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11.12.24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영의 어둔밤-1.감각의 밤.아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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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8 장 영의 어둔 밤

 

제 1 절 감각의 밤 ***히브리인 : 강을 건넌 자들.. 탐욕적 우상숭배의 <갈대아우르=바벨론>으로부터 유브라데강을, 방탕과 색욕의 말초적, 쾌락적 세상향락의 <애굽>으로부터 홍해를, 자행자제하는 육신과 옛자아의 타락한 옛사람의 <제2광야>로부터 요단강을 건너서 마음의 할례를 받고 가나안땅(JC)으로 입성한 믿는 이들로서 생명-풍요이신 JC의 내주하시는 은혜를 공급받아 JC를 살아가고, 내려놓음/벌거벗음/비움의 자신을 JC 온전히 닮아가는 변화 입음에로  내어드리며, 이제 더 나아가 JC와 함께 마귀세력과의 남은 영적전쟁 통해 가나안 일곱족속(마귀세력)을 정복하고 멸해야 생명이신 JC의 풍성과 부요의 충만을 온전히 누리며 왕같은 제사장-거룩한 제사장-복음의 제사장으로서 이웃에게 JC를 분배할 수 있음.

 

1. 감각의 밤 <그 정체가 망상인 거짓 자아로부터의 해방>을 위해 주어지는, 궁극적으로 믿는이의 감성이 욕(욕심)과 맛(감각적 쾌락 = 육체적 정감/오감), 자기사랑/자기고집과 집착(애착)의 자기중심적 거짓자아로부터 벗어나 영에 맞추어 적응하고 의존하도록 하는, 화 하는 정화의 여정 

 

천연적인 사람(=타락한 자연인)에서부터 믿음으로 거듭나서 영적 여정을 시작한 이들에게 있어서, 대체로 하나님과의 합일의 길에 큰 대적이 세가지 있으니 그 첫째는 마귀사탄, 둘째는  세상(마귀사탄의 조직적체계로서 포로됨-중독-사로잡음의 온갖 방법을 통해 여유없게 만들고 염려-근심-두려움 가운데 가두어 마귀의 노예로 살게 한다)이요,  세째는 옛사람<육=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지 않은 모든 것>이다(=육신/죄성과 타락한자아로 조성된 천연적 사람 -- 죄의 몸 가운제 있는 <육신-죄성>에 종속된, 생명이신 하나님외에 자신이 의지하는 바 된, 거짓자아가 유발하는 두가지 정욕<이를 맛과 욕, 곧 정과 욕심이라 함>이 발동되는데, 그 하나는 육신의 정욕(스스로 쾌락추구함의 타락한 방탕/색정)-안목의 정욕(시각-상상에서 시작되는 모든 부러워함/탐심) -이생의 자랑(하나님이 주시지 않은, 스스로 산출코자 하는 부귀영화권세)으로 표현되는 육정이요 또 하나는  욕정(자기 숭배의 의지적 욕구인 이기심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천연적 혼생명/거짓자아에서 유래한 자기 사랑/자기 연민/집착/애집, 자기 의/자기신뢰/자기 주장, 자기자산/체면/자존심-자부심, 곧 요약하면 자기자산-자존심/체면-자기주장/자기 의/자기신뢰-자기사랑의 변화무쌍한 불안정감으로 귀결됨)으로서 결국 의지적 욕념과 집착으로 나타나는 자기사랑(자기애)-자기연민-이기심이다. **영의 참자아인 영적 자아에 비추어 볼 때, 죄의 종/사탄적 체계인 세상은 애굽으로, 무감각/둔감/희미해진 양심대로 본능/환경따라 자행자제하며 사는 천연적 자아(옛자아)의 자연인은 에돔으로, 육적/쾌락적(정욕적) 자아를 모압-암몬으로, 세상과 짝하여 하나님을 적극적으로 대적하는 자아를 블레셋으로, 최종적으로 정복해야 할 가나안 일곱족속을 하늘의 악한 영-어둠세상의 주관자-정사권세능력인 사탄마귀의 세력으로 비유하기도 한다.  

 

실질적인 그리스도인의 길은 전통적으로 3단계로 말하여져 왔는데, 대개 한가지 길(또는 단계)이 끊나는 시점에 두번째 길이 이어지고, 이어서 세번째 길로 접어드는 것 같지만 세가지 길이 동시에 중복되어 전개되거나 후퇴하기도 하는 정화의 길(사랑하올 하나님 추구함)-조명의 길(신뢰로 열어드림/맡김)-합일/일치(상호 거함/안식)의 길로 알려진 성도의 영적 여정을 지나면서 우리는, 우리의 복합된 행동 동기들과 성격의 어두운 면들, 그리고 어렸을 때 받았던 정서적 충격들에 대해 비로소 점점 더 잘 알아가게 되는 것 같다. 이 과정을 일상에서는 <묵상, 렉티오 디비나=영적 독서=말씀으로 기도하기. 기도로 말씀 읽기>과 예수기도/집중기도-관상을 통해 실행할 수 있다.

 

 **정화의 길이란 <자기를 부인하며 능동적으로 사랑이신 하나님 추구하여 찾으며 사랑하기>로서 십자가의 성요한의 [갈멜의 산길]에서 말하듯 <감각의 밤에 외부감각(오감)/정욕이 다루심 받으면서 동시에 내부감각(직관적 믿음)이 고양되며,  영의 밤에 영적자부심을 포함한 거짓자아의 잔재 제거 와 함께 이성(지성)-의지를 다루어 정결함 받는> 능동적 정화를,

**조명의 길이란 <전적인 무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인 자기포기-사랑위해 열어드려 맡기기>로서 십자가의 성요한의 [어둔밤]에서 말하듯 수동적 정화 또는 정화적 관상(관상의 시작)을,

**합일의 길이란 이른 바 하나님과 연합/일치/조화이룸의 <하나님의 현존안에 깊이 거하며 안식함의 실질적 관상-사랑 나누기>로 말하여진다.

 

정화의 길에서 우리는 거짓자아를 다루어 궁극적으로 제거하는, 마치 죽을 것 같은 감각의 밤과 영의 밤을 겪는다. 이 과정을 지나면서처럼 자아 지식을 경험하는 것보다 자존심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은 없다. 그러나 우리가 그 성도의 여정과 정화의 관상과정이 힘든 과정이라 해서 앞으로 나아갈 용기를 잃고 머뭇거린다면, 그것들의 참 가치와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정화의 길이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자신의 죄와 육신, 옛사람을 못박은 성도가,  당신에게로 이끄시는 주님에 대한 신뢰와 사랑의 일념과 애착으로 곧 <현세에서 그분을 얻고 그분안에서 발견됨>의 그분과의 변형하는 일치만 원하여 일편단심 굳센의지의 믿음(내적 감각인 직관적 믿음)-소망-사랑만 간직한 채 성령 인도따라 담대히 영적여정으로 나아가며, 반대로 다른신과 우상, 곧 <멸절시켜야 할 가나안 일곱족속으로 표상된> 자신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에 대한 자각적 의지가 개입하는 의지적 욕념과 집착을 끊고 버림, 곧 일상적인 피조물<세상>에 맛들임(색-성-향-미-촉감에 포로됨과 중독, 갇힘)과 탐하는 욕망(식-성-물-명)에의 욕념-집착, 애념 애집의 자기사랑과 자부심, 자산 등에 일체의 관심을 끊고 버리며 돌이킴, 궁극적으로는, 범사에 온전한 내려놓음-내어드림-비움을 거쳐 영적으로 벌거벗음 (= 그 선하신 뜻을 끝내 이루실,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을 통해, 하나님을 향해, 하나님에 대한 절대신뢰/사랑/기대함으로 삼가 동행하기)의 가장 치열한 <가나안일곱족속 멸절>의 영적정복전쟁에서의 승리를 체득함을 의미.

 

@정화= Purfication (거짓자아에 대한 능동적 정화,  -자기부인 + 하나님 추구하며 사랑하기)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 마가복음 8:34 >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 마 5:8>

<사랑으로 역사하는-유발/자극/충전/발휘/산출/표현되는- 믿음뿐이니라 -갈5:6>

<마 7:7-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마 7:7>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 마7:21>
@조명= Enlightening (거짓자아에 대한 수동적 정화, - 전적인 무에까지 이르도록 자기 포기 +사랑의 하나님이 사랑하시도록 자신을 내려 놓아 맡기고 열고 비워 내어드림, 자의식의 모든 자각조차 흘려 보냄.)
<시편 55:22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 그가 너를 붙드시고..-시55:22>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 마 11:28>

<내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 시 62 : 1>
@일치 =Unification (사랑 나누기/상호거함-누림-안식-동행-지성소 영광 경험)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 요15:4>

<..그들로 다 하나가 되어 우리안에 있게 하사 .. - 요 17 : 21>

<내게 주신 영광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 요17 : 22>

<너는 나를 도장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고 질투는 스올같이 잔인하며 불길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많은 물도 이 시링을 끄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삼키지 못하나니.. 아8:6=7>  

<나의 영혼이 주를 가까이 따르니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거니와 - 시 63 : 8>

 

 **통제되지 않을 때 대죄를 유발하는 식-성-물-명의 4가지 적극적 의지욕들은 성령을 근심케 하며 하나님의 은총을 앗아감과 더불어, 영혼자체에 적극적인 해악을 끼치는데, 탐식욕은 주로 덕에의 게으름을, 관능욕은 몸과 마음의 더러움을, 재물욕(탐욕)은 번민을, 허영욕은 어둠과 맹목을 낳지만 결과적으로 각각의 의지욕들은 결국 (욕심에 시달린) 피로/지침, (포로됨의 슬픈) 고통, (예지상실, 무디어진 의지 흐려진 기억-분별력 상실의) 어둠/혼돈/맹목, (속된 것에 오염되어) 더러움, (미지근함의 틈을 탄 대적 발흥으로) 야윔과 (쓰디쓴 결과의) 상처 등을 동시에 빚어낸다.

