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To Embrace Vulnerability As Your Greatest Strength
Born Vulnerable
“Vulnerability is about showing up and being seen. It’s tough to do that when we’re terrified about what people might see or think.” — Brené Brown
What do you associate with the term vulnerability?
Perhaps it’s weakness, fear, hurt or betrayal.
These are the deep-seated emotions people experience when they reveal aspects of themselves to others.
Let’s be clear. Vulnerability is not a sign of weakness and can be your greatest strength.
“Vulnerability is not winning or losing; it’s having the courage to show up and be seen when we have no control over the outcome. Vulnerability is not weakness; it’s our greatest measure of courage,” affirms research professor and author Brené Brown in Rising Strong.
Vulnerability is a double-edged sword. Those who protect themselves to avoid getting hurt, fail to appreciate intimacy and close relationships.
Everyone is vulnerable, no matter how much they try to avoid it. We are born vulnerable and stay that way for our entire childhood. Our relationship with vulnerability is something we are acquainted with, yet abandon as we merge into adulthood.
Your association with vulnerability requires a shift in awareness in order to strengthen your emotional well-being.
It is no use erecting barricades around you while hoping at the same time others will see the blossoming flower within.
The wall you construct prevents your true nature from being known to others.
It was Rumi who said: “Your task is not to seek for love, but merely to seek and find all the barriers within yourself that you have built against it.”
You must accept your vulnerability if you wish to live a wholesome life. Even the smallest act of letting down your guard is a commitment to your personal growth.
“When we experience a great loss or hurt that feels like ‘broken heartedness’, we now realize that our heart is not broken. It’s actually the heart’s protective shell of defences breaking open to allow us to feel all emotions fully,” writes author Loch Kelly in Shift into Freedom: The Science and Practice of Open-Hearted Awareness.
Your Fractured Parts
“What happens when people open their hearts? They get better.” — Haruki Murakami
Vulnerability is an act of courage because you merge with your authentic self, instead of hiding behind a facade to appease others.
It is within the unknown where your greatest potential lies. Human nature is imperfect, yet the paradox is that we are whole within that sphere of imperfection.
To embrace vulnerability as your greatest strength, you will need to become aware of your pain points. Retaliation leads to suffering, since you are likely to defend your pain like a wounded animal.
Neuropsychologist Mario Martinez writes in his book: The MindBody Code: How to Change the Beliefs that Limit Your Health, Longevity, and Success, “The wound you choose in order to interpret your pain becomes a shield of protection against forgiving, because releasing your grudge means being vulnerable again.”
Vulnerability involves healing your fractured parts by merging with the wholeness of your being.
Consider it akin to a jigsaw puzzle strewn across the floor. Some might say the puzzle is incomplete given the pieces are lying on the floor. However, by gathering them together you create the entire picture piece by piece.
That is the heart of your life story. You have disowned your fractured parts, instead of trying to piece them together.
You are a masterpiece; a Rembrandt replete with perfection. Yet, you focus on your brokenness in the same way as a cracked oil painting when exposed to the elements.
The painting is no less beautiful because of its flaws. It is upon examining it up close that you recognise the defects, while ignoring the complete picture.
“Yes, I am imperfect and vulnerable and sometimes afraid, but that doesn’t change the truth that I am brave and worthy of love and belonging,” affirms Brené Brown.
Heal the Pain
To heal your pain requires undertaking a process of self-examination. You must become curious as to why you react when your pain buttons are triggered.
Every person has pain thresholds. If left unchecked, they become inflamed and dominate your emotional landscape, not to mention your physical health.
The moment you heal the pain, you reintegrate it into the wholeness of your being.
“Make your heart as vast as space, so big that nothing can harm it. When our hearts are that wide, it is as if the judgments are ripples on water, flowing away and leaving no trace. This is what vulnerability makes possible. It allows the natural strength of the heart to emerge,” writes author Mark Coleman in Make Peace with Your Mind: How Mindfulness and Compassion Can Free You from Your Inner Critic.
Suffering ensues when you focus on your sorrow, instead of appreciating the beauty and richness of your complete self.
It is as though you are looking through a magnifying glass on your shattered parts. You give them more attention than they deserve, so others are made aware of your weaknesses too.
Your shadows are one aspect of your character. When healed, you realise the completeness of your being.
Therefore, become a student of vulnerability by taking small risks. This act of self-renewal shines a light on your fractured parts, and is brought to your awareness and seen for what they are; a smokescreen.
“This feeling of rawness is key to working with vulnerability. They often feel like one and the same thing. The challenge is to find a way to be comfortable feeling the innate vulnerability of being human. If we can hold our vulnerability with a loving attention, the painful feelings can unfold and slowly move through us,” affirms author Mark Coleman once more.
Similarly, be wary of the ego and its aversion to being vulnerable. The ego likes to protect its image and vulnerability is a crack in its armour.
It signifies weakness and will do everything to defend itself.
Your greatest triumph will arise when you lean in to your vulnerabilities with openness and compassion.
There is nothing to defend nor protect, for the egoic voice has merely taken command and insisted on protecting you from getting hurt.
I wish to leave you with a passage from Brené Brown’s book Rising Strong in which she writes: “I was reminded that shame is a liar and a story-stealer. I have to trust myself and the people I care about more than the gremlins, even if that means risking being hurt.”
The gremlins she speaks of is the small self preventing your magnificence being known. Trust your heart’s wisdom and its real essence, not the voice in your head.
It is only then you will appreciate how vulnerability is a commanding act of strength and courage.
