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0.07.06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시18.보혈로 하나됨의 효력.하나됨의 믿음소망사랑-동행-의뢰/거함/누림..빌447
첨부파일 :

==시18==

[[아들JC를 사랑하신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으로 인침+공급-충만 받고 세상에 공급하며 주께 반응]]믿음으로 하나됨, 소망의 견고함 다함없는 그 사랑의 완전함/온전함, --구원/승리의 기쁨  ....442저장미꽃위의이슬, 주음성외에는, 어디든지예수나를이끌면 542구주예수의지함이 주님의뜻을이루소서 나의갈길다가도록...내주님없이는못살아 아버지사랑합니다 나의힘이되신여호와여 내일생다가도록 나는비록약하나 I love you, Lord, Open My eyes,Lord, Christ in Me.주께가까이날이끄소서, 주내소망은주더알기, 주하나님독생자예수


*1.나의 힘이신(헤제크..힘,능력<동:하자크>)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라함...[단장의 아픔으로]불쌍히 여기다, 자비-긍휼/체휼/동참-도와일으킴의 깊은 사랑 발휘하다 -->구원의 은혜로 나타남 ::감사 :: Q의 뜻과 심정 알아드리기!!)

*2.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셀라..바위절) 나의 요새시요(메추다..난공불락의 고지요새/성채-그물..침입자는 먹이/사냥감에 불과함) 나를 건지시는(팔라트..도피하다)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하사..도피/피난/피신하다) 나의 바위시요(추르..반석, 바위)나의 방패시요(아겐..원형방패) 나의 구원의(예샤) 뿔이시요(케렌...광채/광선, 뿔, 언덕) 나의 산성이시로다(미스가브...산성피난)

*3.내가 찬송 받으실(할랄...자랑/찬송하다) 여호와께 아뢰리니(카라..불러소환하다,일고 선포하다)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야샤..구원/구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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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사망의 줄이 나를 얽고 불의의 창수가 나를 두렵게 하였으며

*5.스올의 줄이 나를 두르고 사망의 올무가 내게 이르렀도다

*6.내가 환난 중에서 여호와께 아뢰며(라)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샤와...부르짖다/외치다) 그가 그의 성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샤마..듣다,경청하다/세심히사정을 살펴이해하다) 그의 앞에서 나의 부르짖음이 그의 귀에 들렸도다

*7.이에 땅이 진동하고 산들의 터도 요동하였으니 그의 진노로 말미암음이로다

*8,그의 코에서 연기가 오르고 입에서 불이 나와 사름이여 그 불에 숯이 피었도다

*9.그가 또 하늘을 드리우시고 강림하시니(!!!.인생으로 오셔서 동행하시는 구주예수) 그의 발 아래는 어두캄캄하도다

*10.그룹을 타고 다니심이여 바람 날개를 타고 높이 솟아오르셨도다

*11.그가 흑암을 그의 숨는 곳으로 삼으사 장막 같이 자기를 두르게 하심이여 곧 물의 흑암과 공중의 빽빽한 구름으로 그리하시도다

*12.그 앞에 광채로(노가흐...찬란히 빛나는 광채/광명/영광..<형:나가흐>) 말미암아 빽빽한 구름이 지나며 우박과 숯불이 내리도다

*13.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우렛소리를 내시고 지존하신 이가 음성을 내시며 우박과 숯불을 내리시도다

*14.그의 화살을 날려 그들을 흩으심이여 많은 번개로 그들을 깨뜨리셨도다

*15.이럴 때에 여호와의 꾸지람과 콧김으로 말미암아 물 밑이 드러나고 세상의 터가 나타났도다

*16.그가 높은 곳에서 손을 펴사 나를 붙잡아 주심이여 많은 물에서 나를 건져내셨도다

*17.나를 강한 원수와 미워하는 자에게서 건지셨음이여 그들은 나보다 힘이 세기 때문이로다

*18.그들이 나의 재앙의 날에 내게 이르렀으나 여호와께서 나의 의지가 되셨도다

*19.나를 넓은 곳으로 인도하시고 나를 기뻐하시므로 나를 구원하셨도다

-----언약 실행(오직 말씀에 비추어 회개-토설함으로써 수건 제거됨=청결/정결=투명민감한 영.!!)--------

*20.여호와께서 내 의를(체데크) 따라 상 주시며 내 손의 깨끗함을(보르..깨끗함, 청결..<형:바라르>) 따라 내게 갚으셨으니

*21.이는 내가 여호와의 도를 지키고 악하게 내 하나님을 떠나지 아니하였으며

*22.그의 모든 규례가 내 앞에 있고 내게서 그의 율례를 버리지 아니하였음이로다

*23.또한 나는 그의 앞에 완전하여(타밈..완전/온전/건전한, 흠없고 정상적인) 나의 죄악에서 스스로 자신을 지켰나니

*24.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내 의를 따라 갚으시되 그의 목전에서 내 손이 깨끗한 만큼 내게 갚으셨도다

*25.자비로운(하시드..경건/친절한..<명:하사드=성도>) 자에게는 주의 자비로우심을 나타내시며 완전한(타밈) 자에게는 주의 완전하심을 보이시며

*26.깨끗한(바라르) 자에게는 주의 깨끗하심을 보이시며 사악한(익케쉬..구부러진/비틀어진,그릇된) 자에게는 주의 거스르심을(파탈...뒤틀리다,비틀다) 보이시리니

*27.주께서 곤고한(아니..가난한, 비천한/억압받는) 백성은 구원하시고 교만한 눈은 낮추시리이다

----임마누엘의 동행..객관적 구원/주관적 승리의 용사, 의지+신뢰함으로 Q인도따라 용맹을 발함!!---

*28.주께서 나의 등불을(니르..등불) 켜심이여(오르..밝게 빛나다/비추다) 여호와 내 하나님이 내 흑암을 밝히시리이다(나가흐...비추다,빛내다)

*29.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군을 향해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담을 뛰어넘나이다

*30.하나님의 도는 완전하고 여호와의 말씀은 순수하니(차라르...정련/정제/시험/깨끗케하다) 그는 자기에게 피하는 모든 자의 방패시로다

*31.여호와 외에 누가 하나님이며 우리 하나님 외에 누가 반석이냐

*32.이 하나님이 힘으로 내게 띠 띠우시며 내 길을 완전하게 하시며

*33.나의 발을 암사슴 발 같게 하시며 나를 나의 높은 곳에 세우시며

*34.내 손을 가르쳐 싸우게 하시니 내 팔이 놋 활을 당기도다

*35.또 주께서 주의 구원하는 방패를 내게 주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들고 주의 온유함이 나를 크게 하셨나이다

*36.내 걸음을 넓게 하셨고 나를 실족하지 않게 하셨나이다

*37.내가 내 원수를 뒤쫓아가리니 그들이 망하기 전에는 돌아서지 아니하리이다

*38.내가 그들을 쳐서 능히 일어나지 못하게 하리니 그들이 내 발 아래에 엎드러지리이다

*39.주께서 나를 전쟁하게 하려고 능력으로 내게 띠 띠우사 일어나 나를 치는 자들이 내게 굴복하게 하셨나이다

*40.또 주께서 내 원수들에게 등을 내게로 향하게 하시고 나를 미워하는 자들을 내가 끊어 버리게 하셨나이다

*41.그들이 부르짖으나 구원할 자가 없었고 여호와께 부르짖어도 그들에게 대답하지 아니하셨나이다

*42.내가 그들을 바람 앞에 티끌 같이 부숴뜨리고 거리의 진흙 같이 쏟아 버렸나이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뜻, 만민구원----

*43.주께서 나를 백성의 다툼에서(리브..다툼/분쟁/쟁송) 건지시고 여러 민족의 으뜸으로(로쉬..머리) 삼으셨으니 내가 알지 못하는 백성이 나를 섬기리이다(아바드...일하다/섬기다)

*44.그들이 내 소문을 들은(셰마...소문/소식/보고/명성<동:샤마>) 즉시로 내게 청종함이여(샤마..순복/청종하다) 이방인들이 내게 복종하리로다

*45.이방 자손들이 쇠잔하여 그 견고한 곳에서 떨며 나오리로다

*46.여호와는 살아 계시니 나의 반석을 찬송하며(바라크) 내 구원의(예샤) 하나님을 높일지로다

*47.이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보복해 주시고(네카마..복수하다/되갚다...그결과는 회심구원 또는 영원멸망 ) 민족들이 내게 복종하게 해 주시도다

*48.주께서 나를 내 원수들에게서 구조하시니 주께서 나를 대적하는 자들의 위에 나를 높이 드시고 나를 포악한 자에게서 건지시나이다(나찰...도로 뺏어내어(족쇄 벗겨 제거하다)구하여 건져내다)

*49.여호와여 이러므로 내가 이방 나라들 중에서 주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이다

*50.여호와께서 그 왕에게(멜렉) 큰 구원을(예슈아) 주시며 기름 부음 받은 자에게(마쉬아흐..기름부음받은자.왕적제사장.Q의 대행자/대리자.<동:마샤흐>) 인자를(헤세드) 베푸심이여(아사) 영원토록 다윗과 그 후손에게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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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love You, O LORD, my strength."

The LORD is my rock and my fortress and my deliverer, My God, my rock, in whom I take refuge; My shield and the horn of my salvation, my stronghold.

I call upon the LORD, who is worthy to be praised, And I am saved from my enem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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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ords of death encompassed me, And the torrents of ungodliness terrified me.

The cords of Sheol surrounded me; The snares of death confronted me.

In my distress I called upon the LORD, And cried to my God for help; He heard my voice out of His temple, And my cry for help before Him came into His ears.

Then the earth shook and quaked; And the foundations of the mountains were trembling And were shaken, because He was angry.

Smoke went up out of His nostrils, And fire from His mouth devoured; Coals were kindled by it.

He bowed the heavens also, and came down With thick darkness under His feet.

He rode upon a cherub and flew; And He sped upon the wings of the wind.

He made darkness His hiding place, His canopy around Him, Darkness of waters, thick clouds of the skies.

From the brightness before Him passed His thick clouds, Hailstones and coals of fire.

The LORD also thundered in the heavens, And the Most High uttered His voice, Hailstones and coals of fire.

He sent out His arrows, and scattered them, And lightning flashes in abundance, and routed them.

Then the channels of water appeared, And the foundations of the world were laid bare At Your rebuke, O LORD, At the blast of the breath of Your nostrils.

He sent from on high, He took me; He drew me out of many waters.

He delivered me from my strong enemy, And from those who hated me, for they were too mighty for me.

They confronted me in the day of my calamity, But the LORD was my stay.

He brought me forth also into a broad place; He rescued me, because He delighted in me.

The LORD has rewarded me according to my righteousness; According to the cleanness of my hands He has recompensed 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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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 I have kept the ways of the LORD, And have not wickedly departed from my God.

For all His ordinances were before me, And I did not put away His statutes from me.

I was also blameless with Him, And I kept myself from my iniquity.

Therefore the LORD has recompensed me according to my righteousness, According to the cleanness of my hands in His eyes.

With the kind You show Yourself kind; With the blameless You show Yourself blameless;

With the pure You show Yourself pure, And with the crooked You show Yourself astute.

For You save an afflicted people, But haughty eyes You aba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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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 You light my lamp; The LORD my God illumines my darkness.

For by You I can run upon a troop; And by my God I can leap over a wall.

As for God, His way is blameless; The word of the LORD is tried; He is a shield to all who take refuge in Him.

For who is God, but the LORD? And who is a rock, except our God,

The God who girds me with strength And makes my way blameless?

He makes my feet like hinds' feet, And sets me upon my high places.

He trains my hands for battle, So that my arms can bend a bow of bronze.

You have also given me the shield of Your salvation, And Your right hand upholds me; And Your gentleness makes me great.

You enlarge my steps under me, And my feet have not slipped.

I pursued my enemies and overtook them, And I did not turn back until they were consumed.

I shattered them, so that they were not able to rise; They fell under my feet.

For You have girded me with strength for battle; You have subdued under me those who rose up against me.

You have also made my enemies turn their backs to me, And I destroyed those who hated me.

They cried for help, but there was none to save, Even to the LORD, but He did not answer them.

Then I beat them fine as the dust before the wind; I emptied them out as the mire of the stree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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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 have delivered me from the contentions of the people; You have placed me as head of the nations; A people whom I have not known serve me.

As soon as they hear, they obey me; Foreigners submit to me.

Foreigners fade away, And come trembling out of their fortress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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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ORD lives, and blessed be my rock; And exalted be the God of my salvation,

The God who executes vengeance for me, And subdues peoples under me.

He delivers me from my enemies; Surely You lift me above those who rise up against me; You rescue me from the violent man.

Therefore I will give thanks to You among the nations, O LORD, And I will sing praises to Your name.

He gives great deliverance to His king, And shows lovingkindness to His anointed, To David and his descendants fore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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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 22장에서 나타났던 다윗의 생애 이야기를 볼 수 있다. 그것은 그의 생애에 관한 초판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그것이 교회의 봉사에 합당하도록 약간 수정된 재판을 읽을 수 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여러 번 구원해 주심에 대한 다윗의 감사다. 이것을 그는 그의 기억 속에 새롭게 항상 간직하기를 원했고, 그 경험을 선포하고 물려주고자 했다. 이것은 경탄할 만한 작품이다. 그 시정은 매우 훌륭하고 상상은 대담하며 표현은 고상하다. 그리고 각 단어는 매우 적합하며 의미심장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경건함이 그 시를 훨씬 능가하고 있다. 거룩한 믿음, 사랑, 기쁨, 찬미, 그리고 소망이 여기에서 생동하고 활발히 움직이고 있다.

1. 그는 하나님 안에서 개가를 부르고 있다(1-3).

2. 그를 위해 이루어주신 하나님의 구원을 찬미하고 있다(4-19).

3. 그 자신의 결백함에 대한 위로를 얻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그 결백함을 입증해 주셨다(20-28).

4. 하나님께 그의 모든 성취에 대한 영광을 돌리고 있다(29-42).

5. 하나님께서 그와 그의 백성들을 위해 더 역사하시리라는 기대로 그 자신을 격려하고 있다(4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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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안에서의 다윗의 승리와 감사(시 18:1-19)

이 시편의 표제는 우리에게 이 시편을 지은 때를 알려주고 있다. 우리는 그것을 이미 사무엘하에서 알 수 있었고(삼하 22:1), 여기에서는 단지 이 시편이 성전 노래로서 “영장” 또는 선창자에게 주어졌다는 사실만을 알게 된다. 훌륭한 사람들이 자기 자신이 사용할 의도로 개인적으로 만들어놓은 것은 공적으로도 유용할 수 있다. 그리하여 다른 사람들이 그들의 양초에서 빛을 얻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불에서 열도 얻을 수 있게 된다. 본보기는 때로 규칙보다 더 좋은 가르침이 된다.

다윗은 여기에서 모세처럼 “여호와의 종”이라 불리고 있다. 그것은 모든 선한 사람이 하나님의 종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는 그의 왕홀과 칼과 펜으로써 이스라엘에 있는 하나님 나라의 세력을 크게 촉진시켰기 때문이다. 그가 큰 나라의 왕이었던 것보다는 여호와의 종이라는 사실이 그에게는 더욱 큰 영예였다. 따라서 다윗은 스스로를 그렇게 간주했다. “여호와여 나는 진실로 주의 종이오니다”(116:6).

Ⅰ. 여기에서 그는 하나님 안에서, 그리고 그와의 관계 안에서 개가를 올리고 있다. 이 시편의 첫 번째 구절,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하는 말은 이 시편 전체의 범위와 문맥으로서 제일 앞에 제시되어 있다. 율법의 제일 첫 번째 되는 큰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의 모든 훌륭한 찬미와 복종의 원리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모든 긍휼을 여기에 사용해야 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의 마음은 더욱 그를 사랑해야 한다. 이것을 그는 요구하시고, 또한 받아들이실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에게 인색해 매우 초라하게 보답한다면 우리는 매우 배은망덕한 자다. 사랑받는 자의 이득은 사랑하는 자의 기쁨이 된다. 그러므로 그는 이 현을 건드리고 있으며, 이에 대해 그는 매우 즐겁게 수금을 타고 있다(2절). “여호와는 나의 하나님이시나이다. 또한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며, 내 현재의 환난 속에서 내게 필요한, 그리고 내가 바랄 수 있는 전부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안에는, 그를 의지하는 그의 백성들이 위급할 때나 그 밖의 모든 경우에 필요한 것들이 갖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는 나의 반석이시요, 힘이시요 요새이시다.”

1. 즉 “나는 가장 위험할 때와 곤경에 처한 때에 그가 그러하심을 발견했다.”

2. “나는 그러하신 하나님을 택하고 그 밖의 다른 것들을 모두 버렸으며, 나를 보호하는 일에서 오직 그에게만 의지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들은 이처럼 그들의 것인 하나님 안에서 개가를 부를 수 있으며, 확신을 갖고 그에게 요청할 수 있을 것이다(3절). 우리는 이것을 우리의 구원에도 사용해야 하며, 하나님을 더 사랑해야 할 뿐만 아니라 기도를 더욱 사랑해야 한다. 즉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특히 환난의 때에 “여호와께” 확신을 갖고 “아뢰어” 우리가 구원을 얻도록 해야 한다. 왜냐하면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행 2:21)고 적혀 있기 때문이다.

Ⅱ. 그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역사하신 그 구원을 찬미함으로써, 더욱 큰 찬미를 드리려는 마음을 불러일으키고자 하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이 넘치는 생활 상태를 주시하는 것이 좋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능력과 그 안에 있는 선하심을 찬미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1. 우리가 구원된 위험사태가 긴박하고 무서웠을수록 우리를 구원하는 긍휼은 더욱 큰 것이다. 다윗은 지금 그의 대적들의 압력이 어떻게 그에게 쏟아졌는가를 회고하고 있다. 그들은 수효로 그를 압도할 것 같았는데, 그는 이것을 “벨리알의 홍수”, 곧 벨리알 자손들의 여울이라 부르고 있다. 그들은 그를 에워싸고 “그를 둘렀다.” 그들은 그를 놀라게 했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거의 그를 사로잡을 뻔했다. 그들의 올무가 그를 방해했다. 따라서 그때 그의 상황은 외적으로는 싸움이, 그리고 내적으로는 두려움과 고통이 있었다(4-5절).

그의 영혼은 위압당했고, 자신을 가망 없는 자로 여겼다(116:3 참조).

2.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실 것을 열심히 간구할수록, 그리고 그 구원이 우리의 기도에 대한 직접적인 응답일수록 우리는 더욱더 감사해야 한다. 다윗의 구원이 그러했다(6절). 다윗이 기도하는 자라는 것과 하나님이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심이 드러났다. 우리가 다윗처럼 기도한다면 우리도 그처럼 성공할 것이다. 우리가 환난으로 기도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에 귀를 막지는 않으실 것이다. 아니, 동정의 하나님인 그는 더욱 우리를 구하려 하실 것이다.

3.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 일에 더욱 놀랍게 나타나실수록 그것은 더욱 위대하다. 다윗을 위해 역사된 구원도 그러했다. 7절 이하에는 하나님께서 그의 임재와 영광스런 속성을 드러내신 일이 매우 장엄하게 묘사되어 있다. 이 구원 속에서는 사람에 대한 것은 거의 나타나 있지 않고, 하나님에 대한 것이 많이 나타나 있다.

(1)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나타나셨다. 그는 땅을 진동시키셨고, 옛날 시내 산이 그러했던 것처럼 “산의 터”까지도 요동하게 만드셨다(7절). 세상사람들이 두려움에 질려 있을 때 땅이 “진동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세상의 위대한 자들이 부끄러워했을 때 산이 요동했었다.

(2) 그는 그의 백성들의 대적들과 핍박자들에 대해 진노를 보이셨다. “그는 진노하셨도다”(7절). 그의 진노에 연기가 오르고 불이 붙었다. 그것은 불, 즉 열광적인 불이었으며, “그 불에 숯이 피었다”(8절). 자기의 죄로써 그들 자신을 이 불에 대한 석탄(즉 연료)으로 만든 자들은 이 불에 의해 불살라질 것이다. 핍박자들을 대항해 화살을 준비하신 그는 그가 원하실 때 그것을 쏘신다. 그리고 그 화살은 분명 그 과녁을 맞추어 그것을 처형시킨다. 왜냐하면 그 화살은 번갯불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14절).

(3) 그는 그의 백성들의 송사를 변호하시고, 그들을 위해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주실 준비가 되어 있음을 보이셨다. 즉 그는 의를 옹호하시고 고통당하는 종들을 위로하시기 위해 구름을 타고 나셨다(10절). “바람 날개를 타시고, 하늘을 날면서 자기 백성을 도우시는 지존자”에게는 반대나 장애가 있을 수 없다.

(4) 그는 다윗의 경우를 인지하시는 가운데 그의 겸양을 보이셨다. “그가 하늘을 드리우시고 강림하셨다”(9절). 그는 천사들을 보내지 않으시고, 그의 백성들의 환난 가운데 환난당하신 자로서 친히 강림하셨다.

(5) 그는 흑암으로 그 자신을 감추셨으나, 빛에게 그의 백성들의 흑암을 밝히도록 명하셨다. 그는 자신을 숨기시는 하나님이시다(사 45:15). 왜냐하면 그는 “흑암으로 장막을 삼으시기” 때문이다(11절). 그의 영광은 눈으로 볼 수 없으며, 그의 뜻은 헤아릴 수 없고, 그의 행사는 설명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가 보기에는 구름과 흑암이 그를 두르고 있는 것같이 보인다. 우리는 그가 취하신 길을 알지 못하며, 심지어 그가 언제 긍휼의 길로 우리에게 오실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계획이 은밀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자비롭다. 그가 자신을 숨기신다 하더라도 그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구세주이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광채로 인하여 빽빽한 구름이 지나고 위로가 되돌아오며, 일의 상황이 바뀐다. 그리고 암담하고 위협적인 것이 청명하고 즐거운 것이 된다.

4. 구원의 길에 더 큰 어려움이 놓여 있을수록 그 구원은 더욱 영광스럽다. 다윗을 구조하기 위해 바닷물은 물밑이 드러나도록 갈라져야 했다. 또한 땅은 그 터가 나타날 정도로 쪼개져야 했다(15절). 다윗을 건져내야 할 바다는 무수했고 또 깊었다(16절). 모세가 바다에서 건져서 명성을 얻은 것은 실재상의 일이나, 다윗의 경우는 상징적인 일이었다. 그의 대적들은 강했고, 그들은 그를 미워했다. 그가 그대로 내버려둠을 당했다면 그들은 그가 대항하기에 너무 힘겨운 상대였을 것이다(17절). 그리고 그들은 매우 민첩해 “그의 재앙의 날에 그에게 이르렀다”(18절). 그러나 그의 환난 중에도 여호와께서 그의 의지가 되셨으므로 그는 침몰되지 않았다. 하나님은 합당한 때에 그의 백성들을 환난에서 건지실 뿐만 아니라, 그동안에 그들로 하여금 그 환난을 잘 견디어낼 수 있도록 부축하실 것이다.

5. 그 구원을 특별히 더 돋보이게 한 그의 위로가 그것의 열매였다는 사실과 하나님이 그것의 뿌리이며 근원이셨다는 점이었다.

(1) 그것은 그의 성공의 서주였다(19절). “그는 다른 또 한 곤궁 속에서 넓은 곳으로 인도하셨다. 그리하여 나는 돌아왔을 뿐만 아니라 그곳에서 번영하였다.”

