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11.12.24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내적정화와 하나님의 치료-1.내적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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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 장 내적정화와 하나님의 치료


제 1 절 내적 정화


관상의 길을 시작하여 하나님과의 일치로 가는 영적 여정은 우리 인격 안에 있는 어두움이 있음을 인정하는데서 시작한다. 이 어두움울 거짓자아라 한다.(거짓자아 : 거듭나서 성령/하나님 생명과 하나되어 조화/일치 이루어 하나님의 뜻 이루어 가며 안정-인정-통제 욕구 이룸조차 전적으로 하나님 의존하며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영의 참자아와 달리, (타락한) 자기중심(육)을 따라 자기 혼자 스스로 안전(생존)-인정(애정/존중)-통제(권력)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스스로 주인되어-실제로는 종됨- 자행자제하며 사는, 자기-심층적으로 볼 때 육신-마귀를 하나님 자리에 올려 놓고 우상 삼아 사는 자기기만/속임당하는 자아임..거절-결핍감-고립-수치감-두려움-분노의 감정에서 유발된 죄책감-수치심-이기심-방어기제-편견 등의 반응양상 보이며... 자기자산/소유-체면/자존심-자기주장/자기 의/자기신뢰/애집-자기사랑/자기연민/자기애/이기심이 그 실체적 표현이 됨) 사람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종된, 하나님을 담는 그릇으로 창조되었는데, 이 담는 그릇에 담긴 것이 하나님이냐 마귀-육이냐가 그 사람의 어떠함을 결정한다. 만일 아담의 범죄에 따라 태생적으로 물려 받은 이 어두움을 인정하지 않고 여정을 시작한 사람이라 해도 아주 진지하게 이 영적여정에 참여하여 하나님께 자신을 맡겨드리면, 하나님은 적당한 때에 이러한 자신의 결함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시며, 이러한 어둠에서 해방되는 길도 열어 주신다. 십자가의 성 요한이 “어두운 밤”이라고 표현한 밤은 하나님께서 거짓자아로부터 우리를 분리시키시사 돌이켜 영의 참자아로 살아가도록 정화(purification)해 주시는 과정을 말한다. 영적여정이란 바로 이러한 정화의 여정이다.


1) 거짓자아란 무엇인가?


우리는 누구나 거짓자아(false self)를 가지고 있다. 성화의 영적 여정가운데 있는 성도라 하더라도 마찬가지이다. 거짓자아란 어려서부터 세상에 살면서 자신의 이기적인 동기로 스스로 행복을 추구하며 형성시켜 온 습관과 태도, 관념과 가치관들이 혼합된 것으로서, 여기에 더하여 사회에서 제공하는 편견과 잘못된 가치관에 동조하고 자신의 과오와 결함을 옹호하거나 보호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심리기제들을 모두 합한 자아의식이다.  거듭나지 못한 자연인은 그 누구나 하나님께서 심어 주신 본성(영의 참자아) 대신 이 왜곡된 거짓자아를 통해 스스로를 바라보아 판단하며 혼자의 힘으로 행함의 자아의식(거짓자아)으로 살아간다. 그러나 누구든지 “나는 별로 죄지은 것이 없다” 다시 말해 나에게는 거짓자아가 없다고 말한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과의 일치를 이룰 수 없다.


그 이유는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거짓자아가 바로 하나님과의 일치를 가로막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가지고 있는 거짓자아가 바로 하나님과의 일치를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가지고 있는 거짓자아가 하나님과의 일치를 방해한다는 것을 자각하는 것이 영적여정의 시작이며 영적여행 중에 계속 다루어야할 문제이다. 이러한 자각 없이 영적인 여정을 시작하더라도 언젠가는 이 자각에 부딪치게 된다. 이때에는 이러한 자각을 솔직하고 진실하게 받아들여야 비로소 진정한 관상으로 나아갈 수 있다.


2) 거짓자아의 형성


인간에게는 생존/안전, 애정/존중, 권력/통제에 대한 본능적인 욕구가 있다. 이러한 욕구를 좌절시키는 어떤 사건이 일어날 때 분노, 슬픔, 두려움, 탐욕, 부러움, 허영심, 자부심, 무감정 등의 쓰라린 감정이 일어나게 된다. 이러한 욕구의 좌절들은 그 욕구를 채워줄 대상을 찾게 된다. 이 정서들은 진실성이 결여된 것으로 자신들의 지력을 사용하여 정당화, 합리화, 미화, 변명, 투사, 대치, 부인, 억압과 같은 심리적 방어기제로 대체된다. 그리고 이 무의식적인 동기들이 자신의 인격을 지배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 자신이 속한 집단이나 문화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이기적이고 불합리한 가치관을 그대로 받아들인 선입관과 고정관념도 있다. 이러한 것들은 자신의 이기적인 욕구와 동기들을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어떤 형태로 표현하기 위한 것이며, 의식 속에 자리 잡은 양심에 거리낌을 받지 않기 위해 발달시킨 가치관과 태도들이다. 토머스 키딩은 이것을 소속집단이나 사회에 대한 과잉집단 동일시라고도 하며 심리학적으로는 초자아라고 불리기도 한다.


3) 쓰라린 정서의 자각


관상기도 중에 내면에서 일어나고 있는 감정들을 직시하여 억압하지 말고 그것을 드러내는 작업을 해야 한다. 지금 내면에서 일어나는 감정이 바로 내가 과거부터 쌓아놓은 감정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고통스러운 감정, 아픈 마음을 직면하기란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증오심이나 분한 감정이 일어날 때, 그것이 누구 때문이 아니라 내 안에 담아놓은 감정이 올라온 것임을 인정하며 바라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 고통을 하나님 앞에서 쏟아내어야 한다. 고통의 원인이 되는 쓴 뿌리들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마음의 심층으로 들어가 '감정의 자각' 이라는 세제를 사용하여 마음의 모든 얼룩을 닦아내야 한다. '내 안에 이런 아픔이 있구나.' 라고 자각하며 쓴 뿌리를 발견하게 될 때 우리는 그 아픔을 하나님께 내어드릴 수 있다. 그리고 그 분의 치유하심을 경험할 수 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 5:8)라는 말씀은 우리의 마음에 어두움을 주는 이러한 동기들과 자신을 억압하고 감추는 자신의 여러 가지 심리기제에서 해방하라는 말씀이다.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poor in spirit)은 영적으로 많이 치장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즉 방어기제를 쓰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의 모습을 보이는 것을 말한다. 또 마음이 깨끗하다는 것(pure heart)은 이기적 동기를 가지지 않고 가슴이 순수한 사람을 말한다.


우리는 내적 정화를 통해 이기적인 동기들을 버리고 잘못된 집단편견과 집단 고정관념에서 탈피하여 내적 자유를 얻게 된다. 자신의 자아를 초월하고 이탈할 때 거짓자아에서 해방되어 비로소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바라보게 되며 하나님과의 일치를 이룰 수 있게 된다.


1. 수동적 정화


영적 여행에는 여러 단계가 있다. 이 여러 단계를 거치는 동안에, 우리는 바울이 말한 "새로운 피조물"(고후 5:17)이 된다. 우리는 성령께서 우리를 이 여러 단계를 따라 이동시키는 것을 허락하며 각 단계에서 요구되는 일을 행해야 한다. 이 과정에 포함된 요소들 중 수동적 정화(passive purification), 참 자아와 거짓자아, 그리고 능동적(적극적) 정화(active purification) 그리고 영적 여행을 위한 태도 등에 대하여 살펴보자.


기도, 특히 집중기도(Centering Prayer, 향심기도, 구심기도, 마음의 기도 등 다양한 표현이 사용된다) 중에, 자신의 삶에서의 하나님의 임재와 활동에 동의할 때, 우리는 관상의 은사를 받을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수동적 정화는 관상의 은사의 열매들 중 하나이다.


열광적인 신앙이 표준이 된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가 수동적 정화를 인식하려면 방법을 바꾸어야 한다. 수동적 정화란 덕이 아닌듯하다. 특히 수동적이라는 단어가 의심스럽다. 결국, 수동적이란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것이 어떻게 어떤 것과의 일치, 특히 하나님과의 일치에 이르는 방법이 될 수 있겠는가?


