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08.11.13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성령의7역사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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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바람의 역사      행2:2, 요3:8, 시35:5
[4] 바람의 역사 ------------------- 강권의 역사
* 바람의 역사는 강권의 역사입니다.
* 바람 wind.
- 아네모스는 아에미(호흡하다, 불다)에서 유래했으며, 일반적으로 '바람'을 의미합니다.
- 히브리어 루아흐(바람, 숨, 마음, 영)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나, '바람'이란 의미를 나타냅니다.
- 하나님은 구름으로 자기 수레를 삼으시고 바람으로 자기의 사자로 삼으신다(시 104:3이하)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종종 바람을 보내시거나 이용하시는 분으로, 동풍을 불게 하여 애굽 땅에 메뚜기를  보내시고(출10:13), 서풍이 그것들을 멀리 몰아내게 하시고 바람 날개로 날으신다(출 10:19)  고 했습니다.
* 아네모스는 '바람 자체', 또는 '부는 바람'을 의미합니다.
- 마 11:7, 마 14:24, 약 3:4 등에서는 바람으로,
- 마 7:25, 막 4:39, 눅 8:24 등에서는 강한 폭풍으로,
- 계 7:1에서는 '땅의 사방의 바람'으로,
- 마 24:31, 막 13:27에서는 '하늘의 사방'(사[방] 바람으로)에 대하여 사용되었습니다.
* 신약성경에서 반석과 모래위에 세운 집에 불어 닥친 바람(마 7:25 마 7:27절) 또는 바울이   탄 배를 조난시킨 바람(행 27:4, 행 27:7, 행 27:14, 행 27:15)과 같은 바람을 표현하는   단어로 아네모스가 단연 보편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 아네모스는 엡 4:14에서 은유적으로 교훈의 풍조에 대해 사용되었습니다.   믿음에 든든히 서지 못한 자는 특별한 이유도 없이 온전한 교훈에서 속히 떠나게 되어 바람에  의해 가볍게 불려 다니는 것과 같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가르침의 변화성과 공허함을 보여주는 듯합니다.
- 그러나 공관복음 기자들이 예수님께서 바람을 잔잔케 하신 사건(마 8:26이하; 막 4:37 막 4:39 눅 8:23이하)과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어 제자들에게 오신 것(마 14;24이하; 막 6:47이하)을  기록한 것과 같이 예수님을 기상 일기를 통찰하시는 최고자로 분명히 명시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깨달아야만 합니다.
- 바람을 다스리는 데 있어서 천사가 사방의 바람이 지구상에 불지 못하도록 붙잡아 두는 것을   묘사한 요한계시록 문장에서(계 7:1), 바람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이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 행 2장에 보면  성령 강림이 세 가지 징표(徵表)로 나타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행 2:2“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 곧 '바람'과 '불'(마3:11,12)과 '방언'인데 이것들은 모두 유대인들이 전통에서 하나님을 상징적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바람'이 성령의 임재하심에 대한 징표로서 나타난 것은 어원적인 임재하심을 나타내는 표시로 여겨졌습니다.
- 본 구절에는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로 성령의 임재가 상징적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바람'이 성령의 임재하심에 대한 징표로서 나타난 것은 어원적으로 볼 때 '영'(* 프뉴마)이라는 단어가'바람'(* 프노에)과 깊은 연관이 있다는 사실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있습니다.
- 이러한 연관은 예수가 니고데모에게 중생에 대해 말씀하실 때에도 발견됩니다(요 3 : 8).
- 또한 구약 에서도 하나님의 임재를 '바람'으로 표시한 곳이 많이 있는 것을 볼 때(왕상19:11;시104:4)   이 연관이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사상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람 같은'이라했기 때문에 바람과 성령이 동일하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다만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는 성령의 능력과 그의 오심의 충만함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뿐만아니라 이 말은 제자들이 지금까지 체험하였던 것보다 더 친밀하고 인격적이며 강력한 방법으로 성령께서 임재(臨在)하셨다는 것을 나타내 주는 말입니다.
* 요 3:8“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 바람이 임의(任意)로 불매라는 말은 '성령'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루아흐'와 이에 대한 헬라어 '프뉴마'는 둘 다 '바람'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 시 35:5 “저희로 바람 앞에 겨와 같게 하시고 여호와의 사자로 몰아내소서”
- 바람 앞에 겨란 악인의 특성을 잘 나타내 주는 표현 중의 하나입니다.  이러한 표현은 돕는 자가 없는 상태와 무가치한 자의 모습을 그린 것입니다 
- 한편, 시1:4 에서도 악인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다고 하였습니다.
- 악인의 죄를 좇지 아니하며의 '악인'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라사'는 '유죄한자', 곧 '법정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자'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하나님의 율법 앞에서 죄인으로 입증된 자를 말합니다.
- 이들에게는 하나님의 율법 대신에 자신의 삶의 원리가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꾀에 해당하는 말로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는 인간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5] 기름의 역사         시45:7, 히1:9,눅4:18                     요14:6
[5]  기름의 역사 ----- 진리의 역사 ----- 진리 ------ 진리의 영 ------- 보혜사       고후1:21,22 행10:38   요14:16-17  요14:26 모든 것을 가르치고, 생각나게
* 성령의 역사는 기름의 역사이며 진리의 역사입니다.
- 구약에서 기름을 붓는 행위는, 하나님께서 특별한 사람들을(선지자, 왕상 19:16;  왕, 왕상 1:39; 제사장, 출 29:7) 구별하여 소명을 부여하는 것을 뜻합니다.
