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19.11.29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주안에굳게섬..한마음도움기뻐함생각행함 가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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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jlhqhv"(227, 알레데스) 진실한, 진짜의, 신실한.

semnov"(4586, 셈노스) 존귀한, 공경(숭배)할만한, 존엄한, 거룩한.

divkaio"(1342, 디카이오스) 의로운 righteous.

aJgnov"(53, 하그노스) 순결한 pure, 거룩한 holy.

prosfilhv"(4375, 플로스필레스) 마음에 드는, 사랑스러운.

eu[fhmo"(2163, 유페모스) 좋은 소문의, 칭찬할만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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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흔들리지 않는 신앙생활의 원리.[거름망/필터를 적용하라!!]....본문: 빌립보서 4장 4-9(8절~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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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간에서 두루 유익하고 덕스럽다, 기념할만한 업적이라 평가하더라도 그것을 행하는 믿는 이는 마땅히 정말 주님과 그 말씀앞에서 그 근본동기를 다시 점검해 봐야 한다...나의 의를 드러냄이 아닌가 하나님께 합당한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것인가!]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서 그분 보시기에 참된지(말씀에 비추어 볼 때), JC를 닮은 거룩함, 곧 내주하시는 주님 임재의 영광을 사는 것인지, 주님 보시기에 옳은지((거룩하신 주께 합당한지.. 마음에 일말의 거리낌 없고 생명과 평안이 그 안에 가득한지...하나님의 공의와 정의), JC처럼 순전/일편단심/전심전력다함/순결함(손해보는 일처럼 보여도 성령따름...계명/사명/소명)인지, 주님 보시기에 사랑스럽고(내 사랑, 내기쁨) 칭찬하실만한지(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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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Rejoice in the Lord alway: and again I say, Rejoice.

5.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Let your moderation be known unto all men. The Lord is at hand.

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Be careful for nothing; but in every thing by prayer and supplication with thanksgiving let your requests be made known unto God.

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And the peace of God, which passeth all understanding, shall keep your hearts and minds through Christ Jesus.

8.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Finally, brethren, whatsoever things are true, whatsoever things are honest(honorable, and worthy of respect), whatsoever things are just(right, and conformed by God's word), whatsoever things are pure(and wholesome), whatsoever things are lovely(and brings peace), whatsoever things are of good report (admirable, and good repute); if there be any virtue(excellence), and if there be any praise(anything worthy of praise) , think (continually) on these things.(center your mind on them, and implant them in your heart)

9.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Those things, which ye have both learned, and received, and heard, and seen in me, do (in daily life): and the God(Who is the resource) of peace(and wellbeing) shall be with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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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 4장 1~9절의 말씀은 한 마디로 “주 안에 굳게 서라는 명령입니다. 이 명령 안에는, 그들에게 주 안에서 굳게 서지 못하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믿는 자들의 신앙을 공격하는 것들이 있었는데 그것은 시험, 환란, 유혹이라고 부르는 ‘어려움’들입니다. 약1:2에서는 우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한다”고 말합니다. 

베드로는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라”고 말합니다(벧전 4:12). 우리에게 오는 시험과 어려움은 이상한 것이 아니라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어려움들이 우리의 신앙을 흔들 때가 있습니다.

욥기를 읽을 때면, ‘만일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내 삶의 기반을 흔드는 그와 같은 큰 시험을 당할 때 욥과 같이 반응할 수 있을까,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고 했던 아내가 오히려 우리가 보이기 쉬운 모습이 아닐까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 끔찍한 상황에서 믿음이 흔들리지 않고 신앙이 굳게 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때로는 별 것 아닌 것이 신앙을 흔들기도 합니다. 어떤 성도가 지나가며 무심코 던지고 간 말에 신앙이 흔들립니다. 집에서 남편이, 아내가, 부모님이, 자녀가 한 말에 우리는 상처를 입고 신앙생활에 어려움을 겪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내가 뭔가 잘 해보려고 하면 의견이 부딪치는 사람이 있어 어려움이 됩니다. 직장에서 빛과 소금이 되고자 굳게 다짐하지만 그날따라 나의 결심을 공격하는 이들이 반드시 있습니다. 말씀을 읽고 순종하려고 하면 사단이 더 공격을 하는 것 같습니다. 이런 일들이 우리 삶에 비일비재합니다. 그런 시련과 유혹 속에서 어떻게 우리의 신앙을 지킬 수 있을까요?

사도 바울은 빌4:1-9의 말씀을 통해 그에 대한 답을 말해주고 있는데, “주님 안에서 같은 마음(겸손)을 품으라”(2),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4),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5),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아뢰라”(6,7)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염려제목을 기도제목으로 내 놓을 때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그 안에서 승리할 수 있는 ‘치료약’입니다. 오늘 말씀드릴 것은 어떻게 시련과 환란 앞에서 평안을 잃지 않을 수 있을지에 대한 ‘예방약’입니다.

끝으로 형제들아” 사도 바울은 지금까지의 말씀을 종합하며 명령하고 있습니다. 빌립보 형제들과 이 자리에 계신 분들에게 명령합니다. 믿는 자, 형제자매가 반드시 알아야 하고 순종해야 할 것에 대해 주님께서 사도 바울을 통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첫 번째 명령 – 바르게 생각하라

이것들을 생각하라”(8절 하) “생각하라”는 것은 ‘마음 속에 품으라’, ‘마음을 쏟으라’, ‘곰곰이 생각하라’, ‘생각을 메어두라’, ‘마음 속에 간직하라’ 등으로 번역되었습니다. 이것은 그저 스쳐가는 생각이 아니라 무언가를 깊이 생각하여 집중-몰입한 상태를 말합니다. 

책을 읽을 때나 어떤 일을 할 때 생각이 그것에 깊이 빠져 다른 사람이 부르거나 말하는 것을 듣지 못할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와 같은 것입니다. 이 단어는 실제로 수학이나 회계 용어로 사용했던 단어입니다. 정확한 계산과 논리를 따라 결론을 내리는 것, 생각을 고도로 집중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 또한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게 “여기신다”는 말씀에서 사용한 단어이기도 합니다. 모든 것을 계획하신 하나님이 그것을 이루시고 우리를 의롭다고 선포하시는 과정이 이와 같은 사고과정과 같습니다.

‘생각하는 것’은 인간이 다른 동물들과 구분되는 가장 큰 특징입니다.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즉”(잠 23:7) ....이 말씀은 마음에 가진 생각이 그의 모든 것을 결정짓는다는 것입니다. 

만일 제가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지 안다면 또 어떻게 행동할 지도 알 것입니다. 당시 빌립보 성도들은 많은 신들과 철학의 영향으로 사고하고 논쟁하는 것에 익숙했습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이 강조하는 것은 ‘무엇을’ 생각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항상 염두에 두고 생각해 볼 가치가 있는 것들을 6가지로 제시하고 있는데, ‘참된 것’, ‘경건한 것’, ‘옳은 것’, ‘정결한 것’, ‘사랑받을 만한 것’, ‘칭찬받을 만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사용한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찾아보기 힘든 단어들입니다. 오히려 당시 철학자들이 사용하던 단어들입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빌립보 성도들에게 당신들의 철학에 따라서 한번 살아보라고 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9절에서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고 말합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좋은 것들이 아닌, 하나님 안에서 가치있는 것들, 사도 바울이 그들에게 가르쳐줬던 것들을 생각하고 행하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의 가치 기준으로 이 6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참된 것”은 진리를 말합니다. 이 세상에서 참된 것은 무엇입니까? 오늘날 참된 것은 없습니다. 절대적인 진리가 없다는 것이 오늘날의 진리입니다. 저마다 자신의 생각이 있고, 그것이 자신에게 좋으면 좋은 것이지 절대적인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경건한 것”은 평균보다 뛰어난 것, 존경받을 만한 것을 말합니다. 오늘날 존경받는 사람들은 높은 자리에 오른 사람, 돈이 많은 사람, 눈에 띄는 업적을 이룬 사람들입니다. 한 마디로 뭔가 큰 결과를 얻어낸 사람입니다. 과정이야 어떻든 결과가 좋으면 인정받는 사회입니다. “옳은 것”은 정의를 가리킵니다. 제가 어릴 때에는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그 내용에 권선징악이 뚜렷했습니다. 주인공은 착하고 악인은 계속해서 악한 일을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그렇지 않습니다. 나쁜 짓을 하는 사람도 뭔가 이유가 다 있어서 그것을 설명해주니 시청자는 그에게 측은함을 느낍니다. 선과 악이 잘 구분되지 않는 것입니다. “정결함”은 도덕적으로 깨끗한 것을 말합니다. 오늘날 세상의 도덕적 깨끗함은 남에게 피해만 주지 않으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속으로 무슨 나쁜 생각을 하든지, 나 혼자 무슨 짓을 하든지 상관없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사랑받을 만한 것”, “칭찬받을 만한 것”은 그 대상이 누구입니까? 바로 사람에게 사랑받고 칭찬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의 세상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이 대한민국의 생각과 가치의 기준은 분명 ‘사람’에게 있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나 자신’에게 있습니다. 사람들은 참된 것과 옳은 것, 정결한 것 등을 고민하지 않습니다. ‘그냥 내 생각에 옳은 것이면, 정결한 것이면, 다른 사람에게 피해만 주지 않는다면, 나에게 강요하지만 않는다면 괜찮다’하는 이것이 오늘날의 생각입니다. 이것에 대해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할까요?

.....“참된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합당함(내주하시는 성령께서 조명해 주시는 바...하나님말씀은 먹는 그 성도를 거룩하게 합니다.)입니다.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 17:17). 하나님의 말씀이 절대적이고 변하지 않는 진리입니다. “경건한 것”은 JC 주님을 닮아가는 거룩함(이 또한 내주하시어 일깨워 인도하시는 HS하나님 따를 때 JC의 살아계심의 영광 드러남)입니다. 성경에서는 나이든 사람(딛 2:2)이나 집사의 자격(딤전 3:8, 11), 혹은 성도의 삶의 모습(딤전 2:2)을 설명하는데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땅의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기준에 따라 살아가는 삶이, 존경받을 만하고 경건한 것입니다. “옳은 것”은 정의로우신 하나님이 하시는 일(HS께서 바로 그렇게 그 일을 이루심)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은, (그것이 하나님이 하신 일이기 때문에) 옳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속성에 부합하는 모든 것은 옳은 것입니다. “정결한 것”은 더렵혀지지 않은 것(일편단심 HS따를 때 보혈의 효능이 나타남)을 말합니다. 요일3:3에서는 예수님의 깨끗하심을 말할 때 이 단어를 사용되었고 고후11:2에서는 처녀의 정결함을 지칭할 때, 딤전5:22에서는 도덕적으로 흠이 없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정결함은 완전한 깨끗함입니다. ‘내가 저 사람보다는 조금 낫지’ 생각하는 그런 차원이 아니라 흠 없고 완전한 깨끗함입니다. “사랑과 칭찬받을 만한 것”은 그 대상이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사랑받고, 하나님께 칭찬받는 것(오직 HS따라 행함으로써 ..이는 내사랑하는 아들, 내 기뻐하는 자)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어떤 일을 계획하거나 하는 도중에나 마칠때까지 시종일관 생각해야 할 것들입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철학, 종교, 심리학(심지어 과학조차도) 들은 성경에서 말하는 찬찬히 잘 살펴 보면 진리에서 오히려 멀어지게 하며 오히려 견고한 진을 구축하도록 오도합니다. 그들은 참된 것, 옳은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눈에 보이는 결과가 나와야 존경받을 만한 것이고 우리가 추구할 것이라고 말하고 눈에 보이는 해만 끼치지 않으면 좋다고 말합니다. 사람에게 인정받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고 나를 높이는 것, 그것을 추구하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세상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그런 생각에 동조해서는 안 됩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이 세상은 계속해서 잘못된 정보를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텔레비전를 켜는 순간, 인터넷을 여는 순간, 세상은 우리에게 잘못된 정보를 주려고 합니다. 그런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대신에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육체에 있어 행하나 육체대로 싸우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없애버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고후 10:3-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2:15-17)

이 세상과 육신의 것을 생각하지 마시고, 영적인 것과 하늘에 속한 것,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들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에서 분명하게 말하고 있지 않는 것들을 판단하는 기준 역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참된 것” “경건한 것” “옳은 것”들 앞에는 “무엇에든지”라는 말이 반복적으로 함께 나옵니다.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골 3:2) 

주님 안에 굳게 서기 위해, 그 평안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무엇이든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해 생각하시기를 바라고, 세상의 기준에 맞춰 생각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세상의 것들을 버리시고 그러한 생각이 있다면 그것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 보십시오. 무엇에 여러분의 생각이 집중되어 있습니까? 어디에 마음을 쏟고 계십니까? 하나님이 보시기에 참된 것, 경건한 것, 옳고, 정결하고, 사랑과 칭찬받을 만한 것이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 명령 – 바르게 행하라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9). 사도 바울은 이제 그것을(참된 것, 경건한 것 등) “행하라”고 말합니다. 계속해서 그렇게 살라는 것입니다. 반복해서 행동하여 그것이 삶의 방식이 되라는 것입니다. 생각이 그저 생각에서 그치면 ‘공상’, ‘망상’, ‘이론’이 됩니다. 우리가 무엇을 생각한다면 그것을 행할 때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다른 철학은 행할 수 없는 것을 행하라고 하지만, 성경은 행할 수 있는 것을 행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것을 행할 수 있게 하십니다.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는 사도 바울의 가르침이고 주님께 받은 것입니다. “너희가 모든 일에 나를 기억하고 또 내가 너희에게 전하여 준 대로 그 유전을 너희가 지키므로 너희를 칭찬하노라”(고전 11:2) 

사도 바울은 주님께 받은 것을 하나님의 사자(메신저)로서 그들에게 전달해 준 것입니다. “종말로 형제들아 우리가 주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구하고 권면하노니 너희가 마땅히 어떻게 행하며 하나님께 기쁘시게 할 것을 우리에게 받았으니 곧 너희 행하는 바라 더욱 많이 힘쓰라”(살전 4:1) 

사도 바울은 성도들에게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지 가르쳐주었습니다. 사람들은 사도 바울의 간증을 듣기만 한 것이 아니라 실제 눈으로 보았습니다. 추상적인 개념이 가장 효과적으로 구체화되는 것은, 누군가의 삶에 그것이 드러날 때입니다. 그들이 막연하게 생각하던 하나님의 말씀을 사도 바울은 가르쳐주고 삶으로 보여준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너희도 그렇게 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당시 빌립보 성도들은 신약성경이 완성되기 전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사도들을 통해 그들에게 말씀해주셨습니다. 우리는 다른 세대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완성된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성경을 통해 드러내 주셨습니다. 또한 성령님을 우리 안에 넣어주셔서 그것을 깨닫고 행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먼저 믿은 자들’로서 책임이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전 11:1) 

우리는 이런 말을 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다른 사람들, 나중에 믿은 사람들에게 본이 되어 주어야 합니다. 그것은 나이와 상관없습니다. 가장 설득력 없는 논리가 ‘나는 이러했으니 너는 그렇게 살지 말아라’입니다. 적어도 노력을 하면서 그렇게 말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은 성경을 통해 배운 것들을 행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남편과 아내, 동생, 친구에게 “그렇게 행하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이 말씀을 통해 가르쳐주셨고 우리가 행할 수 있게 도우신다, 내 삶이 그것을 증명한다, 내가 경험했다”고 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약속의 말씀 – 평강의 하나님

그런 자들에게 주는 약속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9). 

