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생.시133:3 ]] = 하이임 아드-하올람.. חַ֝יִּ֗ים עַד־הָעֹולָֽם. ...Q과 그분께서 보내신자 예수..를 앎
@헤임<헤이트-요드-요드-멤>...부활생명의 그영께서 일하시는 그손 잡고, 그대로 받아 살아가는바 그분의 담지자/그릇..
@아드<아인-달렛>...자신을 완전히 열어 교통하시는, 만물을 포함하시는, 으뜸/머리요 참생명빛이시라, 산출-발아된 그 생명가지로 생명수 샘으로부터 마시도록 그 샘을 터트려 그 자신이신 생명수 공급 받아 살아감 통해 그분 자신의 어떠함 100% 그대로 살아가는바 그 증인, ((곧 주님은, '베레시트' 그대로 참제자-엘로힘 판박이-반려/동반자-신부/아내/연인 만드사 그분의 충만 넘침, 곧 제2의 성육신, 예수로 살도록, 아버지-아들<Q과 그분께서 보내신자 예수>의 거하시는바, 상호거처 이루시는 분))
@하_올람<헤이_아인-바브(상)-라멛-멤>..#올람 = 영생<아인-바브(상)-라멛-멤> :: 생명나무((Q, 예슈아 메시아흐))로부터 결합한 하나, 곧 나무 본체로부터 발아-산출된 가지((이미, 그분의 모든 속성으로 다 만들어 놓으신바, 그분의 참 생명빛...완전히 열어주신바 그 막힘없는 상호 교통을 통해 본체로부터 생명을 공급받아 사는바, ((모든 노폐물, Q으로부터 오지않은, 삿됨은 교환-패스))..그분의 반려-동반자-함께 멍에 맨자-연인/아내/신부, 참제자..[[마치, 신성한 참 인성의 Q 담는 그릇으로서 이땅을 살아가셨던 분 예슈아 메시아흐!!, 그분 처럼]] Q,.신성한 그분을 담는 참 인성의 담지자/.그릇으로 살아감의 모든 시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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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 베_엘레 헴 하_예이 //하_올람 라_다아트 오트카 //키 아타 하_엘로힘 레다바르 베_에트-야후슈아 하_마쉬아흐 아쉬르 샬라흐티]
==@베_엘레<바브, 알렙-라멛-헤이> @헴<헤이_멤>..(영이신 Q, 곧 성령으로 난바, 성령으로) 전능Q을.. 호흡함으로써 사는 그릇이니.. @하예이<헤이트-요드(점)-요드>..[전능의 능력으로 행하시는 분]부활생명의 그영께서 친히 사역하여 이루시는바.그대로 살아감이라.
==@하_올람<헤이_아인-바브(상)-라멛-멤>..영생, 곧 (발아된)생명가지란 (그 생명-인격이 Q의 참생명-인격으로 대치된) 참제자, 곧 그분의 그릇이기에.. @라_다아트<라멛_달렛-아인-타브>..참제자란 (본체에 붙좇아 결합된바) 결합한 하나로서의 생명가지의 온전케 됨이 무엇인지 알며 100% 그대로 빼어닮고 살아가는자라 하나니.. @오트카<알렙-타브-쿠프>..Q의 진리/형상(곧 알렙에서 타브에 이르는 그 모든 속성-성품-인격-일하심 그 내용 모두) 그대로가 완전히 다 체득-완성/완료되도록 만드사 이루어 가시는도다.
==@키<카프-요드> @아타<알렙-타브-헤이> @하_엘로힘<헤이_알렙-라멛_헤이-요드_멤> : Q의 호흡해내신바..친히 말씀 공급하사 가르치시는 전능 아버지 Q-그분의 말씀이신 '여호와'의 일하심 그대로 붙좇아 따름으로써, 그분을 담는 합당한 그릇/담지자 (성령께서 이루시나니).."베레시트'에 동심합의 이루고 하나됨의 일치, 그 동심합치로!, 그 열납의 기쁨 알며 껴안고 기꺼이 절대적 신뢰로 전심으로 맡겨 따르며 베푸시는 말씀 그대로 수용/적용-조성/빚어 다루심(그분을 머리 삼고 맡겨드림::열어-비워-내어드림-내려놓음)-대치됨 감수하며!! 이루시게 허용해드림이니..바로 그분 행하심으로 하나로 붙좇음, 곧 그분의 모든 속성 그대로 빼어닮아 그대로 사는 존재, 곧 엘로힘 판박이 됨이라.. 곧, 참제자. @레_다바르<라멛_달렛-베이트-레이시>..(그리하여), 결합한 하나 이루신바 그 말씀 안에 계시는 ('베레시트' 이루시는), 그 실제의 영, 100% 그대로 살아내는 참제자 됨으로써 살아가며
--@베_에트-야후슈아<바브,알렙-타브, 요드-헤이-바브(중)-쉰(우)-요드-아인> @하_마쉬아흐<헤이_멤-쉰(우)-요드-헤이트>..또한!!, 예슈야의 모든 어떠함, 곧 '메시아흐'를 살아가는 자가 되나니, 곧 , 지고지선의 진복!! --@아쉬르<알렙-쉰(우)-레이시> @샬라흐타<쉰(우)-라멛-헤이트-타브> 엘로힘-샤마임-아쉬르 그대로 이뤄내실바, 당신의 형상, 그 모든 어떠하심을 부으사 주께서 위임하여 보내신바, 부활생명의 영으로 사는 삶 온전히 이루게 하심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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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어로 영생은 'עולם(올람)' .....시공간 개념 상, 시대 구분으로는 두 가지로 구분. .. 바로 당시는 구약 시대 말이었는데...어디에 속할까, (העולם הזה:올람 하제)와 (העולם הבא:올람 하바) ?? --이스라엘 사람들이 겪었던바 비참한 당시 시대에서는, 다가오는 메시야 시대에 소망을 두고 살아갈 수밖에 없었음.. ....구약에서 말하는 영생은 [예수님 오셔서 이루실바] 오는 시대를 콕 집어 말하는 것이었을 수 있음..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선언하시는 바에 대해 분명하게 그 영적 의미를 살펴보고 적용할 필요가 있다....진정한 의미에서라면!!, ((이 세상이 창조된 그 시점부터!!)) "올람 하제와 올람 하바... 이 두가지 시대를 동시에 살아가고 있으며 [물론!! 영원 이번부터 영세이후까짖 영존하시는 분, 창조주 Q, 주 보시기에는 이미!! 하_올람 안에 있다], 즉 이미 영생을 살고 있다"고 선언하고 계심이다... 즉, 비록 중생성도마다 이땅을 딛고 살고 있는한... 엘로힘 판박이로서 Q 담는 그릇됨이 [이미, 그러나 아직] 만들어져 가고 있기 때문....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절대 진리의 말씀이시요, 중생 성도마다 누릴 바 참믿음 발휘함으로써 무한광대하신 주님, 영이신 Q, 영과 혼의 구주요, 동시에 몸의 구주이신 ((영혼몸, 전존재의 구주!!)) 그분 자신을 이땅에서 지금-현재적으로 누릴 수 있도록 "헤이"와 "요드"를 선물로 적용하고 계시기에.. 매순간 새로이, 매일 새로이 혼의 구원인바!!..."영생-하올람 하제 + 하올람 하바, 새로운-하다쉬"를 누리게 하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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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다<요드-달렛-아인>,.[일하시는 Q, 여호와 + 결합한 하나(달렛) + 생명가지/분천/눈(아인)] = 참생명-참빛 비추사 속속들이 다 아시는바, 여호와의 산출-발아해 내신바 그 생명가지 됨<결합한 하나-교통하는 머리와 으뜸이신 분과 상호 주목/응시/앙망/교통으로 아는바, 막힘없이 서로 알며 그분 자신을 아낌없이 공급하사 완전히 빼어닮은 판박이 만드심..((거꾸로 읽어보면..아인-달렛-요드 = 증인으로서 행하다))..중요한 것은 제한 받지 아니하시는 그분을 제대로 알도록 , 그분을 제한하지 말라, 오직 그릇된 지의 마음 지경을 넓힘에 있다!!
ידע (야다)는 히브리어의 원시 어근 동사. 기본적인 의미는 "알다"이지만, 이 단순한 번역으로는 성경 히브리어에서의 깊이 있고 광범위한 용법을 포착하기 어렵다. 이 단어는 히브리 성경에서 900번 이상 나타나, 가장 자주 사용되는 동사 중 하나다.
1. 의미 범위
ידע의 의미 범위는 꽤 넓다..---인식하다, 보다, 알아내다 ... 경험을 통해 알다... 인정하다, 시인하다, 고백하다... 고려하다 ... 사람을 육체적으로 알다, 성관계를 갖다
2. 히브리 성경에서의 용법
첫째, 인지적 지식 : 가장 기본적인 의미에서 ידע는 인지적 지식이나 인식을 나타낸다. 예를 들면, "이제 내가 여호와께서 자기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구원하시는 줄 아노니(ידעתי)" (시편 20:6)라는 구절이 있다.
둘째, 경험적 지식 : ידע는 종종 경험을 통해 얻은 지식을 의미...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טעמו וראו).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편 34:8). 여기서 "맛보다"(טעמו)와 "알다"(וראו)가 병행되어 경험적 지식을 암시한다.
셋째, 관계적 지식 : ידע의 가장 중요한 측면 중 하나는 관계적 지식, 특히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는 데 사용된다는 것. 예를 들어, "내가 광야 곧 매우 메마른 땅에서 너를 알았거늘(ידעתיך)" (호세아 13:5)라는 구절이 있다. 이 용법은 단순한 인지적 인식보다는 친밀하고 개인적인 지식을 의미한다.
넷째, 성관계 : ידע는 또한 성관계의 완곡어법...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ידע)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창세기 4:1)에서 사용되었다.
다섯째, 신학적 중요성 : ידע를 통해 표현되는 히브리 사상에서의 "앎"의 개념은 성경 신학에서 깊은 의미를 지닌다. 이는 단순한 지적 지식뿐만 아니라 관계적 친밀함, 언약에 대한 충실함, 도덕적 책임을 포함하고 있다.
선지서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는 하나님의 탄식은 인지적 인식의 부족이 아니라 언약에 대한 충실함과 친밀한 관계의 부족을 의미한다
--. "소는 그 임자를 알고(ידע)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ידע)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이사야 1:3)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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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내가 여호와께서 자기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구원하시는 줄 아노니(ידעתי)" (시편 20:6)
--- עתה ידעתי כי הושיע יהוה משיחו יענהו משמי קדשו בגברות ישע ימינו׃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טעמו וראו).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편 34:8)
--- טעמו וראו כי טוב יהוה אשרי הגבר יחסה בו׃
"내가 광야 곧 매우 메마른 땅에서 너를 알았거늘(ידעתיך)" (호세아 13:5)
--- אֲנִ֥י יְדַעְתִּ֖יךָ בַּמִּדְבָּ֑ר בְּאֶ֖רֶץ תַּלְאֻבֹֽות׃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ידע)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창세기 4:1)
--- וְהָ֣אָדָ֔ם יָדַ֖ע אֶת־חַוָּ֣ה אִשְׁתֹּ֑ו וַתַּ֙הַר֙ וַתֵּ֣לֶד אֶת־קַ֔יִן וַתֹּ֕אמֶר קָנִ֥יתִי אִ֖ישׁ אֶת־יְהוָֽה
"소는 그 임자를 알고(ידע)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ידע)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이사야 1:3)
---יָדַ֥ע שֹׁור֙ קֹנֵ֔הוּ וַחֲמֹ֖ור אֵב֣וּס בְּעָלָ֑יו יִשְׂרָאֵל֙ לֹ֣א יָדַ֔ע עַמִּ֖י לֹ֥א הִתְבֹּונָֽ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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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몸, 유기적 생명 공동체, 단체적 그리스도의 표현인 교회를 건축함]]..[[사랑이신 아버지/생명(영생)---아버지의 이름/거룩한 진리 말씀(누림과 보전, 보내심)---영광(체현과 표현)/교회(상호 거처/처소-거함-누림 :: 신성과 인성의 결합mingling)한 하나됨]]
##주님이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당신의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당신을 영화롭게 하옵소서..17:1] 기도하셨는데, 아버지께서 아들을 영화롭게 하시려는 바 그 때란 무엇이며, 영화롭게 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이며 어떤 방식으로 영화롭게 된다는 것인지를 살펴보자...<이제 임박한 그 때>란 아들의 십자가죽음에 뒤따르는 부활의 때요, 영화롭게 됨이란 본래 가지고 계셨던 아들안에서 그 자신의 모든 영광을 나타내셨던 아버지가 부활을 거쳐서 이루어지는 바 아들의 영광의 회복을 통해서 동시에 회복됨이니, 이 땅의 육신 입어 오신 바 그 모든 제한을 벗어버리고 부활의 몸으로 해방되어 나타나심으로써 아버지는 아들안에서 아들을 통하여 동시에 영화롭게 되셨음이다.... 아버지께서 아들안에서 아들을 통해 영화롭게 되시도록 하는 방법으로 택하신 수단은 교회를 통해서(교회에 의해서)인데, 교회가 거듭나고, 거룩케 되고, 십자가애 못박히고, 영광안에서 그리스도와 연합되었을 때 하나님의 아들은 올바르게 표현되고 나타나게 되는 것이었음에 주목하라....하나님의 아들은 함께 하나된 교회와 하나됨을 통해서, 유일한 우주적 교회인 그리스도의 몸에 의해서 영화롭게 되실 것이다....이는 결국 교회의 하나됨의 여부에 달려 있다. 그러기에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되게 하옵소서...17:11]라고 기도하셨다.... 주님의 기도를 살펴본다면 3단계로 구성된 하나됨이 필요함을 보게 된다.
.... 여기의 하나됨의 그 첫째 단계(요인)가 <아버지의 이름안에서 보전되는 문제>임을 본다....아버지의 이름의 실제는 아버지이 신성한 생명이기에 결국 참된 하나됨의 첫째 요인은 아버지의 신성한 생명을 가진 아버지의 그 이름이다...이 <아버지의 신성한 생명>은 17:2에 언급된 <생명>으로서 이제 영생(곧 영원한 생명)이요, <하나님과그의 보내신 자 JC를 앎>이라 정의하고 계신다...한 걸음더 나아가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권위...참된 권위는 오직 하나님의 참사랑에서만 유래됨)]를 주셨다고 말씀하셨음에 유의하라..
.... 그 두번째 단계(요인)는<거룩한 말씀 안에 있는> 하나됨이다....17:21은 놀랍고도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이 구절에서 하나는 상호내재를 통해서 이루시는 TUQ의 하나됨인데, 믿는 이마다 TUQ 안에 있을 때에만 하나됨을 갖게 됨을 의미한다...먼저는 14장에서 본 것처럼 오직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음> 통해서였다...이제 17:17, 18절을 21절과 함께 동시에 취해야 한다. 17, 18절은 [*17.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18.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같이 나도 저희를 보내었고], 17절은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17절에서 믿는 우리는 거룩케 하시는 말씀을 갖는다....이 거룩케 하는 말씀은 TUQ으로부터 세상으로 미끄러짐을 예방할 뿐 아니라 미끄러지더라도 세상으로부터TUQ께로 돌아가도록 분별하는, 거룩케 하는 말씀이다...그러므로 참 하나됨의 두번째 요인은 거룩한 말씀에 의해 거룩케 됨을 통한 TUQ안에 있다.
.... 그 세번째 단계(요인)은 <신성한 영광 안에 있는> 하나됨이다...17:22절에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에 하려 함이니이다]....<영광>이란 여기에서는 그분의 충만함 안에서 아버지를 표현하도록 아버지의 신성한 생명과 본성으로 아버지에 의해 아들에게 주어진 <아들의 명분>으로서, 그 <신성한 영광> 안에는 네 방면, 곧 아들의 명분, 아버지의 생명, 아버지의 신성한 본성, 그 분의 충만함 안에서의 아버지의 표현이 있게 되며 이 네가지를 합한 것이 신성한 영광과 동일하다. 믿는 우리들마다 모두 아들안에서 아들의 명분을 가지고 있음을 기억하라..이때에야, 23절[곧 내가 그들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들로 하나 안으로 온전케 하려 함은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라고 말씀하심으로써 하나됨 안으로 온전케 됨은 여전히 하나되신 TUQ<아버지와 아들> 안에, 곧 아들안에 있는 것<즉, 신성과 인성의 연합mingling 통해 상호 거함>에 관계된 것임을 본다.... 어어서 24절애서는[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이것은 장래에 있을 일시적 달콤함이 아님에 주의하라....이 말씀에 사용된 단어들의 시제는 철저히 현재 시제, 즉 바로 지금 오늘 체험케 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 기도의 응답은 첫째로 부활의 날에 응답되었고, 둘째는 교회가 세워진 날 응답되었다. 교회가 세워졌을 때 모든 제자들은 동일한 영광으로 그 분의 모든 충만함 안에서 아들 안에 계신 아버지를 표현하도록 신성한 생명과 신성한 본성을 가진 아들의 명분 안으로 인도되었다. 지금 우리 모두는 아들과 함께 영광 안에 있다!!.
...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어떤 이들은 첫단계에, 어떤 이들은 두번째 단계에, 소수의 사람들은 주님위 긍휼하심을 입어서 세번째 단계 안에 있음을 경험한다. 이 세번째 단계에 이르러서야 주님의 기도는 성취될 것임을 명심하고 추구하라. 그 때에 비로소 진정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건축을 통한 상호 거처-상호 처소-상호 거험-누림-기업됨이 온전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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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영원하신 뜻은 TUQ 아빠 아버지의 영광 표현인 그리스도의 교회(몸)를 Q의 아들들로 건축함에(세움) 있음...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유기적 공동체의 지체로서, 자녀마다 <아버지께서 JC사랑하심처럼> Q의 사랑받는 (양자로서 앎이 아니라 생명을 그대로 분배 받은) 영적 친자녀됨에 대한 자각따라 <모든 거리낌마다 주께 토설하여 버림으로써 주의 거룩하신 능력의 손의 역사를 친히 이루시도록 산 믿음 발휘하며> 맡겨주신 말씀대로 실행함에 달려 있음... 또한 그리스도의 계명(서로사랑)함이 관건인데, 교통과 연결을 가능케하는 것은 오직 생명과 Q이 부어주시고 실행하게 하시는 사랑안에서 말씀 준행함임을 기억함..
##**23절을 보자..[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하나 안으로 온전케 하려 함은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라고 하심을 볼 때, [아버지께서 주신 주님의 소유된 사람 안에 아들이, 그 아들 안에 아버지께서 계심 통해 하나(하나됨) 안에서 온전케 되는 것은 여전히 아버지 안과 아들 안에 있는 것과 직접 관계됨을 볼 수 있고, 24절에서는 [아버지여 내게 주신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라 말씀하시는 바, 주님은 신성한 영광 안에 계셨으며 아버지께서 그에게 주신 모든 자들 또한 영광 안에서 그분과 함께 있기를 기도하신다....이것은 철저히 현재 시제, 곧 지금오늘도 그리스도의 영광 보고 누림 체험이 가능함을 강조하고 계시기에 그 체험을 얻도록 믿음으로 추구해 들어 갈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이미 제자들은 두번, 부활의 날에, 그리고 교회가 시작된(세워진) 성령강림의 날에 응답되었음을 체험하여 알고 있는 것처럼, 모든 제자들은 동일한 영광 안으로, 그분의 모든 충만함 안에서 아들안에 계신 아버지를 표현하도록 신성한 생명과 신성한 본성을 가진 아들의 명분 안으로 인도되었다. 따라서 믿는 우리는 모두 아들과 함께 영광 안에 있다)....마지막으로 TUQ의 영화롭게 되심 안에 살기 위하여서는 그 전제조건이 [자기부인, 자기 십자가 짐 = 날마다 나는 죽노라]의 십자가에 못 박힘을 깨닫는 것의 필요성을 절감하는 것이 극히 중요하다....이것이 그리스도 안에 하나됨의 최종단계라 할 수 있는데, 이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건축된다.
....요14장에 계시된 <상호 거처>는 출26장의<성막>으로 예표-묘사-표현됨을 볼 수 있어야 한다...성전이나 성막은 단지 하나님의 거처일 뿐 아니라 동시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거처였음을 알 수 있다....시27:4를 보라 [내가 주님께 청하였던 한 가지 일 곧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나로 내 생전에 주의 집에 거하며 주님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그의 전에서 사모하게 하실 것이라].
...성막은 48개의 널판으로, 사람을 뜻하는 6이라는 기본수에 부활(새로운 출발)의 수 8을 곱한 것이요, 갓 태어난 남아의 할례를 행하는 날(레 12:3)이요, 주님의 부활의 날(요20:1)이기에 48은 부활안에 있는 인성을 의미한다. ...인성을 상징하는 48개의 나무 판자는 금으로 덮여 있었고 인접부마다 서로 두 촉을 내어 맞물려 연결되도록 만들어 졌는데(출26:29) 금은 신성한 본성과 신성한 영광을 포함하는 신성을 상징하기에, 금으로 입혀진 48개의 나무 널판은 신성한 영광을 가진 신성한 본질을 상징한다.... 또한 덮여진 금 위에는 금고리들이 있었고 널판들을 연결하여 하나되게 하는 금으로 된 연결 막대가 있었기에 건축은 진정 연결하여 하나됨이라 할 수 있다....연합시키는 요소는 금이었다. 널판들 위에도 금이 덮여 있었고 금고리들에도 싸는 금이 있었고 금 고리들 간에 연결하는 금 막대들이 있었던 바 하나됨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금, 곧 거룩함이었다.
... 오직 <천연적인 타고난 인성이 아니라> 부활의 인성과 함께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은 금으로 상징된 신성한 생명과 본성과 영광이 연합하게 하는 요인인 바 믿는 우리의 하나됨은 우리 자신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명과 본성과 영광과 표현이신 TUQ 안에 있다.
...계시록에 와서는 하나님의 집 건축 역사의 궁극적 완성인 새 예루살렘을 보게 되는데 그것은 단순히 쌓아올려 놓은 것이 아니라 건축된 것인데 그 모습은 벽옥이며,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의 모습도 벽옥으로 묘사됨을 보는데 이 벽옥은 하나님의 표현이자 하나님의 모습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온 새 예루살렘은 하나님과 같은 하나된 거룩함을 보일 것이다...예루살렘 사면은 그 어느쪽에서 보든지 벽옥의 모습을 나타내게 되어 있다.
... 기억해야 할 강조점이 하나 더 있다.. 계시록의 일곱 교회들은 비록 [분명히 지양돠어져야 할 요소들인] 소극적인 것 안에서는 서로 어느정도 구분되지만 [JC를 믿은 모든 교회들은 Q을 표현하기 위한 그들의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가지기에] 적극적 긍정적인 것 안에서는 하나도 다름이 없이 모두 동일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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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하나됨, 진정한 그리스도의 몸을 세움(건축)은 ::: 성령안에서 <자기부인, 자기 십자가 짐, 날마다 나는 죽노라의 실행, 곧 >육에 속한 바 자신을 잃어버림 통해서 이루시는데, 3단계, 즉 ^1.영생에 의해, 아버지의 이름 안에서(17:6-13...독생하신 아들 안에 계신 아버지), ^2.거룩한 말씀에 의해, 거룩케 됨 안에서(17:14-21...실지로 살아 생동하는 거룩케 하는 능력을 가진 진리 말씀과 동행하며 그안에 거함으로써 보냄 받은 자로서 세상으로부터 분별하여 거룩케 함 받은 하나됨을 보전하고 거룩하고 순전함의 모본 지키며 회복하기), ^3.TUQ 표현을 위한, 신성한 영광 안에서(17:22-24) 하나됨<...영광은 JC께서 Q의 많은 아들들마다, 단체적 그리스도의 표현인 유기적 공동체인 교회에게 위임해 주신 바, 신성한 생명과 본성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들의 명분임...그분의 모든 충만안에서 아버지를 대표하고 표현 가능케 함...전제조건은 자신을 부인하고 잊어버려야 함, 곧 날마다 나는 죽노라,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것들을 실행함 그 안에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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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영생에 의해 아버지의 이름안에서]
영생[영원한 생명, 영원 생명]은 아버지의 이름의 실제(나 자신은 아버지의 분배된 분신이요 아버지는 원본이라는 의미)로서, 아버지 이름은 아버지이며 아버지의 실제는 영원 생명이다(육신의 아버지의 실제는 그의 생명의 원본인 것처럼).
..따라서 이 칭호의 실제화[체득]가 일어나야 한다...아버지는 생명의 근원(아버지께서 자기속에 생명이 있음..요5:26)인데, 이는 생명의 번식과 증가<산출>를 위한 것이며, 아버지를 표현하기 위해 아버지에게서 많은 아들들이 태어나게 되는데(요1:12-13), 아버지는 기계적 제조 방식이 아니라 낳음을 통해 생명을 산출하는 <신성한>낳는 생명을 가지고 계심.
...이 아버지 이름을 부를 때, [믿는 이들은 아버지의 이름안에서 하나]라 말할 때 아버지의 신성한 생명안에서 하나임을 의미하고 있는 것.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나님(엘로힘..창1장)> <여호와(영존하신 분...창2장)>로 구약에서 계시되었으나 <아버지>라는 이름은 사9:6, 사63:16, 64:8 등에서 가볍게 언급되고 있을 뿐이지만....신약에서는 특히 마태복음에서(마6:9)에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로 부를 것을 가르치고 계심.
...아버지는 우리의 양부, 우리는 그분의 양자가 아니라 실지로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영적 측면에서는] 그분에게서 태어나서 그분의 생명을 가지고 있기에 우리 아버지는 생명안에서 우리의 아버지, 참된 아버지이다.
...[아바 아버지(롬8:15-16, 갈4:6)]라 <달콤함 가지고>부르짖는 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함이 된다는 것을 기억하자....왜냐하면 JC는 아버지의 이름안에서 오셨고(5:43), 아버지의 이름안에서 역사하셨기 때문임(10:25)...<아버지의 이름 안에>란 <아버지의 실제안에>를 의미하는 바, 아들은 아버지와 하나이기때문이며(10:30), 아들은 아버지의 이름안에서, 즉 아버지의 실제 안에서 오셨고 역사하셨음...또한 아들은 아버지와 하나이기에, 아버지의 어떠하심안에서 믿는이들에게 아버지를 나타내셨는데, 그들은 <아들을 보았을 때 아버지를 보았다(14:9)>고 언급하심은 아버지는 아들 안에서 표현되셨기 때문임.
...또한 JC는[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저희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17:26]라 하셨는데 이는 단순히 가르침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지고지선>최선의 길, 곧 제자들 안으로 생명을 넣어줌 통해서 아버지의 이름 알리심을 이루신다....(이것은 육신적으로 볼 때에도 그러한데, 친아들이 아닌 양자로서는 그의 아버지를 참되게 알기란 훨씬 더 어렵다)... 주 예수께서 이제 부활안에서 영으로 오사 내주하시며 살아계심 통해 넣어주신 그 생명으로 인해 아버지의 생명을 가지고 있는 우리는 생명안에서 또 본성에 있어서 아버지의 어떠하심과 동일하기 때문에 우리는 자연히 아버지를 알게 되는 것이다.
...또한 , [그들은 당신의 말씀을(로고스..항상 있는 말씀) 지키었나이다..17:6]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레마..즉각적인 말씀들) 나는 저들에게 주었사오며 저희는 그것들을 받았나이다..17:8]라 하신 그대로, 로고스와 레마는 둘 다 주님이 믿는 이들에게 영생을 넣어주시는데 사용되는데, 로고스는 <성경안에 기록된>항구적인 말씀으로서 언제나 동일하지만, 레마는 <로고스를 읽을 때> 성령께서 나를 감동시키기 위해 한 문장이나 한 구절 또는 심지어 간단한 단어를 사용하실 것인데((튀어나오게 하신다!!!)) 그 말씀은 즉각적인 말씀이 될 것이며, 이를 통해 공급 받는 <아버지의 실제인> 신성한 생명으로 인해 찬양과 감사, 아버지를 누림의 산 경험이 있게 된다.
...Q의 말씀을 듣고 받았을(영접했을) 때, 우리는 그 말씀에 의해 거듭났고(벧전1:213), Q의 아들들이 되었는데, 이런 방법으로 Q은 우리 아버지가 되시며 말씀은 아버지의 생명 공급 수단이면서 동시에 아버지의 이름 공급원이 되신다...주님은 제자들에게 Q이 아버지이시며, 생명의 근원이시며, 셀 수 없는 아들들 낳기를 의도하시는 분임을 계시하러 오셨고. 이제 제자마다 Q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하셨는데, 그들을 Q의 자녀로 만드는 Q의 생명을 갖게 하셨기 때문임.
...또한 [오직 아바 아버지]라 이름 부름 안에서, <제자들 각자의 추구하는 바 지성이나 총명함이 아니라> 아버지의 이름<신성한 영광, 신성한 생명의 TUQ의 하나됨과 그 어떠하심>안에 <하나된>참여함과 아버지 자신을 누림 통해 세상에서 구별(분별)되고 보전되며 주님의 사랑-기쁨과 즐거움-평안의 충만 넘침은 찬양이 된다.
....*2>[거룩한 말씀에 의해 거룩케 됨 안에서]
.... 거룩한 말씀(로고스-레마...그 안에 있는 거룩케 하는 생명 능력)에 의해 거룩케 됨을 통한TUQ안에서 분별(성별) 되어 참된 하나임을 깨닫고 집중함 통해 악한 자(마귀)안에 처해 있는 (사탄에 의해 조직적으로 안배되고 다스려 지는 악한 조직인) 세상의 미혹과 도발로부터 믿는 이를 보전하고(15) 지켜냄(마6:13)
.... [내가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의 생명이자 모든 것이신 그분 자신과 함께) 당신의 말씀을 (믿는 이, 곧 Q의 자녀된) 저희에게 주었사오니...17:14]..[당신이 나를 세상안으로 보내신 것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안으로 보내었고...요17:18].[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당신의 말씀은(아버지의 말씀은 항상 아버지의 실제를 동반하기에, 하나님 그분 자체를 전달하며 믿는 그들안에서 실지로 역사하여 그분의 전능하심의 효력을 발출한다는 면에서!!) 진리니이다..17:17]...이는 아버지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심과 동일한 방법을 취하셨음을 의미함을 뜻한다
.... Q의 항상 살아 있는 말씀은<믿는 이들이 영접한 바>합당한 세상과 세상적인 것들로부터 믿는 이들을 분별(구별..갈라내어 따로 둠)하여 세상으로부터 Q과 그 목적에로, 단지 위치적으로 뿐만 아니라(마23:17, 19.....금은 성전안에 있을 때 거룩하게 됨) 또한 성질<내적 존재의 기질>적으로도(롬6:19,22) 변화되어 분별되도록 믿는 이들안에서 역사하심 통해 [주님의 말씀 통해 거룩하게 됨]을 이루셨음...성질상 거룩하게 됨에 대해서는 [살전5:23...평강의 Q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라고 쓰여있다.
.... 또한, 아들은 그 자신안에서 절대적으로 거룩하시지만 그분의 제자들을 위한 거룩케 됨의 모본을 세우시기 위하여, 이땅에서의 삶의 방식 안에서 여전히 자신을 거룩하게 하셨다. [또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희도 진리안에서 거룩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17:19] .... 이제, 더 나아가서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믿는 이 각자가 Q말씀따라 삶으로써...TUQ 안에서 거룩하여짐으로써, 이제는 더 나아가>다 하나가 되어 우리(TUQ)안에 있게 하사(=거룩한 말씀을 통하여 교회생활에로의 참된 회복)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17:21]라 기도하신다..
.... *3>[TUQ의 표현을 위한 신성한 영광 안에서]
.....아버지에 의해 사랑하는 아들에게 주신 영광, 그것은 Q아버지의 생명과 본성, 곧 [친아들]아들의 명분이다...그 명분을 주심으로 인해 그분의 그 모든 어떠함의 충만함안에서 극진히 사랑하시는 아버지를 표현해 낼 수 있게 되며(1:18, 14:9, 골2:9, 히1:3) 아버지의 생명과 신성한 본성을 가지게 된다(5:26)...주예수는 하나님의 생명과 본성을 가지고 계시기에 그것이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들과 하나님의 나타남(체현)으로 만든다...그러므로 Q이 아들에게 주신 영광은 아들을 하나님의 표현과 나타남이 되게 만드는 Q아버지의 생명과 본성이다...22절에는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라고 쓰여져 있다....놀랍지 않은가..
.... 말씀을 따라서 적용하여 <주께서 주신 바 그 신성한 영광안에서 믿는 우리가 하나가 되려면> 선결요건은 믿는 우리 자신마다 육적인 옛사람(자아)의 모든 신분과 어떠함을 뒤로 던져 버리고(+= 잊어버리고)신성한 영광에 의해 살아야만 한다....즉, [나는 날마다 죽노라] 나는 죽고 그리스도께서 친히 내안에 사셔야만 한다는 것이다.
.... 이제 23절에서는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를 하나로 온전케 되게 하여 세상으로 하여금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극진히) 사랑하심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라고 말한다....그리스도안에서 온전케 됨의 정도는 믿는이가 자기의 옛사람, 곧 육적 자아를(심지어 혼목숨까지도) 포기함의 정도와 반비례함을 잊지말라.(계시란 말이 그러하듯이 영광은 가리워진 것을 제거함으로써 그 본래적 어떠함이 온전히 드러남이기 때문이다!!)....이 때에야 비로소 [아들을 사랑하심만큼이나] 교회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Q의 영광에 참여하도록 예정하신 바 그리스도의 몸을 위한 목표, 하나된 단체적인 그리스도의 몸으로써 TUQ을 표현해 냄, 바로 그 영광의 신성한 위임안에서 Q의 신성과 인성의 연합을 온전케 하실 수 있으시다...이것이야말로 그 어떤 것보다 더 좋고 더 높은 사랑이다.
..... 이제, 24절을 보자..[아버지여 내게 주신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라고 말한다....이 것의 성취는 아들의 부활로 시작되었으며 그 때 그리스도는 그분의 믿는 이들을 그분의 부활생명에 참여함 안으로 이끄셨고, 그것은 새 예루살렘 안에서 완성될 것인데, 그 때 그분의 믿는 이들은 영원토록 TUQ의 궁극적이고 단체적인 표현을 위한 신성한 영광 안으로 완전히 인도될 것..
..... 아들과 아들의 소유된 믿는 이들은 아버지를 <참되게> 알며 더 알기를 갈망하지만, 세상은 아버지를 알지 못하며 알려 하지도 않는다...거룩하신 아버지는 아들과 아들의 믿는 이들을 사랑하심에 있어서 의로우시며 아버지는 그분의 영광을 아들과 믿는 이들 모두에게 주신다. 아들의 믿는 이들을 거룩케 함에 있어서 거룩하시며(11), 아버지께서는 생명에 관한 모든 것을 주 예수와 그분의 믿는 이들에게 계시하셨는데 이는 주님과 그분의 믿는 이들이 아버지를 알기 때문이요, 세상(사람들)에게는 생명에 대하여 아무것도 계시하지 않을 것인데 이는 그들이 아버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버지는 그분의 분변(판단)하심에 있어서 의로우신데, 이는 그분의 의로우신 판단에 의하여 생명의 문제를 우리에게 계시하시기 때문이다....그러므로 26절의 [나를 사랑하신 사랑]은 그분의 생명과 영광을 아들과 아들의 믿는 이들에게 줌으로 아들과 믿는 이들로 하여금 그분을 표현하도록 하는 아버지의 사랑인데, 하나님의 이름을 앎으로 상호 거함-상호 누림-상호 기업됨 안에서 함께 영원히 부어지는 사랑이다.
==요17==[549.내주여뜻대로행하시옵소서].[407.구주와함께나죽었으니].[546.주의약속하신말씀위에서] [545.이눈에 아무증거아니뵈어도] [543.어려운일당할때] [542.구주예수의지함이]...주님말씀하시면..오나의자비로운주여예수여오소서.은혜로만.주님의성령, 보혈을지나.주품에.주께가오니.주께가까이.사랑의나눔
----세상만민 가운데 구원 받을 자들을 위한, 십자가대속의 죽음 통한 영화롭게 됨을 간구함---
*1.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독사조...찬양하다, 영광에 참예하다]]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2.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세상 중에서 아들을 믿고 영접하는 자마다!!...즉 <복음 듣고 믿어 들어감의> 선택 의지가 중요))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KJV)As thou hast given him power over all flesh, that he should give eternal life to as many as thou hast given him(AMP) even as You gave Him authority over all flesh, that to all whom You have given Him, He may give eternal life.:::아버지는 아들에게 [모든 사람, 곧 만민 가운데 구원하실 자들이 있음]을 주셨는데, 이를 위해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사랑과 영생 주는 말씀과 그 실행 :: 십자가 대속의 죽음과 부활로 모든 거리낌을 제하셨음...오직 Q사랑으로 유익케 함이 참된 권위를 가져온다..)를 주셨음 :: 즉, 회개하고 돌아오는 모든 이들의 구원, 만민 구원의 선결요건을 다 이루어 놓으셨음을 주목하라....이제 영생에 이르는 영혼 구원 획득은 [전파된 복음을 듣고 깨닫고 회개함 통해 믿고 고백하여 세례 받음으로써 오직 JC를 영접하는...요3:16] 믿음에로의 선택 문제임....그러므로 <예정론의 적용을 섣불리 함부로 구원의 여부 결정 영역에까지 확대해서는 안됨.(이것은 철저히 구원받은 이들의 귀납적, 고백적 영역이 됨에 주의하라!!)..또한, 믿음에 있어서 일종의 걸림돌 처럼 느껴지는, 세상에서 신자가 당하는 고난은 [사랑의 그리스도의 어떠함에 이르도록, 그의 장성한 분량의 충만에 이르기까지 회복 하시려는, 하나님의] 연단의 섭리 측면에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택하심(케이리조마이)란 단어와 아포리조(구별하심)에 있어서 선후관계를 세심하게 살펴 보도록 하자...[예정....구별-->선택/임명/보냄]은 보냄 받은 직분에 관한 것이로되, 구원받은 후에야 비로소 깨닫게 되는 바 섬기도록 맡겨 주신 바를 깨닫고 사랑-믿음-소망안에서 감사함으로 수행케 되는 것임.....택함, 예정, 섭리에 대해서 15장을 참고하라]....이를 잘못 적용하는 경우에 [144000명의 선택된 자들을 강조하는 신천지]같은 이단에 동조하는 것이 될 것...
*3.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기노스코...보다(라아, 하자)+듣다(샤마)+경험-관찰-이해-인지하다//배워익혀 능숙하다//관계하다-한몸이루다//교제 통해 성품/인격적으로 알다]]....@@영생 :: life eternal, eternal life..조에 아이오니오스 (아버지)하나님과 그의 보내신자 (아들)JC를 아는[기노스코] 신성한 생명 ::: [마11:27..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4.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5.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독사....카보드(히)..광채/빛-영광-영화-명성/칭찬/평판/명예, 의견....거룩한 사랑의 기이한 섬김으로 완전/온전케하시는 HS통해 그리스도께 참예하는 바 신자-교회는 그리스도의 영광이요...여자는 남자의 영광..오직상호간사랑의섬김통해서만참예함을이룸]]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제자들을 위한 중보, 아버지의 이름, 아버지의 말씀으로 보전됨---------
*6.세상 중에서[JC를 통한 영혼 구원의 대상은 세상 만민임!!...주님은 아시되 유한한 믿는 이들은 알지못하나, 그리스도의 양우리안에 들지 못한 이들이 아직 여전히 남아 있음]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그리스도의 선택하신 바 생명씨앗들인 초대 제자들을 지칭]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그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7.지금 그들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것이 다 아버지로부터 온 것인 줄 알았나이다
*8.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며 그들은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
*9.내가 그들을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10.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온데 내가 그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 [[영광체험하고 참예하는 자의 반응은 경배-찬양-인정-고백-감사]]
*11.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 죽으심과 부활 사이의 3일 동안의 JC임재의 공백기간에 아버지께서 친히 제자들을 보전해 주시기를 구함,
*12.내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고 지키었나이다 그 중의 하나도 멸망하지 않고 다만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
*13.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그들로 내 기쁨을 그들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
*14.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사탄에게 미혹되고 오도-착각하며 타락한 관영한 죄악가운데 살기를 즐기며, 하나님과 그의 말씀, 그리스도를 대적하고 배척하는 사탄의 도구된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으로 인함이니이다
*15.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16.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17.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18.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내었고
*19.또 그들을 위하여((그들로 땅에 떨어져서 죽음 통해 수다한 영적 후사 산출하는 참된 <영적 아비들로서 중보하는> 생명씨앗 됨으로써 Q께 영광 돌리도록, <중재자로서> 나의 피를 드려, 그 피를 의지함 통해 중보하는 본이 되기 위하여)) 내가 나를 (내 몸을 영원한 참된 제물로 드림으로써 모본을 삼도록 예정하시고 보여주신 그대로)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그들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
--------세상 모든 만민 가운데, 곧 모든 믿는 이들을 위한 중보-----------
*20.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21.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아직 구원받을 사람 있기에!!)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22.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23.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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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25.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사옵고 그들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았사옵나이다
*26.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그들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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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 17 Amplified Bible
==The High Priestly Prayer
1 When Jesus had spoken these things, He raised His eyes to heaven [in prayer] and said, “Father, the [a]hour has come. Glorify Your Son, so that Your Son may glorify You.
