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0.08.30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시68.JC승귀/개선,이동장막언약궤인 임마누엘메시야.거처삼으신 복음교회를 통해 능력 발하시는 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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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68.다윗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

[시내산과 성소에 임재해 계신 하나님을 노래함]==승귀/개선, 찬미의 메시야.천년왕국.교회를 통해 능력 발하시는 Q

**내맘의주여484.내구주예수를314


1.하나님이 일어나시니 원수들은 흩어지며 주를 미워하는 자들은 주 앞에서 도망하리이다 ..민10:35.

2.연기가 불려 가듯이 그들을 몰아내소서 불 앞에서 밀이 녹음 같이 악인이 하나님 앞에서 망하게 하소서 

3.의인은 기뻐하여 하나님 앞에서 뛰놀며 기뻐하고 즐거워할지어다 

4.하나님께 노래하며 그의 이름을 찬양하라 하늘을 타고 광야에 행하시던 이(=JC)를 위하여 대로를 수축하라(=맘 열고 JC를, 네 구주Q을 영접하라) 그의 이름은 여호와이시니 그의 앞에서 뛰놀지어다 

5.그의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 ..(모든 외롭고 무력하고 억울한 이들인 고아와 과부, 또한 나그네의 보호자/신원자/회복자)

6.하나님이 고독한 자들은 가족과 함께 살게 하시며 갇힌 자들은 이끌어 내사 형통하게 하시느니라 오직 거역하는 자들의 거처는 메마른 땅이로다 

7.하나님이여 주의 백성 앞에서 앞서 나가사 광야에서 행진하셨을 때에 (셀라) 

8.땅이 진동하며 하늘이 하나님 앞에서 떨어지며 저 시내 산도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 앞에서 진동하였나이다 

9.하나님이여 주께서 흡족한 비를 보내사 주의 기업(=백성들)이 곤핍할 때에 주께서 그것을 견고하게 하셨고 

10.주의 회중(=가난한 자 이스라엘)을 그 가운데에 살게 하셨나이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가난한 자를 위하여 주의 은택을 준비하셨나이다

11.주께서 말씀을 주시니 소식을 공포하는 여자들은 큰 무리라(=여자처럼 연약해 보이는 복음전파자들!!...고전1:26-27) 

12.여러 군대의 왕들이 도망하고 도망하니 집에 있던 여자들도 탈취물을 나누도다 ..(교회안에서 섬김사역으로 머물러 있는 이들도 복음사역에 동참하고 있는 것임!!)

13.너희가 양 우리에 누울 때에는 그 날개를 은으로 입히고 그 깃을 황금으로 입힌 비둘기(일편단심의 믿음으로 승리한 자의 평강!!) 같도다 ..(=승전후 평안의 기쁨안에 누리는 바 교회생활의 존귀와 영광스러움) 

14.전능하신 이가 왕들을 그 중에서 흩으실 때에는 살몬에(에발산-그리심산 사이에 있는 세겜<등, 어깨>인근의 <수목이 울창한>산) 눈이 날림 같도다 (고전12:4-6)

15.바산의 산은(므낫세반지파동부영역 : 바산골란..갈릴리바다동편에서 요단동편중앙의 얍복강상부에 이르는 광활한 목초지 : 작은산들을 거느린 헬몬산이 있음) 하나님의 산임이여 바산의 산은 높은 산이로다 

16.너희 높은 산들아 어찌하여 하나님이 계시려 하는 산을(=시온산...지존하신 창조주-주권자 Q이 친히 정하신 거처 = 기독교회) 시기하여 보느냐 진실로 여호와께서 이 산에 영원히 계시리로다(형언할 수 없을만큼 크고 거룩하신 분의 처소!!) 

17.하나님의 병거는 천천이요 만만이라 주께서 그 중에 계심이 시내 산 성소에 계심 같도다 

18.주께서 높은 곳으로 오르시며 사로잡은 자들을(그리스도인마다 은혜로 JC께 사로잡힌 자들) 취하시고 선물들을[송축] 사람들에게서 받으시며 반역자들로부터도[항복-포로됨] 받으시니 여호와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기 때문이로다(=그리스도의 승천..에베소서에 인용됨..영적으로 볼 때,JC승천때 이미 모든 신자/직분자들은 JC와 동행-승천하여 아버지께 보이신 후 JC우편에 앉히시고, 교회에 선물로 보내주신 바 되었기에 신약교회는 그들로 인해 세워짐) 

19.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셀라) 

20.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의 하나님이시라 사망에서 벗어남은 주 여호와로 말미암거니와 

21.그의 원수들의 머리 곧 죄를 짓고 다니는 자의 정수리는 하나님이 쳐서 깨뜨리시리로다 

22.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그들을 바산에서 돌아오게 하며 바다 깊은 곳에서 도로 나오게 하고 

23.네가 그들을 심히 치고 그들의 피에 네 발을 잠그게 하며 네 집의 개의 혀로 네 원수들에게서 제 분깃을 얻게 하리라 하시도다 

24.하나님이여 그들이 주께서 행차하심을 보았으니 곧 나의 하나님, 나의 왕이 성소로 행차하시는 것이라 

25.소고 치는 처녀들 중에서 노래 부르는 자들은 앞서고 악기를 연주하는 자들은 뒤따르나이다 (고후2:14..승전의 자축행렬!!.작고 미약한 자!!)

26.이스라엘의 근원에서 나온 너희여 대회 중에 하나님 곧 주를 송축할지어다 

27.거기에는 그들을 주관하는 작은 베냐민(<권능>Q능력의 오른팔)과 유다(<믿음>Q신뢰하는 믿음, 기도/찬송으로 동행하며 선두에 서며 섬기며 다스림)의 고관과 그들의 무리와 스불론(은총/은혜<선물-명예-희생>)의 고관과 납달리(<승리>경쟁..육신적 교만이 아니라 Q을 통해 세상과 경쟁해서 이긴 자)의 고관이 있도다 

28.네 하나님이 너의 힘을(섬김의 능력과 유혹 이길 힘!!) 명령하셨도다 하나님이여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것을 견고하게 하소서 (마28:18-20, 행1:8)

29.예루살렘에 있는 주의 전을 위하여 왕들이 주께 예물을 드리리이다 

30.갈밭의 들짐승과 수소의 무리와 만민의 송아지를 꾸짖으시고 은 조각을 발 아래에 밟으소서 그가 전쟁을 즐기는 백성을 흩으셨도다 

31.고관들은 애굽에서 나오고 구스인은 하나님을 향하여 그 손을 신속히 들리로다 

32.땅의 왕국들아 하나님께 노래하고 주께 찬송할지어다 (셀라) 

