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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jgapavw(25, 아가파오) 사랑하다 love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일반 헬라어는 영어와는 달리 '사랑하다'를 의미하는 단어가 여러 종류이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들은 필레오(filevw, 5368), 스테르고(stevrgw), 에라오(ejravw), 아가파오(ajgapavw, 25) 등이다.
(a) 동사 필레오(filevw, 5368)는 사랑과 애정의 표현에 가장 널리 사용되는 단어이다. 이 단어의 여러 파생어를 보면 이를 명백히 알 수 있다. 이 단어는 관심, 돌봄, 환대, 사물에 대한 애착 등의 뜻을 함축하고 있다.--> 필레오(filevw, 5368)을 보라.
(b) 동사 스테르고(stevrgw)는 드물게 나타나며, '사랑하다, 애정을 느끼다' 등을 의미하며, 특히 부모와 자식 간의 쌍방의 사랑을 나타내는데 자주 사용되었다.
스테르고는 또한, 통치자에 대한 국민의 사랑, 인간에 대한 수호신의 사랑, 주인에 대한 개들(dogs)의 사랑을 나타내는데 사용되었다. 남편과 아내의 사랑을 나타내는데는 별로 사용되지 않았다.
이 단어는 신약성경에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다만 합성어 아스토르고스(a[storgo", 794, 롬 1:31; 딤후 3:3)와 필로스토르고스(filovstorgo", 5387, 롬 12:10)가 나타날 뿐이다.
(c) 동사 에라오(ejravw)와 명사 에로스(e[rw")는 신비 종교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 기독교인들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에라오는 '정열적으로 사랑하다, 욕구하다, 그리워 하다'를 의미한다. 에로스는 '정열적인 사랑'이란 의미를 지닌다.
에로스적인 사랑은 자신을 위해 다른 사람(것)을 원하거나 갈망하거나 사랑하는 정열적인 사랑이다. 이 사랑은 남·여의 사랑, 또는 어떤 대상에 대한 갈망, 열망, 욕구를 나타낸다. 특별히 관능적이고 선정적인 양상을 띤다.
① 모든 시대에서 헬라인들은 육감(관능)적으로 즐거워하는, 하급 신(神), 곧 광란적인 에로스를 열렬히 찬양하는 것이다. 그들이 찬양하는 에로스 신(god)은 모든 것을 강제하지만 어느 누구에 의해서도 강요당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헬라인이 에로스에서 추구하는 것은 도취(intoxicaion)와 황홀이며, 이것은 그에게는 신앙(종교 religion)이다. 그에게 있어서 반응은 하늘의 능력들이 주는 최고의 선물이다(Soph, Ant 683이하). 그것은 인간성의 성취이다.
그렇지만 그 반응은 무아경적인 흥분(광란)으로 나타난다(한편 때때로 증오와 더불어 나타나기도 한다). 오로지 반응에 목적을 두고 완전히 감각 또는 감정적으로 몹시 흥분하는 에로스는 모든 인도적 인간성의 표준과 형태를 파괴한다. 관능적 환락(sensual ecstasy)은 중용(moderation)과 균형(proportion, 조화, 바른 관계 등)을 저 멀리 내버려두고 돌보지 않는다.
헬라의 비극작가들은(Soph, Ant. 781이하) 환락(ecstasy, 황홀)에 점점 빠지게하여 이성과 의지와 판단력을 상실하게 하는 에로스(사랑의 신의 이름은 역시 에로스이다)의 불가항력적인 힘을 알고서, 그것을 광신만큼 무서운 것으로 평가했다.
그것은 하나의 신(a god)이며 신들보다 능한 것이다(Eur. Fr., 132, Nauck). 하늘과 땅의 모든 힘은 에로스의 한 최고의 힘과 비교하면 제 2급의 힘들이다. 그것의 전제적인 힘에 사로잡힌 자들에게는 어떠한 선택도, 의지도, 자유도 무시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것에 지배를 받는데서 최고의 희열(행복)을 얻는다. 우리는 여기서 에로스의 어떤 신비한 힘을 찾아볼 수 있다.
② 이러한 에로스는 신비 종교들에서 더욱 무서운 것으로 나타났다. 이 관능적인 도취의 데모니즘(demonism)이 종교적 광신과 함께 행해지는 곳에는 반대로 신앙(religion) 자체가 이 황홀경(ecstasy)에서 경험의 최고점(절정)을 추구한다.
창조적 에로스는 다산을 기원하는 풍요제 의식들의 중심이며, 매춘(prostitution)은 큰 여신들의 신전에서 유행했다. 때때로 동양권에서 행해졌다. 그래서 색정적인 그림과 상징들이 많이 사용되었다. 신화에서 이야기한 신들과 사람들간의 성적 결합은 이러한 예찬(cultus)에서 그 현실적 실현에 도달했다. 이런 신전 혼인에서 그 신자들은 신들의 세계와 육체적인 결합을 경험한다. 신앙과 황홀은 종교적으로 변질된 에로티시즘(eroticism=호색)에서 함께 만나 결합한다. 이런 현상은 한국의 신비종파나 사이비종파에서 찾아볼 수 있다.
③ 헬라인들은 에로스를 더 신비적으로 이해했는데 그것에 의해 그들은 보통 사람이 지니는 인간적인 한계를 넘어 완전에 이르고자 노력했다.
헬라인들이 에로스에서 추구하는 도취는 필연적으로 관능적인 것이 아니다. 이미 헬라의 비전(mysteries)에서 때때로 신비주의에서 그렇게 한 것처럼 에로틱(erotic)의 개념들은 많은 방법으로 육감이나 관능 이상과의 만남에 대한 상징으로 영화된 것이다.
플라톤에 있어서 에로스는 생의 최대의 성취와 향상의 전형(epitome)였다. 그에게 있어서 에로스는 이성의 작용(합리성)을 넘어 사람을 기뻐 날뛰게 하는 황홀이며, 자연적 필요를 충족시키는 원천이며, 최종적으로 창조적 영감을 산출하는 것이다. 에로스를 타오르게 하는 육체적 아름다움은 모든 사랑하는 것에서 의도하고 찾는 선한 하나님 자신을 가리키는 지표이며, 영원한 존재와 진정한 선을 가리키는 지표이다(Symp, 2,100이하). 그에게 있어서 에로스란 의와 감정 억제와 지혜의 습득을 위한 분투, 바로 그것이었다. 그것은 또한 선의 구현이자, 불멸을 얻을 수 있는 길이기도 했다(Symp. 200, 206; Phaedr. 237ff, 242ff). 플라톤은 결정적으로 에로스를 모든 육감(관능)적인 것보다 높인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는 이와 유사하게 에로스를 단순한 경험적인 것에서부터 자유케 하여 발전시켰다. 그에게 있어서 그것은 질서와 운동을 유지시키는 원초적 원리인 견인력으로서의 우주적 기능이다. 따라서 내적으로 세계를 전체적으로 유지시키고 있는 이 사랑은 더 이상 도취와 아무 관계가 없다. 그것은 성격상 엄밀히 의지에서 나온 행동이다.
플로티누스(Plotinus)에게 있어서 진정한 에로스, 모든 사랑을 의미하는 것은 감각과 이성을 넘어 탁월함에 이르고, 모든 한계를 넘어 합치점에 이르는 영혼의 충동이다.
그 시대의 사회 생활에서 비밀 주신제(orgies)를 벌리는 에로스는 신들의 신화에 나오는 감정을 자극하거나 흥분시키는 체험들(사건)을 얻으려하고, 신전들에서 그러한 체험들에 이르게 한 것이다.
맥시무스(Maximus)는 인도적으로 발전시키었다. 플로티누스는 그것을 신비적으로 승화시키고 영화하여, 초자연적 지배자와 영적 결합을 하려는 신비적 열망으로 발전시키었다(Enneads).
초대교회의 시기에 그노시스(Gnosis)는 이런 접근법에 위치하여 자아 초월에 대한 인간 욕망이라는 특별한 경향을 나타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동일한 에로스, 인간 자신의 생활을 초월하는 것에 대한 자연적 충동이다. 여기서 에로틱한 종교의 원형은 관능적 도취이며, 최고 형태의 황홀이다.
에로스는 구약성경에서 잠 7:18("오라 우리가 아침까지 흡족하게 서로 사랑하며 사랑함으로 희락하자")과 잠 30:16("음부와 아이 배지 못하는 태), 이 두 곳에만 사용되었다. 신약성경에는 한 번도 사용되지 않았다.
(d) 그리고 아가파오와 아가페가 있다. 아가파오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충분히 설명한다.
2. 고전 헬라어 문헌에서 아가파오의 용법.
동사 아가파오(ajgapavw, 25)에서 헬라인은 에로스의 이상한 힘이나 마력(magic)을 느끼지 못했으며, 필레오의 따뜻함이나 열정도 거의 느끼지 못했다.
그 어원은 불확실하며, 그 의미는 근거가 약하고 가변적이다.
(a) 때때로 아가파오는 "어떤 것으로 만족하다"란 의미를 지닐 뿐이다.
(b) 때때로 외적 태도에서 이 동사는 "환영하다, 인사하다, 경의를 표(존경)하다"를 의미하며,
(c) 내적 태도에서 "어떤 것을 구하다, 어떤 사람이나 어떤 것을 요구하다"를 의미한다.
(d) 이 동사는 때때로 동료 끼리의 호의, 우정을, 혹은 때때로 동정을 의미하는데 사용되었다.
아가파오의 특별한 성격을 몇몇 실례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을(~보다) 좋아하다, 선택하다, 다른 것보다 위에 한가지 선이나 목적을 두다, 다른 사람보다 한 사람을 더욱 높이 평가하다, 존중하다"를 의미한다.
이렇게 아가파오는 하나님이 어떤 특별한 사람을 좋아하는 것(애호)에 대해 사용될 수 있다. 드물긴 하지만 이 단어가 신의 총애를 받은 사람에 대해 언급할 때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볼 때(Dio. Chrys., 33:21) 분명히 에라오(ejravw)와는 달리, 재물이나 재산을 얻고자 하는 인간 자신의 욕망이 아닌, 타인을 위한 관대한 행위를 뜻하는 말이라 하겠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아가페)을 받은 자는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아하는 위치를 차지한다. 그는 특별한 선물과 재물로 하나님의 복을 받는다.
아가파오의 특성은 이 점에서 확실히 보이는 것이다. 에로스는 만족을 얻을 수 있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찾는 일반적인 세상적인 사랑이다. 아가파오는 분명히 그 대상을 선택하여 지키는 구별을 두는 사랑이다.
에로스는 그 대상에 대한 다소 불확정한 충동에 의해 결정된다. 그러나 아가파오는 그 주체에 의해 자유로이 결정된 결정적인 행동이다.
에로스는 그 최고의 의미로서, 인간의 위쪽으로 향하는 충동, 곧 신에 대한 인간의 사랑에 대해 사용된다. 아가파오는 주로 하나님의 사랑, 보다 높은 자가 보다 낮은 자를 들어올리는, 보다 낮은 자를 다른 사람보다 위에 높이는 사랑이다.
에로스는 다른 것들에서 자신(의 생명)의 주림의 충족을 찾은 것이다. 아가파오는 때때로 "사랑을 베풀다"라고 번역되어야 한다. 그것은 다른 사람을 위하여 주는 능동적 사랑이다.
이 동사는 무엇보다 형용사 아가페토스가 사용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사용되었다. 아가페토스는 동사와 같은 의미의 뉴앙스를 지니고 있으며, 합당한 사물이나 친애하는 자에 대해 사용되며, 특히 부모의 온갖 사랑을 독차지하는 독자(only child)에 대해 사용되었다.
아가파오는 에라오이나 퓔레오과 교환적으로 사용되거나 결합될 때 그 의미나 개성이 여전히 유동적이며 애매하다. 이런 경우에 아가파오는 때때로 단순한 동의어로서 강조나 다양한 표현 때문에 다른 두 단어와 나란히 위치해 있는 것이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플로티누스(Plotinus)에서 아가판은 자기를 (겸손히) 낮추는 사랑에 대해, 에란은 높이 올라가는 사랑에 대해 의식적으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호머로부터 플로티누스까지 에로스는 계속적으로 시인과 철학자들의 사색이나 연구의 주제가 되어온 반면에 아가파오는 거의 언제나 기본적인 토의 주제로도 나오지 않는다. 명사 아가페는 성경 외에서는 단 한번 여신 이시스(Isis)를 아가페라는 칭호로 부른 것이다.
우리가 살펴본 바 성경 헬라어 이전 문헌에서 아가파오의 특성을 알 수 있으며, 우리는 이 특성을 성경 헬라어 아가파오란 단어에서 찾아볼 수 있다.
3. 구약 및 70인역본의 용법.
구약성경에서 사랑을 뜻하는 중요한 히브리어 동사는 아헵이며, 그 역어로서 아가파오가 주로 사용되었다. 이 동사에서 유래한 명사 아하바의 역어로는 아가페가 주로 사용되었다.
구약성경에서 사랑은 그 사람을 강요하여 그가 좋게, 또는 올바르게 평가하거나 인정하는 사물이나 사람에게로 이끌어 가는 자발적인 힘이다. 사람은 이 사랑의 힘에 제어를 받아 자기 자신을 주거나 혹은 사랑의 원인이 되는 대상을 확고히 붙잡거나 혹은 즐거움을 주는 행동을 하는 것이다. 사랑은 내적 인격에 심은 영혼의 불가해한 힘이다.
사람이 사랑의 대상을 올바로 인정하면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사랑한다(신 6:5). 사랑과 미움은 생의 양극이다(전 3:8; 전 9:6).
사랑은 인간 상호간의 사랑, 하나님의 인간과의 사랑, 사물에 대한 사랑 등을 나타낸다.
(a) 이 단어는 남녀의 사랑에 대해 사용되었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남자와 여자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인간의 하나님과 관계, 그리고 남녀의 성적 관계를 시사해 준다. 이 남녀의 사랑은 이성(sexes) 상호간의 생명력 넘치는 충동을 의미한다. 선지자 예레미야(렘 2:25)나 호세아(호 3:1; 호 4:18), 그리고 에스겔(겔 16:37)은 사랑의 성적(sexual) 측면을 매우 진하게 묘사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이것은 단순히 성욕 및 성행위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 단어는 남녀의 연애나 열애(창 29:18이하; 창 34:3; 삿 16:4), 합법적인 부부의 행복한 사랑(창 24:67; 삼상 1:5)을 묘사하는데 사용되었다. 창조의 기사는 성의 구별과 부부간의 사랑이 생을 풍요하게 하는 은사임을 설득력있게 이해시켜 준다(창 2:18이하).
「그러나 이 사랑은 성적 사랑의 범위를 포함하지만 그것으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다. 오히려 헌신적 사랑과 생활의 충실함이 합쳐져 있다. 구약의 초기 기록에 의하면 이러한 사랑은 일부다처나 일처다부 사상과 부합하지 않는다.
구약성경은 충실(참조: 창 20:13; 삿 14:16; 삿 16:4-5; 겔 16:8; 겔 23:17; 호 3:1), 상호의존(참조: 창 24:67), 책임(참조: 삼하 13:1, 4, 15)과 같은 인간 사랑의 다른 측면을 제외하고 성적인 것에 집중하는 위험을 이해시켜 준다(The interpertreter's D.B).」
더 나아가서 아가서는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다"라고 열정적인 사랑의 강력한 힘을 찬양까지 한다. 이 노래는 성적(남녀) 사랑의 기이함과 적극적인 힘을 찬양하지만 그 찬양에는 그 사랑이 근거를 두고 있는 상호의존과 신앙심(헌신)을 강조하고 있다(참조: 아 2:16; 3:1-8; 7:10; 8:6-7). 아가서에서 사랑을 묘사할 때 거의 대부분 아헤브(아가파오)와 아하바(아가페)를 사용했다. 그러나 여자가 남자를 부른 칭호는 도드(히 1730: 사랑하는 자)를 사용했다.
이러한 사랑에 반대되는 것으로서, 암논과 다말의 이야기는 성충동의 야수성, 즉 대상자와 성적 관계를 가지려는 무절제한 요구를 보여준다(삼하 13:1-22). 사랑은 성애 또는 성욕적인 영역에서 세상이 알지 못하는 근원, 곧 마귀로부터 기인한 원시적 힘인 미움을 부인함으로 맞서는 적극적인 능력이다. 이 이야기는 이 두가지 충동의 야수성도 투명하게 보여준다(삼하 13:1-22).
결혼이나 부부 생활은 상대에 대한 사랑 없이도 이루어질 수 있다. 삼손의 신부의 "당신이 나를 미워할 뿐이요 사랑치 아니하는도다"라는 히스테릭한 말에서(삿 14:16; 참조: 삿 16:15; 창 29:31, 33) 동일한 요소가 표현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심지어 법까지도 사랑과 미움의 성욕적 증상에 관여하고 있다(신 21:15이하; 22:31이하; 24:1이하).
(b) 이 단어는 부모와 자식, 가족간의 사랑에 대해 사용되었다. 아브라함은 독자 이삭을 사랑했으며(창 22:2), 리브가는 아들 야곱을 사랑했다(창 25:28). 야곱은 요셉과 베냐민을 사랑했다(창 37:3; 44:20). 잠언은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경계하느니라"고 했다(잠 13:24).
또한 이 단어는 며느리의 시어머니를 향한 사랑과 같은 가족간의 사랑을 표현한다(룻 4:15).
부모에 대한 자식의 사랑은 어느 곳에도 언급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그들은 부모를 존중하고 존경하며 또 부모에게 복종해야 한다.
「참고-창 47:29에 보면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인애(헤세드: 친절, 자비; 70인역본 )란 단어를 사용하여 자기에게 친절을 베풀어 주기를 요청했다. 이것이 부모에 대한 자식의 사랑의 표현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족속이나 가족의 유대는 이스라엘에서 매우 강하였다. 그러므로 '근친' 관계의 중요한 요소인 사랑에 대하여 놀랄 일이 아니다. 그것은 룻 3:10에서 이성 곧 남녀 사랑과 관련되어 있다. 그곳에서 인애(헤세드: 친절, 자비; 70인역본 ejleo")는 남녀 사랑의 개시와 가까운 친족에 대한 충실, 이 둘을 포함하고 있다.」
성경은 가족적 사랑이 너무 선택적일 때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삭은 에서를 사랑하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했다(창 25:28). 그 결과로 야곱과 에서가 서로 반목하고 미워하게 되었다. 요셉에 대한 야곱의 편애로 인하여 다른 아들들이 요셉을 미워하고 시기하게 되었다(창 37:4). 배타적인 사랑은 증오가 들어올 수 있는 지점이 될 수 있다. 이는 사랑이 헌신적일 뿐만 아니라 책임을 다 해야 하기 때문이다.
(c) 이 단어는 친구의 특별한 애착을 나타낸다. 다윗과 요나단 사이의 사랑은(삼상 18:1, 3; 20:17) 여인의 사랑보다 더 깊은 우정의 차원이었다-"그대가 나를 사랑함이 기이하여 여인의 사랑보다 승하였도다(삼하 1:26).
(d) 더 나아가 이 사랑은 사회적 공동 생활의 근본과 규범으로 나타난다-"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레 19:18). 이러한 면에서 사랑은 이웃을 위한, 그리고 이웃을 향한 헌신이며, 이웃을 형제로서 받아들이는 것이고 이웃이 당연히 받아야할 대우를 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은 특히 외국인(레 19:34)과 가난한 자(레 25:35)와 고아의 권리와 관련된 사회적 법률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이웃 사랑은 단순한 친절이나 호의로 해석할 수 없다. 이것은 편협한 배타주의를 배제한다.-바로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은 누구나 이웃이다. 궁극적으로 이것은 인간의 입장에서 볼 때는 적(enemy)으로 생각되는 것같은 사람들에 대한 사랑도 의미한다.
그 이유로 신 22:1-4이 동포를 도울 의무를 부과하는 것인 반면, 출 23:4-5은 특별히 이 의무를 적대적인 사람에게 적용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웃은 동료일 수도 있고 적일 수도 있으므로, 그는 사랑의 대상이지 법적 제한의 대상이 아니다. 이것은 인간으로서의 개인은 법적 개인보다 우선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형태에서 출 23:4이하의 요구와 아마도 한층 더 높은 수준인 잠 25:21에 있는 기본적 진술("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식물을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마시우라")은 원수를 향한 성향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지 않으나 한 특별한 방식의 행위의 의무를 지우는 것으로서, 원수에 대한 사랑을 실천적으로 가르치려고 한 것이다. 요셉은 그의 이야기에서 하나님께서 순종하는 선으로 악을 갚는 그런 실례를 보여준다(창 50:19).
물론 구약성경에는 이러한 원수를 사랑하는 것에 한계가 있다. 시 109편과 잠 14:20 및 적대 국가들에게 향한 일반적인 태도는 이에 대한 예증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 의해 부과된 윤리적인 요구의 고결함은 여전히 존재한다.
(e) 이 단어는 구체적인 것이나 추상적인 것들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데 사용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기름(잠 21:17), 은과 풍부(전 5:10), 뇌물(사 1:23)을 사랑했다. 다른 사람들은 악(시 52:3-5), 사망(잠 8:3), 허사(시 4:2-3), 거짓 맹세(슥 8:17)를 사랑했다. 또 다른 사람은 하나님의 계명(시 119:47), 율법(시 119:97), 증거(시 119:119), 법(119:159), 그리고 그들은 선(암 5:15), 진실과 화평(슥 8:19), 구원(시 40:16-17)을 사랑했다.
4.신약성경에서 아가파오의 용법.
동사 아가파오는 신약성경에서 143회 나오며, 요한의 기록(요한복음에 37회, 요한1-3서에 31회, 요한계시록에 4회)에 가장 자주 나타난다.
1. 공관복음의 용법.
(a) 예수님은 새로운 사랑을 요구하신다. 예수님께서 요구하신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두 계명에 기초하고 있다(마 22:36-마 22:40; 병행구, 막 12:28-막 12:34). 이 두 명령은 신 6:5과 레 19:8을 결합시킨 것이다. 첫째 부분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라는 명령이다. 예수님은 분명히, 의식적으로 그의 백성의 도덕적 전통의 입장을 취하신다. 그러나 그가 요구하는 사랑은 오로지 모든 다른 계명을 그 사랑에 이르게 하고 모든 의가 그 표준을 그 안에서 찾는다는 것을 뜻하는 사랑이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사랑은 의지와 행위의 문제이다. 그러나 그가 듣는 이들을 놀라게 하는 것은 무조건적인 태도로 하나님을 위해 오직 하나님만을 위해 결단하고 준비되어 있기를 요구하신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가능성을 근본적인 양자택일에 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주인의 노예처럼 그를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다(참조: 눅 17:7). 그것은 충실히 유순하게 그의 명령을 듣는 것이며, 스스로를 그의 지배 아래 두는 것이며, 다른 그 무엇보다도 이 통치의 실현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다(참조: 마 6:33). 한편 그것은 그의 전 존재의 근거를 하나님에게 두며, 전적인 신뢰로 그에게 매달리며, 모든 관심과 책임을 그에게 위탁하며, 그의 손에 의해 사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지도 않고 하나님을 섬기지도 않는 모든 것은 미워하고 멸시하는 것이며, 다른 모든 인연과의 관계를 끊는것이며, 방해되는 모든 것을 잘라버리는 것이며(참조: 마 5:29이하), 오직 하나님과 묶는 것 이외의 모든 구속을 끊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두 세력, 즉 재물과 허영은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포기하거나 싸워야 하는 세력들이라고 특별히 언급하신다. 재물을 중히 여기고 부를 축적하려는 자는 하나님의 왕국에서는 아무 쓸모가 없는 믿음이 적은 불신자이다(마 6:24b; 마 6:30이하).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에 대해 "화 있을찐저 너희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을 기뻐하는도다(문자적으로 '사랑하는도다')"라고 화를 선언하신다(눅 11:43). 명성에 대한 사랑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양립할 수 없다.
또 하나 아직 이 사랑을 위협하는 세 번째 위험, 즉 박해에 대한 긴장이 있다. 제자직에는 고난이 수반된다. 아키바(Akiba) 같은 위대한 유대인 순교 신학자들처럼 예수님께서는 부득이 그의 ┻湧?당할 폭행과 고통과 모욕과 수난이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충성에 대한 중대한 불 시험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아시고 말씀하신다(참조: 마 10:17이하; 마 5:10이하). 큰 최후의 고통이 인간에게 다가올 때가 있다(참조: 마 5:29이하; 마 24:10이하; 마 24:12이하). 이 말씀에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특성은 순수하고 단호하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강렬한 열정이며 모든 혼란과 권세와 위협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사랑하는 주님이 나타나실 때까지 굳게 인내하는 적은 무리들의 열정이다.
그리고 제자로서 고난을 받을 때, 하나님의 인정을 받게 된다(참조: 마 10:37이하; 마 25:31이하; 눅 6:22이하). 이와 같은 요구는 사랑이 직면해야 할 고난을 뜻한다. 사랑이란 고난을 통해서만 이 세상에서 이룰 수 있다. 사랑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자기의 가장 사랑하는 이를 희생시키게 하였다면, 그의 제자들에게도 분명 이 사실이 적용될 것이다.
(b) 다음에 예수님께서 이웃에 대한 사랑을 명령하신다: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마 22:39; 병행구 막 12:31).
이 둘째 부분인 이웃 사랑의 계명은 롬 13:9; 갈 5:14; 약 2:8에도 인용되어 있다. 문자적으로 '둘째는 그것과 같이 너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이다'로 번역할 수 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예수님께서 명하신 근본적인 큰 요구이다. 그것은 인류 속에서 새로운 실재를 창조하는 하나님의 사랑으로서, 이 사랑 자체가 인간 상호간의 사랑의 기초이자 동기이다.
랍비 아키바(Akiba)는 이웃 사랑의 계명이 토라(Torah)의 기본 원리이며, 여타의 모든 것들이 이 속에 함축되어 있다고 하였다(참조: 마 22:36이하에 관한 SB I 900-8).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 안에 이런 명령을 덧붙여서 실체화한 것은 신약성경의 특징이다.
예수님은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하라"는 구약성경 및 유대인의 요구를 받아들이시지만 그러나 동포에 국한하는 이웃 사랑에 대한 제한을 단호하게 제거하신다. 그는 또한 이웃 사랑을 우리의 길에서 만나는 의지할 데 없는 사람에게 집중시킨다.
이웃 사랑에 대한 이해를 위해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눅 10:29이하). 서기관은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라고 묻는다. 예수님께서는 나에게 가장 가까운 동포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외국인에게 이르기까지의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의 체계적인 목록을 제시함으로써 답변하지 않으신다(Philo, supra, 40). 또한 모든 사람들이 형제들이라고 하는 가장 멀리 있는 자들에 대한 별난 사랑을 칭찬함으로 대답하지도 않으신다. 그는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에게 가장 가까이 있는 이가 누구인가?"라고 역으로 질문하심으로 노미코스(nomikov", 3544)의 질문에 대답하신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나를 중심에 두고 동심원을 그리는 이전의 그룹 짓기를 산산이 부수는 한편 유기적인 이웃의 개념을 내세우신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 개념에 의해 당신이 중심에 있다는 새로운 그룹 짓기를 시작한다. 그러나 이 체제는 모든 사람과 장소에 도식적으로 적용되는 체계가 아니다. 그것은 오직 절대적인 결합체로 구성된다. 그것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의 둘레에 겹겹이 형성된다. "마침" 어려움에 처한 사람의 가장 가까이에 서 있는 자는 누구든지 똑같이 그에 대하여 이웃의 의무를 지닌다. 세 사람은 똑같이 강도들을 만나 고통하는 사람 가까이에 있다. 그들 중 누가 이웃의 의무를 이행하는가? 이방의 사마리아인이다. 왜인가? 보고 불쌍히 여긴 것이다. 마음이 최종적인 결정을 한다. 마음이 타인의 고통을 알아내는 자가 그의 이웃의 의무를 이행한다. 결정적인 순간에 다른 두 사람은 주저하였으므로 그들의 이웃으로서의 의무를 위반한다. 그러나 이 불쌍히 여김의 도입이 이웃 사랑에 있어서 감정의 낭비를 내포하지 않는다. 요구되는 것은 최대한 감정에 흐르지 않고, 가장 비감상적으로 도움을 위해 준비되어 있는 것이다. 사마리아인은 매우 침착하게 가까운 앞날을 대비하면서 그 순간이 요구하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행하지 않았다. 그는 모든 것을 허비하지도 않고 그 의무와 타인의 죄에 대하여 쓸데없이 말하지 않는 자비를 베푼 것이다. 그는 해야만 하는 것과 그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사람이다. 이것이 이 이야기에 피할 수 없는 절박함을 부여한다.
