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0.02.12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바이어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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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28 복음주의 선교신학자 피터 바이어하우스의 마지막 경고

[김영한 칼럼] 피터 바이어하우스 박사를 추모하며

머리말

독일의 세계적 복음주의 선교신학자요 한국교회의 친구인 피터(페터) 바이어하우스(Peter Beyerhaus) 교수께서 지난 2020년 1월 19일 91세를 일기로 하나님의 영원한 품 속으로 안기셨다.

그는 특히 독일신학자로는 독특하게 세계교회협의회(WCC, World Council of Churches)의 인본주의적 종교다원주의 선교운동에 대해 비판하면서, 예수 그리스도 인격과 구원의 유일성에 기초한 복음주의 선교신학을 제창하고 신학적으로 정립한 공적을 남겼다. 그분의 천국 입성을 환영하면서, 인간적으로 그의 유족과 독일의 동료들에게 애도(哀悼)의 뜻을 표한다.

바이어하우스는 1929년 독일 베를린 부근 호헨크래니히(Hohenkränig)에서 지크프리드 바이어하우스(Siegfried Beyerhaus) 목사 부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독일에서 신학 수업을 시작했고, 9학기 신학 수업을 마치고 스웨덴 웁살라 대학에서 신학 수업을 계속하여 선교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1957년 베를린 선교회의 파송선교사로 아프리카 남아공에 선교사로 가서, 1965년까지 우푸물로(Uphumulo (Natal))에 있는 루터교신학교 학장(Rektor des Lutherischen Theologischen College)으로 봉직하면서 현지인 선교를 하였다.

바이어하우스는 아프리카 현지 부족인들을 대상으로 선교하면서, 아프리카인들의 애미니즘(animism) 등 마술 숭배를 발견하고 영적 전쟁을 전개하였다. 그는 1965년 8년간의 아프리카 선교 사역을 끝내고 독일 튀빙엔 대 선교학과 에큐메니칼신학 교수로 취임하였다.

그는 1997년 은퇴하기까지 자유주의 에큐메니칼 신학이 지배하는 독일 신학계 풍토에서, 성경에 근거한 선교를 정립하기 위해 WCC의 범종교주의, 종교다원주의, 종교혼합주의 선교의 비성경적 측면을 밝히는 복음주의 선교의 전사로서 그의 삶을 바쳤댜.

그가 주도하고 함께 기초한 1970년 프랑크푸르트 선언(Die ‘Frankfurter Erklärung’ von 1970)은 성경에 충실한 선교사역의 신학적 기초로서 평가받고 있다.

바이어하우스는 1970년 독일 남부 지역 비텐비르크 경건주의자들에 의해 주도되어 창립한 알브레히트 벵겔 하우스의 원장(Rektor des Albrecht Bengel Haus)직을 1970년에서 1974년까지 수행하였다.

유럽에서 복음주의 선교를 위한 신앙의 투사요 선교학자였던 바이어하우스 교수는 한국복음주의협의회(한복협)를 창설한 선교신학자요 역사신학지 김명혁 교수와의 개인적 친분으로 한국교회와 인연을 맺었다.

필자도 1971년에서 1977년 독일 첫 유학 시, 그리고 1983-1984년 독일 안식년 체류시 그 분을 개인적으로 만난 적이 있다. 그가 주님의 나라를 위해 독일과 세계 각처에서 펼친 한결같은 복음주의적 신앙과 활동은, 오늘날 세계적으로 복음주의 후예들에게 깊이 각인되고 있다.

바이어하우스는 교회를 위한 성경적 선교 개념을 선교학적으로 정초한 복음주의 사상가였다. 독일 추모자들은 바이어하우스가 ‘그리스도 중심적 에큐메니칼 고백(eine ‘christozentrische Bekenntnis-Ökumene’)에 헌신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바이어하우스는 2016년 그가 16차 방한한 가운데 영락교회에서 개최된 한국복음주의협의회에서, 이제까지의 삶을 회상하는 고별강연을 했다. 그의 강연은 한국교회에 대한 특별한 애정과 더불어, 우리에게 새롭게 다가왔다.

그 때 필자는 그 분의 강연에 대한 논평을 맡아서 그 분의 시종일관 한결같은 복음주의적 활동에 경의(敬意)를 표하며, 하나님께서 노종(老從)의 생애에 아름다운 결실을 맺게 해주실 것을 치하하면서, 다음 세 가지 점을 논평한 바 있다.

1. ‘한국교회의 경이적 성장’ 전파: 독일 및 세계 교회에 한국교회 소개 공헌

필자(筆者)가 1970년대 독일 유학 시절, 바이어하우스 교수께서 하이델베르크대 신학부의 초청으로 튀빙엔에서 올라와서 행한 강연에서 들은 ‘한국교회의 경이적 성장’에 관한 내용은 인상적이었다.