7절에서 하나님의 평강이 지켜주신다고 했는데, 9절에서는 평강의 근원되시는 하나님이 함께 계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주께서 심지가(마음, 혹은 생각이)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사 26:3)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우리는 주 안에서 굳게 서서 요동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흔들리지 않는 신앙의 원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참된 것, 경건한 것, 옳은 것, 정결하고 사랑과 칭찬받을 만한 것을 생각하고 행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감정의 산물이 아닙니다. 뜨거웠던 경험은 신앙을 지켜주지 않습니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것을 생각하고 행동으로 옮길 때 우리의 신앙은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 3:16-17). 

성경의 모든 말씀은 하나님이 직접 주신 말씀입니다. 그것이 우리를 교훈하고 책망하며 바르게 하고 의로 교육합니다. 우리를 온전하게 해서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환경에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말하면서 자신이 그것을 증명했다고 말합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11-12). 

그는 어떠한 상황에 있든지 그 안에서 만족하기를 배운 것입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13). 

이것이 하나님 안에서 평안을 누리는 자의 고백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렇게 살았고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텔레비전을 켜실 때, 책을 펴고 공부를 하고 직장에서 일하실 때, 이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참되고 경건하며 옳고 정결한 것, 사랑받을 만하고 칭찬받을 만한 것을 생각하시고 그런 것을 선택해서 행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엡 4:14) 

사람의 속임수, 간사한 유혹에 빠지지 마십시오. 세상은 계속해서 여러분을 간사한 속임수에 빠뜨리려 합니다. 세상의 풍조에 밀려 요통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생각을 말씀에 메어두시고 그것에 순종함으로 흔들리지 않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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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devlugma(946, 브델뤼그마) 가증한 것, 몹시 미운 것.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브델뤼그마(Aesop. pab. 45p)는 브델륏소(bdeluvssw, 948)에서 유래했으며, 성경과 교회 용어로, '더러운 것, 가증한 것, 몹시 미운 것' 곧 혐오의 대상을 의미한다.

2. 70인역본의 용법. 

브델뤼그마는 70인역본에서 약 120회 나오며, 주로 토에바와 쉭쿠츠 어군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토에바/ 브델뤼그마는 '가증스러운 것'(관습이나 사물), '혐오감을 일으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가증한 것은 일반적인 것, 제의적 혹은 윤리적인 것일 수 있으며, 또한 하나님께 가증스럽게 여겨지는 것, 사람에게 가증스럽게 여겨지는 것일 수 있다. 애굽인들은 히브리인과 함께 식사하는 것(창 43:32),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는 것(출 8:22)을 싫어했다.

하나님께서 가증스럽게 여기는 것은 동성애와 기타 성도착(레 18:22-30; 20:13), 우상 숭배(신 7:25), 인신 제사(신 12:31), 의식적으로 부정한 동물을 먹는 것(신 14:3), 흠있는 제물(신 17:1), 마술(신 18:9-14), 부정직한 거래(신 25:13-16), 제의적 매음(왕상 14:23 이하) 등이다.

토에바는 우상과 동의어로 사용되며(사 44:19 이하), 왕하 23:13에서 밀곰은 암몬 자손의 가증한 것이라고 한다.

**쉭쿠츠/ 브델뤼그마는 '몹시 싫은 것, 가증한 것, 우상'을 의미하며, 항상 우상 숭배 행위와 관련하여 사용되며, 하나님 보시기에 밉고 가증한 것이라는 뜻으로서 우상 그 자체를 언급할 때나 또는 우상 숭배 의식과 관련된 어떤 것을 언급할 때 쓰인다. 우상은 일반적으로 가증한 것이며(렘 16:18; 겔 5:11; 7:20; 대하 15:8; 기타), 우상만이 가증한 것일 뿐만 아니라 우상에 예배하는 자들도 "저희의 사랑하는 우상같이 가증"한 것이다(참조: 호 9:10).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을 우상과 동일시하기 때문이다.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는 적그리스도의 모형이며, 단 11:31에 예언된대로 성전에 제우스의 제단을 설치하고 제우스 신상을 세웠다. 이것이 "멸망케 하는 가증한 것"이라 불린다. 즉 제단의 진정한 목적을 파괴하는, 신성을 모독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적그리스도도 성전에 가증한 것을 세울 것이다. 즉 거짓된 귀신 예배 행위를 뜻한다(단 9:27; 12:11).

**나 3:6의 쉭쿠츠는 "가증하고 더러운 것"이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브델뤼그마는 신약성경에서 6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a)  눅 16:15에서 브델뤼그마는 하나님의 보시기에는 그 실상과 반대이면서 사람들 가운데서 매우 높임을 받으려는 자와 관련하여 우상 숭배와 연관성은 사람들 가운데서 매우 높임을 받으려는 것이나 받는 것은 사람의 마음 안에 우상을 만드는 것임을 암시한다.

(b)  계 21:27에서 '부정한 자들', 혹은 '가증한 일과 거짓말 하는 자'들은 거룩한 도성의 출입이 금지된다.

(c)  계 17:4에서 브델뤼그마는 악한 여인의 손에 있는 금잔의 내용물에 대해 사용되었다: "그 여자는 자주 빛과 붉은 빛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미고 손에 금잔을 가졌는데 가증한 물건과 그의 음행의 더러운 것들이 가득하더라".....브델뤼그마는 혐오스러운 어떤 것을 의미하나 구약에서처럼 우상 숭배와 연관되어 있다. 이것이 여기서 깊은 의미가 있는 것이다.

계 17:5에서 그 악한 여자 이름 중 하나는 "땅의 …가증한 것들의 어미"로 나타난다.....음녀 로마의 잔은 온갖 가증하고 더러운 것으로 가득차 있다. 이러한 표현은 단지 기독교인의 편견이 아니다. 로마 역사가 타키투스(Tacitus)가 로마를 일러 '세계 도처로부터 온갖 잔학하고 추악한 것들이 흘러 들어오고 그런 것이 환영받는 곳'이라고 하였다. 로마의 대철학가 세네카도 로마를 '냄새나는 하수도'라고 불렀다. 로마의 메살리나(Messalina) 왕비가 일반 사창가에서 돈을 받고 몸을 파는 타락한 생활을 했다면 로마 도성의 추악함이 어떠 했는지 짐작이 간다. 로마에 대한 요한의 표현은 전혀 과장이 아니다. 실제로 로마인 자신들이 그들의 문명에 관해 언급한 것에 비교하면 오히려 억제한 것이다. 이 문명으로 기독교가 들어간 것이다. 이런 환경 속에서부터 사람들이 단정한 행위로 돌아서게 된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십자가의 기적이며, 또한 승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W. Barclay).

(d)  막 13:14; 마 24:15에서 '멸망의 가증한 것'을 표현한다. 다음 항목에서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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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 브델뤼그마 테스 에레모시스(946+2050) 멸망의 가증한 것

1. 고전 헬라어 문헌과 70인역본 

막 13:14과 병행구, 마 24:15에 토 브델뤼그마 테스 에레모시스라는 문구가 나온다. 이 문구는 70인역본 단 12:11에서 인용된 것이며, 단 9:27, 단 11:31과 마카베오일서 1:54 이하에서는 이 문구가 약간 다른 형태로 나타난다.

다니엘서에서 이렇게 번역되는 히브리어(쉭쿠츠 쇼멤)는 "(영적) 멸망의 원인이 되는 가증한 것"으로 나타난다. 즉 이것이 보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혐오감을 일으키거나 영적 파멸의 외적 조건을 만들어낸다. 구약성경에서 가증한 것은 주로 하나님께 가증스러운 것, 특히 의례법에 비춰볼 때, 죄를 범하게 하는 대상을 뜻하며, 그래서 이 말은 흔히 우상숭배의 대상들을 나타내곤 한다(쉭쿠츠는 토에바와 동의어이며, 겔 5:11에서 이 두 용어들은 혐오스럽고 가증스러운 우상들을 의미한다. "가증한 것들"을 숭배함으로 말미암아 야기된 혐오감을 생생하게 예증해주는 이야기에 대해서는 에스겔 8장을 참조).

넷슬은(E. Nestle, ZATW 1884의 한 논문에서) "멸망의 가증한 것"이란 문구가 이방신에 대한 경멸을 나타내는 전형적인 유대 용어로서 생겨난 것이라고 논증하였다. "하늘의 주"(바알 샤마임, 흔히 바알 샤멤이라고 발음됨)라는 칭호가 신들의 우두머리인 제우스에게 수여되었다. 유대인들이 그런 말로 제우스를 시인하라는 요구를 받았을 때, 그들은 제우스를 바알 샤멤이 아니라 쉭쿠츠 쇼멤으로, 즉 "천상의 주"가 아니라 "멸망케하는 가증한 것"으로 묘사하였다. 이런 상황은 마카베오1서 1:54 이하에 서술되어 있으며, 이 구절에는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Antiochus Epiphanes , BC. 175-164)가 예루살렘 성전의 대 제단 위에 이교 제단을 세우게 했으며, 이 이교 제단이 "멸망의 가증한 것" 으로 묘사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곳에는 이 제단과 함께 제우스(안티오쿠스는 제우스의 대리자라고 자처하였다)의 형상이 있었음을 시사해 주는 증거가 있다. 물론 이리하여 희생제물을 바치라는 명령에 대한 혐오감은 더욱 극렬해졌다(참조: C. C. Torrey, Documents  of the primitive  Church ). 이렇게하여 하나님의 성전은 이교 신전으로 바뀌어졌다. 예루살렘과 그 외의 지방에서 그런 예배를 드리라는 명령이 발해졌기 때문에 결국 마카비 봉기가 일어나고 다니엘 예언서가 쓰여지게 되었다.

2. 신약성경의 용법 

마 13:14에서 "멸망의 가증한 것"이란 말은 널리 알려진 말이었기 때문인지, 아무런 설명없이 언급되었다. 많은 주석가들은 "가증한 것"의 성(gender)이 중성이나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이란 분사의 성이 남성이란 점을 고찰하고 나서, 가증한 것이란 하나님을 위해 예비된 자리를 차지한 적그리스도라고 결론지었다(참조: 살후 2:4). 만일 "적그리스도"라는 말이 하나님에 대적하는 힘을 의미하는데까지 확장된다면, 이 말이 이 문맥에서 사용되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계 13장과 17장 같이 나중에 발달된 교리가 막13:14의 뜻으로 해석될 수는 없다.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어떤 종류의 우상숭배를 염두에 두고 "가증한 것"이란 말을 사용하셨을 것이다. 누가가 예수님의 말씀을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이란 말로 바꿔썼다는 점은 주목할만하다(눅 21:20). 이 표현은 일반적으로 인정하고 있는 것보다 예수님의 의도에 더욱 가까운 것 같다. 왜냐하면 로마 군인들은 군기에 우상의 형상을 새겨서 밤에는 그것을 땅에 세워 놓고 숭배한 것으로 유명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과의 협정에 따라 이 군기들이 결코 예루살렘에 있는 로마 요새안에는 들어오지 못하였다. 만일 이 군기가 성스러운 곳에 세워진 적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폭력의 결과 때문일 것이며, 여기에는 목숨을 내건 전쟁이 수반되었을 것이다. 이렇듯 이 "가증한 것"은 성읍과 지성소에 대한 신성모독을 불러 일으켜서 마침내 파멸적인 전쟁을 야기시키고 말았으며 그래서 예수님이 막13:2에 나와 있는 예언을 하신 것 같다. 이런 해석은 다니엘서에 있는 구절의 의미와 조화를 이루며, 또한 민족과 예루살렘에 내릴 재앙을 예상하고서 행하신 예수님의 다른 가르침들과 부합된다(참조: 마 23:35이하; 눅 13:1이하; 눅 19:41이하; 눅 23:28이하). 예수님께서 이 성전 및 성읍에 대한 신성모독과 궁극적인 파괴를 나타낼 때 "멸망의 가증한 것"이란 말을 사용하셨다는 것은 그 이전의 구약시대 선지자들, 그리고 특히 이 가증한 것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다니엘과 마찬가지로 이런 사건을 주의 날에 비추어 고찰하셨음을 나타내준다. (참조: G. R. Beasley - Murray ). 

