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10:1-18]=========== 1.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2.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의 목자라 3.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아쿠오)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4.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에이도) 고로 따라오되 5.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6.예수께서 이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셨으나 그들은 그가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기노스코..야다..에세르) 못하니라 7.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8.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9.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10.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11.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12.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 13.달아나는 것은 그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보지 아니함이나 14.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기노스코..야다..에세르) 양도 나를 아는 것이 15.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또16.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17.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18.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1.."Truly, truly, I say to you, he who does not enter by the door into the fold of the sheep, but climbs up some other way, he is a thief and a robber. 2."But he who enters by the door is a shepherd of the sheep. 3."To him the doorkeeper opens, and the sheep hear his voice, and he calls his own sheep by name and leads them out. 4."When he puts forth all his own, he goes ahead of them, and the sheep follow him because they know his voice. 5."A stranger they simply will not follow, but will flee from him, because they do not know the voice of strangers." 6.This figure of speech Jesus spoke to them, but they did not understand what those things were which He had been saying to them. 7.So Jesus said to them again, "Truly, truly, I say to you, I am the door of the sheep. 8."All who came before Me are thieves and robbers, but the sheep did not hear them. 9."I am the door; if anyone enters through Me, he will be saved, and will go in and out and find pasture. 10."The thief comes only to steal and kill and destroy; I came that they may have life, and have it abundantly. 11."I am the good shepherd; the good shepherd lays down His life for the sheep. 12."He who is a hired hand, and not a shepherd, who is not the owner of the sheep, sees the wolf coming, and leaves the sheep and flees, and the wolf snatches them and scatters them. 13."He flees because he is a hired hand and is not concerned about the sheep. 14."I am the good shepherd, and I know My own and My own know Me, 15.even as the Father knows Me and I know the Father; and I lay down My life for the sheep. 16."I have other sheep, which are not of this fold; I must bring them also, and they will hear My voice; and they will become one flock with one shepherd. 17."For this reason the Father loves Me, because I lay down My life so that I may take it again. 18."No one has taken it away from Me, but I lay it down on My own initiative I have authority to lay it down, and I have authority to take it up again This commandment I received from My Father." ================= ei[dw(1492, 에이도) 보다, 알다, 경험하다..모든 경험을 추론하여 속뜻을 이해하고 인지하다. 동사 에이도는 호리아(oJravw, 3708)에 속한 단어이며, 동일한 의미를 가지며, 신약성경에서 (a) '본다, 지각한다'(마 2:2; 마 3:16; 요 21:21 등). (b) '느끼다, 감지하다, 인지하다'(마 27:54; 막 15:39; 눅 17:15). (c) '주목하다, 알아채다, 관찰하다, 발견하다'(마 27:49; 요일 3:1; 마 9:2; 눅 9:47; 롬 11:22 등). (d) '당하다, 경험하다, 체험하다'(눅 2:26; 요 11:40; 히 11:5; 벧전 3:10; 계 18:7 등). (e) '방문하다, 찾아보다'(눅 8:20; 행 16:40; 고전 16:7; 살전 2:17; 살전 3:10). (f) '생각하다'(요 3:1; 행 15:6). (g) '알다'(마 25:13; 막 10:19; 요 10:4; 롬 7:7; 고전 2:2; 계 2:2; 계 2:9 등), '알다'에서 '지식을 얻다, 이해하다, 인식하다'(마 12:25; 막 12:15; 눅 6:8; 눅 11:17; 막 4:13; 고전 13:2 등). (h) 히브리어투로 '~을 존중하다, 소중하다, 주의를 기울이다'(살전 5:12; 참조: 창 39:6). (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 ginwvskw(1097, 기노스코) 알다 know, 이해하다 understand....야다...에세르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동사 기노스코(Homer 이래)는 기본 어근 그노(gnw)에서 형성된 단어이며, 다음의 의미를 지닌다. (a) 이 단어는 기본적으로 사물이나 사람 또는 상황을 감각으로, 특히 시각으로 '알아차리다, 지각하다, 인식하다'를 의미한다. 호머(Homer, Od.)애서 보는 것과 기노스코는 서로 연관되어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경험의 세계에서 그렇게 인지되었던 것을 마음 속에 지적으로 정리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이 단어는 또한 '경험하다, 배우다, 알게 되다'를 의미한다. 즉 경험된 것이 그것을 경험한 사람에게 알려진다. (b) 이 단어는 '구별하다' distinguish를 의미한다. 그 유사한 것이나 서로 다른 것들 사이에 있는 어떤 현상에 대한 경험이나 인지가 이런 일을 유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Homer, Il). (c) 이 단어는 '인격적으로 알다'(Heracl., Frag.), '이해하다'(Homer, Od.), '알다'(친밀함이 인격적 지식을 가져온다). '~와 알고 지내다, ~와 친하다, 숙달되다, 노련하다'(Plato, Rep.)를 의미한다. (d) 이 단어는 '결정하다, 판단하다'(Democr. Fr., Demosth). (e) 형사 법원이나 민사 법원의 판결은 주어진 사실의 비중에 의거하여 내려지기 때문에 이 판결들은 기노스코의 수동형으로 표현되어 '재판을 받다, 판결을 받다'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f) 이 단어는 "아는 사이나 친밀하다'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육체적으로) '알다', 즉 '~와 성적인 관계를 가지다'라는 헬라 용법이 여기에서 유래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아마도 이 용법의 배후에는 헬라어 아닌 다른 언어에서 차용한 단어의 용법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단어의 어근이 라틴어 기그네레([아이를] 낳다)와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이 지적되어 왔다(참조: H. Leisgang, Die Gnosis). (g) 이 단어는 '확인하다, 입증하다, 확증하다'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철학적 지식의 목적은 보는 것인데 이는 일시적이고 가변적인 이 세상의 현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눈을 통해서만 볼 수 있는 영원하고도 실질적인 것을 보는 것이다. 이 확인은 원래 관찰로 말미암는다. 이러한 맥락에서 기노스코는 '통찰력을 얻다, 알아차리다'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이러한 통찰력의 대상은 궁극적으로 종교의 영역에 속할 것이다(Herach., Frag. 5).(참조: E. D. Schmitz; Bultmann). 2. 70인역본의 용법. 동사 기노스코는 70인역본에서 약 800회 이상 나오며, 히브리어 야다(알다)와 그 어형들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며, 라아(보다), 하자(보다), 샤마(듣다) 등 13개 단어의 역어로도 사용되었다. 헬라의 일반적인 태도와 마찬가지로 구약성경에서도 지식은 감각을 통해서 획득된다. 이미 알려진 것은 감각으로 나타나야 하며 그 자체는 그렇게 알려지게 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듣는 것(듣다)과 보는 것(보다)에 관한 동사가 아는 것에 관한 동사와 병행되어 나오는 것을 보게 된다(예: 출 16:6 이하; 신 33:9; 삼상 14:38; 사 41:20). 이것으로 우리는 70인역본이 라아(삿 2:7)와 하자(사 26:11)와 샤마(느 4:15)의 역어로 기노스코를 사용한 이유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헬라와 히브리 사상에서 아는 것에 관한 개념들은 대체로 일치하며 이 두 경우에 감각을 통하여 얻는 경험이 기본적인 것이다. (a) 70인역본에서 야다/ 기노스코는 '알아채다, 인지하다, 경험하다, 관찰하다'를 의미한다(예: 창 3:7; 창 41:31; 삿 16:20; 전 8:5; 사 47:8; 호 5:3). (b) 야다/ 기노스코는 '구별하다' distinguish를 의미한다. "선악을 아는 것"(창 3:5; 창 3:22)은 하나님께 불순종한 결과이다. 좋고 흉한 것을 구별하는 것은 필요하다(삼상 19:36). 어린 아이는 왼손과 오른손을 구별하지 못하며(욘 4:11) 또 선과 악도 구별하지 못한다(사 7:15). 후자의 구절의 문맥과 사 8:4에 나오는 이와 비슷한 언명은 이 언급이, 어린 아이는 유익한 것과 해로운 것을 구별할 줄 모른다는 것에 관한 것이라는 점을 시사해 주는 것 같다. 좋고 흉한 것, 좌우와 같은 것에 대해 관찰하는 것은 결국 그것들을 구별하는 것이 된다. (c) 야다/ 기노스코는 '배워서 알다' know by learning라는 의미를 지닌다(잠 30:3). (d) 이 분사는 사냥(창 25:27), 학문(사 29:11-13), 애곡(암 5:16), 바다를 항해하는 일(대하 8:18), 그리고 악기를 연주하는 일(삼상 16:16)에 능함을 묘사하는 어구에 나온다. (e) 야다/ 기노스코는 어떤 사람을 '아는 것'을 표현한다. 어떤 사람을 아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었다(창 29:5; 출 1:8; 삼하 3:25). 푸알 분사형은 '친척'(왕하 10:11 등)과 '아는 사람'(욥 19:14; 룻 2:1 등)을 지칭한다. (f) 야다/ 기노스코는 '관계하다, 관심을 가지다'(시 1:6; 시 37:18; 시 119:79), '~와 관계를 맺고 싶다'(예: 신 33:9). 