- 다윗 왕은 3번이나 기름 부음을 받았습니다. (* 삼상16:13 사무엘에게,  삼하2:4 유다 족속에게,  삼하5:3 온 이스라엘에게)
* 시 45:7“왕이 정의를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시니 그러므로 하나님 곧 왕의 하나님이 즐거움의  기름으로 왕에게 부어 왕의 동류보다 승하게 하셨나이다”
* 히1:9 '기름 부음'은 하나님께서 누군가에게 사명을 맡기실 때 행하는 의식입니다(출 28:41; 삼상 10:1;  왕상19:16). 그리스도께서 구속 사역을 온전히 이루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을 때 하나님께서는 영광과 존귀의 기름을 예수께 부으셨습니다.
-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게 기름 부으신 목적은 온 우주를 다스리는 권한을 부여하시기 위함입니다.
* 기름부음의 역사는 진리의 역사입니다.
* 요14:6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 길 되신 그리스도는 에덴동산에서 인간이 누렸던 하나님과의 교제는 인간 스스로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깨지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인간의 힘으로는 결코 건널   수 없는 단절이 생기게 되었고, 그 어느 누구도 이 단절을 뛰어 넘어 하나님께로 이를 수   없게 되었습니다.
- 그런데 영원하신 말씀이신 예수께서는 이러한 인간을 다시금 하나님과 연결시키기 위한 다리의  역할을 하시려고 육신이 되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요1:14)
- 주님은 하나님께로 이르는 길이 어디 있는지를 가르쳐 주시는 선생일 뿐만 아니라,   길 자체이십니다.
- 그는 하늘과 땅을 잇는 사다리이신 것입니다(요1:51)
- 그런데 그는 길 가운데 하나의 길이 아니라“유일한 길”이십니다(행4:12)
- 인간은 다른 길을 찾고자 하는 헛된 수고를 포기하고, 예수께로 나아와야 합니다.
* 요14:7“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 예수님은 길을 보여주는 자가 아니라 바로 길이시고, 진리를 계시하는 자가 아니라 바로 진리이시고, 단순히 생명을   주시는 자가 아니라 그가 바로 생명이십니다.
- 진리는 하나님의 본질적인 것과(롬1:25), 그리스도(고후11:10, 엡4:21), 성령(요14:17)과 연관됩니다.
* 요14:26“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 누가복음 4장18-19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고향인 나사렛 회당에 들어가 말씀을 증거하신 내용이 나옵니다.   그때 설교 본문으로 삼으신 말씀이 바로 이사야 61장 1절로 3절의 말씀입니다.
* 사 61:1, 2의 말씀은 예수의 두 가지 사역 곧 선지자적 사역과 메시야적 사역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먼저 예수는 신 18:15,18에 예언된 바로 '그 선지자'(the prophet)로서 심령이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자이심을 증거합니다.
- 그리고 둘째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메시야로서(단 9:24) 영적으로 눈멀고 포로된 자들을 죄악에서 건져내어 자유케 하시기 위해오신 분임을 증거합니다(6:20, 21;7:18-23).
- 예수께 성령이 임했다는 것은 기름부음 받았다는 것과 맥을 같이하는 것으로서 제사장(출 28:41), 선지자(왕상 19:16), 왕(삼상 10:1)들이 기름부음을 받았듯이 예수께서도 기름부음 받으신 분으로서 이러한 직분을   모두 수행하실 것을 시사합니다.
- 따라서 이사야 예언의 주인공이신 예수께서는 (1) 성령을 받은 자이며 (2)복음의 선포자이며 (3)눌린 자를 자유케 하는 메시야의 사명을 감당하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 본문 1절에는‘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라고 기록되었습니다.
- 우리는 여기 나오는‘내’ 혹은‘나’는 누구인가라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회당에 있는 사람들이 다 예수님을 주목하여 볼 때 예수님께서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눅 4:21)”고 말씀하셨습니다.
* 그러므로 이사야 61장 1절에 예언된‘내’혹은‘나’는 바로 그리스도 예수님이라는 것을 예수님 자신이 증거 하신 것입니다.
- 그때 사람들은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 은혜로운 말씀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론 “저 사람이 우리 동네 목수인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 아니냐? 그가 어렸을 때부터 자라는 것을  우리가 다 봤는데 그가 지금 건방지게 구약에 예언된 메시야를 자신이라 하느냐?”라고 예수님을 인간적으로 생각했습니다.
- 그래서 예수님을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죽이려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들과 복잡한 변론을 하지 않고 그냥 저희를 지나가시면서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는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본문은 예수님에 관한 말씀입니다.
* 이 본문은 이사야 선지자가 주전 700년경에 예언한 말씀인데 그것이 700년 뒤에 예수님께 정확하게 이루어졌습니다.
- 우리는 이런 예언의 실현을 볼 때에도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기록하지 않으셨으면 결코  이처럼 정확하게 실현될 수 없는 위대한 말씀이라는 권위를 인정하게 됩니다.
* 본문에서는 메시야가 가진 권위(authority)는 어디서 오는 것이냐, 메시아가 하는 일 (ministry)의 내용은 무엇이냐, 그리고 메시야이신 예수님께서 이런 권위를 가지고 이런 사역을  하는 궁극적인 목적(purpose)은 무엇이냐는 3가지를 알 수 있습니다.
1>. 메시야의 권위(Authority)는 어디서 오는 것인가?
- 메시야는‘기름붓다’라는 뜻을 가진 히브리어‘(maschiach)’에서 파생된 말입니다.   이것을 헬라어로는‘(Christos)’를 쓰는데 우리말로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메시야와 그리스도는 기름 부음을 받은 자(the anointed one)라는 동일한 의미를   지닌 말입니다.
- 구약 시대에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기름 붓는 의식을 통해 취임하는 직임이 세 가지 있었습니다.   왕, 선지자, 제사장입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 직분을 한 몸에 지닌 분이 메시야입니다.
