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0.06.11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시130.사랑.한 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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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130==

*1.주님, 내가 깊은 물 속에서 주님을 불렀습니다.

*2.주님, 내 소리를 들어 주십시오. 나의 애원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

*3.주님, 주님께서 죄를 지켜 보고 계시면, 주님 앞에 누가 감히 맞설 수 있겠습니까?

*4.용서는 주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이므로, 우리가 주님만을 경외합니다.

*5.내가 주님을 기다린다. 내 영혼이 주님을 기다리며 내가 주님의 말씀만을 바란다.

*6.내 영혼이 주님을 기다림이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 간절하다. 진실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 간절하다.

*7.이스라엘아, 주님만을 의지하여라. 주님께만 인자하심이 있고, 속량하시는 큰 능력은 그에게만 있다.

*8.오직, 주님만이 이스라엘을 모든 죄에서 속량하신다.

여호와여 내가 깊은 곳에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

주여 내 소리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지켜보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하게 하심이니이다

나 곧 내 영혼은 여호와를 기다리며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는도다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여호와께서는 인자하심과 풍성한 속량이 있음이라 

그가 이스라엘을 그의 모든 죄악에서 속량하시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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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여호와여 내가 깊은 곳에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

[NASB]시 130:1 Hope in the LORD'S Forgiving Love. A Song of Ascents. Out of the depths I have cried to You, O LORD. [NRSV]시 130:1 A Song of Ascents. Out of the depths I cry to you, O LORD. [NKJV]시 130:1 A Song of Ascents. Out of the depths I have cried to You, O LORD; [NIV]시 130:1 A song of ascents. Out of the depths I cry to you, O LORD; 

*2.주여 내 소리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 

[NASB]시 130:2 Lord, hear my voice! Let Your ears be attentive To the voice of my supplications. [NRSV]시 130:2 Lord, hear my voice! Let your ears be attentive to the voice of my supplications! [NKJV]시 130:2 Lord, hear my voice! Let Your ears be attentive To the voice of my supplications. [NIV]시 130:2 O Lord, hear my voice. Let your ears be attentive to my cry for mercy. 

*3.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지켜보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

[NASB]시 130:3 If You, LORD, should mark iniquities, O Lord, who could stand? [NRSV]시 130:3 If you, O LORD, should mark iniquities, Lord, who could stand? [NKJV]시 130:3 If You, LORD, should mark iniquities, O Lord, who could stand? [NIV]시 130:3 If you, O LORD, kept a record of sins, O Lord, who could stand?  

*4.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하게 하심이니이다

[NASB]시 130:4 But there is forgiveness with You, That You may be feared. [NRSV]시 130:4 But there is forgiveness with you, so that you may be revered. 

[NKJV]시 130:4 But there is forgiveness with You, That You may be feared. [NIV]시 130:4 But with you there is forgiveness; therefore you are feared.  

*5.나 곧 내 영혼은 여호와를 기다리며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는도다

[NASB]시 130:5 I wait for the LORD, my soul does wait, And in His word do I hope. [NRSV]시 130:5 I wait for the LORD, my soul waits, and in his word I hope; 

[NKJV]시 130:5 I wait for the LORD, my soul waits, And in His word I do hope. [NIV]시 130:5 I wait for the LORD, my soul waits, and in his word I put my hope.  

*6.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

[NASB]시 130:6 My soul waits for the Lord More than the watchmen for the morning; Indeed, more than the watchmen for the morning. [NRSV]시 130:6 my soul waits for the Lord more than those who watch for the morning, more than those who watch for the morning. [NKJV]시 130:6 My soul waits for the Lord More than those who watch for the morning--Yes, more than those who watch for the morning. [NIV]시 130:6 My soul waits for the Lord more than watchmen wait for the morning, more than watchmen wait for the morning.  

*7.이스라엘아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여호와께서는 인자하심과 풍성한 속량이 있음이라

[NASB]시 130:7 O Israel, hope in the LORD; For with the LORD there is lovingkindness, And with Him is abundant redemption. [NRSV]시 130:7 O Israel, hope in the LORD! For with the LORD there is steadfast love, and with him is great power to redeem. [NKJV]시 130:7 O Israel, hope in the LORD; For with the LORD there is mercy, And with Him is abundant redemption. [NIV]시 130:7 O Israel, put your hope in the LORD, for with the LORD is unfailing love and with him is full redemption.  

*8.그가 이스라엘을 그의 모든 죄악에서 속량하시리로다

[NASB]시 130:8 And He will redeem Israel From all his iniquities. [NRSV]시 130:8 It is he who will redeem Israel from all its iniquities. [NKJV]시 130:8 And He shall redeem Israel From all his iniquities. [NIV]시 130:8 He himself will redeem Israel from all their si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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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돌보심(시 130:1-4)

이 대목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배운다.

Ⅰ. 우리는 어떠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비록 매우 비참한 경우일지라도, 끊임없이 하나님께 아뢰어야 한다(1절). 가장 훌륭한 인간이라도 때로는 큰 고통과 고난에 빠진다. 또한 때로는 어쩔 줄 몰라서 무엇을 할지도 모르는 비탄과 절망의 심연 속에서 어둡고 낮은 정신으로 사는 불안하고 절망적인 존재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엄청난 절망 가운데서도 우리가 하나님께 매달리며 울부짖을 수 있고, 그로부터 응답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우리들에게 부여된 특권이라고 할 수 있겠다. 기도하는 자는, 비록 같은 지옥에서일지라도, 예레미야의 감옥이나 다니엘의 야수의 굴, 요나의 고기 뱃속에서와 같이 우리가 이 세상에서 경험할 수 있는 가장 큰 고통의 한복판에서라도, 하늘의 높이에 이를 수 있다.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는 것은 우리의 의무며, 권리다. 왜냐하면 그것이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40:1-2)에서 우리가 더 깊이 빠지는 것을 막아주며, 구원하는 가장 훌륭한 길이기 때문이다.

Ⅱ. 한편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평안의 응답이 올 것을 확신하면서 하나님께 간구를 계속한다. 이것이 바로 다윗이 믿음으로 드리는 기도이기 때문이다(2절). “여호와여, 내 소리를 들으시며, 나의 탄식과 기도를 들으소서. 그리고 나의 고통과 소망 속에서 나의 간구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

Ⅲ. 우리는 하나님의 면전에서 죄책감으로 인해 하나님의 정의 앞에 우리 자신을 겸손히 하는 것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의 수많은 죄를 인해 그에게 응답을 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3절). “주께서 죄악을 감찰하실진대 누가 그 앞에 서리이까?” 그가 하나님을 부르는 아주 짧은 단어들인 야(Jah, 여호와)와 아도나이(Adonai, 주님)는 어세가 매우 강하다. 그 단어들은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의 두려운 느낌과 여호와의 징벌의 두려움을 암시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것을 배우고 있다.

1. 우리들의 죄악이 용납되기 위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들을 정당화하거나 죄가 없음을 주장할 수 없다. 우리들의 죄악은 명백하고, 그 책임을 면하기란 어렵다.

2. 그러한 하나님의 권능과 정의를 고백하도록 가르침 받고 있다. 만일 그가 우리의 빗나감을 극단적으로 드러내신다면 우리가 거기에 도달할 소망은 없게 된다. 그의 눈은 가장 훌륭한 사람일지라도 책망할 수 있는 충분한 근거를 발견하실 수 있다. 그리고 만일 그가 우리에게 계속 이같이 대하신다면 우리는 자신을 도울 어떤 길도 가질 수 없고, 설 수도 없으며, 틀림없이 던짐을 받게 될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엄격한 정의로 우리를 대하신다면 우리는 파멸에 이를 것이다. 만일 그가 우리의 부정에 대해서 주목하신다면 크고 많은 부정을 발견하실 것이며, 크게 나쁘고 매우 거역된 죄들을 발견하실 것이다. 그리고 만일 그가 그것에 따라 계속 추궁하신다면 그는 우리에게서 그의 은총의 모든 소망을 닫으시고 우리를 그의 진노 아래 감금시키실 것이다. 그러면 무엇으로 우리 자신들을 도울 수 있을 것인가? 우리들은 탈출을 도모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 징벌의 손에 저항하거나 견딜 수도 없게 된다.

3. 하나님의 인내와 용서를 찬양해야 한다. 그가 우리의 죄악을 드러내신다면 우리는 파멸할 것이다. 하나님의 진노에 의해 “우리가 소멸되지 않음은 그의 자비로 말미암은 것이다.”

Ⅳ.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자비에 우리를 맡겨야 하며, 우리가 스스로를 하나님의 정의에 비추어볼 때 심판 받을 만함을 이해하고, 우리를 위로해야 함을 배우고 있다(4절). 여기에서 다음 두 가지 사실을 고찰해 보자.

1. 참회하는 죄인에 의해 발견되고 간구되는 하나님의 은총.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나이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 가까이 할 때 그에게 죄사함이 있다는 사실은 말할 수 없는 위로가 된다. 그것이 바로 우리에게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죄를 용서하시는 능력을 자신에게 두신다. 그가 스스로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고,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선포하셨다(출 34:6-7). 그는 회개하는 자들의 죄를 용서해 주시기로 약속하셨다. 그를 대하는 어떤 자라도 그가 무자비하다고 생각지 않으며, 오히려 간구하기 쉽고, 자비를 쉽게 보게 될 것이다. 우리에게는 죄악이 있다. 그러므로 그에게 사유하심이 있음은 우리에게 복이 된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주께는 화해가 있나이다”라고 해석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위대한 화해자며, 하나님께서 주신 속량이다.

그는 항상 하나님과 함께 계셔서 우리를 옹호해 주신다. 우리는 그를 통해서 용서를 얻을 수 있는 소망을 갖는다.

2. 그러한 발견에서 설정하고, 거기서 추론해 낸 우리의 의무.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께서 인간을 대담하게 하거나 주제넘게 두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를 경외케 하심이니이다.” 주께서는, 죄인이며 하나님을 대할 수 없는 인간의 자녀들에 의해 예배를 받으며, 섬김을 받으시려는 것이다. 만일 그가 주가 아니라면, 많은 죄악을 사죄하실 수 없었을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모든 비행으로 빗나가게 되지 않는 그의 예배에로 인도되도록 용기를 북돋아준다. 아니, 우리가 진실로 회개한다면 그는 어떤 것이라도 사해 주신다. 그는 특별한 방법으로 회개하는 죄인들을 초청하시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데로 돌아가게 하신다. 그는 은혜롭고 자비로우셔서 저희의 회개를 받아주신다(욜 2:13; 마 3:2). 특별히 우리는 경외의 하나님이 사유하시는 자비에 존경을 가져야 한다(호 3:5. “저희가 여호와께로 와 그 은총으로 나아가리라”). 그리고 우리는 사유하심의 은혜를 기대해야 하며, 우리가 경외의 대상을 하나님으로 정할 때 죄사함의 은혜를 구할 수 있다.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림(시 130:5-8)

Ⅰ. 시편 저자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를 기다릴 것을 약속하고 있다 (5-6절).

다음과 같은 내용을 고찰해 보자.

1. 그의 하나님께 대한 의지. 이것은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로서 절정적으로 표현되었다.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나이다. 나는 그로부터 구원과 위로를 기다리며, 그때가 올 것을 믿고, 그때가 올 때까지 갈망하나이다. 그러나 지연되어도 인내로 참고 견디며, 다른 손으로부터 그것을 찾지 않기로 결심하나이다. 내 영혼이 기다리나이다. 내가 그를 가식으로 기다리지 않고, 오직 성실하게 진심으로 기다리나이다. 나는 기다리는 사람이며, 내 영혼이 기다리는 것은 여호와를 향한 것이고, 그의 은총의 선물과 그의 권능의 활동을 기다리는 것이니이다.

2. 신뢰의 기반. “내가 그 말씀을 바라는도다.” 우리는 그의 말씀 속에서 약속하신 것만을 소망해야 하며, 결코 우리 자신의 환상이나 공상의 피조물을 소망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우리는 그가 그것을 약속하셨기 때문에 소망할 수 있을 뿐, 결코 우리 자신의 공로에 대한 생각으로 소망해서는 안 된다.

3. 신뢰의 정도. “파수꾼의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

(1) 아침이 올 것을 확신한 사람보다 더하다.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께서 그의 약속에 따라 내게 자비로 돌리실 것을 확신한다. 하나님의 언약은 낮과 밤의 법칙보다 정확하기 때문이다. 낮과 밤은 사라질지라도 하나님의 언약은 영원하다.

(2) 아침이 오기를 대단히 갈망하는 사람보다 더하다. 성을 지키는 파수꾼들과 병자들을 돌보는 자들, 해외로 여행하는 자들은 하루 전에 새 날의 동트는 여명을 보고 싶어한다. 그러나 이 선한 사람은 진지하게 하나님 은총의 표징과 그의 은혜의 초대를 위해 더욱 갈망하며, 낮에 행하는 사람들보다 더욱 부지런하게 그의 첫 출현을 알고자 한다. 하몬드 박사는 그것을 이와 같이 읽는다. “내 영혼이 아침의 수비대로부터 여호와를 재촉하나이다.” 그리고 거기에 이러한 의미를 붙인다. “내가 매일 아침에 일찍 주께로 나아갑니다. 나의 깊은 영혼이 제사장들이 아침 예배를 드릴 때에 기도를 드리고자 주 앞에 나아갑니다.”

Ⅱ. 그는 하나님을 같은 방법으로 의지하며, 신뢰하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을 격려하고 있다.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바라고 그를 기다릴지어다.” 백성의 일부만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칭호하는”(사 44:5) 모든 선한 사람들을 격려한다. 하나님께 헌신하는 모든 자들은 즐겁게 자신들을 그에게 두어야 한다(7-8절). 그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1. 자연의 빛이 “그에게 인자하심이 있으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자비로운 하나님이시며, “모든 자비의 아버지”가 되심을 우리에게 알려주기 때문이다. “자비는 그에게 있다.” 그 자비는 그의 본성에 기인하는 고유한 것일 뿐 아니라, 그것이 바로 그의 기쁨이다. 그것은 그의 모든 활동과 그의 모든 뜻에서 그와 함께 있다.

2. 복음의 빛이 “그에게 구속이 있으며”, 그에 의해 설계되고, 그것이 “때가 찼을 때” 이루어짐을 우리에게 알려주기 때문이다. 그 구속은 태초로부터 하나님 안에 숨겨져 있던 것이었다.

