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0.04.12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시146 사랑과 섬김의 빛, 선순환 손길 감사.중보기도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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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146]------- 


**선하신(토브) 하나님의 [근원적 유일무이한 영원생명이신 그분의 성품(존재적 원리/원칙)따라 인자(헤세드...변치않는)와 진실(에메트...말씀 그대로)/신실하심(아만...미쁘신)으로] 선대하사(야타브) 섬겨(마음의 눈높이를 같이하심) 베풀어 주시는 영원무궁 진실한 사랑이 곧 아가페(아가파오)라는 것을 기억하라....말씀따라 JC의 아가페안에서 믿음으로 주이름 부를 때 내주하사 하나되어 친밀히 동행하시며 말씀 기억하고, 일깨우사 깨닫게 하시며 말씀하시는(에셰르..아쉬레) HC께서 Q의 어떠하심을 알게(야다...경험적 깨달음과 감상/음미/찬송) 하사 네 심령에 새기시며, Q누림의 진수를 늘 새로이 체득함으로써 주께 합당한 감사(야다...이는 말씀의 행사를 기억/기념remember함으로써 항상 새로워 짐)와 무릎꿇고 경배함(베라카...바라크)의 누림안으로 이끌리라..


주음성외에는446.이세상끝날까지447.예수더알기원하네453.449.예수따라가며


1.할렐루야 내 영혼아(네페쉬) 여호와를 찬양하라(할랄)

//[NASB]시 146:1 Praise the LORD! Praise the LORD, O my soul! /NRSV]시 146:1 Praise the LORD! Praise the LORD, O my soul! /NKJV]시 146:1 Praise the LORD! Praise the LORD, O my soul! /[NIV]시 146:1 Praise the LORD. Praise the LORD, O my soul. 

2.나의 생전에 여호와를 찬양하며(할랄) 나의 평생에 내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자마르)

//[NASB]시 146:2 I will praise the LORD while I live; I will sing praises to my God while I have my being. /[NRSV]시 146:2 I will praise the LORD as long as I live; I will sing praises to my God all my life long. /[NKJV]시 146:2 While I live I will praise the LORD; I will sing praises to my God while I have my being. /[NIV]시 146:2 I will praise the LORD all my life; I will sing praise to my God as long as I live. 

3.귀인들을(나디브.고결한/고위직의, 책임있는.<명>나다브..귀족)... 의지하지(바타흐...의지/신뢰하다) 말며 도울 힘이(테슈아)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NASB]시 146:3 Do not trust in princes, In mortal man, in whom there is no salvation. /NRSV]시 146:3 Do not put your trust in princes, in mortals, in whom there is no help. /[NKJV]시 146:3 Do not put your trust in princes, Nor in a son of man, in whom there is no help. /[NIV]시 146:3 Do not put your trust in princes, in mortal men, who cannot save. 

4.그의 호흡이(루아흐...숨)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 날에 그의 생각이(에쉬토나...생각/계획) 소멸하리로다(아바드..사멸하다)

//[NASB]시 146:4 His spirit departs, he returns to the earth; In that very day his thoughts perish. /[NRSV]시 146:4 When their breath departs, they return to the earth; on that very day their plans perish. /[NKJV]시 146:4 His spirit departs, he returns to his earth; In that very day his plans perish. /NIV]시 146:4 When their spirit departs, they return to the ground; on that very day their plans come to nothing. 

5.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에제르..helper)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세베르..hope)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에셰르..행복 happiness, 복 blessedness, 지복 bliss' )

//[NASB]시 146:5 How blessed is he whose help is the God of Jacob, Whose hope is in the LORD his God, /[NRSV]시 146:5 Happy are those whose help is the God of Jacob, whose hope is in the LORD their God, /[NKJV]시 146:5 Happy is he who has the God of Jacob for his help, Whose hope is in the LORD his God, /[NIV]시 146:5 Blessed is he whose help is the God of Jacob, whose hope is in the LORD his God, 

6.여호와는 천지와 바다와 그 중의 만물을 지으시며(아사) 영원히 진실함을(에메트) 지키시며(샤마르)

//[NASB]시 146:6 Who made heaven and earth, The sea and all that is in them; Who keeps faith forever; /NRSV]시 146:6 who made heaven and earth, the sea, and all that is in them; who keeps faith forever; /[NKJV]시 146:6 Who made heaven and earth, The sea, and all that is in them; Who keeps truth forever, /[NIV]시 146:6 the Maker of heaven and earth, the sea, and everything in them--the LORD, who remains faithful forever. 

7.억눌린 사람들을 위해 정의로 심판하시며 주린(라에브..굶주린)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 이시로다 여호와께서는 갇힌(아사르.. 매이고 갇혀 감금된) 자들에게 자유를 주시는도다(나타르...풀어 자유케 하다)

//[NASB]시 146:7 Who executes justice for the oppressed; Who gives food to the hungry. The LORD sets the prisoners free. /[NRSV]시 146:7 who executes justice for the oppressed; who gives food to the hungry. The LORD sets the prisoners free; /[NKJV]시 146:7 Who executes justice for the oppressed, Who gives food to the hungry. The LORD gives freedom to the prisoners. /[NIV]시 146:7 He upholds the cause of the oppressed and gives food to the hungry. The LORD sets prisoners free, 

8.여호와께서 맹인들의 눈을 여시며(파카흐) 여호와께서 비굴한 자들을 일으키시며 여호와께서 의인들을 사랑하시며(아헤브)

//[NASB]시 146:8 The LORD opens the eyes of the blind; The LORD raises up those who are bowed down; The LORD loves the righteous; /[NRSV]시 146:8 the LORD opens the eyes of the blind. The LORD lifts up those who are bowed down; the LORD loves the righteous. /[NKJV]시 146:8 The LORD opens the eyes of the blind; The LORD raises those who are bowed down; The LORD loves the righteous. /[NIV]시 146:8 the LORD gives sight to the blind, the LORD lifts up those who are bowed down, the LORD loves the righteous.

9.여호와께서 나그네들을 보호하시며(샤마르) 고아와 과부를 붙드시고(우드) 악인들의 길은 굽게 하시는도다(아와트)

//[NASB]시 146:9 The LORD protects the strangers; He supports the fatherless and the widow, But He thwarts the way of the wicked. /NRSV]시 146:9 The LORD watches over the strangers; he upholds the orphan and the widow, but the way of the wicked he brings to ruin. /[NKJV]시 146:9 The LORD watches over the strangers; He relieves the fatherless and widow; But the way of the wicked He turns upside down. /[NIV]시 146:9 The LORD watches over the alien and sustains the fatherless and the widow, but he frustrates the ways of the wicked. 

10.시온아 여호와는 영원히 다스리시고 네 하나님은 대대로 통치하시리로다(말라크) 할렐루야

//[NASB]시 146:10 The LORD will reign forever, Your God, O Zion, to all generations. Praise the LORD! /[NRSV]시 146:10 The LORD will reign forever, your God, O Zion, for all generations. Praise the LORD! /[NKJV]시 146:10 The LORD shall reign forever--Your God, O Zion, to all generations. Praise the LORD! /[NIV]시 146:10 The LORD reigns forever, your God, O Zion, for all generations. Praise the LO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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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46장 (개요)===

이 시편과 다음에 나오는 나머지 모든 시편은 작은 음역으로 하나님께 대한 찬양을 크게 나타내는 단어인 할렐루야로 시작하고 할렐루야로 끝난다. 

우리는 여기에서 여호와(Jehovah)의 단축형인 야(Jah)로 그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그를 찬양한다. 이 아름다운 시편에서 시편 저자는 다음과 같이 한다.

1.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에 전심을 기울인다(1-2).

2.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신뢰하도록 권한다. 

그것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방법의 하나로 매우 필요하며 훌륭하다. 그는 다음과 같은 것을 보여준다.

   (1) 왜 우리가 인간을 신뢰하지 말아야 하는가?(3-4).

   (2) 왜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해야 하는가?(5) 

자연의 왕국에서 그의 권능 때문에(6), 섭리의 왕국에서 그의 지배 때문에(7), 그리고 메시야의 왕국에서 그의 은총 때문에(8-9), 그것이 영원한 나라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신뢰해야 한다.----많은 유대인 문필가들은 이 시편을 메시야의 영원한 나라와 결부시킨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러한 안목을 갖고서 이 시편을 노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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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관대하심과 긍휼(시 146:1-4)

이 시편은 다윗이 기록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방백이었고, 힘있는 왕이었다. 다음과 같은 일을 왕의 신분으로 생각할 수 있었을 것이다.

Ⅰ. 모든 왕, 방백, 백성 구분없이  할 것없이 신분귀천을 떠나 하나님찬양예배에 참여함이 마땅하다!!!

미갈은 다윗왕 그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예배에서 면제받았다....즉, 그는 그의 제사장들과 백성들이 예배드리는 것을 보는 것으로 충분했다....그는 스스로 나서서 예배를 행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았다.... 미갈은 이렇게 생각했기에 다윗왕 그가 “법궤 앞에서 춤을 추는 것”이 그자신에 대한 경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윗왕 그 자신은 그가 이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일에 능숙하기로 첫째이며 제일가는 자라는 생각을 전혀 갖고 있지 않았을뿐 아니라(1-2절). 그는 자기의 위엄이 찬양하는 일을 면제해 준다고 생각지 않고, 오히려 그것이 그로 하여금 날마다 새로운 찬양으로 인도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을 진실로 찬미하는 일을 경감시키거나 면제한다고 결코 생각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을 고무시키고, 찬양하는 과제를 행한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하라.” 

