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13.08.02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하나님의 경륜<퍼옴>.이냐시오, 순교자열전<모략>.고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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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욥기에 대한 궁극적 답변인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godly edifying = building up, administration, dispensation, fellowship) -- 성경 : 욥기 10:2, 8-9, 13, 엡 3:9  고후 3:17
 

 우리는 욥기 마흔 두 장이 우리에게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과 그분의 택한 백성을 -고난을 통해-다루시는 목적에 관한 이중 질문을 남겨 둔다는 것을 지적했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구약이 아닌 신약에서 발견된다. 이 대답은 다름아닌 하나님께서 그분의 택한 백성 안으로 그분 자신을 분배하기 위한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이다.
 

1. 하나님의 경륜 안에 있는 열 가지 주요 항목
 

 하나님의 경륜은 열 가지 주요 항목으로 구성된다.

처음 세 항목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성육신, 땅 위에서 사신 인성 안에서의 삼위일체 하나님의 삶, 모든 문제들을 해결하고 우주 안에 있는 모든 소극적인 것들을 끝내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만유를 포함한 그리스도의 죽음이다.

넷째 항목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분배하는 부활로서, 이 부활 안에서 인성 안에 계신 그리스도는 그분에 이어 더 많은 아들들이 생기도록 하나님의 맏아들로 태어나셨으며, 이 부활 안에서 인성 안에 계신 바로 그 삼위일체 하나님이 신성한 분배하심을 위해 생명 주는 영이 되셨으며, 이 부활 안에서 그리스도 안의 모든 믿는이들이 거듭나서 하나님의 아들들과 그리스도의 지체들이 되었다.

다섯째 항목은 교회를 산출하기 위해 완결된 영을 부은 그리스도의 승천이다.

남은 다섯 항목은 하나님의 교회, 그리스도의 몸, 새 사람, 과정을 거쳐 완결된 삼위일체 하나님의 유기체, 새 예루살렘이다.

신약에 계시된 다른 모든 항목은 이 열 가지 주요 항목과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관련되어 있다.
 

 2. 믿는이들에게서 나온 분열은 하나님의 경륜 안에 있는 열 가지 항목 외에 다른 부차적인 것<개인 의견>들을 더 강조함 때문에 발생하는 것임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경륜을 구성하는 이 열 가지 항목 외에 다른 어떤 것을 강조할 때마다 많은 다른 의견의 학파가 생기고 믿는이들 가운데 분열이 초래되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들은 신약의 가르침일지라도 하나님의 경륜 안에 있는 열 가지 기본 항목들 가운데 하나가 아닌 물에 잠기는 침례를 강조한다. 이러한 강조는

물에 잠기는 침례를 주장하는 종파에서뿐 아니라, 침례에 사용되는 물의 종류와 앞으로 구부려 받을 것인지 뒤로 젖혀 받을 것인지 앉아서 받을 것인지, 그리고 아버지, 아들, 성령의 이름 안에서 침례받을 것인지 다만 예수의 이름 안에서 침례받을 것인지에 대한 논쟁에서도 나왔다.

다른 믿는이들은 장로회(장로들이 교회를 치리함)와 같은 문제, 교회 집회 가운데서 어떤 종류의 악기가 사용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로 논쟁한다.

몇 해 전 나는 어떤 모임이 집회 가운데서 피아노가 사용되어야 하는가 오르간이 사용되어야 하는가의 문제로 나뉘어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런 종류의 상황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보편적이다. 누구도 신성한 분배하심을 위하는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을 붙들려 하지 않는다.
 

 3. 주관적으로와 체험적으로 하나님의 경륜의 항목들을 배움
 

 우리는 단지 교리적인 방식으로 객관적으로가 아닌 체험적인 방식으로 주관적으로 하나님의 경륜의 항목들을 배워야 한다.

우리는 이 모든 항목들을 어떻게 체험하는가를 상고해 보아야 한다.

어떻게 우리는 그리스도의 성육신, 인생, 십자가에 못박힘, 부활, 승천을 체험할 수 있는가?

어떻게 우리는 교회의 한 부분임과 그리스도의 몸이요, 새 사람이요, 삼일 하나님의 유기체임을 체험할 수 있는가?

어떻게 우리는 실제적이고 체험적인 방식으로 영원 안에서 새 예루살렘의 일부가 될 수 있는가?
 

 4. 유일하신 한 하나님


우리가 이 열 가지 항목을 체험적으로 알고자 한다면, 우리는 그것들이 모두 유일하신 한 하나님을 가리킴을 보아야 한다.

우리에게는 오직 한 하나님이 계시지만, 이 유일하신 하나님은 삼위일체―아버지, 아들, 영―이시다.

아버지와 아들과 영은 하나이다. 아버지는 아들 안에 계시고, 아들은 아버지 안에 계신다. 그 영은 아버지와 아들 모두 안에 계시며, 아버지와 아들은 모두 그 영 안에 계신다. 셋은 동존재(동시에 함께 존재하심)하실 뿐 아니라 상호내재(서로 안에 거하심)하신다. 아무도 그분들을 분리시킬 수 없다. 아버지, 아들, 영 사이에는 구별은 있지만 분리는 없다. 아버지와 아들과 영은 동존재하시며 상호내재하시므로, 아버지가 계실 때 아들과 영 또한 계신다.
 

 5. 삼위일체 하나님이 과정을 거치심
 

성육신 전에 아버지와 아들과 영은 영원 안에서 한 분 하나님이셨지만, 아직 과정을 거치지 않으셨다.

그러나 성육신, 인생, 십자가에 못박히심, 부활과 승천을 거치심으로 이 유일하신 하나님이 과정을 거치셨다. 이 다섯 단계는 그분의 과정의 다섯 부분이었다.