(1) 이러한 구속의 성격. 그것은 죄로부터의 구속이며, 모든 죄로부터의 구속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관하시는 영원한 구속 이외에는 아무것도 있을 수 없다.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마 1:21)이시며,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딛 2:14), “야곱에게서 경건치 않은 것을 돌이키시는”(롬 11:26) 분이기 때문이다. 우리를 죄의 저주와 죄의 지배적인 권세로부터 구속하실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2) 이러한 구속의 풍성함. 그것은 “풍성한 구속이다.” 구속자에게는 공로와 은혜의 충만함이 있으며, 모두에게 풍성하고, 각자에게 충만함이 있다. 신앙인은 내게 풍성하다고 말한다. 죄로부터의 구속은 모든 다른 악으로부터의 구속을 포함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풍성한 구속이다.

(3) 이러한 구속의 은총을 받는 사람들. “저가 이스라엘을 구속하실 것이며”, 그의 성령에 따라 이스라엘을 구속하시고, 하나님과 언약을 맺는 모든 사람들을 구속하실 것이다. “진실로 흠이 없는 이스라엘과 같이” 이스라엘을 구속하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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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m;[}m'(4615, 마아마크) 깊은, 깊은 곳 depth

마아마크(명남)는 아마크(qmo[; , 6009: 깊다)에서 유래했으며, '깊음, 깊은 곳 depth'을 의미한다.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5회 나온다.

마아마크는 사 51:10에서 문자적 의미로 사용되었다: "바다를, 넓고 깊은 물을 말리시고 바다 깊은 곳에 길을 내어 구속 얻은 자들로 건너게 하신이가 어찌 주가 아니시니이까".

마아마크는 비유적 의미로 사용되었다. 겔 27:34에서 바다 "깊은 데서 파선한" 것은 두로의 멸망을 가리킨다. 시 69:2의 "깊은 수렁"과 시 69:14의 "깊은 물"은 고통이나 고난을 가리킨다.(참조: BDB; HE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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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q;(7121, 카라) 부르다, 선포하다, 소환하다, 읽다

카라(동사)는 기본어근이며, '부르다, 선포하다, 소환하다, 읽다'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740회 나오며, 칼, 니팔, 푸알형으로 사용되었다.

(a)  카라는 일차적으로 특별한 말 또는 메시지의 발설을 의미한다. 후자의 용법에 있어서는 이것이 보통 특정한 수령인에게 주어지며 특별한 응답을 유도해 내기 위한 의도가 담겨져 있다. 그러므로 이 어근은 '선포하다, 초대하다'로 번역되는 수가 있다. 드물지만 카라가 단순한 부르짖음을 의미할 때도 있다(예: 시 147:9, 사 34:14).

(b)  카라는 '부르다'는 의미에서 '소환하다'를 나타낸다(창 12:18, 창 20:8-9, 민 22:5, 민 22:20, 민 22:37, 삿 8:1, 삼상 3:5-6, 삼상 3:8 등).

(c)  카라는 '초대하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출 34:15, 삿 14:15, 삼상 16:3, 삼상 16:5 등).

(d)  카라는 '이름의 명명'에 대해 사용되었다.

작명은 때로 이름 지어진 사물에 대한 주권의 주장이 된다. 하나님의 창조는 별들의 작명과 계수를 수반하였다(시 147:4). 그리고 어둠에 관한 작명(창 1:5), 참으로 모든 것에 대한 명명과 계수가 수반되었다(사 40:26). 하나님은 동물들을 아담에게 주어 그것들에 대한 그의 상대적 주권을 주장하게 하였다(창 2:19).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고레스의 이름을 불렀다(여기에 임무를 위한 선택의 뜻이 내포되어 있음에 유의하라, 사 45:4). 때로는 "명명"의 개념이 없을 경우라도 이 주권의 관념이 내포된다. 예컨대 하나님이 태초부터 만대를 불렀다는 표현 등이 그것이다(사 41:4, 한글개역: "명정[命定]하였다"; 참조: 암 5:8). 상기의 용례들에서 그 대상은 응답해야 한다.

(e)  카라는 많은 경우에, 주어진 이름이 명명된 그 사물의 주요 특성을 묘사하는데 사용되었다. 때로 여기에는 언어 유희가 포함된다(창 27:36). 그밖에 이러한 명명은 대상에 대한 고백 또는 개인적 가치 평가를 형성하고 있다(사 5:13, 사 60:14). 혹은 영원한 진리에 대한 인지를 함유하기도 하는데, 예를 들면 예언에 의해 약속되는 아이가 "하나님에 의해", "임마누엘"이라 명명되는 경우이다(사 7:14).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대한 자기의 주권을 확언하였다(사 41:2). 그러나 그들을 또 다른 이름으로 불렀다(사 65:15, "은 찌꺼기", 렘 6:30, 한글개역: "내어버린 은"). 출 33:19, 출 34:6과 신 33:3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반포한다는 것은 그의 속성에 대한 묘사와 주권적 행위에 대한 묘사를 내포한다.

(f)  카라는 '선포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렘 34:5, 욘 3:5, 욜 3:9, 렘 7:2, 왕상 21:9, 왕상 21:12, 렘 36:9 등).

(g)  카라는 '읽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사 29:11, 사 34:16, 렘 36:6, 렘 36:8, 렘 36:10, 렘 36:13, 렘 36:14, 렘 36:15, 렘 36:21, 렘 36:23 등).

(h)  카라는 또한 특정한 직무에로 누군가를 부른다는 뜻을 내포하기도 한다. 바로의 딸의 시녀는 자기가 가서 유모를 "불러" 올 것인지 물었다(출 2:7). 가나안의 모든 주민들을 멸망시킨 것은, 우상숭배에로의 개인적 초대를 수락함으로써 거기에 말려들 수 있는 우호 관계의 온갖 가능성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함이었다(출 34:15).

(i)  카라의 가장 두드러진 용법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과 관계가 있다. 보통 그러한 문맥은 위급한 요구(시 34:6, 시 81:7)나 오랜 필요와 관련된다(예: 가인이 아벨을 죽인 후 인간은 저주의 충분한 효과를 깨달았으며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창 4:26). 경건한 자들은 하나님을 계속 부름으로써 원죄의 존재를 인지하였다(창 12:8, 창 13:4, 시 116:2). 하나님은 이처럼 자신을 부르는 모든 자에게 응답하신다(시 145:8). 참으로 언약의 백성(이방인을 포함하여, 왕상 8:43)에게는 그와 같이 기도하라는 가르침이 주어지며, 그들은 또한 하나님께서 저주를 역전시킬 것을 확신한다(사 55:6, 사 55:13). 그와 같이 하나님을 부르지 않으면 하나님의 진노를 받기에 합당하며(시 79:6) 그것이 정당하다(사 65:12). 말세에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부르는 자들은 저주 받은 이방인들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이며(사 55:5), 그들은 그에게로 달려갈 것이다. 그는 바벨을 역전시킬 것이고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자들은 모두 하나의 순수한 언어로 그를 섬길 것이다(습 3:9). 그들이 부르기 전에도 그는 응답할 것이다(사 65:24). 따라서 에덴이 복원되며 저주는 완전히 폐기된다. 그러한 약속을 받은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부름을 거부했다는 사실은 얼마나 슬픈 일인가(사 65:12). 구원은 진정 여호와께 속한 것이다.(참조: L. J. COPPES; B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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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n;doa}(136, 아도나이) 나의 주 my Lord, LORD

아도나이(yn;doa} , 136)는 아돈의 강조형이며 '나의 주'를 의미한다. 아돈이 가장 일반적인 단수명사형어미와 함께 독특한 복수어형으로 나올 때(아도나, 아도나이) '나의 주'라는 의미를 지니며, 언제나 하나님을 가리킨다. 이 경우 아도나이(yn;doa} , 136)의 눈 아래 모음이 장모음 '아'이다. 엘로힘(하나님)이 히브리어 복수형인 것처럼, 이 단어도 위엄을 나타내는 강의형복수나 복수형일 것이다. 이 접미사가 번역되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참조: 창 18:3, 사 21:8, 시 16:2).

하나님의 이름(야훼 YHWH)을 망령되이 일컫는 위험을 피하기 위해 경건한 유대인들은 고유명 그 자체 대신 아도나[이]라는 말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비록 마소라 본문이 그 본문에 4개의 본래적인 자음을 남겨두었다 할지라도, 그들이 모음 에(?, 다른 이유 때문에 아[?]대신 사용됨)와 아(?)를 첨가 시켜 독자들로 하여금 자음들에 상관없이 아도나[이]로 발음하게 만들었다. 이런 특징이 히브리어 성서에 6,000회 이상 나온다. 가장 좋은 번역은 모두 대문자를 사용하여 "LORD"라는 칭호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예외적인 것으로는 '여호와' Jehovah라는 말을 사용하는 미국표준역성서(ASV)와 신세계번역본(New World Translation), '주' Lord라는 말을 사용하는 확대된 번역본, 그리고 '야훼' Yahweh라는 말을 사용하는 예루살렘 성서가 있다. 유대인들의 이런 신중함은 본문에 나오는 약어 "i. e."를 보고서 "즉" that is이라고 말하는 우리의 관습과 비슷한 것이었다. 후에 유대인들은 "이 이름", "찬송 받을 자", 혹은 "하늘"과 같은 다른 말로 대치시켰다(참조: 막 14:61-62).

아도나이 야훼가 나오는 그런 구절들에서 야훼라는 말은 엘로힘에서 나온 모음으로 지적되며 "Lord GOD"(주 하나님)과 같은 영어 번역어들이 생겨났다(예: 암 7:1).

(참조: L. J. Copper; HE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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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q(6963, 콜) 소리, 목소리, 음성

콜(명남)은 '소리, 음성, 목소리 sound, voice, noise'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500회 이상 나온다.

콜은 주로 성대에서 말하는 소리를 의미한다(실제적으로나 비유적으로).

시적인 구절들(대부분)에서 그 의미는 다양한 여러 소리까지 포용한다. 빈도가 높지는 않지만 콜이 육성이나(창 3:17) 기록에 의해(왕하 10:6) 발성된 것을 뜻할 경우도 있다. 이 단어가 또한 감탄조의 "들으라"라는 뜻으로 작용하기도 한다(참조: GKC, 146b, 사 13:4, 사 66:6 등등).

'소리를 높여 울다'라는 문구는 광범하고 다양한 감정과 상황을 포함하고 있다. 예를 들면 도와 달라는 울부짖음(창 39:14), 현실적 또는 예상되는 비극에 대한 슬픔(창 21:6), 재난이나(출 16:34) 기쁨(창 29:11)의 소리 등이다. 하나님께서는 산 위에서 그리고 후에는 속죄소 위에서 모세와 말씀하심으로써(출 25:22, 민 7:89, 참조: 출 20:22), 법궤를 어떤 수호신으로 여기면 안된다는 것을 가르쳐 보이시고 확증하셨다(삼상 4:6, 삼상 4:14). 후에 하나님의 목소리가 블레셋인들을 뿔뿔이 흩어버렸다(삼상 7:10).

'아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다'라는 표현은 다음의 뜻을 함축한다. 주의하여 믿다(창 4:23), 아무의 제의에 따르다(창 3:17), 요청을 들어주다(창 21:12), 명령에 순종하다(창 21:18), (하나님이) 기도에 응답하다(삼하 22:7).

본 단어가 다음과 같은 신학적 문제들과 관련하여 중요한 역할을 한다(더 좋은 이름들이 없으므로). 예언, 천둥, 언약, 나팔, 이 주제들은 종종 서로 뒤얽힌다. 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의 음성과 모세의 음성(후에는 선지자들의 음성)은 상호 교환될 수 있다(참조: 출 3:18, 출 4:1, 출 7:1). 하나님은 그에게 특정한 표적들을 주시는데 사실상 이 표적들 자체가 말하는 역할을 한다(출 4:8, 한글개역: 난외주를 보라). 그리하여 하나님이 모세를 보내셨음을 확증한다(그러나, 출 5:2). 천둥은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을 상징한다. 즉 천둥이 심판을 초래하며 두려움과 복종심을 불러 일으키기 때문이다(출 9:23, 출 9:29, 참조: 시 29장). 하나님의 '콜'은 우르렁거리는 천둥소리이다. 반면 하나님께 나아갈 때의 인간의 '콜'은 딸랑 거리는 방울 소리이다(출 28:35). 언약의 문제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간명하게 선언하신 다음과 같은 원리에서 찾아볼 수 있다. 즉, 하나님의 종 모세의 명령(음성)은 하나님의 명령(음성)이며, 만일 백성이 그의 언약에 복종하고(귀를 기울이고) 그것을 지키면 복을 받을 것이다(출 19:5). 그들이 불순종하면 심판을 받을 것이다. 이러한 모든 것은 시내산에서 충분히 설명된 바 있다(특히 신명기에서, 삼상 12:14-18, 예레미야의 용례들). 천둥 치듯 바로에게 심판을 내렸던 하나님의 주권적 능력이 이제는 축복의 표적으로 등장한다(출 19:16, 참조: 삼하 22:7-14, 삼하 3:16, H4:16, 등등). 마지막으로 '콜'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들은 나팔소리이다. 그 나팔소리는 하나님의 능력(수 6:5)과 임재의 신호이다(삼하 6:15, 왕상 1:40-45, 고전 15:52).

바알(가나안의 천둥 신)의 거짓 선지자들과 엘리야의 싸움에서, 번개와 천둥을 일으키고(왕상 18:41) 비를 내림으로써(왕상 18장, 참조: 시 29편) 그 상황의 요구를 충족시키고 실현시킨 이는 바로 하나님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또한 세미한 음성으로 말씀 하심으로써(왕상 19:12), (바알이 그러하듯) 자신이 자연의 힘에 불과한 어떤 존재 이상임을 보여 주신다. 바알과의 이 싸움은 두 종교 사이에 있는 오랜 복합적 갈등의 일부이다(참조: W. F. Albrigth).

이러한 갈등은 구약성경의 선지서들과 시가에서 줄곧 입증되는 바이다.

마지막으로 콜이 아담이 동산에서 들었던, 바람을 타고 실려온 하나님의 음성이었음을 당연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창 3:8, 왕상 14:6).(참조: L. J. COPPES; B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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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nj}T'(8469, 타하눈) (은혜를 위한) 탄원(간청)이나 기도

타하눈(명남)은 하난(@n"j; , 2603: 호의, 은혜를 베풀다)에서 유래했으며, (은혜를 위한) 탄원이나 기도 supplication(for favour)'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18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a)  사람에게 간청, 가난한 자가 부자에게 간청하는 것(잠 18:23), 악어가 사람에게 간청하는 것(욥 41:3)을 묘사한다.

