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13.04.10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새 예루살렘, 예수님 당시의 유월절(복음서의 유월절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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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예루살렘>>적용

 

믿는 이들에게 새 예루살렘을 적용함-삼일의 존재함


성경 : 에베소서 4:4-6, 갈라디아서 2:20상, 요한복음 6:57하, 빌립보서 1:20-21, 고린도 전서 12:13, 요한복음 3:6하. 요한계시록 1:4하


새 예루살렘은 다만 장래에 오는 어떤 것에 관한 예언의 항목이 아니다. 거룩한 성 전체가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될 수 있음을 다시 한 번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 장에서 우리는 우리에게 새 예루살렘을 적용하는 삼일의 존재를 보기 원한다. 새 예루살렘 성 본체는 금으로 건축되었고 문은 진주로, 기초와 성곽은 보석으로 건축되었음을 우리는 보았다. 이 성이 세 가지 기본 요소로 되어 서 있는 것이 존재 함이라 새 예루살렘은 삼일의 존재함을 가지고 있다.
 

삼일 하나님에 의해 몸 안에 존재함


우리는 어떻게 이 삼일의 존재함이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되었는지를 볼 필요가 있다. 새 예루살렘은 성경의 전체 계시의 신성한 최종 완성이기 때문에, 되돌아가서 교회를 봄으로써 그의 존재함이 우리에게 적용될 수 있다. 에베소서 4장 4절에는 몸이 있다. 몸은 교회이며 교회는 새 예루살렘의 축소판이다. 우리는 또한 그리스도의 몸을 새 예루살렘의 이전 단계라고도 말할 수 있다. 새 예루살렘은 오고 있으며 교회는 새 예루살렘의 이전 단계로서 오늘날 존재한다. 새 예루살렘은 그리스도의 몸인 이 이전 단계의 충만한 완성이 될 것이다.


우리는 아직 새 예루살렘 안에 있지는 않지만 확실히 우리는 몸 안에 있다. 오늘날 몸에 적용되는 것은 새 예루살렘에서 완성될 것이다. 우리가 이미 본대로 새 예루살렘에는 존재를 위한 세 가지 재료가 있는데 그것들은 금과 진주와 보석이다. 금은 그분의 신성한 본성 안에 계시는 아버지 하나님을 상징하며, 진주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한 그리스도의 산출을 상징하며 보석은 그 영의 변화시키는 역사의 산출을 상징한다. 에베소서 4장 4절부터 6절에 따라 우리는 새 예루살렘의 존재함 안에서 완성되는 오늘날의 그리스도의 몸의 존재함을 위한 영과 주님과 아버지 하나님을 본다. 새 예루살렘의 존재함은 에베소서 4장에서 이미 우리에게 적용되어 왔으며 여전히 우리에게 적용 되고 있다. 날마다 교회 안에, 즉 몸 안에 있는 우리는 새 예루살렘의 존재함의 이 적용을 누리고 있다. 우리는 삼일 하나님의 의해 몸 안에 존재하고 있다.


에베소서 4장 4절부터 6절은,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침례도 하나이요 만유의 하나님과 아버지도 하나이시라 그분은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라고 말한다. 이 구절들 안에서 영과 주님과 아버지가 나온다. 물론 이것은 신성한 삼일성을 가리키지만 이 구절들 안에서 삼일성의 순서는 아버지와 주님과 영이 아니다. 우리는 왜 바울이 영으로 시작하여 주님으로 계속되고 아버지로 끝냈는가를 물어 볼 필요가 있다. 이것은 바울이 주관적인 문제를 만지고 있으며 우리의 체험에서 영은 우리에게 도달하신 삼일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삼일 성이 우리에게 도달할 때 그분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바울은 신성한 삼일성이 도달하는 면에서 영으로 시작한다. 당신이 영을 가질 때 주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당신은 또한 주님을 갖는다(고후 3:17). 그 영이 당신에게 도달한때 신성한삼일성의 세분은 분리되지 않기 때문에 주님은 당신과 함께 계신다. 세 분 사이에는 정확한 구별이 있으나 분리되지 않는다. 당신은 결코 주님을 그 영으로부터 분리할 수 없으며 결코 아버지를 주님으로부터 분리할 수 없다. 주님이 여기 계실 때 아버지가 여기 계신다. 만일 당신이 한분을 가지면 세 분 모두를 가진다. 그 영이 당신에게 도달할 때 주님이 여기 계시며 주님이 여기 계실 때 당신은 또한 아버지를 누린다.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존재함
 

첫 번째로 삼일의 존재함 안에서 우리는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신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존재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당신 위에 계시고 당신 안에 계신 것은 이해하기 쉽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하나님께서 당신을 통과하는 것이 무슨 듯인지 설명할 수 있는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에 있는 것들을 당연하게여기는 나쁜 습관이 있다.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에베소서를 여러 번 읽었겠지만 아버지 하나님이 만유 위에 계시고 만을 통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다는 뜻을 살 펴 본 적이 있는가? 이 구절들이 어떻게 우리 체험에 적용되는가?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 위에 계시고 우리를 통과하시고 우리 안에 계심을 체험하는가?