33.옛적 하늘들의 하늘을 타신 자에게 찬송하라 주께서 그 소리를 내시니 웅장한 소리로다 

34.너희는 하나님께 능력을 돌릴지어다 그의 위엄이 이스라엘 위에 있고 그의 능력이 구름 속에 있도다 

35.하나님이여 위엄을 성소에서 나타내시나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그의 백성에게 힘과 능력을 주시나니 하나님을 찬송할지어다 (시105:4..엡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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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od of Sinai and of the Sanctuary.
To the Chief Musician. A Psalm of David. A Song.68
1 Let God arise, and His enemies be scattered; Let those who hate Him flee before Him.
2 As smoke is driven away, so drive them away; As wax melts before the fire, So let the wicked and guilty perish before [the presence of] God.
3 But let the righteous be glad; let them be in good spirits before God, Yes, let them rejoice with delight.
4 Sing to God, sing praises to His name; Lift up a song for Him who rides through the desert— His name is the Lord—be in good spirits before Him.
5 A father of the fatherless and a judge and protector of the widows, Is God in His holy habitation.
6 God makes a home for the lonely; He leads the prisoners into prosperity, Only the stubborn and rebellious dwell in a parched land.
7 O God, when You went out before Your people, When You marched through the wilderness, Selah.
8 The earth trembled; The heavens also poured down rain at the presence of God; Sinai itself trembled at the presence of God, the God of Israel.
9 You, O God, sent abroad plentiful rain; You confirmed Your inheritance when it was parched and weary.
10 Your flock found a dwelling place in it; O God, in Your goodness You provided for the poor.
11 The Lord gives the command [to take Canaan]; The women who proclaim the good news are a great host (army);
12 “The kings of the [enemies’] armies flee, they flee, And the beautiful woman who remains at home divides the spoil [left behind].”
13 When you lie down [to rest] among the [a]sheepfolds, You [Israel] are like the wings of a dove [of victory] overlaid with silver, Its feathers glistening with gold [trophies taken from the enemy].
14 When the Almighty scattered [the Canaanite] kings in the land of Canaan, It was snowing on [b]Zalmon.
15 A mountain of God is the mountain of Bashan; A [high] mountain of many summits is Mount Bashan [rising east of the Jordan].
16 Why do you look with envy, mountains with many peaks, At the mountain [of the city of Zion] which God has desired for His dwelling place? Yes, the Lord will dwell there forever.
17 The chariots of God are [c]myriads, thousands upon thousands; The Lord is among them as He was at Sinai, in holiness.
18 You have ascended on high, You have led away captive Your captives; You have received gifts among men, Even from the rebellious also, that the Lord God may dwell there.
19 Blessed be the Lord, who bears our burden day by day, The God who is our salvation! Selah.
20 God is to us a God of acts of salvation; And to [d]God the Lord belong escapes from death [setting us free].
21 Surely God will shatter the head of His enemies, The hairy scalp of one who goes on in his guilty ways.
22 The Lord said, “I will bring your enemies back from Bashan; I will bring them back from the depths of the [Red] Sea,
23 That your foot may crush them in blood, That the tongue of your dogs may have its share from your enemies.”
24 They have seen Your [solemn] [e]procession, O God, The procession of my God, my King, into the sanctuary [in holiness].
25 The singers go in front, the players of instruments last; Between them the maidens playing on tambourines.
26 Bless God in the congregations, [give thanks, gratefully praise Him], The Lord, you who are from [Jacob] the fountain of Israel.
27 The youngest is there, Benjamin, ruling them, The princes of Judah and their company [the southern tribes], The princes of Zebulun and the princes of Naphtali [the northern tribes].
28 Your God has commanded your strength [your power in His service and your resistance to temptation]; Show Yourself strong, O God, who acted on our behalf.
29 Because of Your temple at Jerusalem [Pagan] kings will bring gifts to You [out of respect].
30 Rebuke the beasts [living] among the reeds [in Egypt], The herd of bulls (the leaders) with the calves of the peoples; Trampling underfoot the pieces of silver; He has scattered the peoples who delight in war.
31 Princes and envoys shall come from Egypt; Ethiopia will quickly stretch out her hands [with the offerings of submission] to God.
32 Sing to God, O kingdoms of the earth, Sing praises to the Lord! Selah.
33 To Him who rides in the highest heavens, the ancient heavens, Behold, He sends out His voice, a mighty and majestic voice.
34 Ascribe strength to God; His majesty is over Israel And His strength is in the skies.
35 O God, You are awesome and profoundly majestic from Your sanctuary; The God of Israel gives strength and power to His people. Blessed be G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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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nIP;(6440, 파님) 얼굴 face

파님(명남)은 파나(hn:P; , 6437)에서 유래했으며, '얼굴 face'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2,100회 이상 나온다.

(a)  이 독특한 단어 파님은 항상 복수형으로 등장하는데 아마 얼굴이 수많은 부분들의 결합체라는 사실에서 연유한 듯하다.

파님은 ① 사람의 얼굴(창 31:2), "그의 외모"(창 4:5), 한 인간 전체를 뜻하는 대용어(신 7:10)로 사용되었다. ② 관찰자에게로 향해진 면, 예를 들어 '지면'(창 2:6), ③ 이 단어는 관계를 표현하기 위하여 여러 전치사들과 함께 사용된다. 예를 들면, ~의 면전에서 before the face of, ~앞에서 before, ~속으로 into, ~의 정면에서 in front of, ~의 반대편에 opposite 등이다.(참조: E. Tiedtke)

사람의 얼굴은 그 사람을 식별하게 해주고 그 사람의 마음 가짐과 감정을 반영해 준다. 따라서 파님은 자아 또는 자아 감정의 대용어가 될 수 있다. 성경에서 얼굴은(신체의 여타 부분들과 함께) 사람의 생리 기능을 담당하는 외적 기관으로 묘사될 뿐만 아니라 어떤 형태의 행동 방식과 관계되는 것으로 기술되었으며 따라서 어떤 인격성에 의해 특정 지어진다. 얼굴이 상대방의 감정, 기분, 성격을 묘하게도 밝혀주는 것으로 생각되었다는 사실은 극히 당연하다.

"굳은" 얼굴은 반항(렘 5:3), 뻔뻔스러움(잠 7:13), 무자비함(신 28:50)의 표시이다.  "빛나는" 얼굴은 기쁨의 증거이다(욥 29:24). "부끄러워하는" 얼굴은 패배, 좌절, 굴욕을 가리킨다(삼하 19:5). "불꽃같은" 얼굴은 공포에 질린 얼굴이다(사 13:8). "나쁜" 얼굴은 근심 걱정으로 찌든 얼굴이다(창 40:7). "낙담한" 얼굴은 매우 강렬한 분노와 불쾌감에서 연유한다(창 4:5). 누군가의 얼굴을 "부드럽게" 만든다는 것은 그를 달래거나 또는 그의 호의를 구한다는 뜻이다(하나님께 대해, 왕상 13:6, 왕하 13:4). KJV는 이 마지막 문구를 "~가 여호와께 구했다/탄원했다" X sought/entreated the Lord라고 의역하였다(한글개역: "여호와께 간구하매"). 그러나 히브리어 원문은 문자적으로 "~가 여호와의 얼굴을 부드럽게 만들었다"로 된다. 마찬가지로 이 관용구는 사람에 대해서도 사용된다(잠 19:6).

"얼굴을 숨기다"라는 문구는 혐오감을 나타낸다는 의미이며(사 53:3) "얼굴을 돌리다"라는 것은 거부한다는 뜻이다(시 132:10). 역으로 타인의 "얼굴을 들어 올리다"는 호의, 존중, 수락을 나타내 보인다는 뜻이거나(삼상 25:35, 한글개역, "청을 허락하노라") 또는 편파성 편애를 드러낸다는 뜻이다(레 19:15, 한글개역, "편을 들지", "두호하지"). 얼굴을 숙인다는 빈번한 표현은 공손하게 인사하는 것을 의미한다.

파님은 동물의 얼굴들에 해당하는 말로 역시 때때로 사용되었다(겔 1:10).(V. P. Hamilton)

(b)  파님은 특히 하나님의 얼굴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① 위에서 언급한 인간의 얼굴에 관한 관용구들과 문구들의 대부분이 하나님께도 적용되었다. 하나님의 얼굴은 은혜와 신의의 표시로서 "환히 빛난다"(시 4:6). 그의 얼굴이 분노로 "침울해진다"(렘 3:12). 하나님은 그의 얼굴을 "숨기기도" 하신다(시 13:1).