신학적인 문맥에서 자주 이 단어가 적절한 지식을 얻지 못해서 결국 관심의 결여를 초래하고 마는 것에 대한 문제로 나온다(예: 렘 8:7; 시 95:10). (g) 야다/ 기노스코는 '성적 관계를 가지다'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를 알았다"고 하는 유명한 완곡 어법과 그 병행구들(창 4:1; 창 19:8; 민 31:17; 민 31:35; 삿 11:39; 삿 21:11; 왕상 1:4; 삼상 1:19)에서 남녀 쌍방의 성적인 관계를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이 단어는 남색(창 19:5; 삿 19:22)이나 강간(삿 19:25)과 같은 성적 도착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h) 야다/ 기노스코는 '다른 사람과 인격적이며 친숙한 관계를 맺다'를 의미한다. 하나님은 이름으로, 대면하여 모세를 아신다(출 33:17; 신 34:10). 하나님께서 어떤 개인이나(렘 1:5) 어떤 민족을(암 3:2) 아실 때 하나님께서 그를 선정하시거나 선택하신다(참조: 민 16:5 70인역본). 선택으로 이해되는 이 지식은 은혜롭고 자애로운 것이지만 이것은 인격적인 응답을 요구한다. (i) 야다/ 기노스코는 일반적인 문제에 대한 지식 외에도, 다른 신들을 아는 것이든(신 13:3; 신 13:7; 신 13:14) 여호와를 아는 것이든(삼상 2:12; 삼상 3:7) 간에, 신에 대한 인간의 관계에 대해 사용되었다. 이방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며(렘 10:25) 선지자들에 의하면, 이스라엘도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렘 4:22). 애굽의 재앙은 여호와가 하나님이심을 애굽인들이 알도록 하기 위해 보내졌다(출 10:2 등). 그는 그가 하나님이심을 이스라엘인들이 알도록 하기 위해(사 60:16) 그들을 파멸시키시고(겔 6:7) 회복시키실 것이다. 특히 선지자 에스겔은 위협할 때,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는 어구를 사용한다(겔 6:7; 겔 6:10; 겔 6:13; 겔 6:14; 겔 7:4; 겔 7:9;겔 7:27 등). (j) 요약하면 희랍인들이 초연한 지식을 갖고 있으며 또한 사물의 형이상학적 본질에 사변적인 관심을 갖고 있었는데 반해, 구약성경은 지식을 끊임없이 인격적인 만남에서 생겨나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구약성경이 하나님과 창조에 관해서 언급한 것을 보고서, 우리가 이 언급들을 존재론적 추론으로 여겨서는 안되고 하나님의 계시에 응답하는 믿음의 선포로 간주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역사적 과거와 약속된 미래 즉 하나님의 피조물들이 존재하고 있는 이 지상의 영역 속에서의 하나님의 계시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끊임없이 과거와 현재와 미래 속에서의 하나님의 계시를 찾았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예배와 행동 가운데서 하나님의 목적과 요구를 식별할 수 있었던 것이다.(참조: E. D. Schmitz; Bultmann). 3. 신약성경의 용법. 동사 기노스코는 신약성경에서 221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신약성경에서 기노스코의 용법은 헬라의 용법과 구약성경의 용법과 매우 유사하다. (a) '느끼다, 간파하다'(막 5:29; 눅 8:46), (b) '주목하다, 알아 차리다'(막 8:17; 막 12:12; 마 26:10; 고후 2:4; 요 5:42; 요 8:27), (c) '인정하다, 인지하다' recognize(눅 7:39; 마 12:15; 마 22:18; 갈 3:7; 약 2:20; 요 4:1; 요 5:6; 요 6:15), (d) '듣다, (들어서)알다'(막 5:43; 막 15:45; 눅 9:11; 행 17:13; 행 17:19; 빌 1:12; 빌 2:19; 요 11:57; 요 12:9; 마 10:26과 병행구; 행 9:24; 빌 4:5). (e) '확증하다, 확실히 하다, 확인하다' confirm(막 6:38; 막 13:28 이하; 눅 1:18; 고전 4:19; 고후 13:6; 요 4:53; 요 7:51). (f) ① 알아채고 있다(의식)라는 의미에서 '알다' know(마 24:50와 병행구; 눅 2:43; 눅 16:4; 히 10:34; 계 3:3; 요 2:24 이하; 요 7:27; 요일 3:20). ② 또한 익히 앎이나 아는 사이라는 의미에서 '알다'(마 25:24; 눅 12:47 이하; 눅 16:15; 행 1:7; 롬 2:18; 롬 7:1; 고전 5:16; 요 1:48; 요 7:49). ③ 그리고 이해라는 의미에서 '알다'(눅 18:34; 행 8:30; 고전 14:9; 요 3:10). (g) '구별하다, 분별하다' distinguish를 의미한다. 고전 14:7, "혹 저나 거문고와 같이 생명 없는 것이 소리를 낼 때에 그 음의 분별을 내지 아니하면 저 부는 것인지 거문고 타는 것인지 어찌 알게 되리요". (h) '~하는 방법을 알다' know how to. 마 16:3,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천기는 분별할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i) 경험을 통하여 '알다, 깨닫다' find out(요 13:58; 요 15:18; 요 19:4; 요일 2:3; 요일 2:5). (j) '~와 관계를 맺다' ① 마 1:25; 눅 1:34에서 성적인 관계에 대해 사용되었다. ② 마 7:23에서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라는 말씀은 '나는 너희와 전혀 관계를 맺지 않았다'라는 의미이다. ③ 고후 5:21에서 예수님은 "죄를 알지도 못하신다"라고 하셨는데 이것은 그가 죄에 대해 지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께서 죄와 인격적인 관계를 맺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이란 선언이 범죄 행위와 반어법을 나타내주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④ 롬 7:7에서도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라는 문구는 '율법이 없었다면 인간인 나는 죄와 본질적인 관계가 없었을 것이다'라고 의역할 수 있다. ⑤ 고후 5:16에서 '~와 관계가 있다, ~와 관계를 맺다, 개인적으로 알다'를 나타낸다. 이 구절의 의미는 많은 논쟁의 주제가 된다. 상반절에는 오이다멘("우리가 아노니")이 나오며, 하반절에는 기노스코가 에그노카멘("우리가 알았노니")과 기노스코멘("우리가 아노니")의 형태로 나온다. (k) 고전 5:11-21에서 바울은 자기를 개인적으로 공격하며 사도직을 공격하는 적대자들과의 논쟁에 관련되어 있다. 그들은 바울에게는 사도라고 확증할만한 눈에 보이는 영적인 특성, 예를 들면 무아지경의 현상들이 결여되어 있다고 주장했다(고전 5:13). 그들은 그를 자기 자신만을 칭찬하는 '허풍선이'라고 비난했던 것 같다. 바울은 고전 5:11("우리가 ... 사람을 권하노니")과 고전 5:12("우리가 ... 자천하는 것이 아니요")에서 그것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 듯하다. 바울의 변호 중에는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시고, 그래서 상상된, 눈에 보이는 영적인 특성을 가진 사람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이 죽었다"고 하는 언급도 부분적으로 들어있다(고전 5:14 이하). 그래서 바울은 자기가 본 성령과 능력의 분명한 증거에 따라서 지금부터-모든 가치의 전도, 즉 시대의 전환점을 의미하는 그리스도와 관련된 사건 이후로-"우리가 ...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못하노니"라고 말한다. 우리는 이것을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결과로 이해해야 한다(고전 5:14). 이것이 얼마나 명백한 것인가를 나타내기 위해 바울은 모든 사람이 분명히 알 수 있는 언명을 고전 5:16 하반절에 삽입하고 있다: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다시 말하자면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계셨던 것과 마찬가지로 눈에 보이는 그리스도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즉 그와 그렇게 관계하지 않고 오직 우리가 섬기는, 눈에 보이지 않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와만 관계한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에, 그는 모든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 주이시며, 그가 주님이시라는 것은 외면상으로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사도 바울과 사도라고 하는 그의 주장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던 것 외의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외적인 판단과 일반적으로 눈으로 볼 수 있는 기준에 예속되어 있지 않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오직 새로운 피조물만이 가치가 있는 것이다. 외적 현상에 의한(엔 프로소포, 고전 5:12) 판단을 포함하여 이전 것은 지나가고 "새 것이 되었도다"(고전 5:17). 이 논쟁에 비추어 볼 때, 바울이 고후 5:16에서 그가 지상의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알았다는 것을 확증하지도 부정하지도 않는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마찬가지로 바울에게 있어서 이것은 역사적 예수님의 의미와 관계를 띠고 있지 않은 것이다. (l) 기노스코는 '인정하다, 알아주다'를 의미한다. ① 고전 4:19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그가 갈 때 교만한 자의 말이나 그들의 능력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고, 즉 중요시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② 계 3:9에서 빌라델비아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높임을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이(이방인?) 기독 교회에 와 보면 부활하신 이가 그들을 사랑하심을 인정하게 되리라고 약속하셨다(계 2:23). 이렇게 하심으로서 그는 유대인의 종말론적 소망을 뒤짚어 놓으셨다(참조: E. Lohmeyer). ③ 롬 7:1에서 "법을 아는", 롬 2:18; 행 22:14에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와 같은 문구들은 단순히 이론적인 지식을 암시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사람에게 개인적으로 적용되어 인간의 순종을 요구한다는 것에 대한 인지를 암시한다. ④ 요 7:29에서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라고 한 바리새인들의 말은 일반 백성들에 대한 잘 다듬어진 랍비 학자들의 비웃음을 반영해 주는 것이다(참조: SBⅡ 494-521). 이것은 일반 백성들이 실제로 율법을 알아 율법에 순종했다면, 그들은 예수님을 추종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이 내용을 기록하면서 요한은 여기서 율법이 바로 그들 자신을 지적하고 있음을 깨닫지 못하는 바리새인들에 대하여 무의식적으로 비꼬는 것이다(참조: 요 7:42; 요 5:29 이하; 요 11:49 이하). 요 7:51에서는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판결하느냐"고 반박하고 있다. ⑤ 롬 1:21에서 하나님을 알았던 자들의 생각이 허망하여졌다는 말은 헬라 사상의 견지에서 모순된 것으로 보였음에 틀림없다. 그들의 허망함은 하나님을 알지 못한 결과다(참조: 지혜서 13:1).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반드시 그에 합당한 찬미와 감사를 포함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거부한 이교도들은 이 지식을 단순한 지적인 활동으로 격하시켰으며 그들이 지혜라고 생각했던 것은 사실상 어리석음일 뿐이었다(롬 1:22 이하). 이교도들이 분명히 하나님을 알고 있었다하더라도, 그들이 하나님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그들은 핑계할 수 없게 되었다(갈 4:9; 요 1:10; 고전 1:21; 갈 4:8). ⑥ 엡 5:5; 약 1:3; 약 5:20 등에서 지식에 관한 명령과 권유는 이 은사를 붙잡아 변화하는 생활 상황에서 이것을 올바르게 사용하라는 요구인 것이다. ⑦ 눅 10:11에서 이스라엘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인정해야 한다. 행 2:36에서 "이스라엘의 집"은 오순절 사건에 비추어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하라는 요청을 받는다. 