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역개정]마9장 ===중풍병자를 고치시다 1. 예수께서 배에 오르사 건너가 본 동네에 이르시니 2.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3. 어떤 서기관들이 속으로 이르되 이 사람이 신성을 모독하도다 4. 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 5.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 어느 것이 쉽겠느냐 6.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능이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7. 그가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거늘 8. 무리가 보고 두려워하며 이런 권능을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마태를 부르시다 9.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10.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11.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12.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금식 논쟁 14. ○그 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15.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16.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요 17.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한 관리의 딸과 예수의 옷을 만진 여자 18.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에 한 관리가 와서 절하며 이르되 내 딸이 방금 죽었사오나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어 주소서 그러면 살아나겠나이다 하니 19. 예수께서 일어나 따라가시매 제자들도 가더니 20. 열두 해 동안이나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 겉옷 가를 만지니 21. 이는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함이라 22.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이르시되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즉시 구원을 받으니라 23. 예수께서 그 관리의 집에 가사 피리 부는 자들과 떠드는 무리를 보시고 24. 이르시되 물러가라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그들이 비웃더라 25. 무리를 내보낸 후에 예수께서 들어가사 소녀의 손을 잡으시매 일어나는지라 26. 그 소문이 그 온 땅에 퍼지더라 ===맹인들의 눈을 뜨게 하시다 27. ○예수께서 거기에서 떠나가실새 두 맹인이 따라오며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더니 28. 예수께서 집에 들어가시매 맹인들이 그에게 나아오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대답하되 주여 그러하오이다 하니 29. 이에 예수께서 그들의 눈을 만지시며 이르시되 너희 믿음대로 되라 하시니 30. 그 눈들이 밝아진지라 예수께서 엄히 경고하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 하셨으나 31. 그들이 나가서 예수의 소문을 그 온 땅에 퍼뜨리니라 ===말 못하는 사람을 고치시다 32. ○그들이 나갈 때에 귀신 들려 말 못하는 사람을 예수께 데려오니 33. 귀신이 쫓겨나고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거늘 무리가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스라엘 가운데서 이런 일을 본 적이 없다 하되 34. 바리새인들은 이르되 그가 귀신의 왕을 의지하여 귀신을 쫓아낸다 하더라 ===무리를 불쌍히 여기시다 35.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36.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37.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38.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 ====== 마태복음 9장 (개요) 이 장(章)에는 주 예수님의 능력과 긍휼에 대한 두드러진 실례가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그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오는 모든 자를 온전히 구원하실 능력을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아주 기꺼이 구원해 주신다는 사실을 우리들에게 확신시켜 주기에 충분하다. 그의 능력과 긍휼은 여기에서 그가 행하신 선한 직능에서 나타난다. Ⅰ. 사람의 몸에 대하여, 중풍병자를 고치심(2-8). 회당장의 딸을 소생시키시며, 유출병자를 치유하심(18-26). 두 소경을 눈뜨게 하심(27-31). 귀신들린 자에게서 귀신을 내어쫓으심(32-34). 모든 질병을 고치심(35). Ⅱ. 사람들의 영혼에 대해, 죄를 용서하심(2). 마태를 부르시고, 서기관들과 죄인들과 더불어 자유스럽게 대화하심(9-13). 금식의 의무와 연관하여 그의 제자들의 처지를 생각하심(14-17). 복음을 전파하시며 무리들을 민망히 여기사 그들을 위한 일꾼을 예비하심(35-38). .......이와 같이 하심으로써 그는 자신이 의심할 여지없이 영혼과 육신을 모두 치유하시는 유능하고 신실한 의사이심을 입증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가 우리에게 친절을 베풀어주시는데 대한 보답으로 그의 소유물인 우리의 몸과 영혼으로 그를 섬기고 영화롭게 해야만 한다. ======= 중풍병자를 고치심(마 9:1-8) 본 장(章)의 첫 구절은 바로 앞에 있는 8장의 끝 부분으로 되돌아가 살펴보아야 하는데, 그곳에는 가다라인들이 자기들의 돼지를 잃어 버렸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일행을 싫어하게 되었고 급기야는 그가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였다는 기사가 있다. 그런데 여기에는 그 뒤를 이어 "예수께서 배에 오르사 건너갔다"는 말씀이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에게 떠날 것을 명하였으며, 그는 그들의 말을 들어주었다. 그리고 그가 또다시 그들의 지방에 가셨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여기에서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살펴볼 수 있다. 1. 그의 정의 ─ 그는 그들을 떠났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그리스도는 자신을 환영하지 않는 곳에는 오래 머무시려고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올바른 판단하에, 그는 자신을 싫어하는 장소와 사람들은 버리지만, 그가 머물러 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자들에게나 장소에는 머무신다. "믿지 않는 자가" 그리스도와 "헤어지려 하거든 헤어지게 하라." 그러나 그것은 본인에게 위험한 일이다(고전 7:15). 2. 그의 참으심 ─ 멸시와 불순종을 인하여 그들이 마땅히 형벌을 받아야 했지만, 그는 떠나면서 그들을 파괴하기 위해 어떤 심판을 보내지 않으셨다. 그가 이미 마귀의 지배 아래 있었던 자들을 돼지떼처럼 몰사시켰더라도, 그것은 지극히 쉽고 정당했으리라! 실로 그들이 지은 죄악은 큰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냥 지나가셨다. 또한 성을 내시거나 비난하지도 않으시고 "배에 오르사 건너가셨다." 이날은 그의 인내의 날이었다. 그는 "사람의 생명을 파괴하러" 오시지 않고 구원하러 오셨다. 죽이려 함이 아니라 치유하시기 위해 오셨다. 복음의 시대에는 영적인 심판이 더욱 잘 어울린다. (*어떤 사람들은, 이 일 후에 그리 오래되지 않아 로마-유대 전쟁시에 로마인들은 이 가다라인들이 살았던 가다라 성을 맨 먼저 포위하였다는 점을 지적하며 안타까워 한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그리스도를 내쫓은 자들은 불행을 초래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떠나시면 화로다, 화로다! 예수님은 현재 그의 주요 거주지였던 "본 동네, 즉 가버나움"으로 가셨다(막 2:1). 가버나움은 "본 동네"로 불리웠다. 그는 선지자는 자기의 "고향이나 본 동네"에서 존경을 받지 못한다는 것을 친히 말씀하셨었다. 그러나 그는 그곳으로 가셨다. 왜냐하면 그는 "그 자신의 명예를 추구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오히려 지금은 낮은 처지에 있었으므로 그는 사람들의 멸시를 받는 것에도 만족하셨다. 