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편 88편 ..고라 자손의 찬송 시 곧 에스라인 헤만의 마스길, 영장으로 마할랏르안놋에 맞춘 노래
**고통의멍에벗으려고272..변찮는주님의사랑과270..내가깊은곳에서363..어두운내눈밝히사366..죄짐맡은우리구주369..주없이살수없네292..저높은곳을향하여491...나의갈길다가도록384..나의생명되신주380..겸손히주를섬길때212..슬픈마음있는사람91..갈보리산위에150..주달려죽은십자가149..주님의마음을본받는자455..주없이살수없네292..오예수님이제옵니다..보혈을지나..내게로부터눈을들어(시선)..주님과같이..세상을구원하기위해..따스한성령님..주나의모습보네..하나님의음성을..예수의이름으로..세상의유혹시험이..보라너희는두려워말고.
....특정한 죄악과 허물로 인함인가, 아니면 죄성/육신 다루심의 어둔밤인가...어둔밤의 체험의 극단이 바로 JC십자가죽으심임을 기억. Don't ask Why, but Trust Me only!!..오직JC/HS만 남기까지 ....지고지선진복의 Q자신 주시려고 모든 자행자제함 , 곧 육신의 정욕(오감중독과 게으름)-안목의정욕(탐심)-이생의자랑(교만)을 벗기시려는 주님을 앙망함. ....욥과 요나의 체험을 넘어서서 (진멸-축출-제거되어야 할 옛자아죽음-베일 벗은 참자아의 생명으로 JC와 연합함, 곧 ) JC의 십자가죽음안으로 인도하심 ....토하여 내치심이 아니라 주님 장중에, 주님품에, 그 깊은 절대적지고지선의 마음, 그 자궁안에서 들어감의 체험 : 옛자아의 맹목적 자기사랑-이기심-자기자랑/의/주장/애착/연민/자산(치장과 소유)등 모든 친숙함에서 벗어나고 벗김-사름-눌림-압출로 옛자아와 육신(죄성)이 제거되어야 순결한 영적 참자아의 새로운 생명차원으로 들어가게 됨 ....JC보혈/이끄시는HS을 절대신뢰-절대기쁨-절대긍정으로 주께 삼켜지며 연합하라(시131), 견인을 이루라...주안에서 분해되어 주님의 것 됨을 소망하며 기뻐하라..절대적 사랑과 공의, 좌행참 이루리.(롬5, 롬8장 묵상하라)..I'm Nothing in myself, but I'm everything in Christ...야다-에쉐르-베라카-마카리오스 !!..주를 아는가 : 길진리생명빛 ....인자구주 JC의 인격 : 그 복되심의 실제 = 팔복/YHWH의 선하심-인자하심-진실하심(출34:6-7..자비-은혜-오래참으심-인자긍휼-진실무망) = 9가지 성령열매(사랑-희락-화평-오래참음-자비-양선-충성-온유/겸손/친절-절제 + 자선구제/십자가의 대속적 희생제물로 내어줌
....기억하라!!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으심과 부활 승천하신 JC께서 이미 이루신 바 [모든 죄짐 맡아주심으로 내주하사 결코 떠나지도 버리지도 않는 임마누엘성령으로 오셔서 동행-동거-동주하고 계시다] 대속의 죽으심, 부활승천 그 전에 이미 항상 기도하고 결코 낙심하지 말것을 가르치셨음을 잊지말라..오직 주만 앙망하며 기도함안에서 하나되사 도우시는 주성령님을 너의 누림 삼으라...포기할 줄 모르는 말씀 묵상과 기도, 그 극상의 예배드림 통해 주님 얻고 그안에서 발견됨은 그 어떤 절망고독단절, 공황마비감과 끊어짐의 느낌이라도 극복하고도 남는 치유와 회복, JC형상 빼어닮음, 자기를 내어줌에 이르게 이르게 하리라!!
*1.여호와 내 구원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야로 주 앞에서 부르짖었사오니 *2.나의 기도가 주 앞에 이르게 하시며 나의 부르짖음에 주의 귀를 기울여 주소서 *3.무릇 나의 영혼에는 재난이 가득하며 나의 생명은 스올에 가까웠사오니 *4.나는 무덤에 내려가는 자 같이 인정되고 힘없는 용사와 같으며 *5.죽은 자 중에 던져진 바 되었으며 죽임을 당하여 무덤에 누운 자 같으니이다 주께서 그들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시니 그들은 주의 손에서 끊어진 자니이다 *6.주께서 나를 깊은 웅덩이와 어둡고 음침한 곳에 두셨사오며 *7.주의 노가 나를 심히 누르시고 주의 모든 파도가 나를 괴롭게 하셨나이다 (셀라) *8.주께서 내가 아는 자를 내게서 멀리 떠나게 하시고 나를 그들에게 가증한 것이 되게 하셨사오니 나는 갇혀서 나갈 수 없게 되었나이다 *9.곤란으로 말미암아 내 눈이 쇠하였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매일 주를 부르며 주를 향하여 나의 두 손을 들었나이다 *10.주께서 죽은 자에게 기이한 일을 보이시겠나이까 유령들이 일어나 주를 찬송하리이까 (셀라) *11.주의 인자하심을 무덤에서, 주의 성실하심을 멸망 중에서 선포할 수 있으리이까 *12.흑암 중에서 주의 기적과 잊음의 땅에서 주의 공의를 알 수 있으리이까 *13.여호와여 오직 내가 주께 부르짖었사오니 아침에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이르리이다 *14.여호와여 어찌하여 나의 영혼을 버리시며 어찌하여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시나이까 *15.내가 어릴 적부터 고난을 당하여 죽게 되었사오며 주께서 두렵게 하실 때에 당황하였나이다 *16.주의 진노가 내게 넘치고 주의 두려움이 나를 끊었나이다 *17.이런 일이 물 같이 종일 나를 에우며 함께 나를 둘러쌌나이다 *18.주는 내게서 사랑하는 자와 친구를 멀리 떠나게 하시며 내가 아는 자를 흑암에 두셨나이다 -------------- *1.O LORD, the God of my salvation, I have cried out by day and in the night before You. *2.Let my prayer come before You; Incline Your ear to my cry! *3.For my soul has had enough troubles, And my life has drawn near to Sheol. *4.I am reckoned among those who go down to the pit; I have become like a man without strength, *5.Forsaken among the dead, Like the slain who lie in the grave, Whom You remember no more, And they are cut off from Your hand. *6.You have put me in the lowest pit, In dark places, in the depths. *7.Your wrath has rested upon me, And You have afflicted me with all Your waves. Selah. *8.You have removed my acquaintances far from me; You have made me an object of loathing to them; I am shut up and cannot go out. *9.My eye has wasted away because of affliction; I have called upon You every day, O LORD; I have spread out my hands to You. *10.Will You perform wonders for the dead? Will the departed spirits rise and praise You? Selah. *11.Will Your lovingkindness be declared in the grave, Your faithfulness in Abaddon? *12.Will Your wonders be made known in the darkness? And Your righteousness in the land of forgetfulness? *13.But I, O LORD, have cried out to You for help, And in the morning my prayer comes before You. *14.O LORD, why do You reject my soul? Why do You hide Your face from me? *15.I was afflicted and about to die from my youth on; I suffer Your terrors; I am overcome. *16.Your burning anger has passed over me; Your terrors have destroyed me. *17.They have surrounded me like water all day long; They have encompassed me altogether. *18.You have removed lover and friend far from me; My acquaintances are in darkness. ----------------------- A Petition to Be Saved from Death. A Song. A Psalm of the sons of Korah. To the Chief Musician; set to chant mournfully. A didactic or reflective poem of Heman the Ezrahite.88 1 O Lord, the God of my salvation, I have cried out [for help] by day and in the night before You. 2 Let my prayer come before You and enter into Your presence; Incline Your ear to my cry! 3 For my soul is full of troubles, And my life draws near the grave (Sheol, the place of the dead). 4 I am counted among those who go down to the pit (grave); I am like a man who has no strength [a mere shadow], 5 [a]Cast away [from the living] and abandoned among the dead, Like the slain who lie in a [nameless] grave, Whom You no longer remember, And they are cut off from Your hand. 6 You have laid me in the lowest pit, In dark places, in the depths. 