 12:28,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누가복음 11:20,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혹은 손가락]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우리의 심령을 찌르시는 것이 성령의 은혜이다.
주께서는 두아디라성의 자주 장사 루디아의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듣게 하셨다(행 16:14). 주께서 우리의 심령에 은혜를 주셔야 우리가 주를 믿고 그를 사랑하고 그를 따를 수 있다.
[5절] 일어나서 나의 사랑하는 자 위하여 문을 열 때 몰약이 내 손에서, 몰약의 즙이 내 손가락에서 문빗장에 듣는구나[떨어지는구나].
신부는 안일한 마음으로 주저하던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것은 그의 회개와 순종의 결단을 상징할 것이다. 주께서 하신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의 재산을 분배받은 둘째 아들은 아버지를 떠나 먼 나라에 가서 허랑방탕하게 살다가 심히 빈곤하고 비참한 처지에 떨어졌으나 자신의 처지를 깨닫고 아버지 집의 풍요로움을 그리워하며 마침내 굳게 결심하고 일어나 아버지께로 돌아갔다(눅 15:20). 사도 바울도 처음 믿을 때 “이제는 왜 주저하느뇨?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는 말을 들었다(행 22:16). 주께서는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고 말씀하셨다(계 3:19).
신부가 문을 열 때 몰약이 그의 손에서, 몰약의 즙이 그의 손가락에서 문빗장에 떨어졌다. 몰약은 맛은 쓰지만 향기가 좋은 식물이며 성경에서 관유의 재료로 쓰였고 그 외에도 진통제와 방부제로 쓰였다. 신부는 몰약 향유를 손에 풍성히 바르고 신랑을 맞이하려 하였기때문에 그것이 손에서, 손가락에서 떨어진다는 표현일 것이다.
신부의 손과 손가락에서 떨어지는 몰약은 하나님을 사모하는 성도들의 회개와 순종의 행위를 가리킬 것이다. 회개와 순종은 자기 부정의 고통이 따르지만, 하나님 앞에서 향기로운 행위이다. 죄와 불순종은 추한 모습이며, 회개와 순종은 향기로운 일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성도들의 합당한 마음과 행위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성령의 감동으로 주셔야 가능한 일이다(행 11:18).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주 안에서 완전한 자로 여기신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만 믿고 그의 의(義)를 감사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육신적 만족과 안일에 빠져 있지 말고 때때로 우리가 연약할 때 우리를 부르시고 마음 문을 두드리시는 주의 음성에 응답하고 그를 영접하며 그를 따라 회개와 순종의 삶을 살아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꿀송이와 꿀로, 포도주와 우유로, 몰약과 향 재료로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 성경말씀에 합한 찬송과 기도를 올리고 그 말씀에 근거한 선한 인격과 행실로 영광을 돌려야 한다.
##6-9절, 신랑을 만나지 못함
[6절]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 위하여 문을 열었으나 그가 벌써 물러갔네. 그가 말할 때에 내 혼이 나갔구나. 내가 그를 찾아도 못 만났고 불러도 응답이 없었구나.
신부가 뒤늦게 깨달음을 가지고 회개하는 마음으로 문을 열었으나 신랑은 이미 물러갔고 떠난 후이었다. 때가 늦었다. 신부는 문 앞에서 신랑을 볼 수 없었다. 이것은 신부의 더디 응답함과 주저함, 즉 그의 안일함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와 같았다. 사람이 그의 초청을 거절하면 하나님께서 그를 완전히 외면하시는 경우도 있다. 잠언 1:24-26,“내가 부를지라도 너희가 듣기 싫어하였고 내가 손을 펼지라도 돌아보는 자가 없었고 도리어 나의 모든 교훈을 멸시하며 나의 책망을 받지 아니하였은즉, 너희가 재앙을 만날 때에 내가 웃을 것이며 너희에게 두려움이 임할 때에 내가 비웃으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만날 만한 때에 그를 부르고 찾아야 한다. 이사야 55:6,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그가 말할 때에 내 혼이 나갔구나”라는 말은 2절에서 신랑이 문을 두드리며 문을 열어달라고 요청할 때 그가 정신이 나가서, 바른 정신이 없어서 즉시 응답하여 문을 열어드리지 못했다는 신부의 자책의 말이라고 본다. 신부는 정신이 없어서 좋은 기회를 놓쳤다. 바른 정신이 있었다면 문을 열고 그를 영접하였을 것이나, 기회를 잃었다.