그분의 과정의 이 다섯 부분을 통과하심으로 유일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은 과정을 거치셨고, 오늘의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완결되셨다.
 

 6. 삼위일체 하나님이 그 영으로 완결되심


오늘의 삼위일체 하나님은 완전히 그 영으로 완결되셨다.

그 영은 신성한 삼일성의 셋 가운데 마지막이다. 이 완결된 영은 사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완결이다.

만유를 포함한 영으로서, 그분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완결이요 총결이시다.

우리가 그분을 영접할 때, 우리는 아들과 아버지를 영접한다. 이 영은 아들이요 또한 아버지이시다. 셋―아버지, 아들, 영―모두 만유를 포함한 영이시다. 우리 하나님은 완결된 영이시다. 우리의 아버지, 우리의 주, 우리의 주인, 우리의 구속주, 우리의 구주는 생명 주는 영이시다.

이 생명 주는 영은 만유를 포함하고, 복합적이며, 완결되셨다. 더욱이 지금 그분은 우리 안에 계신다.


 7. 영을 좇아 모든 것을 행함
 

 신약은 우리에게 이 영으로 거듭나라고 명하며, 또한 이 영을 통해 신성한 생명을 영접하라고 명한다.

그런 다음 우리는 이 영에 의해 살고 행해야 하며, 그리스도를 체험하고 아버지 하나님을 누려야 하며, 더욱이 모든 것을 그 영을 좇아 행함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충만을 누려야 한다.

우리가 영을 좇아 모든 일을 하는 한, 우리는 그리스도의 성육신, 인생, 죽음, 부활, 그 영이 부어진 함께하는 승천을 체험할 수 있다.

이것은 우리를 하나님의 교회, 그리스도의 몸, 새 사람, 그리고 새 예루살렘으로 총결될 삼위일체 하나님의 유기체가 되게 할 것이다. 


 일상 생활 가운데서 우리는 <세상의 지혜나 윤리도덕적 옳고 그름따라 자행자제함의>선악의 지식 나무의 영역 안에 있어서는 안 되며, <내주하시는 성령을 따라 사는>생명 주는 영의 영역 안에 있어야 한다. 우리는 어떤 것도 선악을 좇아 행하지 말아야 한다.

대신, 우리는 모든 일을 주님과 한 영 됨으로 그 영을 좇아 행해야 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말할 때에도 주님과 한 영이어야 한다.

주님을 위해 말하기 전에 단순하게 이렇게 기도하라. 『주여, 제가 주님과 한 영 될 수 있도록 저와 한 영 되소서. 주님, 제가 말하는 것이 주님이 말하는 것이 될 수 있도록 저의 말함 안에서 말씀하소서.』

이것이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의 분배하심 안에서 사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살고 말할 때, 우리는 신성한 분배하심을 누리고 생명되신, 유일무이한 가장 강한 인격이신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서 증가되고 확장되신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생명으로서 우리 안에서 자라시며,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란다. 결국 이 성장은 <자신 안에 내주하시며 또한 권능으로 기름부어지신 성령따라, 성령과 연합한 한 영으로 이 땅의 삶을 사신 그리스도의>완전한 정도에까지 이르게 될 것이다.
 

 당신과 당신의 배우자 사이에 어떤 문제가 있다 하자.

당신은 아무것도 스스로는 하지 말아야 하는데, 이는 당신이 무엇을 하든 선악의 지식 나무의 영역 안에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다만 갈라디아서 2장 20절을 기도로 읽고 마음의 시선을 내주하시는 그리스도께 돌려 주께서 하시는대로 동의하고 한 영되어 행하여야 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문제나 당신의 분노에 관심 두지 말고, 다만 그리스도께서 당신 안에 사심을 관심하라. 이것이 범사에 있어서 우리의 길이 되어야 한다.
 

 욥기는 많은 헛된 말들과 고소와 변명의 말들을 담고 있다. 제일 중요한 것은 이 책을 읽을 때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경륜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욥이 제기한 질문에 대한 대답인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은 성육신, 인생, 십자가에 못박히심, 부활, 및 영원토록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새 예루살렘으로 귀결될 교회와 그리스도의 몸과 새 사람과 삼위일체 하나님의 유기체를 산출하는 그 영의 부어짐이 있는 승천을 통하여 그분의 신성한 삼일성 안에서―아버지 안에서, 아들 안에서, 영 안에서―그분 자신을 분배하는 것임을 보아야 한다.

 

에베소서에 있는 바울의 말은 욥기에 있는 말과 매우 다르다.
에베소서 1장에서 바울은 하늘에 속한 모든 영적인 복들, 곧 하나님의 선택하심, 하나님의 예정하심, 그리스도의 구속하심, 그 영의 인치심을 말한다. 그러한 축복을 통하여 삼일 하나님은 그분의 모든 은혜받은 사람들과 하나가 되시어 교회, 곧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분의 몸을 이루신다. 그리고 3장에서 바울은 아버지께 무릎을 꿇고 믿는이들이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능력으로 그들의 속사람 안으로 강건하게 되며,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마음에 거처를 만드시고 그들이 하나님의 모든 충만에 이르도록 채워짐으로 하나님의 충만, 하나님의 표현이 되기를 간구한다.