(c) 예수님은 의식적으로 유대의 전통과 대립하는 요구로서 '원수를 사랑하라' 말씀하신다. 마 5:43이하와 눅 6:32이하의 간결한 말씀에서 그 요구에 대한 3중의 결정을 볼 수 있다.
첫째로 그것은 새 시대의 새 요구이다("옛 사람에게 말한 바...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마 5:21; 마 5:43).
둘째로 그것은 칭찬(카라스)을 지적한다("삼", "더하는 것",마 5:46 이하).
셋째로 그것은 "죄인들"(세리들, 이방인들, 마 5:46 이하)과 날카롭게 구별되는 "듣는 자들"에 적용된다(눅 6:27).
예수님께서 요구하신 원수에 대한 사랑은 이 세상과 세대의 자녀들에 관하여, 그 미래가 그들에게 속한 하나님의 새 백성의 자녀들의 태도이다. 그들은 되돌려 받는 것을 기대하지 않는 사랑을 보여주어야 하며, 상환의 가능성이 거의 없는 곳에서 빌려주어야 하고, 제한없이 주어야 한다. 그들은 세상의 적의도 기꺼이 저항없이 희생적으로 감수해야 한다(눅 6:28). 참으로 그들은 그들을 미워하는 자들에게 선을 행해야 하며, 저주하는 자를 위해 축복해야 하고 그들을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눅 6:27 이하; 마 5:44). 이들 요구 중 몇몇에 대해서 랍비의 세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이 완전하고 단호한 강령과 비교해 볼 때 전혀 중요하지 않다. 하나님의 옛 백성, 유대인 공동체의 순교자의 정신조차도, 아직 들어보지 못한 이 순교의 의지에는 훨씬 못 미친다. 여기서 한 새로운 중재가, 순교자의 과업, 즉 하나님을 미워하고 그의 신실한 백성을 멸하는 적대적인 세상을 위한 중재가 이루어진다.
이상주의자들은 항상 있어 왔다. 그러나 여기에서 환상이나 감상적인 생각없이 이웃 사랑의 이상을 현실 속에 전하신 자가 말씀하신다. 그는 모든 사람들이 해야하고 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와 같이 흔들리지 않는 진지한 어조와 현실 감각을 가지고 이 불가능한 요구들에 대해 말씀하신다. 항상 형제 사랑과 보다 좋은 세계에 대한 열광주의자들이 있어 왔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을 아시며 그러므로 오로지 사랑에 근거를 둔 세계 안에서 사는 삶을 요구하신다. 그는 냉철한 현실성과 확신을 가지고 그렇게 하신다.
예수님은 구약성경에 나타난 미움과 원수에 대한 유대인의 견해를 지적하고 있다. 그들은 레 19:18에 대하여, 동족의 자손들에 대해 분노와 복수의 감정 같은 것은 금지되나 다른 백성들에 대해서는 금지되지 않는다고 해석하여, 시 139:19-22과 시 140:9-11과 같은 구절을 그들의 원수들을 미워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예수님은 사랑을 이웃에게 제한한 레 19:18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심지어 원수까지도 이웃 사랑의 대상에 포함시킨다.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의 원수들을 이전의 미움과는 대조적으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계명을 더 이상 확장시키지는 않았으며, 사랑에 관한 율법을 복음의 가르침 아래에 두었다. 이 복음의 가르침은 눅 10:29-눅 10:37에서 분명히 설명된다. '곤경에 처해 있는 자는 누구든지 항상 나의 이웃이다'는 진술은 '나의 이웃은 나에게 자비를 베푼 자이다'는 진술에 부속하고 뒤따른다(참조: 눅 10:37). 바르트는 그의 중요한 신학적 해설에서 내가 누구를 사랑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어리석은 짓임을 강조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전의 원수였던 사마리아인은 나에 대한 그의 자비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나의 이웃이 되었으며 따라서 나로 사랑으로 행하도록 도전(요구)하였기 때문이다(눅 10:37). 다른 말로 하면 사랑 받아본 경험이 도전을 앞서며, 복음이 명령을 앞선다. 그 이유는 예수님 자신이 이 비유의 열쇠가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를 보고 불쌍히 여기는 사마리아 사람의 모습을 통하여 예수님의 모습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 자비로운 구속(십자가)의 사랑을 경험한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d) 예수님께서 새로운 상황을 창조하셨기 때문에 사랑에 대한 그의 요구는 당연한 것이다. 그는 모든 것을 변화시키는 새로운 사건인 하나님의 자비를 선포하신다. 그는 죄사함을 가져오시고, 그것을 경험한 사람들 속에서 새롭고 넘치는 사랑이 흘러 나온다. 이러한 사랑은 모든 생명과 활동에 충만하여 그들을 지도한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새로운 관계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한, 그리고 서로간의 새로운 관계 속으로 들어가게 하였다(눅 6:36이하). 이것은 자비의 관계요 화해의 관계이다.
2) 바울 서신의 용법.
(a)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로 말미암아 창조되는 새로운 상황을 분명히 깨닫고 묘사한다. 이제 바로 동트는 새 시대에 대한 로마서의 주요한 논제는 하나님을 향한 선택된 자들의 사랑으로 시작해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나아가고 마침내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아가페, 롬 8:39)에 대한 확신으로 끝맺는 하나의 찬양에서 절정에 달한다(롬 8:28; 롬 8:31이하). 이 확신은 세 가지 사실에 근거한다.
첫째, 하나님께서 그의 독생자를 보내시고 이 사랑의 행위가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롬 8:27), 곧 아들께서 자신을 제물로 드림으로 십자가 위에서 성취되었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사도를 부르시고 계속해서 그가 택하신 자들을 부르신다. 그의 사랑의 의지가 그들에게 향한다.
셋째, 하나님의 아가페를 우리의 마음에 널리 흐르게 하시며, 그리하여 그 사랑을 결정적으로 경험하게 되고 우리의 삶 속에서 현실된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활동을 하나님의 활동과 구분하지 않으시고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었던 죄를 용서하시는 일을 하신 것과 같이,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을 근본적으로 그리스도의 사랑과 동일한 것으로 여긴다(롬 8:37; 살후 2:16).
하나님의 사랑의 행위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행위 속에서 계시되고 실행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아가페)을 확증하셨"다(롬 5:8).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은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건이 된다. 바울은 이런 변화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준동사형(verbal forms)으로 말하고, 항상 부정과거형으로 말한다(롬 8:37; 살후 2:16; 갈 2:20; 엡 2:4; 엡 5:2).
하나님의 사랑은 선택을 의미한다. 바울은 사랑함과 미워함, 택함과 거절함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에 대해 언급하는 구약의 말씀을 인용하고(롬 9:13; 롬 9:25), 형식상의 병행절에서 아가페토이(사랑하심을 입은 자들)와 클레토이(부르심을 받는 자들)(롬 1:7) 또는 에클렉토이(택하신 자들)와 에가페메노이(사랑하신 자들)까지도 사용한다(롬 1:7; 골 1:12). 선택적인 사랑의 개념에 미리 예정하심(pre-temporal ordination)과 그리스도 사건의 표적(sign)에서 현재적(temporal) 부르심에 대한 두 가지 근본적인 사상이 표현되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하다: "주의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살후 2:13; 엡 1:4이하[아가페]).
하나님께서 그의 크레스토테스(crhstovth", 5544: 선하심)와 아포토미아(ajpotomiva, 663: 엄위)에서 이제 죄인들의 무리로부터 구별된 선택받은 공동체는 하나님과의 영속적인 친교에서 사랑과 평화를 누린다. 그 가운데에서 하나님은 살아있는 능력으로 일하고 계신다(롬 8:35; 고후 13:11이하). 사랑은 우리를 포로로 사로잡는다(고후 5:14). 더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다"(롬 5:5). 이 새롭고 살아있는 능력의 실체는 이들 바울의 말보다 더 설득력있게 표현될 수 없다.
바울 서신의 하나님의 아가페(ajgavph, 26)의 개념의 의미는 명백하다. 그것은 인간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의지와 이 세상의 구원을 지향하는 것(orientation)이다. 사랑의 행위는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목적하시는 것이다. 아브라함 시대부터 하나님께서는 율법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난 자유로운 백성을 미리 아셨다. 그는 아들을 보내시고 최종적으로 성령을 보내심으로 이 백성을 창조하셨다. 그러나 이 성령은 갈라디아서의 위대한 마지막 부분(갈 5:2-갈 6:10)에 사랑의 성령으로 묘사된다(갈 5:22). 서신은 이렇게 역사의 행로를 남긴다.
(b) 하나님의 사랑의 행위의 목적은 새로운 인간이다. 그러나 이 목적은 인간과 인간의 사랑의 행위 없이는 성취되지 않는다. 모든 하나님의 행위는 창조이든지 구원이든지 간에 인간의 행위의 가능성과 필연성 둘 다를 전제로 삼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은 인간의 의지를 배제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긴급한 부르심은 자유에로 부르심이다.
이 기본적인 법, 곧 예수님이 사건에서 가장 분명히 볼 수 있고, 바울에 의하면 모든 곳에서 하나님 행위와 인간의 행위 사이의 관계를 결정하는 이 기본적인 법은(참조: 빌 2:12이하), 하나님 사랑과 인간의 사랑 사이의 관계에 관하여 사도가 말하는 것을 이해하는데 결정적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첫 번째로 말씀하신다. 그가 관계를 세우신다. 이것은 롬 8장에 단호하게 주장되어 있다. 결단, 선택과 부르심은 확고하다. 그로부터 아가페라 불리는 모든 것이 생겨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의 사랑은 부름 받는 자에 쏟아 부어진 하늘로부터의 사랑에 대한 응답일 뿐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것은 근본적인 사랑의 행위, 그 자체와 같이 결단의 행위이다. 그 안에서 하나님께서 그의 택하신 백성과 맺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물리치는 언약이 성취된다(롬 8:28; 참조: 롬 8:37).
바울은 고전 8:3에 똑같은 근본적인 관계를 재치있게 공식화시킨다: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시는바 되었느니라".
우리는 오직 그의 앞에서의 우리의 수동성의 크기만큼 하나님을 향하여 능동적일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첫째로 어떤 참된 의미에서 우리를 의지가 있고 행동하는 인간이되게 하는 생명을 창조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기는 믿음을 사람에게 불러 일으키신다. 그러나 피스티스는 단지 작용을 시작하며, 진정한 실현은 디 아가페로 말미암는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갈 5:6). 하나님께서는 그의 택하신 자들에게 프뉴마를 부으신다(롬 5:5; 살전 2:13). 다시 한번, 인간은 수동적이다. 그러나 프뉴마는 사랑 안에서 행하는 최상의 활동을 위해 인간을 자유롭게 한다. 자유는 사랑 안에서 그 자체를 억제하고 완성시킨다.
프뉴마가 그것에 의해 자유롭게 되는 아가페에 선행한다는 것은 갈 5:22에 고전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 또 "성령의 사랑"(롬 15:30)과 "성령 안에서 너희 사랑"(골 1:8) 같은 결합에서 그리고 고전 4:21에 보다 세련되게 표현되어 있다.
프뉴마와 자유의 관계에 대해서는 롬 8:2에, 자유의 한계와 목적으로서의 아가페에 대해서는 갈 5:13에 나타나 있다. 사랑을 위해 해방됨으로 율법이 성취되고 초월되고 극복되며, 어떤 후퇴와 방해도 허용하지 않는 새로운 질서가 시작된다.
사랑의 한 가지 중요한 목적은 부름받은 자가 그의 이웃에 대한 봉사로서 그의 삶을 사랑과 자유에 두는 것이다: "13 ...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14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갈 5:13-갈 5:14).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롬 13:8 이하), "또 주께서 우리가 너희를 사랑함과 같이 너희도 피차간과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게 하사"(살전 3:12). 바울은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예수님의 명령에 집중하여 예수님과 같은 방법으로 그 명령을 확립한다. 그러나 그의 진정한 관심은 형제 사랑에 집중되어 있다: (참조: 갈 6:10). 언약의 백성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동포를 돕기 위해 준비되어 있음을 의미하던 이웃 사랑은 이제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에게 있어서는 함께 시민된 자들을 위한 봉사를 의미한다. 그것은 형제간의 복지를 행위의 지배 원리로 삼는 것을 의미한다(살전 4:9; 골 1:4; 몬 1:5; 엡 4:2; 엡 6:23; 골 3:19; 엡 5:25). 아가페토스와 아델포스는 서로 바꾸어 사용할 수 있는 용어가 된다(살전 2:8; 몬 1:16).
형제 사랑을 요구하는 우주적이고 역사적인 카이로스에 의해 형제 사랑이 결정적으로 한정된다(참조: 갈 6:10; 롬 13:11). 형제 사랑은 십자가와 텔로스 사이에서 이 결단의 시기에서 유일하게 적절하고 전진적인 태도이다. 그것은 십자가의 표적 아래 선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비와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죽으심으로 인해 존재하게 된 공동체 안에서(빌 2:1이하; 골 3:14이하; 엡 5:2; 참조: 고전 8:11) 봉사와 희생, 용서와 이해(consideration), 도움과 동정, 그리고 쓰러진 자를 세우고 낙담한 자를 회복시키기 위해 준비되어 있는 것이다(롬 12:9; 고전 13:4 이하; 참조: 갈 5:25 이하). 사도 자신의 최상의 가능한 목표는 교회의 선을 위하여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의 아직 남은 고난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다(참조: 고후 6:3; 골 1:24 이하). 그러나 이것은 또한 바울에게 있어서 기본 원칙인 하나님과 인간의 행위 간의 근본적인 관계에 따라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의 행위에 대한 봉사로서 인간의 사랑 안에서 하나님의 행위와 인간의 행위가 결합한다.
사랑은 세우는 일을 한다(고전 8:1). 사랑은 장래의 일을 세운다. 아가페(ajgavph, 26)는 텔로스(tevlo", 5056)의 표적 아래에 있다. 이것은 고전 13장의 위대한 진리이다. 이런 이유로 사랑은("제일 좋은 길", 곧 다른 모든 것을 능가하는 하늘의 선물이며, 사랑은 믿음, 소망, 사랑이 이루는 삼각 구조의 중심에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둘 보다 위대하다. 믿음과 소망은 이 불완전한 세계(aeon)의 한계나 사건들을 견딘다. 사랑으로 인해 장래 세대의 능력은 이미 현재의 세계의 형태 속으로 침입한다. 예수님에게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바울에게 있어서도 아가페는 이 죽음의 세계(aeon) 가운데서 미래가 가지는 유일한 생명의 힘이다.
3. 야고보서의 용법.
(a) 약 1:12에서 주님을 "사랑하는 자"는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는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b) 약 2:5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얻는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찌어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의 나라로 부르실만큼 선하다고 여기셨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든 자는 나의 형제들이며 그들이 비록 누추한 옷을 입고 온다할지라도 뒷자리에 앉게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c) 약 2:8에서 사랑, 곧 이웃 사랑은 새 왕국의 최고의 '법'이다: "너희가 만일 경에 기록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한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그러므로 외모로 사람을 취하면 범법자가 된다(참조: 약 2:9).
4. 베드로의 용법.
(a) 벧전 1:8에서 성도는 예수님을 보지 못했으나 사랑한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b) 벧전 1:22에서 진리로 영혼을 깨끗하게 하면 참으로 형제를 사랑할 수 있다: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
베드로는 벧전 2:17에서 "형제를 사랑하라"고 권고한다.
(c) 벧전 3:10에서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악을 떠나 선한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궤휼을 말하지 말고".
(d) 벧후 2:15에서 발람은 불의 삯을 사랑하다가 망했다: "저희가 바른 길을 떠나 미혹하여 브올의 아들 발람의 길을 좇는도다 그는 불의의 삯을 사랑하다가".
5. 요한의 용법.
바울에게 있어서 아가페는 미래의 원리(principle)이며, 요한에게 있어서 사랑은 현재의 우주적 위기에서 세워지고 있는 그리스도의 세계의 원리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요일 3:16; 요일 4:9 이하).
이 기본적인 사상에서 요한과 바울(롬 8:32)은 일치한다. 그러나 요한이 아버지 하나님의 아들 예수에 대한 사랑에 대해 항상 이야기하는 방식에는 다른 점이 있다(요 3:35; 요 10:17). 모든 사랑은 예수님께 집중된다. 그는 오로지 하나님의 사랑의 중재자이시다. 대조적으로 요한은 아버지에 대한 아들 예수님의 사랑에 대해서는 거의 말한 적이 없다(요 14:31). 그는 아버지께서 그에게 그의 "친구들"로 주신 자들에 대한 아들의 사랑을 더욱 강하게 강조한다. 아들을 통해 아버지의 사랑이 인간의 세상에 이른다(요 17:23 이하; 요 14:21 이하; 요일 4:19; 요 11:5; 요 13:23). 이 사랑은 그의 죽음에 의해 성취되고 공표되었다. 아들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그의 목적을 이루신다(요 13:1; 요 15:13).
요한복음의 아가페는 매우 명백히 겸손한 사랑이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어떤 의미에서는 한 단계 한 단계 이 세상으로 내려오는 천국의 실체이다. 그렇지만 이 천국의 실체는 계시와 도덕적 행위에 의한 승리를 성취한다. 따라서 요한은 바울이 하나님의 행위와 인간의 상호 관계를 통하여 명백하게 설명한 것을 이해하고 있다. 빛과 생명의 세계는 이 세상에서 사랑의 형태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요한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 모두의 삶에서 아가페의 적극적인 특성을 강조할 수 있고 또 강조해야만 한다.
요한이 하나님 또는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요 5:42; 요 8:42; 요 14:28)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고 예수님의 모범을 따르는 형제에 대한 사랑에 의해 가리워 지도록 한 것은(요 13:34 이하; 요 14:15 이하; 요 21:15 이하; 요일 4:20) 극히 일부분이다. 형제 사랑, 아버지와 아들과 아들의 백성의 서클은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공동체를 구성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 공동체의 삶을 위한 궁극적인 실체이며 그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은 그 생활의 법이다(요 15:9 이하; 요일 2:10; 요일 3:10; 요일 4:11 이하).
요일 3:14에는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않는 자는 사상에 거하느니라"고 한다. 요일 3:14; 요일 2:15 이하; 요 3:19에도 그렇다. 아가판은 어떤 목적어에 의해 한정되지 않은 채로 있으며, 단지 이 절에서만 그런 것도 아니다. 눅 7:47에서 그 예를 볼 수 있는 단독으로 사용된 아가폰의 독립적인 배치는 요한일서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것이다(요일 3:18; 요일 4:7 이하; 요일 4:19). 이 사랑은 생생한 활동이며, 존재의 방식이며,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현실화이다. 사랑의 법이 모든 세부적인 요구들을 자신에게로 끌어당기고 끊임없이 되풀이되고 고상한 일관성으로 독자들 앞에 제시된다는 사실이 이것과 조화된다. 단지 때때로 사랑에 대한 요구는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자"와 같은 표현에 의해 정확하게 정의된다(요일 3:18; 요이 1:1).
요한의 서신에서는 보다 일반적으로 훈계가, 여기에서 선택의 사상과는 전혀 관계가 없지만 형제의 관계에 대해서는 매우 단순하게 적용되는 아가페테와 아가페토이라는 절박한 부르심에 의해 중단된다(요삼 1:5; 요일 4:7).
요한계시록에서 형제 사랑에 대한 요구(계 2:19)는 이 분열과 고통에서, 심지어 죽음에 이르기까지라도 하나님께 굳게 매달리라는 열정적인 부르심에 의해 완전히 가리워 진다. 여기에서 사랑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한 이해는 전적으로 그 시대의 필요에 의해서 새로운 생명에 닥친 수난에 대한 신학 사상에 의해 결정된다. 요한계시록의 시작 부분에 충성된 증인 "우리를 사랑하신 자"(토 아가폰티 헤마스)에 드리는 찬양이 나오고(계 1:5) 사랑하는 도시의 마지막 때의 상황의 변화(계 3:9; 계 20:9)와 하나님의 적들에 대한 위협과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는 책망(계 2:4)과 함께 죽기까지 자기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고(계 12:1) 피스티스(믿음)와 아가페(사랑)를 지킨 자들의 영광이 뒤따른다. 많은 사람들의 사랑이 식어지는 때가 왔다(마 24:12).
6. 사도 시대 이후의 용법.
초기의 신조는 몇가지 새로운 이상의 고취와 아울러 이 시대에 전수된다. 클레멘트일서 49-50은 지고의 사랑, 그리고 이 사랑이 공동체와 세상에 대해 가지는 실질적인 의의에 대해 계속적인 인식을 예증해준다. 아가페와 아가폰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행위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기초적인 용어가 되었다. 에가페메노스(**)와 아가페토스(**)는 예수님에 대해 즐겨 사용되는 용어인데 때때로 휘오스(**)나 파이스(**)와 연결되어서 사용되기도 하고 때때로 독립적인 명칭, 사랑하는 아들(Only-Beloved)로 사용되기도 한다(벧후 1:17; Herms, 5, 2, 6; M. Pol., 14, 1; Dg., 8, 11; Barn., 3, 6 등). 교회와 그리스도인들도 역시 하나님께 사랑받고 선택받은 자들이며, 그의 선하신 기쁨이 그들에게 머무는 자들이다.
다시 말해 아가페와 아가판은 이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의 경건을 요약하기 위해 자주 사용되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세상에 대한 경멸과 미움을 요구한다. 이러한 긴장 상태는 여기 유대교에서 경건과 하나님의 사랑의 최후의 표현으로 고귀하게 평가되는 순교를 초래할 수도 있다.
또 다른 형태로 하나님과 이 세상의 현상간의 긴장, 하늘의 사랑과 세상적 사랑 간의 긴장은 금욕주의로 이끌 수도 있다. 아가판은 훈련받은 또 때때로 절제하는 삶을 나타내는 용어, 또는 실제로 금욕의 훈련을 나타내는 용어가 된다. 순결한 아가페는 에로틱한 사랑보다 강하다. 그러나 아가페와 그 파생어들의 가장 일반적인 사용은 형제 사랑을 의미한다. 믿음과 사랑과 소망에 관한, 율법의 의미와 성취에 관한, 그리고 원수의 사랑에 관한 옛 말들은 크게 존중되고 적용된다. 사랑에 대한 모든 경우에 형제들은 중요하다. 공동체의 지도자들은 지치지 않고 봉사로 융화로 선으로 악을 이김으로 형제애적 친교의 의지를 강화시키기 위해 힘써야 한다(벧전 4:7 이하; ICI, 49이하; Barn, 1, 6). 아가페토스는 유행하는 인사말의 형식이다. 아가페는 식탁에서의 친교가 발전된 형제들의 애찬에 대한 전문적인 용어가 되었고 사회적인 의미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참조: E. Stauffer; Walter Bauer; J. H. Thayer).
-------------bhea;(157, 아헤브) 사랑하다 love, 좋아하다 like, 사랑스러운 lovely[[사랑]]
동사 아헤브는 '사랑하다, 좋아하다'를 의미하며, 그 의미의 강도는 하나님의 자기 백성에 대한 무한한 애정에서부터 게으른 대식가의 육체적인 식욕에까지 이른다. 이 동사는 칼 어간의 모든 법(mood)과 니팔 분사형, 그리고 피엘 분사형으로 나온다. 16회의 피엘형은 강의적인 것이 아니라 대개 부정한 '연인' lover을 가리킨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200회 이상 나온다.
구약성경에서 사랑은 그 사람을 강요하여 그가 좋게, 또는 올바르게 평가하거나 인정하는 사물이나 사람에게로 이끌어 가는 자발적인 힘이다. 사람은 이 사랑의 힘에 제어를 받아 자기 자신을 주거나 혹은 사랑의 원인이 되는 대상을 확고히 붙잡거나 혹은 즐거움을 주는 행동을 하는 것이다. 사랑은 내적 인격에 심은 영혼의 불가해한 힘이다. 사람이 사랑의 대상을 올바로 인정하면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사랑한다(신 6:5). 사랑과 미움은 생의 양극이다(전 3:8, 전 9:6). 사랑은 인간 상호간의 사랑, 하나님의 인간과의 사랑, 사물에 대한 사랑 등을 나타낸다.
(a) 이 단어는 남녀의 사랑에 대해 사용되었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남자와 여자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인간의 하나님과 관계, 그리고 남녀의 성적 관계를 시사해 준다. 이 남녀의 사랑은 이성(sexes) 상호간의 생명력 넘치는 충동을 의미한다. 선지자 예레미야(렘 2:25)나 호세아(호 3:1, 호 4:18), 그리고 에스겔(겔 16:37)은 사랑의 성적(sexual) 측면을 매우 진하게 묘사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 단어는 남녀의 연애나 열애(창 29:18이하, 창 34:3, 삿 16:4), 합법적인 부부의 행복한 사랑(창 24:67, 삼상 1:5)을 묘사하는데 사용되었다. 창조의 기사는 성의 구별과 부부간의 사랑이 생을 풍요하게 하는 은사임을 설득력 있게 이해시켜 준다(창 2:18이하).
「그러나 이 사랑은 성적 사랑의 범위를 포함하지만 그것으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다. 오히려 헌신적 사랑과 생활의 충실함이 합쳐져 있다. 구약의 초기 기록에 의하면 이러한 사랑은 일부다처나 일처다부 사상과 부합하지 않는다. 구약성경은 충실(참조: 창 20:13, 삿 14:16, 삿 16:4-5, 겔 16:8, 겔 23:17, 호 3:1), 상호의존(참조: 창 24:67), 책임(참조: 삼하 13:1, 삼하 13:4, 삼하 13:15)과 같은 인간 사랑의 다른 측면을 제외하고 성적인 것에 집중하는 위험을 이해시켜 준다(The interpertreter's D.B).」
더 나아가서 아가서는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다"라고 열정적인 사랑의 강력한 힘을 찬양까지 한다. 이 노래는 성적(남녀) 사랑의 기이함과 적극적인 힘을 찬양하지만 그 찬양에는 그 사랑이 근거를 두고 있는 상호의존과 신앙심(헌신)을 강조하고 있다(참조: 아 2:16, 아 3:1-8, 아 7:10, 아 8:6-7). 아가서에서 사랑을 묘사할 때 거의 대부분 아헵(아가파오)과 아하바(아가페)를 사용했다. 그러나 여자가 남자를 부른 칭호는 도드(d/D , 1730, 사랑하는 자)를 사용했다.
이러한 사랑에 반대되는 것으로서, 암논과 다말의 이야기는 성충동의 야수성, 즉 대상자와 성적 관계를 가지려는 무절제한 요구를 보여준다(삼하 13:1-22). 사랑은 성애 또는 성욕적인 영역에서 세상이 알지 못하는 근원, 곧 마귀로부터 기인한 원시적 힘인 미움을 부인함으로 맞서는 적극적인 능력이다. 이 이야기는 이 두 가지 충동의 야수성도 투명하게 보여준다(삼하 13:1-22). 결혼이나 부부 생활은 상대에 대한 사랑 없이도 이루어질 수 있다. 삼손의 신부의 "당신이 나를 미워할 뿐이요 사랑치 아니하는도다"라는 히스테릭한 말에서(삿 14:16, 참조: 삿 16:15, 창 29:31, 창 29:33) 동일한 요소가 표현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심지어 법까지도 사랑과 미움의 성욕적 증상에 관여하고 있다(신 21:15이하, 신 22:31이하, 신 24:1이하).
아헤브가 '사랑의 행위를 하다'(일반적으로 이것은 야다<알다>나 샤카브<~와 함께 눕다>로 표현된다)라는 뜻을 가지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그러나 왕상 11:1에서 이 단어는 이러한 부가적인 의미를 가지는 것 같다: "솔로몬 왕이 바로의 딸 외에 이방의 많은 여인을 사랑하였으니…"(참조, 렘 2:25). 호세아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바를 기록할 때, 이러한 의미를 사용하였다: "너는 또 가서 타인에게 연애를 받아 음부된 그 여인을 사랑하라…"(호 3:1). 이 단어의 이런 의미는, 이 동사가 사역동사의 어간(분사로서)으로 나올 때 현저하게 나타난다.
