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110.다윗의 시편==
**[내주의보혈은254]..[마음에가득한의심을깨치고257]..예수십자가에흘린피로써259..주예수이름높이어37.. 영광을받으신만유의주여331 주예수의강림이가까우니179
[[전능하신 성부하나님 우편에 앉으심...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심]]
1>영광스러운 통치 :: 성부께서는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를 통하여 만물을 다스리고 계심...성부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통치하심은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구속사역의 대가로 주어진 것임..동시에 심판주로서의 권세도 그러함..
2>그리스도는 보혈로 구속하신 교회의 머리가 되시려고 승천하사, 영원한 구속사역의 효력안에서 성부하나님의 우편에 [요동함 없이] 앉아 계심.. 교회를 시링하시고 교회를 위하여 (지고지선의 진복이신 바)자신을 주시며 영광스럽고 거룩한 교회로<엡 세워 가시며(성장성숙) 보존-보호하시며, 땅끝까지 복음전파를 통해 제자삼음-가르쳐 지키게 함의 대사명을 그들안에서 내주하게 하신 생명의 영이시며 권능의 기름부음이신 성령님을 통해 친히 이루어 가신다..
3>우편은 권능과 권위의 자리....하나님의 권능과 영광으로 만물을 붙들고 다스리시며 원수를 부수시며(천사들과 권세와 능력들이 순복하는 바) 성부하나님과 함께 현재 가장 영광스러운 통치를 시행하고 계심 ...이로써 신자는 일상생활에서 하나님의 통치권을 나타내면서 살 수 있도록 하셨음
4>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되심의 영광....지금 이 세상에서부터 영원에 이르기까지 그분의 권능으로 [회개, 사죄, 영생의 ] 유익과 위로, 믿음-소망-사랑-인내의 모든 은혜들, 곧 보존과 보호, [세상이 보기에는 일견, 고난과 박해, 순교를 당하며 흩어져 멸절될 것처럼 보일찌라도] 극심한 어려움 속에서도 항상 이김을 누리게 하심.....이미 그리스도안에서 하늘에 앉힌 바 된 교회(성도)로 하여금 일상에서 [섬기며 다스림으로써]하나님의 통치권을 나타내며 살 수 있게 하셨다...(사랑으로 역사하는, 생동하는 산 믿음을 발휘하라!!)
*1.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야샤브..앉다/살다/머무르다/거주하다) 하셨도다
*2.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주의 권능의 규를 내보내시리니 주는 원수들 중에서 다스리소서(라다.....다스리다/밟다/지배하다)
*3.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네다바..사랑, 감사,기쁨으로 자원/낙헌/봉헌하다 :3가지낙헌예물: 셀라밈<화목>/네데르<서원>/토다<감사>)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
*4.여호와는 맹세하고 변하지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5.주의 오른쪽에 계신 주께서 그의 노하시는 날에 왕들을 쳐서 깨뜨리실 것이라
*6.뭇 나라를 심판하여 시체로 가득하게 하시고 여러 나라의 머리를 쳐서 깨뜨리시며
*7.[길 가의 시냇물을 마시므로...나는 날마다 죽노라!!..나는 죽고 그리스도로 살기] 그의 머리를 드시리로다 ::: HS따라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
---NLT----
The LORD says to my Lord: "Sit at My right hand Until I make Your enemies a footstool for Your feet."
The LORD will stretch forth Your strong scepter from Zion, saying, "Rule in the midst of Your enemies."
Your people will volunteer freely in the day of Your power; In holy array, from the womb of the dawn, Your youth are to You as the dew.
The LORD has sworn and will not change His mind, "You are a priest forever According to the order of Melchizedek."
The Lord is at Your right hand; He will shatter kings in the day of His wrath.
He will judge among the nations, He will fill them with corpses, He will shatter the chief men over a broad country.
He will drink from the brook by the wayside; Therefore He will lift up His head
-----AMP--
1.The Lord (Father) says to my Lord (the Messiah, His Son),
“Sit at My right hand Until I make Your enemies a footstool for Your feet [subjugating them into complete submission].”
2.The Lord will send the scepter of Your strength from Zion, saying, “Rule in the midst of Your enemies.”
3.Your people will offer themselves willingly [to participate in Your battle] in the day of Your power; In the splendor of holiness, from the womb of the dawn, Your young men are to You as the dew.
4.The Lord has sworn [an oath] and will not change His mind: “[a]You are a priest forever According to the order of Melchizedek.”
5.The Lord is at Your right hand, He [b]will crush kings in the day of His wrath.
6.He will execute judgment [in overwhelming punishment] among the nations; He will fill them with corpses, He will crush the chief men over a broad country.
7.He will drink from the brook by the wayside; Therefore He will lift up His head [triumphantly].
====[시110 개요]====
이 시편은 순수한 복음으로, 유일하게 그리고 전체적으로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며, 선조들에게 약속했고 또 그들에 의해 기대되었던 메시야에 관한 것이다.
옛날 유대인들은 아무리 나쁜 자라도 이 시편을 그렇게 이해했음이 명백하다.
그러나 현대의 유대인들은 곡해하려 하며, 이것을 우리에게서 빼앗아가려 한다.
주 예수께서 이 시편의 처음 말들에 관해 바리새인들에게 질문을 받으셨을 때, 그가 그의 후손이었지만 다윗이 그의 주 그리스도를 영적으로 부른 것이라고 여기셨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편을 택하고, 다윗이 메시야에 관해 말했는지에 대해 질문하기보다 오히려 곤란하게 만들기를 원했다.
그들은 자기들의 불명예로 돌려질 것을 예측하면서도, 아주 분명한 진리에 쉽게 굴복하고 말았다(마 22:41 등).
의심할 여지없이 이 시편은 그리스도에 대해 예언하고 있다.
우리의 구속자로서의 그리스도는 선지자직, 제사장직, 왕직을 수행했으며, 그것도 그의 비하와 승귀에 근거해 수행하셨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삼직이 문제시되고 있다.
1. 그의 선지자직(2).
2. 그의 제사장직(4).
3. 그의 왕직(1, 3, 5-6).
4. 그의 비하 및 승귀의 신분(7).
---이 시편을 노래하면서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일으켜야 하며, 우리 자신을 철저하게 그에게 복종시키고, 그의 은총과 통치에 복종하며, 우리의 선지자요, 제사장이요, 왕 되신 그를 높이 찬양해야 한다.
---우리는 그에게 지배받고, 배우며, 영원토록 구원받기를 소망한다. 모든 교회의 선지자요 제사장이요 왕 되신 그가 모든 대적하는 나라와 권세를 꺾으시고, 아버지 하나님의 나라를 도래시킬 때까지 지배하실 것이다.
===========
승리하게 하시는 하나님(시 110:1-4)
어떤 사람들은 이 시편을 “다윗의 신앙 고백”이라고 부른다. 거의 모든 기독교 신앙의 표제를 여기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표제는 “다윗의 시편”이라고 되어 있다. 그는 메시야가 장차 나타날 것을 믿으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크게 하나님을 찬양하고 스스로 위로를 삼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시편을 부르면서 여기에서 예언된 것은 장차 성취되어 더욱 명확하게 계시될 것을 믿는다.
여기에서는 그리스도에 관해 영광스러운 일들이 말해지며, 우리는 그가 얼마나 위대한가를 생각할 의무를 갖게 된다.
Ⅰ. 그는 다윗의 주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에 특별히 주의 깊게 보아야 한다.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그를 주라 칭하였다”(마 22:43).
그리고 사도가 멜기세덱의 위엄을 입증하면서, 아브라함과 같이 위대한 인물도 그에게 “십일조”를 주었으므로(히 7:4) 그를 그리스도라고 했듯이, 우리는 이로 말미암아 위대한 인물 다윗이 “주라 칭한” 그분이 주 예수임을 분명히 알게 된다.