 

우리는 오늘 우리가 교회 집회 가운데서 말하는 내용들이 어떤 것인지를 한번 심사숙고해 보아야 한다.
신약의 길을 걷고 있는 우리는 모든 성도들이 모든 면에서 온전케 되고, 장비되고, 하나님을 위해 말할 수 있도록 그들을 양육하고 먹이기를 원한다.
참된 의미의 나눔에서 우리가 듣기를 원하는 것은 다름아닌 교회와 함께하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이다.
그런데 믿는 우리 사이의 대부분의 나눔과 교통을 돌아볼 때.  우리는 우리의 어떠함을 말하고, 우리가 가진 것을 말하고, 우리가 누린 것을 말하고, 우리가 사랑하고 감상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참으로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을 귀히 여긴다면, 우리는 우리가 경험한 그리스도, 바로 그것을 말하게 될 것이다.
그럴 때 교회 집회들 가운데서 우리가 예언한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하시고 교회와 함께하시는 하나님 안에서 더욱 더 풍성해 질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여러 해 동안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이었지만 아직도 그리스도를 위해 짧은 말 한 마디도 할 수 없다.
또한 우리는 참으로 그리스도에 대해 객관적인 면에서는 잘 말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주관적, 체험적 측면에서는 그리스도를 살고 있지 않을 수 있으며, 그리스도를 귀히 여기거나 높이는 습관이 없을 수 있다.
만일 우리의 상황이 이러하다면, 어떻게 우리가 생명의 신성한 분배를 위하여 그리스도를 말함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공급할 수 있겠는가?

우리의 교회 생활이 그리스도로 풍성하고, 우리의 기도와 찬양과 예언 안에 그리스도가 함께하시기를 진실로 소망한다.


성경은 일관성 있는 책으로서, 하나님으로 시작하여 하나님으로 끝나고, 생명나무로 시작하여 생명나무로 끝나며, 생수의 강으로 시작하여 생수의 강으로 끝난다. 이것은 성경의 일관성을 보여준다.
이 일관성 있는 책의 주제는 하나님의 경륜-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 하나님의 안배-이며, 사람으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자신의 참된 내용으로 담게 하는것―그리스도를 사람의 생명과 본성과 심지어 인격으로 얻게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우리의 생명과 인격으로 갖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로 조성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로 조성된 결과, 우리는 그리스도-사람, 그리스도인이 된다.
그럴 때 우리는 그리스도를 살아냄으로, 그리스도를 확대함으로, 그리스도를 높임으로 살아계신 , 사시는 그리스도를 표현한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가 함께 모일 때, 우리가 무엇을 하든―우리가 노래하든, 기도하든, 말하든, 예언하든―그리스도의 표현일 것이다.

 

성경 육십육권은 오직 한 가지의 목적을 위해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그 영에 의해 하나님이 그분 자신을 우리 안으로 분배하심으로 그분이 우리 생명이 되고, 우리 본성이 되고, 우리의 만유가 되시어 우리로 그리스도를 살고 표현하게 하려함이다. 바로 이 한가지 목적 이루어냄이 또한 우리 삶을 통제하는 원칙이 되어야 한다. 실제적인 방식으로 생명-인격이신 그리스도는 우리의 누림을 위한 오늘날의 생명나무가 되셔야 한다.

성경은 단지 예언이나 가르침이나 예표에 관한 책만이 아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경륜에 관한 책이다. 단지 성경이 일관적으로 그리스도에 대한 책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직 충분치 않다. 성경은 하나님의 경륜 안의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의 경륜은 신성한 삼일성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그 영으로 그분 자신을 우리 안으로 분배하여 그분을 우리의 생명-본성-인격, 곧 우리의 모든 것이 되게 하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생명-본성-인격으로서 그리스도를  받아들여 적셔지고 점유되어 연합한 한 영으로서 체험할 때, 더 이상 우리가 살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사신다(갈 2:20)고 말할 수 있게 되는데, 이것이 생명나무의 경험이다.

 

@@@ 하나님의 마음의 갈망(하나님의 영원한 경륜)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시고 영원히 존재하시며(출 3:14), 삼일-아버지, 아들, 영-이시다(마 28:19, 고후 13;13). 삼일 하나님은 하나의 마음의 갈망을 갖고 계신다(엡 1:5, 9).
하나님은 그분의 마음의 갈망에 따라 영원한 경륜을 세우셨는데(딤전 1:4하, 엡 1;10, 3:9), 그것은 사람을 신격에서는 아니지만 생명과 본성에서 하나님과 같게 하며(형상과 모양), 하나님 자신을 사람과 하나 되게 하고 사람을 하나님과 하나 되게 함으로써 그분의 표현이 확대되고 확장되어, 하나님의 신성한 모든 속성들이 사람의 미덕들 안에서 표현되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여러 단계들을 통하여 그분의 영원한 경륜을  수행하신다.
첫째, 하나님은 그분의 형상 안에서 그분의 모양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창 1;26-27).
그러고 나서 하나님은 그분의 형상 안에서 그분의 모양대로 창조된 사람-예수, 구원자 하나님-이 되셨다.
하나님은 육체 되심으로써 사람이 되셔서 사람의 본성에 참여하셨다-죄없는, 독없는 구리뱀으로 표상-(히 2:14상).
하나님은 사람의 미덕들을 통해 그분의 속성들을 표현하는 인간 생활을 사셨다.-죄를 짓지 않으셨고 흠이 없으심- 
그분은 세상 모든 사람들의 죄와 죄들을 전가받아 모든 것을-모든 사람-을 포함한 죽음을 죽으셨고,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의 맏아들을 산출하시고 생명 주는 영이 되셨다(롬 8:29, 행 13:33, 고전 15:45).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그분 자신을 그분께서 선택하신 사람들-그분을 믿고 구주로 영접한 이들- 안으로 분배하셔서, 그들을 그들의 생명이신 그분 자신으로 거듭나게 하심으로 많은 아들들, 곧 많은 하나님-사람들을 산출하시고, 그분의 많은 아들들로 교회들을 형성하시며, 과정을 거치시고 완결되신 삼일 하나님의 유기체인 그리스도의 몸을 지체들인 그분의 형제들로 건축하시어, 결국 그분의 영원한 확장과 표현인 새 예루살렘-그리스도의 신부-을 완결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경륜에 관한 진리를 이미 들었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듣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이 진리를 다른 이들에게 제시하고, 그들에게 메시지를 전해 주어야 한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에베소에 머물면서 어떤 사람들이 하나님의 경륜 이외의 것들을 말하지 못하도록 명령하라고 권했다(딤전 1:4).
우리는 하나님의 경륜에 대한 이상의 통제를 받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경륜이 아닌 것은 무엇이라도 말해서는 안 된다.