그리고 그는 찬양으로 살아가기를 결심했다....내가 진심으로 주를 찬양하며, 나의 입으로 그를 “찬송하리로다.” 

나는 하나님을 “여호와”로 앙망하며, 그에게서 무한히 축복 받고, 영광을 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를 나와 언약을 맺은 “나의 하나님”으로서 앙망할 것이다.

우리가 그를 우리의 하나님으로 앙망하면서 그를 찬양할 때 찬양은 가장 즐거운 일이 된다. 

우리는 그에게 관심을 갖고 그와 관계하며 서 있어야 한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나의 생애의 마지막까지 날마다, 부단히 행할 것이다. 아니, “내 목숨이 붙어 있는 동안” 찬송할 것이다. 내가 세상에서 살아 있지 못하게 될 때 나는 찬양을 더욱 잘 할 수 있는 하늘의 존재, 더욱 좋은 존재가 되기를 소망한다.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우리 존재의 위대한 목적이 되는 것은 우리의 커다란 사역과 기쁨이어야 한다. 우리의 시간과 능력을 주께 바쳐야 한다.

Ⅱ. 그가 결과적으로 나라에 큰 축복을 가져왔기 때문에 백성은 영웅을 우상화하는 이방 국가들의 관습에 따라 다윗왕은 경배의 대상이 되었으리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을런지도 모른다. 그들은 모두 나와서 “그의 그림자를 의지하며”, 그를 저희의 “거처”와 “요새”로 삼으려 했던 것 같다. 그러나 다윗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라(3절). 나를 의지하지 말며, 다른 어떤 방백에게도 의지하지 말라. 그들에게 너희의 신뢰를 두지 말라. 그들에게 너희의 기대를 걸지 말라. 그들의 정직함을 너무 확신하지 말라.”

통치자들중 어떤 사람들은 그들이 그럴듯하게 위장하는 것에 능숙해져 있는 것이 타인들로 하여금 그들이 능숙한 통치자라고 착각하도록 유도해 왔을 수도 있다....한낱 실수투성이-변덕장이에 지나지 않는 바, 그들의 견고성과 신실성을 너무 확신하지 말라. 그들은 쉽게 그들의 마음을 바꾸며, 말을 어기는 것이 가능한 자들이다. 

그들이 다윗과 같이 지혜롭고 선하다고 여겨디고 있다해도 그들의 능력과 지속성을 너무 신뢰하지 말아야 한다. 그들은 아담의 자손이며, 약하고 죽어야 할 운명을 가진 자들이다.

실로 그에게 도움과 구원이 있고, 자기를 의지하는 자들을 실망시키지 않으시는 인자(人子)가 있다. 

그러나 다른 모든 인생은 영광 중에 있어도 오래 존재하지 못하는, 갑자기 유명해진 인간과 같다.

1. 우리는 그들의 능력을 결코 확신하지 말아야 한다.

왕들의 권세도 제한되며 속박되고 악화된다. 그들은 우리를 위해, 우리가 기대하는 것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지 못한다. 

다윗은 스스로 고백했다(삼하 3:39). “내가 기름부음을 받은 왕이 되었으나, 오늘날 약하도다.” 구원할 힘이 없는,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라.” 

그는 당황해 어찌할 바를 모르며, “어리벙벙하는 자 같다.” 그는 “용사”였지만, “구원치 못한다”(렘 14:9).

2. 우리는 그들의 지속성을 신뢰하지 말아야 한다.

살아 있는 동안 그의 힘으로 우리를 도우려고 생각하지만, 그는 우리가 그에게 가장 큰 기대를 걸었을 때 갑자기 소멸하게 된다(4절). “그 호흡이 끊어지면”, 다시 돌아가게 된다. 

그것은 매순간 다가온다. 이는 갑자기 영원히 가게 될 것임을 암시해 준다. “그는 흙으로 돌아가리로다.”

흙은 그의 고향이다. 첫 인간에 관련지어 보면, 인간이 흙에서 만들어졌다. 따라서 인간은 말씀에 따라 흙으로 돌아가야 한다(창 3:19). 

그가 세상에 속한 사람이라면, 선택의 측면에서 볼 때, 흙은 자기 분깃으로 선택한 그의 땅이며, 그가 애정을 두었던 것이다. 

그는 자기의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그가 소유한 재산이기 때문에 그의 땅이다. 

그가 세상에서 방대한 소유물을 가졌어도 하나의 무덤이 그에게 남겨져 있는 전부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땅을 주셨다.” 

그리고 그것을 둘러싸고 큰 싸움이 일어난다. 사람들은 “그들의 땅을” 그들의 권위의 표지로 삼고, “저희의 이름을 따라 부른다.” 

그러나 잠시 후에는 땅의 어떠한 부분도 그들의 소유가 되지 못하며, 죽은 몸이 침상으로 삼을 땅만을 차지하게 된다. 그것도 땅이 남아 있는 동안만 그들의 것이 된다. 

인생이 흙으로 돌아갈 때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로다.” 

우리에게 친절을 베풀었던 그의 모든 꿈과 계획이 공허하게 사라져버린다. 그는 한 발짝도 더 나아갈 수 없으며, 그의 모든 계획은 중단되고 그와 함께 사장된다(욥 17:11). 

그러면 인생에게 건 우리의 기대는 어떻게 되겠는가? 방백들은 다른 인생들과 마찬가지로 죽어야 할 운명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에게서 도움의 확증을 얻을 수 없으며, 불멸하시는 권세자(Potentate)로부터 얻을 수 있다. 

“호흡이 콧구멍에 있는 인생을”, 그리고 거기에 오래 있지 않게 될 인생을 “의지하지 말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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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의지하라는 격려(시 146:5-10)

시편 저자는 우리에게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라고 경고한 후에(우리가 그들을 의지한다면 비참하게 절망할 것이다) 우리의 신뢰를 하나님께 두도록 격려하고 있다. 

우리가 그렇게 한다면 행복하게 보장을 받을 것이다. 

“야곱의 하나님으로 자기 도움을 삼으며”, 하나님의 속성과 약속에 관심을 두고, 그것들을 하나님께 맡기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그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Ⅰ. 하나님께서 후원해 주실 자들에게 주어진 성격을 관찰해 보자. 그들은 하나님으로 자기의 도움을 삼는다.

1. 그들은 여호와를 저희의 하나님으로 모시고, 그를 섬기며 예배한다.

2. 그들은 여호와에게 저희의 소망을 두며, 그에게 의지하는 인생을 산다.

그들은 하나님을 선하게 생각하며, 다른 모든 기대가 좌절되었을 때 그에게서 용기를 얻는다. 모든 신앙인은 그를 야곱의 하나님으로, 교회 일반의 하나님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대중적 환난 때에도 그로부터 소망을 기대할 수 있다. 특히 그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다면 모든 개인적인 결핍이나 위기에서도 그를 의지할 수 있다.

(1)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현재의 생과 관련 있는,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선한 것들을 소망해야 한다.

(2)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총 가운데서 장차 올 생에 관련되어 있는 모든 선한 것들을 소망해야 한다.

이에 대해 하몬드 박사는 이 시편 후반부에 성육하신 하나님의 영원한 독생자에 대한 가장 주목할 만한 측면이 나타나 있음을 보면서, 특히 이 구절과 다음 구절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는 10절이 메시야의 날에 해당하는 말씀이라고 말한 랍비 중 한 사람의 말을 인용한다. 그리고 그것은 7-8절을 그리스도께서 메시야에 대해 말씀하신 특징(마 11:5-6)인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걷는다”는 말씀과 비교해볼 때 알 수 있다고 그는 생각한다. 그리고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는 그 말씀의 결어는 5절에 가장 잘 부합된다고 그는 생각한다.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그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그리고 그에게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Ⅱ. “여호와 우리 하나님”에게 소망을 두라고 우리에게 주어진 커다란 격려를 관찰해 보자.

1. 그는 “세상의 창조자”이시다.

그러므로 그는 모든 권세를 가지시며, 그로부터 나온 모든 피조물에 대한 권세와 지휘권이 그에게 달려 있다(6절). “여호와는 천지와 바다와 그중의 만물을 지으셨다.” 

그의 팔은 구원할 수 없을 만큼 짧지 않다. 그것은 그리스도에게 부합된다. 하나님은 그로 말미암아 세상을 지으셨고,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 1:3). 

세상의 구속자가 그 창조자와 동일한 분이시다. 따라서 그가 세상에 호의를 보이시며, 그 처지에 대한 완전한 지식과 그를 도울 수 있는 권세를 갖고 계심을 믿는 것은 커다란 힘이 된다.

2. 그는 침범할 수 없는 신뢰의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려고 힘을 써야 한다. 왜냐하면 그가 “영원히 진실함을 지키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의 말씀은 일점일획이라도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태초로부터” 진실이며, “영원까지” 진실이다. 

우리 주 예수는 아멘이시요, “참된 증인이시요”, 동시에 “하나님 창조의 근본이시요”, 주체이시며, 원리이시다(계 3:14). 

하나님의 진실을 영원히 지키는 것은 그에게 맡겨져야 한다. 왜냐하면 “모든 약속이” 그에게서는 “예와 아멘”이기 때문이다.

3. 그는 상처받은 자의 후원자가 되신다.

