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0.07.02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시17.친밀한하나이신구주내사랑만족모든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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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17[다윗의기도]== 

주안에있는나에게370..주예수내맘에..주예수님내맘에오사386..이세상끝날까지447.살피소서오늘내마음을...저장미꽃위에이슬..빛되신주어둠가운데비추사..나는비록약하나..나는기쁨으로주얼굴보리니


*1.여호와여 의의 호소를(체데크.. 즉 주님의 절대적 공의 ::Q은 근원적 체데크이시며 Q은 베푸신 말씀따라 구주십자가를 믿는이마다 체데크를 맛보고 누림/체득/참여함 허락하셨음) 들으소서 나의 울부짖음에(공의 갈망-갈구함의 부르짖음) 주의하소서 ...거짓 되지 아니한 입술에서((언행심사를 주앞에서 살펴 모든 거리낌/갈등을 자복-회개하고, 믿음으로 자유함가운데 내 모든 것-의미-가치-보람-목적이신 주를 바라봄/머무름/안김...주님 친히 넣어주시는 감동된 말씀을 말함!!)) 나오는 나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소서

*2.주께서 나를 판단하시(미쉬파트..공의/공정의 법령/관습에 기초한 심판/판단/재판) 주의 눈으로 공평함을(메샤르..공평-공정-정직-거침없음-평탄) 살피소서(하자...감찰/통찰/인지/선지/예언하다-보다/바라보다/알아보다..준비/앙망/지각하다)

*3.주께서 내 마음을(레브...속사람, 곧 영적 인격의 됨됨이..이해understanding, 마음heart-정신mind-의지will) 시험하시고(바한...감시/검사/시험/입증하다..백성의 길/마음/심장과폐부를) 밤에(라일..밤은 Q이 일하고 예비하시는 시간) 내게 오시어서(파카드...방문/권고/시찰/계수/임명하다-돌보다/세다) 나를 감찰하셨으나(차라프...정련/정제/시험/연단하다-살피다) 흠을 찾지 못하셨사오니, 내가 결심하고 입으로 범죄하지 아니하리이다(설령 악한 생각이 올라올지라도 그것을 입으로 내어뱉는 범죄를 행하지 않으리!!)

*4.사람의 행사로 논하면((정의, 곧 정직함/올곧은 삶은 오직 Q말씀으로부터 나오는 것이기에)) 나는 주의 입술의 말씀을 따라 스스로 삼가서 포악한 자의 길을 가지 아니하였사오며

*5.나의 걸음이 주의 길을 굳게 지키고 실족하지 아니하였나이다((=친히 인도-동행하셔서 주님의 길 걷도록 도우심인해 양심에 거리낌은 없으나 저는 여전히 부족하며 주안에서 지어져 가고 있는 인생!!)) 

*6.하나님이여 내게 응답하시겠으므로 내가 불렀사오니 내게 귀를 기울여 내 말을 들으소서

*7.주께 피하는 자들을 그 일어나 치는 자들에게서 오른손으로 구원하시는 주여 주의 기이한 사랑을(헤세드...이루 다 형용못할, 놀랍고도 기이한, 경탄을 금치못하는, Q인자하심의 다함없는 풍성/부요/충만/열정) 나타내소서

*8.나를 눈동자 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감추사

*9.내 앞에서 나를 압제하는 악인들과 나의 목숨을 노리는 원수들에게서 벗어나게 하소서(오직 악에서 구하소서)

*10.그들의 마음은 기름에 잠겼으며 그들의 입은 교만하게 말하나이다

*11.이제 우리가 걸어가는 것 그들이 에워싸서 노려보고 땅에 넘어뜨리려 하나이다

*12.그는 그 움킨 것을 찢으려 하는 사자 같으며 은밀한 곳에 엎드린 젊은 사자 같으니이다

*13.여호와여 일어나 그를 대항하여 넘어뜨리시고 주의 칼로 악인에게서 나의 영혼을 구원하소서

*14.여호와여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 그들의 분깃을 받은 사람들에게서 주의 손으로 나를 구하소서 그들은 주의 재물로 배를 채우고 자녀로 만족하고 그들의 남은 산업을 그들의 어린 아이들에게 물려 주는 자니이다

*15.나는 의로운 중에(체데크..Q의 거룩의 어떠하심...오직 JC의지하여 죄를 토설함으로 이루심) 주의 얼굴을 뵈오리니(하자...알아보다/인지하다)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테무나..어떠하심의 영광) 만족하리이다(사바...포식/만족/찬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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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나의 진실을 변호하여 주십시오. 이 부르짖는 소리를 들어 주십시오. 거짓 없이 드리는 나의 기도에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

주님, 친히 "너는 죄가 없다"고 판결하여 주십시오. 주님의 눈으로 공평하게 살펴보아 주십시오.

주님께서는 나의 마음을 시험하여 보시고, 밤새도록 심문하시며 샅샅이 캐어 보셨지만 내 잘못을 찾지 못하셨습니다. 내 입에서 무슨 잘못을 발견하셨습니까?

남들이야 어떠했든지, 나만은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따랐기에, 약탈하는 무리의 길로 가지 않았습니다.

내 발걸음이 주님의 발자취만을 따랐기에, 그 길에서 벗어난 일이 없었습니다.

하나님, 내가 주님을 부르니, 내게 응답하여 주십시오. 귀 기울이셔서, 내가 아뢰는 말을 들어 주십시오.

주님의 미쁘심을 크게 드러내 주십시오. 주님께로 피하는 사람을 오른손으로 구원하여 주시는 주님, 나를 치는 자들의 손에서 나를 건져 주십시오.

주님의 눈동자처럼 나를 지켜 주시고, 주님의 날개 그늘에 나를 숨겨 주시고,

나를 공격하는 악인들로부터 나를 지켜 주십시오. 나의 생명을 노리는 원수들이 나를 둘러싸고 있습니다.

그들의 몸뚱이는 기름기가 번드르르 흐르고 그들의 입은 오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마침내 그들이 나를 뒤따라와 에워싸고, 이 몸을 땅바닥에 메어치려고 노려봅니다.

그들은 찢을 것을 찾는 사자와 같고, 숨어서 먹이를 노리는, 기운 센 사자와도 같습니다.

주님, 일어나십시오. 그들을 대적하시고, 굴복시키십시오. 주님께서 칼을 드셔서, 악인에게서 나의 생명을 구하여 주십시오.

주님, 이 세상에서 받을 몫을 다 받고 사는 자들에게서 나를 구해 주십시오. 주님께서 몸소 구해 주십시오. 그들은 주님께서 쌓아 두신 재물로 자신들의 배를 채우고 남은 것을 자녀에게 물려주고 그래도 남아서 자식의 자식들에게까지 물려줍니다.

나는 떳떳하게 주님의 얼굴을 뵙겠습니다. 깨어나서 주님의 모습 뵈올 때에 주님과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내게 기쁨이 넘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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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ar a just cause, O LORD, give heed to my cry; Give ear to my prayer, which is not from deceitful lips.

Let my judgment come forth from Your presence; Let Your eyes look with equity.

You have tried my heart; You have visited me by night; You have tested me and You find nothing; I have purposed that my mouth will not transgress.

As for the deeds of men, by the word of Your lips I have kept from the paths of the violent.

My steps have held fast to Your paths My feet have not slipped.

I have called upon You, for You will answer me, O God; Incline Your ear to me, hear my speech.

Wondrously show Your lovingkindness, O Savior of those who take refuge at Your right hand From those who rise up against them.

Keep me as the apple of the eye; Hide me in the shadow of Your wings

From the wicked who despoil me, My deadly enemies who surround me.

They have closed their unfeeling heart, With their mouth they speak proudly.

They have now surrounded us in our steps; They set their eyes to cast us down to the ground.

He is like a lion that is eager to tear, And as a young lion lurking in hiding places.

Arise, O LORD, confront him, bring him low; Deliver my soul from the wicked with Your sword,

From men with Your hand, O LORD, From men of the world, whose portion is in this life, And whose belly You fill with Your treasure; They are satisfied with children, And leave their abundance to their babes.