7 Your wrath has rested heavily upon me, And You have afflicted me with all Your waves. Selah. 8 You have put my friends far from me; You have made me an [b]object of loathing to them. I am shut up and I cannot go out. 9 My eye grows dim with sorrow. O Lord, I have called on You every day; I have spread out my hands to You [in prayer]. 10 Will You perform wonders for the dead? Shall the departed spirits arise and praise You? Selah. 11 Will Your lovingkindness be declared in the grave Or Your faithfulness in Abaddon (the underworld)? 12 Will Your wonders be known in the darkness? And Your righteousness in the land of forgetfulness [where the dead forget and are forgotten]? 13 But I have cried out to You, O Lord, for help; And in the morning my prayer will come to You. 14 O Lord, why do You reject me? Why do You hide Your face from me? 15 I was afflicted and close to death from my youth on; I suffer Your terrors; I am overcome. 16 Your fierce wrath has swept over me; Your terrors have destroyed me. 17 They have surrounded me like flood waters all day long; They have completely encompassed me. 18 Lover and friend You have placed far from me; My familiar friends are in darkness. Footnotes Psalm 88:5 Lit Set free. The ancient rabbis understood this to mean that once a man is dead, he is free from all religious duties. Psalm 88:8 Lit abomination to them. ---시88 개요--- 이 시편은 지금까지 읽은 가운데 가장 우울한 시, 즉 백척간두에 홀로 선 자의 참회시, 애도시다. [유일무이하게 모든인류의 죄를 담당하시는 대속자, 겟세마네와 십자가상의 JC에 부합함] 더구나보통의 슬픈 시편과는 달리 처음부터 끝까지 애도와 비애로 일관하고 있으며, 일말의 위로나 기쁨도 암시해 주지 않은 채 끝을 맺고 있다. 여기서 호소하는 바는 공적 이유에서가 아니라(교회 수난에 대해서는 이 시편에 아무런 언급이 없다), 오로지 개인적 이유 때문으로, 특히 외부적 고난과 함께 돌아보는 바 자기 죄에 대한 기억, 그리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대한 두려움으로 말미암아 자기 영혼에 가해지는 비통과 심적 고통에 대해 토로하고 있다. 참회시의 범주에 속하며, 영혼에 미치는 절대적 고독-무력감-단절감-두려움이 이처럼 정당한 통로, 곧 기도로 유일무이한 해결사 YHWH를 향해 방향을 전환하며, 세상에서 당하는 그 어떤 비애라 하더라도 경건한 슬픔으로 승화시킴은 지극히 바람직한 일이다. 이 시편에서 우리가 대하게 되는 것은 다음과 같다. 1. 시편 저자가 당하고 있었던 영혼의 지대한 압박(3-6). 2. 그 압박의 원인이 되고 있었던 하나님의 진노(7, 15-17). 3. 자기 친구들의 사악함(8, 18). 4. 그가 기도로써 하나님께 드린 애원(1-2, 9, 13). 5. 하나님께 드린 그의 겸손한 간언과 탄원(10, 12, 14). --마음의 고통을 당하고 있는 자들은 진정한 마음으로 이 시편을 노래하면 좋을 것이고, 심적 고통이 없는 자들은 이런 경우를 당하지 않고 있음을 감사하고 하나님께 찬미를 돌리면서 이 시편을 봉독해야 할 것이다. ---------------------- 시편 저자의 영혼의 아픔(시 88:1-9) 이 시편과 다음 시편의 제명으로 보아 헤만은 전자의 필명이며, 에단은 후자의 집필자 이름인 것으로 보인다. 유다의 아들 세라에게는 이같은 이름을 가진 아들이 둘 있었다(대상 2:4, 6). 또 열왕기상 4장 31절에는 지혜로 유명한, 같은 이름의 두 사람이 나오는데 여기서는 솔로몬의 지혜를 높여 말하기 위해 솔로몬은 “헤만과 에단보다 더 지혜로웠다”고 표현했다. 레위인들로서 시온의 노래에서 선창자의 역할을 맡았던 헤만과 에단이 이 시편들의 필자와 동일한 인물이었는지 우리는 확인할 길이 없으며, 이들 중 누가 시편 작자인지, 혹은 이들 중 어느 누구도 시편 작자가 아닌지 또한 확실히 알 수 없다. 노래하는 이들의 우두머리 중에 헤만이란 인물이 있었는데,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드는 왕의 선견자 또는 선지자라 불렸다(대상 25:5). 아마 이 시편의 필자도 선견자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런 위로도 볼 수 없었고, 남들에게는 교훈을 주는 자요 위로를 주는 자였으되 스스로의 위로와는 인연이 닿지 않았던 것 같다. 이 시편의 서두에 나오는 "여호와 내구원의 하나님이여" 이 말씀은 전체를 통해 유일한 위로의 말씀이요, 후원의 말씀이다. ((여기에 모든 인류의 전 인생의 무게가 걸려있다!!)) 시편 저자를 둘러싸고 있는 것이라고는 암운과 어두움밖에 없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하소연을 시작하기 전에 하나님을 “내 구원의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두 가지 사실을 시사해 준다. 즉, 그는 사태가 험악했지만 구원을 희구하고 있다. 또 그는 구원을 바라서 하나님께로 자기 눈을 돌리고, 그가 자기 구원의 장본인이 되도록 하나님께 의존하고 있다. 이제 우리가 여기에서 대하게 되는 시편 저자는 다음과 같은 인물이다. Ⅰ. 그는 기도의 사람이었다. 그는 항상 기도에 전념하는 사람으로서, 특히 이제는 고난 중에 있었기에 더욱 그러했다.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지니라.” 그의 위로는 기도드리는 데에 있었다. 그의 불평은 끊임없이 드리는 바 부르짖는 기도에도 불구하고, 그의 고난이 여전하다는 데에 있었다. 1. 그는 기도에 매우 열심이었다. “내가 주께 부르짖었사오며(1절), 당신을 굳게 붙잡으려는 자처럼, 또 자비가 내게 미치지 않을까봐, 긍휼을 놓칠까봐 성스러운 두려움을 품고서 자비라도 잡으려 드는 자처럼 주께 내 손을 펼쳤나이다” (9절). 2. 그는 기도를 매우 빈번히 했고 꾸준히 했다. “나는 매일(9절), 아니, 주야로 주를 불렀습니다”(1절). 이와 같이 인간들은 항상 기도에 힘써야 하며, 기도의 힘을 잃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택함을 입은 자들은 주야로 그에게 부르짖어야 하는 것이니, 아침 저녁으로 기도해야 하며, 매일 낮과 매일 밤을 기도로 시작해야 할 뿐만 아니라, 낮과 밤을 기도하는 가운데 보내기도 해야 한다. 이렇게 하는 것이야말로 참으로 항상 기도하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도 우리는 계속 기도를 드리는 순간마다 우리는 능률적으로 속히 기도를 해야 한다. 3. 그는 하나님을 향해 기도를 드렸고, 하나님께로부터 응답이 오기를 기대하며 염원했다(2절). “나의 기도로 하여금 주 앞에 상달되게 하시며, 주께 용납되도록 하시고, 바리새인들의 기도처럼 인간들 앞에 나타나지 말게 하소서.” 그는 인간들이 자기 기도에 귀 기울일 것을 원치 않고, “여호와여, 주의 귀를 나의 부르짖음에 기울이소서. 왜냐하면 내가 스스로 의뢰하는 것은 그 점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좋으실 대로 그 기도에 어떤 대답이든 해주소서” 하고 바라고 있다. Ⅱ. 그는 슬픔의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어떤 이는 이 시편 저자를 그리스도의 표상으로 이해하는데, 이는 십자가 위에서 토로하신 그리스도의 호소나 그 이전에 때때로 하신 그의 탄원이 이 시편의 취지와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는 부르짖는다(3절). “내 영혼은 곤란으로 가득하나이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도 “지금 내 마음이 고통스럽다”고 말씀하셨으며, 이 시편 저자처럼 고뇌 중에서 “내 영혼이 심히 슬퍼 죽게 되었다”고 하셨다. 시편 저자도 “내 생명이 음부에 가깝나이다”라고 하고 있다. 헤만은 매우 지혜로운데다 또 매우 선량한 사람이었고, 하나님의 사람인 동시에 노래부르는 자였다. 그러므로 그는 쾌활한 기질의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그는 마음에 슬픔이 가득한 자가 되어 고통으로 절망하기 일보 전에 놓여 있다. 내부의 고통은 고통 중에서도 가장 쓰라린 것이며, 때로는 가장 훌륭한 하나님의 성도와 하나님의 종들도 이같은 내적 번뇌로 심한 괴로움을 당한다. 