그는 “압박 당하는 자를 위하여 판단하시며”(우리가 본문에서 읽은 바와 같이), “공의로 판단하신다.” 

그는 자주 그의 섭리에서 행하시며, 심하게 고난 당하는 자들을 구제하시고, 그들의 완전을 깨끗하게 하신다. 

그는 마지막 심판날에 행하실 것이다. 메시야는 거대한 압제자인 사단의 손에서 인생을 구출하러 오셨다. 

그리고 그에게 위탁된 모든 심판과 박해자들에 대한 심판 실행이 뭇사람들 가운데서 행해질 것이다(유 15).

4. 그는 궁핍한 자들에게 관대하게 은혜를 베푸는 자이시다.

그는 “주린 자에게 식물을 주시는 자시로다.” 

하나님은 자연의 갈망에 응답하시기 위해 통속적인 방법으로 그렇게 행하신다. 그러나 그는 때때로 까마귀를 통해 엘리야를 먹이신 것같이 특별한 방법으로도 행하신다. 

그리스도는 자기 가족에게 한두 끼의 식사에 지나지 않는 것을 갖고서 기적적으로 수천 명을 먹이시는 일을 여러 번 행하셨다. 

이것은 우리에게 생명의 떡으로 우리의 영혼을 키우시는 자가 되시는 그에게 소망을 두도록 고무시켜 준다.

5. 그는 속박된 자들에게 자유를 주시는 분이다.

“여호와께서 갇힌 자를 해방하신다.” 

그는 이스라엘을 애굽의 속박의 집에서, 후에 바벨론에서 인도해 내셨다. 

벙어리를 말하게 하시며, “에바다”(열려라) 하는 한 마디 말씀으로써 귀머거리를 듣게 하시고, 그들의 속박을 푸시며, 죽은 자를 무덤에서 일으키시는 그리스도께서 행한 기적들이 모두 “갇힌 자를 해방하시는” 기적에 포함될 것이다. 

우리는 그가 오셔서 선포하신 그 영적인 자유를 바라고 그에게 소망을 두는 자들에게서 격려를 얻을 수 있다(사 61:1-2).

6. 그는 오랫동안 시력을 잃었던 자들에게 빛을 주신다.

“여호와께서 소경의 눈을 여신다.” 

그리고 그의 고난받는 백성들에게 그들이 전에 알지 못했던 위로를 보게 하신다. 

그 증거가 창세기 21장 19절에 나타나 있으며, 엘리사의 사환의 눈을 여신 것에 나타나 있다(왕하 6:17). 이것은 특별히 그리스도에 대해 언급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그 일을 행하시기까지는 “창세 이후로 소경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기”(요 9:32)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적인 조명을 위해서 그에게 소망을 두도록 우리를 격려해 준다.

7. 그는 굽은 자를 곧게 세우시며, 고통을 받고 넘어지는 자들을 일으키신다.

그는 “비굴한 자를 일으키시며”, 짐 진 자들을 위로하시고, 붙들어주시며, 적당한 때에 그들의 짐을 벗기신다. 

이것은 그리스도에 의해 그대로 수행되었다. 그리스도는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가련한 여자를 바로 펴셨다(눅 13:12). 

그는 지금도 무겁고 힘든 짐을 진 자들에게 휴식을 주시며, 유죄로 비천하게 버림받은 자들을 위로하고 세우시는 일을 그의 은총으로 행하신다.

8. 그는 모든 선한 백성들에게 한결같은 인자하심으로 대하신다.

“여호와께서 의인을 사랑하신다.” 

그들은 여호와의 선하신 뜻을 확신할 때, 그의 권능을 더욱 확신하게 될 것이다. 우리 주 예수는 “모든 의를 성취하심으로” 의로운 자들에게 그의 사랑을 보여주셨다.

9. 그는 그의 돌보심이 특별히 필요한 처지에 있는 자들을 위해 자비로운 관심을 갖고 계신다.

“여호와께서 객을 보호하신다.” 

여기에서 “여호와”라는 이름이 다섯 줄에 다섯 번이나 반복된 것을 주목하지 않고 지나가서는 안 된다. 

여호와는 전능한 힘(여호와 의)을 의미한다. 여호와는 억압받는 자들의 구원을 위해 관계하려 힘쓴다. 불행한 자들을 구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더한다. 

“타고 광야에 행하시던 자, 그 이름은 여호와시니라”(68:4).

(1) 객들은 위험에 노출되어 있고, 대개 친구들이 없지만, “여호와께서 그들을 보호하시며”, 넘어지거나 파멸되지 않게 하신다. 많은 가난한 객들은 하나님 보호의 은택을 발견하며, 그에 의해서 생명을 유지한다

(2) 가장을 잃고 가정 일을 돌아보는 자를 잃었기 때문에 그들을 삼키려는 자들, 그들에게 정의를 행하지 않고 오히려 불의를 행하는 자들의 손에 흔히 넘어지는 “고아와 과부를 붙드신다.” 오히려 “여호와께서 저희를 구제하시며”, 그들을 돕는 자들을 세우신다(출 22:22-23 참조).

우리 주 예수는 힘없는 자들을 도우러 세상에 오셨고, 이방과 객을 그의 나라에 받아들이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다. 가련한 죄인들, 아버지가 없는 자같이 된 자들은 그에게서 “긍휼을 얻을 것이다”(호 14:3).

10. 그는 그의 나라에 대적하며, 그 신실한 백성들을 핍박하는 모든 자들의 멸망을 위해 나타나실 것이다.

“악인의 길은 굽게 하시는도다.” 

그러므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에게 소망을” 두게 하며, “멸망당하려” 할지라도 “압제자의 격노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그가 그의 교회에 대항해 싸우는 지옥과 음부의 모든 계획을 전복시키심은 메시야의 영광이다. 

그러므로 우리를 위해 그가 함께하시니 우리를 대적해서 행해질 수 있는 어떤 일에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11. 그의 나라는 모든 시간의 흐름을 거쳐 영원한 종국의 세대에 이르기까지 존속될 것이다(10절).

어둠의 권세의 모든 저해에도 불구하고, “시온아, 여호와 네 하나님은 영원히 대대에 통치하시리로다.” 

이 말은 어느 때에도 하나님을 신뢰하도록 격려해 준다. 그리스도는 시온의 거룩한 산에 왕으로 임하셨고, 그의 왕국은 무한한 영광 중에 존속될 것이다. 

그 왕국은 침략자에 의해서 파괴될 수 없다. 계승자가 필요하지 않고, 계승하는 군주나 군주 정체가 필요하지도 않다. 그것은 영원히 서 있을 것이다. 

시온의 하나님으로서, 시온의 왕으로서 “여호와께서 통치하신다” 함은 말로 다할 수 없는 위로가 된다. 

메시야는 교회에 대해 모든 것을 능가하시는 머리가 되시며, 세상이 존속하는 한 함께하신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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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hea;(157, 아헤브) 사랑하다 love, 좋아하다 like, 사랑스러운 lovely...

## 하나님의 절대적 헌신적 사랑과 그 열정...헤세드[언약적, 영원무궁진실한 하나님의 사랑...JC를 통해 이루시는 거룩한 빼어닮음에 이끄심]와 아헤브[거룩한 한 가족(성 가족)의 부모형제자매로서 서로 친애/의지/용납/축복함의 사랑... + 배우자 상호간의 도드(상호간 유일한 남성과 여성으로서 체득/이해/존중되는 단독적 친밀함)의 사랑)+ 지으신 모든 만물과 원수까지 포함하는 모든 이웃을 사랑하여 구원/유익케 함의 적극적 아가페까지 포함] : 그 사랑은 많은 물로도 결코 끌 수 없다!!

동사 아헤브는 '사랑하다, 좋아하다'를 의미하며, 그 의미의 강도는 하나님의 자기 백성에 대한 무한한 애정에서부터 게으른 대식가의 육체적인 식욕에까지 이른다. 이 동사는 칼 어간의 모든 법(mood)과 니팔 분사형, 그리고 피엘 분사형으로 나온다. 16회의 피엘형은 강의적인 것이 아니라 대개 부정한 '연인' lover을 가리킨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200회 이상 나온다.

구약성경에서 사랑은 그 사람을 강요하여 그가 좋게, 또는 올바르게 평가하거나 인정하는 사물이나 사람에게로 이끌어 가는 자발적인 힘이다. 사람은 이 사랑의 힘에 제어를 받아 자기 자신을 주거나 혹은 사랑의 원인이 되는 대상을 확고히 붙잡거나 혹은 즐거움을 주는 행동을 하는 것이다. 사랑은 내적 인격에 심은 영혼의 불가해한 힘이다. 사람이 사랑의 대상을 올바로 인정하면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사랑한다(신 6:5). 사랑과 미움은 생의 양극이다(전 3:8, 전 9:6). 사랑은 인간 상호간의 사랑, 하나님의 인간과의 사랑, 사물에 대한 사랑 등을 나타낸다.

(a)  이 단어는 [합법적인 범주안에서 허용되는] 남녀의 사랑에 대해 사용되었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남자와 여자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인간의 하나님과 관계, 그리고 남녀의 성적 관계를 시사해 준다. 

이 남녀의 사랑은 이성(sexes) 상호간의 생명력 넘치는 충동을 의미한다. 

