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7:11, 12]
11.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서 있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12. 이르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권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하더라
ajmhvn(281, 아멘) 아멘, 진실로, 그러하도다
동사적 형용사 아멘은 히브리어 아멘의 음역인데, 이 히브리어 단어는 아만에서 유래하였다. 아만은 칼형으로 '확증하다, 지지하다, 뒷받침하다'를 뜻하고, 니팔형으로, '확립되다, 신실하다, 확실하다, 믿을만하다'를 뜻하며, 히필형으로, '확고하다고 알다, 믿다, 확신하다'라는 의미를 가진다.
따라서 아멘의 의미는 '확실한, 확고한, 신실한, 진실한'이다. 부사로는 '확실히, 진실로'를 의미하며, 문장의 종결 부분에서는 '그러하다, 그러할지어다, 그것이 이루어 질지어다'를 의미한다. 이 단어의 반복 용법은 최상급의 의미를 가진다(예: 진실로 진실로 = 가장 확실하게).
1. 구약성경과 유대교의 용법
(a) 아멘은 구약에서 개인 및 공동체와 관련하여 사용하였다. 신자는 '아멘'에 참예함으로 말미암아 축복을 받아들이고 저주를 확증하고 송영에 찬동한다. 모든 경우에 확실하고 구속력이 있는 것이라는 인정이 암시되어 있다
① 첫째로, 그 성취가 하나님의 뜻에 달려있는 일들의 수납을 확증하는 것이다. 왕상 1:36에서 브나냐는 솔로몬의 즉위식을 지시한 다윗의 말에 아멘으로 응답한다. 이 경우 왕의 명령을 이행할 것을 약속하고 또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이행하도록 요청하고, 또한 이를 위한 기도를 응답하여 주시기를 요청하는 것이다.
렘 28:6에서 예레미야는 모든 포로를 바벨론에서 귀환시킬 것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말에 아멘으로 응답한다. 외경 유딧 13:20에서 백성들은 유딧을 축복하는 도성의 지도자 우찌야의 말에 아멘으로 응답한다. 이상의 실례에서 아멘으로 응답함으로 응답자는 그것이 하나님께서 도움으로 성취되기를 바라는 강한 소망을 나타낸다.
② 둘째로, 하나님의 위협이나 저주의 적용을 확증하는 것이다. 민 5:22에서 간음의 혐의를 받은 여인은 제사장의 저주에 관한 말에 두번 아멘으로 응답한다. 말하자면, 자신이 죄를 지었다면 그와 같은 저주가 임해도 좋다고 하는 것이다.
렘 11:5에서 예레미야는 언약의 말씀을 지키지 않은 자들에게 저주를 내리리라는 하나님의 위협적인 말씀에 아멘으로 동의한다. 신 27:15-26에서 백성들은 레위 사람이 열거하는 율법 위반자들에게 한 저주에 대하여 아멘으로 확증하였으며, 느 5:13에서도 마찬가지로 백성들은 느예미야의 입에서 나오는 저주의 위협하에서 아멘으로 자기네의 약속을 확증한다. 이러한 아멘은 만일 자신이 죄를 범하면 자신에게 저주가 내리기를 요청하는 것이다.
③ 셋째로, 송영에 응답하여 하나님에 대한 찬양에 찬동한다. 대표자나 찬양대가 하나님을 송축하거나 그러한 기도를 할 때 백성들, 곧 회중은 아멘으로 응답하였다(느 8:6; 대상 16:36). 시편의 처음 4권의 끝부분(41:13[14]; 72:19; 89:52[53]; 106:48)에 나오는 찬미는 모두 아멘이 첨가된 송영으로 끝나는데 백성의 응답의 표시이다. 언급된 내용은 아멘을 통하여 확실하고 타당하고 구속력 있는 것으로 확증된다. 따라서 이러한 경우도 (참으로)그러하다는 고백과 더불어 그렇게 되어지기를 바라는 강한 소원을 나타낸다.
④ 네째로, 아멘은 하나님의 명칭이나 속성으로 사용되었다. 하나님은 사 65:l6에서 '아멘의 하나님'(한글개역: 진리의 하나님)이라고 칭해진다. 또는 하나님 자신이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확증의 증인이기 때문에 아멘의 하나님으로 칭해진다고 볼 수 있다.
(b) 구약시대에 아멘이 화자(혹은 기자)가 자기 자신의 말을 확증하는 것으로 사용된 것은 오직 한번 뿐인데, 주전 7세기 말엽에 메짜드 카샤비야후가 쓴 한 문서에 나온다. 여기서 그는 '아멘, 내게는 잘못이 없습니다'라고 한다.
(c) 랍비들의 자료에서 '아멘'은 다른 사람이 말한 것을 확증이라고 강조하는 대답으로만 발견될 뿐이다. 요제 차니나(R. Jose b. chanina, AD. 270년경)는 아멘에는 서약, 말의 수용, 그리고 말에 대한 확증이 포함되어 있다고 말하였다.
① 기도나 송영에 대해 아멘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삼는 것이다.
② 탄원, 축복이나 저주에 대해 아멘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신을 그것에 속박시키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자기가 들은 어떤 송영에 대해서도 아멘이라고 말해야 한다. 즉, 유대인은 다른 유대인이 주를 찬양하는 소리를 들었을 때 아멘으로 응답해야 한다. 아멘을 말하는 사람은 그에 따라 하나님의 상급을 풍성히 받을 것이다. 성전 예배의 경우와 달리 회당 예배에서 회중은 예배 인도자가 선언한 송영에, 그리고 아론의 세가지 축복기도(민 6:24이하)에 '아멘'으로 화답하였다.
(d) 어떤 사람이 쿰란 공동체에 가입할 때, 제사장들은 하나님의 영광송을 부르고 하나님의 편에 속한 모든 사람들을 축복한데 반해, 레위인들은 베리알의 편에 속해 있는 모든 사람을 저주하였다. 이 언약 공동체에 가입하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이러한 여러가지 송영 축복과 저주에 대하여 두번 아멘으로 화답하였다(참조: 신 27:15-26).
2. 신약성경의 용법
신약성경에서 아멘은 대략 126회 발견된다(마태복음에 31회, 마가복음에 13회, 누가복음에 6회, 요한복음에 50회, 바울서신에 l4회, 요한계시록에 8회).
(a) 말씀을 시작할 때에는 '확실히, 진실로'라는 의미를 가진다. 이것은 '엄숙하게'라는 의미도 포함하고 있다. 복음서에서 아멘은 예수님의 입에서만 나오는데, 주로 "진실로(아멘) 너희에게 이르노니" 라는 문구로 나온다(막 3:28; 눅 4:24). 이 단어의 반복용법 (아멘, 아멘)은 요한에 의해 요한복음에서만(25회) 사용되었으며, 최상급의 의미를 가진다. -가장 확실하게(요 1:51; 요3:3). 예수님은 아멘으로 말씀을 시작 하심으로 말미암아 그 말씀을 확실하고 신빙성 있는 것으로 만드셨다. 그는 그 말씀들을 지지하시고 자신과 청중들을 그 말씀으로 구속하셨다. 이 말씀들은 그의 위엄과 권위의 표현이다.
(b) 문장의 종결부분, 곧 기도나 송영의 끝부분에서 언급된 것을 강화하고 확증하기 위하여 나타난다. 구약성서의 용법을 따라 역시 참으로 그러하다는 고백과 더불어 그렇게 되어지기를 바라는 강한 소망을 나타낸다. 이러한 경우에 아멘은 '그러하도다, 그러할지어다, 그것이 이루어질지어다'(혹은 이러한 요청이 함축된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롬 1:25; 요 9:5; 요 11:36; 요 16:27; 갈 1:5; 엡 3:21; 빌 4:20; 딤전 1:17; 히 13:21; 벧전 4:11; 계 1:6등).
(c) 아멘은 회당에서 기독교 회중에게로 전해진 관례로, 성경을 읽거나 봉독한 자가 하나님께 엄숙한 기도를 드릴 때 참석한 다른 사람들은 "아멘"이라고 화답하며, 따라서 언급된 것의 내용을 자신의 것으로 삼는다(고전 14:16; 참조: 민 5:22; 신 27:15이하; 느 5:13; 느 8:6).
고후 1:20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모든 약속들이 예수님 안에서 성취되고 보증되었다고 보고 우리가 아멘으로 그것을 확증하며 또한 우리 자신의 것으로 삼는다고 한다.
계 22:20에서 교회는 '진실로'라는 말씀에 대해 아멘으로 화답하여 그 약속을 확증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승락에 대한 교회의 응답이라는 의미에서 고후 1:20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
(d) 계 3:14에서 예수님 자신을 아멘이라고 부르고 그를 실질적으로 아멘의 역어인 "참된 증인"(참조: 시 89:37,38) 이라고 단정 지을 때 이 구절은 사 65:16을 채택한 것이다. 참된 증인이신 그리스도 자신은 자기 안에서 선포되어진 하나님의 약속. 곧 하나님의 승락에 대한 그의 응답에서 "아멘"으로 불리워질 수 있다.- 아멘 -.(Walter Bauer; J.H.Thayer; H.Bietenhard).
eujlogiva(2129, 율로기아...찬송) 찬양, 축복, 복 blessing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율로기아(Pindar)는 유(eu\, 2095: 좋게, 잘)와 로고스(lovgo", 3056: 말, 진술)에서 유래했으며, 다음의 의미를 지닌다.
(a) '좋게 말함', 외양에 사용될 때 '좋게 말하는 것'은 그것의 미적인 매력, 곧 말하고 있는 것의 사람의 마음을 끄는 외양을 언급하는 것이다.
