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0.06.15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시1.진복/생활
첨부파일 :

==시1==


@@성경을 참되고도 깊게 보기 위해서는 오직!! 진리를 말하는 책이요, 결코!! 종교적이거나, [옳고 그름의] 이원론적 선악을 말하는 책이 아님에 정말 유의해서[번역본을 대해야] 한다..


나의갈길다가도록384..내구주예수님, 내영혼의 그윽히, 주내소망은, 주님의 마음을 본받는자...HS의 생각/일깨우시는 말씀-십자가의 길/섬김의 열정-겸손, Q경외함/송축

@달리다 굼(막5:41) = 탈리타 쿰<테이트-라멛-요드_타브-알렙, 코프-바브(중)-멤> @에바다(막7:34) =이파타흐<알렙_페이-타브-헤이트>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막15:34) = 엘리<알렙-라멛-요드> 엘리 라마<라멛-멤-헤이> 아자브타니<아인-자인-베이트-타브-눈-요드>


#(묵상)..시1

***[보냄 받은자, 곧 택자의 받을바, 고난의 두 방면] 

#JC의 고난/죽음 = 영-생명 Q, 곧 JC의 그영, 부활생명의 그영이시자 "베레시트"그대로 이루는 실제의 그영 = 사람의 영과 하나 이루심=, 그분을 공급하심 위함(체휼-자원함..미트하트=죽어야 다시삶) -->#택자-중생 성도의 고난/죽음 : 진정한 의미에서, "베레시트"와, "에셰르"를 알고 JC의 그영,곧 영-생명 Q 얻고 그 가운데 발견됨 (됨-삶) 위한 고난..

===

....@@샤마임<쉰(우)-멤-요드-멤>...샤<쉰(우)> = Q의 형상 + 마임<멤-요드-멤> = 진리, 곧 Q의 형상 =진리 = 성령..결국, 샤마임 = 하늘 = 진리의 성령, Q의 본체의 형상JC, 성육신 하여 이땅에 계셨다가 Q뜻 다 이루시고 부활생명의 그영이 되사, 승천하셨으니. 곧 샤마임은 그분의 거처...그런 의미에서, 중생성도의 영 안으로의 승천이기도 함!!

....@@아레츠<알렙-레이시-체데>= 땅  = Q의 영(알렙) + 사람의 영(레이시) + 결합-연합한 하나(체데) ...땅, 그자체에서 난것은 [Q의 연합되심이 없기에] 천연적인것(타고난것)에 불과함.. ..Q은 샤마임과 아레츠를 "에하드"로 만드셨다고 하셨으니, 이는 거듭난 존재, 곧 샤레츠... 바로 이렇게 만드셨기에!! 거듭난다는 것은 아레츠가 샤마임을, 샤마임의 그 내용은 절대진리이신 TUQ] 취하여 하나되었음을 의미하며, 이때 땅은 비로소 싹이 나고 순이 돋고 꽃 피고 열매맺게 됨.....이를 위해서는 샤마임의 진리, 곧 샤마임 그 실제이신 분 JC!!, 동시에 그분 JC께서 임마누엘로서 이 땅에 오셨음(결국, JC는 천상-천하의 물의 하나된바(=절대진리, 하_마임) 그 자체를 살고 계신분이시라, 하늘이자 땅이심 ...이분의 실체가 우리에게 도달하여 친히 살아가시려면  완전한 Q으로서 참인성을 가지신분, Q의 생명을 공급하시기 위해 고난 받으심(=땅을 딛고 살아가는 실존으로서, 오직 진리=형상-성령을 친히 살아내심+참인성의 그릇으로 살아가시며 그분의 영으로 온전히 살 수 있도록 그분의 영=성령(루하/루아흐 - 하카도쉬)=<레이시-바브(중)-헤이트, 헤이_코프-달렛-쉰(우)> 곧, "베레시트"이루시는 실제의 그영이자, 부활생명의 그영을 주시기 위함).. 한편, 중생 성도-택자의 고난 받음은 참되게 Q 생명의 그영을 접촉함으로써 그분의 실제 그 자체를 받기 위한 것임을 분명히 붙들어야 함.... JC이름으로 세례받음[=육체 끝냄]-->옛남편(<율법 : 생명의 가장 낮은 단계.....*토라<타브-바브(상)-레이시-헤이>..도덕-윤리가 그 위에 있음 ..그 위에 [살리는] 영의 생명-인격이 있는것....율법이나 도덕-윤리 준수 행위로는 결코 구원 이룰수 없음을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속사람 관점으로는 적극 동의한다..)인바 "혼적 실제로서" 문자 그대로 행위 통한 실행을 불식함-->오직 Q의 참생명-인격이신 [성령과 하나인바] 택자의 그 영을 통해 성경을 보라 하심이니!!...토라가 저절로 이루도록 하셨음... ["그렇게 여기라"하심 그대로, 발휘할바 절대적 참 믿음으로 "아멘"의 믿음으로] 취함/거함 이루는바 그영과 하나라, 그 자체가 됨(젹심-점유-충만-운행-신진대사적 선순환 변화-넘쳐남/인침 이룸) = 지고지선-최상의 진복 리게 됨-->

......"눈에는 눈, 이에는 이"에 대한 주님의 마음....(그럼에도불구하고!!...나, 너를 참되게 알고 있고, 그러하기에!! 너를 껴안으며 체휼/공감/용납/기다려줌의 동심합치로 네곁에 말없이 머무르련다.....이미 네게 말한 그대로 닭이 드디어 세번 울었구나!!...다만, 오직 [네게 부탁한바] 긍정의 말만 기억하거라!!)..(.너의 천연적인 말을 하는것이 아니라, 내가 네 입과 마음에 넣어주는바, 생명 주는 영의 말씀, 바로 그말을 그영의 말하게 하심따라 하도록 하자)"

---

@슈브<쉰(우)-바브(중)-베이트>=..본래 "테슈바"를 회개라 정의하고 있음, 곧 "처리되어 존재가 끝남"을 의미하는 "타브"가 앞에 붙는다...진정한 의미의 [회개]란 내 마음속에 일어난바, 샤마임, 곧 하늘 보좌에 계신., 동시에 내마음속의 하늘, 곧 영에 내재하시는 성령과 일치된 하나에로의 귀일인것

....**Q의 형상 =샤마임(진리/생명/기름부음..성령-하늘--"베레시트"이루시는 그영이자 부활생명의 그영 = 부활승천 안에 계시면서 자신을 공급해주시는 CJ의 그영)---**동심합치로 (그영) 상호간에 껴안고 수용함--**마음, 곧 믿는이의 영혼안에 살아계심...((주님 없이 살아가는 혼적 실존에게는, 새로움이란 전혀 없고 다만 나날이 낡아지고 끝나야/죽어야 하는것일뿐 (반드시 처리되어야할바) --곧 nothing/nobody 임을 [ 고난-어려움-병듦 경험 통해] 깨닫게 되며  + 동시에 주님 앞에 영생의 존재로 하나되어 살게 하신바 새 존재가(새영과 새마음) 필요함을 절실히 깨닫는바, 스스로는 전혀 새로와질 가능성이 없음...그러나, 새 소망을 주셨으니..더욱더 자신의 그영을 분배해주신 JC((부활승천 안에서 그영을 부어주심))를 더욱더  갈망하기에 이르게됨.. 날마다-매순간마다 새로움 그 자체이신 하늘=샤마임(Q의 형상)=을 바라보며/JC그분의 이름 부르며..말씀 안에서 그영을 접촉함으로써 그때마다 혼의 변화가 점진적으로!!-그 존재에 합당한 정도로 계속- 나타나게 하고 계심 =말씀/진리의 조성, 그 실제 "샤레츠"를 살게 되어짐.

....**영의 느낌** --슈브는...우림..[=진리의 빛..<알렙-바브(중)-레이시-요드_멤>)의 나날(=욤. 요드-바브(상)_멤)을 삶]...그 삶의 "참된 어떠함" 에 대한 보좌의 측량하심의 그때마다 "여전히 부족함"을 고백하며 십자가를 적용함[=둠밈..<타브-멤-요드_멤>]곧, nothing-nobody임을 느끼는 그 때마다 "십자가를 바라봄으로써, 이제 너는..온전케 되었단다, 선포하시며] 바로 그렇게 여겨주심....이로써 비로소 슈브[쉰(우)-바브(중)-베이트...불(TUQ-쉰=불)로 재만 남은 바로 그 자리에 진리(큰물=하_마임)-말씀의 성령, 곧 씻는 물의 역사 + 새로 모든 것 준비하신 그대로!!, 진리말씀-성령으로 건축되어지고 산출되는바, 주님의 집]가 이뤄지게 하셨기에!! 가능해짐....이것은 아버지 집에, 친히 낳으신분, 그분의 품에로의 귀일이라..이제는, 오직 기름부으심<쉰(우)>으로부터 새로 시작되어 그분이 친히 누리시는바 그분의 노래(아가)됨, = 곧 그분을 머리삼음(머리)으로써 그분의 새롭게 하신 존재 살게 하고 계심=

= 주께서!! 예레드-우레두를 참되게 마친내 완성하여 이루실 것))....이 때, "샤레츠"된 그 사람[하_아담 =참 인성의 사람..명심할것!!.. (성경에서 밝히 드러내는바) 사람의 마음이야말로 바로 그 실존적 사람의 거처인 동산이라, 그것을 경작하고 샤마임의 진리의 영을 살게 하고 계셨다!!(레_아브다흐 우_레_샤므라흐...15절.)]의 마음이 바로, 에덴동산!!!..[#간 베에덴<김멜-눈> #베에덴<베이트-아인-달렛-눈>...다른데에서는 "베간-에덴"으로 쓰고 있음]...에덴 동산은 거듬난 우리 영의 참인성과 영이신 Q의 신성이 서로 심심상인-이심전심의, 동심합치 이뤄 하나 이뤄 살며, 생명 말씀이 있는 곳이다.. ((다만, 명심하라!!..에덴동산을 지키도록 하시는 것은 그대자신이 결코 아님을!!...주목하라!!..두루 도는 불붙는 화염검을<창처럼 뾰족하고 날이 잘 선, 날카로운 말씀의 검, 삿됨을 찔러 죽이고 잘라내버려 처리하는> 말씀의 검 = 곧 이쉬<알렙-요드-쉰(우)>...영이 아닌 것을 접촉하는 모든 순간, 그때마다, "평강 없음"을 인지하는 그 순간마다!! 주님이름부름으로써 그 즉시 처리함 + 그영을 접촉하여 하나됨 안에 그냥 말없이 머무름....반대로, 영 안에 있는 사람끼리 만남은 완전한 평강-생명 흐름 그 누림 안에 있음을 감지케 됨..그때...알게 되는 것은!!..바로 내안에 Q이 만들어져 존재해 계심.. Q의 호흡과 내 호흡, 그분의 의도와 내 의도가 똑같아짐...이것이 바로 에녹의 참된 의미의 영으로 삶, 그 경험인바, 진정한 의미의 동행-동거-동주=할라크<헤이_라멛-쿠프>...즉 주님을 경험-누림-호흡-보조-동작/움직임-언행심사의 모든 면에서 기가 막히게 맟춰진-조화로운 상호 아가/찬송-체득케 됨인것!! [에녹의 승천 두가지 의미 = *1)승천 그 자체 *2) 영 안에 있는 온전한 사람 됨, 그 영속적 경험..두 가지를 다 의미] ((문장이 헤이로 끝나면서, 동시에 수직점 두개를 찍음은 바로 호흡/의도가 일치, 곧 동심합치 이룸 의미..))

---

[잠4:23..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하쎄르 밈메카 이케슈트 페 우레주트 쉐파타임 하르헤크 밈메카] 

 ==@하세르<헤이_싸멕-레이시>...친히 생기로서 불어넣어주신바, 실제의 그영--부활생명의 그영--CJ의 영을 (마음중심, 그 보좌에 좌정하여 계신분)..절대신뢰의 참믿음으로 앙망-동행함으로써, 곧 들이마심으로 호흡하는바, 머리요 으뜸이신 그분을, 일하시는 주님 되시게 하라 @밈메카<멤-멤-쿠프>...진리의 거처됨 살라, (그분이 그토록 소망-교통하심 그대로 받아들여 이루는바, 십자가 거쳐 변화-대치됨 이룬, 그 생생한 현존 나타내라).. @이케슈트<아인-코프-쉰(우)_바브(중)-타브>...기름부음이신 분께서 친히 산출-발아케 하신바이기에, 동심합치로 그분을 전존재로 수용하여 하나됨 온전히 이루라 @페<페이-헤이>...Q 자신을 열어주심 그대로 그분께서 말하게 하신것만 말하는 실존으로 살라...@우레주트<바브(중)_라멛-자인_바브(중)-타브>..오로지 시종일관, (아버지의 완전한 만족이신 아드님을 보듯이!!) 주님의 흐믓하게 여겨 자랑스레 보시는, 그분의 만족에 이르기까지 빚어 다루심 친히 이루시도록 (동심합치의, 이심전심의) 그 참제자됨 살라.. @쉐파타임<신(좌)-페이-타브-요드-멤>...그분의 형상-진리-생명, 곧 기름부음의 육화, 온전히 이룬바 바로 그 기름부음 자체요 원천이신 분의 거처로 살지니.. @하르헤크<헤이_레이시-헤이트-코프>...그것이 진정 [실제의 그영이시요, 동시에 부활생명의 그영, 곧 부활승천 안에 계시는바 CJ의 영이신] 성령께서 그토록 바라고 원하시는 바, 그렇게 예비하셨음이라.. @밈메카<멤-멤-쿠프> ..그로 인해 이루신바, 진리의 거처됨 살라, (그분이 그토록 소망-교통하심 그대로 받아들여 이루는바, 십자가 거쳐 변화-대치됨 이룬, 그 생생한 현존 나타내라).. 

***선포되는 주님 말씀 들음에 있어서는, ((비록, 아직 연한 풀의 단계에 있는것 같아보이더라도...말하는 그사람을 주께서 받으신바 됨이니..결코 그 자리에서 반박하거나 시시비비 가리려 들지 말라..그대 스스로의 생각의 패러다임을 적용함 통해 걸러듣기, 곧 취사선택하려 말라!! = 빗나감이니!!! 다만, 돌이키라,, 회개하라..주 바라기로 앙망하고 주 이름 부르라/의지하고 주께서 열어 깨닫게 하실것을 신뢰하라...[그가 ...개인적으로 교통하기를 진정으로 원하는 경우에라도!!, ...주께 여쭈고-(깨어 있어, 오직 먼저 주님의 원하심인지를 여쭤보고 어찌해야할지 여쭈라..주님의 참생명-인격에 충만히 적셔진 상태로!!...모든 것이 주님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록 할지니..) 오직 그대의 모든 언행심사에 있어서 주님 인도-이끄심따라서만 행하기를 배우라] ...다만 주께서 나중에 (대언자와 그대 자신을..모든 사람 하나하나마다를 ) 친히 깨닫도록 열어주시리라....온전히 내려놓고-열어-비워-내어드리라....누군가가 대표로 기도할 그때에도..그대안의 그리스도께서 친히 그 사람을 받으시는바임을 인정하라, 절대긍정으로!!, 그대안에 계시는 주께서 함께 기도하시게 하라..)) 오직 그대는...전적으로 마치 바싹 마른 스폰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듣고 기도하기를 연습하라.!!!...이땅 걷는 모든 택자 "샤레츠" 하나하나마다 다 지금, 만들어져가고 있는 존재임을 명심하라....어느시점에 이르러서 보좌에 계신 주님의 [참된 변화=참생명, 참빛 그 정도를] 측량하심이 반드시 있게 됨을 명심하라.....부족함 느낄 그때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적용하라.....십자가는 둠밈-곧 완성이기때문이다.= 붙붙는 화염검, 그 날선검이 영 아인, 삿된 것마다 남김없이 하나하나 날카롭게 찌르며 잘라내 버리시며 즐거움의 기름부음으로 보호해주시리라. ..지금 그대 앞에 있는이가, 영안에 있지 아니함을 = 평강 없고 막막한 가운데 처해 있음을 느끼는 그순간..그대는 "주여, 주님의 십자가를 적용합니다...긍휼을 구합니다....기름부음으로 임하사 "저와 이 사람을 보호하소서...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그대로 적용합니다"라 말씀드릴 그때, 우리는 바로 그때 신성과 참인성에로 전환됨을, 그렇게 여겨주심을 믿으라...바로 우리의 영과 주님의 그영이 하나되어 사귐-동행-동거-동주에 이르기까지 호흡-보조 맟춰  함께 거닐게 되는바 에덴을 누리게 됨이라..***우림[=Q의 영을 따라 삶, 그 자체라..곧 빛의 시작 = Q의 영을 따라 삶, 알렙-바브(상)-레이시....알렙에서 쉰(우)까지]과 둠밈[타브]에까지(알렙~타브) 완전히 적용되어 온전케 된 그 상태야말로...참된 의미의 "슈브"의 완성임에 주의하라....오직 십자가 적용함을 배우고, 연습하여 그 실제 이루라..

....오직!!. 기억하고 명심할바, "샤마/셰마/쉐마(이스라엘)..שָׁמַע<쉰(우)-멤-아인>"는 "마라.<멤-레이시>...진리의 영, 그 얼마나 달콤한지...그러나, 그 참 정체를 모르는 자에게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악취로 느껴지듯이...처음엔 쓰게 느껴진다"의 십자가 체득 새김!!  곧, 인생 그 자체가 고통스럽고 쓰디쓴 맛 나는 고난-어려움-곤핍의 문제들 직면함으로써만 영으로 돌이킴, 곧 십자가를 바라보며 주 이름 부름으로써 처리받고 다시 늘 새로우신 분, 그대의 하늘이신 주님 자신을 새로이 공급받아야(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정의해 주신바, 온전/완전이 무엇인지 그 실제를 이루시는, 부활생명의 그영에 대한 생생한 산 경험, 곧 빛과 십자가 처리로 부활생명의 영으로 전존재가 새롭게 됨의 체득이니, 우림(אורים)과 둠밈(תומים), 적용이다) 주 임재 안으로 들어감, 곧 주 앞에 설 수 있음을  절실하게 깨닫고 전적으로 항복함 통해[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라고 고백함으로써..날마다 매순간마다 "하다쉬חָדָשׁ"("내가 너를 새롭게 하노라")!! 말씀하시는 하나님, 곧 보좌로 승천하신 부활생명의 주님 말씀으로 살게 하고 계심이다...주님이 구하는 자마다에게 베풀어 주시는 "새 마음-새 영(겔36장24-32)은, 중생성도가 주님을 직접 뵐 그때까지 혼의 구출, 구원을 가져오는바, 믿음의 어느단계에 있든지 [연한 풀(데셰)--씨 가진 채소(에셰브-페리)-열매맺는 과목(에츠-페리)] 무관하게 매일-매순간을 주께 합당한, 주님 기뻐하시는 예배라, 진정한 의미의 [바_욤 = 그리스도께서 친히 살아가심!!]의 삶, 데바림[주께서 주신바, 전존재로 체득한 그 말씀을 마음판에 새겨주심]을 살기 원하는 바라...영원한 생명, 곧 영생은, Q과 그의 보내신자 JC를 앎이기 때문이라.. 

...@예레드<요드-레이시-달렛>=....@야레드=강림하다<יָרֶד...요드-레이시-달렛>::"베레시트-전지전능의 창조주 Q보시기에!! 당신이 친히 낳으신바 사랑하는 자녀, "샤레츠"로서의 사람에게 지고지선의 진복" 그대로 이루시려 함인바, 실제의 그영 Q께서 Q 말씀으로 중생성도의 마음을 적셔 점차적으로 침투-점유-충만 이뤄나가고 계심을 의미..==>그 완성이 바로 정복[카바쉬..카프-베이트-쉰(우)]-다스림[우레두]인데, @우레두<바브(중)-레이시-달렛-바브(중)>..동심합치, 곧 (가시적-비가시적 영역, 무의식-잠재의식까지 하나도 예외없이) 존재와 관련된 모든 차원-영역에서 그 참된 일치의 생생한 하나, 상호거함 이루심..

...진정한 의미에서 영으로 돌이킨이스라엘이란 (יִשְׂרָאֵל<요드-신(좌)-레이시_알렙-라멛>.."[구원-영생의 지고지선]은혜/선물, JC를 구주-Q로 받고 상호거함 이루어 결합-연합-상호교통의, 동심합치로 사는바, Q의 참제자됨) 이니..성경 속의 #하다쉬-<.חָדָשׁ...헤이트-달렛-쉰(우)...새로운, 새롭게 하다>...#하다시=새 일..이것은 새로운 선물/은혜<-חד"ש>  [하나님의 "하다쉬"로서, "하다시" 이룸으로 살아가신 그분이 바로 JC !!, 그러므로 CJ의 영, 부활생명의, 실제의 그영이 내주하시는 중생성도마다 붙들어야 하는 것은...바로 이 사실을!! 주님 주신바 참 믿음으로 붙들라 하심이니.. 이는 곧 슈브-라파의 실제적/구체적 적용 발현됨 알게 하심이라, 오직 살아계신 CJ의 영과 붙좇는 하나로서, 갱생/부활/회복-발아/산출/확장/증대의 새로운 삶 영위케 하심인것을 ...

===

**김멜<김멜-멤-라멛>=성령=루하<레이시-바브(중)-헤이트> 하_카도쉬<헤이_코프-달렛-쉰(우)> (너그러운 부자시요, 높여지신 Q[가아<김멜-알렙-헤이>-성령Q으로 사는 실존], 곧 메시아[멤-쉰(우)-요드-헤이트...진리로 기름부음 받은자, 곧 부활생명의 영, 그 현존]-참생명 Q 그분을 (높여 받들어 섬겨드림.) 그의 등에 태워 일어나 목표지점에까지 운반-전달하는 섬김이(낙타처럼)  **간=동산<김멜-눈>= 생명 고양-확장-증대-산출 장소.. *가말=(너그러이)선물/은혜(자선)베풀다/후원하다-->갚다/보상하다<김멜-멤-라멛> *가바=일어나다/솟구치다<김멜-베이트-헤이> *깁보르=강한-능한/위대한//가보르=강하고-능하고-위대하게 만들다<김멜-베이트-바브(상)-레이시>....[무적의 강한 용사이신 여호와= 엘 깁보르]

----주께 돌이켜 결합한 하나로 살아가는자마다, 진정한 의미의 부요함((만물의 창조자, 머리/으뜸-반석이신분, 너그러우신 주님의 모든 풍성-부요-충만 공급 열어주사 후히 누리게 하심 + 영생수의 샘 원천이신분이 친히 넘침 근원되심으로, 구별/분별/성별된 당신의 몫 삼으심---그러므로 주께 귀의함, 그 근본동기가 중요!!---

[아담의 코에 생기룰 불어넣으심]......'헤이(ה)'의 상형문자 모양-손을 위로 든 사람.+ '뛰는 사람'.  ...(구성은 달렛+요드)..이것은 근본적으로 '계시' 또는 '보라!'란 의미 --하나님이 알려주신 새로운 이해를 받고 흥분되어 뛰는 것--하나님 아버지가 찬양 받기 합당하시단 것을 알고 손들고 예배하고 경배하는 모습... '헤이(ה)'는 '하나님의 숨/기운', '계시'와 '빛'..빛은 무언가를 밝히기 때문에 '계시'라 할수 있는데, 창조의 첫 날에 '빛'이란 단어는 다섯 번 쓰여지고  이것이 '헤이(ה)'와 일치한다(창세기 1:3-4).  '헤이(ה)'의 숫자값이 '5' 이므로 손의 다섯 손가락와 오감과 오차원과 부합함.. 영적으로 혼의 다섯 단계와 일치. 

((영적 측면에서 본, <주께 귀의함 =헤이/헤이트=>  혼의 5단계)) **네페쉬=본능.INSTINCT<눈-페이-쉰(우)> : 네페쉬-하야<헤이-요드-헤이, (현재-지금 호흡해내신 말씀 적용/누림"아멘") 헤이트-요드-헤이,  -->**루하=감성EMOTION<레이시-바브(중)-헤이트>-->**네샤마=마음/정신/지성MIND<눈-쉰(우)-멤-헤이> : 네샤마-하임 (실존-Q 거처)-->**하야<헤이트-요드-헤이> =부활생명의 그영, 그 기름부음께서 새롭게 하사 새일 이루심 =하다쉬:: 소생/부활/치유/치료/회복/부흥..살아-일어나다(생명충만넘침의 그 실존 --초월성과의 연결고리)--> **예히다=의지,ONENESS<요드-헤이트-요드_달렛...일체/일치됨/붙좇는 하나> :: 레_히_체타아르(체휼, 배우는바..그 십자가 두 방면 적용))) 

==

1.**지고지선의 진복이로다...길/진리-불/빛-영/생명 그 자체, 곧 Q말씀(기름부음이신 Q, 그분의 모든 것 담아 호흡해내신바 그 기름부음-생기가 담겨있음이라)을 그대로 받아 (그대로 그영과 하나되어) 사는 바로 그 사람이여.. -엘로힘-샤마임-아레츠, 곧 Q께서 창조하신바(바라, 베이트-레이시-알렙)-만드신바(아싸..아인-신(좌))-지으신바(예체르, 요드-제데-레이시) 나타난, 바로 그 Q-사람이라!! 

...친히 목양하심으로써 그분의 판박이 참제자 만드시는 Q이시니.... 소망-교통하시며 바로 Q-참인성의 사람을 살아가는 실존, 그 참사람을 만드심이라, 친히 말씀 호흡해내심으로 산출-목양된 참제자를 만드사 동행하는 하나, 그분의 현존 나타나게 하시나니...'베레시트" 그대로 이루심인바 생명나무와 결합-연합-상호교통으로 사는바 (실제의) 그영의 기름부음으로 산출된 그대로 사는 생명가지요, 그영을 머리삼고 채움받아 사는자,  그분의 거처 삼으신 생명가지, 바로 그대로 산출하시도다..

... 동심합치로 말씀안에 거하는바, 말씀의 그영과 결힙한 하나(그영-막힘없는 상호교통의, 으뜸/머리시요 생명 원천되심이라, 구별-분별-성별하시는 분)인 그 현존 이루나니, 곧 부활생명의 영, 그 넘쳐흐름이 그에게 도달한바 참지혜이신 Q의 거처 나타남이라...

...Q 임재 안에-동시에 그 앞에 서 있는 (진리의 증인이요, 그 안에 진리의 기름부음의 참생명-인격께서 거함된바) 기둥이요, 목양하심으로써 동심합치로 동행-동거-동주하는바 그분의 그릇이니, 그분께서 기릅부으신바 모든 것이 그 안에 거함이라 바로 그분께서 그안에 살아계시도다..

-----

2. 진복자 됨이란... Q의 그릇/거처/담지자, 곧 말씀과 하나됨 안에 거함으로써, "베레시트-Q의 창조하신 뜻"그대로 온전케 되고 온전히 이룸 됨이라, 곧 Q의 참생명-인격에로 변화/대치되게 하시는바 , 그영께서 그 과정을 주도하사 온전히 되게 하며 이뤄지게 하심이니..., 말씀이신 그분은 바로 여호와시라 그분 자신, 곧 부활생명의 그영을 열어 부어주시는바 , 곧 그분과 결합-연합한 하나로서 참생명-관계적인격을 기꺼이(기쁨으로 자원하여 껴안고 그 자체로) 능히 살 수 있게 하시는바, (동심합치로, 기꺼이 자신을 맡겨드리는 자마다에게 )말씀안에 거하시는 그영 그대로 살아가는자 됨 이루시도다...그는  여호와께서 호흡해내신바 그 말씀안의 그영(성령)을 들이마심으로 ("하가<헤이_김멜-헤이>...Q 말씀을, 말씀 열어주시는 주님을 앙망-바라보며 깨닫게 하시는바를 고백하며 그 말씀을 아뢰고 기도하며 암송함으로써 마음에 새겨지기까지 읊조리는바, 노래!!가 되신 그분의 노래가 되어) 사는자라.. 말씀이신 여호와(참생명-인격을 공급하심)의 진리, 그 거처 됨. 곧 [그분의 진리 말씀으로 적셔진바]영과 혼이 진정한 하나됨 이룬 샤레츠로서, 오직 그분만 나타내는바, 그분을 참되게 배워 살아가도다

---

3.호흡해내시며 행하시는 분의 실제  곧 (동심합치의 참 믿음 발휘하여 겸손히 자신을 열어-비워-내어드림으로써 맡겨드리는 제자마다) 친히 빚어 다루시고 기름 부어 적심/점유/충만-운행/선순환/변화/대치됨 온전히 이루시고 당신으로 채우신바 참생명나무의 어떠함 온전히 이루시나니.. 분배말씀, 곧 자신을 열어주사 목양/양육해내신바 성령을, 곧 말씀 진리(하_마임)를 사는자 됨이라, 지고지선의 진복이로다.. 그 맺게 하신바 열매란 바로 그영, 말씀이신 여호와라...."베레시트"의 완결, 그 생생한 확장이니, 발아된 가지마다 "베레시트"그대로 참생명-인격 넘치며, 동심합치로 친히 이루신바 분배말씀의 실존됨이라....그분은 목양하시는 Q이시로다, 말씀 사역하심으로 Q의 참생명-인격으로 대치된바 말씀의 제자 만드시나니 바로 그 제자 만드시도다. 진복이로다, 친히 사역하심으로 산출-발아하시고 기름부으신 바 그대로 육화 온전히 이룬 실존 만드심이라.. 친히 사역하여 산출하사 결합-연합-교통함으로 살게 하신바 그 제자는 (참된 의미의 형통함  , 그 지고지선을 누리는바) 부활생명의 영으로 살아가기 때문이로다.