(b)  하나님께 기도(시 143:1, 단 9:3, 단 9:17, 대하 6:21), 탄원의 소리(시 28:2, 시 28:6, 시 31:23, 시 86:6, 시 130:2, 시 140:6, 시 116:2), 그리고 렘 31:9, 렘 3:22, 슥 12:10, 단 9:18, 단 9:23.(참조: B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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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V;q'(7183, 캇샤브) 주의 깊은, 경청하는

캇샤브(형용사)는 카샤브(bv'q; , 7181)에서 유래했으며, '주의 깊은, 경청하는, 친절한'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5회 나오며, 상징적으로, 하나님의 귀가 주의를 기울인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하나님은 자기에게 들려오는 간구에 유의하신다(대하 6:40, 대하 7:15, 느 1:6, 느 1:11, 시 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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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71, 아온) 불법, 부정, 죄악, 죄의 벌

아온(명남)은 아와(hw:[; , 5753)에서 유래했으며, '불법, 부정, 죄악, 사악, 유죄, 죄의 벌(징계)'을 의미한다.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230회 나온다.

명사 아온은 집합명사이다. 예컨대 하나님은 아모리인의 범죄, 타락에 대해 말씀하신다: "아모리 족속의 죄악(단수)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창 15:16). 사르밧 과부는 엘리야에게 당신은 "내 죄(단수)를 생각나게"하려고 왔다고 불평한다(왕상 17:18). 따라서 이 단어는 다음과 같은 관용구에서 나타난다. '아온을 지다'(창 4:13, 출 34:7, 호 14:3, 시 85:3), '아온을 제거하다(히필형)'(슥 3:4), '아온을 갚다'(출 20:5) 등. 이러한 '전체'라는 개념은 집단의 죄뿐만 아니라 개인의 죄와 연관하여서도 나타난다. "염소가 그들의 모든 불의(복수)를 지고"(레 16:22);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단수)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6).

더욱이 위의 언급들이 가리켜주는 바와 같이 이 단어는 행위 및 행위의 결과, 범죄 및 범죄의 형벌 모두를 나타낸다. 양 개념이 모두 나타나지만 때로는 행위('죄')에 초점이 주어지고, 또 때로는 범죄의 결과('형벌')에, 때로는 행위와 그 결과 사이의 상황('죄의식' guilt)에 초점이 주어진다. 형벌을 요하는 범죄에 초점이 주어지는 실례: "이 '죄악' sin이 너희로 마치 무너지게 된 높은 담이 불쑥 나와 경각간에 홀연히 무너짐 같게 하리라"(사 30:13, 참조: 겔 18:30, 겔 44:12, 호 5:5, 욥 31:11, 욥 31:28). 형벌에 강조점이 주어지는 예: "일어나라...그렇지 않으면 네가 성읍의 '형벌' 가운데서 소멸되리라"(참조: 렘 51:7, 시 39:12, 시 106:43, 욥 13:26, 욥 19:29, 스 9:7). '죄의식'(guilt)에 강조점이 주어지는 예: "이 '죄악'을 내게로 돌리시고"(삼상 25:24). 다른 많은 실례들에 대해서는 아래를 보라.

'행위로서의 죄'라는 의미와 '형벌'이라는 의미 사이의 현저한 양면적 의미는 구약성경의 사상에서 죄와 그 형벌은 우리가 생각하는 경향과 같이 근본적으로 별개의 개념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오히려 구약성경에서 인간의 행동과 인간에게 일어나는 일은 기본적인 하나님의 질서 속에 존재하는 하나의 과정으로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것으로 전제된다. 이러한 연관성은 "삶에 대한 종합적인 견해"라고 불리워졌다(Von Rad, G).

어근 하타(죄)도 마찬가지의 기본적인 '종합적' 개념을 보여준다. 예를 들면 민 32:23을 보라: "너희가 만일 그 같이 아니하면 여호와께 범죄함이나 너희 죄가 정녕 너희를 찾아낼 줄 알라". 두 번째 나타나는 이 어근의 명사형은 행위에 대한 '형벌'을 나타낸다(참조: 민 12:11). 따라서 죄는 개인과 혹은 공동체를 멸망시키는 피할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오며 근절되어야만 한다(B. K. W.).

아온은 분명히 하나님의 성품의 특성도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행동의 특성도 아니고(출 20:5, 출 20:6, 출 34:7), 인간의 속성과 행동(그러한 행동에 수반하는 결과를 포함하여)의 저항할 수 없는 특성이다.

아온은 삼상 20:1, 삼상 20:8, 삼하 3:8, 느 4:5, 시 51:2에서 여러 종류의 시민 생활 혹은 사회적(규칙) 위반을 지칭하고, 수 22:17, 삼상 3:13-14에서는 제의적인 (규율) 위반을 가리킨다. 이 용어는 집합 명사 혹은 유사 추상명사로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과거의 범죄의 총합을 나타내는데, 이에 대한 실례는 너무 많아서 모두 열거할 수 없을 정도이다. 민 14:34, 삼상 25:24, 삼하 22:24, 왕상 17:18, 스 9:6, 욥 13-26장, 사 1:4, 렘 11:10가 그 예이다.

어떤 구절에서는 아온의 성질과 내적 근원에 강조점이 주어진다.

욥 15:4-5에서 아온은 하나님 경외하기를 폐하는 것 등과 관련되어 있다.

반면에 시 78:37-38에서 아온은 하나님을 향하여 (마음이) 확고 부동하지 않음과 결합되어 있으며 렘 14:10에서는 그들이 이렇게 방황하기를 좋아하였다 라는 진술과 관련되어 있다.

아온은 간음(민 5:31) 및 우상 숭배(호 5:5, 렘 16:10-11)와 관련된다. 이러한 은유에서는 위반하는 행동과 그 결과인 더럽힘 모두가 묘사된다.

아온의 다른 결과는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 소외(alienation, 레 26:40, 사 59:2, 사 1:4), 그리고 부정(시 51:2, H4)으로 나타난다.

죄책감(guilt)은 내적 인간에 대한 아온의 주요한 결과다. 이 요소는 과거 범죄에 대한 총합을 나타내는 아온의 기능과 쉽게 구별되지 않는다. 그러나 BDB는 죄책감의 요소가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실례를 30여회 이상 열거한다(p. 731).

아온은 그 결과가 내적 인간에게 영향을 끼치는 외에도 가문, 지파, 이스라엘 민족, 열방 및 자연에도 영향을 끼친다. 가문에 대하여, 친숙한 진술은 출 20:5, 신 5:9에서 발견된다.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벌은 가문이나 지파의 개개인들에게 보다 직접적으로 내리는 벌로 집중할 수 있다(레 5:17, 레 18:25, 민 5:31, 삼상 25:24, 삼하 14:9, 시 106:43, 렘 36:31). 아온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형벌을 면할 수 없게 한다(레 26:39, 스 9:7, 스 9:13, 시 107:17과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에 있는 많은 실례). 어떤 의미에서, 대제사장과 제사장들이 그들 임무의 거룩과 성소의 거룩으로 인하여 이스라엘을 대신하여 형벌의 위험을 떠 맡았다(출 28:38, 출 28:43, 레 22:16, 민 18;1, 민 18:23). 예루살렘의 멸망 이후 그 재난은 이스라엘 민족의 아온의 결과로 인식되었다(애 4:6, 애 4:13, 애 4:22, 겔 39:23, 단 9:13, 단 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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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m'v;(8104, 샤마르) 지키다, 준수하다, 보존하다, 감시하다, 주의하다

샤마르(동사)는 기본어근이며, '지키다, 준수하다, 보존(간수)하다, 감시하다, 주의하다'를 의미한다.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470회 나오며, 칼, 니팔, 피엘, 히트파엘형으로 사용되었다.

(a)  샤마르의 기본적인 개념은 '큰 주의를 하여 행한다'를 의미한다.

이 기본적인 개념은 이 동사의 변형된 다양한 의미들 저변에 깔려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동사가 다른 동사들과 결합되면 그 의미는 '면밀하게 혹은 부지런히 행하다'가 된다. 예컨대 잠 19:8에서 "명철에 주의하다"(한글개역 "명철을 지키는"), 신 11:32에서 "모든 규례와 법도를 너희는 행하도록 주의하라 즉 주의 깊게 수행하라(한글개역 "지켜 행할찌니라")", 그리고 민 23:12에서는 주의 깊게 말하다 혹은 충실하게 말하다.

(b)  샤마르는 언약 의무, 율법, 법규, 등에 '면밀하게 주의한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창 18:19에서 보면 아브라함은 그의 자식들에게 여호와의 도를 지키도록 즉 하나님의 도에 조심스럽게 유의하도록 명령해야 한다(출 20:6, 레 18:26, 신 26:16, 겔 11:20). 주의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것은 단지 이론 만의 문제나 마지 못해 추종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들을 행하라'는 표현이 자주 첨가되는데, 겔 37:24에서 그 실례를 찾아볼 수 있다. 잠 4:21은 그것들을 마음에 지키라고 말한다. 더 나아가 이 표현은 율법 등을 지키는 것 뿐만 아니라 제사장 직분과 같은 성직을 지키는 것에 대해서도 사용된다(민 18:7).

(c)  샤마르는 '돌보다, 보호하다'를 의미한다. 여기에는 정원(창 2:15), 양떼(창 30:31), 집(삼하 15:16) 등과 같은 것들을 지키거나 돌보는 것이 포함된다. 또한 생명나무로 가는 길을 지키는 그룹(창 3:24)이나 문지기(사 21:11)나 파숫꾼(아 5:7)과 같이 침입자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지키는 것도 이 의미의 범주에 포함된다. 사람에 대해서도 이러한 의미가 적용될 수 있다. 가인은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창 4:9)라고 묻는다.

다윗은 시 34:20, 시 86:2, 시 121:3-4, 시 121:7 및 기타 구절들에서 하나님의 돌보심과 보호하심에 대해 자주 말한다. 욥 2:6에서 하나님은 사단에게 욥의 생명을 건드리지 말라고 명할 때 샤마르를 사용하신다.

또한 다윗은 요압이 압살롬과 싸우러 가기 전에 그에게 비장하게 타이르기를 "나를 위하여 압살롬을 지키라"(한글개역 "해하지 말라", 삼하 18:12)고 했다.

흔히 이 동사는 인격의 훈련, 즉 개인의 생활과 행동 면에서 주의를 기울여야 할 필요에 대해 사용된다. 시 39:1에서 자기 행위를 조심하는 것, 잠 13:3에서 입을 조심하거나 지키는 것을 묘사한다.

(d)  샤마르는 '중시하다', '...에 유의하거나 주의하다'를 의미한다. 이 단어는 사람이 하나님이나 기타 다른 것들에게 주의하거나 경의를 표하는 태도를 기술한다. 예컨대 호 4:10에서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유의하기를 그만두었다(한글개역 "여호와 좇기를 그쳤다")고 한다. 시 31:6은 헛된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을 언급한다. 또 다른 관련 용법에서 시 130:3에서 기자는 "주께서 죄악을 감찰하실진대(진실로 주의하실진대) 누가 서리이까?"라고 한다(욥 13:27). 이 단어는 삼하 11:16에서처럼 적대한다는 의미로 사용될 수도 있고 슥 11:11과 시 59:9에서처럼 기대한다는 의미로 사용될 수도 있다.

(e)  샤마르는 '보존하다' preserve, '축적하다' store up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에돔이 이스라엘에 대하여 분노를 계속하여 품고 있는 것(암 1:11)이나 지식을 축적하는 것(말 2:7). 이 단어가 창 41:35과 삼상 9:24에서는 음식에 대하여, 출 22:7에서는 귀중한 어떤 물건에 대해 사용되어 있다.(참조: J. E. Hartley; B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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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m'[;(5975, 아마드) 서 있다, 위치를 취하다, 머무르다, 지탱하다

아마드(동사)는 기본어근이며, '서 있다, 위치를 취하다, 머무르다, 멈춰서다, 지탱하다, 견디다'를 의미한다.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500회 이상 나온다.(참조: BDB; HE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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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l's;(5545, 살라흐) 용서하다, 사면하다

살라흐(동사)는 기본어근이며, '용서하다, 사면하다 forgive, pardon'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46회 나오며, 칼형과 니팔형으로만 사용되었다.

살라흐는 성경에서는 오직 하나님에 관하여 사용되었다. 살라흐는 하나님께서 죄인에 대하여 사죄하고 용서하시는 것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이 단어는 그 어떤 형태로든지 사람들이 서로 용서하는 것에 대하여는 결코 사용되지 아니하였다.

동일한 어근이 우가릿어(VT 19: no. 1757)와 아카드어에도 나타나지만 그러나 그 형태에 관한 어떤 분명한 관계에 대하여 고려할 것이 없다. 아카드어 살라후는 제의와 의학문서에서 "뿌린다 sprinkle"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가장 복음주의적인 어조 중 하나는 이 단어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용서와 사면이다. 이 단어는 또한 큰 문제를 일으킨다. 이러한 용서의 본질이 무엇인가? 히브리서는 구약의 용서가 효과가 없고 불가능이었다는 것을 마치 절대적인 것처럼 서술하는 것 같이 보인다(히 9:9, 히 10:4).

해답은 분명한 것이다. 첫째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한 모세의 기도의 응답으로, 그가 이스라엘의 가장 무지몽매한 순간에 저지른 두 가지 죄, 즉 금송아지 사건과 가데스바네아에서의 불평 때에도 이스라엘을 용서하셨다는 것을 친히 선언하신다(출 34:9, 민 14:19-20).

둘째로, 모세의 율법을 기초로 하는 실재적 속죄와 용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는 도전적이며 회개하지 않은 죄인들의 죄를 제외한 모든 죄에 대해서 유효한 것이었다(민 15:30-33). 속죄가 될 때 죄인의 죄가 용서 받는다는 주장은 되풀이 되었다(레 4:20, 레 4:26, 레 4:31, 레 4:35, 레 5:10, 레 5:13, 레 5:16, 레 5:18, 레 5:26, 레 19:22). 거짓말, 절도, 거짓 맹세, 사기(레 6:1-7)와 같은 모든 죄나 "여호와의 금령 중 하나라도 그릇 범한"(레 4:2) 자들은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수 있었다. 이러한 죄들은 제외되기 보다는 "그릇 범죄"(sins of ignorance)와 더불어 신자들을 위한 하나님의 규례(provision)에 특별히 포함되어 있다(민 15:25, 민 15:26, 민 15:28). 마치 이러한 점을 강조하는 것처럼 속죄일에 이스라엘의 "모든 불의"와 죄가 속죄 받았음을 되풀이하여 기록되었다(레 16:21, 레 16:30, 레 16:32, 레 16:34). 그러나 개개 이스라엘인들은 진실한 고백에서 당연히 '겸손해야'("괴롭게 하고") 하였다(레 16:29, 레 16:31). 이러한 용서는 솔로몬이 성전 봉헌 기도를 인도할 때 모든 사람에게 유효하게 되도록 기도한 그러한 종류의 용서이다(왕상 8:30, 왕상 8:34, 왕상 8:39, 왕상 8:50와 대하 6장에 있는 그 병행 구절). 아모스는 다니엘과 같이(암 9:19), 유다를 위하여 용서를 간구하였다(암 7:2). 그러나 때때로 이스라엘은 용서를 받지 못하였다(신 29:19, 애 3:42).