(b) '훌륭한 말이나 고상한 말',
(c) '칭찬, 찬양', 내용에 사용될 때 '좋게 말하는 것'(율로기아)은 찬양과 칭찬을 나타낸다. 이 찬양은 사물에 대한 것이 될 수도 있고(예: 도시[Aesch], 두드러진 행위들[Isoc.]), 또는 사람들에 대한 것일 수도 있다(예: 조상들[Aristoph.], 여인들[Aristph.]), 가끔 이 단어는 신들(목적 속격)을 찬양하는 데에도 사용된다(예: Pan in CIG, Isis.).
(d) '옹호' advocacy(파피루스).
(e) '축복, 복', 고전 헬라어에서 복이나 축복의 개념은 매우 빈약하다. 거기에는 특별한 축복 행위가 없다. B. C. 3세기(Ditt. or. 1, 74, 1)의 비문에 데우 율로기아(하나님의 복)라는 기록이 있는데, 어떤 유대인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2. 70인역본의 용법.
명사 율로기아는 70인역본에서 약 100회 나오며, 주로 히브리어 베라카(1293: 축복, 복, 선물)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 율로게오(eujlogevw, 2127) 참조.
3. 신약성경의 용법.
신약성경에서 명사 율로기아는 16회 나오며, 동사 율로게오는 41회 나온다.
--> 율로게오(eujlogevw, 2127)와 함께 율로기아를 설명하고 율로기아가 적용된 구절에 [N]으로 표시했다.
(a) 신약성경은 구약성경의 복의 개념을 많이 이어 받는다. 히 7:1은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축복하였다고 하며(창 14:19 이하), 이로부터 그의 높은 지위나 우월성을 추론하는데, 더 큰 자가 더 작은 자를 축복하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히 7:6 이하). 히 11:20 이하는 이삭이 야곱을 축복하였고(창 27:28 이하), 야곱이 요셉의 아들들을 축복하였으며(창 48:15 이하), 그들이 믿음으로 그렇게 하였다고 한다.
신약성경 기자들은 조상으로부터 후손으로의 축복의 전수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위대한 약속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확신에서 일어난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확신을 가지고 축복하는 자는 그가 축복한 자를 하나님의 보호 안으로 밀어 넣는다.
히브리서가 이 예들을 말하는 목적은 히 6:12에 언급되어 있다. 곧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때때로 이런 구절 들에는 "축복을 기업으로 받다"(히 12:17[N]; 벧전 3:9[N])와 "약속을 기업으로 받다"(참조: 히 6:12; 히 6:15)와 같은 공식 문구가 실리기도 한다. 축복과 약속이 병행되어 있다는 점을 통해서 볼 때 이곳에서 축복은 현재적인 것이 아니라 종말론적 복을 의미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참조: 마 25:34과 사 65:23).
에서는 악하게도 장자권을 경시했기 때문에 비록 축복을 구하긴 했지만 거부 당한다(히 11:21).
(b) 신약성경은 또한 하나님을 찬미할(bless) 인간의 의무를 인식한다.
눅 1:64에서 사가랴는 그가 다시 말을 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즉시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너무나도 분명하게 깨닫고 찬양을 돌린 참된 이스라엘인이다.
눅 2:28에서 시므온이 아기 예수를 팔에 안았을 때 구주를 보게 하신 은혜에 감사하여 하나님께 찬양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자신이 그리스도로부터 흘러 나오는 복된 나라에 들어간 것이다. 따라서 그 늙은 시몬은 아기 예수의 양친을 축복할 수 있었다(눅 2:34).
(c) 마리아는 이미 이런 축복의 범위 내에 속해 있었다.
마리아는 이미 이 범위 내에 속해 있었다. 만약에 이스라엘의 모든 아내가 그의 아기에 대한 축복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볼 수 있다면 메시야의 어머니는 특별히 "여자들 중에 복된" 자인 것이다.
① 눅 1:28; 눅 1:42,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찌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② 눅 1:42, "여인 중에서 네가 복이 있도다." 이 문구에 대해서는 유딧 13:18; 유딧 15:12; 신 28:3 이하; 삿 5:24을 참조하라.
③ 그러나 가장 복된 자는 메시야 자신이다. 백성들은 메시야의 시온 입성을 환성을 지르며 환영하였다(막 11:9 이하; 마 21:9; 눅 19:38; 요 12:13). 요한복음에서는 율로게오만 나온다: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오시는 그 분과 그의 나라는 그들이 속하는 하나님에 의해 축복 받는다. 그러나 그들은 또한 그들에게 복종하는 백성들에게 환영받는다.
환영(영접)의 형식은 시 118:26에서 유래하며, 메시야의 구속과 연관되어 있다(Midr. Ps 118). 예수님은 마 23:39; 눅 13:35에서 이 동일한 시편을 그의 재림의 날에 적용 시키신다.
(d) ① 메시야가 지상적 모습으로 나타나셨을 때,
그는 그의 백성 중에 경건한 사람으로 행하신다. 그는 관습을 그대로 받아들이시며, 특별히 종교적 관습에서 그리하신다.
그가 식탁에 앉으실 때나 4,000명, 혹 5,000명을 먹이실 때 그는 보통의 유대인 손님, 혹은 집 주인으로 행동하신다. 그는 인정된 형식을 충실하게 따르신다.
그는 손에 떡을 취하시고 축사하신 후 떡을 떼어 나누어 주신다(막 6:41과 병행구; 막 8:7과 병행구).
단 하나 새로운 모습은 기도하실 때 예수께서 예전처럼 아래로 내려다 보지 않고 하늘을 향해 우러러 보셨다는 점이다. 아마도 이것의 요점은 그것이 일상의 평범한 식사가 아니라 기적적인 것이요 그가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고 계신다는 것이리라. 그러나 또한 그의 선교 의식과 이것이 주는 내적 자유에 힘입어 예수님은 이 딱딱한 형식적인 교제에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와 같이 그렇게 생명력 있는 것으로 만드는 신적인 그 무엇을 불어넣고 계신다고 보는 것도 가능하다.
아마도 그는 또 이 감사 기도를, 예컨대 주기도문과 같은 한결 더 자유로운 형태로 표현하셨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에 관한 어떤 것을, 떡을 축사하고 떼어 주는 그 단순한 매일의 과정에 융합하셨음이 틀림없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았다면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가 이 행동으로 주님을 알아보았을 수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유카리스테인이 때때로 율로게인 대신 사용된다면(그리고 막 8:6; 막 8:7에서 둘이 함께 나옴) 이것은 어떤 의미의 차이를 나타내지 않는다. 유카리스테오 역시 히브리어 베레크에 대해 사용된다. 다른 한편 그것은 아람어 원어에 대한 헬라어의 오해로, 많은 MSS가 막 8:7에서 대격 목적어(아우타 혹은 타우타)를 추가한다. 만약 이것이 예수님께서 떡에 축사하시고 그 기적적인 면을 더하셨을 것이라는 사상을 암시한다면 우리는 이스라엘에서 잊어버린지 오래된 개념으로 거슬러 되돌아 가는 것이다.
눅 9:16에서 유사하게 몇몇 MSS만이 독립형을 가지고 다수는 아우투스를, 그 중 몇몇은 에프 아우투스를 추가한다.
② 주의 만찬에서도 역시 예수님은 누룩을 넣지 않은 떡을 취하시고 축복을 선언하신 후 그것을 떼어 나누어 주시며(막 14:22; 마 26:26), 또 축복의 잔을 가지고 그렇게 하신다. 여기서 그는 해석의 말씀을 덧붙이신다. 축복의 잔은 초기 그리스도 교회에서 여전히 행해졌으며, 이에 대해 고전 10:16로부터 알 수 있다. 바울은 여기서 일반적인 유대적 표현인 토 포테리온 테스 율로기아스("축복의 잔")를 사용한다. 한 가지 새로운 요소는 '호 율로구멘' "우리가 축복하는 바"의 추가다. 이것은 바울이 말하는 잔을 다른 모든 잔과 구별하기 위한 것이다. 그 잔을 통하여 회중이 축복받기 때문에 그것에 감사 기도가 적용된다. 그것에 의해 그것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한다."
(e) 예수님은 또 사람들을 직접 축복하셨다.
① 막 10:16에서 예수님은 어린 아이들을 축복하신다(참조: 막 10:13-막 10:16). 그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유대 가장이나 랍비가 하는 것과 똑같이 행동하셨다(참조: SB). 주목할 요점은 마가복음에 있어서 예수님의 활동이 성인들에게만 제한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활동은 어린이들까지도 포함하였으니 곧 생의 모든 단계에서 사람을 포용한다. 이 부분이 주로 관심을 갖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참조: 막 10:15)는 "예수님의 활동과 적극적으로 통합되는 인간의 몸이며 피조적인 실존"이다(C. Westermann).
② 눅 24:50 이하에서 부활하신 주님께서 승천시 제자들에게 축복하셨으며, 그리스도의 축복 이면에는 제사장적인 축복도(Schenk) 족장 기사에 나오는 기업의 축복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축복은 떠날 때 주는 축복의 관습이다. 떠나시는 주님이 자기 교회와 더불어 자기의 축복의 능력을 나누시므로 그는 교회와 결속되게 된다. 축복의 내용은 마태가 자신의 기사에 나오는 이에 상응하는 점에서 분명하게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참조: 마 28:20; 창 26:3)고 말한 것처럼, 높이심을 받은 주님이 교회와 더불어 임재하신다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찬양함으로 응답하였다. 따라서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사역 전체를 하나님께서 그를 보내사 복주셨다는 말로 요약할 수 있었다.
③ 롬 15:29[N]에서 어구는 축복의 행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서의 그리스도의 전도의 결과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은 바울이 로마로 가는 것이, 곧 이 공동체의 성장을 촉진할 것임을 바울이 확신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울은 또한 그리스도께서 가져다 주신 복에 충만하여 로마로 여행할 수 있었다.
