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0.04.10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시126 136 감사.샬롬.에이레네 살전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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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126]============

1.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려 보내실 때에 우리는 꿈꾸는 것 같았도다

2.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그 때에 뭇 나라 가운데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다 하였도다

3.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사메흐..기쁘고 즐거운)

4.여호와여 우리의 포로를 남방 시내들 같이 돌려 보내소서(슈브...회복하다)

5.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린나..기쁨이나 슬픔의 외침...여기에서는 환희의 외침/감탄/기쁨의 환성) 거두리로다

6.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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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박과 고난으로부터 하나님 백성이 크고 놀라운 구원을 얻을 것을 언급한 것을 볼 때, 이 시편은 아마도 에스라 시대에 있었던 이스라엘의 바벨론으로부터의 귀환 때 기록되지 않았을까 추정된다. 바벨론이 언급되어 있지는 않지만(137편에는 언급되어 있다), 바벨론 포로는 주목할 만한 큰 사건이었고, 그로부터의 귀환 역시 그러하다. 그것은 그리스도에 의한 우리의 구속 사건의 모형이 되었다. 아마도 이 시편은 에스라에 의해, 혹은 첫 귀환자들과 함께 나온 몇몇 선지자들에 의해 기록된 것 같다. 우리는 당시의 귀환자들로서, 유명한 시편 저자인 아삽의 자손들 중 노래하는 자들에 관해 읽은 바 있다(스 2:41). 이 시편은 똑같은 것이 진전을 보이며 두 번 반복되는(2-3절과 4-5절)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에 속하며, 그 표제를 가진 나머지 시편들 중에 놓이게 되었다.

1. 포로에서 돌아오는 자들은 감사하라고 부르심 받고 있다(1-3).

2. 아직 포로 중에 남아 있는 자들은 여기서 그들을 위한 기도와(4), 격려를 받고 있다(5-6).

이 시편을 노래하면서 그것을 교회 또는 우리의 땅에 행해진 어떤 특별한 구원과 그리스도에 의한 우리 구원의 놀라운 업적에 적용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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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 중의 소망(시 126:1-3)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 되었을 때, 비파가 버드나무에 걸려 있었다.(시137참고) 왜냐하면 그때 하나님은 울고 통곡하라고 부르셨고, 그때 하나님께서 저희를 슬퍼하시며 그들을 애곡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포로는 되돌려졌고, 그들은 비파를 되찾았다. 섭리가 그들에게 외쳐지고, 그들은 춤을 춘다. 이와 같이 섭리의 모든 활동에 순응해야 하며, 적절하게 감동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쓰이지 않던 슬픈 때를 지난 후에는, 비파가 멜로디를 타고 곡을 불러 일으켜야 한다. 자비에 대한 오랜 소망이 그들의 귀환을 크게 기쁘게 한다.

Ⅰ.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행하신 구원. 그는 “시온의 포로를 돌리셨다.” 시온이 그 타락의 형별로 인해 포로 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러나 그 포로의 목적이 달성되고 의도했던 일이 이루어졌을 때, 포로 됨이 되돌려졌다고 보는 것이 옳다. 고레스가 나라의 사정으로 하나님의 포로들에게 자유를 선포했지만, 그것은 수년 전에 하신 그의 말씀을 따라 “여호와께서 행하신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포로로 보내심은 불에 태우기 위해 풀을 집어넣는 것 같지 않고, 오히려 금을 정화하기 위한 것과 같다. 이스라엘의 해방은 거룩한 산, 즉 하나님의 성소와 거처인 “시온의 포로를 돌리신 것”이라고 불렸다. 왜냐하면 그들의 거룩한 관심의 회복과 신앙의 공적 실행의 활기를 되찾음이 포로 귀환에서 얻은 가장 고귀한 이득이 되었기 때문이다.

Ⅱ. 구원이 그들을 향한 것이라는 기쁨의 놀라움. 그들은 보고 놀랐다. 갑자기 온 것이기 때문에 처음에 그들은 혼동 중에 있었다. 무엇이 그렇게 했으며, 무슨 목적으로 그렇게 되었는지를 알지 못했다. 우리는 “꿈꾸는 것같이” 생각했다. 우리는 그것이 너무 기쁜 소식이어서 사실 같지가 않았다. 그리고 우리가 깨었는지 아닌지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또한 성 베드로가 그의 구원을 잠깐 생각했을 때와 같이(행 12:9) 사실이 아니라(때때로 예언자들에게도 있었던 일이다), 환상 중에 그 표현이 나타난 것이 아닌가 의심했다. 때때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와 같이 그들이 알아차리기 전에 하나님의 인자하심의 축복을 받는다. “우리는 건강을 되찾은 자들과 같았도다”(하몬드 박사의 해석). 구원이 우리에게 임한 것은 위로의 행복한 변화와 같아서 마치 죽음에서 생명으로, 격렬한 고통에서 갑작스런 평안에로 옮겨진 것과 같다. 그 놀라움은 그들에게 황홀경과 같았다. 그것은 황홀한 기쁨과 같이 주어져 그들도 좀처럼 기쁨을 표현하는 데 체면의 한계를 지킬 수 없었다.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그들은 이와 같이 그들의 기쁨을 발했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얼마나 큰 이적을 행하셨는가를 모두에게 알렸다. 과거에 울었던 자들이 이제 웃으며, “새 노래가 그들의 입에 담겼다.” 그것은 적들에 대한 경책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기쁨의 웃음이었다.

Ⅲ. 저희의 이웃이 그것을 인식함. “그들은 열방 중에서 말하기를”,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그 백성을 위해 다른 신들이 우리를 위해 할 수 없는 “대사를 행하셨다 하였도다.” 열방들은 그들의 환난을 보았고, 그 환난에 승리하는 것을 보았다(137:7; 렘 22:8-9). 이제 그들은 이스라엘의 구원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책망 받고 멸시받은 자들에게 명성이 주어지고, 그들을 괄목하게 했다. 그들의 승리가 크게 하나님의 영광으로 돌려졌고,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과 섭리에 대한 감사를 그에게 돌림으로써 다른 신을 섬기는 자들을 무력하게 했다.

Ⅳ. 그들이 구원에 대해 감사함(3절). 열방은 구경꾼에 지나지 않았고, 그것을 단지 뉴스거리로만 말했다. 열방은 그 사건에 참여하지 못했고 아무런 업도 얻지 못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에 대한 참여자로 그것에 대해 말했다.

1. 마음을 기울임으로써.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대사를 행하셨으니”, 우리는 즐겁고, 그로 인해 은택을 입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대로, 행하신 구속에 대해 말하는 것은 위로가 된다. “누가 나를 사랑하며, 나를 위해 자신을 바쳤는가?”

2. 감동되어서. “우리는 기쁘도다.” 이스라엘이 저희 하나님으로부터 떠나 간음하러 간 동안에 기쁨이 그들에게 허락되지 않았다(호 9:1). 그러나 이제 야곱의 불의가 포로에 의해 속죄되었고, 저희의 죄가 사해졌다. 이제 하나님께서 그들을 즐겁게 하신다. 기뻐하는 백성, 장차 그렇게 기뻐할 백성은 참회하며 개혁하는 백성이다.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것을 고찰해 볼 수 있다.

(1) 그의 백성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나타나시는 것은 대사로 간주되어야 한다.

(2) 하나님은 교회를 위해 이루신 모든 대사의 창시자로서 여겨져야 한다.

(3) 교회의 구원이 우리를 위해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관찰하는 것은 유익한 일이다. 그렇게 한다면 우리는 기뻐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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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망의 자비(시 126:4-6)

이 구절들은 소망했던 자비를 바라보고 있다. 포로에서 나온 자들은 여전히 고난 중에 있었으며, 그들의 본토에서도 고난을 당했다(느 1:3).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바벨론에 남아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떨면서 기뻐했고, 아직도 회복되어야 할 슬픔을 마음속에 담고 있었다.

우리는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볼 수 있다.

Ⅰ. 그들의 구원을 완전케 해달라는 기도(4절). “우리의 포로를 돌리소서. 자기 본토에 돌아간 자들로 하여금 지금까지 신음하던 고역을 풀게 하소서. 바벨론에 남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우리가 자유의 혜택을 부여받은 것처럼 저희의 마음이 뛰놀게 하소서.” 자비의 시작은 그것을 완전케 하도록 간구하는 우리에게 격려가 된다. 그리고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 우리가 찬양할 일이 넘쳐 있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기도할 문제가 남아 있게 된다. 우리가 자유하게 되고 번영 중에 있게 될 때, 우리는 고난과 속박 중에 있는 우리의 형제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미 돌아온 형제들과 함께 연합해 포로 중에 있는 자들이 돌아옴은, 남방에 있는 마르고 건조한 나라들에 양쪽으로 흐르는 물줄기처럼 환영될 것이다. 먼 땅에서 오는 이 좋은 소식은 목마른 영혼에게 냉수가 주어진 것과 같다(잠 25:25).

Ⅱ. 구원을 기다릴 수 있는 격려에 대한 약속. 그들이 지금은 슬픈 때에 있을지라도 그 약속을 확신해 장차 좋은 결과가 이루어질 것을 믿는다. 그 약속이 일반적으로 표현되어 있기 때문에 모든 성도들이 이러한 확신을 갖고 자신들을 위로할 수 있으며, 그들의 눈물의 씨가 결국 기쁨의 수확을 거두게 될 것이다(5절).

1. 고난 당하는 성도들은 눈물의 씨를 뿌린다. 그들은 종종 눈물을 흘린다. 그들은 인생의 고난에 참여하고 있으며, 대체적으로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고난에 참여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울며 씨를 뿌린다.” 그들은 고난의 상황에서 의무를 수행하며, 그리하여 그들이 지배받는 섭리의 목적에 응답한다. 눈물을 흘리는 일이 씨를 뿌리는 일을 막을 수 없다. 우리가 크게 고난을 당할 때 우리는 더욱 잘 행동해야 한다. 아니, 비를 맞고 땅이 씨를 받을 준비를 하며, 농부가 젖어 있는 땅을 찾아 씨를 뿌리는 것과 같이, 우리는 회개와 기도와 겸손을 행해 고난의 때를 선용해야 한다. 아니, 그 자체로 씨가 되는 눈물이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죄에 대한 슬픔의 눈물, 고난받는 교회에 대한 동정의 눈물, 기도와 말씀에서 생기는 자비의 눈물을 뿌려야 한다. 이러한 것들은 농부가 곡식이 귀할 때 씨를 뿌리며, 그의 가족을 위해 적지 않은 것을 뿌려 땅에 묻고, 다시 얻을 수확을 기대하면서 뿌리는 것과 같은 귀중한 씨앗이다. 선한 사람은 이와 같이 눈물로써 씨를 뿌린다.

2. 그들은 기쁨의 단을 거두게 된다. 성도들의 고난은 항상 지속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이 저희의 업을 마치면 행복한 시기가 오게 된다. 바벨론 포로는 오랫동안 눈물로 씨를 뿌렸지만, 드디어 기쁨으로 나아오게 되었으며, 견딜 수 있는 고난의 혜택을 수확했고, 그들 본토의 곡식 단을 가져오며,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경험하게 되었다. 욥과 요셉과 다윗과 많은 사람들이 슬픔의 씨 다음에 오는 기쁨의 수확을 경험했다. 경건한 슬픔의 눈물로 씨를 뿌리는 자들은 인봉한 용서와 안정된 평화의 기쁨으로 거두게 될 것이다. 눈물의 골짜기에서(이 세상에서) “성령으로 씨를 뿌리는 자들은 성령으로 영원한 생명을 거두게 될 것이다.” 그리고 실로 기쁨의 추수가 될 것이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라.”