2 Just as You have given Him power and authority over all mankind, [now glorify Him] so that He may give eternal life [b]to all whom You have given Him [to be His—permanently and forever].
3 Now this is eternal life: that they may know You, the only true [supreme and sovereign] God, and [in the same manner know] Jesus [as the] Christ whom You have sent.
4 I have glorified You [down here] on the earth by [c]completing the work that You gave Me to do.
5 Now, Father, glorify Me together with Yourself, with the glory and majesty that I had with You before the world existed.
6 “I have manifested Your name [and revealed Your very self, Your real self] to the people whom You have given Me out of the world; they were Yours and You gave them to Me, and they have kept and obeyed Your word.
7 Now [at last] they know [with confident assurance] that all You have given Me is from You [it is really and truly Yours].
8 For the words which You gave Me I have given them; and they received and accepted them and truly understood [with confident assurance] that I came from You [from Your presence], and they believed [without any doubt] that You sent Me.
9 I pray for them; I do not pray for the world, but for those You have given Me, because they belong to You;
10 and all things that are Mine are Yours, and [all things that are] Yours are Mine; and I am glorified in them.
11 I am no longer in the world; yet they are still in the world, and I am coming to You. Holy Father, keep them in Your name, the name which You have given Me, so that they may be one just as We are.
12 While I was with them, I was keeping them in Your name which You have given Me; and I guarded them and protected them, and not one of them was lost except [d]the son of destruction, so that the Scripture would be fulfilled.
==The Disciples in the World
13 But now I am coming to You; and I say these things [while I am still] in the world so that they may experience My joy made full and complete and perfect within them [filling their hearts with My delight].
14 I have given to them Your word [the message You gave Me]; and the world has hated them because they are not of the world and do not belong to the world, just as I am not of the world and do not belong to it.
15 I do not ask You to take them out of the world, but that You keep them and protect them from the evil one.
16 They are not of the world, just as I am not of the world.
17 Sanctify them in the truth [set them apart for Your purposes, make them holy]; Your word is truth.
18 Just as You commissioned and sent Me into the world, I also have commissioned and sent them (believers) into the world.
19 For their sake [e]I sanctify Myself [to do Your will], so that they also may be sanctified [set apart, dedicated, made holy] in [Your] truth.
20 “I do not pray for these alone [it is not for their sake only that I make this request], but also for [all] those who [will ever] believe and trust in Me through their message,
21 that they all may be one; just as You, Father, are in Me and I in You, that they also may be one in Us, so that the world may believe [without any doubt] that You sent Me.
==Their Future Glory
22 I have given to them the glory and honor which You have given Me, that they may be one, just as We are one;
23 I in them and You in Me, that they may be perfected and completed into one, so that the world may know [without any doubt] that You sent Me, and [that You] have loved them, just as You have loved Me.
24 Father, I desire that they also, whom You have given to Me [as Your gift to Me], may be with Me where I am, so that they may see My glory which You have given Me, because You loved Me before the foundation of the world.
25 “O just and righteous Father, although the world has not known You and has never acknowledged You [and the revelation of Your mercy], yet I have always known You; and these [believers] know [without any doubt] that You sent Me;
26 and I have made Your name known to them, and will continue to make it known, so that the love with which You have loved Me may be in them [overwhelming their heart], and I [may be] in them.”
==Footnotes
John 17:1 I.e. the time of Jesus’ death.
John 17:2 A reference to election or predestination. Also see John 6:39; 17:6, 9, 24; Acts 13:48; Rom 8:29-33; Eph 1:3-6; 2 Thess 2:13; 1 Pet 1:2.
John 17:4 Much of Jesus’ discourse and prayer in John 13-17 is reminiscent of God’s comparison of rain and snow to His word in Is 55:10, 11. Like God’s word, Jesus, who was introduced by John as the Word (John 1:1), comes from God (John 16:28; 17:8), accomplishes God’s desire (John 14:10; 17:4, 8) and then returns to God (John 13:33; 14:4; 17:13).The themes of joy and peace found in Isaiah 55:12 also resonate throughout John 13-17; joy (John 15:11; 16:20-24; 17:13) and peace (John 14:27; 16:33). Isaiah 55; 56 has many points of connection with John’s Gospel as a whole, most notably the invitations to quench thirst (Is 55:1; John 4:13, 14; 7:37) and receive bread (Is 55:2; John 6:26-35, 48-51). Other points of connection between Is 55; 56 and John include the tie between listening and living, appeals to witnesses, calls to obedience, the idea of a special window of God’s nearness, and the inclusion of the Gentiles in salvation.
John 17:12 Hebrew idiom for one destined to perish. The betrayal of Christ by Judas Iscariot was foretold in Ps 41:9; cf John 13:18. John 17:19 Jesus’ sacrificial death allows Christians to be truly sanctified—set apart for God’s purpo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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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sus spoke these things; and lifting up His eyes to heaven, He said, "Father, the hour has come; glorify Your Son, that the Son may glorify You,
even as You gave Him authority over all flesh, that to all whom You have given Him, He may give eternal life.
"This is eternal life, that they may know You, the only true God, and Jesus Christ whom You have sent.
"I glorified You on the earth, having accomplished the work which You have given Me to do.
"Now, Father, glorify Me together with Yourself, with the glory which I had with You before the world was.
"I have manifested Your name to the men whom You gave Me out of the world; they were Yours and You gave them to Me, and they have kept Your word.
"Now they have come to know that everything You have given Me is from You;
for the words which You gave Me I have given to them; and they received them and truly understood that I came forth from You, and they believed that You sent Me.
"I ask on their behalf; I do not ask on behalf of the world, but of those whom You have given Me; for they are Yours;
and all things that are Mine are Yours, and Yours are Mine; and I have been glorified in them.
"I am no longer in the world; and yet they themselves are in the world, and I come to You Holy Father, keep them in Your name, the name which You have given Me, that they may be one even as We are.
"While I was with them, I was keeping them in Your name which You have given Me; and I guarded them and not one of them perished but the son of perdition, so that the Scripture would be fulfilled.
"But now I come to You; and these things I speak in the world so that they may have My joy made full in themselves.
"I have given them Your word; and the world has hated them, because they are not of the world, even as I am not of the world.
"I do not ask You to take them out of the world, but to keep them from the evil one.
"They are not of the world, even as I am not of the world.
"Sanctify them in the truth; Your word is truth.
"As You sent Me into the world, I also have sent them into the world.
"For their sakes I sanctify Myself, that they themselves also may be sanctified in truth.
"I do not ask on behalf of these alone, but for those also who believe in Me through their word;
that they may all be one; even as You, Father, are in Me and I in You, that they also may be in Us, so that the world may believe that You sent Me.
"The glory which You have given Me I have given to them, that they may be one, just as We are one;
I in them and You in Me, that they may be perfected in unity, so that the world may know that You sent Me, and loved them, even as You have loved Me.
"Father, I desire that they also, whom You have given Me, be with Me where I am, so that they may see My glory which You have given Me, for You loved Me before the foundation of the world.
"O righteous Father, although the world has not known You, yet I have known You; and these have known that You sent Me;
and I have made Your name known to them, and will make it known, so that the love with which You loved Me may be in them, and I in th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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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7장 (개요)
본장은 기도문이다. 다른 사람의 기도가 아닌 주님의 기도문, 우리 주 그리스도의 기도문이다.
이 기도문 외에 그가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이 있다.
그는 자신의 죄의 용서를 위하여 기도하실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죄가 없으시므로 죄의 용서를 위하여 기도할 필요가 없으셨던 것이다.
그러나 본문의 이 기도문은 중재자로서의 그리스도에게 필요했던 기도문이고 또 오직 그만이 하실 수 있는 기도문이다.
이같이 이 기도는 그의 중재를 위한 모본이 되는 기도이다. 그럼에도 이 기도문은 우리에게 기도하라는 격려와 교훈으로써도 유익한 것이다.
본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Ⅰ. 기도하시게 된 배경(1).
Ⅱ. 기도문의 내용.
1. 그는 먼저 자신을 위하여 기도하신다(1-5).
2. 그는 그에게 속한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신다.
(1) 서론적인 간구. 여기서 그는 그들을 위한 기도의 이유를 말씀하신다(6-10).
(2) 그가 그들을 위해서 하신 특별한 간구.
① 저희의 보호를 부탁하심(11-16).
② 그들이 성별될 것을 부탁하심(17-19).
③ 그들이 하나가 되게 하여 달라고 부탁하심(11, 20-23).
④ 저들이 영광을 받게 해 주실 것을 기도하심(2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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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중재를 위한 기도(요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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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아버지의 이름 안에서, 아버지와 그의 보내신 자 JC를 앎의 영생안에서]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들마다에게 ...영생[아버지와 아들을 참되게 앎]을 주게 하시려고...만민<모든 육체를 지닌 인간들>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사 ...아들에게 수행하도록 허락해 주셨던 바 그 다스리는 권세는 (이는 성육신-십자가의 대속적 죽음을 통해 아버지께로 가셔서, 부활안에서 육적 제한을 벗은 부활 생명의 그 영이자 부활한 몸으로 변형되시고 제자들에게 오셔서 영원토록 내주하시는 성령을 불어넣어 주시기 위함이었는데) 이는 그리스도에 대한 세인들의 기대와는 정반대였음...이 대속적 죽음-부활의 사역을 온전히 수행하심으로써 아들은 아버지를 믿는 이들에게로 이끌어 옴 통해 아버지를 완전히 나타내게 되는 것이었음......기도 드리는 지금에 있어서 이제 남은 것은 대속적 죽음 통해 아버지께로 가는 마지막 사역만 앞두고 있으나 이미 다 수행하였음을 미리 확증하고 계시는데, 이것을 통해서 창세전부터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본래적 영광으로 돌아감을 허락해 주시기를 기도하고 계심.....아들에게 주신 사람들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셨는데,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말씀을 주었고] 그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준행함으로써, 아들이 그들에게 준 모든 것이 다 아버지로부터 온 것임을 알게 됨 통해서 그들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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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Ⅰ. 그의 기도의 배경(1절).
육신의 몸을 입고 계실 때 그리스도는 깊이 있는 기도를 많이 하셨다(때로 그는 밤을 세워 기도하셨다).
그러나 본문의 기도처럼 완전하게 기록된 것은 다른 곳에는 없다. 다음 사실을 관찰하자.
1. 그가 이 기도를 하신 시기.
그가 이 말씀을 마치신 후 즉 앞에서 그의 제자들에게 송별의 말씀을 하신 후에 그는 그들이 듣는 가운데 기도를 하셨다.
즉 이 기도는 다음과 같이 이루어졌다.
(1) 이 기도는 설교 후에 하신 기도였다.
그는 하나님이 그들에게 하실 말씀을 전한 다음 그들을 위하여 하나님에게 기도하셨다.
우리는 말씀을 전한 후 그 말씀을 들은 사람들을 위하여 또한 기도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마른 뼈들을 향하여 예언한 에스겔은 "생기야 그들에게 돌아오라"고 기도하였다. 설교는 기도로 끝내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의 효과가 증가되는 것이다.
(2) 이 기도는 만찬을 나누신 뒤에 하신 기도였다.
즉 그리스도께서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곧 만찬을 위한 음식을 나누시고 이에 합당한 말씀을 하신 후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 말씀을 지킬 힘을 주시도록 끝으로 이 기도를 하셨던 것이다.
(3) 이 기도는 일종의 가족 기도였다.
그리스도에게 제자들은 그의 가족이었다. 그는 모든 식구들 앞에서 기도로 본을 보이셨다.
그는 아브라함의 아들의 입장을 띄고 식구들을 가르치셨을 뿐만 아니라(창 18:19) 다윗이 아들의 입장에서 그의 식구를 위하여 축복하셨고(삼하 6:20) 그들을 위하여 또 그들과 함께 기도하셨다.
(4) 이 기도는 작별 기도였다.
우리가 친구들과 작별할 때 기도로 작별하는 것이 좋다(행 20:36). 그리스도가 죽으심으로 그들은 헤어지게 되었다.
그런데 이 작별은 기도에 의하여 성별되고 아름답게 승화되었던 것이다.
야곱은 죽으면서 12족장에게 축복하였고, 모세는 죽으면서 12지파에게 축복하였다. 여기 본문의 예수는 임종하시면서 12사도들에게 축복하셨다.
(5) 이 기도는 자신의 희생을 위한 준비 기도였다.
그는 죽음의 대가를 치루심으로 그에게 속한 사람들을 위하여 특별한 가호와 축복을 베풀고자하시었다.
그리스도는 지금 제물을 바치는 제사장의 입장에서 기도하셨다. 이 기도에 힘입어 우리의 모든 기도도 효력이 발생되는 것이다.
(6) 이 기도는 그의 중재하심의 모본이 되는 기도였다.
그는 지금도 살아 계셔서 휘장 안에서 우리를 위하여 중재하신다(하나님 나라를 의미함).
그리고 영광을 입으신 거기서는 그가 지상에 계셨을 때 하신 것처럼 자신을 낮추사 아버지께 간구하시지는 않는다.
하늘에서 그는 자신의 공로에 의지하여 아버지에게 인간들을 위한 중재를 하신다.
거기서 그는 모든 그의 선택받은 자들을 위하여 은덕을 내리실 것을 간청하시는 것이다.
2. 그의 간절한 희망이기도 하시는 외적인 모습에서 나타나고 있다.
즉 그는 먼저 번처럼(11:41)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간구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러한 자세를 갖춤으로 정신을 집중하고자 하신 것은 아니었다.
그는 위하여 기도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이러한 자세를 취하사 기도를 성별하셨고 기도를 조롱하는 자들에 대하여는 기도의 정당성을 나타내셨던 것이다. 기도할 때에 영혼이 하나님을 우러러 봄은 의미 있는 일이다(시 25:1).
예전에 하늘을 향해 너의 마음을 들라는 말씀은 기도를 위한 부름의 말씀으로 사용되었다.
우리도 기도할 때 우리의 소망을 그리로 향하게 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간구한 바 좋은 것들을 받기를 기대해야만 한다.
Ⅱ. 기도의 첫 부분. 여기서
그리스도는 자신을 위하여 기도하신다. 내용을 고찰하여 보자.
1. 그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생각하고 기도한다. "그는 눈을 들어 아버지여"라고 말씀하신다.
기도는 하나님에게만 해야 하듯이 기도할 때 하나님을 아버지로 대하고 그를 우리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우리의 의무임을 기억하자.
양자의 영을 받은 모든 사람들은[내주하시는 그리스도의 영(아들의 영이자 아들안에 계신 아버지의 영이기도 하며, 대속의 십자가죽음 거쳐서 부활안에서 믿는 이들안에 사시기 위해 변형되신 분이심)]을 그 안에 소유한 자마다 아들께서 부활하시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들로서의 명분을 받고 감히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하셨다!!]....하여, 로마서 8장 15절, 갈라디아서 4장 6절에서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짖도록 가르쳐지고 있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시라면 우리는 그에게 담대히 기쁨으로 사랑안에서 나아갈 자유가 있으며 그를 믿을 근거가 있는 셈이며 그러므로 그에게 큰 기대를 가져도 좋은 것이다.
그리스도는 본문에서 하나님을 "거룩한 아버지"로(11절) 또 "의로우신 아버지"(25절)로 부르고 있다. [[여기에서 아버지께서 의로우시다 함은 아버지의 뜻과 자녀에게 계시하신 성품 그대로 행하며 대우하시며 이루시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가 기도할 때 그를 그렇게 부르는 것이 우리를 위하여 대단히 유용하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그의 지시나 또는 위로를 얻기를 바랄 때 그 소원에 합당한 명칭을 붙여 하나님을 부르는 것이 좋다.
2. 그는 먼저 자신을 위하여 기도하셨다.
신성으로서의 그리스도는 우리의 기도의 대상이시다. 그렇지만 한편 인간으로서의 그리스도는 자신이 기도하셔야 했던 것이다.
그것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셨기 때문이었다"(마 3:15).
"구하라. 내가 너에게 주리라"(시 2:8)는 말씀은 주께서 우리에게 하신 말씀인 동시에 하나님이 그리스도에게 주신 약속이기도 하였다.
그가 자기 몸을 바쳐서 사신 바된 것을 위해 또 간구해야만 하셨다면 우리가 기도하지 않는 한 아무 공로도 없이 죄만 지은 우리가 어찌 받기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다만 모든 것을 잃고 말 것이다. 이 사실은 기도의 가치를 앙양시켜 준다.
기도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알려 주신 통신 수단이다. 그리스도 자신도 이 방법을 이용하여 하늘과 의사를 소통하셨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 사실은 기도하는 백성들에게 큰 위로가 된다. 또한 "빈궁한 자의 기도"도 멸시받지 않을 수 있다는 희망의 근거가 된다.
우리를 감싸 주시는 그분에게도 자신을 위하여 간청할 필요가 있었던 때가 있었다.
그것은 중재자로서의 그의 명예로운 사명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게 해 주시기를 바라는 기도였다.
그는 우리에게 하라고 명하신 같은 방법 즉"기도와 간구"(히 5:7)를 이용하셨다.
그도 이렇게 간구하셨으므로 그는 우리의 간구하는 마음을 아신다(출 23:9). 그리고 우리가 간구하는 방법도 아신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위한 기도를 하신 후에 제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셨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자.
이와 같이 자비를 베푸는 것도 먼저 가정에서 시작해야만 한다. 물론 가정에서 끝난다면 안 되지만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자신을 사랑하고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바른 순서인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의 제자들을 위한 기도에 비하여 자신을 위한 기도는 대단히 짧게 하셨다.
우리가 기도할 때 교회를 위한 기도는 잠간 스치고 넘어가서는 안 된다.
모든 성도를 위하여 간구함에 있어서 우리는 충분한 시간을 할애해야 하며 결코 인색해서는 안 된다.
본문에 보면 그리스도가 자신을 위하여 하신 두 가지 간청이 있다. 그 간구는 둘다 자기가 영화를 받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라는 간구를 두 번이나 언급한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하나는 그의 사업을 계속할 수 있기 위하여 하신 청이었다.
그것은 본문에 의하면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란 청으로(1-3절), 그가 지금까지 해오신 것을 앞으로도 할 수 있도록 그렇게 해 주시라는 요구였다.
그리고 또 하나는 그가 지금까지 아버지의 사업을 완수하였으니 나를 영화롭게 해 달하시는 청이다.
그러므로 본문에 "내가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이제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내가 할 일은 하였으니 여호와여 이제는 당신이 하실 차례니이다"고라 하였다(4,5절)(한글 개혁과 다소 틀림:역자 주).
(1) 본문에서 그리스도는 그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영화롭게 해 주실 것을 기도한다(1절). 즉 이런 내용이다.
"약속하신 대로 아들을 영화롭게 하옵소서. 그러면 당신의 뜻을 이루어 아버지의 영광을 들리겠나이다." 이제 본문을 더 상세히 고찰해 보자.
① 그가 위하여 기도하신 것. 그것은 그가 이 세상에서 영화를 얻게 해달하는 것이었다. 즉 이러한 뜻이다.
"모든 어두움의 세력들이 결속하여 당신의 아들을 중상할 때가 이르렀나이다. 그러니 아버지여 이제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첫째, 아버지는 아들이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시던 때에도 표적과 기사를 그를 통하여 나타내시므로 아들을 영화롭게 하셨다.
그를 잡으러 온 자들이 벙어리가 된 듯 한 마디 답변도 못하던 순간, 또 유다가 주님의 무죄를 고백하고 자결로 이 사실을 입증하던 순간, 빌라도의 아내가 꿈에 그의 의로우심을 깨달았고, 빌라도 자신이 입으로 그의 무죄를 선언한 순간, 또 해가 어두워지고 성전 휘장이 찢어지던 순간들에 아버지는 아들을 의롭게 여기셨을 뿐만 아니라 영화롭게 하셨다.
둘째, 아버지는 아들에게 고난을 가하심으로 인하여 땅에서 그를 영화롭게 하셨다.
그가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그는 위엄이 있었고 영광을 받으셨다(13:31). 그가 사탄과 죽음을 정복하신 것은 바로 십자가에서였다.
또 가시관은 그에게 면류관이었다. 또한 빌라도는 예수의 십자가 위에 쓴 패에 그의 생각과는 달리 예수를 적절히 표현했던 것이다.
셋째, 아버지는 아들이 고통을 받으신 후에 땅 위에서 더욱 그를 영화롭게 하셨다.
즉 그를 죽음에서 일으키심으로 그리고 택하신 증인들에게 공개적으로 그를 나타내시므로 또 아들의 입장을 지지하고 그를 위하여 변명해 주시는 성령을 보내 주심으로, 그의 왕국을 인간 세계 속에 세우심으로 그는 아들을 영화롭게 하셨다. 본문에서 그리스도는 바로 이것을 간구하고 주장하신 것이다.
② 이 요구를 관찰시키기 위하여 그가 아버지에게 내세운 조건들,
첫째, 그는 아버지와 자기와의 관계를 근거로 하여 호소한다.
본문에 "당신의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라고 하였다. 하나님과 동체이시며 중재자로서의 당신의 아들이라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시편 2편 7,8절에도 "네가 나의 아들이므로 내가 열방을 너에게 유업으로 주리라"하였다.
또한 사탄도 그가 아들됨의 권리를 포기하면 이 세상 나라를 주겠노라고 유혹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이러한 제안을 보기 좋게 거절하셨다.
그리고 그의 장래의 영광을 아버지에게 의탁하셨다. 본문에서도 그리스도는 장래의 영광을 하나님에게 의탁하신다.
마찬가지로 양자로 선택받은 우리도 믿음으로 아들의 유업을 간구할 수 있음을 기억하자. 왜냐하면 성별되어지면 다음은 영화를 입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문에 "아버지여 당신의 아들을 영화롭게 하옵소서"라 한 것이다.
둘째, 그는 시기가 이르렀다는 사실을 들어 간구한다. 고로 본문에 "때가 이르렀사오니"라고 하였다.
이제는 구체적인 시간까지 결정된 것이다. 즉 그리스도의 수난의 시간이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결정됐다는 말이다.
그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노라고 자주 말씀하셨다. 그러나 이제야말로 그 때가 온 것이고 그는 이 사실을 아셨다.
"사람은 자기의 시기를 알지 못하나"(전 9:12) 인자는 아셨다.
그는 이 시기에 대하여 12장 27절에서는 this hour - 즉 이 때라 하셨으나 본문에서는 the hour - 즉 때라고만 하셨다.
마가복음 14장 35절과 요한복음 16장 21절을 비교하여 보라. "때"라고 하신 것은 강조적인 뜻을 띄고 있다.
왜냐하면 구속자의 탄생의 때가 그러하였듯이 그의 죽음의 때도 가장 의미있고 주목할 만한 때였기 때문이다.
확실히 이 시간이야말로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가장 중대한 시간이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시간은 전에는 결코 없었다.
이와 같이 기대하던 시간은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었다. 그리스도의 때가 이르렀다는 말씀에는 다음의 의미가 있다.
a. "내가 겪어야 할 그 때가 이르렀다"는 말씀이다.
이제 이 장엄한 사건이 절정에 도달한 시기였다. 수많은 작은 접전이 있은 후 하늘과 지옥 사이의 결정적인 전투가 이제 막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이제 하나님 편에는 명예가 또 인간에게는 행복이 좌우되는 중대한 싸움에, 영원히 이기느냐 지느냐 하는 경각이 달린 순간이었다.
그리고 다윗과 미가엘은 이쪽 진영에, 골리앗과 용은 저쪽 진영에 속하여 있었다.
이제 전쟁을 알리는 나팔 소리가 울리면 어느 쪽이 이기느냐 운명이 결정되는 순간이었다. 이쪽 진영에 속한 자들은 다음과 같이 아뢰인다.
"이제 당신의 아들을 영화롭게 하소서. 그로 하여금 이 세상의 정사(政事)들과 권력들에 대하여 승리하게 하시고 그의 발뒤꿈치로 독사의 머리를 밟게 하소서. 이제 당신의 아들을 높이시사 패하지 말게 하옵시며 낙담하지 않게 하소서."
여호수아가 나아가 "정복하며 또 정복할 때도 "여호와께서 여호수아를 강하게 하시니"라고 말씀되었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그의 승리의 병거로 삼으시는 이때에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영화롭게 하셨던 것이다.
b. "내가 [아들이 영원하신 아버지의 뜻 안에서 대속의 구주로서, 또한 부활 통해 변형되시고 믿는 자의 영 안에 내주하도록 예비된 그 영 되심의] 관씌움 받기를 고대하던 마지막 순간이 이르렀다"는 말씀이다.
즉, "내가 영화롭게 되어 당신의 우편에 앉을 때가 이르렀나이다"는 뜻의 말씀이다.
그가 영광을 받으시기까지에는 유혈어린 고난의 막간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 고난의 순간은 전혀 안중에 없는 것처럼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본문에 그는 "내가 영광 받을 때가 이르렀나이다"라고 하였다. 이 순간이 오기 전에 그는 이 영광을 기대하시지는 않았다.
우리도 만일 훌륭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시련의 시간 특히 임종의 시간을 맞이하여 다음과 같이 간구해야 한다.
"때가 이르렀사오니 나를 도우소서. 나를 위하여 나타나소서. 지금이야말로 결정적 순간입니다. 이제 땅에 있는 장막 집이 무너지고 [아버지의 영광 안에 하나되어 있던 자로서의, 참 구주의 대속의 면류관 받음의 영광이 더해지는 바] 내가 영광을 얻을 순간이 온 것입니다"(고후 5:2).
셋째, 그는 아버지의 이득과 관심을 위해 들어 주실 것을 간청하신다.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소서"라고 하셨다.
그는 그의 아버지의 명예를 위하여 지금까지도 일해 오셨기 때문이었다. 그는 고난의 순간을 통과하여 아버지가 영광을 받으시기를 소망하였다.
그는 다음의 두 가지 방법으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셨다.
a. "십자가에서 죽으심"에 의해서였다.
그는 이 죽음을 당해야 할 순간에 있었다. 그의 고난은 "아버지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기 위한"것이었다.
그러므로 이제 아버지는 아들의 고난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표하신다.
이 고난이야말로 사람들로 말미암아 손상된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시킬 수 있는 것이었다.
이렇게 아들은 아버지를 만족스럽게 해드렸으므로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 이를 수 없었던 하나님의 영광에 이른 것이다.
고로 본문의 뜻은 "아버지여 고통 중에 있는 나를 주장하사 이 고난을 내가 잘 감당하여 당신께 영광을 돌리게 하소서"인 것이다.
b. 십자가의 도에 의해서였다.
이 도리는 그가 죽으신 얼마 후 세상에 공포되었고 이 도리에 의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인간 세상에 다시 세워지게 된 것이었다.
그는 아버지에게 그가 받는 고난에 은혜를 베풀고 그 고난을 영광되게 해 주시기를 기도한다.
즉 십자가의 수치를 제거해 주실 뿐만 아니라 이 십자가의 대속의 죽음, 그 효능으로[성전 휘장이 찢어졌듯이 Q께로 나아가는 <불의가 제거됨 통해>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길이 열림으로써 ]구원함을 받은 자들에게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능력이 되게 하여 주시기를 기도한다.
또한, 부활을 통하여 보이신 바 [[요20:21-23] *21.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22.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에서 보듯이, 하나님께서 십자가에서 처형당하신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일으키심으로" 영광[주 영, 하나님으로서 제한받지 않으시는 영광 가운데서의 자유함]을 얻게 하시지 못하였다면 그의 모든 구원을 통해 이어지는 그리스도의 교회를 건축함의 하나님이 숙원사업은 물거품처럼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주님은 "나를 영화롭게 하사 나로 당신을 영화롭게 하게 하소서"라고 기도하신다.
이를 통하여 그가 우리에게 가르치시고자 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a) 우리들이 기도를 통하여 또 여러 가지의 계획과 목적을 통하여 추구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우리의 주된 목표가 되어야 하고 다른 모든 것들은 주님에게 종속되어서 또 주님의 유익을 위해서만이 존속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기도해야 한다.
"당신의 종을 위하여 이와 같은 문제를 처리해 주시옵소서. 이는 당신의 종이 당신을 영화롭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내게 건강을 주옵소서. 그러면 내가 나의 건강한 몸을 드려 당신을 영화롭게 하겠나이다. 나로 성공하게 하옵소서. 그러면 내가 내게 주신 것으로 당신을 영화롭게 하겠나이다."
즉 "이름을 거룩하게 하옵시며"란 기도가 우리의 첫 번째 간구의 내용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우리의 다른 모든 목적을 이룸에 있어서 필연적인 조건이다(벧전 4:11).
(b) 그는 우리가 무엇을 기대하고 바랄 것인가를 우리에게 가르치신다.
만일 우리가 진정으로 자신을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일에 드린다면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는데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지 부족함이 없게 이루어 주실 것이며 충분한 은혜와 적절한 기회를 허락해 주실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의 영광보다는 은밀히 자기를 명예롭게 하는 데 노력을 한다면 그는 우리를 우리의 계획대로 행하게 내버려 두실 것이며 그 결과 우리는 명예를 얻는 대신에 스스로 수치를 당하고 말 것이다.
넷째, 그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모든 것을 위임한 사실을 들어 간구하신다(2,3절).
그는 아버지께서 그에게 위임하신 내용과 일치하게 그리고 그 위임을 철저히 수행하여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기를 원하신다.
즉 아버지께서는 그에게 권세를 위임하셨다. 그러므로 아들이 영화로움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제 그가 아들에게 위임하신 권세를 집행하므로 아들이 그를 영화롭게 하게 해달라고 하신다.
그러므로 위임하신 사실은 그리스도의 간청의 근거가 된 것이었다.
다른 말로 하면 "당신이 아들에게 위임하신 권력을 의지하여 당신의 아들이 당신께 영광을 돌리게 하소서"란 뜻이다.
이런 의미에서도 아들에게 권세를 위임하심이 또 아들을 영화롭게 하셔야 한다는 근거가 되는 것이다.
이제 본문을 통하여 중재자로서의 주님의 권세를 살펴 보자.
a. 그의 권세의 기원.
그 기원은 "아버지가 아들에게 권세를 주신 데서"찾을 수 있다. 그는 "모든 권세를 가지고 계시는" 하나님으로부터 권세를 받으셨다.
타락한 상태 아래서의 인간이 본래의 자기가 되기 위하여서는 새로운 형태의 나라(하나님의 나라)의 휘하에 속해야 한다.
이 나라는 하늘이 인치신 특별 위임에 의하지 않고서는 세워질 수 없는 것이며 이 영광된 사업의 착수자이신 주님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 주님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현저한 격차를 중재하시는 분이시며 또 한편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있게 될 웅대한 결속을 보증해 주시는 유일하신 분이시다.
이 직능을 수행하시기 위하여 그는 권세를 받으셨다.
이 중재자로서의 권세는 창조주로서의 그의 권세와 통치와의 명백히 다른 경로를 거쳐 집행되는 것이다.
교회의 왕이신 주님은 이 세상의 군주들이 그러하듯이 폭군은 아니시다. 그리스도의 다스리시는 권세는 논쟁의 여지가 없이 분명한 것이다.
b. 그의 권세의 범위. 그는 모든 육체에 대하여 권세를 가지셨다.
(a) 이 말은 전 인류에 대한 권세를 지니셨음을 의미한다.
그는 영들의 세계에 대하여도 권세를 가지셨으며 천상의 볼 수 없는 세계의 권세들도 그에게 예속되어 있다(벧전 3:22).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재자가 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에 호소하신다.
그들은 그가 항복케 하여 구원시킬 사람들이었고 이들 가운데 자신에게 주어진 남은 자를 가지고 계셨다.
그러므로 전 인류는 그의 발 아래 굴복되어 있는 것이다.
(b) 이 말은 부패하고 타락된 만민에 대하여 권세를 가지셨음을 의미한다.
그들은 타락하였으므로 육체라고 불리워지게 되었다(창 6:3). 이러한 의미에 있어서 인간이 육체가 되지 않았다면 구속자가 필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죄를 지었으므로 주 예수는 이 죄를 지은 인류에 대하여 전권을 소유하고 계시는 것이다.
또한 그들에 대한 심판권이 그에게 위임되었다. 즉 속박할 수도 있고 또는 석방할 수도 있으며 사면하거나 정죄할 수 있는 권세가 그에게 있었고 지상에서 용서할 권한과 처벌하는 권한이 그에게 있었다. 중재자로서의 그리스도는 전 세계의 통치권을 마음대로 장악하신다.
그는 열방의 왕이시며 그를 알지 못하거나 그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 대해서도 권세를 가지신다.
그는 세상 왕들처럼 그들을 직접 다스리지 않지만 그들을 총지휘하신다(시 22:28; 72:8; 마 28:18; 요 3:35).
c. 이 권세의 거대한 취지와 계획.
그것은 본문에 의하면"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는" 것이다. 여기 우리의 구원의 신비가 공개되고 있다.
(a) 본문에 보면 택함 받은 자들을 구속자에게 넘겨 주시고 그들을 그의 몫으로 또 그가 믿을 수 있는 자들로 주신 분은 아버지이시다.
즉 그들을 그의 사업에 대한 공로와 보상으로 주셨다는 말씀이다. 그는 모든 타락된 인류에 대하여 통치권을 가지고 계시지만 특히 선택된 소수의 무리에 대하여서는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계신다.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복종케 하셨다." 그러나 택함 받은 자들은 그에게 맡겨진 것이다.
(b) 본문에 보면 아들에게 주어진 자들의 행복을 관장하는 일을 하시는 분은 아들이시다.
그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신다. 이제 구속자의 권위가 얼마나 대단한가를 살펴 보자.
그에게 생명과 면류관을 주는 권세가 그에게 있으시다.
이제 상급을 베푸시는 데 있어 이러한 우선권이 있으신 주 예수께서 얼마나 위대하신가를 살펴 보자.
그리고 구원하기로 작정한 자들에게 영생을 주시는 주님이 얼마나 은혜스러운가를 다음에 생각해 보자.
[a] 그는 이 세상에서 구원받을 자들을 성별하신다.
그리고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이 꽃봉오리와 같은 상태에 있는 영적인 생명을 주신다(4:14).
인간의 심령에 부어진 이러한 은혜는 곧 지상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됨을 의미한다.
[b] 그는 저 세상에서 그들을 영화롭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계획과 그 계획의 성취에 의하여 그들의 행복은 완성될 것이다. 본문에는 이 사실만이 기록되고 있다.
왜냐하면 그의 다른 모든 사업들 즉 그들을 가르치며 그들에게 만족감을 주며 그들을 성별하며 그들로 영생을 준비하게 하는 것은 저 세상에서 영화를 얻게 하려는 최종 목표가 있기 때문이다. 진실로 다른 모든 것은 이것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나라요 영광이며 유업을 상속받을 자"로 칭하여지고 있다.
저 세상에서 그들을 영화롭게 하는 것은 최종 단계에 실현될 것이지만 실상 모든 계획은 이를 위하여 처음부터 세워진 것이다.
[c] 본문에는 구속자가 이 세상에 대한 전권적인 통치를 하심으로 우리에게 안겨지는 혜택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
그가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지니신 것은 선택된 자들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한 것이다.
인간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다스림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구원을 위한 것임을 기억하자.
그러므로 고린도 후서 4장 15절에 "모든 것을 너희를 위하여 함이라"기록되었다.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진 그리스도가 정하신 율례와 규례와 약속들은 그리스도에게 주어진 모든 사람들의 영적 생활을 지속시키고 영생을 보장하기 위하여 효율적으로 계획된 것들이다. 그는 교회의 소속된 모든 일의 우두머리이시다.
섭리에 의해 다스려지는 세상과 은혜에 의해 다스려지는 나라들에 대한 지배권이 같은 한 분의 손에 맡겨진 것은 모든 일이 부믈 받은 자들의 유익을 위하여 일치되게 하려는 데 있는 것이다.
d. 이 장대한 계획이 본문에 계속 설명되고 있다(3절).
3절의 내용을 부연하면 다음과 같은 뜻이다. "내게 주라는 권한이 위임되어 주기 시작한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생의 본 뜻이며 또 영생으로 인도하는 길입니다. 이것은 일반 종교가 발견하고자 하는 원리들이기도 합니다. 또 영생은 당신이 중재자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이 예수는 타락된 상태에서 인간을 회복시키기 위하여 이 거룩한 신앙(기독교)의 가르침과 규례를 베푼 자입니다." 이 말씀에는 다음과 같은 뜻이 들어 있다.
(a) 우리가 믿는 기독교 신앙의 제일 큰 목적.
그것은 곧 영생이요, 불사의 인간이 누릴 행복이다. 이것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계획과 성취 속에서 실현되는 것이다.
이 영생의 행복을 주님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내셨고 그에게 속한 모든 사람들에게 보증하신다.
영생은 복음에 의하여 비로소 확실해진 것이요, 또 우리에게 주어질 수 있었다.
이 생명은 세상에서의 우리의 생명에 비해 시간적으로 탁월할 뿐만 아니라 질적으로도 우수하다.
(b) 이 축복된 목표를 성취할 수 있는 확실한 방법.
그것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앎으로 주어진다. 그러므로 본문에 "당신을 아는 것이 곧 영생이니이다"라고 하였다.
이 말씀은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a] 영생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라는 사실이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아는 길은 믿음을 통해서이다. 그러나 저 세상에서는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직접 대하여 알게 된다.
그리스도와 연합하였고 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사귀는 삶을 사는 자들은 어느 정도 영생이 무엇인지를 경험함으로 안다.
그리고 그들은 "이런 것이 하늘나라이라면 하늘나라는 그 얼마나 좋은 곳이겠는가"라고 말한다(시 17:15 을 참조).
[b]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앎이 영생으로 인도한다는 사실이다.
우리를 부르신 그 분을 알 때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다(벧후 1:3). 그리고 이 방법이 우리가 영생을 얻게 되는 방법이다.
기독교 신앙은 다음과 같은 방법에 의하여 우리에게 하늘 가는 길을 보여 준다.
첫째, 우리 존재의 창조자요 복의 근원으로서의 하나님에게 우리를 인도하심으로써이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하나님께로 이끌기 위하여 죽으셨음을 보아도 알 수 있다.
하나님을 우리의 창조자로 아는 것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복종하며, 순종하며 그를 우리의 소유자요, 통치자요, 은혜를 베푸는 자로 신뢰하는 것, 그를 우리를 다스리시는 분으로 알고 그에게 우리 자신을 드리며 우리를 가장 아끼는 분으로 그에게 의지하며 우리의 최고의 목표로써 그를 찬양하는 것, "이것이 곧 영생이다."
본문에서 하나님을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라고 칭하고 있다. 이는 하나님을 가짜요 사기꾼인 이방이 거짓 신들과 구별하기 위한 것이다.
그렇다고 아들의 품격으로부터까지 그를 구별하려는 뜻은 아니다. 아들에 대해서 "참 하나님이요 영생이시라"(요일 5:2)고 강조적으로 말씀되고 있기 때문이다. 본문에서 아들은 아버지와 동등한 신앙적인 대상으로 제시되고 있다.
확실한 사실은 살아계신 마치하나님은 한 분 뿐이시며 우리가 숭배하는 신은 바로 그분이라는 사실이다.
그는 참 하나님이시며 단순한 이름이나 개념에 불과한 분은 아니시다.
그만이 유일하신 참 하나님으로 그와 경쟁자로 세워진 모든 것들은 허사요 거짓에 불과하다. 그에게 예배하는 것만이 오직 참된 종교이다.
둘째,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재자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지시해 줌으로써이다.
그러므로 본문에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라 하였다.
만일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다면 유일하신 참 하나님에 대해 그들이 알므로 영생이 그들에게 주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인간은 타락하였으므로 인간에게 다른 어떤 것이 더 필요하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죄 아래 있으므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곧 그를 의로우신 재판관으로 안다는 뜻이 되며, 우리가 그의 저주 아래 있는 것을 안다는 말밖에는 안 된다. 이러한 앎은 차라리 모르는 것보다 더 해로운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속자로서 그리스도를 아는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를 통해서만이 우리는 지금 하나님에게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곧 영생이다.
그리고 이것이 그가 그에게 주어진 모든 자들에게 주시고자 하는 것이다(6:39, 40 을 참조).
하나님과 또는 그리스도와 사귀고 있는 사람들은 이미 영생의 문턱에 이르는 것과 같다.
(2) 본문에서 그리스도는 지금까지 그가 아버지를 영화롭게 해드린 것을 기억해서 자기를 영화롭게 하시라고 기도한다(4,5절).