마 24:43의 비유에 나오는 명령문도 참조하라. ⑧ 고후 8:9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즉 "부요하게 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을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하게"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실제 행동으로 나타내는 것에 대해 언급한다. 우리는 이것을 리쯔만(Lietzmann)이 해석한 것처럼 단순히 그리스도께서 관대하심의 본이시다를 뜻하는 것으로 해석해서는 안된다(H. Lietzmann, An die Korinther). (m) 기노스코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시고 선택하시는 지식을 언급하는데 사용되었다. -딤후 2:19(민 16:5을 인용함), "그러나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인침이 있어 일렀으되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하며 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찌어다 하였느니라". -고전 8:3,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시는바 되었느니라". -갈 4:9,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더러 하나님의 아신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노릇 하려 하느냐". 여기에서 하나님의 지식은 이방인과 유대인을 똑같이 받아들이시는 하나님의 모든 행동을 포함한다. 이 지식은 영원히 하나님의 피조물에게 유효한 것이며 죄와 불순종에 대한 승리이다. 롬 10:2은 이에 대한 일종의 상대 구절이다. 여기서 바울은 하나님을 위한 유대인의 열심을 인정하긴 하지만 이것이 카타 에피그노신("[참된] 지식을 좋은 것")은 아니다(참조: Arndt, 291). "이것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보다 깊이 통찰하지 못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 결핍되어 있는 지식은 하나님의 방법에 대한 지식과 인지이다"(E. Gaugher, Der Brief an die Romer). (n) 기노스코는 어떤 구절에서 신학적이고 이론적인 지식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① 마 13:11(참조: 막 4:11TR)은 오직 제자들에게만 허락된 "천국의 비밀"에 관한 감추어진 지식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이 지식이 그들을 그 외의 경우에는 사람들에게 감추어져 있는 비유의 권위 있는 해석가가 되게 했다. 롬 6:6에서는 신학적인 진리에 관한 지식, 예를 들면 세례에 관한 특별한 가르침에 대한 지식까지도 삶으로 나타내는 순종을 그 목적으로 삼고 있다. 이러한 지식의 명백한 목적은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에 있는 것이다.( R. Bultmann; E. D. Schmitz). ※ 영지주의와 논쟁에서 나타난 용법 등. 신약성경 시대에는 자기들이 탁월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자랑하는 사람들이 있었다(고전 1:18-2:16; 고전 13:12 이하; 골 2:8; 딤전 4:7; 딤전 6:20). 신약성경 기자들은 자주 사도적 케뤼그마(khvrugma, 2782: 선포, 전도)에 대하여 자기 나름대로의 견해를 가지고 있었던 순례 설교자들과 충돌하곤 했다. 디모데는 이른바 거짓된 지식(그노시스)의 "망령되고 허한 말"과 "변론"을 피하도록 명백히 경고받고 있다(참조: 딤전 6:20). 계 2:24에는 "사단의 깊은 것"을 배웠다고 주장했던 적대자들이 언급되어 있다. 이 기자는 풍자적이면서 올바른 비평적인 판단을 가지고 "하나님의 깊은 것"을 배웠다고 하는 그들의 주장에 항변했던 것 같다(E. Lohmeyer). (a) 바울 서신. 고린도 교회 사람들이 주장하는 지식은 이처럼 바울에게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었다.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고전 8:2). 이것은 고전 15:34과 비교될 수 있는데, 여기에서 바울은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아그노시안 ... 데우)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견지에서 볼 때 바울은 그가 지식으로 이해한 것을 설명하라는 강요를 받은 것이다. 그는 지식을 이미 알려져 있는 것으로서 오직 수동적으로만 표현할 수 밖에 없음을 알았다(갈 4:9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아신 바 되었거늘"이라는 어구를 첨가시킴으로서 인간이 능동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가질 수 있다고 하는 사상을 시정했다). 이미 알려져 있는 이러한 것은 인간이 가지는 하나님에 대한 이전의 어떤 능동적인 이해와 상응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 상응하는 것이다(고전 8:3). 하나님에 대한 완전하고도 참된 지식은 오히려 종말론적 약속과 기대의 일부이다(고전 13:12). 바울은 육을 입고 지상에 오신 존재를 간단히 무시해 버림으로써, 하나님에 의해 알려진 것과 인간이 가지는 하나님에 대한 완전한 지식을 일치시키는 영지주의자들의 에스카톤(목적)에 대한 환상적 기대를 완전히 거부했다. 왜냐하면 바울은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우리를 이미 알고 계셨다는 것을 전적으로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노스데나이(하나님에 의해 알려진 것)는 선택을 포함하고 있다(참조: G. Bornkamm). 제 아무리 인간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생애와 사역에서 자신을 계시하심으로서 전달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을 주신 영이다(참조: 고후 4:6). 에스카톤 이전에는 우리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알 때만 하나님을 알 수 있다(빌 3:10; 참조: 골 2:1 이하). 그러나 그리스도는 신학적인 사색을 통해서 알려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그에 의해서 만나지게 될 때 그리고 우리가 그를 주로 고백하게 될 때 알려진다(빌 3:8). 이러한 고백은 하나님의 아시는 바 된다. 이러한 고백이 없는 곳에서 지식에 대하여 언급하는 것은 쓸데없는 것이다. "만일 누구든지 알지 못하면 그는 알지 못한 자니라"(고전 14:38). 따라서 하나님에 대한 사랑 Love은 하나님에 의해 아시는 바가 되는 것이다(고전 8:3).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새로운 복종과, 죄의 주권으로부터의 해방(참조: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빌 3:10, 참조: 롬 6:3)에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과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나타내는데 열심히 봉사하는 곳에서 구체화되는데, 한편으로 사람들은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의 약속된 부활에 이르려한다(빌 3:10). 참된 지식은 하나님께서 사도의 증거를 통해 어느 곳에서나 나타내셨던 지식이다(고후 2:14). 이것은 최종적으로 완성된 지식은 아니다. 지금 이 지식은 단편적일 뿐이지만(고전 13:12) 완성을 기대한다. 바울이 몬 1:6에서 언급했던 바와 같이, 지식은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하고 그리스도께 미치도록 역사하는" 것이다. 고린도 교회의 영지주의자들은 교만하여 이 지식에 대한 어떠한 것도 알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에게 "내가 편지한 것이 주의 명령인 줄 알라"고 풍자적으로 요구했다(고전 14:37). 이 모든 점에 비추어 볼 때, 바울의 논법이 본질적으로 구약성경적 지식 개념의 범위 안에 머물러 있음이 분명하다. 동시에 그는 이 개념을 종말론적으로 확대하여 완성시켰다. (b) 요한의 기록. 지식이 예수님과 요한 자신의, 그리고 요 10:14 이하에서는 예수님(아들)과 하나님(아버지) 사이의 상호 내적인 친교를 나타낼 수도 있다는 바로 그 사실이 영지주의적 배경을 나타내 주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예레미야스(J. Jeremias)는 불트만(R. Bultmann)이 그의 저서(The Gospel of John, 1971, 380 이하)에서 주장한 것처럼, 이것이 헬라의 신비주의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셈족 사상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지식을 친교로 묘사할 수 있는 가능성은 알고 있는 자, 즉 지식을 전달하는 하나님의 사자와 완전한 초월자로 알려진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동등성에 의거한다. 하나님과 세상 사이의 영지주의적, 이원론적 대조는 세상이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진리의 영"(요 14:17)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언명에 의하여 나타나고 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미움을 받은 것은(요 15:18; 요 16:2) 하나님과 세상 사이의 제거할 수 없는 구별의 결과로 이해되어지지 않으면 안된다. 마찬가지로 계시의 목소리도 하나님이 아닌 마귀를 아버지로 모시고 있는 자들에 의해서 그렇게 인식되어질 수 없다(참조: 요 8:42-43). 반대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분에 대한 지식을 포함하며, 영생과도 동일시되었다(요 17:3). 구원을 가지고 오는 이 지식은 외부로부터의 부르심, 즉 이해력, 말하자면 진리 되신 분을 아는 능력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의 도래를 통하여서만 가능하다(참조: 요 5:20). 지식에 관한 요한의 언어와 요한의 견해가 영지주의의 용어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은 만약 우리가 기독교의 메시지를 받아들인 자들과 이 메시지를 반대한 사람들이 이 메시지를 표현하는 형태에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요한의 목적은 영지주의자들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었으므로 그들의 언어를 사용했던 것이다. 그는 자기 자신의 입장에서 영지주의자와 직면하여 자기 자신의 무기를 가지고 그를 공박했다. 이것이 복음을 신화로 만들거나 요한을 영지주의자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었으나(참조: 요 1:18), 하나님은 그의 보내심을 받은 자, 즉 그 아들에게서 알려지게 될 것이다(눅 10:22). 그는 육체가 되셨던 로고스(말씀)이시다(참조: 요 1:14; 요일 1:1-4). 예수님을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본 것이다(요 14:9; 요 12:45). 그를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은 아버지도 알 것인데, 그 이유는 이 사람이 그를 이미 알았고 또한 보았기 때문이다(요 14:7). 따라서 하나님과의 교제는 예수님과의 교제를 통해서만 행해질 수 있는데, 왜냐하면 이 교제가 예수님의 하나님과의 교제에 상당하기 때문이다(요 10:15). 이 두 가지 수준의 교제는 기노스코로 표현된다. 예수님과 예수님의 사람들 사이에 나누는 교제는 서로를 아는 지식에 의해서 효과적인 교제가 되지만, 이 교제가 영지주의에서와 같이 인간을 신격화시키거나 인간을 이 세상과 역사에서 완전히 제거시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요한에게 있어서 지식은 한 분이신 하나님과 역사적인 통로를 통해서 역사 속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계시로부터 그 형태를 취한다. 자기 아들을 보내심으로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요 17:23; 참조: 요일 4:19 이하)과 세상에 대한(참조: 요 3:16) 자기의 사랑을 나타내셨다. 아들은 자기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의 척도에 따라 자기의 백성들을 사랑하셨다(참조: 요 15:9; 요 17:26). 따라서 하나님과 예수님의 사랑을 받는 자의 지식은 역사의 영역 안에서 사랑으로 표현된다.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 4:8). 