(2) 그것은 그에 대한 하나님의 은총의 표정이었고, 그 표정은 은총을 더욱 감미롭게 만들었다. “여호와께서 나의 업적 때문이 아니라, 그 자신의 은혜와 선한 의지로 인해, 나를 기뻐하심으로 구원하셨도다.” 이것을 “저가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기뻐하지 아니한다 하시면 종이 여기 있사오니 선히 여기시는 대로 내게 행하소서 하리라”(삼하 15:26)는 내용과 비교해 보라. 우리의 구원, 그 큰 구원은 다윗의 자손 속에 있는 하나님의 기쁨에 기인하고 있다. 하나님은 그를 기쁘게 여기심을 친히 선포하셨다.

이것을 노래함에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개가를 부르고 그를 의지해야 한다. 우리는 이것을 다윗의 아들 그리스도께 적용시킬 수 있다. 즉 사망의 슬픔이 그를 둘러쌌고, 그는 그 고난 중에서 간구하셨다(히 5:7). 하나님은 땅을 진동케 하시고 바위가 쪼개지게 하시고, 부활을 통해 그를 넓은 곳으로 인도하셨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와 그의 사업을 기뻐하셨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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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의 결백함(시 18:20-28)

여기에서 볼 수 있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Ⅰ. 다윗은 자신의 결백함에 대해 즐거운 마음으로 회고하고 있으며, 그의 이야기를 거룩함과 진실함으로써 하고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않았다는 그의 양심의 증거를 기뻐하고 있다(고후 1:12). 그의 구원은 이에 대한 증거였고, 이것은 그의 구원의 큰 위로가 되고 있다. 그의 대적들은 그에 대해 그릇된 진술을 했으며, 그의 환난이 오래 계속되었을 때 그도 그 자신을 의심하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의 편이 되신 것을 확실히 보았을 때 그는 그의 의로움에 대한 확증과 위로를 가졌다.

1. 그의 구원은 사람들 앞에 그의 무죄함을 선포했으며, 그가 그릇 정죄당했던 그 범죄들로부터 그를 방면시켰다. 이것을 그는 “여호와께서 그의 의를 따라 상주신” 것이라 일컫고 있다(20, 24절). 즉 그의 손이 깨끗함과 그의 송사가 의로움에 따라서, 그리고 그가 비난당하던 그 선동과 배반과 반역으로부터 하나님께서 그와 그의 대적들의 논쟁을 판가름해 주신 것이라 말하고 있다. 그는 그의 무죄함에 관해 자주 하나님께 호소했다. 그리고 지금 하나님은 공의에 따라(항상 그렇게 하시듯) 그 호소를 판단했다.

2. 그들은 그에 대한 그 자신의 양심의 증거를 확인했다. 그는 여기에서 그것을 매우 기쁘게 회고하고 있다(21-23절). 그의 마음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고 있고, 또 그것을 입증할 준비가 되어 있다.

(1) 그는 확고하게 그의 의무를 지켰으며, 그의 하나님으로부터 사악하거나 고집스럽게 떠나지 않았다. 주의 길을 버린 자들은 실상 그들의 하나님으로부터 떠난 것이며, 그것은 악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가 여러 번 머뭇거리고 여러 차례 발을 잘못 내딛은 것을 깨달을지라도 우리가 회개함으로써 우리 자신을 돌이키고 계속 우리 의무의 길을 나아간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떠난 것으로 간주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 하나님으로부터 사악하게 떠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2) 그는 하나님의 명령의 규례에 항상 유의했다(22절). “그 모든 규례가 내 앞에 있고, 나는 그 모두를 중요시했습니다. 그 어느 것도 보잘것없는 것으로 멸시하지 않았고, 또한 혹독한 것으로 여겨 싫어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 모두를 굳게 지키는 것을 내 일로 삼았고, 그것에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나는 내게서, 내 시야에서, 내 마음으로부터 그 율례를 버리지 않았고, 항상 그것에 유의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길을 중단하려 하여 그 길의 지식을 원하지 않는 자들처럼 행하지 않았습니다.”

(3) 그는 죄악에서 그 자신을 지켰고,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그의 결백함을 보였다. 어떤 죄든 우리를 매우 쉽게 포위하는 죄를 떠나기 위해, 그리고 그 습관을 극복하기 위해 끊임없이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결백하다는 좋은 증거가 될 것이다. 다윗의 구원이 그의 결백함을 밝혀주었던 것과 같이 그리스도의 높이 들리심은 그의 결백함을 밝혀주었으며, 그에게 퍼부어진 비방을 영원히 거두어주었다. 그러므로 그는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셨다”고 일컬어진다(딤전 3:16).

Ⅱ. 따라서 그는 하나님의 통치와 심판에 대한 규정을 제시하고 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께 바랄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게 해주고 있다(25-26절).

1. 다른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푼 자들은(그들도 자비가 필요하며 그들은 자신이 베푼 자비에 의지할 수도 없다) 하나님께 긍휼을 얻을 것이다(마 5:7).

2. 하나님과의 언약, 그리고 그들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성실히 지킨 자들은 하나님에게서 그가 그들에게 약속하셨던 그 모두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결백한 자를 어디서 발견하시든지, 그에게 하나님의 완전하심을 보이실 것이다.

3. 순결한 양심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은 주님의 말씀은 순결하며, 매우 확실하여 의지할 수 있고, 또한 매우 달콤하여 기뻐할 수 있는 말씀임을 발견할 것이다.

4. 하나님을 적대하고 그에 대적해 행하는 자들은 그도 그들을 적대하시고 그들에게 대적해 행하심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레 24:21, 23).

Ⅲ. 따라서 그는 겸손한 자에게는 위로를(“주께서 곤고한 백성은, 즉 해를 당하여 끈기 있게 참는 백성은 구원하시고”), 교만한 자에게는 두려움을(“교만한 눈은, 즉 높은 목적을 가지고 그들 스스로를 위한 큰 이익을 기대하며, 불쌍하고 경건한 자들은 경멸하고 멸시하는 눈을 낮추시리이다”), 그리고 그 자신에게는 격려를 말하고 있다─“주께서 나의 등불을 켜실 것이니라. 즉 주께서 나의 슬픈 마음을 소생시키고 위로하실 것이며, 나를 우울한 상태에 내버려두지 않으실 것입니다. 주께서 나를 환난에서 건지시고, 내게 평강과 번영을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주께서 지금은 가려진 나의 영광을 밝게 만드실 것입니다. 주께서 나의 길을 안내하시고 그 길을 내 앞에 밝히시어 내가 그 올무를 피할 수 있도록 해주실 것입니다. 주께서 내가 일할 수 있도록 나의 등불을 켜시고, 주와 사람 가운데 있는 주의 나라의 유익을 섬길 수 있는 기회를 내게 주실 것입니다.”

흑암 속에서 걷는 자들, 그리고 여러 가지 실의 가운데 수고하는 자들로 하여금 이 구절들을 노래하게 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의 등불이 되시리라는 것을 그들 스스로에게 격려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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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에 대한 확신(시 18:29-50)

Ⅰ. 다윗은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그를 위해 행하신 위대한 일들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되돌아보고 있다. 하나님은 그를 위해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주셨을 뿐만 아니라, 그에게 승리와 성공을 주셨고, 그를 이겼다고 생각하는 자들을 이기도록 해주셨다. 우리가 어떤 한 가지 자비를 얻어 하나님을 찬미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그것으로 인해 우리의 모든 날을 통해 우리를 둘러싸며 우리를 따랐던 더 많은 여러 가지 자비를 관찰해야 한다. 많은 것들이 다윗의 성공에 공헌했다. 그리고 그는 그 모든 것 속에 있는 하나님의 손을 인정하고 있으며, 우리를 형통하도록 이끈 몇 가지 단계를 검토해 봄으로써 우리도 그렇게 하도록 가르치고 있다.

1. 하나님은 군사적인 일에서 그에게 모든 기술과 총명을 주셨다. 그는 자라나면서 이런 일에 대해 훈련받지도 않았고 의도된 적도 없었다. 오히려 그의 재능은 음악, 시, 그리고 명상적인 생활 쪽으로 그를 이끌었다. 하나님께서 “내 손을 가르쳐 싸우게 하신다”(34절).

2. 하나님은 그에게 전쟁의 노역을 겪을 수 있는 육신의 힘을 주셨다. “하나님이” 놋활도 꺾을 수 있을 정도의 “힘으로 그에게 띠 띠우셨다”(34절).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어떤 일을 시키고자 하실 때 그는 분명 그 일에 합당한 능력을 그들에게 주신다.

3. 하나님은 또한 그에게 대적들을 피해 도망가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추격할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날렵함을 주셨다(33절). 그는 “나의 발을 암사슴 발 같게 하신다.” “주께서 내 걸음을 넓게 하셨나이다. 그러나(큰 걸음을 걷는 자들은 실패하기 쉬우나) 내 걸음은 빗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는 매우 민첩했으므로 그의 대적들을 추적해 그들을 잡았다(37절).

4. 하나님께서는 그가 그의 일을 매우 대담하고 용감히 행하도록 하셨으며, 그에게 그의 힘에 비례할 만한 영을 주셨다. 어떤 무리가 그의 길을 막으면 그는 쉽게 그들을 통과했고, 담이 있으면 힘들이지 않고 뛰어넘었다(27절). 보루와 성벽이 있다면 그는 곧 그곳에 올라갔고, 거룩한 도움에 의해 그의 발은 그의 대적의 가장 높은 곳에 세워졌다(33절).

5. 하나님은 극심한 위기 속에서도 그를 보호하셨고 그를 안전케 하셨다. 여러 번 그가 생명의 위협을 당했으나 그는 놀랍게도 보존되었다. “주께서 주의 구원하는 방패를 내게 주시나이다(35절). 그것은 사방에서 나를 방어했습니다. 그것에 의해 나는 나의 멸망을 노리는 백성들의 싸움에서(43절), 특히 강포한 자에게서(48절) 건져졌습니다.” 그 강포한 자란 바로 그를 향해 두 번 이상이나 투창을 던진 사울을 가리킨다.

6. 하나님은 그의 계획 아래 그를 형통케 하셨다. 그의 길을 완전케 하신 것은 하나님이었고(32절), 그를 붙든 것은 그의 오른손이었다(35절).

7. 하나님은 그가 그의 대적들, 즉 블레셋 사람들, 모압 사람들, 암몬 사람들, 그리고 이스라엘을 대적해 싸우는 모든 사람들을 이기게 해주셨다. 그는 특별히 이런 족속들을 의미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대적들이라는 말 속에 그가 면류관을 얻게 되는 것을 반대했던 사울의 집안이나 그의 왕위를 찬탈하려 했던 압살롬과 시바의 무리들이 제외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그의 대적들을 격파시키신 하나님의 선하심을 매우 상세히 설명하고 있으며, 그의 승리를 그 자신의 칼이나 활, 또는 그의 용사의 용맹함 덕택으로 돌리지 않고, 하나님의 은총 덕택으로 돌리고 있다. “내가 그들을 따라가(37절) 치리이다(38절). 대저 주께서 능력으로 내게 띠 띠우셨기 때문입니다(39절). 그렇지 않고서는 내가 그것을 행할 수 없었습니다.” 모든 찬미가 하나님께 돌려지고 있다. “주께서 저희를 내게 굴복케 하셨나이다”(39절). 주께서 “저희로 등을 내게로 향하게 하시어”(40절, 수 10:24처럼) 그들의 목을 발로 밟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죽이도록 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다윗을 미워한 자들과 하나님의 이스라엘을 대적했던 자들은 환난 가운데서 주님께 부르짖었을지라도 소용이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대답하지 않으셨다. 그들이 싸우는 대상자가 하나님일 때 어떻게 그들이 그의 대답을 기대할 수 있었겠는가? 그리고 하나님이 그들을 인정하지 않으셨을 때(그는 그의 백성들을 대적해 행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렇게 하실 것이다) 어떤 도움도 없었으며, 하나님은 그들의 편이 될 수 없었다. “저희를 구원할 자가 없었나이다”(41절). 하나님이 버리신 자들은 쉽게 격파당한다. “내가 저희를 바람 앞의 티끌같이 부숴뜨렸다”(42절). 그러나 그는 뜻이 의로운 자를 위해 복수하시며(47절), 그가 총애하는 자들을 위해서 “그들을 대적하는 자의 위에 그들을 드신다”(48절).

8. 하나님은 그를 보좌로 들어올리셨다. 그리고 그를 건지시고 살아 있도록 해주셨을 뿐만 아니라, 그를 장엄하고 위대하게 하셨다(35절). “주의 온유함이 나를 크게 하셨나이다.” “주의 온유함”을 주의 “교훈”과 “훈계”로 풀이하는 사람도 있다. 다윗은 환난 가운데서 배운 훌륭한 교훈으로 인해 그에게 예정된 권위와 능력에 대한 준비를 갖출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위축은 그를 크게 하는 데 매우 큰 도움이 되었다. 하나님은 그를 위대한 정복자인 동시에 위대한 통치자로 만드셨다. “주께서 나를 열방의 으뜸을 삼으셨나이다”(43절). 모든 이웃나라들이 그에게 조공을 바치는 나라가 된 것이다(삼하 8:6 참조).

9. 이 모든 일에 있어서 다윗은 그리스도의 모형이었다. 즉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리스도를 흑암의 권세와의 싸움으로부터 안전하게 건지셨고, 그들을 이기게 하셨으며, 그의 몸인 교회의 모든 일에 대한 우두머리가 되도록 만드셨던 것이다.

Ⅱ. 다윗은 겸손하고 경건한 숭배심을 품고 하나님의 영광과 완전함을 우러러보고 있다. 하나님께서 섭리로 그를 존대케 하셨을 때, 그는 찬미로써 하나님을 존대케 하려고 노력했다. 즉 그를 찬송하며 높이고자 했다(46절). 다윗이 영화롭게 하는 하나님은 다음과 같은 하나님이시다.

1. 살아 계신 하나님. “여호와는 생존하시니이다”(46절). 우리는 스스로 생명을 갖고 계시므로 살아 계신 하나님이라 불리기에 합당하신 바로 그 하나님으로부터 최초로 우리의 생명을 얻었으며, 우리의 생명이 지속되는 것은 그의 덕분이다. 반면에 열방의 신들은 죽은 신들이다. 사람들 가운데 있는 우리의 가장 좋은 친구들도 죽어가고 있는 친구들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살아 계시고 영원히 살아 계시며, 그를 의지하는 자들을 결코 버리지 않으실 것이다. 그리고 그가 살아 계시므로 그들도 또한 살 것이다. 그는 그들의 생명이시기 때문이다.

2. 필역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도”는 그 자신과 마찬가지로 “완전하시다”(30절). 그는 그가 시작하신 것을 창조와 마찬가지로 섭리 속에서 이루시고 완전케 하시는 하나님이시며, “여호와”라는 이름으로 알려지셨다(창 2:1). 다윗의 길을 완전케 하신 자가 하나님이라면(32절), 그 자신의 길은 더욱 완전하다. 하나님의 일에는 부족함이 없고, 또는 그의 행하시는 것에는 과실을 찾아볼 수 없다(전 3:14). 그리고 그가 시도하신 일은 그 길에 어떤 난관이 놓여 있든지간에 완전히 이루실 것이다. 하나님은 세우기 시작한 것을 마치실 수 있다.

3. 성실한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은 시험된다.” “내가 그것을 시험해 보았으나 그것은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습니다”(하고 다윗은 말하고 있다). 모든 세대의 모든 성도들이 그 말씀을 시험해 보았으나, 여호와의 말씀은 의지하는 자를 결코 버리지 않았다. 그것은 은이 정련되듯 시험되고 있으며, 사람의 말의 가치를 저하시키는 모든 혼합물과 불순물로부터 정제되고 있다. 다윗은 그에 관한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그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이행되는 것을 주시하고 있는데, 그것은 섭리를 아름답게 할 뿐 아니라, 그 약속을 영예롭게 하고 있다.

4. 자기 백성들의 보호자와 방어자이신 하나님. 다윗은 자신에게도 하나님께서 보호자와 방어자가 되심을 발견했다. “그는 내 구원의 하나님이로다(46절). 그의 능력과 은혜에 의해 나는 존재하고 있으며, 또 그것에 의해 구원되기를 바라고 있다. 그러나 나만을 구원해 주시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자기에게 피하는 모든 자의 방패시로다(30절). 즉 그는 그들 모두를 숨기시고 보호하시며, 그들 모두에게 그렇게 하실 능력이 있으시고, 또 준비되어 있으시다.”

5. 이런 모든 것에서 유일하신 하나님은 하나이시니, “여호와 외에 누가 하나님이뇨?”(31절) 그 하나님은 그의 성실한 숭배자들의 도움과 은신처가 되는 반석이시다. 그리고 “우리 하나님 외에 누가 반석이뇨?” 이처럼 그는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렸을 뿐만 아니라, 그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격려하고 있다. 여기에서 다음에 유의하자.

(1) 누군가가 신을 가장하더라도 여호와 외에 하나님이 없는 것은 분명하다. 다른 모든 신들은 위조자다(사 44:8; 렘 10:10).

(2) 누군가가 우리의 지복이 되는 것처럼 가장할지라도 우리 하나님 외에는 반석은 없다. 우리를 행복하게 하기 위해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은 그 이외에 아무도 없다.

Ⅲ. 다윗은 하나님께서 계속 그에게 유익을 행하시리라는 믿음의 소망을 갖고 앞을 내다보고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은 것을 기대하고 있다.

1. 그의 대적들은 완전히 진압될 것이며, 아직 남아 있는 자들도 그의 발등상이 될 것이다. 즉 그의 통치는 광대할 것이다. 그리하여 그가 알지 못하는 백성들까지도 그를 섬길 것이다(43절). 또한 그의 승리, 결과적으로 그의 획득은 쉬울 것이며(“저희가 내 품성을 들은 즉시로 내게 순복함이며”, 44절), 그의 대적들은 그에게 대항함이 아무 소용도 없음을 깨달을 것이다. 자기의 요새로 도망친 자들은 그 요새까지도 신뢰할 수 없게 되며, 그처럼 커다란 다윗의 지혜와 용기와 성공을 보고 은밀한 곳에 숨어서도 두려워할 것이다. 그리하여 다윗의 자손은 만물이 그 아래 굴복하는 것을 보지 못할지라도 모든 대항하는 법칙, 원리, 그리고 권세가 완전히 전멸될 때까지 그가 통치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2. 그의 후손은 메시야 안에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 그는 메시야가 그에게서 나오리라는 것을 예견하고 있다(50절). 하나님께서는 “기름부음 받은 자에게”, 메시야에게, 야곱의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의 모형인 “다윗 자신과 그 후손에게, 영영토록 인자를 베푸셨다.” “그는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갈 3:16).

영원히 다스리실 자는 오직 그리스도뿐이다. 그리고 그의 통치와 평강은 끝이 없이 커질 것이다. 그리스도는 “다윗”이라 불리고 있다(호 3:5).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를 “그의 왕”이라 부르셨다(2:6). 하나님은 그에게, 그리고 여기에서 “그의 후손”이라 불리고 있는 그의 교회와 백성들에게 “영영토록” 구원을 주시고 또 주실 것이다.

이 구절들을 노래함에 우리는 지금까지의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의 승리에 대한 영광과, 복음 나라의 구원과 발전에 대한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야 한다. 그리고 교회의 군병들이 곧 승리하리라는, 영원히 승리하리라는 확신으로써 우리 자신과 서로를 격려해야 한다.

========[빌447]=====

*4.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5.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6.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8.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9.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Rejoice in the Lord always; again I will say, rejoice!

Let your gentle spirit be known to all men. The Lord is near.

Be anxious for nothing, but in everything by prayer and supplication with thanksgiving let your requests be made known to God. 

And the peace of God, which surpasses all comprehension, will guard your hearts and your minds in Christ Jes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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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ivrw(5463, 카이로) 기뻐하다 be glad, 즐거워 하다 rejoice. [[기뻐하다]]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동사 카이로(Homer이래로)는 '기뻐하다, 즐거워 하다'를 의미하며, 어떤 사람이나 사물에 대해 기뻐하는 것을 나타낸다. 현재 명령법은 인사말로 자주 나타난다. 즉 카이레(단수)와 카이레테(복수)는 "안녕하십니까?" "안녕히" Hail!라는 인사말로 사용되었다. 카이레는 무엇보다 신들에게 대한 인사말로 사용되었다. 서신의 서두에서 부정사 형태인 카이레인이 가끔 사용되기도 하는데, 이 경우에는 동사 레게이가 보충되어야 한다(참조: Funk § 480). 즉 "…문안을 [드리다]"([…says] greetings!). 똑같은 관용 어구가 축배를 들 때도 사용되며(즉, "건강을 빌면서!" good health!) 헤어질 때도 사용된다(즉 "안녕히 계십시오[가십시오]!" Farewell!).

2. 70인역본의 용법 

카이로는 70인역본에서 약 80여회 나오며, 주로 '기뻐하다, 기쁘다'를 뜻하는 길, 사마흐, 시스와 '기쁨, 즐거움'을 뜻하는 사메아흐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며, 그러한 의미를 나타낸다.

3. 신약성경의 용법 

카이로는 신약성경에 74회 나오며, 이 동사와 명사 카라(carav, 5479)는 특히, 그리스도를 통한 종말론적 완성 및 그리스도 안에 존재함과 그리스도 안의 소망을 언급한 곳에 현저히 나타난다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선포인 신약성경 메시지 전체가 기쁨의 메시지(→복음 Gospel)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a)  카이로는 인사말로 사용되었다. 부정사 카이레인을 써서 인사한 경우는 행 15:23; 행 23:26; 약 1:1의 편지의 서두에서만 나타난다. 요이 1:10에서 신자들은 이단에 속한 자들에게 카이레인을 하지 말라고 한다: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

여기서 수신자들은 이단 교리를 전하는 자들의 악한 행위에 완전히 연루되지 않도록, 그들을 영접하지도 인사하지도 말라는 경고를 받고 있다.

마 28:9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친숙한 일상적 인사말 카이레테를 사용하여 제자들에게 자신을 알리고 있다: "예수께서 저희를 만나 가라사대 평안하뇨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마 26:49에서 배반자 유다는 예수님께 인사했다: "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하고 입을 맞추니".

안녕과 행복을 소원하는 그 인사의 이면에는 무서운 음모를 감추고 있다.

마 27:29에서는 예수님께 대하여 유대인의 왕(이스라엘)이라고 조롱적 인사를 던지고 있다: "가시 면류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 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가로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그들이 이렇게 인사하지만, 그러나 그들이 전혀 알지 못하고 그 말을 하였으나, 주님이 당연히 받으셔야 할 인사였으니만큼, 그 속에는 하나의 반어적(反語的) 의미가 숨겨져 있다고 볼 수 있다.

눅 1:28에서 마리아는 카이레 그 자체보다는, 오히려 잇따른 메시지에 놀랐다.

(b)  공관복음서에서 예수님의 오심과 사역은 기쁨을 가져왔다. 카이로는 잃어 버린 것을 찾았을 때(눅 15:5이하; 마 18:13), 자기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알았을 때(눅 10:20), 구세주의 선구자가 났을 때(눅 1:14), 그의 탄생의 별을 보았을 때(마 2:10),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에(눅 13:17; 눅 19:6), 기뻐하는 것을 표현한다.

눅 19:37이하(참조: 눅 18:43)에서 예수님께서 입성할 때의 사람들의 분위기는 예수님의 승천 후에 제자들의 분위기처럼 기쁨의 분위기였다: "이미 감람 산에서 내려가는 편까지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의 본 바 모든 능한 일을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가로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마 5:12에서 하나님의 백성은 핍박을 받을 때도 기뻐해야 한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예수님이 하나의 공격의 대상이 되고, 그를 뒤따르는 자들의 길이 고난과 핍박에 이르게 된다 할지라도, 기쁨에 찬 구원의 확신은 상실되지 않아야 한다(눅 6:23).

