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0.04.16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주께순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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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모데전서 2장 

1.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2.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라

3.이것이 우리 구주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이니

4.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5.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6.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대속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러 주신 증거니라

7.이를 위하여 내가 전파하는 자와 사도로 세움을 입은 것은 참말이요 거짓말이 아니니 믿음과 진리 안에서 내가 이방인의 스승이 되었노라

8.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

9.또 이와 같이 여자들도 단정하게 옷을 입으며 소박함과 정절로써 자기를 단장하고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하지 말고

10.오직 선행으로 하기를 원하노라 이것이 하나님을 경외한다 하는 자들에게 마땅한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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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전서 2장 

1.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2.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3.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4.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가

5.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6.성경에 기록되었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로운 모퉁잇돌을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7.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이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8.또한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되었다 하였느니라 그들이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그들을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9.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10.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11.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12.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13.인간의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종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14.혹은 그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상하기 위하여 보낸 총독에게 하라

15.곧 선행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으시는 것이라

16.너희는 자유가 있으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

17.뭇 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존대하라

18.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종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19.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20.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21.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22.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23.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24.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25.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벧전3==========

8.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9.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

10.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거짓을 말하지 말고

11.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며 그것을 따르라

12.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의인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주의 얼굴은 악행하는 자들을 대하시느니라 하였느니라

13.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

14.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며 근심하지 말고

15.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16.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17.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

=========마10=======

16.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17.사람들을 삼가라 그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 주겠고 그들의 회당에서 채찍질하리라

18.또 너희가 나로 말미암아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 가리니 이는 그들과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19.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그 때에 너희에게 할 말을 주시리니

20.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이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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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을 위해 해야 하는 기도(딤전 2:1-8)

위의 구절에서 우리는 다음의 것을 살펴 볼 수 있다.

Ⅰ.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고 특별히 권세있는 자들은 기도하여야 할 것을 명하였다.  디모데는 이것을 행하도록 주의를 기울여야만 하였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기도의 형태에 대하여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아마도 그 이유는 목회자들로 하여금 자기가 제시한 기도의 틀에 얽매이지 아니하도록 하기 위해서 였던 것 같다.  그러나 바울은 목회자들이 일반적으로 "간구하고 기도하고 도교하며 감사를 하여야 할 것"을 권하였다.  즉 악을 피하기 위해 간구하며, 선을 얻기 위해 기도하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중제 기도를 하여, 이미 받은 긍휼에 대하여 감사하라고 했다.  바울은 그들에게 기도할 것을 지시하는 성서가 있고 또 기도의 성령이 그들에게 부어졌으므로 더 이상의 지시를 하지 않는다.  다만 그는 일반적인 기도의 원칙만을 말해 주는 것으로 충분하리라 생각했다.  기독교는 기도의 종교이다.  또한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기도하는 사람들이 되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에베소서 6장 18절에 "무시로 기도하라"고 한 것이다.  기도자들은 우선적으로 자신을 위하여 기도하여야 한다.  이같이 기독교는 구별없는 사랑을 가르치는 종교이다.  또한 왕들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했다(2절).  당시에는 왕들이 이교도요 또 기독교의 적일 뿐 아니라 기독교의 박해자들이었다.  그렇더라도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했다.  왜냐하면 정부가 올바르게 되고 정치를 하는 사람들이 바르게 될 때 그것은 곧 모든 사람을 위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비록 핍박을 받는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만 한다.  본문에는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했는데(2절), 이말은 낮은 위치에 있는 권세자들을 위해서도 기도하라는 뜻이다.  우리는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여야 하며 그들로 인하여 감사 드려야 하며 그들의 번영을 위해 또 그들이 다스리는 나라의 번영을 위해 기도하여야 한다.  따라서 그들에게 반역을 꾀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의 평화로 말미암아 우리가 평화를 가지게 되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에게 감사해야 하는데 그 이유는 그들의 통치의 혜택을 우리가 받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문에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함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다"(2절)라고 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가 왕들을 위하여 무엇이라고 간구해야 하는가를 깨닫게 된다.  그것도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사 그들을 인도하시고 그들을 유용하게 하시고 그들의 다스림 아래서 조용하고 평안한 삶을 누리도록 해 주십시사라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바울은 "그들의 다스림 아래서 승진되고 부를 얻으며 영예와 권세를 얻게 해 달라고 기도하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리스도인이 바랄 최고의 것은 조용하고 평화로운 삶을 누리는 것이며 가난하나마 사적 생활이 보장된 가운데 세상을 사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와 다른 사람이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평화로운 삶을 살도록 소망하여야 한다.  그런데 우리 모두 각자가 경건함과 단정함을 지키지 않고는 조용하고 평화로운 생활이 유지하기를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의무에 충실하라.  그리고 난 후에 우리는 하나님과 국가의 보호를 받기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본문은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2절)라고 하였다.  여기에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의무가 두 가지 말로 요약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  하나는 경건이며 다른 하나는 단정함이다.  경건은 하나님께 대한 올바른 예배를 의미한다.  단정함은 모든 사람에 대한 좋은 행위를 말한다.  이 둘은 서로 조화되어야 한다.  우리가 만약 경건하지 아니한다면 진실로 단정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우리가 단정하지 않다면 진실로 단정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려고 도적질을 한다면 하나님이 이것을 기뻐하실 리 없으시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의 것을 알 수 있다.

1. 그리스도인은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기도에 풍부해야 한다.   또한 그를 자신을 기도와 간구하는 데 써야 한다.

2. 우리가 기도하는 중에 자신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만큼 타인들에 대하여 광범위한 관심을 가지고 기도하여야 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고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감사를 드려야 한다.  또한 우리는 기도의 대상을 제한해서는 안 되며 또 자기 개인이나 가족들만을 위해 감사하여서도 안된다.

3. 기도는 간구, 도고, 감사의 여러 가지 부분으로 구성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이미 받은 긍휼을 감사할 뿐만 아니라 필요한 긍휼을 위하여서도 기도하여야 한다.  또한 우리는 자신이 저지른 죄와 사람의 죄에 대해 심판을 받지 않도록 기도해야 할 것이다.

4. 왕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우리의 기도를 필요로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많은 어려움을 만나며 그들의 높은 위치 때문에 여러 가지 어려움에 당하게 되기 때문이다.

5. 통치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평화롭고 조용한 생활을 하기 위한 가장 올바른 방법이라는 사실이다.  바벨론에 있는 유대인들에게 그들을 사로잡아 간 그 성읍의 평안을 위해 힘쓰고 그 성읍을 위해 주께 기도하라고 하셨는데 왜냐하면 그 성읍이 평안하므로 그들도 평안할 있었기 때문이었다(렘 29:1).

6. 만약 우리가 평화롭고 조용한 삶을 원한다면 우리는 경건과 단정함으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 우리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를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어 그 입술로 궤휼을 말하지 말고 악에서 떠나서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여 이를 좇으라.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저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주의 낯은 악행하는 자들을 향하시느라"(벧전 3:10, 11)고 하였다.  바울이 이 모든 것을 명한 것은 이 일이 "우리 주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바로 이것을 요구한다.  즉 우리가 우리 주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일을 행할 것과 그러한 일에 풍성할 것을 요구한다.

Ⅱ. 우리가 기도하는 중에 모든 사람에 대하여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기 때문이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다(4절).

1.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해야만 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하나님은 한 분이시며 그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류를 위해 선한 뜻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며(5절) 아무도 그분과 같은 자가 없으며 그와 같이 될 수도 없는 유일하신 분이시다.  왜냐하면 무한하신 분은 오로지 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이 유일하신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신다.  주께서는 아무도 멸망하거나 죽지 않고(겔 33:11),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받고 복을 받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으리라고 못박아 말씀하지는 않으셨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모든 사람이 구원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다만 주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고 아무도 그들 자신의 죄로 말미암아 멸망받기를 원치 아니하시는 선한 소망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말씀한다(마 23:37).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지식에 이르고 또 다른 길을 통해서가 아니라 주께서 주신 방법에 의해 구원되기를 바라신다.  복음은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지니기를 요구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구원의 길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로 그리스도께서는 길이시오 진리이시오 또한 생명이 되신다."

2. 우리가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 또다른 이유는 한분의 중보자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속죄의 제물로 내어 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긍휼이 모든 하나님의 사역 가운데 나타난 것처럼, 그리스도의 중보도 모든 인간의 자녀들에게 미치는 것이다.  그 이유는 그가 모든 인류를 구원하기에 충분한 대가를 지불하셨기 때문이다.  주께서는 인류가 하나님과 더불어 새로운 관계를 맺도록 하셨으며 그러므로 우리는 행위의 계약으로써의 율법 아래 거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법 아래 거하는 것이다.  그들은 은혜 아래 있는 것이다.  그들은 무죄를 요구하는 언약 아래가 아니라 새로운 언약 아래에 있는 것이다.  이 계약은 "주께서 자신을 속죄물로 내어 주셨으므로" 성립된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속죄의 대가였음을 명심하자.  우리는 죽어야만 하는 죄인들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죽음과 지옥으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 죽으시되 자신을 기꺼이 모든 사람을 위한 속죄물로 내어 주셨다.  그러므로 모든 인류의 사탄의 지배 아래에 있을 때보다 훨씬 더 좋은 상황 아래에서 거하게 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이 중보자의 일을 스스로 맡으셨다.  분쟁이 없으면 중보자도 필요가 없다.  그러나 죄는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다툼을 만들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양자 사이의 평화를 이루는 중제자가 되신 것이다.  그는 하나님과 인간을 하나로 묶기 위한 중보자이시다.  즉 그는 양자 사이에 손을 얹은 판결자이시다(욥 9:33).  그리스도께서는 기약이 이르면 나타날 속죄물이었다.  즉 구약의 시대에서는 주의 고난과 영광이 말세에 계시될 것이라고 예언되었던 것이다(벧전 1:10, 11).  그 예언에 따라서 주님은 오셨다.  그리고 바울은 위임받고 이방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구원과 속죄의 기쁜 소식을 전하도록 사도와 전도자로 위임되었던 것이다.  또한 바울은 이 그리스도의 중보의 교훈을 모든 사람들에게 전하도록 위임을 받았던 것이다(막 16:15).  바울은 이방인들의 교사로 임명을 받았다.  그는 사도로 부름받은 이외에 "믿음과 진리 안에서" 또는 믿음과 진리로 이방인들에게 전도하라는 특별한 위임도 받게 되었다.  다음을 유의하라.

(1) 우리가 모든 사람들과 우리의 통치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과 평화롭고 조용한 생활을 사는 것은 우리의 구원자이신 하나님이 보시기에 합당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또한 우리가 평화롭고 조용히 살기 위해 기도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는 사실이다.

(2)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인간들이 구원받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이 그들을 구원하시지 않고자 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의 법도 안에서 구원받고자 하지 않기 때문인 것이다.  우리의 복되신 주님은 이러한 우리의 잘못을 경고하신다.  즉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치 아니하는도다"(요 5:40)라고 하시고 또 "내가 너희를 모으려 하였으나 너희는 모이지 아니하였다"고 하셨다.

(3) 구원을 얻고자 하는 자는 진리를 알아야 하는데 왜냐하면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지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정하신 하나님의 방법이기 때문이라는 사실이다.  진리를 아는 지식이 없이는 사람의 마음이 선하여질 수 없다.  만약 우리가 진리를 모른다면 진리에 의해 살 수 없는 것이다.

(4) 하나님이 한 분이듯이 중보자도 한 분이시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로마 교회는 많은 중보자를 내세움으로 많은 신들을 만들어 내는 우를 범하였다.

(5) 신약 성서에 나타나는 중보자이신 주님은 자신을 속전으로 내어 주셨다.  그가 이렇게 하신 것은 바울에 의하면 자신을 드림이 중보자로서 필요하였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의 중제의 근거로도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로마 카톨릭 교도들은 많은 중제자들을 내세우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마치 속죄의 중보자는 한 분뿐인 것처럼 주장하는데 이는 거짓된 것이다.

(6) 바울이 사역자로 세움을 받은 것은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신을 주신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한 중보자이심을 전파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모든 전도자들이 이세상 끝날까지 전하여야 할 본질인 것이다.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서의 자기 직책을 영광스럽게 생각했다(롬 11:13).

(7) 목회자들은 자기가 이해하고 그 진리를 전하여야만 하며 또 그것을 자기 자신도 믿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목회자들은 사도들과 마찬가지로 믿음과 진실함으로 설교하며 그들 자신도 신실하고 진실하여야 한다.

Ⅲ. 기도하는 방법을 가르쳐 줌(2절).

1. 복음 아래 있는 사람들은 특별한 기도처에서만 기도하도록 규제를 받지 않는다.  그리스도인들은 기도에 적당치 않은 곳이 있다거나 기도가 하나님에게 더 잘 열납되는 특별한 곳에 있다는 것을 기독교 신앙은 부인한다(요 4:21).  그러므로 "어느 곳에서든지 기도하라"고 했다.  우리는 벽장 속에서 기도할 수 있으며 우리 집에서도 하며 식사 때도 기도하고 여행을 할 때도 기도하며 회중 가운데서 홀로 기도하며 공공의 장소에서나 은밀한 곳 어디서든지 기도할 수 있는 것이다.

2. 기도하는 중에 우리가 거룩한 손을 드는 것을 하나님의 뜻이다.  그러므로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라"고 하였다(8절).  즉 순결한 손, 죄의 오염에서 깨끗한 손, 죄와 불결을 씻도록 하기 위해 사람들에게 개방된 생명의 샘에서 씻은 그 손을 들고 기도하여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시편 26편 6절에서 "나는 나의 손을 씻기 원합니다"고 하였다.

3. 우리는 사랑 안에서 기도하여야 한다.  분노와 악덕이나 어떤 사람에 대한 노함을 가지고 기도하여서는 안 된다.

4. 우리는 의심함이 없이 믿음으로 기도하여만 한다(약 1:6).  또는 어떤 이들이 해석하듯이 "따지지 말고"기도해야 한다.  그럴 때 그 기도는 응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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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 사람들에 대한 순복(벧전 2:13-25)

그리스도인의 행실의 일반적 원칙은 정직이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모든 상관적인 의무의 양심적 이행이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 여기서 사도 베드로는 이 사실을 특별히 명백하게 다루고 있다.

Ⅰ. 순복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에 있어서 소문난 개혁자들이었을 뿐 아니라, 나라의 소란을 피우는 자들이었다. 그러므로 사도 베드로는 행정 관리들에게 순복해야 하는 규칙과 규범을 설정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으므로 그는 다음과 같은 것을 서술하고 있다.

1. 요청되는 의무는 순복이며, 이는 그들의 사람들에 대한 충성과 존경, 그들의 정당한 법률과 명령에 대한 복종, 그리고 정당한 처벌에 대한 순복을 내포하고 있다. 이 순복이 이루어져야 할 사람들과 대상은 아래와 같다.

(1) 보다 보편적인 것으로 "인간에게 세운 모든 제도"에 대한 순복이다. 행정 관직은 분명히 신성한 권리이다. 그러나 정부의 특별한 형태, 관직의 권력, 그리고 이 권력을 행사하는 사람은 인간의 제도의 하나이며 특수한 각 국가의 법과 제도에 의하여 통치된다. 그리고 이것은 모든 국가를 하나로 묶는 일반적 규범으로써 어떠한 형태이든지간에 정부의 형태를 이룩케 하는 것이다.

(2) 특별히 권위에 있어서 으뜸이요 놀라운 지위에 속한 "위에 있는" 왕에게 순복하라는 것이다. 왕은 법인이지 폭군은 아니다. 또는 "방백에게" 순복하라는 것이다. 이 사람은 대리자이며, 총독 대리이며, 지압 통치자를 말하는 것이며, 어떠한 사람들은 "왕에 의해서 보냄을 받은 자들이다." 즉 왕에 의해서 통치하도록 임명을 받은 자이다.

2. 이러한 의무를 수행하는 이유는 아래와 같다.

(1) "주를 위해서"이다. 이는 인류의 선한 사람들을 위한 행정관으로 정해진 자들이며, 그들은 순종과 순복을 요구하고 있다(롬8장). 그리고 그들의 존귀는 그들의 군주에 대한 신하들의 의무적인 처신에 관여해 있다.

(2) 행정관의 임무의 목적과 용도는 악을 행하는 자를 처벌하고 선을 행하는 자를 칭찬하고 격려하는 것이다. 그들은 선한 사회를 위하여 임명을 받은 자들이다. 이 목적이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 과오는 그들의 기구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시행에 있는 것이다.

① 참된 종교는 시민 통치의 최고 지지자이며 주님과 양심을 위하여 순복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② 모든 처벌과 모든 세상의 법정관들을 방해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 중에도 세상에 악을 행하는 자들이 있다.

③ 행정관이 자기 자신의 의무를 다하며, 세상을 바르게 하는 최선의 방법은 정당하게 형벌을 가하며, 정당하게 상을 주는 것이다.