 

** 한편, 의지에서 오지 않는 자연욕나 제일충동에 불과한 생각들, 동의함이 없는 유혹 등은 그 어느것도 영혼에게 위에 말한 적극적인 해악을 끼칠 수 없고 오히려 영혼을 일깨워 경계하고 조화롭게하여 얻는 유익이 있다. 의지가 가진 애착의 4가지 감정(기쁨, 바람, 무서움, 고통)을 씻어냄으로써,  오직 하나님의 영광존영만 기뻐하며, 오직하나님외에 다른 것을 원하지 않으며, 오직 하나님 아닌것에 슬퍼하지 않으며, 오직 하나님만 두려워 할 때 자연욕의 네가지 감정이 올바로 부려지고, <네 온 맘과 뜻과 정성을 다해 주하나님을 사랑하라>하신대로 영혼의 힘과 능력을 하나님을 위하여 간직하고 향하게 할 수 있고 사랑을 통한 능동적 의지는 하나님과의 합일을 이룰 수 있도록 인도한다.

 

** 반면에, 한가지 덕의 실천 결과 만가지 덕이 동시에 커가는데, 영혼 안에서 (가볍고 부드러움)상쾌함-맑음-빛(쾌청명료), 평화-위로-힘을 한꺼번에 낳고 키운다.


잠시, 여기에서 발달이론을 생각해 보자. 이에 따르면, 인간의 자아 발달은 행복정서프로그램을 따라 반응하는 것으로 알려져왔다. 여기서 <행복>의 정의가 중요한데, 여기서 말하는 행복이란 생존/안전(1세경-식욕이 중심)-사랑/존중(2세경-애정 중심)-힘/통제욕구(3세 이후-권력 욕구 중심) 등 본능적욕구의 즉각적 충족으로 정의한다. 이것이 발달단계에 따라 순조롭게 경험되고 충족되었으면 균형적 상태의 정서로 자라되, 그렇지 않고 상처받고 억눌러져 감정적 성장이 멈춘 채 무의식 속으로 숨어들어가게 되버리고, 성장하면서 부모와 주위 사람들이 이러한 욕구들을 충족시켜 주지 않거나, 우리가 그러한 욕구가 충족되지 않았다고 느낄 때, 우리는 보상 욕구와 프로그램들의 체계를 무의식 속에서 만들게 되는데, 그것을 "에너지중심"(energy center)라고 부른다. 이 에너지 중심들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사건들에 대해 습관적이고 무의식적으로 행동하고 반응하는 방법의 근원이 된다.  

 

그래서  다 자란 후 어느시기에 유아기의 비슷한 환경의 정서적 충격에 노출되면, 본능적욕구의 또 다른 모습인 5욕(식욕/수면욕-애정/성욕-물욕-명예욕)의 불만족감의 아픈 기억에 대한 에너지중심이 발동하게되면 그에 따른 행동반응과 함께 이른바 하나님상실의 감정이요 실락원의 원감정들인 두려움-무감정, 수치감-슬픔, 부러움-탐욕, 분노, 허영심-자부심 등 (또는 결핍감-죄의식-거절감-분노를 말하기도 함)이 표출되어 발현되는데,  이때 사회적초자아의 강압에 의해 이 원감정과 원감정에서 파생된 파생감정과 행동반응들이 다시 통제되고 억눌러지게 되면 여러가지 심리방어기제를 거쳐서 비정상적인 신경증적 현상으로 왜곡되어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 발달이론에 따른 신경병적현상이론이다.

 

결국 타락한 인간에게서의 자아라는 것은 행복추구정서프로그램에 따라 자신의 맛들임과 이기적욕구(식욕-성욕-물욕-명예욕)를 추구하는 이기심의 거짓자아에 다름아니다.. 거짓자아는 그 본질적 정체가 망상이다!!!  이 거짓자아가 커질수록 영의 참자아는 마치 죽어 없는 것처럼 찌그러들게되어 그 기능을 제대로 할 수가 없다. 하나님은 자아의 발달에 있어서도 완전케 하시는 주님이시다. 흙으로 사람을 빚으사 그 코에 당신의 생기를 불어 넣으셔서 생혼(참자아로서의 혼)을 가진 생령으로서의 사람을 만드셨던 하나님은, 당신을 담는 그릇으로서 그리스도를 빼어닮은, 하나님과 완전히 하나된 변형된 일치의 참자아를 믿는 이 안에 새롭게 형성시키신다.


우리가 육신을 신뢰하지 않으면서 모든 맛과 욕을 끊고 오직 사랑과 신뢰로 임마누엘주님의 인도에 자신을 온전히 맡겨 기꺼이 어둔밤에로 나아감으로써, 거짓 자아를 무너뜨리고 우리 거짓자아의 행복추구 정서 프로그램따라 행동하기를 거부할 때, 내면에서 일어나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 그분께서 우리에게 더욱 가까이에 오시는 것 같이 느껴진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 안에 현존하셨기 때문에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전압을 더 올리시는 것이라고 말하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매일매일 규칙적으로 정돈과 청소를 한 방은 보기에도 아주 깨끗하다. 그리고 그런 방안에 앉으면 기분도 좋다. 그러나 만일 1만 볼트 전압의 전구 50개를 켜 놓고 확대경으로 방바닥을 들여다본다면, 온 방안에 작은 미생물들이 기어 다니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을 본 우리는 당장 그 방에서 도망쳐 나오고 말 것이다.


은혜로 다가오셔서 감격스러운 은혜를 은혜로 알아 순종과 믿음, 사랑으로 반응하는 우리의 열성적인 신앙을 보시면서 하나님은 "이 사람은 영적 여정에 진지하군. 자, 가서 일을 시작하고 쓰레기들을 쳐내자"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다. 하나님이 전압을 올리시면 우리의 내면에 마치 버러지들이 기어 다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면 우리는 행복을 위한 정서 프로그램들이 우리와 타인과의 관계에 끼치는 손상들을 명백하게 보게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스스로 좋게 보아 왔던 자신의 행동들까지도 더러운 행주 조각들처럼 보이는 것이다.


16세기 스페인의 신비가인 십자가의 성 요한은 다른 어떤 영적인 저술가보다도 이 어려운 시기를 자세히 알아보았다. 그는 이것을 감각의 밤이라고 불렀다. 이 감각의 밤이 나타났다는 표시로서, 첫번째 표시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갈망은 더 심해지나 지금까지 충족감을 주었던  기도와 일상생활이 오히려 무미건조해지는 느낌이 들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역설이 있다. 만약 그대가 하나님을 굳건하게 신뢰함으로 말미암는 사랑가운데에 지속적으로 머물러 관상중에 있다면, 이러한 건조함이나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영적 위안으로 인한 만족감이 사라짐을 경험하는 것은 우리의 믿음이 퇴보함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경험해보지 못한 영적여정의 새로운 차원으로 돌입했거나 또한 관상 기도를 시작하는데서 오는 직접적인 효과일 수도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내면세계에 신성한 빛을 더욱 강하게 비추시지만 우리에게는 그 경험을 해석할 만한 적절한 감지 기구가 없기 때문인 것이다. 이럴 때 우리는 무엇인가 큰 것을 잃어버린 듯한 느낌을 갖는다. 무엇을 잃어버린 것일까? 아마도 그것은 우리가 성서를 묵상하고, 성체를 받아 모시며, 기도하고 봉사할 때 열매 맺은 결과들, 곧 이전에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즐겼던 그 자유롭고 편안한 감동적이면서도 초월적인 교제의 열림으로 인한 영적 위안의 느낌들이 아닐까.  이때가 다가오면, 혹자는 성서를 집어 들지만 성서를 읽겠다고 작정한 시간 동안 그저 무료하게 성서를 들고 앉아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영적 독서는 마치 전화번호부를 읽는 것처럼 더 이상 흥미가 없어지고 무미건조해진다. 이 영적 위안의 은총을 감지하는 경험이 사라지면서, 우리는 영적인 훈련에서 아무런 이익도 얻지 못한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그리고 동시에 세속적인 것에서도 만족을 얻지 못하게 된다. 성령의 9가지 은사의 하나이면서 신학적으로 ‘지식의 은사’라고 부르는 이 은사의 도움을 힘입어, 점차 믿음이 자라면서 하나님과 관계된 것, 또는 우리가 인생을 살아오면서 힘들여 쌓아온 정서 프로그램에서 만족이 결여된 상태를 경험하게 된다. 성령은 이때, 행복에 대한 우리의 끊임없는 욕구는 하나님만이 채워 주실 수 있다는 자각을 우리 마음속에 주입시켜주신다. 이러한 긍정적인 경험은 쾌락과 힘, 안전 등-생존/안정/권력욕구-에 대해 불만족을 갖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훨씬 넘어서서,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에게 무한한 만족을 줄 수 없다는 자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러한 직관의 빛 속에서, 정서 프로그램이 근본동기가 되어 지금까지 우리가 구축해 온 모든 욕구 충족 도구들이 더 이상 우리에게 아무런 행복도 가져다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로 인해 슬퍼지는 기간이 생기는데, 이 기간 동안 어쩌면 예전엔 우리에게 행복과 충족의 감정을 가져다 주었고 또한 그렇게 가져다주리라고 기대했던 모든 것들이 점차, 절대적이 아닌 상대적인 것들로 여겨지게 된다.