하나님이 얼굴을 드시거나 그의 얼굴을 이스라엘에 비추시면 그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은 평강(즉, 구원)을 받는다. 하나님이 그의 얼굴을 감추거나 돌리실 때 은혜를 거두어가심을 시사한다(참조: 시 13:2, 시 104:29). 하나님과의 교제의 행운을 가져오거나 하나님의 진노 하에 머무름을 가져오거나 하는 하나님의 작용과 반작용은, 그러한 신인 동형론적 묘사로 표현되고 있다.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있는 가능성은 가장 예외적 가능성으로 언급되어 있다(창 32:30, 브니엘: 하나님의 얼굴, 창 16:13, 출 24:9 이하, 신 4:12, 삿 6:22 이하도 역시 참조하라).(참조: E. Tiedtke)

"하나님의 얼굴을 뵙다"라는 구절이 5회 발견되는데 아마 종교 예배를 위해 성소를 찾아간다는 뜻의 전문 용어일 것이다. 다섯 구절은 출 23:15, 출 34:20, 신 31:11, 시 42:2, 사 1:12이다. 이 보기들의 각 경우에서 동사 라아('보다' to see)는 니팔형으로 간주된다. 그렇다면 "나타나다" to appear로 번역되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얼굴을 뵈옵는다는 개념을 "앞에 나타나다" appearing before라는 개념으로 유화시킨 것이다. 한 용례에서(삼상 1:22) 니팔형이 자음 본문에 의해 명시되어 있다. 여기를 니팔 부정사형 레라오트 파나이(하나님 "앞에 나타나다" to appear before God)로 생각할 수 있으며 또 그것이 당연하기도 하지만 칼 부정사형인 리로트 파나이의 가능성은 출 33:20에 비추어 볼 때 상상할 수 없다. 이에 대한 몇몇 예외가 있는데 예를 들면 야곱(창 32:30)과 모세(출 33:11)의 경우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대면하여" face to face 보았다.

만일 인간이 하나님을 보거나 또는 그 음성을 듣기만해도 그는 죽게 된다(출 19:21).

하나님 얼굴을 보는 경험이 얼마나 위험스러운지 항상 강조하고 있다. 죄많은 인간이 거룩한 하나님을 본다면 그는 죽어야 하는 것이다(출 33:20, 참조: 사 6:5).

이러한 이유로 모세(출 3:6)와 엘리야(왕상 19:13) 그리고 스랍조차도(사 6:2) 하나님 면전에서 그들의 얼굴을 가렸다. 하나님을 본 후에도 살아있는 사람은 놀람과 감사(창 32:30, 신 5:24), 두려움(삿 6:22, 삿 6:23, 삿 13:22, 사 6:5)으로 압도당하게 된다. 신약성경에서 하나님은 예수님 안에 출현하셨으며 그만이 아버지를 보았다(요 1:18, 요 6:46, 요일 4:12).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는 통로가 되는 말씀일 뿐만 아니라, 그를 통해 하나님을 볼 수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기도 하다.(참조: V. P. Hamilton)

출 33장에서 세가지 세가지 다른 전승들 - 여호와는 인도자로 한 천사를 보내신다. 성막을 통한 여호와와의 유대 - 여호와의 얼굴(파님)이 이스라엘 백성과 동행하신다 - 는 시내산으로부터 떠난 후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신다는 기본적 사상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 전승의 셋째번 것에서 파님(출 33:14 이하)은 여호와의 이스라엘에게 현현으로 특이하게 인성화된 것 같다. 이것은 해석상에 다양한 시도를 낳았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나의 파님"을 "나 자신"으로, 즉 여호와의 인격적 임재에 대한 강조적 표현으로 이해한다. 또 혹자들은 이 구절이 제사장은 제사 때에 가면을 사용했다는 그네들의 주장을 정당화시켜 준다고 말한다. 또 다른 사람들은 성소에서 제사를 드릴 때에 여호와의 얼굴이 임재하셨음, 즉 하나님의 얼굴이 인간을 향하셨음을 의미한다고 이 구절을 해석한다. 이 구절에는 유일하고도 확실한 해석이 제시될 수 없다.

② 하나님의 얼굴이 성전과 관련하여 언급되어 질 때, 이 용어는 제사와 관련된 것이다. 성경의 범위를 넘어선 이 단어의 용법이 여기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도 있다. 이스라엘 주변의 열방은 신의 얼굴을 성전 우상의 얼굴로 만들어 이를 보고 예배하였다. 이스라엘의 예배에서 사용되어진 우상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이 용어는 예배자가 성전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였다고 했을 때 비유적 의미로만 사용될 수 있었다(시 24:6, 시 42:2[마소라 42:3], 슥 8:21[마소라와 70인역본], 말 1:9[마소라]).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임재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돌아보심을 의미했으며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전에서 특히 그것을 추구했던 것이다. 그래서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찾는 것은 기도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감을 의미한다. 끝으로 제사를 아주 떠나서는 이 단어가 하나님과의 교제를 간구하는 일반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시편 기자는 시 105:4에서 "계속적으로" 이렇게 할 것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촉구하고 있다. 진설병(출 25:30)의 문자적 의미는 "얼굴의 떡"("임재의 떡" RSV)인 것이다. 이런 떡덩이들이 이교도 제사에도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으며 이들의 제사에서는 이 떡들이 신의 음식 역할을 했던 것이다(참조: 렘 7:18). 이스라엘이 이 관습을 이어받았을 때 떡 Bread(아토스)은 하나님의 얼굴 앞에 음식으로가 아닌 예물로 유향과 함께 특별히 마련된 식탁 위에 놓여졌다. 좀 더 자세히 알기 위하여 출 35:13, 출 39:3, 민 4:11, 삼상 21:6, 왕상 7:48, 대상 9:32, 대상 23:29, 대상 28:16, 대하 2:4, 대하 4:19, 대하 13:11, 대하 29:18, 느 10:33, 마 12:4, 막 2:26, 눅 6:4, 히 9:2, 요세푸스의 저서(Ant., 3, 6, 6; 3, 10, 7)를 보라.

③ 랍비 유대주의에서 사람의 최고의 소망은, 죽음에 임한 시각에와 메시야의 날 후에 다가올 세상에서, 혹은 어떤이의 의견에 따르면, 메시야의 시절 동안에라도, 셰키나의 얼굴 또는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것이다. 하나님의 빛의 반사를 받아 의인의 얼굴은 해와 같이 빛날 것이지만(단 12:3) 불신앙인들은 하나님의 얼굴 앞에서 형벌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자카이의 아들 요난(R. Johanan b. Zakkai)이 죽음의 침상에서 두려워 한 것을 대조해 보라(SBI 208; ML 4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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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f(2896, 토브) 좋은, 선한, 즐거운, 선, 이익, 번영, 복지

토브(형용사)는 토브(b/f , 2895)에서 유래했으며, 형용사로는 '좋은, 선한, 즐거운, 유쾌한', 명사로는 '좋은 것, 선, 이익, 번영, 복지'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560여회 나온다.

'선한'은 실제적인 혹은 경제적인 이익을 언급하는 것으로 잘 나온다. 좋은 열매(창 2:9)와 바로의 꿈에 나타난 이삭(창 41:5, 창 41:36)은 먹기에 좋은 것이었다.

요셉의 노예상태가 "좋은" 것은 양식과 민족의 생존 같은 실재적인 이익을 포함하는 것이었다.

"선하지 못한" 모세의 재판에는 실제의 행정적인 불이익도 포함되었다: "모세의 장인이 그에게 이르되 그대의 하는 것이 선하지 못하도다"(출 18:17).

토브로 전달된 다른 실제적인 선은 아합에게 거부한 승리의 약속(대하 18:7); 환대와 우정(창 26:29); 유익한 충고(삼하 17:7, 삼하 17:14); 일반적인 경제번영(왕상 10:7); 농업 번영(호 10:1, ASV); 그리고 하나님의 의지(암 9:4) 등이다.

그러나 국가의 풍기를 문란케한(느 5:9) 강포한 삶(잠 16:29)과 행동은 "선하지 못하다"고 일컬어 진다.

노동의 "선"은 일에서 얻은 실제적인 이득을 가리키는 것 같다: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을 또한 알았도다"(전 3:13, 참조: RSV '기쁨' pleasure).