앞의 간구의 뜻은 이 세상에서 나를 영화롭게 하시라는 것이었고 본문(4,5절)의 뜻은 저 세상에서 나를 영화롭게 하시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본문에 "내가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아버지여 이제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라고 하였다. 본문의 내용을 살펴 보자.
① 그리스도께서는 지상에서의 그의 생활을 회고하면서 무엇이 그의 위로가 되었는지를 말씀하신다.
그것은 "내가 당신을 영화롭게 하였고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었다"는 말씀 속에 나타나 있다(일을 완성시키는 것은 참으로 좋은 일이다)(한글개역과 다소 틀림:역자 주). 그는 지금까지 살면서 겪으신 가난과 수치를 불평하지 않으셨다. 실상 그의 지상에서의 삶은 그 어느 불행한 사람 이상으로 피곤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이 사실을 무시하고 그가 그의 아버지를 위하여 하신 사업과 그 사업의 놀라운 진전을 회고함으로 그는 위로를 삼으신다.
그의 지상에서의 삶을 본문에 기록한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첫째, 그가 이 땅에서 사업을 이루시고 아버지께 영광을 돌렸다는 사실은 그리스도에게도 명예가 되는 일이었다.
그의 지상에서의 삶은 어느 모로 보나 그가 세상에 오신 목적에 완전 일치되었다. 다음 사실을 기억하자.
a. 우리 주 예수는 그를 보내신 분이 하라고 하신 일을 하셨다는 사실이다.
그가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안락한 삶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다만 선한 일을 하시며 모든 의를 이루시기 위한 것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그에게 해야 할 일을 주셨다. 그것은 포도원과 같은 세상에서의 일이었다. 그의 아버지께서 그를 이 일에 임명하셨고 또 그 일을 하는 데 도우셨다.
b. "그에게 주어진 일을" 그가 완성하셨다는 사실이다.
현재로써는 그가 그의 사업의 최종 단계에까지 도달하지는 않으셨지만 지금까지 겪은 고난을 통하여 거의 완전에까지 이른 상태였으므로 "내가 이 일을 이루었노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다. 일을 완성시킨다는 것은 귀한 일이다.
그는 이제 그의 일에 마지막 추진과정에 계셨고 그러므로 ‘텔레이오사스’또는 ‘에텔레이오사’(TR) - 즉 내가 이루었다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그가 그의 사업의 구체적인 부분에 이르기까지 가장 완벽하고도 완전한 방법으로 수행하셨음을 의미한다.
c. 이 일을 완수함으로 그는 그의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셨다는 사실이다.
그는 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렸고 그를 찬양하였다. "그의 사힌 일이 완전하셨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영광인 동시에 구속자의 영광이다.
일을 시작하신 분은 아버지요 그 일을 이루신 분은 아들이었다.
아들이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자신을 포기하였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이 일은 그에게 멸시가 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바로 그 일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아들은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실 수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내가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이와 같이 세상 사람들도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리이다"라고 말하실 수 있었다.
둘째, 그가 이 땅에서 사업을 이루시고 아버지께 영광을 돌렸다는 사실이 기록된 것은 "우리로 그의 봅을 받아 뒤를 따르게 하려고" 모든 사람들에게 본을 보여 주시려는 뜻이 있었다.
a.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라고 정해 주신 일을 우리의 과업으로 삼아야 한다.
이 일을 우리의 능력에 따라 또 활동범위 안에서 이루어야 한다. 우리는 각자 이 세상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야 한다.
b. 우리는 모든 일에 있어서 하나님의 영광을 목적으로 삼아야만 한다.
그가 인간들에게 주시고 그 대가를 바라시는 이 세상, 또한 우리에게 허용된 영원을 위한 준비 과정이요 시험 기간이기도 한 이 세상에서 우리는 할 수 있는 대로 그에게 영광을 돌려야만 한다.
c. 우리는 각자의 인생의 끝날까지 이 세상에서 견디며 살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일을 완성할 때까지 또 우리의 주인을 위한 고용기간이 끝날 때까지 결코 주저앉지 말아야 한다.
셋째, 위의 사실이 기록된 것은 주님을 의지하는 모든 사람들을 격려하기 위한 것이었다.
만일 주님께서 그에게 하라고 주어진 일을 이루시었다면 그는 명실공히 구세주이신 것이다. 그는 그에게 주어진 일을 중간에서 중단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우리를 위하여 그의 일을 완성하신 그 분은 그리스도의 날에 이르기까지 우리 안에서 그의 일을 이루실 것이다.
② 그가 어떠한 믿음으로 그의 앞에 있을 기쁨을 바라셨는가를 살펴 보자.
이러한 믿음이 있었으므로 그는 "아버지여 지금도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던 것이다(5절).
이 기쁨에 그는 소망을 두었고 그에게 이 소망은 부정할 수 없는 것이었다.
첫째, 그가 본문에서 무엇을 위하여 기도하였는가를 생각해 보자.
그는 1절에서처럼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라고 하였다. 같은 내용을 반복해서 기도하는 것을 헛수고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께서도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셨다"(마 26:44). 그러나 같은 기도였으나 "더욱 열심히 기도하셨다."
아버지께서 그에게 약속하셨고 주님도 확실히 믿고 있었지만 그를 위하여 기도하셔야만 했던 것이다.
약속은 기도를 하지 말라고 주어진 것은 아니다. 약속은 우리가 무엇을 바라야 되는지를 지시해 주며 또 우리의 소망의 근거가 된다.
그가 올리움을 받으사 누리신 모든 영예, 권세, 기쁨, 이 모든 것을 포함하여 본문에서는 그리스도가 영화롭게 되셨다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 영화가 어떻게 묘사되고 있는지 생각해 보자.
a. 그것은 하나님과 함께 누리는 영광이다.
주님의 말씀은 "이 세상에서 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옵소서"로 끝나지 않는다. 나아가 "당신 자신의 영화로써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라고 하신다.
그의 아버지와 함께 있으시겠다는 말은 곧 낙원에 거하겠다는 말씀이요 하늘나라를 칭하는 것이다(잠 8:30; 단 7:13; 히 8:1 참조).
높임을 받으신 구속자의 저렇다니 은 영광은 아버지께서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는 곳인 휘장 안에서 드러나리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천상 세계에서의 찬양은 "보좌에 앉으신 분과 어린 양에게" 함께 드리워지며(계 5:13)지상 세계에서 은혜와 평화를 간구하는 기도는 우리 아버지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동시에 드려지는 것이다. 이와 같이 아버지는 아들을 자신의 영화로 영화롭게 하셨다.
b. 이 영화는 그가 "창조 전에 하나님과 함께 가졌던 영화"이다. 이 말씀에 의하여 다음의 사실이 분명하여진다.
(a) 하나님과 동격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는 창세 전에 아버지와 함께 있으셨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신앙하는 대상은 "만물이 있기 전에 계셨고 또 그로 말미암아 만물이 비롯된"분에 대한 것이다.
(b) 아버지와 함께 누렸던 그의 영화는 그가 아버지와 함께 존재하셨던 것과 마찬가지로 영원 전부터였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그는 영원부터 "아버지의 영광의 광채"이셨기 때문이다(히 1:3).
하나님의 세계 창조가 그의 영광에 새로운 것을 더한 것이 아니라 그의 영광을 확인한 데 불과하였던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구속 사업을 착수하신 것은 자신이 영광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창세 전에 아버지와 함께"영화로우셨기 때문이다.
그가 구속 사업을 하신 것은 오직 우리가 영광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었다.
(c)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천한 육신을 입으신 상태에서는 스스로 이 영광을 포기하시고 그것을 휘장으로 덮어 버리시었다.
아직 그는 하나님이셨지만 그는 영광 가운데 계신 하나님이 아니라 "육신으로 나타나신 하나님"이었다.
그가 일시적으로 이 영광을 내놓으신 것은 그의 아버지가 정하신 대로 그의 사업을 철저히 이루겠다고 하신 맹세 때문이었다.
(d) 그는 높임을 받으신 상태에 이르시자 이 영광을 되찾으시고 전에 입으시던 빛의 옷을 다시 입으셨다는 사실이다.
그는 사업을 끝마치신 후 하나님에게 하신 reposcere plgnus - 즉 맹세에서 자유로와지셨다. 그러므로 그는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라 요구하신다.
그는 그의 인간적인 본성까지도 최고의 영예로운 상태에 이르게 하시라고 기도하신다. 그의 몸은 영광된 몸이 될 수 있는 자격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는 신격에만 있었던 영광이 중재자요 임마누엘이며 신인(神人 God-man)이신 분의 인격에도 나타나게 된 것이다.
주님은 이 세상의 군왕들과 구인들과 더불어 영화롭게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시지 않는다.
그는 이 세상과 저 세상을 모두 아시며 그에게 좋으신 것을 택할 수 있었다.
그랬으므로 그는 이 세상의 모든 영광을 합치더라도 족히 비교할 수 없는 저 세상의 영광을 택하셨다.
그는 사탄이 그에게 "이 세상 나라와 이 세상 나라의 영광을 제공하려 하였을 때" 그것을 경멸하였다. 오히려 그는 저 세상의 영광을 더욱 담대하게 선포하였다. "우리도 이 마음을 품어야 되지 않겠는가!" 그는 이렇게 기도하신다.
"여호와여 이 세상의 영광은 당신이 주고자 하시는 자들에게 주소서. 그러나 장차 온 세상에서 내가 찾이해야 할 몫의 영광은 내게 주소서. 내가 인간들에게 멸시를 당하오나 그것은 아무런 문제도 아닙니다. 다만 아버지여 아버지의 영화로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둘째, 그가 무엇을 근거로 간구하셨는가 본문에서 살펴 보자. 그것은 "내가 당신을 영화롭게 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사실을 생각하여 "나를 영화롭게 해달라"고 하신다.
a. 그가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였으니 그를 영화롭게 하셔야 한다는 말씀은 공평성과 정당성을 띤 주장이다.
예수께서 13장32절에서 옳게 보신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영광을 받으셨다면 하나님이 주님을 영광되게 하셔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의 높이움을 받은 때에 있을 온갖 영광을 바르게 평가하셨다.
이러한 무한한 가치를 볼 수 있었으므로 그리스도는 서슴없이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실 수 있었다.
아들이 입은 치욕으로 인하여 아버지가 영광을 입으셨다면 아들도 거시안적 입장에서 볼 때 그가 받으셨던 치욕으로 인하여 그의 영광에 손상을 입을 수 없으시리란 것은 당연한 일이다.
b. 위의 사실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예약에 의한 것이었다.
만일 아들이 "자기를 퇴를 위한 제물로 드리신다면" 그가 강한 자와 전리품을 나누고"(사 53:10, 12) "나라가 그의 것이 된다는 것이 계약되어 있었다.
그는 고통 가운데서도 이 사실을 볼 눈이 있었고 그러므로 여기에 자신을 의지하였다. "그가 십자가를 견디신 것은"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해서였다."
그리고 높임을 받으신 상태에 지금 그는 있으시면서도 아직도 그의 높임이 완성되기를 기다리신다.
그가 이렇게 바라실 수 있는 것은 그가 그의 사업을 이루셨기 때문이다(히 10:13).
c. 위의 사실은 아버지께서 그가 이루신 일을 기꺼이 받으셨고 시인하셨다는 가장 뛰어난 증거였다.
그리스도가 영광 받으심에 의하여 우리는 하나님이 만족하셨음을 알게 되었고, 또 만족을 느낀다.
이것은 아버지께서 예수를 사랑하는 아들로 기꺼이 받으셨다는 참된 증거라 하겠다.
d. 우리는 위의 사실을 통하여 다음의 사실을 배우게 된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하라고 명하신 일을 끝까지 해내는 자들만이 그들이 저 세상에 이르게 되면 아버지와 함께 영화롭게 된다는 사실이다. 이 영광을 바로 본 것은 우리가 아니라 그리스도였다.
그리고 우리의 그리스도에 대한 관심은 우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요구한다. 그리스도를 통해서만이 영생은 하나님의 자유로운 선물로 주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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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중재 기도(1)(요 17:6-10)
자신을 위하여 기도하신 후 그리스도는 다음 그에게 속한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신다.
본문에서 그는 일일이 그들의 이름을 열거하시지는 않았으나 그들 하나 하나의 이름까지 그는 아시고 계셨다(시공을 초월하여 그에게 속한 모든 자들을 의미하고 있음:역자 주).
이제 본문의 내용을 고찰해 보자.
Ⅰ. 그가 위하여 기도하시지 않은 것(9절).
그는 본문에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라"하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기도하시지 않으셨던 무리들에게 속한 세상이 있음을 기억하자.
여기서 세상이라 함은 일반적 의미에서의 인류가 거하는 세계는 아니었다(21절에 보면 그는 바로 인류의 거처로써의 세계를 위하여 기도하신다. 이르시기를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하시었다). 또한 여기서 말하는 세상은 유대인들과 구별한 이방인들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다만 여기서 말하는 세상은((그리스도께서, 위하여 기도하지 않았던, 배제시켰던 세상이란!!)) 세상에서 그리스도에게 주어진 선택받은 자들을 대적하는 무리의 세상을 말한다.
세상을 타작 마당에 있는 아직 바람에 불리지 않은 곡식 더미로 간주하사 하나님은 이를 사랑하시며 이 세상에도 축복된 자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은 "그에게 속한 자들을 완전히 아시며" 세상에서 그에게 주어진 자들을 특별히 살피시고 그들을 추려내신다.
그 다음 남은 것, 곧 제외되고 무가치한 쭉정이 더미를 여기서 세상이라고 하신 것이다.
그리스도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지도 않으시며 또 이들을 위해 죽으신 것도 아니다. 그는 이들을 포기하신다. "이들은 바람에 불려 가버릴 것들이다."
이들을 본문에서 세상이라 칭하셨다. 왜냐하면 이들은 이 세상의 영에 의하여 지배를 받으며 이 세상에서 그들의 몫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들을 위하여 그리스도는 기도하시지 않는다.
열매 맺지 못하는 나무를 용서하시라는 과원지기의 청이 있듯이 그들 대신 그들을 위하여 하나님에게 그가 중재할 수 있는 긍정적인 요소가 없을 때 그는 위하여 기도하시지 않는다.
그가 본문의 기도에서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시지 않는 것은 그들이 축복에 대한 분깃이나 기업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는 엘리야가 이스라엘을 저주하였듯이 내가 세상을 저주하노라고 말씀하시지 않는다.
다만 그들을 위하여 내가 기도하지 않노라고만 하신다. 내가 그들을 제 마음대로 살게 내버려 두시겠다고 하신다.
그들은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지 않았으므로 위대한 대제사장의 마음판에도 제외된 것이다.
어린 양에게 인식되지 못한 자들은 예레미야 7장 16절에서 예언자가 위하여 기도해 주기를 거절한 사람들의 경우처럼 아니 그 이상으로 비참한 것이다.
((그렇지만!!))누가 선택 받았는지 또 제외 당하였는지를 알지 못하는 "우리는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해야만 하는 것이다"(딤전 2:1, 4).
생명이 있는 한 소방도 있고 기도할 여지는 남아 있는 것이다(삼상 12:23 참조).
Ⅱ. 그가 위하여 기도한 사람들. 그는 천사들을 위하여 기도하신 것이 아니고 바로 인간들을 위해 기도하셨다.
1. 그는 "자기에게 주어진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셨다.
이들은 우선적으로 그와 함께 중생에 들어간 제자들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들의 범위가 더 넓게 적용되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즉 그리스도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믿는, 같은 주님 아래 모여든 모든 사람들을 의미한다(6, 8절).
2. 그는 "자기를 믿는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신다(20절).
이들은 현재 그를 믿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이미 전에 그의 오심을 믿고 기다리다 죽은 사람들 즉 시간과 장소를 초월한 모든 믿는 자들에게 적용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그들 모두에게 관심이 있으시기 때문이다.
Ⅲ. 그가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실 수 있었던 이유. 그리고 그가 그들을 아버지에게 부탁하고 추천할 수 있었던 근거. 이것은 다음의 다섯 가지를 들 수 있겠다.
1. 그가 그들에 관하여 맡으신 책임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본문에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다"(6절) 하였고 9절에 다시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라고 하셨다. 이 말씀의 뜻은 이러하다.
"아버지여 내가 지금 위하여 기도하는 자들은 당신이 내게 맡기신 사람들이요, 내가 그들을 위해 간구한 것은 당신이 그들을 내게 맡기신 책임을 수행하는데 필요한 것입니다."
(1)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자들은 먼저 당시의 제자들을 의미하고 있다.
제자들은 주님이 세상에 있는 동안 그에게 교육받도록 그리스도에게 주어진 생도들이며 그가 하늘로 올라가신 다음에는 그 대신 활약을 할 대행자들이다.
그들은 그의 가르침을 배울 자들로 그에게 주어졌고 그의 생애와 기적의 증인이 되며 그의 은혜와 사랑의 증거자로 주어진 자들이었다.
또 이들은 그의 복음의 반포자로 그의 교회의 설립자로 되기 위하여 그에게 주어진 자들이었다.
그들이 그를 따르기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린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숨은 결단에서 우러난 것이었다.
실상 그들이 그를 따른 것은 자신들의 선택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택하사 그에게 주신 것이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대한 선물로 주신 사도직과 목사직은 처음에는 아버지께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신 선물이었던 것이다.
율법 시대에 레위 제사직이 먼저 레위 자손이 아닌 아론에게 주어졌듯이(민 3:9) 아버지께서는 (우리의 믿음의 대제사장이신) 주님에게는 처음에 사도직, 다음에는 모든 시대에 존재하게 된 목사직을 주셨던 것이다. 이들은 주님의 직책을 대신하며 모든 회중을 책임지고 성막(곧 성전)에서 섬기는 일을 하기 위하여 선택된 것이었다(엡 4:8; 시 68:18 참조).
그리스도는 사람들을 위하여 이 선물을 받으셨다. 즉 그것을 사람들에게 주시기 위해서였다. 이 사실은 복음 사역을 명예롭게 해 주며 경시당해 온 복음 사역직을 권위있게 하여 준다.
또한 이 사실은 복음 사역자들이 주님이 그의 직책을 완수하셨듯이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에 전적으로 자기 자신들을 드릴 강력한 책임을 부여한다.
(2) 그러나 이 말씀은 모든 선택된 자들에게 확대 적용된다. 왜냐하면 다른 곳에 이르기를 그들도 그리스도에게 주어진 자라고 하였기 때문이다.(6:37, 39).
그는 자주 그가 구원한 자들은 그의 몫으로 그에게 주어졌다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그들은 그의 보호를 받도록 의탁되어졌고 그들은 그에게 기대를 걸었다.
또한 그들에 관하여 그는 계명을 받으셨다. 그는 본문에서 다음 사실을 보여 주신다.
① 아버지께서는 그들을 주실 권한을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이다.
그 이유는 "그들이 그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것이 아닌 것은 주시지 않았다. 선택된 자 곧 아버지께서 그리스도에게 주신 자들은 세 가지 점에서 하나님의 것이다.
첫째, 그들은 피조물이요 그들의 생명과 삶은 하나님으로부터 얻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그리스도에게 영광된 그릇들로 주어지기 전 그들은 토기장이의 손에 들린 진흙덩이와 같이 하나님의 손 안에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지혜로움에 의해서 그의 영광을 위하여 가장 적합한 것으로 여겨져 구분된 것이다.
둘째, 그들은 죄인들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의 생명과 삶이 그에게 저당당하고 말았다. 구원하라고 그리스도에게 주어진 자들은 타락한 인류 가운데 남은 자들이었다.
그들이 자비를 입어 건짐을 받기 전에 그들은 정의에 의해 희생당하도록 정해져 있었다. 또한 그들이 구세주에게 의탁되기 전에 형리에게 넘겨지도록 정해져 있었다.
셋째, 그들은 선택된 자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생명과 삶은 그를 위하여 계획된 것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을 위하여 구별되었고 이제는 하나님의 대리자이신 그리스도에게 이양된 것이었다.
그는 이 사실을 다시 주장하신다. 즉 "당신이 내게 주신 것은 사람은 누구나 다 당신에게 속한 것이니이다"라고 하신다.
이 말씀은 중재자로서의 그의 직능에 관계되는 모든 사람을 의미하는 것 같지만 본문에서는 특별히 그리스도에게 주어진 사람들만 뜻하고 있다. 즉 다음과 같은 뜻의 말씀이다.
"그들은 당신의 것입니다. 그들의 존재는 자연의 하나님이신 당신께 속하여 있으며 그들의 안녕은 은혜의 하나님이신 당신께 속하여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당신의 것입니다. 그러니 아버지여 그들 모두가 당신을 섬기도록 그들을 당신에게로 인도하나이다."
② 아버지께서는 주실 권리를 가지고 있으시므로 그들을 아들에게 주셨다.
그러므로 양을 보호하기 위하여 목자에게 맡기듯이, 환자를 치료하기 위하여 의사에게 맡기듯이, 어린이들을 교육하기 위하여 교사에게 맡기듯이, "당신이 그들을 내게 주셨습니다"라고 말씀하신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아들에게 그의 몫을 넘겨주셨다. 고로 이르기를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라" 하였다(히 2:13). 그들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에 그리스도에게 넘져졌다.
첫째, 은총에 의하여 선택된 자가 파산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즉 한 명의 어린 소자 하나일지라도 멸망당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들을 맡길 수 있는 분은 충분한 이들의 안전을 보장할 능력이있는 분이어야 했다.
즉 선택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이 목적을 이룰 수 있는 사람이어야 했다.
둘째, 그리스도의 사업이 열매 없는 결과로 끝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들은 그의 씨앗으로 그에게 주어졌다. 그는 씨앗 곧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결과를 보고 만족히 여기셨다"(사 53:10, 11).
그 씨앗은 그가 "헛되이 또 무익하게 함을 다하였고 피를 흘린 것이 아님을 나타내 주는 것이었다(사 49:4).
우리도 그리스도께서 하신 것처럼 주여 내게 주신 은총을 거두지 마시고 내게 주신 위로로 늘 머물게 하소서. 왜냐하면 이 은총과 위로는 당신께서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고 간구해야 한다.
2. 그가 그들을 취하여 가르치시려는 관심이 그에게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본문에(6절)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그들에게 나타내었나이다"라고 하였고, 또(8절)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을 저희에게 주었다"고 하셨다. 좀 더 상세하게 고찰하자.
(1)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숨은 위대한 계획.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타나내고 그를 선포하려는 것이었다(1:18). 또한 무지한 자를 깨우치며 하나님에 관하여 암매(闇昧)한 오판자들을 교정해 주시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하나님이 더욱 사랑을 받으시며 숭배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2) 이 사업에 대한 그리스도의 성실한 수행.
그러므로 그는 말씀하시기를 "내가 다 이루었다"고 하셨다. 그의 충성은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 나타난다.
① 그의 교훈의 진실성에서. 그가 전한 교훈은 그가 아버지로부터 받은 교훈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었다.
그리스도는 구속 사건을 인간의 삶에 있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말씀"도 주셨다.
이 말씀은 아버지로부터 그에게 주어진 것이었다. 메시지를 전함에 있어서 교역자들은 성령께서 가르치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② 그의 가르침의 경향에서. 그의 교훈은 하나님의 이름을 나타내 주었다.
그는 자신의 이익을 구한 것이 아니라 그의 모든 행위와 말씀을 통하여 그의 아버지를 높이는 것을 목적하였다. 다음 사실을 기억하자.
첫째, 하나님의 이름을 인간들의 영혼에 나타내는 것은 그리스도의 특권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아버지를 아는 자는 한 사람도 없으나 다만 아들이 그에게 아버지를 계시하려고 택한 사람들밖에는 아버지를 아는 이가 없다"고 하였다(마 11:27) (한글 개역과 다소 틀림:역자 주). 그만이 아버지를 사귀어 아시며 따라서 그만이 아버지를 나타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그만이 인간들의 영혼에 접하실 수 있고 그러기에 그만이 인간들의 마음을 열어 이해시킬 수 있는 것이다(모세가 그러하였던 것처럼, 신 32:2)교역자는 "여호와의 이름을 선포할 수는 있으나" 그 이름을 나타내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이시다.
그리스도의 말씀에 의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계시된다. 그리스도의 성령에 의해 하나님은 우리 안에 자신을 나타내신다.
교역자들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줄 수 있다. 그러나 그의 말씀을 우리에게 주시어 음식이나 보화처럼 우리 속에 간직하게 하시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이시다.
둘째, 조만간 그리스도께서는 그에게 주어진 자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나타낼 것이요, 그들에게 그의 말씀을 주사 그들의 새로운 출생의 씨앗이 되게 하시며 그들의 영역 생활을 지탱시키시며 영원한 축복의 예표가 되게 하실 것이라는 사실이다.
3. 그들에 대한 그의 보살핌의 좋은 결과와 또한 그가 그들과 함께 맛본 고통을 들어 호소하신다.
그러므로 본문에(6절) "저희는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하였고 "너희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것이 다 아버지께로서 온 것인 줄 알았나이다"(7절) 하였고 "저희가 아버지의 말씀을 받았나이다"(8절)라고 하셨다.
또한 제자들은 말씀을 받아 간직하고 그 말씀을 수긍하였으며 거기에 만족하였고 "내가 아버지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라고 하셨다.
이제 그 내용을 고찰해 보자.
(1)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그에게 주어진 자"들 가운데서 이루어논 성과. 그것은 다음 몇 가지 점으로 생각할 수 있겠다.
① "땅이 그 씨앗을 받아들이고 흙이 비를 흡수하듯이 그들이 내가 전한 말을 받았다"는 점이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에 경청하였고 그 말씀의 의미를 어느 정도까지는 깨달았으며 또 그 말씀에 감화를 받았다.
그들은 그 말씀에서 받은 기억을 깊이 간직하였다. 그들에게 있어서 그 말씀은 "인상 깊이 남아 있을 말씀"이었다.
② "저희는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고 계속 말씀 안에 거하며 말씀대로 수행하였다"는 점이다.
그리스도의 계명은 복종하는 자만이 간직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계명을 가르치는 사람들은 스스로 말씀의 준행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에게 위임된 말씀을 지키는 것이 필수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에 의하여 말씀은 모든 시대에 걸쳐 각처에 전달되어야 하겠기 때문이었다.
③ "저희는 그 말씀을 이해하였고 무슨 이유 때문에 그들이 그 말씀을 받아 간직해야 하는지를 잘 깨달았습니다. 또 그들은 아버지께서 내가 와서 이루려고 한 거룩한 신앙의 참 창시자이심을 깨달았으며 저희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것이 다 아버지께로서 온 것인 줄 알았다"는 점이다.
그리스도의 모든 임무와 권능, 성령의 모든 은사, 모든 성령의 은사와 위로, 하나님이 한 량 없이 그에게 주신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고 그의 지혜에 의하여 고안되었으며 그의 뜻에 의하여 약속되었고 그의 은총에 의하여 설계된 것이었다. 이는 인간을 구원하시므로 자신이 영광되기를 바라셨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의지함에 있어서 그리스도 자신, 그의 존재의 모든 것과 그가 지니신 모든 것, 그가 말씀했고 행하셨던 모든 것, 또 지금 그가 행하시며 앞으로 하고자 하시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나왔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큰 만족을 주는 사실임을 기억하자(고전 1:30).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중재하심에 우리의 영혼을 의탁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하나님에서 비롯되셨기 때문이다.
우리를 의롭게 하심을 약속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면 우리는 만족해야 할 것이요, 또 그가 베푸시는 은혜라면 우리는 그 은혜에 의하여 성별될 수 있는 것이다.
④ 그들은 그 말씀에 대하여 충성의 서명을 하였다. 그것은"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저희가 참으로 알기 때문이었다"(8절). 다음의 사실을 생각해 보자.
첫째, 그들이 믿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 말씀이 진리에 속한 줄을 확실히 알았기 때문이었다.
제자들은 지식적인 면으로는 무식하고 결함이 많았다. 그렇지만 그들이 자신을 아는 것보다 더 그들을 잘 아시고 계시던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믿을 수 있도록 말씀을 잘 납득시키셨다.
우리가 자신의 힘으로는 완전히 알 수 없는 것도 그리스도께서 도와 주시면 확실히 알 수 있으리라는 것을 기억하자.
또한 우리가 보지 못한 것들도 그 속성을 상세하게 묘사하지는 못할지라도 그것의 존재를 확실히 알 수는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살면 비록 보지는 못한 것이라 할지라도 확실히 또 명백히 알 수 있는 것이다.
둘째 우리의 믿음의 내용.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으로부터 오셨으며 그 인격에 있어서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시며 하나님이 그를 보내셨다는 사실이다. 또한 그는 직능으로는 영원하신 왕의 대사이시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도 그리스도와 같이 하나님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며 동등한 권위에서 출발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모든 가르침은 하나님의 진리로 받아들여져야 하며 그의 모든 계명을 하나님의 규례로 여겨 복종해야 하며 그가 하신 모든 약속은 하나님이 보장하시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2) 예수 그리스도는 제자들의 이러한 모습을 어떻게 보시고 계시는가를 살펴 보자.
① 그는 자신의 가르침이 제자들에게 좋은 성과를 끼치게 된 사실을 기쁨으로 여기시고 말씀하신다.
그의 제자들의 어리석음과 연약함이 그를 수 없이 괴롭혔지만 그럼에도 그들의 변함없는 그에 대한 추종과 점진적인 향상 및 결국 이루어 놓은 위대한 성취가 그의 기쁨이 되었다.
그리스도는 그의 생도들이 가르침에 숙달되는 것을 기뻐하시는 스승이시다. 그는 그들의 신앙의 진실성을 높이 평가하셨고 그들의 약점을 너그러이 용납하셨다.
우리는 그가 우리로 만족스러운 성장이 있게 하시며 그도 그 성장의 결과를 대단히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 까닭에 그는 자기에 대한 우리의 신앙을 격려하며 서로 우애를 가지도록 가르치시는 것이다.
② 그는 제자들에게 좋은 성과를 끼친 사실을 들어 아버지께 그들을 위해 간청하신다.
그는 "자기에게 주어진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셨으며 그리고 그들이 자신들을 아버지에게 드렸다는 것을 들어 간청한다.
은혜를 받아 거기에 부응하는 개선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더 큰 은혜를 간청하는데 좋은 이유가 된다는 것을 기억하자.
왜냐하면 "가진 자에게 더 많은 것을 주라"는 것이 약속되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지키고 그를 믿는 자들이 있다면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추천하게 하되 그들을 그의 아버지에게 의뢰하도록 간구하는 것이 옳은 일이다.
4. 그는 그들에 대해 아버지 자신의 관심에 호소한다(9절). 그러므로 본문에서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는 것은 저희가 아버지의 것이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신다.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아버지와 아들 쌍방의 공동 관심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내 모든 것이 당신의 것이요 당신의 것이 나의 것이라"는 말씀을 보게 된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는 (사람들 간에 흔히 있듯이) 내 것 네 것((meum and tuum) 때문에 분쟁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문제는 영원 전에 그들 사이에서 해결된 것이기 때문이다. 즉 "내 모든 것은 당신의 것이요, 당신의 것 또한 나의 것이라"는 말이다.
(1) 그는 제자들을 위하여 특별히 간청하신다. 그 이유를 그는 "그들이 당신의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신다.
선택된 자들을 아버지에게 부탁하는 것보다 그리스도에게 부탁하는 것이 부족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이러한 과정을 거침으로 선택된 자들을 더욱 이롭게 하기 위한 것이다.
다음 사실을 기억하자.
① 그리스도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를 믿는 모든 사람들은 아버지와 계약 관계를 맺은 것으로 간주되어 그들은 아버지의 소유로 간주된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그에게 드리셨고 그들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신들을 아버지에게 드렸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피로써 우리를 구속하신 것은 자신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것이었다(계 5:9, 10). 그들은 "하나님에게 드려진 처음 익은 열매"인 것이다(계 14:4).
② 나는 당신의 것이라고 기도하는 가운데 고백하는 것은 간구의 좋은 방법이다.
그리스도께서도 본문에서 "저희는 당신의 것이라"는 점을 들어 간구하신다. 우리도 자신을 위한 기도에 이 방법을 적용하자. 그리하여 "나는 당신의 것이니 나를 구해 주소서"라고 기도하자. 그리고(출 32:11 에서 모세가 기도한 것같이)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도 아음과 같이 기도하자.
"그들은 당신의 백성이요 당신의 것입니다. 당신의 사람인데 그들을 그대로 버려 두시겠습니까? 그러면 그들은 악마와 세상에게 패배하고 말 것입니다. 그들에 대한 당신의 이익을 위하여서도 그들이 당신을 떠나지 못하게 하소서. 그들은 당신께서 당신의 소유로 삼으신 당신의 것입니다."
(2)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에게 간구할 수 있었던 근거. 그것은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 대하여 설명해 준다.
① 그들은 본질상(in essence) 한 분이시다. 모든 피조물은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다"고 말함이 옳다.
그러나 그 어떤 피조물도 "아버지의 것이 다 내 것이다"고 말하지는 못한다. 다만 본질상 아버지와 동등하시며 권세와 영광이 그와 같으신 분만이 할 수 있는 말이다.
② 그들은 이익 관계에 있어서 공통되신다. 즉 두 분 사이에 소유의 구분이 있거나 이해의 대립이 없으시다.
첫째, 창조자로서 아버지께서 가지신 것은 아들에게도 소유할 권한이 주어졌으므로 아들은 하시는 사업에 편리한 대로 쓰고 처분하실 수 있으시다.
그러므로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다"(마 11:27)고 기록된 것이다. 그에게 주어진 것은 광범위하여 "만물을 그 발 아래 두신 분" 곧 하나님 외에는 예외의 것이 없다.
둘째, 구속자로서 아들이 이루신 것은 아버지를 위하여 계획된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그의 왕국을 곧 아버지에게 드릴 것이다.
아들의 구속 사업을 통하여 이루신 모든 이익은 아버지의 찬양을 위하여 작정된 것이며 또 아들의 사업의 일관된 관심은 아버지의 영광을 돌리는데 집중되었다.
그러므로 그는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아들은 아버지를 섬기는데 자신을 드리지 않는 어떠한 것도 자기 것으로 삼으시지 않는다.
그러므로 본질적 신앙의 지시와 법도에 저촉되는 어떠한 것도 기독교 신앙 속에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한편 제한된 의미에 있어서 "아버지의 것은 다 내 것이다"고 참된 신자는 누구나 말할 수 있다.
계약에 의하여 하나님이 우리의 소유이며 그의 존재의 모든 것 또 그가 가지신 모든 것이 우리의 것이라면 그의 가진 것이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역사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한편 참된 신자라면 누구나 다 "주여 내 것은 다 당신의 것입니다"라고 무제약적으로 말해야 한다. 모든 것을 그의 발 아래 두고 그를 섬기는 일에 써야 할 것이다.
우리의 가진 모든 것을 하나님의 가호와 축복 속에 안심하고 맡겨 그의 쓰심에 합당하게 쓰여질 수 있게 해야 한다.
우리는 이렇게 말해야 한다. "주여 내 가진 것을 돌보소서. 왜냐하면 내 것이 다 당신의 것이기 때문입니다"라고.
5. 그는 그들로 인하여 얻은 자신의 유익을 들어 간구하신다.
그러므로 본문에 ‘데독사스마이’(17:10) - 즉 내가 저희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라고 하셨다.
(1) 이 말씀은 "지금까지 내가 그들로 인하여 영광을 받아 왔다"는 말씀이다.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계시며 누린 작은 영예가 있다면 그것은 제자들로 인한 것이었다. 그들이 그를 따랐고 또 그에게 복종하였으며 또 그의 이름으로 말씀을 전하고 기적을 행하므로 그는 영광을 받아 왔었다. 그러므로 그는 "내가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나이다"라고 하신 것이다.
자신을 통하여 그리스도에게 영광을 돌린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중재(위하여 기도해 주심)의 은총을 받는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2) "내가 하늘로 올라가면 그들로 인하여 영광을 받게 될 것입니다. 즉 그들은 내 이름을 세상에 증거할 것입니다"라고 하신다.
사실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씀을 전파하고 기적을 행하였다. "그들 안에 계시는 성령이 그리스도를 영광되게 하였다"(16:14).
그리하여 본문에 "내가 저희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라고 말씀하신다.
① 그러므로 "나도 저희를 위하여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라고 하신다.
이 타락한 세상 속에서 그래도 그리스도가 바라시는 것이 있다면 교회에 대해서이시다. 그러므로 교회와 교회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그는 휘장 안에 거하시며 마음속에 간직하신다.
② "그러므로 내가 그들을 아버지께 의탁합니다. 그들은 아들을 영화롭게 하는데 수고하였고 이 까닭에 나를 영화롭게 한 저들에게 은혜를 내려 주소서"라고 하신다.
하나님과 아들은 그리스도에게 영광을 돌린 자들을 겸허한 신뢰와 함께 아버지의 특별하신 가호에 맡기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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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중재 기도(2)(요 17:11-16)
그리스도께서는 일반성을 띈 간구로 그의 제자들을 보살펴 줄 것을 아버지께 의뢰하신 후 그들을 위하여 특별한 간청을 드린다.
먼저 그는 그들이 하늘에서 있을 영적인 축복을 받게 해달라고 하신다.
그는 그들이 이 세상에서 부자가 되고 위대하게 되게 해 주실 것을 간구하지는 않았다.
또 그들이 재산을 모으고 명예가 높게 되기를 기도하지도 않으셨다.
다만 그들을 죄에서 보호해 주실 것과 그들에게 주어진 임무를 수행하게 해 주시며 안전하게 하늘나라에 이를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셨다.
영혼의 번영이 최대의 번영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은 다른 사람들과 우리 자신의 영혼을 자신을 대가로 지불하고 사시고 모든 사람의 영혼을 위하여 자신을 주고자 해서였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먼저 영혼을 위하여 구하라고 가르치신다.
또한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들이 처한 현재의 상태와 입장, 그들이 당했던 여러 가지 위험과 사건들을 생각할 때 이러한 축복은 당연한 것이라고 하신다. 그리스도의 중재는 항상 적절하게 주어진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아버지에게 우리의 사정을 중재해 주시는 분은 우리의 소원과 고뇌, 위험과 어려움의 상세한 내용까지도 아신다.
그리고 각자의 형편에 따라 어떻게 중재해야 할 것도 아신다.
예를 들어 베드로는 자신은 위기를 몰랐지만 그는 아시고 "내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였노라"(눅 22:32)고 하셨다.
또한 그는 간구하심에 있어서 관대하시고 넉넉하시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 앞에서 순서에 따라 간구를 하신다.
또 끊임 없이 우리를 중재하시며 우리에게 열심히 끈덕지게 기도할 것과 기도에 인색하지 말 것과 은혜의 보좌에 나아갈 것을 가르치신다.
그리고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않으시면 결코 당신을 보내드리지 않겠나이다"라고 야곱이 기도한 것처럼 기도할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신다.
본문에서 그리스도가 간구한 첫 번째 사실은 제자들을 위한 것으로 그들을 보호해 달라는 것이었다.
이 말씀은 제자들 모두를 아버지의 보호 아래 의탁한다는 말이었다.
보호해 달라는 말씀은 위험을 전제로 한 말씀이요, 그들의 위험은 그들이 살고 있는 이 세상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이 세상의 악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해 달라고 그는 간구하신다.
Ⅰ. 예수께서 간구하신 내용.
그것은 본문에 의하면 "저희를 세상에서 보전해 주시라는 것"이었다. 그들이 세상에서 놓여나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었다.
1.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는 길이 있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이 그러한 방법으로 놓여나기를 기도하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본문에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 가기를 위함이 아니라" 하였다. 이 말씀의 뜻은 다음과 같다.
(1) "나는 그들이 속히 죽어서 세상을 떠나게 해 줄 것을 기도하지 않습니다"란 뜻이다.
세상이 그들에게 괴로움을 끼친다면 보전하는 가장 안전한 길은 서둘러서 그들을 보다 좋은 세상으로 보내 거기서 훌륭한 대접을 받게 하는 것이었다. 즉 그들을 위하여 불 말과 불 병거를 보내 그들을 하늘로 데려가시도록 하는 것이었다.
욥이나 엘리야나 모세와 같은 이들도 괴로운 일이 발생하였을 때 그들을 이 세상에서 데려가 주실 것을 기도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두 가지 이유 때문에 그의 제자들을 위하여 그렇게 기도하지 않으셨다.
① 그가 오신 것은 사람들로 견딜 수 없게 하고 결국은 죽음까지 결단하게 하는 사나운 열기와 고난을 조정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것들을 정복하고자 오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달아나지 않는 것이 그의 뜻이신 것이다.
② 그는 이 세상에서 그들이 일을 하기를 바라셨기 때문이었다. 세상은 그들을 못마땅하게 여겼고(행 22:22) 그러기에 그들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았고(히 11:38) 그들을 살려두는데 인색하였다. 하지만 그리스도는 이 어두운 세상을 동정하여 이곳에서 빛들 곧 그의 제자들을 옮겨 가지 아니하셨다.
