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장: 의, 별거, 구제
1-4절, 왕의 마음, 정직, 의, 교만
[1절] 왕의 마음이 여호와의 손에 있음이 마치 보(洑)의 물(팔게-마임)[수로(水路), 물길]과 같아서 그가 임의로 인도하시느니라.
왕의 마음은 여호와의 손 안에 있는 물길 같다. 세상에서 통치자인 왕의 마음, 곧 그의 계획, 소원, 의향, 의도, 판단은, 온 우주의 통치자인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섭리하셔서 그의 원하시는 바대로 이루어진다는 뜻이다....지고지선의 뜻 이루시려 원하시는 바로 그때에 언제나 주권적으로 역사에 간섭하시는,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반드시 마음에 새기고 기대할 것!!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왕의 모든 일, 세상의 모든 사람의 모든 일, 즉 세상의 모든 일을 다 섭리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애굽 왕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셔서 이스라엘 백성을 여러 날 동안 놓아보내지 않게 하셨다. 출애굽기는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셨다고 9번 기록한다(4:21; 7:3; 9:12; 10:20, 27;11:10; 14:4, 8, 17).
하나님께서는 파사 왕 고레스를 감동하셔서 유대인 들이 고국으로 돌아가도록 허락케 하셨고(스 1:1-3),
또 아닥사스다 왕을 감동하셔서 느헤미야를 예루살렘 총독으로 보내어 그 성곽을 건축케 하셨다(느 2:5-6).
시편 115:3,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 시편 135:6, “여호와께서 무릇 기뻐하시는 일을 천지와 바다와 모든 깊은 데서 다 행하셨도다.” 사도 바울은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다”고 말했고(엡 1:11), 또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신다”고 말했다(빌 2:13).
[2절]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정직하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달아보시느니라].
‘행위’는 ‘길’이라는 뜻으로 사람의 하루하루 살아가는 삶의 걸음과 행위를 가리킨다.
인생은 하루하루 길 가는 나그네와 같다. ‘심령’이라는 원어(립보스 )는 ‘마음들’이라는 말로서 ‘마음의 여러 활동들’을 가리킨다고 보인다.
본문과 비슷하게, 잠언 16:2도,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고 말한다. 거기에서 ‘심령’이라는 원어(루코스 )는 ‘영들’이라는 말로서 ‘영의 여러 활동들’을 가리켰다고 보인다. ‘감찰한다’는 원어(타칸)는 ‘(길이나 무게를) 측량한다’는 뜻이다. 사람은 자기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다 정직하고 깨끗한 것 같아도,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마음과 영의 여러 활동들을 감찰하신다.
사람은 자신의 마음의 깊은 생각과 의향과 뜻을 다 드러내지 않지만, 전지(全知)하신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살피시고 재어보시고 달아보시고 판단하시는 것이다. 요한계시록 2:23에서 주 예수께서는,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 즉 우리의 생각과 의향과 판단이 착한지 그렇지 못한지, 겸손한지 교만한지, 진실한지 거짓된지, 사랑의 마음인지 미움의 마음인지, 거룩한 마음인지 불결한 마음인지, 순수한 마음인지 아니면 불순하고 이기적이고 계산적인 마음인지, 하나님의 영광만 위하는 마음인지 혹은 사람을 기쁘게 하고 그의 낯을 보거나 그의 비위나 맞추는 마음인지를 살피시고 우리의 마음을 재어보시고 달아보시고 판단하시고 선악간에 보응하시는 것이다.
[3절] 의와 공평을 행하는 것은 제사 드리는 것보다 여호와께서 기쁘게 여기시느니라.
의와 공평을 행하는 것은 모든 죄를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의 뜻에 순종하고 그의 계명에 순종하는 실제의 삶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단지 지식이나 형식이 아니라 바르고 의로운 삶, 곧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는 마음과 실제의 삶이다.
제사 드리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종교적 의식을 가리킨다. 물론 그것도 하나님의 명령이지만, 그것은 상징적 행위이었다. 그 실체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 성도의 경건과 회개, 속죄 신앙, 헌신과 순종과 감사 등이다. 의로운 삶은 참된 경건의 당연한 결과이다.
그러나 종교 의식은 의로운 삶을 동반하지 않는 형식적, 위선적 행위로도 가능하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이런 일에 대해 강하게 책망하셨다. 이사야 1:12-15,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말라기 1: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종교 의식보다 의롭고 선한 삶을 원하신다.
[4절] 눈이 높은 것과 마음이 교만한 것과 악인의 형통한 것(니르 )[경작하는 것(KJV), 등불(BDB, LXX, Vg, Syr, NASB, NIV)]은 다 죄니라.
높은 눈과 교만한 마음은 하나님 앞에서 큰 죄악이다.
잠언 6:16-17은, “여호와의 미워하시는 것 곧 그 마음에 싫어하시는 것이 6, 7가지니 곧 교만한 눈과 거짓된 혀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손과 악한 계교를 꾀하는 마음과 빨리 악으로 달려가는 발”이라고 말한다. 잠언8:13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 나는 교만과 거만과 악한 행실과 패역한 입을 미워하느니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겸손한 마음을 요구하신다. 주 예수께서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셨다(마 11:29).
시편 131편에서 다윗은,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치 아니하고 내 눈이 높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미치지 못할 기이한 일을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실로 내가 내 심령으로 고요하고 평온케 하기를 젖뗀 아이가 그 어미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중심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라고 말하였다(시 131:1-2). 겸손한 마음은 하나님의 명하시는 바이다.
본문은 또 악인의 등불은 죄라고 말한다. 등불은 기쁨과 즐거움을 가리킨다. 물론, 악인의 기쁨과 즐거움은 일시적이며 후에는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이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회개하라고 명하셨으나 그들이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먹고 마셨다고 책망하셨다(사 22:12-13). 예수께서도 “너희 이제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라고 말씀하셨다(눅 6:25). 악인들이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은 하나님께 미워하시는 죄악이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왕의 마음이 여호와의 손에 있음이 마치 물길 같아서 그가 임의로 인도하신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세계 역사를 주관하심을 알고 하나님만 바라보고 또 우리의 마음도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의 손 안에 있음을 알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순종해야 한다.
둘째로,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정직하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달아보신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바르고 정직하게만 살아야 한다.
셋째로, 의와 공평을 행하는 것은 제사 드리는 것보다 여호와께서 기쁘게 여기신다. 우리는 단지 형식적 교인이 되지 말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참 경건과 속죄 신앙을 가지고 의와 선을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넷째로, 눈이 높은 것과 마음이 교만한 것과 악인의 기뻐하는 것은 다 죄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교만한 마음과 악인의 즐거워함을 미워하신다. 우리는 늘 온유와 겸손으로 선을 행하기를 기뻐해야 한다.
5-8절, 근면, 속임, 강포, 범죄자의 길
[5절] 부지런한 자의 경영은 풍부함에 이를 것이나 조급한 자는 궁핍함에 이를 따름이니라.
원문에는 ‘확실히’라는 말(아크 )이 두 번 사용되었다. 다시 번역하면, “부지런한 자의 경영은 확실히 풍부함에 이를 것이나 조급한 자는 확실히 궁핍함에 이르리라”(NASB).
부지런한 자의 경영은 확실히 풍부함에 이를 것이다.
잠언 10:4는,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손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되느니라”고 말한다. 무슨 일이든지 많이 기도하고 생각하고 연구하고 새로운 일에도 도전하고 개발하며, 무슨 일이든지 열심히, 철저히 준비하고 인내하며 시행하는 자는 성공할 것이다. 그러려면 부지런해야 하고 그런 자만이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부지런한 자의 계획한 일은 좋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그러나 조급한 자, 즉 마음이 조급하고 손과 발이 조급한 자는 확실히 궁핍함에 이를 것이다. 그런 자는 무슨 일을 할 때 많이 생각하거나 많이 연구하거나 많이 준비하지 못한다. 그런 자에게서는 도전 정신, 개발 정신, 그리고 인내와 끈기를 찾아보기 어렵고, 또 그런 자에게서는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없다. 그런 사람은 시간이나 돈이나 힘만 낭비할 뿐이다. 그러므로 잠언 19:2는, “지식 없는 소원은 선치 못하고 발이 급한 사람은 그릇 하느니라”고 말한다.
우리는 옷을 입을 때 급하다고 첫 단추를 잘못 끼어나가다가 다시 풀고 처음부터 바로 끼어 더 더디게 된 경험이 한번쯤은 있을 것이다.
또 바쁠 때 서두르다가 크고 작은 사고가 나는 경우도 있다. 사고가 나면 일이 더 더디어지고 크게 낭패를 당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슨 일이나 급할수록 침착히 그러나 끈기 있게 행해야 함을 배운다.
[6절] 속이는 말로 재물을 모으는 것은 죽음을 구하는 것이라. 곧 불려다니는 안개[수증기]니라.
속이는 말은 거짓말, 불신실한 말, 일구이언, 약속을 지키지 않는 말, 과장된 말 등을 포함할 것이다. 속이는 말로 재물을 모으는 것은 불의하고 부정직하게 재물을 모으는 것을 말한다. 그러한 행위는 탐심과 죄성(罪性)에서 나오는 것이며 그 자체가 죄이다.
속이는 말로 재물을 모으는 것은 죽음을 구하는 것이다. 죄의 값은 죽음이기 때문이다. 물론, 속이는 말로 재물을 모으는 것만 죄요 죽음에 이르는 것이라는 말은 아니다. 모든 죄가 결국 다 죽음에 이른다.
또 속이는 말로 재물을 모으는 것은 불려 다니는 수증기와 같다. 수증기는 방금 전까지 있는 것 같다가 금방 사라지는 허무한 것이다.
불의하고 거짓되게 번 돈은 쉽게 없어지고 만다. 잠언 13:11은, “망령되이 얻은 재물은 줄어가고 손으로 모은 것은 늘어가느니라”고 말하고, 또 잠언 20:17은, “속이고 취한 식물은 맛이 좋은 듯하나 후에는 그 입에 모래[자갈]가 가득하게 되리라”고 말한다. 수천만원을 모으기는 힘들어도 날리기는 쉽다는 것을 우리는 살면서 종종 본다.
우리는 진실히 일하며 돈을 벌어야 한다. 사도 바울은 성도들에게 조용히 자기 일을 하고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며 자기 양식을 먹으라고 가르쳤다(살전 4:11; 살후 3:12). 또 그는 “누구에게서든지 양식을 값없이 먹지 않고 오직 수고하고 애써 주야로 일함은 너희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려 함이라”고 증거하며(살후 3:8), 그 자신이 손으로 일하여 그의 필요를 해결하는 모본을 보였다(행 20:34-35).
[7절] 악인의 강포는 자기를 소멸하나니 이는 공의 행하기를 싫어함이니라[거절함이니라].
악은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남에게 해를 끼치는 것을 말한다.
악인은 대체로 강포하다. 악인은 말이 거칠다. 그는 남을 쉽게 욕하며 부당하게 비난하고 남의 명예를 훼손하고 남을 중상모략한다.
악인은 행동도 거칠다. 그는 자기보다 약한 자들에 대해 강압적이며 또 자기의 뜻에 맞지 않으면 행패를 부리고 남을 해친다.
악인의 강포는 결국 자기를 소멸시킨다. ‘소멸한다’는 원어(가라르)는 ‘끌고 가버린다’(drag away)는 뜻이다(BDB). 어디로 끌고 가 버리는가? 더욱 잘못된 길로, 마침내 죽음과 멸망의 길로 끌고 가버리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사울은 정당한 이유 없이 신하 다윗을 죽이려고 끈질기게 노력했지만, 죄만 자꾸 짓다가 마침내 자신이 죽고 말았다.
다니엘의 동료들은 충성된 다니엘을 모함하여 죽이려 계획하고 마침내 그를 사자굴에 처형시키는 일에 성공한 듯하였으나, 도리어 자신들과 자신들의 처자들이 그 사자굴에 던지워 죽임을 당하였다. 아하수에로의 가장 높은 신하이었던 악한 하만은 모르드개와 그의 유다 민족을 다 죽이려고 계획하였으나, 결국 자신이 죽고 말았다.
악인이 멸망하는 까닭은 공의 행하기를 거절하였기 때문이다. 공의는 하나님의 계명대로 행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계명의 내용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사랑은 악을 행하지 않는다.
사랑은 강포하지 않는다. 사랑은 온유하며 사랑은 겸손하다. 그러나 악인은 평소에 하나님의 계명을 무시하고 그 계명 순종하기를 거절하였고, 그래서 그는 악하고 강포하게 되었다. 그는 점점 더 잘못된 길로 나아가며 마침내 멸망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8절] 죄를 크게 범한 자의 길은 심히 구부러지고 깨끗한 자의 길은 곧으니라.
‘죄를 크게 범한 자’라는 원어(와자르 )는 ‘죄를 범한 자’라는 뜻이며, ‘심히 구부러지다’는 원어(하파크파크 )는 ‘구부러지다’는 뜻이다.
‘죄를 범한 자의 길’은 죄를 범한 자의 행실을 가리키며 또 그의 가는 길, 그의 삶의 과정도 포함한다. 죄를 범한 자의 길은 구부러져 있다.
그 길은 우선 하나님의 말씀의 표준에서 떠나 있다. 물론 어떤 때에는 일치하게 보이기도 할지 모르나, 어떤 때에는 조금, 또 다른 때에는 매우 멀리 하나님의 말씀에서 이탈해 있는 것이다.
악인의 삶은 매우 주관적이며 감정적이고 변태무쌍하여 종잡을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악인의 삶의 과정은 구부러져 있다. 그 길은 평탄치 못하다. 그의 길에는 가시덤불과 재앙이 많다. 악인에게는 평안이 없다.
이사야 48:22,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
사도 바울은 파멸과 고생이 죄인들의 길에 있고 그들이 평안의 길을 알지 못한다고 말하였다(롬 3:16-17).
그러나 깨끗한 자의 길은 곧다. 사람 중에 정말 깨끗한 자는 아무도 없으나,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의 피로 죄씻음 받고 죄를 버리고 속죄신앙 가지고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며 사는 자는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나오는 자는 주홍 같은 죄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며 진홍같이 붉은 죄라도 양털같이 되리라고 말씀하셨다(사 1:18). 이제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바르게 행하며 악을 버릴 것이다.
또 하나님께서 깨끗한 요셉에게 형통함을 주셨듯이,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에게 평안과 형통을 주실 것이다(창 39:2-3, 23).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부지런한 자의 경영은 풍부함에 이르나 조급한 자는 궁핍함에 이른다. 우리는 무슨 일이든지 조급한 마음으로 행하지 말고 많이 기도하고 부지런히 준비하고 계획해서 해야 한다.
둘째로, 속이는 말로 재물을 모으는 것은 죽음을 구하는 것이며 불려다니는 수증기와 같다. 우리는 결코 더러운 이를 구하거나 탐하지 말고 범사에 진실하고 정직하고 정당하게, 부지런히 일하여 돈을 벌어야 한다.
셋째로, 악인의 강포는 자기를 소멸한다. 왜냐하면 공의 행하기를 거절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불의와 강포를 버리고, 혹시 실수하였다면, 즉시 회개하고 온유하며 겸손하고 정직하며 선하고 진실하게 살아야 한다.
넷째로, 죄를 범한 자의 길은 구부러지고 깨끗한 자의 길은 바르다. 우리는 죄 짓지 말고 바르고 깨끗하게 살아야 평안과 형통을 누린다.
9-12절, 다투는 여인, 악인, 벌, 공의
[9절] 다투는 여인과 함께 큰집에서(베스 카베르 )[집에 함께] 사는 것보다 움막에서(핀나스-가그 )[지붕의 한 구석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나으니라.
다투는 여인과 집에 함께 사는 것보다 지붕의 한 구석에서 사는 것이 낫다. 사람은 누구나 조용히 살고 싶어한다. 행복의 중요한 한 요소는 평안이다. 그것은 집보다 더 중요한 요소이다. 다툼은 사람을 피곤케 만든다. 다툼은 오해, 미움, 욕심, 시기심 등에서 나올 것이다.
그러나 사랑과 긍휼, 관용과 이해심이 있을 때, 평안도 있을 것이다.
성도의 덕은 사랑과 화평이다.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며 교만치 않고 무례히 행치 않고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참는다(고전 13장).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라고 교훈하였다(엡 4:31-32). 그때 평안과 행복도 있을 것이다.
특히, 여성의 덕은 온유함과 조용함과 순복함이다. 디모데전서 2:11,“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 베드로전서 3:1-4, “아내된 자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라. 이는 혹 도를 순종치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위를 봄이라.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조용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가정의 행복은 하나님 안에서 남편의 아내 사랑과, 아내의 남편 순종으로 인한 평안에 있다.
[10절] 악인의 마음은 남의 재앙을 원하나니[악인의 영혼은 악을 사모하나니] 그 이웃도 그 앞에서 은혜를 입지 못하느니라.
악인은 심히 악하다. 가인은 악을 고집하였고 동생 아벨을 죽였다(창 4:8).
노아 시대의 사람들은 심히 강포하였다(창 6:11, 13). 소돔과 고모라 성 사람들은 심히 악하여 롯의 집에 들어온 사람들을 성폭행하려 하였다(창 19:5).
고라의 친구들과 이스라엘 백성의 족장들 250명은 하나님의 종 모세를 심히 대적하였다(민 16:1-2). 이스라엘의 열왕들은 악하였고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핍박하고 죽였다. 신약시대의 유대 종교지도자들, 곧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죽였다. 주님을 3년이나 좇았던 가룟 유다는 은 30개를 받고 주님을 배신하고 그를 넘겨주었다.
사람은 심히 부패되고 악하여 선을 행할 수 없다.
예레미야 13:23,“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있느뇨?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
예레미야 17: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로마서 3:10, 12,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여전히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고 선을 행하는 것이다.
레위기 19:18,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호세아6: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미가 6:8,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仁慈)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11절] 거만한 자가 벌을 받으면 어리석은 자는 경성하겠고 지혜로운 자가 교훈을 받으면 지식이 더하리라.
‘경성하다’는 원어(카캄 )는 ‘지혜롭다, 지혜로워지다’는 뜻이다.
잠언 19:25는, “거만한 자를 때리라. 그리하면 어리석은 자도 경성하리라”고 말한다. 거만한 자는 자신을 높게 여기고 남을 멸시하고 비웃고 조롱하는 자이다. 우리는 그런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런 자가 벌을 받으면, 어리석은 자 곧 순진해서 아무 말이나 믿고 따름으로 잘못된 길에 빠지기 쉬운 자는 지혜를 얻을 것이다.
그러므로 신명기 13장에서 하나님께서는 형제나 친구가 다른 신을 섬기자고 권하면 그는 참된 종교를 부패시키는 큰 악을 범하는 것이니 그의 말을 듣고 그를 따르지 말고 그를 긍휼히 여기지 말고 돌로 쳐죽이라고 엄하게 명하신 후, “그리하면 온 이스라엘이 듣고 두려워하여 이 같은 악을 다시는 너희 중에서 행하지 못하리라”고 첨가해 말씀하셨다(신 13:6-11). 악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은 확실히 사람들에게 지혜를 얻고 정신을 차리게 하는 데 유익하다.
또 지혜로운 사람이 교훈을 받으면 지식이 더할 것이다.
잠언 1:5, “지혜 있는 자는 듣고 학식이 더할 것이요 명철한 자는 모략을 얻을 것이라.”
잠언 9:9, “지혜 있는 자에게 교훈을 더하라. 그가 더욱 지혜로워질 것이요 의로운 사람을 가르치라. 그의 학식이 더하리라.”
잠언19:25, “명철한 자를 견책하라. 그리하면 그가 지식을 얻으리라.”
지혜로운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계명을 행하고자 하는 자인데, 그런 사람이 하나님의 교훈, 즉 성경말씀의 교훈을 받으면, 그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 사람에 대한 지식, 구원과 내세에 대한 지식을 얻고 더 얻을 것이다. 우리는 이런 지혜로운 자가 되어야 한다.
[12절] 의로우신 자는 악인의 집을 감찰하시고 악인을 환난(라아 )[재앙]에 던지시느니라.
‘의로우신 자’는 하나님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악인의 집을 감찰하시고 악인들을 환난에 던지신다. 한 가정에서 아버지의 행동은 그 가족 전체의 경건과 도덕성에 영향을 미치고 그 가정의 행복에 영향을 준다.
하나님께서는 악인인 아버지 한 사람뿐 아니라, 그의 집 전체를 주목하시며 그 집에 내릴 재앙을 준비하신다. 시편 34:16은, “여호와의 얼굴은 행악하는 자를 대하사 저희의 자취를 땅에서 끊으려 하시는도다”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악인을 재앙에 던지신다.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보응이다. 신명기 32:35는 “보수(報讐)는 내 것이라. 그들의 실족할 그때에 갚으리로다”고 말한다.
마지막 날의 심판도 있지만, 세상에서도 하나님의 공의의 징벌이 있다. 그것은 악인들에게 내려지는 무서운 질병, 경제적 파탄, 전쟁, 그리고 지진과 기근 등의 자연재해 등이다.
시편 7:11-12,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 사람이 회개치 아니하면 저가 그 칼을 갈으심이여 그 활을 이미 당기어 예비하셨도다.”
시편 11:6, “악인에게 그물을 내려치시리니 불과 유황과 태우는 바람이 저희 잔의 소득이 되리로다.”
시편 58:10-11, “의인은 악인의 보복당함을 보고 기뻐함이여, 그 발을 악인의 피에 씻으리로다. 때에 사람의 말이 진실로 의인에게 갚음이 있고 진실로 땅에서 판단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 하리로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다투는 여인과 함께 집에서 사는 것보다 지붕 한 구석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낫다.