부정의(apophatic) 전통에서는, 우리가 수동적일 때에 하나님은 수동적이 아니라고 이해한다. 하나님은 적극적인 행위자이시다. 우리가 수동적이 되는 것은 우리가 피조물이며 수용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방법이다. 창조주께서 행하시는 것이 보다 중요하다. 우리는 해가 떠오르게 하거나 비를 내리게 할 수 없다. 영적인 진리를 말하자면, 자신의 내면 생활을 재건하는 일도 그리 효과적으로 행하지 못한다.


수동적 정화와 관련하여 Carl J. Arico, 「A Taste of Silence」에서 인용된 토마스 머튼의 고전인『관상의 새로운 씨』(New Seeds of Contemplation) 중 일부를 재인용 한다 : 
관상이란 단순히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개념을 발견하여 하나님을 그 개념의 범위 안에 제한하며, 하나님을 죄수처럼 그 안에 붙잡아 두는 것이 아니다. 관상이란 하나님에 의해 하나님의 영역, 하나님의 신비, 하나님의 자유 안에 이끌려 가는 것이다. 그것은 개념적으로는 보잘것없고 추론적으로는 보다 보잘 것 없지만 그 보잘 것 없음과 순수함에 의해서 어디든지 말씀을 따라갈 수 있는 순수하고 순결한 지식이다.


관상의 은사는 우리를 하나님의 영역으로 데려간다. 다시 말해서, 영적 여행에 관련된 것을 보고 듣는 일상적인 방법을 초월하여 하나님의 조건으로 보게 해준다. 『관상의 새로운 씨』에서 머튼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


관상 안에서 갈등이나 번민이나 의심으로부터의 도피를 발견하기를 바라지 말라. 관상적 경험의 표현할 수 없이 깊은 확실성은 번민을 일깨워주며, 마음 속 깊은 곳에 피가 멈추지 않고 흐르는 상처처럼 많은 질문들을 일으킨다.


종종 사람들은 평안과 안식을 기대하면서 집중기도에 이끌린다. 그러나 평안과 안식이 집중기도의 목적은 아니다. 집중기도의 정신과 중심은 내면에서의 하나님의 임재와 활동에 동의하는 것이다. 그렇게 동의하며 자신을 하나님께 개방할 때, 하나님은 우리가 자신의 내면에서 최선의 것과 최악의 것을 대면하도록 허락하신다. 그러한 조건에서 하나님께 동의하는 것은 곧 하나님께서 이 지극히 관대한 제안을 충분히 이용하시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디트로이트 출신의 사제이자 작가인 에드 파렐(Ed Farrell)은 종종 "당신이 요청하는 것에 주의하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주실 것이다"라고 말하곤 했다. 그는 특히 샤를르 드 푸꼬오(Charles do Foucauld)의 "나 자신을 당신의 손에 맡깁니다. 나를 당신의 뜻대로 처리 하십시오" 이 포기의 기도에 관해 수동적 정화의 정신을 잘 나타내고 있다고 논평한다.


2. 참 자아와 거짓자아 (자아)


죄란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기를 거부하는 것이 죄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심어 주신 본성(벧후 1:5, 요일 3:9 참조---하나님의 성품과 JC의 인격)인 영의 참자아를 거부하고 자신의 거짓자아에 따라 사는 것이 죄입니다. 이것이 아담이 저지른 죄이며 낙원을 잃게 한 원죄입니다. 이 원죄는 우리 개개인의 죄라기보다는 인류가 갖는 공통적인 거짓자아의 모습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판단의 주인이 되려고 했기 때문에 다른 모든 자유를 잃어버리고 세상과 육정의 종으로 전락하게 되었습니다. 영적인 하나님의 자녀가 육의 노예가 된 것입니다.


현대의 영성 신학자들은 하나님께서 창조를 통해서, 예수그리스도의 말씀과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심어 주신 우리의 자아를 참 자아라 부르고 원죄에 물든 자아를 거짓자아라 부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시고 당신의 숨결을 넣어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생겨날 때 하나님은 우리의 심성의 가장 심오한 부분(inmostbeing)을 만들어 주셨습니다(시 139:13).


그러므로 창조 때부터 우리 안에 하나님의 본성이 있습니다. 또 우리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리스도의 몸을 받아 모시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세례 때에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 안에 성령이 함께하십니다. 즉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 안에 현존하고 계시며 그 하나님의 현존은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신 '참된 나' 안에 계십니다.


겉으로는 영적으로 성장해 보이는 사람, 거룩해 보이는 사람들 중에도 인격적인 성숙의 결여로 참다운 영적 성숙과 거룩함을 이루지 못하고 결과적으로 참된 행복도 얻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하나님의 일꾼들 중에서도 이러한 인격적 미성숙으로, 겉으로는 거룩해 보이면서도 인간적인 나약함을 드러낸 사실들 또한 우리는 많이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이 점을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인격적 성숙과 영적인 성장을 다르다고 생각하면 십중팔구 혼동과 실패를 가져올 것입니다.


수도의 길은 다름 아닌 인격완성의 길이라 해도 좋습니다.


이러한 인격체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지어 주신 자아와는 달리 자신을 주인으로 삼은 자아로 형성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진 인격체, 원죄의 모습을 가진 인격체, 즉 거짓자아의 인격체입니다. 이렇게 참 자아와 다른 자아를 갖게 된 것이 원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거짓자아에 따라 사는 한 하나님에게서 떨어져 사는 것입니다. 이 거짓자아가 사도바울이 말하는 '외적 인간(outer self)'(고후 4:16 참조)이며, '낡은 인간(old self'(롬 6:6, 골 3:9-10 참조)입니다. 그리고 참 자아는 사도 바울이 말하는 '내적 인간(inner self)'(고후 4:16 참조), '새 인간(new self)'(롬 6:6, 골 3:9-10 참조)인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셨던 본래의 영광스런 모습을 잃어버렸습니다(롬 4:23 참조). 참 행복의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므로 불행하게도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참 자아'로 살지 않고 '거짓자아'로 살아갑니다.


우리가 거짓자아에서 참 자아로 가는 것이 회개(Metanoia)입니다. "낡은 인간을 벗어 버리고 새 인간으로 갈아입는"(골 3:9, 10) 것이 회개이며 외적 인간에서 내적 인간으로 가려는 것이 회개입니다. 잘못된 행복 추구의 길에서 참된 행복 추구의 길로 가겠다고 결심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참 자아로 살아가는 것이 참된 변형입니다.


인류의 죄(원죄)를 없애 주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그리스도는 우리의 거짓자아를 없애기 위하여 거짓자아를 십자가 위에 못 박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거짓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써 우리의 참 자아는 우리 안에서 부활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참 자아로 살아가는 것이 거룩한 삶이며, 자녀답게 사는 삶이며, 새로운 삶이고, 하나님과 일치하며 하나님을 뵙는 삶이며 참 행복으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리하면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갈 2:20)라고 고백하며 주님께서 주시는 은총 속에서 참 자유를 누리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1). 자아(自我, ego)


정신분석이론에서 '자기' 또는 '나'로서 경험되며 지각을 통해 외부세계와 접촉하는 인간성격의 일부분.


자아는 기억 · 평가 · 계획하고 여러 방식으로 주변의 물리적 · 사회적 세계에 반응하며 그 속에서 행동하는 부분이다. 정식분석이론에서 자아는 지크문트 프로이트가 인간 정신의 역동을 설명하려는 시도에서 제시한 3가지 요인의 하나로서, 이드 · 초자아와 공존한다. 프로이트의 용어에 따르면 자아(Ego:라틴어로 '나'라는 뜻)는 성격을 실행하는 기능을 하며 이드와 초자아의 통합자이자 외부세계와 내부세계의 통합자이다. 자아는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과거의 사건과 현재의 행위 및 기대와 상상 속에 나타나는 미래의 행위와 관련된 개인적 준거를 제공함으로써 행동에 지속성과 항상성을 부여한다. 신체 개념은 자신의 초기 경험이 중심이 되지만 자아는 성격이나 신체와 공존하는 것은 아니다. 발달된 자아는 특히 위협 · 질병 및 생활환경의 변화 등으로 인해 전생애에 걸쳐 변화할 수 있다.


자아발달


신생아는 자극에 반응하기는 하지만 외부적 자극이든 내부적 자극이든 그것을 통제 · 예상 · 변경할 수 없다. 지각은 원초적이고 산만하며 운동은 둔하고 어색하며, 스스로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학습도 가장 단순한 형태의 자극-반응으로 제한되어 있다.