***HIS leaders
**Humility(겸손 : 죄성 지닌, 스스로 홀로 설 수없는 무력-연약-유한한 자 인정....주 없이는 Nothing-Nobody...주는 나의 모든 것 되심....곧 하나님 없이 스스로는 설 수 없는 유한한 피조물이라는 자각아래에서 모든 것 되시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며 하나님과 주께서 사랑하라 이르신 바 이웃을 존중존대하여 잘 듣고 배우는 마음....Q경외함과 경건의 첫걸음...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마11:29)**Integrity(무결 : 티흠점주름 없음[생각-말-행함].....보혈로 거듭난 이가 생명말씀 따라사는 십자가의 삶, 말씀하시는 JC, 성령따라 행함으로써 Q이 이루어 가실 거룩함, JC를 빼어닮음, JC께 합당함..) **Simplicity(단순, 순전, 순수.......Q은 하나님이 성품인 그 속성을 부분으로서 가지신 것 아니라 그 속성자체이심.....말씀이 육신되신 것처럼.Q이 손수 이루심...31Q과 한영됨 실행=교통, 교제, 사귐....코이노니아 comminion....하나된 교회의 성만찬/영성체 고백과 신비)
@@흠없는 하나님의 어린양, 성육신하신 말씀 하나님-창조주시요 .태초부터 계신 우리의 생명과 세상의 빛 JC...하나님됨을 내려 놓으시고 우리와 다름 없는 연약하고 무력한 사람으로 성육신 하여 이 땅에 오셨으되 죄는 없으신 그분.... 이세상을 거니시면서 아버지를 사랑함이 그분의 계명, 곧 기록된 말씀을 하나님이 말씀하신 바 말하여진 본래 의미, 목적, 뜻대로 지킴임을 아시고 기록된 하나님말씀을 배우시되 극히 존귀히 여기고 사랑하여 성령께 겸손히 온전히 의지하심으로써 아버지를, 자신이 말씀에 계시된 바 바로 그 아드님이심을, 태초부터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아드님의 영광, 아버지의 경륜과 아버지께서 맡기신 바 성육신의 비밀과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이루시는 구주로서의 사명을 깨달아 알고 껴안고 실행하심으로 완전한 교통안에서 아버지 뜻 이루셨음....아버지를 계시하시며 연합하여 하나됨의 신비 이루시며 기록된 말씀을 풀어주시고 인도하시는 HS께 경청할 때 이미 기록된 말씀은 이 땅을 걸어가는 거듭난 그리스도인 모두가 삼위일체하나님과 그분을 경외함의 길을 알기에 충분하다고 증언하는듯 하다!!
[요일1장]**1.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2.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 **3.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4.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5.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 **6.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 **7.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8.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9.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10.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사도신경(10) : 거룩한 공회와 성도의 교통(고전12:12~20)
오늘은 사도신경강해 열번째 시간으로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이 대목을 살펴봅니다. 교회에 관한 말씀입니다. 교회는 우리 신앙생활에 있어서, 더 나아가 인생에 있어서 너무 너무 중요합니다. 교회를 소홀히 여기면 절대로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없습니다. 아니, 신앙생활이 아예 불가능할지도 모릅니다. 스위스의 크리스천 정신과 의사인 폴 트루니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세상에는 혼자서 할 수 없는 일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결혼생활이고, 또 하나는 신앙생활이다.” 맞죠? 아무리 잘난 사람이라도 혼자서는 결혼할 수 없습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 교회 즉 성도들과 함께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의 3대 원리 중 하나가 ‘교회 중심’입니다. 여러분, 아시나요? 신앙생활의 3대 원리! 무엇, 무엇, 무엇이죠?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입니다. 그런데 적잖은 성도들이 교회의 중요성을 잘 모르고 소홀히 여깁니다. 이런 모습은 하나님이 기뻐하시지도 않지만,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게 큰 손해가 됩니다.
아무쪼록 이 시간 말씀을 통해 교회의 중요성을 재인식하시고, 은혜가 충만한 신앙생활을 통해 더욱 복된 인생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1] 거룩한 공회 : 그리스도의 몸인 우주적 교회
여기서 ‘공회’는 ‘교회’를 의미하는데, 구체적으로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즉 우주적 교회를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먼저 본문 12절을 보겠습니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사도 바울은 교회를 인체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몸은 하나인데, 그 몸에 붙어 있는 지체는 여럿인 것처럼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들이 각각 지체로서 한 몸을 이루고 있다는 겁니다.(One Body, Many Members) 또 엡1:22를 보면, 예수님이 ‘교회의 머리’라고 했습니다. 머리이신 예수님과 지체인 성도들이 다함께 그리스도의 몸이고, 그게 곧 교회라는 겁니다. 성도는 죄로 영 죽을 인생들 가운데 예수 십자가 피로 씻음 받은 ‘거룩한 사람들’입니다. 성도(聖徒 Saints)라는 칭호가 바로 그런 뜻이죠. 그러므로 교회는 거룩한 성도들의 공동체이며 ‘거룩한 교회’입니다.
이어서 13절을 보시죠.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성도 즉 교회의 지체(member)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요? 인간 조건은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방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이 말은 인종이나 신분이나 그 어떤 조건도 문제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남녀노소, 빈부귀천, 인종, 언어, 문화 등모든 인간 조건을 초월해서 누구든지 예수 믿으면 성령으로 세례 받고 지체가 되어 한 몸 즉 한 교회를 이루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아담 이후부터 종말까지 지구상에 거하는 사람 중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 사람이면 누구나 교회에 속하는 것입니다. 이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고 단 하나(One Body)입니다. 이를 가리켜 ‘우주적 교회’(Universal Church)라고 부르는데, 우리 말 사도신경에 ‘공회’라고 표현했습니다.