잠언 25:24에 같은 말씀이 있고, 잠언 21:19는, “다투며 성내는 여인과 함께 사는 것보다 광야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나으니라”고 말한다. 사람은 조용한 생활을 좋아한다.
평안은 사람의 행복의 중요한 요소이다. 우리는 사랑, 긍휼, 관용, 인내를 가져야 하고, 특히 여인들은 조용함과 온유함과 순종함을 가져야 한다.
둘째로, 악인의 영혼은 악을 사모하며 그 이웃도 그 앞에서 은혜를 입지 못한다.
사람은 심히 부패되어 선을 행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여전히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고 선을 행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그를 믿을 수도 없었고 지금도 의와 선을 행할 수 없음을 알고 그의 은혜를 사모하고 의와 선을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셋째로, 거만한 자가 벌을 받으면 어리석은 자는 지혜를 얻고 지혜로운 자가 교훈을 받으면 지식이 더한다. 우리는 교만과 어리석음을 버리고 지혜와 겸손을 구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징책으로 그것을 얻어야 한다.
넷째로, 의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악인의 집을 감찰하시고 악인을 재앙에 던지신다. 우리는 공의로우신 심판자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모든 악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의 안에서 의의 길을 걷는 자가 되어야 한다.
13-16절, 구제, 선물, 공의, 명철
[13절] 귀를 막아 가난한 자의 부르짖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면 자기의 부르짖을 때에도 들을 자가 없으리라.
가난한 자는 먹을 것과 마실 것이 없고 입을 옷과 쉴 방이 없을 때, 또 몸이 아프거나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부르짖는다. 그러나 교만하여 남을 무시하고 사랑과 동정심이 없는 사람은 가난한 자의 부르짖는 소리에 대해 귀를 막고 듣지 않는다.
구제와 선행은 시간과 돈이 드는 일인데, 그는 자기에게 손해되는 일은 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 것이다.
신명기 15:7-8, 10,“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 어느 성읍에서든지 가난한 형제가 너와 함께 거하거든 그 가난한 형제에게 네 마음을 강퍅히 하지 말며 네 손을 움켜쥐지 말고 반드시 네 손을 그에게 펴서 그 요구하는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주라,” “너는 반드시 그에게 구제할 것이요, 구제할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 것이니라.”
잠언 14:31,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존경하는 자니라.”
에베소서 4:28,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가난한 자의 부르짖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는 자는 자기의 부르짖을 때에, 즉 육신적으로, 물질적으로 어려운 일이 있을 때에도 들을 자가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기도의 응답을 주시지 않을 뿐 아니라 사람들 중에도 돕는 자가 없을 것이다.
신앙생활은 평소의 생활이다. 평소에 하나님의 법을 지키며 행해야 하고 평소에 하나님과 동행해야 한다. 그래야 환난 날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대할 수 있다.
[14절] 은밀한 선물은 노를 쉬게 하고 품의 뇌물은 맹렬한 분을 그치게 하느니라.
선물은 어떤 일의 대가로 주는 것이 아니고 단지 상대에 대한 사랑과 존경의 표로 그냥 주는 것이며, 은밀한 선물은 자신을 과시하거나 자랑하지 않고 자신의 사랑과 존경의 진심을 은밀하게 표현하는 것이다. 은밀한 선물은 흔히 상대방에 대해 가졌던 오해나 감정을 풀게 하고 노여운 감정까지도 누그러뜨린다.
잠언 18:16, “선물은 그 사람의 길을 너그럽게 하며 또 존귀한 자의 앞으로 그를 인도하느니라.”
뇌물은 맹렬한 분을 그치게 한다. 뇌물은 개인적 이해관계의 목적이 있는 선물이며 보통 그 정도가 좀 지나친 것이다. ‘품의 뇌물’ 곧 은밀한 뇌물은 맹렬한 분을 그치게 한다. 이것은 뇌물을 권장하는 말이 아니고 뇌물의 효능을 말하는 것뿐이다.
잠언 17:8, “뇌물은 임자의 보기에 보석 같은즉 어디로 향하든지 형통케 하느니라.” 물론, 뇌물은 좋지않은 것이다.
출애굽기 23:8, “너는 뇌물을 받지 말라. 뇌물은 밝은 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로운 자의 말을 굽게 하느니라.”
우리는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고 물질을 어려운 사람들과 나누는 자가 되어야 한다. 누가복음 6:38,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로 마서 12:13,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디모데전서 6:18, “[부자들을 명하여]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히브리서 13:1-2,16,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 이 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
[15절] 공의를 행하는 것이 의인에게는 즐거움이요 죄인[악을 행하는 자들]에게는 패망(메키타 )[두려움, 당황함](BDB)이니라.
‘공의’라는 원어(미슈파트 )는 ‘심판’ 또는 ‘공의’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공의를 행한다’는 원어는 ‘심판을 행한다’(KJV)는 뜻도 되고, ‘공의를 행한다’(NASB)는 뜻도 된다. 그 두 뜻이 다 가능하다.
의인은 하나님의 긍휼로 죄씻음 받고 하나님의 법을 지키며 사는 자이다. 의인은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며 오히려 기뻐할 수 있다. 그것은 자신의 의가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잠언 28:1,“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인은 사자같이 담대하니라.”
또 의인에게는 의를 행하는 것이 즐거움이다. 성도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기쁨과 즐거움이며 그것을 행하는 것도 그러하다.
시편 119편의 저자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즐거움이 되었음을 반복해 간증하였다. 24절, “주의 증거는 나의 즐거움이요.” 70절, “나는 주의 법을 즐거워하나이다.” 77절, “주의 법은 나의 즐거움이니이다.” 111절, “주의 증거로 내가 영원히 기업을 삼았사오니 이는 내 마음의 즐거움이됨이니이다.” 143절, “주의 계명은 나의 즐거움이니이다.” 162절, “나는 주의 말씀을 즐거워하나이다.” 174절, “주의 법을 즐거워하나이다.”
그러나 심판을 행하는 것은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는 두려움과 당황함이 된다. 그것은 공의의 형벌이 자신들에게 내릴 것이기 때문이다.
또 공의를 행하는 것도 그들에게 양심의 가책과 두려움과 당황함을 줄 것이다. 악인들은 자신들과 의인들이 다르다는 것을 느끼며 자신의 삶이 의를 행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느끼며 두려워할 것이다.
잠언 10:24, “악인에게는 그의 두려워하는 것이 임하거니와.”
악인들은 평소에도 그러하지만, 의인들의 행위를 볼 때 더욱 그러할 것이다.
[16절] 명철의 길을 떠난[떠나 방황하는](KJV, NASB) 사람은 사망(레파임)[죽은 자들](KJV, NASB, NIV)의 회중에 거하리라.
‘명철의 길’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를 의지하며 그의 긍휼을 받으며 하나님의 계명대로 사는 지혜의 삶이다. 그것은 생명의 길이다.
잠언 9:10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고 말하며, 잠언 3:18은, “지혜는 그 얻은 자에게 생명나무라. 지혜를 가진 자는 복되도다”라고 말한다.
명철의 길을 떠나 방황하는 사람은 한때 명철의 길에 있었으나 어느 날 그 길을 떠난 자, 곧 변절자요 배교자를 가리킬 것이다. 가룟 유다가 한 예일 것이다.
히브리서 6:4-6은 그런 변절에 대해 경고하였다.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명철의 길을 떠난 사람은 죽은 자들의 회중에 거할 것이다. 성경에서 죽음은 영적인 죽음, 육신의 죽음, 영원한 죽음을 다 포함한다. 참 교회는 산 자들의 회중이다. 그러나 명철의 길을 떠난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 없이 살고 그를 경외함이 없고 그의 계명을 저버리는 자들이며 생명 없는 자들 곧 죽은 자들이다.
하나님께서는 생명의 원천이시며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의 말씀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떠나며 그의 계명을 거역하는 것은 죽음의 길이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귀를 막아 가난한 자의 부르짖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면 자기의 부르짖을 때에도 들을 자가 없을 것이다. 우리는 가난한 자들의 부르짖음을 외면치 말고 구제에 힘써야 한다.
둘째로, 은밀한 선물은 노를 쉬게 하고 품의 뇌물은 맹렬한 분을 그치게 한다. 우리는 뇌물을 주고 받지 말아야 하지만, 선물은 좋은 것이다. 선하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정당한 선물을 나누는 것은 지혜로운 일이다.
셋째로, 공의를 행하는 것이 의인에게는 즐거움이요 악을 행하는 자에게는 두려움이다. 우리는 공의를 행하고 악을 행치 말아야 한다. 그러면 두려움과 당황함에 떨어지지 않고 많은 기쁨과 즐거움을 누릴 것이다.
넷째로, 명철의 길을 떠나 방황하는 사람은 죽은 자들의 회중에 거할 것이다. 우리는 명철의 길을 떠나 방황하지 말고 그 길을 붙들어야 한다.
신명기 10:20,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를 섬기며 그에게 친근히 하라[붙들라].”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계명을 지켜야 한다.
17-20절, 연락(宴樂), 악인, 다툼, 지혜
[17절] 연락(宴樂)(시므카 )[기쁨, 쾌락, 연락]을 좋아하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술과 기름을 좋아하는 자는 부하게 되지 못하느니라.
먹고 마시고 기쁘고 즐겁게 노는 것을 좋아하는 자는 가난하게 되며 술과 기름을 좋아하는 자는 부하게 되지 못한다. 기름은 기름진 음식과 고기 종류를 의미한다고 본다.
잠언 23:20은 “술을 즐겨하는 자와 고기를 탐하는 자로 더불어 사귀지 말라”고 말한다.
사람은 필요 이상의 것을 사지 않고 먹지 않고 쓰지 않고 절약하며 살아야 조금씩이라도 저축을 할 수 있지만, 먹고 싶은 것을 다 먹고 쓰고 싶은 것을 다 쓰고 살면 낭비하게 되고 가난을 면치 못할 것이다. 성도의 생활 방식은 검소하고 절약적이게 사는 것이다.
성도는 육신적 쾌락을 좋아하지 말아야 한다. 주께서는 씨 뿌리는 비유에서 가시떨기에 떨어진 씨는 말씀을 듣고 지내는 중 이 세상의 염려와 돈과 일락(逸樂) 곧 육신적 쾌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치 못하는 자를 가리킨다고 말씀하셨다(눅 8:14).
사도 요한은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고 말한 후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라”고 말하였다(요일 2:15-16). 성도는 특히 술취함과 방탕함을 조심해야 한다.
로마서 13:12-13,“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자.”
에베소서 5: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18절] 악인은 의인의 대속(代贖)(코페르 )[대신 죽임을 당하는 것]이 되고 궤사한 자(보게드 )[배신자, 변절자]는 정직한 자의 대신(代身)이 되느니라.
본문은 악인이 의인을 해치려다가 도리어 자신이 해를 당하는 것을 가리킨다고 본다.
시편 7:15-16은, “저[악인]가 웅덩이를 파 만듦이여, 제가 만든 함정에 빠졌도다. 그 잔해는 자기 머리로 돌아오고 그 포학은 자기 정수리에 내리리로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바로와 그 마병들은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을 뒤쫓아와 홍해에서 그들을 죽이려 했으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홍해에 빠져 하나도 남김 없이 다 죽임을 당하게 하셨다(출 14:27-28). 또 후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과 유다를 괴롭혔던 애굽과 구스와 스바를 징벌하실 때, 예루살렘 침공에 실패했던 앗수르 왕 산헤립으로 애굽과 구스와 스바를 징벌케 하셨다(사 43:3). 또 파사 왕 아하수에로의 악한 신하 하만은 경건하고 의로운 유다인 모르드개를 달아 죽이려고 자기 집 뜰에 약 25미터 되는 나무를 세웠으나 왕의 명령으로 그 자신이 거기에 달려 죽임을 당했다(에 7:9-10). 또 다니엘의 시대에는 악한 동료들이 그를 죽이기 위해 다리오 왕에게 한 명을 내리게 했고 다니엘이 그 명을 범했다고 고소하여 그를 사자굴에 던져 넣게 했으나, 하나님께서는 다니엘을 건져주셨고 그 대신 그를 모함하였던 자들과 그 처자들을 죽게 하셨다(단 6:24).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의인을 해치려는 악인에게 공의로운 보응을 내리셨다. 그는 의인의 원수를 갚으셨다.
[19절] 다투며 성내는 여인과 함께 사는 것보다 광야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나으니라.
잠언 21:9도, “다투는 여인과 함께 집에서 사는 것보다 지붕 한 구석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나으니라”고 말하였다.
부부는 사람의 삶의 가장 기본적인 단위이다. 거기에서 가정이 시작된다. 사람이 가족 관계가 좋으면 사회에서도 대인 관계가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지만, 가족 관계가 나쁘면 사회에서도 대인 관계가 나쁠 것이다.
가정은 인생의 기초 훈련소이다. 그것은 인격의 훈련과 인간 관계의 훈련을 시키는 곳이다.
부부의 관계는 교제의 관계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혼자 있어서 외로운 것을 좋지 않게 보시고 남녀가 짝이 되게 하셨다.
물론 성도는 하나님께 기도하며 그와 교제하지만, 사람들 간의 대화와 교제도 필요하다.
부부의 관계는 또한 협력의 관계이다. 여자는 남자를 돕는 자로 창조되었다. 부부는 서로에게 위로와 힘이 되며, 또 그래야 한다.
부부는 언제 성내며 다투는가? 그들은 상대를 오해했을 때, 또 상대에 대한 신뢰와 사랑이 식어지고 불신과 미움이 생겼을 때, 또 마음이 교만하거나 참을성 없는 조급한 마음이나 이기적 욕심을 품을 때 성내며 다툴 것이다. 즉 다툼은 마음의 문제 즉 성격과 인격의 문제이며 가치관의 문제이다. 너무 예민하거나 이해심이 부족하거나 세상적, 물질적 욕심에 얽매여 있는 여인은 남편과 잘 다툴 것이다.
그러나 평안과 화목은 사람의 행복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조건이다. 그것은 아름다운 외모나 물질적 부요보다 더 중요한 요소이다. 그러므로 잠언 17:1은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육선(肉饍,고기)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말하였다.
[20절] 지혜 있는 자의 집에는 귀한 보배와 기름이 있으나 미련한 자는 이것을 다 삼켜 버리느니라.
지혜 있는 자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대로 선하게 사는 자이다. 그의 집에는 귀한 보배와 기름이 있다. 지혜 있는 자는 하나님의 복을 받아 영육의 복을 누리고 또 그는 물질도 절약해 쓰고 저축함으로 물질적 유여함을 누릴 것이다. ‘기름’은 식용과 약용과 미용에 쓰이는 올리브유나 기타 향유들과 기름진 고기들을 가리킬 것이다.
잠언3:13-18, “지혜를 얻은 자와 명철을 얻은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지혜를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낫고 그 이익이 정금보다 나음이니라. 지혜는 진주보다 귀하니 너의 사모하는 모든 것으로 이에 비교할 수 없도다. 그 우편 손에는 장수가 있고 그 좌편 손에는 부귀[부요와 존귀]가 있나니 그 길은 즐거운 길이요 그 첩경은 다 평강[평안]이니라. 지혜는 그 얻은 자에게 생명나무라. 지혜를 가진 자는 복되도다.”
그러나 미련한 자, 곧 하나님을 경외치 않고 그의 명령에 순종치 않고 죄와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이미 주셨던 복들도 다 낭비하고 소모한다.
누가복음 15:11-14,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그 둘째가 아비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비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주었더니 그 후 며칠이 못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하더니 다 없이한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저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미련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물질의 소득을 규모 없이, 절제 없이, 계획 없이 다 쓰고 낭비하고 저축하지 않는다. 그는 영육의 빈곤에 떨어진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먹고 마시고 노는 것을 좋아하는 자는 가난케 되고 술과 기름을 좋아하는 자는 부하게 되지 못한다. 성도는 먹고 마시고 기쁘고 즐겁게 노는 것이나 술과 기름과 고기를 좋아하지 말아야 한다. 성도는 언제나 검소하고 절약적이게 살아야 한다.
둘째로, 악인은 의인 대신에 죽고 배신자는 정직한 자의 대신이 된다. 하나님께서는 악인들, 배신자들을 공의로 징벌하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의 보응을 믿어야 하고 모든 일을 하나님께 맡기고 할 일을 담대히 행하고 하나님 앞에서 의롭고 정직하고 선하게만 살아야 한다.
셋째로, 다투며 성내는 여인과 함께 사는 것보다 광야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낫다(19절).
9절, “다투는 여인과 함께 집에서 사는 것보다 지붕 한 구석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나으니라.”
우리는 남자든지 여자든지 온유하고 겸손하며 자족하고 사랑하며 참고 관용하는 좋은 인격자가 되어야 한다.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가 남편에게 순종하는 것이 복된 가정이다.
넷째로, 지혜 있는 자의 집에는 귀한 보배와 기름이 있으나 미련한 자는 이것을 다 삼켜 버린다. 우리는 사치하고 낭비하며 빈곤에 떨어지는 미련한 자가 되지 말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대로 의롭고 선하게 살며 근검 절약하여 영육의 복을 누리는 지혜자가 되어야 한다.
21-24절, 의와 인자, 지혜, 입, 교만
[21절] 의와 인자를 따라 구하는 자는 생명과 의와 영광을 얻느니라.
‘의’는 하나님의 계명대로 사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이 불의와 죄요 그의 법을 지키는 것이 의이다.
‘인자(仁慈)’는 이웃에게 긍휼과 자비를 베푸는 선한 마음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계명의 내용이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이웃을 우리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다. ‘
따라 구한다’는 말은 ‘따른다, 추구한다(pursue)’는 뜻이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의롭게 살고 인자함으로 사는 것이다.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지키며 의롭게 살아야 한다.
신명기5:32-33, “그런즉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신 대로 너희는 삼가 행하여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하신 모든 도를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삶을 얻고 복을 얻어서 너희의 얻은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하리라.”
신명기 6:25,“우리가 그 명하신 대로 이 모든 명령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삼가 지키면 그것이 곧 우리의 의로움이니라.”
둘째로, 우리는 항상 선하고 인자하게 살아야 한다.
호세아 6: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미가 6: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仁慈)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의와 인자를 따르는 자는 생명과 의와 영광을 얻을 것이다. 죄의 값은 죽음이나, 의의 결과는 영원한 생명이다.
의를 사모하는 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를 얻으며 의의 길에 영광이 있다. 천국의 기쁨과 행복과 영광은 오직 의를 행하는 의인들의 소유이다.
[22절] 지혜로운 자는 용사의 성에 올라가서 그 성의 견고히 의뢰하는 것을 파하느니라.
용사들의 성에 올라가 그 성의 견고히 의뢰하는 것을 파하고 그 성과 그 성에 있는 자들을 굴복시킨다는 것은 자기 목숨을 내어놓는 참으로 위험하고 힘든 일이다. 그러나 지혜로운 자는 그것을 행한다.
전쟁에서 지혜는 힘과 용기보다 더 중요하다. 그러므로 잠언 20:18은, “무릇 경영은 의논함으로 성취하나니 모략을 베풀고 전쟁할지니라”고 말했고, 또 잠언 24:6은, “너는 모략으로 싸우라. 승리는 모사가 많음에 있느니라”고 말하였다. 여호수아 8장에 기록된 아이 성 전투에서 하나님께서는 복병 전술을 쓰게 지혜를 주셨다. 이스라엘 군사들은 거짓 패하여 적군들을 유인해낸 후 복병들로 그 성을 점령케 했다.
영적 전쟁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마귀와 악령들의 세력이 강할지라도, 또 세상의 악의 풍조와 세력이 크고 강할지라도, 우리가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으로 싸우면 우리는 그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다. 기독교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진리이며 그것은 사람 보기에 무지하고 무능하게 보여도,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다(고전 1:22-25).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지혜이시다(고전 1:30).
기독교는 십자가의 복음으로 확장되었고 오늘날도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를 원하는 영혼들은 이 복음으로 구원 얻을 것이다. 또, 진리의 띠, 의의 흉배, 평안의 신발, 믿음의 방패, 성령의 검은 성도들의 힘이다(엡6:13-17). 우리의 개인적 신앙생활도 교회 봉사생활도 그러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슨 일을 할 수 없다고 말할 것이 아니라 주 예수께서 주시는 지혜와 힘으로 다 할 수 있다고 말해야 한다(빌 4:13).
[23절] 입과 혀를 지키는 자는 그 영혼을 환난에서 보전하느니라.
입과 혀를 지키는 자란,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을 가리킨다. 사람은 말의 실수와 범죄, 즉 거짓말이나, 남을 헐뜯고 비방하고 욕하는 말이나, 남의 마음을 상하게 만드는 거친 말 등의 실수와 범죄로 하나님의 징책과 환난을 당한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자는 말수를 줄이고 말의 실수가 없도록 항상 조심해야 한다.
야고보는 야고보서 3:2에서,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고 말하였다.
성도는 우선 진실한 말을 해야 한다. 진실은 성도의 기본적인 덕목이다. 또 성도는 선한 말을 해야 한다. 잠언 15:4는, “온량한 혀는 곧 생명나무라도 패려한 혀는 마음을 상하게 하느니라”고 말했고, 사도바울도 에베소서 4:29에서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고 말했다. 또 성도는 신중한 말을 해야 한다. 잠언 15:28은, “의인의 마음은 대답할 말을 깊이 생각하여도 악인의 입은 악을 쏟느니라”고 말하였다.
입과 혀를 지키는 자는 그 영혼을 환난에서 보전한다.
잠언 12:13,“악인은 입술의 허물로 인하여 그물에 걸려도 의인은 환난에서 벗어나느니라.”
