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후의 중간상태
인간이 죽으면 어떤 상태로 어디에 있을까 하는 것은 종말론의 중요한 주제 가운데 하나이며 아직도 신학적 논란이 계속되고 있는 문제이다. 또한 이것은 장례식이나 추도식 등에서 자주 질문되어지는 실제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기독교 신학은 '중간상태'(中間狀態, the intermediate state)라는 전문적 용어를 사용하여 죽음과 부활 사이의 인간 영혼 상태를 규명하려 시도하고 있다. 그런데 사후의 인간 상황을 논한다는 것은 매우 어렵다.
그 이유는 성경이 '중간 상태'에 관하여 거의 침묵을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성경에 언급된 몇 안 되는 중간 상태에 관한 구절들조차 대부분 유대묵시문학으로부터 인용하거나 영향을 받은 것들이기 때문에, 유대묵시문학의 범주에 들어가는 '외경'(外經)과 '위경'(僞經)에 대한 이해 없이 올바른 해석이 어렵다. 하지만 '외경'과 '위경'은 오류를 포함하고 있는 경외전들이기 때문에 영적 분별력을 가지고 검증의 과정을 거쳐 선별적으로 수용하지 않으면 영혼에 해를 끼칠 수 있다. 이러한 선별적 수용도 중간상태에 관한 성경 구절들을 보완하는 수준에서 멈추어야 한다.
이처럼 신중하게 중간상태에 접근해야 할 중요한 이유는 왜곡된 성경 해석을 통해 마귀가 공격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몇몇 신자들이 입신을 하여 사후의 세계를 경험하고 와서 간증을 하는데, 그 내용들 중 상당 부분들이 영계의 상층부에서 활동하는 미혹의 영들로부터 입수한 잘못된 정보들이다. 그러므로 '중간상태'를 연구하거나 가르치는 말씀 사역자들은 언제나 성경의 범위 안에 거하는 것이 안전하다.
이렇게 어려운 주제인 '중간상태'를 필자가 다루려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영계의 판도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는 엄청난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의 구속 경륜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단순한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인류의 운명을 완전히 전환시킨 '혁명적 사건'이다.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은 이 지상에서뿐만 아니라 음부에까지 지대한 영향력을 끼쳤다.
이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가 지상뿐 아니라 천상과 음부까지도 다스리는 주님이 되셨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으면 현세뿐 아니라 내세에서도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진리를 천명한다(빌2:9-11;계1:18). 또한 필자는 오늘날 신학계에서 어설프게 다루어 난해한 성구로 취급하는 '중간상태'를 바로잡기 위해서이다. 사실 성경에 '난해한 성구'(hard sayings)란 존재하지 않는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모든 성경 구절들은 완벽한 조화를 이룬다.
문제는 그 구절들을 서로 상충됨 없이 어떻게 연결할 것인가에 있다. 그 과정에서 '바른 신학'은 그 도구 역할을 한다. '바른 신학'이란 성경을 뛰어넘는 새로운 신학이 아니라 성경 전체의 근저에 드리워진 하나님의 감추어진 의도를 올바로 인식하여, 정확한 해석의 방향을 제시하는 신학을 의미한다. 필자는 본 단원에서 성경이 허락하는 한계선의 끝자락까지 폭을 넓혀 신중하게 중간상태를 다루어보고자 한다.
1)중간상태에 대한 여러 견해들
중간상태와 관련하여 논란이 되는 문제를 몇 가지로 요약해 보면: 중간적 장소가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가? 이 기간에 인간 영혼은 어디에 있는가? 또 의식을 가지고 있는가, 아니면 의식이 없는가? 지상에서와 달리 형태가 변하는가, 지상에서 지녔던 형태 그대로 유지하는가? 그리고 정화의 과정을 거치는가 안 거치는가? 이처럼 복잡다단한 문제에 대하여 여러 신학적인 견해들이 존재한다.
첫째, 육체와 영혼을 구분하는 이원론에 근거한 헬라 사상에 영향을 받아 육체의 부활을 부인하고 영혼의 영원성을 주장하는 '영혼 불멸설'이 있다. 둘째, 육체와 영혼을 단일체로 보는 일원론에 근거하여 육체의 죽음과 더불어 영혼 역시 소멸한다는 '영혼 멸절설'이 있다. 셋째, 성경에서 죽음을 '잠'으로 묘사한 것에 근거하여 인간 사후 영혼이 부활 때까지 잠을 잔다는 '영혼 수면설'이 있다. 넷째, 인간 영혼은 부활 때까지 최종적인 보상이나 심판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를 유지한다는 '영혼 대기설'이 있다. 다섯째, 지상에서 완전 성화에 도달하지 못한 영혼들이 사후에 고통의 연단 과정을 통과한다는 '영혼 정화설'이 있다. 그러면 이들 이론 가운데 과연 어떤 것이 가장 성경적 교리인가?
정통 기독교는 인간 영혼이 죽음 이후에도 의식 있는 인격체로 존속한다는 것과 그리스도의 재림 시에 영화롭게 변화된 육체가 영혼과 재결합되어 부활할 것을 믿는다. 따라서 정통신학은 '영혼 불멸'과 '육체 부활'을 조화시킨다.
반면에 자유주의 신학은 전자를 견지하나 후자는 부인하며(영혼 불멸설), 신정통주의 신학은 영혼 불멸 사상을 부인하고 안식교(제 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와 여호와 증인들이 주장하는 '영혼 멸절설'에 근거한 육체 부활 사상을 옹호한다. 또한 칼빈 신학은 중간상태에서 영혼이 의식을 지닌다고 보지만, 루터와 재세례파 그리고 소시니안들은 의식과 지각이 없는 깊은 잠의 상태를 유지한다고 본다(영혼 수면설).
개신교 신학은 의인들이 새 하늘과 새 땅이 완성될 때까지 천상낙원에서 육체의 부활(생명의 부활) 때 받을 상급을 기다리며 안식하고 있는 동안, 악인들은 지옥이 완성될 때까지 음부에서 육체의 부활(심판의 부활, 요5:29) 때 당할 심판을 기다리며 두려움 가운데 속박되어 있다고 가르친다(영혼 대기설).
한편 로마카톨릭은 죽음과 동시에 각 개인의 영혼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영원한 지위가 결정된다고 주장한다. 즉 악인들은 즉시 지옥에, 성인들(完德에 이른 성도들)은 즉시 천국에, 그리고 예수님을 믿지만 아직 완전에 도달하지 못한 성도들은 연옥에서 정화의 과정을 통과해야 한다는 것이다(영혼 정화설).
(1)영혼 불멸설
우리가 영혼 불멸에 관하여 논할 때 '성경적 영혼 불멸설'과 '헬라적 영혼 불멸설'을 구분해야 한다. 전자는 하나님을 중심한 사상이고 후자는 인간을 중심한 사상이다. 따라서 두 견해는 궁극적으로 전혀 다른 개념을 지닌다.
①성경적 영혼 불멸 사상-성경은 '영혼 불멸'(the immortality of the soul)을 가르친다. 마태복음 10:28에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는 자를 두려워하라"고 했는데, 본문의 '멸하는'의 원형 '멸하다'(아폴루미 , destroy, perish, 요3:15,16;고전1:18;고후2:15,4:3)란 존재 말살의 뜻을 내포한 '멸절'(滅絶, obliteration, annihilation, destruction of personality)이 아니라 하나님과 영원히 단절되는 '분리'(分離, eternal separation)를 의미한다(눅12:4,5⇔마18:8,25:41,46;막9:48;계14:10,11,21:8).
이 같은 사실은 '아폴루미'의 명사형 '아폴레이아'(destruction, ruin, waste, perdition, devastation, 마7:13;요17:12;빌3:19;살후2:3;딤전6:9;계17:8,11)에서 더욱 명백해진다. '아폴레이아'의 동의어인 히브리어 '아바드'는 현세에서 하나님께 죄를 범한 사람들에게 가해지는 심판으로서의 육체적 죽음을 종종 나타내지만(신7:24, '殄滅'; 잠28:28, '滅亡'; 사60:12, '破滅'), '아바드'의 파생어 '아바돈'과 연계하여 죄로 인한 영원한 형벌의 개념도 내포하고 있다['아바돈'(욥26:6, '멸망의 웅덩이', 28:22, '멸망'; 잠15:11, 27:20, '幽冥', the place of destruction, abyss)은 하나님이 벌주시는 장소(God's place of punishment)라는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구약 사상에서 발전한 헬라어 '아폴레이아'는 좀더 구체적으로 하나님을 반역하는 악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의 결과로서 가해지는 '영원한 형벌'(eternal punishment, 永罰, 마25:46), '영원한 저주'(eternal damnation)를 의미한다(살후1:8,9⇔롬9:22). 사실 악인들에게 임할 가장 소름끼치는 형벌은 육체적 죽음이 아니라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아 하나님의 형상을 완전히 상실한 채 영원히 사는 것이다(눅9:24,25, '자기 목숨을 잃는다' 혹은 '자기를 잃는다'는 것은 인간 존 존재의 상실 즉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하는 것 지칭).
이것은 결국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에서 제외되는 것을 의미한다(계22:19). 따라서 성경적 '영생'의 개념은 하나님과 교제하며 영원히 사는 것을 의미하며(요17:3), 성경적 '멸망'의 개념은 하나님과 단절되어 영원히 사는 것을 의미한다(요10:28).
②헬라적 영혼 불멸 사상-인간의 영혼은 변하지도 소멸하지도 않는 신적 속성을 지녔다고 주장하는 것이 '영원 불멸설'이다. 이것은 죽음을 생명의 단절로 보지 않고, 영원한 생명의 전이로 보는 가장 보편적인 사상이다. 영혼 불멸설은 지구 위에 있는 거의 모든 종교들이 지지하는 공통된 사상이다. 이처럼 '영혼은 불멸하다'란 명제가 동서양과 시대를 막론하여 인류 전체에 보편적인 개념으로 자리잡힌 이유는 교육 과정을 통해서가 아니라 인간 본능을 통해서이다.