========시136==========
1.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2.신들 중에 뛰어난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3.주들 중에 뛰어난 주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4.홀로 큰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는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5.지혜로 하늘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6.땅을 물 위에 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7.큰 빛들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8.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9.달과 별들로 밤을 주관하게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0.애굽의 장자를 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1.이스라엘을 그들 중에서 인도하여 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2.강한 손과 펴신 팔로 인도하여 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3.홍해를 가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4.이스라엘을 그 가운데로 통과하게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5.바로와 그의 군대를 홍해에 엎드러뜨리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6.그의 백성을 인도하여 광야를 통과하게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7.큰 왕들을 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8.유명한 왕들을 죽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9.아모리인의 왕 시혼을 죽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20.바산 왕 옥을 죽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21.그들의 땅을 기업으로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22.곧 그 종 이스라엘에게 기업으로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23.우리를 비천한 가운데에서도 기억해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24.우리를 우리의 대적에게서 건지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25.모든 육체에게 먹을 것을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26.하늘의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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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에의 권면(시 136:1-9)
우리가 여기에서 반복해서 부르심을 받은 의무는 “감사하라”는 것이며, 땅의 소출이나 가축으로써가 아니라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로 “항상 찬미의 제사를 드리는 것”(히 13:15)이다. 우리는 기도하며 참회하라고 진지하게 부르심을 받지 않고, “감사하라”고 부르심 받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신앙의 가장 즐거운 일로 풍요하게 되며, 하늘의 일로 가득 차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다음과 같은 문제들을 고찰해 보자.
Ⅰ. 우리는 누구에게 감사해야 할 것인가? 우리가 모든 선을 받은 그에게, “여호와께”,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1절). “모든 신에 뛰어나신 하나님께.” 천사들이 경배하는 하나님, 그에게서 통치자들이 저희의 권력을 받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거짓 신들이 정복되며 정복될 것이다(2절). “모든 주에 뛰어나신 주께”, 모든 통치자들 위에 뛰어난 주권자이며 모든 지지자에 뛰어난 구원자께 감사를 드려야 한다(3절). 우리는 모든 경배의 행위에서 초월자로 계신 하나님의 우수성을 보아야 하며, 대적할 수 없고 통제할 수 없이 높은 그의 권세와 지배를 보아야 한다.
Ⅱ. 우리는 무엇을 감사해야 하는가? 자기의 모든 감사를 자기 자랑으로 한정시킨 바리새인처럼 하지 말고(“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감사하나이다. 내가 이러저러하게 된 것을 감사하나이다”), 감사를 모두 하나님의 영광에로 향하게 해야 한다.
1. 우리는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선하심을 인해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1절).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가 선을 행하시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가 또한 선하시기 때문에 감사해야 한다(모든 물줄기는 그 근원에까지 올라가야 한다). 그리고 그가 우리에게 인자하실 뿐만 아니라,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 후대에 올 자들에게도 인자함으로 대하실 것이기 때문에 그에게 감사해야 한다. 우리는 세상에서 우리에게 지금 나누어준 자비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하늘의 영광과 기쁨 중에 영원할 인자하심에 대해서도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2. 우리는 그의 권능과 지혜의 기사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일반적으로(4절) 그는 “홀로 큰 기사를 행하신다.” 그 고안은 놀라우며, 계획은 무한한 지혜로 말미암아 이루어졌다. 그는 홀로 놀라운 일들을 행하신다. 그 외에는 아무도 그러한 일을 행할 수 없다. 그는 다른 어떤 것의 조력이나 충고 없이 그것들을 이루신다. 특히 하늘 등을 이루신 기사를 살펴보자.
(1) 그는 하늘을 지으시고 펼치셨다. 우리는 거기에서 그의 지혜와 권능을 볼 뿐만 아니라, 하늘의 온화한 작용에서 그의 인자하심을 맛본다. 하늘이 지속되는 한 하나님의 자비는 그 안에 존속할 것이다(5절).
(2) 그가 육지를 나타나게 하실 때 땅을 바다에서 올리시고 인간을 위한 거주지로 적합하게 만드셨다. 거기에서도 인간에 대한 그 인자하심이 영원할 것이다(6절). 왜냐하면 “인간에게 땅을 주시고”, 그 모든 선물을 주셨기 때문이다.
(3) 그는 하늘과 땅을 지으시고, 그 거리에도 불구하고 그 사이에 관계를 정하셨다. 해와 달과 별을 지으심으로써 그것을 창공에 두어 이 땅에 빛을 비추시고, 영향을 미치게 하셨다(7-9절). 이것들은 우리에게 크기 때문에 “큰 빛들”이라고 불린다. 천문학자들은 달이 많은 별들보다 작다고 우리에게 말할 것이다. 그러나 달이 지구에 더 가깝기 때문에 더 크게 보일 뿐이다. 그들이 연중 계절을 지배하며 세상에 유익을 주기 때문에 “주관한다”고 불린다. 그리고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는다”(눅 22:25). 지배권이 나누어져서 “해로 낮을 주관케 하고, 달과 별들로 밤을 주관케” 했지만, 모든 것이 하나님의 지시와 처분에 복종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방인들이 우상화한 통치자들은 세상의 종이며, 하나님의 신민이다. “해야, 너는 조용히 서 있고, 너 달아, 밤을 주관하라.”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송축함(시 136:10-22)
하나님께서 처음 이스라엘을 하나의 백성으로 형성하시고, 그들 가운데 그의 나라를 세우셨을 때, 그가 이스라엘을 위해서 행하신 큰 일들이 다른 시편에서 이스라엘을 위해서 베푸신 하나님의 권능과 특별한 친절의 기사로 언급된 것과 같이 여기에서도 언급되었다(135:8 등 참조).
Ⅰ. 그는 애굽으로부터 그들을 구출해 내셨다(10-12절). 그것은 그들에게 오래 지속된 자비였다. 그리고 그것에 의해 특징지워진 그리스도에 의한 우리의 구속은 실로 영원하다. 왜냐하면 영원한 구속이기 때문이다. 애굽에서 일어난 모든 재앙들 중에서 장자의 죽음 이외에는 아무것도 언급되지 않았다. 그것이 정복하는 재앙이었기 때문이다. 모든 재앙에서 애굽 사람들로부터 이스라엘 사람들을 구별하신 하나님은 마침내 간계에 의해서가 아니라, 멀리 펼치며 큰 일을 행하시는 강한 손과 팔로 그들 가운데서 이스라엘을 인도해 내셨다. 그들은 이스라엘에 율법을 전하라는 모세의 임무를 깨달았다. 이러한 자비의 기적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은 그 율법에 복종하는 영원한 의무를 갖게 되었다(출 20:2).
Ⅱ. 그는 그들에게 가로막힌 홍해를 건너게 하셨다. 그는 자연의 일반 과정을 통제하시는 권능에 의해서 “바다를 둘로 가르시고”, 그 사이에 길을 열어 이스라엘로 하여금 그 사이로 통과하게 하셨다. 그리하여 이제 그들은 하나님과의 언약관계에 들어가게 되었다(렘 34:18 참조). 그는 바다를 가르셨을 뿐만 아니라, 바다가 갈라졌을 때 그리로 통과해서 지나갈 용기를 그의 백성들에게 주셨다. 이것은 바다에 대한 하나님의 권능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마음에 대한 하나님의 권능의 기사였다. 그리고 그것은 자비의 기적임은 물론 정의의 기적이 되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통로가 되었던 홍해가 추적자들에게는 무덤이 되었다. 그는 거기에서 바로와 그의 군대를 엎드러지게 하셨다.
Ⅲ. 그는 그들을 쓸쓸한 광야로 통과하게 하셨다(16절). 그는 그들을 광야로 인도하셨고, 그들을 먹이셨다. 그들의 장막은 40년 동안 계속되는 기적의 연속으로 음식이 가득했으며, 강하게 되었다. 그들이 광야에서 늑장부리며 방황했다고 할지라도 결코 멸망되지 않았다. 이때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그 인자하심의 불변성은 그들이 광야에서 그를 거역하고 사막에서 그의 마음을 상하게 했기 때문에 더욱 주목할 만한 것이었다.
Ⅳ. 그는 그들에게 자리를 만들어주기 위해서 그들 앞에 있던 왕들을 멸망시켰다(17-18절). 그들을 물러가게 하거나 추방하지 않고 살육하고 죽였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났고, 이스라엘에게는 그의 자비, 변하지 않는 자비가 나타났다. 그들은 “큰 왕”과 “유명한 왕”을 찬미했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인간의 자녀 중에 가장 미천하고 가장 약하고 작은 자들처럼 쉽게 정복하셨다. 그들은 악한 왕들이었다. 그들의 위엄과 영광이 하나님의 정의를 피하지 못하게 했다. 그들이 위대하고 유명할수록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는 그러한 왕들을 이스라엘에게 넘겨주는 것으로 나타났다. 시혼과 옥이 특별하게 언급되었다. 그것은 그들이 요단강 편에서 정복당한 최초의 두 왕이었기 때문이다(19-20절). 하나님의 은총을 전체적으로 보는 것보다 구체적인 항목에 들어가 보는 것이 더 좋다. 각 기사를 관찰하고서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하고 고백하는 것이 좋다.
Ⅴ. 그는 그들에게 좋은 땅을 소유하게 했다(21-22절).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을 소유하시고 세상과 거기에 거하는 것을 소유하신 그가 땅을 한 백성에게서 빼앗아 자기가 기뻐하시는 다른 백성에게 주셨다. “아모리 족속의 죄가 넘쳤다.” 그러므로 그 땅을 그들에게서 빼앗으셨다. “이스라엘”은 그의 “종”이었다. 그들이 광야에서 반역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들에게서 예배 받기를 원하셨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그들에게 속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애굽 사람들에게 “내 백성을 보내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이 가나안 사람들에게도 “내 백성을 들어가게 하라”, 그리하여 그들로 하여금 나를 섬기게 하라고 말씀하셨다. 이러한 점에서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그들에게 “영원하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늘의 가나안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가 영생에 이를 것이다.”
-----영원한 하나님의 자비(시 136:23-26)
하나님의 영원한 인자하심이 송축되었다.
Ⅰ. 그의 교회의 구속에서(23-24절). 우리는 유대 교회를 그 압제자의 손에서 건져내신 많은 구속에서(그들의 지위가 낮아지고 고역을 치를 때 하나님은 그들을 기억하시고 구원자와, 사사들과 다윗 왕을 보내셨다.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모든 적으로부터 보호하셨다), 그러나 특히 보편적인 교회의 큰 구속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할 많은 이유를 갖고 있다. “우리를 비천한 데서 기념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그는 우리를 죄와 사망과 지옥과 우리의 모든 영적인 적들로부터 구속하기 위해 그의 아들을 보내셨다.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그는 죄지은 천사로 보냄을 받은 것이 아니라, 우리를 구속하시기 위해서 보내심을 받았다. 왜냐하면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기 때문이다.
Ⅱ. 그가 모든 피조물을 위해 만드신 식물에서(25절). “그는 모든 육체에게 식물을 주신다.” 그가 생명을 주신 곳 어디든지 합당하고 충분한 음식을 주시는 것은 하나님 섭리의 인자하심의 일례다. 그는 거대한 가족을 부양하시는 선한 가장이시다.
Ⅲ. 그의 모든 영광과 그의 모든 은총에서(26절). “하늘의 하나님께 감사하라.” 이 구절은 그가 영광스러운 하나님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의 인자하심의 영광이 우리의 찬양에서 주목되어야 한다. 그의 “영광의 부요함”이 “긍휼의 그릇”에서 나타난다(롬 9:23). 그것은 또한 그가 위대한 은혜자임을 의미한다. “모든 선하고 온전한 은사는 위로부터”, 빛의 아버지로부터, “하늘의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든 물줄기를 그 근원에까지 찾아 올라가야 한다. 여기에 나타났고 앞에 나타난 특별한 인자하심은 어쩌면 잠깐 동안 지속될지 모르지만, 하나님 안에 있는 인자하심은 “영원하다.” 그것은 그칠 줄 모르고 솟아오르는 샘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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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d:y:(3034, 야다) 던지다, 쏘다, 감사하다, 찬양하다, 고백하다....give thanks to.....[하나님을 <야다 : 참되게 알다> 하는 자 참되게 야다<감사> 하리라]
야다(동사)는 기본어근이며, '던지다, 내던지다 throw, cast'를 의미한다. 좋은 것을 던져 줄 수도 있고, 나쁘거나 불필요한 것을 던져 버릴 수 있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144회 나오며, 칼형에서 '쏘다'(화살, 렘 50:14), 피엘형에서 '던지다'(애 3:53), 히필형에서 '감사하다, 찬양하다, 고백하다', 히트파엘형에서 '고백하다, 감사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야다의 기본적인 의미는 '죄, 하나님의 품성과 역사, 혹은 인간의 특성을 시인하다 혹은 고백하다'이다. 이 동사와 그 동의어 할랄의 기본적인 차이는 후자의 용어가 '갈채하다, 자랑하다', 혹은 어떤 대상을 '기뻐하다'를 강조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에, 야다는 좋든 나쁘든 어떤 사실에 대한 '인정'과 '선언'을 강조한다. 70인역본은 일반적으로 야다를 엑소몰로게오로 번역한다.
동사는 세 가지의 기본적인 방법으로 사용된다.
첫째, 이 단어는 개인적으로든 국가적으로든 죄의 시인 혹은 고백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었다. 기본적인 개념은 시 32:5에 묘사되어 있는 다윗의 개인적인 고백에서 분명하게 관찰되었다. 여기에서 시적인 병행구는 고백이 죄를 감추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하나님께 알리는 것이었음을 설명해 준다. 죄에 대한 고백이 하나님께 행해져야 한다는 사실을 주목하는 것은 중요하다. 국가적인 고백의 개략은 속죄일 의식에서 발견된다. 이때 대제사장은 큰 소리로 이스라엘 민족의 모든 죄를 고백하면서, 자기의 손을 염소의 머리 위에 두어 상징적으로 민족의 죄를 염소에게 전가 시켰다(레 16:21). 힛파엘형은 이 동사가 국가적인 죄의 고백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될 때 일반적으로 사용된다. 이 어간은 또한 이스라엘 죄의 대 고백이 다니엘(단 9:4, 단 9:20), 에스라(스 10:1), 느헤미야(느 1:6), 그리고 바벨론 포로기 동안과 그 이후의 이스라엘 백성(느 9:2-3)들에 의해 행해졌을 때에도 사용되었다. 국가적인 죄의 고백은 일반적으로 공적인 것이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자기 앞에서 우리의 죄를 시인하여(참조: 요일 1:9), 자기와의 본래의 관계를 유지하기를 매우 원하신다.
둘째, 야다는 하나님의 속성과 그의 일에 대한 인간의 공적인 선포나 선언(고백)을 나타내기 위해 주로 사용되었다.(고백적 찬양) 이 개념은 찬양의 의미의 핵심에 있다. 찬양은 하나님이 누구이신가 그리고 그가 무엇을 행하는가에 대한 고백이거나 선언이다. 이 용어는 영역본들에서 가장 자주 '감사하다' thank로 번역되지만, 베스터만(Westermann)에 의하면, 이 번역이 실제적으로 적당한 번역은 아니라고 한다. 즉 구약성경에서 ...아직까지 '감사하다' thank만을 의미하는 동사는 없었다. 일반적으로 '감사하다' thank로 번역되는 호다는 구약성경에서 사람들 사이의 감사에 대한 표현을 뜻하는 말로는 단 한번도 사용되지 않았다. 따라서 처음부터 이 호다는 하나님과 인간에게 똑같이 사용될 수 있는 우리의 언어 '감사하다' thank와 일치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인간들 사이에 일어나는 어떤 것으로서의 우리의 '감사하다'가 가장 분명하게 발견되는 구약성경의 구절들에서 사용된 동사는 베레크이다. 이 동사는 '찬양하다' praise의 기본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축복하다' bless를 의미한다.
이런 사실에 비춰볼 때, 구약성경은 감사하는 것에 대한 독립적인 개념을 가지고 있지 않음이 분명하다.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표시는 찬양에 포함되어 있다. 이것은 찬양의 한 방식이다(Westermann, Claus, The Praise of God in the Psalms, Richmond; John Knox Press, 1965, pp. 26-27).
이 용어의 가장 좋은 역어는 '고백' confession이다. 왜냐하면 시편(참조: 시 89:5, H6, 시 105장, 시 106장, 시 145장)과 그 외의 곳(참조: 대상 29:13)에서 충분히 볼 수 있듯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속성과 일을 고백하거나 선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야다는 '찬양하다' praise를 뜻하는 주요 단어들 중의 하나이다. 이 단어는 히브리인들의 시에서 언제나 할랄(찬양하다) ,자마르(악기로 찬양하다) 룸(높이다), 자카르(기억하다), 카밧(찬양하다), 그리고 나갓(선언하다)과 같은 찬양 용어들과 병행되어 나온다. 감사는 찬양 뒤에 온다. 왜냐하면 사람이 하나님의 속성과 일을 선언할 때, 이런 것들에 대해 감사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찬양은 대개 감사로 이어진다.
[베스터만은 한 주요 요지에 주의를 환기시켰다. 그렇지만 그의 말이 모든 세부적인 것들에 다 필요한지는 의심스러울 것이다. 만약 때로 감사가 찬양에 포함된다면, 특히 이 어근의 기본적인 의미가 BDB가 시사한 바처럼, '인정하다' acknowledge일 때, 어떤 행동이나 일에 대해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 야다가 사용되는 실례들이 감사하다라는 우리의 개념과 동일시될 수 있을 것이다(R. L. H)].
찬양은 일반적으로 여호와나 그의 이름을 그 대상으로 취한다(시 97:12, 시 99:3, 시 136:1-3, 시 136:26). 죽은 자가 아닌, 산 자만이 하나님을 찬양하였다(사 38:18-19, 시 6:5, H6, 시 30:9, H10, 시 88:10, H11). 찬양의 수창자(首唱者)에는 의로운 개인들(시 140:13, H14), 이스라엘 백성(시 106:47), 열방들(시 45:17, H18), 지상의 모든 왕들(시 138:4), 하늘들(시 89:5, H6), 사람의 노(시 76:10, H 11)와 같은 것들이 포함된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위대한 속성과 그의 기적적인 역사들을 고백했다. 여호와에 대한 찬양은 공적인 것으로, 열방들 사이에서(삼하 22:50),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대 회합에서(시 35:18) 발견되었다. 개인이나 백성이 와서 여호와를 찬양할 때, 그들은 종종 악기를 수반하여(대하 5:13, 시 33:2, 시 43:4), 말이나 노래로써, 구두로 찬양하였다(시 109:30, 시 28:7). 이런 찬양은 일반적으로, 다윗이 엄격하게 여호와의 인격에 대한 찬양과 고백으로 경축하는 임무를 맡긴 그런 레위인들(대상 16:4)의 지시하에 성막(혹은 성전)에서 행해졌다(시 100:4, 시 122:4). 이것은 매일 아침과 저녁에 성막에서 수행되어야 했던 예배의 주요 측면이었다(대상 23:30). 이 찬양은 여호와의 옳은 길(여호와의 의)에 따라(시 7:17, H18) 올바른 마음을 가지고(시 119:7) 전심으로 행해져야 했다(시 86:12, 시 111:1). 이런 찬양은 계속적으로 - 영원히 - 행해져야 했다(시 30:12, H13).
셋째, 야다는 또한 어떤 사람에 관한 어떤 진실을 고백하는, 즉 사람에 대한 사람의 칭찬을 나타내기 위해서 사용되었다(시 49:18, H19). '찬양' praise을 의미하는 "유다"라는 이름은 이 어근에서 나온 것이다. 왜냐하면 유다의 형제들이 그를 찬양(혹은 고백)하였기 때문이다(창 29:35).(참조: R. H. Alexander; B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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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의 이유 Reason to Give Thanks ....신명기 26:1-11===
1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시는 땅으로 여러분은 들어갈 것이오. 그 땅을 점령하고 그 땅에서 살 것이오. 2 그 때가 되면 여러분은 하나님 여호와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땅에서 자라난 작물 가운데 처음으로 거둔 것을 광주리에 담아 하나님 여호와께서 예배 받으시기 위해 선택하신 곳으로 나아가시오. 3 그리고 그 당시의 제사장에게 이렇게 말하시오. ‘오늘 제가 제사장의 하나님 여호와께 선언합니다. 여호와께서 저희 조상에게 약속하신 땅으로 제가 왔습니다.’ 4 제사장이 여러분이 가져온 광주리를 받아서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의 제단 앞에 놓으면 5 여러분은 여호와 앞에서 이렇게 말씀 드리시오. ‘제 조상은 떠돌아 다니던 아람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집트로 내려갔다가 몇 안 되는 사람과 함께 그 곳에서 나그네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거기에서 강하고 번성한 큰 나라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6 그러나 이집트 사람들이 우리에게 고된 일을 시킴으로 우리를 학대하고 괴롭혔습니다. 7 그래서 저희 조상의 하나님이신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저희 기도를 들어 주셨고, 여호와께서는 저희가 고통 당하는 것과 고된 일을 하는 것과 학대 받는 것을 보셨습니다. 8 여호와께서는 크신 힘과 능력으로 저희를 이집트에서 인도해 내셨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위엄과 표적과 기적을 보여 주셨습니다. 9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저희를 이 곳으로 인도하시고 젖과 꿀이 흐르는 비옥한 땅을 주셨습니다. 10 이제 제가 여호와께서 저에게 주신 이 땅에서 거둔 첫 열매를 여호와께 가져 왔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 광주리를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 놓고, 여호와 앞에 엎드려 경배하시오. 11 여러분은 레위 사람과 여러분 가운데 사는 외국인과 함께 즐거워하시오.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여러분과 여러분의 집에 주신 온갖 좋은 것을 나누며 즐거워하시오.” (쉬운 성경)