이러한 공개적인 용서의 제안이 너무 고무적이었기 때문에 이사야(사 55:7)는 구원으로 초대하는 마음으로 이 제안을 크게 보도하였다. 그들의 하나님은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시므로 이사야의 청중들은 사람들을 미워하는 데서 나온 모든 생각을 잊어버리고 서로 용서해야 한다.

구약성경에서의 용서의 경험은, 비록 객관적으로 그 용서의 기초와 근거가 그리스도의 죽음에 있을지라도 인격적인 효험이 있었다. 용서에 대하여 사용된 다른 용어들은 죄에 대한 기억을 없애거나 도말하는 죄에 대한 기록을 덮거나 감추는, 죄를 제거하거나 일소하는, 죄를 관대히 봐주는, 대속물을 근거로 하여 용서하는 관념을 강조한다.

예레미야서에 있는 세 가지 본문, 렘 31:34, 렘 33:8, 렘 50:20은 새 언약과 우리 주님의 최후 재림과 관련된 우리 주님의 미래의 용서를 공포한다.(참조: W. C. KAISER; B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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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ey:(3372, 야레) 두려워하다, 무서워하다, 경외하다

야레(동사)는 기본어근이며, '두려워하다, 무서워하다, 경외하다'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330회 나오며, 칼, 니팔, 피엘형으로 사용되었다.

야레의 성경적 용법은 다섯 가지 의미의 영역을 가진다.

(1)  두려움의 감정,

(2)  감정적인 반응에 강조점을 두지 않는, 악에 대한 지적인 예상,

(3)  존경이나 경외,

(4)  의로운 행동이나 경건,

(5)  형식적인 종교적 예배.

(a)  칼형에서 감정적인 반응으로서의 두려움에 관한 전형적인 예들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시내산의 불을 보고 유대인들이 두려워 한 것(신 5:5), 유대인들이 블레셋인들의 동원 소식을 듣고서 미스바에서 두려워한 것이다(삼상 7:7).

다른 예들은 반드시 감정적 반응을 지적할 필요가 없는 악에 대한 예상을 더 강조한다. 다윗이 아기스 궁전에서, 그의 명성이 그에게 위험이 되었다고 생각한 그 인식은(삼상 21:13, "그들의 앞에서 그 행동을 변하여 미친 체 하고 대문짝에 그적거리며 침을 수염에 흘리매") 자기 가족이 자기 자신에게서 빼앗겨질지도 모른다는 야곱의 예상과 부합하는 하나의 실례이다: "야곱이 라반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말하기를 외삼촌이 외삼촌의 딸들을 내게서 억지로 빼앗으리라 하여 두려워하였음이니이다"(창 31:31).

이 두 용법은 위로의 어구나 인사말로서 두려워하지 말라는 부정 명령을 사용할 때 고려된다(예: 창 50:19, 창 50:20). 이런 경우에 야레는 하나 혹은 그 이상이 동의어들과 병행하여 자주 사용된다(예: 하타트: 타락하다, 아라츠: 놀라다). 이와 비슷한 주제는 안전을 두려움이 없는 것으로 정의하는 것이다(예: 시 56:4).

앞에 기록되어 있는 세 번째 용법의 예들은 많이 있다. 이런 존경은 어떤 사람의 부모(레 19:3), 거룩한 곳(레 26:2), 하나님(시 112:1),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시 86:11)에 기인한다. 하나님의 일에 대한 하박국의 "두려움"(합 3:2)과 욥의 고난을 바라보는 그의 친구들의 두려움은(욥 6:21) 이런 종류의 두려움으로 간주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

몇몇 구절들에서, "두려움"과 그에 상응하는 삶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므로 실제의 동의어 개념들이다(레 19:14, 레 25:17, 왕하 17:34, 신 17:19). "두려워하다"를 의로운 삶을 뜻하는 실제적인 동의어로 보는 이 용법이 - 앞에 나오는 어떤 의미로든지 간에 - 의로운 삶을 산출해 내는 동기로서의 "두려움"을 고찰하는 데에 생겼다는 사실은 그럴듯하다. 이런 실제적이고 능동적인 두려움은 애굽 산파들이 그들의 두려워함으로 인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보상을 받은 그런 종류의 두려움이다(출 1:17, 출 1:21). 이런 종류의 두려움은 율법을 읽음으로써 가장 적절하게 알게 되었다(신 31:11-12). 되풀이하여, 강조적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과 관련된 인간의 의로운 행동은 나그네나 체류자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이다(예: 신 10:18-20, 참조: 신 25:18).

형식적인 종교적 예배로서의 "두려워하는 것"에 대한 가장 분명한 예는, 제사 예배에 대해서는 여호와를 "두려워" 하지만(참조: 왕하 17:32-34), 그의 율법에 의로운 순종을 하였는가의 측면에서는 여호와를 "두려워" 하지 않은 북 왕국의 종교 혼합주의자들을 묘사하는 데에 나온다. 신 14:22, 신 14:23에 언급된 형식적 제사 요소들은, 이것이 배워지는 그런 종류의 두려움임을 이 문맥에서 시사해 준다. 앞의 논의와 수 22장의 문맥에 비춰볼 때, RSV가 이 구절에서 '두려움' fear을 '예배' worship로 번역한 것은 아마도 옳을 것이다(신 22:25).

'두려워하는 것'이 '열성가나 추종자임'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이는 몇몇 구절들이 있다. 이 용법은 앞의 네 번째 용법이나 다섯번째 용법을 반영해주는 것 같다. 추정되는 동사의 예들은 욥 1:9과 대하 6:33에서 발견된다.

여러 종류의 두려움이 여러가지 인간의 행위(삼상 7:7, 삼상 15:24)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위대한 행동(출 14:31, 수 4:23, 수 4:24, 삼상 4:7, 삼상 4:9), 심판(사 59:18, 사 59:19), 그리고 하나님의 율법(신 4:10)에 의해 야기될 수 있다.

(b)  니팔형에서 이 단어는 수동적으로 '두려워하게 되다, 경외하게 되다'를 의미한다(시 130:4).

니팔 분사형은 '무서운' terrible, '두려운, 경외하는 awesome, 혹은 '무서워하게 하는' terrifying과 같은 것들을 묘사하기 위해 자주 사용되었다. 이것은 '두렵게 되다'의 니팔분사형의 동명사적 특성의 좋은 예이다(GKC, 116e). 이것은 장소(창 28:17), 하나님(출 15:11), 하나님의 이름(신 28:58), 하나님의 행위(출 34:10), 백성(사 18:2), 그리고 주의 날(욜 2:31, H3:4)을 묘사한다.

(c)  피엘형에서 이 단어는 '두려워하게 하다, 무섭게 하다'를 의미한다(삼하 14:15, 느 6:9, 느 6:14, 느 6:19, 대하 32:18).(참조: A. BOWLING; B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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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p,n<(5315, 네페쉬) 숨쉬는 존재, 영혼, 생명 등

네페쉬(명여)는 '숨쉬다, 원기를 회복하다'를 뜻하는 동사 나파쉬(vp'n: , 5314)에서 유래한 명사이며, '숨쉬는 것이나 호흡하는 존재(피조물), 영혼, 생명' 등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750회 나온다.

(a)  네페쉬는 사람이든 짐승이든 간에 육체를 살아 있는 존재로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단어는 어떤 경우에서(창 36:6) 소마(몸 body)로 번역되어질 수 있다. 네페쉬가 프쉬케로 번역되어 지면 프쉬케는 '넓은 의미에 있어서 인간의 생명적인 것을 의미하며'(G. Von Rad, Old Testament Theology 1, 1962, 153), 다른 말로는 살아 있는 것을 뜻하고 있다. 우리는 성경에서 '살아 있는 혼'이라는 말을 읽게 된다(창 1:20, RSV, living creatures). 죽어가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밖으로 불어내거나(AV 'gives up the ghost' 영혼을 포기한다. 참조: 렘 15:9), 혹은 영혼을 쏟아 붓는다(애 2:12). 영혼은 죽는 자에게서 떠난다(창 35:18). 그러나 영혼(즉 생명)은 육체로 되돌아 올 수 있다(왕상 17:21). '영혼은 영혼으로'라는 것은 '생명은 생명으로'라는 것을 의미한다(출 21:23). 생명의 좌소로서의 피(Blood)는 실질적으로 '네페쉬'나 프쉬케와 동일할 수 있다(창 9:4 이하, 레 17:11, 레 17:14, 신 12:23). (G. Harder).

(b)  "생물"(네페쉬 하이야)는 창 1:20에서 물에 사는 생명체 피조물에 대해 창 1:24에서는 땅에 사는 동물에 대해, 창 2:7에서는 사람(개역: "생령")에 대해, 창 9:10에서는 새들과 땅에 사는 동물에 대해, 창 9:16에서는 사람과 동물에 사용되었다. 동일한 용어가 '모든 생물', 그리고 '사람'에 대해 사용되었다. 이런 경우에 네페쉬 하이야라는 용어는 생명을 가지고 호흡하는 모든 살아있는 피조물을 의미한다.

그러나 동일 용어 '네페쉬 하이야'가 모든 생물에 사용되었다고 해서 모든 생물이 우리 인간과 같은 혼이나 영혼을 가졌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분명히 네페쉬의 기능과 능력에 있어서 곤충과 물고기의 네페쉬와 소, 말 등의 네페쉬와 사람의 네페쉬가 다른 것이다. 기계의 가치와 능력에 따라 장착되는 동력이 다른 것과 비교할 수 있다.

특히 인간적 존재는 본래부터 충동, 욕구, 소망, 의지를 포함하기 때문에 네페쉬는 그런 의미들로도 사용되었으며, 한 개인의 생명을 의미한다. 소생시키고 회복시키는 대상으로서 네페쉬는 영혼(soul)이라는 개념과 생명 life이라는 개념을 모두 포함한다(R. V. Harris의 구약원어사전).

동물의 네페쉬와 사람의 네페쉬가 다른 것은 우선 하나님의 창조 행위에 대한 기사가 밝혀준다. 사람은 창조될 때 동물들과는 달리 생명의 숨(니셰마트 하임, 생명의 숨)을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받은 것이다. 그래서 '네페쉬 하이야'가 된 것이다. 이는 사람의 네페쉬가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과 창조 의지에 의해 창조된 동물의 네페쉬와는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사람의 네페쉬와 동물의 네페쉬의 차이를 밝혀주는 또 하나의 성구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전 3:19-21을 보면 "19 인생에게 임하는 일이 짐승에게도 임하나니 이 둘에게 임하는 일이 일반이라 다 동일한 호흡이 있어서 이의 죽음 같이 저도 죽으니 사람이 짐승보다 뛰어남이 없음은 모든것이 헛됨이로다 20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다 한 곳으로 가거니와 인생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 누가 알랴"

전 3:19에서 단지 한 사건, 즉 죽음이 사람과 짐승에게 똑 같이 찾아온다는 것, 전 3:20에서 '단 한 곳으로 간다는 것은 일종의 무덤을 가리킨다. 죽음이란 누구에게나, 인간이건 짐승이건 간에 예외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전 3:21에서 사람의 네페쉬와 동물의 네페쉬가 돌아가는 곳이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전도서에서는 루아흐[영]가 사용되었지만 문맥상 네페쉬[혼]를 의미한다). 일부 학자들이 전 3:21을 회의적으로 해석하지만 매우 분명하고 명확한 어투로 '인생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간다'고 말한다. 이 사실을 누가 알겠는가? 오직 하나님 선만이 아신다.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은 자는 이 사실을 안다. 그러면 솔로몬도 알고 있었다.

(c)  네페쉬는 자아 생명의 민감한 부분으로서 감정, 사랑(Cant. 1:7), 갈망(시 63:1), 기쁨(시 86:4)의 좌소를 의미한다. 이것은 어떤 것을 더 숙고해야 할 문제는 아니다. '영혼'은 그 생명의 운동과 감정의 여러가지 표현을 나타낸다. 영혼은 인간의 내적 능력을 결합한 요소이다. 따라서 "너의 영혼을 다하여"라는 말이 성립된다(신 13:3). 영혼의 내부에서 음식에 대한 욕망(신 12:20, 신 12:21), 육체의 욕망(렘 2:24), 살인과 복수에 대한 갈망(시 27:12)이 거주하고 있다. 영혼은 자신의 감정을 표현한다. 즉 그것은 울고(시 119:28), 눈물을 흘리며(욥 30:16), "오래" 참는다(욥 6:11). 그러나 지식과 이해(시 139:14), 생각(삼상 20:4)과 기억(애 3:20)도 마찬가지로 영혼에 자리잡고 있다. "영혼"은 전 인격 곧 인간의 전 자아의 총체이다. 따라서 "영혼"은 의미상 "나 자신" 또는 "네 자신"과 동일시 될 수 있을 정도이다(삼상 18:1). 창 2:7에서 네페쉬는 '사람' person, 혹은 '존재' being를 의미한다.

살아있는 피조물 역시 혼(soul)으로 묘사되어 질 수 있다. 집합적 의미에서의 살아있는 모든 것, 곧 모든 생물들(레 11:10). 율법에서 영혼(soul)이라는 말은 특별한 법규와 관련된 당사자를 의미한다(레 4:2, 레 5:1, 레 5:2, 레 5:4, 레 5:15). 사람들을 계수할 때 영혼들(souls)이라고 계수한다(출 1:5, 신 10:22). 구약성경이 죽은 사람을 가리켜 그 사람의 영혼이라 말하며 따라서 이러한 표현으로써 죽은 시체를 의미한다는 사실은 영혼이 몸과는 별개라는 개념 또는 죽을 때 영혼이 몸에서 분리된다는 개념에 구약성경이 전혀 친숙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지적해 주고 있다(민 6:6). (G. Hard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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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w:q;(6960, 카와) 기다리다, 기대하다, 바라다, 소망하다

1. 카와(동사)는 기본어근이며, '기다리다, 기대하다 wait, look for, 바라다, 소망하다 hope'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50회 나오며, 칼형과 피엘형으로만 사용되었다.