유아의 자아는 외부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발전하며, 정신분석학에서 강조하듯이 무력하며 의존적인 유아가 고통스러울 정도로 강한 자극을 변경시키거나 완화시키려는 노력을 반영한다. 그러나 유아는 이 자극을 바꾸거나 완화하지 못하기 때문에 유아는 만족을 얻을 수 있는 수단을 찾는 동안에 긴장을 통제하기 위한 기제를 발전시키며 이 기제들은 점점 복잡한 형태로 발전해간다. 몸에는 지각과 운동이 밀접하게 연관된다. 자극이 오면 곧바로 운동이 따른다. 계속되는 긴장을 견디면서 행동을 늦추는 것은 보다 발달된 자아 기능의 기초이며 나중에 형성되는 성격 기능에서 자아가 수행하는 역할의 원형이다. 자극과 반응의 학습된 분리를 통해 사고 · 상상 · 계획과 같은 보다 복잡한 지적활동이 개입된다. 직접적으로 반응하는 대신 자아는 제3자적 입장에서 현실을 검증하고 어떤 행동과정의 결과를 그려보며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미래의 방향을 결정하는 능력을 갖게 된다. 과거의 사건들에 대한 기억을 축적하고 유지하는 것은 내적인 사고와 판단과정에 필수적이다. 2~3세 때 시작되는 언어습득은 의사전달 및 주변 환경의 통제를 가능하게 해주며 논리적 사고과정의 발달을 위한 강력한 방편을 제공한다.


개인이 지속적으로 발달함에 따라 자아는 더욱 분화되며 초자아가 발달한다. 초자아는 부모와 사회의 기준을 통합함으로써 본능의 억제와 충동의 통제를 가능하게 해준다. 그러므로 자아가 지각하는 도덕적 기준은 성격의 일부가 된다. 성격의 성장과 성숙을 위해 필수적인 갈등이 대두된다. 자아는 방어기제를 구축함으로써 초자아와 이드(원초적 충동)를 매개한다.


2). 참 자아


참 자아에 적용된 정화의 과정에 대한 머튼의 묘사를 소개해 보겠다. 머튼은 참 자아를 "내적 자아"라고 부른다.
하나님만큼 은밀하고 하나님을 닮은 내적 자아는 자신을 완전히 소유하려 하는 모든 개념을 피한다.


관계의 법칙은 다음과 같다. 어떤 친구를 소유하려 하면 쉽게 그 친구를 잃게 된다.


그것은 "물체"가 아니기 때문에 붙잡을 수 없고 연구될 수 없는 삶이다. 그것은 묵상을 포함하여 세상의 어떤 과정에 의해서 도달하거나 감춘 곳에서 끌어낼 수 없는 것이다. 영적 훈련에 의해서 행하는 모든 것은 우리 내면에 침묵, 겸손, 이탈, 깨끗한 마음, 이탈 등을 만들어낸다. 그것들은 내적 자아가 하나님의 임재를 조심스럽게 예측할 수 없이 표명하려 할 때에 필요한 것들이다.


우리가 말하는 참 자아란 무엇인가? 머튼은 이렇게 말한다 :


나의 정체성의 비밀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 안에 감추어져 있다‥‥ 그러므로 나의 실존과 평화와 행복과 관련된 문제는 단 한가지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발견함 안에서 나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다. 만일 내가 하나님을 발견한다면 나 자신을 발견할 것이고, 내가 참 자아를 발견한다면 하나님을 발견할 것이다.


그러므로 참 자아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 안에 감추어져 있다. 내가 하나님을 발견하면 나의 참 자아를 발견할 것이며, 나의 참 자아를 발견하면 하나님을 발견할 것이다.


"토마스 키팅은 Open Mind, Open Heart에서 참 자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우리의 기본적인 선(goodness)의 핵심은 우리의 참 자아이다. 그것의 무게 중심은 하나님이다. 우리의 기본적인 선을 받아들이는 것이 영적 여행에서의 도약이다. 하나님과 우리의 참 자아는 분리되어 있지 않다. 비록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지만, 하나님과 우리의 참 자아는 동일하다.


자기 인식을 목적으로 하는 여행은 하나님을 발견하는 여행이다. Carl J. Arico의 관점에서 보면, 자기 인식을 목적으로 하는 여행은 네 부분으로 구성 된다.


첫 부분은 자기 인식에 대한 욕구이다. 나는 자신에 대해 배우면서 하나님을 발견한다. 만일 내가 자신을 알지 못하면서 하나님을 발견하려고 노력한다면, 나 자신의 밖에 있는 하나님을 발견할 것이다.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시는 분이시므로, 나 자신의 밖에만 있는 하나님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두번째 단계 (나 자신에 대해서 보다 많은 것을 배운 후의 단계)는 나 자신을 받아들이는(self-acceptance) 것이다. 만일 내가 현재의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그리고 내면에 계시는 하나님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나는 곤경에 빠진다. 키팅은 "우리의 기본적인 선을 받아들이는 것이 영적 여행에서의 도약이다"라고 말했다. 이것은 어려운 과정이다. 우리는 무거운 짐 가방을 들고 있다. 우리가 성장하면서 인정받지 못한 것과 관련된 기록들이 내면에서 작용하면서 인정을 요구한다. 사람들이 치료를 시작하면서 자신에게 제공하는 큰 선물은 "자기 인식" (self knowledge) 뿐만 아니라 "자기를 받아들임"(self-acceptance)이다. 예수께서는 그것을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고 표현하셨다. 자기를 받아들이는 데서부터 사랑이 흘러나온다. 우리 자신에 대한 진리를 받아들이려면 도움이 필요하다. 그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단계이다.


세번째 단계는 "자기 개방'(self-opening)이다. 이것은 내 안에서 일하는 영이 나를 필요한 곳으로 인도하도록 자신의 개방하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교차 상황의 또 다른 본보기이다. 나는 내 자아를 알며 나 자신을 받아들인다. 그러므로 나는 그것을 함께 소유하고 있다. 이것은 어떤 면에서는 사실이고, 다른 면에서는 사실이 아니다. 나는 인간적인 차원에서는 훌륭하게 성장했지만, 영적 발달의 차원에서는 앞으로도 계속 전진해야 한다. 정착해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해서, 나는 성령께 마음을 열고, 내가 받아들인 참 자아와 거짓자아에 대처해야 한다. 하나님의 임재와 활동에 나의 존재 전체로 동의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침체에 빠질 것이다.


마지막 단계는 자기포기(self-surrender)이다. 자기 인식에 동의하고 자기를 받아들이고 성령의 사역에 자신을 개방한 후에는, 보다 깊은 차원에서 주님께 복종해야 한다. 현재 의식하고 있는 것을 계속 추진하여 완성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네 단계 모두가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자신을 다루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종종 우리의 가장 큰 원수는 우리 자신이다. 몇 가지 예를 들어 보자. 사람들이 우리를 잘못 판단할 때, 우리는 충격을 받고 어떤 조처를 취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우리의 삶에서 역사하시는 성령께 보다 더 개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그리고 사람들이 우리를 잘못 판단할 때에 충격을 받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 과정을 망칠 것이다. 이렇게 자기를 받아들일 때에 참 자아가 발견된다. 거짓자아는 받아들이기를 거부함으로써 알려져 있는 것을 감출 수 있다. 성령은 이러한 긴장 속에서 일하신다. 내가 연약함 속에 있는 자신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곳이야 말로 내가 하나님을 발견하는 곳이다. 나에게서 연약하고 매력적이지 못한 것들을 아는 것과 그것들을 받아들이는 것은 별개의 것이다. 내가 나의 은사들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나는 은사들 안에서도 하나님을 발견한다. 나의 장점, 매력적이고 재능이 있는 측면을 아는 것과 그것들을 받아들이는 것은 다른 일이다.


Thomas Keating은 그의 경우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방금 주말 피정과 플로리다의 Contemplative Outreach에 참석한 사람들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을 마쳤다. 열흘 동안 치밀하게 진행하여 결실을 얻었다. 참석자들은 피정과 교육을 잘 받아들였고, 훌륭하다고 평가해 주었다. 많은 참석자들이 나에게 와서 감사를 표명했다. 이 기간에 나와 함께 일한 동료는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말하는지 아세요?"라고 말했고, 나는 "그럼요. 나는 그 사람들의 말을 듣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나는 어떤 면에서 사람들의 말을 듣지 않는다는 뜻으로 대답했다. 동료는 계속해서 "하나님은 당신에게 은사를 주고 계십니다. 이 사람들은 당신이 훌륭하게 일한 것을 칭찬하고 있는데, 당신은 그 말을 듣고 있지 않군요. 당신은 존재의 핵심을 찌르는 비판이라면 들으실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나는 사람들의 찬사를 듣지 않았다. 나는 그들의 말을 들었지만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나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은사를 찬양하는 것을 허락 할 수 없었다. 나는 찬사는 듣지 않았지만, 비판적인 평가였다면 듣고 받아들였을 것이다.