십자가의 성 요한에 따르면, 영적인 여정의 이러한 성장에서 오는 두 번째 표시는 우리가 길을 잃고 거꾸로 가고 있을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우리 자신이 저지른 어떤 개인적인 잘못이나 실수로 하나님의 뜻을 거역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갖게 되는 것이라고 한다. 이때는 은총으로부터 아무런 확인을 주는 느낌도 없기 때문에 우리 마음은 더욱 복잡해질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하나님과의 마지막이라고까지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실제로 끝난 것은 그들의 제한된 감각과 이성으로서 그들이 기도하기 위해 감각과 이성에 과도하게 의존했던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한 단계 더 고양된 새로운 차원에서 더욱 친밀한 관계를 주려 하시기 때문에, 그들이 오로지 사랑과 신뢰로 이 때까지 해 오던대로 관상기도를 계속하면서, 자신의 불안한 감정을 성찰하려 들지만 않는다면, 그 사실을 마침내 감지하기 시작할 것이다. 이러한 상태는 이유기의 아기가 엄마 젖을 떼는 것과 같다. 일반적으로 유아는 젖을 떼는 것을 거부하지만, 일단 이것을 받아들이고 나면, 고기와 감자 같은 더 영양가 있는 음식을 즐기게 된다. 이것이 바로 성장의 일부분이다. 감각의 밤이란 하나님과의 관계를 시작할 때 특징적으로 갖게 되는 영적 위안으로부터 젖을 떼는 기간이다. 순수한 믿음의 단단한 영양분은 젖 떨어진 아동이 단단한 음식을 먹을 때 느끼는 것과 같은 새로운 느낌을 준다.


십자가의 성 요한이 말한 세 번째 표시는 영적독서 등, 논리적 묵상을 도무지 할 수 없게 되거나 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어진다는 것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지속해야 한다*) 논리적 묵상은 예수의 가르침과 예수께서 행동으로 보여주신 표본을 깊이 마음에 생각하는 것으로서 일반적으로는 관상 기도로 가는 준비 단계로 묘사되고 있다. 논리적으로 묵상을 하려는 마음이 없으면 마음은 끝없이 방황하게 된다. 이 때는 자신의 의지만으로는 하나님의 은총에 응답하려는 사랑, 찬미, 청원, 혹은 어떠한 응답의 행위로부터 아무런 유익의 느낌도 받지 못한다. 그러면서도 홀로 하나님과 함께 있고 싶어지지만 하나님은 자신으로부터 떠나 아득히 떨어져 계시며 마치 우리에게는 아무런 관심도 없으신 것처럼 느껴진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감각의 밤이 왔다는 것을 분별하기 위해선 이 세 가지가 모두 있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만일 이것들 중에 어떤 것은 있고 어떤 것은 없다면 그것은 우울증과 같은 정신 질환을 가진 상태일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영적 여정에 자신을 투신한 사람들에게 감각의 밤이 "비교적 빨리" 찾아온다고 하였다. 십자가의 성 요한에게 "밤"은 우리가 성찰을 통하여 혹은 감각의 경험을 통하여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일반적인 방법이 어두워진 것을 뜻한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일상적인 방법들이 우리가 알던 방법에서 알지 못하는 방법으로 바뀐다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영적 여정에 대한 우리의 계획과 전략을 송두리째 뒤집어엎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경험을 통하여 영적여정이란 우리가 미리 짜 둔 계획에 따라서 만들어진 길이 아니라는 것을 배운다. 하나님은 성령이 주시는 관상적 은총을 통하여 우리를 깨우쳐 주심으로써 우리가 선입견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주신다. 그의 빛을 우리 영 안에 주입시켜 주시고, 그분의 사랑을 확인시켜 주심으로써 우리의 약함과 부족함을 알게 해주시는데, 그것은 우리를 낙담시키시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그분의 무한한 자비에 우리자신을 완전히 맡길 수 있는 용기를 주시기 위한 것이다. (그 느낌들이나 다른 낯선 느낌들이 올 때, 흔들리지 말고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오히려 지금까지 해 오던 예배-영적독서-관상기도를 놓지 말고 인내함으로 계속해 나가라. 이 경험은 하나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2. 감각의 밤에 오는 영적인 시험들


감각의 밤이 깊어지면 세 가지 특별한 시험을 받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시험들이 이러한 전환기를 더욱 어렵게 만들기는 하지만, 반면에 그것들은 우리의 진보를 가속시키고, 단 한번으로 철저하게, 우리 거짓 자아의 지배적인 동기나 그 영향을 잠재우도록 도와준다. 이러한 유혹이 모든 이에게 나타나는 것은 아니며, 이 세 가지가 한 사람에게만 나타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이런 시험들은 우리가 감각의 밤을 경험하고 있다는 확실한 표시들이 된다.


여기에서 십자가의 성 요한이 쓴 첫 번째 시험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


어떤 이에게는 음욕(淫慾)의 영인 악마의 사자(고후 12:7)가 자신을 드러내보이고는 가증스럽고 난폭한 유혹으로 그들의 감각에 공격을 가하고, 상상에 가장 잘 나타나는 야비한 생각들이나 표현들로 그들의 영을 괴롭히는데, 이것들은 죽음보다 더 큰 고통을 준다.(어둔 밤 14장 1)
안토니오의 이러한 유혹은 아타나시오에 의해 세밀히 묘사되었다. 그가 이전의 생활로 돌아가라는 긍정적, 부정적인 유혹을 물리치자마자 악마는 비장의 술책을 꺼냈다. 그는 안토니오의 상상에 음욕의 생각을 쏟아 부었는데 그것은 마치 침입하는 군대가 진군하기 전, 저항을 줄이기 위해 포탄을 쏟아 붓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그 다음으로 악마는 성적 감정을 불러일으키며 시험했는데 이것은 오랫동안 계속되었던 것 같다. 글에는 안토니오와 악마와의 싸움이 어찌나 격렬했던지 그 이웃에 있던 다른 동료들까지도 그것을 느낄 정도였다고 나타나 있다.


이런 분명한 유혹이 오랫동안 계속되면 그 유혹들에게 흔들리거나 혼란을 느끼게 된다. 즉 "내가 정말로 이것을 거부한다면 왜 자꾸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일까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강박적인 생각들이나 정서들이 지속적으로 돌아오면서 성적인 에너지의 모든 힘들이 끊임없이 의식의 초점 안으로 들어온다. 안토니오가 어린 시절에 은거의 생활을 시작했기 때문에 이전에는 이런 성적인 에너지를 인식하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그는 영적 여정에 전신을 바치는 데 모든 힘을 집중하기 위해서 독신 생활을 하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안토니오는 성령으로 하여금 이 성적인 에너지를 하나님과 그의 제자들을 위해 봉사하는 열정으로 바꾸어 주시도록, 자신의 성적인 에너지의 온 힘과 부딪치며 그것을 받아들여야 했던 것이다.


몇 주간 아니 몇 달 동안 이러한 유혹과 끊임없는 싸움을 하고 난 안토니오는 악마의 마지막 유혹에 부딪쳤다. 그것을 말로 표현하자면 다음과 같다. "안토니오야, 너는 지금까지 최선을 다했지만, 너의 그 최선의 노력도 결국은 아무것도 아니였어. 그러니 이제 그만 항복하는 게 좋을 거야!· 그러나 안토니오의 응답은 분노와 슬픔뿐이었으며, 이것은 곧 그가 악마의 유혹에 동의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안토니오는 그의 분노로 일어난 에너지를 실제적인 방법을 통해 소비했다. 그는 마음의 눈에 선명한 지옥불의 영상을 불러들였다. 이러한 전략은 단순히 공포의 정서를 불러일으키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성적인 부정행위의 유혹에 대처하는데 오히려 해가 될 수 있다. 공포의 감정이 일어나면 신체는 혈관에 화학 물질을 퍼 넣음으로써 반응하는데, 이것은 신체가 도망가거나 싸우는 준비를 하도록 배에 피의 흐름을 집중시키려는 것이다. 그러나 안토니오는 급진적이고 강하게 자신을 끌어당기는 성적인 쾌락에 대항할 만한 생생하고 실제적인 불길의 영상을 도입하려 하였다. 그는 실제적인 불길의 영상과 그에 따른 고통의 상상에 자신을 맡김으로써 마침내 음욕의 불길을 끌 수 있었던 것이다.


안토니오가 이러한 유혹에도 굴하지 않고 거뜬히 이겨내자, 악마는 즉시 전략을 바꾸었다. 안토니오가 유혹에 쉽게 넘어간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다고 느낀 악마는 안토니오에게 관능과의 싸움에서 이긴 것이 얼마나 큰 공로가 되겠냐고 말하며 영적인 자부심을 넣어 주려 하였다. 이에 대한 안토니오의 대답을 임의대로 표현하자면 "지옥에나 가라!" 하는 것이었고 아타나시오는 "이것이 안토니오가 사탄을 이긴 첫 번째 승리였다"라고 기록하였다.