성경은 죽음을 인생의 순리로 보지 않고 죄의 결과라고 가르친다(시90:3-12;롬5:12,6:23;고전15:55,56;히2:14;계21:4). 따라서 죽음은 인간에게 낯설고 어색한 경험(unnatural consequence)이기 때문에 주검을 직면한 자연적 인간은 걷잡을 수 없는 허무를 느낀다(전3:19,21,5:15- 17).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 경륜에서 하나님의 영원한 동반자로 설정되어 있다(마22:31,32). 따라서 모든 인간은 영원한 존재이기 때문에 영혼 불멸 사상은 인간에게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영혼 불멸설'이 하나님을 전제로 이해되지 않고, 인간 자신에 기초하여 이해가 시도되었다는 데 있다. 그래서 인간 중심적인 영혼 불멸설은 심하게 왜곡되어 있다. 영혼 불멸 사상의 체계를 세운 최초의 인물은 플라톤(Plato, B.C. 429-347)이다. 그는 영혼과 육체를 별개의 것으로 해석하는 이원론적 인간학을 가르쳤다. 곧 정신적인 요소로 구성되어있는 영혼은 '신성'(神性)을 지녔기 때문에 불멸하지만, 물질적 요소로 구성되어 있는 육체는 '수성'(獸性)을 지녔기 때문에 사멸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를 근거로 그는 세 가지 이론을 정립하였다. 첫째, '윤회설'(輪回說)이다. 플라톤은 인간의 영혼이 순환운동 혹은 원운동을 한다고 생각했다(靈魂 循環說). 잠자는 자들이 깨어나고 깨어있는 자들이 잠자는 것처럼, 살아있는 자들이 죽고 죽은 자들이 다시 새로운 육체와 결합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영속적 순환운동이 가능한 것은 영혼이 불멸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둘째, '회상설'(回想說)이다. 플라톤은 우리가 지금 무엇을 회상할 수 있는 것은 태어나기 전 피안의 세계에서 알고 있던 것을 회상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가르친다(靈魂 先在說). 셋째, '귀의설'(歸依說)이다. 죽음은 육체의 감옥으로부터 영혼이 분리하여 해방되는 것인데, 이것은 신적 영역으로의 귀의이기 때문에 영혼의 구원을 완성한다는 것이다(靈魂 救援說). 이 세 가지 이론은 마귀로부터 온 그럴듯한 거짓말이기 때문에 우리들이 미혹 당하지 않도록 각별히 경계해야 한다.
(2)영혼 멸절설
'영혼 멸절설'이란 사망 시에 육체는 물론 영혼까지 죽어 완전히 무존재의(nonexistent) 상태가 된다는 이론으로, '전적 죽음'(total death) 혹은 '영혼 소멸'(soul-extinction)이라고도 한다. 이러한 주장을 펴는 대표자들은 안식교·여호와 증인·바르트(K. Barth, 1886-1968)·알트하우스(P. Althaus, 1888-1966)·쿨만(O. Cullmann, 1902-?)·틸리케(H. Thielicke, 1908-?) 등이다.
이들은 '영혼'(soul)이란 용어와 '사람'(person)이란 용어를 동의어로 취급한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몸과 영혼의 통일체 혹은 단일체이기 때문에 영혼이 육체로부터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존속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영혼의 불멸'을 믿지 않고 마지막 날에 있을 '육체의 부활'에 모든 소망을 걸며, 부활 때에 육체는 물론 영혼까지 부활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불신자들은 소멸하고(惡人燒滅), 신자들은 부활 시에 영생을 얻는 '조건적 불멸'(Conditional Immortality)을 이들은 주장한다.
이러면 이런 비성경적인 교리가 어떻게 해서 창출이 되었을까? 그것은 성경 원어에 대해 잘못 적용하였기 때문이다. 안식교는 에스겔 18:4에 "범죄 하는 그 영혼이 죽으리라"와 마태복음 10:28에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에 입각하여, 전자의 '영혼'('네페쉬', soul)과 후자의 '영혼'(soul, 프수케)은 죽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전자의 '네페쉬'는 영혼 그 자체보다 '생명의 호흡'(살아 호흡하는 생명체, 곧 살아있는 목숨)을 의미하여, '범죄 하는 그 사람의 목숨을 거두리라'로 해석해야 한다. 그러나 후자의 '프수케'는 몸과 대비되는 영혼을 의미하여, '영혼을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가 있는 자를 두려워하라'(눅12:4,5)로 해석해야 한다.
또한 안식교는 전도서 12:7에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신(루아흐)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구절과 시편 146:4에 "그 호흡(루아흐)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로다"의 구절을 비교하여, '루아흐'는 전자의 '신'(神 혹은 靈)보다 후자의 '호흡'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주장한다[안식교는 히브리어 '루아흐'의 헬라어 '프뉴마'(靈, 마27:50;행7:59) 역시 생기·호흡·육체의 생명 자체를 뜻하는 말로 변개(變改)시켰다]. 그래서 안식교는 육체에 숨이 끊어질 때 영혼도 함께 소멸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루아흐'라는 단어는 문맥에 따라 '영'(창6:3;욥4:15,10:12;사57:16;겔18:31; 욥32:8,18, '心靈'; 사26:9, '靈魂'; 슥4:6, '神'), '마음'(창26:35,41:8;삼상1:15;왕상21:5;대하21:16;욥20:3;시32:2;잠14:29;사7:2;슥6:8; 삿15:19, '정신'; 전3:21, '혼'), '호흡'(욥7:7,19:17;전3:19;사33:11; 창6:17,22, '氣息'; 욥27:3, '氣運', 혹은 '숨결'; 욥9:18, '숨'; 겔37:5, '生氣', 겔37:5; 민16:22, '生命'), '바람'(창8:1;왕상18:45;욥30:22;시11:6;전2:26)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할 수 있음을 안식교는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3)영혼 수면설
오랫동안 상당한 인기를 끌었던 한가지 견해는 '영혼의 잠'(Soul Sleep)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이다. 이는 영혼이 죽음과 부활 사이의 긴 기간동안 무의식 상태로 잠들어 있다는 사상이다. 16세기의 재세례파(Anabaptists)와 소시니안들(Socinians, 16세기 합리주의자들로 삼위일체 교리와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은 이 사상을 강력히 지지하였다. 이들이 중간상태를 영혼의 잠으로 보는 것은 성경이 '육체적 죽음'을 잠으로 묘사했기 때문이다(신31:16;삼하7:12;왕상1:21,14:20;왕하8:24;대하9:31;막5:39-42;행13:36;고전15:6,18,20,51;살전4:13-15;벧후3:4).
분명히 성경은 '잠'을 육체적 죽음을 묘사할 때 자주 사용하였다(요11:11-14). 하지만 성경은 육체적 죽음 이후의 상태를 잠으로 표현하고 있지는 않다. 구속경륜의 점진적인 계시를 따라 구약성경에서는 약간 흐리게(창37:35;삼상28:8-25;삼하12:23;욥19:26), 신약성경에서는 매우 뚜렷하게 사후의 의식 상태를 기술하고 있다(눅16:19-31). 요한계시록 6:9,10에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어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라고 하였다.
본문의 '죽임 당한 영혼들'은 스데반처럼 죽임 당한 순교자들을 의미하는데 이들은 모두 뚜렷한 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사도행전 7:59,60에서 '잔다'는 표현은 육체적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지 사후의 무의식 상태까지를 포괄하는 개념이 아니다. 예수님 역시 육체적 죽음 이후에 '영'으로 음부에 내려가시지 않았는가?(눅23:46⇒벧전3:19, 'in his spiritual existence he went and preached to the imprisoned spirits', TEV譯)
그러면 왜 성경은 '육체적 죽음'을 '잠'으로 묘사했을까?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면 '육체적 죽음'은 인생의 '끝장'이 아니라 부활을 향한 '과정'이기 때문이다(단12:2;행24:15). 사실 육체적 죽음은 커튼 이쪽에서 저쪽으로 옮겨가는 동작과 같이 육체와 분리된 영혼이 영계로 옮겨가는 스릴 넘치는 체험이다[창35:18, '혼이 떠나려'에서 '떠나다'(뻬체트)의 원형 '야차'는 군인이 전쟁터로 '나가다'(삼상8:20) 혹은 물이 '흐르다'(신8:7) 등으로 번역된다. 이는 사라져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위치를 옮기는 경우에 쓰이는 단어이다; 마27:50, '영혼이 떠나시다'에서 '떠나시다'(아페켄)의 기본형 '아피에미'(to send off, let go, release)는 분리·이탈을 나타내는 전치사 '아포'(away from, out of)와 '보내다'의 의미를 지닌 '히에미'(to send)의 합성어이다.
예수님은 자발적 의지로 자신의 영혼을 음부로 떠나보냈다; 행5:5,10;빌1:23;딤후4:6⇔약2:26]. 누에가 고치의 과정을 거쳐 나비가 될 때, 누에의 정체성이 상실되지 않고 변화를 일으킨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육체'가 사후 '영체'의 과정을 거쳐 '부활체'가 될 때, 인간의 정체성이 상실되지 않은 채 변화를 일으킨다('Life and death, according to Scripture, are not to be thought of as existence and nonexistence, but as two different states of existence'. Louis Berkhof, Systematic Theology, 1953, p.668; 'Death is simply a transition to a different states of existence; it is not, as some tend to think, extinction'. M. J. Erickson, Christian Theology, 1985, p.1169).