이것은 받아들임의 문제이다.(*여기에는 믿음이 결합된다) 우리는 성령께 자신을 개방할 때에 그것을 받아들여야 하며, 그렇게 하면 그것을 제공할 수 있다.


3). 거짓자아


머튼은 거짓자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이것은 내가 원하지만 하나님께서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존재할 수 없는 사람이다. 하나님이 알지 못한다는 것은 결코 사사로운 일이 아니다. 나의 거짓되고 개인적인 자아는 하나님의 뜻과 사랑이 미치지 못하는 곳(현실을 벗어난 곳과 삶에서 벗어난 곳)에 존재하기를 원한다. 그러한 자아는 존재할 수 없는 망상에 불과하다. 우리는 자신에 대해 소중히 여기는 모든 망상들(태어나면서부터 지니고 있으며 우리의 죄의 뿌리에 양분을 공급해 주는 망상들)중 작은 것도 식별하지 못한다. 세상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들의 거짓자아만큼 주관적인 실체는 없다. 그러나 거짓자아는 존재할 수 없다. 이 그림자를 숭배하는데 바쳐진 삶을 죄의 삶이라고 부른다.


"나의 거짓되고 개인적인 자아는 하나님의 뜻과 사랑이 미치지 못하는 곳(현실을 벗어난 곳과 삶에서 벗어난 곳)에 존재하기를 원한다." 이것은 강력한 말이다. 거짓자아란 우리가 망상 속에서 만들어낸 자아이다. 우리는 그것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의 내면에는 거짓자아를 선택하는데 도움을 주는 지식, 명예, 권력, 사랑 등의 중심점들이 있다. 우리는 여정을 돌이켜 하나님께 돌아가서 하나님 안에서 자신을 발견해야 한다. 왔던 길로 돌아가야 한다. 그 길은 우리 자신의 영혼의 중심을 가로지른다. 하나님을 발견하려면 외적인 피조물이나 자신에 대한 내적인 망상에의 집착에서 벗어나야 한다. 토마스 키팅은 거짓자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


거짓자아는 참 자아와는 반대로 발달한다. 그것의 무게 중심은 그 자체이다‥‥ 우리의 선의 기본적인 핵심은 역동적이며 저절로 자라는 경향이 있다. 이 성장은 거짓자아의 망상들과 감성적인 문제들, 문화적인 제약과 개인적인 죄에서 기인하는 부정적인 요인들에 의해 방해를 받는다.


우리는 불안, 두려움, 거짓자아의 무절제한 욕망 등에서 해방되어 참 자아를 되찾아야 한다. 실제로 우리는 무의식 안에 살아 있는 것에서 해방되기 위해서 그것을 표면으로 올라오게 하는 수행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키팅은 Open Miend, Open Heart에서 그 과정에 대해서 논평하지만, 여기에서는 관상기도에 대해서 말하면서 실제로는 집중기도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본격적으로 무의식의 짐을 더는 일이 시작되면,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퇴보하고 있다고 느낄 것이다. 그들은 기도를 시작하면서 끝없는 분심의 흐름을 경험하기 때문에, 관상기도를 할 수 없다. 실제로, 당신이 진정으로 분심을 원하지 않는 한, 관상기도 안에 분심은 존재하지 않는다. 당신이 얼마나 많은 생각을 하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생각들의 수효와 본질은 당신의 기도의 순수성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만일 당신의 기도가 사고의 수준에 머문다면, 당신의 깊은 숙고와 관계가 없는 생각들이 당신을 산만하게 만들 것이다. 관상기도는 사고의 차원이 아니다. 그것은 순수한 믿음 안에서 당신의 뜻을 가지고 하나님의 임재에 동의하는 것이다. 정서적으로 충전된 생각들은 무의식이 정서적인 쓰레기들을 몰아내는 주된 방법이다. 당신은 의식하지 못하지만, 당신의 무의식 안에 감추어져 있으면서 당신의 결정에 영향을 주던 많은 정서적인 갈등이 이런 방법으로 해소된다. 결과적으로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르면, 당신은 보다 큰 행복감과 내적 자유를 느낄 것이다. 기도하는 동안에 당신이 탄식하던 생각들은, 당신의 신경 조직 안에 축적되어온 손상으로부터 정신을 해방시켜 준다.


집중기도에서는 생각과 침묵 모두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생각은 치유되어야 할 것을 운반해오며, 침묵은 치유가 이루어질 공간을 만들어 낸다. 전통적으로 이것이 거짓자아의 수동적 정화라고 이해된다. 우리가 관상의 은사를 적용하시는 성령께 자신을 개방하고 복종할 때에 거짓자아가 치료된다. 집중기도는 이 일이 발생할 수 있는 무대를 설정하지만, 그 자체만으로는 이러한 능력을 갖지 못한다. 그 일을 하는 것을 관상적 은사, 즉 성령이시다.


무덤에서 걸어 나오는 나사로의 이야기를 살펴보자. 예수께서는 마르다에게 나사로의 죽음에 대해 무슨 일인가 하기를 원한다고 말씀하시고, 그가 어디에 묻혔는지를 물으신다. 마르다는 자기 오빠에 대해서 "죽은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라고 말했다. 예수님은 악취에 개의치 않으신다. 예수님은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시면서 대단히 중요한 말씀을 하셨다 :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우리는 이 "풀어 놓으라"는 명령을 성취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는지, 또는 그 일이 나사로에게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이었는지 알지 못한다. 우리는 이러저러한 방법으로 묶여 있다. 우리는 삶의 어느 부분에서 묶여져 있으며, 묶인 것을 푸는 것이 수동적 정화이다. 우리가 완전히 묶여 있으면, 아무리 꿈틀거려도 스스로를 해방시킬 수 없다. 아무리 노력해도 소용이 없으며,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다.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묶인 것을 풀 수 없다.


무엇을 풀어야 하는가? 우리는 무엇을 대면하고 있는가? 우리의 내면에는 성장하면서 심겨진 정서적인 프로그램들이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정서적인 프로그램이란 부모, 교사, 교회 지도자, 공동체, 매스 미디어, 동료 등이 제공한 "옳지 못한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내면에는 사람들이 심어놓은 기록들이 작용하고 있다. 우리의 내면에는 요금을 넣고 희망하는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구식 자동전축이 들어 있다. 우리는 자신의 노래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노래를 연주한다. 심지어 자신의 노래가 무엇인지도 알지 못할지도 모른다. 버튼을 누르면 녹음된 메시지가 흘러나온다. 말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부모인가? 선생님인가? 코치인가? 아니면 TV 광고인가? 참 자아는 내가 방금 말한 것을 말하고 싶어 하는가? 또는 지금 내가 느끼는 것을 느끼고 싶어 하는가? 거기서 흘러나오는 메시지는 "아무 것도 기록해 두지 말라", "사람들은 모두 평범하다", "그런 유형의 사람들은 나보다 열등하다(또는 우월하다)" 등이다. "제6계명과 제7계명을 제외하고는 모든 계명을 범하라"와 같은 무서운 메시지도 있다. 이처럼 미리 녹음된 기록들은 교묘하며, 우리의 판단이나 정서적인 반응이나 세계관에 영향을 준다.


우리는 문화적 조건의 영향을 깊이 받는다. 예를 들어 우리는 종교적인 태도에 있어서 무의식적으로 복음의 모범이 아닌 서방 세계의 모범을 본받아 살고 있다. 서방 세계의 모범은, 모든 일을 주도하는 것은 우리이며 하나님은 상을 주신다고 말한다. 우리는 우리 문화에서 사람들에게 상을 주는 것과 동일한 방법으로 하나님이 상을 주신다고 가정한다. 성공은 우리가 노력하여 얻는 것이고, 금전도 우리가 노력하여 얻는 것이며, 천국도 우리가 노력하여 얻어야 한다. 모든 사람이 그렇게 알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우리 모두가 그것을 알고 있으며, 서로 그것을 강화해준다 우리가 그것을 매우 깊은 차원에서 알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제거하기가 어렵다. 그것은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것처럼 우리의 문화적인 정체성이다.


