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19.12.04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주.JC,하나님insurexS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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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04) ...insurex홈피_양시영_SN@kky04k07

*[마19] 16.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이르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 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혹자들은 이 구절을 오용해서 JC에게도 죄성이 여전히 있었다고 말하고 싶어한다...그러나 그것은 전적으로 오도하는 것이며 복음서의 핵심에서 벗어난 것이다..((요한복음을 찬찬히 음미해 보라!!..))

*[선한.good...아가도스] +[선생님 Master].마19:..네가 나를 선생(JC가 하나님이심. JC안에 하나님이 함께 계셔서 말씀하고 계심을 깨닫고 말함이 아니라 비록 아무리 탁월하고 빼어난 분으로 인정하더라도 오로지 인성의 틀에 국한시켜 그 누구와도 비교불가능한 선생...니고데모도 그렇게 인식했다.."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이라 여긴다면.. [선한]이라는 하나님께만 합당한 말을 써서는 안될 것이다...막10:18, 눅18:19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JC는 아들하나님, 곧, 이땅에 아버지. 아버지의 성령과 함께 보냄받은 메시야로서 당신을 겸손히 [인자..사람의 아들]라고 표현하시지만 주님을 친히 보고 듣는 모든 이들에게 대해[아버지께서 JC안에 계셔서 JC를 통해 친히 말씀하시며 일하시고 계신 것을 깨달으라...JC안에서 친히 말씀하시는 바로 그 아버지를 생생하게 보고 듣고 믿음에 이르러, 믿음을 발휘하여 영생에 들어가도록 하라]고 촉구하심.....따라서 바르게 듣고 보고 깨닫는 자는 당연히 베드로처럼 믿음으로써 <선생>이 아닌 <주, 아도나이=퀴리오스><그리스도,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고백하고 부르는 것이 합당하다고 여기심...


kuvrio"(2962, 퀴리오스) 주님 Lord, 주인 lord.

1. 고전 헬라어의 용법. 

퀴리오스는 퀴로스(ku'ro": 힘, 권위)에서 유래했으며,

(a)  형용사로는

① '힘이 있는, 권세(력)을 가진, 권한을 부여 받은, 권위 있는, 유효한'을 뜻한다. 여기서 힘이란 물리적인 힘이 아니라 지배력을 뜻하며, 법의 경우에는 유효하다를 뜻하며, 사람에게 사용될 때는 권위 있거나 자격이 있다는 뜻이며, 통치자의 경우에는 강력한 영향력을 지닌다를 의미한다.

② '중요한, 결정적인, 주요한'을 의미한다.

(b)  명사로 초기에 드물게 사용되었으나 두가지 고정된 의미

① 종, 집, 시민의 주인,

② 아내나 여자 아이의 법적 보호자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 두 의미 모두 합법성과 권위라는 개념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아테네에서는 데스포테스(despovth", 1203: 주, 주인, 소유자)라는 단어가 더 흔하게 사용되었다. 코이네 헬라어에서 퀴리오스가 법률적인 의미를 더 강하게 지니고, 소유권보다 처분권에 더 강조를 두고 있기는 하지만 두 단어는 거의 서로 교대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신약시대에 가까워질수록 법률적인 요소가 더 강조되게 되었고 데스포테스가 퀴리오스로 점점 대체되는 경향이 있었다.

(c)  처음에 공직자들은 퀴리오이(복수)라고 불리지 않았지만 점점 그 칭호를 붙이는 관습으로 발전 되었고, 나중에는 퀴리오스가 철학자, 의사, 청중들, 남편(아내가 부를 때), 아버지(자식이 부를 때)에 사용되었으며, 그리고 지위가 높은 사람은 누구든 아주 일반적으로 퀴리오스로 일컬어지고 퀴리에(여성형), 퀴리아(Kuriva, 2959)라고 불리워졌다.

(d)  초기 시대에는 퀴리오스가 왕들이나 신들의 칭호로 사용되지 않았다. 헬라 시대에 퀴리오스라는 칭호를 왕들(통치자들)이나 신들에게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주전 1세기에 이르러서 였다(참조: W. Foerster).

퀴리오스 바실류스(주, 왕)는 주전 64년과 50년 사이에 자주 사용되었다. 주전 12년에 이집트에서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데오스 카이 퀴리오스(하나님과 주)라고 일컬어졌다(BGU, 1197, I, 15). 상부 이집트에서 여왕 간다게(참조: 행 8:27)는 헤 퀴리아 바실릿사(여주인, 여왕)으로 불리워 졌다. 퀴리오스라는 명칭은 헤롯 대왕(약 73 ~ 4 B.C), 아그립바 1세(약 10 B.C ~ A.D 44), 아그립바 2세(A.D 27 ~ 약 100)에게도 사용되었다. 통치자들 외에, 고관들도 이 칭호를 받았으며, 예를 들면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총독이 이 칭호를 받았다. 시리아에서도 사정은 이집트에서와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주전 1세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동양에서도 군주를 퀴리오스라고 불렀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퀴리오스 데오스(주와 통치자)와 같은 칭호를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퀴리오스는 신들에게 사용되어 그 시대에 유행했던 사상과 언어에서도 신들을 주(lord)라고 불렀다. 이 경우에 퀴리오스는 기초가 되는 셈어의 상당어구(예: 아돈, 마라, 여성형 랍바트)를 번역한 것이다. 이런 용어들에는 항상 인칭 대명사(나의, 우리의 등)가 첨가되어 신의 이름 앞에 붙여졌다. 퀴리오스를 신에게 사용했을 경우, 이 말을 사용한 종은 그 신에 대한 인격적인 책임 관계에 있게 되며 이때 신은 개인적인 권력을 행사했다. 예를 들어 히브리어의 아돈이 권력을 가진 주를 의미할 때,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상당어는 당연히 퀴리오스이다. 각 신들은 그들에게 제사하는 공동체의 주(lord)로써, 그리고 그 공동체에 속한 각 구성원들의 주 lord로써 숭배 받았다. 다른 주 lord(신)들을 숭배하는 것이 배제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신들 중 어느 하나도 우주적인 주로서 형성화되거나 숭배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e)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B.C. 31 ~ A.D. 14)와 티베리우스(Tiberius, A.D. 14 ~ 37)는 로마인들이 정의라고 생각하는 바에 따라 동방 형태의 군주정치를 거부했으며, 그와 더불어 퀴리오스라는 칭호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모든 것을 거부했다. 그러나 칼리굴라(Caligula, A.D 37 ~ 41)는 퀴리오스라는 칭호가 매력적인 칭호임을 인식하였다. 네로의 비문에는 호 투 판토스 코스무 퀴리오스(세상 모든 사람들의 주, SIG 814, 31)가 묘사되어 있는데 네로(Nero, A.D 54 ~ 68) 이후에 퀴리오스라는 칭호는 더욱 더 자주 사용되었다. 가장 오래된 예문 중의 하나가 사도행전 25:26이다. 퀴리오스라는 칭호는 도미티안(Domitian, A.D 81 ~ 96)에 의해서 다시 평판이 나빠졌는데, 이는 그가 공식적인 서한에서 자기 자신을 도미누스 엣 데우스 노스테르(우리의 주와 하나님)라고 불렀기 때문이다(Suetonius, De Vita Caesarum, 13, 2). 도미티안의 사후에 이 칭호는 그에 대한 기억(담나티오 메모리아에)과 더불어 혐오스러운 것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단어는 나중에 다시 널리 유행하게 되었다. 본래부터 저절로 퀴리오스라는 칭호가 황제를 신이라고 부르지 아니하였다. 그가 신으로 숭배될 때 주라는 칭호도 신의 속성으로 간주된 것이다. 기독교인들이 국가의 전체주의적 태도를 버리고 거부한 것은 곧 지나치게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하는 이런 종교적 주장에 대항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을 처음으로 퀴리오스라고 부르는 용법은 70인역본에서 나타난다(참조: H. Bietenhard).

2. 구약 및 70인역본의 용법. 

퀴리오스는 70인역본에서 약 9000회 이상 나오며, 24개의 히브리어 단어 및 어군들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a)  퀴리오스는 히브리어 아돈(주, 주인)의 역어로 190회, 바알(주 Lord)의 역어로 15회 사용되었는데, 결혼과 재산법에서 바알이 아내나 토지의 주인을 의미하는 반면(호 2:18; 삿 19:22; 삿 19:23 등), 아돈은 사회적 요인에 의하여 결정되며 한 단체에서 책임을 맡고 있는 우두머리인 명령자를 의미한다(삼상 25장).

(b)  퀴리오스는 또한 게비르(지휘관, 사령관), 아람어 마라(주 lord), 샬리트(통치자, 지배자)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c)  그러나 많은 경우에(약 6000회 이상) 퀴리오스는 하나님을 뜻하는 히브리어 고유명사, 즉 신성 4문자 YHWH를 대신한다.

여호와는 창조자이시며, 전 우주와 인류의 주, 또는 주인이시며, 생명과 사망의 주(인) Lord이시다. 무엇보다도 여호와는 이스라엘 즉, 그의 언약의 사람들의 하나님이시다. 여호와를 뜻하는 말로 퀴리오스를 선택함으로써 70인역본 헬라어 본문도 법적인 권위에 관한 사상을 강조했다.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여 그들을 자기 소유로 선택했기 때문에,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합법적인 주 Lord이다. 세상의 창조주로서 그는 또한 세상을 무한히 통할하는 세상의 합법적인 주이기도 하다.

퀴리오스는 하나님을 부르는 호칭인 아도나이의 역어로 사용되었다(창 18:27-32).

3. 신약성경의 용법. 

퀴리오스는 신약성경에서 725회 나오며, 그 중 대부분 누가의 기록(210회)과 바울서신(275회)에 사용되었다.

(a)  퀴리오스의 통속적인 용법.

신약성경에서 퀴리오스는 포도원의 주인(막 12:9과 병행구절), 나귀(눅 19:33)와 개의 소유자(마 15:27), 청지기의 주인(눅 16:3), 종들의 주인(행 16:16; 행 16:19; 엡 6:5; 엡 6:9; 골 3:22; 골 4:1)을 의미한다.

퀴리오스는 또한 어떤 것, 예를 들면 추수(마 9:38) 또는 안식일(막 2:28)을 주관하는 사람을 가리키기도 한다.

퀴리오스의 공손한 어법은 눅 1:43에 나오고, 벧전 3:6; 막 12:36-37; 행 25:26에서는 우월성을 암시한다. 종들이나 일군들은 퀴리에(참조: 눅 13:8)라는 칭호를 사용한다. 유대인들은 마 27:63에서 빌라도에게 같은 호칭을 사용했고, 마리아는 요 20:15에서 동산지기에게, 간수장은 행 16:30에서 바울과 실라에게 같은 호칭을 사용했다(참조: 또한 마 21:29; 행 10:4).

퀴리오스의 형태는 팔레스타인 용법과 일치하며, 마 7:21-22; 마 25:11; 눅 6:46에 나타난다. 고전 2:8("영광의 주")과 살후 3:16("평강의 주")에서는 속격과 결합되어 나온다.