As for me, I shall behold Your face in righteousness; I will be satisfied with Your likeness when I awake.

---Prayer for Protection against Oppressors....A Prayer of David...시17---

1 Hear the just (righteous) cause, O Lord; listen to my loud [piercing] cry; Listen to my prayer, that comes from guileless lips.

2 Let my verdict of vindication come from Your presence; May Your eyes look with equity and behold things that are just.

3 You have tried my heart; You have visited me in the night; You have tested me and You find nothing [evil in me]; I intend that my mouth will not transgress.

4 Concerning the deeds of men, by the word of Your lips I have kept away from the paths of the violent.

5 My steps have held closely to Your paths; My feet have not staggered.

6 I have called upon You, for You, O God, will answer me; Incline Your ear to me, hear my speech.

7 Wondrously show Your [marvelous and amazing] lovingkindness, O Savior of those who take refuge at Your right hand From those who rise up against them.

8 Keep me [in Your affectionate care, protect me] as the [a]apple of Your eye; Hide me in the [protective] shadow of Your wings

9 From the wicked who despoil and deal violently with me, My deadly enemies who surround me.

10 They have closed their [b]unfeeling heart [to kindness and compassion]; With their mouths they speak proudly and make presumptuous claims.

11 They track us down and have now surrounded us in our steps; They set their eyes to force us to the ground,

12 He is like a lion eager to tear [his prey], And like a young lion lurking in hiding places.

13 Arise, O Lord, confront him, cast him down; Save my soul from the wicked with Your sword,

14 From men with Your hand, O Lord, From men of the world [these moths of the night] whose portion [of enjoyment] is in this life—idle and vain, And whose belly You fill with Your treasure; They are satisfied with children, And they leave what they have left [of wealth] to their children.

15 As for me, I shall see Your face in righteousness; I will be [fully] satisfied when I awake [to find myself] seeing Your like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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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Hear a just cause, O Lord, Attend to my cry; Give ear to my prayer which is not from deceitful lips.

2 Let my vindication come from Your presence; Let Your eyes look on the things that are upright.

3 You have tested my heart; You have visited me in the night; You have [a]tried me and have found [b]nothing; I have purposed that my mouth shall not transgress.

4 Concerning the works of men, By the word of Your lips, I have kept away from the paths of the destroyer.

5 Uphold my steps in Your paths, That my footsteps may not slip.

6 I have called upon You, for You will hear me, O God; Incline Your ear to me, and hear my speech.

7 Show Your marvelous lovingkindness by Your right hand, O You who [c]save those who trust in You From those who rise up against them.

8 Keep me as the [d]apple of Your eye; Hide me under the shadow of Your wings, 9 From the wicked who oppress me, From my deadly enemies who surround me.

10 They have closed up their fat hearts; With their mouths they speak proudly.

11 They have now surrounded us in our steps; They have set their eyes, crouching down to the earth, 

12 As a lion is eager to tear his prey, And like a young lion lurking in secret places.

13 Arise, O Lord, Confront him, cast him down; Deliver my life from the wicked with Your sword,

14 With Your hand from men, O Lord, From men of the world who have their portion in this life, And whose belly You fill with Your hidden treasure. They are satisfied with children, And leave the rest of their possession for their babes.

15 As for me, I will see Your face in righteousness; I shall be satisfied when I awake in Your like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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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적들의 악의로 인해 큰 환난과 위기에 처한 다윗은 이 시편에서, 기도로써 그의 믿을 만한 피난처가 되시는 하나님께 그 자신을 아뢰고 있으며, 그에게서 은신처를 구하고 있다.

1. 그는 자신의 결백함에 관해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다(1-4).

2. 하나님께서 그의 결백함을 항상 부축해 주시고, 그의 대적들의 악의로부터 보호해 주시기를 간구하고 있다(5-8, 13).

3. 그의 대적들의 특성을 열거함으로써 하나님께 그의 보호를 탄원하고 있다(9-12, 14).

4. 그는 미래의 행복에 대한 소망으로 그 자신을 위로하고 있다(15).

그리스도는 완전히 무죄했을지라도 미움을 받고 핍박당하셨으며, 다윗과 같이 의롭게 심판하시는 하나님께 그 자신과 그의 사정을 의탁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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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지하고 간곡한 기도(시 17:1-7)

이 시편은 기도다. 우는 때와 기뻐하는 때가 있듯이 찬미할 때와 기도할 때가 있다. 

다윗은 그 당시에 핍박당하고 있었다. 아마도 산에 있는 자고새처럼 그를 추적했던 사울에 의한 핍박이었을 것이다. 외적으로는 싸움이 있었고, 내적으로는 두려움이 있었다. 그리고 이 두 가지는 그로 하여금 은혜의 보좌로 나아가 간청하도록 만들었다. 

그는 이 구절들 속에서 호소하는 방법과(“여호와여, 정직함을 들으소서.” 내 의로운 주장을 주의 법정 앞에 아뢰어 판단받게 하소서), 탄원하는 방법(“나의 부르짖음에 주의하소서.” 1절, 그리고 다시 “귀를 기울여 내 말을 들으소서.” 6절) 두 가지로 하나님께 그 자신을 아뢰고 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집요한 간청으로써 압력을 받을 필요가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기도에 대한 그의 은혜로운 응답을 진지하게 열망하는 것을 이처럼 표현하도록 허용하셨음을 나타내고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하나님께서 청종해 주시기를 탄원하고 있다.

>> 그는 신실했으며 그의 기도에서 하나님께 거짓된 것을 말씀드리지 않았다. 

“그것은 거짓되지 않은 입술에서 나온 것이옵니다.” 그가 의미한 것은 말의 내용과 같았으며, 그의 감정은 입에서 나온 표현과 일치했다. 거짓된 기도는 효과가 없다. 그러나 마음으로 기도를 드렸다면 하나님은 은총으로써 맞아주실 것이다.

>> 그는 다른 때에도 기도를 드리곤 했으며, 그로 하여금 제일 먼저 그의 의무를 행하도록 만든 것은 환난이나 위험이 아니었다. 

“내가 이전에도 불렀사오니(6절), 여호와여, 이제도 내 기도를 들으소서.” 우리가 환난을 당했을 때 기도의 바퀴가 계속 굴러가고 있음을 발견하는 것은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된다. 왜냐하면 그때에는 우리가 더욱 담대히 은혜의 보좌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상인들이 그들의 오래된 고객들에게 기꺼이 혜택을 주려하는 것과 같다.

>> 그는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주목하시리라는 것을 믿음으로 기대했다.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리라는 것을 알고 있사오니, 하나님이시여, 내 기도에 귀를 기울이소서.” 우리가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지하는 것은 그를 향해 우리의 열망을 강력히 주장할 수 있는 좋은 구실이 된다.

Ⅰ. 그의 호소는 무엇인가? 여기에서 다음 사실을 살펴보자.

1. 그가 호소한 것을 인지하고 판단해 주는 곳은 어떤 법정인가? 그것은 하늘에 있는 법정이다. 

“여호와여, 정직함을 들으소서. 사울은 너무 격해 있고, 너무 편견에 차 있어서 그것을 들을 수 없습니다. 여호와여, 나의 판단을 주 앞에 내소서”(2절). 

“사람들은 나를 행악자로 몰아 죽이려 합니다. 여호와여, 나는 그들을 떠나 주께 호소합니다.” 이것을 그는 사울의 면전에서 간언했고(삼상 24:12, “여호와께서는 나와 왕 사이를 판단하사”), 여기에서도 사적으로 예배드리면서 그것을 거듭 말하고 있다.

(1) 하나님의 통치와 심판의 공정성과 범위는 해를 당한 무죄한 자에게 매우 큰 도움이 된다. 