(b) 이 단어는 부모와 자식, 가족간의 사랑에 대해 사용되었다. 아브라함은 독자 이삭을 사랑했으며(창 22:2), 리브가는 아들 야곱을 사랑했다(창 25:28). 야곱은 요셉과 베냐민을 사랑했다(창 37:3, 창 44:20). 잠언은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경계하느니라"고 했다(잠 13:24).
또한 이 단어는 며느리의 시어머니를 향한 사랑과 같은 가족간의 사랑을 표현한다(룻 4:15).
부모에 대한 자식의 사랑은 어느 곳에도 언급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그들은 부모를 존중하고 존경하며 또 부모에게 복종해야 한다.
「참고 - 창 47:29에 보면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인애(헤세드: 친절, 자비)란 단어를 사용하여 자기에게 친절을 베풀어 주기를 요청했다. 이것이 부모에 대한 자식의 사랑의 표현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족속이나 가족의 유대는 이스라엘에서 매우 강하였다. 그러므로 '근친' 관계의 중요한 요소인 사랑에 대하여 놀랄 일이 아니다. 그것은 룻 3:10에서 이성 곧 남녀 사랑과 관련되어 있다. 그곳에서 인애(헤세드: 친절, 자비)는 남녀 사랑의 개시와 가까운 친족에 대한 충실, 이 둘을 포함하고 있다.」
성경은 가족적 사랑이 너무 선택적일 때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삭은 에서를 사랑하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했다(창 25:28). 그 결과로 야곱과 에서가 서로 반목하고 미워하게 되었다. 요셉에 대한 야곱의 편애로 인하여 다른 아들들이 요셉을 미워하고 시기하게 되었다(창 37:4). 배타적인 사랑은 증오가 들어올 수 있는 지점이 될 수 있다. 이는 사랑이 헌신적일 뿐만 아니라 책임을 다 해야 하기 때문이다.
(c) 아헤브은 때때로 종이 그 주인의 지배하에 남아 있기를 원하는 주인에 대한 특별하고도 강한 애착심을 나타낸다. 출 21:5에 보면 "종이 진정으로 말하기를 내가 상전과 내 처자를 사랑하니 나가서 자유하지 않겠노라…"라고 한다. 아마 여기에는 가족애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아들이 그의 아버지를 사랑하듯이 종이 그의 주인을 사랑한다(신 15:16). 이러한 의미가 강조되는 구절로는 삼상 16:21이 있는데 여기에는 사울이 다윗을 크게 사랑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윗을 사랑하고(삼상 18:16) 심히 존경하게 되어 그의 모든 행동들을 경탄으로 바라보았다.
(d) 이 단어는 친구의 특별한 애착을 나타낸다. 다윗과 요나단 사이의 사랑은(삼상 18:1, 삼상 18:3, 삼상 20:17) 여인의 사랑보다 더 깊은 우정의 차원이었다 - "그대가 나를 사랑함이 기이하여 여인의 사랑보다 승하였도다"(삼하 1:26).
(e) 아헵은 정치적 의미로 사용되었다: "솔로몬이 기름 부음을 받고 그 부친을 이어 왕이 되었다 함을 두로 왕 히람이 듣고 그 신복을 솔로몬에게 보내었으니 이는 히람이 평일에 다윗을 사랑하였음이라"(왕상 5:1). 다윗에 대한 히람의 "사랑"은 두 사람 사이의 국제적인 우호 관계나 화해 정책을 예증하는 것이다. 후자가 지적하는 바와 같이 그것이 그가 지극히 충성스러웠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f) 더 나아가 이 사랑은 사회적 공동 생활의 근본과 규범으로 나타난다 -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레 19:18). 이러한 면에서 사랑은 이웃을 위한, 그리고 이웃을 향한 헌신이며, 이웃을 형제로서 받아들이는 것이고 이웃이 당연히 받아야 할 대우를 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은 특히 외국인(레 19:34)과 가난한 자(레 25:35)와 고아의 권리와 관련된 사회적 법률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이웃 사랑은 단순한 친절이나 호의로 해석할 수 없다. 이것은 편협한 배타주의를 배제한다. - 바로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은 누구나 이웃이다. 궁극적으로 이것은 인간의 입장에서 볼 때는 적(enemy)으로 생각되는 것 같은 사람들에 대한 사랑도 의미한다.
그 이유로 신 22:1-4이 동포를 도울 의무를 부과하는 것인 반면, 출 23:4-5은 특별히 이 의무를 적대적인 사람에게 적용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웃은 동료일 수도 있고 적일 수도 있으므로, 그는 사랑의 대상이지 법적 제한의 대상이 아니다. 이것은 인간으로서의 개인은 법적 개인보다 우선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형태에서 출 23:4이하의 요구와 아마도 한층 더 높은 수준인 잠 25:21에 있는 기본적 진술("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식물을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마시우라")은 원수를 향한 성향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지 않으나 한 특별한 방식의 행위의 의무를 지우는 것으로서, 원수에 대한 사랑을 실천적으로 가르치려고 한 것이다. 요셉은 그의 이야기에서 하나님께서 순종하는 선으로 악을 갚는 그런 실례를 보여준다(창 50:19).
물론 구약성경에는 이러한 원수를 사랑하는 것에 한계가 있다. 시 109편과 잠 14:20 및 적대 국가들에게 향한 일반적인 태도는 이에 대한 예증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 의해 부과된 윤리적인 요구의 고결함은 여전히 존재한다.
(g) 이 단어는 구체적인 것이나 추상적인 것들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데 사용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기름(잠 21:17), 은과 풍부(전 5:10), 뇌물(사 1:23)을 사랑했다. 다른 사람들은 악(시 52:3-5), 사망(잠 8:3), 허사(시 4:2-3), 거짓 맹세(슥 8:17)를 사랑했다. 또 다른 사람은 하나님의 계명(시 119:47), 율법(시 119:97), 증거(시 119:119), 법(119:159), 그리고 그들은 선(암 5:15), 진실과 화평(슥 8:19), 구원(시 40:16-17)을 사랑했다.
(h)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기를 "사랑하라"고 명하셨다(신 6:5). 그리고 시편에는 이 계명에 대한 순종의 증거들이 포함되어 있다(시 116:1, 시 145:20). 반대로 하나님은 사람들, 특히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사랑하신다(신 4:37, 사 43:4, 말 1:2). 주님은 또한 시온의 문들(시 87:2), 정의와 공의(시 33:5), 성전(말 2:11)과 같은 것들을 "사랑하신다". 여호수아는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한다(수 22:5). 예레미야는 이 백성이 방황하기를 좋아한다고 질책하였다(렘 14:10).
(i) 이 분사형들은 종종 '친구' friend로 변역되곤 한다. 대하 20:7에 보면, 아브라함은 주의 "벗"이라고 한다.
(j) 위에서 지적하였듯이 피엘형 분사를 번역한 영어 단어 "lover" (연인)는 종종 매춘을 암시하는 경멸적인 뜻을 함축하고 있다. 선지자 예레미야, 에스겔, 호세아 등은 이스라엘의 부정한 관계를 언급하기 위해서 이 단어를 사용한다. 호 2:7, 호 9:12, 겔 16:33, 겔 16:36-37, 렘 22:20, 렘 22:22, 렘 30:14, 애 1:19, 슥 13:6 등).
(참조: R. L. Alden; Nelson's ED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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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rav(5479, 카라.) 기쁨, 즐거움 Joy.
1. 고전 헬라어의 용법
명사 카라(Homer이래로)는 카이로(caivrw, 5463: 기뻐하다, 즐거워 하다)에서 유래했으며,
(a) 문자적으로는 '기쁨, 즐거움', (b) 환유적으로는 '기쁨의 상태'와 '기쁨의 대상'을 의미한다.
2. 70인역본의 용법
카라는 70인역본에서 50여회 나오며, 주로 히브리어 심한(기쁨, 즐거움)와 사손(기쁨, 즐거움)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3. 신약성경의 용법
카라는 신약성경에서 59회 나타나며,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
(a) 문자적으로는 '기쁨, 즐거움'을 의미한다.
① 마 13:20; 병행구, 막 4:16; 눅 8:13에서 카라는 '말씀을 받는 (부정적) 기쁨을 표현한다: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마 28:8에서 제자들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두려움 뿐만 아니라 큰 기쁨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눅 1:14에서 사가랴에게 카라의 약속이 주어졌다: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요 많은 사람도 그의 남을 기뻐하리니".
눅 10:17에서 70인의 제자는 악령을 제어할 수 있는 예수님의 능력을 공유할 수 있었고 기쁨과 만족이 가득하였다: "칠십 인이 기뻐 돌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눅 15:7; 눅 15:10에서 카라는 잃은 것을 찾은 자의 기쁨을 나타낸다. 하나님께서는 잃은 자를 긍휼히 여기신다; 모든 것은 거기에 달려 있다. 하나의 죄인이 회개할 때 하늘에서 기뻐한다. 진실로, 잃은 양과 잃은 은전, 잃은 아들의 비유를 담고 있는 누가복음 15장 전체가 보여 주는 바는, 아버지께 돌아온 잃은 자에 대해, 예수님께서 인간들에게 자기와 함께 기뻐하라고 촉구하고 계신다는 것이다(눅 15:6, 눅 15:9, 눅 15:32).
눅 24:41, 눅 24:52에서 카라는 놀라움과 넘치는 기쁨을 표현한다: "41 저희가 너무 기쁘므로 오히려 믿지 못하고 기이히 여길 때에 이르시되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니"
"52 저희가 그에게 경배하고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가".
② 행 13:52에서 제자들은 성령께서 힘주심을 통해 핍박을 받을지라도 기쁨을 경험하였다: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
박해가 복음의 승리적 진행을 정지시킬 수 없다(행 20:24). 행 8:8에서 보면,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전파되고, 그들이 믿을 때, 그리고 이적이 나타날 때 거기에 해당된 사람들은 크게 기뻐하였다.
③ 요 3:29에서 카라는 '기쁨'의 충만이라는 중요한 특징을 표현한다: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
세례(침례) 요한은, "신랑" 즉 약속된 하늘의 진리의 계시자로 인하여 지금 기쁨이 충만해 있다(참조: 마 9:14이하).
요 15:11에서 예수님은 완전한 기쁨을 가지고 계셨으며, 이 기쁨은 제자들에게도 부여될 수가 있었다. 이것을 그는 아버지께 요청한다(요 17:13).
요일 1:4에서 카라는 하나님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사귐으로 가지는 기쁨을 표현한다: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로라".
요 16:22에서 카라는 장차 슬픔을 대신할 기쁨을 표현한다: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현재의 슬픔은 기쁨으로 변할 것이다. 이 종말론적 기쁨은, "어떤 황홀한 정신적 상태로 묘사되지 않고, 신자들이 더 이상 아무 것도 바랄 필요가 없는 상황으로 정의된다"(R.Bultmann).
④ 바울 서신들은, 기독교인의 기쁨은 슬픔과 고통과 근심 가운데서만이 얻을 수 있다는 역설적 의미를 증거하고 있다. 진실로 이와 같은 사실이야말로, 이 기쁨의 능력을 확실히 증명해 주는 것이다.
이러한 기쁨의 원천은, 단순한 지상적, 인간적 기쁨 너머에 있다. 그것은 엔 퀴리오 즉 주 안에 있는 기쁨이며 따라서 우리의 외부에 있는 것이다. 그것은 빌 1:25; 롬 15:13에서 그것은 "믿음과 기쁨"이다(빌 1:25; 롬 15:13). 그것은 소망, 믿음, 확신에 기초를 두고 있다. 이 믿음은, 모든 싸움과 두려움(고후 7:5)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를 통한 칭의(justification)를 확신하며(롬 8:31이하), 부활하신 주님으로서의 그의 재림을 고대한다. 믿음의 기쁨으로서, 그것은 또한 성령(→ 영 Spirit)의 → 열매 Fruit이기도 하며(갈 5:22), 성령 안에서의 기쁨이라고도 불린다(롬 14:17; 살전 1:6). 이처럼 기쁨은 하나의 영적 은사이며, 이러한 점에서 카리스(charis: → 은혜 Grace)의 개념과 근사하다.
고후 1:14에서 바울은 그는 고린도인들에게 "우리는 너희의 기쁨을 위해 너희와 함께 일한다"고 확언하였다. 고후 2:3에서 바울은 주 안에 있는 기쁨인(참조: 고후 13;11; 빌 3:1) 자기의 기쁨을 모두가 함께 나눠 갖도록 하기 위해 편지를 썼다.
고후 7:13에서 카라는 안심에서 오는 기쁨을 표현한다: "이로 인하여 우리가 위로를 받았고 우리의 받은 위로 위에 디도의 기쁨으로 우리가 더욱 많이 기뻐함은 그의 마음이 너희 무리를 인하여 안심함을 얻었음이니라".
바울은 그들을 이전에 엄히 책망했었으나, 그의 권면이 결국 유익한 효과를 가져왔기 때문에 그들에 대하여 다시 안심하게 되었다.
⑤ 히 10:34에서 카라는 극심한 박해와 위험을 초월하는 기쁨을 표현한다: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앎이라".
당시에 기독교인들에 대한 박해는 이미 극심한 경지에 이르러 교회의 존속 그 자체까지 위협을 받을 정도였다(참조: 벧전 4:13; 롬 8:17). 그러나 비록 물질적 재산을 빼앗겼다 할지라도, 그것이 그들의 기쁨까지 빼앗을 수는 없었다(이것은, 시 46편에 영감을 받은 루터의 찬송가 "견고한 성"(Ein' Feste Burg)의 마지막 몇 행이 잘 예증해 준다:
그리고, 우리의 생명, 재산, 영예, 자녀 아내까지, 그들이 취하여도 그것의 유익은 하찮도다; 이는 모두 사라질 것: 하나님의 도성의 영원함이여.
⑥ 약 1:2은 순교에 대해 기뻐하라는 기독교적인 가르침에 가깝다(참조: 약 5:41). 그러나 교회사상(敎會史上) 이것은 종종, 사실상 순교 그 자체를 위해 순교를 추구하는 것으로 변질되었다. 약 4:9이하에 대해서는, 그 말씀을 신약에서 말하는 구원의 믿음과 같은 것으로 잘못 생각하여, 율법주의적으로 해석하면 안 된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대한 순종으로써 그와 같은 견해는 배척된다. 왜냐하면 그러한 견해는 십자가 상에서 이룬 그리스도의 사역의 일회적, 영구적 가치를 부정하기 때문이다.
(b) 환유적으로는 ① 카라는 '기쁨의 대상'을 나타낸다. 빌 4:1에서 카라는 아무개의 기쁨이 되는 인격체에 대해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
살전 2:19이하에서 카라는 같은 용법을 나타낸다: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의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② 카라는 '기쁨의 상태'를 나타낸다. 마 25:21; 마 25:23에서 카라는 "주인의 즐거움" 곧 주께서 누리는 지복을 나타낸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마 25:21).
히 12:2에서 하늘의 하나님 우편에 있는 지복을 나타낸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그리스도 자신의 기쁨을 기꺼이 버리고 스스로 십자가의 부끄러움을 지셨다. 오직 그를 바라봄으로써 우리는 시험에서의 참음과 인내를 얻을 수 있다(히 12:2).
③ 카라는 '즐거운 잔치'를 나타낸다. 마 25:21; 마 25:23에서 카라는 '잔치',또는 '축하, 회식'이라는 의미도 가진다. (참조: E. Beyreuther; G. Finkenrath; Walter Bauer's GEL NT).
-----$pej;(2654, 하페츠) 기뻐하다, 즐거워 하다[[기쁨]]
1. 하페츠(동사)는 기본어근이며, '기뻐하다, 즐거워 하다'를 의미한다.
기본적인 의미는 '어떤 것에 대해 큰 호의를 느끼다'이다. 이 단어의 의미는 유사한 어근들, 즉 하마드, 하샤크, 그리고 라차와 구별되며, 그 이유는 이 어근들이 감정적인 것을 별로 함축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마드와 하샤크는 일반적으로 '바라다' desire로 번역되며 라차는 필요나 승인의 판단에 의거한 호의를 '수락하다' accept를 의미한다. 하페츠는 그 객체가 그 자체의 본질적인 속성으로써 호의를 갖도록 유혹하며, 주체는 그것이 탐나는 것이기 때문에 쉽게 그것에 매혹당하는 경우에 사용된다. 어느 정도 이와 비슷한 네 번째 어근 '길'은 훨씬 더 큰 감정적인 의미를 함축한다. 여기에서 주체는 즐거워 하는 태도와 행동으로 자기의 기쁨을 표현한다.
구약성경에서 하페츠는 75회 나오며, 칼형으로만 사용되었으며 '감정적인 기쁨을 경험하다'를 의미한다.
이런 기쁨은 인간도 느낄 수 있고 하나님도 느낄 수 있다. 남자들은 여자에 대해서 이것을 경험한다고 한다. 하몰의 아들 세겜은 야곱의 딸 디나를 보고 "기뻐"했다: "이 소년이 그 일 행하기를 지체치 아니하였으니 그가 야곱의 딸을 사랑함이며 그는 그 아비 집에 가장 존귀함일러라"(창 34:19).
아하수에로 왕의 미인선발 대회에 참가한 경쟁자들은 왕이 한번 보고 난 후 그들을 기뻐하지 않을 경우에는 그에게 다시 가지 못했다: "저녁이면 갔다가 아침에는 둘째 후궁으로 돌아와서 비빈을 주관하는 내시 사아스가스의 수하에 속하고 왕이 저를 기뻐하여 그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면 다시 왕에게 나아가지 못하더라"(에 2:14).
사람들은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서 이것을 경험하기도 하였다. 사울왕이 자기 딸 미갈을 다윗과 결혼시키려고, 종에게 지시하기를, 다윗에게 가서 왕이 그를 "기뻐"한다고 전하라고 하였다: "사울이 그 신하들에게 명하되 너희는 다윗에게 비밀히 말하여 이르기를 보라 왕이 너를 기뻐하시고 모든 신하도 너를 사랑하나니 그런즉 네가 왕의 사위가 되는 것이 가하니라 하라"(삼상 18:22).
이 기쁨은 사건과 일에 대해서 경험될 수 있다. 요압이 다윗에게, 왜 인구조사를 하려고 하는가, 왜 군사들을 모으려고 하는가(파카드를 보라), 즉 왜 그것을 기뻐하는가를 물을 때, 이 단어를 사용하였다: "요압이 왕께 고하되 이 백성은 얼마든지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백배나 더하게 하사 내 주 왕의 눈으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그런데 내 주 왕은 어찌하여 이런 일을 기뻐하시나이까 하되"(삼하 24:3). 이 단어는 또한 어떤 활동에 대해 기뻐하는 백성들에게도 사용되었다. 아하수에로 왕은 하만에게, 왕이 존귀케 하기를 "기뻐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었다(에 6:6).
이 단어의 또 다른 용법은 독립적인 의미로 나온다. 예를 들면, 아가서에 되풀이하여 나오는 표현, "내 사랑이 원하기 전에 깨우지 말찌니라"에서 그렇게 나온다(아 2:7, 아 3:5, 아 8:4).
이 단어는 어떤 백성들을 기뻐하는 하나님에 대해 사용되었다. 구원의 노래에서, 다윗은 하나님이 자기를 "기뻐하시기" 때문에 자기를 구출해 주셨다고 말한다(삼하 22:20). 스바 여왕은 하나님이 솔로몬을 "기뻐하셨다"는 이유로 하나님을 송축하였다(왕상 10:9).
하나님은 인간들의 선행에 대해 이런 기쁨을 느낀다고 한다. 예를 들어 그는 안식일을 지키고 율법을 준수하는 것(사 56:4)과 "자비"와 "하나님을 아는 것"(호 6:6), 그리고 "진리"(시 51:8)를 기뻐하신다. 자신에 대해서, 하나님은 그가 "기뻐하시는" 것을 행하신다(시 115:3, 시 135:6). 삼손의 아버지, 마노아는 여호와의 천사가 자기 자신과 아내에게 나타났으므로, 그들이 죽을까봐 두려워하였다. 그러나 그의 아내는 하나님이 그 일을 행하기를 "기뻐"하셨더라면 그들의 재물을 받지 않으셨을 것이라고 대답했다(삿 13:23).
2. 하페츠(동사)는 기본어근이며, '몸을 구부리다 bend down'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욥 40:17에서 1회 나온다: "그 꼬리 치는 것은 백향목이 흔들리는 것 같고 그 넓적다리 힘줄은 서로 연락되었으며".
포프(Pope)는 욥 40:17(AB)에서 "활 모양으로 구부려져 있는 것"이 꼬리에 해당하는 것으로 가정한다.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작은 꼬리를 가진 하마를 가리키는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점이다. "꼬리"라는 단어가 부속 기관을 의미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경우에 그 부속 기관은 백향목처럼 뻗쳐있는 몸통일 것이다(Lisowsky).(참조: L. J. WOOD; B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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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ijrhvnh(1515, 에이레네) 평화, 복지, 번영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에이레네의 기본 개념은 본래 사람들 사이의 관계(relationship)나 태도(attitude)를 의미하지 않고 상태(state), 즉 '평화의 때', 또는 '평화의 상태'를 의미하며, 처음에는 순전히 끊임없이 계속되는 전쟁상태에서의 한 막간(a interlude)으로 생각한 것이다.
이 단어는 전쟁에 반대되는 것, 혹은 전쟁의 종식으로부터 결과하는 상황을 의미한다. 평화는 복된 번영을 가져 오도록 법과 질서가 유지되는 상태이다. "에이레네"는 평화의 상태이며, 평화의 상태에서 땅과 백성을 위한 복이 흘러나온다. 필레몬(Philemon)은 이를 최고의 선(supreme good)으로 격찬했다.
에이레네는 평화 조약이나 평화의 타결과 관련이 있다. 에이레네는 또한 소란, 소요의 정반대를 의미할 수 있다. 에이레네는 평화적인(온화한) 태도, 즉 적의가 없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에픽테투스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등의 스토아 철학자들의 작품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에이레네는 영적 평안이나 마음의 평안이라는 의미를 띠고 나타나게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단어는 이들의 저작에 그리 자주 사용되지 않았다.
특별한 언급으로, 아우구스투(Augustus)가 지중해 세계를 지배한 에이레네를 들 수 있다. 이 시대에서 구속(redemption)을 동경하는 강한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데 황금시대라고 불리워진 이 평화의 상태는 로마 황제가 군대의 힘으로 성취한 법적 또는 정치적 안정이다(Toerster, TDNT).
2. 구약성경 및 70인역본의 용법
1. 구약성경 및 70인역본의 용법 및 의미들
(a) 구약성경에서 에이레네는 250회 이상 나오는 히브리어 단어 샬롬의 역어로 사용된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다. 이에 대하여 예외적인 경우들은 대체로 왕래 및 문안 인사에 관련된 구절들이다. 예컨대 창 26:31; 창 43:23이 이러한 예이다.
그러나 렘 20:10; 사 48:22; 57:21은 이러한 경우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예외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예외적인 구절에서는 소테리아(구원, 구출), 카이레인(기쁨, 안녕)등을 역어로 사용되었다.
약 15개의 구절에서 에이레네는 안식, 평온, 안전, 염려 없음, 믿음직스러움 등의 광범위한 의미 영역을 포괄하는, 히브리어의 여러 가지 단어들에 해당하는 역어로 사용되었다.
예컨대 대상 4:40에서는 '…로부터 안식을 얻다'를 뜻하는 샤카트(히2453)의 역어로, 욥 11:18; 잠 3:23; 사 14:30; 겔 34:27; 38:8, 11, 14; 39:6, 26에서는 '믿을만함, 안전, 염려없음'을 뜻하는 베타흐(히233a)의 역어로, 삼하 3:24에서는 '가다, 걷다'를 뜻하는 할라크(히498)의 역어로, 사 29:24에서는 '이해'를 뜻하는 레카흐(히1124a)의 역어로, 그리고 잠 17:1; 호 2:18에서는 '평온, 안락'을 뜻하는 샬와(히2392d)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또한 에이레네를 역어로 사용하고 있는 몇몇 구절들은 해당 히브리어 단어가 모호하거나 없다: 에 4:16; 미 2:4; 사 32:4; 겔 34:29; 잠언 8:18.
(b) 70인역본은 히브리어 단어들, 주로 샬롬의 역어로 사용했기 때문에, 그 히브리어의 의미들이 이 헬라어의 의미에 영향을 미쳤으며, 또한 70인역본의 용법은 헬라어를 사용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헬라어는 새로운 풍부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히브리어 구약성경의 샬롬과 70인역본의 에이레네를 살펴보면, 에이레네의 여러 가지 의미를 알 수 있다.
이 단어는 '평화 peace'라는 좁은 의미로 제한시켜서는 안된다. 그것은 모든 가능한 형태의 악(evil)과 대조되는, 가장 넓은 의미의 '안녕, 복리' well-being를 의미한다. 만남이나 편지에서(삼하 18:29; 삿 19:20; 단 4:1), 작별 인사에서(삿 18:6; 삼상 20:42) 다른 사람들에게 안녕을 빌며, 대화에서 다른 사람에 관한 안녕을 구한다(삼상16:5). 사람들은 문안 인사를 한다 : "문안하고".
왕하 9:17이하에서와 같이 어떤 사람이 오는 이유에 대한 질문이 있는데, 곧 "평안이냐"는 '도전적인 목적이냐 화평한 목적이냐'라는 질문이다.
왕상 2:13에서 밧세바가 아도니아를 맞이 하면서 "화평한 목적으로 왔는냐"(너의 옴이 화평이냐)라고 말했을 때, 그것은 그녀가 그에게 그의 방문이 '좋은 일'을 뜻하는지를 실제로 묻고 있는 것이다.
시편 기자는 에이레네를 '행운이나 형통'이라는 의미로 사용했는데, 불경한 사람들에 대해서도 적용되고 있다. 의인은 악인의 이런 형통을 봄으로 시험을 받기도 한다(시 73:3). 그러나 이 형통은 외적인 것에 불과하며, 진정한 형통이 아니다(사 48:22).
사 57:18; 시 38:3에서는 육체의 건강을 의미한다.
집회서 38:8에서 의사가 가져오는 에이레네, 즉 건강에 대해 말하고 있다. 전장에서 무사히 안전하게 돌아오는 사람은 건강을 보전한 것으로 볼 수 있다(수 10:21; 왕상 22:17; 대하 19:1; 시 55:18).
또 이 단어는 '만족이나 흡족함' satisfaction을 의미하였는데, 이별에 관하여(창 26:29; 출 18:23; 사 55:12), 잠자리에 드는 것에 관하여(시 4:8), 죽음에 관하여(창 15:15; 렘 34:5) 사용되었다. 여기에서 에이레네는 단순히 안식이나 마음의 평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폭력이나 재난으로 압도당하지 않은 인간의 전상태로서, 폭력을 당하거나 변사의 정반대를 의미한다(참조: 왕상2:6).
또한 살펴볼 가치가 있는 것은 사 29:24의 내용이다: "원망하던 자도 교훈을 받으라"(70인역-말더듬는 혀들은 평화를 말하는 것을 배울 것이다). 이 구절에는 히브리어 샬롬이 없지만 에이레네가 나온다. 이 문맥에서 에이레네는 그들이 올바르게(에이레네) 말하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이사야 32:4에서도 이와 유사한 의미를 나타낸다.
이 단어는 더욱 보편적으로, 전쟁과 대조되는 평화를 의미한다. 잠 17:1; 호세아 20:18("평안히 눕게하리라")과 사 14:30("평안히 눕게 하려니와")에서 이 의미로 에이레네가 샬롬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잠언에서는 다투는 가정과 대조되는 평화로운 가정의 안락을 의미하며, 호세아와 이사야에서는 이 단어는 평화의 때를 의미한다.
대상 22:9에서 평화의 상태를 의미한다: "내가 저의 생전에 평안과 안정을 이스라엘에게 줄 것임이니라". 히스기야는 평화가 그의 시대에는 계속된다는 기대를 가졌기 때문에 이사야의 중대한 예언을 경솔히 취급했다. 여기에는 번영을 누리는 그룹, 예를들면 국가의 번영이라는 의미도 지닌다.