 
1. 하나님의 경륜의 정의

 

경륜(economy)」이라는 단어는 헬라어 「오이코노미아(oikonomia)」의 영어화된 형태로서 「가정의 법, 가정 관리, 가정 행정」을 의미하며, 여기에서 「행정적인 분배(안배), 계획, 경륜」이라는 단어가 파생되었다. 이 헬라어 단어는 분배의 개념을 내포하고 있다.
분배함(dispensing)과 분배(dispensation)는 다르다.
「분배함」이란 단어는 무엇인가를 나누어 주는 것을 뜻하는 반면, 「분배」란 단어는 실상 주로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상용되며, 특정한 시대에 그 시대에 따라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독특하게 다루시는 방식을 가리킨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분배하심이란 중요한 문제를 보지 못한 채 하나님의 시대(분배)에 대해 말한다.

경륜은 (하나님 자신을) 분배하심 위한 계획을 수행하기 위한 (하나님의 때에 따른)안배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경륜은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의 안배이며, 이는 하나님이 그분 자신의 요소와 생명과 본성과 미덕들과 그분이 성취하고 달성하신 모든 것을 그분의 택한 백성에게 분배하심으로 그분의 택한 백성이 신성한 근원의 신성한 요소 안에서 신성한 본질로 조성되게 함으로써 신성한 어떤 것으로 재건축되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분배하심을 받기 전에 우리는 단지 사람이었다. 하나님이 그분의 신성한 조성으로 재건축하신 후에 우리는 주 예수님과 신성하게 인간적이며 인간적으로 신성하게 되었다.
성육신 전에 그리스도는 다만 신성하셨지만, 성육신 후에 그분은 하나님-사람, 곧 신성한 본성을 지닌 사람이 되셨다. 지금 그분은 신성하게 인간적이며 인간적으로 신성하시다.
그리스도에 의해 거듭난 후에 우리는 그분의 지체-일부분이 되었으며, 이제 피조물로서 새창조인 우리는 주께서 주신 소망을 믿음으로 끝까지 붙잡는다면 분배해주사 영접한 그리스도의 생명-그리스도의 본성-그리스도의 인격으로 온전히 점유되고 적셔짐을 통해 신성하게 인간적이며 인간적으로 신성하신 그분과 같은 형상에 이르기까지 변화되게 될 것이다..

 신성하게 인간적이며 인간적으로 신성한 거듭난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유기체, 곧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데, 이는 하나님의 새 창조 안의 새 사람인 하나님의 교회로서 하나님의 새로운 「일」을 수행한다. 다시 말해서, 삼일 하나님의 충만, 표현을 위한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하는 것이다. 삼일 하나님의 유기체인 이 충만은 새 예루살렘으로 최종 완성될 것이다. 성경은 그 서두로서 창조 안에 계신 하나님으로 시작하여 새 예루살렘으로 끝난다. 새 예루살렘은 삼일 하나님과 사람, 곧 그분의 택함받고, 구속되고, 거듭나고, 변화되고, 형상을 본받고, 영화롭게 된 세 부분으로 된 사람과의 연합이다. 새 예루살렘은 영원토록 하나님을 표현하는 하나님과 사람의 이러한 조성체이다.


--하나님의 경륜이란 무엇인가?
66권으로 된 성경에는 여러 가지의 가르침이 있지만 우리가 영적 눈으로 성격을 철저하고도 자세하게 주의해 본다면 하나님의 경륜이란 "하나님 자신을 사람 속에 공급해 주는" 하나님 자신의 계획임을 깨달을 것이다. 하나님의 경륜이란 오로지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람 속에 공급하시는 것이다...<경륜이란 궁극적으로 모든 것의 공급근원이신, 한량없이 풍성하신 하나님께만 쓸 수 있는 말이다>
"경륜"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기 위하여 행정적 운영, 관리하는 경영, 혹은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기 위하여 공급하고 분배하는 직무등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이 경륜 가운데 전능하신, 만유를 포함하신 하나님의 목적은 오직 그분 "자신"만을 우리 속에 공급하시는 것이다.
이 말은 우리 속에 깊이 새기기 위해 여러 번 반복해야 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은 측량하실 수 없이 부요하시다.
그분은 마치 거대한 자본을 가진 능력있는 사업가와 같은 분이다.
하나님에게는 이 우주 가운데 한가지 사업이 있다. 그분의 거대한 재산이 바로 그분의 자본이다. 우리는 그분의 재산이 얼마큼인지 헤아릴 수 없다.
그분 자신이 곧 그분의 모든 자본이다. 그 자본을 가지고 하나님은 자신은 대량으로 "생산"할 것을 계획하신다. 하나님 자신이 사업가도 되고, 자본도 되고, 생산품도 되신다. 그분의 목적은 자기 자신을 많은 사람에게 대량으로 값없이 공급해 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에게는 자신을 사람 안에 넣어 주시기 위해 그러한 거룩한 경영과 관리와 분배와 경륜이 필요하신 것이다.