카와는 의인의 생명을 파멸시키고자 하는 악인들에 대하여 사용되었다(시 56:6, H7, 시 119:95). 꾸준한 인내의 기다림은 위대한 믿음의 표현이다. 이 단어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의 구원을 위해 결정적으로 행동하실 것을 확신 있게 소망하며 끈기 있게 참는다는 의미를 지닌다(창 49:18). 기다림은 인간 존재의 본질, 즉 인간의 혼(nepesh)과 관련된다(시 130:5). 진실한 믿음으로 기다리는 자들은 새 힘을 얻어 계소하여 여호와를 섬기며 그의 구원 사역을 기대한다(사 40:31). 하나님께서 약속한 모든 것이 실현되고 성취될 때가 올 것이다(사 49:23, 시 37:9). 한편 신자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의 의지함으로 자신의 성실과 정직에 의해 생존하게 된다(시 25:21). 그의 믿음은 시험을 통하여 강화되고 그의 인격이 더욱 개발된다(시 27:14). 이스라엘은 사랑과 공의를 굳게 잡으라는 권면을 받는다. 즉 그들은 충성스럽게 율법에 순종해야 하며 공의의 표준들을 변함없이 유지시키고 동시에 신적 사랑의 자세를 간직해야 하는 것이다(호 12:6, H7, 참조: 시 37:34, 욥 4:6).

재난과 심판의 때에 의인들은 위대한 믿음을 발휘해야 한다(사 26:8, 애 3:19-33). 그러므로 아시야는 변함없이 말한다: "이제 야곱 집에 대하여 낯을 가리우시는 여호와를 나는 기다리며 그를 바라보리라"(사 8:17). 하나님께서 구원의 능력을 가지고 현장에 임하실 때, 기다렸던 자들은 넘치는 기쁨과 커다란 노래로 응대할 것이다(사 25:9).

욥은 극렬한 시험 중에 하나님께서 자기의 소망을 나무와 같이 뽑는다고 말한다(욥 19:10). 아마 이 진술은 다음과 같은 그의 믿음의 단언에 대한 하나의 응답일 것이다: "나무는 소망이 있나니 찍힐지라도 다시 움이 나서 연한 가지가 끊이지 아니하며"(욥 14:7). 그러나 그의 철저한 좌절이 이미 다음의 외침에서 표현되었었다: "나의 날은...소망 없이 보내는구나"(욥 7:6, 참조: 잠 11:7).

악인도 역시 소망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잘못된 기초 위에 놓여 있는 이상 그 소망은 그들의 죽음으로 끝날 것이다(잠 11:7, 잠 11:23, 참조: 잠 10:28).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을 끊어 버릴 것이다(욥 8:13, 욥 27:8). 욥은 말한다: "그의 소망은 기운이 끊침이리라"(욥 11:20).

소망은 인간의 마음 속에 영원한 집을 가진다. 장래가 있는 한 소망이 있다(잠 23:18, 아마 영원한 장래를 뜻할 것이다). 그러나 오직 신자만이 진정으로 장래에 대한 자기의 소망을 표현할 수 있다. 왜냐하면 소망은 여호와께만 속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러한 장래를 보장하고 소망을 실체화하기 위해 지혜를 공급하신다(잠 24:14). 악인에게는 그러한 장래(잠 24:20)도 소망(잠 10:28)도 없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있어서 소망의 원천이다. 그리고 그는 그들에게 한 장래와 한 소망을 약속하셨다(시 62:5, H6, 렘 29:11). 예레미야는 포위 공격을 받고 있는 유다를 향해 말한다: "너의 장래(한글개역: "최후")에 소망이 있을 것이라"(렘 31:17). 스가랴는 하나님의 백성을 "소망을 품은 갇혔던 자들" prisoners of hope이라 부른다(슥 9:12). 그리고 그는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회복시키는 경험을 기대하라고 촉구한다(슥 9:12).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친히 "이스라엘의 소망"이라 불린다(렘 14:8, 렘 17:13, 렘 50:7, 참조: 시 71:5).

하나님도 인간에 대한 소망을 표현하신다. 그는 이스라엘을 심고 잘 가꾸어진 포도원으로 만들었다. 하나님의 소망과 목적은, 이스라엘의 성취 즉 그들이 열매를 맺는 것이었다. 이 점은 포도원 안에 포도즙 짜는 틀(한글개역: "술틀")을 설치하였다고 말함으로써 우회적으로 표현하고 있다(사 5:2이하). 그러나 이스라엘은 들 포도만을 맺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그는 이스라엘을 준엄하게 심판해야 했다(사 5:5 이하). 그러나 하나님의 소망은 계속되었다. 왜냐하면 언젠가는 풍성한 열매를 맺을 새 포도원을 계획하였기 때문이다(사 27:2-6).

2. 카와(동사)는 기본어근이며, '모으다, 수집하다 collect'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3회 나오며 니팔형으로 사용되었다(렘 3:17, 창 1:9, 사 60:9).

(참조: J. E. HARTLEY; B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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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b;D;(1697, 다바르) 말, 일, 사건

다바르(명남)는 '말, 말하는 것, 언어, 일(thing), 어떤 것이나 모든 것, 계명, 문제, 행동, 사건, 역사(history) 사업, 원인, 이유' 등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1,450회 나온다(창 11:1, 창 12:17, 창 15:1, 창 19:22, 창 20:8, 민 25:18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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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j'y:(3176, 야할) 기다리다, 기대하다, 바라다

야할(동사)은 기본어근이며, '기다리다, 기대하다 wait, 바라다, 희망을 하다 hope'를 의미한다.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40회 나오며, '니팔, 피엘, 히필형으로 사용되었다. 70인역본에서 이 단어는 '바라다 hope'를 뜻하는 엘피조와 에펠피조로 번역한다.

야할은 니팔형으로 사용된 세 가지 용례들에서, '짧은 기간동안 기다리다'라는 단순한 개념을 지닌다. 예를 들면 노아는 비둘기를 보내기까지 "또 칠일을 기다렸다"(창 8:12). 겔 19:5에서는 "암 사자가 기다리다가 소망이 끊어진 줄을 알고 그 새끼 하나를 또 취하여 젊은 사자가 되게 하니"라고 했다.

이 개념은 또한 피엘형(욥 14:14)과 히필형(삼상 13:8)으로도 표현된다.

그렇지만 야할은 신자들에게 있어 '믿음, 신뢰'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결국 '인내심 강한 기다림'을 야기시키는 '기대' expectation, '소망' hope에 대해 사용되었다. 기대의 의미는 긍정적인 것이다. 즉 미래에 좋은 일이 있을 것으로 기대하는 것이다.

겔 13:6은 백성들이 거짓 선지자들의 공언에 의지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적절한 예이다: "사람으로 그 말이 굳게 이루기를 바라게 하거니와". 이 문구는 문자적으로 '그들이 그들의 말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이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속임으로, 그들이 스스로 속아 실제로 어떤 성취를 기대하고 있다.

시 71:14에서 "나는 항상 소망을 품고"라고 한다. 야할이 좋은 것을 나타낼 때, 70인역본에서 주로 '엘피조' 즉 '바라다'로 번역되었다.

이 야할(바라다 hope)은 고통을 없애주는 상상의 진정시키는 소망도 아니며(희랍 개념에서처럼) 불확실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야할(바라다 hope)은 의인에게 있어 기대의 확고한 근거이다. 이렇게 이것은 하나님께로 향해있다. 시편기자는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바랄찌어다 여호와께는 인자하심(히브리어 헤세드)과 풍성한 구속이 있음이라"(시 130:7, 참조: 시 131:3)고 명령한다.

절망의 때에, 시편 기자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라고 말하면서 자신을 격려한다(시 42:5, H6, 또한 시 42:11, H12, 시 43:5).

그렇지만 이런 확신에 찬 기대에 대해서는, 욥이 "그가 나를 죽이신다 하더라도 내가 그를 바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변백하리라"고 외치는 대목보다 더 잘 증거해 주는 것은 없다(욥 13:15). 그렇지만 ASV와 RSV는 이 구절을 "보라 그가 나를 죽일 것이니 나는 소망이 없다"(한글개역 -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소망이 없노라)라고 번역한다. 이것은 70인역본과 다른 역본들에 의해 뒷받침되는 케레(Qere) 대신 마소라본문의 케딥(Kethib) 독법을 따른 것이다. 이 경우에 욥의 성급함은 그가 여호와를 '인내하면서 기다리기를' 거부하였음을 나타내 준다: "내가 무슨 기력이 있관대 기다리겠느냐 내 마지막이 어떠하겠관대 오히려 참겠느냐"(욥 6:11).

그렇지만 야할(바라다 hope)은 바타흐(신뢰하다 trust)나 카와(기다리다 wait for, 바라다 hope for)와 의미가 비슷한 동의어이다. 예를 들면 미 7:7에서 그것을 알 수 있다. "나는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나니 나의 하나님이 나를 들으시리로다". 마지막 어구는 죄가 심판 당할 때, 하나님의 미래 행동에 대한 의인들의 확신을 분명하게 나타내 준다. 그러나 더욱이 이 절은 믿음의 근거이신 여호와 자신만을 숙고할 뿐만 아니라 그의 하나님의 구원 활동도 숙고하고 있다. 짧게 말해서, 바랄 것은 인간의 상상에서 생겨난 어떤 요구 사항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과 그가 이루도록 제안하실 모든 것이다. 우리는 롬 8:28-29에 표현된 바와 같이, 기독교인의 확신을 상기하게 된다. 즉 경건한 사람은 확신에 차서 하나님의 말씀에 의존할 것이다. 예를 들면, "주를 경외하는 자가 나를 보고 기뻐할 것은 내가 주의 말씀을 바라는 연고니이다"(시 119:74).

시편기자는 주의 규례(시 119:43), 주의 말씀(시 119:81, 시 119:114, 시 119:147, 시 130:5)을 바란다고 고백한다.

그는 또한 하나님의 신실하신 언약적 사랑에 대해서도 확신할 것이다. 예를 들면, "여호와는 그 경외하는 자 곧 그 인자하심(헤세드)을 바라는 자를 살피사"(시 33:18), "중심에 회상한즉 오히려 소망이 있사옴은"(애 3:21),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저를 바라리라 하도다"(애 3:24) 등이다.

"소망"은 현재 문제로부터의 구원을 가져올 뿐만 아니라, 종말론적 의미에서 하나님의 도우심과 궁극적인 구원을 "바라는 것"은 모든 고난의 종말을 가져올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전능한 도움을 약속하신 사 51:5을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내 의가 가깝고 내 구원이 나갔은즉 내 팔이 만민을 심판하리니 섬들이 나를 앙망하여 내 팔에 [의지하리라]". 섬들이 구원자의 오심을 앙망하는 것은 그가 그들을 구속하시고 구원할 능력 있다는 소망의 믿음을 소유하고 있음을 말해준다(참조: G. RAWLINSON).

미 7:7에서는 "오직 나는 여호와를 우러러보며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나니 나의 하나님이 나를 들으시리로다"라고 고백한다. 여기서 야할 즉 "바라보나니"는 간절한 믿음으로 구원의 하나님을 기다릴 것인데, 하나님이 지체하신다 해도 이 믿음은 무너지지 아니할 것이다. 믿음이 있으면 소망도 있는 것이다(참조: W. J. DEANE).

(참조: P. R. GILCHRIST; B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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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q,Bo(1242, 보케르) 새벽, 아침

보케르(명남)는 바카르(rq'B; , 1239)에서 유래했으며, '햇빛의 헤치고 나아감' the breaking through of the daylight를 의미하며 따라서 '새벽' dawn이나 더 일반적으로는 '아침' morning을 의미한다.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200회 이상 나온다.

(a)  보케르는 '아침'을 의미하지만, 정오 이전의 시간대를 가리키지 않고 오히려 밤이 낮으로 바뀌는 시점이나 밤이 끝나는 시각을 가리킨다: "모세가 애굽 땅 위에 그 지팡이를 들매 여호와께서 동풍을 일으켜 온 낮과 온 밤에 불게 하시니 아침에 미쳐 동풍이 메뚜기를 불어 들인지라"(출 10:13).

(b)  보케르는 해 뜨기 직전의 시간을 나타내기도 한다. 삿 19:25에는 기브아인들이 레위인의 첩에게 행음하여 '밤새도록 욕보이다가 새벽 미명에 놓았다'고 언급되어 있다(참조: 룻 3:13). 고대 근동에서는 밤이 세 경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밤의 마지막 시간대는 조경(출 14:24, 한글개역 - "새벽")이라고 불리웠다. 조경(새벽)은 A. M. 2:00에서 해 뜰 때까지 인데, 그와 같은 문맥에서 이 단어는 이 시간대를 가리키는 것 같다.

(c)  보케르는 '새벽녘, 동틀녘' daybreak, dawn을 의미할 수도 있다. 출 14:27에는 아침이 되자(문자적으로, 아침이 돌아올 때 at the turning of the morning) 홍해의 물이 정상적인 상태로 되돌아 왔다는 기사가 나온다. 욥 38:12에서 보케르는 '새벽'의 동의어로 사용된다: "네가 나던 날부터 아침을 명하였었느냐 새벽으로 그 처소를 알게 하여...".

(d)  때때로 보케르는 '이른 아침', 즉 동이 트고 난 바로 직후를 의미한다: "아침에 요셉이 들어가보니 그들에게 근심 빛이 있는지라"(창 40:6). 모세는 아침 일찍 일어나 시내산에 올라갔다. 즉 그는 동 트기 전에 일어나서 하나님께서 명령하신대로 '아침'에 그분 앞에 나아갈 수 있었다(출 34:2, 출 34:4). 야곱은 '아침'에 그의 신부가 라헬이 아니라 레아였다는 것을 알았다(창 29:25, 참조: 삼상 29:10).

(e)  보케르는 밤에 대조되는 것으로 낮 시간 전체를 나타내기도 한다. 시편기자는 다음과 같이 기도한다: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나타내며 밤마다 주의 성실하심을 베풂이 좋으니이다"(시 92:2). 이것은 다른 말로 언제나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참조: 암 5:8).

(f)  시 65:8에서 보케르는 장소, 특히 해 뜨는 곳을 나타낸다: "땅 끝에 거하는 자가 주의 징조를 두려워하나이다. 주께서 아침 되는 것과 저녁 되는 것을 즐거워하게 하시며...".

(g)  보케르는 적어도 한 번은, 부활을 의미한다: "양같이 저희를 음부에 두기로 작정되었으니 사망이 저희 목자일 것이라 정직한 자가 아침에 저희를 다스리리니..."(시 49:14).

(h)  보케르는 '다음날, 내일' morrow, nextday를 의미할 수도 있다. 이런 의미는 출 12:10에 처음으로 나온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유월절 음식을 남기지 말라고 명령하신다: "아침까지 남겨 두지 말며 아침까지 남은 것은 곧 소화하라"(출 12:10, 참조: 레 22:30).

(i)  보케르가 저녁(에레브)과 결합될 때, 이것은 '하루종일(전체)' (창 1:5)을 의미하거나 "저녁부터 아침까지"라는 어구에서는 '밤시간'을 나타내며(레 24:3), "아침부터 저녁까지"라는 어구에서는 '낮 시간'을 나타낸다(출 18:13).(참조: EDBW; B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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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seje(2617, 헤세드) 친절, 인자, 자비, 자애

1. 헤세드(명남)는 하사드(ds'j; , 2616)에서 유래했으며, '친절, 인자, 자비, 자애'를 의미한다.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240회 나온다.

