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2.05.12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렘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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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29장

===포로에게 보낸 예레미야의 편지

1.  선지자 예레미야가 예루살렘에서 이같은 편지를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끌고 간 포로 중 남아 있는 장로들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모든 백성에게 보냈는데

2.  그 때는 여고니야 왕과 왕후와 궁중 내시들과 유다와 예루살렘의 고관들과 기능공과 토공들이 예루살렘에서 떠난 후라

3.  유다의 왕 시드기야가 바벨론으로 보내어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에게로 가게 한 사반의 아들 엘라사와 힐기야의 아들 그마랴 편으로 말하되

4.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가게 한 모든 포로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5.  너희는 집을 짓고 거기에 살며 텃밭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으라

6.  아내를 맞이하여 자녀를 낳으며 너희 아들이 아내를 맞이하며 너희 딸이 남편을 맞아 그들로 자녀를 낳게 하여 너희가 거기에서 번성하고 줄어들지 아니하게 하라

7.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을 구하고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읍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라

8.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하노라 너희 중에 있는 선지자들에게와 점쟁이에게 미혹되지 말며 너희가 꾼 꿈도 곧이 듣고 믿지 말라

9.  내가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어도 그들이 내 이름으로 거짓을 예언함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0.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돌보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성취하여 너희를 이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11.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12.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13.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14.  이것은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는 너희들을 만날 것이며 너희를 포로된 중에서 다시 돌아오게 하되 내가 쫓아 보내었던 나라들과 모든 곳에서 모아 사로잡혀 떠났던 그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이것은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5.  ○너희가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바벨론에서 선지자를 일으키셨느니라

16.  다윗의 왕좌에 앉은 왕과 이 성에 사는 모든 백성 곧 너희와 함께 포로 되어 가지 아니한 너희 형제에게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느니라

17.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칼과 기근과 전염병을 그들에게 보내어 그들에게 상하여 먹을 수 없는 몹쓸 무화과 같게 하겠고

18.  내가 칼과 기근과 전염병으로 그들을 뒤따르게 하며 그들을 세계 여러 나라 가운데에 흩어 학대를 당하게 할 것이며 내가 그들을 쫓아낸 나라들 가운데에서 저주와 경악과 조소와 수모의 대상이 되게 하리라

19.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들이 내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이니라 내가 내 종 선지자들을 너희들에게 꾸준히 보냈으나 너희는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20.  그런즉 내가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보낸 너희 모든 포로여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니라

21.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골라야의 아들 아합과 마아세야의 아들 시드기야에 대하여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그들은 내 이름으로 너희에게 거짓을 예언한 자라 보라 내가 그들을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의 손에 넘기리니 그가 너희 눈 앞에서 그들을 죽일 것이라

22.  바벨론에 있는 유다의 모든 포로가 그들을 저줏거리로 삼아서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너를 바벨론 왕이 불살라 죽인 시드기야와 아합 같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리니

23.  이는 그들이 이스라엘 중에서 어리석게 행하여 그 이웃의 아내와 간음하며 내가 그들에게 명령하지 아니한 거짓을 내 이름으로 말함이라 나는 알고 있는 자로서 증인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시니라

===스마야에게 보낸 편지와 여호와의 말씀

24.  ○너는 느헬람 사람 스마야에게 이같이 말하여 이르라

25.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가 네 이름으로 예루살렘에 있는 모든 백성과 제사장 마아세야의 아들 스바냐와 모든 제사장에게 글을 보내 이르기를

26.  여호와께서 너를 제사장 여호야다를 대신하여 제사장을 삼아 여호와의 성전 감독자로 세우심은 모든 미친 자와 선지자 노릇을 하는 자들을 목에 씌우는 나무 고랑과 목에 씌우는 쇠 고랑을 채우게 하심이어늘

27.  이제 네가 어찌하여 너희 중에 선지자 노릇을 하는 아나돗 사람 예레미야를 책망하지 아니하느냐

28.  그가 바벨론에 있는 우리에게 편지하기를 오래 지내야 하리니 너희는 집을 짓고 살며 밭을 일구고 그 열매를 먹으라 하셨다 하니라

29.  제사장 스바냐가 스마야의 글을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읽어서 들려 줄 때에

30.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31.  너는 모든 포로에게 전언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느헬람 사람 스마야를 두고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내가 그를 보내지 아니하였거늘 스마야가 너희에게 예언하고 너희에게 거짓을 믿게 하였도다

32.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보라 내가 느헬람 사람 스마야와 그의 자손을 벌하리니 그가 나 여호와께 패역한 말을 하였기 때문에 이 백성 중에 살아 남을 그의 자손이 하나도 없을 것이라 내가 내 백성에게 행하려 하는 복된 일을 그가 보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이것은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NASB] 렘29장

1.  Now these are the words of the letter which Jeremiah the prophet sent from Jerusalem to the rest of the elders of the exile, the priests, the prophets, and all the people whom Nebuchadnezzar had taken into exile from Jerusalem to Babylon.

2.  (This was after King Jeconiah and the queen mother, the court officials, the princes of Judah and Jerusalem, the craftsmen and the smiths had departed from Jerusalem.)

3.  [The letter was sent] by the hand of Elasah the son of Shaphan, and Gemariah the son of Hilkiah, whom Zedekiah king of Judah sent to Babylon to Nebuchadnezzar king of Babylon, saying,

4.  "Thus says the LORD of hosts, the God of Israel, to all the exiles whom I have sent into exile from Jerusalem to Babylon,

5.  'Build houses and live [in them;] and plant gardens, and eat their produce.

6.  'Take wives and become the fathers of sons and daughters, and take wives for your sons and give your daughters to husbands, that they may bear sons and daughters; and multiply there and do not decrease.

7.  'And seek the welfare of the city where I have sent you into exile, and pray to the LORD on its behalf; for in its welfare you will have welfare.'

8.  "For thus says the LORD of hosts, the God of Israel, 'Do not let your prophets who are in your midst and your diviners deceive you, and do not listen to the dreams which they dream.

9.  'For they prophesy falsely to you in My name; I have not sent them,' declares the LORD.

10.  "For thus says the LORD, 'When seventy years have been completed for Babylon, I will visit you and fulfill My good word to you, to bring you back to this place.

11.  'For I know the plans that I have for you,' declares the LORD, ' plans for welfare and not for calamity to give you a future and a hope.

12.  'Then you will call upon Me and come and pray to Me, and I will listen to you.

13.  'And you will seek Me and find [Me,] when you search for Me with all your heart.

14.  'And I will be found by you,' declares the LORD, 'and I will restore your fortunes and will gather you from all the nations and from all the places where I have driven you,' declares the LORD, 'and I will bring you back to the place from where I sent you into exile.'

15.  "Because you have said, 'The LORD has raised up prophets for us in Babylon'--

16.  for thus says the LORD concerning the king who sits on the throne of David, and concerning all the people who dwell in this city, your brothers who did not go with you into exile--

17.  thus says the LORD of hosts, 'Behold, I am sending upon them the sword, famine, and pestilence, and I will make them like split-open figs that cannot be eaten due to rottenness.

18.  'And I will pursue them with the sword, with famine and with pestilence; and I will make them a terror to all the kingdoms of the earth, to be a curse, and a horror, and a hissing, and a reproach among all the nations where I have driven them,

19.  because they have not listened to My words, 'declares the LORD,' which I sent to them again and again by My servants the prophets; but you did not listen,' declares the LORD.

20.  "You, therefore, hear the word of the LORD, all you exiles, whom I have sent away from Jerusalem to Babylon.

21.  "Thus says the LORD of hosts, the God of Israel, concerning Ahab the son of Kolaiah and concerning Zedekiah the son of Maaseiah, who are prophesying to you falsely in My name, 'Behold, I will deliver them into the hand of Nebuchadnezzar king of Babylon, and he shall slay them before your eyes.

22.  'And because of them a curse shall be used by all the exiles from Judah who are in Babylon, saying, "May the LORD make you like Zedekiah and like Ahab, whom the king of Babylon roasted in the fire,

23.  because they have acted foolishly in Israel, and have committed adultery with their neighbors' wives, and have spoken words in My name falsely, which I did not command them; and I am He who knows, and am a witness, "declares the LORD. '"

24.  And to Shemaiah the Nehelamite you shall speak, saying,

25.  "Thus says the LORD of hosts, the God of Israel, 'Because you have sent letters in your own name to all the people who are in Jerusalem, and to Zephaniah the son of Maaseiah, the priest, and to all the priests, saying,

26.  "The LORD has made you priest instead of Jehoiada the priest, to be the overseer in the house of the LORD over every madman who prophesies, to put him in the stocks and in the iron collar,

27.  now then, why have you not rebuked Jeremiah of Anathoth who prophesies to you?

28.  "For he has sent to us in Babylon, saying, '[The exile] will be long; build houses and live [in them] and plant gardens and eat their produce.'" '"

29.  And Zephaniah the priest read this letter to Jeremiah the prophet.

30.  Then came the word of the LORD to Jeremiah, saying,

31.  "Send to all the exiles, saying, 'Thus says the LORD concerning Shemaiah the Nehelamite," Because Shemaiah has prophesied to you, although I did not send him, and he has made you trust in a lie, "

32.  therefore thus says the LORD, "Behold, I am about to punish Shemaiah the Nehelamite and his descendants; he shall not have anyone living among this people, and he shall not see the good that I am about to do to My people," declares the LORD, "because he has preached rebellion against the LOR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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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29장 (개요)

거짓 선지자들과 예레미야의 싸움은 전 장에서는 설교를 통하여 진행되었으나 본문에서는 글로써 진행되고 있다. 

전 장에서는 설교에 대하여 설교로 응수되고 있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편지에 대하여 편지로 응수하고 있다. 그 이유는 일부 거짓 선지자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사로잡혀갔기 때문이었다. 

한편 예레미야는 본국에 남아 있었다. 본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예레미야가 바벨론에 있는 포로들에게 쓴 편지. 이 편지는 그곳에 있는 예언자들을 대적하여 쓴 것으로(1-3) 그 편지에서 예레미야는 다음의 사실을 말하고 있다.

   (1) 예레미야는 포로들을 그들의 포로생활에 적응하라고 권한다. 편한 마음으로 그 가운데서도 최선을 다하라고 한다(4-7).

   (2) 예레미야는 그들에게 거짓 선지자들을 믿지 말라고 경고한다. 거짓 선지자들은 그들에게 곧 석방되리라는 헛된 희망을 고취하고 있었다(8, 9).

   (3) 예레미야는 그들에게 70년이 끝나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사 조국에 다시 귀향하게 될 것을 확언한다(10-14).

   (4) 예레미야는 아직 남아 있는 사람들의 파멸을 예언한다. 그들도 심판을 거듭 받다가 드디어 포로가 될 것이라고 한다(15-19).

   (5) 예레미야는 바벨론에 있는 두 명의 거짓 선지자의 파멸을 예언한다. 

이 두 명은 백성들을 죄 가운데서 만족스럽게 지내도록하며 또 그들에게 나쁜 본을 보였다(20-23). 이 때문에 예레미야가 편지를 쓴 것이다.

2. 본문에 바벨론에 있는 거짓 선지자인 스마야가 예레미야를 박해하도록 선동하는 글을 제사장들에게 보낸 편지가 있다(24-29). 

그리고 예레미야가 그런 편지를 쓴데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예레미야에게 임하리라는 경고를 쓰고 있다(30-32). 

이러한 성격의 투쟁이란 여인의 자손과 뱀의 자손 사이에 언제나 있어왔던 것이다(뱀은 사탄을 칭한다: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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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벨론에 거하는 포로들에 대한 충고(렘 29:1-7)

Ⅰ. 예레미야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바벨론에 있는 포로들에게 편지를 띄웠다. 