----

4.공급말씀으로 목양하시는 Q, 그분께서 친히 호흡해 내심으로써 조성-확장하여 세우심이라 그영의 형상 부으심으로 산출하신바 그 생명나무가지를, 그분의 거처 삼으심이라.... 곧 하나님의 거처요, 조성하신바 생명나무임이라 ...진복이로다 ....친히 온전케하신바, 그분자신을 열어 부어주사 막힘없는 상호교통-결합-연합-공급하심으로 분별/구별된바, 동심합치로 성령을 붙좇아 하나됨을 사는 존재, 그 확장됨 이루시도다.. 

----

5.분배말씀으로 산출-발아-양육해내신바 참제자마다, 곧 친히 조성하여 세우신바 그분의 확장이니, 공급말씀으로 목양/양육하심으로써 참제자 만드시는 Q, (말씀 수용/적용-새로이 조성/변화 이루시려는) 그분의 소망-교통하심 그대로 기꺼이 껴안아 감수하는바 머리/으뜸이신 기름부음이신 그영, 그분의 형상 부으심으로 산출-발아된 자요, 그분의 거처됨이라 "베레시트" 그대로 실제의 그영을 머리삼은바 그분자신을 열어주사 말하게 하심따라 부활생명의 그영으로 살아가나니, 사람에게 찾아와 도달하신, 부활생명의 넘쳐흐름인바 참지혜 Q. 그분의 거처됨이요, 바로 그분을 투명하게 나타내도다. 시종일관 "베레시트" 그대로 살아낸바 참된 증인이니, 곧 그분과 참생명의 결합-연합-상호교통으로 구별된 하나라... Q의 소망-교통하심 그대로 기꺼이 다 받아들여 사는자요, 그분의 거처로서, (주 보시기에) 진정한 의로움 그대로 살아가도다..

--

@@@야다- 알다, 이해하다

....야다(동사)는 기본어근이며, '(경험-깨달아)알다 know, 이해하다(그것을 그 의미대로 참되게 반응하며 살아내다) understand'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944회 나오며, 모든 어간에서 사물이나 사람 또는 상황등을 감각 기관으로 얻은 약간씩 차이 나는 여러 가지 지식을 나타낸다. 

이미 알려진 것은 감각으로 나타나야 하며 그 자체는 그렇게 알려지게 되어있다. 그래서 우리는 듣는 것(듣다)과 보는 것(보다)에 관한 동사가 아는 것에 관한 동사와 병행되어 나오는 것을 보게 된다(예: 출 16:6 이하, 신 33:9, 삼상 14:38, 사 41:20). 

야다는 인간(창 18:19, 신 34:10)과 그의 길(사 48:8, 시 1:6, 시 37:18)에 대한 하나님의 지식에 사용되었으며, 여기에서 지식은 심지어 탄생 이전에 시작된다(렘 1:5). 하나님은 또한 들새도 아신다(시 50:11).

야다는 또한 인간의 지식과 짐승의 지식에도 사용되었다(시 1:3).

.....야다는 구약성경에서 다음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a) 야다는 '알아채다, 인지하다, 경험하다, 관찰하다'를 의미한다(예: 창 3:7, 창 41:31, 삿 16:20, 전 8:5, 사 47:8, 호 5:3).

(b) 야다는 '구별하다' distinguish를 의미한다. 

'선악을 아는 것'(창 3:5, 창 3:22)은 하나님께 불순종한 결과이다. 좋고 흉한 것을 구별하는 것은 필요하다(삼상 19:36). 

어린 아이는 왼손과 오른손을 구별하지 못하며(욘 4:11) 또 선과 악도 구별하지 못한다(사 7:15). 후자의 구절의 문맥과 사 8:4에 나오는 이와 비슷한 언명은 이 언급이, 어린 아이는 유익한 것과 해로운 것을 구별할 줄 모른다는 것에 관한 것이라는 점을 시사해 주는 것 같다.좋고 흉한 것, 좌우와 같은 것에 대해 관찰하는 것은 결국 그것들을 구별하는 것이 된다.

(c) 야다는 '배워서 알다' know by learning라는 의미를 지닌다(잠 30:3).

(d) 이 분사는 사냥(창 25:27), 학문(사 29:11-13), 애곡(암 5:16), 바다를 항해하는 일(대하 8:18), 그리고 악기를 연주하는 일(삼상 16:16)에 [도구 사용에] 능함을 묘사하는 어구에 나온다.

(e) 야다는 어떤 사람을 '아는 것'을 표현한다. 

어떤 사람을 아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었다(창 29:5, 출 1:8, 삼하 3:25). 푸알 분사형은 '친척'(왕하 10:11 등)과 '아는 사람'(욥 19:14, 룻 2:1 등)을 지칭한다.

(f) 야다는 '관계하다, 관심을 가지다'(시 1:6, 시 37:18, 시 119:79), '~와 관계를 맺고 싶다'(예: 신 33:9). 

신학적인 문맥에서 자주 이 단어가 적절한 지식을 얻지 못해서 결국 관심의 결여를 초래하고 마는 것에 대한 문제로 나온다(예: 렘 8:7, 시 95:10).

(g) 야다는 '성적 관계를 가지다'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를 알았다"고 하는 유명한 완곡 어법과 그 병행구들(창 4:1, 창 19:8, 민31:17, 민 31:35, 삿 11:39, 삿 21:11, 왕상 1:4, 삼상 1:19)에서 남녀 쌍방의 성적인 관계를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이 단어는 남색(창 19:5, 삿19:22)이나 강간(삿 19:25)과 같은 성적 도착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h) 야다는 '다른 사람과 인격적이며 친숙한 관계를 맺다'를 의미한다. 

하나님은 이름으로, 대면하여 모세를 아신다(출 33:17, 신 34:10). 하나님께서 어떤 개인이나(렘 1:5) 어떤 민족을(암 3:2) 아실 때 하나님께서 그를 선정하시거나 선택하신다(참조: 민 16:5 70인역본). 

선택으로 이해되는 이 지식은 은혜롭고 자애로운 것이지만 이것은 인격적인 응답을 요구한다.

(i) 야다는 일반적인 문제에 대한 지식 외에도, 다른 신들을 아는 것이든(신 13:3, 신 13:7, 신 13:14) 여호와를 아는 것이든(삼상 2:12, 삼상 3:7) 간에, 신에 대한 인간의 관계에 대해 사용되었다. 

이방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며(렘 10:25) 선지자들에 의하면, 이스라엘도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렘4:22). 

애굽의 재앙은 여호와가 하나님이심을 애굽인들이 알도록 하기 위해 보내졌다(출 10:2 등). 

그는 그가 하나님이심을 이스라엘인들이 알도록 하기 위해(사 60:16) 그들을 파멸시키시고(겔 6:7) 회복시키실 것이다. 

특히 선지자 에스겔은 위협할 때,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는 어구를 사용한다(겔 6:7, 겔 6:10, 겔 6:13, 겔 6:14, 겔 7:4, 겔 7:9, 겔 7:27 등).

(j) 요약하면 희랍인들이 초연한 지식을 갖고 있으며 또한 사물의 형이상학적 본질에 사변적인 관심을 갖고 있었는데 반해, 구약성경은 지식을 끊임없이 인격적인 만남에서 생겨나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구약성경이 하나님과 창조에 관해서 언급한 것을 보고서, 우리가 이 언급들을 존재론적 추론으로 여겨서는 안되고 하나님의 계시에 응답하는 믿음의 선포로 간주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역사적 과거와 약속된 미래 즉 하나님의 피조물들이 존재하고 있는 이 지상의 영역 속에서의 하나님의 계시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끊임없이 과거와 현재와 미래 속에서의 하나님의 계시를 찾았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예배와 행동 가운데서 하나님의 목적과 요구를 식별할 수 있었던 것이다.(참조: E. D. Schmitz; Bultmann).


***하나님의 주시는 복***은혜의 성령 누림의 복  = 마카리오스(=JC의 짝 된 이가, 그분의 증거자로서 누리는, 증거궤 반쪽으로서의 복) 안에 다 들어 있음

--->야타브 : 만복 근원 주 하나님 주심의 모든 은혜(God's Reward At Christ' Excess)...야타브<야타브(동사)는 기본어근이며, '선하다, 좋다, 유쾌하다, 즐겁다, 잘하다'를 의미>.. (토브..지고지선의 진복) 선하다, 좋다, 기쁘다, 바르게(잘) 행하다 ::: [신4:40..오늘 내가 네게 명령하는 여호와의 규례와 명령을 지키라 너와 네 후손이 복을 받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한 없이 오래 살리라] 

--->베라카 : 무릎 꿇고 예배/경배함 안에서 베풀어 주시는 축복/축도(Q생명 공급).....바라크 ..(바라크) 무릎을 꿇다, 축복하다, 복을 주다, 찬양하다

--->에쉐르(지복직관) : Q을 친밀히<참되게> 알고 사랑하며 섬기며 그분의 나라까지 인도하시는, 주님 누림의 복.....아쉬레 ...(에셰르) 행복, 복, 지복 에셰르(명남) 또는 아샤르(rv;a; )는 아샤르(rv'a;)에서 유래했으며, '행복 happiness, 복 blessedness, 지복 bliss'을 의미 ...스스로 있는 자(I AM WHO I AM) = 예흐야 에쉐르 예흐예, 야웨 아쉐르 야웨 = 여호와, YHWH..즉 하나님 바로 그분을 참되게 친밀하게 알고 사랑하며 섬김의 복

--->헬레크 : 주님의 기업(소유)된 자마다, 한 걸음씩 주와 동행함의, 주님 길로 동행함으로써 주님을 자기 몫으로 누림의 복...할라크)...분정하다/나누어주다


##[[영혼, 마음]] 

....흙으로 사람(외부인간, 몸)을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HS)를 불어 넣으심으로써 산혼(Living soul)이 됨.

....이것이 영혼(영이 있는  자아..영적 자아...참생명이신 HS을 호흡하는 자아를 영의 참자아라 할 수 있음)

....하나님의 모상을 따라  (하나님이 지으신 바) 지어진  마음을 속사람(내부인간)이라 함.

....마음 = 심령 + 자아..추구하는 패러다임따라 육적 옛자아, 영의 참자아(새자아)로 구분 가능.

....심령(영..spirit..중심에 HS좌정) heart  + 혼적 자아(soul)기능의 역할부분으로서는  정신mind(지성-감성-느낌/욕동, 일반적인 의미의 마음), 이해력understanding(일반적 의미에서의 생각 : 지식-기억-사고통합-추론-논리/상상/학습 : 사려분별/판단....생각자리에 말씀안의 보혈-성령, 곧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추구함으로 가득할 때 그렇게 거룩한 변화를 이루게 될 것), 의지 will로 구분하는 경향.

....말씀-보혈-HS, (JC보혈은 지성소, 곧 말씀과 성령 능력 누림을 가능케 하셨음.

....기독자의 마음은 곧 아들을 사랑하신 아버지의 사랑으로 인침-봉인 받고, 아버지와 아드님의 사랑으로 채움받고 변화됨으로써  (주 이름 불러 의지하며 따르며) 살 때 YHWH의 어떠하심의 패러다임이 저절로 자연스레 구현됨., 

#CORAM-CUM DEO, SOLA FIDE-SOLA SCRIPTURA(HS)-SOLI DEO GLORIA

#언행심사, 마음의 근본동기 [오직 사랑과 생명의 HS주도따름 ) : 주바라기/주이름부름.. 경청-순종-동행, 말씀으로 찬양/기도함, 합일-교통-거함(누림-맛봄-교통) : 감격감동감화충만변화빼어닮음-감사송축영광빼어닮음 =Q께 합당함 =경외함.경계함의 계명 저절로 이루도록.(선줄로 아는자 넘어질까 조심하라)

#[[중생한/거듭난 참자아의 패러다임=여호와의 어떠하심(자비, 은혜, 오래참음/사유-온유/친절/겸손, 인자, 진실, 긍휼/성숙훈련-보수)의 패러다임따라, 주님의 열정적 사랑과 기쁨으로 채움받아 동행하는 연인/신부로 살기]]

[말씀에 비추어 돌아보며 주로 주되시게 함]심령의 가난함-애통-온유함-의에 주리고 목마름 = 인자하신 주님 충만의 그릇==>긍휼히 여김[온유, 친절, 겸손, 드나베누 ]/말씀-HS-보혈의 씻김 능력 의지[마음의 청결함]  ==>화평, 화목의 대사 [복음을 살며 전도-가르침-중보] ==> JC말씀 살며 누리며 공급하기[오직 그리스도의 평강!!]


**선지자-제사장-왕의 기름부음으로 살아가신 JC는 먼저 [Q말씀으로 복음전파-가르침-고치심의]선지자의 직무를 마치신 후 [자신을 대속제물로 드리심의] 제사장의 직무를 완성하신 다음, [부활승천하사] 왕의 직무로 들어가신다!! ****


@@하나님아들 구주 JC의 목숨까지 내놓아 대속할 정도로  극도로 전적으로 타락한 죄성, 옛사람의 습관과 경향을 가지고 있는 태생적으로 육을 따르는 극악무도한 교만한 죄인임을 기억하며 스스로 미워합니다.. [주앞에 서기까지는 결코 "되었다" 함이 없는 인생!!] 오직 영으로 민감하게 깨어 있어서 나와 하나되어 내주하시는 그리스도의 HS따름없이는 모든 언행심사와 선택하는 것 자체가 자긍하며 교만하며 무례하며 제멋대로 혈기방장한 사탄-마귀의 길이요, 전적인 허탄함-무가치-무의미-사망일 수 밖에 없음을 인정하오니, 아드님을 사랑하신 아버지의 절절한 그 사랑으로 인쳐지고 충만케 됨, 하나님의 자비/긍휼-은혜-평강으로 적셔지고 점유되고 충만케 되며 변화되고 새겨짐 이루시는 합일의 길 따르도록 겸비함=심령의 가난함과 죄를 자각하고 애통함으로 참되게 회개함을 늘 불러 일으켜 주소서!!


@@[오늘, 매순간, 모든 만남에서]

내맘, 내눈과 귀를 열어주소서, 앙망하오니, 주여

나아온 이들 위해 무엇을 주시리이까, 지고지선의 진복, 오직 주님자신! 복음진리생명말씀!

구하오니 성령이시여, 오늘 매순간마다 일깨워 영혼몸 늘 새로이 채우소서 

주님마음, 오직 사랑의 감동, 충만한 기쁨, 합치되어 하나된 주님평강, 바로 그 말씀 JC!

나아오는 사람마다 눈 들어 바라볼 때 모든 몸짓마다 친히 만나주소서, 감싸 주소서  

새롭게 JC를 발견하고 믿어 영접함과 전적으로 의지함, 그 구원과 동행함안으로 이끄소서 @@


@@점흠티주름 하나 없는 양심의 영적거울(하나님의 어떠하심, 하나님의 모든 말씀으로 조성되고 새겨진)에 자신을 비추어보아 회개함 = 손과 발을 씻음 

....사랑받기에  합당하신 분, 하나님께  믿음으로 나아가, 직관적 영적 민감성 (맑고 밝고 가볍고 명료함, 고요하고 안정됨,  늘 새롭고 기이하고 놀라운  황홀하고 매혹적인  안아주심 안의 부드럽고 달콤상냥 다정다감, 흐뭇하고 기쁘며 사랑스러움, 그 평안) 따라 교통하며 섬김-거함-누림-맛봄-감격-감사-경배함


@@허물[말씀안의 생명과 성령, 사랑의 뜻을 벗어나 자행자제-치우침]--.죄[말씀안의 주뜻에부합하지 못함 = 말씀안의 참생명과 성령 순종-연합-누림 없음]--악[주님의 말씀을 거부/거절하기에 말씀이 없음]@@


@@***마음 [레브, 레바브...내부인간/속사람  =  정신(이성 = nous ...의식 영역, 때로 무의식 영역에 이르는 영(spirit),  느낌을 포함한 정서/감정(affection)...때로 이해력understanding을 따로 구분하여 nous에 포함시키기도 함), 마음(mind...지성/생각과 이해력 ), 의지(will....선택의지, 일편단심/일심의 지향성울 결정하는 바 심지..패러다임을 선택)]  

.... 영혼의  생각과 의지의 좌소이면서 동시에  그릇. :: 자아, 곧  본질적 사람이라 할 수 있음 

.... 마음의  문과 문지기(선택의지...늘 새로이 깨어나야 함) 가  있음 : 3가지 기능[분별-지향(패러다임 선택/방향성을  결정)-생각 자리  :: 일편단심/일심이 그 특징]의 상호 순환/시너지로 행함  

.... 손상 입은, 부서지고 깨뜨려져 산산조각 난 마음은 트라우마의 기억으로 인해 움츠러 들고 방어적이 되는 바, 냉소적 우울과 좌절, 거절이 큰 특징임  (이것은  모든 인생을 열납하시는 영존하시는 Q에 대한   절대긍정/절대 믿음/절대기쁨의  생명말씀   신뢰 통한  해석과 치유가   없이는  수복 불가능함  

.... 부서지고 손상된 그대로  방치할 때에, 마귀사탄이 조성하고 부추기는 [Q에 대한 오해와 착각의 쓴뿌리]가 그 틈으로 들어와서 꼬드겨, 비방-참소-조롱-미혹-분열-대적하는 마귀사탄은 쓴뿌리를 전존재에 뿌리내리게 하여 더 확대하며, 혼란과 상처를 더 부추겨서 좌절-우울-정신병-귀신들림 등을 야기 함으로써 [거절감-부족감-고립감-수치감-두려움-분노원망원한] +육신의정욕/안목의 정욕/이생의 자랑 + 식성수물명(5욕)을 극대화 하여 그 혼을 사로잡고 영을 쪼그라들게 하며, 곧 저주와 사망으로 끌어들임.

.... 마음은 속사람/내부인간으로서  상호간에 긴밀함 이루며 작동되는 정신(nous) - 마음/이해력- 의지로 그 기능을 생각할 수 있음.....좀 더 세밀히 보자면  영에서는, 직관양심교통 +  혼에서는  지성감성의지로  구분해 볼 수 있으며,   내주하시는 JC의 HS과 하나됨으로 인한 Q의 모든 선하심-인자하심-진실하심 그대로 받아 누림으로써 사랑희락화평으로 가득하고 그 사랑으로 반응하며 그 사랑을 공급할 때 성숙의 온전함 이룸 ...I'm Nothing in myself, I'm everything in Christ!!

@@@***영혼(네페쉬 = 생명, 호흡 ...HS과 하나되어 HS의 생기로 호흡하는  영적 사람이 진정한 의미에서 사람임)   :  마음의 생각과 심지에 따라 봉인되어 자라가는  바, 사람됨의  그 어떠함의 성숙과  그 표현이라 할 수 있을 것 :::  성령으로 호흡하는  생령(living being)이 곧바로  산혼(living soul)임


@@##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의 덕성 3C 연습-실행하기 : conformity(친밀-동거-동조)-communion(친교-성찬-동참)--complacency(JC살기-일치누림복락)

@@그리스도교 //말씀(JC...어떠하심..법.양식 --아버지의 나라..Q말씀은 반드시 응함...그 진복에의 참여.누림 여부는 오직 순종에 달려 있음)..계시(reveal : 베일을 벗기다)..종교(근본과 으뜸되는 가르침...[Q의 유일무이한 절대진리=참종교]와 [상대적 가짜진리, 일리, 거짓된 모조품]를 혼동말라!!)


**[[누가 여호와 하나님과 같으랴!! ..여호와, 성도와 친히 관계 맺으시는 분, 창조주하나님은 믿는, 절대긍정-절대신뢰-절대기쁨으로 하나됨을 사는 내게 절대 만족-절대진리-절대진복이요 영생이심 ]] 

^^피상적인 허망한 색성향미촉의 오감 중독/상대적 일시적 만족감을 초월한 근원적 절대만족(무한 풍성-부요-충만-능력) * 열납하시며 열어주사 누리게 하시는 바 절대기쁨/절대긍정/절대신뢰의 유일무이한 초월적 근원적 진리 샘(길-진리-생명) * 지고지선의 진복=요동없는 초월적 절대 평강의 하나됨/거함/누림/의지-빼어닮음/행복

**세상에 있는 모든 것, 일시적/파괴적/자멸의 허망함으로 귀결됨  ::: 참소/시험/미혹하는 원수 마귀-훼방/방해/핍박/박해하는 대적자 사탄 ::: Q을 오해-착각-불신/배역함의 미혹 도구로 세상의 것을 도용 := 족함 없음..부분타우불/거부고수두분 야기..배역하게 함..육신의 정욕(방탕_무절제)-안목의 정욕(탐욕)-이생의 자랑(허영) = 5욕(식성수물명) + 5감(색성향미촉)만족중독되게 함 << Q 말씀안에는 원하는 바, 이 모든 것에 대한 근원적 만족-기쁨-누림의 무한 풍성충만-영원한 공급, 더 나아가 늘 이김의 능력과 영생이 Q말씀안에 있음


*1.복(에셰르/아샤르...Q알고 경외함의 영생진복.....이것은 모든 인생에 주시는 이땅에서의 일시적 분복(헬레크)와는 다름...오직, JC를 믿고 영접함으로써 내주하시는 HS통해 따름으로 Q을 친밀히 알고 경외함으로 누리는, 그리스도와 Q이 친히 내안에 사시는, Q을 참되게 알고 경외하고 사랑하며 친밀히 섬김-누림-동행함의 진복...전지전능의 창조주하나님의 카보드[얼굴=Q의 모든충만의 어떠하심, 성품, 역사적 이름들, 그 실제와 현존..(기록된+즉각적인)말씀은 그분의 나타내신 바 얼굴의 실제(기록된 말씀)와 현존의 광채(즉각적 말씀)..HS안에서 기록된 말씀 묵상하며 여쭐 때 그안의 영광의 신비/비밀 드러내심]를 보며, 하나님을 생생하게 지속적으로 누리며, ((그분의 모든 영광의 풍성-부요-충만(바라크)를 바라크(경배/송축의 예배)통해 누리는 자[베라카..복의 근원)), 오직 하나님으로(하나님안에-안김/한영됨/교통함/알아드림, 하나님과 함께-동행동주동거, 하나님의-모든영광누림/맛봄/음미/감상/감사예배, 하나님에 의해-인도됨, 하나님으로부터-보내심, 하나님 향해-회개/화목/회복, 하나님을-임재영광/셰키나 드러냄/모든은혜공급통로됨)사는 인생의 지복직관 누림) 있는 사람은 악인들(라샤.....주관적<객관적인 죄-악-불법>의 사악한/범죄한 자...그 특성은 시50-16~23을 참고)의 꾀(에차...조언/충고/도모/모략...악인의 꾀는 모든 탐욕과 정욕의 발로인데, 세상 가치따름인 육신의정욕-안목의 정욕-이생의 자랑으로서 이는 우상숭배!!)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하타...지고지선최우선인 하나님과 그 말씀을 거역/거절/반역/멀리하고 떠난 자)의 길(데레크...선택적 의지따른 태도/방식/행위)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루츠..[하나님과 그 말씀을]경멸하다) 자들의 자리(모샤브...자리/회합/참여/거주)에 앉지 아니하고

*2.오직 여호와의 율법(토라...율법/지시/가르침/훈계, 계명과 율례, 법령...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곧 그리스도)을 즐거워하여(헤페츠...전존재 열어 환영/영접함+ 기쁨과 즐거움 : 거함-누림-맛봄음미감상찬탄감격-감사예배.앙망감동감화충만-빼어닮음, 곧 생명살이 위한 진찬/양식 삼음 : 하페츠[동])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하가...암송하고 반추/묵상/명상/숙고/깊이 생각하다, 신음/슬퍼/회개하다, 속삭이다/중얼거리다/으르렁거리다.... 그 결과는 하나님생명/조에 누림/맛봄-소화-체득-참여...그분의 어떠함으로 조성/변화되어감)

*3.그는 시냇가에(주님은 생명시내-믿는이는 생명시내원천까지 뿌리를 뻗고 박혀 공급받아 생명의 진액삼는 그 나무..영원한 반석 하나님을 신뢰함/믿음의 견고한 심지 뿌리내림-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심..사26)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친히 주님나라, 곧 성도와 교회의 모든 일 하나하나까지 세심하게 주관-감찰-돌보고 인도하시는 주권자 Q의 시간표/그리스도의 재림의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감추어 두신 바요, 또한 선하신 섭리 성취의 때와 기한이 반드시 있음...깨어 그안에 거함의 동행을 연습실행하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찰라흐...모든 순경과 역경/고난/환난고통을 참고 견뎌내어 이겨냄 통해 잘 배워 익혀 그리스도를 빼어닮음에 이르기까지 Q생명+모든은혜가 성장성숙/전진/발전/번영/번성하며 Q과 그리스도를 공급하게 하심)

*4.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5.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미슈파트...영원한 주님의 말씀[공의, 법령]따라 시행되는 공의, 법령, 심판, 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찻디크....의로운/올바른/공정한, 공의로운...JC를 믿음으로써 내주하시는 모든 은혜-평강의 Q, 바로 그 영원무궁한 생명과 사랑의 HS과 동행함으로써 JC로 살며, JC를 살아내는 모든 믿는이들)의 모임(에다....집회/모임, 무리....[JC를 빼어닮아 HS따라 섬김으로 다스리는 겸손한]하나님의 자녀요 아들들, 작은 그리스도, 어린양의 아내, 그리스도의 신부, 새예루살렘 = 교회,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몸)에 들지 못하리로다

*6.무릇 의인들의 길은(데레크...태도/방식)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야다...알다/이해하다...인정/인지/시인하고 친밀히 깊이 함께 하다, 알아주고 보살피며 돌보)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How blessed is the man who does not walk in the counsel of the wicked, Nor stand in the path of sinners, Nor sit in the seat of scoffers!

But his delight is in the law of the LORD, And in His law he meditates day and night.

He will be like a tree firmly planted by streams of water, Which yields its fruit in its season And its leaf does not wither; And in whatever he does, he prospers.

The wicked are not so, But they are like chaff which the wind drives away.

Therefore the wicked will not stand in the judgment, Nor sinners in the assembly of the righteous.

For the LORD knows the way of the righteous, But the way of the wicked will perish.

==================

복 있는 사람(시 1:1-3)

시편의 저자는 경건한 사람의 특성과 조건에 대해 이야기함으로써 이 책을 시작하고 있다. 

이런 특성과 조건을 가진 사람은 누구보다도 먼저 그것이 주는 위안을 얻을 수 있다.

Ⅰ. 경건한 사람의 정신과 그 길의 특성. 

이것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를 시험할 수 있다. 

여호와는 그분꼐 속한 자들을 이름으로 아시나, 우리는 주께 속한 자들을, 그들의 특성으로 그들을 알지 않으면 안 된다

그 특성에 응하기 위해 연구한다는 것은 주께서 허락하시는 시련의 상태와 일치한다. 

곧 그 특성은 거듭난 기독자인 우리가 의무적으로 순종해야 할 법/복음의 요구우리의 궁극적 이익을 위해 말씀 순복 통해 성취하도록 되어 있는 한 가지 약속의 조 두 가지를 뜻한다. 

선한 사람의 특성은 여기에서 그가 선택한 길과 그가 택한 수단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 세상의 일이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대화를 나눌 때 우리가 언제나 금과옥조의 지침으로 택하는 것은 구체적인 결과[영복]에 관한 것이다. 

우리의 규범과 지도자를 선택하는 데에서 생기는 잘못은 근원적이고도 치명적인 것이 된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가 옳다면 우리는 옳은 길로 잘 행하게 된다.

1. 경건한 자, 

그는 악을 피하고, 악을 행하는 무리들과 완전히 절교할 것이며, 결코 그들을 따르지 않을 것이다(1절).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그 특성 가운데 이 부분이 제일 먼저 제시되어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려는 자들은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 “나를 떠날지어다”(119:115) 하고 말해야 하며, 악에서 떠날 때 비로소 지혜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1) 그는 행악자들이 그의 주위에 있는 것을 본다. 세상은 그들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은 각처에 도사리고 있다. 그들은 여기에서 “악인,” “죄인,” “오만한 자”라는 세 가지 특성으로 묘사되어 있다. 불경건함의 절정이 어느 단계에까지 이르는가를 보라. “단번에 악의 극치에 이르는 자는 없다.(Nemo repente fit turpissimus). 