잠언 13:3, “입을 지키는 자는 그 생명을 보전하나 입술을 크게 벌리는 자에게는 멸망이 오느니라.” ......":시편81:10,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하셨을 때, 주님 신뢰와 주님 사랑에 충만케 되어 주님 하실 일 미리 계시하심따라 그분의 지혜따라 말해내는 것을 의미함을 기억하라....즉, 입술은 구속되어야 함을, 오직 주님 지혜와 그 인도따라 구속의 말씀 간증하기를 힘쓰되, 육적 충동따라 함부로 말하는 것을 엄금하고 있음을 명심하라!!......* 하나님은 믿음의 기도를 기뻐하시며 믿음대로 채워주신다. 여기서 ‘채우다’(말레, 강조, 미완)는 ‘가득하게 하다’ 또는 ‘흡족하게 하다’라는 뜻이다. 능력의 하나님은 얼마든지 채우실 수 있다. *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대로 채워주신다. 예수님께서 백부장의 믿음을 보시고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라고 하셨고(마8:13), 또 가나안 여인의 믿음을 보시고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고 하셨으며(마15:28), 그리고 혈루병을 앓고 있던 여인에게도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라고 하셨다(막5:34). * 하나님은 믿음의 분량대로 채워주신다. 선지자의 아내였던 과부와 그녀의 아들이 찾아와 곤경을 호소할 때 엘리사는 “밖에 나가서 모든 이웃에게 그릇을 빌리라 빈 그릇을 빌리되 조금 빌리지 말라”고 하였다(왕하3:4). 그리고 그들은 빌린 그릇에 기름을 부어서 채웠는데 빌려온 그릇에 모두 가득하게 채웠고 그것을 팔아 빚을 갚고 생활을 할 수 있었다(왕하3:1-7절)......
잠언 18:7, “미련한 자의 입은 그의 멸망이 되고 그 입술은 그의 영혼의 그물이 되느니라.”
마태복음12:36-37에 보면, 예수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셨다.
[24절] 무례하고 교만한 자를 이름하여 망령된 자[조소자]라 하나니 이는 넘치는 교만으로 행함이니라[거만한 분노로 행하는 자는 그의 이름이 거만하고 교만한 조소자이니라](KJV).
거만한 마음으로 화를 잘 내는 자는 거만하고 교만한 자이며 남을 조소하고 조롱하는 자이다. 거만하고 교만한 자는 하나님을 무시하고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의 피조물 됨을 깨닫지 못하고 또 자신이 얼마나 죄악된지에 대한 인식이 없는 자이다. 하나님께서 가장 미워하시는 것이 사람의 교만한 마음이다. 잠언 6:16-19, “여호와의 미워하시는 것곧 그 마음에 싫어하시는 것이 6, 7가지니 곧 교만한 눈과 거짓된 혀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손과 악한 계교를 꾀하는 마음과 빨리 악으로 달려가는 발과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과 및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자니라.” 잠언 8:13,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 나는 교만과 거만과 악한 행실과 패역한 입을 미워하느니라.”
하나님의 형상은 교만과 정반대이다. 그것은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이며 남을 조롱하지 않고 이웃을 사랑하고 그의 인격을 존중하는 마음이다.
예수께서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셨다(마 11:29). 그는 하나님이시지만, 자신을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이 되셨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다(빌 2:5-8).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하라”고 하였고(엡 4:31-32),
또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며 무례히 행치 않고 성내지 않는다고 말했다(고전 13:4-5).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의와 인자(仁慈)를 구하여 사는 자는 생명과 의와 영광을 얻는다.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순종하여 의롭게 살고 인자한 마음을 가지고 어려운 이웃을 불쌍히 여겨야 한다.
둘째로, 지혜로운 자는 용사의 성에 올라가 그 성의 견고히 의뢰하는 것을 파한다. 우리는 악한 원수들의 견고한 성을 두려워 말고, 세상일에서나 개인의 신앙생활과 교회 봉사생활에서나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말씀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으로 행해야 한다.
셋째로, 입과 혀를 지키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환난에서 보전한다. 우리는 말로 실수치 않고 범죄치 않도록 조심하고, 항상 진실하고 선하게 말하고 또 무슨 말을 하기 전에 깊이 생각하고 신중하게 말해야 한다.
넷째로, 거만한 분노로 행하는 자는 교만한 자이다. 우리는 거만한 자가 되지 말고, 주님의 온유와 겸손, 사랑과 오래 참음을 본받아야 한다.
25-28절, 게으름, 구제, 악인의 제물, 증인
[25절] 게으른 자의 정욕이 그를 죽이나니 이는 그 손으로 일하기를 싫어함이니라.
게으름은 미련함이며 근면함이 지혜이다. ‘정욕’이라는 원어(타아와)는 ‘소원, 욕심, 욕망, 정욕’이라는 뜻이다. 게으른 자는 놀기를 좋아하고 노래 부르기를 좋아하고 먹고 술 마시기를 좋아하고 오락을 좋아하고 잠자기를 좋아한다. 세상의 재미와 육신적 즐거움과 쾌락을 좋아하는 것이다. 게으른 자는 땀 흘리며 힘들게 일하기를 싫어한다.
그는 욕망에 따라 돈을 낭비하고 시간을 낭비하며 정력과 건강을 낭비한다. 그는 성도의 본분뿐 아니라, 인생의 본분에도 충실하지 못하다. 그는 가난해지고 몸의 건강도 잃어버리기 쉽다. 그것은 죄악된 삶이다.
야고보서 1: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골로새서 3:5-6,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不淨)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숭배니라. 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성도는 영적 생활뿐 아니라 육신 생활에도 부지런해야 한다.
로마서12:11,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에베소서 5:15-16,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없는 자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데살로니가전서 4:11, “종용하여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
데살로니가후서 3:10, 12,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종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
[26절] 어떤 자는 종일토록 탐하기만 하나 의인은 아끼지 아니하고 시제[구제]하느니라.
‘어떤 자’라는 말은 원문에 단순히 ‘그’라고 되어 있다(KJV, NASB).
그것은 앞절의 ‘게으른 자’를 가리키는 것 같다. 게으른 자는 종일토록 무엇을 탐하며 가지기를 간절히 소원한다. 그는 돈에 대한 욕심과 명예에 대한 욕심과 육신적인 쾌락에 대한 욕심이 있다. 그는 먹고 마시며 놀고 세상적 오락과 육신적 쾌락을 구한다. 그러나 그것은 결과적으로 자신을 죽이는 죄악된 낭비적인 삶이다.
그러나 의인은 아끼지 않고 구제한다. 의인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계명대로 사는데, 그의 계명은 가난하고 어려운 이웃을 돌아보며 구제하라는 내용을 포함한다. 신명기 15:8, 10, “반드시 네 손을 그[가난한 이웃]에게 펴서 그 요구하는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주라,” “너는 반드시 그에게 구제할 것이요, 구제할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 것이니라. 이로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범사와 네 손으로 하는 바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시편 37:25-26,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구걸]함을 보지 못하였도다. 저는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고 꾸어주니 그 자손이 복을 받는도다.”
시편 112:5, 9, “은혜를 베풀며 꾸이는[꾸어주는] 자는 잘 되나니 그 일을 공의로 하리로다,” “저가 재물을 흩어 빈궁한 자에게 주었으니 그 의가 영원히 있고 그 뿔이 영화로이 들리리로다.”
마태복음 5:42,“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에베소서 4:28,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27절] 악인의 제물은 본래 가증하거든 하물며 악한 뜻으로 드리는 것이랴.
악인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의 계명을 거역하며 남에게 해를 끼치는 자이다.
제물은 하나님을 섬기는 방식으로 바치는 것이다. 오늘날, 찬송, 기도, 헌금을 가리킨다.
악인들도 제물을 바친다. 그것은 그들의 종교적 만족을 위해서일 것이다. 그들도 천국에 가고 싶고 또 죄에 대한 양심의 가책을 누그러뜨리고 싶은 것이다.
구약시대나 신약시대나 교회 안에도 악인들이 있다. 그들은 가라지들과 쭉정이들이라 불린다. 그들은 하나님께 형식적, 외식적 제물을 드린다.
그러나 악인의 제물, 즉 악인의 찬송과 기도와 헌금은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시고 도리어 미워하신다. 잠언 15:8도 “악인의 제사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신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고 말씀하셨다(사 1:11-13).
하물며, 악인이 악한 뜻으로 드리는 제물은 얼마나 더 가증한 일이 되겠는가! 하나님께서는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비록 교인이라 하더라도 하나님과 사도 베드로를 속이며 드린 헌금을 심히 미워하셨고 그들에게 즉시 죽는 벌을 내리셨다(행 5:5, 10). 만일 악인이 남을 저주하기 위해, 혹은 악한 일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께 제물을 드린다면, 그것은 얼마나 악하고 가증한 일이 되겠는가!
[28절] 거짓 증인은 패망하려니와 확실한 증인의 말은 힘이 있느니라[(진실을) 듣는 자는 계속 말하느니라](KJV, NASB).
‘듣는 자’는 진실을 듣는 자를 가리키며, ‘계속(라네차크 ) 말한다’는 말은 그가 들은 바를 들은 대로 계속, 끝까지 말한다는 뜻일 것이다. 그것은 진실한 증인의 힘있는 증언의 모습이다.
거짓 증인은 진실이 아닌 것을 증거하는 자, 진실을 왜곡시켜 증거하는 자, 진실과 반대되게 증거하는 자를 가리킨다. 거짓 증인은 패망한다.
하나님께서는 거짓 증거를 미워하신다. 거짓 증거는 십계명의 제9계명을 범하는 죄이다. 그것은 잠언 6:16-19에 언급된 대로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6, 7가지 죄악 중에 ‘거짓된 혀,’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으로 언급된 죄악이다. 죄인은 망한다. 모든 죄인은 멸망한다.
그러나 진실을 들은 자는 그 들은 진실을 솔직하게, 담대히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참된 증인의 모습이며 의인의 모습이다.
사도행전 4:19-20,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주님의 사도들은 핍박을 받으면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였고 순교의 피를 흘리기까지 그를 증거했다.
헬라어의 ‘증인’이라는 말(마르튀스 mavrtu")은 ‘순교자’라는 뜻도 가진다.
스데반 집사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다가 죽었다. 참된 증인은 어떤 사실을 듣고 그 들은 바를 들은 그대로 항상 말하는 자이다. 성도가 서로에게 진실을 말하는 것은 성도의 기본적인 덕목이다.
에베소서 4:25,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게으른 자의 욕심은 그를 죽인다. 그것은 그가 그 손으로 일하기를 싫어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게을러 손으로 일하기를 싫어하며 육신적 욕심만 구하는 자가 되지 말고 각자 성도와 직분자로서의 본분과, 세상의 일 즉 직업의 일에도 부지런해야 한다.
둘째로, 게으른 자는 종일토록 탐하기만 하지만, 의인은 아끼지 않고 어려운 이웃을 구제한다. 우리는 자기의 일에 게으르면서 돈이나 명예와 권세나 육신의 즐거움을 탐하기만 하는 자가 되지 말고, 자기 일에 근면하여 소득을 얻고 어려운 이웃을 돌아보며 구제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셋째로, 악인의 제물은 그 자체가 가증하지만, 악한 뜻으로 드리는 것은 더욱 그러하다. 우리는 모든 악을 회개하고 진심이 없거나 악한 의도를 가진 종교 행위를 미워하고,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바른 믿음을 가지고 예배하며 거룩하고 선한 삶을 살기를 힘써야 한다.
넷째로, 거짓 증인은 멸망할 것이나, 진실을 듣는 사람은 끝까지 그것을 말할 것이다. 우리는 어떤 일에서든지 거짓을 증거하는 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를 미워하시고 심판하실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진리의 말씀을 그대로 항상 증거해야 한다.
29-31절, 악인의 얼굴, 하나님, 승리의 길
[29절] 악인은 그 얼굴을 굳게 하나 정직한 자는 그 행위를 삼가느니라.
얼굴은 사람의 마음과 인격의 표현이다. 기쁜 얼굴은 기쁜 마음의 표현이고 슬픈 얼굴은 슬픈 마음의 표현이다. 어린아이의 얼굴은 아직 때묻지 않은 그의 천진난만함을 나타낸다. 또 나이든 사람들의 얼굴은 그의 인생 여정과 그의 형성된 인격을 어느 정도 반영할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그의 계명을 거역하며 남에게 해를 끼치는 악인은 그 얼굴을 굳게 한다. ‘굳게 한다’는 원어(헤에즈 )는 ‘뻔뻔스럽게 한다’는 뜻이다. 악인은 교만할 뿐만 아니라, 또한 부끄러움을 모르고 자책할 줄을 모른다. 그는 양심의 가책을 가지지 않으며 자신의 부족을 인정할 줄 모른다. 그는 남을 미워하고 악을 행하며 뻔뻔스럽게 행동한다. 그러나 반대로, 성도는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가지며 자신의 부족을 항상 느끼며 그것을 부끄러워한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계명대로 바르게 살려고 애쓰는 정직한 자는 그 행위를 삼간다.
‘삼간다’는 원어(야킨 )는 ‘견고케 한다, 바르게 한다’는 뜻이다(KJV, NASB). 이것이 성경에 쓰여진 본문이다(케팁). 마소라 학자들은 이 단어를 ‘살핀다, 분별한다’는 단어(야빈 )로읽으라고 제안하지만(케레 NIV), 그 제안은 정당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 의미는 비슷하다.
정직한 자, 곧 의로운 성도는 그의 길, 그의 행위와 삶을 조심하여 바르게 하고 견고케 한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자신이 범한 실수를 부끄러워하고 모든 악을 버리고 악을 행할까봐 조심하며 오직 의와 선을 택하고 그것을 행하려 힘쓴다.
[30절] 지혜로도, 명철로도, 모략으로도 여호와를 당치 못하느니라.
사람의 지혜와 명철과 모략은 세상에서는 필요하고 유용하고 가치가 있다고 인정받는다. 머리가 좋고 아이큐(I.Q.)가 높은 사람은 공부도 잘하고 사회의 각 방면에서 지도적 인물이나 참모나 보좌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지혜 있는 것이 지혜 없는 것보다 낫다.
그러나 사람의 지혜를 어떻게 하나님의 지혜와 감히 비교할 수 있겠는가! 사도 바울은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했고 사람들에게 미련하게 보이는 십자가의 말씀이 하나님의 지혜이며 하나님께서 그 지혜로 사람을 구원하신다고 증거하였다(고전 1:21, 25).
하나님께서는 다니엘과 세 친구들의 지혜와 총명이 바벨론 온 나라의 지혜자들보다 열 배나 더 뛰어나게 하셨다(단 1:17, 20). 인류의 역사상, 마귀는 하나님의 일을 대적하고 무너뜨리려 모든 지혜를 총동원하며 모든 악한 자들을 사용했지만 결국 실패하였고 또 실패할 것이다.
참 지혜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을 떠나며 그의 계명대로 의와 선을 행하는 것이다.
욥기 28:28, “사람에게 이르시기를 주를 경외함이 곧 지혜요 악을 떠남이 명철이라 하셨느니라.”
시편 111:10, “여호와를 경외함이 곧 지혜의 근본이라. 그 계명을 지키는 자는 다 좋은 지각이 있나니 여호와를 찬송함이 영원히 있으리로다.”
잠언 9:10,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시편 119편의 저자는, “주의 계명이 항상 나와 함께하므로 그것이 나로 원수보다 지혜롭게 하나이다. 내가 주의 증거를 묵상하므로 나의 명철함이 나의 모든 스승보다 승하며 주의 법도를 지키므로 나의 명철 함이 노인보다 승하니이다”고 고백하였다(시 119:98-100).
[31절] 싸울 날을 위하여 마병을 예비하거니와 이김은 여호와께 있느니라.
국가는 전쟁의 날을 위하여 군대와 무기들을 준비한다. 세상 나라에는 군대도 필요하고 무기들도 필요하다. 옛날 아브라함은 조카 롯이 사로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집에서 길리고 연습한 자 318명을 거느리고 200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단까지 쫓아가서 그 가신(家臣)을 나누어 밤을 타서 그들을 쳐서 파하고 모든 빼앗겼던 재물과 조카 롯과 부녀들과 사람들을 다 찾아왔었다(창 14:14-16). 성경은 정당방위를 인정한다. 도적이 밤에 침입해 들어올 때 그를 쳐죽여도 피흘린 죄가 없다(출 22:2).
합법적 전쟁은 인정된다. 여호수아와 사사들과 다윗 등은 다 용사이었다. 한 선지자는 이스라엘 왕 아합에게 “왕은 가서 힘을 기르고 왕의 행할 일을 알고 준비하소서”라고 말했다(왕상 20:22).
그러나 이김은 여호와께 있다. 구약 역사에 전쟁 사건들이 많았으나 전쟁의 승리는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었다. 소년 다윗은 블레셋 장수 골리앗에게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고 말했다(삼상 17:47). 다윗은 시편 20:7에서 “혹은 병거, 혹 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라고 말했다.
유다 왕 아사는 구스 사람 세라의 군사 100만과 병거 300승을 하나님의 은혜로 물리쳤다(대하 15:11-12). 히스기야 왕 때 하나님께서는 하룻밤에 앗수르 왕 산헤립의 군사 18만 5천명을 죽이셨다(왕하 19:35). 그러므로 우리는 전쟁에서 사람의 지혜나 군대와 무기들의 힘을 의지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해야 한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악인은 그 얼굴을 뻔뻔스럽게 하나정직한 자는 그 행위를 바르게 한다. 우리는 악인처럼 얼굴을 뻔뻔스럽게 하지 말고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우리의 행위를 바르게 해야 한다.
둘째로, 사람은 지혜로도, 명철로도, 모략으로도 여호와 하나님을 당치 못한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감히 자신의 지혜와 명철을 의지하지 말고 오직 섭리자 하나님께서 세상의 모든 일, 즉 우리 개인과 가정과 교회와 국가와 세계의 모든 일을 홀로 섭리하심을 믿고 의지하며 순종해야 한다.
셋째로, 싸울 날을 위하여 마병을 예비하지만, 이김은 여호와께 있다.
한 국가가 외부의 침입을 막기 위해 군대를 두고 무기 개발과 군사 훈련을 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우리는 전쟁 때 군사력을 의지하지 말고 승리가 하나님께 있음을 알고 절대 주권적 섭리자 하나님만 의지해야 한다.
===22장: 자녀 교육, 징계, 게으름, 빚 보증
1-4절, 명예, 빈부, 슬기, 겸손과 경외
[1절] 많은 재물보다 명예(쉠 )[좋은 이름](KJV, NASB, NIV)를 택할 것이요 은이나 금보다 은총[은혜]을 더욱 택할 것이니라.
사람은 많은 재물보다 좋은 이름과 명예를 택해야 한다. 이름은 그 인격을 나타내며 좋은 이름은 좋은 인격을 나타낸다. 선한 삶을 사는 좋은 인격자는 좋은 이름을 가진다. 많은 재물보다 사람의 인격성, 곧 그의 경건과 도덕성이 더 귀하고 가치가 있는 것이다.
재물을 포함하여 세상의 모든 것이 헛되다(전 1:2-3; 12:8). 전도서12:13은 사람의 본분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을 지키는 것이라고 말했다. 주께서는 썩는 양식을 위해 살지 말라고 하셨다(요 6:27). 사람이 자기 육신을 위해 심으면 썩어질 것을 거둘 뿐이다(갈 6:8). 그러므로 성도는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아야 한다. 이 세상의 것들은 다 헛된 것이기 때문이다(요일 2:15-17).
또 은이나 금보다 은혜가 더욱 택할 만하다.
‘은혜’(켄 )는 하나님의 덕성 즉 하나님의 은혜, 사랑, 긍휼, 선하심, 아름다우심을 가리키는 뜻이든지, 아니면 사람의 덕성 즉 이웃을 향한 선한 마음, 사랑, 긍휼,자비를 가리킬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 하심과 구원을 얻었고(롬 3:24; 엡 2:8) 또 성화의 과정에서도 하나님의 은혜가 계속 필요하다(고후 13:13).
또 우리는 사랑, 화평, 자비, 양선, 온유의 덕으로 단장되어야 한다. 그것이 성령의 열매이며(갈 5:22-23) 또 위로부터 난 지혜이다(약 3:17). 은혜는 참으로 은이나 금보다 더 가치 있다.
[2절] 빈부가 섞여 살거니와 무릇 그들을 지으신 이는 여호와시니라.
‘섞여 산다’는 원어(니푸가슈 )는 ‘서로 만난다’는 의미이다.
세상에는 부자도 있고 가난한 자도 있다. 사람은 부모의 재산 정도에따라, 자신의 교육 정도에 따라, 직업이나 직장에 따라, 자신의 노력과 근면에 따라, 자신의 건강 상태와 질병 여부에 따라, 사회적 환경이나 시대적 상황에 따라 부자도 되고 가난한 자도 된다. 또 이 모든 일들은 다 하나님의 섭리와 복 주심 여부에 따라 이루어진다.
세상에는 빈번히 부자와 가난한 자 간의 갈등이 있다. 부자와 가난한 자는 주인과 하인,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되는 경우가 많이 있다. 또 부자는 가난한 자의 인격을 존중하지 않고 무시하는 경향이 있고 가난한 자들 중에는 지나친 열등감이나 피해 의식을 가진 자들도 있다. 그런 것들이 부자와 가난한 자 간의 갈등을 더욱 부추긴다.
그러나 부자도 가난한 자도 다 하나님의 창조물이다.
욥기 31:15,“나를 태 속에 만드신 자가 그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우리를 뱃속에 지으신 자가 하나가 아니시냐?”
온 인류는 넓은 의미에서 보면 하나님의 가족이며 한 식구이다. 인류는 아담과 하와의 자손이다. 사도행전17:26,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그러므로 우리는 가난한 자를 멸시하지 말고 불쌍히 여겨야 한다.
잠언 14:31,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존경하는 자니라.”