거기에는 여고냐가 항복하여서 포로로 잡혀가 있었고 그의 어머니, 본문에서는 "환관" 이라고 불리우고 있는 내무대신들과 "유다와 예루살렘의 방백" 들이 있었다. 동시에 그들은 가장 활동적인 인물이었다. 

또한 "목공들과 철공들" 도 사로잡혀 갔는데 이는 예루살렘에 남아있는 자들이 그들의 성을 수축하거나 전쟁 무기로 그들이 무장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온순한 항복에 의하여 느부갓네살이 누그러지길 사람들은 바랐다. Satis est prostrasse leoni-즉 사자는 그의 적수를 쓸어뜨리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그러나 이 거만한 정복자는 아합에 대하여 벤하닷이 그러하였듯이(왕상 20:5, 6) 유다에 더 큰 양보를 요구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포로된 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출발하자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다시 와서 더 많은 "장로들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백성들을" 사로잡아갔다(1절). 

이렇게 하여 그는 만족히 여겼다. 그리하여 군사들이 그들에게 손을 뻗쳐 바벨론으로 그들을 사로잡아갔다. 

이 포로들의 입장은 매우 비관적인 것이었다. 그들은 고국에 계속 남아 있는 나머지 형제들로부터 분리되었기 때문에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자들보다 더 큰 죄인들로 여겨졌다. 

그러므로 예레미야는 그들에게 편지를 써서 그들을 위로하며 그들이 아무런 구원도 없으리라 생각하고 절망하지 말 것과 또 고국에 남아 있는 그들의 형제들을 부러워할 이유도 없음을 확신시켜 준다. 

다음 사실을 기억하자.

1.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도 직접 들려진 말씀처럼 참으로 "하나님의 영감에 의하여" 주어진 것이란 사실이다. 

기록이야말로 멀리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뜻에 대한 지식을 선포하는 적절한 방법이다.

2. 우리는 멀리 있는 친구들에게 적절한 위로와 유익한 충고로 이루어진 경건한 편지를 띄움으로 하나님께 봉사하고 또 선도 행할 수 있게 된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말로 할 수 없는 자들에게 우리는 편지로 써야 한다. 기록된 것은 보존의 장점이 있다. 

예레미야의 이 편지는 시드기야 왕이 느부갓네살에게 보내는 사절들 편에 의해서 바벨론에 있는 포로들에게 전달되었다. 

아마도 그들이 간 것은 시드기야가 느부갓네살에게 조공을 바치고 복종의 서약을 갱신하는 것 때문이든지 또는 느부갓네살과 평화조약을 체결하기 위한 것 때문이든지 일 것이다. 

이 조약을 체결한 때 포로들은 자기들의 문제도 포함되지나 않을까 하는 소망을 품었을 것이었다(3절). 

이들 사절편에 의해서 예레미야는 메시지를 전하였다. 그들 편을 택하여서 그는 메시지의 권위를 높이고자 하였다. 왜냐하면 그 메시지는 하나님이 보내신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을 택한 다른 이유가 또 있다면 바벨론으로 편지를 띄울 이외의 안전한 방법이 없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 편지의 효과는 대단한 것이었다. 

만일 포로된 자들이 고국에 남아 있는 친구들이나 친척들로부터 아무런 소식도 듣지 못한다면 포로 생활은 비참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예레미야의 편지는 멀리 떨어져 있는 자들에게 희망을 주었고 만족감을 주었다.

Ⅱ. 예레미야가 쓴 편지의 내용. 편지 내용이 4절에서부터 24절까지 길게 취급되고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예레미야는 포로들에게 이 편지를 쓰신 분은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 이심을 확증한다. 

예레미야는 다만 기록자 또는 필경사에 불과하다. 포로 생활 속에서도 그들이 하나님은 "만군의 여호와시라" 는 소리를 듣는 것은 큰 위로가 되었다. 

만군의 여호와이므로 그는 그들을 도우실 수 있고 그들을 놓아주실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지금도 "이스라엘의 하나님" 이라고 한다. 

비록 하나님이 그들과 싸우시고 현재 그들의 원수들이 그들에 비해 너무나 강한 것이 사실이지만 하나님은 그의 백성과 맺은 계약을 아직 저버리시지 않았다는 말이다. 

이 말씀은 또한 그들로 바벨론 우상의 모든 유혹에 대하여 자신을 지키라는 경고이기도 하였다. 그 이유는 그들이 섬기는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 은 "만군의 여호와" 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 편지를 보내시는 것은 포로생활을 하는 그들을 격려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것은 그가 그들을 버리지 않으셨다는 증거요 비록 그들에게 못마땅한 점이 있어서 그들을 시정하려고 하시기는 하지만 그들을 포기하지도, 상속권을 박탈하지도 않았다는 증거였다. 

만일 여호와께서 그들을 죽이기를 원하셨다면 그가 그들에게 편지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2. 하나님은 유다를 포로로 사로잡은 자들까지 주관하심을 선언하신다. 

그러므로 그는 4절과 7절에서 "내가 너희로 사로잡혀 가게 하였다" 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명이 없었다면 바벨론 왕이 전력을 기울였어도 그들을 사로잡아 가지는 못했을 것이다. 따라서 바벨론 왕은 위로부터 그에게 허용된 것 이상의 권력을 행사할 수 없었다. 

하나님이 그들을 사로잡혀 가도록 하셨다 해서 그가 그들에게 불공평하시다거나 해하려 하시거나 하려는 것은 아니었음을 그들에게 확신시키고자 한다.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 거기 자신을 적응시키고 참으며 그 고난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과하신 것으로 여기는 것이 매우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그러므로 이르기를 "주께서 이를 행하셨으므로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하였나이다" 라고 하셨다.

3. 하나님은 포로들에게 바벨론에 정착하여 살 것만을 생각하라고 명하신다. 

그리고 그곳에서 최선을 다하여 살라고 말씀하신다(5,6절). 고로 "너희는 집을 짓고 거기 거하라" 고 말씀하신다. 

이 모든 사실을 통하여 그들에게 주지시키고자 하는 사실은 다음과 같다.

(1) 그들이 포로 생활이 속히 끝나리라는 희망을 품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이유는 이 소망 때문에 그들이 정착하지 않고 결과적으로 불 안정된 삶을 살게 될까 해서였다. 

즉 그들이 아무일도 하지 않으려 하며 그곳에서 위로받기를 거절하며 아무 의욕도 없이 편히 쉴 날만 바라서 그들의 정복자들에게 도전하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끝내는 실망이 좌절로 변하여 이런 소망이 없었던 것보다 더 비참한 상태에 머물까 하는 염려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거기서 그들이 계속 살 것으로 생각하고 최선을 다해 그 생활에 스스로 적응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마치 그들이 고향에 있는 것처럼 집을 짓고 곡식을 심고 결혼하며 자녀들을 키우라고 하신다. 그리고 그들의 가족이 번성하는 모습을 보며 기뻐하라고 하신다. 

왜냐하면 그들 당대에는 포로생활을 하다가 죽을 수밖에는 없지만 그들의 자녀들은 살아서 더 좋은 날을 볼 수 있겠기 때문이었다. 

만일 그들이 하나님을 두려운 마음으로 섬기고 산다면 그들이 바벨론에서 편안히 사는데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다만 있다면 때때로 "시온을 기억하고 우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슬픔 때문에 생활에 지장을 초래하여서는 안 된다. 그들은" 소망이 없는 자들처럼 울어서는" 안 된다. 

또한 기쁨이 없는 자들로 행세할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그들이 이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생활 형편에서라도 있는 그대로의 삶을 최대로 선용하는 것, 그것은 우리의 지혜이며 의무이다. 

그리고 우리가 가져야 할 것을 다 갖지 못하였다고 해서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위로마저 내동댕이 쳐서는 아니된다. 

우리가 조국을 사랑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조국이란 기묘하게도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이러한 달콤한 감정은 무엇이라고 설명하기가 어려웁다(nescio qua dulcedine). 

그렇지만 하나님의 섭리가 우리를 어떤 다른 나라로 가도록 하신다면 조건이 우리의 마음에 썩 내키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거기서 마음 편하게 적응하여 살려고 결심을 내려야 한다. 

만일 세상이 "여호와의 것이라면"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어디로 가든지 그곳이 곧 아버지의 땅임에는 별차이가 없는 것이다. Patria est ubicunquebene est-즉 우리가 쉼을 얻을 수 있는 곳 그곳이 바로 우리의 고향인 것이다. 

만약 사태가 전과 다르다 할지라도 그 때문에 안달하는 대신에 만사가 보다 잘되기를 바라며 살아야만 하는 것이다. Non simale nunc, et olim sic erit-즉 당장 고난을 받는다고 늘 고통을 당하라는 법은 없는 법이다.

(2) 그들이 견디기 어려운 포로 생활의 고통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동요되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들이 집은 지어서 무엇 하는가고 얘기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은 스스로 비관하여 사태를 악화시키고는 한다). 

그들은 바벨론의 영주나 주인들이 그들이 집을 지어도 살도록 묵인해 주지는 않으리라든가 그들이 재배한 포도원의 실과를 먹지 못하게 할 것이라고 지레짐작할 수도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에게 "결코 두려워 말라" 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계속하여 "너희가 바벨론 사람들에게 고분고분하면 그들도 너희를 정중히 대접할 것이라" 고 말씀하신다. 

일이나 하면서 자기 사업에나 몰두하는 온순하고 조용한 백성들은 낯선 무리들 가운데서나 원수들에게까지 기대한 이상의 대접을 받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저희를 "사로잡은 모든 자에게서 긍휼히 여김을 받게 하셨다" (시 106:40). 또한 집을 지은 사람을 그 집에서 못살도록 쫓아내는 무자비한 일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다.

4.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그들이 포로된 그 국가의 유익을 위해 일하라고 지시하신다(7절). 또한 그 나라를 위하여 기도하고 그 나라의 발전을 도모하라고 하신다. 

이 말씀은 그들이 바벨론 왕에게 예속되어 있는 동안은 공공질서를 저해하는 짓을 저지르지 말라는 부탁이다. 

비록 바벨론은 왕이 이방인이요 우상 숭배자요 박해자이며 하나님과 그의 교회의 원수 노릇을 하고 있지만 그가 그들을 보호하려는 한은 그들은 그에게 충성을 다하며 경건함과 정직함으로 그의 휘하에서 조용하고 평안한 삶을 사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신다. 

또한 그가 메워 준 멍에를 벗어나려고 시도하지 말고 때가 이르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해방시켜 주실 것을 믿고 참고 그에게 의탁하라고 하신다. 

그들은 그들이 사는 곳의 평안을 위하여 또한 지배자들이 포로인 그들에게 계속 친절을 베풀어주기를 바라서 또한 자기 민족에게 주어진 오명을 씻기 위하여, 그리고 유다가 "항상 배반하는 일을 행하여 열왕과 각 도에 손해가 되었다" (스 4:15)는 평을 면키 위하여 기도해야만 한다고 말씀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살고 있는 정권에 진실함을 나타내기 위하여 뱀과 같이 지혜롭고 또한 비둘기같이 순결해야 했다. 

이런 모든 행위의 근거는 "그 성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 이기 때문이라고 하신다. 

그 나라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면 그들도 마찬가지로 그 재난으로 말미암은 큰 타격을 입을 것은 분명한 일이었다. 

그러므로 초대 기독교인들도 그들의 거룩한 종교의 인내심을 본받아 권력자들을 위하여 기도했었다. 비록 그 지배자들이 박해자들이었지만 말이다. 