본 장(章)에 기록된 모든 일들은 비록 복음서 기자들의 공관서 요람(要覽)에서 보면 다른 사건들도 사이사이에 들어가 있지만, 모두 가버나움에서 일어난 일이므로 여기에 함께 모아진 것이다. 가다라 사람들은 그리스도에게 떠날 것을 원하였지만 가버나움 사람들은 그를 영접하였다. JC께서 어떤 사람들에게서는 모욕를 받는다하더라도, 그분을 영화롭게 할 다른 사람들도 또 있는 법이다. 어떤 사람들은 하지 않으려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은 할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가버나움으로 귀환하신 후 맨 처음에 행하신 것은 중풍병자를 치유하신 것이다. 이것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에 대해 살펴 볼 수 있다. Ⅰ. 중풍병자를 그리스도에게로 데려온 "그의 친구들의 믿음." 그는 중풍병이 심했으므로 자기 스스로는 그리스도에게로 갈 수 없었다. 그러므로 남의 힘을 빌어야 했다. 절름발이도 그리스도께로 가면 거절당하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하자. 우리가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한다면 그는 우리를 영접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의 신앙에 주목하였다. (어린아이인 경우는 스스로 그리스도께로 갈 수 없지만 그는 그 아이들을 주께로 데려오는 사람의 신앙에 유의할 것이며, 그 믿음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은 저희의 믿음," 즉 중풍병자를 데리고 온 친구들의 신앙과 마찬가지로 중풍병자 자신의 믿음을 "보셨다." 아마도 그의 병이 그의 지능을 손상시키고 그 행동을 방해하였을 것이지만, 예수님은 믿음의 어떠함을 보셨다. 그들의 믿음은, 1. 강력한 믿음이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그를 고칠 수 있으며 고칠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병든 사람을 그렇게 공개적으로 또한 그렇게 어려운 난관을 무릅쓰고 데려오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2. 겸손한 믿음. 비록 병든 사람은 걸을 수 없었지만 그리스도에게 방문하기를 요구하지 않고 그에게로 데리고 왔다. 그가 우리를 기다리시는 것보다 우리가 그를 기다리는 것이 더 합당하다. 3. 능동적인 믿음. 그리스도의 능력과 선하심에 대한 믿음 때문에, 그들은 병든 자를 "침상에 누이고" 그에게로 데리고 왔다. 그런 일은 큰 수고가 필요한 일이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강력한 믿음은 그리스도를 따라가는데 있어서 어떠한 장애물도 개의치 않는다는 사실이다. Ⅱ.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그의 은혜."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이 말은 병자에게는 최고의 친절함이었고, "그의 병중의 자리를 온전히 고쳐 펴시기에"(시 4:3) 족한 것이었다. 그에게는 쉬운 일이었다. 우리는 사람들이 그리스도께 무슨 말을 했는지 알 수 없다. 아마도 이 가련한 병자는 스스로 말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예수께 환자를 데려왔던 자들도 입으로보다는 행동으로 말하기를 원하였을 것이다. 그들은 병든 자를 그리스도 앞에 두었다. 그것으로 충분하였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우리 자신과 우리의 친구를 그리스도의 긍휼의 대상으로서 그에게 드러내는 일은 헛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불행도 죄와 마찬가지로 부르짖는다. 또한 자비는 정의에 못지 않게 그 부르짖음을 경청하는데 빠르다. JC께서 말씀하신 것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1. 친절한 호칭. "소자야." 고통받는 자에 대한 격려와 위로는 아들에게 대하는 것처럼 말하는 것임을 유의하라. 왜냐하면 고통은 부성적(父性的)인 훈련이기 때문이다(히 12:5). 2. 은혜스러운 격려. "안심하라. 그것에 대해 편안한 마음을 가져라. 걱정하지 말라." 아마도 이 불쌍한 병자는 자기 침상이 JC 앞에 내려지자 당황하였을 것이며, 이렇게 무례하게 나아온 것에 대해 꾸지람을 들을까봐 두려워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형식에 구애되지 않고 있다. 그는 그에게 "안심하라"고 명하고 있다.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니, 그가 그리스도를 찾은 것이 헛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에게 안심하라고 명하신다. 그후에 그를 치유하고 있다. 그는 자기가 만나는 자들에게 선물을 주려고 하신다. 그 선물은 곧 그를 즐거이 찾으며, 즐거이 신뢰하는 은사요, 또한 큰 용기를 가질 수 있는 은사이다. 3. 그 격려에 대한 정당한 이유.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런데 이것은 다음과 같은 것으로 생각될 수 있다. (1) 그의 육체적인 질병의 치유에 대한 서론으로서. "네 죄는 용서받았다. 그러므로 너는 고침을 받게 될 것이다"라는 말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죄가 질병의 원인인 경우,(때로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죄사함은 질병으로부터의 회복이라 위로가 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죄는 용서되었으나 질병은 제거되지 않을 수도 있다. 또한 질병은 제거되었지만 죄는 용서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질병 회복에 대한 위로도 받았고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화목에 대한 위로도 받았다면, 그 위로는 히스기야와 같이(사 38:17) 우리에게 대한 참된 자비이다. (2) "안심하라"는 명령에 대한 이유로서. "비록 내가 너를 치유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내가 네 죄가 사함을 받은 것을 확신하기만 한다면 너는 나를 공연히 찾지는 않았다고 말하겠지? 또한 네가 중풍병을 계속 앓는다고 할지라도, 죄 용서만도 위로에 대한 충분한 근거로서 여길 것이 아닌가?" 여기에서 유의할 것.... 은혜를 통하여 사죄의 어떤 내적 증거를 가진 자는 비록 어떠한 외적인 고통과 근심 가운데 있다고 할지라도 안심해야 할 이유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사야 33장 24절을 보라. Ⅲ.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것에 대한 "서기관들의 공연한 트집"(3절). 그들은 "속으로 이르되," 혼자 은밀하게 중얼거리기를 "이 사람이 참람하도다(신성을 모독하고 있다)"라고 하였다. 하늘 나라의 능력과 은혜가 지옥의 적대감의 검은 점에 의해 어떻게 낙인이 찍혀 있는가를 살펴 보라. 그리스도의 사죄하심은 참람이라고, 칭해지고 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죄를 사하는 권세를 하나님께로부터 받지 않았다면 그것은 오히려 참람한 것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이러한 위임을 받지 않았으면서도 죄를 용서하는 체하는 그들이 오히려 참람하다. Ⅳ.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일을 계속하기 전에 이 트집에 부당하다는 것을 그들에게 깨우쳐 주셨다. 1. 그는 "그들의 그러한 행동을 힐책하셨다." 그들은 비록 속으로 이 말을 했지만 그리스도는 "그들의 생각들을 아셨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우리 주 예수님은 우리가 속으로 말하는 것을 완전히 알고 계신다는 사실이다. 생각은 은밀하고 갑작스럽지만 그리스도, 즉 영원하신 말씀(히 4:12, 13) 앞에서는 적나라하고 공개적이 된다. 또한 그는 "멀리서도 생각을 통촉하신다(시 139:2)." 그는 그들에게(단순한 사람은 말할 수 없다)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 안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고 하셨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죄 된 생각에는 많은 사악이 있으며, 이것은 주 예수님께 대한 매우 적대적인 행위라는 사실이다. 그는 마음의 통치자이시므로 죄악 된 생각은 그의 권리를 침해하며 그의 점유를 교란시킨다. 그러므로 그는 그들을 유의하시며 매우 불쾌하게 생각하신다. 그들에게는 "쓴 뿌리"가 놓여 있다(창 6:6). 마음에서 시작되어 거기서 끝나며 더 이상 나가지 않는 죄도 다른 죄만큼 위험스럽다. 2. 그는 "그들과 더불어 이 문제에 대해 논쟁하셨다:(5, 6절). 이곳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살펴볼 수 있다. (1) 그는 "은혜의 왕국"에서의 자기 권위를 어떻게 "주장하고" 있는가" 그는 "인자," 즉 중보자에게는 땅에서 "죄를 사할 권세가 있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아들에게 모든 심판을 위탁하시고" 그에게 이 권위를 주셨으니, "이는 그가 인자(人子)이기" 때문이다(요 5:22, 27). 