서방세계에서는, 내적인 행동보다 외적인 행동이 더 중요시 된다. 예를 들어, 당신의 내적 의도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당신은 당연한 결과-선한 것처럼 보이는 것-를 기대할 수 있다. 마음속에 있는 것과는 상관없이 선한 것처럼 보이기를 기대한다. 이것은 우리의 종교적인 태도에도 적용된다.


서방의 종교적 모델에서는 장래의 상과 형벌을 강조한다. 우리가 선을 행하면 선이 돌아올 것이고, 악을 행하면 악이 돌아올 것이다. 예를 들어, 나는 지금 천국에서 받을 상을 위해서 살고 있다. 이것은 참으로 창피한 일이다. 내 말을 오해하지 말라. 나는 천국에 가는 것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지금 상을 주고 계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서, 장차 받을 상이라는 주장을 채택 한다.


복음적 모델은 시대적으로 산업적·기계적인 혁명과 의식 이전의 것이다. 우리의 문화적 성향은 복음적 모델의 권면들을 상세히 설명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그 권면들을 듣거나 따르기가 더욱 어렵다. 그것들 중 몇 가지에 귀를 기울여 보자. 복음의 가치관에서는 모든 일을 주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받아들이고 반응한다.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좋다고 말하는 것은 오해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주어온 것보다 받아온 것이 더 많다. 우리 문화권에 사는 사람들은 제대로 받아들이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 우리는 DNA유전 형질에서부터 시작하여 모든 것을 받았다. 우리의 삶도 받은 것이다. 새로운 생태학적 의식에서는 그것을 우주적 차원에서 강조한다. 우리가 받아온 모든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길 때, 우리 안에, 그리고 주위 세상 안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보지 못한다. 하나님은 언제나 첫 조처를 취하신다.


복음의 틀 안에서는 내면의 행동이 외적 행동보다 중요하다. 우리의 마음이 있는 장소가 중요하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은 부차적인 것이며, 실제로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의 가치관이 행동에 반영되지 않을 때에 우리 안에 내분이 발생할 수 있다. 여기에서 '내분"이라는 단어는 아주 적절한 단어이다. 그것은 긴장과 스트레스를 만들어 낸다. 거기에는 영혼이 나누어진다는 것, 즉 거짓자아의 부름과 참 자아의 부름으로 나누어진다는 의미가 있다. 사도 바울은 자기 안에 두 사람이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고 말했다. 즉 자신이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않고 원하지 않는 것은 행한다고 말했다.


복음에서 강조하는 것은 내일이 아니라, 지금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지금 사랑을 나타내야 한다. 예를 들어, 만일 너의 태도가 개선된다면 내가 너를 사랑하고 용서하겠다고 말하는 것은 어떤 근거에서인가? 비록 "강압적인 사랑"으로 표현되더라도, 우리는 항상 사랑해야 한다. 복음의 가치관과 서방 문화의 가치관 사이에는 예리한 이분법이 존재한다. 복음의 말씀대로 자신을 희생하면서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서방 문화에서는, 누가 우리를 해치면 이자를 붙여서 갚아 주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복수를 한 후에 용서를 요청한다. 우리 시대, 우리 문화에서는 "다른 뺨을 돌려 대라"는 구절의 의미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우리 안에서 서방의 자동 전축이 들어 있어, 복음의 가치관을 근본적으로 방해하는 흥미로운 음악을 연주한다.


 4). 에너지 중심


세상에 갓 태어난 아기는 모든 것을 필요로 한다. 아기는 모든 욕구를 충족시켜 줄 것을 요구한다. 그러한 욕구를 모든 인간이 본성적으로 소유하는 본능적인 욕구라고 부른다. 그러한 욕구에는 생존을 위한 욕구, 사랑을 받으려는 욕구, 지배하려는 욕구 등이 있다. 이것들에 대해 살펴보자. 세상에 태어난 우리에게는 안전과 생존의 욕구가 있었고, 그 욕구는 부모님께서 먹여 주고 입혀주고 살 수 있는 안전한 공간을 제공해줌으로써 충족되었다. 우리는 이러한 환경을 가정이라고 인식하게 되었다. 일부 예외가 있지만,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해당된다. 우리에게는 사랑과 존경을 받으려는 욕구도 있었다. 그것은 우리가 받는 사랑, 우리의 자부심이 존중되는 방법, 우리 스스로가 가족들 중 일부라고 느끼는 분량에 의해 결정되었다. 우리는 처음에는 자신이 모든 일의 중심이 되기를 원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자신이 가정의 중심이 아니라 일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가 모든 사람을 통제할 수는 없었다. 이 때 우리는 세상에는 한계와 제한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안 돼", "이렇게 해", "훌륭하게 행동하는 법을 배워라", "한 번만 더 하면 벌을 줄 테다" 등의 말을 듣는다. 이러한 본능적인 욕구들은 성장 과정에 무척 중요하다. 성장하면서 부모와 주위 사람들이 이러한 욕구들을 충족시켜 주지 않거나, 우리가 그러한 욕구가 충족되지 않았다고 느낄 때, 우리는 보상 욕구와 프로그램들의 체계를 만들게 되는데, 나는 그것을 "에너지중심"(energy center)라고 부른다. 이 에너지 중심들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사건들에 대해 습관적이고 무의식적으로 행동하고 반응하는 방법의 근원이 된다. 따라서 항상 지배하려는 욕구, 또는 자신의 안전을 확인하려 하거나 자기가 받아야할 명성을 확보하려는 욕구가 존재한다.


버튼을 누르면, 우리의 자동 전축에서 선율이 흘러나올 뿐만 아니라, 군악대도 연주를 시작한다. 우리는 권력과 지배, 애정과 존경, 안전과 생존 등의 에너지 중심에 의해 충족되는 이러한 반응들을 위해 많은 정보와 에너지를 동원한다. 지금 우리는 이러한 보상 욕구가 충족되지 않은 데서 비롯된 균형을 잃은 반응에 대해 말하고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순간에 포기하지 못하는 것은 통제의 문제이지만, 특별한 사람이나 집단에서는 평생의 문제가 된다. 자랄 때에는 왜 사이좋게 지내온 형제와 자매들이 있다. 그런데 그들 중 둘은 그다지 사이가 좋지 못했다. 나중에 병든 부모님 때문에 문제가 생겼는데, 병든 부모를 보살피는 일을 도맡으라는 요청을 받은 형제는 나머지 형제들에게 분개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여러 해 동안 서로 말을 하지 않고 지냈다. 이것은 부모의 잘못이었을까, 아니면 어렸을 때부터 깊이 자리 잡고 있는 것 때문이었을까? 누가 그것을 확실히 알 수 있겠는가? 우리가 아는 것은, 형제들 중 아무도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 그것은 정상적인 가정에는 어울리지 않는 반응이라는 것이다. 어딘가, 무엇인가 잘못되어 있다.


균형을 잃은 반응은 피조 된 보상 욕구에 뿌리를 두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성공을 계획하는 방법에도 뿌리를 두고 있다. 우리가 자라면서 부모로부터 받아온 메시지는 어떤 것인가? "무슨 일을 하든지, 성공해라. 우리보다 나은 사람이 되어라." 이것이 우리가 자라면서 받은 메시지가 아닌가? 부모보다 훌륭한 사람이 되라는 것은 더 성공하라는 의미인가? 성공하는데 적용되는 규칙과 규정들이 있다. 언제나 되어지는 것을 지배하라 : 다른 사람이 당신을 이용하지 못하게 하며, 당신에게 발생하는 모든 일을 지배하라. 다시 말해서 힘, 지배력을 가져라. 중요한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어라. 당신이 알고 있는 사람이 중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기억하라. 특히 실수를 범하지 말라. 만일 실수를 범한다면, 반드시 그것에서 벗어나서 체면을 세우라. 결코 실패해서는 안 된다. 정확하게 이런 식으로 표현되지는 않지만, 이런 의미가 함축되어있었다.