선지자 예레미야(렘 2:25)나 호세아(호 3:1, 호 4:18), 그리고 에스겔(겔 16:37)은 사랑의 성적(sexual) 측면을 매우 진하게 묘사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 단어는 남녀의 연애나 열애(창 29:18이하, 창 34:3, 삿 16:4), 합법적인 부부의 행복한 사랑(창 24:67, 삼상 1:5)을 묘사하는데 사용되었다. 

창조의 기사는 성의 구별과 부부간의 사랑이 생을 풍요하게 하는 은사임을 설득력 있게 이해시켜 준다(창 2:18이하).

「그러나 이 아헤브 사랑은 성적 사랑의 범위를 포함하고는 있지만 그것만으로 이루어지지는 않고, 오히려 동시에 헌신적 사랑과 생활의 충실함이 합쳐져 있다는 것을 주목하여야만 한다. 

구약의 초기 기록을 유의해 보라, 그 기록에 의하면 이러한 아헤브 사랑은 일부다처나 일처다부 사상과 결코 부합하지 않는다. 

구약성경은 충실(참조: 창 20:13, 삿 14:16, 삿 16:4-5, 겔 16:8, 겔 23:17, 호 3:1), 상호의존(참조: 창 24:67), 책임(참조: 삼하 13:1, 삼하 13:4, 삼하 13:15)과 같은 인간 사랑의 다른 측면까지 반드시 포함될 때 바르게 이해하는 것인데. 이런 마땅한 의무들을 제외하고 성적인 것에 집중하는, 극악무도한 비인간적 죄성따른 미혹의 위험성을 이해시켜 준다(The interpertreter's D.B).」

더 나아가서 아가서는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다"라고 열정적인 사랑의 강력한 힘을 찬양까지 한다. 

이 노래는 성적(남녀) 사랑의 기이함과 적극적인 힘을 찬양하지만 그 찬양에는 그 사랑이 근거를 두고 있는 상호의존과 신앙심(헌신)을 강조하고 있다(참조: 아 2:16, 아 3:1-8, 아 7:10, 아 8:6-7). 

아가서에서 사랑을 묘사할 때 거의 대부분 아헵(아가파오)과 아하바(아가페)를 사용했다. 그러나 아가페에서 여자가 남자를 부른 칭호는 도드(d/D , 1730, 사랑하는 자...상호간에 책임과 의무를 자발적으로 다하는, 절대유일무이의 헌신적 연인으로 상호 인식하며 그안에서 행함)를 사용하고 있음을 주목하라.

이러한 사랑에 반대되는 것으로서, 암논과 다말의 이야기는 성충동의 야수성, 즉 대상자와 성적 관계를 가지려는 무절제한 요구를 보여준다(삼하 13:1-22). 

따라서, 성경에서 의미하는 하나님 말씀진리 따른 사랑의 개념은 성애 또는 성욕적인 영역에만 몰입하는, 세상이 알지 못하는 근원, 곧 마귀로부터 기인한 원시적 힘인 미움[강제적 폭력 통한 악한 성적 학대]을 부인함으로 JC이름으로 맞서는 적극적인 능력이다. 

이 이야기는 이 두 가지 충동[사랑과 미움]의 야수성도 투명하게 보여준다(삼하 13:1-22). 

[사탄의 미혹을 따르게 되면, 그 결과] 결혼이나 부부 생활은 상대에 대한 사랑 없이도 이루어질 수 있다. 

삼손의 신부의 "당신이 나를 미워할 뿐이요 사랑치 아니하는도다"라는 히스테릭한 말에서(삿 14:16, 참조: 삿 16:15, 창 29:31, 창 29:33) 동일한 요소가 표현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심지어 법까지도 사랑과 미움의 성욕적 증상에 관여하고 있다(신 21:15이하, 신 22:31이하, 신 24:1이하).

아헤브가 '사랑의 행위를 하다'(일반적으로 이것은 야다<알다>나 샤카브<~와 함께 눕다>로 표현된다)라는 뜻을 가지는 경우도 있다. 

물론 이 경우는 아주 드물게 보여지지만..그러나 왕상 11:1에서 이 단어는 이러한 부가적인 의미를 가지는 것 같다: "솔로몬 왕이 바로의 딸 외에 이방의 많은 여인을 사랑하였으니…"(참조, 렘 2:25). 

호세아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바를 기록할 때, 이러한 의미를 사용하였다: "너는 또 가서 타인에게 연애를 받아 음부된 그 여인을 사랑하라…"(호 3:1). 

이 단어의 이런 의미는, 이 동사가 사역동사의 어간(분사로서)으로 나올 때 현저하게 나타난다.

(b)  이 단어는 부모와 자식, 가족간의 사랑에 대해 사용되었다. 

아브라함은 독자 이삭을 사랑했으며(창 22:2), 리브가는 아들 야곱을 사랑했다(창 25:28). 야곱은 요셉과 베냐민을 사랑했다(창 37:3, 창 44:20). 

잠언은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경계하느니라"고 했다(잠 13:24).

또한 이 단어는 며느리의 시어머니를 향한 사랑과 같은 가족간의 사랑을 표현한다(룻 4:15).

부모에 대한 자식의 사랑은 어느 곳에도 언급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그들은 부모를 존중하고 존경하며 또 부모에게 복종해야 한다.

참고 - 창 47:29에 보면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인애(헤세드: 친절, 자비)란 단어를 사용하여 자기에게 친절을 베풀어 주기를 요청했다. 

이것은 부모에 대한 자식의 [반응하는] 사랑의 표현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족속이나 가족의 유대는 이스라엘에서 매우 강하였다. 그러므로 '근친' 관계의 중요한 요소인 사랑을 고려할 때,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그것은 룻 3:10에서 이성 곧 남녀 사랑과 관련되어 있는데, 인애(헤세드: 친절, 자비)는 남녀 사랑의 개시와 가까운 친족에 대한 충실, 이 둘을 포함하고 있다.」

성경은 가족적 사랑이 너무 선택적일 때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삭은 에서를 사랑하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했다(창 25:28). 그 결과로 야곱과 에서가 서로 반목하고 미워하게 되었다. 

요셉에 대한 야곱의 편애로 인하여 다른 아들들이 요셉을 미워하고 시기하게 되었다(창 37:4). 

배타적인 사랑은 증오가 들어올 수 있는 지점이 될 수 있다. 이는 사랑이 헌신적일 뿐만 아니라 책임을 다 해야 하기 때문이다.

(c)  아헤브은 때때로 종이 그 주인의 지배하에 남아 있기를 원하는 주인에 대한 특별하고도 강한 애착심을 나타낸다. 

출 21:5에 보면 "종이 진정으로 말하기를 내가 상전과 내 처자를 사랑하니 나가서 자유하지 않겠노라…"라고 한다. 

아마 여기에는 가족애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아들이 그의 아버지를 사랑하듯이 종이 그의 주인을 사랑한다(신 15:16). 

이러한 의미가 강조되는 구절로는 삼상 16:21이 있는데 여기에는 사울이 다윗을 크게 사랑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윗을 사랑하고(삼상 18:16) 심히 존경하게 되어 그의 모든 행동들을 경탄으로 바라보았다.

(d)  이 단어는 친구의 특별한 애착을 나타낸다. 

다윗과 요나단 사이의 사랑은(삼상 18:1, 삼상 18:3, 삼상 20:17) 여인의 사랑보다 더 깊은 우정의 차원이었다 - "그대가 나를 사랑함이 기이하여 여인의 사랑보다 승하였도다"(삼하 1:26).

(e)  아헵은 정치적 의미로도 사용되었다: 

"솔로몬이 기름 부음을 받고 그 부친을 이어 왕이 되었다 함을 두로 왕 히람이 듣고 그 신복을 솔로몬에게 보내었으니 이는 히람이 평일에 다윗을 사랑하였음이라"(왕상 5:1). 다윗에 대한 히람의 "사랑"은 두 사람 사이의 국제적인 우호 관계나 화해 정책을 예증하는 것이다. 후자가 지적하는 바와 같이 그것이 그가 지극히 충성스러웠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f)  더 나아가 이 사랑은 사회적 공동 생활의 근본과 규범로 나타난다 -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레 19:18). 

이러한 면에서 사랑은 이웃을 위한, 그리고 이웃을 향한 헌신이며, 이웃을 형제로서 받아들이는 것이고 이웃이 당연히 받아야 할 대우를 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은 특히 외국인(레 19:34)과 가난한 자(레 25:35)와 고아의 권리와 관련된 사회적 법률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이웃 사랑은 단순한 친절이나 호의로 해석할 수 없다. 이것은 편협한 배타주의를 배제한다. - 바로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은 누구나 이웃이다. 

궁극적으로 이것은 인간의 입장에서 볼 때는 적(enemy)으로 생각되는 것 같은 사람들에 대한 사랑도 의미한다.

그 이유로 신 22:1-4이 동포를 도울 의무를 부과하는 것인 반면, 출 23:4-5은 특별히 이 의무를 적대적인 사람에게 적용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웃은 동료일 수도 있고 적일 수도 있기에,  사랑의 대상이지 법적 제한의 대상이 아니다. 이것은 인간으로서의 개인은 법적 개인보다 우선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형태에서 출 23:4이하의 요구와 아마도 한층 더 높은 수준인 잠 25:21에 있는 기본적 진술("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식물을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마시우라")은 원수를 향한 성향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지 않으나 한 특별한 방식의 행위의 의무를 지우는 것으로서, 원수에 대한 사랑을 실천적으로 가르치려고 한 것이다. 요셉은 그의 이야기에서 하나님께서 순종하는 선으로 악을 갚는 그런 실례를 보여준다(창 50:19).