그들은 먼저 하나님에 대한 경외감을 던져버리고, 그에 대한 그들의 의무를 소홀히 함으로써 “악인”이 된다. 그러나 그들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믿음의 봉사를 젖혀놓을 때, 그들은 “죄인”이 된다. 즉, 그들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공개적인 반역의 일에 돌입해 죄와 사단을 위한 봉사에 종사하게 된다. 

태만은 범죄의 길을 만들어놓는다. 그리고 태만으로 인해 마음이 매우 경화되어서 마침내 그들은 “오만한 자”가 된다. 즉, 그들은 거룩한 모든 것들에 대해 공개적으로 도전하며, 믿음을 비웃고 죄를 즐긴다. 불의로 향하는 길은 이러하다. 악한 자는 더욱 악해지고, 죄인들은 스스로 다른 사람을 유혹하고 바알 신을 옹호하는 자가 된다. 

우리가 “악인”이라고 번역한 단어는 고정되지 아니하고, 어떤 확실한 규범에 의해 행하는 자가 아니라, 모든 정욕의 지배와 유혹에 따라 행하는 자를 의미하고 있다. 

“죄인”이라는 단어는 죄의 일을 하기로 결심해 그것을 그들의 업으로 삼고 있는 자를 의미한다. 

“오만한 자”란 “하늘을 대적해 입”을 벌리는 자들이다. 

선한 사람은 이런 자들을 슬픈 마음으로 본다. 그들은 그의 의로운 영혼을 끊임없이 괴롭힌다.

(2) 선한 자는 어디서 그들을 보든지간에 그들을 멀리 한다. 그는 그들과 같이 행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렇게 행하지 않기 위해, 그는 그들과 친밀한 대화를 나누지 않는다.

① 그는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한다.” 

그는 그들의 모의에 참석치 아니하며, 그들과 의논하지도 않는다. 아무리 그들이 재치 있고 민첩하며 학식이 있다 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하다면 그들은 그의 상담자가 되지 못한다. 그는 저희의 결의에 가타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눅 23:51), “저희처럼 말하지”도 않는다. 그는 그들의 원칙에 의해 행동하지 않으며, 그들이 주고받는 충고에 따라 행하지도 않는다. 경건치 못한 자들, 즉 악인들은 믿음에 위배되는 충고를 하기에 서슴지 않으며, 그것은 매우 교묘하게 다루어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그것에 물들거나 사로잡히지 않게 되는 것을 스스로 다행스럽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② 그는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한다.” 

그는 그들처럼 행하지 않도록 피한다. 그들의 길이 그의 길이 되지는 못한다. 그는 그 속에 들어오지 않을 것이며, 더구나 “스스로 불선한 길에 서는”(36:4) 죄인처럼 그 속에 계속 있지도 않을 것이다. 그는 가능한 한 그들이 있는 곳을 피한다. 그가 그들을 닮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들과 함께 교제하려 하지 않으며, 그들을 그의 동료로 택하려 하지도 않는다. 그는 그들에게 붙잡히지 않도록 그들의 길에 서지도 않는다(잠 7:8). 그는 감염될까 두려워하며, 역병에 감염된 사람이나 장소로부터 멀리 피한다(잠 4:14-15). 해를 받지 않으려는 자는 해로운 길에서 떠나야 한다.

③ 그는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한다.” 

그는 악한 자리에 편히 앉아서 자신의 마비된 양심을 즐기는 자들과 함께 쉬지 아니한다. 그는, 마귀의 나라를 돕고 발전시키기 위한 방법과 수단을 찾아 철저히 음모를 꾸미거나 의로운 세대들을 정죄하기 위해 강압적인 태도로 공개 재판석에 앉아 있는 자들과 사귀지 않는다. 취한 무리의 자리는 “오만한 자의 자리”며(69:12), 결코 그 자리에 앉지 아니하는 자는 행복한 자다(호 7:5).

2. 경건한 자, 그는 선한 것을 행하고 그것을 신봉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 말씀의 인도하심에 복종하며 그것과 친숙하도록 할 것이다(2절). 

이는 그로 하여금 악인들의 길에서 벗어나고 그들의 유혹을 물리치도록 해준다. “나는 주의 입술의 말씀을 좇아 스스로 삼가서 강포한 자의 길에 행치 아니하였나이다”(17:4).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과 더불어 교제하고 하나님과 함께 그의 말씀에 의해 교제를 가질 때에는, 즐거움이나 발전을 위해 죄인에게 우정을 청할 필요가 없다. “그것이 너의 깰 때에 너로 더불어 말할 것이다”(잠 6:22). 

우리는 “하나님의 율법이 우리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여기는가? 그것은 우리 안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가?” 하고 물음으로써 우리의 영적 상태를 판단할 수 있다.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점을 살펴보자.

(1) 선한 자는 하나님의 율법에 전념한다.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는 자로다.” 

그는 그것이 율법, 하나의 속박일지라도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며, 그가 허심탄회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하나님의 율법이기 때문에, “속사람으로는” 그것을 즐거워한다(롬 7:16, 22).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즐거워하는 자들은 모두 하나님과 그분의 뜻에 대한 계시, 그리고 하나님 안에서 행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을 인도해 주는 성서가 있다는 사실에 매우 기뻐해야 한다.

(2) 선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사귄다.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이것으로써 그가 그것을 즐거워한다는 사실이 나타난다. 왜냐하면 우리는 사랑하는 것에 대해 생각하기를 사랑하기 때문이다(119:97).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함은 그 속에 들어 있는 훌륭한 것들과 이야기를 나눔으로써 마음에 철저히 적용시키고, 또 그것들에 대해 확고한 생각을 갖는 것이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비로소 그 말씀에 훌륭히 감동될 것이며, 우리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는 그 향기와 능력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주야로” 묵상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행동의 규범과 위로의 원천으로 여기고, 그에 대해 꾸준하고 습관적인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밤이든 낮이든, 어떤 일이 일어날 때마다 그것을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지 않아도 될 시간이란 없으며, 또한 그것을 묵상하기에 부적당한 시간이란 없다. 우리는 낮과 밤의 시작인 아침과 저녁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해야 할 뿐만 아니라, 매일의 업무와 대화 속에, 그리고 매일밤의 휴식과 잠 속에서도 이런 생각들을 해야 한다. 

“내가 깨어 있을 때는 언제나 당신과 함께하나이다.”

Ⅱ. 경건한 자의 행복에 대한 확신.

우리는 이런 확신으로써 경건한 자의 성품에 달하도록 우리 스스로를 격려해야 한다.

1. 일반적으로 경건한 자는 “복”을 받는다(1절). 

하나님은 그를 축복하시고, 그 축복은 그를 행복하게 만들 것이다. 그를 완전히 행복하게 만들기에 충분한 모든 종류의 축복, 즉 위 세상과 아래 세상의 모든 축복의 근원이 하나님께 있다. 하나님께는 행복의 요소들이 그 어느 것도 부족하지 않다. 

시편 저자는 복 있는 자를 묘사하고자 할 때, 선한 자를 묘사하고 있다. 왜냐하면 거룩한, 진실로 거룩한 자가 결국 진실로 행복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디에 행복이 있을 것인가를 알려고 하기보다는 행복해지는 방법을 알고자 한다. 

선함과 거룩함은 행복으로 이르는 길일 뿐만 아니라(계 22:14), 행복 그 자체다. 이후에 다른 생이 없다 할지라도 자기의 의무를 지키는 자는 행복하다.

2. 그의 축복은 여기에서 비유로 예증되어 있다(3절). “그는” 과실을 맺으며 무성한 “나무와 같다.”

(1) 이것은 그의 경건한 행실의 결과다. 

그는 하나님의 율법을 묵상하고 그것을 “즙과 피로” 변하게 했으므로 그것은 그를 푸른 나무처럼 만든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과 더불어 교제를 나눌수록 우리는 모든 선한 말과 사업에 대해 더욱 훌륭한 보답을 받을 것이다.

(2) 또는 이것은 약속된 축복에 대한 결과다. 

그는 여호와의 축복을 받으므로 “나무와 같이 될 것이다.” 거룩한 축복은 현실적인 결과를 가져온다. 경건한 자의 행복은 다음과 같다.

① 그가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 심어졌다는 것이다. 

이 나무들은 본래 돌감람나무였으며, 새로 접목되고 하늘로부터의 능력에 의해 심어질 때까지는 그런 나무로 머물 것이다. 아무리 훌륭한 나무라 할지라도 저절로 자라나는 것은 없다. 그것은 “여호와가 심으신 나무”이므로 그는 그 속에서 영광받으셔야 한다(사 61:3). “여호와의 나무는 수액이 가득하다.”

② 그가 은총에 의해 자라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그것은 “하나님의 성을 기쁘게 하는 시내”로 불리고 있다(46:4). 여기에서 선한 자는 힘과 활력을 공급받으나, 그것은 분별할 수 없는 은밀한 방법에 의해 이루어진다.

③ 그의 행실은 유익하도록 번성한 과실이 되리라는 것이다(빌 4:17). 

하나님은 제일 처음 축복하신 자들에게 “생육하라”(창 1:22)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지금도 생육에서 오는 즐거움과 영예는 그 수고의 보답이 되고 있다. 은총의 자비를 즐기는 자들에게는 마음의 평정과 생활의 지침에서 그 은총의 의도에 순응해 과실을 맺을 것이 기대된다. 그리고 포도원의 훌륭한 일꾼에 대한 찬사를 살펴보면, 그들은 선을 행하되 합당한 때에 행할 모든 기회를 이용해 가장 아름답고 가장 유용한 과실을 (그들에게 요구되는) “시절을 좇아” 맺는다.

④ 그의 사업은 손상되거나 망하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그 잎사귀 또한 마르지 아니할 것이니라.” 

사업에서 유익한 과실 없이 잎만을 내는 자들에게는 그 잎마저 마를 것이며, 그들은 그 사업을 자랑했던 것만큼 부끄러워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그 마음속을 다스린다면 그것은 그 사업을 푸르게 하며, 우리에게 위안과 신뢰를 가져다줄 것이다. 이렇게 획득된 월계수들은 결코 마르지 않는다.

⑤ 그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함, 곧 영혼의 형통함이 그를 따르리라는 것이다. 율법에 순응하는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그것은 그가 바라던 대로 또는 그 이상으로 형통할 것이다. 우리는 죄의 사악하고도 위험한 성품에 쉽게 물들기 쉽다. 따라서 우리는 이 구절, 즉 거룩한 율법의 초월적인 탁월함과 우리의 열매가 발견되는 하나님의 은총의 능력과 효력을 노래함으로써 우리 스스로와 서로를 가르치고 권고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죄를 경계하고 죄를 향하는 모든 접근을 막고, 하나님의 말씀과 많은 교제를 나누고 의로움의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에 대해 기도함에, 우리는 모든 악한 말과 일에 대비해 충분히 우리를 강화하고 모든 선한 말과 일로 우리를 무장하기 위해 하나님께 그의 은총을 구해야 한다.

--------------------

악인의 멸망과 그에 대한 해설(시 1:4-6)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Ⅰ. 경건치 못한 자들에 대한 묘사(4절).

1. 일반적으로 그들의 성품과 상황은 의로운 자들과 반대다.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다.” 칠십인역에는 이 내용이 강조적으로 반복되어 있다. “불의한 자는 그렇지 아니하다. 그들은 그렇지 아니하다.” 

그들은 악인의 꾀를 좇으며 죄인의 길에 서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는다.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즐거워하지 않으며, 그것에 대해 생각지도 않는다. 그들은 소돔의 포도 이외에는 과실을 맺지 못한다. 그들은 땅을 해친다.

2. 특히, 의인은 귀중하고 유익하며 실과를 맺는 나무인 반면에, “악인은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즉, 그들은 가장 가벼운 겨로서 집주인이 쓸어버리고자 하는 티끌과 같이 아무런 쓸모가 없는 존재다. 당신은 그들을 귀중히 여기겠는가? 그들을 중요시하겠는가? 악인들은 겨와 같은 것으로 그들이 스스로를 아무리 높이 평가하더라도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아무런 가치도 없다. 당신은 그들 마음의 상태를 알고자 하는가? 그들은 가벼우며 무익하다. 그들은 실속이 없으며 현실성도 갖고 있지 못하다. 그들은 바람이 불고 유혹이 올 때마다 쉽게 이리저리 불려다니며, 확고성을 갖고 있지 못하다. 당신은 그들의 종말을 알고자 하는가? 하나님의 진노는 그들을 결코 곳간에 거두어들이지 않을 것이며, 돌봄을 받지 못하는,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그들을 사악함 속에 버려두실 것이다. 겨는 잠시 동안 밀 속에 섞여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손에 키를 들고” 오고 있으며, “자기 타작마당을 철저히 깨끗하게 하실 것이다.” 자기 자신의 죄와 어리석음으로 인해 스스로를 겨와 같이 만드는 자들은 회오리바람과 거룩한 진노의 불 앞에서 그렇게 될 것이며(35:5), 그 앞에 서거나 피할 수 없게 될 것이다(사 17:13).

Ⅱ. 악인의 파멸(5절).

1. 그들은 패역자들이 유죄판결을 받음과 같이 심판에서 버림을 당할 것이다. “악인이 심판에 견디지 못한다.” 

즉, 그들의 유죄함이 발견될 것이며, 수치와 당황스러움 속에서 교수형에 처해질 것이다. 그들의 탄원과 변명은 경멸스러운 것으로서 제재당한다. 심판의 날이 올 것이며, 각 사람의 성품과 일이 아무리 교묘하게 감추어지고 위장되었을지라도 그때에는 사실 그대로 모두 발견되며, 그들의 거짓은 드러난다. 그에 따라 각 사람의 미래 상태는 결코 변경될 수 없는 판결로써 영원한 세상을 위해 결정될 것이다. 악인은 그 심판에 나타나 육신으로 행한 일에 따라 판결받아야 한다. 그들은 영예롭게 사라지기를 바랄지 모르나 그들의 기대는 그들을 배반한다. “악인은 심판을 견디지 못한다.” 그렇게 될 정도로 그들에 대한 증거는 명백하며, 따라서 그에 대한 심판은 매우 공정하며 치우침이 없을 것이다.

2. 그들은 영원히 복 있는 자의 모임에서 제외되며,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한다. 

즉, (어떤 사람들의 견해대로) “심판”에 서지 못할 것이다. 그 법정에는 그리스도와 함께 입회자가 된 성도들이 세상을 심판할 것이다. 주께서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시어 “뭇 사람을 심판”하러 오실 것이다(유 1:14; 고전 6:2). 또는 그들은 “하늘나라”에 들지 못할 것이다. 간략히 말해서 “처음 난 자들의 교회의 총회”, “의인의 회중”, 모든 성도들의 모임이 있을 것이나, 성도들 이외는 그 누구도 참여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 성도들은 세상에서는 일찍이 없었던 완전한 자들의 회중이 될 것이다(살후 2:1). 

사악한 자들은 그 회중에 자리잡지 못할 것이다. 새 예루살렘에는 부정하거나 성별되지 아니한 자는 그 누구도 들어갈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은 의인이 그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볼 것이나, 그들 자신은 쫓김을 당해 영원히 괴로워할 것이다(눅 13:27). 

사악하고 불경스런 자들은 이 세상에서 의인과 그 회중을 조롱하고 멸시하며, 그들을 가까이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들은 당연히 의인들로부터 영원히 분리된다. 

이 세상의 위선자들은 그럴듯하게 가장하고 의인의 회중에 잠입해, 방해받거나 적발되지 않은 채로 그곳에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일꾼들은 속일지라도 그리스도는 속일 수 없다. 그가 “양과 염소”, “가라지와 곡식”을 분리하실 날이 오고 있다(마 13:41, 49 참조). 그 “위대한 날”(갈대아 사람은 이렇게 부르고 있다)은 발견하는 날, 구별하는 날, 그리고 마지막 구분하는 날이 될 것이다. 그때에 너희가 돌아와 의인과 악인을 분별할 것이나, 여기에서는 그렇게 하기가 때로 힘이 들 것이다(말 3:18).

Ⅲ. 거룩한 자와 사악한 자가 이와 같이 다른 상황에 처하게 되는 이유(6절).

1. 하나님은 의인의 형통함과 행복으로 인한 모든 영광을 받으셔야 한다. 

그들은 “여호와께서 그들의 길을 인정하시기” 때문에 축복받는 것이다. 그분은 그들을 택하시어 그 길로 가게 하시며,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시어 그 길을 택하게 하신다.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고 안내하시며, 그들의 모든 발걸음을 명하신다.

2. 죄인들은 그들 자신의 멸망에서 오는 모든 치욕을 겪어야 한다. 

그들이 택해 가기로 결심한 그 길은 직접 멸망으로 인도하는 길이다. “그러므로” 악인은 멸망한다. 그것은 자연히 파멸로 기울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그런 결과를 맞이해야 한다.

또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받아들일 수도 있다. 주님은 의인의 길을 인정하고 기뻐하시므로, 그분의 은혜로운 미소에 힘입어 그 길은 형통해 좋은 결과를 이룰 것이다. 그러나 그분은 악인의 길에 노하시며 그들이 행하는 것은 모두 그를 불쾌하게 하므로 그 길과 그 속에 있는 자들은 망할 것이다. 각 사람에 대한 판단이 주께로부터 나온다는 것은 확실하며, 그 심판은 우리가 하나님께 인정받는가 못 받는가에 따라 우리에게 좋게, 혹은 나쁘게 내려질 것이며, 영원한 세계에서도 계속 적용될 것이다. 

주께서는 그들의 길을 아시고 그들의 마음을 아시며(렘 12:3), 은밀한 기도를 아시고(마 6:6), 사람들의 비난에 의해 그들의 마음이 아무리 검게 되고 더럽혀졌다 할지라도 그 본심을 아시기 때문에 곧 세상에 그들과 그들의 길을 드러내시어 그들의 영원한 기쁨과 영예가 되도록 하실 것이다. 이런 사실은 낙심하고 있는 의로운 영을 위로해 준다. 또한 죄인의 길이 비록 지금 즐겁더라도 결국엔 망한다는 사실은 유쾌한 상태에서 방심하고 있는 죄인들을 위축시킨다.

이 구절들을 노래하고 그것들을 기원함으로써 우리들 스스로 악인의 분깃에 대해 거룩한 두려움을 가지며, 장차 올 심판에 대한 확고하고 생명 있는 기대를 가지고 그것을 멸시하도록 하자. 또한 우리의 마음을 다해 하나님의 은총을 간구하면서 심판에 대한 준비를 하고, 거룩한 관심을 갖고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인정을 받도록 우리 스스로 분투 노력하자.