참고로 한 가지 말씀드리면, 영문 사도신경을 보면 거룩한 공회를 ‘the Holy Catholic Church’라고 했는데, 여기서 ‘catholic’은 ‘우주적’(universal)이란 뜻입니다. 같은 단어지만 로마 가톨릭교회를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다시 정리해서 말씀드리면, 누구든지 예수 믿으면 그리스도의 몸인 우주적 교회의 멤버가 됩니다. 본인이 원하든지 원하지 않든지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이런 것이죠. 육신적으로도 우리가 태어나면 독립된 존재가 아닙니다. 김氏 가문, 박氏 가문, ... 자동으로 가족의 일원이 됩니다. 피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우주적 교회는 지상에서는 한 시간 한 장소에 다 모일 수 없습니다. 장차 천국에 들어가서는 천상교회로 다 함께 모일 수 있지만, 지상에서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부득불 일정한 시간과 장소에서 성도들이 따로 따로 나뉘어 모이게 됩니다. 이게 바로 ‘지역교회’(Local Church)입니다. 예를 들어, 신반포교회가 하나의 지역교회이죠. 2011년 현재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서초구 반포2동 4-10에 모이는 지역교회입니다.
그러니까 항상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여러 지역교회들이 다른 공간과 다른 시간에 모이고 있지만, 영적으로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천국에 이미 들어간 사람들, 지구상에 흩어져 있는 성도들, 그리고 우리들보다 후 시대 종말 이전까지 지구상에 나타날 모든 성도들(과거, 현재, 미래의 성도들)까지 우주적 교회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두 가지 유의 사항을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교파(敎派 Denomination), 이단(異端 heresy)의 문제입니다. 장로교회, 감리교회, 성결교회, 침례교회, 순복음교회, 그리스도교회 등 ... 이런 것을 교파(=교단)라고 부릅니다. 교파는 쉽게 생각하면 이런 겁니다. 한 아버지에게서 태어난 자녀들이라도 조금씩 다르잖아요. 하나는 말수가 많고, 다른 하나는 말수가 많고 ... 성도들도 비슷합니다. 우리 장로교회 성도들은 대개 차분하고 정적이죠. 아멘도 잘 안 하고 ... (보세요. 잘 안 하시잖아요!) 순복음교회 성도들은 아멘을 얼마나 잘 하는지 ... 제가 순복음교회 가서 설교하는데 너무 아멘을 많이 해서 당황스럽더라고요. 그래도 나중에 적응하니까 나름대로 장점이 많더군요. 박수를 치고 혹은 치지 않고, 통성 기도 혹은 묵상 기도 ... 이런 식으로 서로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질적인 동질성이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신앙고백’이 같습니다. 그 기준이 바로 사도신경이죠. 그리고 확대하면 성경 66권(정경)입니다. 가감 없이 그대로 믿고 고백해야 정통기독교회요 우주적 교회의 멤버인 것입니다.
우리가 현실적으로는 할 수 없이 지역교회에 다니고 있지만, 사실은 그리스도의 몸인 우주적 교회가 진짜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소속된 지역교회가 잘 돼야 하지만, 다른 교회들도 잘 돼야 합니다. 다른 교파 교회들도, 한국교회 전체도, 더 나아가 세계교회가 다 잘 돼야 합니다. 이를 위해 서로 위하여 기도하고 격려하고 협력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이단은 좀 다릅니다. 사이비(似而非) 기독교입니다. 얼른 보면 기독교와 비슷한데 전혀 다릅니다. 교주를 신격화하고, 사도신경이나 성경의 내용과 다른 주장을 늘어놓습니다. 이런 자들은 그리스도의 몸인 우주적 교회의 멤버가 아닙니다. 특별히 조심해야 됩니다. 초대교회 시대부터 항상 그래왔지만, 특별히 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워질수록 이단들이 기승을 부립니다. ......등 ... 별의 별 이단들이 정통교회에 위해를 가하고 많은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습니다.
참 신기하고 기가 막힌 것은 그들의 주장을 들어보면 코미디도 그런 저질 코미디가 없는데도 멀쩡한 사람들이 넘어간다는 사실입니다. 왜 그럴까요? 아무리 지식인이라도 영적인 차원에서는 무지하고, 마귀가 교묘하게 미혹하기 때문입니다.
**지 이야기를 좀 할까요? 며칠 전 원주 시청 앞에서 데모가 있었습니다. **지 본부를 원주에 건축하려고 하니까, 시민들이 들고 일어선 겁니다. 수년 전부터 **지 측에서 처음에는 과천에 건축하려다 시민들 반대로 안 되니까, 인천에서 하려고 했는데 또 시민들 반대로 무산된 적이 있습니다. 이번에는 원주에다 건축하려고 움직이고 있습니다. **지가 본래 과천에서 시작됐기 때문에 애초부터 과천에 본부를 세울 계획이었습니다. 그 때 이런 해괴한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과천(실과 果 + 내 川)은 에덴 동산이고, 청계산은 가운데 ‘계’(溪)가 ‘시내 계’니까 시내산이라고 해석했습니다. 어찌 과천의 이름이 그렇다고 에덴 동산이 됩니까? 그리고 ‘시내’(Sinai)는 본래 히브리어로 수풀을 의미하니까 시내와는 아무 상관도 없습니다. 무료로 성경 공부를 시켜 준다며 사람들을 미혹합니다.(무료성경신학원) 그래서 혹시 외부 성경공부나 프로그램에 참여하실 분은 미리 담당 교역자와 상담 후에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처음에는 잘 몰라요. 나중에 깊이 빠지고 나면 발을 뽑기 힘듭니다. 유념하시고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홍증인회에서는 2002년 월드컵에서 한국팀이 승승장구하는 것으로 복 온 국민이 열광하는 것에 편승해서 이런 해괴한 말을 퍼뜨렸다고 합니다. 안정환, 유상철, 홍명보 선수가 골을 넣어 한국이 승리한 것을 통해 안상홍 하나님의 섭리가 밝혀졌다는 겁니다. (http://blog.naver.com/cselee59/100123624236 대전신학교 허호익 교수 논문 참조)
더욱 기가 막힌 것은 이단들은 하나 같이 정통기독교회를 가리켜 마귀 집단이라고, 목회자들을 마귀의 앞잡이라고 주장합니다. 적반하장이죠. 그러므로 영적으로 혼탁한 말세에는 좋은 교회를 선택하는 게 매우 중요합니다. 1차적으로는 정통교회를 선택해야 합니다. 2차적으로는 그 중에서도 내 신앙을 성장시켜 주고, 내 인생을 축복으로 인도해 주는 교회를 선택하면 좋습니다. 물론 지상교회는 다 불완전합니다. 그러므로 기도하면서 최선을 다하면 됩니다. 마치 결혼하는 것과 같다고 보시면 됩니다.