- 자기 백성을 다스리는 왕이기도 하고, 동시에 자기 백성을 가르치는 선지자이기도 하며, 또한 자기 백성의  죄를 해결하는 제사장의 기능을 한 몸에 수행하고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바로 메시야입니다.   메시야는 권위를 가진 분입니다. 메시야의 권위는 두 가지에서 옵니다.
(1) 첫째,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받은 데서 옵니다.
- 61장 1절 전반에는‘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여기서 여호와의 신이 임하신 것과 기름 부으심을 받았다하는 것이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 이사야서는 메시야의 권위가 성령의 임재에서 온다고 말합니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받아 성령이 임재해 계시므로 메시야에게는 권위가 있다는 것입니다.
- 이사야11장 1-2절에도‘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여호와의 신 곧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그 위에 강림하시리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 이새의 아들은 다윗이고 다윗의 후손은 예수님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에게 여호와의 신이 임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 여호와의 신은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라’고 기록 되었습니다.
- 그러므로 사람이 성령을 받지 않고서는 지혜도 없고 총명도 없고 모략도 없고 재능도 없고 지식도 바로 가질 수 없고 여호와를 경외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 이처럼 메시야의 권위는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았다는데서 오는 것입니다.
* 이사야 42장 1절에도‘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신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공의를 베풀리라’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이 말씀도 역시 예수님에게 성령을 부으신다는 약속입니다.
* 신약성경을 보면 예수님과 성령은 뗄 수 없는 관계임을 알 수 있습니다.
- 예수님께서 모태에서부터 성령의 충만을 받으셨고 침례 받으실 때 성령이 비둘기처럼 임하셨으며 또 성령의 능력을 물 붓듯, 기름 붓듯이 받아 갈릴리를 두루 다니며 착한 일을 행하셨습니다.
- 그리고 가르칠 때도 성령으로 가르치셨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할 때도 성령의 능력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과 성령이 함께 일하신 것은 일일이 열거할 필요가 없는데, 이것은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들이 신약에 모두 이루어진 것을 명확히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 하나님의 일을 하는 일꾼은 그 직분이 목사든, 장로든, 권사든, 집사든, 회장이든, 대장이든, 무슨 직분이든 간에 직분 자체보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과 임재하심을 통해 권위가 나온다는 말씀입니다.
- 고린도교회 사람들은 사도바울에게 “네가 12사도도 아닌데 왜 사도라고 돌아다니느냐?”라며 사도바울의 사도권을 의심했습니다.
- 그러자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2장 4절로 5절에서“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라며 성령의 임재로부터의 자신의 권위를 주장했습니다.
- 어떤 면으로든지 사람이 권위있는 사람이 되려면 그에게 성령이 계셔야 합니다.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날마다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받게 되면 고귀하고 권위가    있게 됩니다.
- 이 세상에서의 출세를 가지고 권위있다고 해봐야 그것은 세상 나라에서는 권위가 있는지  몰라도 하나님 나라에서는 아무것도 아닙니다(Nothing).  하나님 나라에서는 오직 성령과 동행하고,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받으며,   성령에 사로잡힌 사람이 권위가 있게 됩니다.
(2) 둘째, 메시야의 권위는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사명과 권한을 위임 받은 데서 옵니다.
- 본문 이사야 61장 1절 중반에는‘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라고 기록되었습니다.
* 메시야는 하나님 아버지의 보내심을 받아 특수한 사명을 위임 받았기 때문에 권위가 있는 것입니다. 
- 신약에서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메시야의 사역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사명을   받으신 것임을 여러 번 말씀하셨습니다.
- 요한복음 7장 28절에는 ‘내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로라 나를 보내신 이는 참이시니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나’라고 기록되었고,
- 요8장 28절에도 ‘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고 기록되었습니다.
- 요한복음 8장 42절에도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고   기록되었고,
- 요14장 10절에도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향하여 권위를 가지신 분입니다. 그런데 권위(authority)는 순종을 요구합니다.
- 그러므로 예수님께 불순종하는 사람에게는 진노와 파멸이 초래됩니다.
* 이사야 60장 12절에는 ‘너를 섬기지 아니하는 백성과 나라는 파멸하리니 그 백성들은 반드시 진멸 되리라’고 기록되었습니다. 권위자에게 순종하면 축복이고, 불순종하면 파멸이라는 것입니다. 
- 그러므로 예수님 말씀을 들으시고 권위에 순종하시기를 바랍니다.
2>. 메시야의 사역(Ministry)은 무엇인가?
- 이사야 선지자는 두 가지 사역을 말합니다.
1). 첫째, 가난한 자를 구원하는 사역입니다.
- 본문 1절 중반에는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라고 기록되었고,   2절 후반으로 3절 전반에는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라고 기록되었습니다.
-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자에게 은혜를 주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여기서 가난한 자는 물질적으로만 가난한 자(poor)가  아니라 심령이 가난한 자, 마음이 상한 자, 자신의 죄로 인하여 슬퍼하는 자, 자신의 허물로 인하여 근심하는 자를   다 포함하는 것입니다.
- 그들에게 슬픔대신 희락을, 근심대신 찬송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 마태복음 11장 28절에는‘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기록되었고,
- 9장 13절에는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라고 기록되었습니다.
- 또한 마태복음 9장 12절에는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 예수님께서는 무거운 짐을 진사람, 죄를 진 죄인, 그리고 병든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주시고  도와주시며 구원의 은혜를 주시고자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난하고 곤고하고 슬프고   죄를 짓고 마음이 무거우신 분은 메시야 되신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시기를 바랍니다. - 사람이 지위가 높아 교만하면 불안할 때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인사 안하고, 알아주지 않는 것에 성질이 많이 나기 때문입니다.
