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브라임 지파 에브라임은 야곱의 손자로, 온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과 요셉 사이에서 태어난 므낫세의 동생이다. 그러나 므낫세를 대신하여 장자의 기업을 이어간다. 그러므로 야곱의 기업은 에브라임을 통하여 이어진다. 에브라임 지파가 차지한 지역은 상당히 중요한 지역이다. 팔레스타인 전체에서 심장부와 같은 역할을 하는 지역이다. 그래서 에브라임을 이스라엘 전체를 대표하는 명칭으로도 종종 사용되어졌다. 에브라임은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나 첫째 아들의 복, 장자의 복을 받는다. 시작은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한다.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한 길이지만 그 과정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사랑을 선포하는 삶은 아니었다. 시작 못지않게 끝도 중요하다. 한 학기의 마무리를 하는 길목에 서서 나는 어떻게 시작하였고, 끝을 어떻게 준비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자. 에브라임과 그 지파의 삶을 살펴보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여 보자. ==에브라임의 출생과 교훈 (창 41:50)흉년이 들기 전에 요셉에게 두 아들을 낳되 곧 온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이 그에게 낳은지라 (창 41:51)요셉이 그 장자의 이름을 므낫세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나로 나의 모든 고난과 나의 아비의 온 집 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 함이요 (창 41:52)차자의 이름을 에브라임이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나로 나의 수고한 땅에서 창성하게 하셨다 함이었더라 요셉의 장자 출생 이야기에 이어 차자의 출생 이야기가 이어진다. 차자를 낳으면서 ‘나로 그 동안 고생하고 수고했던 이 땅에서 창성하게 하신다. 번영하게 하신다. 축복되데 하신다’고 고백하면서 둘째 아들의 이름을 ‘에브라임’이라고 짓는다. ‘에브라임’이라는 단어의 뜻은 ‘창성함’이다. 이 말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갑절로 열매가 맺어지게 되었다’는 뜻이다. 어두움의 세월이 지나고 광명한 세월이 도래하면서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을 통해서 요셉은 잊을 수 있는 은혜를 누렸다. 그 은혜 중에 둘째 아들을 낳은 것이다. 요셉이 애굽에서 110세를 사는 동안 에브라임의 자손 3대를 보았다. (창 50:23)에브라임의 자손 삼대를 보았으며 므낫세의 아들 마길의 아들들도 요셉의 슬하에서 양육되었더라 에브라임은 그 두 아들이 가드 사람의 짐승을 빼앗으려다 오히려 그들에게 피살되었으므로 몹시 비통해 하였다(대상 7:20-22). (대상 7:20-22) 20)에브라임의 아들은 수델라요 그 아들은 베렛이요 그 아들은 다핫이요 그 아들은 엘르아다요 그 아들은 다핫이요 21)그 아들은 사밧이요 그 아들은 수델라며 저가 또 에셀과 엘르앗을 낳았더니 저희가 가드 토인에게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저희가 내려가서 가드 사람의 짐승을 빼앗고자 하였음이라 22)그 아비 에브라임이 위하여 여러 날 슬퍼하므로 그 형제가 와서 위로하였더라 이것을 달리 해석하려는 사람들도 있다. 가드 사람들이 에브라임의 자녀들의 가축을 빼앗으려 했다는 것이다. 이는 성경의 무오성을 망각한 해석이다. 본문에 충실하게 읽는다면 에브라임의 자녀들이 악한 탐욕으로 인하여 망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들은 또 다시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교훈을 얻는다. 하나님은 우리들 모두가 겸손하게 항상 말씀 앞에서 살기를 원하신다. 조금만 방심하여도 곁길로 갈수 가능성을 가진 연약한 존재들이다. 탐욕은 우상숭배이다. 하나님 앞에서 내려놓자. 하나씩 포기할 수 있고, 버릴 수 있을 때 성도의 삶은 만족과 행복으로 채워지는 것이다. 광야 이동시 지도자는 암미훗의 아들 엘리사마였다(민 2:18). 바란 광야에서 가나안 정탐에는 이 지파의 대표자로서 유명한 눈의 아들 여호수아인데, 그 후부터 그 지파의 명성이 올라갔다(수 19:50, 24:30). (수 19:50)곧 여호와의 명령대로 여호수아의 구한 성읍 에브라임 산지 딤낫 세라를 주매 여호수아가 그 성읍을 중건하고 거기 거하였었더라······ (수 24:30)무리가 그를 그의 기업의 경내 딤낫 세라에 장사하였으니 딤낫 세라는 에브라임 산지 가아스산 북이었더라 지파의 지도자가 누구인가는 매우 중요하다. 아무리 불신과 좌절 속에 빠질 수 밖에 없는 상황일지라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고, 믿음의 세계로 이끌 지도자가 있다면 그것은 행복한 일이다. 에브라임 지파의 여호수아가 바로 그런 존재였다. 가나안 정탐 때에도 갈렙과 함께 믿음의 길을 믿음의 눈으로 내다 보았고, 그 꿈을 백성들과 나눌 줄 알았다. 뿐만 아니라 모세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후 백성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여 약속의 땅을 정복한 믿음의 지도자였다. 모든 사람이 낙망할 시점에 오히려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바른 길을 제시함으로 하나님의 믿음의 길을 보여준 것이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자신이 그런 위치에 설 수 있도록 기도하자. 믿음의 길이 승리의 길이다. ==에브라임에 대한 야곱의 축복 (창 48:17)요셉이 그 아비가 우수를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은 것을 보고 기뻐 아니하여 아비의 손을 들어 에브라임의 머리에서 므낫세의 머리로 옮기고자 하여 (창 48:18)그 아비에게 이르되 아버지여 그리 마옵소서 이는 장자니 우수를 그 머리에 얹으소서 (창 48:19)아비가 허락지 아니하여 가로되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 그도 한 족속이 되며 그도 크게 되려니와 그 아우가 그보다 큰자가 되고 그 자손이 여러 민족을 이루리라 하고 (창 48:20)그 날에 그들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이스라엘 족속이 너로 축복하기를 하나님이 너로 에브라임 같고 므낫세 같게 하시리라 하리라 하여 에브라임을 므낫세보다 앞세웠더라 요셉은 므낫세가 장자의 복을 받기 원한다. 그러나 야곱은 에브라임에게 장자의 축복을 한다. 요셉은 자신의 기대와 어긋난 것이기에 이를 기뻐할 수 없었다. 에브라임을 더 축복하셨다는 말은 므낫세를 축복하지 않았다는 말이 아니다. 그래서 야곱도 “나도 안다 그도 한 족속이 되고 그도 크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생각하면 요셉은 서운함이 있었을 것이다. 자신의 이름의 지파도 빠지고, 또 장남이 아니라 차남이 장자의 복을 받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좀 더 깊이 살펴보면 축복이다. 하나님은 에브라임을 더 크게 사용하셨지만 므낫세도 축복하셨으며, 요셉 대신 자신의 분신인 므낫세와 에브라임 두 지파를 12지파에 넣어 주심으로 장자의 복을 받게 하셨다. 때로 우리의 눈에 서운하고 마음에 들지 않은 일이 있을지라도 인간의 모든 삶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필요 적절한 은혜와 복을 베푸시며 인도해 가신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들은 질문할 수 있다. 왜 하나님은 에브라임을 더 크게 사용하셨을까?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라고 해석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지혜와 무궁하신 계획안에서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기로 작정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의 많은 경우에 어린 자를 들어서 더 크게 쓰시고, 형보다도 아우를, 능한 자보다도 무력한 자를 들어 쓰시는 이유가 있다.