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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12]] 1.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2.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3.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4.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니 5.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6.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7.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8.혹 위로하는 자면 위로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9.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10.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11.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12.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13.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14.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15.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16.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 17.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18.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19.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20.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21.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 cavrisma(5486, 카리스마) 은혜의 선물, 은사.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카리스마는 카리조마이(carivzomai, 5483)에서 유래했으며, 그 의미는 행위로서의 카리스의 결과, 즉 '호의의 증거, 은혜, 은사'를 의미한다. 2. 70인역본의 용법. 명사 카리스마는 70인역본에서 집회서에서만 2회 나오며, '호의'를 나타낸다(7:33; 38:30). 3. 신약성경의 용법. 명사 카리스마는 신약성경에서 17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a) 롬 5:15은 "이 은사(카리스마)는 그 범죄(파라프토마)와 같지 아니하니"라고 선언한다. 이 곳에서 카리스마는 카리스의 의미로 사용된다. 카리스마는 "하나님의 은혜와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으리라"고 하는 생명의 은사이다. 이런 의미가 훨씬 더 공식화된 곳이 롬 6:23; 롬 1:11이다. 여기서는 바울이 나누어 줄 무슨 신령한 은사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고전 7:7에서는 개인적인 면이 부각된다. 여기서 모든 사람이 각각 은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독신 생활이 율법처럼 강제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b) 한 성령을 통해 개개인의 기독자들 안에서 한 은혜가 다방면으로 나타나는 것을 바울은 카리스마, 곧 은혜의 개인적 부여라고 칭한다. 이것은 카리스마의 일반적인 용법과는 다른 특별화된 용법이다. 로마서 12장과 고린도전서 12장에서 바울은 공동체 생활에 있어서의 섬김을 위한 이 특별하고 영적인 부여의 의미를 발전시킨다. 이 카리스마에는 내적인 면과 외적인 면이 있으니 선포의 은사로서의 예언, 섬김, 가르침, 영적인 권면, 회중 가운데서의 다스림이 있고, 또한 구제와 긍휼이 있다(참조: 롬 12:6-8). 이에 추가하여 바울은 고전 12:9 이하와 고전 12:28 이하에서 이미 믿음, 병 고치는 은사, 영을 분간하는 특별한 능력, 방언 말함, 방언 통역함을 열거하였다 또한, 이 기능들의 우선적 순서에 첫째로 사도의 봉사를 둔다(28절). 어떤 은사도 없는 기독자가 있다는 것은 바울에게 있어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동시에 한 개인이 한가지 이상의 은사를 가지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바울 자신을 볼 때에도 바울은 사도직 외에도(고후 1:11), 사도직에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독신의 은사를 소유하고 있었다(고전 9:5). 또한 그는 방언의 은사를 소유하고 있었으며(고전 14:18), 또한 분명히 예언의 은사와 가르치는 은사와 다스림의 은사도 소유하고 있었다. 영적 봉사를 위한 직분은 그가 현재 소유한 카리스마 ((영적 은사))에 의해 결정된다. 물론, 카리스마는 개인의 야망이나 공로에 따라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고전 12:11-27; 롬 12:3-5; 참조: 벧전 4:10). 한편 바울은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 더 좋은 은사들을((하나님께서 가장 크게 영광 받으시고 교회의 덕 세움에 최상의 유익이 되는 바로 그런 은사들... ‘카리스마타 메이조나(크레잇토나’ TR) - dona potiora proestautiora 그 자체가 가장 귀하며 가장 남에게 도움을 주는 것 .)) 열심히 사모하라고 격려하였다(고전 12:31). 이 더 좋은 은사는 공로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기도와 순종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이다.((기도와 순종으로 영적은사들을 열심히 사모하되 더 탁월한 길/삶의 방식과 태도, 곧 믿음 소망 사랑-그중에 제일은 사랑(아가페)-의 길을 따르는 삶을 살라....사랑(아가페)로 사는 삶을 추구하며, 영적 은사들을 사모하며 구하되, 특별히 성경말씀 해석함 통해 듣는 이에게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위로함으로써 사랑을 온전히 이루는데 꼭 필요한 은사인 예언 말하기를 구하고, 방언 말하는 자는 통역함까지 더불어 구할 필요가 있음)) 롬 11:29은 구원 역사에 나타난 이스라엘의 변치 않는 특권들을 카리스마타로 칭한다(참조: 롬 9:4). (c) 딤전 4:14; 딤후 1:6에서 안수식은 직분의 카리스마를 수여한다. 벧전 4:10에서는 사랑으로 하는 모든 봉사가 카리스마이다: "각각 은사를 받은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 여기서 성령의 은사라는 것은 사실상 자질이나 마찬가지이다.(참조: H. Congzelmann; H. -H. Esser). ------------------- diakoniva(1248, 디아코니아) 봉사, 직무, 집사의 직무 = 봉사자(사61:6), 섬기는 자/섬김이(히 1:14), 사역자(시104:4, 히1:7)..주님이 맡기신 일의 실행자 1. 일반 헬라어 문헌과 70인역본의 용법 명사 디아코니아는 디아코네오(diakonevw, 1247: 봉사하다, 섬기다)에서 유래했으며, 봉사하는(섬기는) 활동, 곧 '봉사'를 의미한다. 일반 헬라어와 70인역본에서 여러 가지 의미로 나온다. 그러나 디아코니아는 외경에서 오직 두 번 중요하지 않은 경우에 사용되었다(1Maccabees 11:58; Esther 6:3,5). 2. 신약성경의 용법 디아코니아는 신약성경에서 34회 나타난다, 이 단어는 사도행전에는 흔히 나타나고 바울 서신에는 매우 자주 나타나는데, 복음서에는 눅 10:40을 제외하고는 나타나지 않는다. 신약성경에서 (a) 이 단어는 '식사의 시중을 드는 것'(waiting at table), 더 넓은 의미로 '육신의 식물을 제공하는 것'을 의미한다: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눅 10:40). 초대 교회에서 '식사 관리'는 행 6:1에서 '디아코니아 카데메리네'(개역: 매일 구제), 즉 매일 급식이라고 하였다. (b) 이 단어는 진정한 '사랑의 봉사 수행'(discharge of service)에 대하여 사용된다. 스데반의 집은 성도 섬기는 일에서 그 대표적인 예이다(고전 16:15). 계 2:19에서도 이 '사랑의 봉사'를 의미하며, 사업, 사랑, 믿음, 인내와 연결되어 있다. 이 개념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결정적 요점은 초대 기독교회가 공동체의 교화를 위한 모든 중요한 활동을 디아코니아로 알고 묘사하였다는 사실이다(엡 4:1l - 엡 4:12). 고전 12:4이하에 의하면, 여러 가지 직임(디아이레세이스 디아코니온)과 여러 가지 역사(디아이레세이스 에넬게마톤)에 부합하는 여러 가지 은사(디아이레세이스 카리스마톤)가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서로 다른 봉사들은 모두 같은 주께 바쳐진다. 그들 각자에게 있어 신자는 그의 형제요 그리스도(의 형상)이다. 그는 은혜의 선물로 그에게 맡긴 봉사를 할 책임이 있다. 일반적으로 고전 12:28에 언급된 안틸렙시스(ajntivlhyi", 484: 돕는 것)는 이러한 봉사 행위의 내용, 즉 공동체를 돌보고 도우는 활동을 형성해야 한다. 