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0.07.15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시27.일편단심구주신뢰하나됨구하라찾으라두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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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27--다윗의 시 :: 누가주와같으랴!!(야다-에세르-바라크)...JC십자가보혈 신뢰하여 JC이름 불러 사랑을 고백하라. HS의지함으로써 말씀안의 영과 생명따라 영적 민감성 새로이 하라.cofidence(fidelity)친밀/부종-conformity일치/닯음-communion교통/사귐-complacency안연/안식/평안의 4C발휘.친밀함안에서 자원함의헌신-사렁겨운 순종으로, JC품에안겨 HS안에서 구송으로, 또한 전심으로 기도하라(아이테오.에로타오)..바로 오늘 언제어디서나 Q을 발견하며 노래하라..[지고지선의 진복의 완전한 누림 위해 허락하신 바, 감각의 밤-영의 밤]인 실존적 환난가운데조차, 체휼하시는 JC를 영으로 신뢰하며 기다리라


[주안에있는나에게370].[내주예수주신은혜317],예수는나의힘이요93.누가주를따라.459.내갈길멀고밤은깊은데379.나의생명되신주380.주음성외에는446.주예수님내맘에오사286.주예수내맘에들어와289.주님의마음을본받는자455.내맘에한노래있어410.내맘의주여소망484......고개들어.날찾으라.나를알라.내갈급함.주품에품으소서.주내소망은.OpenMyeyes,Lord.내맘속에있는참된이평화는.내평생사는동안.주나의피난처.사랑의주예수님이.내안에사는이.내맘속에있는참된이평화는. WaitontheLord.너의가는길에.아우것도두려워말라.나주님의기쁨.내안에주를향한이노래.다표현못해도...주발아래무릎꿇고


Wait on the Lord Listen to his Voice, they that wait upon the Lord shall renew their strength

     **     Let your spirit move, where the Spirit of the Lord is, there is peace, sweet peace


@@구원, 구출, 구조, 해방, 자유, 안전, 번영, 승리 ...예샤[v'y<(예샤) ...예수아 : h[;Wvy] : 예수 : !Ihsou'"(이에수스)

2,사전적 의미

1)  예수아 : h[;Wvy] : 예수 : !Ihsou'"(이에수스) 구원, 구출

예슈아(명여)는 야샤([v'y:: 구원하다, 해방시키다)에서 유래했으며, '구원, 구조 salvation,   구출 deliverance'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78회 나온다.

2) 야사 : [v'y:(야샤) 구원하다, 구출하다, 구조하다

야샤(동사)는 기본어근이며, '구원하다, 구출하다, 구조하다'를 의미한다.(구약에 200회) ===>예사 : [v'y<(예샤) 구원, 구출, 구조, 안전, 번영, 승리

3) 예수아....예수아 : ['WvyE(예슈아) 예수아 Jeshua(인) 예슈아(명남)는 예호슈아(['Wv/hy])에서 유래했다.

3,예수아와 예수

1) 예수아 : h[;Wvy](예슈아) 구원, 구출

예슈아(명여)는 야샤([v'y:: 구원하다, 해방시키다)에서 유래했으며, '구원, 구조 salvation,   구출 deliverance'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78회 나온다.

===> 여호수아 : ['Wv/hy](예호슈아) 여호수아 Jehoshua

예호슈아(명남)는 예호와(hwhy)와 야샤([v'y:)에서 유래했으며, '여호와는 구원이시다'.

(1) 이에수스는 구약의 여호수아(출애굽기 등에 나타나는 눈의 아들의 이름), 학개와 스가랴에 나타나는 대제사장의 이름, 삼상6:14과 왕하23:8의 두 사람 이름, 대하31:15의 레위인의 이름)의 헬라어 형태이다. (2) 이에수스는 주후 2세기 초기까지만 해도 통상적인 헬라식의 이름이었다.

행7:45, 히4:8의 여호수아를 이에수스(!Ihsou'")라고 표기한다, 눅3:29 이에수스,(!Ihsou'") 마27:16 이에수스(바라바)(!Ihsou'n) 행13:6의 바리에수스(개역:"바예수")(ba!Ihsou'")스테판.  골4:11의 이에수스(개역: "유스도라하는 예수").(!Ihsou'")스테판...그것도 어쩌다 주후 2세기 후반 이후부터는 이에수스라는 이름이 사라졌다.

4,이제는 어떻게 호칭해야 할까? (미국=Jesus, 중국= 耶蘇, 한국=예수)

지금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이스라엘로 돌아오고 또 히브리어를 회복해서 사용한다. 그들 중에 예수(['WvyE : !Ihsou'")를 메시야(j'yvim;)로 영접한 분들이 날로 늘어나고 있다. 그런데 그들은 구원자의 호칭이 우리와 비슷할 뿐 많이 다름을 본다. 

5,예수의 이름의 호칭

(1) 예수 그리스도(Jesus Christ : j'yvim; ['WvyE : !Ihsou'") ...예수라는 고유명사와 그리스도라는 호칭이 새롭고 독특한 방법으로 연결되어 구성되었다.

(2) 예수의 이름의 의미 ...메시야 : 기름부음을 받은 자 : j'yvim;(마쉬아흐) 기름부음 받은 (자)...마쉬아흐(명남)는 마샤흐(jv'm; : 기름 붓다)에서 유래했으며, '기름부음을 받은, 기름부음을 받은 자'를 의미한다. 이 단어는 명사와 형용사로 사용된다.

a) 구약성경

이에수스(!Ihsou'")는 구약성경에 나오는 예슈아라는 유대 이름의 헬라어 형이다. 히브리어를 헬라어로 음역한 다음, 주격의 격변화를 하기 위해 시그마(-s)를 붙인 것이다.

b) 칭호와 그 의미

(a) 신약성경은 나사렛 예수와 그 제자들의 시대에 예수라는 이름이 유대인들 가운데 널리 퍼져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이러한 설명에 쉽사리 들어맞는다.