"선"은 여러 가지 광범위한 추상적인 관점과 관련하여 사용되었다. 선한 이름은 명성이나 평판의 관점에서 볼 때, 후손보다 더 낫다: "내가 내 집에서, 내 성안에서 자녀보다 나은 기념물과 이름을 주며 영영한 이름을 주어 끊치지 않게 할 것이며"(사 56:5). 다윗이 제후인 아기스에게 충성한 것은 "선한 것"으로 묘사된다: "아기스가 다윗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네가 내 목전에 하나님의 사자 같이 선한 것을 내가 아나 블레셋 사람의 방백들은 말하기를 그가 우리와 함께 전장에 올라가지 못하리라 하니"(삼상 29:9, RSV '흠이 없는' blameless).

엘리후는 진리나 타당성과 관련 지어볼 때 무엇이 선한 것인지를 결정하라고 동료들에게 요구했다: "우리가 스스로 옳은 것은 택하고 무엇이 선한가 우리끼리 알아 보자"(욥 34:4).

지혜로운 사람들에게 있어, 노를 더디 내는 것은 이상적인 용사의 폭력적인 힘보다 더 바람직하였다: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잠 16:32).

마찬가지로, 가난하여도 지혜로운 아이는 고집 센 왕보다 "더 나았다"(전 4:13).

이 단어는 심미적이거나 감각적인 선함도 의미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단어는 "하나님의 아들들"에게 비친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이나 매력(창 6:2), 리브가의 아리따움(창 24:16), 그리고 밧세바의 아름다움(삼하 11:2)을 묘사한다. 이 단어가 사람을 묘사할 때, 영어의 관용구는 '잘생긴' handsome이란 말을 사용한다(삼상 16:12).

감각적인 기쁨이나 좋은 것은 "단"이라고 묘사하는 데에서(렘 6:20), 그리고 다메섹의 물이 요단의 흙탕물보다 더 "낫다"는 나아만의 판단(왕하 5:12)에서 나타난다.

다른 것보다 더 나은 것으로서의 한 포도를 묘사하는 데에는 감각적인 매력도 포함되어 있다: "기드온이 그들에게 이르되 나의 이제 행한 일이 너희의 한 것에 비교되겠느냐 에브라임의 끝물 포도가 아비에셀의 맏물 포도보다 낫지 아니하냐"(삿 8:2).

'선한'은 자주 '행복한' happy을 나타낸다. 이것은 왕이 결혼하는 때를 묘사한다: "내 마음에서 좋은 말이 넘쳐 왕에 대하여 지은 것을 말하리니 내 혀는 필객의 붓과 같도다"(시 45:1). 행복한 축제일은 "좋은 날"로 묘사되기도 한다: "왕의 조명이 이르는 각 도, 각 읍에서 유다인이 즐기고 기뻐하여 잔치를 베풀고 그 날로 경절을 삼으니 본토 백성이 유다인을 두려워하여 유다인 되는 자가 많더라"(에 8:17, RSV '휴일' holiday; 참조: 삼상 25:8).

"좋은 마음"은 행복을 나타낸다(대하 7:10, 잠 15:15).

행복은 술에 의해 야기되기도 하는 것 같다(전 9:7).

토브를 포함하는 관용어로는 선호나 뜻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는 "[어떤 사람의] 눈에 선한"이란 용법이 있다. 이런 용법의 예들로는 도망친 노예가 어떤 곳을 거처로 택함(신 23:16, RSV "그를 기쁘게 하는 곳), 그리고 슬로브핫의 딸들이 남편으로 택함(민 36:6)이 있다. 하나님의 뜻은 이런 식으로 표현될 것이다(삼상 3:18). 이것은 타락하고 죄에 가득찬 욕망을 묘사한다(창 19:8, 삿 19:24). 이런 경우에, 이 관용어는 도덕적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토브는 우수한 질이나 상재적인 가치에 대한 개념도 포함한다. 이런 식으로 이 단어는 하윌라의 "정"금(창 2:12)과 고급 향유(아 1:3, RSV "바르는 기름" anointing oils)를 묘사한다.

우수한 장인은 모세가 "준수하다" (즉 고귀하다)고 묘사되는 경우(출 2:2)처럼, 인간의 성품의 특성이나 고귀성과 마찬가지로 이런 식으로 지칭된다(사 41:7).

토브의 중요한 용법은 도덕적인 선을 가리킨다.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며"(시 34:14, H15)라는 명령은 분명히 "선"을 도덕적인 악과 대조 시킨다. 하나님께서 다루기 어려운 자기 백성을 가르치실 "선한 길"은 도덕적인 삶을 가리킨다(왕상 8:36). '선한'과 '옳은'을 뜻하는 야샤르는 종종 도덕적인 선을 뜻하는 유사한 말로 나온다(대하 14:1, 대하 31:20).

토브는 하나님에 대해 사용되었다.

어떤 용법들에는 앞에서 논의된 둘 이상의 의미의 영역들이 뒤섞여 있다. 옛 언약의 "좋은 땅"은 실제적이며, 경제적이며 미학적인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신 1:25, 수 23:13).

마찬가지로, "선한 분"으로서의 하나님 개념도 "선한"이란 단어의 모든 가능한 의미들을 충분히 함축하고 있다.

하나님은 선하시며(시 106:1, 대상 16:34), 좋으신 주님이시다(시 52:9).

구약성경에서 선의 개념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신앙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하나님의 개념으로부터 분리된 인간적인 것으로서의 선의 개념은 생각할 수도 없는 것이다. 선은 항상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하나님의 은사이며, 그렇기 때문에 선은 인간의 힘의 통제권 밖에 존재한다(창 3:5).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은 단지 '선'이 아니라 선하신 성품을 가지신 분이시라는 사상이 철두철미하게 전제되어 있다. 이러한 인식이 구약성경에 있어서는 하나님과 백성의 관계, 그리고 하나님과 개인의 관계가 성숙해지는 과정에서 더욱 발전하였다.

하나님만이 오로지 선하신 분이시다라는 사실은 구약성경에서 그가 선택한 백성을 구원하신 것, 율법을 주신 것(신 30:15, 잠 28:10), 그리고 출애굽과 가나안 정복(출 18:9, 신 10:29이하)과 같은 역사적 사건들 속에서 명백해졌다. 이스라엘인들은 하나님의 창조 활동(창 l:1-8)에서건, 그의 말씀에서건(사 39:8), 그의 영에서건(시 l43:10), 심지어 그가 반대자들에게 말하기 위해 나타나셨을 때 조차도(창 50:20) 그에게서 유래되는 모든 것은 선하다라는 사실을 알고부터 하나님을 오로지 선하신 분으로 찬양하는 새로운 계기로 발전하였다.

하나님은 역사를 통한 그의 사역에서 선(참조: 출 l8:9)을 행하시는 바 그 목적은 구원이며, 율법을 통해 인간에게 방향을 제시해 주는데 있다. 선은 이미 행해져 왔으며, 또한 준비되어 있다. 하나님이 그의 백성에게 약속했던 선은 메시야적, 종말론적 구원에서 실제로 성취될 것이다(레 32:39 - 42; 사 52:7). 한편 율법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통하여 선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선을 행하는 자는 선하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의 도움,없이 가능할 것인가는 논쟁이 되고 있다. 전도자는 하나님의 도움,없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전 7:20).

랍비 유대주의는 하나님의 선함이 구원을 가져다 준다고 생각했다. 선한 것과 성취 가능한 것은 율법에 계시되어 있다. 하나님의 법을 실행할 때 비로소 인간은 선을 행할 수 있고 또 선해질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인 선은 오로지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동료 인간들 사이의 인격적 관계에서만 실행될 수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앞의 논의에 비춰볼 때, 각 개별 용법은 앞의 의미들 중 어느 것이 가능한지를 고찰하기 위해 분명하게 검토되어야 한다.

