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외와 경건>- JC께서 보이신 그대로 Q의 뜻(Q경외하시는 그분의 모든 어떠하심에 있어서 그 장성한 분량의 충만에 이르도록, 사랑 믿음 인내 온유 의를 이룸, 이것이 참 가르침, 유일 무이한 절대 종교의 의미임 Do You have special current of burning fire-like Devine energy from the Lord? #<시 25:12-14>12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 누구뇨 그 택할 길을 저에게 가르치시리로다 13 저의 영혼은 평안히 거하고 그 자손은 땅을 상속하리로다 14 여호와의 친밀함이 경외하는 자에게 있음이여 그 언약을 저희에게 보이시리로다 #<고후 7:1>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 #<딤전 3:16>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리우셨음이니라 #<딤전 4:7 -9>7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8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9 미쁘다 이 말이여 모든 사람들이 받을 만하도다 #<딛 2:12>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우리가 성경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두 단어가 있습니다. 그 하나는 경외이고 또 하나는 경건입니다. 과연 무엇이 경외이며 무엇이 경건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이러한 문제를 다루어 보기 원합니다. ---경외를 무엇으로 정의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에 대해 성결을 요구하십니다. 즉 구주예수님의 십자가보혈-부활-승천을 믿고 거룩한 새사람으로 거듭난 자녀로서, 내주하시는 생명의 성령과 하나로 연합된 새영의 자각으로 성령의 생각만을 따르는 하나님의 모상인 참자아로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그 임재의식 속에서 그분을 경배하고 섬기며 교제하며 살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고린도 후서 7장 1절에서 말하기를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고 했습니다. 이것을 볼 때 우리가 성결하게 되는 것은 우리의 하나님에 대한 경외함에 큰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성결이십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가까이 할수록 자신(=옛자아, 곧 죄된 본성인 육신과 그 육신을 따르는 거짓자아)의 더러움을 느낄 수 있고 그분에게 봉사 할수록 자신의 육이 섞일까 두려워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처음부터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배울 때 우리는 자연히 모든 일에서 육이 섞일까 두려워하고 조심하고 경계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당신의 아들이 와서 당신에게 어떤 일을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고 물을 때 당신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다면 당신은 당신의 답변 속에 자신의 성분(육)이 섞일까 두려워하여 먼저 하나님께 묻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경외함입니다. 또한 예로, 어떤 형제를 도와 줄 때 당신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다면 당신은 그 형제를 돕는 일에 당신 자신의 성분이 섞일까 두려워하며 또 자신의 성분이 섞이어 그 형제를 돕지 못하게 될까 두려워하게 됩니다. 범사에 당신의 육의 혼합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는 것이 곧 경외함입니다. -다시 예를 들어 말하자면 당신이 어느 형제 자매와 왕래할 때도 당신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섞일까를 두려워하게 됩니다. 당신의 이러한 마음이 바로 경외함입니다. 경외는 곧 당신이 누구를 비판하거나 칭찬하는 일에서 자신이 섞일까를 두려워하고 그 칭찬에 자신이 섞일까를 두려워하게 됩니다. 이렇게 여러 일들 속에 당신 자신의 성분이 섞일까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당신에게 경외하는 마음이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또다시 예를 들어 볼 수 있습니다. 어떤 형제나 자매는 편지 쓰기를 좋아합니다. 일상적인 편지 쓰기는 있을 수 있는 것이지만 어떤 이는 특별히 편지 쓰기를 좋아하여 시간을 낭비해 가며 씁니다. 우리가 만일 하나님을 경외한다면 이런 편지 쓰는 일에서도 자기가 섞이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게 될 것입니다. 누구든지 자기스스로를 위하여 일하고, 자기 스스로의 목적과 자기가 가득한 사람은 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매사에 자기가 끼어드는 것을 두려워하고 하나님께 죄를 지을까 두려워하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자녀들의 옷 한 가지를 사고 물건을 사는데조차 자기만을 위함이 있을까 하나님께 죄를 지을까 두려워하는 것이 마음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또한 어떤 형제가 잘못한 것을 발견할 때, 가서 그를 꾸짖는 데에서도 우리가 만일 하나님 앞에 선 사람이라면, 하나님, 형제를 꾸짖는 이 일에 내가 있을까 두렵습니다.라고 기도하게 됩니다. 이것이 경외함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형제를 꾸짖을 때 그의 감정을 상하게 될까 두려워하는 것은 경외하는 것이 아닙니다. 혹은 어떤 어려움이 있게 될까, 체면이 깎이게 될까 하는 것도 경외하는 것이 아닙니다. 경외함은 하나님 임재앞에서 오직 모든 일에 내 자신이 섞여 있을까를 두려워하고 나 자신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염려가 많아 이것도 무서워하고 저것도 무서워합니다. 외모로 보는 사람들은 그런 사람을 신령한 사람인 줄로 생각하지만 진실로 경외하는 자는 이것저것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다만 한 가지 무서워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자신이 섞이게 될까 하는 것입니다. 