6절에서는 [하나님과 아버지]라는 말이 사용된다(회복역 참조). 우리 모두는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임을 알지만 이 구절에서 바울은 [과]라는 접속사를 삽입한다. 우리는 하나님과 아버지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는지를 물어볼 필요가 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의 창시자이시며 그분의 영원한 목적과 영원한 경륜의 창시자이시다. 아버지이신 하나님은 몸을 위한 생명의 근원이시다. 창시자로서 그분은 옛 창조 안에서 우리를 창조하셨으며, 근원으로서 그분은 새 창조 안에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여 교회가 되게 하셨다. 옛 창조의 면에서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 새 창조의 면에서 우리는 아버지에 의해 거듭났다. 우리는 한 면으로는 여전히 옛 창조이며 다른 면으로는 새 창조이다. 에베소서 2장 15절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육체 안에서의 죽음을 통하여 한 새사람이 창조되었으며 이 새사람은 몸이라고 말해준다. 이 몸은 창시자이신 하나님이 몸이며 근원이신 아버지의 몸이다. 바로 그 창시자와 근원이 우리 모두 위에 계시며 우리 모두를 통과하시며 우리 모든 안에 계신다. 
 

만유 위에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 위에 계신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다스림은 권위를 상징한다. 회사의 직원들은 다른 사람의 위에 있거나 밑에 있다. 하나님은 우리 위에 계시며 우리 모두는 그분 아래 있다. 이것은 그분이 우리 위에 통치자이시며 우리 위에 권위를 가지셨음을 뜻한다. 우리는 이미 제 33장에서 우리가 안에 있는 보좌에 복종할 때 신성한 생명의 흐름을 체험함을 보았다. 물건을 사러 갈 때 [보좌를 던져버리지]말라. 당신이 백화점 안으로 들어갈 때 하나님을 보좌에서 끌어내리지 말라. 당신은 그분을 보좌에 앉으시게 해야 한다. 당신은 하나님 아래에 있으며 하나님은 당신 위에 계심을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이 통치자이시며, 하나님이 당신 위에 권위이시다. 당신은 자신을 그분의 권위에 복종시켜야 한다.


불신자들의 체험 안에는 그들 다스리거나 그들 위에 계시는 하나님이 없으나 우리의 체험에서는 어떠한가? 하나님이 우리 위에 계시다는 것은 교리가 아니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어야 한다. 우리의 가정이나 가족은 하나님의 권위 아래 있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되는 삼일의 존재함을 누리려고 한다면 하나님의 권위 아래 있어야 하며 그분의 통치 아래 있어야 한다. 그분은 우리 위에 계시고 우리는 그분 아래 있으므로 우리는 자신을 그분께 복종시킬 필요가 있다.


오늘날 이 땅에서 모든 사람이 자유를 갖기를 좋아 한다. 또한 모든 사람이 다른 사람의 위에 있기를 좋아 한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권위이시며 우리는 그분의 권위 아래 자신을 복종시켜야 함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어떤 사람 밑에도 있기를 원치 않는 불신자들과 같아서는 안 된다. 우리는 위에 우리의 권위이신 하나님을 믿는 이들이다.
 

만유를 통과하심


한 하나님과 아버지는 또한 만유를 통과하신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이 오늘 나를 통과하실 수 있었는가를 자신에게 물어 보아야 한다. 그분은 우리를 통과하셨는가, 아니면 우리가 그분을 막았는가? 어떤 길이나 차선에는 [통행금지]라는 표시가 있다. 물론 이것은 당신이 이 길을 통과할 수 없음을 뜻한다. 그리스도인 초기 시절에 하나님께서는 나를 통과하시기 위해 자주 나와 다투셨다. 사실상 겉으로 보기에 나는 매우 윤리적이고 도덕적이고 선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린 신자인 나를 쉽게 통과 하실 수 없었다. 그 당시 내 안에 있는 대부분의 차선들과 길들에는 [통행금지]라는 표시가 있었다. 하나님이 통과 하실 수 없었다. 우리 가운데 특히 젊은 성도들은, 어떤 일에 있어서 하나님이 그들을 통과하셨는가를 자신에게 물어 볼 필요가 있다. 당신이 정기적으로 집회에 오지만 이것은 당신이 하나님을 통과시켰음을 뜻하지는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 위에 계셔야 하며 그분은 또한 우리를 통과하셔야 한다. 우리는 [그분을 통해 금지시켰는가?]라는 질문을 해야 한다. 대부분의 시간에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우리에게서 [막다른 골목]이라는 표시를 보실 뿐이다.


많은 경우 우리 존재 안에 있는 모든 길이 막히고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통과하실 수 없다. 당신은 하나님께서 항상 당신을 통과하실 수 있다고 믿는가? 대부분의 시간에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고속도로를 갖지 못하시고 오히려 [많은 빨간 신호등]이 있는 길을 가신다.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기본적인 문제는 우리가 그분께 길을 열어드리지 않는 것이다. 당신의 성격은 훌륭하고 도덕적으로는 당신의 행동에 틀린 것이 없을지 모르나 당신 안에 있는 모든 길은 하나님께 막혀 있다.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를 통과하시도록 길을 열어드리는 것은 매우 귀한 것이다. 매우 자주 우리는 하루 종일 하나님을 우리 안에서 통과하지 못하게 한다. 이것은 우리의 존재함을 위해 하나님을 누림이 많지 않음을 뜻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하나님이 계시지만 그분이 우리를 통과하실 수 없었다. 여기에서 바울의 가르침은 다 체험적인 것이다.
 