인간의 심령은, 가장 위대한 자의 심령이라고 할지라도 자기의 취약함을 늘 견디어낸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니, 오히려 자기의 약점 아래서 쇠퇴하고 침체하게 된다. “그렇다고 한다면, 누가 상한 심령을 견디어낼 수 있는가?” Ⅲ. 그는 자기 자신을 빈사의 지경에 이른 자로, 즉 슬픔으로 인해 이제 그 심장이 터질 지경에 이른 자로 간주했다(5절). “사망자(유령단체의 한 구성원) 중에 던지운 바 되었으며 살륙을 당하여 무덤에 누운 자같이 되었으니 아무도 죽은 자의 부패와 멸망을 돌아보지도 않으며 걱정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주께서도 그들을 더이상 기억하지 않으십니다. 시신들을 보호하지도 않으시며, 먹여 살리지도 않으시기에 그들은 부패되며 구더기의 먹이가 되고 맙니다. 그들은 주의 손으로부터 끊어진 자들입니다. [살아 생전에] 주의 손은 그들을 지지하시는 일과 그들을 도우려고 내어미시는 일에 사용되어 왔으나, 이제는 더이상 이런 기회가 없게 되었사오니, 그들은 당신의 손에서 끊어졌사옵고, 당신의 손으로 말미암아 끊어졌사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음부에 있는 자에게는 자기 손을 펼치지 아니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욥 30:24). “주께서는 나를 가장 낮은 웅덩이 속에 두셨사오니, 내 처지와 내 심령을, 더 낮아질 수 없을 만큼 낮게 하시며, 어두움 속에, 깊은 곳에 두셨사오니(6절), 밑바닥에 떨어져 탈출할 길이 보이지 않음으로 해서 최악의 막다른 궁지에 몰리게 되었고, 모든 것을 포기하게 되었나이다.” 이와 같이, 선량한 자들도 큰 고난을 당할 수 있으며, 자기들의 곤경에 대해 그토록 우울한 걱정을 품을 수도 있고, 때로는 역경의 결과에 대해 그토록 암담한 결론을 내리기가 쉬운 것이니, 이는 우울의 힘과 약한 믿음 때문이다. Ⅳ. 그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노여움에 대해 불평했으니, 그의 어려움과 괴로움에다 지독한 고초를 더한 것은 하나님의 노여움이었기 때문이다(7절). “주의 노가 나를 심히 누르시나이다.” 만일 그가 자기의 불행 중에서도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을 [날카롭게] 식별할 수 있었다면, 그 누르심을 가벼운 것으로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세게, 매우 억세게 그를 눌러 그는 거의 주저앉아 기절할 지경이었다. 그의 심령에 대한 이 분노의 억누름은 그에게 고통을 가하는 하나님의 “물결”이어서, 한 파도 다음에는 또 다른 파도가 밀려와 그에게 굽이쳤다. 그가 한 어두운 생각에서 채 깨어나기도 전에 또 다른 암담한 생각이 그를 억압했다. 이 파도들은 울부짖으며 맹렬히 그를 때렸으며, 그에게 고통을 가해 내리누르는 일에 사용된 하나님의 물결은 일부가 아니라 전부였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녀들조차 때로는 자신들이 진노의 자녀들이 아닌가 해서 불안해하는 수가 있으니, 어떤 외적인 고통도 그런 염려만큼 그들에게 큰 부담을 주지는 않는다.[지고지선의 극진한 사랑의 Q으로부터 끊어질 것 감은 느낌과 실질적 염려는 가장 지독한 고통이다!!...엘리엘리 라마 사박다니.] Ⅴ. 그의 고통을 더하게 한 것은 그의 친구들도 자기를 버리며, 낯선 자같이 행세했다는 점이었다. 우리가 고통 속에 있을 때 주위에 우리를 사랑하며, 동정하는 자들이 있다는 것은 다소 우리에게 위안을 준다. 그러나 이 선량한 자에게는 그런 자들도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자기 친구들을 성실하지 못한 자, 의리 없는 자, 몰인정한 자라고 비난하지도, 책망하지도 않고, 이 고난에 관계하신 것은 하나님의 손길이란 점을 염두에 두고서 하나님께 호소를 드린다(8절). “주께서는” 나의 “[내가 아는 자들, 친한 친구들, 곧 모든] 친지들을 내게서 멀리 떠나게 하셨습니다.” 섭리는 그의 친구들을 데려가 버리셨고, 그에게 도움이 되지 못하도록 하셨거나 아니면 그에게 쏟던 애정을 소원하게 만드셨다. 왜냐하면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께서 정하시는 만큼만 우리에게 관계할 뿐이며, 더이상은 관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의 오랜 지기가 우리를 꺼려하며, 친절한 대우를 받을 수 있으리라 기대하던 자들이 불친절한 자로 드러날 때는 우리가 다른 고난을 견디어낼 때와 마마찬가지로 이 또한 참지 않을 수 없으며, 마찬가지의 인내로써 하나님의 뜻에 승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욥 19:13 참조). 아니, 그의 친구들은 그에게 낯선 외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를 미워하기까지 했으니, 이는 그가 가난한 자가 되며 곤란을 당하는 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주께서는 나를 그들에게 가증한 자가 되게 하셨나이다. 그들은 나를 꺼려할 뿐만 아니라 싫어하기까지 하며, 멸시할 뿐만 아니라 혐오하기까지 하나이다.” 그토록 지혜로 이름을 날리던 헤만이 온 세상의 빈축을 사며, 아무런 즐거움도 없는 자로 무시당한다는 사실에서, 어떻게 해 이같은 시험이 있을 수 있는가, 의아롭게 여기지 말 것이다. Ⅵ. 그는 자기의 경우를 어쩔 수 없는 것으로, 통탄할 수밖에 없는 일로 간주했다. “나는 갇혀서 나갈 수 없게 되었사오니 하나님의 진노에 사로잡힌, 꼼짝할 수 없는 포로이오며, 탈출할 수 있는 길도 열려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누워 있으며, 자기의 고통 속에 파묻혀 있으니, 이는 그가 이 곤경에서 헤어날 가망이라고는 도무지 바라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그는 비탄을 금치 못한다(9절). “내 눈이 고통으로 인하여 슬퍼하나이다.” 때로 울어서 슬픔을 발산하면 고통스런 마음이 다소 후련해지는 때가 더러 있다. 그러나 울음으로 인해 기도가 막혀서는 안 된다. 우리는 눈물로 씨를 뿌려야 한다. “내 눈은 슬퍼하지만 나는 매일 주께 부르짖나이다.” 기도와 눈물을 병행시켜라. 그러면 그 둘은 함께 기뻐 받으시는 바가 될 것이다. “나는 네 기도를 들었노라. 또 네 눈물도 보았노라.” --------------------- 어찌하여 내 영혼을 버리시나이까(시 88:10-18) 이 문단에서 우리가 대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Ⅰ. 시편 저자는 자기가 현재 처해 있는 비참한 처지를 들어 하나님께 충간한다(10-12절). “주께서 사망한 자에게 기적을 베푸셔서 그들을 다시 일으키시겠나이까? 죽어 매장당한 자들로 일어나 주를 찬송하게 하시리이까? 아닙니다. 자기들이 누운곳에서 일어나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은 그들의 자손들에게 맡길 것입니다. 그들이 [살아닌다 해도]그렇게 [주께 찬양드림의 일을]행하리라고 생각하는 자들은 아무도 없습니다. 단지 하나님께 찬양을 드린다는 것만을 위해 어찌 그들이 부활해야 하며, 뭣 때문에 그들이 살아나야 한단 말입니까? 우리가 처음 태어날 때 얻은 생명과 맨 나중 부활하여 얻을 것이라고 희망을 두는 생명은 물론 그와 같이 당신께 대한 찬양을 위해 사용되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주의 백성에 대한 주의 인자하심이 무덤에 죽어 누워있어서 듣지 못하는 자들에게 선포하시렵니까? 즉, 거기 매장돼 누워 있는 자들에 의해서나 아니면 죽은 자들에게 선포하실 수가 있을 것입니까? 그리고 당신의 약속에 대한 주의 성실하심을 멸망당한 자들 가운데에서 말씀하실 수가 있습니까? 주의 기사가 흑암 중에 베풀어지거나 거기서 알려질 수 있겠습니까? 죽은자들이란 본래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거늘, 또 인간들 스스로도 기억되지 않는 망각의 땅에서, 즉 무덤에서 주의 의가 알려질 수 있습니까? 참으로 영혼은 몸을 떠나가더라도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알 수 있으며, 하나님의 성실하심과 공의와 인자하심을 선포할 수 있으나, 육체는 죽으면 그뿐입니다. 죽은 육체는 안락한 중에 누릴 수 있는 하나님의 은총을 받지 못하며, 자기가 받은 은총에 답하여 찬송으로 되돌려드리지도 못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시편 저자가 마치 하나님이 그를 도울 수도 없는 분이라고 생각하거나 도움을 주지 않으려던 분으로 생각하기라도 한 양 이 간언의 말씀들을 절망의 언어라고 해석해서는 안 될 것이며, 더욱이 이 말씀들이 마지막 날에 있을,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불신앙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더더구나 안 된다. 그는 [오직] 조속한 구원을 바라서 하나님께 이와 같이 탄원하고 있다. “여호와여, 당신께서는 선하시고 신실하시며 의로우십니다. 이와 같은 당신의 속성들은 [살아생전에, 내가 죽기전에]나를 구원하실 때에 알려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제게 대한 구원이 속히 이뤄지지 않을 때에는, 구원이 이른다고 하더라도 [아마] 너무 늦을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이제 곧 죽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구원도 사후 약방문이 되어 내가 아무런 위안도 받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욥도 종종 이같이 탄원했다(욥 7:8, 10:21). Ⅱ. 