신랑이 이미 떠난 후이었기 때문에 신부는 그를 찾아도 못 만났고 그를 불러도 응답이 없었다. 그것은 분명히 그의 게으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이었다. 마지막 날에 천국문이 닫힌 후에도 늦게 와서 문을 두드리는 자들은 결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을 것이다(눅 13:24-25).
[7절] 성중에서 행순(行巡)[순찰]하는 자들이 나를 만나매 나를 쳐서 상하게 하였고 성벽을 파수하는 자들이 나의 웃옷을 벗겨 취하였구나.
신부는 신랑을 찾으러 문밖에 나갔고 성중에서 성을 돌며 지키는 자들을 만났는데 그들은 그를 상하게 하였다. 성벽을 지키는 자들도 비슷한 부류의 사람들인데 그들은 그의 웃옷을 벗겨 취하기까지 하였다. ‘순찰하는 자들’이나 ‘성벽을 파수하는 자들’은 교회의 직분자들을 가리키는 것 같다. 그런데 교회의 직분자들이 주를 사모하는 진지한 신자를 돕고 위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해치고 핍박한 것이다.
이런 일은 교회역사상 구약시대나 신약시대나 많이 있었다. 땅 위에 이상적 교회가 없었다. 지상 교회들은 항상 많은 연약을 보였고 때때로 심히 부패했다. 선한 직분자들은 경건하여 연약한 자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배려하며 돌아보지만, 악한 직분자들은 경건하고 진지하기보다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것들을 구하고 그런 방식으로 행동하곤 하였다. 그들은 오히려 경건한 교인들을 멸시하고 비방하고 중상모략하였으며 그들을 낙심시키고 핍박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 선지자 당시의 유대 지도자들을 자기만 먹이고 약한 자들을 강포로 다스리는 자들이라고 책망하셨다(겔 34:2, 4).
구약교회의 지도자들인 왕이나 제사장들은 참 선지자들을 핍박하고 죽이기도 했다. 예수님 당시 교회 지도자들인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게 했다.
사도 바울은 구약교회의 지도자들에게 많은 핍박을 받았다. 교회의 부패는 그 지도자들, 그 직분자들의 부패에서 잘 드러났다.
[8절] 예루살렘 여자들아, 너희에게 내가 부탁한다. 너희가 나의 사랑하는 자를 만나거든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다고 하려무나.
신부는 예루살렘 여자들에게 그의 사랑하는 자를 만나거든 그가 그를 사랑하기 때문에 병이 났다고 말해달라고 부탁한다. 아가 2:5에 서도 그는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음이니라”고 말했다. 그는 신랑을 너무 사랑하고 사모한 나머지 병이 났다. 성도는 하나님을 사랑하며 사모하지만, 때때로 하나님의 함께하심이나 그의 도우심과 응답하심을 보지 못하여 병이 날 때도 있다. 시편 41편 저자는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하나님을 갈급하게 찾았으며 살아계신 하나님을 갈망하였고 그의 도우심과 응답하심을 받지 못한다는 주위의 조롱 때문에 주야로 눈물까지 흘렸고 그의 영혼은 낙망하고 불안해하였다(시 41:1-3, 5). 시편 119편 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항상 사모함으로 그의 마음이 상한다고 고백하였다(시 119:20).
그러나 이런 때에도 성도는 낙심치 말고 주를 찾는 일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다면 마침내 그를 만나게 될 것이다. 예레미야 29:12-13,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며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다가 갑자기 멸망당한 노아의 때나 롯의 때와 같이 주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도 비슷한 현상이 있을 것이며 어떤 사람들은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해져 덫과 같이 그 날을 맞이할 것이다(눅 17:27-28; 21:34). 그러나 참된 성도는 어떤 상황에서도 낙심치 말고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눅 18:1; 마 24:42-43).