만유 안에
 

바울은 계속해서, 하나님께서는 만유 안에 계신다고 말한다. 바울은 만유 위로부터 시작하여 만유 안에로 마친다. 첫째로 당신은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어야 하며, 그 다음 당신은 그분께 항상 길을 열어 드려야 한다. 그 결과 그분은 당신 안에 거할 수 있다. 바울은 객관적인 하나님에 관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의 서술은 전체가 주관적이다. 하나님이 우리 위에계시고 우리를 통과하시고 우리 안에 계심은 체험적이며 우리의 존재로서의 그분의 임재를 누릴 수 있는 주관적인 것이다. 우리는 우리 위에 계시고 우리를 통과하시고 우리 안에 계신 이 하나님에 의해 존재 한다.
 

우리의 체험
 

믿는 이들인 우리 모두는 하나님을 가졌으나, 우리의 체험 안에서 우리 위에 계시고 우리를 통과하시고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을 가졌는가? 정말 하나님께서 당신 위에 계시고 당신을 통과하시고 당신 안에 계시는가? 아마 당신의 직업이나 사업이나 공부나 진급이 당신 위에 있었고 하나님은 위에 계시지 않았을 것이다. 매일 많은 것들이 당신을 통과하고 있다. 당신은 많은 것들에게 길을 열어주지만 하나님께는 열어드리지 않는다. 많은 것들이 지금 당장 당신 안에 거하고 있으나 하나님은 당신 안에 거하시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당신 위에계시지도 않고 당신을 통과하시지도 못하고 당신 안에 계시지 않을 수 있다. 우리는 우리와 멀리 계시는, 다만 삼층천에 계신 하나님을 가지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바울은 몸 위에계시고 몸을 통과하시고 몸 안에 계신 분이신 그리스도의 몸의 하나님을 보여준다. 이것이 우리의 매일의 존재함을 위한 주관적인 하나님이다. 우리는 우리가 진정 어디에 있는가를 볼 수 있도록 우리를 [점거하시는]주님 앞에 정직해 질 필요가 있다. 만일 우리가 진정으로 주님께 열려 있다면 우리는 벗어나 그분 아래에 있지 않았고 그분을 통과시키지 않았고 그분으로 하여금 우리 안에서 다스리도록 하지 않았음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분은 우리에게 그러한 하나님이 되기를 원하시지만 우리는 그분께 동의하지 않을 수 있다.


우리가 교통해 온 것은 오늘날 교회 생활 안에서 우리에게 미리 적용되는 새 예루살렘이다. 오늘날 교회 생활 안에서 우리는 우리의 매일의 체험에 적용되는 이러한 방법으로 우리와 함께 존재하시는 하나님을 가져야 한다. 매일 우리는 그분 아래에 있어야 하며 그분이 우리를 통과하시도록 해야 하며 그분이 우리 안에 머무실 수 있도록 우리 안에 있는 방을 그분께 드려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그분과 함께 존재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성도들이 그들 위에 계시고 그들을 통과하시고 그들 안에 계신 하나님과 함께 존재 하지 않는다.
 

주 그리스도와 함께 존재함


우리는 또한 주 그리스도와 함께 존재할 필요가 있다(엡 4:5). 오늘날 우리의 존재함은 그분이 우리 안에 사시는 방법으로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야 한다.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사신다는 메시지를 듣고 또 들었지만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는 우리 안에 살아 계신 그리스도와 함께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사심은, 우리 위에 계시며 결국에는 우리 안에 계신 아버지의 연장이다. 아들이 우리 안에 사심은 아버지께서 우리 안에 계심의 연장이다. 아들이 우리 안에 사심은 아버지께서 우리 안에 계심의 연장이다. 아버지께서 우리 위에 계시고 우리를 통과하시고 우리 안에 계실 때 그것이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사시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사실 때(갈 2:20상) 우리는 그분에 의해 살며(요 6:57하), 이것이 우리가 그분에 의해 존재한다는 뜻이다. 더 나아가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산다(빌 1:24). 그리스도에 의해 사는 것은 그리스도를 사는 것만큼 높지 않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살 필요가 있다. 우리가 사는 그 그리스도는 우리가 함께 존재하는 바로 그 실체이다. 우리는 산 실체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존재한다.