그는 기도를 계속하겠다고 결심하는데, 구원이 지체됨으로 인해 더욱 그리했다(13절). “주께 나는 몇 번이고 부르짖었사오며, 그러는 행동 속에서 위로를 발견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숨 거두기까지] 계속해서 그렇게 행하겠나이다. 아침에 내 기도는 주를 가로막으리이다.” 비록 우리 기도가 즉각적인 응답을 얻지 못하더라도 우리는 기도를 중단하면 안 된다. 왜냐하면 “눈에 보이는 것에는 정한 때가 있고, 결국에 가면 그것이 말해 주며, 거짓말을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응답을 늦추심은 우리의 인내심과 기도의 투지력을 시험하시기 위함이다. 그는 자기의 심기가 활발히 움직이고, 하루의 일과가 산더미처럼 밀려들기 전인 아침 일찍이 하나님을 찾아야 하겠다고 결심한다─즉, 걱정으로 부대낀 뒤 슬픈 상념들이 밤의 정적 속에서 조용히 가라앉은 아침에 말이다. 그러나 어떻게 그가 “내 기도는 주를 가로막을 것입니다” 하고 말할 수 있었던가? 이는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하나님보다 자기가 더 먼저 깨어 기도하겠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기 때문이다. 이는 그가 일상적인 기도시간보다 일찍 일어나겠다고 하는 것, 즉 자기의 보통 기도시간에 “앞서서 행하겠다”(즉, 앞에 간다) 함을 의미한다. 우리의 역경이 크면 클수록 우리의 기도도 더욱더 간절해지고 진지해져야 한다. “내 기도가 주 앞에 스스로 모습을 나타내어 때를 늦추지 아니하고 당신과 함께할 것이며, 자비의 실마리가 풀리도록 촉진하기 위해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날이 새기도 전에 믿음과 기대로 자비를 향해 나아가리이다.” 하나님께서는 흔히 여러 가지 자비로써 우리의 기도와 기대를 인도하신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기도와 바람으로써 그의 자비보다 앞서 나아가자. Ⅲ. 그는 자기가 하나님께 말씀드리고자 하는 일들을 그의 기도 안에 정해 둔다. 1. 그는 자기가 그때에 처해 있던 비천하고도 고통스런 상태에 대해 하나님께 겸손히 그 이유를 묻고자 한다(14절). “여호와여, 주께서는 어찌하여 내 영혼을 버리시나이까? 나를 포기한 자처럼 취급하실 만큼 당신에게 노여움이 일어나게 한 것은 무엇입니까? 어찌해서 주께서 나와 다투시는지 내게 이유를 나타내어 보이소서.” 그는 왜 하나님께서 오래된 종을 버리시며, 하나님을 버리지 않기로 작정한 자를 왜 하나님은 버리셔야 하는지 궁금히 여기면서 말한다. “사람들이 나를 버리는 것은 이상할 것도 없지만, 여호와여, 당신은 당신의 은사와 소명을 주신 자에게 후회하지 않는 분이신데, 어찌해서 저를 버리십니까? 주께서는 어찌하여 주의 얼굴을 숨기셔서, 내게 화를 내는 자같이 하시며, 나를 총애하는 마음이 없거나 당신이 내게 대한 은총을 갖고 계시지 않다는 것을 내게 알리려고 하는 자같이 하시나이까?”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하나님께서 얼굴을 숨기시는 것보다 더 비탄스런 일은 없으며, 하나님께서 그 자녀의 영혼을 버리시는 것보다 더 두려운 일은 없다. 만약 태양에 구름이 끼어 있다면, 지구는 어떤 감옥이 될 것인가! 2.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자비를 베푸실 때까지는 전에 했던 하소연과 같은 호소를 겸손히 반복할 것이다. 그가 하나님께 자기의 불행이라고 묘사하는 것은 두 가지 일이다. (1) 하나님께서 그에게 공포가 되셨다는 것. “나는 주의 두려움을 당하나이다”(15절). 그는 자기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또 그 진노의 결과에 대한 염려로 계속 놀람을 당했다. 그는 하나님의 수중에 떨어지는 일과 하나님의 존전에 대죄해 자기 운명을 선고받음을 생각만 해도 공포에 사로잡혔다. 그는 자기에 대한 하나님의 불쾌하심과 그의 존엄무쌍하신 공포에 대한 염려로 식은땀을 흘리며, 사시나무 떨듯 했다. 하나님의 총애를 받도록 지정된 자들도 일시적으로는 그의 두렵게 하심을 당할 수 있다. 양자의 마음도 처음에는 두려움에 예속된 심정이다. 불쌍한 욥도 “자기를 치려고 열을 지은” 하나님의 공포에 대해 불평했다(욥 6:4). 여기에서 시편 저자는 자기 생각을 확연히 털어놓으면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공포가, 곧 그의 “맹렬하신 진노”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해 준다. 그러한 두려움들이 그에게 입힌 무서운 흔적은 무엇이며, 그가 입은 상처는 얼마나 깊은 것인지 살펴보자. ① 그것들은 그의 생명을 거의 취해가 버렸다. “내가 그것들에게 너무나 고통을 당하여 죽게 되었사오며”, “혼령조차 버리게 되었나이다. 주의 두렵게 하심이 나를 끊었나이다”(16절). 저 영원한 단절이란 지옥은 무엇이냐? 저주받은 죄인들이 그 단절에 의해서 하나님과 모든 행복으로부터 영원히 끊어질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두려움이 죄 많던 저희 양심을 죄며 먹이로 삼는 데가 아니냐? ② 그 두려움들은 그의 이성을 거의 못쓰도록 탈취해 가버렸다. “내가 주의 두렵게 하심을 당할 때에는 황망하였나이다.” 여호와의 두렵게 하는 일은 많은 자들과 몇몇 선량한 자들에게 이런 슬픈 효과를 자아냈으며, 그들은 이로 인해 그들 자신의 영혼을 전혀 소유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이는 극히 애처로운 일로서 크나큰 동정심을 가지고 보지 않으면 안 된다. ③ 이 일은 오래도록 계속되었다. “나는 소시로부터 주의 두렵게 하심을 당하나이다.” 그는 소년시절부터 우울증으로 고통을 당해 왔고, 슬픔이란 학교의 규율 아래 훈련을 받아왔다. 설사 우리의 날이 고통으로 시작하고, 슬픔의 날들이 오랫동안 계속되더라도 우리는 이것을 이상히 여기지 말고, 고생이 되더라도 인내로 이겨내자. 저명한 현자이자 선인이었던 헤만이 “소시적부터 곤란을 당하여 거의 죽게 되었고”, 하나님의 두렵게 하심을 당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이와 같이 많은 사람들은 젊을 때에 멍에를 멘다고 하는 것이 자기들에게 유익한 일임을 발견했고, 슬픔이 웃음보다 더 낫다고 하는 것을 깨달았다. 젊을 적에 많은 고생을 당하고 종종 빈사의 지경에 처함으로써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습관적인 진지성을 터득하게 되며, 세상을 멀리할 수 있게 되었고, 이것은 평생토록 그들에게 큰 도움이 된다.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크게 쓰시기로 작정하는 자들에게도 때때로 이와 같은 종류의 훈련을 예비해 두신다. ④ 그의 고난은 이제 극에 달했고, 여느 때보다 더 악화되었다. 하나님의 두렵게 하시는 일이 이제 그의 주위에 둘러서 그는 사면팔방으로부터 각양각색의 고통에 공격당했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곳이라고는 바늘구멍 하나 없었다. 환난은 물이 범람하듯 그에게 덮쳐왔으며, 그것도 매일, 하루종일 습격해 왔다. 그에게는 휴식도 유예기간도 없었고, 숨쉴 틈도 없었으며, 잠깐 평정을 되찾는 시간도 없었다. 희망의 빛이라고는 전혀 비치지도 않았다. 이와 같은 것이 지혜가 뛰어나며, 아주 선량한 인간의 비참한 모습이었다. 그는 공포로 둘러싸여서 어떤 피난처도 찾을 수 없었고, 바람받이에서 누울 곳도 찾을 수 없었다. (2) 이 세상에 있는 어떤 친구도 그에게 위로가 되지 못했다는 것(18절). “주께서는 사랑하는 자와 친구를 내게서 멀리 떠나게 하셨나이다.” 어떤 자는 죽었고, 어떤 이는 멀리 떨어져 있으며, 아마 대개는 몰인정하게 대했을 것이다. 종교의 위로(=진리되신 주님의 위로) 다음 가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우정과 사교에서 오는 위로라고 할 수 있다. 친구가 없다는 것은 어쩌면 거의 (이생의) 위로가 없다는 말과 마찬가지인데, 친구들이 있다가 없어진 자들에게는 재난이 더 한층 고통스런 것이 된다. 시편 저자는 이것이 그의 비애를 종결시키고, 이 우울한 일에 결정타를 가하는 것이기라도 한 양, 이 말씀으로 여기에서 자기의 호소를 끝맺는다. 만일 친구들이, 산산히 흩으시는 하나님의 섭리로 인해 우리에게서 멀리 떠나게 된다고 할 때, 아니 우리의 지기가 죽음으로 말미암아 암흑 속으로 옮겨지는 경우, 우리는 그 일을 쓰라린 고통으로 여길 만한 이유가 있기는 하지만, 그 일 가운데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감지하고, 그에 승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 요15장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1.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2.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3.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 *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6.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8.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14.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15.