④ 마 25:34에서 이 복은 오래된 것이다. 구약성경에서 증거하는 하나님의 계시된 뜻 안에서의 위대한 분리는 주님께서 아버지의 복된 자들을 저주 받은 자들로부터 분리하실 마지막 날에 성취될 것이다. 저주 받은 자는 영원한 죽음에 이르는 반면, 축복 받은 자들은 생명을 누리고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갈 것이다.
⑤ 갈 3:8에서 바울은 창 12:3 하반절을 인용한다. "모든 이방(즉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바울은 이 인용문에 자신의 기독론적 사고 계열과 일치하는 새로운 해석을 부여한다.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축복의 성취가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구속적 행동으로 나타난 것이다. 이 축복의 은사는 이제 더 이상 큰 민족의 은사나 땅의 풍성함의 은사가 아니라 약속된 그리스도의 영(Spirit)이다(갈 4:14[N]). 야훼 기자의 인용문과 이에 대한 바울의 해석 사이의 공통의 근거는 약속된 축복과 그리스도 안에서 그 축복의 성취 모두가 땅의 모든 민족들에게 이르러야 한다는 사실에 있다(갈 4:8; 갈 4:14). 갈 3:8-갈 3:14에서도 바울은 축복과 저주의 관계를,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죽으심으로 율법의 모든 저주를 스스로 대신하여 단번에 받으심으로써(갈 3:13) 열방의 신자들이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구속 활동의 축복을 받는다는 것으로 해석한다. 그들은 예전에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복의 완전성을 알고 있었을 것이지만(갈 3:8 이하; 갈 3:14[N]; 히 6:14), "신령한 복"으로서는 지금 완전하게 이해하였다(엡 1:3; 행 3:25 이하).
(f) 복받은 자들에게는 새로운 율법이 적용된다(참조: 히 6:7 이하[N]).
땅을 기업으로 받으라고 요청받으며(벧전 3:9), 악을 악으로 갚아서는 안된다. 자연 상태의 인간은 축복("찬송") 보다 저주하기가 더 쉽다(약 3:9 이하). 구약성경의 의인은 헬라인들처럼 저주에 대한 자연적인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또 저주를 당하지 않도록 경계했다. 이것은 욥 31:30에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그러나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저주를 완전히 이기라고 명령하셨을 때 그것은 오히려 또다른 문제이다: "너희를 저주하는 그들을 축복하라"(눅 6:28; 마 5:44). 이 명령은 초대 기독교 공동체에 깊은 인상을 주었다(롬 12:14; 고전 4:12).
여기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원수들의 저주, 핍박, 욕설 또는 비난을 그와 반대되는 축복으로 대하라는 권고를 받는다. 이곳에서 축복은 단순히 원수들에 대한 친절한 태도를 의미한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계명은 보복법(이우스 탈리오니스[ius talionis])을 대신한다(이것은 특히 벧전 3:9에 명확하게 나타남). 축복을 방해하는 것과 저주는 폐지되었다.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저주를 받으셨으므로(갈 3:13), 기독교인들은 무조건적으로 축복하라는 권고만을 받을 뿐이다(롬 12:14). "그리스도의 교회와 각 기독교인들은 더 이상 아무도 저주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역사는 또한 그의 대적들에게도 유용하기 때문이다"(Watermann; H.-G. Link).
(g) 율로기아는 그같은 무조건적인 사랑에서 솟아나는 것이므로 구약성경에서처럼 예루살렘을 위한 모금으로서 선물에 대해 사용된다: "5 이러므로 내가 이 형제들로 먼저 너희에게 가서 너희의 전에 약속한 연보를 미리 준비케 하도록 권면하는 것이 필요한 줄 생각하였노니 이렇게 준비하여야 참 연보답고 억지가 아니니라 6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고후 9:5; 고후 9:6[N]). 여기서 축복과 은사의 관계(참조: 창 33:11)가 나타난다. 바울은 자신이 예루살렘 공동체를 위해 모으고 있었던 연보를 율로기아(한글개역 난외 주: "복")라고 부른다. 이 문맥은 율로기아가 인색하지 않은 헌금("억지"와 반대됨)을 의미하는 것임을 보여준다. 고린도 교회는 "많이"(엡 율로기아스, 한글개역 난외 주: "복으로"; 반대어는 페이도메노스, "적게") 헌금을 해야 한다. 그래야 이 헌금을 통해 하나님의 축복이 예루살렘 교회에 확실하게 나타나게 될 것이다.
(h) 고전 14:16에서 율로게오는 하나님에 대한 무아지경적인 찬양을 표현하는 제의적 행위의 의미에서 사용된다. 저주의 말인 아나데마 예수스와 확연히 구별되는, 고백의 말인 퀴리오스 예수스는 성령에 의해 영감받는 것으로서 참 기독교인의 율로기아이다(참조: 고전 12:3).
(i) 거짓 교사들이 로마 교인들의 마음을 유혹하는 크레스톨로기아와 율로기아("공교하고 아첨하는 말")는 일반 헬라어 용법에 비추어 해석하려고 시도되고 있다(롬 16:18[N]). 한편 아마도 팔레스틴적 요소가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즉 확신을 주기 위해 약속에 대해 실제보다 부풀리는 듯한 인상을 나타낸다.
(j) 요한계시록의 기자는 마지막 때의 영원한 말씀이 보좌에 앉으신 그분과 어린양을 찬양하고 영화롭게 하는 것을 포함한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계 5:12; 계 5:13; 계 7:12[N]).(참조: H. W. Beyer; H. -G. Link).
dovxa(1391, 독사...영광) 광채, 영광, 영화, 명성.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독사(Homer이래)는 도케오(dokevw, 1380)에서 유래했으며, 기본 의미는 '생각하는 것, 의견'이다. 이것은 두 가지 형태를 취하는데, '나는 생각한다'라는 도케오의 의미에서 '내가 가지는 의견'을, '나는 ~라고 간주한다'라는 도케오의 의미에서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 가지는 의견'을 의미한다.
(a) 이 단어는
① '기대, 의견, 견해, 단순한 추측', 철학적 주의.② 좋은 평판, '명성, 칭찬'.③ '빛, 광채'를 의미한다.
(b) 이 단어는 요세푸스와 필로의 작품에서,① '견해'나 '주의',② '명예'나 '영광',③ '장려' 그리고④ '하나님의 광휘'와 같은 의미를 지닌다.
2. 70인역본의 용법
명사 독사는 70인역본에서 400회 이상 나오며, 25개의 히브리어를 번역하며, 주로 카보드(영광)를 번역한다.
독사는 70인역본에서 일반적으로 히브리어 카보드와 동일한 의미를 나타낸다. 독사는 '견해, 의견'(전 10:1; 집회서 8:14; 마카베오사서 5:17), '장려, 권능, 세상적 장엄'(사 17:4; 사 35:2; 학 2:3), 하나님의 권능과 영광(사 24:7이하; 사 29:3; 사 42:8),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사 2:10, 사 2:19, 사 2:21; 출 33:22; 시 102:15) 등을 의미한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명사 독사는 신약성경에서 167회 나오며, 한글개역 성경은 한번 '광채'로 번역하고, 모두 '영광'으로 번역했다.
(a) 독사는 하나님의 존재 양식을 나타낸다. 신약성경에서 독사의 용법은 일반 헬라어 용법보다 70인역본을 따른다. 이 단어는 '평판'과 '능력'이라는 의미를 나타내기도 하지만 특별히 '하나님의 존재 양식'을 표현한다. 따라서 이 용어는 헬라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성서적 용어가 되었다.
신약성경에서 70인역본과 같이 '하나님의 영광, 영예', '하나님의 장엄', '하나님의 권능', 하나님의 가견적 광채는 고전적인 것이 아니며, 단지 문맥에서 차이를 식별해야 한다. 그렇지만 항상 표현되는 것은, 비록 신현현의 가시적 요소를 여러 가지로 강조할지라도 하나님의 존재 방식이다. 예를 들면,
행 7:2에서 아브라함이 메소포타미아에서 본 "하나님의 영광",
눅 2:9의 크리스마스 기사에서 "주의 영광",
눅 9:31이하; 벧후 1:17의 변형에 대한 기사에서 "지극히 큰 영광",
행 22:11의 다메섹 도상의 경험 "그 빛의 광채",
계 15:8; 계 21:23의 하늘의 성전과 하늘의 도성에서 "하나님의 영광" 등이다.
신약성경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이미 실재하는 것을 실제적 인정과 감사로 고백하거나(행 12:23; 롬 4:20; 계 16:9) 찬양하는 것(눅 2:14; 눅 19:38; 롬 11:36; 롬 16:27; 엡 3:21; 빌 4:20; 딤전 1:17; 계 4:9; 계 7:22 등)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의 송영은 에스틴(ejstivn)을 전제한다(갈 1:5; 벧전 4:11).
요한의 독특성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키는 용법과 인간이나 하나님이 부여해 주는 명예나 찬양에 대한 용법을 거의 순수하게 병행시킨다는 사실이다(요 12:41; 요 12:43).
(b) 독사는 예수님의 영광을 표현한다. 신약성경에서 독사를 하나님과 관련시킨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그리스도와 관련시킴으로써, 결정적인 단계를 취한다.
이 관계는 여러가지 방법으로 표현되며,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관계의 전동력론(whole dynamism)은 독사의 용법에 반영되어 있다.
롬 6:4에서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영광에 의해 다시 살아나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딤전 3:16에서는 영광 속으로 올리워진다: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리우셨음이니라".
행 7:55에서 스데반은 하나님의 영광의 오른 편에 계신 그를 보았다.
베드로전서에서 그의 "고난 후에 받으실 영광"(벧전 1:11)과 그에게 "영광을 주신 하나님"(벧전 1:21)에 대해 말한다.