눅 22:5에서 유다가 당국자들과 예수님을 넘겨 주기로 합의했을 때 그들이 기뻐했다: "저희가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언약하는지라".

눅 23:8에서 수난의 때에 헤롯이 예수님을 만나보고 기뻐했다: "헤롯이 예수를 보고 심히 기뻐하니 이는 그의 소문을 들었으므로 보고자 한 지 오래였고 또한 무엇이나 이적 행하심을 볼까 바랐던 연고러라".

(c)  사도행전에서는 교회의 불가항력적, 전세계적 확장에 대한 기쁨이 반복적으로 표현된다. 먼저 그리스도를 위해 능욕과 핍박을 받음에 대한 사도 Apostle들의 기쁨이 있다(행 5:41; 마 5:11이하). 박해가 복음의 승리적 진행을 정지시킬 수 없다. 이방인을 끌어 모은데 대한 기쁨도 있다(행 11:23; 행 13:48; 행 15:3). 복음이 이방인에게 전파되고, 그들이 세례(침례)를 받았을 때, 거기에 해당된 사람들은 크게 기뻐하였다(행 8:8, 행 8:39; 행 15:31).

(d)  요한의 기록에서 중요한 것은 충만한 기쁨이다. 요 3;29에서 세례(침례) 요한은, "신랑" 즉 약속된 하늘의 진리의 계시자로 인하여 지금 기쁨이 충만해 있다(참조: 마 9:14이하, 병행구, 막 2:18이하; 눅 5:33이하). 종말론적 시간은 이미 도래하였다. 요 4:35 전후 문맥을 보면 이 때는 계속적인 파종과 수확기가 병존하는 시기이고(요 4:35이하), 예수님께서는 자기에게 주어진 사역을 이미 성취하고 계신다(요 4:34). 요 8:56에 보면, 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아브라함도, 수확이 시작되는 이 때를 보며 즐거워 하는 일에 동참하였다. 여기에서 카이로는 기다리는 기쁨이고 아갈라오마이는 성취된 기쁨이다.

요 16:20이하에서 예수님께서는 자기의 죽음을 자기의 제자들이 기뻐해야 한다고 설명하신다. 왜냐하면 죽음은 승리요 발전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슬픔을 책망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부활이 그 슬픔을 기쁨으로 어떻게 바꾸게 될 것인지를 보여준다. 요 14:27이하에서 기쁨을 평화와 연결시키는 것은 기쁨의 종말론적인 성격을 만들어 낸다.

요 11:15에서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 때 거기 있지 않은 것을 기뻐하셨다. 그 이유를 설명하신다: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하신대".

요이 1:4; 요삼 1:3에서 사도 요한은 믿음의 형제들이 진리 안에서 행하는 것을 기뻐했다.

계 11:10에서 카이로는 악한 즐거움을 나타낸다: "이 두 선지자가 땅에 거하는 자들을 괴롭게 한 고로 땅에 거하는 자들이 저희의 죽음을 즐거워하고 기뻐하여 서로 예물을 보내리라 하더라".

계 19:7에서 성도들은 어린 양의 혼인 잔치의 때가 되었기 때문에 즐거워 한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e)  바울 서신들은 기독교인의 기쁨은 슬픔과 고통과 근심 가운데서만이 얻을 수 있다는 역설적 의미를 증거하고 있다. 진실로 이와 같은 사실은 이 기쁨의 능력을 확실히 증명해 주는 것이다.

① 이러한 기쁨의 원천은 단순한 지상적, 인간적 기쁨 너머에 있다. 그것은 주 안에 있는 기쁨이며, 따라서 우리의 외부에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바울은 그의 독자들에게 계속하여 기쁨의 존재를 상기시켜 주고, 그 기쁨을 표현하라고 권면하고 있다(빌 3:1; 빌 4:4; 빌 4:10; 롬 12:12; 고후 6:10).

빌 1:15이하; 빌 1:18에서 바울은 동기에 상관하지 않고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기뻐하였다: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그러면 무엇이뇨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바울은 놀라운 비이기적 자세를 유지했다. 그는 어떤 자들이 그들 자신의 명성을 얻기 위해 전파하고 있는 것을 알았으나 이 전도자들의 동기에 상관없이 복음이 전파되고 있는 것을 기뻐하였다. 믿음과 그것의 결과적 기쁨이 우리 자신으로부터 나오지 않기 때문에, 좋지 못한 동기에 의해 그리스도가 전파된 때 조차도, 바울은 확신과 기쁨을 지닐 수가 있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은혜로운 사역을 행해야 한다는 것이며 또한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공유해야 한다는 사실이다(빌 1:15-18).

② 고린도후서에서 바울은 기쁨을 들립시스(고통, 고난, 박해, 환난)와 직접적으로 대조시키고 있다.

바울이 편지를 기록할 때, 들립시스를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고후 2:4), 엔 퀴리오, 즉 "주 안에" 있는 기쁨인(빌 3:1) 자기의 기쁨을 모두가 함께 나눠 갖도록 하기 위해(고후 2:3) 썼다고 하였다. 고린도인들의 삶은 수동적 자포자기 상태 또는 사망을 낳는 세상 근심(고후 7:9이하)에 의해서가 아니라, 순결한 믿음의 기쁨에 의해 지배를 받아야 했다. 바울은 그들을 이전에 엄히 책망했었으나, 그의 권면이 결국 유익한 효과를 가져왔기 때문에 그들에 대하여 다시 안심하게 되었다(고후 7:13).

③ 바울은 빌립보서를 쓸 때 감옥에 있었다. 당시에는 아직 자기의 재판의 결과를 알 수 없었고, 분명히 외로움을 느끼었을 것이다(빌 2:20이하). 그리고 충성스런 복음 전파도 위기에 빠져 있었을 것이다(빌 1:15이하; 빌 2:21). 또 다시 들립시스가 있었으며(골 1:24), 이것이 근심의 원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와 계속적인 기쁨의 근거 역시 있었다. 즉 그것은 빌립보인들이 복음에 참여함으로 인한 감사(빌 1:5)와 그리스도가 계속 전파됨으로 인한 기쁨이었다(빌 1:18). 그리스도와 복음에 의해 속박을 당한 바울은 그의 독자들에게, 자기와 함께 기뻐하라고(빌 2;17이하), 또 염려를 버리라고(빌 4:6), 나아가서는 성령의 교제 안에서 한 마음을 품으라고 권면하고 있다. 비록 바울에게 근심할 수 밖에 없는 까닭이 있고, 그가 곧 죽게 된다 할지라도, 그리스도가 그의 몸에서 존귀하게 되는 한(빌 1:20), 그게 무슨 상관이 있으리오!

이처럼 빌립보서의 기쁨은 계속적이고 "도전적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릎쓰는" 기쁨이다(K.Barth).(참조: 빌 2:17; 빌 4:4). 이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힘은 그 자체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모든 것을 하나님께 아뢰는, 지칠 줄 모르는 기도를 통해 생성된다(빌 4:6; 참조: 살전 5:16; 골 1:11). 그것은 복음의 세계적 확산에서(살전 3:9; 골 2:5), 그리고 복음을 전한 교회들의 왕성한 성장에게 그 힘을 얻는다(빌 4:10; 참조: 살전 2:20;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것은 주 안에서의 기쁨이다(빌 4:4).

④ 벧전 4:13에서 카이로는 고난과 영광에 관련되어 나타난다: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그리고 롬 12:15에서 관용은 우리에게, 우리 자신으로부터의 여유를 가질 수 있도록 해줌으로써 타인들을 긍휼히 여길 수 있게 해 준다. 다른 한편 고전 7:30; 고후 6:10에서 카이로는 우리에게, 현재의 기쁨과 슬픔은 이 생(生)에만 속할 뿐이며 우리의 궁극적 몫은 아니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준다.  (참조: H.Conzelmann; E.Beyreuther; G.Finkenra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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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jpieikhv"(1933, 에피에이케스) [관용하는]온순한, 온화한, 순한, 온유한, 친절한, 참을성 있는, 관용하는.

1. 고전 헬라어 문헌 

형용사 에피에이케스와 명사 에피에이케이아는 에이코스(알맞는, 어울리는, 적절한, 온당한)에서 유래하였거나 아니면 에이코(굴복하다, 양보하다)에서 유래하였을 것이며,호머 시대 이래로 '온당한 알맞는 생활방식'이라는 의미로, 투키디데스 이래로 '관용, 인내, 온유'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에피에이케스 및 그 어군의 단어들은 본래 제멋대로 방자한 태도와는 대조적으로 균형 잡히고, 지성적이며 잘 어울리는 외모를 표현하는 데에 사용되는 말이었다. 후에 그것은 법률의 적용에 있어서 어떠한 희생이 있더라도 자기 자신의 공민권을 포함한 모든 공민권이 단호히 확립되어야 한다는 태도와는 대조적으로, 정의의 엄격성을 그 법률적 표현 및 제권리와 함께 융통성 있게 할 용의가 있는, 인정 있고 사려 깊은 태도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게 되었다.

이 에피에이케스 단어군과 프라위스(prau?", 4239) 단어군의 개념, 이 개념은 모두 억제되지 않는 분노, 가혹함, 야수성 그리고 이기심과 반대된다. 이 개념은 고상한 마음을 가진 사람, 즉 모욕을 받고도 화를 내지 않는 현인, 재판에 임하여 인정 많은 재판관,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서 자비로운 왕 등이 지닌 성격의 특징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이 단어들은 이상적 통치자에 관한 묘사나 고위직에 있는 사람에 대한 찬사 속에 자주 등장한다.

헬라 및 헬라 철학에서 이 개념은 높은 가치를 지닌 사회적 미덕이자 이상을 표현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개념을 정열과 무감정의 양극단 사이에 있는 복된 중용의 덕이라고 생각하였다(F.Hauck/S.Schulz).

2. 70인역본의 용법 

70인역본에서 명사 에피에이케이아는 l0회 등장하며, 에피에이케스 및 그 형용사형은 6회 등장한다. 이 단어들은 세상 통치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자비심(삼상 12:22; 시 86:5; 지혜서 12:18)과 왕의 행동(마카베오이서 9:27), 선지자(왕하 6:3) 및 경건한 자(지혜서 2:19)의 행동을 묘사하는데 사용되었다.

3. 신약성경의 용법 

신약성경에서 에피에이케스는 5회 나오며, 에피에이케이아는 2회 나온다. 약 3:17에서 에피에이케스는 위로부터 난 지혜의 목록에 나타난다: 에피에이케스는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이 함께 살 때 지켜야 할 규칙을 표현한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빌 4:5), "범사에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낼 것을 기억하게 하라"(딛 3:2). 딤전 3:3에서는 특히 감독들의 자질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감독은…오직 관용하며". 벧전 2:18에서 에피에이케스는 종들의 주인에게 적용되었다: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복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고후 1O:1에서 바울은 프라위테스와 에피에이케이아를 예수님께서 지상에 계실 동안 사람에게 보여주셨던 태도의 특징으로 언급하면서, 그것을 본받아야 할 모범으로 교회에 제시한다: "너희를 대하여 대면하면 겸비하고 떠나 있으면 담대한 나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친히 너희를 권하고".

에피에이케이아는 기독교인에게 요구되는 태도를 표현하지만,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에게도 적용된다. 행 24:4에서 에피에이케이아는 총독 벨릭스 앞에서 유대인 변사 더둘로가 바울을 고소하는 연설을 할 때 사용되었다: "당신을 더 괴롭게 아니하려 하여 우리가 대강 여짜옵나니 관용하여 들으시기를 원하나이다".(참조: F.Hauck/S.Schulz; W.Bauder).→ prau?", 4239 프라위스.  → prau?th", 4240 프라위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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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nwvskw(1097, 기노스코) 알다 know, 이해하다 understand.[[알다, 이해하다]]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동사 기노스코(Homer 이래)는 기본 어근 그노(gnw)에서 형성된 단어이며, 다음의 의미를 지닌다.

(a)  이 단어는 기본적으로 사물이나 사람 또는 상황을 감각으로, 특히 시각으로 '알아차리다, 지각하다, 인식하다'를 의미한다. 호머(Homer, Od.)애서 보는 것과 기노스코는 서로 연관되어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경험의 세계에서 그렇게 인지되었던 것을 마음 속에 지적으로 정리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이 단어는 또한 '경험하다, 배우다, 알게 되다'를 의미한다. 즉 경험된 것이 그것을 경험한 사람에게 알려진다.

(b)  이 단어는 '구별하다' distinguish를 의미한다. 그 유사한 것이나 서로 다른 것들 사이에 있는 어떤 현상에 대한 경험이나 인지가 이런 일을 유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Homer, Il).

(c)  이 단어는 '인격적으로 알다'(Heracl., Frag.), '이해하다'(Homer, Od.), '알다'(친밀함이 인격적 지식을 가져온다). '~와 알고 지내다, ~와 친하다, 숙달되다, 노련하다'(Plato, Rep.)를 의미한다.

(d)  이 단어는 '결정하다, 판단하다'(Democr. Fr., Demosth).

(e)  형사 법원이나 민사 법원의 판결은 주어진 사실의 비중에 의거하여 내려지기 때문에 이 판결들은 기노스코의 수동형으로 표현되어 '재판을 받다, 판결을 받다'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f)  이 단어는 "아는 사이나 친밀하다'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육체적으로) '알다', 즉 '~와 성적인 관계를 가지다'라는 헬라 용법이 여기에서 유래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아마도 이 용법의 배후에는 헬라어 아닌 다른 언어에서 차용한 단어의 용법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단어의 어근이 라틴어 기그네레([아이를]  낳다)와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이 지적되어 왔다(참조: H. Leisgang, Die Gnosis).

(g)  이 단어는 '확인하다, 입증하다, 확증하다'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철학적 지식의 목적은 보는 것인데 이는 일시적이고 가변적인 이 세상의 현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눈을 통해서만 볼 수 있는 영원하고도 실질적인 것을 보는 것이다. 이 확인은 원래 관찰로 말미암는다.

이러한 맥락에서 기노스코는 '통찰력을 얻다, 알아차리다'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이러한 통찰력의 대상은 궁극적으로 종교의 영역에 속할 것이다(Herach., Frag. 5).(참조: E. D. Schmitz; Bultmann).

2. 70인역본의 용법. 

동사 기노스코는 70인역본에서 약 800회 이상 나오며, 히브리어 야다(알다)와 그 어형들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며, 라아(보다), 하자(보다), 샤마(듣다) 등 13개 단어의 역어로도 사용되었다. 헬라의 일반적인 태도와 마찬가지로 구약성경에서도 지식은 감각을 통해서 획득된다. 이미 알려진 것은 감각으로 나타나야 하며 그 자체는 그렇게 알려지게 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듣는 것(듣다)과 보는 것(보다)에 관한 동사가 아는 것에 관한 동사와 병행되어 나오는 것을 보게 된다(예: 출 16:6 이하; 신 33:9; 삼상 14:38; 사 41:20). 이것으로 우리는 70인역본이 라아(삿 2:7)와 하자(사 26:11)와 샤마(느 4:15)의 역어로 기노스코를 사용한 이유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헬라와 히브리 사상에서 아는 것에 관한 개념들은 대체로 일치하며 이 두 경우에 감각을 통하여 얻는 경험이 기본적인 것이다.

(a)  70인역본에서 야다/ 기노스코는 '알아채다, 인지하다, 경험하다, 관찰하다'를 의미한다(예: 창 3:7; 창 41:31; 삿 16:20; 전 8:5; 사 47:8; 호 5:3).

(b)  야다/ 기노스코는 '구별하다' distinguish를 의미한다. "선악을 아는 것"(창 3:5; 창 3:22)은 하나님께 불순종한 결과이다. 좋고 흉한 것을 구별하는 것은 필요하다(삼상 19:36). 어린 아이는 왼손과 오른손을 구별하지 못하며(욘 4:11) 또 선과 악도 구별하지 못한다(사 7:15). 후자의 구절의 문맥과 사 8:4에 나오는 이와 비슷한 언명은 이 언급이, 어린 아이는 유익한 것과 해로운 것을 구별할 줄 모른다는 것에 관한 것이라는 점을 시사해 주는 것 같다.

좋고 흉한 것, 좌우와 같은 것에 대해 관찰하는 것은 결국 그것들을 구별하는 것이 된다.

(c)  야다/ 기노스코는 '배워서 알다' know by learning라는 의미를 지닌다(잠 30:3).

(d)  이 분사는 사냥(창 25:27), 학문(사 29:11-13), 애곡(암 5:16), 바다를 항해하는 일(대하 8:18), 그리고 악기를 연주하는 일(삼상 16:16)에 능함을 묘사하는 어구에 나온다.

(e)  야다/ 기노스코는 어떤 사람을 '아는 것'을 표현한다. 어떤 사람을 아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었다(창 29:5; 출 1:8; 삼하 3:25). 푸알 분사형은 '친척'(왕하 10:11 등)과 '아는 사람'(욥 19:14; 룻 2:1 등)을 지칭한다.

(f)  야다/ 기노스코는 '관계하다, 관심을 가지다'(시 1:6; 시 37:18; 시 119:79), '~와 관계를 맺고 싶다'(예: 신 33:9). 신학적인 문맥에서 자주 이 단어가 적절한 지식을 얻지 못해서 결국 관심의 결여를 초래하고 마는 것에 대한 문제로 나온다(예: 렘 8:7; 시 95:10).

(g)  야다/ 기노스코는 '성적 관계를 가지다'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를 알았다"고 하는 유명한 완곡 어법과 그 병행구들(창 4:1; 창 19:8; 민 31:17; 민 31:35; 삿 11:39; 삿 21:11; 왕상 1:4; 삼상 1:19)에서 남녀 쌍방의 성적인 관계를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이 단어는 남색(창 19:5; 삿 19:22)이나 강간(삿 19:25)과 같은 성적 도착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h)  야다/ 기노스코는 '다른 사람과 인격적이며 친숙한 관계를 맺다'를 의미한다. 하나님은 이름으로, 대면하여 모세를 아신다(출 33:17; 신 34:10). 하나님께서 어떤 개인이나(렘 1:5) 어떤 민족을(암 3:2) 아실 때 하나님께서 그를 선정하시거나 선택하신다(참조: 민 16:5 70인역본). 선택으로 이해되는 이 지식은 은혜롭고 자애로운 것이지만 이것은 인격적인 응답을 요구한다.

(i)  야다/ 기노스코는 일반적인 문제에 대한 지식 외에도, 다른 신들을 아는 것이든(신 13:3; 신 13:7; 신 13:14) 여호와를 아는 것이든(삼상 2:12; 삼상 3:7) 간에, 신에 대한 인간의 관계에 대해 사용되었다. 이방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며(렘 10:25) 선지자들에 의하면, 이스라엘도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렘 4:22). 애굽의 재앙은 여호와가 하나님이심을 애굽인들이 알도록 하기 위해 보내졌다(출 10:2 등). 그는 그가 하나님이심을 이스라엘인들이 알도록 하기 위해(사 60:16) 그들을 파멸시키시고(겔 6:7) 회복시키실 것이다. 특히 선지자 에스겔은 위협할 때,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는 어구를 사용한다(겔 6:7; 겔 6:10; 겔 6:13; 겔 6:14; 겔 7:4; 겔 7:9;겔 7:27 등).

(j)  요약하면 희랍인들이 초연한 지식을 갖고 있으며 또한 사물의 형이상학적 본질에 사변적인 관심을 갖고 있었는데 반해, 구약성경은 지식을 끊임없이 인격적인 만남에서 생겨나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구약성경이 하나님과 창조에 관해서 언급한 것을 보고서, 우리가 이 언급들을 존재론적 추론으로 여겨서는 안되고 하나님의 계시에 응답하는 믿음의 선포로 간주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역사적 과거와 약속된 미래 즉 하나님의 피조물들이 존재하고 있는 이 지상의 영역 속에서의 하나님의 계시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끊임없이 과거와 현재와 미래 속에서의 하나님의 계시를 찾았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예배와 행동 가운데서 하나님의 목적과 요구를 식별할 수 있었던 것이다.(참조: E. D. Schmitz; Bultmann).

3. 신약성경의 용법. 

동사 기노스코는 신약성경에서 221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신약성경에서 기노스코의 용법은 헬라의 용법과 구약성경의 용법과 매우 유사하다.

(a)  '느끼다, 간파하다'(막 5:29; 눅 8:46), 

(b)  '주목하다, 알아 차리다'(막 8:17; 막 12:12; 마 26:10; 고후 2:4; 요 5:42; 요 8:27),

(c)  '인정하다, 인지하다' recognize(눅 7:39; 마 12:15; 마 22:18; 갈 3:7; 약 2:20; 요 4:1; 요 5:6; 요 6:15), 

(d)  '듣다, (들어서)알다'(막 5:43; 막 15:45; 눅 9:11; 행 17:13; 행 17:19; 빌 1:12; 빌 2:19; 요 11:57; 요 12:9; 마 10:26과 병행구; 행 9:24; 빌 4:5). 

(e)  '확증하다, 확실히 하다, 확인하다' confirm(막 6:38; 막 13:28 이하; 눅 1:18; 고전 4:19; 고후 13:6; 요 4:53; 요 7:51). 

(f)  ① 알아채고 있다(의식)라는 의미에서 '알다' know(마 24:50와 병행구; 눅 2:43; 눅 16:4; 히 10:34; 계 3:3; 요 2:24 이하; 요 7:27; 요일 3:20).

② 또한 익히 앎이나 아는 사이라는 의미에서 '알다'(마 25:24; 눅 12:47 이하; 눅 16:15; 행 1:7; 롬 2:18; 롬 7:1; 고전 5:16; 요 1:48; 요 7:49).

③ 그리고 이해라는 의미에서 '알다'(눅 18:34; 행 8:30; 고전 14:9; 요 3:10). 

(g)  '구별하다, 분별하다' distinguish를 의미한다.

고전 14:7, "혹 저나 거문고와 같이 생명 없는 것이 소리를 낼 때에 그 음의 분별을 내지 아니하면 저 부는 것인지 거문고 타는 것인지 어찌 알게 되리요". 

(h)  '~하는 방법을 알다' know how to.

마 16:3,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천기는 분별할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i)  경험을 통하여 '알다, 깨닫다' find out(요 13:58; 요 15:18; 요 19:4; 요일 2:3; 요일 2:5). 

(j)  '~와 관계를 맺다'

① 마 1:25; 눅 1:34에서 성적인 관계에 대해 사용되었다.

② 마 7:23에서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라는 말씀은 '나는 너희와 전혀 관계를 맺지 않았다'라는 의미이다.

③ 고후 5:21에서 예수님은 "죄를 알지도 못하신다"라고 하셨는데 이것은 그가 죄에 대해 지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께서 죄와 인격적인 관계를 맺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이란 선언이 범죄 행위와 반어법을 나타내주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④ 롬 7:7에서도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라는 문구는 '율법이 없었다면 인간인 나는 죄와 본질적인 관계가 없었을 것이다'라고 의역할 수 있다.

⑤ 고후 5:16에서 '~와 관계가 있다, ~와 관계를 맺다, 개인적으로 알다'를 나타낸다. 이 구절의 의미는 많은 논쟁의 주제가 된다. 상반절에는 오이다멘("우리가 아노니")이 나오며, 하반절에는 기노스코가 에그노카멘("우리가 알았노니")과 기노스코멘("우리가 아노니")의 형태로 나온다. 