(b) 예수가 잉태 될 때

마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 jIhsou'n)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6,..즉, 본래의 호칭을 정확히 찾아본다면///[예수아]

수1:1 여호와의 종 모세가 죽은 후에 여호와께서 모세의 수종자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개역개정)

7,예수아

요19:19 빌라도가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mydWhy]h' &l,m,w yrex]n;h' ['Wvy)이라 기록되었더라.   20 예수께서 못 박히신 곳이 성에서 가까운 고로 많은 유대인이 이 패를 읽는데  히브리와 로마와 헬라 말로 기록되었더라. IHSOUS O NAZWRAIOS O BASILEUS TWM IOUDAIWN.(스테판)  ..mydWhy]h' &l,m,w yrex]n;h' ['Wvy = 예수아=['Wvy : 하나자리=yrex]n;h : 우멜렉=&l,m,w : 하예후딤=mydWhy]h'  십자가 명패의 네 글자들의 앞 자를 모으면 hwhy(여호와)가 된다. 분명한 것은 예수님 때의 (요한복음) 빌라도도 히브리 글로 “예수아”라고 기록을 했었다.

행26:14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말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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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어 [가알] ...건지다, 되 사다,(값을 치르고!!) 속량/구속하다, 근친의 역할<=고엘...>을 행하다...la'G:(1350, 가알) 

가알(동사)은 기본어근이며, '되사다, 도로 찾다, 속량하다, 구속하다 redeem, 근친 역할(권리, 의무)을 행하다'를 의미한다. 

따라서 이 어근은 '자기 친족을 어려움이나 위험에서 구하다'는 의미를 지니게 된다. 이 어근과 매우 유사한 어근 파다([d"P; , 6308): 구속하다 redeem) 사이의 한 가지 차이점은, 일반적으로 가알(la'G: , 1350)의 강조점이 근친((그리스도는 생명/피를 나눔으로써 가장 가까운 근친되셨음을 명심하라!!))의 특권이나 의무인 속량에 있다는 데에 있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100회 이상 나오며, 칼형과 니팔형으로만 사용되었다.

가알은 착하고 진실한 사람이 자기의 친족을 위해 할 수 있는 일들을 포함하는 4개의 기본적인 상황에서 사용되었다.

(a)  첫째로, 가알은 오경의 법령에서 궁핍한 때에 판 밭을 되사는 것이나 가난할 때 자신을 판 이스라엘인 노예를 자유롭게 하는 것을 언급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이런 매입과 무르는 일은 근친의 의무였다(레 25:25-54).

레 25:25에서 "만일 너희 형제가 가난하여 그 기업 얼마를 팔았으면 그 근족이 와서 동족의 판 것을 무를 것이요"라고 하였다. 만약에 자신이 부유하게 되면 그 사람 자신이 그것을 '무를' 것이다(레 25:26). 가난한 자는 자기 자신을 동족 이스라엘인에게나(레 25:39) 이스라엘에 살고 있는 타국인(레 25:47)에게 팔기도 하였다. 

속량할 책임은 가장 가까운 친척 - 형제, 삼촌, 사촌들, 가족의 혈족 - 에게 있었다(레 25:25, 레 25:48, 레 25:49). 경제적인 어려움에 처한 친척을 속량한 redeemed 자(혈연자)는 '근족 - 구속자'로 알려져 있었다.(참조: EDBW)....가난한 자의 구제에 관한 가장 유명한 실례는 수혼법에 대한 구약성경의 증거가 가장 광범위하게 미치는 룻기에 있는 것 같다. 

신 25:5-10에 의하면, 남편의 형제는 후사 없는 과부를 취하여서 씨를 영속시키고, 남자 후손과 결부되어 있는 땅의 계승을 보증해야 했다. 여기에서 근친은 야밤이라고 불리어진다. 어근 가알은 사용되지 않는다

.....룻의 상황에서는 두 가지 것들, 즉 밭과 수혼이 언급된다. 

((첫째 근친 가격 가진 이))  근친은 밭을 사는 것을 기꺼워했지만, 룻과 결혼하는 것은 기꺼워하지 않았다. 문제의 요지는 나오미가 가난하여 밭을 팔 수 밖에 없었을 때, 근친은 그녀를 위해 그 밭을 되사야 했다는 데 있다. 그는 후사 없는 형제의 과부를 위해서 이 일을 기꺼이 했다. 그가 룻과 결혼하여 그들의 기업을 지속시킬 자손을 일으켜야 한다는 것을 알고는, 그는 거부하였으며 ((두번째 근친인)) 보아스가 개입하였다. 

그러나 이 두 가지 것, 즉 친족과 수혼은 구별되어야 한다. 

.....고엘(구속자)이란 단어는 후자의 제도를 가리키지 않는다. 레게트(Leggett)는 룻기에 구속적이고 메시야적인 유형론의 주제가 들어있다고 보았다. 

"고엘(goel)로서의 보아스의 행동들에서 우리는 보아스의 후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역사가 예시되어 있음을 보았다. ...보아스가 구속의 권리를 소유하였으면서도 분명히 룻을 위하여 개입할 의무는 없었던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도 그러하셨었다. ....그러나 나오미는 룻과 보아스를 맺오주고 싶었기에, <반드시 며느리와 결혼해서 자식을 낳아야 한다는 조건을 내걸고 있다>고..룻도, 보아스도 [절차를 분명히 정당하게 밟고서..제1근족이 포기하였음을 공중 앞에서 확인케 한 후에 룻을 보아스는 맞아들인다..

보아스가 이 가난한 과부들의 곤경을 보았을 때 그의 생애가 여호와와 여호와의 율법에 의해 지배를 받고 있었으므로 그들을 구원하러 왔던 것과 같이 메시야의 경우도 그의 생애가 하나님의 법에 의해 지배되고 또한 그가 가난한 자들과 억압 받는 자들을 공정하고 정당하게 대우하실 것이라는 사실이 예언되었다(시 72:2, 시 72:4, 시 72:12, 시 72:13, 사 11:4).

(b)  둘째로, 가알은 재산이나 여호와께 바쳐진 희생제물 아닌 짐승들을 무르는 것, 혹은 부정한 짐승들의 첫 소산을 무르는 것과 관련하여 사용되었다(레 27:11-33). 

이 사상은 인간이 교환물로 그에 상응하는 것을 여호와께 바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속전은 부정직한 교환을 피하기 위해 약간의 추가 몫이 제공되었다. 이런 경우에 무르는 자는 친족이 아니라 재산의 주인이었다.