이 일이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닌가를 무서워하고 이 일이 하나님을 거치지 않은 일인가를 무서워하고 이 일이 하나님을 위한 일이 아닌가를 무서워하고, 이 일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는 일인가를 두려워하고, 이 일에 자신의 성분이 섞이게 될까를 무서워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형제 자매여, 우리의 생명이 자라날 때, 우리는 다른 것을 무서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 자신을 무서워하게 되고 하나님 앞에 죄스러운 일을 무서워하게 됩니다. 어느 형제 자매는 다른 형제나 자매의 어떤 잘못이 발견됐을 때 머리를 써서 자기의 총명한 방법으로 해결하려 합니다. 우리는 자신에게 물어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방법이 과연 영에 속한 것인가를, 우리는 이러한 방법을 영에 속한 것이라고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수단일 뿐입니다. 그 일 자체만 해결하려는 것이므로 영에 속한 분량은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화가 맹렬할 때에도 자아는 섞이는 것입니다. 형제 자매여, 우리가 혈기를 낼 때에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을 뿐 아니라 우리가 온유할 때에도 자아가 섞일까 두려워합니다. 허다한 경우, 우리가 혈기를 낼 때 자아가 섞이게 되고 온유할 때에도 우리의 자아가 섞이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온유하다고 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아닙니다. 경외란 하나님 앞에서 자아가 섞여 있을까 두려워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람의 가장 고귀한 마음은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의 성분이 있을까 두려워하는 것이 바로 경외함인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란, 자행자제하여 육으로 행함 곧 죄는 거룩하신 하나님 마음을 아프게 하고 그분과의 온전한 하나됨의 관계를 깨뜨리는 것이기에 보혈로 거듭난 새로워진 자녀로서 죄를 미워하며, 만복근원이신 존경하는 자랑스런 하나님아빠와 친밀한 사랑의 연합의 기쁨을 누리는 가운데 하나님아빠가 죄에서 나를 구속하신 구속자요 영광과 존귀와 찬양 받으시기에 합당한 무한하신 거룩하신 창조주이시며, 나는 절대 홀로 설 수 없고 넘어져 범죄하기 쉬운 오직 연약하고 유한한, 육을 가진 피조물이기에 항상 언제 어디서나 영광의 주께 합당하도록 육이 끼어들지 않게 주님 뜻만 경청순종하여 따르며 주님께 의지할 필요가 있음을 자각하고 인정하는 겸손함의 마음입니다. (=죄를 미워하는 자녀로서, 범사에 완전한 보호-공급-기쁨과 즐거움(누림)-방위, 곧 모든 필요에 대한 충족의 근원 되시는 하나님만 늘 의지하며 주께 합당하게 늘 하나님 임재앞에서 기쁨으로 그분과 동행하려 하는 참자아로 그분의 뜻을 따라 행하고자 함) ---그러면 경건이란 무엇입니까? 디모데전서 3장 16절에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라고 했습니다. 경건은 바로 하나님이 육신으로 나타나신 것입니다.(=성육신의 비밀의 확장)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사람을 통해서 나오는 것입니다. 당초에 하나님의 생명이 주 예수님(교회의 머리)의 몸에서 나타난 것과 같이 오늘도 역시 하나님의 생명이 그를 믿는 사람에게서(교회)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경건은 다른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속에 있어서 우리를 통해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일 참으로 구원받았다면 우리의 생각과 언어와 행동과 태도에 내가 아닌 그리스도가 살아 있어 우리를 통해 나타나게 됩니다. 이것이 곧 경건의 생활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계속 우리 육신을 통해서 나타나시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3장 12절의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것은 다른 사람이 우리의 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곧 다른 사람이 우리의 언어와 태도 가운데서 하나님을 느낄 수 있는 것이며, 우리의 행동과 처신 가운데서 하나님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 우리의 복장이나 가구, 실내장식, 우리의 일거일동에서도 하나님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과 접촉할 때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서 하나님을 느낄 수 있는 이것이 바로 경건입니다. -유감스러운 것은 그리스도인 가운데서 참으로 경건하게 사는 사람들이 과연 몇이나 되느냐는 것입니다. 어떤 형제 자매는 행동도, 말도 마음대로 하고 서로 농담을 주고 받고 희롱하는 말을 건네면서도 아무 느낌도 없습니다. 또 은밀히 술을 먹고 노름을 해도 속에 성령의 책망이 없습니다. 소위 그리스도인이라 하는 사람에게서 이런 일이 일어나니 그들은 경건의 근본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경건의 생활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경건의 외모(모양)만 있고 경건의 실제가 없는 것은 아무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경건의 실제라는 뜻은 절대로 경건의 외모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경건의 발원은 하나님의 생명에 속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의 본성이 경건입니다. 이 생명이 우리의 육신을 통해 나타나는 그것이 곧 경건입니다. -우리의 결점은 우리 자신의 성분이 너무 많은 것입니다. 우리는 아직도 육에 속하여 있기 때문에 경건의 생명을 막고 있어 그 생명이 자유롭게 나타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만일 그리스도인 안에 경건의 느낌이 없다면 우리는 그가 속에 생명이 없는 사람이거나 흑암 가운데 있는 사람으로 간주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빛 속에 있는 그리스도인은-그 느낌의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다소라도 느낌이 있습니다. 