물론 구약성경에는 이러한 원수를 사랑하는 것에 한계가 있다. 시 109편과 잠 14:20 및 적대 국가들에게 향한 일반적인 태도는 이에 대한 예증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 의해 부과된 윤리적인 요구의 고결함은 여전히 존재한다.

(g)  이 단어는 구체적인 것이나 추상적인 것들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데 사용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기름(잠 21:17), 은과 풍부(전 5:10), 뇌물(사 1:23)을 사랑했다. 

다른 사람들은 악(시 52:3-5), 사망(잠 8:3), 허사(시 4:2-3), 거짓 맹세(슥 8:17)를 사랑했다. 

또 다른 사람은 하나님의 계명(시 119:47), 율법(시 119:97), 증거(시 119:119), 법(119:159), 그리고 그들은 선(암 5:15), 진실과 화평(슥 8:19), 구원(시 40:16-17)을 사랑했다.

(h)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기를 "사랑하라"고 명하셨다(신 6:5). 

그리고 시편에는 이 계명에 대한 순종의 증거들이 포함되어 있다(시 116:1, 시 145:20). 

반대로 하나님은 사람들, 특히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사랑하신다(신 4:37, 사 43:4, 말 1:2). 

주님은 또한 시온의 문들(시 87:2), 정의와 공의(시 33:5), 성전(말 2:11)과 같은 것들을 "사랑하신다". 

여호수아는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한다(수 22:5). 

예레미야는 이 백성이 방황하기를 좋아한다고 질책하였다(렘 14:10).

(i)  이 분사형들은 종종 '친구' friend로 변역되곤 한다. 대하 20:7에 보면, 아브라함은 주의 "벗"이라고 한다.

(j)  위에서 지적하였듯이 피엘형 분사를 번역한 영어 단어 "lover" (연인)는 종종 매춘을 암시하는 경멸적인 뜻을 함축하고 있다. 

선지자 예레미야, 에스겔, 호세아 등은 이스라엘의 부정한 관계를 언급하기 위해서 이 단어를 사용한다. 호 2:7, 호 9:12, 겔 16:33, 겔 16:36-37, 렘 22:20, 렘 22:22, 렘 30:14, 애 1:19, 슥 13:6 등).(참조: R. L. Alden; Nelson's EDOT). 