이것들은 누구의 가치관인가? 복음의 가치관인가? 아니면 서구문화의 가치관인가? 한 번도 실수를 범하지 않는 사람, 항상 좋은 평판을 받는 사람, 항상 지배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은 영적 여행에 능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만일 그것이 여행이라면. 그것은 자기가 좋아서 하는 여행이지, 그리스도가 우리를 부르신 여행이 아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는 실수를 범한 적이 있는 분으로 간주된다. 그 분은 특히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실 때에는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지 못했고, 지배하는 위치에 있지도 않았다. 중요한 인물들은 예수님을 좋게 생각하지 않았다. 혹시 예수께서 모든 것을 완전히 지배하셨다고 생각한다면, 예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드린 기도를 읽어보라. 다음과 같이 질문해 보라. 예수님은 지배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어떻게 이해시키셨는가? 자신이 잘못을 범했다는 것을 결코 인정하려 하지 않는 사람을 예수님은 어떻게 가르치셨는가? 중요한 사람들에게 감명을 주는 일에만 관심을 가진 사람에게 사랑하는 법을 어떻게 가르치셨는가? 내 말을 오해하지 않기를 바란다. 충분히 호감을 받고 접촉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삶을 지배하는 사람이 되면 된다. 열심히 일하려고 노력하여 실수를 하지 않으면 된다. 문제는 애착의 정도, 또는 권력이나 애정이나 안전과 관련된 것들이 부족할 때에 비정상적으로 반응하는데 있다.


영적 여행을 하는 동안에, 우리는 무슨 일을 잘못하거나 도전적인 말을 하면 무척 당황한다. 통제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날 때, 사람들이 우리를 좋게 생각해주지 않을 때, 또는 불안을 느낄 때에, 우리는 괴로워한다. 우리는 마치 자신이 홀로 떨어져 나가는 것처럼 느낀다. 만일 이것이 학대의 상황이 아니라면, 이런 때에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이것이 그 시기에 꼭 필요한 일일 수도 있다. 종종 떨어져 나가는 것은 우리의 참 자아가 아닐 수도 있다. 나사로를 묶었던 붕대처럼 풀어지는 것은 우리의 거짓자아를 이루는 경솔한 문화적 가르침이다. 주님이 우리를 묶었던 것을 풀어 주시지만, 처음에는 우리의 기분이 좋지 않을 수도 있다.


우리의 반응은 매우 무의식적인 것이기 때문에 식별하기가 어렵다. 이 내면의 기록들은 우리의 허락이 없이 활동하는 듯하다. 그것들은 우리의 일부이다. 우리가 규칙적으로 기도, 특히 기도를 시작하면, 그것들은 서서히 지워진다. 이것은 완전히 옳은 표현은 아니다 : 집중기도를 할 때에는 우리가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작용하신다. 우리가 내면에서의 하나님의 임재와 활동에 동의하면(집중기도는 우리의 동의를 담는 그릇 역할을 한다),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우리가 물려받거나 습득한 거짓자아를 제거해 주신다. 이것이 기도의 힘이다. 왜냐하면 성령의 도움이 없이 혼자의 힘으로는 무엇을 해야 할지 알지 못하고 요청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가 생존과 안전, 지배, 사람들의 존경 등을 바랄 수 없다는 말이 아니다. 이것들을 원하는 것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욕구가 중독증처럼 될 때, 이러한 욕구들이 너무 중요한 것이 되어 그것을 얻기 위해서 필요한 일이라면 무슨 일이라도 하려 할 때, 이러한 욕구들은 해로운 것이 된다. 우리가 그것들이나 다른 것을 소유하려는 욕구를 느낄 때, 그것들은 우리의 영적 여행을 방해한다. 우리가 그것들을 소유하고 있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중독이다. 이 일은 교묘하게 발생한다. 무척 교묘하기 때문에 공공연하게 공격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무절제한 욕구들을 제거하고 삭제하는 것은 수동적 정화의 은사이다. 그것은 우리가 성령께 복종하고 모든 일을 맡길 때에 발생한다.


만일 우리가 적극적인 정면 공격에 의해서 이러한 중독 증세들을 제거하려 한다면, 우리는 무의식중에 자신이 제거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과 동일한 사유 과정과 가정들을 사용하게 될 것이다.


만일 우리가 지배욕을 제거하는 일을 지배해야 한다면, 우리는 더 많은 지배욕을 만들어낼 것이다. 만일 우리가 안전에의 욕구를 제거하면서 안전해야 한다면, 더 많은 안전에의 욕구를 만들어 낼 것이다. 만일 우리가 존경받으려는 욕구를 제거하면서 존경심을 확보해야 한다면, 존경받으려는 욕구를 더 많이 만들어낼 것이다. 우리가 자멸적인 활동의 순환을 만들기 시작하면, 영혼의 상태는 전보다 악화된다. 겸손을 자랑하는 종교 공동체가 있었다. 영적 여행에서 이 부분은 매우 교묘한 것일 수 있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


만일 당신이 거짓자아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가장 친한 친구 네 사람을 불러서, 당신의 작고 사소한 잘못들에 대해이야기해 보라.


우리는 동료들과 지나치게 동일화하는 태도도 버려야 한다. 이것은 자신이 속한 집단, 또는 부모와 학교와 교회와 국가로부터 받은 가르침을 자랑스럽게 여겨서는 안 된다는 말이 아니다. 지나치게 동일화하는 것은 영적 여행에 장애물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주위 사람들이 복음의 가치관을 따르고 있는지 살펴 보아야한다. 늙었다고 해서 그것들을 변화시키지 못하거나 포기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산다는 것은 변화하는 것이며, 우리는 자신의 것으로 삼은 거짓 가르침들 -우리의 거짓자아- 을 변화시킨다.


수동적 정화는 우리의 본성적인 능력들을 쇠약하게 만들지 않는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본성적이 능력은 약해지는 것이 아니라 분명해진다. 질서, 안전, 즐거움 등을 향한 건전한 성향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다. 이러한 능력들에 집착하여 필요한 주의를 집중하지 못하고 방심하게 되고 호전적이 되는 것은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아무 것에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느낌을 갖기 시작하여 그것을 떨쳐버릴 수 없게 될 때, 이러한 애착들은 우리를 최대한으로 활용한다. 또 우리는 슬픔이나 상실감을 느끼거나 또는 사소한 이유 때문에, 또는 표면적으로는 아무 이유가 없이 크게 화를 내기 시작한다. 어떤 사람들은 종종 정욕적인 욕망을 예리하게 의식하며, 우리는 정욕적인 느낌과 감각 때문에 어려움을 느낀다. 때때로 우리는 자신이 완전하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열등한 것처럼 여기는 이상한 느낌을 갖기도 한다. 이러한 일이 일어날 때, 해결책은 바쁘게 활동하는 것, 부인하면서 미소 짓는 것, 애완동물들과 함께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 등이 아니다. 이러한 일회적인 해결책을 사용하는 것은 잡초를 뿌리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윗부분만 잘라주는 셈이 된다.


다음은 1987년에 Carl J. Arico가 캘리포니나의 멘로 파크에 있는 Vatican II Institute에서 안식년을 보낼 때의 이야기이다. 어느 날 아이오아 주에서 온 사제는 성찬 예배를 주재 설교 하면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다 :


나는 매년 여름 우리 집 농장에서 경작하는 일을 돕습니다. 어느 날 나는 트랙터를 몰다가 우리 집안에서 수백 년 동안 경작해온 밭 한 가운데 있는 무엇인가를 들이받았습니다. 무슨 일인지 확인하려고 트랙터에서 내렸습니다. 밭 가운데 커다란 바위가 있었습니다. 그것을 움직여보려고 했지만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밭 가운데 0.5톤짜리 바위가 있었습니다. 형제들이여, 영적 여행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면서 마음을 열어놓고, 인생에서 성령의 사역에 자신을 개방할 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우리는 결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무엇이 닥치든지 그것에 초연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거룩한 농부가 새로운 씨앗을 심을 공간을 마련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감동적인 이야기이다. 인생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우리가 혼자 힘으로 도달할 수 있는 것보다 더 깊은 차원에서 하나님의 사역에 자신을 개방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의식하는 느낌과 반응은 하나님의 뜻에 동의하는 기회가 된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서 치유나 용서, 또는 찬양이 필요한 것을 보여 주신다.