수많은 문학적인 표현들은 특별한 취급을 필요로 한다. "선과 악"은 보편성에 대한 관용어로 이용된다(민 24:13, 삼하 13:22). 어떤 이들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이런 보편성을 뜻하는 관용어에 지나지 않는다고 시사하였다(창 2:9). 그러나 창세기 앞부분의 문맥은 전체적으로 이 어구의 도덕적 의미에 기초하고 있다. 다른 사람의 말을 "선한 것"으로 인정한다는 것은 곧 동의나 수용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도덕적 판단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왕하 20:19, 참조: 삼상 20:7).

"선한 눈"은 관대함을 나타낸다(잠 22:9, RSV '관대한 눈' bountiful eye ).

전도서에서, "선을 보다" to see good는 좋은 것이나 삶의 기쁨을 경험하다로 번역된다(전 5:18, RSV '기쁨을 발견하다' find enjoyment; 전 6:6, RSV '선을 향유하지 못하다' enjoy no good).(참조: A. BOWLING; E. BEYREUT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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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68장 (개요)

이 시편은 아주 우수한 시다. 그러나 그 참뜻이 모호한 부분이 많다.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처럼 그 뜻을 이해하기 어려운 것들이 나온다. 

또 다윗이 언제, 어떤 일로 썼는지도 불분명하다. 그러나 아마 하나님이 다윗으로 그 주위의 모든 대적들로부터 휴식을 얻게 해주자, 그가 법궤(하나님 임재의 징표요 그리스도 중보성의 한 예표였다)를 오벳에돔의 집에서 시온의 장막으로 옮겨갈 때 지은 시 같다. 

그 이유는 모세가 법궤를 이동할 때 했던 기도(민 10:35)와 이 시편의 첫마디가 같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다윗은 예언의 영에 인도되어서, 메시야에 관한 찬란한 일, 곧 그의 승천과 그의 나라의 지상 건립을 예언하게 되었다.

1. 하나님의 대적(1-2)과 하나님의 백성(3)에 대한 기도로 시작한다.

2. 다음으로는 찬양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나머지 시 전체는 이 찬양이 주도하게 된다. 

그 찬양은 만민에게 하나님에 대한 찬양을 촉구하며     (4, 26, 32), 여러 가지 찬양의 주제를 제시하고 있다.

   (1)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인자하심(4-6).

   (2)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에게 이전에 베풀어주신 기사, 곧 광야 통과(7-8), 가나안 정착(9-10), 대적 격파(11-12), 그리고 그 압제자들로부터의 구출 따위(13-14).

   (3) 하나님이 자기 교회에 계신 특별한 임재(15-17).

   (4) 그리스도의 승천(18)과 그를 위한 그의 백성의 구원(19-20).

   (5) 그리스도께서 대적을 물리치고 얻을 승리와 그가 자기 교회 위에 베푸실 은총(21-28).

   (6) 이방인이 나아옴으로 인한 교회의 확장(29-31).

3.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과 은총에 대한 경외감에 넘친 시인으로써 이 시편을 끝맺고 있다(32-35). 

---우리는 이 시편을 노래하면서, 이 모든 위대한 일들에 대해 당연히 감명받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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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적들의 분산을 비는 기도(시 68:1-6)

Ⅰ. 다윗은 하나님께서 영광 중에 나타나시기를 기도하고 있다.

1. 그것은 그의 대적들을 부끄럽게 하기 때문이다(1-2절). 

“하나님은, 그들에게 형을 언도하시는 재판장으로서, 싸움터를 빼앗고 그들을 처형하는 대장으로서, 일어나사 원수를 흩으시며,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땅을 지킬 수 없고 더욱이 주를 대적할 능력이 없는 자들로서, 주 앞에 도망하게 하소서. 하나님은 해가 힘있게 솟아오를 때처럼 일어나소서. 그러면 암흑의 자식들은, 황혼이 떠오르는 해 앞에서 도망하듯이 흩어질 것입니다. 마치 연기가 해를 가리울 것처럼 올라가나 곧 바람에 의해 걷혀버려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게 되는 것처럼, 그들을 쫓아내소서. 불 앞에 밀랍이 녹듯이, 그들로 하여금 빨리 녹아버리게 하소서.” 

이처럼 다윗은 모세의 기도를 해설하고 있으며, 되풀이해 그 자신과 그의 시대에 적용시킬 뿐만 아니라, 그에 대해 설명함으로써 성경의 기도를 우리가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를 지시하고 있다. 

아니, 이 시편은 구속주가 그의 나라의 대적들을 쳐 승리하는 것을 내다보고 있다. 

왜냐하면 JC는 이스라엘을 광야에서 인도한, 바로 그 언약의 천사였기 때문이다. 다음 사실들을 주목하자.

(1) 하나님의 원수요, 그를 미워해, 사람들 가운데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와 여자의 후손들을 대적하는 옛 뱀과 연합한 자들이 있으며, 과거에도 있었고 또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2) 하나님과 원수 되는 자들은 사악한 자들이며, 사악한 자들의 자손들일 수밖에 없다.

(3) 우리가 이러한 원수들의 회개-구원을 위해 기도해야 할지라도,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원수들에 대적해,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적의와 하나님 나라에 대한 그들의 모든 시도를 물리칠 기도를 동시에 해야 한다.

(4) 하나님께서 일어나시기만 한다면, 회개할 줄 모르고 돌이키지 않는 그의 모든 원수들, 즉 회개하고 그에게 영광을 돌리려 하지 않는 원수들은 분명히 흩어지고 그리고 쫓김을 당할 것이며, 그의 존전에서 멸망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누구도 하나님께 대해 마음을 완악하게 하고서는 형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심판의 날은 “경건치 않은 사람들의” 완전하고도 최종적인 “멸망의 날”이 될 것이다(벧후 3:7). 

따라서 그들은 그때에 주께서 나타나실 그 타오르는 불 앞에서 밀처럼 녹을 것이다(살후 1:8).

2. 그의 백성들의 위로와 기쁨을 위한 것이다(3절). 

“지금 슬픔 속에 있는 의인은 기뻐하여, 그의 은혜로운 임재 가운데 하나님 앞에서 뛰놀며 기뻐하게 하소서.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의 기쁨입니다. 그들이 언제나 하나님 앞에 올 때에 기뻐하게 하소서. 그렇습니다. 그들로 하여금 지극히 즐거워하게 하소서. 그들로 기쁨을 갖고 즐거워하게 하소서.”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들은 지극한 즐거움을 갖고 기뻐할 이유가 있다. 

우리는 이러한 기쁨을 모든 성도들에게서 바라야 한다. 

왜냐하면 기쁨은 그들에게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빛은 의로운 자들을 위해 있다.”

Ⅱ. 그는 Q께서 영광스럽게 나타나신 것에 대해 찬송하고 있으며, 우리에게 그를 찬송하도록, 곧 그의 이름을 찬양하고 그를 격찬하도록 요청하고 있다.

1. 그를 위대하신 하나님, 무한히 위대하신 하나님으로서 격찬하도록 요청하고 있다(4절). 

그는 “그의 이름 여호와에 의해서, 하늘을 타고 다니시는도다”(한글 개역과 다소 다름─역주). 

그는 천체의 모든 운동의 원천이시며, 병거를 타는 자가 병거를 운전하듯, 천체들을 지시하고 조종하시고, 하늘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최고의 명령권을 지니고 계신다. 

그는 그의 백성을 돕기 위해 매우 빠르게, 매우 강하게, 그리고 대항하는 자들이 못 미치도록 매우 높게 하늘을 타신다(신 33:26). 

그는 하늘을 그의 이름 “여호와”, 곧 스스로 존재하며 스스로 충족하는 자, 모든 존재와 능력과 운동과 완전함의 근원인 자의 이름으로 다스리신다. 

이것이 영원한 그의 이름이다. 

우리가 이처럼 하나님을 격찬할 때는, 마땅히 “그 앞에서 뛰놀아야” 한다. 

하나님에 대한 거룩한 기쁨은 우리가 그를 경배할 때 지녀야 하는 경외감과 경건한 두려움에 매우 잘 일치한다.

2. 은혜로우신 하나님, 인자하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서 그를 격찬하도록 요청하고 있다. 

