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고전 6:17) === 믿는 이는 주님과 한 영임. 믿음으로 주님과 연합하여, 그분의 지체로서 내영에 합하여 한영된 주님<나는 주님의 것, 주님은 내 것>과 동행함은 하나님의 임재의식안에 거하는 삶보다 더 중요하다 <펀글> **살전5:23을 참고하라 -- <살전5:23-24 : 23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24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우리는 만유를 포함한 그리스도가 우리의 분깃이고, 우리가 이 그리스도의 교통 안으로 부르심 받았음을 보아왔다. 그러나 성육신되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어떻게 우리의 누림을 위한 분깃이 되실 수 있는가?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6장 17절을 상고할 필요가 있다. 이 구절에서 바울은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고 선포한다. 우리가 그 안으로 부르심을 받은 이 교통은 생명주는 영이신 그리스도이다. 이 교통을 체험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분과 한 영이어야 한다. 우리의 영 안에서 우리는 생명주는 영과 하나이다. 오래 전 내가 이 나라에서 사역을 시작했을 때, 나는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거듭난 사람의 영, 즉 하나님의 영이 내주하시는 사람의 영을 가지고 있으며 우리는 주님과 한 영이라는 사실을 강조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이 영을 갖고 있음을 알고서 놀랐다. 물론 그들은 그들에게 혼과 마음이 있다는 것은 알았다. 그러나 사람의 영을 알지 못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에 대해서는 알고 있다. 그러나 그들 모두에게 사람의 영이 있다는 것은 알지 못한다. 최근에 교회 생활 안으로 들어온 사람들이 그들에게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의 영이 있음을 깨닫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매일의 생활에서 우리는 그 영을 사용해야 한다. 우리가 매일의 생활에서 문제들에 직면할 때 우리는 우리의 혼이나 몸 또는 우리의 영으로 반응할 수 있다. 한 형제가 그날의 노동으로 피곤하여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다고 가정해 보자. 그는 아내가 불만이 가득하고 자기에게 언짢은 느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형제는 세 가지 중 한 가지로써 반응할 수 있다. 우주 가운데서 가장 통상적인 첫 번째 방법은 그가 혼 안에서, 특히 생각이나 감정으로 반응하는 것이다. 두 번째로 가능한 것은 화가 나서 육체적인 방법으로 반응하는 것이다. 세 번째로 택할 수 있는 것은 이 형제가 그의 거듭난 영을 사용함으로써 반응하는 것이다. 모든 믿는 이들이 우리의 영이 거듭나서 만유를 포함한 생명주는 영이 내주하고 있음을 깨닫는 것은 필수적으로 중요한 사실이다. 아내와의 관계에서 어려움에 직면한 그 형제는 그의 영을 사용하여 생명주는 영이 그를 인도하도록 허락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그는 아내에게 무슨 말을 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지를 알게 될 것이다. 형제가 그런 식으로 살고 있는 것을 관찰한 사람이면 누구나 그가 보통 남편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인식할 것이다. 몸을 사용하여 육체적으로 반응하거나 혼을 사용하는 대신에 그는 그의 영을 사용한다. 우리는 모두 일상생활, 특히 결혼 생활과 가정생활에서 우리의 영을 사용할 필요가 있다. 거듭난 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분깃이신 그리스도를 체험할 수 있고 또한 이 그리스도의 교통을 체험할 수 있다. 우리의 영이 그 영으로 거듭나지 않고 그 영이 내주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는 우리의 분깃이 될 수 없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교통 안에 있을 수도 없다. 전기 기구가 작동하려면 전류를 지녀야 하는 것처럼 우리가 우리의 분깃이신 그리스도를 체험하고 그의 교통을 누리려면 우리는 그 영 안에 있어야 한다. 전류가 기구 안으로 흐를 때만이 우리는 실지로 빛이나 열이나 또는 차가운 공기를 가질 수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오직 주님과 한 영 됨으로써만이 그분을 만유를 포함한 분으로 체험할 수 있다. 