그리하여 안토니오는 음욕의 영에 동의하기를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유혹을 물리쳤다는 더욱 은근한 만족감에도 동의하지 않았다. 자신이 죄가 없다고 하는 자부심은 자부심 중에서도 가장 위험한 자부심이다. 이것은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은총을 마치 자신이 한 것인 양 모두 자신의 공로로 돌리는 것과 같다. 이러한 영적 여정의 지점에서 갖는 위험은 자신이 개인적인 죄에서 해방되었다는 것과 덕의 수련이 쉬워졌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머리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감각의 밤에서는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이기심들이 모두 드러난다. 겸손은 이렇듯 은밀하게 일어나는 자아 지식의 체험으로부터 열리는 쓰고도 달콤한 열매이다. 겸손이란 우리가 자기 비난이나 부끄러움, 분노, 혹은 낙망같은 정서적 반응을 동반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잘못을 편한 마음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한편, 자기 비난이란 신경질환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자기 비난은 상처받은 자존심이 '그랬구나. 이 머저리야! 너는 언제나 일을 그르친단 말이야! 너는 나의 (환상적인) 완덕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구나!"라고 말하는 것이다. 겸손은 자신이 연약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과 하나님의 무한하신 자비에 확신을 갖는 것 사이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감각의 밤에 오는 두 번째 유혹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 밤의 또 다른 때에는, 불경의 영이 와서 영혼의 모든 관념과 생각의 길목에다, 감당할 수 없는 불경심-원망/불평/불만/분노-을 놓아 주는 것이다. 이것들은 때로 심한 광란을 일으키며 그 불경심을 상상 속에 집어넣어 주어 영혼이 그것의 대부분을 입 밖에 내도록 만들고, 그럴 때 그것은 견디기 어려운 고문이 되는 것이다.(어둔 밤 14장 2).


 이러한 시험을 경험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하나님을 잃어버렸으며, 이전의 하나님과의 관계는 이제 끝이라는 결론을 맺는다. 그래서 그들의 불안은 더욱 강해진다.


저질스런 분노에 부딪쳐서 절망의 느낌을 갖는 것은 어느 삶에서든 일어난다. 내가 수련원에서 나와서 허원자들의 숙소로 옮겨졌을 때, 제의실 관리인을 도와 미사 집전에 쓰일 제의들을 준비하는 일이 내게 맡겨졌다. 나는 나의 자유 시간의 전부를 기도하는 데 쓰길 원했기 때문에 자유 시간이 되자마자 급히 방에 가서 얼굴을 씻고는 곧바로 성당으로 가곤 하였다. 어떤 때에는 제의실 관리인이 내가 성당으로 가는 길을 막으며, 기대하지 않았던 방문 손님이 지금 막 도착했는데 미사를 드리고 싶어 한다고 손짓을 하곤 하였다. 손님 신부를 위해 제대와 제의를 준비하는 것이 나의 소관이었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이때가 오랜 동안 영적으로 메마른 시기였기 때문에 참을성이 적을 수밖에 없었다. 제의실 관리인이 내 앞을 걸어가는 것을 보았을 때, 나는 모멸감을 일으키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내 기도 시간이 또 그냥 끝나 버리는구나. 왜 장상(長上)들은 이 일을 다른 사람에겐 시키지 않는 거야?" 제의들을 마련하는 일을 주신 것에 감사를 드리기는커녕 나는 속으로 투덜대며 하나님께 중얼거렸다. 불경한 생각들이 때때로 내 머리를 휩쌌다. 그래도 이즈음 하나님께서 내 인생의 모든 것을 살피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이렇게 말하곤 하였다. "주님, 저에게 왜 이러십니까? 제가 가진 조금밖에 안 되는 시간에 기도하려고 애쓰는데 주님은 왜 얼마 안 되는 기회마저도 허락하지 않으십니까?" 그러나 그러고 나면 곧 죄의식이 일어난다. "주님께서 나에게 얼마나 잘해 주시는데, 나는 왜 이런 생각을 한단 말인가? 아마 나에게는 성소가 없는 모양이야!" 그러면 내 안에서 간교한 소리가 들려온다. "당연하지. 너에게는 성소가 없어! 여기는 네가 있을 곳이 아니야!" 이처럼 나를 유혹하는 마귀는 나의 부정적인 생각을 거들어 주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행복해 하였다.


감각의 밤에 오는 세 번째 시험은 실제로 기대할 수 있는 후기 정화의 과정과 흡사한 것으로서 십자가의 성 요한이 영의 밤이라고 부른 것이다. 여기서 거짓 자아의 마지막 흔적들이 깊은 내면에서 정화되어 가는 것이다.
또 다른 경우에는 이사야가 현기증-혼란-의 영(사 19:14)이라고 부른 가증스런 영이 그들을 귀찮게 굴기도 하는데, 그것은 그들을 유혹에 넘어가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시험해 보려는 것이다. 그 영은 그들의 감각을 너무나 어둡게 하여 당황하고 갈팡질팡하게 만들며 너무나 혼란스럽게 만들기 때문에, 그들이 자신의 판단에 대해 자문을 받거나 깊이 생각한다 해도, 결코 만족할 만한 도움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 스스로 판단하게 만든다.(어둔 밤 14장 3).
이러한 불확실성은 자신의 성소나 어떤 양심의 심각한 문제에 대해서 일어 날 수 있다. 이 병에 걸린 사람은 마치 자신이 탁구공처럼 이쪽저쪽을 왔다 갔다 하는 것같이 느낀다. "그래, 그래야지. 아니야, 다른 것을 하는 것이 더 나아. 아니야, 그것 말고. 어쩌면 이것을." 이럴 때에는 영적 지도자에게 가서 상담을 하고 그가 "여기에 문제의 해결책이 있네"라고 말해 주어도 그것은 1분도 가지 않고, 즉시 다시 불확실의 소용돌이 속에 빠져서 하나님에게 배척당했거나 버림받은 것이라고 느낀다.


왜 하나님은 이렇듯 참기 어려운 시험을 허락하시는 것일까? 이러한 극단적인 유혹들은 마치 어두운 무대를 비추는 스포트라이트처럼 행복을 위한 각 정서 프로그램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이기심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음욕의 영은 쾌락과 애정/존중의 본능적 욕구를 불지르는 욕망의 강도(强度)를 드러낸다. 감각의 밤에, 모든 자의적인 관능적 만족은 말라 버린다. 이러한 상황이 오래 지속되면 인간의 본성은 어떤 감정이라도 느낌을 주는 것이면 무엇이든 얻으려고 갈망하게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쾌락을 주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찾으려 든다. 성행위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감각적 경험 중에서 가장 많은 쾌락을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욕의 유혹은 다른 어떤 유혹보다도 큰 힘을 가질 수가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쾌락에 대한 갈망을 과식, 다양한 종류의 음악 감상, 끊임없는 유흥과 정신 산만을 일으키는 행위 등, 지긋지긋하고 건조한 상태를 벗어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슨 일을 통해서든 이것을 발산하고 싶어 한다.


불경의 영은 조정/통제하려는 권력욕구에 대한 것이다. 감각의 밤에 우리는 아무것도 스스로 조정할 수 없게 된다. 자신을 개선하려는 계획을 포함하여 어떤 계획도 아무런 성과를 얻지 못한다. 나아가 이것은 강력한 욕구 좌절을 일으켜서 불경할 정도의 분노로 표현되기도 한다. 그래서 임마누엘하나님을 시험해보고 싶고, 하나님의 목을 잡고 조르고 싶어지기도 하는 것이다.


혼란/불확실성의 영은 우리의 생존/안전의 프로그램에 뿌리 박혀 있는 확실성의 욕구를 비추어 준다. 이 시험에서 우리는 어떤 것에 대해서도 확신을 가질 수 없다. 영적인 여정은 알지 못하는 곳으로의 부르심이다. 이에 대한 성서적인 표본은 아브라함이다. "너의 아버지와 집과, 친구와 친척과, 토지를 떠나 장차 내가 보여줄 땅으로 가라"(창 12:1). 하나님은 먼저 우리가 어린이와 같이 반응하던 방법에서 불러내시어, 온전한 정신 자아적 의식에 알맞는 관계로 나아가라고 이끄신다. 그러나 그러한 일이 일어나고 난 다음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디로 이끄시는지는 알 수 없다. 바울 사도는 "눈으로 본 적이 없고, 귀로 들은 적이 없으며, 아무도 상상조차하지 못한 일을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마련해 주셨다"(고전 5:9)라고 말했다. 그곳에 도달하는 유일한 길은 그곳이 어딘지를 알려고 하지 않겠다고 주님께 동의하는 것이다. 확실성에 대한 욕망이나 요구는 신뢰의 대양에서 항해를 시작하는 데에 방해물이 되는 것이다.