퀴리오스는 천사들을 칭할 때도 사용되었으며(행 10:4; 계 7:14), 다메섹 밖에서 하늘의 환상을 볼 때 (자기가) 알지 못하는 이에게도 사용되었다(행 9:5; 행 22:8; 행 22:10; 행 26:15).

(b)  퀴리오스이신 하나님.

헬라 회당에서 사용하던 용법에 따라, 하나님을 종종 퀴리오스라고 칭하였으며, 특히 여호와를 뜻하는 말로 퀴리오스를 사용하는 수많은 구약성경 인용문에서 그러했다. 공식적으로 성경을 봉독할 때에 신성 4문자 대신 퀴리오스를 사용하는 관습과 일치한다(예: 롬 4:8 = 시 32:2;시 9:28이하. = 사 10:22이하.; 사 10:16 = 사 53:1; 사 11:3; 눅 19:10; 눅 11:34 = 사 40:13; 사 14:11 = 사 45:23; 사 15:11 = 시 117:1; 고전 3:20; 시 94:11; 시 14:21 = 사 28:11이하.).

퀴리오스는 자주 누가복음의 탄생 기사에서 하나님을 가리켜 말한다(예: 눅 1:32; 눅 2:9).

퀴리오스가 속격으로 나와 다른 단어와 함께 쓰이는 형태는 구약성경의 용법과 일치하는데 예를 들면 퀴리오스의 손(눅 1:66; 행 11:21); 퀴리오스의 천사(마 1:20; 마 2:13; 마 28:2; 눅 1:11; 눅 2:9; 행 5:19;행 8:26; 행 12:7); 퀴리오스의 이름(약 5:10; 약 5:14); 퀴리오스의 영(행 5:9; 행 8:39); 퀴리오스의 말(행 8:25; 행 12:24; 행 13:48이하.; 행 15:35이하.)등이다.

"퀴리오스가 말씀하시니라"라는 공식 문구(롬 12:19 = 신 32:35; 고후 6:17; 사 52:11; 계 1:8 참조: 출 3:14)도 역시 구약성경에서 유래한 표현이다.

요한계시록의 기자는 때때로 "주 하나님"(퀴리오스 호 데오스)이라는 구약성경의 어구에 강조적인 엄숙한 단어 판토크라토르(전능하신 이)를 첨가한다(계 1:8; 계 4:8; 계 11:17; 계 16:7; 계 19:6; 계 21:22).

우리 주 우리 하나님(호 퀴리오스 카이 호 데오스 헤몬) 이라는 공식 문구는 도미티안이 채택하여 사용했던 칭호를 생각나게 한다.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계 4:11; 참조: 요 20:28).

계 11:15; 계 22:6에 나오는 예배의식상의 공식 문구는 주목해 볼만하다.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를 "하늘과 땅의 퀴리오스"(마 11:25; 눅 10:21; 참조: 히 1:2; 집회서 51:1; 토빗 7:18)라고 했을 때 그는 유대식의 언어 형태를 채택한 것이다.

마 9:38에 보면 하나님은 (종말론적인) 추수의 퀴리오스이다. 하나님은 유일한 통치자이시며 왕중의 왕이시며 만주의 퀴리오스이시다(참조: 단 2:47), 그는 우리의 퀴리오스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나게 하실 분이시다(딤전 6:15). 하나님은 창조자이시며 따라서 만물의 주이시다(행 17:24). 하나님을 퀴리오스라고 부르며 또한 그렇게 인정함으로서 신약성경은 특별히 하나님이 창조주이심과 역사 속에서 나타난 그의 능력, 그리고 그의 공정한 우주 지배권을 표현하고 있으며 동시에 그에 대한 믿음과 구약성경의 믿음과의 연속성을 고백하고 있다.

(c)  퀴리오스이신 예수님

① 퀴리오스이신 지상의 예수님. 지상에 계신 예수님에게 사용된 퀴리오스는 처음에는 정중한 형태의 호칭이었다(마 17:4, 퀴리에: 요 6:34; 요 13:6). 이런 호칭의 형태도 예수님을 지도자로서 인정하며 그에게 기꺼이 순종한다는 뜻을 내포한다(마 7:21; 마 21:29 이하; 눅 6:46). 인자(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예수님은 또한 안식일의 퀴리오스이시다. 그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거룩한 날을 다스린다(막 2:28 이하). 그의 죽음과 부활 후에도 지상의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기독교 공동체의 무한한 권위를 지닌다. 바울은 최종적으로 문제를 해결해 주는 퀴리오스의 말씀들에 호소했다(고전 7:10; 고전 12:25; 살전 4:15; 참조: 행 11:16; 행 20:35).

② 퀴리오스이신 높임 받으신 예수님. 예배에 사용된 신앙 고백적인 외침인 퀴리오스 이에수스(예수는 주이시다)는 의심할 바 없이 바울 이전의 헬라 기독교 공동체에서 유래했다. 이 고백이 가장 오래된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가장 오래된 기독교 신조들 중의 하나이다. 이런 고백으로 신약 공동체는 자신을 주님께 복종했지만 동시에 그를 세상의 통치자라고도 고백했다(롬 10:9; 고전 12:3; 빌 2:11). 하나님은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며 그를 만민의 퀴리오스라는 자리로 높이 올리셨다. 더욱이 하나님은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 즉 자기 자신의 이름인 주라는 이름을 "주셨으며"(빌 2:9 이하.; 참조: 사 45:23 이하) 그와 아울러 그 이름에 적합한 지위도 주셨다(빌 2:5-11). 높임을 받은 퀴리오스이신 그리스도는 모든 인간을 다스린다(롬 14:9). 그밖에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모든 왕들을 다스리는 통치자로, 만주의 주로, 만왕의 왕 King으로 불리운다는 사실에 암시되어 있다(계 17:14; 계 19:16). 이런 방식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동일한 영예의 칭호를 받았다(딤전 6:15; 참조: 단 2:47). 그 당시의 유대 사상에 따르면, 자연과 역사에 있어서 세상의 다른 영역은 천사들의 힘으로 다스려졌다. 그리스도가 이제 퀴리오스의 지위로 높여졌으므로, 모든 권세들이 그에게 예속되었으며 또한 그를 섬겨야 한다(골 2:6; 참조: 엡 1:20이하.). 한 하나님과 한 퀴리오스이신 예수님은 이교 세계의 수많은 신들 및 주들과 반대된다(고전 8:5이하.; 엡 4:5이하).

예수님의 높이심과 주로써 취임한 것에 관한 성경적인 근거는 시편 110:1에 나와있다(참조: 마 22:44; 막 12:36; 막 16:19; 눅 20:42이하.; 행 2:34). 시편에서 따온 이 구절의 유대적인 해석은 메시야적 미래를 기대했으나 - 메시야적인 해석은 교회를 반대하는 유대인들 가운데서 오랫동안 은폐되어 있었다 - 기독교인의 믿음 안에서 이 소망은 현재의 것으로 전이되었다. 메시야인 예수님의 주권은 현재적인 실재이다. 그는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권세와 주권을 감추어진 방법으로 실행하고 있으며 종말론적인 미래에는 메시야의 통치가 완성될 것이다. 이 믿음은 도마의 신앙고백(요 20:28), 호 퀴리오스 무 카이 호 데오스 무(나의 주 나의 하나님)에서 분명해졌다. 원시 기독교는 예수님을 주로 세우는 것을 일신교에 위배된다고 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일신교를 확고하게 해주는 것이라고 보았다(고전 8:6; 엡 4:5; 빌 2:11). 주 예수님을 높이셔서(행 2:36) 그를 만물의 주로 삼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다.

③ 퀴리오스와 주의 만찬. 퀴리오스는 주의 만찬과 관련된 표현에 자주 나온다. "주의 상"(고전 10:21); "주의 죽으심"(고전 11:26); "주의 잔"(고전 10:21; 고전 11:27); "주를 노여워하시게 하겠느냐"(고전 10:22),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고전 16:22); "주의 만찬"(고전 11:20),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고전 11:32),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고전 11:27). 이런 다른 여러 가지 표현들은 주의 만찬이 기독교 공동체가 특별한 방법으로 퀴리오스의 구원의 사역을 따르며 또한 퀴리오스의 몸과 능력을 나누어 받는 장소임을 나타내고 있다.

④ 퀴리오스와 성령. 바울은 기독교 공동체에 성령으로 말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구별하라고 훈계했다(고전 12:3). 어떤 사람이 성령으로 충만하다면, 그는 "예수는 주님이시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퀴리오스이신 예수님에 대한 충성을 고백함으로써, 새로운 언약에 속한 사람은 누구든지 또한 영의 세계에 속하여 더 이상 옛 언약과 그 문자의 세계에 속하지 않는다. 그는 자유로운 상태에 놓여 있다.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고후 3:17).

⑤ 서신의 문안에 나오는 퀴리오스. 바울 서신의 처음 인사말(마지막 부분에는 그렇지 않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라는 글귀 옆에 자주 언급된다(롬 1:7; 고전 1:3; 고후 1:3; 갈 1:3; 빌 1:2; 살후 1:2; 딤전 1:2; 딤후 1:2; 몬 1:3). 마지막 인사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에게[혹은 너희 심령과, 또는 너희 모든 사람에게] 함께 있을지어다"라는 말은 바울 이전의 전통을 계승한 것으로, 이 전통의 궁극적 기원은 아마도 주의 만찬에 있었던 것 같다(참조: 고전 16:23; 고후 13:13; 몬 1:25; 계 22:17-21). 하나님을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로 묘사하는 것은 이방기독교 헬라 공동체로 소급되어야 한다(롬 15:6; 고후 1:3; 고후 11:31; 참조: 벧전 1:3; 엡 1:3; 엡 1:17; 골 1:3). 이 공식 문구가 본래의 유대 문맥(하나님에 대한 찬양) 속으로 삽입되었다. 이방 세계의 많은 퀴리오이들과 대조되고 창조의 대행자(고전 8:6)로 인정된 단 한분 퀴리오스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교에서 고백하는, 그리고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에게 전도할 때 전파하는 한 분이신 하나님과 일치하는 분이다. 따라서 기독교 선교사들은 하나님 아버지를 믿을 뿐만 아니라 퀴리오스이신 예수님도 믿으라고 촉구했다(행 5:14; 행 18:8).

(d)  퀴리오스의 주권.