의롭지 못한 자들에 의해 비방당하고 모욕당하고 누명을 입을 때, 우리가 나아가 호소할 수 있는 의로우신 하나님을 갖고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위안이 된다. 하나님은 우리 편이 되어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억눌린 자의 후원자이시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의 마음과 일을 참된 빛에 밝히 드러내고 모든 거짓된 가면을 벗김으로써, 그리고 모든 불의한 자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파멸과 각 사람이 그 행위대로 받게 될 상벌을 결정함으로써, 사실에 따라 심판하신다.

(2) 성실은 엄밀한 심문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더욱이 은혜의 언약 방침에 따른 하나님 자신의 심문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주의 눈은 공평함을 살피소서.”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사곡한 자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 되는 반면에 정직한 자에게는 기쁨이 된다. 그리고 그것은 부당하게 정죄당하고 어떤 면에서든 해를 당한 자들에게 특히 위로가 된다.

2. 그의 호소가 좋은 결과를 가져오리라고 기대할 수 있는 증거는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시험하신 일이었다. 

“주께서 내 마음을 시험하셨나이다”(3절). 하나님의 판결은 옳다. 하나님은 항상 그의 지식에 의해 행하시는데, 그것은 사람들이 가장 정확한 검증과 엄격한 조사에 의해 얻을 수 있는 것보다 더욱 분명하며 절대로 오류가 없는 지식이다.

(1) 그는 하나님이 그를 시험하셨음을 알았다.

① 그 시험은 영혼 속에 있는 하나님의 대리자인 그의 양심에 의한 것이었다. 

“한 인간의 영혼은 여호와의 등불이다.” 이 등불로 하나님은 그를 감찰하셨고, 그가 “자리에 누워 심중에 말하던 밤에” 그를 “권고하셨다.” 그는 그 감찰에 복종했다. 그리고 잘못된 것을 발견하기 위해 그의 행동을 신중하게 반성했다. 그러나 그의 대적들이 그를 책망한 것과 같은 잘못은 그 어느 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② 또한 섭리에 의한 시험이었다. 

하나님은 그에게 사울을 죽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두 번씩이나 주심으로써 그를 시험하셨다. 하나님은 사울의 악의, 그의 친구들의 배신, 그리고 그가 겪은 많은 도전으로써 그를 시험하셨다. 그러므로 만일 그가 그의 대적들이 말한 것과 같은 자였다면 드러났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시험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위배되는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았고, 그들이 그를 정죄했던 모든 것들을 증거할 만한 사실은 조금도 발견되지 않았다.

(2) 하나님은 그의 마음을 시험하셨고 그에 대한 결백함을 입증하실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결백함을 더욱 증명하기 위해, 그의 양심이 증언하고 있는 두 가지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① 그는 혀로 죄를 짓지 않기로 확고히 결심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에 힘입어 결심하고 완전히 결정하며 입으로 범죄치 아니하리이다.” 그는 “그렇게 안 되기를 바라나이다.” 또는 “나는 그렇게 되지 않기를 원합니다” 하고 말하지 않고, “나는 완전히 결심하고 그렇게 하지 않으리이다” 하고 말했다. 그는 이렇게 그 입에 재갈을 먹였다(39:1). 

입으로 범죄치 않기 위해 끊임없이 결심하고 경계하는 것은 우리의 결백함에 대한 좋은 증거가 될 것이다.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다”(약 3:2). 그는 “내 입이 결코 범죄치 않을 것”이라고 말하지 않고(왜냐하면 우리는 여러 가지로 실수하기 때문이다), “내가 범죄치 않을 것을 결심하나이다” 하고 말했다. 

마음을 살피시는 자는 그 결심이 진실된 것인지 아닌지를 아신다.

② 그는 사악한 말은 물론 사악한 행동을 피하려고 주의했다(4절). 

“사람의 일반적인 행사로 논하면, 즉 인간의 행동과 일들에서, 나는 주의 말씀의 지시를 따라 스스로 삼가서 강포한 자의 길에 행치 아니하였나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특히, 그가 사울을 죽일 능력을 지녔을 때에도 죽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하지 못하게 하고 아비새에게 “죽이지 말라”고 했던(삼상 26:9) 일을 언급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더 일반적인 면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즉 그는 스스로 삼가서 모든 악한 행사를 피했고, 그의 직책의 의무에 따라, 다른 사람들도 피하게 하려고 노력했다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여기에서 다음 사실을 주목하자.

첫째, 죄의 길은 피괴자의 길이다. 영혼을 죄의 길로 꾀어내어 파멸시키는 파괴자, “아바돈”(Abaddon)과 아폴리욘(Apollyon)이라는 이름을 지닌 마귀의 길이다.

둘째, 우리 모두는 그 파괴자의 길에 들어서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가 멸망으로 인도되는 길을 걷는다면, 멸망과 비참함이 결국 우리의 몫이 될 때 우리는 스스로를 탓하지 않으면 안 된다.

셋째, 우리는 우리의 지침이며 표준인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그 지시와 훈계를 준수함으로써, 파괴자의 길을 떠나야 한다(119:9).

넷째, 우리가 조심스럽게 죄의 길을 피한다면, 우리는 환난 가운데 있을 때 회고함으로써 큰 위로를 얻게 될 것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를 지키면 악한 자가” 유혹으로써 “우리를 만지지도 못하므로”(요일 5:18), 우리는 그 악한 자가 우리를 두렵게 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바랄 수 있다.

Ⅱ. 그의 탄원은 무엇인가? 

그것은 간단히 말해서, 그를 향한 하나님의 선한 뜻에 대한 증거와 그것을 받을 만한 자격으로서 하나님께서 그의 안에 역사하심을 체험하려는 것이었다. 이것이 곧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오는 은혜이며 평강이다.

1. 그는 자기 안에 하나님의 은혜가 역사되기를 간구하고 있다(5절). 

“나의 걸음이 주의 길을 굳게 지켰나이다. 여호와여, 나는 주의 은혜로 인하여 파괴자의 길을 떠나 내 스스로를 지켰나이다. 그와 같은 은혜로써 내가 주의 길을 지키게 하소서. 내가 악을 행하지 못하도록 제재하실 뿐만 아니라, 항상 선한 일을 풍성히 하도록 재촉하소서. 나의 걸음이 주의 길을 굳게 지켜서 내가 그 길에서 돌아서거나 벗어나지 않게 하소서. 나의 걸음이 주의 길을 굳게 지켜서 내가 죄에 머뭇거리거나 빠지지 않게 하시고, 내 의무를 소홀히 하거나 무시하지 않게 하소서. 여호와여, 여지껏 나를 지키신 것처럼 앞으로도 계속 지켜주소서.”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길을 가고 있는 자들은 그들의 걸음이 그 길을 굳게 지키도록 지도할 필요가 있으며, 또 기도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가 기쁘게 우리를 붙들어주실 때만 있을 수 있으며, 그가 기쁘게 우리를 인도하고 부축하시며 이끄실 때에라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다윗은 여태까지 그의 의무의 길을 지켜왔지만, 그것이 미래의 그의 안전함까지 보장해 주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는 “여호와여, 계속 나를 지키소서” 하고 기도하고 있다. 

하나님의 길을 계속 나아가고 지키려는 자들은 믿음과 간구를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신선한 은혜와 힘을 날마다 공급받아야 한다. 다윗은 그의 길이 미끄럽다는 것과 자기 자신이 연약하고 사실상 그리 확고하지도 못하며, 또 훌륭히 갖추어져 있지도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자기가 머뭇거리는 것을 주시하고는 조금도 실족하지 않도록 도와주는 자가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러므로 그는 이렇게 기도하고 있다. “여호와여, 나를 지키시어 내 발이 미끄러지지 않게 하소서. 또한 주님과 주의 섭리와 약속에 대해 정직하지 못하거나 불신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는 말이나 행동을 결코 하지 못하게 하소서.”

2. 그는 그에 대한 하나님의 은총의 표징을 간구하고 있다(7절). 여기에서 다음을 살펴보자.

(1) 어떻게 그는 하나님을 그의 백성의 보호자며 구세주로서 바라보고 있으며, 그를 그렇게 여겨 부르고 있는가?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기도 속에서 격려를 얻고 있다.