이 세 가지 시험이 하나님께서 즐겨 쓰시는 것들이다. 신성한 빛은 문제의 근원에 조명등을 비추는데, 그 근원이란 다름아니라 행복을 위한 각각의 정서 프로그램의 핵심을 이루는 우리의 본성적 이기심이다. 우리는 우리의 거짓 자아를 우리 마음대로 끝낼 수 없다. 단지 그것이 사라지도록 허용할 뿐이다. 거짓 자아를 무너뜨리기 위한 일들을 성령의 인도하심따라-부드러운 자극에 따라-우리 스스로 시작하면, 우리의 노력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나서시어 나머지 일들을 마무리해 주신다. 우리는 그저 그것에 동의하면 되는 것이다. 이것이 거기에서 해야 할 가장 큰 일이다. 우리의 노력이 모두 실패로 돌아가면, 우리는 마침내 하나님의 무한하신 자비의 은총을 받아들이게 된다.


감각의 밤은 우리의 행복을 위한 정서 프로그램의 근원이 이기심(=자기사랑)이라는 것을 알게 해준다. 이 영역에서 우리가 만족을 원하는 욕망들을 떠나보내고 나면, 우리는 영구한 평화의 길로 나아가게 된다. 이때에도 흥분시키는 사고나 정서가 일어나기는 하지만 이것들은 더 이상 정서적인 혼란으로까지 이르지는 않는다. 우리의 정서적 프로그램이 좌절될 때마다 타올랐던 고통스런 정서들을 참아 내기 위해서 쏟아 냈던 큰 에너지들을, 이제는 우리와 함께 살고 있고 또 우리가 봉사해야 하는 사람들을 위해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게 된다.


3. 문화적 조건화로부터의 자유(무덤 속의 안토니오)


여러 가지 투쟁을 거치며 새로운 융화-주님과 하나됨-의 수준으로 나아감에 있어서,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 자신,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새로운 시각으로 전환시켜야 한다. 이렇게 하는 데는 몇 년의 시간이 걸릴지 모른다. 그리고 이 전환이 이루어진 다음에 우리는 그 이전의 수준에서 영양을 주었던 영적인 음식에 입맛을 잃게 되고 더 이상 영양가도 없게 된다. 이때, 우리는 다시 한 번 믿음의 위기를 겪는다. 그리고 또 다른 영적인 투쟁을 크게 치르면서 믿음과 사랑의 다음 단계로 도약한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다음 수준에 즉시 자리를 잡는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의 모든 관계들을 새로운 시각에 융화시키는 데 긴 시간을 거쳐야 한다.


안토니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감각의 밤>악마들과 1차전을 끝낸 안토니오에게 내적 평정의 기간, 십자가의 성 요한이 플라토(산 중턱에 있는 일종의 평원지대: 역자주)라고 부르는 기간이 찾아왔다. 여기에서 플라토는 거짓 자아의 정화 후에 생겨나는 자유로운 감각을 일컫는다. 그러나 이러한 정화가 영적 여정의 끝은 아니다. 안토니오는 악마들이 또 다른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자기에게 주어진 영적인 진전을 진전이라고 간주하지 않고 마치 처음 여정을 시작하는 사람처럼 하루하루를 새롭게 시작하였다.


처음 융화의 시간을 지내고 난 다음부터 안토니오는 하나님이 그를  미지의 세계로 부르셨음을 더욱 강하게 내부에서 느끼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신뢰에 있어서 획기적인 도약을 하라는 부르심이었다. 그의 전기(傳記)에는 단순하게 이렇게 쓰여 있다. "안토니오는 자기 마을에서 좀 떨어진 무덤을 찾아 떠났다"(안토니오의 생애 8장 26). 우리가 만일 4세기에 살고 있으면서 이 이야기를 읽었다면 아마 우리의 모골(毛骨)이 송연해졌을 것이다. "그가 무덤으로 가다니!" 하면서 못 믿겠다는 듯 소리를 질렀을 것이다. 특히 보통의 상상 속에서 사막에 있는 무덤은 악마들이 들끓는 곳이라고 믿어져 왔기 때문이다. 그 당시엔 자기 친척이나 친구를 무덤에 묻는 동안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그 무덤에 머물러 있지 않았을 것이다.


안토니오에 대한 이야기는 간단히 쓰였지만, 이 이야기는 안토니오가 악마의 지역에 들어가 악마들과 투쟁할 것인가 아닌가를 분간하기 위해 1년 혹은 그 이상도 숙고했을 것임을 보여준다. 마침내 그는 악마에 대항하기로 결심하였다. 무덤으로 간다는 그의 결심은 엄청난 용기를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그 당시의 사회상으로 볼 때, 사회적 조건화에서 한걸음 벗어난 것이며 보편화된 사회적 고정 관념을 완전히 거부하는 행위인 것이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안토니오는 아마도 수줍고 소심한 기질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 스스로도 아직 자신 안에 소심한 기질이 남아 있음을 인식하고 있었고 그것과 스스로 부딪치라는 영감을 하나님께로부터 얻었던 것 같다. 안토니오와 다른 공상적인 금욕가들과의 차이점은, 이러한 결정이 은총에 의한 영감에서 왔다는 사실이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첫 번째 여정에 발을 들여놓기도 전에 영적 여정에서 앞선 사람들을 모방하려 든다. 그들은 한꺼번에 완덕에 이르려고 시험과 봉사 활동을 자기 역량 이상으로 하려든다. 그러나 그들은 으레 넘어지게 마련이다. 우리는 자신의 일에 대해 하나님께서 지원해 주시기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영적 여정은 우리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악마의 영역에서 싸움을 하겠다는 결정을 내린 것은 문화적인 과잉 동일시에서부터 자신을 자유롭게 하려는 투쟁에 대한 분명한 표시였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신화적 회원의 의식 수준에는 특정한 집단에 대하여 과잉으로 동일시하려는 특징이 있다. 안토니오의 경우에 그 문화는, 악마에게 어떤 지역에 대하여 관할권을 인정해 줌으로써,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의 영역을 제한해 버리는 것이었다. 자유롭게 된다고 하는 것(신화적 회원 의식에서 정신 자아적 의식으로 나아간다고 하는 것)은 문화적 기대, 상투적 고정 관념, 고정된 사고방식에서부터 탈피해 하나님의 선하심과 능력에 대하여 더 큰 신뢰를 갖는 길로 나가는 것을 뜻한다.


안토니오는 혼자 무덤으로 가면서 친구들에게 무덤을 잠그라고 하였다. 이렇듯 세밀하게 기술한 내용을 보면, 안토니오는 자신의 결단이 약해지는 것을 두려워하였던 것일까? (그 당시 사막의 무덤이라고 함은 사막의 동굴 안에 있는 구멍들에 시체를 넣는 곳으로, 무덤으로 들어간다고 함은 이 동굴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 역자 주).


안토니오의 용기에 악마들이 놀랐다. 악마는 아마도 "이 친구가 여기서 무엇을 하려는 거야? 건방지게 내 구역에다 발을 들여놔? 이 친구를 내쫓아 버리자!"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악마는 같은 패거리의 악마들을 모두 불러서 안토니오를 죽어라고 두들겨 반쯤 의식을 잃게 만들었다. 안토니오는 그 후에 사람의 힘으로는 그렇게 처절하게 때릴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안토니오에게 빵을 가져왔던 그의 친구는 그가 의식을 잃은 채 땅바닥에 쓰려져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 친구는 안토니오를 업어다가 교회에 누였다. 그의 친척들과 친구들은 그가 이미 죽은 줄 알고 슬피 울었다.


그러나 한밤중이 되자 그들은 머리를 떨구며 모두 졸기 시작하였다. 안토니오가 깨어나서 그들이 머리를 끄덕거리며 졸고 있는 것을 보았다. 이 모습을 보던 그의 마음속에선 이런 의문이 일어났을 것이다. "성령께서 나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이만하면 충분하다 구급차를 불러 병원으로 가거라'는 것인가? 아니면 '안토니오야, 이 싸움은 끝장을 봐야 해, 돌아가거라. 내가 뒤를 봐 주마' 하는 것인가?"