이것이 우리가 기도하는 동안에, 그리고 매일의 활동 안에서 수동적 정화가 행하는 것이다. 성령은 우리의 삶 안에 있는 에너지 중심들을 포함하여 많은 것을 보게 하시며, 그것들이 우리를 얼마나 통제하는지 보게 해주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신에 대해 질문을 시작하면, 내면에서 성령의 사역이 시작된다. 우리 자신에 대한 질문은 어떤 것인가? '내가 허락하지 않았는데 나의 삶을 지배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내가 예상한 방법으로 성원하지 않는 사람은 누구인가?" '내 자신이 상처받기 쉽다는 것을 인정했기 때문에 나에 대해서 무엇인가 알고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내가 완전하지 않다는 것을 발견한 사람이 있을까?" 에너지 중심들은 온갖 잡음과 유익하지 못한 소용돌이를 만들어낸다. 이 세 가지 중심은 모든 동경, 모든 두려움, 모든 욕구를 확대하여 그것들이 우리의 주의를 완전히 사로잡게 만든다.


우리의 정서적 프로그램은 모든 것이 정상적이라고 말하기 때문에, 우리는 내면에 있는 에너지 중심들을 바라보지 않는다. 우리는 이러한 혼란 속으로 들어간다. 우리는 그 세 가지 중심들의 신경과민적인 욕구들을 모두 충족시켜 주기로 작정한다. 우리는 완전히 지배할 것이고,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을 것이고, 모든 감각적 인 변덕을 충족시켜 줄 것이다.


우리가 죽기 전에 몇 가지 실수를 더 범할 것이라는 전제에서부터 시작해 보자. 만일 우리가 항상 안전하고 올바르기로 결심한다면, 어떻게 성장할 수 있겠는가?


두번째 전제와 관련하여, 모든 사람이 우리를 좋아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가정해 보자. 그밖에 새로운 것이 무엇인가? 예수님도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을 좋아하게 할 수는 없었다. 간혹 우리가 기대하는 것이 비현실적인 것일 수 있음을 아는 것이 위안이 되지 않는가?


이제 우리가 항상 지배한다고 생각한다는 전제를 가지고 시작해 보자. 그렇다면 하고 싶은 대로 하지 못할 때에, 우리는 어떻게 행하는가? 우리의 방식이 항상 우리에게 유익한 것인가?


지배, 존경, 안전 등의 영역에서 욕구가 충족되지 않을 때에 우리의 반응은 여러 가지이다. 정치적인 원동력을 살펴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과거에 있었던 대통령 선거에서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친 주제들 중 하나는 "경제"였다. 지금 우리의 논의에서 모든 것은"지배"에 집중된다. 우리는 사람들이나 하나님 앞에서 통제할 수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우리는 책임을 지고 싶어 한다. 여기에서의 초점은 "존경"이다. 우리는 사람들이나 하나님으로부터 하찮게 여김을 받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우리는 충분한 관심을 받기를 원한다. 여기에서의 초점은 "안전"이다. 우리는 사람들이나 하나님 앞에서 불안하게 느끼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우리는 자신감을 갖고 싶어 한다. 지배하거나 안전하게 느끼거나 존경을 받지 못할 때에, 우리는 어떻게 반응하는가?


한 가지 방법은 후퇴이다. 우리는 "내 장난감을 가지고 집으로 가련다. 더 이상 이 공동체에서 놀지 않겠다", "더 이상 가족들에게 말을 걸지 않겠다", "아무도 내 음식을 맛있게 먹지 않으니, 다시는 요리를 하지 않겠다" 등의 말을 한다.


또 한 가지 방법은 공격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우리가 도전적인 태도를 취하기 때문에 아무도 우리에게 접근하지 못한다. "다시 한 번 나를 방해하면, 물에 빠뜨려 버릴 테다." 자신이 결코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만큼 공격적이지는 않다. 그렇다면, 수동적-공격적인 태도를 취하여, 필요할 때에 자신의 관심을 억제하고 얼음처럼 냉담하게 행동하는 것은 어떤가? 그것 역시 다른 형태의 공격이다. 실제로 선한 일을 하는 사람들, 특히 사회활동을 하는 사람들은 때때로 공격적인 위치에서 일한다. 그렇기 때문에 머튼은 우리가 앉아서 묵상하면서 자신의 개혁 욕구가 바른 마음에서 생겨난 것인지 확인해야한다고 말했다. 개혁은 우리의 분노와 공격성을 합법화해줄 수 있다. 지도자에 대한 불만 때문에 소란스러운 국가들을 보라. 개혁을 위한 운동이 비폭력 운동인 경우는 극히 드물다. 폭력은 정당화되고 합리화되고 필요한 것으로 찬양된다. 새 지도자들도 옛 지도자의 행태를 답습하며, 폭력의 순환은 계속된다.


또 다른 방법은 매우 의존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우리의 욕구를 보살펴 주기를 원한다. 우리는 권위를 가진 사람들에게 아첨을 한다. 자신의 가문이 훌륭한 가문이기를 원한다. 만일 권위를 가진 사람들이 우리에게 인사를 하지 않거나 경의를 표하지 않으면, 우리는 방에 들어가서 그 사람(상관, 주교, 손윗사람, 코치 등)이 우리를 좋아하지 않는 이유를 생각한다. 우리는 여전히 착한 어린이처럼 쓰다듬어 주기를 원한다. 그것은 바보 같은 짓이다. 우리는 존경받고 존중되어야 한다. 그러나 만일 권위 있는 사람의 미미한 모욕이 우리의 내면에 혼돈을 초래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삶을 파괴할 것이다.


다음으로 조건부 항복(capitulation)이라고 불리는 가장 미묘한 방법이 있다. 우리는 항복한다. 궁극적으로 우리가 원하는 대로 하게 될 것을 기대하면서 벌어지는 일을 받아들인다. 다시 말해서, 협상을 한다.


위에 말한 반응들, 또는 방법들 -후퇴, 공격성, 의존성, 조건부항복- 은 미봉책이다. 그것들은 문제의 핵심에 이르지 못한다. 즉 권력과 존경과 안전에 토대를 둔 성공과 행복을 지나치게 의존하는 태도를 버리게 하지 못한다. 균형을 잃고 그것들에게 집착할 때, 우리는 변화를 향한 여행에 커다란 장애물들을 만들어낸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두 가지 방법으로 말해보자. 정화에 대해서 말하자면, 그것을 적극적인 것과 수동적인 것으로 볼 수 있다. 수동적인 것은 우리의 삶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임재와 활동에 동의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기도에 충실함으로써, 즉 영적 독서와 집중기도를 실천하여 성령이 우리 안에서 보다 깊이 역사하시는 것을 허락하며 진정으로 기도함으로써, 우리는 거룩한 의원이 필요한 일을 행하시는 것을 허락한다. 우리는 마음을 열어놓고 받아들이며, 우리의 기도는 "주님, 당신에게 필요한 일을 행하십시오"라는 메시지를 보낸다. 위에서 말한 밭을 경작한 이야기는 드러내야 할 것을 드러내는 것을 허락하는 데 대한 훌륭한 예이다. 수동적인 정화는 근원에 이를 뿐만 아니라 적극적인 방법에 이르는 길을 마련해 준다.

 
3. 적극적인 정화


적극적인 정화(active purification)는,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자원을 사용하여 우리의 문제를 다루는 구체적인 방법이다. 우리는 자신의 삶에서 진행되고 있는 것의 기초가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기 때문에, 그것에 감연히(과감하게) 맞서야 한다. 예를 들자면, 밭을 간 후에는 새 생명의 씨를 뿌려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무엇인가? 분명하게 생각을 할 수 없거나, 잠을 이룰 수 없는 상황에 휘말렸다고 느낀다면, 기도하면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요청하라. 자신에게 일어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 눈과 들을 수 있는 귀를 달라고 성령께 요청하라.