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과 영광을 선포하시려는 하나님의 의도로 해석할 수 있다. ==에브라임에 대한 모세의 축복 (신 33:16)땅의 보물과 거기 충만한 것과 가시떨기 나무 가운데 거하시던 자의 은혜로 인하여 복이 요셉의 머리에, 그 형제 중 구별한 자의 정수리에 임할지로다 (신 33:17)그는 첫 수송아지 같이 위엄이 있으니 그 뿔이 들소의 뿔 같도다 이것으로 열방을 받아 땅 끝까지 이르리니 곧 에브라임의 만만이요 므낫세의 천천이리로다 므낫세는 천천의 복을 받지만 에브라임은 만만의 복을 받는다. 창세기 마지막 부분을 보면 이스라엘 12지파에 대한 인구 조사가 실시된다. 백성들의 숫자를 계수할 때 에브라임 지파가 40,500명, 므낫세 지파가 32,000명이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시고, 예언하신 대로 에브라임 지파가 므낫세 지파보다 더 창성하게 발전해 간다. 주님은 예언하시고 행동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유의할 부분은 하나님은 우리를 다양하게 사용하신다는 것이다. 결코 에브라임을 축복받고, 므낫세는 축복을 받지 못했다는 형식으로 이해하면 안된다. 바울 사도는 디모데후서에서 하나님이 쓰시는 그릇들 가운데는 금 그릇도 있고, 은그릇도 있고, 나무그릇도 있고, 질그릇도 있다고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각각 여러 가지 다양한 재능을 주시고, 각각 다르게 사용하시는 분이시다. 그런데 우리들은 내가 왜 은그릇이어야 하느냐, 금그릇으로 사용되지 못하여 불평하는 경우가 있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있는 모습 그대로 사용하신다.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인이 쓰실 수 있도록 자신을 깨끗하게 준비하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그릇이라 할지라도 더러우면 주인의 손에 쓰임 받을 수 없다. 옆의 사람이 가진 것을 비교하면서 불평하기보다 내게 주신 은혜에 감사하며 섬겨야 한다. 에브라임의 잘못들에게 대해 몇 가지 묵상할 것이 있다. 첫째, 에브라임은 우상숭배의 대명사가 되었다. 솔로몬이 죽고 난 뒤 왕국은 분열되었으며, 그때로부터 에브라임의 역사는 이스라엘 왕국의 역사가 되었다. 첫 번째 임금인 여로보암은 에브라임 족속이었다(왕상 11:26). 르호보암의 손에서 나라를 찢어내어 열 지파를 여로보암에게 주신 분은 하나님이셨다(왕상 11:29-31). 여로보암이 하나님과 동행했다면 이스라엘의 역사가 달라졌을 것이다. 여로보암은 금 송아지를 만들어 벧엘과 단에 세움으로 이스라엘에 우상 숭배 제도를 세웠다. 여호와께서 경고의 기별을 보내시고 왕의 앞에서 이적까지 행하였으나(왕상 13:1-6), 여로보암은 악한 길에서 떠나지 않았다(왕상 13:33). (왕상 13:1-6) 1)때에 하나님의 사람이 여호와의 말씀으로 인하여 유다에서부터 벧엘에 이르니 마침 여로보암이 단 곁에 서서 분향하는지라 2)하나님의 사람이 단을 향하여 여호와의 말씀으로 외쳐 가로되 단아 단아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다윗의 집에 요시야라 이름하는 아들을 낳으리니 저가 네 위에 분향하는 산당 제사장을 네 위에 제사할 것이요 또 사람의 뼈를 네 위에 사르리라 하셨느니라 하고 3)그 날에 저가 예조를 들어 가로되 이는 여호와의 말씀하신 예조라 단이 갈라지며 그 위에 있는 재가 쏟아지리라 하매 4)여로보암 왕이 하나님의 사람의 벧엘에 있는 단을 향하여 외쳐 말함을 들을 때에 단에서 손을 펴며 저를 잡으라 하더라 저를 향하여 편 손이 말라 다시 거두지 못하며 5)하나님의 사람의 여호와의 말씀으로 보인 예조대로 단이 갈라지며 재가 단에서 쏟아진지라 6)왕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말하여 가로되 청컨대 너는 나를 위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여 내 손으로 다시 성하게 기도하라 하나님의 사람이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니 왕의 손이 다시 성하여 전과 같이 되니라······ (왕상 13:33)여로보암이 이 일 후에도 그 악한 길에서 떠나 돌이키지 아니하고 다시 보통 백성으로 산당의 제사장을 삼되 누구든지 자원하면 그 사람으로 산당의 제사장을 삼았으므로 우상숭배는 에브라임의 큰 죄악이었으며, 멸망의 원인이었다. (호 7:8)에브라임이 열방에 혼잡되니 저는 곧 뒤집지 않은 전병이로다 (호 9:17)저희가 듣지 아니하므로 내 하나님이 저희를 버리시리니 저희가 열국 가운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에브라임을 사랑하신다. (호 11:8)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아서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호 8:12)내가 저를 위하여 내 율법을 만가지로 기록하였으나 저희가 관계 없는 것으로 여기도다 오늘날 세상에는 에브라임이 걸었던 것과 같은 길을 걷는 우상숭배자들이 많이 있다. 현대인들은 금전, 부, 편리함, 쾌락, 명예, 지위 등등을 섬긴다. 하나님께서 부르시지만 그들은 우상과 합하여 나아간다. 성도의 교제보다 세속적인 사교가 더 즐겁게 여겨진다. 거룩한 나라, 왕 같은 제사장,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으로 부름 받은 우리들은 정말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사랑하며 살고 있는가? 에브라임처럼 우상숭배하고 있는 부분은 없는가? 에브라임 이후 북 이스라엘 왕국은 대부분은 악한 왕들로 하나님의 법을 떠나 살았다. 한 사람의 길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경험하는 순간이다. 바로 내가 중요함을 기억하자. 둘째로, 에브라임 지파는 시기심을 품고 남의 성공을 헐뜯는 병폐가 있었다. 에브라임 지파 사람들은 입다에게 암몬 자손과 싸우러 갈 때 자신들을 청하지 않았다고 불평하며, 그의 집을 사르겠다고 위협했다. 입다는 도움을 요청해도 에브라임 사람들이 응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에브라임의 이런 말 때문에 입다를 따르던 사람들은 심히 격분했다. 마침내 입다는 길르앗 사람을 다 모아 에브라임과 싸워 파하였다. 도망치는 에브라임 사람들을 자기 신분을 숨기고 에브라임 사람이 아닌 척 하였다. 그때 길르앗 사람은 발음을 통하여 식별하였다. 그들은 히브리 발음도 제대로 못하는 부끄러운 자로 죽임을 당하였다. (삿 12:6)그에게 이르기를 십볼렛이라 하라 하여 에브라임 사람이 능히 구음을 바로 하지 못하고 씹볼렛이라 하면 길르앗 사람이 곧 그를 잡아서 요단 나루턱에서 죽였더라 그 때에 에브라임 사람의 죽은 자가 사만 이천명이었더라 진실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의 잘됨을 배 아파 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돌아보게 한다. 만약 에브라임처럼 하나님이 심판하신다면 우리들은 어떻게 될까 생각해 본다. ==에브라임 지파를 상징하는 보석 (출 28:19)세째 줄은 호박 백마노 자수정이요 에브라임 지파를 상징하는 보석은 호박(ligure)이다. 고대 보석에 대한 정보를 보면 이 보석을 깎기가 대단히 어려웠다고 한다. 그래서 오랫동안 정성을 다해 깎아야 하며, 또한 깎고 다듬을수록 더 아름다운 광채를 발하는 황금색 보석이다. 고난의 밤이 지난 다음에 축복의 새벽은 다가오는 것이다. 호박이라는 보석이 채석하기 어렵고, 깎기 어렵지만 다듬어 놓으면 아름다운 광채를 발하는 것처럼 고난의 밤을 지난 사람들에게는 영광스러운 새벽이 주어진다는 사실을 교훈해 준다. ==그러면, 에브라임 지파가 우리들에게 주는 영적 교훈은 무엇인가? 이 보석은 한번 다듬어 놓으면 그 다음에 귀하게 쓰임을 받는다. 본래 에브라임은 동생이었다. 그는 어려운 조건에서 인생을 출발했다. 그러나 형보다 더 존귀하게 쓰임을 받았던 에브라임은 오늘 우리의 삶의 출발이 가난하고 연약하고 불우한 환경에서 시작할지라도 하나님이 사용하시면 귀하게 쓰임 받을 수 있으면 교훈 받는다. 내게 남들보다 좋은 조건을 갖지 못하고, 내가 남들보다 탁월한 것들이 없다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불평하거나 낙심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에브라임을 쓰신 하나님이 곧 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어려운 환경을 갈고 닦아서 호박같이 귀히 쓰임 받는 존재로 쓰실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자. 나는 누구인가? 어떤 모습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가?