- 그러나 욥처럼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찌라”며 겸손하고 낮아지면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지금 없다고 해서 무슨 큰일이냐 본전이지’라고 생각하게 되고, 조금 배고파도 큰일 날 거 없고, 조금 가난해도 별로 슬플 것도 없다고 생각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 이처럼 사람이 마음을 낮추면 거기서 하나님의 은혜가 오고, 메시야의 도우심이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늘 마음을 낮추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2). 둘째, 메시야 사역은 억압에서 해방하는 사역(Ministry of Deliverance)입니다.
- 본문 1절 후반에는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라고 기록되었습니다.   20세기 우리나라에 해방신학(Theology of Liberation), 혹은 민중 신학이라는 잘못된 신학이  들어왔습니다.
- 해방신학의 기조는 만인구원설로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명(Mission of God)은 온세상 사람을 다 천국으로 인도하고 구원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 그러므로 사람의 영혼구원은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하실 일이라고 주장하는데 이것은 진실이   아닌 이단사상입니다.
- 그들은 하나님께서 만인을 구원하실 것이기 때문에 교회는 영혼 구원을 위해 애쓸 필요가 없고,  교회가 할 일은 정치적으로 압박받고 경제적으로 약한 프로레탈리아 계급을 해방시켜 주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사상을 가진 해방신학이 남미에서 시작되었는데 우리나라에 들어와 개정되어 민중신학 이 되었습니다.
- 민중 신학, 해방신학은 마르크스주의(marxism)가 기독교와 결합된 잘못된 사상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근거로 삼았던 구절이 바로 오늘 본문 이사야 61장 1절로 3절 말씀입니다.
- 이들은‘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라는 것을 정치적인 포로, 사회적인 억압으로 해석했습니다.
-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정치적인 억압이나 사회적인 억압보다도 더 무서운 것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영적인 억압, 마귀의 억압, 죄의 억압입니다.
* 요한복음 8장 32절로 34절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 케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라고 반문합니다.   그런데 사실 이스라엘은 그 당시에도 로마의 속국이었으므로 남의 종이었습니다.
- 이처럼 거짓말을 하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님께서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죄의 종이면서도 종인 줄을 모르고 마귀의 노예이면서도 노예인줄을 모르는 것이 불신자들의 현실입니다.
- 죄의 종된 자가 하나님의 종이 되고, 마귀의 종된 자가 성령의 종이 되는 내면의 변화를 가르친 것입니다.
3>. 메시야의 구원 사역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 본문 3절 후반에는‘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 메시야가 죄인을 구원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Glory of God)을 나타내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자기 영광을 위해서 살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은 자기의 존재 목적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 자기 영광을 위하다보면 시험과 좌절과 곤고가 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면 시험이  오지 않고 좌절감도 없는 것입니다.
* 이사야 43장 7절에는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고 기록되었고,
- 49장 3절에도‘너는 나의 종이요 내 영광을 나타낼 이스라엘이라 하셨느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 또한 이사야 66장 19절에도 ‘그들이 나의 영광을 열방에 선파하리라’고 기록되었습니다.
* 모든 물건에는 그것을 만든 목적이 있습니다.  시계도 사람이 시간을 본다는 목적으로 만들어 졌습니다.  그런데 시계가 그 시계를 만든 인간을 떠나서는 그 목적을 알 수 없습니다.  시계가 사람 팔에 있을 때에 사람이 시계를 보고 시간을 아는 것입니다.
*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면 존재의 목적에 대해서 영원히 헛갈릴 수밖에 없습니다.
- 사도 바울도 고린도전서 10장 31절에서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며 존재 목적을 분명히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구원받은 사람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습니까? ‘의의 나무’가 되어 열매를 맺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 본문 3절 후반에는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하심이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우리는 푸석푸석하고 썩어 한번만 충격이 와도 넘어가는 약한 나무가 되지 말고, 단단한 의의  상수리 나무(oak of righteousness)가 되어야겠습니다.
- 시편 1편 3절에는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라고 기록되었습니다.
-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께 뿌리를 내려 하나님으로부터 양분을 빨아 들여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서 언제나 말씀의 진리와 성령의 은혜가 임하여야 우리가 의롭게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길 외에 인간이 의로워 질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요 메시야 이십니다. 구약의 메시야 예언을 모두 다 실현하신 유일하고 확실한 분은 예수님   한 분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의 능력으로 권위를 입으시고 지금도 곤고한 자를 구원하시며 억눌린 자를  해방시키고 계십니다.
- 그리고 구원받은 사람은 의의 나무가 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살게 하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면에서 우리의 모범이 되십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인생이 슬픈 인생이 아니라 권위 있고 의미 있으며 고상한 인생이 되고 싶으면 예수님을 믿고 성령의 능력 침례를   받으십시오.
- 성령의 능력을 받으므로 곤고한 자와 억눌린 자를 구원하고 해방시키는 일을 우리도 해야 됩니다.   그리고 열방에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야 됩니다. 우리는 선교를 해야 복을 받습니다.   이렇게 하여 우리도 개인적으로 하나님께 칭찬받는 사람이 되고 교회도 명성을 얻는 교회가   될 줄로 믿습니다.

[6] 생수의 역사        요3:5, 요7:38  
[6]   생수의 역사 ----- 소생의 역사    
* 성령의 역사는 생수의 역사입니다.  생수의 역사는 소생의 역사입니다.
* 계22:1“ 또 저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1>. 생명수는 하나님과 예수님의 보좌에서 발원됩니다.(계22:1)
- 생명수의 강은 영생과 무한한 은혜를 상징합니다.
* 창2:10에는 강이 에덴에서 발원하여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 창26:18에는 이삭이 아브라함 때에 팠던 우물들을 다시 팠다고 했습니다.
* 창49:22절에는 요셉의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다고 했습니다. 
* 시1:3에는“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렘17:8) * 렘2:13, 렘17:13에는 생수의 근원이 여호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 요4:10에서는“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물을 마시는 것은 참된 예배요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서는 것을 말합니다.