(k)  고전 5:11-21에서 바울은 자기를 개인적으로 공격하며 사도직을 공격하는 적대자들과의 논쟁에 관련되어 있다. 그들은 바울에게는 사도라고 확증할만한 눈에 보이는 영적인 특성, 예를 들면 무아지경의 현상들이 결여되어 있다고 주장했다(고전 5:13). 그들은 그를 자기 자신만을 칭찬하는 '허풍선이'라고 비난했던 것 같다. 바울은 고전 5:11("우리가 ... 사람을 권하노니")과 고전 5:12("우리가 ... 자천하는 것이 아니요")에서 그것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 듯하다. 바울의 변호 중에는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시고, 그래서 상상된, 눈에 보이는 영적인 특성을 가진 사람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이 죽었다"고 하는 언급도 부분적으로 들어있다(고전 5:14 이하). 그래서 바울은 자기가 본 성령과 능력의 분명한 증거에 따라서 지금부터-모든 가치의 전도, 즉 시대의 전환점을 의미하는 그리스도와 관련된 사건 이후로-"우리가 ...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못하노니"라고 말한다. 우리는 이것을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결과로 이해해야 한다(고전 5:14). 이것이 얼마나 명백한 것인가를 나타내기 위해 바울은 모든 사람이 분명히 알 수 있는 언명을 고전 5:16 하반절에 삽입하고 있다: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다시 말하자면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계셨던 것과 마찬가지로 눈에 보이는 그리스도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즉 그와 그렇게 관계하지 않고 오직 우리가 섬기는, 눈에 보이지 않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와만 관계한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에, 그는 모든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 주이시며, 그가 주님이시라는 것은 외면상으로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사도 바울과 사도라고 하는 그의 주장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던 것 외의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외적인 판단과 일반적으로 눈으로 볼 수 있는 기준에 예속되어 있지 않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오직 새로운 피조물만이 가치가 있는 것이다. 외적 현상에 의한(엔 프로소포, 고전 5:12) 판단을 포함하여 이전 것은 지나가고 "새 것이 되었도다"(고전 5:17). 이 논쟁에 비추어 볼 때, 바울이 고후 5:16에서 그가 지상의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알았다는 것을 확증하지도 부정하지도 않는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마찬가지로 바울에게 있어서 이것은 역사적 예수님의 의미와 관계를 띠고 있지 않은 것이다. 

(l)  기노스코는 '인정하다, 알아주다'를 의미한다.

① 고전 4:19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그가 갈 때 교만한 자의 말이나 그들의 능력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고, 즉 중요시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② 계 3:9에서 빌라델비아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높임을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이(이방인?) 기독 교회에 와 보면 부활하신 이가 그들을 사랑하심을 인정하게 되리라고 약속하셨다(계 2:23). 이렇게 하심으로서 그는 유대인의 종말론적 소망을 뒤짚어 놓으셨다(참조: E. Lohmeyer).

③ 롬 7:1에서 "법을 아는", 롬 2:18; 행 22:14에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와 같은 문구들은 단순히 이론적인 지식을 암시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사람에게 개인적으로 적용되어 인간의 순종을 요구한다는 것에 대한 인지를 암시한다.

④ 요 7:29에서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라고 한 바리새인들의 말은 일반 백성들에 대한 잘 다듬어진 랍비 학자들의 비웃음을 반영해 주는 것이다(참조: SBⅡ 494-521). 이것은 일반 백성들이 실제로 율법을 알아 율법에 순종했다면, 그들은 예수님을 추종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이 내용을 기록하면서 요한은 여기서 율법이 바로 그들 자신을 지적하고 있음을 깨닫지 못하는 바리새인들에 대하여 무의식적으로 비꼬는 것이다(참조: 요 7:42; 요 5:29 이하; 요 11:49 이하). 요 7:51에서는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판결하느냐"고 반박하고 있다.

⑤ 롬 1:21에서 하나님을 알았던 자들의 생각이 허망하여졌다는 말은 헬라 사상의 견지에서 모순된 것으로 보였음에 틀림없다. 그들의 허망함은 하나님을 알지 못한 결과다(참조: 지혜서 13:1).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반드시 그에 합당한 찬미와 감사를 포함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거부한 이교도들은 이 지식을 단순한 지적인 활동으로 격하시켰으며 그들이 지혜라고 생각했던 것은 사실상 어리석음일 뿐이었다(롬 1:22 이하). 이교도들이 분명히 하나님을 알고 있었다하더라도, 그들이 하나님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그들은 핑계할 수 없게 되었다(갈 4:9; 요 1:10; 고전 1:21; 갈 4:8).

⑥ 엡 5:5; 약 1:3; 약 5:20 등에서 지식에 관한 명령과 권유는 이 은사를 붙잡아 변화하는 생활 상황에서 이것을 올바르게 사용하라는 요구인 것이다.

⑦ 눅 10:11에서 이스라엘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인정해야 한다. 행 2:36에서 "이스라엘의 집"은 오순절 사건에 비추어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하라는 요청을 받는다. 마 24:43의 비유에 나오는 명령문도 참조하라.

⑧ 고후 8:9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즉 "부요하게 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을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하게"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실제 행동으로 나타내는 것에 대해 언급한다. 우리는 이것을 리쯔만(Lietzmann)이 해석한 것처럼 단순히 그리스도께서 관대하심의 본이시다를 뜻하는 것으로 해석해서는 안된다(H. Lietzmann, An die Korinther). 

(m)  기노스코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시고 선택하시는 지식을 언급하는데 사용되었다.

-딤후 2:19(민 16:5을 인용함), "그러나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인침이 있어 일렀으되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하며 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찌어다 하였느니라".

-고전 8:3,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시는바 되었느니라".

-갈 4:9,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더러 하나님의 아신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노릇 하려 하느냐".

여기에서 하나님의 지식은 이방인과 유대인을 똑같이 받아들이시는 하나님의 모든 행동을 포함한다. 이 지식은 영원히 하나님의 피조물에게 유효한 것이며 죄와 불순종에 대한 승리이다. 롬 10:2은 이에 대한 일종의 상대 구절이다. 여기서 바울은 하나님을 위한 유대인의 열심을 인정하긴 하지만 이것이 카타 에피그노신("[참된] 지식을 좋은 것")은 아니다(참조: Arndt, 291). "이것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보다 깊이 통찰하지 못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 결핍되어 있는 지식은 하나님의 방법에 대한 지식과 인지이다"(E. Gaugher, Der Brief an die Romer). 

(n)  기노스코는 어떤 구절에서 신학적이고 이론적인 지식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① 마 13:11(참조: 막 4:11TR)은 오직 제자들에게만 허락된 "천국의 비밀"에 관한 감추어진 지식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이 지식이 그들을 그 외의 경우에는 사람들에게 감추어져 있는 비유의 권위 있는 해석가가 되게 했다.

롬 6:6에서는 신학적인 진리에 관한 지식, 예를 들면 세례에 관한 특별한 가르침에 대한 지식까지도 삶으로 나타내는 순종을 그 목적으로 삼고 있다. 이러한 지식의 명백한 목적은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에 있는 것이다.( R. Bultmann; E. D. Schmitz). 

※ 영지주의와 논쟁에서 나타난 용법 등.

신약성경 시대에는 자기들이 탁월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자랑하는 사람들이 있었다(고전 1:18-2:16; 고전 13:12 이하; 골 2:8; 딤전 4:7; 딤전 6:20).

신약성경 기자들은 자주 사도적 케뤼그마(khvrugma, 2782: 선포, 전도)에 대하여 자기 나름대로의 견해를 가지고 있었던 순례 설교자들과 충돌하곤 했다. 디모데는 이른바 거짓된 지식(그노시스)의 "망령되고 허한 말"과 "변론"을 피하도록 명백히 경고받고 있다(참조: 딤전 6:20).

계 2:24에는 "사단의 깊은 것"을 배웠다고 주장했던 적대자들이 언급되어 있다. 이 기자는 풍자적이면서 올바른 비평적인 판단을 가지고 "하나님의 깊은 것"을 배웠다고 하는 그들의 주장에 항변했던 것 같다(E. Lohmeyer). 

(a)  바울 서신.

고린도 교회 사람들이 주장하는 지식은 이처럼 바울에게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었다.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고전 8:2). 이것은 고전 15:34과 비교될 수 있는데, 여기에서 바울은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아그노시안 ... 데우)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견지에서 볼 때 바울은 그가 지식으로 이해한 것을 설명하라는 강요를 받은 것이다. 그는 지식을 이미 알려져 있는 것으로서 오직 수동적으로만 표현할 수 밖에 없음을 알았다(갈 4:9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아신 바 되었거늘"이라는 어구를 첨가시킴으로서 인간이 능동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가질 수 있다고 하는 사상을 시정했다). 이미 알려져 있는 이러한 것은 인간이 가지는 하나님에 대한 이전의 어떤 능동적인 이해와 상응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 상응하는 것이다(고전 8:3). 하나님에 대한 완전하고도 참된 지식은 오히려 종말론적 약속과 기대의 일부이다(고전 13:12). 바울은 육을 입고 지상에 오신 존재를 간단히 무시해 버림으로써, 하나님에 의해 알려진 것과 인간이 가지는 하나님에 대한 완전한 지식을 일치시키는 영지주의자들의 에스카톤(목적)에 대한 환상적 기대를 완전히 거부했다. 왜냐하면 바울은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우리를 이미 알고 계셨다는 것을 전적으로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노스데나이(하나님에 의해 알려진 것)는 선택을 포함하고 있다(참조: G. Bornkamm). 제 아무리 인간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생애와 사역에서 자신을 계시하심으로서 전달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을 주신 영이다(참조: 고후 4:6). 에스카톤 이전에는 우리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알 때만 하나님을 알 수 있다(빌 3:10; 참조: 골 2:1 이하). 그러나 그리스도는 신학적인 사색을 통해서 알려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그에 의해서 만나지게 될 때 그리고 우리가 그를 주로 고백하게 될 때 알려진다(빌 3:8). 이러한 고백은 하나님의 아시는 바 된다. 이러한 고백이 없는 곳에서 지식에 대하여 언급하는 것은 쓸데없는 것이다. "만일 누구든지 알지 못하면 그는 알지 못한 자니라"(고전 14:38). 따라서 하나님에 대한 사랑 Love은 하나님에 의해 아시는 바가 되는 것이다(고전 8:3).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새로운 복종과, 죄의 주권으로부터의 해방(참조: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빌 3:10, 참조: 롬 6:3)에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과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나타내는데 열심히 봉사하는 곳에서 구체화되는데, 한편으로 사람들은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의 약속된 부활에 이르려한다(빌 3:10). 참된 지식은 하나님께서 사도의 증거를 통해 어느 곳에서나 나타내셨던 지식이다(고후 2:14). 이것은 최종적으로 완성된 지식은 아니다. 지금 이 지식은 단편적일 뿐이지만(고전 13:12) 완성을 기대한다. 바울이 몬 1:6에서 언급했던 바와 같이, 지식은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하고 그리스도께 미치도록 역사하는" 것이다. 고린도 교회의 영지주의자들은 교만하여 이 지식에 대한 어떠한 것도 알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에게 "내가 편지한 것이 주의 명령인 줄 알라"고 풍자적으로 요구했다(고전 14:37). 이 모든 점에 비추어 볼 때, 바울의 논법이 본질적으로 구약성경적 지식 개념의 범위 안에 머물러 있음이 분명하다. 동시에 그는 이 개념을 종말론적으로 확대하여 완성시켰다.

(b)  요한의 기록.

지식이 예수님과 요한 자신의, 그리고 요 10:14 이하에서는 예수님(아들)과 하나님(아버지) 사이의 상호 내적인 친교를 나타낼 수도 있다는 바로 그 사실이 영지주의적 배경을 나타내 주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예레미야스(J. Jeremias)는 불트만(R. Bultmann)이 그의 저서(The Gospel of John, 1971, 380 이하)에서 주장한 것처럼, 이것이 헬라의 신비주의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셈족 사상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지식을 친교로 묘사할 수 있는 가능성은 알고 있는 자, 즉 지식을 전달하는 하나님의 사자와 완전한 초월자로 알려진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동등성에 의거한다. 하나님과 세상 사이의 영지주의적, 이원론적 대조는 세상이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진리의 영"(요 14:17)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언명에 의하여 나타나고 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미움을 받은 것은(요 15:18; 요 16:2) 하나님과 세상 사이의 제거할 수 없는 구별의 결과로 이해되어지지 않으면 안된다. 마찬가지로 계시의 목소리도 하나님이 아닌 마귀를 아버지로 모시고 있는 자들에 의해서 그렇게 인식되어질 수 없다(참조: 요 8:42-43). 반대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분에 대한 지식을 포함하며, 영생과도 동일시되었다(요 17:3). 구원을 가지고 오는 이 지식은 외부로부터의 부르심, 즉 이해력, 말하자면 진리 되신 분을 아는 능력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의 도래를 통하여서만 가능하다(참조: 요 5:20).

지식에 관한 요한의 언어와 요한의 견해가 영지주의의 용어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은 만약 우리가 기독교의 메시지를 받아들인 자들과 이 메시지를 반대한 사람들이 이 메시지를 표현하는 형태에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요한의 목적은 영지주의자들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었으므로 그들의 언어를 사용했던 것이다. 그는 자기 자신의 입장에서 영지주의자와 직면하여 자기 자신의 무기를 가지고 그를 공박했다. 이것이 복음을 신화로 만들거나 요한을 영지주의자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었으나(참조: 요 1:18), 하나님은 그의 보내심을 받은 자, 즉 그 아들에게서 알려지게 될 것이다(눅 10:22). 그는 육체가 되셨던 로고스(말씀)이시다(참조: 요 1:14; 요일 1:1-4).

예수님을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본 것이다(요 14:9; 요 12:45). 그를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은 아버지도 알 것인데, 그 이유는 이 사람이 그를 이미 알았고 또한 보았기 때문이다(요 14:7). 따라서 하나님과의 교제는 예수님과의 교제를 통해서만 행해질 수 있는데, 왜냐하면 이 교제가 예수님의 하나님과의 교제에 상당하기 때문이다(요 10:15). 이 두 가지 수준의 교제는 기노스코로 표현된다. 

예수님과 예수님의 사람들 사이에 나누는 교제는 서로를 아는 지식에 의해서 효과적인 교제가 되지만, 이 교제가 영지주의에서와 같이 인간을 신격화시키거나 인간을 이 세상과 역사에서 완전히 제거시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요한에게 있어서 지식은 한 분이신 하나님과 역사적인 통로를 통해서 역사 속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계시로부터 그 형태를 취한다. 자기 아들을 보내심으로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요 17:23; 참조: 요일 4:19 이하)과 세상에 대한(참조: 요 3:16) 자기의 사랑을 나타내셨다. 아들은 자기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의 척도에 따라 자기의 백성들을 사랑하셨다(참조: 요 15:9; 요 17:26). 따라서 하나님과 예수님의 사랑을 받는 자의 지식은 역사의 영역 안에서 사랑으로 표현된다.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 4:8). 아들이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순종으로 아버지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입증하셨듯이(요 14:31), 그를 아는 자도 하나님의 명령, 무엇보다도 자기 형제를 사랑하라는(요일 4:7 이하; 요일 2:7-11) 명령을 지킴으로서(요일 2:3 이하), 또한 죄를 짓지 아니함으로써(요일 3:6), 자기의 지식을 입증하는 것이다. 이처럼 기노스코는 두 가지로 적용된다. 첫째로, 이 지식은 아들의 보내심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을 의미하며(요 17:8; 요일 3:6), 둘째로는 선포된 메시지에 복종하는 것으로도 묘사되는 이 지식에 기초한 사랑에 순종하는 것을 의미한다(요일 4:6). 이러한 지식은 이미 지금 여기에서 영원한 생명 Life이 되었는데(요 17:3) 왜냐하면 이것은 하나님의 역사적 계시에서 유래된 역사 속에 있는 한 생명이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에 비추어 볼 때, 요한의 개념은 영지주의의 개념과 고의적인 정반대적인 것으로 두드러진다.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에서 믿음과 지식을 똑같은 수준 위에 두는 것도 적어도 지식과 대조시켜 믿음을 낮게 평가한 영지주의에 대한 논박의 일부분이다. 요 17:3이 영생을 지식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지만 요 3:36은 믿음에 기인하는 것으로 본다. 베드로의 고백에 관한 요한의 견해에서(요 6:69) 우리는 믿음을 지식에 종속하는 제일 첫 단계로 보려는 유혹을 받을 수 있으나, 요일 4:16에서는 이 순서가 "알고 믿었노니"로 되어 있다.

오직 자기 자신의 구원에만 관심을 가지는 영지주의의 자기 만족은 형제 사랑(요 13:35)과 단합(요 17:21 이하)에서 교회가 존재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과는 반대된다. 더욱이 이 배후에 있는 궁극적인 목표는 아들이 보냄을 받았다는 사실을 세상이 믿게 되고 또한 이 계시가 온 세계에 알려지게 될 때에만 달성될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우주(창조)와 구원에 대한 영지주의의 이원론을 요한이 전혀 가지고 있지 않을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영지주의자에게 있어서 이러한 이원론은 극복될 수 없는 것인데, 그 이유는 이 이원론은 우주적인 타락 이전에 이미 정해진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영지주의의 견해에 따르면 우주는 완전히 그리고 치명적으로 하나님을 알 수 없고 구원 받을 수도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요한에게 있어서 세상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이다(참조: 요 1:1 이하; 요일 2:14).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에 대한 증오로 표현되는 알지 못하는 것은 나타난 계시를 믿지 않는 결과이며(요 8:42 이하) 이것은 결과적으로 죄를 초래한다(참조: E. Kasemann). "만약 '유대인들'이 이해할 수 없다면 그것은 그들이 참으로 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도 이 지식을 심화시키고 풍요롭게 하는데 관심이 있긴 했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이미 알고 있는 것만 들으려고 할 뿐, 새로운 것을 들어 그들이 전에 알고 있던 모든 것과 그와 아울러 이런 지식의 상태 곧 자기에 대한 그들 자신의 이해를 포기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런 식으로는 들을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이 왜 들을 수 없는가라는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이 영역에서 어떤 것을 할 수 있는 것과 어떤 것을 하고자 하는 것이 하나이며 동일하다는 점에 대한 이해 부족을 나타내어 줄 뿐이다"(R. Bultmann). 지식과 믿음에로의 부름은 이렇게 세상을 위해서도 남아 있다. 아들을 보내심으로 나타난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이제 실제적인 것으로 나타나서 실재의 새로운 차원을 연 것이다.

요한의 어휘가 영지주의와 명백히 유사성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그의 주제는 영지주의의 신화적 사변보다는 구약성경의 전승에 나오는 지식의 개념과 훨씬 더 가깝다는 것도 마찬가지로 분명하다. (참조: E. D. Schmit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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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jgguv"(1451, 엥귀스) 가까이 near. [[가까이, 가까운]]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부사 엥귀스(Homer)는 엔(ejn, 1722: ∼에)과 귀온(gui'on: 손, 팔) (즉 손닿는 곳에)에서 유래했으며,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a)  공간적으로 '가까이에'(Thuc.,),

(b)  시간적으로 임박하다는 의미의 '가까이에'(Epict.),

(c)  숫자를 셀 때, '거의'(Xen.; P. Oxy.),

(d)  유사한(plat.),

(e)  친족인(Related , plat.),

(f)  비유적으로 '영적 태도', 또는 '지적 접근'을 의미한다(Epict.).

2. 70인역본의 용법 

엥귀스는 70인역본에서 약 60회 나오며, 주로 히브리어 카롭(가까운 친족)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엥귀스는 '이웃'(출 32:27; 시 15:3)을 나타내며, 하나님과 의인 사이의 관계(시 33:18)를 나타낸다.

3. 신약성경의 용법 

엥귀스는 신약성경에서 23회 나오며, 다음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a)  엥귀스는 공간적 의미로 '가까이(에)'를 나타낸다.

① 독립적으로, 요 19:42. 눅 19:11; 요 3:23; 요 6:19; 요 6:23; 요 11:18; 요 11:54; 요19:20; 행 1:12. 여격과 함께, 행 9:38; 행 27:8.

② 비유적으로, 엡 2:17에서 엥귀스는 관사와 함께 `가까이에 있는 자들'을 의미한다: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가까운데 있는 자들"은 하나님께 가까이 접근해 있는 자들, 즉 유대인들을 가리키고, "먼데 있는 [자들]"은 참된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있어서 신정(하나님의 다스리심)의 은총을 누리지 못하는 자들, 즉 이방인들을 가리킨다(참조: 사 57:19).

엡 2:13에서 엥귀스는 동사와 함께 가깝게 되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이 말은 하나님의 나라, 또 그 복에 가까워졌다는 것을 나타낸다. 랍비들은 드물지 않게 '가깝게 만들다'라는 말을 '개종자로 만들다'라는 말과 동일한 것으로 사용했다.

롬 10:8에서 "말씀이 네게 가까와 …있다"(신 30:14의 인용).

(b)  엥귀스는 시간적 의미로, 임박하여 곧 일어날 일과 관련하여 사용되었다: 마 24:32; 마26:18; 막 13:28; 눅 21:30, 31; 요 2:13; 요 6:4; 요 7:2; 요 11:55; 계 1:3; 요 22:10.

빌 4:5에서 엥귀스는 하늘로부터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 사용되었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마 24:33; 막 13:29에서 "문 앞에"라는 말이 추가되어 나타난다.

히 6:8에서 엥귀스는 저주받는데 가까이 있는 것을 나타낸다: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와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히 8:13에서 '엥귀스는 아파니스무'는 '곧 사라질 것이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새 언약이라 말씀하셨으매 첫 것은 낡아지게 하신 것이니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 가는 것이니라"(W.L.Lome).(참조: J.H.Thayer; Walter Bauer; H.Preisk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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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rimnavw(3309, 메림나오) [[염려하다]] care, 걱정하다 be anxious....스스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예상/상상해보며 미리 걱정/근심/괴로워 하다]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동사 메림나오(Sophodes이래)는 메림나(mevrimna, 3308)에서 유래했으며, 영어의 'to care'와 같은 의미로 여러가지 의미를 지닌다. 이 단어는

(a)  '어떤 사람이나 어떤 것을 돌보다' (자녀에 대해) '보호하다'.

(b)  어떤 것을 '염려하다'나 '주의 깊은 관심을 가지다'. (우 메림난)은 (어떤 것을) '모른다'라는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어떤 것에 대한 이러한 관심은 미래의 동향과 관련된다.

(c)  따라서 어떤 것에 '집중하거나 열중하다, ~을 얻으려고 노력하다, 분투하다'를 의미하며, '야심'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d)  '어떤 것에 대한 걱정스러운 기대, 어떤 것을 직면하거나 당할 수 있는 일에 대하여 염려(걱정)하는 것'에 대해 사용되었다.

(e)  '심사숙고하다, 탐문하다'.

(f)  '근심, 슬픔'에 대해서도 사용되었다.

2. 70인역본의 용법 

동사 메림나오는 70인역본에서 9회 나오며, 6개의 히브리어를 번역한다. 메림나오는 '걱정(염려)하다'(삼하 7:10; 대상 17:9), '괴로워하다' (예: 죄 때문에: 시38:18)를 의미한다. 출 5:9에서 '관심을 가지다, ~에 관하여 생각하다'를 나타낸다.

잠 14:23에서는 '노력하는 것'을 나타낸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동사 메림나오는 신약성경에서 19회 나오며, 마태복음(7회), 누가복음(5회), 바울서신(고린도전서에서 5회, 빌립보서에서 2회) 사용되었다.

구약성경과 마찬가지로 신약성경도 염려를 주로 일상생활에서 직면하는 빈곤과 굶주림 및 기타 걱정거리들에 대한 인간의 자연적 반응으로서 생각한다. 인간은 무거운 짐이 가해지면 자신은 무기력하게 직면할 수 밖에 없는 그러한 운명에 처한 것으로 상상한다. 염려로써 인간은 자기가 당면한 것으로부터 최선을 다하여 자신을 보호하려고 노력한다.