다윗왕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자기가 통치한다는 것을 인정하며, 그분의 종으로서 용납되기를 바란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자기에게서 나올 후손이었기 때문에 “주”라 칭했다고 생각한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직계인 어머니도 그를 자기의 “구주”라고 칭한다(눅 1:47).
심지어는 그의 양친도 그의 백성, 그가 구원한 자들이었다.
Ⅱ. 그는 하나님의 뜻과 명령에 의해 주권적인 주로 세워졌다.
“여호와 내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왕으로서 “앉으라”고 하셨다. 그는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다”(벧후 1:17).
그것은 존귀와 영광의 근원 되는 그에게서 받은 것이지, “스스로 취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는 정당한 주이시며, 그의 권한은 논의의 여지가 없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부정될 수 없다. 그러므로 그는 영원한 주님이시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철회되지 않는다. 그는 확실히 아버지께서 그에게 맡기신 나라를 소유하시며, 아무도 방해하지 못할 것이다.
Ⅲ. 그는 가장 높은 영광의 자리에 나아가며, 하늘과 땅에서 절대적인 통치력을 위탁받는다.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앉는 것은 휴식하는 자세다. 그의 노력과 고난 후에 그는 그의 모든 노고에서부터 휴식에로 들어간다.
또 그것은 다스리는 자세다. 그는 앉아서 법을 주며, 심판을 내린다.
그것은 계속 체재하는(중보/중재하는) 자세다. 그는 영원까지 왕과 같이 앉아 있다.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은 그의 위엄과 그의 지배(그 실행과 나타내심의 실제)를 의미한다.
....그것은 아버지에 의해 그에게 주어진 존귀이며, 그에게 위임된 신뢰다.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에게 내려오는 모든 은총과 인간이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예배가 그의 손을 통해서 지나간다.
Ⅳ. 그의 모든 대적자들은 적당한 때에 그의 발등상이 되니, 그때까지는 아니다.
....그러나 또한 중보자의 활동은 어느 면에서는 끝나게 될 것이지만, 그때에는 중보자의 영광에서 통치해야 한다.
1. 심지어는 그리스도께서도 세상에서 그의 나라와 백성, 그의 영광과 권리에 대항해 싸우는 대적자들을 가지게 된다.
....그가 거기에서 저들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하려는 자들이 있다. 사단과 연합해 전혀 그가 통치하지 못하도록 하려는 세력들이 있다.
2. 이러한 대적자들은 “그의 발등상이 될 것이다.”
....그는 그들을 굴복시키시며, 승리하신다. 그는 쉽게 그렇게 행하신다. 마치 발을 옮겨놓듯이 쉽게 행하신다. 또 거기에는 타당성이 있다.
....그는 그러한 방법으로 그들을 굴복시키시고, 그의 영광과 저희의 끊임없는 굴욕을 취하실 것이다. 그는 “악인을 밟으실 것이다”(말 4:3).
3.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 일을 [이미 십자가로]수행하셨다. “나는 네 원수로 네 발등상이 되게 하리라.” 누가 그 일을 할 수 있을 것인가?
4. 그 일은 즉시 수행되는 것은 아니다. 그의 모든 적들이 지금 사슬에 묶여 있지만, 아직 그의 발등상이 된 것은 아니다.
....이것을 사도는 주시한다. “지금 우리는 만물이 아직 저에게 복종한 것을 보지 못한다”(히 2:8).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승리와 영광을 완전케 하기 위해서 기다리신다.
5. 그는 그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기다리신다.
....그리고 그들의 모든 권세와 사악함이 그의 나라에 아무런 방해도 주지 못하게 하신다. 그가 하나님 우편에 앉아 있음은 마침내 모든 그의 적들을 짓밟을 것을 선언함이다.
Ⅴ. 그는 예루살렘에서 시작해 세상에 왕국을 건설하려고 한다(2절).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주의 권능의 지팡이(곧 홀)를 내어보내시리니”, 그의 왕국이 세워지며 유지되고 통치될 것이다.
....메시야는 그가 하늘에서 전능자의 우편에 앉아 있을 때 지상에 있는 교회들을 취하며, 보살필 것이다. 율법이 수여된 그 놀라운 산, 시내 산 건너편에 있는(히 12:18, 24; 갈 4:24-25) “거룩한 산 시온에 세운 왕”(2:6)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왕국은 다윗의 도성, 시온으로부터 일어난다. 그가 다윗의 후손이고, “그의 선조 다윗의 보좌”를 취하려 하기 때문이다.
....그의 힘이 지팡이 또는 그의 권능의 지팡이에 의해서라는 말은 그의 영원한 복음을 의미하며, 거기에 수반되는 성령의 능력을 의미한다―말씀의 보도(報道)와 여호와의 팔이 그것을 수반한다(사 53:1; 롬 1:16).
....복음은 말씀과 권능과 “성령 안에서”(살전 1:5) 나타난다. 말씀과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 영혼들은 먼저 낮아지고, 하나님께 대한 복종으로 인도되며, 하나님의 뜻에 따라 지배되고 통치 받게 된다.
---마침내, 하나님께서 이 권능의 지팡이를 [곧 성육신하신 JC] 보내셨다. 그는 성령을 부으셨고, 말씀을 가르치는 자들에게 사명과 자격을 주셨으며, “성령을 주셨다”(갈 3:5). 그것은 시온으로부터 보내진다. 시온에서 성령이 주어졌고, 복음의 설교도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되어 만방 중에 이르러야 한다(눅 24:47, 49 참조). 신앙의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다”(사 2:3).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진 그리스도의 복음은 기적을 행하는, “하나님을 통한 능력”(고후 10:4)이 된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권능의 지팡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복음에서 빛나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암시하는 왕의 홀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그의 교회를 돌보시는 자비를 암시하는 목자의 지팡이와 막대기를 의미한다고 보고 있다. 그는 “위대한 목자이시며, 선한 목자”이시기 때문이다.
Ⅵ. 건설된 그의 왕국은 어두움의 권세를 가진 모든 대적자들에도 불구하고 세상에서 보전되며, 지켜진다.
....그리스도는 다스리며, 율법을 주시고, 그것에 의해 그의 백성을 다스리며, 그들을 완전케 하신다.
....그 자신의 뜻을 행하시며, 그들을 안락하고 행복하게 하시고, 그 자신의 뜻을 성취하시며, 인간 가운데서 그의 나라를 보전하신다. 그의 왕국은 하나님께 속하며, 굳게 설 것이다. 그의 관은 머리 위에 굳게 자리 잡으며, 번영하게 될 것이다.
....그는 “그 원수 중에서” 다스리신다. 그는 그의 백성들 중에서 하늘에 앉아 계신다. 거기에서 그의 영광의 보좌는 그를 신실하게 예배하는 자들로 둘러싸여 있다(계 5:11).
....그는 그의 대적자들 가운데서 지상을 [교회, 성도의 기도를 통해]지배하며, 제자들은 “이리들 가운데에 있는 양과 같이” 보내졌다. 그는 “저희가 어디에 사는 것을 알며, 거기는 사단의 위가 있는 곳이다”(계 2:13).
....이것은 모든 악한 정책들과 지옥과 지상의 권력들―그것은 교회가 세워진 반석을 흔들 수 없다―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의 근거를 보존할 뿐만 아니라 그 지위를 얻게 되는 영광에 이바지한다. “진리는 위대하며, 승리하게 될 것이다.”
Ⅶ. 그는 수많은 백성들을 갖게 되며, 그들은 그에게 그 이름의 존귀와 영광이 되기 위해 존재하게 된다(3절).
1. 그들은 그의 백성이 되며, 그는 또한 논쟁의 여지가 없는 칭호를 얻게 된다.
....그들은 그들의 생명과 존재를 주시며 또 몰수하는 아버지에 의해 그에게 주어졌다. “저희는 아버지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습니다”(요 17:6).
....그들은 그로 말미암아 구속받았다. 그는 “친백성”(딛 2:14)이 되도록 하기 위해 그들을 사셨다. 그들은 본인들의 승낙에 앞서 권리상 그의 것이었다. 그는 그들이 개종하기 전에 “고린도에 있는 많은 사람들을 취했다”(행 18:10).