(3) 그리스도인들이 행정관에게 순복해야 할 다른 이유는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요, 결과적으로 그들의 임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식하고 어리석은 자들의 악의에 찬 중상을 못하도록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기 대문이다(15절).

① 선한 사람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의 뜻"이 어떠한 의무를 수행하는데 가장 유력한 판단 기준이 된다.

② 행정관들에 대한 순종은 그리스도인들의 의무 중 중요한 일부분이다. 이는 "하나님의 뜻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③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관계에 있어서 가장 무식하고 어리석은 자들의 불합리한 비난을 받지 않도록 처신하도록 힘써야만 한다.

④ 신앙과 신앙적인 사람들에 대해서 비난하는 사람들은 무식하고 어리석은 자이다.

(4) 사도 베드로는 그들에게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영적인 본질을 상기시키고 있다. 유대인들은 신명기 17장 15절에서 나타난 대로 군주가 아닌 그들의 "형제 중에서 택한 한 사람에게"순종할 것이라고 결론을 줄이고 있으며, 개종한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와의 관계 때문에 그러한 복종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과오를 방지하기 위하여 사도 베드로는 그리스도인들이 자유하나 무엇으로부터 자유한가를 말해 주고 있다. 결코 시민 행정관에게 순복을 요구하는 율법에 대한 의무나 복종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은 죄와 사탄의 압박으로부터 또한 형식적 율법으로부터 영적인 자유를 얻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악을 가리우는 데나 혹은 하나님이나 그들의 윗 사람에게 대한 어떤 의무를 게을리 하는데 사용해서는 아니 된다. 다만 그들은 하나님의 종이란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①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자유인이다(요 8:36). 그들은 사탄의 지배로부터 자유하며, 율법의 정죄와 하나님의 정죄, 임무의 무거운 짐, 그리고 죽음의 공포로부터 자유하다.

② 예수 그리스도의 종들은 그들의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함부로 남용하지 아니하도록 단단히 조심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 대해 악을 가리거나 윗사람에게 대해 불복종을 가리기 위한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3. 사도 베드로는 네 가지의 찬탄할 만한 순복에 대한 그의 이야기를 마치고 있다.

(1) "뭇 사람"을 공경하라는 것이다. 적당한 존경을 모든 사람들에게 베풀어야 할 것을 말한다. 가난한 자가 멸시를 받아서는 안 된다(잠 17:5). 사악한 무리들이 공경을 받아야 한다. 다만 그들이 사악함으로가 아니라, 그들의 또 다른 기질 곧 재질, 신중함, 용기, 고용의 우월성, 혹은 백발의 머리 때문에 공경을 받아야 한다. 아브라함, 야곱, 사무엘, 선지자들, 그리고 사도들은 선량치 못한 사람들에게도 적당한 경을 베푸는 일에 주저하지 아니했다.

(2) "형제를 사랑하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형제이다. 그들은 머리되신 그리스도에게 연합되었고, 거의 같은 자격을 부여받았으며, 같은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서로 서로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같은 본향을 향해 가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특별한 애정으로써 서로를 사랑해야만 한다.

(3) 최고의 공경과 의무와 순복으로써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 만일 이것이 결여되어 있다고 하면 다른 세 가지 임무의 어느 하나도 행해지지 않는다면 그들이 해야 할 임무는 수행되지 않는다.

(4) 어느 다른 사람에게 보라. "왕에게 해당한 최상의 공경을" 그에게 드려야 한다.

Ⅱ. 종들의 경우에 대해서도 백성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사도적인 결론을 격려하고 있다. 이는 그들의 그리스도인의 자유가 그들의 불신앙적이며 잔인한 주인들로부터 그들을 자유케 하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사도는 "종들아!순복하라"(19절)고 말한다. 사도 베드로가 의미하는 종은 고용되었거나 돈으로 팔려 온자, 혹은 전쟁에서 잡혀 온 자, 집에서 태어난 자가 아니면 계약에 의해서 견습자로 얼마 동안 섬기는 자들을 말한다. 아래의 사실들을 주시해 보자.

1. 사도 베드로는 그들의 임무를 성실하게 그리고 결백하게 이행하도록 하급자가 해야 하듯이 존경과 애정으로 회신하며, 고난과 불편에도 인내로 "순복하도록" 복종할 것을 명령하고 있다. 사환들은 그들의 주인들에게 마땅히 순복해야 할 의무가 있다. 이는 주인이 사람들의 섬김을 받을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선하고 관용하는 자" 곧 그들을 잘 대하면서 조금씩 그들의 권리를 감사하는 자에게 뿐만 아니라 전혀 기쁘게 해 주지 아니하는 왜곡되고 심술궂은 자에게도 순복하라는 것이다. 아래 사항을 알아두자.

(1) 사환들은 그들의 주인에게 순복함으로 그들을 혹시나 기분 상하게 할까 하는 두려움으로 그들의 주인에게 처세해야 한다.

(2) 어느 한 관계의 죄 많은 비행은 또 다른 관계에  대한 죄 많은 행위를 정당화하지는 못한다. 즉 사환은 비록 그 주인이 몹시 까다롭고 사악하다고 할지라도 자기의 맡은 바 직분을 수행하여야 한다.

(3) 선한 사람들은 그들의 사환과 아래 사람들에게 온유하고 온순하여야 한다. 우리들의 경건한 사도 베드로는 고위층에 있는 사람들에게만 아니라 가난한 사환들에 대한 그의 사랑과 관심을 보여 주고 있다. 여기에 명백히 그들의 경청자들 중 좀 더 가난한 자와 그 외의 사람들에게 적용해야 할 목회자들이 사도 베드로에게서 배워야 할 점이 있다.

2. 사환들에게 순복할 임무를 부여한 사도베드로는 그것에 관하여 정중히 이야기를 계속 펴 나간다.

(1) 그들이 부당하게 고난을 당하고 있지 않고, 고집이 센 주인들에게 그들의 임무를 계속하며 고난을 감수하고 있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을 생각함으로 겪었던 고난에 상급을 더 하실 것이다. 그들이 정당하게 벌을 받을 때에는 아무리 견디는 것이라 해도 칭찬받을 만한 것이 못된다.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19,20절). 아래의 사실을 알아두자.

① 세상에 천박한 상태란 없다. 다만 거기에서 인간은 양심적으로 살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

② 가장 양심적인 사람은 종종 크나큰 고난을 겪는 자가 된다. "하나님께 대한 양심 때문에 그들이 최악의 고난을 당하고, 그들이 선을 행하기 때문에 고통을 받는다. "  그러나 이러한 종류의 고난받는 자는 칭찬받을 만하며 그들은 하나님과 그의 신앙을 영화롭게 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 이는 그들의 최상의 소망이요, 만족이다.

③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고난을 인내로써 견디어야 한다. "죄가 있어 매를 맞으면 참아야 한다. " 이 세상에서의 고통은 언제나 우리들의 미래의 행복을 보장하지 못한다. 곧 만일 아이들과 종들이 예의가 없고 불성실함으로 이로 인해 받는 고통은 하나님께 용납될 수도 없거니와 사람들의 칭찬을 받을 수도 없다.

(2) 부정당한 고난 가운데 그리스도인 종들이 참아야 할 것을 격려하는 몇 가지의 이유를 더 하고 있다(21절).

① 그리스도인으로 부르심을 받은 것은 "이를 위하여" 부름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②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셨으며,"우리의 "본"이 되었으므로 우리는 그의 발자취를 따라야 한다. 그러므로 아래의 몇 가지를 기억하자.

첫째, 선한 그리스도인들은 고난받은 사람이라 일컬어질 종류의 사람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고난을 기대해야만 한다. 기독교적인 용어로 표현하자면 그는 자기를 스스로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도록 되어 있는 자들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명령과 하나님의 섭리, 그리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예비된 은총에 의하여 부르심을 받았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들이 부름을 받았으므로 그들은 마땅히 고난을 받도록 되어 있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을 위하여 아니 "우리들을 위하여" 고난을 받으셨다. 즉 하나님께서 고난을 받으신 것이 아니며, 하나님께서 성결케 하신 그가 고난을 받으신 것이며, 그는 이 목적을 위해 세상에 보내심을 받았다. 고난을 받으신 것은 그리스도의 육과 함께 영이 고난을 받으셨다. 그리고 그는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대신해서 그리고 우리의 선함을 위해 고난을 받으셨다(24절).

셋째, 그리스도의 고난 당하심은 우리들이 세상에서 당하는 가장 부당하고 잔인한  고통에도 우리로 하여금 잠잠케 하실 수 있다. 그는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최선의 준비와 온전한 인내로써 우리를 위하여 자진해서 고난을 당하셨다. 이 모든 고난은 그가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인간(God-man)이심에 당하신 것이다. 따라서 최악의 징벌을 당해야 할 우리 인간들이 후세에 말할 수 없는 상급을 이루게 하는 이생의 고난을 기쁨으로 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3. 그리스도의 순복과 인내의 본에 대해서 여기에 보충 설명이 있다.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으셨다. "

(1) 그리스도는 불법적으로 까닭없이 고난을 당하셨다. 그는 "죄를 범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22절). "그는 아무에게도" 폭력이나 불의, 혹은 "악을 행하신 바가 없다. " 그는 어떠한 종류의 죄악도 행하시지 않았다. "그의 입에는 궤사도 없으셨다"(사 53:9). 그의 말씀과 그의 행동이 모두 진실하고 의롭고 올바르다.

(2) 인내하셨다.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셨다"(23절). 그들이 주님을 비방하고 , 욕하며, 망령되이 불렀으나 그는 "잠잠하고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셨다. "그들이 계속 상처를 입히고 때리며 그에게 가시 면류관을 씌웠으나 그는 "위협하지" 않으셨다. 그는 오로지 때가 이르러 그의 순결성을 밝히시며 그의 원수들을 갚아 주시며 "의롭게 판단해 주실" 하나님께 자신과 모든 문제를 위탁하셨다. 우리는 아래 몇 가지 사항을 알 수 있다.

① 우리의 축복 받은 구속자는 온전히 거룩하신 분이며 죄에서 해방되시었으므로 어떠한 시험도, 비난도, 그로 하여금 최소한의 죄악된 또는 예의에 벗어난 말을 저지르도록 할 수 없었다.

② 죄에 대한 비난도 그것의 임무를 정당화할 수 없다. 따라서 원수들의 무례함과 잔인함 그리고 불의함을 비난 복수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정당화해 주지 않을 것이다. 죄에 대한 이유는 결코 자랑스러운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죄를 파하기 위한 강력한 이유를 항상 간직하고 있다.

③ 하나님의 심판은 모든 사람과 모든 문제에 대해 정당하게 이루어질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우리들은 인내와 순종으로 우리 자신을 변호해야 한다.

4. 21-23절을 미루어 볼 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단순히 고난 가운데 인내의 본보기만을 목적으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사도 베드로는 여기에서 죽음에 대한 더 영광된 계획과 효력을 첨가하고 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도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주지해야 할 사실은 아래와 같다.

(1) 고난받는 사람. 곧 예수 그리스도를 말한다. "친히"라고 하는 말은 "몸소"라는 의미이다. "친히"라고 하는 표현은 강력한 표현이며 그가 모든 고대 예언을 입증하고 있음을 보여 주고 그리스도를 레위 제사장들(그들은 다른 짐승의 피를 드린 자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위하여 몸소 피를 흘리신 분이다. 히 1:3)과 구분하며, 인간 구원을 위한 역사에 그리스도 외에 누구도 참여를 배제하는 것을 보여 주기에 필요한 것이다. 여기에 "몸으로"라고 하는 말이 첨가되어 있는데 이는 마음으로 받는 고통이 아니었다(마 26:38). 마음의 고통은 내적인 것이요, 감추어져 있는 것인데 반해 몸의 고통은 본을 보이기 위한 이 고난받는 종이라는 관점에서 볼 수 있는 것이며 더욱 명확한 것이다.

(2) 그가 받은 고난은 "벌거 벗기움"과 상처와 죽음, 곧 가혹하고 수치스러운 "십자가의 죽음"이었다.

(3) 그가 고난을 받으신 까닭은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기 위함이다. 이는 우리에게 이러한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다.

① 그리스도는 "자신을 희생시키심으로" 우리의 죄를 없이 하신 분과 같이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다(사 53:6).

② 그리스도는 그들의 징벌을 담당하심으로 하나님의 의를 충족시켰다.

③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제하시며 우리로부터 멀리 하셨다. 이는 마치 속죄양이 사람들의 죄를 머리에 지고 상징적으로 담당하였고 그 죄를 먼 광야로 내어쫓은 것과 같이(레 16:21, 22) 하나님의 어린양은 몸소 우리의 죄를 단번에 담당하시고 세상 죄를 없이하셨다(요 1:29).

(4) 그리스도의 고난의 열매는 이러하다.

①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이룩된 성화와 죄의 극복, 그리고 의의 거룩한 신생이다. 이에 대한 본보기와 능력있는 동기와 권능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서 나타났다.

② 의롭다하심이다. 그리스도는 속죄 제물로서 장사되었고 십자가에 못 박힌 바 되었으며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얻었다. " 여기에서 알아야 할 점은 이런 것이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모든 백성들의 죄를 담당하셨고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그들을 속죄하셨다.

둘째, 인간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죄를 담당하시고 그의 죄를 속죄하셨으므로 그는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죽기까지는 그리스도께 안전하게 의지할 수 없다.

5. 사도 베드로는 그들의 이런 상태와 현재 상태의 다른 점을 상기시킴으로 그리스도인 된 사환들에게 대한 그의 충고를 마치고 있다(25절). "저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하는 말은 아래와 같은 사실을 나타내는 말이 된다.

(1)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그는 길을 잃는다. 이는 인간 스스로의 행동이며 그는 쫓겨난 것이 아니라 자진하여 떠나 길을 잃은 것이다.

(2) 그의 비극은 바로 이것이다. 그가 목장을 떠나며 목자와 양떼들을 떠나 크나큰 위험에 자신을 노출시키는 것이다.

(3) 중생함으로 이러한 상태에서 회복을 얻는다. "돌아왔느니라" 하는 이 말은 수동형으로써 죄인이 돌아오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의 결과임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들의 모든 실수와 방황에서 그의 양떼들을 사랑하시며 그들을 위하여 생명을 바치는 참된 목자이시며 부지런한 목자요, 감독이요, 그들의 영혼을 보살피는 그리스도에게 돌아오는 것이다. 여기에서 배울 바 몇 가지는 아래와 같다.

① 중생하기 이전의 죄인들은 항상 길을 잃고 방황하는 자들이다. 그들의 삶은 과오와 실수로 일관된 삶이다.

② 예수 그리스도는 언제나 그의 양떼와 함께 거하며 그들을 돌보는 영혼의 목자장이며 감독이시다.

③ 이 절대적인 목자의 사랑과 보호를 기대하는 자들은 그에게 돌아와야만 하며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아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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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 제자의 파송에 붙인 설교(마 10:16-42)

이 모든 구절들은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이 받는 고난과 연관이 되어 있으며 그들은 여기에서 기대할 것과 준비할 것을 가르침 받고 있다. 그들은 또한 어떻게 그것을 견디며 또한 그들 가운데서 어떻게 일을 수행할 것인가에 대해 가르침을 받고 있다. 설교의 이 부분은 그들의 현재 위임보다 더욱 더 앞을 내다보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동안 어떤 큰 어려움이나 박해를 직면하였다는 사실을 찾아 볼 수 없으며, 또한 그들이 그것들을 잘 참을 수 있었다는 사실을 찾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여기에서 그들이 직면하게 될 고난에 대해 미리 경고를 받고 있으며,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후에 그들의 사명은 확대되며 "지금 가까이 있었던" 하늘나라가 실제적으로 세워질 것이다. 그들은 그때에 어떤것에 대해서도 꿈꾸지 않을 것이며 외적인 과시와 능력에 대해 꿈꾸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그들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보다 더 큰 고난을 기대해야만 한다고 하셨다. 또한 그들이 왕이 될 것을 기대했을 때 죄인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띠를 띠고 있을 때 갑옷을 벗어버린 것처럼 이에 준하여 준비하고 자만하지 않도록 이후에 우리가 직면하게 될 근심에 대하여 말해 주는 것이 좋다. 여기에는

Ⅰ. 어려움에 대한 예언과 , Ⅱ. 그것과 관련된 조언과 위로의 명령이 혼합되어 있다.

Ⅰ. 여기에는 어려움에 대한 예언이 기록되어 있다. 제자들은 그들이 일할 때 이 어려움을 직면해야만 하였다. 그리스도는 그 자신의 고난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고난을 예견하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수행하신 것처럼 그들로 하여금 수행하도록 하실 것이다. 그는 그들에게 미리 말씀하신 것은 어려움들이 그들에게 놀라움이 되지 않고 또한 그들의 신앙에 충격을 주지 않기 위함이며 예언이 성취되므로 그들이 그들 신앙에 대한 확신을 가지도록 하기 위함인 것이다.

그는 그들에게 그들이 고난받아야 할 것과 누구에게서 고난받을 것인가를 말씀하고 있다.