===== 착한, 선한, 옳은 ===

kalov"(2570, 칼로스) ...선한, 좋은, 아름다운, 고상한. [[너희의 착한 행실 Good Deeds 마5:16]]..한편, JC께서 나는 선한 목자라..하셨을 때 칼로스를 아가도스의 용례로 사용하심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형용사 칼로스(Homer 이래)는 산스크리트어(Sanskrit) 칼리아(Kalya: 건전한, 강력한, 강한, 탁월한)와 기원상 관련이 있으며,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 이 단어는

(a)  '조직상 건강한, 적합한, 유용한, 쓸모있는'을 의미하며, 알맞은 피난처(Homer), 건강한 몸(Plato), 순수한 금속(Theognis), 흠없는 희생 제물(Xenophon), 알맞거나 편리한 장소(Xenophon),

(b)  미학적으로 '아름다운'을 뜻하며, 따라서 '마음에 드는, 매력적인, 사랑스러운'이란 의미도 지닌다.

(c)  사람의 내적 성질에 적용될 때 이 단어는 '도덕적으로 선한'이란 의미를 가진다(Sophocles, Pindar).

칼로스의 개념은 헬라 사상의 역사 과정에서 '탁시스' 질서와 '쉼메트리아'(symmetria: 대칭, 균형)와 연결되어 총괄적인 의미를 갖게 되었다. 칼로스는 이러한 상황에서 '외적 현상이든 내적 성향이든 간에 건전함, 건강, 완전함, 질서의 완전한 상태'를 의미하게 되었다. 그래서 헬라 세계에서는 이 용어를 특히 신의 세계에 적용한다(W. Grundmann, kalos, TDNT, Ⅲ537).

2. 70인역본의 용법. 

형용사 칼로스는 70인역본에서 약 225회 나오며, 15개의 히브리어 단어들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a)  칼로스는 야페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며(예: 창 12:14; 창 29:17; 창 39:6; 창 41:2), '아름다운'을 나타낸다. 그러나 대부분 토브('유용한, 선한' 등)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며, '유용한'(예: 창 2:9), 더욱 자주 '도덕적으로 선한'을 의미한다(잠 17:26; 잠 18:5 등).

칼로스가 도덕적 선으로 나타나는 곳에는 토브의 역어로 사용되어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는 것을 의미한다. 칼로스는 창조 기사에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질서 있는 '아름다움'이라는 의미가 나타나 있기는 하지만(창 1:4; 창 1:10; 창 1:12; 창 1:21; 창 1:25; 창 1:31), 미학적인 의미는 대체로 결여되어 있다.

(b)  대부분의 경우에 칼로스는 구약성경과 유대의 윤리적 체제에서 '도덕적 선'을 의미하며 아가도스(ajgaqov", 18)의 동의어로 사용되었다(민 24:1; 신 6:18; 신 12:28; 대하 14:1; 잠 3:4; 사 1:17; 암 5:14 이하; 미 6:8 등). 칼로스는 타락 기사에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묘사하는데 사용되었다(창 2:17; 창 2:18; 창 3 5 이하; 창 3:22).

(c)  칼로스가 아가도스와 병행하여 사용될 때, '사랑스러운', 또는 '기뻐하는'이라는 의미를 지닌다(시 135:3). (참조: G. Bertram).

3. 신약성경의 용법. 

형용사 칼로스는 신약성경에서 99회 나오며, 다음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칼로스는 신약성경에서 '선한'을 뜻하기 위해 아가도스(ajgaqov", 18: 선한, 좋은, 104회)만큼 자주 사용되고 있으며, 이러한 현상이 신약성경 전반에 나타나고 있다는 것은 특기할 일이다.

(a)  공관복음서의 용법.

① 세례(침례) 요한의 설교에서 "좋은 열매"에 대한 비유를 본다: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지우리라"(마 3:10; 병행구 눅 3:9). 열매가 단수라면 그것은 새로운 삶 전체를 두고 하는 말이다. 여기서는 개개의 선한(혹은 악한) 행위들을 더 이상 하나 하나 헤아릴 수 없다(KRV Study Bible).

② 예수님의 '나무와 열매에 대한 비유'에서도 '좋은 열매'가 나타난다(마 7:17; 마 7:18; 마 7:19; 마 12:33). 좋은 열매가 나는 것은 나무가 전체적으로 건강한 경우이다. 이와 같이 사람도 예수님의 선포에 뿌리를 박고 그것으로부터 살 때에 좋은 열매를 맺는다. 사람이 자기 밭에 뿌린 "좋은 씨"는 하나님의 통치에 관한 말씀이다(마 13:24; 마 13:27; 마 13:37; 마 13:38).

③ 그물로 잡아 그릇에 담은 좋은 것들은 메타노이아(metavnoia, 3341: 마음의 변화, 회개)에 의해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게 된 사람들을 의미한다(마 13:48). 선교라는 그물은 악한 자들과 선한 자들을 공동체에 끌어들인다. 여기서 칼로스는 항상 하나님의 바실레이아(나라)를 지향한다.

④ 마 5:16에서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선행을 요구하신다: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착한 행실"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를 의롭게 하려고 애썼던 구식 '율법의 공적'이 아니라(참조: 롬 3:10; 롬 3:28; 갈 2:16), 지금 동터 오는 하나님 나라의 지평에 걸맞는 삶과 행동거지(거듭난 자에게 합당한 삶의 행위)를 가리킨다. 즉 마 5:3-12과 마 5:21-48에 제시된 척도에 따르는 삶과 행동거지이다(참조: 엡 2:8-10).

⑤ 베다니의 시몬의 집에서 기름 붓는 기사에서(막 14:6) 예수님은 자신의 임박한 수난을 알아채고, 그에게 행한 그 사랑의 행위를 제자들의 기름을 판 돈으로 행할 수 있는 자선보다 중요하고 훌륭한 것이라고 하셨다. 이러한 행동을 할 수 있는 기회-그의 육체에 미리 기름을 부음으로써 그의 수난의 길을 제자들에게 확인시키는-란 오로지 이 역사적 계기 안에서만 제공될 수 있을 뿐이었다. 이 일을 행할 기회는 더 이상 없으나 구제는 언제나 할 기회가 있는 것이다.

(b)  요한복음의 용법.

① 요 2:10에서 칼로스는 다른 종류보다 '더 우수한, 상질의'와 같은 의미를 지닌다: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 여기에서 '상질의 포도주'는 종말론적인 기쁨과 삶의 풍요를 미리 맛보는 것이며, 그것에 대한 상징이다(욜 3:18; 암 9:13; 창 49:10-12).

② 요 10:11; 요 10:14에서 예수님을 "선한 목자"로 묘사한다: "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14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이것은 헬레니즘의 목신(牧神)들 및 이스라엘 백성들의 목자들(지도자들)과 대조되는 독특한 주장을 전달한다. 그 주장의 근거는 선한 목자가 그의 양떼들을 알고 있다는 것과 그는 양떼들을 이리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바친다는데 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목숨을 바쳐 양떼들로 하여금 그 자신이 성부 하나님과 나누고 있는 친교에 참여케함으로 말미암아 그 자신이 선하고, 능력이 있으며, 찬양을 받을만한 참 목자임을 입증하신다.

③ 요 10:32; 요 10:33에서 유대인들과 논쟁하는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행한 많은 선행들에 관해 이야기한다.

예수님은 그의 선행 중에서 어떤 것 때문에 백성들이 나를 돌로 치려고 하느냐라고 묻는다. 예수님이 하신 일들은 하나님의 일이었기 때문에 선하다. 그렇지만 그가 한 일들에는 백성들이 받아들일 수 없거나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메시야 주장이 포함되어 있다. 백성들이 그를 돌로 치려한 것은 그 선행 때문이 아니라 그의 메시야적 주장 때문이었다.

(c)  바울 서신의 용법.

① 바울 문헌에서 최초의 용법은 독립적이며, 이 단어는 토 아가돈(선 good)과 동의어이다. 롬 7:18; 롬 7:21에서 이 단어는 우리가 내적으로 행하기를 원하는 선을 나타낸다: "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21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그러나 이 선은 육신의 법과 상충하므로 우리는 칼론을 성취할 수 없다.

고후 13:7에서 동일한 의미에서 이 단어는 또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새로운 가능성에 대해 사용된다: "...너희로 선을 행하게 하고자 함이라". 이 가능성은 그리스도인 전체 삶을 채우는 것이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찌니"(갈 6:9).(참조: 롬 12:17, 여기서 칼론은 찬양을 받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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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jgaqov"(18, 아가도스) 선한 good, [[선한 선생님이여 Good Teacher!!  막10:18]]

아가도스는 형용사와 실명사로 사용되며, 사물이나 인격의 탁월이나 중요성을 표현한다. 형용사로서 이 단어는 '탁월한, 우수한, 좋은, 선한, 훌륭한'을 뜻한다. 실명사로서 이 단어가 인격의 탁월성, 사물의 질, 또는 물질적인 것이나 정신적인 것의 좋은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단어는 헬라 철학에서 도덕적, 영적 고결을, 헬레니즘과 성경에서 구원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래서 이 단어는 인물, 사물, 조건, 상태, 자질, 감정, 행위, 때(time)를 묘사하는데 사용된다.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a)  헬라 철학에서의 아가도스. 선(善)의 개념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철학자의 관심은 존재에 의미를 주는 중요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예를들면, 소피스트 (Sophists)는 선을 쾌락과 동일시하였다. 플라톤은 선의 개념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가장 고상하며 탁월한 이데아라고 한다. 왜냐하면 선은 부패하게 하고 파괴하는 악과는 대조적으로 보존하고 유지하는 힘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선에 대한 훈육으로 말미암아 선하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선을 신성이나 이성, 미덕이나 중용, 필요한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는 그의 윤리학에서 모든 행위의 목적을 선의 어떤 형태에의 도달로 정의한다.

(b)  헬레니즘에서의 아가도스. 헬레니즘(보다 덜 인본주의적인)에서 아가도스 곧 '선'의 개념은 종교적인 색채를 띠었으며, 한때 종교적인 의미로 널리 유행하게 되었다. 선은 구원을 의미한다. 헤르메스 문헌에 따르면 구원은 신성(Divinity), 즉 신격화에 의해서 발생한 것이며 선이다. 그러므로 선의 속성 속에는 구원을 가져다 주는 신이 보존되어 있었다(하나님은 선이다). 왜냐하면, 신만이 물질에 부속되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선은 우리 편에서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을 의미하고, 하나님 편에서는 '친절, 선함'을 의미한다. 인간은 물질적인 것들의 금욕과 신성화에 의해서 선하게 된다.

필로(헬레니즘 유대교에 관한 해설자)에게 있어서 최고의 선한 신(神)은 인격적 하나님이시다. 필로는 온건(중용), 하나님에 대한 경외, 지혜를 영혼이 하나님, 즉 최고의 선(善)에 이르는 길을 찾는데 필요한 가장 훌륭한 재산들로 지적했다. 경건, 믿음, 지혜는 선한 것들이며, 이런 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도우심과 더불어 우리는 하나님을 알고 그분을 섬길 수 있게 된다.

2. 구약성경의 용법 

(a)  구약성경과 유대교에서 선(善)에 대한 접근 방식은 헬레니즘에서와 같이 종교적인 것이지만, 여기서 결정적인 것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이다. 구약성경에서 선의 개념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신앙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하나님의 개념으로부터 분리된 인간적인 것로서의 선의 개념 - 그리스와 헬레니즘 사상에 있는 개념과 비교할 때 - 은 생각할 수도 없는 것이다. 선은 항상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하나님의 은사이며, 그렇기 때문에 선은 인간의 힘의 통제권 밖에 존재한다(창 3:5).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은 단지 '선'이 아니라 선하신 성품을 가지신 분이시라는 사상이 철두철미하게 전제되어 있다. 이러한 인식이 구약성경에 있어서는 하나님과 백성의 관계, 그리고 하나님과 개인의 관계가 성숙해지는 과정에서 더욱 발전하였다.

하나님만이 오로지 선하신 분이시다라는 사실은 구약성경에서 그가 선택한 백성을 구원하신 것, 율법을 주신 것(신 30:15; 잠 28:10), 그리고 출애굽과 가나안 정복(출 18:9; 신 10:29이하)과 같은 역사적 사건들 속에서 명백해졌다. 이스라엘인들은 하나님의 창조 활동(창 l:1-8)에서건, 그의 말씀에서건(사 39:8), 그의 영에서건(시 l43:l0), 심지어 그가 반대자들에게 말하기 위해 나타나셨을 때 조차도(창 50:20) 그에게서 유래되는 모든 것은 선하다라는 사실을 알고부터 하나님을 오로지 선하신 분으로 찬양하는 새로운 계기로 발전하였다.

하나님은 역사를 통한 그의 사역에서 선(참조: 출 l8:9)을 행하시는 바 그 목적은 구원이며, 율법을 통해 인간에게 방향을 제시해 주는데 있다. 선은 이미 행해져 왔으며, 또한 준비되어 있다. 하나님이 그의 백성에게 약속했던 선은 메시야적, 종말론적 구원에서 실제로 성취될 것이다(레 32:39 - 42; 사 52:7). 한편 율법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통하여 선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선을 행하는 자는 선하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의 도움없이 가능할 것인가는 논쟁이 되고 있다. 전도자는 하나님의 도움없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전 7:20).

(b)  랍비 유대주의는 하나님의 선함이 구원을 가져다 준다고 생각했다. 선한 것과 성취 가능한 것은 율법에 계시되어 있다. 하나님의 법을 실행할 때 비로소 인간은 선을 행할 수 있고 또 선해질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인 선은 오로지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동료 인간들 사이의 인격적 관계에서만 실행될 수 있는 것이다.

3. 신약성경의 용법 

(a)  기본적인 접근방식은 역시 종교적이다. 하나님만이 참으로 선하시다. 예수님은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막 l0:17이하; 눅 l8:18이하; 마 19:17)고 하셨다. 하나님의 인격적 개념은 중성으로 표현할 수 없다. 이러한 구절에서 아가도스는 도덕적 완전을 의미하며, 선함(goodness)과 친절(kindness)로 되어 있는 하나님의 본질적 선함을 표현한다.

신약사상의 중심점인 구원,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구원 계시는 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아가도스는 이 의미로 히 9:11("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와 히 10:1("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에서 사용되었다. 미래 세계에 속하고, 또한 모형들과 그림자들의 '실체'로서, 토라를 통하여 전달된 것들과 관계된 멜론타 아가타(장차 오는 좋은 일들)는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공동체에 주어진다.