(c)  셋째로, 가알은 살해당한 사람을 대신하여 "피의 보수자"(RSV '보복자' revenger)가 되는 가장 가까운 친족을 언급하는데 사용되며, 칼 분사 고엘로 나타난다. 

고엘은 구속자이며, 이 구속자는 '피의 보수자'로 불리우는데, 그의 임무는 자신의 친척을 살해한 자를 처벌하는 것이다(신 19:6). 

이 사상은 가까운 친족이 생명에는 생명으로 지불해야 한다는 것임에 틀림없다. 

돈을 지불함으로서 집을 재매입하거나 노예를 속량할 수 있는 것처럼, 친족의 잃어버린 생명은 마땅히 살인자의 그에 상응하는 생명으로 지불되어야 한다. 친족은 피의 보수자이다. 

이런 사형 제도는 피비린내 나는 숙원과 구별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고엘은 죄없는 사형 집행인이었으며 따라서 살해되어서는 안되었기 때문이다. 

이 단어는 '보수자'라는 의미로 12회 나온다(민 35:12, 민 35:19, 민 35:21, 민 35:24, 민 35:25, 민 35:27, 신 19:6, 신 19:12, 수 20:3, 수 20:5, 수 20:9).(참조: R. L. Harris).

(d)  넷째로, 가알은 하나님께서 '구속자'로서 '구속하시는 행위'에 대해 사용되었다.

출 6:6에서 "나는 여호와라 내가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어 내며 편 팔과 큰 재앙으로 너희를 구속하여"라고 약속하신다(출 6:6, 참조: 시 77:15). 이스라엘은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주께서 그 구속하신 백성을 은혜로 인도하시되"(출 15:13). "하나님이 저희의 반석이시요 지존하신 하나님이 저희 구속자이심을 기억하였도다"(시 78:35).

이사야서에는 '구속자'라는 단어가 하나님을 지칭하여 13회 나오는데 모두 사 41- 63장에서 사용되었다. 

가알은 하나님에 대해 9회 사용되었으며, 사 43:1에서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가알은 애굽으로부터의 구원(사 51:10, 사 63:9)과 바벨론의 포로생활로부터의 구원(사 48:20, 사 52:3, 사 52:9, 사 62:12)을 언급하는데 사용되었다. 이스라엘의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사 41:14)이며 '너희의 왕 이스라엘의 창조주'(사 43:14, 사 43:15)이며 '만군의 여호와'(사 44:6)이며 '야곱의 전능자'(사 49:26)이다. 그의 구원에 참예하는 자는 '구속 받은 자'이다(사 35:9).

시편에는 종종 영적인 구원이 육적인 구원과 병행되어 나온다. 예를 들면 시 69:18., "내 영혼에게 가까이 하사 구속하시며 내 원수를 인하여 나를 속량하소서". 시 103:2, 시 103:4.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윤택을 잊지 말찌어다...네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이 그러하다(참조: EDBW).

유명한 구절, 욥 19:25에서 고엘이란 단어는 흠정역성경에서 '구속자' redeemer로 번역되며 어떤 이들은 이 단어가 속죄의 사역을 하러 오실 그리스도의 오심을 나타내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이것은 히브리어 파다에 의해 더욱 특징적으로 표현될 것이다.

 이제 욥 19:25에 나오는 이 단어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결국에는 욥을 죽음의 먼지에서 구속할 친구이자 친족으로서의 하나님의 사역과 더욱 정확하게 관련된다. 

욥 19:26의 난해한 어구, "이 가죽...후에"는 다른 모음들과 함께 "내가 깨어난 후에"로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NIV 각주와 욥 14:12-14을 참조하라. 

욥 14:12-14에서 부활에 관한 욥의 질문은 하나님께서 결국에는 그를 돌아보시며 욥은 나무처럼 제 2의 성장을 할 것이라는 그의 소망에 의해 절정에 달하게 된다 - 욥 14:14의 할리파는 욥 14:7의 할랍에 대한 응답이다). 어쨌든 욥은 마침내 자기 자신의 눈으로 자기의 고엘이신 하나님을 볼 것으로 기대한다(참조: R. L. Harr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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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엘”의 이해 - 구속적 의미를 중심으로  

Ⅰ. 시작하는 말

고엘 제도는 고대 히브리 사회에서 발견할 수 있는 독특한 제도이다. 이 제도는 원래 친족들을 중심으로 한 혈연 공동체를 중심으로 사회생활이 영위되던 때에 공동체 사회를 유지 운영하기 위한 방법으로 근동에 널리 알려졌던 제도이다. 

성경에서는 이 제도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친족이 죄 값을 대신 무른다거나(민5:8), 도피성 제도(민35장), 계대 결혼법(신25:5-10) 등이 바로 이 제도에 대해 간접적으로 증명해 주고 있다. 

나아가 성경은 땅과 관련된 율법의 독특한 조항인 기업 무르는 법까지도 이 “고엘”(לאג)과 연관시킴으로써 고엘 제도의 의미를 한층 더 심화 시킨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서 고엘 제도는 한 혈연 공동체 내에 속한 구성원들이 서로의 생명과 재산 및 가문을 보호해 주기 위한 일종의 상보(相保)제도였던 것이다.

이같이 여러 각도에서 서로 상보자의 관계에 있던 고엘은 히브리어로는 모두 고엘 이라는, 즉 단순히 친족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었으나 개역 성경 각 문맥에서는 그 문맥에서 강조되는 측면에 따라 친족(계대 결혼을 하여 준사람), 기업 무를 자, 보수자 등으로 각각 다르게 번역되었다. 

그런데 이 ‘고엘’이라는 단어 속에 흐르는 의미를 가만히 살펴보면 구속사적인 의미가 너무도 짖게 깔려 있다는 사실을 거부할 수 없게 된다. 이러한 의미는 ‘룻기’서에서 절정을 이룬다. 

이렇게 되면 고엘은 단순히 관습적이거나 당시 사회적 규례라는 의미로만 한정할 수 없다. 즉 고엘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의미하는 바가 각별하다는 말이다. 따라서 본 소논문에서는 당시 히브리 사회에서 “고엘”(לאג)과 관련하여 성경 전반에 나타난 신학적인 의미를 정리하는 가운데 특별히 ‘룻기’서에 나타난 의미는 ‘기업 무를 자’와 관련하여 구속사적인 의미에 초점을 맞추고, 그 연관성을 추적하고자 하는 것이다.

