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11.02.11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권능의 기름부음-왕의 기도.제3의물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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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의 기도<믿음으로 연합하여 그리스도와 하나된 영을 소유한 믿는 이의 예수이름으로 명령하기> - 왕의 기도를 할 수 있는 자격요건을 확인하라

 

기도 응답에 대한 불신앙과 무지에서 벗어나야 한다. 하나님께 기도했다면 삶 가운데 실제로 하나님의 응답이 나타나야 하는데, 하나님의 응답을 받아본 체험이 희소한 탓인지 아예 기도 응답을 기대하지 않거나 기도 응답 받는 일이 결코 쉽지 않다고 생각하는 불신앙적 자세나 무지에서 벗어나야 한다. 기도 응답은 하나님과의 생명의 나눔으로 이루어진다. 기도 응답의 여부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려 있거나 반대로 인간의 믿음에 달린 것이 아니다. 기도 응답은 하나님과 그 백성사이의 생명의 나눔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지 일방적인 요구나 법적 요구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왕의 기도는 왕이신 예수님처럼 문제를 향해 꾸짖고 명령하는 기도이다.
왕의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서 이루는 기도이다. 왕의 기도는 왕이신 하나님의 자녀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문제를 향해 명령하거나 믿음으로 선포하는 기도로써 예수님이 하셨던 바로 그 기도의 방법을 따라하는 기도이다.
왕의 기도는 하나님의 자녀로써 우리가 이 땅에서 마땅히 누려야 할 축복이다.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
과거-현재의 나는 마귀의 자녀(요일3:10)-하나님의 자녀(엡2:19),
과거-죽은 자(엡2:1)-산자. 과거는 하나님께 나갈 수 없던 자(엡2:18)-나갈 수 있는 자,
<엡2:5-6>을 보면 하나님께서 영적으로 죽은 우리를 살리셨고, 일으키사, 앉히시니 라는 과정을 거쳐 구원하셨습니다. 이것은 마치 어떤 사람이 죽어 있는 시체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 넣어 다시 소생시킨 후 그 사람을 일으켜 세워서 귀한(영광) 자리로 앉히는 광경을 연상케 합니다.
<엡2:12>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나는 누구인가?
나는 하나님의 자녀(요1:12) 하나님은 왕이십니다.(시145:1), 그러므로 우리는 왕자이다. 왕자는 왕(아버지)의 특권을 갖고 있습니다.
<롬5:17>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자녀인 우리는 왕자의 신분을 확실히 알고 특권을 사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갈3:26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갈3:29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 우리의 과거는 원죄를 받아 저주 아래 살며, 율법에 종노릇하며 살던 자였습니다.
<롬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율법 아래 있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라 하더라도 참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종의 위치에 있습니다.(갈3:23-24)

예수님께서 여자의 몸에 나시고 율법 아래 나신 것은 율법의 속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갈3:13) 하나님의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시려고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사(빌2:8) 율법을 완성하시고 하나님과 생명관계를 회복시켜 성령(아들의 영)을 주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하나님의 유업을 받을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딛3:7> “우리로 저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후사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갈4:4-7>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5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6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갈 7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  -- 이 은혜 안에 치유와 부요와 축사 등 각종 응답이 있습니다.

그럼, 은혜 아래 사는 자인 나는 현실(땅)에서 은혜를 제대로 누리며 살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하면서 기도 응답을 받고 아버지의 것을 마음껏 누리는 풍성한 삶을 누리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전혀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왜! 나의 기도는 불확실한가? 예수님의 기도는 어떠했나?
예수님의 기도는 응답되지 않은 기도가 하나도 없습니다.
예) 요11장 나사로를 살리신 일. 예수님은 자신이 하는 모든 기도가 아버지께 상달되며 또한 아버지께서 자신의 기도에 즉각 응답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주변에 둘러선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내신 것을 믿게 할 목적으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요11:41-44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42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43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44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선포로 죽은 자를 살리는 기도를 이루신 것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니까? 그러나 주님은 아들로써 우리(아들의 명분)을 가진 자들의 본이 되어 사셨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를 믿으라 그리하면 나의 하는 일보다 더 큰 일도 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요14:12)
예)베드로가 왕의 기도를 통해 죽은 자를 살려 냈습니다.
<행9:40> “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어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가로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
예수님의 제자도 했던 일이라면 우리도 그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이밖에도 성경에는 다른 제자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신 사살이 여러 곳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동일한 일이 일어나는 것도 가능해야 하지 않을까요?