때문에 바울은 우리에게 주님과 합하는 자는 그분과 한 영이라고 말한다. 주님을 믿고 그분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모두 그분에게 연합되었다. 영 안에서 우리는 참으로 그분과 하나이다. 우리는 거듭난 영을 가지고 있으며 그리스도는 지금 우리 영 안에 거하는 생명주는 영이시다. 그 결과 우리는 그분과 한 영이다. 얼마나 놀라운가! 오, 우리는 모두 우리가 주님과 한 영임을 알아야 한다. 만약 이것을 본다면 우리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나는 주님과 한 영임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영을 가진 나를 창조하셨고 나의 영은 그분으로 인하여 거듭났습니다. 오늘날 만유를 포함한 그리스도는 내 영 안에 거하는 생명주는 영이십니다. 그분은 나의 영과 하나이고, 나는 그분과 하나입니다.』 형제들은 가끔 나에게 내가 매년의 집회와 훈련에서 어떻게 그렇게 많은 메시지를 줄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어떤 형제들은 나에게 이 수천 수백의 메시지들이 어디서 나오는지 물었다. 나는 이 메시지들이 나의 영과 연합된 생명주는 영이신, 만유를 포함한 분인 그리스도로부터 나온다고 간증할 수 있다. 내가 주 예수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그분은 나를 공급하신다. 이것이 내가 계속해서 메시지를 줄 수 있는 이유이다. 유일한 제한은 시간과 육체적인 힘뿐이다. 주님의 공급에는 제한이 없다. 사실상 나는 말하면 할수록 더 말할 수 있다. 영적인 저장고는 그침이 없다. 물이 흘러나오면 나올수록 더 흘러난다. 주님과 한 영인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공급이 무한량하다. 한 형제가 그의 아내에 대한 불만을 갖고 당신에게 온다고 하자. 그 형제는 이렇게 말할지 모른다. 『주님이 당신에게는 친절하고 부드럽고, 참을성 있고 사랑스러운 아내를 주셨군요. 그러나 나의 아내는 함께 살기가 몹시 어렵습니다. 당신의 아내가 내 아내 같다면 당신은 아마 나의 결혼 생활보다 더 악한 상황에 처할 것입니다. 나는 도대체 나의 아내와 함께 살아나갈 길이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러한 형제를 돕는 가장 좋은 길은 그 문제들을 그에게 설명하거나 그와 따지는 것이 아니다. 또한 그를 가르치거나 그에게 더 교리적인 관념을 주는 것도 합당한 방법이 아니다. 그에게 가장 시급한 필요는 그가 주님과 한 영임을 인식하는 것이다. 그러한 상황에 처한 형제로 하여금 그가 주님과 한 영이며, 또한 그는 주님의 이름을 불러야 한다는 것을 볼 수 있도록 돕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당신이 이 형제로 하여금 그가 생명주는 영과 한 영임을 이해하도록 돕고 또한 그로 하여금 주님을 부를 수 있도록 돕는다면, 그 형제의 생활에는 커다란 변혁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 당신이 다른 성도로 하여금 그가 주님과 한 영임을 깨닫게 하려면, 당신 자신이 그분과 한 영 된 것에 대한 충분한 체험을 가져야 한다. 당신이 그러한 사람이 된다면, 당신의 아내가 당신의 마음을 상하게 할 때에라도 당신은 영을 사용하여 주 예수의 이름을 부르고 그분의 공급을 받을 수 있음을 간증할 것이다. 그리스도를 떠나서 어떤 형제가 훌륭한 남편이 되거나 어떤 자매가 합당한 아내가 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예외가 없다.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우리 모두 다 똑같다. 자매가 좋은 아내가 되거나 형제가 좋은 남편이 되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혼은 하나님에 의해 정해진다. 따라서 결혼은 하나님의 안배이며, 합당한 남편이나 아내가 되는 것은 매우 어렵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것 외에 다른 길이 없다.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간증할 수 있듯이 우리가 우리의 영을 사용하여 주의 이름을 부를 때 우리는 그분의 달콤함을 누린다. 때로는 주님이 아주 다정하게 우리를 만지기 때문에 우리는 울기도 한다. 또 어느 때는 찬양이 흘러나오고, 가장 훌륭하고 가장 적합한 아내와 남편을 우리에게 주신 주님께 감사를 드릴 수도 있다. 우리가 우리의 영을 사용해서 주님의 이름을 부를 때 즉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좋은 배필을 주셨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리 가운데 이러한 체험이 더욱 더 많아지길 바란다. 