언제부터인지 추수감사절이 하나의 절기가 되었습니다. 마치 일년 내내 감사를 잊고 살던 사람들이 이 날이 되면 잊고 있었던 감사의 마음을 되찾는 것 같은 그런 느낌입니다. “감사”는 말은 영어로 “Thanksgiving”이라고 합니다. 문자적인 의미는 “감사의 행위(the act of giving thanks)” 혹은 “감사의 표현(an expression of thanks)” 이라는 뜻입니다.
여러분은 올 한 해 동안 무슨 감사 드릴 일이 있습니까? 무슨 감사를 표현할 일이 있습니까? 어렵고 힘든 일만 있었지 감사 드릴 일은 없습니까? 한국의 세브란스 병원에 가면 심장혈관병동이 있는데, 그 병동에 누가 썼는지 모르지만 “어느 환자의 고백”이라는 시가 걸려 있다고 합니다.
     주님! 때때로 병들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     이로 인해 인간의 약함을 깨닫게 해주시기 때문입니다.
     가끔 고독의 수렁에 내던져 주심도 감사합니다. ...     그것은 주님과 가까워지는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일이 제대로 안되게 틀어주심도 감사합니다. ...     그래서 나의 교만이 반성될 수 있습니다.
     아들, 딸이 걱정거리가 되게 하시고, 부모와 동기가 짐으로 느껴질 때도 있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     그로 인해 인간된 보람을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먹고 사는데 힘겨웁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     눈물로서 빵을 먹는 심정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불의와 허위가 득세하는 시대에 태어난 것도 감사합니다. ...     이로 인해 하나님의 의가 분명히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땀과 고생의 잔을 맛보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     그래서 주님의 사랑을 진실로 깨닫기 때문입니다.
     주님! 이 모든 일로 감사할 마음을 주심을 감사합니다. ...     이 모든 일로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계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 기도문이 입원 환자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줄 뿐만 아니라 내방객들에게도 신앙적인 도전을 주고 있어 화제가 되고 있다고 합니다. 
수술을 앞둔 환자가 이 시를 보는 순간 말할 수는 위로와 용기를 얻고, 또 병문안을 왔다가 이 시를 발견하고 이 시를 베껴다가 다른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의 삶이 얼마나 연약한 것입니까? 
병들고, 낙심하고, 외롭고, 일이 뒤틀리고, 걱정과 근심이 떠나지 않고, 게다가 경제적으로 힘들면 저절로 세상에 대한 불평과 원망이 나올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세상을 원망해 봐야 아무 것도 바뀌는 것이 없습니다. 자기 자신만 망가지고 맙니다. 
성격이 삐뚤어져서 왜곡된 시각으로 세상을 보게 되고, 자연히 인간 관계에 문제가 생기고, 삶의 의욕을 잃어 버리고, 열등의식에 빠져서 헤어나오지 못하게 됩니다. 
그런데 반대로, 똑 같은 일을 겪으면서도 그 마음에 감사의 마음이 들며 그것을 견지하는 믿음의 산소망을 붙든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똑 같은 환경 속에서도 어떤 사람은 자기 자신을 망가뜨리고 파괴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감사로 자신을 변화 시키고, 자신을 더욱 성숙한 사람으로 변화 시키고, 주변을 변화 시켜 나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편에 속한 사람입니까?
성경에 “감사”라는 말이 수도 없이 많이 등장합니다. 
구약성경에 127번, 신약 성경에 57번, 모두 184번이나 등장합니다. 이 말은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을 믿는 신앙생활에서 감사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신앙의 인물들이 그만큼 하나님께 감사하는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어로 감사를 “토다”라고 합니다. 
이 “토다”라는 말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고백적인 언어입니다. 그래서 이 “토다”라는 말에는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뜻이 들어 있고, 하나님께 감사 제물을 드린다는 뜻이 있습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며, 우리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부르자. 우리가 감사함으로 그 앞에 나아가자(시편 95:2)”라고 했을 때, 감사라는 말이 “토다”입니다. 
또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자시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 이름을 송축할지어다(시편 100:3-4)라고 했을 때, 여기 감사라는 말이 “토다”라는 말입니다.
“토다”라는 말은 “토를 단다”라는 말이 아닙니다. 누가 말하면 꼭 뒤에 뭐라고 종알종알 하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토를 단다”고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감사라는 말은 하나님과의 관계적인 말이요, 하나님께 대한 고백적인 말입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가 있습니다. 감사라는 말을 가볍게 여기지 말자는 것입니다. 
금방 “Thank God” 하고 나서 돌아서서 불평하는 그런 우리 태도를 반성하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감사를 특별한 의미를 담아서 드리자는 것입니다. 
피조물이 창조주에게,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 아버지에게,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에 대한 고백으로 감사를 드리자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시편 136편은 감사의 시편으로 널리 알려진 시편입니다. 
우리는 이 시편에서 진정한 감사의 의미가 무엇인지 배워야 합니다. 제가 앞 부분을 읽으면 여러분은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His love endures forever)”하고 말하시면 됩니다. 단순히 기계적으로 반복하지 말고 하나님께 대한 여러분의 신앙고백이 되게 하십시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1절)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이에게 감사하라(11절)
     강한 손과 펴신 팔로 인도하여 내신 이에게 감사하라(12절)
     (우리 앞에 놓인) 홍해를 가르신 이에게 감사하라(13절)
     자기 백성을 인도하여 광야를 통과하게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16절)
     우리에게 땅을 기업으로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21절)
     우리를 비천한 가운데에서도 기억해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23절)
     우리를 우리의 대적에게서 건지신 이에게 감사하라(24절)
     굶주린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25절)
     하늘의 하나님께 감사하라(26절)
어떻습니까? 바로 이것이 성경적인 의미에서 감사, 토다입니다. 
여러분, 오늘 읽은 신명기 26장 말씀을 보십시오. 아마도 이 말씀은 구약 성경에 기록된 추수감사절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이 아닌가 합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농사를 지어 처음 익은 열매를 광주리에 담아 그것을 여호와의 성소로 가지고 가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제사장에게 이렇게 말하라고 합니다. “여호와께서 저희 조상에게 약속하신 땅으로 제가 들어 왔습니다.” 
그러면 제사장은 그 광주리를 받아서 하나님의 제단에 앞에 놓습니다. 그 때 너는 하나님께 이렇게 말씀 드리라고 합니다. “제 조상은 떠돌아 다니던 아람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집트로 내려갔다가 몇 안 되는 사람과 함께 그 곳에서 나그네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거기에서 강하고 번성한 큰 나라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집트 사람들이 저희에게 고된 일을 시킴으로 저희를 학대하고 괴롭혔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저희 기도를 들어 주셔서, 크신 힘과 능력으로 저희를 이집트에서 인도해 내셨습니다. 이제 여호와께서는 우리를 이 곳으로 인도하시고 우리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비옥한 땅을 주셨습니다. 이제 제가 여호와께서 저에게 주신 이 땅에서 거둔 첫 열매를 여호와께 가져 왔습니다.” 여기서 “아람 사람”이라는 말은 메소포타미아의 밧단 아람(Paddan Aram)에서 20년 동안을 살았던 야곱을 의미합니다.
모세는 지금 그의 백성들에게 감사의 삶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가르치는 방법이 특이합니다. 자기들의 역사를 돌이켜 보게 합니다. “우리 조상은 떠돌아 다니던 아람 사람이었습니다. 흉년을 피해 이집트로 내려 갔지만 몇 명 안 되는 소수의 사람들이었고, 그 땅의 나그네에 불과했습니다.....그런데,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땅으로 들어왔습니다. 이것이 이 땅에서 거둔 첫 열매입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특이한 것은 막상 이 말씀에는 감사라는 말이 한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 속에 구구절절이 자기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인자하심, 하나님의 “enduring love”가 끊이지 않은 강물처럼 흐르고 있습니다.
감사는 지금 내가 가진 것이 많고 적음에 대한 우리의 반응이 아닙니다. 
감사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신실하심에 대한 고백입니다. 
우리의 손에 든 것이 많든지, 적든지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하나님 앞에 가지고 가서 그렇게 고백해야 하는 것입니다. 
과거의 고난의 역사 속에서 나에게 인자를 베풀어 주신 하나님, 그리고, 여기까지 나를 인도하신 하나님께 “하나님, 내가 하나님의 은혜로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내가 이 땅에서 거둔 첫 열매입니다” 이렇게 고백해야 합니다.
모세가 자기 백성들에게 가르친 감사의 교훈이 하나 더 있습니다. 11절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레위 사람과 여러분 가운데 사는 외국인과 함께 즐거워하시오.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여러분과 여러분의 집에 주신 온갖 좋은 것을 나누며 즐거워하시오.” 
하나님께 대한 감사는 이웃을 초청해서 함께 즐거워하는 축제로 이어집니다. 이렇게 축제를 벌여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because of all the good things the Lord your God has given to you and your household” 모세는 계속 이렇게 말합니다. “Remember to include the Levites and the foreigners living among you in the celebration.”
“추수감사 헌금을 드리는 일곱 단계”라는 아주 감동적인 글을 읽었습니다. 
이 말씀은 실제로 한국의 어느 교회 주보에 실렸던 글입니다. 
(1) 오늘부터 한 주간 동안 올 일년을 통하여 하나님께 감사한 것들을 열심히 찾아서 감사의 기도를 드리십시오. 
(2) 마음 속으로 얼마를 헌금할 것인가를 작정하여 봉투에 넣은 다음 하나님께 감사 함으로 드린다고 기도하십시오.  
(3) 여러분 주위에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을 찾아보십시오. 그 동안 연락이 되지 않았던 먼 친척도 좋습니다. 자신의 가족도 좋습니다. 
(4)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에게 그 돈의 일부를, 혹은 전부를 따뜻함으로 전달하십시오. 혹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이 자신이라고 여겨지는 사람은 자신을 위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 돈을 쓰셔도 좋습니다. 사업을 하는 사람은 그 이웃들과 함께 추수감사의 기쁨을 그 돈으로 나누시기 바랍니다. 
(5) 이렇게 하고도 그 봉투에 남은 돈이 있거든 교회의 헌금함에 넣으시기 바랍니다. 
(6) 혹 그 봉투에 돈이 모자라거든 여러분들이 그 동안 교회에 헌금한 돈이 있으니 교회에 청구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귀하고 아름답고 가치 있는 교회입니다. 여러분이 하는 일이 곧 교회가 하는 일입니다. 내가 목회자의 양심으로 말하건대 여러분 모두가 빈 봉투를 헌금함에 넣는다면 나는 매우 기쁘겠습니다. 
(7) 위의 여섯 단계를 거치면서 그 봉투에 돈을 더 넣고 싶은지 좀 뺄까 하는 생각이 드는지 자신을 잘 살펴보십시오. (1994. 11. 6. 오전예배 설교 중에서)
위의 내용은 대전시 유성구에 있는 한 교회의 주보에서 발췌한 글입니다. 여기 소개된 내용은 매년 추수감사절을 앞두고 그 교회 성도들에게 설교하는 내용이라고 합니다. 어쩌면 올해도 그 교회의 목사님은 똑 같은 꼭 같은 설교를 했을 것이고, 그 교회 교인들은 똑 같은 설교를 들었을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세상에 이상한 교회도, 별난 교회도 다 있다는 생각이 듭니까? 저도 처음에는 그랬습니다. 그러나, 찬찬히 생각해 보면 이 말씀은 감사절의 깊은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단순히 교회에다 헌금을 안 해도 된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여기서 정말 중요한 것은 과연 "교회가 무엇이냐?" 하는 근본적인 질문입니다. “누가 우리의 이웃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감사 드린다는 것은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이 이상한 교회의 주보에 실린 이 내용들을 우리 모두가 한번쯤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살전5]=======
전 장의 끝부분에서 그리스도의 부활과 재림에 관하여 언급하였던 사도는 더욱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가 오실 시기에 대하여 알려고 하는 태도의 무익함을 말한다. 그것은 사악한 자들에게는 갑작스러운 것과 두려움이 될 것이요, 성도들에게는 위로가 될 것이다(1-5). 그런 다음 그는 그들에게 근신과 절제의 의무를 권유하고 그들의 입장에 부끄러움이 없도록 믿음, 소망, 사랑을 연습할 것을 권면한다(6-10). 다음에 그는 그들이 다른 사람에게 또한 서로서로에게 지고 있는 의무를 다할 것을 권고한다(11-15). 그런 후에 그리스도인이 행한 대단히 중요한 몇몇 의무를 설명한다(16-22). 그리고 이 서신을 끝맺는다(2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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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2.주의 날이 밤에 도둑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알기 때문이라
3.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리니 결코 피하지 못하리라
4.형제들아 너희는 어둠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둑 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5.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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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날(살전 5:1-5)
본문에서 우리는 다음의 내용을 볼수 있다.
Ⅰ. 바울은 데살로니가인들에게 그리스도의 오실 정해진 시기에 관하여 묻는 것은 필요없는 일이요, 무익한 것임을 말한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그는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다(1절)고 말하였다. 그리스도가 오실 것은 확실한 일이다. 또 그가 오실 때도 정해져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이 이것에 관하여 기록해야 할 필요는 없었다. 그러므로 그에게 이에 관하여 계시가 주어지지도 아니하였다. 따라서 그들이나 우리나 아무도 이 비밀을 알려고 해서는 안 된다. "이 비밀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소관 아래 두신 것이다." 그리스도 자신조차도 지상에 계실 때 이것을 알리지 않으셨다. 그 일은 교회의 위대한 선지자로서의 그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또한 그는 사도들에게도 이 사실을 나타내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직은 우리가 일해야 할 시기이다. 이 사실을 알고 그대로 행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의무인 것이다. 우리가 언제 어느 때 우리의 생의 결산을 서로 제출해야 하는지를 우리는 알 수 없으며, 또한 그것에 대하여 알아야 할 필요조차도 없는 것이다. 우리에게 공연한 호기심에 의해 우리가 전혀 알 필요가 없는 것을 알려고 하며 또 안다해도 아무런 이익도 되지 않는 것에 대해 알려고 하는 것들이 많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Ⅱ. 바울은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오심이 급격히 임할 것과 그것이 모든 사람들에게 대단한 경악이 될 것을 말한다(2절). 이 사실이야 말로 그들이 완전히 알 수 있고 또 알아야 할 사실이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 자신이 "너희가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마 24:44)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또한 마가복음 13장 35,36절에도 이르기를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집 주인이 언제 오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 그라 홀연히 와서 너의 자는 것을 보지 않도록 하라"고 하였다. 바울이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하여 말씀하였고 또한 그가 갑작스럽게 오실 것을 분명히 말하였다. "밤중에 도적같이"라는 말씀은 그의 오심을 의미한 말씀이다(계 16:15). 도둑이 모든 사람들이 곤히 잠든 한밤중에 오듯이 주님의 날도 이같이 갑자기 이를 것이다. 그의 나타나심도 이같이 돌발적이요, 놀라운 것이 될 것이다. 따라서 그가 오실 정확한 때를 아는 것보다 그가 갑작스럽게 오신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더 유익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지식은 우리로 꺠어 경건하게 하여 그가 언제 오시든지 그를 맞이할 수 있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Ⅲ. 바울은 데살로니가인들에게 주님이 오심이 불신앙자들에게는 얼마나 큰 두려움이 될 것인지를 말한다(3절). 주님의 날에는 그들의 멸망이 있을 것이다. 의로우신 하나님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의 적대자들 위에 파멸을 내리실 것이다. 그들의 이와 같은 멸망은 모두에게 임할 것이며 변개할 수 없는 것이 될 것이다.
1. 그 날은 갑작스럽게 닥칠 것이다. 그 날이 육적인 안일과 환락에 사로잡혀 있는 그들에게 덮쳐서 그들을 넘어뜨릴 것이다. 그들이 자기 마음 속에 평화와 안전이 있다고 말할 때 그들이 더없는 행복을 꿈꾸며 환상과 육감을 즐기는 일에 탐닉하고 있으면서 주님의 임재는 전혀 생각 못하고 있을 때 "잉태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같이" 정해진 시간에 그러나 누구도 기대하지 않았고 또 크게 두려워하지 않고 있는 때에 그 날이 임할 것이다.
2. 그것은 그들에게 피할 수 없는 파멸이 될 것이다. "그들은 결단코 피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뾰족한 도망의 방법을 알 수 없을 것이다. "불의를 범한 자들이 자신을 숨길 아무 장소도 없을 것이다." 그 날에는 그 폭풍우로부터 숨을 피난처가 아무데도 없을 것이며 악한 자들을 태울 불꽃으로부터 그들을 가려 줄 그늘이 없을 것이다.
Ⅳ. 바울은 데살로니가인들에게 의로운 자들에게는 그 날이 얼마나 위로가 될 것인가를 말한다(4,5절). 여기서 다음 사실을 살펴 보자.
1. 성도들이 지니는 특성과 특권. 그들은 어둠 가운데 있지 아니한다. 그들은 빛의 자녀들이다. 그것은 모든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데살로니가인들에게도 행복한 시기가 될 것이다. 그들은 이방 세계처럼 죄와 무지의 상태에 처해 있지 아니하였다. 그들은 "한때 어둠 가운데 있었으나 주님 안에서 밝은 데 거하게 되었다." 데살로니가인들은 자기들이 볼 수 없는 영원한 것들, 특별히 그리스도의 오심과 그 결과에 대한 여러 가지 거룩한 계시를 알 수 있는 은총을 받고 있었다. 그들은 "낮의 아들들이었다."  왜냐하면 낮의 빛이 그들 위에 떠 있기 때문이다. 의로우신 태양이 그들 위에 또 올라서 그의 날개 아래 그들을 품고 고쳐 주셨다. 그들은 더 이상 이교도의 어둠 가운데 있지 아니하였으며 또한 율법의 어둠 아래 거하지도 아니하였고, 오로지 복음 아래 거하였다. 그 복음은 그들에게 빛 가운데서 생명과 불멸함을 가져다 주었다(딤후 1:10).
2. 이 날에 그들이 처할 유리한 조건. 그것은 "그 날이 도적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라"(4절)는 사실이다. 그 날에 그들이 놀라게 되는 것은 오로지 그 자신의 책임이다. 그들은 이미 경고를 받았으며 그 날의 대처하도록 충분히 도움을 받았다. 또한 그들은 인자 앞에서 위로와 신뢰로써 설 수 있기를 바랄 수 있었다. 그들에게 그 날은 "주님은 앞에서 새로워지는 날이 될 것이며" 주님은 그를 바라는 자들에게 죄없이 나타나 그들의 구원을 이루실 것이고 밤에 도적과 같이가 아니라 낮에 친구와 같이 그들에게 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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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
7.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취하는 자들은 밤에 취하되
8.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
9.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심이라
10.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어 있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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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경계와 근신의 생활(살전 5:6-10)
앞서 말한 것에 근거하여 사도 바울은 몇 가지 필요한 의무에 대하여 권고한다.