그러므로 성경은 사후의 삶과 부활에 대한 믿음에 근거하여 '육체적 죽음'(physical death)을 '잠'으로 묘사하는 관용적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육체적 생명'(physical life)은 지녔지만 '영적 생명' (spiritual life) 없이 삶을 살아가는 사람의 상태를 '사망'(영적 죽음, spiritual death)으로(엡2:1,4:18⇔눅15:24,32;롬11:15;골2:13;계3:1), 그리고 악의 부활로 되살아났지만 영적 생명 없이 삶을 지옥에서 보낼 사람의 상태를 '둘째 사망'(영원한 죽음, eternal death)으로 성경은 묘사하고 있다(계2:11,20:6,14,21:8).
(4)영혼 대기설
개신교 신학에서 중간상태에 관해 정통적 교리로 널리 인정받는 사상은 '영혼 대기설'이다. 이 사상의 특징은 의인들에 대한 '보상'(상급)과 악인들에 대한 '심판'(형벌)이 종말의 끝 날까지 '유보'(留保, 혹은 保留)된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의인들은 '천상낙원'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안식 가운데 대기하고 있다가(빌1:23;계6:11,14:13) 그리스도의 지상 재림 때에 부활(생명의 부활)하여 '하나님의 심판대'(롬14:10-12, 혹은 '그리스도의 심판대', 고후5:10)에서 심판을 받은 후 하늘의 상급을 수여 받게 되며(마16:27;눅14:14;고전4:5⇒고전9:25;딤후4:8;약1:12;벧전5:4;계2:10⇔살전2:19), 악인들은 '음부'['형벌의 기대소'(the waiting place of torment), Irving L. Jensen]에서 고통 가운데 대기하고 있다가 천년왕국이 끝날 때 부활(심판의 부활)하여 '흰 보좌 심판대'(요12:48⇒계20:11-15)에서 심판을 받은 후 영원한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이다(히10:27;벧후2:9,3:7).
이 교리는 원론적으로 타당하다(마12:36,37;행10:42,17:31,24:25;딤후4:1;히9:27;벧전4:5). 그러나 '낙원'(고후12:4)과 '새 예루살렘'(계21:1,2,10,11), '음부'(눅16:23)와 '지옥'(마5:29,30;막9:43,45,47)의 개념 사이에는 미묘한 뉘앙스가 존재한다. '천상낙원'은 의인들이 입주(入住)하면서 현재 건설되어 가다가 천년왕국 끝에 완성이 되면 '새 예루살렘'으로 명명될 것이며(요14:2,3), '음부'(하데스)는 악인들이 입주하면서 현재 확장되어 가다가 천년왕국 끝에 완성될 '지옥'(게헨나)에 편입될 것이다(계20:14).
따라서 '천상낙원'과 '새 예루살렘', '음부'와 '지옥'은 용어상 차이는 있지만, 본질상 동일한 장소이다. 즉 「'천상낙원'에서 '새 예루살렘'으로, '음부'에서 '지옥'으로」라는 표현은 '이동'이 아니라 '완성'의 의미를 함축한다['새 예루살렘'이 들어서는 '새 하늘과 새 땅'은 현재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이 들어서 있는 '시온 산'과 동일한 곳이다, 히12:22;계14:1⇔왕하19:21;대상11:5-9]. 차이가 있다면 '새 예루살렘'과 '지옥'은 부활체를 입고 들어가는 영원한 세계라는 것이다(마5:29,30,10:28,18:8,9;막9:43,45,47).
이런 차이를 제외하고는 '(천상?)낙원'과 '새 예루살렘'의 상태(빌1:23;살전4:17⇔계21:3), '음부'와 '지옥'의 상태는 동일하다(눅16:23,24⇔계14:10,11). 따라서 의인이든 악인이든 영혼들에 대한 '일반적 심판'은 중간상태에서 벌써 이루어지며,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지상 재림 때, 불신자들은 흰 보좌 심판 때에 '최종적 심판'이 있을 것이다. 음부에 떨어진 부자는 이미 지옥 형벌의 고통 가운데 있었으며(눅16:23-24), 천상낙원에 들어간 성도들은 이미 영생복락을 누리고 있다(고후12:4).
(5)영혼 정화설
개신교는 종교개혁과 더불어 교부시대부터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성화'(聖化) 개념을 포기하고 '칭의'(稱義) 개념에만 집착하였다. 그 결과 개혁주의 신학은 '사후 연단을 통한 영혼 정화'를 배격하고, 대신 '죽음'이 완전 성화에 이르게 하는 '연단의 절정'(the culmination of the chastisements)이라고 주장한다(Louis Berkhof, Systematic Theology, pp.670,71).
위클리프(John Wycliffe, 1324-1384)와 후스(John Huss, 1339-1415) 그리고 쯔빙글리(Ulrich Zwingli, 1484-1531)를 기점으로 하여 개신교가 진저리치며 '사후 영혼 정화설'을 혐오하게 된 근본 원인은 로마카톨릭이 성경과 체험을 근거로 한 교부들의 '정화의 불'(the purificatory fire) 사상을 스콜라철학과 기복주의에 근거한 '연옥의 불'(the purgatorial fire) 사상으로 변질시켰기 때문이다.
그런데 교회사적으로 '정화의 불' 사상은 그 뿌리가 깊다. 클레멘트(Clement of Alexandria, 150?-216)·오리겐(Origen, 185-254)·어거스틴(Augustine, 354-430)·그레고리(Gregory, 540-604) 등이 성경에 입각하여 '정화의 불' 사상을 발전시켰다. 그런데 스콜라철학(물질주의적 개념을 강조하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근거한 사상)에 입각하여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는 '정화의 불'을 '연옥의 불' 개념으로 변질시켰다.
'정화의 불'은 하나님이 영혼의 불순물을 제거하기 위한 '교육적·교정적 징계'(purification)를 강조하는 반면, '연옥의 불'은 인간이 영혼의 죄 값을 치르기 위한 '형벌적·배상적 징계'(punishment)를 강조한다. 여기서 로마카톨릭이 주장하는 '연옥'(煉獄, Purgatory, '정화의 장소')이 문제가 되는 것은 '연옥'이라는 용어 자체 보다 '연옥' 교리의 내용에 있다.
연옥 교리는 사후의 정화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의해 진행되지 않고, 살아있는 사람들이 죽은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께 바치는 기도와 헌물의 업적을 통하여 가능하다고 가르친다. 이것은 성경이 말하는 정화의 개념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인본주의 사상이다[사4:3,4, 하나님은 의인들을 정화하기 위한 '심판의 영'(the Spirit of judgment)과 '소멸의 영'(the Spirit of burning), Delitzsch; 말3:2,3].
또 다른 문제는 성경에서 '사후 정화의 불' 개념에 대한 구체적인 예를 우리가 많이 발견할 수 없다는 데 있다. 이것은 성경이 '중간상태'에 대하여 거의 침묵을 지키고 있는 것과 맥을 같이 한다. 하지만 사후에 '정화의 불'이 존재한다는 믿음은 이 땅에서 연단과정을 모두 마치지 못하여 완전 성화에 도달하지 못한 성도들이 사후에 잔여 연단과정을 거치면서 온전히 정화되어야 한다는 지극히 당연한 성경적 논리에서 발로한 것이다(고전3:12-15, 본문의 '불'은 죄를 씻기 위한 '정화의 불'이 아니라 상급을 결정하기 위한 '판단의 불'⇒고전4:3-5;고후5:10;약5:9).
2)음부에 대한 성경적 견해
히브리어와 헬라어 원어 셩경에 기록된 '음부'[陰府, 히브리어로 '스올'(sheol, 쉐올), 헬라어로 '하데스']는 신학자들과 성경번역가들이 혼동을 일으키는 난해한 용어이다. 그 이유는 음부에 대한 개념 정의가 신학적으로 어렵기 때문이다(사도신경과 아다나시우스 신경의 '하데스'는 영어에서 'He descended into hell'로 잘못 번역되었으며, 사도신경은 한국어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음부'의 개념을 이해하지 못했던 신학자들에 의해 이 부분이 축출 당함).
그래서 17세기 영어 번역인 흠정역(1611년 판 KJV譯)에는 구약성경에 65번 쓰여진 '스올'을 역자의 주관에 따라 31번 '무덤'(grave, 창37:35,42:38,44:29,31;삼상2:6;왕상2:6,9;욥7:9,14:13,17:13,21:13,24:19;시6:5,30:3,31:17,49:14-'2회',15,88:3,89:48,141:7;잠1:12,30:16;전9:10;아8:6;사14:11,38:10,18;겔31:15,32:21;호13:14-'2회')으로, 31번 '지옥'(hell, 신32:22;삼하22:6;욥11:8,26:6,9:17, 16:10,18:5;시55:15,86:13,116:3,139:8;잠5:5,7:27,9:18,15:11,24,23:14,27:20;사5:14,14:9,15, 28:15,18,57:9;겔31:16,17,32:21,27;암9:2;욘2:2;합2:5)으로, 3번 '구덩이'(pit, 민16:30,33;욥17:16)로 번역하여 혼란을 가중시켰다.
그리고 또한 흠정역은 신약성경에 11번 쓰여진 '하데스'를 10번 '지옥'(마11:23,16:18;눅10:15,16:23;행2:27,31;계1:18,6:8, 20:13,14)으로, 1번 '무덤'(고전15:55)으로 번역하였다. 그런데 '스올'이나 '하데스'를 '무덤'이나 '지옥' 혹은 '구덩이'로 번역해야 할 아무런 신학적 근거도 없이 역자의 선입관이 만들어낸 무서운 착각이다.
