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09.04.22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하나님 경외하기. 하나님 갈망
첨부파일 :

<여호와를 경외하라! -창세기 22:1-12>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이며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은 목사인 존 베벨이 지은 여호와를 경외하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의 서문에서 그는 다음과 같은 고통스러운 간증을 하고 있습니다.
1994년 여름, 그는 미국 남부에 있는 교회에서 집회를 인도해 달라는 초청을 받았습니다. 그 교회는 2년전 이미 하나님의 강력한 역사를 경험한 교회였습니다. 한 부흥강사가 와서 4주 동안 머물렀는데, 주님께서 임재하셨고 교회는 부흥했습니다.
교인들 중 많은 이들이 소위 거룩한 웃음을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의 목사와 신도들은 그러한 경험을 하면서 하나님을 추구하는 대신 신비한 체험을 추구하는 실수를 범했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알기보다 영적 체험들 자체에 더욱 깊은 관심을 쏟았습니다. 이것은 성령을 사모하는 이들이 범할 수 있는 가장 흔한 실수 중의 하나입니다.
그 교회에서 집회를 인도하던 둘째날 밤이었습니다. 성령님께서는 하나님을 경외함에 대해 설교하도록 존 베벨을 이끄셨습니다. 순종하는 마음으로 그는 하나님을 경외함에 대하여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날 밤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찬양과 경배순서가 끝난 후 담임목사는 사전에 어떤 협의도 없이 전 날 존 베벨이 한 설교를 고치는데 상당한 시간을 소요하였습니다. <신약시대의 성도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그 목사님이 설교를 정정하는 요지였습니다.
그 목사님은 자기 주장의 근거로 요한 일서 4:18절 말씀을 제시했습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
애석하게도 그 목사님은 '두려움의 영'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혼동하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이 목사님뿐 아니라 오늘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두려움의 영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 사이를 혼동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에게 두려움의 영을 주시지 않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딤후 1:7)>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성경에는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여호와의 신 곧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그 위에 강림하시리니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사 11:2-3) >

하나님은 우리에게 두려움의 영을 주시지 않고 양자의 영을 주십니다(롬 8:15). 그런데 성경에 의하면 그 양자의 영이 바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고, 그 신이 우리에게 임하면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 변화된다고 말씀해줍니다. 행여라도 이 말씀이 구약성경에 기록되어 있으므로 구약 시대 사람들에게만 해당한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사 11:1)>라는 말로 시작되고 있는 이 예언은 바로 우리 주 예수님께 대한 예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 임한 성령님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었고 실제로 예수님은 여호와를 경외했습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히 5:7)>
보십시오. 예수님조차도 하나님을 경외했습니다. 성령을 이사야 선지자가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라고 부른 것을 볼 때 성령님 역시 하나님을 경외했습니다.
그렇다면 성령님과 예수님 조차도 경외하는 여호와 하나님을 우리가 경외하는 것이 무엇이 이상합니까?  만약 우리는 신약시대에 사는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신성 모독에 가깝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해야 합니다.

성경에는 무서워하는 종의 영에 사로잡히는 것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매우 결정적인 증거가 있습니다.
<뭇 백성이 우뢰와 번개와 나팔소리와 산의 연기를 본지라. 그들이 볼 때에 떨며 멀리 서서 모세에게 이르되 당신이 우리에게 말씀하소서. 우리가 들으리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말게 하소서. 우리가 죽을까 하나이다.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두려워 말라. 하나님이 강림하심은 너희를 시험하고 너희로 경외하여 범죄치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출 20:18-20) >
이 말씀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두려워하지 말라.라고 외쳤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오늘날 많은 목회자들과 성도들의 사상이 바로 여기에서 멈추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모세의 말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곧바로 <하나님이 강림하심은... 너희로 경외하여 범죄치 않게 하려 함이니라>라고 말했습니다.
즉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지만 하나님을 경외해야 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 사이의 구분을 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지는 않았습니다. 반면에 모세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는 않았지만 하나님을 경외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똑같은 조건에서 광야를 통과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끊임없이 우상을 숭배하고 주를 시험하고 간음하고 원망하다가 멸망 받고, 모세는 하나님께 충성한 이유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두려움을 본받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모세에게 있었던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은 반드시 본받아야 합니다.