새 예루살렘의 정면에는 열 두 진주문이 있다. 건물의 앞부분을 정면이라고 부른다. 오늘날 우리는 우리의 정면으로서, 즉 앞부분으로서 우리에게서 살아 나타나는 그리스도를 가져야 한다. 우리는 우리 위에 계시고 우리를 통과하시며 우리 안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존재할 뿐 아니라 우리를 그리스도에 의해 살 수 있도록 하며, 그리스도를 살 수 있도록 하는 우리 안에 사신 그리스도와 함께 존재한다. 결국에는 우리는 그리스도를 확대한다(빌 1;20). 새 예루살렘에서 보이는 첫 번째 것은 진주문들이다. 이 문들은 그리스도의 확대이며 오늘날 우리는 우리의 존재함 안에서 그리스도가 확대되는 방법으로 존재해야 한다. 우리가 그런 상태에 들어가려면 우리 안에 있는 신성한 본성이 발전되고 생명 안에서 성장하기 위한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만 새 예루살렘의 존재함은 우리의 일상생활에 적용되어야 함을 깨달아야 한다. 새 예루살렘의 성(成)은 아버지의 본성이고 문은 진주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에 의해 살아야 하며 그리스도를 살아야 하며 우리 안에 그분이 사심에 의해 그리스도를 확대해야 한다. 그분이 우리 안에 사실 때 그분은 확실히 우리 주변에 그분의 부활 생명을 분비하여 우리를 진주로 만드신다. 이 진주들이 그분의 확대이다.
 

그 영과 함께 존재함


마지막으로 우리는 그 영과 함께 존재해야 한다(엡 4:4). 에베소서 4장 4절은 함 몸과 한 영을 가리킨다. 이 구절은 바로 그 영이 몸인 교회의 본질이며 실체임을 가리킨다. 오늘날의 교회는 실질적으로나 본질적으로 그 영 자신이어야 한다. 영이 없다면 몸이 없고 교회가 없다. 영이 없으면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인간적인 무리에 속한 것이다. 교회는 실질적으로나 본질적으로나 영이어야 한다. 찬송할 때 우리는 영으로 한다. 말할 때 우리는 영으로 한다. 봉사할 때 우리는 영으로 한다. 간증하고 교제하고 기능을 발휘할 때 우리는 모든 것을 영으로 한다. 영이 없으면 교회의 실질이 없다. 영이 없으면 교회는 사회의 다른 조직과 똑같다. 교회는 실질인 영과 한 몸이어야 한다.


어떤 사람은 어떻게 영이 교회의 실질이나 본질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에 대해 의심할지 모른다. 첫째로 신약은 우리가 영으로 거듭났음을 말해준다(요 3;6). 영이 우리를 거듭나게 했기 때문에 이 거듭나게 한 영은 교회의 바로 그 실지이요 본질이다. 신약은 또한 우리에게 우리가 영안에서 침례 받았음을 말해준다(고전 12:13). 지금 우리는 그 영을 마시는 사람들이다(고전 12:13). 매일매일 그 영이 우리의 음료이며 우리가 마시는 그것이 우리의 내적인 본질이 된다. 그러므로 그 영이 교회 생활의 내적인 본질이 되어야 한다. 더 나아가서 우리는 지금 그 영에 의해 변화되고 있다(고후 3:18). 그분은 지금 우리의 옛 본성의 옛 요소를 대치하고 내보내기 위해 우리에게 더해지고 있는 신성한 요소로 우리를 변화시키고 계신다. 당신과 나는 우리의영적인 본질인 그 영으로 존재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새 예루살렘에서 완성되는 몸의 생활을 위해 칠 배로 강화된 영에 의해(계 1:4하) 강해지고 풍성케 되어가고 있다.

 

이상(Vision)의 필요


삼일의 존재함 안에서 새 예루살렘을 적용하는 것은 에베소서 4장 4절부터 6절까지에서 설명되어 있다. 이 구절들은 어떻게 교회가 삼일 하나님, 즉 아버지와 주님과 그 영과 함께 존재할 수 있는가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나는 우리 모두가 삼일의 존재함에 관해 어떤 것을 보았기를 바란다. 성경은 계시들로 충만하고 이상들로 충만한 책이다. 우리는 우리의 지식의 능력에 따라 성경을 제한되게 이해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지식은 너무 적다. 이것 때문에 바울은 에베소서 1장 17절에서,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우리에게 주시어 우리가 어떤 것을 볼 수 있도록 우리의 내적인 눈을 열어 주시기를 기도했다. 삼일 하나님이 우리의 매일의 존재함이 되시는 길을 보기 위해 우리에게는 이상이 필요하다. 우리 위에 계시고 우리를 통과하시고 우리 안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존재하고 아들에 의해 살고 아들을 살고 아들을 확대하기 위해 아들을 우리 생명으로 취할 수 있도록 우리 안에 살아계신 아들과 함께 존재하는 길을 보기 위해 우리에게는 이상이 필요하다. 또한 우리는 삼일 하나님의 완성이 지금 우리 안에 계시는, 도달하신 그 영이심을 보아야 한다. 그분은 우리를 거듭나게 하셨고 우리는 그분 안에서 침례 받았고 우리는 그분을 마시고 있으며 그분은 우리를 변화시키고 계신다. 그분은 우리의 교회 생활의 실질이시며 본질이시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되는 새 예루살렘의 존재함이다. 나는 매일 우리 존재함의 실질이 되는 그 영과 주님과 아버지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성경의 이 놀라운 부분을 인해 기쁘다 영원 안에 있는 새 예루살렘의 존재함을 오늘 미리 맛본다는 것은 진실로 놀라운 것이다.