2>. 어린 양이 성도를 생명수 샘으로 인도 하십니다(계7:17, 계21:6, 계22:17))
3>.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줍니다(계21:6, 22:17)
- 겔47:3-5 성전에서는 흐르는 물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 성전에서 발원한 물은 바닷물을 소성시키며, 강변에 늘어선 수많은 초목을 자라게 하여 각종 열매를 맺게 합니다.   뿐만 아니라 각양 각 색의 물고기가 자랄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을 제공해 줍니다.  에덴 동산의 생명의 강(창2:10)과 새 예루살렘 성의 생명수의 강(계22:1,2)을 연상시키는 이 물은 복음(성령)을 가리키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 왜냐하면, 복음은 그것을 접하는 모든 자에게 새 생명의 원천을 제공해 주며, 온갖 풍성한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해주기 때문이다.(고전2:13, 갈5:18,22,23)   그러나 이 물이 진펄과 개펄을 소생시키지 못했다는 사실에 유의하여야 합니다.   진펄과 개펄은 사해의 언덕 위에 위치한 고로 물을 받지 못합니다.   이는 복음을 거부하는 자는 결단코 구원을 얻지 못함을 예시하는 것입니다.  
* 생수는 성령님을  비유하는데, 이런 비유가 성령님의 인격성을 제외함이 아닙니다.   요한복음은 성령님의 인격성(人格性)을 밝히 말하고 있습니다(1:33, 3:34, 6:63).
*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고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성령으로 거듭 난다'는 사실에 있다고 보아야  무방할 것입니다.
- 물은 깨끗하게 하는 상징으로 유대인들에게는 희생 제사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요소입니다.   특별히 제사장은 몸을 씻지 않고서는 언약의 피를 갖고 성소에 들어갈 수 없었으며, 또한 침례  요한은 사람들에게 죄 사함을 받기 위한 회개를 촉구하였고 이러한 촉구를 받아들여 죄를 회개한 자에게는 물로 침례를 주었습니다.
- 한편 고넬료와 그의 친구들은 물침례를 받기 전에 이미 성령의 선물을 받았으며(행 10:47, 48)  에디오피아의 내시도 또한 그러했던 것으로 추측해 불 수 있습니다(행 8:26-39).
- 결국 '물'이 무엇을 나타내든 간에  본절의 의미에는 큰 변화가 없습니다.
- 물을 자연적 출생으로 볼 경우에는, 사람은 육적 출생뿐만 아니라 성령으로 말미암은 영적 출생을  통해 비로소 하나님 나라에 참여케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이를 침례 요한의 침례와 관련시킬 경우에는, 침례 요한의  침례가 증거하고자 했던   성령 침례를 통해 중생이 이루어진다는 의미로 이해됩니다. 
- 끝으로 이를 기독교의 침례와 연관시킨다면, 중생이 그리스도와의 연합 곧 성령 침례를 통해   이루어지며 물침례는 이 사실에 대한 공적 선포(宣布)이자 상징적 의식으로서의 의의를 지님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 요7:38에서는“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리라”
- 성경에 이름과 같이란 말씀은 다음 성귀들을 기억하게 합니다.   곧, 사 43:20, 44:3, 55:1, 58:11; 겔 47:1-12; 욜 3:18; 슥 13:1, 14:8 등 입니다.
- 여기 이른 바 그 배에서란 말은 성령님께서 신자의 가장 깊은 심령 속에서 역사하실 것을   가리킵니다.
-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질 영적 역사는, 이렇게 인간의 가장 깊은 요구를 만족시켜 주며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여 줍니다.
* 그리스도인들이 기도응답을 받는 가장 좋은 방법은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반드시 이루시는 신실한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기도하면   반드시 응답 하십니다.
*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44장에서 새로운 약속을 더하셨습니다. 바로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 예수님께서도 믿는 자들은 성령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7:38-39)
- 생수의 강이란 예수님을 믿는 자가 받을 성령을 의미합니다.
-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뱃속에서 생수의 강이 넘쳐나는 것처럼 시원하고 생동감 넘치는 삶을 살게 됩니다.
* 요한복음 7장에 상응하는 구약의 약속이 바로 본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약속의 주체는 하나님이시며, 핵심내용은 3절입니다. “대저 내가 갈한 자에게 물을 주며 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며 나의 신을 네 자손에게,   나의 복을 네 후손에게 내리리니”   여기서 물과 시내란 하나님의 신이 후손들에게 임하여 복을 받게 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 요한복음 7장에 나타난 생수의 강이 성령을 의미하듯, 이사야 44장에 나타난 갈한 자에게 주시는 물도 성령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성령을 부어주시겠다는 약속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말씀인 것입니다.
1). 약속의 대상
* 이 약속을 받을 대상은 누구인지에 대해 우리는 먼저 해답을 명확하게 정의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약속이 나에게도 해당되는 것인지 분명히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 우선 이 약속이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주어진 것은 아닙니다.   회개치 아니하는 자들에게 임하는 결과를 이사야서는 우리에게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성소의 어른들로 욕을 보게 하며 야곱으로 저주를 입게 하며 이스라엘로  비방거리가 되게 하리라” (사 43:28)
- 불순종하고 회개하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약속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들은 저주와 비방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 그렇다면 이 약속의 대상은 누구일까요?
- 본문 1절을 보면 “나의 종 야곱, 나의 택한 이스라엘아”라고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종으로서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의 종 된 사명을 수행하는 이스라엘 백성들만이 이 약속의 대상입니다.
- 2절 후반부에는 “나의 택한 여수룬아 두려워 말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여수룬’이란 이스라엘의 애칭으로서 ‘내 의로운 백성’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아!, 혹은 이스라엘아! 부르실 때는 대개 법적인 이야기를 진행하십니다.