므낫세 지파 므낫세는 요셉의 아들이다. 므낫세와 에브라임 대신 야곱의 아들인 요셉을 다루어야 할 것 같다. 그러나 요셉 대신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다루는 중요한 이유는 요셉에게 장자의 복을 누리기 때문이다. 지파도 그 아들인 므낫세와 에브라임이 각각 한 지파씩 형성하여 장자의 복을 누린다. 므낫세 지파는 요단강을 중심으로 양쪽으로 나누어 진다. 성경을 읽어보면 ‘므낫세 반 지파’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하는데 두 지역 중 한 지역만 언급할 때 이런 표현을 쓰고 있는 것이다. 므낫세 지파는 광범위한 지역을 차지하면서 발전해 나간다. 므낫세 지파의 별명은 ‘나무’이다. 요단강을 중심으로 양쪽으로 발전해간 지파로 좌우로 퍼져나간 모양이 나무 가지처럼 되어 있기에 붙여진 별명이다. 이제 므낫세와 그 지파의 삶을 살펴보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여 보자. ==므낫세의 출생과 교훈 (창 41:46)요셉이 애굽 왕 바로 앞에 설 때에 삼십세라 그가 바로 앞을 떠나 애굽 온 땅을 순찰하니 (창 41:47)일곱해 풍년에 토지 소출이 심히 많은지라 (창 41:48)요셉이 애굽 땅에 있는 그 칠년 곡물을 거두어 각성에 저축하되 각성 주위의 밭의 곡물을 그 성중에 저장하매 (창 41:49)저장한 곡식이 바다 모래 같이 심히 많아 세기를 그쳤으니 그 수가 한이 없음이었더라 (창 41:50)흉년이 들기 전에 요셉에게 두 아들을 낳되 곧 온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이 그에게 낳은지라 (창 41:51)요셉이 그 장자의 이름을 므낫세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나로 나의 모든 고난과 나의 아비의 온 집 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 함이요 (창 41:52)차자의 이름을 에브라임이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나로 나의 수고한 땅에서 창성하게 하셨다 함이었더라 요셉은 두 아들의 이름을 아주 논리적으로 지었다. 첫 아들은 므낫세, 둘째는 에브라임이다. 므낫세는 ‘잊어버림’, 에브라임을 ‘창성함’이라는 뜻이다. 잊어버려야 그 다음 축복이 다가온다. 고난과 역경과 원망스러웠던 일, 실패의 경험이 있는 사람이 과거에만 묶여 있다면 그 사람은 앞을 향해 나아갈 수 없다. 요셉은 첫 아들을 낳으면서 하나님이 자신의 아픈 과거를 잊게 만드시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아들을 낳자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모든 고난과 아비의 온 집 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는 의미에서 ‘므낫세’라는 이름을 짓는다. 요셉의 이 고백은 매우 의미 심장한 고백이다. 이 아들을 낳기까지 요셉은 많은 고통과 역경과 아픔과 눈물과 배신, 오해 등을 경험해야 했다. 지금까지 힘든 험난한 길을 걸어왔다. 이제 므낫세를 낳으면서 서서히 광명의 빛이 돋아나기 시작한다. 이런 환경에서 요셉의 고백은 다른 한편으로 요셉의 기대이다. 신앙고백이다. 다른 사람이 아닌 형제에게 당했던 그 고난과 박해와 억울한 사연들은 쉽게 잊혀지지 않을 아픔이다. 환경과 조건이 좋아질 때, 새로운 시대가 펼쳐질 때 요셉은 ‘이제야말로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나를 과세하고 나를 박대했던 형제들에게 복수할 좋은 기회를 주셨다’고 말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요셉의 고백은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로 나의 모든 고난과 아비의 온 집안 일을 이제는 잊어버리게 하셨다’이다. 여기에서 용서의 의미를 생각한다. 용서란 잊어버리는 것이다. 누가 나에게 잘못한 과오를 내가 잊을 수가 있다면, 내가 그 사람을 정말 용서해 가고 있는 것이다. 요셉도 이미 그런 일들을 잊어버리고 있었기에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용서하는 요셉의 모습은 창세기 45장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창 45:4)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그들이 가까이 가니 가로되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창 45:5)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 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요셉은 자신의 생명을 앗아가려 했던 형제들의 행동을 하나님의 섭리의 관점에서 해석하며 모든 것을 용서하고 있다. 삶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어떠한지 돌아보게 만드는 부분이다. 삶을 대하는 요셉의 태도는 한마디로 삶 전체를 하나님의 섭리라는 커다란 관점에서 보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들의 인생을 해석할 수 있는 실마리를 얻게 된다. 모든 일을 하나님의 섭리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다. 그러면 이렇게 고백할 수 있다. (롬 8:28)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시다. 요셉은 억울한 일을 당하면서도 한 번도 불평했다는 성경을 기록을 찾을 수 없다. 왜냐하면 요셉은 그 모든 삶의 경험들을 하나님의 섭리라는 관점에서 해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는 참새 한 마리도 땅에 떨어지지 않음을 믿었던 것이다. 잊어버린 다음 새로운 역사는 시작된다. 잊어버림의 축복에 대해 생각하자. 그리스도인은 현재에 살아야 한다. 과거 속에서 사는 삶은 불행하다. (빌 3:13)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빌 3:14)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우리가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좇아가기 위해서는 뒤에 있는 것을 잊어야만 한다. 경주장에서 달리는 선수가 자꾸 뒤를 돌아본다면 이 사람을 목표를 향해 잘 달릴 수 없다. 그래서 바울은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린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뒤에 있는 실패 만이 아니라 성공도 잊어야 한다. 과거의 성공에 도취되어 있으면 현재의 삶이 무력해 질 수 밖에 없다. 과거를 잊어야 미래를 향해 떠날 수 있다. 므낫세는 문자적으로 ‘잊어버림’이라는 뜻이다. 재미있는 것은 므낫세가 장자(長子)이나 장자의 복을 누리지 못한다. 차자(次子)인 에브라임이 장자의 복을 받는다. 야곱과 에서의 사건이 생각난다. 결국 역사가 다시 반복됨을 경험한다. 부모의 생활태도가 얼마나 중요한지 이런 측면에서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우리의 행동이 자녀들에게 그대로 복사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므낫세 대신 에브라임이 장자의 축복을 받았기 때문에 므낫세는 저주 받은 것인가? 반문하지 말아야 한다. 므낫세는 므낫세대로 축복을 받았다.에서, 야곱의 경우와는 다르다. 에서는 자신의 실수로 장자의 특권을 빼앗기지만 므낫세는 그렇지 않다. 므낫세 나름을 복을 주셨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장자의 복을 강조하는 것은 그 장자권의 계보를 통하여 후일 메시야가 구세주로 오시게 됨으로 장남의 축복을 중요시했던 것이다. ==므낫세에 대한 야곱의 축복 (창 48:10)이스라엘의 눈이 나이로 인하여 어두워서 보지 못하더라 요셉이 두 아들을 이끌어 아비 앞으로 나아가니 이스라엘이 그들에게 입 맞추고 그들을 안고 (창 48:11)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네 얼굴을 보리라고는 뜻하지 못하였더니 하나님이 내게 네 소생까지 보이셨도다 (창 48:12)요셉이 아비 무릎 사이에서 두 아들을 물리고 땅에 엎드려 절하고 (창 48:13)우수로는 에브라임을 이스라엘의 좌수를 향하게 하고 좌수로는 므낫세를 이스라엘의 우수를 향하게 하고 이끌어 그에게 가까이 나아가매 (창 48:14)이스라엘이 우수를 펴서 차자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고 좌수를 펴서 므낫세의 머리에 얹으니 므낫세는 장자라도 팔을 어긋맞겨 얹었더라 (창 48:15)그가 요셉을 위하여 축복하여 가로되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의 섬기던 하나님, 나의 남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 (창 48:16)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사자께서 이 아이에게 복을 주시오며 이들로 내 이름과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의 이름으로 칭하게 하시오며 이들로 세상에서 번식되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여기에서 이스라엘은 야곱을 가리키는 말이다. 