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17.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라 *18.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20. 내가 너희에게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은즉 너희도 박해할 것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것이라 *21. 그러나 사람들이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이 모든 일을 너희에게 하리니 이는 나를 보내신 이를 알지 못함이라 *22. 내가 와서 그들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 *23. 나를 미워하는 자는 또 내 아버지를 미워하느니라 *24. 내가 아무도 못한 일을 그들 중에서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그들에게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들이 나와 내 아버지를 보았고 또 미워하였도다 *25. 그러나 이는 그들의 율법에 기록된 바 그들이 이유 없이 나를 미워하였다 한 말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 *26.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27.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언하느니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기]=== **시109:4>>나는 사랑하나 그들은 도리어 나를 대적하니 나는 기도할 뿐이라....마침내 중심에 부끄러움을 깨닫고 회개함으로 주 이름 불러 구원에 이르도록 Ⅱ. 그는 자신의 의무 지키기를 결심하고, 그 위로를 취한다. “그러나 나는 기도할 뿐이다”(4절). “나는 기도한다”(원문으로는 후자가 더 옳다). “나는 기도를 위해 있으며, 나는 기도의 사람이다. 나는 기도를 사랑하며, 기도를 고귀하게 여겨 실천한다. 그리고 기도의 일을 행하며, 내가 기도할 때 참 내가 된다.” 선한 사람은 기도에 힘쓰며, 사도들처럼 “기도하는 일에 전무한다”(행 6:4). 다윗의 적들이 그를 거짓되게 고소하고, 그를 거짓으로 내세웠을 때, 그는 하나님께 맡겼으며, 기도로써 그의 모든 문제를 하나님께 위탁했다. 그들은 그의 사랑에 대한 적대자들이었지만, 그는 계속해서 그들을 위해 기도했다. 만일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학대하며 해친다고 해도 우리는 그들에 대한 우리의 의무를 버리거나, “저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서 결단코 범치 아니해야 한다”(삼상 12:23). 그들이 그의 신앙 때문에 그를 미워하고 박해한다고 할지라도 그는 그것을 반드시 지켰다. 그들은 그의 예배를 인해 그를 조롱했지만, 그들은 그것으로부터 그를 떠나게 하지 못했다. “나는 기도할 뿐이다.” 여기 다윗은 “미워하는 말”과 거짓말로 둘러싸여 이유 없이, 그의 사랑과 그의 “선한 일들”(요 10:32)에는 아랑곳없이, 적들이 그를 박해했던 그리스도의 모형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그들을 위해 기도했고, “기도할 뿐이었다.” “아버지여, 저희를 용서하여 주소서.” ============= ----[복의 근원/유통=축복=영생=영생복락의 삶..베라카.시133:3..바라크=헬레크(분복)+에쉐르=마카리오스(신령한 복/진복)]---- ...마카리오스의 진복은 JC께서 말씀하신 팔복 + 기꺼이 목숨을 포함한 자기의 모든 것을 내어줌의 자선구제를 통해 YHWH의 형상/ 어떠하심 이루는 것... hk;r;B](1293, 베라카) 축복, 복을 주는 것....복의 근원[복의 통로/유통자...축복하는 자]이 됨 베라카(명여)는 바라크(&r'B; , 1288)에서 유래했으며, '축복, 복을 주는 것'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70회 나온다. (a) 베라카는 '축복, 복 주심 blessing'에 대해 사용되었다. ① 부모의 축복(창 27:12-41, 창 49:28), 모세의 축복(신 33:1). ② 하나님의 복 주심(출 32:29, 레 25:21, 신 11:26, 신 11:27, 신 11:29, 신 23:6(= 느 13:2), 신 28:2, 신 28:8, 신 30:1, 신 30:19, 수 8:34, 삼하 7:29, 시 3:8, 시 21:3, 시 133:3, 사 44:3, 스 34:26, 스 44:30, 욜 2:14, 말 3:10, 창 39:5, 신 12:15, 신 16:17, 신 33:23, 시 129:8, 잠 10:22, 시 24:5, 창 28:4). ③ 사람의 축복(시 109:17, 잠 10:6, 잠 11:25, 잠 28:20). ④ 가난한 자의 축복(욥 29:13, "망하게 된 자도 나를 위하여 복을 빌었으며 과부의 마음이 나로 인하여 기뻐 노래하였었느니라"). (b) 베라카는 복의 근원 즉 복을 주는 한 복에 대해 사용되었다. 아브라함(창 12:2), 이스라엘(사 19:21, 겔 34:26, 슥 8:13), 의인의 씨(시 37:26), 왕(시 21:6), 의인의 기념(잠 10:7), 새로운 포도즙(시 65:8)은 세계나 인류 사회에 한 복이 되는 것이다. (c) 베라카는 '복, 번영'에 대해 사용되었다. 정직한 자의 축원이나 번영(잠 11:11), 이른 비의 은택(시 84:6), 하늘의 복, 원천의 복, 태의 복(창 49:25), 아비의 복(번영)(창 49:26), 너의 복(번영)(말 2:2). (d) 베라카는 하나님에 대한 찬양에 대해 사용되었다. '축복'이 하나님께 돌려질 때, 그것은 찬양과 감사의 표현이었다: "너희 무리는 마땅히 일어나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신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할찌어다 주여 주의 영화로운 이름을 송축하올 것은 주의 이름이 존귀하여 모든 송축이나 찬양에서 뛰어남이니이다"(느 9:5). (e) 베라카는 '선물, 선사'에 대해 사용되었다(창 33:11, 수 15:19, 삿 1:15, 삼상 25:27, 삼상 30:26, 왕하 5:15). 잠 11:25에서 베라카는 '활수한 사람'/주께 드리며 (주님 지혜따라) 너그러이 나누고 구제하고 베풀며 누림의 바라크로 사는자에 대해 사용되었다: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 (f) 베라카는 '평화 협정'에 대해 사용되었다: 왕하 18:21(= 사 36:16): "이제 네가 저 상한 갈대 지팡이 애굽을 의뢰하도다 사람이 그것을 의지하면 그 손에 찔려 들어갈찌라 애굽 왕 바로는 무릇 의뢰하는 자에게 이와 같으니라".(참조: BDB; TWOT). ----------[복음]----------- eujaggevlion(2098, 유앙겔리온) 기쁜 소식 good news, 복음 gospel.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유앙겔리온은 유앙겔로스(eujavggelo")에서 유래했다. 유앙겔로스는 사자를 뜻하며, 승리의 소식이나 기쁨을 일으키는 정치적 또는 개인적 소식을 가져오는 자이다. 헬라 시대에 이 단어는 신탁을 전하는 자를 의미하기도 한다. 따라서 유앙겔리온은 형용사와 명사로 사용되며, 다음 의미를 지닌다. (a) 유앙겔리온은 '기쁜 소식'을 의미하며, 또한 '기쁜 소식에 대한 보상'을 의미한다. 이 단어는 '승리의 소식'이나 전달문을 나타내는 전문 용어가 되었다. 이러한 전달문은 주로 승리의 전달문이지만 기쁨을 가져오는 정치적이며 개인적인 전달문에 대해서도 사용된다. 이러한 전달문들은 신들의 선물로 간주된다. 전달문을 받았을 때, 감사함으로 또한 신들로 하여금 그 선물을 지키도록 하기 위해 신들께 희생제를 드린다. 이러한 희생제의 배후에는 정령(精靈) 신앙자 자신의 종교적 제의의 불신이 존재한다. 이 전달문에 대하여 신들게 빨리 감사를 드리라, 그렇지 않으면 그 전달문이 말하는 행운을 잃을지도 모른다(J. Schniewind, Euangelion, 1931, 182). (b) 유앙겔리온은 '신탁의 말'(미래의 어떤 사건에 대한 약속)을 의미하며, 이러한 유앙겔리온에 대해 감사를 드렸다. (c) 유앙겔리온은 황제 숭배에서 중요하다. 황제 숭배의 지역에서 신적 통치자의 탄생 소식, 통치 시대의 도래, 또는 즉위, 그리고 또한 그의 말들, 포고령, 행동들은 행복과 평화에 대한 세상을 기다리며 오랫동안 소망하여온 바의 성취를 가져오는 기쁜 소식들이었다. 2. 70인역본의 용법. 유앙겔리온은 70인역본에서 3회 나오며, 히브리어 베소라(기별, 소식)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며, '기별이나 소식'(삼하 4:10; 삼하 18:4; 삼하 18:25)을 의미한다. 3. 신약성경의 용법. 유앙겔리온은 신약성경에서 76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a) 유앙겔리온은 예수님께서 자기 자신에 관해 사용하셨다. ① 막 1:15; 막 8:35; 막 10:29; 막 13:10; 막 14:9; 막 16:15; 마 4:23; 마 9:35; 마 24:14; 마 26:13(막 1:1; 막 1:14)에서 예수님에게서 유래한다. 예수님께서 사 35장과 사 61장에 나오는 메시야에 대한 기대의 말씀들이 자신의 말씀과 행동들에서 성취되었다는 것을 지적하셨다는 것은 가능한 설명이다(참조: 마 11:5 이하=눅 7:22). ② 실제로 결정적인 문제는 예수님께서 친히 유앙겔리온이라는 말을 사용하셨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이 단어가 예수님의 메시지의 본질적 요소를 적절히 표현한 말인가 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미 자신의 말씀과 행동에서 기쁜 소식으로 존재하는 하나님의 나라(막 1:14)의 도래를 인식하셨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막 13:16). 