그래서 20세기에 들어와 '음부'에 대해 더 많은 신학적 연구가 이루어지면서 이러한 번역들이 문맥과 맞지 않게 되자, 미국표준역본(ASV)과 개정표준역본(RSV)은 원어의 음역을 따서 '스올'(Sheol)과 '하데스'(Hades)로 번역하였다. 이런 측면에서 한글 개역성경이 '스올'과 '하데스'를 '무덤'이나 '지옥'으로 번역하지 않고 '음부'라는 적절한 용어를 창출해 낸 것은 역자의 영적 분별력이 걸출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과연 '음부'는 신학적으로 풀기 어려운 난제인가? 필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성경에서 '중간상태'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를 거의 찾아보기 힘든 데 비하여, 음부는 76번이나 언급될 정도로 신구약 성경에 그 성격과 특성이 명백하게 서술되어 있다. 다만 '음부'에 대해 우리가 정확히 해석하려면, 몇 가지 원칙을 따라야 한다.
첫째, '음부'는 구속경륜에 근거하여 '점진적 계시'에 따라 하나님이 드러내신 범주 안에서 해석해야 한다.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 부활 이전의 낙원 개념'(눅23:43)과 '예수 그리스도 부활 이후의 낙원 개념'(고후12:4)이 전혀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구분 없이 '음부'를 획일적으로 해석할 때 큰 오류를 범하게 된다.
둘째, '음부'는 히브리어나 헬라어에 나타난 분명한 원어의 뜻을 무시하고 사사로이 풀어서는 안 된다. 해석자의 주관적 선입견과 신학적 입장을 고집하면, '음부' 본래의 의미에서 벗어나 큰 오류를 범하게 된다. 셋째, '음부'는 그와 밀접한 관계를 지닌 단어들과 혼동하여 동의어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 성경에는 무덤을 지칭하는 고유한 단어들, 즉 히브리어로 '케베르'(grave, 민19:16;삼하3:32, 구약성경에 67번 사용), 헬라어로 '므네메이온'(tomb, 마8:28;요20:6, 신약성경에 41번 사용)이 있다.
그리고 지옥을 지칭하는 고유한 단어들, 즉 구약에서는 '유명'(幽冥, Abaddon, 아바돈, 잠15:11,27:20, ' 淪의 자리'; 욥26:6, '멸망의 웅덩이', 욥28:22,31:12;시88:11, '멸망', destruction), 신약에서는 '지옥'(hell, 게엔나, 마5:22,29,30,10:28, 18:9,23:15,33;막9:43,45,47;눅12:5;약3:6)·'불못'(마3:12, '꺼지지 않는 불'-막9:43⇔사66:24, '지옥 꺼지지 않는 불', 마13:42,50, '풀무불', 18:8, '영원한 불', 18:9, '지옥 불', 25:41, '영영한 불', 계14:10, '불과 유황', 19:20, '유황 불 붙는 못', 20:10, '불과 유황 못', 14,15절, '불못')·타타루스(Tartarus, 탈타로스, the deepest abyss, 벧후2:4)·무저갱(無底坑, 아붓소스, the bottomless pit, the abyss, 눅8:31;롬10:7;계9:1,2,11,11:7,17:8,20:1,3)등이 있다.
이러한 몇 가지 기본 원칙을 해석자가 성실히 준수한다면, '음부'의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1)음부 및 관련 용어 정의
성경을 연구해 보면 사후의 세계를 지칭하는 단어로 '스올'(혹은 하데스) 뿐 아니라 '유명'(아바돈)·'무저갱'(아붓소스)·타타루스·지옥(게헨나) 등이 나타난다. 이들 용어는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지만 다소 차이를 보인다.
'스올'은 신구약 성경 전체에서 죽은 자의 처소를 의미하며(예수 그리스도 부활 이전), 구약의 '유명'은 신약의 '무저갱'과 동일한 장소로서(계9:1,2,11) 타락한 천사들을 결박해 놓은 감옥 곧 '타타루스'라고도 부른다(벧후2:4⇔유1:6). 그리고 최후의 심판이 이루어진 후 악인들의 감옥인 '스올'(예수 그리스도 부활 이후)과 타락한 천사들의 감옥인 '무저갱'은 결국 영원한 형벌의 장소인 '지옥'(게헨나)에 편입될 것이다(마25:41⇔계20:10,15).
①음부-신구약성경에서 영혼이 사멸한다거나 수면 상태에 있다는 개념을 어디에서도 우리는 찾아낼 수 없다. 오히려 죽어서 육체를 떠난 영혼들이 의식을 지닌 채 살아있다고 가르친다. 이러한 사실을 분명히 제시하는 것은 신약성경에서 '하데스'로 번역된 구약성경의 '스올'이라는 단어이다.
'스올'은 '죽은 자의 거처'(the realm of the death, the afterlife) 혹은 '하계'(下界, the underworld),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여 '죽어서 육체를 떠난 영혼들이 거처하는 장소'(the abode of souls loosed from their bodies)를 의미한다(창37:35). 따라서 성경 번역자들이 '스올'을 '무덤'이나 '지옥' 혹은 '구덩이'로 번역한 것은 잘못이며, 더욱이 '무저갱'과 혼동해서도 안 된다(롬10:7).
②유명-잠언 15:11에 "음부와 유명도 여호와의 앞에 드러나거든 하물며 인생의 마음이리요"라고 기록되어 있는데(잠27:20), '유명'(幽冥)은 '음부'(陰府)와 구분되는 사후 영역이다. 히브리어로 '유명'(아바돈, abaddon)은 '파멸의 장소'(the place of destruction, 혹은 '멸망의 웅덩이', 욥26:6)나 '파멸'(ruin)을 의미한다(욥28:22, 31:12;시88:11). 요한계시록 9:11에는 "저희에게 임금이 있으니 무저갱의 사자라, 히브리 음으로 이름은 아바돈이요 헬라 음으로 이름은 아볼루온이더라"고 하였다.
여기서 아바돈은 '무저갱을 다스리는 사자'(the ruling angel of the Abyss), 아볼루온은 문자적으로 '파괴자'(the destroyer, Exterminator)를 의미한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하여 구약성경에 기록된 '유명'의 의미를 추적해 보면, 구약시대에도 타락한 천사들을 가두어 놓는 어두운 감옥 곧 무저갱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③무저갱-신약성경에 8번 나타나는 단어인 '무저갱'(아붓소스)은 '밑 없는 깊은 구덩이'(the bottomless pit) 혹은 '심연'(Abyss, unfathomable depth)이란 의미를 지닌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이 악령들에게 최후의 심판을 시행하여 지옥에 던지기 전에 악령들을 감금해 놓는 감옥으로 표현하고 있다(the place of imprisonment for evil spirits, 계19:20,20:10). 특히 이곳은 절망의 나락처럼 탈출구가 없어 공포를 자아내는 고통스러운 형벌의 장소임을 또한 나타내고 있다(눅8:30,31).
여기에 대한 좀더 구체적인 설명이 베드로후서 2:4과 유다서 1:6에 기록되어 있다. 먼저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벧후2:4⇔사24:21,22;에녹서10:4,54:4,5⇔에녹서10:6,16:1,22:4, 10,11,103:8)에서 '지옥'(타타로스, the deepest abyss)은 무저갱을 의미한다[호머(Hormer, B.C. 9세기 무렵의 그리스 최고 서사시인)의 〈일리아드〉(Illiad 8:13)에는 타타루스가 음부보다 훨씬 더 깊은 곳에 있는 무저갱으로 묘사되고 있는데(Homer described Tartarus as 'a black hole, a bottomless pit'), 성경 역시 이를 지지하고 있다.
한글 개역성경 롬10:6,7에서 가장 높은 곳 '하늘'과 대조를 이루는 가장 낮은 곳 '아붓손'의 기본형 '아붓소스'는 '음부'가 아닌 '무저갱'으로 번역했어야 한다; 시135:6(70인 역은 시134:6, '모든 깊은 데서', in all deeps, '아붓소이스)]. 그리고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 날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유1:6)에서 '흑암'(조포스, darkness, '어두운 구덩이', '흑암의 쇠사슬', '어두움의 결박'으로 번역할 수도 있다, Cranfield, Lenski)은 역시 무저갱을 의미한다[욥기 41:32(바닷물, the deep, 70인 역은 욥41:24)은 '무저갱'과 '타타루스'를 동의어로 취급하고 있다. '톤 데 타르타론 테스 아붓손', 이를 직역하면 '타타루스 곧 무저갱'].
***하나님이 반역한 천사들을 감금해 놓으신 이유
결박되어 있는 천사들은 루시퍼가 하나님을 반역할 때 함께 모반에 동참하였던 천사들로 보인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천사들 가운데 ⅓이 루시퍼의 편에 서서 타락했다고 전제할 때(계12:4), 이들 중에 괴력을 지닌 정사와 권세 급 천사들 뿐 아니라 일반 천사들도 상당수가 무저갱에 갇혀 있는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이렇듯 하나님이 이들 천사를 감금해 놓은 이유는 만일 이들 모두가 일시에 인간 세상으로 내려와 인간들을 미혹하면 짧은 기간 내에 인류와 그 문명이 타락하여 하나님의 구속 섭리가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한 채 자멸해 버릴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의 인격 시험 도구로 타락한 천사들 중 일부를 풀어 세상에서 활동하게 허락하시고 나머지는 무저갱에 가두어 놓았다가 7년 대환난 때에 이들을 무저갱으로부터 풀어놓아 불신자들을 미혹하며 고통 가운데 악으로 급속히 익게 만드는 도구로 하나님은 사용하실 것이다(살후2:6,7⇒계9:1-11).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무저갱에 사단을 천년 간 감금해 놓았다가 천년왕국 끝에 다시 풀어 인간의 악한 본심을 드러내기 위한 미혹의 도구로 사용하실 것이다(계20:1-3,7-10).