야곱이 하나님께 새롭게 받은 이름이다. 요셉은 아버지가 오른 손을 얹어 장자 므낫세를 축복해 주기를 원한다. 그러나 야곱은 오른손을 차자의 머리에 얹었다. 요셉의 기대는 무너졌다. 그러나 이런 행동 속에는 하나님의 소중한 뜻과 놀라운 섭리가 담겨있다. 에브라임 지파를 연구하면서 더욱 자세히 살펴보자. 야곱은 요셉과 그의 두 아들을 만난 감격을 떠올리며 감격속에서 요셉의 두 아들을 축복한다. 15)...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의 섬기던 하나님, 나의 남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 16) 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사자께서 이 아이에게 복을 주시오며 이들로 내 이름과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의 이름으로 칭하게 하시오며 이들로 세상에서 번식되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자신의 삶을 인도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심정을 토로하며 손자들을 축복한다. 사실 므낫세 지파은 후일에 유다 지파 다음으로 많은 인구로 늘어난다. ==므낫세에 대한 모세의 축복 (신 33:16)땅의 보물과 거기 충만한 것과 가시떨기 나무 가운데 거하시던 자의 은혜로 인하여 복이 요셉의 머리에, 그 형제 중 구별한 자의 정수리에 임할지로다 (신 33:17)그는 첫 수송아지 같이 위엄이 있으니 그 뿔이 들소의 뿔 같도다 이것으로 열방을 받아 땅 끝까지 이르리니 곧 에브라임의 만만이요 므낫세의 천천이리로다 들소의 뿔에 대한 말씀은 장차 이 지파가 어떤 모습으로 팔레스타인 지역을 담당하면서 발전해 갈 것인가를 예언하고 있는 말씀이다. 요단강을 중심으로 해서 나뭇가지처럼 혹은 들소의 뿔처럼 양쪽으로 므낫세와 에브라임 지파가 뻗어나갈 것에 대한 예언이다. ‘에브라임의 만만이요, 므낫세의 천천이리로다’는 말씀에서 에브라임이 더 많은 축복을 받을 것임을 알수 있다. 왜 므낫세가 에브라임보다 더 적은 복을 받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이에 대해 므낫세는 불평하지 않는다. 므낫세는 자신 나름의 축복을 받으면서 발전해 갈 수 있었다. 여기에 므낫세가 남긴 소중한 교훈이 있다. 하나님이 내가 아닌 남을 더 축ㅂ고하실 때에 나는 하나님의 섭리를 신뢰하면서 나에게 허락하신 모든 환경을 하나님의 뜻으로 겸허하게 받아드리는 자세가 중요하다. 그래서 므낫세는 축복을 받는다. 역사가 흐를수록 므낫세 지파가 점점 더 발전해 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모세의 예언적 축복처럼 마치 첫 수송아지의 위엄처럼 역사가 흘러갈수록 므낫세 지파는 점점 더 강성해 진다. 그리고 더 아름다워져 간다. 우리 주변에서 하나님이 나보다 더 많은 축복을 다른 사람에게 베풀어 주실 때에 그것을 질투함 없이 받아들이며 자기 몫의 삶을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게 살아가는 자세의 소중함을 배울 수 있다. 자신을 돌아보자. 하나님 앞에서 나에게 주어진 몫에 감사하며 신실하게 이루어 가고 있는가? ==므낫세 지파를 상징하는 보석 (출 28:19)세째 줄은 호박 백마노 자수정이요 므낫세 지파를 상징하는 보석은 백마노이다. 백마노는 영어로 agate라고 한다. 보석 사전에 의하면 이 보석은 강철보다 강하다고 한다. 특별히 이 보석의 특징은 녹이 나지 않기 때문에 오래 둘수록 더 좋은 보석이라고 한다. 므낫세 지파의 운명과도 잘 연결된다. 오래 두면 둘수록 좋아지고, 날이 갈수록 좋아지는 것과 므낫세 지파은 연결된다.므낫세 지파는 날이 갈수록 더 발전해 갔다. 이 보석은 고대 중동지방 중에 시실리(Sicily) 섬을 중심으로 이 보석이 많이 채석되었다고 한다. 이 보석의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는 채석된 상태 그대로는 절대로 사용할 수가 없는 보석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이 보석은 잘라서 갈고 다듬을수록 더욱 찬란한 빛을 발했으며 바로 이러한 점이 백마노라는 보석의 특징이다. 채석된 상태로는 거칠어서 오래 다듬고 다듬어야 진가를 발휘하는 백마노 같은 므낫세 지파는 우리에게 좋은 교훈을 준다. 둘째로 므낫세 지파는 개혁에 많은 관심과 동참을 하였다. 자신을 깎고 닦아서 찬란한 빛을 내게 하는 개혁에 동참하여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드러낸 지파이다. 므낫세 지파는 수도로부터 멀리 떨어지고, 성전으로부터 원거리에 있었으며, 북방 왕국에 소속되어 있었지만 유다의 선한 왕들에 의해 일어난 신앙 개혁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아사 왕이 우상을 부수고 여호와게 대한 예배를 새롭게 하였을 때 므낫세 지파 가운데 ‘아상의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심을 보고 아사에게 돌아오는 자가 많았다’(대하 15:8-9). (대하 15:8)아사가 이 말 곧 선지자 오뎃의 예언을 듣고 마음을 강하게 하여 가증한 물건을 유다와 베냐민 온 땅에서 제하고 또 에브라임 산지에서 빼앗은 성읍들에서 제하고 또 여호와의 낭실 앞 여호와의 단을 중수하고 (대하 15:9)또 유다와 베냐민의 무리를 모으고 에브라임과 므낫세와 시므온 가운데서 나와서 저희 중에 우거하는 자를 모았으니 이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고 아사에게로 돌아오는 자가 많았음이더라 유다 왕 히스기야가 유월절 잔치를 베풀었을 때 므낫세 지파로부터 대표자들이 와서 심령을 겸비케 하고 유월절에 참여하였다(대하 30:1,10,11,18). 또한 그들이 거하는 지방에서 우상을 제거하는 일에도 참여하였다(대하 31:1). 요시야 당시에 있었던 개혁 운동도 역시 므낫세 지방까지 미쳤다.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관심을 잃지 않고 므낫세와 아몬 당시에 더럽혀졌던 성전의 재건을 위해 그들의 재산을 헌납했다(대하 34:9). 가나안에 정착한 후에는 므낫세 지파에 관한 기록이 거의 없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여기 저기 조금씩 표현된 기록들은 그들이 항상 그의 주를 공경하려는 열망으로 가득 차 있었음을 시사해 주고 있다. 다윗이 사울을 대항하여 블레셋 편으로 싸우러 나갔을 때, 므낫세 지파로부터 많은 병사들이 다윗에게 가담하였다. 그러나 블레셋 사람들이 다윗이 전쟁에 나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때 시글락에 있던 다윗에게 합세한 므낫세의 강한 용사들의 대장이 일곱 명이나 잇었다. 그들은 다윗을 도와 다윗의 가족들을 붙잡아 간 잔당을 쳤는데 ‘다 큰 군대요 군대 장관’이었다(대상 12:19-22). (대상 12:19)다윗이 전에 블레셋 사람과 함께 가서 사울을 치려 할 때에 므낫세 지파에서 두어 사람이 다윗에게 돌아왔으나 다윗 등이 블레셋 사람을 돕지 못하였음은 블레셋 사람의 방백이 서로 의논하고 보내며 이르기를 저가 그 주 사울에게로 돌아가리니 우리 머리가 위태할까 하노라 함이라 (대상 12:20)다윗이 시글락으로 갈 때에 므낫세 지파에서 그에게로 돌아온 자는 아드나와 요사밧과 여디아엘과 미가엘과 요사밧과 엘리후와 실르대니 다 므낫세의 천부장이라 (대상 12:21)이 무리가 다윗을 도와 적당을 쳤으니 저희는 다 큰 용사요 군대 장관이 됨이었더라 (대상 12:22)그 때에 사람이 날마다 다윗에게로 돌아와서 돕고자 하매 큰 군대를 이루어 하나님의 군대와 같았더라 가장 위대한 사사 기드온은 므낫세 지파였다. 기드온은 요단 서편에서 나온 유일한 사사 시대의 용사이다. 동쪽에 자리잡은 반 지파는 서편의 반 지파보다는 더 호전적이었다. 이는 가나안 정복과정에서 서편지파는 보다 일찍 정착을 하였으나 동편의 지파는 정복의 과정동안 함께 싸움에 동참했다. 싸움에 동참함이 호전적 성격으로 변화시큰 주된 요인은 아니다. 그러나 중요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러면, 므낫세 지파가 우리들에게 주는 영적 교훈은 무엇인가? 무엇보다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환경을 불평이나 원망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자세를 배우는 것이다. 때때로 하나님은 나와 가까이 살고 있는 주변의 사람들을 나보다도 더 많이 축복하실 때가 있다. 그때에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께 묻고 싶어 한다. “하나님, 저 사람보다 내가 여러 가지 상황으로 보아도 그 축복은 당연히 저에게 와야만 하는 것인데, 왜 내게는 그런 축복을 거두시고 저 사람에게만 축복을 내리십니까?” 이런 태도는 우리의 마음에 원망을 심는다. 불평을 심는다. 우리의 인생을 비판의 심연 속으로 들어가게 한다.이럴 때 므낫세 지파는 우리들에게 좋은 교훈을 준다. 세월이 거듭 될수록 더 귀하게 쓰임을 받는 지파이다