[9절] 여자 중 극히 어여쁜 자(하야파 )야, 너의 사랑하는 자가 남의 사랑하는 자보다 나은 것이 무엇인가. 너의 사랑하는 자가 남의 사랑하는 자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기에 이같이 우리에게 부탁하는가.
신부는 ‘여자 중 극히 어여쁜 자’라고 불리운다. 이 표현은 이상적교회와 신자들을 묘사하는 것이라고 본다. 이상적 교회와 신자들은 극히 아름답다. 그것은 영적, 도덕적, 인격적인 면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상적 신자들은 경건하고 성결하며 선하고 진실하다. 그들은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형제들과 이웃을 진심으로 사랑한다.
예루살렘 여자들은 “너의 사랑하는 자가 남의 사랑하는 자보다 더 나은 것이 무엇인가”라는 뜻으로 두 번이나 반복하여 말한다. 예루살렘 여자들은 아직 영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일반 교인들을 상징하는 것 같다. 그들은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구주의 뛰어나심에 대해 알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두 번이나 반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께서는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시며 영원 전부터 스스로 계신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그는 천지만물을 홀로 창조하셨고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며 도덕적으로 완전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는 영광의 하나님이시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보다 더 사랑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이시며 그로 말미암아 천지만물이 창조되었다. 그는 사람의 아들로 이 세상에 오셨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셔서 대속제물이 되셨고 3일 만에 부활하셨고 40일 만에 승천하셨고 영광 중에 재림하실 것이다. 그는 세세토록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시다(계 5:12). 이 세상의 그 무엇도, 금은보화도 주 예수님과 비교할 수 없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을 만날 만한 때에 불러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만날 만한 기회가 항상 있는 것이 아니며 죄를 회개할 수 있는 기회도 항상 있는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둘째로, 하나님을 참으로 믿고 따르려는 성도가 때때로 교회 안에서 비방과 핍박을 당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금방 얻지 못하지만 낙심하지 말고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디모데후서 3:12, “무릇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우리는 거룩하고 흠이 없는 교회를 세우기 위해 힘써야 하지만, 교회의 불완전함을 보거나 비방과 핍박을 당할 때 낙심치 말고 주님을 찾고 따라야 한다. 우리가 전심으로 주를 찾고 찾으면 그를 만나고 응답을 얻을 것이다.
셋째로, 우리는 이 세상에서 영원하신 하나님, 온 세상의 창조자와 섭리자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보다 더 귀한 것, 더 사랑할 만한 것, 더 복된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알고 그를 가장 사랑해야 한다.
##10-16절, 신랑의 아름다움
[10절] 나의 사랑하는 자는 희고도 붉어 만 사람에 뛰어난다.
신랑은 ‘나의 사랑하는 자’라고 불린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도들이 가장 사랑해야 할 분이시다. 우리가 먼저 그를 사랑한 것이 아니고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해 자신을 속죄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으므로(엡 5:2), 우리도 그를 가장 사랑해야 한다.
‘희다’는 원어(차크 )는 ‘눈부시다, 맑다’는 뜻이다(BDB, KB). 그것은 그의 거룩하심을 나타내는 것 같다. ‘붉다’는 말은 그의 건강하심 즉 그가 쇠하지 않으심을 나타내는 것 같다.
예수께서는 지극히 거룩하시다. 그는 아무 죄가 없으시다. 그러므로 성경은 두 번이나 그의 무죄하심을 증거한다(히 4:15; 요일 3:5).
또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셨다”고 말하였고(고후 5:21), 또 베드로는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다”고 증거하였다(벧전 2:22).
또 예수께서는 항상 건강하시고 약하지 않으신다. 그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다(요 11:25). 그는 약함이 없는 생명 자체이시다. 그는 사도 요한에게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라”고 말씀하셨다(계 1:17-18). 히브리서 13:8은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고 말했다.
그는 만 사람에 뛰어나신다. 본래 하나님과 동등하시며(빌 2:6-11)만물보다 먼저 나신(골 1:15-16) 그 분과 비교할 자는 아무도 없다.
[11절] 머리는 정금 같고 머리털은 고불고불하고 까마귀같이 검구나.