만일 그가 분명히 "영생을 주는 권세"를 가지고 있다면, 그는 정말로 가지고 계신다(요 17:2). 그는 죄를 용서하는 권세도 가지고 있음에 분명하다. 왜냐하면 범죄는 제거되어야만 하는 장애물(bar)이며, 이를 제거하지 않으면 하늘 나라를 결코 소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죄의 능력이 우리의 뼈 중의 뼈이신 "인자"의 손에 맡겨져 있다는 사실은 회개하려는 죄인들에게 얼마나 큰 격려를 주는가! 또한 만일 그가 "세상에서도 죄를 사하는 권세"를 가지고 있었다면, 이제 "회개케 하사 죄사함을 얻게 하시려고" 아버지의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신"그에게는 그 권세가 얼마나 더하겠는가!(행 5:31). (2) 그는 자연의 왕국에서 지니고 있는 능력에 의해 은혜의 왕국의 능력을 어떻게 "입증하고" 있는가? "일어나라 걸어가라"는 말보다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이 더 쉽지 않으냐? 그는 선지자로 선포되었든지 하나님으로 권위가 인정되었든지 간에 병을 고칠 수 있는 자는 이와 같은 방법으로 죄를 사하실 수 있다. ① 이것은 그리스도가 신적인 사명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한 일반적인 논증이다. 그의 이적, 특히 그의 이적적인 치유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 그의 대해 말을 사실로 확증한다. 그의 치유하심에서 드러난 "능력"은 그가 "하나님에 의해 보내심을 받은 자"임을 증거 하였다. 그것들에 나타난 "긍휼"은 그가 "고치고 구원하려"고 하나님에 의해 보내심을 받은 자임을 입증하였다. 진리의 하나님은 거짓에다 그의 도장을 찍지는 않을 것이다. ② 그것은 이 경우에 특별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었다. 중풍병은 죄라는 병의 한 징후에 불과했다. 이제 그는 그러한 징후의 즉각적인 제거에 의해 근원적인 질병을 실제적으로 치유하신다는 사실을 드러나게 하셨다. 이와 같이 죄와 질병 사이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형벌을 없이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는 의심할 여지없이 죄를 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서기관은 법적인 의로움에 서 있었고 거기에, 자신들의 신뢰를 두었으며, "죄의 용서"라는 가르침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에서 그 가르침을 영화롭게 하였으며,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려는" 사명으로 세상에 왔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Ⅴ. 병든 사람을 즉각적으로 치유하심. 그리스도께서는 그들과의 논쟁을 그치시고 돌이켜 그 병든 사람을 말씀으로 치유하셨다. 아무리 필요한 논쟁이라도 우리들로 하여금 우리의 손이 하려고 발견한 선행을 막아서는 안 된다. 그는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말씀하셨다. 치유하는, 소생시키는, 강하게 하는 능력이 이 말씀에 수반되어 있다. "그는 일어나 집으로 돌아갔다"(7절). 1. 그리스도께서 그의 "침상을 가지고 가라"고 명령하신 것은 그가 "완전히" 완쾌되었다는 것과 그는 더 이상 침상 위에 누어서 옮겨져야 하는 처지에 있지 않다는 사실과 또 그는 침상을 "가지고" 갈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 주기 위함이다. 2. 그가 그를 "집으로" 보낸 것은 그가 오랫동안 짐이 되어 왔던 가족들에게 축복이 되게 하려 함이었다. 또 전시효과로 자기 곁에 오래 있게 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이런 일은 사람에게서 오는 영광을 구하는 자들이라면 능히 할 일이었다. Ⅵ. 이 사건이 무리들에게 끼친 인상(8절). 그들은 "이를 보고 두려워하였으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모든 이적 기사는 우리의 마음을 넓게 열어 오직 놀라운 일을 하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데" 도움을 주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이 불쌍한 사람에 행한 일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다른 사람의 긍휼은 우리의 칭찬이 되어야 하며 또한 우리는 그들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한다는 사실에 유의하라. 왜냐하면 우리는 서로가 지체가 되기 때문이다. 비록 그리스도를 믿거나 따르려고 할 정도로 확신한 자들은 무리들 중에 소수였지만, 그들 모두는 JC를 하나님이나 하나님의 아들로 찬미하지 않고 단지 이런 권세를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께 찬미를 드렸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하나님은 선을 행하기 위해 "사람에게 주신" 모든 능력을 인하여 영광을 받으셔야 한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모든 능력은 원래 그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샘으로서 그 안에 있으며, 저수지로서 사람 안에 있다. ---------- 마태를 부르시고 세리와 죄인들과 교제하심(마 9:9-13) 이 구절에는 불쌍한 세리들, 특별히 마태에게 베푼 그리스도의 은혜와 호의의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그가 사람들의 육신에 대해 행하신 것은 그들의 영혼에 대한 친절한 의도를 위해 길을 만든 것에 불과하다. 여기에서 살펴보려고 하는 것은, Ⅰ. 이 복음서의 저자인 마태의 소명. 마가와 누가는 그를 레위라고 부르고 있다. 아마도 마태라는 이름은 세리로서 대부분 잘 알려졌던 이름이었던 것 같다. 그는 겸손하게 자신을 레위라는 영예로운 이름보다 오히려 이 이름으로 불렀다.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그를 사도로 불렀을 때 마태라는 이름을 부여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가 시몬에서 베드로라는 이름을 주신 것과 같다. 마태라는 뜻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교역자는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들의 사역과 그 사역을 위한 재능들은 그들에게 준 하나님의 선물이다. 1. 그리스도께서 마태를 부르실 때 그(마태)가 취한 자세. 그는 세리였기 때문에 "세관에 앉아 있었다"(눅 5:27). 그는 가버나움 포구에 있는 세관의 관리나 수세리(收稅吏), 또는 토지세를 받는 사람이었다. (1) 그는 자기의 직업에 열중하고 있었다. 다른 제자들도 그럴 때 부름을 받았다(마 4:18). 여기에서 유의할 것.... 사탄은 게으른 자를 선택하여 시험하러 오는 것처럼, 그리스도는 일하는 자를 선택하여 부르시러 오시는 것이다. 그러나, (2) 그것은 진지한 사람들에게는 악명이 난 직업이었다. 왜냐하면 그 직업에는 매우 많은 매수와 유혹이 수반되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직업에는 정직한 사람이 거의 종사하지 않았다. 마태 자신은 사도 바울이 한 것처럼(딤전 1:13) 회심 전의 자기 자신을 인정함으로써, 그를 부르신 그리스도의 은혜가 더욱 위대함과 또한 하나님께서는 모든 종류의 사람들 가운데 자기의 남은 자를 두고 계신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아무도 세상에서의 자기들의 직업 때문에 자기들이 불신앙 가운데 있다고 자기들을 정당화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죄악된 직업"에서도 어떤 사람은 부르심을 받으며 또한 "정당한" 직업에 있지만 단지 몇몇 사람만 "그 안에서" 구원받았기 때문이다. 2. 이 부르심의 인도하는 능력. 비록 마태의 동류 중 어떤 사람이 이미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었다 할지라도 마태가 그리스도를 찾거나 따르려고 했다는 기록을 찾아 볼 수 있다. 오히려 그리스도가 그의 선하심의 축복으로 그를 이끌었던 사실을 찾아 볼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먼저 말씀하셨다." 우리가 그를 택한 것이 아니라 그가 우리를 선택하셨다. 그는 말씀하시기를, "나를 따르라"고 하셨다. 또한 동일한 신적이고 전능하신 능력이 마태를 개심 시키기 위해 이 말씀에 수반되었다. 이것은 중풍환자를 고치기 위하여, "일어나 걸으라"(6절)고 하는 말씀에 수반되었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구원의 변화가 "창시자"로서의 그리스도와 '수단"으로서의 그의 말씀에 의해 영혼에 작용되고 잇다는 사실이다. 그의 복음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다"(롬 1:16). 소명은 효과적이었다. 이는 그가 소명을 위해 오셨기 때문이다. "그는 일어나" 즉시로 그를 좇았다. 그는 순종하기를 거부하거나 늦추지 않았다.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은 즉시 응답하며 또 모든 이의를 극복한다. 