그리스도는 그들의 것이며 또한 우리의 것이다. 또한 우리는 이 그리스도의 교통 안으로 부르심을 받았다. 이 교통은 오직 영 안에서만 일어난다. 그분과 합하는 자는 한 영임을 찬양하자! 그와 같이 우리는 한 근원과 한 근본, 즉 하나의 그칠 줄 모르는 저장고를 갖고 있다. 이 근원은 그리스도이시며, 과정을 거친 삼일 하나님이시며, 만유를 포함한 생명주는 영이시다. ###음식과 몸에 있어서 자유를 남용하는 것을 다룸 === 그리스도의 지체 15 절은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 말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유기적으로 연합되었고(17절),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영 안에 거하시며(딤후 4:22), 우리 마음에 그분의 거처를 만들기 때문에(엡 3:17), 우리의 정결케 된 몸을 포함하여 우리의 전존재는 그분의 지체가 된다. 그러므로 그와 같은 지체의 직분을 실행하기 위해 우리는 그분께 우리의 몸을 드려야 한다(롬 12:1, 4-5). ***주님과 한 영 17 절에서 바울은 『그러나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고 말한다. 이 구절에서 합한다는 말은 그분 안으로의 믿음을 통한 믿는 이들의 주님과의 유기적인 연합을 말한다(요 3:15-16). 이 연합은 포도나무와 가지에 의해 예로 들어졌다(요 15:4-5). 그것은 단지 생명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또한 생명 안의, 거룩한 생명의 문제이다. 이 같은 부활하신 주님과의 연합은 오직 우리의 영 안에만 있을 수 있다. 「한 영」이라는 표현은 우리의 영과 그 영이신 주님과의 연합(mingling)을 가리킨다. 우리의 영은 지금 우리 안에 계시며(고전 6:19) 우리의 영과 하나이신(롬 8:16)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 거듭났다(요 3:6). 이것이 부활을 통하여 생명주는 영이 되셨고(고전 15:45, 고후 3:17), 이제 우리의 영과 함께 하는(딤후 4:22) 주님의 실제이다. 이 연합된 영은 로마서 8장 4절부터 6절에서처럼 바울의 서신에서 종종 언급된다. ***성령의 전(殿) 19 절에서 바울은 『너희 몸은 너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 말한다. 성령은 우리 영 안에 있으며(롬 8:16) 우리 영은 우리 몸 안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몸은 성령의 거처인 성전이 된다. 20 절에서 바울은 『너희는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결론짓는다. 여기에 언급된 값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이다(행 20:28, 벧전 1:18-19, 계 5:9). 우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6장 13절부터 11장 1절까지의 부분의 문맥을 따를 때 특별히 먹는 것과 결혼 두 가지 문제에 있어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으로 하여금(요일 4:13) 우리의 몸을 점령하고 적시게 함으로 그의 성전인 우리의 몸을 통하여 그분 자신을 표현하도록 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몸을 엄격하고 철저하게 통제하기를 훈련해야 하며 우리의 몸을 복종케 하여(고전 9:27) 산 제물로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롬 12:1). ***합당한 수용력을 위한 필요 고린도전서 6장에 있는 이 구절들은 우리의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이고 우리가 주님과 한 영이며 우리와 몸이 성령의 전이라고 말하는 신약 성경의 유일한 구절들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 구절들을 읽을 때 우리는 그것들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지나칠지도 모르며 그것들과 그 안에 계시된 중요한 문제들을 공부하는 데 적절한 시간을 들이지 않을지도 모른다. 우리의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라고 말하는 15절에 당신은 얼마나 시간을 들였는가? 매우 소수의 믿는 이들만이 이 구절에 합당한 주의를 기울였다. 그렇다. 19절에 관한 메시지, 즉 믿는 이들의 몸이 성령의 전이라는 것에 관한 메시지는 주어졌다. 그러나 당신은 주님의 회복 안으로 들어오기 전에 주님과 한 영이라는 것에 관한 메시지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주님과 합하는 자는 한 영이라는 것에 관한 메시지를 들어 본적이 있는가? 