속에 있는 경건의 느낌을 따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이 바로 경건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경건한 생활을 하려면 훈련이 필요합니다. 디모데 전서 4장 7절에서도 말씀하시기를,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고 하셨습니다. 경건에 이르는 연습은 자기의 언어를 관리하는 것과 큰 관계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음대로 말하는 것은 경건하지 않다는 큰 표시입니다. 우리가 활발할 때에는 활발하고, 신선할 때는 신선하되, 하나님이 우리 말을 통해 나와야 합니다. 경건은 하나의 생활입니다. 경건은 하나님이 우리의 생활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시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무엇이 경외입니까? 경외는 너무나도 사랑하는 아빠, 거룩하고 존귀하신 창조주하나님께 누를 끼칠까 조심하고 두려워하는 마음, 곧 어떤 일에서나 자기 육의 성분이 섞일까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득죄할까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경건입니까? 경건은 나를 내려놓음과 내주하시는 성령, 곧 하나님생명 나타냄의 경청순종생활입니다. 곧 일상 생활에서 하나님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의 원칙은 우리의 중심에서부터 충만하여 넘쳐서 밖으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만일 사람이 경건의 외모만 주의하고 경건의 생명에 속하지 않게 되면 그것은 하나의 위장된 행위요, 경건의 실제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경외하는 마음을 둔다면 자기의 거짓자아의 활동이 있을까 두려워하게 됩니다. 거기에서 반대, 거절, 정죄, 일체의 불경건한 생각, 언어, 행동, 태도 등의 외면적인 무질서를 관리하지 않으면 속에서 묵인하지 않고 반드시 책망하여 불안하게 합니다. 이러한 경건의 외모가 참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경외에 이르는 연습과 경건에 이르는 훈련인 규칙적 묵상과 관상, 곧 일상속의 하나님의 임재연습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거쳐 전진하시는 길을 얻으시기 원합니다. <질문> 1) 하나님은 성결이십니다. 우리가 성결하게 되는 것은 우리의 하나님에 대한 ( )에 큰 관계가 있습니다. 2) 당신의 ( )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곧 경외함입니다. 3) 경외란 하나님 앞에서 ( )가 섞여 있을까 두려워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람의 가장 고귀한 마음은 바로 하나님을 ( )하는 마음입니다. 4) 경외가 무엇인지 말해 보세요. 5) ( )은 바로 성육신의 확장, 곧 또하나의 성육신으로서 하나님이 ( )으로 나타나신 것이며, 이는 하나님이 ( )을 통해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6) 경건의 생활은 어떠한 것을 말합니까? 7) 경건의 발원은 하나님의 ( )에 속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 )의 본성이 경건입니다. 8) 내주하여 계신 경건의 ( )을 따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이 바로 경건한 사람입니다. 9) 경건은 하나의 ( )입니다. 경건은 하나님이 우리의 ( )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10) 경건이 무엇인지 말해 보세요.
<신령과 진리의 예배(요 4:23-24)> ---23*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4*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 23*그러나 한 때가 오고 있으니 바로 지금입니다. 이 때는 진정한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아버지께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릴 때입니다. 이는 아버지께서 이렇게 그 분께 예배드리는 사람들을 찾고 있기 때문입니다. 24하나님은 영이시며,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스위스의 신학자 칼바르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기독교 예배는 인간 삶 속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 중에서 가장 기념비적이고, 가장 긴박하고, 가장 영광스러운 행동이다. 그가 한 이 말은 하나님을 알고 섬기고 싶어하는 모든 사람들이라면 모두 인정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렇게 예배의 중요성과 영광을 인정하면서도 참된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지금도 많은 성도들이 예배의 방법과 장소, 그리고 예배의 내용 문제에 대해서 질문하고 있으며, 그 대답을 찾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오늘날 수많은 교회에서는 갖가지 예배 프로그램이 시도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오늘날의 모습은 예배의 장소에 대해 물었던 수가 성 여인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수가 성 여인에게 가르쳐 주신 주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드려야 할 진정한 예배가 어떤 것인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1. 진정한 예배를 드릴 때가 왔다(23) 그러나 한 때가 오고 있으니 바로 지금입니다. 이 때는 진정한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아버지께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릴 때입니다. 이는 아버지께서 이렇게 그 분께 예배드리는 사람들을 찾고 있기 때문입니다(23). 