신분에 대한 임무나 그것에 의한 소득이 그리스도께서 그를 부를 때 그로 하여금 머물러 있게 할 수는 없다. "그는 혈육과 의논하지 않았다"(갈 1:15, 16). 그는 직장과 그 방면으로 출세하려는 희망을 포기하였다. 우리는 어부 출신의 제자들이 이후에 종종 고기를 잡았다는 기록을 찾아볼 수 있지만 마태가 또다시 "세관에 앉았다"는 기록은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Ⅱ. 그리스도께서 이 때를 자아 세리들과 죄인들과 교제하심. 그리스도께서 마태를 부르신 것은 그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과 친숙하려고 하심이었다. "예수께서는 집에서 앉아 식사하셨다"(10절). 다른 복음서 기자들은 말하기를, 마태는 가난한 어부들이 부르심을 받았을 때 그들이 도저히 할 수 없었던 "큰 잔치"를 베풀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마태가 그 자신에 대해 말하게 될 때 그는 그것이 자신의 집이라거나 잔치였다고 말하지 않고 다만 "집에서 앉아 식사하셨다"고 하였다. 그가 그리스도에게 드렸던 존경보다는 세리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은혜를 기억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우리 자신의 선행에 대해 인색하게 말하는 것이 우리에게 합당하다는 사실이다. 여기에서 살펴보려고 하는 것....그 마태가 그리스도를 초대하였을 때 그는 "그와 함께" 제자들을 초대하였다. 그리스도를 환영하는 자들은 그를 인하여 그에게 속한 모든 자들을 환영해야만 하며, 그들을 마음 속 깊이 받아들여야 한다. 2. 그는 "그를 만나러 온" 많은 세리들과 죄인들을 초대하였다. 이것은 그의 옛 친구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와 친숙케 하려고 마태가 목적한 주요한 일이었다. 그는 경험에 의해 그들의 시험이 어떤 것임을 잘 알고 있었고 또한 그들을 동정하였다. 그는 경험에 의해 그리스도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알았고 그들에 관해 절망케 하려고 하지 않았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정말로 그리스도에게 인도된 자는 다른 사람들도 그에게 인도되기를 바라지 않을 수 없으며, 또한 그런 일을 위해서 뭔가를 하려 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참된 은혜는 단지 한 조각의 빵을 먹는데 족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초대할 것이다. 마태의 개종에 의해 동업관계가 깨어지자 즉시 그의 집은 세리들로 만원이 되었다. 그리고 "그가 그리스도를 따랐던 것" 같이 그들 중 몇몇은 분명히 그를 따랐을 것이다. 안드레와 빌립도 이와 같았다(요 1:41, 45; 4:29). 사사기 14장 9절을 보라. Ⅲ. 바리새인들이 이것에 대해 불쾌하게 생각함(11절). 그들은 공연히 트집을 잡았다.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여기에서 살펴 볼 것.... 1. 그리스도는 시기를 받았다. 그가 자신을 대항하는 죄인들의 반박을 참으셨던 것은 그의 고난 중 결코 적은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큰 분쟁을 제거하러 오신 그리스도보다 사람에게서 큰 시비를 받은 자는 없다. 이와 같이 그는 그가 말한 것이 정당하다고 인정받고, 그가 말한 모든 것이 기꺼이 그대로 받아들여져야 할 바 성육신 하신 신성에 합당한 영예를 그 자신이 스스로 거부하였다. 왜냐하면 그는 결코 어떤 일을 잘못 말씀하시거나 행하시지는 않았지만 그가 말씀하거나 행했던 모든 일에 죄인들은 흠을 잡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우리도 비난을 받으리라고 기대하고 이에 대해 준비하고 또한 그것을 꾸준히 견디어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2. 그와 더불어 논쟁했던 자는 바리새인들이었다. 그들은 거만스럽고 뻔뻔스러운 자들이었으며 다른 사람들의 흠을 잡으려고 애쓰는 자들이었다. 또한 선지자 시대에, "홀로 서라. 내게로 오지 말라. 나는 너보다 거룩하니라"고 말했던 자들과 똑같은 성질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죄인들"을 피하는데 매우 엄격하였으나, "죄"를 피하는 데는 엄격하지 않았다. 그들은 장로의 전통들을 정확히 지켰으며, 또한 동일한 정신을 선포하여 그들 자신이 이것에 의해 지배를 받았다. 3. 그들은 아직 그리스도 자신에게 트집을 잡지는 않았다. 그들은 감히 그에게 트집을 잡을 용기가 없었고 오직 제자들에게 트집을 잡았다. 제자들은 동일한 무리 안에 있었으나 그 논쟁은 그 주인에 대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주인이 하지 않았다면 그들이 이런 트집을 그들에게 잡을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트집의 원인은 제자들보다는 오히려 선지자였던 그(주님)에게 있으며 그의 그러한 처신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였으며, 또한 그들은 그의 위엄을 위해서는 그 무엇보다 이러한 무리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하였다. 선생에게 혐의를 가졌기에 그들은 제자들과 다투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그의 교훈들, 법칙들을 변호하고 정당화할 수 있도록 하는 것과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벧전 3:15)하도록 하는 것이 기독자가 할 일이라는 사실에 유의하라. 그는 하늘나라에 계신, 우리를 위한 중보자이시므로 우리는 이 땅에서 그를 위해 중보자가 되자. 그리고 그를 향한 비난을 우리 자신의 것으로 삼자. 4. 그 불평은 "그리스도가 세리들과 죄인들로 더불어 먹는다"는 것이었다. 물론, 사악한 사람괴 교제하는 것은 하나님의 율법에 어긋난다(시 119:115; 1:1). 아마도 그들은 이 일을 빌미삼아 제자들에게 그리스도를 비난함으로써 그에게서 그들을 유혹해내며, 그를 싫어하게 함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더 나은 무리를 데리고 있던 자기들의 제자로 삼으려고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들은 "개종자를 만들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녔기 때문이다." 세리들과 친숙케 되는 것은 "장로들의 전통"과 위배되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것을 가증스러운 일로 여겼다. 그들은 이것 때문에 그리스도에 대해 분개하였다. (1) 왜냐하면 그들은 "그에게 나쁜 일이 일어나기를" 원하였으며, 또한 그로 하여금 허위 진술을 할 수 있는 기회만을 노렸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최상의 말들과 행위를 악의로 해석하는 것은 쉽고도 매우 일반적인 일이라는 사실이다. (2) 왜냐하면 그들은 세리들과 죄인들에게 "쓸모 없기를" 바랬으며 또한 그리스도의 호의가 그들에게 미치는 것을 시기하였고, 그들이 회개에 이르는 것을 탄식하였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그러는 그들 자신들이 어쩌면 하나님의 은혜를 가지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그 은혜에 참여하기를 싫어하고 그것을 기뻐하지 않고 있지는 않은지 당연히 자문해 봐야 한다는 사실이다. Ⅳ. 그리스도께서 세리들과 죄인들로 더불어 교제하는데 있어서 그 자신과 그의 제자들을 위해 행하신 변호. 아마도 제자들은 아직 약했으므로 바리새인의 트집에 응답하려고 하지 않고 그것을 그리스도에게 가져 왔으며, 그리하여 그가 그것을 들었거나(12절) 또한 바리새인들이 제자들에게 말하는 것을 멀리서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확실히 알 수 없다. 단지 그로 하여금 그 자신을 변호하고 입증하며, 그 자신과 우리를 위해 대답하시도록 하라. 1. 세리들이 당한 필요하고도 절박한 사정이 그의 도움을 큰 소리로 청하였다. 따라서 세리들을 위해 그들과 대화하시는 그를 정당화시켰던 것이다. 그리스도를 순수한 윗 세상에서 이 불결한 세상에로 모셔온 것은 이들 가난하고 잃어버린 죄인들이 당하는 절실한 필요성이었다. 또한 불순하다고 생각되었던 이 무리에게로 그를 모셔온 것도 마찬가지였다. (1) 그는 세리들의 처지의 필요성을 입증하고 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세리들은 병든 자이므로 도움 받고 치료받아야 할 필요가 있었으나 바리새인들은 그들 자신이 도움과 치료를 받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에 유의하라. ① 죄는 영혼의 질병이다. 죄인들은 영적으로 병든 자이다. 원래적인 타락은 영혼의 병이며, 실제적인 범죄는 그 상처이거나 질병의 부스럼이다. 그것은 불구이며 허약이며 불안이며 황폐이며 살상이지만,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그것은 치료가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② 예수 그리스도는 영혼의 위대한 의사이시다. 육체적인 질병에 대한 그의 치유는 그가 "날개 아래 고치심"을 가지고 계심을 의미한다. 