============
[[생활...生活]]..뿌려진 생명말씀이 (생동하는-발휘되는, 견고한) 믿음을 통해 작동되어 [고백한 바 마땅한 그 생명길을 따라..예비하신 때와 기한에] 마침내 생명 열매 맺는 과정
자원(字源)...상형문자
生자는 ‘나다’나 ‘낳다’, ‘살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生자의 갑골문을 보면 땅 위로 새싹이 돋아나는 이미지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그래서 生자는 본래 ‘나서 자라다’나 ‘돋다’라는 뜻으로 쓰였었다. 새싹이 돋아나는 것은 새로운 생명이 탄생했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生자는 후에 ‘태어나다’나 ‘살다’, ‘나다’와 같은 뜻을 갖게 되었다. 生자가 다른 글자와 결합할 때는 본래의 의미인 ‘나다’를 전달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姓(성 성)자는 태어남은(生)은 여자(女)에 의해 결정된다는 뜻이다.
------------------------
자원(字源)...회의문자
活자는 ‘살다’, ‘살아있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活자는 水(물 수)자와 舌(혀 설)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舌자는 뱀의 혓바닥을 그린 것으로 ‘혀’라는 뜻이 있다. 그래서 活자는 혀(舌)에 수분(水)이 있다는 의미에서 ‘살아있다’를 뜻하게 된 것으로 해석하곤 한다. 
그러나 소전에서는 舌자가 아닌 ‘원활하다’라는 뜻을 가진 ‘氏+口(괄)’자가 쓰였었다. 이것은 ‘물의 흐름이 원활하다’라는 뜻이다. 여기서 말하는 물의 흐름이라는 것은 몸속 혈액이 원활히 움직이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소전에서는 글자의 조합이 바뀌면서 해석 역시 달라졌다.
------------------------------
자원(字源)...상형문자
氏자는 ‘성씨’와 관련된 한자이다. 氏자와 관련된 해석은 다양하다. 갑골문에 나온 氏자를 보면 이미지사람 손에 무언가를 들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또는 땅속에 있는 뿌리 열매를 그린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일부에서는 이것이 종족을 상징하는 지휘봉을 그린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이렇게 뜻이 제각각인 것은 氏자와 결합하는 글자들이 다양한 의미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장 적절한 해석은 나무뿌리를 그린 것으로 보는 것이다. 왜냐하면, 혈통도 나무뿌리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줄기에서 시작되어 점차 확산하기 때문이다.
-------
-------
[[축복 ...에쉐르(에셰르)와 바라크... - 시편 1:1-6]]
시편 1편은 평생 읽어도, 다시 읽어도, 세월이 지나서 읽어도 은혜가 되는 귀한 말씀입니다. 시편 전체의 주제가 되는 장이기도합니다.
흔히 옛말씀 틀린 것 하나 없다고들 하는데 어쩌면 시편 1편의 말씀이야말로 평범해보이지만 인생을 지탱해주는 신앙의 놀라운 은혜를 말하고 있음을 늘 발견하게 됩니다.
복있는 사람을 말씀하십니다!
복있는 사람이 되기 원합니다!
그런데 이 축복이라는 히브리어 단어는 두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바라크의 축복이요 하나는 에쉐르의 축복입니다.
바라크의 축복은 물질적인 것을 포함한 현세적, 가시적 축복입니다.
창세기의 생육(生育)의 축복이 바로 바라크의 축복이었습니다.
[창1:22]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바라크)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아브라함에게 주신 축복도 바라크의 축복이었습니다.
[창12: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바라크)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그러나 시편 1편의 축복은 아쉬레/에쉐르의 축복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만난 사람, 주내안에, 나주안에 하나되어 거함/누림/맛봄의 특징으로서 영혼 깊은 곳의 진동치/요동치/뺏지 못할, 완전한 만족, 기쁨과 행복, 곧 지복직관의, 성장성숙생명열매맺음이 있는 영적 축복을 말합니다. 헬라어로는 마카리오스라고 하는데 바로 예수님의 마태복음 5장의 마카리오스의 축복과 같습니다.((내영혼의 그윽히 깊은데서....))
[마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즉 아쉐르의 축복은 내면 깊은 곳의 축복입니다.
물론 바라크의 축복도 당연히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런데 오래 가고 영원한 것은 바로 아쉐르의 축복! 내면의 축복입니다.
바라크의 축복과 함께 결코 다함이 없는 에쉐르- 시편 1편의 축복을 받기 원합니다.
그런데 그런 축복을 받는 사람- 복있는 사람은 먼저 자기 선을 분명히하는 지혜가 있는 사람입니다.
[시1:1]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즉 1절에 나타난 '하지 않아야할 것' 대한 이해가 분명한 사람입니다.
자신의 기질과 경향을 스스로 알아 늘 조심하는 사람들입니다.
복있는 사람은 그러므로,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않습니다. 따르는 것은 생각이 기울어간다는 뜻입니다.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않습니다.
여호와 앞에 서라!고 성경은 수없이 말씀하십니다. 여호와 앞에 설만큼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여호와 앞에 서야하는 우리들이 죄인의 길에 서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 복있는 사람입니다.
복있는 사람은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는 사람입니다. 
앉았다는 것은 이미 습관화되고 길들여져지고 익숙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생각이 그 방향으로 끌려갔습니다. 그리고 행동으로 그 죄인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것이 습관이 되었습니다. 생각이 행동이 되고 행동이 습관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복있는 사람은!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나라는 사람이, 아니 인간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기울어지기 쉬운 존재임을 잘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알고 조심합니다. 경계합니다. 내 자신의 마음과 생각을 조심스럽게 다룹니다!
나는 무엇이 가장 즐거운가! 무엇보다 복있는 사람은 그는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는 사람입니다.
[시편 1: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즐거움의 근원! 이것이 그의 영성을 좌우할 것입니다. 여호와의 율법이 즐거우십니까? 무엇이 즐거우십니까? 나는 무엇이 즐거운 것일까요? 나는 무엇을 할 때 즐거워하는 성향인가요?
멋진 연애를 하는 것, 일류 레스토랑을 가는 것, 비싼 가방이나 옷을 입는 것, 멋진 여행지를 구경가는 것은 어쩌면 누구에게나 '즐거운' 본능적으로 '즐거운' 일일 것입니다. 그것 또한 지나치지 않으면 하나님의 축복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늘', '더' 즐거우면 아직 우리는 복있는 사람은 안 된, 아니 되고 있는 과정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아이 시절에는 텔레비젼 보는 것이 성경 읽는 것보다 즐거울 수 있습니다. 밖에 나가서 노는 것이 교회다니는 것보다 즐거울 수 있습니다.
진정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게 될 때까지 얼마나 많은 세월이 걸릴까요? 지금 성경을 읽을 때 마음의 즐거움이 있다면 나는 이미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시편 1: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주야로 그 말씀을 묵상한다는 말은 '말씀'에 사로 잡히도록 스스로를 관리한다는 뜻입니다.
내 마음을 지배하는 것이 악인들의 꾀가 아니기를, 내가 선택한 것이 죄인들의 길이 아니기를, 내가 앉아 있는 곳이 오만한 자의 자리가 아니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나를 다스리는 것입니다. 나의 영적 습관을 바꾸는 것입니다. 오직! 이라는 말은 그래서 자세와 태도에 대한 결단을 말합니다.
[시편 1: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오직!이라는 단어에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삶의 원리와 방식을 채택하는 단호함을 말합니다. 내가 살아가는 방법을 택하는 방식입니다! 묵상하며 그 말씀이 체질화되고 인격화되고 언어화되고 습관화되고 드디어는 자연스러운 즐거움이 되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내면의 기쁨이 될 때까지 묵상하는 것입니다.
[시편 1: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그러면 그의 인생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같이 될 것입니다. 모든 생명있는 것은 열매를 맺는 것이 중요합니다! 잘 자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복있는 사람의 자세와 태도를 기뻐하시고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열매를 맺게하시겠다고 약속합니다!
[시1:3]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시1:4]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시1:5]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시1:6]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의인은 생산적인 삶을 살지만 악인은 생에 대하여 무의미만 남기고 부정적인 기록만 남기게 될 것입니다.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악인은 결국 불안정하고 무의미라고 무가치하고 순간성에 머무르고 말 것입니다.
복있는 사람이 시냇가에 심은 나무같다고 하십니다.
뿌리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뿌리가 지금 시냇가의 수액과 연결되어있는 것입니다.
내 뿌리가 나아가 닿아있는 방향! 그것이 중요합니다. 보이지 않는 내 마음이 늘 닿아있는 곳, 내 무의식의 심연이 연결되어있는 곳,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내 영혼은 늘 아름답게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그 시냇가( 히브리어 페레그)는 운하運河 channel, canal 라는 뜻도 있습니다. 그냥 자연적으로 흐르는 강물이기도 하지만 운하, 즉 의도적으로 팠다는 뜻도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우리가 어떤 곳에 심겼을지라도 그 뿌리 쪽으로 축복의 운하를 파주시기도 합니다.
에쉐르의 축복을 먼저 누리면 바라크의 축복도 다가올 줄로 믿습니다. 말씀을 묵상하면 악인의 길을 따르기 쉬운 우리의 삶의 방향을 그 말씀이 힘있게 바꾸어줄 것을 믿습니다!
=======
hd:y:(3034, 야다) 던지다, 쏘다, 감사하다, 찬양하다, 고백하다
야다(동사)는 기본어근이며, '던지다, 내던지다 throw, cast'를 의미한다. 좋은 것을 던져 줄 수도 있고, 나쁘거나 불필요한 것을 던져 버릴 수 있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144회 나오며, 칼형에서 '쏘다'(화살, 렘 50:14), 피엘형에서 '던지다'(애 3:53), 히필형에서 '감사하다, 찬양하다, 고백하다', 히트파엘형에서 '고백하다, 감사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야다의 기본적인 의미는 '죄, 하나님의 품성과 역사, 혹은 인간의 특성을 시인하다 혹은 고백하다'이다. 
이 동사와 그 동의어 할랄의 기본적인 차이는 후자의 용어가 '갈채하다, 자랑하다', 혹은 어떤 대상을 '기뻐하다'를 강조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에, 야다는 좋든 나쁘든 어떤 사실에 대한 '인정'과 '선언'을 강조한다. 70인역본은 일반적으로 야다를 엑소몰로게오로 번역한다.
동사는 세 가지의 기본적인 방법으로 사용된다.
첫째, 이 단어는 개인적으로든 국가적으로든 죄의 시인 혹은 고백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었다. 
기본적인 개념은 시 32:5에 묘사되어 있는 다윗의 개인적인 고백에서 분명하게 관찰되었다. 여기에서 시적인 병행구는 고백이 죄를 감추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하나님께 알리는 것이었음을 설명해 준다. 죄에 대한 고백이 하나님께 행해져야 한다는 사실을 주목하는 것은 중요하다. 국가적인 고백의 개략은 속죄일 의식에서 발견된다. 이때 대제사장은 큰 소리로 이스라엘 민족의 모든 죄를 고백하면서, 자기의 손을 염소의 머리 위에 두어 상징적으로 민족의 죄를 염소에게 전가 시켰다(레 16:21). 힛파엘형은 이 동사가 국가적인 죄의 고백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될 때 일반적으로 사용된다. 이 어간은 또한 이스라엘 죄의 대 고백이 다니엘(단 9:4, 단 9:20), 에스라(스 10:1), 느헤미야(느 1:6), 그리고 바벨론 포로기 동안과 그 이후의 이스라엘 백성(느 9:2-3)들에 의해 행해졌을 때에도 사용되었다. 국가적인 죄의 고백은 일반적으로 공적인 것이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자기 앞에서 우리의 죄를 시인하여(참조: 요일 1:9), 자기와의 본래의 관계를 유지하기를 매우 원하신다.
둘째, 야다는 하나님의 속성과 그의 일에 대한 인간의 공적인 선포나 선언(고백)을 나타내기 위해 주로 사용되었다. 
이 개념은 찬양의 의미의 핵심에 있다. 찬양은 하나님이 누구이신가 그리고 그가 무엇을 행하는가에 대한 고백이거나 선언이다. 
이 용어는 영역본들에서 가장 자주 '감사하다' thank로 번역되지만, 베스터만(Westermann)에 의하면, 이 번역이 실제적으로 적당한 번역은 아니라고 한다. 즉 구약성경에서 ...아직까지 '감사하다' thank만을 의미하는 동사는 없었다. 
일반적으로 '감사하다' thank로 번역되는 호다는 구약성경에서 사람들 사이의 감사에 대한 표현을 뜻하는 말로는 단 한번도 사용되지 않았다. 따라서 처음부터 이 호다는 하나님과 인간에게 똑같이 사용될 수 있는 우리의 언어 '감사하다' thank와 일치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인간들 사이에 일어나는 어떤 것으로서의 우리의 '감사하다'가 가장 분명하게 발견되는 구약성경의 구절들에서 사용된 동사는 베레크이다. 이 동사는 '찬양하다' praise의 기본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축복하다' bless를 의미한다.
이런 사실에 비춰볼 때, 구약성경은 감사하는 것에 대한 독립적인 개념을 가지고 있지 않음이 분명하다.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표시는 찬양에 포함되어 있다. 이것은 찬양의 한 방식이다(Westermann, Claus, The Praise of God in the Psalms, Richmond; John Knox Press, 1965, pp. 26-27).
이 용어의 가장 좋은 역어는 '고백' confession이다. 왜냐하면 시편(참조: 시 89:5, H6, 시 105장, 시 106장, 시 145장)과 그 외의 곳(참조: 대상 29:13)에서 충분히 볼 수 있듯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속성과 일을 고백하거나 선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야다는 '찬양하다' praise를 뜻하는 주요 단어들 중의 하나이다. 이 단어는 히브리인들의 시에서 언제나 할랄(찬양하다) ,자마르(악기로 찬양하다) 룸(높이다), 자카르(기억하다), 카밧(찬양하다), 그리고 나갓(선언하다)과 같은 찬양 용어들과 병행되어 나온다. 
감사는 찬양 뒤에 온다. 왜냐하면 사람이 하나님의 속성과 일을 선언할 때, 이런 것들에 대해 감사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찬양은 대개 감사로 이어진다.
[베스터만은 한 주요 요지에 주의를 환기시켰다. 그렇지만 그의 말이 모든 세부적인 것들에 다 필요한지는 의심스러울 것이다. 만약 때로 감사가 찬양에 포함된다면, 특히 이 어근의 기본적인 의미가 BDB가 시사한 바처럼, '인정하다' acknowledge일 때, 어떤 행동이나 일에 대해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 야다가 사용되는 실례들이 감사하다라는 우리의 개념과 동일시될 수 있을 것이다(R. L. H)].
찬양은 일반적으로 여호와나 그의 이름을 그 대상으로 취한다(시 97:12, 시 99:3, 시 136:1-3, 시 136:26). 죽은 자가 아닌, 산 자만이 하나님을 찬양하였다(사 38:18-19, 시 6:5, H6, 시 30:9, H10, 시 88:10, H11). 
찬양의 수창자(首唱者)에는 의로운 개인들(시 140:13, H14), 이스라엘 백성(시 106:47), 열방들(시 45:17, H18), 지상의 모든 왕들(시 138:4), 하늘들(시 89:5, H6), 사람의 노(시 76:10, H 11)와 같은 것들이 포함된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위대한 속성과 그의 기적적인 역사들을 고백했다. 
여호와에 대한 찬양은 공적인 것으로, 열방들 사이에서(삼하 22:50),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대 회합에서(시 35:18) 발견되었다. 개인이나 백성이 와서 여호와를 찬양할 때, 그들은 종종 악기를 수반하여(대하 5:13, 시 33:2, 시 43:4), 말이나 노래로써, 구두로 찬양하였다(시 109:30, 시 28:7). 이런 찬양은 일반적으로, 다윗이 엄격하게 여호와의 인격에 대한 찬양과 고백으로 경축하는 임무를 맡긴 그런 레위인들(대상 16:4)의 지시하에 성막(혹은 성전)에서 행해졌다(시 100:4, 시 122:4). 
이것은 매일 아침과 저녁에 성막에서 수행되어야 했던 예배의 주요 측면이었다(대상 23:30). 이 찬양은 여호와의 옳은 길(여호와의 의)에 따라(시 7:17, H18) 올바른 마음을 가지고(시 119:7) 전심으로 행해져야 했다(시 86:12, 시 111:1). 이런 찬양은 계속적으로 - 영원히 - 행해져야 했다(시 30:12, H13).
셋째, 야다는 또한 어떤 사람에 관한 어떤 진실을 고백하는, 즉 사람에 대한 사람의 칭찬을 나타내기 위해서 사용되었다(시 49:18, H19). 
'찬양' praise을 의미하는 "유다"라는 이름은 이 어근에서 나온 것이다. 왜냐하면 유다의 형제들이 그를 찬양(혹은 고백)하였기 때문이다(창 29:35).(참조: R. H. Alexander; BDB). 
======
---히[(율법을) 즐거워하다]---
$p,je(2656, 헤페츠) 기쁨, 즐거움 ,  믿고 대망하며 기대하는 바 [영속적인 최고관심갈망소원누림감상만족]
헤페츠(명남)는 하페츠($pej; , 2654: 기뻐하다, 즐거워 하다)에서 유래했으며, '기쁨, 즐거움'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39회 나온다.
헤페츠는 "기쁨의 땅"(말 3:12) 혹은 "기쁨의 말"(전 12:10)과 같은 표현에서 사용되었으며, 여기에서 "땅"이나 "말"이 제공해주는 기쁨에 대해 말한다.
의인에 대해서, 시 1:2은 그의 "기쁨"이 여호와의 율법에 있다고 말한다: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어떤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기쁨을 줄 때는, 그들이 이런 기쁨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땅에 있는 성도는 존귀한 자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저희에게 있도다"(시 16:3).
헤페츠는 어떤 사람이 행하거나 가지기를 강하게 원하는 것을 나타내는데 사용되었다. 
예를 들어, 솔로몬은 스바 여왕에게 그녀가 "기뻐하는" 모든 것을 주었다: "솔로몬 왕이 왕의 규례대로 스바 여왕에게 물건을 준 외에 또 저의 소원대로 무릇 구하는 것을 주니 이에 저가 그 신복들로 더불어 본국으로 돌아갔더라"(왕상 10:13).
욥은 자기가 가난한 사람들이 "기쁨"을 갖지 못하도록 제지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내가 언제 가난한 자의 소원을 막았던가 과부의 눈으로 실망케 하였던가"(욥 31:16).
헤페츠는 어떤 사람의 큰 관심사, 즉 관심사, 즉 그의 일에 대해 더 많이 사용되었다. 
이스라엘의 관심은 금식하는데 있었으며, 이것이 그들의 "기쁨"이었다고 한다: "이르기를 우리가 금식하되 주께서 보지 아니하심은 어찜이오며 우리가 마음을 괴롭게 하되 주께서 알아주지 아니하심은 어찜이니이까 하느니라 보라 너희가 금식하는 날에 오락을 찾아 얻으며 온갖 일을 시키는도다"(사 58:3).
이사야는 하나님의 "기쁨"이 그리스도의 손에서 이루어질 것이라고 기록한다: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사 53:10).
하페츠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에 대해서도 사용되었다.
바사 왕, 고레스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것을 이룰 것이다: "고레스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그는 나의 목자라 나의 모든 기쁨을 성취하리라 하며 예루살렘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중건되리라 하며 성전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네 기초가 세움이 되리라 하는 자니라"(사 44:28). (참조: L. J. WOOD; BDB). 
-----[헬]기뻐하다, 즐거워하다------
caivrw(5463, 카이로) 기뻐하다 be glad, 즐거워 하다 rejoice. 믿고 대망하며 기대하는 바 [영속적인 최고관심갈망소원누림감상만족]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동사 카이로(Homer이래로)는 '기뻐하다, 즐거워 하다'를 의미하며, 어떤 사람이나 사물에 대해 기뻐하는 것을 나타낸다. 
현재 명령법은 인사말로 자주 나타난다. 즉 카이레(단수)와 카이레테(복수)는 "안녕하십니까?" "안녕히" Hail!라는 인사말로 사용되었다. 
카이레는 무엇보다 신들에게 대한 인사말로 사용되었다. 서신의 서두에서 부정사 형태인 카이레인이 가끔 사용되기도 하는데, 이 경우에는 동사 레게이가 보충되어야 한다(참조: Funk § 480). 즉 "…문안을 [드리다]"([…says] greetings!). 
똑같은 관용 어구가 축배를 들 때도 사용되며(즉, "건강을 빌면서!" good health!) 헤어질 때도 사용된다(즉 "안녕히 계십시오[가십시오]!" Farewell!).
2. 70인역본의 용법 
카이로는 70인역본에서 약 80여회 나오며, 주로 '기뻐하다, 기쁘다'를 뜻하는 길, 사마흐, 시스와 '기쁨, 즐거움'을 뜻하는 사메아흐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며, 그러한 의미를 나타낸다.
3. 신약성경의 용법 
카이로는 신약성경에 74회 나오며, 이 동사와 명사 카라(carav, 5479)는 특히, 그리스도를 통한 종말론적 완성 및 그리스도 안에 존재함과 그리스도 안의 소망을 언급한 곳에 현저히 나타난다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선포인 신약성경 메시지 전체가 기쁨의 메시지(→복음 Gospel)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a)  카이로는 인사말로 사용되었다. 
부정사 카이레인을 써서 인사한 경우는 행 15:23; 행 23:26; 약 1:1의 편지의 서두에서만 나타난다. 
요이 1:10에서 신자들은 이단에 속한 자들에게 카이레인을 하지 말라고 한다: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
여기서 수신자들은 이단 교리를 전하는 자들의 악한 행위에 완전히 연루되지 않도록, 그들을 영접하지도 인사하지도 말라는 경고를 받고 있다.
마 28:9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친숙한 일상적 인사말 카이레테를 사용하여 제자들에게 자신을 알리고 있다: "예수께서 저희를 만나 가라사대 평안하뇨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마 26:49에서 배반자 유다는 예수님께 인사했다: "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하고 입을 맞추니".
안녕과 행복을 소원하는 그 인사의 이면에는 무서운 음모를 감추고 있다.
마 27:29에서는 예수님께 대하여 유대인의 왕(이스라엘)이라고 조롱적 인사를 던지고 있다: "가시 면류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 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가로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그들이 이렇게 인사하지만, 그러나 그들이 전혀 알지 못하고 그 말을 하였으나, 주님이 당연히 받으셔야 할 인사였으니만큼, 그 속에는 하나의 반어적(反語的) 의미가 숨겨져 있다고 볼 수 있다.
눅 1:28에서 마리아는 카이레 그 자체보다는, 오히려 잇따른 메시지에 놀랐다.
(b)  공관복음서에서 예수님의 오심과 사역은 기쁨을 가져왔다. 
카이로는 잃어 버린 것을 찾았을 때(눅 15:5이하; 마 18:13), 자기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알았을 때(눅 10:20), 구세주의 선구자가 났을 때(눅 1:14), 그의 탄생의 별을 보았을 때(마 2:10),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에(눅 13:17; 눅 19:6), 기뻐하는 것을 표현한다.
눅 19:37이하(참조: 눅 18:43)에서 예수님께서 입성할 때의 사람들의 분위기는 예수님의 승천 후에 제자들의 분위기처럼 기쁨의 분위기였다: "이미 감람 산에서 내려가는 편까지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의 본 바 모든 능한 일을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가로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마 5:12에서 하나님의 백성은 핍박을 받을 때도 기뻐해야 한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예수님이 하나의 공격의 대상이 되고, 그를 뒤따르는 자들의 길이 고난과 핍박에 이르게 된다 할지라도, 기쁨에 찬 구원의 확신은 상실되지 않아야 한다(눅 6:23).
눅 22:5에서 유다가 당국자들과 예수님을 넘겨 주기로 합의했을 때 그들이 기뻐했다: "저희가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언약하는지라".
눅 23:8에서 수난의 때에 헤롯이 예수님을 만나보고 기뻐했다: "헤롯이 예수를 보고 심히 기뻐하니 이는 그의 소문을 들었으므로 보고자 한 지 오래였고 또한 무엇이나 이적 행하심을 볼까 바랐던 연고러라".
(c)  사도행전에서는 교회의 불가항력적, 전세계적 확장에 대한 기쁨이 반복적으로 표현된다. 
먼저 그리스도를 위해 능욕과 핍박을 받음에 대한 사도 Apostle들의 기쁨이 있다(행 5:41; 마 5:11이하). 
박해가 복음의 승리적 진행을 정지시킬 수 없다. 
이방인을 끌어 모은데 대한 기쁨도 있다(행 11:23; 행 13:48; 행 15:3). 복
음이 이방인에게 전파되고, 그들이 세례(침례)를 받았을 때, 거기에 해당된 사람들은 크게 기뻐하였다(행 8:8, 행 8:39; 행 15:31).
(d)  요한의 기록에서 중요한 것은 충만한 기쁨이다. 
요 3;29에서 세례(침례) 요한은, "신랑" 즉 약속된 하늘의 진리의 계시자로 인하여 지금 기쁨이 충만해 있다(참조: 마 9:14이하, 병행구, 막 2:18이하; 눅 5:33이하). 종
말론적 시간은 이미 도래하였다. 요 4:35 전후 문맥을 보면 이 때는 계속적인 파종과 수확기가 병존하는 시기이고(요 4:35이하), 예수님께서는 자기에게 주어진 사역을 이미 성취하고 계신다(요 4:34). 
요 8:56에 보면, 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아브라함도, 수확이 시작되는 이 때를 보며 즐거워 하는 일에 동참하였다. 
여기에서 카이로는 기다리는 기쁨이고 아갈라오마이는 성취된 기쁨이다.
요 16:20이하에서 예수님께서는 자기의 죽음을 자기의 제자들이 기뻐해야 한다고 설명하신다. 왜냐하면 죽음은 승리요 발전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슬픔을 책망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부활이 그 슬픔을 기쁨으로 어떻게 바꾸게 될 것인지를 보여준다. 
요 14:27이하에서 기쁨을 평화와 연결시키는 것은 기쁨의 종말론적인 성격을 만들어 낸다.
요 11:15에서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 때 거기 있지 않은 것을 기뻐하셨다. 그 이유를 설명하신다: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하신대".
요이 1:4; 요삼 1:3에서 사도 요한은 믿음의 형제들이 진리 안에서 행하는 것을 기뻐했다.
계 11:10에서 카이로는 악한 즐거움을 나타낸다: "이 두 선지자가 땅에 거하는 자들을 괴롭게 한 고로 땅에 거하는 자들이 저희의 죽음을 즐거워하고 기뻐하여 서로 예물을 보내리라 하더라".
계 19:7에서 성도들은 어린 양의 혼인 잔치의 때가 되었기 때문에 즐거워 한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e)  바울 서신들은 기독교인의 기쁨은 슬픔과 고통과 근심 가운데서만이 얻을 수 있다는 역설적 의미를 증거하고 있다. 
진실로 이와 같은 사실은 이 기쁨의 능력을 확실히 증명해 주는 것이다.
① 이러한 기쁨의 원천은 단순한 지상적, 인간적 기쁨 너머에 있다. 
그것은 주 안에 있는 기쁨이며, 따라서 우리의 외부에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바울은 그의 독자들에게 계속하여 기쁨의 존재를 상기시켜 주고, 그 기쁨을 표현하라고 권면하고 있다(빌 3:1; 빌 4:4; 빌 4:10; 롬 12:12; 고후 6:10).
빌 1:15이하; 빌 1:18에서 바울은 동기에 상관하지 않고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기뻐하였다: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그러면 무엇이뇨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바울은 놀라운 비이기적 자세를 유지했다. 그는 어떤 자들이 그들 자신의 명성을 얻기 위해 전파하고 있는 것을 알았으나 이 전도자들의 동기에 상관없이 복음이 전파되고 있는 것을 기뻐하였다. 
믿음과 그것의 결과적 기쁨이 우리 자신으로부터 나오지 않기 때문에, 좋지 못한 동기에 의해 그리스도가 전파된 때 조차도, 바울은 확신과 기쁨을 지닐 수가 있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은혜로운 사역을 행해야 한다는 것이며 또한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공유해야 한다는 사실이다(빌 1:15-18).
② 고린도후서에서 바울은 기쁨을 들립시스(고통, 고난, 박해, 환난)와 직접적으로 대조시키고 있다.
바울이 편지를 기록할 때, 들립시스를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고후 2:4), 엔 퀴리오, 즉 "주 안에" 있는 기쁨인(빌 3:1) 자기의 기쁨을 모두가 함께 나눠 갖도록 하기 위해(고후 2:3) 썼다고 하였다. 
고린도인들의 삶은 수동적 자포자기 상태 또는 사망을 낳는 세상 근심(고후 7:9이하)에 의해서가 아니라, 순결한 믿음의 기쁨에 의해 지배를 받아야 했다. 
바울은 그들을 이전에 엄히 책망했었으나, 그의 권면이 결국 유익한 효과를 가져왔기 때문에 그들에 대하여 다시 안심하게 되었다(고후 7:13).
③ 바울은 빌립보서를 쓸 때 감옥에 있었다. 
당시에는 아직 자기의 재판의 결과를 알 수 없었고, 분명히 외로움을 느끼었을 것이다(빌 2:20이하). 그리고 충성스런 복음 전파도 위기에 빠져 있었을 것이다(빌 1:15이하; 빌 2:21). 또 다시 들립시스가 있었으며(골 1:24), 이것이 근심의 원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와 계속적인 기쁨의 근거 역시 있었다. 즉 그것은 빌립보인들이 복음에 참여함으로 인한 감사(빌 1:5)와 그리스도가 계속 전파됨으로 인한 기쁨이었다(빌 1:18). 
그리스도와 복음에 의해 속박을 당한 바울은 그의 독자들에게, 자기와 함께 기뻐하라고(빌 2;17이하), 또 염려를 버리라고(빌 4:6), 나아가서는 성령의 교제 안에서 한 마음을 품으라고 권면하고 있다. 
비록 바울에게 근심할 수 밖에 없는 까닭이 있고, 그가 곧 죽게 된다 할지라도, 그리스도가 그의 몸에서 존귀하게 되는 한(빌 1:20), 그게 무슨 상관이 있으리오!
이처럼 빌립보서의 기쁨은 계속적이고 "도전적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릎쓰는" 기쁨이다(K.Barth).(참조: 빌 2:17; 빌 4:4). 
이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힘은 그 자체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모든 것을 하나님께 아뢰는, 지칠 줄 모르는 기도를 통해 생성된다(빌 4:6; 참조: 살전 5:16; 골 1:11). 
그것은 복음의 세계적 확산에서(살전 3:9; 골 2:5), 그리고 복음을 전한 교회들의 왕성한 성장에게 그 힘을 얻는다(빌 4:10; 참조: 살전 2:20;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것은 주 안에서의 기쁨이다(빌 4:4).
④ 벧전 4:13에서 카이로는 고난과 영광에 관련되어 나타난다: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그리고 롬 12:15에서 관용은 우리에게, 우리 자신으로부터의 여유를 가질 수 있도록 해줌으로써 타인들을 긍휼히 여길 수 있게 해 준다. 다른 한편 고전 7:30; 고후 6:10에서 카이로는 우리에게, 현재의 기쁨과 슬픔은 이 생(生)에만 속할 뿐이며 우리의 궁극적 몫은 아니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준다.
(참조: H.Conzelmann; E.Beyreuther; G.Finkenrath). 
---------
ajgalliavw(21, 아갈리아오마이) 기뻐하다, 즐거워하다, 크게 기뻐하다. [성취된 바  넘치는, 억제/주체못할 기쁨으로]
1.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아갈리아오마이와 그 명사형 아갈리아시스는 70인역본, 신약성경 및 이들에 의 존하고 있는 유대와 기독교 저술가들의 저서에만 발견된다. 이 단어들은 세속 헬라어 아갈로와 아갈로마이 (호머 이래)에서 비릇된 후기 어형들이다. 아갈로는 `숭배하다, 경외하다, 존경하다, 영광스럽게하다'(Plato,  Aristotle ). 아갈로마이는 어떤 것을 '과시(자랑)하다'(Herodotus), `즐기다, 어떤 것에서 기쁨을 맛보다'(Homer), '황홀해하다, 크게 기뻐하다'(Herodotus)는 의미로 나타난다. 이것은 인간 전체를 사로잡는, 인간의 근본적 기쁨의 감정이다. 그리고 아갈로마이는 제의적, 아마도 황홀한 축제적 기쁨이다(Eur.Ba.157; Tro. 452).
신약성경에는 인간의 기쁨과 행복을 뜻하고 그 특성을 표현하는 세 개의 주요 단어들이 있다. 카이로는 신체적 안락과 안녕이 기쁨의 토대를 이룬다. 그러므로 이 동사는 사람들이 서로 만나고 헤질 때 주고 받는 인사로 사용한다. 이러한 인사는 건강 및 안녕을 바라는 표현이며, 사람들은 이러한 것들이 자기에게 있어 주기를 바란다. 유프라이노는 기쁨의 주관적 강정을 가리킨다.
아갈리아오마이는 기쁨과 만족의 외적 표현 및 공적 예배에서 맛보는 환희를 가리킨다. 이 단어는 `몹시(크게) 기뻐하다, 기뻐날뛰다'를 의미한다.
2. 70인 역본과 유대교의 용법 
(a)  70인 역본에서 아갈리아오마이와 아갈리아시스는, 길(기뻐하다, 기뻐함) 과 라난(기뻐 소리지르다)의 역어로 가장 많이 사용되었다. 이 단어들은 과거와 현재에 있어서 하나님의 구원 행위를 축하하고 찬양하는 제의적 축제의 기쁨을 가리킨다(예:시32:11). 이 단어들의 의미는 곧 공적 예배의 범주를 넘어 확대되었다. 아갈리아오마이는 하나님 앞에서 감사하며 기뻐하는 공동적, 개인적 태도 둘다 표현하게 되었다(참조: 시9:l4; l6:9; 21:l; 31:7; 35:27; 92:4).
이 기쁨은 과거의 하나님의 구원 체험에 대한 표현이며, 나아가서는 미래에도 하나님께서 신실하게 대해 주실 것을 바라보며 기뻐하는 것이다. 이것을 여호와께서 이미 보증하신 것으로 믿는 것이다(참조: 합3:18).
공적 예배의 기본 행위는 그대로 존속하지만 하니님의 전능한 행위에 대한 말없는 증거들. 즉 하늘과 땅과 산과 섬들과 같은 피조 세계까지도 기쁨에 싸여있으며, 이것들 모두 기쁨에 동참하거나 기뻐하리는 부름을 받고 있다(시l9:5; 89:12; 96:11; 97편 등). 하나님 자신도 이 기쁨에 동참하신다(사65:19). 바벨론 포로 기간과 그 후의 선지자들에 의하여, 비참한 상황에서 조차도 일어니게 되는, 자기 하니님에 대한 이스라엘의 기쁨은, 궁극적 구원에 대한 예견적 감사와 메시야에 대한 기쁨을 포함하는데까지 확대되었다(사61장). 히브리인들의 감사와 찬양의 태
도가 가장 심원한 표현에까지 도달한 것은 바로 이러한 종말론적 영항에서 였다. 마침내 아갈리아오마이는 종말론적 용어로 사용되었으며, 제의적 축제의 전형이 되는 마지막 때의 기쁨을 의미한다(참조:시96:11이하; 97:8; 126:2,5; 사25:9).
(b)  과거와 현재와 종말론적 미매에 있어서의 하니님의 구원 행위에 대한 지극히 큰 기쁨은 그후에도 계속 이어져 내려와 랍비 신학과 랍비들의 유대주의 신앙의 특색을 이루게 되었다(SB Ⅳ 2, 85 이하). 유대인의 전(全) 삶의 목표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었다. 기쁨은 이처럼 `하늘의 어떤 함창단의 선을과도 같은 유대 백성의 극적인 역사'를 수반하였으며, 예배식에서 그들의 신앙 생활의 주된 요소가 되었다`(E. Stauffer, Jerusalem  und Rom, 1957. l02).
(c)  랍비 유대교와는 대조적으로, 쿰란 공동체에서는 구원의 날이 이미 시작되었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찬송과 기도를 통해(특히 감사 두루마리[1QH]와 공동체 규정[1QS]의 끝 부분[10:1l]에서) 자비로써 그들에게 구원을 주시고 비밀들(Secrets )에 대한 통찰력을 부여하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였다.
3. 신약성경과 초대 교회의 용법 
신약성경에서 아갈리아오마이는 11회 사용되었다. 이 단어들은 신약성경에서도 70인 역본의 용법과 같이 사용된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차이점이 있다. 즉 구약성경에서는,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계속하여 도와 주셨고 또 지금도 여전히 돕고 계시는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확고한 신뢰로부터 지극한 기쁨이 일어난다. 메시야 도래시 하나님께서는 그의 마지막 구원 행위로써 모든 궁핍과 고통을 제거하실 것이다.
반면 신약성경에서는 이 기쁨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종말론적 구원 시대를 지금 이미 열으시고, 그리스도의 재림시에 이 구원을 영광스럽게 완성하실 하나님께로 향해 있다. 하나님의 구원은 항상 알리아-( )의 주제이다. 참으로 하나님의 종말론적 구원행위는 기쁨의 주제이다.
(a)  복음서에는 예수의 탄생 전에도 기쁨에 관한 기사가 있다. 주의 선구자가 태어났을 때 사가랴는 기뻐 노래하였으며(누가1:14), 엘리사벳의 태 속에 있는 아이조차도 기쁨에 동참하였다(누가1:44). 예수께서는 세례(침례) 요한의 빛 가운데서 잠시 즐거워하였던 경건한 이스라엘인들에 대해 언급하셨다(요한5:35). 찬양의 노래에서 마리아는 자기가 하니님의 구원 목표에서의 한 위치를 부여받았다는 사실로 기뻐하였다(누가1:47).
(b)  예수께서는 구원을 친히 가져오신 분으로서, 인간들에게 기뻐하라고 요청하셨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도 이 기쁨에 동참하셨다. 팔복은 다음과 같은 권고로 끝을 맺는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마태5:l2; 참조: 누가6:23) 구원의 때가 가까왔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영적으로 기뻐하셨다(누가10:21).
그러나 동시에 이 구원이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나고, 구원에는 심판도 포함되기 때문에 지혜있는 자들에게는 숨겨졌다(누가 10:21; 참조: 마태11:25). 아브라함(온전하게된 의인들 중의 한 사람, 히브리(12:23)도 구원의 때를 보고 기뻐하였다. 초대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구원 사역으로 인한 마지막 날의 택함받은 자로 자신들을 간주하였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과 장래의 재림을 기쁨의 근원으로 삼았으며, 또한 다윗의 기쁨을 기독론적으로 해석하였다 (행전2:26; 베드로가 시편16:10을 인용한 부분).
(c)  빌립보의 간수도 온 가족과 더불어 기뻐하였다(에칼리아사토). 그도 역시 믿음을 소유하게 되었고, 믿음과 세례(침례)를 통하여 마지막 날의 구원받은 공동체에 소속되었기 때문이다(행전16:34).
(d)  떡을 나누는, 종교 의식시의 식사에서 초대교회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재림을 바라보면서 기쁨으로 찬미하였다. 그들은 기쁨으로 찬미하였다. 그들은 기쁨으로(엔 아갈리아세) 성찬 예식을 거행하였다(행전2:46; 참조: J.Jeremiasa the Eucharistric  Words of Jeeus, 1966, 254).
(e)  베드로전서에서는 마지막 날의 고난에 개의치 말라고 교회에 권고하고 있다. 왜냐히면, 세상 끝날에 나타날 기쁨과 견주어 볼 때, 고난은 증요하지 않기 때문이다.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날 때 우리는 기뻐할 것이다(벧전1:6,8; 4:13).
(f)  요한계시록에서 세상 끝날에 다음과 같이 외치는 한 음성이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라고 신자들을 권고하고 있다(계시록19:7).
바울 서신에는 이 단어가 나타나지 않는데, 이는 때때로 카우카스다이(자랑하다)를 그 대신으로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g)  과거를 포함하며 또한 미래를 가리키는 축제적인 기쁨(festive  joy)는 이처 럼 신약 교회와 교회에 소속된 기독교인 개개인의 독특한 자세가 되었다. 마치 종말의 잔치(eschatological banquet,; 참조: 계시록19:7-9) 때와도 같이, 교회의 공적 예배는 기쁨으로 층만해 있었다. 기쁨은 과거에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성취된 구원을 통해 경험된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현재에 겅험하며 미래에도 경험하 리라 확신한다. 이와같이 바라볼 때 현재의 고난도 감소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 러한 고통이 우리를 무겁게 안박할 때조차도 우리에게는 역설적으로 기뻐할 수 있는 훌륭한 근거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기쁨은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인격에 근거를 두고 있다. 부활하시고 지금 현재 살아 계시며 장자 오실 주님이야말로  바로 우리의 모든 기쁨의 근원이 되는 것이다. 신약의 이러한 아가리아는 하나님의 구원행위에 대한 종말론적 기쁨을 표현한다.
(E.Beyreuther; Bultmann). 