필자는 그때 처음으로 그분의 선교학적 강연을 통해, ‘한국교회의 성장이 교회사적으로 유례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국내에서 미처 알지 못한 한국교회의 성장과 교회사적 위상을 독일에서 알게 된 것이다.

당시 유신(維新) 독재 시절 독일 튀빙엔대 젊은 신학자인 몰트만 교수가 한신대 초청으로 한국에 와서 강연하고, 민중신학을 변호하였다. 당시 몰트만은 한국 군사 정권의 유신체제에 대해, 민주화와 인권을 주장한 민중신학을 대변한 것이었다. 당시 몰트만은 한국에서 혜성 같은 신학자로 알려졌다.

이에 반해 튀빙엔대 신학부 동료인 바이어하우스는 당시에는 전혀 한국교회에 알려지지 않았다. 그런데 실상 독일 교회에서 한국교회의 성장에 관해 선교학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연구한 자가 바로 바이어하우스 교수였던 것이다.

몰트만이 한국의 민중신학을 독일에 알린 것에 반해, 바이어하우스는 선교학적 관심에서 한국의 빌리그래함전도대회, 민족복음화대성회 등을 통한 한국교회의 경이적 성장에 관해 유럽에 알렸던 것이다. 바이어하우스의 한국교회에 대한 보고는 복음주의적 선교학적 관심에 의한 것이었다.

필자는 당시 바이어하우스의 하이델베르크대 강연을 통해, 한국교회가 선교학적으로 유례 없는 중대한 발전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비로소 아는 계기를 가졌다.

그래서 필자는 바이어하우스의 한국복음주의협의회 강연 논평에 있어, 그가 ‘선교사(史)에 있어 유례 없는 한국교회의 발전상’을 선교학적으로 활용하면서, 복음주의 선교를 위하여 한 평생 애쓴 것에 대하여 감사하고, 그 공헌에 대하여 높게 평가하였다.

2. 한결같은 복음주의적 열정과 WCC 내 혼합주의적 요소를 지적한 공헌

독일 개신교회의 선교는 주로 교회의 날(Kirchentag)을 개최하는 에큐메니칼 진영이 주도권을 쥐고, 복음화와 전도보다는 인간화와 사회화, 제3국 선교활동도 주로 사회개발협력(Entwicklungshilfe)으로 진행됐다.

바이어하우스는 1968년 웁살라 총회 이후 WCC의 선교 방향이 타종교와 이데올로기와의 대화와 인종주의에 대한 투쟁(two controversial programs, the dialogue with non-Christian religions and ideologies and the fight against racism)으로 경도(傾倒)된 것을 지적하는데 예언자적 공헌을 했다.

바이어하우스는 권위주의 정권의 인종주의에 대한 에큐메니칼 진영 과격파들의 무력적인 투쟁을 반대하고, 종교간 대화에서 힌두교, 무슬림, 불교도에 대한 선교가 불필요하다는 견해를 제시한선교 모라토리움을 비판했다.

그리고 1970년 ‘선교기반 위기에 대한 프랑크푸르트 선언(Frankfurt’s statement about the foundation crisis of mission)’을 주도했다. 그는 1973년 방콕 WCC 대회에서 당시 총무 필립 포터(Philip A. Potter)의 과격한 사회화 선교 정책에 대항해, 복음적 선교정책을 천명하였다.

바이어하우스는 독일 내에서는 당시 발터 쿠네트(Walter Künneth) 등 엘랑엔의 복음주의자들과 함께 공동체의 날(Gemeinde Tag)을 주도하였다.

국제적으로는 WCC의 인간화 편향적 선교활동의 대안으로, 영국의 복음주의 성공회 신학자 존 스토트(John Stott)와 함께 1974년 ‘로잔 복음화 운동’을 창립하였다.

피터 바이어하우스 “아프간 피랍, 고난받을 때 하나님 임재”

▲2007년 8월 한국을 방문해 강변교회에서 설교한 피터 바이어하우스 박사. 당시 78세였다. ⓒ크리스천투데이 DB

바이어하우스는 2013년 한국복음주의협의회 초청으로 한국 강변교회에서 행한 강연 ‘세계 기독교의 동향과 한국교회에 드리는 조언’에서, 오늘날 위기에 있는 세계교회의 영적 위기를 다음 세 가지로 지적하였다.

“서구교회와 특히 독일 교회의 가장 분명한 위험한 경향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간단하게 서술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로, 신앙과 윤리의 성서적인 기초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기독론과 구원론과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에 대한 왜곡에 분명하게 나타났습니다.