--이제 보다 구체적인 것을 보기로 하자.
우리는 하나님의 목적이 그분 자신을 공급해 주시는 것임을 알았다.
이제 우리는 그분이 무엇을 공급하시는가를 알기 위해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가를 발견해야 한다.
바꾸어 말해서 하나님의 실제 내용은 무엇인가? 어느 사업가가 제품을 생산할 계획을 세운다면 먼저 제품의 재료에 대해서 분명히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본질은 영이시다(요한복음 4:24).
전능하시고, 만유를 포함하시고, 우주 안에 충만하신 하나님의 본질은 바로 영이시다.
하나님은 만들어 내는 분이고 그분의 목적은 자신을 제품으로 생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분이 만들어 내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자신의 성분, 즉 영이라야 한다.


2. 하나님의 경륜의 단계


--우리는 하나님의 목적을 알았고, 하나님이 무엇을 공급하시는가를 알았다.
그러면 이제 하나님이 그의 경륜을 통해서 어떻게 공급되는가를 깨달아야 한다.
바꾸어 말해서 하나님이 사람 속에 넣어 주시는 것은 영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이 역사를 어떻게 하시는지를 알아야한다.
하나님은 삼일성(三一性)에 의해 이 역사를 하신다. 삼일(三一)하나님-아버지, 아들, 성령-이 바로 하나님의 경륜의 중심이다.
과거 수세기 동안 기독교에는 삼일성(Trinity)에 대한 많은 이론들이 있었다. 그러나 삼일성(三一性)은 그것이 하나님의 경륜과 연결되지 않는다면 올바로 이해될 수 없다.
왜 그분의 경륜을 이루는 데 하나님의 세 인격들이 필요한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서로 다른 세 하나님이 아니라 세 인격으로 나타난 한 분의 하나님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세 인격이 있는 목적은 무엇인가?
무엇 때문에 아버지 하나님, 아들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 계신가?
그 이유는 오직 삼일성(三一性)을 통해서만이 그분의 영이 우리 안에 공급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고린도후서 13장 13절은 삼일성(三一性)에 의한 하나님의 경륜의 단계를 보여준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여기에 아들의 은혜가 있고 아버지의 사랑이 있고 성령의 교통하심이 있다.
이들은 무엇인가? 이들은 서로 다른 세 하나님들인가? 사랑과 은혜와 교통은 서로 다른 것들인가?
아니다. 사랑과 은혜와 교통은 세 단계에 있는 한가지 성분이다.
사랑은 근본이요, 은혜는 사랑의 표현이요, 교통은 은혜 안에서 이 사랑을 전해 주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 그리스도, 성령도 세 인격 안에 나타난 한 분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근본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표현이요 성령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사람안에 전해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삼일성(三一性)의 세 인격은 하나님의 경륜의 과정 안에서 이어지는 세 단계가 된다.
이러한 세 단계가 없다면 하나님의 성분은 사람 속에 공급될 수 없다. 하나님의 경륜은 아버지로부터 아들안에서 그영을 통하여 발전된다.


** '경륜'의 의미에 대한 해석
 

  '경륜'은 헬라어로 집, 가정, 거처를 가리키는 오이코스(oikos)와 '법(law)'을 의미하는 노모스(nomos) 두 단어의 합성어이다.
이 두 단어가 합한 것이 '가정의 법규(household law)'이다. 더욱 전진된 해석은 '가정의 행정'이다.
그러므로 이 단어가 의미하는 바는 가정의 법률, 가정의 법규, 가정의 관리, 가정의 행정이다.
가정의 행정이기 때문에 거기에는 안배(arrangement), 계획(plan)이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가정의 행정'은 가정의 법규를 수행하기 위한 것이므로 안배와 계획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안배와 계획이 있기 때문에 또한 목적(purpose)이 있다.


@ 하나님의 경륜 :


#ㆍ하나님의 가정 관리, 하나님의 가정의 행정적 안배, 신성한 경영
 

  하나님의 경륜은 하나님의 가정 관리요, 하나님의 가정의 행정적 안배요, 신성한 분배(계획)이다.
여기서 뜻하는 바 경륜이란 하나의 안배, 즉 계획이다.   이 경륜은 에베소서 1장 10절과 3장 9절에 계시되었다.
에베소서 1장 9절과 10절은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경륜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오이코노미아(oikonomia)'인데 이 단어에서 우리는 '이코노미(economy : 경륜)'라는 영어 단어를 얻는다.
에베소서 1장 9절에서 '경륜'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청지기 직분'이나 '가정 관리'라고도 번역할 수 있다.
'행정'이라는 단어로 쓸 수도 있는데, 그 이유는 결국 이 경륜, 이 청지기 직분과 가정 관리가 하나의 영원한 행정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전 우주는 결국에 가서 하나의 행정 아래 있게 될 것이다.
  3장 2절에서 그는 하나님의 은혜의 청지기 직분을, 3장 9절에서는 비밀의 경륜을 말한다. 3장 9절에서 바울은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비밀이란 그분의 감추인 목적이다.
그분의 목적은 그분 자신을 그분의 택한 사람들 안에 분배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거기에 하나님의 비밀의 경륜이 있다.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즉 영원 전부터 하나님 속에 감추어져 있었던 것인데 이제는 신약의 믿는 이들에게 밝히 드러나게 되었다.
  디모데전서 1장 4절에서 바울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말하고 있다.
여기서 '경륜'의 헬라어 단어는 '오이코노미아'이다. 헬라어에서 '하나님의 경륜'이란 말은 '하나님의 가정 경제'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분 자신을 표현하는 집, 혹은 가정을 갖기 위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 자신을 그분의 택한 사람들 안으로 분배하기 위한 하나님의 가정 행정인데, 이 가정(집)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이다.
바울의 사역은 이 하나님의 경륜에 초점을 두었다(골 1:25, 고전 9:17).