에이레네는 전 3:8에 전쟁과 대조시킨 "평화"와, 그리고 렘 29:7에 "성읍의 평안", 38:4에 "백성의 평안" 등에서 "평안을 구한다"는 표현에서와 같이 "평화의 상태"보다 더 근본적인 것, 즉 평화 =백성의 안녕에 관련된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샬롬/ 에이레네는 상태보다 오히려 관계를 암시한다.
많은 구절에서 이 단어는 이러한 의미를 가지는데, 국가나 그룹 간의(왕상 5:12; 삿 4:17; 왕상 5:4; 대상 12:18), 개인 간의(슥 6:13) 우호적 관계를 의미한다.
신 20:10에 '한 백성에 평화를 선언'하는 것은 한 백성의 관계의 수용을 의미하며(참조: 삿 21:13), 그 안으로 들어가는 자들은 평화의 사신들이다(사 33:7).
이 단어는 시편 35:27에서 외적 형통이나 성공에 더하여 인간의 전적인 안녕(well-being)을 의미할 수 있다: "나의 의를 즐거워하는 자로 기꺼이 부르고 즐겁게 하시며 그의 종의 형통을 기뻐하시는 여호와는". 여기서 형통과 안녕은 선(good)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
시편 122:8에서 시인은 "네 가운데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한다. 70인역본에는 '내가 참으로 너를 위하여(에 관하여) 평화를 말했다'고 번역되어 있다. '너를 위하여'는 '예루살렘을 위하여'이다.
시인은 바로 앞에서 이미 안녕과 형통을 원했다. 환언하면 이 용어는 여기서 확고한 '형통'이라는 의미에서 '선(good)'이라는 더 넓은 의미로 쉽게 이동한다.
따라서 잠 3:17에서 "그 길은 즐거운 길이요 그 첩경은 다 평강이니라"고 말한다. 70인역본은 '그녀의 길은 옳은 길이요 그녀의 모든 첩경은 평화에 있느니라'고 번역했다.
시 34:14은 도덕적 선을 의미한다: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며 화평을 찾아 (그를) 따를지어다."
슥 8:19에서 "오직 너희는 진실과 화평을 사랑할지니라."
말 2:6에서 "그가 화평과 정직한 중에서(으로) 나와 동행하며, 많은 사람들을 돌이켜 죄악에서 떠나게 하였느니라." 70인역본은 '그가 그의 길을 에이레네로 똑 바르게하여 내 앞에서 행하게 하며…'라고 번역했다.
잠 12:20에서 "악을 꾀하는 자의 마음에는 궤휼이 있고 화평을 논하는(조장하는) 자들에게는 희락이 있느니라." 70인역본은 '에이레네를 원하는 자들은 즐거워하리라'고 번역했다. 이러한 구절에서 '에이레네'는 도덕적 선을 의미한다.
(c) 이 단어는 두람(J. I. Durham)에 의하면, '완전, 완성, 성공, 성취' 등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샬롬은 '완전'이란 개념은 민 6:24이하에 나오는 축복의 절정을 이루는 대목에 나타난다. 여기에서 이 개념은 다른 모든 축복들을 요약하고 있으며, 여호와의 임재에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이 축복은 모세가 여호와로부터 받아 아론과 그의 자손들에게 이스라엘을 축복하는데 사용하도록 전한 것이다(민 6:22 이하). 이 축복의 내용은,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이다(민 6:24이하).
여기에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찌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민 6:27)는 구절이 첨가되었다. 두람은 이 구절을 주석하기를 '샬롬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오직 그가 임재하실 때에만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축복 속에 샬롬이 사용된 것을 볼 때에도 샬롬은 제의 용어로서 사용되었으며, 여러 가지 번역본이나 많은 주석가들이 일반적으로 이 말에 부여해 온 것보다 횔씬 더 포괄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보다 확실하게 믿게 된다. 왜냐하면 민 6:24-26 에 나오는 샬롬은 하나님께로부터 축복을 받고(바라크) 지킴을 받으며(샤마르) 은혜를 받는(하난) 사람, 하나님의 임재 속에 이 두가지 상태로 있는 사람, 즉 충족되고, 그리하여 온전하게 된 사람을 묘사하는 말로서 사용되고 있다. 실로 이러한 사람은 신약성경의 주의 말씀에 부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5:48).
또 두람은 '샬롬은 구약성경에서 자주 포괄적으로 본 성취 또는 완성, 실제로 사람이 혼자 힘으로 가장 좋은 환경에서 얻을 수 있는 그 어떤 성공이라도 훨씬 능가하는, 삶과 정신에 있어서의 완성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된다'라고 주장한다(창 15:15; 29:6; 37:14; 43:27이하.; 출 18:7,23; 민 25:12; 신 23:7; 삿 18:15; 삼상 17;18, 22; 20:7; 25:6; 삼하 11:7; 18:28이하; 왕상 22:27이하; 왕하 22:20; 사 45:7; 48:18; 53:5; 54:10, 13; 57:2,19; 59:8; 60:17; 66:12; 말 2:5이하.).
특히 이 점은 왕하 22:20에 나오는, 요시야가 열조에게 돌아가리라는 여호와의 약속에서 분명하게 제시되고 있다. 여기에서 요시야가 평안히(in peace, KSB) 열조에게 돌아간다는 식의 해석보다는, 그는 '성공하여 in success', 즉 그의 소명을 완성하고 흡족한 마음으로 열조에게 돌아갈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아래서는 항목을 만들어 에이레네의 의미를 설명한다.
2. 하나님의 선물로서의 에이레네
이 단어는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로서, 선, 좋은 것, 구원을 의미한다. 샬롬/ 에이레네와 연합된 좋은 것은 그것들을 위한 기도에서든, 그것들이 나타날 때 하나님의 선물로 인정하든, 자연적으로 이스라엘에서 항상 하나님과 관련시키었다.
기드온은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샬롬'이라고 불렀다. 이 매우 오래된 고대 표현에 대한 분명한 해석이 불가능하다면 우리는 이 고백의 위대한 의미에는 경건한 자들이 후에 많은 다른 상황에서 말하고자한, 특별히 구약의 기도에서 표현된 것과 같은 모든 것을 그 근본에 포함하고 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은 하늘에서 평화를 만드시며(욥 25:2), 또한 우리에게 평화를 약속하시며, 그의 백성에게 평화의 복을 내리시며, 그의 종들의 형통을 원하신다(시 35:27; 참조: 147:14), "다윗과 그 집에는 여호와로 말미암은 평강이 영원히 있으리라"(왕상 2:33).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시 122:6).
샬롬은 진실로 여호와로부터 오며, 완전히 충족하게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신념은 시편 85편에 두드러지게 표현되어 있다. 기자는 기도 중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 "그가 그 백성, 그 성도들에게 화평을 말씀하실 것이라 … 영광이 우리 땅에 거하리이다 긍휼과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입맞추었으며"(85:8-10).
이 사상의 맥락에서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구원하시려는 성향은 완전한 지상적 평화의 동기로 생각된다. 여기서 우리는 샬롬이라는 말의 구약의 용법의 최고점을 본다.
레위기에서 하나님은 그 땅에서 그의 백성에게 샬롬을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신다(레26:6). 이 문맥은 확고한 복이 뜻하는 것, 즉 원수들과 야수들로부터 평화를 아주 분명히 보여 준다. 이것은 특별한 의미에서 일종의 구원이다. 그것은 약속의 땅에서 안식과 평온이며, 그러므로 신명기 기자는 독특한 용어 메구하(안식)를 표현한 것이다(신 12:9). 이렇게 그들은 예언적 약속의 바로 가까이에 있다.
에이레네는 이 시대나 구원 시대에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선을 가리키는데 사용되게 되었다. 이 단어가 어떤 생활 영역에서나 하나님이 주신 선을 의미한다는 것은 구약신앙의 특성이다. 사 46:7에서 그 일반적인 기사를 볼 수 있다: "나는 평안도 짓고 환란도 창조하니". 이 경우에는 앞에서 언급한 레위기 26:3이하의 축복과, 그리고 민 6:26의 축복("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도 포괄한다.
때때로 에이레네의 정확한 내용을 말하기란 불가능하지만, 한편 그것이 항상 인간을 위한 선한 것이며, 거기에 그의 안녕이나 구원이 놓여있는 것이다. '에이레네'는 이런 의미에서 선한 것이며 구원이다.
이러한 구원을 의미하는 구절들을 더 들어보면, 렘 29:11에서 하나님은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라고 말씀하셨다. 시 119:165에서 율법을 사랑하는 자들의 큰 평화는 율법을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들이 당하는 장애물과 대조된다. 여기에 평화는 내적 구원이며 파멸이 아니다.
따라서 집회서 1:18에서 에이레네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증진되고 '기에이아 야세오스'(건강한 치유, 완전한 건강)와 연결되어 있다(참조: 사 9:7). 시 35:8과 9에 하나님이 약속하신 평화는 구원이며, 이 문장에서 평화와 구원이 연결되어 있다.
이 구원은 렘 16:5에서 하나님의 구원이라 부른다: "나의 평강". 애 3:17에 "주께서 내 심령으로 평강을 떠나게 하니"라는 말은 "내가 복(아가다: 선, 선한것)을 잊어버렸음이여"라는 말로 해석되어야 한다. 여기서 평강은 선한 것이며, 곧 구원이다. 이 평화에 참여한다는 것은 거기에 포함된 구원의 은총을 누린다는 것을 뜻하는 반면, 평화에서 제외된다는 것은 그 모든 복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평화를 거두어 가시면 어쩔 수 없이 애통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된다.
히브리인들은 때때로 이러한 동맹이나 협정에 대해 베리트(언약)를 사용했으며, 따라서 샬롬은 베리트와 관련하여 나타난다. 이 두 단어의 관계는 너무 강하므로, 이런 문맥에서 샬롬은 일종의 공식 용어가 된 것같다.
이 사상은 샬롬의 관계가 언약에서 두 당사자에 의해 인쳐진다는 것이다(수 9:15; 왕상 5:12). 환언하면, 언약은 '샬롬'의 관계를 개시하는 것이다. '샬롬'의 관계는 언약의 결과이다. 여호와의 이스라엘과의 화평의 언약을 나타내는, 이러한 구절들에서 '샬롬'은 실질적 안녕이 아니라 언약을 맺은 자들의 성향에 의존하는 평화의 관계를 의미하는 동시에 구원을 위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비누하스와 평화의 언약(민 25:12; 집회서 45:24), 레위와 평화의 언약(말 2:5), 다윗과 평화의 언약(겔 34:25; 37:26)은 구원의 언약이다.
사 54:10에서 여호와께서는 "나의 인자는 네게서 떠나지 아니하며 화평케 하는 나의 언약은 옮기지 아니하리라"고 약속하신다(Rad, TDNT).
3. 종말론적 기대의 한 요소로서 샬롬/ 에이레네
샬롬은 종말론적 기대의 한 요소이다. 영원한 평화의 최종적 상태에 대한 대망은 선지서들과 다른 성문서들에서 일관하게 표현하는 구약 종말론의 한 요소이다.
이 널리 퍼진, 다방면에 걸친 이 대망의 사실은 샬롬이라는 단어가 관계하고 있는 구절들에서 항상 발견되지 않을지라도 언급되고 있다.
낙원의 상태의 회복이 예언될 때(사 11:10이하; 호 2:20이하; 암 9:31), 하나님의 주관하에 국제적인 평화가 예언될 때(사 2:2이하), 혹은 평화의 때가 도래하는 마지막 시대의 한 겸손한 평화의 왕에 대한 기대를 말할 때(슥 9:9이하), 샬롬이라는 단어가 이런 중심적인 종말론적 구절에 사용되지 않거나 슥 9:10에서와 같이 오직 많은 다른 것들 곁에 사용될지라도, 우리는 가능한 한 가장 넓은 의미의 샬롬에 관한 예언적인 선포를 듣게 된다.
따라서 그 단어가 실제로 발견되는 구절들에 대해 어떤 보다 큰 비중을 두지 않는다. 사 9:5에 메시야 아이의 이름들에서 그 최종 이름 샬롬 사르(평화의 왕)는 의미의 중요성에 있어서 선행하는 다른 이름들과 다를 바 없다. 그 이름은 하나님의 사명(commission)을 지닌 분(사 9:1-6)으로서의 메시야는 도래하는 메시야 왕국의 평화의 보증인(guarantor)과 보호자이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것은 사 9:7의 가장 중요한 기사에서 다시 다윗의 보좌와 결부된 구원을 위해 영원히 있을 것이라고 표현되어 있다. 미 5:5에서 "이 사람은 우리의 평강이시다"라는 표현은 이 전체 예언의 본질을 요약한 것이다.
피조된 세상은 지금은 그것이 저지른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받고 있고 스스로 분열하고 있지만, 결국은 다시 온전하게 될 것인데(사 11:6-9; 29:17-24; 6:1-9), 그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실 것이다(사 65:17-19; 참조: 계 21:1-4).
평화에 관한 언약의 갱신에 관련된 메시지는 우주적이고 영속적인 평화에 관한 약속으로 발전되었으며, 이 구원의 날의 도래는 하나님께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자(사 61:1, 2)로서 평화의 나라의 담지자요 설립자인 평강의 왕(사 9:5,6)에 자주 결부되었다.
흥미있는 점은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가 모든 풍부한 의미를 지니는 데도 불구하고 어느 곳에서도 특별히 내적인 평화의 태도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참으로 그것이 개인보다 오히려 그룹에 대해 사용되는 구절들이 더 많다.
개인에 대한 용법의 전형적인 보기로서, 애 3:17을 들 수 있다: "주께서 내 심령으로 평강을 멀리 떠나게 하시니 내가 복을 잊어버렸음이여". 그러나 여기에 샬롬도 감추인 내적인 것이 아니라 그 자체를 외적 안녕의 형태로 나타낸다. 그룹과 관련된 대부분의 보기에서 샬롬은 분명히 외적으로 드러내보일 수 있는 어떤 것을 의미한다(Rad, TDNT).
샬롬은 이스라엘의 정치적 열망에 관련된 사회적 차원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순전히 개인적인 영역을 훨씬 넘어서는 공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샬롬이 체다카(의, 사 48:18; 시 86:10)와, 그리고 미쉬파트(재판, 슥 8:16)의 실제적 이상과, 나아가 심지어는 페쿠다(관리, 사 60:17)와 밀접히 관련된다는 사실이 입증된다. 이것은 또한 가장 보편적인 용례에서 이 단어는 개인적 개념어라기 보다는 사회적 개념어임을 시사한다(H. Beck, C. Brown , DNTT).
4. 예언자의 메시지로서의 샬롬/ 에이레네
이믈라의 아들 미가야에서 에스겔까지의 소선지자들은 거짓 선지자들이 선포한 구원의 메시지를 강렬하게 대항했다. 수세기를 통해 계속된 이 투쟁에서 모든 사람의 주의를 끈 표어는 샬롬(평화)이다. 참으로 전문 용어 인나베 레샬롬(그는 평화를 예언한다)은 이와 관련하여 나타난다(렘 28:9).
샬롬은 어떤 선지자 서클의 정점이었으며, 따라서 이 용어는 두 파당 사이의 심한 투쟁의 중심이 되었다. 문제는 이미 구원의 선지자들을 반대한 미가야의 입장에서 보여졌다. 그러나 이 용어 자체가 나오지 않는다(왕상 22:5이하).
미가는 몇몇 대항자들과 싸웠는데 그들을 이득을 얻기 위하여 예언하는 자들이라고 비난했다. 그들은 이득이 있는 한, 구원을 선포할 것이다: "내 백성을 유혹하는 선지자는 이에 물면 평강을 외치나 그 입에 무엇을 채워주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전쟁을 준비하는 도다…"(미 3:5이하).
예레미야는 그 치열한 투쟁에 투신하여 선지자들로부터 가장 강렬한 저항을 받았다. 큰 고통 중에서 예레미야는 샬롬 에메트(영원한 구원)를 약속하는 예루살렘의 운명이 무엇인지를 말한다(렘 14:13이하).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심상히 고쳐 주며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렘 6:14). 렘 28장에서 예레미야와 이런 선지자들 간의 극적인 교전의 이야기를 읽는다. 예레미야와 하나냐 간의 문제의 요점은 샬롬(평화)이냐, 라아(환란)이냐 이다.
최종적으로, 에스겔은 거짓 선지자들이 구원이 없는데도 샬롬 하존(구원의 이상)을 본다고 하며 백성을 잘못 인도했다고 동일한 항의를 했다(겔 13:16이하). 여기서 "이들은 예루살렘에 대하여 예언하여 평강이 없으나 평강의 묵시를 본다하는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이니라…"며, 대항한다.
거짓 선지자들의 문제는 샬롬의 문제를 넘어가며, 이 문맥에서 추적할 수 없다. 그렇지만 의심할 수 없는 것은 그들이 선포한 샬롬이 신화적 개념으로 옷 입은 궁국적 종말론적 평화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실제적 정치적 평화, 즉 모든 중대한 정치적 문제가 잘 해결되어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보장하는 평화 가운데서 살 수 있다는 약속이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마치 예레미야가 처음에 이 견해를 함께 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는 다음에 여호와께서 "이 백성에게서 평강을 빼았으셨다"는 것을 보게 되었다(렘 16:5).
거짓 선지자들의 프슈도스(yeu'do", 5579: 허위, 거짓말)는 그들이 샬롬을 예언한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예레미야와 에스겔도 다른 상황들에서 이것을 예언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히려 그들이 백성의 죄를 알지 못했으며, 따라서 절박한 심판에 관하여 어두운 정치적 장면을 해석할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예레미야와 에스겔로서는 대응 표어 에인 샬롬(평강이 없다)이란 표어를 만들었다(렘 6:14; 8:11; 12:12; 30:5; 겔 13:10,16).
거짓 선지자들의 샬롬과 예레미야와 에스겔의 에인 샬롬 간의 싸움은 강도를 더하여 갔으며, 그러나 주전 597년과 586의 예루살렘의 정복과 멸망으로, 어떤 긴장 완화가 있게 되고, 구원을 예언했던 거짓 선지자들은 철저히 불신을 당했다. 이제는 새롭고 더 큰 의미에서 샬롬의 약속은 예레미야와 에스겔의 예언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들 중의 하나가 되었다.
따라서 예레미야는 사로잡힌 자들에게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악이 아니라 구원을 생각하신다는 놀라운 기사를 기록한다(렘 29:11). 여기에서 우리는 예레미야서에 있는 후기 구원 예언의 근거를 본다. 다른 나라들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가져올 구원을 보고 떨 것이다(렘 33:9). 동일한 주제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과 맺은 평화의 언약에 대한 에스겔의 절정에 달한 메시지에 다시 등장한다(겔 24:25; 37:26이하).
샬롬에 대한 싸움은 이사야의 마지막 장들에서 나타나지 않는다. 여기서 샬롬은 벌써 선지자의 입장의 어떤 중요한 양상을 보여주는 표어가 아니다. 그것은 단순히 이 예언의 충분하고 장엄한 요지의 하나이다.
만일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말씀을 들었다면, 그들의 샬롬은 강과 같이 흘러내렸을 것이고 그들의 체다카(의)는 바다의 물결과 같이 되었을 것이다(사 48:18). 여기서 이 평행 관계는 이 용어가 지금 한 영적 의미를 받는다는 것을 보여 준다.
유사하게 사 54:13에서 예루살렘 자손에게 약속한 구원의 복은 체다카(의)의 복과 결부되어 있다. '샬롬'과 '체다카'의 동일한 결합은 하나님의 새 도성에 대한 예언적 표현에서 나타난다: "내가…화평을 세워 관원을 삼으며 의를 세워 감독을 삼으리니 다시는 강포한 일이 네 땅에 들리지 않을 것이요 황폐와 파멸이 네 경내에 다시 없을 것이며 네가 네 성벽을 구원이라 네 성문을 찬송이라 칭할 것이라"(사 60:17-18).
사 32:17에 의하면 샬롬은 의의 결과이다: "의의 공효는 화평이요 의의 결과는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라". 이 시적 예언에는 '샬롬'이 더욱 실제적 의미로, '카보드'(영광)와 연결되어 있는 사 66:12에서 다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가능한 가장 풍부한 음조를 발하는 것이 있다.
여기서 언급하고자 하는 것은, 아름다운 소리로 "먼데 있는 자에게든지 가까운데 있는 자에게든지 평강이 있을지어다 평강이 있을지어다"(사 57:19)고 한 것과 같이 평화는 풍부한 기대를 표현하는 용어지만, 더욱 정확한 신학적 용어로 해석되지 않은 용어이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어떤 모호함을 가지고 있으므로, 이러한 많은 측면적 용어를 잘 사용하지 못하는 번역자들은 때때로 이러한 구절들에서 샬롬이 그의 회복된 백성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인 이상, 더욱 현실적인 '안녕, 복리 well-being'를, 더욱 분명한 '평화 peace'를, 신학적으로 더욱 포괄적인 '구원 salvation'을 사용해야 할지 알지 못한다.
3. 랍비들, 위경 등 유대 문헌의 용법
1. 랍비들의 문헌
(a) 랍비 문헌에서 평화라는 개념 전체에 깔려 있는 것은 여호와의 샬롬이다. 그러나 이 개념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와 그리고 순전히 인간적인 차원에서 모두 그 의미가 확대되었다. 샬롬은 인사말로서 만날 때('샤알 베샬롬', 안녕을 구하거나 비는 말)나 작별할 때(안녕히 가라) 상대의 안녕을 구하는 것이다. 살롬으로 인사하고 인사에 답한다.
또한 샬롬은 '순조(順調), 안녕, 안전'이란 의미로 사용되었다. pBer, 60에는 임신 6개월 부터 9개월 까지 순조로운 출산(순산)을 위해 기도한 것과 아이의 가고 오는 길에서의 보호,곧 안전을 위한 언급이 있다. 그리고 '휴식이나 안식'이란 의미로도 나타난다. 샬롬은 유대인의 무덤비에서 '안녕이나 구원'이란 의미로 기록되었다.
(b) 랍비 문헌에서도 구약성경에서와 같이 샬롬은 하나님이 그의 백성에게 주시는 선물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바벨론의 18개의 간구는 그의 백성에게 하나님의 복이 임하기를 기원하는데 그 최종 간구는 그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복과 평화가 임하기를 구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샬롬은 베레카(복, 지복)와 병행되고 같은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비록 유대인들 간에 메시야 시대의 평화의 개념에 대하여 견해차가 있었지만, 평화는 의인의 몫이며, 구약성경에서와 같이 메시야 시대의 지복(Blessings)의 총화이다. 이사야 52:7은 이것에 대하여 언급한다.
(c) 샬롬은 또한 사람들(개인들, 가정, 단체, 국가들) 간의 투쟁의 반대어이다. 따라서 사람들 간의 화평케 하는 것에 대해 자주 강조한 내용을 찾아 볼 수 있다. pea.,1.1에 의하면 이것은 그 열매들을 즐기는 것들 중에 하나이다. 학자들의 역할은 세상에 평화를 증진시키는 일이며(Ber 64a), 엘리야는 와서 세상에 평화를 먼저 확립한다(Eduy. 8:7). 예배에서 평화를 위한 기원으로 끝맺지 않은 축도나 기도가 없다(Lev. R. 9:9). '샬롬'은 하나님의 이름들 중 하나이다(Shab. 10b; 2:1, 4b). UK. 3:12에 '거룩한 자여, 그는 찬양을 받으리로다. 그 안에 평화보다 더 가치있는 어떤 복을 간직하고 있는 그릇이 없도다'라고 말한다.
Rabban Simeon b. Gamaliel의 기록에 '세 가지, 즉 진리와 심판과 평화로 말미암아 세계가 보존된다'고 하였다(Avot 1:18). 이 기록에 의거하여 탈무드(Talmud)는 '만일 심판이 집행되면 진리가 지지를 받고 평화가 증진되기' 때문에 그 세 가지는 사실상 하나라고 선언한다(TJ, Ta'an. 4:2, 68a). 탈무드 랍비들의 최고 이상은 평화이기 때문에 그들은 할 수만 있으면 평화를 위하여 정의나 심판을 유보하거나 제외하였다.
힐렐(Hillel)에 있어서 아론은 평화를 추구하는 자의 한 모델이다(Ab,.1,12; ckawh, Str.B,.1.217). S.NU(42.6:26)에는 이방인들이나 이스라엘이 우상숭배의 죄가 있을지라도 그들이 평화하는 한 사탄이 그들을 해칠 수 없다고 한다. 랍비들은 호 4:17을 해석하여 '이스라엘이 우상들과 연합되어 있을지라도 평화가 그 안에 우세하고 있는 한 그대로 두라'고 가르친다(Gen. R.38:6).
평화를 확립하기 위하여 진리의 엄격한 노선에서 벗어나는 것도 허락되었으며(Yer. 65b), 탈무드는 민 5:23에 관련하여 '만일 남편과 아내 사이에 평화를 확립하기 위하여 신성하게 기록된 하나님의 이름을 지울 수 있다면, 전세계의 평화를 이루기 위하여 참으로 더욱 많이 그렇게 해야 한다'고 선언한다. 랍비들은 성경 자체와 모순하여 어떻게 사람들 간의 평화를 지지하는지를 설명한다(CKAWH,Slav. En. 52:11-13).
이것은 이웃의 '샬롬', 곧 구원을 구하는 문제가 아니라 다툼의 종식이라는 의미의 [샬롬]을 구하는 문제이다. 아마도 이것은 불일치나 불화가 메시야의 도래를 방해한다는 사상에 의한 것같다. 랍비들의 기록은 시기, 다툼, 불화가 하나님의 뜻에 반대가 된다는 강한 신조를 명시하고 있다. 이 견해에 따르면, 바로 세상의 존속은 평화에 의존한다(Ab., 1,18). 물론 하늘에 있는 것들 역시 불화할지라도 그렇다는 것이다(참조, 골1:20).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대하여 구약성경에서 발견하지 못하는 '샬롬'의 용법을 도입하게 한다. 다마스커스 문서는 하나님이 모든 육체와 다투고 있다는 사실로 시작한다. 이 다툼은 평화를 이루는 장막을 만들기까지 널리 펴져 나간다. 우상숭배와 같은 죄들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간의 반목을 조성하지만(Lv. r.,7 on 6:2), 제단의 돌들은 그들 간의 평화를 조성한다M. Ex., 29 등). 하나님과 사람 간의 평화와 다툼은 사람이 두 가지, 곧 긍정적으로와 부정적으로 행동하는 상호관계를 포함한다.
(d) 앞에서 살펴본 바, 샬롬은 유대인이 대망하던 구원의 핵심 바로 그것으로 되어있다. 이러한 평화를 추구하고( Rabbi Hille1, Aboth I:I2. SBI 217) 사람들 사이에 평화를 세우는 것은 반드시 해야만 할 일이었다. 랍비들의 가르침에서 평화롭게 하는 자의 역할은 신약성경에 나오는 그것과 유사한데, 이 점에서 랍비 유대주의는 신약성경의 '새 계명'과 비슷하다.
하지만 여기에서의 근본 동기는 이유에 대한 적극적인 사랑이라기보다는 샬롬을 방해할런지도 모르는 모든 것을 제거하고자 하는 욕망이다. 순전히 인간적인 차원에서 적용되는 것은 또한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도 적용된다. 이리하여 평화라는 개념은 사람이 행한 것과 행하지 않은 것 모두를 한층 중요하게 생각하는 새로운 차원을 얻게 된다. 이러한 평화에 대한 개념은 구약 시대 이후 발전한 새로운 용법에 큰 영향을 주었다.
2. 위경, 요셉푸스, 필로
(a) 위경에서 종교적 용법을 고찰해 보면, Test ⅩⅡ에서 '평화의 천사'라는 말이 나타난다. 여기에서 에이레네는 Test. L. 18:4와 D. 5:9,11에서와 같이 전쟁의 중단으로 표현된 구원을 의미하지만(Test. Jud. 22:1이하) 그것은 구원의 효과를 내지 못한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Test. ⅩⅡ와 특별히 Eth. En에서 평화의 반대는 랍비들의 견해와 같이 하나님과 이스라엘 또는 인류와 투쟁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이다. Eth. En에 의하면 불경건한 자에게는 긍휼과 평화가 없고(5:15), 하늘의 타락한 수호 천사들에게는 평화도 없고 용서도 없지만(12:5), 반면에 의인에게는 평화가 약속되어 있다.