그는 노련하고 신실하고 동정심이 많으신 의사이시며 병든 자를 고치시는 것이 그의 직무요 임무이다. 현명하고 선한 사람들은 그들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의사와 같이 되어야만 한다. 그리스도도 그러하였다. ─ 즉 현명한 사람은 그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환자에 대한 의사의 느낌을 마음에 품는다. ③ 죄라는 병을 가진 영혼은 이 의사를 필요로 한다. 왜냐하면 그들의 병은 위험하기 때문이다. 저절로 나을 수는 없을 것이다. 어떤 사람도 우리를 도울 수 없다. 우리는 이와 같이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가 없이는 영원히 파멸되는 것이다. 지각 있는 죄인들은 그들의 필요를 알며, 이에 따라서 그들 자신을 그에게 의탁한다. ④ 그들 자신이 건전하고 온전하다고 생각하는 무리가 있다. 그들은 생각하기를 자신들에게 "그리스도는 필요가 없으며," 라오디게아(교회계 3:17)와 같이 그분 없이도 자기 힘으로 꾸려나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처럼 바리새인들이 그리스도의 말씀과 방법에 대한 지식을 원하지 않은 것은 그들이 그를 필요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은 아무것도 필요한게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요 9:40, 41). (2) 그리스도는 그들의 필요성이 자기가 그들과 친밀하게 교제하는 것을 충분히 정당화시켜 주며, 또한 그것 때문에 자기가 비난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입증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 필요성은 그것을 "자비의 행동"으로 만들기 때문인데 이것은 언제나 신앙 고백보다 더 앞서며, 본체가 그림자보다 더 나은 것처럼 선행과 자비는 위엄보다 더 나은 것이다. 도덕적이고 자연적인 책임에 속해 있는 그러한 의무들은 적극적이고 의식적인 하나님의 율법보다 앞서는 것이거늘, 하나님이 제정하신 법칙들보다 그것을 보다 엄격하게 만든 사람들의 부칙이나 장로들의 전통에 물론 앞서는 것이다. 그는 이것을 호세아 6장 6절,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13절)에서 인용한 구절에 의해 입증하고 있다. 바리새인들이 부과하였던 세리들의 단체와는 엄밀한 분리는 "제사보다 못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그들과 더불어 교제하신 것은 일반적인 긍휼 이상의 것이었으며, 따라서 그것에 우선하는 것이었다. 사무엘이 보여 준 것처럼(삼상 15:22, 23) 자기를 위하여 주신말씀 그대로 잘 행하는 것이 제사보다 더 낫다면 하물며 다른 사람에게 선을 행하는 것이랴! 영혼의 개종을 촉진시키는 것은 가능한 긍휼의 최상의 행동이다. 그것은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하는 것이다"(약 5:20). 그리스도는 어떻게 이것을 인용했는가를 살펴 보라. 즉 "그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여기에서 유의할 것.... 성경은 문자와 친숙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고 그 뜻을 이해하기 위해 배워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그안에서 말씀하시는 분을 만나고 씨름하라!!)) 그들은 성경의 의미를 최고로 배웠으며, 그들 자신의 허물에 대한 책망과 그들 자신의 행위에 대한 규칙으로서 그것들을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를 배웠다. 그리스도께서 인용하신 이 성경은 그를 변호하는데 이바지하였을 뿐만 아니라, 또한 ① 참된 종교는 어디에 있는가를 보여 준다. 다시 말하면 참된 종교는 외적인 준수(의식)에 있거나, "음식이나 마시는 것," 성결의 겉치레, 하찮은 특별한 의견이나 의심스러운 논쟁에 있지 않고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영육에 대해 할 수 있는 모든 선행을 하는데 있으며, 또한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데" 있다. ② 종교를 도덕보다는 의식(儀式)에 치중하는 자들의 바리새적인 위선을 정죄한다(마 23:23). 그들은 그러한 정욕들을 극복하는 경건의 능력을 싫어하지만 그들의 자만과 탐심, 야망, 악의와 일치되어질 수 있거나 또한 아마도 도움이 될 수 있는 그러한 경건의 모양을 지지하고 있다. 2. 그리스도는 자신의 사명의 본질과 목적을 역설하고 있다. 그는 그의 규율을 지켜야만 하며 또한 그가 위대한 교사로 지명 받은 목적인 그것을 수행해야만 한다. 이제 그는 말씀하시고 계시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려 왔노라. 그러므로 세리들과 교제해야만 한다." 여기에서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1) 그의 임무는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불러 회개시키는 것이었다." 이것은 그의 첫 번째 본문이었으며 그의 모든 설교의 취지이기도 하였다. 복음의 소명은 회개에로의 소명이며, 또한 우리의 마음과 생활을 변화시키는 소명이라는 사실에 유의하라. (2) 그의 임무가 해당되는 사람(그가 임무를 수행하시는 대상)은 "의인"이 아니라 "죄인"이다. 다시 말하면, ① 사람의 자녀가 "죄인들"이 아니었다면, 그리스도께서 그들 가운데 오실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는 "사람"으로서의 사람이 아니라 "타락한" 사람으로서의 사람의 구세주이시다. 첫 번째 아담이 그의 원래적인 "의(義)를 계속하였다면 우리는 둘째 아담을 필요로 하지 않았을 것이다. ② 그러므로 그의 "가장 위대한 임무"는 "가장 큰 죄인"에게 놓여져 있다. 병든 사람의 처지가 위급하면 할수록 의사의 도움은 더욱 중시될 것이다. 그리스도는 "죄인" 특히 "괴수"를 "구원하시러"오셨으며(딤전 1:15), 죄인이지만 비교적 의로운 사람을 구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 중에 최고로 악한 사람을 구원하러 오셨다. ③ 죄인이 그 자신의 죄를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그리스도와 그 복음은 그들을 환영할 것이다. 또한 모든 사람들은 자기들의 집을 가지려는 자들보다는 자기들과 사귀기를 원하는 자들을 선택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의인들," 즉 자칭 의인들로 자만하면서 곧 자기들의 구세주에 대해 싫증을 내고 말 자들에게서 성공하리라는 기대를 걸고 오신 것이 아니라 지극히 겸손한 "죄인들," 죄에 싫증이 난 자들 중에서 성공의 기대를 가지고 오셨다.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오실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그들에게 환영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 요한의 제자들이 금식에 대한 질문을 함(마 9:14-17)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에게 대한 반대는 그의 설교에 지극히 유리한 어떤 기회를 제공했다. 이와 같이 진리의 중요성은 종종 반대자들에게서 겪는 반대에 의해 더 뚜렷이 부각되며 따라서 그리스도의 지혜는 악에서부터 선을 가져온다. 이것은 이 장(章)에 있어서 이에 대한 세 번째 실례이다. 죄를 사하시는 그의 능력의 설교와 죄인을 받으실 준비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트집에 의해 야기되었다. 이와 같이 여기에서는 그의 가족의 행위에 대한 회상으로부터 그들을 위한 그의 보살핌에 관한 설교가 생겼다. Ⅰ. 요한의 제자들이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그들처럼 자주 금식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 반론을 제기함. 이것은 세리들과 죄인들과 더불어 먹는 것 이외에 그들의 신앙 고백이 해이하다는 실례로서 책망을 받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의 신앙고백을 보다 더 엄격한 것으로 바꿔야 한다고 제시되고 있다. 바리새인의 제자들이 그들과 함께 연합되어 있었다고 다른 복음서 기자들은 나타내고 있다(막 2:18; 눅 5:33). 우리는 그들이 요한의 제자들을 그들의 대변자로 이용하여 내세웠다고 추측할 수 있는데, 이는 그들이 그리스도와 그이 제자들과 더욱 친근하였으므로 그것을 더욱 그럴듯하게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악한 사람이 선한 사람을 부추기어 음모를 실행하도록 하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만일 하나님의 백성간에 서로 의견에 맞지 않는다면 흉계가 있는 사람은 이 경우를 이용하여 불화를 일으키게 하며 서로를 대하여 분쟁케 하며 또한 서로에게 떨어지게 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의 미끼로 쉽게 만들어 버린다. 만일 요한과 예수의 제자들이 충돌된다면 숯불을 불면서 비열하게 일한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그들은 불평하기를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고 하였다. 