잠언17:5, “가난한 자를 조롱하는 자는 이를 지으신 주를 멸시하는 자요 사람의 재앙을 기뻐하는 자는 형벌을 면치 못할 자니라.”
[3절] 슬기로운 자는 재앙을 보면 숨어 피하여도 어리석은 자들은 나아가다가 해를 받느니라.
다윗은 여러 번 사울 왕의 칼을 피해 도망했었다.
엘리야도 이세벨의 칼날을 피해 호렙산으로 도피했었다.
예수께서도 제자들에게 핍박을 피하라고 교훈하시며 “이 동네에서 너희를 핍박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고 말씀하셨다(마 10:23).
사도 바울도 때때로 핍박을 피하였다. 사도행전 9:23-25, “여러 날이 지나매 유대인들이 사울 죽이기를 공모하더니 그 계교가 사울에게 알려지니라. 저희가 그를 죽이려고 밤낮으로 성문까지 지키거늘 제자들이 그를 밤에 광주리에 담아 성에서 달아 내리니라.” 사도행전 14:5-6, “이방인과 유대인과 그 관원들이 두 사도를[그들을] 능욕하며 돌로 치려고 달려드니 저희가 알고 도망하여 루가오니아의 두 성 루스드라와 더베와 및 그 근방으로 가서.”
그러나 진리를 위해 싸워야 하고 정의를 위해 싸워야 할 때가 있다. 그때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때이다. 그때는 순교의 정신과 용기가 필요한 때이다. 그때 나서서 싸우지 않으면 비겁하고 비굴한 자임이 드러날 것이다.
예수께서는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고 말씀하셨고(마 10:28), 또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고 말씀하셨다(마 16:25).
사도 바울은 그런 정신으로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예루살렘에 올라갔다. 사도행전 20:23-24에 보면, 그는 이렇게 말했다.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그것이 충성된 마음이다.
[4절]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응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
겸손은 사람의 매우 중요한 덕이다.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의 피조물임을 인정하고 또 하나님 앞에서 부족하고 흠과 실수가 많은 죄인임을 인정할 때 겸손할 수 있다. 사람은 겸손해야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다. 교만한 자는 하나님을 무시하고 하나님을 대적한다.
또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도 매우 중요한 덕이다. 하나님을 경외함이 경건이요 믿음이다. 그것이 하나님을 아는 사람의 마음가짐이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자이시며 우리는 피조물이고, 하나님께서는 무한하신 자, 전지 전능자이시고 우리는 유한자요 연약한 자이다.
또 하나님께서는 거룩하신 자이시며 우리는 죄가 많았고 또 죄성을 가진 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두렵고 떨림으로 엎드려야 한다.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할 때 죄를 미워하고 죄를 멀리하게 된다.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응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계명에 순종하며 살면 이 세상에서도 복된 삶을 누릴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신명기 28장은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는 자가 물질의 복, 건강의 복, 자녀의 복, 사회적 평안의 복을 누릴 것이며 또 그런 사람이 이 세상에서 머리가 될지언정 꼬리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고 말했다(딤전 4:8). 또 그것이 영생의 길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의 계명을 지키면 그것이 의이며 그것이 생명의 길이다(신 5:33; 8:1; 잠 6:23).
영생에 이르는 자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계명을 지킬 것이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많은 재물보다 좋은 이름을 택하고, 은이나 금보다 은혜를 택하는 것이 낫다. 우리는 많은 재물과 은금을 크게 여기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와 경건과 도덕성을 크게 여겨야 한다.
둘째로, 부자와 가난한 자가 섞여 살지만 그들을 지으신 이는 여호와시다.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하고 서로 사랑하며 다른 사람의 생명과 정조와 재산과 명예를 해하지 말고 남에게 선을 베풀어야 한다.
셋째로, 슬기로운 자는 재앙을 보면 숨어 피해도 어리석은 자는 나아가다가 해를 받는다. 재앙을 피해야 할 때 피하는 것은 지혜이다. 그러나 진리와 의를 위한 싸움에는 비겁하게 물러나지 말고 힘써 싸워야 한다.
넷째로,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을 얻는다. 우리는 겸손히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모든 형태의 악을 버리며 그의 명령만 순종해야 한다. 그것은 현세와 내세에 복된 길이다.
5-8절, 패역, 자녀 교육, 부자, 악행
[5절] 패역한 자의 길에는 가시와 올무가 있거니와 영혼을 지키는 자는 이를 멀리하느니라.
‘패역한 자’는 고의로 하나님의 계명과 법도, 곧 인생의 정로를 벗어난 자를 가리킨다. ‘길’은 삶을 가리킨다. 그것은 사람들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삶을 다 포함한다. 패역한 자의 삶에는 가시와 올무가 있다.
‘가시’는 찌르는 고통스런 일들을 가리킨다. ‘올무’는 시험거리들, 위험한 일들, 재난들, 사고들을 가리킨다. 찌르는 가시와 발에 걸리는 올무는 정신적 고통, 육체적 고통, 물질적 고통을 다 포함할 것이다. 사람이 가시에 찔리고 올무에 걸리면, 큰 고생과 낭패를 당할 것이다.
그러나 영혼을 지키는 자는 그것들로부터 멀리 있다. ‘영혼을 지킨다’는 말은 영혼을 죄악과 불결로부터 지킨다는 뜻이다. 우리는 어떻게 자신의 영혼을 죄와 불결로부터 지킬 수 있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우리의 마음에 두고 깨어 기도하며 성령의 힘과 도우심을 구할 때 그렇게 할 수 있다.
시편 119:9는,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이다”라고 말했고, 갈라디아서 5:16은,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고 말했다. 자기 영혼을 지키는 자는 가시와 올무를 피할 것이다.
잠언 12:13,“악인은 입술의 허물로 인하여 그물에 걸려도 의인은 환난에서 벗어나느니라.”
잠언 21:23, “입과 혀를 지키는 자는 그 영혼을 환난에서 보전하느니라.”
이사야 26:7, “의인의 길은 정직함[평탄함]이여, 정직하신 주께서 의인의 첩경을 평탄케 하시도다.” 악인에게는 평안이 없다(사48:22; 57:21). 그러나 의인에게는 큰 평안이 있다(사 48:18).
[6절]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우리는 자녀들에게 어릴 때부터 바른 것을 가르쳐야 한다.
사람은 어릴 때부터 나쁜 것을 배울 수 있고 그것이 버릇이 될 수 있다. 무엇이 바른 길인가?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이 그 ‘바른 길’을 가르쳐준다. 신구약성경은 사람에게 마땅히 행해야 할 길을 가르쳐준다.
성경의 첫 번째 중요한 내용은 십계명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가르친다. 우리는 자녀에게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성경책을 읽고 기도하고 찬송하고 헌금을 드리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 또 십계명은 부모를 공경하고 살인하지 말고 간음하지 말고 도적질하지 말고 거짓말하지 말고 탐내지 말라고 가르친다.
성경의 두 번째 중요한 내용은 복음이다. 그것은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을 얻고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소식이다. 죄의 결과는 죽음과 지옥이지만, 예수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 이것이 성경의 핵심이다.
‘마땅히 행할 길’이라는 원어(알-피 다르코 )는 ‘그의 길을 따라서’ 혹은 ‘그의 길의 분량을 따라서’라는 뜻이다(BDB, KJV,NASB).
이 말씀은 아이의 연령의 정도, 이해의 정도에 따라 가르치라는 뜻도 될 것이다.
우리는 자녀가 어릴 때는 성경을 단순하게, 쉽게 가르치고 나이가 들수록 조금씩 더 자세하게 가르쳐야 한다. 그러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할 것이다.
어릴 때 받은 교훈은 오래 간직된다. 그것은 늙을 때까지 간직된다. 어릴 때의 교육은 참으로 중요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녀들에게 어릴 때부터 성경을 가르치고 경건 훈련을 시키고 의와 선과 진실의 삶을 가르쳐야 한다.
[7절] 부자는 가난한 자를 주관하고 빚진 자[빌리는 자]는 채주(債主)[빌려주는 자]의 종이 되느니라.
이것이 세상의 현실이다. 주께서 하신 비유 중에, 어떤 임금이 일만 달란트 빚진 자가 갚을 것이 없을 때에,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고 명했다(마 18:23-25). 또 그 종이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하나가 빚을 갚지 못하자 그가 조금 더 참아 달라고 엎드려 간구함에도 불구하고 그를 옥에 가두었다(마 18:28-30). 이것이 세상이다.
야고보서 2:6은 “부자는 너희를 압제하며 법정으로 끌고 가지 아니하느냐?”라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는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 성도는 가난한 자를 학대하지 말고 불쌍히 여겨야 하며 구제해야 한다.
잠언14:31,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존경하는 자니라.”
의인 욥은, “남종이나 여종이 나로 더불어 쟁변할 때에 내가 언제그의 사정을 멸시하였던가?” “내가 언제 가난한 자의 소원을 막았던가? 과부의 눈으로 실망케 하였던가? 나만 홀로 식물을 먹고 고아에게 먹이지 아니하였던가? 실상은 내가 젊었을 때부터 고아를 기르기를 그의 아비처럼 하였다”라고 말했다(욥 31:13, 16-18).
경건한 다윗은,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구걸]함을 보지 못하였도다. 저는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고 꾸어주니 그 자손이 복을 받는도다”라고 말했다(시 37:25-26).
잠언은, 현숙한 여인은 가난한 자에게 손을 펴며 궁핍한 자를 위해 손을 내미는 자라고 묘사하였다(잠 31:20). 또 주께서는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양들은 굶주리고 헐벗는 가난한 형제를 돌아보았다고 말씀하셨다(마 25:40).
[8절] 악을 뿌리는 자는 재앙을 거두리니 그 분노의 기세(氣勢, 쉐베트)[지팡이](rod)(KJV, NASB, NIV)가 쇠하리라.
‘악을 심는다 혹은 뿌린다(sow)’는 말은 악을 혼자 행하는 것뿐 아니라, 이곳 저곳에, 이 사람 저 사람에게 행하며 또 다른 사람들에게 악을 퍼뜨리고 전염시킨다는 뜻도 가지는 것 같다. 악은 누룩과 같이 다른 사람을 부패시키는 성질이 있다. 그러므로 성경은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진다고 말했고(고전 5:6), 또 악한 친구들이 선한 행실을 더럽힌다고 말하였다(고전 15:33).
악을 심는 자는 재앙을 거둘 것이다. ‘재앙’이라는 원어(아웬 )는 ‘환난, 재난’이라는 뜻이다(BDB, NIV). 이 말은 어떤 영어성경들에서는 ‘헛된 것’(KJV, NASB)이라고 번역되었다.
사람이 악을 행하면 하나님께서 환난과 재난으로 벌하실 것이다.
시편 1:6은,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라고 말하였고, 시편 11:6은, “악인에게 그물을 내려치시리니 불과 유황과 태우는 바람이 저희 잔의 소득이 되리로다”라고 말했다.
또 악인은 헛된 것, 곧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것을 거둘 것이다. 악인의 삶은 결국 시간과 힘과 돈을 낭비한 것뿐일 것이다.
또 악인의 분노의 지팡이 즉 기세는 쇠할 것이다. 악한 자들이 악을 행할 때 나타내는 분노의 기세는 상당히 힘이 있어 보인다. 선을 행하는 자는 온유하고 겸손하지만, 악을 행하는 자는 교만하고 분노한다. 그러나 그 분노의 기세는 꺾이고 쇠해질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에게 환난과 재난을 주셔서 그의 교만을 꺾으실 것이며 그의 악한 행위들을 헛되게 만드시고 폐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패역한 자의 길에는 가시와 올무가 있으나 영혼을 지키는 자는 그런 것이 없다. 우리는 패역한 길로 가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바른 길로 감으로 생명과 평안을 누려야 한다.
둘째로,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마땅히 행할 길을 가르쳐주는 하나님의 유익한 말씀이다. 우리는 자녀들에게 어릴 때부터 성경을 가르쳐야 한다.
셋째로, 부자는 가난한 자를 주관하고 빌리는 자는 빌려주는 자의 종이 된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부지런히 살아야 하고, 또 우리 주위의 가난한 자를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며 구제하며 선을 베풀어야 한다.
넷째로, 악을 심으며 뿌리는 자는 재앙을 거둘 것이며 그 분노의 기세는 쇠할 것이다. 우리는 악을 행하거나 악인과 친근히 하다가 함께 재앙을 당하지 말아야 하고,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지하고 악의 세력을 두려워 말고 성경의 교훈대로 선하고 온유하고 겸손한 자가 되어야 한다.
9-12절, 선한 눈, 거만, 마음의 정결, 지식
[9절] 선한 눈(토브 아인 )[후한 눈](KJV)을 가진 자는 복을 받으리니 이는 양식을 가난한 자에게 줌이니라.
눈은 마음을 드러낸다. 어떤 영어성경들은 ‘선한 눈을 가진 자’를 ‘후한 자’(NASB, NIV)라고 번역했다. 선한 눈 즉 선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가난한 자에게 양식을 나눠줄 것이다. 구제는 하나님의 뜻이며 명령이다.
신명기 15:10, “너는 반드시 그[가난한 형제]에게 구제할 것이요, 구제할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 것이니라. 이로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범사와 네 손으로 하는 바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의인의 특징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선한 마음을 가지고 선한 말과 선한 행동을 하는 것이며 그 선한 마음은 특히 구제로 나타난다.
시편 37:21, “악인은 꾸고 갚지 아니하나 의인은 은혜를 베풀고 주는도다.”
시편 37:26, “저는[의인은]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고 꾸어주니 그 자손이 복을 받는도다.”
잠언 21:26, “어떤 자는 종일토록 탐하기만 하나 의인은 아끼지 아니하고 시제[구제]하느니라.”
본문은 의인이 양식을 가난한 자에게 주기 때문에 복을 받을 것이라고 말한다.
잠언 11:25,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 잠언 13:21, “재앙은 죄인을 따르고 선한 보응은 의인에게 이르느니라.” 잠언 19:17,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 마태복음 6:3-4,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구제와 선행을 갚아주신다.
[10절] 거만한 자를 쫓아내면 다툼이 쉬고 싸움과 수욕이 그치느니라.
‘거만한 자’라는 원어(레츠 )는 ‘조롱하는 자, 비웃는 자’라는 뜻이다.
조롱하고 비웃는 것은 교만하고 거만한 자의 모습이다. 그런 자는 다툼을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 잠언 13:10은, “교만에서는 다툼만 일어날 뿐이라. 권면을 듣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고 말하였다. 잠언28:25는 “마음이 탐하는 자는 다툼을 일으키나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풍족하게 되느니라”고 말했는데, 거기에서 ‘탐한다’는 원어(레카브)도 ‘교만하다’는 뜻이다(BDB, KJV, NASB).
인간 관계에서 화평과 일치를 가지려면, 온유와 겸손, 오래 참음과 양보와 사랑의 덕을 갖추어야 한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4:1-3에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말했고, 또 빌립보서 2:3에서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고 말했다. 우리는 겸손과 사랑으로 단합해야 한다.
본문은 조롱하는 자를 쫓아내라고 말한다. 그것은 그런 자와 교제를 끊고 교회에서 내어보내라는 뜻이다. 그것은 절교의 벌이다. 또 “그리하면 다툼이 쉬며 싸움과 수욕도 그치리라”고 말한다. 물론 시시비비도 가려야 하겠지만, 교만한 자는 끝까지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분란을 일으키므로 성도의 교제에서 제외되어야 한다. 자신의 잘못을 회개치 않고 온유와 겸손의 덕을 사모하지도, 행하기를 힘쓰지도 않는 자는 실상 교회 안에 있는 것이 합당치 않다.
[11절] 마음의 정결을 사모하는 자의 입술에는 덕이 있으므로 임금이 그의 친구가 되느니라.
본문은 우리에게 마음의 정결을 사모하는 자, 입술에 덕이 있는 자가 되라고 교훈한다. 마음의 정결함은 생각과 감정과 의지의 정결함이다. 그것은 중생(重生)[거듭남]과 회개의 결과이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그러므로 마음의 정결함은 오직 철저한 회개를 통해서만, 즉 죄를 깨닫고 죄를 미워하고 죄를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씻음 얻음으로만 가능하다. 사도행전 15:9는 우리가 믿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깨끗케 하셨다고 말한다.
우리는 마음의 정결함을 사모하며 사랑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거룩하게 사는 자가 되는 것이다(살전 4:3).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는 자, 곧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뜻을 행하고자 하는 자는 마음의 더러움을 씻음 받고 마음의 정결함을 사모하며 사랑해야 한다.
또 우리는 입술에 덕이 있는 자가 되어야 한다. ‘덕’이라는 원어(켄)는 ‘은혜, 친절함, 사랑스러움’이라는 뜻이다.
사람의 마음은 말로 표현된다. 주께서는 사람이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하며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말하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말한다고 말씀하셨다(마 12:34-35).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4:29에서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고 교훈하였다.
마음의 정결함을 사모하고 입에 덕이 있는 자는 훌륭한 인격자이며 모두가 그를 좋아하고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왕이라도 그의 친구가 되며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께서도 그를 친구로 받아주실 것이다.
[12절] 여호와께서는 지식 있는 자를 그 눈으로 지키시나 궤사한 자의 말은 패하게 하시느니라[여호와의 눈은 지식을 지키시나 변절자의 말은 폐하시느니라].
하나님의 눈은 모든 것을 보시고 판단하시고 보응하신다. 그 눈은 특히 지식을 지키신다. 그 지식은 바른 지식, 참된 지식, 공의의 지식, 진리의 지식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지식을 지키신다. 하나님 앞에서 참 지식은 언제나, 누구에게나 동일하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이며(요 17:17), 하나님의 진리, 성경 진리는 변하지 않는다. 하나님께는 잘못된 지식이 없으시며 시대마다 변하는 지식도 없으시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의 지식을 사모해야 하며 그 지식을 얻어야 한다. 잠언 8:10은, “너희가 은을 받지 말고 나의 훈계를 받으며 정금보다 지식을 얻으라”고 말했고, 잠언 22:17은, “너는 귀를 기울여 지혜 있는 자의 말씀을 들으며 내 지식에 마음을 둘지어다”라고 말했다. 또 잠언19:27은, “내 아들아, 지식의 말씀에서 떠나게 하는 교훈을 듣지 말지니라”고 말했다. 우리는 지식 있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변절자의 말은 폐하신다. ‘궤사한 자’라는 원어(보게드 )는 ‘변절자, 배신자’라는 뜻이다. 변절자는 자기에게 유리하거나 불리할 때 말을 바꾸며 참 지식을 저버린다. 그는 한 주인을 섬기지 않고 두 주인 혹은 여러 주인을 섬기는 자이며, 바른 생각과 참된 지식을 버린 자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의 생각과 중심을 다 아시고 판단하시고 그를 폐하신다. ‘패하게 한다’는 원어(살라프 )는 ‘폐한다, 뒤집어엎다, 파괴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시편 34:13은, “네 혀를 악에서 금하며 네 입술을 궤사한 말에서 금할지어다”라고 말했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선한 눈을 가진 자는 양식을 가난한 자에게 주기 때문에 복을 받을 것이다. 우리는 선한 눈, 곧 친절하고 너그럽고 후한 마음을 가지고, 우리 주위에 가난한 자들에게 우리의 가진 것을 나누는 선한 자가 되어야 하고 그때 하나님께 복을 받을 것이다.
둘째로, 조롱하는 자를 쫓아내면 다툼이 쉬고 싸움과 수욕이 그칠 것이다. 우리는 교만하고 거만한 마음을 가져 남을 조롱하거나 비웃지 말고 오직 온유와 겸손, 사랑과 양보의 심령을 가진 자가 되어야 한다.
셋째로, 마음의 정결을 사모하는 자의 입술에는 덕이 있으므로 왕이 그의 친구가 될 것이다. 우리는 마음의 정결을 사모하고 선하고 덕스럽고 은혜로운 말을 해야 하고 그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친구가 되실 것이다.
넷째로, 여호와의 눈은 지식을 지키시나 변절자의 말은 폐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의와 진리의 바른 지식을 사모하며 소유하고 끝까지 붙드는 자들을 붙드시고 복 주시고 그 지식을 저버리는 변절자를 폐하실 것이다.
우리는 성경의 바른 지식을 사모하며 소유하고 끝까지 붙들어야 한다.
13-16절, 게으름, 음녀, 아이, 학대
[13절] 게으른 자는 말하기를 사자가 밖에 있은즉 내가 나가면 거리에서 찢기겠다 하느니라.
잠언 26:13도, “게으른 자는 길에 사자가 있다, 거리에 사자가 있다 하느니라”고 비슷하게 말한다. 무슨 일이든지 세상일에는 종종 크고 작은 어려움이 있고 예기치 못하는 난관들도 있다. 또한 성도가 하는 일에는 사탄과 악령들과 악한 자들의 방해도 있다. 그러므로 성도는 무슨 일을 하든지 먼저 겁부터 내지 말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와 용기를 가지고 또 고난을 각오하며 참고 견디면서 해야 한다.
그러나 게으른 사람은 “사자가 밖에 있은즉 내가 나가면 거리에서 찢기겠다”고 말하며 일을 하지 않으려 한다. 그는 예상되는 가장 어려운 상황을 가정하고 겁을 내며 핑계를 대며 게으름을 피우는 것이다.
그러나 실상, 사자는 보통 숲이 있는 들판에 있고 길거리에 있지는 않다. 성도의 앞길에 어려운 난관이 항상 있는 것은 아니다. 또 설령, 위험이 있다 해도, 우리는 할 일은 해야 할 것이다. 사람이 교통사고의 위험이 있다고 해서 자동차 운전을 하지 않는다면, 그는 많은 활동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성도는 고난과 위험을 각오하며 살고 일해야 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은 자기를 부정하고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길이다. 성도의 신앙생활에는 언제나 마귀와 악령들의 방해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고 담대히 행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고 말했고(빌 1:29), 또 “내게 능력 주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말했다(빌 4:13 전통본문).