또한 포로된 유대인들은 그들이 사로잡은 땅의 평안을 위하여 기도하고 그를 위하여 애써야 했다면 우리가 우리의 조국을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조국이 있으므로 우리는 같은 핏줄의 통치 아래 자유만으로 살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조국이 평안해야 우리와 우리에게 속한 모든 것이 평안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배에 탄 승객이라면 모두 그 배의 안전에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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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벨론에 있는 포로들에게 주는 충고(렘 29:8-14)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이 포로 생활을 평온하게 할 수 있도록 다음과 같은 조치를 취하신다.

Ⅰ. 하나님께서는 자칭 선지자들이라고 하는 자들이 거짓된 기초위에 세운 건물에서 그들을 끄집어 내신다(8, 9절). 

그들은 백성들에게 포로 생활이 속히 끝날 것이니 바벨론에 정착할 생각은 하지 말고 돌아 갈 준비나 하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본문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제 그들이 너희를 속이리라. 비록 그들이 나의 이름으로 예언한다 할지라도 너희에게 거짓을 예언함이니라. 그러니 그들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며 또 너희 스스로 속임을 당하지 않도록 하라" 고 하신다. 

우리가 우리의 영혼을 보존하려하시는 진리의 말씀을 갖고 있으면서도 현혹당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잘못이다. 왜냐하면 진리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현혹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너희가 꾼 꿈도 신경을 쓰지 말라" 고 하신다. 즉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이 신비하게 여기는 꿈과 환상을 경고하신다. 

백성들은 무슨 꿈이라도 꾸면 온통 거기에 정신을 다 쏟는다(다만 그들이 깨어있을 때 생각했거나 발생하였던 사건들이 꿈속에서 순간적으로 나타났을 뿐인데 그들은 그것을 생각하고 또 여러 사람에게 말하며 그것을 무슨 좋은 징조나 되는 듯이 여겨 헛된 기대로 부풀게 되곤하는 것이다). 또한 예언자들도 자신들이 꾼 꿈에 근거하여 예언을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에게 말씀하신다. 즉 거짓 예언자들의 꿈은 너희를 위하여 조작된 꿈이라고 하신다. 

왜냐하면 그들은 백성들이 원하는 꿈을 꾸기를 바란다. 그들은 그렇게 하여서 자기들이 원하는 꿈이 잠 속에서 나타나게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꿈이라도 근거를 잡아 백성들을 설득하고 그래서 속일 수 있겠기 때문이었다. 

또한 거짓 예언자들이 이런 거짓된 것을 예언하는 이유는 백성들이 좋은 일만이 예언되기를 바랐기 때문이기도 하였다(사 30:10). 

그들은 자기들이 말하던 것을 꿈으로 꾼다. 거짓 선지자들이 아첨하는 말로 백성들을 죄 가운데 머물게 하는 것은 백성들이 달콤한 말을 좋아하는데 원인이 있었다. 

백성들은 예언자들에게 은근한 태도로 비위를 맞춰 줌으로 또 그들의 입에서 좋은 예언이 나오기를 바랐던 것이다.

Ⅱ. 하나님은 백성들에게 그들이 소망을 걸 만한 확실한 근거를 제시하신다.

 우리는 백성들이 집을 모래 위에 지었다고 해서 그 집을 부셔버리라고만 설득해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그들이 다시 지을 수 있는 반석이 준비되었다고 말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본문에서 그들에게 그들이 속히 돌아갈 수는 없더라도 결국은 돌아갈 것이라고 약속하신다. 그것은 곧 70년이 차고 난 후이다. 

이 말씀에 의거하여 볼 때 70년의 포로생활이란 마지막 사로잡혀 갈 때부터 계산된 것이 아니라 첫 번째 사로잡혀 갈 때부터 계산된 것이 분명해진다. 

교회의 구속이 우리가 바라는 시대에 이루어지지 않을지라도 하나님의 때가 되면 그 일은 충분히 이루어질 것이다. 

하나님의 때야말로 가장 적절한 때인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약속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실 것이라는 사실이다. 

비록 그가 오랫동안 그들에게 전혀 무관심하셨던 것 같지만 그들 가운데 찾아오시며 그들을 위하사 영광을 그들에게 안겨 주리라고 하신다. 

즉 귀하신 분들이 천한 사람들을 방문하면 그것이 곧 천한 사람들에게 무상의 영광이 되듯이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포로 생활을 종식시키실 것이며 포로생활에서 오는 모든 재난을 면케 하시겠다고 하신다. 

또한 그들이 흩어져 있어 어떤 이는 이 나라, 다른 이는 저 나라에 있지만 그가 "쫓아 보내었던 열방과 모든 곳에서 모으며" 그들이 모두 따를 한 법을 세워 다시 그들을 하나로 연합시키겠다고 하신다. 

또한 그들이 먼 곳에 있지만 다시 그들의 조국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요, "사로잡혀 떠나게 되었던 본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하신다(14절).

1. 포로에서의 귀향은 백성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 속의 실현이 될 것이다(10절). 

그러므로 본문에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실행하겠다" 고 하신다. 

참으로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존엄한 말씀을 경시해서 그 예언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지 않게 되는 일이 없도록 하자. 

정말 하나님의 말씀인 것은 또한 "선한 말" 이시다. 그러므로 그것은 유익한 것이요, 일점 일획도 땅에 떨어질 수 없는 것이다. 

"그가 말씀하셨으니 또한 이루지 아니하시랴" 는 말씀이 있다. 이 말씀이 있기 때문에 그들의 포로생활에서의 귀향은 안연하게 이룰 것이다. 

또한 귀향은 하나님의 약속한 바의 "선한 말씀" 의 성취가 될 것이다. 즉 은혜로운 약속의 실현이라 하겠다.

2. 포로에서의 귀향은 그들을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목적의 관철이 될 것이다(11절). 

그러므로 본문에서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니니" 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모든 일은 계획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나타난 일은 모두 그의 마음속에 생각되었던 일들이다(행 15:18). 

또한 그가 행하신 일은 그의 계획과 전혀 일치된다. 그는 "그의 뜻에 따라" 모든 일을 이루신다. 

우리는 종종 우리의 생각도 모를 때가 있다. 또한 자신의 마음도 모를 때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안에 어떤 불확실한 요소도 없으시다. 

때때로 우리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우리에게 모두 불리할 것이라고 두려워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와는 정반대의 계획을 품으신다. 

즉 그의 계획들은 선한 것이지 악한 것은 아니다. 비록 나쁜 것으로 보이는 것일지라도 결국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계획된 것이다. 

그의 생각은 모두 약속된 미래를 향하여 역사하는 것으로 때가 되면 그가 이루신다. 

비록 우리가 기대하던 때에 이루어지지 않을지라도 우리가 기대하던 결과는 꼭 이루어지는 것이다. 

열매가 익을 때까지 참고 기다리면 과실을 즐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소망을 주시고 또 기다리게 하신다. 이것이 그의 참 뜻인 것이다.

(1) 하나님은 그들에게 그들의 고통의 결과가 어떠할지를 보라고 하신다(그것은 고무적인 결과가 될 것이라고 하신다). 

그들의 고통이 오래 지속될지라도 언제나 계속될 것은 아니라고 하신다. "시온에게 은혜를 베풀 때" "곧 그 정한 때" 가 반드시 오리라하신다. 

최악의 사태에 이르면 그들이 회개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때가 되면 그가 그들의 영광된 구속을 완성시키실 것이다. 그 일이 완성될 수 있음은 하나님의 일에는 빈틈이 없으시기 때문이다. 

창조를 시작하시자 그는 하늘과 땅의 창조를 마치셨다. 그러므로 그가 창조하신 하늘과 땅의 만군이 그의 백성에게 축복을 내릴 것이다. 

하나님은 자비를 베푸실 때는 그것이 완성될 때까지 자비를 베푸신다. 하나님은 중간에서 그만두는 일이 없으시다.

(2) 하나님은 그들에게 기대를 가지라고 하신다. 

그들이 바라고 원하던, 그리고 오랫동안 기다려 왔던 것에 대하여 기대를 가지라고 하신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공포스런 미래를 기다리라고 하지도 않으셨고 그들의 환상에 대한 기대를 가지라고 하지도 않으셨다. 

그가 그들에게 약속하셨고 또 그들에게 최선의 결과를 이루어 줄 목적을 믿음을 갖고 기다리라고 하셨다.

3. 포로 생활에서의 귀향은 그들의 기도와 간구에 대한 응답이 될 것이라 하신다(12-14절).

(1) 하나님은 그들에게 기도하도록 격려하신다.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라."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약속하신 바 선을 이루고자 하실 때는 그들에게 기도의 영을 부어 주신다. 

그들에게 기도의 영이 임하면 그가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고자 하신다는 좋은 표시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라던 바 목적이 가까워 옴을 볼 때 우리는 부르짖어야 된다. 

약속이 주어지는 것은 기도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기도를 격려하기 위하여 주어지는 것이다. 

구속이 가까워 올 때는 우리는 기도로써 그것을 맞이할 준비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기억하자. 

다니엘은 70년이 다 찬 것으로 생각되자 "주 하나님께 기도하고 간구하기를 더욱 열심히 하였다" (단 9:2, 3).

(2) 그들이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임하여 그들을 구원하실 것이라고 하신다(시 80:2). "내가 너희의 기도 소리를 듣겠고 너희를 만나 주리라." 

"구하라 그러면 주실 것이다" 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으니 우리는 그 약속에 의지하자.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는 말씀을 우리의 좌우명으로 삼자. 

하나님에게 구할 것이 있으면 우리는 그를 찾아야 한다. 찾되 부지런히 찾아야 하고 그를 구하는 바른 방법을 따라 찾으며 믿음과 소망을 굳건히 해야 한다. 

우리는 계속 구해야 하며 또 수색하는 자가 으레 그러하듯이 구함에 있어서 오는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 

또한 구하되 참마음으로 해야 한다(이 말은 진실함과 정직함으로 구하라는 말이다). 

또한 전심으로 구해야 된다(이 말은 힘과 열성을 다하여 기도하라는 말이다). 

이같이 하나님을 구하는 자들은 그를 찾게 될 것이다. 또한 그가 풍성하게 상 주시는 이심을 알게 될 것이다(히 9:6). 

하나님께서는 결코 "너희가 구하여 보라. 그러나 허사가 되리라" 고 말씀하신 적이 없으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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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 선지자들의 운명(렘 29:15-23)

앞에서 예레미야는 포로들 가운데 진중하며 올바른 것을 사모하는 자들에게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호의를 갖고 계심을 확신시켜 주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포로들 가운데 예레미야가 그들에게 전한 하나님의 뜻과 위로를 경시하고 거짓 선지자들이 그들에게 아첨하는 말을 의지하는 자들을 향하여 예레미야는 말한다. 

예레미야의 편지가 그들에게 당도할 때 그들은 다음처럼 말하게 되리라고 예레미야는 말한다. 

"예레미야는 왜 그렇게 극성스러운가? 누가 자기더러 우리를 충고하라고 하였는가? 여호와께서 바벨론에서 우리를 위하여 선지자들을 일으키셨는데 말이야(15절). 

우리는 이들 선지자들로 만족하다. 그들을 의지하면 되지 않는가? 구태여 예루살렘에 있는 예언자에게 청종할 이유가 있는가?" 라고 할 것이라고 한다. 

이들의 뻔뻔스러운 악에 대하여 살펴보자. 먼저 예언자들이 거짓을 예언하면서도 그들은 하나님께 그 예언을 받았다고 하였었다. 

마찬가지로 백성들은 자기들에게 아첨하는 예언자들을 영접하고는 그들의 거짓 예언을 하나님의 책임으로 전가시키고 자기들에게 이런 예언자들을 일으킨 것은 여호와이시라고 말하였다. 