2. 그들은 “기뻐하는 백성”, 기쁨의 백성이 될 것이다.
....그것은 봉사를 택하는 종이며, 강제로 봉사하는 종들을 암시하지는 않는다. 또한 그것은 자원해 나서는 병사를 의미하며, 인간을 억압하는 병사를 암시하지 않는다(“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그것은 자유의지에 따른 제물로 예배함이며, 억지로 드리는 제사가 아님을 의미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산 제사로 드린다.” 그리스도의 백성은 기뻐하는 백성이다. 영혼의 회개는 그리스도의 것이 되기를 기뻐하는 데서 성립되며, 전적인 순종과 만족으로 그의 멍에와 그의 세력 속으로 들어감을 의미한다.
3. 그들은 “주의 권능의 날에” (또는) “주가 모으시는 날에” 있게 된다.
....주가 병사를 모으실 때, 주는 자진해 참가한 수많은 지원자를 발견하신다. 기호가 세워지며, “이방인들이 그것을 찾는다”(사 11:10, 60:3). 그렇지 않으면 주가 그들을 싸움에 이끌어내었을 때, 그들은 “어린 양이 인도하는 대로 따라가는 자”(계 14:4)가 된다. (또는) “주의 군대의 날에”, 신앙을 버린 자들을 진압하고 버림받은 천사들의 나라를 파괴하기 위해, 처음 복음의 전파자가 그리스도의 군대로서 보냄을 받을 때, “주의 백성이 된 모든 자들은 기뻐하게 된다.”
....그러므로 “주의 권능의 날에” 우리는 기쁨을 취한다. 복음을 따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보편적인 권능”이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백성이 되기를 즐겁게 여기게 하는 것으로, 복음을 확증케 하기 위해 행해진 부인할 수 없는 기적들 외에, 그 위대한 저자와 그 안에 포함된 내재적 초월성의 높은 권위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그리스도의 백성에게 말씀의 능력으로 함께하는 “특별한 권능”, 즉 성령의 권능이 있다. 이것은 그들이 자발적이 되게 하는 데 효과적이다.
전자는 죄인들에게 변명거리를 남겨 놓지 않는다. 후자는 성도들에게 자랑할 거리를 남겨놓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백성이 되기를 기뻐하는 자의 경우 누구든지, 그들을 그렇게 되도록 만든 것은 하나님의 자유롭고 전능한 은총이다.
4. 그들은 “거룩함의 아름다움에” 있게 된다.
(1) 그들은 거룩함의 아름다움에 의해 그에게 이끌리게 된다.
그들은 그의 아름다움을 봄으로써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기에 매료될 것이다. 그는 거룩한 예수이며, 거룩한 나라가 되는 교회의 아름다움이다.
(2) 그들은 그로 말미암아 그의 성역을 다스리는 영적인 제사장들로서 거룩함의 아름다움에 들어가게 된다.
“예수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는 담대하게 가장 거룩한 곳에 들어가게 되었기 때문이다.”
(3) 그들은 은총과 성화의 아름다운 복장과 장식을 하고서 주님에게 나아간다.
거룩함은 그리스도 권속의 제복이며, “그의 집을 영원하게 한다.” 그리스도의 병사는 모두 이와 같이 옷 입었다.
이것이 그들의 입는 군기(軍旗)다. 하늘의 군대들은 “희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고 그를 따른다”(계 19:14).
5. 주님은 그에게 헌신하는 수많은 백성을 갖게 된다.
백성의 많은 수효는 왕의 영광인데, 그것이 이 왕의 영광이 된다.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 즉, 여름 아침에 이슬방울처럼 많은 젊은 개종자들이 나온다.
복음의 초창기, 신약의 아침에, 교회의 젊은 시기에 커다란 무리가 그리스도에게로 구름같이 모였으며, 믿었던 수많은 무리가 있었으니, “여호와에게로 내리는 이슬 같은 야곱의 남은 자”(미 5:7; 사 64:4, 8)가 있었다.
“아침에”(그들의 매우 어린 시절에) 주는 주의 백성의 젊음, 즉 그들이 젊었을 때 가지는 저희의 마음과 감정을 이슬같이 취하신다. 그들은 주의 청년들이다. 그들은 주께 바쳐진 것들이다. “이슬 같은 주의 청년”은 그리스도에게로 모여드는 젊은 사람들의 거대하고도 아름답고 소망스런 모습이다. 그것은 땅에 떨어지는 이슬처럼 세상에서 열매맺게 된다. 우리의 이슬 같은 젊음은, 우리 생애의 아침이라 할지라도, 우리 주 예수께 바쳐져야 한다.
6. 주는 왕이 되실 뿐만 아니라, 제사장도 되신다(4절).
같은 주님이 말씀하신다.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맹세하고 변치 아니하리라. 너는 제사장이다. 즉 너는 제사장이 될 것이다.”
하나님의 맹세의 말씀에 의해 그가 봉헌되셨다.
(1)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제사장이다.
그는 그 직분에 임명되었으며, 그것을 신실하게 수행하신다. 그는 “하나님께 속한 일에 사람을 위하여 예물과 속죄하는 제사를 드린다”(히 5:1).
그는 우리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제사장직을 담당하셨다. 그는 우리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목자이며, 하나님께 우리를 옹호해 주시는 분,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서 계신 중보자이다.
(2) 그는 “영원한 제사장”이다.
그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뜻에서 제사장을 위해 준비된 분이다. 그는 구약의 성도들에게 제사장이었으며, 종말의 때까지 모든 믿는 자들을 위한 제사장이 되신다.
그가 그리스도의 제사장 되심 이외에 다른 은총의 방편을 기대하지 못하기 때문에, 또한 그 축복의 열매와 결과가 영원까지 남아 있게 될 것이기 때문에 “영원한 제사장”이 되신다.
(3) 그는 맹세로써 제사장이 되셨다.
사도는 아론의 제사장직보다 그의 제사장직의 탁월성을 입증하려 노력한다(히 7:20-21). 그것은 폐지할 수 있는 능력자가 없는 직임이라는 것을 보이면서 “여호와께서 맹세하셨다.” 그가 엘리의 제사장직에 대해 행하심과 같이(삼상 2:30) “그는 변치 아니하시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영광과 그리스도인들의 위로를 위해 의도되었다.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은 최고의 비준에 의해 확증된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의 믿음과 소망을 세우기 위한, 흔들리지 않는 터전을 이루게 하려 하신 것이다.
(4) 그는 아론의 반열이 아니라, 멜기세덱의 반열에 선 제사장이다.
멜기세덱이 아론보다 앞선 제사장이며, 여러 경우에 아론보다 우수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제사장직 표현은 더 생생하게 드러난다.
멜기세덱은 “그 보좌에 앉은 제사장”(슥 6:13)이었으며, 의의 왕이요 평화의 왕이었다. 그리스도도 그와 같은 분이다.
멜기세덱은 후계자가 없었다. 그리스도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제사장직은 변함 없는 것이다.
사도는 이 말씀에 대해 크게 논하며(히 7장), 거기에 근거하여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에 대해 강론한다. 그가 보여준 것은 결코 새로운 생각이 아니었다. 오히려 가장 확실한 이 예언의 말씀에 기초한 것일 뿐이었다.
신약성서가 구약성서를 설명해 주듯이, 구약성서도 신약성서를 확증해 주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양자의 알파요 오메가이기 때문이다.
------------------
메시아의 지배(시 110:5-7)
Ⅰ.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의 위대한 구속자가 그 대적자들을 “그의 발등상”(1절)으로 삼기 위해 정복하심을 본다(5-6절).
우리 주 예수는 자기 왕국을 건설하는 데에 반대하는 모든 세력을 쳐부수며, 거기에 반대와 항거를 일으키는 모든 자들을 파멸시키신다.