이 기쁨의 메시지는 이미 그것을 전하는 전달자와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니, 곧 이 전달자는 예수님 자신이셨던 것이다(참조 비교: 눅 11:20; 마 5:1 이하). 더욱이 예수님께서는 이 전달문을 전하는 자와 원작자로만 나타나시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이 전달문의 주제, 곧 이 전달문이 말하는 주인공으로 나타나시는 것이다. 따라서 초대 기독교회가 예수님의 강림과 관련된 구원의 메시지를 묘사하기 위하여 유앙겔리온이라는 술어를 취한 것은 매우 일관성이 있는 것이다. (b) 바울이 신약성경에서 유앙겔리온이란 용어를 확립시켰다는 것은 근거가 있는 말이다. 바울에 있어서 유앙겔리온은 그의 신학의 중심 개념이 되었다. 이것은 익숙한 기쁜 소식을 의미하였으니, 곧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성육신과 죽으심과 부활에서 세계의 구원을 위하여 역사하셨다는 것이다(롬 1:1 이하; 고전 15:1 이하). 이 사건이 이미 구약성경에서 약속되어 있는 한, 구약은 이 복음에 속한다(에팡겔리아). 약속은 유앙겔리온과 언어적으로나 개념적으로 밀접하게 관련되며 또한 율법과 복음의 알력이 이 술어에 관련되어 바울의 기록들에 나타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유앙겔리온은 바울에 의하여 사용된 바와 같이 전하여지는 내용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선포의 행위, 과정, 그리고 실행까지를 의미하는 것이다. 전도의 내용과 전도의 과정은 하나이다. 이들이 서로 밀접하게 나열되는 때(고전 9:14; 고전 9:18)를 제외하고는 사고에 있어서 분리되지 않는다(롬 1:1). 왜냐하면 선포라는 바로 그 행동에 있어서 그 내용은 실제가 되며 또한 그것이 포함하고 있는 구원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복음은 단순하게 구원의 역사를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구원의 역사이다(G. Friedrich, TDNT). 선포의 행위는 동사 유앙겔리조마이(eujaggelivzw, 2097)에 의해서만(참조: 고전 1:17) 나타내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 행위를 나타내는 명사로 사용되는 유앙겔리온에 의하여서도 나타내어진다. 따라서 고후 8:18에서 유앙겔리온은 복음 전도를 의미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복음", 또는 "그리스도의 복음",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의 복음"이라는 구절에 나오는 소유격(예: 롬 1:1; 롬 15:16; 고전 9:12; 고후 2:12)은 목적어와 주어로 취급되어야 한다. 곧 그리스도 또는 하나님께서는 모두 복음의 내용이요 창시자라는 것이다. 이곳에서 뚜렷한 구별을 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때때로 바울은 한면을, 또 어떤 때는 다른 면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언제나 복음이 선포될 때마다(고후 11:7, 갈 1:11의 유앙겔리제스다이; 갈 2:2, 살전 2:9의 케뤼쎄인; 고전 9:14의 카탕겔레인; 살전 2:2의 랄레인), 이 복음은 능력으로 충만해진다. 복음은 믿음을 창조하고(롬 1:16 이하; 빌 1:27), 구원과 생명(롬 1:16), 또한 심판까지도 가져온다(롬 2:16). 복음은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며(참조: 롬 1:17), 소망의 성취를 가져오며(골 1:5; 골 1:23), 사람들의 생활에 개입하며 교회를 창조한다. 이 복음은 사람의 발명품이 아니라(갈 1:11) 하나님 또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자신의 사자(使者), 사도들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것이므로 사도들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고후 10-13장; 갈 2:7 이하, 이곳에서 전달문의 선포라는 뜻의 유앙겔리온은 분명히 아포스톨레의 목적과 내용으로 규정되고 있다. 곧 유대인과 또한 이방인을 향한 바울과 베드로의 사도적 임무를 말하는 것이다). 전령과 성벽 위의 파숫군이 하나님의 강림을 선포한다고 하는 사 40:9; 사 52:7; 나 1:15와 똑같이 전달자는 복음을 선포한다(롬 10:15). 바울은 특히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한다(롬 1:1; 참조: 갈 1:16). 그러므로 "복음의 참예자"로서(고전 9:23) 그는 "자신의 복음"을 말할 수 있었다(롬 16:25; 고후 4:3). 이 말로써 그는 예루살렘에서 전파되었고(갈 1:6-9; 고후 10:13-16) 이제는 유대 율법의 경계를 부수고 이방인들을 위한 복음이 되었고 율법으로부터 자유한 하나의 복음을 나타내었다(갈 1:16; 갈 2:7; 갈 2:8; 롬 1:15). 한편 바울의 반대자들은 "다른 복음"을 전하였다(갈 1:6-10; 고후 11:4). 그들은 바울에게 공격을 가했다. 그러나 사도권과 복음의 전파는 함께 속한 것이므로 바울과 그의 사도권에 대한 모든 공격은 거꾸로 복음에 대한 공격이었던 것이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자신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강요되는 것처럼-(참조: 고전 9:16)-주님을 전하는 것이다(참조: 고후 10:18; 고후 4:5; 갈 1:10). (c) 공관복음서들에서도 마찬가지로 유앙겔리온은 교회에서 전파되는 바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 사건에 대한 좋은 소식에 주어지는 명칭이다. 그러나 이것이 자세하게 표현될 때에, 각각의 복음서 기자들은 다양한 강조들을 한다. 이것들은 그들 각자의 신학적 입장에 영향을 받는다. ① 마가복음 기자는 바울의 유앙겔리온 용법과 매우 유사하게 사용하는 입장을 취하며 막 1:1과 막 1:14를 제외하고는 항상 유앙겔리온을 독립적으로 사용한다. 그가 유앙겔리온을 편집적인 구절에서 사용한다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학자들은 그가 유앙겔리온을(아마 바울에게서 취하며) 공관복음서 형태로 도입한 사람이었다고 추론한다. 바울과 마찬가지로 마가복음 기자는 예수님을 복음의 내용이며 창시자로 본다.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 예수님께서는 존재하시고 역사하신다. 곧 복음을 위하여 행해지는 것은 예수님을 위하여서도 행해진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막 8:35; 막 10:29). 이 복음의 내용은 개인적인 사건들을 수반한 예수님의 역사이다(참조: 막 14:5). 마가복음 기자는 이 사건들을 단순하게 역사적인 관심으로 기록하지 않고 복음이 무엇인가를 표현하기 위하여 예수님에 대한 기사를 사용한다. 복음은 영광스러운 신적 구속자에 대한 정보가 아니라 감추어진 영광을 소유한 고난받는 인자를 통한 구원의 메시지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아들은 십자가를 향한 길에서 그를 따르는 자들을 제외하고는 나타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가복음 기자는 유앙겔리온을 자신이 기록한 책 전체에 대한 일종의 책명처럼 사용한다(막 1: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이 의미는 이 이야기들이 단순히 예수님에 대한 보고문이 아니라 교서라는 뜻이다. 이 이야기들은 예수님을 살아계신 주님으로 선포하며, 또한 예수님께서 친히 마가복음의 독자들에게 말씀하시며 믿음을 주시고 강건하게 하시는 좋은 소식인 것이다(막 1:15). ② 마가복음의 유앙겔리온의 이 용법과 대조되어 마태복음 기자는 "천국 복음"(마 4:23; 마 9:35), 또는 "이 복음"(마 26:13; 참조: 마 24:14)과 같이 수식함이 없이는 전혀 이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강조점을 표현하는 것이다. 이러한 전면(前面)에서 이제 예수님에 대한 개념이 복음의 전달자요, 선포자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 복음의 내용은 이제 예수님께서 자신의 제자들을 가르치시는 가르침 가운데 주로 나타나게 된다(마 4:23; 마 9:35; 마 24:14; 그러나 마 26:13에서 "복음"은 수난 기사를 말하고 있다). 그러나 교회가 이 복음을 전하는 한, 예수님 자신도 복음의 내용이 되신다(참조: 특별히 마 24:14; 마 26:13). ③ 사도행전에서 유앙겔리온이란 술어는 행 15:7과 행 20:24에서만 발견된다. 아마도 이것은 누가복음 기자의 특별한 구상과 관계된 것일 것이다. 곧 예수님의 시대는 교회 시대와 구별되어야 하고 또한 예수님의 전도와 사도의 전도가 구별되어야 한다는 것에 따른 그의 구상일 것이다. 따라서 누가복음 기자는 사도의 전도를 유앙겔리온으로 묘사할 수 있었다(행 15:7; 행 20:24). 그러나 예수님의 전도는 유앙겔리온으로 묘사되지 않는다. 