그리고 그들을 계속 세상에 두셨는데 이는 이 세상에 "그들이 전한 말씀을 통하여 그를 믿는 자들을"위해서였다.
주님이 세상에 계신 동안은 아직 그들이 세상에서 데려감을 당해서는 아니 되었다. 그들은 각각 순교해야 할 순서가 섭리에 의하여 정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각각 자기에게 주어진 증거를 완료하기까지는 데려감을 당치 아니하였다. 다음 사실을 기억하자.
첫째, 훌륭한 사람들이 이 세상을 하직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일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오히려 가공스럽고 낙담시키는 일이다(사 57:1).
둘째,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제자들을 사랑하셨지만 그들이 소명받을 때 그랬던 것처럼 즉시 그들을 하늘로 보내시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그들을 얼마 동안 세상에 더 두시면서 이 지상에서 선을 행하여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하늘에 합당한 자로의 준비를 갖추게 하신다.
마음대로 죽을 수 없으므로 즉 하나님이 살라고 하셨기에 사는 많은 훌륭한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2) "나는 그들이 이 세상의 고통에서 전적으로 자유롭게 되고 그 고통을 모면하고 이 세상의 수고와 두려움에서 벗어나 동요없는 삶을 누릴 수 있는 평안하고 안전한 곳으로 보내 달라고 기도하지는 않습니다. 내가 그들을 위하여 바라는 보전은 그러한 유의 보전이 아닙니다"란 뜻이다.
칼빈은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즉 모든 고통에서 자유롭게 되어 그들이 사치스러운 안일을 누리기를 바라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도우심에 의하여 그들이 위험에 부딪첬을 때 보호함을 받기를 기도하신 것이다.
즉 그들이 이 세상과의 모든 갈등에서 보호하심을 입게 해 달라고 기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세상에 의하여 정복당하지 말기를 바라신 것이었다.
예레미야가 원하였던 것처럼 그들이 백성을 떠나 멀리 가버리기를 원하신 것이 아니었고(렘 9:2) 에스겔과 같이 "악한 자들의 얼굴을 대하도록 그들의 얼굴을 담대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였다(겔 3:8).
그리스도를 위한 군사의 명예는 수도 생활의 서원을 하고 세상에서 물러나는 것보다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는 것이다.
또한 다락방에서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보다 성 안에서 그를 섬기는 것이 더욱 그리스도를 명예롭게 해드리는 것이다.
2. 그들이 세상에서 놓여나는 또 하나의 방법은 이 세상에 있는 부패에서 그들을 보전함으로 가능하였다.
그는 바로 그들이 이렇게 보전되기를 위하여 기도하신다(11, 15절). 본문의 예수님의 간구는 셋으로 분류할 수 있다.
(1) "거룩하신 아버지여 당신이 내게 주신 저희를 보전해 주소서" 하신 간구가 그 하나이다.
① 이제 그리스도는 그들을 떠나시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떠나신다고 그들이 아무런 보호도 없이 내버림을 당한 것 아니라는 것을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인식시키려고 하셨다.
오히려 그는 그들이 듣는 가운데 그의 아버지인 동시에 그들의 아버지이신 분의 보호 아래 그들을 의탁하신다.
그리스도 자신이 직접 제자들을 하나님의 돌보심에 의탁하셨다는 것은 모든 믿는 자들에게 말할 수 없는 위로가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시는 사람들은 안전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의 사랑하는 이들이 자기에게 의탁하신 자들을 보호해 주시기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 사실에 힘입어 우리는 믿음으로 "우리 영혼의 보전을 하나님께 의탁할 수 있는 것이다"(벧전 4:19; 딤후 1:12).
첫째, 그는 본문에서 그들을 하나님의 보호에 의탁하신다.
즉 그들이 그들의 원수의 적의 때문에 패배당하지 않게 되기를 의탁하신다.
다른 말로 그들과 그들이 관여하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섭리의 특별하신 가호를 받게 되기를 간구하신다. 즉 다음과 같은 말씀이다.
"그들이 사명을 완수할 때까지 그들의 생명을 보전해 주소서. 그들에게 위로를 주시고 그들이 직면하는 곤경에 의하여 넘어지지 않게 붙잡아 주소서. 세상에서 그들이 손해를 보지 않게 하시며 파산당하지 말게 하소서"란 뜻의 간구이다.
바로 이 기도에 힘입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 세상에서의 복음의 사역과 그리스도의 교회가 놀라우리만큼 보전되어 온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은혜로 그의 교회와 사역자들을 지켜 주시고 유지케 하시지 않았더라면 벌써 오래 전에 사라져 버렸을 것이다.
둘째, 그는 그들을 하나님의 훈도 아래 의탁하신다.
즉 그들이 그들의 의무에서 스스로 떠나거나 마음이 변하여 곁길로 빠지는 일이 없도록 하나님께 의탁하신다. 즉 다음과 같은 말씀이다.
"그들이 고결성을 잃지 않게 하여 주시고 제자로의 사명을 다하게 하시며 그들의 의무에서 떠나지 않게 지켜 주소서"란 뜻의 말씀이다.
은혜의 경지에 들어가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은혜로운 보호를 받기 위해서도 하나님의 능력은 필요하다(10:28, 29; 벧전 1:5 참조).
② 그는 하나님의 이름에 의지하여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므로 호소에 활력을 부여한다.
첫째, 그는 하나님을 "거룩하신 아버지"라고 칭한다.
우리가 자신과 또 다른 사람들을 하나님의 보호 아래 의탁할 때 우리는 다음 사실로 인하여 간구할 용기를 얻게 된다.
a. 하나님의 거룩하신 속성에 의지하므로 우리는 간구할 용기를 얻게 된다.
왜냐하면 그의 거룩하심 때문에 그에게 나아오는 거룩한 자들은 보호해 주시겠다고 그가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맹세하실 때 "그의 거룩함으로 맹세하신다"(시 89:35). 만일 그가 거룩한 하나님이시요 죄를 미워하신다면 거룩한 자들을 그의 것으로 삼으실 것이며 죄로부터 그들을 보호하실 것이다. 그리고 그들도 죄를 최대의 악으로 미워하고 싫어한다.
b. 그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므로 간구할 용기를 얻게 된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의 아들이 되는 것이다. 그가 하나님이시라면 자기의 자녀들을 보호해 주실 것이며 그들을 가르치시고 보존하실 것이다.
그밖에 누가 이런 역할을 담당해 줄 수 있겠는가?
둘째, 그는 제자들을 아버지께서 "그에게 주신 자들"이라고 하신다.
아버지께서 선물로 주신 것은 그가 또한 보호해 주시리라고 안심해도 좋다.
이 말씀의 뜻은 "당신이 내게 주신 은혜와 위로로 내게 주신 자녀들과 또 내가 받은 사명을 보전해 주소서"인 것이다.
(2) "당신 자신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해 주소서"라고 간구하신다. 즉 다음과 같은 뜻이다.
①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그들을 보전해 주십시요. 그들을 보전해 주심으로 나의 이름과 영예 뿐만 아니라 당신의 이름과 영예도 보전되는 것입니다. 만일 그들이 변심하거나 주저 앉아 버리면 나나 당신의 이름과 영예 모두가 이로 인하여 수모를 당할 것입니다."
구약에 나오는 인물들은 자주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라고 간구하였다.
이들은 그들 자신의 어떤 이익을 위해서보다는 하나님의 이름의 영예를 위하여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사실을 들어 간구하기를 위안으로 삼았다.
② 그들을 당신의 이름 안에 보호해 달라고 하신다.
원문대로 하면 ‘엔 토 오노마티’(17:11) 즉 저희를 당신의 이름을 알고 두려워하는 일에 늘 거하게 하시며 어떠한 대가를 치루더라도 당신의 이름을 고백하고 섬기는 일에 그들이 거하게 하소서. "당신의 이름의 이익을 그들로 추구하게 하시며 그들로 당신의 이름에 신실하게 하소서. 그들로 당신의 진리 안에 거하게 하시며 당신의 율례와 계명의 법도 아래 거하게 하소서"라는 뜻이다.
③ 그들로 당신의 이름에 의하여 또 그 이름을 통하여 보전되게 하시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 말은 "당신 자신의 능력에 의하여 또 자신의 손으로 그들을 보전하시며 그들을 당신 자신처럼 여기사 보존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일하시며 그들로 당신의 즉시적인 보호를 받게 하소서. 당신이 스스로 약속하신 보전수단에 의하여 그들을 지키시며 그 이름으로 당신 자신을 나타내소서. 말씀과 율례로 그들을 지키시고 당신의 이름이야말로 저들의 강한 성이 되게 하시며 저들의 장막과 거처가 되게 하소서"라는 뜻이다.
(3) 그들을 "악으로부터" 또는 악에 물들지 않도록 보전해 달라고 하신다.
그는 그들에게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고 매일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다. 그의 기도는 제자들에게도 기도하라는 격려가 되고 있다.
이 기도의 뜻은 다음과 같다.
① "저희를 악한 자 곧 악마와 그의 모든 도구로부터 보전해 주소서. 또 악한 자와 그의 모든 자녀로부터 그리고 유혹자인 사탄에게서 저희를 보호해 주시어서 저희로 휩쓸려 떠나가게 마시며 그들의 믿음으로 낙심케 하지 마소서. 파멸자인 그로부터 저희를 보호하시어 저들로 절망에 빠지지 말게 하옵소서"라는 뜻이다.
② "악한 것 곧 죄로부터 저희를 보전해 주소서. 죄와 유사한 모든 것에서 또는 죄로 유혹하는 모든 것에서 저희를 보전하소서. 저희로 악에서 떠나도록 보전하소서"(고후 13:7)란 뜻이다. 죄는 그 무엇보다도 우리가 두려워하고 면하기를 바라야 할 악이다.
③ "이 세상의 악에서 저희를 보전하소서. 그리고 이 세상의 고난에서 저희를 보전하소서. 그리하여 세상에서 찔림을 당하거나 악의에 의하여 상처를 당하지 않게 하소서"라는 뜻이다. 즉 이 말은 저희로 고난을 피하게 해달라는 것이 아니고 고난을 극복하게 해달라는 간구이다.
아무리 많은 고난이 닥쳐도 그로 인하여 악을 저지르지 않게 하시며 어떤 해도 당하지 않게 해달라는 말씀이다.
Ⅱ. 그가 그들의 보호를 하나님께 강력히 호소하신 데는 다음 다섯 가지 이유가 있다.
1. 그는 지금까지 그가 저희를 보전해 왔음을 한 이유를 드신다(12절).
"내가 이 세상에서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였습니다."
또한 복음에 대한 참된 믿음과 하나님 섬기는 일에 저희가 거하게 되었습니다. 나의 동반자들로서 내게 주신 자들은 내가 보전하였으므로 저희는 모두 안전하였고 그들 중에 하나도 잃어버리거나 또는 변심하거나 파멸에 이르지 아니하였습니다. 다만 있다면 "지옥이 예정된 아들"(유다를 지칭함) 뿐이었습니다. "그만이 탈락되었고 이것은 성서의 말씀이 이루어지기 위한 것이었습니다."라고 하신다. 다음 사실을 고찰하자.
(1) 그의 제자들에 관하여 맡으신 책임에 대한 그리스도의 성실한 수행.
그러므로 본문에 "그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저희를 보전하였다"고 하였다. 그들에 대한 그의 보전은 헛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그들을 하나님의 이름 안에 보전하였고 그들이 어떤 위험스러운 잘못이나 죄에 떨어지지 않도록 보전해 주셨다.
또한 바다와 육지를 횡단하며 개종할 자를 찾는 바리새인들과의 충돌에서도 그들을 지켜 주셨다.
그는 저희가 그를 버리지 않도록 하셨고 그들이 그를 위하여 아낌없이 떠났던 보잘 것 없는 것에로 돌아가지 않도록 지키셨다.
그가 저희를 전도하러 보내실 때도 그들에 대한 보호의 눈길을 걷우시지 않았다. 그는 몸은 따로 떨어져 있을망정 마음은 그들과 함께 하였던 것이다. 그를 따랐던 많은 사람들은 이런 저런 문제에 부딪쳐서 그를 따라갔다. 그러나 그는 12제자만은 떠나지 않도록 보전하셨다. 그는 저희의 생명을 노리는 박해자의 마수에서 저희를 지키셨고 자신은 잡히시면서도 저희를 보전하시기까지 하셨다(18:9). "그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는" 볼 수 있는 방법 즉 언제나 그들의 뇌리에 사라지지 않을 교훈으로 또 그들의 보는 앞에서 행한 기적으로 저희를 지켜 주셨다. 그러나 이제 그가 저희를 떠나고 나면 그들은 보다 영적인 방법으로 보전되어야 했다. 감지할 수 있는 위로와 지원은 때로 주어지기도 하고 때로 사라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위로가 사라지더라도 그들이 고독하게 버림을 당하지는 않는다. 그리스도께서 그를 직접 따르는 제자들에게 본문에서 말씀하신 내용은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모든 성도들에게도 참된 말씀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성도들을 지금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보전하신다. 이 말씀의 뜻은 다음과 같다.
① 그들이 약하여 스스로의 힘으로는 자기를 보전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그들 자신의 힘만으로는 저희가 사는데 충분하지는 못한 것이다.
② 하나님께서는 저희를 보전할 가치가 있는 것으로 여기고 계신다는 사실이다. 저희는 그의 보시기에 귀중한 존재요 영예로운 존재로 곧 그의 재화요 보물이다.
③ 그들에 대한 구원이 계획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들이 보전된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벧전 1:5). 악한 자는 심판날을 위하여 남겨져 있는 것처럼 의인은 축복의 날을 위하여 보전되어야 하는 것이다.
④ 저희는 주 예수님께 할당된 몫이었다. 그의 몫으로써 그는 저희를 보전하셨고 선한 목자가 양떼를 지키기 위하여 몸을 버리듯이 그렇게 자신을 드리셨던 것이다.
(2) 그리스도께서 자신이 하시는 일에 대하여 가지신 확신. 그러므로 본문에 "그 중에 하나도 멸망치 않고"라고 말씀하신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에게 주어진 모든 사람들을 틀림 없이 보전하신다. 그러므로 그들 중에 어느 누구도 결코 멸망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그들 자신이 스스로 버림당한 것은 아닌지 또는 거의 버림받는 상태에 있는지 의심을 품을 때가 있을지는 몰라도(어떤 급박한 상황에 처했을 때 그런 마음을 품게 된다) 그러나 하나도 결코 잃지 않으려는 것이 아버지의 뜻인 것이다(6:39). 이 사실은 마지막 날 그들이 다 한자리에 모일 때 그들이 다 모였는데도 그 누구도 부족함이 없게 됨으로 분명해질 것이다.
(3) 유다에게는 낙인이 찍힌다. 그가 보호하려 하였던 사람들 중에서 유다는 제외되었다. 그도 그리스도에게 주어진 자들 가운데 속해 있었으나 그들과 같지는 않았다. 그는 유다에 대해서 이미 내 놓은 자식으로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 스승과 스승을 따르는 동료 제자들의 사회를 포기하고 자신을 악마의 인도함에 맡기어 얼마 후에는 가야 할 곳으로 갈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멸망당해야 마땅하였다. 그러나 유다의 배신과 그의 당한 파멸이 그의 스승이나 동료들의 잘못 때문은 아니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① 그는 "멸망의 자식"이었다. 그러므로 자신들의 보전을 그리스도에게 의탁한 제자들과는 달랐다. 그가 멸망당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가 고꾸라져 멸망하도록 내버려두셨다. 그는 가인처럼 "파괴자의 아들"이었고 악한 자의 소산이었다. 다른 말씀에도 주께서 멸하실 가장 큰 원수를 "멸망의 아들"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그가 "불법의 사람"이기 때문이다(살후 2:3). 사도들 가운데 하나가 멸망의 아들로 판명되었다는 것은 경악할 만한 사실이다. 이로 보건대 인간의 마음이 하나님 보시기에 바르지 아니하면 교회에서는 지위나 명성, 은혜를 받는데 남달리 누리는 특권이나 기회 또는 인간의 신앙 고백이나 외적인 선행이 파멸을 면하는데 인간에게 아무런 도움도 안 된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한동안 같은 신앙을 고백하며 지난다. 그러나 결국은 멸망의 아들임이 드러나는데 이러한 자들은 유다처럼 돈 전대를 사랑한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주어진 자들에게서 유다를 구별하였다는 사실은(본문의 ‘에이 메’란 접속사는 예외적 용법이 아니라 반의적 용법으로 쓰이고 있다) 진리와 참 신앙은 그것에 대하여 거짓을 행하는 자들의 배신 때문에 손실을 입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 준다(요일 2:19).
② 위의 결과는 성서의 말씀이 이루어진 것이었다. 유다의 범죄는 하나님의 섭리에 의하여 예견된 것이었고 그의 말씀 속에 예언된 것이었다. 이 사건은 예언된 후 그 논리적 결과로써 일어난 사건이었다(시 41:9; 69:25; 109:8 참조). 실상 우리가 사도 중 한 사람이 변절할 것이라는 사실을 구약을 통해 알지 못하였다면 우리는 이 일에 경악을 금치 못하였을 것이다.
2. 그는 지금 그들을 떠나야만 하며 따라서 그가 지금까지 하셨던 방식대로 더 이상 그들을 지킬 수 없다는 사실을 들어 간구하신다(11절). 즉 이런 말씀이다. "이제는 당신이 저희를 보전해 주십시오. 그래야 내가 저희와 함께 있는 동안 그들에게 쏟았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을 보전하사 하나님과 내가 하나인 것같이 저희도 우리와 하나가 되게 하소서." 우리는 21절에서도 이러한 내용의 간구를 고찰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본문에서 이 말씀은 무슨 의미가 있나 살펴 보자.
(1) 그는 기쁜 마음으로 자신의 세상에 대한 작별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그는 승리감과 환희에 도취하여 작별에 관하여 말씀하신다. 그는 이러한 기쁨으로 그가 떠나야 할 세상과 또 그가 가실 세상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그의 생각을 부연하면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다.
①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합니다. 나는 이제 이 괴로움 많은 세상을 작별하고자 합니다. 나는 이미 이 세상의 괴로움을 충분히 맛보았고 이제는 내가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할 기쁨의 시간이 가까왔읍니다. 지금 나는 이 세상에서 내가 해야 할 사명을 완수하였습니다. 이제는 할 수 있는 대로 빨리 이 세상을 떠나는 것만이 남은 일입니다." 저 세상에 그들의 집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더 이상 이 세상에 머물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생각하는 것이 즐거움이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해야 할 것을 완료하고 저 세상을 맞이할 준비가 되었다면 도대체 무엇이 우리를 지체하도록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겠는가? 우리가 우리의 죽음의 선고를 받게 된다면 거룩한 승리감에 도취되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이제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한다. 이 어둡고 속임수로 가득 찬 세상, 가련하도록 공허하며 불결한 유혹으로 가득 찬 세상에 말이다. 가시덤불 같은 이 세상 때문에 더 이상 괴롭힘을 당하지도 않겠고 그 함정과 그물의 위협도 더 이상 받지 않을 것이다. 이제 바람이 거센 광야와 같은 이 세상에서 더 이상 방황하지도 않겠고 폭풍이 이는 바다 같은 세상에서 이리 쏠리고 저리 쏠리지도 않으리라. 이제 나는 더 세상에 있지 아니하노라. 기쁜 마음으로 세상을 작별하며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하노라"라고 말이다.
② 또한 그는 "이제 나는 아버지께로 갑니다"라고 말씀하신다. 이 세상을 하직하는 것은 임종을 앞둔 그리스도가 맛보신 위로의 절반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것은 임종을 맞이한 그리스도인에게도 마찬가지이다. 나머지 절반의 보다 좋은 위로는 아버지에게로 가서 그의 곁에 앉아 영원하고 다함이 없는 즐거움을 누리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아버지에게 간다는 것을 생각할 때 기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기억하자. 비록 그것이 어두운 죽음의 골짜기를 통과해야 이루어지는 일이라도 말이다. 우리가 몸을 떠나 주님과 함께 거한다는 것은 마치 어린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와 아버지의 집에 거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임종시에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이제 나는 내가 택하고 섬겼으며 내 영혼이 그토록 갈구하던 당신에게로 갑니다. 빛과 생명의 근원이시며 축복과 기쁨의 왕관이며 중심이신 당신에게 갑니다. 이제 나의 그리움이 충족될 것이며 나의 소망이 성취되며 나의 행복이 완성될 것이외다. 왜냐하면 이제 내가 당신에게 가기 때문입니다."
(2) 그는 부드러운 관심을 가지고 그가 뒤에 남겨두고 가는 사람들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그의 말씀을 부연하면 다음과 같다. "그러나 저희는 세상에 있습니다. 나는 이 세상이 얼마나 악한 곳인지를 경험하였습니다. 그런데 내가 사랑하는 이 적은 무리들이 이 세상에 살아야만 한다니 이를 어찌하면 좋습니까? 거룩하신 아버지여 저희를 보전하옵소서. 저희는 내가 함께 있기를 원하오니 내 대신 당신이 저희와 함께 계소서. 앞으로 나는 그들을 이제껏 감당하였던 것보다 더욱 세상으로 깊숙이 보내고자 하기 때문에 그들은 지금까지 보전되어 왔던 것보다 더욱 보전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세상으로 깊숙이 뛰어들어가 이 격동의 바다 속에서 주의 사역을 해야 하는데 만일 당신이 저희를 보전하시지 않으면 저희는 실패하고 말 것입니다." 다음 사실을 기억하자.
① 우리 주 예수께서 아버지에게 가셔도 이 세상에 남아 있는 가의 사람들에 대한 세심한 관심을 버리지 않고 그대로 지니고 가셨다는 사실이다. 그는 계속하여 그들을 측은히 여기셨다. 그는 그의 가슴판 곧 그의 마음에 그들이 이름을 간직하시고 십자가에서 그의 손의 박혀진 못으로 그의 손바닥 위에 그들의 이름을 새기시었다. 그가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지셨다 해서 그도 그들을 볼 수 없는 것은 아니었고 그들이 그의 마음에서 사라진 것은 더욱 아니었다. 우리가 만약 이 거친 세파를 다 거쳐 목적지에 거의 이르렀다고 하면 이제야 이 세파에 뛰어드는 자들을 동정해야 하며 우리가 세상을 떠난다면 아직 세상에 남아 있어야 할 사람들을 동정해야 한다.
② 그의 제자들이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절대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것을 표현하실 때, 그는 다만 "저희는 세상에 있습니다"라고 말씀하셨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은 하늘을 목적 삼은 사람들에게 세상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예고하는 말씀이다. 이 세상은 그들을 유혹하여 곁길로 가게 하며 또는 악의를 가지고 그들을 증오하며 핍박하기도 한다.
3. 그는 그들이 만족한 심정으로 스스로의 안전함을 알게 될 것과 또 자신이 그들의 안전함을 보는 즐거움이 얼마나 클 것이냐는 점을 들어 아버지에게 간구한다. 그러므로 그는 본문에 "내가 이 말을 하옵는 것은 저희로 내 기쁨을 저희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함이니이다"(13절)라고 하신다.
(1)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제자들이 기쁨으로 충만하기를 간절히 바라셨다. 왜냐하면 그들이 더욱 크게 기뻐하는 것이 그의 뜻이기 때문이다. 그는 눈물과 고통 속에 그들을 떠나시지만 그들의 기쁨은 충만할 수 있도록 배려를 아끼지 않으셨다. 그들의 그의 안에서 맛보는 기쁨이 끝났다고 그들이 생각하고 있을 때 그는 그들이 기쁨이 전보다 더욱 완전에 가까워지고 그들이 기쁨으로 더욱 충만하도록 조치를 취하셨던 것이다. 우리가 본문에서 얻는 교훈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기쁨을 발견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는 "이 기쁨은 내가 주는 나의 기쁨이라"고 말씀하시며 또는 "내가 바로 기쁨 자체이다"라고 말씀하신다.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인의 제일의 기쁨이다. 세상 안에서 맛보는 기쁨은 세상이 지나감에 따라 시들고 만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의 기쁨은 그리스도처럼 영원한 것이다.
② 부지런히 우리의 기쁨을 건설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기쁨을 건설하는 일은 모든 참된 신자들의 특권인 동시에 의무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생활 속에서 그 어떤 부분도 이에 비교할 수 없다(빌 3:1; 4:4).
③ 완전한 기쁨을 목표로 삼아야겠다는 점이다. 그리스도께서 이 기쁨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도 이 기쁨을 우리 안에 채워야 한다.
(2) 이제까지 그는 제자들을 아버지의 가호와 보호에 엄숙하게 의탁하셨다. 그리고 그들을 그가 간구하신 데 대한 증인들로 곁에 두셨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그는 "내가 저희와 이 세상에서 함께 있는 동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니다"라고 말씀하신다. 하늘에서 그들의 보전을 부탁하는 그의 중재도 그 자체로써는 효력이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세상에서 이 사실을 말씀하시므로 제자들에게는 더 큰 만족과 위로를 줄 수 있었다. 또한 이로써 그들이 환난 중에도 기뻐하게 할 수가 있었다. 다음 사실을 기억하자.
①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백성들의 미래의 복된 삶을 위하여 위로의 상급을 예비하셨을 뿐만 아니라 현재도 위로를 베푸시며 이러한 위로의 공급은 현재에 그들이 만족을 얻게 하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그는 본문에서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은혜를 베푸시어 그의 최후의 뜻과 유언을 공포하신다. 그리고 그가 그들에게 남기신 유산이 무엇인가를 그들에게 알리시고(많은 유언자들은 이 사항을 말할 때 남겨 주는 것이 없으므로 부끄러워하는 바이다) 그들이 얼마나 훌륭하게 보호될 것인가를 알리심으로 그들이 큰 위로를 받을 수 있게 하신다.
② 그리스도의 우리를 위하신 중재는 그의 안에서 우리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는 데 충분하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그리스도의 중재보다 우리의 두려움과 불신을 가라앉게 하고 우리들에게 큰 위로를 효과 있게 제공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는 언제나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을 뵈옵는다. 사도 바울도 로마서 8장 34절에서 이 사실을 긍정하고 있다(히 7:25 참조).
4. 그는 또한 그들이 그로 인하여 세상에서 악한 흉계에 직면할 것이라는 점을 들어서 하나님께 간구하신다(14절). 그러므로 그는 본문에서 "나는 저희에게 세상에 공포해야 할 당신의 말씀을 주었나이다. 또한 저희는 당신의 말씀을 받았고 스스로 믿었으며 세상에 그것을 전파해야 할 책임을 수락하였나이다. 그로 인하여 세상이 저희를 미워하였으니 이는 내가 그리한 것 이상으로 저희가 이 세상에 속해 있지 아니하였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하신다. 본문에서 우리는 다음의 교훈을 찾을 수가 있다.
(1)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에 대한 세상의 혐오. 그리스도께서 그들과 함께 계신 동안은 그들은 세상에 대한 적대 행위를 별로 하지 아니하였다. 그랬음에도 세상은 저희를 미워했다. 그런데 앞으로 그들이 복음을 더 광범위하게 전파하여 세상을 변모시키려 하므로써 세상이 저희를 더 미워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아버지여! 당신이 저들의 친구가 되어 주소서. 그 이유는 저희에게는 많은 원수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로 당신의 사랑을 받게 하시옵소서. 왜냐하면 세상의 증오가 그들을 덮쳐 오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이 같은 무서운 도전의 와중에서 당신의 가호로써 방패를 삼게 하소서." 약한 자의 편이 되시며 무력한 자를 돕는 것을 하나님은 명예로 여기신다. 그러므로 주님은 기도하신다. "여호와여 저희에게 긍휼을 베푸소서. 사람들이 저희를 삼키려 하나이다."
(2) 세상이 저희를 미워하는 이유. 이 미움 때문에 예수님은 더욱 강력하게 보호를 간구하신다.
① 한 이유는 그들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들에게 주어진 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세상이 거의 다 받아들이기를 거절하였고 그것을 고백하고 설교하는 사람들을 미워하였는데도 말이다. 그리스도의 선하신 뜻과 그의 아름다운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세상의 악의와 비방을 각오해야만 한다. 세상은 특별한 방법으로 복음 사역자들을 미워하였다. 왜냐하면 이들은 사람들을 세상에서 불러 내고 그것에서 그들을 분리해 놓고 사람들에게 세상의 악의와 비방을 각오해야만 한다. 세상은 특별한 방법으로 복음 사역자들을 미워하였다. 왜냐하면 이들은 사람들을 세상에서 불러 내고 그것에서 그들을 분리해 놓고 사람들에게 세상과 짝이 되어 살지 말라고 가르치며 그러므로 세상을 정죄하였기 때문이다. "아버지여 저희를 보전하옵소서. 왜냐하면 저희가 공격을 당하는 것은 당신 때문이요 고통을 받는 것도 당신을 위해서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시편 기자도 "주를 찾으므로 내가 욕을 당케 마옵소서"라고 간구한다(시 69:7).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말씀을 간직하는 사람들은 시험이 닥쳤을 때 특별한 보호를 받을 자격이 주어진다는 사실기억하자(계 3:10). 바로 이러한 보호 때문에 순교자들이 주어지는 고통을 기쁨으로 견디는 것이다.
② 또 다른 이유는 보다 특수한 것이다. 즉 "저희가 세상에 속해 있지 아니하기 때문에" 세상이 그들을 미워한다는 것이다. 능력 안에서 그리스도의 말씀이 그에게 주어진 사람들은 이 세상에 속해 있지 아니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여 그것을 받아들인 모든 사람에게 그 말씀은 영향을 미쳐 저희로 세상의 부를 버리고 또한 세상의 악에서 돌아서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상은 그들에게 원한을 품는 것이다.
5. 그는 저희가 거룩한 동기에 의하여 세상을 멀리하고 자기와 연합하였다는 사실을 들어 아버지에게 간구한다(16절). 그는 이렇게 기도한다. "아버지여 저희를 보전해 주소서. 왜냐하면 저희가 나의 영과 마음에 속하여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삽나이다." 신앙으로 살고자 하는 사람들은 자신을 하나님의 보호하심에 의탁해야 한다.
(1) 신앙의 삶을 살려는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서 사셨던 대로 그 발자취를 따라가야 한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모방하는 자들을 사랑하신다.
(2) 신앙으로 살려는 사람들은 세상이 주는 이익에 얽매여서는 안 되고 또 세상을 섬기는 일에 자기를 드려서도 안 된다. 다음 사실을 생각해 보자.
①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셨다는 사실이다. 그는 결코 세상에 속해 있으신 적이 없으셨다. 이제 그는 자기가 속하지 않은 세상을 떠나려는 순간에 이르신 것이다. 이 말씀이 뜻하는 내용을 다음과 같은 요점으로 고찰해 볼 수 있다.
첫째, 그의 위치. 그는 결코 세상에 대한 애호가가 아니셨고 세상의 군왕이나 귀인도 아니셨다. 그에게는 세상의 재물이 하나도 없었다. 심지어 머리 두실 곳조차 없을 지경이었다. 또한 세상적인 권세도 없으셨다. 그는 세상의 판관도 재산 분배자도 아니셨다.
둘째, 그는 거룩한 영. 그는 세상에 대해서는 완전히 죽으셨다. 세상에 속한 왕은 그의 안에서 아무 이익도 발견하지 못하였다. 이 세상에 속한 것은 그에게 무관하였다. 영예조차 그러하였다. 그는 결코 명예를 추구하지 아니하셨다. 부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우리로 인하여 가난하게 되셨다. 쾌락도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는 슬픔에 친숙한 분이었기 때문이다(8:23 참조).
② 따라서 참된 그리스도인들도 이 세상에 속해 있지 아니하다는 사실이다. 저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성령이 세상의 영을 대적하기 때문이다.
첫째, 그들이 세상에서 멸시를 받는 것이 그들의 운명이다. 그들 앞서 가신 주님이 그러셨던 것 이상으로 그들은 세상과 어울리지 못한다.
둘째, 세상에서 해방을 얻는 것은 그들의 특권이다. 아브라함이 그의 고향을 떠났듯이 말이다.
셋째, 세상에 대하여 죽는 것이 그들의 의무요 특성이다. 그들에게 있어 가장 즐거운 순간은 저 세상과의 대화이며 또 그래야만 마땅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주된 관심은 이 세상 일이 아니라 저 세상의 일이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약하였고 결점도 많았다. 그렇지만 주님은 그들을 위하여 그들이 이 세상과 이 땅에 속하지 아니하였음을 말씀하셨다. 그들이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으므로 그는 저희를 하늘의 보호하심에 의탁하시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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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중재 기도(3)(요 17:17-19)
그가 저희를 위하여 기도하신 다음제목은 그들을 거룩하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들을 악으로부터 보전해 주실 뿐만 아니라, 선하게 해달하고 하신다.
Ⅰ. 본문의 첫째 간구는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라는 것이다(17절).
이 말씀은 당신의 말씀으로 거룩하게 하옵소서라는 뜻과도 통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곧 진리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 자체인 것이다. 그는 제자들이 아래와 같이 거룩하게 되기를 바라신다.
1. 그리스도인으로서 성별되기를 바라신다.
그러므로 그의 기도하심은 다음과 같다. "아버지여 저희를 거룩하게 하옵소서. 그들을 거룩하게 하심이 곧 저희를 보전해 주시는 것이니이다"(살전 5:23).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 보자.
(1) 주님은 저희가 거룩하게 되는 은혜를 구하셨다. 제자들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이미 거룩하였다.
그러나 그는 다시 "아버지여 저희를 거룩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신다. 이 기도의 의도는 다음과 같다.
① "저희 안에서 역사하기 시작한 성별의 역사를 더욱 공고하게 하시고 그들의 믿음을 굳게 하시며 그들의 선에 대한 열의를 더욱 강렬하게 하시며 그들의 훌륭한 결단이 변하지 않게 하옵소서"란 뜻이다.
② "저희 안에 일어난 선한 사업을 계속 수행하시어 빛이 더욱 강렬하게 비치도록 하옵소서"란 뜻이다.
③ "이 사업을 완전케 하시며 완전한 거룩으로 관씌우소서. 저희를 최후까지 거룩하게 하옵소서"란 뜻이다. 다음 사실을 기억하자.
첫째, 이것은 그의 것이 된 모든 사람들이 거룩하게 되기를 바라는 모두를 위한 그리스도의 기도라는 사실이다.
그들을 거룩하게 하시려는 이유는 더러운 것을 그대로 그의 것 삼으실 수 없으셨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들이 거룩하게 되지 아니하면 그들을 그의 사업에 참여시킬 수도 없고 그들로 그의 아버지를 뵙게 할 수도 없기 때문이었다.
둘째, 은혜로 거룩하게 된 자들은 더욱 성화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이다.
제자들일지라도 거룩하게 해 주시는 은혜를 위하여 간구해야만 하였다.
우리에게서 좋은 일을 시작하신 그분이 그 일을 또한 완성해 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전진하지 않는 것은 곧 후퇴하는 것이기에, 거룩하게 된 자는 계속 거룩해져야만 한다.
그는 아직 이루지 못한 자인 것처럼 앞으로 전진하고 위로 솟구쳐야 한다.
셋째, 의롭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신 것과 마찬가지로 거룩하게 하시는 이도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다(고후 5:5).
넷째,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해달하는 중재 기도를 하신다는 사실은 거룩케 하는 은혜를 우리가 간구하게 하는 격려가 된다는 사실이다.
(2) 이 은혜가 수여되는 수단.
그것은 "하나님의 진리를 통해서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이 곧 진리이다.
이 말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이 거룩에 이르는 수단을 제한하셨다는 뜻은 아니다.
①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표현되고 또 집약된다.
하나님의 계시는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록된 말씀에서 볼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불순물이 없는 순수한 진리일 뿐만 아니라 결함이 없는 완전한 진리이다.
② 이 진리의 말씀이 우리가 거룩에 이르는 정상적인 방법이다. 우
리 자신의 힘으로는 거룩해질 수 없다. 말씀만이 항상 거룩하게 하는 힘을 지닌다.
그러므로 성령도 거룩하게 하시는 아름다운 역사를 시작하고 수행하심에 있어서 보통 이 말씀을 도구로써 사용하신다.
말씀이야말로 새로운 출생의 씨앗이요(벧전 1:23), 새로운 삶의 양식인 것이다(벧전 2:1, 2).
2. 사역자로서 성별되기를 바라신다.
그러므로 그의 기도하심은 다음과 같다. "저희를 거룩하게 하옵소서. 당신 자신과 당신을 섬기는 일을 위하여 저희를 구별하시고 세상에서 준 저희의 사도 직분을 하늘에서도 인정하옵소서"라고 하신다.
예레미야 1장 5절에 보면 선지자들도 거룩함을 입은 자라고 불리워지고 있으며 제사장들과 레위인들도 그렇게 불리우고 있다.
이러한 소명의 입장에서 볼 때 "저희를 거룩하게 하소서"란 말의 뜻은 다음과 같다.
(1) "저희에게 직분을 감당할 자격을 부여하옵소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저희에게 은혜를 주시고 사역자로서 필요한 은사를 베푸시사 저희를 신약 시대의 사역자로 부족함이 없게 하소서"라는 뜻이다.
(2) "저희를 구별하여 사도 직분을 감당하게 하소서(롬 1:1). 나는 저희를 불렀고 저희는 그 부름을 수락하였나이다. 아버지여 당신께서도 저희의 사도직을 아멘으로 인정하옵소서"라는 뜻이다.
(3) "저희를 사도직에 몰두할 수 있게 하옵소서. 당신의 손으로 저희와 함께 하시며 당신의 진리에 의하여 또는 그 진리 안에서 저희를 거룩하게 하옵소서. 당신의 진리는 외양이나 허상이 아니옵니다. 또한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이 기름 부음을 받고 제사를 드림으로 거룩하게 되었듯이 저희를 형식적으로나 의식적으로 성별하지 마옵시고 참으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저희로 당신의 진리 곧 당신의 진리의 말씀에 대하여 거룩하게 하옵시며 당신의 진리를 세상에 전하는 전도자가 되게 하옵소서. 제사장들을 제단을 섬기는 일을 위하여 성별하셨듯이 저희를 성별하여 복음을 전하게 하소서"란 뜻이다(고전 9:13, 14). 다음 사실을 기억하자.
①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사역자들을 위하여 특별한 관심을 가지시고 아버지에게 중재하시며 오른 손에 별들을 잡으신 아버지의 은총에 저희를 의탁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② 복음 사역자들을 위해 하나님께 구해야 할 가장 중대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들을 거룩하게 하여 달라는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즉 저희를 세상으로부터 구별하여 오로지 하나님만을 위해 헌신하며 그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는 말씀에 스스로 먼저 감동되어서 말씀과 가깝게 하여 달라는 것이다. 저희로 "우림과 둠밈" 곧 "빛과 성결"을 간직하게 하여 달라고 구해야 한다.
Ⅱ. 제자들을 성별해 주실 것을 간구하시고 그 간구를 강조하기 위하여 주님은 두 가지 이유를 본문에서 제시하신다.
1. 저희가 하나님께 사명을 받았기 때문이다(18절).
본문에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시어서 사람들에 대한 당신의 대사로 삼으셨듯이 나를 저희를 나의 사절로서 세상에 보내기 위하여 그들을 또 불렀습니다"라고 하신다. 본문의 뜻은 다음과 같다.
(1) 그리스도는 자신의 사명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그는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셨습니다"라고 하였다.
기독교 신앙을 창조하신 주님도 그의 사명과 지시는 모든 신앙의 근원이 되시며 목적이 되시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으셨다.
그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무엇을 말씀하셨고 행하셨으며 저희에게 어떠한 존재가 되시는가를 말씀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에 의하여 보냄을 받으셨다. 이 사실 때문에 그는 위로를 받으셨고 또한 우리에게도 주님을 의지하므로 위로가 넘칠 수 있는 것이다.
이같이 주님의 사명이 하늘에서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주님에 대한 기록도(성서) 하늘에서 부여된 것이다.
(2) 그는 그가 제자들에게 부여한 위임에 대하여 만족스럽게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그는 "그러므로 내가 저희를 같은 사명을 위하여 또 같은 계획을 수행하기 위하여 보내었습니다"라고 말씀하신다.
즉 그가 가르치시던 같은 말씀을 전하고 같은 증거로써 그 말씀을 확고하게 하며 저희에게 위탁된 그 사명을 다른 신실한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위탁할 책임을 부여하여 저희를 보내셨다는 말씀이다. 그는 자신의 사명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저희에게는 저희의 사명이 무엇인가를 알리셨다(20:21).
이 사실은 제자들로 저희의 사명을 그리스도로부터 받았음을 영광스럽게 인식하게 하여 준다.
또한 중재자로서의 주님에게 주어진 사명과 화해자로서 사역자들에게 주어진 사명 사이에 유사성이 있음을 저희이게 알려 줌으로 저희의 사명의 존엄성을 인식하게 하여 준다.