Ⅰ. 경계와 근신(6절). 경계와 근신의 의무는 각각 명백한 차이를 가지고 있다. 그러면서 그것들은 또한 상호간에 유사성을 지닌다. 왜냐하면 우리가 너무나 많은 유혹에 휩싸여 무절제하고 분수에 지나친 생활을 하게 되면 우리가 경계하지 않는 한 근신할 수 없으며 또 근신하지 않는 한 깨어 있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1. 그러니 "우리는  다른 사람과 같이 잠자지 말고 깨어서 있도록 하자." 우리가 안전하다고 부주의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우리의 경계를 그만 두면 안 된다. 죄와 죄의  유혹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계속적으로 지켜야 한다. 인간은 일반적으로 자기의 의무에 큰 위험에 빠져 있으면서 "평안하다, 안전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영원히 좌우될 귀중한 순간들을 게으르게 꿈이나 꾸면서 소비해 버린다. 그리고 잠자는 사람들이 주변에서 무엇이 일어나는지 모르듯이 저 세상에 관하여 생각도 못하고 주의도 못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꿈을 꾸고 있기 때문에 그 모든 일들을 올바르게 생각해 보지도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경계하자. 그리고 깨어있는 자답게 또한 파수보는 자답게 행동하자.
2. 우리는 또한 "근신해야 한다" 또한 절제하고 삼가야 한다. 우리는 우리를 얽매려는 이 세상의 것들에 대한 욕망과 본능적인 욕구를 삼가야 한다. 절제는 지나치게 먹고 마시는 것과는 반대되는 의미를 일반적으로 지닌다. 특히 본문에서 이 말은 술취함에 상반되는 의미로 사용된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은 동시에 모든 것에 대한 절제를 뜻하는 말이다. 우리 주님께서도 제자들에게 경고하시기를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눅 21:34)고 하셨다. 절제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주께서 가까우시기 때문에 우리의 온전함을 모든 사람들에게 알게 해야 한다." 이외에도 경계와 근신은 "낮의 자녀로서"의 그리스도인의 성품과 특권에 가장 알맞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취하는 자들은 밤에 취하기 때문이다"(7절). 낮 시간을 잠으로 소비해 버리는 행위는 가장 비난되어져야 할 사실이다. 왜냐하면 낮은 일하기 위한 것이지 자기 위한 시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많은 사람들의 눈이 지켜보는 낮에 술에 취하는 것은 자기들의 부끄러움을 광고하는 자들이다. 만약 신적 계시의 혜택을 입지 못한 자들이 자신을 방임하므로 사탄에 의해 죄된 안락함 가운데 잠이 든다면 결코 이상할 것은 없다. 또한 만약 그들이 자기들의 욕망에 목이 매여서 온갖 방탕과 사치에 탐닉한다 해도 그것이 이상할 것은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밤에 속하여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위험을 깨닫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잠을 잔다. 그는 자기들의 의무를 깨닫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취하여 지낸다. 그러나 그들의 얼굴에 축복된 복음의 빛을 받는 그리스도인들이 자기들의 영혼과 새로 울 세계에 대하여 어찌 부주의할 수 있겠는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는 사람들은 특별한 몸가짐을 가지고 처신해야 한다.
Ⅱ. 경계하는 것만큼 충분히 무장을 갖추어야 한다. 즉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어야 한다. 이러한 무장은 그리스도인답게 근신하기 위하여 필요하며 또한 이러한 무장은 주님의 날을 준비하는 것도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심령의 적들은 너무 많고 힘이세며 악의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악마들은 많은 사람들을 부주의하게 하고 안심하게 하며 오만하게 하며 그들도 취하게 하므로 즉 거만과 정욕으로 취하게 하므로 그들을 자기 편으로 만들고 또 그러한 일에 붙들어 매어 놓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러한 유혹들에 대항하여 우리 자신을 충분히 무장할 필요가 있다. 즉 영적인 갑주를 둘러 가슴을 보호하고 영적인 투구로 머리를 안전하게 보호해야만 하나. 그러한 영적인 무기들은 기독교의 세 가지 큰 은혜인 믿음, 소망, 사랑으로 구성된다(8절).
1.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이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근신하고 절제하도록 지켜줄 것이다. 만약 우리가(영이신) 하나님의 눈동자가 항상 우리 위에서 지켜 보신다는 것과 우리에게는 격전을 벌려야 할 영적인 원수들이 있고, 위하여 준비해야 할 영적인 세계가 있다는 것을 믿는다면 우리가 왜 근신하고 절제해야 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믿음은 우리의 원수들의 공격에 대한 최선의 방어가 될 것이다.
2. 우리는 우리의 심령을 사랑으로 불태워야 한다. 사랑은 역시 우리를 방어해 줄 것이다. 하나님께 속한 일과 하나님께 대한 신실함과 불붙은 열정은 우리로 근신하고 경계하게 할 것이며 유혹과 고난의 때에 우리가 배교하지 않도록 우리를 지켜 줄 것이다.
3. 우리는 구원을 우리의 소망으로 삼아야 한다. 그리고 구원에 대한 생동력있는 소망을 지녀야 할 것이다. 은혜에 의한 이러한 영생에 대한 희망은 투구가 머리를 보호하는 것같이 우리를 보호할 것이며 우리로 죄의 기쁨에 도취되지 않도록 막아 줄 것이다. 이러한 죄의 기쁨은 잠간에 불과한 것이다. 만약 우리가 구원의 소망을 갖고 있다면 우리의 소망을 흔들리게 하고, 우리가 소망하는 위대한 구원에 우리를 부적당하게 만들고 또 무가치한 자로 만드는 행위를 하게 되지 않도록 주의하여야 한다. 구원과 구원에 대한 소망을 이야기한 후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어떤 근거와 이유로써 이 구원에 소망을 가질 수 있는가를 보여 준다. 전에도 고찰하였던 것처럼 그는 그들에게 구원의 소망을 가질 만한 가치가 아무것도 없음을 말한다. 구원에는 우리의 공적이 필요하다는 가르침은 비성서적이고 반성서적인 교훈들이다. 그러한 것들은 아름다운 소망의 근거가 될 수는 없다,  오로지 우리의 소망은 다음의 것에만 근거되어야 한다.
(1) 하나님의 약속위에 근거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구원을 얻게 하려는 것이기 때문이다"(9절). 우리 구원의 첫쨰 원인을 추적해 본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이다. 어두움과 무지 가운데서 살다가 죽어가는 사람들 또한 밤에와 같이 술 취하고 잠자는 자들은 "하나님의 진노가 예비되어 있음"이 명백하다. 그러나 낮에 속한 자들로서 만약 그들이 깨어 근신한다면 그들은 "구원을 얻을 약속"을 받은 것이 분명한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의 확실함과 확고함은 우리 소망을 격려해 주고 지지해 주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자신의 공로나 또는 능력으로 구원을 얻는다면 우리는 구원에 대하여 아주 희망할 수 없거나 거의 희망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하심 때문에 구원을 얻을 수 있음을 알기 때문에 이 구원이 흔들리지 아니한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는 것이다(왜냐하면 선택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은 영원히 설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약속 위에 우리는 흔들리지 않는 소망을 건설하는 것이다.
(2) 그리스도의 은혜와 공로에 근거해야 한다. 그 구원은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가능해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약속과 함께 그리스도의 속죄에 힘입어서이고 우리의 구원에 대한 소망 또한 이 양자에 근거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운 계획과 목적에 관해 생각해야 하는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이 목적을 위하여 죽으시고 고난받으심에 관하여서도 생각해야 한다. 그가 그렇게 하심은 "우리로 하여금 깨든지 자든지(깨든지 자든지란 사도가 전에도 암시하였듯이 살든지 죽든지와 같은 뜻을 지닌 말이다. 왜냐하면 믿는 자들에게 죽음은 잠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와 함께 살게 하기 위해서이셨다."  즉 영원히 그와 함께 연합하여 영광 가운데 살게 하시기 위해서 고난과 죽음을 당하신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바라는 구원이 "주님과 함께 영원히 거하는 것"이듯이 또한 그들의 희망의 근거는 그들의 주님과의 연합이다. 만약 그들이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 안에 살고 그를 위하여 살면 죽음의 잠이 영적인 생명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며 또한 이후의 영광의 생명을 손상시키지 못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으므로 우리는 죽든지 살든지 주의 것이 된다. 우리가 여기서 할 때는 그를 위해 살고, 그곳에 갔을 때는 그와 더불어 살게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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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그러므로 피차 권면하고 서로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 같이 하라
12.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 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을 너희가 알고
13.그들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너희끼리 화목하라
14.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게으른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라
15.삼가 누가 누구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지 말게 하고 서로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따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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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 상호간의 의무(살전 5:11-15)
본문에서 바울은 데살로니가인들에게 몇 가지 의무를 권면하였다.
Ⅰ. 서로 긴밀한 관계를 지니고 있는 자들이 서로 져야 할 의무에 대한 권면. 이러한 관계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이 위로를 받고 권면하며 상대방의 덕성을 계발하도록 해야 할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11절).
1. 그들은 스스로에 대하여 또 상대방에 대하여 권면하고 위로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처음 주어졌을 때는 이러한 방법으로 주어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서 자신을 스스로 위로할 수 있는 사람은 또한 다른 사람들도 위로할 수 있고 또 그러한 마음을 지니게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 우리 자신을 위로하거나 또는 다른 사람을 위로하는 길은 말씀의 권면에 의거해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자신의 위로와 행복에 관하여 주의하는 것뿐 아니라 타인들의 위로와 행복을 증진시키는 것에 대하여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자. 가인과 같은 자들은 "내가 나의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고 말을 한다. "우리는 서로 짐을 나누어 져야만 한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2. 그들은 서로가 서로의 덕성을 증진시키고자 힘써야 한다. 우리는 "서로 덕을 세우기를 힘쓰라"(롬 14:19)는 말씀에 의거하여 그렇게 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서로가 함께 영적인 집을 구성하고 있는 살아있는 돌들이므로 서로 상대방의 은혜의 역사를 증진시킴으로써 전체 교회의 유익을 증진시키기 위하여 노력해야 할 것이다. 또한 우리가 어떻게 하면 내가 사귀는 사람의 덕성을 증진시킬 수 있을까를 연구하는 것은 우리 각자의 의무이다. 또한 우리는 "모든 사람들의 이익을 도모하여 그들은 기쁘게 하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서로서로 우리의 지식과 경험에 관하여 대화하여야 한다. 또한 우리는 기도하며 찬미하는 일을 함께 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 타인 앞에서 좋은 본이 되어야 한다. 이와 같이 서로서로 위로하고 덕성을 증진시키는 일은 특히 같은 이웃이나 한 가족으로 사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의무이다. 또한 그것이 최상의 인보정신(隣保精神)이며 사회의 목적에 부응하는 최선의 방법이 될 것이다. 서로 친밀한 관계 안에서 사랑을 나누는 사람들은 그러한 관계 때문에 서로에게 위와 같은 친절을 베풀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며 또한 그러기에 친절을 베푸는 것은 더욱 당연한 의무가 되는 것이다. (본문의 "너희가 하는 것같이 하라"는 말씀을 보아) 데살로니가인들은 이 일을 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일을 계속하고 더욱 진전하도록 하라고 권면을 받고 있다. 우리가 선을 행하고 있는 사람들은 그들이 그 일을 계속하도록 그리고 더욱 선을 행하도록 권면을 통하여 격려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Ⅱ. 바울은 데살로니가인들에게 사역자들에게 행하여야 할 그들의 의무를 보여 준다(12,13). 바울 자신은 비록 데살로니가인들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을 수밖에 없었지만 그들 가운데서 수고하는 다른 사역자들이 거기 있었다. 그들은 이들 사역자들에게 이 의무를 이행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 바울은 그들에게 다음의 사실을 생각해 보라고 권유한다.
1. 복음의 사역자들의 수고가 어떠한 것이었는지를 기억하라고 한다. 사역자들은 자기들이 마땅히 지녀야 할 존귀하고 명예로운 명칭에 신경을 쓰는 것보다는 그들이 소명받은 의무와 일에 대하여 더욱 마음을 써야 한다. 그들의 사업은 매우 값지고, 영예로우며 유익한 것이다.
(1) 사역자들은 자기의 성도를 가운데서 수고하되 부지런히 해야 하며 기운이 진하기까지 그리해야 한다. "그들은 말씀과 가르침을 위해 수고해야만 한다"(딤전 5:17). 그들은 수고하는 자로 인식되어야 할 것이며 무위도식하는 자로 여겨져서는 아니 될 것이다. 그들은 자기 성도들과 더불어 수고해야 하며, 그들을 위로하고 덕성을 증진시키며 가르치는 일에 부지런해야 한다.
(2) 사역자들은 자기 성도들을 다스려야 한다. 그러한 내용의 말씀이 디모데 전서 5장 17절에도 기재되고 있다. 그들은 다스리되 가혹하게 다스려서는 아니 되며 사랑으로 다스려야 한다. 그들은 잠간 있을 주인처럼 지배권을 마구 행세하여서는 안 된다. 다만 양떼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됨으로써 영적인 안내자의 입장에서 다스려야 한다. 그들은 주님 안에서 백성들을 다스려야 한다. 그들은 세상의 통치자들과는 구별되며 또한 그리스도의 아래 있는 사역자에 불과한 것으로 그에 의해 임명되었고 또 자신의 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법에 의해서 백성을 다스려야만 하는 입장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또한 그들의 직무와 그들의 모든 수고의 목적을 암시하여 준다. 즉 그들은 주께 봉사하며 주의 영광을 위하여 수고해야 하는 것이다.
(3) 그들은 백성들을 경성시켜야 한다. 공개적으로 할 뿐만 아니라 기회가 닿는 대로 개인적으로도 자기 성도들을 권계하여야 한다. 그들은 자기의 성도들을 선을 행하도록 훈계해야 하며 잘못을 저질렀을 때 다시 거기 빠지지 않도록 가르쳐야 한다. 그들은 자기 성도들에게 좋은 상담자가 될 뿐만 아니라 그들을 각성케 하고 양무리에게 그들이 처해있는 위험에 대하여 경고하고 잘못이나 또는 잘못되기 쉬운 것을 교정하고 계도하는 것이 그들의 의무이다.
2. 사역자들을 향한 성도들의 의무. 사역자와 회중들 사이에는 상호의 의무가 있다. 만약 사역자들이 회중들 가운데서 마땅히 수고해야 한다면,
(1) 그들은 자기의 사역자들을 알아야만 한다. 목자가 자기 양떼들을 알아야 하는 것처럼 양떼들도 자기의 목자를 알아야만 한다. 그들은 그의 인품을 알고 그의 말을 청종하고 그를 그들의 존중하며 그의 가르침과 다스림과 권계에 대하여 존경심을 가져야 한다.
(2) 그들은 그들의 사역자들을 사랑 안에서 높이 존경해야만 한다. 그들은 목사직을 귀중히 여기고 사역자들을 존경하고, 사랑하며 적절한 방법으로 그들의 존경과 애정을 표해야 한다. 이러한 것은 그들의 수고에 대한 마땅한 일이다. 왜냐하면 목자들의 임무는 그리스도의 영광된 인간의 영혼의 행복을 증진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실한 사역자들을 경홀히 여기지 않아야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그들은 그들의 수고로 인하여 높이 존경받아야 하는 것이다. 다른 일로는 존경받을 만한 사람이 목회 때문에 모욕을 당하지 않게 해야 한다. 그들의 타인들이 자기들을 영예롭게 여기라고 주장하지 않더라도 신실하고 근면한 사역자들에게는 영예가 주어져야 한다.
Ⅲ. 그는 그리스도인 상호 간의 의무에 대하여 다른 여러 가지를 권고한다.
1. "너희끼리 화목하라"(13절)고 한다. 어떤 사람은(다른 사본의 내용을 인용하여) 이 권유를 사역자들에 대한 회중들의 의무를 말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즉 그들이 서로 평화롭게 지내야 하며, 사역자와 회중 간에 어떤 경우에 있어서든지 의견 충돌이 일어나거나 지속되어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본다. 그러한 불화는 회중들에 대한 목자의 수고와 훈계가 열매 맺는 것을 저해한다는 것이 입증될 것이다. 사역자들과 회중이 서로의 사랑을 이간시킬 수 있는 모든 일을 피하여야만 한다는 것은 틀림 없는 일이다. 그리고 회중들은 그들 상호간에 일어날 수 있고, 또 지속될 수 있는 어떠한 의견 차이라도 일어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함으로 또한 평화와 조화를 보존하기 위하여 온갖 적절한 대비책을 강구함으로 그들 가운데 평화를 지속시켜야 한다.
2. "규모없는 자들을 권계하라"(14절)고 한다. 어떤 사회에도 무질서하게 살아가는 자들이 있기 마련이다. 그들은 자기의 위치와 계층을 무시하고 행동한다. 그런 사람들을 경고하고 타이르는 것은 사역자의 의무일 뿐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의 의무이기도 하다. 그러한 사람들은 그들의 죄에 대하여 경책을 받아야 하고 그들이 직면한 위험에 대하여 경고를 받아야 하며, 또한 그들이 자신들의 영혼에 가하는 상해에 대하여 분명히 경계를 받아야 한다. 또한 그들의 행위가 다른 사람들에게 끼치는 해에 대하여서도 경계를 받아야 한다. 그들이 행해야 할 바 의무가 무엇인지들 그들에게 주지시키고 그렇게 행하지 않을 때 그들을 경책해야 한다.
3. "마음이 악한 자들을 안위하라"고 한다(14절). 이 구절은 소심하고 마음이 약한 사람들이나 낙심한 자와 슬퍼하는 심령을 지닌 자들을 위해서 쓰여진 말씀이다. 어떤 사람들을 고난과 손실과 상해를 입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낙심하여 또 비굴하게 되고 고난을 두려워한다. 그런 사람은 용기를 북돋아 주어야 한다. 우리는 그들을 멸시하여서는 안되며 그들을 위로해 주어야 한다. 그들에게 대하는 친절한 위안의 말 한마디가 얼마나 그들에게 도움이 되는지를 알아야 한다.
4. "힘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라"고 한다(14절). 어떤 사람들은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잘 수행해 나가지 못하며 자기의 짐을 잘 감당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을 붙잡아 주고, 그들의 허약함을 도와 주고 그들의 짐을 같이 들어 주어 그것을 그들로 감당할 수 있게 해 주어야 한다. 그런 사람들을 붙잡아 주고 강하게 해 주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그들에게 말해 주며 또한 그들에게 그 은혜를 애써서 베풀어야 한다.
5.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오래 참으라"고 한다(14절). 우리는 참고 용서해야 한다. 만일 분쟁이나 상해의 조짐이 야기되기 시작한다면 참아야 하며, 우리의 분노를 억눌러야 한다. 적어도 우리는 우리의 화를 결제하는데 실패해서는 안 된다. 이 의무는 모든 사람에게 비록 상대가 선하든지 악하든지, 귀하든지, 천하든지를 불구하고 행하여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요구나 기대를 너무 강조해서는 안 되며, 또한 우리의 울분을 폭발시키거나 또한 우리의 짐에 대해 불평해서도 안될 것이다. 다만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고 모든 사람을 좋게 생각하도록 애써야 한다.
6. "삼가 누구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지 말라"고 한다(15절). 이 말씀을 삼가 명심하고 주의깊게 행해야 한다. 우리는 스스로 복수하는 일을 결코 행하지 말아야 한다.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에게 해를 입혔다고 해서 상대에서 꼭같이 대하거나 다른 보복을 행한다면 정당하다고 볼 수는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를 받고 그 용서를 바라는 사람답게 우리도 용서할 수 있어야 한다.
7. "항상 선을 좇으라"고 한다(15절). 우리는 어떻게 하면 우리의 의무를 다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지 늘 연구해야 한다. 타인들이 우리에게 선으로 대하든지 악으로 대하든지 어떤 환경에서도 그렇게 하고자 연구해야 한다. 타인들이 우리에게 어떻게 대하든지 그들에게 선을 행하여야 한다. 우리는 항상 타인들의 행복을 더하여 주기 위한 도구가 되어야 하며 타인들에게 자비를 베풀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먼저 우리들 자신 가운데 이 행복이 이루어지기 위하여 힘써야 하고("먼저 믿음의 가정들에게 하고") 그다음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그렇게 해야 한다(갈 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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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항상 기뻐하라
17.쉬지 말고 기도하라
18.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19.성령을 소멸하지 말며
20.예언을 멸시하지 말고
21`.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22.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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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가지 권면(살전 5:16-22)
본문에서 우리는 기억하기 용이하게 되어 있으면서도 우리의 심령과 생활의 지침으로 대단히 유익한 짤막한 여러 가지 권면들을 대하게 된다. 왜냐하면 이 의무들은 대단히 중요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권면들이 어떻게 연결되고 있는지를 고찰하여 보고 유기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Ⅰ. "항상 기뻐하라"고 한다(16절). 이 말씀은 영적인 기쁨에 관한 말씀으로 이해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 세상적 위로에 대한 기쁨에 대해서는 기뻐하되 기뻐하지 않는 것처럼 자제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오래 살기를 기대하거나 전 생애를 세상적 기쁨으로 채우고자 기대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기뻐한다면 우리는 그 기쁨을 더욱 확대시켜야 한다. 그의 안에서 우리의 기쁨은 충만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의 안에서 계속적인 기쁨의 향연을 누리지 못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잘못이다. 만일 우리가 세상적인 일로 슬픔을 당한다 하더라도 그래도 항상 기뻐할 수 있어야 한다(고후 6:10). 신앙적인 삶은 기쁨의 생활이며 그것은 끊임없는 기쁨의 삶임을 기억하자.