① 퀴리오스이신 예수님 앞에서의 기독 공동체(교회)의 활동. 기독교 공동체의 삶에 관한 모든 표현들을 보면 기독교 공동체는 권위를 가지고 그것을 공동체에 행사하는 퀴리오스 앞에 서있다(고전 4:19; 고전 14:36; 고전 16:7). 그는 그 공동체를 성장하게 하며(살전 3:12 이하) 사도들에게 권위를 부여하고(고후 10:8; 고후 13:10) 그의 몸의 지체들에게 서로 다른 직책을 부여한다(고전 3:5; 고전 7:17; 고전 12:5). 퀴리오스는 환상과 계시를 제시해준다(고후 12:1). 기독교 공동체의 삶 전체가 공동체와 퀴리오스의 관계에 의하여 결정된다(롬 14:8). 몸 즉 완전히 지상적인 기독교인의 존재는 퀴리오스에게 속한 것이다(고전 6:13). 이러한 사실이 음란한 행동들을 못하게 한다. 퀴리오스는 각 사람에게 맞는 양의 믿음을 준다(고전 3:5; 고전 7:17; 엡 4:7). 그는 평화의 퀴리오스이시므로 평강을 주시며(살후 3:16) 자비를 베푸시고(딤후 1:16) 총명을 주신다(딤후 2:7). 퀴리오스이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기초 위에서는 심지어 주인과 종의 세속적 관계조차도 새로운 양상을 띠게 된다. 세상의 퀴리오이를 충성스럽게 섬기는 것은 곧 교회의 퀴리오스를 섬기는 것이다(골 3:22이하.; 참조: 벧전 2:13).

② '퀴리오스를 통하여, 퀴리오스 안에'라는 문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라는 공식문구는 감사(롬 7:25; 고전 15:57); 찬양(롬 5:11); 권고(롬 15:30; 살전 4:2)라는 매우 다양한 문맥에 나온다. 이 모든 구절들에서 퀴리오스라는 단어는 교회의 생활과 개인의 생활에 대해 가지는 높임 받은 주님의 능력을 주장하기 위하여 사용되었다. "주 안에서"라는 문구는 특별히 바울서신에 자주 나온다(예: 고후 2:12; 엡 4:17; 살전 4:1; 롬 14:14; 롬 16:2; 빌 2:29; 빌 3:1; 빌 4:1; 롬 16:21; 롬 16:22; 고전 16:19).

③ 재림에 관한 구절들(고후 5:6; 고후 5:8; 살전 4:17; 고전 1:8; 고전 5:5; 고후 1:14; 살전 5:2; 살후 2:2; 고전 1:7; 살후 2:1; 딤전 6:14; 고전 4:5; 빌 4:5; 살전 6:16이하,; 약 5:7; 살후 1:9; 살후 2:8; 빌 3:20등). (참조: H. Bietenhard).

(참조: W. Foerster; H. Bietenhard; Bauer; J. H. Thayer). 

----[마19:16-30]---

16.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이르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 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18. 이르되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19.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20. 그 청년이 이르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온대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21.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22.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23.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24.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25. 제자들이 듣고 몹시 놀라 이르되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26.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27.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대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29.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30.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막10:17-31]---

17.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8. 예수께서 이르시되 (선생님이라 부르면서)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19.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속여 빼앗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20. 그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나이다

21.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22.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으로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23. 예수께서 둘러 보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하시니

24. 제자들이 그 말씀에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다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얘들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25.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26. 제자들이 매우 놀라 서로 말하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하니

27.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28. 베드로가 여짜와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

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30.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31.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눅18:18-30]--------

18. 어떤 관리가 물어 이르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20. 네가 계명을 아나니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21. 여짜오되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22.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네게 보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23. 그 사람이 큰 부자이므로 이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

24.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25.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26. 듣는 자들이 이르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

27. 이르시되 무릇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

28. 베드로가 여짜오되 보옵소서 우리가 우리의 것을 다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

29.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30. 현세에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시니라

===위에 있는 구절 말씀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받게 된다.

Ⅰ. 그리스도께서는 천국에 가려면 어떤 길로 가야 될지를 주님께 지도 받으려는 좋은 마음을 가진 관원과 말씀하셨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할 바는 다음과 같다.

1. 이 세상에서 자기들의 영혼과 내세에 대한 관심에 있어서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다고 구별하는 사람들을 본다는 것은 복된 일이다. 누가는 한 관원이 이러한 사람임을 알았다. 관원들 중에는 그리스도를 존경하는 사람이 별로 없었는데 이 관원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이 사람이 교회의 치리자인지 정부의 관원인지는 밝혀져 있지 않지만 권력층의 한 사람이었음은 분명하다.

2. 우리는 누구나 천국에 가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고 물어 보려고 하는 관심은 중대한 것이다.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이 말은 무신론자와 이교도는 갖지 않은 영생의 신앙을 암시하는 것으로써, 이런 관심은 조심성이 없고 사려가 없는 사람들은 갖고 있지 않고 또한 어떠한 생각에서든지 이 영생의 신앙에 동의하는 것은 이 세상과 육신에 온 마음을 쏟고 있는 사람들은 갖고 있지 않다.

3. 영생을 유업으로 받을 사람들은 자신들을 자기들의 주님, 교훈 하시는 주님이시며 다스리시는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맡기되 그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심을 확실히 알아야 한다. 천국에 가는 길을 배울 수 있는 곳은 그리스도의 학교밖에는 없다. 그곳의 교훈에 의해서만 천국에 들어갈 수 있고, 또한 계속하여 그 안에는 거할 수 있다.

4. 그리스도를 자기들의 주님으로 시인하려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명을 받으신 자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심을 소유하신 분으로 믿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관원이 당신이 선하다고 부름을 옳게 이해하고 있다면 주님을 하나님이라고 불렀어야 할 것이며, 또한 주님은 과연 하나님이시었다(19절).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네가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그런즉 너는 나를 하나님으로 믿어야 하지 않겠느냐? 그래야만 네가 옳으니라."

5. 우리 주님 그리스도는 천국에 가는 길을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시기 전 그대로 두고 변하지 않으시고, 다만 그 길을 보다 편하고, 쉽고 또한 유쾌하게 만드시고, 우리가 잘못된 길로 들어갈 경우를 대비하여 구원의 길을 마련해 놓으셨다. "네가 계명을 아느니라." 그리스도께서는 율법과 선지자를 폐하러 오시지 않고 더 굳건히 하러 오셨다. 네가 영생을 유업으로 받기를 원하느냐? 네 자신을 그 계명에 의하여 다스려라.

6. 우리가 정말로 행복하게 되려면 주님께서 두 번째로 말씀하신 의무를 양심적으로 지켜야 한다. 우리는 경건한 행동이 아무리 그럴듯하다고 하더라도 이 두 번째로 말씀하신 의무를 대신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계명을 크게 범하여도 관계치 않다는 말은 아니다. 우리는 마땅히 이들 계명을 잘 알아서 지켜야 한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산상보훈에서 그 범위와 영적 성격과 또한 지켜야 할 것을 말씀하신 대로이다.

7. 사람들은 무식하기 때문에 순진하다고 생각한다. 이 관원이 그랬다. 그는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나이다" 하고 말했다(21절). 관원은 바리새인이 11절에서 말한 이외의 자신의 잘못을 몰랐다. 관원은 자기가 어려서부터 덕행의 길을 밟기 시작하였으며 오늘날까지 계속하여 내려왔고, 한 번도 율법을 범한 일이 없음을 자랑으로 삼았다. 만일 그가 하나님의 법의 영적 성격과 그 범위를 알고, 그 자신의 마음으로 깨닫고 있었다면,─잠시만이라도 그리스도의 제자이고, 주님이 어떤 분이심을 알았더라면, 그는 아주 반대로 말했을 것이다. "저는 이 모든 것을 어릴 때부터 생각으로, 말로 또한 행동으로 범했습니다."

8. 우리의 영적 상태를 시험할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께, 우리 형제에게, 이 세상에 대하여 또한 다른 사람에 대하여 어떠한 애정으로 대하느냐는 것이다. 왜냐하면

(1) 만일 관원이 진정한 애정을 가지고 그리스도께 대했다면 그는 "와서 주님을 따르고," 주님의 훈육을 순종하기를 어떠한 대가를 지불하면서라도 힘썼을 것이다. 주 예수와 운명을 같이 하며, 주님이 어디를 가시든지 그를 따라가려고 하지 않는 사람은 영생을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

(2) 관원이 그의 형제에 대하여 진정한 애정을 가졌더라면, 경우에 따라서는 그의 토지의 소산 중에서는 마땅히 받쳐야 할 것을 하나님의 수령인이 되는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었을 것이다.

(3) 관원이 만일 응당 그랬어야 했을 이 세상을 하나님 나라보다 경멸히 여겼다면 그는 자기가 가진 것을 팔아야 할 필요가 있을 때에 주저하지 않고 가진 것을 팔아서 하나님의 가난한 백성들을 구제했을 것이다.

(4) 관원이 만일 응당 그랬어야 했던 대로 다른 세상 곧 하늘나라를 보다 중하게 생각하여 하늘나라에 보다 많은 보물을 쌓아 두기를 원하여,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위하여 남겨두고, 잃어버리고 또 투자하는 모든 것에 대한 보상을 하늘나라에서 받게 될 줄로 믿게 될 것이다.

9. 세상에는 아주 칭찬 받을 만한 많은 것을 가졌지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어서" 멸망을 당하는 사람이 있다. 이 관원이 바로 그러한 사람이었다. 관원은 이것 때문에 그리스도와 갈라져서 모든 조건을 아주 잘 지키었지만 자기와 자기 재산에서 떨어지지 못했다. 이로 인해서 그는 "청컨대 나를 용서하도록 하라." 만일 이것이 거래 조건이라 하면 그것은 바로 계약이 성립되지 않는 것이다.

10. 세상에는 그리스도를 떠나기 싫어하면서도 결국은 그를 떠나는 사람이 많다. 이들은 자기들의 신념과 자기들의 타락성 사이의 오랜 갈등을 치른 뒤에 결국은 그 타락성이 승리를 거두어 하나님과 재물을 다같이 섬길 수 없음을 매우 슬프게 여기기는 하니만 하나를 버리지 않을 수 없으면 세상의 재물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버리게 된다.

Ⅱ. 이 경우에 그리스도께서 제자들과 하신 말씀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게 된다.

1. 부함은 하늘나라로 들어가는 길에 있어서 여러 사람들에게 큰 지장이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부자가 당신과 관계를 끊게 된 마지못해함과 후회할 만한 일에 제자들의 관심을 집중시키셨다. 주님은 이 부자가 "심히 근심하는 것"을 보시고 그를 불쌍히 여기셨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떻게 어려운지" 하셨다(24절). 만일 이 부자 관원이 베드로, 야고보 또는 요한과 같이 이 세상에서 가진 것이 적었더라면 아마도 그는 베드로, 야고보, 요한과 마찬가지로 세상에서 가진 것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따랐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큰 재물을 가졌기 때문에 그에게 큰 영향을 미치어서 자기 재산을 자선 사업에 쓸 의무를 감당하기보다도 그리스도와 관계를 끊는 길을 택했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부한 자의 구원받는 일이 어려움을 아주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25절). 이것은 매우 어려움을 속담투로 말씀하신 것이다.