Ⅱ. 고엘(לאג)의 개념

히브리어의 '고엘'은 한마디로 친족(kinsman)이란 뜻이다. 보다 더 깊게 말하자면 ‘고엘‘은 구속하다’, ‘친족으로서 행하다’, ‘가장 가까운 친척으로서 역할을 맡다’라는 의미의 동사 ‘가알’(la'G:)의 현재 능동태 분사 형이다. 즉 ‘구속자’, ‘친척으로서 행동하는 자’라는 뜻이다. 따라서 고엘 제도라고 할 때는 친족들 사이에서 지켜야 할 권리와 의무에 관한 제도를 가리킨다. 

예를 들어 고대 근동 사회에서는 가난한 형제가 빚 때문에 종으로 팔려가게 되었을 경우에 가까운 친척이 그 빚을 갚음으로써 그를 종의 굴레에서 해방시켜 주어야 했다(레 25:47-55). 또한 형제가 자신의 토지를 팔았을 경우에 가까운 친척이 일정 기간 후에 그 값을 치름으로써 다시 그 토지를 돌려받게 할 수 있었다(레25:23-28). 그리고 자기 형제가 죄를 지었을 경우에 친족은 그 형제의 죄 값을 무를 의무를 지게 된다(민5:8). 뿐만 아니라 자기 친족 중에 한 사람이 누군가에 의해 살해되었을 경우에는 가까운 친척이 그를 위해 피의 보수자가 될 수도 있었다(민35:19). 

무엇보다도 ‘고엘’과 관련된 사회적 제도 중에서 가장 중요한 항목은 형제가 자식이 없어 죽었을 경우에 가까운 형제 순으로 남겨진 미망인과 동침하여 그 가문이 존속되게 하여야 했다. 이처럼 자녀의 다수가 하나님의 최대 축복으로 여겨졌던 고대 근동 사회에서는 자녀 없이 죽은 형제의 기업 이을 자를 낳게 해주는 계대결혼(繼代結婚)관습이 있었다.

Ⅲ. 고엘(לאג)의 규례

이처럼 고엘 제도는 혈연 공동체가 사회, 정치의 기본 단위 이던 시대에 혈연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이 서로 생명과 재산 그리고 가문을 지켜 주기 위한 제도로서 일반적으로 자연 발생적인 제도로 보는 견해가 많다. 그런데 ‘룻기’(룻2:20, 3:9, 12, 4장)에서 등장하는 계대결혼제도 즉 ‘기업 무를 자’는 이미 레위기나 민수기, 그리고 신명기에서 이미 규범화된바 있다. 

특별히 신명기25장 5절에서10절까지의 말씀은 ‘고엘’(לאג)이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 어떻게 규례화 되었는지 비교적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관련 내용을 인용해보는 것이 이해에 도움이 될 것 같다.

< 한글 개역 성경> 신명기 25:5-10

5절 형제가 동거하는데 그 중 하나가 죽고 아들이 없거든 그 죽은 자의 아내는 나가서 타인에게 시집가지 말 것이요 그 남편의 형제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를 취하여 아내를 삼아 그의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그에게 다 행할 것이요

6절 그 여인의 낳은 첫 아들로 그 죽은 형제의 후사를 잇게 하여 그 이름을 이스라엘 중에서 끊어지지 않게 할 것이니라

7절 그러나 그 사람이 만일 그 형제의 아내 취하기를 즐겨하지 아니 하거든 그 형제의 아내는 그 성문 장로들에게로 나아가서 말하기를 내 남편의 형제가 그 형제의 이름을 이스라엘 중에 잇기를 싫어하여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내게 행치 아니하나이다. 할 것이요

8절 그 성읍 장로들은 그를 불러다가 이를 것이며 그가 이미 정한 뜻대로 말하기를 내가 그 여자 취하기를 즐겨 아니하노라 하거든

9절 그 형제의 아내가 장로들 앞에서 그에게 나아가서 그의 발에서 신을 벗기고 그 얼굴에 침을 뱉으며 이르기를 그 형제의 집 세우기를 즐겨 아니하는 자에게는 이같이 할 것이라 할 것이며

10절 이스라엘 중에서 그의 이름을 신 벗기운 자의 집이라 칭할 것이니라.

이와 같이 자식이 없이 죽은 자의 아내는 그의 형제에게 가서 아이를 낳을 수 있는 권리가 있었다. 그리고 그의 형제는 그 여인에게 의무를 이행해야 했다. 그러나 이것은 절대적인 의무가 아니라 거절할 수 있는 여지가 있었다. 그렇지만 의무의 불이행에 대한 조치는 감수해야 했다. 그런데 “신을 벗긴다.”는 특이한 조치가 주어진다. 여기서 신(sandal)은 고대 근동 사회에서 통상적으로 신던 신발이었으나, 특히 과부와 그녀의 법적 후견인이나 수혼자와의 관계에서는 의복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어떤 사람이 땅을 살 때, 한 시간, 하루, 일주일 혹은 한 달 동안 걸어서 만들 수 있는 삼각형 모양만큼의 땅을 살 수 있었다는 사실에 기인한 것이었다(왕상21:16-17). 땅은 측량할 때는 삼각형으로 했으며, 경계석 역할을 하도록 자연석으로 측량 기준점을 만들었다(신 19:14). 그들은 신을 신고 땅 위를 걸었으므로, 신은 그 땅의 휴대용 권리증서가 되었다. 과부는 후견인의 신을 벗김으로써(룻4:7) 그에게서 자기 집안의 땅을 관리할 권한을 제거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고엘 제도는 그 의미가 각별했을 것이다. 즉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소작인으로 삼아 땅을 빌려 주셨으므로, 그들은 땅을 팔 수 없었으며, 빚을 갚기 위해 땅의 일부를 저당 잡혔더라도 가능한 한 빨리 소유권을 되찾는 것이 매우 중요하게 여겨졌다. 땅에 대한 이 같은 양도할 수 없는 권리가 얼마나 중요한가는 아합 왕이 나봇의 포도원을 사겠다고 제의했을 때 나봇의 포도원을 양도할 수 없다고 거절한 일에서 볼 수 있다(왕상21-2-3). 메소포타미아에서는(특히 초기에) 종종 개인이 아니라 가족이 땅을 소유했다. 따라서 어떤 개인이든 토지를 팔 수 있는 능력이 제한되어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고엘 제도는 이스라엘이 각 지파를 중심으로 한 부족 국가의 형태를 벗어나 중앙 집권 체제인 왕정 국가로 발전하면서 그 기능이 점차 약화되었다. 그리고 고엘 제도에 의해 이루어졌던 사회의 공의 실현이나 혼란 방지 등은 국가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리고 각 사람의 결혼도 자유롭게 이루어지면서 기업 무르는 자나 계대 결혼도 거의 그 의미를 상실하게 되었다. 물론 고엘 제도의 영향이 완전히 사라졌던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다윗 통치 때에도 고엘 제도에 의해 기브온 사람들이 사울에 의해 죽임당한 동족들의 죽음을 복수하는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다(삼하21:1-9). 그러나 왕정 시대 후기에는 이 같은 제도 시행의 흔적을 전혀 발견할 수 없다. 대신 ‘고엘’의 의미는 선지자들에 의해 신학적인 의미로 발전되었으며, 택한 백성 이스라엘과 신약 교회의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이해하는데 있어 중요한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Ⅳ. 고엘(לאג)의 성경적 기원