***사후 악한 인간 영들도 '무저갱'에 들어갈 수 있는가
그런데 베드로후서 2:17과 유다서 1:13에는 거짓 교사들에게도 베드로후서 2:4과 유다서 1:6에 기록된 타락한 천사들에게처럼 동일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음을 시사하지만, 본문의 '캄캄한 어두움'(호 조포스 투 스코투스, 'blackest darkness', NLT譯; 'the mist of darkness', KJV譯)과 영원히 예비 된 '캄캄한 흑암'(호 조포스 투 스코투스)은 지옥의 대기소인 무저갱이라기 보다 영원한 형벌의 장소인 지옥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해야 더 정확하다.
왜냐하면 지옥이란 형벌의 장소라는 의미를 지닌 '불구덩이'만을 나타내지 않고(마13:42,50), 생명의 빛인 하나님과 그 은혜로부터 영원히 단절된 장소인 '어두운 곳'을 나타내기도 하기 때문이다(마8:12,22:13,25:30;눅13:28). 이 땅에 사는 동안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나지 못한 불신자들의 사악한 영들은 현재 '음부'에 갇혀있다.
④지옥-'게헨나'(지옥)는 원래 예루살렘 성밖 남서쪽에 있는 계곡인 '힌놈의 골짜기'(Hinnom Valley, 게 힌놈)에서 따온 것이다(수15:8,18:16). '힌놈의 골짜기'는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로도 불린다. 솔로몬은 이곳에 몰록을 위한 산당을 지었으며(왕상11:7), 아하스 왕 시대에는 몰록과 바알을 위하여 자녀를 불태워 바치는 제사도 드렸다(왕하16:3;대하28:3). 또 므낫세가 자기 자녀들을 희생재물로 바쳤던 장소이기도 하다(대하33:6⇒렘32:26-35). 그런데 요시야 왕은 모든 우상을 척결하고 이곳을 부정한 곳으로 규정하였다(왕하23:1-25; 힌놈의 골짜기가 쓰레기장이었고 부정한 시체들을 태우는 火葬爐가 있는 곳이었다고 흔히 말하지만, 확실한 고고학적 근거는 없다).
이처럼 구약성경에서 '힌놈의 골짜기'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등을 돌린 배교의 표징이요, 배교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과 심판을 나타내는 단어가 되었다(렘7:31,32,19:5,6). B.C. 1세기경부터 '힌놈의 골짜기'라는 말이 은유적으로 사용되면서 극심한 고통의 장소라는 개념으로 발전하였다. 한편 신약성경에서 '지옥'을 '게엔나'라 칭한 것은 히브리어 '게 힌놈'을 헬라식으로 발음한 것이다. 따라서 신약성경의 '지옥'(게헨나, Gehenna)은 구약성경의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아 하나님이 반역하는 무리들을 심판하실 '영원한 형벌의 장소'(the eternal place of punishment, 마25:41)를 의미한다.
(2)음부의 변천 과정
우리가 이미 전술한 바와 같이 '음부'는 지옥과 구분되는 '죽은 자의 처소'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이전'과 '예수 그리스도 부활 이후'의 음부 개념이 전혀 다르다. 물론 '음부'도 '악인구역'과 '의인구역'으로 구분되지만, '예수 그리스도 부활 이전'의 죽은 자들은 모두 음부로 내려갔다. 한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더불어 음부의 '의인구역'에 있던 구약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천상낙원으로 옮겨졌다. 따라서 현재 악인들이 죽으면 음부에 내려가며, 의인들이 죽으면 천상낙원에 들어가게 된다.
그러면 왜 그리스도 부활 이전의 성도들은 '천상낙원'(註 필자는 새예루살렘이 완성되기 전의 천국을 '천상낙원'이라 부른다)에 들어갈 수 없었을까? 죄를 용납하실 수 없는 하나님의 거룩한 속성 때문이다(왕상8:46;욥15:14-16,25:4-6;전9:20;사64:6⇒삼상6:20⇒히9:22).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을 통하여 예수님의 피가 천상의 속죄소에 뿌려져야 인간이 하나님의 보좌에 접근할 수 있는 것이다(히9:11-14,23,24). 이런 연유로 구약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이 완성될 때까지 음부의 의인구역에서 기다려야만 했다(히9:28).
①점진적인 계시를 따라 발전하는 음부의 개념-구약성경 초기에 나오는 음부는 '죽은 자의 처소'로서 의인과 악인 모두가 죽으면 가야하는 동일한 장소로 묘사되었으며, 악인들에 대한 형벌과 고통의 개념을 나타내고 있지 않았다(창25:8,17,35:29,49:29,33⇔왕상11:43,14:20,31,15:8,,24,16:6,28,22:40⇔삼상28:8-25⇔창37:35;시9:17, 死後世界認識).
그런데 B.C. 3세기경부터 유대묵시문학에 '사후 보응에 대한 믿음'(a belief in retribution after death)이 나타나면서, 의인들은 음부에서 낙원의 기쁨을 기다리며 생명수 샘물을 마시고 있는 동안 악인들은 최후의 심판을 기다리며 억류되어 있는 상태로 묘사되었다(4Ezra4:35,41,7:32,80,85,95, 死後報應信仰). 그 이후 부활과 영생에 대한 히브리적 사상이 발전하여 스올 혹은 하데스에 대한 개념에 지대한 변화를 가져왔는데, 하데스는 죽은 자의 일시적인 거주지(the temporary abode)로서 죽음과 부활 사이에 머무는 장소로 유대 묵시문학에 기술되어 있다(2Macc.6:23;1En.102:5, 103:7;2Bar23:4).
즉 죽은 의인들은 하데스에서 하나님의 보호아래 있다가 부활 때에 천국에 들어갈 것이며, 악인들은 음부에서 고통 중에 있다가 마지막 심판 이후 불못에 던져질 것이라는 개념이 지배적이었다(Pss.Sol,14:9-10,15:10,13;16:2). 이와 같이 하데스는 모든 죽은 사람들이 반드시 들어가는 곳으로서 의인을 위한 천국 및 악인을 위한 지옥과 뚜렷하게 구별되었다(復活永生思想).
그러다가 신약시대의 유대묵시문학에서 사악한 자들의 영원한 형벌의 개념이 발견된다. 이 때에 와서 하데스는 때때로 어두움의 장소일 뿐 아니라 형벌과 불의 장소로써 표현되었다(1En63:10, 惡人永罰槪念). 그리고 하데스 보다 좀 더 발전된 형태로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순교자 저스틴·이레니우스·터툴리안·노바티안·오리겐·닛사의 그레고리·암브로스 그리고 어거스틴 등이 음부의 교리를 정화의 불 개념으로 발전시켰다(淨化의 불 理解).
②예수 그리스도 부활 이전의 음부 상황-'부자와 거지 나사로 이야기'로 명명되는 누가복음 16:19-31은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기 이전 음부의 상황에 대하여 매우 중요한 자료를 우리에게 제공해 주고 있다. 본문에서 음부에 떨어진 부자는 극심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아브라함의 품'에서 안식하고 있는 나사로를 볼 수 있었다. 하지만, '큰 구렁'(카스마 메가, a great chasm, or barrier)이 사이에 놓여 있어 서로 왕래할 수 없었다.
우리는 본문에서 예수 그리스도 부활 이전의 음부 상황에 대해 몇 가지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첫째, 부자와 거지 나사로가 죽어서 간 곳은 동일한 음부였다(서로 상대방을 바라 볼 수 있었다, 23,24절). 둘째, 나사로가 들어간 '아브라함의 품'은 음부의 '의인구역'을 지칭하며, 부자가 들어간 '음부'는 음부의 '악인구역'을 지칭한다(서로 분리되어 교제할 수 없었다, 26절). 셋째, 나사로가 들어간 음부의 '의인구역'은 최종적 구원을 기다리며 쉬는 안식의 장소였다(나사로는 위로를 받고 있었다, 25절). 넷째, 부자가 들어간 음부의 '악인구역'은 지옥 형벌과 동일한 고통의 장소였다(부자는 뜨거운 불 속에서 고통 당하고 있었다, 24절).
구약성경은 음부의 상황에 대해 몇 가지 실마리를 제공해 준다: 첫째, 음부에 사는 영혼들은 일을 할 수 없다(전9:10). 둘째, 음부에 사는 의인들은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없다(시6:5,88:10-12;사38:18). 어쨌든 음부는 그곳이 의인구역이든 악인구역이든 무차별 무제한적으로 희생자들을 삼키기 때문에(욥3:1-19;겔32:18-32⇒잠27:20,30:15, 16;합2:5) 구원을 필요로 하는(시30:3,49:15,89:48⇒시16:10) 어둡고 혼돈된 영역(욥10:20-22;시143:3), 음산한 적막이 감도는 지역(시94:17,115:17)으로 묘사되고 있다(삼하22:6;시18:4,5,86:13,116:3;아8:6).
③영으로 음부에 내려가신 예수 그리스도-만일 예수 그리스도가 음부의 '의인구역'에 있는 영혼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이 땅에 와서 죽지 않으셨다면, 음부의 '의인구역'에 있던 구약성도들은 영원히 음부에 갇혀있을 수밖에 없는 절망적인 상황이었다(욥14:10-19). 더욱이 하나님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외에 어느 누구도 사망의 세력을 쥐고 있는 마귀와 음부의 속박을 깨고 그곳에서 의인들의 영혼을 건질 권세를 가진 자가 없었다(히2:14,15).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한 속죄사역은 살아있는 사람들 뿐 아니라 죽은 구약성도들에게도 절실한 것이었다. 만일 예수님이 초림하여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사망과 음부의 권세를 깨뜨리지 않았다면 오늘날 우리 모두는 음부라는 암울한 감옥에 끌려가야만 했을 것이다(계1:18). 그런데 하나님의 구속 경륜을 따라 아담과 믿음의 선조들에게 약속했던 구원의 시간이 도래하자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죽으셔서 '영'(靈)으로 즉시 음부의 '의인구역'으로 내려가셨다.