2. 헤세드(명남)는 하사드(ds'j; , 2616)에서 유래했으며, '책망, 비난, 수치, 치욕'을 의미한다.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2회 나온다(레 20:17, 잠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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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b;r;(7235, 라바) 많다, 크다, 증가하다, 쏘다

1. 라바(동사)는 기본어근이며, '많다(많아지다), 크다(커지다), 증가하다'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220회 나오며, 칼, 피엘, 히필형으로 사용되었다.

라바는 창 1:22에서 처음으로 나온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어 가라사대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다 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여기서 모든 번역은 '증가하다, 번식하다'라고 번역한다.

그러나 그 이후의 구절에서 라바는 '증가하다'(창 7:17-18), '많다'(대상 23:17), '너무 많은'(창 43:34)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된다. 단 한번의 경우에 매우 많은 이란 의미들이 입증된다.

라바의 히필어간의 표준적이고 가장 보편적인 의미는 '증가하다, 번식하다'이다. 그러나 이 외에 다양하게 '많은 것을 구하다' ask much(창 34:12), '많이 모으다' gather much(출 16:18), '많이 산출하다' yield much(느 9:37), '더 많이 주다' give more(민 26:54), '쌓다' to heap .등으로 번역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제시된 의미의 넓은 범위는 본래의 히브리어 어근의 범위를 보여준다.

라바는 일반적으로 양을 나타내는 문맥에 제한되어 나타나긴 하지만 비유적인 표현에서도 얼마간 사용된다. 이 어근은 다음과 같은 특별한 의미로도 사용된다. '오래 살다'(욥 29:18), 하나님을 거역하는 '말을 많이 하다'(욥 34:37), '많은 자녀들을 갖다'(대상 7:4).

2. 라바(동사)는 기본어근이며, '쏘다, 던지다'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1회 나온다.

창 21:20, "하나님이 그 아이와 함께 계시매 그가 장성하여 광야에 거하며 활 쏘는 자가 되었더니".(참조: W. WHITE; B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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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dP](6304, 페두트) 구별, 자유(구속)

페두트(명여)는 파다(hd:P; , 6299)에서 유래했으며, (a) '분리, 구별', (b) '몸 값을 치르고 자유케함, 속전'을 의미한다.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4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a)  '분리, 구별', 출 8:19.

(b)  '자유(구속)', 시 111:9, 시 130:7, 사 50:2.(참조: Geseni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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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71, 아온) 불법, 부정, 죄악, 죄의 벌

아온(명남)은 아와(hw:[; , 5753)에서 유래했으며, '불법, 부정, 죄악, 사악, 유죄, 죄의 벌(징계)'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230회 나온다.

명사 아온은 집합명사이다. 예컨대 하나님은 아모리인의 범죄, 타락에 대해 말씀하신다: "아모리 족속의 죄악(단수)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창 15:16). 사르밧 과부는 엘리야에게 당신은 "내 죄(단수)를 생각나게"하려고 왔다고 불평한다(왕상 17:18). 따라서 이 단어는 다음과 같은 관용구에서 나타난다. '아온을 지다'(창 4:13, 출 34:7, 호 14:3, 시 85:3), '아온을 제거하다(히필형)'(슥 3:4), '아온을 갚다'(출 20:5) 등. 이러한 '전체'라는 개념은 집단의 죄뿐만 아니라 개인의 죄와 연관하여서도 나타난다. "염소가 그들의 모든 불의(복수)를 지고"(레 16:22);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단수)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6).

더욱이 위의 언급들이 가리켜주는 바와 같이 이 단어는 행위 및 행위의 결과, 범죄 및 범죄의 형벌 모두를 나타낸다. 양 개념이 모두 나타나지만 때로는 행위('죄')에 초점이 주어지고, 또 때로는 범죄의 결과('형벌')에, 때로는 행위와 그 결과 사이의 상황('죄의식' guilt)에 초점이 주어진다. 형벌을 요하는 범죄에 초점이 주어지는 실례: "이 '죄악' sin이 너희로 마치 무너지게 된 높은 담이 불쑥 나와 경각간에 홀연히 무너짐 같게 하리라"(사 30:13, 참조: 겔 18:30, 겔 44:12, 호 5:5, 욥 31:11, 욥 31:28). 형벌에 강조점이 주어지는 예: "일어나라...그렇지 않으면 네가 성읍의 '형벌' 가운데서 소멸되리라"(참조: 렘 51:7, 시 39:12, 시 106:43, 욥 13:26, 욥 19:29, 스 9:7). '죄의식'(guilt)에 강조점이 주어지는 예: "이 '죄악'을 내게로 돌리시고"(삼상 25:24). 다른 많은 실례들에 대해서는 아래를 보라.

'행위로서의 죄'라는 의미와 '형벌'이라는 의미 사이의 현저한 양면적 의미는 구약성경의 사상에서 죄와 그 형벌은 우리가 생각하는 경향과 같이 근본적으로 별개의 개념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오히려 구약성경에서 인간의 행동과 인간에게 일어나는 일은 기본적인 하나님의 질서 속에 존재하는 하나의 과정으로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것으로 전제된다. 이러한 연관성은 "삶에 대한 종합적인 견해"라고 불리워졌다(Von Rad, G).

어근 하타(죄)도 마찬가지의 기본적인 '종합적' 개념을 보여준다. 예를 들면 민 32:23을 보라: "너희가 만일 그 같이 아니하면 여호와께 범죄함이나 너희 죄가 정녕 너희를 찾아낼 줄 알라". 두 번째 나타나는 이 어근의 명사형은 행위에 대한 '형벌'을 나타낸다(참조: 민 12:11). 따라서 죄는 개인과 혹은 공동체를 멸망시키는 피할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오며 근절되어야만 한다(B. K. W.).

아온은 분명히 하나님의 성품의 특성도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행동의 특성도 아니고(출 20:5, 출 20:6, 출 34:7), 인간의 속성과 행동(그러한 행동에 수반하는 결과를 포함하여)의 저항할 수 없는 특성이다.

아온은 삼상 20:1, 삼상 20:8, 삼하 3:8, 느 4:5, 시 51:2에서 여러 종류의 시민 생활 혹은 사회적(규칙) 위반을 지칭하고, 수 22:17, 삼상 3:13-14에서는 제의적인 (규율) 위반을 가리킨다. 이 용어는 집합 명사 혹은 유사 추상명사로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과거의 범죄의 총합을 나타내는데, 이에 대한 실례는 너무 많아서 모두 열거할 수 없을 정도이다. 민 14:34, 삼상 25:24, 삼하 22:24, 왕상 17:18, 스 9:6, 욥 13-26장, 사 1:4, 렘 11:10가 그 예이다.

어떤 구절에서는 아온의 성질과 내적 근원에 강조점이 주어진다.

욥 15:4-5에서 아온은 하나님 경외하기를 폐하는 것 등과 관련되어 있다.

반면에 시 78:37-38에서 아온은 하나님을 향하여 (마음이) 확고 부동하지 않음과 결합되어 있으며 렘 14:10에서는 그들이 이렇게 방황하기를 좋아하였다 라는 진술과 관련되어 있다.

아온은 간음(민 5:31) 및 우상 숭배(호 5:5, 렘 16:10-11)와 관련된다. 이러한 은유에서는 위반하는 행동과 그 결과인 더럽힘 모두가 묘사된다.

아온의 다른 결과는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 소외(alienation, 레 26:40, 사 59:2, 사 1:4), 그리고 부정(시 51:2, H4)으로 나타난다.

죄책감(guilt)은 내적 인간에 대한 아온의 주요한 결과다. 이 요소는 과거 범죄에 대한 총합을 나타내는 아온의 기능과 쉽게 구별되지 않는다. 그러나 BDB는 죄책감의 요소가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실례를 30여회 이상 열거한다(p. 731).

아온은 그 결과가 내적 인간에게 영향을 끼치는 외에도 가문, 지파, 이스라엘 민족, 열방 및 자연에도 영향을 끼친다. 가문에 대하여, 친숙한 진술은 출 20:5, 신 5:9에서 발견된다.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벌은 가문이나 지파의 개개인들에게 보다 직접적으로 내리는 벌로 집중할 수 있다(레 5:17, 레 18:25, 민 5:31, 삼상 25:24, 삼하 14:9, 시 106:43, 렘 36:31). 아온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형벌을 면할 수 없게 한다(레 26:39, 스 9:7, 스 9:13, 시 107:17과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에 있는 많은 실례). 어떤 의미에서, 대제사장과 제사장들이 그들 임무의 거룩과 성소의 거룩으로 인하여 이스라엘을 대신하여 형벌의 위험을 떠 맡았다(출 28:38, 출 28:43, 레 22:16, 민 18;1, 민 18:23). 예루살렘의 멸망 이후 그 재난은 이스라엘 민족의 아온의 결과로 인식되었다(애 4:6, 애 4:13, 애 4:22, 겔 39:23, 단 9:13, 단 9:16).

아온에 반드시 형벌이 따르는 것은 아니었다. 형벌을 피할 수 있는 길이 있었다. 인간의 탄원 기도와 하나님의 구원 선포는 아온을 벗어날 길을 보여준다.

인간은 아온을 깨닫고 고백해야 한다(창 44:16, 레 16:21, 느 9:2, 시 32:5, 시 38:18, H19). 그리고 하나님께 죄 사함을 구해야 한다(출 34:9, 민 14:19, 욥 7:21, 시 25:11). 인간은 또한 그의 생활 방식을 변화시켜야 한다(겔 18:30, 겔 36:31). 형벌을 대신 받을 대체물이 제공된다(레 16:22, 사 53:5-6, 사 53:11, 겔 4:4-6).

가장 중요한 것은 아온을 제거하고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행동이다. 이것은 약속되고 실제로 선포된다(민 14:18, 시 65:3, H4, 시 78:38, 시 103:3, 잠 16:6, 사 6:7, 렘 32:18, 단 9:24, 미 7:18-19, 슥 3:4, 슥 3:9, 참조: 다윗의 입맞춤에 의한 용서의 행동, 삼하 14:32). 세 군데에서는 하나님의 깨끗케 하시는 행동이 강조되어 있다(시 51:4, 렘 33:8, 겔 36:33).