그는 위대하시나 그 어느 것도, 아니 가장 비천한 것도 멸시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위대하신 능력의 하나님이시므로, 그는 환난당하는 자들을 위로하시는 데 그의 능력을 사용하신다(5-6절). 

고아와 과부, 그리고 고독한 자는 그가 그들에게 모든 것을 충족케 하심을 안다. 

하나님의 선하심이 얼마나 그의 영광이 되고 있는가를 살펴보라. 

하늘을 “타고 광야에 행하시며”, 그 이름이 “여호와”이신 그가 곧 왕들의 왕, 군주들의 군주로서, 그리고 나라와 민족의 모든 일에 대한 최고의 지휘자로서 숭앙되어 왔어야 한다고 사람들은 생각할 것이다. 그는 실로 그러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히려 “고아의 아버지”인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신다. “하나님은 높으실지라도 천한 자를 존중하신다.” 

이와 같은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는 자들은 행복하다. “하늘을 타시는” 자는 모실 만한 가치가 있는 아버지이시다. 

“자기들의 하나님이 여호와인 백성들은” 세 배나 행복하다.

(1) 가족들이 가장을 여의었을 때, 하나님은 그들을 돌보시며, 친히 그들의 가장이 되신다. 

그리고 과부와 고아들은 그들이 상실한 친족관계를 하나님 안에서 발견하며, 그것은 무한히 더 낫다. 

그는 “고아의 아버지”로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복 주시고 가르치시며, 그들에게 공급해 주시고 분배해 주신다. 

그는 “그들을 살려두실” 것이며(렘 49:11), 그에게서 그들은 “긍휼을 얻을” 것이다(호 14:3). 

그들은 그를 아버지라고 부를 자유, 그리고 그들의 후견인으로서 그에 대한 그들의 관계를 탄원할 자유를 갖고 있다(146:9, 10:14, 18). 

그는 과부들의 재판장 또는 보호자로서 그들에게 권고해 주시고, 그들의 슬픔을 바로잡아 주시며, 그들을 인정하시고 신원해 주신다(잠 22:23). 

그는 그들의 모든 호소에 귀를 열어놓으시며, 그들의 모든 궁핍함에 대해 손을 펼쳐놓으신다. 

그는 “그 거룩한 처소”에서 그렇게 하시는데, 그 처소는 하늘에 있는 그의 영광의 처소나(거기에서 그는 심판의 보좌를 예비하셨고, 고아나 과부는 자유로이 아뢰며, 그 보호를 받고 있다. 9:4, 7), 땅 위에 있는 그의 은혜의 처소로서 해석될 수 있다. 

따라서 이 말씀은 과부와 고아들이 어떻게 하나님께 신원하는가에 대한 지시다. 

그들로 하여금 그의 거룩한 처소로, 그의 말씀과 성찬식으로 나아가게 하라. 

거기에서 그들은 그를 발견할 수 있으며, 그에게서 위안을 발견할 수 있다.

(2) 가족이 형성될 때, 그는 바로 그 설립자이시다. 

“하나님은 고독한 자로 가족 중에 처하게 하시며”, 외로운 자들을 안락한 친척관계로 들어가게 하시고, 정착하지 못한 자들을 정착하게 하신다(113:9). 

그는 “밖에서” 위안을 “구할” 수밖에 없는 “자들을 집에 거하게 하시어”─하몬드 박사는 이렇게 풀이하고 있다─ 빈곤한 자들에게 생계를 마련할 길을 열어주신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총에 속한 일이듯이, 또한 사람이 베풀어야 할 자선의 훌륭한 길이다.

3. 의로우신 하나님으로서 격찬하도록 요청하고 있다.

(1) 하나님은 억눌린 자들을 풀어주시기 때문이다. 

그는 “수금된 자를 이끌어내사 형통케 하시느니라.” 

그리고 부당하게 감금되고 예속되어 있는 자들을 자유롭게 놓아주신다. 하나님께서 자유케 해주시려는 자들은 어떤 사슬도 묶어둘 수 없다.

(2) 압제하는 자들에게 응보를 내리시기 때문이다. 

“거역하는 자의 거처는 메마른 땅이로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이 속이고 해함으로써 얻은 것에서 위로를 얻지 못한다. 

하나님께 거역함으로 인해서, 모든 즐거움의 원천이 되는 하나님의 축복을 박탈당한 자들에게는 아무리 기름진 옥토라도 메마른 땅이 될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애굽에서 광야로 이끌려나왔으나 거기에서 그들은 애굽 사람들보다 더 풍성히 공급받았는데, 그 애굽 땅은 때로 나일강의 물이 끊어졌을 때 메마른 땅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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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휼을 회고함(시 68:7-14)

저자는 하나님께서 근래에 그와 그의 백성들을 위해 행하신 큰 일들에 대해 감사드리고 난 후, 하나님께서 옛날 그들의 열조를 위해 행하신 것에 대해 찬미할 기회를 마련하고 있다. 

새로운 긍휼은 우리로 하여금 이전에 받은 긍휼을 회상케 하며, 그에 대한 감사한 마음을 소생시켜야 한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Ⅰ. 하나님께서 친히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해 내셨다. 

그가 그들을 사슬에서 풀어내신 후, 메마른 땅에 내버려두시지 않고 그들 앞에서 앞서 나가사 “광야에 행진하셨다”(7절). 

그것은 여행이 아니라 진실로 행진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병정들로서, 군기를 든 군대로서 대오를 유지하며 나아갔기 때문이다. 

애굽 사람들은 저들이 광야에 갇힐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나 스스로 속았다. 

하나님의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선두로 하고 있었으므로 광야를 행진했고, 거기서 잃어버림을 당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광야로 이끌어내신다면, 그는 분명 거기에서 그들의 앞장을 서실 것이며, 그들을 거기에서 이끌어내실 것임을 확신하자.

Ⅱ. 그는 시내 산에서 그들에게 그의 영광스러운 임재를 나타내셨다(8절). 

이스라엘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보거나 그의 음성을 들은 백성들은 결코 없다(신 4:32-33). 

그들처럼 상세히 해설되고 이처럼 시행된 뛰어난 율법을 가진 백성들은 결코 없다. 

그때 “땅이 진동하였고”, 아마도 이웃나라들은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거기에는 물론 우레가, 하늘에서 떨어뜨린 것처럼 보인 뇌우를 동반하고 있는 우레가 있었다. 

반면 하나님의 교훈은 “빗방울처럼 떨어졌다"(신 32:2).

“시내 산”, 그 거대한 산, 그 긴 산마루가 있는 산도 “하나님 앞에서 진동하였다”(삿 5:4-5; 신 33:2; 합 3:3 참조). 

하나님의 엄위의 두려운 광경은 그들을 두려움과 무서움으로 위압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를 믿고 의지하도록 격려했다. 

그들의 행복한 정착을 가로막는 어떤 어려움의 산이 있었을지라도, 시내 산도 옮기실 수 있었던 그분께서 제거하실 수 있었고, 이기실 수 있었다.

Ⅲ. 그가 그들을 위해 광야와 가나안에서 매우 편안한 삶을 마련해 주셨다(9-10절). 

“주께서 흡족한 비를 보내셨고, 가난한 자를 위하여 주의 은택을 준비하셨나이다.”

1. 이것은 광야에서 그들의 장막에 만나를 공급해 주셨던 사실을 언급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메추라기처럼 광야에서 만나가 그들에게 비같이 내렸던 것이다(78:24, 27). 그리고 그것은 관대한 또는 아낌없이 주는 비라고 불리기에 마땅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거룩한 하사품에 대한 놀라운 실증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스라엘 진영(여기서는 “하나님의 산업”이라 부르고 있는데, 그 이유는 그가 그들을 택하시어 그 자신에게 특유한 보배가 되게 하셨기 때문이다)이 “곤핍할 때”에, 그리고 곧 멸망당할 것 처럼 여겨질 바로 그 때에 다시 새로이 견고케 하셨다.