둘째로, 전통적인 주류 교회들과 선교 단체들이 복음화의 정력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치명적인 것은 우리 서구 나라들 안에서 무신론적 인본주의가 교회들을 도전하고 있고 반 기독교적인 이슬람 종교가 도시와 마을 마다 모스크를 세우면서 그들의 보루를 세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슬람을 영적 교제와 대화의 동반자로 받아드리게 되면서 종교 혼합주의가 젊은 신자들의 마음을 혼란에 빠지게 만들었습니다.

셋째로,하나님께서 세우신 일부일처 제도와 가정 제도가 무시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이혼이 빈번하게 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정식으로 결혼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전통적인 결혼이 적당히 교제하면서 함께 사는 잡동사니 가정으로 대치하게 되었습니다.

동성애가 공개적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는데 법적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하고, 교회들에 의해 받아들여지기도 합니다. 현대 신학자들은 동성애를 하나님께서 세우신 또 하나의 결혼 제도라고 선언합니다.”

바이어하우스가 강연에서 지적한 세 가지 선교적 위기란 다음 세가지다. 

첫째로 하나님 말씀인 성경 권위 상실로 인한 신앙과 윤리의 성경적 기초의 흔들림 위기, 둘째로 종교 간의 대화와 종교혼합주의로 인한 선교 동력 상실의 위기, 셋째로 동성애로 인한 가정과 결혼의 위기다.

이 세 가지는 오늘날 현대교회가 직면한 위기요 복음주의 교회가 교회의 순수성을 지켜내기 위하여 극복해야 할 중대한 시대적 과제라는 것을 바이어하우스는 천명한 것이다.

3. 젠더 이데올로기를 제3의 인류문화학적 혁명((적그리스도적))이라고 경고한 공헌

바이어하우스는 21세기에 대두된 제3의 문화혁명인 젠더 이데올로기(Gender Ideology)에 대한 비판도 주도했다.

그는 오늘날 복음주의 교회에 젠더 이데올로기의 사탄적 흐름에 대항할 사명이 있음을 역설했다. 젠더 이데올로기는 오늘날 동성애 인권 운동과 성소수자 차별금지법 제정 운동으로 이미 영국과 미국 사회를 장악하여, 동성애를 사회적으로 허용하고 동성애 금지 반대 발언과 운동을 금지하도록 하여 이들 사회를 이교도적 사회로 변질시키고 있다.

오늘날 한국에서도 매년 6월 퀴어축제와 차별금지법 제정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바이어하우스는 독일 교회가 이에 이떻게 대처하고 있으며, 그 대처 방안을 제시해 주었다.

2016년 6월 한국복음주의협의회 초청으로 방문한 바이어하우스 교수는 필자가 섬기는 기독교학술원이 개최한 특별강연(2016년 6월 10일)에서 젠더 주류화 운동(Gender Mainstreaming)은 젠더 이데올로기에 의한 성 혁명 프로그램이라고 비판하였다.

바이어하우스가 지적한 것처럼, 젠더 주류화 운동은 두 번에 걸쳐 선행된 거대한 혁명들, 즉 정치적 신분제를 전복한 프랑스 대혁명(1789)과 경제적 계급제를 전복시킨 볼셰비키 혁명(1917) 이후, 1968년 세 번째 세계사적·문화인류학적 성 혁명은 하나님의 창조질서와 하나님 주권에 대항하여 일어나고 있다.

바이어하우스는 젠더 주류화 운동에 대한 비판을 데살로니가후서 2장 1-12절에 근거해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사도 바울은 예언자적 기도와 묵상 가운데, 성령으로 주어진 계시를 통해 앞으로 도래할 규범 폐기의 적그리스도의 도래를 예언하고 있다.

이 구절이 가리키는 ‘불법한 자(anthroopos tees anomias)’란 “하나님이나 숭배함을 받는 자 위에 뛰어나 자존하여” 하나님의 지성소 위에 앉아 있는 자,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하는” 적그리스도다. 이 구절은 오늘날의 정신적·윤리적으로 무법 상황을 예시해주는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 젠더 주류화 운동(Gender Mainstreaming)은 하나의 성 문화 혁명으로, 남성과 여성으로 이루어지는 이성애 문화를 제거하고 이를 남성과 남성, 여성과 여성이라는 동성애(同性愛) 문화로 바꾸고자 한다.

이 운동은 20세기 초중반기 있었던 이전의 다른 현대적 이데올로기 운동들, 즉 마르크스주의, 모택동주의, 스탈린주의, 파시즘, 나치주의와 군국주의 등 전체주의(totalitarianism), 그리고 빌헬름 라이히(Wilhelm Reich, 1897–1957)에 의해 제안된 프로이드-마르크스주의와 같이 총체적으로 적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해 주고 있다.

젠더 주류화 운동이 갖는 적그리스도의 길이란 전통적 규범을 총체적으로 거부하고, 가치와 규범의 혼돈과 혼란을 초래하는 무규범(Anomie) 상태를 말한다.