히 13:21에 의하면 영광은 하나님께 돌려지는 것처럼 그에게 돌려진다. 그는 영광의 주님이시다(고전 2:8; 약 2:1)
종말론적인 소망(참조: 사 40:5)은 우리의 위대하신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의 나타남이다(딛 2:13; 벧전 4:13; 벧전 5:1; 막 13:26등). 이 언급들의 대부분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며, 독사가 성육신한 예수님에 적용된 것은 매우 드물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 이 단어는 재림(parousia)과 관계되어 있다(막 8:38; 막 10:37; 막 13:26과 병행구, 마 19:28; 마 25:31).
누가복음에서 독사는 그리스도의 탄생과 변모 기사에 나타난다. 그리스도의 탄생에 독사의 계시(눅 2:9)는 천사들의 출현과 같이 하늘나라에서 그의 오심을 지적한다. 요 17:5에서 그리스도의 성육신 전 "하나님과 함께 가졌던 독사"를 언급한다.
요한복음에서, 오직 믿음으로 또한 성육신한 그리스도의 영광을 본다(요 1:14; 요 2:11; 요 11:40). 그리스도의 이 독사는 본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영광을 받으셔야 한다(요 7:39; 참조: 요 12:23; 요 13:13; 요 16:14; 요 17:1, 5의 기도). 영광으로 들어간 것은 십자가에서이다(요 13:31). 여기에서 하나님의 독사가 고백되며 또한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한다. 신자들이 성령으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는 것은 이 수난의 빛에서이다.
(c) 독사는 신자와 관련하여 사용되었다.
구약성경에서 강조점은 하나님의 독사를 보는 것에 있다(참조: 레 9:6; 사 6:1; 사 35:2). 랍비들에게 있어서도 영원한 행복은 하나님의 영광을 기대하는 것이다. 그러나 신약성경에서 강조점은 참여에로 옮겨진다.
빌 3:21에서 부활 때에 몸은 그리스도의 몸과 같이 영광의 몸으로 변모된다: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영화롭게 된다. 신자들은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그 영광에 참예할 것이다(골 3:4). 신자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을 것이다(참조: 롬 8:17). 그리스도는 영광의 소망이다(골 1:27).
독사에의 참여는 그리스도에의 참여로 말미암는다. 영원한 영광이 우리의 부르심의 목적이다(벧전 5:4; 고전 5:10; 살전 2:12; 살후 2:14; 고후 4:17; 딤후 2:10). 여기에서부터 그 영광을 누리는 것이 신자의 목적의 하나이다(롬 5:2). 이 죄많은 시대에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에 미치지 못한다(롬 8:18; 롬 8:21). 욕된 것으로 심겨진 것이 영광스런 것으로 다시 산다(고전 15:43). 그렇지만 미래의 영광은 그 근거를 하나님의 목적과 행동에 두고 있으며, 따라서 우리가 이미 영화롭게 되었다고 말해질 수 있다(참조: 롬 8:29 - 롬 8:30; 고전 2:7). 성령은 영광을 가져오는 새로운 것의 보증이다(참조: 엡 3:16; 벧전 4:14).
이것은 특히 고후 3:7이하에서 분명해진다. 여기에서 모세의 영광을 그리스도의 새롭고 더 큰 영광과 대조시키며,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신자들이 어떻게 영광에서 영광으로 변화되는가를 보여준다. 여기에서 움직임은 현재의 영광에서부터 종말론적인 완전한 영광에로 옮겨가는 것이다. 이것은 복음의 사역에 의해 실행된다. 왜냐하면 복음의 사역은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제공해주기 때문이다(고전 4:6). 이와 마찬가지로, 요한복음 17장에는 제자들이 그리스도의 영광을 볼 것이며(요 17:24), 그가 그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되며(요 17:10), 그가 아버지에게서 받은 영광을 그들에게 주신다(요 17:22)고 언급되어 있다.
(d) 독사는 천사들의 영광을 표현한다.
겔 9:3 등에서 그룹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지니고 유대교에서처럼 천사가 영광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히 9:5은 영광의 그룹에 대해 언급한다: "그 위에 속죄소를 덮는 영광의 그룹들이 있으니 이것들에 관하여는 이제 낱낱이 말할 수 없노라".
계 18:1은 천사의 영광에 대해 언급한다: "이 일 후에 다른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권세를 가졌는데 그의 영광으로 땅이 환하여지더라".
유다서와 베드로후서에서 천사들을 '독사이'라고 부른다. 유 1:8에서는 "영광", 벧후 2:10에서는 '영광있는 자들'로 번역했다.
(e) 독사는 인간 또는 세상 권세에 대하여 사용되었으며, '화려, 장대, 탁월' 등을 나타낸다. "천하 만국과 그 영광", 즉 그것들의 자원, 부, 그들 도성들의 장대함과 위대함, 그것들의 비옥한 땅, 그것들의 많은 인구(마 4:8; 눅 4:6), "땅의 왕들의 영광"(계 21:24), "만국의 영광"(계 21:26), 왕의 영광, 찬란한 의복 등(마 6:29; 눅 12:27), "육체의 영광"(벧전 1:24), "직분의 영광"(고후 3:8 - 고후 3:11), "여자는 남자의 영광"(고전 11:7), "땅에 속한 자의 영광"(고전 15:40), "해, 달, 별의 영광"(고전 15:41)을 나타낸다.(참조: Walter Bauer; J.H.Thayer; S.Aalen; G.Kittel).
sofiva(4678, 소피아..지혜) 지혜 wisdom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소피아(Homer. 이래)는 '지혜'를 의미하며, 매우 다양한 문제들에 대한 지식에 관해 사용된다. 그러므로 이 단어가 뜻하는 미묘한 의미의 차이는 각각의 특수한 경우마다 문맥에서 찾아야 한다. 이 단어 및 단어군은 유별난 능력과 지식을 가리키는 것으로 초기에는 실제적인 영역까지도 포함했으나(목수의 소피아, Homer. I1), 후기에는 이론상의 지식에 중점을 두고 있다. 후기의 소피아는 가르침을 받을 수도 있고 습득할 수도 있는 지식으로 간주되었다. 스토아 학파에서는 이론과 실제가 일치한다: "지혜는 깨닫게 된 지식이다"라는 것이다. 지혜로운 자의 행동은 소피아이다. 그 행동에 있어서 지혜로운 자 그 자신은 스토아 철학의 필요 불가결한 주체이다.
2. 70인역본의 용법.
명사 소피아는 70인역본에서 약 260회 나오며, 주로 히브리어 호크마(지혜)의 역어로 사용되었다(출 28:3; 신 4:6; 삼하 14:20; 왕상 2:6; 왕상 5:9이하; 욥 4:21; 욥 11:6; 시 37:30; 잠 1:2, 잠 1:7; 전 1:13, 전 1:16; 전 1:18; 렘 8:9). 이 단어는 또한 다음에 나오는 단어들의 역어로 사용된다: 그리고 비나(이해, 잠 2:3; 잠 3:5); 테부나(이해, 왕상 3:1; 참조: 왕상 5:9 [왕상 4:29]; 잠 18:2); 다아트(지식, 잠 1:7, 잠 1:29); 무사르(징벌, 단련, 훈계, 징계, 권함, 훈계, 잠 8:33); 마하셰베트(사상, 착상, 출 35:33); 세켈(통찰력, 사려분별, 대상 22:12)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명사 소피아는 신약성경에서 51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a) 전통적 용법.
복음서에서 이 단어의 용법은 일반적으로 구약성경 및 유대개념과 연관되어 있으며, 지혜는 하나님의 선물로 간주된다.
눅 2:40에서 예수님의 지혜가 '자라다'라는 말씀은 구약성경의 용례를 반영하고 있다(참조: 삼상 2:26). 이것은 율법의 지식과 경건한 삶의 형태를 가리키는 것이다. 눅 2:52에서도 같은 의미를 지닌다. 막 6:2에는 목수 아들의 지혜에 대한 나사렛 주민들의 놀라움이 묘사되어 있다(참조: 마 13:54). 사도행전에서 스데반도 또한 하나님께서 주신 성령과 지혜를 소유한 자로서 묘사되며, 바로 이 이유 때문에 그의 증거에 대한 반론을 펼 수 없었던 것이다(행 6:3, 행 6:10). 구약성경의 전례가 정확하게 언급되어 있다(행 7:10; 참조: 창 39:2이하, 창 39:21; 창 41:40-46; 시 105:21). 다가올 마지막 날 핍박 당할 때 변명할 말을 위해 지혜를 주시리라는 약속(눅 21:15)도 역시 동일한 용어로 공식화되었다.
(b) 유대인의 것과 같은 개념이 나타난다.
지혜가 사람들을 자기에게로 부른다는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지혜를 인격체로 이해하는 전통이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마 11:19, 병행구절, 눅 7:35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라는 문장 배후에 놓여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예수님(그의 증거자인 요한도)은 구원을 가져다 주는 "지혜"의 입으로 이해된다. "이 세대"에 대한 심판의 말씀을 도입한다면(이것이 눅 11:49에서는 하나님의 지혜의 말씀으로 소개되는 반면 병행구인 마 23:24이하에서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이해된다) 예수님은 땅에 오신 지혜로 이해될 수 있다. "이 세대"를 솔로몬의 지혜를 듣기 위하여 땅 끝에서 온 남방의 여왕과 대면시켰는데 여기에 함축된 책망이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라는 언명에서 확실시 된다(마 12:42, 병행구절 눅 11:31; 참조: 왕상 10:1-10; 대하 9:1-12). 사람들이 경멸하는 하늘의 지혜에 대해 생각해 볼 때 이 점을 매우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즉 예수님 안에서 이 지혜는 최종적으로 출현하였으며 소피아 기독론에 대한 거론은 일리가 있는 것 같다.