[14절] 음녀의 입은 깊은 함정이라. 여호와의 노를 당한 자는 거기 빠지리라.
음녀는 음란한 여자, 단정치 못한 여자를 가리킨다. 그는 성(性)을 부부의 사랑의 수단으로 귀히 여기지 않고 단지 오락물이나 돈 버는 수단으로 생각하고 쉽게 자신의 몸을 남에게 주는 여자이다. 음녀의 입은 남자들을 유혹하는 입이다. 그는 달콤한 말로 그들을 유혹한다.
음란한 남자의 입도 마찬가지이다. 본문은 음녀의 입이 깊은 함정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사람이 거기서 헤어 나오기 어려운 함정이라는 뜻이다. 거기에 빠진 자는 큰 낭패를 당할 것이며 결국 죽을 것이다.
본문은 여호와의 노를 당한 자가 거기 빠질 것이라고 말한다. ‘여호와의 노를 당한 자’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고 노하시는 자를 가리킨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미워하시고 노하시는 것은 그의 범죄함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자를 음녀의 유혹에 빠지게 버려두신다는 뜻이다. 작은 죄를 회개치 않는 자는 더 큰 죄에 빠질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 죄를 회개하고 멀리하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순종하는 사람은 음녀의 유혹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지켜주시기 때문이다. 시편 25:15, “내 눈이 항상 여호와를 앙망함은 내 발을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실 것임이로다.”
잠언 2:16, “지혜가 또 너를 음녀에게서, 말로 호리는 이방 계집에게서 구원하리라.” 잠언 6:23-24,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 이것이 너를 지켜서 악한 계집에게, 이방계집[음녀]의 혀로 너를 호리는 말에 빠지지 않게 하리라.”
[15절]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혔으나 징계하는 채찍이 이를 멀리 쫓아내리라.
사람의 마음 속에는 날 때부터 가지고 태어난 부패성이 있고 하나님을 아는 지혜가 없고 도덕적 분별력과 통제력이나 자제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사람의 마음은 깨끗하지 못하다. 아이의 마음이라도 그렇다.
오히려 도덕적 훈련을 받지 못한 아이의 마음은 도덕적 훈련을 받은 어른들의 마음보다 더 혼란스럽기도 하다.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혀 있다. 그 속에는 사상적 혼란이 있다. 아이에게는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고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께 예배드릴 줄 모르고 안식일을 구별할 줄 모르는 무신론적 생각이 있고, 하나님 아닌 헛된 것들에 의미와 가치를 두는 우상숭배적 생각도 있다. 도덕적 혼란도 있다. 부모를 공경치 않고 순종치 않고 거역하는 마음, 남을 미워하고 욕하고 해치려는 마음, 성적 문란 즉 음란한 마음, 도적질하는 마음, 거짓말하는 마음, 여러 가지 탐심 등이 있다. 이런 죄악된 것들이 아이들의 마음 속에 얽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징계하는 채찍이 이를 멀리 쫓아낸다. 이것은 말씀의 교훈을 전제한 것이다. 부모가 자녀를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훈하지만, 그래도 말을 잘 듣지 않으면 징계의 매가 필요하다. 그것은 미운 감정에서 나온 매가 아니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사람을 만들려고 드는 사랑의 매이다. 잠언 13:24, “초달을 차마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
자녀를 위한 징계의 매는 효력이 있다. 그것은 자녀의 마음속에 있는 미련한 것들을 멀리 쫓아내며, 그로 하여금 사상적, 도덕적 잘못을 깨닫고 바른 생각을 하고 바른 길을 걷게 할 것이다.
[16절] 이(利)를 얻으려고 가난한 자를 학대하는 자와 부자에게 주는 자는 가난하여질 뿐이니라.
물질적 이익을 가장 큰 가치로 알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벌려는 자는 심지어 가난한 자를 학대하면서까지 자기 이익을 구하려 한다. 그러나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데, 가난한 자를 구제하기커녕 도리어 학대하니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이요 하나님을 멸시하는 큰 죄악이다. 잠언 14:31은,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존경하는 자니라”고 말한다.
본문은 또 ‘부자에게 주는 자’에 대해서도 말한다. 부자에게 주는 것은 많은 경우에 나쁜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주는 뇌물성 선물이다. 그런 사람은 아부하고 아첨하기를 잘한다. 그것은 상대를 위해 준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해 준 이기적 행위이다.
본문은, 물질적 이익을 얻으려고 가난한 자를 학대하는 자와 부자에게 주는 자는 가난하여질 뿐이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를 학대하는 자에게서 복을 거두시고 도리어 재앙을 내리실 것이다. 또 부자에게 선물을 주는 자는 돈을 헛되이 쓰는 자이다. 우리의 재능과 건강, 시간과 돈은 세상 사는 동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것들이며 헛되이 낭비하지 말고 바르게 써야 한다. 성도의 물질 관리법은, 우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돈을 쓰는 것이고, 또 자신을 위해서는 검소하게, 절약적이게 쓰는 것이고, 또 먹을것과 입을 것에 어려움을 당하는 주위의 가난한 자들을 돌아보며 구제하고 또 그 외에 이웃을 위한 선한 일들에 쓰는 것이다. 사람이 돈을 낭비하면 가난해진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게으른 자는 사자가 밖에 있은즉 내가 나가면 거리에서 찢기겠다고 한다. 우리는 게으른 자가 되지 말고 또 고난을 두려워하며 겁내는 자도 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지혜와 용기를 얻어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담대히 해야 한다.
둘째로, 음녀의 입은 깊은 함정이며 하나님의 노를 당한 자는 거기에 빠질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회개함으로 하나님의 노를 피하고 음녀의 말에 빠지지 말고 음란죄에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셋째로,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혔으나 징계하는 채찍이 이를 멀리 쫓아낸다. 우리는 원죄의 부패성을 인식하고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말씀의 바른 교훈과 징계의 매로써 자녀들을 바르게 교육해야 한다.
넷째로, 이(利)를 얻으려고 가난한 자를 학대하는 자와 부자에게 주는 자는 가난하여질 뿐이다. 우리는 불의하고 악하게 물질적 이익을 얻으려 하지 말고, 정당하게 벌고 바르게 그리고 선하게 쓰는 자가 되어야 한다.
17-21절, 지혜의 말씀, 진리의 말씀
[17-18절] 너는 귀를 기울여 지혜 있는 자(카카밈 )[지혜 있는 자들]의 말씀을 들으며 내 지식에 마음을 둘지어다. [이는](키 ) 이것을 네 속에 보존하며 네 입술에 있게 함이 아름다우니라[아름다움이니라].
지혜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원하시는 바를 이해하고 바르고 선하게 살며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는 자들이다. 솔로몬도 하나님의 은혜로 그런 지혜와 지식을 얻었었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은 그의 지식과 지혜가 되었고 그는 또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고 가르칠 수 있었다. 본문은 우리가 귀를 기울여 지혜 있는 자들의 말씀을 들으며 지식에 마음을 두라고 말한다. 우리는 참된 지혜와 지식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마음을 두어야 한다.
그렇게 해야 할 이유는 이것을 마음 속에 보존하고 입술에 있게 함이 아름답기 때문이다. 사람이 지혜와 지식을 그 마음 속에 보존하면 그는 지혜와 지식이 있는 인격이 되며 지혜와 지식이 있게 행동하게 될 것이다. 또 사람은 지혜와 지식을 그 입술에 있게 하면, 그는 경건하고 바른 말, 선하고 덕스럽고 진실한 말을 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사람이 외모는 아름다워도 그 인격이 아름답지 못하다면 그것이 참으로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성경은 인격적, 도덕적 덕성과 아름다움을 훨씬 더 크게 여긴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참으로 값진 아름다움이다. 그러므로 사도 베드로는,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고 말했다(벧전 3:3-4).
[19절] 내가 너로 여호와를 의뢰하게 하려 하여 이것을 오늘 특별히 네게 알게 하였노니.
본문의 ‘이것’은 앞절에 말한 ‘지혜와 지식의 말씀’을 가리킨다. 본문은 지혜와 지식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의지할 것을 교훈한다.
우리는 이 세상의 것들을 의지하지 말아야 한다. 이사야 3:1-2,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예루살렘과 유다의 의뢰하며 의지하는 것을 제하여 버리시되 곧 그 의뢰하는 모든 양식과 그 의뢰하는 모든 물과 용사와 전사와 재판관과 선지자와.” 이사야 2:22,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
우리는 식량도, 돈도, 권세도, 사람도, 자기 자신도 의지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영원하신 하나님만 의지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만 의지하면 구원과 영생을 얻고 힘을 얻을 것이다. 이사야 45:22, “땅끝의 모든 백성아, 나를 앙망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나는 하나님이라. 다른 이가 없음이니라.” 이사야 40:31,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우리는 아브라함처럼 바랄 수 없는 중에 하나님을 바라고 믿어야 한다(롬 4:18). 우리는 성경말씀을 통하여 믿음을 얻는다. 요한복음 20:31,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로마서 10:17,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았았느니라.” 디모데후서 3:14-15,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20-21절] 내가 모략과 지식의[지식을] 아름다운 것을[이전에]17) 기록하여 너로 진리의 확실한 말씀[말씀의 확실함]을 깨닫게 하며 또 너를 보내는 자에게 진리의 말씀으로 회답하게 하려 함이 아니냐? <17) ‘아름다운 것’이라는 원문은 마소라 학자들이 ‘세 번째 것들, 아름다운 것들’이라는 말(솰리쉼 )(KJV, NASB)로 읽으라고 제안하지만(케레), 본래는 ‘3일 전에, 이전에’라는 말(쉴숌 )로 쓰여 있다(케팁)(BDB).>
하나님께서는 지혜와 지식의 말씀들을 성경에 기록케 하셨다. 성경은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주신 목적은 두 가지이다.
첫째는 진리의 말씀의 확실함을 깨닫게 하기 위함이다. ‘확실함’이라는 원어(코쉐트 )는 ‘정당함, 믿을 만함’이라는 뜻이다. 누가는 누가복음을 쓴 목적을 데오빌로 각하로 하여금 그 배운 바의 확실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말했다(눅 1:4). 우리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진리의 정당함, 믿을 만함, 확실함을 깨닫고 그 진리를 확신하게 된다. 디모데후서 3:14-15,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둘째는 진리를 고백하고 가르치게 하기 위함이다. ‘너를 보내는 자에게’라는 말은 진리를 배우게 하려고 ‘너에게 보내는 자들에게’(KJV) 라는 뜻보다 진리를 전하라고 ‘너를 보낸 자에게’(NASB, NIV)라는 뜻일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기록인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진리를 배우고 고백해야 하고 또 그 진리를 가르치고 전해야 한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귀를 기울여 지혜 있는 자들의 말씀을 들으며 그 지식에 마음을 두어야 한다. 그것을 마음에 두고 고백함이 아름답기 때문이다. 사람의 참 가치와 아름다움은 단지 외적인 것에나 물질적인 것에 있지 않고 인격성 곧 경건과 도덕성에 있다.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를 의뢰하게 하시기 위해 지혜와 지식의 말씀을 우리에게 알게 하셨다. 우리는 헛된 세상의 것들을 의지하지 말고, 오직 성경말씀을 통하여 창조자와 섭리자 하나님을 알고 의지하고 그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고 의지하고 따라가야 한다.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모략과 지식을 이전에 기록하게 하셔서 우리로 진리의 말씀의 확실함을 깨닫게 하시며 또 그것을 고백하며 가르치게 하신다. 성경은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창고이며 우리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과 그의 모든 진리를 확신하고 고백하며 다른 이들에게 전할 수 있다.
22-29절, 탈취, 노, 빚 보증, 지계석, 근실함
[22-23절] 약한(달 )[약한, 가난한](BDB) 자를 약하다고 탈취하지 말며 곤고한(아니 )[환난 당하는, 가난한] 자를 성문에서 압제하지 말라. 대저 [이는] 여호와께서 신원(伸寃)하여[원통함을 풀어] 주시고 또 그를 노략하는 자의 생명을 빼앗으시리라[빼앗으실 것임이니라].
우리는 약하고 가난한 자의 것을 빼앗거나 압제하지 말아야 한다.
‘성문에서’라는 말은 ‘공적으로’라는 뜻이다. 옛날에 성문 앞은 사람들이 모이는 공공 장소이었다. 거기에서 장로들의 재판이 있었다. 그러므로 성문 앞에서 가난한 자를 압제하는 것은 매우 뻔뻔스럽고 큰 악이다.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들의 억울함을 다 아시고 갚아주시고 그들의 소유물을 빼앗는 악인들을 죽이실 것이다. 신명기 27:19는, “객이나 고아나 과부의 송사를 억울케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고 말하였고, 또 시편 140:12는, “내가 알거니와 여호와는 고난 당하는 자를 신원(伸寃)하시며[원통함을 풀어주시며] 궁핍한 자에게 공의를 베푸시리이다”라고 말하였다.
[24-25절] 노를 품는 자와 사귀지 말며 울분한 자와 동행하지 말지니그 행위를 본받아서 네 영혼을 올무에 빠칠까 두려움이니라.
잠언은, 노하기를 속히 하는 자는 어리석은 일을 행하며 분을 쉽게 내는 자는 다툼을 일으킨다고 말한다(잠 14:17; 15:18; 29:22). 또 사람이 노하면 범죄하기 쉽다(시 37:8; 잠 29:22). 그러므로 우리는 노하기를 더디해야 한다. 잠언 14:29와 16:32는,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크게 명철하며 용사보다 낫다고 말한다. 전도서 7:9도 “급한 마음으로 노를 발하지 말라”고 말하였다. 야고보서 1:19-20도, “성내기는 더디하라.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고 말하였다.
노하기를 더디하는 것은, 성도들에게 주신 성경의 전체적 가르침, 즉 온유와 겸손과 관용, 사랑과 인내, 항상 기뻐함 등의 가르침에 일치한다. 우리는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노를 억제해야 한다.
또 우리는 노를 품는 자와 사귀지도 말며 울분한 자와 동행하지도 않는 것이 좋다. 그 이유는 우리가 분노한 자나 울분한 자의 행위를 본받아 우리의 영혼을 올무에 빠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남의 행동을 잘 따라해서 악한 자와 교제하면 악한 일을 배우기 쉽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리석은 자나 악한 자와 교제하는 것부터 조심해야 한다. 우리는 노를 품는 자와 사귀지 말고 그와 동행하지 말아야 한다.
[26-27절] 너는 사람으로 더불어 손을 잡지(타카 카프 )[손을 치지, 손바닥을 치지] 말며 남의 빚에 보증이 되지 말라. 만일 갚을 것이 없으면 네 누운 침상도 빼앗길 것이라. 네가 어찌 그리하겠느냐?
손을 치는 것은 옛날에 사람이 무엇을 보증할 때 사용한 방식이었다. 잠언 6:1, “타인을 위하여 보증하였으면[네 손을 치면].” 잠언 17:18,“지혜 없는 자는 남의 손을 잡고[남의 손을 치며].”
사람이 남의 빚에 보증이 되지 않는 것이 지혜이다. 잠언 17:18은,“지혜 없는 자는 남의 손을 잡고[손을 치며] 그 이웃 앞에서 보증이 되느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남의 빚을 보증하였으면 그는 속히 가서 간청하여 그 보증을 취소하는 것이 좋다. 잠언 6:1-3, “내 아들아, 네가 만일 이웃을 위하여 담보하며 타인을 위하여 보증하였으면 네 입의 말로 네가 얽혔으며 네 입의 말로 인하여 잡히게 되었느니라. 내 아들아, 네가 네 이웃의 손에 빠졌은즉 이같이 하라. 너는 곧 가서 겸손히 네 이웃에게 간구하여 스스로 구원하라.”
남의 빚을 보증한 자는 손해를 당할 것이다. 만일 갚을 것이 없으면, 누운 침상도 빼앗길 것이다. 그러므로 잠언 11:15도, “타인을 위하여 보증이 되는 자는 손해를 당하여도 보증이 되기를 싫어하는 자는 평안하니라”고 말했고, 잠언 20:16도, “타인을 위하여 보증이 된 자의 옷을 취하라. 외인들의 보증이 된 자는 그 몸을 볼모잡힐지니라”고 말했다.
[28절] 네 선조의 세운 옛 지계석(게불 )[경계 표시]을 옮기지 말지니라.
경계 표시는 토지를 측량하고 박아둔 말뚝이다.
신명기 19:14,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어 얻게 하시는 땅 곧 네 기업된 소유의 땅에서 선인(先人)의 정한 네 이웃의 경계표를 이동하지 말지니라.”
잠언23:10, “옛 지계석을 옮기지 말며 외로운 자식의 밭을 침범하지 말지어다.”
지계석을 옮기는 것은 속여서 남의 재산을 취하는 것이며 더러운 이익을 탐하는 것이다. 그것은 양심을 더럽히는 악한 행위이다.
성도는 선조가 세운 옛 지계석을 옮기지 말아야 한다. 성도는 더러운 이(利)를 탐하지 말아야 한다. 성경은 감독과 집사가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않는 자이어야 한다고 교훈하였다.
디모데전서 3:3, “[감독은] 더러운 이(利)를 탐하지 아니하며”(전통본문). 디모데전서 3:8, “[집사도] 더러운 이(利)를 탐하지 아니하고.” 디도서 1:7, “[감독은]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며.” 이것은 성도의 모범적 삶의 한 부분이다. 성도는 더러운 이익을 탐하지 말고 도둑질하거나 속이지 말고 정정당당하게, 정직하고 진실하게 살아야 한다. 그것이 바른 생활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모든 행위를 공의로 보응하실 것이다.
신명기27:17, “그 이웃의 지계표를 옮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호세아 5:10, “유다 방백들은 지계표를 옮기는 자 같으니 내가 나의 진노를 저희에게 물같이 부으리라.”
[29절] 네가 자기 사업에 근실한(마히르 )[신속한, 부지런한(KJV), 능숙한(NASB, NIV)](BDB) 사람을 보았느냐? 이러한 사람은 왕 앞에 설 것이요 천한 자 앞에 서지 아니하리라.
사람이 자기 일에 신속하고 부지런해서 어떤 방면에 뛰어난 실력가가 되면, 그는 나라의 통치자 앞에 설 것이며 그 앞에서 지위를 가질 것이다. 각 분야의 학자들은 통치자의 보좌관이나 자문위원이 될 것이며, 각 분야의 전문가들도 통치자의 조언자가 될 것이다.
하나님의 일과 교회의 일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성도가 자기 본분을 다하면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직분자가 될 것이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가 일곱 집사를 뽑으려 할 때, 열두 사도들은 모든 제자들을 불러 말했다.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저희에게 맡기리라”(행 6:3).
사도 바울은 교회의 감독 즉 장로의 자격과 집사의 자격을 말할 때 신앙생활과 인격의 성숙함과 온전함을 중요한 요소로 들었다. 디모데전서 3:2, “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디모데전서 3:8, “집사들도 단정하고 일구이언을 하지 아니하고.” 디모데전서 3:11, “여자들도 이와 같이 단정하고.” ‘단정함’은 ‘존경할 만함’이라는 뜻이다. 또 사도 바울은 맡은 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충성이라고 말했다(고전 4:2).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약하고 가난한 자들을 압제하거나 탈취하지 말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돌아보아야 한다. 가난한 자를 압제하는 것은 하나님을 멸시하는 죄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과 보응을 두려워해야 한다. 우리는 가난한 자를 사랑하고 구제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노를 품거나 울분한 자와 사귀지 말고 동행치 말아야 한다. 그것은 그들의 행위를 본받아서 우리의 영혼을 올무에 빠칠까 염려함이다. 노하기를 더디하는 것이 지혜이며 또 노한 자와 사귀지 않는 것도 지혜이다. 성도가 노한 자와 친근히 교제하면 범죄하기 쉽다.
셋째로, 우리는 대신 갚을 마음과 능력이 없다면 남의 빚에 보증이 되지 말아야 한다. 남의 빚에 보증이 되는 것은 선한 일인지는 모르나 어리석은 일이다. 남의 빚을 보증한 자는 손해를 입을 각오를 해야 한다.
넷째로, 우리는 선조들이 세운 땅 경계표를 옮기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더러운 이를 탐하지 말고 정직하고 선하고 진실하게 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공의로 보응하실 것이다.
다섯째로, 우리는 세상의 일이든지, 하나님의 교회의 일이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근실한 자, 즉 신속하고 부지런한 자, 일에 익숙한 자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교회에서도 그러할 것이다.
===23장: 물질, 자녀 징계, 술
1-8절, 탐식, 재물, 악인의 대접
[1-3절] 네가 관원과 함께 앉아 음식을 먹게 되거든 삼가 네 앞에 있는 자[네 앞에 있는 것](KJV, NASB, NIV)가 누구인지 생각하며 네가 만일 탐식자여든 네 목에 칼을 둘 것이니라. 그 진찬(珍饌)[맛있는 음식]을 탐하지 말라. 그것은 간사하게 베푼(케자빔 )[속이는](NASB, NIV) 식물이니라.
본문은, 관원이 베푼 진수성찬을 조심하고 그것을 탐하지 말고 네 목에 칼을 두라고 교훈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간사하게 베푼 음식, 즉 속이는 식탁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순수한 대접이 아니고 나쁜 의도를 가진 계산적인 대접이며 시험과 올무가 될 식탁이며 흠 잡힐 빌미가 될 식탁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대접받는 일을 조심해야 한다. 특별히 악인이 베푸는 대접은 피하는 것이 지혜이다. 악한 자의 대접을 받으면 악한 일에 동참하기 쉽고 한번 대접을 받으면 그 후에는 악한 자를 끊거나 물리치기 어려워질 것이다.