==========
[시편1편...복있는사람들]
복 있는 사람은 악한 일을 행치 않으며 
죄인의 길에 서지도 아니하고 오만한 곳에 아니 서도다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복 되도다 묵상하며 사는 사람들 복 되도다 순종하며 사는 사람들 
여호와께서 여호와께서 함께 하리라 축복을 받을 자여
물가에 심은 나무가 그시절을 좇아 열매 맺으며 그 잎사귀가 시들지 않음같이 
그 하는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형통하리로다 그 하는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아멘 아멘
===
===
"이는 내 시랑하는 아들-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신 아버지여...독생하신 아들 하나님, 그리스도를 이땅에 보내사 나를 대속하시고 이 땅을 향한 아버지 뜻 이루시려 거듭난 참 믿는이로서 나를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님과 함께 보내신 분,  한량없이 영원무궁한 아버지 사랑-기쁨 깨달아 알게하시고 감사케 하시니, 날마다 더 새로이 열어주소서(항기쉬기범감 그 안에서)....나는 죽고 그리스도로 사는 삶, 날마다 타락한 사람(육체, 속 육신/죄성의 옛사람) 곧 옛사람 나는 죽어 사라지고 오로지 (넘치는 그리스도로 충만한) 거듭난 새사람(그리스도-사람)으로만 살기 원하오니...오직 그리스도만 남도록 전 존재를, 무엇보다도 속사람을 다루어 주옵소서.... 바로 오늘 지성(지각)-감성-의지-태도-지향을 새롭게 하여주사 시공을 초월하여 의식하는 모든 관계- 모든 장소-모든 순간마다 모든 만물 가운데 계신 분, 로고스(다바르), 말씀이신 하나님, 말씀하시는 그리스도께만 열려있어서 운행하시며-일하시며-행하시며-말씀하시며-이끄시는 그리스도를 참되게 알아채고 정확히 인식하도록 예민한 영적 지각과 분별-통찰력을 새롭게 발휘하게 하사 보고-듣고-깨달으며 주 보시기에 합당하도록 온전히 하나되어 순복하는 삶 이루옵소서....
===
오늘부터 시편을 공부합니다. 개인적으로 많이 기대하고 소망했던 시간이어서 제 안에 깊은 감사가 있습니다.
'시편'은 '예언의 노래'(대상25:1,2)로서 성령님의 감동으로 쓰여진 진리의 본질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편을 연구할 때, 아버지의 마음, 의의 길로 회복이 이루어 집니다.
전에도 부분적으로 나눴지만 본격적으로 이 위대한 진리의 본질을 깊이, 체계적으로 공부하는 것은 처음입니다.
먼저 시편의 처음, 1편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성경의 원리는 그 ‘첫 머리’, 곧 ‘장자’에 '본질'을 담는 것입니다. 
‘장자의 원리’는 성경의 아주 중요한 기초인데 시편 역시 그 처음 부분에 시편 전체의 길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아버지는 율법에서 ‘처음 난 것’, 첫 열매, ‘초태생’은 모두 ‘나의 것’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장성한 자들은 그런 말씀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시편 1:1-3)]
너무나 유명하고 열방의 교회마다 암송하다시피 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잘 안다는 착각을 합니다. ....우리의 착오와 함정은 익히 알려진 것들, 오랜 전통의 근거들을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런 것들 안에 진리의 부분들이 있을 터입니다. 그러나 진리란 아버지의 본래적인 영, 마음, 의의 구조여야 합니다.
유대인들이 가장 실패한 부분이 그것인데 자기들이 오랫동안 안다고 생각해온 구조를 진리라고 확신한 것입니다. ...아마도 우리는 이 시 1편의 진정한 영적 본질을 온전히 알았던 적이 없었을 지도 모릅니다. ((제 이야기입니다. 그동안 너무 익숙해서 잘 안다고 생각했던 이 시편을 다시 공부하면서 거의 모르고 있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문자적으로는, 사람의 사전적, 문자적인 이해는 가졌지만 아버지의 진정한 뜻을 영적으로 보지는 못했습니다. ...지금도 그 본질을 온전히 알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알고 싶어서, 알기 위하여 함께 공부해 보기를 원합니다.))
시편은 '영적인 노래'입니다. 이 시편의 '첫 머리'는 성경 전체의 가장 본질적인 ‘의인의 길’을 집약한 시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복’은 곧 ‘영생’이요 ‘구원’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창세 전에 아버지가 예비하신 유업을 누리는 자들입니다.
주목하십시오! 그들(복있는 자들)은 무조건 자기 열심만 가진 신앙인들이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악인들의 꾀’와 ‘죄인들의 길’과 ‘오만한 자의 자리’에 함께 하지 않는 삶입니다....그냥 문자적으로 읽으면 우리와는 상관이 없는 패역한 자들의 삶을 말씀하시는 것 같아 보입니다. ..우리처럼 이렇게 교회에, 신앙에 열심인 자들에게 ‘악인’이나 ‘오만함’은 어울리지 않게 느껴집니다. ..그런 느낌 자체가 아직 본질을 읽어내지 못했음을 알게 하는 척도입니다. ...이것은 모든 세대를 거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걷는 진리의 길에 대한 분별입니다....그것은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저는 이 '악인과 죄인, 오만한 자'의 의미를 성경 자체의 개념으로 공부하면서 이것이 바로 나의 모습임에 깊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런 자들의 길에 서 있다 함에 대해서는, ...앞으로 그것은 더욱 나누기로 하고..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 서 있는 자들은 반드시 그런 자들과 함께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영적 지경이 우리 안에 없어야만 영생의 복을 누립니다.  
그들과 함께 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의인의 길’에 서 있는 것입니다.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시편 1:6)]
그러므로 ‘복 있는 자들’은 아버지가 아시는 ‘의인들(짜디킴)’을 의미합니다. ‘인정하신다’의 히브리어는 ‘야다’인데 ‘실제적으로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안다고 하시는 '의인들'은 또 누구인가요? ...그냥 우리가 막연히 생각하는 그런 신앙인들인가요? ... 일반적으로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자들'을 말씀하시는 것인가요? ...우리는 이제 시편 공부에서 진정한 '의인의 길'을 배울 것입니다. ...그런 자들을 아버지가 아신다고 하시기에 진정한 '의인'의 실제를 깊이 연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충격적이지만!!) 역사서나 선지서, 시편등에서 이 '악인들'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리키는 것임을 압니다. 그들은 흔히 생각하듯 일부러 악한 짓을 하거나 아주 패악한 못된 종자들이 아닙니다. ...나름대로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려고 했던 자들입니다. ...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고 제사장, 선지자 같은 '주의 종들'입니다. ...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입니다. ... 그래도 하나님의 법, 의의 기준에 검증 할 때에 악을 행하는 것으로 판별되면 아버지가 모른다고 하십니다. ... 저는 이것이 가장 두렵습니다. ... 아주 좋은 예가 산상설교에 나옵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7:22,23)] ...여기 주님께서 ‘모른다’고 하신 이들은 신앙 생활을 안하거나 아주 형편없는 악한 자들이 아닙니다. ... 주님 말씀대로 그들은 외적으로는 정말 열심있는 사역자들이요 신앙인들입니다. ... 뜨거움으로 "주여, 주여"하고 주님을 부르는 자들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선지자의 삶과 병과 귀신을 성령의 능력으로 치유하는 자들이기도 합니다. ... 주님의 이름으로 정말 헌신적으로 사역을 하는 자들입니다. ... 그런데도 주님은 '내가 너희를 도무지 모른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들여다보노라면 [어찌보면!!] 아주 이상하고 혼란스럽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에서] 우리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은 [불법을 행하는 자라 하신] 그들이 우리와 다른 패역한 자들이겠거니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주님은 달리 보고 계십니다] 어쩌면 우리보다 더 뜨겁고 헌신된 종들일 수가 있습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의의 기준, 진리의 준거틀로 분별 할 때에  ‘불법’을 행한 자로 판명이 났기에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바로 시편에서 말하는 '악인들, 죄인들, 오만한 자들'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 이것이 두렵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 헌신과 열심이 진정한 진리의 기준에 합당한 것이 아닐 때, '불법'이 됩니다. ...이것이 엄중한 진리의 세계입니다. ... 진리의 세계를  사는이들... 그들은 우리처럼 세상=세상가치=이 세대 가치 풍조와 쉽게..., 세상처럼 쉽게 타협하지 않습니다. 그에 비해, (어쩌면) 우리는 좋은게 좋은 것이고 은혜 안에서 다 해결되고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다 용납하신다는 위대한 착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께서 말씀하시는 ‘불법’은 무엇입니까? .... 헬라어로 ‘아노미아’ (=아노미) 인데 ‘노모스’, 곧 ‘하나님의 법’을 ‘벗어났다’는 뜻입니다. 요한은 그것이 곧 ‘죄’(요일3:4...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라고 했습니다. ... 하나님의 기준, 공의, 말씀의 법을 벗어난 삶을 ‘악인’. ‘죄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배경은 2005년 전후 미국발 전지구적 금융위기 경험으로 인한 경제적 변화였던바] 코로나 재앙을 경험하고 난 지금에 와서 건강-재정-삶의 질적 저하를 피부로 느끼며 절감하기에...(심지어 일부 목회자/선지자라  자칭하는 자들까지도도 거기 가담하여 부추김으로써 적극 오도-옹호-동조함으로써 자기 배채우기에 급급하고 있는바) 세인들은 불분명한 의미로  그저 "뉴노멀new normal시대"로 들어섰기에 "나는~하련다, 내 인생 내껀데 누가 말려"  말하고 싶어하며, (그 근저에는 "심판하시는 하나님은 없다"하며 제소견에 좋아보이는대로, 그냥 [될대로되라식의] 흥청망청 소비지향주의에 빠져들어 극한 타락/방탕-방종/음란/간음/음탕/이혼/태아 살인/동성애-온갖 중독, 잘먹고-잘놀고-일안하고-잘쉬다가 배터져 죽으면 그만이요, 살만큼 살았으면... 자살하면 그뿐이라는 자기 방임 논리[내인생은 나의것이라는, 천상천하유아독존적 자기변명으로 살도록 꼬드기는 사탄마귀의 논리]에 생계유지 위한 매춘이 아니라 음탕 그 자체를 원하여 자기 몸을 굴리며 팔아넘김으로 [자포자기/영적 자살]버려짐/끊어짐을 자초하고 있음에도...혹자들도 덩달아 (저물가-저금리-저성장-고규제의 3저1고 기간의)경제적 변환기라거나, 테크놀로지 측면에서도 전환기를 맞았다는 측면에서 환호하며 그렇게 말하고 싶어하며... 교묘히 주님 주신 시간과 재물의 악용-남용-오용함의 낭비를 꼬드겨 함께 멸망당하기 원하나!!, 적어도 그리스도의 사람이라면, 주님 마음에는 그런 말은 없다..고 부인함이 당연합니다..도대체가 말이 안되는 것이기 때문이지요..거듭난 그리스도인에게는 normal개념이란 오로지 영존하시는 영생의 하나님이요 인자하심과 준엄하신(심판하시는)하나님이 계심을 알고 삶의 척도로 삼기에 불신세상과는 전혀  다르기 때문이지요....보십시요..노멀 = 노모스= 법 = 영원히 살아계시는 하나님이요 그분의 말씀, 계명인데..그 무엇이 뉴노멀이라는 겁니까!!...참되게 믿는이라면, 세상이 무슨 말하며, 어떤 의도로 말하고 있으며, 스스로도 무슨말 하는지 찬찬히 새겨보고 마음과 입을 지켜야할 것입니다))
...우리는 ‘의인’, ‘악인’을 문자적으로 일반적인 의미로 이해하고 있기에 이것에 대한 감각이 매우 둔합니다.
악인은 패역하고 우상숭배하고 하고 ‘적그리스도’로만 생각하는데 이 악인의 길이  바로 (어쩌면 지금 걷고 있는바) 우리의 길일 수도 있다는 것을 주목하고 분별해야 합니다. ...
우리 안에 온전한 진리가 없다면 말입니다.
그러므로 누가 하나님의 복, 영생을 누리는 자입니까? ...진리를 온전히 알고 그 길을 걸어 가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복있는 자들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시1:2)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시편을 매우 낭만적으로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 매우 심각하고 충격적이며 치밀하고 본질적입니다. ... 율법을 ‘즐거워 한다’든지 ‘주야로 묵상한다’는 말을 우리는 껍데기만 알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냥 우리가 지금 하는대로 성경을 암송하거나 큐티나 묵상하는 것이겠지 ..편하게 생각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 그런데, 그 말씀의 수준은 결코 그런 수준이 결코!! 아닙니다. .. 여호수아에게 주신 말씀에 의하면 그것은 ‘가나안(안식)’에 들어 가느냐 아니냐의 결정적 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 바로 ‘안식의 땅’에 들어 가는 것이 바로 ‘복을 받는 것’입니다. ...‘영생’이요 ‘구원’의 본질입니다.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수1:8)]
하나님의 말씀이 단순하고 쉽게 느껴지면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아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누가 진리를 단순하다고 말하는가요? ....그것은 세속에 물든 우리의 편리주의, 실용주의적 사고입니다. .... 그것이야말로!! 가장 성경에서 경계하는 ‘죄’입니다. ... 물론 진리를 그것을 꺠달은 이에게는 단순할 수 있습니다. ... 그러나 그것의 본질은 매우 깊고 오묘하며 측량 할 수 없는 아버지의 의, 길, 마음을 담고 있는 지혜와 지식입니다(롬11:33,34) ...아버지의 진리는 깊은 비밀이며 ‘엄중한 것’입니다. ... 그것은 우리의 생명을 좌우하는 것입니다.
시편의 '마지막'은 150편입니다. 
[할렐루야 그의 성소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의 권능의 궁창에서 그를 찬양할지어다(시편 150:1)] ...시편의 시작은 진리의 길을 걸어 가는 의인들의 삶이고 그 마지막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완성된 영생의 풍경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처음과 나중'의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진리'라는 히브리어 '에메트'는 알파벳의 가장 처음인 '알레프'와 중간인 '멤', ..그리고 마지막인 '타브'로 구성된 것입니다. ... 상식적인 말이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진리를 설명하는 중요한 것입니다. .."아멘 = 아만...= 진실로"...그 바탕은 에무나 곧 진리 말씀을 시종일관 그대로 이루시는 하나님, "말씀하신 바를 반드시 이루시는 "신실과 참이신 하나님"이 반드시-틀림없이 "그분의 입이 말씀하사 발하여진 바로 그대로 이루신다"함입니다. ... 반드시 이루시는 하나님의 입의 말씀 , 특히 "심판"에 관련된 맹세-언약 말씀은 매우 준엄
그래서 1편과 150편은 같은 본질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문자적으로는 전혀 다른 시처럼 보입니다. ...1편은 '복있는 자'에 대한 것이고 150편은 하나님의 성소에서 '찬양하는 자'입니다. ..그런데 문자와 수건을 벗기고 그 안의 '진리의 영'을 읽어내는 이라면 이것이 같은 본질임을 간파하실 것입니다. 
여기서 ‘그의 성소’, 곧 ‘하나님의 성소’에서 ‘찬양함’이 '영생의 축복'입니다. 
...당연히 '찬양한다'는 것은 우리가 아는 찬송가나 복음성가를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 물론 노래로 찬양하고 예배하는 것은 중요한 것입니다...그러나 성경이 , 특히 시편의 찬양은 우리의 생각과 다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성소에 거하는 종들, 아버지가 아신다 인정한 거룩한 의인들이 '영과 진리로서 경배하는[하나되신 그리스도를 참되게 사는] 삶'을 가리킵니다. 그것이 '찬양'입니다.
시편에서 '찬양', '감사', '즐거워 함', '기도'라는 의미들을 배울 것입니다.  
나님의 성소에서 찬양하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 이제 시편을 공부하면서 아시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말씀하시는 하나님, 태초부터 계신 참되신-신실과 참 그 자체인, 반드시 이루어지는 말씀, 곧 히브리어 "다바르"요, 헬라어로 로고스 ...이 말씀을 붙들어(븉좇아) 하나 됨(=영접함 ..이로 인해 TUQ안으로 들어가 하나로 삶)을 "다바크"라 하고, 그로 인해 걸어가는 인생 광야를 "미드바르"라 하며, 그 때 걷는 발걸음마다 데비르(드비르 = 주님 계신 성소, 곧 그분의 거처/집에 거함) 됨 경험하며, 그 때 그분은 참 목자로서, 그대는 그분의 양으로서 그분의 도베르(목장) 안에서 삶을 살고 있을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성소에서 찬양함....이것이 창세 전에 아버지가 예비하신, 정하신 가장 신령한 복(엡1:3)입니다.
[우리로 그 아들 안에서 (그분의 짝-아내-신부 됨에 합당하도록) 흠이 없는 거룩한 존재들이 되고 그 은혜의 영광을 깨닫고 찬송하는 자들(엡1:4-6)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달아야 우리 삶에 영적 혁명이 일어나고 불법 안에서 열심이 아닌 '완전한 진리'를 사모하는 갈망이 샘처럼 터질 것입니다.
여기 150편 1절에서 시편 기자는 그냥 ‘성소’가 아니라  ‘그의 권능의 궁창’에서 찬양한다고 선포했습니다. 
...성경의 중요한 문법은 같은 개념을 병렬적으로 나열하여 그 깊이를 더하는 것인데  특히 시편이 병행구조로 된 구절들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성소’와 ‘그의 권능의 궁창’은 동일한 개념입니다. 
‘권능’은 히브리어로 ‘오즈’입니다. ((하나님의 권능은 이루시는 권능[코아흐 = 헬라어 뒤나미스 = 그리스도를 살며 공급하는 하나님의 능력]와 더불어 보호하고 지키시는 하나님의 권능[=오즈...그분의 하늘 보좌가 있는 하늘 성소, 처소, 거처 = 집, 목장 개념...영원 안식처/피난처...불의 방어벽-요새/산성-영원한 방패/영원 반석]가 있습니다))
... 그래서 ‘오즈의 마법사’가 나왔는지는 모르나 하나님의 ‘능력, 위엄’을 나타내는 것인데. 이런 단어들이 우리에게는 여전히 문자적 개념입니다.
.... 그것이 실지로 무엇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궁창’은 "하늘 궁창" ‘라카아’인데 창세기 1장 8절에 처음 나옵니다.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창세기 1:8)]
‘궁창’이 ‘하늘’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성소’에 있는 자들은 ‘하늘에 거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왕국은 하늘 + 땅에서 이루어지도록 예정하셨습니다...하늘에서는 아버지의 뜻이 이미 이루어졌고, 주 예수님은 땅에서도 아버지의 뜻을 이루러 오셨습니다...즉 하늘 왕국(=천국)에 합당한 자라야 땅에서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자격이 있게 되고, 이를 위해 이 자격요건을 공급하시려고 십자가 대속의 죽음을 통해 부활생명 얻도록 예정하신바, 거듭난 참 믿는이들을 부르셨고 그들의 이름을 하늘에 생명책에 기록해 두셨으며, 부활하신 날 밤에 오셔서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 말씀하시며 당신께서 받으신 부활생명의 성령을 분배해 주신 그 바텅위에 더하여!! 이 땅에 보냄 받은 사명 다하라고!! 권능의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파하는 사명 다하도록 위로부터 내려보내 주신 것입니다..))
 ...바로 ‘하늘에 속한 자’, ‘하나님 나라의 백성’, 계시록에서 구원의 완성을 나타내는 비전으로 나오는 하늘 보좌 앞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계7:14,15, 22:3,4)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 땅에서, 사람들에 의해 세워진 신앙, 조직과 예배의 구조가 아닙니다. 아버지의 위엄과 능력이 있는 그 보좌 앞에서, 그 얼굴 앞에서 섬기는 하늘 백성이 되는 것이 진정으로 찬양하는 자들입니다.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에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그들의 이마에 있으리라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심이라 그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계22:3-5)]
계시록의 마지막 완성, 새 예루살렘의 비전이 바로 그의 성소, 권능의 궁창에서 찬송하는 종들의 모습입니다. 시편의 완성은 이것을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 
그리고 이것은 죽은 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의 영적 실존 가운데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그 자체입니다. ... 이것이 '주의 영광을 보는 것'이고 '하나님의 임재'를 만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편을 단지 우리의 영적인 어려움에 위로와 소망을 주는 낭만적이고 감성적인 영적인 교훈 정도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진정한 구원의 완성을 향해 걸어 가는 의인들의 여정에 대한 깊은 비밀입니다.
=======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시편 1:3)]
이 시 1편에 나오는 구절은 우리가 잘아는 익숙한 것입니다. .. 그냥 대강 읽어도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 하실 것입니다. ...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것이 아니라 성경 전체에서 구원의 가장 본질적인 비전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시편 기자가 말하는 '복있는 자'인  ‘그’는 히브리어 성경에 ‘하이쉬’라고 쓰여져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성경은 번역된 것이고 원문은 히브리어로 쓰여져 있습니다. ... 우리 번역에는 그냥 ‘그’라고 되어 있지만 원문에는 정관사 ‘하(영어의 the)’가 붙은 ‘이쉬’, 곧 ‘그 사람’입니다. ...히브리어 '이쉬'는 '남자'를 가리키는데, 히브리 성경에서 '그 남자'는 그냥 사람의 성별이 아닌 '영적인 구별'을 나타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성경을 그냥 문자나 우리의 개념으로 읽으면 안됩니다. ..그것이 가진 본질을 읽어내야만 진리에 접근하게 됩니다. ... '하이쉬(그 남자)'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표적인 언어입니다.
히브리 성경에서 정관사가 붙으면 그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의미를 나타냅니다. ... 일반적인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특별히 주목하는 ‘거룩한 의인’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형상을 닮은 자들입니다. 구약 시대의 진리의 길을 걸어간 의인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예표들입니다.
[대제사장 여호수아야 너와 네 앞에 앉은 네 동료들은  내 말을 들을 것이니라 이들은 '예표의 사람들'이라 내가 내 종 싹을 나게 하리라(슥3:8)]
스가랴 선지자 때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많은 믿음의 사람들을 아버지는 ‘예표의 사람들’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종인 ‘싹(메시아 예슈아)’의 예시인 것입니다.
....복있는 그 사람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은 자로서 ‘철(사시,절기)’을 따라 열매를 맺습니다. 이것 역시 아주 아주 깊은 영적인 개념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계시하는 '절기(모에드)'와 연관되는 것이지만 그것을 다루다가는 너무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해서 절제하기로 합니다. ...진정한 '의인들'은 '절기의 본질'을 알고 그것의 열매와 추수에 이른 자들입니다. 왜냐하면 절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의 본질을 계시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개념들을 알지 못하면 그냥 '물가에 심겨진 나무'처럼 늘 푸르른 영혼이구나.. 그런 정도의 감성적인 해석을 넘지 못할 것입니다. .. 그리고 지금 우리가 그 정도에 머물러 있구요. ...우리는 이것이 역시 계시록의 마지막 비전에 나온다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또 그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계시록 22:1-2)]
이제 감이 잡히시는지요? ...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나오는 ‘진리의 생수(물가)’를 먹고 ‘달마다(철따라)’ 열매를 맺는 '생명나무들'이 바로 시편 1편의 ‘물가에 심기운 나무들’입니다. ...이것은 진정한 생명의 근원, 그 나무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의 형상을 가진 자들입니다. ...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완성과 연결되는 영적인 그림이요 예언입니다. ... 이 '축복의 지경'이 열려야 진정한 '하나님 나라의 본질'에 들어 서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런 구원의 비전, 완성의 그림들이 너무나 부족합니다. ... 그래서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었으니 이제 열심히 신앙생활 하면 된다...는 정도의 생각을 넘지 못하는 것입니다. ... 아버지의 구원의 길은 깊고 위대하며 놀랍도록 거룩한 여정입니다. ... 이것을 아는 것이 '아버지의 마음'을 아는 것입니다.
 시편이 구원의 본질을 예언적으로 노래한 것임을 주목해야 합니다. ... 그동안 이해해 오던 시편에 대한 선입견을 버리고 공부를 해야 합니다.
그 다음 구절을 다시 살펴 보십시오.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에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계시록 22:3) ]...느껴지는 것이 있으신지요?
보좌로 부터 나온 '생수의 강가(물가)'에 심겨진 나무들, 그 진리를 흡수하여 때를 따라 열매를 맺는 이들, 아버지 얼굴 앞에서 경배하는 자들에게는 다시 '저주'가 없습니다. 이것이 시편이 말하는 하늘의, 하늘에 속한, '복이 있는 자'입니다.
‘다시 저주가 잆다’는 것은 무엇을 생각하게 하는지요? ... 그것은 ‘에덴의 타락’으로 인한 ‘저주’가 다시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 저주로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아담은 동산에서 추방되었습니다. ..히브리 성경에는 '하아담'이라고 쓰여있습니다. .. 참으로 우리는 이런 성경의 일점일획을 놓치면 안됩니다.
지금까지는 어쩔수 없었다 해도 이제는 주님 말씀대로(마5:17-19) 정확한 진리의 길을 추구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로 전락하고 맙니다.
이미 우리가 창세기 공부에서 깊이 탐구했지만 ‘에덴동산’과 ‘아담’은 ‘성소’와 거기서 예배하는 ‘제사장’에 대한 계시입니다. ... 이것은 이제 신학자들도 일반적으로 말하는 것으로 거기서 추방된 것이 '저주'입니다. ...아버지의 보좌, 임재, 얼굴 앞에서 에덴의중앙에서 흐르는 그 생수( 물가)에 심겨진 나무에서 쫓겨나는 것입니다. ...이제 그 저주는 사라지고 다시 ‘그의 종들’이 생명수를 먹는 물가에 심기운 나무들이 되고 진정으로 하나님과 어린 양을 섬기는 경배가 회복이 됩니다. ... 이것이 바로 ‘그의 성소’에서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 회복이 일어날 때 비로서 진정으로  "할렐루야!"를 소리 높여 외칠 수 있습니다. ... 그것을 '찬송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시편의 주제입니다.....타락한 아담(이스라엘, 교회)이 다시 ‘에덴의 성소’, 곧 ‘영과 진리의 경배’를 회복하는  치열하고 뜨거운 갈망과 여정입니다.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시27:4)]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시84:1,2)]
시편 기자들의 가장 큰 갈망과 노래는 ‘하나님의 집(성소)’에서 온전한 예배를 드리며 사는 그것입니다. ... 너무나 자주 읽은 구절들이라 감동의 깊이가 별로 없을 것 같은데 이것이 진정한 구원의 본질입니다. ... 이제 시편을 공부하면서 그것이 무엇인지, 그 영적인 비밀의 감격이 무엇인지를 깨달아 가기 소망합니다.
우리의 묵표는 시냇가에 심겨진 아버지가 기뻐하시고 주목하시는 ‘그 한사람(하이쉬)’,  그 ‘의인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인의 길을 걸어 갈 때, 비로소 진정으로 ‘할렐루야’를 외치게 됩니다.  성소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 전에는 기뻐 뛰고 큰 소리로 예배하고 찬양한다고 하지만 아버지가 "내가 너를 모른다"라고 하실 수 있습니다. 저는 그것이 가장 억울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스라엘처럼 열심은 대단한데 우리를 모른다고 하시고 심판을 받는다면 얼마나 억울한 일인가요? 
그러나 누구도 우리가 가진 이 영적 기초가 아버지 앞에서 심판의 대상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 확신이 믿음이 좋은 것이라 착각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믿음은 심정의 확신이 아닙니다. 진정하고 온전한 진리의 반석 위에 서는 것입니다.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그들의 이마에 있으리라(계시록 22:4)]
보좌로부터 나온 그 생명의 진리를 먹고 자란 그 나무들’ 곧 ‘하나님의 집에 심겨진 나무들’(시92:13)은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자들입니다. 
이것 역시 시편의 가장 중요한 주제입니다.
다양한 시편의 저자들이 공통적으로 가구한 내용이 ‘주의 얼굴을 보기를 원합니다’라는 것입니다.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뵈오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시17:15)]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사 복을 주시고 그의 얼굴 빛을 우리에게 비추사 주의 도를 땅 위에, 주의 구원을 모든 나라에게 알리소서(시67:1,2)]
[주의 얼굴을 주의 종에게 비추시고 주의 율례로 나를 가르치소서(시119:135)]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내용이 ‘주의 얼굴을 보는 것’에 대한 간구입니다. 계시록 22장은 이것이 역시 마지막 구원을 이룬 자들의 영적인 실제로 계시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진정 ‘주의 얼굴을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온전히 알지 못합니다. 그냥 막연히 한 시대의 유행처럼 주의 얼굴을 보게해달라고 기도하고 찬양할 뿐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차원이 다릅니다. 진정 주의 얼굴을 봐야 ‘하늘에 속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앞으로 시편 공부에서 이 부분 역시 깊이 공부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육신에 속한 ‘부분적인 것’을 넘어서 ‘온전한 것’, ‘장성한 자’의 수준에 이르면 ‘주의 얼굴과 얼굴 마주 대할 것’(고전13:12)이라 했습니다. 
주의 얼굴을 보는 영적 수준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것이야 말로 진정한 ‘사랑(아가페)’에 이른,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른 자들의 영적인 모습입니다. 
이들이 바로 하나님이 찾으시는 ‘하이쉬(그 한 사람)’입니다. 신약에서는 ‘아들의 형상을 본 받은 자’(롬8:29)를 가리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을 아주 쉽고 가볍게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함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5:48)고 하셨습니다.  
아버지의 수준, 형상, 이름, 얼굴, 유업을 가진 자가 되어야 진정한 ‘자녀(아들)’입니다. 그 모델은 단연 우리주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시편의 본질은 ‘그리스도의 형상’입니다.
====
모든 말씀이 그렇지만 시편 역시 그 배경과 기초적인 지식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 지식이 없이 각자 취향과 영적인 도움과 위로가 되는 것을 취해서  유익을 얻는 편입니다.
시편은 그냥 계시로 한번에 되어진 것이 아니라 많은 시간과 공간을 거쳐서 믿음의 의인들에 의해서 편집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영감으로 지은 수많은 시들이 있습니다.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오직 아버지의 얼굴과 진리를 추구했던 그들의  성령 안에서  드린 기도, 찬양, 고백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시편은 그런 것들 중에서 편집자들이 의도적으로 취하고 분류하고 편집한 것입니다.
가장 많은 것은 다윗의 시지만 모세의 시도 있고 솔로몬, 아삽, 고라, 무명 시인들의 시도 많습니다.
아마 모세의 시는 출애굽 여정 가운데 기록 되었고 계속 전승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시는 주로 '기도'의 형태를 가집니다. 
모세가 처했던 상황들은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고 패역했던 광야의 시간이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그의 시를 연구할 때는 광야의 사건들, 이스라엘의 영적인 상황이라는 배경을 깊이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다윗은 너무나 당연하구요.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이 시들을 여러 시대에 걸쳐 편집되어 지금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수많은 많은 시들의 문서들을 망라해서 누군가가 편집한 것인데 무작정 한 것이 아니고 성령님의 감동으로, 지혜 가운데 '의도적인 편집'이 되어진 것입니다.  
그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성경은 무조건 하늘에서 부어지고 쓰여진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감동 안에서 믿음의 의인들이 '원소스들(original sources)'을 그 시대의 영적 상황을 배경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150편이나 되는 이 시편들을 누가 왜 편집한 것일까요? 우리가 본격적으로 시편의 비밀 가운데 들어 가기 전에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저자의 의도도 모른 채 해석을 하는 것은 어린 아이 수준이고 아전인수가 되기 쉽습니다. 
시편은 한권의 책이 아니라 5권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그것은 '토라(모세 오경)'처럼 다섯 권으로 의도적으로 분류한 것입니다. 
실제로 시편은 토라와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이 다섯권은 토라와 영적인 본질이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시편의 편집자들은 명확한 의도를 가지고 있음을 연구하면 할수록 깨닫게 됩니다.  
먼저 히브리 성경에서 시편이 위치하는 부분을 알아야 합니다.  
현재 우리가 갖고 있는 구약 성경은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39권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본래 '히브리 성경의 순서'를 따른 것이 아닙니다. ‘70인역’이라는 기원전 3세기 중엽에 구약을 헬라어로 번역한 성경의 배열을 따른 것입니다. 
우리는 히브리성경의 순서가 아닌 이 '칠십인역'의 배열을 취했는데 아무래도 초대교회가 로마 제국으로 확산되면서 유대적인, 히브리적인 뿌리와 단절하면서 의도적으로  그렇게 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의 성경 배열은 매우 헬라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시편을 이해하려면 원래 히브리 성경, 구약의 순서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성경의 순서를 정한 것에 영적인 의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현존하는 히브리 성경의 순서를 편집하고 배치한 대표적 인물을 유대인들은 ‘에스라’로 생각합니다. 
그와 함께 120여명의 지혜로운 현인들이 바벨론 포로 이후에 회개하는 영으로 성경을 재정립하고 ‘토라 포션’과 같은 연구의 구조들을 만들어 냈다고 믿습니다. 
그들의 작업에 성령이 주도적으로 함께 했다고 합니다. 저도 그럴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이에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떠는 자가 사로잡혔던 이 사람들의 죄 때문에 다 내게로 모여오더라(스9:4)]
여기 이스라엘의 죄를 통한히 여기는 ‘말씀으로 인해 떠는 자들(하레드)’이 에스라와 함께 새롭게 성경을 정립한 그룹의 힌트 일 수가 있습니다. ..후에 이들에게서 '바리새파'가 나옵니다.
선지서를 면밀히 연구하면 성전의 회복은 ‘말씀의 회복’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는 선지자들을 통해서 그것을 수없이 말씀하셨지만 유대인들도 우리도 그것을 깊이 읽어내지 못했습니다. 
에스라나 깨어 있는 의인들은 그 말씀을 듣고 순종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가장 심혈을 기울인 것이 바로 성경을 다시 재정립하고 연구하고 순종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다시 정립한 히브리 성경의 구조가 지금 히브리성경의 순서입니다. 여기엔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믿음의 의인들의 깊은 회개와 영적인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그 순서는 먼저 ‘모세 오경’, 다음으로 ‘예언서’인데 그것은 ‘전기 예언서’와 ‘후기 예언서’로  나누어 집니다. 
전기 예언서는 뜻밖에도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 '열왕기'가 들어 갑니다.  
이 히브리인들은 우리와 달리 그 성경이 '예언적인 기록'이라고 믿은 것입니다. 우리 성경에서 사무엘이나 열왕기가 상,하로 나누어졌지만 그것은 70인역의 구분일 뿐입니다. 히브리 성경은 사무엘, 열왕기가 각각 한 권씩으로 되어 있습니다. 
70인역은 아마도 분량이 많아서 그것을 구별한 것인 것 같은데 그런 편리주의 실용주의가 헬라의 대표적인 개념입니다. 
지금 우리의 성경에 나누어져 있는 장과 절 역시 후대에 되어진 것입니다. 
그것은 편리한 부분이 있으나 말씀의 흐름을 의도적으로 단절하는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본래 영적으로 이어져 있는 말씀을 사람의 의도로 구분하여 다른 것처럼 인식하게 만들었습니다.
이제 장성한 자들은 이런 부분에 눈을 떠야 하고 외적인 구조들에 이해서 진리의 생수가 막히는 것에 대해 분별하는 감각을 가져야 합니다.
아버지의 진리, 그 뜻을 아는 것에는 아주 예민하고 진지하고 세밀하게 분별하며 적용하는 (그리스도의 짝이요, 그리스도를 사는 그리스도-사람인) 심각한 '하이쉬'들이 되어야 합니다.
'후기 예언서'는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그리고 12개 '소선지서'가 포함됩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시편'이 나옵니다. 시편은 율법, 예언서 다음에 위치합니다.  이런 흐름을 주목하십시오.  (여기에 욥기나 잠언이 포함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이 '역사서'인데 '에스라서'와 '느헤미야'가 한권으로 되어있고 뜻밖에도 '다니엘'이 거기 포함됩니다. 
그리고 가장 마지막에 '역대기'가 한 권으로 되어 있습니다. 
히브리 현인들은 이런 순서를 따라 성경을 읽고 연구하는 것이 진정한 '바벨론의 회복', '새 예루살렘의 회복'으로 의도했을 수 있습니다.
모세의 토라(율법)은 하나님의 법, 의를 다룹니다.  그것을 온전히 깨닫지 않고 순종하지 않는 것이 ‘죄(불법)’입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이라는 우상과 흑암의 지경에 포로로 사로잡혀간 것은 바로 이 '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편 앞에서 ‘예언서’인 사무엘, 열왕기, 그리고 선지서들이 있는데  모두 ‘이스라엘의 죄’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역시 하나님의 법, 율법을 깨닫지 못하고 순종하지 못한 '불법'이 무엇인지를 극명하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시편 역시 처음부터 이 부분을 강하게 강조하고 끝까지 경고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시편 1:1-2)]
이 악인들, 죄인들, 오만한 자들이 바로 율법을 알지 못하는 '불법의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런 자들의 길은 외적으로 경건의 모양과 열심을 갖추어도  '알지 못한다(인전하지 않음)'고  말씀 하시는 것입니다.
시편 역시 바벨론 포로 이후 깊고 치열한 회개의 영을 가진 의인들에 의하여 편집의 과정을 거쳤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진정한 의인들이, 여호와의 집, 성소, 진리의 물가에 선 나무들임을 처음부터 강조합니다. 시편은 전체가 바로 그런 의인들의 치열한 삶의 간구를 기록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영적인 배경을 간과하기에 시편의 본질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감성적인 접근을 주로 해왔던 것입니다.
시편의 주제는 두렵고 떨림으로 ‘여호와의 율법으로 사는 자들’에 대한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을 '토라'처럼 '다섯권'으로 분리한 것입니다.  시편을 토라와 깊이 연관하여 연구하지 않으면 본질을 놓칠 수가 있습니다.
율법에 대한 깊은 지식, 순종이 있어야 다시는 이방에 포로로 끌려 가지 않는다는  회개와 통회의 영이 시편을 그런 위치에 배열한 것입니다.
그리고 히브리 성경의 마지막은 역대기입니다.
아담, 셋,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 에녹, 므두셀라, 라멕, 노아, 셈, 함과 야벳은 조상들이라(역대상 1:1)
역대기의 시작은 아담으로부터 시작되는 족보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회복이 창조의 근원적인 회복, '에덴의 회복'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에덴의 회복이 진정한 '새 예루살렘'의 완성입니다.
여기 역대기에  특이한 점들이 있습니다... ‘가인’과 같은 범죄한 자의 족보는 나오지 않습니다.
특이한 것은 사무엘서와 열왕기에서는 이스라엘의 범죄의 근원에 다윗과 솔로몬을 포함시킵니다.
그들의 죄가 이스라엘이 남과 북으로 분열되고 성전을 건축하지만 결국 이방에 사로잡혀가는 원인이 됩니다.
그러나 역대기에는 특이하게도 다윗과 솔로몬, 그들의 죄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다시 가져 오려는 다윗의 열정을 아주 자세히 기록합니다.
그리고 성전에서 섬기는 제사장, 파수꾼, 찬양하는 예배자들을 재정하고 세웁니다.
성전에 있는 자들, 예배의 회복, 보수하고 파수하는 자들의 회복. 그리고 나서 언약궤를 시온으로 가져옵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언약궤와 제사장, 성전에서 섬기는 종들이 없이는 ‘하나님의 성소’, 곧 ‘성전’을  지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솔로몬이 다윗이 유지를 받들어 성전을 건축하는 열심과 과정을 아주 자세히 다룹니다.
그리고 역대기의, 히브리성경의 마지막 구절을 보십시오.
[바사 왕 고레스가 이같이 말하노니 하늘의 신 여호와께서  세상 만국을 내게 주셨고 나에게 명령하여 유다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너희 중에 그의 백성된 자는 다 올라갈지어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역대하 36:23)]
이것이 역대기의 마지막 내용입니다. 
바벨론에서 돌아와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는 비전을 마지막으로 기록함으로 성경을 읽는 본질이 무엇인지 제시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전의 회복'입니다.
역대기의 시작인 에덴의 아담의 족보, 첫 창조와 마지막 완성이 곧 '새 예루살렘', ‘하나님의 성소'가 되는 것임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 구약 성경 전체의 아버지가 보여주신 그림과도 같습니다.
계시록의 마지막 비전도 ‘새 하늘과 새 땅’이고 ‘새 예루살렘 성전’의 회복입니다.
그런데 왜 역대기 기자들은 다윗이나 솔로몬의 죄를 기록하지 않았을까요?
바로 그 앞에 나오는  ‘시편’이 그 답입니다.
시편은 바로 사무엘, 열왕기에서 보여지는 이스라엘의 불법과 죄에 대한 ‘회개의 본질'입니다. 
‘악인들’, ‘죄인들’, ‘오만한 자’의 위치에서 ‘여호와의 율법’을 깊이 깨닫고 순종함으로 온전히 의의 길을 걷는 회복의 여정을 다은 것이 바로 시편입니다.
그래서 히브리 성경의 편집자들은 시편을 그 중심에 배치한 것입니다.
시편은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성전으로 건축되는 비밀을 담고 있습니다.
이 배경을 가지고 시편을 본격적으로 공부할 때, 우리는 진정한 '하나님의 성소'에서 찬양하는 거룩한 의인들이 될 것입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전 3:16,17)]
그래서 시편의 기자들은 한결 같이 ‘성전’을 사모하고 거기에 거하기를 심령이 쇠하기까지 사모한 것입니다. ...우리가 이 시편의 본질을 알 때 진정한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는 거룩한 백성으로  세워질 수 있습니다.
다윗을 중심으로 한 시편의 주인공들은 거의 죄, 환난, 고난 속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어서 회개하는 자들입니다....오직 하나님의 능력과 도움, 진리 안에 거할 때만이 그것을 이기는 자들이 됨을 처절하게 가르칩니다. ...우리는 시편을 통해 그것을 깨닫고 변해야 합니다.
===

