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후3:16-18] 16..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 But whenever anyone turns to the Lord, the veil is taken away. 17..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Now the Lord is the Spirit, and where the Spirit of the Lord is, there is freedom. 18..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And we, who with unveiled faces all reflect the Lord's glory, are being transformed into his likeness with ever-increasing glory, which comes from the Lord, who is the Spirit. [요17:24-26] 24.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Father, I want those you have given me to be with me where I am, and to see my glory, the glory you have given me because you loved me before the creation of the world. 25.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사옵고 그들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았사옵나이다 Righteous Father, though the world does not know you, I know you, and they know that you have sent me. 26.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그들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 I have made you known to them, and will continue to make you known in order that the love you have for me may be in them and that I myself may be in them."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욜2:28-32) 에 대한 바른 해석 ----------------------------------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욜2:28-32) - 다가올 어떤 날을 기대하는 말씀인가? 28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29 그때에 내가 또 내 신으로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30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 31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같이 변하려니와 32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 ------------------------------------- 묘하게도 “더 성경적”인 것보다, “덜 성경적”인 것이 더 인기가 있는 경우가 많이 있고, 어떤 경우에는 심각하게 잘못 되거나 왜곡된 것이 정상적인 것보다 폭발적으로 사람들에게 지지를 받는 때가 있습니다. 아마도 제가 생각키로 이 요엘서의 본문을 가지고 만들어진 요즈음의 찬양들이 아마 그렇지 않을까 생각을 해 봅니다. 좀 오래되기는 했지만 두란노 경배와 찬양에서 나온 찬양 중에 이 가사를 가지고 만든 찬양이 있었습니다. “모든 민족에게 주 성령 부어 주소서...”라고 시작하는 찬양이었죠. 이 찬양의 후렴부는 이렇게 됩니다. “그 날엔 주의 영이 임하여 큰 부흥 이 땅 위에 일어나리라 모든 영혼 깨어 일어날 때 주 예수를 부르는 자 구원되리...” 제가 기억하기로는 이 찬양이 사람들로 하여금 어떠한 영적 흥분, 혹은 부흥을 향한 열망을 불러 일으켰던 것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최근에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고 있는 찬양으로 역시 이 구절을 사용한 찬양이 있습니다. “마지막 날에 내가 나의 영으로 모든 백성에게 부어 주리라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청년들은 환상을 보고 아비들은 꿈을 꾸리라 주의 영이 임하면...” 이 찬양 역시 뒷부분의 후렴에서는 사람들에게 영적 흥분, 혹은 성령의 임재, 부흥을 향한 열망을 불러 일으키는 가사로 맺고 있습니다. “성령이여 임하소서 우리에게 임하소서” 단적으로 결론을 먼저 말씀드리고 글을 시작하자면, 저는 개인적으로 이 찬양들을 제가 가르치는 아이들에게 금지시키고 있습니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이 가사를 가지고 미래에 올 어떤 날을 대망하면서 노래를 불러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이 요엘서의 본문은 이미 성취되었습니다.(그러나, 끝난 것은 아니고 성취중인,완결되어 자는 여정의 생동하는 말씀으로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둘째는 이 가사의 내용들이 부흥이나 성령의 임재에 관하여 우리에게 그릇된 교리들을 전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이 찬양들을 제가 가르치는 아이들에게 부르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의미를 신중하게 잘 살펴봄이 중요..교리인가, 말씀의 영원성인가..오버해선 곤란함)) 그렇다면 왜 그런 것입니까? 그에 관해 간단하게나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이 성경구절을 가지고 미래에 올 어떤 날을 대망하면서 노래를 불러서는 안되는 이유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제가 앞에서 말씀드린 요즘의 찬양들은 요엘서의 이 본문들이 미래에 이루어질 어떤 격렬한 부흥의 날에 관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가사들에서는 공통적으로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청년들은 환상을 보고, 아비들은 꿈을 꾸리라”라는 가사들이 전적으로 나중 어떤 날에 이런 일들이 실제로 일어나게 될 것이라고 하는 상상들을 담고 있습니다(저는 사실 개인적으로 이 찬양을 부르는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이 빈야드적 부흥집회에서처럼 사람들이 이상한 소리를 읊조리면서 반실신상태에서 종교적 무아지경에 빠지는 것을 기대하는 것인지 의아스럽습니다). 