- 그러나 하나님께서 여수룬이라는 애칭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부를 때는 대개 복을 주시겠다는 말씀을 전하십니다.   따라서 이 약속의 대상은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사랑을 입으며,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칭찬하시는 믿음을 가진 유다 백성들입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만이 약속의 대상이 됩니다.
* 둘째로 이 약속은 육적인 유다 백성들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닙니다. “혹은 이르기를 나는 여호와께 속하였다 할 것이며 혹은 야곱의 이름으로 자칭할 것이며 혹은   자기가 여호와께 속하였음을 손으로 기록하고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칭호하리라”(5)
- 이 말씀은 이방인도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을 수 있음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 이스라엘에 속하지 않았던 사람이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스스로를 칭호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믿고 그와 같이 될 것임을 의미합니다.
- 그러므로 성령을 주시겠다는 약속은 유대인과 이방인 중에서 순종하고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을 사람들에게  동시에 주어졌습니다.
* 사도 베드로는 오순절에 이 약속이 실현되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마가의 다락방에서 120명의 문도들과 함께 기도할 때 성령의 부으심을 받고 다음과 같이 설교했습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 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행 2:38-39)
-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부르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는 사람들은 누구나 성령을 선물로 받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 베드로와 사도들은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를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행 5:32)고 말씀합니다.     사도들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모든 말씀과 행하신 모든 일들이 진리임을 증언하는 증인들입니다.   사도들은 성령을 힘입어 예수님께서 본인의 위격에 대해 하신 모든 말씀, 본인의 가치에 대해서  전하신 모든 말씀, 또한 행하신 모든 기적이 진리임을 증언하였습니다.
- 성령님은 사도들에게 역사하셔서 예수님의 모든 말씀과 기적과 삶이 진실임을 함께 증거 하신 것입니다.  복음에 순종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고 성령을 받은 사람들은 성경의 모든 말씀을 더욱 확고한 진리로 믿어 흔들  리지 않는 신앙을 갖게 됩니다.
2). 약속의 내용
* 본문에 나타난 약속은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을 부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불신자들은 성령을 알지 못합니다. 성령을 상상할 수도 없으며, 체험하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신자들에게는 성령께서 내주하셔서 날마다 지혜와 권능과 용기를 주시는 삶을 체험하게  됩니다.   만약 성령께서 오시지 않는다면 우리의 영혼은 마치 마른 땅과 같이 갈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지 않고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의 영혼은 당연히 공허할 수밖에 없습니다.
- 성령을 받으면 새 술에 취한 것처럼 사람이 변화됩니다.   반면에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헌 술에 취합니다.
* 이와 같은 약속의 말씀은 이사야서뿐만 아니라 구약성경의 다른 책 안에서도 많이 발견됩니다. “그 때에 내가 또 내 신으로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욜 2:29)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슥 12:10)
*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주시되 맛보기로 잠깐만 주시는 것이 아니라 풍성하고 넉넉한 소낙비처럼 부어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 성령을 소낙비처럼 내려주시겠다는 약속은 사도행전 2장 오순절 사건에서 최초로 실현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으로 교회에 임하시는 성령의 역사가 끝난 것이 아닙니다.   초대교회는 모일 때마다 이 약속을 붙들고 성령을 부어주시라고 기도했고, 거듭해서 성령을 받았습니다.
* 사도행전 4장 31절에는“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 사도행전 8장에서는 사마리아 사람들이 빌립 집사의 증거로 예수님을 믿고, 베드로와 요한 사도 의 안수로 성령 충만을 받은 사건이 기록되었습니다.
* 사도행전 10장에는 이방인 고넬료의 권속들이 베드로를 초청해서 말씀을 듣다가 성령을 받은 사건 이 나타납니다.
* 이처럼 사도행전을 통하여, 또한 교회 역사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께서 반복적으로 교회에   성령을 부어주셨음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모일 때마다 이사야 44장 1-5절에 약속하셨으니 내 영혼에 성령을 소낙비처럼  부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3). 약속의 결과
* 하나님께서 성령을 부어주시면 세 가지 명백한 결과가 나타납니다.
* 첫째로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너를 지으며 너를 모태에서 조성하고 너를 도와줄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종 야곱, 나의 택한  여수룬아 두려워 말라”(2).   하나님께서는 갈한 자에게 성령을 부어주심으로 도우십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인해 우리 안에 있는 두려움이 모두 사라지게 됩니다.   다시 말해 성령께서 우리 안에 임하시면 우리 영혼의 두려움이 모두 사라지는 것입니다.
* 초대교회의 사도들은 정권을 가진 자들에게 끊임없는 위협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에 기록된 바처럼 그들은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담대하게 나아갔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행 4:19).  뿐만 아니라 그들은 담대하게 기도했습니다. “주여 이제도 저희의 위협함을 하감하옵시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옵시며”(행 4:29).   성령의 충만함을 입으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책임지시기 때문에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 둘째로 영혼의 갈증이 사라집니다.   목이 마를 때 물을 마시면 갈증이 사라지듯, 성령을 받으면 영혼의 갈증이 사라집니다.   전도서는 성령이 아니면 채워질 수 없는 영혼의 공허한 마음을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전 3:11)
* 사람은 아무리 이 세상에서 바쁘게 살고, 열심히 돈을 벌어도 왠지 이런 삶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곧 깨닫고 공허해합니다.   영혼의 공허함이란 지식이나 돈, 쾌락으로 채워지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내려주시는 성령으로만 채워집니다.   이렇게 성령이 부은바 되면 인간의 영혼은 만족감으로 가득 찹니다.