우리는 순수한 대접을 주고받아야 한다. 순수한 대접이란 존경이나 사랑을 가지고 베푸는 대접이다. 그것은 나사로의 형제들인 마르다와 마리아가 예수님을 위해 잔치하며 대접한 것과 같은 것이다(요 12:2).
또 주께서는 자기를 식사에 청한 어떤 사람에게 교훈하시기를, 갚을 것이 없는 가난한 자들과 병자들을 청하라고 하셨다(눅 14:12-13).
[4-5절] 부자 되기에 애쓰지(야가 )[수고하지, 피곤케 하지] 말고 네 사사로운 지혜를 버릴지어다(카달 )[끊어버릴지어다]. 네가 어찌 허무한 것에 주목하겠느냐? 정녕히 재물은 날개를 내어 하늘에 나는 독수리처럼 날아가리라.
성도는 부자가 되려고 피곤하게 수고하거나 애쓰지 말아야 하고, 돈을 많이 버는 지혜도 끊어버려야 한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라고 했다(딤전 6:9-10).
성도가 부자가 되기에 애쓰지 말고 돈 버는 지혜를 버려야 할 이유는 돈이 허무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느 날 독수리처럼 날아가 버릴 것이며 내가 죽으면 남의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시편 39:6, “재물을 쌓으나 누가 취할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누가복음 12:20,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야고보서 4:14,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믿고 또 그의 공급하신 것으로 만족하며 살아야 한다. 마태복음 6:31-32,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디모데전서 6:7-8,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히브리서 13:5,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6-8절] 악한 눈이 있는 자의 음식을 먹지 말며 그 진찬(珍饌)을 탐하지 말지어다.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爲人)도 그러한즉 그가 너더러 먹고 마시라 할지라도 그 마음은 너와 함께하지 아니함이라. 네가 조금 먹은 것도 토하겠고 네 아름다운 말도 헛된 데로 돌아가리라.
‘악한 눈’은 악한 마음을 반영하는 눈이다. 그것은 상대를 미워하고 약점을 잡고 해치려 하며 인색한 눈이다. 모세의 율법은 제7년 면제년이 가깝다고 가난한 형제에게 악한 눈을 들고 아무것도 꾸어주지 않는 행위에 대해 경고하였다(신 15:9). 잠언 28:22도 악한 눈이 있는 자는 재물을 얻기에만 급하다고 말하였다. 악한 눈을 가진 자가 있다.
성도가 악한 눈이 있는 자의 음식을 먹지 말고 그 진수성찬을 탐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그의 마음이 그와 함께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가 그더러 먹고 마시라고 말할지라도 그것은 입술의 말뿐이며 그 마음은 그의 흠을 잡고 그에게 시험과 올무를 놓으려는 것이다. 사람은 마음에 가득한 것을 그의 말과 그의 행동으로 나타낸다(마 12:35). 악한 자의 대접은 진심이 아니다. 그것은 가식적인 것이며 속이는 것이다. 그것은 나쁜 의도를 가진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악한 자의 대접을 조심해야 한다. 이미 1-3절에서 관원이 간사하게 베푼 맛있는 음식을 탐하지 말고 네 목에 칼을 두라고 교훈했었다.
악한 자의 대접은 나쁜 의도를 가진 대접이므로 거기에 빠지면 해를 당케 될 것이다. 우리는 악한 자의 대접을 좋아하지 말고 그 맛있는 음식을 탐하지 말아야 한다. 성도는 남의 대접받기를 좋아하지 말고 남을 대접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또 남을 대접할 때는 선한 눈으로, 진심과 사랑과 겸손으로 해야 한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정부의 관리와 함께 음식 대접을 받을 때 우리 앞에 있는 것이 속이는 음식일지 모르므로 그 맛있는 음식을 탐하지 말고 조심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남을 대접할 때에는 아무 조건이 없이, 계산적이지 않고 순수한 마음으로 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세상에서 부지런히 일하며 살지만, 부자가 되려고 피곤하게 수고하며 애쓰지 말고 돈 많이 버는 지혜도 버려야 한다. 우리는 돈의 헛됨을 알고 하나님만 믿고 현재 가지고 있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악한 눈이 있는 자의 음식을 먹지 말고 그 풍성한 식탁을 탐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대접받기를 좋아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남을 대접할 때에는 진심과 사랑과 겸손으로 해야 한다.
9-14절, 미련한 자, 옛 지계석, 교훈, 징계
[9절] 미련한 자의 귀에 말하지 말지니 이는 그가 네 지혜로운 말[너의 말의 지혜](원문, KJV, NASB)을 업신여길 것임이니라.
우리는 미련한 자들에게 말하지 말아야 한다. 그 이유는, 그가 우리의 지혜로운 말 혹은 우리의 말의 지혜를 업신여길 것이기 때문이다.
잠언 26:16에 “게으른 자는 선히 대답하는 사람 일곱보다 자기를 지혜롭게 여긴다”고 말했는데, 미련한 자도 그러하다. 미련한 자의 특징은 자신의 미련함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소에게 경 읽기라는 속담이 있다. 소에게 성경이나 종교의 경전을 읽어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깨닫는 마음이 없는 미련한 자는 짐승보다 나을 것이 없다. 시편 73:22는 “[내가] 우매무지하니 주의 앞에 짐승이라”고 고백하였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고 말씀하셨다(마 7:6). 하나님의 진리의 자세한 내용을 미련한 자에게 말해주어도 그는 깨닫지 못하고 그 가치를 알지 못하고 도리어 그 진리를 무시하고 비방하고 모욕할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자주 말씀하셨다(마11:15 전통본문; 13:9, 43 전통본문; 눅 8:8; 14:35). 미련한 자들에게는 먼저 심령의 새로워짐과 들을 귀의 열림이 필요하다. 그들은 하나님을 알고 두려워하며 자신들이 피조물이며 죄성을 가진 부족한 존재들임을 알아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의 지식을 사모하게 된다. 성도는 자신의 무지함과 미련함을 깨닫고 들을 귀가 열린 자이다.
[10-11절] 옛 지계석[경계, 경계 표시]을 옮기지 말며 외로운 자식(예소밈 )[고아들]의 밭을 침범하지 말지어다. 대저 그들의 구속자(救贖者)는 강하시니 너를 대적하사 그 원(寃)을 펴시리라[원통함을 갚으시리라].
사람이 옛 경계 표시를 옮기고 고아들의 밭을 침범하는 것은 불의하고 더러운 이익을 탐하는 것이다. 불의하고 더러운 이익 때문에 자기의 양심을 속이고 자기의 양심을 더럽히지 말라는 것이다.
본문은, 이는 그들의 구속자(救贖者)께서 강하시며 너를 대적하사 그 원통함을 갚으실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고아들의 아버지이시며 그들의 구속자(救贖者)이시다. 시편 68:5, “그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 하나님께서는 의로우시고 진실하시다. 그는 의와 진실을 기뻐하시고 불의와 거짓을 미워하시며 진노하시고 심판하신다. 그는 억울한 일 당하는 고아들을 구원하시며 그들을 억울케 하는 자들을 징벌하실 것이다.
성도는 물질 문제에 있어서 불의와 불법을 행하지 말아야 한다. 그는 정직하고 의롭고 진실하게 돈을 벌고 자기 재산을 관리하고 또 돈을 사용해야 한다. 그러므로 잠언 16:8은, “적은 소득이 의를 겸하면 많은 소득이 불의를 겸한 것보다 나으니라”고 말했고, 또 잠언 20:17은, “속이고 취한 식물은 맛이 좋은 듯하나 후에는 그 입에 모래[자갈]가가득하게 되리라”고 말했다. 사도 바울은 감독 즉 장로와 집사의 자격을 말할 때, “더러운 이(利)를 탐하지 아니하는” 것을 들었다(딤전 3:3[전통본문], 8). 그것은 성도의 물질생활이 어떠해야 함을 교훈한다.
[12절] 훈계(무사르 )[교훈, 훈계, 징계]에 착심(着心)하며[마음을 두며] 지식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라.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바른 길을 교훈하고 잘못된 것을 책망한다. ‘지식의 말씀’은 진리의 지식의 말씀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말씀은 지식의 말씀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지식의 말씀이며, 교훈과 책망의 말씀이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해, 사람의 죄와 구원에 대해, 또 사람의 바른 삶에 대해 가르쳐준다. 그것은 경건과 의와 선에 대해 말한다. 잠언 1:7-8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내 아들아, 네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고 말했다. 또 사도 바울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고 증거하였다(딤후 3:16-17).
‘착심(着心)하다’는 말은 ‘마음을 가지다, 마음을 두다’는 뜻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려면 그런 마음을 가져야 한다. 입술로나 겉모양으로만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겉모습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마음을 원하신다.
우리는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신 6:5). 귀를 기울이는 것도 마음이 있을 때에 가능하다. 마음이 없고 다른 생각을 하면, 바른 말도 들리지 않는다. 우리는 들으려는 마음이 필요하다.
[13-14절] 아이를 훈계(무사르 )[교훈, 훈계, 징계]하지 아니치 말라. 채찍으로 그를 때릴지라도 죽지 아니하리라. 그를 채찍으로 때리면 그 영혼을 음부(陰府)(쉐올 )[지옥, hell(KJV)]에서 구원하리라.
본문은, “아이를 훈계[교훈, 훈계, 징계]하지 아니치 말라”고 말한다.
어른에게도 교훈과 훈계와 징계가 필요하지만, 아이에게는 더욱 필요하다. 어릴수록 교훈과 훈계가 필요하고 매도 필요하다.
신명기 6:4-7,“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잠언22:6,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에베소서 6:4,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본문은 또 “채찍으로 그를 때릴지라도 죽지 아니하리라. 그를 채찍으로 때리면 그 영혼을 음부(陰府)[지옥]에서 구원하리라”고 말한다.
훈계와 징계는 진정한 자녀 사랑이다. 잠언 13:24, “초달을 차마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
잠언 19:18, “네가 네 아들에게 소망이 있은즉 그를 징계하고.”
자유방임주의는 바른 교육 방법이 아니고 자녀들에 대한 사랑도 아니다. 엘리 제사장이 죽은 것은 자기 아들들이 저주를 자청(自請)하였으나 금하지 않은 죄 때문이었다. 사무엘상 3:13, “내가 그 집을 영영토록 심판하겠다고 그에게 이른 것은 그의 아는 죄악을 인함이니 이는 그가 자기 아들들이 저주를 자청하되 금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교훈과 징계는 자녀들을 바른 사람 만드는 데 유익하다. 매는 그들의 영혼을 음부(陰府) 곧 지옥에서 건져낼 것이다. 잠언 22:15는,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혔으나 징계하는 채찍이 이를 멀리 쫓아내리라”고 말했고. 잠언 29:15는, “채찍과 꾸지람이 지혜를 주거늘 임의로 하게 버려두면 그 자식은 어미를 욕되게 하느니라”고 말했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미련한 자의 귀에 말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가 지혜로운 말을 업신여길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미련한 자에게 단지 하나님과 사람의 죄에 대한 기초적 진리를 말해 하나님을 경외하고 자신이 죄악됨을 깨닫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
둘째로, 우리는 옛 지계석을 옮기지 말고 고아와 과부의 밭을 침범하지 말아야 한다. 두려우신 공의의 심판자 하나님께서 그들의 원한을 풀어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불의의 이익을 탐하지 말고 공의의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하고 항상 정직하고 의롭고 진실하게만 살아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교훈에 마음을 두고 지식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한 말씀이며(딤후 3:16) 하나님과 사람과 구원과 내세에 관한 지식의 말씀이다. 우리는 성경말씀에 우리의 마음을 두고 우리의 귀를 기울여야 한다.
넷째로, 우리는 자녀를 징계해야 하며 그 매는 그를 죽이는 것이 아니고 살리는 것이며 그의 영혼을 지옥에서 구원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자녀를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고(엡 6:4) 필요할 때 매를 들기도 해야한다. 그것이 바른 교육 방법이며 자녀의 영혼을 구원하는 방법이다.
15-19절, 지혜와 정직, 하나님 경외, 정로(正路)
[15-16절] 내 아들아, 만일 네 마음이 지혜로우면 나 곧 내 마음이 즐겁겠고 만일 네 입술이 정직을 말하면 내 속이 유쾌하리라.
본문은 경건한 부모가 자녀들에게 주는 교훈일 뿐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들에게 주시는 교훈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이 지혜롭기를 원하신다. 사람이 마음이 지혜로우면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뜻을 깨닫고 그의 계명대로 행한다. 반면에, 마음이 미련한 자는 하나님을 무시하고 믿지 않고 그의 뜻을 알지 못하고 그의 계명을 거역하며 이 세상의 헛된 것들을 추구한다.
하나님께서는 또 우리의 입술이 정직을 말하기를 원하신다. 마음에 지혜가 있으면 입술이 정직을 말할 것이다. 사람은 마음에 있는 것을 입으로 말한다. 마음에 미련함이 있으면 미련한 것, 곧 불의하고 거짓된 것을 말할 것이나, 마음에 지혜가 있으면 지혜로운 것, 곧 경건과 의와 선과 진실을 좋아하고 말하고 전하고 행할 것이다.
본문은, 그러면 “내 마음이 즐겁고 유쾌하리라”고 말한다. 자녀들이 지혜롭게, 정직하게 살면, 부모에게 마음의 기쁨과 즐거움이 된다. 또 우리가 그렇게 살면 하나님께서도 기뻐하신다. 요한이서 4, “너의 자녀중에 우리가 아버지께 받은 계명대로 진리에 행하는 자를 내가 보니 심히 기쁘도다.” 요한삼서 3-4, “형제들이 와서 네게 있는 진리를 증거하되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즐거움이 없도다.” 이것은 부모와 목사의 기쁨일 뿐 아니라, 주 하나님의 기쁨이시다.
[17-18절] 네 마음으로 죄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고 항상 여호와를 경외하라. 정녕히 네 장래가 있겠고 네 소망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우리는 죄인의 물질적 부요와 세상적 성공을 부러워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그들의 형통을 부러워한다면 우리는 하나님 대신, 세상의 것을 크게 여기는 자이며 세상 사랑과 세상 욕심을 가진 자일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하지 말고 항상 하나님을 경외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인정하고 섬기며 그의 계명에 순종해야 한다. 그것이 지혜이고 의이며, 참된 평안과 행복과 승리의 길이다.
본문은 그렇게 할 때 “정녕히 네 장래가 있겠고 네 소망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고 말한다. 사람은 장래가 있어야 한다. 현재 좋은 것만으로는 안 된다. 현재 좋은 것 같아도, 내일 망하는 자들이 있고, 또 마지막 날 지옥 가는 자들이 있다. 주께서 주신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는 그 진리를 증거한다. 부자는 세상에서 부요하게, 호화롭게 살았지만, 죽은 후에 지옥, 고통의 장소에 던지웠다(눅 16:19-23).
그러나 현재 환경적으로, 세상적으로 나쁜 것 같아도 내일 잘되는 자들이 있다. 다윗이나 모르드개가 그러했다. 의인은 일곱 번 넘어져 도 다시 일어난다(잠 24:16). 현재 불행하게 죽는 것 같아도 장차 영생할 자들이 있다. 예수님 자신이 그러했고, 주의 이름 때문에 죽은 순교자들이 그러했다. 주께서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다(마 5:10-12). 성도
들의 복된 부활과 천국과 영생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19절] 내 아들아, 너는 듣고 지혜를 얻어 네 마음을 정로(正路)로 인도할지니라.
“너는 들으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말씀과, 그것에 근거한 경건하고 바른 교훈을 들으라는 뜻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지혜를 얻는다. 성경은 지혜로운 자와 미련한 자를 항상 대조시킨다. 지혜로운 자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요 그의 계명을 행하는 자이지만, 미련한 자는 하나님을 모르고 그를 두려워하지 않고 그의 뜻과 계명을 거역하고 죄만 짓는 자이다. 모든 사람은 지혜로운 자와 미련한 자, 이 둘 중에 하나이다.
본문은, “너는 듣고 지혜를 얻어 네 마음을 정로로 인도할지니라”고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지혜를 얻고, 또 지혜를 얻어야 우리의 마음을 정로(正路)로 인도할 수 있다. 사람은 마음이 중요하다. 잠언 23:7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爲人)[사람의 됨 됨이]도 그러하다”고 말한다.
사람의 마음은 영혼의 활동 곧 지정의(知情意)의 활동 영역이다. 사람의 마음이 곧 그의 인격을 형성한다. 마음에서 말과 행동이 나온다. 그러므로 사람은 자기의 마음을 잘 지켜야 한다. 잠언 4:23,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정로로’라는 원어(베데렉 )는 ‘그 길로’라는 뜻이다. ‘그 길’은 인생의 바른 길(正路)을 가리킨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성경에 교훈하신 길이다. 세상에는 정로가 아닌 길들이 많다. 사사 시대와 같이, 많은 사람들은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고 있다(삿 21:25). 그러나 성경만이 인생의 정로를 보인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고 말하였다(딤후 3:16-17).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마음이 지혜롭고 정직을 말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이것은 부모와 목사와 하나님께 기쁨이 된다.
둘째로, 죄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고 하나님만 경외하는 자가 장래가 있고 소망이 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계명을 순종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현세의 복과 내세의 천국과 영생이 확실히 있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말씀을 듣고 지혜를 얻어 우리 마음을 정로(正路)로 인도해야 한다. 인생의 정로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대로 사는 것이다. 그것은 복된 길이요 영생의 길이다.
20-25절, 탐식, 부모 청종, 진리, 의인
[20-21절] 술을 즐겨하는 자와 고기를 탐하는 자로 더불어 사귀지 말라. [이는] 술 취하고 탐식하는 자는 가난하여질 것이요 잠자기를 즐겨하는 자는 해어진 옷을 입을 것임이니라.
우리는 술을 즐겨하는 자와 고기를 탐하는 자와 함께 사귀지 말아야 한다. 친구는 영향을 주고받는다. 잠언 13:20은, “지혜로운 자와 동행하면 지혜를 얻고 미련한 자와 사귀면 해를 받느니라”고 말했고, 고린도전서 15:33은,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힌다”고 말했다.
술을 즐겨하는 자와 사귀면 술 마시는 것을 배우고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성도는 술 취함을 경계해야 한다. 에베소서 5:18은 술 취하는 것이 방탕한 것이라고 말했고, 고린도전서 6:10은 그런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 했다. 또 장로와 집사의 자격에 술을 즐기지 않는 것과 술에 인박이지 않은 것이 포함되었다(딤전 3:3, 8).
또 고기를 탐하는 자와 사귀어도 나쁜 영향을 받는다. 음식을 탐하는 것도 좋지 않다. 먹는 것은 즐거운 일이지만, 사람은 일하기 위하여 적당하게 먹어야지, 먹는 것 자체에 너무 빠져서는 안 된다. 천국 소망을 가진 성도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어느 정도 있으면 만족하며 살아야 한다(딤전 6:8). 또 잠도 너무 많이 자는 것은 게으른 일이므로 그런 자와도 친근히 하지 말아야 한다. 사람은 적당하게 먹고 잠도 적당하게 자고 부지런하게 자기 할 일을 하며 살아야 한다.
본문은, “이는 술 취하고 탐식하는 자는 가난하여질 것이요 잠자기를 즐겨하는 자는 해어진 옷을 입을 것임이니라”고 말한다. 우리가 술을 즐겨하는 자나 고기를 탐하는 자와 사귀지 말아야 할 이유는 그런 삶이 무절제하고 낭비적이고 가난할 수밖에 없는 삶이기 때문이다. 또 잠을 너무 많이 자는 게으른 삶도 마찬가지이다. 성경은 게으름도 악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그런 자들과 친근히 하지 말아야 한다.
[22절] 너 낳은 아비에게 청종하고 네 늙은 어미를 경히 여기지 말지니라.
자녀들이 부모를 공경하고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은 십계명에 명시된, 사람의 기본적 의무이다. 출애굽기 20:12,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레위기 19:3, “너희 각 사람은 부모를 경외하라.” 부모를 공경하는 것속에는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도 포함된다.
부모 공경의 법은 하나님께서 명하신 인간 관계의 법들 중에 가장 첫째 되는 법이다. 가정은 사회의 기본 단위이며 이 법은 사회의 기본적 질서를 지키는 법이다. 가정은 사람의 마음과 인격을 단련시키는 훈련장이며, 가정에서 잘하는 사람이 사회에서도 잘할 수 있다.
신약성경도 여전히 자녀가 부모를 공경하고 순종할 것을 교훈한다.
에베소서 6:1-2,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골로새서 3:20,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부모를 멸시하고 거역하는 것은 큰 죄악이다. 구약의 율법은 자기 부모를 치거나 저주하는 자, 또 순종치 않고 거역하는 자를 정죄하며 반드시 죽이라고 엄히 명하였다. 출애굽기 21:15, “자기 아비나 어미를 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 21:17, “그 아비나 어미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 신명기 21:18-21도 그러하다.
일반적으로, 부모는 자녀에게 바른 것을 말하고 자기 자녀가 바른 사람이 되고 좋은 사람이 되기를 원하며 교훈한다. 그러므로 자녀들은, 죄 지으라는 말 외에는 부모의 교훈을 잘 듣고 순종해야 하며 어머니가 늙고 힘이 없고 정신이 흐려졌다고 해서 그를 경히 여겨서는 안 된다. 자녀는 부모의 사랑과 수고를 잊지 말고 보답해야 한다.
[23절] 진리를 사고서 팔지 말며 지혜와 훈계와 명철도 그리할지니라.