그러나 성경말씀이 이 본문을 다루는 방식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요엘서의 본문이 사도행전에 인용되었다는 사실은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면 사도행전에서 이 본문이 인용되었을 때 그것이 어떤 의미로서 인용되었습니까? 이 본문은 사도행전 2장에 나타납니다. 직접적으로 2장 16절에 이것이 요엘서로부터 인용된 것이라는 사실이 나타나 있습니다. “이는 곧 선지자 요엘로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그러면 이 요엘서로부터의 인용은 무엇을 설명하기 위한 것입니까? 사도행전 2장에서는 교회설립을 위한 놀라운 사건인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이 일어납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보혜사를 기도하며 기다리고 있던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같은 소리와 함께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형상이 나타나면서 성령께서 임하셨습니다(2-3절). 성령이 임하자 그 징표로서 사람들이 각자 난 곳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일을 말하기 시작했습니다(8, 11절). 이 이야기를 듣고 어떤 이들은 “이 어찐 일이냐”라고 했고(12절), 어떤 이들은 조롱하며 “저희가 새 술에 취하였다”라고 말하였습니다(13절). 이 말이 있은 후에 14절부터 베드로가 거기에 모인 사람들에게 말하기 시작합니다. 성경은 이것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이후에 말하는 내용들은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에 대한 일종의 주석’입니다. 여기에서 베드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곧 선지자 요엘로 말씀하신 것이니!” ‘이’가 무엇을 가리킵니까? 이것은 명백하게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을 가리킵니다. 즉 여기의 ‘이는’이 가리키는 것은 “여기서 지금 일어나고 있는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은” 이라는 뜻입니다. 베드로는 “여기서 지금 일어나고 있는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은”, “곧 선지자 요엘로 말씀하신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바로 이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이 요엘서가 말씀하신 내용, 곧 요엘서의 ‘성취’라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은 명백하게 요엘서의 본문이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 때에 성취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조금 다른 방식으로 말하자면, “요엘서의 예언은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을 겨냥한 것이다”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런 간단한 사실을 전제하고 본문을 본다면, 본문이 말하는 내용은 무엇이겠습니까? 그렇게 본다면 여기 나타나 있는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예언 : 남녀 구분 없음, 말씀하시는 주성령, 진리의 영의 감동따라 죄-의-심판에 대하여 주성령의 증언하심 통해 듣는 이들이 회개하여 거룩하신 주께 돌이키게 함),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환상=비전들...하나님의 필요, 하나님의 마음, 곧 심정과 속마음, 뜻-계획-경륜을 알아가며 동의, 사랑하기에 자원하여 헌신함으로써 바로 그 주님을 알며 사랑하며, 살아내며 동행하며 섬기는 제자-군사-어린양의 신부-하나님의 자녀),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꿈=하나님이 있으라 하신 곳, 하라 하신 그 일, 맡기신 바로 그 일이 주께 어떤 의미인지 들어 깨닫고 성취를 위해 소망을 품고 행동하는 성숙한 인격적 반응 , 즉 일하시는 하나님의 극진한 사랑과 열정을 체험함 통해 그 사랑의 감동따라 자원함의 순종으로 주어진 나날을 준비하고 올인함=80세에 이른 모세, 85세 때의 갈렙을 기억하자) ”라는 말씀이 먼 훗날 일어날 어떤 황홀경의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내 영으로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주리니 저희가 예언할 것이요”라는 말씀이 오순절 성령 강림과 함께 성취되었음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 어떠한 시각에서 보면 "모든 민족에게" "마지막 날에"라는 찬양이 단순히 격정적 부흥 운동을 위한 찬양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부흥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회복입니다. 부흥운동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부흥(회복)을 추구하는 것 자체가 어떠한 "부흥주의"로, 혹은 운동으로 현상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오해가 될 수 있는 현상이 오순절 계통의 교회들에서 일어나는 것은 사실이지만 부흥을 꿈꾸는 그 전체를 마치 활홍경에 빠지는 신비체험을 추구하는 것으로 여기는 것도 오해가 아닐까요? 문제가 되지 않을까요? 현대사회에서 제도화된 교회가 초대교회에 있었던 놀라운 복음의 역사를 이루는 통로로 사용되지 못하는 상황에서 초대교회와 같은 부흥을 꿈꾸는 것, 초대교회로 교회가 회복되어 강력한 복음의 역사가 일어나길 소망하는 것이 진정한 부흥을 꿈꾸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렇게 본다면 앞서 말한 두 찬양을 부를 수 있는 것을 통해 요엘서의 말씀은 다시금 하나님이 약속하신 성령의 역사가 있었던 초대교회로의 회복을 꿈꾸는 부흥이 아닐까요? 사실 두 찬양은 단순히 부흥회 할때 부흥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대명령이 이루어지길 기대하고 소망하는 마음이 담긴 찬양입니다. 선교를 위한 찬양입니다. 다만 부르는 사람들이 단순히 교회의 부흥이나 신비한 성령체험을 위한 찬양으로 오인할 수 있는 것이죠. 앞으로 일어날은 전혀 새로운 일이 아니라 이미 있었던 초대교회의 역사가 이제까지 그러한 일이 없었던 모든 민족과 백성과 방언 중에 일어나는 것이 바로 요엘서의 말씀이 성취되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성령이 만민에게 부어지는 일.... 