거룩한 사랑의 확증이 되어야 하는 종교의 의무가 분쟁과 다툼의 근거가 되는 것은 슬픈 일이다. 이곳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살펴볼 수 있다. 1. 그들은 그들 자신의 금식을 어떻게 자랑하였는가?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자주 금식한다." 금식은 교회의 모든 시대를 통하여 특별한 경우에 경건한 의식으로 지켜져 왔다. 바리새인들은 이 일에 더욱 그러하였다. 그들 중 많은 사람이 일주일에 이틀을 금식하였으나 대부분은 위선자였고 사악한 사람이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거짓되고 형식적인 신앙 고백자들은 종종 외부적인 헌신이나 고행의 행동에 있어서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다는 사실이다. 요한의 제자들은 부분적으로 그들의 선생(요한)을 따라 "자주 금식하였다." 왜냐하면 그는 "먹거나 마시러"오지 않았기 때문이다(마 11:18). 사람들은 비록 언제나 똑같은 내적 원리로는 아니라 하더라도 그들의 지도자를 모방하기 쉬우며 부분적으로 회개에 대한 선생의 교훈을 추종하기 쉽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종교 교리의 (참생명과 무관한 바) 보다 엄격한 부분들에 대해서는 "속박의 영"을 따라 훈련 받고 있는 자들이 대개 " 더 철저히 준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편 이것들은 그 때와 장소에 따라 좋은 것이기는 하지만, 우리는 그것들을 통해서도 이것들이 목표로 삼는 바, 인도하시는 분,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그를 신뢰하는 생활에로 정진해야만 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자주 금식한다"는 사실, -적어도 그들의 생각에- 자주 금식한다고 말하려고 그리스도에게로 왔다. "많은 사람은 각기 자기의 인자함을 자랑하느니라"(잠 20:6). 신앙 고백자들이 그들 안에 특별한 일이 있다면 종교상 그들 자신의 수행에 대해 자랑하는 것은 자칫 범하기 쉬운 일이다. 아니, 그들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들을 자랑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그들 자신을 주장하며 의로운 자로 자처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2. 그들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자신들처럼 자주 금식하지 않는다고 어떻게 비난하였는가?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은밀한 금식을 할 것과 "사람에게 보이려고" 금식하지 말라고 가르쳤다는 사실을 알 까닭이 없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금식하지 않는다"고 단정한 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무자비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그들의 금식을 선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우리들은 사람들의 종교를 단지 시야에 들어오는 것이나 세상의 관찰에 의해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그들처럼 자주 또는 오래 금식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추측한다면 정녕 그들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가진 것보다 더 많은 신앙심을 가졌다고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 실제로는 그 자신들이 헛된 신앙고백자들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그들은 다른 모든 자들의 잘못에 대해서도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스스로 여기면서, 사람이나 사물을 시험하고 측정함으로써 그들 자신을 종교상 표준으로 만드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다. 마치 그들보다 못한 자는 적게 행하며 그들보다 많이 행한자는 많이 행하였는데, 이것은 그들의 겸손과 자비가 부족함을 나타내는 명백한 증거이다. 3. 그들은 어떻게 이러한 불평을 그리스도에게로 가져왔는가? 여기에서 유의할 것....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부작위(omission)에 의해서든지 작위(commission)에 의해서든지 잘못을 범하였다면 그리스도 자신은 그것에 대해 들은 것을 확증할 것이며, 그것 때문에 모욕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오, 예수여, 이 사람이 당신의 그리스도인입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영예를 고려한다면 자신의 처신과 행동을 잘 해야 한다. 그리스도와의 다툼은 제자들에게 옮겨졌고(11절), 제자들과의 다툼은 그리스도에게 옮겨졌다(14절)는 사실과 이것은 사역자가 백성과, 백성이 사역자와, 한 친구가 다른 친구와 분쟁케 하기 위하여 불화를 야기시키며 사람을 죽이는 방법이라는 사실에 유의하라. Ⅱ. 그리스도께서 이 일로 그의 제자들에게 하신 변명. 그리스도는 요한의 제자들이 앞서 행한 "왜 당신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라는 질문에 대해 그들을 나무라셨다. "아니, 너희는 그것을 행하는 이유를 가장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외부적으로 봉헌을 드리면서도 그것을 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거의 알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단지 그의 제자들의 행위를 변호하고 있다. 제자들이 그들 스스로 말할 수 없을 때 그리스도는 그들을 위해 말할 것을 준비하셨다. 자녀의 모든 것을 정당화하게 되는 것이 지혜의 영예인 것처럼 지혜에 대해 정당화되는 것이 자녀의 행복이라는 사실에 유의하라. 우리가 그리스도의 규칙과 본보기를 따라 행한 것을 그는 우리를 위해 확증해 주실 것이며, 우리는 신뢰를 가지고 우리의 정직을 밝혀 주시도록 그에게 맡겨둘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 당신은 나를 위해 응답하실 것이옵니다"(Herbert). 그리스도는 그들의 "금식하지 않는 것"에 대해 변호하시면서 두 가지 일을 제시하고 있다. 1. 그 의무는 적합하지 않다(15절).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뇨?" 여기에서 살펴볼 것....그리스도의 대답은 매우 적합하며 그 자신의 제자들의 행위를 적절히 정당화시킬 뿐만 아니라 요한의 관례나 그의 제자들의 행위를 정죄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바리새인들이 이 논쟁을 야기시켰을 때 그들은 그리스도가 그 자신의 제자들이나 요한의 제자들을 나무라기를 원하였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우리가 어떤때 부당하게 비난을 받는다면, 다른 사람을 비난하거나 욕을 퍼부을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분명히 하기만 해야 한다는 사실에 유의하라. 이러한 것은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행할 수 있는데, 다른 사람을 비난함이 없이 우리의 행동을 정당화시킬 수도 있다. 이제 그의 논법은 혼인 예식이 계속 되는 동안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일반적인 관습에서 인용되고 있다. 우울과 슬픔에 찬 모든 실례는 부적당하고 불합리한 것으로 간주되는데, 그것은 마치 삼손의 결혼식과 마찬가지였다(삿 14:17). (1)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신랑방에 있는 손님"으로서, 잔치에 초대되고 영접되었다. 그러나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그렇지 않고 "여종의 자손'(갈 4:25, 31) 이었으며, 흑암과 두려움 아래에 머물고 있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양자의 영을 가진 그리스도의 신실한 추종자들은 속박과 두려움의 영을 가진 자들이 다른 사람처럼 즐거움을 맛볼 수 없을 때(호 9:1) 지속적인 잔치를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이다. (2)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요한의 제자들이 소유하지 못하였던 "그들과 함께한 신랑"을 소유하였다. 그들의 선생은 지금 투옥되었으며, 그의 생명이 계속적으로 위험한 상태에 있었으므로 그들이 "자주 금식"하는 것은 합당한 일이었다. 신랑을 그들에게 빼앗길 날이 이를 것이니, "그 때에는 마땅히 금식해야만 할 것이다." 그가 떠나려고 할 때 그들은 슬퍼하였다(요 16:6). 환난과 고통은 그가 갔을 때 그들에게 닥쳐왔으며, 이것은 그들로 하여금 "슬퍼하고 기도하는 계기." 