이 젠더 이데올로기에 주도되는 젠더 주류화 운동이 적그리스도적 준동이라는 사실에 대한 위험성 지적은, 바이어하우스가 한국교회에 와서 마지막으로 해준 중대한 문화인류학적 경고였다.

맺음말

재작년인 2018년 10월 5일, 한국에서 바이어하우스학회가 조직됐다. 바이어하우스의 유일한 한국인 박사 학위 제자인 이동주 교수(아신대 은퇴)를 주축으로, 조종남, 김명혁, 깁상복, 김영한, 오성종, 이승구 박사와 이재훈 목사가 참여해 출범하였다.

이 학회를 중심으로 바이어하우스 아카데미(Beyerhaus Akademie)가 시작돼, 목회자와 평신도들에게 오늘날 종교다원주의와 종교혼합주의 속에서 복음주의적 선교가 무엇인가를 계몽하는 뜻 깊은 1주간 집중 강의가 시작되었다.

돌이켜 보면, 재작년 바이어하우스 학회가 한국에서 창립된 것은 그 분의 별세에 대비한 것이 되었다.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뜻이 계신 것이었다.

마지막 때인 오늘날, WCC 등 각종 선교운동이나 신학운동에 나타나는 혼합주의와 세속주의 운동에 대한 바이어하우스의 예언자적 경고는, 그의 별세 이후 지구촌 세계 교회가 복음주의적 순수성을 유지하기 위해 깊이 명심하고 지켜야 할 교훈이다.

독일과 미국의 복음주의 신학자들, 그리고 한국개혁신학회, 한국복음주의신학회, 한국기독교학회, 한국복음주의협의회 등 그 분을 존경하고 그의 사상에 동의하는 후학 복음주의 신학자들과 목회자들, 선교사들은 그 분이 남기신 복음주의적 성경적 선교 개념의 위대한 유산을 계승 발전시키기를 소원해 본다.

김영한 박사(기독교학술원장/ 한국개혁신학회·복음주의신학회 증경회장/ 숭실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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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후서 2장 [개역개정]

1.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심과 우리가 그 앞에 모임에 관하여

Now we request you, brethren, with regard to the coming of our Lord Jesus Christ and our gathering together to Him,

2.영으로나 또는 말로나 또는 우리에게서 받았다 하는 편지로나 주의 날이 이르렀다고 해서 쉽게 마음이 흔들리거나 두려워하거나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라

that you not be quickly shaken from your composure or be disturbed either by a spirit or a message or a letter as if from us, to the effect that the day of the Lord has come.

3.누가 어떻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되지 말라 먼저 배교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그 날이 이르지 아니하리니

Let no one in any way deceive you, for it will not come unless the apostasy comes first, and the man of lawlessness is revealed, the son of destruction,

4.그는 대적하는 자라 신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과 숭배함을 받는 것에 대항하여 그 위에 자기를 높이고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내세우느니라

who opposes and exalts himself above every so-called god or object of worship, so that he takes his seat in the temple of God, displaying himself as being God.

5.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이 일을 너희에게 말한 것을 기억하지 못하느냐

o you not remember that while I was still with you, I was telling you these things?

6.너희는 지금 그로 하여금 그의 때에 나타나게 하려 하여 막는 것이 있는 것을 아나니

And you know what restrains him now, so that in his time he will be revealed.

7.불법의 비밀이 이미 활동하였으나 지금은 그것을 막는 자가 있어 그 중에서 옮겨질 때까지 하리라

For the mystery of lawlessness is already at work; only he who now restrains will do so until he is taken out of the way.

8.그 때에 불법한 자가 나타나리니 주 예수께서 그 입의 기운으로 그를 죽이시고 강림하여 나타나심으로 폐하시리라

Then that lawless one will be revealed whom the Lord will slay with the breath of His mouth and bring to an end by the appearance of His coming;

9.악한 자의 나타남은 사탄의 활동을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that is, the one whose coming is in accord with the activity of Satan, with all power and signs and false wonders,

10.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있으리니 이는 그들이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받지 못함이라 

and with all the deception of wickedness for those who perish, because they did not receive the love of the truth so as to be saved.

11.이러므로 하나님이 미혹의 역사를 그들에게 보내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For this reason God will send upon them a deluding influence so that they will believe what is false,

12.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들로 하여금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in order that they all may be judged who did not believe the truth, but took pleasure in wickedness

13.주께서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에 관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심이니

But we should always give thanks to God for you, brethren beloved by the Lord, because God has chosen you from the beginning for salvation through sanctification by the Spirit and faith in the truth.

14.이를 위하여 우리의 복음으로 너희를 부르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It was for this He called you through our gospel, that you may gain the glory of our Lord Jesus Christ.