백성들로 강퍅케 하므로 죄 가운데 있게 하며 거짓되고 근거없는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소망으로 그들을 현혹시키는 예언자들은 결코 하나님이 세우신 예언자들은 아니다. 

백성들이 믿는 예언자들은 백성들에게 다시는 포로로 잡혀가는 일이 없을 것이요 사로잡혔던 자들로 곧 돌아가게 되리라로 말하였다. 

이런 예언에 대하여 예레미야는 다음과 같이 답변한다.

Ⅰ. 본문에서 예레미야는 거짓 예언자들의 예언과는 반대로 아직 예루살렘에 남아있는 자들이 완전히 망하고 말 것을 예언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다윗의 위에 앉은 왕과 이 성에 거하는 모든 백성이 너희가 돌아갈 때 너희를 영접하리라고 생각하나 천만의 말씀이다.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자들도 차례차례 심판을 받아 칼과 기근과 염병으로 죽으리라. 이로서 수다한 무리가 죽고 다만 가난한 자들과 곤궁한 자들만이 살아남아 세계 열방 중에 흩어지리라(16,18절)고 한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악한 무화과 같게 하신다. 아니 악한 무화과처럼 취급하신다. 자신들의 악으로 말미암아 그들 스스로 악한 무화과가 된 것이요, 따라서 하나님도 그들을 그렇게 취급하신다. 

마치 소금이 맛을 잃으면 아무 쓸데없어 쓰레기통에 버려지듯이 말이다. 썩은 무화과 역시 마찬가지의 운명을 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말씀은 우리가 24장에서 보았던 예언과 환상을 회상시켜 주고 있다. 이들에게 주어진 심판의 이유는 회개할 줄 모르는 죄인들이 당하는 영원한 파멸의 이유도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을 심판한다고 불의할 수는 없는 것이다. 오히려 그의 정당성이 입증되는 것이다(19절). 

본문의 말씀대로 이는 "그들이 여호와의 말을 듣지 아니하며 듣지 아니함인 것이다."

Ⅱ. 예레미야는 바벨론에 거하는 거짓 선지자들에게 임할 하나님을 심판을 예언한다. 

그들은 바벨론에 거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기만한 자들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이 거짓 선지자들을 하나님이 세운 선지자들이라고 자랑하는 포로된 모든 자녀들을 부르신다(20절). 

그리고 "너희는 조용히 서서 너희가 그토록 신임하는 예언자들의 운명에 대하여 들으라" 하신다. 

두 예언자들의 이름이 본문에 나오는데 그들은 "아합과 시드기야였다" (21절). 이들 예언자들에 대하여 고찰해 보자.

1. 그들이 견책받는 죄는 불경과 부도덕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거짓을 예언한 자" 였고(21절)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명하지 아니한 거짓을 그의 이름으로 말하는 자" 들이었다(23절). 

거짓말은 나쁜 짓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을 속여 거짓된 희망을 품게 하는 것은 더욱 나쁜 행위이다. 그러나 더 더욱 나쁜 것은 그들의 거짓말을 모두 진리의 하나님에게 전가시키는 행위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악한 마음에 대한 공의로운 심판으로 그들을 내버리셨다는 사실은 그들 스스로 자초한 운명이므로 놀라울 것이 못된다. 

그들은 "이스라엘 중에서 망령되이" 행한 자들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 이웃의 아내와 행음하였기" 때문이었다. 

음행은 망령된 행위이다. 그런데 이 망령된 짓을 이스라엘 가운데서 행하였다면 더욱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 주제에 예언자인양 하지만 바로 이러한 악행이 그들의 거짓됨을 드러내고 만다. 

하나님은 이런 비열한 난봉군들에게 그의 사명을 맡기지는 않으신다. 그는 "거룩한 선지자들의 여호와 하나님이시지" 이러한 불순한 무리들의 하나님은 아닌 것이다. 

본문에서 거짓 선지자들이 왜 아첨을 하여 다른 사람들을 죄 가운데 지내게 하였는지 이유가 밝혀진다. 그것은 백성들을 책망할 만한 염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 음탕한 짓들을 세상 사람들의 눈길에서 은폐하는 길은 사람들의 신임을 얻는 길밖에 없다는 것을 그들은 잘 알았다. 

그러나 "나는 아는 자요 증거인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고 하신다. 

아무리 은밀한 죄라도 하나님에게는 드러나게 마련이다. 하나님은 위선이란 두꺼운 망토로 가리워 놓은 추행도 보실 수 있다. 

하나님께서 이들 모든 어두움의 숨겨진 행위들을 드러내시는 날이 이를텐데 그때가 되면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고야 만다.

2. 이들 거짓 선지자들에게 주어진 심판의 경고. 

"바벨론 왕이 너희의 목전에서 저희를 죽일 것이라" 고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비참하게 죽게 하신다. 즉 그들을 "불살라 죽이리라" 고 하신다(22절). 

느부갓네살이 이들 거짓 선지자들을 가혹하게 처형한 것은 그들의 불경과 부도덕 때문이 아니고 반역죄 때문이었다고 우리는 생각할 수도 있다. 

즉 공공의 안녕을 깨뜨리고 백성들을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키도록 이들 불온한 정신의 소유자들이 획책하였기 때문이었다고 말이다. 

그러나 이런 이유보다는 그들의 음행이 드러날 정도로 지나쳤으므로 그들은 이렇게 비참한 최후를 당한 것이요, 그래서 그들의 이름의 바벨론에 있는 포로들 가운데 저주거리가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봄이 옳겠다(22절). 

사람들이 자기들이 싫어하는 자를 가장 나쁜 말로 저주할 때 "여호와께서 너로 시드기야와 아합 같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고 말하는 것보다 더 나쁜 저주는 없을 것이라고 한다. 

이같이 하여 백성들은 자기들이 자랑으로 여겼던 예언자들을 수치스럽게 생각할 것이요, 끝내는 그들의 말을 들은 자신들의 어리석었음을 수긍하게 된다. 

때때로 하나님의 신실한 선지자들은 한 나라의 가시와 같은 노릇을 한다는 문책을 받을때도 있다. 그리하여 고난을 당하고 살해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이 죽여 사라졌을 때 이들 거짓 선지자들과는 달리 그들의 이름은 축복이 되며 그들에 대한 회상은 아름다운 추억이 되는 것이다. 

악인들에게는 오명과 치욕이 안겨지지만 순교자들에게는 영광과 명예가 안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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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야의 악행(렘 29:24-32)

우리는 바벨론에 있는 포로들에게 보낸 예레미야의 편지의 내용을 다 살펴보았다. 

바벨론에 있는 포로들은 그것을 받아 보고는 하나님과 예레미야에게 그러한 사실을 알려 주심에 대하여 감사를 표하고 편지를 귀중하게 보관하였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있었던 거짓 선지자들이 이 편지를 보고 가만히 있지는 않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왜냐하면 이 편지는 그들의 본체를 드러내 주기 때문이었다. 

본문에 이들 거짓 선지자들 중 한 명에 관한 말씀이 있다.

Ⅰ. 그가 예레미야의 대한 적의를 어떻게 나타냈는가에 대하여. 

이 부지런한 친구는 "느헬람 사람 스마야" 로서(난외의 기록을 보면) 그 이름의 뜻은 "꿈꾸는 자" 였다. 

꿈꾸는 자라 함은 그가 자기의 모든 예언을 꿈속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처럼 행세하였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그는 예레미야가 포로들에게 보낸 편지 사본을 얻었든지 그것이 낭독되는 것을 들었든지 그 편지에 관하여 무슨 정보를 입수하였든지 한 것 같다. 

그리고 그 편지가 그를 극도로 초조하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그는 손에 펜을 잡고 편지에 응수한 것이다. 

그러나 그 방법이 어떠하였는가? 그는 자신의 사명을 정당화함에 있어서 예레미야에게 편지를 보내지 않고 또 포로들이 속히 돌아오리라는 자기의 예언을 지지하는 타당한 이유도 제시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거짓 선지자들이 신방할 만한 후견자들인 제사장들에게 편지를 쓴다. 그리고 제사장들에게 예레미야를 박해할 것을 교사하였다. 

그는 백성들의 승인을 얻어서 쓰기나 하는 것처럼 자기 이름을 내세워 편지를 썼다. 

그는 마치 자기가 전 인류에 대한 지령자이기나 한 것처럼 예루살렘에 있는 제사장들과 남은 모든 백성들에게 회람 편지를 띄웠다. 

아마도 이 편지는 예레미야의 편지를 전해 주었던 사자들의 편에 의해 보내진 것 같다. 그러나 이 편지는 주로 스바냐를 대상으로 한 편지였다. 

이 스바냐는 마아세야의 아들이든지 아니면 마아세야를 우두머리로 하는 제사장 반열에 24번의 서열에 속해 있는 자였다. 

그는 대제사장은 아니었고 대제사장에게 속한 부제사장이었거나 20장 1절의 바스훌과 같이 성전에서 다른 중요한 직책을 맡은 자였던 것 같다. 

아마도 그는 예언자들이라고 자칭하는 무리들을 바르게 식별하기 위하여 특수한 방식에 의하여 임명된 제사장 위원회의 회장이었던 것 같다. 

당시에는 예언자라고 자칭하는 무리들이 많았었고 따라서 진부(眞否)를 가려내는 판결이 필요하였다. 그러면 스마야의 편지의 내용은 무엇이었는가 살펴보자.

1. 스마야는 스바냐와 다른 제사장들에게 그들의 직책상 띠고 있는 임무를 상기시키고 있다(26절). 

그리하여 그는 "여호와께서 너로 제사장 여호야다를 대신하여 제사장을 삼으셨도다" 라고 그의 직책을 상기시킨다. 

어떤 이는 스마야가 요아스 시대의 위대한 개혁자였던 유명한 여호야다를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가테이커씨(Mr. Gataker)는 말하기를 스마야가 스바냐를 그 정신과 열심에 있어서 여호야다와 같은 정도라고 추켜세우고 있다고 본다. 즉 스바냐를 제사장으로 세운 것은 여호야다가 그랬듯이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라고 부추긴 것으로 본다. 그래야 스바냐가 우쭐하여 예레미야를 대적할 수 있겠기 때문이었다. 

가테이커씨(Mr. Gataker)는 계속 말한다. 예레미야를 모함하는 스마야의 이러한 행동은 치사하고 더러운 것이었다. 

그러나 악랄한 중상배요 거짓 선지자인 그들은 이 일을 시도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열심히 있고 또 경건한양 가장까지 하였다(사 66:5; 요 16:2). <그러나 나의 생각에는 여기서 말하는 여호야다는 요아스 시대의 여호야다와는 다른 자로서 스바냐의 바로 전임자였던 것 같다. 아마도 여호야다는 제사장들 가운데서 바벨론으로 사로잡혀간 사람이었던 것 같다(1절).> 

여호야다가 사로잡혀 갔으므로 스바냐는 자기가 생각했던 것보다 먼저 세력과 신망이 있는 이 자리를 물려받게 된 것 같다. 

그리고 스마야는 이를 이용하여 스바냐에게 하나님의 섭리가 그의 편이 된 것은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박해하라고 한것이었다고 설득시키려 하였다. 

또한 그에게 스마야는 이같은 시기에 그가 권력을 잡게 되었는데 만약 권력을 행사할 기회를 놓치거나 남용하면 부당한 것이요 하나님께 감사할 줄 모르는 짓이라고 설득시키려 하였다. 

불의를 저지를 힘이 있다고 해서 그것으로 불의로운 행위를 합리화시키는 자들이 있는데 이는 그들의 마음이 비참할 정도로 강퍅하게 된 탓이라 하겠다. 