* 시편 기자와 같이 “주께서...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시 23:5)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 마지막으로 성령이 임하시면 우리의 삶이 활력을 띠게 됩니다.   본문 3절 후반부터 4절까지를 보면 ‘나의 신을 네 자손에게, 나의 복을 네 후손에게 내리리니  그들이 풀가운데서 솟아나기를 시냇가의 버들 같이 할 것이라’고 기록되었습니다.
- 성령께서 임하시면 우리의 인생이 번창합니다.   버드나무 한 그루만 시냇가에 심어도 몇 년이 지나면 그 시냇가를 덮을 만큼 울창해지듯이 왕성하게 번창합니다.   성령께서 임하시면 가정과 사업과 교회가 번창하고, 내 인생에 왠지 모를 기름이 흘러 원활하게 흐르는 인생이 됩니다.   반면에 성령충만을 받지 못하면 왠지 모르게 인생이 뻑뻑하고 잘 돌아가지 않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 성령께서 임하시면 반드시 복이 옵니다. 회복되고, 번창하며, 치료 받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우리가 인생의 담대함과 영혼의 내적 만족, 그리고 인생의 번영을 경험할 수 있는 것도 모두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성령으로 인한 것입니다.
*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주신 약속을 붙들고, 기도를 통해 이 약속을 주장해야 합니다.    이 약속이 교회적으로 실현되는 것이 부흥입니다. 우리는 부흥을 소망합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1907년에 부흥이 일어났고, 그 뒤로 50년 후인 1960년대에 다시 부흥이 찾아  왔습니다.   그러므로 그로부터 50년 후인 2010년대가 되면 하나님께서 이 땅에 다시금 부흥을 주실 것입니다.   부흥은 인간의 수단과 방법으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부흥은 오직 성령의 부으심을 통해 일어납니다.

[7] 비둘기의 역사       마3:16, 막1:10       
[7] 비둘기의 역사 -- 온유의 역사        눅3:22, 요1:32  
* 비둘기(dove)는 신약성경에서 10회 나오며, 사복음서에만 나온다(막 1:10 병행구 마 3:16/ 눅 3:22/ 요 1:32 막 11:15 병행구 마 21:12/ 요 12:14 요 12:16 마 10:16 눅2:24).
1>.성전을 깨끗하게 하시는 기사에서 막 11:15과 그 병행구절은 특권을 지닌 소매상이 제 동물을  팔기 위해 제공된 비둘기를 언급합니다.
- 성전 앞마당에서의 그들의 매매는 성전을 찾는 사람들이 제사를 위해 깨끗한 동물들을 얻는 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 레2:14-17 새의 번제 : 우양의 번제를 드리지 못하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산비둘기나 집비둘기 새끼를 드릴 수 있다는 특례법입니다. - 비록 제물을 잡는 방법이 우양의 그것과 다르지만, 피 흘림, 완전 소각,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 등은 우양과 전혀 차이가 없습니다.   이는 경제적 이유로 하나님께 대한 헌신에 불성실할 수 없음과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하나님의   구속 은혜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고전1:18-31)
* 번제의 경우에는 소나 양이나 염소나 비둘기의 수컷만 됩니다. 암컷은 제물로 쓸 수 없습니다.
* 눅 2:24은 레 12:8의 가난한 자에  관한 말씀을 인용하면서 새로 어머니가 된 자를 정결하게 하기 위해 규정된 두 마리의 비둘기 희생 제물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 마10:16에서 예수님께서는 전통적인 사상을 사용하여 제자들을 보내는 것을 지혜로운 뱀과 악의  없는 비둘기의 행동에 비유 하십니다.
- 제자들은 마치 약탈하는 이리들 가운데 무방비 상태로 있는 양과 같지만 그들이 사람들과 교제 할 때에는 그들의 지혜로움과 함께 비둘기 같은 악의 없는 성품을 드러냅니다.
2>.복음서들의 예수님의 침례(세례)에 관한 기사에 따르면,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그의 위에 내려 오셨습니다.   성령께서 하늘로부터 비둘기가 비행하면서 내려오는 것처럼 내려오셨다는 것은 환상의 유형과는  일치하지 않습니다.   이 장면에서 현상들이 통합될 때에 천국의 요소들은 형태에 있어서 현실이 되고 구체적인  형상을 가집니다.   비둘기는 침례(세례)와 하늘로부터의 목소리라는 틀 구조 안에서 성령을 주시는 것의 중요성을 현실화한 형상화된 상징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 고대에는 관례적으로 세 가지 상징적 요소들을 비둘기와 관련시켰습니다.
- 그것은 신의 현시이며 신의 교감하는 새, 인간 영혼의 현시, 그리고 유대교에서는 이스라엘의  상징입니다.   첫 번째로 언급한 상징적 단계(하나님의 현시의 하나로서의 비둘기)는 프뉴마(영)/ 루아흐 (바람, 숨, 마음, 영) 그 자체가 하나님의 현시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비둘기의 형상은 그러므로 프뉴마로서의 하나님의 현시의 환상적이고 예언적인 실현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비둘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교감하는 새로서 나타납니다.   비둘기 형상의 성령은 카리스마적, 환상적 실체로서 하늘로부터의 목소리에 의해 묘사되는  아버지와 아들 간의 결속을 가능하게 합니다.
* 마3:16 비둘기같이 라고 사용된 직유법은 성령과 비둘기를 명백히 관련시킵니다.   즉 이 말은 성령 강림의 방식이 비둘기 같다는 뜻도 되고, 성령이 비둘기 모습을 하고 나타났다 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 누가복음 3:22에는 후자의 견해를 강조하기라도 하듯 '형체로'가 첨가되어 있습니다.   한편 성령에 관하여 이와 같은 유추적 표현이 나오는 구약성경은 창 1:2 뿐입니다.