베냐민 지파 야곱의 12 아들 중 막내 아들이다. 라헬의 몸에서 요셉의 동생으로 태어났다. 그의 출생지에 대해 창세기 35:16은 에브랏 부근이라고 하고, 창 35:22-26에서는 밧단아람이라고 하였다. 라헬은 베냐민을 낳으면서 죽었다. 베냐민은 요셉과 더불어 야곱의 편애를 받았다. 요셉을 잃은 후 야곱의 편애는 베냐민에게 더욱 집중되었다. 그러나 요셉과는 달리 이복 형제들의 사랑도 어려서부터 한 몸에 받으면서 자랐다. 어머니 없이 자란 아이에 대한 지극한 사랑은 그 형제들이 애굽으로 갈 때 동행을 허락하지 않은 야곱의 모습에서도 찾을 수 있다.(창 42:38) (창 42:38)야곱이 가로되 내 아들은 너희와 함께 내려가지 못하리니 그의 형은 죽고 그만 남았음이라 만일 너희 행하는 길에서 재난이 그 몸에 미치면 너희가 나의 흰 머리로 슬피 음부로 내려가게 함이 되리라 그가 애굽으로 갈 때 자주 그를 ‘아이’(창 43:8)라고 부르지만, 기록에 따르면 그때 그는 이미 열 아들의 아버지였다(창 46:21). (창 43:8)유다가 아비 이스라엘에게 이르되 저 아이를 나와 함께 보내시면 우리가 곧 가리니 그러면 우리와 아버지와 우리 어린 것들이 다 살고 죽지 아니하리이다 (창 46:21)베냐민의 아들 곧 벨라와 베겔과 아스벨과 게라와 나아만과 에히와 로스와 뭅빔과 훕빔과 아릇이니 부모에게는 아이가 아무리 커도 아이로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할머니들을 보면 항상 아버지를 볼 때 ‘내 새끼, 아가’란 말을 서슴지 않고 사용하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이는 사랑의 표현이다. 베냐민은 아버지 야곱의 특별한 사랑을 받고 자란 것이다. 베냐민과 그 지파가 살았던 지역은 유다와 에브라임 지파 사이에 있는 지역이다. 이곳은 사해 바다 바로 위에 예루살렘과 베들레헴이 있는 곳이다. 실제 팔레스타인 자체에서 큰 지역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이곳은 대단히 중요한 지역으로서 팔레스타인의 정치, 사회, 군사적 요새지를 베냐민 지파가 점령하면서 확장되어 나간다. 그런 점에서 베냐민 지파가 차지하는 역할은 상당히 크다고 말할 수 있다. 이제, 베냐민과 그 지파의 삶을 살펴보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여 보자. ==베냐민의 출생과 교훈 (창 35:16-20) 16)그들이 벧엘에서 발행하여 에브랏에 이르기까지 얼마 길을 격한 곳에서 라헬이 임산하여 심히 신고하더니 17)그가 난산할 즈음에 산파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 말라 지금 그대가 또 득남하느니라 하매 18)그가 죽기에 임하여 그 혼이 떠나려할 때에 아들의 이름은 베노니라 불렀으나 그 아비가 그를 베냐민이라 불렀더라 19)라헬이 죽으매 에브랏 곧 베들레헴 길에 장사되었고 20)야곱이 라헬의 묘에 비를 세웠더니 지금까지 라헬의 묘비라 일컫더라 베냐민의 이름은 어머니에 의해 처음 ‘베노니’라고 붙여졌으나, 아버지에 의해 ‘베냐민’으로 수정되어 불린다. 여기에는 슬픈 이야기가 담겨있다. 야곱에 사랑했던 라헬이 임신하여 기쁨으로 부풀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말할 수 없는 난산의 아픔과 고통을 겪으며 아들을 낳았지만, 그 출산이 라헬에게는 인생의 마지막이 되었다. 그래서 야곱은 베들레헴으로 가는 길에 라헬을 장사지낸다. 자녀를 낳을 수 없는 아픔 가운데 첫 아들 요셉을 얻었다. (창 30:22-24) 22)하나님이 라헬을 생각하신지라 하나님이 그를 들으시고 그 태를 여신 고로 23)그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가로되 하나님이 나의 부끄러움을 씻으셨다 하고 24)그 이름을 요셉이라 하니 여호와는 다시 다른 아들을 내게 더하시기를 원하노라 함이었더라 어렵게 요셉을 얻었다. 그런데 그 요셉의 이름의 뜻이 무엇인가? 라헬의 마음 속에 다시 다른 아들을 하나님이 더해 주시기 원하는 마음으로 이름을 지었다. 만일 이때 요셉 하나로 라헬이 만족했더라면 그녀의 목숨을 보존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도 해본다. 라헬의 죽음은 지나친 과욕이 가져온 비극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은 인간이 조르면 많은 경우에 그것을 주신다. 그러나 구에게 그것을 허락하시지만 그것이 최선이 아닌 경우도 종종 있다. 그래서 우리들은 하나님의 뜻에 집중해야 한다. 하나님의 뜻에 나의 뜻을 맞추어야 한다. 라헬이 임신하여 길을 가다가 갑자기 진통이 시작되어 난산 끝에 베냐민을 얻는다. 그래서 라헬은 죽음의 면전에서 그 아들의 이름은 ‘베노니’, 즉 ‘슬픔의 아들’이라고 부른다. 어머니는 그렇게 불렀을지라도 야곱은 그렇게 부르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 베냐민, 즉 ‘오른 손의 아들’이라고 부른다. 오른 손은 일반적으로 힘을 상징한다. 비록 아내를 잃었지만 슬픔을 딛고 일어서서 ‘아주 씩씩하고 강하고, 또 힘 있는 아들’이 되어달라고 기대하며 ‘베냐민’이라는 이름을 짓고 있는 것이다. ==베냐민에 대한 야곱의 축복 (창 49:27) 베냐민은 물어 뜯는 이리라 아침에는 빼앗은 것을 먹고 저녁에는 움킨 것을 나누리로다 베냐민의 별명은 ‘이리’이다. 얼른 생각하면 이런 별명을 좋지 않게 느껴진다. 그것은 ‘이리, 늑대, 여우’라는 동물의 이미지가 우리들의 생각과 다름을 전제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런 이미지는 동물들의 맹렬한 기상, 목표를 쟁취하기 위해서 앞을 향해 나아가는 공격적인 성격들을 상징할 때 사용한 이미지이다. 이 동물들은 체구가 대단히 작으면서도 아주 강인하고 힘이 세고, 목표를 잘 성취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는 동물들이다. ‘아침에는 빼앗은 것을 먹고’라는 말은 어떻게 해서든지 목표한 것을 이루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 ‘저녁에는 움킨 것을 나누어 준다’는 말씀은 목표한 것을 이룬 후에 그것을 나눈다는 것을 말씀은 보여 준다. 이 말은 샘이 많은 성격을 묘사한다기보다는 어린 아이가 고집을 부리거나 시샘을 하여 토라지는 것 같은 버릇없음을 말한다. 이런 일은 많은 식구 중에 가장 막내둥이에게 흔히 있는 일로 어머니도 달래기가 힘든 것이다. 이런 어리석은 정신은 그들이 거의 전멸되기까지 싸울 때, 베냐민 지파에게 잘 드러났는데, 그들은 오히려 기브아의 악한 사람들을 도로 놓아줌으로 징벌을 당했던 것이다(삿 20:12-48). 이로 인하여 그들의 숫자는 600 명으로 줄어들었으나 다윗의 시대에 와서는 다시 상당한 수의 지파가 되었다(대상 7:6-12). 사사 시대의 베냐민 족속은 "물매로 돌을 던지면 호리도 틀림없는" 사람들 칠백 명을 배출할 수가 있었다(삿 20:16). (삿 20:16)이 모든 백성 중에서 택한 칠백명은 다 왼손잡이라 물매로 돌을 던지면 호리도 틀림이 없는 자더라 약 350 년 후에 베냐민 족속의 사람 가운데 "활을 가지며 좌우 손을 놀려 물매도 던지며 살도 발하는" 자들이 있었다(대상 12:1-2). (대상 12:1)다윗이 기스의 아들 사울을 인하여 시글락에 숨어 있을 때에 그에게 와서 싸움을 돕는 용사 중에 든 자가 있었으니 (대상 12:2)저희는 활을 가지며 좌우 손을 놀려 물매도 던지며 살도 발하는 자요 베냐민 지파 사울의 동족인데 그 이름은 이러하니라 베냐민 족속은 특수한 목적으로 궁술을 익혔으며, 활과 물매를 사용할 줄 아는 기술이 뛰어나 찬양을 받은 유일한 족속이었다(대상 8:40; 대하 17:17; 삼하 1:22). (대상 8:40)울람의 아들은 다 큰 용사요 활을 잘 쏘는 자라 아들과 손자가 많아 모두 일백 오십인이었더라 베냐민의 자손들은 이러하였더라 (대하 17:17)베냐민에 속한 자 중에 큰 용사 엘리아다는 활과 방패를 잡은 자 이십만을 거느렸고 (삼하 1:22)죽은 자의 피에서, 용사의 기름에서 요나단의 활이 물러가지 아니하였으며 사울의 칼이 헛되이 돌아오지 아니하였도다 베냐민의 영토는 유다의 북쪽에 있는데, 두 지파 사이에 놓여진 경계선이 예루살렘 도성을 지나가고 있었다. 기브아에서 불행한 처신의 결과로 위기를 맞은 이후로(삿 19:14-39), 그 지파가 가지고 있던 완고하고 고집불통이었던 성격이 변화된 증거들을 많이 볼 수 있다. 하나님의 거룩한 법궤가 20 년 동안이나 그들의 지경인 기럇-여아림에 있었는데, 그곳에서 한 제사장이 그 법궤를 돌보고 있었다(삼상 7:1-2). 라마는 베냐민의 도시로, 이곳은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희생을 드렸던 선지자 사무엘의 고향이다. 