....이제는 '시편'은 어떤 것인지를 공부하고자 합니다. 그냥 자기 감동에서 나온 찬양이나 기도, 시만은 아니라는 것은 대강 알지만 도대체 어떤 영적인 메카니즘에 의해서 시편들이 쓰여지고 구성되었는지 정확히 손에 잡히지는 않으실 겁니다.

[여호와께서 다윗을 모든 원수의 손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신 그 날에 다윗이 이 노래의 말씀으로 여호와께 아뢰어(사무엘하 22:1)]

지금 읽은 말씀은 다윗이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고 '노래(찬양)'한 것'인데 그것이 '시편'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잘 살피면 시편의 구조를 이해하는데 매우 유익할 것입니다. 

여기서 다윗의 '모든 원수'는 '블레셋의 거인족들'(삼하21:15-21)입니다.  

'블레셋'은 성경에서 유일하게 '할례 받지 않은'(삿14:3, 삼상17:26, 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이방인'들입니다.

성경을 온전히 공부하려면 이런 표현들을 무심히 지나치면 안됩니다. 이방인들은 모두 할례받지 않은 자들인데 '블레셋'만 그런 이름으로 부르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모든 성경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에 이르는 지혜'(딤후3:!5)임을 잊으시면 안됩니다. 

'블레셋'은 진정으로 '심령의 할례'를 받지 않은 자들에 대한 상징인 것입니다. 그 블레셋 족속들 중에서도 이 노래와 시는 '거인족(라파)'을 이긴 것에 대한 것입니다.

히브리 성경에는 정관사를 붙여서  '하라파'라고 씀으로 그 거인족들이 어떤 영적인 의미를 가짐을 나타냅니다. 

이들은 이스라엘 10지파 정탐꾼들이 '악평'을 하게 한 그 '네피림의 자손들'(민13:32,33)에 해당되는 족속입니다. 

민수기 역시 '한네피림'이라는 어느 특정한 의미를 두고 있습니다. 그것은 창세기 6장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당시에 땅에는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로 들어와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은 용사라 고대에 명성이 있는 사람들이었더라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창6:4,5)

왜 시편의 의미를 공부하는데 이 말씀을 연결하는지 아시는지요?  

시편의 대부분은 다윗이 말하는 '모든 원수들'들과의 관계에서 나온 기도, 찬양들입니다.  

특히 다윗의 시에는 이 '원수들'이 시편 1편에서 이미 나누었던 '악한 자', '죄인들', '오만한 자'들이기 때문에 이런 성경의 영적 본질을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표면적이고 문자적인 것만 보면 진정한 시편의 본질과 그것으로 거룩한 의인이 되는 것에서 실패할 수 있습니다. 

위의 말씀은 다윗이 이긴 '모든 원수'인 '네피림'의 '근원'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자기들이 좋아하는 것'(창6:2,3)으로 아내를 삼아서 생긴 족속들입니다. 이것을 주목하셔야 합니다.  자기들 보기에 '아름답다'(토브)고 여기는 그것에 취해서 아내를 삼았는데 그 결실이 '거인족'입니다.

네피림의 히브리어는 '네필'인데 그것은 '추락', '타락'을 뜻하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외적으로 장대한 거인들이라는 것에 주목하지만 성경은 하나님의 기쁘시 뜻(히브리어 토브)가 아닌 자기들이 원하는 것, 자아의 열망에서 추구하는 모든 것을 '타락'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죄악의 관영함'이었던 것입니다.

다윗의 모든 원수들. 사울, 압살롬, 아히도벨, 블레셋 등 모든 세력들은 바로 이 영적 구조를 가진  '육신에 속한 자'들입니다. 곧 오늘 우리의 모습을 계시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그들과의 관계 속에서 탄식하며 하나님의 얼굴과 구원,  뜻을 구하는 기도를 했는데  그것은 자신 안에 있는 영적인 실존이기도 합니다. 

그 원수들, 악한 자들의 공격과 지배를 다윗은 '환난(짜르)'이라고 합니다. 

역시 그것은 자신 안에 있는 죄악, 불법, 악함에 대한 탄식이며 거기서 해방되고자 하는 갈망인 것입니다.  그런 내용의 기록들이 시편입니다.

그리고 그 원수들의 손에서 이기게 하신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과 은혜를 찬양한 것이  역시 시편입니다.  

그러므로 시편은 이 '영적인 원수'를 이긴 자의 노래이며 그 '육체가 됨'에서 해방되는 비밀인 것입니다. 이 기초를 깊이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이 시편 전체의 구조이기 때문입니다.

이 '거인족들' 이기고 찬양한 그것이 시편 18편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시편 안에는 모든 하나님의 대적, 악의 구조들, 불법의 영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역사, 전략이 계시되어 있습니다. 

단지 블레셋 거인들이나, 당시 다윗의 대적들을 이긴 것으로만 해석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 성경에서도 이 전쟁에 정관사를 붙여  '함밀하마'(삼하21:19)라고 기록했습니다.  

왜냐하면 시편은 개인의 영적 상황 속에서 나왔지만 그들 안의 성령님이 동일한 영적 전쟁을  하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서 그것을 노래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시 다윗의 노래 다음에 나옵니다.

[이는 다윗의 마지막 말이라 이새의 아들 다윗이 말함이여   높이 세워진 자, 야곱의 하나님께로부터 기름 부음 받은 자,  이스라엘의 노래 잘 하는 자가 말하노라(사무엘하 23:1 )]

이것은 시편의 본질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말씀이므로 주목하여 살펴야 합니다. 

다윗이 '말하는 것'의 히브리어는 '네움'입니다. 히브리어 성경에서 '말하다'는 주로 '아마르'나 '다바르'를 사용하는데 여기서는 왜 '네움'일까요? 

그래서 우리는 조금 수고스럽더라도 이젠 원어 성경으로 살펴야 합니다. 

'네움'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매우 엄중한 말씀'을 가리킵니다. 

시편은 그냥 다윗같은 믿음의 사람들이 기도나 감사, 깨달음의 자기 고백이 아님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영(루아흐)'이 각 상황을 통해 아버지의 엄하고 무거운 뜻을  계시하시는 것입니다.

------@@히>네움 = 말함, 발언, 신탁((특별한 맹세로 주어진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분명한 언약 말씀, 또는 준엄한[취소할 수 없는] 심판 경고 말씀))

네움(명남)은 '말함, 발언 utterance, 신탁 oracle'를   의미  ... 이 단어가 사용되었을 때 그 메시지의 기원과 권위에 대해 특별한 주의가 요구되는데, 즉 그 메시지가 그 기원과 권위에 있어서 하나님이심을 선언하는(렘 23:31, 시 36:1 등) 관용적 표현으로만 사용된다.

1. 네움의 의미는 렘 23:31에서 분명히 보여진다. 

하나님은 자기들의 말에 네움(!aun] , 5002), 즉 하나님이 그것을 말씀하셨다고 덧붙이는 거짓 선지자들에게 대적하라고 선언하신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그들이 혀를 놀려 그가 말씀하셨다 하는 선지자들을 내가 치리라".

이 기본적인 의미는 겔 13:7에서도 분명히 나타난다: "너희가 말하기는 여호와의 말씀이라 하여도 내가 말한 것이 아닌즉 어찌 허탄한 묵시를 보며 거짓된 점괘를 말한 것이 아니냐". 여기서 하나님은 그들은 참 환상(묵시)을 보지 못했으며 거짓된 점괘를 말하며 하나님이 말씀하시지도 않았는데 하나님의 권위를 내세운다고 거짓 선지자들을 비난하신다.

렘 9:22에서 선지자는 '그의 신탁의 말씀의 진실성에 대한 모든 의심을 털어버리기 위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구별하는 말', "이것은 여호와의 네움이니라"라는 말로 그가 받은 신탁을 시작하도록 명령 받는다(C. F. Keil; Jeremiah).

때때로 이 공식 문구는 발언의 중대성들을 강조하는 하나님의 맹세로 앞에 부가된다(겔 20:3, 겔 20:31, 겔 33:11). 예언서에 나오는 이러한 공식 문구 중 반수 가량은 항상 하나님의 언약적인 명칭, 즉 여호와와 왕(렘 46:18)으로 이루어져 있다(사 56:8).

슥 12:1은 제목의 형식을 취하며,「네움 예호와」는 '여호와의 선언'이란 의미를 지닌다.

2. 예언서 이외에서 네움(!aun] , 5002)의 용법은 매우 흥미로운 점을 보여준다.

창 22:16에서 천사는 여호와께서 하신 '말씀'(네움)을 전한다: "가라사대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참조: 히 6:13 이하).

민 24:15이하에서 발람의 "홀" 예언을 네움, 곧 하나님을 듣고 '말하는 것'(네움)이라고 한다.

삼하 23:1에서 다윗은 형식과 내용에 있어서 이 예언의 양자 모두를 상기시킨다(참조: KD). 네움은 하나님의 사역(monergism)만큼 확실하였다. 물론 하나님의 언약에 항상 붙어 다니는 '영원한'은 그 적용에 있어서는 하나님께서 결정하신다. 하나님의 맹세의 특별한 의미는 아브라함 언약(갈 3장, 히 6:16 이하)과 모세 언약(히 7장) 간의 차이에 대한 신약성경의 논의에서 보여진다.

시 110:1에서 "내 주(아도나이)"에게 말씀하신 여호와의 네움은 맹세로 시인한 언약을 포함한다: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시 110:4, 참조: 히 7:21).

시 36:1에서는 흥미롭게도 '범죄'는 신 계시를 요구한다: "악인의 죄얼이 내 마음에 이르기를 그 목전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다 하니". "내 마음속에 악인의 범죄에 관한 하나님의 계시(신탁)가 있다".

잠 30:1은 문제가 많은 구절인데 델레취(F. Delitzsch)는 이 구절을, 마음으로부터 나온 것(즉 아굴의 잠언)은 엄연히 진실되다는 것을 나타낸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여기에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받은 계시라는 개념도 역시 마땅히 포함되는 것 같다: "이 말씀은 야게의 아들 아굴의 잠언이니 그가 이디엘과 우갈에게 이른 것이니라".

--------[히6:1-20...1.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2.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   3.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   4.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5.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6.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7.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이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8.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9.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너희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것 곧 구원에 속한 것이 있음을 확신하노라   10.  하나님은 불의하지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고 있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   11.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함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12.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하나님의 확실한 약속 =네움)) 13.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 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   14.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에게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하게 하고 번성하게 하리라 하셨더니   15.  그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   16.  사람들은 자기보다 더 큰 자를 가리켜 맹세하나니 맹세는 그들이 다투는 모든 일의 최후 확정이니라   17.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하지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을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18.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하지 못할 사실로 말미암아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난처를 찾은 우리에게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19.  우리가 이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 가나니   20.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 가셨느니라]   

..............가라사대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참조: 히 6:13 이하). .... 하나님의 언약에 항상 붙어 다니는 '영원한'은 그 적용에 있어서는 하나님께서 결정하신다. 하나님의 맹세의 특별한 의미는 아브라함 언약(갈 3장, 히 6:16 이하)과 모세 언약(히 7장) 간의 차이에 대한 신약성경의 논의에서 보여진다. .... 하나님이 친히 맹세로 시인한 언약을 포함한다: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시 110:4, 참조: 히 7:21).  ....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받은 계시라는 개념도 역시 마땅히 포함되는 것 같다: "이 말씀은 야게의 아들 아굴의 잠언이니 그가 이디엘과 우갈에게 이른 것이니라". ---------

이 히브리어 '네움'이 사용된 중요한 예를 들어 설명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 전능자의 환상을 보는 자,  엎드려서 눈을 뜬 자가 말하기를 야곱이여 네 장막들이,  이스라엘이여 네 거처들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민 24:4,5)]

이 성령 충만함으로 말하는 자가 누구인지 아시겠습니까? 놀랍게도 거짓 선지자의 대명사인 '발람'입니다. 여기 발람이 '말하기를'이란 히브리어가 바로 '네움'입니다.  

이것은 육신에 속한 발람이 할 수 있는 말씀이 아닙니다.  

육신에 속한바 발람, 그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하고 영적인 눈에 열리고 말씀이 들여 오기 시작하자  갑자기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비전을 보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네움'입니다.

다윗이나 시편의 저자들은 연약한 자들이고 자신의 '연약함'이나 외부의 '원수들'로 인해 고통을 당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하자 영적인 말씀을 듣게 되고 비전을 보고 엎드려져 말씀을 말하게된 것입니다. 이것이 '시편'의 원리입니다.

발람같은 육신에 속한 자가 성령의 충만함으로 그 입술이 하나님의 진리, 비전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다시 앞에서 읽은 구절을 살펴 보겠습니다.

[이는 다윗의 마지막 말이라 이새의 아들 다윗이 말함이여 높이 세워진 자, 야곱의 하나님께로부터 기름 부음 받은 자, 이스라엘의 노래 잘 하는 자가 말하노라(사무엘하 23:1)]

다윗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엄중한 진리인 '네움'을 말하는 자인데, 그것을 말하는 자의 조건이 무엇인지도 가르쳐 줍니다. 

이것은 시편 저자들의 영적인 정체성과 같습니다.

먼저 '높이 세워진 자'입니다. 히브리 성경에는  '알 후캄 학게벨'인데 '높이(알)', '세워진', 또는 '올려진(후캄)'. '그 사람', 또는 '그 용사'(학게벨)입니다. 