2.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는 모두가 이러한 이 세상에 대한 애착심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애착심을 가진 것에 대하여 그리스도께서는 구원을 얻으려면 이 세상의 것에 무관심해야 된다고 말씀하시니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실로 어려운 것이다. 모든 것을 팔아버리든가,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도와 관계를 끊게 된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 (26절) 제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요구하시는 어렵고 불합리한 일에 대하여 잘못을 발견하지 못했다. 다른 세상에서의 영원한 행복을 바라는 저들로서는 이 세상에서 그들에게 귀하게 여겨지는 모든 것을 버리려고 해야만 영원한 행복을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제자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세상에 마음이 너무도 집착되어 자기들의 기대에 대하여 자포자기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3. 우리의 구원의 길은 도달하지 못할 만큼 어려움이 많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의 온전히 무한하신 능력 곧 모든 능력과 지혜에 뛰어나신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에 의하여 가능하다. "무릇 사람의 할 수 없는 것을(사람이 노력함으로써 그 정신을 이 세상으로부터 하나님께로 돌리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로써 이는 마치 바다를 갈라지게 하고, 요단강을 물리침같이 불가능한 일이다.)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 하나님의 은혜는 사람의 영혼에 역사하셔서 그 굽고 비뚤어진 것을 바로 잡으셔서 처음과는 반대되는 성품을 갖게 하시고, 우리 안에서 역사하셔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신다."

4. 우리에게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버리고 잃은 것 또한 행하고 고난받은 일에 대하여 말을 너무 많이 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 경향이 바로 베드로에게서 나타났다. "보옵소서. 우리 우리의 것을 다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28절). 이렇게 사람이 자기의 생각대로 한다면 주님을 따르기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림에 있어서 주님에 대한 자신과 자신의 형제의 애정을 과장함을 억제하기가 어렵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절대로 자랑할 것이 못된다. 우리는 오히려 주목할 만한 것이 못됨을 알고, 자기가 주님을 위하여 헌신함에 있어서 후회되고 어려움이 있었던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또한 나중에도 그 버린 것들을 동경하는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스스로 부끄럽게 생각해야 한다.

5.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버렸거나 바친 것이 무엇이든 지간에 우리의 약함과 약점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서나 내세에서 우리에게 풍성한 보답이 있음이 틀림없는 것이다(29, 30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자기의 재산이나 친척의 위안을 버린 사람은 이 희생한 것들로 인하여 하늘나라와 그 나라에서 누릴 즐거움을 받기 위한 봉사에 지장을 받기보다도 "금세에 있어서 여러 배를 받고," 하나님의 성령의 은혜와 위로하심. 하나님과의 교통에 있어서의 즐거움, 선한 양심의 기쁨 등에 있어서 큰 축복을 받을 것이며, 자기들을 평가하며 개선할 줄 아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들의 모든 잃은 것에 상쇄할 만큼 풍성한 유익을 받을 것이다. 그것뿐이 아니다. 내세에 있어서 영생을 받을 것인데 이것은 부자 관원이 눈과 마음으로만 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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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요 10:22-42) 

예루살렘에 수전절이 이르니 때는 겨울이라.  예수께서 성전 안 솔로몬 행각에서 거니시니, 유대인들이 에워싸고 이르되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하게 하려 하나이까 그리스도이면 밝히 말씀하소서 하니,(22-2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거늘,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25-30) 

유대인들이 다시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31)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 선한 일로 너희에게 보였거늘 그 중에 어떤 일로 나를 돌로 치려 하느냐?(32)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선한 일로 말미암아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신성모독으로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33)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율법에 기록된 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신성모독이라 하느냐?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하지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하시니,(34-38) 

그들이 다시 예수를 잡고자 하였으나 그 손에서 벗어나 나가시니라.(39)  

다시 요단 강 저편 요한이 처음으로 세례 베풀던 곳에 가사 거기 거하시니, 많은 사람이 왔다가 말하되 요한은 아무 표적도 행하지 아니하였으나 요한이 이 사람을 가리켜 말한 것은 다 참이라 하더라.  그리하여 거기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으니라. (요10:4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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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부자 청년과 대화하심(마 19:16-22)

여기에는 그리스도와 어떤 부자 청년간에 오고 간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그 부자 청년은 한 심각한 문제를 가지고 그리스도에게 말을 걸어왔다. 본문에는 그를 "어떤 청년"(20절)이라고 부르고 있으나 필자는 그를 "어떤 귀족"(gentleman)이라고 부르고 싶다. 왜냐하면 그는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관원이었기 때문이다(눅 18:18). 그는 행정관이었고 또한 그 지방의 치안판사였다. 아마도 그는 나이에 비해서 능력이 훨씬 뛰어났던 것 같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그 나이에 행정관이 될 리는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청년 귀족은 매우 정당하게 천국에 대하여 흥정을 하였다. 그러나 역부족이었다.

Ⅰ. 그 청년 귀족은 천국을 매우 정당하게 흥정을 하였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친철하고도 부드럽게 대하여 주셨다.

1. 그 청년 귀족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심각하게 말을 걸어옴(16절).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이보다 더 탁월하고 중대한 질문은 있을 수 없다.

(1) 그는 그리스도에게 존칭을 썼다. didavskale ajgaqo;n - 선한 선생님이여. 이 명칭은 다스리는 자가 아니고 가르치는 선생을 뜻한다. 그 귀족 청년이 그를 "선생님"이라 부른 것은 그리스도에게 가르침을 받겠다는 순종과 자원을 뜻한다. 그리고 "선한 선생님"이라고 한 것은 그 선생님에게 대한 그의 특별한 애정과 존경심을 나타내 주고 있다. 이는 마치 니고데모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님이시다"라고 한 것과 같다. 우리는 성경에서 이스라엘의 선생인 니고데모와 이 관원보다 더 그리스도를 존경하여 부른 예를 찾아 볼 수가 없다. 사람의 품위와 지위는 그 사람을 더욱 예절 바르게 해 준다. 이 관원이 그리스도의 외모가 심히 초라하였지만 그에게 존칭을 사용한 것은 그가 귀족다운 자였음을 드러내어 준다. 유대인들 가운데서도 자기네들의 선생을 "선한"이라는 낱말을 곁들여 인사하는 경우는 그리 흔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 칭호는 그 관원이 그리스도에 대해 지니고 있는 존경심이 보통이 아니었음을 뜻한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는 선한 선생님이요, 선생 중에 가장 훌륭하신 선생님이시다. 그 누구도 그리스도와 같이 잘 가르치지는 못한다. 그는 그의 선하심 때문에 더구나 특출하시다. "그는 온유하시고 무지한 자를 크게 불쌍히 여기시며, 또한 그의 마음은 겸손하시기" 때문이다.

(2) 그 관원은 매우 중대한 문제를 가지고 그리스도에게로 왔다(그 문제는 매우 중대한 문제이다). 그는 그리스도를 시험하려고 온 것이 아니고 진심으로 그에게서 가르침을 받으려고 왔다. 그의 질문은 이렇다.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이 말 가운데 나타난 것을 보면,

① 그는 영생에 대한 확실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부활을 부인하는 사두개인이 아니었다. 그는 이 세상에서 천국 복락을 준비하고 있는 자들에게는 저 세상에서 그 천국 복락이 예비 되어 있음을 확신하고 있었다.

② 그는 그 자신도 영생복락을 누리면서 영원히 살리라는 것을 자신에게 확신시키고 싶었으며, 이 세상의 어떤 기쁨보다 더 나은 영생을 간절히 소원하였다. 그 청년 귀족과 같은 젊은 높은 지위를 가진 자가 저 세상에 대해서 그와 같이 관심을 가지고 염려한다는 것은 희귀한 일이었다. 부자들은 이와 같은 질문을 하는 것이 자기들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리고 젊은 사람들은 그것을 생각하기에는 아직도 시간이 충분히 남아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여기 그의 영혼과 영생에 대하여 염려하는 한 부자 청년이 있었다.

③ 그는 이 영생복락을 얻으려면 무엇인가 선한 일을 해야만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참고 선을 행하여 우리는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 곧 영생을 구한다"(롬 2:7). 우리는 행하되, 선한 일을 행해야만 한다. 그리스도의 피만이 영생의 유일한 약조금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에게 순종하는 것은 영생을 얻는 약속된 방법이다(히 5:9).

④ 그는 이 영생을 얻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기꺼이 할 작정이었다. 적어도 그렇게 마음먹고 있었다. 영생을 누리는 것이 어떠한 것이며, 영생을 얻지 못하는 것은 어떠한 것인가를 아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그것을 얻게 되는 것을 기뻐한다. 천국은 이러한 거룩한 침노를 당하고 있다. 수많은 사람들은 "우리에게 선을 보일 자가 누구냐?"고 묻지만, 우리의 가장 큰 질문은 '우리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니까?"이어야 한다. 우리가 무엇을 하여야 영원히 행복하며, 저 세상에서도 행복할 수 있을까? 왜냐하면 이 세상은 우리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것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2.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청년 귀족에게 주신 격려의 말씀.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문제를 가지고 자기를 찾아오는 사람을 대답도 해 주지 않고 돌려보내는 일을 결코 하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그렇게 대답을 해 주는 것이 그에게는 큰 기쁨이 되기 때문이다(17절).

그의 대답을 살펴보면,

(1) 그는 그 청년 귀족의 신앙을 친절하게 도와주신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고 부르느냐?" (역주:우리 성경에는 "어찌하여 내게 선한 일을 묻느냐?"로 되어 있음)고 말씀하셨을 때 그가 책망할 의도로 말씀하신 것은 분명히 아니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 청년이 그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 "선한 선생님"이라고 부르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그가 한 말 가운데서 그의 신앙을 알아보려고 그렇게 말씀하신 듯하다. 그 청년 귀족은 그리스도를 단지 한 선한 인간으로만 취급하여 존경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선한 하나님으로 알아 섬기도록 그 관원을 이끌어 주고저 하셨다. 왜냐하면 "선한 이는 오직 한 분 곧 하나님뿐이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서투르게 말해진 것이나 서투르게 잘못되어진 일을 그가 할 수 있는 대로 최대로 활용하신다. 마찬가지로 그는 잘 말해진 것이나 잘 행하여진 것도 그가 할 수 있는 대로 최대로 활용하신다.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해석은 우리가 의도한 것보다 훨씬 낫다. 예를 들면 "내가 굶주렸을 때 너희는 내게 먹을 고기를 주었다. 그렇지만 너희들은 그것이 내게 준 것이라고 생각지 못했었다"(마 25:35-40 참조). 그리스도께서는 이 청년으로 하여금 자기를 하나님으로 알게 하든지, 아니면 자기를 "선한"이라고 부르지 않게 하든지 하고자 하신다. 그래서 우리에게 언제든지 주어지는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로만 돌려 드리도록 우리를 가르쳐 주신다. 어떤 사람이 우리를 "선하다"고 부른다면 모든 선은 하나님에게서만 나옴을 그들에게 가르쳐 주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서 우리에게가 아니라 하나님에게만 영광을 돌리게 해야 한다. 모든 면류관은 그의 보좌 앞에 놓여 있어야 한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하나님만 선하시다는 사실이다. 오직 하나님 이외에는 아무도 원천적으로, 처음부터, 변함없이 선하지 않다. 그의 선하심은 그 자신에게서 또한 그 자신으로부터 나오며, 피조물 가운데 있는 모든 선은 그로부터 나온 것이다. 그는 선의 원천이시다. 그 물줄기가 어떤 것이든지 간에(역주:선의 원천에서 흘러나오는 물줄기) "모든 샘들(모든 은사와 선물들)은 하나님 안에 있다"(약 1:17 참조). 그는 가장 위대한 선(善)의 전형이요 본보기이시다. 그에 의해서 모든 선이 측정되어야 한다. 그를 닮고 그의 마음에 합하는 것은 선이다. 우리는 우리의 언어로 그를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있어서도 우리 예수님은 "그의 영광의 광채"이셨으며(그의 선하심은 그의 영광이다), 또한 "그의 인격의 분명한 형상"이시다. 그러므로 그를 "선한 선생님'이라고 부른 것은 적절하다.