즉 종교적인 금식의 계기를 만들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①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교회의 신랑이며, 그의 제자들은 "신랑의 친구들"(영문은 "신부방의 아이들"-역주)이다. 그리스도는 이와 비슷하게 요한의 제자들에게 그 자신에 대해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요한은 그 자신을 신랑의 친구라고 불렀을 때 그것을 사용했기 때문이다(요 3:29). 또한 만일 그들이 이 힌트에 의해 그들의 선생이 말했던 것을 회상했다면, 그들은 자신들이 대답했을 것이다. ② 신랑의 친구(신부방의 아이들)인 자들의 상태는 이 세상에서 많이 변화를 겪기가 쉽다. 그들은 긍휼과 심판을 노래한다. ③ 신랑의 친구들은 신랑과 오래 지낼 수 있느냐, 아니면 곧 헤어지느냐에 따라서 즐겁기도 하고 우울하기도 하다. 그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 하나님의 촛대는 그들의 머리 위에 비취며, 모든 것은 순조롭다. 그러나 만일 그가 물러간다면 비록 짧은 기간이기는 하지만 "그들은 근심하고," 침울하게 지내게 된다. 태양이 있음(presence)과 가까움은 낮과 여름을 만들지만, 없음(absence)과 먼 것은 밤과 겨울을 만든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즐거움에 대한 모든 것 중 모든 것이다. ④ 모든 의무는 때에 맞추어 행해진다. 전도서 7장 14절, 야고보서 5장 13절을 보라. 슬퍼할 때가 있고, 기뻐할 때가 있으며, 이 모든 것을 우리는 자신에 적응시켜야 하며, 적당한 때에 열매를 맺어야 한다. 금식할 때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의 방법에 유의해야만 한다. 그가 "우리를 위해 애통할" 때에 우리는 "슬퍼해야만"한다. 또한 우리에게 관한 그의 섭리의 세대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주 하나님이 애통과 슬픔에로 부르실"때가 종종 있다. 이와 같이 우리 앞에 있는 어떤 특별한 일에 유의해야만 한다(마 17:21; 행 13:2). 2. 그들은 능히 금식고행의 의무를 행할 만큼 이미 훈련받은 능력은 없었다. 이것은 두 가지 유사점으로 설명되었다. 그 하나는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것으로서 기운 것이 낡은 옷을 당겨 헤어짐이 더하게 되며(16절), 또한 그 하나는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부대에 넣는" 것으로서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지게 된다(17절).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요한이나 바리새인의 고행과 같은 이러한 고행을 견딜 수 없었다. (*이것은 박학한 휘트비(Whitby) 박사가 다음과 같은 이유로 제시하고 있다.) 유대인 가운데는 엄격한 생활을 하였던 바리새인과 에세네 종파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종종 산이나 광야에 살며 많은 사람이 나실인이었던 "선지자 학교"가 있었다. 그들은 또한 사람을 엄격하게 훈련시키기 위하여 개인적인 학문 기관을 가졌다. 아마 이들로부터 요한의 제자들이나 바리새인들이 많이 나왔던 것 같다. 한편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그 직접적으로 소명을 받았으므로 이러한 엄격함에 익숙하지 않았고 또한 그들에게 적합하지 않았으며 그것에 의해 그들의 다른 일에도 오히려 더 적합하지 않았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1) 어떤 종교적 의무는, 마음의 최고 긴장을 요구하며 혈육에 대해 극도로 불쾌한 "새 옷"과 "새 포도주"와 같이, 다른 의무들 보다 더 힘들고 고달프다. 이러한 것은 그것에 수반하는 종교적인 금식과 의무이다. (2)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대부분은 아직 영아의 상태를 지나왔다. 그리스도의 정원에 있는 모든 나무들이 다 자라난 것은 아니었고, 태어나면서부터 그의 모든 학생들이 동일한 상태에 있지는 않았다. "그리스도 안에는" 어린아이도 있고 성인도 있다. (3) 종교적인 훈련이나 연습 과제들을 부과함에 있어서 젊은 기독자들의 연약함과 허약성이 세심하게 고려되어야만 한다. 그들을 위해 마련된 양식이 그들의 나이에 적합한 것이 되어야 하는 것처럼(고전 3:2; 히 5:12), 그들에게 지나치지 않은, 적합한 훈련을 행해야만 한다. 그리스도는 제자들이 감당치 못할 것을 그들에게 말씀하시지 않았다(요 16:12). 젊은 초신자들은 그들이 용기를 잃어 도중에 포기하지 않도록, 맨 처음부터 힘든 의무가 부가되어서는 안 된다. 이와 같은 것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배려에서 엿볼 수 있는데, 하나님이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실 때 그는 블레셋의 길로 그들을 인도하시지 않았다(출 13:17, 18). 또한 이것은 야곱이 그의 자녀와 가축을 혹사하지 않도록 돌보며 천천히 이끌어 간 것(창 33:13)과 같다. 그리스도께서도 이와 같이 그의 가족 중 소자와 양떼를 돌보신다. 그는 순탄하게 그들을 인도하신다. 이러한 배려의 부족 때문에 자주 '부대는 터지고 포도주는 못쓰게 된다." 많은 사람의 신앙 고백은 맨 처음의 무분별 때문에 실패하며 수포가 되고 만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선행에 있어서 (스스로) 더욱 지나치게 행하며, 지나치게 의롭게 되려는 일이 있다는 것인데, 이와 같이 "지나치게" 행하는 것은 사탄의 간교 때문에 행하지 않은 것으로 입증될 수도 있음이다. --------- 회당장의 직원의 딸과 혈루병걸린 여자(마 9:18-26) 여기에서는 함께 병행된 역사에 대한 두 구절이 기록되어 있다. 그 하나는 야이로의 딸을 소생시키신 것이요, 또 하나는 다른 것 가운데 삽입구로 소개된 것으로서 그가 야이로의 집으로 갈 때 "혈우병"을 가진 여자를 고치신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이적은 널리 유포되었고 뒤섞여졌기 때문이다. 그를 "보내신 자의 일"은 그의 일상과제였다. 그는 바리새인들의 트집, 즉 "이 말씀을 하실 때"(18절)에 대한 응답으로 앞서의 일들을 말씀하시는 것에서부터 이러한 선행을 하시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우리는 이것이 논쟁의 불쾌한 일에 주어진 유쾌한 증거로 추측할 수 있으며, 이것은 비록 때때로 필요하기는 하지만 선한 사람은 헌신과 자비의 일을 착수하기 위하여 기꺼이 버려둘 것이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Ⅰ. 그리스도께 대한 회당장의 인사(18절). "한 직원," 즉 회당장이 "와서 절하였다." "회당장이 그를 믿은 일이 있는가?" 그렇다. 여기에 있는 한 회당장으로서, 그의 신앙은 다른 회당장들의 불신앙을 비난하였다. 이 회당장은 방금 죽은 열두 살 된 딸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의 가족들을 위로하기 위한 이 돌파구가 그로 하여금 그리스도에게로 나오게 하였다. 여기에 유의할 것.... 근심이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을 찾아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우리 친척의 죽음은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에로 스스로를 내몰아야만 유익하다. 어떤 일이 바로 그렇게 해 줄 수만 있다면 그것은 겉보기와 달리 참 좋은 일이다. 고통이 우리의 가족에게 도래할 때 우리는 놀라움으로 주저앉아 버려서는 안 된다. 오히려 욥과 같이 "엎드려 예배해야 한다." 여기서 살펴볼 것은, 1. 그리스도에게 대한 이 인사에 나타난 회당장의 겸손. 그는 자신이 그리스도에게 임무를 가지고 왔다. 그는 자기의 종을 보내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주 예수님을 섬기는 것은 지위 높은 회당장에게 있어서 경시해 버릴 일이 아니라는 사실에 유의하라. ... 그는 무릎을 꿇고 "그에게 절하였다." 그리고 할 수 있는 모든 존경을 그에게 드렸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하나님께로부터 자비를 얻으려고 하는 자는 그리스도에게 경의를 표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2. 이 인사에 나타난 그의 신앙. "내 딸이 방금 죽었사오나, 다른 어떤 의사가 지금 오더라도 늦지만 그리스도께서 오시면 늦지 않겠나이다." 참으로, 그리스도는 사후에도 유일무이한 의사이다. 왜냐하면 그는 "부활이요 생명"이시기 때문이다....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으소서. 그러면 살겠나이다." 이것은 진정 자연의 능력 이상이었다(- 즉 한 번 생명은 회복될 수 없다). 생명은 오직 그리스도의 능력 안에 있으며, 그는 "그 자신 안에 생명"을 가지고 계시며, 또한 "그가 하시고자 하는 자를 소생시키신다." 그런데 그리스도는 그분 자신에게 있어서는 "자연적으로!!," 그것에 전혀 "거스리지" 않고 일반적인 방법으로 역사 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이와 같은 요구를 그에게 가져올 수밖에 없다. 생명이 있는 동안 소망이 있고 기도를 위한 기회가 있다. 