그러나 Eth. En. 1:17이하에 의하면, 평화는 심판의 유보 또는 비집행이며, 따라서 평화는 용서와 심판자의 긍휼과 연결되어 있다. 그렇지만 평화는 또한 빛과도 연결되어 있어서 긍정적인 의미를 함축하며, 구원을 뜻하기도 한다. 이러한 의미의 평화는 '평안히 내버려 두었다'란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할 수 있다. 열 두 족장의 유훈에서 평화는 재판을 유보하는 것, 즉 범법자를 동정하여 유예해 주는 것, 혹은 적어도 그에 대한 형벌의 집행을 유예하는 것을 의미한다. 위경에서 평화는 또한 인간들 사이의 일치나 화합을 의미하기도 한다(Foerster, TDNT; H.Beck, C. Bro wn, DNTT).
(b) 요세푸스는 구약성경과 랍비들의 용법을 철저하게 따른다(Ant. 1, 179; 11, 216; 8, 405; War 2, 135).
(c) 필로는 언어학적으로, 그리고 실질적으로 헬라 전승을 따른다. 그에게 있어서 에이레네는 정치적 평화와 욕망의 싸움과 대조로, 오직 하나님께만 속하고(Heinemann,413ff), 하나님으로부터만 찾아 얻을 수 있는 내면적 안식인 마음의 평안을 의미한다(Vit. Mos., 1, 304). 그렇다고 해서 평화의 외면적이고 객관적으로 입증이 가능한 상태를 가리키는 측면과 무관하지 않다. 내면적, 외면적으로 싸움과 평화는 그룹을 이룬다. 내면적 싸움이 가장 나쁘며, 그것이 모든 악의 근원이다. 필로는 헬라 철학의 영향을 받아서 역시 내면적 평화를 유혹과 탐욕에 대한 승리로 간주하였다(Jos. 57). 이디오피아어 에녹서 52:11은 '평화와 사랑을 가져오는 자는 복이 있다'라고 선언하고 있다(Foerster, TDNT).
3. 쿰란 문서
쿰란 공동체는 변절한 이스라엘로부터 자신을 분리시켜(1QS 8:4-9; CD 1:4과 해당 구절) 자신을 구원 받은 자들의 종말론적 공동체라고 생각하였다. 이 공동체의 성원들은 이미 종말론적 평화를 향유하는 경지에 들어간 것이다.
그들의 문헌에서는 영원한 평화(IQS 2:4), 평화의 넘치는 풍요( IQS 4:7), 끝이 없는 평화(IQH 7:l5), 지속적인 평화(IQH 15:16), 제한 없는 평화(IQH 18:30) 등에 관한 구절이 나온다. 그러나 이 공동체는 아직도 투쟁의 와중에 있다(CD 4:13 및 그 밖의 해당 구절에서는 벨리알과 이스라엘 및 미가엘의 싸움이 언급되고 있고, IQM 1:9 이하에서는 빛의 아들들과 어둠의 아들들의 싸움이 언급되어 있다).
평화의 도래는 재난과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다(IQH 1:17). 구원은 구원을 받을 사람들이 불 붙는 용광로 속에서 연단을 받은 후에라야만 참된 것으로 인정 받는다(IQM 17:1). 하나님은 이미 영원 무궁한 평화의 언약(구원)을 생명의 바늘로 새겨 놓으셨다(IQM I2:3). 이러한 평화는 더 이상 거절을 당하지 않으며(IQH 9:11), 구원의 복으로 충만한 피난처가 된다(IQH 9:33). 평화는 구원과 행복과 같은 것이다. '하나님의 평화'(IQM 3:5; 4:14)와 '하나님의 기쁨'은 하나님의 백성이 안전한 그들의 고향에 도달하는데 필요한 암호이다(1QM 3:11).
4. 신약성경의 용법
1. 서론
에이레네는 신약성경에 92회 사용되었으며, 요한 1서를 제외한 신약의 모든 성경에 나온다. 복음서에 25회(마 4회, 막 1회, 눅 14회, 요 6회), 사도행전에 7회, 바울 서신에 47회, 야고보서에 3회, 베드로서에 5회, 유다서에 1회, 요한서신과 계시록에 4회 사용되었다.
신약성경에서 에이레네의 변화 또는 발전된 의미를 모두 추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단어는 형태와 내용에 있어서 70인역본과 히브리어 구약성경의 전통을 착실히 따르고 있다. 그리고 랍비 문헌의 샬롬과 같은 의미로도 사용되었다. 추가로 고전 헬라어 문헌에 나타난 의미들이 그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신약성경에서의 의미는 인사와 그리고 유사한 표현에서 안녕(well-being)이나 구원(salvation)이란 의미를 가진다.
마 5:34(눅 7:50)와 약 2:16에서 작별 인사로, 눅 10:5; (눅 24:36); 요 20:19; 요 20:21; 요 20:26에서 도착 인사로 사용되었으며, 당시 팔레스틴에서 유행한 인사를 번역한 것이다.
행 16:36에서 누가가 로마 간수의 인사말로 "평안히 가라"는 말을 사용했는데, 그는 분명히 그 인사말을 70인역본에서 취했으며, 새 언약의 사람들에게 어울리는 인사말이라고 생각했다.
사도 바울 역시 항상 그의 편지서들에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라는 인사말을 사용했다.
계 1:4에도 동일한 인사말이 나온다. 이것은 히브리인과 아람인의 인사와 같은 것이다.
디모데전·후서, 요한이서, 그리고 유다서에서는 자비를 뜻하는 말과 함께 사용되었으며, 평화는 또한 예를 들어 벧전 5:14; 요삼 1:15에서처럼 끝맺는 인사말에 나온다. 구약성경의 평안히 가라와 비슷한 말이 행 15:33과 고전 16: 11에 나오며, 눅 2:9에 나오는 시므온의 말도 이와 비슷한 의미를 지닌다.
안전(security)이란 의미의 에이레네는 눅 11:21에서 찾아볼 수 있다(참조: 살전 5:3). 고전 14:33에서는 구약성경의 영향이 한층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데 여기서 에이레네는 무질서의 정반대이며, 교회 안의 무질서에 반대되는 상태를 나타낸다. 행 14:2.
신약성경에서 이 단어의 주요 의미는 분명히 헬라적인 의미가 아니라 보다 깊은 의미에서의 구원이다. 에이레네는 인간 간의 일치 또는 조화를 나타내며(행 7:26; 갈 5:22; 엡 4:3; 약 3:18; 참조: 벧전 3:11), 하나님과의 화평도 의미한다.
에이레네는 행 12:20; 행 24:2; 마 10:34; 계 5:4에서는 전쟁과 반대되는 평화에 대해 사용되었다. 바울은 이 단어를 영혼의 평안에 대해 사용하는데(참조: 롬 15:13), 이런 용법은 매우 드문 헬라의 용법이다.
눅 14:32에서는 평화의 조건을 구하기보다는 오히려 인사하는 것을 뜻하는 아람어투가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문맥상으로는 존경과 무조건적 복종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신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그 용법상 세 가지 중요한 개념을 지니고 있다. - ⑴ 안식의 느낌으로서의 평화, ⑵ 하나님과의 화해의 상태로서의 평화, ⑶ 그리고 종말론적 구원으로서의 평화이다. 이 중 마지막 의미가 기본적인 것이다.
2. 가장 광범위한 의미에서 만물의 정상적인 상태로서의 에이레네
고전 14:33에서 바울에게 있어 에이레네는 고린도 교회에서 생각을 예언함으로 야기된 어지러움(혼란스런 상태)과 반대되는 정상적인 상태이다.
영감을 주시는 하나님은 어지러움(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고 평화의 하나님이시다. 영감은 다툼과 혼란을 위한 구실을 허용하지 않고 있으며, 따라서 시기와 분쟁은 하나님의 임재의 표시가 아니다. 여기서 지적하는 원리는 이적(miracles)이 법의 위반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법을 위반하는 편이 아니라 법을 지키므로 결과하는 평화, 곧 질서의 편이다. 이 질서의 평화는 진정한 교회의 정상적 상태인 것이다(고전 12:2; 약 3:16과 비교).
평화는 공동 예배(고전 14:33)와, 사도와 그의 협동자들 간의 교제에 결정적인 요인이 되는 것이다. 이 의미에서 에이레네가 분명히, 강조적으로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은 신약성경의 다른 곳에서 주목을 끄는 내부와 외부 사이의 관계를 보여준다.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는 건강한 또는 정상적인 상태는 하나님에 의해 영혼이나 인류에 제한되지 않고 전 우주에 미치는 것이다(참조: 1corinthians, ICC; V. Hasler, EDNT; Foerster, TDNT).
3. 인간의 종말론적 구원으로서의 에이레네
(a) 여기에서 출발점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구원, 특별히 종말론적인 구원이라는 의미를 지니는 구약성경의 샬롬이다.
눅 1:79에 사가랴의 찬송에서 에이레네는 대망한 종말론적 구원이다.
눅 2:14에 천사의 찬송에서 에이레네는 사람들 중에 평화나 하나님과 평화 뿐만이 아니라 이제 땅으로 온 구원을 가리킨다.
눅 19:42에 "평화에 관한 일"과 눅 19:38에 "하늘의 평화"도 구원이다.
계 12:10과 계 19:1에 "구원(소테리아)은 에이레네와 동일한 것이며, 그 의미는 (요한계시록에서 소테리아와 동일한) 에이레네가 하늘에 있고 하늘에서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역사적 사건으로 온다. 히 13:20은 이것을 "평강의 하나님"과 "양의 큰 목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내신 자"를 동일시 함으로써 넌지시 암시한다.
히 7:2은 그리스도의 전형으로서의 멜기세덱은 살렘 왕, 곧 평화의 왕이시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 구원은 평화의 복음으로 선포된다(엡 6:15; 참조: 행 10:36; 엡 2:17). 그것은 그리스도의 구원이다(요 14:27). 세상은 오직 [샬롬]을 원하며, 그리스도는 자기가 확보한 구원을 주신다.
예수님은 관습적인 작별인사를 사용하셨으며(막 5:34; 병행구, 눅 7:50), 예수님은 친히 제자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닌 평안의 인사(이 집에 평안이 있을 찌어다)를 가르쳐 주셨다. 제자들이 어느 집에든지 들어갈 때 하는 인사는 소원이 아니다. 그 평안은 그대로 거절하거나 받거나 해야 하는 선물이다. 그러므로 만일 거절하면 참으로 그 평안은 제자들에게로 돌아오는 것이다(눅 10:5이하; 마 10:13). 이스라엘의 마지막 세대는 최종적 선택을 직면하고 있다. 평화의 인사 형태에 동반하는 구원의 말없이 어느 성읍이나 집에도 들어갈 수 없다. 이 인사를 받는 사람은 누구든지 '평화의 아들'이 되지만 이 인사를 거절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구원으로부터 영원히 제외되어 있는 것이다(V. Hasler, EDNT).
그리고 편지서들(롬 1:7; 고전 1:3; 고후 1:2; 갈 1:3; 빌 1:2; 살전 1:1; 몬1:3)과 계시록(계 1:5)에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라는 인사 또는 축도의 말은 특수한 의미를 지닌다. 유대인의 축복 공식문은 '긍휼과 평화'이다(2bar. 78:2). 바울은 이 축복문에서 '긍휼' 대신 '은혜'를 취하여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있기를 원하노라)"라고 축복한다.
그는 "은혜와 평강"을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시키므로, 예배 의식을 따랐다. 이 축복으로 그는 그의 독자들에게 주님의 구원의 은사를 수여하는 것이다.
그는 이 은사를 고전 1:4-고전 1:9의 서언에서 더욱 정확히 묘사하며, 갈 1:4에서 그 축복을 이어 부언하고 있다. 후자에서 카리스(은혜)는 희생제사의 방식으로 설명되어 있고, 에이레네는 악한 현세대로부터 구원 받는 해방의 과정으로 설명되어 있다. 사도 요한이 그의 계시록 서언에서 독자들에게 한 축복도 바울의 축복이 의미하는 바와 같은 것이다.
우리는 이 구원을 구해야 한다: 히 12:14에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고 경고한다. 이 문구에서 에이레넨 메타(개역, 더불어 화평함)는 다른 사람들과 일치나 화합을 의미하지 않는다. 저는 다리가 고침을 받을 수 있는 우리의 발을 위한 곧은 길을 만들라는 권고 후에 모든 사람과 교제하여 구원을 구하라는 명령이 뒤따른다.
이 구원은 골 3:5에서 마음을 다스리는 능력이다.
이 구원은 빌 4:7에서 사람을 보호하는 능력이다.
어떤 학자들은 6절에 비추어 이것이 불안에 반대되는 평안감을 의미한다고 하지만 동의하기 어렵다. 그것은 신자가 보호받는 왕국이다. 비록 인간 관계 속에서 이 구원이 때때로 사람의 외적인 일들과 동일하지 않으며, 심한 적대적인 경험으로 인도할지라도 그렇다(마 10:34이하).
(b) 이런 구절들에서 에이레네는 실질적으로 조에(생명)와 병행하며, 바울은 롬 8:6에서 평안과 생명을 동일하게 취급한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바울은 육신의 노력은 사망, 영의 노력은 에이레네로 인도한다고 말한다. 그는 7절의 첫 부분에 근거를 둔다. 육신의 노력은 하나님께 대적하는 것이며 오직 사망으로 인도한다. 조에(생명)와 다나토스(사망)가 종말론적으로 그대로 받아들일 존재 양식인 것과 같이 조에(생명)는 그와 병행하는 에이레네와 함께 있다.
에이레네(= 샬롬 = 구원)는 최종적 성취의 상태이며, 새로운 피조물의 정상적 상태이다. 이와 같은 특징은 벧후 3:14에서 나타난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안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엔 에이레네) 나타나기를 힘쓰라."
여기에서 에이레네는 기본적인 내적 성벽이나 내적인 평안도, 하나님의 은혜도 아니며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형성된 심신의 회복과는 별도로, 상상할 수 없는 완전한 복지(안녕)나 정상 상태를 암시한다.
이 의미에서 바울의 더욱 친숙한 인사는 때때로 데오스 테스 에이레네스(평화의 하나님)로 말한다. 이 묘사는 바울이 평화의 하나님을 기대한 것과 확고하게 연결되어 있다.
평화의 내용은 문맥에서 결정될 수 있다. 롬 16:20에서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단을 너희 발아래서 상하게 하시리라"고 말했는데, 이 사탄의 파멸은 구원의 일부이다. 평강(화)의 하나님('데오스 테스 에이레네스')이란 말은 하나님이 평화와 지복을 시행할 것이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탄을 멸하실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벧후 3:14과 실질적으로 동일한 정도의 구원과 복지(안녕)의 절대적인 내용은 살전 5:23에 나타난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실 때에 흠이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에이레네는 바로 '영적 번영'이 아니라 전인간, 곧 영혼과 몸의 구원이다. 동일한 의미는 히 13:20이하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에이레네는 카리스(은혜)의 결과인 영혼의 평화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인간의 구원을 의미한다.
구약성경과 랍비적 용법에 근거해서, 에이레네는 이와같이 가장 심오하고 포괄적인 의미를 요구한다. 에이레네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미 일어나고 있는 전인(whole man)의 종말론적 구원이다. 그것은 확실한 성취의 상태로서 카이네 크티시스(새로운 피조물)의 상태를 의미한다. 이 의미에서 구원은 예수님의 부활에서 계시되었다(참조: Foerster, TDNT; H.Beck, C.Brown, DNTT; V.Hasler, EDNT 등).
4. 하나님과의 화평으로서의 에이레네
신약성경에서 에이레네는 하나님과의 평화의 관계에 대하여 드물게 사용되었다. 그 첫 언급은 엡 2:14-엡 2:17이다. 바울은 사 57:19을 생각하고 있었으며, 그러므로 구원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 용어가 15절에 나타날 때 그 반대어 에크드라(증오, 적의; 개역, 원수된 것)에 대하여 어떤 해석자들은 하나님에 대한 사람들의 적의를, 어떤 해석자들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적의를 의미한다고 한다.
만일 율법이 유대인과 이방인을 갈라놓고 이스라엘을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키는, 이 두 가지 역할을 알지 못한다면 이 구절들을 거의 올바로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율법으로 말마암아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적대와, 또한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적대가 일어난다. 사실 유대인들은 율법을 통하여, 그리고 율법을 위하여 그들 자신들을 이방인들로부터 분리하고 이방인들을 원수로 생각해야 했으며, 이방인들은 그런 유대인을 적대적으로 대했다.
따라서 14절에 "그는 우리의 화평(에이레네)이시라"는 포괄적인 의미를 나타낸다.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폐하셨을 때, 두 가지 무질서 곧 사람들 중에 무질서와 하나님에 대한 무질서를 파기하셨다.
이 에이레네는 하나님과의 평화와 인류 중에 평화를 의미한다. 따라서 그것은 질서, 모든 관계의 회복(healing)을 의미한다. 그래서 15절에 에크드라(원수된 것)란 표현도 일반적인 의미를 가진다. 15절에 "화평하게 하시고"와 16절에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도 역시 일반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에크드라와 에이레네는 여기서 인종 안에서 많은 서로 다른 형태를 취하는 객관적 상태들이다.
만일 하나님과 평화가 이 구절에서 에이레네의 일부이라면 롬 5:1에서 에이레네는 그 유일한 의미를 나타낸다. "하나님으로 더불어"라는 말이 보여주는 것과 같이 이 언급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지적한다. 이것은 롬 5:10에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원수들이며, 하나님이 그들과 화해하셨다는 사실에 동의한다(참조, 엡 2:16). 그래서 다음 평화는 사람이 변경한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상호관계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화해의 사역을 하심으로써 신자들이 하나님에 대하여 가지게 되는 관계이다.
5. 인간의 상호 평화로서의 에이레네
롬 14:17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말한다. 그는 강한 자들에게 말하기를 하나님의 나라는 그들이 생각하는 바와 같이 다른 사람들을 데리고 와서 먹고 마시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 가운데서 의와 평화와 희락의 통치로 되어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희락(카라)"은 15절의 "근심하게 되"(뤼페이타이)어서는 안되는 것을 보여 주며, 의(디카이오쉬네)는 여하한 사람의 양심도 침해 당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생각나게 한다. 평화(에이레네)는 하나님의 나라에는 어떠한 종류의 질병이나 악이나 불화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바울은 계속하여 이 영역에서 그리스도를 봉사하는 자들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사람들의 마음에 든다고 말한다. 그는 이렇게 하여 "평화에 관한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라는 권고를 한다. 여기에 에이레네는 오이코도메(덕을 세움)와 병행하는 것이며, 그것은 분명히 상호 간의 평화를 의미한다. 그렇지만 17절에서 에이레네는 이것보다 더 큰 것이다.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는 것은 성령 안에서 건강을 증진시키는 어떤 것의 창조, 즉 '에이레네'를 함축한다. 그렇지만 실제적으로 로마에 있는 교회에 적용하면, 이 건강을 증진시키는 일은 의심 없이 평화이다.
우리는 고전 7:15의 난해한 말에 동일한 사상의 어떤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화평 중에서 너를 부르셨느니라". 바울이 만일 이방인 배우자가 결혼을 파하려고 하면 기독교인 배우자는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할 때 그것은 주님께서 이혼에 관하여 말씀하신 것과 모순되는 것같이 보인다: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속 받을 것이 없느니라". 이것은 오직 주님의 말씀, 곧 우리는 이러한 경우에 노예들과 같이 구속받지 않는다는 말씀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15절에서 우리는 제한(restriction)이 아니라 이유(reason)를 가진다. 여기에 '데'는 '그러나 but'가 아니라 '오히려 rather'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 부름에 대한 언급은 바로 앞에 말한 것을 위한 근거를 확립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오히려'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언급된 개인적 경우를 넘어가서, 하나님이 우리를 평화로(혹은 평화를 위하여) 부르신 것을 우리에게 일반적으로 말하는 근거를 확립한다. 따라서 '에이레네'는 마지 못해서 유지하는 결혼 생활의 불화에 대한 반대 이상을 의미한다. 그것은 죄가 의도한 정상에 대한 파괴 상태와 정반대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만물의 건강한 상태, 정상적 상태를 함축한다. 당신이 배우자와 불화할 때 그를 구원하는 것이 당신의 사명이라고 생각해 보라. 구원과 그 결과인 화합의 복이 당신의 가정에 임할 것이다. 인간의 상호 간의 평화도 이 정상적 상태에 포함되어 있다. 다음 절(16절)은 '가르'로 시작한다. 여기서 '그러면, 그렇다면'이란 의미를 지닌다. : "(그렇다면) 아내된 자여 네가 남편을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며 남편된 자여 네가 네 아내를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리요."
딤후 2:22은 확실히 우리가 내적 경건(신앙심)으로 평화를 조장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는 메타가 에이레네에 관계하지 않고 '…와 함께'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자체 안에서 에이레네는 '구원을 가져 오는 것'을 의미하는 것도 당연하다. 한편 그것은 확실히 싸우고 있는 변론(제테세이스)을 한번 보지 않고 말하지 않는다(23절).
다음 구절들에서는 단순히 사람들 사이의 일치나 화합(concord)을 의미한다. 엡 4:3: "화평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약 3:18 :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의가 자라나는 씨는 화평케 하는 자들이 화평으로 뿌리게 되는 것이다. 시기(젤로스)와 다툼(에리데이아)은 '에이레네'의 정반대이다. 벧전 3:11에서 시 34편에서 인용하여 "화평을 구하여 이를 좇으라"라는 말을 무슨 의미로 사용했는지 정확히 말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 의미는 아마도 일치와 화합(참조, 9절)일 것이다(참조: Foerster, TDNT).
6. 영혼의 평화로서의 에이레네
롬 15:13에서 이 단어는 영혼의 평화를 의미한다: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그러나 이 단어가 어떻게 이 의미를 취하게 되었는지를, 즉 정상적 상태에 대한 신약성경의 이 단어의 일반적 용법에서 유래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평강의 하나님"이란 말이 외적 생명에 관한 의미를 함축하는 것과 같이, 그리고 에이레네가 인간의 전존재의 정상적 상태 - 카라(기쁨)와 불가분리적인 상태인 구원 - 을 인간 안에 창조하신다.
여기에서 에이레네의 개념은 스토아 철학의 소극적인 갈레네(고요함, 평온)와 다르다. 이 평화는 스토아 철학자들이 말하는 세상으로부터 은둔도 아니고 영적 세계나 시비적 명상에로의 경건한 도피도 아니다. 그것은 사람이 삶을 살아가면서 영원을 찾을 때에 이미 하나님의 평화를 누리는 기쁨이 충만한 확신이다(참조: Foerster, TDNT; H.Beck, C.Brown, DNTT). 이러한 영혼의 평화는 히브리어 샬롬의 특징도 아니다. 따라서 이러한 평화는 독특하게 기독교적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그리고 영혼 또는 마음의 평화에 관한 문맥들을 찾아 볼 수 있는데, 예를 들면 롬 8:6의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강"이라는 구절과 갈 5:22의 성령의 열매들 중 하나로서 "화평"은 이러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전자에서 에이레네는 생명인 구원을 뜻하고, 후자에서 사람들 간의 일치, 조화를 뜻하지만 내적, 영혼의 평화도 포함하고 있다(참조: 롬 14:17, [인간 상호 평화로서의 에이레네] 항목).
빌 4:7에는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골 3:15에는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고 기록되어 있다. "평강", 하나님의 '구원하는 능력'이 다스리는 영역으로서 마음과 생각이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다. 이 구원하는 능력의 다스림을 받음으로 마음 또는 영혼이 평화를 누리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참조: Walter Bauer; H.Beck; C.Brown; W.Foerster; G.Von.Rad).
------------katallavssw(2644, 카탈랏소) 바꾸다, 화해시키다.[[화평]]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동사 카탈랏소는 카타(katav, 2596)와 알랏소(ajllavssw, 236: 변하다, 변경하다, 바꾸다)에서 유래했다. 변화의 개념이 두드러지는 이 단어는,
(a) '바꾸다, 변화하다' change.
(b) '교환하다' exchange(Plat., Hdt.).
(c) '화해시키다' reconcile(Aristot.).
(d) '스스로 화해하다' reconcile(Xenoph.).
카탈랏소는 일반적으로 고전 헬라어 문헌에서 적의나 불만의 표출 이후에 사람들 사이에 '본래의 화합을 회복하는 것'을 의미하였다(Xen., Eur., Aristot.).
카탈랏소는 종교적 의미로 사용되었다하더라도(Soph. Al.), 헬라와 헬라니즘의 이방 종교의 화해 의식에서 본질적 역할을 하지 못했다. 일반적으로 하나님과 인격적 관계에 대한 사상은 헬라 사상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2. 70인역본의 용법.
(a) 동사 카탈랏소는 70인역본에서 4회 나오며, 렘 48:39에서 하타(2865: 넘어 뜨리다, 부숴뜨리다")를 번역하여, '파괴하다'는 의미를 나타내며, 마카베오이서에서는 '화해하다'는 의미를 나타낸다(1:5; 7:33; 8:29).
(b) 유대주의에서는 기도와 고백과 회개와 같은 행위를 통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은총으로 바뀐다는 의미에서 하나님은 '화해된다'고 말하지만(마카베오이서 1:5; 7:33) 이러한 용례는 매우 드물다.
카탈랏소는 다른 사람이나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달래다, 스스로 화해시키다, 화해하다, 화해시키다'를 의미하는 랍비 용어에 상당한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동사 카탈랏소는 신약성경에서 6회 나오며, 바울 서신에만 사용되었다.
(a) 남편과 아내.
헬라어 결혼 기록에서 카탈랏세스다이(부정사)는 그들의 '화해 reconciliation'(P. Oxy.)를 나타내는데 사용된다. 고전 7:11에서처럼 카탈라게나이(katallagh'nai)는 여기에서 그의 남편과 헤어진 아내 쪽에서의 행동이며 단지 그녀에게 일어난 어떤 일 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마 5:24과 BGU, 846, 10에서 디알라게나이(diallagh'nai)가 단지 사이가 멀어진 자들에게 일어난 어떤 일뿐만 아니라 그들에 의해 행해진 어떤 일인 것과 같다. 고전 7:11에서 아내가 다소간에 악의를 가지고 남편을 떠났다고 생각할 이유는 없다.
(b) 하나님과 인간
① 신약성경에서 바울만이 이 단어를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 사용하는데 카탈랏소는 하나님에 대해서만 사용되고 카탈라게나이(katallagh'nai)는 인간에 대해서만 사용된다.
하나님께서는 고후 5:18에서 우리 또는 세상을 자기 자신과 화목하게 하신다. 그는 화해나 화목하게 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우리 또는 세상과 화목하게 하신 것이 아니다. 다른 한편 롬 5:10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되거나 고후 5:20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인간은 화해에 대하여 같은 조건이 아니다. 화해는 쌍방이 똑같이 그들이 적이었던 곳에서 친구가 된다는 의미에서 상호적이다.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주권은 모든 면에서 유지된다.
카탈랏소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상태의 전환 또는 회복이며 동시에 인간 자신의 상태의 전환 또는 회복이다.
고후 5:18에서 이 단어는 인간을 위하여 가능한 가장 포괄적인 회복의 기초로서 소개된다. 즉 그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으며 이전 것은 지나가고 모든 것은 새 것이 되었다.
롬 5:10에서도 역시 이 단어는 날카로운 변화를 나타낸다. 우리는 더 이상 '연약한 자, 경건치 않은 자'(롬 5:6), '죄인들'(롬 5:8)이 아니며,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진다(롬 5:5). 인간의 기질이나 그의 하나님과의 법적인 관계뿐만 아니라 그의 삶의 전체 상태의 변화가 일어난다. 다른 한편 그것은 하나님 편에서의 마음의 어떤 변화가 있었다는 것은 지지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의 은혜로운 뜻은 구약성경에서 오래 전에 계시되었기 때문이다.