즉 예수님은 아담 이후 수천 년 동안 자신들을 '음부의 권세'로부터 구원해줄 메시아의 도래를 학수고대하던 구약성도들에게 내려가셨던 것이다. 누가복음 23:43에서 예수님이 회개하는 한편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약속했는데, 여기서 '낙원'(파라데이소스, Paradise)은 '천상낙원'[고후12:2-4, '셋째 하늘'('the highest heaven', Weymouth譯, 신10:14)과 '낙원'은 동일한 장소; 계2:7]이 아닌 음부의 '의인구역'(아브라함의 품)을 의미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바로 그날'('오늘', 세메론, 'this very day', TCNT譯; 마21:28;막14:30;눅13:33) 회개하는 강도의 영혼 역시 예수님처럼 음부의 '의인구역'으로 내려간 것이다. 음부의 '의인구역'(낙원)으로 가서 구약의 성도들에게 구원의 때가 도래했음을 알리고 '악인구역'에 있는 악인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온 우주 만물의 주관자요 심판자이심을 선포하셨다(벧전3:18-20).
<참고>'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셨다'는 말의 의미(벧전3:18-20) ▶"저가 또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셨느니라.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벧전3:19,20). 본문에서 '옥'(푸라케, prison)에 있는 영들에게 그리스도께서 전파하셨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예수님께서 죽어 영으로 음부의 '악인구역'에 내려가 노아의 홍수 때에 죽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여 그들에게 두 번째 구원의 기회를 제공하셨다는 의미일까? 이 전체 문맥 속에서 이 문장을 자세히 연구해 보면, 이 문장의 의미는 히브리서 9:27의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두 번째 기회가 없다)란 말씀과 모순되지 않는다.
본문에서 우리가 주목해야할 사실은 흠정역(KJV)에서 "전파했다"(preached)로 번역된 단어가 헬라어의 '복음을 전하다'(유앙겔리조 , 마11:5;행8:25;벧전1:12)가 아니라-만약 이 단어가 사용되었다면, 이 구절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후에 영으로 '하데스 악인구역'에 가셔서 구원받지 못한 영혼들에게 구원의 메시지를 전하셨다는 의미가 되었을 것이다-왕이나 권력자가 '승리의 메시지를 선포하다'(to proclaim a victory message, to announce, proclaim aloud, declare)를 의미하는 '케룻소'(창41:43;출32:5;마3:1;눅12:3;계5:2)이다. 그러므로 본문이 실제로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단지 그리스도께서 하데스에 있는 영들(의인과 악인구역 모두)에게 선포하셨다는 것이다('He made a proclamation to the imprisoned spirits', Wuest譯).
▶물론 '케룻소'의 단어에는 선포된 말씀에 긍정적으로 응답할 것을 기대하는 '초청'의 의미도 함축하고 있다(마4:23, '傳播';눅3:3,4:18,19,8:1, '頒布';행8:5,10:42, '傳道', 28:31;고전1:23). 이 경우는 '하데스의 의인구역' 안에 있었던 구약성도들에게 적용된다. '하데스 의인구역'에 선포하신 내용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을 통하여 인간의 죄 값이 모두 치러졌으니 믿음 안에서 죽은 구약의 모든 성도들을 하늘로 데려갈 준비가 완료되어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하늘에 올라갈 것이라는 기쁜 소식이다(이 사건은 엡4:8에서 실제로 일어났다).
그리고 '하데스 악인구역'에 선포하신 소식은 대홍수가 저들을 땅위에서 쓸어버리기 전에 안전한 방주로 피신해야 살수 있다고 전파했던 노아의 엄숙한 경고를 재확인 한 것이다. 베드로후서 2:5에서 노아는 "의의 전파자-불의한 자들을 향해 하나님의 권위로 하나님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전달하는 자"(케룩스, herald, public messenger, 傳達者·布告者, '전파하는 자', preacher, 딤전2:7;딤후1:11)로 묘사하고 있는데, 베드로전서 3:19와 같은 어근의 단어이지만 그 적용 용도가 전혀 다르다.
베드로후서 2:5에서 노아가 '의의 전파자'라는 개념은 그 당시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전한 것이요, 베드로전서 3:19에서 예수님이 음부의 '악인구역'에 갇힌 영들에게 전파하신 것은 심판자이심을 공적으로 선언한 것이다.
<참고>음부에 있는 영혼들의 구원(니고데모 19:1-20:1 발췌 요약) (음부의 의인구역에 있는 영혼들에게) 예수님이 그의 손을 펼치시며 말씀하셨다. "내게로 오라! 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고, 선악을 아는 나무의 열매를 먹어 정죄 받아 마귀와 죽음의 쇠사슬에 묶였던 나의 성도들이여! 이제 나의 십자가로 인하여 이 세상 임금인 사탄과 죽음은 정복되었다"(Then Jesus stretched forth his hand, and said, Come to me, all ye my saints, who were created in my image, who were condemned by the tree of forbidden fruit, and by the Devil and death; Live now by the wood of my cross; the Devil, the prince of this world, is overcome, and death is conquered).
그리고 예수님이 아담의 손을 잡으시며 "너에게 평강이 있기를…. 그리고 네 후손들에게도." 그러자 아담은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 떨리는 큰 목소리로 눈물을 흘리며 말하였다. "오, 예수님! 주님을 찬양합니다. 주께서 저를 붙드시며 저의 원수가 저로 인해 즐거워하지 못하도록 하셨습니다. 오, 주 나의 하나님! 제가 부르짖을 때 주께서 구원하셨나이다". 이때 주님께서 오른 손으로 아담을 붙드시고 음부에서 나오셨다. 그리고 구약의 모든 성도들이 그 뒤를 따랐다. 예수님께서 모든 성도들을 미가엘 천사장에게 맡겨 빛과 자비와 영광으로 가득 찬 천상낙원으로 인도하였다.
<참고>'자던 성도들의 몸이 많이 일어났다'는 말의 의미(마27:51-53) 마태복음 27:51∼53은 난해한 구절로 평가받는 구절이다: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예수의 부활 후에 저희가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본문을 푸는 열쇠는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에 있다.
먼저 '자던 성도'(many of the dead saints)란 누구를 지칭하는가? 혹자는 이들을 예수님 시대 이전의 의로운 유대인들 즉 족장·선지자·순교자들이었다고 가르친다(D. A. Hagner). 하지만 본문의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에서 '보이니라'(에네파니스데산,'were manifest', '…plainly appeared', Rotherham譯)의 기본형 '엠파니조'( to make known)는 다른 사람 앞에 자신의 모습을 보였다는 의미이다(요14:21). 그래서 사람들이 살아난 사람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인식했다는 말이다.
따라서 본문의 '자던 자'는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을 믿었던 성도들이라고 해석해야 한다. 이러한 필자의 확신은 '일어나되'(에게르데산, were raised)를 통하여 더욱 확고해 진다. '에게르데산'의 기본형 '에게이로'(wake up, arouse, rise)는 많은 경우에 '부활'을 의미하지만(마16:21,17:23;행10:40,13:30;롬4:25,8:34;고전6:14,15:4), 본문에서는 '회생'(回生)을 의미한다(마10:8,11:5;막5:41;눅7:14;요12:1). 왜냐하면 어느 누구도 예수님보다 먼저 부활할 수 없기 때문이다(고전15:20-24).
이 놀라운 사건의 순서를 원어성경에 근거하여 해석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운명하실 때 성서 휘장이 찢어짐과 동시에 땅이 진동하고 무덤의 입구를 막았던 돌들이 깨지면서 성도들의 몸이 무덤에서 일어났다. 그 즉시 살아난 성도들은 무덤에서 밖으로 나와 예수님이 부활하실 때까지 예루살렘 성밖에 머물렀다. 3일 후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 그러자 회생한 성도들이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 자신들이 살아난 것을 사람들에게 증거 하였다(개역성경에 ⇒ 의 순서로 번역한 것은 오류, NIV譯이 정확하게 번역).
하나님은 이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전달하시려는 것일까?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가 죽으심으로 사망의 세력이 완전히 정복당하고 예수님을 믿는 모든 성도들에게 장차 생명의 부활이 있음을 강력히 시사한다(왕하13:20,21).
<참고>'나를 만지지 말라!'는 말의 의미(요20:17)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말로 랍오니여 하니(이는 선생님이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요20:16,17). 본문의 '나를 만지지 말라'에서 '만지지'(합투, touch)란 현재 진행형이고 '메'(not)라는 부정어가 사용됐음으로 현재 이미 진행되고 있는 행위를 금지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합투'의 기본형 '합토'는 흠정역(KJV) 번역처럼 단순히 손을 대는 정도가 아니라 '강하게 비끄러매다'(fasten to), '붙잡고 늘어지다'(cling to, adhere to, 막5:27;요일5:18)란 매우 강한 의미를 지닌다('Be not detaining me', Rotherham譯). 즉 이 말은 마리아에게 부활된 예수님의 몸이 부정타니 손을 대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마태복음 28:9 "예수께서 저희를 만나 가라사대 평안하뇨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에서 '붙잡고'(에클라테산, seized hold of)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에 여인들이 신체적으로 접촉하는 것을 주님이 허락하셨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embraced his knees', Greber譯). '붙들고 늘어지지 말라'는 예수님 명령의 이유가 다음에 나온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요20:17). 본문에서 한글 개역성경은 '왜냐하면'이라는 뜻의 이유나 원인을 나타내는 '가르'(for)를 번역하지 않았다. 따라서 본문을 원문대로 다시 번역하면, '왜냐하면 내가 아직까지도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for I have not yet ascended to the Father', NASB譯)가 된다. 본문의 '올라가지'(아나베베카)는 완료형 동사로, 이미 아버지께로 올라갔어야 하는데 아직까지 올라가지 못하고 있는 상태를 가리킨다. 따라서 본문은 예수님이 곧 승천해야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부활하자마자 천상낙원으로 가서 자신의 피를 천국의 속죄소에 뿌려 속죄사역을 완성해야할 사명이 아직 남아 있으니 붙잡지 말고 놓아달라는 말씀이다(히9:11-14,23-26).