구약 성경에 나오는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경외했습니다. 구약에 보면 하나님을 경외했던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나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배움에 있어서 아브라함 보다 더 좋은 모델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께서 직접 시험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시험에 당당히 합격하여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 22:12)>라고 하나님께서 인정한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의 생애만큼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의 중요성에 대하여 그렇게 실제적이고 폭넓은 교훈을 담고 있는 사람은 드뭅니다. 그러므로 오늘은 아브라함의 생애를 통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에 대하여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1. 참된 믿음의 소유자는 아브라함처럼 여호와를 경외합니다.
저는 존 베벨 목사님이 지은 여호와를 경외하라는 책을 읽으면서 많은 면에서 공감을 느꼈습니다. 제가 가장 공감한 대목은 '은혜'와 '믿음'에 대한 그의 설명이었습니다. 놀랍게도 그는 내가 평소에 설교하고 주장해온 그대로의 주장을 그 책에서 하고 있었습니다.
먼저, '은혜'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난 이삼십년 동안 많은 교회들이 가르치고 믿어 온 은혜는 진정한 은혜가 아니라, 왜곡된 은혜이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를 게을리 하고 하나님의 선하심만을 지나치게 강조한 결과이다... 수많은 대화 속에서 그리고 많은 강대상에서, 나는 많은 신도들과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모든 것을 포장하여 불순종을 변명하는 것을 들어왔다. 은혜는 우리의 공로 없이 얻은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덮어주기는 하지만- 그러나 우리가 배운 대로는 아니다. 그것은 '변명'이 아니라 '권능'이다... 비록 은혜가 덮기는 하지만, 단지 은폐하는 것만이 아니다. 은혜는 우리가 하나님의 권위에 순종하고 경건한 삶을 살도록 해주고 능력을 준다.
이것은 평소의 저의 주장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그는 자기 주장의 근거로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히 12:28)>라는 말씀을 인용했습니다. 그러나 평소 저는 은혜에 대해 설명할 때 이 말씀보다 고린도전서 15:10절<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이나 디도서 2:11-15절<*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하지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너는 이것을 말하고 권면하며 모든 권위로 책망하여 누구에게서든지 업신여김을 받지 말라> 말씀을 즐겨 인용하는 편입니다.
다음으로, 그는 '믿음'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언어에서 '믿다'라는 단어는 무엇의 존재를 정신적으로 인정하는 것으로 축소되었다. 사람들은 감정적으로 감동을 받아서 회개의 기도를 드리지만, 곧 그들이 있었던 불순종의 길로 되돌아간다. 그들은 자신들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결여된 감정적인 구원을 믿으며, 계속 자신들을 위해 살아가고 있다. 그들이 믿기는 한다.- 그러나 성경은 말한다.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 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약 2:19) >마음이 바뀌지 않고 행동의 변화가 없을 때에 예수님을 인정하는 것이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성경은 '믿다'라는 단어에 매우 다른 뜻을 반영하고 있다. 그것은 예수님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보다 더 크다. 그것은 그분의 말씀과 뜻을 순종한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이것이 히브리서 5:9절을 설명해준다.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믿는 것은 순종하는 것이고, 순종한다는 것은 믿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증거는 그에 부합하는 순종이었다. 그는 귀중한 아들을 하나님께 드렸다. 아브라함에게는 아무 것도, 심지어 그의 아들일지라도,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보다 더 소중하지 않았다. 이것이 진정한 믿음이다. 이것이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롬4:16)으로 존경받는 이유다. 이와 같은 믿음과 은혜의 증거를 오늘날 우리 교회에서 보고 있는가? 우리는 어떻게 속아왔는가?
존 베벨은 믿음은 곧 순종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히브리서 5:9절 말씀을 사용했지만 저는 주로 히브리서 3:18-19절 말씀을 사용합니다.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냐 곧 순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에게가 아니냐 *이로 보건대 그들이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 > 어쨌든 저는 은혜와 믿음에 관하여 제가 평소에 가르쳐 온대로 이렇게 정확하게 주장하는 사람을 본 일이 없는데, 특히 은혜에 있어서 더욱 그렇습니다.
저는 존 베벨의 은혜와 믿음에 관한 통찰력 있는 설명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런데 저는 그의 책을 계속 읽어가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그분에게 순종하는 것이다>라는 새로운 그의 믿음의 정의에 대해 읽게 되었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저는 이 말의 후반부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러나 전반부에 나타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라는 설명은 난생 처음 들어보는 믿음에 대한 새로운 정의였습니다.
처음에 저는 고개를 갸우뚱했습니다. 그러나 열린 마음으로 그 책을 읽어본 결과 그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 왜 그 말이 사실인지 여러분에게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아브라함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었습니다(롬4:1-3). >그런데 야고보는 아브라함에 대해 이렇게 썼습니다.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 것인 줄 알고자 하느냐?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이에 경에 이른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약 2:21-24)>
이처럼 아브라함이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은 아니나 그렇다고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행함이 있는 산 믿음의 소유자였으며 그가 보여준 순종이 곧 그의 믿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순종적인 믿음을 증명해주는 사건이 본문에 나옵니다. 바로 야고보가 예로 든 그 사건입니다. 그리고 본문에서 천사는 아브라함에게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 22:12)>라고 말했습니다.
이로 보건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참으로 구원 얻는 참 믿음의 본질적인 속성 중 하나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그분에게 순종하는 것이다... 우리가 구원받은 지가 얼마나 오래 되었든지 간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은 여전히 불타올라야 한다. 사실, 그것은 구원받음의 핵심적인 요소이다라고 주장한 존 베벨 목사님의 주장은 지극히 성경적인 진리입니다. 여러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이처럼 근원적으로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자 그러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에는 각각 소극적인 면과 적극적인 면이 있습니다. 그것을 알기 쉽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죄를 멀리하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잠 3: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잠 8:13)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인하여 악에서 떠나게 되느니라.(잠 16:6)