② 우리는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화목되었다(롬 5:10). 그가 우리를 위하여 정죄 당하셨을 때, 우리는 그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었다(고후 5:21). 이 정도로 화해는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과 병행한다(참조: 롬 5:9에 대하여 롬 5:10). 이것이 바울의 칭의에 대한 견해에서 매우 중요한 로기제스다이(logivzesqaiv; 롬 4:3; 롬 4:4; 롬 4:5; 롬 4:6; 롬 4:8; 롬 4:9; 롬 4:10; 롬 4:11; 롬 4:23; 롬 4:24)가 고후 5:19에 다시 나타나는 이유이다: "저희의 죄를 저희에 [돌리지] 아니하시고". 이제 화해 안에서 단순한 죄와의 관계의 제거 이상의 것이 일어난다는 데에는 의문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그들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말씀하시고 예수님을 위하여 사람들에게 간청하는 사자들을 보내셨다: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고후 5:20). 아들의 너무나 큰 희생도 마다하지 않는, 그리고 인간에게 간청한다는 것은 너무나 굴욕적인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넘치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계시를 통하여 우리들은 우리의 삶의 전체 상태가 새로워진다.
고후 5:14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신다. 우리는 다시는 우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우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산다(고후 5:15). 우리는 우리가 모든 다른 사람들처럼 죽었으며, 이제 새로운 피조물들이라고 생각한다. 화해에 의해 우리의 죄많은 이기심이 극복되고 하나님과의 친교가 일어나며, 그 친교 속에서 우리의 죄많은 이기심은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으로 대체된다. 이것들은 바울에게 있어서 양심에 계시되고 반대자들에 대한 대답으로 제시될 수 있는 현존하는 사실들이다(고후 5:11-15). 그것들은 양심으로부터 떼어내어 심리학적인 면에서 주장될 수 없다. 그러나 바울이 양심을 말하고, 이것을 그의 자기 옹호의 근거(고후 5:11, 고후 5:12)로 삼았다는 사실은 이러한 사실들의 인식은 단순히 실제로 하나님의 사랑에 의한 사랑으로 이끌리지 않는 대상에게 대한 단순한 믿음의 전달 이상이다라는 것을 보여준다. 설사 새로운 사실이 근본적으로 그리고 끊임없이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행위에 의해 일어나고, 그리고 인간 자신은 죄인이며 세속적이기를 그치지 않는다 해도 인간은 하나님의 활동의 변화의 단순한 대상물이 아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의 방문을 받는 자이며, 그래서 사랑에 눈뜨는 자이다.
이것은 특히 롬 5:5에 명백하다. 우리(화목된 자들)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은 현존하고 활동하는 실재가 되었지만, 이전에 우리는 그것으로부터 떨어져 있어서 단지 우리 자신의 삶을 살았다. 이것은 여전히 육체 속에서 사는 우리들에게 주어진 성령에 의해서 일어난다. 그러므로 옛 것과 새 것이, 그 자신의 마음과 성령이 모두 인간 속에서 발견된다: 그러나 이미 그는 전체적으로 성령을 통하여 새롭게 되었고, 그는 성령 안에서 걸을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된다(롬 8:4).
종종 인간이 화해에서 능동적인가 또는 수동적인가 하는 질문이 제기된다. 참된 대답은 그들이 능동적이 되는 것이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사랑하는 행위을 전하는 디아코니아 테스 카탈라케스("화목케하는 직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는 친히 그들을 능동적이게 하시며, 그들에게 그들 자신을 하나님과 화해시키는 권리와 능력을 모두 주신다. 카텔라게멘("화목되었은")과 카탈레겐테스("화목된 자로서")가 의심할 여지없이 중간태가 아니고 수동태를 취한다. 이것은 롬 5:9의 수동태 디카이오덴테스("의롭다함을 얻었은즉")와의 일치를 위해, 또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우리를 향한 성령의 역사하심에 대해 말하는 문맥에 의해서도 요구된다. 우리는 화해를 받아들였으나 공격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간청하심으로 받아들인 것이다(고후 5:20). 인간의 활동은 그로하여금 어떤 선물을 받아들이도록 요구하게 하는 것이라는 말로 보다 더 나은 어떤 표현 방식을 상상할 수 없다.
바울이 화해의 말씀을 요구(request)하라고 말한 사실은 인간을 화해에 있어서 단지 수동적일 뿐이라고만 생각했다는 어떤 가능성의 여지를 전혀 주지 않는다. 화해에 있어서 인간도 역시 인격이다. 어떤 화해가 적어도 그를 위한 것일 수 있는 이유는 오직 그가 한 인격이며, 따라서 능동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고후 5:20의 카탈라게테("화목하라")와 고전 7:11의 카탈라게토("화합") 간의 유사함도 역시 화해에 있어서 인간의 어떤 단순한 수동성을 부정한다. 만약 그녀가 그것에 관하여 전적으로 수동적이라면, 그 아내에게 화해를 요구할 수 없다. 설사 그녀가 화해를 시도하지 않을지라도 그녀는 적어도 남편의 시도에 동의해야만 한다. 만약 그녀가 전적으로 수동적이었다면 새로운 친교는 있을 수 없고 따라서 그녀 자신과 남편 사이에 화해도 있을 수 없다.
③ 바울은 항상 화해에 대해서 개인적 고백의 형식으로 말한다.
즉 "우리가" 화목되었다(롬 5:9; 롬 5:10; 고후 5:18)고 표현한다. 그는 고후 5:19-고후 5:20에서만 세상과의 화해에 대해 언급하는데 여기에서도 세상은 "우리"와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가장 넓은 가능한 범위에서 정확히 같은 의미를 나타낸다. 우리와 세상은 본질적으로 같다. 왜냐하면 화해를 제쳐놓는다면, 우리도 역시 단지 약하고 죄 많고 불경건하며, 화해는 무제한적으로 모두를 위해 정해진 것이기 때문이다. 화해가 진행하는 과정 속에 있다고 생각되는 한, 그것은 세상에 대한 화해이다. 이것이 바울이 고후 5:19-고후 5:20에서 화해에 대해 이해한 방식이다. 그는 그의 직무를 디아코니아 테스 카탈라게스("화목하게 하는 직책")로서 거의 생각할 수 없었고 그의 메시지의 내용도 "너희들은 화목되라"가 아니기 때문에, 만일 그가 화해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안에서 완결된다는 것을 믿었다면, 그런 점에서 뒤 따르는 것은 더 이상 그것의 어떤 부분도 형성하지 않는다. 디아코니아 테스 카탈라게스("화목하게 하는 직책")이 아직 끝나지 않았고, 세상은 아직 그 모든 구성원들이 로고스 테스 카탈라게스("화목하게 하는 말씀")를 듣지 못했기 때문에, 화해 자체를 완결된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을 것임은 분명하다. 명백히 화해의 기초가 되는 것, 즉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한 의문도 있을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자의 직무는 세상을 구성하는 개인들의 회복을 이루는 그의 사역을 통한 계속되는 화해의 실행이다. "우리의" 화해는 완결되었고 바울은 그것에 대해 부정과거로 말할 수 있다(롬 5:9, 롬 5:10[롬 5:11]; 고후 5:18). 그러나 이것은 세상의 화해로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다.
고후 5:19의 "~안에서 ... 화목케 하시며"(엔 카탈랏손)이라는 문구는 종결된 사역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고후 5:19-고후 5:20에서는 이 일이 완결될 때와 장소는 생각하고 있지 않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바울이 세상을 화해의 대상으로 생각했다는 사실로부터, 그에게 있어서 화해는 오직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죄의 관계를 제거하는 데에만 있다는 결론을 내려서는 안되는 것은 전체로서의 세상은 새로운 피조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은 결국 바울이 명백하게 화해의 직책과 인간의 자기 화해라고 부르는 것이 화해의 아무 부분도 구성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된다. 바울은 세상이 화목되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세상의 화해는 유대인들의 아포볼레(버림)처럼 완성되지 않는다. 둘 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시작되었고, 둘 다 성취의 과정 중에 있다. 바울이 의미하는 화목된 세상은 오직 하나님의 목적과 건설로 존재하는 것의 완성을 예상할 때에만 예상할 수 있다.
④ 화해에 앞서 일어나는 적대적 상태는 고후 5장에는 전혀 언급되지 않으며, 롬 5장에 암시적으로 언급될 뿐이다. 그러나 롬 5:10의 에크드로이(원수들)를 일방적으로 인간의 하나님에 대한 적의에만 한정된다고 이해할 이유는 없다. 왜냐하면 비록 하나님의 인내 역시 분명히 나타나고 활동하지만, 롬 1:18-롬 1:32에서 바울이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 현존하는 명백한 사실로서 아주 분명히 말하였기 때문이다(롬 2:2, 롬 2:5; 롬 3:26). 참으로 롬 11:28에서 디 휘마스("너희를 인하여")와 병치된 아가페토이("사랑을 입은 자들")는 우리에게 에크드로이("원수들")가 수동적으로 사용되었다는 것, 즉 "하나님의 진노 아래 서있는"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바울은 결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얼마간의 조화와 신뢰의 결핍을 인간의 탓으로 돌리지 않는다. 만일 그런 부류의 어떤 것이 아마도 고후 5:10의 고전 7:11과의 유사성으로부터 추론되었다면, 이것은 단지 부차적일 뿐이다. 롬 8:7에서 하나님에 대한 적대의 가장 중요한 표현은 불순종인데, 이 불순종은 고후 5:15에서 자신을 위하여 사는 것이라고 불리운다. 화해 이전의 인간의 상태의 본질적인 특징은 하나님의 사랑의 명령을 수행할 수 없는 자기 본위(롬 8:7c)와 그 결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고(롬 8:8) 진노와 심판 아래 있음으로 인한 혼란이다.
화해는 예수님의 죽으심을 통해 일어나는 것인데 이 예수님의 죽으심은 분명히 단지 우리를 유리하게 하는 어떤 것도 아니고 단순히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계시도 아니다(롬 5:8). 그것은 우리를 대신하는 그리스도의 대속이다(고후 5:20, 고후 5:14 이하). 우리를 자신과 화목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항상 동시에 우리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이런 이유로 화해는 고후 5:21: "위로 저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와 고후 5:19: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모두에서 의롭다 하심을 포함한다. 사랑의 발화로서 그것은 용서로 죄를 제거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포함한다. 롬 5:9과 롬 5:10에서 "의롭다 함을 얻는" 것과 "화목된 것"은 유사하다 해도 이것이 '화해'를 '의롭다함'으로 변형시킬 어떤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화해'에는 '의롭다함'에는 놓여 있지 않는 사랑의 발화가 속하기 때문이다. 바울은 믿음을 의롭다 하심과 가장 밀접하게 관련시켰지만, 그가 의롭다하심으로부터 사랑을 끌어내지 않은 것처럼 롬 5장이나 고후 5장에서 화해와 관련하여 의롭다하심을 언급하지 않은 것은 이것과 일치한다.(참조: F. Buchsel; Walter Bauer; J. H. Thayer).
------하나님과 화목하라 (욥22:21~30)
유명한 화가가 되기를 원하는 몇 명의 소년들이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방문했습니다. 그는 아주 조용한 가운데 예수님의 얼굴을 그리는 작업에 열중하고 있었는데 한 소년이 화판 더미에 걸려 넘어지는 바람에 작업이 방해를 받아 기분이 상했습니다. 그는 붓을 집어던지고 어쩔 줄 몰라 하는 소년에게 화를 내며 심하게 꾸짖었습니다. 소년은 울면서 화실 밖으로 뛰어나갔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다시 붓을 들고 예수님의 얼굴을 완성시켜 보려고 애썼지만 그림을 그릴 수 없었습니다. 그의 창조성과 영감은 화를 낸 후 전혀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울고 있는 소년에게 다가가 말했습니다. "얘야, 미안하구나. 내 말이 너무 지나쳤다. 나를 용서해다오. 나는 너보다 더 잘못했구나. 너는 그저 화판에 걸려 넘어진 것뿐인데 공연히 화를 내어 나의 생명 안에 흘러드는 하나님의 영감을 막았구나. 나와 함께 다시 화실로 들어가지 않겠니?". 그런 후 그는 자연스럽게 예수님의 얼굴을 그릴 수 있었습니다. 화목하게 하는 삶에서 하나님의 평화와 기쁨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죄는 분열을 만듭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파괴합니다. 죄인의 마음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에 문제가 생깁니다. 어려움이 임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화목을 원하십니다.
본문은 '하나님과 화목 하라' 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에는 사람과 화목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과 화목해야 한다는 중요한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화목' 이라는 말의 헬라어는 '카탈랏소' 입니다. 카타- 아래로라는 말과 알랏소- 잘못된 것을 새롭게 바꾸다라는 말이 합성된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화목은 하나님과 잘못된 관계를 바꾸고 회복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고치라는 뜻입니다.
진정한 복은 하나님과 관계가 바르게 될 때 얻어집니다. 본문 21절은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 고 하십니다. 화목은 하나님과 관계가 통하는 일입니다. 하나님과 화목한 후에 평안해집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복이 임합니다. 따라서 하나님과 통할 때 평안과 복이 찾아옵니다. 영적인 문제는 영으로 해결되어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통해야 은혜도 받고, 평안도 누리고, 기쁨도 맛보고, 감사한 마음도 우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막히면 어떤 일도 되는 일이 없습니다. 바느질하는 사람이 실에 매듭이 지어져 있으면 바느질이 안 되는 것과 같습니다. 바느질이 되려면 반드시 매듭을 먼저 풀어야합니다. 하나님과 매듭이 있으면 어떤 일도 절대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먼저 하나님과 매듭을 풀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화목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화목 하는 길은 무엇입니까?
첫째로 하나님 말씀을 마음에 두어야 합니다
하버드대학 총장을 역임하였던 찰스 윌리암 엘리옷은 어렸을 때 얼굴에 큰 점이 있는 점박이였는데 이는 수술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러기에 소년은 그 점 때문에 열등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어머니께서 우울하게 지내는 아들을 붙잡고 말씀하십니다. "찰스야! 너의 얼굴에 있는 점을 없앨 수는 없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네 마음에 두고 살아라. 그리하여 네 영혼이 크게 자란다면 사람들은 더 이상 얼굴에 있는 점을 보지 않고 네 속에 있는 인격과 믿음을 볼 것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두었고 그 결과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대학의 총장이 된 것입니다.
본문 22절에도 "청컨대 너는 그 입에서 교훈을 받고 그 말씀을 마음에 두라" 고 하였습니다. "마음에 둔다" 는 말은 "피와 심장이 움직이는 곳 즉 생명의 중심에 있게 한다" 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삶의 중심이 되게 한다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행하고 생각하고 움직인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이 곧 화목입니다.
국민이 언제 당당할 수 있습니까? 법을 지킬 때입니다. 법을 지키고 사는데 경찰이 무섭습니까? 도리어 경찰이 있어 마음 든든합니다. 자식은 언제 떳떳합니까? 부모님 말씀대로 행할 때입니다. 인생이 언제 평안 할 수 있습니까? 세상 만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 말씀을 따라 살 때입니다.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에게 불행이 찾아 온 것도 하나님의 말씀을 어겼을 때입니다. 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따먹은 후에 두려움과 불안이 찾아 왔습니다.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관계를 하나님께만 두겠다고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삶의 가치를 하나님의 말씀에 두고 살겠다고 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아닌 그 무엇에도 나의 마음과 삶을 맡기지 않겠다고 결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두고 순종해야 합니다. 당장 손해보는 것 같아도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과 매듭져 있는 것들을 풀어야 합니다. 그리고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두며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화목하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머리가 아닌 마음에 두고 순종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어미 꿩이 새끼들에게 늘 주의를 주었습니다. "먹이를 먹을 때는 입으로 먹지만 귀는 항상 내 음성에 주의를 기울여라. 너희를 해치려는 짐승이 나타나면 내가 소리칠 테니 지체말고 나무 위로 날아가거라.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먼 곳으로 가지 마라." 그런데 새끼 중 한 마리가 어미 말을 흘려버리고 멀리 갔습니다. 얼마 후에 여우가 나타나자 어미 꿩은 소리 지릅니다. 새끼들은 어미의 목소리를 듣고 일제히 나무 위로 날아 올랐습니다. 그러나 어미 꿩과 떨어져 있던 새끼는 목소리를 듣지 못하여 그만 여우의 먹이가 되고 말았습니다. 성경은 이렇듯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지면 멸망을 받게 되며 불행의 늪에 허덕이고 만다는 것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본문 23절에서 "네가 만일 전능자에게로 돌아가고 또 네 장막에서 불의를 멀리 버리면 다시 흥하리라"고 하십니다. "전능자에게로 돌아간다" 는 말은 회개를 의미합니다. 과거의 죄악된 생활에 머물러 있으면 하나님께서 결코 복을 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떳떳하지 못한 행위에서 돌이켜야 합니다. 하나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돌아가기만 하면 복을 다시 주십니다. 또한 불의를 멀리 버리기만 하면 다시 흥하게 하실 것이라고 우리에게 약속하셨습니다.
"불의를 네 장막에서 버리라" 는 말은 성도답게 살라는 의미입니다. 악한 말을 하고 상처 주는 말을 도무지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불신자와 같은 행동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망해도 일으켜 주십니다. 장막에서 불의를 버리면 다시 흥하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장막은 삶의 영역을 말합니다. 지금 여러분의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이 원치 않으시는 불의한 모습이 있다면 과감히 버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화목한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26절 이하는 하나님과 화목한 자들이 얻는 은혜의 내용입니다. "네가 전능자를 기뻐하여 하나님께 얼굴을 들 것이며 너는 그에게 기도하겠고 그는 들으실 것이며 너의 소원한 것을 네가 갚도록 하겠다" 고 말씀하십니다. 기도한 것, 소원 한 것, 작정한 것을 다 들어 응답하여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어 28절은 "무엇을 경영하면 이루어 질 것이요 네 길에 빛이 비취리라" 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과 화목하면 인생의 가는 길이 환하게 보이는 축복을 얻게 됩니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고 앞이 보이지 않는다면 먼저 하나님과 화목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할 때 내가 가야할 길이, 내가 해야할 일이 보이게 됨을 분명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하나님을 보배로 삼아야 합니다
미국 스미스 소니언 박물관에서 세계 최고의 다이아몬드를 공개하였습니다. 이름은 '호프 다이아몬드' 이며, 45캐럿짜리 인도산 다이아몬드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소유한 자마다 하나같이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여 '저주의 보석' 이라고 불려집니다. 최초의 소유자는 페르시아 총독인데 그는 도둑에게 살해당하여 비명에 갔습니다. 두 번째 소유자는 페르시아 왕이었습니다. 그도 반란군에 의해 처형당했습니다. 세 번째 소유자는 프랑스의 루이 14세인데 그는 목에 이 보석을 걸어본 후 천연두에 걸려 죽었습니다. 루이 16세가 네 번째 소유자인데 그는 왕비와 함께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마지막으로 영국의 최대 재벌인 헨리 필립 호프라는 사람에게 넘어갔습니다. 그래서 그 다이아몬드는 호프 다이아몬드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호프가는 곧 몰락하고 말았습니다. 세상 보화와 재물을 좇는 인생의 종착역은 죽음과 허무라는 교훈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본문 24절 이하에 "네 보배를 진토에 버리고 오빌의 금을 강가의 돌에 버리라 그리하면 전능자가 네 보배가 되시며 네 귀한 은이 되시리니" 라고 말합니다. 누구나 하늘의 참된 보화를 얻으려면 먼저 세상의 보배는 지푸라기처럼 버려야 된다는 뜻입니다. 하늘의 보화에 비하면 세상 것은 아무리 귀한 것이라도 비교할 것이 못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세상 것을 붙잡고 있으면서 하늘의 것을 더 받으려고 합니다. 본문의 '그리하면' 이란 접속사는 절대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세상 보화를 버리지 않으면 절대로 참된 보배를 얻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보배를 진토에 버리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자기 것이 아까워 어물어물 하는 자는 보배를 얻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알고 나서 세상 것을 다 배설물처럼 버렸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하나님을 보배로 얻기 위해 세상 것에 연연해서는 안됩니다. '죽어야 산다'는 말과 함께 '버려야 산다'는 말도 진리임을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훼방되는 일은 속히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 모든 욕심을 비워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이 참 보배가 되어 주십니다. 다같이 찬양합니다. "주 예수 보다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 영 죽을 내 대신 돌아가신 그 놀라운 사랑 잊지 못해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 자랑 다 버렸네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예수 밖에는 없네"
여러분이 가장 귀하게 여기는 것은 무엇입니까? 물질입니까? 명예입니까? 쾌락입니까?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가장 귀하신 보배로 삼아야 합니다. 하박국 선지자처럼 오직 여호와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과 화목하게 됩니다. 무엇이든 경영하면 이루어 주십니다. 서원 한 것을 갚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길에 빛을 비추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부디 세상과 화목하기보다 먼저 하나님과 화목하시기 바랍니다. 그 일이 힘들고 어려워도 먼저 하나님과 화목 하는 은혜로운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김광일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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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d:y:(3034, 야다) 던지다, 쏘다, 감사하다, 찬양하다, 고백하다[[감사..단독]]
야다(동사)는 기본어근이며, '던지다, 내던지다 throw, cast'를 의미한다. 좋은 것을 던져 줄 수도 있고, 나쁘거나 불필요한 것을 던져 버릴 수 있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144회 나오며, 칼형에서 '쏘다'(화살, 렘 50:14), 피엘형에서 '던지다'(애 3:53), 히필형에서 '감사하다, 찬양하다, 고백하다', 히트파엘형에서 '고백하다, 감사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야다의 기본적인 의미는 '죄, 하나님의 품성과 역사, 혹은 인간의 특성을 시인하다 혹은 고백하다'이다. 이 동사와 그 동의어 할랄의 기본적인 차이는 후자의 용어가 '갈채하다, 자랑하다', 혹은 어떤 대상을 '기뻐하다'를 강조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에, 야다는 좋든 나쁘든 어떤 사실에 대한 '인정'과 '선언'을 강조한다. 70인역본은 일반적으로 야다를 엑소몰로게오로 번역한다.
동사는 세 가지의 기본적인 방법으로 사용된다.
첫째, 이 단어는 개인적으로든 국가적으로든 죄의 시인 혹은 고백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었다. 기본적인 개념은 시 32:5에 묘사되어 있는 다윗의 개인적인 고백에서 분명하게 관찰되었다. 여기에서 시적인 병행구는 고백이 죄를 감추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하나님께 알리는 것이었음을 설명해 준다. 죄에 대한 고백이 하나님께 행해져야 한다는 사실을 주목하는 것은 중요하다. 국가적인 고백의 개략은 속죄일 의식에서 발견된다. 이때 대제사장은 큰 소리로 이스라엘 민족의 모든 죄를 고백하면서, 자기의 손을 염소의 머리 위에 두어 상징적으로 민족의 죄를 염소에게 전가 시켰다(레 16:21). 힛파엘형은 이 동사가 국가적인 죄의 고백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될 때 일반적으로 사용된다. 이 어간은 또한 이스라엘 죄의 대 고백이 다니엘(단 9:4, 단 9:20), 에스라(스 10:1), 느헤미야(느 1:6), 그리고 바벨론 포로기 동안과 그 이후의 이스라엘 백성(느 9:2-3)들에 의해 행해졌을 때에도 사용되었다. 국가적인 죄의 고백은 일반적으로 공적인 것이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자기 앞에서 우리의 죄를 시인하여(참조: 요일 1:9), 자기와의 본래의 관계를 유지하기를 매우 원하신다.
둘째, 야다는 하나님의 속성과 그의 일에 대한 인간의 공적인 선포나 선언(고백)을 나타내기 위해 주로 사용되었다. 이 개념은 찬양의 의미의 핵심에 있다. 찬양은 하나님이 누구이신가 그리고 그가 무엇을 행하는가에 대한 고백이거나 선언이다. 이 용어는 영역본들에서 가장 자주 '감사하다' thank로 번역되지만, 베스터만(Westermann)에 의하면, 이 번역이 실제적으로 적당한 번역은 아니라고 한다. 즉 구약성경에서 ...아직까지 '감사하다' thank만을 의미하는 동사는 없었다. 일반적으로 '감사하다' thank로 번역되는 호다는 구약성경에서 사람들 사이의 감사에 대한 표현을 뜻하는 말로는 단 한번도 사용되지 않았다. 따라서 처음부터 이 호다는 하나님과 인간에게 똑같이 사용될 수 있는 우리의 언어 '감사하다' thank와 일치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인간들 사이에 일어나는 어떤 것으로서의 우리의 '감사하다'가 가장 분명하게 발견되는 구약성경의 구절들에서 사용된 동사는 베레크이다. 이 동사는 '찬양하다' praise의 기본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축복하다' bless를 의미한다.
이런 사실에 비춰볼 때, 구약성경은 감사하는 것에 대한 독립적인 개념을 가지고 있지 않음이 분명하다.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표시는 찬양에 포함되어 있다. 이것은 찬양의 한 방식이다(Westermann, Claus, The Praise of God in the Psalms, Richmond; John Knox Press, 1965, pp. 26-27).
이 용어의 가장 좋은 역어는 '고백' confession이다. 왜냐하면 시편(참조: 시 89:5, H6, 시 105장, 시 106장, 시 145장)과 그 외의 곳(참조: 대상 29:13)에서 충분히 볼 수 있듯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속성과 일을 고백하거나 선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야다는 '찬양하다' praise를 뜻하는 주요 단어들 중의 하나이다. 이 단어는 히브리인들의 시에서 언제나 할랄(찬양하다) ,자마르(악기로 찬양하다) 룸(높이다), 자카르(기억하다), 카밧(찬양하다), 그리고 나갓(선언하다)과 같은 찬양 용어들과 병행되어 나온다. 감사는 찬양 뒤에 온다. 왜냐하면 사람이 하나님의 속성과 일을 선언할 때, 이런 것들에 대해 감사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찬양은 대개 감사로 이어진다.
[베스터만은 한 주요 요지에 주의를 환기시켰다. 그렇지만 그의 말이 모든 세부적인 것들에 다 필요한지는 의심스러울 것이다. 만약 때로 감사가 찬양에 포함된다면, 특히 이 어근의 기본적인 의미가 BDB가 시사한 바처럼, '인정하다' acknowledge일 때, 어떤 행동이나 일에 대해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 야다가 사용되는 실례들이 감사하다라는 우리의 개념과 동일시될 수 있을 것이다(R. L. H)].
찬양은 일반적으로 여호와나 그의 이름을 그 대상으로 취한다(시 97:12, 시 99:3, 시 136:1-3, 시 136:26). 죽은 자가 아닌, 산 자만이 하나님을 찬양하였다(사 38:18-19, 시 6:5, H6, 시 30:9, H10, 시 88:10, H11). 찬양의 수창자(首唱者)에는 의로운 개인들(시 140:13, H14), 이스라엘 백성(시 106:47), 열방들(시 45:17, H18), 지상의 모든 왕들(시 138:4), 하늘들(시 89:5, H6), 사람의 노(시 76:10, H 11)와 같은 것들이 포함된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위대한 속성과 그의 기적적인 역사들을 고백했다. 여호와에 대한 찬양은 공적인 것으로, 열방들 사이에서(삼하 22:50),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대 회합에서(시 35:18) 발견되었다. 개인이나 백성이 와서 여호와를 찬양할 때, 그들은 종종 악기를 수반하여(대하 5:13, 시 33:2, 시 43:4), 말이나 노래로써, 구두로 찬양하였다(시 109:30, 시 28:7). 이런 찬양은 일반적으로, 다윗이 엄격하게 여호와의 인격에 대한 찬양과 고백으로 경축하는 임무를 맡긴 그런 레위인들(대상 16:4)의 지시하에 성막(혹은 성전)에서 행해졌다(시 100:4, 시 122:4). 이것은 매일 아침과 저녁에 성막에서 수행되어야 했던 예배의 주요 측면이었다(대상 23:30). 이 찬양은 여호와의 옳은 길(여호와의 의)에 따라(시 7:17, H18) 올바른 마음을 가지고(시 119:7) 전심으로 행해져야 했다(시 86:12, 시 111:1). 이런 찬양은 계속적으로 - 영원히 - 행해져야 했다(시 30:12, H13).
셋째, 야다는 또한 어떤 사람에 관한 어떤 진실을 고백하는, 즉 사람에 대한 사람의 칭찬을 나타내기 위해서 사용되었다(시 49:18, H19). '찬양' praise을 의미하는 "유다"라는 이름은 이 어근에서 나온 것이다. 왜냐하면 유다의 형제들이 그를 찬양(혹은 고백)하였기 때문이다(창 29:35).(참조: R. H. Alexander; BDB).