1. "그들은 어떻게 고난을 받을 것인가?" 확실히 어려운 일들을 당할 것이다. 왜냐하면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기"(16절) 때문이다. 초라하고 구원의 여망이 없으며 보호되지 않는 양의 무리가 사나운 이리 가운데서 두렵고 찢기울 것 이외에 무엇을 더 바랄 수 있겠는가?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사악한 사람은 이리들과 같으며 그들의 성품은 삼키고 파멸시키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백성과 특히 그의 사역자들은 그들과는 반대되는 성품과 성벽을 가진 양과 같으며 흔히 그들에게 쉬운 먹이가 된다.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다 버린 자들에게 많은 위험이 있음을 나타내는 것은 그에게 있어서 몰인정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는 큰 심판날에 그들이 그의 오른편에 앉게 될, 말하자면 그의 양을 위해 예비된 영광이 봉사와 마찬가지로 고난에 대한 충분한 보상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아셨다. 그들은 소름끼치는 "이리 가운데 있는 양"과 같다. 그러나 위로를 주시는 그리스도는 그들을 앞서 보내고 있다. 그리스도가 위로를 주시는 분이 되신 것은 그가 그들을 보호하시며 증명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가장 어려운 경우를 알도록 하기 위하여 그는 그들에게 특별히 그들이 기대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말씀하고 있다.

(1) 그들은 미움받게 될 것을 기대해야만 한다(22절).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게 될 것이다." 그것은 남은 모든 자의 뿌리이며, 그 뿌리는 쓰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시는 자를 세상은 미워한다는 사실이다. 마치 왕실이 축복하는 자를 서민이 미워하는 것처럼. "만일 세상이 연고 없이 그리스도를 미워하였다면"(요 15:25), 그것은 그의 형상을 가졌고 그의 사업을 봉사한 자들을 미워한 것이므로 놀라지 말라. 우리는 메스꺼운 것을 싫어하며 또한 그들은 "만물의 찌끼같이 여겨지는" 것이다(고전 4:13). 우리는 유해한 것을 싫어하며 또한 그들은 "나라를 괴롭게 하는자"(왕상 18:17)와 그들의 이웃에게 고통을 주는 자(계 11:10)로 간주되는 것이다. 미움을 받고 악의 의 대상이 되는 것은 쓰라린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당신의 이름을 인한" 것이다. 또한 이것은 어떤 구실로든지 미움받는 자의 참된 이유를 말할 뿐만 아니라 이와 같이 미움받는 자들에 대한 위로를 말하고 있다. 그것은 좋은 이유 때문이며 그들은 그 안에서 그들과 더불어 참예하며 그것을 자신이 떠맡아 줄 좋은 친구를 가지고 있다.

(2) 그들은 죄인으로 인식되고 고발되리라는 기대를 가져야만 한다. 그들의 그칠 줄 모르는 악의는 저항할 수 없는 악의이며 또한 그들은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기 위하여"(17, 18), 공공적인 평화를 보살피는 총독이나 공의석에 넘겨주기 위하여 시도할 뿐만 아니라 설복할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많은 재난이 종종 법과 공의라는 미명 아래 선한 사람에게 행해진다는 사실이다. "재판하는 곳에 악, 즉 핍박하는 악이 있다"(전 3:16). 그들은 공회에서의 높은 통치자에게서 뿐만 아니라 통치자나 왕, 최고의 직권자에게서 당할 고통을 내다보아야 한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일반적으로 행해진 이와 같은 험악한 항의 아래 그들에게 이끌리는 것은 두렵고도 위험스러운 것이었다. 왜냐하면 "왕의 분노는 사자의 노호와 같기" 때문이다. 우리는 종종 이것이 "사도들의 행동"에서 성취되었음을 찾아 볼 수 있다.

(3) 그들은 죽음에 넘겨질 것을 각오해야 한다(21절). "그들이 자들을 죽는 데" 즉 내어 줄 것이다. 당당하고 경건하게 죽도록 할 것이며, 그때는 죽음이 가장 무서운 "두려움의 왕"으로 나타나게 되리라. 원수들의 악의가 이것을 가할 만큼 높이 격노할 것이다. 그들은 "성도들의 피"에 굶주려 있다. 성도들의 믿음과 인내는 이것을 기대하는 만큼 견고하게 서 있다. "내 목숨을 내 자신에 대해 귀중하게 여기지 말라." 그리스도의 지혜는 그것을 인정하고 있으며, 순교자의 피를 어떻게 "진리의 표"와 "교회의 씨"로 만드는가를 알고 있다. "자기들의 목숨을" 사랑하지 않고 죽는데 내어 준 이러한 거룩한 군대에 의하여 사탄은 정복되었고 그리스도의 나라와 그 관심은 두드러지게 진척되었다(계 11:11). 그들은 원수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죄인으로 죽는 데 버려졌으나, 실제로는 희생 제물로서 죽음에 처하여진 것이다(빌 2:17; 딤후 4:6). 번제물로서, 하나님의 영예에 대한 인식의 제물로서 또한 그의 진리와 변호 안에서 제물로서 죽는 데 처하여진 것이었다.

(4) 그들은 이러한 고난들 가운데서 가장 밉살스럽고 굴욕적인 이름들과 인물들로 낙인 찍혀질 것을 기대해야 한다. 박해자들은 자기들의 유혹함과 잔인함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박해받는 자들에게 곰 가죽을 씌워 먼저 변장시키지 않는다면 그들은 이 세상에서 수치를 당하게 될 것이다. 그들이 저들에게 붙인 모든 악한 이물들 중 최고의 악명이 여기에 진술되어 있다. 그들은 저들을 바알세불(마귀들의 왕 이름)이라고 불렀다(25절). 그들은 저들을 흑암의 나라의 세력의 장본인으로 나타내고 있다. 모든 사람은 마귀를 미워한다고 생각하므로 그들은 저들로 하여금 모든 사람에게 유해한 자들로 만들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이 세상은 어떻게 기만되고 있는가를 보고 놀라워하라.

① 사탄의 불구대천의 원수가 사탄의 친구로 표현되고 있다. 마귀의 나라를 멸망시킨 사도들을 마귀라고 불렀다. 이와 같이 "사람은 자기들이 알지 못한 일"과 그들이 증오하고 직접적으로 반대하는 일로 비난을 받는다.

② 사탄의 철저한 심복이 그의 원수로 생각될 것이며, 또한 그렇다고 결코 그들이 사탄을 대적하여 싸운다고 할 때보다 더욱 효과적으로 그의 일을 행할 수는 없다. 종종 마귀에게 가장 가까이 접근해 있는 자는 대부분 다른 사람들을 마귀의 아버지로 만드는 법이다. 다른 사람의 옷으로 치장한 자들은 그들 자신의 마음속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숨겨진 것은 밝히 드러날 때(여기에 뒤따라 나오는 것처럼, 26절)가 온다는 사실은 다행한 일이다.

(5) 이러한 고난은 여기에서 검과 불화에 의해 표시되고 있다(34, 35절). "내가 화평(일시적인 평화와 외적인 번영)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은 이 세상에서 부귀와 능력을 그의 모든 추종자들에게 주기 위함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스도는 "아니다!"라고 말씀하시면서 "내가 온 것은 그들에게 화평을 주려고 함이 아니다. 그들을 하늘에 있는 화평에 대해 확신할 수는 있으나 땅 위에 있는 화평에 대해 확신할 수는 없다."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은 우리를 하나님과 화평 시키려 함이며 그 화평은 우리의 양심에 있어서의 화평이요 형제와 더불어의 화평이다. 그러나 "너희는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복음에 대해 신앙을 고백하는 자가 그들을 안전하게 지켜 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자는 모름지기 복음의 목적을 오해하는 자라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어려움을 줄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만일 모든 세상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인다면 자연히 보편적인 화평이 뒤따르지만 그를 거절하는 자가 많이 있고 또한 앞으로 있는 동안(그러한 자들은 "이 세상의 자녀"들 뿐만 아니라 "뱀의 후손"이다) 세상에서 불러냄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는 그들의 불화의 열매를 감수할 각오를 지녀야만 한다.

① "화평"을 구하지 말고 "검"을 구하라. 그리스도는 그의 제자들이 세상을 거스려 싸우며 이 검이 행한 "정복하는 일"(계 6:4; 19:21)에 대항하여 싸우도록 하기 위하여 "말씀의 검"을 주려고 오셨다. 또한 세상이 "말씀의 검"으로 마음을 찌르며(행 7:54) 그리스도의 증인의 증거에 의해 고통을 받는(계 11:10) 제자들과 더불어 싸우며 "박해의 검"을 주시려고 오셨으며 또한 이 검이 행한 잔인한 일에 대항하여 싸우도록 "말씀의 검을 주려고" 오셨다. 그리스도는 이 검을 꺼낼 경우를 제시하며 또한 이 검을 보낸다고 말해질 수 있는 복음을 보내셨다. 그는 그의 교회로 하여금 그의 백상의 은혜들의 시련과 칭찬을 위해 고통받는 상태로 들어갈 것과 그들의 원수들의 죄의 "분량을 채우도록" 명령하고 있다.

② "화평"이 아닌 "불화"를 구하라(35절). "내가 온 것은 불화하게 하기 위함이다." 이러한 복음 전파의 결과는 복음에 잘못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에게 잘못이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말해진 일들을 믿고" 또 "어떤 사람들은 믿지 않을" 때 믿는 자들의 신앙은 믿지 않는 자들을 정죄하며 따라서 그들은 믿는 자들에 대항하여 적개심을 가지는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최고로 난폭하고 무자비한 반목은 종교의 차이에서 생긴 자들에게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는 그의 제자들에게 그들이 당해야 할 것을 말씀하고 계시며 이러한 것은 어려운 말씀이었다. 만일 그들이 이러한 것들을 참을 수 있다면 그들은 어떤 것도 참을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그의 일을 할 때 직면할 수 있는 최악의 경우를 말해 줌으로써 우리들을 공평하고 신실하게 취급하였다는 사실이다. 또한 그는 우리들도 앉아서 먼저 비용을 계산함으로써 우리 자신들을 정대하게 대하기를 바란다.

2. 그들은 여기에서 그들이 누구에게서 또한 누구에 의해서 이러한 어려운 일들을 겪게 될 것인가에 대해 이야기를 듣고 있다. 정녕 지옥을 열어버려야 한다. 또 큰 구원에 대해 아무런 분깃도 없는 절망적이고 자포자기적인 영들 즉 마귀도 이러한 악의에 찬 원수가 "사람들을 향한 선한 뜻"이며 "세상을 하나님과 화목시키는" 본체인 교훈을 이용할 수 있기 전에 정체가 드러나야 한다. 아니, 생각이나 할 수 있으랴? 이 모든 불행이 그들에게 구원을 전파하려고 왔던 복음 전파자에게 일어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피 흘리기를 좋아하는 자는 온전한 자를 미워하지만 의로운 자는 그의 영혼을 구한다"(잠 29:10). 그러므로 하늘은 땅을 매우 반대한다. 왜냐하면 땅은 지옥의 세력 아래 있기 때문이다(엡 2:2).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이러한 어려운 일들을 당하는 것은,

(1) 사람들로부터이다(17절). "사람들을 삼가라. 너희는 너희와 더불어 동일한 본성을 가진 자들에 대하여서도 너희를 보호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이러한 것은 그러한 성품의 비행과 타락으로써(home homini lupus─즉 사람은 사람에게 대해 이리이다) 사람처럼 교활하고 책략적이며 짐승처럼 잔인하고 야만적이며 전적으로 인간성으로 불리운 것을 빼앗는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박해하는 격노와 적개심은 사람들로 하여금 야수나 마귀로 바꾸게 된다는 사실이다. 바울은 에베소에서 사람의 소양을 가진 맹수와 더불어 싸웠다(고전 15:32). 가장 친한 친구를 조심해야 할 때가 도래한다는 것은 매우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것들이 같은 피로 이루어졌고 "뼈 중의 뼈"인 자들에게서 생겨난다는 사실은 그리스도의 고난받는 종들의 근심을 더욱 심화시키는 것이다. 박해자들은 이러한 점에서 짐승보다 더욱 악하며, 그들은 그들 자신의 종류를 먹이로 삼는 것이다. Saevis inter se convenit ursis ─즉 야만적인 곰들도 그들 가운데서는 일치한다.

우리가 보호와 동정을 기대할 수 있는 자가 "우리를 치려고 일어나는 것"은 매우 비참한 일이다. "사람," 그 이상은 아니다. 단순한 "사람"이다. "사람," 성도가 아니다. "육에 속한 사람"(고전 2:14), "이 세상 사람"(시 17:14)이다. 성도는 "사람들" 이상이며, "사람들에게서 구별된다." 그러므로 "그들에 의해 미움을 받는다." 사람의 본성은 만일 그것이 성화되지 않는다면 사탄에게 버금가는 세상에서 가장 최악의 성품인 것이다. "그들은 사람이기" 때문에 종속적이고 의존적이며 죽어야하는 피조물인 것이다. "그들은 사람"이지만 단지 "인생뿐인 것이다"(시 9:20). "너는 어떠한 자이기에 죽을 사람을 두려워하느냐?"(사 51:12) "사람들을 삼가라." 하몬드(Hammond)박사도 그와 같이 말하고 있다. 너희가 친숙한 사람들, 즉 그리스도를 버린 유대인 산헤드린의 사람들을 삼가라(벧전 2:4).

(2) "경건의 모양"을 가지고 종교를 과시하는 신앙 고백자들로부터이다. "그들은 그들의 회당," 즉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들의 교회 훈련을 수행하는 장소에서 "너희를 채찍질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을 채찍질하는 것이 그들 종교의 한 과제로 여겼던 것이다. 바울은 "회당에서 다섯 번 매맞았다"(고후 11:24). 유대인들은 모세에 대한 열심이라는 명목 아래 그리스도와 기독교에 대해 매우 혹독한 박해를 가하였으며, 그러한 불법 행위를 그들 종교의 점수에 가산하였던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야심적인 박해자들로부터 많은 고난을 당하였으며, 그들은 제자들을 "그들의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추방하여 그들을 죽였으며, 또한 "그들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고 하며 또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영광을 받으시기를 원하노라"(사 55:5; 슥 11:4, 5)고 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회당은 박해를 신성케 하는 것과는 동떨어진 것이며 그 박해는 의심할 여지없이 회당을 모독하고 속되게 할 것이다.

(3) 위대한 사람들과 권세를 가진 사람들로부터이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데까지 초대의 힘을 발휘하여 그들을 채찍질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더 이상 할 수 없을 때는 그리스도에게 행하였던 것처럼 로마의 힘에 넘겨주었던 것이다(요 18:30). "너희들은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 갈 것이다"(18절). 그들은 더욱 힘을 가지고 있으므로 더욱 큰 불행을 야기시킬 수 있다. "총독들과 임금들"은 그들의 능력을 그리스도에게서 받으며(잠 8:15), 또한 그의 종이 되고 그의 교회의 보호자와 양부가 되어야만 했다. 그러나 그들은 종종 그들의 능력을 그를 대적하는데 사용하고, 그를 대적하고 그의 교회를 핍박하는 것이다. "지상의 임금들"은 그리스도의 나라를 대적하였다(시 2:1, 3; 행 4:25, 26).

(4) 모든 사람들로부터이다(22절). "너희는 모든 사람," 즉 모든 사악한 사람들에게서 "미움을 받게 될 것이다." 이것은 사람들의 보편성이다. 왜냐하면 "모든 세상은 사악함"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의로운 대의를 사랑하고 인정하고 지지하는 사람은 매우 적기 때문에 우리는 그 친구가 "모든 사람들에게서" 미움을 받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다 치우쳤으며," 그러므로 '내 백성을 삼켰다"(시 14:3). 하나님께로부터의 배교가 행하는 것만큼 성도들에 대한 적개심이 행해지는 것이다. 어떤때는 그것이 다른 어떤 때보다 더욱 일반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모든 불순종의 자녀"의 마음속에 숨어 있는 이 독소의 어떤 것이 있다. "세상은 너희를 미워한다." 왜냐하면 "온 땅은 짐승을 이상히 여기기" 때문이다(계 13:3). "모든 사람은 거짓말장이" 이므로 진리를 미워하는 것이다.