사무엘은 "해마다 벧엘과 길갈과 미스바를 순회하여 그 모든 곳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렸고, 라마로 돌아왔"다(삼상 7:15-17). 이스라엘의 많은 군중이 모였던 미스바는 베냐민의 지경 안에 있었다(삿 20:1; 왕하 25:23). 여기서 여호와께서 무서움에 떠는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셨다. "그 날에 여호와께서 블레셋 사람에게 큰 우뢰를 발하여 그들을 어지럽게 하시니, 그들이 이스라엘 앞에 패한지라"(삼상 7:5-11). 그러면 이런 야곱의 예언적 축복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생각해 보자. 사사기에 나오는 베냐민 출신의 에훗은 이런 베냐민지파에 대한 예언적 성취를 보여준다. (삿 3:15-22) 15)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한 구원자를 세우셨으니 그는 곧 베냐민 사람 게라의 아들 왼손잡이 에훗이라 이스라엘 자손이 그를 의탁하여 모압 왕 에글론에게 공물을 바칠 때에 16)에훗이 장이 한 규빗 되는 좌우에 날선 칼을 만들어 우편 다리 옷 속에 차고 17)공물을 모압 왕 에글론에게 바쳤는데 에글론은 심히 비둔한 자이었더라 18)에훗이 공물 바치기를 마친 후에 공물을 메고 온 자들을 보내고 19)자기는 길갈 근처 돌 뜨는 곳에서부터 돌아와서 가로되 왕이여 내가 은밀한 일을 왕에게 고하려 하나이다 왕이 명하여 종용케 하라 하매 모셔 선 자들이 다 물러간지라 20)에훗이 왕의 앞으로 나아가니 왕은 서늘한 다락방에 홀로 앉아 있는 중이라 에훗이 가로되 내가 하나님의 명을 받들어 왕에게 고할 일이 있나이다 하매 왕이 그 좌석에서 일어나니 21)에훗이 왼손으로 우편 다리에서 칼을 빼어 왕의 몸을 찌르매 22)칼자루도 날을 따라 들어가서 그 끝이 등뒤까지 나갔고 그가 칼을 그 몸에서 빼어내지 아니하였으므로 기름이 칼날에 엉기었더라 이 말씀을 통해 엿볼 수 있는 에훗의 모습은 물어 뜯는 이리,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서 잔인하게 도전하는 행동이다. 야심만만한 혈기로 가득한 듯 하지만 에훗은 이스라엘 민족을 구출한다. 즉, 자신이 가진 성격적 장점을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 사용한 것이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도 베냐민 지파 출신이었다. (삼상 9:21)사울이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이스라엘 지파의 가장 작은 지파 베냐민 사람이 아니오며 나의 가족은 베냐민 지파 모든 가족 중에 가장 미약하지 아니하니이까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이같이 말씀하시나이까 베냐민 지파가 차지한 땅은 별로 크지 않다. 그러나 작은 땅에서 많은 용사들을 배출했다. 사울도 바로 그런 사람 중의 한 사람이다. 본문은 사울이 서서히 역사의 무대 위로 등장하게 되는 장면이다. 사울은 초기에 용맹스런 왕이었다. 전투에서 많은 승리를 거두고 많은 적들을 물리쳐서 이스라엘을 반석 위에 놓은 훌륭한 왕이었다. 그러나 말년은 참 고독했다. 다윗에 대한 질투로 말미암아 스스로를 허물어가면서 몰락해 가는 사울 왕가의 비운을 볼 수가 있다. 우리는 라헬을 통해서 베냐민이라는 아들이 출생하는 과정 중에 ‘슬픔과 기쁨’이 동시에 교차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베냐민이라는 아들이 태어나는 것을 기쁨이었다. 그러나 강청함으로 아들을 얻지만 출산 도중 목숨을 잃은 라헬을 생각할 때 슬픔이다. 여기서 우리들은 중요한 교훈을 얻는다. 기쁨과 슬픔은 결코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이다. 교차로를 함께 지나고 있다. 문제는 어떻게 기쁨을 계속 유지할 수 있느냐이다. 또한 에스더서에 나오는 모르드개도 베냐민 출신이다. (에 2:5)도성 수산에 한 유다인이 있으니 이름은 모르드개라 저는 베냐민 자손이니 기스의 증손이요 시므이의 손자요 야일의 아들이라 모르드개는 에스더를 길러 준 양부이다. 여기에서 만나는 모르드개 역시 성격이 냉철하면서도 굴복할 줄을 모르고, 그러면서도 한 가지 목적을 향해서 전념하는 이미지를 발견할 수 있다. 모르드개는 하나님께 받은 목표를 이루기 위해 끈질긴 집념을 가졌던 사람이다. 신약의 바울도 베냐민 지파 사람이다. (빌 3:5)내가 팔일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바울의 성격도 역시 베냐민 지파 사람의 성격을 그대로 이어가고 있다. 여기서 배우는 것을 하나님 말씀은 반드시 성취된다는 것이다. 베냐민 지파를 향한 야곱의 예언적 축복은 그대로 그 지파의 사람들의 삶 속에서 이루어진다. ==베냐민에 대한 모세의 축복 (신 33:12)베냐민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여호와의 사랑을 입은 자는 그 곁에 안전히 거하리로다 여호와께서 그를 날이 맟도록 보호하시고 그로 자기 어깨 사이에 처하게 하시리로다 모세의 베냐민을 향한 축복을 보면 야곱이 묘사한 베냐민의 성격에 결정적인 변화가 따랐다. 야곱이 자기 앞에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파괴하는 이리로 비유했던 그 겁없는 성격도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으로 변화되었다. 이제는 그 무모한 힘을 여호와께 대한 관심과 그분의 백성을 보호하려는 데 사용한다. "여호와의 사랑을 입은 자는 그 곁에 안전히 거하리로다." 또한 ‘하나님의 어깨 사이에 처하게 하신다’는 말씀에서 어깨는 우리에게 ‘힘’이라는 이미지를 보여준다. 우리는 아주 무거운 짐을 처리할 때 어깨에 메고 간다. 특별한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입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는 지파가 바로 베냐민 지파이다. 고대 베냐민 지파의 성격과 이방을 위한 사도 바울과의 유용성을 비교하는 것은 흥미 있는 일이다. 바울은 "나도 … 이스라엘인이요 … 베냐민 지파라"(롬 11:1)고 말했다. 후에 바울이라 부른 사울은 스데반을 돌로 칠 때, 처음으로 우리에게 알려졌다. 그는 "스데반의 죽음에 동의한 사람"이었다(행 7:58; 8:1). 다음으로 그는 "물어뜯는 이리"로 "교회를 잔멸"하려고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었다"(행 8:3). 무서운 이리가 피에 굶주려 그 먹이를 찾는 것처럼 "주의 제자들을 대하여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였다"(행 9:1). 이런 사람의 곁에 있는 주의 제자들에게는 안전함이 없었다. 그러나 "물어뜯는 이리"와 같은 힘을 가진 사람이 회심을 하면 그만큼 더 열정적으로 주의 사업과 그의 영광을 보살피고 보호하게 된다. 베냐민 지파의 사울이 예수님의 나타나심을 목격한 다음부터(행 9:3-9) 그의 이리 같은 습성이 사라지고, 주의 사랑을 받는 자들이 그의 곁에 안전하게 거할 수 있었다. 다메섹에 있던 성도들이 이제는 더 이상 위험에 처해 있지 않았다. 그들을 잔해하려던 자가 이제는 친구가 되었을 뿐 아니라, 어느 때든지 그들을 보호하는 사람이 된 것이다(행 9:10-19). 하나님은 하나의 친절한 행위라도 결코 보상하시기를 잊지 않으신다(삼상 2:30). 사울이 "주의 사랑하는 자들"을 보호하고 보살필 때, 주께서 그를 항상 품고 계셨다. 아무도 그를 해할 수 없었다. 무서운 독사가 물어도 힘을 잃었다(행 28:1-6). 그를 빠뜨릴 물도 없었다(행 27:23-25). 하나님은 그를 언제나 보호하고 계셨던 것이다. 모세를 통하여 주신 축복의 말씀은 "여호와께서 그를 날이 맟도록 보호하시고, 그로 자기 어깨 사이에 처하게 하실 것"(신 33:12)이라고 했다. 어떤 주석가들은 이 말씀을 베냐민의 지경 안에 있는 모리아 산에 세워질 성전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길을 가면서 거칠고 험한 곳들을 지날 때 아버지의 강한 어깨 사이에 안겨서 옮겨진 어린 시절의 추억들을 가진 사람에게 이 말씀은 다른 의미를 갖는다. "여호와께서 그를 날이 맟도록" 해와 위험으로부터 보호하실 것이다. 생애의 노정에서 우리의 힘으로는 도무지 해결할 수 없는 난관에 봉착했을 때, 우리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전능의 팔로 우리를 번쩍 들어, 그의 능력이 아니고서는 전혀 불가능한 곳에 우리를 안전히 내려놓으신다. 마치 어린 아이가 두 팔로 힘껏 아빠의 목을 껴안고 그 두 어깨 사이에 매달려 있는 것처럼 할 때, 인간으로는 도무지 불가능한 일을 성취할 수 있다. 복된 곳이 있다. 그곳은 주를 사랑하는 자가 안전하게 거할 수 있는 곳이다. 그런 곳에 거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에게는 불평과 중상의 소리가 영원히 잠잠할 것이다. ==베냐민 지파를 상징하는 보석 (출 28:19)세째 줄은 호박 백마노 자수정이요 베냐민 지파를 상징하는 보석은 자수정(amethyst)이다. 