시편의 저자들,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들이 누구인지 가르쳐 주는 매우 중요한 개념입니다.  

이들은 이땅에 살지만 '높음', 곧 '하나님의 성소', '권능의 궁창'에 거하는 자들(시150:1)입니다.

'세워진 자'는 '쿰'이라는 히브리어에서 나왔습니다. 잘 아시는 그 말은 '일어난 자', '부활한 자'. '깨어난 자'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앞에서 발람은 '눈을 뜬 자', '보는 자'라고 했는데 이것이 '부활'의 본질입니다.  

육신의 눈, 관점에서 죽고 영적인 눈, 관점이 열려 아버지의 진리, 비전, 뜻을 분별하고 보는 수준입니다.

이런 자들이 "하나님께로부터 기름 부음 받은 자, 이스라엘의 노래 잘 하는 자"(삼하23:1)로서 '네움'의 말씀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시편의 본질입니다.

그러므로 시편의 '노래(찬양)'은 단순한 곡조를 가진 것이 아닙니다.  

그런 형식을 무시하지 않지만 '노래'는 하나님의 영적인 비밀, 계획, 뜻을 보고 선포하는  '신령한 노래'(대상25:1,2), '새 노래'(계14:3)인 것입니다.  

그런 사람을 '하게베르'라고 부릅니다.

'게베르'는 시편의 중요한 용어로서 하나님의 용맹한 자들, 용사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편 34:8)]

여기서 '하나님께 피하는 자'가 바로 '하게베르'입니다. 그들은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아는 자'입니다. 

이것을 통해 시편의 본질을 맛보기로 느끼실 수가 있는데 하나님께 '피하는 자'의 히브리어는 '하싸'입니다.  

이들은 심판과 환란의 때에 오직 아버지의 구원, 날개 아래, 피난처에 들어 갈 수 있는 '남은 자들'입니다(사14:32, 57:13, 습3:ㅣ12). 바로 '물가에 심겨진 복 있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아무나 그런 은혜를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고 아는 자여야 합니다. 

(그런데...우리는 이 시편을 잘알고 있고 대강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정말 그런건가요??)

여기 '선하심'은 히브리어로 '토브', 곧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이 온전하고 완전한 아버지의 지혜, 길, 의의 본질(토브)을 '맛보다=실지로 먹고 마심으로써 감상하여 참되게 속속들이 깨닫고 느껴 합당하게 평가하다'는 '타암'인데 그것은 '감지하는 것'입니다. 깨닫고 이해하고 느끼고 아는 것입니다.

----##타암 = 판단, 분별(력), 법령..."맛보다, 지각하다"에서 유래했으며, '미각, 맛 taste, 판단, 판결 judgment'을 의미.. (a) 타암은 만나(출 16:31, 민 11:8), 감추인 만나(계2:17),  달걀 흰자(욥 6:6), 모압에 비유된 포도주(렘 48:11)의 '맛'을 묘사한다. (b)  타암은 비유적으로, 주권적인 [선하신 = 토브, 칼로스] 하나님의 말씀 즉 계명에서 나오는 경건한=선한(=아가도스) '판단, 분별(력) = 주님 마음에 그대로 들어맞는=합당한 판단과 분별 능력, 바로 그대로 말과 행동을 참되게 이루는자'에 대해 사용되었다. 선한 '판단'은 오직 하나님의 계명에서 나오며(시 119:66) 하나님의 주권적인 지배 안에 있다(욥 12:20). 판단력을 지닌 여자는 창찬 받으며(삼상 25:33), 반면에 경건한 분별력이 없는 여자는 코에 금고리를 건 돼지와 같다(잠 11:22). 잠 26:16에서 "선히 대답하는 사람"은 '분별(력) 있는, 즉 신중하게 대답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삼상 21:13에서 다윗이 자기 '행동'을 변화시켜 아기스 앞에서 미친 사람처럼 행동한 것을 묘사한다: "그들의 앞에서 그 행동을 변하여 미친 체 하고 대문짝에 그적거리며 침을 수염에 흘리매". 여기서 "그 행동을 변하여"는 그의 판단이나 분별력을 변장, 위장하는 것을 의미한다. 시 34:1에서 "미친체 하다가"도 같은 의미를 나타낸다. 다윗은 상황의 위급함을 판단하고서 다르게 행동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c)  타암은 '법령, 칙령'에 대해 사용되었다. ...욘 3:7, "왕이 그 대신으로 더불어 조서를 내려 니느웨에 선포하여 가로되 사람이나 짐승이나 소떼나 양떼나 아무 것도 입에 대지 말찌니 곧 먹지도 말 것이요 물도 마시지 말 것이며".-------

하나님께서 창세 전부터 예비하신 그 의의 길, 진리의 본질이 무엇인지 아는 자가 되어야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서 그 그늘, 날개 아래서 안식할 수 있습니다. 

그런 자가 바로 '하게베르'입니다. 이들은 또한 '심령이 가난한 자들'입니다.

바로 앞에서 다윗은 동일한 본질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의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시편 34:6)]

그는 자신을 '곤고한 자'라고 표현합니다.  히브리어로 '아니'인 그것은 '가난한 자', '낮추어진 자', '온유한 자'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신 '가난한 자', '온유한 자'가 그것입니다. 이 '아니'의 본질을 가진 자들이 시편의 대표적인 주인공들입니다. 

그것은 철저히 자기가 부인되고 오직 하나님의 영으로 진리만을 담아낸 자들을 가리킵니다. 

시편이 지향하는 가장 본질적이고 궁극적인 영성이 바로 '아니'에 담겨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깊이 주목해야 합니다.

시편은 이들의 부르짓음(카라)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기도 합니다. 신약에서 이것은 바로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마태11:29)] ...'온유하고 겸손하다'가 히브리어로 '아니'입니다. 시편의 저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인 것입니다. 

진정으로 바벨론에서 해방되고 하나님의 성전을 회복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낮추고 죽기까지 복종하심'(빌2:8)으로 하나님의 높임과 영광을 얻으셨습니다. 이것을 가진 자들이 되어야 하나님의 성소에서 찬양하는 자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자기 부인과 십자가의 길은 오직 아버지 보좌에 도달하는 유일한 길(요14:6)이며  그 자체가 '성소에서 찬양하는 삶'의 원형이었던 것입니다.

시편은 전체가 이 본질에 이르는 것을 지향합니다.

[여호와의 영이 나를 통하여 말씀하심이여  그의 말씀이 내 혀에 있도다(사무엘하 23:2)]

그런 하나님의 성소에 오른(알리야) 높이 세워진 '하게베르', '다윗'같은 자들에게 성령이 임하십니다. 

성령님은 '진리의 영'이시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그들의 '혀'에 두십니다. 그것이 바로 '시편'입니다. 

시편이 전부 하나님의 성령으로 인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주목하십시오. 

그래서 시편 안에는 아버지의 진리의 길, 본질, 영적 원리들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앞으로 그것들을 깊이 보고 느끼고 맛볼 것입니다. 

시편은 그저 성도들의 감성적인 고백이나 은혜의 찬송이 아닙니다.  진리의 성령님이 주시는 '말씀'자체입니다.

[다윗이 군대 지휘관들과 더불어 아삽과 헤만과 여두둔의 자손 중에서  구별하여 섬기게 하되 수금과 비파와 제금을 잡아 신령한 노래를 하게 하였으니  그 직무대로 일하는 자의 수효는 이러하니라(역대상 25:1)]

다윗만이 아니라 성소에서 섬기는 찬양하는 자들이 부른 '영적인 노래'가 시편에 수록되었습니다. 

유명한 아삽, 헤만, 여두둔은 모두 시편의 저자들입니다.  그들이 부른 노래 역시 다윗처럼 성령이 임하여 '그 말씀'을 부어 주신 것으로 '신령한 노래'입니다.

히브리어로는 "신령한 노래" 역시 정관사가 붙은 '한니바'인데 곧 '나바', '예언'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예언'은 아버지로 부터 나오는 하나님의 길, 비전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시편은 '예언'입니다.

저는 <숨겨진 일>이라는 시편을 연구한 책을 쓰면서 그 안에 감추인 놀라운 예언적 구조를 탐구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시편을 예언이라고 인식하지 못하는 이들이 그것을 지나치다고 비판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생각에 아는 이들에게만 읽히도록 초판만 찍고 절판하였습니다. 시편은 우리가 상상 하는 것 이상의 놀라운 '감추인 보화'입니다.

===
[어찌하여 이방 나라들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헛된 일을 꾸미는가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며(시편 2:1-2)]
이제 본격적으로 시편의 맛을 보고자 합니다.  
시1편과 2편은 저자나 '표제'가 없는데 이것은 서로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1편에서는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며"(시 1:1)라고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의인들'에 대조되는 '악인', '죄인', '오만한 자'가 2편에서는 앞에서 읽은 것처럼 '이방나라'와 '민족들', '세상 군왕들'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이것들이 서로 상관이 없는 것으로 읽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성경 읽기는 대부분 문자적인 구조를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시편의 편집자들은 여러 시들을 취합해서 그것의 영적인 의미가 이어지도록 편집했다는 것을 잊지마시기 바랍니다. 
그들에게 1편과 2편은 서로 이어지고 역시 3,4편도 그러합니다.
왜 편집자들은 다윗이 압살롬에게 쫓겨 가던 때, 곧 그의 후반기에 지은 시를 가장 앞쪽에 배치했을까요? ...그 시의 내용들이 '복있는 자'와 그에 대조되는 '악인들'에 대한 의미를 극명하게 가르쳐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1,2편과 3,4편은 서로 연결된 병렬구조 속에서 공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른 것에서도 이런 의도를 가지고 되어 있기에 주목하여  살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읽는 성경 번역 자체가 이 시1편과 2편의 두 구조를 연결하여 생각할 수 조차  없게 만들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젖이나 먹는 어린 아이가 아니기에 이런 많은 장애, 틀을 뛰어 넘어야 합니다. ...문자와 수건을 넘어서 그 '영적 본질'을 읽어내는 감각을 키워야 합니다.
시2편에 '의인'을 대표하는 하나님의 '기름부운 자'를 대적하는 '악한 세력들'이 나오는 것인데,  그들이 누구인지 구체적으로 보여줍니다.
우리는 그들이 '이방 나라들'이 '세상 군왕들'이라고 되어 있으니 단순히 '이 세상의 세력들', '이방인들'일 것이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을 가지고 세상의 불의와 악한 구조를 대적하는 기도, 사역들을 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그런 부분에 가장 많이 인용되는 구절이기도 하구요. ...그것은 원문이나 성경이 가르치는 의미를 모르는 것에서 나온 발상입니다.
성경 전체도 그렇지만 시편에서 주로 다루는 '악인', '원수', '이방나라'는 우리 안에 있는 영적인 불의와 악의 구조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모든 성경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에 이르는 지혜'(딤후3:15)임을 잊지 마십시오.  ..그것은 아버지가 우리를 '훈계와 의로 교육하기 위하여' 기록하신 것입니다.
비록 이스라엘의 역사적 현실을 담은 것이라 해도 항상 우리의 영적인 구조, 실제로 읽어야 온전히 성경을 읽어내는 것입니다. ...그런 의도로 쓰여졌기 때문입니다.
대부분 이 기초조차 가지지 않고 스스로 지식인, 의인, 안다고 착각하는 교만함 때문에 성경을 얼마나 왜곡되게 읽어왔는지 모릅니다. ...시편이 사람 자신의 고백을 넘어서 성령께서 주시는 '말씀'(삼하23:2)이라는 것을 절대로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성령께서 각 시편 기자들의 입을 통해 말씀하심으로 '진리의 영적 구조'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여기 '이방 나라들'로 번역된  히브리어로 '고임'은 '민족', '열방', '나라'를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방 나라'라고 번역하고 우리는 그저 믿음의 지경 밖 '이 세상'이라고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약 성경 전체에서 꼭 '고임'은 '이방'만 가리키는 용어가 아닙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가리키는 용어로도 많이 쓰인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너로 심히 번성하게 하리니 내가 네게서 민족들(고임)이 나게 하며 왕들이 네게로부터 나오리라(창17:6)]
[슬프다 범죄한 나라(고임)요 허물 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사1:4)]
'고임'은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가리키는 용어로도 쓰이고 '이스라엘 백성'으로도 수없이 많이 쓰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우고자 하시는 '그 나라(이스라엘)'가 바로 '고임'이라는 말로 쓰였습니다. ... 그러므로 무조건 '이방 나라'로만 생각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 또한 그렇게 번역되었을지라도 성경이 말하는 '이방인'이라는 의미가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항상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가'에 집중해야 합니다. ...이 집중력을 잃으면 사람의 생각이나 구조에 갇히게 되는데 그것이 '이방'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주목하십시오.
주님은 당시 하나님께 그토록 열심이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사두개인들'에게 '개', '돼지', 심지어 '뱀들', '마귀의 자식들'로 비유하십니다.   
'개'나 '돼지'는 율법이 규정하는 대표적인 '부정한 동물'이고 '이방인들'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누구보다 정통적인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이스라엘이라고 자부하는 그들을 왜 이방인처럼 말씀하셨을까요?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표면적인 이스라엘'(롬2:28,29)이 진정한 이스라엘이 아니고 그 마음에 할례를 받은 '이면적(영적) 이스라엘'이 진정한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민족들', '왕들'은 바로 이 '영적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이 세우시려는 '큰 나라(가돌 고임)', 곧 '거룩한 나라'입니다....그러나 당시 유대의 종교지도자들, 백성들은 대부분 하나님께 열심은 있으나 그 말씀의 본질을 깨닫지 못하고 헌신했는데(롬10:2) 그런 이들을 '이방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개념입니다.
성경은 영적인 언어인 것입니다.  우리가 역사적 현실, 구조들을 무시하지 않되 성경이라는 진리가 가진 본질적 개념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것이 '거룩한 것'(마7:6)이고 이것을 무시하는 영적 구조들을 '개와 돼지'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당시 바리새인, 서기관, 제사장 그룹들을 '이방인'으로 말씀하셨으니 얼마나 충격적인 발언이겠습니까?
이들이 시2편의 기름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는 '이방 나라'라고 한 것입니다. ...아직 이런 것들이 익숙하지 않으신 분들이 있을 터인데 시편에서 우리는 그런 성경의 구조들을 많이 배우게 될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기존에 인식하는 것이 맞다면 '이방 나라' '세상군왕들', '민족들'은 무조건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한 구조라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 그리고 실제로 이스라엘과 교회의 역사에서 그런 인식으로 오히려 하나님의 진리와 사랑의 본질을 헤친 일들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여기서 '헛된 일'을 꾀하는 '민족들'(시2:1)은 히브리어로 '레옴'인데 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전부 예수님의 말씀에 나오는 개념들입니다.
그리고  '세상 군왕들'은 히브리어로 '아레츠 멜레크'입니다. ..이 말은 '땅의 왕들'이란 뜻인데 성경에서 주로 '이스라엘의 지도자'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런 개념들이 잘못 읽히면 성경 전체를 오해하게 됩니다. 예를 들면 계시록 1장에서,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계1:5)]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셨습니다. ...헬라어로는 '게스 바실류스'인데 문자 그대로 하면 이것은 '세상의 왕들'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결코 그들의 머리가 아니시며 거듭난 자들을 그분의 몸으로 삼으신바,  '교회'의 머리가 되신 것입니다.
신약에서 '세상', '땅'을 의미하는 '게'는 히브리어로 '에레츠'와 동일하며 그것은 거의 '이스라엘 땅'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 이 개념을 알지 못하여 우리는 성경의 많은 부분을 오해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 이런것 때문에 '종말'이나, 주님의 '재림', 이스라엘에 대하여 오해한 부분이 많습니다.
성경을 그 본질대로 정확히 안다는 것은 가장 중요한 기름부음이며 '능력'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권능'은 '진리의 반석위에 서는 것'입니다. 이것은 시편의 가장 중요한 주제이고 앞으로 깊이 공부하게 될 것입니다.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리라(계21:24)]
이것은 '새 예루살렘성'에 대한 것인데 '만국'이라는 헬라어 '에드노스'는 시편에서 말한 '고임'과 동일한 단어입니다.
우리가 흔히 쓰는 '이방', '열방'이라는 말인데 그것 대로라면 '열방'이 새예루살렘성에 들어간다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그래서 막연하게 열방이 회복되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뒤에 '땅의 왕들'도 동일하게 '게스 바실류스'인데 시2편의 '세상 군왕들'과 같은 것입니다.
이들이 어떻게 그곳에 들어갈까요? ...헬라어로는 '게스 바실류스'이앞에서 말한 것처럼 시편의 대표적인 문법은 '병행법'입니다.
그 뒤에 27절을 보면 그 성은 아무나 들어가지 못한다고 되어있습니다.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계21:27)]
그렇다면 여기 새 예루살렘에 들어 오는 ''만국', '땅의 왕들'은 바로 계시록1장 5절에서 보았던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머리'로 삼은 그 나라, 왕들인 것입니다.
그들이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이고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거룩한 나라들'입니다.
왜 제가 이렇게 한 구절, 하나의 개념으로 집중해서 다루는지 이해가 되시는지요? ... 성경의 개념, 본질적 구조가 잘못되면 전체를 이해하는데 크게 왜곡되기 때문입니다.
시편은 이 진리의 본질적 구조들, 원리들, 공식들을 가장 많이 담고 있는 말씀입니다.
다시 시2편으로 돌아가 기름부음 받은 자를 향하여 '이방 나라'들이 '분노'했다고 되어 있는데 그것이 어떤 의미일까요? 이것이 바로 '악인들의 행위'를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이 '분노'의 히브리어는 '라가쉬'입니다....우리는 그저 분노라고만 생각하지만 이 말은 '떠들썩함', 자기 감정, 분에 못이겨 '격노함'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주목할 것은 이것이 시1편에 연결되는 '악인'의 구조라는 것입니다. 이 '라가쉬'의 '떠들썩함', '격노'가 바로 우리를 '이방인'이 되게 하는 용적 요소입니다. 
시편은 진정한 왕, 의인들은 하나님 얼굴 앞에서 잠잠해야 할 것을 가르칩니다.
[너희는 떨며 범죄하지 말지어다 자리에 누워 심중에 말하고 잠잠할지어다 (셀라)의의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를 의지할지어다(시4:4)]
지금 다윗은 자신을 대적하는 '압살롬'과 '아히도벨'의 무리들을 향하여 이 시를 말하는 것입니다. ...
그들은 '가짜 왕', 거짓 제사장'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자신들의 생각과 욕망으로부터 나오는 것으로 사는 그들이 바로 '이방 나라'이며 '세상 군왕'인 것입니다.
시2편 기자는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음 자'인 '다윗'을 대적하는 그런 이스라엘의 패역한 무리들을 향하여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메시아(기름부음 받은 자)'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적 노래입니다. ...다윗은 '악한 자'를 상징하는 그들에게 심중에 말하고 '잠잠하라'고 경고합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의 '분노'에 대비되는 것입니다.
'잠잠하다'는 것은 문자적으로 그냥 '침묵'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깊은 관계속에서 '중심(레바브)'에 새겨진 말씀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감정, 사람의 말을 하는 것이 '라가쉬(분노)'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로 오면 '사람의 계명, 장로들의 유전'(마15:3,9)가 됩니다. ...당시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은 자기들의 그 전통적인 구조로서 기름부음 받은 왕인 예수님을 대적하고 분노했습니다. ... 
진정한 의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주님 앞에서 '잠잠해야'합니다. 그것이 바로 '의의 제사'를 드리는 것(시4:4)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오직 하나님의 의, 뜻을 구하는 것이 진정으로 잠잠함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과 주의 성전을 사모하는 열정으로 오히려 기름부음 받은 자를 분노하고 대적하게 됩니다. 이것은 모두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며 불평하지 말라 오히려 악을 만들 뿐이라(시37:7,8)]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도다(시62:1)]
시편은 수없이 하나님 앞에서 '잠잠하라'고 가르칩니다.  
그것의 히브리어 '다맘'은 '벙어리가 되다'라는 기본 뜻을 가지는데 '자기 안에서 나오는 말'을 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주님은 사람의 입으로 들어 가는 것이 악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나오는 것, 곧 사람의 계명, 관점, 생각이 악하다고 하셨습니다(마15:18).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 진리의 본질만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다맘'은 자신의 것을 멈추는 것, 멸망시키는 것, 잘라 버리는 것이란 의미를 가집니다. 
하나님 앞에서 철저히 자기를 부인하고 육신에 속한 구조를 죽이는 것이 '잠잠함'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헌신으로 추구해도 '분노'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의 아주 중요한 사건 중에 여호수아가 태양과 달을 멈추게 한 것이 있습니다. 이것이 '분노'와 '잠잠하다(다맘)'의 본질을 잘 가르쳐 주는 말씀입니다.
=======
[여호와께서 아모리 사람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넘겨 주시던 날에 여호수아가 여호와께 아뢰어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이르되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무르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서 그리할지어다(수10:12)]
여호수아가 태양을 멈추게 한 이 유명한 사건을 우리는 물리적으로 이해합니다. ...그래서 태양과 달을 멈추게 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저도 예전엔 그렇게 생각하여 이 주제로 다큐멘터리를 만들려고 할 정도로 심취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기록된 ‘야살의 책’은 역시 시편적인 성격을 가지는 것입니다. ...지금 이것은 여호수아의 기도문입니다. 시편의 저자들처럼 대적을 향한 하나님께 구하는 간구이고 사사기에 나오는 ‘드보라의 노래’처럼 예언적인 의미가 강합니다. 이런 기초조차 무시하고 성경을 해석하기 때문에 본질적인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조하신 우주의 질서를 파괴하면서까지 역사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문자적 성경 이해로 그런 하나님으로 인식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권능, 능력을 무시하는 것처럼 느껴지나 봅니다. 그것 역시 성경이 말하는 '권능'이 무언지 모르는 소치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종말의 현상인데 하늘과 땅을 다 흔들어 버리고 불로 태우시는 하나님으로 착각합니다. 
아버지는 ‘사랑’이시고 가장 큰 관심은 우리의 회개와 새롭게 창조되는 것입니다. ...아가페의 본질을 추구하지 않는 이들은 외적인 것들로 뒤집어지기를 구합니다. .,.. 하나님 나라가 우리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주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예슈아(예수)’와 동일하고 지금 이것은 ‘아모리 족속’과 전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당시 가나안을 지배하던 다섯 왕이 연합하여 여호수와와 화친을 한 히위족속을 공격했습니다(수10:3-5).
(이것 자체가 가지는 복음적인 의미가 크지만 절제하기로 합니다.) 
간략하게 나누면 '이방인'에게 아브라함의 언약과 축복, 구원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을 대적하는 죄악입니다. 
이것 때문에 사랑의 주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의 매매와 장사, 환전을 그토록 심하게 진노하신 것입니다. 
그들이 점거한 장소가 '이방인의 뜰'이었던 것입니다. 이 소식을 들은 여호수아는 진치고 있던 ‘길갈’에서 ‘아얄론 골짜기’까지 달려 가서 이 전쟁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성경’이 ‘예수님을 예언한 것’(요5:39)이고 그 안에서 구원에 이르는 지혜(딤후3:15)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것을 반복하여 강조하는 이유는 우리가 이 기초를 잊으면 사람의 계명에 갇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예수님과 사도들의 가르침이기에 그것이 우리의 ‘성경 해석의 원칙’이 되어야 합니다.
만일 진정으로 그 기초를 가지고 있다면 이 사건이 달리 보일 것입니다.
이 여호수아의 대적인 가나안5 왕들의 대표는 ‘예루살렘 왕’ 인 '아도니세덱’입니다.
이것만으로도 우리는 이 사건이 예수님과 당시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과의 관계가 있음을 간파하게 됩니다.
‘예루살렘’이라는 말이 성경에서 여기 처음 등장하는 중요한 부분입니다.
‘아도니세덱’이란 ‘아도니(주, 주권자)’와 ‘쩨데크(의)’의 합성어로 '의의 지도자'란 뜻입니다. 바리새인, 서기관들이 스스로를 그렇게 자부한 것입니다. 
이것은 역시 예수님을 예표하는 ‘살렘 왕’, 멜기세덱(의의 왕)’을 연상하게 합니다. ‘아도니세덱’은 하나님으로 부터가 아닌 스스로 의롭다 여기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등에 대한 그림자입니다.
어떤 분들은 지나친 비약이라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 분들은 " 성경은 나에 대하여 기록했지만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나오지 않는다"(요5:39,40)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다시 들으시기 바랍니다.
여호수아서는 이들을 ‘아모리 족속’이라고 부릅니다. ....각기 다른 족속인데 통칭하여 그렇게 부릅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출애굽과 가나안 정복을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가득 찰 때’(창1:16)이루어 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명기를 보면 가나안을 눈 앞에 두고 마지막 가장 중요한 전쟁이 '아모리'와의 싸움입니다.
아모리를 이겨야 가나안에 가고 가서도 그들의 연합군과 전쟁을 해야 합니다.
그들은 누구인고 그 이유가 무엇인지 이해하려면 성경의 개념과 구조를 알아야 합니다.
‘아모리’는 ‘아마르’에서 나온 것인데 그것은 ‘말하다’라는 것입니다. ...아모리 족속의 죄악은 ‘자기 안에서 나오는 말을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을 가장 많이, 강하게 책망하신 것이 그것입니다.
그들 안에서 나온 사람의 가르침, 계명, 장로들의 유전이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 죄임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냐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무리를 불러 이르시되 듣고 깨달으라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마15:3,9-11)]
우리 안에서 나온 그 말(아마르)가 바로 ‘아모리의 죄악’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이방 세력들, 죄악의 구조는 우리 안에 있는 육신에 속한 것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지혜요 본보기(고전10:11)입니다.... 이것이 이해되어야 ‘태양’과 ‘달’을 멈추게 하신 것이 무엇인지 열립니다. ...성경에서 태양과 달, 별들은 ‘쩨바 하샤마임’, 곧 ‘만군’이고 그것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을 상징합니다.
특별히 창세기 1장의 ‘넷째 날’에 지어진 이 ‘광명체들’은 히브리어로 ‘마오르’라고 하는데 ‘오르’,곧 ‘빛(진리)’을 담은 그릇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어로 ‘광야’가 ‘미드바르’, 곧 ‘다바르(말씀)’의 장소 이듯이 말입니다.
이것을 들으면 왜 예언서들과 주님께서 종말의 현상으로 “해가 어두워 지고 달이 핏같이 변하며 하늘의 별들이 떨어진다“고 여러번 말씀하시는지 이해가 될 것입니다. ...그것이 ‘태양이 멈추고 달이 멈추는 것’입니다. 
성경 자체의 언어 구조를 배워야 합니다.
여기서 ‘멈추다’가 바로 앞에서 계속 나누었던 ‘잠잠하라’의 ‘다맘’입니다.
이 태양과 달은 실제 하늘의 그것이 아니라 당시 예루살렘 왕을 중심으로 한 ‘아모리 족속’의 지도자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창세기 37장에서 요셉은 ‘이스라엘’의 미래에 대한 예언적인 꿈을 꾸었습니다.
[요셉이 다시 꿈을 꾸고 그의 형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또 꿈을 꾼즉 해와 달과 열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 (창37:9)]
이것을 들은 야곱은 그것이 장차 이스라엘이 될 그의 부모와 형제들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해석을 합니다.  
성경에서 해와 달, 별은 ‘만군’, 곧 ‘하늘 군대’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자기 안에서 나온  말(아마르)로서 ‘분노’와 ‘헛된 일’과 ‘악한 꾀’로서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메시아, 여호수아, 예슈아)’를 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람의 계명, 경배의 구조들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가르침으로 헛된 경배를 드린다"(마15:9)라고 하셨습니다.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눅24:44)] ... 이 말씀이 이제 실감 날 것입니다.
제발 문자를 벗어나 진리의 영적 흐름과 구조를 분별하십시오. 이 모든 것이 이스라엘의 지도자들(해, 달,별)이 예수님을 대적하는 것으로 성취됩니다. 
그것을 ‘멈추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종말’의 대표적인 현상입니다. 종말은 우주가 뒤틀리고 별이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계명, 가르침, 헛된 경배가 그치는 것(다맘)입니다.  그런 경배의 시스템이 하나님의 진동, 큰 지진에 의하여 ‘다맘’, 곧 그치고, 멸망하고 잘라지는 것입니다. 
과거의 이스라엘, 중세의 교회가 그랬고 지금 우리가 그 심판의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하늘’의 ‘해, 달 ,별들’이 어두워지고 떨어지는 것이 보이지 않나요? ... 이렇게 명확하게 말씀이 이루시는데도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한다면 영적인 수건에 가려진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이렇게 말씀에 집중하는 것은 오히려 심판을 받지 않기 위함입니다.
정말 우리의 일, 말을 그치고 오직 아들에게 ‘입맞춤’(시2:12)을 해야할 때입니다.
그의 입에서 나온 그 진리, 그 영과 생명(요6:63)을 들을 귀로 듣고 흡수하는 것만이 살 길입니다.
다시 나누지만 시편은 성령이 저자들의 혀에 담아 주신 ‘말씀’(삼하23:2,3)입니다.
성경 전체가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이것은 특히 ‘말씀의 구조와 원리'를 가르쳐 줍니다.
다시 처음 구절로 돌아가 살펴보기 원합니다.
[어찌하여 이방 나라들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헛된 일을 꾸미는가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며 우리가 맨 것을 끊고 그의 결박을 벗어버리자 하는도다(시편 2:1-3)]
이 개념 하나만 온전히 정리해도 성경의 많은 구조들을, 특히 예수님의 복음을 이해하는데 큰 길이 열릴 것입니다. ...눈치가 빠른 분들은 이미 나눈 것만으로도 복음서와 계시록의 예수님 말씀들이 여러 갈래로 연결되는 것이 보일 것입니다. ... 영적인 눈치과 감각과 분별이 발달되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어린 아이같은 진리를 향한 순전함, 나는 무지하다는 심령의 가난함, 낮아짐이 필요합니다. 바리새인, 서기관들처럼 무언가 안다고 생각하고 아도니세덱의 영에 머무르면 이미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의인이 아니라 죄인들, 스스로 '죄인 중 괴수'라 여기는 이들을 부르러 오셨습니다.
이 시편의 내용은 매우 중요한 기초이므로 조금 더 나누고자 합니다.
이 말씀과 동일한 본질이 계시록에 나옵니다.
[감사하옵나니 옛적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신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친히 큰 권능을 잡으시고 왕 노릇 하시도다 이방들이 분노하매 주의 진노가 내려 죽은 자를 심판하시며 종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또 작은 자든지 큰 자든지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상 주시며 또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실 때로소이다 하더라(계11:17,18)]
시편은 예언적이고 묵시문학적인 성경이 강한데 우리는 그저 감성적으로 이해하고 그런 부분이 있음을 잘 모릅니다.
계시록에 대한 지금 우리의 인식은 매우 오해되는 부분이 많은데 그것은 ‘율법’과 ‘선지서’, ‘시편’의 구조와 연결되어 있음을 알지 못함에서 옵니다. ... 그것이 단절된 가운데 해석을 하니 이상한 종말의 물리적 현상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계시록은 단연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며 초대교회와 지금 우리에게 일어나는 영적인 실제입니다.
특히 시편의 구조는 계시록과 깊은 연결이 됩니다.
이 말씀에서 감사하는 이들은 하늘 보좌 앞에서 경배하는 ‘24장로들’입니다.
이것은 시편의 노래, 구조와 동일한 성령 안에서의 고백입니다.
계시록에는 '새노래들'이 나오는데 그것은 시편의 노래와 같습니다.
그들은 시편 저자들처럼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의인들의 상징입니다.
왜 감사하냐면 옛적에도 계시고 지금도 계신 주 하나님이 권능을 잡으시고 왕노릇 하시기 때문입니다. 계시록 11장은 예루살렘 성전을 측량하고 ‘기름부음 받은 두 증인’과 ‘큰 지진’으로 성을 무너 뜨리는 것입니다. ... 그것으로 하나님의 왕노릇, 곧 그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전’인 우리의 ‘옛사람의 구조’를 무너 뜨리시는, 이전 것이 지나고 '새 것'이 되는 재창조와 같습니다. ...역사적 현실로는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는 것(마24:1-4)의 성취지만 우리의 영적인 실존을 다룬 것입니다.
주목해야 할 것은 그 심판의 대상이 먼저 전능자에게 ‘분노’하는 ‘이방’(계11:18)입니다.
눈이 번쩍 뜨여지시나요? ...이것은 시2편에서 기름부음 받은 자에게 ‘분노’하는 ‘이방나라’와 동일합니다. 히브리어로는 ‘고임’이고 헬라어로는 동일한 개념의 ‘에드노스’를 쓰고 있습니다. '분노'역시 히브리어와 헬라어가 동일한 '라가쉬'와 '올게'입니다.
우리는 계시록을 통해서 더욱 구체적으로 '이방 나라가 분노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오늘 우리의 영적인 문제라는 것을 명확히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
===((점검하기!!))
오직 그리스도께서 그의 머리-남편-주인-주님이심을 참되게 깨달아 알고 참되게 깨닫고 감사-감격하며 가장고귀하신 분께 합당한 전존재 기울여 내어드림-올인하여 진정한 그분의 짝됨으로 살아가기로 결심한바....더더욱 알아가게 되는 그분의 [먼저 베풀어주셨고, 또 새로이 베푸시는 그분의] 사랑과 기쁨에 완전히 적셔지고 닮아가는 거듭난 영혼이라, 오직 유일무이한 충만 = 충분/만족이신 그리스도를 보고, 구하고-찾고-두드리며, 그 누구보다도 뛰어난 유일무이의, 무적의 용사 하나님=엘 깁보르를 아는자 ...."그 하나님을 알기에 그분을 신뢰하며 그분께 피하며(=하싸") 그분과 하나되어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며(-타암. "그분의 토브"를 맛보고 감상-음미, 깨닫고 느끼며 합당하게 평가하고 감사하다) 실지로 그렇게 사는 참된 용사=알(높이..권능의 궁창, 하나님의 하늘 성소) 후캄("쿰"..올려 세워진...부활 안에서 깨어난) 학게벨(그 용사-사람) ....영과 진리러 경배함의 어떠함을 참되게 알고 동행하는자.
===네피림, 아낙 자손, 거인족, 아말렉 사람, 아모리 사람, 가나안 사람, 블레셋 사람에 대한 이해...
##하나님의 원수 사탄마귀와 짝된, 육에 속한자, "벨리알" 지옥의 자식, "네피림" "아낙 자손" "아모리 족속" "가나안 사람" "블레셋 사람"...[네필, 네팔..."기간테스"= 거인족]....(자기 힘 믿고 사는 "타락한 사람인 육체에 속한 용사"...영적 측면에서  그 자손은 아낙 자손, 블레셋 사람- 골리앗 형제들) 침략자-습격자-약탈자-공격자-생존경쟁과 약육강식 논리로 사는자....하나님의 아들들(곧, 여호와 신앙으로 올곧게 사는, 하나님의 참생명 산출 가능한 하나님 생명  소유자들)--사람의 딸들(세상 가치-유행-풍조 따라 맹종하며 사는 자들....겉보기에 화려하고 눈길 끄는 치장으로 아내삼고 싶은 유혹과 육체의 정욕적 충동 불러 일으키는 타락한 세상 풍조의 아첨-아양-미혹/현혹/유혹에 능숙한, 일편단심/일향 미쁨의 가치 모르는 세상적 딸들/ 여자들) == 결국 믿는이가 주께 여쭘으로써  깨어있지 않으면 이들의 결혼으로 산출되는 자식들은, (비록 그 아비가 하나님 생명 받아 하나님말씀으로 사는 믿는이라 하더라도...) ...주님  바라며 앙망하며 은혜로만 살기를 배우지 않는다면...결국  육체만 신뢰하여 다른이들을 침략-습격-약탈-탈취-공격하여 먹고사는 육체에 속한 자, 곧 사탄마귀-벨리알의 자식, 세상적 거인(세상가치로 무장된 악명 자자한, 그 종말은 허망한 영멸인.. 세상적 용사나 블레셋 사람)이 되고 말것임을 의미..
....네필(명남)은 네팔(lp'n: , 5307)에서 유래한 듯하며, '습격이나 공격하는 자'를 의미한다. 70인역본은 기간테스로 번역하는데, '거인들'(giants)이란 의미를 나타낸다. 우리는 전자의 의미를 따라 '침략자'나 '습격자', 또는 '약탈자'로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창 6:4, "당시에 땅에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하여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이 용사라 고대에 유명한 사람이었더라".....민 13:33, "거기서 또 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
===
1:1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אַ֥שְֽׁרֵי־הָאִ֗ישׁ אֲשֶׁ֤ר׀ לֹ֥א הָלַךְ֮ בַּעֲצַ֪ת רְשָׁ֫עִ֥ים וּבְדֶ֣רֶךְ חַ֭טָּאִים לֹ֥א עָמָ֑ד וּבְמֹושַׁ֥ב לֵ֝צִ֗ים לֹ֣א יָשָֽׁב׃ 
아쉬레이-하이쉬 아쉬르 로 할라크 바아차트 레쉬아임 우베데레크 하타임 로 아마드 우베모샤브 레침 로 야쉬브  
1: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כִּ֤י אִ֥ם בְּתֹורַ֥ת יְהוָ֗ה חֶ֫פְצֹ֥ו וּֽבְתֹורָתֹ֥ו יֶהְגֶּ֗ה יֹומָ֥ם וָלָֽיְלָה׃ 키 임(체우) 베토라트 예호와 헤페초 우베토라토 예흐게 요밈 와라일라
1:3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וְֽהָיָ֗ה כְּעֵץ֮ שָׁת֪וּל עַֽל־פַּלְגֵ֫י מָ֥יִם אֲשֶׁ֤ר פִּרְיֹ֨ו׀ יִתֵּ֬ן בְּעִתֹּ֗ו וְעָלֵ֥הוּ לֹֽא־יִבֹּ֑ול וְכֹ֖ל אֲשֶׁר־יַעֲשֶׂ֣ה יַצְלִֽיחַ׃ 
웨하야 케에츠 샤톨 알-펠케 마임 아쉬르 페르요 이텐 베이토 웨알레후 로-일볼 웨콜 아쉬르-이아셰 야첼리아흐
1:4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לֹא־כֵ֥ן הָרְשָׁעִ֑ים כִּ֥י אִם־כַּ֝מֹּ֗ץ אֲֽשֶׁר־תִּדְּפֶ֥נּוּ רֽוּחַ׃  로-켄하레샤임 키 임-킴모츠  아쉬르-틷데펜누 루아흐
1:5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עַל־כֵּ֤ן׀ לֹא־יָקֻ֣מוּ רְ֭שָׁעִים בַּמִּשְׁפָּ֑ט וְ֝חַטָּאִ֗ים בַּעֲדַ֥ת צַדִּיקִֽים׃  알-켄 로-야쿠무 레쉬아임 밤메쉬페트 웨하타임 바아다트 찯디킴
1:6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כִּֽי־יֹודֵ֣עַ יְ֭הוָה דֶּ֣רֶךְ צַדִּיקִ֑ים וְדֶ֖רֶךְ רְשָׁעִ֣ים תֹּאבֵֽד׃  키-요데아 예호와 데레크 찯디킴 웨데레크 레샤임 토베드