1.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한다(17절). 더욱 기뻐하게 되는 방법은 쉬지 않고 기도하는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만약 우리가 더욱 더 기도에 힘쓴다면 더욱 더 기뻐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시간을 정해 놓고 기도해야 하며 끊임없이 순간적인 기도를 계속해야 한다. 우리는 항상 기도하고 실망하지 말아야 한다. 또한 기도에 싫증을 느끼지 말고 계속 기도해야 한다. 기도가 찬양에게 삼키운 바 되는 그러한 세계가 올 때까지(역주: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찬양만이 있고 기도의 필요가 없을 것이라는 뜻) 그렇게 해야 한다. 이 말씀은 기도 이외에 아무 것도 하지 말라는 뜻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다른 어떤 일을 해야 한다는 이유 때문에 기도가 방해를 받아서는 안 된다.
2. "범사에 감사하라"고 한다(18절). 만약 우리가 쉬지 않고 기도한다면 모든 일에 있어서 감사해야 할 이유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간구함으로 모든 요구하는 바를 하나님께 알려야 하듯이 또한 우리는 감사를 생략해서도 안 된다(빌 4:6).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를 드려야 한다. 우리가 번창할 때도 마찬가지로 어려운 때도 감사해야 한다. 우리는 어떠한 환경도 그것이 내게 주어진 최상의 것이려니 생각하고 감사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 대해 어떤 경우에 처해서도 불평을 삼가려고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대하여 불평할 이유를 결코 지니지 않게 될 것이며, 항상 찬송과 감사를 드릴 조건을 더욱 많이 갖게 될 것이다. 바울은 말하기를 "우리가 감사하는 것이"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였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우리와 화해하려 하심에 대하여 감사해야 한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또한 그를 통하여 그를 위하여 우리로 더욱 기뻐하게 하시며 범사에 감사하도록 명하신다. 감사는 하나님을 기뻐하게 하시며 범사에 감사하도록 명하신다. 감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일이다.
3. "성령을 소멸치 말라"고 한다(19절). 왜냐하면 우리의 약함을 도우시며 기도와 감사 가운데서 우리를 도와주시는 분이 은혜와 간구의 성령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말씀되고 있다. 성령은 불과 같이 역사하여 인간의 영혼을 빛나게 하며, 소생시키고 순결케 한다. 우리는 이 거룩한 불을 소멸치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연료를 없애 버리면 불은 꺼지고 말 듯이 우리가 우리 영혼을 분발시키지 않는다면 또한 우리 안의 모든 것을 성령의 지시에 일치시키지 않는다면 우리는 성령의 소명시키게 될 것이다. 물을 붓거나 많은 양의 진흙(또는 잡동산이 오물)을 끼얹으면 불은 꺼지고 만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육적인 욕망이나 애정에 탐닉하거나 세상적인 것에 착념하므로 성령을 소멸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4. "예언을 멸시치 말라"고 한다(20절). 우리가 은혜의 방법들을 소홀히 한다면 우리는 은혜의 성령을 상실하게 된다. 예언에 의해 지금 우리는 말씀에 대한 설교를 이해하게 되며 성경을 해석하고 적용할 수 있다. 우리는 이것을 멸시하지 말고, 존중하고 귀중히 여겨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예언은 우리의 지식과 은혜, 거룩함과 위로를 더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이 정하신 그의 법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말씀의 설교가 평이하며 사람들의 지혜의 달콤한 요소를 결여하고 있다고 해도 또 우리가 알고 있었던 것 이상의 것을 듣지 못했다고 하여도 설교를 멸시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었던 것들을 들을 때 우리의 마음을 분발케 하며, 그것에 대한 우리의 애정과 결단을 촉발함으로 깨우치기 위해서 필요할 때에 많은 관심을 갖고 우리의 의무로 받아 들이는 것은 유익하고 또 도움이 된다.
5.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라"고 한다(21절). 범사에 헤아린다는 것은 필요한 경고이다. 우리가 설교를 평가해야 하지만 그 설교자에 대한 신뢰도에 의하여 평가하지 말고 오직 성경의 말씀에 비추어 평가해야 한다. 우리는 설교자들이 말한 것이 진실인지 아닌지 알기 위해 성경을 찾아 보아야 한다. 그러나 항상 시험하려는 태도를 취함으로 마음이 정해지지 않은 채로 머물러서는 안 될 것이다. 결국 우리는 그것으로 인하여 어떤 반대와 고난을 만나더라도 그것을 견고히 붙들고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교황이 절대 무오하고 절대적 신앙을 가졌고 또 그에게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는 카톨릭의 가르침은 성서에 입각한 교훈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자.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분별있는 판단력을 가져야 하며,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과 악" 참과 거짓을 "분별해야 한다"(히 5:13, 14). 모든 일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은 좋은 것을 구별하여 견고히 붙잡기 위해서인 것이다. 우리는 "여러 가지 미혹하는 교리에 의해 이리저리 밀려 다니는 어린애와 같이" 늘 찾기만 하거나 또는 마음이 흔들려서는 안 된다.
6. "악한 것은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한다(22절). 이것은 우리가 거짓 교리에 미혹되거나 믿음이 흔들리지 않게 하는  좋은 방법이다. 주님께서도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아닌지 알아야 할 것이라"(요 7:17)고 하셨다. 마음 속에 부정을 채우고 살아가는 가운데 악을 허용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결정적인 과오를 범하게 하는 준비 작업이 될 것이다. 반면에 순결한 영혼과 신실한 생활은 인간으로 하여금 그것을 사랑하는 가운데서 진리를 받아들이게 하여 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악과 악한 것의 모양과 죄와, 죄와 같이 보이는 것과 죄로 이끌어 주는 것과, 죄와 비슷한 것들을 버려야 한다. 죄의 모양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죄의 기회를 멀리하지 않으며, 죄의 유혹과 접근해 움을 피하지 않는 자는 머지 않아 실제로 죄짓는 행위를 저지르고 말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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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23.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25.형제들아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26.거룩하게 입맞춤으로 모든 형제에게 문안하라
27.내가 주를 힘입어 너희를 명하노니 모든 형제에게 이 편지를 읽어 주라
28.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23.Now may the God of peace Himself sanctify you entirely; and may your spirit and soul and body be preserved complete, without blame at the coming of our Lord Jesus Christ.
24.Faithful is He who calls you, and He also will bring it to pass.
25.Brethren, pray for us. 
26.Greet all the brethren with a holy kiss.
27.I adjure you by the Lord to have this letter read to all the brethren.
28.The grace of our Lord Jesus Christ be with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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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인들을 위한 바울의 기도(살전 5:23-28)
이 서신을 끝맺는 본문의 말씀에서 다음의 내용을 살펴 볼 수 있다.
Ⅰ. 그들을 위한 바울의 기도(23절). 이 서신의 첫머리에서 바울은 데살로니가인들에게 그의 기도 가운데서 그들을 항상 기억 한다는 것을 말했다. 그리고 지금도 그는 하나님을 향하여 마음을 듣고 그들을 위해 기도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다음을 주의하여 보자.
1. 바울이 기도를 드린 대상. 그 대상은 바로 "평강의 하나님"이었다. 그분은 은혜의 하나님이시며 평강과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그는 평강을 만드시는 분인 동시에 일치 조화를 사랑하시는 분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평강과 화목을 지닌다면 그가 기도한 바 모든 것을 평강을 주재하시는 하나님께서 속히 이루어 주실 것이라고 한다.
2. 데살로니가인들을 대신하여 바울이 기도한 것은 그들의 성화 즉 "하나님이 친히 그들로 하여금 온전히 거룩하게 하여 주실것"과 그들의 보존 즉 그들을 "흠없이 보전하여 주실 것"에 대해서였다. 그는 그들이 온전히 거룩하게 되고, 전 인격이 거룩하게 되며 영과 혼과 몸 전체가 온전히 보전되기를 기도한다. 또한 그는 최상의 인물들도 이 세상에 있는 동안 부분적으로 성화되기 때문에 그들이 온전히 즉 완전하게 거룩하게 되기를 위해 기도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완전한 거룩함을 갖기 위해 기도하고, 그것을 향해 용감히 나아가야 한다. 은혜의 선한 사업이 시작된 곳에서는 기도는 끊임없이 지속되고, 보호되며 보존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함을 입은 모든 사람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위하여 온전히 보전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함을 입은 모든 사람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위하여 온전히 보전되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 하나님께서 그분의 선한 사업을 성령 안에서 베푸시지 않는다면 , 그것은 잘못되고 말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에게 그의 일을 온전케 이루시도록 기도해야 한다. 또한 결국 우리가 "말할 수 없는 기쁨으로 영광의 보좌 앞에 흠없이 드려질 때까지" 우리를 "흠없이 보존해 주시고" 모든 죄와 순결치 못한 것으로부터 자유롭게 해 주실 것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Ⅱ.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시리라는 그의 신뢰어린 확신. 그러므로 그는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24절)고 말한다.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지식에로 그들을 부르실 때, 그의 친절함과 사랑이 그들에게 증명되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그들을 끝까지 보존해 주시리라는 것을 이루실 것이며, 그가 약속하신 바를 이룩하기고, 그들을 향한 모든선을 이루심으로 기뻐하실 것을 그들에게 확언한다.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충성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의존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Ⅲ. 바울이 그들의 기도를 요구함. 그러므로 본문에서 그는 "형제들아,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25절)고 말한다. 우리는 서로를 위해서 기도해야 할 것이다. 형제들은 우애로운 사랑을 기도로 표시해야 할 것이다. 대 사도 바울은 그들을 형제라고 부르는 것과 기도를 요청하는 것을 체면을 손상시키는 일이라고 생각지 않았다. 전도자들은 그의 교우들의 기도를 필요로 한다. 더 많은 교우들이 그들의 사역자가 될 수 있을 것이며 반면 회중들은 그들의 사역에 의해 더욱 더 많은 유익을 얻을 수 있게 된다.
Ⅳ. 바울의 문안. 그는 "거룩한 입맞춤으로 모든 형제에게 문안하라"(26절)고 말한다. 바울은 자신과 실바누스와 디모데로부터 다정한 인사를 그들에게 보낸다. 그리고 그들도 서로 그들의 이름으로 문안하라고 한다. 또한 그는 그들에게 서로 사랑의 입맞춤을 문안하라고 한다. 사랑과 정을 나타내라고 한다(벧전 5:14). 이 입맞춤을 본문에서는 거룩한 입맞춤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는 입맞춤을 거룩한 입맞춤이라고 말함으로 이 입맞춤을 통하여 당시의 흔히 행해지던 불순한 동기에서의 입맞춤을 배제하려고 깊이 배려하고 있다. 유대인들의 입맞춤같이 배신의 입맞춤이 되어서는 안 되며 창녀의 입맞춤같이 음란한 입맞춤이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잠 7:13)
Ⅴ. 이 서신을 읽는 문제에 대한 바울의 엄숙한 부탁(27절). 이것은 권고일 뿐 아니라 주님에 의거한 명령이다. 이 서신은 모든 거룩한 형제들에게 읽혀져야만 했다. 성경을 읽는 것은 평민들에게도 허용되어야 하고 그 누구에게도 금지되어서는 안 될 뿐만 아니라, 그것은 그들의 절대적인 의무이며 또 그러한 설득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하여서는 성경을 통용되지 않는 용어 속에 숨겨 두어서는 안 되며, 일반 민중의 언어로 번역되어 성경을 알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자유로이 읽을 수 있고, 또 알 수 있게 하여야 한다. 회중에서 율법을 낭독해 주는 것은 유대인들이 회당에서 드린 안식일 예배에 필수적인 부분이었다. 마찬가지로 성서는 그리스도인들의 공중 집회에서도 읽혀져야 한다.
Ⅵ. 관례적인 사도의 축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아멘"(28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 주신 은혜를 알고, 주께서 우리를 위해 대가를 치루고  사 주신 은혜에 관심을 가지며, 그 은혜에 참여하여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주 안에 거하는 것보다 더 복된 일은 없다. 그리스도는 우리 모두 부족을 채워 주는 영원히 그리고 넘치도록 흐르는 은혜의 분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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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v;(7965, 샬롬) 평화, 복지, 번영
샬롬(명남)은 샬람(!l'v; , 7999)에서 유래했으며, '평화, 복지, 번영, 행복, 건강, 완전, 안전' 등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250회 나온다.
샬롬은 헬라어 에이레네(1515)의 개념을 확장시키는데 영향을 미침으로 이 헬라어도 성장과 번영이라는 셈어 개념을 함축하기에 이르렀다(신구약에 나타난 평화-샬롬/에이레네-에 대한 더 상세한 연구는 신약편의 1515 에이레네를 참고요).
샬롬은 대략 50-60회 용례에서 '분쟁의 부재'를 의미한다, 예를 들어 왕상 4:25은 온 땅과 그 이웃 국가들이 복종하였던 태평한 솔로몬 시대의 국가의 안녕을 반영하고 있다.
이 경우에 '평화'는 단순한 전쟁의 부재 그 이상을 의미한다. 오히려 동사 샬렘의 어근 의미가 샬롬의 진정한 개념을 더 잘 표현해 준다. 완전, 무결, 조화, 완성이 그 개념에 더 가깝다. 다른 이와의 손상이 없는 관계라는 개념과 맡은 일의 완수 개념이 샬롬에 내재해 있다.
샬롬은 약 2회에 걸쳐 인사말 또는 작별의 인사로 사용된다(삿 19:20, 삼상 25:6, 삼상 25:35). 남에게 샬롬을 비는 것은 축복을 내포한다(삼하 15:27). 샬롬을 주지 않는 것은 저주를 뜻한다. 현대 히브리어에서 샬롬은 '안녕하세요' hello와 '안녕히 가세요(계세요)' goodbye의 뜻으로 사용된다. 동족 아랍어 salaam을 유의해 보라.
샬롬은 하나님의 언약(베리트)적 행위의 결과이며, 의의 결과이다(사 32:17). 샬롬은 거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용례가 하나님의 임재의 결과인 완전한 충족의 상태를 묘사하고 있다. 이 점은 특히, 하나님이 택한 대리자들 즉 아론 계통의 제사장들 및 다윗 계통의 왕들과 맺은 '평화의 언약'(베리트 샬롬, 민 25:12, 사 54:10, 겔 34:25, 말 2:5)에 관한 구절들에 잘 지적되어 있다. 적대자들(이삭과 아비멜렉, 창 26:29), 사업상의 양측 당사자들(솔로몬과 히람, 왕상 5:12) 및 인간과 하나님(아브라함, 창 15:15) 사이의 협약 체결의 표시가 되는 평화가 언약적 협정의 관점에서 묘사되고 있다.
이러한 종류의 평화는 그 근원이 하나님 안에 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샬롬을 말씀하실 것이다(시 85:8). 대상 22:9-10에서 다윗에게 준 하나님의 약속은 샬롬을 메누하(평온), 누아흐(안식) 및 셰케트(평온하다)와 함께 문맥 중에 두고 있으며 이것들을 하나님의 선물로 묘사하였다.
이 개념에 대한 고전적 진술이 아론과 그의 자손들의 축도에 등장한다(민 6:24-26).
이 축도문은 하나님이 샬롬을 부여한 그 사람을, 여호와에 의해 복을 받는(바라크) 자, 보호받는(샤마르) 자 및 은혜를 받는(하난) 자와 동일시하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사를 통한 완전한 충족이다.
샬롬의 의미에는 또한 강한 종말론적 요소가 존재한다. '다윗의 자손' 메시야는 특별히 평화의 왕(사르 샬롬)-땅 위에 완성과 의를 가져오시는 분으로 인지되고 있다.
바울은(엡 2:14) 그리스도를 우리의 화평으로 인지하는 가운데 이 주제들을 연결시키고 있다. 그는 완전성을 가져오는 메시야이자 왕이다. 그러나 그는 또한 하나님의 마지막 말씀-인류에게 구속을 가져오신 "종결짓는 희생제물"이시다.(참조: G. L. Carr; B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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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ijrhvnh(1515, 에이레네) 평화, 복지, 번영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에이레네의 기본 개념은 본래 사람들 사이의 관계(relationship)나 태도(attitude)를 의미하지 않고 상태(state), 즉 '평화의 때', 또는 '평화의 상태'를 의미하며, 처음에는 순전히 끊임없이 계속되는 전쟁상태에서의 한 막간(a interlude)으로 생각한 것이다.
이 단어는 전쟁에 반대되는 것, 혹은 전쟁의 종식으로부터 결과하는 상황을 의미한다. 평화는 복된 번영을 가져 오도록 법과 질서가 유지되는 상태이다. "에이레네"는 평화의 상태이며, 평화의 상태에서 땅과 백성을 위한 복이 흘러나온다. 필레몬(Philemon)은 이를 최고의 선(supreme good)으로 격찬했다.
에이레네는 평화 조약이나 평화의 타결과 관련이 있다. 에이레네는 또한 소란, 소요의 정반대를 의미할 수 있다. 에이레네는 평화적인(온화한) 태도, 즉 적의가 없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에픽테투스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등의 스토아 철학자들의 작품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에이레네는 영적 평안이나 마음의 평안이라는 의미를 띠고 나타나게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단어는 이들의 저작에 그리 자주 사용되지 않았다.
특별한 언급으로, 아우구스투(Augustus)가 지중해 세계를 지배한 에이레네를 들 수 있다. 이 시대에서 구속(redemption)을 동경하는 강한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데  황금시대라고 불리워진 이 평화의 상태는 로마 황제가 군대의 힘으로 성취한 법적 또는 정치적 안정이다(Toerster, TDNT).
2. 구약성경 및 70인역본의 용법 
1. 구약성경 및 70인역본의 용법 및 의미들
(a)  구약성경에서 에이레네는 250회 이상 나오는 히브리어 단어 샬롬의 역어로 사용된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다. 이에 대하여 예외적인 경우들은 대체로 왕래 및 문안 인사에 관련된 구절들이다. 예컨대 창 26:31; 창 43:23이 이러한 예이다.
그러나 렘 20:10; 사 48:22; 57:21은 이러한 경우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예외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예외적인 구절에서는 소테리아(구원, 구출), 카이레인(기쁨, 안녕)등을 역어로 사용되었다.
약 15개의 구절에서 에이레네는 안식, 평온, 안전, 염려 없음, 믿음직스러움 등의 광범위한 의미 영역을 포괄하는, 히브리어의 여러 가지 단어들에 해당하는 역어로 사용되었다.
예컨대 대상 4:40에서는 '…로부터 안식을 얻다'를 뜻하는 샤카트(히2453)의 역어로, 욥 11:18; 잠 3:23; 사 14:30; 겔 34:27; 38:8, 11, 14; 39:6, 26에서는 '믿을만함, 안전, 염려없음'을 뜻하는 베타흐(히233a)의 역어로, 삼하 3:24에서는 '가다, 걷다'를 뜻하는 할라크(히498)의 역어로, 사 29:24에서는 '이해'를 뜻하는 레카흐(히1124a)의 역어로, 그리고 잠 17:1; 호 2:18에서는 '평온, 안락'을 뜻하는 샬와(히2392d)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또한 에이레네를 역어로 사용하고 있는 몇몇 구절들은 해당 히브리어 단어가 모호하거나 없다: 에 4:16; 미 2:4; 사 32:4; 겔 34:29; 잠언 8:18.
(b)  70인역본은 히브리어 단어들, 주로 샬롬의 역어로 사용했기 때문에, 그 히브리어의 의미들이 이 헬라어의 의미에 영향을 미쳤으며, 또한 70인역본의 용법은 헬라어를 사용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헬라어는 새로운 풍부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히브리어 구약성경의 샬롬과 70인역본의 에이레네를 살펴보면, 에이레네의 여러 가지 의미를 알 수 있다.
이 단어는 '평화 peace'라는 좁은 의미로 제한시켜서는 안된다.  그것은 모든 가능한 형태의 악(evil)과 대조되는, 가장 넓은 의미의 '안녕, 복리' well-being를 의미한다. 만남이나 편지에서(삼하 18:29; 삿 19:20; 단 4:1), 작별 인사에서(삿 18:6; 삼상 20:42) 다른 사람들에게 안녕을 빌며, 대화에서 다른 사람에 관한 안녕을 구한다(삼상16:5).  사람들은 문안 인사를 한다 : "문안하고".
왕하 9:17이하에서와 같이 어떤 사람이 오는 이유에 대한 질문이 있는데, 곧 "평안이냐"는 '도전적인 목적이냐 화평한 목적이냐'라는 질문이다.
왕상 2:13에서 밧세바가 아도니아를 맞이 하면서 "화평한 목적으로 왔는냐"(너의 옴이 화평이냐)라고 말했을 때, 그것은 그녀가 그에게 그의 방문이 '좋은 일'을 뜻하는지를 실제로 묻고 있는 것이다.
시편 기자는 에이레네를 '행운이나 형통'이라는 의미로 사용했는데, 불경한 사람들에 대해서도 적용되고 있다. 의인은 악인의 이런 형통을 봄으로 시험을 받기도 한다(시 73:3). 그러나 이 형통은 외적인 것에 불과하며, 진정한 형통이 아니다(사 48:22).
사 57:18; 시 38:3에서는 육체의 건강을 의미한다.
집회서 38:8에서 의사가 가져오는 에이레네, 즉 건강에 대해 말하고 있다. 전장에서 무사히 안전하게 돌아오는 사람은 건강을 보전한 것으로 볼 수 있다(수 10:21; 왕상 22:17; 대하 19:1; 시 55:18).
또 이 단어는 '만족이나 흡족함' satisfaction을 의미하였는데, 이별에 관하여(창 26:29; 출 18:23; 사 55:12), 잠자리에 드는 것에 관하여(시 4:8), 죽음에 관하여(창 15:15; 렘 34:5) 사용되었다. 여기에서 에이레네는 단순히 안식이나 마음의 평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폭력이나 재난으로 압도당하지 않은 인간의 전상태로서, 폭력을 당하거나 변사의 정반대를 의미한다(참조: 왕상2:6).