(참조: C. SCHULTZ; B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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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13]-------
*4.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5.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6.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7.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자행자제함과 죄악, 허물들은 모두 사랑의 결여 문제!!...사랑의 하나님이 부어주신 바로 그 사랑, 사랑의 HS으로 적셔지고, 점유되고, 충만, 변화(감격-감동-감화-순종-헌신), 하나됨-교통-인도함 받기를!!
Love is patient, love is kind and is not jealous; 
love does not brag and is not arrogant, does not act unbecomingly; 
it does not seek its own, is not provoked, does not take into account a wrong suffered, does not rejoice in unrighteousness, but rejoices with the truth;
bears all things, believes all things, hopes all things, endures all thin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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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의미(고전 13:4-7)
바울은 여기에서 사랑의 특질과 결과를 말하여 우리가 이 은혜를 가지게 하며 만약 우리가 가지고 있지 않으면 가질 때까지 마음이 쏠리도록 한다. 이것은 좋은 은혜요 좋은 특성도 가지고 있다.
Ⅰ. 오래 참는 일이다.  ‘마크로뒤메이’(13:4) 그것은 분노나 복수심이 없이 악과 해함과 도발을 참는 일이다. 그것은 마음을 확고히 하고 성난 감정에 능력을 주어서 이웃의 행위에 성이 나서 날뛰는 대신에 참고 개선됨을 기다리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받는 무시와 냉소를 견디어 나가는 것이다.
Ⅱ. 그것은 온유한 것이다.  - ‘크레스튜에타이’ 그것은 자애롭고 관대한 것이다. 예의바르고 의무감이 있는 것이다. 온유의 법이 그 입에 있도다." 그의 마음은 넓고 그의 손은 펴있다. 그것은 선과 은혜를 줄 준비가 되어 있다. 유익하기를 바라고 선을 행할 기회를 찾는다. 온유는 손해를 참고 선을 행하려고 한다.
Ⅲ. 사랑은 투기를 누른다. 그것은 "투기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의 선을 시기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의 은사나 좋은 점이나 명예나 재산을 배아파하지 않는다. 우리가 우리의 이웃을 사랑한다면 그의 행복을 시기하지 않고 오히려 함께 즐거워한다. 이웃의 축복이 우리의 행복을 감소시키는 대신에 증가시킨다. 이것이 은유와  자비의 특성이다. 시기는 악의의 열매이다. 우리가 축복을 기원하는 형제의 축복이 우리를 슬프게 할 수 없다. 선을 행하려는 마음이 악을 행할 수 없다.
Ⅳ. 사랑은 자랑과 헛된 영광을 억누른다.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자만심으로 부풀거나 자기에게 속하지 아니한 명예나 권력이나 존경을 가로채지 않는다. 건방지거나 남을 경멸하거나 짓밟지 않는다. 참다운 형제애를 불타는 사람은 남을 낫게 여긴다(롬 12:10). 그들은 다툼이나 헛된 영광의 마음에서 하지 아니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긴다(빌 2:3). 참 사랑은 형제를 존경하고 귀하게 여긴다. 이것은 자신의 명예나 자만을 제한한다. 나쁜 성질이 형제애에서나 자비심에서 나오지 않는다. 여기에 "자랑하지 아니하며"는 다른 의미가 있다. 적당한 번역이 없다. 시리아말은 "떠들거나 괴롭히지 않고"로 되어 있다. 사랑은 성난 감정을 가라앉힌다. "교활하지 아니하며"로 번역한 것도 있다(Non perperam et perverse agit). 남을 함정으로 인도하여 쓸데없이 괴롭히지 않는다. 고집이 세거나 반대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허식과 아첨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중심에 없는 말을 하는 태도다. 사랑은 그러한 거짓이나 아첨을 싫어한다. 참 사랑과 선의에 이런 것이 있을 수는 없다.
Ⅴ. 사랑은 경건의 범위를 넘지 아니한다.  ‘우크 아스케모네이’ - 즉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버릇없는 일이나 천하고 악한 일을 하지 않는다. 때와 장소에 어긋나는 행동을 아니하며 모든 사람에게 그들과 우리에게 어울리는 행동을 하며 윗 사람에게는 존경으로 아랫 사람에게는 친절과 겸손으로 대한다. 모든 사람에게 선의와 친절로 대한다. 질서나 지위를 무시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정하신 위치를 지키며, 비난하거나 멸시하지 않는다. 사랑은 어색한 행동을 행하지 않는다.
Ⅵ. 사랑은 이기심에 반대한다.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부당하게 자기의 칭찬이나 명예나 이익이나 쾌락을 추구하지 않는다. 참으로 자기애는 모든 사람에게 다 있으며 몸에 들어 있다. 자신에 대한 온당한 사랑은 이웃에 대한 사랑의 척도가 되며 우리 주께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사랑이다. 바울은 사랑이 자기를 전적으로 무시한다고 의미하지 않는다. 사랑은 자기의 소유를 포기하며 자신과 모든 이익을 무시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사랑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는 자기애의 원리를 뽑아내는 것이다. 사랑은 남을 해치고 무시하며 자신의 유익을 구치 아니한다. 오히려 남을 위하여 자기의 것을 무시한다. 다른 사람의 복지와 만족과 이익을 추구한다. 개인의 이익보다 교회와 사회의 복지를 앞세운다. 공공의 희생과 손해로써 자신을 과장하고 부요케하고 만족시키지 않는다.
Ⅶ. 감정을 조정하고 억누른다. ‘우크 파록쉬네타이’ - 즉 성내지 아니하며 그것은 성질의 모를 깍으며 마음을 아늑하고 부드럽게 하여 격한 감정을 품거나 계속 가지지 않는다. 사랑의 불이 타는 곳에 분노의 불꽃이 튀거나 타지 않는다. 사랑은 까닭없이 성내지 아니하며 타당한 정도를 넘지 않도록 적당하게 조정한다. 사랑이 지배하는 마음에 분노가 머물지 않는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성내기 어렵고, 분노를 속히 멈추고 화해한다.
Ⅷ.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원한을 품거나 복수를 하지 않는다. 잠시나 오래 성내지 않는다. 해를 끼치거나 원수를 갚지 않는다. 남을 악하게 생각지도 않는다. ‘우크 로기제타이 카콘’- 그것은 악을 추리해서 내지 않으며, 추측으로 죄를 씌우지 않는다. 참 사랑은 질투하거나 의심하지 않는다. 사랑은 나타나는 결점을 덮어 주고 숨겨있는 것을 들쳐 내지 않는다. 증거없이 의심하지 않으며 그에게 불리한 증거를 불신하려는 경향이 있다. 남을 나쁘게 생각하지 않으며 증거가 나타날 때에는 슬퍼한다. 최악의 경우를 생각지 않고 최선을 희망한다.
Ⅸ.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일이 제시된다.
1. 소극적으로. "불의를 기뻐하지 않으며" 어떠한 사람에게도 상처를 주는 데에 기뻐하지 않는다. 분명한 증거없이 어떤 사람도 악하게 여기지 않는다. 악의를 품지 않으며 더우기 행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남을 해치는 데에 기쁨을 가질 수 없다. 다른 사람의 결점과 실패를 기뻐하지 않고 자만과 악의에서 당당히 뽐내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사랑은 우월감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죄는 기쁨이 아니라 슬픔의 일이 된다. 동료의 비극을 즐기는 것은 가장 악한 일이다. 죄에 빠지는 것보다 더 파멸적인 상태가 어디에 있겠는가. 그런데 다른 사람의 죄를 기뻐함은 사랑의 배치된 일이다.
2. 긍정적으로.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신약에서 진리라고 불리어지는 복음의 성공을 기뻐한다. 사람들이 복음의 빛을 받아 선하게 되는 것을 기뻐한다. 그들의 죄를 기뻐하지 아니하고 그들이 잘하며 청렴하고 충성되게 될 때에 기뻐한다. 사랑은 진리와 공의가 번창하며 양심이 깨끗하게 되고 상호의 신앙과 신의가 수립되며 경건과 참 믿음이 융성하는 것을 만족하게 여긴다.
Ⅹ. ‘판타 스테게이, 판타 피스튜에이’- 즉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어떤 이는 전자를 "모든 것을 덮는다"로 읽는다. 원문은 그런 의미이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벧전 4:8). 충고가 허용하는 한 잘못을 덮는다. 형제의 결점을 광고하는 것이 아니다. 부득불한 충고만이 예외이다. 이 일도 개인적으로 말하나 공적인 석상에서는 하기 싫어한다. 우리의 결점을 우리가 처리하듯이, 형제의 결점을 처리하여야 한다. 될 수 있는 한 수치와 비난을 당하지 않게 하고 덮어 준다. 혹은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손해를 참으며 분노를 일으키는 자극에도 오래참는다. ‘판타 휘포메네이’ 견고히 서서 견디어야 한다. 모든 손해와 이용당함과 저주와 중상과 투옥과 추방과 속박과 고문과 죽음도 참는다. 다음을 주목하자. 열렬한 사랑이 마음을 얼마나 확고하고 견인하도록 만드는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사랑은 무엇을 견디지 못할까? 얼마나 많은 무시와 상처를 견디어야 하는가? 얼마나 많은 모험과 어려움을 당하는가?
ⅩⅠ. 사랑은 다른 사람들을 믿고 바란다.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란다." 
사랑은 신중을 파괴하여 단순하고 어리석게 모든 말을 뱉지 않는다(잠 14:15). 
지혜는 사랑과 함께 거하고 사랑은 주의 한다. 나타난 증거가 없으면 모든 사람을 잘 생각하고 좋게 여긴다. 어두운 면이 있어도 좋게 생각한다. 
사랑은 이성에 입각하여 좋게 판단하고 믿는다. 보이는 표면을 초월한다. 본의가 아니게 남을 나쁘게 생각지 않는다. 
남을 좋게 생각지 못하게 되더라도 그래도 바란다. 소망을 가진다. 어떤 일을 절망적으로 결론맺지 않고 개선을 바라고 희망을 가진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이 얼마나 자비로운가. 상대한 모든 사람에게 하늘의 불로 마음이 따뜻하고 입에서 넘쳐나와 모든 사람을 따뜻하게 하는 사람이 복이 있도다. 
거룩한 주님이 부탁한 명령을 받들어 신령한 원리로 활기가 넘치는 기독교가 얼마나 아름다울까.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4, 35). 
거룩하신 예수님 당신의 제자 중 이와 같은 성격을 가진 자가 얼마나 적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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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9:1-7==
*1.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2.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
*3.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하게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눌 때의 즐거움 같이 그들이 주 앞에서 즐거워하오니
*4.이는 그들이 무겁게 멘 멍에와 그들의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주께서 꺾으시되 미디안의 날과 같이 하셨음이니이다
*5.어지러이 싸우는 군인들의 신과 피 묻은 겉옷이 불에 섶 같이 살라지리니
*6.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7.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But there will be no more gloom for her who was in anguish; in earlier times He treated the land of Zebulun and the land of Naphtali with contempt, but later on He shall make it glorious, by the way of the sea, on the other side of Jordan, Galilee of the Gentiles.
The people who walk in darkness Will see a great light; Those who live in a dark land, The light will shine on them.
You shall multiply the nation, You shall increase their gladness; They will be glad in Your presence As with the gladness of harvest, As men rejoice when they divide the spoil.
For You shall break the yoke of their burden and the staff on their shoulders, The rod of their oppressor, as at the battle of Midian.
For every boot of the booted warrior in the battle tumult, And cloak rolled in blood, will be for burning, fuel for the fire.
For a child will be born to us, a son will be given to us; And the government will rest on His shoulders; And His name will be called Wonderful Counselor, Mighty God, Eternal Father, Prince of Peace.
There will be no end to the increase of His government or of peace, On the throne of David and over his kingdom, To establish it and to uphold it with justice and righteousness From then on and forevermore The zeal of the LORD of hosts will accomplish th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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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야의 약속(사 9:1-7)
본장의 서두에 있는 말들은 모든 일이 어둡고 우울하게 보였던 전 장(前章)의 끝부분을 분명히 가리키고 있다. 즉 전 장에는 "보라, 환난과 흑암과 고통의 흑암 뿐이로다" 고 했다. 이것은 매우 암담하나, 그렇게 극심하지는 않다. 왜냐하면 "정직한 자에게는 흑암 중에 빛이 일어나며" (시 112:4), "어두워 갈 때 빛이 있게 되고" (슥 14:7), 전에는 고통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질적으로나 정도에 있어서) 그러한 흑암이 없으리로다" 라고 했기 때문이다(1절). 최악의 사태에도, 하나님의 백성은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이 말이 한글 성경에는 불분명함) 그들의 고통을 어느 정도 완화시키고 진정시킬 수 있는 위로를 얻게 되리라는 것을 명심하자. 그들은 핍박을 당하여도 버린 바 되지는 아니하며(고후 4:9),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한다(고후 6:10). 상황이 가장 흑암 중에 있을 때에도, "빛을 지으시고 어두움도 창조하신" (45:7) 자가 그들의 한계를 정하시어, 서로 대조되게 하셨다는 것(창 1:4)은 우리에게 위로를 주는 일이다. 그 하나님은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여지껏 흑암이 있었고 그것은 매우 오래 지속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있지 않게 될지니라."
Ⅰ. 여기에 다음 세 가지 사실이 약속되어 있다. 그 모두는 결국 복음의 은혜를 가리키고 있다. 그 당시의 성도들은 어둡고 흐린 날에는 그 은혜에 대한 소망으로 자신들을 위로해야 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고통 중에는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소망 - 비록 그것이 지금은 그 당시의 그리스도의 첫번째 강림과는 큰 차이가 있을 지라도 - 으로 우리 자신을 위로해야 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말일에 교회를 위해 모아 두신 그 긍휼은, 교회가 당하는 현재적 재난으로 인해 교회와 함께 애통하고 있는 자들에게 힘이 될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다음에 관한 약속을 볼 수 있다.
1. 영화로운 빛에 대한 약속이다. 그것은 흑암을 점차로 축출할 것이며, 그 빛은 이전에 때때로 있었던 빛과는 다르리라고 했다. "전에 고통하던 자에게는" 그런 고통이 없으리라고 했다. 이제는 이전과 같이 어두운 때는 없을 것이다. 즉,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으로" (그 땅들은 외딴 곳에 있었으므로, 이웃의 대적들의 침입을 가장 많이 당했다), "멸시를 당케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편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다" 고 했다(1절). 아마도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찢으시고 그 사방을 치신" (왕하 10:32) 그 때를 가리키는 것 같다. 하나님은 더 큰 심판을 백성들에게 내리시기 전에 보다 작은 심판을 내려 그들의 반응을 시험하신다. 그러나 가벼운 고통이 겸손케 하고 개혁하는 데 소용이 없게 되면, 우리는 더 심한 고통을 당할 것을 예상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심판하실 때에는, 항상 그가 이기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스불론과 납달리 땅에는 흑암 시대가 있다. 그리고 "이방인들의 갈릴리에는 고통의 흑암" 이었다. 그것은 그들이 무지하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며(그들은 "율법과 증거의 말씀" 을 쫓아 말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빛이 없었다." 8:20) 그들이 당하는 고생과 외면적인 일에 대한 그들의 절망적인 마음가짐에서 볼 때도 그러하다. 우리는 그 두 가지 사실을 동시에 읽을 수 있다(대하 15:3, 5). "이스라엘에는 참 하나님과 가르치는 예언자가 끊어졌으니, 그 시대에는 평강이 없었도다" . 그러나 경고된 그 흑암(8:22)이 그 정도로까지 크게 미치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다. 왜냐하면,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았기" 때문이다(2절).