안토니오는 이러한 두 가지 선택 앞에서 고민하였다. "돌아가야 하는가? 아닌가? 이것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감인가? 아니면 단순히 나의 생각일 뿐인가?" 그리고 그는 -처음에 주신 말씀따라- 모험을 해 보기로 결정하였다. 그는 친구 한 명을 깨워서 그를 다시 무덤으로 데려가 달라고 졸랐다. 그 친구는 다른 사람들이 깨지 않도록 조용히 안토니오를 등에 업고 다시 무덤에 데려다가 바닥에 누였다. 그리고는 문을 잠갔다.(어떻게 이런 친구가 다 있을까하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안토니오는 너무 약해서 일어설 수 없기 때문에 누워서 기도하였다. 그는 기도를 끝내고 다시 악마들에게 도전하였다. "내가 여기 왔다!" 라고 그는 소리쳤다. "나는 너희들의 주먹질이 겁나지 않아, 나를 아무리 치고 때려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놓을 수 없다." 그리고는 습관대로 시편을 노래하기 시작하였다. "비록 나의 원수들이 나를 향해 진을 친다 해도 나는 두렵지 않으리라"(시 27:3). 여기에서 두려움에 관한 그의 말을 들어 보자, 그는 자신의 마지막 남은 두려움을 몰아내어, 성령이 하시는 대로 모두 맡겨 드리고 따르는데 있어서 완전히 자유롭게 되려고 하였다.
아타나시오는 이렇게 적었다. "악마들은 안토니오가 그렇게 맞고도 다시 돌아온 용기에 대해 놀랐다. 악마들은 그의 개(사막의 교부들은 악마들을 그렇게 불렀다)들을 다시 불러 모으고는 화가 치밀어 이렇게 소리쳤다. '이것 봐. 우리가 이 친구를 이기지 못했어. 음욕의 영으로도 안 되고 주먹질로도 안 되었어. 더구나 이제는 그가 우리에게 도전해 오지 않나, 아무래도 다른 방법을 써야겠어.'
"그날 밤 악마들이 어찌나 소란을 피웠는지 그곳은 지진이 일어난 것 같았다. 이것은 마치 야수와 뱀의 모습을 한 악마들이 그 조그만 공간을 향해 사방에서 쳐들어오는 것 같았다. 그곳은 삽시간에 사자, 곰, 표범, 들소, 뱀, 독사, 전갈, 늑대 등의 환영(幻影)으로 꽉 찼다. 짐승들은 각기 그들의 특징대로 움직였다. 사자들은 으르렁대며 곧 달려들 것 같았고, 들소들은 그들을 짓밟고 지나갈 것처럼 보였다. 뱀들도 곧 달려들 것처럼 노려보았다. 나타난 모든 동물들이 동시에 부르짖는 소리들은 몹시 두려웠고 또 매우 맹렬하였다. 매 맞고 찔리어 온몸이 극심한 아픔 중에 있으면서도 안토니오는 두려움 없이 누워 있었다(안토니오의 생애 9장 27).
맨 마지막 말 "두려움 없이"라는 말을 보면 이제 안토니오는 두려움의 차원을 지난 것처럼 보인다. 이야기는 계속된다.
그렇지만 안토니오의 정신은 맑았다. 그는 몸의 고통으로 신음하였지만 그의 마음은 이미 그 상황까지도 지배하고 있었다. 안토니오는 그들을 놀리기 위해 이렇게 말하였다 "너희들이 정말 힘이 있다면 하나만 나와도 충분하지 않느냐. 내 정신을 빼어 버리려고 내게 겁을 주는 것이겠지만, 어디 나를 대항할 힘을 받았으면 나와 봐라. 만일 그렇지 않다면 왜 흥분들을 하는 거냐?" 수많은 책략을 부려 보았지만 결국 악마들은 안토니오를 속이는 것이 아니라 이제 자신들을 속일 뿐이라는 것을 알고 안토니오를 향해 이를 악물었다. 주님은 안토니오의 투쟁을 잊지 않으시고 안토니오를 도우셨다. 안토니오가 위를 쳐다보았을 때에 지붕이 열리고 빛줄기가 그에게 내려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악마들은 즉시 사라졌다. 육신의 고통도 사라졌다. 그리고 동굴은 이전의 모습대로 돌아왔다. 안토니오는 하나님의 도움이 내려온 것을 알아차리고 이제 자유롭고 크게 숨을 들이쉬며 점차 고통이 사라져 감을 느꼈다(안토니오의 생애 9장 27).


이러한 상황에서 으레 일어날 수 있는 의문을 그는 그 환상에게 물었다.
"어디 계셨습니까? 왜 내가 처음 고통을 받기 시작할 때 나타나지 않으셨습니까? 그러자 음성이 들려 왔다. "안토니오야, 나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나는 너의 행동을 지켜보려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네가 지금까지 꿋꿋이 참아 내고 항복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언제나 너를 도와 줄 것이며, 네 이름이 사방에 알려지게 하겠다"(안토니오의 생애 10장 28).
이 마지막 구절은 아브라함이  산에서 커다란 믿음의 시험을 마친 후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하신 약속과 흡사하다.
이 말씀을 들은 안토니오는 일어나 기도하였다. 그는 힘이 솟아났고, 이전보다 그의 몸이 강해졌음을 느꼈다. 이때 그의 나이는 약 35세였다(안토니오의 생애 10장 28).


앞의 질문과 대답은 내 마음에 좀 걸리는 것이 있다. "내가 바로 여기에서 너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다." 라는 대답이 설득력 있는가? 안토니오가 말한 것처럼 왜 하나님께서는 좀 일찍 오시지 않았나? 안토니오와 같은 처지에 있었다면 누구라도 하나님께 완전히 버림받았다고 느꼈을 것이다. 하나님의 무한하신 동정심은 어디 있었던 것인가? 마치 하나님께서는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으신 것처럼 보였다.


이러한 엄청난 고통 앞에서 하나님을 대신하여 대답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좀 진부한 것 같다. 나는 이러한 답변 대신, 제랄드 허드가 이름 붙인 '건조함과 어둔 밤' 이라는 책에 나오는 한 이야기의 비유를 들어 보겠다.


어느 과학자가 이 지구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색깔의 조화를 이루는 나비의 혈통을 개발하는 것에 자신의 생애를 바치고 있었다. 그는 몇 년의 실험 끝에 한 고치에서 그의 유전자적 대작이 나타나리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나비가 부화하리라고 믿은 날에 그는 그의 전 직원들을 불러 모았다. 그 창조물이 고치에서 나오는 과정을 그들은 숨도 크게 쉬지 못하며 기다렸다. 오른쪽 날개가 빠져 나오고 그리고 왼쪽 날개의 대부분이 빠져 나왔다. 이 모습을 본 직원들은 자축하기 위하여 샴페인을 돌리며 시가(여송연)도 돌리고 있었는데, 그때 그들은 왼쪽 날개 끝이 고치의 구멍에 걸려 나오지 않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순간 이상한 두려움을 갖기 시작했다. 나비는 자유로워지기 위해 절망적으로 다른 날개를 퍼덕이고 있었다. 그렇게 애를 쓰는 사이에 나비는 점점 기운이 빠져 가고 있었다. 그리고 퍼덕이는 시간이 점점 길어져 갔다. 끝내 과학자는 자신의 긴장을 참아 내지 못하고 작은 칼을 집어 그 구멍을 아주 조금 잘라 내었다. 마지막 안간힘 끝에 나비는 실험실 탁자 위로 빠져 나와 자유롭게 되었다. 이것을 본 모든 사람들이 다시 샴페인과 시가를 돌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은 곧 다시 조용해져야 했다 그 이유는 나비가 자유롭게 되기는 했지만 날지를 못했기 때문이다.


고치에서 빠져 나오려고 했던 것은 피를 날개의 끝에 보내어 고치에서 나오는 동시에 새 생명을 즐기면서 마음껏 날 수 있게 해주는 자연의 법칙이었던 것이다. 그 피조물을 살리려고 한 것이, 그만 나비가 활동하는 힘을 무기력하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결국 나비가 날 수 없게 된 것을 통해 우리는 모순 논리를 보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저지르지 않으시려는 실수이다. 우리는 안토니오를 바라보고 계신 하나님의 이미지를 이해해야 한다. 우리가 유혹과 고난을 받고 있을 때에 하나님은 서둘러서 우리를 구해 주지 않으시고 그의 자비를 잠시 참고 계시는 것이다. 영적 투쟁은 우리가 우리 존재의 모든 구석구석을 열어서 은총의 신성한 에너지를 받을 준비를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분이 당장에 그 즉시 직접 나서서 개입하지는 않으신다. 우리의 변형이 일단 이루어지고 나면 우리가 신성한 생명을 온전하게 누리도록 하기 위해 우리를 기다려 주시는 것이다. 만일 정화와 치유가 주님 보시기에 충분히 일어나기 전에 하나님의 도우심의 손길이 너무 일찍 이르면, 신성한 생명으로 살아가는 궁극적인 우리의 능력을 좌절시킬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안토니오의 싸움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아타나시오의 글은 이렇게 계속된다. "그 다음날 안토니오는 하나님께 봉사하려는 더욱 큰 열정으로 영감을 받아 나아갔다." 그는 사막을 향해 갔다. 4세기에 사막은 악마들의 본거지로서 악마들의 군사 산업 지구가 있었으며, 생명과 공동체, 국가와 세계를 파괴하려는 계획을 수립하는 곳쯤으로 생각되었었다.


그래서 안토니오는 악마의 힘이 집중해 있는 그 사막으로 걸어갔다. 수도 생활이 세상에서 도피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수도 생활은 바울 사도가 '높은 곳에 있는 악한 힘-하늘에 있는 약한 영'이라고 말한 그 힘과 투쟁하는 사람들이 벌이는 공격적인 활동이다. 이 활동으로 그들은 인간을 지배하려 드는 악마들의 힘을 빼앗으려고 투쟁을 하는 것이다. 고독의 고행은 유치원 교육이 아니라 영적 여정의 대학원 교육이다. 안토니오가 악마의 탄약 더미의 상징처럼 보이는 버려진 요새에 자리를 잡았다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그가 그곳에 가자마자 뱀들은 재빨리 그곳을 도망쳐 나갔다. 안토니오는 다시 그의 친구에게 문을 잠그도록 하고, 그곳에 머무르는 동안 아무도 만나지 않으며 악마들과의 싸움을 계속하였다.


그는 그렇게 그곳에서 20년을 보냈다. 그의 친구들이 때때로 찾아와 안에서 나는 소리를 듣고는 그 안에서 혹시 폭동이 일어난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악마들은 안토니오를 이겨 내지 못하고 이제는 그에게서 도망치려고 하고 있었다. 안토니오는 시편의 여러 가지 구절로 기도하면서 사람들을 억누르고 있는 악마의 손을 풀어 주려고 하였으며 "하나님이 일어나시어 그의 원수들을 흩으셨다. 연기가 사라지듯 그들도 사라지게 하라"와 "모든 나라들이 나를 짓누르지만, 나는 주님의 이름으로 그들을 몰아냈도다"라는 구절들을 좋아하였다.