세상에 완전한 배우자는 없죠. 하지만 나에게 맞는 가장 좋은 배우자를 위해 기도하고 선택합니다. 그리고 일단 결혼한 후에는 어떻게 해야죠? 옆집 아저씨만 쳐다보면 안 되죠. 옛날에 선 봤던 미스터 김만 생각하고 있어도 안 되죠. 이제는 결혼한 배우자와 아름다운 가정을 가꾸어 가야 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최선을 다해 좋은 교회 선택하고, 그 후에는 더 좋은 교회 만드는 데 힘을 모아야 합니다. 그럴 때 그 교회를 통해 나 자신이 은혜와 축복을 풍성하게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게 무엇입니까? 성도의 교통입니다. 더 좋은 교회를 만들기 위해 성도가 서로 교통해야 됩니다. 그게 결국 나 자신에게 유익이 됩니다.
[2] 성도의 교통(교제) : 적극적인 멤버십
여기서 ‘교통’이란 말은 ‘교제’(fellowship, communion)를 의미합니다. 각자 성도는 지체(member)로서 적극 교회에 참여해야 합니다. 말하자면 성도의 멤버십이죠. 본문 15절~16절을 보십시오. “15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16 또 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니” 지역교회들의 모습이 혹시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할지라도 멀리 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이따금 교회들의 부정적인 모습을 보고 실망한 나머지 교회를 멀리하거나 떠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 심정은 이해가 되지만, 하나님이 싫어하시고 자기도 손해입니다.
무교회주의자들이 있습니다. 기성 교회를 혐오하고 자기들끼리 모입니다. 이 꼴 저 꼴 보기 싫다 우리끼리 속닥하게 모여서 신앙생활 하자! 이런 겁니다. 순수한 신앙을 가진 훌륭한 분들도 많지만 성경적 교회론의 관점에서 볼 때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대표적으로 우찌무라 간조(19세기 후반 일본의 신학자이며 사역자), 함석헌 선생, 그리고 김교신 선생 등이 그런 분들입니다.
여러분, 필립 얀시를 아시나요? 그는 우리 시대 최고의 기독교 작가로 그의 저작들이 한국어로 번역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고 있습니다. 그는 한때 교회의 위선과 문제점을 보고 교회를 박차고 나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후 인간은 연약하고 부족하지만 하나님의 영광이 남아있는 마지막 보루가 교회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돌아왔습니다. 교회의 부정적인 모습은 인간들의 과오일 뿐이므로 그로 인해 교회까지 부정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마치 이런 겁니다. 목욕물이 더럽다고 그 안에 있는 어린아이까지 버리면 큰일 나겠죠.
그러므로 성도라면 누구나 지역교회에 소속되어 적극적인 멤버십을 실천해야 됩니다. 그 구체적인 방법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① 각종 모임에 열심히 참석하며 은혜 받을 것 :
은혜는 한 마디로 영적 에너지입니다. 우리가 은혜를 받아야 승리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영혼이 힘을 잃으면 범사에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은혜 받는 방법은 하나님과 1대1 관계에서 경건의 시간을 많이 갖는 게 기본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한 가지는 성도들의 모임을 통해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성도들은 영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성도들이 서로에게 은혜의 전달 통로가 됩니다. 습니다. 교회의 모습이 그런 원리를 잘 보여줍니다. 엡4:15~16 “ ...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16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 ” 머리이신 예수님을 중심으로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지체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은혜를 전달해 줍니다.
이런 원리는 예수님의 포도나무와 가지 비유에도 그대로 나타나 있습니다. 요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예수님이 포도나무의 줄기입니다. 성도는 가지입니다. 그 전체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입니다. 가지는 줄기에 붙어있어야 양분과 수분을 빨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열매를 풍성히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예배와 각종 모임에 열심히 참석해서 할 때 은혜를 받습니다. 물론 개개인이 말씀과 기도로 예수님께 붙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너무 부족합니다. 장로교의 창설자인 쟝 깔뱅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인간은 본래 무지하고 나태하다. 그래서 신앙 증진을 위해 외적 도움으로 교회를 주셨고 목회자를 주셨다.”
그런데 간혹 교회의 모임이나 목회자들, 다른 성도들을 우습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정 바빠서 그렇다면, 요즘 같은 때에는 교회 홈피나 미디어를 통해서라도 부지런히 접촉해야죠. 그게 아니고 은근히 교만에 빠져서 교회 활동을 소홀히 하게 되는데, 그건 아주 위험한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혼날 짓입니다.