그 좋은 일들은 "영원한 속죄"(아이오니아 뤼로시스, 히 9:12)와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는" 것(라투류에인 데오 존티, 히 9:14), 즉 죄와 죽음의 세력에서 구원받아, 살아계신 하나님과 친교 및 그를 섬기는 것으로 되어있다.

하나님의 선하심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좋은 일들"을 베푸신 그 '자비'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새로운 삶의 기회를 부여 받는 것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선하심 속에서 그것을 나누어 받는 한에 있어서만 선하고, 선을 행함으로 말미암아 타인에게 그 선을 전할 수 있다. 예수님은 선한(칼로스) 목자로서 자신의 생명을 희생시켜 지금 당장 구원이라는 영원한 선을 유효하게 만들고 있다(이 구절 속에 있는 칼로스는 아가도스의 동의어로 사용됨).

롬 10:15에서 이사야의 "좋은 소식을 가져오는...자"(메밧셀 토브)에 대한 예언(사 52:7)을 채용하여 사도직에 적용한다. 그래서 사도들은 이 "좋은 소식"의 전파자들이다. 사도의 선포 내용은 메시야의 구원이다.

예수님의 무죄성에 대한 많은 논란은 마19:17과 그 병행구들과 관련되어있다. 마가와 누가에는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마태에는 다른 형식으로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로 기록되어있다. 이 기자들은 예수님이 하나님과 비교하여 자신의 무죄성이나 선함을 부인하는 것으로 보지 않는다. 그들에게 있어서 그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마가와 누가의 전언에서 예수님의 말씀은 아마도 인간은 결코 무죄할 수 없으며, 따라서 네가 나를 한 인간으로 생각하다면 나를 선하다고 할 수 없지 않는가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마태의 전언은 예수님의 의도를 정확히 전해주고 있다. 그는 자신의 무죄성에 대한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영예에 대한 문제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말하자면, 예수님의 질문자에 대한 대답은 하나님의 주권과 완전한 선함을 전하는 말에 맡겨져 있다. 문제는 질문자가 그 앞에 무릎을 꿇고 그에게 영광을 돌려야 하는, 홀로 선하신 분인 하나님께 주의를 돌리는 것이다.요 1:46에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라는 회의적인 질문에서 "선한 것"에 해당하는 아가돈(중성)은 '구원'(참조, 시 14:7), 곧 메시야가 가져오는 구원을 의미한다. 모리스(Morris)에 의하면, 이 질문은 나사렛에 관한 어떤 알려진 견해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메시야가 별로 중요하지 않은 그런 곳에서 결코 나올 수 없다고 생각한 어떤 사람의 주장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무난하다는 것이다.

(b)  세상에서는 선이라고 할 만한 아무 것도, 선하다고 할 만한 아무도 없다. 인간들이 세운 제도들 사이에 있는 옳음과 그릇됨의 구분은 하나님 앞에서 무너지고 만다. 이것은 (1) 하나님 홀로 선하시고 다른 아무 것도 선하지 않다는 것과 (2) 멜론타 아가타(장차 오는 좋은 것)는 그것들 안에서 죄와 사망이 폐하여 지기 때문에 오직 참된 아가도스이다는 사실이 알려 준다. (참조: J.H.Thayer; E.Beyreut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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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kaivwma(1345, 디카이오마) 규정, 법령, 의로운 행동.[[righteous acts...옳은 행실 계19:8]]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디카이오마(Thu. 이래)는 디카이오오(dikaiovw, 1344: 의롭다고 하다)에서 유래했으며 (a)  '근거' ground 나 '주장' or claim. (b)  '기록된 증거' written proof, '문서' document, '비준' validation. (c)  '법령' decree, '법규' statute, '규례' ordinance. (d)  '선고' sentence, '징벌' punishment, 그리고 (e)  (때로 '배상'으로서의) '의로운 행동' right action과 같은 여러 가지 (법적인) 의미를 지닌다.

2. 70인역본의 용법. 

명사 디카이오마는 70인역본에서 약 150회 나오며, 주로 히브리어 호크(규정, 관습, 법률, 제정된 것), 그 다음으로 후카(규정된 것, 제정, 법규, 법령)와 미쉬파트(판단, 판결, 올바름, 공의, 권리, 법령)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명사 디카이오마는 신약성경에서 10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a)  신약성경에서 디카이오마의 가장 일반적인 의미는 '법규, 규례(법령)', 특히 하나님의 법령(눅 1:6 "규례"; 롬 2:26 "제도"; 히 9:1 "예법", 제의 규정), 혹은 하나님의 도덕적 명령(롬 1:32 "정하심") 혹은 하나님의 법 전체(롬 8:4 "요구")를 의미한다.

(b)  다음으로 이 단어는 법적인 요구를 이행할 때의 '옳은 행동'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① 이 단어는 롬 5:18(실질적으로 빌 2:8 참조)에서 그리스도와 관련하여 이 의미로 나온다. 여기에서 이 단어의 의미가(16절에서처럼) '칭의의 선고'라고 하는 생각은 이 절의 대구법과 거의 조화되지 않으며, 디카이오시스 조에스의 주관화를 야기시키는 것 같다.

② 계 15:4에서 이 단어는 하나님에 대해 사용된다. 그의 "의로우신 일(들)"(혹은 심판[들]): "주여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오리이까 오직 주만 거룩하시니이다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으매 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하리이다 하더라".

③ 계 19:8("옳은 행실")에서는 성도들의 "의로운 행위들"을 의미한다: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c)  롬 5:16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의인의 선고'이다: "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을 인하여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바울은 다른 반의어 때문에 롬 5:18에서 이 단어의 의미를 쉽게 변화 시켜서 그리스도의 의로운 삶이 우리의 칭의의 기초가 된다는 사실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 (참조: G. Schre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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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kaio"(1342, 디카이오스) 의로운 righteous.[[옳은]]...무엇에든지 옳으며.빌4:8

형용사 디카이오스(Homer. 이래)는 디케(divkh, 1349: 옳음, 공의, 정의)에서 유래했으며, '디케를 준수하는, 의로운, 하나님과 인간의 법을 지키는, 그의 의무를 이행하는' 자를 뜻하고, 그리하여 초기 언어에서 루터는 넓은 의미로 '올바른'이란 이 단어를 사용한다; 헬라 문헌에서 심지어 물질적인 것에도 사용되어(Xen. mem.) '가장 비옥한'(Xen. Cyr.)을 뜻하기도 한다.

70인역본에서 히브리어 차딧크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a)  넓은 의미에서 '정직한, 옳은, 고결한,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

① 일반적으로 : 마 1:19(의미하는 바는, 그의 약혼녀가 공적 비난을 당하게 하는 것은 그의 의로움과 양립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마 10:41; 마 13:49; 마 23:28; 마 25:37, 마 25:46; 눅 1:6, 눅 1:17; 눅 14:14; 눅 18:9; 눅 20:20; 롬 5:7; 딤전 1:9; 약 5:6, 약 5:16; 벧전 3:12; 요일 3:7; 계 22:11; 

"죄인과 경건치 아니한 자", 벧전 4:18; "의인과 악인", 마 5:45; 행 24:15; 

그의 경건과 정직으로 주목 받는 구약성경의 인물에 대해: 마 13:17; 히 12:23; 따라서 아벨, 마 23:35; 히 11:4; 롯, 벧후 2:7; 

실제이든 가상이든 간에, 스스로를 의롭다고 여기는 자들, 스스로 덕을 자랑하는 자들에게도 사용된다: 마 9:13; 막 2:17; 눅 5:32; 눅 15:7, 

"경건하여"와 함께, 눅 2:25; "거룩한"과 함께, 막 6:20; "선하고"와 함께, 눅 23:50; "하나님을 경외하는"과 함께, 행 10:22; "그의 의로움", 요일 3:12. 

중성 토 디카이온 '요구하는 의무로 간주되는 것, 

옳은 것': 벧후 1:13; 복수형, 빌 4:8; "옳으니라", 엡 6:1; 빌 1:7; 

심판관이신 "하나님 앞에서"와 함께, 행 4:19.

② 두드러진 부정적 개념: '순진한, 흠 없는, 죄 없는'; 따라서 이방인들이 그리스도를 가리켜 말할 때 사용되었다: 마 27:19, 마 27:24 RGL br. Trbr. WHmrg.; 눅 23:47; 마 23:35; 

죄와 교제하지 않는,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 롬 7:12.

③ 특히, 이 단어는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는 방식에 있어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부합하는 자, 그리하여 마음이나 삶을 바로 잡을 필요가 없는 자에게 사용된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만이 디카이오스로 불리울 수 있다: 행 7:52; 행 22:14; 벧전 3:18; 요일 2:1; 

"거룩하고 의로운", 행 3:14; 나머지 인간 중에서 단 한명의 디카이오스라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은 당연히 부정된다, 롬 3:10(전 7:21).

하나님에 대해: '거룩한', 롬 3:26. '그리고 옳다고 하는 사람' 혹은 '의롭다고 선언하는 자'에 근거하여 '옳은'이나 '의로운'으로 번역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본질적 의미는 '거룩한'이다. 하나님은 이 거룩한 품성으로 인해 죄를 미워하고 벌하신다, 요일 2:29.

④ 문맥상으로, '하나님이 좋다고 인정하는,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있는': 

롬 5:19; "믿음으로"와 함께, 믿음으로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갈 3:11; 히 10:38; "하나님 앞에서는 의인이", 롬 2:13.

(b)  좁은 의미에서, '각각의 의무를 이행하는'; 사법적 의미에서 말로 표현되든 그들을 대하는 태도에서 보여지든 간에 '다른 사람에게 정당한 판단을 내리는': 딛 1:8; 

따라서 그들의 행위에 따라 공평하게 인간에게 보상하는 하나님께 사용, 계 16:1; 동일한 의미로 요 17:25(그는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충실한 제자들과 '세상'에게 똑같은 재앙을 내리지 않으신다); 요 1:9(그는 그의 통치의 법을 실시하시며, 또한 죄 사함에 관한 법도 실행하신다)에서도 사용된다; 그리스도에 대해, "의로우신 재판장", 딤후 4:8; "공의로운 심판", 요 5:30; 요 7:24; 살후 1:5; 복수형, 계 16:7; 계 19:2; 하나님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 계 15:3.

중성 토 디카이온 "의", 다른 사람에게 마땅히 주어야 할 것, 골 4:1; 공의와 법률에 합치하는 것, 눅 12:57; 그것은 공의에 합치하는 것이다, 살후 1:6; 공과에 따라, 마 20:4; 마 20:7. (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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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ijrhvnh(1515, 에이레네) 평화, 복지, 번영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에이레네의 기본 개념은 본래 사람들 사이의 관계(relationship)나 태도(attitude)를 의미하지 않고 상태(state), 즉 '평화의 때', 또는 '평화의 상태'를 의미하며, 처음에는 순전히 끊임없이 계속되는 전쟁상태에서의 한 막간(a interlude)으로 생각한 것이다.

이 단어는 전쟁에 반대되는 것, 혹은 전쟁의 종식으로부터 결과하는 상황을 의미한다. 평화는 복된 번영을 가져 오도록 법과 질서가 유지되는 상태이다. "에이레네"는 평화의 상태이며, 평화의 상태에서 땅과 백성을 위한 복이 흘러나온다. 필레몬(Philemon)은 이를 최고의 선(supreme good)으로 격찬했다.

에이레네는 평화 조약이나 평화의 타결과 관련이 있다. 에이레네는 또한 소란, 소요의 정반대를 의미할 수 있다. 에이레네는 평화적인(온화한) 태도, 즉 적의가 없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에픽테투스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등의 스토아 철학자들의 작품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에이레네는 영적 평안이나 마음의 평안이라는 의미를 띠고 나타나게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단어는 이들의 저작에 그리 자주 사용되지 않았다.

특별한 언급으로, 아우구스투(Augustus)가 지중해 세계를 지배한 에이레네를 들 수 있다. 이 시대에서 구속(redemption)을 동경하는 강한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데  황금시대라고 불리워진 이 평화의 상태는 로마 황제가 군대의 힘으로 성취한 법적 또는 정치적 안정이다(Toerster, TDNT).

2. 구약성경 및 70인역본의 용법 

1. 구약성경 및 70인역본의 용법 및 의미들

(a)  구약성경에서 에이레네는 250회 이상 나오는 히브리어 단어 샬롬의 역어로 사용된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다. 이에 대하여 예외적인 경우들은 대체로 왕래 및 문안 인사에 관련된 구절들이다. 예컨대 창 26:31; 창 43:23이 이러한 예이다.

그러나 렘 20:10; 사 48:22; 57:21은 이러한 경우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예외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예외적인 구절에서는 소테리아(구원, 구출), 카이레인(기쁨, 안녕)등을 역어로 사용되었다.

약 15개의 구절에서 에이레네는 안식, 평온, 안전, 염려 없음, 믿음직스러움 등의 광범위한 의미 영역을 포괄하는, 히브리어의 여러 가지 단어들에 해당하는 역어로 사용되었다.

예컨대 대상 4:40에서는 '…로부터 안식을 얻다'를 뜻하는 샤카트(히2453)의 역어로, 욥 11:18; 잠 3:23; 사 14:30; 겔 34:27; 38:8, 11, 14; 39:6, 26에서는 '믿을만함, 안전, 염려없음'을 뜻하는 베타흐(히233a)의 역어로, 삼하 3:24에서는 '가다, 걷다'를 뜻하는 할라크(히498)의 역어로, 사 29:24에서는 '이해'를 뜻하는 레카흐(히1124a)의 역어로, 그리고 잠 17:1; 호 2:18에서는 '평온, 안락'을 뜻하는 샬와(히2392d)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또한 에이레네를 역어로 사용하고 있는 몇몇 구절들은 해당 히브리어 단어가 모호하거나 없다: 에 4:16; 미 2:4; 사 32:4; 겔 34:29; 잠언 8:18.