이것은 그들의 믿음을 견고케 했고, 또 하나님의 능력과 선하심에 대한 없어지지 아니할 증거가 되었다. 

심지어 광야에서도 하나님은 자기 회중이었던 이스라엘을 위해 편안한 거처를 마련하셨다.

2. 또는 이것은 가나안, 즉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흡수한다”고 일컬어지고 있는(신 11:11) “젖과 꿀이 흐르는” 그 땅에서 그들에게 적절한 때에 필요한 것을 주신 사실에 대한 언급으로도 볼 수 있다. 

그 풍성한 땅이 거기에 거하는 자들의 죄악으로 인해 불모지로 변했을 때, 하나님은 심판 속에서도 긍휼을 기억하시어 그들에게 흡족한 비를 내리시고 다시 새롭게 하셨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회중이 거기에 거했으며, 거기에는 가난한 자도 배불리 먹을 만큼 양식이 충분히 있었다. 

이는 이스라엘을 위해 마련된 하나님의 영적 양식을 가리키고 있다. 

은혜의 성령과 은혜의 복음은 하나님께서 그의 산업을 견고케 하신 흡족한 비며, 그 비에서 그들의 열매가 나온다(사 45:8). 

그리스도 자신이 바로 이 비이시다(72:6). “저는 땅을 적시는 소낙비같이 임하리라.”

Ⅳ. 그는 빈번히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대적들을 이기게 하셨다. 

군대들, 군대들의 왕들은 그들이 제일 처음 가나안에 왔을 때부터, 그리고 사사들 시대에도, 계속해 다윗 시대까지 그들을 대적했으나 그들은 그 대적들을 물리쳤다(11-12, 14절). 

여기에서 다음을 관찰하자.

1. 하나님은 그들의 총사령관이었다. 

“주께서” 그들 군대의 대장으로서 “말씀을 주셨다.” 

그는 그들을 위해 재판장들을 세우셨고, 그들에게 명령하시고 지시하셨으며, 그들에게 성공을 확신시켜 주셨다.

“하나님은 자기의 성결로 말씀하셨으니”, 곧 “길르앗은 나의 것”이라고 하셨다.

2.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려주는 하나님의 사자 선지자들이 있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그의 말씀을 주셨고(주의 말씀이 그들에게 임했다), 그때에 “선포하는 자들이 큰 무리였다.” 

곧 예언자들과 “여자예언자들”이 큰 무리를 이루었다(“선포하는 자들”은 여성으로 나와 있다. 한글 개역과는 다소 다름─역주). 

하나님께서 보내시고자 하는 소식이 있을 때, 그에게는 사신들이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한글 개역과는 다소 다름─역주). 

또는 아마도 승리를 얻었을 때, 보통 그렇게 한 것처럼 여자들도 개가에 합세한 사실을 언급한 것일지도 모른다(출 15:20; 삼상 18:7). 

그때 그들은 하나님이 이루신 일에 대해 개가를 부르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주목했다.

3. 그들의 대적들은 패해 부끄러움을 당했다. 

“여러 군대의 왕들이 도망하도다.” 

아주 큰 두려움과 말할 수 없는 긴박함을 안고 도망했다. 싸우지도 않고서 도망했으며, 일격을 가하지도 않고 후퇴했다. 

그들은 신속히 도망했고, 도망한 후 다시는 군세를 회복하지 못했다.

4. 그들은 싸움터의 탈취물로 부요케 되었다. 

“집에 거한 여자도 탈취물을 나누도다.” 

남자들뿐만 아니라, 집에 머물렀던, 탈취물을 나누기 위해 분배물 곁에 머물렀던 용사들뿐만 아니라(삼상 30:24) 집에 거한 여자도 분깃을 가졌는데, 이는 탈취한 물건이 많음을 시사하고 있다.

5.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행하셨던 이 위대한 일들은 그들에게 성별되었고, 그들의 교화에 기여했다(14절). 

“전능하신 자가 그녀를 위해(교회를 위해) 열왕을 그중에서 흩으실 때에는 살몬에 눈이 날림 같도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의해 정결케 되고 깨끗하게 되었도다. 

“무리가 적군을 향해 나아갔을 때, 그들은 모든 악한 것들로부터 그들 자신을 [거룩하게] 지켰다”, 

그리하여 그 무리는 승리를 거두고 돌아왔고, 이스라엘은 그 승리에 의해 정결함을 견고케 했다. 

이스라엘의 승리에 대한 이 이야기는 구속주가 자기 소유인 자들을 위해 사망과 지옥 위에 높이 들리심으로써 얻은 그 승리에 적용될 수 있다. 

그리스도의 부활에 의해, 우리의 영적 대적들은 도망하게 되었고, 그들의 힘이 꺾였으며, 그들은 영원히 하나님의 백성들을 해할 수 없게 되었다. 

이 승리는 제일 먼저 여자(공포하는 여자 선지자)에 의해 제자들에게 통지되었고(마 28:7), 그들에 의해 다시 온 세상에 전파되었다. 

한편, 집에 거하는 믿는 자들은 비록 그것을 위해 어떤 일도 기여한 바 없었지만, 그 혜택을 즐기고 있으며, 그 탈취물을 나누고 있다.

Ⅴ. 천하고 멸시받는 처지에서 그들은 장엄하고 번영하는 상태로 승진했다. 

그들이 애굽에서 노예로 지냈고, 후에 때로 힘센 이웃들에 의해 압제당했을 때, 그들은 천시당하는 깨어진 그릇처럼, 또는 즐겨 쓰이지 않는 검고 더럽고 퇴색한 그릇처럼 “토기”, 곧 쓰레기 “속에 누워”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드디어 그들을 그 속에서 “건지셨고”(81:7), 다윗의 시대에 그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번영하는 나라들 중의 하나가 될 가망성이 있었으며, “그 깃을 황금으로 입힌 비둘기같이”(13절) 그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눈에 사랑을 받는 존재가 되었다. 

“따라서”─하몬드 박사는 말하고 있다─“그리스도의 나라 아래에서는 나무와 돌을 숭배하면서 피조물들 가운데 가장 낮고 비천한 상태에 이르고 가장 타락한 정욕 속에 빠졌던 이방의 우상 숭배자들도, 그 혐오스러운 상태에서 떠나 그리스도를 섬기고, 그리스도의 모든 덕, 곧 세상에서 가장 큰 내적 아름다움을 실천하는 데까지 이르러야 한다.” 

그것은 또한 교회가 고난당하는 상태에서 건져지는 것과 신자들이 낙심 후에 위로를 얻는 것에 적용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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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온의 영광(시 68:15-21)

다윗은 하나님께서 일반적으로 이스라엘을 위해 행하신 것에 대해 그를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서 찬미한 후에(8절), 여기에서 그를 특별히 시온의 하나님으로서 찬미하고 있다. 

9장 11절과 비교해 보라.

“너희는 시온에서 거하신 여호와를 찬송하라.” 

이러한 이유에서 시온은 “하나님의 산”이라 불리고 있다.

Ⅰ. 다윗은 시온을 바산의 산과 그밖의 높고 비옥한 산에 비교하고 있으며, 시온을 그것들보다 더 기뻐하고 있다(15-16절). 

시온은 그것들과 비교할 때 작고 낮으며, 그것들처럼 가축들과 목초로 덮여 있지 않음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산, 하나님이 거하시려 하는”, 그리고 그의 특별한 임재의 표적을 나타내시기 위해 [주권적으로] 택하신 산(132:13-14)이라는 점에서, 다른 어느 산들보다 탁월하다. 이 세상에서 높고 크게 되는 것보다 하나님께 거룩하게 되는 것이 훨씬 더 영예롭다.