특히 이러한 관계에 있어서의 교훈적인 것은 막 10:29의 유앙겔리온이 눅 18:29에서는 바실레이아로 대치되는 것이다. 유앙겔리온 또는 유앙겔리조마이를 사용하는 신약성경의 다른 기록들은 대체로 위에서 말한 바울의 개요를 따르고 있다. 이 단어들은 인간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인 이 능력의 복음의 특별한 국면들을 분명히 하는 경향이 있다. 이 복음은 전도자요, 사도요, 교사인 바울에게 위탁되었다(딤후 1:11). 죽음에서 부활하시고 다윗의 혈통에서 나신 예수 그리스도(딤후 2:8)에 대한 복음의 메시지는 일회적인 과거 사건으로 제한되지 않고 현재에 능력으로 충만된 말씀으로 경험되며 그러므로 또한 이 복음은 인간의 사슬에 얽매일 수 없다(딤후 2:9). 이 복음은 거듭남과 새 생명을 낳으며(벧전 1:23-25) 평화를 가져오며(엡 2:17; 엡 6:15) 가까이 있던 자와 멀리 있던 자들, 곧 이방인과 유대인들을 함께 이끌며(엡 3:1-9), 구원을 주며(엡 1:13),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다"(딤후 1:10). (참조: U. Becker; G. Friedrich; Walter Bauer; J. H. Thayer). ----------[축복]---------------- eujlogevw(2127, 율로게오) 칭찬하다, 찬양하다, 축복하다.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동사 율로게오는 유(eu\, 2095: 좋게, 잘)와 로고스(lovgo", 3056: 말, 진술)에서 유래했으며, (a) '~에 대해 좋게 말하다', 즉 '훌륭하게 말하다'나 어떤 사람에 대해 '좋게 말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Plat.). (b) '칭찬하다, 찬양하다'를 의미한다. 이 단어는 신들이 사람을 칭찬하는 것에도 사용되지만(Eur. Suppl.) 사람이 신들을 찬양하는 것에 대해서도 사용되었다(Isis). 단 한번 신들이 율로게인의 주어로 나온다. 신들은 사람들을 그들의 선한 행위로 고찰한다. 이것은 사람들을 보호하고 그들에게 재능을 부여하는 신들의 역할을 반영한다. 이 역할은 헬라 종교에 전혀 알려져 있지 않은 것은 아니다(참조: Aesch., Eumenides, 997 이하). 그러나 우리는 축복이라고 하는 특별한 활동이 헬라 신들에 기인하는 것으로 볼 수는 없다. 율로게오는 70인역본에서 처음으로 '축복하다' bless라는 의미로 나온다. 2. 70인역본의 용법. 동사 율로게오는 70인역본에서 40회 나오며, 몇 회를 제외하고는 모두 바라크(1288: 무릎을 꿇다, 찬양하다, 복주다, 축복하다 등)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a) 아버지는 축복할 권리를 가지고 있으며 그의 상속자들에게 축복을 전달할 수 있다(창 27:4 이하; 창 48:15; 창 49:25-창 49:26). (b) 야곱이 그의 아들 요셉에게 축복할 때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의 형식으로 하였다(창 49:25). 창조물은 하나님의 축복에 의존한다. 하나님은 복을 주어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하셨다(창 1:22). 남자와 여자는 태초부터 축복 받는다(창 1:28). 하나님은 복된 소나기를 보내심으로써 그의 피조물을 유지시키신다(겔 34:26). 그는 농작물과 가축 뿐만 아니라(신 28:1 이하), 안식일도(창 2:3) 축복하신다. 특별한 축복들은 구원사와 관련되어 있다(참조: 창 17:7-8; 창 26:3). 선민의 역사는 축복이나 저주 하에 있다(신 11:26 이하; 30:1 이하). 계명을 지키지 않을 경우 축복은 저주가 된다. 하나님을 믿고 그의 뜻을 행하는 의로운 사람들은 축복을 받을 것이지만 죄인들은 저주를 당한다(렘 17:5, 7; 시 24:4-5). (c) 하나님의 약속한 복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은 제의적인 형태를 취한다. 참으로 제의(예배)는 이스라엘의 복 개념의 근원인 것이다. 제의에서 이스라엘은 생명을 구하며(암 5:4 이하), 이 생명은 신탁을 통하여, 제사장의 말을 통하여 그에게 허락된다(삼상 1:17). 축복을 선언한 자들로 멜기세덱(창 14:19), 모세(신 33:1 이하), 여호수아(수 14:13), 엘리(삼상 2:20), 다윗(삼하 6:18), 그리고 솔로몬(왕상 8:14) 등이다. 축복하는 것은 점차 제사장의 특권이 된다(레 9:22-23; 민 6:22 이하; 신 10:8). 시 3:8의 기도는 끊임없이 성전 예배식에서 반향된다. (d) 이 어군의 중요한 용법은 또한 하나님께 찬양을 돌리고 영광을 돌린다는 의미에서 신자들이 하나님을 찬미하는 것이다(창 24:48; 신 8:10; 삿 5:2, 9; 시 16:7; 시 34:1; 시 67:26 등). (e) 히브리 동사는 인사한다는 일반적인 의미에서 축복하는 것에 대해 사용되기도 한다(삼상 13:10). (f) 이 용어는 또한 저주가 의도되는 곳에서 완곡적으로 사용되기도 한다(욥 1:11; 욥 2:5; 욥 1:21; 왕상 21:10, 13). 3. 신약성경의 용법. 신약성경에서 동사 율로게오는 41회, 명사 율로기아([N]으로 표시됨)는 16회 나온다. 여기서 이 두 단어를 함께 설명한다. (a) 신약성경은 구약성경의 복의 개념을 많이 이어 받는다. 히 7:1은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축복하였다고 하며(창 14:19 이하), 이로부터 그의 높은 지위나 우월성을 추론하는데, 더 큰 자가 더 작은 자를 축복하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히 7:6 이하). 히 11:20 이하는 이삭이 야곱을 축복하였고(창 27:28 이하), 야곱이 요셉의 아들들을 축복하였으며(창 48:15 이하), 그들이 믿음으로 그렇게 하였다고 한다. 신약성경 기자들은 조상으로부터 후손으로의 축복의 전수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위대한 약속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확신에서 일어난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확신을 가지고 축복하는 자는 그가 축복한 자를 하나님의 보호 안으로 밀어 넣는다. 히브리서가 이 예들을 말하는 목적은 히 6:12에 언급되어 있다. 곧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때때로 이런 구절 들에는 "축복을 기업으로 받다"(히 12:17[N]; 벧전 3:9[N])와 "약속을 기업으로 받다"(참조: 히 6:12; 히 6:15)와 같은 공식 문구가 실리기도 한다. 축복과 약속이 병행되어 있다는 점을 통해서 볼 때 이곳에서 축복은 현재적인 것이 아니라 종말론적 복을 의미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참조: 마 25:34과 사 65:23). 에서는 악하게도 장자권을 경시했기 때문에 비록 축복을 구하긴 했지만 거부 당한다(히 11:21). (b) 신약성경은 또한 하나님을 찬미할(bless) 인간의 의무를 인식한다. 눅 1:64에서 사가랴는 그가 다시 말을 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즉시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너무나도 분명하게 깨닫고 찬양을 돌린 참된 이스라엘인이다. 눅 2:28에서 시므온이 아기 예수를 팔에 안았을 때 구주를 보게 하신 은혜에 감사하여 하나님께 찬양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자신이 그리스도로부터 흘러 나오는 복된 나라에 들어간 것이다. 따라서 그 늙은 시몬은 아기 예수의 양친을 축복할 수 있었다(눅 2:34). (c) 마리아는 이미 이런 축복의 범위 내에 속해 있었다. 마리아는 이미 이 범위 내에 속해 있었다. 만약에 이스라엘의 모든 아내가 그의 아기에 대한 축복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볼 수 있다면 메시야의 어머니는 특별히 "여자들 중에 복된" 자인 것이다. ① 눅 1:28; 눅 1:42,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찌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② 눅 1:42, "여인 중에서 네가 복이 있도다." 이 문구에 대해서는 유딧 13:18; 유딧 15:12; 신 28:3 이하; 삿 5:24을 참조하라. ③ 그러나 가장 복된 자는 메시야 자신이다. 백성들은 메시야의 시온 입성을 환성을 지르며 환영하였다(막 11:9 이하; 마 21:9; 눅 19:38; 요 12:13). 요한복음에서는 율로게오만 나온다: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오시는 그 분과 그의 나라는 그들이 속하는 하나님에 의해 축복 받는다. 그러나 그들은 또한 그들에게 복종하는 백성들에게 환영받는다. 환영(영접)의 형식은 시 118:26에서 유래하며, 메시야의 구속과 연관되어 있다(Midr. Ps 118). 예수님은 마 23:39; 눅 13:35에서 이 동일한 시편을 그의 재림의 날에 적용 시키신다. (d) ① 메시야가 지상적 모습으로 나타나셨을 때, 그는 그의 백성 중에 경건한 사람으로 행하신다. 그는 관습을 그대로 받아들이시며, 특별히 종교적 관습에서 그리하신다. 그가 식탁에 앉으실 때나 4,000명, 혹 5,000명을 먹이실 때 그는 보통의 유대인 손님, 혹은 집 주인으로 행동하신다. 그는 인정된 형식을 충실하게 따르신다. 그는 손에 떡을 취하시고 축사하신 후 떡을 떼어 나누어 주신다(막 6:41과 병행구; 막 8:7과 병행구). 