저는 개혁교회를 사랑하는 사람들에서 퍼온 글이기 때문에 글 쓰신 분의 입장을 전혀 이해못해서 올리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두 찬양에 대한 전제한 것은 현상이지 두 찬양 자체에 대해 올바른 이해에서 시작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부흥이라는 것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글을 통해 제가 오인해서 이 찬양을 사용하지 않아야겠다고 깨달았습니다. 저 역시 배우고 갑니다. 부흥운동이 아니라 모든 민족과 백성 가운데 정말 초대교회의 역사가 일어나 주님이 다시오실 그 날이 하루 속히 다가오길 기대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것이 성취되었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이 본문이 말하고 있는 이 내용들이 바로 “선지자적 직무”와 관련된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성경이 완성된 후 모든 직접적 계시행위들은 종결되었습니다(히1장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1장 성경 부분을 참조하십시오). 그런데, 요엘서와 사도행전 본문에 나타나 있는 ‘예언’, ‘환상’, ‘꿈’은 모두 구약시대 때 계시를 위해 사용되던 도구들이었습니다. 즉 본문에 나타나있는 “이제 모든 사람들에게 이 도구가 열린다”라고 되어 있는 예언과 환상과 꿈들은 하나님께서 옛 시대(구약)때에 자기 백성들에게 특정인(선지자)을 통해서 계시를 주시던 방식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이 말씀은 이 과거 선지자에게 주셨던 직무가 성령과 함께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게 되었다는 것을 선포하는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여호와께서 그 신을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민11:29)고 말씀하신 것을 읽습니다. 그리고 새 언약이 올 때에 이제 우리는 의문의 법을 가지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이 다 이 계시의 말씀을 각각 가질 수 있게 되기 때문에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알 것인데”(렘31:34), 이것은 하나님께서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33절)두시는, 즉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33절) 새언약의 성격이 모든 사람에게 다 하나님의 계시를 허락해 주시는 것임을 읽을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신약 시대에 와서는 더 이상 제사장이나 선지자나 왕이 따로 존재하지 않고, 모든 사람이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벧전2:9)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계시를 전달해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을 대신해서 보혜사를 보내시겠다고 하셨을 때, 이 보혜사가 “진리의 영”이시며(요14:17), 이 성령께서 바로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26절)고 하신 그 분이신 것을 압니다. 성경은 성령의 가장 중요하고도 기초적인 역할이 우리를 말씀인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것으로서, “자의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그것을 말씀하시는”(요16:13-14) 분이심을 가르치고 있습니다(요한복음 14장과 17장의 본문이 주님께서 올리워 가신 후 내려보내실 보혜사의 역할을 설명하고 계신 부분임을 주목하십시오). 즉, 새 시대인 신약시대에는 성령이 바로 이 계시 전달의 중추인 것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요엘서를 이렇게 읽을 수 있습니다. “요엘서 본문은 오순절 성령강림을 통해 이제 모든 사람들이 선지자 되었음을 말씀하고 있다” 이것이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의 의미입니다.
여기에 한 가지 더 덧붙여서, 요엘서의 본문 중 “자녀들은....”의 부분은 그렇다고 치고, “피와 불과 연기”라든지,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같이 변하는”것과 같은 본문이 오순절 성령강림 때에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요엘서의 본문이 “부분적으로” 성취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의 주장 역시 근거없음을 말해야 하겠습니다. 사도행전 본문은 요엘서의 “일부분”을 싣고 있지 않습니다. 두 본문을 비교해 보시면 알겠지만, 사도행전 본문은 요엘서의 본문 “전부”를 싣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도행전 본문의 “요엘서 본문이 성취되었다”고 하는 부분에서 역시 “피와 불과 연기”나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피가 되리라”고 한 말씀을 동일하게 인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행2:19,20).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이 직접적인 현상으로 나타나지 않았다고 해서 그것은 나중에 일어날 일이다....라고 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이 부분 역시 사도행전에서 성취되었다고 하였으므로, 그 일이 오순절날에 일어났다고 보아야만 합니다. 지면관계상 여기서 상세하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경이 이런 기상현상이나 무서운 징조를 말할 때, 반드시 직접적인 ‘현상’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상징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즉, 직접 해가 어두워지거나 달이 피가 되지 않았지만, 성경은 오순절 성령강림이 이러한 역사적 대격변임을 저런 표현을 빌어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 되겠습니다(성경에서는 나라가 망한다거나, 역사적 격변이 일어날 때를 기상현상과 결부지어 상징적으로 쓰고 있는 부분이 많습니다. 이것은 상징적 성경해석과 관련된 다른 글들을 참조하십시오)
여기에 부흥찬양 가사들의 잘못된 부흥관이 얹혀져 있음을 우리는 인식해야겠습니다.