(a)  마 6:25이하에서 메림나오는 미래에 관련된 '자기 염려'를 나타낸다. 문제는 걱정이나 염려가 무엇을 뜻하는가를 보여준다. 근심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그 이유는 생명은 음식보다 더 중하며(참조: 마 6:25), 미래는 우리의 손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걱정함으로 그 키를 한 자도 더할 수 없다(마 6:27). 신장과 같은 전혀 중요하지 않은 문제도 인간이 염려함으로 보장될 수 없을찐대 인간의 생명 그 자체는 더욱 그러하기 때문이다.

마 6:34에서 메림나오는 동일한 의미를 나타낸다. 이 말은 지혜 전승의 말에서 나온 것이며 유대인과 이방인에게도 이와 유사한 말이 있다(참조: Camms.ad). 내일의 염려를 오늘의 염려에 더하여 보태는 이러한 제자는 남용적인 방법으로 행동하고 있으며 오랫동안 그 사실을 인식해 온 세속적 지혜에 의해서도 부합되지 않는 부끄러운 일이다. 따라서 염려는 어리석은 일이며 하나님이 없는 자의 짓이다. 왜냐하면 걱정은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돌보심에 의심을 표명하기 때문이다. 공중의 새를 먹이시고 일시적으로 들에 피는 꽃도 아름다운 것으로 입히시는 하나님은 자기의 피조물인 인간을 위해서는 "더 많은 것을" 행하실 것이다(참조: 마 6:26; 마 6:30). 왜냐하면 그는 자기의 자녀들의 필요한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이다(참조: 마 6:32). 이러한 사실을 잊어버리거나 믿음이 연약하여 근심으로 이끌려 들어가는 자는 이방인과 같이 행동하고 있는 것이다(참조: 마 6:32).

(b)  눅 10:41에서 메림나노는 어떤 일에 관하여 '염려하다'를 의미한다: "주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마리아와 마르다에 대한 누가복음의 설명(눅 10:38-눅 10:42)은 산상 설교에서와 똑같은 대조적 자세들을 보여주고 있다. 필요한 것들을 얻기 위하여 사람이 걱정하는 "많은 것"은 필요한 "한 가지" 일과 대조가 된다. 이러한 것은 생의 목적과 관계된 문제인 것이다. 마리아는 그러한 문제가 예수님의 교훈에서 대답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 걱정은 하나님의 나라를 열심히 갈구하는 것과 대조가 된다. 한편 여기서 '마음을 쓴다'라는 의미를 함축한다.

(c)  고전 7:32-고전 7:34에서 바울은 다른 사람들을 염려할 때 따르게 되는 위험을 말하고 있다. 바울은 교회의 지체들에 걱정이 없기를 원했기 때문에 종말론적 입장의 견지에서 결혼하지 않은 자들에게 미래에 결혼하지 말 것을 권고하며(참조: 고전 7:29, 고전 7:31) 결혼한 자들에게는 호스 메(마치 … 않은 것처럼)라는 개념의 자유 속에서 주님을 위해 살도록 권유하고 있다(참조: 고전 7:29). 여기서 염려는 또한 어떤 것에 '열중(또는 몰두)하다', 어떤 것을 얻으려고 '노력하다'라는 의미로 확장된다.

마 6:31에서도 이런 '열중(또는 몰두)'이나 어떤 것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것을 나타낸다.

(d)  빌 4:6에서 멜림나오는 '어떤 일을 직면하여 걱정'하는 것을 나타낸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근심, 걱정에서 해방되어야 할 이유는, 주께서 가까이 계시다는 사실에(참조: 빌 4:5) 또한 감사로 하나님께 기도함으로써 원하는 바를 아뢸 수 있는 교회의 특권에 있다.

(e)  마 10:19에서 메림나오는 '숙고하다, 준비하다'를 의미한다: "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 그 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병행구, 눅 12:11).

(f)  고전 12:25에서 '돌본다'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하여 [돌아보게 하셨으니]".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하나의 몸처럼 형성시키시어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하여 돌아보게 하셨"던 것이다.

빌 2:20에서 디모데는 빌립보의 교회에 그들의 사정을 [생각하여] 돌볼 유일한 자로 언급되고 있다: "이는 뜻을 같이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내게 없음이라".

(참조: J.H.Thayer; Walter Bauer; Bultmann; J.Goetzma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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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seuchv(4335, 프로슈케) 기도, 기도처.[[기도]]

1. 고전 문헌 및 70인역본의 용법. 

명사 프로슈케는 프로슈코마이(proseuvcomai, 4336: 기도하다)에서 유래했으며, '기도, 기도처'를 의미한다.

70인역본에서 프로슈케는 기도, 기도하는 집, 회당(왕상 8:28; 대하 6:29; 마카베오일서 7:37; 마카베오삼서 7:20)에 대해 사용되었다.

2. 신약성경의 용법. 

명사 프로슈케는 신약성경에서 38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a)  프로슈케는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에 대해 사용되었다(마 17:21; 마 21:22; 막 9:29; 눅 22:45; 행 3:1; 행 6:4; 행 10:31; 롬 12:12; 고전 7:5; 골 4:2; 롬 1:10; 엡 1:16; 살전 1:2; 몬 1:4; 몬 1:22; 벧전 3:7; 계 5:8; 계 8:3; 계 8:4 등).

(b)  프로슈케는 '기도하는 장소(곳)'에 대해 사용되었다(행 16:13; 행 16:16).

(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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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vhsi"(1162, 데에시스) 간구, 기도 prayer. [[간구]]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데에시스(Lysias, Pla. 이래)는 데오마이(devomai, 1189: 원하다, 바라다, 간청하다, 탄원하다)에서 유래했으며,

(a)  본래의 의미는 '부족' lack, 여기서

(b)  '소용, 필요, 간구, 간청, 탄원'이란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2. 70인역본의 용법. 

명사 데에시스는 70인역본에서 테힌나(간구; 예: 왕상 8:28, 왕상 8:30, 왕상 8:38, 왕상 8:45, 왕상 8:52, 왕상 8:54; 왕상 9:3; 시 6:9; 시 55:1), 타하눈(시 28:2, 시 28:6; 시 31:22; 시 86:6; 시 116:1; 시 130:2; 시 140:6; 시 143:1), 린나(비탄의 외침, 한탄의 기도; 시 17:1; 시 61:1; 시 88:2; 시 106:44), 샤와(도와 달라는 외침; 시 34:17; 시 39:12; 시 40:1; 시 145:19)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이 단어는 기도에 있어서 하나님에게 간구하고 요구할 때에만 사용된다. 이 경우에는 가끔 프로슈케(기도)와 병행하여 사용된다(왕상 8:38, 왕상 8:45; 시 6:9; 시 17:1; 시 39:12; 렘 11:14).

3. 신약성경의 용법. 

명사 데에시스는 신약성경에서 18회 나오며, 언제나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에 대해 사용되었다(눅 1:13; 눅 2:37; 눅 5:33; 행 1:14; 롬 10:1; 고후 1:11; 고후 9:14; 엡 6:18; 빌 1:4, 빌 1:19; 빌 4:6; 딤전 2:1; 딤전 5:5; 딤후 1:3; 히 5:7; 약 5:16; 벧전 3:12).

(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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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thma(155, 아이테마) 요청, 요구. [[구할것...필요]]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아이테마(Pla. 이래)는 아이테오(aijtevw, 154, 요구하다, 요청하다)에서 유래했으며,

(a)  '요구'(demand), 폭군의 요구에 대해 사용되었다(Plutarch, Demetr. 3).

(b)  '요청'(request), '간구'(petition), '욕구'(desire)를 의미한다(Aristot. Rhet. Al, 20p; P. Flor., 296, 16).

2. 70인역본의 용법. 

명사 아이테마는 70인역본에서 16회 나오며, 주로 '요구, 요청'을 뜻하는 셰엘라와 셸라의 역어로(11회)로 사용되었다(예: 삿 8:24; 삼상 1:17; 삼상 1:27; 시 106:15 등).

3. 신약성경의 용법. 

명사 아이테마는 신약성경에서 3회 나온다.

눅 23:24에서 세속적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에 빌라도가 저희의 구하는대로 하기를 언도하고". 종교적 의미에서 그것은 특별히 기도를 구성하는 개개의 요청들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데에시스(devhsi", 1162: 간구, 간청)와는 달리 아이테마는 요청의 내용을 지적한다.

빌 4:6; 요일 5:15에서도 같은 의미를 사용되었다.

빌 4: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요일 5:15,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 (참조: G. Stahlin, TDNT; H. Sch?nweiss, DN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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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jcaristiva(2169, 유카리스티아) 감사함 thanksgiving.[[감사드림]]

1. 고전 헬라어 문헌 

명사 유카리스티아는 카이르/카르라는 어근에서 파생되고 이 단어의 주요 어군들은 기쁨(joy)의 감정을 표현한다. 이 말은 '잘, 좋게, 바르게, 적절하게, 매우(very)'란 뜻의 부사 유(eu\, 2095)와 합성된 카리스(cavri", 5485:사람이 기뻐하는 그 모든 것, 은혜)의 파생어이다. 그 뜻은,

(a)  '감사하는 태도',

(b)  '감사함을 보여주는 표현, 감사의 표현, 감사함'(주전 5세기 히포크라테스로 부터).

2. 70인 역본의 용법 

명사 유카리스티아는 70인 역본에서 4번 나오며, 사람이 사람에게, 그리고 사람이 하나님에게 감사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 단어는 마카베오이서 2:27에서 많은 사람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을 말한다.

집회서 37:11에서 감사하기 싫어하는 자와는 의논하지 말아야 한다는 경험상의 입장을 밝히고 있다.

지혜서 l6:28은 사람들에게 날이 새기 전에 그 날을 감사함으로 시작하라고 충고한다. 그러므로 이 단어가 구약성서로부터 어떤 특별한 신학적 사상을 전수 받았다는 근거는 전혀 없는 것이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명사 유카리스티아는 신약성경에서 15회 나오며, 단 한번 사람에 대한 감사의 의미로 사용된 것 외에 모두 하나님에 대한 감사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바울의 서신에서 감사는 기본 의미를 지닌다.

살전 3:9 이하에는 바울이 하나님께 어떠한 감사함으로 보답할까 하는 계획을 보여준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교회가 자기에게 준 기쁨의 보답으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자 하지만, 한편 예배와 사적 생활에서 감사를 되풀이 하기를 스스로 불러일으킨다.

고전 14:16에서 바울은 방언으로 말하는 것에 관한 그의 논증과 관련해서 비입교자가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이해하고 "아멘"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바울은 특별한 은혜에 대한 감사를 언급한다. 은혜는 감사로 인하여 더해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후 4:15).

모금된 연보는 그것을 모금한 자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감사함을 불러일으키게 한다(고후 9:11 이하). 이러한 것은 예배에서 감사의 주제가 될 수 있다.

어떠한 간구와 중보 기도도 동시적인 감사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빌 4:6; 골 2:7; 골 4:2; 딤전 2:1). 감사에 기초한 생활이야말로(엡 5:4) 악한 생활에 상반되는 것이다. 감사의 요구는 기도에 기본적인 요소이다. '감사는 기독교 표현의 좋아하는 본질적인 방법이다(Schlier)'.

딤전 4:3; 딤전 4:4에서(일반적으로 감사하는 마음은 배척당하지 않고 받아들여진다) 식사하기 전에 감사 기도를 드린다는 특수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데, 이것은 유대인의 관습에 의한 것으로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된다. '이 세상의 왕, 주(여호와) 우리 하나님 당신께 감사드립니다...'(SBI 685 이하를 참조). 바울은 하나님의 창조에 호소하여, 금욕주의적 음식법을 거절하는데 음식을 감사함으로, 즉 축복으로 기쁘게 받는 한에서는 버릴 것이 없다는 것이다.

유카리스티아는 요한계시록의 찬가 가운데 감사의 찬송을 의미하기도 한다(계  4:9; 계 7:12). 감사는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는 천적 존재의 영광송에 속하는 것이다. 유카리스티아는 2세기 동안에 전체적인 성만찬 예배를 의미하는 일반적인 명칭이 되었다.

(참조: Walter Bauer; J.H.Thayer; H.-H,Ess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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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nwrivzw(1107, 그노리조) 알리다, 알게 하다.[[아뢰다]]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동사 그노리조(Aeschyl. 이래)는 기노스코(ginwvskw, 1097: 알다, 이해하다)에서 유래했으며,

(a)  '알게하다, 계시하다'(Aeschyl., Diod., Plut.),

(b)  '알다'(Diochrys., Plut. 등)를 의미한다.

2. 신약성경의 용법. 

동사 그노리조는 신약성경에서 25회 나오며, '알리다' announce, '공개적으로 또는 명쾌하게 알게 하다; make known publicly or explicitly라는 의미로 가장 자주 사용되며, 때때로 '신성한 방법으로 알리다' communicate in a solemn way라는 의미로 사용된다(눅 2:15; 눅 2:17; 요 15:15; 요 17:26 bis; 롬 9:22; 롬 9:23; 롬 16:26; 벧후 1:16).

이 절수들 모두에서 모두에서 이 동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오는 하나님의 구원의 계시를 말한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인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 사건을 선포하다'라는 그노리조의 종교적인 의미의 함축은 이 동사의 용법, 특히 요한복음과 골로새서와 에베소서(골 4:9과 엡 6:21는 제외)에서의 용법을 결정한다.

이러한 의미의 범위 안에는 롬 16:26(전례의 규정에 의한 용법); 고전 15:1(신앙 고백의 형식으로 복음을 전함); 갈 1:11과 벧후 1:16가 들어간다.

행 2:28은 시 16:11, 70인역본이 부활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견지에서 인용된 것이므로 돌아가신 예수님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에 대해 이야기한다. 롬 9:22 이하는 알리시는 하나님의 행위에 대해 직접적으로 이야기한다.

고전 12:3의 말씀은 중요한 종교적인 사실들에 대한 도입으로 이해된다: '나는 너희가 이해하기를 원한다', '또는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한다, 내가 너희에게 선포한다.' 여기에 고전 15:1과의 관련성이 있다.

이 동사는 고후 8:1; 골 4:9; 엡 6:21에 알게 하다, 전하다라는 중립적인 의미로 나타난다.

행 7:13B A vg는 창 45:1의 70인역본과 완전히 일치되게 '자신을 계시하다, 자신을 알리다, 자기의 정체를 밝히다'로 번역되어야 한다.

빌 1:22에서 이 동사는 '나는 말할 수 없다', 또는 알 수 없다, 분간할 수 없다를 의미한다.

빌 4:6에서 이 단어는 감사함으로 기도하는 자의 구할 것을 '알려야 하는, 아시도록 해야 하는' 그리스도인들의 기도에 대해 사용되었다 이런 의미로 언급되어 그리스도인 회중의 기도 특유의 성격을 형성한다.(참조: O. Kno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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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u'"(3563, 누스) 마음, 이해(력), 이성, 사고 [[지각]]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누스(Homer. 이래)는 노오스(novo": 마음)에서 유래했으며, 다음의 의미를 지닌다.

(a)  원래 이 단어는 하나의 대상에 대한 '내적인 감각'을 의미하였다.

(b)  그후 이 단어는 '기질, 이해력, 통찰력, 이성, 마음'을 의미하였다. 감정 및 의지와 더불어 이해력은 생각하는 능력으로서, 사람의 내적 능력에 속한다(예: Parmenides, 16, 2).

(c)  누스는 또한 마음의 반성으로 결정되는 도덕적 태도와 성질을 의미하기도 한다.

(d)  또한 이 단어는 '결심, 의향, 의지'를 의미한다.

헬라 철학과 종교에서 누스는 세계와 존재를 이해하는 사고 기관으로서의 '이성' reason 혹은 '마음' mind을 의미하게 된다. 초기 헬라 철학에서 이해력은 모든 것을 인지하고 명령하고 통제한다고 한다(예: Anaxagoras, Fragment 12).

플라톤(Plato)에게서 누스는 사고의 전 영역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영혼의 세부분 중 가장 높은 부분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누스는 로기스티콘(순수한 사고를 지배하는 원리)이라고 불리운다(Phaedr. 247c). 이와 같이 진실되고 신성한 이성은 인간과 우주 곧 대우주와 마찬가지로 소우주를 다스린다(Tim. 30a b, 46c 이하). 이성은 진리를 깨닫게 한다(Rep. 6, 490b). 필로마데스(Philomathes)에 의하여 온(존재)과 더불어 생겨난 이성과 진리는 지식에 이르게 된다. 인간이 하나님을 인식하는 것은 그의 이성에서이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는 이해력을 영혼의 능력 위에 두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누스 데오레티코스(이론적인 이성)와 누스 프라크티고스(실천 이성)를 구별하였다(An., Eth. Nic). 이 이성은 불멸의 거룩한 것이다. 누스는 인간의 마음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며 신의 구현이다(Eth. Nic).

이와 같이 누스와 신을 연결시키는 것은 또한 스토아 학파의 특성이기도 하다. 에픽테투스(Epictetus)에 따르면, 이성은 하나님의 본질이라고 한다.

헤르메스에서 누스는 이성의 눈인데, 이 눈을 통해서만이 인간은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다고 한다. 이러한 누스는 영혼 속으로 들어가 영혼을 인도하여 지식에 이르도록 한다. 대체로 이와 같은 것은 전형적인 영지주의적, 혼합종교적 구원교리이며, 누스에 대한 헬라 개념은 이 교리에 기여하게 된다.

2. 70인역본의 용법. 

명사 누스는 70인역본에서 약 32회 나온다. 헬라어 문헌에서 누스가 중추적 역할을 한 것에 비추어보면 생각보다 드물게 사용되었다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누스는 '마음, 내적 본질'을 뜻하는 히브리어 레브와 레밥의 역어로 6회 사용되었다는 사실은 이 본문이 어떤 헬라화의 과정을 겪었다는 것을 보여준다.(출 7:23; 사 10:7b, 등); 그러나 이것은 또한 누스가 어떤 점에서는 의지와 더욱 밀접한 관계에 있다는 것으로 이해되어져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누스의 다른 표현들로는 '명심하다'(마카베오이서 15:8), '어떤 것에 주의를 기울이다'(에스드라상 9:41)가 있으며; 그리고 문구로는 '이해하는 마음'(마카베오사서 1:35; 2:16), '순수한 마음'(베냐민의 언약 3:8), '순진한 마음'(지혜서 4:12), 혹은 요세푸스의 작품에 나오는 '건강한 마음'(Ant. 8:28) 등이다.

그러나 동시에 레브를 번역하는데 누스가 사용되었다는 것은 또한 사색의 요소를 포함하는 것이며, 때로는 실제적인 결심을 하게 하는 목적을 지닌 거의 철학적 숙고까지 포함하는 것이다(사 10:7; 사 41:22).

누스가 루아흐의 역어로 사용된 것은 예외적인 일이다(사 40:13; 삿 8:14). 그러나 누스가 오젠(귀 ear)의 역어로 사용된 것은 우스(귀 ear)를 사용해야 할 것을 서기관의 실수로 누스를 사용한데서 기인하는 것 같다(욥 33:16; 욥 12:11).

3. 신약성경의 용법. 

명사 누스는 신약성경에서 24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a)  '마음, 기질, 성벽'. 이러한 의미에서 누스는 자연인이나 그리스도인의 내적 성향이나 도덕적 태도를 표현하지만, 오로지 형식적인 표현에서만 사용된다. 롬 1:28에서 아도키모스 누스("상실한 마음")는 하나님의 형사적 심판 아래 있는 이방인들에 대해 사용된다. 이방인들은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한다(엡 4:17). 잘못된 판단에 따라 행동하는 자는 "그 육체의 마음을 좇아" 헛되이 과장하고(골 2:18), "마음이 부패하여 진다"(딤전 6:5, 참조: 딤후 3:8). "저희 마음과 양심"은 더럽다(딛 1:15). 그리스도인들은 누스를, 즉 그 생각과 뜻의 내적 방향과 도덕적 의식의 성향을 끊임없이 새롭게 해야 한다: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롬 12:2),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엡 4;23). 그리스도인들의 회중은 그 구성원들이 같은 마음으로 굳게 할 때 단합된다(고전 1:10, 여기서 누스와 그노에는 동의어이다).

(b)  '실천적 이성'. 누스는 뜻과 행동을 구체적으로 결정하는 도덕적 의식이다. 그것은 순전히 인간의 기능으로서, 사람에게 이러한 기능이 있다는 사실은 하나님을 향한 사람의 책임을 암시한다. 롬 7장의 "나"는 "속 사람"(롬 7:22)으로는 하나님의 법에 매여있음을 깨닫는다. 마음(누스)은 그것을 하나님의 법(노모스)으로 선언하며(롬 7:23), 그 도덕적 의식의 견지에서 "나"는 하나님의 법의 기준에 따라 행동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섬기노라"(롬 7:25).

(c)  '이해'. 이 의미에서 누스는 지적인 기관으로, 상태든 행동이든 지식의 능력(지력)이다. 눅 24:45에서 그것은 구약성경을 깨닫는 이해력을 의미하고 계 13:18에서는 묵시적 비밀을 간파하는 통찰력을 뜻한다. 계 17:9에서 신적인 지혜에 의해 조명되는 "지혜 있는 뜻이 여기" 있다. 빌 4:7에서 기도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은 불안에 지배받는 인간의 사고를 초월하는 해방의 능력이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 누스는 특별히 방언으로 말하는 자들이 황홀경에서 발하는 모호한 말들 배후에 놓여있는 프뉴마와 대조되는 이해력이다. 누스는 그 자체로 그의 지각을 소유하고 있는 자의 한 가지 기능이다. 그것은 이해하기 쉬운 말로 분명한 생각을 전달하는 이해력이며, 이때 영적 황홀경 상태 가운데서의 그의 활동은 잠시 정지된다(고전 14:14이하, 고전 14:19).

살후 2:2의 "쉬 동심하거나 두려워 하거나 하지 아니할 그것이라"에서 누스는 언제나 냉정한 예지력을 발휘할 수 있는 확고한 판단력을 가리킨다. 여기서 의미하는 바는 파루시아에 대한 과장된 사상들을 직면할 때 용의주도함이나 사려 깊음이다.

(d)  '생각, 판단, 결심'. 바울은 강한 자와 연약한 자 사이의 논쟁에서 롬 14:5에서 한가지 규칙을 제시한다. 즉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찌니라" 이다(참조: 집회서 5:10). 롬 11:34에 나오는 이사야서 구절의 인용문,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에서 누스는 분명히 하나님의 구원의 뜻을 가리킨다. 바울은 롬 9-11장에서 제기되는 문제의 해결을 이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뜻에서 발견한다. 동일한 문구가 고전 2:16 상반절에서 사 40:13로부터 인용된다. 여기서 또한 문맥(고전 2:7이하)은 지금은 명백히 나타난 감취었던 구원 계획을 지적한다. 고전 2:16 하반절인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 하나님의 영, 성령, 고전 2:11, 고전 2;14)을 가졌느니라"에서 이 용어가 겪는 의미의 뚜렷한 변화는 언어 유희를 보여주는데 앞의 (a)의 의미, 즉 "마음"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바울이 헬라 신비주의의 방식에 따라 누스와 프뉴마를 동일시한다고 가정할 필요는 없다.

(참조: J. Behm; Walter Bauer; J. H. Thay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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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Jperevcw(5242, 휘페레코) 능가하다, 탁월하다, 위에 있다. [[뛰어나다, 넘어서다]]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동사 휘페레코(Homer. 이래)는 휘페르(uJpevr, 5228: ~의 위에, ~을 넘어서, ~을 위하여, ~에 관하여)와 에코(e[cw, 2192: 가지다, 쥐다, 소유하다)에서 유래했으며,

(a)  '~위에 오르다, ~위에 치솟다, 능가하다, ~보다 낫다, 뛰어나다, 탁월하다', 실명사로 '탁월, 빼어난 가치',

(b)  '지배하다, 권세를 가지다, 위에 있다, 지위, 권위, 권세에 있어서 우월하다', 실명사로 '통치자'를 의미한다.