제가 옛날에 그랬잖아요. 회개하는 마음으로 소개해 드립니다. 대학생 때 예수님을 영접하고 너무 좋아서 열심히 캠퍼스에서 전도했습니다. 그리고 선교단체와 함께 여러 가지 활동을 했습니다. 지역교회는 수준이 낮다고 생각하고 주일낮예배에 한번 딱 참석하고 나머지 시간은 캠퍼스에서 열심을 냈습니다. 초신앙 때에 그만큼 한 것은 가상했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는 아주 시건방졌을 겁니다. 그러던 중 기도하는데 하나님이 저더러 신학교에 가서 목사가 되라는 겁니다. 너무나 기분이 나빴습니다. 공부 못하는 사람들이나 가는 신학교에 가서 수준 낮은 목사가 되라고요? 내가 미쳤어요 ... ? 반발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기도하는데, 하나님이 제 뒤통수를 탁 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야, 임마! 네가 그렇게 잘 났냐? 그럼 네가 가서 잘 하면 되잖아?” 그 말씀에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졌죠. 우여곡절 끝에 두 손 들고 신학교에 입학했습니다. 막상 신학교에 입학해서 보니까, 공부 많이 한 석사, 박사도 와 있는 겁니다. 신앙적으로도 훌륭한 분들이 얼마나 많은지! 공부는 또 얼마나 센지 과목도 수도 없이 많고 외국어도 성경원어인 헬라어 히브리어, 게다가 라틴어까지 공부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첫 학기는 정신을 못 차릴 정도였습니다. 그때 제 교만이 꺾였습니다. 교회가 얼마나 귀하고 목회자들이 얼마나 귀한지, 눈물로 기도하고 헌신하는 성도들이 얼마나 귀한지 깨닫고 많이 회개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지역교회들이 많이 부족하지만 그래도 그 교회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부어지는 것입니다. 목회자들과 직분자, 성도들을 통해 풍성한 은혜로 역사하십니다. 이 사실을 꼭 믿으시고 교회의 각종 모임에 열심히 참석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은혜 받습니다. 영혼이 살아납니다. 그러면 승리합니다. 요삼2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부디 이 말씀대로 교회를 통해 은혜 받으심으로 영혼이 잘 되시고, 세상에 나아가 승리하고 복된 인생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② 교회와 함께, 교회를 위해 기도할 것 :
교회와 함께 기도하고, 교회를 위해 기도하는 게 중요합니다. 물론 개인적으로 기도할 수 있죠. 그런데 턱없이 약합니다. 특히 우리가 어려운 일을 당하면 기도하기조차 힘듭니다. 그때 교회와 함께 기도하면 능력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약5:14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교회의 장로들은 목회자들과 신앙의 선배들을 가리킵니다. 때때로 병원 심방을 가면 우리 교우들이 거의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이상해요. 수술 받을 때 다른 사람들보다 아프지도 않고 회복도 빨이요! 교회에서 성도들이 기도 많이 해 주셔서 그런가 봐요.” 이게 바로 교회와 함께 하는 기도의 힘입니다.
그리고 평소에 교회를 위해 많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교회가 은혜로 강해져야 나도 온 성도들도 다함께 은혜를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승리할 수 있습니다.
③ 교회와 성도들을 사랑할 것 :
우리가 흔히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그 증거가 무엇일까요? 주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 그리고 주님의 사명에 충성하는 것이겠죠. 그런데 또 한 가지 중요한 게 있습니다. 교회와 성도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을 정말 사랑한다면 당연히 교회를 사랑하고 그 지체인 성도들을 사랑해야 됩니다. 말로는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교회에 무관심하고 성도끼리 서로 돌보지 않으면 모순입니다. 고전12:25~26 “25 ...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 26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정말 한 몸이라면 어떤가요? 공동운명체이며 영적인 유기체이므로 한 성도가 아프면 함께 아프다는 겁니다. 한 성도가 기쁘면 함께 기쁘다는 겁니다. 한 마디로 동고동락해야 마땅합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목회를 하면서 흐뭇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는 성도들의 애경사를 챙길 때입니다. 예를 들어 초상이 나면, 목회자와 성도들이 함께 찾아갑니다. 그러면 피차 큰 위로가 됩니다. 어떤 교우는 이렇게 말하더군요. “목사님이 오니까 친정아버지 온 것 같아요!” 저보다 나이가 드신 분이 그래요. 얼마나 위로가 되면 그럴까요? 이게 교회의 모습입니다.
요즘 신문을 보니까, 일본에서 고독사(혼자 지내다 사망하는 것), 무연사(연고자가 없이 사망하는 것)가 늘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심지어 직장(直葬 연고자가 없어 사망 즉시 화장하는 것) 같은 새로운 풍속이 생겨난다고 합니다. 존엄한 인근의 죽음이 이렇게 처리된다는 게 너무 안타깝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고독한지 말 상대조차 없습니다. 그래서 말벗 서비스(10분에 1000엔=14,000원)란 게 있다고 합니다. 못 견딜 정도로 말하고 싶을 때 전화를 거는 겁니다. 남의 나라 일이지만, 우리나라에도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죠. 그러나 교회의 멤버가 되면 이런 염려는 사라집니다. 서로 사랑하며 위로 받을 수 있습니다. 이런 사실을 명심하시고, 부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 서로 사랑하며 섬기는 아름다운 교회 이뤄 가시기 바랍니다.