------rm'z:(2167, 자마르) 노래하다, 찬양하다, 연주하다 [[공동의 고백/찬송으로]]
자마르(동사)는 기본어근이며, '노래하다, 찬양하다, 연주하다'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45회 나오며, 여호와를 찬양하는데 사용되었다.
(a) 찬양의 노래는 출 15:2에 처음으로 나온다. 여기에서 모세는 홍해에서의 애굽인에 대한 승리를 노래한다. 이 동사는 삿 5:3, 드보라가 시스라와 그의 강한 병거의 격파를 기념하기 위하여 쓴 승리의 노래에서 사용된다(참조: 시 68:4[5], 시 68:32[33]).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이 사는 날 동안 그들의 목소리와 악기를 높여 여호와를 찬양한다(시 104:33, 시 146:2). 몇 구절에서 이 찬양은 여호와의 '이름'에 돌려진다. 왜냐하면 그 '이름'이 여호와 자신을 나타내기 때문이다(시 66:4, 시 18:49[50], 시 135:3).
신실한 자들은 음악으로 '그 행사'(시 9:11[12])에 대하여, 그분이 이루신 '영광스러운 일' 혹은 '기이한 행동'(사 12:5, 시 105:2)에 대하여 하나님을 찬양한다. 시 101:1에서는 여호와의 사랑과 정의가('인자와 공의') 찬양 받는다. 시 119:54에서 하나님의 '율례가 나의 노래의 주제이다'(NIV)고 한다.
사 24:16에서 노래의 말은 '의로우신 자에게 영광'이다. 시 47:7은, 하나님은 모든 지상의 왕이시므로 사람들은 그에게 '마스길'을 노래해야 한다고 한다. 또한 시 45장의 제목에서 의미가 불확실한 이 용어가 발견된다.
(b) 자마르는 악기와 직접 연관되어 사용되었다. 수금(시 71:22), 열 줄 비파(시 33:2, 시 144:9), 하아프(시 98:5, '수금'), 탬버린(시 149:3, '소고')은 모두 하나님을 찬양할 때 '연주하기' 위해 사용된다.
시 149:3의 병행구는 춤으로 여호와를 찬양하는 것에 대한 언급이다: "춤 추며 그의 이름을 찬양하며 소고와 수금으로 그를 찬양할찌어다". 이런 언급들을 고려해 볼 때, 자마르나 그 동족어가 나오는 곳에서 반드시 노래하는 것을 암시하지는 않는다.
(c) 자마르는 부정적인 의미의 노래에 대해서도 사용되었다. 사 25:5은 여호와께서 '포악한 자의 노래'를 멈추게 하심으로써 가난하고 궁핍한 자에게 그의 신실하심을 보여주신다고 한다.
암 5:23에서 이스라엘이 공평과 의를 버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절기에서 부르는 노래와 음악 듣기를 거부하신다고 한다.(참조: R. L. Harr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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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k'z:(2142, 자카르) 기억하다, 상기하다 remember [[기억/회상/상기]]
자카르(동사)는 기본어근이며, '기억하다, 상기하다 remember'를 의미한다.
이 단어는 (1) '기억' 이나 '주의 집중'과 같은 완전한 내적 활동, (2) 적절한 외적 행동을 수반하는 내적 정신 활동, (3) '언급하다'는 의미를 들을 수 있게 말하는 것 까지를 나타낸다. 여기서 '언급한다'는 것은 기억이나 생각의 연장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230회 나오며, 칼, 니팔, 히필형으로만 사용되었다.
1. 칼형에서 이 단어는 '기억하다, 상기하다, 생각하(해내)다'를 의미한다.
칼형의 대부분의 실례들은 내적 정신 활동을 언급하는데, 이에 동반하는 외적 행동을 언급할 경우도 있고 언급하지 않을 경우도 있다. 내적 정신 활동의 예로서 예루살렘에 대한 유대인의 회상(시 137:1)과 그들이 노예였음에 대한 그들의 기억(신 5:15)이 있다. '기억하는 것'은 '잊어버리는 것'과 대조된다(시 74:22-23). '명상하다' mediate 혹은 '생각하다' think about의 의미는 욥이 사악한 자의 행복에 대하여 생각할 때(욥 21:6-7)와 시편기자가 하나님을 묵상할 때(시 63:6 [H7]) 사용된다. 하나님께서 '기억하소서'라고 도전 받을 때 그 말은 오히려 '주의를 기울이다'를 의미한다. 왜냐하면 어떠한 것이라도 하나님의 전지하심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시 89:47). 위에 언급한 의미 중에서 어느 것이 개개의 구절에 가장 적합한지를 결정하기가 어려울 때가 많다.
많은 구절들에서 이 단어는 적절한 행동을 취하는 부가적 의미가 위에서 언급한 의미에 첨가된다. 그의 언약에 대한 하나님의 '기억'은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고(출 2:24) 보전하시는(레 26:44-45) 결과를 가져온다. 반대로, 죄를 기억하는 것은 은총의 보류에 상당하는 것이다(호 7:1-2). 히스기야의 과거의 성실함을 기억하셔서 치료해 주셨고(왕하 20:3), 노아를 기억하셔서 물을 감하게 하셨다(창 8:1). 하나님에게 있어서 악을 기억하지 않는 것은 바로 용서하시고 장래의 심판을 거두는 것이다(시 79:8-9).
또한, 인간에게 있어서 기억하는 행위는 행동을 결과한다. '기억함'이란 회개(겔 6:9) 혹은 계명의 준수(민 15:40) 특히 안식일을 지키는 것(출 20:8)으로 나타난다. 땅의 모든 끝의 '기억'은 바로 '회개'이다(시 22:27 [H28]). 정치적인 관계에서 협정을 기억하지 않는 것은 그것을 어기는 것이다(암 1:9).
몇몇 이러한 실례들은 명백한 원인과 결과의 뚜렷한 예들이다. 그러나 또 다른 경우에 '기억하는 것'과 수반되는 행동 사이의 관계가 너무나 밀접하여 그들은 실제로 기자의 마음과 일체가 된다(성경의 히브리어에서 '듣다'와 '순종하다' 사이의 밀접한 관계).
몇몇 경우에 칼형은 청취 가능한 담화를 언급한다. 나 2:6에서는 생각해서 언급하는 것까지 포함한다. 어떤 강한 자들의 낭독은 호머에 나오는 영웅들의 낭독에 필적할 수 있는 것 같다. 과부는 다윗에게 그녀의 남은 아들의 보호에 대한 맹세나 들을 수 있는 기원을 다윗에게 요구했다(삼하 14:11).
바다 생물의 배에서 요나가 '기억하다'는 기도에서 들을 수 있게 '호소하다'라는 의미로 받아 들일 수 있을 것이다(욘 2:8). 만약 이 단어에 '이야기하다, 기원하다'와 같은 의미를 허용할 수 있다면 하나님의 기적적인 역사를 '기억하는 것'은 그러한 역사에 대한 공개적인 낭독일 수 있을 것이다(대상 16:12).
하나님의 위대하신 행동을 회상하는 시편들은 그러한 낭독의 실례를 제공해 준다(시 104편, 시 105편, 시 106편). 그러나 이런 경우에도 언제나 기억이 강조되었으며, 기억을 언급하는 것에 불과하다.
2. 니팔형에서 이 단어는 '기억되다, 상기되다'를 의미한다.
니팔형은 칼형과 히필형의 수동태로 나온다. 이것은 '기억을 얻다'를 나타낸다(욥 24:20). '기억함을 얻는 것'은 구원 받을 것이라는 적당한 행동을 수반할 수 있을 것이다(민 10:9). 기생은 마치 기억함을 얻을 뿐만 아니라 '주목 받기' 위하여, 혹은 '그녀에게 주의를 기울이게 하기 위하여' 노래를 불렀다(사 23:16).
이 단어는 니팔형으로 호 2:19, 슥 13:2, 욥 28:18, 겔 21:29, 겔 3:20, 겔 18:24, 겔 33:13, 겔 18:22, 렘 11:19, 에 9:28 등에도 나타난다.
3. 히필형에서
(a) 이 단어는 '기억이 나게 하다'를 의미한다.
사 43:26, "너는 나로 기억이 나게 하고 서로 변론하자 너는 네 일을 말하여 의를 나타내라".
(b) 이 단어는 '기억되게 하다, 기억하고 있다, 기억을 간직하다'를 의미한다(삼하 18:18, 시 45:17, 출 20:24).
(c) 이 단어는 '언급하다'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창 40:14에서 술관원장이 바로에게 자기에 대해 말해 주기를 바라는 요셉의 바람을 표현한다: "당신이 득의하거든 나를 생각하고 내게 은혜를 베풀어서 내 사정을 바로에게 고하여 이 집에서 나를 건져내소서".
다른 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출 23:13, 수 23:7)을 금하는데 여기서 '언급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사 49:1에서 문맥상의 병행어인 '부르셨고'는 남이 들을 수 있게 말하는 것이 '내 이름을 말씀하셨고'와 관련된다는 것을 나타낸다.
삼상 4:18에서 언약궤에 대하여 다른 사람이 들을 수 있을 정도로 말하였기 때문에 엘리가 죽음을 초래하였다: "하나님의 궤를 말할 때에 엘리가 자기 의자에서 자빠져 문 곁에서 목이 부러져 죽었으니 나이 많고 비둔한 연고라 그가 이스라엘 사사가 된지 사십년이었더라".
사 12:4에서 '언급'이나 '선포'를 의미한다.
시 20:7에서 정확한 의미는 분명하지 않지만 '공개적인 언급'을 가리키는 것 같다: "혹은 병거, 혹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대상 16:4에서 '여호와를 찬양'하는 언급을 의미한다.
(d) 이 단어는 히필 분사형에서 '기록'이나 기록자의 직무에 대해 사용되었다(삼하 8:16, 삼하 20:24, 왕상 4:3, 왕하 18:18, 왕하 18:37 = 사 36:3, 사 36:23, 대상 18:15, 대하 34:8).
(e) 이 단어는 '기념(물)로 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사 66:3에서 분향과 관련하여 사용되었다: "소를 잡아 드리는 것은 살인함과 다름이 없고 어린 양으로 제사 드리는 것은 개의 목을 꺾음과 다름이 없으며 드리는 예물은 돼지의 피와 다름이 없고 분향하는 것은 우상을 찬송함과 다름이 없이 하는 그들은 자기의 길을 택하며 그들의 마음은 가증한 것을 기뻐한즉".(참조: BDB; T. E. Mccomisk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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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tanoevw(3340, 메타노에오) 마음을 바꾸다, 회개하다, 회심하다.[[자복/회개/통회]]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동사 메타노에오(Antipho 이래)는 메타(metav, 3326)와 노에오(noevw, 3539: 지각하다, 인지하다, 생각하다)에서 유래했으며, 다음의 의미를 지닌다. 이 단어는 매우 드물게 나타난다.
(a) 메타노에오는 '후에' 또는 '나중에 알아 차리다'(때때로 '너무 늦게'라는 의미를 포함한다)(Epicharmus), '후에나 뒤에 동의하다'(BGU.).
(b) 그 다음에 메타노에오는 '마음(mind)을 바꾸다, 다른 견해를 채택하거나 받아들이다, 감정을 바꾸다'(Plut.), '결의나 의사를 바꾸다'(Diod.), '다른 의견에 이르다, 의견을 바꾸다'(Antiphon)를 의미한다.
(c) (b)의 의미에서 만일 이전 견해가 어리석었거나 부적당하거나 악하였다는 인정에서 마음의 변화가 일어난다면 '유감으로 생각하다, 후회하다' regret, '양심의 가책을 느끼다' feel remorse, '한탄하다'(Xenoph.)의 의미가 되는 것이다.
(d) 고전 헬라어에서 메타노에오 어군은 신약성경에서 이 어군의 용법처럼 정확한 의미로 사용되는 단계로까지는 발달되지 못하였다. 비록 그 의미에 회심에 속하는 몇몇 요소들을 찾아볼 수 있다고는 할지라도, 헬라 사회는 인간의 전 삶의 철저한 변화나 회심, 돌아옴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이러한 사실은 회심의 개념이 헬라 사상에서 유래된 것이 아니며, 그것의 기원은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한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2. 70인역본의 용법.
동사 메타노에오는 70인역본에서 약 22회 나오며, 하나님에 관해서든지(참조: 삼상 15:29; 렘 18:8; 욜 2:13-15; 암 7:3, 6), 인간에 관해서든지(렘 8:6; 렘 13:19) 간에 히브리어 니함의 니팔형을 번역하는데 사용되었다. 히브리어 니함의 니팔형은 '어떤 일에 대해 죄송하게 여기다, 유감이다, 뉘우치다'를 의미한다.
돌아감(옴)의 사상은 특히 선지자들이 설교하였고, 히브리어 동사 슈브이며, 헬라어로는 에피스트레포(ejpistrevfw, 1994)로 번역되고 있다(암 4:6; 호 5:4; 호 6:1). 돌이키라는 예언적 요구에는 백성과 하나님, 그리고 개인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반드시 인격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전제가 놓여 있다. 죄와 배교는 이러한 인격적 관계를 방해하고 파괴한다. 돌이킴은 전인으로서의 그 인간에게 완전히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 주는 것이며,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것은 악을 외면한다는 의미를 포함한다.
쿰란 공동체는 모든 악으로부터 돌아설 것과 모세의 율법으로 모두 돌아갈 것을 성원들에게 요구함으로써 회개의 촉구를 계속하였다. 따라서 그 공동체의 성원들은 자신들을 스스로 이스라엘의 회심자들로 칭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계약을 회심의 언약이라고 불렀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동사 메타노에오는 신약성경에서 34회 나오며, 요한계시록에 12회, 공관복음에 16회, 사도행전에 5회, 그리고 바울 서신에서는 고린도후서에 1회만 나온다.
신약성경은 70인역본의 용법을 따르지 않고(70인역본은 슈브를 에피스트레포로 번역했다) 돌아오다(회전하다)를 의미하는 슈브의 뜻을 표현하기 위하여 메타노에오를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의미상의 변화는 구약성경의 다른 헬라어 번역본들과 헬레니즘 유대주의 속에서 이미 보여지고 있었다. 단어 선택의 변화, 즉 에피스트레포 대신 메타노에오를 선택한 것은 신약성경이 슈브의 구약적 용법 속에 내포되어 있는 구체적이며, 물리적 개념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생각이나 사상, 의지의 개념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신약성경에서는 '회개하다, 회심하다'라는 관념(이와 마찬가지로 회개와 개종이라는 관념도)이 두각을 나타내게 된다. 신약성경에는 돌아온다는 전인에 의한 결단이 강조되어 있다. 우리가 단순히 겉모양의 변모나 지적인 관념의 변화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는 사실은 분명한 것이다.
언어학적 이해: 대중적인 헬라 의미의 메타노에오는 눅 17:3에서 형제에 대한 잘못에 대한 후회를 나타낸다. 고후 7:9; 고후 7:10에서 메타노이아는 후회(양심의 가책)를 나타낸다.
다른 곳에서 유일하게 가능한 의미는 '마음을 바꾸다, 마음의 변화' 또는 '회심하다, 개종하다', '회심, 개종'이다. 그러나 그 용어는 세속적 헬라어와는 유사성이 없기 때문에, 구약과 유대교의 개종의 개념의 경향을 따라 종교적 도덕적 의미를 지닌다.
메타노에오와 메타노이아는 '회개, 회심'에 대해 사용되었다.
(a) 세례(침례) 요한.
회심은 세례(침례)요한의 메시지에서 기본적인 특징이었다(마 1:4과 병행구절; 마 3:2, 마 3:8과 병행구절, 마 3:11, 참조, 행 13:24; 행 19:4; 눅 1:16). 하나님의 통치의 도래가 임박하였고 그의 심판이 바로 가까이에 있다; 그러므로 시간의 마지막 기간에 인간의 유일한 과제, 메타노이아가 있다. 요한이 진전시킨 것은 회심으로의, 불경건하고 죄많은 과거와의 단절로의, 하나님께로 돌아섬으로의 부름인데, 이는 역사속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향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부르심은 어떤 선지자의 입에 의한 것보다 더 절대적인데 이는 그것이 하나님의 종말론적 계시의 절박함 아래에 서있기 때문이다.
요한이 그의 표어로 삼은 그 용어는 같은 시대의 유대인들에게 익숙한 것이었다. 그것은 죄를 내던져 버리고 계명을 완수하려는 그들의 지치지 않는 다방면의 노력의 요약이다.
그러나 그 표어는 그 말에 완전히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회심은 단호하다. 그것은 진심이어야 하며 외관상으로만이어서는 아니된다. 그것은 모두에게 요구되는 것이며, 단지 이름난 죄인들(눅 3:12 이하)이나 이방인들(눅 3:14)에게만 요구되는 것이 아니다. 회심은 그것이 필요 없다고 생각한 유대인들에 대해서도 요구된다(막 3:7 이하). 그것은 안으로부터의 변화를 의미한다. 이 변화는 회심에 상당하는 생활(마 3:8; 참조: 마 3:10),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는 사랑과 의의 삶으로(눅 3:10-눅 3:14) 증명되어야 한다.
회심에 대한 설교와 함께 요한은 죄의 용서(마 1:4 병행구절)와 회심(마 3:11) 모두를 가져오는 정화의 성례인 회심의 침례(막 1:4 병행구절; 행 13:24; 행 19:4)를 연결한다. 그 의미하는 바는 오는 세계를 위한 인간 본성의 완전한 변화는 침례 속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이다. 요한의 세례(침례)라는 종말론적 성례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위해 오는 구원 속에 한 자리를 얻은 회심한 공동체를 형성하신다.
메타노이아는 하나님의 선물인 동시에 인간의 과제이다. 하나님께서는 세례(침례)를 통해 회심을 수여하시고, 거기에 인간은 그것이 그에게 주어지게 하라, "이 시대가 지속되는 동안 그 자신의 존재의 신적 기초로서 그것을 유지하고 인증하라"는 부르심으로 말미암아 소환받는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의 첫머리에서 우리는 유대교를 초월하고 구약의 예언적 경건에 대한 근본적인 통찰력을 새롭게 하여 새로운 종말론적 확신을 갖게 한다는 회심의 개념을 발견한다.
(b)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공관 복음서의 기자들에 따르면 메타노에이테(2인, 복수, 현재, 명령)는 바실레이아(나라, 왕국)의 메시지가 지시하는 바와 확고하게 결합되어 있는 명령이다(막 1:15; 마 4:17). 그러나 예수님은 단순히 세례(침례)의 부름을 반복하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회심을 그 분 자신의 인격 속에서 종말론적 바실레이아의 현존하는 실체로부터 필연적으로 뒤따르는 기본적인 요구로 삼으심으로 그것을 수정하시고 초월하신다.
회심에로의 부르심은 그가 보내심을 받은 목적이다(눅 5:32). 예수님의 회심에 대한 설교는 이전의 그런 설교 중 어떤 강력한 설교보다도 훨씬 능가한다(마 12:39 이하. 병행구절: 요나).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도 역시 회심에로의 부르심이다(마 11:20 이하. 병행구절 참조: 5:8).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의 뜻과 관련된 메타노이아는 예수님께서 보이신 구원의 방법이다. 그것은 취하여야할 방법이지 이론적으로 묘사된 방법이 아니다. 예수님은 구약성경의 회심의 선포, 특히 유대교의 개종 신앙을 초월하신다(참조, 눅 16:30 이하). 바실레이아의 도래를 생각할 때, 테슈바(8666: 돌아옴)를 표현하는 전통적인 유대교의 방식, 즉 예를 들면 뉘우침의 감정, 비통의 몸짓, 참회의 행위 또는 고행(참조, 마 11:21 병행구절) 등은 아무 가치가 없다.
하나님의 최종적인 계시는 인간 편에서의 최후의 무조건적인 결단을 요구한다. 그것은 근본적인 회심, 본성의 변화, 죄악으로부터의 완전한 돌아섬, 절대적인 복종으로 단호하게 하나님을 향하는 것을 요구한다(막 1:15; 마 4:17; 마 18:3). 회심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심판 아래 떨어진다(마 11:20 이하, 병행구절; 눅 13:3, 눅 13:5; 눅 19:40 이하; 눅 23:28 이하).
이 회심은 단호하다. 되돌아 가는 것은 있을 수 없으며, 오직 지금 선택한 길을 따라 신뢰할 만한 태도로 전진할 뿐이다. 그것은 전체 인간에 영향을 미친다. 첫 번째로 그리고 근본적으로 개인의 삶에, 그 다음은 필연적으로 항상 그의 행위에, 모든 상황에서 그의 생각과 말과 행위에 영향을 미친다(마 12:33 이하, 병행구절; 마 23:26; 막 7:15 병행구절).
예수님의 모든 선포는, 그것의 하나님의 왕국을 위한 절대적인 요구(산상 수훈, 제자직에 대한 말씀)와 함께 메타노이아라는 용어가 사용되지 않을 때 조차도 메타노이아의 선포이다. 그것은 무조건적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돌아서라는, 무조건적으로 하나님께 대항하는 모든 것, 즉 단지 노골적인 악뿐만 아니라 주어진 상황에서 완전히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돌아서라는 선포이다(마 5:29 이하, 마 5:44; 마 6:19 이하; 마 7:13 이하, 병행구절; 마 10:32-39 병행구절; 막 3:31 이하, 병행구절; 눅 14:33, 참조, 막 10:21 병행구절 등).
종말론적 광신, 혹은 도덕주의, 혹은 결의론(casuistry) 등과 같은 종류와 달리, 회심의 요구는 하나님의 왕국에 대한 예수님의 설교에서 단 하나의 유일한 명령이다.
그것은 모두에게 차별없이 설교되며 구원이 있는 유일한 길을 가리키기 위해 보여주기 위해 가차없이 엄격하게 제시된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완전한 항복과 헌신을 요구한다: 그 하나님은 죄인인 나에게 자비로우신 하나님이시다(눅 18:13).
그것은 의인보다는 죄인들을 찾으시는 하나님께로의 회심이다(눅 15:7, 눅 15:10, 참조, 눅 15:17 이하; 눅 5:32; 눅 13:3; 눅 13:5).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의 치명적인 갈등 속에서 그의 회심으로의 부르심의 본질을 나타내 보이신다.
예수님의 설교 속에서 믿음은 회심으로부터 자라나는 것인데(막 1:15), 그것은 그가 요구하는 두 번째 것으로가 아니라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 메타노이아의 실제적인 면의 성장이다.
예수님께서 이해하시는 회심은 단순한 거절이 아니다. 그것은 종말론적 심판의 위협에 직면한 옛 본성과의 단절 이상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통치권에 의하여 요구되는 인간의 전체 발걸음을 포함한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새로운 인격적 관계, 즉 피스티온(믿음)의 관계를 세움으로 달성된다. '회심하다' to convert, '회심되다' to be converted는 하나님의 왕국의 서광(曙光)이 인간에게 요구하는 모든 것을 포함한다.
그러나 이 절대적인 요구는 인간 자신의 공로로 충족시킬 수 없다. 마 18:3에서 예수님께서는 어린 아이를 본보기로 들어 예수님에게 있어서 '회심하다, 다른 사람이 되다'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보여주신다: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어린 아이이다'라는 것(파이디온)은 작다는 것,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것, 그것을 잘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회심한 자는 하나님 앞에서 작아지며(참조, 마 18:4), 하나님께서 그의 안에서 일하시도록 할 준비가 되어 있다. 예수님께서 선언하시는 하늘 아버지의 자녀들은 단순히 그로부터 받은 자들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그들이 자신에게 줄 수 없는 것을 주신다(참조, 막 10:27 병행구절). 이것이 메타노이아의 본질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구속력있는 요구가 되기 위해 아직도 중단되지 않는다. 그것은 동일한 시간에 이 둘 모두이다; 이것은 다른 쪽에 대하여 한 쪽의 어떤 계산된 활동도 불가능하게 할 만큼 절대적이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그의 공표와 함께 선포하시는 회심을 위한 부르심의 배후에는 그가 이 통치를 가져오시는 자로서 이루시는 변화(transformation)의 약속이 있다(참조, 마 11:28 이하). 만약 예수님께서 요한의 신적 임무로 인정하셨던 요한의 물세례(침례)(막 11:30 병행구절)가 구원의 성취를 기다리던 자들의 회심을 가져왔다면(마 3:11), 예수님께서 완전한 능력으로 베푸시는 성령의 세례(침례)는,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인간, 즉 회심한 인간을 창조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전달해 준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메타노이아에 관한 예수님의 메시지의 가차 없는 신랄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우리를 참회하는 행위의 고통이나 절망으로 몰아넣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삶을 위한 기쁜 복종을 불러 일으킨다. 이것은 메타노이아가 이제 더 이상 유대교에서처럼 율법이 아니라 복음이기 때문이다.
(c) 초기의 기독교
① 일반적으로, 사도의 선포(kerygma)에서도 역시 회심은 기본적인 요구이다. 이미 예수님께서 살아계신 동안에, 그의 위임으로, 그의 제자들은 회심을 위한 그의 부르심을 위임받았다(막 6:12). 그 후 그들은 부활하신 주님으로부터 모든 사람들에게 그의 이름으로 회심을 전파하도록 지시받는다(눅 24:47). 사도행전에 의하면 제자들의 전도의 핵심은 메타노이아의 메시지이다(행 2:38; 행 3:19; 행 5:31; 행 8:22; 행 11:18; 행 17:30; 행 20:21; 행 26:20). 히 6:1은 초기 기독교의 교리의 기본적인 조항 가운데 메타노이아에 관한 교훈을 들고 있다. 회심하지 않는 것은 그릇된 완고함의 표시이다(계 2:21 이하; 계 9:20 이하; 계 16:9, 계 16:11). 요한복음에서 회심과 세례(침례)는 관련되어 있다(참조, 행 13:24; 행 19:4). 유사하게, 명백히 초기의 관례와 일치하는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는 회심과 세례(침례)를 연결시킨다(행 2:38). 회심의 본질은 구약의 예언서들의 회심에 대한 설교로부터 익숙한 필치로 묘사되어 있다. 그것은 악으로부터 멀리 돌아섬(행 8:22, 참조, 행 3:26; 히 6:1; 계 2:22; 계 9:20 이하; 계 16:11)과 하나님을 향하여 돌아섬이다(행 20:21; 행 26:20; 계 16:9, 참조, 벧전 2:25). 그것은 인간의 과제이며(행 2:38; 행 3:19; 행 8:22; 행 17:30; 행 26:20, 변화된 삶의 방식의 증거를 포함함), 그것은 또한 하나님의 선물이다(행 5:31, 참조, 행 3:26; 행 11:18; 계 2:21). 그렇지만 그 개념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하는 역사적 계시에 근거를 둠으로 말미암아 신약성경의 특성을 부여 받았다(행 5:31). 그것은 또한 종말론적 사실주의(행 3:19 이하; 행 17:30)와 함께 그리고 전인류적인 표현으로 이해된다(행 11:18; 행 17:30; 행 20:21; 행 26:20, 참조, 눅 24:47; 벧후 3:9). 메타노이아가 성령의 역사라는 사실(참조, 행 11:15 이하와 행 10:45과 함께 행 11:18)은 예수님께서 성령의 세례(침례)에 대한 요한의 약속을 성취하셨다는 가정 하에서만 설명된다. 예수님의 복음의 메시지에서처럼, 메타노이아와 피스티스는 결합되어 있을뿐 아니라 함께 전체를 이룬다.
요한계시록의 회심을 위한 긴급한 부르심(계 2:5, 계2:16; 계3:3, 계 3:19)은 임박한 종말의 예상에 기초한다. 이 부름은 그리스도교 교회들을 위협하고 그들을 반성하게 하여 죄와 연약으로부터 돌아서게 하고 그들의 이전 삶의 상태를 회복하게 한다. 여기에서 강조점은 끝까지 인내하는 것이다. 회심하는 것은 단지 한 사람의 삶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실제로 철저하게 죄를 거절함으로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목표를 향하게 하는 것이다.
사도행전에서도 역시 회심의 목적은 궁극적인 구원이며(행 11:18), 특히 죄의 용서와 죄의 씻음이다(눅 24:47; 행 3:19, 참조, 행 8:22). 죄의 용서는 행 2:38에서 세례(침례)와 결부되고 행 10:43에서는 믿음과 결부된다. 그러나 종말론적 구원의 축복으로서 그것은 또한 행 5:31에서 메타노이아와 나란히 발견된다.