2. 70인역본의 용법. 

동사 휘페레코는 70인역본에서 13회 나오며, 아메츠(553: 강한, 대담한, 튼튼한, 창 25:23), 아다프(5736: 남다, 초과하다, 출 26:13; 레 25:27), 아라크(748: 길다, 연장하다, 길어지다, 왕상 8:8; 대하 5:9) 등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동사 휘페레코는 신약성경에서 5회 나오며, 바울서신과 베드로전서에만 사용되었다.

(a)  빌 4: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가 이해하거나 생각할 수 있는 것을 뛰어넘는 것이다.

(b)  빌 3: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바울이 그리스도를 주로 아는 지식은 가장 훌륭한 것이다.

(c)  빌 2:3,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여기고". 신자들은 겸손하게 다른 사람을 자기 보다 낫게 여겨야 하는 것이다.

(d)  벧전 2:13,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복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여기서 휘페레곤티(분사)는 '통치자'로 통한다. 왕은 제일 높은 통치자이다.

(e)  롬 13:1,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바라". 여기서 일반적으로 통치를 하는 자들, 당국자들을 가리킨다. (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G. Dell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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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ijrhvnh(1515, 에이레네) 평화, 복지, 번영 [[평강]]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에이레네의 기본 개념은 본래 사람들 사이의 관계(relationship)나 태도(attitude)를 의미하지 않고 상태(state), 즉 '평화의 때', 또는 '평화의 상태'를 의미하며, 처음에는 순전히 끊임없이 계속되는 전쟁상태에서의 한 막간(a interlude)으로 생각한 것이다.

이 단어는 전쟁에 반대되는 것, 혹은 전쟁의 종식으로부터 결과하는 상황을 의미한다. 평화는 복된 번영을 가져 오도록 법과 질서가 유지되는 상태이다. "에이레네"는 평화의 상태이며, 평화의 상태에서 땅과 백성을 위한 복이 흘러나온다. 필레몬(Philemon)은 이를 최고의 선(supreme good)으로 격찬했다.

에이레네는 평화 조약이나 평화의 타결과 관련이 있다. 에이레네는 또한 소란, 소요의 정반대를 의미할 수 있다. 에이레네는 평화적인(온화한) 태도, 즉 적의가 없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에픽테투스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등의 스토아 철학자들의 작품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에이레네는 영적 평안이나 마음의 평안이라는 의미를 띠고 나타나게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단어는 이들의 저작에 그리 자주 사용되지 않았다.

특별한 언급으로, 아우구스투(Augustus)가 지중해 세계를 지배한 에이레네를 들 수 있다. 이 시대에서 구속(redemption)을 동경하는 강한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데  황금시대라고 불리워진 이 평화의 상태는 로마 황제가 군대의 힘으로 성취한 법적 또는 정치적 안정이다(Toerster, TDNT).

2. 구약성경 및 70인역본의 용법 

1. 구약성경 및 70인역본의 용법 및 의미들

(a)  구약성경에서 에이레네는 250회 이상 나오는 히브리어 단어 샬롬의 역어로 사용된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다. 이에 대하여 예외적인 경우들은 대체로 왕래 및 문안 인사에 관련된 구절들이다. 예컨대 창 26:31; 창 43:23이 이러한 예이다.

그러나 렘 20:10; 사 48:22; 57:21은 이러한 경우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예외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예외적인 구절에서는 소테리아(구원, 구출), 카이레인(기쁨, 안녕)등을 역어로 사용되었다.

약 15개의 구절에서 에이레네는 안식, 평온, 안전, 염려 없음, 믿음직스러움 등의 광범위한 의미 영역을 포괄하는, 히브리어의 여러 가지 단어들에 해당하는 역어로 사용되었다.

예컨대 대상 4:40에서는 '…로부터 안식을 얻다'를 뜻하는 샤카트(히2453)의 역어로, 욥 11:18; 잠 3:23; 사 14:30; 겔 34:27; 38:8, 11, 14; 39:6, 26에서는 '믿을만함, 안전, 염려없음'을 뜻하는 베타흐(히233a)의 역어로, 삼하 3:24에서는 '가다, 걷다'를 뜻하는 할라크(히498)의 역어로, 사 29:24에서는 '이해'를 뜻하는 레카흐(히1124a)의 역어로, 그리고 잠 17:1; 호 2:18에서는 '평온, 안락'을 뜻하는 샬와(히2392d)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또한 에이레네를 역어로 사용하고 있는 몇몇 구절들은 해당 히브리어 단어가 모호하거나 없다: 에 4:16; 미 2:4; 사 32:4; 겔 34:29; 잠언 8:18.

(b)  70인역본은 히브리어 단어들, 주로 샬롬의 역어로 사용했기 때문에, 그 히브리어의 의미들이 이 헬라어의 의미에 영향을 미쳤으며, 또한 70인역본의 용법은 헬라어를 사용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헬라어는 새로운 풍부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히브리어 구약성경의 샬롬과 70인역본의 에이레네를 살펴보면, 에이레네의 여러 가지 의미를 알 수 있다.

이 단어는 '평화 peace'라는 좁은 의미로 제한시켜서는 안된다.  그것은 모든 가능한 형태의 악(evil)과 대조되는, 가장 넓은 의미의 '안녕, 복리' well-being를 의미한다. 만남이나 편지에서(삼하 18:29; 삿 19:20; 단 4:1), 작별 인사에서(삿 18:6; 삼상 20:42) 다른 사람들에게 안녕을 빌며, 대화에서 다른 사람에 관한 안녕을 구한다(삼상16:5).  사람들은 문안 인사를 한다 : "문안하고".

왕하 9:17이하에서와 같이 어떤 사람이 오는 이유에 대한 질문이 있는데, 곧 "평안이냐"는 '도전적인 목적이냐 화평한 목적이냐'라는 질문이다.

왕상 2:13에서 밧세바가 아도니아를 맞이 하면서 "화평한 목적으로 왔는냐"(너의 옴이 화평이냐)라고 말했을 때, 그것은 그녀가 그에게 그의 방문이 '좋은 일'을 뜻하는지를 실제로 묻고 있는 것이다.

시편 기자는 에이레네를 '행운이나 형통'이라는 의미로 사용했는데, 불경한 사람들에 대해서도 적용되고 있다. 의인은 악인의 이런 형통을 봄으로 시험을 받기도 한다(시 73:3). 그러나 이 형통은 외적인 것에 불과하며, 진정한 형통이 아니다(사 48:22).

사 57:18; 시 38:3에서는 육체의 건강을 의미한다.

집회서 38:8에서 의사가 가져오는 에이레네, 즉 건강에 대해 말하고 있다. 전장에서 무사히 안전하게 돌아오는 사람은 건강을 보전한 것으로 볼 수 있다(수 10:21; 왕상 22:17; 대하 19:1; 시 55:18).

또 이 단어는 '만족이나 흡족함' satisfaction을 의미하였는데, 이별에 관하여(창 26:29; 출 18:23; 사 55:12), 잠자리에 드는 것에 관하여(시 4:8), 죽음에 관하여(창 15:15; 렘 34:5) 사용되었다. 여기에서 에이레네는 단순히 안식이나 마음의 평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폭력이나 재난으로 압도당하지 않은 인간의 전상태로서, 폭력을 당하거나 변사의 정반대를 의미한다(참조: 왕상2:6).

또한 살펴볼 가치가 있는 것은 사 29:24의 내용이다: "원망하던 자도 교훈을 받으라"(70인역-말더듬는 혀들은 평화를 말하는 것을 배울 것이다). 이 구절에는 히브리어 샬롬이 없지만 에이레네가 나온다. 이 문맥에서 에이레네는 그들이 올바르게(에이레네) 말하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이사야 32:4에서도 이와 유사한 의미를 나타낸다.

이 단어는 더욱 보편적으로, 전쟁과 대조되는 평화를 의미한다. 잠 17:1; 호세아 20:18("평안히 눕게하리라")과 사 14:30("평안히 눕게 하려니와")에서 이 의미로 에이레네가 샬롬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잠언에서는 다투는 가정과 대조되는 평화로운 가정의 안락을 의미하며, 호세아와 이사야에서는 이 단어는 평화의 때를 의미한다.

대상 22:9에서 평화의 상태를 의미한다: "내가 저의 생전에 평안과 안정을 이스라엘에게 줄 것임이니라". 히스기야는 평화가 그의 시대에는 계속된다는 기대를 가졌기 때문에 이사야의 중대한 예언을 경솔히 취급했다. 여기에는 번영을 누리는 그룹, 예를들면 국가의 번영이라는 의미도 지닌다.

에이레네는 전 3:8에 전쟁과 대조시킨 "평화"와, 그리고 렘 29:7에 "성읍의 평안", 38:4에 "백성의 평안" 등에서 "평안을 구한다"는 표현에서와 같이 "평화의 상태"보다 더 근본적인 것, 즉 평화 =백성의 안녕에 관련된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샬롬/ 에이레네는 상태보다 오히려 관계를 암시한다.

많은 구절에서 이 단어는 이러한 의미를 가지는데, 국가나 그룹 간의(왕상 5:12; 삿 4:17; 왕상 5:4; 대상 12:18), 개인 간의(슥 6:13) 우호적 관계를 의미한다.

신 20:10에 '한 백성에 평화를 선언'하는 것은 한 백성의 관계의 수용을 의미하며(참조: 삿 21:13), 그 안으로 들어가는 자들은 평화의 사신들이다(사 33:7).

이 단어는 시편 35:27에서 외적 형통이나 성공에 더하여 인간의 전적인 안녕(well-being)을 의미할 수 있다: "나의 의를 즐거워하는 자로 기꺼이 부르고 즐겁게 하시며 그의 종의 형통을 기뻐하시는 여호와는". 여기서 형통과 안녕은 선(good)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

시편 122:8에서 시인은 "네 가운데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한다. 70인역본에는 '내가 참으로 너를 위하여(에 관하여) 평화를 말했다'고 번역되어 있다. '너를 위하여'는 '예루살렘을 위하여'이다.

시인은 바로 앞에서 이미 안녕과 형통을 원했다. 환언하면 이 용어는 여기서 확고한 '형통'이라는 의미에서 '선(good)'이라는 더 넓은 의미로 쉽게 이동한다.

따라서 잠 3:17에서 "그 길은 즐거운 길이요 그 첩경은 다 평강이니라"고 말한다. 70인역본은 '그녀의 길은 옳은 길이요 그녀의 모든 첩경은 평화에 있느니라'고 번역했다.

시 34:14은 도덕적 선을 의미한다: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며 화평을 찾아 (그를) 따를지어다."

슥 8:19에서 "오직 너희는 진실과 화평을 사랑할지니라."

말 2:6에서 "그가 화평과 정직한 중에서(으로) 나와 동행하며, 많은 사람들을 돌이켜 죄악에서 떠나게 하였느니라." 70인역본은 '그가 그의 길을 에이레네로 똑 바르게하여 내 앞에서 행하게 하며…'라고 번역했다.

잠 12:20에서 "악을 꾀하는 자의 마음에는 궤휼이 있고 화평을 논하는(조장하는) 자들에게는 희락이 있느니라." 70인역본은 '에이레네를 원하는 자들은 즐거워하리라'고 번역했다. 이러한 구절에서 '에이레네'는 도덕적 선을 의미한다.

(c)  이 단어는 두람(J. I. Durham)에 의하면, '완전, 완성, 성공, 성취' 등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샬롬은 '완전'이란 개념은 민 6:24이하에 나오는 축복의 절정을 이루는 대목에 나타난다. 여기에서 이 개념은 다른 모든 축복들을 요약하고 있으며, 여호와의 임재에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이 축복은 모세가 여호와로부터 받아 아론과 그의 자손들에게 이스라엘을 축복하는데 사용하도록 전한 것이다(민 6:22 이하). 이 축복의 내용은,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이다(민 6:24이하).

여기에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찌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민 6:27)는 구절이 첨가되었다. 두람은 이 구절을 주석하기를 '샬롬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오직 그가 임재하실 때에만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축복 속에 샬롬이 사용된 것을 볼 때에도 샬롬은 제의 용어로서 사용되었으며, 여러 가지 번역본이나 많은 주석가들이 일반적으로 이 말에 부여해 온 것보다 횔씬 더 포괄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보다 확실하게 믿게 된다. 왜냐하면 민 6:24-26 에 나오는 샬롬은 하나님께로부터 축복을 받고(바라크) 지킴을 받으며(샤마르) 은혜를 받는(하난) 사람, 하나님의 임재 속에 이 두가지 상태로 있는 사람, 즉 충족되고, 그리하여 온전하게 된 사람을 묘사하는 말로서 사용되고 있다. 실로 이러한 사람은 신약성경의 주의 말씀에 부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5:48).

또 두람은 '샬롬은 구약성경에서 자주 포괄적으로 본 성취 또는 완성, 실제로 사람이 혼자 힘으로 가장 좋은 환경에서 얻을 수 있는 그 어떤 성공이라도 훨씬 능가하는, 삶과 정신에 있어서의 완성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된다'라고 주장한다(창 15:15; 29:6; 37:14; 43:27이하.; 출 18:7,23; 민 25:12; 신 23:7; 삿 18:15; 삼상 17;18, 22; 20:7; 25:6; 삼하 11:7; 18:28이하; 왕상 22:27이하; 왕하 22:20; 사 45:7; 48:18; 53:5; 54:10, 13; 57:2,19; 59:8; 60:17; 66:12; 말 2:5이하.).

특히 이 점은 왕하 22:20에 나오는, 요시야가 열조에게 돌아가리라는 여호와의 약속에서 분명하게 제시되고 있다. 여기에서 요시야가 평안히(in peace, KSB) 열조에게 돌아간다는 식의 해석보다는, 그는 '성공하여 in success', 즉 그의 소명을 완성하고 흡족한 마음으로 열조에게 돌아갈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아래서는 항목을 만들어 에이레네의 의미를 설명한다.

2. 하나님의 선물로서의 에이레네

이 단어는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로서, 선, 좋은 것, 구원을 의미한다. 샬롬/ 에이레네와 연합된 좋은 것은 그것들을 위한 기도에서든, 그것들이 나타날 때 하나님의 선물로 인정하든, 자연적으로 이스라엘에서 항상 하나님과 관련시키었다.

기드온은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샬롬'이라고 불렀다. 이 매우 오래된 고대 표현에 대한 분명한 해석이 불가능하다면 우리는 이 고백의 위대한 의미에는 경건한 자들이 후에 많은 다른 상황에서 말하고자한, 특별히 구약의 기도에서 표현된 것과 같은 모든 것을 그 근본에 포함하고 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은 하늘에서 평화를 만드시며(욥 25:2), 또한 우리에게 평화를 약속하시며, 그의 백성에게 평화의 복을 내리시며, 그의 종들의 형통을 원하신다(시 35:27; 참조: 147:14), "다윗과 그 집에는 여호와로 말미암은 평강이 영원히 있으리라"(왕상 2:33).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시 122:6).

샬롬은 진실로 여호와로부터 오며, 완전히 충족하게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신념은 시편 85편에 두드러지게 표현되어 있다. 기자는 기도 중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 "그가 그 백성, 그 성도들에게 화평을 말씀하실 것이라 … 영광이 우리 땅에 거하리이다 긍휼과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입맞추었으며"(85:8-10).

이 사상의 맥락에서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구원하시려는 성향은 완전한 지상적 평화의 동기로 생각된다. 여기서 우리는 샬롬이라는 말의 구약의 용법의 최고점을 본다.

레위기에서 하나님은 그 땅에서 그의 백성에게 샬롬을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신다(레26:6). 이 문맥은 확고한 복이 뜻하는 것, 즉 원수들과 야수들로부터 평화를 아주 분명히 보여 준다. 이것은 특별한 의미에서 일종의 구원이다. 그것은 약속의 땅에서 안식과 평온이며, 그러므로 신명기 기자는 독특한 용어 메구하(안식)를 표현한 것이다(신 12:9). 이렇게 그들은 예언적 약속의 바로 가까이에 있다.

에이레네는 이 시대나 구원 시대에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선을 가리키는데 사용되게 되었다. 이 단어가 어떤 생활 영역에서나 하나님이 주신 선을 의미한다는 것은 구약신앙의 특성이다. 사 46:7에서 그 일반적인 기사를 볼 수 있다: "나는 평안도 짓고 환란도 창조하니". 이 경우에는 앞에서 언급한 레위기 26:3이하의 축복과, 그리고 민 6:26의 축복("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도 포괄한다.

때때로 에이레네의 정확한 내용을 말하기란 불가능하지만, 한편 그것이 항상 인간을 위한 선한 것이며, 거기에 그의 안녕이나 구원이 놓여있는 것이다. '에이레네'는 이런 의미에서 선한 것이며 구원이다.

이러한 구원을 의미하는 구절들을 더 들어보면, 렘 29:11에서 하나님은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라고 말씀하셨다. 시 119:165에서 율법을 사랑하는 자들의 큰 평화는 율법을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들이 당하는 장애물과 대조된다. 여기에 평화는 내적 구원이며 파멸이 아니다.

따라서 집회서 1:18에서 에이레네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증진되고 '기에이아 야세오스'(건강한 치유, 완전한 건강)와 연결되어 있다(참조: 사 9:7). 시 35:8과 9에 하나님이 약속하신 평화는 구원이며, 이 문장에서 평화와 구원이 연결되어 있다.

이 구원은 렘 16:5에서 하나님의 구원이라 부른다: "나의 평강". 애 3:17에 "주께서 내 심령으로 평강을 떠나게 하니"라는 말은 "내가 복(아가다: 선, 선한것)을 잊어버렸음이여"라는 말로 해석되어야 한다. 여기서 평강은 선한 것이며, 곧 구원이다. 이 평화에 참여한다는 것은 거기에 포함된 구원의 은총을 누린다는 것을 뜻하는 반면, 평화에서 제외된다는 것은 그 모든 복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평화를 거두어 가시면 어쩔 수 없이 애통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된다.

히브리인들은 때때로 이러한 동맹이나 협정에 대해 베리트(언약)를 사용했으며, 따라서 샬롬은 베리트와 관련하여 나타난다. 이 두 단어의 관계는 너무 강하므로, 이런 문맥에서 샬롬은 일종의 공식 용어가 된 것같다.

이 사상은 샬롬의 관계가 언약에서 두 당사자에 의해 인쳐진다는 것이다(수 9:15; 왕상 5:12). 환언하면, 언약은 '샬롬'의 관계를 개시하는 것이다. '샬롬'의 관계는 언약의 결과이다. 여호와의 이스라엘과의 화평의 언약을 나타내는, 이러한 구절들에서 '샬롬'은 실질적 안녕이 아니라 언약을 맺은 자들의 성향에 의존하는 평화의 관계를 의미하는 동시에 구원을 위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비누하스와 평화의 언약(민 25:12; 집회서 45:24), 레위와 평화의 언약(말 2:5), 다윗과 평화의 언약(겔 34:25; 37:26)은 구원의 언약이다.

사 54:10에서 여호와께서는 "나의 인자는 네게서 떠나지 아니하며 화평케 하는 나의 언약은 옮기지 아니하리라"고 약속하신다(Rad, TDNT).

3. 종말론적 기대의 한 요소로서 샬롬/ 에이레네

샬롬은 종말론적 기대의 한 요소이다. 영원한 평화의 최종적 상태에 대한 대망은 선지서들과 다른 성문서들에서 일관하게 표현하는 구약 종말론의 한 요소이다.

이 널리 퍼진, 다방면에 걸친 이 대망의 사실은 샬롬이라는 단어가 관계하고 있는 구절들에서 항상 발견되지 않을지라도 언급되고 있다.

낙원의 상태의 회복이 예언될 때(사 11:10이하; 호 2:20이하; 암 9:31), 하나님의 주관하에 국제적인 평화가 예언될 때(사 2:2이하), 혹은 평화의 때가 도래하는 마지막 시대의 한 겸손한 평화의 왕에 대한 기대를 말할 때(슥 9:9이하), 샬롬이라는 단어가 이런 중심적인 종말론적 구절에 사용되지 않거나 슥 9:10에서와 같이 오직 많은 다른 것들 곁에 사용될지라도, 우리는 가능한 한 가장 넓은 의미의 샬롬에 관한 예언적인 선포를 듣게 된다.

따라서 그 단어가 실제로 발견되는 구절들에 대해 어떤 보다 큰 비중을 두지 않는다. 사 9:5에 메시야 아이의 이름들에서 그 최종 이름 샬롬 사르(평화의 왕)는 의미의 중요성에 있어서 선행하는 다른 이름들과 다를 바 없다. 그 이름은 하나님의 사명(commission)을 지닌 분(사 9:1-6)으로서의 메시야는 도래하는 메시야 왕국의 평화의 보증인(guarantor)과 보호자이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것은 사 9:7의 가장 중요한 기사에서 다시 다윗의 보좌와 결부된 구원을 위해 영원히 있을 것이라고 표현되어 있다. 미 5:5에서 "이 사람은 우리의 평강이시다"라는 표현은 이 전체 예언의 본질을 요약한 것이다.

피조된 세상은 지금은 그것이 저지른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받고 있고 스스로 분열하고 있지만, 결국은 다시 온전하게 될 것인데(사 11:6-9; 29:17-24; 6:1-9), 그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실 것이다(사 65:17-19; 참조: 계 21:1-4).

평화에 관한 언약의 갱신에 관련된 메시지는 우주적이고 영속적인 평화에 관한 약속으로 발전되었으며, 이 구원의 날의 도래는 하나님께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자(사 61:1, 2)로서 평화의 나라의 담지자요 설립자인 평강의 왕(사 9:5,6)에 자주 결부되었다.

흥미있는 점은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가 모든 풍부한 의미를 지니는 데도 불구하고 어느 곳에서도 특별히 내적인 평화의 태도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참으로 그것이 개인보다 오히려 그룹에 대해 사용되는 구절들이 더 많다.

개인에 대한 용법의 전형적인 보기로서, 애 3:17을 들 수 있다: "주께서 내 심령으로 평강을 멀리 떠나게 하시니 내가 복을 잊어버렸음이여". 그러나 여기에 샬롬도 감추인 내적인 것이 아니라 그 자체를 외적 안녕의 형태로 나타낸다. 그룹과 관련된 대부분의 보기에서 샬롬은 분명히 외적으로 드러내보일 수 있는 어떤 것을 의미한다(Rad, TDNT).

샬롬은 이스라엘의 정치적 열망에 관련된 사회적 차원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순전히 개인적인 영역을 훨씬 넘어서는 공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샬롬이 체다카(의, 사 48:18; 시 86:10)와, 그리고 미쉬파트(재판, 슥 8:16)의 실제적 이상과, 나아가 심지어는 페쿠다(관리, 사 60:17)와 밀접히 관련된다는 사실이 입증된다. 이것은 또한 가장 보편적인 용례에서 이 단어는 개인적 개념어라기 보다는 사회적 개념어임을 시사한다(H. Beck, C. Brown , DNTT).

4. 예언자의 메시지로서의 샬롬/ 에이레네

이믈라의 아들 미가야에서 에스겔까지의 소선지자들은 거짓 선지자들이 선포한 구원의 메시지를 강렬하게 대항했다. 수세기를 통해 계속된 이 투쟁에서 모든 사람의 주의를 끈 표어는 샬롬(평화)이다. 참으로 전문 용어 인나베 레샬롬(그는 평화를 예언한다)은 이와 관련하여 나타난다(렘 28:9).