실상 주님 자신이 "사도로"(히 3:1), "사역자로"(롬 15:8)(한글 개역에는 수종자로 되어 있음), "사자(messenger)로"(말 3:1) 보내심을 받으셨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그는 아들로 보냄을 받으신 데 비해서 그들은 종으로 보냄을 받았다는 사실 뿐이다.
이러한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다음의 내용들이 분명하게 나타난다.
① 어째서 그리스도께서 저희에 대하여 그토록 관심을 가지셨으며 그들의 입장을 늘 심중에 생각하셨느냐 하는 점이다.
그 이유는 자기 자신이 저희에게 어려운 사명을 맡기셨기 때문이었다. 이 사명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는 대단한 능력이 요구되는 것이었다.
그리스도는 자신이 보내신 사람들을 지켜 주시며 또 그를 위하여 고용된 사람들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그가 우리를 부르신 그 일에 우리가 적절히 적응하게 하시며 우리로 그 일을 감당하게 하신다는 것을 기억하자.
② 어째서 그가 그들을 그의 아버지에게 의탁하셨나는 점이다.
그 이유는 그가 그들의 활동에 관심을 가지고 계셨기 때문이었다.
실상 그들의 사명은 주님의 사명을 실행하는 것이었고 그들의 사명은 그의 사명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으로부터 사람들에게 줄 선물을 받으셨고(시 68:18)(한글 개역과 다소 틀림:역자 주) 또 받은 것을 사람들에게 주셨다(엡 4:8).
그러므로 그는 그의 아버지에게 그가 주신 선물들을 보장하시고 유지시켜 달라고 기도하신다.
그리고 선물들을 그들에게 주셨음을 확증해 달라고 하신다.
아버지께서는 그를 세상에 보내셨을 때에 그를 거룩하게 하셨다(10:36).
이제 그와 마찬가지로 그들도 보냄을 받는 지금 그들로 거룩하게 하여 달라고 하신다.
2. 그가 그들을 위하여 기울인 노력이 본문의 간구의 또 하나의 이유가 되고 있다(19절).
그러므로 그는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한다"고 말씀하신다. 본문의 뜻은 다음과 같다.
(1) 그리스도께서 중재자로서의 사업과 직분을 위하여 자신을 바치심. 이것이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한다"는 말씀의 뜻이다.
그는 이 일을 위하여 자기를 전적으로 바치셨다. 또한 이제는 이 일을 위하여 자기의 몸까지 드리시려는 순간이었다.
즉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이 자기를 희생 제물"로 하나님에게 바치시려는 순간이었다.
그는 자신을 제사장이요 또한 제단의 희생 제물로서 성별하시었다.
그가 "당신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옵소서"라고 하였던가 "아버지여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또는 "아버지여 나의 영혼을 당신께 의탁합니다"라고 말하였을 때 그는 아버지께 약속한 바 그를 기쁘시게 해드린다는 약속을 지켰다. 그러기에 그는 자신을 성별하셨다.
이 사실을 그는 아버지에게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는 이유로 제시하신다.
왜냐하면 그의 중재 기도는 하나님을 만족스럽게 해드림으로 응답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대제사장으로서 속죄일에 "오직 자기 피로 성소에 들어가셨고" 휘장 안에서 분향하심과 동시에 희생의 피를 뿌리셨던 것이다(레 16:12, 14).
(2) 그리스도께서 그의 제자들을 위하여 호의를 보이심.
그는 그들을 위하여 즉 그들이 거룩하게 되기 위하여 다른 말로 그들이 순교자가 될 수 있기까지 호의를 나타내셨다.
그러므로 본문에는 이러한 의미도 들어 있다. "저희가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의 유익을 위하여 몸을 바치도록 내가 [그 본보기로!!]나를 희생합니다."
바울도 자기를 드려졌다고 말한다(빌 2:17; 딤후 4:6).
성도들의 죽음 가운데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귀한 점이 있다면 그것은 주 예수의 죽으심에 힘입은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성도와 사역자들이 될 수 있었던 것도 하나님께서 자격을 부여하시고 용납하셨기 때문이라고 나는 본다.
① 목회직은 그리스도가 피를 대가로 치루고 사신 것으로 하나님의 만족하심이 이루어 좋은 복된 열매 중의 하나인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결과는 그리스도의 공로의 대가에 의거한 것이다. 율법 아래서 제사장들은 황소와 염소의 피로 임명을 받았다.
그러나 복음의 사역자들은 예수의 피로써 임명되어진다.
② 모든 훌륭한 그리스도인들의 참된 거룩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결과이다. 그 죽으심의 대가를 지불하므로 성령의 선물도 주어진 것이다.
"그는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셨고 이로써 교회를 거룩하게 하셨다"(엡 5:25, 26). 목표를 설정하신 그는 또한 방법도 계획하셨다.
즉 그리스도는 세상에 오셔서 진리를 증거하셨고 죽으심으로 진리를 확증하셨으며 이제 그 진리에 의하여 저희는 거룩함을 입은 것이다.
진리의 말씀은 그 거룩하게 하는 효능과 힘을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부터 받았다.
어떤 이들은 이 말을 읽고 그들이 전리로 거룩하여진 것이 사실일 것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참으로 예배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성령과 진리로 거룩해져야만 한다.
그리스도가 기도한 것은 바로 그들이 거룩하여지기를 위해서였다. 즉 그의 것이 된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였다.
왜냐하면 그들이 거룩하게 되는 것이 바로 그의 뜻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용기를 내서 거룩하게 해 주실 것을 기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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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중재 기도(4)(요 17:20-23)
그들의 순결성을 위하여 기도하신 다음 그는 그들이 하나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신다. 왜냐하면 위로부터 온 지혜는 첫째는 순결이고 다음은 평온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친교라는 것은 그것이 아론의 거룩한 머리 위에 부은 기름이나 거룩한 산 시온 위에 내린 이슬과 같이 고귀하게 이루어질 때 그 진가를 발휘하는 것이다. 다음 사실을 고찰하자.
Ⅰ. 이 기도에 포함되고 있는 대상들(20절)에 대하여 주님은 "지금 나의 제자로 있는 이 사람들 뿐만 아니요"(여기에 포함되는 대상은 11제자와 70명의 제자 그리고 그가 세상에 계셨을 때 그를 따랐던 남녀를 말한다) "저희 말을 인하여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입니다. 즉 이후 제자들의 설교를 듣고 또는 장차 올 세대를 위하여 저희가 쓴 글을 통하여 나를 믿는 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이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그들이 이 기도로 한 마음이 되기를 바라며 또한 이 기도에 의하여 모두 한결 같은 은혜를 입게 되기를 바랍이니이다"라고 기도하신다. 본문을 통하여 다음의 사실을 기억하자.
1. 여기서 말씀된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명상하는 일에 열심히 있으며 그를 믿으며 앞으로 믿을 사마들이란 사실이다. 바로 이것이 그를 따를 사람들이 갖출 자격이다. 그리고 이 말에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갖추어야 할 특징도 포함되고 있다. 당시에 살았던 사람들은 그를 보고 믿었으나 그러나 그 후 세대의 사람들은 그를 보지 못하고도 믿었던 것이다.
2. 영혼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도달하는 길은 "말씀을 통해서"라는 사실이다. 바로 이 목적을 위하여 그리스도는 성서를 기록하도록 명하셨고 장차 오는 세대를 위하여 세상이 있는 동안은 교회를 세우시고 그 교회 안에서 말씀 전하는 일이 계속되게 하셨던 것이다.
3.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그를 확실히 그리고 그를 정확하게 아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칭 자유로운척하며 변덕을 부리는 인간의지의 우발성이나 인간성에 깊이 깃든 죄를 모르시고 함부로 기도하신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는 그를 위하여 기도하는 사람들을 잘 아셨다. 하나님의 전지하심과 그의 결의에 의하여 모든 일이 확고하게 결정된 것을 그는 아셨다. 그는 누가 그에게 주어졌는지 그리고 누가 영원한 생명을 부여받아 "어린 양의 책에" 등록되었는지 또 누가 의심 없이 그를 믿을지를 아셨다(행 13:48).
4. 예수 그리스도는 뛰어나고 위대한 신앙인들 뿐만 아니라 가장 천박하고 연약한 신자들을 위해서도 중재 기도를 하신다는 사실이다. 그는 그의 왕국에서 신망과 영예를 한 몸에 받을 가장 높은 지위에 앉을 자들 뿐만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안중에도 두지 않는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중재하신다. 하나님의 섭리가 가장 비천한 미물에 이르기까지 작용하듯이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은혜도 가장 비천한 그리스도인에게까지 역사한다. 선한 목자는 가련한 양무리까지 일일이 살피시는 것이다.
5. 예수 그리스도는 명상을 통하여 아직 태어나지 않은 선택된 소수의 무리들 즉 앞으로 그가 인도해야 할 다른 양들인, 아직 창조되지 않은 백성들(시 22:31)까지도 예상하시고 기도하신다는 사실이다. 그들이 "모태에서 형성되기 전에 그는 그들을 아셨으며"(렘 1:5) 세상에 오시기 전부터 하늘에서 그들을 위해 기도하셨다. 하나님은 바로 그리스도에게 "이 일을 옛적부터 고하였고 성사하기 전에 그것을 보이셨던 것이다"(사 48:5).
Ⅱ. 이 기도의 목적(21절). 그것은 "저희가 다 하나가 되는 것이었다." 전에도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11절)라고 그는 말씀하셨고 다시 22절에서도 그렇게 말씀하심을 볼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이 문제에 얼마나 관심이 있으셨는가를 우리는 여기서 발견하게 된다. 어떤 이들은 11절의 하나가 되게 해달라는 기도를 사역자와 사도로서의 제자들이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내용이 일치하기를 바라서 말씀하신 특별한 말씀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복음서 기자들의 기록의 조화나 첫 번째 복음에 대한 전파자들의 설교 내용의 일치는 이 기도에 의한 것이라고 본다. 이 말은 그들이 한 마음을 가져야 된다는 뜻을 지니 뿐만 아니라 증거 내용도 하나가 되어야함을 뜻한다. 복음 사역자들의 단합은 복음의 힘이 되며 미덕이 된다. 그러나 21절의 하나가 되게 해달라는 기도는 모든 신자들을 대상으로 하신 것이 틀림 없다. 이 기도는 그의 것이 된 모든 사람들을 위한 기도로써 우리의 결단을 요구하는 기도이다. 즉 "저희가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하나가 되어 온전함을 이루게 하옵소서"란 기도이다(21-23절). 이 기도에는 세 가지 내용이 포함되고 있다.
1. 그들이 모두 협력하여 하나가 되게 해 달하는 기도이다. "아버지여 저희를 모두 하나로 여기시고 저희에게 대헌장을 내리시어 그것에 의하여 저희가 한 교회로 단합하게 하옵소서. 저희가 이쪽 하늘 끝과 또 다른 하늘 끝에 이르기까지 서로 헤어져 있으며 태초로부터 종말에 이르기까지 여러 세대에 걸쳐 살며 서로 알지 못하고 또 서신의 교환이야 없다고 하더라도 저희로 저희의 같은 머리인 내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신 것이다(11:52; 엡 1:10).
2. 저희 모두가 한 성령에 의하여 생기를 얻게 되기를 위하여 기도하신다. 이것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소서"란 기도 속에 포함된 다른 뜻이다.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하나가 되는 것은 성령에 의해서만이 이루어지고 유지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라"고 하였다(고전 6:17). 우리 모두가 이러한 기도를 잊지 말고 같은 성령의 능력에 의하여 하나가 되도록 하자.
3. 저희가 사랑과 자비로 하나가 되어 한 마음을 품게 해달라는 기도이다. 즉 다음과 같이 하나가 되게 해달라는 말씀이다.
(1) 판단이나 느낌에 있어서 하나가 되게 해 달하는 뜻이다. 물론 이 말은 작은 것 하나에 이르기까지 일치되게 해 달하는 뜻은 아니다. 실상 이러한 일은 가능하지도 않고 또 필요하지도 않다. 다만 하나님에 속한 변역할 수 없는 진리에 있어 이 기도에 힘입어 저희가 모두 일치하게 해 달하는 기도이다. 변역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진리로는 하나님의 가호하심을 받는 것이 목숨보다 중하다는 것, 하나님에 대한 죄는 가장 큰 악이라는 것, 그리스도는 가장 좋은 우리의 벗이라는 것, 이 생 후에 저 세상의 생이 있다는 등등의 사실이다.
(2) 좋아할 것과 싫어할 것에 대하여 저희가 하나가 되게 해 달하는 뜻이다. 거룩하게 된 자들은 모두 같은 신의 속성과 형상을 가진다. 그들은 모두 같은 새 마음을 가지며 그러기에 그것은 한 마음인 것이다.
(3) 저희가 계획과 목적에 있어 하나가 되게 해 달라는 뜻이다. 저희가 언어가 다르고 표현 방법은 다르지만 모두 같은 양자의 영을 받았으며 같은 법도를 준수하고 있으며 사실상 같은 목적을 위해 기도한다.
(4) 사랑과 열정에 있어서 저희가 하나가 되게 해달하는 뜻이다. 각각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에는 세상의 모든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이 사랑하는 같은 것을 사모하는 마음이 우러나오는 법이다. 그리스도가 본문에 서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오늘날 우리가 사도신경을 통하여 고백하는 "성도의 교제"를 위한 것이었다. 즉 모든 신자들이 하나님과 친교를 나누게 될 것과 또 그들이 하늘과 땅에 거하는 모든 성도들과 친밀히 연합되기를 위한 기도이다(요일 1:3). 그러나 그리스도의 이 기도는 모든 성도들이 하늘나라에 가기 이전에 완전한 실현을 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저희가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다"(23절;엡 4:13).
Ⅲ. 이 간구가 응해지기 위하여 열거한 이유들에 의하여 밝혀진 사실들, 그것은 세 가지이다.
1. 아버지와 아들의 하나됨이다. 이 말씀은 계속 반복되고 있다(11, 21-23절).
(1) 이 말은 아버지와 아들이 성격과 본질에 있어서 하나이시며 권능과 영광이 동등하시며 서로 사랑하심에 있어서 하나라는 뜻이다. "아버지는 아들을 언제나 사랑하시고" 아들은 아버지를 늘 기쁘시게 해드렸다. 그들은 계획에 있어서 하나이시며 활동에 있어서 하나이시다. 이 친밀한 하나됨은 "아버지가 내 안에 그리고 내가 아버지 안에"란 말씀 속에 잘 나타나고 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적들의 위협을 받으실 때 또 그를 따르던 자들이 그에게서 떨어져나갈 때 이런 고통 중에서 그를 도와달라는 뜻에서 자주 언급되고 있다. 이같이 그는 아버지 안에 아버지는 그 안에 거하시었다.
(2)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라는 사실을 근거로 그의 제자들도 하나가 되게 해달라는 소망이 강조되고 있다.
① 아버지와 아들의 하나 되심은 모든 하나 됨의 표상이다. 우리는 여기서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이 하나 되기를 얼마나 열망하시는가를 볼 수 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가 하나이신 것처럼 신자들도 아음과 같은 뜻에서 하나이다.
첫째, 신자들의 연합은 완전하고도 밀접한 연합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속성에 의하여 또 신의 은총의 능력에 의하여 신의 뜻을 추구함에 있어서 하나가 되고 있다.
둘째, 신자들의 연합은 거룩한 목적을 위한 성령 안에서의 거룩한 연합이다. 이 연합은 어떤 세속적인 목적을 위한 정치적 단체로써의 연합은 아니다.
셋째, 신자들의 연합은 완전한 연합이다. 설혹 불완전한 점이 있을지라도 결국은 완전한 연합이 될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도 같은 속성과 같은 소유와 완전함을 가지고 계신다. 신자들도 그들이 거룩하여진 이상 아버지와 아들과 같은 것을 가지고 있다. 더구나 하늘의 영광 가운데 은총이 완전히 실현된다면 그들은 서로 정확하게 일치할 것이며 모두 같은 이념을 추구할 것이다.
② 아버지와 아들의 하나 도심은 모든 하나 됨의 중심이 된다. 그러므로 그는 저희가 우리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해달하고 기도하신다. 즉 모두가 한 가지로 만나는 곳이 아버지와 아르의 하나 되신 곳이다. 한 분 하나님이 있고 한 분 중제자가 있으시다. 그리고 이 안에서 모든 신자들은 하나이며 저희 모두가 일치하여 한 분 하나님의 가호하심에 의지하는 것이 축복이며 한 분 중제자의 공로를 그들의 의로 여겨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목표로 삼고 그리스도를 길(way)로 삼는 삶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공모는 될지언정 연합은 될 수 없다. 서로 하나이신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참으로 연합한 모든 사람들은 서로 서로 또한 연합하게 뢰 것이다.
③ 아버지와 아들의 하나 되심은 제자들이 하나가 되어야 할 이유가 된다. 창조주와 구속주는 그 목적과 계획에 있어서 하나이시다. 그러나 만일 모든 신자들이 그리스도와 일치하여 하나가 되지 않는다면 또한 구속자가 신도들을 위하여 은총을 하나님께 받으셨듯이 그들이 서로 공동으로 구속주로부터 은혜를 받으려 하지 않는다면 창조주와 구속주의 하나 되심은 무의미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계획은 하나님에게 배반한 인류를 하나님께 환원시키려는 데 목적이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아버지여 모든 믿는 자로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그리고 한 몸을 이루어 저희가 서로 화해를 이루게 하소서"라고 말씀하신다(엡 2:15, 16). 이것은 교회 내에서의 유대인과 이방인들의 연합에 대한 말씀이시다. 나는 본문의 그리스도의 기도가 주로 목적하는 것은 이방인들도 "함께 후사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게" 하기 위하여라고 생각한다. 그가 죽으심으로 이루고자 한 목표는 바로 여기에도 있는 것이다(엡 3:6). 그러나 나는 내가 만난 어떤 주석가도 본문을 이렇게 해석하는 사람이 없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한다. 그리스도의 기도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아버지여 믿음을 소유한 이방인들로 믿음이 있는 유대인들과 연합하게 하소서. 그리고 이 둘이 합하여 하나의 새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또한 "나는 저희 안에 저희는 내 안에"라는 말씀도 이러한 연합이 교회의 미덕(美德)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비로 교회 자체의 존립을 위해서도 필요 불가결한 것임을 보여 주는 말씀이다.
첫째, 이 연합은 성도들과 그리스도의 연합이다. 이것은 "내가 저희 안에"란 말씀이 뜻하는 바이다. 신도들의 마음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는 새 사람에게 있어서는 그의 생명이요 영혼이시다.
둘째, 이 연합은 그리스도를 통한 신도들의 하나님과의 연합이다. 이것이 "아버지께서 내 안에"란 말씀의 뜻하는 바이다. 즉 나로 인하여 하나님이 저희 안에 계신다는 말씀이다.
셋째, 이러한 연합의 결과로 신도들 사이의 연합이 이루어진다. 이것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소서"란 말씀이 뜻하는 바이다. 우리는 그의 안에서 온전하여지는 것이다.
2. 그리스도께서 저희에게 빛과 온갖 은혜를 부어 주심의 목표가 저희의 하나됨에 있었다는 사실이다(22절). 그러므로 본문의 뜻은 다음과 같다.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습니다. 나는 당신의 연락 수단이요, 연락 책임자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내가 이 영광을 저희에게 준 것은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그런데 이제 와서 저희가 서로 하나가 되지 않는다면 저희에게 준 은사가 모두 헛 것이 되고 마옵니다." 이 은사는 그러면 누구에게 주어진 은사일까?
(1) 이 은사는 사도들과 첫 번째 교회 설립자들에게 수여된 은사를 말한다고 볼 수 있다. 세상에 대하여 하나님의 대사가 되는 영광, 기적을 행하는 영광, 세상에서 사람을 몰아 한 교회를 이루는 영광 또 인간들 가운데 하나님 나라의 보좌를 세우는 영광이 모든 것들은 그리스도에게 주어진 것들이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기 위하여 저희를 보낼 때 이 영광의 얼굴을 사도들에게도 수여하였다."
(2) 또는 이 은사는 모든 신도들에게 일반적으로 주어진 은사라고 볼 수도 있다. 아버지와 계약을 맺고 지내는 영광, 또 아버지에게 받아들여져 그의 품 안에 누으며 그의 우편에 앉도록 예정되어진 영광, 이 모든 것은 아버지께서 구속주에게 주신 영광이었다. 그리고 이 영광을 구속주는 구속받은 모든 사람에게 주시마 약속하셨다.
① 이 영예는 그가 저희에게 주신 것이라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그들을 위하여 이 영예를 준비하셨고 그리스도의 약속을 참된 선물로 믿는 믿음에 따라 저희에게 주시고자 마련한 것이기 때문이다.
② 이 영예는 저희에게 주라고 그에게 아버지로부터 주어진 것이었다. 이 영예는 그들을 위하여 보관하라고 그에게 주신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이 일에서 그를 임명하신 분에게 성실하셨다.
③ 그가 저희에게 이 영예를 주신 것은 저희로 하나 되게 하고자 하셔서였다.
첫째, 그들에게 아버지와 아들과 연합하는 특권을 주시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한 분 하나님 아버지와 한 분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의 공통적인 관계에 힘입어 모두 하나가 되어야 했다. 성령의 은사, 이것은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영광의 선물인데 아들에 의하여 이 성령의 선물은 모든 신도들에게 주어지며 또 성령은 그들을 하나되게 하신다. 왜냐하면 그가 주시는 은사는 여러 가지나 같은 역사를 하기 때문이다(고전 12:4 등).
둘째, 저희를 아버지와 아들과 연합하는 일에 참여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저희가 같은 신조, 같은 계약, 한 성령, 한 성서를 믿고 사용하기로 한 점을 생각할 때 또한 그들이 같은 하나님, 같은 그리스도를 예배하며 같은 하늘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을 생각할 때 그들은 또한 같은 마음을 지니고 의견의 불일치를 보여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세상적인 영광은 인간들을 서로 갈라놓는 요인이 되고 있다. 왜냐하면 만일 어떤 사람이 출세하면 다른 사람은 쇠퇴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세상적인 나라에 대한 꿈에 젖어있는 동안은 그들은 때때로 논쟁을 하곤 하였었다. 그러나 영적인 영예는 모든 그리스도의 신복들에게 똑같이 수여되기 때문에 또한 저희가 모두 하나님 나라의 왕이요 제사장들이므로 경쟁할 이유나 반목할 이유도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께서 저희에게 주신 영광을 취하면 취할수록 저희는 헛된 영광에 대한 욕망을 버리며 따라서 이러한 일로 왈가왈부할 마음이 사라지게 된다.
3. 그는 저희의 하나됨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좋은 영향을 주게 해달라고 탄원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저희의 하나됨이 공익에 기여하게 해달라고 탄원하신다. 이 사실은 본문에서 두 번씩 강조되고 있다(21절). 한 곳에서는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라고 하셨고, 또 다시 "아버지께서 저희를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23절)라고 하셨다. 그 이유는 이 사실을 알지 못하고서는 참된 신앙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신자들은 그들이 무엇을 믿는지를 알아야 한다. 또 어째서 무슨 이유로 믿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무턱대고 믿는 사람들은 무모한 짓을 하는 것과 같다. 본문에서 그리스도가 보여 주시고자 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1) 일반적인 인간 세상에 대한 그리스도의 선하신 뜻을 나타내 주신다. 그의 모든 것이 그러하듯이 이러한 마음도 아버지의 마음에서 물려 받으신 것이다. 그는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기를 바라시며 "진리에 대한 지식에 이르기를" 바라신다(딤전 2:4; 벧후 3:9). 그러므로 세상을 믿게 하며 돌이키는데 가능한 모든 방법을 다 사용하자는 것이 그의 의도이시다. 우리는 선택받은 자가 누구인지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서 있는 곳에서 더 많은 사람의 구원을 위하여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리고 이 구원을 방해할 어떤 행위도 저지르는 것을 삼가야 한다.
(2) 교회가 하나됨으로 맺어질 좋은 결실을 보여 주고자 하신다. 교회가 하나됨으로 기독교의 진리성을 세상에 보여 줄 수 있으며 많은 사람으로 기독교 진리를 받아들이게 하는 수단이 되는 것이다.
① 광의에 있어서 교회의 하나됨은 기독교에 대한 세상의 태도를 호전시킬 수 있으며 외부에 있는 자들로 기독교를 좋게 평가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첫째, 복음서의 강령에 의하여 교회가 한 몸으로 규합되면 기독교는 대단히 격상될 것이다. 세상의 자녀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과는 헤어져 예수를 믿고 전의 그들의 모습을 벗어버리고 변화가 되며, 설교라는 어리석은 방법에 의하여 교회가 융성하고 신의 섭리와 은총에 의하여 교회가 보존되며 놀라우리만큼 훌륭하게 교회가 이루어지고 조직되는 것을 세상이 보게 된다고 할지라도 그들이 교회를 비난하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들은 "우리도 당신과 함께 교회에 가야겠오. 하나님이 자네들과 함께 하시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요"라고 말할 것이다.
둘째, 그리스도인들이 사랑과 자비로 연합하면 그들이 고백하는 신앙이 품위있는 것이 될 것이다. 그리고 첫 번 초대 교회 가운데 있었던 사랑이 그런 역사를 불러 일으켰듯이 다른 사람들로 저희와 동참하려는 욕망을 가지게 할 것이다(행 2:42, 43; 4:32, 33).
기독교가 서로 논쟁을 일삼는 대신에 다른 모든 분쟁도 종식시키며 사람들의 분노를 쉬게 하며 험악한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며 사람들로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친절한 마음과 사랑의 성격을 지니게 하며 예의 바르고 자비로우며 또 그들로 모든 인간 관계에 있어서나 사회 생활에 있어서 사회를 보전 발전시키는데 열심히 있게 한다면 이로써 기독교는 다른 신앙을 지닌 사람들에게도 호의적인 반응을 얻게 될 것이다.
② 협의에 있어서 교회의 하나됨은 사람들에게 다음의 사실에 대한 호의적인 생각을 일으킬 것이다.
첫째,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좋게 생각할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에 저희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알고 믿을 것이라고 하였다. 교회의 하나됨에 의하여 그리스도를 보내신 분은 하나님이란 사실이 나타날 것이다. 또한 그의 가르침은 신적인 성격을 띠었고 이 교훈으로 인한 신앙을 통하여 서로 다른 역량과 기질과 이해관계에 처해 있는 사람들이 믿음으로 하나가 되고 사랑으로 한 마음이 되었다는 사실이 드러날 것이다. 확실히 그리스도는 인간들의 마음을 한 모양으로 지으신 능력의 하나님이요 사랑과 평화의 하나님에 대한 예배자들이 하나가 될 때 그리스도도 한 분이요 그의 이름도 하나로 사람들에게 인식될 것이다.
둘째, 그리스도인들에 대하여 사람들이 좋게 생각할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에 그들이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심같이 저희도 사랑하심을 알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본문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a. 신도들의 특권. 아버지께서 그의 아들을 사랑하시던 것과 같은 사랑으로 저희를 몸소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사랑으로 사랑을 받는다.
b. 이 특권을 누리려면 저희가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만일 우리가 순전한 마음으로 서로 사랑한다면" 이 사실에 의하여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심이 나타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마음에 뿌려진 사람들은 같은 마음으로 변모된다. 훌륭한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하나님에게 존귀한 여김을 받는다는 사실을 세상이 안다면 이 사실은 세상에 좋은 감화를 미칠 것이다. 유대인들에게는 다음과 같은 격언이 있다. "세상이 좋은 사람들의 가치를 알기만 하다면 진주로 담을 싸서 그들을 보호할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는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의 사랑은 더욱 많이 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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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중재 기도(5)(요 17:24-26)
본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Ⅰ. 그리스도에게 주어진 모든 사람들을 영화롭게 해 주실 것을 간구하신다(24절). 여기에는 사도들 뿐만 아니라 모든 신자들이 포함된다. 그러므로 본문에 "나는 저희도 나와 함께 있기를 원하옵니다"라고 하셨다. 다음의 사실드렸을 고찰해 보자.
1. 본문의 기도와 전의 기도와의 관련성. 앞의 기도에서 그는 하나님이 저희를 보전하시고 거룩하게 하시며 일치되게 해 주시기를 기도하였다. 그런데 이제 본문에서 그는 하나님께서 이 모든 은사 위에 저희에게 영광으로 관씌워 주시기를 기도하신다. 이 기도를 본을 삼아 우리도 먼저 은혜를 위해 다음은 영광을 위해서 기도해야만 한다(시 84:11). 왜냐하면 이렇게 간구해야 하나님이 주시기 때문이다. 다음과 같은 태도를 지닌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총을 받을 수 없다. 한 경우는 "기초 없이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자"와 같은 경우로 그는 하나님께서 먼저 거룩하게 하시지 않고도 사람들을 영광되게 하실 줄로 아는 자이다. 다른 경우는 "건축을 시작은 하였으나 완성시키지 못하는 어리석은 건축자"와 같은 경우로 그는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거룩하게는 하고 그들을 영광되게 해 주지는 않는 분으로 아는 자이다.
2. 간구의 방법. 그것은 "아버지여 내가 원하옵나이다"는 것이었다. 본문에서 그리스도는 전처럼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 우리도 기도할 때는 마찬가지로 해야 한다. 그러나 그가 ‘델로’(qevlw) - 즉 내가 원합니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리스도만이 쓰실 수 있는 언어 사용법으로 평범한 일반 간구자들에게 격에 맞지 않는 것이며 오직 구할 바에 대하여 마땅한 대가를 치루신 분에게만 해당되는 것이다.
(1) 넓은 의미에 있어서 이 사실은 그리스도의 중재의 권한을 나타내 준다. 그의 말씀은 세상에서와 마찬가지로 하늘에서도 권세가 있었다. 그는 "자신의 피를 드려 거룩한 곳에 들어가셨으며" 그러기에 거기서의 그의 중재는 절대적 효능을 발휘하는 것이다. 그는 왕의 입장에서 중재하신다. 왜냐하면 그는 (멜기세덱과 같이) 보좌에 앉으신 제사장 곧 왕적인 제사장(kingly priest)이시기 때문이다.
(2) 특별히 여기서 이 말씀은 그의 특별한 권위를 나타내준다. 그는 영생을 부여하는 권세를 가지셨고(2절)., 그리고 그 권세에 의거하여 "아버지여 내가 무엇을 원하옵나이다"라고 하신다. 비록 그가 지금은 "종의 형체"를 입으셨지만 앞으로 그가 영광된 재판장으로 재림하실 때 그의 권세는 가장 놀라웁게 발휘될 것이며 그의 마음에 합당한 자들에게 "너희 축복받을 자들아 나아오라" 하실 것이며 그때 또한 "아버지여 내가 이렇게 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말씀할 것이다.
3. 간구의 내용. 모든 선택받은 자들이 결국은 하늘나라에 와서 그와 함께 거하며 그의 영광을 보며 그 영광에 참여하게 해 달라는 것이다. 다음의 사실을 고찰해 보자.
(1) 우리가 바라는 하늘나라에서 우리는 어떠한 상태로 있게 될까? 우리가 누릴 행복은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가?를 살펴 보자. 하늘나라에서는 세 가지가 성취된다.
① 우리는 그리스도가 계신 곳에 거하게 된다. 그러므로 본문에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라고 하였다. 즉 그리스도의 영이 죽음을 당하신 후 잠시 머무르셨던 낙원이요, 승천하신 후에는 그의 몸과 영혼이 가신 삼층천을 말하는 것이다. 즉 "내가 있는 곳"이라고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실 때는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하나는 내가 잠시 있던 곳이란 뜻이고 또 하나는 내가 영원히 거하는 곳이란 뜻이다. 이 세상이란 곳은 우리에게 transitu - 즉 나그네 길에 불과한 것이다. 하늘나라야말로 우리가 영원히 있을 참 우리의 거처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렇게 여기셨으니 우리도 그렇게 믿어야 될 것이다.
② 우리는 그리스도가 계신 곳에 그와 함께 거하게 된다. 이것은 무슨 말장난에 불과한 것은 아니다. 이 말은 우리가 그리스도가 계신 같은 행복된 장소에 우리도 머문다는 의미 뿐만 아니라 그가 계신 곳이 곧 행복한 장소라는 뜻이다. 이것은 "기쁨이 충만한 상태인 것이다." 제일 좋은 하늘나라는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는 곳이며 거기서 우리는 그와 사귀며 교제하는 것이다(빌 1:23).
③ 우리는 거기서 아버지께서 그리스도에게 주신 그의 영광을 바라보게 된다. 다음의 사실을 생각하여 보자.
첫째, 구속자의 영광이 곧 하늘나라의 광채이다. 그의 영광은 너무 빛나므로 천사들도 그 앞에서 얼굴을 가린 그러한 영광이었다(12:41). 어린 양은 새 예루살렘의 광채이시다(계 21:23). 또 그리스도는 그의 아버지의 영광으로 오실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아버지의 영광의 광채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의 은혜를 내리시듯이 하늘나라에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아직 낮은 상태에 머물러 계셨지만 "아버지께서 이 영광을 내게 주셨습니다"라고 확신있게 말씀하셨다. 그 영광은 매우 확실한 것이었고 또 그에게 가까이 이르러 있었다.
둘째, 구속받은 자가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현재의 복은 하늘나라의 영광을 앙망하는데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앞으로 그의 영광스러우신 모습을 직접 대면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욥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욥 19:26, 27)고 하였다. 그때가 되면 구속받은 자들은 그의 영광된 사업이 성취된 것을 명백히 볼 것이다. 그들은 모든 은총의 시내가 거기로부터 흘러나오는 사랑의 샘을 보게 될 것이며 또 그리스도의 영광을 그제야 온전히 깨달을 것이다(그러므로 격언에 Uxor fulget radiis mariti - 즉 남편이 유명해지면 아내도 유명해진다는 말이 있다.). 또한 그들은 그리스도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되어 영광에서 영광으로 이르게 될 것이다.
(2) 우리가 하늘나라를 바라볼 수 있게 된 근거. 그것은 그리스도의 우리에 대한 중재 외에는 없다. 왜냐하면 그는 "아버지여 내가 원하옵니다"라고 말씀함으로 우리를 아버지에게 중재하시고 계시기 때문이다. 또 그리스도의 중재로 인하여 우리가 소망을 가졌다는 증거는 우리의 성화이다. 왜냐하면 이런 소망을 가진 자는 스스로를 순결케 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순결해지려는 것은 그것이 그리스도의 뜻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입은 것이다"(히 10:10). 본문에서 그리스도는 자신이 그가 선택하신 자들과 함께 하늘나라에서 영광을 나누지 않는다면 자신의 행복도 성취될 수 없다는 식으로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므로 우리의 구원의 주님도 온전하여지시기 때문이다"(히 2:10).
4. 이러한 요구를 하실 수 있는 이유. 그것은 본문에 의하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라"고 하신다. 바로 이 사실이 그의 다음과 같은 행위의 이유가 되고 있다.
(1) 그가 이 영광을 자신이 받게 되리라고 믿은 이유가 된다. 그는 "당신이 나를 사랑하시므로 이 영광을 내게 주실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신다. 아들에게 주어진 중제자로서의 명예와 권세는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에 근거하고 있다(5:20). "아버지는 아들을 사랑하시며" 그가 하는 일을 대단히 기뻐하시며 그러기에 "만물을 아들에게 맡기신 것이다." 그리고 이 사실은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계획에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므로 그리스도는 "창세 전부터" 중재자로서 그를 하나님이 사랑하셨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2) 그에게 주어진 자들이 그와 함께 그의 영광에 동참하게 되리라는 것을 바라시는 이유가 된다. 즉 본문은 다음과 같은 뜻의 말씀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며 그러기에 내 안에 있는 그들을 사랑하십니다. 따라서 내가 그들을 위해 요구하는 것을 아버지께서 부정하실 수 없습니다."
Ⅱ. 본 기도의 결론. 이 부분은 제자들을 위한 그의 모든 간구를 강조하려는 데 뜻이 있는 것이다. 특별히 마지막 부분의 간구 즉 저희를 영화롭게 해달라는 간구를 강조하고자 하신다. 본문에 그가 특별히 주장하고 또 간청한 두 가지 사실이 있다.
1. 아버지에 관하여. 그는 아버지에 관하여 다음의 사실들을 말하신다(25절).
(1) 그는 하나님에게 "의로우신 아버지"라는 칭호를 붙인다. 앞에서 저희를 거룩하게 해달라고 하실 때 그는 하나님을 "거룩하신 아버지"라고 칭하였다. 이제는 저희를 영화롭게 해달라고 하시면서 그는 하나님을 "의로우신 아버지"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이 칭호는 의로우신 재판장이신 그리스도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최고의 면류관이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약속하셨고 또 아들이 이를 위하여 대가를 지불한 모든 아름다운 것의 우리에 대한 수여가 보증되는 근거는 바로 하나님의 의(義)이다.
(2) 그는 죄악 속에 있는 세상에 대하여 규정하기를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고 하신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무지가 온 천하에 만연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들이 거하는 곳은 바로 어두움 속이다. 이러한 무지 때문에 그리스도는 다음의 사실을 제시하신다.
① 제자들에게 특별한 은총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두 가지 이유 때문인데 하나는 그들의 사명 때문이고(그들에게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은 하나님을 아는 세상으로 변모시킬 사명이 주어지고 있다) 또 한 이유는 이 사명을 이루기가 대단히 어려웁다는 이유 때문이다(그들은 빛에 대항하는 자들을 빛으로 인도해야 하며 또 그들을 빛 가운데 살도록 보존해야 했다).
② 그들이 앞으로는 더 특별한 은총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 이유는 그들은 세상이 가지지 못하였던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소유하였기 때문이다.
(3) 그는 자기를 위하여 간구하시면서 "그러나 나는 아버지를 알았나이다"라고 말씀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일찌기 어느 누구도 도달할 수 없는 정도로 아버지를 아셨다. 또 그가 무슨 이유 때문에 세상에 오셨는지 또 아버지의 인간 세상에 대한 경륜이 무엇인지를 아셨다. 그러므로 그는 본문의 기도를 하시며 우리가 잘 아는 사람에게 하듯이 믿음으로 아버지에게 나아오신 것이다. 본문에서 그리스도는 그의 것이 된 사람들을 위하여 축복을 간구하신다. 그런데 이 간구를 하시면서 그는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였으나"라고 말씀하실 다음에 의례 예상하게 되는 "저희는 아버지를 알았나이다"라는 말씀을 하사지 않고 본문의 말씀 즉 "나는 아버지를 알았나이다"라고 하셨다. 이 말은 그들의 아버지에 대한 지식이 내세울 만한 것이 못된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이다. 또한 이 말은 우리를 하나님의 가호에 의탁하기 위해 우리에게 특별히 내세울 것이 없다는 사실도 되는 것이다. 우리의 아버지에 대한 관심, 또 아버지와의 사귐은 오로지 그리스도의 우리에 대한 관심에서 온 중제하심의 결과요 거기에 의존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는 쓸모 없는 존재이나 그는 가치 있으신 분이시다.
(4) 그는 자기 제자들을 위하여 간구하시면서 "저희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을 아셨나이다"라고 하신다(한글 개역에는 이 부분이 없음). 그러기에
① 그들은 이 불신의 세상에서는 구별되어야 한다고 하신다.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오시고 그의 은총을 나타내신 무리들은 "하나님께서 그를 보내신 것"을 믿지 아니하였으나 제자들은 이 사실을 알았고 믿었으매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였다.
무지와 불신앙을 고집하는 이 세상 가운데 살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또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최고로 기쁘시게 해 드리는 일이며 후에는 남들이 차지하지 못하는 영광으로 틀림 없이 관씌움을 받으리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순박한 믿음을 지닌 자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순전한 은혜를 받게 되는 것이다.
② 세상과는 구별되었기에 저희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명상에 잠기기를 즐겨하였고 또한 그의 아버지와의 친한 사귐을 통해 얻어진 은혜의 동참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본문의 말씀의 뜻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내가 아버지를 직접 그리고 완전히 알았나이다. 그리고 저희들은 지금까지는 아버지를 몰랐었고 또 알 만한 능력도 없었사오나 그렇지만 이제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알았나이다. 그리고 그들이 알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알았고 또 구속자인 나의 안에서 창조주이신 당신을 알았나이다."
그리스도를 하나님이 보내신 분으로 알므로 그들은 그 안에서 아버지를 알았고 또 그리스도를 통해 아버지와 사귀는 방법을 배우게 되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아버지여 나를 인하여 저희를 돌보아 주소서"라고 간구하신 것이다.
2. 그의 제자들에 관하여(26절).
제자들에 대하여 그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내가 저희를 인도하여 아버지를 알게 하였나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더욱 이 일을 위하여 매진할 것입니다. 이러한 크고 진지한 뜻을 가진 것은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저희 안에 있고 나도 저희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
그 구체적 내용을 살펴 보자.