(c) 바울서신.
① 롬 11:33이하에서 바울은 지혜 용어와 지혜 개념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찬양한다. 이제 하나님의 지혜는 율법이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연결되어야만 한다는 점이 다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기 때문이다(참조: 롬 10:4, 롬 10:9-10).
② 그러나 바울은 복음을 고린도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단순한 지혜의 말로 생각하지 않는다(참조: 고전 1:17; 고전 2:1; 고전 2:4). 그것은 십자가의 말씀이다(고전 1:18 이하). 동시에 바울은 그의 비판자들의 언어를 사용하여 이 말씀을 참된 지혜라고 묘사한다. 고린도인들에게 지혜는 분명히 이 시대에 속하지 않은 구원의 축복이며 이전에는 감추어졌으나 지금 우리의 종말론적 영화(glorification)를 위해 계시된 것이다. 계시를 받아들인 자들은 낮아졌다가 높임을 받으신 주님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지혜를 알기 때문에, 영적이며 지혜롭게 되고 현재와 미래의 모든 것을 알며, 새로운 시대가 완성될 때 심판 받지 않는다. 바울은 십자가를 무시하는 어리석음을 세상의 지혜라고 부름으로써 평가절하한다. 하나님은 사람보다 '지혜로운' 십자가의 어리석음으로 자신을 계시하셨다(고전 1:25). 그리스도께서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시며, 마찬가지로 믿는 자들도 그들 자신의 지혜는 없으며, 오직 어리석은 자가 되어 그리스도에게서만 능력과 지혜를 구할 때에 지혜롭다. 하나님은 어리석은 자들을 자신께로 부르심으로 지혜로운 자들을 부끄럽게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지혜로운 것들을 무효로 하시기 위해 지혜롭지 않은 것들을 택하셨다. 하나님께서 예수님 자신을 우리의 지혜가 되게 하셨으므로 자랑할 여지가 없다. 십자가는 헬라인들과 서기관들의 지혜를 어리석게 만든다. 하나님께서는 모두가 하나님을 알도록 세상에게 그의 지혜를 줄지라도 세상은 자신의 지혜를 통해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전 1:21).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신다는 전도의 어리석음, 즉 그 메시지에 일치하는 선포의 형태를 통해서이다(고전 2:1). 이러한 원칙에서 바울은 오직 십자가에서의 하나님의 시작에 기초해서, 그리고 종말과 관계 있는 믿는 자들이 세상과 확고하게 거리를 둠으로 고린도인들이 그리스도에 대해 하나님의 지혜라고 말하는 것을 지지한다. 물론 많은 해석자들은 세상의 지혜를 헬라 철학에 속하는 것으로 보며, 따라서 바울은 여기에서 특정한 영지주의의 형태와 그것과 관계된 카리스마적 언설에 대해서가 아니라 고린도의 교육받은 계층에 호소하는 철학적이며 수사적인 복음에 대한 관념에 대해 반대하고 있다고 결론짓는다.
(d) 골로새서와 에베소서
골 1:9과 엡 1:8에서 하나님의 뜻과 가치있는 행위를 포함하는 기독교적 지식의 성장을 소피아로 부른다. 이 지혜는 은혜를 얻는다(엡 1:7). 이 지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종말론적 축복에 대한 지식을 포함한다(엡 1:17-18). 이 지혜는 그리스도의 비밀에 대한 지식인데, 그리스도께는 모든 지혜의 보물들이 감추어져 있다(골 1:26-27). 이 지혜는 인간의 교훈인 영지주의적 교사들의 거짓 소피아(참조: 골 2:8)와 반대되는 것이다. 엡 3:10에서 문맥은 하나님의 각종 지혜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그리스도께 들어감으로 성취되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숨겨졌다가 나중에 다시 높아지는 지혜의 개념은 공식화된다.
(e) 요한계시록
계 5:12의 죽임당한 어린 양은 종말론적 선물로 지혜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다(참조:7:12). 계 13:18과 계 17:9의 지혜는 비밀스러운 지식이다. 특별한 지식이 짐승의 수를 세고 계 17:1 이하의 환상을 해석하기 위해 요구된다. 오직 고백하는 자들만이 그 의미와 그 날에 일어나는 일의 결과를 이해할 수 있다.
(f) 야고보서
야고보서에서 지혜는 도덕적으로 올바른 발걸음이다(참조: 약 3:13, 약 3:17-18). 이 지혜는 다툼과 무질서가 아닌 평화로 인도한다. 이 점에서 지혜는 적대자들이 추구하거나 가르치는 지혜와 정반대의 입장에 서있다. 이 지혜는 이론적인 것이 않고 실제적이고 도덕적인 결과로 그 자체를 나타낸다.
(g) 베드로후서
벧후 3:15은 바울이 "그 받은 지혜대로" 썼다고 말한다; 따라서 그 말씀은 지혜를 사도의 가르침과 동등시하고 있다.(참조: V. Wilckens).
eujcaristiva(2169, 유카리스티아...감사) 감사함 thanksgiving.
1. 고전 헬라어 문헌
명사 유카리스티아는 카이르/카르라는 어근에서 파생되고 이 단어의 주요 어군들은 기쁨(joy)의 감정을 표현한다. 이 말은 '잘, 좋게, 바르게, 적절하게, 매우(very)'란 뜻의 부사 유(eu\, 2095)와 합성된 카리스(cavri", 5485:사람이 기뻐하는 그 모든 것, 은혜)의 파생어이다. 그 뜻은,
(a) '감사하는 태도',
(b) '감사함을 보여주는 표현, 감사의 표현, 감사함'(주전 5세기 히포크라테스로 부터).
2. 70인 역본의 용법
명사 유카리스티아는 70인 역본에서 4번 나오며, 사람이 사람에게, 그리고 사람이 하나님에게 감사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 단어는 마카베오이서 2:27에서 많은 사람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을 말한다.
집회서 37:11에서 감사하기 싫어하는 자와는 의논하지 말아야 한다는 경험상의 입장을 밝히고 있다.
지혜서 l6:28은 사람들에게 날이 새기 전에 그 날을 감사함으로 시작하라고 충고한다. 그러므로 이 단어가 구약성서로부터 어떤 특별한 신학적 사상을 전수 받았다는 근거는 전혀 없는 것이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명사 유카리스티아는 신약성경에서 15회 나오며, 단 한번 사람에 대한 감사의 의미로 사용된 것 외에 모두 하나님에 대한 감사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바울의 서신에서 감사는 기본 의미를 지닌다.
살전 3:9 이하에는 바울이 하나님께 어떠한 감사함으로 보답할까 하는 계획을 보여준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교회가 자기에게 준 기쁨의 보답으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자 하지만, 한편 예배와 사적 생활에서 감사를 되풀이 하기를 스스로 불러일으킨다.
고전 14:16에서 바울은 방언으로 말하는 것에 관한 그의 논증과 관련해서 비입교자가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이해하고 "아멘"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바울은 특별한 은혜에 대한 감사를 언급한다. 은혜는 감사로 인하여 더해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후 4:15).
모금된 연보는 그것을 모금한 자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감사함을 불러일으키게 한다(고후 9:11 이하). 이러한 것은 예배에서 감사의 주제가 될 수 있다.
어떠한 간구와 중보 기도도 동시적인 감사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빌 4:6; 골 2:7; 골 4:2; 딤전 2:1). 감사에 기초한 생활이야말로(엡 5:4) 악한 생활에 상반되는 것이다. 감사의 요구는 기도에 기본적인 요소이다. '감사는 기독교 표현의 좋아하는 본질적인 방법이다(Schlier)'.
딤전 4:3; 딤전 4:4에서(일반적으로 감사하는 마음은 배척당하지 않고 받아들여진다) 식사하기 전에 감사 기도를 드린다는 특수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데, 이것은 유대인의 관습에 의한 것으로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된다. '이 세상의 왕, 주(여호와) 우리 하나님 당신께 감사드립니다...'(SBI 685 이하를 참조). 바울은 하나님의 창조에 호소하여, 금욕주의적 음식법을 거절하는데 음식을 감사함으로, 즉 축복으로 기쁘게 받는 한에서는 버릴 것이 없다는 것이다.
유카리스티아는 요한계시록의 찬가 가운데 감사의 찬송을 의미하기도 한다(계 4:9; 계 7:12). 감사는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는 천적 존재의 영광송에 속하는 것이다. 유카리스티아는 2세기 동안에 전체적인 성만찬 예배를 의미하는 일반적인 명칭이 되었다.
(참조: Walter Bauer; J.H.Thayer; H.-H,Esser).
timhv(5092, 티메...존귀) 값, 가치, 영예, 존경.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티메(Homer 이래)는 티오(tivw: 평가하다, 존중하다, 존경하다)에서 유래했으며, 다음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a) 법적으로 '평가, 보상, 형벌, 배상',
(b) 높거나 유명 인사에 대해, '가치(중요성), 영예, 명예, 존경',
(c) '영예(영광)의 직(분), 공직',
(d) '위엄, 존엄함'(Dignity), 신에 대해 사용.
(e) '사례금, 보수금',
(f) '상품(금), 영예의 표상, 훈장',
(g) 물건의 가치에 대해, '평가, 가치, 값, 구매 가격',
(h) '변제',
(i) 매우 중요한 것은 종교적 용법이다. 티메는
① 하나님에 대한 '예배',
② 사람들에 관심을 가지는 신들에 대한 '숭배'를 의미한다.
③ 티마이는 신들을 예배하는 제물이나 축제, 혹은 그들을 위한 헌금에 대해 사용되었다. 신들은 자신이 통제하는 권능의 영역 때문에 제물과 찬양의 노래들을 통해 영예를 받는다. 신들은 그들의 편에서 인간들에게 그들의 세상의 영예와 행운의 지위를 줌으로서 그들을 영예롭게 한다.