④ 교회와 함께 사명을 감당할 것 :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부여 받았습니다. 목회자나 직분자들이나 선교사들만 그런 게 아닙니다. 모든 성도들이 교회와 함께 사명을 받았습니다. 주님이 오시는 날까지 복음을 전하고 온 세계에 선교하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그 일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그런데 얼마나 어려운지 몰라요. 그래서 교회와 함께 하는 겁니다. 그러면 훨씬 쉽게 할 수 있고 함께 이 땅의 축복과 내세 천국의 영광을 얻게 됩니다. 전4:9,12 “9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 12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 하느니라” 혼자서는 힘에 부쳐도 성도들과 함께 교회와 함께 하면 실패하지 않고 승리합니다. 그리고 더 큰 상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여러 사역 프로그램에 기도로 물질로 몸으로 헌신하시기 바랍니다. 거기에 축복과 영광이 있습니다.
여러분, 교회는 신앙의 센터인 동시에 인생의 센터입니다. 주님과의 개인적인 관계도 중요하지만, 교회와의 관계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이 고백을 할 때마다 교회의 중요성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는 각각 그 지체임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아무쪼록 교회를 사랑하는 자에게 약속하신 놀라운 은혜와 축복을 누리는 승리자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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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신경해설]제11강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2010. 7. 19. 18:28
◆ 거룩한 공회
사도신경이 오늘의 모습으로 형성되기까지는 상당한 시일이 걸렸습니다. 그리고 이미 말씀드렸듯이 초기에는 아주 단순했으나 점차 내용이 첨가되었습니다. A.D.341년까지 교회에서 사용하던 옛 로마 사도신경에는 ‘거룩한 공회’(the Holy Church)라고 되어 있으며, 북아프리카 지방에서 어거스틴이 중심이 되어 쓰던 사도신경에도(약400년경) ‘거룩한 공회’(Sanctam Ecclesiam)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다 6세기 이후에 와서 전통적이고 복음적인 교회를 이단 종파들과 구별하기 위해, ‘우주적, 전체적, 보편적’이란 뜻을 가진 '카톨릭'(catholic)이란 말을 ‘거룩한 공회’에 첨가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사도신경의 결정판이 A.D.750년에 만들어졌는데, 거기에는 ‘거룩하고 보편적 교회’(Sanctam Ecclesiam Catholicam; the Holy Catholic Church)로 통일되어 있습니다. 우리말 번역에는 ‘거룩한 공회’로 되어 있으나, 이 ‘공회’라는 말에는 ‘보편적 교회, 공교회’(catholic church)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 거룩한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이 몸담고 살아갈 참된 공동체에 대한 목마름이 있습니다. 특별히 그리스도인인 경우 이상적인 교회에 대한 목마름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상적인 교회 공동체를 찾기 위해 방황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세상에서 이상적인 공동체나 교회를 찾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아마 평생 그러한 공동체를 만나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사도신경에서 우리는 교회를 가리켜서 ‘거룩하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현실교회를 볼 때 교회를 거룩하다고 하기에는 수긍이 가지 않는 점이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를 거룩하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교회는 거룩하신 하나님이 세우셨기 때문에 거룩합니다. 또한 교회는 거룩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에 거룩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 모이는 회중들의 상태와 상관없이, 예수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시고, 그에게서 내려오는 거룩한 영의 양식을 먹고 사는 사람들이 모이는 공동체이기 때문에 교회를 거룩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우리가 교회에 대한 고백을 할 때, 현재의 세속화되고 분열이 극심한 교회 자체를 바라보며 충성을 다짐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고백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나아가며, 성령의 능력 가운데 있는, 본질적으로 거룩한 교회를 소망하면서 드리는 고백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신경에서 ‘거룩한 공회’를 믿는다고 고백을 할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교회로 나아가고자 하는 새로운 다짐을 하게 됩니다. 이 고백을 통해 우리는 ‘차지도 뜨겁지도 않은’ 사교 모임과 같은 수준에 안주하려는 유혹을 뿌리치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적극적으로 순종하려는 결의를 새롭게 하게 되는 것입니다.
흔히 ‘거룩’이라고 하면, 우리나라의 많은 교인들은 ‘점잖음’, ‘도덕적 완전성’ 등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신경에서 말하는 ‘거룩’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사도신경에서 말하는 ‘거룩한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부름받았으며 지금도 부름받고 있는 하나님께 속한 무리들이라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무리들에게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과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어떻게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따라서 이 과제를 얼마나 신실하게, 또 바르게 파악해서 자기 자신을 드리느냐에 따라 거룩한 교회가 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삶을 거룩하게 하기 위한 운동이 끊임없이 일어나야 하는데, 이 운동은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만 이루어집니다. 즉, 성령의 역사가 살아있는 교회가 거룩한 교회인 것입니다.
◆ 보편적 교회 또는 공회
‘보편적 교회’라는 말은 라틴어 'Ecclesiam catholicam'을 번역한 말입니다. 그런데 이 ‘카톨릭’이란 말이 문제를 많이 일으킵니다. 왜냐하면, ‘카톨릭’이란 말이 로마카톨릭교회의 대명사처럼 쓰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본래 카톨릭(catholic)이란 말은 헬라어 ‘카톨리케’를 그대로 로마자로 옮긴 것입니다. 이 말은 ‘보편적, 일반적, 우주적’이란 뜻입니다. 이 말을 사도신경에 넣은 이유는, 앞서 밝혔듯이, 초기 기독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의 원리를 멀리하고 복음의 진리를 벗어난 이단종파들과 혼란에 빠진 여러 종파들을 경고하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인이 되시는 전통적이고 복음적인 교회를 총칭하면서 사용했던 말입니다. 그리고 어떤 한 개인의 소유물이 아니며, 전세계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교회요, 전세계의 교인들이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며 하나님께 감사의 찬송을 드리기 위하여 모이는 공동체이기 때문에, 교회는 ‘보편적’ 교회라는 것입니다.
현재 세계의 기독교 교회는 크게 나누어서 세 가지가 있는데, 로마카톨릭교회(천주교)와 동방정교회와 프로테스탄트교회(개신교)입니다. 이 세 종류의 교회 가운데 어느 교회가 보편적 교회이며, 따라서 거룩한 공회일까요?