 

 

예수님 당시의 유월절--복음서의 유월절 이해


현대인들은 예수님 당시 얼마나 많은 유대인들이 유월절, 칠칠절(오순절), 그리고 초막절에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라갔으며, 얼마나 성대하게 절기를 지켰는지 상상하기 어렵다. 유대인들은 이 세 절기를 ‘성전으로 올라가는 절기(shelosheth ha-Regalim)’라고 불렀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 대한 복음서의 기록에 대해 예로부터 두 가지 논란이 있다. 첫째는 유월절과 무교절에 대한 논란이요, 둘째는 최후의 만찬이 언제 시행되었느냐에 대한 논란이다. 이 논란을 해결하는데 있어서, 믿는 이들의 성경기록을 연구하고 이해하는 전제 조건으로서 필요한 태도는 주예수께서는 <사람의 규례가 아니라> 절대적으로 완벽하게 하나님의 규례에 따라서 사셨고 당신 자신을 세상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요 최후의 유월절 어린 양으로서 인식하셨다는 것을 먼저 신뢰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또 하나를 참고로 덧붙인다면 예수님의 부활은 금요일 오후3시에 운명하셔서 토요일 하루를 온전히 무덤에 묻히신 상태로 지나시고 주일 새벽, 적어도 동이 트기전인 오전 6시 이전에 부활하셨음을 볼 때 실제로는 만 30-33시간이지만, 유대인의 날짜 개념상, 금요일 오후3시-오후6시까지의 제1일, 금요일 오후6시부터 다음날인 토요일 오후 6시까지의 제2일, 토요일 오후6시부터 주일 오전3-6시경까지의 제3일째에 부활하셨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 필요가 있다.


역사가인 요세푸스는 당시의 유월절 상황을 기록하였다: Cestius는 대제사장에게 ‘로마 황제인 네로에게 보고하기 위하여 유월절 예루살렘에서 희생양으로 잡는 양의 수가 얼마나 되는지’를 묻고 있다. 요세푸스는 유월절 희생 제물로 예루살렘에 도착한 양의 숫자를 256,500 마리라고 기록하였다. 학자들은 희생양의 숫자에 근거하여 절기에 참여한 사람들의 수를 대략 짐작한다. 양 한 마리당 10명이 나누어 먹었을 경우,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모인 수는 대략 2백만명이 넘는다는 계산이다. 예루살렘 인근 마을로부터 이렇게 많은 수의 양들이 유월절을 위해 준비되었다. 요세푸스는 절기를 위하여 2,700,000명의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다고 기록하였다(JW II, 14:3). 물론 학자들은 요세푸스의 기록이 과장되었다고 생각한다.


예루살렘 주변으로 안식일에 걷기 알맞은 거리에 많은 마을들이 세워졌다. 이들 마을에 사는 주민들은 절기를 위해 예루살렘에 온 순례자들에게 숙박과 희생양, 그리고 의식에 필요한 그릇들을 제공하였다. 성경에 기록된 베다니, 벳바게 같은 마을들이 이런 부류에 속한다.


누가는 유월절 마지막 주간을 간단하게 언급하였다: 예수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니… 백성들이 다 그에게 귀를 기울였다(눅 19:47). 특히 솔로몬 행각은 초대 기독교인들의 복음을 전하는 장소로 이용되었다(눅 19:47-48, 행 3:11, 5:12).


예수님 당시의 요하난 벤 자카이(Johanan Ben Zakkai)는 습관적으로 성전 입구에 앉아 아침부터 저녁까지 가르쳤다고 기록한다. 탈무드는 말하기를 벤 자카이는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이곳 외에 다른 곳을 선택할 이유가 없었으며, 또한 그는 성전 입구에서 가르치는 것을 크게 즐거워하였다고 기록한다.


예수님께서 유월절을 앞둔 마지막 주간에 하신 설교와 비유는 하나님의 포도원인 이스라엘 백성들의 책임과 관련이 깊다. 예수님은 당시 종교적인 지도자들을 책망하셨다. 화려하게 건축된 성전 맞은편 감람산에 앉으신 예수님은, 세상 종말과 자신이 다시 오실 것을 말씀하셨다(마 24, 막 13, 눅 21). 바리새인, 사두개인 그리고 헤롯당은 예수님의 말씀에 꼬투리를 잡고 체포하려 했지만 많은 군중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므로 실패하였다.


헤롯 당원과 바리새인들은 정치적인 문제를 갖고 예수님께 질문하였다: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라고 묻는 그들에게, 예수님은 “외식하는 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셋돈을 내게 보이라” 하시니 그들은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왔다. 당시 데나리온에는 Tiberius Caesar Divi라고 새겨 있었다. 그 의미는 ‘신령하신 황제 디베리우스’라다. 그러나 예수님은 시험하는 자들의 질문에 직접 대답하는 것을 피하시고 동전에 새겨진 화상을 가리키며 말씀하셨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마 22:15-22, 막 12:13-17, 눅 20:20-25). 하나님께 속한 것은 하나님께 돌리고, 가이사가 자신의 것이라 선언한 것에 대해서도 그리하라는 의미이다(동전에는 로마 황제의 상과 그에 대한 글이 새겨 있었다). 이 사건 이후 복음서는 저희가 백성 앞에서 그의 말을 능히 책잡지 못하고 그의 대답을 기이히 여겨 잠잠하니라고 기록하였다.