(1)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을 위하여 하신 일. 그것에 대하여 본문에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저희에게 알게 하다"고 기록되었다.
① 그리스도는 이 일을 그를 직접 수종하던 제자들을 위하여 행하시었다. 즉 내내 그와 출입을 함께 하던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다.
그는 저희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선포하는 것과 저희 안에 그에 이름에 대한 경외심을 일으키는 것을 본분으로 여기셨다.
그리스도의 모든 교훈과 기적의 취지는 아버지의 영예를 높여드리고 또 아버지의 대한 지식을 널리 퍼뜨리기 위한 것이었다(1:18).
② 이 일을 그는 자기를 믿는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하셨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저희에게 그의 아버지의 이름을 알려 주시지 않는다면 저희가 그를 믿게 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다음 사실을 기억하자.
첫째,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아버지의 이름에 대하여 알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는 그의 이름을 선포하셨고 또 우리의 이해의 문을 열어 그 계시를 받아들이게 하시었다.
둘째,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가호 아래 부탁하신 사람들을 그는 먼저 인도하셔서 저희를 아버지와 사귐을 갖게 하신다는 사실이다.
(2) 그가 앞으로 저희를 위하여 하시고자 계획하신 일.
본문에 의하면 "아버지의 이름을 알게 하였고 또 앞으로도 그 이름을 알게 할 것이라"고 하셨다. 그는 부활하신 다음 제자들에게 더욱 수준 높은 교훈을 주시고자 마음먹고 계셨다(행 1:3).
그러고 승천하신 후에는 성령을 부어 주심으로 저희로 보다 하나님의 일에 깊은 지식을 갖게 하고자 마음 먹고 계셨다.
그리고 그가 마음에 빛을 던져 주고 모든 신자들에게는 더욱 강렬한 빛을 비치시려고 뜻하고 계셨다.
그리스도는 한 번 그의 아버지의 이름을 선포하신 곳에서 계속 그 일을 수행하실 것이다. 가진 자에게는 더욱 풍성히 주시는 분이 그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은 더욱 그를 알 필요가 있으며 또 그것을 바라야 한다. 그러므로 그가 다음과 같이 간구하신 것은 당연한 것이다.
"아버지여 저희를 주장하사 은혜를 베푸소서. 왜냐하면 저희가 아버지를 인정하고 당신에게 영예를 돌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3) 이 모든 일을 시도하신 그의 목적.
그것은 저희로 묘한 사색에 몰두하게 하거나 또는 저희에게 학식있는 사람들과 상대할 수 있는 자료를 제공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다음 두 가지 방법으로 저희에게 참된 행복을 확립해 주고 증진시켜 주려는 데 있었다.
① 하나님과의 교제. 본문의 말씀은 다음과 같은 뜻이다.
"저희로 하나님과 사귐을 갖게 하기 위해서 나는 아버지의 이름에 대한 지식과 또 당신께서 스스로 나타내신 당신의 모든 모습과 당신의 사랑에 저희에게 알리었나이다. 그리고 나를 사랑하신 아버지의 사랑이 저희에게 임할 뿐만 아니라 저희 안에 거하게 하려 함이니이다." 이 말씀의 뜻은 다음과 같다.
첫째, "저희가 거룩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사랑의 열매를 저희로 맛보게 하소서. 아버지께서 나로 충만하게 하셨던 사랑의 성령으로 저희 안에 거하게 하소서"란 뜻이다.
그리스도는 그의 아버지의 이름을 신자들에게 알려 주신다. 이 하늘의 빛이 그들의 마음에 비추므로 하나님의 사랑도 그들의 마음에 퍼지어 그들 가운데서 저희를 주장하여 거룩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고 또 저희로 신의 본성에 참여하게 하셨던 것이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거하게 될 때 하나님의 사랑은 자석이 바늘을 끌어 당기는 것과 같은 작용을 우리 속에서 일으키신다.
그것은 우리로 하나님에 대한 경건하고 헌신적인 사랑으로 이끈다. 그것은 성령으로 거듭난 자 속에서 역사하는 영과 같은 것이다.
둘째, "저희가 하나님의 사랑을 맛봄으로 위로를 받게 하소서. 저희로 저희에게 알려진 하나님의 이름을 지님으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게 하시고 앞으로 더욱 그 이름을 알게 되므로 위로를 받게 하옵소서. 저희가 하나님을 알 뿐만 아니라 저희가 하나님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깨닫게도 하옵소서"란 뜻이다(요일 2:3). 저희의 마음이 기쁨으로 가득 찬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저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이다"(롬 5:5).
이 하나님이 우리로 그의 사려깊은 사랑으로 만족케 하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경지에 거하게 된 것을 스스로 만족케 하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경지에 거하게 된 것을 스스로 만족히 여기도록 배려하신다. 그리하여 우리로 하나님 안에서 자족하며 또 계속 그와 사귀는 삶을 살게 하신다. 이 일이 이루어지도록 우리는 기도해야 하며 더욱 간청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그것을 소유하게 되면 이에 대하여 그리스도에게 감사해야 하며 만일 우리가 그것을 염원하게 된 때는 그러한 마음이 일어난 사실에 대하여 스스로 감사해야 한다.
② 그리스도와의 교제. 본문에 "나도 저희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는 말씀이 바로 이 사실을 뜻하고 있다.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에 대한사랑에 리를 수 없으며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지 않고서는, 다른 말로 그리스도를 우리 안에 거하시지 않게 하고서는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할 수 없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내주하심을 경험하지 않고서는 곧 그리스도의 성령이 우리 마음 가운데 거하시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감지할 수도 없고 깨달을 수도 없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가 우리를 부끄럽지 않게 하시는 영광의 소망이신 것이다(골 1:27).
하나님과의 모든 사귐, 그와 우리가 서로 나누는 사랑 이 모든 것은 주 예수의 손을 거쳐야 하며 이를 통하여 받는 위로도 순전히 그에게 힘입은 것이다. 그리스도는 바로 앞에서도(23절) "나도 저희 안에 있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셨었다.
그리고 본문에서도(이 말은 실상 빼도 의미가 통할 수 있는데도) 다시 이 내용을 반복하셨다.
이것은 그가 기도를 이 말로 끝맺으심으로 그리스도께서 이 일에 얼마나 관심이 크신가를 보여 주고 있다.
그의 모든 간구의 중심점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그리고 이 기도로 "다윗의 아들 예수의 기도는 끝을 맺는다." "나로 저희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 내게 이 일만 이루어지면 더 이상 바랄 아무것도 없나이다"란 뜻이다.
구속받은 자들 가운데 거하시는 것이 구속자에게는 영광이 된다. 이것이 그에게는 영원한 안식이 되신다. 그러므로 그는 이것을 바라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함을 꼭 이루도록 하자. 그리고 그의 중재하심으로 위로를 얻자. 여기서 본문의 기도는 끝난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지금도 사셔서 우리를 위하여 이 기도를 하시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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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다 know, 이해하다 understand.(야다/기노스코) ginwvskw(1097, 기노스코)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동사 기노스코(Homer 이래)는 기본 어근 그노(gnw)에서 형성된 단어이며, 다음의 의미를 지닌다.
(a) 이 단어는 기본적으로 사물이나 사람 또는 상황을 감각으로, 특히 시각으로 '알아차리다, 지각하다, 인식하다'를 의미한다.
호머(Homer, Od.)애서 보는 것과 기노스코는 서로 연관되어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경험의 세계에서 그렇게 인지되었던 것을 마음 속에 지적으로 정리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이 단어는 또한 '경험하다, 배우다, 알게 되다'를 의미한다. 즉 경험된 것이 그것을 경험한 사람에게 알려진다.
(b) 이 단어는 '구별하다' distinguish를 의미한다.
그 유사한 것이나 서로 다른 것들 사이에 있는 어떤 현상에 대한 경험이나 인지가 이런 일을 유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Homer, Il).
(c) 이 단어는 '인격적으로 알다'(Heracl., Frag.), '이해하다'(Homer, Od.), '알다'(친밀함이 인격적 지식을 가져온다). '~와 알고 지내다, ~와 친하다, 숙달되다, 노련하다'(Plato, Rep.)를 의미한다.
(d) 이 단어는 '결정하다, 판단하다'(Democr. Fr., Demosth).
(e) 형사 법원이나 민사 법원의 판결은 주어진 사실의 비중에 의거하여 내려지기 때문에 이 판결들은 기노스코의 수동형으로 표현되어 '재판을 받다, 판결을 받다'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f) 이 단어는 "아는 사이나 친밀하다'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육체적으로) '알다', 즉 '~와 성적인 관계를 가지다'라는 헬라 용법이 여기에서 유래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아마도 이 용법의 배후에는 헬라어 아닌 다른 언어에서 차용한 단어의 용법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단어의 어근이 라틴어 기그네레([아이를] 낳다)와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이 지적되어 왔다(참조: H. Leisgang, Die Gnosis).
(g) 이 단어는 '확인하다, 입증하다, 확증하다'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철학적 지식의 목적은 보는 것인데 이는 일시적이고 가변적인 이 세상의 현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눈을 통해서만 볼 수 있는 영원하고도 실질적인 것을 보는 것이다. 이 확인은 원래 관찰로 말미암는다.
이러한 맥락에서 기노스코는 '통찰력을 얻다, 알아차리다'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이러한 통찰력의 대상은 궁극적으로 종교의 영역에 속할 것이다(Herach., Frag. 5).(참조: E. D. Schmitz; Bultmann).
2. 70인역본의 용법.
동사 기노스코는 70인역본에서 약 800회 이상 나오며, 히브리어 야다(알다)와 그 어형들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며, 라아(보다), 하자(보다), 샤마(듣다) 등 13개 단어의 역어로도 사용되었다.
헬라의 일반적인 태도와 마찬가지로 구약성경에서도 지식은 감각을 통해서 획득된다. 이미 알려진 것은 감각으로 나타나야 하며 그 자체는 그렇게 알려지게 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듣는 것(듣다)과 보는 것(보다)에 관한 동사가 아는 것에 관한 동사와 병행되어 나오는 것을 보게 된다(예: 출 16:6 이하; 신 33:9; 삼상 14:38; 사 41:20).
이것으로 우리는 70인역본이 라아(삿 2:7)와 하자(사 26:11)와 샤마(느 4:15)의 역어로 기노스코를 사용한 이유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헬라와 히브리 사상에서 아는 것에 관한 개념들은 대체로 일치하며 이 두 경우에 감각을 통하여 얻는 경험이 기본적인 것이다.
(a) 70인역본에서 야다/ 기노스코는 '알아채다, 인지하다, 경험하다, 관찰하다'를 의미한다(예: 창 3:7; 창 41:31; 삿 16:20; 전 8:5; 사 47:8; 호 5:3).
(b) 야다/ 기노스코는 '구별하다' distinguish를 의미한다.
"선악을 아는 것"(창 3:5; 창 3:22)은 하나님께 불순종한 결과이다. 좋고 흉한 것을 구별하는 것은 필요하다(삼상 19:36). 어린 아이는 왼손과 오른손을 구별하지 못하며(욘 4:11) 또 선과 악도 구별하지 못한다(사 7:15). 후자의 구절의 문맥과 사 8:4에 나오는 이와 비슷한 언명은 이 언급이, 어린 아이는 유익한 것과 해로운 것을 구별할 줄 모른다는 것에 관한 것이라는 점을 시사해 주는 것 같다. 좋고 흉한 것, 좌우와 같은 것에 대해 관찰하는 것은 결국 그것들을 구별하는 것이 된다.
(c) 야다/ 기노스코는 '배워서 알다' know by learning라는 의미를 지닌다(잠 30:3).
(d) 이 분사는 사냥(창 25:27), 학문(사 29:11-13), 애곡(암 5:16), 바다를 항해하는 일(대하 8:18), 그리고 악기를 연주하는 일(삼상 16:16)에 능함을 묘사하는 어구에 나온다.
(e) 야다/ 기노스코는 어떤 사람을 '아는 것'을 표현한다.
어떤 사람을 아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었다(창 29:5; 출 1:8; 삼하 3:25). 푸알 분사형은 '친척'(왕하 10:11 등)과 '아는 사람'(욥 19:14; 룻 2:1 등)을 지칭한다.
(f) 야다/ 기노스코는 '관계하다, 관심을 가지다'(시 1:6; 시 37:18; 시 119:79), '~와 관계를 맺고 싶다'(예: 신 33:9). 신학적인 문맥에서 자주 이 단어가 적절한 지식을 얻지 못해서 결국 관심의 결여를 초래하고 마는 것에 대한 문제로 나온다(예: 렘 8:7; 시 95:10).
(g) 야다/ 기노스코는 '성적 관계를 가지다'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를 알았다"고 하는 유명한 완곡 어법과 그 병행구들(창 4:1; 창 19:8; 민 31:17; 민 31:35; 삿 11:39; 삿 21:11; 왕상 1:4; 삼상 1:19)에서 남녀 쌍방의 성적인 관계를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이 단어는 남색(창 19:5; 삿 19:22)이나 강간(삿 19:25)과 같은 성적 도착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h) 야다/ 기노스코는 '다른 사람과 인격적이며 친숙한 관계를 맺다'를 의미한다.
하나님은 이름으로, 대면하여 모세를 아신다(출 33:17; 신 34:10). 하나님께서 어떤 개인이나(렘 1:5) 어떤 민족을(암 3:2) 아실 때 하나님께서 그를 선정하시거나 선택하신다(참조: 민 16:5 70인역본). 선택으로 이해되는 이 지식은 은혜롭고 자애로운 것이지만 이것은 인격적인 응답을 요구한다.
(i) 야다/ 기노스코는 일반적인 문제에 대한 지식 외에도, 다른 신들을 아는 것이든(신 13:3; 신 13:7; 신 13:14) 여호와를 아는 것이든(삼상 2:12; 삼상 3:7) 간에, 신에 대한 인간의 관계에 대해 사용되었다.
이방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며(렘 10:25) 선지자들에 의하면, 이스라엘도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렘 4:22).
애굽의 재앙은 여호와가 하나님이심을 애굽인들이 알도록 하기 위해 보내졌다(출 10:2 등). 그는 그가 하나님이심을 이스라엘인들이 알도록 하기 위해(사 60:16) 그들을 파멸시키시고(겔 6:7) 회복시키실 것이다. 특히 선지자 에스겔은 위협할 때,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는 어구를 사용한다(겔 6:7; 겔 6:10; 겔 6:13; 겔 6:14; 겔 7:4; 겔 7:9;겔 7:27 등).
(j) 요약하면 희랍인들이 초연한 지식을 갖고 있으며 또한 사물의 형이상학적 본질에 사변적인 관심을 갖고 있었는데 반해, 구약성경은 지식을 끊임없이 인격적인 만남에서 생겨나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구약성경이 하나님과 창조에 관해서 언급한 것을 보고서, 우리가 이 언급들을 존재론적 추론으로 여겨서는 안되고 하나님의 계시에 응답하는 믿음의 선포로 간주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역사적 과거와 약속된 미래 즉 하나님의 피조물들이 존재하고 있는 이 지상의 영역 속에서의 하나님의 계시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끊임없이 과거와 현재와 미래 속에서의 하나님의 계시를 찾았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예배와 행동 가운데서 하나님의 목적과 요구를 식별할 수 있었던 것이다.(참조: E. D. Schmitz; Bultmann).
3. 신약성경의 용법.
동사 기노스코는 신약성경에서 221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신약성경에서 기노스코의 용법은 헬라의 용법과 구약성경의 용법과 매우 유사하다.
(a) '느끼다, 간파하다'(막 5:29; 눅 8:46),
(b) '주목하다, 알아 차리다'(막 8:17; 막 12:12; 마 26:10; 고후 2:4; 요 5:42; 요 8:27),
(c) '인정하다, 인지하다' recognize(눅 7:39; 마 12:15; 마 22:18; 갈 3:7; 약 2:20; 요 4:1; 요 5:6; 요 6:15),
(d) '듣다, (들어서)알다'(막 5:43; 막 15:45; 눅 9:11; 행 17:13; 행 17:19; 빌 1:12; 빌 2:19; 요 11:57; 요 12:9; 마 10:26과 병행구; 행 9:24; 빌 4:5).
(e) '확증하다, 확실히 하다, 확인하다' confirm(막 6:38; 막 13:28 이하; 눅 1:18; 고전 4:19; 고후 13:6; 요 4:53; 요 7:51).
(f) ① 알아채고 있다(의식)라는 의미에서 '알다' know(마 24:50와 병행구; 눅 2:43; 눅 16:4; 히 10:34; 계 3:3; 요 2:24 이하; 요 7:27; 요일 3:20).
② 또한 익히 앎이나 아는 사이라는 의미에서 '알다'(마 25:24; 눅 12:47 이하; 눅 16:15; 행 1:7; 롬 2:18; 롬 7:1; 고전 5:16; 요 1:48; 요 7:49).
③ 그리고 이해라는 의미에서 '알다'(눅 18:34; 행 8:30; 고전 14:9; 요 3:10).
(g) '구별하다, 분별하다' distinguish를 의미한다.
고전 14:7, "혹 저나 거문고와 같이 생명 없는 것이 소리를 낼 때에 그 음의 분별을 내지 아니하면 저 부는 것인지 거문고 타는 것인지 어찌 알게 되리요".
(h) '~하는 방법을 알다' know how to.
마 16:3,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천기는 분별할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i) 경험을 통하여 '알다, 깨닫다' find out(요 13:58; 요 15:18; 요 19:4; 요일 2:3; 요일 2:5).
(j) '~와 관계를 맺다'
① 마 1:25; 눅 1:34에서 성적인 관계에 대해 사용되었다.
② 마 7:23에서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라는 말씀은 '나는 너희와 전혀 관계를 맺지 않았다'라는 의미이다.
③ 고후 5:21에서 예수님은 "죄를 알지도 못하신다"라고 하셨는데 이것은 그가 죄에 대해 지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께서 죄와 인격적인 관계를 맺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이란 선언이 범죄 행위와 반어법을 나타내주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④ 롬 7:7에서도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라는 문구는 '율법이 없었다면 인간인 나는 죄와 본질적인 관계가 없었을 것이다'라고 의역할 수 있다.
⑤ 고후 5:16에서 '~와 관계가 있다, ~와 관계를 맺다, 개인적으로 알다'를 나타낸다. 이 구절의 의미는 많은 논쟁의 주제가 된다. 상반절에는 오이다멘("우리가 아노니")이 나오며, 하반절에는 기노스코가 에그노카멘("우리가 알았노니")과 기노스코멘("우리가 아노니")의 형태로 나온다.
(k) 고전 5:11-21에서 바울은 자기를 개인적으로 공격하며 사도직을 공격하는 적대자들과의 논쟁에 관련되어 있다. 그들은 바울에게는 사도라고 확증할만한 눈에 보이는 영적인 특성, 예를 들면 무아지경의 현상들이 결여되어 있다고 주장했다(고전 5:13). 그들은 그를 자기 자신만을 칭찬하는 '허풍선이'라고 비난했던 것 같다.
바울은 고전 5:11("우리가 ... 사람을 권하노니")과 고전 5:12("우리가 ... 자천하는 것이 아니요")에서 그것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 듯하다. 바울의 변호 중에는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시고, 그래서 상상된, 눈에 보이는 영적인 특성을 가진 사람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이 죽었다"고 하는 언급도 부분적으로 들어있다(고전 5:14 이하). 그래서 바울은 자기가 본 성령과 능력의 분명한 증거에 따라서 지금부터-모든 가치의 전도, 즉 시대의 전환점을 의미하는 그리스도와 관련된 사건 이후로-"우리가 ...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못하노니"라고 말한다.
우리는 이것을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결과로 이해해야 한다(고전 5:14). 이것이 얼마나 명백한 것인가를 나타내기 위해 바울은 모든 사람이 분명히 알 수 있는 언명을 고전 5:16 하반절에 삽입하고 있다: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다시 말하자면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계셨던 것과 마찬가지로 눈에 보이는 그리스도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즉 그와 그렇게 관계하지 않고 오직 우리가 섬기는, 눈에 보이지 않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와만 관계한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에, 그는 모든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 주이시며, 그가 주님이시라는 것은 외면상으로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사도 바울과 사도라고 하는 그의 주장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던 것 외의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외적인 판단과 일반적으로 눈으로 볼 수 있는 기준에 예속되어 있지 않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오직 새로운 피조물만이 가치가 있는 것이다. 외적 현상에 의한(엔 프로소포, 고전 5:12) 판단을 포함하여 이전 것은 지나가고 "새 것이 되었도다"(고전 5:17). 이 논쟁에 비추어 볼 때, 바울이 고후 5:16에서 그가 지상의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알았다는 것을 확증하지도 부정하지도 않는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마찬가지로 바울에게 있어서 이것은 역사적 예수님의 의미와 관계를 띠고 있지 않은 것이다.
(l) 기노스코는 '인정하다, 알아주다'를 의미한다.
① 고전 4:19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그가 갈 때 교만한 자의 말이나 그들의 능력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고, 즉 중요시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② 계 3:9에서 빌라델비아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높임을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이(이방인?) 기독 교회에 와 보면 부활하신 이가 그들을 사랑하심을 인정하게 되리라고 약속하셨다(계 2:23). 이렇게 하심으로서 그는 유대인의 종말론적 소망을 뒤짚어 놓으셨다(참조: E. Lohmeyer).
③ 롬 7:1에서 "법을 아는", 롬 2:18; 행 22:14에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와 같은 문구들은 단순히 이론적인 지식을 암시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사람에게 개인적으로 적용되어 인간의 순종을 요구한다는 것에 대한 인지를 암시한다.
④ 요 7:29에서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라고 한 바리새인들의 말은 일반 백성들에 대한 잘 다듬어진 랍비 학자들의 비웃음을 반영해 주는 것이다(참조: SBⅡ 494-521). 이것은 일반 백성들이 실제로 율법을 알아 율법에 순종했다면, 그들은 예수님을 추종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이 내용을 기록하면서 요한은 여기서 율법이 바로 그들 자신을 지적하고 있음을 깨닫지 못하는 바리새인들에 대하여 무의식적으로 비꼬는 것이다(참조: 요 7:42; 요 5:29 이하; 요 11:49 이하). 요 7:51에서는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판결하느냐"고 반박하고 있다.
⑤ 롬 1:21에서 하나님을 알았던 자들의 생각이 허망하여졌다는 말은 헬라 사상의 견지에서 모순된 것으로 보였음에 틀림없다. 그들의 허망함은 하나님을 알지 못한 결과다(참조: 지혜서 13:1).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반드시 그에 합당한 찬미와 감사를 포함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거부한 이교도들은 이 지식을 단순한 지적인 활동으로 격하시켰으며 그들이 지혜라고 생각했던 것은 사실상 어리석음일 뿐이었다(롬 1:22 이하). 이교도들이 분명히 하나님을 알고 있었다하더라도, 그들이 하나님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그들은 핑계할 수 없게 되었다(갈 4:9; 요 1:10; 고전 1:21; 갈 4:8).
⑥ 엡 5:5; 약 1:3; 약 5:20 등에서 지식에 관한 명령과 권유는 이 은사를 붙잡아 변화하는 생활 상황에서 이것을 올바르게 사용하라는 요구인 것이다.
⑦ 눅 10:11에서 이스라엘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인정해야 한다. 행 2:36에서 "이스라엘의 집"은 오순절 사건에 비추어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하라는 요청을 받는다. 마 24:43의 비유에 나오는 명령문도 참조하라.
⑧ 고후 8:9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즉 "부요하게 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을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하게"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실제 행동으로 나타내는 것에 대해 언급한다. 우리는 이것을 리쯔만(Lietzmann)이 해석한 것처럼 단순히 그리스도께서 관대하심의 본이시다를 뜻하는 것으로 해석해서는 안된다(H. Lietzmann, An die Korinther).
(m) 기노스코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시고 선택하시는 지식을 언급하는데 사용되었다.
-딤후 2:19(민 16:5을 인용함), "그러나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인침이 있어 일렀으되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하며 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찌어다 하였느니라".
-고전 8:3,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시는바 되었느니라".
-갈 4:9,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더러 하나님의 아신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노릇 하려 하느냐".
여기에서 하나님의 지식은 이방인과 유대인을 똑같이 받아들이시는 하나님의 모든 행동을 포함한다. 이 지식은 영원히 하나님의 피조물에게 유효한 것이며 죄와 불순종에 대한 승리이다. 롬 10:2은 이에 대한 일종의 상대 구절이다. 여기서 바울은 하나님을 위한 유대인의 열심을 인정하긴 하지만 이것이 카타 에피그노신("[참된] 지식을 좋은 것")은 아니다(참조: Arndt, 291). "이것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보다 깊이 통찰하지 못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 결핍되어 있는 지식은 하나님의 방법에 대한 지식과 인지이다"(E. Gaugher, Der Brief an die Romer).
(n) 기노스코는 어떤 구절에서 신학적이고 이론적인 지식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① 마 13:11(참조: 막 4:11TR)은 오직 제자들에게만 허락된 "천국의 비밀"에 관한 감추어진 지식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이 지식이 그들을 그 외의 경우에는 사람들에게 감추어져 있는 비유의 권위 있는 해석가가 되게 했다.
롬 6:6에서는 신학적인 진리에 관한 지식, 예를 들면 세례에 관한 특별한 가르침에 대한 지식까지도 삶으로 나타내는 순종을 그 목적으로 삼고 있다. 이러한 지식의 명백한 목적은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에 있는 것이다.( R. Bultmann; E. D. Schmitz).
※ 영지주의와 논쟁에서 나타난 용법 등.
신약성경 시대에는 자기들이 탁월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자랑하는 사람들이 있었다(고전 1:18-2:16; 고전 13:12 이하; 골 2:8; 딤전 4:7; 딤전 6:20).
신약성경 기자들은 자주 사도적 케뤼그마(khvrugma, 2782: 선포, 전도)에 대하여 자기 나름대로의 견해를 가지고 있었던 순례 설교자들과 충돌하곤 했다. 디모데는 이른바 거짓된 지식(그노시스)의 "망령되고 허한 말"과 "변론"을 피하도록 명백히 경고받고 있다(참조: 딤전 6:20).
계 2:24에는 "사단의 깊은 것"을 배웠다고 주장했던 적대자들이 언급되어 있다. 이 기자는 풍자적이면서 올바른 비평적인 판단을 가지고 "하나님의 깊은 것"을 배웠다고 하는 그들의 주장에 항변했던 것 같다(E. Lohmeyer).
(a) 바울 서신.
고린도 교회 사람들이 주장하는 지식은 이처럼 바울에게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었다.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고전 8:2). 이것은 고전 15:34과 비교될 수 있는데, 여기에서 바울은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아그노시안 ... 데우)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견지에서 볼 때 바울은 그가 지식으로 이해한 것[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설명하라는 강요를 받은 것이다. 그는 지식을 이미 알려져 있는 것으로서 오직 수동적으로만 표현할 수 밖에 없음을 알았다(갈 4:9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아신 바 되었거늘"이라는 어구를 첨가시킴으로서 인간이 능동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가질 수 있다고 하는 사상을 시정했다).
이미 알려져 있는 이러한 것은 인간이 가지는 하나님에 대한 이전의 어떤 능동적인 이해와 상응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 상응하는 것이다(고전 8:3).
하나님에 대한 완전하고도 참된 지식은 오히려 종말론적 약속과 기대의 일부이다(고전 13:12).
바울은 육을 입고 지상에 오신 존재를 간단히 무시해 버림으로써, 하나님에 의해 알려진 것과 인간이 가지는 하나님에 대한 완전한 지식을 일치시키는 영지주의자들의 에스카톤(목적)에 대한 환상적 기대를 완전히 거부했다.
왜냐하면 바울은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우리를 이미 알고 계셨다는 것을 전적으로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노스데나이(하나님에 의해 알려진 것)는 선택을 포함하고 있다(참조: G. Bornkamm).
제 아무리 인간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생애와 사역에서 자신을 계시하심으로서 전달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인 것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을 주신 영에 의한 것이다(참조: 고후 4:6). 에스카톤 이전에는 우리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알 때만 하나님을 알 수 있다(빌 3:10; 참조: 골 2:1 이하). 그러나 그리스도는 신학적인 사색을 통해서 알려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그에 의해서 만나지게 될 때 그리고 우리가 그를 주로 고백하게 될 때 알려진다(빌 3:8).
이러한 고백은 하나님의 아시는 바 된다. 이러한 고백이 없는 곳에서 지식에 대하여 언급하는 것은 쓸데없는 것이다. "만일 누구든지 알지 못하면 그는 알지 못한 자니라"(고전 14:38).
따라서 하나님에 대한 사랑 Love은 하나님에 의해 아시는 바가 되는 것이다(고전 8:3).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새로운 복종과, 죄의 주권으로부터의 해방(참조: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빌 3:10, 참조: 롬 6:3)에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과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나타내는데 열심히 봉사하는 곳에서 구체화되는데, 한편으로 사람들은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의 약속된 부활에 이르려한다(빌 3:10).
참된 지식은 하나님께서 사도의 증거를 통해 어느 곳에서나 나타내셨던 지식이다(고후 2:14). 이것은 최종적으로 완성된 지식은 아니다. 지금 이 지식은 단편적일 뿐이지만(고전 13:12) 완성을 기대한다. 바울이 몬 1:6에서 언급했던 바와 같이, 지식은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하고 그리스도께 미치도록 역사하는" 것이다.
고린도 교회의 영지주의자들은 교만하여 이 지식에 대한 어떠한 것도 알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에게 "내가 편지한 것이 주의 명령인 줄 알라"고 풍자적으로 요구했다(고전 14:37). 이 모든 점에 비추어 볼 때, 바울의 논법이 본질적으로 구약성경적 지식 개념의 범위 안에 머물러 있음이 분명하다. 동시에 그는 이 개념을 종말론적으로 확대하여 완성시켰다.
(b) 요한의 기록.
지식이 예수님과 요한 자신의, 그리고 요 10:14 이하에서는 예수님(아들)과 하나님(아버지) 사이의 상호 내적인 친교를 나타낼 수도 있다는 바로 그 사실이 영지주의적 배경을 나타내 주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예레미야스(J. Jeremias)는 불트만(R. Bultmann)이 그의 저서(The Gospel of John, 1971, 380 이하)에서 주장한 것처럼, 이것이 헬라의 신비주의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셈족 사상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지식을 친교로 묘사할 수 있는 가능성은 알고 있는 자, 즉 지식을 전달하는 하나님의 사자와 완전한 초월자로 알려진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동등성에 의거한다.
하나님과 세상 사이의 영지주의적, 이원론적 대조는 세상이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진리의 영"(요 14:17)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언명에 의하여 나타나고 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미움을 받은 것은(요 15:18; 요 16:2) 하나님과 세상 사이의 제거할 수 없는 구별의 결과로 이해되어지지 않으면 안된다.
마찬가지로 계시의 목소리도 하나님이 아닌 마귀를 아버지로 모시고 있는 자들에 의해서 그렇게 인식되어질 수 없다(참조: 요 8:42-43).
반대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분에 대한 지식을 포함하며, 영생과도 동일시되었다(요 17:3).
구원을 가지고 오는 이 지식은 외부로부터의 부르심, 즉 이해력, 말하자면 진리 되신 분을 아는 능력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의 도래를 통하여서만 가능하다(참조: 요 5:20).
지식에 관한 요한의 언어와 요한의 견해가 영지주의의 용어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은 만약 우리가 기독교의 메시지를 받아들인 자들과 이 메시지를 반대한 사람들이 이 메시지를 표현하는 형태에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요한의 목적은 영지주의자들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었으므로 그들의 언어를 사용했던 것이다. 그는 자기 자신의 입장에서 영지주의자와 직면하여 자기 자신의 무기를 가지고 그를 공박했다. 이것이 복음을 신화로 만들거나 요한을 영지주의자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었으나(참조: 요 1:18), 하나님은 그의 보내심을 받은 자, 즉 그 아들에게서 알려지게 될 것이다(눅 10:22). 그는 육체가 되셨던 로고스(말씀)이시다(참조: 요 1:14; 요일 1:1-4).
예수님을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본 것이다(요 14:9; 요 12:45). 그를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은 아버지도 알 것인데, 그 이유는 이 사람이 그를 이미 알았고 또한 보았기 때문이다(요 14:7).
따라서 하나님과의 교제는 예수님과의 교제를 통해서만 행해질 수 있는데, 왜냐하면 이 교제가 예수님의 하나님과의 교제에 상당하기 때문이다(요 10:15). 이 두 가지 수준의 교제는 기노스코로 표현된다.
예수님과 예수님의 사람들 사이에 나누는 교제는 서로를 아는 지식에 의해서 효과적인 교제가 되지만, 이 교제가 영지주의에서와 같이 인간을 신격화시키거나 인간을 이 세상과 역사에서 완전히 제거시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요한에게 있어서 지식은 한 분이신 하나님과 역사적인 통로를 통해서 역사 속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계시로부터 그 형태를 취한다. 자기 아들을 보내심으로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요 17:23; 참조: 요일 4:19 이하)과 세상에 대한(참조: 요 3:16) 자기의 사랑을 나타내셨다. 아들은 자기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의 척도에 따라 자기의 백성들을 사랑하셨다(참조: 요 15:9; 요 17:26). 따라서 하나님과 예수님의 사랑을 받는 자의 지식은 역사의 영역 안에서 사랑으로 표현된다.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 4:8). 아들이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순종으로 아버지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입증하셨듯이(요 14:31), 그를 아는 자도 하나님의 명령, 무엇보다도 자기 형제를 사랑하라는(요일 4:7 이하; 요일 2:7-11) 명령을 지킴으로서(요일 2:3 이하), 또한 죄를 짓지 아니함으로써(요일 3:6), 자기의 지식을 입증하는 것이다. 이처럼 기노스코는 두 가지로 적용된다.
첫째로, 이 지식은 아들의 보내심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을 의미하며(요 17:8; 요일 3:6),
둘째로는 선포된 메시지에 복종하는 것으로도 묘사되는 이 지식에 기초한 사랑에 순종하는 것을 의미한다(요일 4:6). 이러한 지식은 이미 지금 여기에서 영원한 생명 Life이 되었는데(요 17:3) 왜냐하면 이것은 하나님의 역사적 계시에서 유래된 역사 속에 있는 한 생명이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에 비추어 볼 때, 요한의 개념은 영지주의의 개념과 고의적인 정반대적인 것으로 두드러진다.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에서 믿음과 지식을 똑같은 수준 위에 두는 것도 적어도 지식과 대조시켜 믿음을 낮게 평가한 영지주의에 대한 논박의 일부분이다. 요 17:3이 영생을 지식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지만 요 3:36은 믿음에 기인하는 것으로 본다. 베드로의 고백에 관한 요한의 견해에서(요 6:69) 우리는 믿음을 지식에 종속하는 제일 첫 단계로 보려는 유혹을 받을 수 있으나, 요일 4:16에서는 이 순서가 "알고 믿었노니"로 되어 있다.
오직 자기 자신의 구원에만 관심을 가지는 영지주의의 자기 만족은 형제 사랑(요 13:35)과 단합(요 17:21 이하)에서 교회가 존재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과는 반대된다. 더욱이 이 배후에 있는 궁극적인 목표는 아들이 보냄을 받았다는 사실을 세상이 믿게 되고 또한 이 계시가 온 세계에 알려지게 될 때에만 달성될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우주(창조)와 구원에 대한 영지주의의 이원론을 요한이 전혀 가지고 있지 않을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영지주의자에게 있어서 이러한 이원론은 극복될 수 없는 것인데, 그 이유는 이 이원론은 우주적인 타락 이전에 이미 정해진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영지주의의 견해에 따르면 우주는 완전히 그리고 치명적으로 하나님을 알 수 없고 구원 받을 수도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요한에게 있어서 세상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이다(참조: 요 1:1 이하; 요일 2:14).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에 대한 증오로 표현되는 알지 못하는 것은 나타난 계시를 믿지 않는 결과이며(요 8:42 이하) 이것은 결과적으로 죄를 초래한다(참조: E. Kasemann). "만약 '유대인들'이 이해할 수 없다면 그것은 그들이 참으로 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도 이 지식을 심화시키고 풍요롭게 하는데 관심이 있긴 했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이미 알고 있는 것만 들으려고 할 뿐, 새로운 것을 들어 그들이 전에 알고 있던 모든 것과 그와 아울러 이런 지식의 상태 곧 자기에 대한 그들 자신의 이해를 포기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런 식으로는 들을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이 왜 들을 수 없는가라는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이 영역에서 어떤 것을 할 수 있는 것과 어떤 것을 하고자 하는 것이 하나이며 동일하다는 점에 대한 이해 부족을 나타내어 줄 뿐이다"(R. Bultmann). 지식과 믿음에로의 부름은 이렇게 세상을 위해서도 남아 있다. 아들을 보내심으로 나타난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이제 실제적인 것으로 나타나서 실재의 새로운 차원을 연 것이다.
요한의 어휘가 영지주의와 명백히 유사성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그의 주제는 영지주의의 신화적 사변보다는 구약성경의 전승에 나오는 지식의 개념과 훨씬 더 가깝다는 것도 마찬가지로 분명하다.(참조: E. D. Schmit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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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양하다 praise, 영화롭게 하다 glorify. 영광을 받다.(참되다 하여) 인정을 받다....doxavzw(1392, 독사조) ....JC가 <아버지에 의해>영화롭게 하심을 받음과 영광 받으심은 동일한 과정인데, <실지로는>십자가에서 죽으심 통해 <십자가 고난과 대속의 경험을 가지신>본래의 하나님 되심의 영광안으로 들어가심이요, 이것을 통하여 그 영으로 변화되심임을 기억하라..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동사 독사조(Xen. 이래)는 독사(dovxa, 1391)에서 유래했으며, 항상 '영광에 참예한다'를 의미한다.
이 단어는
(a) '의견을 가지다, 믿다, 생각하다, 상상하다',
(b) '칭찬(송)하다, 찬양하다, 존중하다, 존경하다, 경의를 표하다, 영예를 주다'를 의미한다.
2. 70인역본의 용법.
독사조는 70인역본에서 약 130회 나오며, 14개의 히브리어 단어들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며, (a)의 의미는 나오지 않으며, 주로 (b)의 의미로 나온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독사조는 신약성경에서 60회 나오며, (a)의 의미는 나오지 않고 (b)의 의미로만 나온다.
독사조는 신약성경에서 (b)의 의미를 나타내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a) 독사조는 '칭찬하다, 칭송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마 6:2; 눅 4:15).
(b) 독사조는 '영예롭게 한다, 영화롭게 한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요 8:54; 계 18:7; 계 15:4; 롬 1:21; 롬 11:13; 고전 6:20 등).
(c) 독사조는 영광스러운 지위나 상태로 높여지는 것을 나타낸다. 그리스도에 대하여(요 7:39; 요 12:16; 요 13:31 이하; 요 17:1; 요 17:5; 행 3:13), 그리스도인들에 대하여(롬 8:30). (참조: J. H. Thayer; G. Kittel; Walter Bau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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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시하다, 알리다, 보여주다, 나타내다. fanerovw(5319, 파네로오)
1. 고전 헬라어 문헌
파네로오는 파네로스(fanerov", 5318:보이는, 명백한, 뚜렷한)에서 유래했으며, '보이게하다, 계시하다, 나타나다'를 의미한다.
이 단어는 감추어져 있거나 알려지지 않은 것을, 명백하게, 또는 눈에 보이게, 또는 알려지게 하거나 말이든 행위든 또는 어떤 방식으로 든지 명백히 나타나는 것을 의미한다.
2. 70인역본의 용법
파네로오는 70인역본에서 렘 33:6에 한번 나타나며, 갈라(나타나다, 보여주다)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보라 내가 이 성을 치료하며 고쳐 낫게 하고 평강과 성실함에 풍성함을 그들에게 나타낼 것이며".
3. 신약성경의 용법
파네로오는 신약성경에서 47회 나타나며, '계시하다, 알게하다, 보이다, 나타내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a) 마가복음에서 파네로오는 3회 나타난다. 막 4:22에서 속담에 담긴 비유의 숨은 뜻을 보인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드러내려 하지] 않고는 숨긴 것이 없고 나타내려 하지 않고는 감추인 것이 없느니라". 막 16:12; 막 16:14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신 것을 언급한다.
(b) 바울은 파네로오와 아포칼륍토(ajpokaluvptw, 601)를 동의어로서 사용하였다. 이것은 특별히 롬 1:17과 롬 3:21을 비교해 보면 알 수 있다.
롬 1:19과 고전 4:5에서 파네로오는 '보이게 하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전자에서는 창조에서의 "하나님의 영원하신 권능과 신성"의 계시에 관하여 언급되어 있다: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후
자에서는 모든 감추어진 것들이 드러날 때 임할 심판에 대해 언급되어 있다: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여기에는 그가 때가 이르기 전에 심판을 공표하지 않고 그것을 하나님의 주관에 맡긴다는, 아울러 그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때이른 칭찬을 받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실제적인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다른 언급들에서 요점은 복음 안에서의 계시이다. 재귀적 용법은 결코 사용되지 않았다. 특별한 일들은 항상 계시된다.