롬 12:7에서 디아코니아는 프롭헤테이아(예언)와 디다스칼리아(가르침) 사이에 온다. 그러나 행 6:4에서는 말씀의 전파까지도 바로 디아코니아, 즉 생명의 떡으로서의 복음의 제공으로 묘사되어 있다. 전도자의 참된 봉사는 그의 형제들의 구원을 목적으로 하며, 따라서 그는 화목케 하는 말씀을 그들에게 전파함으로 말미암아 텐 디아코니안 테스 카탈라게스(화목케 하는 직책[봉사])를 다해야 한다(고후 5:18이하). 히 1:14에 보면 이 점에서 천사들은 하나의 모델이다: "모든 천사들은 부리는 영으로서 구원 얻을 후사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뇨". 봉사는 복음(Gospel)으로 지향한다. 고후 3:7 - 고후 3:9에서 율법을 지키려는 모든 노력은 디아코니아 투 다나투(개역: 죽게하는 직분), 디아코니아 테스 카타크리세오스(개역: 정죄의 직분)이며, 한편 복음에 대한 믿음은 디아코니아 투 프뉴마토스(개역: 영의 직분), 디아코니아 테스 디카이오쉬네스(개역: 의의 직분)이다. 바울이 새로 만든 이런 문구는 기독교의 봉사(service)의 개념의 변증적 긴장 상태를 나타낸다. (c) 이 단어는 공동체에서 '어떤 직무나 의무의 수행'에 대해 사용된다. 사도의 직분(롬 11:13; 고후 4:1; 고후 6:3이하; 고후 11:8; 행 1:17; 행 1:25; 행 20:24; 행 21:19; 딤전 1:12), 복음 전도의 직무(딤후 4:11)나 마가와 같은 동역자들의 활동(딤후 4:11)은 봉사로서 '어떤 의무나 직무 수행'이다. 골 4:17에서 바울이 아킵보에게 권면한 봉사 활동은 비록 아킵보가 집사인지 아닌지 불확실하지만, 직무상의 활동이다. (d) 이 단어는 '모금'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예루살렘을 위한 모금은 디아코니아로 묘사되었다. 사도의 강조하는 바는 이것이 단순히 외형적인 일이 아니라 기독교적인 사랑의 참된 행동이라는 것이다(롬 15:31이하; 고후 8:1-고후 8:6; 고후 9:1; 고후 9:12이하; 참조: 행 11:29이하; 행 12:25)(참조: Beyer, TDNT). * 식사 대접(행 6:1)을 포함한 공동 식사 친교가 신약성경의 디아코니아를 이해하는데 기본적 요소가 된다. 각 개인의 집에서 '떡을 떼는 것'에 대해, 부자가 가난한 자를 돌보았던 애찬(참조:고전 11:17 - 고전 11:34)에 대해, 그리고 디아코니아에 전념했던 스데반의 집과 같은 가정 교회들(고전 16:15)에 대해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 한다. 힘과 소유물을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사용한 이와같은 봉사는 친교를 지켜 주는 기본적 요소로 볼 수 있다(고후 9:13; 참조: 행 5:4; 고후 9:7). 이 봉사 사역은 또한 지교회로부터 도움을 필요로 하는 타 교회로 확장되었다(행 11:29; 행 12:25; 고후 8:3이하; 고후 9:1 - 고후 9:5). 주고 받은 물질적, 영적 디아코니아는 그리스도의 희생에 대한 인식에서 이루어진다(고후 8:9; 고후 9:12 - 고후 9:15). 금전과 소유물 뿐만 아니라 몸과 생명까지도 포함하는(고후 8:5) 이 봉사 사역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수단이 된다(엡 4:12).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바울은 카리스마적 은사들을 디아코니아(봉사들 services)라 부르는데, 이것들은 전 유기체의 일부인 것이다(고전 12:5; 개역: 직임). 디아코니아는 개개의 특별한 영적 은사(Gift, 롬 12:7)에 대해서도 사용되며(롬 12:7), 마찬가지로 집사 역시 여러 봉사자들 중의 한 부류인 것이다. 바울은 디아코니아의 개념을 더욱 더 확대시켰다. 그는 사도들의 디아코니아에서 표현된 구원의 전체,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들 중에서와 사람들을 위한 하나님의 디아코니아를 보았다. 구약성경에 이미 하나님의 디아코니아가 존재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율법으로 표현되었으며, 따라서 사망과 정죄로 표현되었다(고후 3:7; 고후 3:9).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영의 봉사'(개역: 직분), '의의 봉사, 화해의 봉사'가 시작되었다(고후 3:8이하). 그리고 이 봉사 사역은 사도들에게 위임되었으며, 그들은 그리스도의 사자들로서 "하나님과 화목하라"고 선언한다(고후 5:18이하). 따라서 디아코니아라는 용어는 복음 선포 사역에 대한 전문 술어로 사용될 수 있다(롬 11:13; 고후 4:1; 참조: 딤후 4:5). 나아가서는 교회 전체가 세상을 위해 봉사하는 하나의 몸이다(엡 4:1 - 엡 4:16). 그 구성원들은 곧 "일군들"이며, 교회는 주의 재림을 위하여 준비하는 직원들(functions)이다. -------------------- ejnevrghma(1755, 에네르게마a) 활동, 유효한 능력.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에네르게마(Epicurus 이래)는 에네르게오(ejnergevw, 1754)에서 유래했으며, (a) '활동'(Polyb.), '효능이나 효력', (b) '경험' experience(Plut.)을 의미한다. 2. 신약성경의 용법. 명사 에네르게마는 신약성경에서 2회, 고전 12:6과 고전 12:10에만 나오며, '활동, 유효한 능력...모든 에너지의 근원으로서 참생명 하나님의 일하심의 효력'이란 의미를 나타낸다. 이 두 구절에서 에네르게마는 카리스마(cavrisma, 5486)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6절에서는 거의 균등하지만 10절에서는 뒤나미스(duvnami", 1411)와 관계를 강조한다. (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H. Paulsen)
[[고전12]] =============== 1.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2.너희도 알거니와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 갔느니라 3.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4.은사((카리스마...참생명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생명 성숙, 고양과 충만을 위한 기능적 선물))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5.직분((디아코니아...그리스도의 몸의 지고지선의 유익 위해 위임하신 섬김, 봉사의 직무))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6.또 사역((에네르게마...하나님께서 친히 이루시는 활동))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7.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8.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9.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10.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11.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12.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13.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14.몸은 한 지체뿐만 아니요 여럿이니 15.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16.또 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니 17.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냐 18.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19.만일 다 한 지체뿐이면 몸은 어디냐 20.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21.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지 못하리라 22.그뿐 아니라 더 약하게 보이는 몸의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23.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느니라 그런즉 24.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그럴 필요가 없느니라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귀중함을 더하사 25.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 26.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27.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28.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을 행하는 자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 29.다 사도이겠느냐 다 선지자이겠느냐 다 교사이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이겠느냐 30.