예배는 피조물인 사람이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찬양과 영광을 돌리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하나님께 예배드려야 하는 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예배를 드릴 특정한 장소(예루살렘 성전)를 지정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여러 가지 성전에서 봉사하는 직분들과 그 제도에 대해서 자세하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은 역사서와 시가서 선지서를 성경으로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가르침을 거부했습니다. 그들은 그 대신 모세 오경에서 족장들의 예배 중심지가 되었던 그리심 산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당시 유대인과 사마리아 사람들은 이러한 이유로 인해 예배 장소에 대해 첨예하게 맞서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예배 장소가 참된 예배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로 부각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제 예배 장소가 문제가 되지 때가 도래했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주님은 이제 예배 장소에 상관없이 누구든지 하나님께 진정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때가 왔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어느 민족이든지 예배 장소에 상관없이 하나님께 신령과 진리로 예배를 드릴 때가 되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예배 장소에 상관없이 신령과 진리로 예배드리는 사람들을 찾으시고 있습니다. 이전에는 하나님께서 예배 장소를 지정하시고 그 곳에서 예배를 드리라고 지시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성전의 원형이신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셨기 때문에 외형적인 예배 장소가 큰 문제가 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제 이 시대는 어느 민족이든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때입니다. 이 시대는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는 자마다 구원을 받을 수 있으며, 또 하나님의 영을 선물로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어디에서든지 자기 안에 있는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수가 성 여인에게 바로 이러한 때가 도래했다는 것을 선언하셨습니다. 이제 예배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외형적인 형식이나 장소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성령 안에서 드리는 예배의 내용입니다. 2. 신령과 진리의 예배(24) 하나님은 영이시며,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리는 것이 마땅합니다(24). <하나님은 영이시니>는 하나님의 존재 양식에 대한 간결하면서도 정확한 표현입니다. 영으로 번역된 ‘프뉴마’는 보지지 않는 존재를 의미합니다. 육의 의미로 사용되는 사륵스와 대립됩니다. 즉 하나님의 영역과 세상의 영역을 구분하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인간이 영이신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채널은 육이 아니라 영입니다. 영은사람의 내적 생활의 대표적인 부분으로 가장 높은 꿈과 사상과 이상과 욕망의 근원 및 기원이 됩니다. 따라서 영으로 드리지 않는 예배는 하나님께서 받으시지 않습니다. 신령의 헬라어 ‘프뉴마’는 영, 성령으로 번역됩니다. 진정에 해당되는 ‘알레데이아’는 진리라는 의미입니다. 결국 신령하다는 것은 비물질으로서 시간이나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영인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미입니다. 사람은 삼위적 존재입니다. 사람은 육체, 혼, 영을 가지고 있습니다(일부 신학자는 영과 혼을 같은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몸으로 예배를 합니다. 정한 시간에 정한 장소에서 행하였으니 예배를 하였다고 합니다. 사마리아인이 예루살렘성전과 그리심산 위에서 예배를 드린 것의 차이를 묻는 것과 같습니다. 주일 아침 교회의 한 좌석을 차지하고 않아 있거나 찬송을 부르거나 촛불을 들고 있거나 성가대에 앉아 있으면 예배를 드렸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관습은 예배를 위한 수단이 될 수도 있지만, 이러한 관습은 오히려 예배를 방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들 자체가 예배가 아닙니다. 참된 예배는 신적 본성과 동류인 인간의 영이 실제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와 아름다움과 진리와 거룩과 긍휼과 자비와 은총과 능력과 그의 모든 다른 속성들을 생각하고 하나님께 찬미를 드릴 때만 존재하는 것입니다. 성경학자 윌리암 바클레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참되고 진정한 예배란 사람이 영을 통해서 하나님과 더불어 우정과 친밀함을 느끼게 될 때 존재하게 된다. 참되고 진전한 예배란 어떠한 장소에 나아가는 것이 아니다. 어떠한 의식이나 예배 절차를 거치는 것도 아니다. 심지어 어떤 예물을 가지고 오는 것만도 아니다. 불멸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영이 하나님께 말하고 만날 때에 참된 예배가 있게 된다.> 주님은 이 시대에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갖추어야 할 내용으로 두 가지를 제시하셨습니다. 