이 세 가지 사항들은 철저히 연구할 가치가 있다. 나는 단지 문자적으로 말씀을 연구하는 것을 말하지 않고 체험의 빛 안에서 연구하는 것을 말하고 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주님과 한 영임을 실행하는 것은 아주 드물다. 여러분은 「주님과 한 영」이라는 제목의 책이나 심지어 메시지를 알고 있는가? 전통적인 신학과 실행의 영향으로 인하여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6장 17절과 같은 구절을 소화할 수 없다. 그들에게는 주님과 한 영이라는 필수적인 사항을 수용할 여지가 조금도 없는 것 같다. 그러나 그들은 거룩함, 승리, 능력, 기적, 방언 말함 등과 같은 문제에 있어서는 대단한 관심을 갖고 있다. 오순절파 안에 있는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방언 말하는 것을 매우 강조한다. 어떤 경우에 그들은 방언 말하는 것이 참된 것인지 아닌지조차 관심하지 않는다. 그들은 방언 말하는 것에 빠져 있기 때문에 기도에 주의하지 않으며 바울의 온전케 하는 사역에 대한 중심 이상을 전혀 주의하지 않는다. 만일 어떤 이가 방언을 말하면 이 믿는 이들은 쉽게 흥분된다. 그러나 어떤 이가 『주여, 당신의 긍휼과 은혜를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하면 그들은 즉시 관심이 없어진다. 그들은 이런 종류의 기도에는 마음이 없다. 더욱이 당신이 그들에게 하나님의 경륜의 이상에 대하여 말한다면 그들은 당신이 말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당신은 그와 같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알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다. 그들은 말씀을 알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들 안에는 하나님의 계시의 중요한 문제들을 위한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상황은 생명의 떡에 관한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용력이 없었던 주 예수의 제자들과 비슷하다. 주님은 그분이 생명의 떡이요, 생명을 주기 위하여 하늘에서 내려왔으며, 그의 살은 먹을 수 있고 그의 피는 마실 수 있으므로 그를 먹는 자마다 그로 인하여 살리라고 말했다(요 6:33, 35, 55, 57). 주님의 말씀을 받을 수 없었던 사람들은 말했다.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요 6:60). 우리 또한 하나님의 계시를 받기 위한 용량이 매우 제한되어 있을지 모른다. 종교와 전통에 중독된 영향 때문에 우리는 주님과 한 영이라는 바울의 말과 또는 우리의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라는 말을 받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마늘을 먹거나 마늘 냄새로 가득한 방 안에 있던 사람이 결국 마늘 냄새나 맛에 무감각하게 된 것과 같을지 모른다. 같은 원칙으로 우리의 영적인 냄새와 맛에 대한 감각도 사실상 우리의 내적 존재 전체가 전통적인 기독교의 영향 아래 아주 오래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경륜의 어떤 중요한 문제를 인식할 능력을 갖지 못한 것이다. 만일 이것이 우리의 상황이라면 우리는 고린도전서 6장을 15절과 17절에 감동됨이 없이도 거듭거듭 읽을 것이다. 오랫동안 나 역시 고린도전서 6장을 17절의 중요성을 보지 못한 채 읽었다. 그러나 어느 날 이 구절이 나에게 열려지기 시작했다. 나는 그와 같은 구절이 실제로 성경에 있었는지를 스스로 물어 보았다. 17절에서 바울은 분명히 말한다.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그 때로부터 나는 이 구절에 많은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했고 그것을 체험하기 위하여 나 자신을 훈련했다. 1947 년과 1948년에 니 형제님은 자주 영을 훈련하고 영을 해방해야함을 말씀하셨다. 그는 종종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에서-복음을 전하고, 성도들을 접촉하고, 말씀을 사역하는 데-우리의 영을 사용해야 하며 우리의 영을 해방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우리가 가장 많이 사용하는 우리 존재의 부분이 곧 우리가 가장 중시하는 부분임을 지적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생각 안에 산다면 그가 말할 때마다 그의 생각이 튀어나올 것이다. 마찬가지로 감정 안에 사는 사람은 그의 감정을 표현할 것이다. 