이 보석의 색상은 보라 자주빛이다. 다른 몇 보석과 마찬가지로 자수정 역시 제련이 어려운 보석으로 알려져 있다. 구하기 힘들고, 만들기 힘든 보석이지만 만들어 놓으면 가장 값비싼 보석으로 사람들에게 귀하게 여김을 받고 쓰임을 받았던 보석이다. 개성이 강하고 아주 사납고, 전투적이며, 혈기왕성한 사람들일지라도 하나님의 손에서 잘 사용되면 귀히 쓰일 수 있다. 바울이 만일 모든 일에 유하고 부드러운 성격의 소유자였다면 그가 전세계를 누비면서 극성스럽게 전도하는 거창한 일을 시도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 앞에는 이런 저런 다양한 사람들이 다 필요하다. 때론 부드럽고 조용한 사람도 필요하지만 하나님의 위대한 사역을 완수하기 위해 열정적인 사람도 필요한 것이다. 우리 주변에 다양한 사람을 주신 이유를 생각해 보자. 그리고 내게 주신 사람들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자. 그럴 때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풍성한 행복으로 가득 채워지는 것이다. ==그러면, 베냐민 지파가 우리들에게 주는 영적 교훈은 무엇인가? 베냐민 지파는 값비싼 대가를 지불하고 인상 깊은 일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베냐민을 출생하면서 어머니의 죽음이라는 대가를 지불했다. 여기서 배우는 교훈이 있다. 희생없이 하나님의 위대한 일은 이루어 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시 126:5)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모든 사람들은 다 믿음의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이 믿음의 사람들은 자세히 살펴보면 또한 희생의 사람들이었다. 아브라함도 가나안 땅을 얻기 위해서 자기의 고향과 친척을 버리는 희생의 결단이 요청되었다. 이삭은 순종의 사람이 되기 위해 자신의 목숨 조차도 제단에 바치는 희생의 결단을 하였다. 민족의 반역자라는 말을 감수하면서까지 하나님의 백성들을 자신의 집에 감추어 주는 일을 하였던 라합를 생각해도 마찬가지 이다. 이들은 철저하게 희생의 사람들이었다. 희생을 통하여 하나님의 놀라운 보상을 받았다. 믿음장이라고 불리는 히브리서 11장의 중요한 구절 중 하나가 바로 6절이다. (히 11:6)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바울의 희생이 1세기 전세계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접하고 변화될 수 있는 은혜를 얻었다. 현대 그리스도인들의 가장 큰 약점은 희생없이 성취와 복만 추구하는 것이다. 본회퍼(D. Bonhoeffer)는 현대의 기독교회가 연약해진 원인을 지적하면서, 무엇보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그리스도를 따라가기 위해서 필요한 대가를 지불하는 일을 거절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희생 없이 어떤 성취도 없다. 오늘 우리들의 모습을 돌아보자. 무엇보다 희생을 싫어하는 시대정신 속에서 모든 사람들을 섬기기 위해, 자신을 희생제물로 내어주시기 위해 성탄하신 주님을 묵상하자. 그리고 우리의 내면이 바로 이런 주님의 정신이 가득하도록 기도하자. (막 10:45)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단 지파 ‘단’의 어머니는 빌하이다. 빌하는 라헬의 시녀였다. 레아가 아들들을 출산하는 동안에 라헬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라헬은 자신의 시녀인 빌하를 통해서 아들을 얻게 된다. 그 아들이 바로 ‘단’이다. 단은 야곱의 다섯째 아들이었다. 그러나 단 지파의 이름은 잊혀진 이름이 되었다. 약속의 땅에 들어갈 때는 유다 다음으로 용사가 많았던 단 지파가 어떻게 잊혀진 지파가 되었을까? 단 지파의 지역은 지중해 연안의 가장 아래편이다. 단의 후손은 좋은 지역이 아닌 상당히 소외된 지역에서 살았다. 하나님은 각각 다른 열 두 제자를 선택하셨다. 그처럼 구약에서도 하나님은 다른 성격의 열 두 지파를 선택하셨다. 여기서 생각하는 것은 주님을 믿고 따르는 자녀들의 삶의 방법은 반드시 동일한 것이 아니다. ==단의 출생 (창 30:1-6 1)라헬이 자기가 야곱에게 아들을 낳지 못함을 보고 그 형을 투기하여 야곱에게 이르되 나로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죽겠노라 2)야곱이 라헬에게 노를 발하여 가로되 그대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느냐 3)라헬이 가로되 나의 여종 빌하에게로 들어가라 그가 아들을 낳아 내 무릎에 두리니 그러면 나도 그를 인하여 자식을 얻겠노라 하고 4)그 시녀 빌하를 남편에게 첩으로 주매 야곱이 그에게로 들어갔더니 5)빌하가 잉태하여 야곱에게 아들을 낳은지라 6)라헬이 가로되 하나님이 내 억울함을 푸시려고 내 소리를 들으사 내게 아들을 주셨다 하고 이로 인하여 그 이름을 단이라 하였으며 단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억울함을 푸심’이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하나님이 나를 판단하셨다”는 뜻이다. 구약의 다니엘과 단이라는 이름은 같은 이름이다. ‘단 + 엘’이 다니엘이다. 그래서 다니엘은 ‘하나님은 나의 심판자’라는 뜻이다. 라헬은 야곱의 사랑을 입고 있었지만 레아가 자녀를 낳는 동안 자녀를 낳지 못했다. 자식이 없어서 투기심을 일으키게 되었다. 더 이상 참기 힘들었던 라헬은 야곱에게 가서 ‘나로 자식을 낳게 하든지 아니면 죽게 해 달라’고 요구한다. 시기로 가득찬 라헬이 인내하지 못하고 폭발하고 있다. 이에 대한 야곱의 답변이 흥미롭다. ‘야곱이 라헬에게 노를 발하여 가로되 그대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느냐’ 자신을 하나님이 아니기에 어찌할 수 없다는 답변이다. 라헬은 기발한 대안을 내어 놓는다. 자신의 여종 빌하를 통해 ‘자녀를 낳으라’는 것이다. 이런 상황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사랑하기는 자신을 더 사랑하지만 자녀로 인해 레아에 머물고 있는 남편을 보면서 남편을 자신 곁에 붙잡아 놓는 방법은 자녀를 낳는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자신은 자녀를 출산하지 못하니 대신 빌하를 통해서라도 자녀를 낳아야겠다 생각한 것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은 아니다. 인간적인 계획과 계략이다. 그런데 항상 인간적인 계획과 육신의 뜻이 성공한다. 라헬은 계획대로 빌하를 통하여 아들을 얻게 된다. 그 아들의 이름이 단이다. 아들이 태어나자 라헬은 ‘드디어 하나님이 내 원통한 심정을 아시고 이 모든 상황을 판단해 주셨다’는 의미의 이름을 지은 것이다. ==야곱의 축복 중에서 단 (창 49:16)단은 이스라엘의 한 지파 같이 그 백성을 심판하리로다 (창 49:17)단은 길의 뱀이요 첩경의 독사리로다 말굽을 물어서 그 탄 자로 뒤로 떨어지게 하리로다 (창 49:18)여호와여 나는 주의 구원을 기다리나이다 본문에서 단의 별명을 읽을 수 있는데 ‘뱀’이다. ‘그 백성을 심판하리라’는 예언은 그리 좋은 의미가 아니다. 이 말은 자기의 백성을 닥치는 대로 친다는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심판이라는 단어는 좋은 의미로 사용될 수도 있지만 나쁜 의미로 사용될 수도 있다. 긍정적으로 공의로 무엇을 판단하여 올바르게 회복시킨다는 개념으로 사용될 수 있으나, 부정적으로 복수를 한다는 정죄의 개념으로도 사용할 수 있다. 본문에서는 부정적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17절의 길가의 뱀과 첩경의 독사를 생각해 보자. 어느 길을 무사가 말을 타고 달려가는데 갑자기 독사가 등장하여 무사가 타고 있는 말의 발굽을 물어 넘어뜨리는 모습을 상상하게 한다. ‘말굽을 물어서 그 탄 자로 뒤로 떨어지게 하리로다’ (17절) 단은 ‘뒤에서 무는 자’ 곧 참소하는 자를 표상한다. 이러한 성격은 하나님이나 사람 모두 싫어하는 것이다. (시 101:5)그 이웃을 그윽히 허는 자를 내가 멸할 것이요 눈이 높고 마음이 교만한 자를 내가 용납지 아니하리로다 야곱의 예언적 기도는 왜 단 지파에게 영원한 유업의 몫이 없는지 그 이유를 설명해 준다. 참소하는 자는 시온산에 설 수 없다고 하였다. (시 15:1)(다윗의 시)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유할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거할 자 누구오니이까······ (시 15:3)그 혀로 참소치 아니하고 그 벗에게 행악지 아니하며 그 이웃을 훼방치 아니하며 결국 이런 점을 생각해 보면 단은 마지막 계수에서 빠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본문의 강조 개념은 심판이다. 