(b)  70인역본은 히브리어 단어들, 주로 샬롬의 역어로 사용했기 때문에, 그 히브리어의 의미들이 이 헬라어의 의미에 영향을 미쳤으며, 또한 70인역본의 용법은 헬라어를 사용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헬라어는 새로운 풍부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히브리어 구약성경의 샬롬과 70인역본의 에이레네를 살펴보면, 에이레네의 여러 가지 의미를 알 수 있다.

이 단어는 '평화 peace'라는 좁은 의미로 제한시켜서는 안된다.  그것은 모든 가능한 형태의 악(evil)과 대조되는, 가장 넓은 의미의 '안녕, 복리' well-being를 의미한다. 만남이나 편지에서(삼하 18:29; 삿 19:20; 단 4:1), 작별 인사에서(삿 18:6; 삼상 20:42) 다른 사람들에게 안녕을 빌며, 대화에서 다른 사람에 관한 안녕을 구한다(삼상16:5).  사람들은 문안 인사를 한다 : "문안하고".

왕하 9:17이하에서와 같이 어떤 사람이 오는 이유에 대한 질문이 있는데, 곧 "평안이냐"는 '도전적인 목적이냐 화평한 목적이냐'라는 질문이다.

왕상 2:13에서 밧세바가 아도니아를 맞이 하면서 "화평한 목적으로 왔는냐"(너의 옴이 화평이냐)라고 말했을 때, 그것은 그녀가 그에게 그의 방문이 '좋은 일'을 뜻하는지를 실제로 묻고 있는 것이다.

시편 기자는 에이레네를 '행운이나 형통'이라는 의미로 사용했는데, 불경한 사람들에 대해서도 적용되고 있다. 의인은 악인의 이런 형통을 봄으로 시험을 받기도 한다(시 73:3). 그러나 이 형통은 외적인 것에 불과하며, 진정한 형통이 아니다(사 48:22).

사 57:18; 시 38:3에서는 육체의 건강을 의미한다.

집회서 38:8에서 의사가 가져오는 에이레네, 즉 건강에 대해 말하고 있다. 전장에서 무사히 안전하게 돌아오는 사람은 건강을 보전한 것으로 볼 수 있다(수 10:21; 왕상 22:17; 대하 19:1; 시 55:18).

또 이 단어는 '만족이나 흡족함' satisfaction을 의미하였는데, 이별에 관하여(창 26:29; 출 18:23; 사 55:12), 잠자리에 드는 것에 관하여(시 4:8), 죽음에 관하여(창 15:15; 렘 34:5) 사용되었다. 여기에서 에이레네는 단순히 안식이나 마음의 평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폭력이나 재난으로 압도당하지 않은 인간의 전상태로서, 폭력을 당하거나 변사의 정반대를 의미한다(참조: 왕상2:6).

또한 살펴볼 가치가 있는 것은 사 29:24의 내용이다: "원망하던 자도 교훈을 받으라"(70인역-말더듬는 혀들은 평화를 말하는 것을 배울 것이다). 이 구절에는 히브리어 샬롬이 없지만 에이레네가 나온다. 이 문맥에서 에이레네는 그들이 올바르게(에이레네) 말하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이사야 32:4에서도 이와 유사한 의미를 나타낸다.

이 단어는 더욱 보편적으로, 전쟁과 대조되는 평화를 의미한다. 잠 17:1; 호세아 20:18("평안히 눕게하리라")과 사 14:30("평안히 눕게 하려니와")에서 이 의미로 에이레네가 샬롬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잠언에서는 다투는 가정과 대조되는 평화로운 가정의 안락을 의미하며, 호세아와 이사야에서는 이 단어는 평화의 때를 의미한다.

대상 22:9에서 평화의 상태를 의미한다: "내가 저의 생전에 평안과 안정을 이스라엘에게 줄 것임이니라". 히스기야는 평화가 그의 시대에는 계속된다는 기대를 가졌기 때문에 이사야의 중대한 예언을 경솔히 취급했다. 여기에는 번영을 누리는 그룹, 예를들면 국가의 번영이라는 의미도 지닌다.

에이레네는 전 3:8에 전쟁과 대조시킨 "평화"와, 그리고 렘 29:7에 "성읍의 평안", 38:4에 "백성의 평안" 등에서 "평안을 구한다"는 표현에서와 같이 "평화의 상태"보다 더 근본적인 것, 즉 평화 =백성의 안녕에 관련된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샬롬/ 에이레네는 상태보다 오히려 관계를 암시한다.

많은 구절에서 이 단어는 이러한 의미를 가지는데, 국가나 그룹 간의(왕상 5:12; 삿 4:17; 왕상 5:4; 대상 12:18), 개인 간의(슥 6:13) 우호적 관계를 의미한다.

신 20:10에 '한 백성에 평화를 선언'하는 것은 한 백성의 관계의 수용을 의미하며(참조: 삿 21:13), 그 안으로 들어가는 자들은 평화의 사신들이다(사 33:7).

이 단어는 시편 35:27에서 외적 형통이나 성공에 더하여 인간의 전적인 안녕(well-being)을 의미할 수 있다: "나의 의를 즐거워하는 자로 기꺼이 부르고 즐겁게 하시며 그의 종의 형통을 기뻐하시는 여호와는". 여기서 형통과 안녕은 선(good)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

시편 122:8에서 시인은 "네 가운데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한다. 70인역본에는 '내가 참으로 너를 위하여(에 관하여) 평화를 말했다'고 번역되어 있다. '너를 위하여'는 '예루살렘을 위하여'이다.

시인은 바로 앞에서 이미 안녕과 형통을 원했다. 환언하면 이 용어는 여기서 확고한 '형통'이라는 의미에서 '선(good)'이라는 더 넓은 의미로 쉽게 이동한다.

따라서 잠 3:17에서 "그 길은 즐거운 길이요 그 첩경은 다 평강이니라"고 말한다. 70인역본은 '그녀의 길은 옳은 길이요 그녀의 모든 첩경은 평화에 있느니라'고 번역했다.

시 34:14은 도덕적 선을 의미한다: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며 화평을 찾아 (그를) 따를지어다."

슥 8:19에서 "오직 너희는 진실과 화평을 사랑할지니라."

말 2:6에서 "그가 화평과 정직한 중에서(으로) 나와 동행하며, 많은 사람들을 돌이켜 죄악에서 떠나게 하였느니라." 70인역본은 '그가 그의 길을 에이레네로 똑 바르게하여 내 앞에서 행하게 하며…'라고 번역했다.

잠 12:20에서 "악을 꾀하는 자의 마음에는 궤휼이 있고 화평을 논하는(조장하는) 자들에게는 희락이 있느니라." 70인역본은 '에이레네를 원하는 자들은 즐거워하리라'고 번역했다. 이러한 구절에서 '에이레네'는 도덕적 선을 의미한다.

(c)  이 단어는 두람(J. I. Durham)에 의하면, '완전, 완성, 성공, 성취' 등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샬롬은 '완전'이란 개념은 민 6:24이하에 나오는 축복의 절정을 이루는 대목에 나타난다. 여기에서 이 개념은 다른 모든 축복들을 요약하고 있으며, 여호와의 임재에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이 축복은 모세가 여호와로부터 받아 아론과 그의 자손들에게 이스라엘을 축복하는데 사용하도록 전한 것이다(민 6:22 이하). 이 축복의 내용은,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이다(민 6:24이하).

여기에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찌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민 6:27)는 구절이 첨가되었다. 두람은 이 구절을 주석하기를 '샬롬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오직 그가 임재하실 때에만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축복 속에 샬롬이 사용된 것을 볼 때에도 샬롬은 제의 용어로서 사용되었으며, 여러 가지 번역본이나 많은 주석가들이 일반적으로 이 말에 부여해 온 것보다 횔씬 더 포괄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보다 확실하게 믿게 된다. 왜냐하면 민 6:24-26 에 나오는 샬롬은 하나님께로부터 축복을 받고(바라크) 지킴을 받으며(샤마르) 은혜를 받는(하난) 사람, 하나님의 임재 속에 이 두가지 상태로 있는 사람, 즉 충족되고, 그리하여 온전하게 된 사람을 묘사하는 말로서 사용되고 있다. 실로 이러한 사람은 신약성경의 주의 말씀에 부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5:48).

또 두람은 '샬롬은 구약성경에서 자주 포괄적으로 본 성취 또는 완성, 실제로 사람이 혼자 힘으로 가장 좋은 환경에서 얻을 수 있는 그 어떤 성공이라도 훨씬 능가하는, 삶과 정신에 있어서의 완성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된다'라고 주장한다(창 15:15; 29:6; 37:14; 43:27이하.; 출 18:7,23; 민 25:12; 신 23:7; 삿 18:15; 삼상 17;18, 22; 20:7; 25:6; 삼하 11:7; 18:28이하; 왕상 22:27이하; 왕하 22:20; 사 45:7; 48:18; 53:5; 54:10, 13; 57:2,19; 59:8; 60:17; 66:12; 말 2:5이하.).

특히 이 점은 왕하 22:20에 나오는, 요시야가 열조에게 돌아가리라는 여호와의 약속에서 분명하게 제시되고 있다. 여기에서 요시야가 평안히(in peace, KSB) 열조에게 돌아간다는 식의 해석보다는, 그는 '성공하여 in success', 즉 그의 소명을 완성하고 흡족한 마음으로 열조에게 돌아갈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아래서는 항목을 만들어 에이레네의 의미를 설명한다.

2. 하나님의 선물로서의 에이레네

이 단어는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로서, 선, 좋은 것, 구원을 의미한다. 샬롬/ 에이레네와 연합된 좋은 것은 그것들을 위한 기도에서든, 그것들이 나타날 때 하나님의 선물로 인정하든, 자연적으로 이스라엘에서 항상 하나님과 관련시키었다.

기드온은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샬롬'이라고 불렀다. 이 매우 오래된 고대 표현에 대한 분명한 해석이 불가능하다면 우리는 이 고백의 위대한 의미에는 경건한 자들이 후에 많은 다른 상황에서 말하고자한, 특별히 구약의 기도에서 표현된 것과 같은 모든 것을 그 근본에 포함하고 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은 하늘에서 평화를 만드시며(욥 25:2), 또한 우리에게 평화를 약속하시며, 그의 백성에게 평화의 복을 내리시며, 그의 종들의 형통을 원하신다(시 35:27; 참조: 147:14), "다윗과 그 집에는 여호와로 말미암은 평강이 영원히 있으리라"(왕상 2:33).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시 122:6).

샬롬은 진실로 여호와로부터 오며, 완전히 충족하게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신념은 시편 85편에 두드러지게 표현되어 있다. 기자는 기도 중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 "그가 그 백성, 그 성도들에게 화평을 말씀하실 것이라 … 영광이 우리 땅에 거하리이다 긍휼과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입맞추었으며"(85:8-10).

이 사상의 맥락에서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구원하시려는 성향은 완전한 지상적 평화의 동기로 생각된다. 여기서 우리는 샬롬이라는 말의 구약의 용법의 최고점을 본다.

레위기에서 하나님은 그 땅에서 그의 백성에게 샬롬을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신다(레26:6). 이 문맥은 확고한 복이 뜻하는 것, 즉 원수들과 야수들로부터 평화를 아주 분명히 보여 준다. 이것은 특별한 의미에서 일종의 구원이다. 그것은 약속의 땅에서 안식과 평온이며, 그러므로 신명기 기자는 독특한 용어 메구하(안식)를 표현한 것이다(신 12:9). 이렇게 그들은 예언적 약속의 바로 가까이에 있다.

에이레네는 이 시대나 구원 시대에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선을 가리키는데 사용되게 되었다. 이 단어가 어떤 생활 영역에서나 하나님이 주신 선을 의미한다는 것은 구약신앙의 특성이다. 사 46:7에서 그 일반적인 기사를 볼 수 있다: "나는 평안도 짓고 환란도 창조하니". 이 경우에는 앞에서 언급한 레위기 26:3이하의 축복과, 그리고 민 6:26의 축복("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도 포괄한다.

때때로 에이레네의 정확한 내용을 말하기란 불가능하지만, 한편 그것이 항상 인간을 위한 선한 것이며, 거기에 그의 안녕이나 구원이 놓여있는 것이다. '에이레네'는 이런 의미에서 선한 것이며 구원이다.

이러한 구원을 의미하는 구절들을 더 들어보면, 렘 29:11에서 하나님은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라고 말씀하셨다. 시 119:165에서 율법을 사랑하는 자들의 큰 평화는 율법을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들이 당하는 장애물과 대조된다. 여기에 평화는 내적 구원이며 파멸이 아니다.

따라서 집회서 1:18에서 에이레네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증진되고 '기에이아 야세오스'(건강한 치유, 완전한 건강)와 연결되어 있다(참조: 사 9:7). 시 35:8과 9에 하나님이 약속하신 평화는 구원이며, 이 문장에서 평화와 구원이 연결되어 있다.

이 구원은 렘 16:5에서 하나님의 구원이라 부른다: "나의 평강". 애 3:17에 "주께서 내 심령으로 평강을 떠나게 하니"라는 말은 "내가 복(아가다: 선, 선한것)을 잊어버렸음이여"라는 말로 해석되어야 한다. 여기서 평강은 선한 것이며, 곧 구원이다. 이 평화에 참여한다는 것은 거기에 포함된 구원의 은총을 누린다는 것을 뜻하는 반면, 평화에서 제외된다는 것은 그 모든 복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평화를 거두어 가시면 어쩔 수 없이 애통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된다.

히브리인들은 때때로 이러한 동맹이나 협정에 대해 베리트(언약)를 사용했으며, 따라서 샬롬은 베리트와 관련하여 나타난다. 이 두 단어의 관계는 너무 강하므로, 이런 문맥에서 샬롬은 일종의 공식 용어가 된 것같다.

이 사상은 샬롬의 관계가 언약에서 두 당사자에 의해 인쳐진다는 것이다(수 9:15; 왕상 5:12). 환언하면, 언약은 '샬롬'의 관계를 개시하는 것이다. '샬롬'의 관계는 언약의 결과이다. 여호와의 이스라엘과의 화평의 언약을 나타내는, 이러한 구절들에서 '샬롬'은 실질적 안녕이 아니라 언약을 맺은 자들의 성향에 의존하는 평화의 관계를 의미하는 동시에 구원을 위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비누하스와 평화의 언약(민 25:12; 집회서 45:24), 레위와 평화의 언약(말 2:5), 다윗과 평화의 언약(겔 34:25; 37:26)은 구원의 언약이다.