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이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이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이겠느냐 3`.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그 자체로서 남에게 가장 큰 유익을 끼치는 영적 은사들을))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가장 탁월한 삶의 태도. 방식)) 너희에게 보이리라 But covet earnestly the best gifts: and yet shew I unto you a more excellent way. ===================== [[엡4]]..... 1.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신앙에 합당하게 되기 위하여 행해야 하는 일반성을 띤 교훈이다. 바울은 그때 로마에서 죄수로 갇혀 있었다. 그리고 그는 "주를 위하여" 또는 주 안에서 갇힌 자가 되었다. 이 말씀은 할 수 있는 한 주를 위한 자라는 뜻을 의미 한다. 이에 대하여서는 3장 1절을 참조하라. 바울은 자기가 갇힌바 된 것을 반복하여 언급한다. 이는 그가 자기의 갇힌 바 된 것을 부끄러워 아니함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었다. 바울은 자기가 행악자로서 고난을 당하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또한 그가 갇힌 것을 반복하여 말한 또 다른 이유는 그가 그들에게 쓴 내용을 부드럽게 또 설득력 있는 입장에서 추천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복음의 교훈을 위하여 고난을 받을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그들도 복음을 가치있게 여기고 진지한 경의 표하고 충성스럽게 지킬 것을 확신하였다. 우리는 여기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 된 한 가련한 죄수의 간구를 읽을 수 있다. 그는 "그러므로 주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1절)라고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너희를 위하여 행하신 것과 또 어떤 자리로 너희를 부르셨는지를 생각해 보라. 이제 내가 너희에게 열심히 구하노니(내게 가련한 조수들이 흔히 그들의 친구들에게 요구하는 것과 같은 무슨 위문품으로 보낸다거나 또 나를 석방시키기 위하여 노력하지 말고) 선한 그리스도인임을 증거하고 너희 신앙과 부르심에 합당하도록 살라. 하나님의 은혜가 너희에게 가져다 준 복된 삶에 부끄럽지 않게 거기에 일치하고 적절하게 행하라. 하나님께서 너희를 이교도의 자리에서 기독교도로 부리신 그 부름에 합당하게 살라"고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에 의하여 자기들이 불리움을 받은 복음과 그것을 위하여 자기들이 불리움을 받은 영광에 합당하도록 살아야 함을 명심하자. 이 둘이 다 그리스도인의 사명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부름을 받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나라와 영광을 마음에 두고 그 나라와 영광의 상속자답게 행해야만 한다. ----------------- 2.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3.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4.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5.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6.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7.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8.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혔던 자들을 사로잡으시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9.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래 낮은 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10.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하게 하려 하심이라 11.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12.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13.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14.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15.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16.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 일치에 대한 교훈(엡 4:2-16) 위의 말씀에서 바울은 좀더 각별한 권고를 하였다. 바울은 4장 안에서 두가지를 자세히 설명하였다. 그 하나는 일치와 사랑이요 또 다른 하나는 순결과 거룩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진지하게 탐구해야 할 과제이다. 만약 우리가 모든 성도들에게 신실한 동료가 되지 못하거나 또는 모든 죄에 대하여 시원한 원수가 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지 못하고 있는"것이 된다. 위의 단원은 상호간의 사랑과 단합과 일치에 대한 권유가 포함되어 있고 또 이러한 요소들을 증진시키는 적절한 수단과 동기들이 취급되고 있다. 성경 안에서 위의 사실만큼 우리에게 열심히 강조된 말씀도 없을 것이다. 사랑은 그리스도 왕국의 율법이며 그리스도 학교의 과목이며 그리스도 가족들의 제복이다. 다음을 생각해 보자. Ⅰ. 일치의 방법. 그것은 "모든 겸손과 온유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는" 것이다(2절). 낮아짐을 통하여 우리는 겸손 즉 자기를 즐겨 낮추어 생각하는 것을 배우게 된다. 이것은 교만과는 상반되는 것이다. 온유함을 통하여 우리는 그것이 인간들이 서로 미워하지 않고 타인들의 결점을 쉽게 공격하지 않도록 하는 인간 영혼의 가장 뛰어난 성품임을 배우게 된다. 또한 온유함은 진노한 원한과 격분에 반대되는 성향이다. "오래 참음"은 복수를 하려함이 없이 해 받음을 인내로 견디는 것을 의미한다.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는 것"은 사랑의 정신에 입각하여 타인의 약점으로 인하여 사랑하는 것을 그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가장 훌륭한 그리스도인이란 서로 용납하며 서로 상대방을 가장 훌륭한 사람으로 여기며 다른 사람의 풍성한 은혜는 고무하나 그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는 자를 말한다. 우리는 자신에게서 스스로 용서할 수 없는 많은 요소들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서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고 여겨지는 죄를 발견하였더라도 지나치게 나쁘게 여기지 말고 우리가 자신을 용서하는 것처럼 그를 용서해야 한다. 이러한 행위가 없이는 일치는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일치를 위한 첫 걸음은 겸손이다. 겸손함이 없이는 온유함이나 오래 참음이나 용서가 있을 수 없으며 이 모든 것이 없이는 일치란 있을 수 없다. 교만과 격정은 화평을 깨뜨리며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실수를 저지르게 한다. 겸손과 온유함을 화평을 회복시키며 그것을 유지하여 준다. "교만과 격정은 논쟁을 일으키고" 겸손은 사랑을 가져 온다. 겸손하면 겸손할수록 더욱 더 일치감이 형성된다. 만약 우리가 온유함과 겸손한 마음을 지니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를 부르신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에 의하여 부름을 받고 그를 위하여 부름을 받은 그분은 뛰어나게 마음을 온유하고 겸손하셨으며 또 그가 우리에게 자기를 배우도록 명령하셨기 때문이다. Ⅱ. 바울이 표현한 일치의 특성. 그것은 "성령이 주신 일치"이다(3절).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되는 자리는 마음과 영혼 가운데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됨이란 생각의 일치에 있는 것이 아니요, 예배의 형식과 모양이 하나 되는 것이 아니라, 다만 한 마음과 한 영혼으로 합하는데 있는 것이다. 이러한 마음과 사랑의 일치야말로 하나님의 성령이 하나되게 하심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이 일치는 성령에 의해 와지는 것이며 성령의 열매 가운데 하나이다. 이 일치됨을 보존하도록 우리가 노력해야 할 것이다. 본문 "힘써 지킴"이란 단어는 복음적 용어이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야만 한다. 