“주께 피하는 자를 그 일어나 치는 자에게서 오른손으로(어떤 대리인이 필요 없이 오직 주 자신의 능력으로) 구원하시는 주여.” 하나님께 의지하는 것이 하나님 백성들의 특성이다. 그는 그들을 극진한 친구로 만들기를 기뻐하신다. 왜냐하면 그는 의로운 자들과 교제하시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그를 그들의 신탁자로 삼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에게 그들 자신을 맡겼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의뢰하는 자들은 많은 대적들, 즉 일어나 그들을 치고 그들의 멸망을 노리는 많은 대적들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무리들을 능히 처리하실 수 있는 한 친구를 갖고 있으며, 그가 그들을 위하시기만 한다면 누가 그들을 치든지 아무 문제가 없다. 그는 그들의 구세주가 되는 것을 영예로 여기신다. 그의 전능하신 능력은 그들을 위해 마련되어 있으며, 그들은 모두 그가 그들을 구원하실 준비가 되어 있음을 발견했다.

난외주에는 “일어나 주의 오른손을 치는 자들에게서, 주께 피하는 자를 구원하시는 주여”라고 적혀 있다. 성도들의 대적이 되는 자들은 하나님과 그의 오른손을 반역하는 자다. 그러므로 틀림없이 하나님이 합당한 때에 그들을 대적하러 나타나실 것이다.

(2)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기대하고 열망하는 것은 무엇인가? “주의 기이한 인자를 나타내소서.” 이 말은 다음 두 가지를 의미한다.

① 그 뛰어난 은총. 

“나를 위해 주의 인자하심을 예비하여 놓으소서. 내게서 일반적인 긍휼을 끊지 마시고, 주께서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행하시는 것같이 내게도 은혜를 베푸소서.”

② 놀라운 은총. 

“주의 인자하심을 감탄스러운 것으로 만드소서. 여호와여, 나와 다른 사람들이 놀랄 정도로 주의 은총을 내게 나타내소서.”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놀라울 정도로 풍부하고 충만하다. 여러 가지 사례 속에서 특별히 기이함이 나타나고 있다(118:23). 그리고 그리스도가 “성도들에게 영광을 받으시고 믿는 모든 자들에게 찬양을 받으시기” 위해 오실 때에는, 성도들의 구원 가운데 그것이 분명 놀랍게 나타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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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호와 긍휼을 간구함(시 17:8-15)

우리는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것을 살펴볼 수 있다.

Ⅰ. 다윗은 무엇을 간구하고 있는가? 그의 생명을 노리는 대적들에게 둘러싸였을 때 그는 하나님께, 그리고 그가 기름부음을 받은 그 면류관에, 자기를 치려는 모든 자들의 시도에서 안전하게 보존해 주실 것을 간구하고 있다. 이 기도는 그리스도가 온갖 고난과 굴욕스러운 역경 속에서도 보존되시어 높이 들리시는 영광스럽고 기쁜 상태에 이르시리라는 사실을 예언하는 것이며, 또한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하늘나라에까지 보호해 주실 것을” 신뢰하면서 그들의 영혼을 하나님께 의탁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귀감이 된다.

1. 다윗은 그 자신이 보호받기를 간구하고 있다(8절). 

“나를 안전하게 지키시고 나를 단단히 감추소서. 그리하여 내가 발각되지 않고 공격당하지 않게 하소서. 나의 영혼을 구하소서. 사망으로부터 나의 죽어야 하는 생명을 구하실 뿐만 아니라, 죄로부터 나의 불멸의 영혼을 구하소서.”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자기 스스로를 둔 자들은 믿음 가운데서 그 혜택을 간청할 수 있다.

(1)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지켜주실 것을 기도하고 있다.

① 사람이 자기 눈동자를 지키듯 매우 관심을 기울여 지켜주실 것을 간구하고 있다. 

우리의 본성은 눈동자를 놀랍게 보호하고 있으며, 우리에게 잘 보관하도록 가르치고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법을 “눈동자”처럼 지킨다면(잠 7:2) 우리는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그렇게 지켜주실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다. 누구든지 그의 백성을 “범하는 자는 그의 눈동자를 범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슥 2:8).

② 암탉이 병아리를 날개 아래 모으는 것같이 매우 따뜻하게 지켜주실 것을 간구하고 있다(그리스도께서는 이 비유를 마태복음 23장 37절에서 사용하고 있다). 

“주의 날개 그늘 아래 감추사 나를 안전하고 따뜻하게 해주소서.” 또는 이것을 오히려 하나님의 보좌를 덮고 있는 천사들의 날개를 언급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하나님의 이스라엘에 특별히 부여된 그 영광스러운 은혜의 보호 아래 내가 있게 하소서.” 

다윗이 여기에서 간구하고 있는 것은 다윗의 자손, 우리 주 예수에게서 이루어졌다. 그에 관해서, 하나님께서 “그를 그의 손 그늘에 숨기시며, 그로 마광한 살을 만드사 그 전통에 감추셨다”(사 49:2)고 적혀 있다.

(2) 다윗은 계속 기도하고 있다. “여호와여, 나를 사악한 자들과 세상사람들로부터 지키소서.”

① “그들처럼 되거나 행하게 하지 마소서. 그들의 꾀를 좇지 않게 하시고, 그리고 그들의 길에 서거나 그들의 요리를 먹지 않게 하소서.”

② “그들에 의해 파멸되거나 쓰러지게 하지 마소서. 그들이 나를 칠 뜻을 품지 않게 하소서. 그들이 나를 이기도록 하지 마소서.”

2. 그를 죄나 환난 속으로 이끌려는 그의 대적들의 모든 계획을 격파시키실 것을 간구하고 있다(13절). 

“여호와여, 일어나 나의 편이 되소서. 그리하여 나의 대적을 실망시키시고 그 실망으로 인해 그 자신이 보는 데서 그를 쓰러뜨리소서.” 

사울이 다윗을 핍박했을 때, 특히 사울이 그를 자신의 희생물로 만들 수 있으리라고 확신했던 때에도 사울은 얼마나 번번이 실패했는가! 그리고 그리스도를 죽게 만들어 그들의 목표를 이루었다고 생각했던 그리스도의 대적들은 그의 부활에 얼마나 실망했는가!

Ⅱ. 이 탄원에 대한 그 자신의 믿음과, 성공에 대한 소망을 격려하기 위해 무엇을 호소하고 있는가?

1. 그의 대적들의 악의와 사악함을 진술하고 있다.

 “그들은 호의를 얻기엔 합당치 않은 자들이며, 만일 내가 하나님의 특별하신 돌보심에 의해 그들로부터 구원되지 않는다면 그들은 나를 멸망시킬 것입니다. 여호와여, 나를 압제하고 나를 황폐케 하며 몰락시키는 자들이 얼마나 사악한 자들인가를 보옵소서.”

(1) “그들은 매우 심술궂으며 악의에 차 있습니다. 그들은 나의 피를, 내 마음의 피를 갈망하는 극한 원수들, 즉(단어 그대로) 영혼의 원수들입니다.” 

다윗의 대적들은 그를 죄로 몰고, 하나님으로부터 떼어내기 위해 온갖 힘을 다 기울였다. 그들은 그에게 “가서 다른 신들을 섬기라”고 말했으므로(삼상 26:19) 그가 그들을 대적해 기도했던 것이다. 우리 영혼의 대적들은 우리의 최악의 대적이며, 또 그렇게 간주해야만 한다.

(2) “그들은 매우 방심상태 있으며 감각적이고 무례하며 거만합니다. 저희가 자기 기름에 잠겼나이다(10절). 

그들은 그들 자신의 영예와 능력과 풍족함으로 그들 스스로를 두르고 에워싸나이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을 무시하며 그의 심판에 도전합니다(73:7; 욥 15:27). 그들은 즐거움에 탐닉하며 내일도 오늘과 같으리라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 입으로 교만하게 말하면서 그들 자신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을 모독하며, 하나님의 백성들을 짓밟고 모욕합니다(계 13:5, 6 참조). 여호와여, 이러한 자들은 굴욕당하고 천히 여겨지며 그들 스스로를 알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이 교만한 자들을 무시하고 멸시하는 것이 주의 영광이 되지 않겠습니까?”