로마카톨릭교회는 그들의 교회가 진정한 ‘거룩한 공교회’라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카톨릭’이란 말이 곧 로마카톨릭교회의 대명사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이렇게 주장하는 이유는, 1)예수께서 베드로에게 그를 기초로 해서 교회를 세우겠다고 했으며, 2)그에게 천국 열쇠를 주어서 천상과 지상의 권한을 부여해 주었는데, 그 열쇠를 로마카톨릭교회가 대대로 물려받았기 때문이며, 3)로마카톨릭교회는 한번도 분열이 없이 이때까지 계속해서 하나의 교회로 발전되어 왔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동방정교회는 그들 나름의 보편성과 정통성을 주장합니다. 그들에 의하면 동방교회는 오순절(pentecost)에 의해서 만들어진 교회이며, 대다수의 제자들이 예루살렘과 인근 각처에 가서 전도하여 세워진 교회가 바로 오늘의 동방정교회의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진리를 가장 순수하게 보존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교회 이름을 동방정통교회(東方正統敎會, Orthodox Eastern Church)라고 부릅니다. 따라서 그들의 교회야말로 전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요, 예수의 제자들에 의해서 세워진 교회요, 오순절 사건에 의해서 세워진 교회이기 때문에 그들의 교회가 바로 카톨릭 교회라고 합니다.
이러한 주장에 대하여 프로테스탄트교회는 조금 다른 각도에서 프로테스탄트교회의 카톨릭성을 주장합니다. 교회의 교회성은, 그것이 지니고 있는 역사의 길이나, 조직의 견고성이나 어떤 제도의 불변성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교회를 교회로 만들고, 그 교회에 생명력을 부여해 주고, 그 교회를 통하여 신과 인간이 어떠한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교회가 수행하는 기능이 무엇인가에 매여 있다고 봅니다. 로마카톨릭교회나 동방정교회는 그들이 가지고 있다고 하는 전통성, 사도계승권, 교회제도의 견고성 같은, 외형적이고 제2차적인 중요성 밖에 없는 것에다가 그들의 카톨릭성의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프로테스탄트교회는 교회 존립의 근거요, 교회 생명력의 원천이요, 교회 기능수행의 목표가 되는 신언(神言)인 성경말씀과 복음진리에 교회의 카톨릭성의 근거를 둡니다. 다시 말하자면, 교회는 그 세력이나 역사, 조직, 구성원 등과 관계없이, 거기에 말씀이 선포되고 성례전이 집행되며, 성령이 임재하기만 한다면, 그것이 바로 교회의 카톨릭성의 불변적 요소가 된다는 것입니다.
프로테스탄트교회는 장로교회든 감리교회든, 침례교회든 성결교회든간에 이 복음을 지키고, 이 복음을 선포하고, 그리스도의 현실적인 관계성을 체험하는 하나의 의식으로서 예전을 집행합니다. 따라서 역사와 전통의 측면에서는 로마카톨릭교회나 동방정교회가 훨씬 오래된 것이 사실이지만, 저들이 순수한 말씀을 벗어나 너무나 인본적이고 외형적인 것과 제도적인 것에 치우쳐 있음을 고려할 때, 프로테스탄트교회야말로 진짜 카톨릭(보편적) 교회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를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교회는 ‘거룩하고 보편적인 교회’(거룩한 공회)입니다. 그 교회를 움직이는 힘의 원동력은 성령의 능력입니다. 우리는 세상적인 힘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 가운데 있는 교회를 믿습니다. 세상에서 성령의 능력 가운데 있는 교회는 하나님과 세상을 위해 봉사하는 교회입니다. 우리는 믿음 안에서 교회에 대한 소망을 갖게 됩니다. 우리의 소망은 교회의 크기나 재정의 풍부함에 있지 않습니다. 교회 구성원의 세련됨이나 화려함에 교회의 소망이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의 소망은 성령의 역사가 살아있는 거룩하고 보편적인 교회에 대한 소망입니다.
◆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
우리말로는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이라고 여러 단어로 되어 있으나 라틴어에서는 단 두 단어로 되어 있습니다. 즉 ‘콤뮤니오 상토룸(communio sanctorum)’입니다. 이 말은 ‘성도의 사귐’ 곧 성도가 서로 교제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사도신경에서 고백하는 ‘성도의 교제(사귐)’는 교회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교제는 공동체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교회를 떠나서는 온전한 성도의 교제가 사실 불가능합니다. 교회는 성도들의 신앙적 어머니입니다.(칼빈)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진리의 말씀을 계속 선포하시어 성도들을 영적으로 양육하십니다. 진리와 성경말씀에 대한 교육을 받게 합니다. 공동생활을 통해 신앙훈련을 받게 합니다. 성례전을 정당하게 집행함으로써 신의 은총을 계속 공급받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통하지 않고는 신앙의 양육을 받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교회를 통해 신앙훈련을 제대로 받지 못하면 신앙의 탈선을 가져오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성도의 교제는 단순히 믿는 사람들끼리 모여 인간적인 교제를 갖는 것이 아닙니다. 이 교제는,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거룩함과 그리스도의 은총 그리고 성령의 은사에 참여하는 길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공동체들은 인간이 고안해 낸 어떤 사회적 이념, 경제적 이해관계, 정치적 이념, 학연, 지연 등으로 서로 얽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더욱더 분열, 갈등, 계층 간의 적대감을 만들어 냅니다. 이 세상 공동체는 그 기반이 매우 취약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러한 사회적, 인간적 관계를 넘어섭니다. 성도의 교제는 ‘수직적’인 신앙에 그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에 어떤 방해 요인도 극복해 갈 수 있습니다.