(5) 그들 자신의 모든 친척들로부터이다. "장차 형제가 형제를 죽는데 내어 줄 것이다"(21절). 이 때문에 "사람(man)이 그 자신의 아버지와 불화하게 될 것이다." 아니다. 보다 더 연약하고 나약한 성(性)을 가진 여자들도 역시 박해자가 되며 박해를 받게 될 것이다. "박해하는 딸이 믿는 어머니를 대적할 것이며," 어떤 사람은 생각하기를 이러한 처지에서는 본래적인 애정이나 자식으로서의 의무가 그 분쟁을 그치게 할 수 있다고 할 것이다. 또한 그때에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대적한다고 할지라도" 놀라지 말라. 매우 종종 사랑의 냉정함은 분쟁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35절). 일반적으로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36절). 그의 친구들이 되려는 자들은 기독교를 신봉하기 때문에 특히 핍박을 받을 때 이것을 의지하기 때문에 그에 대하여 몹시 성을 낼 것이며 또한 그를 거스려 그의 핍박자들과 제휴할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가장 강력한 친족적 사랑과 의무의 유대는 종종 그리스도와 그의 교훈에 대한 적의로 말미암아 깨뜨려졌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것은 참 종교를 거스리는 편견이었고 거짓된 것에 대한 열심이었으며 모든 관심과 최고의 성스러움, 매력적인 것과 애정이 이러한 몰록(Molochs)들에게 드려져 왔다. "여호와와 그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하는" 자들은 이러한 "맨 것을 끊으며 그 결박을 벗어버린다"(시 2:2, 3). 그리스도의 배우자는 그 "어미의 아들들"의 분노로부터 어려운 일을 겪는다(아 1:6). 이러한 자들로부터의 고난은 더욱 비참하다. 그 어느 것도 이것보다 더 짜를 수 없다. "그가 곧 너로다. 나의 동류, 나의 동무이다"(시 55:12, 13). 또한 이러한 자들의 적의는 대개 도무지 화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노엽게 한 형제와 화목하기가 견고한 성을 취하기 보다 어려우니라"(잠 18:19). 고대와 현대의 순교사(殉敎史)는 이러한 실례들로 가득 차 있다. 이상의 모든 것을 종합해 보건데 "그리스도 안에서 경건하게 살려고 하는 자는 핍박을 받아야만 나타났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 많은 "환난을 거쳐야만" 우리는 "하나님 나라로 들어갈 것임을 기대해야만 한다."

Ⅱ. 이러한 고난의 예고와 더불어 우리는 여기에서 고통의 때를 위한 권고와 위로를 찾아 볼 수 있다. 그도 그들을 실로 위험스러운 곳으로 보내고 있으며 또한 그것을 기대하고 계시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시험을 잘 견딜 수 있도록 가르치고 격려함으로 무장시켜 보내신다.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그가 말씀하신 것을 종합해 보자.

1. 몇 가지 일들에게 권고와 지시하는 방법으로.

(1) "너희는 뱀같이 지혜로워라"(16절). "너희는 그렇게 해도 좋다"(어떤 사람은 이 말씀을 허락하는 것으로 취한다). "너희가 비둘기처럼 남을 해치지 않는다면 너희가 좋아하는 만큼 용의주도해도 좋다." 그러나 이것은 오히려 모든 때에 유용한, 특히 고난의 때에 유용한 그의 길을 아는 신중한 사람의 지혜를 우리에게 추천하는 교훈으로 간주될 수 있다. "그러므로, 즉 너희는 이리 가운데 양과 같이 노출되어 있으므로 뱀과 같이 지혜로워라. 교활하게 다른 사람들을 속이는 여우와 같이 지혜롭지는 말아라. 오히려 그 자신만을 방어하며 또한 자신의 안전을 위해 자리를 옮기는 뱀과 같이 지혜로워라."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뱀"과 같이 미움을 받고 박해를 받으며, 또한 그들의 파멸은 기정화 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뱀"의 지혜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들이 일상적으로 그러하듯이 이 세상에서 어려움 가운데 많이 노출되어 있는 그리스도의 사람들과 사역자들은 불필요하게 그들 자신들을 노출시켜서는 안 되며, 그들 자신의 보호를 위해 공정하고도 정당한 수단을 사용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이 지혜의 모본을 보여 주셨다(마 21:24, 25; 22:17, 18, 19; 요 8:6, 7). 그는 그의 때가 오기까지 여러 번 그의 원수의 손에서 벗어나셨다. 바울의 지혜를 본보기로 살펴 보라(행 23:6, 7). 그리스도를 인하여 우리는 목숨과 그 모든 위로에 대해 냉담해야만 한다. 그러나 그것들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머리가 깨어지지 않도록 안전케 하는 것이나 "술사의 소리를 듣지 아니하는"(시 58:4, 5) 것이나 또한 "바위틈에 피하는 것"은 "뱀"의 지혜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뱀같이 지혜로울 수"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머리 위로 고통을 끌어들이지 않도록 "지혜로워야"한다. 악한 날에 침묵할 수 있으며 우리가 그것을 도울 수 있다면 "범죄하지 않도록 지혜로워야"한다.

(2) "너희는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유순하라. 그리고 온유하라. 또한 침착하라. 손상에 대해 무엇이든지 하지 말며 악의에 대해 무엇이든지 참으라. 비둘기처럼 증오하지 말라. 이것은 언제나 전자와 병행해야만 한다." 그들은 "이리 가운데로 보내심을 받고" 있으며, 그러므로 "뱀과 같이 지혜로워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양과 같이 보냄을 맏고" 있으며, 그러므로 "비둘기 같이 순결해야"한다. 우리는 자신이 잘못을 저지르지 않기 위하여, 오히려 그 밖의 다른 사람에게 잘못을 행하지 않기 위하여 "지혜로워야" 한다. 우리는 하나를 주고 되돌려 받는 "뱀"의 간교함보다는 20번의 손상을 참을 수 있는 "비둘기"의 순결을 사용해야만 한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말과 행동에서, 특별히 그들이 처하여 있는 원수들과의 관계에서 결백하고 무해 하는데 대해 계속적으로 관심을 가져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육식(肉食)을 하는 새들로 포위되어 있을 때 그들을 성나게 하거나 또는 그들에 의해 성을 내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비둘기 같은" 성령을 필요로 한다. 다윗은 매의 날개보다는 멀리 날아가서 휴식을 얻기 위하여 "비둘기의 날개"를 갈망하였다. "성령은 비둘기와 같이 그리스도에게 임하였다." 또한 모든 신자들은 전쟁이 아닌, 사랑을 위해 마련된 "비둘기 같은" 영 즉 "그리스도의 영"에 참예하는 것이다.

(3) "사람들을 삼가라"(17절). "언제나 조심하라. 그리고 위험스러운 무리를 피하라. 너희가 말하고 행한 것을 유의하라. 어떤 사람의 신임에 대하여 너무 동떨어진 추측을 하지 말라. 가장 그럴듯한 주장에 대해 방심하지 말라. 친구를 믿지 말라. 아니, 네 품 속에 있는 아내를 믿지 말라"(미 7:5).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유의하는 것은 은혜스러운 자들에게 합당하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사람들을 삼가라"는 가르침을 받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곤고하기 때문에 우리는 신뢰해야 할 사람을 알지 못한다. 일찍이 우리 주님이 그의 제자들 중의 하나에 의하여 입맞춤으로 배반을 당하였으므로 우리는 "사람들," 즉 "거짓 형제들"을 조심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4)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19절). "너희는 총독들 앞에 끌려갈 때에 버젓하게 행동하라. 그러나 어떻게 빠져나갈까를 궁리함으로 고민하지 말라. 지혜롭게 생각하고, 근심하거나 당황, 또는 불안한 생각을 하지 말라. 이러한 "염려"는 "하나님께 맡겨 버려라." 마치 "너희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를 염려하지 않는 것처럼─ad captandam benevol entiam─즉 비위를 맞추기 위하여 훌륭한 말을 하려고 노력하지 말라. 그릇된 변명을 겉치레할 뿐인 이상한 표현이나 화려한 꾸밈을 하지 말라. 좋은 금은 그것을 도금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마치 그 스스로 말하는 것이 충분하지 않은 것과 같이 이 일에 열심하는 것은 너희의 변명이 자신 없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너희는 가야하는 근거를 알고 있다. 그리고 그때에 verbaque praevisam rem non invita swquentur─즉 적절한 표현이 쉽사리 생기게 될 것이다. 그 누구도 "무엇을 말할까 미리 염려하지" 않았던 3인의 전사(戰士, 다니엘의 세 친구)보다 총독이나 왕 앞에 더 잘 말하였던 사람은 없다.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단 3:16; 시 119:46)을 보라).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어떻게 잘 "말할"것인가 보다는 어떻게 잘 "행할" 것인가를 더 유의해야 하며, 또한 어떻게 그들의 정직을 "변호"할 것인가 보다는 어떻게 그것을 "유지"할 것인가를 더 유의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Non magna loquimur, sed vivimus─즉 자만한 말이 아닌, 우리의 생활은 최상의 변증을 이룬다.

(5) "이 동네에서 너희를 핍박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23절). "이와 같이 너희와 너희의 교훈을 거절하는지의 여부를 시험하라. 그렇게 함으로써 네 자신의 안전을 위해 피하라."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임박한 위험이 닥쳐올 경우에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하나님께서 그의 섭리로 "그들에게 도피의 문을 개방할" 때 도망함으로써 그 자신들을 안전케 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피하는 자는 다시 싸울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군병들이 그들의 군기를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그들의 지역을 포기하는 것은 불명예스러운 일이 아니다. 그들이 "의무"의 길에서 나가지 않으면서도 "위험"의 길에서 나갈 수는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제자들을 위하여 피난처를 마련하신 그의 돌보심을 보라. 그와 같이 명하셨으므로 핍박은 동시에 모든 각처에서 휘몰아치지 않는 것이다. "어느 한 성"이 그들에게 뜨거울 때 "다른 성"은 보다 차갑게 또는 "적은 성역"으로 보존된다. 곧 이것은 사용되고 멸시되지 않은 은혜이다. 그러나 언제나 이러한 단서가 붙는다. 즉 죄스럽고 부당한 수단이 피신을 위해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그때에 그러한 것은 하나님께서 개방하시는 문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특별한 경우에 "지혜"와 정직이 "교훈하기에 유익한" 모든 것들의 적용에 있어서, 즉 그리스도와 그의 사도들의 역사에 있어서 이 규율에 대한 많은 실예 들을 발견할 수 있다.

(6) "저희를 두려워 말라"(26절). 왜냐하면 "그들은 단지 몸만을 죽을 수 있기 때문이다"(28절).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그들의 수많은 원수들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그들의 의무와 관심사가 된다는 사실이다.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의 평화를 교란시키는 혼돈의 덫을 가져온다. 즉 우리가 죄로 빠져 들어가도록 혼란시키는 덫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조심스럽게 주시되고 추구되고 기도되어야만 한다. 때가 악하고 원수가 격동하며 사건들이 위협적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비록 땅이 옮겨진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선하신 하나님, 선한 이유, "은혜로 말미암은 선한 소망"을 가지고 있으므로 두렵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 이것은 곧 말해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시험에 이를 때 고문과 고통, 토굴과 돛배(옛날 노예나 죄수들에게 젖게 한 배), 도끼들과 교수대, 불과 장작더미는 용감한 사람들을 두렵게 하기에 충분한 특히 두 서넛의 쇠약한 걸음에 의해 피할 수 있는 것이 명백할 때 뒷걸음질치게 하는 두려운 일이다. 그러므로 이 시험에 대해 우리를 무장하기 위하여 여기에 다음과 같은 사실이 기록되고 있다.

① 원수들의 제한된 능력으로부터 이끌어낸 이 두려움에 대한 좋은 이유. 그들은 "몸을 죽일 수 있다." 이것은 그들의 격노가 최고도에 이르렀을 때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행할 수 있지만 그 이상은 더 나갈 수 없다. 그들은 "영혼을 죽이거나" 해할 수 없다. 영혼은 사람이다. 이로 보건데 영혼은(어떤 사람이 생각하는 것처럼) 죽음에 처하여지거나 또는 사고나 인식을 박탈당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그렇게 될 경우에는 몸을 죽이는 것이 영혼도 죽이는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영혼은 하나님과 그의 사랑에서 끊어질 때에 죽게 된다. 하나님과 그의 사랑은 영혼의 생명이며 또한 그의 진노의 그릇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이것은 그들의 능력보다 더 벗어나 있다.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은 세상의 모든 것으로부터 우리를 분리시킬 수 있을지는 모르나 결코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분리시키지는 못한다. 도한 우리로 하여금 그를 사랑하지 못하게 만들거나 그에게 사랑 받는 것을 못하게 할 수도 없는 것이다(롬 8:35, 37). 따라서 만일 우리가 우리의 보석들처럼 자신의 영혼에 대해여 관심을 가지게 된다면 그것들을 빼앗아 갈 능력이 없는 사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들은 단지 죽게 될 몸을 죽일 수 있느냐, 하나님을 즐겁게 할 "영혼"은 죽일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은 장농(cabinet)을 부실 수 있는 데 지나지 않는다. 이방인은 폭군을 다음과 같이 비웃었다. Tunde capsam Anaxarchi, Anaxachum non laedis─즉 너희는 아낙사쿠스의 처지를 욕할 수 있으나 그 자신을 해칠 수는 없다. 값비싼 보석은 만져지지 않는다. 세네가(Seneca)는 죽음 그 자체는 현명하고 선한 사람에게 참으로 어떤 재해를 입힐 수 없기 때문에 너희는 그를 해칠 수 없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Si maximum illud ultra quod nihil habent iratae leges, aut saevissimi domini minantur, in quo imperium suum fortuna consumit, aequo placidoque animo accipimus, et scimus morten malum non esse ob hoc, ne injuriam quidem─ 즉 만일 우리가 손상을 입히는 법과 무자비한 폭군이 전혀 고통을 입히지 않고 또한 운명이 그 지배를 종결지우는 최후의 극단을 태연하고 침착하게 직면한다면 우리는 죽음이 악이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죽음은 최소한의 상해도 야기시키지 않기 때문이다(Seneca, De Constantia).

② 그것에 대한 좋은 처방. 그것은 곧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유의하라.

첫째, "지옥"은 "영혼의 몸"의 파멸이다. 그것은 전인(全人)의 파멸인 것이다. 만일 영혼을 잃는다면 몸도 역시 잃게 된다. 그들은 함께 범죄 하였다. 몸은 죄로 이끄는 영혼의 시험자였다. 그들은 영원히 함께 고통을 받아야만 한다.

둘째, 이 파멸은 하나님의 능력에서부터 비롯된다. 그는 "멸하실 수 있으시다." 그것은 그의 "힘의 영광"에서 비롯되는 파멸이다(살후 1:9). 그는 그것으로 "그의 능력을 알게 하실 것이다." 판결을 내리는 그의 권위뿐만 아니라 그 판결을 수행하는 그의 능력을 알게 하실 것이다(롬 9:22).

셋째,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최고로 훌륭한 성도들에 의해서도 "경외를 받으셔야만 한다." "주님의 두려움을 알므로써 우리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를 경외하도록 설득할 수 있는 것이다." "그의 두려움에 따라 그의 진노가 된다면 그의 진노에 따라 그의 두려움이 될 것이다." 특별히 그 이유는 "아무도 그의 노(anger)의 능력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시 90:11). 순진한 아담도 위협에 두려워하였으니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성스러운 두려움을 억제할 필요가 없음을 알아야 한다. "아브라함(그때는 이미 죽었었다)의 하나님은 이삭(아직 살아 있었다)의 경외하는 이"라고 불리워지고 있다(창 31:42, 53).

넷째, 하나님과 영혼을 지배하시는 그의 능력을 두려워하는 것은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에 대항하는 최고의 제해물(除害物)이 될 것이다. 하나님의 불찬성의 얼굴을 대함 보다는 세상의 모든 사람의 찡그린 얼굴을 대함이 보다 나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에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그 자체에 있어서 가장 옳은 것과 같이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안전하다(행 4:19). "장차 죽게 될 사람을 두려워하는" 자는 그들을 지은 자인 여호와를 잊는 자이다"(사 51:12, 13; 느 4:14).

(7)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데서 이르는 것을 광명한 데서 말할 것이다"(27절). "어떠한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영원한 복음을 전하고 선포하여 너희의 임무를 수행하라. 그것은 너희의 임무이다. 원수들의 의도는 너희를 파괴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것을 분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결과는 어떻게 되든 간에 그것을 전파하라." "내가 말한 것을 너희는 말하라."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사도들이 우리들에게 나누어 준 것은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받았던 것과 똑같다는 사실이다(히 2:3).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던 바를 말하였는데─즉 "그것이 모든 것이었으며 그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들 대사들은 그들의 교훈을 은밀하게, "어두운 데서," 귀로, 구석에서, 비유로 받았다. "그리스도는 많은 것들을 공개적으로 말씀하셨으며," 그가 공중 앞에서 설교하셨던 것과 틀리게 "은밀히 설교하신 일은 전혀 없다"(요 18:20).

그러나 그가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하나니 나라에 속한 일들"에 관하여 특별히 교훈 하셨을 때는 귀(ear) 속으로 속삭이셨다(행 1:3). 왜냐하면 그때에 그는 "그 자신을 결코 드러내어 나타내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사명을 "빛 가운데서" 그리고 "지붕 위에서" 수행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복음의 교리는 모든 사람에게 관련된 것이기 때문이다(잠 1:20, 21; 8:2, 3). 그러므로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이방인들이 교회로 받아들여질 것에 대한 첫 번째 암시는 "지붕 위에서" 행해졌다(행 10:9).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어떠한 경우에도 그리스도의 복음이 숨겨져야 할 필요는 없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모든 뜻은 계시되어야만 한다"(행 20:27). 많은 무리들에게 그것은 분명히 그리고 완전히 전해져야만 한다.