사 54:10에서 여호와께서는 "나의 인자는 네게서 떠나지 아니하며 화평케 하는 나의 언약은 옮기지 아니하리라"고 약속하신다(Rad, TDNT).

3. 종말론적 기대의 한 요소로서 샬롬/ 에이레네

샬롬은 종말론적 기대의 한 요소이다. 영원한 평화의 최종적 상태에 대한 대망은 선지서들과 다른 성문서들에서 일관하게 표현하는 구약 종말론의 한 요소이다.

이 널리 퍼진, 다방면에 걸친 이 대망의 사실은 샬롬이라는 단어가 관계하고 있는 구절들에서 항상 발견되지 않을지라도 언급되고 있다.

낙원의 상태의 회복이 예언될 때(사 11:10이하; 호 2:20이하; 암 9:31), 하나님의 주관하에 국제적인 평화가 예언될 때(사 2:2이하), 혹은 평화의 때가 도래하는 마지막 시대의 한 겸손한 평화의 왕에 대한 기대를 말할 때(슥 9:9이하), 샬롬이라는 단어가 이런 중심적인 종말론적 구절에 사용되지 않거나 슥 9:10에서와 같이 오직 많은 다른 것들 곁에 사용될지라도, 우리는 가능한 한 가장 넓은 의미의 샬롬에 관한 예언적인 선포를 듣게 된다.

따라서 그 단어가 실제로 발견되는 구절들에 대해 어떤 보다 큰 비중을 두지 않는다. 사 9:5에 메시야 아이의 이름들에서 그 최종 이름 샬롬 사르(평화의 왕)는 의미의 중요성에 있어서 선행하는 다른 이름들과 다를 바 없다. 그 이름은 하나님의 사명(commission)을 지닌 분(사 9:1-6)으로서의 메시야는 도래하는 메시야 왕국의 평화의 보증인(guarantor)과 보호자이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것은 사 9:7의 가장 중요한 기사에서 다시 다윗의 보좌와 결부된 구원을 위해 영원히 있을 것이라고 표현되어 있다. 미 5:5에서 "이 사람은 우리의 평강이시다"라는 표현은 이 전체 예언의 본질을 요약한 것이다.

피조된 세상은 지금은 그것이 저지른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받고 있고 스스로 분열하고 있지만, 결국은 다시 온전하게 될 것인데(사 11:6-9; 29:17-24; 6:1-9), 그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실 것이다(사 65:17-19; 참조: 계 21:1-4).

평화에 관한 언약의 갱신에 관련된 메시지는 우주적이고 영속적인 평화에 관한 약속으로 발전되었으며, 이 구원의 날의 도래는 하나님께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자(사 61:1, 2)로서 평화의 나라의 담지자요 설립자인 평강의 왕(사 9:5,6)에 자주 결부되었다.

흥미있는 점은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가 모든 풍부한 의미를 지니는 데도 불구하고 어느 곳에서도 특별히 내적인 평화의 태도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참으로 그것이 개인보다 오히려 그룹에 대해 사용되는 구절들이 더 많다.

개인에 대한 용법의 전형적인 보기로서, 애 3:17을 들 수 있다: "주께서 내 심령으로 평강을 멀리 떠나게 하시니 내가 복을 잊어버렸음이여". 그러나 여기에 샬롬도 감추인 내적인 것이 아니라 그 자체를 외적 안녕의 형태로 나타낸다. 그룹과 관련된 대부분의 보기에서 샬롬은 분명히 외적으로 드러내보일 수 있는 어떤 것을 의미한다(Rad, TDNT).

샬롬은 이스라엘의 정치적 열망에 관련된 사회적 차원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순전히 개인적인 영역을 훨씬 넘어서는 공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샬롬이 체다카(의, 사 48:18; 시 86:10)와, 그리고 미쉬파트(재판, 슥 8:16)의 실제적 이상과, 나아가 심지어는 페쿠다(관리, 사 60:17)와 밀접히 관련된다는 사실이 입증된다. 이것은 또한 가장 보편적인 용례에서 이 단어는 개인적 개념어라기 보다는 사회적 개념어임을 시사한다(H. Beck, C. Brown , DNTT).

4. 예언자의 메시지로서의 샬롬/ 에이레네

이믈라의 아들 미가야에서 에스겔까지의 소선지자들은 거짓 선지자들이 선포한 구원의 메시지를 강렬하게 대항했다. 수세기를 통해 계속된 이 투쟁에서 모든 사람의 주의를 끈 표어는 샬롬(평화)이다. 참으로 전문 용어 인나베 레샬롬(그는 평화를 예언한다)은 이와 관련하여 나타난다(렘 28:9).

샬롬은 어떤 선지자 서클의 정점이었으며, 따라서 이 용어는 두 파당 사이의 심한 투쟁의 중심이 되었다. 문제는 이미 구원의 선지자들을 반대한 미가야의 입장에서 보여졌다. 그러나 이 용어 자체가 나오지 않는다(왕상 22:5이하).

미가는 몇몇 대항자들과 싸웠는데 그들을 이득을 얻기 위하여 예언하는 자들이라고 비난했다. 그들은 이득이 있는 한, 구원을 선포할 것이다: "내 백성을 유혹하는 선지자는 이에 물면 평강을 외치나 그 입에 무엇을 채워주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전쟁을 준비하는 도다…"(미 3:5이하).

예레미야는 그 치열한 투쟁에 투신하여 선지자들로부터 가장 강렬한 저항을 받았다. 큰 고통 중에서 예레미야는 샬롬 에메트(영원한 구원)를 약속하는 예루살렘의 운명이 무엇인지를 말한다(렘 14:13이하).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심상히 고쳐 주며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렘 6:14). 렘 28장에서 예레미야와 이런 선지자들 간의 극적인 교전의 이야기를 읽는다. 예레미야와 하나냐 간의 문제의 요점은 샬롬(평화)이냐, 라아(환란)이냐 이다.

최종적으로, 에스겔은 거짓 선지자들이 구원이 없는데도 샬롬 하존(구원의 이상)을 본다고 하며 백성을 잘못 인도했다고 동일한 항의를 했다(겔 13:16이하). 여기서 "이들은 예루살렘에 대하여 예언하여 평강이 없으나 평강의 묵시를 본다하는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이니라…"며, 대항한다.

거짓 선지자들의 문제는 샬롬의 문제를 넘어가며, 이 문맥에서 추적할 수 없다. 그렇지만 의심할 수 없는 것은 그들이 선포한 샬롬이 신화적 개념으로 옷 입은 궁국적 종말론적 평화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실제적 정치적 평화, 즉 모든 중대한 정치적 문제가 잘 해결되어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보장하는 평화 가운데서 살 수 있다는 약속이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마치 예레미야가 처음에 이 견해를 함께 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는 다음에 여호와께서 "이 백성에게서 평강을 빼았으셨다"는 것을 보게 되었다(렘 16:5).

거짓 선지자들의 프슈도스(yeu'do", 5579: 허위, 거짓말)는 그들이 샬롬을 예언한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예레미야와 에스겔도 다른 상황들에서 이것을 예언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히려 그들이 백성의 죄를 알지 못했으며, 따라서 절박한 심판에 관하여 어두운 정치적 장면을 해석할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예레미야와 에스겔로서는 대응 표어 에인 샬롬(평강이 없다)이란 표어를 만들었다(렘 6:14; 8:11; 12:12; 30:5; 겔 13:10,16).

거짓 선지자들의 샬롬과 예레미야와 에스겔의 에인 샬롬 간의 싸움은 강도를 더하여 갔으며, 그러나 주전 597년과 586의 예루살렘의 정복과 멸망으로, 어떤 긴장 완화가 있게 되고, 구원을 예언했던 거짓 선지자들은 철저히 불신을 당했다. 이제는 새롭고 더 큰 의미에서 샬롬의 약속은 예레미야와 에스겔의 예언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들 중의 하나가 되었다.

따라서 예레미야는 사로잡힌 자들에게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악이 아니라 구원을 생각하신다는 놀라운 기사를 기록한다(렘 29:11). 여기에서 우리는 예레미야서에 있는 후기 구원 예언의 근거를 본다. 다른 나라들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가져올 구원을 보고 떨 것이다(렘 33:9). 동일한 주제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과 맺은 평화의 언약에 대한 에스겔의 절정에 달한 메시지에 다시 등장한다(겔 24:25; 37:26이하).

샬롬에 대한 싸움은 이사야의 마지막 장들에서 나타나지 않는다. 여기서 샬롬은 벌써 선지자의 입장의 어떤 중요한 양상을 보여주는 표어가 아니다. 그것은 단순히 이 예언의 충분하고 장엄한 요지의 하나이다.

만일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말씀을 들었다면, 그들의 샬롬은 강과 같이 흘러내렸을 것이고 그들의 체다카(의)는 바다의 물결과 같이 되었을 것이다(사 48:18). 여기서 이 평행 관계는 이 용어가 지금 한 영적 의미를 받는다는 것을 보여 준다.

유사하게 사 54:13에서 예루살렘 자손에게 약속한 구원의 복은 체다카(의)의 복과 결부되어 있다. '샬롬'과 '체다카'의 동일한 결합은 하나님의 새 도성에 대한 예언적 표현에서 나타난다: "내가…화평을 세워 관원을 삼으며 의를 세워 감독을 삼으리니 다시는 강포한 일이 네 땅에 들리지 않을 것이요 황폐와 파멸이 네 경내에 다시 없을 것이며 네가 네 성벽을 구원이라 네 성문을 찬송이라 칭할 것이라"(사 60:17-18).

사 32:17에 의하면 샬롬은 의의 결과이다: "의의 공효는 화평이요 의의 결과는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라". 이 시적 예언에는 '샬롬'이 더욱 실제적 의미로, '카보드'(영광)와 연결되어 있는 사 66:12에서 다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가능한 가장 풍부한 음조를 발하는 것이 있다.

여기서 언급하고자 하는 것은, 아름다운 소리로 "먼데 있는 자에게든지 가까운데 있는 자에게든지 평강이 있을지어다 평강이 있을지어다"(사 57:19)고 한 것과 같이 평화는 풍부한 기대를 표현하는 용어지만, 더욱 정확한 신학적 용어로 해석되지 않은 용어이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어떤 모호함을 가지고 있으므로, 이러한 많은 측면적 용어를 잘 사용하지 못하는 번역자들은 때때로 이러한 구절들에서 샬롬이 그의 회복된 백성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인 이상, 더욱 현실적인 '안녕, 복리 well-being'를, 더욱 분명한 '평화 peace'를, 신학적으로 더욱 포괄적인 '구원 salvation'을 사용해야 할지 알지 못한다.

3. 랍비들, 위경 등 유대 문헌의 용법 

1. 랍비들의 문헌

(a)  랍비 문헌에서 평화라는 개념 전체에 깔려 있는 것은 여호와의 샬롬이다. 그러나 이 개념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와 그리고 순전히 인간적인 차원에서 모두 그 의미가 확대되었다. 샬롬은 인사말로서 만날 때('샤알 베샬롬', 안녕을 구하거나 비는 말)나 작별할 때(안녕히 가라) 상대의 안녕을 구하는 것이다. 살롬으로 인사하고 인사에 답한다.

또한 샬롬은 '순조(順調), 안녕, 안전'이란 의미로 사용되었다. pBer, 60에는 임신 6개월 부터 9개월 까지 순조로운 출산(순산)을 위해 기도한 것과 아이의 가고 오는 길에서의 보호,곧 안전을 위한 언급이 있다. 그리고 '휴식이나 안식'이란 의미로도 나타난다. 샬롬은 유대인의 무덤비에서 '안녕이나 구원'이란 의미로 기록되었다.

(b)  랍비 문헌에서도 구약성경에서와 같이 샬롬은 하나님이 그의 백성에게 주시는 선물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바벨론의 18개의 간구는 그의 백성에게 하나님의 복이 임하기를 기원하는데 그 최종 간구는 그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복과 평화가 임하기를 구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샬롬은 베레카(복, 지복)와 병행되고 같은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비록 유대인들 간에 메시야 시대의 평화의 개념에 대하여 견해차가 있었지만, 평화는 의인의 몫이며, 구약성경에서와 같이 메시야 시대의 지복(Blessings)의 총화이다. 이사야 52:7은 이것에 대하여 언급한다.

(c)  샬롬은 또한 사람들(개인들, 가정, 단체, 국가들) 간의 투쟁의 반대어이다. 따라서 사람들 간의 화평케 하는 것에 대해 자주 강조한 내용을 찾아 볼 수 있다. pea.,1.1에 의하면 이것은 그 열매들을 즐기는 것들 중에 하나이다. 학자들의 역할은 세상에 평화를 증진시키는 일이며(Ber 64a), 엘리야는 와서 세상에 평화를 먼저 확립한다(Eduy. 8:7). 예배에서 평화를 위한 기원으로 끝맺지 않은 축도나 기도가 없다(Lev. R. 9:9). '샬롬'은 하나님의 이름들 중 하나이다(Shab. 10b; 2:1, 4b).  UK. 3:12에 '거룩한 자여, 그는 찬양을 받으리로다. 그 안에 평화보다 더 가치있는 어떤 복을 간직하고 있는 그릇이 없도다'라고 말한다.

Rabban Simeon b. Gamaliel의 기록에 '세 가지, 즉 진리와 심판과 평화로 말미암아 세계가 보존된다'고 하였다(Avot 1:18). 이 기록에 의거하여 탈무드(Talmud)는 '만일 심판이 집행되면 진리가 지지를 받고 평화가 증진되기' 때문에 그 세 가지는 사실상 하나라고 선언한다(TJ, Ta'an. 4:2, 68a). 탈무드 랍비들의 최고 이상은 평화이기 때문에 그들은 할 수만 있으면 평화를 위하여 정의나 심판을 유보하거나 제외하였다.