다음으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라는 책을 쓴 조이 도우슨 여사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에 대해 이렇게 썼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순종과 직접 관련이 있다. 아브라함이 여호와의 음성을 듣고 이에 순종해 아들인 이삭을 죽이려는 찰라 천사가 아브라함에게 말하였다.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로 아노라.'(창22:12)...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생활이라 하는 것은 곧 하나님께 대하여 즉시, 기쁘게,  온전히 순종하는 것을 말한다.
지혜자 솔로몬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전 12:13) >이와 같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에서 떠나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
끝으로 하나만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서론에서 저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과 경외하는 것, 이 둘이 서로 다르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언뜻 보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거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거나 그게 그거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둘은 서로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그것은 다음 두 가지의 비교를 통해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먼저, 우리는 예수님과 사탄을 서로 비교해 봄으로써 그 차이를 인식할 수 있습니다.
사탄은 하나님을 두려워할까요? 두려워하지 않을까요? 성경은 사탄이 하나님을 두려워한다고 말씀합니다.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약 2:19) >
이처럼 사탄도 하나님을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사탄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탄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복종하지 않습니다.
사실 야고보서 2:19절 말씀은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의 소유자를 꾸짖기 위해 기록된 말씀입니다. 따라서 사탄이 만일 하나님께 복종한다면 여기서 그를 예로 들 수는 없는 것입니다.
사탄과 달리 우리 주 예수님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는 않았지만 경외했습니다. 그리고 사탄과 달리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별개입니다.
다음으로,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을 비교해 보아도 둘 사이의 차이를 알 수 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을 경외했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했습니다. 이것은 광야 생활 중에 보인 그들의 대조적인 반응에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에게 눈에 보이는 유익이 있는 한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그러나 괴롭거나 더이상 유익이 없다고 생각되면,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쓰디쓴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그들은 이전 생활과 현재의 상태를 재빨리 비교했습니다. 언제든지 한 쪽이 기울어지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돌아가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기 보다는 안락함을 원했습니다.
어디 한번 그들의 행적을 따라가 볼까요? 수세기 동안 이스라엘은 애굽의 압제로부터 구해 달라고 기도하며 부르짖었습니다. 그들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를 갈망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냈습니다. 모세는 바로 앞에 나아가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놓아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바로는 오히려 백성들의 노역을 가중시켰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음과 같은 말로 모세와 아론을 원망했습니다. <너희가 우리로 바로의 눈과 그 신하의 눈에 미운 물건이 되게 하고 그들의 손에 칼을 주어 우리를 죽이게 하는도다. 여호와는 너희를 감찰하시고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출 5:21) >
또, 출애굽 이후, 바로의 마음이 다시 완악해져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추격하였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시 이렇게 불평했습니다. <애굽에 매장지가 없으므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뇨?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내어 이같이 우리에게 하느뇨?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고한 말이 이것이 아니뇨? 이르기를 우리를 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뇨?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출 14:11-12) >
얼마 후 하나님이 바다를 가르셔서, 이스라엘 자손들은 마른땅을 건넜고 그들의 압제자들이 바다 속에 수장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송축하고 그분 앞에서 춤을 추며 찬양했습니다.
그들은 다시는 그분의 선하심을 의심하지 않으리라 확신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마음을 몰랐습니다. 또 다른 시험이 닥치자 불신앙이 다시 드러났습니다. 겨우 삼일 후에 쓴 물이 아니라 단물을 원한다며 그들은 불평을 쏟아 놓았습니다(출 15:22-25).
며칠이 지나고 이스라엘 자손들은 다시 양식이 부족하다고 불평해댔습니다.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았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하여 내어 이 온 회중으로 주려 죽게 하는도다.(출 16:3)>
다시 이스라엘 족속들은 마실 물이 없다고 불평했습니다. <거기서 백성이 물에 갈하매 그들이 모세를 대하여 원망하여 가로되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생축으로 목말라 죽게 하느냐?(출 17:3)>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려움을 만날 때마다 거듭거듭 불평을 해댔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좋아 보이면 하나님의 말씀을 지켰습니다. 그러나 만일 순종이 고난을 의미하면, 재빨리 돌아서서 불평을 했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왜 이 모양입니까?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한편, 하나님을 진심으로 경외한 자였던 모세의 반응은 그들과 판이했습니다. 우리가 잊고 사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모세 역시 이스라엘이 당한 모든 고난에서 예외가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이라.(히 11:24-26) >
이와 같이 모세는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과 함께 고난을 당했습니다. 이스라엘이 목말랐을 때 모세도 목이 말랐고, 이스라엘이 배가 고팠을 때 모세도 배가 고팠습니다. 가나안으로 가는 길이 험했을 때 모세 혼자 말을 타고 가거나 편안히 가마에 실려간 것이 아닙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이 당한 모든 고난에 동참한 자입니다. 그런데 모세가 불평한 적이 한번이라도 있습니까? 한번도 없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그들은 모두 똑같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습관적으로 걸핏하면 불평한 이스라엘 백성들과는 달리 단 한번도 하나님께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단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와 진심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의 차이점입니다
.