그는 자기에게 대항해 싸우며, 박해나 사악한 저지에 의해 자기 백성과 자기 나라의 권리에 대항해 싸우는 자들은 누구든지 혹심하게 대하실 것이다.
여기에서 다음 사항들을 주의 깊게 관찰해 보자.
1. 정복자는 “여호와 아도나이”(Adonai)이시다.
주 예수, 모든 심판이 위탁된 그가 정복자다. 그는 그의 적들에 대해 자기의 역할을 잘 행하신다. “오 교회여! 여호와께서 너의 우편에 계신다.”
즉, 자기 백성에게 가까이 하시며, 그들에게 현실적인 도움이 되는 여호와가 그들의 우편에 있으며, 그들을 강하게 하고 구원하시는 여호와가 그들을 위해 자기의 대적자들과 그들의 대적자들에 대항해 나타나신다(109:31 참조). “그는 가난한 자의 우편에 계신다”(16:8)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그의 교회 우편에서 그의 활동을 행한다고 말할 때 그 의미는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나타나시기를 원한다면, 우리도 “스스로 분발해야”(삼하 5:24) 함이라고 했다.
또는 1절에 언급된 것과 같이, “오 하나님! 주의 우편에 계시옵소서” 하는 말에서 우리는 그의 위엄과 지배권을 보게 된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심은 그의 적들에게는 크나큰 공포를 말하지만, 그의 백성들에게는 행복을 말해 준다.
2. 승리를 위해 정해진 시간이 있다. [지금은 이미 승리하신 그리스도의 인내의 날이다!!]
“그의 진노의 날에”, 즉 그것을 위해 정해진 시간에 저희 죄악의 분량이 찼기 때문에 그들은 파멸에 이른다. 그의 인내의 날이 끝날 때는 그의 진노 날이 온다.
(1) 그리스도는 은총은 물론 내리실 진노도 소유하신다.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그 아들에게 입맞추라”고 하신다. 그가 “진노하심으로” 대하기도 하시기 때문이다(2:12). 우리는 “어린양의 진노”에 관해 읽을 수 있다(계 6:16).
(2) 정한 진노의 날이 있으며, “시온의 논쟁에 대한 보상의 해”, 즉 구속의 해가 있다.
그 시간은 특별한 적들의 멸망을 위해 정해졌으며, 그 시간이 올 때는 그런 일이 일어나며, 이전보다 얼마나 다른가를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의 진노의 큰 날은 시간의 종말에 있게 될 것이다(계 6:17).
3. 승리의 범위를 보자.
(1) 그것은 매우 높게 미친다.
그는 “열왕을 칠 것이다.” 그리스도에게 대항하던 인간들 중 가장 위대한 자도 그 앞에서는 굴복하게 된다.
지금까지는 늘 승리해 왔던 “지상의 왕들”이며 지배자라고 할지라도 그 습격에 의해 스스로 부끄러움을 당하게 된다(2:2-5).
사람들 가운데 그들의 권력이 압제적인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책임을 물으실 것이다.
그들의 힘이 아무리 크고, 그들의 정책이 아무리 심원하더라도 그리스도는 그들을 치실 것이다. 그들이 교만하게 행하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그들을 이기신다.
사단은 이 세상의 왕이며, 죽음의 왕, 공포의 왕이다. 우리는 어린양과 더불어 싸우는 왕들에 대해 읽은 바 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낮아지며, 파멸에 이를 것이다.
(2) 그 승리는 매우 멀리 퍼진다.
그리스도의 승리의 트로피가 “열방 중에”, 많은 나라들 가운데서 들려지며, 그의 적이 있는 곳 어디에서나 그의 눈뿐 아니라 그의 “손이 그들을 발견해 내고”(21:8), 그의 진노가 그들을 뒤쫓는다. 그가 “만국을 중재한다”(욜 3:2).
4. 승리의 정당성을 보자.
“그가 열방 중에 판단하리라.” 그것은 격분 속에서 수행되는 군사적인 실행이 아니라, 법률상의 문제다. 저주하고 살육하기 전에 그는 심판하신다.
그는 그들이 스스로 멸망을 자초함과 그들에게 되돌아갈 바위를 스스로 굴려버렸음을 명백하게 드러내실 것이다.
그리고 “그가 말할 때 의로움이 인정될 것이며, 하늘이 그의 의로우심을 선포할 것이다”(계 19:1-2 참조).
5. 승리의 결과를 보자.
그의 대적자들을 완전하게 전적인 파멸로 이끌 것이다. 그는 그들을 철저하게 치시리라. 그가 급소를 치시며, 치유될 수 없는 상처를 주시기 때문이다.
메시야의 처음 약속에 언급된 것과 같이, 그는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다.” 그는 “그 원수의 머리를 쳐서 깨치시리라”(68:21).
어떤 이들은 사단이건 적그리스도이건, “열방 위의 머리가 되는 자를 상하게 할 것이다”(창 3:15). 라고 읽는다.
“여호와는 그의 입에서 숨을 끊으실 것이다.” 그는 이와 같이 그의 대적자들을 파괴해 “죽은 시체들로 자리를 채우게” 하신다. 여호와께 살육 당한 자가 많을 것이다(사 34:3; 겔 39:12, 14; 계 14:20, 19:17-18 참조). “죽은 시체로 골짜기를 채우는 것”(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해석한다)은 아마도 “저주받은 영혼들로 지옥을 채우는 것”(이것은 가끔 “힌놈”의 골짜기와 비교된다. 사 30:33; 렘 7:32)이리라. 그것이 그리스도에게 계속해서 적대감을 갖는 자들의 몫이 된다.
Ⅱ. 우리는 여기에서 그의 성도들을 구원하며, 그들을 위로하는 [성육신하사 죄의 전가-저주/고난-십자가 죽음을 맛보심으로써 대속하신]구속자를 본다(7절).
1. 그는 저희의 이익을 위해 낮아지셨다.
“그는 길가의 시냇물을 마시고”, 아버지께서 그의 손에 두신 쓴잔을 마신다. 그는 비천하고 곤궁하게 되며, 동시에 그의 일에 열중하신다.
....그는 큰 길가에 있는 호수로부터 흙탕물을 마신다. 율법의 저주의 방편에 개입한 하나님의 진노는 “길가의 시냇물”이었으며, 그의 계획의 길에 놓였다. 즉, 그는 그것을 거쳐야 하며, 우리 구원의 길에 개입해 우리와 하늘 사이에 가로놓인 그것을 제거해야 한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한 저주가 되사 이 시냇물을 마셨다. 그러므로 그가 그의 고난에 들어갔을 때 그는 “기드론 시내 저편으로 나가신 것이다”(요 18:1). 그는 이 “검은 시냇물”(기드론의 의미)을 깊이 마셨다. 이 피묻은 시냇물은 우리의 구속과 구원의 길에서 제거하기 위해 “길가의 시냇물”처럼 마셔졌다.
2. 그는 우리의 이익을 위해 높아지신다.
“인하여 그 머리를 드시리로다.” 죽으셨을 때 그는 “머리를 숙이셨다”(요 19:30).
....그러나 그는 그의 부활에서 그 자신의 힘으로 머리를 곧 높이셨다. 그는 정복자로서 머리를 높이 드셨다. 물론 정복자 그 이상이다. 이것은 그의 승귀(exaltation)는 물론 그의 기쁨(exultation)을 의미한다. 이것은 그의 고양(高揚)일 뿐만 아니라 승리를 의미한다.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골 2:15).
....다윗은 그분의 모형으로서 이렇게 말한다.
“이제 내 머리가 나를 두른 내 원수 위에 들릴 것이다”(27:6). 그의 승귀는 그의 비하의 보상이었다.
“그가 자기를 낮추셨으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였다”(빌 2:9). 그가 길가의 물을 마셨기 때문에 그는 그 자신의 머리를 치켜들 수 있었다.
그리하여 그의 모든 신실한 추종자들의 머리를 치켜들 수 있게 되었다. 만일 그의 신실한 추종자들이 그와 더불어 고난을 받게 된다면, 그들은 그와 더불어 또한 다스리게 될 것이다.