앞에서 언급했듯이 우리는 ‘고엘’이라는 제도를 대하면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기는 것이 있다. 그것은 계시의 말씀 즉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당시 사회의 관습에서 파생된 하나의 전통이 규범화 된 것 같은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된 내용은 창세기 38장(창 38:7-11)에서 처음으로 등장하는데 오난은 자신의 형수인 다말과의 동침으로 형인 엘의 대를 잇게 하라는 아버지 유다의 지시를 받는다. 당시까지만 해도 계대 결혼법이 규정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칼빈은 죽은 자를 위해 이름을 얻어주는 것은 인도적인 행위로 간주되었던 것으로 보고 자연스런 본능에 의한 경향으로 보았다. 물론 완전히 틀린 해석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

그러나 만일 ‘고엘’ 인도적인 행위에 그친다면 ‘고엘’의 의미는 더 확장 될 수 없고, 그저 성경 속에 나타난 당시의 사회관습의 하나로 이해되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아무리 인도적인 방법이라고 해도 오늘날에 계대 결혼법을 이행하기에는 사회적인 혹은 문화적인 괴리(乖離)가 크기 때문이다. 더욱이 사회적 관습이나 전통으로 인한 것이라면 하나님과의 관련성을 약화 시키는 해석이 되고 말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당시의 시대적인 관습을 배제한 근본적인 의미를 도출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비단 계대결혼법이라는 국한 된 개념이아니라 여러 가지 용도로 쓰인 ‘고엘’의 의미 속에 흐르는 공통적인 혹은 근본적인 의미를 살펴야 한다.

성경적 관점에서 볼 때 ‘고엘’은 크게 두 가지 의미로 압축하여 말할 수 있는데 하나는 형제의 죄 값을 무르거나(민5:8), 속전을 주고 그 친족이나 형제를 구원하여 내는 의미(레 25:47-55), 즉 대속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이며, 또 하나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의 자손들을 유지 혹은 번성하게 하시기 위한 수단으로 여러 곳에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레25:21, 24, 30 룻4:6). 따라서 ‘고엘’에 대한 성경적 기원은 단순히 당시 사회의 관습에 기인한 것으로 볼 수 없으며 하나님께서 그의 택하신 백성을 다스리시는 방법임을 알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고엘’에 대한 성경적 기원은 창세기 38장에 나타난 유다의 가정에서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 왜냐하면 유다가 차자 오난에게 장남 엘의 대를 잇게 하기 위해 지시 했다는 것은 이미 그 이전부터 그 사회에서 관행처럼 인식되어있다는 것을 암시한다(창38:7-11).

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온 우주만물과 인류를 창조하시고 복을 주셨다. 그리고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서 번성해갈 것을 명령하셨다(창1:22, 28, 8:17, 9:1, 9:17). 즉 이미 하나님께서는 인류를 세상의 대리 통치자로 주시면서 번성하게 하시기로 작정하신 것이다. 그러나 인류는 이러한 하나님의 축복과 명령을 저버리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시켰다(창3:6).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축복을 완전히 몰수하지 않으시고 아브라함과 그 자손을 통하여 창대케 하시겠다는 약속을 하셨다(창12:2). 아브라함은 이 약속을 믿었고 하나님께 의로운 자로 여김 받았다(창15:5,6, 출32:13). 신약시대의 전체를 아우르는 약속의 성취, 즉 예수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은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이 실현되는 결과인 것이다.

모세 역시 이러한 하나님의 축복과 구속에 대한 언약적 관점에서 이스라엘 민족의 정치 이념으로 삼았다(레25:21, 30, 신33:21). 이런 점에서 ‘룻기’서에 나타난 ‘고엘’ (룻2:20, 기업 무를 자)이라는 단어도 축복과 구속에 대한 언약적 관점으로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유다와 다말, 룻과 보아스를 통하여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를 탄생하게 하셨고(룻 4:12-22; 마 1:1-17), 예수께서는 인류의 구속주가 되셨기 때문이다(마20:28, 막10:45). 그러므로 ‘고엘’은 단순히 당시의 사회관습으로만 볼 수 없다. 따라서 ‘고엘’의 기원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향하신 축복과 구속에 대한 언약의 역사에서 찾아야 한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경륜 속에 기업을 무를 수 있도록 당시 사회에 배려하신 것이다. 즉 ‘고엘’의 근본적인 이념은 문화명령(창1:22)과 구속 언약(창15:5,6, 렘33:15)에서 기인한 것이라 할 수 있다.

Ⅴ. 고엘(לאג)의 의미와 구속적 관련성

우리는 앞에서 ‘고엘’(לאג)의 기원이 인간 본능에 의해 생겨난 자연발생적인 것이거나 당시 사회 관습에 의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오히려 이미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축복과 구속언약에서 ‘고엘’(לאג)의 기원을 찾았다. 