첩경의 독사처럼 남들에게 유해한 존재가 될 것이라는 대단히 불길한 징조가 이 지파에게 예언되고 있다. 사사기에 보면 단 지파가 기업의 땅을 얻지 못했을 때의 이야기가 나온다. (삿 18:1)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고 단 지파는 이 때에 거할 기업의 땅을 구하는 중이었으니 이는 그들이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 이때까지 기업의 땅 분배함을 얻지 못하였음이라 그런데 이 때 단 지파는 아주 중대한 죄를 짓는다. (삿 18:27-31) 27)단 자손이 미가의 지은 것과 그 제사장을 취하고 라이스에 이르러 한가하고 평안한 백성을 만나 칼날로 그들을 치며 불로 그 성읍을 사르되 28)그들을 구원할 자가 없었으니 그 성읍이 베드르홉 가까운 골짜기에 있어서 시돈과 상거가 멀고 상종하는 사람도 없음이었더라 단 자손이 성읍을 중건하고 거기 거하며 29)이스라엘의 소생 그 조상 단의 이름을 따라 그 성읍을 단이라 하니라 그 성읍의 본 이름은 라이스더라 30)단 자손이 자기를 위하여 그 새긴 신상을 세웠고 모세의 손자 게르손의 아들 요나단과 그 자손은 단 지파의 제사장이 되어 이 백성이 사로잡히는 날까지 이르렀더라 31)하나님의 집이 실로에 있을 동안에 미가의 지은바 새긴 신상이 단 자손에게 있었더라 단 지파를 중심으로 우상 숭배라는 민족적 범죄가 자행되고 있다. 즉, 민족 전체에게 우상숭배의 범죄를 하도록 유도한 것이 단 지파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는 본문이다. (왕상 12:25-29) 25)여로보암이 에브라임 산지에 세겜을 건축하고 거기서 살며 또 거기서 나가서 부느엘을 건축하고 26)그 마음에 스스로 이르기를 나라가 이제 다윗의 집으로 돌아가리로다 27)만일 이 백성이 예루살렘에 있는 여호와의 전에 제사를 드리고자 하여 올라가면 이 백성의 마음이 유다 왕 된 그 주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서 나를 죽이고 유다 왕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리로다 하고 28)이에 계획하고 두 금송아지를 만들고 무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다시는 예루살렘에 올라갈 것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 신이라 하고 29)하나는 벧엘에 두고 하나는 단에 둔지라 이 말씀들을 통해 단 자파가 우상 숭배를 유도하고, 단 지파가 살고 있는 그 지역 자체가 우상 숭배의 진원지가 되고 있다. 이런 이유로 인하여 단 지파는 시작은 창대했으나 나중은 잊혀진 지파가 된 것이다. 사사기에 나오는 삼손은 단 지파 출신의 지도자로 20년간 이스라엘을 다스렸다. 시작은 좋았지만 그는 인간적인 그릇된 판단에 의해서 인생을 그르친 사람이다. ==단 지파가 오늘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가장 중요한 교훈은 ‘올바른 판단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라헬은 자신의 인간적인 지혜에 의지해서 남편의 마음을 자신에게로 돌이키게 하기 위해 시녀를 남편에게 주어 아들을 얻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것은 유익한 결과를 가져오지 못했다. 이런 행동은 그릇된 판단이었다. ‘하나님이 내 억울함을 푸셨다. 이제 나는 올바르게 판단되었다’ 라고 라헬은 생각했지만 이는 올바른 판단이 아니라 그릇된 판단이었다. ==모세의 축복 중에서 단 (신 33:22)단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단은 바산에서 뛰어나오는 사자의 새끼로다 야곱의 축복에서 단 지파의 별명이 ‘뱀’이었다. 그런데 모세의 축제에서 발견하는 단 지파의 또 다른 별명은 ‘사자’이다. 이것은 두 가지 측면을 생각하게 한다. 그들이 가진 힘을 긍정적으로 잘 사용하면 사자의 용맹하고 날쌘 힘을 연상케 하지만, 그 힘이 잘못 사용되어 남을 파괴하고 괴롭히는 뱀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어두움과 밝음,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 등 두 가지 운명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삼손의 생애가 이러했다. 하나님이 주신 놀라운 힘을 가지고 자기 민족을 위해 일했을 때 유익한 결과를 가져 왔다. 그러나 자기 정욕을 위해 잘못 사용되었을 때 그것은 자신과 자기 민족을 망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삼손은 사자도 되었지만 뱀도 되었던 것이다. ‘바산에서 뛰어 나오는 사자의 새끼와도 같다’ 단은 힘이 있는 지파였다. 싸움을 잘했고, 무사들이 많이 나왔다. 단 지파가 잘될 때에는 어떠했는가? (수 19:47-48) 47)그런데 단 자손의 지경이 더욱 확장되었으니 이는 단 자손이 올라가서 레센을 쳐서 취하여 칼날로 치고 그것을 얻어 거기 거하였음이라 그 조상 단의 이름을 따라서 레센을 단이라 하였더라 48)단 자손의 지파가 그 가족대로 얻은 기업은 이 성읍들과 그 촌락이었더라 단 지파가 싸움을 잘 한 것이 드러난다. 단 지파의 영토는 싸움을 통하여 확장되었다. 그런데 단 지파가 끝까지 승승장구하지는 않았다. 역사가 흘러갈수록 점차 숫자는 줄어들었다. 이는 우리의 뜻대로 무엇인가를 이룰 수 있지만 그것이 마지막까지 남을 수 있는 궁극적인 축복은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 준다. 성막이 광야에 세워졌을 때, 하나님께서는 단 지파의 오흘리압에게 지혜를 주셔서 공교한 일을 금과 은과 놋으로 만들게 하였다.(출 31:3-6) (출 31:3-6) 3)하나님의 신을 그에게 충만하게 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과 여러 가지 재주로 4)공교한 일을 연구하여 금과 은과 놋으로 만들게 하며 5)보석을 깎아 물리며 나무를 새겨서 여러가지 일을 하게 하고 6)내가 또 단 지파 아히사막의 아들 오홀리압을 세워 그와 함께 하게 하며 무릇 지혜로운 마음이 있는 자에게 내가 지혜를 주어 그들로 내가 네게 명한 것을 다 만들게 할지니 이러한 재능을 계속 소유하고 있었던 단 족속들은 부요한 도성 두로에 매력을 느껴 그 거민들과 혼인을 하였다. 여러 해가 지나서 솔로몬이 성전을 지을 때 두로 왕 히람은 예루살렘 성전을 위하여 금과 은과 놋 일을 공교히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그 선조들에게 주신 재능을 그때까지 소유하고 있었던 단 자손을 보냈다. (대하 2:13-14) 13)내가 이제 공교하고 총명한 사람을 보내오니 전에 내 부친 후람에게 속하였던 자라 14)이 사람은 단의 여자 중 한 여인의 아들이요 그 아비는 두로 사람이라 능히 금, 은, 동, 철과 돌과 나무와 자색 청색 홍색실과 가는 베로 일을 잘하며 또 모든 아로새기는 일에 익숙하고 모든 기묘한 식양에 능한 자니 당신의 공교한 공장과 당신의 부친 내 주 다윗의 공교한 공장과 함께 일하게 하소서 단 지파는 다윗 시대에 이스라엘 족속들 가운에 자기 위치를 여전히 지키고 있었다. (대상 27:22)단의 관장은 여로함의 아들 아사렐이니 이스라엘 지파의 관장이 이러하며 그러나 그 후로는 지파를 가리키는 이름으로서는 사라지고, 단지 북쪽에 있는 도성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된다. 결국 단 지파의 마지막은 저주가 된다. (계 7:5-8) 5)유다 지파 중에 인 맞은 자가 일만 이천이요 르우벤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갓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6)아셀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납달리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므낫세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7)시므온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레위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잇사갈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8)스불론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요셉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베냐민 지파 중에 인 맞은 자가 일만 이천이라 이 본문은 하나님이 역사의 마지막 환난 때에 이스라엘 각 지파를 보호하시고 그들을 통해서 예수님이 다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