15.그러므로 형제들아 굳건하게 서서 말로나 우리의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전통을 지키라

So then, brethren, stand firm and hold to the traditions which you were taught, whether by word of mouth or by letter from us.

16.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를 사랑하시고 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을 은혜로 주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서

Now may our Lord Jesus Christ Himself and God our Father, who has loved us and given us eternal comfort and good hope by grace,

17.너희 마음을 위로하시고 모든 선한 일과 말에 굳건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comfort and strengthen your hearts in every good work and wo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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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2]

1.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2.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3.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4.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선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NASB]Or do you think lightly of the riches of His kindness and tolerance and patience, not knowing that the kindness of God leads you to repentance? [NRSV]Or do you despise the riches of his kindness and forbearance and patience? Do you not realize that God's kindness is meant to lead you to repentance? [NKJV]Or do you despise the riches of His goodness, forbearance, and longsuffering, not knowing that the goodness of God leads you to repentance? [NIV]Or do you show contempt for the riches of his kindness, tolerance and patience, not realizing that God's kindness leads you toward repentance? [Darby]or despisest thou the riches of his goodness, and forbearance, and long-suffering, not knowing that the goodness of God leads thee to repentance? 

5.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6.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7.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8.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

9.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는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며

10.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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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hstov"(5543, 크레스토스) 온화한, 유쾌한, 친절한, 선한.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형용사 크레스토스(Hdt. 이래)는 크라오마이(cravomai, 5530: 이용하다, 사용하다)에서 유래했으며,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a)  기본적인 의미는 '탁월한, 유용한, 목적에 적합한, 좋은 류의'이다. 이 단어는 '더 일하는 벌, 단정한 집, 맛있는' 또는 '건강에 좋은 음식, 좋은 제물, 심한 상처, 좋은 경험, 성공, 번영, 행운' 등에 대해 사용되었다.

(b)  이 단어가 사람에 대해 사용될 때는 '훌륭한, 공정한, 정직한'이란 도덕적 의미를 지닌다. 이 단어는 또한 '좋은 태도나 예의, 좋은 성질'을 나타내며, 특정한 임무에 '알맞은' 사람을 나타낸다. 또 다른 의미로는 '친절한, 온화한, 유순한, 마음이 좋은', 심지어 '단순한' 등을 의미한다.

(c)  크레스토스는 고유명사로도 사용되었다.

2. 70인역본의 용법 

크레스토스는 35회 나오며, '뛰어난, 진짜의 값비싼'을 뜻하는 히브리어들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나 주로 히브리어 코브를 번역한다.

(a)  이 단어가 사물에 대해 사용될 때, 겔 27:22; 겔 28:13에서 야칼의 역어로 보석을 묘사하며, 단 2:32에서 타브의 역어로 '금'을 묘사하며, 렘 24:2, 렘 24:3, 렘 24:5에서 토브의 역어로 '무화과'를 묘사한다.

(b)  이 단어가 사람에 대해 사용될 때는 '친절한, 호의의, 은혜로운'(렘 52:32; 시 112:5), '정직한'(잠 2:22)을 나타낸다.

(c)  이 단어는 하나님의 위엄과 은혜와 관련하여, 하나님에 대해서(시 106:1; 렘 33:11), 하나님의 이름과(시 52:9) 자비(시 69:16)에 적용하고 있다. 우리는 좋으신 주님(시 34:8)께 소망과 신뢰를 가진다. 하나님은 선하시고 올바르시고(시 25:8) 그의 규례는 선하다(시 119:39).

3. 신약성경의 용법 

크레스토스는 신약성경에서 7회 나오며, 다음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a)  ① 크레스토스는 눅 5:39에서 물건에 대해 사용되어 물건의 '좋은'을 나타낸다: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

② 고전 15:33에서 크레스토스는 선한 행실을 묘사한다: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b)  크레스토스는 눅 6:35에서 하나님의 사람들을 향한 태도와 행위에서 '온화하고 친절한'을 나타낸다: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빌리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로우시니라". 하나님의 자비하심은 심지어는 은혜를 모르는 배은망덕한 인간들과 사악한 인간들(완고한 죄인들) 조차도 포용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친절함(자비)에는 한계가 없으며, 또한 하나님의 자비하심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도 그들의 원수들에 대한 무조건적인 사랑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 11:30에서 크레스토스는 (온유와 겸손이신) 그리스도의 '친절'을 나타낸다: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여기서 그리스도는 이 용어를 사용하여 그의 메시지를 유대교의 메시지와 대조하고 크레스토스는 그의 인격과 사역에 나타난 하나님의 '친절과 호의적인 도움의' 충만을 나타낸다.