특별히 구속사적 의미에서 볼 때 ‘고엘’(לאג)은 다음의 두 단어와 중요한 유기적인 관련성을 지닌다. 이것은 구속에 대한 의미를 구성하는 요소 중에서 ‘고엘’(לאג)의 의미가 실제로 중요하게 작용한다는 말이다. 하나는 ‘하포드카’(ךדכה, 신13:5)이고, 또 하나는 ‘파라크’(קרפ , 시136:24)이다.

첫째 ‘하포드카’는 ‘몸값을 치르고 살려내다.’(ransom)라는 의미의 동사 ‘파다’(הדכ, 출13:13-...어린 양으로 대속할 것이요...모든 장자 된 자는 다 대속할 지니라. )의 분사형에 2 인칭 남성 단수 접미사가 붙은 것으로 ‘몸값을 치르고 살려낸 자’란 뜻이 된다. 그런데 본래 동사 ‘파다’는 부과된 가격대로 치르고 노예를 산다는 의미를 가진다(출13:13; 34:20). 뿐만 아니라 이에 해당하는 에디오피아어는 ‘땅을 사다’(purchased land), 즉 재산을 늘리기 위해 무엇을 시들인다는 의미를 갖는다(레25:27). 이처럼 재산을 늘린다는 의미와 밀접한 ‘파다’가 ‘구속하다’는 의미로 쓰일 때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대가를 지불하셨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둘째 ‘파라크’(קרפ)는 ‘갈기 갈기 찢어버리다’(tear apart)란 뜻인데, 맹수를 찢고 먹이를 물고 갈 때 그 맹수를 찢고 먹이 동물을 구출한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파다’ 와 동일하게 ‘구속하다’는 의미로 해석되지만(시136:24), 특히 대적을 쳐부수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와 관련하여 ‘고엘’(לאג)의 동사형 가알(לאג)은 ‘파다’(출13:13)와 거의 동일하게 어떤 대가를 지불하고 구속해 내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이 단어는 친족으로서 대신 그렇게 했다는(act as kinsman) 즉 혈연적인 친밀성을 강조한다(레 27:13,15).

이처럼 하나님의 구속하심에는 하나님께서 지불하신 희생과, 원수를 대적하여 이루신 승리 그리고 당신 백성과 한 가족이 되시는 친밀성이 포함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시더라(마12:50). 

따라서 우리를 율법의 저주(갈3:13)와 사단의 올무인 죄(롬 7:23)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친히 우리의 형제가 되신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대속의 제물로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엡 1:7; 벧전 1:18), 다시 부활하셔서 사단을 완전히 굴복시키셨다. 그러므로 ‘고엘’은 구속주이신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이 된 자들에게 혈연적인 친밀성을 강조해줌으로써 영적으로 가장 강력한 연대의식을 가지게 한다.

Ⅵ. 고엘(לאג)의 신학적 이해

이와 같이 ‘고엘’은 문자적인 의미에 있어서도 구속적 의미와 밀접한 관련성을 가진다. 이제 조금만 더 뚜렷하게 ‘고엘’의 의미를 정리하고자 한다. 즉 예수그리스도의 구속사역뿐만 아니라 이미 구약시대에서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고엘’로서 우리의 친족 구속자가 되셨음을 밝히고자 하는 것이다.

먼저 창세기48장 16절에서 하나님은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분으로 소개된다. 그리고 이사야서(41:12-14)에서는 아예 대적의 손에서 구원하여 내시는 “구속자”로 번역되기도 했다. 그리고 하나님은 스스로 이스라엘의 왕이 되시기 위해(사 44:6), 주(主)와 남편이 되시기 위해(사49:26; 54:5) ‘고엘’로서의 의무와 사랑(사54:5)을 다 행하여 보이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가난한 자와 고아의 구속자이시기도 하다(잠23:11). 또한 그분은 잃어버린 생명을 다시 얻게 하시되 영생을 얻게 하시는 분으로도 소개된다(욥19:25). 이처럼 이스라엘을 선택하시고 계속 지켜 주신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가장 가까운 친족으로서 ‘고엘’의 의무를 다하신 분으로 비유되고 소개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예수그리스도는 더욱 특별한 의미에서 모든 믿는 자들의 ‘고엘’이 되셨다. 즉 그분은 직접적으로 자기 생명을 많은 사람의 대속 제물로 내어 주셨다(마20:28). 인간의 능력이나 힘으로는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는 죄인의 감옥에서 구원하여 주셨다(딛2:14). 베드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속해 주신 것이 금과 은에 의해서가 아니라 보혈의 피로 속량해 주셨다고 고백한바 있다(벧전1:18,19). 이것은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써 우리의 죄 값을 대신 치루시고 우리를 구원해 주셨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롬7:24; 갈1:4; 골1:3).

Ⅶ. 맺는 말

하나님은 인류의 창조와 더불어 우리의 ‘고엘’(לאג)이 되어 오셨다. 우리가 이 땅에서 환난을 당할 때 현실에서도 온전히 도우시는 분이시다. 앞에서도 알 수 있었듯이 성경은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그저 창조주와 피조물로 묘사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을 하나의 혈연관계 즉 절대로 뗄 수 없는 한 친족, 혹은 한 핏줄의 관계로 묘사하고 있다. 비록 인간이 반역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기도 했지만 하나님은 인류를 향하신 작정을 환원하지 않으셨고 결국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상실된 혈연관계를 다시금 회복하셨다. 즉 우리의 영원한 죄 값을 치르신 것이다.

그러므로 ‘고엘’(לאג)은 우리에게 계시하신 하나님의 구속경륜 가운데 인간이 인식하는 한 가장 강력한 연대의식의 표현이며 불가항력적인 상황에서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하나님 안에서 이웃과 서로 돕고, 서로 아픔을 같이하며, 남의 어려움을 자신이 책임지는 영적공동체를 이루어 나가는데 좋은 도구가 된다. 비록 구약시대의 계대결혼이나 죄를 무르는 등의 시대적인 규범이 오늘날까지 통용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이 시대에서도 ‘고엘’(לאג)의 근본적인 의미를 통하여 하나님과 내 이웃을 향한 사랑을 충분히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 아니 우리의 마땅한 실천적 의무라 하겠다.