(1) 그 예언자가 살아 있을 때에 유다와 이스라엘에는 많은 예언자들이 있었는데, 그들의 예언은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신봉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지시와 위로를 주는 큰 빛이었다. 기록된 말씀 이외에도 그들에게는 예언이 있었다. 그들에게 이런 일이 얼마나 오래갈는지를 알려 준 예언들이 있었다(시 74:9). 그것은(외부적인 고생이라는 점에서 보면) 그들이 "흑암 중에 앉아, 그늘진 땅에 거하던" 때에는 커다란 위안이 되었다.
(2) 이것은 우리 주 예수께서 하나의 예언자로서 나타나기 사작했을 때, 그리고 스블론과 남달리 땅에서 또 이방인의 갈릴리에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을 때, 완전히 이루어지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규약의 예언자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증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모형이었다. 그가 오셔서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에 거하셨을 때, 그때에 이 예언이 이루어졌다고 일컬어지고 있다(마 4:13-16). 다음 사실들에 주목하자.
① 복음을 모르는 자들은 흑암 속에서 행하며, 자기들이 무엇을 행할지 또 어디로 가야할지를 모른다. 그리고 그들은 사망의 그늘의 땅에, 짙은 흑암과 극도의 위험 속에 거한다.
② 복음이 어떤 곳에나 사람에게 들어오면, 빛 곧 큰 빛이요 더욱 더 빛을 발할 찬란한 빛이 들어오는 것이다. 흑암 속에 있는 자들에게는 빛이 반갑듯이, 우리는 복음을 반가운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준비된 마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에게 최고로 유용하기 때문이며, 또한 그 자체를 증거해 주기 때문이다. 진실로 이 빛은 즐겁다.
2. 영화로운 번영과 그것으로 인한 전 인류의 기쁨에 대한 약속이 있다(3절). "하나님이시여, 주께서 이 나라를, 곧 주께서 긍휼을 예비해 두신 이 유대 민족을 창성케 하셨나이다. 비록 그것이 연이은 쓰라린 심판에 의해 감소되었을지라도, 이제 주께서 그것을 다시 창성케 하시기 시작했습니다." 만일 다수의 사람이 근면하다면 그 민족의 수효는 그 민족의 힘이며 재산이 된다. 그리고 민족들을 커지게 하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말이 뒤따르고 있다. "주께서는 그 즐거움 - 정욕적인 기쁨과 환락, 그리고 그런 즐거움의 대상과 원인이 되는 것들 - 을 더하게 하시지 않았나이다(개역 한글판에는 "더하게 하셨나이다" 로 되어있음. 역주).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주의 앞에서 즐거워하였나이다. 즉 그들 중에는 진지한 영적 기쁨이, 하나님을 바라봄으로써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는 기쁨이 풍성하게 있습니다." 이것은 2절에 언급되어 있는데, 복음의 빛이 비치는 시대에 매우 잘 적용될 수 있다. 그때에는 하나님이 그 나라, 곧 복음의 이스라엘을 창성케 하셨다. (마소라 텍스트에 의하면)" 주께서 그 기쁨을 크게 하셨으니, 곧 그 빛을 받는 모든 사람에게니이다." 다음의 말들은 그러한 해석을 뒷받침 해 준다. "그들이 주(主) 앞에서 즐거워하나이다. 그들이 거룩한 의식 가운데 주 앞에 나와 크게 기뻐하나이다. 그들의 희락은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이스라엘의 것과 같지 아니하며(주께서는 그런 즐거움을 더하게 하지 아니하셨나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총과 주의 은혜의 표적 안에 있습니다." 복음이 빛과 능력으로 들어올 때는 기쁨도 동반해 온다는 것을 명심하자. 그리고 그 복음을 올바로 받는 자들은, 그것을 기뻐하며 또 기뻐할 것이다. 그러므로 열방의 전향이 이렇게 예언되어 있다(시 67:4). "열방을 기쁘고 즐겁게 노래할지라" (시 116:11 참조).
(1) 그것은 거룩한 즐거움이다. "그들이 주 앞에서 즐거워 하나이다" 고 했다. 그들은(그리스도처럼, 눅 10:21) 영으로 기뻐하며 더욱이 하나님 앞에서 기뻐한다. 세상의 눈에는 그들이 항상 슬프게 보일지라도,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그들이 항상 기뻐하고 있다(고후 6:10).
(2) 그것은 큰 즐거움이다. 그것은 "추수하는 즐거움 같다" 고 했다. 즉 눈물로 씨뿌리고 땅의 귀한 열매를 오래 참음으로써 기다려 온 자들이 기쁨으로 추수하는 즐거움 같다. 그리고 군인이 위험한 전투 후에 "탈취물을 나누는" 때의 즐거움과 같다. 복음은 그것과 함께 풍성함과 승리를 가져온다. 그러나 그 기쁨을 얻고자 하는 자들은 추수의 즐거움을 얻기 전의 농부처럼, 힘든 일을 각오해야 하며, 탈취물을 나누는 즐거움을 얻기 전의 군인처럼 전투를 각오해야 한다. 그러나 그 즐거움이 왔을 때는, 즐거움이 수고에 대한 충분한 보상이 되어 줄 것이다(행 8:8, 39 참조).
3. 영광스러운 자유와 해방에 대한 약속이 있다(4, 5절). "그들이 주 앞에서 즐거워할 것이며, 거기에는 좋은 이유가 있는데, 이는 그들의 무겁게 멘 멍애를 꺾으시어, 그들을 편케 하셨고, 더 이상 노역을 하지 않게 만드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께서 그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 곧 오랫동안 의인에게 머물러 있던 악인의 막대기를 꺾으셨기 때문입니다." 마치 미디안의 멍에가 기드온의 힘으로 이스라엘의 목에서 꺾어져 나갔던 것과 같다. 만일 하나님께서 이전에 베푸신 구원의 역사를 우리를 위해 역사할 사건에 대한 모형으로 삼으신다면, 우리는 거기서 격려를 얻어 하나님에게 소망을 두고 그를 찾아야 한다(시 83:9). "주는 미디안에게 행하신 것 같이 저희에게도 행하소서!"
본문에서 언급하고 있는 현세적인 구원이 무엇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아마도 산헤립이 예루살렘의 주인이 되지 못하도록 한 사건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손에 의해 "미디안의 때와 같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싸움들은 보통 매우 소란스럽고 많은 피의 댓가로써 승리를 얻지만, 그 승리는 조용하게, 그리고 시끄럽지 않게 이루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여기서는 산헤립을 뜻함 - 역주)의 영광 밑에다가 불을 놓으실 것이다" (10:16). 그리하여 "사람이 피우지 않은 불이 그를 멸하리라" (욥 20:26). 그러나 의심할 바 없이 본문은 더 앞의 사건 곧 흑암 속에 있는 자들에게 찾아올 저 큰 빛의 복된 열매와 결과를 내다보고 있다. 그것은 자유를, 곧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눅 4:18) 가져올 것이다.
(1) 복음의 의도와 그 은혜의 의도는 죄와 사탄의 멍에를 꺾는 것, 죄와 타락의 짐을 제거하고 우리를 그 압제자의 막대기에서 자유케 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영광스러운 자유 가운데로 들어갈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형식적인 율법의 멍에를 꺾으시사(행 15:10; 갈 5:1) 우리를 "원수의 손에서" 건지시어, 우리가 그를 "두려움 없이 섬기게" 하셨다(눅 1:74, 75).
(2) 이것은 불같이 역사하시는 성령에 의해 행해진다(마 3:11). 그것은 전투하는 용사들이 어지러이 싸우는 것처럼 그렇게 행해지지는 않는다. 우리 싸움의 무기는 현세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싸움은 심판하는 영과 소멸하는 영으로 수행된다(4:4). 그것은 사람의 마음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에 의해 "미디안의 날(때)과 같이" 된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기드온이시다. 이적을 행하는 것은 그의 칼이다.
Ⅱ. 그러한 교회를 위해 이 큰 일들을 수행하고 성취시킬 자는 누구이며 어디에 있는가? 이사야 예언자는 그 위대한 일들이 메시야를 통해서 되리라고 했다(6, 7절). 그는 이사야가 예고한 대로 처녀의 아들로서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 이라 했다(7:14). 그는 예언자들의 문체를 따라, 그것이 이미 이루어진 일인 것처럼 말하고 있다. "한 아이가 났다." 그 사실은 마치 이미 이루어진 것처럼 확실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의 성육신 전에도 교회는 "여자의 후손" 에 관한 첫번째 약속 덕분에(창 3:15) 메시야의 업적에서 오는 큰 이득과 혜택을 이미 받아왔기 때문이다. 그는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이었던 것과 동시에 "창세 때부터" 태어난 아이였다(계 13:8). 하나님께서 구약의 교회를 위해 베푸신 모든 큰 위업은 영생의 말씀인 메시야를 통해서 된 일이며, 중보자인 그 때문에 된 일이다. 그는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자였고, 하나님께서 살피시는 자였다(시 84:9).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얼굴 빛을 그의 성소에 비추시는 것은, 우리 주님 곧 주 그리스도를 인함이다(단 9:17). 유대 민족, 특히 다윗의 집은 그 축복을 간직한 자들이므로, 여러 차례 절박한 멸망에서도 보존되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지극히 큰 긍휼을 그의 교회를 위해 보존해 두셨고, 그 교회는 하나님의 섭리의 특별한 배려 아래 있다. 그러므로 어떻게 하나님의 교회가 이보다 더 안전할 수 있었겠는가?
갈대아 의역본은 그것은 영존할 자 곧 그리스도에 대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리고 이 본문 구절은 그와 그의 나라에 대한 유명한 예언이다. 의심할 바 없이 주로 이 구절에 근거하여 있는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린 자들은 때때로 이것을 되돌아보았고 즐겁게 이것을 읽었다.
1. 스스로를 낮추신 그를 보라. "전능하신 하나님" 이신 바로 그가 "한 아이로 태어 나셨다." 신이 잠간 동안의 생을 사는 아기로 되셨다. "영존하시는 아버지" 는 "우리에게 주신 바 된 아들" 이시다. 이러한 것이 우리의 모습을 취하신 그의 겸양이시다. 이처럼 그는 그 자신을 낮추시고 비우심으로써, 우리를 높이시고 채우셨다. 그는 우리 인간 세상에 태어 나셨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 그는 타락한 상태에 있는 우리의 입장이 요구하는 모든 것이 되시기 위해 값없이 우리에게 주어졌다. 그는 "우리에게 났다." 우리에게, 곧 죄지은 천사들에게가 아니고 우리 인간을 위해서 주신 바 되었다. 이 사실은 매우 의기양양하게 언급되어 있으며, 그 천사가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다" (눅 2:11)고 말하면서, 메시야가 오신 것을 목자들에게 전한 것은 바로 이 말씀을 주목하여 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스도가 태어 나시어 우리에게 주신 바 된 것은 가장 큰 슬픔과 두려움의 날에도 우리 소망의 큰 초석이며, 우리 기쁨의 초석이라는 것을 명심하자.
2. 높이 들리우신 그를 보라.
우리에게 주신바 된 이 아이, 이 아들, 이 하나님의 아들, 이 인자(人子)는 우리에게 큰 자비를 베푸실 능력을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최고의 존귀와 능력을 부여 받으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가 우리의 친구가 되신다면, 우리는 행복하지 않을 수 없다.
(1) 그가 도달하게 된 위엄과 모든 이름 위에 있는 그의 이름을 보라. 그는 "기묘자, 모사" 등으로 불리워질 것이다(그리고 우리도 그가 그렇게 불리우고 있는 것과 불리워질 것을 확신한다). 그의 백성은 이 이름을 통해 그를 알고 섬길 것이다. 그리고 그 이름에 충분히 응하는 자답게 그들은 그에게 복종하며 의지할 것이다.
① 그는 "기묘자요 모사" 이다. 그가 "기묘자" (wonderful)라 불리우는 것은 마땅하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인 동시에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의 사랑은 천사들과 영화롭게 된 성도들의 경탄의 대상이다. 즉 그의 탄생, 사망, 부활, 그리고 승천에서 그는 실로 놀라우셨다. 끊임없는 경이(이적)가 그를 따랐고 논쟁할 여지도 없이 그에 관한 경건의 비밀은 심대했다. 그는 "모사" (counsellor) 이시다. 왜냐하면, 그는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계획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인생들에게 훈계하시며 그 속에서 우리의 번영을 도모하신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훈계하" 시는 것은 그를 통해서이다(시 16:7; 계 3:18). 그는 아버지의 지혜이시며, 또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에게 지혜를 주신다.
혹자는 이것을 함께 연결시키고 있다. 즉 그는 기묘한 모사, 모사들의 기묘 또는 기적이라고 보는 것이다. 다른 점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는 모사(상담자)라는 점에서 아주 탁월하시며, 아무도 그와 같이 가리칠 수 없다.
②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 - 하나님, 전능자" 이시다. 그는 자기의 사업을 수행하실 지혜를 가지고 계시듯, 또한 힘을 가지고 계신다. 그는 가장 완전한 구원을 이루실 능력이 있다. 그것이 바로 중보자의 과업이니,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 이하의 것은 그것을 이룰 수 없다.
③ 그는 "영존하시는 아버지" 또는 "영원의 아버지" 이시다. 그는 하나님이시며 영원 전부터 영원까지 계시는 아버지와 함께 한 자이시다. 그의 백성에 대한 그의 아버지다운 배려와 자상함은 영원하다. 그는 그들에 대한 영생과 행복의 창조자이시다. 따라서 그들에 대해서 거룩하시고 영원하신 아버지이시다. 그는 천사들에게가 아니라 그에게 복종케 된(히 2:5) "장차 오는 세상의 아버지" (칠십인 역은 그렇게 해석했다), 곧 복음의 나라의 아버지이시다. 그는 영원 전부터 위대한 구속 사업의 아버지이셨다. 그는 늘 그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구원은 "모사" 로서 그의 지혜의 소산이었고, "영존하시는 아버지" 로서 그의 사랑의 소산이었다.
④ 그는 "평화의 왕" 이시다. 왕으로서 그는 그의 나라에 평화를 보존하시며, 평화를 명하신다. 아니 그는 평화를 창조하신다. 그는 우리의 평화이시다. 그리고 그의 백성들의 마음을 지키며 주관하는 것은 그의 평화이다. 그는 평화를 애호하는 왕이시며 그의 통치자 평화로울 뿐 아니라 모든 선의, 곧 그의 백성들에게 있어서 현재와 미래의 축복이 되는 모든 평화의 창시자이며 수여자이시다.
(2) 그가 도달된 주권과 모든 주권 위에 있는 그의 보좌를 보라(6절). "그 어깨에는" 또 오직 그의 어깨에만, "정사를 멜 것이다." 그는 자기 어깨에 권력의 뱃지(" 다윗 집의 열쇠" 22:22)를 달게 될 뿐만 아니라, 그 권력의 짐을 지게 될 것이다. 그 아버지께서 그에게 그 짐을 지우실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결코 양도될 수 없는 통치권을 갖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수행하실 것이다. 따라서 분명 그의 나라는 잘 다스려질 것이다. 그가 정권을 어깨에 메실 것이며, 모세처럼 자기의 짐이 중하다고 결코 불평하지는 않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나 혼자는 이 모든 백성을 질 수 없나이다" 라고 모세는 불평했었다(민 11:11, 14).
그리스도의 통치에 관해 영광스러운 것들이 여기에 언급되어 있다(7절).
① 그것은 번창하는 나라가 될 것이다. 그것은 증가될 것이다. 그의 나라의 영역은 더욱 더 확대될 것이며 날마다 많은 사람이 거기에 더하여질 것이다. 그 광채가 더하여질 것이며, 그것은 이 세상에서 더욱 더 눈부시게 빛날 것이다. 지상의 군주들은 모두 그에게 비하면 초라한 자들이다. 따라서 금으로 시작되어 철과 진흙으로 끝나고, 각 군주국은 점차로 시들어 버린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나라는 성장하는 나라이며 마침내는 완전케 될 것이다.
② 그것은 평화의 왕이신 그의 성품에 합당한 평화로운 통치가 될 것이다. 그는 사랑으로 다스릴 것이며 사람의 마음을 다스릴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통치가 있는 곳은 어디에나 평화가 있을 것이며, 그의 나라가 번창함에 따라 평화가 더할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께 복종할수록 우리는 더 편하고 안전하다.
③ 그것은 의로운 통치가 될 것이다. 다윗의 아들인 그가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에게 맡겨진 나라를 다스릴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실 것이라" 고 했다(눅 1:32, 33). 유대인과 이방인이 연합되는 복음의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군림하시는 거룩한 산 시온이다(시 2:6).
④ 그 나라는 신중하게 또 정의롭게 다스려져, 그 통치의 위대한 목적에 부합될 것이다. 바로 이것이 그 나라의 기초이다. "그가 그것을 굳게 세우고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다." 그리스도의 나라에서 모든 일은 잘 처리되고 있으며 또 처리될 것이다. 그리고 그의 백성 중 어느 누구도 결코 불평할 이유가 없게 될 것이다.
⑤ 그것은 영원한 나라가 될 것이다. "그 정사(government)의 더함이 무궁할 것이라" 했다(그것은 계속 성장할 것이다). 평화의 더함이 무궁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 나라 백성들의 행복이 영원토록 지속될 것이며, 아마도 in infinitum - 영원히 진보될 것이다. 그는 "지금부터 영원토록" 다스리실 것이다. 즉 모든 세대를 통해서 뿐만 아니라 그 나라가 하나님 곧 아버지께 넘겨 질 때까지 구속자와 구속함을 얻은 사람들 모두의 영광은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
⑥ 하나님께서 친히 이 모든 것을 수행하셨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즉 그 손에 모든 능력을 지니시고 모든 창조물을 지휘하시는 여호와께서 이를 이루시리라. 다윗의 위에 평화의 왕이 거기에 앉혀질 때까지, 다윗의 위를 보존하실 것이다. 그의 열심이 그것을 행하실 것이다. 그 자신의 영예, 그의 약속의 신빙성, 그리고 그의 교회의 유익에 대한 그의 빈틈없는 배려가 그것을 행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들 중에 있는 그리스도의 나라의 진보에 크게 마음을 기울이신다는 것을 잊지 말자. 이 사실은 그 나라가 잘 되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매우 큰 위안이 된다.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 이 모든 도전을 극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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