롬 2:4에서 바울은 회개할 여지를 남겨 두신 하나님의 인자를 묘사하기 위해 토 크레스톤(중성)을 사용한다: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대하여 회개치 않은 자들은 경멸하고, 그러므로 자기들에게 임할 진노를 쌓아 가고 있다. 

여기서 의미하는 것은 그리스도 이전에 백성들이 지은 죄에 대하여 하나님이 은혜로 참아주신다는 것이다. 바울이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은 자비로우시다. 그러나 이러한 친절이 특별하게 표현되고 하나님의 구원 사업에서 완성되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벧전 2:3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에서도 계속되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볼 수 있다.

(c)  엡 4:32에서 눅 6:35; 눅 6:36의 그리스도의 말씀과 그 이상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인용하여 신자들 상호간의 관계에 적용한다: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참조: J.H.Thayer; K.Weiss; E.Beyreut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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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공정한 통치(롬 2:1-16)

사도는 본장에서 유대인 세계 역시 암담하고 죄악뿐이요 아니 어떤 면에서 보면 더 악화되어 있다는 걸 보여 주기 위해서 하나님은 유대인이나 이방인 모두를 동일한 조건에 두고 공의를 행사하신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물론 이때 하나님은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들의 편을 더 추켜 주는 편협한 처사를 하지 않으신다.

Ⅰ. 그는 유대인들의 자가당착을 꼬집고 있다(1절).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이니라." 일반적인 의미에서 이 훈계는 스스로 남을 규탄하고 지도하며 판단하는 입장에 있다고 생각하는 "많은 선생"(약 3:1)에게 적용될 수도 있는 말이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 특별히 유대인을 두고 말하고 있으며 그들에게 특별히 이 일반적인 책임을 묻고 있다(21절).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유대인들은 일반적으로 교만한 사람들이었다고 볼 수 있으니 그들은 불쌍한 이방인들을 아주 멸시하고 조롱하였으며 심지어는 자기 가축 중에 개보다도 못한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이런 그들도 부도덕하고 사악한 것은 마찬가지였으니 우상 숭배자들은 아니었다 해도 신성 모독죄를 범하기는 다를 바 없었다(22절). "그러므로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이다." 자연의 빛밖에 없던 이방인들이 핑계할 수 없다면(1:20 절) 하물며 하나님의 계시된 뜻인 율법을 가지고 이방인보다 훨씬 더 많은 도움을 받은 유대인들이야 말할 나위 있겠는가?

Ⅱ. 그는 하나님의 통치에 있어서의 공의의 불변성을 주장하고 있다(2, 3절). 문제의 핵심을 찌르기 위해서 그는 우리가 관계하고 있는 하나님이 얼마나 의로운 분이요 그의 처사가 얼마나 공정한가를 보여 주고 있다. 사도바울의 필체의 특징 중에 하나는 어떤 주제가 있으면 그걸 두고 여러 가지 부대설명을 한다는 점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공의를 두고 말하는 여기서도 마찬가지다(2절).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로 된다"는 사실 곧 영원한 공의와 평형의 원칙대로, 겉모양이 아니라 마음에 따라(삼상 16:7), 사람의 외모가 아니라 그 마음속에 따라 하나님의 심판이 처리된다는 건 우리 모두 익히 확신하고 있는 교리이다. 만약 하나님이 공의롭지 못한다면 그는 하나님일 수 가 없다. 그러나 자기들도 똑같이 죄가 있는 일을 가지고 남을 정죄하는 자들 곧 그런 죄를 밥먹듯이 하는 자들이 죄악에 대한 기치를 들고 죄짓는 자들에게 큰 소리 뻥뻥 지르기만 하면 그걸로 속죄가 되고 하나님의 공의를 가라앉힐 것으로 생각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되는 것이 천 번 만 번 당연한 일이다. 죄인의 양심을 파고드는 그의 솜씨를 보시라. 그는 묻고 있다. "……사람아……네가……줄로 생각하느냐?"(3절) 하나님의 지음을 받아 그 아래 복종하며 그분에게 책임을 다해야 할 피조물이요 이성적인 동물이라는 인간이여! 하는 식이다. "이런 '네가 하나님의 판단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께 하챦은 핑계가 통하겠으며 만유의 의로운 심판장께서 쉽사리 속아 넘어가 떨어지겠느냐?" 사람들에게서 더할 나위 없는 신임을 받아 사면을 받을 수 있는, 제 아무리 그럴싸한 정치범이라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도리는 없는 법이니 곧 심판과 정죄를 피할 길이 없다는 얘기다.

Ⅲ. 그는 두 가지면에서 그들을 정죄하고 있다(4, 5절).