이것이 성경을 보는 눈을 가리는 요소가 됩니다. 요엘서는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을 겨냥해서 씌어졌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지나간’ 일이라고 해버리면 본문의 다이나믹함이 퇴색되어 버리고 맙니다. 나랑 별로 상관없는 것처럼 되어 버리고 맙니다. 그러다보니 본문을 찬양가사로 만든 노래들은 성경본문에 없는 내용들을 추가로 삽입해 넣었습니다. 앞에 말씀드린 두 찬양은 모두 이런 삽입구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경배와 찬양의 노래에는 “큰 부흥 이 땅위에 일어나리라”는 말을 넣었습니다. 전적으로 본문을 격정적 부흥에 대한 것으로 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두 번째 노래에서는 “성령이여 임하소서 우리에게 임하소서”를 넣고 있습니다. 이것은 전자보다 더 나쁩니다. 본문의 내용은 개인에게 임하는 성령에 대해 쓰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상황을 살펴볼 때, 잘못된 부흥관은 우리 한국교회들이 전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대단히 심각한 문제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돌아보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으로는 만족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다보니 그것을 “나에게 일어나는 어떤 격정적인 일”이라고 해야 설득력이 생기고, 마음이 뜨거워지는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을 저는 전적으로 한국교회가 부흥운동의 역사적 배경 위에 세워진 교회이기 때문이다....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한국교회는 전적으로 웨슬리안적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본문을 통해서 나에게 일어날 어떤 “격정적인 부흥운동”을 바라보는 것 보다, 과거 “오순절 성령강림을 통해서 우리가 다 선지자되었다”고 하는 것이 훨씬 더 강력하고 놀라운 사건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요엘서의 본문이 사도행전에서 성취되었다고 할 때, 그것이 의미하는 엄청난 의미들을 바라보는 것으로 놀라운 기쁨에 빠지고, 하나님의 역사에 감탄해야 하는 것입니다. ----------------- **부흥 REVIVAL=(십자가-부활-임마누엘로 실제로 개인의 삶안으로 들어오신 주JC를 영접하여 그분으로 사는)생명의 회복 RECOVERY of LIFE에서부터 일어나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JC를 살아냄안에서의 성장성숙, 강화와 확장, 산출=선교에로 동참을 그 자녀된 이들(=무익한 종)에게 허용하시는 주하나님을 보라!!)(계7장의 보좌앞에서의 예배를 보라!! 하나님의 완전한 기쁨과 만족이신 JC를 통해, 하나님의 선교를 통해 얻은 바 된 보좌 앞 무리들을 보라, 기대하라!!) **회복과 부흥은 부활의 능력...부흥과 성장은 생명의 부활 통한 하나님나라의 원리...이땅에서의 참여와 누림은 오직 발휘되는 산 믿음으로!! 우리가 믿고 소망하는 (진정한 의미의)부활은 생명의 부활이자 새하늘과 새 땅으로의 부활..생명의 부활안에 두가지 중요한 능력이 포함되어 있다..[첫째 회복의 능력, 둘째, 부흥의 능력]..부활을 통한 회복에는 3가지가 포함된다..==생명으로의 회복(부활을 통한, 부활안에서 거듭남...교통의 회복)==영광(=하나님을 빼어닮음...형상과 모양 회복)안으로의 회복==완전함으로의 회복(완전한 평강 : 의의 공효는 평안과 안전....장막을 치심) ---->생명의 부활의 능력은 반드시 회복과 부흥으로 나타나게 될 것(죽음과 실패는 생명과 성공으로, 악함과 추함은 선한과 아름다움으로, 불완전/불안한 삶은 완전과 안전의 삶의 회복으로...시냇가에 심은 나무를 보라!!)
**삼증유승혁7079059348-01 01042812604 01081924877 01051206260 01042931622 01056619123 01097970214 ****비급검치주건보적용금지(건보/심평)=한도내지급제한40%=>약처건보=실보한도(80-90%)/복사요구차상기재상이내용이해요 **TVPoint : 로그인비번kkyk___전환가능포확인/전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