11절부터 16절까지에서, 신부는 신랑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흠이 없고 아름답다고 표현한다. 신부는 신랑의 머리가 정금 같다고 말한다. 정금은 가장 귀한 것을 나타낸다. 만왕의 왕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머리는 가장 귀하며 금면류관을 쓰기에 합당하시다(계 14:14).
또 신부는 신랑의 머리털이 고불고불하고 까마귀같이 검다고 말한다. ‘고불고불하다’는 원어(탈탈림, )는 ‘흔들리는 야자나무 가지들’을 뜻한다(BDB). ‘까마귀같이 검다’는 것은 원기왕성함을 뜻
한다. 사람이 젊고 건강하면 머리털이 많고 새까맣지만, 노약해지면 머리털이 적고 희어진다. 우리 주 예수께서는 세월이 흐른다고 쇠약해지는 분이 아니시다. 그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이시다(히 13:8). 그는 언제나 원기왕성하신 생명의 주님이시다.
[12절] 눈은 시냇가의 비둘기 같은데 젖으로 씻은 듯하고 아름답게도 박혔구나.
신부는 신랑의 눈이 시냇가의 비둘기 같으며 우유로 씻은 듯하고 아름답게 박혀 있다고 말한다. 성경에서 비둘기는 순결함의 상징이다(마 3:16; 10:16). 그것은 짐승의 사체(死體)를 먹는 까마귀가 불결함을 상징하는 것과 대조된다. 더욱이 시냇가의 비둘기는 시냇물에 씻은 것처럼 깨끗함을 나타낸다. 신부는 그것이 우유로 씻은 듯하고 아름답게 박혀 있다고 말한다. 사람의 눈은 그의 마음을 나타낸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눈이 거룩하고 아름답다는 것은 그의 마음이 거룩하고 아름다움을 나타낸다.
[13절] 뺨은 향기로운 꽃밭 같고 향기로운 풀언덕[돋운 화단]과도 같고 입술은 백합화 같고 몰약의 즙이 뚝뚝 떨어진다.
향기로운 풀들과 나무들이 있는 꽃밭과 화단은 아름다운 풀과 꽃때문에 보기에도 좋고 냄새도 향기롭다. 이와 같이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름다운 주님이시며 그의 인격은 참으로 향기롭다. 주께서는 친히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라고 말씀하셨다(마 11:29).
히브리서는, “이러한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합당하니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자라”고 증거하였다(히 7:26). 또 사도 베드로는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救贖)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고 말하였다(벧전 1:18-19).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온유하고 겸손하시며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과 같으시다.
또 신랑의 입술은 백합화 같고 몰약의 즙이 뚝뚝 떨어진다고 표현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몰약의 즙이 뚝뚝 떨어지듯이 은혜로운 말씀이 가득하시다. 누가는, “저희가 다 그를 증거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기이히 여겼다”고 증거했다(눅 4:22). 또 사도요한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증거하였고(요 1:14),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고 하였다(요 1:16-17).
[14절] 손은 황옥을 물린 황금 노리개 같고 몸은 아로새긴 상아에 청옥을 입힌 듯하구나.
신부는 신랑의 손이 황옥을 물린 황금 노리개 같다고 말한다. ‘황금노리개’라는 원어(갈릴 )는 ‘원통 막대, 혹은 막대기’라는 뜻이다(BDB). 옛날 영어성경은 ‘반지(ring)’라고 번역했고(KJV) 근래의 영어 성경들은 ‘막대기(rod)’라고 번역하였다(NASB, NIV).
손은 사람이 무슨 일을 하는 가장 중요한 지체이며, 특히 무엇을 나누어줄 때 꼭 필요하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손은 은혜와 능력의 손이다. 그는 그 손으로 수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다. 누가복음 4:40, “해 질 적에 각색 병으로 앓는 자 있는 사람들이 다 병인을 데리고 나아오매 예수께서 일일이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고치시니.”
손이 황옥에 물린 황금 원통 막대와 같다는 것은 그의 행하시는 일들과 은혜를 나누어주심이 부요하고 순수하고 존귀함을 가리키는 것 같다. 고린도전서 12:5,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에베소서4:7, 11,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 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주께서는 우리에게 직분을 주신다.