-------
hd;r;(7287, 라다) 밟다, 다스리다, 지배하다
1. 라다(동사)는 기본어근이며, (a)'지배하다 have dominion, 다스리다(통치하다) rule', (b) 특수화된 의미로 '밟다 treed'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22회 나오며, 칼형과 히필형으로만 사용되었다.
(a) 칼형에서,
(1) 이 단어는 '밟다'를 의미한다.
욜 3:13, "너희는 낫을 쓰라 곡식이 익었도다 와서 밟을찌어다 포도주 틀이 가득히 차고 포도주 독이 넘치니 그들의 악이 큼이로다".
(2) 이 단어는 '지배하다, 다스리다'를 의미한다.
창 1:26에서 사람이 통치할 대상들은 원전에 따르면 5종류로 분류된다.
① 바다의 물고기들.
② 공중의 새들,
③ 육축(가축),
④ 땅의 모든 것, 우베콜 하아레츠는 직역하면 '그리고 땅의 모든 것'이다. 한글 개역과 KJV, NASB, NIV 등은 '온 땅'이라는 의미로 번역했다. 그러나 표준 새번역은 '땅 위에 사는 온갖 들짐승', 공동번역은 '모든 들짐승'이라고 번역했다 - 이것은 S사본을 따른 것인데 거기에는 하이야트(동물, 짐승, 여성, 단수, 연계형)가 삽입되어 있다. 따라서, '그리고 그 땅의 모든 짐승'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그런데 만일 마소라 본문의 표현대로 '땅의 모든 것'이란 무엇인가? Leupold는 그의 창세기 주석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온 땅'을 그 단순한 의미로 취한다. 즉, 땅은 인간이 정복해야 할 대상이다. 인간이 이 분야에서 해야 할 활동이란 자연력 정복, 물리, 전기, 화학, 생리학 등의 분야이다. 참된 과학은 무엇이나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이 광범위한 특허장에 포함된다.
⑤ 땅에 기는 모든 기는 것.
창 1:28에서도 사람이 통치할 대상들은 마찬가지이다. 라다는 '지배하다'는 개념이 강하다. 여기서 명령형이 사용되었다. 하나님은 피조물을 인간의 지배하에 두고 '다스리라'고 명령하신다. 인간의 사명은 세상에서 그의 직무를 하나님께 책임 있는 것으로 인정하고 피조물에 대해 주권을 행사하는 것이다.
라다는 보다 빈번히 사용되는 동사인 마샬과 가까운 동의어로 사용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라다는 하나님의 지배보다는 인간의 지배를 가리키는데 한정되어 사용된다(시 110:2 등). 이 어근은 적들에 대한 이스라엘의 지배(사 14:2)와 종족 민족에 대한 이방 나라들의 지배(사 14:6)에 대해 사용된다.
애 1:13에는 가장 어렵고 독특한 용법이 나온다. RSV는 이 구절을 "그가 위로부터 불을 보내셨으니 그 불을 나의 뼈에 내리셨다" From on hight he sent fire; into my bones he made it decend라고 잘못 번역한다. KJV와 JPS는 보다 정확히 "위에서부터 나의 골수에 불을 보내셨으니 그것이 골수를 이기었다" From above hath he sent fire into my bones, and it prevaileth against them라고 번역한다(한글개역은 "위에서부터... 불을 보내어 이기게 하시고"). 그러나 보다 더 나은 번역은 "그는 위에서부터 나의 모든 뼈에 불을 보내셨으니 그 불이 그 뼈들을 위압했다"이다.
(b) 히필형에서 이 단어는 '다스리게 하다'를 의미한다. 사 4:2에서 메시야왕의 통치를 묘사하는데 사용되었다: "그 날에 여호와의 싹이 아름답고 영화로울 것이요 그 땅의 소산은 이스라엘의 피난한 자를 위하여 영화롭고 아름다울 것이며".
2. 라다(동사)는 '닦아 깨끗이 하다, 긁어내다, 벗겨내다'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2회 나오며, 칼형으로 사용되었다.
삿 14:9에서 꿀을 긁어내는 것을 묘사한다: "손으로 그 꿀을 취하여 행하며 먹고 그 부모에게 이르러 그들에게 그것을 드려서 먹게 하였으나 그 꿀을 사자의 몸에서 취하였다고는 고하지 아니하였더라".
렘 5:31에서 비유적으로 재물이나 돈 등을 긁어 내는 것을 묘사한다: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그 결국에는 너희가 어찌 하려느냐". 여기서 '다스린다'는 의미로는 번역할 수 있다.
(참조: BDB; TWOT).
-------
hb;d;n](5071, 네다바) 자발적임, 자유의지, 자원 제물 =낙헌제물=봉헌예물
네다바(명여)는 나다브(bd'n: , 5068)에서 유래했으며, '자발적임 voluntariness, 자원, 제물 freewill offering'를 의미한다.
이 단어는 자발적인 행동이나 자발적인 봉헌을 나타낸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26회 나온다.
(a) 네다바는 '자발적임, 자발적으로'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호 14:5에서 '자발적으로, 즉 즐거이' 사랑하는 것을 묘사한다. 시 68:9에서 아낌 없이 주는 비 즉 족한 비에 대해 사용되었다. 시 54:6에서 '자발적으로(혹은 기꺼이)', 신 23:24에서 '자유의지로'라는 문자적 의미로 사용되었다.
(b) 네다바는 '자발적인 헌물, 자원제물'에 대해 사용되었다. 네다바는 성막과 성전 건축을 위한 자발적인 헌물(나다브의 목적어)을 나타낸다. 출 36장에 의하면 백성들은 모세가 그만 바치라고 부탁할 만큼 그토록 많이 자원하여 가져왔다. 나아가 이 명사는 "가르침이나 약속 때문이 아니라 헌신에서" 바쳐진 제물을 나타낸다.
이러한 제물은 세가지 유형의 화목제물 중의 하나이다(셀라밈, 다른 두가지는 네데르: 서원예물, 토다: 감사제물이다).
셸라밈은 "속죄를 가져오는 하나님과의 화해를 상징한다"(PTOT, p. 386). 셸라밈은 그 자체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서 기인하는 은총과 축복의 상태를 축하한다(세상에 알린다). 하나님께서 친교의 만찬의 주인으로 행하시면서, 전체 과정의 세부 사항을 지시하고 감독하신다. 번제에 쓰이는 짐승과 같은 짐승이 사용된다(그러나 새는 제외됨). 그러나 암컷과 수컷 모두 다 허용된다(심지어 약간 흠 있는 것도 허용됨)(레 22:23, "낙헌제물"). 이 제사는 번제를 드릴 때와 같은 과정을 밟는다.
네다바에서 동물의 각 부위(양의 꼬리뿐만 아니라 장, 신장, 간 주위의 모든 지방)는 제단에서 불태워야 한다. 다른 부위(가슴이나 오른쪽 다리)는 상징적으로 하나님께 바쳐지며 제사장들이 먹는다. 제물의 나머지 부분은 2일 이내에(레 7:16) 제물을 드린 사람, 그의 가족, 그리고 아마도 몇몇 초대 받은 손님들(그 땅의 가난한 자들), 그들은 모두 의식상으로 정결해야 한다(레 7:16)"(AI, p. 418).
몇몇 구절에서 이 단어가 특기할만한 방법으로 사용된다. 시 68:9, H10에서 하나님은 자발적으로 비를 보내시어 그의 산업을 회복시키심에 대하여 찬양받으신다. 이러한 고백 속에 내포되어 있는 사상은, 바로 언약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번영을 주셨지만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셔야 할 여하한 의미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언약의 백성은 그의 언약을 파기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축복하셨다(호 14:4, H5). 시 110:3에서는 백성들이 자원 제물이 된다. 시 119:108에서 자원 예물(한글개역 "낙헌제")은 바로 기도이다. 이러한 구절들은 하나님께서 수많은 희생제물보다(암 4:5) 마음 속에서 우러나는 순종(삼상 15:22, 호 6:6)을 원하신다는 성경에서 끊임없이 나오는 주제를 밝히 나타낸다.