샬롬은 어떤 선지자 서클의 정점이었으며, 따라서 이 용어는 두 파당 사이의 심한 투쟁의 중심이 되었다. 문제는 이미 구원의 선지자들을 반대한 미가야의 입장에서 보여졌다. 그러나 이 용어 자체가 나오지 않는다(왕상 22:5이하).

미가는 몇몇 대항자들과 싸웠는데 그들을 이득을 얻기 위하여 예언하는 자들이라고 비난했다. 그들은 이득이 있는 한, 구원을 선포할 것이다: "내 백성을 유혹하는 선지자는 이에 물면 평강을 외치나 그 입에 무엇을 채워주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전쟁을 준비하는 도다…"(미 3:5이하).

예레미야는 그 치열한 투쟁에 투신하여 선지자들로부터 가장 강렬한 저항을 받았다. 큰 고통 중에서 예레미야는 샬롬 에메트(영원한 구원)를 약속하는 예루살렘의 운명이 무엇인지를 말한다(렘 14:13이하).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심상히 고쳐 주며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렘 6:14). 렘 28장에서 예레미야와 이런 선지자들 간의 극적인 교전의 이야기를 읽는다. 예레미야와 하나냐 간의 문제의 요점은 샬롬(평화)이냐, 라아(환란)이냐 이다.

최종적으로, 에스겔은 거짓 선지자들이 구원이 없는데도 샬롬 하존(구원의 이상)을 본다고 하며 백성을 잘못 인도했다고 동일한 항의를 했다(겔 13:16이하). 여기서 "이들은 예루살렘에 대하여 예언하여 평강이 없으나 평강의 묵시를 본다하는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이니라…"며, 대항한다.

거짓 선지자들의 문제는 샬롬의 문제를 넘어가며, 이 문맥에서 추적할 수 없다. 그렇지만 의심할 수 없는 것은 그들이 선포한 샬롬이 신화적 개념으로 옷 입은 궁국적 종말론적 평화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실제적 정치적 평화, 즉 모든 중대한 정치적 문제가 잘 해결되어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보장하는 평화 가운데서 살 수 있다는 약속이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마치 예레미야가 처음에 이 견해를 함께 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는 다음에 여호와께서 "이 백성에게서 평강을 빼았으셨다"는 것을 보게 되었다(렘 16:5).

거짓 선지자들의 프슈도스(yeu'do", 5579: 허위, 거짓말)는 그들이 샬롬을 예언한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예레미야와 에스겔도 다른 상황들에서 이것을 예언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히려 그들이 백성의 죄를 알지 못했으며, 따라서 절박한 심판에 관하여 어두운 정치적 장면을 해석할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예레미야와 에스겔로서는 대응 표어 에인 샬롬(평강이 없다)이란 표어를 만들었다(렘 6:14; 8:11; 12:12; 30:5; 겔 13:10,16).

거짓 선지자들의 샬롬과 예레미야와 에스겔의 에인 샬롬 간의 싸움은 강도를 더하여 갔으며, 그러나 주전 597년과 586의 예루살렘의 정복과 멸망으로, 어떤 긴장 완화가 있게 되고, 구원을 예언했던 거짓 선지자들은 철저히 불신을 당했다. 이제는 새롭고 더 큰 의미에서 샬롬의 약속은 예레미야와 에스겔의 예언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들 중의 하나가 되었다.

따라서 예레미야는 사로잡힌 자들에게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악이 아니라 구원을 생각하신다는 놀라운 기사를 기록한다(렘 29:11). 여기에서 우리는 예레미야서에 있는 후기 구원 예언의 근거를 본다. 다른 나라들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가져올 구원을 보고 떨 것이다(렘 33:9). 동일한 주제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과 맺은 평화의 언약에 대한 에스겔의 절정에 달한 메시지에 다시 등장한다(겔 24:25; 37:26이하).

샬롬에 대한 싸움은 이사야의 마지막 장들에서 나타나지 않는다. 여기서 샬롬은 벌써 선지자의 입장의 어떤 중요한 양상을 보여주는 표어가 아니다. 그것은 단순히 이 예언의 충분하고 장엄한 요지의 하나이다.

만일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말씀을 들었다면, 그들의 샬롬은 강과 같이 흘러내렸을 것이고 그들의 체다카(의)는 바다의 물결과 같이 되었을 것이다(사 48:18). 여기서 이 평행 관계는 이 용어가 지금 한 영적 의미를 받는다는 것을 보여 준다.

유사하게 사 54:13에서 예루살렘 자손에게 약속한 구원의 복은 체다카(의)의 복과 결부되어 있다. '샬롬'과 '체다카'의 동일한 결합은 하나님의 새 도성에 대한 예언적 표현에서 나타난다: "내가…화평을 세워 관원을 삼으며 의를 세워 감독을 삼으리니 다시는 강포한 일이 네 땅에 들리지 않을 것이요 황폐와 파멸이 네 경내에 다시 없을 것이며 네가 네 성벽을 구원이라 네 성문을 찬송이라 칭할 것이라"(사 60:17-18).

사 32:17에 의하면 샬롬은 의의 결과이다: "의의 공효는 화평이요 의의 결과는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라". 이 시적 예언에는 '샬롬'이 더욱 실제적 의미로, '카보드'(영광)와 연결되어 있는 사 66:12에서 다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가능한 가장 풍부한 음조를 발하는 것이 있다.

여기서 언급하고자 하는 것은, 아름다운 소리로 "먼데 있는 자에게든지 가까운데 있는 자에게든지 평강이 있을지어다 평강이 있을지어다"(사 57:19)고 한 것과 같이 평화는 풍부한 기대를 표현하는 용어지만, 더욱 정확한 신학적 용어로 해석되지 않은 용어이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어떤 모호함을 가지고 있으므로, 이러한 많은 측면적 용어를 잘 사용하지 못하는 번역자들은 때때로 이러한 구절들에서 샬롬이 그의 회복된 백성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인 이상, 더욱 현실적인 '안녕, 복리 well-being'를, 더욱 분명한 '평화 peace'를, 신학적으로 더욱 포괄적인 '구원 salvation'을 사용해야 할지 알지 못한다.

3. 랍비들, 위경 등 유대 문헌의 용법 

1. 랍비들의 문헌

(a)  랍비 문헌에서 평화라는 개념 전체에 깔려 있는 것은 여호와의 샬롬이다. 그러나 이 개념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와 그리고 순전히 인간적인 차원에서 모두 그 의미가 확대되었다. 샬롬은 인사말로서 만날 때('샤알 베샬롬', 안녕을 구하거나 비는 말)나 작별할 때(안녕히 가라) 상대의 안녕을 구하는 것이다. 살롬으로 인사하고 인사에 답한다.

또한 샬롬은 '순조(順調), 안녕, 안전'이란 의미로 사용되었다. pBer, 60에는 임신 6개월 부터 9개월 까지 순조로운 출산(순산)을 위해 기도한 것과 아이의 가고 오는 길에서의 보호,곧 안전을 위한 언급이 있다. 그리고 '휴식이나 안식'이란 의미로도 나타난다. 샬롬은 유대인의 무덤비에서 '안녕이나 구원'이란 의미로 기록되었다.

(b)  랍비 문헌에서도 구약성경에서와 같이 샬롬은 하나님이 그의 백성에게 주시는 선물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바벨론의 18개의 간구는 그의 백성에게 하나님의 복이 임하기를 기원하는데 그 최종 간구는 그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복과 평화가 임하기를 구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샬롬은 베레카(복, 지복)와 병행되고 같은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비록 유대인들 간에 메시야 시대의 평화의 개념에 대하여 견해차가 있었지만, 평화는 의인의 몫이며, 구약성경에서와 같이 메시야 시대의 지복(Blessings)의 총화이다. 이사야 52:7은 이것에 대하여 언급한다.

(c)  샬롬은 또한 사람들(개인들, 가정, 단체, 국가들) 간의 투쟁의 반대어이다. 따라서 사람들 간의 화평케 하는 것에 대해 자주 강조한 내용을 찾아 볼 수 있다. pea.,1.1에 의하면 이것은 그 열매들을 즐기는 것들 중에 하나이다. 학자들의 역할은 세상에 평화를 증진시키는 일이며(Ber 64a), 엘리야는 와서 세상에 평화를 먼저 확립한다(Eduy. 8:7). 예배에서 평화를 위한 기원으로 끝맺지 않은 축도나 기도가 없다(Lev. R. 9:9). '샬롬'은 하나님의 이름들 중 하나이다(Shab. 10b; 2:1, 4b).  UK. 3:12에 '거룩한 자여, 그는 찬양을 받으리로다. 그 안에 평화보다 더 가치있는 어떤 복을 간직하고 있는 그릇이 없도다'라고 말한다.

Rabban Simeon b. Gamaliel의 기록에 '세 가지, 즉 진리와 심판과 평화로 말미암아 세계가 보존된다'고 하였다(Avot 1:18). 이 기록에 의거하여 탈무드(Talmud)는 '만일 심판이 집행되면 진리가 지지를 받고 평화가 증진되기' 때문에 그 세 가지는 사실상 하나라고 선언한다(TJ, Ta'an. 4:2, 68a). 탈무드 랍비들의 최고 이상은 평화이기 때문에 그들은 할 수만 있으면 평화를 위하여 정의나 심판을 유보하거나 제외하였다.

힐렐(Hillel)에 있어서 아론은 평화를 추구하는 자의 한 모델이다(Ab,.1,12; ckawh, Str.B,.1.217). S.NU(42.6:26)에는 이방인들이나 이스라엘이 우상숭배의 죄가 있을지라도 그들이 평화하는 한 사탄이 그들을 해칠 수 없다고 한다. 랍비들은 호 4:17을 해석하여 '이스라엘이 우상들과 연합되어 있을지라도 평화가 그 안에 우세하고 있는 한 그대로 두라'고 가르친다(Gen. R.38:6).

평화를 확립하기 위하여 진리의 엄격한 노선에서 벗어나는 것도 허락되었으며(Yer. 65b), 탈무드는 민 5:23에 관련하여 '만일 남편과 아내 사이에 평화를 확립하기 위하여 신성하게 기록된 하나님의 이름을 지울 수 있다면, 전세계의 평화를 이루기 위하여 참으로 더욱 많이 그렇게 해야 한다'고 선언한다. 랍비들은 성경 자체와 모순하여 어떻게 사람들 간의 평화를 지지하는지를 설명한다(CKAWH,Slav. En. 52:11-13).

이것은 이웃의 '샬롬', 곧 구원을 구하는 문제가 아니라 다툼의 종식이라는 의미의 [샬롬]을 구하는 문제이다. 아마도 이것은 불일치나 불화가 메시야의 도래를 방해한다는 사상에 의한 것같다. 랍비들의 기록은 시기, 다툼, 불화가 하나님의 뜻에 반대가 된다는 강한 신조를 명시하고 있다. 이 견해에 따르면, 바로 세상의 존속은 평화에 의존한다(Ab., 1,18). 물론 하늘에 있는 것들 역시 불화할지라도 그렇다는 것이다(참조, 골1:20).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대하여 구약성경에서 발견하지 못하는 '샬롬'의 용법을 도입하게 한다. 다마스커스 문서는 하나님이 모든 육체와 다투고 있다는 사실로 시작한다. 이 다툼은 평화를 이루는 장막을 만들기까지 널리 펴져 나간다. 우상숭배와 같은 죄들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간의 반목을 조성하지만(Lv. r.,7 on 6:2), 제단의 돌들은 그들 간의 평화를 조성한다M. Ex., 29 등). 하나님과 사람 간의 평화와 다툼은 사람이 두 가지, 곧 긍정적으로와 부정적으로 행동하는 상호관계를 포함한다.

(d)  앞에서 살펴본 바, 샬롬은 유대인이 대망하던 구원의 핵심 바로 그것으로 되어있다. 이러한 평화를 추구하고( Rabbi Hille1, Aboth I:I2. SBI 217) 사람들 사이에 평화를 세우는 것은 반드시 해야만 할 일이었다. 랍비들의 가르침에서 평화롭게 하는 자의 역할은 신약성경에 나오는 그것과 유사한데, 이 점에서 랍비 유대주의는 신약성경의 '새 계명'과 비슷하다.

하지만 여기에서의 근본 동기는 이유에 대한 적극적인 사랑이라기보다는 샬롬을 방해할런지도 모르는 모든 것을 제거하고자 하는 욕망이다. 순전히 인간적인 차원에서 적용되는 것은 또한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도 적용된다. 이리하여 평화라는 개념은 사람이 행한 것과 행하지 않은 것 모두를 한층 중요하게 생각하는 새로운 차원을 얻게 된다. 이러한 평화에 대한 개념은 구약 시대 이후 발전한 새로운 용법에 큰 영향을 주었다.

2. 위경, 요셉푸스, 필로

(a)  위경에서 종교적 용법을 고찰해 보면, Test ⅩⅡ에서 '평화의 천사'라는 말이 나타난다. 여기에서 에이레네는 Test. L. 18:4와 D. 5:9,11에서와 같이 전쟁의 중단으로 표현된 구원을 의미하지만(Test. Jud. 22:1이하) 그것은 구원의 효과를 내지 못한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Test. ⅩⅡ와 특별히 Eth. En에서 평화의 반대는 랍비들의 견해와 같이 하나님과 이스라엘 또는 인류와 투쟁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이다.  Eth. En에 의하면 불경건한 자에게는 긍휼과 평화가 없고(5:15), 하늘의 타락한 수호 천사들에게는 평화도 없고 용서도 없지만(12:5), 반면에 의인에게는 평화가 약속되어 있다.

그러나 Eth. En. 1:17이하에 의하면, 평화는 심판의 유보 또는 비집행이며, 따라서 평화는 용서와 심판자의 긍휼과 연결되어 있다. 그렇지만 평화는 또한 빛과도 연결되어 있어서 긍정적인 의미를 함축하며, 구원을 뜻하기도 한다. 이러한 의미의 평화는 '평안히 내버려 두었다'란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할 수 있다. 열 두 족장의 유훈에서 평화는 재판을 유보하는 것, 즉 범법자를 동정하여 유예해 주는 것, 혹은 적어도 그에 대한 형벌의 집행을 유예하는 것을 의미한다.  위경에서 평화는 또한 인간들 사이의 일치나 화합을 의미하기도 한다(Foerster, TDNT;  H.Beck, C. Bro wn, DNTT).

(b)  요세푸스는 구약성경과 랍비들의 용법을 철저하게 따른다(Ant. 1, 179; 11, 216; 8, 405; War 2, 135).

(c)  필로는 언어학적으로, 그리고 실질적으로 헬라 전승을 따른다. 그에게 있어서 에이레네는 정치적 평화와 욕망의 싸움과 대조로, 오직 하나님께만 속하고(Heinemann,413ff), 하나님으로부터만 찾아 얻을 수 있는 내면적 안식인 마음의 평안을 의미한다(Vit. Mos., 1, 304). 그렇다고 해서 평화의 외면적이고 객관적으로 입증이 가능한 상태를 가리키는 측면과 무관하지 않다. 내면적, 외면적으로 싸움과 평화는 그룹을 이룬다. 내면적 싸움이 가장 나쁘며, 그것이 모든 악의 근원이다.  필로는 헬라 철학의 영향을 받아서 역시 내면적 평화를 유혹과 탐욕에 대한 승리로 간주하였다(Jos. 57). 이디오피아어 에녹서 52:11은 '평화와 사랑을 가져오는 자는 복이 있다'라고 선언하고 있다(Foerster, TDNT).

3. 쿰란 문서

쿰란 공동체는 변절한 이스라엘로부터 자신을 분리시켜(1QS 8:4-9; CD 1:4과 해당 구절) 자신을 구원 받은 자들의 종말론적 공동체라고 생각하였다. 이 공동체의 성원들은 이미 종말론적 평화를 향유하는 경지에 들어간 것이다.

그들의 문헌에서는 영원한 평화(IQS 2:4), 평화의 넘치는 풍요( IQS 4:7), 끝이 없는 평화(IQH 7:l5), 지속적인 평화(IQH 15:16), 제한 없는 평화(IQH 18:30) 등에 관한 구절이 나온다. 그러나 이 공동체는 아직도 투쟁의 와중에 있다(CD 4:13 및 그 밖의 해당 구절에서는 벨리알과 이스라엘 및 미가엘의 싸움이 언급되고 있고, IQM 1:9 이하에서는 빛의 아들들과 어둠의 아들들의 싸움이 언급되어 있다).

평화의 도래는 재난과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다(IQH 1:17). 구원은 구원을 받을 사람들이 불 붙는 용광로 속에서 연단을 받은 후에라야만 참된 것으로 인정 받는다(IQM 17:1). 하나님은 이미 영원 무궁한 평화의 언약(구원)을 생명의 바늘로 새겨 놓으셨다(IQM I2:3). 이러한 평화는 더 이상 거절을 당하지 않으며(IQH 9:11), 구원의 복으로 충만한 피난처가 된다(IQH 9:33). 평화는 구원과 행복과 같은 것이다. '하나님의 평화'(IQM 3:5; 4:14)와 '하나님의 기쁨'은 하나님의 백성이 안전한 그들의 고향에 도달하는데 필요한 암호이다(1QM 3:11).

4. 신약성경의 용법 

1. 서론

에이레네는 신약성경에 92회 사용되었으며, 요한 1서를 제외한 신약의 모든 성경에 나온다. 복음서에 25회(마 4회, 막 1회, 눅 14회, 요 6회), 사도행전에 7회, 바울 서신에 47회, 야고보서에 3회, 베드로서에 5회, 유다서에 1회, 요한서신과 계시록에 4회 사용되었다.

신약성경에서 에이레네의 변화 또는 발전된 의미를 모두 추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단어는 형태와 내용에 있어서 70인역본과 히브리어 구약성경의 전통을 착실히 따르고 있다. 그리고 랍비 문헌의 샬롬과 같은 의미로도 사용되었다. 추가로 고전 헬라어 문헌에 나타난 의미들이 그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신약성경에서의 의미는 인사와 그리고 유사한 표현에서 안녕(well-being)이나 구원(salvation)이란 의미를 가진다.

마 5:34(눅 7:50)와 약 2:16에서 작별 인사로, 눅 10:5; (눅 24:36); 요 20:19; 요 20:21; 요 20:26에서 도착 인사로 사용되었으며, 당시 팔레스틴에서 유행한 인사를 번역한 것이다.

행 16:36에서 누가가 로마 간수의 인사말로 "평안히 가라"는 말을 사용했는데, 그는 분명히 그 인사말을 70인역본에서 취했으며, 새 언약의 사람들에게 어울리는 인사말이라고 생각했다.

사도 바울 역시 항상 그의 편지서들에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라는 인사말을 사용했다.

계 1:4에도 동일한 인사말이 나온다. 이것은 히브리인과 아람인의 인사와 같은 것이다.

디모데전·후서, 요한이서, 그리고 유다서에서는 자비를 뜻하는 말과 함께 사용되었으며, 평화는 또한 예를 들어 벧전 5:14; 요삼 1:15에서처럼 끝맺는 인사말에 나온다. 구약성경의 평안히 가라와 비슷한 말이 행 15:33과 고전 16: 11에 나오며, 눅 2:9에 나오는 시므온의 말도 이와 비슷한 의미를 지닌다.

안전(security)이란 의미의 에이레네는 눅 11:21에서 찾아볼 수 있다(참조: 살전 5:3). 고전 14:33에서는 구약성경의 영향이 한층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데 여기서 에이레네는 무질서의 정반대이며, 교회 안의 무질서에 반대되는 상태를 나타낸다. 행 14:2.

신약성경에서 이 단어의 주요 의미는 분명히 헬라적인 의미가 아니라 보다 깊은 의미에서의 구원이다. 에이레네는 인간 간의 일치 또는 조화를 나타내며(행 7:26; 갈 5:22; 엡 4:3; 약 3:18; 참조: 벧전 3:11), 하나님과의 화평도 의미한다.

에이레네는 행 12:20; 행 24:2; 마 10:34; 계 5:4에서는 전쟁과 반대되는 평화에 대해 사용되었다. 바울은 이 단어를 영혼의 평안에 대해 사용하는데(참조: 롬 15:13), 이런 용법은 매우 드문 헬라의 용법이다.

눅 14:32에서는 평화의 조건을 구하기보다는 오히려 인사하는 것을 뜻하는 아람어투가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문맥상으로는 존경과 무조건적 복종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신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그 용법상 세 가지 중요한 개념을 지니고 있다. - ⑴ 안식의 느낌으로서의 평화,  ⑵ 하나님과의 화해의 상태로서의 평화, ⑶ 그리고 종말론적 구원으로서의 평화이다. 이 중 마지막 의미가 기본적인 것이다.

2. 가장 광범위한 의미에서 만물의 정상적인 상태로서의 에이레네

고전 14:33에서 바울에게 있어 에이레네는 고린도 교회에서 생각을 예언함으로 야기된 어지러움(혼란스런 상태)과 반대되는 정상적인 상태이다.

영감을 주시는 하나님은 어지러움(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고 평화의 하나님이시다. 영감은 다툼과 혼란을 위한 구실을 허용하지 않고 있으며, 따라서 시기와 분쟁은 하나님의 임재의 표시가 아니다. 여기서 지적하는 원리는 이적(miracles)이 법의 위반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법을 위반하는 편이 아니라 법을 지키므로 결과하는 평화, 곧 질서의 편이다. 이 질서의 평화는 진정한 교회의 정상적 상태인 것이다(고전 12:2; 약 3:16과 비교).

평화는 공동 예배(고전 14:33)와, 사도와 그의 협동자들 간의 교제에 결정적인 요인이 되는 것이다. 이 의미에서 에이레네가 분명히, 강조적으로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은 신약성경의 다른 곳에서 주목을 끄는 내부와 외부 사이의 관계를 보여준다.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는 건강한 또는 정상적인 상태는 하나님에 의해 영혼이나 인류에 제한되지 않고 전 우주에 미치는 것이다(참조: 1corinthians, ICC; V. Hasler, EDNT; Foerster, TDNT).

3. 인간의 종말론적 구원으로서의 에이레네

(a)  여기에서 출발점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구원, 특별히 종말론적인 구원이라는 의미를 지니는 구약성경의 샬롬이다.

눅 1:79에 사가랴의 찬송에서 에이레네는 대망한 종말론적 구원이다.

눅 2:14에 천사의 찬송에서 에이레네는 사람들 중에 평화나 하나님과 평화 뿐만이 아니라 이제 땅으로 온 구원을 가리킨다.

눅 19:42에 "평화에 관한 일"과 눅 19:38에 "하늘의 평화"도 구원이다.

계 12:10과 계 19:1에 "구원(소테리아)은 에이레네와 동일한 것이며, 그 의미는 (요한계시록에서 소테리아와 동일한) 에이레네가 하늘에 있고 하늘에서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역사적 사건으로 온다. 히 13:20은 이것을 "평강의 하나님"과 "양의 큰 목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내신 자"를 동일시 함으로써 넌지시 암시한다.

히 7:2은 그리스도의 전형으로서의 멜기세덱은 살렘 왕, 곧 평화의 왕이시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 구원은 평화의 복음으로 선포된다(엡 6:15; 참조: 행 10:36; 엡 2:17). 그것은 그리스도의 구원이다(요 14:27). 세상은 오직 [샬롬]을 원하며, 그리스도는 자기가 확보한 구원을 주신다.

예수님은 관습적인 작별인사를 사용하셨으며(막 5:34; 병행구, 눅 7:50), 예수님은 친히 제자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닌 평안의 인사(이 집에 평안이 있을 찌어다)를 가르쳐 주셨다. 제자들이 어느 집에든지 들어갈 때 하는 인사는 소원이 아니다.  그 평안은 그대로 거절하거나 받거나 해야 하는 선물이다. 그러므로 만일 거절하면 참으로 그 평안은 제자들에게로 돌아오는 것이다(눅 10:5이하; 마 10:13). 이스라엘의 마지막 세대는 최종적 선택을 직면하고 있다. 평화의 인사 형태에 동반하는 구원의 말없이 어느 성읍이나 집에도 들어갈 수 없다. 이 인사를 받는 사람은 누구든지 '평화의 아들'이 되지만 이 인사를 거절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구원으로부터 영원히 제외되어 있는 것이다(V. Hasler, EDNT).