이들 제사장들의 본래의 임무는 "무릇 미친 자와 자칭 선지자" 를 색출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하나님의 신실한 예언자들이 본문에서는 자칭 예언자, 직권 찬탈자로 간주되고 있으며 악마에게 사로잡혀서 신적인 영감은 결여된 미친 사람들이나 광포한 인간 또는 정신착란자로 간주되고 있다. 

즉 거짓 선지자들의 특징이 참 선지자들에게 씌워졌다. 

만약 이런 특징이 정말 참 예언자들에게서 볼 수 있는 것이라면 미친 사람처럼 묶어 사기군처럼 처형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었다. 

스마야는 바로 예레미야를 이렇게 처리해야 한다고 결론짓고 있다. 

스마야는 그들에게 예레미야가 자신의 사명에 대한 증거를 댈 수 있는지 시험해 보라거나 그가 미치지 않았는지 알아보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물론 그에게 그러한 하자가 없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한 번이라도 예레미야가 이런 오명을 쓴 일이 있었다면 그는 비난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2. 스마야는 그들에게 예레미야가 포로들에게 보낸 편지에 대하여 말한다(28절).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대저 그가 바벨론에 있는 우리에게 예언자의 권한을 사칭하여 편지하기를 때가 오래리니 단념하고 현실에 적응하는 것이 상책이라하오" 라고 한다. 

그런데 도대체 이 말이 무엇이 해로와 예레미야를 범죄자로 몰아세우려 하는가? 생각하면 이해가 안 된다. 거짓 선지자들은 이전에 사로잡혀 가는 일은 결코 없으리라고 하지 않았던가!(14:13) 

그러나 예레미야는 사로잡혀 가게 될 것을 말했고 또 이루어진 사건은 그가 옳았음을 이미 입증해 주었다. 

그러므로 포로기가 곧 끝나리라고 말하는 자들보다 포로기가 오래리라고 말하는 예레미야를 신용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저들은 벌써 거짓말장이들이었음이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3. 스마야는 예레미야를 "미쳤고 자칭 선지자라는" 이유를 들어 그에게 벌을 내릴 것을 요구한다. 

그는 그들이 예레미야를 옥에 가두고 그에게 "차고를 채우도록" 명령을 내리기를 바랐다(26절). 

그들이 이같이 그를 처형하면 그에게 모욕을 가한 것으로 말미암아 백성들이 그를 좋지 않은 선입견을 갖고 보게 될 것이요 그러면 그의 명성도 저하되고 따라서 예루살렘에서의 그의 예언이 신임받지 않게 될 것을 바랐다. 

또한 이로서 바벨론에 있는 포로들이 예레미야에 의해 영향받는 일이 없게 되기를 바랐다. 

한걸음 더 나아가 스마야는 스바냐의 태만에 대하여 그를 꾸짖기까지 한다(27절). "이제 네가 어찌하여 아나돗 사람 예레미야를 책망하지 아니하느냐?" 

이들 거짓 선지자들이 얼마나 오만불손한가를 알게 된다. 그들은 사로잡혀 있으면서도 자유인인 동시에 권력을 지니고 있는 제사장들을 손아귀에 넣으려 하고 있는 것이다. 

이웃보다 아는 것이 많은 체 뽐내는 사람들이 흔히 저지르는 범과를 그가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본문에서 죄인들의 마음의 완악한 두드러진 실례를 찾아보게 된다. 우리도 "마음이 어느 순간에라도 완악하여지지 않도록" 두려움을 갖고 살아야 하겠다. 

본문에서 우리는 이들의 상태를 분석해 볼 수 있다.

(1) 이 죄인들은 가장 확실한 증거에 의해서도 믿게 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 자신의 말씀을 확고히 하였었다. 이 말씀이 그들에게도 분명히 전하여졌었다(슥 1:6). 

그렇지만 그들은 예레미야가 그들이 바라는 대로 좋은 미래를 예언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를 예언자로 부르는 것이 온당치 않다고 주장하였다. 

의도적으로 보지 않으려는 자들이야말로 소경중의 소경이라 하겠다.

(2) 그들을 가장 혹심한 징벌에 의해서도 돌이킬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여호와의 사자들을 비웃고 여호와의 예언의 말씀을 청종치 않았기 때문에" 비참한 노예 상태로 전락하였다. 하나님께서 그들과 겨루시는 것은 죄로 인해서였다. 

그러나 이들은 "곤고할 때에 더욱 여호와께 범죄하였다" (대하 28:22). 이 죄를 그들은 사로잡혀 있으면서도 끈질기게 범하고 있다. 

이 사실은 재난을 가한다고 해서 사람들이 그들의 죄에서 스스로 돌이키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하나님의 은총이 그들에게 역사하지 않는 한 재난도 소용없는 것이다. 오히려 불행을 자탄하여 더욱 부패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솔로몬의 다음과 같은 말씀이 언제나 진리임을 깨닫게 된다(잠 27:22). "미련한 자는 곡물과 함께 절구에 넣고 공이로 찧을지라도 그의 미련은 벗어지지 아니하느니라."

Ⅱ. 예레미야가 이 사실을 알게 된 경로에 대하여(29절). 

본문에 보면 "스바냐가 스마야의 글을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읽어 주었음" 을 알게 된다. 

스바냐는 스마야가 예레미야에게 품은 계획대로 그를 처리하려고 시도하지 않았다. 오히려 예레미야에게 존경을 표시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왜냐하면 그가 21:1 과 37:3 에서 예언자로서 예레미야에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사명을 부여받은 사실을 보아도 할 수 있겠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예레미야를 보호하였다. 

명예와 권력을 계속 누리고 있던 그가 포로로 있는 스마야보다 하나님과 그의 심판을 더욱 두려워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는 예레미야로 편지의 내용을 알도록 도와주었다. 

이는 그에게 사로잡힌 자들 중에서까지 그가 적들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하려는데 목적이 있었다. 

우리의 친구들에게 그들의 적이 누구인지 알게 하는 것은 큰 친절을 베푸는 것임을 기억하자.

Ⅲ. 이 편지를 쓴 이유로 스마야에게 선고된 형벌의 내용에 대하여. 

예레미야가 스마야의 무고에 대하여 하나님께 간구하자 하나님은 그에게 답변하시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이 예언의 말씀을 스마야에게 보내지 말고 스마야를 하나님이 세우신 예언자로 취급하여 그를 오만하게 만들고 있는 "모든 포로들에게" 보내라고 명하셨다(31,32절). 

그들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리라고 하신다.

1. 스마야가 그들을 우롱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스마야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평화를 약속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보내지 않으셨다. 

그는 하나님의 위임을 날조하고 거기에다가 하늘의 인봉된 사실을 아는 권세를 지닌 것처럼 사칭하였다. 

그리고 백성들로 "거짓을 믿게 하였고" 그들에게 거짓된 위로를 전하여 줌으로 정작 참된 위로는 받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그가 그들을 우롱하였을 뿐만 아니라 더욱 나쁜 것은 그가 그들로 하나님에 대한 반역자를 만들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하나냐가 그랬듯이(28:16) 포로된 백성들에게 "여호와께 대한 반역을 교사하였다." 

만일 반역에 대한징벌이 가해진다고 하면 자신들의 가르침과 행동으로 반역을 가르친 자들에게 더욱 심하게 안겨질 것이었다.

2. 스마야가 "필경은 어리석은 자가 되리라" 는 사실이다(17:11). 

그의 이름과 가문이 소멸될 것이요 매장될 것이다. 그는 그의 이름을 물려받을 후손을 갖지 못할 것이다. 

그의 가계(家系) 또한 그에게서 종식될 것이다. 또한 "이 백성 중에 거할 그의 사람이 하나도 없을 것이라." 

그와 그에게서 출생한 어떠한 사람도 "내가 내 백성에게 행하려 하는 선한 일을 보지 못하리라" 하신다. 

살아있는 동안에 하나님의 은총을 바라며 살기를 기뻐하지 않는 자들은 훗날에 하나님께서 그의 교회에 내리시는 은총을 나누어 받을 가치가 없는 자들임을 기억하자. 

스마야는 예레미야가 포로들에게 바벨론에서 그들의 가족들이 번성하는 것을 볼 수 있도록 노력하라고 충고한 사실에 대하여 격노하였었다. 

또한 예레미야가 포로들이 번식하고 줄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 데 대하여 노하였다 .

이렇게 예언한 예레미야가 못마땅하여 예루살렘에 편지를 쓴 스마야가 거기서 자손을 볼 수 없으리라는 것은 사필귀정이다. 