(3) “그들은 쉬거나 지침이 없이 나를 치려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나를 에워싸나이다(9절). 

그들은 지금 어느 정도 그들의 목표를 이루었습니다. 그들은 우리를 포위했고, 우리의 걸어가는 길을 에워쌌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어디로 가든지 우리를 추적하며, 사냥개가 산토끼를 쫓듯 우리를 바싹 쫓아옵니다. 매우 많은 사람들이 빨리 움직여 우리에게서 모든 것을 다 빼앗으려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다른 곳을 보는 척하며, 마치 그들이 묵상에 잠기거나 혼자 생각에 골몰해 있거나 다른 것에 대해 생각하는 것처럼 땅을 굽어보고 있습니다.” 또는(다른 사람들의 견해대로) “그들은 나를 해치기 위해 주의 깊게 일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굽어보면서 그들의 뜻을 이룰 어떤 기회도 결코 놓치려 하지 않고 있습니다.”

(4) “그들의 두목(그것은 사울이었다)은, 특별한 의미에서, 살아가기 위해 게걸스럽게 먹이를 잡으려는 사자와 같이 특히 잔인하고 야비하며, 교활하고 돌발적입니다”(12절). 

선한 자들에게는 선을 행하는 것이 그들의 양식이 되는 것 이상으로, 악한 자들에게는 재앙을 끼치는 것이 그들의 양식이 된다. 그는 “은밀한 곳에 엎드린 젊은 사자”같이 그의 잔인한 계획을 위장한다. 이것은 사울에게 적절히 적용된다. 사울은 다윗을 찾으러 사자들이 먹이를 잡기 위해 숨곤 했던 “들염소바위”(삼상 24:2)와 “십 황무지”(삼상 26:2)로 갔기 때문이다.

2.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제하고 제재하실 능력을 갖고 계심을 진술하고 있다.

(1) “여호와여, 그들은 주의 칼입니다. 그러하오니 어떤 아버지가 자기 칼에 자기 자식들이 해를 입도록 내버려두겠습니까?” 

우리가 사람들로부터 해를 입을 때 참을성 있게 견뎌야 하는 이유는 그들은 고통을 주는 도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고통은 본래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며, 그의 뜻에 우리는 복종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들이 하나님의 칼이라는 사실은 그들은 그가 원하시는 대로 조종할 수 있고, 그가 없이는 움직일 수 없으며, 그가 그의 사업을 다 행하셨을 때에는 칼집에 들어가게 될 하나님의 칼이라는 사실을 뜻한다.

(2) “그들은 주의 손이므로 그것으로 주께서 주의 백성들을 징계하시며 주의 노하심을 느끼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환난이 나오기 때문에 그는 그 손에서 구원도 또한 나올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즉 “같은 손으로 상처내시고 고치신다”(Una eademque manus vulnus opemque tulit). 하나님의 손에서 도망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오직 모든 것은 그 손에 의해 움직일 수 있을 뿐이다. 우리가 사람의 힘을 두려워하고 있을 때, 그것이 하나님의 능력에 의할 뿐이고, 또 거기에 종속되어 있음을 안다면 매우 위안이 될 것이다(사 10:6-7, 15 참조).

3. 그들 외적의 형통함을 진술하고 있다(14절). “주여, 그들을 대적하여 나타나시옵소서.”

(1) “그들은 완전히 세상에 마음을 쏟고 있고, 주님이나 주의 은총에는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그들은 세상의 영에 의해 행하는 세상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 세상의 재물과 즐거움을 사랑하고 그것을 열심히 추구하며(그것을 그들의 사업으로 삼으며), 그 즐거움 속에서 안식을 찾고─그것을 그들의 복으로 삼으면서 세상의 추세에 따라 걸어갑니다. 그들은 금생에서 저희 분깃을 받나이다. 즉 그들은 이 세상의 좋은 것들을 가장 좋은 것으로서, 그리고 그들을 행복하게 만들기에 충분한 것으로서 간주합니다. 따라서 그들은 그것을 택하며 그들의 지복을 그 속에 안치하고, 그것을 그들의 주된 선으로서 지향합니다. 그들은 그것에 만족하여 휴식을 취하며 그들의 영혼은 그 속에서 편함을 얻습니다. 그리고 더 먼 곳을 바라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또 다른 생애를 위한 준비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이런 것들이 그들의 위로이며(눅 6:24), 그들의 좋은 것이고(눅 16:25), 그들의 상이며(마 6:5), 그들의 한 데나리온의 약속(마 20:13)입니다. 자, 여호와여, 이런 성품을 지닌 자들이 이 세상의 모든 재물보다도 주의 은총을 좋아하고 주님을 자기 소득으로 취함으로써 주를 영예롭게 하는 자들을(16:5) 대적하도록 지지하시고 장려하시겠습니까?”

(2) 그들은 이 세상에서 풍족을 누린다.

① “그들의 욕구는 증가되며 그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그들은 주의 (감추어진) 재물로 배를 채우나이다.” 

이 세상 물건들은 재물이라 불린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렇게 간주되기 때문이다. 반면에 영혼에게는, 그리고 영원한 복에 비하면 그것은 쓰레기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창조물의 여러 부분에 감추어져 있으며 섭리의 탁월한 시여 속에 가리워 있다. 땅과 그 땅의 충만함은, 아무리 세상사람들이 그것을 자기의 것으로 생각하고 그 속에 있는 하나님의 섭리를 잊을지라도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그곳에 감추어진 재물은 하나님의 것이다. 날마다 즐겁게 지내는 자들은 “주의 (감추어진) 재물로 배를 채우나”, 그것은 단지 “배를 채우는 것”에 불과하며(고전 6:13), 그들의 영혼을 채우지는 못한다. 그것은 영혼을 위한 양식이 아니며, 그들을 만족시킬 수도 없기 때문이다(사 55:2). 그것은 껍질이며 재이며 바람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의 배를 위할 뿐 그들의 영혼엔 관심이 없기 때문에 재물을 좋아한다.

② 그들은 무수한 가족들을 거느리고 있으며, 많은 재물을 그들에게 남겨준다. 즉 그들은 “자녀로 충만하다.” 그러나 자녀들이 아무리 많아도 그 목초지는 가득 차지 않는다. 

그들은 자녀들을 위해 충분한 것을 갖고 있으며 “그들의 남은 산업을 그들의 어린아이에게”, 그 손자에게 “유전”한다. 이것이 그들의 천국이며, 그들의 축복이며, 그들의 전부다. 

다윗은 “여호와여, 나를 구하소서. 내가 나의 소득을 그들과 함께 하도록 하지 마소서. 나를 치려는 그들의 계획으로부터 나를 구하소서. 그들은 매우 많은 재물과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주께서 내 편이 되지 않는 한 나는 그들과 겨룰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4. 그는 그의 소득과 행복이신 하나님께 자신이 의지하고 있음을 진술하고 있다. “그들은 이 생애에서 자신의 소득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런 자가 아니며, 이 세상의 것을 거의 갖고 있지 않습니다. 즉, 나는 그것을 갖고 있지 않으며 필요치도 않고 좋아하지도 않습니다(Nec habeo, nec careo, nec curo). 

내가 내 행복을 두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소망과 기쁨뿐입니다. 그것이 내가 바라는 것이고, 그 소망으로 나 자신을 위로합니다. 그리고 그것에 의해 이 세상에서 그들의 소득을 취하는 자들로부터 나 자신을 구별합니다.”

(1) 만족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은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의무며, 위안으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선한 마음과 선한 생명을 지녔던 그리스도의 의로써 옷입은) 의로움 속에서 믿음으로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아야 하며, 그를 항상 우리 앞에 모셔야 한다. 그리고 주의 아름다움을 묵상함으로써 날마다 즐거워해야 한다. 또한 우리가 매일 아침 일어났을 때 우리는 그의 말씀 속에서 우리 앞에 제시된 그의 형상을 기뻐해야 하며, 그의 새로운 은혜로써 우리에게 도장 찍혀진 그의 형상을 기뻐해야 한다. 하나님의 은총에 관한 우리의 체험과 그에 대한 우리의 확증에서 우리는 관능적인 즐거움으로 배를 채우는 자들이 갖는 것보다 더 큰 만족감을 느껴야 한다.