 
#ㆍ하나님께서 그분의 선한 기쁘심에 따라 정하신 계획
 

  하나님의 경륜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선한 기쁘심을 따라 정하신 계획이다.
에베소서 1장 9절은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그분의 선한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 예정하신 것이니"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선한 기쁘심이란 그분의 마음의 갈망이다. 이 선한 기쁘심은 하나님께서 하나의 경륜, 곧 계획을 위해 그분 자신 안에서 목적하셨던 것이다(10절). 
하나님께서 정하신 이 계획은 그분의 선한 기쁘심, 그분의 마음의 갈망에 따른 것이었다.   이것은 하나님 자신이 그분의 영원한 목적의 시작이요, 기원이요, 영역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하나의 계획, 하나의 갈망을 갖고 계시며, 그분의 계획에 따라 하나의 목적을 갖고 계신다.   하나님의 선한 기쁘심은 그분 자신을 우리 안으로 분배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유일한 갈망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분 자신을 우리 안에 분배하시려는 '꿈'을 갖고 계신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분이 고대하는 것, 그분의 열망은 그분 자신을 그분의 택한 사람들 안에 분배하시는 것이다.
 

#ㆍ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정하신 영원한 계획
 

  하나님의 경륜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정하신 영원한 계획을 말한다.
에베소서 3장 11절은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고 말한다. 만세로부터의 목적은 영원의 목적이요, 영원 전에 하나님께서 정하신 영원한 계획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의 영원한 경륜을 정하셨다.
성경에 계시된 그리스도는 삼일 하나님의 체현이시며 성육신과 인생과 십자가에 못 박히심과 부활과 승천과 강림하심 등을 포함한 모든 과정들을 통과하셨다. 그러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영원한 경륜을 정하셨다. …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모든 것이시다. 사실,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의 모든 내용들은 바로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는 이 경륜의 중심과 둘레요, 요소요, 영역이요, 수단이요, 목표요, 푯대이다.
 

#ㆍ신성한 삼일성 안에서 하나님 자신을 그분의 택한 사람들 속으로 분배하심
 

  어떤 방법으로 하나님은 그분의 삼일성 안에서 그분 자신을 그분의 택한 사람들 속으로 분배하시는가?
이 분배하심은 세 단계를 갖고 있다.
첫 단계는 아버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아버지께서 그 근원이요, 기원이시다.
둘째로, 이 분배하심은 과정이신 아들 하나님으로 말미암는다.
셋째로, 하나님의 분배하심은 그 수단과 영역이신 그 영 하나님 안에서이다.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아들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그 영 하나님 안에서 이러한 단계들을 통하여 하나님은 그분 자신을 그분의 택한 사람들 속에 분배하신다. 
 

#ㆍ하나님의 나라인 교회를 산출하고 새 예루살렘을 완성하기 위해
 

  하나님 자신을 그분의 택한 사람들 속에 분배하기 위한 하나님의 신약 경륜은 교회를 산출하기 위한 것이다(엡 3:10).
이 분배하심은 그리스도 안에서 정하신 그분의 영원한 목적에 따라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나타내기 위한 교회를 낳는다(엡 3:9-11).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삼일성 안에서 분배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나타내 보이기 위해 교회가 산출된다는 뜻이다.
  고린도전서 4장 17절과 20절은 <하나님의>왕국이 오늘날의 교회 생활임을 보여 준다.
17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행사 곧 내가 각처 각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고 말한다. 그런 뒤에 20절에서 그는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고 말한다.
이 구절들은 하나님의 왕국이 각처에 있는 각 교회요, 각처 각 교회가 하나님의 왕국임을 보여 준다. 
하나님의 왕국인 교회는 하나의 최종 완성을 갖게 될 것인데, 이 최종 완성은 삼일 하나님의 영원한 표현을 위한 새 예루살렘이 될 것이다.
계시록 21장 2절은 이렇게 말한다.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새 예루살렘은 모든 세대에 걸쳐서 하나님에 의해 구속받은 모든 성도들로 된 살아 있는 구성체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배필로서 그리스도의 신부요, 하나님의 처소로서 하나님의 거룩한 성이다.

그리스도의 신부로서의 새 예루살렘은 '그녀의 남편'인 그리스도에게서 나와서 그분의 배필이 되는데, 마치 하와가 남편인 아담에게서 나와 그의 배필이 된 것과 같다(창 2:21-24).
새 예루살렘은 그리스도의 생명과 본성의 풍성함에 참여함으로써 남편을 위한 신부로 예비된다.
하나님의 거룩한 성으로서의 새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처소가 되기 위해 하나님께로 온전히 성별되고 하나님의 거룩한 본성으로 완전히 흠뻑 적셔진다.


# * 하나님이 사람 되심은 피조물인 사람으로 생명과 본성에 있어서 하나님과 똑같게 되도록 하려 하심이다―성경 전체의 개요임
 

"하나님이 사람 되심은 피조물인 사람으로 생명과 본성에 있어서 하나님과 똑같게 되도록 하려 하심이라."는 성경 전체의 개요이다.
성경 전체는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에 관한 설명이다. 

하나님이 사람 되시고 피조물인 사람이 생명과 본성에 있어서 하나님과 똑같게 되게 하려 하셨다는 이 말은 듣기에 매우 간단하지만, 어떻게 하나님이 사람이 되시는가를 알려면 시간을 들여 연구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이 사람 되심은 사람으로 하여금 생명과 본성에 있어서 하나님과 똑같이 되게 하려 하심이지만 대체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것인가?
이 방면에서도 우리는 자세하게 볼 필요가 있다. 엄밀히 말해서, 이 말은 성경 전체의 개요이다.
성경 전체는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에 관한 설명이다.