2. 위로와 격려의 방법에 의해. 여기에서는 그 목적에 대해 많이 언급되어 있다. 또한 거의 충분하지는 않지만 그들의 사역과 어떤 능력의 협조 없는 현재의 연약함을 통하여 맞붙어 싸워야 했던 많은 어려움을 고려하면서 그들은 가까스로 이러한 취급의 전망을 가질 수 있었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그들은 왜 즐거워해야 하는가를 나타내 보여 주고 있다.

(1) 여기에는 그들의 현재 사명에 대해 특유한 단어가 기록되어 있다(23절).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오리라." 그들은 "인자," 곧 메시야의 "나라'가 "가까이 이르렀다"고 전파하였다. 그들은 "당신의 나라가 임하시옵시며"하고 기도하였다. 이제 그들은 이와 같이 기도하고 전파하면서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그리스도의 승귀와 성령의 부으심으로 나라가 임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위로가 되었으니, 곧

① 그들이 말했던 것은 잘 되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인자가 오고 계시다"고 말했는데, 이제는 "보라 그가 오신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스도는 "그의 사자의 말을 확증하실 것이다"(사 44:26).

② 그것은 빨리 잘 되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일하는 시간은 짧을 것이며 곧 끝날 것이라는 사실은 그리스도의 일군들에게 위로가 된다는 사실에 유의하라. 고용인도 자기의 시간을 가지는 법이다. 일과 전쟁은 잠시 동안에 만료된다.

③ 또한 위로가 되는 것은 그때에 그들은 보다 높은 지위에 오르게 되기 때문이다. "인자가 올 때에 그들은 위로부터 보다 큰 능력을 부여받게 될 것이다." 지금 그들은 위임자와 특사로 파송되었다. 그러나 머지 않아 그들의 사명은 확대될 것이며 또한 그들은 전권대사로서 세상으로 파송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2) 여기에는 그들의 일반적인 사역과 연관된 많은 어휘들이 있으며 또한 그들이 그 가운데서 직면해야하는 고통들이 기록되어 있다. "그것들은 좋은 말들이며 위로를 주는 말들이다."

① 그들의 고난은 "그들과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함이다(18절). 유대인 공의회가 너희를 죽게 하려고 로마 관원들에게 넘겨 줄때에 이로 말미암아 어느 한 재판석에서 다른 재판석으로 분주하게 재촉을 받는 것은 너희의 증거를 보다 공공연하게 나타내는 데 도움을 주게 될 것이며, 유대인들에게와 마찬가지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기회를 주게 될 것이다. 아니, 너희는 그들에게 증거를 나타낼 수 있을 것이며 또한 너희가 당하는 바로 그 고난들에 의해 그들에게 증거로 나타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하나님의 백성, 특히 하나님의 사역자들은 그들의 "행하는"(doing) 사역과 "고난받는"(suffering) 사역에 있어서 그의 증인(사 43:10)이 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순교자─그리스도를 위한 "증인"이라고 불리우는데 이는 그의 진리가 의심할 여지없이 확실하며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리스도를 위한 증인이 됨으로써 그들은 그와 그의 복음을 반대하는 자들에게 증인이 되는 것이다. 순교자들은 고난을 받음으로써 그들이 고백한 복음 진리를 증거하며 동시에 그들을 핍박하는 자들의 적의에 대해 증거가 되는 것이다. 그들은 이 두 가지 방법으로 그들에 대해 증거가 되며, 성도들이 세상을 심판하는 큰 심판날에 명백하게 나타낼 것이다. 판결의 이유는 "너희가 이러한 자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라"이다. 만일 그들이 고난이 증거가 된다면 그들은 얼마나 즐겁게 견디어야만 하는가! 왜냐하면 그 증거는 그러한 것들이 오기 전에는 끝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계 11:7). 만일 그들이 그리스도의 증인이라면 그들은 자신들이 인내해야하는 책임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될 것이다.

② 어떠한 경우에도, 특히 그들이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증거하기 위하여 소환을 당해야만 할 때에 그들은 하나님의 임재와 성령의 즉각적인 도우심을 가져야만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때에 무슨 말할 것을 너희에게 주시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세상의 어리석은 자들 가운데서" 선택함을 받은 무식하고 무지한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특히 위대한 사람들 앞에 불리웠을 때 그들 자신들의 능력을 공정하게 불신하였을 것이다. 모세가 바로에게로 보냄을 받았을 때 그는 불평하기를 "나는 본래 말에 능치 못한 자라"고 하였다(출 4:10). 예레미야가 열방의 선지자로 세움을 받았을 때 그는 한사코 "나는 아이라"(렘 1:6, 10)고 거절하였다. 이제 이러한 제안에 답하여,

첫째, 그들은 여기에서 "그들이 무슨 말을 해야할 것인가"가 이전의 어떤 때가 아닌 바로 "그 때에" 그들에게 주어질 것이라는 약속을 받고 있다. 그들은 "즉석에서" 말할 것이며 비록 그것에 대해 잘 연구하지는 않았지만 유창하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그를 위해 말씀하도록 불러내실 때에 우리는 무엇을 말할 것인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도록 그를 의존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비록 우리가 극도의 불리한 입장과 실망 가운데서 애쓸 때에라도 그를 신뢰할 수가 있는 것이다.

둘째, 그들은 여기에서 성령이 그들을 위하여 그들의 간구를 끌어올리실 것이라는 보장을 받고 있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10:20). 그들은 그들 혼자만이 이러한 경우에 방치되지 않으며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책임을 지신다. 그의 지혜의 성령이 그들 "속에서" 말씀하시는데 이는 종종 그의 섭리가 그들을 위하여 놀랍게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 이 둘(성령, 섭리)에 의해 그들은 그들의 핍박자들의 양심 속에도 나타나게 된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그 목적으로 말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하실 뿐 아니라 그들이 담대하게 말할 수 있는 능력도 주셨다. 강단에서 그들을 도우셨던 동일한 성령이 법정에서 그들을 도우셨다. 이러한 예언자를 가진 그들은 순조롭게 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그가 모세에게 말씀하셨던 것처럼 그들에게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출 4:12)고 말씀하신다.

③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22절).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에 유의하는 것은 매우 위로가 된다.

첫째, 이러한 고생은 "끝"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들은 오랫동안 지속될는지 모른다. 그러나 항상 지속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는 이것으로 그 자신을 위로하셨으며, 이것은 그의 추종자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내게 관한 일이 이루어간다"(눅 22:37). Dabit Deus his quoque finem─즉 또한 하나님은 이것들을 종결 지우실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우리가 고난받는 시기에 대한 신앙적인 기대는 이러한 가운데서 우리를 지탱시켜 주는 데 큰 유익이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거기서는 악한 자가 소요를 그치며 거기서는 곤비한 자가 평강을 얻을 것이다"(욥 3:17). 하나님은 "장래에 소망을 주실"것이다(렘 29:11). 고통은 마치 "고용의 날과 같이" 지루하게 보일지 모르나 하나님께 감사드릴 것은 그것들은 영원히 계속되는 것이 아니다.

둘째, 그것들이 계속되는 동안 견딜 수 있다. 그것들은 "영원한"것이 아니며 따라서 그것들은 "참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들은 "끝까지" 견디어 낼 수 있는 것들이다. 왜냐하면 고난 자들은 영원한 팔 안에서 그것들을 견디어 낼 것이기 때문이다.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주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

셋째, 구원은 "끝까지 견딘" 모든 자들이 영원한 보상이 될 것이다. 폭풍우가 몰아치고 길이 진수렁이 될지라도 가정의 즐거움은 모든 것을 위하여 바로잡을 것이다. 영광의 면류관에 대한 신앙적인 유의는 모든 세대에 있어서 고난받는 성도들의 강심제와 음식물이 되어왔다(고후 4:16, 17, 18; 히 10:34). 이것은 "참는 데" 있어서 우리에게 격려가 되며 "끝까지 견디는 데" 있어서 약속이 된다. "잠시 동안만" 견디는 자나 "시험 때에 넘어지는" 자는 헛되게 달음질할 자들이며 그들이 획득한 모든 것을 잃어버린 자들이다. 그러나 견디어낸 자는 분명히 상급을 얻을 수 있으며 또한 그들만이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얻게 될 것이다.

④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아무리 하찮은 취급을 받는다 할지라도 그것은 그들의 주인이 전에 받았던(24, 25절) 취급 이상의 것은 아니다. "제자는 그 선생보다 높지 못하다." 우리는 그들이 가장 비천한 의무, 곧 남의 발을 씻는 것도 사양치 말아야 될 이유로서 이것을 그들에게 제시하였음을 알 수 있다(요 13:16). 여기에서 그것은 왜 그들이 어려운 고난에 넘어지지 말아야 하는가에 대한 이유로 주어져 있다. 그들은 이 말씀에 대해 회상하게 된다(요 15:20). "하인이 그 주인보다 더 낫지 못하다"는 격언적인 표현이다. 따라서 그로 하여금 "더욱 나으려는" 기대를 가지도록 해서는 안 된다.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선생," 우리를 가르치시는 "선생"이시며 우리는 그에 대해 배우는 그의 제자들이다. 그는 집의 "주인" (oijkodespovth")이시며 그의 가족인 교회에서 독재적인 능력을 소유하고 계시다.

둘째, 우리의 주인이시요 선생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으로부터 매우 딱딱한 대우를 받으셨다. 세상은 그를 "바알세불"(파리의 왕, 귀신들 중의 우두머리)이라고 불렀고 그가 이 바알세불과 동맹을 맺었다고 말하였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를 모욕한 자들의 사악함이나 그 자신이 이러한 모욕을 당하신 그리스도의 인내가 더욱 기이한 것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2영광의 하나님이셨던 그리스도는 파리들의 왕으로 낙인이 찍혀졌으며, 이스라엘의 왕은 에그론의 왕으로, 빛과 생명의 임금은 사망과 흑암의 능력을 가진 임금으로 오명을 써야만 했던 것이다. 사탄의 가장 큰 적수요 파괴자인 그리스도는 그의 동맹자로 중상을 당해야만 하지만 아직도 그는 "죄인들의 이러한 반박을 견디시는"것이다.

셋째, 그리스도가 세상에서 당하신 학대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똑 같은 것을 당하리라는 기대와 그것에 대해 준비할 것을 고무시켜 주며 또한 그것을 끝까지 인내할 것을 당부해 준다. 그리스도를 미워한 자가 그를 인하여 그의 제자들을 미워한다고 해도 이를 이상히 여기지 말라. 또한 머지 않아 "그와 함께 영광 가운데 있게" 될 자가 지금 "그와 함께 고난을 당한다고 해서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는 "쓴 잔"으로 시작하셨으니 그를 위해 기꺼히 맹세를 하자. 그가 십자가에서 참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이를 용이하게 하셨다.

⑤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다"(26절). 우리는 이것을 다음과 같은 것으로 이해한다.

첫째,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대한 복음의 계시로, "너는 그것을 전파하라(27절). 왜냐하면 그것은 전파될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신비로서 사람들의 자녀에게 숨겨진 진리들은 모든 나라들에 그들 고유의 언어로서 모두 알려지게 될 것이다"(행 2:11). "땅의 끝은 이 구원을 보아야만 한다." 그것은 확실히 행해질 사역이라는 사실은 그리스도의 일을 하는 자들에게 큰 용기가 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진척시키실 경작지이다.

둘째, 바알세불이라고 불리운 그리스도의 고난받는 종의 결백성에 대한 해결책으로, 그들의 참된 성격은 지금 거짓된 색깔로 불공평하게 감추어지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그들의 무죄성과 탁월성이 지금 "감추어져 있다고" 할지라도 그들은 드러나게 될 것이다. 때로 그것은 이 세상에서 꽤 많이 행해지기도 하는데 그때는 성도의 의로움이 결과적인 사건에 의해 "빛과 같이 빛나는" 때이다. 그러나 그들의 영광이 모든 세상과 또한 천사들과 사람들, 지금 그들을 "조롱거리로 만드는"(고전 4:9) 모든 사람들에게 드러나는 것은 큰 심판날일 것이다(고전 4:9). 그들의 모든 비난은 사라져 버릴 것이며 지금 "감추어진" 그들의 은혜와 봉사는 "드러나게 될 것이다"(고전 4:5).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의인이 해와 같이 빛나게 될" 마지막 날에는 "육신"과 마찬가지로 "이름"들의 부활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은 사람들의 온갖 중상과 비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위로가 된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은 그의 진리를 신실하게 드러내어야 한다. 적합한 시기에 그들의 정직함을 나타내는 것은 그에게 맡겨두도록 하자.

⑥ 하나님의 섭리는 특별한 방법으로 성도들의 고난에 있어서 그들과 관련되어 있다(29-31절). 특히 모든 피조물과 그들의 행동 또한 가장 적은 것에까지도 미치는 하나님의 보편적인 원리의 교리와 우리의 첫 원리들에 의지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자연의 빛은 이것을 우리들에게 가르치고 있으며 또한 이것은 모든 사람, 특히 신앙으로 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그는 그들에게 온화한 관심을 가지고 계시다)들에게 위로를 준다. 여기에서 살펴 볼 것은,

첫째, 모든 피조물들, 특히 "참새"와 같이 작은 피조물들에게 미치는 섭리의 일반적인 범위(29절)이다. 이러한 작은 동물들은 매우 보잘 것 없는 것이므로 그들 중 어느 하나도 가치 있게 여겨지지 않는다. 이 참새들은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의 가치밖에 되지 않는다(아니, 여러분은 다섯 마리를 두 앗사리온에 살수 있을 것이다. 눅 12:6). 그러나 그들은 신적인 돌보심에서 제외되지 않는다.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1. 그들은 음식을 위해 "땅에" 내려앉아 곡식알을 쪼아먹는 것이 아니라 "너희 천부"께서 그의 섭리에 의해 그들을 위하여 그 곡식을 땅에 놓아두시는 것이다. 병행 구절인 누가복음 12장 6절에 보면 이것은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라도 잊어버리시는 바 되지 않았다"고 표현되어 있다. "그는 그것들을 먹이신다"(마 6:26). 참새들을 먹이시는 자는 성도들을 굶주리게 하시지 않을 것이다.

2. 그것들은 하나님의 지시 없이는 자연적인 죽음이나 난폭한 죽임에 의해 "땅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피조물 중에서 가장 적은 일부분일지라도 그들의 죽음은 신적 섭리에 의해 이른다고 한다면 하물며 그의 제자들의 죽음이랴! 높이 날아다니던 새가 죽을 때는 "땅에 떨어진다는" 사실에 유의하라. 죽음은 높은 곳에 있는 것을 땅으로 떨어지게 한다. 어떤 사람은 생각하기를, 그리스도는 여기에서 문둥병자를 깨끗케 하는데 사용되었던 "두 마리의 참새"(눅 14:4-6)를 암시하고 있다고 한다. 가장자리에 있는 두 마리의 새는 "참새"라고 불리운다. 그들 중 하나는 죽임을 당해 "땅에 떨어지고" 또 다른 하나는 날아가도록 내버려진다. 두 마리가 죽임을 당한 것은 우연한 일처럼 보여졌다. 고용된 사람은 그들이 좋아한 것을 택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는 그것을 계획하고 결정하였다. 그런데 참새들도 그들이 그의 피조물이기 때문이라면 이러한 보살핌의 눈을 가지신 하나님은 그의 자녀인 너희에게는 더욱 더 보살피는 눈을 가지실 것이다. 만일 참새가 "너희 천부의 허락 없이" 죽지 않는다면 사람, 곧 기독자나 사역자나 친구나 내 어린아이는 정녕코 그의 허락 없이 죽지 않을 것이다.

새들은 섭리의 지시에 의하지 않고서는 새잡이군의 그물에 걸리거나 화살에 맞아 죽게 되지는 않을 것이며 따라서 시장에 팔리게 되지도 않을 것이다. 간교한 새잡이군과 같은 너희의 원수는 너희에게 "덫을 놓고" 몰래 너희를 향해 쏘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내버려두시지 않는다면 그들은 너희를 사로잡거나 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 왜냐하면 너희의 원수는 "위에서 주어진 것"이 없으면 너희를 대적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들의 활과 덫을 깨뜨릴 수 있으시며(시 38:12-5; 64:4, 7), 또한 우리의 영혼으로 하여금 "새와 같이 도망하게"하신다(시 124:7). "그러므로 염려하지 말라"(31절).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하나님의 백성의 모든 두려움을 잔잔케 하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의 교리 속에 충분히 있다는 사실이다.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모든 사람들도 그러하다. 왜냐하면 다른 피조물들은 사람을 위해 지은 바 되었으며 "그 발아래 두어졌기" 때문이다(시 8:6-8). 아무리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한 마리의 참새보다 더 가치 없는 것으로 멸시를 받는다 할지라도 세상에서 가장 탁월한 자인 그들이야 오죽 더 하겠느냐.