본문은, “진리를 사라”고 말한다. ‘산다’는 원어(카나 )는 ‘얻는다, 산다’는 뜻이다. 잠언 4:5, “지혜를 얻으며 명철을 얻으라.” 사람은 진리를 어떻게 사며 얻는가? 이사야 55:1,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포도주와 젖’은 하나님의 진리를 가리킨다.
사람이 진리를 얻는 것은 돈으로가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그러나 참된 회개와 믿음과 기도와 간구로 얻는다.
잠언 2:1-6, “내 아들아, 네가 만일 나의 말을 받으며 나의 계명을 네게 간직하며 네 귀를 지혜에 기울이며 네 마음을 명철에 두며 지식을 불러 구하며 명철을 얻으려고 소리를 높이며 은을 구하는 것같이 그것을 구하며 감추인 보배를 찾는 것같이 그것을 찾으면 여호와 경외하기를 깨달으며 하나님을 알게 되리니.” 야고보서 1: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본문은 하나님의 진리를 산 후에 팔지 말고 간직하고 지혜와 훈계와 명철도 그렇게 하라고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와 지혜와 훈계와 명철을 세상 것들, 즉 세상의 부귀, 권세, 영화나 육신적 쾌락과 바꾸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지혜는 금과 은이나 진주보다 낫고, 또 그것은 장수(長壽)와 부귀(富貴), 평안과 즐거움의 길이며 또한 영생의 길이다
(잠 3:13-18). 그러므로 시편 19:10은 “[하나님의 말씀은] 금 곧 많은 정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라고 말했고 시편 119:72, 127은, “주의 입의 법이 내게는 천천 금은보다 승하니이다,” “그러므로 내가 주의 계명을 금 곧 정금보다 더 사랑하나이다”라고 말하였다.
[24-25절] 의인의 아비는 크게 즐거울 것이요 지혜로운 자식을 낳은 자는 그를 인하여 즐거울 것이니라. 네 부모를 즐겁게 하며 너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
자녀는 하나님께서 주신 기업이며 상급이다. 시편 127:3은,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라고 말한다.
자녀는 부모의 소유물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주신 기업이며 상급이며 선물이다. 그러므로 부모는 자녀를 하나님의 말씀의 교훈대로 잘 교육시켜야 한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말했다(엡 6:4).
부모는 자녀들을 의롭고 지혜롭게 잘 양육할 때 그 자녀들로 인해 크게 즐거움을 얻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자녀들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의 계명대로 살며 죄 짓지 않을 것이며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평안과 형통의 복을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부모는 그 자녀들로 인해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다. 그러므로 잠언 10:1은, “지혜로운 아들은 아비로 기쁘게 한다”고 말하며, 잠언 15:20 도, “지혜로운 아들은 아비를 즐겁게 한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미련하고 악한 자녀는 부모에게 슬픔과 고통이 된다. 왜냐하면 그런 자녀는 하나님의 징벌과 재앙을 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잠언 10:1은, “미련한 아들은 어미의 근심이라”고 말하였고, 잠언17:25는, “미련한 아들은 그 아비의 근심이 되고 그 어미의 고통이 되느니라”고 말하였다. 그러므로 본문은 자녀들에게 “네 부모를 즐겁게하며 너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고 교훈하였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술을 즐기고 고기를 탐하고 잠자기를 즐겨하는 자와 사귀지 말고 또 그런 삶을 본받지 말아야 한다.
둘째로, 사람은 자기를 낳고 기른 부모님, 특히 늙으신 부모님을 경히 여기지 말고 공경하고 순종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며 명령이다.
셋째로, 우리는 진리와 지혜를 사되 하나님의 은혜로, 회개와 믿음으로, 기도로 사고, 산 후에는 그것을 세상 것들과 바꾸지 말아야 한다.
넷째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의인과 지혜자가 되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부모님도 기쁘게 해야 하고 또 우리의 자녀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바르게 가르쳐 복된 자녀가 되게 함으로 즐거움을 얻어야 한다.
26-35절, 음행의 덫, 금주(禁酒)
[26-28절] 내 아들아, 네 마음을 내게 주며 네 눈으로 내 길을 즐거워할 지어다. 대저 음녀는 깊은 구렁이요 이방 여인은 좁은 함정이라. 그는 강도같이 매복하며 인간에 궤사한 자가 많아지게 하느니라.
‘강도같이’(KB, NASB, NIV)라는 원어(케케세프 )18)는 ‘먹이감을 위해’(BDB, KJV)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궤사한 자’라는 원어(보게딤 )는 ‘배신적이게, 불신실하게 행하는 자들’이라는 뜻이다. 본문은 우리에게 음행의 죄를 경계하라고 교훈한다. 부부의 사랑의 관계를 벗어난 음행의 죄는 사람의 죄악들 중에 큰 죄악이다.
본문은 음녀가 깊은 구렁이요 이방 여인은 좁은 함정이며 먹이감을 위해 매복하여 사람을 넘어뜨리며 불신실하게 행하는 자들이 많아지게 한다고 말한다. 음녀는 의도적으로 이성을 유혹하는 여인이다. 그는 사람이 헤어나올 수 없는 깊은 수렁과 좁은 함정 같다. 음행하는 자는 배우자와 가정에 또 사회에서 불신실한 자이다.
음행을 피하는 대책은 무엇인가? 본문은 그 대책으로 “내 아들아, 네 마음을 내게 주며 네 눈으로 내 길을 즐거워할지어다”라고 말한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며 성경적 교훈에 두어야 한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을 생각하며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말씀을 묵상해야 한다. 잠언 4:23은,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고 말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우리 마음을 지키며 우리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게 해야 한다.
또 우리는 우리의 눈으로 하나님의 길을 즐거워해야 한다. <19) 우리가 18) 베케세프 라고 된 사본들도 매우 많다고 함(BHS).19) 유대교 학자들은 ‘즐거워해야 한다’는 원어(티르체나 )를 ‘지켜야 한다’(팃초르나 )(< )로 읽으라고 제안했지만(케레)(LXX, Syr,Targ, Vg; KJV, NIV), 쓰여진 대로(케팁), ‘기뻐해야 한다’(티르체나 )(< )로 읽는 것이 옳다고 보인다(NASB).>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품고 그 길과 교훈을 눈으로 즐거워할 때, 그 말씀은 우리를 음행으로부터 지켜줄 것이다. 시편 119:9,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이다.” 잠언 2:16, “지혜가 또 너를 음녀에게서, 말로 호리는 이방 계집에게서 구원하리니.” 잠언 6:23-24,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 이것이 너를 지켜서 악한 계집에게, 이방 계집의 혀로 호리는 말에 빠지지 않게 하리라.”
음행은 범죄할 환경을 피하는 것도 지혜이다. 잠언 5:7-8, “아들들아, 나를 들으며 내 입의 말을 버리지 말고 네 길을 그에게서 멀리하라. 그 집 문에도 가까이 가지 말라.” 또 하나님께서 주신 부부의 관계도 잘 지켜야 한다. 잠언 5:18-19, “네 샘으로 복되게 하라. 네가 젊어서 취한 아내를 즐거워하라. 그는 사랑스러운 암사슴 같고 아름다운 암노루 같으니 너는 그 품을 항상 족하게 여기며 그 사랑을 항상 연모하라.” 고린도전서 7:5, “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의 절제 못함을 인하여 사단으로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29-35절] 재앙이 뉘게 있느뇨? 근심이 뉘게 있느뇨? 분쟁이 뉘게 있느뇨? 원망이 뉘게 있느뇨? 까닭 없는 창상[상처]이 뉘게 있느뇨? 붉은 눈이 뉘게 있느뇨? 술에 잠긴 자에게 있고 혼합한 술을 구하러 다니는 자에게 있느니라. 포도주는 붉고 잔20)에서 번쩍이며 순하게 내려가나니 너는 그것을 보지도 말지어다. 이것이 마침내 뱀같이 물 것이요 독사같이 쏠 것이며 또 네 눈에는 괴이한 것이 보일 것이요 네 마음은 망령된 것을 발할 것이며 너는 바다 가운데 누운 자 같을 것이요 돛대 위에 누운 자 같을 것이며 네가 스스로 말하기를 사람이 나를 때려도 나는 아프지 아니하고 나를 상하게 하여 도 내게 감각이 없도다. 내가 언제나 깰까 다시 술을 찾겠다 하리라. 20) < 31절의 ‘잔’이라는 원어는 유대교 학자들이 제안하는 읽기(코스 )이며 고대 역본들의 지지를 가지지만(LXX, Syr, Targ, Vg; KJV, NASB, NIV), 히브리어 본문에는 원래 포도주 부대(키스 )라고 쓰여 있다(케팁).>
본문은 술의 폐해에 대하여 자세히 증거한다. 술 취하는 자들에게는 재앙과 근심과 분쟁과 원망과 까닭 없는 성처와 붉은 눈이 있다. ‘술에 잠긴 자’라는 말은 ‘술을 오래 마시는 자’라는 뜻이다. 본문은 술이 뱀같이 물며 독사같이 쏠 것이기 때문에 보지도 말라고 교훈한다. 또 술취하는 자들의 눈에는 괴이한 것(자로스 )[이상한 여자들](KJV)이 보일 것이요 그들의 마음은 망령된 것[패역한 것]을 발할 것이며 그들은 바다 가운데 누운 자 같을 것이며 돛대 위에 누운 자 같을 것이다. 또 사람이 그를 때리거나 상하게 하여도 아픈 감각이 없을 것이다.
술의 폐해는 크다. 술은 슬픔과 재앙, 분쟁과 원망과 상처 등을 가져오고 뱀같이 물고 독사같이 쏘며 눈에 이상한 여자들이 보이고 마음에 패역한 것들을 말하게 만든다. 또 마음은 허황하게 되고 감각이 없어지며 비정상적이고 비인격적이고 불신실한 자가 된다. 오늘날 음주는 자신의 몸을 해치는 여러 질병들의 원인으로 알려져 있을 뿐 아니라 사람들을 죽이는 교통사고의 주범이 되었다. 술취함은 방탕한 것이며(엡 5:18) 술 취하는 자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전 6:10; 갈 5:21).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감독의 자격으로 술을 즐기지 않는 것을 들었고 집사의 자격으로도 술에 인박이지 않은 것을 들었다(딤전 3:3, 8).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음행은 큰 죄이며 거기에 빠지면 헤어 나오기 어렵다. 음녀는 깊은 구렁과 좁은 함정이다. 음행을 피하는 대책은 경건한 삶이다. 우리는 마음과 생각을 하나님께 두며 그의 모든 교훈을 즐거워하며 힘써 행해야 한다. 또 우리는 음행에 넘어질 수 있는 환경을 피하는 것이 지혜이며 또 결혼과 부부 관계를 잘 지켜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술의 신체적, 경제적, 도덕적 폐해들을 알고, 술취함이 방탕함이며 천국에 못 들어갈 큰 죄악임을 알고, 술을 멀리하고 쳐다보지도 말아야 한다. 우리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엡 5:18) 하나님의 평안과 위로와 능력을 얻고 맑은 정신으로, 절제 있고 근면하게 살아야 한다.
===24장: 의인, 결혼 준비, 게으름
1-6절, 악인, 집, 전쟁
[1-2절] 너는 악인[들]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며 그와[그들과] 함께 있기도 원하지 말지어다. [이는] 그들의 마음은 강포를 품고 그 입술은 잔해를 말함이니라[해를 끼침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일시적으로 악인들에게 형통함을 허용하신다. 그들은 건강하고 물질적 부요를 누리고 그들의 자녀들은 번창하고 출세하고 성공하기도 한다.
사람이 악인들의 형통을 부러워하는 까닭은 외적인 것, 세상적인 것, 즉 건강과 물질과 세상적 성공에 가치를 두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실상 허무한 것들이다. 전도서 1:2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헛되다고 증거했다. 그것들이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고 다섯 번이나 헛되다는 말을 반복하며 증거했다.
성도가 악인들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그들이 악한 자이기 때문이다. 본문은, “이는 그들의 마음은 강포를 품고 그 입술은 해를 끼침이니라”고 말한다. 악인들은 마음 속에 강포한 마음을 품고 계획하고 강포한 말과 행동을 하며 남에게 해를 끼친다. 그러므로 그들의 현재의 복은 진정한 복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셨고 미워하시고 조만간 심판하시며 징벌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육신적인, 물질적인, 세상적인 것들에 가치를 두지 말아야 한다. 그것들은 실상 다 헛된 것들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그의 나라에 가치를 두고 경건함과 의로움과 선함에 가치를 두어야 한다.
시편 15:1-5는 하나님의 성산(聖山)에 거할 자는 의롭고 정직하게 행하며 진실을 말하며 남을 비방하거나 악을 행치 않는 자라고 말했다.
[3-4절] 집은 지혜로 말미암아 건축되고 명철로 말미암아 견고히 되며 또 방들은 지식으로 말미암아 각종 귀하고 아름다운 보배로 채우게 되느니라.
이 집은 물질적인 집이나 개인의 삶이나 가정이나 교회를 다 가리킬 수 있을 것이다. 건축자는 집을 지을 때에 지혜와 명철과 지식이 필요하다. 지혜롭고 명철하며 지식 있는 설계자와 건축자는 아름답고 견고한 집을 잘 지을 수 있고 집의 내부 구조도 적절하게 배치하여 각종 좋은 것들을 들여놓을 수 있게 할 것이다.
개인의 삶을 건립하는 데도 지혜와 명철과 지식이 필요하다. 유다서20,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라.” 지혜롭고 명철한 자는 자신의 삶을 견고히 세우며 지식이 있는 자는 자신의 삶의 모든 영역들에 귀하고 아름다운 것들로 채울 것이다.
가정을 세우는 것도 그러하다. 시편 127:1, “여호와께서 집[가정]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와 명철과 지식의 시작이다. 사람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와 명철과 지식으로 가정을 세울 때, 가정은 든든히 세워질 것이다.
교회의 건립도 그렇다. 교회는 하나님의 집이다. 고린도전서 3:9, 16,“[너희는] 하나님의 집이니라,”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나 이 성전은 완성된 것이 아니고 지금 건립되는 과정에 있다(엡 2:21-22). 교회의 교역자들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세우려고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다(엡 4:12). 모든 성도들은 믿음과 지식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의 충만한 데까지 이르도록 자라가야 한다. 에베소서 4:13, 15,“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성도 개인도, 교회 전체도 자라가야 한다.
[5-6절] 지혜 있는 자는 강하고 지식 있는 자는 힘을 더하나니 너는 모략으로 싸우라. 승리는 모사가 많음에 있느니라[이는 네가 모략으로 싸울 것이며 승리는 모사가 많음에 있음이니라](NASB).
지혜 있는 자는 강하고 지식 있는 자는 힘이 있다. 싸움은 육신의 힘만으로 되지 않는 법이다. 전쟁의 역사는 무기의 발달의 역사이다.
전쟁은 지식과 지혜의 싸움이다. 돈을 버는 것도 옛날과 같이 단순히 농사를 짓고 고기를 잡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오늘날의 농촌은 비닐하우스나 각종 농사 방법을 개발하여 많은 소득을 올리고 있다. 우리 나라도 스마트폰이나 자동차나 텔레비젼 등의 기술을 통해 경제적 큰 소득을 얻고 있다. 또 젊은이들은 단순한 노동보다는 머리를 쓰는 일이나 전문적 기술을 가짐으로써 물질적 유여함을 누리려 한다.
본문은 “이는 네가 모략으로 싸울 것이며 승리는 모사가 많음에 있음이니라”고 말한다. 전쟁은 군사력만으로 싸우는 것이 아니고 작전이 매우 중요하다.
성경에서 다윗 시대에 반역을 일으킨 아들 압살롬은 그의 모사인 아히도벨보다 다윗편의 모사인 후새의 지혜로 인해 실패했다(삼하 17-18장). 잠언 20:18, “무릇 경영은 의논함으로 성취하나니 모략을 베풀고 전쟁할지니라.” 우리는 전쟁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의 일에서나 신앙생활에서도 지혜와 용기가 필요하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계명을 행하는 것이 지혜와 명철이며, 또 거기에서 힘과 용기가 나온다. 잠언 24:16,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러지느니라.” 잠언 28:1,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인은 사자같이 담대하니라.”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악인들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고, 악인들의 악 자체를 미워해야 한다. 우리는 오직 최고의 가치를 하나님께 두고 그의 계명대로 경건하고 의롭고 선하게만 살아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와 명철과 지식으로 집을 건축해야 한다. 물질적 집도, 개인의 삶도, 가정도, 또 교회도 그렇게 세워야 한다.
셋째로, 지혜와 지식이 있는 자는 강하며 전쟁에서 승리한다. 우리는 지혜와 지식을 가지고 힘과 용기를 얻어서 승리의 생활을 해야 한다.
7-10절, 지혜, 악, 낙담
[7절] 지혜는 너무 높아서 미련한 자의 미치지 못할 것이므로 그는 성문에서 입을 열지 못하느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 곧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계명을 행함으로 얻는 지혜는 미련한 자가 깨닫지 못하고 소유하지 못하는 고상한 덕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얻을 수 있다. 미련한 자는 육신적, 물질적, 세상적 차원의 것만 이해하고 생각하고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에 영적, 천적(天的), 내세적인 것을 알지 못한다.
미련한 자는 성문에서 입을 열지 못한다. 옛 시대에 성문 앞은 사람들이 모여 대화하는 곳이며 법정으로도 사용되었다. 신명기 21:19에 보면,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을 처벌할 때 그 부모는 그를 잡아서 성문에 이르러 그 성읍 장로들에게 말하여 벌을 받게 하였다.
지혜자는 사람들 앞에서나 법정에서 바른 주장과 변론과 어떤 반박을 할 수 있다. 그는 무엇이든지 양심적으로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미련한 자는 사람들 앞에서 바르고 선하고 진실한 말을 당당하게 하지 못할 것이다. 그는 지혜가 없고 용기와 담력이 없는 자이다.
미련한 자의 말은 도리어 다른 사람에게 반박 당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말이 경우와 이치에 맞지 않고 이성과 양심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또 그의 말은 경건한 자에게는 더욱 반박을 당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사상적으로나 윤리적으로 성경 교훈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성경은 우리의 믿음과 행위의 기준이며 최종적 권위를 가진다.
[8-9절] 악을 행하기를 꾀하는 자를 일컬어 사특한 자(바아르 메짐모스)[음모의 사람](BDB, NASB, NIV)라 하느니라. 미련한 자의 생각(짐마 )[음모]은 죄요 거만한 자(레츠 )[조롱하는 자]는 사람의 미움을 받느니라.
악을 행하기를 꾀하는 자는 음모의 사람이라고 불린다. 또 미련한 자의 음모는 죄이다. 미련한 자의 음모는 불경건하고 불의하고 남에게 악을 행하려는 계획이다. 그것은 죄악되다. 우리는 그런 악한 생각이나 계획을 품는 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
또 조롱하는 자는 사람의 미움을 받는다. 겸손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존중하지만, 교만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조롱한다. 그렇게 조롱하는 자는 사람들의 미움을 받는다. 그 이유는 사람들에 대한 그의 태도가 올바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회적 존재인 사람은 서로 존중하며 살아야지 남을 조롱하면 안 된다. 또한 양심적으로도 그것은 합당하지 않다. 사람은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이나 도덕적으로 다 그만그만하고 또 도덕적 부족과 결함이 없는 사람이 없는데, 자신이 대단히 선한 것처럼 생각하고 남을 무시하고 조롱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더욱이, 성경말씀 앞에서도 그런 태도는 바르지 못하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피조물이며 죄인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스스로 자신을 높여서는 안 된다. 사람은 누구든지 겸손히 상대를 존중하며 살아야 한다.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교훈에 순종하는 것이며, 그의 교훈은 우리가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겸손히 처신하며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게 사는 것이다.
[10절] 네가 만일 환난 날에 낙담하면(라파 )[기운이 없으면] 네 힘의 미약함을 보임이니라.
환난 날은 어려운 일이 닥친 날을 가리킨다. 예를 들어, 자기 몸이 중한 병에 걸렸다거나, 부모님이나 남편이나 아내나 자녀가 중한 병에 걸렸거나 죽었거나, 또는 실직, 부도, 파산 등 경제 파탄이 생겼거나, 또는 대형사고, 전염병, 기근, 지진, 전쟁 등의 경우를 가리킨다.
평소에 건강하고 활달하던 사람도 환난 날에는 기운이 빠지고 맥이 풀리고 식욕이 없어지고 일할 의욕도, 심지어 살아갈 의욕도 없어지기 쉽다. 만일 우리가 환난 날에 낙담하여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우리의 힘의 부족과 미약함을 보이는 것뿐이다.
이것은 사람의 일반적인 모습일 것이다. 사람은 조금씩 차이가 있을 뿐 다 연약한 존재이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사람들도 일시적으로는 낙심했었다. 민수기 11장에 보면,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만나만 먹는 것을 싫어하고 고기 먹기를 원하여 울었을 때, 모세는 괴로운 심정으로 하나님께 “이 모든 백성을 내가 잉태하였나이까?” “즉시 나를 죽여 나로 나의 곤고함을 보지 않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였다(민 11:12, 15). 엘리야도 갈멜산에서 큰 승리를 거둔 다음날 왕후 이세벨이 그를 죽이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도망하여 광야의 한 로뎀나무 아래 앉아 하나님께 죽기를 간구하였다(왕상 19:4).