「헬라 사상에서 티메는 사람이 그의 직책, 지위, 부 등 또한 지위 자체, 즉 위엄과 특권이 있는 직책으로 인해 지역 사회에서 누리는 당연한 평가를 말한다. 노예들에게는 티메가 없다.
스토아 학파는(참조: Epictetus) 그들이 참 자아에 관여하지 아니하고 다만 신체와 눈에 보이는 소유물들에만 관여하는 체함으로서 모욕과 불명예를 면하려 했다. 그들은 왕의 지위와 같은 지위에서 유래한 명예를 헌신짝처럼 여겼다. 그렇지만, 그들은 노예를 천대하는 잘못을 범하였다.」
2. 70인역본의 용법.
티메는 70인역본에서 약 70회 이상 나오며, 11개의 히브리어 단어들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티메는 영예나 영광(시 29:1; 욥 34:19; 출 28:2; 욥 40:10), 지불금(값)(욥 31:29), 봉사에 대한 사례금(집회서 38:1), '값'(창 44:2; 민 20:19), '보상(금)'(창 20:16), '속전'(시 49:8), 장자의 대속을 위한 '지불금'(출 34:20), '귀중품, 보화'(겔 22:25), 세금(마카베오일서 10:29), 왕의 '위엄'(단 5:20)을 의미한다.
3. 신약성경의 용법.
티메는 신약성경에서 42회 나오며, 다음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a) 티메는 존경을 의미한다.
① 롬 12:10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은 '존경'을 서로 먼저하라고 권한다.
딤전 6:1에서 바울은 종들은 하나님의 이름과 기독교의 가르침이 훼방을 받지 않도록 그들의 주인을 존경하라고 말한다.
벧전 3:7에서 남자들은 아내들에게 그들에게 당연히 돌려야 할 영예를 주어야 한다고 한다: "남편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살전 4:4에서 티메는 아내가 받아야 하는 '존경'이며, 이것은 그녀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받을 권리이다.
롬 13:7에서는 '국가에 대해 존경을 표하는 것'을 나타낸다: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공세를 받을 자에게 공세를 바치고 국세 받을 자에게 국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
② 티메는 '존귀, 위엄, 영예, 인정'을 의미한다.
요 4:44에서 기자는 예수님께서 전에 선언하신 말씀을 언급한다. 선지자는 '인정'을 받지 못한다.
벧후 1:17과 히 2:7; 히 2:9; 히 3:3의 기독론적 진술에서 티메는 독사(영광)와 함께 나타난다. 히 2:7 이하에서 그리스도의 수난은 그가 영광과 존귀(시 8:5 이하)로 관 쓰심, 곧 위엄스러운 제사장 수임 및 그에게 부여한 막강한 통치 지위를 얻기 위한 전제 조건이었다.
히 3:3에서 그리스도의 영광과 존귀함과 모세의 그것들과 비교되어 있다: "저는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을만한 것이 마치 집 지은 자가 그 집보다 더욱 존귀함 같으니라".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리스도는 구 언약의 대표자보다 훨씬 더 우월하다. 확실히 모세의 위치는 매우 영예로운 것이었다. 그는 이스라엘 집을 지도하는 일을 맡았으며, 하나님의 종으로서 충성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충성하셨다. 아들은 원칙적으로 하나님에 대해서 모세와는 다른 차원의 관계에 서 있다. 그는 하나님과 동등한 지위에 계시기 때문에(참조: 히 1:2-3), 집 지은 자 곧 이스라엘의 창조자이시다. 하나님의 집에서 충성하는 것과 하나님의 집을 맡은 것은 차이가 있다. 말씀과 행위를 통한 모세의 충성된 섬김은 장래에 말할 것, 곧 아들을 통하여 아버지를 말씀하시는 것(참조: 히 1:2)에 대한 지시(증거)이다.
히 5:4에서 티메는 '직분의 존귀'나 '지위 자체'를 나타낸다: "이 존귀는 아무나 스스로 취하지 못하고 오직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라야 할 것이니라".
벧전 2:7에서 그리스도인들은 티메를 받는다. 그들은 그 기초가 그리스도이신 신령한 집으로 세워진 산돌들로서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예하는 존귀한 자들이다. 이것은 종말론적인 언급이 아니라 오히려 "산돌"(참조: 벧전 2:3)과 "산돌들"(벧전 2:5)의 현재의 관계를 묘사한다. 여기서 티메를 값비싼 소유(보배)로 번역하는 것은 문맥상 적합하지 않다.
벧전 1:7에서 자신의 믿음을 고난을 통하여 입증하는 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받을 것이다.
고전 12:23; 고전 12:24에 의하면 신자들이 주목할만한 아무런 재능도 갖지 못해도 어느 것도 중요하지 않는 것이 없으며, 그들은 나머지 신자들과 동등하게 존귀하다.
딤후 2:20; 딤후 2:21에서 어떤 그릇은 귀하게 쓰임을 받고, 어떤 그릇은 천하게 쓰임을 받는다. 신자들은 모든 선한 일에서 하나님께 봉사할 수 있는 영예로운 부름을 받는 그릇이 되기 위하여 불의에서 자신을 깨끗이 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비유는 티메가 인격의 '존귀'는 물론 사물의 '가치'도 의미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롬 9:21에 보면 유사하게 토기장이는 동일한 진흙으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것과 같이 하나님은 그의 창조적 능력의 주권적 행사로 인류 역사에서 어떤 자들을 진노의 그릇으로, 또 다른 자들을 긍휼의 그릇으로 만드는 그의 목적을 집행할 자유를 가지고 계신다. 에이스 티멘 스큐오스("귀히 쓸 그릇")는 문자적으로 '귀한 그릇' 또는 '영예로운 그릇'이며, 그것이 정해진 용법은 영예를 가져오는 그릇이다.
롬 2:7; 롬 2:10에서 독사와 티메와 아프달시아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여 선을 행하면 마지막 심판 때에 받을 상이다.
(b) 티메는 '사례금, 보수금'을 의미한다.
딤전 5:17에서 티메는 '사례금'을 함축하고 있는 듯하다: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할 것이니라".
(c) 골 2:23은 난해한 구절이다. 바울은 여기서 분명히 그노시스 이단의 표어들을, 그 내용을 정확히 규정함 없이 채택하고 있다. 그들에게 있어서 티메는 선택과 신격화를 의미하는 용어이다. 바울은 이러한 사상의 티메를 거부하는 것이다. 여기서 티메는 '영예나 존귀'(honour)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가능성은 전혀 배제할 수는 없다. 다른 가능성은 티메를 '가치'라는 의미로 보는 것이다.
(d) 티메는 '가치, 값'을 의미한다.
계 21:26에서 티메는 독사와 함께 세상 상품에 대해 사용되었다: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오겠고". 이 구절은 사 60:11의 기록을 채택한 것이다. 이 도시에 관한 여러가지 묘사들은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그 내용이 서로 배척하는 점이 있을지라도 이 도시의 비교할 수 없는 탁월을 묘사하는데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고 본다.
행 4:34에서 밭과 집을 판 '값'을 나타낸다.
행 5:2; 행 5:3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자기의 판매 대금을 전액 공동체에 바친다고 하면서 그 중 얼마를 자기의 몫으로 감추었다.
행 9:19에 의하면 '티메'는 에베소에서 불에 태운 책 '값'에 대해 사용되었다.
행 7:16은 아브라함이 돈으로 산 무덤에 대해 언급한다.
고전 6:20에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산 바되었다. 고전 7:23에서도 같은 내용이다.
(e) 티메는 의례적 용법으로 사용되었다.
딤전 1:17의 송영에서 '영예나 존귀'라는 의미로 나온다: "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어지이다 아멘". 딤전 6:16의 계급에서도 마찬가지다.
계 4:9; 계 4:11; 계 5:12; 계 5:13; 계 7:12에서 더욱 발전적 송영문을 보여준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J. Schneider).
duvnami"(1411, 뒤나미스..능력..권능) 힘, 세력, 능력, 역량.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뒤나미스(Homer. 이래)는 뒤나마이(duvnamai, 1410)에서 유래했으며,
(a) ① '능력, 힘, 세력'② '가능성, 할 수 있음'③ 신체적, 지적, 영적 '힘, 능력'을 의미한다.
(b) 호머 이래로 자주 발견되는 뒤나미스는 '성취할만한 능력, 체력'을 의미하며, '군대, 전투력', 그리고 '정치력'을 의미하기도 한다. 인간의 본성에 대해 깊이 사고하는 헬라 철학자들과 의학자들은 그 개념을 체력과 정신력에 의존하는 생존하고 활동하고자 하는 힘 혹은 능력이라는 그 말의 본래 의미로 사용하였다.
뒤나미스는 자연의 영역에서 나타난다. 예를 들면 그 말은 더위와 추위의 기세, 식물들과 자연 요소들을 치유하는 능력이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헬라 시대에 그 말은 형이상학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포시도니우스(Posidonius)는 기본적인 원소에서 생명체의 원리를 보았다.
스토아 학자들은 사방에 퍼져있는 창조적인 힘을 하나님과 동일시하였다(Alexander of Aphrodisiensis).
영지주의자들은 하나님을 전능하신 자로 찬양하였으며 인간들이 거룩한 힘과 합해짐으로써 구원을 받을 것으로 생각했다(Corp. Herm., Poimandres, I, 26).
사람들은 특히 마술을 통해서 초자연적인 능력들을 공유하고자 하였다(I amblichus, De Mysteriis 2, 1). 병든 사람들은 아스클레피우스(Asclepius) 신의 능력의 실연으로 말미암아 치료 받고자 하였다(P. Oxy).
2. 70인역본의 용법.