만약 다른 사람이 우리와 다투고자 한다면 우리는 가능한 한 최선을 다해 그들과 다투지 아니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만약 다른 사람이 우리를 멸시하고 미워한다면 우리는 그들을 멸시하거나 미워하지 아니하도록 힘써야 한다. 또한 본문의 "평안의 매는 줄"이 있다. 이 말은 평화가 사람들을 하나가 되게 하고 서로서로 친교를 갖고 살도록 매는 줄이란 뜻의 말이다. 평화로운 성격과 행동은 그리스도인을 하나가 되게 한다. 반면에 불일치와 논쟁은 그들의 마음과 사랑의 결속을 해치고 분열을 초래한다. 약한 줄이 많이 모이어 꼬여지면 강하게 된다. 평화의 결속은 사회의 힘이 된다. 모든 선한 사람들과 그 사회의 모든 사람들이 꼭 같은 길이와 꼭 같은 정서와 꼭 같은 판단을 하게 되는 사회가 와진다는 것이 아니라, 평화의 결속이란 그들 모두의 상이점에도 불구하고 서로 하나가 되게 한다는 말이다. 여러 나뭇가지를 한 데 묶은 것처럼 거기에는 길이가 다르고 강도가 다른 것들이 함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로 묶이고자 노력 할 때 그들은 그 주의 가장 굵고 강한 것보다 더욱 덩 강한 힘을 낼 수가 있을 것이다. Ⅲ.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의 일치를 증진시켜 주는 여러 가지 동기들. 바울은 우리를 설득하기 위하여 몇 가지를 역설하였다. 1. 우리의 기독교 신앙에는 기쁨과 영광이 되고 있는 많은 일치된 것들이 있음을 상기시킨다. 바울은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하나이니" 마음도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한다(4절). 하나의 몸에 두 개의 마음이 있다면 이는 괴물일 것이다. 몸이 하나이라면 그몸에 속한 모든 것이 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보편적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비한 한 몸이며 훌륭한 그리스도인라면 누구나 한 헌장 아래 규합되어 한 몸을 이루어야 하는 것이다. 그 헌장은 복음의 헌장으로 그의 선물과 은혜에 의하여 이 몸을 소생시키고 생기있게 하고 하나의 계약은 복음의 다스리는 성령에 의하여 활력있게 역사하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께 속하여 있다면, 우리는 한 분, 같은 성령에 의하여 활력을 공급받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또한 본문에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리라"(4절)고 하였다. 소망은 본문에서 소망해야 할 대상, 소망해야 할 것, 곧 하늘 나라의 유업을 지시해 주고 있다. 이스라엘을 위하여 우리는 불리움 받은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영원한 생명이라는 동일한 소망으로 부르심을 받았다. 그들이 모두가 소망을 두는 한 분, 그리스도가 있고 그들 모두가 바라보고 나아가는 하나의 하늘 나라가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한 마음을 품어야 한다. 이 말씀은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명령에 의하여 모든 성도들은 직접적으로 그에게 복종해야 한다. 또한 "믿음도 하나이요"라고 하였는데 이는 기독교 신앙의 가르침이 들어있는 복음의 의미하는 말이다. 또는 이 말은 이로 인하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구원을 받은 믿음(그리스도를 믿음)이란 동일한 은혜를 말하는 말씀이다. 또한 "세례도 하나이요"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우리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우리의 신앙을 고백한 바로 그 세례를 말하는 것이다. 또한 세례란 이로 인하여 우리가 자신을 그리스도와 관계 짓는 같은 성례적인 계약을 말한다. 또한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다"(6절)고 하였다. 이 한 분 하나님은 교회의 모든 진실된 회원들을 그의 자녀도 삼으시는 바로 그분을 말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창조에 의하여 모든 인간의 아버지가 되신 것처럼 이제는 특별한 관계에 의하여 보든 교인 아버지가 되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만유 위에 계시다"고 했는데 그는 그의 본질상 만유 위에 계시며 그의 품격이 영광스럽게 흠없이 완전하다는 점에 있어서 만유 위에 계신다. 또한 이 말은 하나님이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시고 특히 주의 교회를 섭리로 다스림을 뜻하는 말이다. 또한 "만물을 통일하신다"고 하였는데 이는 그가 그 자신의 섭리에 의하여 만유를 주장하시고 다스리심을 뜻하는 말이다 또한 "만유 가운데 계신다"고 하였는데 이는 그가 그의 성령과 특별한 은총에 의하여 성전에 거하시는 것처럼 모든 믿는 자들 가운데 계심을 뜻하는 말이다. 이 같이 많은 "하나됨"들이 있는데 한 가지 곧 "마음의 하나됨" 또는 "영혼의 하나님"만이 없다면 얼마나 애석한 일인가. 2. 그리스도께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수여하신 은사의 다양성을 상기시킨다. 그러므로 본문에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을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7절)라고 하였다. 비록 그리스도의 교회에 속한 회원들이 그렇게 많은 점에 일치하였다고 하더라도 그들에게 몇 가지의 다양성은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 다양성이 그들 가운데서 차별 의식을 가져 와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이 모든 다양한 은혜는 같은 위대한 목적을 위하여 계획되고 동일한 풍성한 주재자로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인 우리 각 사람에게 은혜 즉 은혜의 선물이 주어졌다. 어떤 사람에게는 좀 더 큰 은사가 다른 사람에게는 좀 덜한 은사가 주어졌다.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이 받은 다양한 은사는 초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논쟁의 계기가 되었다. 그 은사에 따라 어떤 사람은 바울을 위하였고 다른 한편은 아볼로를 위하였다. 그러나 바울은 그 문제에 관하여 다툴 필요가 없음을 보여 준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은 보편적인 덕성을 위하여 함께 각각의 임무에 쓰여지고 있다. 왜냐하면 모든 만물에게는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각기 임무가 주어졌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들에게 각자에게 가장 적합한 것으로 여겨지는 은사를 주셨다. 모든 사역자들과 모든 그리스도의 일원들을 그들이 소유한 은사와 은혜에 대하여 그의 덕을 입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바로 이것이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만 하는 이유이다. 왜냐하면 "우리 각 사람에게 은혜를 주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은혜를 주시고 그의 은사들을 내려 주신 모든 사람들은(비록 이 은사들이 규격이 다르고 명칭이 다르고 느낌이 다르더라도) "서로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사도는 이 경우를 그리스도께서 수여하신 몇 가지 은사에 특별히 적용시킨다. 먼저 사도는 이 은사들이 그리스도에 의해 주어졌음을 다윗의 말을 통하여 밝힌다. 다윗은 이 말을 통하여 그가 은사를 주실 것을 예언했었다(시 68:18). 그는 이렇게 인용한다. "그러므로 그가 이르기를" 즉 시편 기자가 말하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고 인용한다. 다윗은 그리스도의 승천을 예언하였다. 바울은 본문에서 이 말씀에 대하여 이후에 나오는 세 절의 말씀 속에서 본문에서 이 말씀에 대하여 이후에 나오는 세 절의 말씀 속에서 자세히 설명한다. 그는 먼저 "그가 올라가셨다"는 말씀에 대하여 언급한다. 사도는 그리스도가 인간의 모습 그대로 승천하신 곳, 즉 가장 높은 하늘 나라를 염두에 두고 이 말을 하였다. 또한 이 말을 통하여 사도는 그가 올리움을 받은 상태, 즉 그의 아버지에 의하여 높임을 받으시고 특별히 영광을 입으신 상태를 나타내고자 하였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에 대하여 마음을 쏟아 보자.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우리의 복된 구세주께서는 하늘 나라에 오르셔서 하나님의 보좌의 우편에 앉아 계신다. 그리고 이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신다는 완전한 증거가 된다. 위대한 정복자가 개선 행진을 할 때에는 자기 포로 중에 뛰어난 자들을 사슬에 매달고 군사들과 관중들에게 상금과 전리품을 뿌려 주는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는 승리의 정복자로 하늘에 오르셨을 때 "사로잡힌 자들을 데리고 가셨다." 구약에서 이 말씀은 이전에 다른 사람들을 포로로 사로잡았던 바로 그 강한 적들이 정복되었음을 의미하는 말로 쓰여졌다(삿 5:12 참조). 