그리고 편지서들(롬 1:7; 고전 1:3; 고후 1:2; 갈 1:3; 빌 1:2; 살전 1:1; 몬1:3)과 계시록(계 1:5)에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라는 인사 또는 축도의 말은 특수한 의미를 지닌다. 유대인의 축복 공식문은 '긍휼과 평화'이다(2bar. 78:2). 바울은 이 축복문에서 '긍휼' 대신 '은혜'를 취하여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있기를 원하노라)"라고 축복한다.

그는 "은혜와 평강"을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시키므로, 예배 의식을 따랐다. 이 축복으로 그는 그의 독자들에게 주님의 구원의 은사를 수여하는 것이다.

그는 이 은사를 고전 1:4-고전 1:9의 서언에서 더욱 정확히 묘사하며, 갈 1:4에서 그 축복을 이어 부언하고 있다. 후자에서 카리스(은혜)는 희생제사의 방식으로 설명되어 있고, 에이레네는 악한 현세대로부터 구원 받는 해방의 과정으로 설명되어 있다. 사도 요한이 그의 계시록 서언에서 독자들에게 한 축복도 바울의 축복이 의미하는 바와 같은 것이다.

우리는 이 구원을 구해야 한다: 히 12:14에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고 경고한다. 이 문구에서 에이레넨 메타(개역, 더불어 화평함)는 다른 사람들과 일치나 화합을 의미하지 않는다. 저는 다리가 고침을 받을 수 있는 우리의 발을 위한 곧은 길을 만들라는 권고 후에 모든 사람과 교제하여 구원을 구하라는 명령이 뒤따른다.

이 구원은 골 3:5에서 마음을 다스리는 능력이다.

이 구원은 빌 4:7에서 사람을 보호하는 능력이다.

어떤 학자들은 6절에 비추어 이것이 불안에 반대되는 평안감을 의미한다고 하지만 동의하기 어렵다. 그것은 신자가 보호받는 왕국이다. 비록 인간 관계 속에서 이 구원이 때때로 사람의 외적인 일들과 동일하지 않으며, 심한 적대적인 경험으로 인도할지라도 그렇다(마 10:34이하).

(b)  이런 구절들에서 에이레네는 실질적으로 조에(생명)와 병행하며, 바울은 롬 8:6에서 평안과 생명을 동일하게 취급한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바울은 육신의 노력은 사망, 영의 노력은 에이레네로 인도한다고 말한다. 그는 7절의 첫 부분에 근거를 둔다. 육신의 노력은 하나님께 대적하는 것이며 오직 사망으로 인도한다. 조에(생명)와 다나토스(사망)가 종말론적으로 그대로 받아들일 존재 양식인 것과 같이 조에(생명)는 그와 병행하는 에이레네와 함께 있다.

에이레네(= 샬롬 = 구원)는 최종적 성취의 상태이며, 새로운 피조물의 정상적 상태이다. 이와 같은 특징은 벧후 3:14에서 나타난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안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엔 에이레네) 나타나기를 힘쓰라."

여기에서 에이레네는 기본적인 내적 성벽이나 내적인 평안도, 하나님의 은혜도 아니며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형성된 심신의 회복과는 별도로, 상상할 수 없는 완전한 복지(안녕)나 정상 상태를 암시한다.

이 의미에서 바울의 더욱 친숙한 인사는 때때로 데오스 테스 에이레네스(평화의 하나님)로 말한다. 이 묘사는 바울이 평화의 하나님을 기대한 것과 확고하게 연결되어 있다.

평화의 내용은 문맥에서 결정될 수 있다. 롬 16:20에서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단을 너희 발아래서 상하게 하시리라"고 말했는데, 이 사탄의 파멸은 구원의 일부이다. 평강(화)의 하나님('데오스 테스 에이레네스')이란 말은 하나님이 평화와 지복을 시행할 것이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탄을 멸하실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벧후 3:14과 실질적으로 동일한 정도의 구원과 복지(안녕)의 절대적인 내용은 살전 5:23에 나타난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실 때에 흠이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에이레네는 바로 '영적 번영'이 아니라 전인간, 곧 영혼과 몸의 구원이다. 동일한 의미는 히 13:20이하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에이레네는 카리스(은혜)의 결과인 영혼의 평화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인간의 구원을 의미한다.

구약성경과 랍비적 용법에 근거해서, 에이레네는 이와같이 가장 심오하고 포괄적인 의미를 요구한다. 에이레네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미 일어나고 있는 전인(whole man)의 종말론적 구원이다. 그것은 확실한 성취의 상태로서 카이네 크티시스(새로운 피조물)의 상태를 의미한다. 이 의미에서 구원은 예수님의 부활에서 계시되었다(참조: Foerster, TDNT; H.Beck, C.Brown, DNTT; V.Hasler, EDNT 등).

4. 하나님과의 화평으로서의 에이레네

신약성경에서 에이레네는 하나님과의 평화의 관계에 대하여 드물게 사용되었다. 그 첫 언급은 엡 2:14-엡 2:17이다. 바울은 사 57:19을 생각하고 있었으며, 그러므로 구원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 용어가 15절에 나타날 때 그 반대어 에크드라(증오, 적의; 개역, 원수된 것)에 대하여 어떤 해석자들은 하나님에 대한 사람들의 적의를, 어떤 해석자들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적의를 의미한다고 한다.

만일 율법이 유대인과 이방인을 갈라놓고 이스라엘을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키는, 이 두 가지 역할을 알지 못한다면 이 구절들을 거의 올바로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율법으로 말마암아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적대와, 또한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적대가 일어난다. 사실 유대인들은 율법을 통하여, 그리고 율법을 위하여 그들 자신들을 이방인들로부터 분리하고 이방인들을 원수로 생각해야 했으며, 이방인들은 그런 유대인을 적대적으로 대했다.

따라서 14절에 "그는 우리의 화평(에이레네)이시라"는 포괄적인 의미를 나타낸다.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폐하셨을 때, 두 가지 무질서 곧 사람들 중에 무질서와 하나님에 대한 무질서를 파기하셨다.

이 에이레네는 하나님과의 평화와 인류 중에 평화를 의미한다. 따라서 그것은 질서, 모든 관계의 회복(healing)을 의미한다. 그래서 15절에 에크드라(원수된 것)란 표현도 일반적인 의미를 가진다. 15절에 "화평하게 하시고"와 16절에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도 역시 일반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에크드라와 에이레네는 여기서 인종 안에서 많은 서로 다른 형태를 취하는 객관적 상태들이다.

만일 하나님과 평화가 이 구절에서 에이레네의 일부이라면 롬 5:1에서 에이레네는 그 유일한 의미를 나타낸다. "하나님으로 더불어"라는 말이 보여주는 것과 같이 이 언급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지적한다. 이것은 롬 5:10에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원수들이며, 하나님이 그들과 화해하셨다는 사실에 동의한다(참조, 엡 2:16). 그래서 다음 평화는 사람이 변경한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상호관계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화해의 사역을 하심으로써 신자들이 하나님에 대하여 가지게 되는 관계이다.

5. 인간의 상호 평화로서의 에이레네

롬 14:17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말한다. 그는 강한 자들에게 말하기를 하나님의 나라는 그들이 생각하는 바와 같이 다른 사람들을 데리고 와서 먹고 마시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 가운데서 의와 평화와 희락의 통치로 되어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희락(카라)"은 15절의 "근심하게 되"(뤼페이타이)어서는 안되는 것을 보여 주며, 의(디카이오쉬네)는 여하한 사람의 양심도 침해 당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생각나게 한다. 평화(에이레네)는 하나님의 나라에는 어떠한 종류의 질병이나 악이나 불화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바울은 계속하여 이 영역에서 그리스도를 봉사하는 자들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사람들의 마음에 든다고 말한다. 그는 이렇게 하여 "평화에 관한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라는 권고를 한다. 여기에 에이레네는 오이코도메(덕을 세움)와 병행하는 것이며, 그것은 분명히 상호 간의 평화를 의미한다. 그렇지만 17절에서 에이레네는 이것보다 더 큰 것이다.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는 것은 성령 안에서 건강을 증진시키는 어떤 것의 창조, 즉 '에이레네'를 함축한다. 그렇지만 실제적으로 로마에 있는 교회에 적용하면, 이 건강을 증진시키는 일은 의심 없이 평화이다.

우리는 고전 7:15의 난해한 말에 동일한 사상의 어떤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화평 중에서 너를 부르셨느니라". 바울이 만일 이방인 배우자가 결혼을 파하려고 하면 기독교인 배우자는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할 때 그것은 주님께서 이혼에 관하여 말씀하신 것과 모순되는 것같이 보인다: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속 받을 것이 없느니라". 이것은 오직 주님의 말씀, 곧 우리는 이러한 경우에 노예들과 같이 구속받지 않는다는 말씀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15절에서 우리는 제한(restriction)이 아니라 이유(reason)를 가진다. 여기에 '데'는 '그러나 but'가 아니라 '오히려 rather'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 부름에 대한 언급은 바로 앞에 말한 것을 위한 근거를 확립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오히려'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언급된 개인적 경우를 넘어가서, 하나님이 우리를 평화로(혹은 평화를 위하여) 부르신 것을 우리에게 일반적으로 말하는 근거를 확립한다. 따라서 '에이레네'는 마지 못해서 유지하는 결혼 생활의 불화에 대한 반대 이상을 의미한다. 그것은 죄가 의도한 정상에 대한 파괴 상태와 정반대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만물의 건강한 상태, 정상적 상태를 함축한다. 당신이 배우자와 불화할 때 그를 구원하는 것이 당신의 사명이라고 생각해 보라. 구원과 그 결과인 화합의 복이 당신의 가정에 임할 것이다. 인간의 상호 간의 평화도 이 정상적 상태에 포함되어 있다. 다음 절(16절)은 '가르'로 시작한다. 여기서 '그러면, 그렇다면'이란 의미를 지닌다. : "(그렇다면) 아내된 자여 네가 남편을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며 남편된 자여 네가 네 아내를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리요."

딤후 2:22은 확실히 우리가 내적 경건(신앙심)으로 평화를 조장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는 메타가 에이레네에 관계하지 않고 '…와 함께'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자체 안에서 에이레네는 '구원을 가져 오는 것'을 의미하는 것도 당연하다. 한편 그것은 확실히 싸우고 있는 변론(제테세이스)을 한번 보지 않고 말하지 않는다(23절).

다음 구절들에서는 단순히 사람들 사이의 일치나 화합(concord)을 의미한다. 엡 4:3: "화평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약 3:18 :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의가 자라나는 씨는 화평케 하는 자들이 화평으로 뿌리게 되는 것이다. 시기(젤로스)와 다툼(에리데이아)은 '에이레네'의 정반대이다. 벧전 3:11에서 시 34편에서 인용하여 "화평을 구하여 이를 좇으라"라는 말을 무슨 의미로 사용했는지 정확히 말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 의미는 아마도 일치와 화합(참조, 9절)일 것이다(참조: Foerster, TDNT).

6. 영혼의 평화로서의 에이레네

롬 15:13에서 이 단어는 영혼의 평화를 의미한다: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그러나 이 단어가 어떻게 이 의미를 취하게 되었는지를, 즉 정상적 상태에 대한 신약성경의 이 단어의 일반적 용법에서 유래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평강의 하나님"이란 말이 외적 생명에 관한 의미를 함축하는 것과 같이, 그리고 에이레네가 인간의 전존재의 정상적 상태 - 카라(기쁨)와 불가분리적인 상태인 구원 - 을 인간 안에 창조하신다.

여기에서 에이레네의 개념은 스토아 철학의 소극적인 갈레네(고요함, 평온)와 다르다. 이 평화는 스토아 철학자들이 말하는 세상으로부터 은둔도 아니고 영적 세계나 시비적 명상에로의 경건한 도피도 아니다. 그것은 사람이 삶을 살아가면서 영원을 찾을 때에 이미 하나님의 평화를 누리는 기쁨이 충만한 확신이다(참조: Foerster, TDNT; H.Beck, C.Brown, DNTT). 이러한 영혼의 평화는 히브리어 샬롬의 특징도 아니다. 따라서 이러한 평화는 독특하게 기독교적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그리고 영혼 또는 마음의 평화에 관한 문맥들을 찾아 볼 수 있는데, 예를 들면 롬 8:6의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강"이라는 구절과 갈 5:22의 성령의 열매들 중 하나로서 "화평"은 이러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전자에서 에이레네는 생명인 구원을 뜻하고, 후자에서 사람들 간의 일치, 조화를 뜻하지만 내적, 영혼의 평화도 포함하고 있다(참조: 롬 14:17, [인간 상호 평화로서의 에이레네] 항목).

빌 4:7에는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골 3:15에는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고 기록되어 있다. "평강", 하나님의 '구원하는 능력'이 다스리는 영역으로서 마음과 생각이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다. 이 구원하는 능력의 다스림을 받음으로 마음 또는 영혼이 평화를 누리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참조: Walter Bauer; H.Beck; C.Brown; W.Foerster; G.Von.R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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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rdiva(2588, 카르디아) [[마음]] heart.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카르디아(Homer 이래로)는 '마음'을 의미하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a)  본래 생리학적으로, 사람이나 짐승의 신체의 중심기관으로서의 마음에 대하여 사용되었다(Homer, Aesch., Plat., Aristoph. 등)

(b)  비유적으로 도덕적, 지적 생명의 자리로서의 마음, 즉

① 감정과 열정의 자리(분노, 용기나 비겁, 기쁨이나 슬픔, 사랑과 미움 같은 것을 나타낸다),

② 생각이나 상상력의 자리,

③ 의지와 결심의 자리를 의미한다.

(c)  또 다른 비유적 용법으로, 자연에 관한 특별한 의미로 사용될 때 '나무의 심'과 '식물의 종자' the seed of plants 였다. 또한 카르디아는 핵심 즉(인간, 동물, 식물의) 가장 깊숙한 부분이라는 일반적인 의미도 지녔다.

이 단어는 더 이상 단순히 신체의 중심부를 지칭하는 말로만 사용된 것이 아니라 인간 전체의 지적, 영적 중심부를 지칭하는 말로도 사용되었다.

2. 70인역본의 용법 

카르디아는 70인역본에서 약 800회 이상 나오며, 주로 마음을 뜻하는 레브와 레밥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70인역본에서 카르디아는 감정적인 생활, 지적인 생활, 의지적인 생활 및 종교적 생활을 포괄한 인간 생활의 중심이다.

3. 신약성경의 용법 

카르디아는 신약성경에서 148회 나오며, 공관복음서에 47회, 요한복음에 6회, 사도행전에 17회, 바울서신에 52회, 공동서신에 13회, 히브리서에 10회, 계시록에 3회 사용되었다.

(a)  카르디아가 신체의 중심기관이며, 육체적 활력의 자리라는 사상은 눅 21:34("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행 14:17의 시적 표현("그러나 자기를 증거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너희에게 하늘로서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너희 마음에 만족케 하셨느니라 하고")과 약 5:5에만 나타난다:"너희가 땅에서 사치하고 연락하여 도살의 날에 너희 마음을 살지게 하였도다"(참조: 삼상 21:7; 시 101:5; 시 103:15).

(b)  카르디아는 인간의 내부 생명과 영혼의 모든 힘과 기능의 근원과 자리이다.

① 카르디아는 느낌과 감정, 욕망, 정욕의 자리이다. 기쁨(행 2:26; 요 16:22; 행 14:17), 고통과 슬픔(요 16:6; 요 14:1; 요 14:27; 롬 9:2; 고후 2:4; 행 2:27; 행 7:54; 행 21:13; 눅 4:18), 사랑(고후 7:3; 고후 6:11; 빌 1:7), 욕망(롬 10:1; 눅 24:32), 정욕(약 3:14; 마 5:28; 마 6:21 등).

② 카르디아는 이해와 사고와 반성의 자리이다.

마 12:34(과 병행구),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마 13:15,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라"

막 7:21(과 병행구),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눅 1:51,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눅 2:35,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

눅 9:47, "예수께서 그 마음에 변론하는 것을 아시고 어린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자기 곁에 세우시고"

행 8:22, "그러므로 너의 이 악함을 회개하고 주께 기도하라 혹 마음에 품은 것을 사하여 주시리라"

히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죄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고전 2:9,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눅 2:19; 눅 2:51,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지키어 생각하니라 ,예수께서 한가지로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그 모친은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

마 9:4, "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가라사대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

막 11:2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마 24:48(과 병행구), "만일 그 악한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롬 10:6,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계 18:7, "그가 어떻게 자기를 영화롭게 하였으며 사치하였든지 그만큼 고난과 애통으로 갚아 주라 그가 마음에 말하기를 나는 여황으로 앉은 자요 과부가 아니라 결단코 애통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롬 1: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눅 24:25, "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③ 카르디아는 의지와 결정의 자리이다.

고후 9:7,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행 11:23,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고전 4:5,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고전 7:37, " 그러나 그 마음을 굳게 하고 또 부득이한 일도 없고 자기 뜻대로할 권리가 있어서 그 처녀 딸을 머물러 두기로 마음에 작정하여도 잘하는 것이니라"

눅 21:14, "그러므로 너희는 변명할 것을 미리 연구치 않기로 결심하라"

행 5:4,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요 13:2,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

계 17:17, "하나님이 자기 뜻대로 할 마음을 저희에게 주사 한 뜻을 이루게 하시고 저희 나라를 그 짐승에게 주게 하시되 하나님 말씀이 응하기까지 하심이니라"

행 5:3, "베드로가 가로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골 4:8, "내가 저를 특별히 너희에게 보낸 것은 너희로 우리 사정을 알게 하고 너희 마음을 위로하게 하려 함이라"

엡 6:22, "우리 사정을 알게 하고 또 너희 마음을 위로하게 하기 위하여 내가 특별히 저를 너희에게 보내었노라"

따라서 카르디아는 인간의 외부와 대조하여 인간의 내부 전체를 대표한다.

살전 2:17, "형제들아 우리가 잠시 너희를 떠난 것은 얼굴이요 마음은 아니니 너희 얼굴 보기를 열정으로 더욱 힘썼노라"

고후 5:12, "우리가 다시 너희에게 자천하는 것이 아니요 오직 우리를 인하여 자랑할 기회를 너희에게 주어 마음으로 하지 않고 외모로 자랑하는 자들을 대하게 하려 하는 것이라"

막 7:6(과 병행구), "가라사대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마 15:18,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롬 10:8, "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뇨 말씀이 네게 가까와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고후 6:11, "고린도인들이여 너희를 향하여 우리의 입이 열리고 우리의 마음이 넓었으니"

롬 2:29,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행 7:51,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

행 4:32,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

골 2:2, "이는 저희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원만한 이해의 모든 부요에 이르러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라"

요일 3:19,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로다"

벧전 3:4,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로다"

④ 카르디아는 하나님을 향하여 가는 종교적 중심지이며, 종교적 생활의 뿌리이며 도덕적 행위를 결정하는 곳이다(예: 눅 16:15; 롬 5:5; 롬 8:27; 엡 3:17; 히 8:10; 벧후 1:19; 죄인의 마음, 막 7:21; 요 12:40; 엡 4:18; 약 1:26; 구속받은 자의 마음, 마 11:29; 딤전 1:5; 살전 3:13; 골 3:22; 벧전 3:15; 약 4:8, 등).

(c)  "땅의 내부"라는 의미는 마 12:40에서 나온다: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

(참조: Walter Bauer ; T.Sorg ; J.Beh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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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vhma(3540, 노에마) [[생각]], 사상, 계획.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노에마(Homer 이래)는 노에오(noevw, 3539: 지각하다, 인지하다, 생각하다)에서 유래했으며, 다음을 의미한다. 노에마는

(a)  누스(nou'", 3563)의 활동 결과로서, '생각된 것', '생각, 사상' thought(Homer).

(b)  '개념' concept(Aristot.), 문제의 '요점' point(Epigr.),

(c)  '의도된 것, 결심, 결의, 계획'(Plat.)을 의미한다.

2. 70인역본의 용법. 

명사 노에마는 70인역본에서 3회 나오며, '악한 계획, 음모, 공격'이란 의미로 사용되었다(집회서 21:11; 바룩일서 2:8; 마카베오삼서 5:30).

3. 신약성경의 용법. 

명사 노에마는 신약성경에서 6회, 바울서신(고린도전서와 빌립보서)에서만 사용되었으며, 신학적인 의미를 찾아 볼 수 있다.

(a)  고후 11:3에서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뜻에 대한 이해력 즉 구원과 관계된 생각. 이 생각은 부패되어서 더 이상 그리스도를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다: "뱀이 그 간계로 이와를 미혹케 한것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b)  고후 3:14에서 위에서(고후 11:3) 지적한 그러한 생각은 완고하여서 하나님 말씀과 성경에 대해 접근하지 못한다: "그러나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라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c)  고후 4:4에서도 또한 이 생각은 혼미해져서 그로 인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에서 오는 빛을 지각할 수 없어서 불신앙으로 인도될 뿐이다고 한다: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d)  고후 10:5에서 사도로서의 신분과 임무의 권위로서 사도 바울은 모든 생각을 사로 잡는 것을 임무로 하고 있으므로 이 생각은 사도 바울에게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는 것이다: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따라서 노에마는 일반적인 판단력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받은 영향에 의거하여 결정을 내리고 옳은지 그른지에 대해 판단을 내릴 수도 있다.

(e)  고후 2:11에서 노에마의 복수는 사단의 책략을 의미하고 있다: "이는 우리로 사단에게 속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그 궤계를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로라". 빌 4:7에서, 즉 빌립보서의 절정에서 바울은 그의 독자들에게 기도로 하나님께 모든 것을 위탁하고 계속 즐거워 하며 인내하고 근심에서 자유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이어서 그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참조: G. Harder; J. Behm; Walter Bauer; J. H. Thay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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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urevw(5432, 프루레오) 망보다, 감금하다, 보존하다 [[지키다]]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동사 프루레오(Aeschyl., Hdt. 이래)는 프루로스(frourov": 파수군)에서 유래했으며,

(a)  '망보다, 지키다, 파수보다, 수호하다'

(b)  '감금하다'

(c)  '지키다, 보존하다'

(d)  '경계하다'를 의미한다.

2. 신약성경의 용법. 

동사 프루레오는 신약성경에서 4회 나오며, 고린도후서(고후 11:32), 갈라디아서(갈 3:23), 빌립보서(빌 4:7), 베드로전서(벧전 1:5)에만 사용되었다.

(a)  고후 11:32, "다메섹에서 아레다왕의 방백이 나를 잡으려고 다메섹 성을 지킬쌔". 여기서 다메섹 성을 지킨 것은 그가 군사들로써 성을 에워쌌다는 것이 아니라, 보초병들을 배치하여 성문들을 경계 시켰다는 것을 의미한다.

(b)  갈 3:23,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여기서 프루레오는 구원 역사 속에서의 율법의 역할을 뜻하는 특별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우리가 모세 율법의 권능으로부터 도피하지 못하도록 율법의 통제하에 감금되어 있는 것을 나타낸다.

(c)  벧전 1:5,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 여기서는 교회는 거짓 교리에 대항하여 싸울 때 하나님의 보호를 받으리라는 명령을 받는다.

(d)  빌 4: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빌립보 성읍이 로마의 주둔군에 의하여 수호되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평강이 빌립보 교인들의 생각을 수호하여 주신다.

(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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