* 참고자료

- BHS(Biblia Hebraica Stuttgartensia 4th)

- 그랜드 종합주석③, 성서교재간행사, 1994.

- 그랜드 종합주석④, 성서교재간행사, 1994.

- John Calvin, 칼빈성경주석, 2권, 역 칼빌 성경주석출판위원회, 성서교재간행사, 1995

- John H. Walton 외2인, IVP성경배경주석(구약), 역 정옥배 외3인, 한국기독학생출판부,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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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무름은 크게 3가지 의미로 쓰일 수 있는데

(1)가족의 재산을 다시 회복하거나 유지하는 책임(레25:25,27:9-33)

(2)가난 때문에 몸이 팔린 친족을 속량하는 책임(레25:47-55)

(3)피의 보수자의 역할 담당(민35:9-28, 신19:6-13, 수20:2-9)으로 볼수 있습니다.

즉 가족 중 한사람이 여러가지 이유로 노예 상태나, 극빈 상태나, 곤경에 빠질 때 그 가운데서 구해내는 책임이 바로 기업무를자의 책임입니다.

그리고 이런 기업 무름의 정신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바로 구속주라는 개념에서 나온 것입니다.



*1.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예샤, 예슈아..동>야샤..구원-구출-구조하다)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임마누엘구주목자-내영광-하나됨

*2.악인들이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으나 나의 대적들, 나의 원수들인 그들은 실족하여 넘어졌도다

....원수마귀(참소자)/대적사탄(방해자)-세상-육신...이미 그리스도께(또한 그분의 몸된 교회와 모든 지체들에게!!) 머리를 짓밟힌 이들의 유일한 절망적인 최후 발악 전략은 [자기연민에 빠져들게 함, 즉 의심을 통해!!...거듭난 믿는이라도 흔들리게 하여 두루 돌아다니며 우는 사자처럼 삼키려 시도함]영원한 요새와 바위요 반석-영원한 방패-생명 능력-불의 방어벽-여호와 라아이신 임마누엘 주님을 절대 신뢰함-기뻐함-교통하며 모든 것 되어주시는 왕이요 주인, 머리-남편으로 의지하며 산 믿음의 순종/동행-감사-사랑함에서 떼어놓으려함.

*3.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 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태연하리로다(=바타흐..친밀/친근-연합한 하나됨 안의 언약에 신실하신, 신실과 참이신  Q을 신뢰함으로 오는 날마다 새롭게 경험하는 생생한 안정감/태연자약 누림 = 안연함<주께 뿌리 내려있음의 확고부동>)

*4.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구하고찾고두드림(마7:7)..."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seek[제테오, 에크제테오(부지런히/열심히/발견할 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마침내 찾다)] my face"...성육신하여 이 땅에 오셔서 친히 인생을 사신 구주에게 그분과 함께(그분을 참되게 믿는) 모든 단독자로 여기사 그분의 사랑-기쁨 삼으신 아버지께서 말씀하셨을 바로 그 때 구주께서 새벽 오히려 미명에 한적한 곳에 나가 찬송과 기도로 [사랑과 기쁨의 아버지께 믿음으로 자신을 열어드리며 부드러이 아버지 이름을 부르시며] 아버지 얼굴을 구하심으로써 그날에 필요한 모든 것을 아버지로부터 공급받고 아버지와 함께 (일거수 일투족마다) 하나되어 사셨다..

*5.여호와께서 환난 날에 나를 그의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그의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숨기시며 높은 바위 위에 두시리로다

*6.이제 내 머리가 나를 둘러싼 내 원수 위에 들리리니 내가 그의 장막에서 즐거운 제사를 드리겠고 노래하며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7.여호와여 내가 소리 내어 부르짖을 때에 들으시고 또한 나를 긍휼히 여기사 응답하소서 

.....교통(아버지와 아들의 교통안에 머뭄)...땅에 있는 성도는 존귀한 자이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저와 함께 있도다!!...하셨나이다..

*8.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실 때에 내가 마음으로 주께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하였나이다

*9.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시고 주의 종을 노하여 버리지 마소서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나이다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나를 버리지 마시고 떠나지 마소서

*10.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열납하심 받은 성도의 영원한 만족 누림 !!

*11.여호와여 주의 도(=데레크 : 길way-도로road-행위deed-습관habit-태도manner/attitude--행로..동>다라크:걷다)를 내게 가르치시고(=야라..가르치다-던지다-쏘다-비를 내리다) 내 원수를 생각하셔서 평탄한(=미쇼르, ..명>야샤르::올곧음/공정-정직-평지) 길로 나를 인도하소서(=나하..안내-인도하다-이끌다)....Q의 어떠하심=성의진선따른 무한풍성한 사랑의 열정...성화-영화!!

*12.내 생명을 내 대적에게 맡기지 마소서 위증자와 악을 토하는 자가 일어나 나를 치려 함이니이다

*13.내가 산 자들의 땅에서 여호와의 선하심을 보게 될 줄 확실히 믿었도다...시65:4의 약속성취=영생.Q영광의 모든 아름다움-풍성-은택 :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살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

*14.너는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환난과 고통, 불가항력적 좌절의 상황에 처한 혼의  감정=자기연민[부정-분노-타협-우울-불안 /거부고수두분]...이것은 그 의미를 주께 묻고 돌이켜 회개하며, 오직 Q를 잠잠히 신뢰하며 기대하고 기다리며 동행할 때에 JC안에서 이미  이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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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ORD is my light and my salvation; Whom shall I fear? The LORD is the defense of my life; Whom shall I dread?

When evildoers came upon me to devour my flesh, My adversaries and my enemies, they stumbled and fell.

Though a host encamp against me, My heart will not fear; Though war arise against me, In spite of this I shall be confident.

One thing I have asked from the LORD, that I shall seek: That I may dwell in the house of the LORD all the days of my life, To behold the beauty of the LORD And to meditate in His temple.

For in the day of trouble He will conceal me in His tabernacle; In the secret place of His tent He will hide me; He will lift me up on a rock.

And now my head will be lifted up above my enemies around me, And I will offer in His tent sacrifices with shouts of joy; I will sing, yes, I will sing praises to the LORD.