그런데 본문에서 사로잡음은 이전에 우리를 사로잡았던 모든 영적인 적들을 사로잡음을 말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전에 우리를 정복하였던 자들을 정복하셨다. 즉 죄와 사탄과 죽음 같은 것들을 정복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먼저 "십자가 위에서" 이 모든 것에 대하여 승리를 거두셨다. 그러나 그 승리는 그리스도의 승천으로 완성되었다. 즉 그가 만유의 주가 되시고 죽음과 음부의 열쇠를 그의 손 안에 쥐셨을 때 그의 승리는 완성되었다. 그리고 "그가 선물을 인간을 위해서 받으셨다"고 기록되어 있다(역주: 한글 개역과 틀림, 한글 개역은 선물을 인간에게서 받으셨다로 되어 있음).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위하여 받으신 것은 인간들에게 은혜와 은사의 막대한 분량을 주시기 위해서였다. 특히 그는 성령의 은사로써 그의 제자들을 풍성하게 하셨다. 바울은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승천에 관하여 먼저 언급한 후 먼저 "그가 내리셨음"을 말한다(9절). 바울의 이 말을 한 의도는 다음과 같다. 즉 다윗의 그리스도의 승천에 관하여 말했 때 그는 그리스도의 지상에서의 겸손하심에 대해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바울은 보고 있다. 왜냐하면 그가 승천하셨다는 것은 그가 먼저 아래로 내려 왔음을 나타내 주기 때문이다. 즉 그의 승천은 지상에서의 그의 겸비의 강력한 증거가 된다고 보고 있다. 그 다음에 바울은 "땅 아랫 곳으로" 내리셨음을 말한다. 이 말씀은 "내가 은밀한 데서 지음을 받고 땅의 깊은 곳에서 기이하게 지음을 받은 때에 나의 형제가 주의 앞에서 숨기우지 못하였나이다"(시 139:15)라고 한 다윗의 시에 비추어 볼 때 그의 성육신을 뜻함이라고 볼 수 있겠다. 또는 "나의 영혼을 찾아 멸하려 하는 저희는 땅 깊은 곳에 들어가며"(시 63:9)라는 말씀에 따라 그의 장례를 의미한다고 볼 수도 있겠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죽음을(그의 선조물이 말하였듯이) "땅의 깊은 곳에 들어가심"이라고 불렀다. 그는 육신을 입으심으로 이 땅에 내려 오셨다. 또한 그는 장례되어 땅 아래로 내려 가셨다. "요나가 고기의 뱃 속에 사흘 낮, 사흘 밤을 지낸 것처럼 인자도 땅 속에서 사흘을 거하리라"는 말씀대로 이루어졌다. 다음에 사도는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케 하려 하심이라"(10절)고 말씀한다. 즉 그리스도께서(보이는 하늘인) 별과 공기가 있는 하늘 훨씬 위 즉 제일 높은 하늘로 오르셨다는 말이다. 바울은 "이는 만물을 충만케 하려 하심이라"고 말한다. 즉 교회에 속한 모든 사람들에게 각자의 조건과 상태에 따라 적합한 은사와 은혜를 주신다는 말씀이다. 우리 주께서는 먼저 자기를 겸손히 낮추심으로 높임을 받으셨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그는 먼저 내려오셨고 그 다음에 올라 가셨다. 바울은 다음에 승천할 때에 그리스도가 주신 은사가 무엇이었는가를 우리에게 말씀한다. 먼저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은사로써 "그 중의 얼마를 사도로" 세우셨음을 말한(11절). 물론 그리스도께서는 승천하시기 전에 이미 그들 중 몇 명을 사도로 보내셨었다(마 10:1-5). 그러나 그후 다시 한 사람이 추가되었다(행 1:26). 그들 모두에게 주님께서 특별한 방법과 분량의 성령을 볼 수 있게 부어 주심으로 그들은 더욱 확고히 무장되게 되었고 부끄러움 없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리스도께서 승천 때에 교회에 부으신 은사는 화평과 화해의 사역의 은사였음을 기억하자. 사역은 은사는 그리스도 승천의 결실이다. 사역자들은 여러 가지 은사를 받았는데 이 은사는 주 예수에 의하여 그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교회를 위해 주신 두 종류의 사명이 있다. 그 하나는 "특별한" 것으로 "사도와 선지자와 복음 전하는 자들"과 같이 교회에서 상위를 점하는 직분을 가리킨다. 그 중에 사도가 으뜸이다. 이들 사도들을 그리스도는 직접 부르셨고 특별한 은사와 기적을 행하는 능력과 그리스도의 진리를 빠짐없이 전하는 사명으로 무장시키셨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이적과 복음의 소명을 이미 받았으므로 복음을 전파하고 교회를 세우고 다스리도록 그는 그들을 보내셨다. 또 선지자라 함은 여기서 구약의 말씀을 설명하고 앞으로 일어날 일을 예언하던 사람으로 보여진다. 복음 전하는 자는 안수받은 자들로(딤후 1:6) 바울이 전도 여행에 데리고 다닌 사람들이며(갈 2:1), 사도들이 이미 세운 교회를 안정시키기 위하여 보내졌으며(행 19:22) 한 군데에서 정착하여 있지 아니하고 언제든지 다시 부름을 받으면 옮겨갔다(딤후 4:9). 또 다른 하나는 보통의 사역자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목사와 교사들과 같이 좀 낮은 위치에 속하고 또 좁은 범위에서 활동하도록 선택된 자들을 가리킨다. 어떤 이들은 이 두 가지 명칭이 한 직분을 가리키는 말로 본다. 또 다른 이들은 이 두 명칭은 각각 구별된 직분을 말하는데 둘 다 교회 안에 있으며 일반적인 직분이라고 설명한다. 목사들이 개개의 교회 안에서 제일 우두머리로 정한 사람인데 그리스도께서 정하신 방법에 따라 성도들을 인도하고, 교훈하고, 말씀으로 먹이는 자들이다. 그들은 또한 자주 사제나 장로라고 불리웠다. 교사들도 교훈을 통하여 성도들을 인도하고 복음을 전하는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이었다. 우리는 여기서 그리스도가 그의 교회안에서 자기가 원하시는 대로 직분을 정하고 또 그 직책에 합당한자들을 세우시는 것이 그의 대권임을 알게 된다. 교회 안에 처음에도 이렇게 여러가지 직책이 있었고 지금까지 여러 은사들이 있다는 사실은 교회의 부요함을 보여 준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그의 교회에 대하여 얼마나 친절하신가! 또한 그는 그의 교회와 교회의 개발을 위해 얼마나 주위를 기울이시는가! 그가 승천하실 때에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의 은사를 부어 주셨다. 성령의 은사는 다양하다. 어떤 것은 좀더 크고 어떤 것은 분량이 적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교회의 유익을 위하여 있는 것이다. 이 점이 다음의 내용에 기록되고 있다. 3. 인간들에게 여러 가지 은사를 주신 그리스도의 대 목적과 계획. 그리스도의 은사는 그의 교회의 유익을 위하여 주신 것이며 그의 나라와 유업이 인간들에게 있어지게 하기 위하여 주어진 것이다. 이 모든 은사가 이러한 보편적인 목적을 위하여 계획되었다는 사실은 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다른 사람의 은사를 시기하지 아니하고 서로 사랑해야 하는가에 대한 좋은 대답이 될 것이다. 이 모든 은사는 "성도들은 온전케 하려 하심이다"(12절). 즉 이전에는 죄로 인하여 분리되어 있고 떨어져 있던 사람들을 질서있게 영적인 자리로 나아오게 하며 또한 그 안에서 좀 더 강해지고 확고해지도록 하며 앞으로 나아오게 하며 그러므로 각자가 각자의 고유한 위치와 기능 가운데서 전체의 유익을 위하여 공헌하게 하기 위해서이라는 말이다. 또한 "봉사의 일을 하기 위해서"라고 하였다. 즉 그들이 복음이 가르치는 일을 하게 하며 그들의 목회적 기능의 분야를 성공적으로 감당하게 하시기 위하여 세우셨다는 말이다. 또한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13절)고 하였는데 이 말씀은 교인들의 받은 은사를 증가시키고 새로운 성도를 늘림으로써, 그리스도의 신비한 몸이 되는 교훈를 세우게 하기 위하여 그들을 세우셨다는 말이다. 이 모든 것이 우리로 하여금 하늘 나라를 예비하게 하기 위하여 계획된 것이다. 그러므로 13절에 "우리 모두가 ~에 이르기까지"라고 본문에 기록되어 있다. 위에서 말씀되어진 은사와 직분들은 성도들이 완전해질 때까지 교회 안에서 지속된다는 것이다. 이 은사들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아는 지식과 믿음 안에서 하나가 될 때까지(즉 모든 참된 신자들이 같은 귀중한 믿음에 의하여 함께 모일 때까지) 계속된 것이다. 또한 이 은사로 말미암아 우리가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며 위대한 중보자가 되심을 사변적으로 알고 인정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깊은 사랑으로 그를 인식하게 되며 모든 마땅한 영예와 신뢰와 복종을 그에게 바치게까지 되는 것이다. 또한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라고 하였는데 이는 우리에게 은사와 은혜가 충만하여 우리가 이 세상에서 예속된 것과 같은 어린아이와 같은 연약함을 벗어버리도록 해 주신다는 말씀이다. 또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13절)라고 하였는데 이는 그리스도의 충만함으로부터 오는 모든 은사 안에서 무르익고 완전히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을 말한다. 또는 그리스도를 충만하게 하신 그리고 그의 신비한 몸을 완성시키신 그 장성함의 분량에까지 성도들이 이르게 됨을 말한다고 볼 수도 있다. 이제 우리는 완전한 세상에 갈 때까지는 결코 온전한 인간이 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는 충만함이 있고 이 충만함은 그리스도께로부터 나온 것이다. 