안토니오가 55세가 되었을 때, 그의 친구가 그 요새의 문을 헐어 버렸다. 안토니오는 이것을 이제 고독에서 나오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받아 들였다.


안토니오는 거룩한 신비의 생활을 시작하여 하나님의 영으로 가득 차게된 사람이 성소를 나오듯 그 요새에서 나왔다. 그를 본 친구들은 그의 몸이 이전의 모습을 그대로 지니고 있는 것에 놀랐다. 그는 운동부족으로 살이 찌지도 않았고 단식과 투쟁으로 몸이 마르지도 않았다. 그는 그들을 떠났을 때와 똑같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의 영혼은 아주 순수하여, 슬픈 일에 위축되지도 않았고 즐거운 일에도 흐트러짐이 없었으며, 그를 반기려는 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우쭐거리지도 않았다. 그는 완전히 이성으로 인도되고 성격이 안정되어 완벽하게 스스로를 컨트롤하고 있었다. 그는 모든 사람들에게 세상의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사랑을 구하도록 힘쓰라고 가르쳤다(안토니오의 생애 14장 32).


이전에 악마들에게 속했던 사막이 이제는 평화의 장소가 되었다. 그 사막은 10년도 채 되지 않아서 수천 명의 수도자로 메워졌다.


안토니오의 영적 여정의 체험은 하나님이 우리의 삶 안에서 어떻게 활동하시는가에 대한 고전적인 예이다. 영적 여정을 버리고 이전의 생활로 돌아가라는 첫번째 유혹에 대해 맹렬하게 저항하였을 때 그는 감각의 밤에 들어갔고, 그동안에 하나님은 그가 가진 거짓 자아의 무의식적인 동기를 버리게 하기 위해 활동하셨다. 새로 얻은 자유를 일상생활과 일상적인 관계로 융화하면서 어느 정도의 안정(플라토: 역자 주)을 즐긴 다음에 그는 더 나아가 악마들과 부딪쳤는데, 동시에 이것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데 장애가 되는 문화적 조건화의 영향을( 롬12:2, 이 세대-풍조/유행/가치-를 본받지 말라는 말씀처럼) 철저하게 떠나 버리는 과정이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이것을 영의 어두운 밤이라고 불렀다. 이 전환적 시기에 대해서는 ‘영의 밤’에서 다루어질 것이다. 이때 이루어진 결정적인 시험으로 안토니오는 비로소 변형하는 일치로 들어갔던 것이다.


4. 감각의 밤의 열매


감각의 밤은 우리의 행복을 위한 미숙한 프로그램을 무너뜨리는 것에 관한 것이다. 이 프로그램은 성인이 되어서까지 작용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영적 여정을 시작할 때, 우리의 첫 번째 열성은 아직 성숙치 않은 상태이며 아직 이러한 프로그램의 영향을 받고 있다는 사실조차 거의 깨닫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더 자라기 위해서는 어떤 무엇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영적 여정의 어떤 시점에서, 기도 시간 동안에 하나님이 부재하시다는 감각이 퍼지고 이러한 감각이 생활의 다른 영역에도 스며든다. 그러나 실제로 이것은 그리스도와 더 깊은 일치가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대부분은 그렇게 경험하지 않는다. 우리 앞에 성서적 의미의 사막이 전개되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 무슨 잘못이 생겼다는 우려를 먼저 갖게 되는 것이다.


감각의 밤에 우리는 피상적인 영적 음식으로부터 순수한 믿음이라는 단단한 음식으로 전환하라는 부르심을 받는다. 기도와 성례와 '거룩한 독서(lectio divina)'에서 즐기던 감각적인 위안은 마치 간식과 비교될 수 있다. 우리는 이제 더욱 좋은 음식, 즉 믿음의 마른 빵을 제공받는다. 엄마의 젖을 떼는 아이는 그동안 먹었던 젖에서 떨어지는 것을 싫어하지만, 단단한 음식을 섭취함으로써 더 성장할 수 있다. 이와 비슷하게 하나님은 신성한 어머니처럼, 위안이라는 젖가슴에서 우리를 밀어내어서 우리가 순수한 믿음의 음식에 적응하도록 하신다. 이 순수한 믿음이라는 음식은 영적 여정의 거친 땅에서 우리에게 힘을 준다.


감각의 밤은 우리가 아동기에서 초기 사춘기로 자라면서, 기본적인 욕구의 불충족에 대해 만족되지 않을 보상을 요구하는 것으로 반응하며 자리 잡은 정서적 불구를 치유해 준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메말라 감을 경험하면서 동시에 우리가 이전에 행복을 찾았던 모든 일에서도 만족을 얻지 못한다. 정서적인 프로그램이 말라 버리고 부수어지면서 마지막 저항을 하는 것이다.


감각의 밤에 얻어지는 기본적인 열매는 겸손이다. 겸손은 인간 가족 사이에서 우리의 위치를 올바르게 잡도록 도와주고, 또한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인생의 부침(浮沈)을 참아 내게 한다. 사실 상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전보다 더욱 보호하시지만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비밀스럽게 하신다.


감각의 밤은 정서 프로그램을 무너뜨리고 거짓 자아를 없애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이러한 정화의 과정으로 열리는 열매는 거짓 자아의 강박적이고도 고식적인 방해로부터 해방되어, 무엇인가를 하려는 우리의 결정을 거짓 자아의 영향을 받지 않고 자유스럽게 내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우리가 찾고 있는 환상적인 목표가 계속해서 좌절되면서 분노, 슬픔, 두려움, 자부심, 탐욕, 음행, 질투, 그리고 다른 육체적 죄를 짓게 하는 병적인 정서를 일으킬 때, 우리는 겉으로 평온을 유지하기 위해 계속해서 노력해야 한다. 감각의 밤에 거짓 자아가 작아지고 하나님께 대한 신뢰가 더욱 자라면서 우리는 그 에너지를 다른 더 좋은 것에 쓸 수 있게 된다.


감각의 밤은 거짓 자아를 무너뜨리는 것 이상의 일을 한다. 우리의 강박적이고도 습관적인 과잉 반응을 이완시켜 주고, 동시에 우리의 무의식 속에 있는 에너지를 방출시킨다. 이것은 향심 기도와 같은, 수동적으로 하는 정규적인 관상 기도의 수련에 우리의 여정이 바탕을 두고 있을 때 더욱 그렇다. 감각의 밤은 사고와 감정, 비평과 연상들을 초월해 하나님 안에서 쉬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신체적 기능들과 지각의 수준에서 영적인 기능과 직관의 수준으로 그 인지력이 옮겨 가고, 다시 더 깊은 수준의 신성한 현존의 문을 열어 주는 것이다. 이 상태는 우리에게 더 큰 휴식을 준다. 그리고 이 휴식은 다시, 아동 초기의 방어 기제가 우리의 인식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지금까지 막아 왔던 무의식적인 활동들을 이완시켜 준다.


무의식의 에너지는 긍정적 혹은 부정적인 방법으로 나타난다. 심령 능력과 영적인 위안은 일반적으로 긍정적인 정서를 만들어 낸다. 우리 성격의 어두운 면이나 혼합된 동기들이 우리의 인식 안으로 밀고 들어오면, 거짓자아가 우리에게 끼치는 손상을 경고하면서 부정적인 정서가 일어난다.


여러 수도자들이 미처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갑작스럽게 힘찬 에너지가 솟구쳐 오르는 경험을 하였다. 어떤 경우에는 무의식의 에너지를 완화시키기 위해 만든 만트라나 호흡 수련으로 이러한 일들이 생기기도 한다. 만일 감각의 밤으로 자존심이 정화되기 전에 우리가 영적인 위안과 심령능력 혹은 성령 은사를 체험하면 환희의 감정이 넘쳐흐를 것이고, 만일 성격의 어두운 면들이 올라오면 깊은 낙담의 늪에 빠져 버릴 것이다. 이런 때에 좋은 영적 가르침은 이러한 순진성에 대한 해독제가 된다. 이 세상 종교들의 모든 위대한 영적 전통들에서는 영적 여정을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필수적인 두 가지 수련으로서, 하나님께 대한 예배와 다른 이들을 위한 봉사를 요구한다. 크리스찬에게 있어서 하나님께 대한 헌신과 예배는 '거룩한 독서(lectio divina : 성서를 통해 거룩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 그리고 기도의 수련으로 개발된다. 우리 각자의 삶의 처지에 따라 무엇이든지 우리가 해야 할 의무를 충족시킴으로써 우리는 다른 이에 대한 봉사를 통해 성장한다. 이러한 두 가지 둑을 쌓아 두면, 긍정적인 혹은 부정적인 내용들이 무의식에서 올라오더라도 이것들이 넘치지 않도록 막아주는 안전한 수로를 형성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감각의 밤 기간 동안에 드러나는 여러 가지 자아 지식(自我知識)으로부터 이익을 얻도록 준비시키며, 우리가 그것들을 다룰 수 있는 적절한 훈련과 태도를 마련하기 전에, 무의식 속에 억압된 내용들이 의식 속으로 튀어 오르는 위험을 피할 수 있도록 미리 준비하게 한다.