(2)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질문에 대답하시면서 그의 습관을 솔직하게 보게 하신다. 그는 먼저 자기를 선하게 보는 그 생각에서부터 출발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하나님이 되심을 변증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처럼 쓸 데 없는 변론을 벌이다가 중심 된 문제를 놓치고 곁길로 나가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리스도의 대답을 요약하면 "네가 영생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이다.

① 제안된 목표는 생명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 청년은 질문할 때에 영생에 대하여 말했다. 그런데 그리스도는 대답하실 때에 생명에 대하여 말씀하고 계시다. 이는 우리에게 영생이 유일한 참된 생명임을 가르쳐 주기 위함이다. 그 영생에 관한 말들은 이 "생명"이라는 단어들로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행 5:20). 현재의 육신의 생명이 생명(영생)으로 불리우는 예는 거의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살아 있으나 죽음 안에 있기" 때문이다. 또는 "생명으로"에서와 같이 "생명"이라는 말로 기록되어 있다. 이는 영적인 생명이 영생의 시작이요 전조적인 까닭이다. 그 청년은 그가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을"수 있는가를 알기를 원하였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그가 어떻게 하면 그 영생에 들어갈 수 있는가를 그에게 말씀해 주시고 있다. 우리는 그 영생을 그리스도의 공로로만 얻을 수가 있다. 그렇지만 그 때까지는 아직 충분하게 계시되지 아니한 하나의 신비였다. 그러기에 그리스도께서는 그것을 뒤로 미루고 계시는 것이다. "생명에 들어가는" 방법은 순종함에 의해서이며,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영생의 길로 인도하신다.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해서 우리는 영생에의 자격을 "얻게"되며, 우리의 증거인 순종에 의해서 그것을 "입증"한다. "믿음에 덕을 더함으로써"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우리에게 넉넉히 주신다"(벧후 1:5, 11). 그리스도는 우리의 생명이시오, 성부 하나님께로 가는 이시다. 또한 하나님을 보며, 그에게 이를 수 있는 길이시다. 그는 유일한 길이시다. 그러나 믿음의 순종과 행함의 의무는 그리스도에게로 가는 길이다. 우리는 죽을 때에 이 길로 장래의 생명에 들어가게 되며, 마지막 심판날에는 완전히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그들의 의무를 다 행하는 자들만이 오직 그때에 생명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부지런하고 충성된 종만이 "주님의 기쁨에 동참할"수가 있게 된다. 그 기쁨은 곧 그의 영생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생명에 들어가고 있다.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9히 4 : 3). 우리는 장차 나타날 영광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면서 평화와 위로와 기쁨을 얻는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반드시 신실하게 순종하는 것이 불가피하게 필요한 것이다.

② 지시된 그 방법은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계명들이 우리에게 계시되고 알려진 대로 하나님의 그 계명들을 지키는 것은 생명과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요, 방법이다. 이 속에 있는 신실성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합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복음의 완전이시오 또한 우리가 회개할 때 용서해 주시기 위해 준비된 자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회개를 결여하고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율법의 정죄하는 권세에서 구함을 받는다. 그러나 그 율법의 명령하는 권세는 중보자의 수중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권세 아래에서 그 수중에서 아직도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다(고전 9:21). 즉 법 아래 있는 것이지, 언약 아래 있는 것이 아니다. "계명들을 지키는 것" 가운데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큰 계명이기 때문이다(요일 3:23). 그리고 모세의 율법 중의 하나는 큰 선지자가 세움을 받을 때 백성들이 그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 것이었다. 지금부터 영원까지 우리가 행복하게 되기 위하여는 하나님의 계명을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 계명들을 지켜야"한다. 지키데 우리의 길로 삼아 그 계명들 안에서 행하며, 우리의 규례로 삼아 그 계명들을 떠나지 않으며, 그 계명들을 우리의 보물처럼 간직하고 우리의 눈동자처럼 조심스럽게 보존해야 한다.

③ 그 청년이 어느 계명을 지켜야 하는가 묻자 예수님께서는 그가 지켜야 할 몇 가지 계명들에 대하여 말씀해 주셨다(18, 19절). "그 청년이 묻자오되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하나님의 계명을 행하려고 하는 자들은 그 계명들을 부지런히 조사하여 그것들이 어떠한 것들인가를 알아보아야 한다. 에스라는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할 것을 결심하였었다(스 7:10). "모세의 율법에는 여러 가지 많은 계명들이 있었습니다. 선한 선생님, 그들 중 계명인지를 가르쳐 주십시오. 어느 계명을 지키는 것이 구원을 얻는 데 필요합니까?" 이것이 젊은 청년 귀족의 질문 내용이다.

이 질문에 답하여 그리스도께서는 몇 가지 계명의 이름을 들어 말씀하고 계신다. 특별히 둘째 돌비에 새겨진 계명들을 언급하신다.

첫째, 우리 자신과 이웃의 생명에 관한 것이다. "살인하지 말라."

둘째, 우리 자신과 이웃의 순결에 관한 것인데 순결은 생명과 같이 우리에게 귀한 것이다. "간음하지 말라."

셋째, 우리 자신과 이웃의 재물과 또한 외형적인 재산에 관한 것인 바, 이는 물건을 가질 수 있는 법(法)에 의하여 보장되고 있다. "도덕질하지 말라."

넷째, 진실에 관한 것으로 우리 자신과 이웃의 명예와 관계가 있다. "거짓 증거하지 말라." 네 자신을 위해서도 말고 다른 사람을 해하려고도 하지 말라. 대개 이 계명은 백지 조항으로 되어 있다.

다섯째, 존속 관계의 의무에 관한 것이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여섯째, 사랑에 대한 포괄적인 율법에 관한 것이다. 이는 이 모든 의무들의 원천이요, 요약이다. 여기에서 이 모든 의무들이 파생되는 것이며, 여기에 모두 기초를 두고 있고, 이모든 의무들이 성취되는 것도 이 포괄적인 사랑의 율법 안에서이다.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갈 5:14, 롬 13:9). 그러므로 이는 "최고의 법"이다(약 2:8). 어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이 계명이 여기에 있는 것은 둘째 돌비의 요약으로써가 아니고 계명의 특별한 내용을 담은 것으로 보고 있다. 즉 "탐내지 말라"(마가복음에는 "속여 횡령하지 말라")는 계명으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다른 사람에게 결손이나 손실을 입힘으로써 내 자신에게 유익이나 보탬이 되도록 꾀하는 것은 합법적이 아니라는 취지로 그들은 생각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이 탐내는 것이요, 내 이웃보다도 내 자신을 더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그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해야 하며 또한 나 자신이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그를 대접해야 한다. 우리 주님께서는 여기서 둘째 돌비에 새겨진 계명들만을 일일이 열거하고 있다. 이는 마치 첫째 돌비에 새겨진 계명들은 덜 중요하다는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예수님께서 둘째 돌비의 계명들만을 열거하신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지금 모세의 위치를 점하고 있는 자들이 가르칠 때에 이 계명들을 전적으로 무시하였거나, 또는 크게 부패시켰기 때문이다. 그들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강조하였지만, "의와 인과 신," 즉 둘째 돌비의 계명의 핵심은 버렸다(23:23). 그들의 가르침은 의식적인 것에만 치우쳤으며, 도덕적인 것은 전혀 가르치지 않았다. 그러기에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가장 소홀하게 다룬 것을 가장 힘 주어 강조하신 것이다. 진리와 의무가 대등한 위치에 있을 때는 서로 밀쳐내려고 해서는 안 되며 또한 각각 자기의 위치를 알아서 분수를 지켜야 한다. 그러나 평행의 원리는 밀쳐냄을 당할 위험이 있는 것을 돕도록 하고 있다. 지금 우리가 증거 하도록 부름을 받은 것을 반대를 받고 있거나 매우 무시를 당하고 있는 그 진리를 위함이다.

2. 그리스도께서는 그 청년과 우리 모두에게 도덕적인 정직이 참된 기독교의 한 필수적 요소임을 가르쳐 주시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 정직에 대해 유의토록 하신 것이다. 단순히 도덕적인 사람은 완전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지만 비도덕적인 사람은 확실히 참된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로 하여금 근실하고 의로우며 경건하게 살도록 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첫 돌비의 계명들은 그 안에 종교의 기본 요소들을 더 많이 지니고 있지만, 둘째 돌비의 계명들은 그 안에 종교의 증거들을 더 많이 지니고 있다. 우리의 빛은 하나님을 사랑할 때 "타오른다." 그러나 그 빛은 이웃을 사랑할 때 "빛난다."

Ⅱ. 그 청년이 영생에 미치지 못하고 실패한 두 가지 요소.

1. 그는 교만과 자기 자신의 공로와 힘에 대한 헛된 자만심으로 말미암아 실패하였다. 이 자만심은 수많은 사람들을 파멸에 이르게 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을 행복하다고 생각함으로써 자신을 비참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어떠한 계명들을 지켜야 하는가를 그에게 말씀하였을 때 그는 매우 건방지게 대답하기를 "이 모든 것을 어려서부터 지켜 왔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라고 하였다(20절).

(1) 그 청년은 율법을 외부로 드러나는 죄만을 금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렇게 생각한 것이라면 그는 참 말을 한 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예수님도 그 점을 알아 주셨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그를 반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가복음에 보면 "그가 그를 사랑하셨다"라고 되어 있다(막 10:21). 그러므로 아직까지 그 청년은 그리스도의 호감을 사고 있었으며, 그를 기쁘시게 하고 있었다. 사도바울은 그가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빌 3:6)였던 것을(그 무흠한 것이 그리스도에 비하면 찌꺼기와 같이 불순한 것이지만) 원래 하찮은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하나의 특권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가 이 모든 계명들을 준수한 것은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모두 행하는 정도의 것이었다. "내가 이 모든 것을 지켰사오니," 그가 계명을 지킨 것은 "어려서부터"였으며 또한 일상적인 것이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사람이 큰 죄를 범하지 않으면서도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에는 이르지 못하는 수가 있다는 사실이다. 그의 손은 외형적인 오염으로부터 깨끗하면서도 그는 그의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영원히 멸망하는 수가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에도 이르지 못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그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불러오기는 해왔지만 어려서부터 사기와 불법과 술 취함과 거짓 증거 등을 일삼아 범하여 왔다고 한다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이는 참으로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청년이 자기가 더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자 한 것은 칭찬할 만하였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그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업적을 충족시키는 데는 무엇인가 부족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것을 알고자 하였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에게 잘못이 있는 한, 그것을 기꺼이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는 아직껏 그가 알고 싶어하는 바를 알지 못하였고, 목적한 바를 이루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리스도에게 더 가까이 나아갔던 것 같다. 그리고 그리스도만을 주시하였다. 그는 그리스도의 교훈이 모세의 율법을 향상시키고 완성시킬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 청년은 그리스도의 종교의 특별한 계율들이 어떤 것인가를 알고 싶어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을 연마하고 완성시키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얻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2) 그가 말한 이 말 가운데서 그는 자신의 무지와 어리석음을 나타내었다.