마지막으로 아주 중요한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것은 방금 말씀드린 이스라엘 백성이 우리들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들의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그러나 저희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신고로 저희가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그런 일은 우리의 거울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저희가 악을 즐겨한 것 같이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저희 중에 어떤 이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간음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간음하지 말자. 저희 중에 어떤이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시험하지 말자. 저희 중에 어떤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고전 10:1-11) >
6절에서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이 우리의 거울이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상숭배하는 자신, 간음하는 자신, 주를 시험하는 자신, 원망하는 자신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회개해야 합니다.
11절에서 바울은 다시 이스라엘 백성이 <우리에게 거울이 되고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되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으로 자신을 비추어보고 경계를 받고 회개하여 참으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 변화받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2.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만이 하나님의 시험을 통과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시험을 치러 보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학교 시험, 입학 시험, 자격 시험, 승진 시험, 면허 시험, 사법고시, 행정고시 등 여러 종류의 시험들이 있습니다.
만약 시험을 준비하는 일이 힘들고 어렵다고 하여 그것들을 피해 간다면 그 사람은 사회의 낙오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시험에는 이와 같은 세상적인 시험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영적 시험도 있습니다.
영적 시험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주시는 시험이고, 다른 하나는 마귀가 주는 시험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시험은 헬라어로 '도키마조'라고 하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상을 주시기 위해서 하는 시험을 말합니다.
이러한 시험은 마치 입학시험과 같아서 시험을 치를 때는 괴롭고 힘들지만 일단 시험에 합격하고 나면 큰복이 됩니다. 반면에 마귀가 주는 시험은 '페이라조'라고 하는데 마귀는 우리를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기 위하여 시험을 가져다줍니다.
페이라조의 시험은 외부로부터 다가올 때도 있지만 대부분 내부에서 솟아나는 정욕을 통해 일어납니다. 바꾸어 말해서 페이라조의 시험은 인간이 내부에서 발생하는 죄의 유혹을 가리킵니다.
이런 것은 마귀가 주는 시험입니다. 절대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시험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악의를 가지고 인간을 시험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의의 하나님이시며 지극히 거룩하십니다.
하나님의 속성상 하나님이 인간을 죄악에 떨어뜨리기 위해 시험하신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3-15)>라고 말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창 22:1) >여러분, 누가 아브라함을 시험했습니까?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시험받을 때 시험한 자는 마귀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실 때 시험한 자 역시 하나님이 아니라 원수 마귀였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친히 아브라함을 시험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와나 예수님이 당한 시험은 페이라조의 시험이지만 아브라함이 받은 시험은 도키마조의 시험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과연 믿음의 조상이 될 자격이 있나 없나? 를 알아보시기 위해 친히 베푸신 시험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시험 결과에 따라 아브라함에게 굉장한 복이 될 수 있는 복된 시험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시험을 받을 때에 자기가 시험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까요? 몰랐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하고 살아가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능력을 받을 자격이 있나 없나?' '축복을 받을 자격이 있나 없나?' '높임을 받을 자격이 있나 없나?'를 알아보시기 위해 우리를 시험해 보실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미래가 우연이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바로 시험 성적이 우리의 미래를 좌우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도키마조 시험에 합격하여 우리를 위하여 예비해놓으신 것들을 능히 받고 누리기 위하여 하나님이 베푸신 시험에 수석으로 합격한 아브라함을 공부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아브라함은 75세 때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아들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남부러울 것이라고는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엄청난 재산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아내를 가지고 있었고 충성스러운 종들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아들이 없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께서 아들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아들을 곧 주실 줄로 알고 학수고대하며 기다렸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쉬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25년이 지나서 그의 나이가 100살이 돼서야 그 약속은 이루어졌습니다. 100세의 아브라함이 아들을 낳은 것은 말 그대로 기적이었습니다. 그는 기적으로 얻은 아들 이삭을 끔찍이 사랑했습니다.
이삭이 자라면서 아브라함과 이삭 사이의 정은 더욱 깊어졌습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자기 목숨보다도 소중하였습니다. 그의 엄청난 재산도 이 아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이 주신 이 아들 보다 귀하지 않았습니다.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 22:1-2) >