힐렐(Hillel)에 있어서 아론은 평화를 추구하는 자의 한 모델이다(Ab,.1,12; ckawh, Str.B,.1.217). S.NU(42.6:26)에는 이방인들이나 이스라엘이 우상숭배의 죄가 있을지라도 그들이 평화하는 한 사탄이 그들을 해칠 수 없다고 한다. 랍비들은 호 4:17을 해석하여 '이스라엘이 우상들과 연합되어 있을지라도 평화가 그 안에 우세하고 있는 한 그대로 두라'고 가르친다(Gen. R.38:6).

평화를 확립하기 위하여 진리의 엄격한 노선에서 벗어나는 것도 허락되었으며(Yer. 65b), 탈무드는 민 5:23에 관련하여 '만일 남편과 아내 사이에 평화를 확립하기 위하여 신성하게 기록된 하나님의 이름을 지울 수 있다면, 전세계의 평화를 이루기 위하여 참으로 더욱 많이 그렇게 해야 한다'고 선언한다. 랍비들은 성경 자체와 모순하여 어떻게 사람들 간의 평화를 지지하는지를 설명한다(CKAWH,Slav. En. 52:11-13).

이것은 이웃의 '샬롬', 곧 구원을 구하는 문제가 아니라 다툼의 종식이라는 의미의 [샬롬]을 구하는 문제이다. 아마도 이것은 불일치나 불화가 메시야의 도래를 방해한다는 사상에 의한 것같다. 랍비들의 기록은 시기, 다툼, 불화가 하나님의 뜻에 반대가 된다는 강한 신조를 명시하고 있다. 이 견해에 따르면, 바로 세상의 존속은 평화에 의존한다(Ab., 1,18). 물론 하늘에 있는 것들 역시 불화할지라도 그렇다는 것이다(참조, 골1:20).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대하여 구약성경에서 발견하지 못하는 '샬롬'의 용법을 도입하게 한다. 다마스커스 문서는 하나님이 모든 육체와 다투고 있다는 사실로 시작한다. 이 다툼은 평화를 이루는 장막을 만들기까지 널리 펴져 나간다. 우상숭배와 같은 죄들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간의 반목을 조성하지만(Lv. r.,7 on 6:2), 제단의 돌들은 그들 간의 평화를 조성한다M. Ex., 29 등). 하나님과 사람 간의 평화와 다툼은 사람이 두 가지, 곧 긍정적으로와 부정적으로 행동하는 상호관계를 포함한다.

(d)  앞에서 살펴본 바, 샬롬은 유대인이 대망하던 구원의 핵심 바로 그것으로 되어있다. 이러한 평화를 추구하고( Rabbi Hille1, Aboth I:I2. SBI 217) 사람들 사이에 평화를 세우는 것은 반드시 해야만 할 일이었다. 랍비들의 가르침에서 평화롭게 하는 자의 역할은 신약성경에 나오는 그것과 유사한데, 이 점에서 랍비 유대주의는 신약성경의 '새 계명'과 비슷하다.

하지만 여기에서의 근본 동기는 이유에 대한 적극적인 사랑이라기보다는 샬롬을 방해할런지도 모르는 모든 것을 제거하고자 하는 욕망이다. 순전히 인간적인 차원에서 적용되는 것은 또한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도 적용된다. 이리하여 평화라는 개념은 사람이 행한 것과 행하지 않은 것 모두를 한층 중요하게 생각하는 새로운 차원을 얻게 된다. 이러한 평화에 대한 개념은 구약 시대 이후 발전한 새로운 용법에 큰 영향을 주었다.

2. 위경, 요셉푸스, 필로

(a)  위경에서 종교적 용법을 고찰해 보면, Test ⅩⅡ에서 '평화의 천사'라는 말이 나타난다. 여기에서 에이레네는 Test. L. 18:4와 D. 5:9,11에서와 같이 전쟁의 중단으로 표현된 구원을 의미하지만(Test. Jud. 22:1이하) 그것은 구원의 효과를 내지 못한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Test. ⅩⅡ와 특별히 Eth. En에서 평화의 반대는 랍비들의 견해와 같이 하나님과 이스라엘 또는 인류와 투쟁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이다.  Eth. En에 의하면 불경건한 자에게는 긍휼과 평화가 없고(5:15), 하늘의 타락한 수호 천사들에게는 평화도 없고 용서도 없지만(12:5), 반면에 의인에게는 평화가 약속되어 있다.

그러나 Eth. En. 1:17이하에 의하면, 평화는 심판의 유보 또는 비집행이며, 따라서 평화는 용서와 심판자의 긍휼과 연결되어 있다. 그렇지만 평화는 또한 빛과도 연결되어 있어서 긍정적인 의미를 함축하며, 구원을 뜻하기도 한다. 이러한 의미의 평화는 '평안히 내버려 두었다'란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할 수 있다. 열 두 족장의 유훈에서 평화는 재판을 유보하는 것, 즉 범법자를 동정하여 유예해 주는 것, 혹은 적어도 그에 대한 형벌의 집행을 유예하는 것을 의미한다.  위경에서 평화는 또한 인간들 사이의 일치나 화합을 의미하기도 한다(Foerster, TDNT;  H.Beck, C. Bro wn, DNTT).

(b)  요세푸스는 구약성경과 랍비들의 용법을 철저하게 따른다(Ant. 1, 179; 11, 216; 8, 405; War 2, 135).

(c)  필로는 언어학적으로, 그리고 실질적으로 헬라 전승을 따른다. 그에게 있어서 에이레네는 정치적 평화와 욕망의 싸움과 대조로, 오직 하나님께만 속하고(Heinemann,413ff), 하나님으로부터만 찾아 얻을 수 있는 내면적 안식인 마음의 평안을 의미한다(Vit. Mos., 1, 304). 그렇다고 해서 평화의 외면적이고 객관적으로 입증이 가능한 상태를 가리키는 측면과 무관하지 않다. 내면적, 외면적으로 싸움과 평화는 그룹을 이룬다. 내면적 싸움이 가장 나쁘며, 그것이 모든 악의 근원이다.  필로는 헬라 철학의 영향을 받아서 역시 내면적 평화를 유혹과 탐욕에 대한 승리로 간주하였다(Jos. 57). 이디오피아어 에녹서 52:11은 '평화와 사랑을 가져오는 자는 복이 있다'라고 선언하고 있다(Foerster, TDNT).

3. 쿰란 문서

쿰란 공동체는 변절한 이스라엘로부터 자신을 분리시켜(1QS 8:4-9; CD 1:4과 해당 구절) 자신을 구원 받은 자들의 종말론적 공동체라고 생각하였다. 이 공동체의 성원들은 이미 종말론적 평화를 향유하는 경지에 들어간 것이다.

그들의 문헌에서는 영원한 평화(IQS 2:4), 평화의 넘치는 풍요( IQS 4:7), 끝이 없는 평화(IQH 7:l5), 지속적인 평화(IQH 15:16), 제한 없는 평화(IQH 18:30) 등에 관한 구절이 나온다. 그러나 이 공동체는 아직도 투쟁의 와중에 있다(CD 4:13 및 그 밖의 해당 구절에서는 벨리알과 이스라엘 및 미가엘의 싸움이 언급되고 있고, IQM 1:9 이하에서는 빛의 아들들과 어둠의 아들들의 싸움이 언급되어 있다).

평화의 도래는 재난과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다(IQH 1:17). 구원은 구원을 받을 사람들이 불 붙는 용광로 속에서 연단을 받은 후에라야만 참된 것으로 인정 받는다(IQM 17:1). 하나님은 이미 영원 무궁한 평화의 언약(구원)을 생명의 바늘로 새겨 놓으셨다(IQM I2:3). 이러한 평화는 더 이상 거절을 당하지 않으며(IQH 9:11), 구원의 복으로 충만한 피난처가 된다(IQH 9:33). 평화는 구원과 행복과 같은 것이다. '하나님의 평화'(IQM 3:5; 4:14)와 '하나님의 기쁨'은 하나님의 백성이 안전한 그들의 고향에 도달하는데 필요한 암호이다(1QM 3:11).

4. 신약성경의 용법 

1. 서론

에이레네는 신약성경에 92회 사용되었으며, 요한 1서를 제외한 신약의 모든 성경에 나온다. 복음서에 25회(마 4회, 막 1회, 눅 14회, 요 6회), 사도행전에 7회, 바울 서신에 47회, 야고보서에 3회, 베드로서에 5회, 유다서에 1회, 요한서신과 계시록에 4회 사용되었다.

신약성경에서 에이레네의 변화 또는 발전된 의미를 모두 추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단어는 형태와 내용에 있어서 70인역본과 히브리어 구약성경의 전통을 착실히 따르고 있다. 그리고 랍비 문헌의 샬롬과 같은 의미로도 사용되었다. 추가로 고전 헬라어 문헌에 나타난 의미들이 그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신약성경에서의 의미는 인사와 그리고 유사한 표현에서 안녕(well-being)이나 구원(salvation)이란 의미를 가진다.

마 5:34(눅 7:50)와 약 2:16에서 작별 인사로, 눅 10:5; (눅 24:36); 요 20:19; 요 20:21; 요 20:26에서 도착 인사로 사용되었으며, 당시 팔레스틴에서 유행한 인사를 번역한 것이다.

행 16:36에서 누가가 로마 간수의 인사말로 "평안히 가라"는 말을 사용했는데, 그는 분명히 그 인사말을 70인역본에서 취했으며, 새 언약의 사람들에게 어울리는 인사말이라고 생각했다.

사도 바울 역시 항상 그의 편지서들에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라는 인사말을 사용했다.

계 1:4에도 동일한 인사말이 나온다. 이것은 히브리인과 아람인의 인사와 같은 것이다.

디모데전·후서, 요한이서, 그리고 유다서에서는 자비를 뜻하는 말과 함께 사용되었으며, 평화는 또한 예를 들어 벧전 5:14; 요삼 1:15에서처럼 끝맺는 인사말에 나온다. 구약성경의 평안히 가라와 비슷한 말이 행 15:33과 고전 16: 11에 나오며, 눅 2:9에 나오는 시므온의 말도 이와 비슷한 의미를 지닌다.

안전(security)이란 의미의 에이레네는 눅 11:21에서 찾아볼 수 있다(참조: 살전 5:3). 고전 14:33에서는 구약성경의 영향이 한층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데 여기서 에이레네는 무질서의 정반대이며, 교회 안의 무질서에 반대되는 상태를 나타낸다. 행 14:2.

신약성경에서 이 단어의 주요 의미는 분명히 헬라적인 의미가 아니라 보다 깊은 의미에서의 구원이다. 에이레네는 인간 간의 일치 또는 조화를 나타내며(행 7:26; 갈 5:22; 엡 4:3; 약 3:18; 참조: 벧전 3:11), 하나님과의 화평도 의미한다.

에이레네는 행 12:20; 행 24:2; 마 10:34; 계 5:4에서는 전쟁과 반대되는 평화에 대해 사용되었다. 바울은 이 단어를 영혼의 평안에 대해 사용하는데(참조: 롬 15:13), 이런 용법은 매우 드문 헬라의 용법이다.

눅 14:32에서는 평화의 조건을 구하기보다는 오히려 인사하는 것을 뜻하는 아람어투가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문맥상으로는 존경과 무조건적 복종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신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그 용법상 세 가지 중요한 개념을 지니고 있다. - ⑴ 안식의 느낌으로서의 평화,  ⑵ 하나님과의 화해의 상태로서의 평화, ⑶ 그리고 종말론적 구원으로서의 평화이다. 이 중 마지막 의미가 기본적인 것이다.

2. 가장 광범위한 의미에서 만물의 정상적인 상태로서의 에이레네

고전 14:33에서 바울에게 있어 에이레네는 고린도 교회에서 생각을 예언함으로 야기된 어지러움(혼란스런 상태)과 반대되는 정상적인 상태이다.

영감을 주시는 하나님은 어지러움(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고 평화의 하나님이시다. 영감은 다툼과 혼란을 위한 구실을 허용하지 않고 있으며, 따라서 시기와 분쟁은 하나님의 임재의 표시가 아니다. 여기서 지적하는 원리는 이적(miracles)이 법의 위반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법을 위반하는 편이 아니라 법을 지키므로 결과하는 평화, 곧 질서의 편이다. 이 질서의 평화는 진정한 교회의 정상적 상태인 것이다(고전 12:2; 약 3:16과 비교).

평화는 공동 예배(고전 14:33)와, 사도와 그의 협동자들 간의 교제에 결정적인 요인이 되는 것이다. 이 의미에서 에이레네가 분명히, 강조적으로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은 신약성경의 다른 곳에서 주목을 끄는 내부와 외부 사이의 관계를 보여준다.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는 건강한 또는 정상적인 상태는 하나님에 의해 영혼이나 인류에 제한되지 않고 전 우주에 미치는 것이다(참조: 1corinthians, ICC; V. Hasler, EDNT; Foerster, TDNT).

3. 인간의 종말론적 구원으로서의 에이레네

(a)  여기에서 출발점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구원, 특별히 종말론적인 구원이라는 의미를 지니는 구약성경의 샬롬이다.

눅 1:79에 사가랴의 찬송에서 에이레네는 대망한 종말론적 구원이다.

눅 2:14에 천사의 찬송에서 에이레네는 사람들 중에 평화나 하나님과 평화 뿐만이 아니라 이제 땅으로 온 구원을 가리킨다.

눅 19:42에 "평화에 관한 일"과 눅 19:38에 "하늘의 평화"도 구원이다.

계 12:10과 계 19:1에 "구원(소테리아)은 에이레네와 동일한 것이며, 그 의미는 (요한계시록에서 소테리아와 동일한) 에이레네가 하늘에 있고 하늘에서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역사적 사건으로 온다. 히 13:20은 이것을 "평강의 하나님"과 "양의 큰 목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내신 자"를 동일시 함으로써 넌지시 암시한다.

히 7:2은 그리스도의 전형으로서의 멜기세덱은 살렘 왕, 곧 평화의 왕이시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 구원은 평화의 복음으로 선포된다(엡 6:15; 참조: 행 10:36; 엡 2:17). 그것은 그리스도의 구원이다(요 14:27). 세상은 오직 [샬롬]을 원하며, 그리스도는 자기가 확보한 구원을 주신다.