①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해석하신 대로 율법을 영적인 의미로 이해한다면 의심할 여지도 없이 그는 여러 가지로 이 모든 계명들을 범하였던 것이다. 그가 만일 율법의 깊은 뜻과 영적인 의미를 잘 알고 있었더라면 그는 '내가 이 모든 것을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부끄러워하고 한숨을 지으면서 말하기를 '내가 이 모든 것을 범하였나이다. 저의 죄를 사함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라고 했을 것이다.

② 그가 한 말에는 교만과 헛된 영광의 기미가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믿음의 법에 의하여 배제되는(롬 3:27) 자만심이 가득차 있다. 그 자만심은 의롭게 되는 것을 불가능케 한다(눅 18:11, 14). 그 청년은 바리새인들처럼 자신들을 과대평가 하였다. 그는 사람들 앞에서 자기 신앙을 고백하여 칭찬을 받고 그것을 자랑으로 여겼으나 실은 그것이 그의 신앙고백을 합당치 않은 것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라고 그가 말한 것은, 예수님에게서 가르침을 더 받겠다는 간청이라기 보다는 자기의 현재의 완전성을 칭찬해 달라는 요구와 자기에게 부족한 점이 있으면 지적하여 보여달라는 도전이었던 것이다.

2. 그는 현세와 거기서 누린 바 향락을 너무 사랑하였기 때문에 실패하였다. 이 점은 바로 그가 예수님과 의견을 달리한 제거할 수 없는 치명적인 암석이었다.

(1) 그 청년이 받은 바 실험(21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율법의 범위에 대하여 논쟁을 벌이는 것보다는 이 말씀이 그 자신을 발견케 하는 보다 효과적인 방법이었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그 청년이 율법을 자만스럽게 순종한 문제를 이야기하는 것을 중단하셨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와서 나를 따르라." '네가 온전해지려고 한다면 네가 율법을 순종할 때 신실하였음을 입증하고자 한다면 (신실성은 복음의 완전임), 그리스도께서 모세의 율법에 첨부한 것에까지 도달하고자 한다면 네가 생명에 들어가고자 한다면, 그리하여 완전하게 행복해지고 싶다면 와서 나를 따르라." 왜냐하면 여기에 그리스도께서 규정하고 있는 것은 선을 쌓는 일에 관한 일도 아니고, 우리가 구원받게 되는 완전성도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필수 불가결한 의무이다.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것을, 지금까지 우리 모두에게도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만일 자신을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입증하고 마침내 영생의 상속자가 되려고 하면 다음과 같은 두가지의 것을 반드시 행해야 한다.

① 우리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부귀와 재물보다 먼저 천국의 보화를 실질적으로 좋아해야 한다. 하늘의 영광은 이 세상의 영광에 앞서 훨씬 탁월한 것으로 판단하여 생각해야 한다. 지옥 대신에 천국을 취하는 것은 우리의 덕택이 아니지만, 세상에서 가장 악한 사람도 그가 이 세상을 떠나야 할 또한 그 새 예루살렘을 도피성으로 삼기를 기뻐할 것이다. 또한 그 도피성을 여분으로 갖고자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결단을 내림으로써 이 세상보다 오히려 그 도피성을 취하게 되면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이 되는 첫걸음이다. 이에 대한 증거로써,

첫째, 우리는 하나님을 존귀케 하고 그를 섬기는 데 있어서 이 세상에서 우리가 가진 바 모든 것을 처분해야 한다.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구제하는 일이 매우 급박할 때는 가진 것을 팔아 필요한 사람들에게 주어야 한다. 마치 초대 교회가 행하였던 것처럼 이 명령을 준수해야 한다(행 4:34). 경건 되게 사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너희가 절약할 수 있는 것과 모든 여분의 물건들을 팔아야 한다. 그리고 별로 쓸모가 없는 것도 팔아야 한다. 하나님의 이름을 존귀케 하고 가난한 자들을 돕기 위해서는 그러한 물건을 미련 없이 팔아버릴 수 있어야 한다. 세상에 애착을 두지 않고 경멸하는 것과 또한 가난한 자들과 가난으로 괴로움을 당하는 자들을 불쌍히 여기는 것은 모두 구원을 위한 필요 조건들이다. 재력을 가지 자들은 세상을 하찮게 여기고 또한 우리의 형제들을 불쌍히 여긴다는 사실을 증거하기 위하여 구제를 해야만 한다. 이것으로 마지막 날에 심판을 받게 된다(25:35).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하지만은, 그들은 믿는 대로 행하지 않는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세상을 멀리해야 한다는 것은 확실한 진리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과 돈을 함께 섬길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청년을 가장 용이하게 공략할 죄가 바로 탐심이었음을 아셨다. 따라서 그 청년은 그가 소유한 제물은 정직하게 번 것이었지만, 그것을 기꺼이 포기할 수가 없었다. 이로써 그는 자신의 불신실함을 드러낸 것이다. 이 명령의 말씀은 아브라함이 받은 소명과도 같았다.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창 12:1). 하나님께서는 신자들을 그들이 받은 바 가장 강력한 은혜로 시험하시는 것과 같이, 위선자들은 그들의 가장 강력한 부패로 시험한다.

둘째,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위하여 버렸거나, 또는 잃었거나를 막론하고 투자한 모든 것을 저 세상에서 충분히 보상을 받으리라는 소망을 신뢰해야 한다. "너희는 하늘에 보화를 쌓아 두라." 우리는 보이지 않는 복락을 인하여 하나님을 신뢰해야 한다. 이 복락이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면서 바쳐드린 바 모든 것을 충분히 보상해 줄 것이다. "네가 가진 것을 팔아서 주어라"는 명령은 참으로 행하기 힘들고 난처한 것으로 들린다. 그러므로 거기에 대한 이의가 곧 제기된다. 즉 "자선은 집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말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는 곧 바로 추가하여 말씀하시기를,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고 하신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의 약속의 말씀은 그의 명령들을 용이한 것으로 만들어 주며, 그의 멍에를 견딜 만한 것이 되게 하며, 기쁘고 상쾌하고 안락한 것으로 만들어 준다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이 약속은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소유를 팔라고 하신 그 명령이 그의 자선과 세상을 경멸하는데 대한 시험이었던 것과 같이 그 청년의 신앙을 시험한 것이었다.

② 우리는 주 예수님의 지도와 다스리심에 완전히 맡겨야 한다. "와서 나를 좇으라." 여기에서 그 청년에게 나를 좇으라고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의 뜻은 언제나 곁에서 그를 수종들며 따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는 마치 제자들이 예수님을 좇을 때 그들의 직업을 포기했던 것처럼 그 청년도 이 세상에서 가지고 있던 모든 소유를 파는 것이 그를 좇는데 필요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를 좇을 때 우리에게도 다음과 같은 것이 우리에게 요구된다. 그의 규례와 명령들을 당연히 준행해야 하며 엄격하게 그를 본 받아야 하며, 기쁘게 그의 뜻에 순종해야 하며, 올바르게 순종하여 그의 법도들과 그의 율법을 준행해야 한다. 그런데 이상의 모든 것을 행할 때,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만을 의지하고 그와 비교해 볼 때 다른 모든 것은 분토처럼 여겨야 하며, 특히 그리스도보다 우위를 차지하려는 것이 있으면 철저하고도 단호하게 배격하고 정말 분토처럼 여길 수 있어야 하며, 이러한 원리에 입각하여 준행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완전히 좇는 것"이다. 우리가 모든 것을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준다 해도 우리가 와서 그리스도를 좇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무런 소용도 없다. 또한 가난한 사람들을 먹이기 위하여 나의 모든 재산을 바친다 해도 사랑이 없으면 그것은 내게 아무런 유익이 없다. 따라서 이러한 조건들에서만이(그 이하일 수는 없다) 구원이 얻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 조건들은 매우 쉽게 무리가 없는 것들로써 구원을 받을 자들에게는 어쨌든 힘든 것이 아니다.

(2) 그 청년은 본색은 드러나게 되었다. 이 말씀은 그의 헛점을 찔렀다(22절).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여 가니라."

① 그는 부자였으며, 또한 그의 재산을 사랑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가버렸다. 그는 이러한 조건에서는 영생을 얻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첫째, 이 세상에서 많은 것을 가진 사람들은 그것을 사랑하며, 또한 크게 애착하는 유혹을 매우 강하게 받고 있다. 세상 재물이 미혹하는 힘은 대단한 것이어서 부자가 더 욕심을 내어 재물을 모으려 한다. 재물이 늘어날 때 그 재물에 애착할 위험이 짙어진다(시 62:10). 어떤 사람이 자기가 가진 것이라고는 두 렙돈 뿐일 때 그것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명령을 받았으면, 또는 밀통에 밀가루 한웅큼과 항아리에 약간의 기름밖에 없을 때 그것으로 떡을 만들어 가난한 선지자에게 주라는 명령을 받았다면, 어떤 사람은 생각하기를 그 시험은 참으로 어려운 것이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시험들은 극복되었었다(눅 21:4; 왕상 17:14). 이는 곧 세상을 사랑하는 그 사랑이 그 사랑이 가장 절박한 궁핍보다도 더 강하게 사람의 마음을 잡아끌어 당기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둘째, 이 세상에 대한 지극한 사랑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멀리하게 한다. 그런데 그들은 겉으로는 그를 가까이하고 싶어하는 눈치를 보인다. 많은 재산은 그것을 초월하는 자들에게는 천국 가는 데 크게 도움을 주지만, 그 재물을 사랑하는 데 휘말려드는 사람들에게는 천국 가는데 그 많은 재산이 오히려 큰 장애물이 된다.

그렇지만 그가 그 자리에서 돌아서서 가버린 것을 보면 그는 매우 정직하였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제시하신 조건을 마음으로 응락할 수 없었기에 그것을 할 수 있는 척하지 않고 그대로 가버렸던 것이다. 이는 데마보다 훨씬 나은 것이다. 데마는 "의의 길을 알고 난" 후에 이 세상을 사랑하여 사도 바울을 버리고 돌아서 버렸었다(딤후 4:10 참조). 그러므로 그 청년은 완전한 그리스도인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위선자는 아닌 것이다.