- 탈무드에는 창1:2이 '하나님의 신은 비둘기같이 수면에 운행하시니라'로 해석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근거로 어느 합리주의자는 비둘기 한마리가 예수의 머리 위에 날개치고 있었다고  합니다.   여하튼 이것이 환상적 장면이든 아니든 분명 성령이 신인(God-Man)이신 메시야로서의 사역을 수행하도록 돕기 위해 예수 위에 임하신 것입니다.
- 즉 예수께서는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성령의 적극적이고도 완전한 후원을 받으신 것입니다.   이러한 점은 '예수의 참 인간으로써 합당한 은사인 성령을 받으심으로 공생애의 첫 발을 내디디셨습니다.  주관적으로 볼 때 신인을 연합시킨 성령이 육화(肉化)하신 말씀(예수) 위에 임하셨고, 객관적으로 볼 때 그 성령으로 인해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계시되셨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 한편 성경 문학적으로 비둘기는 성령의 교통하는 힘의 온유(11:29)와 순결(1:16)과 생명의  충만(창1:2; 요7:37-39)을 상징하는데, 이것들은 예수의 품성과 사역의 특질과 좋은 비교가  되고  있습니다.
- 예수께 성령이 임하심은 시45:7에 예언된 관유(灌油,기름부음)의 성취였습니다.   실로 율법에 있어서도 흠 잡을 것이 없는 예수께서는 율법에 정한 나이 30세(민 4:3) 때에 공개적 절차를 통해 공식적인 그리스도(기름부음 받은 자)가 되심으로 우리의 선지자,  대제사장, 왕으로서 취임하셨던 것 입니다.   여기에서 물과 불과 성령의 삼각 침례가 완성되었습니다.
* 한편 막1:10에서 마가의 보고에 따르면 '하늘이 갈라지고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오시는' 장면을 본 사람이 오직 예수뿐이었다는 암시를 주고 있는데, 이는 마가의 초점이 예수의 경험을 기록한 것이지 요한에 대해 말하려 함이 아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 여기서 마가는 하늘에서 일어난 현상에 대해 '하늘이 갈라지다'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는 마가의 생동감 넘치는 기록 방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 이와는 대조적으로 마태와 누가는 매우 차분한 용어인 '아노이고'(*'열다')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하늘이 갈라진다는 것은 인류가 대우주적  전기(轉期)를 맞았음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즉 이제 인류는 절망의 하늘을 '찢고' 새 소망을 선사하시는 그리스도를 공적으로 영접하게   되는 것입니다.   특히 이 표현은 사 64:1의 '원컨대 주는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시고 주의 앞에서 산들로 진동하기를'을 반영하고 있다고 봅니다.
* 누가는 성령께서 예수에게 임하신 것은 요한의 침례를 통하여 되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의 복종과 기도를 통해서 이루어진 것임을 밝히고 있습니다(눅 3:21).
- 한편 본문에서 성령은 '비둘기같이' 임하셨다고 했는데(요 1:32) 이는 성령의 순결하고도   온유한 통치와 특성을 반영한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 눅3:22에서는 성령이 비둘기 같이 강림했다고 전합니다.   누가는 성령이 임할 때 오직 예수만이 그것을 의식했고 그곳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의식하지   못하였다는 식의 별다른 보도를 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아마도 그곳에 있었던 다른 사람 들은 성령 강림의 의미를 깨닫지 못한 채 비둘기 같은 형체가 내려오는 것만을 보았을 것입니다.
- 한편 '비둘기'가 의미하는 바에 대해서는 학자간에 다양한 견해가 있으나  온유하고 평화스런 속성을 나타낸다고 봄이 무난할 것입니다.
- 한편 성경에 기록된 성령의 모습과 그 의미를 도표화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성령의 의미 모습 : 
- 신자의 삶에서 죄를 소멸시키며 성결케 하는 능력(사 6:1-7; 행 2:3)
- 영적인 삶을 충만하게 넘치도록 채우시는 힘(요 7:37-39)
- 신자를 당신의 것으로 소유하셔서 완전하게 영원한 교호(交互)를 약속하심(엡 1:13)
- 기름 사역을 위해 부여되는 능력(행 10:38)
* 한편 이러한 성령 임재는 구약의  예언대로 하나님이 그의 종에게 성령을 부어 주시리라하신 약속(사 42:1)과 성령이 그 새로이 생겨난 가지에 임할 것이란 예언을 성취시키는 것이기도   합니다(사 11:2).
- 또한 예수가 하늘나라의 일을 위하여 위임을 받고 그 일을 시작하기 이전의 준비 절차로 왕,   제사장, 선지자로서 기름부음을 받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 요1:32 온유의 역사  성령이 비둘기같이 하늘로서 내려와서
- '하늘'은  일반적으로 지상과 대칭되는 창공과 우주를 의미합니다.   그리이스인들은 하늘을 신들의 거처인 올림푸스로 생각했습니다.
- 그러나 성경의 관점에서 볼 때 '하늘'이란 (1) 하나님에 의해 피조 된 창공(창 1:6-8;행 4:24) 혹은   (2)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곳(전 5:2;마 516;막 11:25)을 의미합니다.
- 하지만 위의 두 개념은 엄밀하게 말해서 서로 판이합니다. 즉 피조된 이 세상과 영원한 하나님의 거처인 하늘나라는 동일하지 않습니다.
- 특히 성령이 '불이 혀'(행2:3)로 상징된 것과는 달리 예수의 수세(受洗)시에 비둘기로 상징되어  강림한 것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1) 죄에 대해서 순결하신 그리스도의 본성(마 10:16;히 4:15),
(2) 온유하신 그리스도의 성품(마 11:29),
(3) 하나님의 사랑과 총애를 받으시는 그리스도의 사역(아1:15; 마3:17;막 1:11;눅 3:22)등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 임한 성령은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침례 요한이 눈으로 볼 수 있게끔 임하였음이 분명합니다(33, 3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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