그러나 성도는 하나님께로부터 힘을 얻는다. 다윗은 고난 중에 하나님께 부르짖고 그를 의지함으로 평안과 담대함을 얻었다. 시편 18:1,“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시편 3:3-6,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 리를 드시는 자니이다.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천만인이 나를 둘러치려 하여도 나는 두려워 아니하리이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를 사모하고 그의 은혜로 모든 죄를 다 회개하고 그를 경외함으로 지혜를 얻어, 사람들 앞에서나 법정에서 무엇을 주장하거나 변론하거나 변명할 때, 성경에 맞고 이성에 맞고 양심에 맞는 지혜롭고 합당한 말을 담대히 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악을 꾀하는 음모자가 되지 말고, 미련하고 악한 계획을 품는 자가 되지 말고, 남을 조롱하는 거만한 자도 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처신하며 정직하고 선하게만 살아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환난 날에 낙담하고 기운을 잃는 연약한 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환난 날에 두려워하지 말고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함으로써 힘과 평안을 얻고 잘 극복해야 한다.
11-16절, 구원, 꿀, 의인
[11-12절] 너는 사망으로 끌려가는 자를 건져주며 살륙을 당하게 된 자를 구원하지 아니치 말라. 네가 말하기를 나는 그것을 알지 못하였노라 할지라도 마음을 저울질하시는 이가 어찌 통찰하지 못하시겠으며 네 영혼을 지키시는 이가 어찌 알지 못하시겠느냐? 그가 각 사람의 행위대로 보응하시리라.
본문은 사망으로 끌려가는 자들과 살육을 당하게 된 자들을 외면치 말고 구원하라는 교훈이다. 이것은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의 교훈과 같다. 강도 만나 죽게 된 한 사람을 제사장과 레위인은 지나쳤지만, 선한 사마리아인은 그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생명의 위험을 무릅썼고 시간과 돈을 사용하였다(눅 10:30-35).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은 인간 관계에 대한 가장 큰 계명이다(마 22:39).
본문은 오늘날 적어도 두 가지 일에 적용될 수 있다.
첫째로, 우리는 전도에 대한 사명감을 가져야 한다. 우리 주위에는 죄로 인해 영원한 지옥을 향해 가고 있는 수많은 영혼들이 있고, 우리는 그들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입을 열어 전도해야 한다. 전도는 교회의 사명이며 우리 모두가 힘써야 할 일이다. 또 우리는 이 일을 위해 기도하고, 헌금하고, 헌신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북한 주민들의 인권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한다. 북한에는 지금도 20만 내지 30만 명 이상이 정치범수용소에서 인간 이하의 학대를 받고 있다고 하며, 국제사회는 북한의 핵개발과 인권 탄압을 규탄하며 그들에게 여러 가지 제재를 가하고 자유와 개방을 요구하고 있다. 북한은 많은 사람을 죽이고 학대하는 공포정치로 유지되고 있다. 우리는 이런 북한의 독재정권이 속히 무너지고 변화되기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13-14절] 내 아들아, 꿀을 먹으라. 이것이 좋으니라. 송이꿀을 먹으라. 이것이 네 입에 다니라. 지혜가 네 영혼에게 이와 같은 줄을 알라. 이것을 얻으면 정녕히 네 장래가 있겠고 네 소망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꿀은 벌들이 꽃의 꿀을 모은 것이다. 그것은 아미오산, 비타민, 미네랄 등을 포함한 설탕 같은 성분으로서 아주 뛰어난 에너지 식품이다.
그것은 입에 달고 몸에도 힘이 되므로 모든 사람이 좋아한다. 본문은 꿀을 먹으라고 권하면서 지혜가 꿀과 같다고 말한다. 잠언이 말하는 지혜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며 그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다. 하나님과 주 예수님 자신이 지혜이시며 하나님의 말씀이 지혜이며, 사람이 하나님과 주 예수님을 믿고 성경말씀 곧 하나님의 말씀대로 경건하고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하게 사는 것이 지혜이다.
지혜는 꿀같이 우리 마음에 즐거움이 되고 힘과 위로가 된다. 시편73편 저자는 하나님께 대해,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라고 고백하였고(시 73:25),
시편 84편 저자는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라고 말하였다(시 84:1).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을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다고 고백하였고(시 19:10-11), 시편 119편의 저자도 하나님의 말씀을 그의 즐거움과 위로라고 말하며 주의 말씀의 맛이 꿀보다 더하다고 고백하였다(시 119:24, 50, 92, 103). 잠언 3:17은 지혜의 길이 곧 즐거움과 평안의 길이라고 말하였다.
본문은 또 우리가 지혜를 얻으면 정녕히 우리의 장래가 있고 우리의 소망이 끊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잠언 3:18은 “지혜는 그 얻는 자에게 생명나무라”고 말한다. 지혜는 확실히 영원한 생명의 길이다.
또한 디모데전서 4:8은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고 말하였다.
[15-16절] 악한 자여, 의인의 집을 엿보지 말며 그 쉬는 처소를 헐지 말지니라.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러지느니라[엎드러짐이니라].
본문은 악한 자에게 의인의 집을 엿보거나 그의 쉬는 처소를 헐려고 하지 말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스가랴를 통해서도, “남을 해하려 하여 심중에 도모하지 말라”고 명하셨으나 이스라엘 백성은 그 말씀 듣기를 싫어하여 등으로 향하며 귀를 막았다(슥 7:10-11). 악한 자는 교만과 욕심과 시기심 때문에 의인을 해치려 한다. 의롭고 선하고 겸손한 사람은 선의의 경쟁은 하나 시기심을 품고 남을 미워하고 해치려 하지는 않는다. 가인은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를 받으셨을 때 그 일 때문에 동생을 미워하며 시기하였고 마침내 들에서 그를 쳐죽였었다(창 4:3-8). 다른 사람을 때리거나 죽이는 것뿐 아니라, 남에 대해 확실한 근거도 없이 비방하고 비난하는 것도 매우 악한 일이다.
의인을 해치려는 것이 소용없는 까닭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지만 악인은 재앙으로 인해 엎드러지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계명대로 사는 의인들도 때때로 넘어진다. 그는 자신의 부족과 실수와 하나님의 징계로, 혹은 하나님의 깊으신 뜻과 섭리 가운데 넘어진다. 그러나 의인은 일곱 번 넘어져도 다시 일어날 것이다. 그는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또 그의 도우심으로 다시 일어날 것이다. 시편 37:24도, “[의인은]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손으로 붙드심이로다”라고 말한다. 선지자 미가는 미가7:8에서, “나의 대적이여, 나로 인하여 기뻐하지 말지어다. 나는 엎드러질지라도 일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의인을 해치려는 것은 소용이 없다. 그러나 악인은 재앙으로 인해 엎드러질 것이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사망으로 끌려가는 자들을 못본 체하지 말고 구원해야 한다. 우리는 멸망할 영혼들을 불쌍히 여기고 전도하며 고통 당하는 북한 성도들과 동포들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가 지혜를 꿀과 송이꿀처럼 사모하면 정녕히 장래가 있고 소망이 끊어지지 않을 것이다. 지혜의 삶은 현세와 내세에 복된 삶이다.
셋째로, 의인은 일곱 번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지만 악인은 재앙으로 인해 엎드러진다. 우리는 악하게 살지 말고 오직 의롭게만 살아야 한다.
17-22절, 원수, 행악자, 반역자
[17-18절] 네 원수가 넘어질 때에 즐거워하지 말며 그가 엎드러질 때에 마음에 기뻐하지 말라. 여호와께서 이것을 보시고 기뻐 아니하사 그 진노를 그에게서 옮기실까 두려우니라.
원수는 사람을 악하게 비난하고 괴롭히고 해치고 죽이려 하는 자이며 그런 자 때문에 사람은 하나님께 탄원하며 호소하기도 한다. 사람은 교만과 욕심, 시기심과 미움 때문에 다른 사람의 원수가 된다. 사울 왕과 압살롬 같은 이는 다윗의 원수이었고, 에돔 나라, 암몬 나라, 모압 나라, 애굽 나라, 앗수르 나라 등은 이스라엘 나라의 원수이었다.
원수는 때때로 넘어지고 엎드러진다.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악에 대해 공의로 심판하시고 징벌하신다. 심판자 하나님께서 일어나시면 악한 원수는 엎드러질 것이다.
그런데 그때에 우리는 그것을 보고 즐거워하거나 기뻐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행위도 온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도 그들처럼 하나님 앞에서 부족과 실수와 범죄함이 없지 않다. 다윗 같은 믿음의 사람도 간음하고 살인하는 큰 실수와 죄를 범했었다. 성도의 복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신 데에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으로 아직도 살아 있고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원수의 넘어짐과 재앙 당함을 기뻐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높은 마음을 보시고 기뻐하시지 않으셔서 그의 진노를 그에게서 옮기실 수도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원수를 갚아주심을 감사할 수 있으나, 다른 한편 높은 마음이나 남을 멸시하는 마음을 갖지 말고 두려운 마음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죄와 부족을 용서하신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오늘까지 살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19-20절] 너는 행악자의 득의함을 인하여 분을 품지 말며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라. 대저 행악자는 장래가 없겠고 악인의 등불은 꺼지리라.
행악자는 남에게 악을 행하고 해를 끼치는 자를 말한다. 선은 남에게 유익을 주는 것이며 악은 남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다. 행악자가 득의(得意)한다는 말은 악을 행하는 자가 그의 원하는 바를 이루고 그의 하는 일이 잘되어 형통하다는 말이다. 악한 자가 돈도 잘 벌고 성공도 하고 출세도 하고 그의 자녀들도 건강하고 번창하는 것 같은 경우를 말한다. 그래서 그 악인은 기뻐하고 자랑한다.
그러나 성도는 행악자의 잘됨을 인해 마음이 상하거나 분을 품거나 또는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아야 한다. 성도는 세상의 것들을 크게 여겨서는 안 된다. 성도가 세상의 것들을 크게 여기면, 그는 세상적 가치관을 가지고 현실을 보고 현실을 사는 자가 될 것이다. 성도는 영적, 도덕적 가치, 즉 하나님과 그의 계명을 지키는 일의 가치를 물질적, 현세적 가치보다 더 크게 여기는 자이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과 성경 진리를 아는 성도들이 가져야 할 가치관이다.
그러므로 행악자가 현세에서 형통한 것 같아도, 성도는 마음이 상하거나 분을 품지 말고 부러워하지도 말아야 한다. 본문은 “이는 행악자는 장래가 없겠고 악인의 등불은 꺼질 것임이니라”고 말한다. ‘장래’는 후손의 복을 포함할 것이지만, 최종적으로는 내세(來世)의 복 곧 천국과 영생을 가리킨다. 행악자에게는 복된 내세가 없다. 또 악인의 등불곧 그의 기쁨과 행복은 얼마 가지 않아서 꺼질 것이다. 잠언 13:9도,“의인의 빛은 환하게 빛나고 악인의 등불은 꺼지느니라”고 말하였다.행악자는 현세에서도 내세에서도 결코 복되지 않다.
[21-22절] 내 아들아, 여호와와 왕을 경외하고 반역자로 더불어 사귀지 말라. 대저 그들의 재앙은 속히 임하리니 이 두 자의 멸망을 누가 알랴.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과 세속 국가의 통치자를 경외해야 한다. 베드로전서 2:17,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공경하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사람의 기본적 의무이다. 하나님께서는 크시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시다. 그는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화산과 지진과 폭풍과 홍수를 주관하시며 사람들의 출생과 죽음, 복과 화를 주관하시고 인류의 역사를 주장하시는 전지 전능하신 하나님,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이시다. 모든 사람은 창조주, 섭리자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섬겨야 한다.
또 한 나라의 왕을 두려워하는 것도 그 나라의 백성에게는 기본적 의무이다. 왕은 한 나라에 세움을 받은 최고의 통치자이다. 제5계명의 정신은 집에서 부모를 공경하고 학교에서 선생을 존경하고 교회에서 목사와 장로들을 존경하고 사회에서 통치자들을 존중하는 것을 포함한다. 그것이 질서이며 순리이며 선한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가정이나 단체나 사회가 무질서와 혼란에 빠지기를 원치 않으신다.
또 우리는 반역자들과 사귀지 말아야 한다. ‘반역자’라는 원어(쇼님)는 ‘변하는 자들’이라는 뜻이다. 그들은 한때 하나님과 왕에게 충성했다가 변한 변절자들이다. 우리가 반역자들과 사귀지 말아야 할 이유로 본문은, “대저 그들의 재앙은 속히 임하리니 이 두 자의 멸망을 누가 알랴”고 말한다. ‘이 두 자의 멸망’(피드 쉐네헴 )은 ‘이 두 자’ 곧 하나님과 왕으로부터 오는 재앙(NASB, NIV)을 가리켰다고 본다. 하나님께서는 반역자를 벌하실 것이며 왕도 그러할 것이다.
우리가 반역자와 사귀면, 우리도 같은 재앙을 당할 것이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남을 해치는 악인이 되지 말고 원수가 엎드러질 때 기뻐하지 말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그 진노를 그에게서 옮기실 것이다. 우리는 오직 선을 행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행악자의 득의(得意)함을 인해 분을 품지 말고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아야 한다. 행악자는 장래가 없겠고 악인의 등불은 꺼질 것이기 때문이다. 행악자는 현세와 내세에서 결코 복되지 않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과 왕을 경외하고 반역자와 사귀지 말아야 한다. 그들로부터 재앙이 속히 임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왕을 경외하는 것은 사람의 기본적 의무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에 주신 질서이다.
23-34절, 공정한 재판, 집 세움, 거짓 증인, 게으름
[23-26절] 이것도 지혜로운 자의 말씀[지혜로운 자들에게 속하는 것들] (KJV)이라. 재판할 때에 낯을 보아주는 것이 옳지[좋지] 못하니라. 무릇 악인더러 옳다 하는 자는 백성에게 저주를 받을 것이요 국민에게 미움을 받으려 니와 오직 그를 견책하는 자는 기쁨을 얻을 것이요 또 좋은 복을 받으리라. 적당한 말로 대답함은 입맞춤과 같으니라[모든 사람은 바른 말로 대답하는 자의 입술에 입맞추리라](KJV).
판사가 재판할 때 피고의 낯을 보아 바르지 않은 판결을 내리는 것은 좋지 않다. 잠언 18:5는, “악인을 두호하는 것과 재판할 때에 의인을 억울하게 하는 것이 선하지 아니하니라”고 말한다. 출애굽기 23:2-3도, “다수를 따라 악을 행하지 말며 송사에 다수를 따라 부정당한 증거를 하지 말며 가난한 자의 송사라고 편벽되이 두호하지 말지니라”고 말한다. 재판은 공정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아는 사이니까, 고향 사람이니까, 학교 동문이니까 배려하여 재판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불의한 재판을 미워하신다. 잠언 17:15, “악인을 의롭다 하며 의인을 악하다 하는 이 두 자는 다 여호와의 미워하심을 입느니라.” 잠언 28:4, “율법을 버린 자는 악인을 칭찬하나 율법을 지키는 자는 악인을 대적하느니라.” 사람들도 불의한 재판을 미워한다. 사람은 이성과 양심이 있기 때문에 사물의 옳고 그름을 어느 정도 분별하고 판단한다. 그러므로 악인을 옳다고 하면 사람들의 저주와 미움을 받을 것이며, 악인을 책망하면 기쁨과 복을 얻을 것이다.
26절은 앞의 구절에 연결되고 ‘입술’은 바른 말로 대답하며 악인을 견책하는 자의 입술을 가리킨다고 보인다. 본문은 바른 말로 대답하는 자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을 것이라는 뜻이라고 본다.
[27절] 네 일을 밖에서 다스리며 밭에서 예비하고 그 후에 네 집을 세울지니라.
요즘에는 가정에서 집안의 일과 집밖의 일의 구분이 흐려지는 경향이 있지만, 하나님의 본래의 뜻은 남자는 집밖의 일을 하고 여자는 집안의 일을 하는 것이다. 잠언 31:23, “그 남편은 그 땅의 장로로 더불어 성문에 앉으며.” 잠언 31:27, “[현숙한 아내는] 그 집안 일을 보살피고 게을리 얻은 양식을 먹지 아니하나니.” 디도서 2:5, [젊은 여자들은] “집안 일을 하며.” 남편은 ‘바깥양반’이고, 아내는 ‘집사람’이다.
본문은 밖에서 다스리고 밭에서 예비하고 그 후에 집을 세우라고 말한다. 집을 짓는 자는 먼저 구상과 설계를 하고 거기에 드는 비용을 준비하고 또 그것을 위해 필요한 자재들과 건축기술자들과 일꾼들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본문에서 집을 세우는 것은 가정을 세우는 것을 말한다고 본다. 사람이 결혼하여 가정을 세우려면 준비가 필요하다.
사람은 결혼을 위해 기본적으로 성숙한 마음과 진실한 사랑과 건강한 몸을 준비해야 하고, 또 어느 정도 물질적 안정과 여유도 가져야 한다.
그러므로 사람이 집을 세우려면, 먼저 안정적 직장을 가져야 하고 일을 열심히 해서 돈을 어느 정도 저축한 후에 해야 한다.
사람은 무슨 일을 하든지 준비와 순서가 없이 즉흥적으로나 막연한 생각으로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집을 고칠 때, 먼저 새 장판부터 바꾸고, 그 다음에 벽지를 뜯고 새것으로 바르고, 그 다음에 문과 문틀에 페인트칠을 한다면, 그는 일을 거꾸로 하는 자일 것이다. 그는 먼저 낡은 장판과 벽지를 뜯어내고, 그 다음 문과 문틀에 페인트칠을 하고, 그 다음 새 벽지를 바르고, 끝으로, 새 장판을 깔아야 할 것이다. 이처럼 가정을 세우는 결혼도 준비와 순서가 필요하다.
[28-29절] 너는 까닭 없이 네 이웃을 쳐서 증인이 되지 말며 네 입술로 속이지 말지니라. 너는 그가 내게 행함같이 나도 그에게 행하여 그 행한 대로 갚겠다 말하지 말지니라.
증인은 진실해야 한다. 우리는 항상 진실한 증거를 해야 한다. 까닭 없이, 즉 정당한 이유 없이 이웃에게 해를 끼치는 거짓 증거를 하는 것은 십계명의 제9계명을 어기는 매우 큰 악이다. 그것은 남의 인격을 모독하고 그의 신임성을 손상시키고 그의 명예를 더럽히고 그의 하는 일을 허물어뜨리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 교만과 욕심과 미움에서 나오는 행동이다. 성도들은 서로 지체가 되므로 거짓을 버리고 진실만을 말해야 하며(엡 4:25), 항상 선한 마음을 품어야 한다.
또 우리는 남이 우리에게 행한 악에 대해 보복하려 하지 말아야 한다. 사회질서와 안녕을 위한 공적 형벌은 필요하지만, 사사로운 보복은 하나님께서 금하신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모든 사람에게 사랑과 선을 베푸는 것이며 심지어 우리에게 해를 끼쳤거나 해를 끼치려 하는 원수에게까지도 사랑과 선을 베푸는 것이다.
마태복음 5:39,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라.” 마태복음 5: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에게 선을 베풀며 너희를 모욕하고](전통본문)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로마서 12:17, 20,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 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30-34절] 내가 증왕(曾往)에[이전에] 게으른 자의 밭과 지혜 없는 자의 포도원을 지나며 본즉 가시덤불이 퍼졌으며 거친 풀이 지면에 덮였고 돌담이 무너졌기로 내가 보고 생각이 깊었고 내가 보고 훈계를 받았었노라. 네가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눕자 하니 네 빈궁이 강도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같이 이르리라.
본문은 ‘게으른 자의 밭’과 ‘지혜 없는 자의 포도원’을 같은 부류에 둔다. 게으름은 곧 미련함이요, 부지런함은 곧 지혜이다.
게으름의 표시는 삶과 일터의 현장에서 나타난다. 게으른 농사꾼의 밭과 포도원은 가시덤불이 퍼졌고 거친 풀이 덮였고 돌담이 무너졌다고 표현된다. 이와 같이, 게으른 학생, 게으른 주부, 게으른 직원, 게으른 성도, 게으른 직분자도 비슷할 것이다. 그의 삶과 사역의 현장에 그의 게으름의 흔적이 나타나 있을 것이다.
게으름의 한 표는 잠을 많이 자는 것이며, 그 결과는 물질적 궁핍이다. 잠언 10:4는,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손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되느니라”고 말한다. 잠언 31장에 보면, 현숙한 여인은, 양털과 삼을 구하여 부지런히 손으로 일하며, 밤이 새기 전에 일어나서 그 집 사람들에게 식물을 나눠주며, 또 그 집안 일을 보살피고 게을리 얻은 양식을 먹지 아니한다고 묘사되었다(잠 31:13, 15, 27).
세상일도, 영적인 일도 그러하다. 로마서 12:11,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에베소서 5:16,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디모데전서 4:15, “이 모든 일[경건 훈련]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재판관은 재판할 때 사람의 낯을 보지 말고 공평하게 해야 하며, 선과 악을 공의로 판단하고 선을 칭찬하고 악을 책망해야 하고, 악을 행한 자에게 바른 말로 책망하고 권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과 사람의 인정과 사랑을 입을 것이다.
둘째로, 사람은 무슨 일을 하든지 계획을 세우고 잘 준비한 후에 해야 한다. 집을 짓는 일도, 사업을 하는 일도 그러하다. 자세한 계획과 준비 없이 일을 시작하면 실패할 것이다. 특히 젊은이들은 가정을 세우려 할때 정신적, 신체적, 경제적 준비를 어느 정도 한 후 해야 할 것이다.
셋째로, 우리는 까닭 없이 이웃에 대해 거짓 증거를 하지 말고 우리에게 해를 끼친 자에게 개인적 보복도 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선하게 하고 진실하게 하며 원수들에게도 끝까지 선을 행해야 한다.
넷째로, 우리는 자기의 일에 게으르지 말아야 한다. 게으른 자는 지혜 없는 자이며 사람이 게으르면 가난하게 된다. 우리는 가정 일이나 학교 공부나 직장 일이나, 또 믿는 일, 즉 규칙적으로 성경 읽고 기도하는 일,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봉사하는 일도 게으르지 말고 열심히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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