여러분, 이 말을 들었을 때 아브라함이 받았을 충격을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그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어려운 일을 요구하시리라고는 꿈에도 상상해본 일이 없었습니다. 그는 정신이 아득해졌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의 목숨보다도 더한 것, 즉 그의 마음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만일 아브라함이 이 시험을 통과하면, 다른 모든 시험도 통과할 것임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로 시험하시지 않고 이 한 가지로 아브라함의 모든 것을 시험하려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는 순종하던가 아니면 불순종을 선택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불순종은 이 위대한 믿음의 사람에게 고려의 대상조차 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경건한 경외심으로 가득 찬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아브라함의 반응에 감동을 받습니다.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창 22:3)> 그는 사라와 아들에 대해 논의하지 않았습니다. 주저함도 없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순종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에게는 언약의 아들 이삭보다 더 소중한 것이 딱 한 가지가 있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삭의 아버지이기 이전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였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삼일간의 여정을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에게 앞으로 무엇을 해야하는 지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주었습니다. 만일 그에게 조금이라도 흔들림이 있었다면, 이 기간동안 그것이 드러났을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여러분이여, 이 점을 꼭 기억하도록 하십시오. 하나님의 시험에 합격하는 것은 베드로가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에도 가기를 예비하였나이다>라고 말한 것처럼 즉흥적이거나 충동적인 결단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충동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하고 난 후에 후회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습니다. 이런 것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칠 때 하였던 순종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순종은 흔들림이 없는 확고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아브라함처럼 충동적인 순종이 아닌 확정적인 순종을 할 수 있을까요?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가라사대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사자가 가라사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 22:11-12)>
이 말씀에 드러나듯이 아브라함의 순종의 뿌리는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시험에 합격하려면 시험을 치르는 그 시간에만 정신을 바짝 차리면 되는 것이 아니라, 평소에 열심히 공부하고 숙제를 잘 해감으로써 실력을 닦아두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주시는 시험 역시 시험을 치르는 그 시간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평소에 얼마나 하나님을 경외하고 자기의 몸을 쳐서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시켜 왔느냐가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에 따라 시험 당할 때의 우리의 반응이 결정되며, 시험에 합격 불합격 여부가 좌우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여러분께 묻겠습니다. 어제 여러분은 어떻게 하루를 보내셨습니까? 어제 여러분은 하루를 살면서 크고 작은 유혹을 받았을 것입니다. 과연 그 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그 유혹들을 요셉처럼 단호하게 뿌리쳤습니까?
그리고 지난 한 주간동안 여러분은 어떻게 사셨습니까? 과연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일주일을 사셨습니까? 학생들의 경우 꼭 대학 입학시험을 치러 보아야만 그가 합격할지 불합격할 지를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반에서 혹은 전교에서 1-2등 하는 학생이 시험에 떨어질 리는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경외하여 모든 악에서 떠난 자인 욥의 경우 그는 어떤 시험에도 승리할 것을 이미 하나님께서 알고 계셨습니다. 아브라함처럼 욥도 시험받는 그 순간만 하나님을 경외한 것이 아니라 시험받기 전에 이미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였습니다. 그래서 현재의 나의 모습이 중요하고 매 순간 순간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이 사실을 기억하고 날마다 하나님을 경외함으로써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더욱 키워나가도록 합시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한 것처럼 어느 날 우리를 시험하실 때 시험에 합격하여 하나님이 예비하신 복을 받아 누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3. 하나님의 친구가 되려면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가 돼야만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친밀함에 대해 다소 위험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을 향해 기도나 찬양 중에 아빠!라고 서슴지 않고 부르는 일부 청년들의 경우처럼 하나님께 격식을 차리지 않고 마치 육신의 아빠를 대하듯 그렇게 거리감 없이 대하는 것이 하나님을 향한 친밀함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해 아빠라고 부른다고 하나님과 친밀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진짜 하나님과의 친밀함은 그런 인간적인 표현을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통해서 얻어집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하나님과 각별히 친밀했던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을 경외했던 사람들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욥은 고난 당할 때에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며 다음과 같이 고백했습니다.
<내가 이전 달과 하나님이 나를 보호하시던 날에 지내던 것 같이 되었으면― 그 때는 그의 등불이 내 머리에 비취었고 내가 그 광명을 힘입어 흑암에 행하였었느니라. 나의 강장하던 날과 같이 지내었으면― 그 때는 하나님의 우정이 내 장막 위에 있었으며 그 때는 전능자가 오히려 나와 함께 계셨으며...(욥 29:2-5)>
이와 같이 욥의 장막 위에는 하나님의 우정이 깃들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욥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난 자(욥1:1)>였습니다.