아들이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순종으로 아버지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입증하셨듯이(요 14:31), 그를 아는 자도 하나님의 명령, 무엇보다도 자기 형제를 사랑하라는(요일 4:7 이하; 요일 2:7-11) 명령을 지킴으로서(요일 2:3 이하), 또한 죄를 짓지 아니함으로써(요일 3:6), 자기의 지식을 입증하는 것이다. 이처럼 기노스코는 두 가지로 적용된다. 첫째로, 이 지식은 아들의 보내심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을 의미하며(요 17:8; 요일 3:6), 둘째로는 선포된 메시지에 복종하는 것으로도 묘사되는 이 지식에 기초한 사랑에 순종하는 것을 의미한다(요일 4:6). 이러한 지식은 이미 지금 여기에서 영원한 생명 Life이 되었는데(요 17:3) 왜냐하면 이것은 하나님의 역사적 계시에서 유래된 역사 속에 있는 한 생명이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에 비추어 볼 때, 요한의 개념은 영지주의의 개념과 고의적인 정반대적인 것으로 두드러진다.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에서 믿음과 지식을 똑같은 수준 위에 두는 것도 적어도 지식과 대조시켜 믿음을 낮게 평가한 영지주의에 대한 논박의 일부분이다. 요 17:3이 영생을 지식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지만 요 3:36은 믿음에 기인하는 것으로 본다. 베드로의 고백에 관한 요한의 견해에서(요 6:69) 우리는 믿음을 지식에 종속하는 제일 첫 단계로 보려는 유혹을 받을 수 있으나, 요일 4:16에서는 이 순서가 "알고 믿었노니"로 되어 있다. 오직 자기 자신의 구원에만 관심을 가지는 영지주의의 자기 만족은 형제 사랑(요 13:35)과 단합(요 17:21 이하)에서 교회가 존재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과는 반대된다. 더욱이 이 배후에 있는 궁극적인 목표는 아들이 보냄을 받았다는 사실을 세상이 믿게 되고 또한 이 계시가 온 세계에 알려지게 될 때에만 달성될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우주(창조)와 구원에 대한 영지주의의 이원론을 요한이 전혀 가지고 있지 않을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영지주의자에게 있어서 이러한 이원론은 극복될 수 없는 것인데, 그 이유는 이 이원론은 우주적인 타락 이전에 이미 정해진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영지주의의 견해에 따르면 우주는 완전히 그리고 치명적으로 하나님을 알 수 없고 구원 받을 수도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요한에게 있어서 세상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이다(참조: 요 1:1 이하; 요일 2:14).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에 대한 증오로 표현되는 알지 못하는 것은 나타난 계시를 믿지 않는 결과이며(요 8:42 이하) 이것은 결과적으로 죄를 초래한다(참조: E. Kasemann). "만약 '유대인들'이 이해할 수 없다면 그것은 그들이 참으로 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도 이 지식을 심화시키고 풍요롭게 하는데 관심이 있긴 했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이미 알고 있는 것만 들으려고 할 뿐, 새로운 것을 들어 그들이 전에 알고 있던 모든 것과 그와 아울러 이런 지식의 상태 곧 자기에 대한 그들 자신의 이해를 포기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런 식으로는 들을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이 왜 들을 수 없는가라는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이 영역에서 어떤 것을 할 수 있는 것과 어떤 것을 하고자 하는 것이 하나이며 동일하다는 점에 대한 이해 부족을 나타내어 줄 뿐이다"(R. Bultmann). 지식과 믿음에로의 부름은 이렇게 세상을 위해서도 남아 있다. 아들을 보내심으로 나타난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이제 실제적인 것으로 나타나서 실재의 새로운 차원을 연 것이다. 요한의 어휘가 영지주의와 명백히 유사성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그의 주제는 영지주의의 신화적 사변보다는 구약성경의 전승에 나오는 지식의 개념과 훨씬 더 가깝다는 것도 마찬가지로 분명하다.(참조: E. D. Schmitz). ================= ajkouvw(191, 아쿠오) 듣다, 경청하다, 주의하다, 들어서 깨닫다.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동사 아쿠오(Oracula sibyllina 이래로)는 '듣다'라는 의미를 가졌으며, 본래 '들음'이란 의미로 소리에 대한 지각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들음'은 청각 작용 뿐 아니라 들려온 내용을 정신적으로 이해하고 수용하는 것까지 포함한다. 이로 인하여 다양한 언어학적 용법이 나타난다. 2. 70인역본의 용법 아쿠오는 70인역본에서 매우 많이 사용되었으며, 대부분 히브리어 샤마를 번역한다. 따라서 아쿠오는 히브리어 동사의 미묘한 의미의 차이를 공유한다. 여기서도 역시 본래의 의미는 청각 작용이다(예를 들면, 나팔소리를 들음, 삼하 15:10). 한편 사람이 진술, 보고, 소식 등을 받자 마자(창 14:14) 즉시 이해는 수반된다. 이해는 수용, 경청(창 1:23; 창 23:11), 인식(창 11:7; 창 42:3), 들린 것에 대한 주의력("…을 듣고" 창 3:17; 창 23:16; 출 24:7)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샤마는 '복종하다'라는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이러한 의미에서의 샤마는 70인역본에서 자주 강조형 복합어들로 번역되었다(이를테면, 창 42:21 이하; 삿 2:17). 아쿠오는 이런 과정을 걸으면서 '듣다, 경청하다, 주의(유의)하다, 이해하다'와 '복종하다'라는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고대와 중세 영어에서 '듣다'와 '복종하다'는 두 의미를 동일한 단어로 표현한 것이 나타난다. 전자의 의미는 후자의 의미를 포함하며, 어떤 문장에서는 그것을 대용하기도 한다. 3. 신약성경의 용법 아쿠오는 신약성경에서 약 430회 나오며, 본질적으로 헬라어 문헌과 70인역본의 용법을 따른다. (a) 아쿠오는 신약성경의 메시지를 "어떻게" 듣는가라는 신학적 질문을 할 때 나타난다. 이 메시지의 내용은 옛 언약 하에서 약속된 메시야인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를 믿는 자들에게는 구약성경의 메시지를 능가하는 구원의 충만함과 새로운 계기가 주어진다. 예수님 안에서 명시된 이 계시는 단지 들음을 통해서가 아니라 모든 감각기관을 통해 인식된다(요일1:1). 본질상 이것은 듣는 것과 보는 것의 문제이다. 예수님은 그 이전 세대들에서 경건한 자들이 갈망했던 구원을 목격했던 자들의 눈과 귀를 향해 축복을 선포했다(마 13:16이하; 눅10:23이하). 예수님은 투옥된 세례(침례) 요한이 보낸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마 11:4; 병행구, 눅 7:22). 이와 같은 그의 말씀과 나란히 예수님의 능력있는 행위가 나타난다. 변화산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의 감추인 영광을 보았으며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는 소리를 들었다. "저의 말을 들으라"(마 17:5; 병행구, 막 9:7; 눅 9:35). 예수님의 탄생 기사에 나타나는 목자들의 찬미의 노래 뿐만 아니라 산헤드린 앞에서의 사도들의 고백도 그들이 보고 들은 것에 대해 언급한 것이다(눅 2:20; 행 4:20). (b) 사람들은 예수님의 생애, 부활, 오순절 사건도 보고 들은 것에 의해 인식한다. 그리스도에 대한 바울의 중대한 환상은(고전 15:9) 행 22:14, 행 22:15에 부연 설명되어 있다. 바울은 자기가 보고 들었던 것에 대해 증인이 되어야만 했다. 기독교 공동체에 미친 엄청난 효과를 미친 오순절 사건도, 본래 보고 들은 것을 통해 인식되어졌다(행 2:33). 고후 12:1 이하에 언급된 바울의 계시와 환상들도 이 사건과 관련되어 있다. 사도는 황홀경 속에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고후 12:4). 듣는 행위는 또한 요한계시록의 환상들 속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계 1:10; 계 5:11, 계 5:13 등). 한편 우리의 구원의 신비는 통찰할 수가 없다. 즉,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고전 2:9). (c) 그리스도의 메시지는 중대한 계시적 사건에 근거하고 있다. 복음은 선지자들을 통해 선포되었다.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받아 들이는 데는 믿음이 요구된다. 그러나 롬 10:14이하(비교: 시 19:14; 신 32:21; 사 65:1 이하)에 의하면 믿음은 듣는 것을 전제로 하며, 이 들음은 전파하는데 달려있다: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d) 눅 10:16의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라"라는 문구를 음미해 볼 때 신약성경은 예수님의 말씀과 사도의 말을 구분하지 않는다. 사도들은 예수님의 증인으로 충분한 자격을 부여받았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그것을 들은 자들에 의해 확실하게 전달되었다(히 2:3). 그 메시지를 듣는 것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것이며 진리의 말씀(엡1:13; 엡 4:20 이하) 또는 하나님의 말씀(행 13:7, 행 13:44 등)을 듣는 것이다. 이렇게 들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될 때 응당 그 결과로서 세례(침례)를 받게 된다: "또 회당장 그리스보가 온 집으로 더불어 주를 믿으며 수다한 고린도 사람도 듣고 믿어 세례를 받더라"(행 18:8). (e) 구약에서 듣는 것과 행하는 것의 연결을 신약에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옛 사람들에게 선포되었던 말씀을 초월한다(마 5:21). 그의 가르침을 보면 그에게 주어진 권위가 표현되었다. 산상수훈을 결론짓는 비유에서 주님은 자기의 말을 듣고 행하는 자를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자로 비유한다(마 7:24이하). 눅 11:28에서 예수님은 자기의 말을 듣고 지키는 자들에게 축복을 선포한다. 요 10:16, 요 10:27은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따르는 양에 대해 언급한다. 막 12:28이하에서 예수님은 경건한 유대인들에 의해 날마다 암송된 셰마("Hear") 또는 이스라엘 신조를 인용하고 있는데, 그것은 신 6:4-신 6:9; 신 11:13-신 11:21; 민 15:37-신 15:41로 이루어져 있다. 그 구절들은 이스라엘 민족이 자기의 전(全) 존재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할 의무를 날마다 그리고 계속적으로 기억해야 할 것을 선언하고 있다. 예수님은 그 말씀을 인용했던 것이다. 즉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 인용문은 주로 70인역본을 따르고 있다. (f) 말씀을 듣는 것은 항상 믿음, 즉 하나님의 말씀을 수용하는데 이르게 하지는 않는다(막4:16; 눅 8:13). 만일 뿌려진 말씀의 씨가 열매를 맺으려면 듣고 깨달아야만 한다(마 13:23; 마 15:10).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하며 그것을 수용하지 않는 거스리는 태도는 결국 강퍅한 마음을 낳게 된다. 그 까닭에 사 6:9이하에서 선포된 강퍅해짐을 나타내는 문장에 대한 언급이 신약에서 특히 유대 민족과 관련해서 여러 차례 나타난다(마 13:13이하, 병행구, 막 4:12; 눅 8:10; 요 12:40; 행 28:27; 롬 11:8). 요한복음에서 유대인들은 솔직이 그런 식으로 듣는 것은 실제로 듣는 것이 아니라는 말을 듣는다(요 5:37; 요 8:43). 이것은 스데반이 재판 받으면서 재판관들을 "마음과 귀에 할례받지 못한 자들"이라고 묘사했을 때 의미했던 것이며, 그 다음의 그들의 행동이 스데반의 그 책망을 입증한다(행 7:51, 행 7:57). 예수님의 제자들 조차도 이해하지 못하며 듣지 못함을 막지 못했다(막 8:17이하). 마찬가지로 히브리서에서도 성도들이 시 95:8과 관련하여 완고해짐을 긴급하게 경고하고 있다(히 3:7-히 3:11, 히 4:3-히 4:11). 이러한 완고해짐과 대조되는 현상이 하나님께서 귀를 열어주신 자들과(사 50:5) 착하고 선한 마음으로 말씀을 지키는 자들(눅 8:15)의 수용성으로 나타난다.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은 오직 이런 식으로 듣는 것 뿐이다(마 13:11; 병행구, 막 4:11, 눅 8:10). 그러나 그러한 들음과 깨달음이 하나님의 은사이지만 결코 인간의 행위가 배제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갖가지의 주의하라는 경고에서 이러한 것을 볼 수 있다. 