오늘날 신앙생활에서 우리를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이 바로 이 기도와 기도 응답에 관한 문제입니다.
예수님이나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사람들은 특별하기 때문에 예외였다고 생각하거나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정말 들으시는지 그리고 그 기도에 응답하시는지에 대해 우리는 아직 확신이 없습니다. 그러면서 여전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런 기도가 얼마나 뜨겁고, 적극적일 수 있겠습니까?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우리는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와 하나님의 뜻이라는 두가지를 잘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예수님, 나와 하나님은 어떤 관계인가?
마3장을 보면 <마3:16-17>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하나님은 예수님을 가르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랑하고 기뻐하신 아들에게 모든 것을 부어 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하나님께 어떤 자인가요? 나 역시 하나님의 사랑하신 아들(딸)이요 하나님의 기뻐하는 자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요1:12-13 >

==모든 문제는 하나님과의 관계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 어떤 존재입니까?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시오 나는 하나님의 아들(딸) 맞습니까? 옆집 아저씨와의 관계 같지 않습니까? 육신의 아버지와 교제하며 응답을 기다리는 것과 옆집 아저씨와 교제하며 응답을 기다리는 것은 분명 차이가 있습니다. 아버지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아들을 버리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롬5:8)

==하나님이 친아버지와 자녀 사이라면 눈치 볼것 없다
우리는 마음속으로 하나님이 오늘은 내 기도를 안들으실 거야, 너무 바빠서 이런 일 따위는 신경 안 쓰실 걸“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사탄이 우리를 속이는 거짓말입니다.
강조: 내가 예수님을 주로 시인(영접)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그리고 내 좋을대로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살고 있다면, 그리고 지금 세상 어느 것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산다면 당신은 하나님의 사랑을 입을 자격이 있는 아들이요 하나님의 기뻐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왕자)로 왕의 기도를 할 자격이 있어 시도(선포)하는데 왜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강력히 경험하지 못하는가?
**그것은 죄악으로 인해 관계가 깨졌기 때문입니다. 본문 <미3:4> “그 때에 그들이 여호와께 부르짖을지라도 응답지 아니하시고 그들의 행위의 악하던 대로 그들 앞에 얼굴을 가리우시리라”
**교만하거나,  위기중에서 흔들려서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겸손과 믿음이 필수.
**어떤 상황에서도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라(마10:19-20) (내 경험과 감정(혈기)고집으로 성령의 인도를 거부하고 범죄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범죄한 백성들의 기도를 듣지 아니하신다.
<사1:15>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19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20 너희가 거절하여 배반하면 칼에 삼키우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
따라서 응답의 비밀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먼저 회복되어야 하고 또한 흔들림 없는 믿음으로 선포해야 합니다.(마21:22)

 

1>나의 주인께 집을 내어드리라
대부분 우리의 영성은 성령님을 부분적으로 모시고 내 마음의 집을 부분적으로 개조했음을 깨닫습니다. 우리의 영적 상태는 예수님을 믿고 성령님을 모시고 산다고 하지만 아직 주인이 완전히 안바뀐 상태로서 조금 변화 되었어도 아직 주인은 나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사역하려면 내 마음의 집을 리모델링하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그분이 사시기에 편리하도록 재건축되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내 몸이 성령님의 집(주인)되게 해야 한다는 것
<엡2:22> “너희도 성령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우리의 할 일은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일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그 분 안에서=즐거워하고 그 분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는 청지기로 살며 그 분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예)포도열매는 포도나무에 붙어있으면 자연적으로 열매 맺습니다.
<요15:5, 7>,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내가 내 집을 가꿀 때는 힘이 들고 복잡하지만 내 집을 전부 하나님께 넘겨드리고 청지기의 삶, 자존자의 삶이 아닌 의존자의 삶을 살게 되면 참된 기쁨이 오고 근심 염려가 사라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예)요8장 간음한 여인을 향해 말씀하신대로-요8:10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11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 --- 죄값은 죽음입니다. 사는 길은 죄 짓지 않는 것입니다. 그럼  죄 짓지 않고 살 수 있는 사람은 누군가요? 다시는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은 나는 죽고 내 안에 죄 없으신 예수님이 들어와 사시는 길 뿐입니다.