④ 예수 그리스도 부활 이후의 음부 상황-마침내 예수 그리스도는 속죄사역을 완성하신 후 수천 년 동안 음부의 의인구역에 갇혀있던 영혼들을 모두 데리고 천상낙원으로 입성하셨다. 에베소서 4:8∼10은 이것을 드라마틱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가 위(천상낙원)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아이크말로시아, '戰爭 捕虜', 'a group of captives', 'a multitude of Captives', Wilson譯, 음부에 갇힌 많은 자들, Justin Martyr, 사61:1-3;눅4:18 참조)를 사로잡고(데리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행한 대로 상급을 주셨다) 하였도다.
올라가셨다(아네베 , he ascended, 승천하셨다) 하였은즉 땅 아랫 곳(하데스, Tertullian·Irenaeus·Jerome·Chrysostom·Meyer·Alford, '하늘 위'와 대비되는 표현, 빌2:10,11)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내리셨던 그가 곧 하늘 위('above all heavens', KJV譯; 'beyond the highest Heaven', TCNT譯)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케 하려('…that the whole universe from lowest to highest might know his presence', Phillips譯; 행3:21;골3:11) 하심이니라"(시68:18).
이 사건은 인류 역사에 있어 새로운 시대를 여는 시작에 불과하였다. 음부의 열쇠를 쥐고 계신 예수님 때문에(계1:18) 그의 몸된 교회 역시 음부의 권세를 이기고(마16:18) 천상낙원으로 갈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을 누가복음 16:16은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본문의 '그 후부터'(from that time)는 하나님 나라 복음이 전파된 시점을 의미하며(마3:1,2,4:17), '그리로'(에이스 아우텐, into it)란 '하나님 나라로'를 의미한다. 또 '침입하느니라'(비아제타이, 侵擄를 당한다, 마11:12)의 기본형 '비아조'(enter by force)는 '거세게 밀어닥치다', '몰려들다', '온 힘을 다해 그리로 향하다'란 의미를 지닌다('…presses violently into it', Sawyer譯; 'come crowding in', Norlie譯).
따라서 본문은 하나님 나라 복음을 받아드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성도들이 예수님의 피(속죄은총) 때문에 사후 음부의 의인구역으로 들어가지 않고 이 땅에 사는 동안 영적 하나님 나라에 속해 있다가 사후 곧바로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천상낙원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음을 보여준다(요8:21,12:26,17:24;고후5:1-7;빌1:23⇒히10:19-22). 그래서 현재 음부의 의인구역은 비어있다.
[출처] 사후의 중간상태에 관하여 (청계산기도원) |작성자 순례자
견고한 토대? http://blog.naver.com/kmjnt/110091827721
**무궁한 인자와 아가페 사랑의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하신 사람에게, 아담이 하와에게 고백한 것처럼. <너는 내 뼈중의 뼈요, 살중의 살이라 = 나의 가장 귀한 보배, 소중하고 존귀한 분신이요, 짝이라>라고 고백하시며 아드님을 사랑하시는 바로 그 사랑으로 자신의 영광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어주신다.. 사도바울은 <이 비밀이 크도다>라 말하면서 바로 그것이 교회와 그리스도의 관계임을 이어서 말한다..바로 그 하나님의 사랑의 차원을 경험하여 알며 그분의 영광과 그 사랑을 더 알아가기를 소망하고 기대하며 또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는자, 곧 하나님 안에 거하며 그 영광의 풍성과 부요, 충만을 누리며 그분의 생명을 살며 그분의 영광을 나타내며 온 피조계에 하나님을 대표하며 사는 그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이 계획하고 안배해두신 <행복프로그램>대로 극도의 행복을 맛보아 경험적으로 알며 살아가게 되어있다..
**생명의 영파<생명파>는 뇌에 도달하면 스파크를 일으켜서 뇌세포를 자극하는데, 이로 인해 미리 세포핵 내 염색체에 코딩시켜 놓은대로<행복프로그램>에 관계된 호르몬들을 산출하도록 하기 위해 관계된 유전자들을 발현시킨다.. 이로 인해 산출되는 행복물질<또는 행복프로그램 호르몬>들은 사랑하는 연인이 거룩함과 순결함 가운데 서로 아끼며 절제하며 기다리던 결혼을 통해 부부가 되고 알아가게(yada) 될 때 완전한 행복 경험/하나됨의 교감으로 경험할 수 있는데, 단계별로 나타나는 호르몬들은 다음과 같다..평화(걱정없음)-세로토닌, 수면-멜라토닌, (사랑-용납의)기쁨-엔도르핀, 만족-CCK, 황홀함(새로운 발견에 대한 경탄-환호-로맨틱)-도파민, 극치감(목숨까지 희생하는 일체감/일편단심... 자기자신처럼 여김 : "내 뼈중의 뼈, 살중의 살")-옥시토신
**<한편>야다가 아닌, 혼전 성교나 기타 모든 음란함으로는 비록 어쩌면 CCK까지는 도달할 수 있을 지는 모르나 옥시토신까지는 결코 도달할 수가 없다..
**사탄은 하나님의 <엘엘룐으로서의 위치와 능력>은 갖기 원했으나 (아마도)아가페사랑이란 품성은 원치 않았던 것 같다. <악을 모르고, 자유의지를 사람에게 특별히 허락하시고, 하늘정부의 질서 위해 과감히 [공의와 정의]를 기준 삼아 즉각 처벌하지 않고, 오래오래 참아주고 기다리며, 회개하면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조건없이 용서하는, 또한 자신을 대속의 십자가에 내어주어 자유의지 허용하신 사람에 대해 무한책임을 지시며, 자원해서 아가페로 모든 피조물을 섬기며, 읹다와 성실을 아낌없이 베푸는 하나님은, 내 기대에 어긋나는 하나님이다>는 전제를 가짐으로써 하나님의 품성에 동의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의 절대권위를 인정 안하고 하나님의 의도를 곡해하며, 한편 자기가 지어낸 거짓말로 하와에게 거짓말하여 결국 하나님의 품성에 대해 참소함으로써 하와로 하여금 하나님의 품성을 신뢰하는데서 떠나도록 불신의 틈을 내었다. 그 때 이미 참된 의미로서의 <죄-하나님의 품성 오해와 곡해로 인한 그분의 뜻을 거역/불순종>는 시작되었고 하나님의 품성을 오해함은 결국 생명을 돌보시는 하나님을 거절하고, 본질상 도둑질하여 죽이고 멸망케 하는 사탄에게 종속되는, 빛보다 어둠에 있기를 좋아하는 굳어지고 얼음장같이 차가워진 마음의 <화-멸망>을 자초하는 생명 상실의 문제가 되었고 이로써 질병과 사망이 유래되었다..
**따라서 성경말씀을 통해 하나님의품성에 대한 오해를 바로잡고 온전한 믿음에 들어가게 될 때, 염색체 싱의 모든 유전자는 조화롭게 완전케 발현되고, 그 생명의 운행은 모든 기관의 줄기세포<가지세포>들을 온전케 함으로써 몸의 회복과 부활은 당연한 귀결이 된다.
****결국, <죄>는 <불순종 그 자체가 아니다!!!-그것은 선행 원인의 결과임>하나님의 품성을 오해함으로써 자유의지적으로 그분을 거절하고 사탄에게 동조하기로 선택하여 스스로 사탄에게 사로잡힘에 다름아니다...하나님의 품성<아가페 사랑>은 그분의 영광임..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품성(어떠하심)을 그대로 이 땅에서 살아내시며 아버지의 영광/하나님의 참된 품성을 드러내셨다. JC는 하나님의 품성에 대한 <신실하고 참된 증인>이시다...또한 구약에서조차 하나님의 사람들은(아벨에서부터) 하나님의 품성을 계시를 통해 알고 그것을 믿고 그 품성따라 하나님을 신뢰함으로써 한 영됨을 살아 낸 사람들이며, 신약시대의 모든 사도-제자들과 순교자들도 그리한 사람들이다.. 따라서 마땅히 하나님의 성품 그 차원에서 모든 성경말씀을 풀어주시도록 성령께서 일깨워 주시기를 기도하자 . 순교자들이 바라는 바 신원-보수-복수는 자기들을 죽이는 자들이 참되게 하나님의 품성을 알고 주께 돌이켜 구원받도록 일치해서 기도하는 이들이었다.. 참으로, 하늘의 복수(보수, 신원)는 하나님의 자비를 나타내심으로 인해 구원 얻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품성을 오해함으로써 어둠과 사망에 사로잡혀서 하나님의 사람들을 돌로 쳐 죽인 이 들이 예수라는 <산 돌>에 맞아 옛사람이 온전히 죽임 당하게 하시고 거듭남을 주신다..이것이 다메섹도상에서 사도바울에게 나타난 예수그리스도의 의미이다..