니산월의 중요한 날인 유월절 세데르(Seder)가 임박하였다. 유월절이 시작되기 한 달 전부터 팔레스틴의 모든 길과 다리들은 보수공사에 들어갔다. 절기가 시작되기 2주 전에 양무리에서 제사장들을 위하여 십일조가 구별되었으며, 성전 금고는 비워 두었고, 무덤이 있는 장소들은 하얗게 회를 뿌려 무덤에 닿아 부정하게 되는 일을 금하였다. 요한은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우매 많은 사람이 자기를 성결케 하기 위하여 유월절 전에 시골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요 11:55). 만약 절기를 지킨 사람이 지체하지 않으면 제사장이 공적으로 선포한 희생양 고기를 가지고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유월절당일은 이동이 가능한 날이었다- 이 날 이스라엘은 출애굽했다).. 하지만 무교절은 안식일로서 이동이 제한된다) 정확히 유월절은 니산월 14일 저녁<해 저물 때-오후5시>부터 15일의 시작인 저녁 전<해 저물기 전> 까지요, 무교절은 15일의 시작인 <저녁> 곧, 니산월 15일부터 시작하여 21일까지 7일간 계속되었다. 그래서 요세푸스는 유월절을 8일 절기라 기록하였다. 이 두 절기는 무교병을 먹는 기간이란 측면에서 볼 때 서로 하나의 절기처럼 연결되어 있었고 따라서 성경의 기자들은 당시에 쓰던 용례 그대로를 차용하여서 8일 동안의 기간을 동일한 축제 기간으로서 <유월절> 또는 <무교절>로 관례상 혼용하여 사용하였던 그대로를 기록하였다.(겔 45:21).....따라서, 본래 유월절 양을 잡을 유월절 당일-니산월 14일-을 첫째, 무교절의 첫날(마26, 막14)이라고 기록했고, 둘째로, 무교절의 예비일이면서 동시에 안식일의 예비일인 니산월14일-곧 본래적 유월절 당일-을 [그 당시에는  유월절 양 먹는 잔치날을 본래적으로는 무교절이면서 안식일인 니산월 15일로 미루어서 Pasha로서 함께 지켰기에] 유월절의 예비일이라고까지 기록하게 되었다.(요19)...마태, 마가, 누가들이 <무교절의 첫날>이란 표현을 구태여 쓴 것은 주예수의 하나님께 대해 절대적이면서 완전한 <소제>로서의 흠없는 인생을 강조한 것이요, 요한이 유월절, 유월절잔치란 표현을 쓴 것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마지막 유월절 양을 강조함이라고 할 수 있겠다.  <유대인의 하루는 저물때인 저녁6시경부터 다음날 저녁6시경까지임> ***따라서 마26:17<무교절의 첫날에..준비하기 원하시나이까.>, 막14:12에서는 <무교절의 첫날 곧 유월절 양 잡는 날에..예수께 여짜오되..유월절 음식을 잡수시게 준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로 표현하고 있는데, 엄밀한 의미로는 아직 저녁이 안되었으므로 <무교절의 첫날 저녁-본래적 의미의 유월절-의 식탁을 준비하기 위하여>라고 이해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제자들이 주께 여쭌 그 시각이 니산월 14일이 시작되기 대략 5시간 전인 오후 12시 30분 경 hagigah festive offering을 드릴 때로서 이 때가 유대인들에게 유월절을 준비하도록 알려주는 시간이었으리라고 짐작되기 때문이다. ***주님 자신이 최후의 유월절양이셨으므로 최후의 만찬에는 같이 나눌 유월절양은 따로 필요없었고, 최후의 만찬 곧, 성찬<주님의 상>이 베풀어지기 전에 가룟유다는 <배반 위해>그 자리를 떠났음(요13:30)..


첫째달 초하루(니산월 제1일)는 성막봉헌일로서 안식일<토요일>이며, 그 후 7일마다 하나님이 제정하신 정기적인 안식일이 반복된다. 첫째달에는 두 개의 중요한 절기가 있다. 첫번째 잔치는 니산월 14일<목요일 저녁-금요일 저녁전>에 있는 희생 제사로(구약에 기록된 본래의 유월절희생), 같은 날 저녁의 유월절 잔치(Seder)와 관련이 있다. 그리고 두번째는 니산월 15일<금요일 저녁-토요일 저녁전>의 festive offering으로(구약에 기록된 7일간의 본래의 무교절의 시작), 요한복음 18:28의 유월절 잔치(히브리말 pasha로 썼음)를 암시하는데, 그 내용은 -유대인들은 더럽힘을 받지 아니하고 유월절 잔치(pasha)를 먹고자 하여 관정에 들어가지 아니하더라-고 되어 있다. 또한 요한복음에 기록된 <예비일>이란 표현은, 역사가 요세푸스에 따르면 축제나 안식일의 준비를 위해서만 쓰는 용어인데, 보통은 안식일<토요일>을 위하여 모든 것을 준비하는 <금요일>에 대해서만 쓰였고, 요19;14절에서는 <이날은 유월절의 준비일이요 때는 제육시라>, 19:31에서는 <이날은 준비일이라.. 그 안식일이 큰 날이므로 그 안식일-본래적 의미의 무교절의 첫날, 곧 니산월15일-에 시체들을 십자가에 두지 아니하려 하여>, 19:42절에서는<이날은 유대인의 준비일이요>란 표현에서처럼 십자가사건 당시에는 본래의 유월절<금요일>을 안식일<토요일>에 임의대로 옮겨서 같은 날에 안식일이요 Pasha로서 지킨 것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 많은 기독교 학자들은 이 구절에 근거하여 본래의 유월절 잔치(Seder)를 예수님께서 니산월14일인 목요일밤에 거행하셨고, 돌아가신 날은 아직 15일이 시작되기전인, 같은 날 니산월14일인 금요일 오후3시로 이해하고 있다.