==예수 믿는데 정말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신가? 여기에 성령세례와 충만를 받아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엡518)
중생(구원)으로 만족해선 안됩니다. 우리의 능력은 주의 영이 나를 지배-교제-인도 받을 때부터 시작되고 능력이 흐르고 인생은 자유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롬8:4>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지금 우리의 능력은 얼마나(%) 주의 영에 지배 받는 삶인가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충만은 완전히 정복된 상태입니다. 내 의지까지 내어드려야 합니다

 

2>그리스도 안에서 살라
<고후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바울은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갈2:20)
내가 나를 포기하고 자아가 완전히 죽어야 비로소 내 안에서 그리스도가 나의 주인이 되시며,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승리의 삶을 사시는 것이 가능해 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도 내 마음대로 살면--고난당하게됩니다.(눅15장 탕자의 비유)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된 신분과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지위에 맞는 새로운 행동과 거듭난 태도(성화)를 통해서만이 나의 현재의 삶이 변화될 수 있습니다. 이 깨달음을 실천할 때 하나님의 능력이 나를 통해 흐르기 시작할 것입니다.

 

이상의 선결요건들이 왕의 기도의 자격입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죽고,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주인(주님)으로 사시는, 참된 구원을 얻는 하나님의 자녀만이 왕의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이면 기도한 일이 실제로 일어나느냐 마느냐의 여부는 이미 아무 문제도 아닙니다. 기도의 결과만 놓고 하나님이 내 기도에 응답하시느냐 응답하지 않으시냐 눈치보는 차원이 아니라는 말입니다.(맡긴 인생) 그리스도 안에 산다는 의미를 다시 정리하면--나는 하나님에게서 독립되어 있는 자존자가 아니요 의존자라는 것입니다. 의존자라는 것은 자신의 자아가 완전히 죽은 사람, 자신의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을 의미합니다. 갈5: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3>중요한 것은 자녀라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삶입니다
예수님은 기도속에서 아버지가 행하시는 일을 보았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고, 그대로 선포하셨습니다.
<요5:17-20>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18 유대인들이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만 범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19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20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의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기이히 여기게 하시리라 30 내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원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하려는 고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말씀하시고 보여주시는대로 행하셨습니다.
응답(치유)의 사람이 되기 원한다면-절대 내 뜻대로 살아서는 안됩니다. 그렇다고 내 의지로 순종핟겠다는 것도 안됩니다. 아버지가 내 안에 계셔서 아버지가 아버지의 일을 행하시게 해야 합니다.
<요14:10>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아버지가 그의 일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내 안에서 아버지가 아버지의 일을 행하심으로 그분의 영광이 이 땅에 나타나도록 사는 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의 삶입니다.

 

결 론 -- 왕의 기도를 할 수 있는 자격
1)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만이 할 수 있습니다. (나를 포기하고 나의 자아가 그리스도와 더불어 십자가에 죽어야 비로소 내 안에서 그리스도가 주인이 되시며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그분의 뜻대로 살아가실 수 있는 것입니다.
2)하나님을 아버지로 믿는다면 분명한 응답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옆집 아저씨처럼 생각하지 말라. 친아버지는 자식의 요구를 피하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자녀의 기도에 항상 귀기울이십니다.
3)하나님의 자녀는 아버지의 뜻을 소원하여 그 뜻대로 행해야 한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말씀하시고, 보여주시는대로 사셨습니다. <내가 아버지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아버지가 행하신다.> (그것은 자아를 내려놓는만큼 이루어진다. 내 안에서 아버지가 일을 행하심으로 그분의 영광이 이 땅에 나타나도록 사는 것이 성도의 본분입니다. 따라서 왕의 기도는 나의 뜻대로 하는 기도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따라 성취하는 기도입니다.

나는 누구이며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기억하십시오, 아버지의 자녀라면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과 딸로서 그 자격을 확인하고 하나님의 자녀된 자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권세 있는 기도인 왕의 기도를 실천하시기 바랍니다.

<<제3의 물결 >> 
 

현대 은사운동의 가장 대표적인 ‘제3의 물결’ 운동은 직접적으로 윔버와 함께 한 풀러 신학교의 와그너 교수의 영향 하에서 전 세계적인 파급효과를 나타내었다.
와그너는 윔버를 초빙 강사로 ‘표적과 기사’ 강의를 개설하였는데, 이 강의에 참석한 학생들의 수는 800여명 이상이나 되었다.