**<사탄이 준 생각대로 그것을 받아들임인>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여 사망을 낳느니라(약1:5)<롬6:23>죄의 삯은 사망이요(사탄의 인격인 죄가 사망안에서 <죄인들을> 지배하는 것이 사탄과 세상의 공의의 원칙, 곧 품성 원칙이듯) 하나님의 은사는(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는 값없이 베푸시는 은혜이며 그 은혜는) 그리스도예수 우리주안에 있는 영생이니라)(그리스도예수 우리주로 말미암는 영생안에서 보증된 바 믿음으로 얻는 의로움을 통해 <죄인의 죄를 사하시고 JC보혈로 의롭다 하심 얻은 자들을> 다스리는 것이며 그것이 하나님의 품성이다)---<죄>란 엄밀히 말하자면 <하나님, 곧 생명>에서 떠남이다..그러기에 사망은 당연한 귀결이다..간음한 여인에게 적용.. 돌을 들어서 그 여인을 칠 준비를 하고 있는 각 사람의 죄를 JC께서 땅에 쓰셨다는 것은 각 사람들이 하나님의 성품을 오해하고 있음을 갓사람들에게 알게 하기 위해 각사람들의 이름을 쓰시고 하나님의 돌로 치게 하신 바의 원뜻을 예를 들어서 쓰신 것이리라..삼손과 데릴라, 다윗과 밧세바...간음하였으나 오히려 자비와 긍훌하심을 받은 이들...나단은 마땅히 죽을 각오로 담대히 다윗왕에게 나아가 비유를 들어서 얘기했고,. 스스로 다윗이 죄 범했음을 인정하고 정죄했을 때 나단은 하나님의 용서를 곧바로 선포했다.. 바로그것이 <산 돌=살리는 돌 JC>에 맞는 경험이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란 산 돌 JC께 침을 받아 통회하고 죄사함받아 중생한 경험 있는 자..를 의미. 이제 무두 도망가고 도망가지 않은 유일한 사람 죄인 당사자만 JC앞에 있다.. 그녀를 JC는 정죄하지 않으시고 자유함을 선포하셨다... 그 여자는 생명의 산 돌, JC께 맞아 옛사람은 죽고 새사람으로 거듭났다..<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이것이 중심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사람과 화해, 기대의 멧세지<다시는 잘못 선택해서 비참해지지 말고-너도 고생이지만 나 예수의 마음은 더욱 찢어진다- 올바른 선택해서 생명안에 거하라!!!>
**사탄적 쳬계인 세상에서는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오해가 언제나 문제를 일으킨다.. <내가 병에 걸린 것은 내가 죄를 지은 것에 대한 천벌(하나님이 징계/벌한 결과)이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실제로는 질병/사망의 근원은 우리를 하나님에게서 분리시켜서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사탄이요, 실제로 질병과 사망은 사탄이 그 시작점이고 그것은 우리가 선택한 결과로서 <사탄으로부터> 형벌을 자초했다... 즉, 사탄의 미혹/속임 + 강제로 넣어준 사망파와 관계된 부정적 생각들을 자신이 선택함(과식, 과로, 부정적-파괴적 정서/스트레스--원인자 : 사탄) --->세포내 활성산소 발생 증가, 제거 감소 --> 세포의 손상 ==세포막, 미토콘드리아, 세포핵 손상 : 질병 발생 유발<구속의 길=SOD경로>.... 하나님의 구원하심이 JC십자가 대속의 희생을 통해 우리에게 베풀어 졌다 하더리도 나자신이 그것을 의지적으로 선택하여 영접하지 않으면 실제로 <받은 것>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과 생명파, 또는 사탄이 집어 넣어주는 생각 또는 사망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자유의지적 선택>의 개념이 적용되는 것이다!!! ... 올바른 것(성령의 생각은 궁극적으로 생명과 평안이기에)을 선택하라..
**하나님의 품성을 곡해한 사탄과 그 체계인 세상의 관념을 그대로 받아들여 수용함으로써(잘못된 믿음=하나님의 품성 오해 상태) 그분의 품성을 오해한 병자들의 영적 상태는 자기가 지은 죄에 대해 하나님이 벌하여 자기가 병들었다고 (속 마음으로는)원망하면서도 한 편, 그 병이 더 심해질까봐 그 상한 속마음을 감춘채 입술로는 <사랑한다>고 고백하는<영적 바벨론>상태임... 따라서 하나님의 품성에 대한 올바른 계시가 필요<이것은 인자가 되어 섬기러 오신 주예수님, 네가 온 것은 양으로 하여금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함이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하리라...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라 말씀하시는 바로 주예수님께 돌아갈 때 얻게 됨>.. 이것이 치유에 이르는 <참 믿음>의 원동력임..
**<내게로 오라>하신 그분은 다시 <내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고 하신다... 이 말씀은 내자신의 모든 무력함과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중생한 이는 그리스도와 연합하였고 그분과 하나이기에, 예전에는 아담의 모든 부패가 그대로 우리에게 적용되어 흘러나왔듯이, 이제는 믿음으로 주와 함께 우리의 옛사람이 십자가에서 죽었고 장사지낸 바 되었고 주예수님의 부활과 하나되어 부활한 새사람으로서 그리스도는 머리요 나는 그의 몸으로서 하나되었기에 그분의 이름으로 그분의 가지신 모든 것은 내것으로 여기고 선포하고 누리며 그렇게 실제로 살아가는 삶, 곧 하나님 영광안의 모든 풍성과 부요, 그 충만함을 실제로 맛보아 알며 누리고 더 나아가 그로 인해 예수님이 단번에 이루신 그 거룩하심 안에서 성령 인도하심따라 믿음으로 행함의, 주께서 내안에서 율법을 저절로 이루시는 삶을 살라 하심이다.
**갑자기 격한 물리적 운동/과욕. 과로, 과식, 또는 내적스트레스 곧 절대긍정의 믿음안에 거하여 얻는 영적-정서적 평안을 깨뜨리는 모든 상황, 곧 분노를 발출하거나, 선택 위한 내적 갈등을 겪고 있다거나, 거절감-결핍감-타의적 고립무원/외로움-수모/정죄감-두려움/불안/불신-분노/원망/원한/용서못함 등의 내적스트레스를 그대로 용인하게 되는 경우, 그와 공명되어 나타나는 부정적/파괴적 에너지(사망파)가 부신수질의 노르에피네프린이 분비를 상승시키고 이로 인해 갑자기 모세혈관이 수축하여 혈액의 흐름이 순간적으로 멈추었다가 재관류되면서 유해산소가 가장 많이 발생하는 것으로 확인됨. ---항산화작용 관련 물질=항산화제(구속하는 JC처럼 자기를 희생하여 유해산소기를 유익한 물질-산소와 물-로 바꾸어줌) ;;; 대표적 --SOD, 비타민C : 무엇을 먹을지 궁금하면 그것 또한 Q께 물으라!!! 필요한 것을 알게 하여주시리니..
**염색체 상에 표시된 질병관계 유전자 부위의 의미 - 해당 유전자 부위의 스위치가 꺼지면 (=유전자 변이, 생체전기의 약화, 스위치 역할하는 메칠기의 정상적 작동 불능)관계된 질병이 발병함
**JC의 안식일 개념 ----모든 것을 손 떼고 그냥 쉬는 날이 아니라, 오히려 백성들을 위해 안식일에 일하는 제사장적 섬김처럼 선행(하나님의 사랑안에 거하며 그분과 한 영되어 행하는 생명 살리는 일)을 하는 날...따라서 어떤 현상이나 결과를 볼 때에는 그 자체 보다 그 이면에서 작용한 그 근본동기를 파악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믿는 이가 <그분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이시며 또한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신 분을 진리요, 근원적 생명과 아가페 사랑으로 경험하여 알지 못할 때에는 결국 생명을 살리시는 하나님의 생명원리에 따라 <참믿음 발휘함 통해서> 그분과 친밀한 하나됨의 동행을 실행할 수 없게 되고, 더 나아가 사탄적 세상이 제시하는 선악지식적 이분법(축복과 형벌)과 기복적 우상화에 치우치게 됨....따라서 어떤 현상이나 결과를 볼 때에는 그 자체 보다 그 이면에서 작용한 그 근본동기를 파악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
**참믿음<생명 하나님을 신뢰하며 동행, 그안에 거함>과 거짓믿음<하나님 신뢰에서 떠남>은 생체전자파의 주파수가 서로 확연히 다르다.....따라서 사람의 선택이 중요하다.. --참믿음은 하나님의 성품-조건없는 아가페사랑-을 바르게 깨닫고 하나님의 생명파=생기와 일치하고 공명하는 주파수를 가지며, 오도된 거짓믿음은 도둑질하여 죽이고 멸망시키는 사탄의 사망파와 공명하는 주파수를 가진다. ===>그 사람이 인지하여 깨닫고 발휘하는 믿음체계가 어떠하냐에 따라 생명파나 사망파를 선택할 수 있고, 이는 그 자신의 뇌파의 주파수를 바뀌게 한다..
**뇌파의 종류는 5가지로 구분됨 ::::: @진선미의 생명파==알파파 산출, @거짓-악-더러움의 사망파는 베타파를 산출, 더 나아가 @빠르고 불규칙한 감마파는 이성을 잃은 격분상태이나 자유의지는 있음, @델타파는 의식없는 깊은 수면상태... 알파파와 델타파 사이의 @쎄타파는 뇌질환상태에서 나오는데 황홀경/쾌감을 종종 유발하는 최면파, 또는 속칭 <자기 비움>의 명상파(?)로서 이성적 판단 상실 + 자유의지 잃은 마비 상태..감각적 인식의 착각 가져오는 비정상적 변질 유발... 이는 실상은 악령에 사로잡힘의 현상임.. ::::: 이와 더불어, 뇌세포에서의 행복호르몬 관련 유전자의 활성-생성 분출은 여부가 결정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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