둘째, 섭리가 그리스도의 제자들에 대해 특히 그들의 고난에 있어서 취하는 특별한 인식(30절).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 심지어 가장 적게 여겨지는 것에 대해서까지 관심을 가지신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격언적인 표현이다. 이것은 의심스러운 탐문의 사실을 나타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정신(Etenal Mind)의 무한한 영광에 대해 경시하거나 무한한 휴식에 대해 동요함이 없이 그 자체를 모든 사건에로 확대시키는 하나님의 섭리적인 돌보심을 계속적으로 믿으면서 살 것을 격려하기 위한 표현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들의 머리털을 세신다면 그는 더욱 더 그들의 머리를 세실 것이며 또한 그들의 생활과 그들의 위로, 그들의 영혼에 대해 염려하실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들 자신이 염려하는 것보다 더욱 더 그들에 대해 염려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돈과 재물, 그리고 가축을 세는 데 열심인 자는, 떨어지고 잃어버릴 그들의 머리털을 세는 데는 결코 유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백성의 "머리털을 세시며" 그들의 "머리털 하나도 상치 않을 것이다"(눅 21:18). 그 적은 것 하나라도 그들에게 상처를 입히지는 못할 것이다." 하나님에게 있어서 그의 성도들은 매우 귀중하다. 또한 그들의 삶과 죽음도!

⑦ 그는 머지 않아 승리의 날에, 지금 곤고한 때에 그를 인정한 사람들을 인정할 것이며 또한 그때에도 그를 부인한 자들이 그에 의하여 내어버림과 거절함을 받게 될 것이다(32, 33절).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에 유의하라.

첫째, "사람들 앞에서 그리스도를 시인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며 또한 만일 우리가 그것을 행한다면 그것은 이후에 우리의 말할 수 없는 영광과 행복이 될 것이다.

1. 우리가 그를 봉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것에로 부르심을 받아 그를 위해 고난을 받을 때 그리스도를 믿고 그 신앙을 고백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다. 우리는 우리와 그리스도와의 관계, 그를 위한 시중, 그에게서부터의 기대에 대해 부끄럽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로 말미암아 우리의 신앙의 진실성이 입증되고, 그의 이름이 영화롭게 되며, 다른 사람들이 감화를 받게 된다.

2. 이 고백이 우리로 하여금 비난과 고통을 당하게 만든다 할지라도 우리는 "의인의 부활 시에" 이것에 대해 충분한 보상을 받게 될 것이다. 그때에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듣게 된다는 것은 우리의 말할 수 없는 영예와 행복이 될 것이다(우리가 무엇을 더 바라리요). 즉 "그는 비록 세상의 보잘 것 없는 벌레에 불과하지만 나는 그를 시인하리라. 이 사람이야말로 나를 사랑했고 나로 말미암아 사랑을 받았던 나의 것 중 하나요. 나의 친구, 나의 사랑하는 자 중 하나이다. 내 피로 산 사람이요, 내 영의 제작품이다. 나는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하리라. 그때에 그것은 그를 취하여 최상의 봉사를 할 것이다. 나는 그를 위하여 좋은 말을 해줄 것이다. 그때에 그는 내 아버지 앞에서 그의 판결을 받기 위하여 나타날 것이다. 나는 그에게 나타나겠으며 그를 내 아버지 앞에 나타내 보일 것이다." 그리스도를 영예롭게 하는 자들을 그는 이와 같이 영예롭게 하실 것이다. 그들은 그를 "사람들 앞에서" 영예롭게 하실 것이다. 그것은 "보잘 것 없는"일이다. 그리고 그는 그들을 그의 "아버지 앞에서" 영예롭게 할 것이다. 그것은 "위대한"일이다.

둘째,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그리스도를" 부정하고 거절하는 것은 위험스러운 일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행하는 자는 "큰 심판 날에 그에 의하여 거절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에 그들은 그를 매우 필요로 할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를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은 자들을 그의 종들로 인정하지 않으실 것이다. "내가 말하노니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느니라"(7:23). 사람이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것이 이 세상에서 그에게 드릴 수 있던 최고 선의 일이었던 기독교의 초창기에 있어서 이러한 신앙 고백은 후에 이것에 수반되는 세속적인 유익을 가진 것에 비한다면 하나의 진실성에 대한 보다 더 큰 시련이라고 할 수 있었을 것이다.

⑧ 그들의 제자 직분의 기초는 마치 고난들을 그들에게 대해 매우 가볍고 쉽게 하려고 한 것처럼 이러한 기질과 성벽에 두어졌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그의 추종자로 삼으신 것은 고난을 위해 준비하는 조건에서였다(37-39절). 그는 맨 처음에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만일 그들이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기꺼이 버리지 않으면 그에게 "합당치 않다"고 하셨다. 사람들은 신앙 고백을 할 때 거기에 필수적으로 수반될 뿐만 아니라 또한 그들이 예측하였던 난관들에 대해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는다. 그들은 기꺼이 그러한 피곤과 고생에 순복한다. 그렇지 않으면 신앙 고백의 특권과 유익을 포기하는 것이 된다.

그런데 기독자의 신앙 고백에 있어서 그들은 이러한 것이 지니는 위엄과 행복을 받을 가치가 없는 자로 여겨지는데, 이는 이러한 가치를 그리스도에 대한 관계에 두지 않고 다른 어떠한 관심보다도 앞에 두기 때문이다. 계약의 조건을 지키려하지 않는 자들은 거래에서 유익을 기대할 수 없는 법이다. 이와 같이 하여 계약 조건은 설정되는 것이다. 만일 종교가 "어떤"(any)일에 가치가 있다면 그것은 "모든"(every) 일에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의 진리를 믿는 자는 모두가 곧 그 가치를 알게 될 것이다. 그것을 자신들의 임무와 행복으로 삼는 자는 그 밖의 모든 것을 그것에 순복 하도록 할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 있어서의 기독자가 아닌 자는 스스로 멸망을 자초하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우리가 아무리 그리스도를 위해 버리거나 잃거나 고난받는다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에게 손해보는 거래를 하는 것은 아님을 알면 용기가 솟아날 것이다. 아무리 우리가 이 값비싼 진주를 잃는다 할지라도, 우리가 그것을 위해 제공한 것은 매우 가치가 있다는 신념이 우리로 하여금 위로를 받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앞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첫째, 우리는 가장 친근하고 소중한 친척들, 곧 "아버지와 어머니, 아들과 딸" 앞에서 그리스도를 높여야 한다. 이 친척들 사이에는 시기할 것이 없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사랑할 수 있는 여지가 있으며 따라서 이 친척들은 우리를 매우 사랑하는 사람들로 열거되어 있다. 자식은 그들의 부모를 사랑해야 하며, 또한 부모는 그들의 자식을 사랑해야만 한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그리스도보다 그들을 더 사랑한다면 그에게 합당치 않다. 우리는 그가 말씀하셨던(21, 35, 36절) 우리의 친척들을 증오함으로써 그리스도에게 버림받아서도 안 되며, 마찬가지로 그들을 사랑함으로써 그리스도에게서 멀어져서도 안 된다. 기독자는 모름지기 "그 부모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내가 그를 보지 못하였다"(신 33:9)고 말한 레위와 같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둘째, 우리의 안락과 평안에 앞서 그를 높여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십자가를 지고 그를 따라가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에게 합당치 않다. 여기에서 살펴 볼 수 있는 것은,

1.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자는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할 것"을 각오해야 하며,

2. "십자가를 지고" 갈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그가 하셨던 것처럼 인내해야 하며,

3. 우리가 십자가를 지고 갈 때 그것을 참는 방법을 우리에게 보여 주신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은 큰 용기가 된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신실하게 그를 따른다면 그가 당하신 고난을 통해 그의 영광 가운데로 우리를 인도하실 것이다.

셋째, 목숨보다 그리스도를 높여야 한다(39절).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다." 그리스도를 부인함으로써 목숨을 얻었다고 생각하는 자는 영원한 사망 가운데서 그것을 잃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인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 즉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것 보다는 목숨을 버리려는 자는 그의 말할 수 없는 이익, 즉 영원한 생명으로 그것을 얻게 될 것이다. 그들은 장차 오는 생명을 위해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으므로 이 세상의 목숨에 대해서는 냉담한 것이다.

⑨ 그리스도 자신은 그들의 주장(이유)을 진심으로 지적함으로써 그 자신을 그들의 모든 친구에게 친구로 나타내며 또한 여하한 때에라도 그들에게 주어져야난 했던 모든 친절을 도로 갚으려고 하셨다(40-42절).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라."

첫째, 대개 모든 사람들이 그들을 거절하려고 하지만 그러나 그들은 그들을 영접하고 환대하며, 복음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이를 인하여 그들을 집으로 영접하려고 하는 몇몇 사람을 만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 여기에 암시되어 있다. 최악의 시기에도 은혜의 선택에 의하여 남은 자가 있기 마련이다.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은 수고를 "헛되게"하지 않을 것이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는 친절하게든지 불친절하게든지 그의 신실한 사역자에게 행한 것을 그 자신에게 행한 것으로 간주하며 또한 그들이 "취급받은 것"을 그 자신이 취급 받으신 것으로 여기신다.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라." 전권대사에게 주어진 영예와 멸시는 그를 보낸 이에게 대한 영예와 멸시를 나타낸다. 사역자들은 "그리스도를 위한 사도들"이다. 그리스도는 그에게 대한 존경을 입증하려는 사람들에 의해 여전히 환영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의 백성과 사역자들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있다. 또한 그는 세상 끝 날까지 "항상 그들과 함께"있으시다. 아니, 그 영예는 보다 높이 올라가나니,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그것을 자신에게 행한 것으로 간주하실 뿐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도 역시 그렇게 하신다. 그리스도의 사역자를 환대함으로써 그들은 "모르는 천사"가 아닌 그리스도, 곧 하나님 자신을 환대하는 것이다(마 25:37).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았나이까?

셋째,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행해진 친절이 결코 적지는 않지만 만일 그렇게 행한 경우가 있거나 그 이상의 것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그것이 비록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을 준 것에 불과하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받아들여질 것이다(42절). 그들은 "소자들"이며, 보잘 것 없고 연약하며, 종종 원기회복이 필요하며, 적은 것에도 기뻐하는 자들이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냉수 한 그릇"도 그들에게는 매우 큰 호의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보여진 친절함은 선물의 값에 의하지 않고 주는 자의 사랑과 애정에 의해 그리스도의 책에 가치 있는 것으로 기록된다. 이에 비추어 과부의 적은 돈은 일반적으로 통용되었을(pass current) 뿐만 아니라 높이 평가되었다(눅 21:3, 4). 따라서 은혜가 참으로 풍성한 사람은, 비록 세상에서 가난하다고 할지라도 선한 일에 풍성할 수 있을 것이다.

넷째, 그리스도께서 장차 받으실 그의 제자들에게 대한 친절은 그리스도를 목표로, 또한 그를 인하여 행해져야만 한다. 선지자는 "선지자의 이름으로" 영접되어야 하며, "의인"은 "의인"의 이름으로, "소자"는 "제자의 이름으로" 영접되어야 한다. 그 이유는 그들이 학식이나 재치가 있기 때문이 아니며, 또한 그들이 우리의 친척이나 이웃이 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은 의로우며 따라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선지자요 제자들이며 따라서 그리스도의 심부름을 위해 파송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사역자에게 행해진 친절 위에 가치를 두는 것은 그리스도에게 대한 신앙적인 존경이다. 우리가 맨 처음 이 일에서 그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다면 그는 이 일에 관심을 두시지 않으신다. Ut tivi debeam diquid pro eo quod praestas, debes non tantum mihi praestare, sed tanquam mihi─즉 네가 제출한 어떤 봉사를 위하여 나로 하여금 너에게 대한 의무를 느끼기를 원한다면 너는 그 봉사를 수행할 뿐만 아니라 네가 그것을 나를 위해 한다는 사실을 나로 하여금 확신케 하도록 해야 한다(Seneca).

다섯째, 그리스도의 백성과 사역자들에게 보여진 친절함은 받아들여질 뿐만 아니라, 풍성하고 적절하게 보상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선한 일을 행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은 매우 엄청나다. 만일 그것이 주님에게 행해진다면 그는 그들에게 이자를 붙어 다시 지불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불의치 아니하사 사랑의 수고를 잊어버리시지 않기" 때문이다(히 6:10).

1. 그들은 "상을 받을 것이며" 결단코 그것을 "잃지 않을"것이다. 그는 "그들이 상을 받을 만하다"고 말씀하시지 않는다. 우리는 어떠한 임금도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받을 자격이 없다. 오히려 그들은 하나님의 값없는 선물로서 "상을 받게 될"것이다. 또한 그들은 종종 사람들 가운데서 선행을 하는 경우에서와 같이 "결단코 그 상을 잃지 않을"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보상해야하는 자들은 거짓되거나 잊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의인의 부활시 까지는 그 상이 늦춰질 수 있으며 또한 완전한 보상도 연기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상은 결코 "잃어버리지 않을"것이며 또한 연기됨으로써 잃어버리는 바가 되지 않을 것이다.

2. 이것은 "선지자의 상"이며 "의인의 상"이다. 다시 말하면,

(1) 하나님께서 선지자와 의인에게 주시는 상이다. 그들에게 주어진 축복은 그들의 친구에게도 미칠 것이다.