와그너는 ‘제3의 물결’을 제1기인 1900년 초 오순절운동이나 제2기인 1960년대의 은사운동과는 구별지었다.
‘제3의 물결’ 운동에서는 성령세례를 제2차적인 체험으로 보지 않고 중생 시에 일어나는 것으로 보는 경향이 많다.
그리고 그 후에 나타나는 성령 충만을 받는 체험이 헌신된 그리스도인으로 만들어 준다고 본다.
그리고 방언도 역시 필수적인 것으로는 보지 않는다.


빈야드 신학은 또한 많은 부분에 있어서 풀러의 신약학 교수인 래드의 가르침에 의존하고 있기도 하다.
래드는 하나님의 나라를 단지 복음전파의 용어로서만이 아니라, 사단의 권세를 제압하는 하나님의 능력의 현존으로 또한 해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 점에서 빈야드의 ‘능력 대결’ 또는 ‘능력 전도’의 강조가 그 신학적, 성서적 기반을 제공받게 된다.


현재 오순절주의와 은사파 교회들이 제3세계 지역 선교와 교회에서 크게 성공을 거두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교리 논쟁이나 변론을 통해서가 아니라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 확장되어진다고 하는 점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포위는 오순절적 은사운동을 통한 교회 성장의 전형적인 모델로서 한국의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예를 보여주고 있다.
심스가 지적한 바와 같이 꿈, 환상, 능력 대결, 여러 가지 ‘성령의 나타남’ 등의 초자연적 성령의 능력을 의지함은 다원화 상황 속에서 효과적으로 사람들을 설득시키는 힘을 보여준다.
이 운동이 한국에 소개된 것은 특히 이재범이 번역한 이른바 ‘능력 시리즈’의 영향이 큰 것으로 알려져 있다.
빈야드운동의 특성을 나타내 주는 가장 잘 알려진 용어가 바로 ‘능력전도’라는 말인데, 윔버는 이 말의 뜻을 다음과 같이 풀이하였다.
“능력전도란 합리적인 동시에 합리성을 초월하는 방식으로 복음을 전하는 방법 - 복음을 선포함과 아울러 표적과 기사를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는 것을 말한다.
이는 또한 성령께서 영감(靈感)을 주시는 가운데 그 능력을 덧입어서 하나님의 임재를 초자연적인 방식으로 드러내 보여 주면서 복음을 증거하는 것이다.”


빈야드운동의 한국교회의 접목 작업은 신학적 검증 및 비평 작업을 충분히 거쳐야 할 단계이지만, 이미 많은 교회와 선교단체들이 이 운동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최근에는 인터넷의 발달로 인해 영성운동이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초월하여 확장되어가고 있다.
홈페이지의 접속을 통해 문자의 교신뿐만 아니라, 음성이나 동영상으로도 세미나 집회의 참여, 상담, 치유, 기도 등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특히 현재 인터넷을 통해 대표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제3의 물결’ 계통의 영성운동에는 새생활영성훈련원의 박철수목사, 능력사역훈련원의 임평구목사, 새인천중앙감리교회의 임용빈목사, 그리고 성령치유센터의 민경섭목사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이 영성운동들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강조점들은 능력사역, 내적 치유, 성령의 기름부음, 예언 사역 등으로 나타나는데, 이 같은 점들은 빈야드운동에서 나타나는 전형적인 특색들을 보여주고 있다.


빈야드운동은 특히 신학적으로 일부 세대주의나 개혁주의 노선에 서있는 복음주의 신학으로부터 적지 않은 저항을 받아 왔다.
빈야드운동에서 방언이나 병고침 등의 성령의 나타남을 ‘사도적 표적’과 동일시하게 될 때는, 표적은 사도시대로서 끝났다고 보는 세대주의적 신앙관과 정면으로 대치되는 현상을 피할 길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빈야드운동의 지도자들은 성령의 나타남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 좀더 분별력있는 신학 작업을 통해 한국교회에 덕을 세울 수 있어야 할 것이다.

 

http://cafe.daum.net/hskimy/G3yl/77?q=%C0%BA%BB%E7%C6%C4%20%C1%A63%C0%C7%20%B9%B0%B0%E1&re=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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