또한 하나님의 축복된 말씀을 경시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의 은덕을 상실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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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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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29:10-14...*11.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티크바]을 주는 것이니라   *12.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13.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14.이것은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는 너희들을 만날 것이며 너희를 포로된 중에서 다시 돌아오게 하되 내가 쫓아 보내었던 나라들과 모든 곳에서 모아 사로잡혀 떠났던 그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이것은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
.........히브리어로 ‘카바’는 ‘기다리다’란 뜻을 가지고 있는 동사. 이 ‘카바’라는 말에서 ‘티크바’ 곧 ‘소망(희망)’이라는 말이 유래되었음. 기다림과 소망은 같은 어원에서 나온 말.... 진실로 기다림은 소망이 있어야 가능하다. 히브리어  사전에 티크바는 원래 ‘끈’<노끈> 이라는 뜻... 어원은 동사형인 ‘카바(6960)’에서 유래되었는데, 카바는 ‘끈으로 함께 묶다.’는 뜻과 더불어 "기대하다 기다린다"는 뜻이 있음
.... <결론적으로> 소망이란 것이 내가 믿는 그 무언가에, 즉 [= 이신, <그분의 말씀, 곧 호흡하심으로 천지를 창조해내신, (그 말씀하신 바 반드시 그대로 이루시는) 신실하신 하나님과 그분의 뜻과 의도 따라 그대로 그 경륜 이루시며 그분을 믿는 이에게 그분의 영원하신 뜻을 제시하시고, 미리 약속하신 말씀에] 나를 단단히 묶고 붙좇는 (하나 됨의) 행위. 즉, "어떤 근거 없이 불확실하게 수동적으로 그저 기다림"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내가 믿는 그분과 신실하신 그분의 말씀에 거듭난 믿는이로서 내 존재 전부를[그 허리를]  단단히 함께 묶어 붙들어 매고 날마다 그 말씀으로 자신의 내장(속 사람)을 채우는 행위가 참 소망이자 확신의 소망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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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망, 신뢰, 허리/옆구리, 어리석음(악한/헛된 소망), ...ls,K,(3689, 케셀) 
[시편 78:7 그들로 그들의 소망을 하나님께 두며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잊지 아니하고]
케셀(명남)은 카살(ls'K; , 3688)에서 유래했으며, (a) '허리 lion', (b) '어리석음 stupidity', (c) '신뢰, 확신 confidence, 소망 hope'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13회 나온다.
(a)  '허리' 또는 '옆구리': (레 3:4, 레 3:10, 레 3:15, 레 4:9, 레 7:4, 욥 15:27, 시 38:8).
(b)  '어리석음': 어리석은 것으로서의 확신이나 희망은 악한 것으로 간주된다(전 7:25). 이것은 생활방식이 이 세상만을 위하여 사는 것에 있는 자에게 적용이 된다: "저희의 이 행위는 저희의 우매함이나 후세 사람은 오히려 저희 말을 칭찬하리로다(셀라)"(시 49:13).
(c)  '신뢰, 소망': 확신과 소망은 하나님을 의뢰하는 것과 그것에 대한 부족과 관계가 있다(욥 8:14). 여호와는 너의 의뢰할 자이다: "대저 여호와는 너의 의지할 자이시라 네 발을 지켜 걸리지 않게 하시리라"(잠 3:26). 법도는 이스라엘로 소망을 하나님께 두게 하기 위함이다(시 78:7).
욥은 금으로 소망을 삼은 적이 없다고 한다: "내가 언제 금으로 내 소망을 삼고 정금더러 너는 내 의뢰하는 바라 하였던가"(욥 31:24). (참조: BDB; TW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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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망 hope, 기대 expectation.  ejlpiv"(1680, 엘피스)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엘피스(Homer 이래)는 엘포(ejlpw: 바라다, 기대하다)에서 유래했으며, '기대, 희망, 소망'을 의미한다.
(a)  일반헬라어에서 엘피스는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소망'(hope)이라는 단어와 일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단어는 흉사(두려움)나 길사(소망)에 관계없이 모든 종류의 미래사에 대한 예상을 나타내는 일반적인 단어이기 때문이다. 
'좋은, 밝은, 기쁜'과 같은 형용사와 더불어 소망을 나타내는데 사용되기도 했다.
(b)  플라톤은 인간 존재는 단순히 현재를 수용하고 과거를 회상하는 것만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간에 미래에 대한 기대에 의해 결정된다고 말한다. 소망(희망)은 미래에 대한 주관적 계획이다. 엘피스는 좋은 소망에 대해서도 종종 사용되었다. 
헬라인들에게 있어 소망은 절망 가운데 위로를 뜻했다. 그러나 이 소망은, 이 소망의 근거를 학문적 탐구에 두었던 현자들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기만적이고 불확실한 것이 되기도 한다.
(c)  플라톤에게 있어서, 소망 안에 작용하고 있는 것은 아름다운 것과 좋은 것을 향한 충동이다. 
소망은 현재의 삶을 초월한다. 그러므로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신비종교는 사후의 복된 삶에 대한 약속과 더불어 소망에 기초하며, 소망은 믿음과 진리 그리고 에로스와 더불어 진정한 삶을 이루는 요소들 중 하나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신비종교들이 약속하는 신격화와 불멸은 인간의 허무한 몽상이었다.
(d)  세상적인 소망도 중요하다. 
제우스는 소망을 주며, 아우구스투스는 옛 소망을 완성하며 새 소망에 불을 붙인 자로 찬양을 받는다. 그렇지만 스토아 학자들은 소망에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 예를들어 에픽테투스는 이 어군을 기대의 의미로만 사용하고 소망은 미래에 대한 주관적인 계획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멀리해 버린다(R.Baltmann).
2. 70인역본의 용법 
엘피스는 70인역본에서 약 100회 이상 나오며, 17개의 히브리어를 번역하는데, 주로 히브리어 바타흐 어군, 티크와를 번역한다. 
엘피스는 70인역본에서 '소망, 신뢰, 안전'이란 의미를 나타낸다.
3. 신약성경의 용법 
엘피스는 신약성경에서 53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a)  엘피스의 의미.
신약성경에서 엘피스(및 동족어)는 헛된 기대나 두려운 예상을 전혀 나타내지 않고 항상 어떤 좋은 것에 대한 기대를 나타낸다. 
수많은 구절들에서 엘피스는 인간의 태도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이 소망이 지향하고 있는 구원의 객관적인 유익을 나타낸다(갈 5:5; 골 1:5; 딛 2:13). 
이 동사나 명사가 수식 없이 독립적으로 사용되는 곳에서는 대개 종말론적 성취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롬 8:24; 롬 12:12; 롬 15:13; 엡 2:12 등).
신약성경의 모든 증거들은 약속된 그리스도의 도래를 통해 구약성경의 소망이라는 특유한 표현으로 상황이 근본적으로 변경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 구속자 안에서 세상의 구원의 날은 하나님의 위대한 "오늘"로 나타났다. 
전에는 미래였던 것이 이제 구속자 안에서 믿음으로 인하여 현재가 되었으니 곧 의롭다 함이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그의 자녀라는 관계요, 성령님의 내재하심이요, 이스라엘과 열방의 신자들로 구성되는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이 된 것이다. 
구원의 현존은 요한복음에서 실현된 종말론 가운데 가장 강하게 강조된다. 
따라서 엘피스(elpis)라는 단어는 요한복음에 나오지 않는다. 새로운 상황 때문에 신약의 소망은 내용과 근거에 있어서 모두 새 형태를 취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서 그리스도를 기다린다.
(b)  소망은 믿음과 사랑과 함께 기독교인의 기본 요소를 형성한다(살전 1:3; 고전 13:13). 
이 요소들 중 어떤 한 요소라도 다른 두 요소가 없으면 존재할 수 없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없이는 결코 소망이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소망은 그리스도 안에만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소망이 없으면 믿음 자체도 공허하고 무익한 것일 뿐이다(참조: 고전 15:14, 고전 15:17).
이 때문에 이것은 산 소망, 거듭남의 산 소망이라는 중생으로 인해 주어진<생생하게 살아 생동하며 효력 발휘 되는> 산 소망 묘사될 수 있다: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벧전 1:3).
엡 2:12에 의하면 이전에 우리는 세상에서 소망이 없었다. 물론 이방에도 형이상학적인 미래에 관한 사상이 있었으나 죽음의 공포로부터 안위와 해방을 주는 소망에 대한 사상은 없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소망을 가진 것이다: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살전 4:13).
(c)  소망의 본질적 특징은 세가지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다. ((보라, 아드님 안에 아버지가 체현되시고, 아드님은 부활 승천 안에서 생명 주는 영<그 영>이 되셔서, 그 영은 믿는이가 "주 예수여"라고 그분 이름을 부를 때 <창세전부터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만들어 놓으신 바, 결코 끊어지지 않는 [믿는이에게 적용되는 <제한받거나 다함이 결코  없는> 붙드는 그 능력은 세상 끝까지 영원히 지속되고 작동되는 믿음-소망-사랑의] 성부-성자-성령으로 구성된 삼중적 동아줄<삼겹줄>일진대, 우리를 창조하사 인생의 삶 주시고 그분을 믿게 하신 아버지 하나님의 뜻하신 경륜적 목적에 우리를 영원히 동여매어 연결시켜 주고 계신다....이것이 우리가 확신하는 바,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 말씀하신,  주 예수님 그분 자신의 확실한 소망일진대, 하나님은 오늘날도 주 예수님의 사랑과 주 예수님의 믿음과 주 예수님의 소망을 참되게 그분을 믿는, 구하는 자에게 <내주하여 계신> 부활 생명의 성령을 통해 한량없이 주고 계신다....이것이 상호 기업[구주 재림으로 참여하는 천년왕국, 뒤이어 새 하늘과 새 땅 안에서 보여주시는 새 예루살렘, 곧 상호 거처이자 기업 됨]의 풍성한 소망이다.))....그러므로 <뉴 노멀이 도래했으니.. 이젠 더 이상 교회에 소망 없다>고 결코 함부로 말하지 말라..민29장의 나팔절-속죄일-장막절에 드려지는 특별 예물들을 곰곰히 주님께 그 그림이 무엇인지 여쭈어 보라!!
① 소망의 내용-소망은 절대로 자기 중심적이 아니고 항상 그리스도와 하나님 중심적이다. 
그 본질은 개인의 축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우주적인 왕의 통치로 그 가운데에서 하나님께서는 "만유의 주가" 되시는 것이다(참조: 고전 15:28). 
부활은 엔 사르키(en sarki: 육체 안에)나 또는 카타 사르카(kata sarka: 육체를 따라)로 생명을 되찾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중생을 통하여 엔 프뉴마티(en pneumati: 성령 안에서)와 카타 프뉴마(kata pneuma: 성령을 따라)로 받은 생명의 완성이다(참조: 롬 8장). 
왜냐하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기" 때문이다(참조: 고전 15:45). 
엘피스의 범위에 있어서 그 내용은 구원(살전 5:8)의 (갈 5:5)썩지 않는 몸으로 부활(; 참조: 고전 15:22이하), 영생(딛 1:2; 딛 3:7), 하나님을 보며 하나님의 형상과 닮게 됨(참조: 요일 3:2이하), 하나님의 영광(롬 5:2; 골 1:27; 참조: 고후 3:12)으로 정의된다.
② 소망의 근거-이 소망은 선행(율법 Law)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비하신 역사에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소망"으로 지정된다: "우리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딤전 1:1),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이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골 1:27).
그리스도께서는 소망의 사회에 있어서 외인이 아니다. 그는 신자들이 복음 안에서 십자가에 달리셨다가 다시 사신 주님으로 인정하는 분이며, 그들이 그 분의 임재를 성령을 통해 알고 있는 분이다. 곧 그들의 소망은 "강림하신 그 분의 미래"에 있는 것이다(Kreck).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신의 아들을 은사로 주심과 함께 우리가 기독교 사회로 전향함으로 인하여 모든 것을 주실 것이라는 확신까지 주신다(참조: 롬 8:32). 
그리스도께서 "첫 열매"로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에 우리 모두도 다시 살아나게 될 것이다(참조: 고전 15:20이하). 
이 도래하신 자는 높임을 받으신 분으로서, 하나님께서는 이미 모든 것들을 그 분께 양도하셨고 또한 이 분을 교회의 머리로 주셨다.(참조: 엡 1:22).
③ 은사로서의 소망의 본질-엘피스 아가데(좋은 소망)로서 소망은 믿음과 마찬가지로 성부의 은혜의 선물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를 사랑하시고 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을 은혜로 주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서"(살후 2:16).
따라서 소망은 우리가 부름을 받는 구원의 메시지를 통해 전달된다: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 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바요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노라"(골 1:23).
부르심에서 소망의 목표는 그 풍성함 가운데 밝혀진다: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엡 1:18).
그리고 소망은 이미 부르심을 받은 자들을 하나되게 한다: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엡 4:4).