또한 살펴볼 가치가 있는 것은 사 29:24의 내용이다: "원망하던 자도 교훈을 받으라"(70인역-말더듬는 혀들은 평화를 말하는 것을 배울 것이다). 이 구절에는 히브리어 샬롬이 없지만 에이레네가 나온다. 이 문맥에서 에이레네는 그들이 올바르게(에이레네) 말하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이사야 32:4에서도 이와 유사한 의미를 나타낸다.
이 단어는 더욱 보편적으로, 전쟁과 대조되는 평화를 의미한다. 잠 17:1; 호세아 20:18("평안히 눕게하리라")과 사 14:30("평안히 눕게 하려니와")에서 이 의미로 에이레네가 샬롬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잠언에서는 다투는 가정과 대조되는 평화로운 가정의 안락을 의미하며, 호세아와 이사야에서는 이 단어는 평화의 때를 의미한다.
대상 22:9에서 평화의 상태를 의미한다: "내가 저의 생전에 평안과 안정을 이스라엘에게 줄 것임이니라". 히스기야는 평화가 그의 시대에는 계속된다는 기대를 가졌기 때문에 이사야의 중대한 예언을 경솔히 취급했다. 여기에는 번영을 누리는 그룹, 예를들면 국가의 번영이라는 의미도 지닌다.
에이레네는 전 3:8에 전쟁과 대조시킨 "평화"와, 그리고 렘 29:7에 "성읍의 평안", 38:4에 "백성의 평안" 등에서 "평안을 구한다"는 표현에서와 같이 "평화의 상태"보다 더 근본적인 것, 즉 평화 =백성의 안녕에 관련된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샬롬/ 에이레네는 상태보다 오히려 관계를 암시한다.
많은 구절에서 이 단어는 이러한 의미를 가지는데, 국가나 그룹 간의(왕상 5:12; 삿 4:17; 왕상 5:4; 대상 12:18), 개인 간의(슥 6:13) 우호적 관계를 의미한다.
신 20:10에 '한 백성에 평화를 선언'하는 것은 한 백성의 관계의 수용을 의미하며(참조: 삿 21:13), 그 안으로 들어가는 자들은 평화의 사신들이다(사 33:7).
이 단어는 시편 35:27에서 외적 형통이나 성공에 더하여 인간의 전적인 안녕(well-being)을 의미할 수 있다: "나의 의를 즐거워하는 자로 기꺼이 부르고 즐겁게 하시며 그의 종의 형통을 기뻐하시는 여호와는". 여기서 형통과 안녕은 선(good)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
시편 122:8에서 시인은 "네 가운데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한다. 70인역본에는 '내가 참으로 너를 위하여(에 관하여) 평화를 말했다'고 번역되어 있다. '너를 위하여'는 '예루살렘을 위하여'이다.
시인은 바로 앞에서 이미 안녕과 형통을 원했다. 환언하면 이 용어는 여기서 확고한 '형통'이라는 의미에서 '선(good)'이라는 더 넓은 의미로 쉽게 이동한다.
따라서 잠 3:17에서 "그 길은 즐거운 길이요 그 첩경은 다 평강이니라"고 말한다. 70인역본은 '그녀의 길은 옳은 길이요 그녀의 모든 첩경은 평화에 있느니라'고 번역했다.
시 34:14은 도덕적 선을 의미한다: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며 화평을 찾아 (그를) 따를지어다."
슥 8:19에서 "오직 너희는 진실과 화평을 사랑할지니라."
말 2:6에서 "그가 화평과 정직한 중에서(으로) 나와 동행하며, 많은 사람들을 돌이켜 죄악에서 떠나게 하였느니라." 70인역본은 '그가 그의 길을 에이레네로 똑 바르게하여 내 앞에서 행하게 하며…'라고 번역했다.
잠 12:20에서 "악을 꾀하는 자의 마음에는 궤휼이 있고 화평을 논하는(조장하는) 자들에게는 희락이 있느니라." 70인역본은 '에이레네를 원하는 자들은 즐거워하리라'고 번역했다. 이러한 구절에서 '에이레네'는 도덕적 선을 의미한다.
(c)  이 단어는 두람(J. I. Durham)에 의하면, '완전, 완성, 성공, 성취' 등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샬롬은 '완전'이란 개념은 민 6:24이하에 나오는 축복의 절정을 이루는 대목에 나타난다. 여기에서 이 개념은 다른 모든 축복들을 요약하고 있으며, 여호와의 임재에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이 축복은 모세가 여호와로부터 받아 아론과 그의 자손들에게 이스라엘을 축복하는데 사용하도록 전한 것이다(민 6:22 이하). 이 축복의 내용은,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이다(민 6:24이하).
여기에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찌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민 6:27)는 구절이 첨가되었다. 두람은 이 구절을 주석하기를 '샬롬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오직 그가 임재하실 때에만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축복 속에 샬롬이 사용된 것을 볼 때에도 샬롬은 제의 용어로서 사용되었으며, 여러 가지 번역본이나 많은 주석가들이 일반적으로 이 말에 부여해 온 것보다 횔씬 더 포괄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보다 확실하게 믿게 된다. 왜냐하면 민 6:24-26 에 나오는 샬롬은 하나님께로부터 축복을 받고(바라크) 지킴을 받으며(샤마르) 은혜를 받는(하난) 사람, 하나님의 임재 속에 이 두가지 상태로 있는 사람, 즉 충족되고, 그리하여 온전하게 된 사람을 묘사하는 말로서 사용되고 있다. 실로 이러한 사람은 신약성경의 주의 말씀에 부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5:48).
또 두람은 '샬롬은 구약성경에서 자주 포괄적으로 본 성취 또는 완성, 실제로 사람이 혼자 힘으로 가장 좋은 환경에서 얻을 수 있는 그 어떤 성공이라도 훨씬 능가하는, 삶과 정신에 있어서의 완성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된다'라고 주장한다(창 15:15; 29:6; 37:14; 43:27이하.; 출 18:7,23; 민 25:12; 신 23:7; 삿 18:15; 삼상 17;18, 22; 20:7; 25:6; 삼하 11:7; 18:28이하; 왕상 22:27이하; 왕하 22:20; 사 45:7; 48:18; 53:5; 54:10, 13; 57:2,19; 59:8; 60:17; 66:12; 말 2:5이하.).
특히 이 점은 왕하 22:20에 나오는, 요시야가 열조에게 돌아가리라는 여호와의 약속에서 분명하게 제시되고 있다. 여기에서 요시야가 평안히(in peace, KSB) 열조에게 돌아간다는 식의 해석보다는, 그는 '성공하여 in success', 즉 그의 소명을 완성하고 흡족한 마음으로 열조에게 돌아갈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아래서는 항목을 만들어 에이레네의 의미를 설명한다.
2. 하나님의 선물로서의 에이레네
이 단어는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로서, 선, 좋은 것, 구원을 의미한다. 샬롬/ 에이레네와 연합된 좋은 것은 그것들을 위한 기도에서든, 그것들이 나타날 때 하나님의 선물로 인정하든, 자연적으로 이스라엘에서 항상 하나님과 관련시키었다.
기드온은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샬롬'이라고 불렀다. 이 매우 오래된 고대 표현에 대한 분명한 해석이 불가능하다면 우리는 이 고백의 위대한 의미에는 경건한 자들이 후에 많은 다른 상황에서 말하고자한, 특별히 구약의 기도에서 표현된 것과 같은 모든 것을 그 근본에 포함하고 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은 하늘에서 평화를 만드시며(욥 25:2), 또한 우리에게 평화를 약속하시며, 그의 백성에게 평화의 복을 내리시며, 그의 종들의 형통을 원하신다(시 35:27; 참조: 147:14), "다윗과 그 집에는 여호와로 말미암은 평강이 영원히 있으리라"(왕상 2:33).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시 122:6).
샬롬은 진실로 여호와로부터 오며, 완전히 충족하게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신념은 시편 85편에 두드러지게 표현되어 있다. 기자는 기도 중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 "그가 그 백성, 그 성도들에게 화평을 말씀하실 것이라 … 영광이 우리 땅에 거하리이다 긍휼과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입맞추었으며"(85:8-10).
이 사상의 맥락에서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구원하시려는 성향은 완전한 지상적 평화의 동기로 생각된다. 여기서 우리는 샬롬이라는 말의 구약의 용법의 최고점을 본다.
레위기에서 하나님은 그 땅에서 그의 백성에게 샬롬을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신다(레26:6). 이 문맥은 확고한 복이 뜻하는 것, 즉 원수들과 야수들로부터 평화를 아주 분명히 보여 준다. 이것은 특별한 의미에서 일종의 구원이다. 그것은 약속의 땅에서 안식과 평온이며, 그러므로 신명기 기자는 독특한 용어 메구하(안식)를 표현한 것이다(신 12:9). 이렇게 그들은 예언적 약속의 바로 가까이에 있다.
에이레네는 이 시대나 구원 시대에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선을 가리키는데 사용되게 되었다. 이 단어가 어떤 생활 영역에서나 하나님이 주신 선을 의미한다는 것은 구약신앙의 특성이다. 사 46:7에서 그 일반적인 기사를 볼 수 있다: "나는 평안도 짓고 환란도 창조하니". 이 경우에는 앞에서 언급한 레위기 26:3이하의 축복과, 그리고 민 6:26의 축복("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도 포괄한다.
때때로 에이레네의 정확한 내용을 말하기란 불가능하지만, 한편 그것이 항상 인간을 위한 선한 것이며, 거기에 그의 안녕이나 구원이 놓여있는 것이다. '에이레네'는 이런 의미에서 선한 것이며 구원이다.
이러한 구원을 의미하는 구절들을 더 들어보면, 렘 29:11에서 하나님은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라고 말씀하셨다. 시 119:165에서 율법을 사랑하는 자들의 큰 평화는 율법을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들이 당하는 장애물과 대조된다. 여기에 평화는 내적 구원이며 파멸이 아니다.
따라서 집회서 1:18에서 에이레네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증진되고 '기에이아 야세오스'(건강한 치유, 완전한 건강)와 연결되어 있다(참조: 사 9:7). 시 35:8과 9에 하나님이 약속하신 평화는 구원이며, 이 문장에서 평화와 구원이 연결되어 있다.
이 구원은 렘 16:5에서 하나님의 구원이라 부른다: "나의 평강". 애 3:17에 "주께서 내 심령으로 평강을 떠나게 하니"라는 말은 "내가 복(아가다: 선, 선한것)을 잊어버렸음이여"라는 말로 해석되어야 한다. 여기서 평강은 선한 것이며, 곧 구원이다. 이 평화에 참여한다는 것은 거기에 포함된 구원의 은총을 누린다는 것을 뜻하는 반면, 평화에서 제외된다는 것은 그 모든 복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평화를 거두어 가시면 어쩔 수 없이 애통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된다.
히브리인들은 때때로 이러한 동맹이나 협정에 대해 베리트(언약)를 사용했으며, 따라서 샬롬은 베리트와 관련하여 나타난다. 이 두 단어의 관계는 너무 강하므로, 이런 문맥에서 샬롬은 일종의 공식 용어가 된 것같다.
이 사상은 샬롬의 관계가 언약에서 두 당사자에 의해 인쳐진다는 것이다(수 9:15; 왕상 5:12). 환언하면, 언약은 '샬롬'의 관계를 개시하는 것이다. '샬롬'의 관계는 언약의 결과이다. 여호와의 이스라엘과의 화평의 언약을 나타내는, 이러한 구절들에서 '샬롬'은 실질적 안녕이 아니라 언약을 맺은 자들의 성향에 의존하는 평화의 관계를 의미하는 동시에 구원을 위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비누하스와 평화의 언약(민 25:12; 집회서 45:24), 레위와 평화의 언약(말 2:5), 다윗과 평화의 언약(겔 34:25; 37:26)은 구원의 언약이다.
사 54:10에서 여호와께서는 "나의 인자는 네게서 떠나지 아니하며 화평케 하는 나의 언약은 옮기지 아니하리라"고 약속하신다(Rad, TDNT).
3. 종말론적 기대의 한 요소로서 샬롬/ 에이레네
샬롬은 종말론적 기대의 한 요소이다. 영원한 평화의 최종적 상태에 대한 대망은 선지서들과 다른 성문서들에서 일관하게 표현하는 구약 종말론의 한 요소이다.
이 널리 퍼진, 다방면에 걸친 이 대망의 사실은 샬롬이라는 단어가 관계하고 있는 구절들에서 항상 발견되지 않을지라도 언급되고 있다.
낙원의 상태의 회복이 예언될 때(사 11:10이하; 호 2:20이하; 암 9:31), 하나님의 주관하에 국제적인 평화가 예언될 때(사 2:2이하), 혹은 평화의 때가 도래하는 마지막 시대의 한 겸손한 평화의 왕에 대한 기대를 말할 때(슥 9:9이하), 샬롬이라는 단어가 이런 중심적인 종말론적 구절에 사용되지 않거나 슥 9:10에서와 같이 오직 많은 다른 것들 곁에 사용될지라도, 우리는 가능한 한 가장 넓은 의미의 샬롬에 관한 예언적인 선포를 듣게 된다.
따라서 그 단어가 실제로 발견되는 구절들에 대해 어떤 보다 큰 비중을 두지 않는다. 사 9:5에 메시야 아이의 이름들에서 그 최종 이름 샬롬 사르(평화의 왕)는 의미의 중요성에 있어서 선행하는 다른 이름들과 다를 바 없다. 그 이름은 하나님의 사명(commission)을 지닌 분(사 9:1-6)으로서의 메시야는 도래하는 메시야 왕국의 평화의 보증인(guarantor)과 보호자이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것은 사 9:7의 가장 중요한 기사에서 다시 다윗의 보좌와 결부된 구원을 위해 영원히 있을 것이라고 표현되어 있다. 미 5:5에서 "이 사람은 우리의 평강이시다"라는 표현은 이 전체 예언의 본질을 요약한 것이다.
피조된 세상은 지금은 그것이 저지른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받고 있고 스스로 분열하고 있지만, 결국은 다시 온전하게 될 것인데(사 11:6-9; 29:17-24; 6:1-9), 그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실 것이다(사 65:17-19; 참조: 계 21:1-4).
평화에 관한 언약의 갱신에 관련된 메시지는 우주적이고 영속적인 평화에 관한 약속으로 발전되었으며, 이 구원의 날의 도래는 하나님께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자(사 61:1, 2)로서 평화의 나라의 담지자요 설립자인 평강의 왕(사 9:5,6)에 자주 결부되었다.
흥미있는 점은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가 모든 풍부한 의미를 지니는 데도 불구하고 어느 곳에서도 특별히 내적인 평화의 태도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참으로 그것이 개인보다 오히려 그룹에 대해 사용되는 구절들이 더 많다.
개인에 대한 용법의 전형적인 보기로서, 애 3:17을 들 수 있다: "주께서 내 심령으로 평강을 멀리 떠나게 하시니 내가 복을 잊어버렸음이여". 그러나 여기에 샬롬도 감추인 내적인 것이 아니라 그 자체를 외적 안녕의 형태로 나타낸다. 그룹과 관련된 대부분의 보기에서 샬롬은 분명히 외적으로 드러내보일 수 있는 어떤 것을 의미한다(Rad, TDNT).
샬롬은 이스라엘의 정치적 열망에 관련된 사회적 차원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순전히 개인적인 영역을 훨씬 넘어서는 공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샬롬이 체다카(의, 사 48:18; 시 86:10)와, 그리고 미쉬파트(재판, 슥 8:16)의 실제적 이상과, 나아가 심지어는 페쿠다(관리, 사 60:17)와 밀접히 관련된다는 사실이 입증된다. 이것은 또한 가장 보편적인 용례에서 이 단어는 개인적 개념어라기 보다는 사회적 개념어임을 시사한다(H. Beck, C. Brown , DNTT).
4. 예언자의 메시지로서의 샬롬/ 에이레네
이믈라의 아들 미가야에서 에스겔까지의 소선지자들은 거짓 선지자들이 선포한 구원의 메시지를 강렬하게 대항했다. 수세기를 통해 계속된 이 투쟁에서 모든 사람의 주의를 끈 표어는 샬롬(평화)이다. 참으로 전문 용어 인나베 레샬롬(그는 평화를 예언한다)은 이와 관련하여 나타난다(렘 28:9).
샬롬은 어떤 선지자 서클의 정점이었으며, 따라서 이 용어는 두 파당 사이의 심한 투쟁의 중심이 되었다. 문제는 이미 구원의 선지자들을 반대한 미가야의 입장에서 보여졌다. 그러나 이 용어 자체가 나오지 않는다(왕상 22:5이하).
미가는 몇몇 대항자들과 싸웠는데 그들을 이득을 얻기 위하여 예언하는 자들이라고 비난했다. 그들은 이득이 있는 한, 구원을 선포할 것이다: "내 백성을 유혹하는 선지자는 이에 물면 평강을 외치나 그 입에 무엇을 채워주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전쟁을 준비하는 도다…"(미 3:5이하).
예레미야는 그 치열한 투쟁에 투신하여 선지자들로부터 가장 강렬한 저항을 받았다. 큰 고통 중에서 예레미야는 샬롬 에메트(영원한 구원)를 약속하는 예루살렘의 운명이 무엇인지를 말한다(렘 14:13이하).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심상히 고쳐 주며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렘 6:14). 렘 28장에서 예레미야와 이런 선지자들 간의 극적인 교전의 이야기를 읽는다. 예레미야와 하나냐 간의 문제의 요점은 샬롬(평화)이냐, 라아(환란)이냐 이다.
최종적으로, 에스겔은 거짓 선지자들이 구원이 없는데도 샬롬 하존(구원의 이상)을 본다고 하며 백성을 잘못 인도했다고 동일한 항의를 했다(겔 13:16이하). 여기서 "이들은 예루살렘에 대하여 예언하여 평강이 없으나 평강의 묵시를 본다하는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이니라…"며, 대항한다.
거짓 선지자들의 문제는 샬롬의 문제를 넘어가며, 이 문맥에서 추적할 수 없다. 그렇지만 의심할 수 없는 것은 그들이 선포한 샬롬이 신화적 개념으로 옷 입은 궁국적 종말론적 평화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실제적 정치적 평화, 즉 모든 중대한 정치적 문제가 잘 해결되어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보장하는 평화 가운데서 살 수 있다는 약속이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마치 예레미야가 처음에 이 견해를 함께 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는 다음에 여호와께서 "이 백성에게서 평강을 빼았으셨다"는 것을 보게 되었다(렘 16:5).
거짓 선지자들의 프슈도스(yeu'do", 5579: 허위, 거짓말)는 그들이 샬롬을 예언한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예레미야와 에스겔도 다른 상황들에서 이것을 예언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히려 그들이 백성의 죄를 알지 못했으며, 따라서 절박한 심판에 관하여 어두운 정치적 장면을 해석할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예레미야와 에스겔로서는 대응 표어 에인 샬롬(평강이 없다)이란 표어를 만들었다(렘 6:14; 8:11; 12:12; 30:5; 겔 13:10,16).
거짓 선지자들의 샬롬과 예레미야와 에스겔의 에인 샬롬 간의 싸움은 강도를 더하여 갔으며, 그러나 주전 597년과 586의 예루살렘의 정복과 멸망으로, 어떤 긴장 완화가 있게 되고, 구원을 예언했던 거짓 선지자들은 철저히 불신을 당했다. 이제는 새롭고 더 큰 의미에서 샬롬의 약속은 예레미야와 에스겔의 예언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들 중의 하나가 되었다.
따라서 예레미야는 사로잡힌 자들에게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악이 아니라 구원을 생각하신다는 놀라운 기사를 기록한다(렘 29:11). 여기에서 우리는 예레미야서에 있는 후기 구원 예언의 근거를 본다. 다른 나라들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가져올 구원을 보고 떨 것이다(렘 33:9). 동일한 주제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과 맺은 평화의 언약에 대한 에스겔의 절정에 달한 메시지에 다시 등장한다(겔 24:25; 37:26이하).
샬롬에 대한 싸움은 이사야의 마지막 장들에서 나타나지 않는다. 여기서 샬롬은 벌써 선지자의 입장의 어떤 중요한 양상을 보여주는 표어가 아니다. 그것은 단순히 이 예언의 충분하고 장엄한 요지의 하나이다.
만일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말씀을 들었다면, 그들의 샬롬은 강과 같이 흘러내렸을 것이고 그들의 체다카(의)는 바다의 물결과 같이 되었을 것이다(사 48:18). 여기서 이 평행 관계는 이 용어가 지금 한 영적 의미를 받는다는 것을 보여 준다.
유사하게 사 54:13에서 예루살렘 자손에게 약속한 구원의 복은 체다카(의)의 복과 결부되어 있다. '샬롬'과 '체다카'의 동일한 결합은 하나님의 새 도성에 대한 예언적 표현에서 나타난다: "내가…화평을 세워 관원을 삼으며 의를 세워 감독을 삼으리니 다시는 강포한 일이 네 땅에 들리지 않을 것이요 황폐와 파멸이 네 경내에 다시 없을 것이며 네가 네 성벽을 구원이라 네 성문을 찬송이라 칭할 것이라"(사 60:17-18).
사 32:17에 의하면 샬롬은 의의 결과이다: "의의 공효는 화평이요 의의 결과는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라". 이 시적 예언에는 '샬롬'이 더욱 실제적 의미로, '카보드'(영광)와 연결되어 있는 사 66:12에서 다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가능한 가장 풍부한 음조를 발하는 것이 있다.
여기서 언급하고자 하는 것은, 아름다운 소리로 "먼데 있는 자에게든지 가까운데 있는 자에게든지 평강이 있을지어다 평강이 있을지어다"(사 57:19)고 한 것과 같이 평화는 풍부한 기대를 표현하는 용어지만, 더욱 정확한 신학적 용어로 해석되지 않은 용어이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어떤 모호함을 가지고 있으므로, 이러한 많은 측면적 용어를 잘 사용하지 못하는 번역자들은 때때로 이러한 구절들에서 샬롬이 그의 회복된 백성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인 이상, 더욱 현실적인 '안녕, 복리 well-being'를, 더욱 분명한 '평화 peace'를, 신학적으로 더욱 포괄적인 '구원 salvation'을 사용해야 할지 알지 못한다.
3. 랍비들, 위경 등 유대 문헌의 용법 
1. 랍비들의 문헌
(a)  랍비 문헌에서 평화라는 개념 전체에 깔려 있는 것은 여호와의 샬롬이다. 그러나 이 개념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와 그리고 순전히 인간적인 차원에서 모두 그 의미가 확대되었다. 샬롬은 인사말로서 만날 때('샤알 베샬롬', 안녕을 구하거나 비는 말)나 작별할 때(안녕히 가라) 상대의 안녕을 구하는 것이다. 살롬으로 인사하고 인사에 답한다.
또한 샬롬은 '순조(順調), 안녕, 안전'이란 의미로 사용되었다. pBer, 60에는 임신 6개월 부터 9개월 까지 순조로운 출산(순산)을 위해 기도한 것과 아이의 가고 오는 길에서의 보호,곧 안전을 위한 언급이 있다. 그리고 '휴식이나 안식'이란 의미로도 나타난다. 샬롬은 유대인의 무덤비에서 '안녕이나 구원'이란 의미로 기록되었다.
(b)  랍비 문헌에서도 구약성경에서와 같이 샬롬은 하나님이 그의 백성에게 주시는 선물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바벨론의 18개의 간구는 그의 백성에게 하나님의 복이 임하기를 기원하는데 그 최종 간구는 그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복과 평화가 임하기를 구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샬롬은 베레카(복, 지복)와 병행되고 같은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비록 유대인들 간에 메시야 시대의 평화의 개념에 대하여 견해차가 있었지만, 평화는 의인의 몫이며, 구약성경에서와 같이 메시야 시대의 지복(Blessings)의 총화이다. 이사야 52:7은 이것에 대하여 언급한다.
(c)  샬롬은 또한 사람들(개인들, 가정, 단체, 국가들) 간의 투쟁의 반대어이다. 따라서 사람들 간의 화평케 하는 것에 대해 자주 강조한 내용을 찾아 볼 수 있다. pea.,1.1에 의하면 이것은 그 열매들을 즐기는 것들 중에 하나이다. 학자들의 역할은 세상에 평화를 증진시키는 일이며(Ber 64a), 엘리야는 와서 세상에 평화를 먼저 확립한다(Eduy. 8:7). 예배에서 평화를 위한 기원으로 끝맺지 않은 축도나 기도가 없다(Lev. R. 9:9). '샬롬'은 하나님의 이름들 중 하나이다(Shab. 10b; 2:1, 4b).  UK. 3:12에 '거룩한 자여, 그는 찬양을 받으리로다. 그 안에 평화보다 더 가치있는 어떤 복을 간직하고 있는 그릇이 없도다'라고 말한다.
Rabban Simeon b. Gamaliel의 기록에 '세 가지, 즉 진리와 심판과 평화로 말미암아 세계가 보존된다'고 하였다(Avot 1:18). 이 기록에 의거하여 탈무드(Talmud)는 '만일 심판이 집행되면 진리가 지지를 받고 평화가 증진되기' 때문에 그 세 가지는 사실상 하나라고 선언한다(TJ, Ta'an. 4:2, 68a). 탈무드 랍비들의 최고 이상은 평화이기 때문에 그들은 할 수만 있으면 평화를 위하여 정의나 심판을 유보하거나 제외하였다.