(2) 그것은 하나님께서 선지자와의 인을 통하여 주신 상이다. 그들의 기도에 응하여(창 20:7) 주시는 상이다.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할 것이라"고 하셨으니, 그것이 곧 선지자의 상이다. 또한 그들의 사역에 의해 주시는 상이다. 그가 말씀의 전파자에게 친절한 자들에게 말씀의 교훈과 위로를 주실 때에 그는 "선지자의 상"을 보내시는 것이다. 선지자의 상은 하늘에 속한 일들에서의 영적인 축복이다. 만일 우리가 그것들의 가치를 안다면 그것들을 좋은 보상으로 여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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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13---
1.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2.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3.다스리는 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4.그는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네게 선을 베푸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따라 보응하는 자니라
5.그러므로 복종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진노 때문에 할 것이 아니라 양심을 따라 할 것이라
6.너희가 조세를 바치는 것도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들이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 바로 이 일에 항상 힘쓰느니라
7.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조세를 받을 자에게 조세를 바치고 관세를 받을 자에게 관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
8.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9.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10.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11.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12.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13.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14.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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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세에 대한 복종(롬 13:1-6)
우리는 권력자들을 상대로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가 하는 점이 여기 밝혀져 있다. 우리 머리 위에 권세를 가지고 있는 자들을 가리켜 "위에 있는 권세들"이라고 부르는 것은 왕과 그 밑에 따르는 모든 권력자들의 권위와 위엄을 두고 하는 말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그걸 가진 사람들을 들춰 말하지 않고 그 권력의 위치를 두고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사람들이 제아무리 악하고 시온의 백성의 멸시를 받는 몹쓸 사람들이라도(시 15:4), 이들이 가진 공의로운 권세는 복종하고 순종해야 한다. 사도는 앞 장에서 우리 스스로 복수하지도 말고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고 가르쳤지만 이것이 그리스도인들 사회에서 일반 행정의 질서를 무시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을까 해서 이 기회에 그 필요성과 악행을 저지르는 자에게 내리는 당연한 처벌의 부과를 주장하고 있다.
Ⅰ. 임무 부과. "각 사람은 ……굴복하라." 스스로 영적인 사람이라고 자칭하는 교직자들까지 다 포함해서 누구나 굴복하라는 말이다. 가령 로마 교황청은 국가 권력에 무관하다면서 모든 왕들을 교황에게 굴복케 하여 스스로 최고 높은 자리 곧 하나님의 자리까지 올라서는 그런 자들도 예외없이 여기에 굴복하라는 얘기다. 이것은 우리의 양심을 어떤 인간의 의지에 굴복하라는 얘기가 아니다. 법률을 만들어 인간의 마음을 묶어 놓은 것은 하나님의 대권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돌려야 한다. 이 말은 우리의 복종이 자발적이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어야 한다는 얘기다."심중에라도 왕을 저주하지 말라"(전 10:20). 헤아리고 상상하는 건 배반의 시작이다. 여기서 요구하는 복종에는 충심에서의 공경(벧전 2:17)과 외적인 존경을 다 포함된다. 곧 그들에게 직접 말할 때나 그들을 두고 타처에서 말할 때나 마찬가지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것은 합법적이요 정직한 문제에 있어서는 그들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요 그밖에 다른 문제에 있어서는 저항 없이 벌을 달게 받으며 인내하는 것이요 만사에 있어서 신하의 위치와 본분에 일치하는 것이다. "그들은 보다 높은 권세들이다. 그들이 그렇게 내버려 두고 거기에 복종하기만 하라." 이처럼 공적 권세에 복종할 것을 이처럼 강조하는 이유는 충분히 이해가 간다.
1. 그 이유는 기독교 신앙이 이 세상에서 사회 안녕과 질서, 정부에 원수요, 이 세상을 왈칵 뒤집어 놓는 분파요 가이사의 원수들이요, 더욱이 그 지도자들이 갈릴리 사람들이라는 비난 때문이다. 모두가 낯익은 중상이다. 예루살렘은 "패역한 성읍이라……항상……열왕과 각 도에 손해가"되는 존재로 여겨져 왔다(스 4:15, 16). 우리 주님께서도 당신의 왕국은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고 그들에게 말씀하셨지만 이들에게 마찬가지 비난을 받으셨다. 그렇다면 그분의 추종자들에게 있어서도 원수들이 이들에 대한 만행의 구실을 이처럼 잡은 이상 "분파적이요 선동적이며 난폭하다"는 똑같은 중상 모략으로 모든 세기에 걸쳐서 욕을 먹어 오는 건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따라서 사도는 이 중상을 제거하기 위해서 공적 권세에의 순종이 그리스도의 율법의 하나라고 지적하고 있다. 곧 그리스도교는 백성이 선한 신하가 되도록 도와주는 것인 만큼 그 종교 원리 원칙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분파와 반역이라는 말을 이들에게 뒤집어 씌우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다.
2. 또 다른 이유는 크리스천들이 공적 권세에 대해 달리 생각을 품기 쉬운 유혹 때문이다. 이들 가운데는 본래 유대인들도 있어서 아브라함의 자손이 다른 민족에게 굴복하는 건 되지 않는 소리라고 생각하는 자들이 있었다. 그들의 왕은 동족 가운데서 나와야 한다는게 이들의 사고방식이었다(신 17:15). 게다가 바울은 그들에게 이들은 더 이상 "율법 아래 있지 않고" 그리스도에 의해서 자유롭게 되었다고 가르쳐 왔다. 이 자유가 방종으로 흘러 분파와 반역을 조장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그는 공적 권세에 복종할 것을 명하고 있다. 이것이 더욱 강조되어야 할 것은 자기들의 시민권과 권위를 아직 파괴하지 않은 권세자들은 이방인이요 불신자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당시 권력은 박핼? 일삼고 있었으며 법률 전체가 이들을 몰아 세우고 있었다.
Ⅱ. 이 임무 실천의 이유. 왜 우리는 복종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
1. "진노를 두려워해서"(새번역). 우리가 저항으로 말미암아 안고 들어가는 위험 때문이다. 권세자들은 칼을 쥐고 있으므로 이들을 거스리는 건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귀한 모든 걸 궁지에 모는 것이요 무모한 짓이다.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신앙 때문에 권세자들의 칼을 받기가 쉬웠는데 그들의 반역으로 이걸 더 악화할 필요가 없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저항이나 반역의 기미가 조금이라도 발견되면 이것이 확대되어 전체 사회에 편파적인 문제로 등장하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이들이 우선 복종할 필요가 있었다. 이렇게 해서 그들이 모시는 하나님 문제로 그들을 들볶을 거리를 주지 않는 것이다. "거스리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2절)는 말씀은 이런 뜻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들 스스로에게 책임이 돌아가는 것이다(크리마 렘프손타이). 그 저항이 하나님에게 관계되는 것이기에 그는 그 책임을 따져 물으실 것이다. 권세자들 역시 마찬가지다. 이렇게 해서 저항자들은 율법의 채찍을 맞고 위에 있는 권세들이 내리깔고 뭉게기엔 너무 높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모든 공적인 통치가 배반과 반역에 엄하고 가혹한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관원들은……두려움이라"(3절)는 말이다. 이것은 물론 유익한 논리이긴 하지만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는 수준 이하다.
2. 우리는 "진노를 두려워해서만이 아니라 또한 양심을 위해서도" 복종해야 한다. "처벌을 겁내서"(formidine paenae)가 아니라 "덕을 사랑하기"(virtutis amore) 때문이다. 이것이 일반 공공임무를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아들이는 이유다. 곧 이 임무가 "양심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러한 관계에 두신 섭리를 생각하고 그의 교훈이 우리로 하여금 이 관계에서 파생되는 임무에 복종케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똑같은 일이라도 여러 가지 다른 차원에서 실천되어질 수 있다. 이제 양심으로 하여금 복종케 하기 위해서 그는 다음 몇 가지 이론을 전개하고 있다(1-4, 6절).
(1) 권력의 제도면에서.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하나님은 이 세상의 지배자와 통치자로서 권력기구를 제정하셨으니 모든 공권(civil power)은 그에게서 발원하며 그는 당신의 섭리에 의해서 그 권력을 가진 자들이 누구이건 그들의 손에 이것을 관리하도록 하셨다. 덕분에 의해서 제왕의 통치가 가능하다(잠 8:15). 이 권력의 횡포와 남용은 하나님 소관이 아니다. 그가 죄의 원저자(author)가 아니요 권력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타고난 여러 능력이 죄의 도구로 악용되는 경우가 많지만 그러나 그것은 엄연히 하나님의 창조 능력에서온 것이듯이 공권은 하나님의 통치 능력에서 온 것이다. 이 세상에 더 없이 불의하고 독제적인 왕이라도 위에서 허락하신 만큼의 권력 이상을 가지고 있지 않다(19:11). 신의 섭리는 특별한 모양으로 국가와 국민에게 영향을 미치는 통치형태의 변화와 전복에 관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면 이것은 일반적인 통치를 두고 해석할 수도 있다. 인류를 다스리는 데 있어서 그들 가운데 다스리는 자들과 다스림을 받는 자들을 구별하시되 약육강식하는 바다의 고기처럼 내버려 두시지 않으셨다는 점에 있어서 그것은 하나님의 지혜, 능력 그리고 선하심의 한 가지 예증이다. 이 점에 있어서 그는 그의 피조물의 유익을 생각하셨다. "모든 권세는," 전체 정치, 귀족 정치, 민주 정치 가릴 것 없이 그 통치력이 어디에 국한되어 있든 그것이 당장 보아서는 인간의 제도 같지만(벧전 2:13) 하나님의 제도이기 때문에 마땅히 그걸 받아들이고 복종해야 한다. 하나님의 제도이기 때문에 마땅히 그걸 받아들이고 복종해야 한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테타그메나이, 13:1), 이것은 군 사용어로 권세자들 임명뿐 아니라 군대에서 부하가 최고 지휘관에게 바치는 복종을 의미한다. 권력자들 가운데는 그들이 받은 은사와 임무가 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누구고 간에 "권력을 저항하는 자는 하나님의 제도를 저항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하나님에게서 오는 큰 재앙도 달리 많지만 권력기구는 하나님의 정하신 바요 하나의 위대한 법률이요 위대한 축복이다. 그래서 통치를 받지 않겠다고 벼르던 벨리알의 자녀들은 법을 어기고 축복을 모독한 자로 여겨졌다. 그러기에 권세자들은 신들(gods)이라고 말한다(시 82:6). 하나님의 권위의 형상이 이들에게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권력을 멸시하는 자들은 하나님 자신을 멸시하는 것이다. 이것은 물론 특징 왕과 왕국의 권리, 그들의 부속국가에 적용할 수도 없으며 또 여기에서 치자와 피치자간의 원형적인 계약관계에 대한 어떤 원칙이 생길 수도 없다. 다만 개인들로 하여금 그 개인적인 자격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이들을 놓아 주신 주위 환경에 가능한 한 평화롭고 조용하게 처신하라는 얘기다. 하나님께서 이들을 좋아 주신 주위 환경에 가능한 한 평화롭고 조용하게 처신하라는 얘기다. 하나님께서 섭리 가운데 그들 위에 세워 두신 공적 권력을 마땅히 생각하고 살라는 얘기다(딤전 2:1, 2). 권세자들이 하나님의 사자라는 말이 연거푸 되풀이되고 있다. 그는 "하나님의 사자"다(4, 6절). 권세자들은 더욱 특이한 면에서 하나님의 사자들이다. 이들이 지니는 위엄은 우리의 충성을 요구한다. 이들이 우리를 지배하지만 결국 그들은 하나님의 종들이요 하나님에게 결산을 볼 자들이다. 공적인 정의 집행, 분쟁해결, 정직한 자들의 보호, 범법자들의 교도와 처벌, 국가적인 평화와 질서 유지, 이 모든 면에 있어서 권세자들은 하나님의 사자들로서 행동한다. 하급 권세자를 죽이는 일에 있어서도 비록 그가 옳은 일을 한다고 하지만 왕에게 배신 행위로 몰리듯이 신자들도 자신들의 임무 수행에 있어서 어떠한 권세자든 저항하는 것은 하나님의 제도를 저항하는 것이다.
(2) 권력의 의도면에서. "관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① 권력은 악한 행위와 악인들에게 무서운 존재이다. 권력에는 칼자루가 있으니 전쟁의 칼일 뿐 아니라 공의의 칼이다. 권력자는 "속박의 후손들"로서 범법자들을 괴롭게 하는 자들인데 라이스 백성들에게는 이런 사람들이 없었다(삿 18:7). 죄와 타락의 힘은 어찌나 강한 것인지 하나님이나 자연의 율법, 그리고 다가올 진노에 대한 관심 정도로는 많은 사람들의 지독한 사회악을 억제할 수가 없고 오직 지금 당장의 처벌이 뒤따라야만 가능하다. 따라서 타락하고 고의적인 인류가 이것을 필수적이게끔 만들었다. 따라서 무법자와 불순종하는 자들을 처벌하는 법률이 그리스도인 국가에도 제정되어야 마땅하며(딤전 1:9) 복음에도 그것이 일치하는 것이지 모순되는 게 아니다. 인간들이 서로간에 이러한 금수와 맹수가 되고 말면 "남을 견제 하기 위해서"라도(in terrorem) 마땅히 처벌을 받고 멸망받아야 한다. 말과 나귀도 이래서 재갈과 고삐로 묵는 것이다. 이런 면에 있어서 권세자는 "하나님의 사자"(4절)다. 그는 하나님의 심부름꾼으로서 일처리를 한다. 따라서 그의 판단을 자신의 개인적인 원한과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 "악으로 행하는 자에게……보응하는 자니라." 제 아무리 충실한 권세라도 그의 사법적인 처리 과정은 물론 더러는 그 큰 날의 심판을 어렴풋이나마 예고하고 그것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지만, 하나님의 심판과는 훨씬 비교가 안된다. 그들은 오직 악한 행동만 붙잡고 늘어지며 악을 "행하는"자에게만 진노를 베풀지만 하나님의 심판은 악한 생각에까지 미치며 마음의 의도를 살핀다.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하나님께서 그러한 권력을 권세자의 손에 쥐어 주신 것은 거저가 아니라 무질서를 바로잡고 견제하려는 의도에서다. 그러므로 "권세자들의 눈에 띄고 그들의 제제에 속한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권세자들의 눈은 재빠르고 그들의 팔은 길기 때문이다." 범법자들의 처벌이 하나님의 제도로서 운용되고 그에 의해서 제정된다는 것은 아주 좋은 일이다. 첫째, 죄를 미워하시는 거룩한 하나님으로서 그 죄에 대한 공적인 증거가 이렇게 해서 마련된다. 둘째, 온 세계의 왕이요 평화와 질서의 하나님으로서 이 평화와 질서가 이렇게 해서 유치된다. 셋째, 선한 자들의 보호자로서 그들 자신과, 가족, 재산 및 그 이름이 이런 방법으로 보호를 받는다. 넷째, 죄인들의 영원한 멸망을 원치 않고 일부를 처벌함으로, 다른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하여 그와 같은 악을 방지하고 나머지 사람들도 이걸 들어 두려워하고 고의적으로 죄를 짓지 않게 하기 때문이다. 아니 이것은 처벌받는 자들을 사랑하는 의도에 된 일이니 육신은 멸망받아도 영혼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받게 하려는 것이다.
② 권력은 선을 행하는 자들에게는 칭찬이다. 제 할 일을 다하고 있는 자들은 권력자들의 칭찬과 보호를 받게 마련이다. "선한 일을 하라(3절). 그러면 권력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 권력은 그 자체로서는 무섭지만 자신들의 죄로 스스로 거기에 가증스러운 존재를 만드는 자들이 아니며 따라가 붙잡지 않는다. 불은 가연성 물질만 태울 뿐이다. 그대는 권력의 칭찬을 받을 것이다." 이것이 권력의 의도다. 따라서 우리는 양심을 위해서 거기에 복종해야 한다. 공공의 유익을 위해서 제정된 권력인 만큼 개개인의 이익은 거기에 압도되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슬픈 일은 이 은혜로운 의도가 곡해되어 칼을 쥔 자들이 죄를 좋아하고 묵인하면서 선을 행하는 자들에게는 무서운 존재가 되는 것이다. 악한 자가 높은 자리에 올라서면 이렇게 되는 게 사실이지만(시 12:1, 8) 그러나 이런 대라도 일반적인 보호라는 축복과 유익, 정부와 질서의 체면이라는 건 여전히 있는 만큼 무질서하게 보상을 시도하는 것보다는 선행에 대한 핍박을 인내하며 받아들이는 게 우리의 임무다. 네로처럼 정부의 목적을 악용한 군주도 없었지만 바로 이 사람에게 바울은 탄원을 제기했으며 그 아래서 부하 권력자들과 법률의 보호를 한 두 번 받은 게 아니다. 아무 것도 없는 것보다는 나쁜 정부라도 있는 게 낫다.