첫째, 그 상황을 분류하라. 그 느낌을 식별하고, 영향을 받는 것처럼 보이는 에너지 중심이 무엇인지 확인하라 : 때로 세 개의 에너지 중심 모두가 영향을 받는 경우도 있다. 그것에 어떤 명칭을 붙이는 것은 자유이다. 그러나 그것을 정당화하지 말고, 핑계를 대지 말라. 우리는 지배하지 못하는 것을 싫어한다. 우리는 사람들의 호감을 받지 못하면 슬퍼한다. 사람들이 우리를 완전하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우리는 실망한다. 그것을 분류하여 명칭을 붙이라. 그것을 버리려고 노력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것을 맛보라. 그것을 가로질러 걸어가라. 우리가 무의식중에 그것을 포기하기 때문에 내면에 있는 거짓자아가 지금 이 순간을 엉망으로 만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자신에게 화를 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자신의 녹음기가 그처럼 크게 소리를 내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첫 단계를 취한 후에, 기도하라. 간단하게 "환영합니다"라고 기도하라. 그 기도를 원하는 만큼 자주 되풀이 하라. 당신은 무엇을 환영하는가? 당신은 하나님께서 치유, 용서, 또는 찬양에게 당신의 관심을 이끌어 주시는 특별한 선물을 환영하고 있다. 만일 하나님께서 당신의 삶의 사건들 안에서, 그것들을 통해서, 그리고 그것들을 도구로 하여 역사하신다고 믿는다면, 당신은 이 상황에 하나님이 임재하신다고 믿을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임재를 환영한다. 그 사건 자체를 환영하고 싶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 사건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임재를 환영한다.


그 다음에는 "이 상황을 지배하려는 나의 욕구를 버립니다"라고 말하라. 그리고 기다리라. 당신이 종국에는 이 상황을 지배하기를 원하겠지만, 이 순간에는 지배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따라서 하나님께 지배해 달라고 요청하라. 장황하게 "주님, 나는 지배하기를 원합니다. 항상 지배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내가 통제할 수 없습니다. 이 상황을 지배하지 못하는 나의 무능함을 당신께 바칩니다. 당신의 뜻대로 행하십시오"라고 표현하지 말고, 문제의 핵심으로 들어가서 "이 상황을 지배하려는 나의 욕구를 버립니다. 환영합니다"라고 말하라.


이렇게 하면 문제가 해결되는가? 당장에는 해결되지 않지만, 몇 분 동안 그 사건을 둘러싼 잡음과 혼란에서 벗어날 수 있다. 우리는 주께서 오셔서 필요한 일을 행하실 공간을 만든다. 그것은 어떤 상황에 대해 일상적인 방법으로 반작용하기 보다는 응답하는데 도움을 준다.


4. 여행을 위한 태도

 

정화, 참 자아, 거짓자아 등에 대한 문제를 다루면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 몇 가지가 있다. 토마스 키딩은 그것들을 "여행을 위한 태도들"(attitudes for the journey)라고 부른다.


첫째, 우리는 자신의 어두운 부분을 환영하고 돌보아 주어야 한다. 그것은 우리의 일부이다. 그것은 생소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기도하고 살아야 하는 것의 일부이다. 이것 대신에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부인하는 것이다. 부인과 진리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 항상 그렇듯이, 진리는 우리를 자유하게 한다. 어두운 측면의 에너지가 완전히 자유하게 되면, 그것은 우리가 변화하는 데 필요한부분이 된다. 자기 인식과 자기 용납은 본질적인 것이다. 우리는 자신을 불쌍히 여겨야 한다. 나는 우리 자신의 어두운 자아를 보고 웃어도 좋다고 생각한다. 단테가 영적 여행을 다룬 서사시의 제목을 『신곡』(The Divine Comedy)라고 부른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자신의 어두운 측면을 다룰 때, 우리는 자신을 성가시게 하는 사람들이나 사건들이 실제로는 선물이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한다. 그들은 우리의 자동 전축을 작동시키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우리의 어두운 부분을 끌어내어 우리가 그것들을 인정하고 대처할 수 있게 해준다. 그 때에 우리의 자동 전축 안에 녹음된 것들은 기도를 통해서 성령에 의해 지워지기 시작한다. 우리의 관상 여행 중 일부는 이러한 문제들을 확인하고 인정하는 것이다. (키딩은 정상적인 상황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키딩은 이 공식을 학대의 상황에 적용하지 않는다. 그러한 상황에서는 단순히 포기하는 것 이상의 분명한 조처를 취해야 한다. 그러나 때때로 포기는 학대의 상황에 처한 사람에게도 그들이 특정한 상황에 사로잡힌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용기를 갖게 해줄 수 있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자신을 자유롭게 할 행동 계획을 찾아낼 수 있게 된다. 그러한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때 사람들은 학대 속에서 사는 것 외에 다른 길이 없다고 느낀다).


두번째 태도는, 모든 반대되는 증거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완전히 우리 편이심을 염두에 두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개인적인 성장과 고결함을 촉진하는 것을 즐겨 하신다. 우리는 그것을 위해서 피조 되었다. 어린이들이 노력하지만 제대로 하지 못할 때, 사랑하는 부모는 제대로 행하고 싶어 하는 자녀의 소원을 보고서 그 아이를 돕기 위해서 힘이 닿는 한 모든 일을 한다. 부모는 자녀의 성장과 고결함을 볼 때에 가장 깊은 즐거움을 느낄 것이다. 이것이 우리 각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태도라고 믿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 우리의 내면에서 하나님을 사랑하시는 분으로 보지 않고 멀리 떨어져 계시면서 우리를 비난하시는 분으로 여기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러한 기록들은 변경하거나 없애야 한다.


세번째 태도는, 치료를 필요로 하는 우리의 욕구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자비와 긍휼을 의지한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우리가 여행을 계속하고 나이가 들면서, 점차 자신의 허물들을 보려 하며 치유되어야 할 것을 보려 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닌가? 우리는 "나의 미소 속에는 엄청난 분노가 놓여 있다. 그 분노는 되풀이하여 나타나기 때문에, 나에게는 치유가 필요하다"라고 말한다. 그런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그 다음에 우리는 분노 속에서도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우리에게는 정욕이 있으며, 그것을 교정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것을 하나님께 가져오는 순간을 가다리면서 여러 해 동안 지켜보셨다. 우리는 나이가 들면서 점점 더 하나님의 자비를 접하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알면서도, 한편으로는 확신을 갖지 못했지만, 이제 진정으로 하나님의 자비를 받아들일 수 있다.


기억해야 할 네번째 태도는, 신뢰는 완전한 사랑으로 발달한다는 것이다. 신뢰하면, 신뢰가 생긴다. 두려움은 무익한 것이다. 두려움은 주로 우리의 머리속에 존재하며 상황의 실체와는 거의 상관이 없다. 신뢰가 성장하면, 사랑도 성장한다. 영적 여행을 하는 동안, 우리는 대체로 자신의 능력만 바라본다. 이것은 치유되고 용서받아야 할 태도이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이미 충분하다. 너는 언제 나를 바라보려느냐?"라고 말씀하시는 곳에 도착한다. 인생은 우리가 걱정과 염려하는 것 이상이다. 그것은 하나님과 관계하는 것이기도 하다.


토마스 키팅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우리의 참 자아를 의식하는 것, 그리고 이 경험에서 흘러나오는 영적 평안과 기쁨을 깊이 의식하는 것은 거짓자아의 해체와 죽음에 따르는 정신적 고통을 상쇄해준다. 거짓자아를 움직이게 하던 힘이 쇠퇴하면, 참 자아는 하나님의 사랑의 동력으로 "새로운 자아"를 세운다. 
새로운 자아를 세우는 일에는 무수한 잘못이 따르며, 때로는 죄도 따른다. 그러한 잘못들은 참 자아의 침범할 수 없는 선에 비하면 지극히 하찮은 것에 불과하다.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고, 우리가 해친 사람들로부터 용서를 구해야 하며, 그 다음에는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새로운 확신과 활력을 가지고 행동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우리를 무덤에서 불러내고 계시다"고 생각해 보자. 우리는 어떻게 무덤에서 나오는가? 하나님은 이미 수동적 정화의 과정을 통해서 우리를 묶고 있던 것들을 풀어 주고 계시다. 우리의 전통에서는, 우리가 침묵 속에 하나님께 복종할 때에 치유가 시작된다고 말한다. 우리는 기도 시간이 아닐 때에 드러나는 것들을 식별할 수 있으며, 지배, 존경, 안전 등 세 가지 중심을 바라본다. 이것을 심리학으로 축소하지 말라. 이것을 식별하는 것은 심리학의 일이 아니다. 믿음이 없으면, 이것은 쓸데없는 일이 된다. 이 세 가지 중심을 적절하게 이용한 예는 팔복 중 처음 세 가지 복에서 찾아볼 수 있다. 관상자는 팔복을 실천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우리는 팔복을 무시하고 지나치는 경향이 있다. 우리 문화의 사고방식으로 보면 그것들은 실질적이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우리 시대에는 영적 독서 기도와 팔복을 함께 행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그것들은 그리스도의 "지혜"의 가르침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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