====간구기도도고감사드림의 중보기도...기도자의 선결요건..HS따라 살며 누리는 경건-단정-절대적 고요-평안의 선순환===

[[딤전2장]]기도에 대한 가르침
1.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2.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라
3.  이것이 우리 구주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이니
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6.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대속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러 주신 증거니라
7.  이를 위하여 내가 전파하는 자와 사도로 세움을 입은 것은 참말이요 거짓말이 아니니 믿음과 진리 안에서 내가 이방인의 스승이 되었노라
8.  ○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
9.  또 이와 같이 여자들도 단정하게 옷을 입으며 소박함과 정절로써 자기를 단장하고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하지 말고
10.  오직 선행으로 하기를 원하노라 이것이 하나님을 경외한다 하는 자들에게 마땅한 것이니라
11.  여자는 일체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우라
12.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 오직 조용할지니라
13.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하와가 그 후며
14.  아담이 속은 것이 아니고 여자가 속아 죄에 빠졌음이라
15.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숙함으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의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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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을 위해 해야 하는 기도(딤전 2:1-8)
위의 구절에서 우리는 다음의 것을 살펴 볼 수 있다.
Ⅰ.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고 특별히 권세있는 자들은 기도하여야 할 것을 명하였다. 
디모데는 이것을 행하도록 주의를 기울여야만 하였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기도의 형태에 대하여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아마도 그 이유는 목회자들로 하여금 자기가 제시한 기도의 틀에 얽매이지 아니하도록 하기 위해서 였던 것 같다.  그러나 바울은 목회자들이 일반적으로 "간구하고 기도하고 도교하며 감사를 하여야 할 것"을 권하였다.  즉 악을 피하기 위해 간구하며, 선을 얻기 위해 기도하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중제 기도를 하여, 이미 받은 긍휼에 대하여 감사하라고 했다. 
바울은 그들에게 기도할 것을 지시하는 성서가 있고 또 기도의 성령이 그들에게 부어졌으므로 더 이상의 지시를 하지 않는다.  다만 그는 일반적인 기도의 원칙만을 말해 주는 것으로 충분하리라 생각했다. 
기독교는 기도의 종교이다.  또한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기도하는 사람들이 되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에베소서 6장 18절에 "무시로 기도하라"고 한 것이다. 
기도자들은 우선적으로 자신을 위하여 기도하여야 한다.  이같이 기독교는 구별없는 사랑을 가르치는 종교이다.  또한 왕들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했다(2절).  당시에는 왕들이 이교도요 또 기독교의 적일 뿐 아니라 기독교의 박해자들이었다.  그렇더라도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했다.  왜냐하면 정부가 올바르게 되고 정치를 하는 사람들이 바르게 될 때 그것은 곧 모든 사람을 위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비록 핍박을 받는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만 한다. 
본문에는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했는데(2절), 이말은 낮은 위치에 있는 권세자들을 위해서도 기도하라는 뜻이다.  우리는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여야 하며 그들로 인하여 감사 드려야 하며 그들의 번영을 위해 또 그들이 다스리는 나라의 번영을 위해 기도하여야 한다.  따라서 그들에게 반역을 꾀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의 평화로 말미암아 우리가 평화를 가지게 되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에게 감사해야 하는데 그 이유는 그들의 통치의 혜택을 우리가 받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문에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함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다"(2절)라고 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가 왕들을 위하여 무엇이라고 간구해야 하는가를 깨닫게 된다.  그것도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사 그들을 인도하시고 그들을 유용하게 하시고 그들의 다스림 아래서 조용하고 평안한 삶을 누리도록 해 주십시사라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바울은 "그들의 다스림 아래서 승진되고 부를 얻으며 영예와 권세를 얻게 해 달라고 기도하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리스도인이 바랄 최고의 것은 조용하고 평화로운 삶을 누리는 것이며 가난하나마 사적 생활이 보장된 가운데 세상을 사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와 다른 사람이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평화로운 삶을 살도록 소망하여야 한다.  그런데 우리 모두 각자가 경건함과 단정함을 지키지 않고는 조용하고 평화로운 생활이 유지하기를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의무에 충실하라.  그리고 난 후에 우리는 하나님과 국가의 보호를 받기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본문은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2절)라고 하였다.  여기에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의무가 두 가지 말로 요약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  하나는 경건이며 다른 하나는 단정함이다.  경건은 하나님께 대한 올바른 예배를 의미한다.  단정함은 모든 사람에 대한 좋은 행위를 말한다.  이 둘은 서로 조화되어야 한다.  우리가 만약 경건하지 아니한다면 진실로 단정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우리가 단정하지 않다면 진실로 단정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려고 도적질을 한다면 하나님이 이것을 기뻐하실 리 없으시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의 것을 알 수 있다.
1. 그리스도인은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기도에 풍부해야 한다.   또한 그를 자신을 기도와 간구하는 데 써야 한다.
2. 우리가 기도하는 중에 자신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만큼 타인들에 대하여 광범위한 관심을 가지고 기도하여야 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고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감사를 드려야 한다.  또한 우리는 기도의 대상을 제한해서는 안 되며 또 자기 개인이나 가족들만을 위해 감사하여서도 안된다.
3. 기도는 간구, 도고, 감사의 여러 가지 부분으로 구성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이미 받은 긍휼을 감사할 뿐만 아니라 필요한 긍휼을 위하여서도 기도하여야 한다.  또한 우리는 자신이 저지른 죄와 사람의 죄에 대해 심판을 받지 않도록 기도해야 할 것이다.
4. 왕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우리의 기도를 필요로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많은 어려움을 만나며 그들의 높은 위치 때문에 여러 가지 어려움에 당하게 되기 때문이다.
5. 통치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평화롭고 조용한 생활을 하기 위한 가장 올바른 방법이라는 사실이다.  바벨론에 있는 유대인들에게 그들을 사로잡아 간 그 성읍의 평안을 위해 힘쓰고 그 성읍을 위해 주께 기도하라고 하셨는데 왜냐하면 그 성읍이 평안하므로 그들도 평안할 있었기 때문이었다(렘 29:1).
6. 만약 우리가 평화롭고 조용한 삶을 원한다면 우리는 경건과 단정함으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 우리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를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어 그 입술로 궤휼을 말하지 말고 악에서 떠나서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여 이를 좇으라.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저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주의 낯은 악행하는 자들을 향하시느라"(벧전 3:10, 11)고 하였다. 
바울이 이 모든 것을 명한 것은 이 일이 "우리 주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바로 이것을 요구한다.  즉 우리가 우리 주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일을 행할 것과 그러한 일에 풍성할 것을 요구한다.
Ⅱ. 우리가 기도하는 중에 모든 사람에 대하여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기 때문이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다(4절).
1.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해야만 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하나님은 한 분이시며 그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류를 위해 선한 뜻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며(5절) 아무도 그분과 같은 자가 없으며 그와 같이 될 수도 없는 유일하신 분이시다.  왜냐하면 무한하신 분은 오로지 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이 유일하신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신다.  주께서는 아무도 멸망하거나 죽지 않고(겔 33:11),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받고 복을 받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으리라고 못박아 말씀하지는 않으셨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모든 사람이 구원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다만 주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고 아무도 그들 자신의 죄로 말미암아 멸망받기를 원치 아니하시는 선한 소망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말씀한다(마 23:37).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지식에 이르고 또 다른 길을 통해서가 아니라 주께서 주신 방법에 의해 구원되기를 바라신다.  복음은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지니기를 요구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구원의 길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로 그리스도께서는 길이시오 진리이시오 또한 생명이 되신다."
2. 우리가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 또다른 이유는 한분의 중보자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속죄의 제물로 내어 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긍휼이 모든 하나님의 사역 가운데 나타난 것처럼, 그리스도의 중보도 모든 인간의 자녀들에게 미치는 것이다.  그 이유는 그가 모든 인류를 구원하기에 충분한 대가를 지불하셨기 때문이다. 
주께서는 인류가 하나님과 더불어 새로운 관계를 맺도록 하셨으며 그러므로 우리는 행위의 계약으로써의 율법 아래 거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법 아래 거하는 것이다.  그들은 은혜 아래 있는 것이다.  그들은 무죄를 요구하는 언약 아래가 아니라 새로운 언약 아래에 있는 것이다.  이 계약은 "주께서 자신을 속죄물로 내어 주셨으므로" 성립된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속죄의 대가였음을 명심하자.  우리는 죽어야만 하는 죄인들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죽음과 지옥으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 죽으시되 자신을 기꺼이 모든 사람을 위한 속죄물로 내어 주셨다.  그러므로 모든 인류의 사탄의 지배 아래에 있을 때보다 훨씬 더 좋은 상황 아래에서 거하게 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이 중보자의 일을 스스로 맡으셨다.  분쟁이 없으면 중보자도 필요가 없다.  그러나 죄는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다툼을 만들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양자 사이의 평화를 이루는 중제자가 되신 것이다.  그는 하나님과 인간을 하나로 묶기 위한 중보자이시다.  즉 그는 양자 사이에 손을 얹은 판결자이시다(욥 9:33). 
그리스도께서는 기약이 이르면 나타날 속죄물이었다.  즉 구약의 시대에서는 주의 고난과 영광이 말세에 계시될 것이라고 예언되었던 것이다(벧전 1:10, 11).  그 예언에 따라서 주님은 오셨다.  그리고 바울은 위임받고 이방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구원과 속죄의 기쁜 소식을 전하도록 사도와 전도자로 위임되었던 것이다.  또한 바울은 이 그리스도의 중보의 교훈을 모든 사람들에게 전하도록 위임을 받았던 것이다(막 16:15). 
바울은 이방인들의 교사로 임명을 받았다.  그는 사도로 부름받은 이외에 "믿음과 진리 안에서" 또는 믿음과 진리로 이방인들에게 전도하라는 특별한 위임도 받게 되었다.  다음을 유의하라.
(1) 우리가 모든 사람들과 우리의 통치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과 평화롭고 조용한 생활을 사는 것은 우리의 구원자이신 하나님이 보시기에 합당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또한 우리가 평화롭고 조용히 살기 위해 기도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는 사실이다.
(2)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인간들이 구원받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이 그들을 구원하시지 않고자 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의 법도 안에서 구원받고자 하지 않기 때문인 것이다. 