나는 이 교통으로 많은 도움을 받았으며 그때로부터 영을 사용하고 영을 해방하기 위하여 노력했다. 그러나 나는 아직 6장 17절에 감동되지는 않았었다. 1958 년 주님은 주님을 먹고 주님을 마시며 주님을 누리는 것에 대한 것들을 열어주시기 시작했다. 그 때 나는 주 예수께서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고 말씀하신 요한복음 6장 57절을 읽기 시작했다. 나는 또한 우리가 만일 주님을 먹고 주님을 마시고 주님을 누리려면 우리의 영을 알아야 함을 깨달았다. 영을 아는 것을 떠나서는 주님을 접촉할 수 없다. 나는 한 메시지에서 우리가 어떤 특정한 음식의 본질을 알 때만이 그런 종류의 음식을 어떻게 먹는가를 안다는 것을 지적했다. 같은 방법으로 만일 우리가 주님을 먹기 원한다면 우리는 주님의 본질에 대하여 알아야 한다. 오늘날 주님은 생명주는 영이시다. 이것은 영적인 음식의 본질이 영임을 의미한다. 우리는 오직 우리의 영을 사용하여 그 영을 접촉할 수 있다. 요한복음 4장 24절은 『하나님은 영이시니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는 영과 실제 안에서 예배할지니라』고 말한다. 이 구절에 의하면 오직 영만이 그 영을 만질 수 있고 오직 영만이 성령을 예배할 수 있다. 1960 년에 영에 관한 부담과 빛과 말씀이 강화되었다. 그 결과 영에 관한 메시지가 거듭거듭 주어졌다. 내가 이 나라에서 사역을 시작했을 때 나는 또한 영을 강조했었다. 만일 여러분이 초기에 발간된 「흐름」(The Stream)지를 읽어 본다면 메시지들 중 많은 것이 영을 중심 삼고 있음을 볼 것이다. 나는 고린도전서 6장 17절을 본 것이 주님이 내게 주신 사역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음을 간증할 수 있다. ***위대한 비밀 주님과 합한 우리 믿는 이들은 한 영이다. 이것은 위대한 비밀이다. 아마 성경 안에 계시된 가장 비밀스러운 문제일 것이다. 누가 그와 같은 비밀을 설명할 수 있는가? 당신은 우리가 주님과 한 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물론 우리가 그것을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것을 분명히 체험할 수는 있다. 나는 종종 아침에 이렇게 기도한다. 『주여, 당신과 한 영 됨을 실행할 새 날을 주심을 감사합니다.』 우리 같은 죄인들이 주님과 한 영이 될 수 있다니 얼마나 놀라운가! 우리가 이것을 생각할수록 우리는 더욱더 그것이 얼마나 놀라운가를 깨닫는다. 6 장 17절에서 바울은 우리가 주님과 한 영인 사실을 명백하게 선포한다. 그러나 우리 중 거의 아무도 이것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우리는 체험적인 방법으로 이 구절을 연구하고 탐구할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우리는 우리가 말하는 것과 행하는 모든 것에서 어떻게 주님과 한 영이 되는가를 체험하고 배워야 한다. 우리가 여러 가지 일들을 할 때 우리가 주님과 한 영 인가 아닌가를 생각해야 한다. 6 장 17절에 의하여 주님과 한 영이라는 이상을 보았기 때문에 나는 로렌스 형제가 <체득하고> 실행한 것<하나님의 임재연습>이 전적으로 구약의 것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하나님의 임재 안에 있기를 훈련했지만 주님과 한 영 됨을 <체득하여> 그렇게 살며 실행하는 것까지는 알지못했다고 여겨진다. 하나님의 임재 안에 있는 것과 주님과 한 영인 것과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우리는 바울이 6장에서 세 가지 필수적인 사항들을 다루고 있음을 보았다. 이 사항들은 너무 크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들을 적절하게 소화하기 위해서는 많은 영의 훈련이 필요하다. 우리의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요, 우리는 주님과 한 영이며 우리의 몸이 성령의 전이라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이것에 대한 이상이 아주 분명해지자 나는 자신을 억제하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이 이상에 대한 부담이 너무 중하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감당하기가 어렵다. 나는 어떤 교회들과 어떤 성도들이 계속 옛 길로 가며 바울의 온전케 하는 사역의 이상을 소홀히 하고 기독교의 일을 수행하는 것은 생각하기조차 감당하기 어렵다. 참으로 믿는 우리는 우리의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요 우리가 주님과 한 영이며 우리의 몸이 성령의 전이라는 이상을 보는 것이 그 무엇보다 절실히 필요하다. ***중심 이상을 봄 나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의 상황과 우리 가운데 있는 상황 때문에 염려스럽다. 