1. 그 첫째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곧 "인자하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는 데 있다(4절). 이것은 신의 특유한 은총을 받은 유대인에게 더욱 적용되는 말이다. 그 은총을 주신 수단은 바로 자비요 우리가 빛에 대해 죄를 범하는 만큼 우리는 그만큼 더욱 더 사랑에 대해 죄를 범하는 셈이다. 대부분의 죄악 밑바닥에는 신의 선하심에 대한 얕고 천박한 생각이 깔려 있다. 온갖 고의적인 죄악에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멸시하는 생각이 깔려 있다는 얘기다. 그것은 그분의 중심에 대한 모멸이니 이들은 이것을 기회로 더욱 더 죄악에 대해 담대하게 되고 만다(전 8:11). 이것은 "하나님의 선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곧 그 의도하는 바가 "회개케 한다는 점을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회개하게 하는 데 있어서 어떠한 방법을 취하고 잇는가를 주의해 볼 필요가 있다. 그는 사람을 짐승처럼 모는게 아니라 이들을 이성적인 피조물로서 인도하고 달래고 있으니(호 2:14) 곧 사랑의 줄로서 인도하고 있다(호 11:4; 렘 31:3 비교). 하나님의 선하심(그의 섭리, 인내, 그리고 모든 은사의 선하심)을 생각하면 필연적으로 우리 모두가 회개의 자리에 이를 수밖에 없으며 하고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불신앙 가운데 머무는 이유는 이들이 이점을 알지 못하며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2. 그 둘째는 하나님의 진노를 사는 데 있다(5절). 이 진노를 사는 이유는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 때문이요, 죄인들이 파멸에 이르는 이유는 이러한 마음에 이끌려 따라가기 때문이다. 죄를 범한다는 것은 마음의 행로대로 행한다는 것인데 그 마음이 고집불통이요 회개를 모르는 마음일 때 그 행로야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죄악의 길로 치닫는 자는 스스로에게 "진노를 쌓는"결과를 초래할 뿐이다. 쌓는다는 말에는 풍성하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이 죄악의 보물은 영원토록 사용해도 다함이 없을 것인데도 죄인들은 여기에 또 죄악을 보물처럼 쌓아 놓는 것이다. 온갖 고의적인 죄악은 수십가지 새끼를 치기 마련이요 청산할 날을 재촉할 뿐이다. 어떤 사람들이 "그들이 나뭇가지를 그 코에 두었다"는 말을 "그들의 진노에 가지를" 치다는 식으로 번역한 그대로다(겔 8:17). 보물을 쌓는다는 말에는 비밀이란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진노의 보고, 아니 진노의 탄약고는 하나님 자신의 마음으로 그것은 비밀 장소에 봉인된 보물과 마찬가지로 깊숙히 보관되어 있다(신 32:34; 욥 14:17). 그러나 여기에는 탄약고의 실탄이 전쟁에 대비해서 보관되어 있는 것처럼 장기적인 목적으로 유보되어 있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다(욥 38:22, 23). 이 보물들은 마치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짐" 같이 활짝 열어 제쳐질 것이다(창 7:11). 도매금으로 몽땅 처분되고 말 "진노의 날"에 대비해서 보물처럼 쌓여질 뿐이다. 지금은 죄인들에 대해서 인내와 용납의 날이지만 그러나 언젠가는 진노의 날이 오고야 말 것이다. 사실 죄인들에게 있어서 하루하루는 진노의 날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악한 자에게 매일 분노"하시기 때문이다(시 7:11). 그러나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은 아직 남아있다(계 6:17). 그리고 이 날은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날"이다. 하나님의 진노는 우리의 격정과 같은 분냄이 아니니 그분에게는 노함이 없기 때문이다(사 27:4). 그것은 의로운 심판이니 곧 그의 본성에 어긋나기 때문에 죄를 처벌하려는 의지이다. 이 의로운 심판은 죄인들의 번영과 성공 속에 겹겹이 감취어 있지만 오래쟎아 만천하에 곧 들어날 것이요 피상적인 무질서는 자리를 물러나고 하늘은 그의 의를 선포하게 될 것이다(시 1:6).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에는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Ⅳ. 그는 하나님의 심판 진행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5절에서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을 언급하고 여기서는 그 심판의 의로움을 풀어 설명하고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기대할 수 있는게 무엇이며 하나님께서 어떠한 척도에 따라 세상을 심판하실 것인가 하는 걸 보여 주고 있다. 이 분배적인 공의의 형평성은 인간 외모가 아니라 그 공과에 따라 찬, 반이 주어진다는 데 있으며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이다.

1.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그 행한대로 보응"하실 것이다(6절). 이것이 성경에 종종 언급되는 이유는 만유의 심판장께서 올바르게 행사하신다는 점을 증명하려는 뜻에서이다.

(1) 은혜를 베푸시는 면을 보면 7, 10절에 두 번 언급되어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자비를 즐거이 베푸시기 때문이다.