(참조: T. E. MCCOMISKEY).
--------
[b'v;(7650, 샤바) 맹세하다, 엄명하다
샤바(동사)는 기본 어근이며, '맹세하다 sware, 엄명하다 adjure'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190회 나오며, 칼(1회, 겔 21:23), 니팔, 히필형으로 사용되었다.
(a) 샤바는 니팔형으로 가장 많이 사용되었는데 그 의미가 본 어간의 특징인 재귀적 강조 용법을 반영하고 있다. 즉 '맹세로서 자신을 묶다' to bind oneself by an oath가 된다(예: 창 26:3, "내가...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것을" 즉 내가 맹세로써 나 자신을 아브라함에게 구속시켰다). 샤바의 32회 용례가 히필형으로 사용되었으며 이 어형은 전형적인 사역의 의미를 지닌다. 즉 '아무개로 하여금 맹세하게 하다'를 의미한다(예: 왕상 2:42, "내가 너로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게 하고").
히브리어 동사 '맹세하다'는 모음이 부착되지 않은 고대의 본문에서 일곱이라는 숫자와 동일할 뿐만 아니라 창 21:22-34에 기록된 B. C. 2000년의 사건에 의해서 상호 간의 어떤 관련성이 시사되어 있다. 이 기사에서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이 문제를 정직하게 다루겠다고 맹세하기를 원한다. 반면 아브라함 편에서는 아비멜렉에게 그 우물이 아브라함 자신의 소유임을 맹세하라고 요구한다. 그리고나서 아브라함은 정확하게 암양 새끼 일곱 마리를 증표로 아비멜렉에게 줌으로써 맹세를 인친다. 그리하여 우물은 브엘세바 곧 일곱 맹세의 우물이라 불린다. 따라서 BDB는 샤바를 함축성 있는 한 줄 문구로 달리 표현하여 정의하기를, '일곱으로 자신을 ...하다, 또는 자신을 일곱 가지 것으로 묶다'라고 하였다(p. 989). 게세니우스(Gesenius)는 헤로도토스(Herodotus) 8과 일리아드(Iliad) 243을 인용하여 고대 세계에서 7의 수로써 협정에 조인하는 것이 드문 일이 아니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b) 구약성경에서 맹세한다는 것은 맹세자가 어떤 약속 행위를 신실하게 수행하겠다는 증거로, 또는 진실하게 어떤 악한 행동을 범하지 않겠다는 증거로 파할 수 없는 신성한 말을 주는 것이었다(창 21:23, "거짓되이 행치 않기를 ...에게 맹세하라"). 경우에 따라서는 자신이 어떤 사실을 공공연히 인정하였음을, 또는 미래에도 그것을 계속 인정하겠다고 맹세하였다. 창 21:30-31에서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에게, 아브라함 자신이 그후 브엘세바라 불렀던 그 우물을 판 이상 그것이 자신의 소유라는 사실에 대해 맹세하게 한 예가 바로 이런 경우이다.
(c) 조약(아브라함과 아비멜렉 사이의 조약, 창 21:23, 야곱과 라반 사이의 조약, 창 31:50)과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유언(야곱과 요셉, 창 47:31)에서 맹세는 그 원래의 약속적인 기능을 갖고 있었다. 곧 당사자들은 스스로를 여호와의 권능과 심판 아래 두었으니, 여호와께서는 그 약속의 효력에 대한 증인으로 불리워지고 또한 인정 받으신 것이다. 종종 맹세하는 자보다 더 위대하거나 고귀하다고 상호 인정하는 제 3자를 빌어 맹세하였다(예: 왕상 2:8, "내가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여"). 예루살렘의 옛 죄악 중에는 어떤 자들이 "신이 아닌 것들로 맹세한"(렘 5:7) 사실도 있었다. 이러한 경우 하나님 또는 거짓 신에게, 맹세한 바의 진실성과 신실성을 입증해 달라고 빌었으며, 만일 맹세자가 거짓말을 하거나 미래에 그 서약을 지키지 못하면 그를 심판해 달라고 암암리에 호소하였다. 구약성경의 맹세는 처음부터 여호와를 믿는 믿음의 고백을 암시적으로 담고 있는 것이었다(신 6:13, 신 10:20). 거짓 맹세하는 것은 여호와의 이름 Name을 욕되게 하는 것과 동등한 것이었다(출 20:7, 레 19:12). 신 6:13 및 사 19:18 등과 같은 구절에서 하나님 자신이 그 백성에게 자기 이름으로 맹세할 것을 명하셨으며 스스로가 이에 찬성함을 보여 주셨다. 이 내용이 마 5:33-37과 어떻게 조화될 수 있을 것인가? 그 답인즉, 그리스도는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범하게 하는 임시 변통적인 맹세와, 당시 유행했던 바리새인들의 결의론(casuistry)에 대해 경고하였다는 생각이다. 따라서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을 법정 상황에서의 맹세에 대한 절대적 금지로 해석하지 않았다. 사실은 정반대로 경건한 자들이 성경에 입각하여 "하나님께 맹세코"라고 맹세를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않고 법정의 '증언'이라는 것이 보다 널리 시행되고 있음을 보게 되는데, 이는 악한 날의 표적인 것이다.
여호와의 이름으로 행한 맹세는 매우 거룩하고 신성했으므로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곧 제거될 운명에 처했던 기브온 거민들의 고의적 속임수에 넘어간 후, 이렇게 선언했다. "우리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로 그들에게 맹세하였은 즉 이제 그들을 건드리지 못하리라"(수 9:19). 그러므로 성경은 또한 거짓 맹세자들에게도 화와 심판을 선언한다(슥 5:3, 슥 5:4, 말 3:5). 예수께서 변덕스럽고 교활한 자들에게, 단순히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라고 말하는 것이 더 좋다고 경고하신 것은 당연하다(마 5:37).
(d) 창세기에서 우리는 주로 인간들에 의한 맹세들에 대해 보게 되는 반면에 신명기는 여호와의 맹세의 우월성을 말한다. 여호와께서는 스스로 맹세하시며 그 맹세 형태는 '자기 자신을 가리켜' 또는 '나의 사는 것으로 ~하는 것이다'(민 14:21 이하, 창 22:16, 암 6:8).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말씀의 진실성을 맹세로 보장하신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맹세는 여호와의 약속의 확증과 동등하다. 여호와께서는 족장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기로 맹세하였고(신 1:8, 신 6:10, 신 6:18, 신 6:23), 이스라엘의 조상들과 맺은 언약을 맹세로 인증하셨다(신 4:31, 신 7:8, 신 7:12, 신 29:12 이하). 창세기에 나오는 족장들에 대한 여호와의 약속들에 들어있는 기본 요소들, 즉 민족(창 12:2)과 땅(창 13:5)과 언약(창 17:7)은 신명기의 훈계들에서 다시 나타나며 여호와의 맹세에 대한 언급들로 그 유효성이 강화된다(신 8:1, 땅; 신 8:18, 언약).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의 씨에게 복을 주며 그의 씨를 통해 모든 나라에 복을 주겠다고 그에게 맹세한 사실은 크게 강조해야 할 중요한 사실이다(창 22:16, 창 22:18, 참조: 갈 3:8, 갈 3:16). 요셉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한 것, 즉 그 땅을 그들의 자손에게 영원히 줄 것이라는 약속을 이행하리라고 강렬하고 굳게 확신했으므로, 요셉 역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히필형, 즉, 그들로 하여금 자기에게 맹세하게 했다) 그들이 언젠가 그 땅으로 돌아갈 때 자기의 뼈를 가지고 가라고 부탁하였다(창 50:24-25).