② 그러나 그는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근심하며 갔던"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에게 마음이 크게 쏠려 있었기 때문에 그와 헤어지기가 싫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많은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지은 죄로 인하여 파멸에 이른다는 사실이다. 즉 근심하며 그리스도를 떠나가는 것이다. 그러나 그를 떠나간 것을 참으로 후회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가 후회한다면 그리스도에게 되돌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청년의 재물이 그를 시험하는 것이 되었을 때 그것은 그를 "근심케 하는 것"이 되고 말았다. 그의 모든 소유가 없어지고, 그의 영생에 대한 모든 소망도 역시 없어지게 될 때 그 슬픔(근심)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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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와 천국(막 10:17-31)

Ⅰ. 여기에는 그리스도와 "청년"사이의 희망에 찬 대면의 장면이다. 마태복음 19장 20, 22절에는 "청년"이라고 하였고 누가복음 18장 18절에는 "관원"이라고 하였는데 지위가 있는 사람인 듯하다. 여기에 나와 있으나 마태복음에는 그렇지 못한 것은 그가 그리스도에게 대단히 유망한 이야기를 한 점이다.

1. 그가 그리스도에게 "달려"왔다. 이것은 곧 그의 겸손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가 그리스도에게 나올 때에 그는 관원으로서의 위엄과 명예도 개의치 않은 것이다. 그렇게 함은 또한 그가 자기의 열심과 끈기를 나타낸 것도 되는 것이다. 그는 급한 사람 마냥 달려 나와 그리스도와 대화를 갖기를 원하였다. 그는 지금 대선지자와 더불어 그의 평안에 속한 일들에 대하여 의논할 수 있는 기회를 맞이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은 것이다.

2. 그는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쌔" 무리 가운데 계실 때에 예수께 나온 것이다. 그는 비록 관원이었지만 니고데모처럼 밤에 몰래 찾아와 담화를 나눈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가 "밖에서 그를 만났을 때에(자기에게 충고해 줄 기회를 얻어) 입을 맞추어도 자기를 업신여길 자가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아 8:1).

3. 그는 예수께 "꿇어앉아" 물었는데 이것은 그가 예수를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으로 큰 가치와 존경을 나타낸 표시이며, 예수께 가르침을 받고 싶은 그의 간절한 소원을 나타낸 것이다. 그는 예수께 무릎을 꿇고 엎드리었는데, 이것은 지금 그가 예수께 경의를 표하기 위할 뿐만 아니라 항상 예수께 복종하겠다는 뜻을 나타낸 것이다. 그는 마치 자기 영혼이 예수에게 경배 드림을 의미하는 것처럼 꿇어 엎드린 것이다.

4. 예수에게 드린 그의 질문은 신중하고 무게가 있는 것이었다.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비록 그 당시에 우세한 당파인 사두개인들에 의하여 부인되었지만 영생은 그에게 신조의 한 종목이었다. 그는 영생이 우리에게 약속된 것일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그가 "영생을 얻을"수 있는 것은 가능한 것으로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는 그렇기 때문에 지금 자기가 영원히 행복하려면 어떻게 하여야 되느냐고 묻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선을 소유할 수 있는가를 묻는다.(시 4:6). 그는 내세에서 최대의 선을 즐기기 위해서 이 세상에서 어떠한 선을 행해야 되느냐고 묻는 것이다. 그의 질문은 "우리에게 선을 보일 자가 누구냐?" 가 아니고(시 4:6)'누가 우리에게 선을 행하도록 하겠느냐?"는 것이다. 그는 의무를 행하므로서 행복을 구한 것이다. 솔로몬이 궁구한 첫째의 선은 인생들이 마땅히 행할 바를 행하는 선이었다(전 2:3).

(1) 이 질문은 그 자체가 대단히 신중한 것이었다. 그것은 영생에 관한 문제였고 그의 관심은 영생에 대한 것이었다. 사람들이 천국에 가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되느냐고 신중하게 묻기 시작할 때에는 거기에 얼마만큼 유망성이 있어 보이는 것이다.

(2) 이 질문은 가장 적격자에게, 즉 모든 면에서 대답하시기에 적합하시고 그분 자신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시며 영생에 이르는 참된 길이 되시는 분에게 물어진 것이다. 그분은 천국에서 우리를 위해 천국문을 여시려고 오셨고 우리에게 천국문을 여시기 위하여 오신 것이다. 구원을 받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를 알고 싶은 자들은 자신들을 그리스도에게 드리고 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영생을 보여 주고 영생을 얻는 길을 보여 주는 것이 기독교의 특색인 것이다.

(3) 이 질문은 가르침을 받기 위한 선한 목적으로 물은 것이다. 우리는 어떤 율법사에 의해서 이와 같은 질문을 물은 것을 볼 수 있다(눅 10:25). 그는 무릎도 꿇지 않고 서서 물었고 예수를 시비하기 위한 나쁜 목적으로 물은 것이다. 그는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이 청년의 물음은 그리스도께서 보시기에 좋은 의도에서 한 질문이었다. 하더라도 그리 좋은 말은 못되는 것이다.

5. 그리스도께서 이 청년의 청원에 대해서 친절히 응해 주시었다.

(1) 그의 신앙을 도와줌으로써 그렇게 하였다(18절). 그가 예수에게 "선한 선생님"이라고 불렀는데, 예수께서 그를 시정해 줌으로써 당신을 하나님으로 보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아무도 선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고 하나님의 이름도 하나인 것이다(슥 14:9). 영어의 하나님(God)은 선(good)과 유사한 점이 있는 것이다. 히브리어로 능력의 하나님의 이름은 엘로힘(Elohim)이라 하는데 "강한 하나님"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선을 강조하기 위해 선하신 하나님(good God)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2) 실행을 지시하심으로 그렇게 하시었다. "계명을 지키라." "네가 계명을 아나니"(19절). 예수께서 인간에게 대한 여섯 계명을 진술하시었는데 그것들은 우리의 이웃에게 행해야 할 계명들이다. 예수께서는 그 계명들의 순서를 바꾸어 놓으시었다. 제 7계명을 제 6계명 앞에 둠으로써 간음이 살인 못지 않게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임을 암시하시었다. 제 5경을 맨 뒤에 두었는데 이것은 특별히 기억하고 지키도록 하기 위함이며 끝까지 잘 지키도록 하기 위함일 것이다. 제 10계명 "너희는 탐하지 말라" 대신에 우리 주께서 "속여 취하지 말라"고 하시었다. 이 말의 원어 "메 아포스테레세스"는 하몬드 박사에 의하면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으로 만족하도록 하고 다른 사람의 것을 축내면서 네 것을 많게 하려고 구하지 말라"고 하였다. 다른 사람에게 잘못과 손해를 끼침으로 말미암아 우리 자신이 앞서거나 부요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정의의 원칙인 것이다.

6. 그 청년은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지 않음으로써 공명정대하게 천국을 구하려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어느 정도까지에는 대답할 수 있었다.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20절). 그는 자신이 그렇게 행한 것으로 생각하였고 그의 이웃들도 그렇게 생각하였던 것이다. 하나님의 율법의 범위와 영적인 무지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들을 사실보다도 더 낫게 보이도록 하는 것이다. 바울은 "율법이 없이는 살아 있었다. 그러나 그가 율법이 신령한 줄을 알게 되었을 때에 자기 자신이 육신에 속하여 있음을 보게 되었다"(롬 7:9, 14). 그러므로 자기는 수치스러운 죄에서 자유함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는 자는 영생의 길에 있어서 다른 사람들보다 앞서 있는 것이다. 그러나 비록 우리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함을 얻지 못하는" 것이다(고전 4:4).

7.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친절히 대하시었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21절) 예수께서 그가 무흠하게 살아온 것을 아시고 기뻐하시었으며, 그가 어떻게 더 나은 생활을 살을 수 있는 가에 대해서 알고 싶어하는 것을 보시고 기뻐하시었다. 그리스도께서 특별히 이 청년 부자가 "그 얼굴을 하늘로 향하여 그 길을 물으며 말하는"것을 보시고 사랑하시었다(렘 50:5).

Ⅱ. 그리스도와 이 청년 사이의 슬픈 이별.

1.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시험적인 명령을 하시었다. 이 명령에 의해서 그가 진실로 영생을 목적하고 구했으며 그것을 밀고 나갈 것인가가 판명되는 것이다. 그는 분명히 그 심령으로부터 영생을 사모하는 것 같았다. 그러므로 사실이 그러하다면 그는 마땅히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했을 것이다. 그러면, 그가 진실로 그 심령에서 영생을 구하였을까? 그러면 그를 시금석 위에 데려다 세워 보자.

(1) 그는 그리스도를 섬기기 위해서 자기 재산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는 마음이 있었는가? 그에게는 많은 재산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 재빨리 기독교란 필요한 경우에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도록 요구하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행 4:34, 35). 그런데 그가 어떻게 그것을 면할 수 있단 말인가? 얼마 후에 말씀을 인해서 환난과 핍박이 일어날 것이며, 그는 그 재산을 팔지 않으면 안 되거나 다 빼앗기게 될 것인데, 그러면 그는 어떻게 될 것인가? 그러므로 그는 그 최악의 사태를 지금 알아야 하는 것이다. 만일 그가 그런 불행에 이르지 않으려면 그 재산에 대한 자기의 권리를 포개해야 되는 것이다. 그가 처음에 예수에게 나와서 좋은 태도를 보인 것처럼 나중에도 그러했어야 하는 것이다.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를 주라"(21절). 아마 그에게는 양육해야 할 가족이 없었던 것 같다. 그러므로 그가 가난한 자들의 아버지가 되어 그들로 그이 상속자들이 되게 하라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마땅히 자기의 능력에 따라서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기회가 있을 때 어떠한 어려움을 무릎 쓰고 그렇게 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세상 재물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자로부터 우리의 의무를 이행하도록 생계비뿐만 아니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우리와 함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우리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이 세상에서 사용하도록 하는 "달란트"로 주신 것이다.

(2) 그는 그리스도의 제자로 부름을 받을 수 있는 그 어렵고 값비싼 봉사를 수행할 수 있고 "하늘에서 보화"를 얻으려고 주님을 의지할 수 있는 마음이 있었는가? 그는 그리스도에게 "영생을 얻으려면" 그가 지금까지 행해온 일 외에 무엇을 해야 되느냐고 물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그가 얻고 싶어하는 "영생"에 대해서 진정으로 확고한 마음이 그에게 있으며 그 귀한 가치를 알고 있나 판명될 수 있는 이 명령을 그에게 내리신 것이다. 그가 진정으로 하늘에 보화가 있음을 믿었다면 충분히 그가 그리스도를 위해서 모든 것을 떠나거나, 버리지 않았겠는가? 그가 그리스도를 신뢰하려고 하였는가? 그는 자기의 모든 가치가 그리스도에게 있음을 믿고 미래의 영광을 위해서 현재의 십자가의 고난을 참을 수 있었는가?