롬 3:21은 롬 1:17을 되풀이 하는데 현재형 아포칼륍테타이("나타나서")를 완료형 페파네로타이("나타났으니")로 바꾸었다. 그러나 이것은 과거의 특별한 때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에 의한 칭의에 대한 단 한번의 계시를 의미한다(참조: 롬 3:24 - 롬 3:26; 롬 1:3이하).
바울은 파네로오를 고린도후서에서 9회나 사용하고 있는데, 특히 논쟁 문맥에서 사용하고 있다.
그는 이 단어를 그의 설교를 통하여 임하거나 일어나는 계시에 대해(고후 2:14; 고후 11:6), 바로 그의 생활에 대해 사용했다.
그 자신의 사도적 생활 방식은 그 자체가 그리스도 자신의 생활 방식과 비교 된다는 데에서 그리스도의 역설적 계시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 그의 대적들을 포함하여 - 하나님께서 성공 중에 자신을 나타내실 것을 기대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상 계시는 다르게 임한다.
바울의 사도적 방식은 고난과 고통의 방식이어서,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고후 4:10 이하).
다른 한편으로, 교회 안에 믿는 남녀가 있다는 사실로 그들이 그리스도로부터 온 편지이며, 바울의 대적들이 자랑하는 신임장과는 다르게 바울의 사도직을 입증하는 분명한 증거임을 알 수 있다.
고후 5:10 이하에서 파네로오는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만인이 출두한다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여기에서 이 동사는 3회 나타나는데, 우리가 출두할 뿐만 아니라(10절), 우리가 누구인지 하나님께 알리어진다(ll절a).
바울은 여기에 그것이 독자들의 양심에도 알리어지기를 바라는 소망을 덧붙였다(11절b). 고후 7:12에서 바울은 자신이 기록한 의도는, "오직 우리를 위한 너희의 간절함 이 하나님 앞에서 너희에게 나타나게 하려 함이로다"하고 선언하였다.
비록 바울의 웅변술이 미숙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사도직과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이 명백해지었다는 소망을 표현한다(고후 11:6).
(c) 그외의 바울 서신에서도 파네로오와 아포칼륍토는 동의어로 사용되었다. 골 1:25 이하와 엡 3:5을 비교하면 할 수 있다. 계시는 선포에서 발생한다(골 1:25이하; 골 4:4; 롬 16:25 - 롬 16:27). 엡 5:13 이하에서 그리스도인의 행위는 빛의 관점에서 취급되었다: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이 빛으로 나타나나니 나타나지는 것마다 빛이니라". 계시의 사상은 이 세대들에게는 감추어졌으나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내어진 신비라는 관점에서 훨씬 더 발전되었다(골 1:26; 골 3:4; 골 4:4; 참조: 엡 3:5; 엡 6:19).
바울은 딤전 3:16에서 원시 기독교 찬송가를 인용하여 신비의 주제를 채택하고 있다: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리우셨음이니라".
여기서 파네로오는 성육신(incarnation)을 말한다(참조: 요 1:31; 히 9:26; 벧전 1:20; 요일 1:2; 요일 3:5; 요일 3:8에서의 예수님 성육신적 사역을 뜻하는 용례). 군드리(Gundry)는 이 구절이 다음과 같은 사실에 비춰볼 때, 승천에 이르기까지의 전체적인 지상 사역을 언급한다고 생각한다.
① 인간의 생애를 뜻하는 사르크스(savrx, 4561)를 사용했다는 점(참조: 갈 2:20; 빌 1:22, 빌 1:24; 히 5:7).
② '태어난다'와 같은 보다 특정한 동사 대신에 '나타난다'라는 일반적인 동사를 사용했다는 점,
③ '영광 중에 받아들여졌다'라는 종합적인 언급을 했다는 점. 이렇게 해서 에파네로데는 행동이 전체로서 생각되었음을 나타내는 단순 과거 수동태이다.
또한 딤후 1:1O에서 화네로오는 성육신의 의미를 뜻하는 말로도 사용되는데, 여기에서 하나님의 권능 안에서 복음의 정의를 내리고 있다: "이제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저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목회서신들에서 이 동사가 나오는 다른 구절들에서도 성육신(incarnation)을 염두에 두고 있으나, 이제 그것은 선포에 의해 전달된다: "자기 때에 자기의 말씀을 전도로 나타내셨으니 이 전도는 우리 구주 하나님의 명대로 내게 맡기신 것이라"(딛 1:3).
(d) 파네로오는 히브리서 9장에서 2회 나오나 의미는 약간 다르다. 히 9:26에서 성육신에 관하여 언급되어 있는데, 성육신의 목적은 구약성경의 희생제사와 속죄(의식)일을 능가하는 속죄 희생제를 드리려 함이었다. 그리스도의 현현은 유일회적이며 다시 되풀이 될 수 없다: "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의 피로써 성소에 들어가는 것 같이 자주 자기를 드리려고 아니하실찌니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물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히 9:25 이하). 역으로, 저자는 앞서 논하기를 법궤의 구조(그리고 암암리에 성전)와 대제사장 외에는 아무도 성소 내부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이 옛 언약의 종교와 의식의 불완전성의 증거라 한다. "성령이 이로써 보이신 것은 첫 장막이 서 있을 동안에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것이라"(히 9:8).
(e) 파네로오는 또한 베드로전서에서도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말로 2회 나오는데, 여기에는 그리스도의 역사적인 삶에서와 그의 재림에서의 두 가지 현현에 관하여 언급되었다. 벧전 1:20에서 "그는 창세전부터 미리 알리신바 된 자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바 되었으니]"라고 하였고, 벧전 5:4에서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다"고 하였다.(참조: C.Brown).
(f) 요한의 기록에서 파네로오는 실제로 아포칼륍토(ajpokaluvptw, 601)의 동의어로 자주 사용되었는데, 아포칼륍토는 사 53:1을 인용하고 있는 요 12:38에서만 사용되었다.
요 1:31에서 세례(침례) 요한이 와서 물로 세례(침례)를 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스라엘에 나타내려 함이다. 요 2:11에서 가나의 표적이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었다.
요 7:4에서 "세상", 곧 모든 사람의 눈 앞에 나타나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형제들이 그에게 예루살렘으로 가기를 격려하며 말하기를,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하였다. 그러나 그 말은 믿음의 부족을 드러낸 것이며(요 7:5), 예수님은 아직 그의 때가 오지 않았을 때에 그들의 권면을 거절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그들의 때, 그리고 세상을 따르는 그들의 태도는 항상 여기에 있다(요 7:6).
예수님은 하나님의 실체, 하나님의 이름(요 17:6), 하나님의 하시는 일(요 3:21; 요 9:3)을 나타내신다. 요한에 의하면, 예수님의 모든 행위는 계시라고 부를 수 있다(요 2:11). 간접적으로 하나님의 실체는 증거에서 계시된다. 예를들면, 세례(침례) 요한의 증거 등이다: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게 나타내려 함이라 하니라"(요 1:31). 요 21:1("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바다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이 이러하니라")과 요 21:14(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에서 화네로오는 그의 제자들에게 보여주신 예수님의 자기 계시, 곧 부활하신 주님의 나타남을 의미한다.
요한일서에서도 화네로오는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예수님의 사역는 계시로 묘사되어 있다: "그가 우리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내신바 된 것을 너희가 아나니"(요일 3:5).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요일 3:8). 그 계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계시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요일 4:9; 요일 3:16). 그 목적이 살리려 한 것이라면 전계시(全啓示)는 역시 생명(조에, 요일 1:2)으로 요약될 수 있다: 요한은 예수님 안에 "이 생명이 [나타내신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바 된] 자니라"고 하였다. 그것은 또한 생명의 말씀의 내용이다(요일 1:1).
요일 2:19에서 공동체를 떠나는 불신자들의 행동은 그들이 참으로 공동체에 속하지 않았음을 나타낸다: "저희가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저희가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
파네로오는 그리스도의 오심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요일 2:28: "자녀들아 이제 그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 바] 되면 그의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요일 3:2: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요한계시록에도 2회 나타난다. 계 3:18에서 라오디게아 교회는 부요하신 그리스도로부터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라"는 권면을 받는다. 여기에는 자기 만족적인 번영에 빠져 결국 교회의 참된 상태에 눈이 멀어버린 그 교회의 미지근한 태도가 언급되어 있다. 계 15:4에서 이긴 자들은 "오직 주만이 거룩하시니이다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으매] 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하리이다"는 사실을 찬송하고 있다.(참조: R.Bultmann/D.Luhrmann; C.Brow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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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정론]을 다룰 때 <특히 구원받을 자의 택정 문제에 관한한, 참 근원이신, 전지전능하신 주 앞에서 저마다 고백적이어야 하고 필요없는 논쟁에 말려들어 치우치치 않도록>극히 조심할 필요가 있음...사랑하시기에 택하여 불러내심과 <그 사랑에 반응하여, 사랑에 겨워> 사랑 드리며 순종함의 상호 선택 문제임...물론 사람의 헌신과 사랑은 유한하고 불완전하지만..!!
***세상을[세상 사람을 그 누구도 차별없이] 사랑하시는 하나님[본래 온 인류는 하나님의 동역자로서 모든 피조세계를 [섬기며 다스리도록] <생육-번성-충만-정복-다스림>의 축복을 받은 존재임,
***비록 아담이후 죄로 인해 타락한, 죄악이 관영한 세상이 되었으나, 때가 차매 아들 JC의 성육신하심으로써 대속의 십자가죽음-부활 거쳐 자신을 참되게 내어주심 통해 내주하시는 그 영으로서 오셔서 내주하시는 바, 그리스도를 참되게 믿고 헌신하는 이마다 JC를 통해 그 사랑을 나타내심으로써 영생구원안으로 회복된 자로서, 맡겨주신 바 주님의 사명을 수행함 통해, 세상을 구원하고 완전히 회복케 하려 하신다((목표는 이 땅에 임하는 바 하나님 나라의 회복이다))......아버지께서 JC께 주시는 자마다 JC께 올 것이다!!
***다만, 내가 과연 그리스도를 참되게 만났는가, 또한 그 말씀하시는 바 확증안에서 그리스도를 추구-헌신함으로써 그분의 어떠하심에 전적으로 자신을 맡겨드리며 그분의 인도하심을 의뢰하면서 살아가고 있는가, 주께 합당한 열매는 무엇이라 말할 수 있을까...이것을 돌아보면 [택정함<성별...인침...아포리조>과 보내심<직분...케이리조마이>]에 대한 개인적인 해답을 할 수 있을 것...
[요6:35-70]
*35.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36.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 하였느니라 *37.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38.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39.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40.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
*44.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45.선지자의 글에 그들이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 *46.이는 아버지를 본 자가 있다는 것이 아니니라 오직 하나님에게서 온 자만 아버지를 보았느니라 *47.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48.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49.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50.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51.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53.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54.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55.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56.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57.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58.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
*61.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군거리는 줄 아시고 이르시되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62.그러면 너희는 인자가 이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본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63.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64.그러나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 하시니 이는 예수께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누구며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처음부터 아심이러라 *65.또 이르시되 그러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66.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67.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68.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69.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 *70.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의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 *71.이 말씀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가리키심이라 그는 열둘 중의 하나로 예수를 팔 자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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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하다 choose. 골라내다 pick out, ejklevgw(1586, 에클레고)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a) 동사 에클레고(Hdt. 이래)는 에크(ejk, ejx, 1537: ~로부터)와 레고(levgw, 3004: 모으다, 셈하다, 열거하다, 말하다)에서 유래했으며, '골라내다, 집어내다, 선택하다'를 의미한다.
선택에 있어서 첫째로 어떤 특정한 것을 선택하기 위한 여러 대상들이 있고 둘째로는 선택을 하는 사람은 그를 강제하는 어떠한 상황들에 의해서라도 구속 받지 않고 자유롭게 자신의 결정을 내린다. 셋째로 선택을 하는 사람을 적어도 선택의 순간에 있어서는 선택 받는 사람 또는 사물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
더욱이 선택의 행위(따라서 이 단어군)는 선택자에 의한 판단, 곧 그가 자신의 목적 성취를 위해 가장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대상에 대한 판단을 포함한다.
이 결정을 내리는데 있어서 주요한 것이 객관적 표준들인가 또는 주관적 감정들과 주관적 고려 사항들인가 하는 것은 극히 중요한 것이 아니다.
(b) 이 단어와 에클로게(ejklevkto", 1588)는 군사, 정치에서 특정한 임무를 수행하는 또는 특정한 직분을 가지는 사람을 선택하는데 사용되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선택에 있어서 고려될 때 사려 분별과 경험, 사회에 있어서의 적당한 위치, 또는 충분한 부, 용기와 적합성 등이 각 경우의 필요 조건들이었다.
그러나 그로 하여금 자신의 기능을 사용하는 것을 가능케 하고 또한 동시에 그에게 의무를 주는 것은 선택 그 자체이다.
개인들의 선택이거나 또는 한 집단의 선택이거나 관계 없이 선택은 하나의 구별로 간주된다(드물지만 이 단어는 특별한 가혹성을 함축한 부정적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선택은 대개 어느 정도는 귀족적 엘리트에 대한 개념과 일치한다. 한편 선택은 선택 받는 자가 소속된 공동체의 다른 모든 구성원들의 복리와 관련된 모종의 의무나 과제를 수반한다. 적합한 기관들을 통해 폴리스(polis)는, 특별한 재능들을 소유한 개인에게, 모든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그 재능들을 발휘할 기회를 부여한다.
(c) 이 단어(군)는 사물들에 대해서도 사용되었다.
① 특정한 좌석들의 선택에 대하여(Plat. Tim 24c),
② 지적으로나 미적으로 선한 것을 선택하는 것에 대해(Plat., Sym, 198d),
③ 일반적인 문헌들이나 특정한 작품에서 특별한 구절을 선택하는 것에 대해(Athenaeus, 14, 663 등) 사용되었다.(참조: L. Conenen; G. Schrenk).
2. 70인역본의 용법.
동사 에클레고는 70인역본에서 약 140회 나오며, 대부분 바하르(택하다, 뽑다, 더 좋아하다)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땅이나 장소(성전)를 선택하는 것(창 13:11; 신 12:5 이하), 적절한 재료를 고르는 것(사 40:20), 신중한, 동시에 좋아함과 욕구에 의한 선택(창 6:2), 왕(삼상 8:18; 삼상 10:24; 삼상 16:8 이하; 삼하 6:21), 제사장들(신 18:5; 삼상 2:28), 종(사 43:10)과, 백성의 대표자로 야곱과 아브라함의 선택(사 41:8), 제시한 재앙을 택하는 것(삼하 24:12), 여호와와 다른 신들 중에서(수 24:15) 여호와를 '결정하거나 택하는 것'(수 24:22), 하나님의 성전에서의 생활과 행악자들 세계에서의 생활 사이의 근본적이며 종교적 '결정'에 대해 사용되었다. 그리고 삼하 19:39에서는 '좋아하다', 욥 29:25에서는 '결심하다'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에클레고는 바라르(구별하다, 뽑다, 선택하다, 정결케 하다, 닦아내다)의 역어로 사용되어 사람을 선택하는 것(대상 16:41), 패역한 자들을 '가려내는 것'(겔 20:38), 사람을 '정결케 하는 것'(단 11:35; 단 12:10)을 나타낸다.
에클레고는 바라(선택하다)의 역어로 사용되어 왕을 '택하는 것'(삼상 17:8)을, 라카흐(취하다, 받아들이다)의 역어로 사용되어 훈계를 '받아들이는 것'(잠 24:32), 카발(받아들이다, 택하다)의 역어로 제시된 재앙을 '택하는 것'(대상 21:11), 카바츠(모으다)의 역어로 장로들을 '모으는 것'(욜 2:16), 투르(탐구하다, 찾다)의 역어로 장막칠 곳을 '찾는 것'(신 1:33)을 나타낸다.
그리고 에클레고는 잠 17:3에서 히브리어 해당어 없이 '골라냄, 마음의 연단'을 나타낸다(참조: L. Coenen).
3. 신약성경의 용법.
동사 에클레고는 신약성경에서 22회 나오며, 눅 9:35를 제외하고 항상 중간태로 사용되었다.
(a) 공관복음
① 눅 10:42과 눅 14:7에서 에클레고는 둘이나 혹은 더 많은 가능성 중에서 선택한다는 일반적인 의미를 지닌다.
② 눅 6:13에서 에클레고는 보다 더 많은 수효 중에서 선택하는 것을 의미한다: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 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
③ 막 13:20에서 에클레고는 마지막 때의 기독교 공동체에 대해 사용되었다: "만일 주께서 그날들을 감하지 아니하셨더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어늘 자기의 택하신 백성을 위하여 그날들을 감하셨느니라".
여기서 "자기의 택하신 백성"은 문자적으로 자기가 '택하신 택한 자들(혹은 선민)'이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불신자들의 무리 가운데서 그분의 사랑하는 자로 따로 구별하신 자들, 또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메시야 왕국에서 시민이 되게 하신 자들이다.
가증한 것이 종말에는 너무나 끔찍한 형태를 취하기 때문에 마지막 신앙인까지도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의 유혹이나 픅력에 굴복하고 말 것이다. 만일 하나님 자신이 미리 개입하시고 인자의 출현을 통해서 그 행태를 끝장 내지 않으시면 그렇다는 것이다.
(b) 요한복음.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의 선택에 대해 말씀하신다(요 6:70; 요 13:18; 요 15:16; 요 15:19). 요한복음에서 용법은 공관복음의 용법과 비슷하다.
유다가 어찌하여 선택받게 되었는가 하는 것이 특별한 문제이다(요 6:70). 그가 제자 중에 포함된 것은 성경을 이루기 위함이다(요 13:18-19).
유다가 떠났을 때에는 선택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요 15:16 이하). 선택하시는 분은 예수님이시다(요 6:70 등). 그러나 선택의 배후에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계신다(요 6:65).
선택은 믿음과 순종의 영역 안에서 이루어진다. 만약 하나님 아버지께서 유다를 주시지 않았다고 한다면, 이것은 유다가 예수님의 말씀을 행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요 13:17).
선택의 목표는 사랑 안에서 열매를 맺는 것이다(요 15:16-17). 어느 곳에서도 유다가 디아볼로스로 예정되었다고는 말하지 않는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그렇지만 배반 자체는 하나님이 예견하시고 결정하신 것이다.
선택의 참된 목적은 유다가 떠난 이후에야 비로소 나타난다. 왜냐하면 선택이란 세상에서부터의 선택이며, 세상은 제자들을 미워하고 그들과 싸울 것이기 때문이다(요 15:18 이하).
선택은 그리스도로부터 기원될 때만 열매 맺을 수 있다. 선택은 열매 맺는 섬김의 근거이며 원천이다.
이 본문들에서 특별히 사도들에게 하나의 전체 공동체에 대한 폭넓은 언급을 적용시키고 있다. 가장 극심한 갈등이라도 주님의 결정 안에서 그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을 유다로부터 배울 수 있다.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상태도 심판과 은혜 안에서 예수님에 의하여 완전히 해결된다.
(c) 사도행전.
사도행전에서 에클레게스다이는 많은 의미로 사용되지만 결코 그리스도의 공동체의 선택에 대해서는 사용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1) 이 단어는 직무자의 선택에 대해 사용되었는데,
① 예수님에 의한 사도들의 선택(행 1:24),
② 공동체에 의한 집사들의 선택(행 6:5),
③ 사도들, 장로들 그리고 전체 공동체에 의한 안디옥으로 갈 대표들의 선택(행 15:22; 행 15:25)을 나타낸다.
2) 이 단어는 또한 바울이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말한 계시의 역사에 대한 개요(행 13:17)에서 조상들의 선택(참조: 마카베오이서 1:25과 파테르)에 대해 사용되기도 하는데 안디옥에서 그는 진지하게 이스라엘인의 선택을 받아들인다.
3) 마지막으로 베드로가 이 단어를 사도들의 회의를 향한 베드로의 연설에서 이방 선교의 길을 열기 위해 자기를 선택한 것(행 15:7)에 대해 사용했다.
(d) 바울 서신과 야고보서의 에클레게스다이: 공동체의 선택.
① 고전 1:27~29에서 사용된 엑셀렉사토(과거 중간 3인 단수)의 삼중 용법은 인간적으로 연약함을 나타내는 공동체가 하나님의 공평한 뜻에 부합한다는 사실을 표현한다. 하나님께서는 이에 의하여 지혜와 강함과 명예를 부끄럽게 하신다.
삼중의 히나(i{na, 2443)와 호포스 메(o{pw", 3704 mhv, 3361)는 그 공동체를 형성하시는 하나님의 선택하시는 뜻의 목적을 강조한다. 따라서 그것들은 선택의 목적은 하나님 한 분만이 최상이셔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런 의미에서 그 용어는 선택에 대한 이기적 관심들을 근본적으로 깨뜨리는 것을 포함한다.
② 엡 1:4에서 그 강조는 영원한 선택이라는 것에 있으며, 그 목적은 그리스도 안에서 양자됨이고, 그 결과는 이기적이지 않은 사람으로서 성화된 삶을 사는 것이다.
③ 약 2:5은 고전 1:26 이하와 병행구절이다. 여기서 부자와 가난한 자 간의 구별에 대한 반론이 있다.
여기에서도 역시 강조점은 하나님께서 궁핍한 자들을 받으신다는 공동체의 경험에 놓여 있다. 그들은 오직 택하심에 의해서 부요해진다. 그 두 개의 대격은 선택에 달려 있는 선물을 나타낸다. 엡 1:5 이하에서처럼 에클레게스다이와 함께 주어지는 거저 주시는 은혜의 선물이 강조된다.
그러므로 높임을 받은 가난한 자는 하나님 또는 사람 앞에서 아무런 공로도 주장할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의 승리는 바울 서신과 야고보서 모두에서 에클레게스다이에 의해 분명하게 표현된다.(참조: G. Schrenk)
===[[예정론]]에 대한 <불신자와의>무의미한, 쓸모없는 사변적 논쟁에 가담하지 말라..===<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창세전에 예정하신 바 선택<신자의 택정함>과 유기<불신자를 그대로 두심>를 돌아 볼 때, 예정과 선택은 다만 참된 기독자의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는>고백이기때문이다
**[[주님의 마음을 품으라....성경을 두루 살펴보건데, 분명히 예정론은 옳다...하지만 그대가 제자삼은, 또는 제자 삼으려 하는, 어떤이의 구원에 대해 그의 최종 구원의 가부를 알도록 허락되어 있지 않았고, 그 결정권을 가진 자, 심판자가 아니라는 것을 유념하라!!...다만 격려하고 경계하며 권고하라, 중보하라...판별은 주께 맡겨드리라...그대에게 맡겨진 범위안에서 일편단심, 일심으로 주 안에서 순종하라]]
...잊지말라..JC의 제자들 중에서 가룟유다는 주님이 그에 대해 모든 것을 아시면서도 12제자 가운데 두셨고 계속 일상을 같이 하시면서 최종적인 배반의 시간까지 말씀으로 함께 양육하시며 경계-권고하셨음을!!
...이처럼, 유한한 존재인 믿는 이들은 [처음부터 자라나온 바 그 싹으로는, 곡식인지, 가라지인지 구분이 어렵고, 이제 비록 많이 자라났기에 알곡 맺을 곡식인지, 가라지인지 구분이 되더라도 [사람이란 언제나 유한하고, 또 언제 주님의 구원하시는 은혜의 때가 주어질 지 랑지 못하기에] 심판이 이르기전에 섣불리 뽑아 축출하려 하지 말고 주께서 말씀하신 바로 그대로 구주의 심판에 맡겨두는 것이 옳다.
...다만 오직 기억할 것은 [온 세상-모든 족속]이 복음 전파 대상이라는 것을 유념하자는 것이요, 다만 그 중에서 알곡과 가라지가 있음을 짐작할 수는 있을 것이로되 [가룟유다를 위해, 인내로 끝까지 참아 주시면서 경고하고 중보하셨던 주님처럼] 최종 판별은 주께 맡겨드리고, [주께서 깨닫게 하시고 열어 주사 맡겨주신 바] 자기가 맡은 그일을 끝까지 일심으로 해 냄이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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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3:13-18(17,18)]] ==위로부터 난 지혜// *13.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냐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 *14. 그러나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하지 말라 *15.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땅 위의 것이요 정욕의 것이요 귀신의 것이니 *16.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라 *17.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 *18.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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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근거 –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 (엡1:1-6)====
1.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4절)
(1) 성경은 예정과 선택을 말한다.
- 예정론에 대해서 거론하려 하면 사람들은 칼빈을 먼저 떠올린다. 마치 칼빈이 예정론을 만든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예정론은 어거스틴과 요한 칼빈의 창작물이 결코 아니다.
예정론은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성경이 예정과 선택을 말하지 않았으면 우리는 예정론에 대하여 한마디도 하지 않을 것이다.(엡1장, 롬8장)
(2) 그 핵심을 놓쳐서는 안된다!! 예정론의 핵심은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우리 구원의 안전함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예정을 불신자들과 신학 논쟁할 때 언급한 것이 결코 아니었다. 에베소 성도와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구원의 확신을 말할 때이다.
--예정은 영원 전 하나님의 작정에 나타난 신비이다.
자신이 예정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 서 구원 얻은 성도들뿐이다.
끊없는 사변과 허탄한 이야기에 빠지지 말라. 깨닫게 열어주신바 신비는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이다))
(3) 예정론은 성도의 선택을 감사함이지, 불신자의 유기 여부를 단정하고 정죄함이 아니다.
-- 지금 불신자 중에서 누가 선택되고 누가 유기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예정에 대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성도의 구원 부분 뿐이다.
불신자의 유기는 그가 죽기 전까지 아무도 모른다. 지금 교회를 핍박하는 불신자 중에서 사도 바울 같은 인물이 있을지 그 여부를 아무도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가 불신자의 유기 여부를 가지고 논쟁하는 것은 우리도 알 수 없는 부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4) 예정론에 대한 세 가지 오해, 오도된 몬쟁
--첫째, 불신자 유기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오해이다.
예정론은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에 모순이 된다는 것이다. 예정은 선택과 유기에 대한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이다.
하나님께서 어떤 자는 선택하여 구원하시고 어떤 자는 유기해서 지옥에 보내신다면 이는 공의와 사랑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자기 죄로 멸망 당하는 자들 중에서도 일부를 선택하여 마침내 구원하시고, 나머지는 그대로 두셨음을 망각한다.
하나님이 유기시켜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죄로 멸망에 이르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 죄로 지옥가는 모든 멸망자 중에서 어떤 자를 구원해 주심을 찬양받으셔야지, 그대로 두심을 비난 받아야 하지 않는다.
유기의 한자적 의미는 “버리심”이지만, 유기의 성경적 의미는 “그대로 두심”이다.
-- 둘째, 숙명론(Fatalism)으로 혼동하는 오해이다.
숙명론은 인간의 행동과 책임을 배제한다. 그러나 예정론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인격적 반응도 사용하신다.
하나님의 섭리는 인간이 자발적으로 행동하도록 도우시고 인도하신다. 인간의 행동을 무시하는 하나님의 주권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지금 피조세계와 인간의 삶에 간섭하시고 역사하신다.
일반종교의 숙명론과 기독교 예정론의 차이는 인간의 행동을 도우시는 하나님의 섭리 유무에 있다.
-- 셋째, 꼭두각시 인형의 오해이다.
이는 숙명론의 다른 표현이다. 예정론은 구원에 있어서 성도를 꼭두각시 인형으로 만들어 인간의 행동과 노력이 필요 없게 한다는 것이다.
갓난아기가 어머니 품에서 젖을 먹고 있다. 젖은 누가 먹는가? 엄마가 먹는 것이 아니다. 아기가 먹는 것이다.
누가 아기를 자라게 했는가? 아기가 먹어서 자랐는가? 엄마가 먹여서 자랐는가?
둘 다 맞지만 아기는 자기 힘으로 젖을 먹어 성장했다고 자랑할 수 없다. 아기의 젖먹는 행위는 엄마가 아기에게 해준 일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정상적인 아이라면 엄마가 나를 자라게 하셨다고 고백하고 자기는 아무 것도 한 일이 없다고 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이다.
2.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4절)
(1)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은 죄로부터 거룩함(=성화)이다.
-- 하나님의 선택하심으로 구원얻은 성도는 성화가 나타난다.
성화는 상급이 아니다. 구원의 목적이요 당연한 열매이다. 구원 얻은 성도는 죄에 대한 태도의 변화가 나타난다.
이전에 그는 죄를 좋아하고 죄의 본성이 이끄는 대로 나아갔다. 그러나 구원이후 그는 죄가 싫어지고 거룩함을 사모하게 된다.
거룩의 영이신 성령께서 그 속에 거하시기 때문이다.
3. 그의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5절)
(1) 구원은 우리에게 달려있지 않고,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이다.
-- 구원은 우리의 행위와 공덕에 달려있지 않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다.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다.
나의 행함이 조금이라도 연관된다면 하나님과 다른 사람 앞에 자랑할 것이 있지만 구원은 그런 것이 아니다.
구원에 관하여 인간이 자랑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거저주시는 선물이다.
오직 믿음의 은혜으로 얻는 구원은 인간의 모든 자랑과 공로를 주장할 수 없게 한다.
4.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5절)
(1) 예정과 선택은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해서만 보여 진다.
-- 선택은 창세전에 이루어졌지만, 선택은 시간 속에서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해서만 보여진다.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난 백성만 자신이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받은 자임을 알게 된다. 이것 이외에 자신의 예정 여부를 확인할 어떠한 방법도 없다.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고 거듭난 이후에만 알 수 있다.
(2) 예정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모든 성도들이 확신하는 필연적/경험적 고백이다.
-- 선택은 논리적 결론이 아니라 구원 얻은 성도만 확신할 수 있는 공통의 고백이다.
하나님과 인간이 누구인줄 알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성령의 역사로 구원얻은 자는 절대로 자기 힘으로 구원 얻었다고 말하지 않고 하나님의 예정하심을 입었다고 고백한 다. 이는 논리적 결론이 아닌 체험적 고백이다.
5.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6절)
(1) 예정은 구원의 모든 동인을 하나님께 돌리는 성도의 마땅한 고백이다.
-- 예정은 숙명론이 아니다.
예정은 우리의 적극적인 행동을 말하되 그 배후에서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말한다.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를 인격으로 여기시며 도우신다.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간섭됨도 있으나 그것은 긴박한 경우 소수의 특수한 경우이다.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가 자유의지를 가지고 행동하도록 도우시고 인도하신다. 따라서 구원은 내가 믿었지만 그보다 먼저 하나님의 섭리와 도우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정은 구원의 모든 동인을 하나님께 돌리는 마땅한 고백이다.
(2) 예정은 자신의 전적 부패를 체험한 성도의 올바른 고백이다.
-- 죄를 알고 자신의 전적 부패를 아는 성도는 하나님의 예정을 고백하고 찬양할 수밖에 없다.
구원은 절대로 자기에게서 나올 수 없다. 하나님의 은혜로 주시는 예정이 아니고는 불가능하다.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고 자신은 조금도 드러낼 수가 없다.
하나님의 선택이 아니라면 구원은 불가능하다. 인간의 전적 부패, 전적 무능력 때문이다.
<적용>예정과 선택을 통해서
(1) 비로소 우리는 구원의 확신을 얻고 평안함을 갖게 한다.
-- 나의 공덕이 아닌 하나님의 영원하신 선택에 있기 때문에, 우리의 구원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 예정 속에서만 성도는 참 안식과 평안함을 갖는다.
(2) 우리는 죄에 빠지지 않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돌리게 된다.
-- 죄의 본질은 인간의 교만과 자랑이다.
구원에 관한 티끌만한 공덕이 들어가도 인간은 죄의 본성대로 그것을 자랑하고 내세우게 되어있다.
예정과 선택을 참되게 깨닫고 이해아여 알 때만 우리는 죄에 빠지지 않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
(3) 우리로 우리 주님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여 살아가게 한다.
-- 예정은 우리의 전인격적 결단과 행동을 촉구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자발적인 행동을 통해 변화되어 가도록 인도하신다. 비인격 짐승인 소는 고삐잡고 앞에서 끌고 가지만, 인격인 아이는 아이 스스로 행동하도록 부모가 도와주며 가르치고 간섭하듯 말이다. 결국 내가 행동하는 것이나 나는 절대로 자랑할 것이 없다. 그렇게 되도록 도와주신 분은 하나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 이 둘 사이의 긴장을 절대로 잊지 말라. 어떤 것도 약화시켜서는 안된다.....https://m.blog.naver.com/lawpa/701472767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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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하드-삼위일체의 비밀]]
[스가랴 14장 9절 “여호와께서 천하의 왕이 되시리니 그 날에는 여호와께서 홀로 한 분(אחד)이실 것이요 그의 이름이 홀로 하나(אחד)이실 것이라”]
[요한복음 17장 21-23절 “21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 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22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23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도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완전한 연합 =oneness
‘유일한’, ‘하나’ 등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에하드’ (אחד)는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숫자 1과는 다른 뜻을 담고 있습니다. ‘에하드’는 전혀 다른 것들이 완전하게 연합하여 하나가 된 것을 의미합니다. 즉 에하드는 완전한 연합 혹은 완전한 하나됨을 뜻합니다. 빛과 어둠, 낮과 밤이 연합하고 하나가 되어 하루(에하드)가 됩니다.(창세기 1장 5절) 남자와 여자가 연합하여 한(에하드) 몸이 됩니다.(창세기 2장 24절) 하나님은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셨습니다.(출애굽기 13장 21절)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전혀 다르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을 인도하는 도구라는 점에서 동일(에하드)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그의 죽음과 다시 사심은 전혀 다르지만 온전히 하나입니다. 부활이 없다면 십자가도 헛된 것이고 십자가가 없다면 부활도 없습니다.
>>삼위일체
에하드의 뜻에 비추어 스가랴 14장 9절을 다시 번역하면 ‘그 날에는 여호와께서 완전한 연합이실 것이요 그의 이름은 완전한 하나됨이실 것이다’가 됩니다. 종말의 때에 알려질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은 ‘에하드’(완전한 하나됨 혹은 완전한 연합)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그 아들과 성령이 모두 다른 인격을 가지셨지만 완전히 연합된 한 분(에하드)이십니다. 이 비밀을 이해할 수 없어서 유대인들은 메시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하나님이 ‘에하드’이심을 숫자 1로 이해했기 때문에,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선언을 신성모독으로 간주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의 인격과 성품과 존재양식을 드러내고 하나님이 우리의 창조자요 구원자요 통치자이심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나와 아버지는 하나(에하드)이니라’(요한복음10장30절)고 선언합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신 마지막 기도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완전히 연합한 하나(에하드)임을 선언하고, 이 ‘에하드’가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이루어지기를 소원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에하드’라는 주님의 말씀에는 생명을 바쳐 아버지를 사랑한 아들 예수님의 고백이 담겨져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생명을 바침으로 아버지와의 완전한 연합을 성취하신 그 아들의 사랑입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
주님은 아버지와 아들의 이 완전한 연합, 완전한 사랑이 주님과 우리 사이에, 그리고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소원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존재 이유는 주님과의 완전한 연합을 성취하는 것,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이 온전한 하나됨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이 완전한 연합(에하드)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를 향한 당신의 사랑을 세상에 증명하기 원하십니다.
>>생명을 버리는 사랑
완전한 연합, 완전한 하나됨은 오직 생명을 버리는 사랑을 실천할 때 성취됩니다. 생명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생명을 다해 형제를 사랑할 때, 주님과의 완전한 연합이 이루어지고 그리스도인들의 완전한 하나됨이 성취됩니다.