① 은총의 대상. "참고……하는 자에게는" 이렇게 해서 우리는 신의 은총에 대한 관심도를 측정할 수 있으며 그걸 획득하기 위해 어떠한 방향을 잡아야 할 것인가를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의로운 하나님께서 보상으로 갚아 주실 자들은

첫째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들" 곧 스스로 올바른 목적을 설정하는 자들이다. 바꿔 말하면 영원히 썩지 아니하는 존귀와 영광을 구하는 자들이니, 즉 현재 그리고 영원토록 하나님을 영접하는 자들이다. 모든 실제적인 종교에는 거룩한 야망이 밑바닥에 깔려 있기 마련이요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를 찾는 것을 우리의 하늘같이 높은 소망과 목적으로 삼는 것이요 그보다 못한 것은 그 어느 것도 용납하지 않는 것이다. 구한다는 말에는 잃어 버렸다는 뜻, 그걸 되찾겠다는 욕망, 이 욕망에 비등하는 추구와 노력 등의 뜻이 포함되어 있다.

둘째 올바른 목적을 설정하였으면 올바른 방법을 택하여 거기에 집착하는 자들이다. "참고 선을 행하며" ① 선행이 있어야 한다(10절). 많이 알고 말 잘하고 약속 잘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선을 행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선 그 자체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선을 행하는 방법에 있어서도 신경을 써야 한다. ② 지속적인 선행이어야 한다. 기분내키는 대로의 용두사미가 아니라 끝까지 믿고 나가는 선행이어야 한다.

③ 참을성 있는 선행이어야 한다. 이 인내라는 말에는 선행의 장기적인 면과 이것을 행하는 데 있어 따라오는 여러 가지 난관이 내포되어 있다. 선을 지속적으로 행하려는 사람은 최대한의 인내를 발휘할 필요가 있다.

② 이 은총의 결과. 그는 이러한 자들에게 영생을 주실 것이다. 천국은 생명 곧 영원한 생명이요 그것은 참고 견디며 선을 행하는 자들이 받는 보상이이 여기서 말하는 대로 "영광과 존귀와 평강(10절)이다. 영광과 존귀를 자기 것으로 추구하는 자들이 이것을 차지한다는 말이다(7절). 이 세상의 헛된 영광과 존귀를 구하는 자들은 대개 이걸 찾지 못하고 실망하지만 영원한 영광과 존귀를 구하는 자들에게는 이것이 주어질 것이니 그 "영광과 존귀"뿐 아니라 거기에 "평강"도 따를 것이다. 세상의 영광과 존귀는 보통 어려움이 따르지만 하늘의 영광과 존귀는 결코 성가심이 없는 영원한 평화가 다르고 있다.

(2) 다음으로 화를 주시는 면을 보자(8, 9절).

① 화의 대상. 일반적으로 악을 행하는 자들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자면 "당을 지어 진리를 쫓지 아니하는 자들"이다. 모든 고의적인 죄는 본질적으로 하나님과의 싸움으로 "자기를 지으신 자로 더불어 다툼"이요(사 45:9) 더없이 절망적인 분쟁이다. 하나님의 영은 죄인들과 더불어 싸우며(창 6:3) 회개할 줄 모르는 죄인들은 이 영과 싸우며 빛을 거역하는 자들로서(욥 24:13) 속임꾼이요 성령께서 떼어 놓으려고 하는 죄가 좋다고 그걸 가까이하려고 고전분투하는 자들이다. 곧 "당을 지어 진리를 쫓지 않는 자들"이다. 종교의 진리는 아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천의 단계로 옮겨져야 하는 것으로 우리를 지도하고 다스리며 명령하는 것이다. "곧 실제와 연관된 진리"라는 말이다. "불의를 쫓는 자들" 곧 불의의 손가락질에 놀아나는 자들이다. 진리의 종괴기를 거절하는 자들이 불의의 종으로 떨어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없다. 

② 이 화의 결과 내지는 그 사례 "노와 분, 환난과 곤고" 이것이 죄의 삯이다. "노와 분"이 "환난과 곤고"를 유발하는 것은 필연적이요 불가피한 것이다. 이것도 "영혼"에게 베풀어질 것이다. 영혼이 진노의 그릇이요 환난과 곤고의 주체인 것이다. 영혼이 이 진노를 받는 것은 죄 때문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이 노와 분' 그리고 그 결과로 오는 곤고의 영향을 유일하게 견뎌 낼 수 있는 것은 영혼뿐이다. 지옥이란 노와 분의 결과인 영원한 환난과 곤고다. 이것은 하나님과 다투는 데서, 곧 타오르는 불섶에 가시덤불을 내던지는 데서 오는 결과다(사 27:4). 그분의 황금 홀에 엎드리지 않는 자는 그분의 쇠창살에 맞아 부서지기 마련이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각자 품행에 따라 처분하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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