그리고 충만으로의 성장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 위임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늘나라에 도달할 때까지는 그 충만한 분량에는 결코 이르지 못할 것이다. 그들이 이 세상에 속하여 있는 한 하나님의 자녀들은 성장한다. 라이트푸트(Dr. Lightfoot) 박사는 사도가 여기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아는 믿음과 지식에 일치가 되어 결합함으로 그들이 완전한 인간을 이루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게 하려고 이 말씀을 한 것으로 이해한다. 바울은 다음 구절에서 그의 거룩한 제도를 세우신 하나님의 목적이 무엇이며 그리고 이 제도들이 우리에게 주는 결과가 무엇인가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즉 그가 교회에 여러 가지 직분을 세우신 뜻과 목적이 무엇인가를 말씀한다. (1)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않게 위해서 이다"(14절). 이 말씀은 우리가 지식에 있어서 더 이상 어린 아이가 되거나 믿음이 약하여지거나 우리의 판단력이 일관되지 못하거나 쉽게 모든 유혹에 굴복하고 이 사람 저 사람의 비위나 맞추려하고 사람들이 시키는 대로 좌우되는 일이 없도록 하게 하기 위해서 라는 말이다. 어린 아이들은 쉽사리 강요당한다. 우리도 이런 것을 주의하여 중심이 안잡힌 배와 같이 또는 공중의 구름과 같이 진실함도 없고 견고성도 없으면서 바람처럼 넓게 펴져있는 교훈에 의해 이리저리로 흔들리지 않도록 주의하여야겠다. 또한 "사람의 궤술"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한다고 하였다. 이 말씀은 도박으로부터 취해진 비유이며, 악한 자들의 간교한 행악함을 의미한다. 또한 "간사한 유혹에 빠져"라 하였는데 이는 유혹을 하고 또 속이는 길을 찾음에 있어서 재주 있음을 의미하는 말이다. 이는 그 다음에 "속이려고 기다린다"는 말을 통하여 그 간교함의 실태가 드러난다. 즉 약한 자들을 유혹하여 그들을 진리로부터 끌어내기 위하여 숲 속에 기다리는 것처럼 한다는 말이다. 다른 사람들을 거짓된 교훈과 죄에 이르도록 유혹하여 속이는 자들은 대단히 악하고 불경건한 사람들임에 틀림이 없음을 기억하자. 바울은 여기서 그러한 사람들이 이를 위하여 궤술과 간사함을 사용하는 비열한 인간들이라고 말하였다. 우리들이 그러한 유혹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는 가장 최선의 길은 거룩한 진리를 배우고 그리스도의 성령의 빛과 은사를 얻도록 기도하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진리를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대로 알아야 하며 그 진리 안에서 확고히 설 수 있게 되어야 한다. (2) 이는 우리가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말하기 위해서이다"(15절). 또는 사랑 안에 있는 진리를 따르며 또는 믿음의 형제들을 사랑하는 일에 신실하게 되기 위해서라는 말이다. 우리가 진리되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추종한다고 하면 우리는 서로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 사랑은 놀라운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사랑과 더불어 진리를 보존하도록 주의해야만 한다. 또한 진리도 놀라운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것을 사랑 가운데서 전하며 다툼으로 말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필연적으로 요구 된다. 진리와 화평 이 두가지는 함께 공존해야 한다. (3) 우리가 "범사에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게 하기 위해서이다." 즉 그리스도 안으로 더욱 더 깊이 뿌리를 내리게 하기 위해서이다. 또한 범사에 즉 새로운 인간으로서 갖추어야 할 모든 요소와 사랑과 믿음과 지식에 있어서 그에게까지 자라야 한다고 말씀한다. 우리는 성숙함을 향하여 성장해야 한다. 성숙함은 어린 아이와 상반되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성장하는 사람이야 말로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증명하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알고 그를 믿고, 그를 사랑하고, 그를 의지할수록 더욱 모든 은혜가 우리에게 풍성하게 될 것이다. 그는 우리의 머리이시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장하여야만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의 머리되시는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릴 수 있게 된다. 그리스도인의 성장은 곧 그리스도의 영광인 것이다. (4) 우리가 한 몸의 지체처럼 서로 돕게 하기 위해서이다(16절). 여기서 바울은 자연적인 몸과, 그리스도의 신비한 몸을 비교하여 설명하였다. 물론 이 신비한 몸의 머리되시는 이는 그리스도이다. 바울은 우리의 몸의 각 지체가 각각의 성장과 발전을 위하여 상호간에 교통하며 연합하여야 하듯이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도 은혜 안에서의 영적인 발전과 심장을 위하여, 서로 사랑하고 일치해야 하며 각각의 은사의 열매들을 더불어 나누어야 한다고 말씀한다. 그에게서(즉 각 지체에게 지시를 하며 자양분을 전달하는 머리이신 그리스도부터)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각 부분이 일치하여 신체를 도움으로 또는 몸의 동맥과 정맥과 같은 성령, 믿음, 사랑, 성례전 등이 그리스도인들을 머리이신 그리스도에게 또한 동료 지체인 각 사람들과 서로 일치하게 도움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그들이 질서있게 또한 확고하게 일치하며 각자가 자기의 자리를 지킴으로)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즉 다시 말하면 어떤 이들이 말하는 것처럼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능력을 따라, 그리고 각 지체가 몸 안에서의 제각기의 위치를 지키고 임무를 수행함에 따라 역사함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성령은 그리스도께서 각 지체에게 충분하시다고 판단할 때까지 하나님이 그의 큰목적, 즉 그 몸을 자라게 하기 위하여 정하신 방법들로 효과있게 하려고 능력으로 역사하신다. 또는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머리로서 각 지체를 명령하고 소생시키는 "그리스도의 능력에 따라" 서라는 말씀으로 볼 수도 있다. 또는 각 지체의 "효율적인 역사에 따라"서란 말씀으로도 볼 수 있다. 즉 각 지체가 자기 받은 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고 각 지체에게 맡겨진 대로 모두에게 자양분을 공급하므로 한 말씀으로도 볼 수 있다.) 그 몸을 자라게 한다. 이러한 자람은 몸을 위해서는 필수적인 것이다. 그리스도인 각자는 전체 몸의 유익을 위하여 그리스도께로부터 은혜와 은사를 받았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이로써 몸이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워지는 것이다"(16절). 우리는 이 말씀을 다음 두 가지 내용 중 한 말씀이든지 또는 말로써만의 그리스도와 타인들에 대한 사랑에게 행동으로 실현되는 것을 의미하든지 일 것이다.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상호간 사랑은 영적인 성장을 가져 온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육신의 덕을 세우는 것은 사랑 안에서 가능하다. 반면에 "서로 분열하여 싸우는 나라는 서지 못하리라." =======*12.여호와를 경외하는 자 누구냐 그가 택할 길을 그에게 가르치시로다 *13.그의 영혼은 평안히 살고 그의 자손은 땅을 상속하리로다 *14.여호와의 친밀하심이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있음이여 그의 언약을 그들에게 보이시리로다((시25:12-14))====
[[ 오늘날 선지자란 어떤 직분을..?(엡2:20~22)]]....거룩한 로맨스 하나님 음성 듣기 1,2권!!..권영철