단 하나 새로운 모습은 기도하실 때 예수께서 예전처럼 아래로 내려다 보지 않고 하늘을 향해 우러러 보셨다는 점이다. 아마도 이것의 요점은 그것이 일상의 평범한 식사가 아니라 기적적인 것이요 그가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고 계신다는 것이리라. 그러나 또한 그의 선교 의식과 이것이 주는 내적 자유에 힘입어 예수님은 이 딱딱한 형식적인 교제에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와 같이 그렇게 생명력 있는 것으로 만드는 신적인 그 무엇을 불어넣고 계신다고 보는 것도 가능하다. 아마도 그는 또 이 감사 기도를, 예컨대 주기도문과 같은 한결 더 자유로운 형태로 표현하셨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에 관한 어떤 것을, 떡을 축사하고 떼어 주는 그 단순한 매일의 과정에 융합하셨음이 틀림없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았다면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가 이 행동으로 주님을 알아보았을 수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유카리스테인이 때때로 율로게인 대신 사용된다면(그리고 막 8:6; 막 8:7에서 둘이 함께 나옴) 이것은 어떤 의미의 차이를 나타내지 않는다. 유카리스테오 역시 히브리어 베레크에 대해 사용된다. 다른 한편 그것은 아람어 원어에 대한 헬라어의 오해로, 많은 MSS가 막 8:7에서 대격 목적어(아우타 혹은 타우타)를 추가한다. 만약 이것이 예수님께서 떡에 축사하시고 그 기적적인 면을 더하셨을 것이라는 사상을 암시한다면 우리는 이스라엘에서 잊어버린지 오래된 개념으로 거슬러 되돌아 가는 것이다. 눅 9:16에서 유사하게 몇몇 MSS만이 독립형을 가지고 다수는 아우투스를, 그 중 몇몇은 에프 아우투스를 추가한다. ② 주의 만찬에서도 역시 예수님은 누룩을 넣지 않은 떡을 취하시고 축복을 선언하신 후 그것을 떼어 나누어 주시며(막 14:22; 마 26:26), 또 축복의 잔을 가지고 그렇게 하신다. 여기서 그는 해석의 말씀을 덧붙이신다. 축복의 잔은 초기 그리스도 교회에서 여전히 행해졌으며, 이에 대해 고전 10:16로부터 알 수 있다. 바울은 여기서 일반적인 유대적 표현인 토 포테리온 테스 율로기아스("축복의 잔")를 사용한다. 한 가지 새로운 요소는 '호 율로구멘' "우리가 축복하는 바"의 추가다. 이것은 바울이 말하는 잔을 다른 모든 잔과 구별하기 위한 것이다. 그 잔을 통하여 회중이 축복받기 때문에 그것에 감사 기도가 적용된다. 그것에 의해 그것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한다." (e) 예수님은 또 사람들을 직접 축복하셨다. ① 막 10:16에서 예수님은 어린 아이들을 축복하신다(참조: 막 10:13-막 10:16). 그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유대 가장이나 랍비가 하는 것과 똑같이 행동하셨다(참조: SB). 주목할 요점은 마가복음에 있어서 예수님의 활동이 성인들에게만 제한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활동은 어린이들까지도 포함하였으니 곧 생의 모든 단계에서 사람을 포용한다. 이 부분이 주로 관심을 갖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참조: 막 10:15)는 "예수님의 활동과 적극적으로 통합되는 인간의 몸이며 피조적인 실존"이다(C. Westermann). ② 눅 24:50 이하에서 부활하신 주님께서 승천시 제자들에게 축복하셨으며, 그리스도의 축복 이면에는 제사장적인 축복도(Schenk) 족장 기사에 나오는 기업의 축복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축복은 떠날 때 주는 축복의 관습이다. 떠나시는 주님이 자기 교회와 더불어 자기의 축복의 능력을 나누시므로 그는 교회와 결속되게 된다. 축복의 내용은 마태가 자신의 기사에 나오는 이에 상응하는 점에서 분명하게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참조: 마 28:20; 창 26:3)고 말한 것처럼, 높이심을 받은 주님이 교회와 더불어 임재하신다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찬양함으로 응답하였다. 따라서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사역 전체를 하나님께서 그를 보내사 복주셨다는 말로 요약할 수 있었다. ③ 롬 15:29[N]에서 어구는 축복의 행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서의 그리스도의 전도의 결과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은 바울이 로마로 가는 것이, 곧 이 공동체의 성장을 촉진할 것임을 바울이 확신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울은 또한 그리스도께서 가져다 주신 복에 충만하여 로마로 여행할 수 있었다. ④ 마 25:34에서 이 복은 오래된 것이다. 구약성경에서 증거하는 하나님의 계시된 뜻 안에서의 위대한 분리는 주님께서 아버지의 복된 자들을 저주 받은 자들로부터 분리하실 마지막 날에 성취될 것이다. 저주 받은 자는 영원한 죽음에 이르는 반면, 축복 받은 자들은 생명을 누리고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갈 것이다. ⑤ 갈 3:8에서 바울은 창 12:3 하반절을 인용한다. "모든 이방(즉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바울은 이 인용문에 자신의 기독론적 사고 계열과 일치하는 새로운 해석을 부여한다.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축복의 성취가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구속적 행동으로 나타난 것이다. 이 축복의 은사는 이제 더 이상 큰 민족의 은사나 땅의 풍성함의 은사가 아니라 약속된 그리스도의 영(Spirit)이다(갈 4:14[N]). 야훼 기자의 인용문과 이에 대한 바울의 해석 사이의 공통의 근거는 약속된 축복과 그리스도 안에서 그 축복의 성취 모두가 땅의 모든 민족들에게 이르러야 한다는 사실에 있다(갈 4:8; 갈 4:14). 갈 3:8-갈 3:14에서도 바울은 축복과 저주의 관계를,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죽으심으로 율법의 모든 저주를 스스로 대신하여 단번에 받으심으로써(갈 3:13) 열방의 신자들이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구속 활동의 축복을 받는다는 것으로 해석한다. 그들은 예전에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복의 완전성을 알고 있었을 것이지만(갈 3:8 이하; 갈 3:14[N]; 히 6:14), "신령한 복"으로서는 지금 완전하게 이해하였다(엡 1:3; 행 3:25 이하). (f) 복받은 자들에게는 새로운 율법이 적용된다(참조: 히 6:7 이하[N]). 땅을 기업으로 받으라고 요청받으며(벧전 3:9), 악을 악으로 갚아서는 안된다. 자연 상태의 인간은 축복("찬송") 보다 저주하기가 더 쉽다(약 3:9 이하). 구약성경의 의인은 헬라인들처럼 저주에 대한 자연적인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또 저주를 당하지 않도록 경계했다. 이것은 욥 31:30에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그러나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저주를 완전히 이기라고 명령하셨을 때 그것은 오히려 또다른 문제이다: "너희를 저주하는 그들을 축복하라"(눅 6:28; 마 5:44). 이 명령은 초대 기독교 공동체에 깊은 인상을 주었다(롬 12:14; 고전 4:12). 여기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원수들의 저주, 핍박, 욕설 또는 비난을 그와 반대되는 축복으로 대하라는 권고를 받는다. 이곳에서 축복은 단순히 원수들에 대한 친절한 태도를 의미한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계명은 보복법(이우스 탈리오니스[ius talionis])을 대신한다(이것은 특히 벧전 3:9에 명확하게 나타남). 축복을 방해하는 것과 저주는 폐지되었다.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저주를 받으셨으므로(갈 3:13), 기독교인들은 무조건적으로 축복하라는 권고만을 받을 뿐이다(롬 12:14). "그리스도의 교회와 각 기독교인들은 더 이상 아무도 저주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역사는 또한 그의 대적들에게도 유용하기 때문이다"(Watermann; H.-G. Link). (g) 율로기아는 그같은 무조건적인 사랑에서 솟아나는 것이므로 구약성경에서처럼 예루살렘을 위한 모금으로서 선물에 대해 사용된다: "5 이러므로 내가 이 형제들로 먼저 너희에게 가서 너희의 전에 약속한 연보를 미리 준비케 하도록 권면하는 것이 필요한 줄 생각하였노니 이렇게 준비하여야 참 연보답고 억지가 아니니라 6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고후 9:5; 고후 9:6[N]). 여기서 축복과 은사의 관계(참조: 창 33:11)가 나타난다. 바울은 자신이 예루살렘 공동체를 위해 모으고 있었던 연보를 율로기아(한글개역 난외 주: "복")라고 부른다. 이 문맥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