또 신부는 신랑의 몸이 아로새긴 상아에 청옥을 입힌 듯하다고 말한다. ‘몸’이라는 원어(메에 )는 ‘창자, 배, 몸’ 등의 뜻을 가진다.
특히 ‘창자’라는 뜻은 성경에서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을 상징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은 가장 아름답고 지극히 존귀한 몸이며 특히 그의 마음에 가득한 긍휼과 사랑은 참으로 아름답고 고귀하다. 고린도후서 5: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주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다.
[15-16절] 다리는 정금 받침에 세운 화반석[대리석] 기둥 같고 형상[모습]은 레바논 같고 백향목처럼 보기 좋고 입은 심히 다니 그 전체가 사랑스럽구나. 예루살렘 여자들아, 이는 나의 사랑하는 자요 나의 친구일다.
신부는 신랑의 다리가 정금 받침에 세운 대리석 기둥 같다고 말한다. 사람의 다리는 몸을 이동하고 지탱하는 지체이다. 다리가 튼튼한 사람은 어디든지 잘 다닐 수 있고 높은 계단도 잘 올라가며 또 오랫동안 서 있어도 피곤치 않는다. 그러나 다리가 튼튼하지 못하면 어디다니기도 힘들고 서 있기조차 힘들다.
예수 그리스도의 다리는 정금 받침에 세운 대리석 기둥처럼 아름답고 튼튼하시다. 그는 많은 죄인의 죄짐을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셨다(요 1:29). 그는 솔로몬 성전 앞 낭실의 두 기둥 야긴과 보아스처럼(왕상 7:21-22) 그의 나라와 교회를 붙드신다. 그러므로 교회는 모든 악한 세력의 대적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견고히 서 있다.
또 신부는 신랑의 모습이 레바논 같고 백향목처럼 보기 좋다고 말한다. 그것은 레바논 백향목처럼 아름답고 크고 위엄 있음을 묘사한 것일 것이다. 주 예수님의 모습은 아름답고 당당하고 위엄이 있으시고 그의 모습을 본 사도 요한은 그 발 앞에 엎드러졌었다(계 1:17).
또 신부는 신랑의 입이 심히 달다고 말한다. 입은 말하는 기관이다. 그의 입이 심히 달다는 말은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들이 심히 은혜스럽다는 뜻일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것은 성도들에게 심히 은혜가 된다. 시편 119:103,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하니이다.”
신부는 신랑의 몸 전체가 사랑스럽다고 말한다. 그의 눈에 신랑의 몸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사랑스럽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도들에게 바로 그러하시다. 그는 조금도 흠과 점이 없으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를 지극히 사랑하며 기뻐해야 한다(벧전 1:8).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얼굴과 피부가 희고 머리는 정금 같으시며 눈은 시냇가의 비둘기 같고 우유로 씻은 듯이 아름답고 뺨은 향기로운 꽃밭 같으시다. 그는 지극히 거룩하시고 지극히 존귀하시고 아름다우시고 영광스러우시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그를 따라 항상 거룩하고 선하고 품위 있게 살아야 하고 또 지극히 존귀하신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사랑해야 하고 결코 이 세상의 헛되고 죄악된 것들을 사랑하지 말아야 한다.
둘째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얼굴과 피부가 붉고 머리털이 검으시며 그의 다리는 정금 받침에 세운 대리석 기둥 같으시다. 그는 언제나 원기왕성하시고 쇠하지 않으시고 튼튼하게 행하신다. 우리는 그에게서 영원한 생명을 풍성히 받아 늘 힘있게 그를 믿고 따라가야 한다.
셋째로, 주 예수께서는 입술이 백합화같이 아름답고 몰약의 즙이 뚝뚝 떨어지며 그의 입의 말씀은 심히 달다. 그는 오늘날도 성경말씀 안에서 성령의 감동 속에 풍성한 은혜의 말씀, 꿀같이 단 말씀을 우리에게 주신다. 우리는 그 말씀을 늘 사모하며 받아 누리고 전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