“너희 높은 산들아, 어찌하여 시기하여 보느뇨? 어찌하여 [겉보기에] 초라한 시온을 모욕하며 너희의 높음을 자랑하느뇨? [그러나, 보라 진실로]이것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산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크기에서 그것을 능가하고 최상의 산이라 할지라도 이 위에 왕의 깃발이 올려졌으므로 너희는 모두 여기에 항복해야 한다.” 

시온은 복음의 교회 모형이었으므로, 특별히 영예로웠다. 

따라서 교회는 시온 산이라 불리고 있으며(히 12:22), 이것은 “여호와께서 이 산에 영영히 거하시리로다” 하는 그의 말 속에 암시되어 있다. 

복음의 시온에서 그 사실은 완성된다. 구속주의 나라에 비교될 만한 나라가 이 세상에는 없으며, 복음헌장에 의해 형성된 성읍에 비교될 만한 성읍이 없다. 

왜냐하면 거기에 하나님이 거하고 계시며, 또 영원히 거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Ⅱ. 다윗은 시온을 시내 산과 비교하고 있다. 

시내 산에 대해 그는 이미 언급했다(8절). 

이제는 비록 시내 산의 경우처럼 두드러지게 나타나지는 않더라도, 실지로 시온에는 [여전히] 쉐키나, 곧 거룩한 임재가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17절). 

천사들은 “하나님의 병거”다. 하나님은 그것을 대적들과 싸우는 병거로 사용하시며, 그의 친구들에 대해 엘리야에게 하셨던 것처럼(그리고 나사로도 천사들에 의해 받들려 올라갔다고 일컬어지고 있다) 운반하는 병거로, 그리고 그의 영광과 전능을 보이시는 중에서는 의식용의 병거로 사용하신다. 

그 병거는 매우 무수하다. 그 수는 “만만”이다. 하늘의 예루살렘에는 “천만 천사”가 있다(히 12:22). 

다윗이 싸운 대적들은 병거를 갖고 있었다(삼하 8:4). 그러나 그것들은 하나님의 병거에 비하면 수효로나 힘으로 어떠한가? 

다윗이 하나님의 병거를 자기의 편으로 하고 있는 한, 그는 “병거와 말”을 의지하는 자들을(20:7)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하나님은 무수한 천사들을 동반하고 시내 산에 나타나셨고, 그 천사들에 의해 율법이 전해졌다(행 7:53). 

“여호와께서 일만 성도 가운데서 강림하신다”(신 33:2). 

그리고 여전히 하나님은 시온에다 자기의 영광을 나타내시고, 또 실제로 무수한 천군을 거느리고 임재해 계신다. 

이것이 하나님이 그들 사이에 “거하는” 것으로 말해지고, 그 그룹들로써 상징되고 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들은 그 구절의 끝 문장을, “시내 산은 성소에 있다”로 읽고 있다. 

즉, 성소가 시내 산 대신 이스라엘에 있었고, 거기에서 그들은 하나님의 신탁을 받았다. 

우리 주 예수는 이 병거들을 지휘하신다. 맏아들이 세상에 들어오게 되실 때, 거기에는 “하나님의 모든 천사가 저에게 경배할지어다” 하는 지시가 들어 있다(히 1:6). 

그들은 매사에 그에게 수종 들었다. 그리고 그는 이제 그들 가운데 계시며,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저에게 순복하고 있다”(벧전 3:22). 

그리고 천사들은 그리스도인들의 엄숙한 모임에 함께 참여한다는 사실이 신약에 암시되어 있다(고전 11:1). 

여자들은 “천사들을 인하여” 그 머리 위에 베일을 쓰는 것이 마땅하다(엡 3:10 참조).

Ⅲ. 시온 산의 자랑은 바로 하나님께서 “거룩한 산에 세우신”(2:6) 왕, “시온의 딸에게 임한”(마 21:5) 왕이었다. 

그 왕의 승천을 시편 저자는 특별히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말은 분명히 그렇게 적용되어 있다(엡 4:8). 

“주께서 높은 곳으로 오르셨도다”(18절. 47:5-6과 비교). 

그리스도가 높은 곳으로 오르신 것이 여기에 과거의 일로 언급될 만큼 확실했고, 그의 영예에 관한 것으로서 언급될 만큼 위대했다. 

이 말은 높이 들리신 그의 전체 상태를 포함하고 있으나, 특별히 그가 하늘로 승천하시어 아버지의 우편에 계심으로써 그의 승천은 물론 우리의 유익이 되었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1. 그는 그때에 지옥의 문을 이기셨다. 

그는 “사로잡힘을 사로잡았다”(한글 개역과는 다름─역주). 즉, 그는 위대한 정복자들이 하듯, 당당하게 자기의 포로들을 이끄시고, 그들을 “공개적으로 드러내셨다”(골 2:15). 

그는 우리를 사로잡고 있던 자들, 만일 그가 개입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를 영원히 사로잡고 있을 자들을 사로잡으신다. 

아니, 그는 죄와 사단의 권세를 완전히 꺾으셨으므로, “사로잡힘 그 자체를 사로잡으셨다.” 

그가 사망의 사망이셨던 것과 같이, 그는 또한 사로잡음의 사로잡음이시다(호 13:14).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영적인 원수들에게 완전히 승리하신 그 승리를 시사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그로 말미암아 “정복자 이상의” 존재들이 된다. 즉 승리자가 된다(롬 8:37).

2. 그때에 그는 모든 믿는 자들에게 천국의 문을 열어놓으셨다. 

“주께서 선물을 인간을 위해서 받으셨도다.” 

즉 그가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로 바울 사도는 풀이하고 있다(엡 4:8). 왜냐하면 그는 주시기 위해 받으셨기 때문이다. 

그의 머리 위에 성령의 기름부음이 쏟아져 그의 옷자락까지 내려올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그가 받으신 것을 주셨다. 영생을 주는 권세를 얻었으므로, 그는 아버지께서 “그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신다(요 17:2). 

“주께서 선물을 인간을 위해서 받으셨지”, 천사들을 위해 받은 것은 아니다. 

타락한 천사들이 성도가 될 수 없었고, 또한 서 있는 천사들이 복음의 사역자가 될 수도 없었다(히 2:5). 

또 그 선물은 유대인들만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을 위한 것이다. 누구든지 원하는 자는 이 선물의 혜택을 얻을 수 있었다. 

사도 바울은 이 선물(은사)이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혹은 목사와 교사”라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다(엡 4:11). 

즉 복음 사역자의 제도와 그에 대한 자격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데, 이는 하늘의 선물과 그리스도 승천의 결실로 존중되어야 한다. 

“주께서 선물을 인간에게서 받으셨도다”(난외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즉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될 수 있도록, 기꺼이 그 자신에게 인성(人性)을 입히셨다. 

중보자이신 그 안에 “모든 충만함이 거하며, 그의 충만함에서 우리가 받을 수 있다.” 

우리를 위해 이 선물들을 받으신, 그리스도의 친절과 사랑을 찬미하기 위해 시편 기자는 다음 일들에 주목한다.

(1) 우리가 그것들을 박탈당했던 사실을 주목하고 있다. 

그는 “패역자”, 패역했던 자를 위해 그것들을 받으셨다. 인간의 모든 자손들은 타락한 상태에서는 패역했었다. 

이는 아마도 특히,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 되었던 이방인들을 의미하는 것일지 모른다(골 1:21). 

그들을 위해 이 선물을 받으며, 그들에게 그것을 준다. 

그리하여 그들이 무기를 내려놓을 수 있도록, 그들의 적의가 죽을 수 있도록, 그리고 그들이 다시 충성할 수 있도록 한다. 

이것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패역자들이 복종해 사함을 받을 뿐만 아니라, 발탁되기까지 하는 뛰어난 그리스도의 은혜를 찬미하고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 아래에서 위탁되었는데,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우리의 법으로 말하면 권리 박탈이 취소된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패역한 세상에 오셨으나, 그 세상을 정죄하기 위함 아니라, 그분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을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2) 그 속에 우리를 위해 마련되어 있는 은총을 주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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