그 두 가지는 첫째로 영(프뉴마; spirit)이며 둘째는 진리(알레떼이아; truth)였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이 영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영과 진리로 드려야한다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면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린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첫째로 영으로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영은 성령(The Spirit)이 아니라, 예배 드리는 사람들의 영(spirit)을 의미합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영적인 예배의 의미는 몸이나 외형적인 예배가 아니라 영혼으로 드리는 예배를 의미합니다. 사람들이 영으로 예배를 드려야 하는 이유는 예배를 받으시는 분이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형식이나 외형으로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께 어울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몸이나 습관적으로 예배를 드릴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자주 습관적으로 교회에 나가서 매일 하던 대로 찬송을 부르고, 기도하며, 말씀을 듣고, 또 헌금을 드립니다. 우리 중에 많은 사람들은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지 못합니다.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이 세상에 나가서 하나님 뜻에 순종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예배는 중심과 영혼으로 드리는 예배가 아니라 습간을 따라 몸으로 드리는 형식적인 예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외형적인 예배는 영이신 하나님께 합당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 마음과 생각을 모두 아시며 우리의 중심으로 드리는 예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영으로 예배 드리는 사람들을 찾으시며, 그들의 영혼을 축복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드려야 할 진정한 예배는 영으로 드리는 영적인 예배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힘만으로는 영적인 예배를 드릴 수 없습니다. 진정한 영적인 예배는 성령께서 우리를 도와주실 때에 드릴 수 있습니다. 성령은 우리 영이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수 있게 하며, 영으로 그 분의 이름을 높이게 해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을 제공해 줍니다. 이러한 예배는 역동적이며 기쁨과 감사가 있는 예배입니다. 이 시대에 성도들이 드려야 할 예배는 성령의 도움을 받아 영으로 드리는 영적인 예배입니다. 둘째로 진리로 드리는 예배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진리로 드리는 예배에 대해서는 몇 가지 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1) 첫째로 진리의 예배는 진실한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를 의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사람들은 거짓이나 외식으로 예배를 드려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영이신 하나님은 거짓을 미워하고 진실을 사랑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입술로는 하나님을 존경하되 마음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사람들이 드리는 경배를 헛된 경배라고 책망하셨습니다(마 15:8-9). 그러므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며 거짓이나 외식이 없는 진실한 마음으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2) 둘째로 진리의 예배는 성경에 하나님이 가르쳐 주신 방법을 따라 드리는 예배를 의미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 예배는 자신을 만든 예식을 따라 드리는 예배가 아닙니다. 기독교 예배는 하나님이 이미 가르쳐 주신 방법을 따라 드리는 예배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섬겨야 하는 지에 자세하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예배는 우리가 창작한 예배가 아니라, 하나님이 가르쳐 주신 방법을 따라 드리는 예배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주님은 사람의 가르침으로 하나님을 헛되이 경배하는 일에 대해 책망하셨습니다(마 15:9). 3) 셋째로 진리의 예배는 진리가 되시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드리는 예배를 의미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자신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과 진리가 되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죄인들은 자기 이름으로 거룩하신 하나님을 예배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죄인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아갈 때에만 그들을 영접해 주십니다. 주님이 죽으실 때에 성전 휘장이 찢어진 것은 바로 주님께서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 놓으셨다는 것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진리의 예배는 진리이신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예배를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선인과 정직한 자란 무엇입니까 : 선인, 곧 선을 행하는 자란 인자를 행하는 자, 곧 성령의 인도와 성령의 부어주시는 사랑을 따라 모든사람과 더불어 거룩함과 화평을 추구하며, 사랑과 긍휼, 관용과 온유함의 변함없는 사랑으로 사랑하며 사는 자요, 정직한 자란, 곧 말씀 앞에서 정직을 행하는 자로서 삶의 절대기준인 하나님 말씀대로 곧 조명된 그 말씀에 자신을 비추어 살면서 세상과 타협않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 자 입니다. 곧 예수님처럼, 내주하시는 그리스도를 살아내는 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