즉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마 11:15; 마 13:9; 병행구, 막 4:9; 눅 8:8). 또한 "듣고 깨달으라"(마 15:10). 또한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막 4:24). 또한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계 2:7, 계 2:11, 계 2:17, 계 2:29; 계 3:6, 계 3:13, 계 3:22). (g) 요 5:25, 요 5:28에서 아쿠오는 종말의 때에 듣는 것에 대해 사용되었다. 즉 무덤 속에 있는 자가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것이니 어떤 이는 생명의 부활로 어떤 이는 심판의 부활로 나올 것이다.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무덤에서 불러 내신 나사로의 부활은(요 11:43) 이와 같은 종말 사건에 대한 예기이다. (h) 아쿠오는 하나님의 들으심에 대해 사용되었다. 요 11:41, 요 11:42에서 하나님의 들으심에 관해 언급한다: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계 9:20은 우상이 듣지 못한다는 구약성경의 표현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를 들으신다(요 9:31). 성도들은 하나님의 뜻에 일치할 때 하나님께서 자기들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것을 확신하게 된다(요일 5:14). 스데반의 증언에서는(출 3:7을 인용한 행 7:34) 애굽에서 들려오는 이스라엘 백성의 탄식하는 소리에 대해 언급한다. (참조: Walter Bauer; G.Kittel; W.Mundle). ================= 선한 목자 예수(요 10:1-18) 이 설교가 22절에서 말하는 것과 같이 겨울의 "수복절"에 행하여졌는지의 여부는 확실치가 않다. 그러나 수복절 전후에 있었을 것이다. 그리스도는 양의 비유(26,27절)를 설교하셨다. 따라서 여기 나타난 설교와 동시적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또 이 설교가 앞장에 나오는 바리새인들과의 논쟁의 계속이었는지도 확실치가 않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교회의 목자들"이기 때문에, 자기들로부터 아무런 위임도 받지 않은 예수는 하나의 침입자요 사기꾼이어서, 자기들이 예수에게 반대한다고 했다. 또 그래서 사람들도 그리스도를 반대하고, 자기들에게 붙어야 한다고 보았다. 여기에 대해, 그리스도는 누가 거짓 목자였고, 누가 진실 된 목자였는지를 묘사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들 자신에 대한 판단은 그들에게 맡기셨다. Ⅰ. 여기에 비유 혹은 은유가 있다(1-5절). 그것은 양을 경영하는 그 나라의 관습에서 취한 것이다. 거룩한 진리를 제시해 주기 위해서 사용될 비유들은 가장 익숙하고 평범한 것이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목적을 밝혀 주어야 할 것이 오히려 흐리게 해서는 안 된다. 이 설교의 서문은 엄숙하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아멘, 아멘." 이러한 격렬한 선언은 그가 말하는 것의 확실성과 비중을 암시해 주고 있다. 우리는 교회의 찬양과 기도 속에서 이중 "아멘"을 본다(시 41:13; 72:19; 89:52). 만일 우리가 하늘에서 우리의 "아멘"이 받아들여지기를 원한다면, 그리스도의 "아멘"이 이 땅을 지배하게 하자. 1. 이 비유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보게 된다. (1) 양떼들에게 위험이 되고 주인에게는 해가 되는 도둑과 강도가 있다(1절). 그는 합리적인 방법으로 들어가지 않고 "문이 아닌 다른 곳" 곧 창문이나 벽을 타고 들어간다. 사악한 사람들은 악한 일을 하는 데 얼마나 부지런한가! 그들은 사악한 음모를 위해서 온갖 어려움을 감수하며, 위험을 무릅쓴다. 사실 이것은 하나님을 섬기는데 있어서 나태하고 비정한 우리들을 부끄럽게 해 준다. (2) 양떼에 대한 소유권을 가지고 그들을 돌보고 있는 정당한 주인을 밝히 구별한 특성이 잘 나타나 있다. "그는" 권위를 가지고 있는 자처럼 "문으로 들어간다"(2절). 그는 "다친 것을 싸매주고," "병든 것을 강하게 해 주는"(겔 34:16) 따위의 좋은 일을 해주기 위해서 들어온다. 양은 인간의 보호를 필요로 한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대가로 인간에게 봉사하게 된다(고전 9:7). 그들은 자기들을 입혀 주고 먹이를 공급해 준 자들에게 옷감과 먹을 것을 제공해 준다. (3) 목자는 준비된 입구를 발견한다. "그에게 문지기가 문을 열어 준다"(3절). 옛날에는 대문 안에 양우리가 있었다. 그래서 아무도 그들에게 곧바로 들어올 수는 없고 문지기가 열어 주거나 집주인이 열쇠를 주어야만 했다. (4) 그는 양을 보호하고 관리한다. 개나 말에게 하는 것처럼 주인이 양들에게 친근히 말할 때, 또 그들이 우리로 들어올 때, "그의 음성을 듣는다." 더구나 그는 "자기의 양의 이름을 부른다." 그들에 대한 주의, 그들에 대한 정성이 그토록 정확하다. 그리고 그는 그들을 우리에서 푸른 초장으로 인도한다. 그리고 그들을 밖으로 몰고 나왔을 때, 그는 그들을 뒤에서 몰지 않고(이것은 당시의 습관이었다) 그들이 당하게 될지도 모르는 어떠한 위험이나 해를 막아 주기 위해서 "그들보다 앞서 가고," 그렇게 습관 됨으로써 양들은 안전하다. (5) 양이 이상하게도 목자를 따름. "그들은 그의 목소리를 알고 있다." 그것으로 그의 마음을 분별하고, 낯선 사람의 음성과도 구별한다(소도 자기의 주인을 안다. 사 1:3). "그들은 낯선 자를 따르지 않는다." 의심스러운 일이 있을 때는 달아나게 된다. "그의 목소리," 곧 목자의 음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 비유이다. 우리는 그것에 대한 열쇠를 가지고 있다(겔 34:31). "너희 인간들은 나의 양떼이며, 나는 너의 하나님이다." 2. 이 비유를 잘 살펴보자. (1) 선한 사람은 적절하게도 양에 비유되고 잇다. 창조주에게 의존되어 있는 피조물인 인간들이 "그의 목장의 양"으로 불리워지고 있다. 새로운 피조물인 선한 사람들은 양의 좋은 성품을 가지고 있어서, 양처럼 "해를 끼치지 않고" 비공격적이다. "온유하고" 조용하며 시끄럽지가 않다. 도살군과 털깎는 자의 손아래서도 양처럼 "인내하며" 목자에게 "유용하고" 유익하며, 서로 잘 "어울리고," 제물로도 많이 사용된다. (2) 세상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는 열방에 흩어졌던 "하나님의 자녀"들이 "모여드는""양의 우리"이다(11:52). 그리고 그 안에서 그들은 연합되고 하나가 된다. 그것은 좋은 우리이다(겔 34,14 ; 미 2;12를 보라). 이 우리는 튼튼하다. 하나님 자신이 "불 성벽"과도 같이 지키시기 때문이다(슥 2:5). (3) 이 양의 우리는 도둑과 강도들을 당한다. 곧 파괴하고 먹어 삼키는 잔인한 가해자들, "포악한 늑대들"(행 20:9), 또는 그리스도의 양을 훔쳐서 악마에게 제사지내고 양의 먹이를 빼앗아 죽이려드는 도둑들이 범접한다. 다시 말하면 양의 옷을 입은 "늑대들"(마 7:15)이다. (4) 양의 목자장은 양떼들과 거기에 속한 모든 것을 훌륭히 보살핀다. 하나님은 목자장이시다(시 23:1; 80:1). 그는 자기 양을 아시며, 하나하나 이름을 들어 그들을 부르며, 그의 표시를 해 두신다. 그리고 풍요한 초장으로 그들을 인도하고, 거기서 그들에게 먹이와 휴식을 제공하며, 그들에게 부드럽게 이야기해 주고, 자기의 섭리로 그들을 지켜 주고, 성령과 말씀으로 그들을 인도하며 "자기의 발걸음을 따르게 하기 위해서" 그들보다 앞서서 간다. (5) 하나님의 양떼들을 먹이도록 위탁받은 작은 목자들은 그 책임에 충성을 다해야 한다. 즉 정치인들은 그들의 모든 세속적인 권익을 보호해 주어야 한다. 그리고 성직자들은 그들의 영적인 권익에 봉사해야 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분명하게 가르치며 복음적 의식을 올바로 집전하여 "그들의 영혼에 먹여야" 한다. 그들은 정규적인 서임이라는 "문으로 들어가야 하고," 그런 이들에게 "문지기가 문을 열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영은 "그들 앞에 열린 문을 두며," 교회에서 그들에게 권위를 주고, 그들의 가슴속에는 확신을 줄 것이다. 그들은 자기 양떼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알아야 하고, 그들을 지켜보아야 한다. 그리고 솔선하여 공중 예배의 목장으로 그들을 인도해야 하며,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입과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입이 되어야 한다. 자신들의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도 믿는 자들에게 본이 되어야 한다. (6) 참으로 그리스도의 양인 자들은 그들의 목자에게 대단히 유순할 것이며, 낮선 자들에 대해선 대단히 조심하고 피할 것이다. ① "그들은 그들의 목자를 따른다." 왜냐하면 분별하는 귀와 복종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서 그들은 "목자의 음성"을 알기 때문이다. ② "그들은 낯선 자로부터 도망하고," 그를 따르기를 두려워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의 음성을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음성"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자들,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으로부터 우리를 "그리스도에 관한 환상"으로 이끌려는 자들을 따른다는 것은 위험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직접 거룩한 진리의 효능과 권능을 체험한 자들, 그리고 그것의 맛과 재미를 아는 자들은 사탄의 간계를 발견하고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는 훌륭한 제능을 가지고 있다. Ⅱ. 이 설교의 흐름과 의미를 유대인들은 몰랐다(6절). "예수는 비유를" 그들에게 말했다. 상징적이나 현명하고, 우아하고, 교훈적인 이야기를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무슨 뜻으로 말씀하는지 깨닫지 못하였다." 그가 의미하는 "도둑과 강도들," 그리고 "선한 목자"가 누구인지를 깨닫지 못하였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으나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많은 사람들의 수치요 죄다. 그들은 원치 않았기 때문에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일반 사물이 대해서도 잘 모른다. 따라서 비유와 그것이 계시하는 바를 비교해서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의 지식에 대해 큰 자만을 가졌다. 그래서 그 자만이 의문시되어야 한다는 것을 침을 수 없었다. "예수가 말씀하신 사실들을 능력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빈번히 그 가장 위대한 지식인으로 자처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일에는 가장 무지한 자들이 된다. Ⅲ. 이 비유의 특색을 충분히 보여 주면서, 그것에 대해 설명하셨다. 주 예수의 말씀 속에 어떤 난점들이 있어 보이더라도, 만일 우리가 그를 기꺼이 이해하려 한다면, 그는 자신을 기꺼이 드러내신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또한 성귀가 다른 것을 해석해 주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성령은 거룩하신 예수의 통역자 역을 하신다. 그 비유에서 그리스도는 "문으로 들어간다"는 점에서 도둑과 다르다고 구별하셨다. 그런데, 그 비유에 대한 설명을 보면, 그는 자기 자신을 목자가 들어가는 "문"으로도, 그리고 그 문으로 들어가는 "목자"로도 이야기하고 있다. 비록 똑 같은 사람을 문과 목자 둘에 모두 비유한다는 것은 수사학에 있어서 어법 위반이라 할지라도, 그리스도는 스스로의 생명을 가지고 계심으로, 자신에게서 권위를 이끌어내더라도 그의 신성에서 보면 결코 어법 위반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그 "자신"은 "그 자신의 피"를 문으로 하여 "성소에 들어가신다." 1. 그리스도는 "문"이다. "의를 찾는다"고 주장하나 소돔 사람처럼 "문을 발견하기에 지쳤던" 자들에게 이 말씀을 하셨다. 그들은 문을 발견할 수 없는 곳에서 찾았다. 그는 또 그것을 하나님의 유일한 양들이라고 자부하던 유대인들과 그들의 유일한 목자들이라 생각하던 바리새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양의 우리의 "문이다" 즉 교회의 문이다. (1) 일반적으로 말해 보면 이렇다. ① 그는 들여보내기에 적합하지 않은 도둑과 강도들을 막기 위해 "닫혀진 문"과 같다. 문을 닫는 것이 집이 안전인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교회가 자신과 그 적 사이에 주 예수의 개입과 그의 지혜, 권능, 선보다 더 커다란 안전을 어디서 얻을 것인가? ② 그는 통행과 상호 소통을 위해 "열린 문"과 같다. 