힐렐(Hillel)에 있어서 아론은 평화를 추구하는 자의 한 모델이다(Ab,.1,12; ckawh, Str.B,.1.217). S.NU(42.6:26)에는 이방인들이나 이스라엘이 우상숭배의 죄가 있을지라도 그들이 평화하는 한 사탄이 그들을 해칠 수 없다고 한다. 랍비들은 호 4:17을 해석하여 '이스라엘이 우상들과 연합되어 있을지라도 평화가 그 안에 우세하고 있는 한 그대로 두라'고 가르친다(Gen. R.38:6).
평화를 확립하기 위하여 진리의 엄격한 노선에서 벗어나는 것도 허락되었으며(Yer. 65b), 탈무드는 민 5:23에 관련하여 '만일 남편과 아내 사이에 평화를 확립하기 위하여 신성하게 기록된 하나님의 이름을 지울 수 있다면, 전세계의 평화를 이루기 위하여 참으로 더욱 많이 그렇게 해야 한다'고 선언한다. 랍비들은 성경 자체와 모순하여 어떻게 사람들 간의 평화를 지지하는지를 설명한다(CKAWH,Slav. En. 52:11-13).
이것은 이웃의 '샬롬', 곧 구원을 구하는 문제가 아니라 다툼의 종식이라는 의미의 [샬롬]을 구하는 문제이다. 아마도 이것은 불일치나 불화가 메시야의 도래를 방해한다는 사상에 의한 것같다. 랍비들의 기록은 시기, 다툼, 불화가 하나님의 뜻에 반대가 된다는 강한 신조를 명시하고 있다. 이 견해에 따르면, 바로 세상의 존속은 평화에 의존한다(Ab., 1,18). 물론 하늘에 있는 것들 역시 불화할지라도 그렇다는 것이다(참조, 골1:20).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대하여 구약성경에서 발견하지 못하는 '샬롬'의 용법을 도입하게 한다. 다마스커스 문서는 하나님이 모든 육체와 다투고 있다는 사실로 시작한다. 이 다툼은 평화를 이루는 장막을 만들기까지 널리 펴져 나간다. 우상숭배와 같은 죄들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간의 반목을 조성하지만(Lv. r.,7 on 6:2), 제단의 돌들은 그들 간의 평화를 조성한다M. Ex., 29 등). 하나님과 사람 간의 평화와 다툼은 사람이 두 가지, 곧 긍정적으로와 부정적으로 행동하는 상호관계를 포함한다.
(d)  앞에서 살펴본 바, 샬롬은 유대인이 대망하던 구원의 핵심 바로 그것으로 되어있다. 이러한 평화를 추구하고( Rabbi Hille1, Aboth I:I2. SBI 217) 사람들 사이에 평화를 세우는 것은 반드시 해야만 할 일이었다. 랍비들의 가르침에서 평화롭게 하는 자의 역할은 신약성경에 나오는 그것과 유사한데, 이 점에서 랍비 유대주의는 신약성경의 '새 계명'과 비슷하다.
하지만 여기에서의 근본 동기는 이유에 대한 적극적인 사랑이라기보다는 샬롬을 방해할런지도 모르는 모든 것을 제거하고자 하는 욕망이다. 순전히 인간적인 차원에서 적용되는 것은 또한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도 적용된다. 이리하여 평화라는 개념은 사람이 행한 것과 행하지 않은 것 모두를 한층 중요하게 생각하는 새로운 차원을 얻게 된다. 이러한 평화에 대한 개념은 구약 시대 이후 발전한 새로운 용법에 큰 영향을 주었다.
2. 위경, 요셉푸스, 필로
(a)  위경에서 종교적 용법을 고찰해 보면, Test ⅩⅡ에서 '평화의 천사'라는 말이 나타난다. 여기에서 에이레네는 Test. L. 18:4와 D. 5:9,11에서와 같이 전쟁의 중단으로 표현된 구원을 의미하지만(Test. Jud. 22:1이하) 그것은 구원의 효과를 내지 못한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Test. ⅩⅡ와 특별히 Eth. En에서 평화의 반대는 랍비들의 견해와 같이 하나님과 이스라엘 또는 인류와 투쟁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이다.  Eth. En에 의하면 불경건한 자에게는 긍휼과 평화가 없고(5:15), 하늘의 타락한 수호 천사들에게는 평화도 없고 용서도 없지만(12:5), 반면에 의인에게는 평화가 약속되어 있다.
그러나 Eth. En. 1:17이하에 의하면, 평화는 심판의 유보 또는 비집행이며, 따라서 평화는 용서와 심판자의 긍휼과 연결되어 있다. 그렇지만 평화는 또한 빛과도 연결되어 있어서 긍정적인 의미를 함축하며, 구원을 뜻하기도 한다. 이러한 의미의 평화는 '평안히 내버려 두었다'란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할 수 있다. 열 두 족장의 유훈에서 평화는 재판을 유보하는 것, 즉 범법자를 동정하여 유예해 주는 것, 혹은 적어도 그에 대한 형벌의 집행을 유예하는 것을 의미한다.  위경에서 평화는 또한 인간들 사이의 일치나 화합을 의미하기도 한다(Foerster, TDNT;  H.Beck, C. Bro wn, DNTT).
(b)  요세푸스는 구약성경과 랍비들의 용법을 철저하게 따른다(Ant. 1, 179; 11, 216; 8, 405; War 2, 135).
(c)  필로는 언어학적으로, 그리고 실질적으로 헬라 전승을 따른다. 그에게 있어서 에이레네는 정치적 평화와 욕망의 싸움과 대조로, 오직 하나님께만 속하고(Heinemann,413ff), 하나님으로부터만 찾아 얻을 수 있는 내면적 안식인 마음의 평안을 의미한다(Vit. Mos., 1, 304). 그렇다고 해서 평화의 외면적이고 객관적으로 입증이 가능한 상태를 가리키는 측면과 무관하지 않다. 내면적, 외면적으로 싸움과 평화는 그룹을 이룬다. 내면적 싸움이 가장 나쁘며, 그것이 모든 악의 근원이다.  필로는 헬라 철학의 영향을 받아서 역시 내면적 평화를 유혹과 탐욕에 대한 승리로 간주하였다(Jos. 57). 이디오피아어 에녹서 52:11은 '평화와 사랑을 가져오는 자는 복이 있다'라고 선언하고 있다(Foerster, TDNT).
3. 쿰란 문서
쿰란 공동체는 변절한 이스라엘로부터 자신을 분리시켜(1QS 8:4-9; CD 1:4과 해당 구절) 자신을 구원 받은 자들의 종말론적 공동체라고 생각하였다. 이 공동체의 성원들은 이미 종말론적 평화를 향유하는 경지에 들어간 것이다.
그들의 문헌에서는 영원한 평화(IQS 2:4), 평화의 넘치는 풍요( IQS 4:7), 끝이 없는 평화(IQH 7:l5), 지속적인 평화(IQH 15:16), 제한 없는 평화(IQH 18:30) 등에 관한 구절이 나온다. 그러나 이 공동체는 아직도 투쟁의 와중에 있다(CD 4:13 및 그 밖의 해당 구절에서는 벨리알과 이스라엘 및 미가엘의 싸움이 언급되고 있고, IQM 1:9 이하에서는 빛의 아들들과 어둠의 아들들의 싸움이 언급되어 있다).
평화의 도래는 재난과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다(IQH 1:17). 구원은 구원을 받을 사람들이 불 붙는 용광로 속에서 연단을 받은 후에라야만 참된 것으로 인정 받는다(IQM 17:1). 하나님은 이미 영원 무궁한 평화의 언약(구원)을 생명의 바늘로 새겨 놓으셨다(IQM I2:3). 이러한 평화는 더 이상 거절을 당하지 않으며(IQH 9:11), 구원의 복으로 충만한 피난처가 된다(IQH 9:33). 평화는 구원과 행복과 같은 것이다. '하나님의 평화'(IQM 3:5; 4:14)와 '하나님의 기쁨'은 하나님의 백성이 안전한 그들의 고향에 도달하는데 필요한 암호이다(1QM 3:11).
4. 신약성경의 용법 
1. 서론
에이레네는 신약성경에 92회 사용되었으며, 요한 1서를 제외한 신약의 모든 성경에 나온다. 복음서에 25회(마 4회, 막 1회, 눅 14회, 요 6회), 사도행전에 7회, 바울 서신에 47회, 야고보서에 3회, 베드로서에 5회, 유다서에 1회, 요한서신과 계시록에 4회 사용되었다.
신약성경에서 에이레네의 변화 또는 발전된 의미를 모두 추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단어는 형태와 내용에 있어서 70인역본과 히브리어 구약성경의 전통을 착실히 따르고 있다. 그리고 랍비 문헌의 샬롬과 같은 의미로도 사용되었다. 추가로 고전 헬라어 문헌에 나타난 의미들이 그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신약성경에서의 의미는 인사와 그리고 유사한 표현에서 안녕(well-being)이나 구원(salvation)이란 의미를 가진다.
마 5:34(눅 7:50)와 약 2:16에서 작별 인사로, 눅 10:5; (눅 24:36); 요 20:19; 요 20:21; 요 20:26에서 도착 인사로 사용되었으며, 당시 팔레스틴에서 유행한 인사를 번역한 것이다.
행 16:36에서 누가가 로마 간수의 인사말로 "평안히 가라"는 말을 사용했는데, 그는 분명히 그 인사말을 70인역본에서 취했으며, 새 언약의 사람들에게 어울리는 인사말이라고 생각했다.
사도 바울 역시 항상 그의 편지서들에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라는 인사말을 사용했다.
계 1:4에도 동일한 인사말이 나온다. 이것은 히브리인과 아람인의 인사와 같은 것이다.
디모데전·후서, 요한이서, 그리고 유다서에서는 자비를 뜻하는 말과 함께 사용되었으며, 평화는 또한 예를 들어 벧전 5:14; 요삼 1:15에서처럼 끝맺는 인사말에 나온다. 구약성경의 평안히 가라와 비슷한 말이 행 15:33과 고전 16: 11에 나오며, 눅 2:9에 나오는 시므온의 말도 이와 비슷한 의미를 지닌다.
안전(security)이란 의미의 에이레네는 눅 11:21에서 찾아볼 수 있다(참조: 살전 5:3). 고전 14:33에서는 구약성경의 영향이 한층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데 여기서 에이레네는 무질서의 정반대이며, 교회 안의 무질서에 반대되는 상태를 나타낸다. 행 14:2.
신약성경에서 이 단어의 주요 의미는 분명히 헬라적인 의미가 아니라 보다 깊은 의미에서의 구원이다. 에이레네는 인간 간의 일치 또는 조화를 나타내며(행 7:26; 갈 5:22; 엡 4:3; 약 3:18; 참조: 벧전 3:11), 하나님과의 화평도 의미한다.
에이레네는 행 12:20; 행 24:2; 마 10:34; 계 5:4에서는 전쟁과 반대되는 평화에 대해 사용되었다. 바울은 이 단어를 영혼의 평안에 대해 사용하는데(참조: 롬 15:13), 이런 용법은 매우 드문 헬라의 용법이다.
눅 14:32에서는 평화의 조건을 구하기보다는 오히려 인사하는 것을 뜻하는 아람어투가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문맥상으로는 존경과 무조건적 복종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신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그 용법상 세 가지 중요한 개념을 지니고 있다. - ⑴ 안식의 느낌으로서의 평화,  ⑵ 하나님과의 화해의 상태로서의 평화, ⑶ 그리고 종말론적 구원으로서의 평화이다. 이 중 마지막 의미가 기본적인 것이다.
2. 가장 광범위한 의미에서 만물의 정상적인 상태로서의 에이레네
고전 14:33에서 바울에게 있어 에이레네는 고린도 교회에서 생각을 예언함으로 야기된 어지러움(혼란스런 상태)과 반대되는 정상적인 상태이다.
영감을 주시는 하나님은 어지러움(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고 평화의 하나님이시다. 영감은 다툼과 혼란을 위한 구실을 허용하지 않고 있으며, 따라서 시기와 분쟁은 하나님의 임재의 표시가 아니다. 여기서 지적하는 원리는 이적(miracles)이 법의 위반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법을 위반하는 편이 아니라 법을 지키므로 결과하는 평화, 곧 질서의 편이다. 이 질서의 평화는 진정한 교회의 정상적 상태인 것이다(고전 12:2; 약 3:16과 비교).
평화는 공동 예배(고전 14:33)와, 사도와 그의 협동자들 간의 교제에 결정적인 요인이 되는 것이다. 이 의미에서 에이레네가 분명히, 강조적으로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은 신약성경의 다른 곳에서 주목을 끄는 내부와 외부 사이의 관계를 보여준다.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는 건강한 또는 정상적인 상태는 하나님에 의해 영혼이나 인류에 제한되지 않고 전 우주에 미치는 것이다(참조: 1corinthians, ICC; V. Hasler, EDNT; Foerster, TDNT).
3. 인간의 종말론적 구원으로서의 에이레네
(a)  여기에서 출발점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구원, 특별히 종말론적인 구원이라는 의미를 지니는 구약성경의 샬롬이다.
눅 1:79에 사가랴의 찬송에서 에이레네는 대망한 종말론적 구원이다.
눅 2:14에 천사의 찬송에서 에이레네는 사람들 중에 평화나 하나님과 평화 뿐만이 아니라 이제 땅으로 온 구원을 가리킨다.
눅 19:42에 "평화에 관한 일"과 눅 19:38에 "하늘의 평화"도 구원이다.
계 12:10과 계 19:1에 "구원(소테리아)은 에이레네와 동일한 것이며, 그 의미는 (요한계시록에서 소테리아와 동일한) 에이레네가 하늘에 있고 하늘에서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역사적 사건으로 온다. 히 13:20은 이것을 "평강의 하나님"과 "양의 큰 목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내신 자"를 동일시 함으로써 넌지시 암시한다.
히 7:2은 그리스도의 전형으로서의 멜기세덱은 살렘 왕, 곧 평화의 왕이시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 구원은 평화의 복음으로 선포된다(엡 6:15; 참조: 행 10:36; 엡 2:17). 그것은 그리스도의 구원이다(요 14:27). 세상은 오직 [샬롬]을 원하며, 그리스도는 자기가 확보한 구원을 주신다.
예수님은 관습적인 작별인사를 사용하셨으며(막 5:34; 병행구, 눅 7:50), 예수님은 친히 제자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닌 평안의 인사(이 집에 평안이 있을 찌어다)를 가르쳐 주셨다. 제자들이 어느 집에든지 들어갈 때 하는 인사는 소원이 아니다.  그 평안은 그대로 거절하거나 받거나 해야 하는 선물이다. 그러므로 만일 거절하면 참으로 그 평안은 제자들에게로 돌아오는 것이다(눅 10:5이하; 마 10:13). 이스라엘의 마지막 세대는 최종적 선택을 직면하고 있다. 평화의 인사 형태에 동반하는 구원의 말없이 어느 성읍이나 집에도 들어갈 수 없다. 이 인사를 받는 사람은 누구든지 '평화의 아들'이 되지만 이 인사를 거절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구원으로부터 영원히 제외되어 있는 것이다(V. Hasler, EDNT).
그리고 편지서들(롬 1:7; 고전 1:3; 고후 1:2; 갈 1:3; 빌 1:2; 살전 1:1; 몬1:3)과 계시록(계 1:5)에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라는 인사 또는 축도의 말은 특수한 의미를 지닌다. 유대인의 축복 공식문은 '긍휼과 평화'이다(2bar. 78:2). 바울은 이 축복문에서 '긍휼' 대신 '은혜'를 취하여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있기를 원하노라)"라고 축복한다.
그는 "은혜와 평강"을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시키므로, 예배 의식을 따랐다. 이 축복으로 그는 그의 독자들에게 주님의 구원의 은사를 수여하는 것이다.
그는 이 은사를 고전 1:4-고전 1:9의 서언에서 더욱 정확히 묘사하며, 갈 1:4에서 그 축복을 이어 부언하고 있다. 후자에서 카리스(은혜)는 희생제사의 방식으로 설명되어 있고, 에이레네는 악한 현세대로부터 구원 받는 해방의 과정으로 설명되어 있다. 사도 요한이 그의 계시록 서언에서 독자들에게 한 축복도 바울의 축복이 의미하는 바와 같은 것이다.
우리는 이 구원을 구해야 한다: 히 12:14에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고 경고한다. 이 문구에서 에이레넨 메타(개역, 더불어 화평함)는 다른 사람들과 일치나 화합을 의미하지 않는다. 저는 다리가 고침을 받을 수 있는 우리의 발을 위한 곧은 길을 만들라는 권고 후에 모든 사람과 교제하여 구원을 구하라는 명령이 뒤따른다.
이 구원은 골 3:5에서 마음을 다스리는 능력이다.
이 구원은 빌 4:7에서 사람을 보호하는 능력이다.
어떤 학자들은 6절에 비추어 이것이 불안에 반대되는 평안감을 의미한다고 하지만 동의하기 어렵다. 그것은 신자가 보호받는 왕국이다. 비록 인간 관계 속에서 이 구원이 때때로 사람의 외적인 일들과 동일하지 않으며, 심한 적대적인 경험으로 인도할지라도 그렇다(마 10:34이하).
(b)  이런 구절들에서 에이레네는 실질적으로 조에(생명)와 병행하며, 바울은 롬 8:6에서 평안과 생명을 동일하게 취급한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바울은 육신의 노력은 사망, 영의 노력은 에이레네로 인도한다고 말한다. 그는 7절의 첫 부분에 근거를 둔다. 육신의 노력은 하나님께 대적하는 것이며 오직 사망으로 인도한다. 조에(생명)와 다나토스(사망)가 종말론적으로 그대로 받아들일 존재 양식인 것과 같이 조에(생명)는 그와 병행하는 에이레네와 함께 있다.
에이레네(= 샬롬 = 구원)는 최종적 성취의 상태이며, 새로운 피조물의 정상적 상태이다. 이와 같은 특징은 벧후 3:14에서 나타난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안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엔 에이레네) 나타나기를 힘쓰라."
여기에서 에이레네는 기본적인 내적 성벽이나 내적인 평안도, 하나님의 은혜도 아니며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형성된 심신의 회복과는 별도로, 상상할 수 없는 완전한 복지(안녕)나 정상 상태를 암시한다.
이 의미에서 바울의 더욱 친숙한 인사는 때때로 데오스 테스 에이레네스(평화의 하나님)로 말한다. 이 묘사는 바울이 평화의 하나님을 기대한 것과 확고하게 연결되어 있다.
평화의 내용은 문맥에서 결정될 수 있다. 롬 16:20에서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단을 너희 발아래서 상하게 하시리라"고 말했는데, 이 사탄의 파멸은 구원의 일부이다. 평강(화)의 하나님('데오스 테스 에이레네스')이란 말은 하나님이 평화와 지복을 시행할 것이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탄을 멸하실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벧후 3:14과 실질적으로 동일한 정도의 구원과 복지(안녕)의 절대적인 내용은 살전 5:23에 나타난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실 때에 흠이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에이레네는 바로 '영적 번영'이 아니라 전인간, 곧 영혼과 몸의 구원이다. 동일한 의미는 히 13:20이하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에이레네는 카리스(은혜)의 결과인 영혼의 평화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인간의 구원을 의미한다.
구약성경과 랍비적 용법에 근거해서, 에이레네는 이와같이 가장 심오하고 포괄적인 의미를 요구한다. 에이레네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미 일어나고 있는 전인(whole man)의 종말론적 구원이다. 그것은 확실한 성취의 상태로서 카이네 크티시스(새로운 피조물)의 상태를 의미한다. 이 의미에서 구원은 예수님의 부활에서 계시되었다(참조: Foerster, TDNT; H.Beck, C.Brown, DNTT; V.Hasler, EDNT 등).
4. 하나님과의 화평으로서의 에이레네
신약성경에서 에이레네는 하나님과의 평화의 관계에 대하여 드물게 사용되었다. 그 첫 언급은 엡 2:14-엡 2:17이다. 바울은 사 57:19을 생각하고 있었으며, 그러므로 구원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 용어가 15절에 나타날 때 그 반대어 에크드라(증오, 적의; 개역, 원수된 것)에 대하여 어떤 해석자들은 하나님에 대한 사람들의 적의를, 어떤 해석자들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적의를 의미한다고 한다.
만일 율법이 유대인과 이방인을 갈라놓고 이스라엘을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키는, 이 두 가지 역할을 알지 못한다면 이 구절들을 거의 올바로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율법으로 말마암아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적대와, 또한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적대가 일어난다. 사실 유대인들은 율법을 통하여, 그리고 율법을 위하여 그들 자신들을 이방인들로부터 분리하고 이방인들을 원수로 생각해야 했으며, 이방인들은 그런 유대인을 적대적으로 대했다.
따라서 14절에 "그는 우리의 화평(에이레네)이시라"는 포괄적인 의미를 나타낸다.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폐하셨을 때, 두 가지 무질서 곧 사람들 중에 무질서와 하나님에 대한 무질서를 파기하셨다.
이 에이레네는 하나님과의 평화와 인류 중에 평화를 의미한다. 따라서 그것은 질서, 모든 관계의 회복(healing)을 의미한다. 그래서 15절에 에크드라(원수된 것)란 표현도 일반적인 의미를 가진다. 15절에 "화평하게 하시고"와 16절에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도 역시 일반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에크드라와 에이레네는 여기서 인종 안에서 많은 서로 다른 형태를 취하는 객관적 상태들이다.
만일 하나님과 평화가 이 구절에서 에이레네의 일부이라면 롬 5:1에서 에이레네는 그 유일한 의미를 나타낸다. "하나님으로 더불어"라는 말이 보여주는 것과 같이 이 언급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지적한다. 이것은 롬 5:10에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원수들이며, 하나님이 그들과 화해하셨다는 사실에 동의한다(참조, 엡 2:16). 그래서 다음 평화는 사람이 변경한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상호관계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화해의 사역을 하심으로써 신자들이 하나님에 대하여 가지게 되는 관계이다.
5. 인간의 상호 평화로서의 에이레네
롬 14:17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말한다. 그는 강한 자들에게 말하기를 하나님의 나라는 그들이 생각하는 바와 같이 다른 사람들을 데리고 와서 먹고 마시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 가운데서 의와 평화와 희락의 통치로 되어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희락(카라)"은 15절의 "근심하게 되"(뤼페이타이)어서는 안되는 것을 보여 주며, 의(디카이오쉬네)는 여하한 사람의 양심도 침해 당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생각나게 한다. 평화(에이레네)는 하나님의 나라에는 어떠한 종류의 질병이나 악이나 불화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바울은 계속하여 이 영역에서 그리스도를 봉사하는 자들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사람들의 마음에 든다고 말한다. 그는 이렇게 하여 "평화에 관한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라는 권고를 한다. 여기에 에이레네는 오이코도메(덕을 세움)와 병행하는 것이며, 그것은 분명히 상호 간의 평화를 의미한다. 그렇지만 17절에서 에이레네는 이것보다 더 큰 것이다.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는 것은 성령 안에서 건강을 증진시키는 어떤 것의 창조, 즉 '에이레네'를 함축한다. 그렇지만 실제적으로 로마에 있는 교회에 적용하면, 이 건강을 증진시키는 일은 의심 없이 평화이다.
우리는 고전 7:15의 난해한 말에 동일한 사상의 어떤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화평 중에서 너를 부르셨느니라". 바울이 만일 이방인 배우자가 결혼을 파하려고 하면 기독교인 배우자는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할 때 그것은 주님께서 이혼에 관하여 말씀하신 것과 모순되는 것같이 보인다: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속 받을 것이 없느니라". 이것은 오직 주님의 말씀, 곧 우리는 이러한 경우에 노예들과 같이 구속받지 않는다는 말씀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15절에서 우리는 제한(restriction)이 아니라 이유(reason)를 가진다. 여기에 '데'는 '그러나 but'가 아니라 '오히려 rather'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 부름에 대한 언급은 바로 앞에 말한 것을 위한 근거를 확립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오히려'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언급된 개인적 경우를 넘어가서, 하나님이 우리를 평화로(혹은 평화를 위하여) 부르신 것을 우리에게 일반적으로 말하는 근거를 확립한다. 따라서 '에이레네'는 마지 못해서 유지하는 결혼 생활의 불화에 대한 반대 이상을 의미한다. 그것은 죄가 의도한 정상에 대한 파괴 상태와 정반대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만물의 건강한 상태, 정상적 상태를 함축한다. 당신이 배우자와 불화할 때 그를 구원하는 것이 당신의 사명이라고 생각해 보라. 구원과 그 결과인 화합의 복이 당신의 가정에 임할 것이다. 인간의 상호 간의 평화도 이 정상적 상태에 포함되어 있다. 다음 절(16절)은 '가르'로 시작한다. 여기서 '그러면, 그렇다면'이란 의미를 지닌다. : "(그렇다면) 아내된 자여 네가 남편을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며 남편된 자여 네가 네 아내를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리요."