모든 곳의 그리스도인들이 사탕발림의 설교, 곧 그들을 미혹하고 중독 시키는 설교를 듣고 있다. 심지어 우리 가운데 어떤 이들도 영적인 메시지에 의하여 미혹되었다. 그러한 형제들은 말하기 위한 자료로 라이프 스타디 메시지의 일부분을 사용하지만 여전히 중심 이상을 보지 못한다. 그 결과 말하는 사람들이나 듣는 사람들 모두가 표적을 잃을지도 모른다. 집회들은 좋아 보이고 심지어 도움을 주는 것 같아 보이지만 성도들은 바울의 온전케 하는 사역이나 요한의 보수하는 사역의 중심 이상에 의해 도움을 받고 있는가? 어떤 경우 이것은 의심스럽다. 우리가 우리의 사역과 일과 교회들을 돕기 위한 노력에 있어서 표적을 잃기란 가능한 것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경륜보다 다른 것에 주의를 기울인다면 사실상 성도들로 미혹되게 하는 위험이 있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 하나님께서 갈망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비밀인 교회에 관한 온전케 하는 사역을 수행하는 그의 신실한 종인 사도 바울에게 보이셨던 이상을 보는 남은 자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단지 교리들로서 성도들에게 제시되어서는 안 되며 하나의 실제로서 공급되어져야 한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것들의 실제를 다른 이들에게 공급하려면 우리 자신들이 먼저 그 실제를 만져야 한다. 이 이상과 부담 때문에 나는 교리뿐인 메시지를 위해서는 마음이 전혀 없다. 이 메시지에서 다루어진 세 가지 중요한 사항들이 우리에게 교리로 남아 있어서는 안 된다. 나는 우리 중 어떤 이들이 아직 우리의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요 성령의 전이며 또한 주님과 한 영이라는 것들에 관한 실제를 만지지 못했거나 체험적인 실제를 갖지 못했을까봐 깊이 염려된다. 만일 교회들 안에서 사역하는 형제들이 이 이상을 본다면 그들의 말함은 급진적으로 변할 것이다. 그들은 결코 다시는 다른 이들에게 단지 교리들을 주는 방법으로 말하지 않을 것이다. 자연히 그들은 그리스도와 그의 몸 이외는 어느 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할 것이다. 이 메시지에서 나의 부담은 교리들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40년 전에 나는 보상, 해 받음, 불을 통과하여 구원받음, 교회에서 추방되어야하는 여러 부류의 사람 등과 같은 주제로 많은 메시지들을 전했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것들에 관한 메시지들을 전할 부담이 없다. 그 대신 나는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그들의 무교절로 누리는 것에 부담이 있다. 특히 나는 수년 동안 회복 안에 있는 사람들이 여전히 중심 이상을 보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 부담이 있다. 이 사람들은 알맹이 대신 껍데기만을 가지고 있으며 이 껍데기들로 다른 이들에게 사역한다. 그들의 훈련 아래 있는 사람들은 어떤 영양 공급이나 생명 공급도 받지 못하여 그 결과 자라지 못한다. 만일 우리가 모두 이상을 보았다면 우리의 상황은 전적으로 다를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주님과 한 영이며 우리의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요 성령의 전이라고 증거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체험이 부족하고 이러한 것들을 받아들이고 그것들을 이해하기 위한 우리의 분량이 여전히 제한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이렇게 말해야 한다. 『주여, 나는 무엇을 해야 할 줄을 모릅니다. 나는 어떻게 회개할 줄을 모르고 어떻게 자백할 줄을 모르고 어떻게 기도해야 할 줄을 모릅니다. 주여, 나는 단지 여기 당신 앞에 있습니다. 나에게 긍휼을 베푸소서. 나는 당신의 경륜에 대한 분명한 이상을 보아야 합니다. 나에게 긍휼을 베푸소서. 주여, 나로 이 이상의 실제를 만지게 하시고 바로 그것을 행하여 다른 이들을 돕게 하소서.』 우리는 모두 바울에게 보이신 그 이상을 볼 수 있도록 그분의 긍휼을 얻기 위해 주님을 앙망하자. 우리가 그러한 이상을 볼 때만이 우리는 음식과 몸에 있어서 자유를 남용하는 것으로부터 보호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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