성령의 능력을 통해 우리는 넘치는 소망을 받는다: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롬 15:13). 왜냐하면 성령님께서는 처음 익은 열매로 우리에게 주어지기 때문이다(참조: 롬 8:23). 
성령이 신자들 안에 거하심은 신자의 부활에 대한 보증이다.(참조:롬 8:11).
(d)  기독교인들의 소망의 특성들.
① 소망은 항상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대한 확실하며 확고한 기대이다. 
소망은 재림의 최전면에 있는 그 긴박성과 심판들에 대해 못 본채 하지 않고 장차 나타날 하나님의 도성을 바라본다.
롬 4:18에서 아브라함의 믿음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람"으로 표현되었다. 즉 미래에 대해 인간의 판단으로는 불가능하다고 선언하는 것과는 반대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통해 그에게 주어진 소망을 굳게 세웠다는 것이다. 
몸의 구속을 기다리는 교회는 고통 중에 있는 모든 크티시스(피조물)와 동일한 것을 느끼며 몸의 구속을 소망한다(롬 8:20 - 롬 8:23).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들이 실현될 것이라는 확신으로 기독교인은 소망 가운데 영광을 돌린다. 곧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여 찬송한다: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롬 5:2).
② 소망은 우리 구주되신 주님에 대한 인내와 훈련과 확신에 찬 기다림과 기대이다. 
소망을 가진 자들은 위로를 받고 확신을 갖는다(살후 2:16). 
롬 5:4; 살전 1:13; 히 6:11의 주요한 강조점은 끈기있는 인내이다. 
반면에 빌 2:20; 히 3:6; 벧전 1:21에서 소망은 확고한 확신의 요소를 지닌다. 
소망은 개인의 깨끗함의 동기가 된다(요일 3:3). 
소망은 우리가 흔들림이 없이 소망에 대한 우리의 고백을 든든히 붙잡을 것과(히 10:23), 우리에게 우리의 소망에 대해 설명해주기를 요청하는 그 어느 누구에게라도 대답할 준비를 갖출 것을 요구한다(벧전 3:15). 
그러나 마지막으로 신약성경의 소망은 즐거운 기다림이라는 것이다(롬 12:12). 
소망은 용기와 힘을 주며 마치 투구가 머리를 보호하는 것과 같이 속사람을 보호한다(살전 5:8). 닻을 내릴 때 배가 안전한 것과 같이 우리의 생활은 성소로 들어가신 우리의 위대한 대제사장 그리스도에게 우리를 묶어두는 소망에 의해서 안전하게 된다(히 6:18이하).
(e)  바울은 골 1:4, 골 1:5에서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둔 소망", 살전 2:19에서 "우리의 소망", 고후 1:7에서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에 대해 언급한다. 
이 모두 그리스도와 관련된 소망이다. (참조: Walter Bauer; R.Baltmann; E.Hoffma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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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소망, 소망의 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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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망의 근원
[벧전1:3-12...산 소망...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4.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5.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   6.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7.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8.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9.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10.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11.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받으실 영광을 미리 증언하여 누구를 또는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12.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알린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 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
>>소망이란 .....무엇인가 좋은 것을 갈구하고 그것을 얻기를 기대하는 것으로 정의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하고도 진정한 소망의 근원이 되시는데, 그 이유는 예수만이 무엇이 최선인지를 아시고 그것이 확실히 이루어지게끔 하실 수 있는 주권과 권능을 가지셨기 때문입니다. 대조적으로 다른 소망들은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먼지처럼 흩날리는 상황적 현실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미래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있지만, 이러한 기대는 종종 이 세상의 삶에만 국한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썪지 않는 천국의 유업을 잇는 산 소망을 약속하셨습니다. 우리가 매일 품는 세상적인 갈망은 곧 사라져버릴 것이지만, 영원한 하늘나라의 집은 삶의 폭풍이 몰아칠 때 우리의 궁극적인 피난처가 됩니다.
하지만 현재 삶에 고통이 존재하고 그 어떤 구원도 눈에 보이지 않을 때면 천국은 멀어 보이기만 합니다. 그렇다면 현재의 고난을 어떻게 견뎌야 합니까? 그 방법은 현재의 상황이 더 좋은 쪽으로 바뀔 수 있기를 고대하는 소망을 통해서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처한 어려운 상황이 개선되지 않을 때 주님께서 어떻게 좋은 방향으로 바뀔 수 있도록 일하고 계신가요? 베드로는 주님께서 우리의 믿음의 확실함을 위하여 연단하셔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금보다도 귀하고, 심지어는 우리가 겪는 어려움으로부터의 구원보다도 더 귀함을 입증합니다. 이 얼마나 역설적입니까? 우리로 하여금 소망을 잃게 만드는 어려움이 바로 하나님 안에서 우리의 믿음과 소망을 키우기 위해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도구인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영생에서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의 소망도 약속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겪는 어려움을 해결해주시지 않을 때에도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보다 위대한 일을 하고 계심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영원한 집에 도달하게 될 때, 우리가 주 안에서 소망을 간직했기에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키워주신 측량할 수 없는 믿음의 큰 가치를 알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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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146편...1.  할렐루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하라   2.  나의 생전에 여호와를 찬양하며 나의 평생에 내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3.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4.  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 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하리로다   5.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6.  여호와는 천지와 바다와 그 중의 만물을 지으시며 영원히 진실함을 지키시며   7.  억눌린 사람들을 위해 정의로 심판하시며 주린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 이시로다 여호와께서는 갇힌 자들에게 자유를 주시는도다   8.  여호와께서 맹인들의 눈을 여시며 여호와께서 비굴한 자들을 일으키시며 여호와께서 의인들을 사랑하시며   9.  여호와께서 나그네들을 보호하시며 고아와 과부를 붙드시고 악인들의 길은 굽게 하시는도다   10.  시온아 여호와는 영원히 다스리시고 네 하나님은 대대로 통치하시리로다 할렐루야]
[시146:5...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당신은 “그렇게 되기를 소망합니다”라고 말할 때 어떤 뜻으로 그 말을 합니까?
당신이 믿는 사람이라면 소망은 그저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에 대해서나 누군가에 대해 소망을 갖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는 소망을 품도록 초대받았습니다. 그러한 소망은 우리 자신의 힘이나 이 세상 우리 주변의 그 어떤 것의 힘에 의해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하나님의 품성에 의하여 소망을 품도록 초대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하시고 이를 지키시며, 이는 우리 주 하나님 때문에 미래에 대한 소망을 가질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시편 146편은 이 세상의 지배자나 그밖의 지도자를 신뢰하는 것이 헛됨을 지적합니다. 비록 우리가 업계의 높은 사람들이나 정치적 지도자들, 혹은 우리 자신의 선한 노력에 희망을 두고 싶어할 수도 있겠지만, 시편 기자는 그러한 모든 것들이 소멸할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합니다. 우리가 가장 존경하는 영웅조차 인간의 한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유일하게 남은 진실된 소망의 근원은 주 하나님이십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귀인들이나 오늘날의 정치적 지도자들과는 달리 주님은 단지 부유하고 권력있는 자들보다 더 우리를 돌보십니다. 주님은 시편 146편에서 억눌린 사람, 주린 자, 갇힌 자, 그리고 맹인들에게 약속하십니다. 비록 당신이 어떤 사람이고 얼마나 가망없다고 느끼고 있을지라도 하나님은 하나뿐인 소망의 진정한 근원이십니다. 절망하게 될 때 오늘의 도움이자 내일의 소망이 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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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146:1~5...에포(EPOH)와 호프(HOPE)의 차이
잭 캔필드(J. Canfield)의 「가장 절망적일 때 가장 큰 희망이 온다.」는 책에 나온 이야기다. 암전문의 두 사람을 소개하고 있다. 둘은 친구인데, 전이성 암환자에게 똑같은 약을, 똑같은 양으로, 똑같은 스케줄에 따라, 똑같은 용도로 처방을 했다. 그런데 한 사람은 환자의 생존율이 22%밖에 안 되었고, 다른 한 사람은 74%나 되었다. 약 처방전을 나눠주는 사람만 다를 뿐인데 어떻게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일까? 그들이 처방해서 환자에게 나눠준 약은 에토포사이드(Etoposide), 플라티눔(Platinum), 온코빈(Oncovin), 하이드록쉬리아(Hydoxyurea)이다. 치료효과가 낮은 의사는 약을 환자에게 줄 때마다 이렇게 말했다. ‘어제도 먹은 에포(EPOH)입니다(네 가지 약 이름의 첫 자를 따면 ’EPOH‘가 됨). 잘 드십시오.’ 반면에 치료효과가 높은 의사는 환자에게 약을 주며 이렇게 말했다. ‘당신의 호프(HOPE)입니다(EPOH를 뒤집으면 ’HOPE‘가 됨). 잘 드시면 당신에게도 소망이 있을 것입니다.’ 한 사람은 처방에 따라 그냥 약만 주었고, 다른 한 사람은 ‘희망’을 말하면서 약을 주었다. 그런데 그 결과는 이토록 큰 차이로 나타났다. 한 사람은 10명 중에 7명이 죽었고, 다른 한 사람은 10명 중에 7명이 살았다. 절망적인 사람에게 희망을 품게 하는 소망의 말 한 마디가 이렇게 큰 차이를 만들어낸 것이다. 상황이 힘들고 어려울수록 소망의 끈을 놓지 말아야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람은 공기가 없어도 1분을 버틸 수 있지만 희망이 없으면 1초를 버티지 못한다고 한다. 인간은 소망을 먹고 사는 존재라 그렇다. 소망은 영혼의 산소와 같다. 
인간은 소망으로 살아가는 존재다. 소망이 없다면 살았으나 죽은 것과 다름이 없다. 
로마의 정치가 키케로(M.T.Cicero)는 ‘삶이 있는 한 소망도 있다’(While there's life, there's hope)고 했다. 삶에 대한 긍정을 이야기하기 위해 이렇게 말한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소망이 있는 한 삶도 있다(While there's hope, there's life)고 바꾸어 말하고 싶다. 소망이 있어야 삶다운 삶, 참 삶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단테(A.Dante)는 그의 「신곡」에 나온 지옥문 위에 ‘여기로 들어오는 자는 모두 희망을 버릴지니라.’고 적어놓았다. 소망이 없는 곳, 그곳이 지옥이라는 뜻이다. 
소망이 없는 삶은 살아도 사는 삶이 아니다. 사실 많은 사람이 어떤 상황에 절망한 이유는 그 상황 자체보다는 미래에 대한 소망이 없기 때문이다. 
롤로 메이(Rollo May)라는 심리학자는「사랑과 의지」라는 그의 책에서 사람이 자기 삶의 방향을 찾아가는 데에는 세 단계가 있는데, 그 첫째가 ‘소망’이라고 했다. 소망이 있어야 자기 삶의 방향을 찾아갈 수가 있다. 소망이 곧이 이정표와 같기 때문이다. 그렇다. 소망은 삶의 절대적인 요소인 산소와 같고, 올바른 삶을 지향하는 이정표와 같다. 이 시간에는 주님께 기쁨이 되는 삶, 열두 번째 ‘소망’에 대하여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산 소망이신 예수님
본문은 할렐루야로 시작해서 할렐루야로 마치는 할렐루야 시편 중에 하나다. 도울 힘도 없는 허무한 사람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도움으로 삼고, 사람에게 소망두지 말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는 내용이다.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5). 
그런데 여기에 나온 ‘소망’이란 단어가 히브리어로 특이하다. 일반적으로 많이 사용되는 단어는 ‘티크바’(תקוה)인데, 여기서는 ‘세베르’(שבר)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다. 