그러나 우리의 친구가 죽을 때 그 경우는 결정된다. "우리는 그들에게로 갈 것이지만 그들은 우리에게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이적을 행하면서 이 땅 위에 계셨을 바로 그 때, 이와 같은 신뢰는 정당한 것일 뿐만 아니라 극히 칭찬할만하다. Ⅱ. 그리스도께서 그의 인사에 응하기 위해 준비하심(19절). 즉시로 "예수께서는 일어나," 그의 일행을 남겨두고 "그를 따라갔다." 그리스도는 자기의 딸을 소생시키려는 그의 소원을 들어주시려 했을 뿐만 아니라 그 일을 하기 위해 그의 집으로 기꺼이 가 주려고도 하셨다. 정녕 그는 야곱의 후손들에게, "너희는 공연히 나를 찾노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그는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라고 말했던 신하에게는 (요 4:48-50) 그와 함께 가기를 거절하셨지만, "주여, 오시옵소서. 그러면 살겠나이다"고 말했던 회당장과는 함께 가셨다. 왜 그러하셨을까.. 그리스도께서 이적을 행하실 때 취하셨던 여러 방법은 아마도 상이한 마음의 구조와 기질에 의한 것인 듯하며, 이것은 그에게 요청한 사람들에게 있었으며 또한 "마음을 살피는 자"가 완전히 아시고 그 자신이 거기에 따라 동조하였던 것이다. 그는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것과 그가 취하는 길을 아신다. 또한 여기에서 살펴볼 것...."예수께서 그를 따르실 때," 그가 자신의 항구적인 동반자로 선택한 "그의 제자들로 뒤따랐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대동하신 것은 당당한 모습을 보여 주거나 관찰을 하게 함이 아니라, 이후에 그의 교훈을 전파하는 설교자가 될 자들이 그의 이적에 대해 증거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Ⅲ. 가난한 여자의 혈루병을 치유하심. 그를 "가난한"여자라고 부르는 것은, 그의 처지가 가련할 뿐만 아니라, 또한 설령 그녀가 이 세상에 어떤 재산을 가지고 있었다 할지라도 자신의 질병을 치유하기 위해 "모든 것을 의사에게 바쳤으나" 결코 완쾌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의 상태는 이중적으로 악화되었으며, 이전에는 많이 가지고 있었으나 지금은 텅빈 상태가 되어 버렸다. 그녀는 건강을 회복하려다가 가난하게 되었고 그렇다고 지금 건강이 회복된 것도 아니었다. 이 "여자는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았다"(20절). 이 병은 그녀를 쇠약하고 허약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의식적으로 불결하게 되어 "성전 뜰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어느누구도 그리스도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지는 못하였다. 그녀는 어쨌든 딸이 죽은 회당장을 따라가면서 그리스도에게 요청하여 자비를 얻었으며, 이 일은 그리스도를 믿는 회당장의 신앙에 큰 격려와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그리스도는 매우 은혜스럽게 연약한 믿는이들의 개인적 특성과 마음 구조를 고려하시며, 그 처지를 염두에 두신다. 여기에서 살펴보려고 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1. 그리스도와 그의 능력에 대한 여자의 큰 믿음. 그녀의 병은 천형적이므로 그녀는 겸손하게도 다른 사람이 하는 것처럼 치유를 위해 그리스도에게 공개적으로 말씀드리지 않고, 믿음의 성령의 특별한 충동에 의해 "그리스도의 겉옷만 만져도" 자신의 혈루병이 나을 것임을 확실히 믿게 되었다. 이것은 아마도 신앙과 혼합된 어떤 추측에 근거한 것 같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녀는 그리스도에게 직접 나아가지 않았으며, 그렇지 않으면 어떤 사람이 생각하는 것처럼 엘리사의 뼈를 만짐으로 죽은 사람이 일어난 사실을 목표하고 있었다(왕하 13:21). 그러나 어떤 "이해의 연약성"이 거기에 있었든지 간에 그리스도는 간과하시고 그녀의 신앙의 진지성과 능력을 받아들이기를 기뻐하였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사랑하며 절대적으로 신뢰하며 앙망하는 자의 마음에 있는 "꿀 방울을 먹기" 때문이다(아 4:11). 그녀는 그리스도의 "겉옷의 옷깃만 만져도" 나을 것이라고 믿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깊은 신뢰와 사랑으로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자는 한사람한사람마다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는 모든 것에 있는 그분의 효능을 체험하도록 특별히 허락된다는 사실이다. 대제사장이 기름부음 받았던 "거룩한 기름은 옷깃까지 흘러내린다"(시 133:2). 그리스도 안에는 이러한 은혜의 충만이 있으므로 "우리가 그것에서 모두 받을 수 있다"(요 1:16). 2. 이 여자에 대한 그리스도의 큰 호의. 그는 그의 치유하는 감응력을 멈추지 않았으며(그는 하셨을 수도 있다), 그녀는 그것을 그리스도께서 아시리라고는 미쳐 생각지 못했지만 ...그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는 치유를 받기 위하여 이 수치스러운 환자는 고심하였었지만.... 드디어 이제 그녀는 기쁨 충만하여 되돌아 갈 수 있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자신이 그리스도에게 왔던 바로 그 목적을 이루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녀가 그냥 그렇게 가도록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리스도는 그녀를 치료하신 바 그 확대된 능력을 발휘하실 뿐만 아니라 그녀의 믿음을 따라 위로와 더불어 칭찬하심으로써 더욱 더 크신 은혜를 일깨워 주실 것이었다. 확실히, 그녀의 신앙의 승리는 칭찬과 영예를 더욱더 크게하였음이 틀림없다. 그리스도는 그녀를 보려고 "돌이키셨으며"(22절) 즉시로 그녀를 발견하였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사람에게는 드러나지 않도록 그 자신을 숨기지만 은밀히 개인적으로 주께 나아가 기도하는 바 참되게 믿는이의 하늘 나라에 대한 요청마다, 은밀한 중에 보시는 그리스도에게 그대로 알려지며 열납된다는 것은 겸손한 기독자들에게 큰 용기가 된다는 사실이다. (1) 그는 "딸아 안심하라"고 말씀하심으로써 "그녀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 있다." 그녀는 비밀히 온 것에 대해 책망 받을까봐 두려워하였지만, 오히려 격려를 받고 있다. ① 그가 그녀를 "딸"이라고 부른 것은 "아들"이라고 불렀던 "중풍병 환자"에게 하셨던 것처럼(2절) 아버지의 온유함으로 그녀에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그리스도는 한나와 같이(삼상 1:15) 슬픈 영인 "시온의 딸들"을 위하여 예비된 위로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믿는 여자는 그리스도의 "딸"이며 그는 그들을 이와 같은 자로 인정하실 것이다. ② 그는 그녀에게 "안심하라"고 명하고 계시다. 만일 그리스도가 그녀를 "딸"로 인정하신다면 마땅히 그렇게 되어야 한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성도의 위로는 그들의 양자 됨에 기초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안심하라"는 그의 명령은 "구원받았다"는 말씀이 건강을 가져다 준 것처럼 그녀에게 위로를 가져다주었다. 그리스도의 백성이 위로를 받아야 된다는 사실은 그의 뜻이며, 고통받는 영들에게 위로를 명령하시는 것은 그의 특권이라는 사실에 유의하라. 그는 "입술의 열매, 평강을 지으신다"(사 57:19). (2) 그는 그녀의 신앙에 경의를 표하고 있다. 그 밖의 모든 은혜가 그리스도에게 큰 영예를 드리고 있으며 따라서 그는 그것에 큰 경의를 표하고 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 이와 같이 "그녀는 신앙에 의해 좋은 소식과 좋은 평판을 얻었다." 모든 은혜들 중에서 JC께서 친히 신앙에 최고의 경의를 표하고 있는 것처럼, 모든 신자들 중에서 가장 겸손한 자에게까지 진실한 경의를 표하고 있다. 이는 마치 자신이 가졌다고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큰 믿음을 발휘하여 행함의 실제로 나타내었던 바, 바로 지금 여기에 있는 이 여자와 같다. 그녀가 "안심하게 된 것은" 그녀가 구원(온전)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녀의 믿음이 그녀를 온전케 하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① 그녀는 영적으로 고침을 받았다. 그녀는 치유함을 받았는데, 이것은 신앙의 적절한 열매요 결과이며, 죄의 용서와 은혜의 역사이다. 그것들이 이와 유사한 영적인 축복에 수반된다면 우리는 그때 우리의 현세적 자비에 있어서 풍성하게 위로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 유의하라. 신앙에 의해 "생명의 떡"으로 배불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의(義)의 옷으로 옷 입혀질" 때 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