아브라함에 대해 하나님은 <나의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창 18:17)>라고 말씀하셨고, 성경은 그를 하나님의 친구 혹은 벗이라고 칭하고 있습니다(대하 20:7, 약 2:23) 그런데 아브라함도 본문에 나타난 대로 진심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였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람 모세에 대하여 <사람이 그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출 33:11)>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모세 역시 진심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였습니다. 이와 같이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이 하나님과 가장 깊은 우정과 친교를 나누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하나님과 친밀해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마음의 정결을 사모하는 자의 입술에는 덕이 있으므로 임금이 그의 친구가 되느니라.(잠 22:11)>
이처럼 오직 마음이 깨끗한 사람만이 하나님의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친구가 되려면 마음이 깨끗해져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깨끗해질 수 있습니까?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고후 7:1) >
이와 같이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만이 자신을 깨끗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친구가 되려면 하나님을 경외해야 합니다.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요 15:14)>
이 말씀 역시 동일한 진리를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친구가 되려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런데 본문에 나타난 아브라함의 순종이 보여주듯이 순종은 곧 경외함의 결과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야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친구가 되려면 하나님을 경외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야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가장 직접적인 성구는 앞의 두 구절이 아니라 시편 25:14절 말씀입니다.
<여호와의 친밀함이 경외하는 자에게 있음이여 그 언약을 저희에게 보이시리로다.(시 25:14) >
여러분, 이 이상 무슨 증거가 더 필요합니까?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친교에 없어서는 안될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한편, 우리는 이 말씀이 아브라함의 생애에 그대로 이루어진 것을 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였습니다. 그 결과 아브라함에게는 여호와의 친밀함이 있었고, 하나님께서는 그 언약을 아브라함에게 보여주셨습니다.
먼저, 아브라함에게는 여호와의 친밀함이 있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두 도시를 불과 유황으로 심판하시기 직전의 일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창 18:17)>라고 말씀하시고, 아브라함에게 소돔과 고모라 위에 드리워진 심판에 대해 미리 말씀해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곧 중재에 나섰고 의인들의 생명을 구해주실 것을 간청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심판의 손으로부터 다른 사람들의 생명이 보존되기를 간구했습니다. 우리는 이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오직 친구만이 심판을 수행할 권력이 있는 왕이나 재판관에게 그렇게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종이나 신하가 그러한 탄원을 했다면, 불경하게 여겨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탄원하여 소돔과 고모라를 구할 수 있는 의인의 숫자를 50명에서 10명까지 끌어내렸습니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였고 하나님의 친밀하심이 아브라함에게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아가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당신의 언약을 보여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시험에 만점으로 합격한 직후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당신의 새로운 면을 보여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수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렸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수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창 22:13-14)>
이와 같이 하나님은 여호와 이레로서의 하나님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뜻은 <여호와께서 예비하신다>라는 뜻입니다. 아담 이래로 아무도 하나님을 이렇게 깊게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당신의 벗 아브라함에게 당신의 마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아직 비밀이었던 그분의 마음과 성격을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예외적으로 보여주셨습니다.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언약을 아브라함에게 다시 한번 밝히 보여주시며 확고하게 하셨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두 번째 아브라함을 불러 가라사대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창 22:15-18) >
사랑하는 여러분, 이 세상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하나님과 더욱 친밀하여지고 그분을 더욱 깊이 알아 가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이것은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였던 하나님의 사람 다윗이 가장 소망한 것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시 42:1)>
가장 위대한 사도였던 바울 역시 같은 소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빌 3:10-11)>
그런데 이러한 소망은 오직 하나님을 경외함으로써만 이룰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친밀하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존 베벨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의 시작이며, 출발점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우리 안에 굳건히 뿌리내릴 때까지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그리고 우정이 시작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합시다. 그래서 하나님과 더욱 더 친밀하여지고 주님을 더 깊이 체험하고 알아 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결론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거듭난 사람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모시게 됩니다(갈 4:6-7).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모든 육체의 심판자로서의 하나님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히 12:23). 하나님은 이 점을 명확히 하셨습니다.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시리라.(히 10:30)>