유대인인 알프레드 에더스하임(Alfred Edersheim) 박사는 복음서에 서로 일치되지 않는 기사들을 보면서 이것들을 억지로 짜맞추려는 노력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주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준수하는 유대인들의 참된 관습에 반대하여 유월절 음식을 나누기 전에 유월절 잔치(Seder)로 참석하신 적이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주신 규례에 의하면 유월절 음식(Seder)을 먹는 시간은 니산월 14일 저녁-목요일 저녁-이지 니산월 15일 저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산헤드린 공의회는 유월절 양을 먹는 잔치(Seder)를 목요일 저녁에서 니산월 15일인 금요일 저녁으로 연기하였다. 이것은 <무교절>잔치의 첫번째 날인, 금요일 저녁부터 시작되는 안식일을 의식해서였을 것이다-<요19:31에서는 -그 안식일이 큰 날이므로-라는 표현을 써서 본래의 안식일<금요일 저녁/밤-토요일 아침/낮까지>임을 말하는데, 원래 큰 안식일이란 표현은 구약에서 하나님이 창조를 마치시고 안식하심으로써 제정하신 제7일 안식일을 뜻한다(출 31:15)>. 그러므로 그 때 당시 유대인들은 유월절 양(Seder)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니산월14일 오후 3시에 운명) 그 날-금요일-이지만, 그 시간 상으로 볼 때,  니산월15일인 금요일 저녁에 Pasha로서 먹었다.


요한이 18:28에 기록한 히브리말인 pasha은 (7일간의 무교절의 시작일인) 니산월 15일의 잔치를 가리키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 어떤 인간적인 해석을 내릴 수가 없다. 히브리어로 세데르(seder)는 유월절 양을 먹는 잔치를 의미한다. 탈무드의 기록을 참고하면 “저녁에 이르러, 그러나 자정을 넘기지는 않는다”고 기록한다. 신약성경에 기록된 만찬과 오늘날 세데르는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매우 보편적인 잔치이다. 세데르를 준비하는 사람은 다섯 가지를 염두에 두어야 했다: 잔치를 치를 장소, 음식을 함께 나눌 최소한의 10명을 선정하는 일, 희생양으로 잡을 양을 결정하는 일, 그리고 잡은 양을 취하여 석류 위에서 굽는 것이었다.


성전의 제사장들은 30명이 그룹을 지어 돌아가면서 근무하였는데 30이란 수는 하나님의 수와 완전 수를 합친 것이다(3X10). 지금도 사마리아인들은 유월절 양 잡는 희생제사를 고대 방법 그대로 지키고 있다. 성전이 파괴된 이후 유대인들은 유월절 희생양을 더 이상 잡지 못하고 있다. 그들에게는 구별된 제사장과 성전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지금도 아침 기도 시간을 빌어 이를 상기하면서, 성전과 희생 제사를 다시 드릴 수 있도록 기도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속죄일에 정통 유대인들은 닭을 희생함으로 희생제사를 상징적으로 지키고 있다.
유대인들은 잡은 닭을 유대인들의 머리 위에 돌리면서 다음과 같은 기도를 반복한다: “이것이 나에게 유익이 되기를 바랍니다. 닭은 사망으로 들어가고 나는 영생과 평화를 누리게 하옵소서.” 일부 유대인들은 이런 관습이 바벨론 이방 제사로부터 비롯되었다 하여 배척하기도 한다.


유대인들 각 가정 역시 나름대로 유월절을 위하여 준비한다. 가정의 여인들은 니산월 13일의 시작인 저녁부터 바빠지기 시작한다. 손에 촛불을 들고 그릇을 세밀히 살피고 집안 구석 구석 곰팡이나 누룩이 있는지를 확인한다. 바울 역시 묵은 누룩을 버리라고 말하였다(고전 5:7, 출 12:15). 지금도 유대인들은 거의 1주일간 매일같이 곰팡이를 없애기 위하여 물로 집안을 청소한다. 그들은 낮에 직장에 출근하기 때문에, 저녁에 집으로 돌아오면 우리 같은 외국인들에게 불편을 줄 정도로 소음을 내며 밤늦도록 청소를 한다. 이 같은 전통은 모세의 율법과 스바냐 1:12과 관련이 있다.
“그 때에 내가 등불로 예루살렘에 두루 찾아 무릇 찌끼 같이 가라앉아서 심중에 스스로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복도 내리지 아니하시며 화도 내리지 아니하시리라 하는 자를 벌하리니 그들의 재물이 노략되며 그들의 집이 황무할 것이라. 그들이 집을 건축하나 거기 거하지 못하며 포도원을 심으나 그 포도주를 마시지 못하리라”(렘 48:11 참고).