실제로 우리는,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스라엘과 다윗에게 맹세한 바를 수행한다는 사실의 절대적 확실성과 불변성을 강조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가리켜(창 22:16), 자신의 거룩함으로(시 89:35, 자기 오른손으로(사 62:8), 그의 큰 이름으로(렘 44:26) 맹세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히 6:13-19을 보라.
(e) 그러나 여호와의 맹세는 저주(curse)의 형태를 취할 수도 있다. 이 저주를 가지고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백성들의 불순종을 벌하신다. 따라서 불평하는 이스라엘인들은 광야에서 죽을 것이며(민 14:21, 민 14:28, 신 1:34 이하, 신 2:14), 모세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고(신 4:21), 엘리의 범죄는 속죄받지 못할 것이다(삼상 3:14). 약속에 대한 유효성과 불순종에 대한 저주에 모두 기여하는 여호와 맹세의 양면성은 사실상 축복 Blessing과 저주 Curse의 구조에 상당하는 것이다.
(f) 랍비적 유대주의에서 맹세를 하는 관습은 널리 만연되어, 다음과 같은 맹세의 유형들로 구별될 수 있을 것이다.
① 단정적 맹세
② 증거의 맹세
③ 서약의 맹세(정결의 맹세)
④ 재판관의 맹세
⑤ 랍비적인 맹세
⑥ 위증적인 맹세(참조: J. Schneider, TDNT, V, 461, SB I, 321 이하). 헬라주의에서 나타나는 것과 같이 지나친 맹세들을 제한하려는 노력들이 있었다. 스토아 학파들과 같이 필로(Philo)도 맹세의 폐지를 주장하였다(Spec. Leg. 2, 238). 그의 견해로는 맹세를 하지 않는 것이 가장 좋고 두번째로 가장 좋은 것은 진실되게 맹세하는 것이다. 그러나 가장 나쁜 것은 맹세를 깨뜨리는 위증죄를 범하는 것이다(Decal. 84-93, 참조: J. Schneider TDNT V 179). 맹세를 하는 것에 대한 가장 강력한 반대는 에세네파들 가운데에서 발견된다. 그들은 맹세 대신에 분명한 말들을 매우 높이 찬양하였다(참조: Josephus, War. 2, 8, 6; 참조: CD 9:1-10:3, 이 내용은 삼상 25:26의 주석으로 저주의 맹세는 오직 재판관들에 의해서만 요구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에세네파에도 입회 의식의 맹세들이 있었다(요세푸스, War 2, 8, 7; CD 15:5; IQS 5:7-11).(참조: H.-G. Link; V. P. Hamilton; BDB).
---------
!aun](5002, 네움) 말함, 발언, 신탁
네움(명남)은 '말함, 발언 utterance, 신탁 oracle'를 의미한다. 이 명사형은 칼수동분사형태를 따라 형성된다(GKC의 Hebrew Grammar, 50a).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376회 나오며, 주로 예언서(렘 167회, 겔 83회, 사 23회, 암 21회, 슥 20회)에서 사용되었고, 예언서 외에서는 단지 20여 회만 사용되었다.
이 단어가 사용되었을 때 그 메시지의 기원과 권위에 대해 특별한 주의가 요구되는데, 즉 그 메시지가 그 기원과 권위에 있어서 하나님이심을 선언하는(렘 23:31, 시 36:1 등) 관용적 표현으로만 사용된다.
1. 네움의 의미는 렘 23:31에서 분명히 보여진다. 하나님은 자기들의 말에 네움(!aun] , 5002), 즉 하나님이 그것을 말씀하셨다고 덧붙이는 거짓 선지자들에게 대적하라고 선언하신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그들이 혀를 놀려 그가 말씀하셨다 하는 선지자들을 내가 치리라".
이 기본적인 의미는 겔 13:7에서도 분명히 나타난다: "너희가 말하기는 여호와의 말씀이라 하여도 내가 말한 것이 아닌즉 어찌 허탄한 묵시를 보며 거짓된 점괘를 말한 것이 아니냐". 여기서 하나님은 그들은 참 환상(묵시)을 보지 못했으며 거짓된 점괘를 말하며 하나님이 말씀하시지도 않았는데 하나님의 권위를 내세운다고 거짓 선지자들을 비난하신다.
렘 9:22에서 선지자는 '그의 신탁의 말씀의 진실성에 대한 모든 의심을 털어버리기 위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구별하는 말', "이것은 여호와의 네움이니라"라는 말로 그가 받은 신탁을 시작하도록 명령 받는다(C. F. Keil; Jeremiah).
때때로 이 공식 문구는 발언의 중대성들을 강조하는 하나님의 맹세로 앞에 부가된다(겔 20:3, 겔 20:31, 겔 33:11). 예언서에 나오는 이러한 공식 문구 중 반수 가량은 항상 하나님의 언약적인 명칭, 즉 여호와와 왕(렘 46:18)으로 이루어져 있다(사 56:8).
슥 12:1은 제목의 형식을 취하며,「네움 예호와」는 '여호와의 선언'이란 의미를 지닌다.
2. 예언서 이외에서 네움(!aun] , 5002)의 용법은 매우 흥미로운 점을 보여준다.
창 22:16에서 천사는 여호와께서 하신 '말씀'(네움)을 전한다: "가라사대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참조: 히 6:13 이하).
민 24:15이하에서 발람의 "홀" 예언을 네움, 곧 하나님을 듣고 '말하는 것'(네움)이라고 한다.
삼하 23:1에서 다윗은 형식과 내용에 있어서 이 예언의 양자 모두를 상기시킨다(참조: KD). 네움은 하나님의 사역(monergism)만큼 확실하였다. 물론 하나님의 언약에 항상 붙어 다니는 '영원한'은 그 적용에 있어서는 하나님께서 결정하신다. 하나님의 맹세의 특별한 의미는 아브라함 언약(갈 3장, 히 6:16 이하)과 모세 언약(히 7장) 간의 차이에 대한 신약성경의 논의에서 보여진다.
시 110:1에서 "내 주(아도나이)"에게 말씀하신 여호와의 네움은 맹세로 시인한 언약을 포함한다: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시 110:4, 참조: 히 7:21).
시 36:1에서는 흥미롭게도 '범죄'는 신 계시를 요구한다: "악인의 죄얼이 내 마음에 이르기를 그 목전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다 하니". "내 마음속에 악인의 범죄에 관한 하나님의 계시(신탁)가 있다".
잠 30:1은 문제가 많은 구절인데 델레취(F. Delitzsch)는 이 구절을, 마음으로부터 나온 것(즉 아굴의 잠언)은 엄연히 진실되다는 것을 나타낸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여기에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받은 계시라는 개념도 역시 마땅히 포함되는 것 같다: "이 말씀은 야게의 아들 아굴의 잠언이니 그가 이디엘과 우갈에게 이른 것이니라".(참조: L. J. Coppes, TWOT; HELOT; IHOT).
-------------------
@/da;(113, 아돈) 주, 주님, 주인, 소유주
아돈(명남)은 '주, 주님 Lord, 주인 master, 소유주 owner'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350회 나온다.
(a) 아돈은 접미사가 없는 단순 어형으로, 혹은 가장 일반적인 단수 접미사나 다른 대명사적 접미사들과 함께 아도니나 아도나[이]를 말할 때, 아돈은 대개 사람들을 가리킨다. 사라는 자기 남편을(창 18:12), 아브라함은 손님으로 온 천사들을(창 19:2), 아브라함의 종은 되풀이하여 자기 주인을(창 24장) 이런 말로 불렀다.
애굽의 바로(창 40:1), 그의 "대신" 요셉도 이 칭호로 지칭되었다(창 42:10). 룻은 보아스와 결혼하기 전에 그에게 이 칭호를 사용하였다(룻 2:13). 한나는 제사장 엘리를(삼상 1:15), 사울의 종들은 사울을 칭호로도 불렀다(삼상 16:16). 마찬가지로 왕보다 아래의 공직자들, 예를 들면 요압 같은 사람도 이 명칭을 지녔다(삼하 11:9). 왕상 16:24에는 사마리아 "산 '주인,' 세멜이"라는 독특한 말이 나온다. 선지자 엘리야는 "주"라는 칭호를 지녔다(왕상 18:7).