② 바울. 회심의 개념은 바울 서신들에도 나타난다. 롬 2:4에서 마지막 심판을 예상하는 인간의 회심(참조, 롬 2:3, 롬 2:5 이하)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인도하는 목적지이다; 딤후 2:25에는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함"이 하나님의 선물로 묘사된다. 고후 7:9 이하에서 고린도 교인들의 메타노이아는 바울이 그들 속에 불러일으킨 근심의 결과이다. 그러나 바울은 메타노이아를 종교적으로 하나님의 역사이며(고후 7:9) 구원의 수단으로 이해한다(고후 7:10). 헬라적 표현이라기보다는 기독교적 표현으로, 그는 메타노니아를 "악으로부터 해방시키고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게 하는 생각과 뜻의 변화"로 생각한다. 바울이 회심을 나타내는 일반적인 단어들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그는 그런 의미를 자신의 특유한 신학적 용어로 표현한다. 만약 예수님께 있어서 회심이 믿음을 포함한다면, 바울에게 있어서 메타노이아는 그의 구원의 교리에서 중심적인 개념인 피스티스(믿음)에 포함된다. 그는 하나님의 은총에 의한 인간의 본성과 행위의 완전한 개조로서의 회심의 개념을 그 자신의 독특한 죽음과 생성을 나타내는 단어, 즉 옛사람의 죽음과 새사람의 다시 살아남, 새로운 창조, 새롭게 함 등으로 진술한다. 바울이 기독교의 경건의 기본적인 개념에 대해 이런 식으로 다시 고쳐 말한 것에 대한 다른 이유들이 제시될 수 있을 것이다. 회개의 습관에 의해 평가 절하된 용어에 대한 혐오와 함께 우리는 바울 자신의 기독교적 경험의 명확한 주제를 고려해야만 한다. 그러나 그렇다 할지라도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 이루어지는 근본적인 변화의 개념은 여전히 바울에게 있어서 그의 전체 신학의 기초이다. 그리고 이것은 정확히 예수님께서 이해하신 것과 같은 회심에 대한 사상이다.
③ 요한. 요한은 부담되는 용어인 메타노에오와 메타노이아를 피하지만 그도 역시 바울에 못지 않게 그 문제 자체를 가지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도 역시 믿음은 회심을 포함한다. 세례(침례) 요한의 설교, 요한 복음에서의 예수님 자신의 설교, 그리고 요한일서에서의 요한 자신의 권고는 모두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강요하며, 따라서 그에게로의 회심을 요구한다. 그 이면에 악으로부터 돌아섬이 있음은 요한복음의 예수님과 요한일서의 기자가 빛과 어두움, 진리와 허위, 사랑과 미움, 생명과 죽음,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 그어 놓은 선명한 선을 볼 때 자명하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나라로 가는 길인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남이라는(요 3:3-요 3:8) 개념은 마 18:3의 사상의 다른 표현이며, 그것의 배후에는 공관복음서의 예수님의 메시지에서 발견되는 것과 같은 기적을 행하시는 성령의 능력에 대한 똑같은 확신이 서있다. 신약성경 전체에 걸쳐 회심의 사상의 내적인 연속성이 존재한다.
④ 히브리서에 나오는 둘째 번 메타노이아의 불가능성은 이것을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기독교적 신앙에 태만하게 되어 둔한 무관심에 빠지게 될 명백한 위험과 관련하여 고려할 때, 회심에 수반되는 완전한 변화의 중대함을 강조한다. 인간은 메타노이아를 자기 뜻대로 마음대로 할 수 없으며(히 12:7 예를 들면), 참으로 배교자를 새롭게하는 메타노이아는 없다(히 6:4-히 6:6). 권고하는 문맥에 나타나는 둘째 번 회개의 불가능성에 대한 언급에 의해 제기되는 어려움은, 만약 우리가 결의론(決疑論)이나 유대교나 구약성경의 관습이 의미하는 의식적(ritual) 회개의 관점에서 생각한다면 해결될 수 없다.
신약성경의 회심에 대한 견해를 배경으로 하는, 기자의 생각과 염려는 이해할 만하다. 그의 삶에서 이 결정적인 변화를 한때 경험하고 새로운 창조가 되어 종말론적 구원이 계시된 무리에 들어간 사람은 그 때문에 영원한 성장을 시작한다. 만일 그가 이 성장을 멈춘다면, 그는 살아계신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서서, 완전한 자각과 의지를 가지고 범죄하며(히 10:26), 따라서 종말론적 심판을 받게 된다(히 6:8; 히 10:27 이하). 이 경우에는 다시 그를 회심하게 할 인간의 가능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특수한 경우에 대한 날카로운 목회적 경고의 형식에서 히브리서는 메타노이아가 총체적(totality)이며, 그것의 포기는 결과적으로 전체의 포기라는 확신을 표현한다.(참조: Behm; Walter Bauer; J. H. Thay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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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v;(8085, 샤마) 듣다 hear [[경청/순복]]
샤마(동사)는 기본어근이며, '듣다 hear'를 의미하며, '경청하다 listen to, 순종하다 obey'라는 의미도 지닌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115회 나오며, 칼, 니팔, 피엘, 히필형으로 사용되었다.
샤마는 '듣다'라는 기본적인 의미를 지닌다. 이 기본적인 의미는 여러가지 방식으로 확대되는데, 대개 효과적인 들음이나 경청을 포함한다.
① '경청하다' listen to, '주의를 기울이다' pay attention,
② '순종하다' obey('명령'고 같은 단어들과 함께 쓰일 경우),
③ '기도에 응답하다' answer prayer, '듣다' hear,
④ '이해하다' understand,
⑤ '비판적으로 듣다' hear critically, '(법정에서) 조사하다, 심문하다' examine(in court).
파생 어간들은 이런 의미들에서 적합하게 수정된 의미를 지닌다.
샤마의 기본적인 용례는 무수하다(예를 들면 민 12:2에서 여호와께서 미리암과 아론의 불평을 들으셨다). 신 4:12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음성은 들었지만 형체는 보지 못했다. 창 3:8에서 아담과 하와는 동사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무엇을 듣는지 하는 것은 종속절에서 표현된다. 창 37:17에서 "(그들이) 하는 말을 들었다", 창 14:14에서 "그의 형제가 사로잡혔다는 것을 들었다", 삿 7:11에서 "그들이 하는 말을 들으라".
샤마는 '귀를 기울이다', '따르다' listen to라는 의미를 지닌다. 창 3:17에서 아담이 아내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즉 그는 그녀가 이끄는 대로 따랐다. 왕상 22:19에서 "왕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라고 한다. 시 81:11, 잠 12:15에서도 예증된다.
샤마는 이러한 의미에서 점차 변하여 '순종하다' to obey라는 의미를 나타내게 되었다. 그 실례는 출 24:7, 사 42:24, 느 9:16, 렘 35:18에서 볼 수 있다.
삿 13:9에서는 하나님께서 그 기도에 반응한다. 즉 응답한다는 의미에서 "마노아의 목소리를 들으신다". 비슷한 용법이 겔 8:18, 시 4:1에서 발견되는데,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라는 표현은 "내가 부를 때에(내게) 응답하소서"라는 말과 병행된다. 또한 시 34:17에서도 발견된다. "의인이 외치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기도의 응답과 관련하여 하나님은 렘 11:10-11에서 매우 중요하고 진지한 원리를 말씀하신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실 때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았으므로 환난 날에 그들이 하나님께 부르짖을찌라도 하나님께서 그들의 부르짖음을 듣지 않으신다(응답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그들은 알게될 것이다. 미 7:7은 의인의 확신을 표현한다. 즉 하나님의 음성에 스스로 귀기울이는 자는 하나님께서도 그의 기도를 진실로 들으시리라는 것을 확신한다. 보다 더 고무적인 강한 말씀이 시 94:9에 나온다. "귀를 지으신 이가 듣지 않으시겠느냐?".
효과적으로 듣는다는 말은 '이해한다'는 개념도 역시 포함한다. 예컨대 창 11:7에 의하면 바벨탑 사건에서 언어가 혼란된 이후에 사람들은 더 이상 서로 "들을"(즉 이해할) 수 없게 되었다.(J. E. Hartley)
(참조: BDB; Gesenius; TW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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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g;h;(1897, 하가) 신음하다, 슬퍼하다, 으르렁거리다, 묵상(명상)하다, 깊이 생각하다 [[묵상/숙고/암송/낭송/연구]]
하가(동사)는 기본어근이며, '신음하다, 슬퍼하다, 으르렁거리다, growl, 말하다, 속삭이다, 중얼거리다, 명상(묵상)하다, 숙고하다 muse'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25회 나오며, 사 8:18(히필형)을 제외하고는 칼형으로 사용되었다. 하가는 비둘기의 우는 소리(사 38:14, 사 59:11)나 먹이를 보고 으르렁거리는 사자의 소리(사 31:4)와 같은 '낮은 소리'이다.
하가는 때때로 모압의 심판에 관한 애곡(사 16:7, 렘 48:31)을 묘사한다.
마술사들은 마술을 행할 때 속삭거리거나 중얼거린다고 한다: "혹이 너희에게 고하기를 지절거리며 속살거리는 신접한 자와 마술사에게 물으라 하거든 백성이 자기 하나님께 구할 것이 아니냐 산 자를 위하여 죽은 자에게 구하겠느냐 하라"(사 8:19).
시편기자는 절망에서 하나님께 도우심을 구하기 위해 호소하고 울부짖는다: "여호와여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나의 심사를 통촉하소서"(시 5:1).
하가는 종종 악한 자가 마음에 품거나 악한 나라가 꾀하는 간계를 언급하는데, 이는 거짓말이나 속이는 말로 나타난다(시 2:1, 잠 24:2).
악한 자의 말은 마음에서(사 59:13) 그리고 혀에서(사 59:3) 나온다고 묘사되어 있다. 의인도 역시 적절한 대답을 '궁리'하거나 '숙고'할 수 있으며(잠 15:28). 그들은 지혜(시 37:30)나 하나님의 의(시 35:28, 시 71:24)에 대해 말한다.
시 19:14에서 "마음의 묵상"이 "내 입의 말"과 병행되어 있는데, 여기에서 시편기자는 자기 자신의 말을 자연과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과 비교한다.
하가의 또 다른 긍정적인 용법은 사악한 자의 간계와 마찬가지로(시 38:12),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계속하여 묵상하는 것과 관련된다(수 1:8, 시 1:2). 아마도 묵상 중에 성경을 작은 소리로 낭송하였던 것 같다. 시편기자는 또한 하나님(시 63:6)과 그의 사역(시 77:12, 시 143:5)에 대해 묵상하는 것에 관해 언급한다.(참조: H. Wolf).
시 1:2에서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라고 말한다. 국제 비평주석(ICC. C. A. Briggs)은 이 문구를 "그가 그의 율법을 주야로 연구(공부)한다"(in his law he studies day and night)라고 번역하고, 연구하는 것에 대해 "낮고 소곤거리는 작은 소리로 그것을 여러 번 읽고 그것을 마음 속에 새겨 넣고 깊이 기억하는 동양의 특유한 공부 또는 교수방법"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묵상은 그 이상 숙고하거나 묵상하는 과정을 포함한다.
아마도 하가는 율법을 낮고 작은 소리로 읽고 깊이 생각(묵상)하거나 또는 기억한 것을 암송하면서 깊이 생각(묵상)하는 것을 뜻한다.
묵상은 예배, 영적 갱신, 정신적 원기회복, 하나님과 교통에 있어서 가장 가치 있는 행위였다(욥 15:4, 시 77:3, 시 77:6). 묵상은 이삭과 관련하여 최초로 언급되었다. 이삭은 "저물 때에 들에 나가 묵상하다가" 리브가가 오는 것을 보았다(창 24:63). 다윗은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시 19:14)라고 기도했다. 여호수아는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 대로 다 지켜 행하라"는 명령을 받았다(수 1:8). 경건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업과 기사를 묵상하여 새로운 희망과 힘을 얻었고(시 77:12, 시 119:27), 주의 말씀을 묵상하여 지혜와 지식을 얻었다(시 119:97-99).
존 필립스(John Phillips)는 묵상하는 방법을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 우리는 하나님의 면전으로 나아가 성경을 펴 들고 "주여 말씀하소서 주의 종이 듣겠습니다"라고 말한다. 그 다음 우리는 정연한, 음미하는, 깊이 생각(묵상)하는 방법으로 성경을 읽고 성경의 진리를 이해하여 사용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우리는 성경의 말씀을 심사숙고 할 때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한다.
· 내가 피해야 하는 어떤 죄가 여기에 있는가?
· 내가 필요로 하는 어떤 약속이 있는가?
· 내가 얻어야 할 어떤 승리가 있는가?
· 내가 향유해야 할 어떤 행복이 있는가?
· 내가 하나님, 그리스도, 성령, 인간, 죄 등에 관하여 전에 결코 알지 못했던 어떤 진리가 있는가?
· 내가 여기서 배울 수 있는 중요한 것이 있는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할 때 노트와 펜을 가지고 성령이 마음에 이르시는 것을 적으면 그 효과를 더할 것이다. 기록하는 것은 더 정확한 사람을 만들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것을 말로 표현할 수 없다면 어떤 것도 거의 배우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렇게 묵상함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감동과 가르침을 받고 신령한 지혜와 지식과 새 힘을 얻어 매일 생활에 올바르게 적용하여 복된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참조: 토브주석 창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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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f'B;(982, 바타흐) 믿다, 신뢰하다, 의지하다, 안심하다, 안전하다 [[의지/의뢰]]
바타흐(동사)는 기본어근이며, '믿다, 신뢰하다, 의지하다, 확신하다', 여기서 '안심하다, 염려 없다'를 의미한다. 이 단어의 기본적인 개념은 '확고부동' firmness이나 '견고함' solidity과 관련있는 것 같다. 어쨌든 히브리어에서 바타흐는 신뢰할 만한 것이나 사람이 있다는데서 오는 행복감과 안도감을 나타낸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120회 나오며, 칼형과 히필형으로만 사용되었다.
70인역본이 바타흐를 결코 피스튜오(4100: ~을 믿다 believe in)로 번역하지 않고 엘피조(1679: 소망하다, 기대하다, 긍정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다), 엘피스(1680: 소망, 기대), 아스팔레이아(803: 견고함, 안전함, 확실성)으로 번역한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이것은 바타흐가 "믿음"에 포함된 계시에 대한 완전히 지적이고 의지적인 반응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안전하거나 확실하다고 느끼는 감정을 강조하는 것임을 나타내는 것 같다. 따라서 바타흐 어군은 '안전감'이나 '염려 없는 평온'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바타흐는 인간 관계에 사용될 때는 불안정이란 의미를 내포한다. 이웃과 함께 "마음 편히 사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쉽게 믿고 쉽게 속는 것으로 인하여 상처 받는 한편, 그들의 무방비한 태도를 이용하는 사람들은 비난 받았다(참조: 세겜인들의 거짓된 안전대, 레위와 시므온의 잔인성, 창 34:25, 이스라엘의 거짓된 안전대, 곡의 잔인성, 겔 38:10-11). 잠 3:29은 믿고 있는 이웃을 속이는 것에 대해 분명하게 경고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구약성경은 하나님을 의뢰한데서 오는 이런 확신감의 타당성을 다른 어떤 종류의 어리석은 안심과 대조 시킨다. 이런 모든 신뢰가 치욕과 수치로 끝날 것인데 반해(시 31:14, H15),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는 사람들은 원수에게서 구출되며(시 22:4, H5), 그들의 기도가 응답 받으며(대상 5:20), 그들이 똑바른 길로 가며(잠 3:5),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며(시 16:9, 시 33:21), 마음의 평안을 깨닫고 공포가 없어질 것임(시 4:8, H9, 사 26:3)은 분명하다. 그래서 여호와를 신뢰하라고 거듭 권고하고 있다(잠 16:20, 사 30:15, 렘 17:7).
바타흐는 가장 많이 사용되는 시편들(전부 181회 중 50회 사용)에서 대부분 일관성 있게 하나님을 믿는 것의 가치를 표현하고 있다. 이 구절들은 또한 소망의 근거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의 공적이나 일종의 "오는 말에 가는 말"(tit-for-tat)과 같은 그러한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헤세드와 그의 확고한 신실하심과, 그의 자비로우신 애정에 있음을 지적해 준다.
겔 33:13은 어느 누구도 감히 생명의 소망을 자기 자신의 의로움에 기반을 둘 수 없음을 분명하게 말해주며, 렘 7:4, 렘 7:8, 렘 7:14은 신성한 문구(신근)와 건물을 믿는 것이 어리석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런 의미에서, 구약성경은 하나님의 영생의 선물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는 소망이 있다고 선포하는 신약성경을 예시해 준다.
하나님에 대한 이런 소망은 일종의 불평하는 바람이 아니라 확신하는 기대이다. 그칠새 없는 근심이 통례였던 이방 종교들과는 달리 히브리 종교는 신뢰성과 확실성이 주된 성품이신 한 분 하나님을 알았다(신 33:28, 삼상 12:11, 시 27:3). 근심과 확신 사이의 이런 대조는, 이교도가 기교 없이는 결코 남아있지 못하고 이것을 통해서 자기가 스스로의 운명을 어느 정도 지배했다고 느낀데 반해, 경건한 히브리인은 개인적인 수단 없이 철저하게 자기 자신을 알았다는 사실을 우리가 상기할 때, 훨씬 두드러진다. 변덕스러운 신들, 복수심에 불타는 악마, 그리고 불가사의한 마력의 바다에 그대로 내버려 두는 것보다는 인자하고 믿을 만한 하나님께 철저하게 의존하는 것이 더 낫다. 인간의 운명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다스림과 하나님의 완전한 신뢰성을 고려해 볼 때 인간이 하나님이 아닌 어떤 다른 것을 신뢰한다는 것은 전혀 근거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서 모든 해악으로부터 자동적으로 보호되는 것은 아니다. 또한 하나님을 믿기를 거부한다고 해서 반드시 가난과 박탈의 길로 들어서는 것도 아니다. 욥은 위로자들의 부드러운 확신에 대해, 어느 정도 통렬하게 비꼬면서 이런 분명한 모순을 지적하였다(욥 12:6, 욥 24:23). 그렇지만 욥도 고통가운데서 다른 어떤 안전의 근원도 결국에는 무가치해진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욥 31:24, 욥 39:11, 사 50:10).
구약성경은 이런 거짓 안전의 근원을 어느 정도 상세하게 고찰하여, 하나님게 대한 소망의 탁월함과 대조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거짓된 안전의 근원에는 인간(시 118:8, 시 146:3, 잠 25:19, 렘 17:5), 악(사 47:10), 폭력과 압제(시 55:23, H24, 시 62:10, H11, 사 30:12), 부(시 49:6, H7, 시 52:7, H9, 잠 11:28), 우상(시 31:6, H7, 시 115:8, 사 42:17, 합 2:18), 군사력(신 28:52, 시 44:6, H7 사 31:1, 렘 5:17, 호 10:13), 종교(렘 7:4, 렘 7:8, 렘 7:14), 자기 자신의 의로움(겔 33:13, 호 10:13), 이방인들과의 동맹(사 36:4 이하, 겔 29:16)이 포함된다. 특별히 성경은, 그런 만족의 보잘것없는 근거를 결코 평가하지 않고서 이런 만족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경멸한다(사 32:9-11, 겔 30:9, 암 6:1).
아마도 바타흐를 둘러싼 핵심 문제가 짧은 범위 안에서 가장 분명하게 나타나는 곳은 왕하 18장 왕하 19장일 것이다. 여기에서 앗수르왕 랍사게는 하나님을 믿는 히스기야의 믿음의 가치에 도전하는데 이 믿음은 충분히 입증된다. 이 단어는 이 곳과 병행구절들에 20회 나온다(사 36-37장, 대하 32장). 인간관계에서는 단 하나의 믿음의 영역이 권고된다. 즉 현숙한 성품을 가진 아내를 믿는 남편(잠 31:11, NIV)에 대해서이다.(참조: J. N. Oswalt; B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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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jkolouqevw(190, 아콜루데오) 따르다, 뒤따르다.[[말씀-성령인도따라 동행]] =[제자]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동사 아콜루데오(Homer 이래)는 켈류도스(kevleuqo", 길)에서 유래했으며,
(a) 문자적 의미로 '함께 가다, 동반하다, 뒤따라 가다, 따라가다'이며,
(b) 비유적 의미로는 '(추세나 의견)을 따르다, 동의하다, 순응하다'를 의미한다.
(c) 스토아 철학자들은 아콜루데오를 종교적, 철학적 의미로 사용했다. 이 단어는 현자가 세상 법칙에 따른다는 것을 언급하는데 사용되었다. 자연 혹은 하나님을 '따르는 것'은 철학적 삶의 기본 방향이다. 여기에서 따른다는 것은 실제적으로 통합에 의해 자기 존재를 확인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의미의 이면에는 이성적인 인간과 하나님과의 본유적 관계에 대한 헬라적 견해가 있다.
2. 70인역본의 용법.
동사 아콜루데오는 70인역본에서 14회 나오며, 주로 할라크의 역어로 5회, 히브리어 상당어 없이 6회 사용되었다.
(a) 아콜루데오에 상당하는 히브리어는 민 22:20에 하나님께서 발람에게 "함께 가라"는 것 외에는 할라크 아하레(직역: 뒤따라 가다, 4회)로 나타난다.- 삼상 25:42에 아비가일이 다윗의 사자를 따라가는 것, 왕상 19:20에 엘리사가 엘리야를 따르고 싶어한 것, 호 2:7에 이스라엘 백성이 연애하는 자를 따라 가는 것, 사 45:14에 만방이 주를 따르는 것에 대해 사용되었다.
(b) 구약성경에서 할라크 아하레라는 표현은 특별히 호세아, 예레미야, 신명기 기록에서 이교로의 변절에 전문 용어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에 그 독특한 의미를 가지게 된다. 다른 신(神)들을 따라가는 것은 백성의 기본 죄이며, 모든 재난(심판)의 원인이다(삿 2:12; 신 4:3; 신 6:14; 왕상 21:26; 렘 11:10). 호세아에서 이 표현은 간음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정부를 따르고 남편을 잊어버렸다(호 1:2; 호 2:7; 호 2:13).
여호와를 따르는 것은 신명기에 나타나지만(신 1:36 등) 별다른 강조가 없다(왕상 18:21은 예외). 그 이유는 그것이 우상숭배와 관련되었기 때문이다. 렘 2:2의 광야에서 여호와를 좇는 것(출 13:21-22)에 대한 언급에서 결혼에 대한 개념이 고려되고 있다. '하나님의 길로 걷는다'는 표현이 애호되고 있다(신 5:30 등).
3. 신약성경의 용법.
동사 아콜루데오는 신약성경에서 90회 중 복음서에 80여회, 사도행전에 3회, 바울서신에 1회, 요한계시록에 6회 나타난다.
(a) 신약성경에서 따른다는 개념은 하나님께 결코 적용되지 않는다. 이 개념은 팔레스타인 용법에 의해 암시되지 않았으며 초기 기독교도 이 표현을 형성하는데 별다른 역할을 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전혀 새롭고 독특한 개념이 생도 관계를 뿌리로 하여 그 속에서 생겨났기 때문이다. 심지어 하나님을 따른다는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관념에 익숙한 헬레니즘 영역으로 그리스도교가 들어갔을 때조차도 아콜루데오라는 동사와 따른다는 개념 전체는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실로 역사적 예수님을 '따른다'는 사상에 크게 영향을 받기 때문에 이 말들은 더 이상 어떤 다른 종교적 용법으로 전환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스도의 제자직에 엄격히 제한되어 사용된 아콜루데오의 특별한 용법은 통계상으로 분명하게 증명된다. 요한계시록에서 단 한번 사용된 경우를 제외하면 아콜루데인은 전적으로 사복음서에서만 발견된다. 이 용어는 어느 정도는 외적으로 따르는 것을 함축하는데, 예컨대 막 3:7과 병행구절, 마 8:10과 병행구절에서 무리가 예수님을 좇는 것과 마 8:19에서 좁은 의미에서 제자들이 예수님을 좇는다고 할 때이다: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제자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좇는다(막 10:28; 막 1:18; 눅 5:11). 그러나 이것은 아콜루데인의 모든 다른 관계들을 끊는다는 의미에서의 자기 헌신을 의미함을 암시한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마 8:22), "또 다른 사람이 가로되 주여 내가 주를 좇겠나이다 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케 허락하소서"(눅 9:61).
제자는 랍비의 생도가 행하는 바와 같이 행하되, 외적으로는 랍비의 생도와 똑같으나 내적으로는 예수님께 결속되어 있다. 따라서 이 용어는 제자직의 의미를 여전히 가지면서 한편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새로운 내용과 표시를 획득한다.
이 용어의 신약성경의 용법의 배타성은 원시 기독교에게는 유일한 하나의 제자직만 있으며, 따라서 유일한 하나의 좇음, 즉 예수님과의 관계만이 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막 2:14과 병행구절에서 아콜루데이 모이, "나를 좇으라"는 요구는 곧 메시야의 요구이다.
(b) 아콜루데인(따르는 것)은 메시야를 좇는 것을 의미하므로 이 제자직은 본질적으로 종교적 선물이다. 아콜루데인은 예수님 안에 제공된 구원에 참예함을 의미한다. 눅 9:61 이하에 따르면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만이 아콜루데인을 성취할 수 있다. 막 10:17; 막 10:21 및 병행구에서 아콜루데이 모이는 "영생"에 관한 질문에 대한 답변이다.
요 8:12에서도 마찬가지다: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동일한 사상이 계 14:4에서도 나타난다: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c) 하지만 아콜루데인은 또한 예수님의 운명에 함께 하는 것을 암시한다. 마 8:19 이하에서 아콜루데소 소이("좇으리이다")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이다. 막 8:34과 병행구절에서 예수님은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라고 하신다. 요 12:25-26에서도 동일한 관계를 찾아볼 수 있다. 이 구절들을 통하여 분명히 알 수 있는 바는, 어떤 의미에서 아콜루데인은 예수님의 본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그의 구원을 누림으로 야기되는 메시야와 함께 하는 삶과 고난에 전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d) 이 용어의 은유적 용법이 얼마나 강력한지는 다음의 고찰에 의해 드러난다.
한편으로 전승은 확실히 본래부터 마 10:38; 눅 14:27과 같은 말씀들을 보유하고 있으며(마 10:38,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눅 14:27,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다른 한편으로 전승은 예수님과 함께 다닌다는 의미에서 아콜루데인을 행사하지 않는 제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매우 본래부터 나타낸다.
더욱 더 두드러진 것은 전승의 세번째 명백한 특징이다. 즉 이 단어와 예수님의 역사(history)의 구체적인 활동이 너무나 강하게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어떤 다른 명사도 이 제자직의 개념에 일치하여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신약성경에는 단지 능동적인 표현만이 나타나는데, 그 이유는 이 용어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 행위이지 개념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근거에서 아콜루데인이라는 용어가 복음서에서만 사용되고, 또 사복음서 모두에서 그 용법상 일치점이 있으며, 복음서들이 이 용어가 의미하는 관계를 역사상의 예수님에게 국한시키는 것은 우연이 아닌 것이다. 신약성경의 서신들에서는 다른 표현들이 높임 받으신 퀴리오스(kuvrio", 2962: 주, 주님) 및 그의 프뉴마(pneu'ma, 4151: 영)와의 관련을 강조하는 데에 사용된다.
이 용어가 예외적으로 복음서 외에서 유일하게 사용된 계 14:4은 분명 마 10:38을 특정한 부류의 신자들에게 적용한 것이다. 여기서 그 개념에 주어진 분명한 새로운 내용은 마찬가지로 사도 시대에 '따른다'는 묘사가 예수님의 제자들 외에 어느 누구에게도 결코 사용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비록 사도행전은 바나바와 마가, 혹은 바울과 그의 집단(circle)의 경우처럼 스승과 제자(master-pupil) 관계에 친숙해 있었지만 어쨌든 다른 자료들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식의 표현을 피한다.(참조: G. Kittel; C. Blendinger; Walter Bauer; J. H. Thay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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