유대인들이 구약을 읽기 시작한 지도 이미 삼천오백 년이 되었고, 그리스도인이 신·구약을 읽은 지도 거의 이천 년이 다 되어간다. 수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읽어 보았다.
그러나 매우 애석한 것은, 성경의 참된 의미와 의의를 본 사람은 몇 사람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역대로부터 성경 안에 있는 이상을 본 사람이 없다는 말이 아니라, 그들이 본 것이 모두 부분적이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것은 육신이 되심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형상을 입는 것은 변화로 말미암는다. …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입는 변화는 갑작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일생 동안 일어나는 변화요, 그분의 형상을 본받아 그분과 똑 같아지기까지의 변화이다. 또한 결국 우리는 그분과 함께 그리스도의 영광 안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주 영에 의해 우리 몸의 구속 입음을 통해서이다. 이것은 우리 온 존재의 마지막 단계의 구속으로서 우리를 영광 안으로 이끈다. 피조물로서 새창조인 우리는 거듭남, 거룩게 됨, 새롭게 됨, 변화됨, 같은 형상이 됨과 영화롭게 됨을 거치면서 참되게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갖게 된다.
  이 과정의 결과로 하나의 유기체가 산출된다. 이 유기체는 사람이 되신 하나님과 또 형상과 모양에 있어서 하나님과 동일케 됨의 변화를 입은 사람 사이의 연합이자 상호 섞임이다. 이 유기체는 삼일 하나님 가운데 아버지로 말하면 하나님의 집 곧 아버지의 집이요, 아들로 말하면 그리스도의 몸이다. 집은 하나님으로 하여금 거처를 갖게 하고, 몸은 하나님으로 하여금 표현을 갖게 한다. 그 최종적인 결과는 바로 새 예루살렘이 된다. 

 

 하나님의 경륜은 그리스도를 중심 삼은 큰 바퀴와 같음
 

  에스겔 1장에서 하나님의 경륜은 하나의 거대한 바퀴에 비유된다(15-21절).
이 거대한 바퀴의 축은 하나님의 경륜의 중심이신 그리스도를 표징하며, 그 테는 새 예루살렘으로 총결되는, 그리스도의 배필인 교회를 표징한다.

그리스도의 지체들인 많은 믿는 이들은 새 예루살렘으로 총결되는 그리스도의 몸인 그 테까지 확산되는 중심축의 살들이다.
이 큰 바퀴는 단지 하나님의 경륜만이 아닌 하나님의 경륜의 움직임이다.
창세기 1장으로부터 현재까지 이 바퀴는 계속 움직이고 있다.

하나님의 경륜의 움직임은 결코 멈춘 적이 없으며, 오늘날 이 큰 바퀴는 우리에게까지 이르렀다.

매 시대마다, 매 세대마다 이 큰 바퀴는 움직여 오고 있다.

오늘날 우리 모두는 땅 위에 이 큰 바퀴의 움직임의 일부이다.

때로는 이 바퀴의 움직임이 아주 느리지만, 때로 너무 빨라서 우리가 좀처럼 그것을 따라가지 못한다.

 

**이냐시오 영성수련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jwa0729&logNo=90152592898

**순교자열전 http://www.ipeniel.org/zbxe10/?mid=martyrs&page=1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의 비밀<모략> 

 

벧전 2:18-25 성도의 고난

 

서론: 예수를 믿음으로해서 받는 고난이 있습니다. 목사로서 전도사로서 장로 권사 집사로서 교사로서 받는 고난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고난을 잘 참고 인내하며 하나님 앞에 참으로 아름다운 것입니다.


1. 고난의 종류(18-20).


“18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복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19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20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성경에는 고난의 의미를 크게 두 가지로 보고 있습니다. 의미 없는 고난(그리스도와 상광 없는)과 의미 있는 고난(그리스도와 상관 있는)입니다. 
 

1) 의미 없는 고난입니다. 이는 자신이 잘못하여 스스로 당하는 어려움입니다.  


“20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죄가 있어 매를 맞으면 그 죄의 결과로 응당한 벌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사환이 이런 자신의 과오로 인하여 주인에게 매를 맞고 참는 것은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 없는 고난에 대하여 사람들은 연민을 느끼게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근본적으로 그를 동정하거나 안타깝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비록 자신이 어떤 일을 위하여 죽음에까지 내어놓더라도 의미가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악한 집단 혹은 자신의 이익을 챙기며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기 위한 행동으로 인한 고통 등입니다. 그리고 외적으로는 의미가 있어도 그 자신의 동기가 불확실하고 우발적 행동이거나 영웅적 동기로 나타내는 희생도 때로는 의미를 상실할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 보면 사회적 불만과 자기 불만으로 의를 가장한 희생도 자주 발견됩니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3).

 
2) 의미 있는 고난입니다. 이는 자신이 당하는 고난의 이유가 선한 일이나 타인 유익 때문에 온 것일 경우입니다. 이런 것은 아름다운 고난입니다.  