첫째, 문이신 그리스도에 의해 우리는 하나님의 양떼로의 입장을 허락 받게 된다(14:6). 둘째, 우리는 그에 의해 도움을 받고, 그에게 용납되면서 그의 이름에 의해, 그 안에서 걸어가면서 신앙 생활을 한다(슥 10:12). 셋째, 그를 통해서 하나님이 교회를 방문하시고, 자기를 알리신다. 넷째, 문이신 그에 의해 양떼들은 마침내 하늘의 왕국으로 들어갈 허락을 받게 된다(마 25:34). (2)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① 그리스도는 "목자들"의 문이어서, 그를 통해 들어오지 않고는 아무도 "목자'로 간주할 수 없다. "도둑들과 강도들이다"(그들이 목자들인 척한다 해도 소용없다). 양은 그들의 음성을 알아듣지 못한다. 이것은 "이스라엘"에 있는 목자들, 곧 정치인이든 사역자건 메시야에 대한 생각도 없이 혹은 그들의 육적인 관심이 제시한 다른 기대를 가지고 직무를 수행했던 모든 사람들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첫째, 그들에게 주어진 성격을 살펴보자. 그들은 "도둑들"이고 "강도들"이다(8절). 시간적으로 말하면 "그에게 앞서 갔던 자들"중 많은 자들은 충실한 목격자들이었다. 그러나 자기들의 위임을 "미리 앞질렀고," 그가 보내기 전에 간 모든 자들(렘 23:21). 적 그리스도처럼 "자기 자신을 높이고," 그리스도보다 뛰어난 척한 모든 자들이 강도와 도둑이다(살후 2:4).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그리고 대제사장들, 심지어 내 앞에 왔던 많은 사람들까지 포함하며 나를 반대하는 편견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나의 권세를 애써 방해하고, 사람들의 마음속에 내가 들어 갈 자리를 남겨두지 않으려는 모든 사람들, 그들이야말로 도둑이요 강도들인 것이며, 그 정당한 주인을 속이면서 아무런 권한도 없이 사람들의 마음을 훔치고 잇다." 그들이 오히려 우리 주님을 도둑이요 강도로 저주했다. 왜냐하면 주님은 그들과 어떤 계약도 없었고, 그들을 문으로 삼아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반면에 그리스도는 그들이 자기로부터 위임을 받았어야 했고, 자기를 뒤따라야 했음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그를 뒤따르지 않고, 오히려 "앞서기" 때문에, "도둑들"이요 "강도들"이었다. 그들은 그의 제자들로서 오지 않았다. 따라서 횡령자로서 정죄받았고, 그들의 가장된 위임은 박탈되었다. 그리스도의 적들은 그의 교회의 강도이지만 스스로 목자들인 척하고. 더욱이 "목자들 중의 목자"인 체한다는 사실을 유의하라. 둘째, 그들로부터 양을 보호하기 위해 취해진 보호를 보자. "양은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참 경건의 향기를 지닌 신령하고 거룩한 자들, 하나님과 그 거룩성에 성실히 헌신했던 자들은 선조들의 전통을 인정할 수 없었고, 그들의 형식을 즐기지도 않았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그들의 선생으로부터 어떤 지시가 없는한 손을 닦지 않은 채 식사하거나 안식일에 밀을 따거나 하는 일에도 개의치 않았다. 왜냐하면 바리새주의 보다 참 기독교에 반대되는 것은 없었기 때문이며, 더구나 그들의 위선적인 예배보다 영혼을 더 진정으로 어둡게 만들어 버리는 것은 결코 없었기 때문이다. ② 그리스도는 "양"의 문이다(9절). 양처럼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디 에무’ - 즉 문으로써의 나를 통과하여) 양 우리로 들어오면 구원을 얻을 것이다." 그는 도둑으로부터 안전할 뿐만 아니라, 그가 들어오나 나가나 만족할 것이다. 첫째, 우리 안으로 들어오는 방법에 대한 분명한 방향이 제시되어 있다. 우리들은 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과하여"들어가야 한다. 하나님과 인간의 위대한 중재자이신 그에 대한 신앙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과의 계약 관계에 들어가고, 그와 교통하게 된다. 그리스도의 교회에로 들어가는 길 외에는 하나님의 교회로 들어갈 수 없다. 구주의 은혜와 통치에 기꺼이 복종하기를 원하는 자 외에는 사람들 중에 있는 하나님의 왕국의 일원으로 간주될 수 있는 자가 없다. 우리는 "신앙의 문"을 통하여 들어가야 한다(행 14:27). 왜냐하면 "무죄"의 문은 우리에게는 닫혀있고, 그 "길"은 통과할 수 없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창 3:24). 둘째, 이러한 명령을 준수하는 자들에게 대한 귀중한 약속들이 있다. a. 그들은 "이로부터 구원을 얻을 것이다." 이것이 "그들의 가정의 특권이다." 이러한 양들은 죄악에 대한 거룩한 정의의 심판에서 구원받을 것이고, 그들의 위대한 목자가 손해를 보상할 것이며, 으르렁대는 사자의 먹이가 되는 것으로부터 구원받게 되며, 그들은 "영원히 만족하게"될 것이다. b. 그러는 동안에 "그들은 들어오고 나가며 꼴을 발견한다." 이것이 그들의 "길"의 특권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은혜에 의해서 살아갈 것이고, 각자의 집에서 인간으로서 살게 될 것이며, 거기에서 "자유스러운 입장과 퇴장, 그리고 귀환"을 누리게 될 것이다. 참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편히 있다. 그들이 나가도 낯선 자처럼 쫓겨나지 않고 자유롭게 다시 들어온다. 그들이 들어올 때는 침입자처럼"들어와 갇히지" 않고 또 나갈 자유를 가진다. 그들은 아침에 들로 나가고 밤에 우리 안으로 들어온다. 어디서나 목자가 그들을 인도하고 지켜 준다. 어디서나 그들은 꼴을 발견한다. 들에서는 풀을 우리 안에서는 먹이를 얻는다.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그들은 대화할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고, 그 말씀에 의해서 그들의 영적인 생은 부양 받고 영양을 공급받게 되며, 그 말씀으로부터 그들의 귀중한 소맞이 이루어진다. 그들은 하나님의 집의 재물로 부요해진다. 2. 그리스도는 "목자"이다(11절 이하). 그는 구약 성서에도 하나의 "목자"로 예언되었다(사 40:11; 겔 34:23; 37:24; 슥 13:7). 신약 성서에서도 그는 "위대한 목자"(히 13:20), "목자장" 그리고 "우리 영혼의 목자요 감독"으로 이야기되고 있다(벧전 2:25). 하나님은 우리의 대 주인이요, 우리는 창조에 의해서 그 초장의 양이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그의 아들 예수를 우리의 "목자"로 보내셨다. 그리고 거듭거듭 그는 그 관계를 인정하셨다. 그는 선한 목자가 양떼를 다루는 것처럼 그의 교회와 신자들 모두를 보호하며, 목자들이 그들의 양떼들에게 기대하듯 교회와 온 신자들의 참여와 복종을 기대하신다. (1) 그리스도는 "문으로 들어오지 않았던" 도둑이 아니라, "목자"이다. 다음 사실을 유의하자. ① 도둑의 사악한 계획(10절). 도둑은 선한 목적으로 "들어오지 않으며." "훔치고 죽이고 파괴하려고" 온다. 첫째, 그들은 그리스도와 그의 목장으로부터 신자들의 마음과 애정을 "훔치고," 그들은 영적으로 "죽이고 파괴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몰래 가지고 들어오는" "이단설들"은 유해한 것이기 때문이다. 영혼의 기만자들은 영혼의 살인자들이다.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말로 성서를 보존함으로써 그것을 훔치는 자들은 그들을 "죽이고 파괴한다." 무지와 우상 숭배는 파괴적인 것들이다. 둘째, 그리스도의 양떼로부터 훔쳐내지 못할 자들은 박해하고 학살함으로써 몸을 "죽이고 파괴하려고" 한다. 도적 당하지 않을 자도 살해의 위험은 있는 것이다. ② 목자의 은혜로운 계획. 그가 오신다. 첫째, "양에게 생명을 주기 위하여다." 죽이고 멸망시키는 도둑의 계획(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계획이 없던)에 반대하여, 그리스도는 "내가 너희 가운데로 온다"고 말씀하셨다. 그 이유는 a. "그들로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다. 그는 무리들, 곧 교회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 왔다. 교회는 지금까지 양떼로 뒤덮인 초장과 같다기보다는 오히려 마른 뼈들이 가득 찬 골짜기같이 보였었다. 그리스도는 거룩한 진리를 변호하고 거룩한 계율들을 깨끗하게 하고 불평의 원인을 제거하고 없어진 열심을 일깨우며, 그의 무리 중 잃어버린 자들을 찾고, "상한 자들을 감싸주기 위해서"(겔 34:16) 오셨다. 그리고 이것은 죽은 자에게 대한 생명과 같은 것이다. 그는 모든 것을 내포하고 있으며, 위협적인 죽음의 반대이다(창 2:17). 우리는 용서받은 범죄자처럼, 치유된 병자처럼, 부활한 죽은 자처럼, "생명을 가지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의롭게 되고, 성화 되고, 결국 영화롭게 될 것이다. b. 그들로 "생명을 보다 풍성히" 누리게 하기 위해서다. 본문은 비교급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죄로 말미암아 박탈당한 생명보다 훨씬 "더 풍부한," 그리고 모세의 율법에 의해 약속되었던 생명보다 "더 풍부한," 그리고 우리가 "묻거나 생각할 수"있는 것보다 휠씬 더 풍성한 생명을 얻게 되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풍성히 갖게 되리라"라고 원급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리스도는 생명과 ‘테릿손’-즉 보다 많은 무엇, 보다 "나은" 무엇, 곧 유익한 삶을 주기 위해 오셨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살 수 있을 뿐 아니라 그것도 편안하게 풍성하게 기쁘게 살 수 있다. 풍부한 생은 "영원한 생명"이요, 죽음이나 죽음의 공포가 없는 생명이요, 훨씬 "더 알찬" 생명이다. 둘째, "양들을 위해 자기의 생명을 바치기 위해" 오셨다. 그가 "그들에게" 생명을 주기 위함이다(11절). "선한 목자는 자기의 생명을 양을 위해 바친다." a. 양을 위해 자기의 생명을 내놓는 것이 모든 선한 목자들의 특성이다. 야곱이 그가 피곤을 무릅쓰고 양들에게로 갔을 때 그러했다(창 31:40). 다윗이 "사자와 곰을 죽였을"때 그러했다. 성 바울도 그랬다. 그러나 b. 그의 무리를 보호하고 침입을 막기 위해 자기의 생명을 내어주고, 자기 피를 흘려 깨끗하게 하고 잘못을 보상하는 것은 위대한 목자의 특권이었다. (2) 그리스도는 삯군이 아니라 "선한 목자"이다. 양을 죽이고 짓밟으려는 것을 목적하고 있는 도둑들은 아니지만, 보통 목자로 통하나 의무를 담당하는데 부주의한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의 무관심 때문에 많은 양떼들이 해를 입었다. "어리석은 모자들," 게으른 목자들"이다(슥 11:15, 17). 이런 것에 반대하여 ① 그리스도는 "자기를 선한 목자로 부르고" 있다(11절). 그리고 다시 14절에서 ‘호 포이멘 호 칼로스’ - 즉 목자, 곧 선한 목자,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목자라 부르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목자들 중 최고이며, 영혼의 통찰력을 지니는데 있어서 세상에서 제일이며 그처럼 기술적이고 그처럼 신앙적인이며, 그처럼 부드러운 자는 아무도 없다. 그가 했던 것처럼 공급해 주고, 인도해 주고, 영혼을 보호해 주고, 고쳐 주는 자는 아무도 없음을 유의하라. ② 그는 모듬 삯군과는 달리 "신실하다"(12-14절). 거기서 다음을 생각해 보자. 첫째, 충성스럽지 못한 목자의 부주의성(12,13절). 삯군, 종으로 고용되어 그 노력의 대가를 받는 자, 곧 "자기 양이 없는 자," 양으로 인해서는 이득도 손실도 없는 자라 늑대가 오고 있거나 다른 위협적인 것이 오는 것을 보면 그 늑대에게 양을 맡기고 달아난다. 왜냐하면 실제로 그는 "그들을 돌보지"않기 때문이다. 여기에 거짓 목자의 태도에 대한 분명한 구절이 있다(슥 11:17). 악한 목자들 곧 악한 정치인과 성직자들의 나쁜 원칙과 나쁜 행위가 묘사되고 있다. a. 그들의 "나쁜 원칙들." 곧 그들의 나쁜 행위들의 근원이다. 조용한 시간에는 생각지도 않다가 시련의 시기에는 왜 영혼을 담당한 자들이 임무를 저버릴까? 그들을 거짓되게 그리고 이기적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a) 그것은 그들이"삯군"이요 "양을 염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목자의 임무를 그리스도를 섬기고 선행하기 위한 기회로써가 아니라 살기 위한 방편 및 부유해지려는 수단으로 맡았다. 그들을 이끄는 것은 돈에 대한, 그리고 그들 자신의 배에 대한 사랑이다. "제단에서 일하며 거기서 나오는 것으로 먹고사는 자들"이 삯군인 것은 아니다. 일군은 음식을 먹을 자격이 있다. 그리고 미천한 생계는 그 맡아 하는 일까지 미천하게 만들게 된다. 일보다도 임금을 더 사랑하는 자들이 바로 "삯군"이다(신 24:15; 삼상 2:29; 사 56:11; 미 3:5, 11 등을 보라). (b) 그들은 일에 별로 관심이 없다. 그들은 "양을 중히 여기지 않는다." 즉 타인의 영혼에 관심이 없다. 그들의 임무는 그들 형제의 보호자요 협조자가 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 형제들의 주인이 되려는 데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일만 추구하고 있다. 