바울은 로마서에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보라(롬 11:22)>고 외쳤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교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라는 교훈과 균형을 이루지 못할 때 문제가 생깁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경외함이 하나님을 사랑함과 균형을 이루지 못할 때 같은 결과가 발생합니다. 우리에게는 둘 다가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느 한 진리가 아니라 둘 다를 붙잡아야 하며 불균형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경외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대부분의 설교자들은 지나치게 하나님의 사랑만을 전합니다. 그 결과 우리는 세상이 아닌 교회에서 하나님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수많은 무리들을 볼 수 있습니다. 존 베벨이 잘 지적한 대로 놀랍게도 교회의 어떤 사람들보다도 사탄이 더 떨고 있습니다.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 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약 2:19)>
이 말씀은 구원받았다고 말하지만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대한 야고보 사도의 경고입니다. 오늘날도 교회 안에 자신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미 말씀 드린 대로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자는 참된 믿음의 소유자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대단히 심각한 문제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꼭 알아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과 한 도를 주어 자기들과 자기 후손의 복을 위하여 항상 나를 경외하게 하고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기 위하여 그들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는 영영한 언약을 그들에게 세우고 나를 경외함을 그들의 마음에 두어 나를 떠나지 않게 하고...(렘 32:39-40) >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한 때 하나님을 열심히 믿다가 하나님을 떠납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 의하면 그 이유는 그들의 마음속에 기독교의 진리를 믿는 믿음은 있었을지 모르나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결코 하나님을 떠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떠난다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에게는 전혀 고려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참 구원을 받고 그리고 끝까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느냐 아니냐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참 신자가 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또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일평생 하나님을 섬기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영혼의 구원과 안전을 위해 사활적으로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나를 경외함을 그들의 마음에 두어>라는 약속의 말씀을 부여잡고 <하나님이여, 나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주옵소서. 저로 하여금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로 만들어 주옵소서>라고 간절히 부르짖어 기도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일을 하나님의 방법대로 하시도록 신뢰하는 그 백부장의 믿음과 같은 큰 믿음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눅7:9> 누가는 로마군 백부장의 “큰 믿음”에 대해 말합니다.  백부장은 제일 먼저 예수님께 병으로 죽어가는 그의 종을 고쳐달라고 간구함으로써 그의 믿음을 표현하였습니다.  그런다음 그는 예수님은 언제 어디서나 그의 종을 치유하실 수 있다는 고백을 함으로써 그의 믿음을 표현하였습니다.  그 백부장은 자기 생각과 방법대로 해달라고 예수님께 요구하지는 않았습니다.
“응답되지 않은” 기도에 대해 우리가 흔히 듣는 설명은 우리에게 충분한 믿음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누가복음 17장 6절에서 우리에게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다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라고 명령하면 그것이 우리에게 순종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기도의 효력은 우리에게 믿음이 얼마나 있느냐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진정 믿음 자체가 있는지 없는지에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주께서 오늘 우리에게 물으시며 약속하십니다.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눅8:22-25, > <여호와의 손이 짧아졌느냐. 민11:13-23>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마8:5-13>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시81:7-13>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사 9:1-7>
믿음은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님의 권능에 대한 무한한 신뢰”라고 풀이됩니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때때로  응답되지 않은 기도들은 단순히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우리의 소원을 그대로 들어주지 않는 경우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주께 구하는 것이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인지 아닌지를 가장 정확하게 아시는 분이십니다. 어쩌면 우리의 원하는 그 시기가 하나님의 때가 아니거나, 우리의 믿음과 성품의 연단 등 어떤 더 큰 목적을 하나님께서 마음에 두고 계시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당신의 사정을 다 아뢰신 연후에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눅 22:42)라고 기도하신 것을 기억합시다... 때때로 내 믿음이 연약하다고 느껴지는 때엔, 잠잠히 하나님앞에서 돌이켜 생각해보아 주님의 뜻에 순종하지 못한 것이 여전히 남아있다면 주님의 뜻에 재빨리 순종하는 편을 택하는 것이 오히려 현명합니다. 빌 존슨은 이렇게 겸손히 고백합니다. <...내 안에서 믿음을 찾아보기 힘들어서 나는 재빨리 순종하는 편을 택합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닮아가도록 우리에게 주신 거룩하신 하나님성품의 연단을 위해 허락하신 삶속의 시련이 닥쳐오는 때마다, 그것을 이겨내는데 필요한)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약 1:5-8> --이는 지혜에만 국한되지 않고, 어떤 것이든지 주께 모든 것을 구하는, 한없이 너그러우시고 자비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에 대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고후1:3-6>3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4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5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6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하나님이 성도에게 예수닮기 위한 성화의 과정으로서 반드시 필요한 삶의 시련을 주실 때는 더불어 위로도 함께 베풀어 주십니다.. 하나님의 위로를 받은 우리는 또한 그 위로로 힘든상황가운데 있는 다른 이들을 위로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합니다.