딤후 2:22은 확실히 우리가 내적 경건(신앙심)으로 평화를 조장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는 메타가 에이레네에 관계하지 않고 '…와 함께'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자체 안에서 에이레네는 '구원을 가져 오는 것'을 의미하는 것도 당연하다. 한편 그것은 확실히 싸우고 있는 변론(제테세이스)을 한번 보지 않고 말하지 않는다(23절).
다음 구절들에서는 단순히 사람들 사이의 일치나 화합(concord)을 의미한다. 엡 4:3: "화평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약 3:18 :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의가 자라나는 씨는 화평케 하는 자들이 화평으로 뿌리게 되는 것이다. 시기(젤로스)와 다툼(에리데이아)은 '에이레네'의 정반대이다. 벧전 3:11에서 시 34편에서 인용하여 "화평을 구하여 이를 좇으라"라는 말을 무슨 의미로 사용했는지 정확히 말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 의미는 아마도 일치와 화합(참조, 9절)일 것이다(참조: Foerster, TDNT).
6. 영혼의 평화로서의 에이레네
롬 15:13에서 이 단어는 영혼의 평화를 의미한다: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그러나 이 단어가 어떻게 이 의미를 취하게 되었는지를, 즉 정상적 상태에 대한 신약성경의 이 단어의 일반적 용법에서 유래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평강의 하나님"이란 말이 외적 생명에 관한 의미를 함축하는 것과 같이, 그리고 에이레네가 인간의 전존재의 정상적 상태 - 카라(기쁨)와 불가분리적인 상태인 구원 - 을 인간 안에 창조하신다.
여기에서 에이레네의 개념은 스토아 철학의 소극적인 갈레네(고요함, 평온)와 다르다. 이 평화는 스토아 철학자들이 말하는 세상으로부터 은둔도 아니고 영적 세계나 시비적 명상에로의 경건한 도피도 아니다. 그것은 사람이 삶을 살아가면서 영원을 찾을 때에 이미 하나님의 평화를 누리는 기쁨이 충만한 확신이다(참조: Foerster, TDNT; H.Beck, C.Brown, DNTT). 이러한 영혼의 평화는 히브리어 샬롬의 특징도 아니다. 따라서 이러한 평화는 독특하게 기독교적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그리고 영혼 또는 마음의 평화에 관한 문맥들을 찾아 볼 수 있는데, 예를 들면 롬 8:6의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강"이라는 구절과 갈 5:22의 성령의 열매들 중 하나로서 "화평"은 이러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전자에서 에이레네는 생명인 구원을 뜻하고, 후자에서 사람들 간의 일치, 조화를 뜻하지만 내적, 영혼의 평화도 포함하고 있다(참조: 롬 14:17, [인간 상호 평화로서의 에이레네] 항목).
빌 4:7에는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골 3:15에는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고 기록되어 있다. "평강", 하나님의 '구원하는 능력'이 다스리는 영역으로서 마음과 생각이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다. 이 구원하는 능력의 다스림을 받음으로 마음 또는 영혼이 평화를 누리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참조: Walter Bauer; H.Beck; C.Brown; W.Foerster; G.Von.R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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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Wv(7725, 슈브) (되) 돌아가(오)다, 회복하다
슈브(동사)는 기본어근이며, '(되)돌아 가(오)다, 회복하다'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1,000회 이상 나오며, 칼, 폴렐, 푸알, 히필, 호팔, 풀랄형으로 사용되었으며,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칼형과 히필형에 국한한다.
성경에는 회개의 과정에 있어서의, 인간의 책임을 묘사해 주는 관용구들이 풍부하다: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라"(수 24:23),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여호와께 속하라"(렘 4:4), "네 마음의 악을 씻어버리라"(렘 4:14),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호 10:12) 등등. 그러나 인간의 회개 행위에 관한 이러한 모든 표현은 이 한 동사 슈브에 포괄되며 슈브로 요약된다. 이 동사는 본질적으로 회개의 두 가지 필수 조건들을 다른 어느 동사보다도 더 잘 결합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두 가지 필수 조건이란 악에서 돌아서는 것과 선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칼 어간에서 슈브는 10가지 상이한 의미를 지니며 이 의미들도 각각 다시 나뉘고 그 중 몇몇 용례는 의미를 정확히 지적하기 어렵다고 한다(Hollacay). 이 중 두 세 가지는 특별히 고찰해 볼만하다.
우선 첫째로, 물리적 동작이나 운동의 뜻을 함축하고 있는 슈브의 기본 의미 '(되)돌아오다'는 270회 이상 출현한다. 하나님이 주어일 경우가 몇 번 있다: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사라)로 돌아오리라"(창 18:14). 인간이 주체인 경우가 가장 많다: "내가(아브라함) 아이(이삭)와 함께 저기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창 22:5). 히필 어간에서는 '되돌리다, 다시 가져가(오)다'라는 의미로 87회 등장한다.
둘째로, 종종(120회 이상) 슈브는 일종의 조동사 구실을 하여 둘째 동사의 행위를 되풀이하는 기능을 갖는다: "그리고 이삭이 그 우물들을 '다시' 팠다"(창 26:18).
셋째로 슈브의 칼형이 지니는 중요한 용법이 또 하나 있는데 이것은 신학적으로 극히 중대한 것으로서 언약의 공동체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회개의 의미에서), 또는 악으로부터 돌아서는 것(죄를 버리고 부인한다는 의미) 혹은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서는 것(배교한다는 의미)을 다루고 있는 구절들에서 출현한다. 이러한 문맥에서 슈브의 칼형이 129회 사용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하나님 대 인간의 관계를 논할 때 슈브의 히필형은 11회 밖에 사용되지 않는다. "너희는 마음을 '돌이켜'(칼명령형) 우상을 '떠나고'(히필)"(겔 14:6).
모든 어간을 고찰하고 난 후 홀러데이(Holladay)는 언약의 문맥에 슈브의 용례가 총 164회 등장한다고 결론짓는다.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바와 같이 그들의 대다수 곧 113회가 고전적/문학적 선지서들에서 발견되며 예레미야가 그 선두를 달린다(48회). 예레미야와는 대조적으로 이사야의 첫 39장에는 슈브의 언약적 용법이 단지 6회 밖에 발견되지 않는다(만일 우리가 사 30:15을 "너희가 [하나님께로] 돌이켜 안연히 처하여야 구원을 얻을 것이요"라고 읽지 않고 '여전히 앉아 yashab 즉 외국과의 동맹을 끊고 안연히 처하여야 구원을 얻을 것이요'라고 읽는다면 5회 밖에 되지 않음). 나머지 뒷 부분의 27장에서는 단 4회가 발견된다: 사 44:22, 사 55:7, 사 57:17, 사 59:20. 이처럼 우리는 이 두 예언서가 정경에서 서로 등을 돌리고 있는 흥미로운 현상에 접하게 된다. 즉 첫째 것은 이 주제에 관해 사실상 침묵하고 있으며, 둘째 책은 소리가 꽤 크게 울린다는 사실이다. 이사야의 용례 결핍 현상은 아마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다는 식의, 이 선지자의 어투 때문일 것이다. 매우 통렬하게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말한다: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염려컨대 그들이 다시 돌아와서(슈브)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사 6:10). 돌아올 수 없는 지점에 도달하고 말았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완악성을 미리 내다보시고 이를 자기의 계획 속에 혼입시켰다. 그러므로 선지자 이사야는 좌절할 필요가 없었다(마 13:13 이하).
수많은 구절에서 슈브가 "포로 생활에서 돌아오다" to return from exile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칼형: 물론 에스라와 느헤미야에서 나오며(스 2:1, 느 7:6), 그리고 특히 사 10:22, 렘 22:10, 슥 10:9.
히필형: 특히 왕상 8:34, 렘 12:15.
포로 생활에서의 귀환 개념과 언약에로의 복귀 개념 사이의 관련성은 명백하다. 포로생활로부터의 귀환은, 어느 형태의 죄이든 그 죄에서 돌아서는 것 만큼의 갱생이었다. 하나님의 그 어느 쪽의 돌아옴이든 허락한다는 것은 그의 언약적 신실성을 확증해 주는 것이다.
확실히 구약성경에는 회개의 교리에 대한 체계적 설명이 없다. 이것은 그 어느 것보다 더 잘 예증된다(시 51). 그러나 백성들에게 '~에로' 또는 '~으로부터' '돌아서라'는 요구가 주어진다는 사실은, 죄가 근절할 수 없는 오점이 아니라 돌아섬으로써 즉 하나님이 부여하시는 능력에 의해 죄인이 자기 운명의 방향을 수정할 수 있음을 뜻한다. 회개를 이해하는데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즉 하나님의 자비의 임의로운 주권적 행동과, 인간이 통회와 슬픔을 초월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의식적 결단을 하는 것이 그것이다. 후자에는 모든 죄의 거부와 자기의 삶을 위한 하나님의 전체적인 뜻을 긍정하는 행위가 포함되어 있다.(참조: V. P. Hamilton; B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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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jgavph(26, 아가페) 사랑 love.
1. 성경 외의 용법. 
명사 아가페는 아가파오(ajgapavw, 25: 사랑하다)에서 유래한 후기 헬라어이며, 성경 외의 문헌에서는 단 한번 발견되는데, 바로 여신 이시스(Isis)에게 아가페라는 칭호가 붙여졌다(P.Oxy. 1380, 109; A. D. 2세기).--> 아가파오(ajgapavw, 25)
2. 70인역본의 용법. 
명사 아가페는 70인역본에서 19회 나오며 아하바(160: 사랑)의 역어로 사용되어 연애(삼하 13:5), 남녀의 사랑(렘 2:2)에 대하여 주로 사용되었으며, 아가서에서 주로 나타난다(아 2:4 이하; 3:5, 10; 5:8; 7:6; 8:4 이하).
70인역본이 의미가 복잡한 에로스보다는 오히려 보다 단순한 단어인 아가페를 사용하는 것도, 인간의 모든 사상, 감정, 행위 그리고 예배가 하나님의 선행 작용에 대한 하나의 반응이기 때문이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명사 아가페는 신약성경에서 116회 나오며, '사랑, 애정, 호의, 자비심'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단어는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a)  아가페는 인간의 사랑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① 고전 8:1; 고전 13:4-고전 13:8; 빌 1:9; 롬 13:10; 마 24:12; 롬 12:9; 고후 6:6; 딤전 1:5; 요일 4:16; 고전 13:1-고전 13:3; 빌 2:2; 고전 14:1; 딤전 6:11; 딤후 2:22; 골 3:14; 벧후 1:7; 골 1:8; 살전 1:3; 고후 8:8; 히 10:24; 빌 2:1; 벧전 5:14; 몬 1:7; 롬 14:5; 엡 5:2; 골 4:21; 엡 4:15; 고전 16:14; 엡 3:17; 엡 4:2; 골 2:2; 살전 5:13; 엡 4:16; 갈 5:13; 갈 5:6; 몬 1:9; 살전 3:6; 살전 5:8; 딤전 1:14; 딤후 1:13; 몬 1:5; 엡 6:23; 딤전 2:15; 딤전 4:12; 딤전 6:11; 딤후 2:22; 딤후 3:10; 딛 2:2; 계 2:19; 고전 13:13; 골 1:4 이하; 살전 1:3; 살전 5:8; 딤후 1:7; 롬 12:9; 고전 6:6; 벧전 4:8; 갈 5:22; 롬 15:30; 골 1:8; 살후 2:10; 엡 1:15; 골 1:4; 살전 3:12; 살후 1:3; 고후 2:4; 고후 2:8; 벧전 4:8; 요 13:35; 고후 8:7; 고전 15:24.
② 하나님을 향한 사랑. 눅 11:42; 요 5:42; 요일 2:15; 요일 3:17; 요일 4:12; 요일 5:3; 살후 3:5; 고후 7:1; 히 6:10.
(b)  아가페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①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 요일 4:9; 요일 4:16; 롬 5:8; 요일 3:1; 엡 1:4이하; 엡 2:4; 고후 13:13; 요일 4:7; 고후 13:11; 요일 4:8; 요 15:9; 요 15:10; 요 15:13; 롬 8:35; 고후 5:14; 엡 3:19.
②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관계. 요 15:10; 요 17:26; 골 1:13.
(c)  아가페는 초대교회에서, 친교의 입맞춤이라는 형태로 표현되었다. 이 입맞춤은 회중 예배시, 하나의 정규적 순서였었다(예: 롬 16:16; "거룩하게 입 맞춤으로"[엔 휠레마티 하기오]). 벧전 5:14에서 "사랑의 입맞춤"(엔 휠레마티 아가페스)이라는 표현이 나타난다. 사실상 이 의식(rite)의 상세한 사항들은 전혀 알려지지 않고 있다.
(d)  유 1:12에서 복수 아가파이스는 "애찬"(love-feasts)을 의미한다: "저희는 기탄 없이 너희와 함께 먹으니 너의 애찬의 암초요 자기 몸만 기르는 목자요 바람에 불려가는 물 없는 구름이요 죽고 또 죽어 뿌리까지 뽑힌 열매 없는 가을 나무요".
이 애찬은 '초대 기독교인들이 그들의 예배와 관련하여 형제적인 사랑을 북돋우고 표현하기 위해' 함께한 식사를 말한다. 이단자들은 애찬에 참석하는 것을 자기네의 탐욕과 부도덕을 증진시키는 기회로 삼았으며, 심지어 고린도 교회는 이단자들로 인하여 분열되어 파당이 생기고 술취한 자들의 난장판이 되기도 하였다(고전 11:17-고전 11:22).(D. R. Rose).
[아가페는 초대 교회 의식들 중의 하나를 뜻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여기에 대해서는 단지 암시적으로 나타나 있을 뿐이다. 고전 11:17이하는 성찬식이 평상의 식사와 함께, 후에 "애찬"(love feast, 아가페)이 주의 만찬 자체로부터 분리되었으며, 그 본연의 위치에서 거행되었다(참조: 유 12; 벧후 2:13; Ign. Smy. 8:3; Clem. Alex., Paedogogus 2, 1).
그 차이점은, 설교가 행해지는 예배나 성찬식 예배의 중심이 기쁨에 찬 신앙의 선포였던 반면, 공동 식사의 주요한 의의는 그들이 아가페 속에서 함께 나눈 특별한 친교의 실시에 있었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분명히 이와 같은 예배는 신도들이 사회적 자선 행위를 통해 자기들의 사랑을 표현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참조: 행 6:1이하).
(W. Gunther; H.-G. Link, TBZNT)]
(e)  아가페의 헬라어 의미는 대등한 사람들간의 존경과 호의이다. 기독교의 아가페는 하나님과 그의 자비 앞에서는 모두 똑같이 가치없음을 자각함으로부터 비롯된다. 이 사랑(caritas)의 정신에 의해 형제들에 대한 태도와 교제가 결정된다. 따라서 이 새로운 형제애는 에로스로 인해 타락하고, 승화된 에로스에 의해 스스로를 초월하려고 헛되이 시도하는 세상 안에서 성장하여 간다. 바꾸어 말하면 바라지 않고 주는 사랑을 아는 교회가 성장한다. 감각과 초감각이 혼합된 신비적 사교들이 아 뮈스테리아 아가페스(사랑의 비밀)의 맑고 깨끗함 앞에 굴복한다.(E. Stauffer).
초대 교회에서 형제들과 자매들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던 여러가지 이름들은, 아가페(agape)에 기초를 둔 이 새 공동체가 그들 스스로를 하나님의 가족으로 이해했다는 증거이다.(W. Gunther, H.-G. Link).
(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E. Stauffer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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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rav(5479, 카라.) 기쁨, 즐거움 Joy.
1. 고전 헬라어의 용법 
명사 카라(Homer이래로)는 카이로(caivrw, 5463: 기뻐하다, 즐거워 하다)에서 유래했으며,
(a)  문자적으로는 '기쁨, 즐거움',
(b)  환유적으로는 '기쁨의 상태'와 '기쁨의 대상'을 의미한다.
2. 70인역본의 용법 
카라는 70인역본에서 50여회 나오며, 주로 히브리어 심한(기쁨, 즐거움)와 사손(기쁨, 즐거움)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3. 신약성경의 용법 
카라는 신약성경에서 59회 나타나며,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
(a)  문자적으로는 '기쁨, 즐거움'을 의미한다.
① 마 13:20; 병행구, 막 4:16; 눅 8:13에서 카라는 '말씀을 받는 (부정적) 기쁨을 표현한다: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마 28:8에서 제자들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두려움 뿐만 아니라 큰 기쁨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눅 1:14에서 사가랴에게 카라의 약속이 주어졌다: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요 많은 사람도 그의 남을 기뻐하리니".
눅 10:17에서 70인의 제자는 악령을 제어할 수 있는 예수님의 능력을 공유할 수 있었고 기쁨과 만족이 가득하였다: "칠십 인이 기뻐 돌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눅 15:7; 눅 15:10에서 카라는 잃은 것을 찾은 자의 기쁨을 나타낸다. 하나님께서는 잃은 자를 긍휼히 여기신다; 모든 것은 거기에 달려 있다. 하나의 죄인이 회개할 때 하늘에서 기뻐한다. 진실로, 잃은 양과 잃은 은전, 잃은 아들의 비유를 담고 있는 누가복음 15장 전체가 보여 주는 바는, 아버지께 돌아온 잃은 자에 대해, 예수님께서 인간들에게 자기와 함께 기뻐하라고 촉구하고 계신다는 것이다(눅 15:6, 눅 15:9, 눅 15:32).
눅 24:41, 눅 24:52에서 카라는 놀라움과 넘치는 기쁨을 표현한다: "41 저희가 너무 기쁘므로 오히려 믿지 못하고 기이히 여길 때에 이르시되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니"
"52 저희가 그에게 경배하고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가".
② 행 13:52에서 제자들은 성령께서 힘주심을 통해 핍박을 받을지라도 기쁨을 경험하였다: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
박해가 복음의 승리적 진행을 정지시킬 수 없다(행 20:24). 행 8:8에서 보면,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전파되고, 그들이 믿을 때, 그리고 이적이 나타날 때 거기에 해당된 사람들은 크게 기뻐하였다.
③ 요 3:29에서 카라는 '기쁨'의 충만이라는 중요한 특징을 표현한다: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
세례(침례) 요한은, "신랑" 즉 약속된 하늘의 진리의 계시자로 인하여 지금 기쁨이 충만해 있다(참조: 마 9:14이하).
요 15:11에서 예수님은 완전한 기쁨을 가지고 계셨으며, 이 기쁨은 제자들에게도 부여될 수가 있었다. 이것을 그는 아버지께 요청한다(요 17:13).
요일 1:4에서 카라는 하나님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사귐으로 가지는 기쁨을 표현한다: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로라".
요 16:22에서 카라는 장차 슬픔을 대신할 기쁨을 표현한다: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현재의 슬픔은 기쁨으로 변할 것이다. 이 종말론적 기쁨은, "어떤 황홀한 정신적 상태로 묘사되지 않고, 신자들이 더 이상 아무 것도 바랄 필요가 없는 상황으로 정의된다"(R.Bultmann).
④ 바울 서신들은, 기독교인의 기쁨은 슬픔과 고통과 근심 가운데서만이 얻을 수 있다는 역설적 의미를 증거하고 있다. 진실로 이와 같은 사실이야말로, 이 기쁨의 능력을 확실히 증명해 주는 것이다.
이러한 기쁨의 원천은, 단순한 지상적, 인간적 기쁨 너머에 있다. 그것은 엔 퀴리오 즉 주 안에 있는 기쁨이며 따라서 우리의 외부에 있는 것이다. 그것은 빌 1:25; 롬 15:13에서 그것은 "믿음과 기쁨"이다(빌 1:25; 롬 15:13). 그것은 소망, 믿음, 확신에 기초를 두고 있다. 이 믿음은, 모든 싸움과 두려움(고후 7:5)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를 통한 칭의(justification)를 확신하며(롬 8:31이하), 부활하신 주님으로서의 그의 재림을 고대한다. 믿음의 기쁨으로서, 그것은 또한 성령(→ 영 Spirit)의 → 열매 Fruit이기도 하며(갈 5:22), 성령 안에서의 기쁨이라고도 불린다(롬 14:17; 살전 1:6). 이처럼 기쁨은 하나의 영적 은사이며, 이러한 점에서 카리스(charis: → 은혜 Grace)의 개념과 근사하다.
고후 1:14에서 바울은 그는 고린도인들에게 "우리는 너희의 기쁨을 위해 너희와 함께 일한다"고 확언하였다. 고후 2:3에서 바울은 주 안에 있는 기쁨인(참조: 고후 13;11; 빌 3:1) 자기의 기쁨을 모두가 함께 나눠 갖도록 하기 위해 편지를 썼다.
고후 7:13에서 카라는 안심에서 오는 기쁨을 표현한다: "이로 인하여 우리가 위로를 받았고 우리의 받은 위로 위에 디도의 기쁨으로 우리가 더욱 많이 기뻐함은 그의 마음이 너희 무리를 인하여 안심함을 얻었음이니라".
바울은 그들을 이전에 엄히 책망했었으나, 그의 권면이 결국 유익한 효과를 가져왔기 때문에 그들에 대하여 다시 안심하게 되었다.
⑤ 히 10:34에서 카라는 극심한 박해와 위험을 초월하는 기쁨을 표현한다: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앎이라".
당시에 기독교인들에 대한 박해는 이미 극심한 경지에 이르러 교회의 존속 그 자체까지 위협을 받을 정도였다(참조: 벧전 4:13; 롬 8:17). 그러나 비록 물질적 재산을 빼앗겼다 할지라도, 그것이 그들의 기쁨까지 빼앗을 수는 없었다(이것은, 시 46편에 영감을 받은 루터의 찬송가 "견고한 성"(Ein' Feste Burg)의 마지막 몇 행이 잘 예증해 준다:
그리고, 우리의 생명, 재산, 영예, 자녀 아내까지, 그들이 취하여도 그것의 유익은 하찮도다;
이는 모두 사라질 것: 하나님의 도성의 영원함이여.
⑥ 약 1:2은 순교에 대해 기뻐하라는 기독교적인 가르침에 가깝다(참조: 약 5:41). 그러나 교회사상(敎會史上) 이것은 종종, 사실상 순교 그 자체를 위해 순교를 추구하는 것으로 변질되었다. 약 4:9이하에 대해서는, 그 말씀을 신약에서 말하는 구원의 믿음과 같은 것으로 잘못 생각하여, 율법주의적으로 해석하면 안 된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대한 순종으로써 그와 같은 견해는 배척된다. 왜냐하면 그러한 견해는 십자가 상에서 이룬 그리스도의 사역의 일회적, 영구적 가치를 부정하기 때문이다.
(b)  환유적으로는 ① 카라는 '기쁨의 대상'을 나타낸다. 빌 4:1에서 카라는 아무개의 기쁨이 되는 인격체에 대해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
살전 2:19이하에서 카라는 같은 용법을 나타낸다: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의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② 카라는 '기쁨의 상태'를 나타낸다. 마 25:21; 마 25:23에서 카라는 "주인의 즐거움" 곧 주께서 누리는 지복을 나타낸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마 25:21).
히 12:2에서 하늘의 하나님 우편에 있는 지복을 나타낸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그리스도 자신의 기쁨을 기꺼이 버리고 스스로 십자가의 부끄러움을 지셨다. 오직 그를 바라봄으로써 우리는 시험에서의 참음과 인내를 얻을 수 있다(히 12:2).
③ 카라는 '즐거운 잔치'를 나타낸다. 마 25:21; 마 25:23에서 카라는 '잔치',또는 '축하, 회식'이라는 의미도 가진다.(참조: E. Beyreuther; G. Finkenrath; Walter Bauer's GEL 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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