◆ 초대교회와 성도의 교제
우리는 초대교회 공동체에서 교제의 모범을 보게 됩니다. 사도행전2:42~47을 보면, 초대교회 공동체의 몇 가지 특성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1)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들이 많이 나타났습니다. 2)믿는 사람들이 함께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했습니다. 3)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누었습니다. 4)성전에 모여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었습니다. 5)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 6)구원받은 사람이 날마다 더했습니다.
이상에 열거한 내용들은 모두 성도의 교제 가운데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만약 신앙공동체 속에서 교제가 없었다면 이러한 일들은 나타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표적, 물건의 통용, 소유의 분배, 떡을 뗌, 하나님 찬양은 외적으로 드러난 교제의 표현들입니다. 교회의 거룩성과 보편성도 사실은 성도들의 교제 가운데서 발견되는 것입니다.
‘성도’란 거룩하게 구별된 무리를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불신자들과 구별됩니다. 그런데 그 구별됨은 관계 속에서 분명히 나타나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이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것이 곧 성도의 교제입니다. 그런데 성도의 교제는 세상 사람들의 교제와는 다릅니다. 성도의 교제는 시간과 죽음을 넘어서는 교제입니다. 성도의 교제는 인간적인 계산을 넘어서는 교제입니다. 성도의 교제는 신앙 안에서 하나 곧 한 가족이 되는 교제입니다. 성도의 교제는 구원의 역사를 이루는 교제입니다.
◆ 성도의 교제 대상
먼저, 사도신경에 나타나 있는 성도의 교제는 이 세상을 떠난 성도들과의 교제입니다. 이 교제는 그들 혼과 영교하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히12:1)”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성도의 교제 가운데서 이미 영원의 시간 가운데 들어가 있는 많은 증인들을 회상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증인들이 살아간 삶의 모범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들이 닦아 놓은 영성의 길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며 살아가는 우리들의 영성 생활에 좋은 등불이 되고 있습니다. 신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세, 예언자들, 사도들은 이미 오래 전에 살았던 인물들이지만, 오히려 살아있는 사람보다 더 생생하게 우리 가운데 현존합니다. 그리고 기독교 역사에서 영원히 잊혀질 수 없는 수많은 인물들은 언제나 우리 가운데 살아 있습니다.
다음으로, 종족, 문화, 혈연, 학연, 지연을 초월해서 현재 살아 있는 성도들과 갖는 교제입니다. 유대인들이 즐겨 사용하는 비유 중에 머리 둘을 가진 어린아이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어머니가 아이를 낳았는데 몸은 하나이고 머리가 둘이었습니다.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 아이를 한 아이로 보아야 하는지, 아니면 둘로 보아야 하는지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그때 한 지혜로운 랍비가 해답을 제시했습니다. “뜨거운 물을 한쪽 아이 머리에 부었을 때, 다른 아이도 동시에 울면 하나이고, 울지 않으면 그 때는 둘로 보아야 한다.” 이 이야기는 전세계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은 어디에 있든지 하나임을 말하고자 지어낸 이야기입니다. 비록 흩어져 있지만 유대인이 고통당하면 다른 곳에 있는 유대인들 역시 그 아픔을 같이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주 안에서 하나라고 흔히 쉽게 얘기합니다. 우리는 진정으로 주 안에서 하나입니까? 얼마나 같이 아파하고 같이 기뻐합니까?
나아가 성도의 교제는 개 교회의 범주를 넘어 세계의 모든 그리스도인들과 한 하나님 아버지를 섬기는 형제자매들로서의 교제입니다. 비록 시간과 공간의 제약 때문에 서로 흩어져 있지만 어디에 있든지 우리는 주 안에서 한 형제자매입니다. 우리는 서로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서로를 위해 중보하는 기도로 영적 교통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성도의 교제는 교회라는 울타리를 넘어서 소외되고 고통받는 가난한 자, 병든 자들과 연대해 가는 교제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고 하신 것처럼 성도들의 교제는 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들과 연대해서 살아가는 것도 포함됩니다.
이러한 성도의 교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교제에는 하나님과의 교제가 포함됩니다. 그리스도인은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와의 교제 가운데 살게 됩니다. 이 교제는 이 현실 세계에서뿐 아니라 영원히 계속되는 교제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세상에 있는 그 어떤 것들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롬8:39). 하나님을 믿는다는 의미는 하나님과 교제 가운데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과 교제 가운데 있다는 것은 영원 가운데 있다는 의미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고자 합니까? 하나님과의 교제가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여러분 자신의 진정을 드리지 아니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껍데기만으로 흉내만 내어서는 결코 영생의 문을 볼 수 없을 것입니다.
◆ 성도의 교제와 성만찬
교회생활에서 성도 간의 사귐이 가장 강하게 나타나는 장소는 성만찬입니다. 이 성만찬에는 성도의 사귐의 신비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첫째, 이 성만찬은 거룩함에의 참여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희생과 성령의 임재 사건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만찬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사건을 현재의 사건으로 새롭게 경험하게 됩니다. 둘째, 이 성만찬에서 우리는 구름과 같이 허다한 증인들도 함께 참여하는 오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축제를 바라보게 됩니다. 셋째, 우리는 성만찬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형제자매들과 사귐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의 역사에서 사랑의 책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을 믿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교회 안에서 믿음의 신비인 성도의 교제가 온전히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주 안에서 이루어질 성도의 교제에 대한 소망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바로 우리 자신이 먼저 온전한 성도의 교제를 위한 썩어지는 한 알의 밀알이 됩시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삶이 바로 복된 삶의 출발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