누룩과 곰팡이는 죄와 고통을 상징한다. 랍비 엘리에셀(Rabbi Eliezer)에 의하면 가정은 완전히 청결을 유지해야 하며 심지어는 염색장이의 천, 서기관의 아교도 깨끗해야 했다. 니산월 13일 낮동안은 14일의 저녁 만찬을 위하여 금식함으로 시간을 보냈다. 여인들은 쓴나물, haroseth 소스, 땅콩, 알몬드, 건포도 등을 식탁에 마련하였다. 그리고는 이것들을 한 곳에 섞었다. 이것은 히브리인들이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을 하면서 진흙을 구운 것을 상징하는 것이다. 식탁에는 음식을 깊이 담가 먹기 위해 소금물 또는 식초를 마련하였는데 이것은 노예생활을 하면서 고통에 눈물 젖은 세월들을 기억하는 것이다.


니산월 14일이 시작되기 대략 5시간 전 약 오후 12시 30분 경 hagigah festive offering이 드려질 때 사람들은 유월절 양을 준비하도록 그 시간을 일깨워 주었다. 복음서 역시 이런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베드로와 요한은 유월절을 위한 방과 유월절 양을 준비할 책임이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성내로 들어가라. 그리하면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리니 그를 따라가서 어디든지 그의 들어가는 그 집 주인에게 이르되 선생님의 말씀이 내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먹을 나의 객실이 어디 있느냐 하시더라 하라”(막 14:13-14)고 하셨다. 하지만 물을 긷는 일은 주로 여인들의 몫이었다. 제자들을 인도한 집 주인은 마가의 어머니인 마리아가 분명하다(눅 22:7-13, 행 12:12).


수 년간 계속된 고고학적 발굴로 말미암아 다락방에 대한 가능한 장소를 추정할 수 있으며, 여기에 대한 새로운 이해들이 마련되었다. 가톨릭 학자인 Bargil Pixner은 자신의 글에서 시온산의 에세네 사람들을 위한 넓은 구역을 기록하였다. Bargil Pixner은 말하기를 예수님 당시 요세푸스와 필로는 바리새인들의 수를 약 6천명, 에세네 사람들은 약 4천명으로 추정하였다.


주전 37년 쿰란이 파괴되었을 때 헤롯은 시온 언덕에 그들의 정착지를 마련하기까지 광야에 일시적으로 공동체를 마련할 것을 허락하였다. 시온산을 발굴한 결과 두꺼운 벽으로 두른 많은 방들은 정결을 위하여, 그리고 순례자들을 위하여 마련되었음이 드러났다. 물동이를 이고 갔던 사람은 아마도 실로암 연못에서 정결의식에 필요한 생수를 길어 나른 사람이었을 것이다.


일부 비평학자들은 예수님께서 에세네 사람들이 마련한 방에서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의식을 행하였을 것이라는 점에 착안하였는데, 에세네 사람들이 사용한 달력은 유대 월력에 비하여 2일 앞서는데 그렇다면 목요일이 된다. 당시 유대인들의 주류는 누구였는가? 바리새인들 아니면 에세네 사람들 아니면 사두개인들이었기에, 이것 역시 연구의 충분한 가치가 있다. 하지만 당시 보편적인 월력은 바리새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월력이었으며, 그러므로 비평학자들이 말하는 에세네 사람들의 달력 즉 다른 달력에 준하여 유월절을 지켰다는 것은 신빙성이 적다.


아무튼 에세네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도 유월절 세데르는 마련되었다. 그리고 발굴의 결과 사도행전 2:41에 언급된 3천명이 세례를 받은 사실에 주목하여 그 세례는 에세네 사람들의 장소에서 행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이 장소는 후에 기독교의 중요한 장소로 이용되었다. 구속에 대한 예수님의 공적인 사역은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갈릴리 가나에서 처음으로 시작되었다. 예수님은 자신을 참포도나무라 하셨다. 이제 그분은 자신의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만찬을 나누시면서 예수님은 새 언약을 주신 분으로서 포도나무의 열매를 말씀하시면서 자신의 가르침을 마무리하셨다(요 15).
 

이주섭 목사

현)두루Tentmaker(www.eduru.co.kr/두루투어/두루에듀/두루문화원) 고문
현)조지아 크리스챤 대학교 (Georgia Christain University) 역사 지리학과 교수현)성서지리연구원 (Institute of the Biblical Geography) 원장
전)예루살렘 대학 역사학과에서 고대 성읍, 히브리 대학 고고학과에서 고대 도로를 수학
전)4X4 지프를 이용하여 방문 가능한 모든 성경적인 유적들을 탐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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