우리의 복되신 주님은 이러한 우리의 잘못을 경고하신다.  즉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치 아니하는도다"(요 5:40)라고 하시고 또 "내가 너희를 모으려 하였으나 너희는 모이지 아니하였다"고 하셨다.
(3) 구원을 얻고자 하는 자는 진리를 알아야 하는데 왜냐하면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지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정하신 하나님의 방법이기 때문이라는 사실이다. 
진리를 아는 지식이 없이는 사람의 마음이 선하여질 수 없다.  만약 우리가 진리를 모른다면 진리에 의해 살 수 없는 것이다.
(4) 하나님이 한 분이듯이 중보자도 한 분이시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로마 교회는 많은 중보자를 내세움으로 많은 신들을 만들어 내는 우를 범하였다.
(5) 신약 성서에 나타나는 중보자이신 주님은 자신을 속전으로 내어 주셨다.  그가 이렇게 하신 것은 바울에 의하면 자신을 드림이 중보자로서 필요하였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의 중제의 근거로도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로마 카톨릭 교도들은 많은 중제자들을 내세우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마치 속죄의 중보자는 한 분뿐인 것처럼 주장하는데 이는 거짓된 것이다.
(6) 바울이 사역자로 세움을 받은 것은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신을 주신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한 중보자이심을 전파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모든 전도자들이 이세상 끝날까지 전하여야 할 본질인 것이다.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서의 자기 직책을 영광스럽게 생각했다(롬 11:13).
(7) 목회자들은 자기가 이해하고 그 진리를 전하여야만 하며 또 그것을 자기 자신도 믿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목회자들은 사도들과 마찬가지로 믿음과 진실함으로 설교하며 그들 자신도 신실하고 진실하여야 한다.
Ⅲ. 기도하는 방법을 가르쳐 줌(2절).
1. 복음 아래 있는 사람들은 특별한 기도처에서만 기도하도록 규제를 받지 않는다.  그리스도인들은 기도에 적당치 않은 곳이 있다거나 기도가 하나님에게 더 잘 열납되는 특별한 곳에 있다는 것을 기독교 신앙은 부인한다(요 4:21).  그러므로 "어느 곳에서든지 기도하라"고 했다. 
우리는 벽장 속에서 기도할 수 있으며 우리 집에서도 하며 식사 때도 기도하고 여행을 할 때도 기도하며 회중 가운데서 홀로 기도하며 공공의 장소에서나 은밀한 곳 어디서든지 기도할 수 있는 것이다.
2. 기도하는 중에 우리가 거룩한 손을 드는 것을 하나님의 뜻이다. 
그러므로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라"고 하였다(8절).  즉 순결한 손, 죄의 오염에서 깨끗한 손, 죄와 불결을 씻도록 하기 위해 사람들에게 개방된 생명의 샘에서 씻은 그 손을 들고 기도하여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시편 26편 6절에서 "나는 나의 손을 씻기 원합니다"고 하였다.
3. 우리는 사랑 안에서 기도하여야 한다. 
분노와 악덕이나 어떤 사람에 대한 노함을 가지고 기도하여서는 안 된다.
4. 우리는 의심함이 없이 믿음으로 기도하여만 한다(약 1:6). 
또는 어떤 이들이 해석하듯이 "따지지 말고"기도해야 한다.  그럴 때 그 기도는 응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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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들에게 주는 바울의 경고(딤전 2:9-15)
Ⅰ. 위의 구절에서, 기독교 신앙을 고백한 여인들을 반드시 그리스도인답게 아담하고 경건하고 조용하며 순종하여야 할 것이 명령되고 있다.
1. 여인들은 차림이 단정해야 하며 자극적인 화려한 옷이나 지속한 것이나 값비싼 옷으로 단장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이 자기를 단장하는데 사용할 더 좋은 장식이 있기 때문이다.  즉 그 장식품은 바로 "선행"이므로 이것으로 단장하는 것이 신앙을 고백한 사람에게 어울리는 것이다. 
선행은 가장 좋은 장식품이라는 것을 명심하자.  선행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대단히 값진 것이다.  신앙 고백을 한 사람들은 다른 일에 있어서나 마찬가지로 몸차림에 있어서도 자기의 고백에 알맞는 차림을 해야 할 것이다.  좋은 옷을 입기 위하여 돈을 낭비하는 대신에 경건과 자비의 사업을 위하여 돈을 쓰는 것이 진실로 선한 일이다.
2. 여인들은 기독교의 원리와 그리스도와 성경을 배워야 한다. 
여인들이 자기들은 여자인고로 구원에 필요한 공부를 면제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여서는 안 될 것이다.
3. 여인들은 조용하고 순종하며 복종하여야 하며 남자의 권위를 빼앗아서는 안 될 것이다.  그 이유가 본문에서 주어지는데 그 까닭은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았고" 그 다음에 이브가 지음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사실은 여인들이 남자에게 의존하며 남자에게 순종하여야 한다는 사실을 설명하여 주는 것이다.  또한 여인은 남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았고 남자의 반려자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을 나타내 보여 준다. 
창조 때에 나중 지음 받은 것이 여자가 남자에게 순종해야 할 하나의 이유이지만 또한 여자가 먼저 범죄했다는 것도 여자가 남자에게 순종해야 할 또다른 이유이다.  본문에 "아담이 과일을 보지 아니하였다"라고 했는데 이 말은 그가 처음 죄를 범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뱀이 남자에게 직접으로 유혹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여인이 먼저 범죄하였다(고후 11:3).  그러므로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고 형벌이 여자에게 선고된 것이다(행 3:16). 
정절은 지키는 여인들을 해산함으로(메시야가 여인에게서 출산하므로) 구원을 얻으리라는 것은 위로의 말씀이다(15절).  이 말씀은 여인의 몸에서 나신 메시야께서 뱀의 머리를 쳐부수실 것이라는 의미이며(창 3:15), 혹은 그들이 만약 믿음과 긍휼과 거룩함과 절제를 지킨다면 죄아래 있을 때 그들이 받은 형벌이 그리스도께 용납받음에 장애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다.
Ⅱ. 여기서 우리는 다음의 것을 살펴 볼 수 있다.
1. 기독교 규칙의 적용범위. 
기독교의 교훈은 남자들에게 뿐만 아니라 여인들에게도 또한 그들의 인격뿐만 아니라 옷차림까지 규제한다.  여자들은 옷차림도 여성답게 단정하여야만 하는 것이다.  여인들은 태도와 행동에 있어서 복종하는 마음으로 종용하여야 하는 것이다.
2. 여인들도 남자들처럼 같은 신앙 고백을 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도 세례를 받기 때문이며 도 이 세례로 말미암아 여인들도 경건해야 할 의무가 부과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성들의 영예를 높여 주기 위해 사도행전에 사도들의 시대에 기독교를 위하여 종사한 유명한 여인들의 이름이 언급되어 있는 것이다.
3. 여인들에게는 사치스러운 복장을 하려는 경향이 더하기 때문에 여인들은 이점에 조심하는 것이 더욱 필요하다.
4. 신앙 고백을 한 사람들의 가장 좋은 장식품은 선행이다.
5. 바울의 가르침에 따르면 여인은 반드시 배우는 자가 되어야 하며 교회 안에서 공중을 가르치는 선생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왜냐하면 가르친다는 것은 권위를 필요로 하는 직책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인들은 남자의 권위를 침해해서는 안 되며 잠잠하여야 한다.  이렇게 금지가 있긴 하지만 훌륭한 여인들이라면 가정에서 신앙 원리를 자녀들에게 가르칠 수 있고 또 가르쳐야만 한다. 
디모데는 어렸을 때부터 성경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어머니와 할머니가 아니라면 누가 그를 가르쳤겠는가?(딤후 3:15) 또한 아굴라와 그의 부인 브리스길라도 아볼로에게 하나님의 법을 좀더 정확히 알도록 자세히 설명하여 주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일은 은밀히 행했다.  이 사실은 그들이 그를 데려다가 사사로이 가르쳤다.  그 말씀을 통해 알 수 있다(행 18:26).
6. 남자의 권위가 여인의 위에 있다는 것과 또한 여인이 남자에게 순종하여야 한다는 두가지 좋은 이유가 본문에 제시된다(13,14절), 
그 첫째 이유는 아담이 먼저 창조되었고 하와는 그 다음에 창조되었다는 점이다.  즉 남자가 여인을 위해서 창조된 것이 아니라 여자가 남자를 위해 창조되었다(고전 11:9).  또한 둘째 이유는 여인이 죄를 짓고 또 남자로 하여금 범죄하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7. 여인에게는 해산의 위험과 고통이 주어졌다. 
이것은 하와의 범죄로 인하여 같은 여인으로서 받는 벌의 일부분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구원을 받으리라"는 위로가 주어진다.  여자는 해산의 어려움을 당하지만 생명을 출산하며 살아있는 아이들의 산 어머니가 될 것이 그 위로가 된다.  그러므로 여인들을 해산의 고통을 당할 때 그들이 필요할 때 도우시리라는 그들에게 주어진 약속 믿음으로 의지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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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왕의 왕, 만주의 주JC아래에 이미 패하여 굴복한바  단지, 하늘의 악한영-어둠세상의 주관자들인 악한 영들 곧 [정사권세-주관자능력]에 대한 합당한 영적 전투 +중보를 의미함을 기억하라...합당한 영적무장 + 중보기도 연습/실행을 힘씀으로써 JC안에서 이미 허락하신 JC이름의 언약적 승리를 성취하라....치리자들이 범하는 죄악은 많은 사람들을 괴롭게 하며 오염시키게 되므로 악에 사로잡힌 저들의 범죄와 악행의 근원을 JC이름으로 막고 그들이 회개하며 주님의 이름불러 주께로 돌이키기를 중보하라==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라..2019. 11. 10.>>
딤전 2:1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2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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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록된 성경 말씀은 모두가 하나님의 자기계시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기라 함은 곧 예수 그리스도이기에, 성경은 기록된 말씀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열어서 보여주는 책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는 이들이 처음에는 성경을 예수 그리스도로 보지 못합니다. 우리가 지켜야만 하는 종교적 계율이나 명령으로 오해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 본문은 믿는 사람들이 자칫 오해할 수  있는 말씀들 중의 하나입니다. 일반적으로 이 본문의 의도를, 믿는 자들이 나라의 높은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는 것으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만 본다면 로마제국 시대에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를 하는 목적은 바울이 말한 것처럼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기 위함이다라고 읽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까지도 그대로 확장적용한다면 우리가 위정자들을 위해서 기도하면 우리 역시 위정자들의 도움으로 일신의 안위와 믿음생활의 평안을 제공받게 된다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이 정말 그런 의미라면 위정자들을 위한 기도란 것이 아주 세속적인 것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십자가의 길을 간다고 하는 기독교인들이 자신들의 안위와 신앙생활의 평안을 위해서 기도를 하는 꼴이 되고 말았으니까 말입니다. 그러면 과연 정말로 이 편지는 그런 의미로만 쓰여진 것일까요...놓그렇다면 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
 신약성경이 기록되던 당시는, 이스라엘이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됨으로 말미암아 나라를 잃고 많은 유대인들이 이방인이 되어 세계 각국을 떠돌아다니던 시대였습니다. 물론 이들 중에는 기독교인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면 디아스포라가 된 기독교인들이 지배자들을 위한 기도를 통하여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게 되었던가요?
이스라엘 사람들은 1948년 팔레스타인 땅에서 현재의 국가를 세우기까지 거의 이천년간을 나라도 없이 떠돌아 다녔습니다. 그리고 간신히 나라를 세우기는 했지만 여자들까지도 군 복무를 해야 할 정도로 국가의 안보는 불안하기만 합니다. 현재에도 가자 지구를 비롯한 주변 중동국가들과의 끊임없는 불화와 전쟁으로 인하여 이스라엘은 중동의 화약고라고 불릴 정도입니다.  물론 기독교인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 수는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해야 할 정도로 희소하기만 합니다. 그런데 그들마저도 유대인들에 의해서 많은 핍박을 받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렇다면 현재 이스라엘에 거주하는 기독교인들은 그들의 위정자들을 위한 기도를 하지 않고 있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의 이 권면이 무색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기도회, 구국기도회 등을 많이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기도를 한 만큼 기독교인들이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그렇다고 대답하기가 참으로 껄끄럽게 느껴지는 것이 오늘 우리의 현실일 것입니다.  날이 갈수록 기독교회가 많은 사람들에게 부정적으로 비춰지고 있으며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는 실정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현실 앞에서 과연 임금들과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라는 바울의 권면은 정말 진리이겠습니까? 물론 진리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는 범주가 너무 좁은 것은 아닐까, 무엇인가 빼 먹고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주객이 전도된 것은 아닐까  묻는 것입니다.