(3) 거기에서 얻는 우리의 유익 면에서. "그는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네게 선을 이루는 자니라. 너는 정부의 혜택을 받고 있으므로 그걸 유지하는 일을 해야지 그걸 어지럽게 하는 일은 해서는 안 된다." 보호는 충성을 유발한다. 우리가 정부의 보호를 받으면 거기에 복종하는 게 마땅하다. 정부를 치켜 올림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울타리를 그만큼 높이는 것이다. 우리는 세금을 통해서 이 복종을 표시하기도 한다(6절). "너희가 공세를 바치는 것도 이를 인함이라. 곧 양심에 마땅하다고 보는 네 복종과 감사의표로써 바치는 것이다. 너는 세금을 바침으로 너는 권력자의 권위를 소유할 뿐 아니라 그 권위의 축복을 네 것으로 하는 셈이다. 정부를 유지하느라 수고를 아끼지 않는 그 수고의 보상으로 너는 그걸 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권력자가 마땅히 그의 할 일을 다하고 있다면 그는 바로 이 일에 항상 힘쓰는 것이 된다. 그들의 수고를 생각하면 우리가 바치는 세금과 복종은 마땅한 것이다." 공세를 바치라(포루스 텔레이테). 그는 "네가 그걸 구호금으로 내라"는 식으로 얘기하는 게 아니라,  "그것을 마땅한 빚으로 알고 내라. 아니면 공공 행정의 축복과 혜택에서 모두 돌려 받을 것을 알고 빌려 주라. 그 혜택은 네가 다시 받을 것이다" 하는 식이다. 바로 이 점이 사도의 교훈이다. 따라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을 배워 실천해야 한다. 곧 땅에 거하는 경건한 자들이 그 땅에서 조용하고 평화롭게 살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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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와 사랑(롬 13:7-10)
여기에는 공의와 사랑의 교훈이 담겨 있다.
Ⅰ. 공의(7절).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라." 물론 이 말은 앞서 말한 권력자들을 두고 한 말이자 우리와 관계되는 모든 사람을 두고 한 말이기도 하다. 공정하다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그가 받을 것을 주는 것이다. 우리가 가진 것은 청지기로써 가지고 있는 것뿐이다. 다른 사람들도 우리의 가진 것에 관심이 있으며 그걸 그들에게 돌려 주는 게 마땅하다.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에게 그가 마땅히 받으실 것을 드리고, 네 자신, 네 가족, 네 친척, 네 지역 사회, 네 교회, 가나한 자 그리고 거래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들의 몫을 돌려 주라. 그들의 몫을 돌려 주되 법률로써 강요받을 때가지 기다리지 말고 즉석에서 실천하라". 그의 세목을 보자.
1. 마땅한 세금. "공세를 받을 자에게 공세를 바치고 국세 받을 자에게 국세를 바치라." 처음 이 복음이 전파되던 지역의 대부분은 당시 로마제국에 멍에 아래 있었다. 바울은 이 편지를 부유하기 때문에 세금과 기타 공과금으로 골치를 앓고 있던 로마 사람들에게 쓰고 있다. 따라서 그는 그들에게 이 세금을 정직하게 낼 것을 강조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공세와 국세를 구별하여 전자는 고정적인 세금이고 후자는 필요에 따라서 내는 잡세로 보기도 한다. 어떻든 양자가 다 법률에 따른 것이기 때문에 충실하고 양심적으로 내는 게 마땅하다. 우리 주님도 그의 어머니가 세금내러 갔을 때 태어나셨으며 그도 또한 씨이저에게 세금 바칠 것을 명했다. 다른 일에 있어서는 올바른 사람들이 이 일에 있어서는 양심을 속이고 왕을 속이는 건 죄가 아니라는 식으로 어물어물 넘어가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건 바울의 교훈에 어긋난다. "공세를 받을 자에게 공세를 바치라."
2. 마땅한 존경.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면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 이것은 우리가권세자들에게 지고 있는 임무뿐 아니라 부모, 스승 그리고 주 안에서 위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지고 있는 임무를 종합한 것이다. 이것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제 5계명에 따른 것이다. 이것을 "너희 각 사람은 부모를 경외하라"(레 19:3)는 말씀과 비교해 보라. 놀라서 겁나기 때문이 아니라 사랑과 존경, 순종에 찬 경외다. 윗 사람에 대한 이런 마음의 존경이 없이는 그밖에 다른 임무도 제대로 할 수 없다.
3. 마땅한 빚. "아무에게도 아무 빚도 지지 말라. 지불할 수 있는데도 빚을 지고 있어서는 안 된다. 각 사람에게 그의 몫을 되돌려 주라. 그걸 네 스스로 쓰지도 말고 더욱이 네 자신을 위해 싸놓지도 말라" "악인은 꾸고 갚지 않는다"(시 37:21). 이 문제를 익히 아는 사람들도 빚지고 있는 게 죄라는 건 전혀 생각치 않는 사람이 허다하다.
Ⅱ. 사랑. "아무에게든지 아무것도지지 말라"(오페일레테)하는 식으로 읽는 사람도 있다. "네가 어느 누구에겐 진 것이 무엇이든 이 사랑의 빚이라는 말로 다 표현 할 수 있다. 서로 사랑하는 것은 항상 갚고 갚아도 또 갚아야 할 빚이다." 사랑은 빚이다. 하나님의 율법과 인류의 이익이 바로 그렇게 만들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자유로 안 해도 좋은 무엇이 아니라 서로에게 빚지고 있는 모든 임무의 원칙이요 종합이다. 왜냐하면 사랑은 "율법의 성취"이기 때문이다. 물론 완전한 것은 아니지만 그것에로의 진 일보인 것이다. 이것은 둘째 돌판에 새겨진 모든 것을 종합하는 것이니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요일 4:20). 만약에 사랑이 진지하다면 그건 "율법의 성취"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이 "사랑"이란 말이야말로 우리의 모든 본문을 한 마디로 간략하게 함축하고 있는 말이요 우주의 미와 조화가 아닐 수 없다. 사랑을 주고 받는 일이야말로 이성적인 존재의 기쁨과 행복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은 사랑"(요일 4:16)이요 사랑은 영혼에 박힌 그의 형상이다. 이것이 있는 곳에 그 영혼은 제 모양을 갖추며 마음은 온갖 선한 일에 적합하게 된다. 사랑이 율법의 성취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 그는 다음 두 가지를 소개하고 있다.
1. 개별적인 교훈의 소개(9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에 다 포함되어 있는 십계명의 후반부를 그는 나열하고 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곧 같은 분량이 아니라 같은 성질의 사랑이다. "그 정도가 똑 같을 수는 없지만 네 자신을 사랑하는 동일한 정성으로" 네 이웃을 사랑하라. 자기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자는 자기 이웃의 몸, 재산, 명성도 자기 것처럼 잘 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이 기초에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황금률이 서 있다. 이런 면에 있어서 인간의 율법의 제지가 없었던들, 처벌도 없었을 것이요(이것은 인간의 악의 때문에 다 필요하게 된 것이다) 사랑의 율법만으로도 이 모든 잘못과 상처를 방지하고 우리들 가운데 평화와 질서를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여러 계명을 나열하는 데 있어서 그는 제 7계명을 제 6계명 앞에 놓고 있다. "간음하지 말라." 이 간음이라는 말이 흔히 사랑이라는 미명 아래 진행되고 있지만(이 좋은 말이 그렇게까지 악용되는 것은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살인이나 도둑질과 마찬가지로 사랑을 어기는 것이다. 진정한 형제애는 우선 형제의 영혼을 사랑하는 것이다. 남들로 하여금 죄를 짓도록 유혹하고 그들의 마음과 양심을 더럽히는 자는, 비록 더없이 열렬한 사랑의 핑계를 대겠지만(잠 7:15, 18), 실제에 있어서는 영혼을 거슬려 싸우는 악마와 같이 그들을 미워하고 있는 것이다.
2. 형제애의 성격에 관한 일반적인 교훈. "사랑은 악을 행하지 않는다"(10절). 사랑 가운데 걷는 자는, 곧 사랑의 원리의 지배를 받고 사는 자는 "악을 행하지 않는다." 그는 "이웃에게" 어떠한 악을 품지도 실천하지도 않는다. 그뿐 아니라 자기와 관계를 맺고 있는 누구에게나 마찬가지다(우크 에르가제타이). 따라서 악을 도모하는 걸 가리켜 침상에서의 악의 실천이라 부르고 있다(미 2:1). 사랑은 어느 누구에게도 악을 품거나 계산하지 않으며 어떠한 종류의 편견이나 상처를 주는 일을 일체 반대한다. "악을 행하지 않는다." 어떠한 종류의 악이든 반대한다는 얘기다. 표현되어진 것보다 표현되지 않은 것에 더 많은 의미가 담겨 있다. 사랑은 악을 행하지 않을 뿐 아니라 가능한 한 모든 선을 강구한다. 왜냐하면 이웃에게 악을 꾀하는 것뿐 아니라 마땅히 선을 베풀어야 할 자에게 선을 보류하는 것도 죄이기 때문이다(잠 3:27-29). 이것이 곧 사랑은 율법의 성취요 율법의 모든 목적에의 해답이라는 걸 입증하는 것이다. 이것 말고 우리에게 악을 억제하고 선을 행하도록 강요하는 게 또 다른 게 없지 않는가? 사랑은 전 율법에 대한 순종의 살아 있는 적극적인 원리다. 사랑의 법이 있는 곳에는 전 율법이 씌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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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지침(롬 13:11-14)
우리는 여기서 스스로 온건하고 경건할 것을 가르침 받고 있다. 우리의 주 업무는 우리를 보살피는 일이다. 그리스도인의 일과에 있어서 네 가지 일이 지적되고있으니 곧 언제 일어날 것인가, 어떻게 단장할 것인가, 어떻게 걸을 것인가 그리고 어떤 대책을 세울 것인가이다.
Ⅰ. 언제 일어날 것인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11절). 죄의 잠에서(죄악스런 상태는 잠자는 상태이기 때문에), 육의 안일한 잠에서, 게으름과 태만에서, 영적 사망의 잠에서 깨어 날 때가 가까워 온 것이다. 지혜로운 처녀나 어리석은 처녀들이 다 잠들고 있었다는 점을 주의하라(마 25:5). 우리는 때때로 잠에서 깨어나기 위해 누가 흔들어 주고 자극을 줄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의 모든 제자들에게 내려진 명령은 "깨어 있으라"(watch)는 말이다. "깨어 있으라. 곧 네 영혼, 내면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으라. 죄를 조심하고 선한 일을 하도록 힘쓰며 언제고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살아가거라."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우리가 처한 시간. 시기를 알거니와, 지금 시간이 어느 때인가를 생각해 보면 벌써 일어날 때라는 걸 알게 될 것이다. 지금은 복음의 시대요 받아들여진 시대며 일하는 시대다.  지금은 어둠에 있던 때와는 달리 하나님께서 보다 많은 것을 요구하시는 때다. 해가 중천에 떠 올라 우리 얼굴을 비치고 있으니 진작 일어났어야 할 때다. 우리는 아직도 이 빛을 받으며 자고 있는가?(살전 5:5, 6). 다른 사람들은 다 일어나 활동하고 있으니 진작 일어났어야 할 때다. 이 때가 바쁜 때인 줄 알라. 할 일도 많거니와 주님께서는 또 일을 많이 맡기신다. 이 때가 위험한 때인 줄 알라. 우리는 원수들과 사냥군들의 틈바구니 속에 있다. 블레셋 사람들이 쳐들어와 우리 이웃을 불사르고 우리 집도 불붙어 있으니 진작 일어났어야 할 때다. 충분히 잘 만큼 잤으니 일어나야 할 때다(벧전 4:3). 보라 신랑이로다 깨어 일어날 때다."
2. 우리에게 임박한 구원.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니라. 이제 우리가 우리 몫으로 선택한 영원한 행복이 우리가 처음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보다 더 가까워졌다. 우리가 처음 사랑을 가졌을 때보다 여행 목적지에 가까웠으므로 우리의 옷매무새를 여미도록 하자. 우리가 우리의 중앙에 가까울수록 우리의 활동은 그만큼 더 빨라져야 한다. 우리와 하늘 나라 사이에는 한 걸음밖에 안남았는데 그렇게 뭉그적 거리고만 있을 것인가? 그렇게도 발걸음이 무거워서야 되겠는가? 날이 그만큼 단축되고 은혜가 그만큼 증대할수록 우리의 구원은 그만큼 가까워오는 것이기에 우리의 영적 활동 또한 그만큼 신속하고 박력이 있어야겠다.
Ⅱ. 어떻게 단장할 것인가. 잠자리에서 일어나면 다음으로 옷을 줏어 입어야 한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옷을 입을 때다. 빛이 환하게 되고 나면 이전에 비해서 복음의 은혜를 더욱 분명하게 볼 수 있다. 유대인들의 횡포와 잔인의 밤이 다 지나갔으니, 곧 그들이 핍박의 날도 저물었으니 우리의 구원도 가까워 온 것이다. 곧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구속의 날이다(눅 21:28). 이에 따라 하늘의 영광 안에서 이뤄질 우리의 완전 구원의 날도 가까워 있다."
1. "그렇다면 무엇을 벗어야 하겠는가? 잠옷이다. 잠옷을 대낮에 입고 있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어두움의 일을 벗어버려라." 죄악스런 행동은 모두 어둠의 일로써 무지와 실수의 결과다. 이런 행동은 모두 은시과 남의 눈 피하는 걸 좋아하며 지옥과 파멸로 끝나고 만다. 그러므로 낮에 다니는 사람은 잠옷을 벗어 버리자. 그것을 실천하는 걸 중지할 뿐 아니라 그걸 증오하고 경원하며 더 이상 상종을 말자. 영원이 문턱에 와 있으니 더 이상 불리한 짓을 하지 않도록 경계하자"(벧후 3:11, 14).
2. "다음으로 우리는 무엇을 입어야 하겠는가?" 우리의 영혼에게 무슨 옷을 입힐 것인가?
(1) "빛이ㅡ 갑옷을 입으라." 그리스도인들은 원수들의 득실거리는 가운데 사는 군인이요 그들의 생활은 전쟁이다. 따라서 그들의 복장은 갑옷이어야 한다. "하나님의 갑옷"을 입어야 하는 것이다(엡 6:13 이하). 그리스도인은 갑옷을 입고 있지 않으면 발가벗은 거나 마찬가지다. 성령의 여러 은혜는 사탄의 유혹과 이 악한 세상의 공격에서 지켜 주는 갑옷이다. 빛의 갑옷이라는 것은 로마 군인들의 군복이 반짝거리는 걸 두고 말한 것이라고 보는 이들도 있고 또는 대낮에 입기에 어울리는 복장이라서 그렇다고 보는 이들도 있다. 성령의 은혜야말로 꼭 알맞은 휘황찬란한 갑옷이요 하나님 앞에 귀한 것이다.
(2)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으라"(14절). 이 명령은 13절에 있는 천박한 여러 정욕과 대조를 이루는 것이다. "방탕과 술주정"의 옷을 벌어버리라는 말 다음에는 그 반대의 말인 "온건과 절제의 옷을 입으라"는 말이 나올 법한데 그렇지가 않다.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는 말에는 이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다. 칭의를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의를 입고서 그분 안에서 발견되어지도록 하시라(빌 3:9). 맏형의 제사장 옷을 입고 있으라. 그럼 그 축복을 얻을 것이다. 성화를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영과 은혜를 입으라. 새 사람을 입으시라(엡 4:24). 은혜의 길을 확인하고 그 행동을 재빨리 살아나게 하라."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그리스도인들이 단장할 수 있는 최선의 복장이요 무장이다. 이 옷은 검소하면서도 반짝거리고 위엄이 있으며 적을 막아준다. 그리스도가 없이는 우리는 맨 몸이요, 일그러진 몸이나 마찬가지다. 그밖에 다른 모든 것은 누더기요 무화과 잎사귀며 누추한 초가집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미 크고 튼튼하며 따스하고 질긴 가죽 옷을 준비해 주셨다. 우리는 세례 받음으로 이미 그리스도를 옷 입는다고 고백했다(갈 3:27). 이 고백을 진심으로 하자. "주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옷입되 너를 다스리는 주님으로, 너를 구원하는 예수로 옷입으며 이 양자에 있어서 이 다스리는 일과 구원하는 일을 위해 하나님 아버지의 임명과 기름부음을 받은 그리스도로 받아들이라."
Ⅲ. 어떻게 걸을 것인가. 우리가 잠에서 깨어나 옷을 입었으면 수도사처럼 부러 캄캄하고 은밀한 곳에만 앉아 있을 게 아니다. 우리가 좋은 옷을 입은 이유는 그걸 입고 잘 보이려는 것이 아닌가? "……행하자"(Let us walk). 그리스도교는 우리에게 눈을 떼시지 않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어떻게 걸어야 할 것인가를 가르쳐 준다(살전 4:1).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는(엡 5:8) 말씀과 비교해 보라. 우리의 행동은 복음에 어울리는 것이라야 한다. "단정히 행하라." 곧 네 주장대로 단정히 행하며 우리 주 하나님의 말씀을 단장하며 네 종교를 남에게 아름답게 추천하는 방향으로 행동하라. 특별히 그리스도인들은 남들이 눈여겨 보는 점에 있어서 방정하게 행동해야 하며 어질고 좋은 평판을 얻도록 해야한다. 특별히 여기에는 세 쌍의 경고가 있다.
1. 우리는 "방탕과 술주정"을 금해야 한다. 먹고 마시는 일(drinking)에 있어서 우리는 과식 과음을 금해야 한다. 추호도 난봉꾼이라는 인상을 남들에게 줘서는 안 되며 감각적인 입맛을 극으로 몰고 가서는 안 된다. 방탕과 술주정으로 마음을 어둡게 해서는 안 된다(눅 21:34). 이것은 낮으로 알고 행동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취하는 자는 밤에 취하기" 때문이다(살전 5:7).
2.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제 칠 계명에서 금하는 육신의 정욕 곧 어둠의 일은 하나도 하지 말라는 얘기다. 간음과 간통은 금지된 방이다. 음란한 생각과 애정, 음란한 표정, 말, 책, 노래, 몸짓, 춤 곧 불결하게 만드는 이 모든 것은 금하는 호색에 속한다. 정숙과 검소라는 순결하고 신성한 법을 어가는 것은 모두 여기에 속한다.
3. "쟁투와 시기하지 말며." 이것 역시 흑암의 일이다. 왜냐하면 쟁투와 시기를 밥먹듯이 하면서도 누구 하나 자기는 분쟁을 좋아하며 시기심이 많다고 인정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시기 질투를 받아가며 살아가는 게 성도들의 운명이긴 하지만 그러나 스스로 쟁투하고 시기하는 것은 겸손하고 평화로운 예수의 제자들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일이다. 방탕과 술주정이 있는 곳에 간음과 호색, 그리고 분쟁과 시기가 따르게 마련이다. 솔로몬은 이것을 하나로 묶어 얘기하고 있다(잠 23:29 이하). 술에 잠긴 자들 에게(30절) 분쟁이 있고 까닭 없는 상처가 있으며(29절) 그들이 눈에는 이상한 여인들이 보일 것이다(33절)
Ⅳ. 어떤 대책을 세울 것인가(14절).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몸에는 신경을 쓰지 말라." 우리의 지대한 관심은 우리의 영혼의 대책을 강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몸은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는가? 그렇다. 그러나 두 가지 금지 사항이 여기 따르고 있다.
1. 무리한 염려로 고민하는 것. "몸을 위해 뭘 어떻게 할까 하고 안달하지 말라. 뭘 어떻게 먹여 살릴까 하고 조바심을 갖지 말라. 염려하지 말라"(마 6:31). 쓸데없는 초조한 염려를 경계하고 있다.
2. 못된 욕심에 탐닉하지 말 것. 그저 몸을 먹여 살리지 말라는 게 아니라[몸은 등(lamp)과 같아서 계속 기름을  공급해야 한다] 거기서 나오는 정욕을 채우지 말라는 말이다.  몸의 필수적인 것은 공급되어야지만 그 욕정은 만족시켜서는 안 된다.  생리적인 욕망은 채워져야 하지만 호색적인 취향은 억제하고 거절되어야 마땅하다. 우리 몸에 고기를 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일용할 양식을 주십사고 기도하라는 가르침이 있다. 그러나 우리 정욕을 위해 고기를 달라고 조르는 건 골치 아프다(시 78:18). 영 가운데 행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육신의 정욕을 채우지 않도록 해야 한다(갈 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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