그리고 디모데와 같이 "영혼들의 상태를 자상히 보호하려"하지 않는다. 그들이 늑대가 올 때 달아나리라는 것 외에 기대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그는 "양들을 염려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양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어느 점에서 보면, 하급 목자들은 어떤 경우라도 "자신의 양을 갖고 있지 않으며" 양에 대해 지배권과 재산권도 갖고 있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내 양을, 내 어린양들을 먹이라"고 그리스도는 말씀하셨다). 그러나 정성과 사랑의 관점에서 보면, 하급 목자들은 양들을 "자기들 양"으로 여겨야 한다. 바울은 그가 "사랑하는 자들 또는 바라던 자들"을 자신의 사람들로 간주하였다. 교회의 관심을 진심으로 지지하지 않는 자, 그것들을 그들 자신의 것으로 간주하지 않는 자들의 충성은 오래 가지 못할 것이다. b. 그들의 "나쁜 행실." 이것은 나쁜 원칙들의 결과이다(12절). (a) 삯군이 늑대가 오는 것을 볼 때, 그가 근본적으로 자기의 임무를 어떻게 버리는가 보라. 거기서 그를 가장 필요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양을 버리고 달아나고 있다. 임무보다 자신들의 안전을 더 신경 쓰는 자들은 사탄의 유혹에 쉽게 먹이가 된다. (b) 그 결과는 얼마나 치명적인가! 삯군은 양들이 스스로 잘 처신하겠지 생각하나, 사정은 그렇게 되지 않는다. "늑대가 그들을 잡고," "양들을 흩는다." 끔찍한 살상이 무리들 가운데 자행된다. 이 모든 것은 신뢰할 수 없는 목자에게 모두 책임이 있다. 죽어 가는 영혼들의 피는 부주의한 목자의 손에서 찾아야 한다. 둘째, 여기서 선한 목자의 은혜와 부드러움이 예언된 대로(겔 34:21, 22 등) 전자에 반대하여 놓여져 있음을 보라. "나는 선한 목자다." 이것은 교회와 교회의 모든 권속들에 대한 위안의 말이다. 그러나 교회는 삯군의 사기와 계약 파기 때문에 해를 입고 위험에 직면하게 될지도 모른다. 주 예수는 언제나 선한 목자이다. 목자의 선함에 대한 두 가지 중요한 예들이 여기에 있다. a. 자기 양떼 및 거기에 속한 모든 것을 "잘 아신다." (a) 그는 선한 목자처럼(3,4절) "현재 그의 양떼들을" 잘 알고 있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그리스도와 참 신자들 사이에는 상호 사귐이 있고 서로 잘 알고 있다. 앎은 사랑을 뜻한다. [a] 그리스도는 "그의 양들을 안다." 그는 "분별하는" 안목으로 누가 그의 양들이고 누가 아닌가를 알고 있다. 그는 많은 약점을 가지고 있는 양들과 그럴 듯한 위장을 하고 있는 염소들을 알고 있다. 그는 "친근한" 눈으로 실제로 그 자신의 양떼들인 자들을 알고 잇다. 그는 그들의 상태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고, 그들은 위해 자신을 관계시키고 그들을 향한 부드러움과 애정을 지니고 그들을 중재하면서 끊임없이 그들을 생각한다. 그는 그들을 성령으로 내방하며 그들과 교제를 한다. 그는 그들을 "알고 있다." 곧 그는 그들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시 1:6; 37:18; 출 33:17), [b] 그는 "그들을 알고 잇다." 그는 우호의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그리고 그들은 그를 신앙의 눈으로 바라본다. 그리스도가 양을 아는 것이 그들이 그를 아는 것보다 앞서 놓여 있다. 왜냐하면 그가 우리를 먼저 알았고 사랑했기 때문이다(요일 4:19). 그리고 우리의 행복은 우리가 그를 아는 것이라기 보다는 그가 우리를 아시는 것이다(갈 4:9). 그러나 "그들이 그를 알고 있다"는 점이 그리스도의 양들의 특성이다. 그들은 그를 모든 위선자들과 침입자와 구별하여 알고 있다. 그들은 그의 마음을 알고 있고, 그의 음성을 알고 있고, 그의 죽음의 위력을 경험함으로써 모두를 알고 있다. 그리스도는 마치 여기서 그가 자기 양떼들에게 알려주는 것이 영광이라도 되며, 그들의 존경이 자기에게 명예를 준다는 식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이 때를 즈음하여 그리스도는 아버지와 자신의 상호인지를 언급하고 있다(15절). "아버지께서 나를 아신 것처럼 나도 아버지를 안다." 이것은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 있다. 첫째, 그리스도와 신자들 사이를 유지시켜 주는 친밀한 사귐과 관계의 근거이다. 이 관계의 결속끈인 은혜의 계약이 아버지와 아들사이의 구 속의 계약 속에 터를 닦고 있다. 왜냐하면 아버지와 아들은 그 문제에 있어서 서로 완전히 잘 이해하고, 거기에는 어떤 불확실성이나 위험을 초래할 만한 실수라는 것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주 예수는 "그가 선택한 자들을 알고 있고"(8:18) 그들은 "자기들이 믿는 자를 알고 있다"(딤후 1:12). 그 모든 것의 근거는 아버지와 아들이 "화평의 계약을 맺을 때" 서로의 마음에 지니고 있는 완전한 지식인 것이다. 둘째, 그리스도와 신자들 사이에 있는 친밀성울 보여 주고 있는 하나의 비유라고 볼 수도 있다. 따라서 그것은 그 앞의 말과 관계될 수 있다. 곧 "아버지가 나를 알고 또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처럼,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또 양들이 나를 안다." 17장 21장과 비교하라. 아들이 "양처럼 도살자에게 인도될"때도 아버지가 그를 알았고 사랑했고, 고통 중에도 그를 인정했던 것처럼, 그리스도도 그들이 "홀로 있을 때," 그들을 부드러운 눈으로 지켜보면서 그들과 함께 있게 될 것이다. 또 아들이 아버지를 알았고 그를 사랑했고 복종했으며, 아버지가 그를 저버린 것같이 보였을 때조차도 그를 자기의 하나님으로 확신하면서 언제나 아버지를 기쁘게 했던 것처럼, 믿는 자들도 복종적이고 굳은 신앙의 생각을 가지고서 그를 알고 있다. (b) 그는 "앞으로 그의 양떼에 속할 자들도 알고 있다(10절)."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을 내가 가지고 있다." "내게는 다른 양들이 있다." "그들도 역시 내가 인도하리라." 다음을 살펴보자. [a] 그리스도는 가련한 이방인들을 주목하셨다. 그는 때로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들"을 향한 그의 특별한 관심을 표명했었다. 사실 그 자신의 선교는 그들에게 한정되었다. 그러나 "나는 다른 양들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였다. 시간이 흘러 그리스도를 믿게 될 자들, 그리고 이방인들 가운데서 그에게 복종할 자들도 여기서 "양"으로 불리워지고 있다. 그들이 아직 "부름을 받지 않았고," 그들 중 대부분이 "태어나지도 않았으나" 그들은 하나님에게 선택되었고 영원부터 거룩한 사랑 속에서 그리스도에게 주어졌기 때문에, 그는 그들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그 자신의 구입에 의해 아직 소유하지 못한 많은 영혼에 대해서는 권리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아직 그들이 사악한 상태로 있었지만 그는 고린도에 "많은 사람들"을 가졌다(행 18:10). "나는 다른 양들을 가지고 있다"고 그리스도는 말씀하신다. "나는 그들을, 나의 심정을 다해 가지고 있고, 나의 눈 속에 그들을 가지고 있고, 마치 내가 이미 그들을 소유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리스도는 "다른 양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첫째, "작은 무리들"만 가지고 있다는 경멸을 제기하기 위해서다. "선한" 목자가 아직은 "가난한"목자이다.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고 있는 것보다 더욱 많은 양들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둘째, 유대인들이 자기들에게서만 메시야가 양을 모으게 된다고 생각한 그 자존심과 공허한 자랑을 꺾어버리기 위해서이다. "아니다. 너희들은 그들을 너희 양떼의 개들과 함께 두는 것도 거절하지만 나의 양떼의 어린양들과 함께 둘 다른 양들이 있다"고 그리스도는 말하고 있다. [b] 그들에 관한 그의 은혜의 목적과 결의. "나는 그들 역시 인도해야 한다. 하나님의 집으로, 교회 안으로 그리고 이것은 위해 잃어버린 양처럼 그리고 그들의 방황에서부터 되돌이켜야 한다"(눅 15:5). 그러나 왜 그가 그들을 인도 "해야"하는가? 그 필요성은 무엇인가? 첫째, "그들의 처지의 필요성"이 그것을 요구했다. "나는 데려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끝없이 방황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양과 같이, 그들은 결코 그들 스스로 되돌아오지 못할 뿐 아니라, 아무도 그들을 데리고 올 수도 또 데리고 오려 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둘째, 그들 자신에 대한 "그 자신의 계약의 필요성"이 그것을 요구했다. 그는 그들을 데려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자기의 생각이나 계획에 충성스럽지도 진실하지도 못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나의 것이고, 내가 데려 왔고, 내가 값을 지불했다. 따라서 나는 그들을 무시하지도 그들이 멸망하도록 버려 두지도 아니한다." 그는 그를 믿었던 자들을 자기의 명예를 걸고 데려가야 한다." [c] 다음 두 가지가 그 행복한 효과와 결과이다. 첫째, "그들은 나의 목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나의 목소리가 그들 가운데 들리게 될 뿐만 아니라(그들이 듣지 못했고, 그래서 믿지 못했지만, 앞으로 복음의 소리가 지상 끝까지 울려 퍼질 것이다) 그 소리가 그들에게 들리게 될 것이다. 나는 말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듣도록 하리라." 신앙은 들음을 통해서 온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목소리에 대한 우리의 근면한 준수는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그리고 그를 통해 하나님에게로 나아가게 되는 수단과 증거인 것이다. 둘째, "한 우리와 한 목자가 있을 것이다." 한 명의 목자가 있듯이, 우리도 하나니라. 그리스도의 신앙에로 되돌아오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은, 모두가 하나의 교회로 통합될 것이고, 차별 없이 특권을 나누어 갖게 될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될 것이다. 두 지팡이들이 주님의 손 속에서 하나가 된다. 한 명의 목자는 하나의 우리를 만들고, 한 분 그리스도는 한 교회를 만든다는 사실을 유의하라. 교회가 그 구성에 있어서 하나인, 한 머리에 복종하고 성령에 의해 생명이 불어넣어지고 하나의 법칙에 의해 인도되는 것같이, 교회의 구성원들도 사랑과 애정 속에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엡 4:3-6). b. 그리스도가 "그의 양들을 위해 자신을 바치심"이 그가 선한 목자라는 또 다른 증거이며, 여기서 그는 "그의 사랑을 더욱"드러내신다(15, 17, 18절). (a) 그는 "그의 무리를 위해 죽는" 것이 목적이라고 선언한다(15절). "나는 양떼를 위해 나의 생명을 버리노라." 그는 자기의 생명을 그들을 위해 모험에 걸뿐만 아니라(이 경우에는 목숨을 "구하려는" 소망이 그것을 "잃는 데"서 오는 "공포를 상쇄할 것이다") 생명을 실제적으로 "버렸고," 우리를 구하기 위해 죽음의 필연성에 복종하였다. ‘티데미’(5087) - 즉 하나의 저당물, 혹은 담보물로 "내가 그것을 네 놓았다." 구입자가 지불한 돈과 같은 것이다. 도살되도록 지명된, 희생되도록 준비된 양이 목자의 피로 대속된 것이다. 그는 착한 양들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그들을 대신해서 그의 생명을 버렸다. 수많은 양들이 속죄의 제물이 되어 그들의 목자들을 위하여 희생 제물로 바쳐져 왔다. 그러나 놀랍게도 거꾸로 목자가 양들을 위해 희생되고 있다. 이스라엘의 목자, 다윗이 죄를 졌을 때 파괴적인 천사가 양떼들에게 검을 휘둘렀다. 그때 다윗은, "이 양들이 무슨 나쁜 짓을 하였습니까? 차라리 나를 치소서"하고 간청하였다(삼하 24:17).그리고 다윗의 자손 예수는 죄가 없고 흠이 없었다. 반면에 그의 양떼들이 나쁜 일을 했다. 그런데도 예수는"당신의 손으로 나를 치소서"하고 말씀하신다. 그리스도는 여기서 스가랴 13장 7절를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칼아, 깨어서 나의 목자를 치라." 목자를 치는 것이 현재로서는 양떼를 "흐트러뜨리기" 위한 것이나, 결국은 그들을 모으기 위한 것이었다. (b) 그는 다음 네 가지 면으로, 많은 사람에게 걸림돌이 되고 있는 십자가의 혐오성을 벗겨 버리신다. [a] "양떼들을 위해 그가 생명을 내어놓음"은 그가 존귀를 받게 되는 조건이요 과정이었다(17절). "내가 내 생명을 버리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다. 이런 조건으로 중재자인 나는 아버지의 용납과 인정과 영광을 받게 되리라. 