이 세베르에는 희망이란 뜻도 있지만 주로 ‘곡식’, ‘양식’이라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창세기를 보면, 극심한 흉년에 이집트에 곡식이 있다는 소식을 들은 야곱은 그의 자녀에게 이렇게 말한다. ‘야곱이 또 이르되 내가 들은즉 저 애굽에 곡식(שבר)이 있다하니 너희는 그리로 가서 사오라. 그러면 우리가 살고 죽지 아니하리라.’(창42:2). 여기에 나온 ‘곡식’이 세베르다. <곡식을 뜻하는 말에는 > 이를 뜻하는 오켈(אֹכֶל), 레헴(לֶחֶם) 등의 단어가 있는데, 굳이 세베르를 사용한 것이다. 이는 소망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소망은 살기 위해 매일 먹는 양식과 같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야곱 가족에게 양식은 단순히 허기를 해소하는 것이 아니라 내일의 소망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 소망(שבר)을 두는 자’란 하나님을 자기 양식(שבר), 곧 삶의 양식, 영혼의 양식으로 삼는 자를 뜻한다. 이런 사람이 복이 있다고 한 이유는 먹고 마시고 배고프지 않는 영원한 ‘양식’(שבר)이 곧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이 신약에서 예수님과 신비하게 연결이 된다. 주님은 오병이어 사건에 이은 유명한〈생명의 양식〉설교(요6:)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요6:36,48). 주님 자신이 ‘떡’(שבר)이라는 선언이다. 다시 말하면 생명의 떡, 곧 ‘산 떡’이라는 것이다. 즉, 주님이 ‘소망’이라는 말씀이다. 베드로의 표현을 빌리면 ‘산 소망’(벧전1:3)이란 뜻이다. 주님은 ‘산 소망’이시다. 
>>산 소망이란 이런 뜻이다
첫째, 산 소망은 ‘살려주는(살게 하는)’ 소망이라는 뜻이다. 
사람을 살리는(혹은 살려주는), 살게 하는 것이 소망이다. 그렇다. 소망은 사람에게 힘을 준다. 살고자 하는 의욕을 주고, 용기를 주고, 이유를 준다. 그래서 산 소망은 살리는(살게 하는) 소망인 것이다. 소망은 어떤 경우에도 포기하지 않고 노력할 수 있는 힘을 준다. 대개의 경우 능력이 없어서 실패하는 것이 아니라 포기해서 실패한다. 그래서 성공의 비결로 가장 많이 듣는 답이 포기하지 말라는 것이다. 절망을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 함은 이런 이유에서다. 소망이 있으면 어떤 환경도 상황도 역경도 질병도 넘어설 수가 있다. 주님이 바로 그렇게 만드시는 분이기에 그렇다는 것이다. 주님이 곧 살리는, 살려주는, 살게 하는 분이시다. 이 주님께 소망을 두는 자가 복이 있고, 이런 사람이 주님께 기쁨이 된다.
둘째, 산 소망은 ‘살아있는’ 소망이라는 뜻이다. 
산 소망은 시간이 지나면 없어지는 소망이 아니라 영원히 살아있는 소망, 곧 영생의 소망이다. 그러므로 산 소망은 살게 하는 소망이면서 살아있는 소망이다. 단지 세상에서 건강을 회복하고 사업을 성공하게 해주는 것을 넘어 영생을 얻게 해주는 영원한 소망인 것이다. 베드로의 소망에 대한 정의가 이를 잘 보여준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3~4). 
소망이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유업)인데, 썩지도 손상되지도 시들지도 않는 것이다. 성도의 삶이란 이것을 바라보고 기대하며 사는 것이다. 주님은 썩지 않고, 손상되지 않고, 시들지 않는 하늘의 유업을 잇게 하시는 영원히 살아계신 분이시다. 이렇게 주님은 먹고 마시고 배고프지 않는 영원한 ‘양식’(שבר)으로 이 땅에 오셨다. 신앙 생활이란 이 주님께 소망을 두고 사는 것, 이 주님을 마음에 품고 바라보며 기대하면서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주님께 소망을 두는 사람은 복이 있다.
>>주님을 소망한다는 것..."기도하고-기대하며-기다리기의 <3 기>를 실행하라>"
주님은 먹고 마시고 배고프지 않는 영원한 양식으로 이 땅에 오셨다. 그래서 우리를 살게 하고, 살아있는 산 소망이 되셨다. 중요한 것은 이런 주님에 대한 우리의 태도다. 그 태도를 결정짓는 것이 또한 소망에 있다. 
소망이란 의미로 흔히 사용되고 있는 ‘티크바’(תקוה)란 단어가 이를 잘 보여준다. 이 단어의 본래 의미는 ‘끈’, ‘줄’인데, ‘카바’(קוה)라는 동사에서 왔다. 이는 ‘끈이나 줄로 함께 단단히 묶다.’, ‘확신을 가지고 기대하다.’, ‘참을 성 있게 기다리다.’, ‘사모하다.’ 등의 여러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주님을 소망한다는 것, 혹은 주님께 소망을 둔다는 것은 ‘3기’로 요약할 수 있다. 이것이 곧 산 소망이신 주님께 대한 중요한 태도로 ‘기’다리고, ‘기’대하고, ‘기’도하는 것이다.
구원의 소망, 상급의 소망, 천국에서 누리는 영원한 영광을 소망하는 자는 어떤 상황에서도 참을 성 있게 기다리는 것이 필요하다. 신앙생활은 한마디로 말하면 참고 기다리는 것이다. 주님께서도 ‘끝까지 견디는 자가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셨다.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고 바울을 통해 말씀하셨다(롬8:25). 
소망은 어떤 경우에도 우리를 끝까지 참고 기다리게 한다. 또한 소망은 믿음이 주님께서 약속하셨다고 받아들이는 모든 것을 확신을 가지고 기대하게 한다. 아직 오지 않았지만 곧 오게 될 것이라고, 더 좋고, 더 나은 것을 우리로 기대하게 한다. 
주님의 말씀과 약속, 능력과 축복을 믿고 그것에 대해 기대를 갖게 하는 것이 소망이다. <참되게 믿는이라면 마땅히 그가 붙좇는 바> 주님의 약속을 붙잡고 <직접 주께 여쭈어 봐야 한다...지금 닥친 문제의 상황-환경-처지-형편에 대해 주님은 어찌 보고 계신지...레마의 말씀을 구하라!!...그분은 교통하시는 하나님이시니!!> 이 땅을 살아가는 실존적 고통과 고난에 대해... 병든 사람은 치료를 기대하고, 문제가 있는 사람은 도우심과 해결을 기대하고, 위기에 처한 사람은 구원을 기대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기다림과 기대는 우리를 자연스럽게 기도로 이끈다. 기다림과 기대를 품고 주님께 간절히 기도하게 만든다. 그래서 기다림과 기대, 그리고 기도, 이 세 가지를 ‘3기’라고 한 것이다. 
이렇게 기다리고 기대하며 기도하는 사람을 가리켜 주님께 묶인 사람, 주님에 단단히 붙잡힌 인생이라고 말한다. 주님을 소망하고, 주님께 소망을 둔 사람을 주님께서 기뻐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일상에서 확신을 가지고 주님을 기대하고, 참을 성 있게 주님을 기다리며, 쉬지 않고 주님께 기도하는 생활을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은혜에 묶이고, 사랑에 묶이고, 능력에 묶이고, 사명에 묶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주님을 소망하고, 주님께 소망을 둔 사람의 태도다. 때문에 주님께서 이런 사람에게 복을 주시고, 이런 사람을 기뻐하시는 것이다.
>>이루어지는 소망...세상 소망이냐 살리는, 살게 하는 산 소망이냐
산 소망은 ‘이루어지는’ 소망이다. 소망이 아무리 좋아도 이뤄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참 소망이 아니다. 이뤄지지 않는 소망은 소망이 아니다. 산 소망은 반드시 이루어지는 소망이다. 
어느 작가는 ‘희망이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없는 것이다.’고 했다. 세상 소망에 대한 <상대적 의미로서> 훌륭한 정의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세상 소망은 망상이고 신기루 같은 것이다. 때문에 사람들은 소망을 말하면서 절망하는 것이다. 이 점이 세상 소망과 산 소망의 결정적인 차이다. 
산 소망은 살리는, 살려주는, 살게 하는 소망이고, 살아있는 영원한 소망이고, 반드시 이뤄지는 소망이다. 마치 배의 닻과 같고, 밤하늘에 빛나는 별과 같고, 새의 날개와 같은 것이다. 그래서 어떤 시련의 풍랑에도 부서지지 않고, 환난의 밤에도 방황하지 않고, 의지하는 것이 무너져도 추락하지 않고, 비상할 수가 있는 것이다. 
교회력에 의하면, 오늘이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소망의 절기 대강절 첫 주일이다. 이 소망의 절기에 산 소망이신 주님으로 충만하기를 기원한다. 확신을 가지고 주님을 기대하고, 참을 성 있게 주님을 기다리며, 쉬지 않고 주님께 기도하는 생활에 정진하여 주님께 더욱 단단히 묶인 삶이 되자. 성도와 교회는 세상의 소망이다. 그러니 소망의 바이러스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절망의 노래를 부르고 있는 사람들에게 산 소망을 주는 사람, 절망으로 가득 찬 세상에 산 소망을 주는 교회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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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망의 근원 찾기   
 [시62:5... 5.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
[시62편...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여두둔의 법칙에 따라 부르는 노래
1.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도다   2.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크게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3.  넘어지는 담과 흔들리는 울타리 같이 사람을 죽이려고 너희가 일제히 공격하기를 언제까지 하려느냐    4.  그들이 그를 그의 높은 자리에서 떨어뜨리기만 꾀하고 거짓을 즐겨 하니 입으로는 축복이요 속으로는 저주로다 (셀라)   5.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   6.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7.  나의 구원과 영광이 하나님께 있음이여 내 힘의 반석과 피난처도 하나님께 있도다   8.  백성들아 시시로 그를 의지하고 그의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셀라)   9.  아, 슬프도다 사람은 입김이며 인생도 속임수이니 저울에 달면 그들은 입김보다 가벼우리로다   10.  포악을 의지하지 말며 탈취한 것으로 허망하여지지 말며 재물이 늘어도 거기에 마음을 두지 말지어다   11.  하나님이 한두 번 하신 말씀을 내가 들었나니 권능은 하나님께 속하였다 하셨도다   12.  주여 인자함은 주께 속하오니 주께서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심이니이다 ]
1950년대 백림 대학 피아노 교수로 유명하였던 헐만 씨는 나치 독일 때 전쟁 반대자로서 강제 노동 수용소에 갇혔다가 살아남은 사람입니다. 그는 하루 종일 심한 노동을 하고 지친 몸으로 매일 한 시간씩 잠들기 전에 나무 침대를 피아노 건반 삼아 연습하였다고 합니다. 후에 ‘무엇이 죽음의 수용소에서 당신을 살아남게 하였느냐’는 질문에 그는 ‘나는 반드시 다시 피아노를 연주할 것이다’라는 불굴의 소망 때문이었다고 대답했습니다. 소망은 이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소망의 근원을 어디서 찾아야 할까요?
첫째, 소망은 영원할 수 있는 곳에서 찾아야 합니다.
소망은 영원해야 합니다. 일시적인 소망은 또 다시 근심과 걱정으로 바뀌고 맙니다. 소망은 문자적으로 끈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한 가닥의 줄과 같은 것이 희망입니다. 
다윗은 여러 가지 절망적인 상황에서 한 가닥 소망을 찾았습니다. 그는 본문 시편 62편 5절에서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대저 나의 소망이 저로 좇아 나는도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영원한 소망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오직 하나님만이 나의 반석’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기 반석은 돌로 조각한 우상이 아니라 전적으로 의지할 수 있는 대상을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신뢰할 수 있는 힘의 원천이시며 영원하신 분이십니다. 사람은 희망이 있을 때 비록 형편과 사정이 어려울지라도 힘차게 하루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희망이 있을 때 새 힘을 얻고 독수리가 날개를 치며 올라가듯이 힘차게 도약할 수 있습니다. 소망이 있으면 피곤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소망은 하나님 안에서 찾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소망을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 안에서 영원한 소망을 찾으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소망은 해결할 수 있는 곳에서 찾아야 합니다.
다윗은 절망적인 상황에서 소망을 찾았습니다. 그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시편 62:6절에서 ‘오직 하나님만이 나의 구원’이시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하나님 안에 소망이 있음을 말씀했습니다. 그는 로마서 15장 13절에서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문제들을 해결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여러분이 어떤 무거운 짐을 지고 있을지라도 해결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문제들은 불가피한 경우가 많습니다. 또한 예상할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문제는 예기치 않은 방법으로 우리에게 찾아옵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들은 하나님으로 해결 받을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소망을 하나님 안에서 찾고 문제를 해결 받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소망은 보호할 수 있는 곳에서 찾아야 합니다.
다윗은 “오직 저만 나의 산성이시니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시 62:6)라고 말씀합니다. 산성의 본래 의미는 낭떠러지로 ‘피난처’라는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산성 곧 피난처는 보호 받을 수 있는 장소를 의미합니다. 다윗은 하나님 안에 피난처가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그 분으로 보호 받을 수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하나님 안에 보호가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들이 하나님 안에 피할 길이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나갈 때, 하나님께서는 문제를 사용하셔서 우리를 발전시키십니다. 우리에게 있는 여러 가지 문제들은 하나님에 의하여 우리들을 발전시키고 성장시키기 위하여 사용됩니다. 성장은 문제와 인내 갈등 그리고 승리와 해결 모두를 요구합니다. 만약 문제가 홀로 우리를 성장시키기에 충분하다면 우리 모두는 지금쯤 대단히 성숙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문제가 찾아올 때 피할 길이 열려야 하고 보호를 받아야 합니다. 거기에 유익이 있을 수 있고 발전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소망의 근원을 찾으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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