하나님이 한 분(에하드)이라는 것은 단순한 교리가 아닙니다. 에하드는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에 가장 중요한 존재양식입니다. 에하드는 그리스도인들이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가장 중요한 존재양식입니다. 에하드는 독생자의 죽음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기 원하시는 아버지의 사랑, 자신의 생명을 바쳐 아버지를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하신 그 아들 예수의 무한한 사랑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에하드(완전한 연합)은 생명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 생명을 다해 형제를 사랑한다는 것이 참임을 증명해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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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에트-엘레 디베르 야후슈아 바이샤 에이나이브 하-샤마에마 바이-오마르 아비 힌네-바아 하-샤아 파에르 에ㅡ-비네크 레마안 에트-비네크 예파에르크 감-베네크
==@에트-엘레<알렙-타브,알렙-라멛-헤이>..Q의 모든 속성 담은 말씀들을 하나하나 일러주심 @디베르<달렛-베이트-레이시>..마음판에 새길바 명심할 그 말씀들 @야후슈아<요드-헤이-바브(중)-쉰-아인>...예수께서 @바이샤<바브-요드-쉰(좌)-알렙>..주목하시다(샤아..쉰-알렙) @에이나이브<아인-요드-눈-요드-바브>..두눈을 (한곳에) 집중하다 @하-샤마에마<헤이, 쉰-멤-요드-멤-헤이>..하늘을 우러러 @바이-오마르<바브-요드, 알렙-멤-레이시>..*아마르<창1:1,2 다 이룬 그 마음 바탕위에서> @아비<알렙-베이트-요드>..일하시는 아버지.. @힌네-바아<헤이-눈-헤이, 베이트-알렙-헤이>... 지금-여기를 (보옵소서) @하-샤아<헤이, 쉰-아인-헤이>...*샤아(쉰-아인-헤이) = 응시하다 @파에르<페이-알렙-레이시...~를 영화롭게하다(재귀용법)..*페에르=영화로움/머리장식, 면류관을 씌움> @에트-비네크<알렙-타브(Q의 모든속성으로 낳은), 베이트-눈-쿠프>..벤=아들..비네크= 아들 됨의 어떠함을, 열망하심 그대로 이룸.. @ 레마안<라멛-멤-아인-눈>..말씀하심의 진리 그대로 생명 확장 완성 @에트-비네크 예파에르크<요드-페이-알렙-레이시-쿠프>..행하며 말씀하시는 아버지를 드러냄 @감-베네크<김멜-멤, 베이트-눈-페이>..성령 거처로 살아냄 이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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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카-아쉬르 나타타 로 하-쉘라탄 알-콜-바사르 레마안 이텐 하-예이 올람 레코 아쉬르-나타타 로
== @카-아쉬르<카프, 알렙-쉰-레이시>, Q의도 그대로! 창1:1,2의 엘로힘-샤마임-아레츠의 완성 이룸, 그야말로 진복임.. @나타타<눈-타브-타브>..말씀 근원이신 아버지에 이르도록 참생명완성 이룸..@로<라멛-바브(상)>..말씀으로 그 생명 인격이 완전히 빼어닮음 이룸 @하-쉘라탄<헤이, 쉰-라멛-테이트-눈 **쉘라 =샬롬, 평강 **쉘라흐 : 평강/생명길 인도>..평강 말씀의 흐름, 곧 참지혜로 사는 생명 확장 @알-콜-바사르<아인-라멛, 카프-라멛, 베이트-쉰-레이시>육신에까지 말씀 분배-새겨진-그영의 거함 충만..@레마안<라멛-멤-아인-눈>..말씀하심의 진리 그대로 생명 확장 완성 @이텐<요드-타브-눈>여호와 생명 완성 확장 @하-예이<헤이-요드-요드>일하시는 여호와 생명의 궁극 도달 @올람<아인-바브(상)-라멛-멤>..분배받은바 생명-인격변화 이룸의 말씀 거처 이룸..@레콜<라멛-카프-라멛>가르침 받고 새겨진 말씀 그자체임을 명심함..@아쉬르-나타타 로 :::2절 서두 반복임.. @카-아쉬르<카프, 알렙-쉰-레이시>, Q의도 그대로! 창1:1,2의 엘로힘-샤마임-아레츠의 완성 이룸, 그야말로 진복임.. @나타타<눈-타브-타브>..말씀 근원이신 아버지에 이르도록 참생명완성 이룸..@로<라멛-바브(상)>..말씀으로 그 생명 인격이 완전히 빼어닮음 이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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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베엘레 헴 하-예이 하-올람 라-다아트 오트카 키 아타 하-엘로힘 레-바데크 베-에트-야후슈아 하-마쉬아흐 아쉬르 쉴라흐타
== @베엘레<바브, 알렙-라멛-헤이>..일러주심으로써 마음판에 새겨진 모든 말씀, 하나하나의 다바르마다 @헴<헤이-멤>..생명 호흡의 그릇/거처 건축 요소 이루며, 그 안에 담긴것은 바로 @하-예이<헤이-요드-요드>..그침 없는 생명 호흡+@하-올람<헤이-아인-바브(상)라멛-멤>..영원한 = 영생.. 그 영생의 정의는 @라-다아트<라멛, 달렛-아인-타브 *다아트= 영존Q의 참지식/그분을 앎-그분 움직임을 알아채는-친밀한 분별지식>..그 영원 생명에 이르게 하는 영생 지식 @오트카<알렙-타브-페이>..Q의 모든 속성 그대로 빼어닮음에로 인도 @키<카프-요드>..영혼의 마음판에 수용/적용/조성-저절로 자연스레 작동될바, @아타<알렙-타브-헤이>..Q의 모든 속성 나타남의 실제라, @하-엘로힘<헤이, 알렙-라멛-헤이-요드-멤>..곧, 하나님 @레바데크<=레바+데크 ..라멛-베이트, 달렛-페이>심장/중심/심정 :: 정의/공의 그 자체인데 @베-에트-야후슈아<바브, 알렙-타브, 요드-헤이-바브(중)-쉰-아인>..하나하나마다 Q의 모든속성따라 호흡-행함으로써 동심합의/합일/일치 이룬바, 그대로 이루게 하사 부으시고 분배/전달하심이니, 곧 예수시라 @하-마쉬아흐<헤이, 멤-쉰-요드-헤이트>..진리말씀 그 자체를 부으심으로 행하는바 부활생명의 영, 그 기름부음의 행함을 표현/알게하심 @아쉬르<알렙-쉰-레이시>창1:1,2에서의 엘로힘-샤마임-아레츠..온전히 이루심/나타남/얻으시도다..그들 한사람한사람마다 @쉴라흐타<쉰-라멛-헤이트-타브>..보내심 받은자(사도)이니, 그 사명 완성케 하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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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아니 페아르티카 바-아레츠 킬리티 멜라케트카 아쉬르치바타니 라아쇼트
==아니<알렙-눈-요드>Q생명 그 확장을 살며 행하는 존재, 나는 @페아르티카<페이-알렙-레이시, 타브-쿠프>..Q 그분만을 말함으로써 머리되신 주님, 그 영을 표현/발출함은 @바-아레츠<베이트, 알렙-레이시-체데>땅, 곧 혼에도 주님으로서 거하실바 유일무이한 의로움, 머리이신 그 영 Q만을 발현케 함이니, @ 킬리티<카프-라멛-요드-타브-요드>수용/적용/조성/새겨진바, 그 말씀이 작동되어 온전케 되기까지 그리하는바 @멜라케트카<멤-라멛-알렙, 카프-타브-쿠프>진리말씀Q, 바로 그분으로 조성-새겨짐을 온전히 이루리니(그것이 Q 나라의 일이다) @아쉬르 @치바타니<체데-바브(중)-요드, 타브-눈-요드>동심합의/합일/일치된 의지로!! 유순/온유한 자의 청종함 통해 그 온전한 생명 확장 나타냄으로 사는자마다 @ 라아쇼트<라멛-아인-쉰<좌>-바브(상)-타브>..분배받은바 그말씀따라서만 모든일 행하며 생명 인격변화 온전히 이룬자이니(자행자지함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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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베-아타 피아레니 아타 아비 임메카 바카보드 아쉬르 하야-리 임메카 테렘 헤요트 하-올람
==@베-아타<바브, 아인-타브-헤이>..그러므로, 분배하신바 그 말씀으로 하여금 온전한 실제 됨 이루라 @피아레니<페이, 알렙-레이시-눈-요드>..아버지, 곧 머리로서, 교통하시는 Q 그 영을 따라 말하며 행하라.. @아타<알렙-타브-헤이>..그분의 모든 속성의 실제적 실존으로 살라 @아비<알렙-베이트-요드>아버지 그분을 살라 @임메카<아인-멤-쿠프>..분배받는 말씀마다 그대로 이루리니 @바카보드<베이트, 카프-베이트-바브(상)-달렛>수용/적용-조성-새겨진 말씀 그 자체가 되고 생명-인격 변화 입은바 존재의 모든 영역이 근원적 생명-사랑의 교통으로 연합한 하나이룸, 곧 영광!!, 그분의 거처되라 @아쉬르 @하야-리<헤이-요드-헤이, 라멛-요드>여호와를 호흡함으로 그 생명으로 사는자 @임메카<아인-멤-쿠프> 분배받는 말씀마다 그대로 이루리니 @테렘<테이트-라멛-멤>(부활생명의 그영의 흐름인바) 참지혜의 말씀의 거하심이요 @헤요트<헤이, 요드-바브(상)-타브> 호흡마다 여호와, 그 생명-인격의 완전하심의 실제요 @하-올람<헤이, 아인-바브(상)-라멛-멤> 분배된 말씀, 그 생명-인격으로 호흡하는 그릇/지성소이니, 곧 생명 말씀 호흡이야말로 영원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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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에트 쉬메카 호타에티 리베네이 하-아담 아쉬르 나타타 리 미토크 하-올람 레카 하이우 베-리 나타티 오탐 베에트-데바르카 나차루
==@에트<알렙-타브> Q의 모든 속성 담긴바 @쉬메카<쉰-멤-쿠프>부으신 모든 말씀 실제 이루라 @호타에티<헤이-바브(상), 달렛-아인-타브-요드>..여호와의 생명-인격으로 변화받고 그 참지식따라 행하라 @리베네이<라멛, 벤-눈-요드>..참아들로서 행함을 배우라 @하-아담<헤이, 알렙-달렛-멤>..참 아담 됨이니.. @아쉬르 @나타타<눈-타브-타브>..생명 확장의 온전함으로 그 궁극적 온전함 이루게 되리니 @리<라멛-요드>말씀따라 행하라 @미토크<멤-타브-바브(상)-쿠프>진리말씀의 온전케 하실바 그 생명-인격으로 변화받음 실제 이루라 @하-올람<헤이, 아인-바브(상)-라멛-멤>영생 거처/그릇의 실제 @레카<라멛-쿠프>..말씀의 실제 이룸 @하이우<헤이, 요드-바브(상)>..여호와 그 실제 @베-리<바브, 라멛-요드>그러므로, 말씀따라 행하라 @나타티<눈-타브-타브>..생명 확장의 온전함으로 그 궁극적 온전함 이루리니 @오탐<알렙-타브-멤> Q속성 담긴 그릇이라 @베에트-데바르카<바브, 알렙-타브, 달렛-베이트-레이시-쿠프>..Q의 모든 속성 담긴바 다바르 실제 이루라 @나차루<눈-체데-레이시-바브(중)> 참생명이요, 의로우신 그영과 동심합의/합일/일치됨일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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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베-아타 야드우 키-콜 아쉬르 나타타 리 메이메카 후
==@베-아타<바브, 알렙-타브-헤이>..그러므로, Q의 모든속성 그대로 호흡하며 @야드우<요드-달렛-아인-바브(중)>..전심으로 부활생명의 그 영과 현합한 하나로 행하며 분배 받고 빼어닮음 이룸으로써 @키-콜<카프-요드, 카프-라멛> .. 조성됨 그대로 행하며, 그리하기를 배우고 @아쉬르 @나타타<눈-타브-타브> ..생명확장의 온전함, 그 완성에 이르며 @리<라멛-요드> 메이메카<멤-아인-멤-쿠프> ..말씀따라 그대로 행함으로써 말씀 분배의 그릇됨의 나타남 이루라 @후<헤이-바브(중)-알렙>..일편단심으로 Q뜻 이룸으로 그 생명을 호흡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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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키 하-데바림 아쉬르 나타타 리 나타티 라헴 베헴 키벨룸 바이키루 베-에메트 키 메임마카 야차티 바이-아미누 키 아타 쉴라흐타니
==@키<카프-요드> @하-데바림<헤이, 달렛-베이트-레이시-요드-멤>.. 다바림, 곧 영의 감동으로 마음판에 새겨진 말씀 그대로 따라 행하라 @아쉬르 @나타타<눈-타브-타브> @리<라멛-요드> ..생명확장의 온전함 궁극적 완성 이루며 말씀따라 행하며 @나타티<눈-타브-타브> @라헴<라멛-헤이-멤>..그 말씀의 거처요 @베헴<바브, 헤이-멤> 그 영의 거처요 @키벨룸<코프-베이트-라멛-바브(중)-멤>..거하는 바 말씀과 동심합의/합일/일치의 그릇됨 열망하심 그대로 @바이키루<바브-요드, 카프-요드-레이시-바브(중)>..그 영과 일치되어 사는자 @베-에메트<베이트, 알렙-멤-타브>..Q속성의 모든것인 진리가 거하며 @키<카프-요드> 그 진리로 조성되며 새겨짐인바 @메임마카<멤-아인-멤-쿠프>분배받은 진리의 거처 표현됨이니 @야차티<요드-체데-알렙-타브-요드>..Q의 모든 속성, 곧 의로써 삶이요 @바이-아미누<바브-요드, 알렙-멤-요드-눈-바브(중)>.진리의 실제로 행함이라 @키<카프-요드> @아타<알렙-타브-헤이> Q의 모든 속성의 실존이라, 그 속성으로 수용/조성/새겨져 행하는바 @쉴라흐타니<쉰-레멛-헤이트-타브-눈-요드>..보내심 받은자의 온전한 삶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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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아니 베-아담 아에티르 라크, 로 베-아드 하-올람 아에티르, 키 임-베아드 엘레 아쉬르 나타타, 리 키-레카 헴마
== @아니<알렙-눈-요드> 베-아담<베이트,아인-달렛-멤> 아에티르<알렙-아인-타브-요드-레이시 *아타르..아인-타브-레이시..-중재기도하다>..내게 주신 사람들을 위해 중재/중보하오니.. @라크<라멛-쿠프> 로<라멛-알렙> 베-아드<베이트,아인-달렛 *아드..아인-달렛..증인> 하-올람<헤이, 아인-바브(상)-라멛-멤 *올람..:영원>...그들은 배운바 그대로 사는 실존,곧 아버지를 배우고, 영원한 증인 됨이오니... @아에티르<알렙-아인-타브-요드-레이시> 키<카프-요드> 임-베아드<알렙-멤,베이트,아인-달렛> 엘레<알렙-라멛-헤이>..아버지의 말씀이 거하는, 실제로 살아내는 그 증인 됨 이루시기를 간구하나이다 @아쉬르<알렙-쉰(우상)-레이시>..복되도다 @나타타<눈-타브-타브(중)..생명씨앗됨 그대로 발현함> 리<라멛-요드> 키<카프-요드>-레카<라멛-쿠프> 헴마<헤이-멤(중)-헤이> ..배운 그대로, 새겨짐 그대로, 배운바 그대로 실행함 통해 그 마음 중심이 성령과 하나됨 이룬 실존들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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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베콜-아쉬르 리 레카 후 베-쉴르카 쉴리 베-니트파아르티 바헴
== @베콜<바브, 카프-라멛>-아쉬르...그러므로, 새겨진 그말씀이 복되도다 @리<라멛-요드> 레카<라멛-쿠프>..배운바 실행하며, 실존의 삶 이루나니.. @후<헤이-바브(중)-알렙>..그 마음 중심이, 거하시는바 성령 Q과 하나라 @베-쉴르카<바브,쉰(우상)-라멛(중)-쿠프> 쉴리<쉰(우상)-라멛(중)-요드>..그러므로 마음중심에 부어주신 말씀 그대로 새겨 실행하는이마다 바로 그리 살게되나니..@베-니트파아르티<바브, 눈-타브,페이-알렙-레이시,타브(중)-요드 *파아르..페이-알렙-레이시..영화롭게 하다-영광 나타내다> 바헴<베이트(중)-헤이-멤>...그리하여 참생명 완성 그 자체, 곧 영화롭게 됨이 그 존재 중심에 실재함으로써 살게 되나니, 생명 호흡이신 성령께서 거하는 바 거처삼은 지성소/마음/그릇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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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베-아니 에이네니 오드 비올람 베-헴 바-올람 헴마 비-아니 바 엘레이카 아비 하-카도쉬 네초르 오탐 베-쉬메카 에트 아쉬르 나타타 리 레마안 이헤이우 에하드 카모누
==@ 베-아니<바브, 알렙-눈-요드> @에이네니<알렙-눈-눈(중)-요드> @오드<아인-바브(상)-달렛> 비-올람<베이트, 아인-바브(상)-라멛-멤> @베-헴<바브,헤이-멤> @바-올람<베이트, 올람> @헴마<헤이-멤(중)-헤이>... ..나는 지금 여기 아버지의 증인-영생-거처로서 있는바 @비-아니<바브, 아니> 비<베이트-알렙> 엘레이카<알렙-라멛-요드-쿠프>...아버지의 말씀 행하며 이룸 위해 있는것처럼.. @아비<알렙-베이트-요드> 하-카도쉬<헤이, 코프(중)-달렛-바브(상)-쉰(우상)>...거룩하신 아버지여..@네초르<눈-체데(좌상)-레이시> 오탐<알렙-타브-멤> 베-쉬메카<베이트(중), 쉰(우상)-멤-쿠프>..아버지의 속성 충만한 그 생명의 영과 연합한 하나 이루어 주사 @에트<알렙-타브>-아쉬르..창1:1,2 그대로 이루심의 진복!! @나타타<눈-타브-타브(중)>..생명씨앗됨 그대로 발현케 하옵소서 @리<라멛-요드>..이로써, 말씀따라 삶.. @레마안<라멛-멤-아인-눈>..그 마음에 말씀 거하는바 분배된 말씀으로 살아감 @이헤이우<요드-헤이-요드-바브(중)>오직 참생명 호흡의 영과 하나로 행하는바 @에하드<알렙-헤이트-달렛> 카-모누<카프,멤-눈-바브(중)>..하나 됨 그 궁극 이루는 바 주 뜻 그대로 말씀으로 새겨지고 하나될바 생명 그릇됨 이루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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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비-흐요티 임마헴 비-올람 아니 나차르티 오탐 비-쉬메카 에트-아쉬르 네타탐 리 샤마르티 베로-아바드 메헴 이쉬 줄라티 벤-하아바돈 레말트 데바르 하-카투브
====@비-흐요티<바브, 헤이-요드-바브(상)-타브>..성령께서 친히 생명-인격변화 주도하사 Q의 어떠하심에까지 온전케 하시나니.. @임마헴<아인-멤-헤이-멤>..분배하신 진리말씀 그대로 성령 내재하심으로 말미암음이라.. @비-올람<베이트, 아인-바브(상)-라멛-멤>... 그 거처 곧 분배-공급하신 말씀으로 주님의 생명-인격 빼어닮은 영생의 그릇 만드시나니.. @아니<알렙-눈-요드>..나는.. @나차르티<눈-체데-레이시-타브-요드>..확장되는 생명으로 연합한 하나됨 온전히 이루시는 그영의 완전함으로 행하는바 @오탐<알렙-타브-멤>..Q의 모든 속성/내용의 거처됨이라.. @비-쉬메카<베이트, 쉰(우상)-멤-쿠프>..Q의 생명-인격 빼어닮음, 그 명성 그대로 거함 이루나니.. @에트-아쉬르<알렙-타브, 알렙-쉰(우상)-레이시>.. 그 속성/내용 그대로 빼어닮음은 그야말로 진복인바.. @네타탐<눈-타브-타브-멤>...그 생생한 생명 확장의 온전/완전함이 그 안에 거하며.. @리<라멛-요드>.. 공급말씀 그대로 행하는바.. @샤마르티<쉰(우상)-멤-레이시-타브>..영광스러운 Q이름 그대로 생명-인격 변화의 완전함이 그대로 나타날바.. @베로-아바드<바브, 라멛-알렙, 알렙-베이트-레이시>..Q을 섬김/청종의 참 그릇이라.. @메헴<멤-헤이-멤>...진리말씀의 생생한 생명으로 호흡하는 거처인바.. @이쉬<알렙-요드-쉰(우상)>..말씀 그대로 청종/준행함 인해 진리-말씀, 곧 불-빛을 발현하게 됨이라.. @줄라티<자인-바브(중)-라멛-타브-요드>..동심합의/합치로 Q의 기뻐하며 만족하시는 그릇의 완전함이 무엇인지 나타내는바.. @벤-하아바돈<베이트-눈, 헤이-알렙-베이트-달렛-바브(상)-눈>..친히 낳은 아드님, 곧 그 생명-인격 빼어닮음이 바로 아버지의 어떠함으로 체현된 자라.. @레말트<라멛-멤-라멛, 알렙-타브>..Q의 모든 속성/내용 그자체를 공급 받아 거하는 바 참제자됨 이룬바, @데바르<달렛-베이트-레이시>...영의 감동으로 마음판에 새겨진 영생 말씀이요..@하-카투브<헤이-카프-타브-바브(중)-베이트>..동심합치로 새겨짐의 완전함 이룬바, 그분의 거처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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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베아타 힌네니 바 엘레이카 베에트-엘레 아니 메다베르 바-올람 레마안 타말레 라헴 쉬메하티 베-키르밤
==@베아타<바브, 아인-타브-헤이>..분배해주신 말씀마다 온전한 실존됨 그대로 이루나니.. @힌네니<헤이-눈-눈-요드>.. 보라, 여기.. @바<베이트-알렙>..거하시는 하나님을.. @엘레이카<알렙-라멛-요드-쿠프>..Q의 공급말씀 이루심 그 현존 나타남을 .. @베-에트-엘레<바브, 알렙-타브, 알렙-라멛-헤이>.. 곧 Q의 모든속성/내용 그대로요, Q공급말씀의 실존이로다.. @아니<알렙-눈-요드>.. 나는.. @메다베르<멤-달렛-베이트-레이시>.. 진리말씀!!, 바로 그 친히 새겨놓으신 말씀, 곧 다바르이니.. @베-올람<베이트, 아인-바브(상)-라멛-멤>..생명-인격화된 그 거처 곧 영생의 그릇이라.. @레마안<라멛-멤-아인-눈>..공급말씀 거처요 분배하심의 생생한 증거이니.. @타말레 <타브-멤-라멛-알렙>..온전케 된 마음 그릇, 말씀 공급하시는 Q이라..@라헴<라멛-헤이-멤>..공급말씀의 그 실제가 거하는 그릇이라..@쉬메하티<쉰(우상)-멤-헤이트-타브-요드>.. 부어주신 모든말씀이 생명-인격화된 거처, 부활생명의 영이요, 그 온전함으로 행하는도다... @베-키르밤<베이트, 코프-레이시-베이트(중)-멤>..곧 그토록 열망하신 그대로, 동심합치로 이루신 바 유일무이한 머리로서 교통하는 그 거처, 그영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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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아니 나타티 라헴 에트-데바르카 베-하올람 샤네 오탐 야안 키 로 민-하올람 헴 카-아쉬르 감-아노키 로 민-하올람 아니
==@아니<알렙-눈-요드>..나는.. @나타티<눈-타브-타브-요드>..참생명의 온전/완전함으로 행하나니.. @라헴<라멛-헤이-멤>..공급말씀 실제의 거처됨이라.. @에트-데바르카<알렙-타브, 달렛-베이트-레이시-쿠프>.. Q의 모든 속성/내용이 그대로 새겨진바 다바르, 그 현존이라..@베-하올람<바브, 헤이-아인-바브(상)-라멛-멤>.. 분배-공급하여 생명-인격의 온전한 빼어닮음 이루는도다. @샤네<쉰(우)-눈-알렙>..분배의 생명의 그 Q이요..@오탐<알렙-타브-멤>..Q속성/내용 의 거처 그대로라.. @야안<요드-아인-눈>..행하며 분배하는 확장하는 참생명 그자체이니..@키<카프-요드>..말씀 받고 수용/적용함으로써 조성-새겨짐 원하는 그대로 조성하며 행하게 하는도다.. @로<라멛-알렙>..말씀공급의 Q이라.. @민-하올람<멤-눈, 헤이-아인-바브(상)-라멛-멤>..영생의 만나 그 자체이니.. @카-아쉬르<카프, 아쉬르>.. 받아 먹는자마다 진복 누림 알게 되리라.. @감-아노키<김멜-멤, 알렙-눈-카프-요드>.. 또한 성령의 거처이니..@로<라멛-알렙>..말씀 공급하는 Q이라...@민-하올람<멤-눈, 헤이-아인-바브(상)-라멛-멤>..영생의 생명양식은.. @아니<알렙-눈-요드>..바로 나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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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베-로 아에티르 레카 아쉬르 티카헴 민-하올람 라크 쉬티체렘 민-하라
==베-로<바브, 라멛-알렙>..그러므로, 말씀 공급하는Q이요.. @아에티르<알렙-아인-타브-요드-레이시>..Q의 모든 속성/내용 분배함 통해 온전함에 이루며 행하게 하는바.. @레카<라멛-쿠프>..공급말씀 나타남 그 자체이니!!.. @아쉬르..진복이라.. @티카헴<타브-코프-헤이트-멤>..갈망하심 그대로 완성된 실제의 거처요.. @민-하올람<멤-눈, 헤이-아인-바브(상)-라멛-멤>.. 영생의 생명양식, 만나로다.. @라크<레이시-코프>.. 공급말씀의 실제적 현존 나타남이니 ..@쉬티체렘<쉰(우)-타브-체데-레이시-멤>.. 부어주심의 완성, 그 자체인 그영의 마음 그릇이요.. @민-하라<멤-눈, 헤이-레이시-아인>..생명 호흡의 그영의 분배이니, 곧 만나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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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로 민-하올람 헴 카-아쉬르 감-아노키 에이네니 민-하올람
==@로<라멛-알렙>..말씀공급하시는 Q이라.. @민-하올람<멤-눈, 헤이-아인-바브(상)-라멛-멤>...영생의 생명양식, 만나를 주시나니.. @헴<헤이-멤>..영적 생명 호흡의 거처로다 @카-아쉬르<카프, 아쉬르>..그분으로 조성된자마다 진복이니.. @감-아노키<김멜-멤, 알렙-눈-카프-요드>..성령의 담지자/그릇/거처, 곧 확장산출력 충만한 Q생명으로 조성되고 행하도다.. @에이네니<알렙-요드-눈-눈-요드>...Q의 일하심은 생명 삶에서 영생에 이르나니..@민-하올람<멤-눈, 헤이-아인-바브(상)-라멛-멤>..영생의 생명 양식 먹음 인함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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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카데쉬 오탐 베아미테카 데바르카 에메트
==@카데쉬<코프-달렛-쉰(우)>.. 갈망하심 그대로 TUQ이 부활생명과 사랑 충만한, 그분의 속성/내용으로 완전히 조성되고, 근본동기-의식/무의식/잠재의식까지 모든 영역에서 동심합치로 그 어떤 장애나 거리낌 전혀 없는 교통으로 연합한 하나 이루나니.. @오탐<알렙-타브-멤>..Q의 모든 속성/내용의 그릇이요.. @베아미테카<베이트, 알렙-멤-타브-쿠프>.. 거하는바, Q진리말씀의 완성, 그 실체라.. @데바르카<달렛-베이트-레이시-쿠프>..곧, 새겨진 말씀, 다바르 그 자체시요 @에메트<알렙-멤-타브>..Q의 모든 속성/내용이 거처이니, 곧 진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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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카-아쉬르 아타 쉴라흐타 오티 엘-하올람 켄 감-아니 쉴라흐티 오탐 엘-하올람
==@카-아쉬르<카프, 아쉬르> @아타<알렙-타브-헤이>...Q의 모든 속성/내용으로 조성된 실존마다 진정코 복되도다.. @쉴라흐타<쉰(우)-라멛-헤이트-타브> @오티<알렙-타브-요드> @엘-하올람<알렙-라멛, 하올람>...부어주신바 공급말씀의 거처, 곧 완성된 부활생명의 영으로서 Q의 모든 속성/내용 바로 그것으로 행하는 하나님 삶 인해.. @켄<카프-눈>..Q의 집을 세우도다 @감-아니<김멜-멤, 알렙-눈-요드>... 성령의 거처된 나는... @쉴라흐티<쉰(우)-라멛-헤이트-타브-요드> @오탐<알렙-타브-멤> @엘-하올람<알렙-라멛, 하올람> 또한, ..Q의 속성/내용 가득채움 받은 참제자를 파송하는 자요 영생의 하나님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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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바-아니 마-케디쉬 에트 니페쉬 바-아담 레마안 이헤이우 감-헴 메-쿠다쉼 베-에메트
==바-아니<바브, 알렙-눈-요드>..그러므로, Q생명으로 살지니.. @마-케디쉬<멤-, 코프-달렛-쉰(우)-요드-멤>..거룩함으로 행하는 바로 그 생명 거처.. @에트-니페쉬<알렙-타브, 눈-페이-쉰(우)-요드>..Q의 모든 속성/내용으로 충만케 됨 인해, 생명말씀 말하며 Q의 부으심으로 행하는자..@바-아담<베이트, 아인-달렛-멤>..아버지 집에 거하는바, 그 참아담일지니.. @레마안<라멛-멤-아인-눈>..공급말씀이 거처됨 인해 분배하는 생명으로.. @이헤이우<요드-헤이-요드-바브(중)>..행하는바마다 동심합치로 영 생명호흡으로 살지니.. @감-헴<김멜-멤, 헤이-멤> @메-쿠다쉼<멤-코프-달렛-쉰)우)-요드-멤>...그토록 갈망하시던바, 성령의 거처-생명의 거처, 곧 성도라.. @베-에메트<베이트, 알렙-멤-타브>..진리가 그 안에 거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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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올람 로 레바드 베아드-엘레 아노키 마에티르 리크 키 임-감-베아드 하마아미님 비 피 데바림
==@올람<알렙-바브(상)-라멛-멤>..생명근원이신 아버지의 그 영원생명, 바로 거기로부터 잇대어 연결-발출된바 공급말씀 담는 담지자/거처/그릇으로서 생명-인격의 변화 이루심의 온전함을 이룬, 영속적 새로움, 그 영원이라.. @로<라멛-알렙>..공급말씀이신 하나님이시니.. @레바드<라멛-베이트-달렛>..Q말씀의 거처로서 인생 길 가는동안 마르지 않는 영생의 샘물 공급원이시요, 아무런 장애-거리낌 없는, 열린 마음문의 고통으로 전존재 모든 영역에서 늘 새롭게 하시는 유일무이한 으뜸이신 분, 그분과 연합한 하나 이루시나니..@베아드-엘레<베이트-아인-달렛, 알렙-라멛-헤이>..친히 상호거처됨으로 그분의 가지된 자마다 전후좌우 위아래 완전히 완전히 두르시는 분, 하나님 말씀 그 실존이시로다.. @아노키<알렙-눈, 카프-요드>.. 하나님 생명, 그 생명 말씀을 기쁨으로 받아 수용/적용함으로써 전존재를 날마다 매순간마다 새로이 조성하며 새기심 갈망함으로 살라.. @마에티르<멤-아인-타브-요드-레이시>..분배 받은 그대로, 진리말씀의 온전함으로 행하는 바 그영이시니 @라크<라멛-쿠프>..그 공급말씀 그대로 그분의 현존 나타내라.. @키<카프-요드>..기쁨으로 받은 말씀으로 기꺼이 감동가운데 수용/적용, 조성-새겨짐으로 행할지니.. @임-감-베아드<알렙-멤, 김멜-멤, 베이트-아인-달렛>..하나님의 거처요, 성령의 거처로서, 완전히 두르심의 궁극을!! 믿음 발휘함으로써 체득하고 그 안에 거하라.. @하마아미님<헤이-멤-알렙-멤-요드-눈-요드-멤>..하나님의 호흡하시는바 진리말씀의 그 거처, 행함마다 생명이 되는 거처되리니.. @비<베이트-요드>-피<페이-요드>..거처됨으로써 행하며, 그로 인해 그분의 말씀을 말함으로 행하라.. @데바림<달렛-베이트-레이시-요드-멤>..마르지 않는 영생의 생명샘물이시요 열린마음문의 상호 교통 이루신바, 사랑-생명의 주님 체득함으로써 마음판에 깊이 새겨진바 성별된 그말씀, 곧 다바르의 거처됨 알게 되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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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레마안 이헤이우 쿨람 에하드 카-아쉬르 아타 아비 비 아타 바-아니 바크 베 하이우 감-헴마 바누 케-에하드 레마안 야아민 하올람 키 아타 쉴라흐타니
== @레마안<라멛-멤-아인-눈>..공급말씀이 거처됨 인해 분배하는 생명으로.. @이헤이우<요드-헤이-요드-바브(중)>..행하는바 하나하나마다 동심합치로 영 생명호흡으로 행할지니.. @쿨람<카프-라멛-멤> @에하드<알렙-헤이트-달렛> .. 말씀을 기쁨으로 수용/적용함으로써 그말씀으로 조성되고 마음판에 새겨지게할바, 그 공급말씀의 거처, 부활생명의 영이신 그 하나님과 연합한 하나!! 바로 그것을 이루라..@카-아쉬르<카프, 아쉬르> 아타<알렙-타브-헤이>.. Q의 모든 속성/내용으로 조성되고 새겨진 그 실제됨이 그 얼마나 진복인지!!..복되고 복되도다.. @아비<알렙-베이트-요드> @비<베이트-요드> @아타<알렙-타브-헤이>,,거하시는 분 아버지를 살라..그분의 거처됨으로써 행하라..그분의 속성/내용 그대로를 살라.. @바-아니<바브, 알렙-눈-요드> ..그리하여, Q생명, 나 예수가..@바크<베이트-쿠프>..거함의 실제 나타내며 @베-하이우<바브, 헤이-요드-바브(중)>..동심합치로 영 생명을 호흡하며.. @감-헴마<김멜-멤, 헤이-멤-헤이>..성령의 거처, 곧 생명호흡하는 실제의 어떠함 나타냄 같이.. @바누<베이트-눈-바브(중)> ..동심합치로 거처된 삶 나타내라..@케-에하드<카프, 알렙-헤이트-달렛>.. 조성하여 새기실바는, 연합한 하나, 그 하나님이시니.. @레마안<라멛-멤-아인-눈>..공급말씀이 거처됨 인해 분배하는 생명이시로다. @야아민<요드-알렙-멤-요드-눈>...하나님의 진리말씀, 그 생명 삶 이룸 참되게 나타내시리니.. @하-올람<헤이-아인-바브(상)-라멛-멤>..가지된 이의 영원 궁극의 어떠함 드러내시리니.. @키<카프-요드> @아타<알렙-타브-헤이>..공급말씀 기쁨으로 받아 수용/적용함으로써 조성하며 새기실바 Q의 모든 속성/내용의 실존 그대로 이루며 나타내시리니..@ 쉴라흐타니<쉰(우)-라멛-헤이트-타브-눈-요드>...곧 보내심받은자마다 그분의 완전한 생명으로 행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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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바-아니 나타티 라헴 에트-하카보드 아쉬르 나타타 리 레마안 이헤이우 에하드 카-아쉬르 아나흐누 에하드
==.@바-아니<바브, 알렙-눈-요드>..나는.. @나타티<눈-타브-타브-요드>..참생명의 온전/완전함으로 행하나니.. @라헴<라멛-헤이-멤>..공급말씀 실제의 거처됨이라..@에트-하카보드<알렙-타브, 헤이, 카프-베이트-바브(상)-달렛> 아쉬르 @나타타<눈-타브-타브>..참생명의 온전/완전함으로 행하라.. @리<라멛-요드>..공급말씀을 행하라.. @레마안<라멛-멤-아인-눈>..공급말씀이 거처됨 인해 분배하는 생명으로.. @이헤이우<요드-헤이-요드-바브(중)>..행하는바 하나하나마다 동심합치로 영 생명호흡으로 행할지니.. @에하드<알렙-헤이트-달렛>.. 말씀을 기쁨으로 수용/적용함으로써 그 말씀으로 조성되고 마음판에 새겨지게 하실바, 그 공급말씀의 거처, 부활생명의 영이신 그 하나님과 연합한 하나!! 바로 그것을 이룸, 곧 에하드이니..@카-아쉬르<카프, 아쉬르>.. Q의 모든 속성/내용으로 조성된 실존마다 진정코 복되도다.. @아나흐누<알렙-눈-헤이트-눈-바브(중)>..Q생명은, 곧 부활생명의 동심합치이니.. @에하드<알렙-헤이트-달렛>..오직 Q, 부활생명의 영으로 연합한 하나 이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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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아니 바헴 베-아타 비 레마안 이헤이우 무-셀라밈 레-에하드 우-레마안 예다 하올람 키 아타 쉴라흐타니 베-아하브타 오탐 카-아쉬르 아하베타니
==@아니<알렙-눈-요드>..나는.. @바헴<베이트-헤이-멤>..Q거처로서, 참생명 호흡의 그릇이니... @베-아타<바브, 알렙-타브-헤이>..Q의 모든 속성/내용의 실존이로다.. @비<베이트-요드>..그분 거처로서 행하라.. @레마안<라멛-멤-아인-눈>..공급말씀이 거처됨 인해 분배하는 생명으로.. @이헤이우<요드-헤이-요드-바브(중)>..행하는바 하나하나마다 동심합치로 영 생명호흡으로 행할지니 @무-셀라밈<멤, 쉰(우)-라멛-멤-요드-멤>..마음그릇, 곧 부어주신 모든 말씀 담지자로서 그 대로 행하는 그릇이니.. @레-에하드<라멛-에하드>.."에하드"의 공급말씀이라.. @우-레마안<바브(중), 레마안>..동심합치로 공급말씀 거처이자 분배하는 생명 삶 이루나니.. @예다<요드-달렛-아인>..오직 "달렛" 곧, 상호 완전히 마음의 열린문으로 교통-왕래하는바, 그 부활생명의 영과 연합한 하나라, 생명-사랑의 생명수를 한량없는 공급하시는 분의 모든 속성/내용으로 살면서 분배하라.. @하-올람<헤이-아인-바브(상)-라멛-멤>..생명 호흡의 분배하심을 빼어닮아 생명-인격의 하나됨 이룬바, 공급말씀의 거처됨, 곧 영원한 거처 됨 이루라.. @키<카프-요드> @아타<알렙-타브-헤이> @쉴라흐타니<쉰(우)-라멛-헤이트-타브-눈-요드>..받은 말씀을 기쁨으로 수용/적용함 통해 그대로 조성되고 새겨짐 이룸으로써 그리 행하라 @베-아하브타<바브, 알렙-헤이-베이트-타브>..그리함으로써 Q의 생명 호흡하심, 그 거처됨.. 곧 "아하브,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이루라.. @오탐<알렙-타브-멤>..Q의 모든 속성/내용 그대로 변화되고 담긴 그릇 되리니.. @카-아쉬르<카프, 아쉬르>..말씀을 기쁨으로 수용/적용함 통해 그리될바..진복이로다.. @아하베타니<알렙-헤이-베이트-타브-눈-요드>..바로 그렇게 Q사랑의 생명 온전히 이루며 행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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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아비 아쉬르 네타탐 리 레초니 쉬-이헤이우 임마디 바-아쉬르 에흐예 아니 레마안 예헤주 비케보디 아쉬르 나타타 리 키 아하베타니 리페네이 모쎄도트 올람
==@아비<알렙-베이트-요드>..아버지여.. @아쉬르..진복이신분이시여.. @네타탐<눈-타브-타브-멤>..온전/완전한 생명 그 자체이신분이여.. @리<라멛-요드>..공급말씀 그 자체로 행하시며.. @레초니<레이시-체데-바브(상)-눈-요드>..Q뜻 그대로 연합-교통하며 Q생명-인격의 온전한 빼어닮음 변화 이루시는바 유일무이한 으뜸이신분, 참제자 너희는 그분의 생명확장으로 행하라.. @쉬-이헤이우<쉰(우)-요드-헤이-요드-바브(중)>..전적인 동심합치로, 부어주시는 생명 호흡마다 그대로 행할바.. @임마디<아인-멤-달렛-요드>..진리말씀 그대로 변화 이루고 그 안에 담은바 증인됨 살라.. @바-아쉬르<베이트, 아쉬르>..그 거처된자마다 진복이니.. @에흐예<알렙-헤이-요드-헤이>..Q의 생명호흡을 살아내는 실존, 곧 Q 여호와로다.. @아니<알렙-눈-요드>..Q생명을 사는 자, 나 예수는.. @레마안<라멛-멤-아인-눈>..공급말씀이 거처됨 인해 분배하는 생명으로. @예헤주<요드-헤이트-자인-바브(중)>..동심합치로 행하는바, Q 께서 만족하시는, 부활생명의 영으로 조성된 그 그릇 만드나니.. @비케보디<베이트, 카프-베이트-바브(상)-달렛-요드>..거처됨, 곧 온전한 변화 이룬바 그 생명-인격이 Q을 빼어닮도록 조성되고 새겨짐 이룬 "달렛"으로서 행하는자마다.. @아쉬르 @나타타<눈-타브-타브>..진복, 곧 온전/완전한 생명 이루나니.. @리<라멛-요드>..공급말씀 그대로 행하라.. @키<카프-요드>..바로 그렇게 조성되고 새겨짐으로써 행하라.. @아하베타니<알렙-헤이-베이트-타브-눈-요드>..Q의 완전한 사랑, 그 생명으로 행하라.. @리페네이<라멛-페이-눈-요드>..입을 열어 말하게 하실바 그 공급말씀을, 오직 그 생명을 살아내며 행하라.. @모쎄도트<멤-바브(상)-싸멕-달렛-바브(상)-타브>..보좌에 계신 분의 진리말씀, 그 생명-인격의 온전한 빼어닮음, 교통-공급함 통해 궁극의 연합한 하나, 그 온전함 이루라.. @ 올람<아인-바브(상)-라멛-멤>..분배하신 그 말씀, 그대로 생명-인격의 온전한 빼어닮음 이룸의 그릇됨은, 곧 영원에 이르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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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아비 하-차디크 헨 하올람 로 예다에카 비-아니 예다에티카 베-엘레 히키루 아쉬르 아타 쉴라흐타니
==@아비<알렙-베이트-요드>..행하시는분, 살아계신 아버지여.. @하-차디크<헤이, 체데-코프-달렛-요드-코프>..하나됨의 갈망 그대로 그 궁극 "달렛"을 이루사 실지로 그리 행하는 삶 갈망하시니...과연 아버지는 의로우시나이다 @헨<헤이-눈>..보소서..여기.. @하-올람<헤이, 아인-바브(상)-라멛-멤> @로<라멛-알렙> @예다에카<요드-달렛-아인-쿠프>..영원하신분 아버지를 알고, 바로 그렇게 조성된어 행하는 증인들 만드심 나타내시나니.. @비-아니<바브, 알렙-눈-요드>..나도.. @예다에티카<요드-달렛-아인-타브-쿠프>..온전한 증인됨의 그 실제를 나타내었나이다. @베-엘레<바브, 알렙-라멛-헤이>..Q 공급말씀을 호흡하며.. @히키루<헤이, 카프-요드-레이시-바브(중)>..동심합치로, 조성-새겨짐 이룬 그대로 행하는 그영의 실제 이루시나니.. @아쉬르 @아타<알렙-타브-헤이> @쉴라흐타니<쉰(우)-라멛-헤이트-타브-눈-요드>...진복이로다..Q의 모든 속성/내용의 실존 나타남이요. 부으신 공급말씀 그대로 부활생명의 영, 그분의 그 온전한 생명 확장 이루며 사는 자들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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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비-아니 호다에티 에트-쉬메카 베-오씨프 레-호디암 레마안 타흐예-밤 하-아하바 아쉬르 아하베타니 베-감 아니 에흐예 바헴
==비-아니<바브, 알렙-눈-요드>..그러므로 나도.. @호다에팀<헤이-바브(상)-달렛-아인-타브-요드-멤>..생명 호흡 통해 빼어닮은 바 생명-인격의 궁극에 이룬 증인이자 그릇으로서.. @에트-쉬메카<에트, 쉰(우)-멤-쿠프>..Q의 모든 속성/내용 그대로 변화 받고 담긴 실제를 드러내오니.. @베-오씨프<바브, 알렙-바브(상)-싸멕--요드-페이>..그 빼어닮은바 Q 생명-인격의 어떠함이 바로 보좌에 계신분 그 자체라, 그로써 행하며 말씀을 전하오니..@레-호디암<라멛-, 헤이-바브(상)-달렛-요드-아인-멤>..공급말씀, Q 생명-인격 빼어닮음 그대로 호흡하는바 그 참생명의 증인된바 그거처라.. @레마안<라멛-멤-아인-눈>..동심합치로 공급말씀 거처이자 분배하는 생명 삶 이룸에 있어서.. @타흐예-밤<타브-헤이-요드-헤이, 베이트-멤>..온전케 하소서, 참생명을 호흡하며 행하는 그 실존, 거처요 그릇됨을.. @ 하-아하바<헤이, 알렙-헤이-베이트-헤이>..Q사랑의 실존 됨 나타내오니.. @아쉬르.. 진복이로다..@아하베타니<알렙-헤이-베이트-타브-요드>..Q사랑의 완전함, 그 삶을 사는 이여.. @아니(알렙-눈-요드>..나도.. @에흐예<알렙-헤이-요드-헤이>..Q의 참생명 호흡의 실존으로서 @바헴<베이트-헤이-멤>..참 생명 호흡의 거처요 그릇된 너희와 하나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