즉 내가 선택된 남은 자를 위한 회생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외아들로서 그가 영원부터 아버지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신인(神人)으로, "임마누엘"로서 그가 "양들을 위해 죽기" " 때문에" 그는 아버지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따라서" 하나님은 선택된 그를 기뻐하셨다. 이 일에 대해서는 그가 하나님의 "충실한 종"이었기 때문이다(사 42:1). 따라서 하나님은 말씀하셨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우리를 사랑했기 때문에 아들을 더욱 사랑하시니,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얼마나 큰가? 양떼들을 위해 자기의 생명을 버려야 하는 하나님의 뜻에 자기 자신을 복종시켰으니, 아버지의 사랑을 얼마나 귀중하게 보았는가! 그는 하나님의 사랑이 그의 모든 봉사와 고통을 보상해 준다고 생각했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그것이 우리를 위해서 너무 적다고 생각할 것인가? "아버지께서 나를" 곧 나와 모두를 "사랑 하셨다." 즉 신앙으로 나와 하나가 된 모든 사람을 사랑하셨다. [b] 그가 자기의 생명을 버림은 그것을 다시 받기 위해서였다. "나는 생명을 버리노라. 그것을 다시 얻기 위해서." 첫째, 이것이 아버지의 사랑의 효과였고, 그의 승귀의 첫 단계이며, 사랑의 결실이다. 그는 하나님의 "거룩한 자"이기 때문에, "썩음을 보지" 않아야 한다(시 16:10). 하나님은 그를 너무 사랑하셨기에 그를 무덤에 남겨둘 수 없었다. 둘째, 그는 자기의 부활에 의해서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자신을 힘있게 선언할 기회를 가지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그의 생명 포기에서 염두에 두었었다(롬 1:4). 하나님의 전략으로(아이왕 앞에선 여호수와 같이. 수 8:15), 그는 마치 죽음 앞에서 매맞은 사람처럼 죽음에 굴복했다. 그러나 그것은 보다 영광스럽게 죽음을 정복하고 무덤을 승리하기 위해서다. 그는 "치욕의" 몸을 내던졌다. 마치 하나의 밀알처럼(12:24) 이 세상에 맞는 생명을 포기하여, 저 세상에 맞는 생명을 입으시는 것이다. [c] 그는 그의 고난과 죽음을 완전히 자원하였다(18절). "아무도 내 뜻 없이는 나의 목숨을 빼앗아가지 못하고, 또 그럴 수도 없다 그러나 나는 내 생명을 자유로이 포기하는 것이다. 나는 내 자신의 행동과 행위로써 바친다. 왜냐하면 나는 그것을 버릴 권세와 다시 얻을 권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무도 못가진 권세이다. 첫째, 여기서 생명의 주님, 특별히 그 자신의 생명의 주(主)로서의 그리스도의 권능을 본다. 그는 모든 세상과 맞서 "자기의 생명을 지킬"권능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생명은 그 자신의 동의 없이는 빼앗아 갈 수 없었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폭풍으로 빼앗긴 것처럼 보였을 때도 실제로는 보존되었다. 그것은 침해되지 않았고 결코 빼앗기지 않는다. 주 예수는 피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의 박해자들의 손으로 넘겨진 것이 아니라, 그의 시간이 다가왔기 때문에 그들의 손에 자신을 맡겼던 것이다. "아무도 나의 생명을 빼앗아 갈 수 없다." 이것은 가장 용감한 영웅에게도 결코 주어지지 않았던 하나의 도전이었다. 또 그는 그의 생명을 버릴 권세를 갖고 있었다. 그는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그가 원하면 영혼과 육체 사이의 결합을 풀 수 있었고, 아무런 강압이 없이도 영혼과 몸을 서로 갈라놓을 수 있었다. 몸을 자발적으로 취한 그는, 그것을 자발적으로 다시 버릴 수 있었다. 이것은 그가 큰 소리로 외쳤을 때 나타났다. 또 그는 그것을 할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우리가 잔인한 수단, 곧 그것으로 우리 자신의 생명을 끝낼 수단을 발견할 수 있다 해도, "우리는 합법적으로 행할 수 있을 때만 그렇게 할 수 있다." 우리는 생명을 포기할 자유가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 자신의 생명을 포기할 권한을 가졌다. 그는 (우리가 그렇듯이) 생명이나 죽음에 대한 채무자가 아니라 완전히 그것들을 넘어섰다. 그는 "생명을 다시 가질" 권세를 가졌다. 우리은 그렇지 못하다. 한 번 버려진 우리의 생명은 "땅에 엎어진 물과도" 같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생명을 버리고도 다시 회복할 수 있다. 둘째, 여기서 그리스도의 은혜를 본다. 아무도 법률에 의해 그의 생명을 요구할 수 없고, 그 생명을 강제로 빼앗을 수도 없었다. 그래서 우리의 구속을 위해 "스스로 생명을 내놓았다." 그래서 구주가 되셨다. "보라, 내가 여기 있다." 그리고 우리의 사정이 또한 그것을 요구한다. 그가 그를 희생 제물로 바쳐야 한다. "여기에 내가 있다. 이들을 보내라. 이 뜻을 따라 우리가 거룩하게 되었다"(히 10:10). 그는 제사를 드리는 자요, 도시에 제물이었기에, 그 자신을 바쳤다. [d] 그는 아버지의 생명과 약속을 표현하기 위해 이 모두를 행하였다. "이 계명을 내가 내 아버지로부터 받았다." 이에 대한 그의 결의는 단호하다. 그런데 그것은 그의 자발적인 실행보다 앞서, 하나님이 필수적이게끔 만들어 놓은 그러한 계명이 아니다. 이것은 중재의 율법이며, 하나님이 "그의 마음에 새겨 두신" 것이다. 따라서 그는 그것을 "즐거이" 행한다(시 40:8). ============= [시25:14]여호와의 친밀하심((소드))이 그를 경외하는**야레)) 자들에게 있음이여 그의 언약((베리트))을 그들에게 보이시리로다((야다)) ============ d/s(5475, 소드) 의논, 협의, 조언, 집회 소드(명남)는 본래 '확신의 말'을 의미하며(참조: '은밀히 말하다'를 의미하는 아랍어 사와다), 여기서 '의논, 협의' counsel이란 의미가 되었으며, '권고, 조언, 집회, 모임'이란 의미도 가진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21회 나온다. 소드는 지혜 있는 '의논'이 성공에 이르는 열쇠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의논이 없으면 경영이 파하고 모사가 많으면 경영이 성립하느니라"(잠 15:22). 소드는 충고를 하는 신실한 친구들의 일단을 뜻하는 데까지 그 의미가 확장된다(시 55:14, H15, 시 83:3, H4). 희망을 가지고서 이러한 친구들은 결코 어떤 사람과 맞서거나(욥 19:19) 비밀을 누설하지 않는다(잠 11:13, 잠 20:19, 잠 25:9). 여호와를 경외하며 행하는 지혜 있는 정직한 사람은 하나님의 은밀한 조언을 받을 것이다(시 25:14, 잠 3:32, 암 3:7, 참조: 욥 15:8, 욥 29:4). 이러한 사람은 역시 하나님을 경외하고(시 89:7) 그를 찬미하는(시 111:1) 다른 사람들과 교제할 것이다. 이러한 사람은 행악자들과 절교할 것이며(창 49:6, 렘 15:17), 저들의 악한 책략에서 구원하여 주시기를 기도할 것이다(시 64:2, H3). 하나님은 친히 사악한 회의를 반대하실 것이며(렘 23:18-22), 그 회원들 위에 그의 진노를 쏟으사(렘 6:11) 저들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게 하실 것이다(겔 13:9).(참조: D. W. THOMAS; BDB). ================== arey:(3373, 야레) 경외하는 (자), 두려워하는 (자) 야례(형용사)는 야레(arey: , 3372: 두려워하다, 경외하다)에서 유래했으며, '두려워하는, 경외하는'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46회 나오며, 명사적 의미와 형용사적 의미로 사용되었다. '두려워하는 자, 경외하는 자'라는 표현이 자주 나타난다.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자'는 실제적인 의나 경건을 자기의 두려움을 이행할 것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로서 욥은 악을 피한다: "우스 땅에 욥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욥 1:1). 시 128:1에서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는 여호와의 길로 나아간다.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메시지에 응답함으로써 자기의 특별한 경건을 입증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는 악한 자와 대조된다(전 8:13). 하나님의 선하심(시 31:19), 필요한 것의 조달(시 34:9), 보호(시 33:18, 시 33:19), 보호하시는 자비(시 103:11) 소원을 이루어 주신다는 약속(시 145:19)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들에게 제공된다. 야레의 흥미있는 용법은 시 22편에서 발견된다. 여기에서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너희여"라는 어구는 한편으로는 '야곱의 자손' 및 '이스라엘의 자손'과 병행되며(시 22:23), 다른 한편으로는 "대회"(시 22:25)와 병행된다. 이 병행구들, 특히 그 중에서도 마지막 병행구는 이 용어가 예배 드리기 위해 모인 예배 회중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이 용법의 가능한 두 개의 다른 실례들도 발견된다(시 115:11, 시 115:13, 시 118:4).야레는 또한 두려움의 감정이나 악에 대한 예상을 나타낸다(출 9:20, 신 20:8, 삿 7:3).(참조: A. BOWLING; BDB). ====================== tyriB](1285, 베리트) 언약, 계약, 협정 베리트(명여)는 '언약, 계약, 조약, 협정, 법령, 서약, 동맹'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280회 이상 나온다. (a) 베리트는 다양한 종류의 협약을 뜻하는 일반적 구약성경 용어이다. 이러한 협약들에는 다음과 같은 의미들이 포함된다. 법적 효력이 있는 것으로 간주되는(삼상 20:8) 두 친구 간의 계약(삼상 18:3) 자신들의 권익 범위(창 21:22 이하, 창 26:26 이하, 왕상 5:12, MT 5:26), 또는 화평 조건을(왕상 20:34) 정하는 두 주권자 간의 계약, 그 백성들까지도 포함하는 두 왕 사이의 계약, 두 부족이 언약을 맺기도 하였다(수 15:9). 이 단어는 이스라엘과 그 종들 사이의 계약에 대해서도 사용된다(렘 38:8 이하).(역자주. 이 히브리어의 본래 의미는 그것이 왕과 종의 소유자들 간의 계약이었다는 것이다). 왕이 자신의 신하들과 계약을 맺을 때(왕하 11:4[역자주. 이 계약은 아마도 여호야다와 호위병 사이의 개인적 협약이었을 것이다]), 또는 계약에 의해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신하가 되었을 때(삼상 11:1) 그 상황은 약간 달랐다. 아브넬이 다윗과 맺은 계약은(삼하 3:12 이하) 아브넬 뿐만 아니라 온 이스라엘도 다윗의 백성으로 만들고자 하는 것이었다(삼하 3:21).(J. Guhrt) 국가간의, 혹은 개인간의 조약이나 협정으로서의 언약은 쌍방이 평등한가 아니면 한쪽이 다른 쪽보다 우월한가를 근거로 하여 이해되어야 한다. 창 14:13에서 아브라함과 아모리인들은 평등하게 조약을 체결하였지만, (여호수아 통치 하의) 이스라엘과 기브온인들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다(수 9장). 여기에서는 언약의 맹세적인 면이 가장 중요한 것으로 제시된다. 비록 기브온의 종자들이 거짓말한데 대한 벌을 받긴 했지만(수 9:22-23),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은 그들을 보호해 주어야할 의무를 여전히 지고있었다. 훨씬 후에, 사울이 맹세한 언약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을 때, 그의 가족들은 벌을 받았다(삼하 21장). 두 집안이나 국가들 사이에 조약이 체결되었다는 표로써, 스텔라(돌)를 세우는 것은 일반적인 관례였다(참조: 야곱과 라반, 창 31:44-47). 양측은 모두 이 언약이 변경될 수 없음을 나타내주는 증인으로 하나님을 끌어들인다. 더구나 시나이 언약의 경우에서처럼, 야곱과 라반은 산에서 희생 제사를 드렸고 공동식사를 나누었다(창 31:54-55). 이런 조약을 보증해 주는 다른 표시들로, 예를들면 두 왕족 사이의 결혼 같은 것이 있다(왕상 9:16). 그렇지만 언약의 말, 즉 약속과 규정의 형태로 되어있는 이 말들을 철자화하고, 증언하고 서명하고 봉인한 기록 문서가 언약 체결에서 가장 중요한 도구이었다. 이런 언약 문서들은 많이 있다(참조: D. R. Hillers, Covenant: The History of a Biblical Idea, Baltimore, 1969). 베흠(Behm)은 '법적으로 보증된 평화나 개인적인 충성에 대한 보증으로서 언약보다 더 확고하게 보증해주는 것은 없다'고 결론 짓는다(TDNT, Ⅱ, 115, 참조: 암 1:9). 혈연을 제외하고는, 언약이 고대 세계의 백성들이 서로간에 보다 넓은 관계를 이루는 길이었다(Treaty and Covenant, D. J. McCarthy, Rome, 1963, 175). 다윗과 요나단의 관계에 관한 기록들은 구약성경에서의 두 개인들 사이의 맹약에 대한 아주 분명한 언급이다(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