무의식으로부터 올라오는 에너지에서 얻는 한 가지 긍정적인 이익은 직관적 의식 수준의 발전이다. 켄 월버(Ken Wither)의 모델에 따르면, 직관적 수준은 정신 자아 수준도 초월하여 모든 현실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열어 준다고 한다. 인간의 두뇌에는 아직도 활성화를 기다리는 잠재력이 있다고 한다. 만일 우리가 신비가들의 경험을 믿는다면, 현재수준의 인간의 의식은 더 높은 수준으로 가는 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들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 인간의 잠재력은 변형하는 일치 중에 완전히 활성화하는 것이다.


신화적 회원 의식에서 우리는 부모와 국가, 인종, 어렸을 적의 종교 교육의 가치를 무조건 받아들인다. 이렇게 무조건 받아들인 것들은 우리가 세상을 보는 관점, 혹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신화가 된다. 감각의 밤에 이러한 우리의 선입관념들이 영혼의 밤에서 만큼 깊게 이루어지지는 않으나, 도전을 받는 것은 사실이다.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듯이 감각의 밤은 우리가 지금까지 완전하다고 느꼈던 근본을 뒤집고, 현실을 보는 새로운 길을 열어 준다.


각각의 인간 발달 단계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발달 상태에 맞게 자신을 보여주신다. 그러므로 원시인과 어린이에게는 태풍 같은 하나님이 되시고, 신화적 회원의 의식 수준에서는 단일 신 하나님이 되시고, 복음에서 보여주는 온전한 인간 가족에게는 무한히 살피시는 하나님이 되신다. 우리는 자라면서 이러한 각각의 수준에 맞게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다.


감각의 밤에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원시적인 아이디어들은 도전을 받는다. 그 아이디어에는 우리의 초기 아동기 때에 우리에게 보여진 편견도 포함된다. 만일 하나님이 악귀나 경찰이나 무서운 판사로 보여졌다면, 이러한 무서운 이미지에 대한 정서적 연상이 무의식 속에 깊이 스며든 채 남아있을 것이다. 그것들은 정서적 판단이지 진정한 판단은 아니므로 바로잡아져야 한다. 감각의 밤은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왜곡된 관점에 부딪쳐 그것을 버릴 수 있도록 해준다. 그러고 나면 하나님을 그분 그대로 보도록 자유로워지면서, 이 자유가 풀어 주는 커다란 힘을 존경과 사랑으로 다른 사람들과 관계 맺도록 하는데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게 한다.


우리가 하나님과 관계를 맺어 온 우리의 제한된 방법을 다루는 하나의 방법은 우리가 갖는 하나님께 대한 잘못된 관념들을 잠재우게 하는 것이다. 관상 기도로 하나님 안에 쉬는 일이 습관화되면, 우리가 갖고 있는 행복을 위한 정서 프로그램과 문화적 조건화에 가졌던 동일시를 자동적으로 해체하게 된다. 우리는 이미 깊은 수준에서 하나님과 만나고 있는 것이다. 얼마 가지 않아서 우리가 생각하는 수준으로 갖던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교통(communion)하는 수준의 관계로 자랄 것이다. 교통의 관계는 존재와 존재, 현존과 현존의 관계이며 이것이 순수한 믿음 속에서 갖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다.


감각의 밤은 우리가 갖는 투신의 성격을 명료하게 해준다. 예수께서 "나를 따르라"고 하신 말씀을 우리의 가슴으로 받아들일 때, 그분이 우리를 친구로 부르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친구 관계에는 언제나 친구에 대한 투신이 따른다. 이것이 안토니오가 그의 모든 유혹을 물리치고 변형하는 일치로 이르게 만든 성향이었다. 그의 기본적인 방법은 언제나 같았다. 영적인 여정에 대한 투신, 끊임없는 기도,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지탱할 힘을 주시리라고 신뢰하는 마음이었다.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보이는 것, 내적인 정화, 일상생활에서 받는 시험들이 우리의 투신에 도전을 한다. 우리 시대에는 투신하는 사람이 드물다. 사람들은 한 직장에서 다른 직장으로 옮기고, 결혼 생활은 끝까지 가지 않으며, 평생 동안 하려고 선택한 직업도 중도에 바꾸고, 수도 생활과 독신의 맹세는 이전처럼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다. 사람들이 자신의 투신에 머물도록 도와주고 강요하였던 이전의 여러 가지 제도는 현대의 문화적인 혁명으로 사라졌다. 이러한 사회적인 발달이 어떤 좋은 것을 가져왔는지는 모르지만, 이전에 있었던 투신의 모습이 적어도 서구 사회에서는 대부분 없어졌다.


대부분의 젊은 부부는 결혼 당시에 그들이 어떠한 상황에 부딪칠 것인지에 대해 대부분 아무런 대책이 없다. 어려운 상황이 일어나면, 그들은 자주 서로 잘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헤어지기로 결정한다. 그리하여 비통한 이혼을 하고 다른 짝을 구하지만 결국, 똑같이 끔찍한 과정을 되풀이한다. 물론 어떤 투신의 관계는 죽음이나 위험에 이르는 경우도 있다. 또 어떤 관계에서는 로맨틱한 면이 우세하여 자기희생을 해야 하는 사랑의 요구 앞에서 깨어지기 일쑤다.


사실상 투신이 성공하는 관계에서도 어려움은 일어난다. 사랑은 사람을 상처받기 쉽게 만든다. 하나님과 다른 사람으로부터 사랑받는다고 느끼면 자신을 방어할 필요가 없어진다. 그리하면 방어가 줄어들고, 성격의 어두운 면이 의식 속에 뿐만 아니라, 행동으로도 올라와 어쩌면 배우자를 실망시킬지도 모른다. 당신의 배우자도 비슷한 경험을 하기를 바란다. 혼인의 한 가지 목적은 상대방의 어두운 면이 진전되도록 하는 은총을 제공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결혼은 정화와 변형의 학교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부부가 서로의 실수와 어두운 면과 약점을 받아들이면 그것은, 즉 서로 간에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일을 하는 것이다. 인간의 사랑은 혼인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상징하며 그 사랑을 상대방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결혼에 투신하면 자아 지식의 과정을 잘 거칠 수 있게 되고, 이러한 깨달음을 통해 이익을 거두게 되는 것이다.


결혼하게 된 동기가 잘못된 것을 깨달았다고 하자. 당신이 남자라면, 당신이 전혀 가져 보지 못했던 엄마나, 아니면 당신의 엄마와 똑같은 사람을 찾고 있었을 것이고, 그가 당신의 모든 욕구 -빨래하고 매일 식탁을 준비하고 당신의 눈물을 닦아 주어야 하는- 를 채워 줄 수 있음을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당신은 당신의 자아 지식이 진전하면서, 갑자기 이러한 판단들이 애초에 결혼하는 동기로서 옳은 것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결국엔 "내가 자유를 얻는 오직 한 가지 길은 이 관계를 완전히 청산하는 것이다"라는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신을 투신하는 경우에 당신은 "왜 나는 새로운 성찰을 이 관계에 불러들이고 이것이 도움이 되는지 아닌지를 알아보려고 하지 않는가?"라고 말할 것이다. 의존하는 경향이 아주 깊게 스며들어 있을 경우에는, 이렇게 하는 것이 언제나 가능한 것은 아니다. 아주 심각한 잘못을 저질렀을 경우에 이별이 정말로 필요할지는 모르겠으나, 투신하는 관계의 경우엔 그렇게 새로 얻은 성찰을 부부 관계에 도입해 보려고 먼저 노력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누구도 완전히 순수한 동기를 가지고 수도 생활이나 사제의 길과 같은 투신의 길로 들어서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어떤 동기를 가지고 투신의 길로 들어갔는가 하는 것보다는 끈기를 갖겠다는 동기가 실은 더 중요하다.


감각의 밤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신에 대한 책임을 지고 또 그리스도를 따르겠다는 우리 개인적인 응답에 대하여 책임을 지라고 부르신다. 여기에는 우리와 함께 살고 있는 사람들과 더 나아가 인간 가족 전체에 대한 책임도 포함된다.


감각의 밤에, 점차로 이전에 우리가 가졌던 모든 힘과 위대한 원천이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그 투신을 포기하려는 유혹도 매우 커진다. "이 영적 여정은 나에게 도저히 맞지 않아. 나에게는 부양해야할 가족이 있고 전문직 생활도 있어. 내 안에서 솟구치는 이 모든 고통스럽고 부정적인 것들을 더 이상 감당하지 못하겠어." 이러한 메마름과 유혹이 길어지면, 우리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영적 여정을 아주 끝내 버리고 다시는 시작하지 않겠다고 원하도록 만들기도 한다. 만일 우리의 여정에 대한 투신을 거두어들인다 해도 거짓 자아는 여전히 우리 뒤를 따라온다. 우리가 어디를 가든지 우리는 새로이 맞이하는 상황에서 다시 그것과 부딪쳐야 하는 것이다. 투신은 이러한 퇴보적인 본능에 반대하며 이렇게 말한다.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테야.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그리스도의 사랑을 위해 정화의 사막을 지나가기로 결심했어." 이것이 감각의 밤의 작업이 완수될 수 있도록 해주는 결단인 것이다.

아가서강해-유동근 http://www.cltv.co.kr/program/program_list.asp?idx=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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