 

###하나님을 갈망하는 사람

하나님을 갈망하는 사람[God Chaser]
주님이 그러하시듯 주님을 참되게 알고 사랑하며 높여드리며 섬기고자 하는 열정에 사로잡힌 사람.
영적 굶주림과 목마름으로 ‘하나님 임재와 동행, 누림’을 간절히 소망하는 사람.
그분을 잡고자, 또 그분께 잡히고자 왕이신 하나님을 구하고 찾고 두드리며 끊임없이 추구하며 좇는 사람.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고 볼 수 없는 것을 본 이들, 그 후 하나님 외에 그 어떤 것으로도 만족할 수 없는 사람.

-토미 테니의 ‘하나님 당신을 갈망합니다’ 중에서-

하나님을 갈망하는 사람은 곧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그 마음을 배우며 그분이 먼저 가신 믿음의 길을 따라 자신 또한 걸어가길 원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생명의 말씀을 사모하고 그의 음성에 귀 기울이는 사람.
빠르게 변하는 세상 속에서 길을 잃지 않고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바라보는 순전한 사람.
하나님은 오늘도 그런 사람을 찾으십니다.



===주께서 내맘에 두신 7가지 갈망(Q의 갈망=자녀의 갈망...곧 상호갈망/열망)===

[[열납]]아버지의 열납하시는 자, 사랑-기쁨이신  JC처럼, 내가 또한 바로 그분의 사랑, 기쁨과 즐거움 됨---내가 하나님의 영원한 즐거움의 대상임을 참되게 알기 원함

[[매료-매혹-황홀....영광체험]]영광체험 통해 그 경이로운 아름다움을 날마다 경험 ---넘치는 경이감에 매료/매혹되기 원함

[[열정과 어떠하심...Q알기]]하나님의 어떠하심과 [올인]하시는 무한한 사랑의 열정 바로 그대로 반응---전심으로 Q 추구/열정을 쏟아 붓기 원함

[[JC 바라기/빼어닮기]] 하나님의 어떠하심에 합당한 파트너/신부로서의 거룩한 아름다움에 도달/소유하기 원함

[[하나됨/연합/헌신-친밀]]하나님과 완전한, 친밀한 연합 이룸 --부끄러움 없는 친밀함으로 하나됨 원함

[[생명 확장/영적 아비-어미로서 생명 낳기]]바로 그렇게 그 비밀/사랑을 땅끝까지 전파하여 주께 돌이키고 JC의 몸에 참여케 함---지복직관/지고지선/진복의 영향과 능력 공급하기 원함 

[[유일무이, 독특한 영원한 기념]]예비하신 하나님의 뜻(계획, 안배, 섭리) 그대로 온전히 이룸 ---참된 영적 성취 원함


=====[JC안에서 믿는이 각사람의 위치와 지위]===JC.하나님의 말씀(생각 + 발설된 말씀 그자체..메시아/구원자/그리스도 = memra)========
a beloved  =사랑받는/총애하는(특별히 사랑하는) ... a favorite child/friend.(늘)마음에 있고/흐뭇한/마음에 쏙 드는 자녀/절친(필레..목숨까지)/형제(아흐..한태에서 태어난)... a darling.(아헤브-도드....유일한 배필)사랑하는 연인/신부
...하나님의 품안에 있는 JC처럼 사랑과 기쁨인 총아/기린아/사명자[믿는 이는 각자가 하나님앞에서 단독자로서 그러함을 고백하고 그렇게 살기를 결단해야 함....이들이 바로 하나님나라, 백성, 새예루살렘, 그리스도의 신부, 어린양의 아내인 교회를 이루는 성도임] ...***총아 : 모든 피조물 중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사랑과 기대[총애...은총]을 받는 자요 마침내 나타나, 자유케 해 주기를 만물이 고대하는 자....하나님자신이 JC의 십자가/부활로 낳으신 바, 특별히 사랑하는 자녀-백성.....***기린아(하나님 경외하기-하나님과 동행하기를 배워 실행함으로써, 곧 JC를 믿는 믿음안에서 하나님이 부어주신 HS을 통해 친히 이루어 가시는 바, 지혜/총명/-슬기/재능/권능이 탁월하여 하나님 뜻하신 바를 십자가의 길을 따라 이룰, 장래가 촉망되는 아이)....***사명자(하나님이 맡기신 시대적 소명을 깨닫고 실행하는자....하나님을 맛봄/누림--하나님을 체득/성장성숙--모든 피조계를 섬기며 다스리시는 하나님께 참여!!)
이전글 : 경외와 경건
다음글 : 2010캄선약제목록 두루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