2. 그는 이 명령을 듣자 떠나가 버렸다(22절). "이 말씀을 듣고 슬픈 기색을 띠고."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따르라고 하는 것보다 어떤 쉬운 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지 못한 것을 안타깝게 여기고, 영생도 얻고 세상 재물도 간직할 수 없음을 안타깝게 여긴 것이다. 그러나 그가 제자가 될 수는 없었다 하더라도 이를 변명하는 태도를 취하지는 않았다. "근심하며 가나리"(22절).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하신 진리가 여기에 입증된 것이다(마 4:24). 그가 재물을 붙들고 있는 동안 그는 사실 그리스도를, 마치 그분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는 그런 모든 자들처럼 멸시한 결과가 되는 것이다. 그는 마음에 있는 것을 사려고 시장에서 값을 물은 것이다. 그러나 근심하며 그곳을 떠난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가 부른 값으로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청년을 멸망하게 한 것은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탓이었다. 그러므로 "미련한 자의 안일은 자기를 멸망시키"는 것이다(잠 1:32). 그리고 부요한 중에 소일하는 자들은 시험을 받아 하나님께 대하여 "우리를 떠나라"고 하며 그들의 마음에 대하여 "하나님을 떠나라"고 하게 된다.

Ⅲ.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제자들과 말씀하심.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따르려고 한 젊은 사람을 깜짝 놀라 돌아서게 한 그 말씀을 진정시키고 그 말 가운데 나타난 가혹함을 씻어버리기 위해 어떤 설명을 하였다고 생각하려고 한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모든 사람의 마음을 다 아시고 계시는 것이다. 그 청년이 부자이며 관원이기 때문에 당신의 제자가 되라고 하신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가 가려면 가라고 하신 주님의 태도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뜻을 거역하면서 아무도 붙들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그를 불러 돌아서게 하시지 않은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 기회를 맞이하여 당신의 제자들에게 두 가지 사실을 가르치려 하신 것이다.

1. 이 세상의 많은 것을 소유한 사람들이 구원을 받기는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많은 재물을 소유한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위해서 그것들을 버리라고 한다 해서 버리고 따르거나 선을 행하기 위해서 내놓을 사람이 적기 때문이다.

(1) 그리스도께서 여기에서 이 사실을 주장하였다. "예수께서 둘러보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예수께서는 당신이 하시려는 말씀을 모든 제자들이 주의해서 잘 듣고 그들이 과대 평가하기 쉬운 세상 재물에 대하여 옳은 판단을 갖고 그들의 잘못된 생각을 고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23절). 그 부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별로 없는, 움켜쥐려는 시험이 많고 그대로 지나치기 어려운 점들이 많은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얘들아"하고 부르셨는데, 그것은 왜냐하면 그들이 그러한 사실에 대해서 마땅히 아이들과 같은 심정에서 배워야 하고 그들은 그 청년이 움켜쥐려고 그리스도에게 돌아섰던 그런 재물보다도 더 좋은 것으로 분배받도록 하기 위함이었던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고 하신 것이다. 여기에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신 것은 그들이 재물이 많은 것보다 그들이 재물을 신뢰하고, 재물이 그들을 보호하여 주고 생계를 가능하게 하는 것처럼 생각하여 의지하며, 다만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야 함에도 "금으로 소망을 삼는"(욥 31:24) 그런 것이 더욱 위험한 일이라는 것이다. 세상의 재물에 대해서 이와 같이 과대한 평가를 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와 그의 은혜에 대해서 올바른 가치관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들을 신뢰하지 않는 자들이나 물질의 허무성을 알므로 가난하면서도 그들의 영혼이 행복한 자들은 어떠한 역경도 극복할 수 있으며 그리스도를 위해서 쉽게 그 재물들을 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적은 재물을 가지고 있지만 그들이 만일 그 적은 것에 마음을 빼앗기고 그것에서 행복을 찾으려는 자들은 그것 때문에 그들은 그리스도를 떠나게 되는 것이다.

예수께서 이 주장을 강조하였다. "약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25절). 여기에 나온 두 가지의 불균형은 너무 차가 크다(그렇지만 그 차이가 크면 클수록 여기에 의도하신 더 좋은 대답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자들은 약대와 바늘귀의 불균형의 차이를 조금 좁혀 보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① 어떤 이들은 추측하기를 예루살렘성에는 보통 "바늘귀"라고 부르는 협문이나 쪽문이 있었을 것이며, 그것이 너무 협소해서 약대가 짐을 싣지 않고 빈몸으로 끌어야만 통과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것이다(창 24:11). 그러므로 부자가 세상 재물의 짐을 기꺼이 벗어 놓지 않으면 천국에 들러갈 수 없고 신앙적 의무에 대해서 겸손히 굽혀야만 그 "좁은 문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② 다른 어떤 이들은 설명하기를 우리가 "약대"라고 번역한 이 말은 때로는 밧줄을 의미하는데 그것은 "바늘 귀"로 통과되지는 않지만 전연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부자를 빈자와 비교하는 것은 밧줄을 실과 비교하는 것이나 같은데 밧줄은 강하기는 하나 유연하지를 못하기 때문에 그것을 도로 풀지 않으면 "바늘귀"로 통과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자는 그의 부한 재물로부터 얽힌 것을 풀어야만 되는데 그렇게 할 때에 그에게 소망이 있다는 것이다. 밧줄을 풀은 실이 바늘귀로 통할 수 있는 것 같이 그에게 천국에 들어갈 소망이 있으며 그러지 않고는 그는 지상에 닻을 내리고 있는 상태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2) 이 진리는 제자들에게 놀라움을 안겨 주었다. "제자들이 심히 놀라 서로 말하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26절). 그들은 유대교 선생들의 일반적인 소감이 어떠함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성령이 부자들에게 찾아와 거하기를 원한다고 믿었다. 그들은 일시적인 선한 일들에 대해서 구약에 풍부하게 약속되어 있음을 잘 알고 있다. 그들은 또한 부자나 연약한 자에게나 똑 같이 그 약속들이 타당하지만 부자들이 선을 행할 수 있는 기회가 많기 때문에 부자가 천국에 갈 수 없다고 하신 말씀을 듣고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던 것이다.

(3)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부자들이 구원을 얻는 길에 놓인 장벽을 하나님의 전능하신 힘으로 해결하실 수 있다는 여유 있는 말을 하여 그들을 안심시켰다.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27절). 사람의 수단이나 힘으로는 그 어려운 장애물을 해결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써 해결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으로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27절). 만일에 의인도 구원함을 받기가 어렵다면 부자는 더 말할 나위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나 천국에 들어갔을 때에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야 마땅하다. "우리안에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2. 이 세상에 대해서 가난하고 그리스도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린 사람들의 구원은 위대한 것이다. 베드로가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28절)라고 자기 자신과 다른 제자들이 주를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버렸다고 말하자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이다. "너희가 잘하였도다. 마지막 날에 이르면 너희가 잘하였음이 판명될 것이다. 너희가 넉넉하게 보상을 받을 것이다. 너희와 같이 적은 것을 버린 자나 많은 소유를 버린 자나 다 보상을 받게 될 것이다.

(1) 주를 위해 버린 손실이 대단히 클 것을 암시하였다. 예수께서 그에 대해서 일일이 열거하시었다.

① 세상적인 부에 대해서 먼저 말씀하시었는데 그 중에서 집을 맨 먼저 말씀하시고 전토를 맨 나중에 말씀하시었다. 만일에 사람이 자기의 거주지인 집을 버린다면 그리고 자기의 생계의 수단이 되는 전토를 버린다면 자기 자신을 거지로 만들고 추방자가 되게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방법이 고행을 위해 나선 성도들의 선택한 길이 되어왔다. 제아무리 편리하고 욕심이 나며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이라 하더라도 아름다운 큰 저택들이 즐비한 하늘 나라와 빛 가운데 살고 있는 성도들의 거주지인 천국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이다.

② 귀한 가족들에 대해서 다음에 말씀하시었다.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형제나 자매나"(30절). 여기에도 다른 일시적인 축복과 마찬가지로 인생의 위안과 관계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것이 없이는 세상은 광야와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이들 중에 한편을 버려야만 한다. 우리가 기억할 것은 우리는 어느 누구보다도 그리스도와 가까운 생명의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교제를 계속하기 위해서는 모든 세상을 끊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그리고 레위와 같이 부모에 대해서 "내가 당신들을 모릅니다"라고 할 수 있어야 한다. 선한 사람의 지조에 있어서 가장 큰 시련은 그리스도에 대한 자기의 사랑이 합리적인 인간적 사랑 즉 자기의 의무와 경쟁할 때인 것이다. 그리스도를 위해 자기의 어떤 욕망을 버리는 것은 그래도 쉬운 편이다. 왜냐하면 그런 것은 자기 안에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위해서 부모나 처자나 형제 자매들을 버리는 일은, 그들을 자기가 마땅히 돌보고 사랑해야 할 사람들이기 때문에 더욱 어려운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함이 그리스도를 부인하거나 버리는 것보다 낫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위해 손해를 보아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더욱 영광을 받으시고 복음이 더욱 전파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순교자가 되게 하는 것은 고난이 아니라 명분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 유익도 큰 것이다.

(2) 이 유익을 살펴보도록 하자.

①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30절). 종류를 따라 열거하지 않았으며 모두 동등하게 취급하신 것이다. 그는 자기 생전에는 자기의 손실에 대해 흡족한 보상을 받게 되어 넘치는 위로를 받게 된다. 그리스도와 그의 관계, 모든 성도들과의 교제, 영생의 축복, 주 안에서 얻은 형제, 자매, 집들 등등의 축복도 그 보상인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로 말미암아 모든 것을 잃었던 욥은 그 두 배의 축복을 받았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을 당하는 성도들에게 백 배의 축복을 약속하신 것이다. 모든 피조물을 위로하는 성령의 위로 중에 이 모든 축복을 허락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여기 마가복음에는 "핍박을 겸하여" 다 하였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들이 승리자들이 되었을 때에라도 그들은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당하는 자들임을 기억해야 한다. 그들이 천국에 이를 때까지는 핍박을 벗어나지를 못하는 것이다. 현제에서 복음을 받는 자들에게도 이 핍박이 따르는 것이다. 왜냐하면 복음이 우리에게 주어짐은 그리스도를 믿게하려는 것뿐만 아니라 예수의 이름으로 고난도 당하게 하기 위함인 것이다. 그러나 이것만이 다는 아니다. 

② 그들은 내세에 영생을 얻게 되는 것이다. 만일에 그들이 금세에서 백 배의 축복을 받으면 그들은 더 이상 감히 다른 축복을 기대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하기도 쉽다. 그러나 그들이 금세에서 받는 축복도 적은 듯이 영생의 축복을 받을 것을 말씀하시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주를 위해 버린 것의 만 배도 더 되는 축복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그리스도를 위해 모든 것을 버렸다고 너무 많이 말을 하고 실제로 그들이 한 것 보다 지나치므로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비록 그들이 처음으로 부름을 받았지만 그들 뒤에 제자로 부름을 받을 사람들이 있을 것이고 그들보다 더 나을 수 있다고 하시었다. 사도 바울을 보더라도 그는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 자였지만 다른 모든 사도들보다 더 많은 일을 한 것이다(고전 15:10). 그러므로 "먼저 된 자로서 나중되고 나중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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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벧후 1:1-11==((영생=구원=샬롬=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

1.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함께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2.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영생)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3.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5.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6.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7.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8.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9. 이런 것이 없는 자는 맹인이라 멀리 보지 못하고 그의 옛 죄가 깨끗하게 된 것을 잊었느니라

10.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하리라 

11.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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