(2) 그것은 또한 저 세상에 있는 우리의 보상과 행복으로 간주될 수 있다. 

다윗은 앞의 시편에서도 이런 것에 대한 전망으로 끝맺었는데, 이 시편에서도 그렇게 하고 있다. 그런 행복은 의로움을 얻고 성별케 된 의로운 자들만을 위해서 예비되고 계획되어 있다. 그들이 깨어났을 때, 영혼이 사망에서, 육신의 잠에서 깨어났을 때, 그리고 육신이 부활해 무덤 속의 잠에서 깨어났을 때, 그들은 그 행복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 행복은 다음 세 가지 속에 있다.

① 하나님과 그의 영광을 직접 볼 수 있게 된다. “나는 주의 얼굴을 보리니”, 

그것은 이 세상에서처럼 희미한 거울을 통해 보는 것과는 다르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거기서 온전케 될 것이며, 증강된 지력이 그를 채울 것이다.

② 그와 같은 형상을 갖게 된다. 우리의 거룩함이 거기서 온전케 될 것이다. 

이것은 전자의 결과로 생긴다. 즉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라”(요일 3:2).

③ 이 모든 것으로부터 나오는 완전하고도 충만한 만족을 갖게 된다. “나는 만족하리이다.” 

그것에 크게 만족하리이다. 하나님 안에서, 그리고 그의 얼굴과 형상, 우리를 향한 그의 선한 뜻과 우리 속에 있는 그의 선한 역사 안에서만 영혼의 만족이 있을 수 있다. 그리고 그 만족까지도 우리가 천국에 가기 전까지는 온전케 되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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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eivdhsi"(4893, 쉬네이데시스) 의식 consciousness, 양심 conscience.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쉬네이데시스(Domoc.이래)는 쉬네이도(suneivdw, 4894: 함께보다,이해하다)에서 유래했으며, '의식, 양심, 성실함'을 의미한다.
디오, 스트라보, 플루타르크 등 저술가들은 어떤 사람이 자신의 행동들을 회고해 볼 때 자신을 정당화시킬 수 있는가 여부에 의거하여 그의 양심이 선한(아가데, 혹은 오르데)지 악한(데이네 혹은 포네라)지를 말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선한 양심은 평강을 누리는데 반해 악한 양심은 양심의 소유자를 사정없이 괴롭혀서 그로 하여금 고통을 느끼게 한다고 한다. 이에 관한 일례는 모친 살해죄를 지은 오레스테스(Orestes)의 비극에서 볼 수 있는데, 그는 양심을 자신을 파멸시키는 질병으로 보고 있다. 헬라 문헌에서 에리니에스(Erinyes)는 악한 양심의 병폐를 신화적으로 구현한 것이었다.
기독교 이전의 헬라 문헌은 거의 오로지 악한 양심에 관하여 언급하는데 반해 로마인들, 특히 시세로(Cicero)는 자주 선한 양심과 심지어 깨끗한 양심과 가장 좋은 양심에 관하여 언급했다는 사실은 주목할만하다. 양심은 자주 비난과 좌절의 성격을 띠고 나오는 실패와 악에 대한 회고적 지식인 것이다. 그러나 해야 할 일이 분명하게 정해져 있고 그 의무를 이행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로마 관리와 법률가의 윤리적으로 견실한 구조속에서는 그에 적절한 의무감이 쉽게 생겨난다.
양심에 있어서  한 인간 속에는 두개의 자아가 깃들어 있다. 즉 인간은 동일한 사물들을 각기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며, 서로 반대되는 두 개의 세력들,즉 질서를 지향하는 세력과 무질서를 지향하는 세력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것이다. 갈등은 과거의 무질서에 대한 지식으로부터 시작되며, 따라서 양심은 미래에 대한 준비보다 과거에 대한 평가에 더 깊이 관련되어 있다. 이러한 갈등이 존재론적인 것일 경우, 자아 성찰에 있어서 지식이 크게 작용하는 반면에 그 갈등이 윤리적인 경우에, 그 자아성찰에 있어서 도덕적 양심이 크게 작용하며, 이 두 요소는 역사적으로 실제적으로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특히 후기 스토아(Later Stoa) 학파(Seneca)에서 양심의 회고적 특성은 피타고라스 학파(Pythagoreans)의 영향을 받아 약화되었다. 양심은 신이 개개인에게 부여한 감시인(에피트로포스; 라틴어 테스티스 "증인" Witness)으로 생각되었다. 양심의 역할은 순리대로 살도록 인간을 인도하고 그의 도덕 발달을 지도하는 것이었다. 인간의 양심 속에는 그 사람의 행동에 대한 믿을 수 있는 방향 표지가 들어 있다(M.Poblenz, Die Stoa, Ⅰ, 1948, 320). 양심의 임무는 여전히 주로 이미 일어난 일 혹은 아무리 잘 봐주더라도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해 심판을 내리는 사람의 비판적 항소법원의 임무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양심이 규범적 안내자가 되는 근거가 되었다.(참조: C.Maurer, TDNT, Ⅶ 907).
2. 70인역본의 용법 
...명사 쉬네이데시스는 70인역본에서 3회만 나온다. 
전 10:20에서 마음을 번역하고 있는데 번역상 문제가 있는 듯하며, 집회서 42:18에서는 단순히 '지식'을 의미한다. 지혜서 17:11에서는 도덕적으로 나쁜 '양심'을 가리키며, 이 구절에서 나쁜 양심은 사법적인 개념을 지닌 것으로 재판관과 형집행자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구약성경은 양심에 해당하는 용어를 전혀 지니고 있지 않다.
....이것은 인간 본성에 대한 이해가 헬라인들과 다른데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옛 언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인간의 자기 자신에 대한 태도의 문제보다는 오히려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태도 문제가 더 중요하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단지 하나님과의 계약 관계의 통치하에 있었다. 그리고 자아에 대한 지식은 하나님으로부터 그의 말씀(시 139편)을 통하여 왔으며, 책임있는 행위를 가능케 하였던 이 말씀은 매우 가까운 곳에 있었으며(신 30:14), 선과 악은 이 말씀에 의하여 인지되었다.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으며(시 14:1),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었고, 양심은 자아를 하나님의 거룩한 뜻에 조화시키고자 하는 자발적인 마음이었다. 이스라엘인은 자기의 자의식을 탐색하는 데 보다는 하나님 앞에서의 자신의 책임성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다. 인간은 하나님께 신앙 고백을 하고 그의 율법을 순종으로 준행하고자 하였다.
이것은 구약성경의 고통받는 양심이 그 실체에 대하여 모른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양심의 소리는 그 고유한 본래의 가치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양심의 소리는 인간에게 그의 처신에 대한 설명을 요구하는 거룩한 재판관의 소리이다. 양심의 기능은 마음(히브리어 렙..레브)에 속해 있다. 이것은 내적 불안/불화=편치않음으로 나타난다. 구약성경은 이것을 인정한다(창 42:21; 삼상 24:5; 삼상 25:31). 양심의 소리의 울림근원과 절대기준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은 이러한 내적인 불화와 갈등(=쉼/안식에 들지 못함)에 있어서 결정적인 기준의 역할을 하였다. 즉,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을 정죄하고 참회하도록 촉구한다. 그리고 개인적인 회개를 통하여 인간의 죄를 용서하고 인간을 다시 새롭게 함으로써 인간을 죄로부터 자유롭게 해주기도 하였다(시 51편).
지혜서 17:10에서 악은 원래가 소심해서 제 입으로 자신을 단죄하며 양심의 가책을 몹시 받으면 언제나 최악의 경우를 생각한다. 여기에서 양심은 '한 사람 속에서 검사와 판사의 역할을 맡고 있다'.
필로는 "로마인 세네카(Seneca)가 들은 것만큼이나 높이 외치는 양심의 소리를 들었다."(M.Pohlenz) 그에게 있어서 양심은 자율적 항소 법정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에 의하여 형성된 규범적 실체인 것이다. 양심의 임무는 엘렌케인(유죄를 선언하다, 꾸짖다, 들춰내다) 즉 인간으로 하여금 죄를 자각하여 참회케 하는 것이다. '양심(영혼에서 산출되는 엘렌쿠스[elenchus])은 일단 깨어나게 되면, 고소자로 등장하여 양심 소유자를 기소하여 죄를 씌우고 수치를 당케 한다. 반면에 양심은 그를 바로 잡아주며 회개할 것을 권면하는 재판관으로서 지시하며, 양심은 설득하고 나면 기뻐하고 누그러진다'(Decal., 87). 그렇지 않으면 양심은 계속적으로 그 죄인을 괴롭힌다. 양심은 자비하신 하나님 품으로 이 죄인을 이끌기 위하여 이 모든 일을 수행한다. 필로의 양심 교리의 구약성경적 기반은 바로 이런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다.(참조: H.C.Hahn).
3. 신약성경의 용법 
명사 쉰네이데시스는 신약성경에서 30회 나오며, 복음서에는 사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어떤 사본들에는 요 8:9에서 이 단어를 사용한다.
1. 바울서신의 용법.