 
죄를 범하여 감옥에 가서 고생하며 고통가운데 오랜 세월을 보내었다면 누구에게도 자랑이 될 수 없고 이것은 오히려 부끄러운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조국과 민족, 정의와 선 그리고 하나님과 복음을 위하여 당하는 고난이라면 그것은 자랑스러운 것이며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2. 그리스도의 고난(21-25)


“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22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23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25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그리스도는 만유의 구원이라는 사명으로 죽기까지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1) 욥의 고난이 있습니다.
고난하면,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욥입니다. 욥은 고난당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스 땅에 욥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욥 1:1). 욥은 순전했습니다. 욥은 정직했습니다. 욥은 하나님을 경외했습니다. 욥은 악에서 떠난 자였습니다. 이 정도면 신앙이 얼마나 좋습니까? 아마 지금도 이런 신앙 가졌다면요, 단연 우등생일 것입니다.  
그런데 욥이 고난당한 겁니다. 욥의 삶에 느닷없이 고난이 찾아왔습니다. 하루아침에 재산을 다, 몽땅 잃었습니다. 순식간에 자녀를 다 잃었습니다. 온 몸에 악창이 났습니다. 얼마나 심했던지 기와 조각을 가지고 자기 몸을 긁어야 할 정도로 중증이었습니다. 욥의 고난이 얼마나 컸던지 아내까지 그를 저주했습니다.  
욥의 고난은 애매한 고난이었습니다. 왜 고난을 당하는지 욥은 몰랐습니다. 알 수가 없죠. 순전하게 살죠, 정직하게 살죠, 하나님을 경외하고 살죠, 악에서 떠나서 살죠. 근데 고난이 올 것을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 23:10).

 
우리의 삶 가운데도 이런 고난이 찾아올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선을 베푸는데 도리어 고난당할 때가 있습니다. 잘 한다고 했는데, 고난의 파도가 쳐올 때가 있습니다. 잘한다고 했는데 욕먹을 때가 있습니다. 칭찬받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칭찬은커녕 비판만 받습니다. 그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 때, 난 어떻게 해야 할까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성경이 가르쳐줍니다. 하나님을 생각하라. “19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고난을 당할 때, 고난을 보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묵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뜻이 어디 있을까?’ 나는 모르나, 하나님은 이유가 있습니다.

 
2) 요셉의 고난입니다.


“요셉이 이끌려 애굽에 내려가매 바로의 신하 시위대장 애굽 사람 보디발이 그를 그리로 데려간 이스마엘 사람의 손에서 그를 사니라”(창 39:1).  

요셉에게 고난이 왔습니다. 요셉은 형들의 미움으로 죽음의 구덩이에 빠졌다가 이스마엘 사람의 상인에게 은 20개에 팔렸고 애굽에서 또 바로의 신하 시위대장 보디발에게 팔렸지요.  
요셉은 한 족장의아들 신분에서 애굽의 노예 신분으로 전락되었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그 주인의 아내로 인해 겁탈 죄를 쓰고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요셉은 두 번씩이나 팔렸어도 억울하게 옥에 갇혔어도 형들이나 주인 여자를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3) 다윗의 고난입니다.


목동이었던 다윗은 유대의 베들레헴에서 8형제 중 막내로 태어납니다. 소년다윗은 혈색이 좋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다웠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명령으로 양을 지킬 때, 덤벼드는 사자나 곰을 쳐 죽여 임무에 대한 충실성과 용기를 가진 자입니다. 하나님은 선지자 사무엘을 베들레헴에 보내어 사울의 뒤를 이를 자로서 다윗에게 기름을 붓게 하였습니다.
소년 다윗이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전쟁터에 갔다가 하나님의 군대 이스라엘을 욕하고 모욕하는 골리앗을 죽이고 그로인해 사울 왕의 사위가 되어 사울 왕을 섬기게 됩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의 명성 때문에 사울 왕의 질투를 받게 됩니다. 즉, 다윗이 개선할 때 이스라엘 모든 성에서 여인들이 나와 노래하며, 춤추며, 북을 치면서 환영했는데, 그들은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라고 뛰놀며 화창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그날부터 사울 왕은 다윗을 틈만 나면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때부터 사울 왕은 다윗을 죽이려했습니다(삼상 18:10,11). 즉, 왕 자신을 위해 수금을 타는 다윗에게 창을 던졌던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이 피하여 실패했습니다. 사울은 그를 두려워하여 멀리하기 위해 천부장으로 삼았습니다(삼상 18:13).  


사울은 딸 미갈이 다윗을 사랑하는 것을 이용하여 다윗을 죽이려고 블레셋 사람의 양피 100을 가져오면 딸을 주겠다고 말했습니다. 다윗도 미갈을사랑했으므로 그는 블레셋 사람 200을 죽이고 그 양피를 왕에게 바치고 사위가 되었습니다(삼상 18:20-27).  


사울은 아들 요나단과 모든 신하들에게 다윗을 죽이라는 명령을 공공연히 내렸습니다. 사울에게 악신이 접하자, 수금타는 다윗에게 그는 또 창을 던졌으나, 이번에도 이를 피한 다윗은 그 밤에 집으로 도망쳐 갔습니다. 그리고 아내 미갈의 도움으로 창문에서 달아 내리움을 받아 성밖으로 도망쳤습니다(삼상 19:17). 

 
쫓기는다윗: 다윗은 사울을 피하여놉의 아히멜렉 제사장에게 가서 왕명이라고 거짓말을 함으로써 먹을 것과 칼을 얻었습니다. 여기서 다윗의 옛날 신앙과 용기를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삼상 21:1-9).  


하나님을 우리가 믿었다면 하나님의 때까지, 하나님의 때까지 인내하는 것입니다. 기다리는 것입니다. 인생은 내 때에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때에 나를 복 주시는 것입니다. 내 때에 내가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때에 내가 인정받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하나님의 때까지, 하나님이 인정하실 때까지, 은혜를 베풀어 주실 때까지, 끝까지 인내하는 것입니다.
 

사도(제자)들의 고난. 사도 바울의 고난.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히 11:24).


귀하신 교역자 여러분, 교역자이기에 고난 또한 클줄 압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시도 때도 없이 닦쳐오는 고난들 잘 인내합시다. 이것이 하나님께 정말 아름다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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