====>[개인적인 생각과 바램...하나님과의 친밀함이 열쇠....] ...화자는 (HS통해 하나님말씀을 궁구-해석-깨달아 선포함으로써, 몸 전체를 섬겨 유익하게 하는 생명 은사로서) 예언의 은사와 (주님의 보냄을 받아 그리스도의 온전한 몸을 섬기는 직분의 직능인) 선지자적 포괄적 직능을 혼동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또한 선지자적 직능 영역을 임의대로 제한함으로써 HS의 주되심을 제한하는 것은 아닐까... ::::: 신약교회에서의 선지자 직능을 두고 [예언을 현재 장차 오실 JC에 대한 말씀 + 회개촉구의 말씀]으로 그 범주를 규정하고, 이미 JC가 오신 후인 현재 교회에는 회개촉구의 말씀 직능이 더 중요하다]고 위에서 제기한 바에 대해 ::: 아직도 다 알지 못하고 초월적이며, 늘 새롭고 무한하신 기묘자 하나님의 자기계시에 대해 열린 태도로 접근하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느껴지며, 성경에 묘사된 선지자적 직능 범주의 중요성과 적용가능성을 믿는 이 개개인의 상대적 취사선택의 문제로 두는 것보다 그 어느것도 배제하지 않고 오히려 성령HS께서 주도하심을 따르는 [전도와 선교의, 때와 장소라는 현장성에 따른] 직능의 융통성 관점으로 보는 것이 더 적합하지 않을까 느껴짐. ..... 어떤 경우라도, 어떤 상황과 환경에서라도 기름부음 받은 선지자 직능의 준비와 나타냄을 주도해 나가시는 분은 주 곧 HS이시며, 신약교회시대-은혜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믿는 이들로서는 하나님의 경륜, 곧 하나님나라-그리스도의 몸인 우주적 교회의 확장과 회복, 그 참생명의 성장과 성숙, 영적자녀들 산출이라는 측면에서 전체를 통괄해서 파악하고 언제든지 HS께서 준비시키시는 바로 그것을 따르는 것이 더 합당할 듯. ..... 실제적 영적 전투의 최전선인 전도와 이방선교 현장, 영적 최전선에서는 초대교회 때와 마찬가지로 오늘날도 여전히 HS께서 주도하시는 바 [미래에 대한 예언도 교회에 꼭 필요할 때 때때로 주시는 것이지만<행11:27-28>, 선지자적 직능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제자들의 하나님나라 복음을 JC이름으로 선포함[전도자-사도적 직능]과 함께 이미 주신 바 원수사탄의 권세를 깨뜨려 자유케 하는 JC이름으로 권능사역(--치유, 축사, 소생케 하심 등 모든 표적...모세와 엘리야에게서도 볼 수 있음)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은 자명하다. ...., 따라서 선지자적 직능안에 있는 설교를 포함한 하나님의 말씀인 JC복음 선포 전반에 더하여 미래에 대한 예언 부분도 마찬가지로 제한하기 보다는 [꼭 필요하다면 HS께서 알게 하신다]는 열린 마음으로 HS의 주도하심에 대한 지식과 이해, 훈련-준비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 한편, 이미 형성된 지역교회가 있는 곳에서는 예수그리스도를 온전히 알고 사랑하며 섬기는 가운데 그분을 유일한 참생명으로서 풍성히 누리며 내적 성령열매와 외적 전도의 열매로 표현되는 참생명의 성장성숙, JC를 빼어닮는 영적 자녀들과 사도-선지자-복음전도자-교사-목자등 오중직분자들의 풍성한 산출로 귀결되는 순결한 신부, 어린양의 아내로 준비되어 감을 위한 이해가 필요한 것은 아닐까. ..... 신약성경에서 보듯, 거짓=가짜가 있다는 것은 참됨=진짜가 있기 때문에 혼란을 부추겨서 넘어지게하려는 사탄의 궤계가 이 땅에 가견적인 하나님나라가 도래하기까지는 오늘날도 여전히 존재하기에 경계함으로써 깨어있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닐까. ..... 영으로 영을 분별하는 것이 여전히 어렵고 번거로운 일이라 해도 그것이 정말 살아계신 하나님을 참되게 드러내는 일이라면 섣불리 선지자직능 범위를 개개인의 의견과 관점에 따라 임의대로 제한하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시켜서라도 하나님과 하나님나라를 위해 HS을 구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 아닐까.. 오직 순전한 사랑겨운 순종으로 주께 반응하며 기도-말씀-금식으로 HS과 함께 거하려 하는 이는 과연 누구일까... ----초대교회 사도들의 사역 주안점들을 구태여 구분해 보자면 사도바울까지는 [근본 머릿돌은 JC자신...사도와 선지자들의 기초 위에] 성령의 거하시는 전의 확장인 바 , 하나인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건축과 확장, 외연 확대...사도요한의 경우는 그 위에 한걸음 더 나아가 교회의 생명성의 견고함 회복과 확장, 생명누림을 위한 필수요건들을 성찰함과 동시에 주님 뜻에 합당한 교정과 보수-수축-재건-확장사역을 통해 그리스도를 누림으로써 사랑과 생명의 온전함을 회복-확장, 생명산출하는 것에 주안점을 두고 있는 듯 하다. ================== [눅 10 : 19]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예수이름의))권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 "Behold, I have given you authority to tread on serpents and scorpions, and over all the power of the enemy, and nothing will injure you. ===전도자=== [눅10 ; 1-24] 1.그 후에 주께서 따로 칠십 인을 세우사 친히 가시려는 각 동네와 각 지역으로 둘씩 앞서 보내시며 2.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3.갈지어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4.전대나 배낭이나 신발을 가지지 말며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며 5.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말하되 이 집이 평안할지어다 하라 6.만일 평안을 받을 사람이 거기 있으면 너희의 평안이 그에게 머물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7.그 집에 유하며 주는 것을 먹고 마시라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옮기지 말라 8.어느 동네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영접하거든 너희 앞에 차려놓는 것을 먹고 9.거기 있는 병자들을 고치고 또 말하기를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가까이 왔다 하라 10.어느 동네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아니하거든 그 거리로 나와서 말하되 11.너희 동네에서 우리 발에 묻은 먼지도 너희에게 떨어버리노라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을 알라 하라 12.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 날에 소돔이 그 동네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13.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14.심판 때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15.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16.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요 나를 저버리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저버리는 것이라 하시니라 17.칠십 인이 기뻐하며 돌아와 이르되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18.예수께서 이르시되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19.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 20.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21.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시며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22.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구인지 아는 자가 없나이다 하시고 23.제자들을 돌아 보시며 조용히 이르시되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 24.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많은 선지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바를 보고자 하였으되 보지 못하였으며 너희가 듣는 바를 듣고자 하였으되 듣지 못하였느니라 ================= zwhv(2222, 조에) 생명 life.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조에(Homer 이래)는 '생명(life)'을 의미한다. (a) 조에는 헬라에서 유기적 존재들, 동물, 사람, 식물의 물리적 생명력을 의미한다. 생명은 물건이 아니라 모든 살아있는 피조물을 특징 지우는 생명성(vitality)이다. 각 개개인 뿐만 아니라 전 우주까지도 살아있는 유기체, 또는 영혼을 갖고 있는 세계로 생각되었다. (b) 헬라인들은 세 번째의 성분, 곧 이성 Reason, 정신 mind, 이해력 understanding(nou'", 3563)이 인간의 생명을 특징 지우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소마(sw'ma, 4983)와 또한 다소간 프쉬케(yuchv, 5590)가 자연적 생명을 구성하는 반면 누스(nou'", 3563)는 외부로부터 인간 생명으로 들어가 이 생명을 자연적 생명, 즉 동물의 생명 이상으로 향상시키고 여러 가지 양자택일을 할 수 있는 하나의 존재의 유형을 생산해내는 신적 요소인 것이다. (c) 만약 신의 조에가 누스와 관련되어 있다면, 이것은 조에가 자연의 생명력을 포함하면서 동시에 초월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의 최고 가능성은 또한 누스이며, 누스는 육체와 분리될 수는 없지만, 육체와 구별함으로써만이 그 목적을 성취할 수 있다. 따라서, 참된 인간의 조에는 사람이 그것을 통해 몸과 혼을 결합함으로 조온이 되는 조에가 아니다. 