명사 뒤나미스는 70인역본에서 약 600회 나오며, 주로 하일(138회)과 차바(113회)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며, 일반적으로 '군사력'을 의미한다.
뒤나미스는 또한 통치자의 힘, 천국 그리고 하나님의 힘에 대해 사용되었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명사 뒤나미스는 신약성경에서 118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a) 그리스도의 사실.
신약성경의 모든 개념들과 마찬가지로, 신약성경의 힘에 관한 개념도 그리스도의 사실에서부터 결정적인 영향을 받았다. 이 사실은 분명히 언제나 하나님의 힘과 관련되는 구약성경의 메시야관과 관련되어 있다(참조: 사 9:5; 사 11:2; 시 110:2; 마 5:5). 이 힘은 주로 왕적인 능력이지만 예언적인 힘도 포함되어 있다(참조: 미 3:8; 행 7:22[모세]; 눅 1:17[세례(침례)요한]).
신약성경에서는 예언적인 면이 매우 두드러진다(참조: 눅 24:19). 그렇지만 그리스도는 힘을 부여받은 선지자 이상의 존재이다; 그의 전 존재는 특별히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결정된 유일 무이한 것이다. 이것은 동정녀 잉태 기사에서 성령과 지존자의 능력의 병행에서 표현된다. 형식을 묘사하려는 어떤 시도도 행해지지 않았다. 성육신은 정상적인 발생 과정을 초월하는 잉태와 더불어 시작된다. 그리스도 탄생 때 독특하고 특별한 능력의 작용으로 말미암아 그에게 하나님의 아들이란 칭호가 붙여진다(눅 1:35). 이런 사실에 의거해 볼 때, 그리스도는 그의 사역에서 성령의 특별한 능력을 지닌 자이다(눅 4:14, 눅 4:36). 하나님의 본질이 힘이므로, 힘의 부여는 성령의 선물과 결부되며, 성령의 선물은 그리스도에게 그의 권세(엑수시아)를 전달해 준다. - 이 권세는 그가 귀신을 쫓아내거나 병자를 고칠 때 행사할 수 있는 능력(뒤나미스)을 지니는 권세이다(눅 5:17; 눅 6:19; 눅 8:46). 이런 이유로, 그의 제자들이 증거한 바는 하나님께서 성령과 권능으로 예수님께 기름 부으셨다는 것이다(행 10:38). 그가 행한 일들도 뒤나메이스(복수)라고 불리워질 수 있다(막 6:2; 눅 19:37; 또한 행 2:22). 이 일들은 그 당시 세계에서 행한 비슷한 능력의 행동들과 다음의 세 가지 면에서 다르다:
① 이 일들은 마술과 관련이 없다.
② 이 일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인, 말씀으로 행해지는데, 여기에서 하나님 나라가 역사 속으로 들어와서 적대 세력의 지배를 전복시킨다.
③ 이 일들은 이 일을 행하시는 분에 대한 믿음과 이 일들이 행해지는 사람들의 믿음을 전제하며, 따라서 인격적인 관계가 요구된다(마 13:58; 참조: 막 9:14이하). 믿음으로 모든 것이 가능하다. 믿음에는 능력이 있다(막 9:23). 왜냐하면 믿음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에 참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능한 일들은 놀라움과 찬양을 불러 일으키며(마 13:54; 눅 19:37), 헤롯에게서는 양심의 불안을 불러 일으킨 것 같다. "그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는 세례 요한이라 저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으니 그러므로 이런권능이 그 속에서 운동하는도다 하더라"(마 14:2).
요한복음은 뒤나메이스를 사용하지 않고, 엑수시아나 세메이온과 함께 동사 뒤나스다이를 사용함으로써, 강조점을 행동에서 능력으로 전이시킨다: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가로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줄 아나이다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요 3:2). 충만한 메시야적인 능력에서 행해진 세메이아는 독특한 행동들이다. 예수님은 오로지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계시기 때문에, 즉 그가 아버지와 교제함으로써 하나님의 권능을 지니기 때문에 그것들을 할 수 있다.
요한복음에는 뒤나미스라는 말이 없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예수님의 메시야 활동은 아들의 보내심에,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의 뜻의 통일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들은 아버지 없이 아무 일도 할 수 없다(요 5:19, 요 5:30, 뒤나타이). 그리고 그의 기적들은 예수님의 신적 권능을 드러내는 징표이다(요 3:2; 요 9:16; 요 10;21, 항상 뒤나타이라는 단어가 사용된다). 반대로 인간들이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하나님의 실재의 영역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어둠의 세계 속에 감금되어 있기 때문이다(요 3:3; 요 8:43; 요 14:17, 우 뒤나타이). 그들은 오직 선택(요 6:44)과 거듭남(요 3:5)을 통해서 해방될 수 있다.
요한에게서 볼 수 있는 특별한 특징은
① 뒤나스다이에 유일무이한 그리스도 사건이 있다는 점.
② 이 사건 속에 있는 권능은 새 시대를 여는 하나님의 권능이라는 점이다. 이 권능은 십자가 사건과 부활에서 특별하게 나타난다.
그리스도 자신의 부활은 마 22:29에 나오는 그의 말씀을 뒷바침해 준다: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게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행 2:24에서 베드로는 이 부활의 권능을 매우 인상깊게 부정적인 표현으로 나타낸다: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죽음의 권세는 깨뜨려졌다. 하나님의 권능이 예수님께서 권능의 행동을 하도록 그에게 능력을 부여해 준 것처럼 또한 예수님께서 새 생명을 가지도록 능력을 부여해 준다.
바울은 고전 6:14("하나님이 주를 다시 살리셨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과 고후 13:4("성구삽입")에서 이 점을 설명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그의 부활로 말미암아 권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언된다: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롬 1:4).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권능이라고 전파한다: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 1:24). 부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이 아니며 그에게 권능 그 자체가 부여된 것도 아니다; 부활로 말미암아 그가 소유하게 된 것은 성육신의 외적인 약함과 대조되는 완전한 능력의 아들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으셨으니 우리도 저의 안에서 약하나 너희를 향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저와 함께 살리라"(고후 13:4). 만약 그리스도가 절대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불리운다면,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능력을 의인화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안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 안에서 승리적으로 작용하며 그것을 목적지에까지 이끌어가기 때문이다.
히브리서에서 이 능력은 파괴될 수 없는 생명의 능력이라고 일컬어진다; 이 권능은 죽을 수 밖에 없는 것의 도달 범위를 넘어 선다. 이 능력으로 아들은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이 세상을 다스린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3).
요한계시록에서 이 능력은 영광과 동일시된다: "그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것 같더라"(계 1:16).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은 능력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다: "큰 음성으로 가로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계 5:12).
그리스도의 백성들은 그가 그의 일을 완성하고 다른 모든 세력들을 굴복시켜 하나님의 완전한 통치를 확립하실(*빌 3:21) 능력을 가지고 오시기를 기다린다: "또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하시니라"(막 9:1). 이 오심은 눈으로 볼 수 있을 것이며 그리스도는 그의 능력있는 천사들을 동반하신 것이다: "환난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주 예수께서 저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중에 나타나실 때에"(살후 1:7).
(b) 하나님의 능력, 악마적인 세력들, 그리고 구원의 능력.
① 그리스도 사건은 하나님의 능력에 대하여 빛을 던져준다. 그리스도의 능력은 하나님의 능력이며, 따라서 이것은 부여된 것으로 묘사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제를 나눔으로써, 이 능력을 부여받는다. 따라서 그의 능력은 구약성경에서처럼, 종말론적 사건의 역사적인 능력이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그리스도 사건에서 나타난다(마 22:29; 참조: 히 11:19). 하나님은 그의 전능하신 통치에 의해 뒤나토스가 된다(참조: 눅 1:49). 그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참조: 마 19:26). 믿음으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만물은 그의 영원한 능력과 신성을 분명하게 선언한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찌니라"(롬 1:20). 그러므로 신약성경은 마 6:13; 계 4:11 등에서처럼, 구약성경의 송영을 받아들인다. 계 11:17-18과 계 12:10의 송영은, 그리스도 사건에서 하나님 능력이 이미 나타났듯이, 하나님의 능력이 적대적 세력들을 멸망시키고 세상을 완전하게 하시리하는 고백을 암시하고 있다.
② 그리스도 사건은 또한 악마적인 세력을 이해하는데 새로운 빛을 비춰준다. 신약성경은 이 세력들을 인정한다: "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마 24:29). 이 세력들은 우주적 세력인 동시에 천사적인 세력들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더불어 그 힘을 잃어버렸으며 그의 재림 때 공개적으로 그 힘을 박탈당할 것이다. 이 두 사건들 사이에는 긴장이 있다. 신자들의 새 생명은 하나님에게서 유래한 것이며 그의 지배 아래 있기 때문에(엡 1:20-21; 롬 8:38, 롬 8:39), 이 세력들은 제거된다. 그렇지만 그들은 여전히 싸우며(계 13:2, "내가 본 짐승은 표범과 비슷하고 그 발은 곰의 발 같고 그 입은 사자의 입 같은데 용이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그에게 주었더라") 결국 복종하게 될 것이다: "그 후에는 나중이니 저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고전 15:24). 적그리스도는 능력을 가지고 나타나서 거짓을 퍼뜨릴 것이다; 그리스도의 오심만이 다시 그를 최종적으로 멸망시킬 것이다: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살후 2:9).
③ 그리스도의 사역 또한 구원의 능력에 관한 질문에 새로운 답을 준다. 제자들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에 대해 묻자, 그리스도는 구원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은 없으며, 오직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만이 구원하실 수 있다고 대답하였다(참조: 마 19:26).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인간의 무능력을 날카롭게 강조한다. 우리의 약함 때문에, 율법조차도 죄와 죽음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할 수 없다(롬 8:3).
히브리서는 제사에서 똑같은 무능력을 발견하고 있다(*히 10:1, 히 10:11).