예수님은 관습적인 작별인사를 사용하셨으며(막 5:34; 병행구, 눅 7:50), 예수님은 친히 제자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닌 평안의 인사(이 집에 평안이 있을 찌어다)를 가르쳐 주셨다. 제자들이 어느 집에든지 들어갈 때 하는 인사는 소원이 아니다.  그 평안은 그대로 거절하거나 받거나 해야 하는 선물이다. 그러므로 만일 거절하면 참으로 그 평안은 제자들에게로 돌아오는 것이다(눅 10:5이하; 마 10:13). 이스라엘의 마지막 세대는 최종적 선택을 직면하고 있다. 평화의 인사 형태에 동반하는 구원의 말없이 어느 성읍이나 집에도 들어갈 수 없다. 이 인사를 받는 사람은 누구든지 '평화의 아들'이 되지만 이 인사를 거절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구원으로부터 영원히 제외되어 있는 것이다(V. Hasler, EDNT).

그리고 편지서들(롬 1:7; 고전 1:3; 고후 1:2; 갈 1:3; 빌 1:2; 살전 1:1; 몬1:3)과 계시록(계 1:5)에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라는 인사 또는 축도의 말은 특수한 의미를 지닌다. 유대인의 축복 공식문은 '긍휼과 평화'이다(2bar. 78:2). 바울은 이 축복문에서 '긍휼' 대신 '은혜'를 취하여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있기를 원하노라)"라고 축복한다.

그는 "은혜와 평강"을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시키므로, 예배 의식을 따랐다. 이 축복으로 그는 그의 독자들에게 주님의 구원의 은사를 수여하는 것이다.

그는 이 은사를 고전 1:4-고전 1:9의 서언에서 더욱 정확히 묘사하며, 갈 1:4에서 그 축복을 이어 부언하고 있다. 후자에서 카리스(은혜)는 희생제사의 방식으로 설명되어 있고, 에이레네는 악한 현세대로부터 구원 받는 해방의 과정으로 설명되어 있다. 사도 요한이 그의 계시록 서언에서 독자들에게 한 축복도 바울의 축복이 의미하는 바와 같은 것이다.

우리는 이 구원을 구해야 한다: 히 12:14에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고 경고한다. 이 문구에서 에이레넨 메타(개역, 더불어 화평함)는 다른 사람들과 일치나 화합을 의미하지 않는다. 저는 다리가 고침을 받을 수 있는 우리의 발을 위한 곧은 길을 만들라는 권고 후에 모든 사람과 교제하여 구원을 구하라는 명령이 뒤따른다.

이 구원은 골 3:5에서 마음을 다스리는 능력이다.

이 구원은 빌 4:7에서 사람을 보호하는 능력이다.

어떤 학자들은 6절에 비추어 이것이 불안에 반대되는 평안감을 의미한다고 하지만 동의하기 어렵다. 그것은 신자가 보호받는 왕국이다. 비록 인간 관계 속에서 이 구원이 때때로 사람의 외적인 일들과 동일하지 않으며, 심한 적대적인 경험으로 인도할지라도 그렇다(마 10:34이하).

(b)  이런 구절들에서 에이레네는 실질적으로 조에(생명)와 병행하며, 바울은 롬 8:6에서 평안과 생명을 동일하게 취급한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바울은 육신의 노력은 사망, 영의 노력은 에이레네로 인도한다고 말한다. 그는 7절의 첫 부분에 근거를 둔다. 육신의 노력은 하나님께 대적하는 것이며 오직 사망으로 인도한다. 조에(생명)와 다나토스(사망)가 종말론적으로 그대로 받아들일 존재 양식인 것과 같이 조에(생명)는 그와 병행하는 에이레네와 함께 있다.

에이레네(= 샬롬 = 구원)는 최종적 성취의 상태이며, 새로운 피조물의 정상적 상태이다. 이와 같은 특징은 벧후 3:14에서 나타난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안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엔 에이레네) 나타나기를 힘쓰라."

여기에서 에이레네는 기본적인 내적 성벽이나 내적인 평안도, 하나님의 은혜도 아니며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형성된 심신의 회복과는 별도로, 상상할 수 없는 완전한 복지(안녕)나 정상 상태를 암시한다.

이 의미에서 바울의 더욱 친숙한 인사는 때때로 데오스 테스 에이레네스(평화의 하나님)로 말한다. 이 묘사는 바울이 평화의 하나님을 기대한 것과 확고하게 연결되어 있다.

평화의 내용은 문맥에서 결정될 수 있다. 롬 16:20에서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단을 너희 발아래서 상하게 하시리라"고 말했는데, 이 사탄의 파멸은 구원의 일부이다. 평강(화)의 하나님('데오스 테스 에이레네스')이란 말은 하나님이 평화와 지복을 시행할 것이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탄을 멸하실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벧후 3:14과 실질적으로 동일한 정도의 구원과 복지(안녕)의 절대적인 내용은 살전 5:23에 나타난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실 때에 흠이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에이레네는 바로 '영적 번영'이 아니라 전인간, 곧 영혼과 몸의 구원이다. 동일한 의미는 히 13:20이하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에이레네는 카리스(은혜)의 결과인 영혼의 평화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인간의 구원을 의미한다.

구약성경과 랍비적 용법에 근거해서, 에이레네는 이와같이 가장 심오하고 포괄적인 의미를 요구한다. 에이레네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미 일어나고 있는 전인(whole man)의 종말론적 구원이다. 그것은 확실한 성취의 상태로서 카이네 크티시스(새로운 피조물)의 상태를 의미한다. 이 의미에서 구원은 예수님의 부활에서 계시되었다(참조: Foerster, TDNT; H.Beck, C.Brown, DNTT; V.Hasler, EDNT 등).

4. 하나님과의 화평으로서의 에이레네

신약성경에서 에이레네는 하나님과의 평화의 관계에 대하여 드물게 사용되었다. 그 첫 언급은 엡 2:14-엡 2:17이다. 바울은 사 57:19을 생각하고 있었으며, 그러므로 구원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 용어가 15절에 나타날 때 그 반대어 에크드라(증오, 적의; 개역, 원수된 것)에 대하여 어떤 해석자들은 하나님에 대한 사람들의 적의를, 어떤 해석자들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적의를 의미한다고 한다.

만일 율법이 유대인과 이방인을 갈라놓고 이스라엘을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키는, 이 두 가지 역할을 알지 못한다면 이 구절들을 거의 올바로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율법으로 말마암아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적대와, 또한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적대가 일어난다. 사실 유대인들은 율법을 통하여, 그리고 율법을 위하여 그들 자신들을 이방인들로부터 분리하고 이방인들을 원수로 생각해야 했으며, 이방인들은 그런 유대인을 적대적으로 대했다.

따라서 14절에 "그는 우리의 화평(에이레네)이시라"는 포괄적인 의미를 나타낸다.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폐하셨을 때, 두 가지 무질서 곧 사람들 중에 무질서와 하나님에 대한 무질서를 파기하셨다.

이 에이레네는 하나님과의 평화와 인류 중에 평화를 의미한다. 따라서 그것은 질서, 모든 관계의 회복(healing)을 의미한다. 그래서 15절에 에크드라(원수된 것)란 표현도 일반적인 의미를 가진다. 15절에 "화평하게 하시고"와 16절에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도 역시 일반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에크드라와 에이레네는 여기서 인종 안에서 많은 서로 다른 형태를 취하는 객관적 상태들이다.

만일 하나님과 평화가 이 구절에서 에이레네의 일부이라면 롬 5:1에서 에이레네는 그 유일한 의미를 나타낸다. "하나님으로 더불어"라는 말이 보여주는 것과 같이 이 언급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지적한다. 이것은 롬 5:10에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원수들이며, 하나님이 그들과 화해하셨다는 사실에 동의한다(참조, 엡 2:16). 그래서 다음 평화는 사람이 변경한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상호관계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화해의 사역을 하심으로써 신자들이 하나님에 대하여 가지게 되는 관계이다.

5. 인간의 상호 평화로서의 에이레네

롬 14:17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말한다. 그는 강한 자들에게 말하기를 하나님의 나라는 그들이 생각하는 바와 같이 다른 사람들을 데리고 와서 먹고 마시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 가운데서 의와 평화와 희락의 통치로 되어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희락(카라)"은 15절의 "근심하게 되"(뤼페이타이)어서는 안되는 것을 보여 주며, 의(디카이오쉬네)는 여하한 사람의 양심도 침해 당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생각나게 한다. 평화(에이레네)는 하나님의 나라에는 어떠한 종류의 질병이나 악이나 불화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바울은 계속하여 이 영역에서 그리스도를 봉사하는 자들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사람들의 마음에 든다고 말한다. 그는 이렇게 하여 "평화에 관한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라는 권고를 한다. 여기에 에이레네는 오이코도메(덕을 세움)와 병행하는 것이며, 그것은 분명히 상호 간의 평화를 의미한다. 그렇지만 17절에서 에이레네는 이것보다 더 큰 것이다.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는 것은 성령 안에서 건강을 증진시키는 어떤 것의 창조, 즉 '에이레네'를 함축한다. 그렇지만 실제적으로 로마에 있는 교회에 적용하면, 이 건강을 증진시키는 일은 의심 없이 평화이다.

우리는 고전 7:15의 난해한 말에 동일한 사상의 어떤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화평 중에서 너를 부르셨느니라". 바울이 만일 이방인 배우자가 결혼을 파하려고 하면 기독교인 배우자는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할 때 그것은 주님께서 이혼에 관하여 말씀하신 것과 모순되는 것같이 보인다: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속 받을 것이 없느니라". 이것은 오직 주님의 말씀, 곧 우리는 이러한 경우에 노예들과 같이 구속받지 않는다는 말씀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15절에서 우리는 제한(restriction)이 아니라 이유(reason)를 가진다. 여기에 '데'는 '그러나 but'가 아니라 '오히려 rather'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 부름에 대한 언급은 바로 앞에 말한 것을 위한 근거를 확립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오히려'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언급된 개인적 경우를 넘어가서, 하나님이 우리를 평화로(혹은 평화를 위하여) 부르신 것을 우리에게 일반적으로 말하는 근거를 확립한다. 따라서 '에이레네'는 마지 못해서 유지하는 결혼 생활의 불화에 대한 반대 이상을 의미한다. 그것은 죄가 의도한 정상에 대한 파괴 상태와 정반대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만물의 건강한 상태, 정상적 상태를 함축한다. 당신이 배우자와 불화할 때 그를 구원하는 것이 당신의 사명이라고 생각해 보라. 구원과 그 결과인 화합의 복이 당신의 가정에 임할 것이다. 인간의 상호 간의 평화도 이 정상적 상태에 포함되어 있다. 다음 절(16절)은 '가르'로 시작한다. 여기서 '그러면, 그렇다면'이란 의미를 지닌다. : "(그렇다면) 아내된 자여 네가 남편을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며 남편된 자여 네가 네 아내를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리요."

딤후 2:22은 확실히 우리가 내적 경건(신앙심)으로 평화를 조장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는 메타가 에이레네에 관계하지 않고 '…와 함께'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자체 안에서 에이레네는 '구원을 가져 오는 것'을 의미하는 것도 당연하다. 한편 그것은 확실히 싸우고 있는 변론(제테세이스)을 한번 보지 않고 말하지 않는다(23절).

다음 구절들에서는 단순히 사람들 사이의 일치나 화합(concord)을 의미한다. 엡 4:3: "화평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약 3:18 :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의가 자라나는 씨는 화평케 하는 자들이 화평으로 뿌리게 되는 것이다. 시기(젤로스)와 다툼(에리데이아)은 '에이레네'의 정반대이다. 벧전 3:11에서 시 34편에서 인용하여 "화평을 구하여 이를 좇으라"라는 말을 무슨 의미로 사용했는지 정확히 말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 의미는 아마도 일치와 화합(참조, 9절)일 것이다(참조: Foerster, TDNT).

6. 영혼의 평화로서의 에이레네

롬 15:13에서 이 단어는 영혼의 평화를 의미한다: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그러나 이 단어가 어떻게 이 의미를 취하게 되었는지를, 즉 정상적 상태에 대한 신약성경의 이 단어의 일반적 용법에서 유래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평강의 하나님"이란 말이 외적 생명에 관한 의미를 함축하는 것과 같이, 그리고 에이레네가 인간의 전존재의 정상적 상태 - 카라(기쁨)와 불가분리적인 상태인 구원 - 을 인간 안에 창조하신다.

여기에서 에이레네의 개념은 스토아 철학의 소극적인 갈레네(고요함, 평온)와 다르다. 이 평화는 스토아 철학자들이 말하는 세상으로부터 은둔도 아니고 영적 세계나 시비적 명상에로의 경건한 도피도 아니다. 그것은 사람이 삶을 살아가면서 영원을 찾을 때에 이미 하나님의 평화를 누리는 기쁨이 충만한 확신이다(참조: Foerster, TDNT; H.Beck, C.Brown, DNTT). 이러한 영혼의 평화는 히브리어 샬롬의 특징도 아니다. 따라서 이러한 평화는 독특하게 기독교적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그리고 영혼 또는 마음의 평화에 관한 문맥들을 찾아 볼 수 있는데, 예를 들면 롬 8:6의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강"이라는 구절과 갈 5:22의 성령의 열매들 중 하나로서 "화평"은 이러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전자에서 에이레네는 생명인 구원을 뜻하고, 후자에서 사람들 간의 일치, 조화를 뜻하지만 내적, 영혼의 평화도 포함하고 있다(참조: 롬 14:17, [인간 상호 평화로서의 에이레네] 항목). 

빌 4:7에는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골 3:15에는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고 기록되어 있다. "평강", 하나님의 '구원하는 능력'이 다스리는 영역으로서 마음과 생각이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다. 이 구원하는 능력의 다스림을 받음으로 마음 또는 영혼이 평화를 누리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참조: Walter Bauer; H.Beck; C.Brown; W.Foerster; G.Von.R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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