(b) 그러나 특히 시편에는 오직 사람에게만 사용될 수 있는 이런 어형들이 하나님에 대해 사용되는 많은 구절들이 나타난다. 출 34:23은 "주,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하 아돈 야훼 엘로헤 이스라엘)을 결합시키고 있다. 신 10:17은 "만주의 주"(아도네 하 아도님)라는 구문에서 단수와 복수 모두를 사용하고 있다. 시 8:1에서 하나님은 "여호와 우리주"(야훼 아도네누)라는 칭호를 지닌다.
시 110:1에서는 메시야가 이 칭호를 지닌다: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c) 여러 가지 인명에 아도니가 포함되어 있다. 즉 아도니 - 베섹(삿 1:5), 아도니세덱(수 10:1), 아도니야(세사람, 왕상 1:8, 대하 17:8, 느 10:17), 아도니감(스 2:13), 그리고 아도니람(왕상 4:6).
(d) 아돈이 가장 일반적인 단수 명사형어미와 함께 독특한 복수형으로 나올 때 아도나(이)는 언제나 하나님을 가리킨다. 이 어형에 대해서는 아도나이(@D:a' , 135)를 보라.
(참조: L. J. Coppes; BDB).
-----------
jl'v;(7971, 샬라흐) 보내다, 뻗치다, 쫓아내다, 내보내다
샬라흐(동사)는 기본어근이며, '보내다, (손을) 뻗치다, 쫓아내다, 내보내다'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850회 나오며, 칼, 니팔, 피엘, 히필, 푸알형으로 사용되었다.
동사 샬라흐는 '보내다', '내보내다', '풀어 주다'를 뜻하며, 다툼과 불화의 측면에서 사용될시 '펴다', '전개하다'를 의미하고, 손이나 막대기에 사용될 때는 '내밀다', '내뻗다'를, 뿌리와 가지에 사용될 경우 '뻗다', '뻗어나가다'를, 그리고 에쉬(불)와 함께 쓰이면 '불붙이다'를 의미한다.
(a) 샬라흐는 사람이 타인을 모처에 보낸다든지(창 28:5, 창 37:13) 또는 사람이 공물이나(삿 3:15) 편지를 보낸다(왕상 21:8, 왕하 5:5)는 표현에 사용된다.
그와 마찬가지로 하나님도 종종 사람들을 자기의 사자, 대리자로서 어떤 공적 임무에 보내는 것으로 묘사된다. 예컨대 하나님께서 자기의 선지자들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경고하도록 커다란 열심을 가지고 그들을 보낸다는 말이 자주 나온다(참조: 사 6:8, 렘 1:7, 렘 25:4, 렘 26:5, 렘 35:15, 겔 2:3-4, 삿 6:8). 거짓 선지자들은, 하나님이 보내지 않았다(렘 14:14-15). 모세는 하나님의 대리자였고(출 4:28, 신 34:11) 기드온도 그러하였다(삿 6:14). 선지자들의 메시지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으로부터 보냄 받은 것으로 간주된다(슥 7:12, 사 9:8). 그리고 그 메시지는 하나님의 뜻을 성취할 것이다(사 55:11).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구주를 보내어 마음이 상한 자들을 싸매 주고 갇힌 자들을 해방시켜 준다는 사실이다(사 61:1).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해낼 때 표적과 기사를 보내었다(시 135:9). 그러나 그들이 만일 자기에게서 돌아서서 우상에게로 향하게 되면 그들에게 견책과 혼란과 저주를 보낼 것이라고 경고한다(신 28:20).
(b) 샬라흐의 '내보내다', '쫓아내다'라는 의미는 일반적으로 피엘형에서 발견된다(창 12:20, 창 18:16). 창 3:23은 분명히 추방을 뜻하며 렘 28:16은 죽음의 뜻을 함축하고 있다. 이혼은 아내를 내어 보내는 것이다(신 22:19, 신 22:29, 사 50:1).
(c) 샬리흐는 '풀어주다, 해방하다'를 의미하며, 역시 주로 피엘형으로 발견된다. 이 때는 손님이 떠나는 것을 정식으로 허용한다는 가벼운 의미로 사용되거나(창 18:16, 창 24:54) 또는 애굽의 이스라엘과 같은 노예들(출 4:21), 바벨론 포로들(사 45:13) 그리고 구덩이의 죄수들을 풀어준다(슥 9:11)는 보다 강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시 81:12에서는 하나님이 거역하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임의로 행하도록 버려두어 그 결과를 감수하게 하셨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 위에 여러가지 형태의 재앙을 풀어 놓는다는 구절들도 피엘형이 사용된 이상, 물론 이와 동일한 범주에서 고려되어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보호의 손길을 거두고 여러가지 적대적 세력을 풀어놓는다는 의미이다(민 21:6, 렘 9:16, 암 4:10, 기타 등등).
(d) 샬라흐는 다툼을 '펴다, 전개하다'라는 의미를 나타낸다(잠 6:14, 잠 6:19).
(e) 샬라흐는 손을 '내뻗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삼상 24:6에서 이런 의미를 나타낸다: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의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하고".
시 110:2에서 메시야는 열국을 통치할 때 자기의 홀을 뻗친다. 렘 17:8과 겔 17:6에서 뿌리와 가지가 뻗어 나간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f) 샬라흐는 '불붙이다, 불을 보내다'라는 의미를 나타낸다(호 8:14, 암 1:4, 암 1:7, 암 1:10, 암 1:12).(참조: H. J. Austel).
-----------
$j'm;(4272, 마하츠) 강타하다, 심하게 상처 입히다, 파괴하다
마하츠(동사)는 기본어근이며, '강타하다, 심하게 상처 입히다, 박살내다, 파괴하다'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14회 나온다.
(a) 마하츠의 의미는 야엘이 시스라에게 행했던 것처럼, 일반적으로 치명적이고 결정적인 것이다: "손으로 장막 말뚝을 잡으며 오른손에 장인의 방망이를 들고 그 방망이로 시스라를 쳐서 머리를 뚫되 곧 살쩍을 꿰뚫었도다"(삿 5:26).
(b) 여호와는 그의 큰 진노의 날에 많은 나라의 왕들을 강타하실 것이다(시 110:5, 시 110:6). 사실상, 그는 지금도 계속해서 죄를 짓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하신다(신 33:11, 시 68:21). 그래서 불 경건한 자의 나라는 하나님의 마지막 구원이 마침내 도래하기까지 적개심이 증가하는 것을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합 3:13).
(c) 하나님은 강타하고 치유하신다: "이제는 나 곧 내가 그인줄 알라 나와 함께 하는 신이 없도다 내가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며 상하게도 하며 낫게도 하나니 내 손에서 능히 건질자 없도다"(신 32:39). 엘리바스도 이 점을 알고 있었다: "하나님은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 그 손으로 고치시나니"(욥 5:18).
시 68:23에서는 복수심에 불타서 의를 행하시는 하나님을 매우 생생하게 묘사한다: "너로 저희를 심히 치고 그 피에 네 발을 잠그게 하며 네 개의 혀로 네 원수에게서 제 분깃을 얻게 하리라 하시도다". 여기에서 하나님은(종말에 다시 살아난 이스라엘 국가에 대항해오는) 원수들의 피로 그의 발을 때리시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 절이 시 58:10로 설명될 수 있으리라는 가능성도 있다. 시 58:10에서 이 동사는 피로 발을 씻는다(라하츠)라는 의미로 나온다. 고대의 사본들은 시 68:23에서도 '씻다' wash로 표기한다.
(참조: W. C. Kaiser; HELOT).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해설 https://www.aladin.co.kr/shop/ebook/wPreviewViewer.aspx?itemid=248655497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아계신 그리스도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cworldview&logNo=221018499343&proxyReferer=https:%2F%2Fwww.google.com%2F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