프쉬케는 물질에 있어서 생명력의 원리이지만, 이것은 또한 물질과 대조되는 것인 인간의 자아(selfhood)의 원리이기도 하다. 이와 마찬가지로 조에는 자연의 현상으로서의 생명이지만 또한 특별히 인간의 생명이기도 하다. 이 인간의 생명의 가능성은 유기적인 본질에서 성취되지 않으며 이것은 종(species)의 영속화를 넘어선 의미를 지닌다. 인간의 생명은 그 자체의 운명을 가지며, 행복과 불행을 알고, 그 자신의 가능성에 대해 인식하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의 생명은 그것에 고유한 것이 무엇인지에 관한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2. 70인역본의 용법 조에는 70인역본에서 약 260회 나오며, 거의 대부분 히브리어 하이('살아있는' 것)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조에는 무엇보다도 생명의 길이나 질병, 죽음과 구별되는 생명력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때리시고 치료하시는 생명과 역사의 주인이시다. 후에 하나님의 선물인 생명은 영원한 생명이다(참조: 마카베오사서 18:18). 고대의 비문들은 지상의 생명에 대해 언급을 한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명사 조에는 신약성경에서 135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a) 조에는 자연적 생명을 나타낸다. ① 조에는 자연적 죽음과 구별되는 자연적 생명을 가리킨다. 롬 8: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고전 3:22,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빌 1: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② 눅 16:25에서 '살아있는 동안'을 묘사한다: "아브라함이 가로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눅 12:15; 행 8:33에서도 마찬가지이다. ③ 고전 15:19에서 이 세상에서 '삶을' 표현한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딤전 4:8에서도 같은 의미를 가지며, "내 생"과 대조되어 있다: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④ 약 4:14에서 일시적이고 제한적인 생명을 묘사한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⑤ 히 7:3에서 '생'의 끝을 묘사한다: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⑥ 계 11:11에서 '생'기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삼 일 반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생]기가 저희 속에 들어가매 저희가 발로 일어서니 구경하는 자들이 크게 두려워하더라".(참조: 창 6:17; 창7:15). (b) 조에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 속하는 초자연적 생명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이 생명은 신자들이 미래에 받을 것이지만, 이 땅에서 지금 향유하는 것이다. ① 요일 5:20에서 하나님은 참 생명, 곧 영생[또한 근원적 영적 참생명]이시다: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 요 5:26a에서 하나님 안에 생명이 있다: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요 12:50에 의하면 하나님의 명령은 영생이다: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아노라 그러므로 나의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이르노라 하시니라". ② 요 5:26b에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으셨다. 요 1:14에서 "그 안에 생명이 있다". 요일 5:11에서도 이를 증거한다. 그는 "생명의 주"이시며(행 3:15), "생명의 말씀"이시다(요 1:1). "이 생명이 인간에게 나타내시게 된 것이다"(요일 1:2). 그는 "생명의 떡"이다(요 6:35; 요 6:48; 요 6:33). 그는 단순히 "생명"이란 말로 표현되었다(요 11:25; 요 14:16). 그는 "우리의 생명"이시다(골 3:4). 그 안에 있는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며(요 1:4b) 따라서 사람들은 그를 따름으로 말미암아 생명의 빛을 얻는다(요 8:12). (c) 조에는 하나님과 그리스도로부터 얻는 신자들의 생명을 나타낸다. ① 이 생명은 은혜와 거룩의 생명이다. 롬 6:4에서 우리는 "세례(침례)를 받음으로 말미암아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된다. 엡 4:18에서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는" 자들을 묘사한다: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② 이 생명은 구원과 영광의 생명이다. 이 생명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이며(딤후 1:1), 그의 말씀과 복음의 전도로 말미암아 효력을 발한다, 요 6:68; 요 6:63; 행 5:20; 빌 2:16; 딤후 1:10; 고후 4:12. 사도들은 복음의 전도로, 사람들을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게" 한다(고후 2:16). ③ 성령은 생명의 능력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하신다, 롬 8:2; 롬 8:6; 롬 8:10; 요 6:63. ④ 그리스도의 말씀과 같이 하나님의 계명(엔톨레)도 생명에 이르게 한다, 롬 7:10. ⑤ 이 생명은 하나님의 선물로 간주되었다, 딤후 1:1에서 "썩지 아니할 것"과 함께, 벧후 1:3에서 "경건"과 함께, 롬 8:6에서 "평안"과 함께 나타난다. ⑥ 진실로 생명의 에클레시아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은 생명, 곧 은혜의 선물의 상속자들이다, 벧전 3:7. ⑦ 이 생명은 그들이 육체로 거하는 동안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 있다, 골 3:3. ⑧ 그의 생명을 상실 당한 자는 누구든지 영광의 생명에서 제외된다. 행 11:18; 행 13:46; 행 13:48. ⑨ 특별히 요한복음에 따르면, 하나님의 생명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받는 것이다. 아들을 믿는 자는 생명(요일 5:12), 곧 영생을(요 6:40; 요 6:47) 소유하였고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요 5:24; 요일 3:14). 신자들에게 주어지는 영생은 사랑과(참조: 요 15:17), 기쁨(참조: 요 16:20-요 16:24) 안에서 그 모습을 나타낸다. 요일 3:14에 따르면 형제간의 사랑은 참 생명의 척도가 된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에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비록 요한의 생명에 대한 견해에 많은 점들이 영지주의자들의 관점과 일치한다고 할지라도 요한은 정반대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왜냐하면 영지주의자들은 영생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거의 도달하기 어려운 세계로 옮겨 버린 반면에 요한은 영생을 바로 현재로 가져오며 또한 그리스도의 말씀과 계명과 인격에 굳게 닻을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요 17:3). 이 영생을 지금 이곳에서 소유하는 신자들은, 사망과 심판이 더 이상 생각할 요소들이 아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요 5:24; 요 11:25). 왜냐하면 영생은 그 안에 영원의 씨앗들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요 4:14; 요 6:27; 요 12:25). (d) 조에는 종말의 복된 시대에서 누릴 생명에 대해 사용되었다: 요 3:15. ① 내세의 영생, 마 10:30; 눅 18:30; 막 19:29. ② 영생에 대한 질문, 막 10:17; 눅 18:18; 눅 10:25; 마 19:16이하. ③ 마지막 심판의 결과, 마 25:46; 롬 2:7; 마 7:14; 마 18:8이하; 막 9:43, 막 9:45; 롬 5:17이하, 롬 5:21; 롬 6:22이하. ④ 죽은 상태에서 나온 자들의 생명, 롬 11:15; 갈 6:8; 딤전 1:16; 딤전 6:12, 딤전 6:19; 벧전 3:10. ⑤ 이 생명은 참 생명으로 불리워진다, 딤전 6:19; 딛 1:2; 딛 3:7. ⑥ 생명 책, 빌 4:3; 계 3:5; 계 13:8; 계 17:8; 계 20:12, 계 20:15; 계 21:27. ⑦ 생명의 나무, 계 2:7; 계 22:2; 계 22:14; 계 22:19. ⑧ 생명의 면류관, 계 2:10. ⑨ 생명수, 계 21:6; 계 22:1; 계 22:17; 계 7:17.(참조: Walter Bauer; H.G.Link; R.Bultman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