(a)  쉬네이데시스는 바울 서신의 여러 구절에서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는 문제에 관련되어 있다(고전 8:7이하; 고전 10:25이하). 이것은 고린도교회에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있었던 주장을 암시한다. 바울에게 있어서 양심은 의지와 지식 사이의 분열이나 판단과 행위 사이의 분열에 의하여 위협받고 있는 '자아 인식'을 의미하였다. 즉 양심은 아무런 편견도 없는 공평한 판단력이 아니라 뜻과 행위에 있어서의 '자아 인식인' 것이다.
바울은 이와 관련하여 두가지 사항을 피력하고 있다. 한편으로, 바울은 기독교인들이 이질적인 양심에 의해 통제되는 것에서 자유해야 한다고 선언하고 있다. 바울은 바르트가 "하나님 말씀으로 말미암아 자유롭게 된 양심"이라 부른 그것을 언급하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바울은 다른 사람의 보다 더 민감한 양심에 주의를 기울이라고 요구한다.
바울의 결정적 진술은 쉬네이데시스에 어떤 제한을 두는데, 그것은 자유와 책임을 동시에 가져야하는 것이다. 여기서 자유는 아직 우상들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채 자신이 참되신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완전한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는 연약한 자들을 위한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이런 이질적인 양심에 의해 통제되는 것에서 자유해야 한다. 바울은 바르트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자유롭게 된 양심'이라 부른 그것을 언급하는 것이다. 책임은 그리스도께서 연약한 자들을 위하여 죽으신 까닭에 인간의 연약함을 인식하고 그 연약함을 받아들이는 강한 자들을 위한 것이다. 바울은 다른 사람들보다 연약하여, 더 민감한 양심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연약한 자들은 우상들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는 것에 대하여 의혹을 품거나 근심하지 말아야 하며 강한 자들은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임의로 먹음으로써 연약한 자들로 하여금 의혹에 빠지도록 하지 말아야 한다.
피어스(C.A.Pierce)의 '신약성경에서 양심'(1955)이란 연구 논문은 이에 대한 이해를 도와줄 것이다. 피어스는 이 용어가, 일반적으로 우리가 그릇된 일을 행할 때 느끼는 고통이라는 도덕적으로 나쁜 부정적 의미를 지닌 일상적인 헬라어였다고 주장한다. 피어스는 이 용어가 양심을 표어로 사용한 고린도 교회를 경유하여 신약성경으로 들어왔다고 암시한다. 이는 구약성경과 복음서에서 이 용어가 나오지 않으며 고린도서와 후기 서신들에서 이 단어가 널리 사용되는 이유를 설명해 주고 있다. 고린도 교인들은 그 당시의 여러가지 절박한 문제들에 대한 그들의 태도, 특히 우상에게 바쳐졌던 고기를 먹는 관습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양심에 호소하고 있었다. 어떤 이들은 그들이 청결한 양심을 가지고 이 일을 할 수 있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그들은 이 고기를 먹는 관습이 허용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바울은 양심만이 변함없고 오류를 범치않는 안내자라는 사상을 비난하고 있다. 고전 4:4에서 바울은 우데 가르 에마우토쉬노이다(나는 내 양심에 거리낄 것이 아무 것도 없다, NEB)라는 동사형을 사용하여 이는 양심 그 자체로는 그가 행했을런지도 모를 어떤 비행에서 그를 무죄 방면시켜주지 못한다는 것을 제시해주고 있다. 어떤 사람은 그의 양심이 죽었거나 교육을 충분히 받지 못함으로해서 양심에 거리끼지 않을 수 있다. 행동의 옳음과 잘못을 결정하는데는 다른 요소들이 있다. 기껏해야 양심은 저지물에 불과하다.
후기 서신에서 바울은 기독교인이 우상에게 바친 고기를 먹는 예법에 관한 고린도 교회의 긴급한 문제들에 비추어서 양심의 한계점을 설명하고 있다. 연약한 형제는 우상들을 아무것도 아니라고 알고 있는 강한 형제의 본을 따라서 그 고기를 먹을 수 있다. 그는 그의 마음 속에 정해진 분명한 행동 원칙들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의미에서 연약한 것이다. 그는 그 고기를 먹고 나서 양심으로 인하여 고통을 당하는 것이다(고전 8:7, 고전 8:10, 고전 8:12).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민감하여 동시에 교육을 충분히 받지 못한 양심이다. 이 딜렘마로부터 헤어날 길은 '지식'에(고전 8:11이하) 의거하여 즉 양심에 의해 고통 당하지 않는 "강한" 형제를 모방하여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 의거하여 행동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고전 8:13).
고전 10장에서 양심은 다시 종속적 역할을 하고 있다. 다시 기독교인의 행동 동기로 사랑이 언급되어 있다(고전 10:23이하). 사실 고린도 교인들은 양심의 문제를 거론하기를 피해야 한다(고전 10:27, 고전 10:28, 고전 10:29). 이 문제는 보다 약한 사람과 그의 양심에 대한 관심이라는 보다 높은 차원으로 끌어올려진다. 신자는 시장에서 무엇이든 사서 먹을 수 있다. 하지만 양심의 문제들을 제기하지 않기 위해서는 식물의 출처를 묻지 않는 것이 상책이다. 그러나 약한 형제가 고기가 우상에 바쳐진 것이었다고 말하면 그것을 먹지 않는 것이 가장 좋다. 이는 고기를 먹는 사람의 양심을 더럽힌다거나 반신반의하는 습관에 젖어 듦으로써 그의 영성을 약화시키는 경우가 아니라 민감한 사람의 양심을 자극하는 것을 피하는 경우이다.
환언하면, 어떤 사람이 우리가 양심을 행동의 길잡이라고 부르는 것을 오로지 고통을 피하려는 수단으로만 삼는다면, 양심은 대단히 불완전한 길잡이가 될 것이다. 어쨌든 기능을 발휘하기 위하여 양심은 지식에 의존한다(고전 10:25이하). 이유는 양심 그 자체만으로는 그 고기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양심은 오로지 그 양심 밖에 있는 도덕적인 원칙들과 관련하여 효과적으로 작용할 뿐이다. 청결한 양심은 의로움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다(고전 4:4). 반면에 지나치게 예민한 양심은 다른 근거들 위에서만 해결될 수 있을 뿐인 딜렘마(dilemma)로 고통을 당하도록 유도할 수 있다(8장과 10장). 행동을 위한 궁극적 근거는 하나님의 사랑과 영광이다(고전 10:31이하; 참조: 고전 13:1 - 고전 14:1).
(b)  롬 13:5에서 "양심을 인하여"라는 문구는 세 가지의 가능한 해석을 할 수 있다.
① 우리의 마음 속에 자리잡을 수도 있는 악한 양심을 피하는 것이나,
② 양심이 제시하는 확신, 도덕적 고려에 따라 행하는 것이나,
③ 국가와 하나님의 뜻 사이의 결속 때문에 행하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여기서 롬 13장은 고전 10장과 달리 강압에 의한 복종이 아니라 행위와 자아 인식의 합일 안에서의 긍정적인 복종을 권면하고 있으며, 따라서 롬 13:6에 비추어 볼 때 "양심을 인하여"라는 문구는 ③의 의미를 지닌 것으로 보인다. 즉 신자들은 국가를 단지 하나님의 종으로 간주하여야만 하는 것으로서, 벧전 2:19도 역시 이 점을 나타내 주고 있다: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c)  양심은 다른 구절들에서 심판관의 기능을 지니고 있다.
① 하나님에 근거한 자의식(自意識)은 그 자체 좋은 긍정적인 것으로 확신할 수 있다. 따라서 바울은 그가 거룩함과 진실함으로 행한다고 확신시킨 그의 양심의 증거를 자랑하였다: "우리가 세상에서 특별히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써 하되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함은 우리 양심의 증거하는 바니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라"(고후 1:12; 참조: 요일 3:19이하). 이러한 양심의 증거는 하나님이 불어넣어 주신 것이다. 마찬가지로 바울은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는 다른 사람들의 양심 판단이 바울의 선교적인 삶과 사역의 성실성을 인정하기를 바라고 있다(고후 4:2; 고후 5:11). 이러한 판단은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하여 행해지는 것이다. 이러므로 단지 악한 고소적 양심을 회피하는 것만이 열망할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과 삶의 일치를 확인하는 선한 양심을 가지는 것이 한층 더 중요한 것이다.
② 롬 9:1에서 바울이 그가 거짓말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증거해줄 증인으로서 그의 양심에 호소하고 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여기서 양심이 사도의 큰 슬픔을 언급할 때 이 소리는 단지 고통하는 것 뿐만 아니라 성령으로 말미암아 확인될 때 맹세의 의미를 지닌다.
③ 롬 2:15에서 이방인들의 양심은 인간의 책임을 지적한다: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여기서 비록 인간의 양심이 죄를 고소할 뿐 아니라 자신을 변호할 수 있을지라도 양심은 사법적 기능을 지니고 있다. 일반적으로 바울의 서신들에 있어서 양심의 고소적 역할은 다소 약화되어 있는데, 이는 율법이 그 무엇보다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예리하고 신랄한 고소자로 작용하고 있으며, 이 율법마저도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는 하나님에 의하여 기각되기 때문이다.