요 3:3에서 언급되듯이, 만약 거듭나지 아니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우리 스스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도 없다: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줄 알지 못함이로다"(요 8:43).
만약 아버지께서 이끌지 않으신다면, 어느 누구도 하나님께 나아올 수가 없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요 6:44). 하나님만이 구원할 능력을 지니시며, 그는 예수님 안에 그의 권능을 나타내신다(롬 1:16; 고전 1:18). 이 능력은 신비적인 입교식을 통하여 주어지는 것도 아니고, 단순히 구원을 지시해 주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십자가의 도의 능력이다. 이것은 우리를 어둠의 권세에서부터 해방시키고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의 나라로 우리를 옮김으로써, 구원을 부여해 준다. 이것은 그리스도 사건의 구원 행동, 즉 역사 안에서 행한 하나님의 능한 행동에 근거하고 있다.
우리는 벧후 1:3-4에서만, 즉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를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고 우리에게 생명과 경건에 속한 것들을 주신다고 할 때만 역동적인 개념보다는 실질적인 개념을 엿볼 수 있다.
(c) 제자들의 능력.
전파는 하나님의 뒤나미스로서,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을 계속하며, 그리스도를 대표하는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능력을 부여 받았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보내실 때(눅 9:1), 능력으로 그들을 무장 시켰다. 이 능력은 악마의 힘을 이긴다: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눅 10:19). 제자들은 믿음으로만 이 능력을 가질 수 있다(참조: 막 9:14이하). 이것은 성령에 의한 그리스도 자신의 임재의 능력이다(눅 24:48; 눅 24:49; 행 1:8). 능력으로 설교하고 병을 고치게 하는 특별한 능력의 부여가 오순절에 일어났다(행 4:7이하, 행 4:33; 행 6:8, 행 6:10).
바울의 사역은 표적과 기사의 능력에 의해, 즉 성령의 능력에 의해 효력을 발한다: "이 일로 인하여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롬 15:19).
뒤나메이스는 사도직의 표시이다(갈 3:5; 살전 1:5). 그러나 이 능력은 그리스도의 임재 방식뿐만 아니라 신자의 존재 방식으로서의 성령의 능력이다. 사도들은 십자가의 증인들이다; 그들은 외적으로는 약하나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전파하며, 따라서 청중들의 믿음은 하나님의 능력에 의거하게 된다(참조: 고전 2;1이하). 뒤나미스는 메시지의 형식이 아닌 메시지의 내용과 관련된다. 전파의 목표는 성령으로 그리스도의 임재를 나타내는 것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구원 능력을 나타내는 것이다. 바울이 사역자가 된 것도 똑같은 능력에 의해서이다: "이 복음을 위하여 그의 능력이 역사하시는대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군이 되었노라"(엡 3:7). 고전 5:3-4에서처럼, 공동체의 유익을 위하여 그리스도의 능력은 또한 사법적인 것일 수도 있다: "3 내가 실로 몸으로는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함께 있어서 거기 있는 것 같이 이 일 행한 자를 이미 판단하였노라 4 주 예수의 이름으로 너희가 내 영과 함께 모여서 우리 주 예수의 능력으로". 여기에서는 만일 신자들이 사단에게 넘겨지지 않는다면, 사단은 신자들을 제어할 힘을 가질 수 없다는 사실과 심지어 사단에게 넘겨질 경우에도 그 목적은 여전히 구원에 있다는 사실이 주목되어야 한다. 사도 자신의 삶과 사역에서 그리스도의 능력은 끊임없이 능력을 강화하는 것을 의미한다(빌 4:13; 딤전 1;12; 딤후 4:17). 이 강화하는 것은 원조의 형태를 취하며, 따라서 마나(mana)의 견지에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그의 종 사이의 인격적인 관계의 견지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d) 공동체의 능력.
하나님의 구원 능력에 의거하는 공동체가 바울의 목표이다(참조: 고전 2:1이하). 신자들은 "주 안에" 있을 때 강할 것이다(참조: 엡 6:10). 사단의 세력에서 구출되었지만, 여전히 위험에 싸여있는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능력이 그들을 보호하고 보존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은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보호 받는다: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벧전 1:5). 이 사도의 기도는 그들이 하나님의 큰 능력을 누리게 해 달라는 것이다: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1:19), 혹은 그들이 모든 능력으로 강건하게 해달라는 것이다: "그 영광의 힘을 좇아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골 1:11). 그리스도의 부활에 근거한 이 능력은 그들의 부름과 영광스런 기업에 대한 소망을 만들어 낸다. 기독교인들이 참고 인내하려면 이 능력을 알아야 한다. 이것은 보전할 뿐만 아니라 변화시키는 힘이다. 성령의 능력으로 그들에게는 소망이 넘친다: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롬 15:13). 속 사람이 성령의 능력으로 강건하게 됨으로 그들은 포괄적으로 말해서 그리스도와 교제를 나누는 가운데서, 그리고 그리스도의 사랑 가운데서 성장한다(참조: 엡 3:14이하). 그들은 하나님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 없고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요일 3:9), 사랑할 수 있는 새로운 능력을 가진다(참조: 요일 4:7). 모든 선한 결의와 믿음의 일은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성취될 것이다: "이러므로 우리도 항상 너희를 위하여 기도함은 우리 하나님이 너희를 그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여기시고 모든 선을 기뻐함과 믿음의 역사를 능력으로 이루게 하시고"(살후 1:11). 공동체의 구성원들도 뒤나미스를 행하는 영적인 은사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어떤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이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고전 12:10). 더구나 공동체에서 역사하는 능력은 궁극적으로 부활의 능력이다: "3 이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말씀하시는 증거를 너희가 구함이니 저가 너희를 향하여 약하지 않고 도리어 너희 안에서 강하시니라 4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으셨으니 우리도 저의 안에서 약하나 너희를 향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저와 함께 살리라"(고후 13:3-4). 하나님은 주님을 일으키셨으며 그의 능력으로 우리를 일으키실 것이다: "하나님이 주를 다시 살리셨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고전 6:14). 비천한 몸이 영광의 몸으로 변하는 것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근거한다(빌 3:21). 어느 누구도 신자들을 그리스도의 손에서 잡아챌 수 없다(요 10:28-29). 바울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의 부활의 능력 - 그의 백성을 위해 새롭고 영원한 생명을 창출해내는 능하신 행동 - 을 알기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었다. 이것은 진정한 뒤나미스의 원천이다.
(e) 능력과 약함.
하나님의 능력은 인간 존재의 약하고 부패하기 쉬운 영역에서 역사한다. 따라서 이것은 믿음으로만 볼 수 있는 것이지만,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이것은 인간의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으로 알려진다. 십자가의 도는 외적인 약함 속에 감추어져 있다: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으셨으니 우리도 저의 안에서 약하나 너희를 향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저와 함께 살리라"(참조: 고후 13:4). 그러나 하나님의 약함이 인간의 강함보다 더 강하다(고전 1:25). 바울은 이런 사실을 그의 사도 직무의 모든 약함 속에서 인식하게 되었다(고후 12:9-10; 참조: 빌 4:13). 이 초월적인 능력은 비겁의 영이 아닌 능력과 사랑과 자제(딤후 1:7)의 영을 주시는 하나님께 속한다(고후 4:7). 약함은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하는데 필요한 전제 조건이다. 이 약함은 그리스도의 임재의 보증(증거) - 바울은 이 증거에서 자아로부터 해방과 하나님에 대한 의지를 발견하다. - 이다. 약함 속에서 강해진다는 법칙에 따라 하나님의 부활 능력은 복음의 사역자에게 있어서나 그리스도교 공동체 전체에게 있어서나 더욱 더 풍성하게 역사한다.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능력안에 있어")'는 사도와 모든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믿음의 실재를 표현해 준다(고후 6:7).(참조: W. Grundmann).
ijscuv"(2479, 이스퀴스..힘) 힘 strength, power, 세력 might.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이스퀴스(Hesiod 이래)는 이스코(i[scw: 저지하다)에서 유래했으며, 생명체나 물건들이 지니고 있는 '힘' strength과 '능력' power을 의미한다.
헬라의 비극 문학에서 이 단어는 신들에게 사용되었지만 후기에는 별로 두드러지지 않게 되었다.
2. 70인역본의 용법.
명사 이스퀴스는 70인역본에서 약 330회 나오며, 30개의 히브리어의 역어로 사용되었고 주로 코아흐(능력 과시)를 번역한다.
이 단어는 사람의 육체적인 힘(수 8:3; 삿 16:5; 시 22:15; 시 31:10; 겔 30:21), 인간의 지적인 능력(잠 8:14)을 나타내며, 민 14:13에서는 특별히 신적인 능력을 뜻하는데 사용되었다. "애굽인 중에서 주의 능력으로 이 백성을 인도하여 내셨거들 그리하시면 그들이 듣고"(시 29:4; 시 147:5 등). 그래서 이것은 인간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기도 한 것이다(미 3:8; 시 18:1; 시 29:11).
3. 신약성경의 용법.
명사 이스퀴스는 신약성경에서 10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a) 이스퀴스는 막 12:30에서 인간의 능력을 가리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것이요"(병행구 막 12:33; 눅 10:27). 즉 우리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b) 엡 6:10에서 주님의 능력은 그리스도인의 강건함의 근거라고 말한다: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c) 살후 1:9에 의하면 하나님의 영광스런 능력 안에서 심판이 집행되리라고 한다: "이런 자들이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d) 벧전 4:11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힘)은 그리스도인의 사역을 위해서도 발휘된다: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것 같이 하라".
(e) 계 5:12과 계 7:12의 송영에서 이 힘(능력)은 하나님과 그리스도께 돌려진다.(참조: W. Grundamnn; G. Brauma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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