===="헤이"..가 나올때!!..Q의 호흡하심으로 나타난바 되었음을 강조하고 있음을 염두에 두라!!..."레이시 = 친히, 머리 되사,교통하는 그영 CJ"를 볼 때에!!.. 꼭 염두에 둬야 할 바는 그 단어가 포함하고 있는바 Q의 사역이 무엇인지를 체크해야 함.......((보통, 복 받으세요--바라크"라 할때..즉, "바라크"라 말할때, 그 복은..베레시트의 실제가 이루어진 것이 진복임을 의미...즉, 아크(알렙-쿠프!! 하나님을 삶이야말로 진복임을 의미)) ..언재 어디서나 무슨 상황에서든지, 내안에 들어와 계신 Q의 실제를 [획일적으로가 결코 아니라!!] 그때 그때 융통성 있게, 적용할 수 있는 권한 가졌음이야말로 진복인 것..

===1. 아쉬레이-하이쉬 아쉬르 로 할라크 바아차트 레쉬아임 우베데레크 하타임 로 아마드 우베모샤브 레침 로 아쉬브 
.....@아쉬레이-하이쉬<알렙-쉰-레이시-요드, 헤이_알렙-요드-쉰(우)> ..창1:1-2절 그대로..Q의 호흡하심으로 지음 받은 그 존재, 아마르(말씀)따라 그대로 샤마르(청종)하는 참사람 JC가 살아가신 그대로 바로 그분 손에 이끌려, 곧 진리/말씀-빛/불로 성육신 하여 오신 그 Q을 살지니...참빛 = 오르(알렙-바브(상)-레이시).."빛이 있으라 = 영안에 있으라 = 말씀 받는 그대로 완전히 존재를 열어드림으로써 수용-적용-조성-작동되고 채워지라"하셨을때, 그 빛이 실지로 필요한 곳은 아레츠.. 즉 실지로 참빛 Q을 안다는것은 말씀을 수용-적용함 곧 그분의 참생명-[사랑/생명 넘치는 너그럽고/다정다감하신-인도/배려/긍휼/자비/예비/공급하심의 참아버지]관계적 인격, 곧 Q의 형상에로의 변화 온전히 이루고 그안에 바로 그 참생명 Q이 채워져 넘쳐나기에 기름부음 안에서 접촉하는 이는 [기름부음 안에서] 누구나 그것을 분별하여 느낄 수 있기에 ...마치 쇠조각이 자석에게 이끌리듯 저절로 이끌리며/매료되고/의지하고 싶고/더 알고 싶고/존중하는 마음이 생겨나게 하는 구심력을 느끼게 됨.. 
.....@아쉬르<알렙-쉰-레이시>..엘로힘 바로 그분을 그대로 찍어낸바 판박이여 복되도다.. @로<라멛-알렙...창1:1,2그대로 Q-사람 됨에 대해!! 경험-체험 통해 참되게 알아가도록, 인도하시는 Q>..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Q의 참생명-관계적 인격의 어떠함으로 그분의 모든 속성과 일하심의 그 내용 그대로 찍어냄 된 참제자라, 곧 [창조주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요, 친히 그분의 형상을 빼어닮은, 택자인 그대를 낳은바, 참생명의 아버지시라... 절대적으로 사랑하고 신뢰하기를 배우고, 절대긍정-절대신뢰-절대기쁨-절대감사-찬양함으로써, 그분의 "베레시트"그대로 동심합치로 따름이야말로 지고지선-지복직관의 진복임을 알아가는 삶을 살며, 말씀하시는 하나님, 말씀이신 하나님을 참되게 배운자의 마땅한 바라.. @할라크<헤이_라멛-쿠프..*할라크=동행=동역..*라크(라멛-쿠프)는 [라멛-알렙], 곧 창1:1-2절 그대로 Q-t사람 됨에 대해 경험-체득함 통해 참되게 알아가며 배운바 그대로 참생명이신 Q, 그 숨결과 호흡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호흡함으로써 배운바를 살아내는 바 동행함 이룸의 실제 나타남!!.>. 내주하시며 그의 주위을 감싸며 두르시는 분, 그를 통해 살아계시는 주님의 충만이 그의 삶 자리자리마다 넘쳐서 그냥 배어나는바 되리니.. @바아차트<베이트_아인-체데-타브  베이트-타브(곧, 바트/거함, 그 안에 아인-체데를 넣은 구조:: 생명가지의 생명나무본체와하나됨이 바로 상호거함!!>..거함, 곧 생명가지 [생명가지 = 체마흐 예호와 (צמח יהוה...체데-멤-헤이트 예호와)]의 생명나무=베레시트 안의, 생명나무=에츠 ... [= 에츠 하하임( וְעֵ֤ץ הַֽחַיִּים ..아인-체데, 헤이-헤이트-요드(정)-요드-멤)]]와 하나된바, 상호교통의 하나됨, 그렇게 상호거처로 사는 삶의 온전함을 아버지께서 친히 공급하심으로써 드러내도록 하라... @레쉬아임<레이시_쉰(우)-아인-요드-멤  *레쉬아 = CJ의 그영, 곧 그분의 영 형상 *예슈아(요드-쉰-아인) *아인-쉰-레이시 = 아쉬르 -->로쉬>..공급하신 말씀, 그안에 담긴 Q의 모든 것 하나하나마다 생명가지의 참제자에게 분배되는바, [동심합치의, 발휘되는 산 믿음의 받아들여 수용-적용-조성되고, 그영, 곧 예슈아  그분 자신을 그대로 담아내는 그릇됨 사는것이기에] [그영 따르는자마다 Q삶 넘침의 흐름 공급이라, 그분을 찍어냄 되게 하시며.. @우베데레크<바브(중), 베이트-달렛-레이시-쿠프 .."베레시트=말씀 원천이신 주님 계신 성전 그 자체임" 그 성전 안의 생명수 원천으로부터 물 공급 받음 통해 그영 형상의 실제 만들고 계심을 의미...*데레크 = 달렛 통해 레이시 이룸의 진리생명길>..CJ께서 걸아가신 그 길 동행 으로 아버지집에 거하게 하시는바..@하타임<헤이트-테이트-알렙-요드-멤 *하타임=밀알> [옛존재는 십자가에서 처리되어 죽고, 오직 발아된바]부활생명 넘침 흐름의 참 생명 지혜로 아버지를 사는, 곧 그분의 손에 이끌려 살아가는, 그분의 담지자로 살게 하시나니.... @로<라멛-알렙>..말씀 공급하시는 Q이시로다!! @아마드<아인-멤-달렛 *아모드=기둥(아인-멤-바브(상)-달렛).> 생명분배하여 낳은이들에게 생명양식인바 진리말씀-그 참생명으로 "달렛"의 삶 나타내시나니.. @우베모샤브<바브(중),베이트-멤-바브(상)-쉰(우)-베이트 *모샤브=마을, 정착지(멤-쉰(우)-베이트)>..아버지의 나라=집=공동체에 살게 하신자, 곧 Q의 베레시트로 "CJ, 그 Q생명으로 살아감의!!, 동심합치"가 무엇인지 알고 추구함 그자체의 삶 사는바라.. @레침<라멛_체데-요드-멤  *라촌=기뻐하다(주체할 수 없는 기쁨에 겨워!! 날마다 "생명말씀 잔치의 집이라!! " 방방 뛰며) )>...십자가로 하나됨 깨닫고 기뻐하는자를 극도로 기뻐하시나니.. @로<라멛-알렙>..말씀하시는 아버지라.. @야쉬브<요드-쉰(우)-베이트  *슈브=회개/돌이킴(쉰(우)-바브(중)-베이트)> ..[주님 손에 이끌려!!] 아버지께로 돌이키는자마다에게 그리하시도다..
---
*[Q의 베레시트 이룸 위해, 구하는 생명가지마다에게 유일무이하신 기묘자-모사이신분, Q이 베풀어 알게하시는바] 전략/지략/도모/모략/충고/조언/결의/의논 = 에차(חצע..헤이트-아인-체데) *야아츠(יָעַץ 요드-아인-체데)..= 지혜/방책/묘책/상담/상의/의논/조언/결정/해결하다 ---이 "베레시트"이룸 위한 [역사와 인생 주관자이신분] Q의 행정-경영이 바로 경륜이요 섭리임을 붙들고 [절대 신뢰-절대 기쁨-절대 긍정-절대 감사의 발휘되는 산 믿음으로!!] 그분께 안겨 의지함으로써, 친히 이끌어가시며 인도하시는 그분의 손 잡고 한걸음씩 그분을 호흡하며 나아감이 바로 진정한 찬양-경배요 경외함이기에, Q의 때-시간에 꽃 피우며 열매 맺게 하실바니..
----[사46:3--13...  3.  야곱의 집이여 이스라엘 집에 남은 모든 자여 내게 들을지어다 배에서 태어남으로부터 내게 안겼고 태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업힌 너희여   4.  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하겠고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 내가 지었은즉 내가 업을 것이요 내가 품고 구하여 내리라   5.  너희가 나를 누구에게 비기며 누구와 짝하며 누구와 비교하여 서로 같다 하겠느냐   6.  사람들이 주머니에서 금을 쏟아 내며 은을 저울에 달아 도금장이에게 주고 그것으로 신을 만들게 하고 그것에게 엎드려 경배하며   7.  그것을 들어 어깨에 메어다가 그의 처소에 두면 그것이 서 있고 거기에서 능히 움직이지 못하며 그에게 부르짖어도 능히 응답하지 못하며 고난에서 구하여 내지도 못하느니라   8.  너희 패역한 자들아 이 일을 기억하고 장부가 되라 이 일을 마음에 두라   9.  너희는 옛적 일을 기억하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같은 이가 없느니라   10.  내가 시초부터 종말을 알리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뜻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   11.  내가 동쪽에서 사나운 날짐승을 부르며 먼 나라에서 나의 뜻을 이룰 사람을 부를 것이라 내가 말하였은즉 반드시 이룰 것이요 계획하였은즉 반드시 시행하리라   12.  마음이 완악하여 공의에서 멀리 떠난 너희여 내게 들으라   13.  내가 나의 공의를 가깝게 할 것인즉 그것이 멀지 아니하나니 나의 구원이 지체하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나의 영광인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원을 시온에 베풀리라]
-----
===2.키 임(체우) 베토라트 예호와 헤페초 우베토라토 예흐게 요밈 와라일라
......@키<카프-요드>..예수님 이름 부르며 전존재 중심으로 주시는 말씀 하나하나에 깃든 주님마음따라 활짝 마음 열고 그 말씀 진리 그대로 수용-적용하고 그 말씀 전존재의 생명 양식삼아 완전히 그대 자신이 말씀과 하나되기까지 그리할지니, 이로써 주님이 일깨우시는 바로 그때 그분과 하나로 행보할 수 있게 되리라..  @임<알렙-멤>..하나님은 그 말씀이시요,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베토라트<베이트_타브-바브(상)-레이시-타브>..그 말씀 안에 들어있는 Q의 실제, 곧 그분의 참생명-관계적 인격의 어떠하심에로 완전히 적셔지고 변화 온전히 이룰바, 그 정의가 "Q께서 거듭난 택자에게 요구하시는 바, 그분의=그의 마음안에 두신 참생명의 법= 절대적으로 유일무이한 그 법은, 곧 "Q삶 위해!! 영을 사용하는 법인바, 그것이 "토라"의 참 정의임을 명심하라..."법이 많을수록 그 나라는 망하는 법이다"..이 패러독스를 기억하고 명심하라.. @예호와<요드-헤이-바브-헤이>..바로 그분의 호흡해 내신 생명 숨결이 바로 !! 그분이 여호와의 실제시라.. @헤페초<헤이트-페이-체데-바브(상)>..동심합치의 믿음 발휘할바 그 말씀이신 여호와, 곧 Q말씀의 생명 호흡 그 숨결로 전존재 가장 깊은데서 나오는 진실한 갈망 그 자체가 되게 할지니.. @우베토라토<바브(중), 베이트-타브-바브(상)-레이시-타브(상)  *레이시-타브(라토) = 그분이 생각하시는 바 그대로 이루어짐>..곧 생생한 활력 지닌 그 말씀이 인도하고 이끄사 그대로 작동되어 지도하심 그 능력 온전히 나타나게 하라.. @예흐게<요드-헤이-김멜-헤이 *하가=성령의 계시(헤이-김멜-헤이)>.. 여호와를 전달하시는  지혜와 계시의 영 공급 =깨달음, 깨우침!! 곧 생명 호흡 숨결이신 성령을 "매순간"  접촉함으로써 그리하라.. @요밈<요드-바브-멤-멤 *욤=여호와의 담긴바, 곧 그대로라..>..곧 여호와의 진리말씀의 그릇이기에.. @와라일라<바브, 라멛-요드-라멛> 배운바 그 말씀이 그대 자신 안에 그대로 들어와 만들어져서 거하시게 됨이니..
===3. 웨하야 케에츠 샤톨 알-펠게 마임 아쉬르 페르요 이텐 베이토 웨알레후 로-이볼 웨콜 아쉬르-이아셰 야첼리아흐
......@웨하야<바브,헤이-요드-헤이>..여호와로 살아가는바, @케에츠<카프-아인-체데>..기쁨으로 그 말씀을 수용/적용/내어맡김/중생-부활-발아-결합한 하나된 생명나무 가지요 .. @샤톨<쉰(우)-타브-바브(상)-라멛>..Q형상의 참생명-인격 그대로 온전히 대치됨 이룬, 판박이 참제자로다 @알-펠게<아인-라멛, 페이-라멛-김멜-요드>..분배케 하시는 말씀마다, 성령의 말하게 하심따라 그대로 말하는바....@마임<멤-요드-멤>..진리말씀의 담지자로 사는도다.... 
@아쉬르 ..진복이로다.. @페르요<페이-레이시-요드-바브(상)>..참생명-인격이신 그영께서 증거케 하시나니.  @이텐<요드-타브-눈>..베레시트 그대로 생생함이라  @베이토<베이트-아인-타브-바브(상)>..Q의 참생명-인격 그대로 온전히 대치된바 그의 마음은 말씀의 거처요, 
@웨알레후 <바브,아인-라멛-헤이-바브(중)>..동심합치로 분배말씀을 호흡하며.. @로-이볼<라멛, 요드-베이트-바브(상)-라멛>..말씀이신 여호와, 그분의 완전한 참제자 만드시나니.. @웨콜<바브,카프-라멛> 과정 거쳐 완성된 제자로다. @아쉬르<알렙-쉰(우)-레이시>-이아셰<요드-아인-쉰(좌)-헤이> ..친히 사역하심으로써 산출한 바라.. @야첼리아흐<요드-체데-라멛-요드-헤이트>...그분의 사역하심으로 온전/완전한 확장이라, 과정 거쳐 온전히 이루신바 참제자마다 부활생명의  그영, CJ께서 친히 살아가시나니...그 존재 안에 보배로우신 주님의 어떠함으로 가득히 채워진 참제자는, 진귀한 보배창고로다.
===4. 로-켄하레샤임 키 임-킴모츠  아쉬르-틷데펜누 루아흐
....@로-켄하레샤임<라멛-알렙, 카프-눈,헤이,레이시-쉰(우)-아인-요드-멤>.공급말씀이신 Q은  친히 말씀으로 조성하여 (죽음부활중생 거친) 참생명-관계적 인격의 어떠함에로의 변화 + 증거 가진 참제자를 세우시며, 호흡하심으로써 그영의 형상 부으신 그대로 담긴, 생명나무 가지를 산출하시나니  @키<카프-요드> @임-킴모츠<알렙-멤, 카프-멤-체데>  진리말씀-생명나무의 가지마다 Q의 거처...  @아쉬르-틷데펜누<타브-달렛-페이-눈-바브(중)-타브>....말씀<그안의 영과 생명>으로 온전.완전케 된바, Q말씀 그대로 결합한 하나로서 구별된 자마다 Q의 참생명, 부활생명의 영으로 살아가나니, . @루아흐<레이시-바브(중)-헤이트> 곧 영에 속한바 부활생명의 그영과 하나라, 영으로 살도다. 
===5. 알-켄 로-야쿠무 레쉬아임 밤메쉬페트 웨하타임 바아다트 찯디킴
.....@알-켄<아인-라멛, 카프-눈>..참생명가지된 제자, 상호결합-교통 통하여 그 생명나무의 모든 내용 그대로 받아 세워지나니 @로-야쿠무<라멛-알렙, 요드-코프-멤-바브(중)> 공급-인도하시는 Q이라,  @레쉬아임<레이시-쉰(우)-아인-요드-멤>..곧 그영의 부으시는 모든것 그대로 전달-교육-다룸 받고 자라가는 생명가지 산출하시나니.. @밤메쉬페트<베이트_멤-쉰(우)-페이-테이트>..진리말씀의 모든 형상이 말씀 그대로 거하는바 곧 참생명지혜를 사는바 @웨하타임<바브,헤이트-테이트-알렙-요드-멤>..넘치는 부활생명, 그 흐름인 참 지혜로 행하는 판박이 그릇으로 나타남이니 @바아다트<베이트_아인-달렛-타브>..그 안에 참증인 온전히 이룬바 @찯디킴<체데-달렛-요드-코프-요드-멤> 생명나무와 결합된 바 교통으로 하나 이룬바 의로운 가지로다
===6. 키-요데아 예호와 데레크 찯디킴 웨데레크 레샤임 토베드
.....@키-요데아<카프-요드, 요드-바브(상)-달렛-아인> @예호와 @데레크<달렛-레이시-쿠프> @찯디킴<체데-달렛-요드-코프-요드-멤> @웨데레크<바브,달렛-레이시-쿠프> @레쉬아임<레이시-쉰(우)-아인-요드-멤> @토베드<타브-알렙-베이트-달렛> ...그는 오직 말씀 받는 그대로 기꺼이 동심합치로 그분의 길로 행하며, 수용-적용-다루심 받아 새로이 조성되고 결합한 하나의 열린 상호 교통으로 살아가나니, 곧 참생명-관계적 인격이 바로 그 여호와의 어떠하심 그대로인바 충만 발현되며 나날이 그분의 장성한 분량의 충만에 이르나니, 진복이로다
이전글 : 시140.정사권세능력.모든시험/멸절하려는 포악자의 박해를 이겨내는 성도의 참된 힘/능력_구주보혈과 JC이름
다음글 : 시3.대적/여호와. 구주JC발견/그의 일하심을 찬양/더 분발하시도록 구하라.검진청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