2. 다른 서신들의 용법.
이 서신들에는 양심에 대하여 그것을 아가도스(ajgaqov", 18: 선, 행 23:1; 딤전 1:5; 딤전 1:19; 벧전 3:16; 벧전 3:21), 카다로스(kaqarov", 2513: 정결, 딤전 3:9; 딤후 1:3), 칼로스(kalov", 2570: 좋은, 히 13:18), 아프로스코포스(ajprovskopo", 677: 거리낌이 없는, 행 24:16), 포네로스(ponhrov", 4190: 나쁜, 악한, 히 10:22)와 같은 특별한 성격에 의해 특징 짓는다.
(a)  사도행전. 행 24:16은 사실상 행동 규칙을 정하고 있다: "나(바울)도 하나님과 사람을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노라."  마찬가지로, 바울은 유대 지도자들이 모인 회합에서 다음과 같이 호소하기 시작했다: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날까지 내가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행 23:1).
(b)  목회 서신들은 선한 양심을 크게 강조한다. 이 서신들은 "저희 마음과 양심이 더러운" "더럽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딛 1:15)과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딤전 4:2)에 관하여 언급한다. 이것과 대조로 그리스도인들은 "믿음과 선한 양심"(딤전 1:19; 벧전 3:16)을 가져야 하며, "청결한 양심으로 섬겨야"(딤후 1:3) 한다. 따라서 선하고 청결한 양심은 그리스도인의 특색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에게는 '양심의 판단과 믿음의 판단이 일치하기' 때문이다(W.Schrage).
딤전 1:5은 "청결한 마음" 및 "거짓 없는 믿음"과 함께 양심을 활동 중에 있는 사람의 근원으로 지적한다. 요약해서 말하면 양심은 "믿음의 비밀"이 발견될 수 있는 장소로 간주될 수 있다(딤전 3:9). 이것은 세례(침례)의 본질인(벧전 3:21) "청결한 양심을 달라고 하나님께 호소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이유이다. 같은 구절에서 청결한 양심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결부되어 있다.
(c)  히브리서. 히 9:14에서 "그리스도의 피"가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도록 죽은 행실에서"부터 양심을 깨끗하게 한다고 선언한다. 이 대목에서 신약성경의 양심에 대한 이해가 기독론적 근거 위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볼 수 있다. 대제사장이 매년 한번씩 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던 속죄일 의식의 상징을 사용해서 히 10:22은 신자들에게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스스로 새 생활에 들어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것을 촉구하고 있다. 후기 유대교는 계속 제사를 드렸음에도 불구하고 죄의식에서 완전히 해방되지 못했음을 깨달았다(히 9:9; 히 10:2). "우리에게 선한 양심이 있는 줄을 확신하노니"(히 13:18). 이는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적 희생만으로 인한 것이다.
이와 같이 이해한 양심에 대한 기독교 그리스도인의 이해는 예수 그리스도의 용서하시는 권능에 대한 믿음으로 인하여 변화된 것이다.
(참조: H.C.Hanh; C.Maurer; Walter Bauer; J.H.Thay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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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8:9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행 23:1 바울이 공회를 주목하여 가로되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날까지 내가 범사에 (+18)[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하거늘
행 24:16 이것을 인하여 나도 하나님과 사람을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노라
롬 2:15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롬 9:1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롬 13:5 그러므로 굴복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노를 인하여만 할 것이 아니요 또한 [양심]을 인하여 할 것이라
고전 8:7 그러나 이 지식은 사람마다 가지지 못하여 어떤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고로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지느니라
고전 8:10 지식 있는 네가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것을 누구든지 보면 그 약한 자들의 [양심]이 담력을 얻어 어찌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지 않겠느냐
고전 8:12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
고전 10:25 무릇 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고전 10:27 불신자 중 누가 너희를 청하매 너희가 가고자 하거든 너희 앞에 무엇이든지 차려 놓은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고전 10:28 누가 너희에게 이것이 제물이라 말하거든 알게 한 자와 및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
고전 10:29 내가 말한 [양심]은 너희의 것이 아니요 남의 것이니 어찌하여 내 자유가 남의 [양심]으로 말미암아 판단을 받으리요
고후 1:12 우리가 세상에서 특별히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써 하되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함은 우리 [양심]의 증거하는 바니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라
고후 4:2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궤휼 가운데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천거하노라
고후 5:11 우리가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을 권하노니 우리가 하나님 앞에 알리워 졌고 또 너희의 [양심]에도 알리워 졌기를 바라노라
딤전 1:5 경계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나는 사랑이거늘
딤전 1:19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딤전 3:9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야 할찌니
딤전 4:2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딤후 1:3 나의 밤낮 간구하는 가운데 쉬지 않고 너를 생각하여 청결한 [양심]으로 조상 적부터 섬겨 오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딛 1:15 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나 더럽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아무 것도 깨끗한 것이 없고 오직 저희 마음과 [양심]이 더러운지라
히 9:9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이에 의지하여 드리는 예물과 제사가 섬기는 자로 그 [양심]상으로 온전케 할 수 없나니
히 9: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히 10:2 그렇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케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어찌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리요
히 10:22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히 13:18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우리가 모든 일에 선하게 행하려 하므로 우리에게 선한 [양심]이 있는 줄을 확신하노니
벧전 2:19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벧전 3:16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벧전 2: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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