1절에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했는데 여기서 모든 사람을 원문으로 보면 “판톤 안스로폰”입니다. 직역하면 “사람들의 모든 것들을 위하여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의 모든 것들”이란 무엇이겠습니까? 사실 이 질문은 물어보나마나 한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이미 알고 있듯이 사람들의 모든 것들이란 이 세상에서 높음과 강함을 추구하는 바 이 땅의 가치관/패러다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율법의 문자와 종교적 행위에 매여서 살아가는 것을 믿음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가치와 패러다임, 곧 YHWH께서 밝혀주신 하나님의 어떠하심따른 패러다임...하나님이 기뻐하신 뜻과 주님의 도(곧, 태도/방식/자세의 틀)를 따름이 진정한 목적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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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11:4또 말하되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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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2절은 그 가치관이 사람들을 어떤 상태에 있게 만드는가를 구체적으로, 비유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쩌면 바울은 사람들의 모든 것들을 임금들로 비유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렇다면  임금들이란 높아질 대로 높아져 있는 사람들 곧 세상가치관따라 올인하며 기복적 열심으로 ((말씀을 깨닫게 해 주시는 성령이 아니라 육을 따라)) 추구하는 있는 행위를 믿음이라고 생각하고 있음을 비유하는 말은 아닐까요.   오늘날 어쩌면 나 자신이 교회 안에서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자신의 종교행위를 통하여 공로와 업적을 쌓고 스스로 높은 자리에 올라가 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은 아닐까요. 그러함으로써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기는 말하지만 그 의미를 아는 일에는 관심도 없고 오히려 십자가를 자신의 안위와 평안을 위한 부적정도로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그래서 “다 이루었다” 라고 말씀하신 그 십자가 앞에서 여전히 율법 문자의 행위를 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율법주의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율법과 종교의 문자적 행위를 통하여 스스로 부자가 되고 스스로 높아진 사람들의 마음을 임금이라고 비유하는 것은 아닐까요.... 다시 말해서 성도가 마땅히 추구하며 머무를 바 지고지선의 진복이자 최상의 가치이신 예수님보다 높아져 있는 상태를 임금과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라고 한 것은 아닐까요.... 이런 견지에서 볼 때,  바울의 이 권면은, 일반적으로 알고 있듯이 우리가 위정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녹이시고 다른 백성들의 마음도 변화시켜서 우리의 편의를 잘 봐주게 하셔서 평안한 믿음생활을 하게 될 것이라는 뜻만으로 읽어서는 곤란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편, 주님앞에서 곰곰히 생각해 보면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란 궁극적으로는 바로 나 자신을 가리키는 말씀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최우선적으로 불신자나 나 이외의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하라는 말씀이 아니고 믿는 나자신을 향한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고 또 보지만, 설교를 듣고 또 듣지만, 여전히 그 의미인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여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삶을 사는 것을 믿음생활이라고 오해하고 있는 나 자신을 가리키는 것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다 이루심을 인정하지 않고 나 스스로의 행위로 높아져서 임금들과 같이 높은 지위에 올라가 있는 나를 알게 된다면 나의 이런 상태에 대한 간구(=데에시스-간청, 기도, 청원))와 기도(=프로슈케-기도, 예배, 예배당)와 도고(=엔튝시스-회견, 간구, 기도)와 감사(=유카리스티아-감사, 예배의 한 행위로서 감사한 말)를 하게 된다.....우리가 이런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에 이르게 된다면 말씀 그대로 우리는 경건함(=유세베이아-복음의 개요, 거룩)과 단정함(=셈노테스-존엄, 정직, 정중) 가운에 고요(=에레모손-소란으로부터 자유로운, 조용한한)와 평안(=헤쉬키오스-자기 자리를 유지하는)을 누리는 생활(=비오스-생명, 생계의 수단) 곧 천국을 누리게 된다는 것이요. 그리고 바로 이런 우리의 상태가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선한 것이니 곧 우리의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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딤전 2:3이것이 우리 구주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이니 4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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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연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된 나와 우리는 선악 이원론에서 해방되어 모든 것들을 선한 것으로만 보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들을 선한 것으로 보게 된 우리를 하나님께서는 선하다고 하시는 것이고 이 선한 것을 받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구원을 받게 된 사람들은 진리를 아는데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가 이런 상태에 있게 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 원하심을 언약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이니 곧 언약이 성취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이 말은 권면이나 명령이 아니라 하나의 언약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게 된 사람들은 말씀을 통하여 자신의 높아진 것을 알게 될 때에 다른 이들을 위한 간구-기도-간구-도고-감사를 드림이 주님 뜻에 합당하게 되지 않을까요.... 우리는 또한 JC이름을 가진 영적 전사들이기 때문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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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5....다윗의 찬송시
1.  왕이신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2.  내가 날마다 주를 송축하며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3.  여호와는 위대하시니 크게 찬양할 것이라 그의 위대하심을 측량하지 못하리로다
4.  대대로 주께서 행하시는 일을 크게 찬양하며 주의 능한 일을 선포하리로다
5.  주의 존귀하고 영광스러운 위엄과 주의 기이한 일들을 나는 작은 소리로 읊조리리이다
6.  사람들은 주의 두려운 일의 권능을 말할 것이요 나도 주의 위대하심을 선포하리이다
7.  그들이 주의 크신 은혜를 기념하여 말하며 주의 의를 노래하리이다
8.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긍휼이 많으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크시도다
9.  여호와께서는 모든 것을 선대하시며 그 지으신 모든 것에 긍휼을 베푸시는도다
10.  여호와여 주께서 지으신 모든 것들이 주께 감사하며 주의 성도들이 주를 송축하리이다
11.  그들이 주의 나라의 영광을 말하며 주의 업적을 일러서
12.  주의 업적과 주의 나라의 위엄 있는 영광을 인생들에게 알게 하리이다
13.  주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이니 주의 통치는 대대에 이르리이다
14.  여호와께서는 모든 넘어지는 자들을 붙드시며 비굴한 자들을 일으키시는도다
15.  모든 사람의 눈이 주를 앙망하오니 주는 때를 따라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며
16.  손을 펴사 모든 생물의 소원을 만족하게 하시나이다
17.  여호와께서는 그 모든 행위에 의로우시며 그 모든 일에 은혜로우시도다
18.  여호와께서는 자기에게 간구하는 모든 자 곧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 하시는도다
19.  그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의 소원을 이루시며 또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사 구원하시리로다
20.  여호와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은 다 보호하시고 악인들은 다 멸하시리로다
21.  내 입이 여호와의 영예를 말하며 모든 육체가 그의 거룩하신 이름을 영원히 송축할지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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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6
1.  할렐루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하라
2.  나의 생전에 여호와를 찬양하며 나의 평생에 내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3.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4.  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 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하리로다
5.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6.  여호와는 천지와 바다와 그 중의 만물을 지으시며 영원히 진실함을 지키시며
7.  억눌린 사람들을 위해 정의로 심판하시며 주린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 이시로다 여호와께서는 갇힌 자들에게 자유를 주시는도다
8.  여호와께서 맹인들의 눈을 여시며 여호와께서 비굴한 자들을 일으키시며 여호와께서 의인들을 사랑하시며
9.  여호와께서 나그네들을 보호하시며 고아와 과부를 붙드시고 악인들의 길은 굽게 하시는도다
10.  시온아 여호와는 영원히 다스리시고 네 하나님은 대대로 통치하시리로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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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7
1.  할렐루야 우리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이 선함이여 찬송하는 일이 아름답고 마땅하도다
2.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세우시며 이스라엘의 흩어진 자들을 모으시며
3.  상심한 자들을 고치시며 그들의 상처를 싸매시는도다
4.  그가 별들의 수효를 세시고 그것들을 다 이름대로 부르시는도다
5.  우리 주는 위대하시며 능력이 많으시며 그의 지혜가 무궁하시도다
6.  여호와께서 겸손한 자들은 붙드시고 악인들은 땅에 엎드러뜨리시는도다
7.  감사함으로 여호와께 노래하며 수금으로 하나님께 찬양할지어다
8.  그가 구름으로 하늘을 덮으시며 땅을 위하여 비를 준비하시며 산에 풀이 자라게 하시며
9.  들짐승과 우는 까마귀 새끼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도다
10.  여호와는 말의 힘이 세다 하여 기뻐하지 아니하시며 사람의 다리가 억세다 하여 기뻐하지 아니하시고
11.  여호와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과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기뻐하시는도다
12.  예루살렘아 여호와를 찬송할지어다 시온아 네 하나님을 찬양할지어다
13.  그가 네 문빗장을 견고히 하시고 네 가운데에 있는 너의 자녀들에게 복을 주셨으며
14.  네 경내를 평안하게 하시고 아름다운 밀로 너를 배불리시며
15.  그의 명령을 땅에 보내시니 그의 말씀이 속히 달리는도다
16.  눈을 양털 같이 내리시며 서리를 재 같이 흩으시며
17.  우박을 떡 부스러기 같이 뿌리시나니 누가 능히 그의 추위를 감당하리요
18.  그의 말씀을 보내사 그것들을 녹이시고 바람을 불게 하신즉 물이 흐르는도다
19.  그가 그의 말씀을 야곱에게 보이시며 그의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보이시는도다
20.  그는 어느 민족에게도 이와 같이 행하지 아니하셨나니 그들은 그의 법도를 알지 못하였도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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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8
1.  할렐루야 하늘에서 여호와를 찬양하며 높은 데서 그를 찬양할지어다
2.  그의 모든 천사여 찬양하며 모든 군대여 그를 찬양할지어다
3.  해와 달아 그를 찬양하며 밝은 별들아 다 그를 찬양할지어다
4.  하늘의 하늘도 그를 찬양하며 하늘 위에 있는 물들도 그를 찬양할지어다
5.  그것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함은 그가 명령하시므로 지음을 받았음이로다
6.  그가 또 그것들을 영원히 세우시고 폐하지 못할 명령을 정하셨도다
7.  너희 용들과 바다여 땅에서 여호와를 찬양하라
8.  불과 우박과 눈과 안개와 그의 말씀을 따르는 광풍이며
9.  산들과 모든 작은 산과 과수와 모든 백향목이며
10.  짐승과 모든 가축과 기는 것과 나는 새며
11.  세상의 왕들과 모든 백성들과 고관들과 땅의 모든 재판관들이며
12.  총각과 처녀와 노인과 아이들아
13.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할지어다 그의 이름이 홀로 높으시며 그의 영광이 땅과 하늘 위에 뛰어나심이로다
14.  그가 그의 백성의 뿔을 높이셨으니 그는 모든 성도 곧 그를 가까이 하는 백성 이스라엘 자손의 찬양 받을 이시로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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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9
1.  할렐루야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며 성도의 모임 가운데에서 찬양할지어다
2.  이스라엘은 자기를 지으신 이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시온의 주민은 그들의 왕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할지어다
3.  춤 추며 그의 이름을 찬양하며 소고와 수금으로 그를 찬양할지어다
4.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기뻐하시며 겸손한 자를 구원으로 아름답게 하심이로다
5.  성도들은 영광 중에 즐거워하며 그들의 침상에서 기쁨으로 노래할지어다
6.  그들의 입에는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 있고 그들의 손에는 두 날 가진 칼이 있도다
7.  이것으로 뭇 나라에 복수하며 민족들을 벌하며
8.  그들의 왕들은 사슬로, 그들의 귀인은 철고랑으로 결박하고
9.  기록한 판결대로 그들에게 시행할지로다 이런 영광은 그의 모든 성도에게 있도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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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0
1.  할렐루야 그의 성소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의 권능의 궁창에서 그를 찬양할지어다
2.  그의 능하신 행동을 찬양하며 그의 지극히 위대하심을 따라 찬양할지어다
3.  나팔 소리로 찬양하며 비파와 수금으로 찬양할지어다
4.  소고 치며 춤 추어 찬양하며 현악과 퉁소로 찬양할지어다
5.  큰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하며 높은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할지어다
6.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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