Hear, O LORD, when I cry with my voice, And be gracious to me and answer me.

When You said, "Seek My face," my heart said to You, "Your face, O LORD, I shall seek."

Do not hide Your face from me, Do not turn Your servant away in anger; You have been my help; Do not abandon me nor forsake me, O God of my salvation!

For my father and my mother have forsaken me, But the LORD will take me up.

Teach me Your way, O LORD, And lead me in a level path Because of my foes.

Do not deliver me over to the desire of my adversaries, For false witnesses have risen against me, And such as breathe out violence.

I would have despaired unless I had believed that I would see the goodness of the LORD In the land of the living.

Wait for the LORD; Be strong and let your heart take courage; Yes, wait for the LO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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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27장 (개요)

어떤 사람들은 다윗이 왕위에 오르기 전 그가 환난 가운데 있었으며, 아마도 그의 부모의 상을 당했던 때에 이 시편을 지은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가 늙었을 때, 아비새가 그를 구해 그가 장대한 자에게서 놀랍게 구조되고(삼하 21:16-17), 그의 백성들이 이스라엘의 등불이 꺼지지 않게 하기 위해 그가 생명을 걸고 출전하도록 해서는 안 된다고 결의했던 경우에 지은 것으로 보고 있다. 혹은 이것은 어떤 특별한 경우에 지어지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기에는 은혜로운 영혼들이 항상, 특히 환난을 당해 하나님께 향할 때에 갖는 경건하고 믿음이 깊은 감정이 잘 표현되어 있다.

1. 그의 믿음에 대한 용기와 거룩한 담대함(1-3).

2.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그가 얻는 만족감과 그에 대한 체험에서 얻는 이득(4-6).

3. 하나님과 그의 은총과 은혜에 대한 그의 소망(7-9, 11-12).

4. 하나님께 대한 그의 기대, 그리고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그에게 소망을 갖도록 하려는 격려(10, 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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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고한 믿음(시 27:1-6)

우리는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것을 살펴볼 수 있다.

Ⅰ. 다윗은 얼마나 생동하는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 안에서 개가를 부르고 있으며,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그리고 그가 얻은 유익을 영화롭게 하고 있는가?

1. “여호와는 나의 빛이시니이다.” 

---다윗의 신하는 그를 “이스라엘의 등불”이라 불렀다(삼하 21:17). 그는 사실상 타고 있는, 그리고 빛나는 등불이었다. 그러나 그 스스로는 마치 그가 달처럼, 빛되신 주님이 비추어 주신 빛을 반사함으로써 빛났음을 여기에서 인정하고 있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시니이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비추신 빛의 반사가 그들에게 비취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의 빛으로서 그들이 의혹 가운데 있을 때 길을 보여주시고, 그들이 슬픔에 잠겨 있을 때 그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즐겁게 해주신다. 그들은 지금 그의 빛 가운데서 그들의 길을 행하며, 그의 빛 가운데서 영원히 빛을 보리라는 소망을 갖는다.

2. “그는 나의 구원이시니 나는 그 안에서 안전하며 그에 의해 구원될 것이다.”

3. “그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 위험한 생명의 보호자로서 내가 죽음을 당하지 않게 해주실 뿐만 아니라, 내 연약한 생명의 힘으로서 내가 낙심하거나 위축되고 시드는 것을 막아주신다.” 

---믿는 자의 빛이신 하나님은 그의 생명의 빛이시므로 그는 하나님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고 움직인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우리 자신을 강건케 하도록 하자.

Ⅱ. 얼마나 담대한 용기를 가지고 그는 그의 대적들을 이기고 있는가? 

---믿음에서 나온 용기만큼 꿋꿋한 것은 없다. 하나님께서 그를 위하시면 누가 그를 대적할 수 있겠는가?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전능자께서 그의 호위자가 되신다면 그는 두려워할 까닭이 없게 된다. 만일 그가 그러함을 안다면 그는 두려워하는 마음을 갖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빛이라면 그는 어둠을 두려워하지 않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그의 구원이실 때 그는 어떤 무기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는 이미 패주당한 대적들 위에서 개가를 부르고 있다(2절). 

::: 그의 대적들은 “그의 살을 먹으려고” 그에게로 왔다. 그리고 그 이상의 성공을 거두리라고 확신하고 왔지만, 그들은 넘어지고 말았다. “그가 그들을 죽여 쓰러뜨린 것”이 아니라, “실족하여 넘어진 것”이었다. 그들은 매우 당황하고 약화되었으므로 더이상 그들의 계획을 추진시킬 수 없었다. 

::: 이처럼 한마디 말로써 그리스도를 잡으려고 왔던 자들은 비틀거리며 땅에 엎드러졌다(요 18:6). 

---하나님의 백성들을 대적하던 어떤 사람들의 멸망은 그 대적자들 모두가 완전히 정복되리라는 전조다. 이들이 넘어졌으므로, 따라서 그는 나머지 대적들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 “비록 그들이 무수하여 무리를 이루고 있을지라도─그들이 대담하고 그들의 공격이 위협적일지라도─ 한 사람을 대항하여, 즉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칠지라도─그들이 나에 대항하여 전쟁을 벌일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리로다. 천군의 주님이 우리를 보호하시면 어떤 군대들도 우리를 해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신다는 확신 속에서 내가 안연하리로다.” 그는 다음 두 가지 사실을 확신하고 있다.

1. 그는 안전할 것이다. “하나님이 나의 구원이시라면 환난 날에 나를 비밀히 지키시고 나를 위험과 그 두려움이 벗어난 곳에 두시리라.” 

---하나님은(렘 36:26에서처럼) 환난의 날에 그의 백성들에게 피난처를 마련해 주실 뿐만 아니라, 그가 친히 그들의 은신처가 되실 것이다(32:7). 그의 섭리가 그들을 안전케 할 것이며, 적어도 그의 은혜가 그들을 편케 해줄 것이다. 

---그의 이름은 곧 그들이 믿음으로써 달려가는 견고한 망대다(삼상 18:10). “여호와께서 나를, 엔게디 요새(삼상 23:29)가 아닌 장막 은밀한 곳에 숨기시리로다.” 

::: 하나님의 은혜로운 임재, 그의 능력, 그의 약속, 기도를 들으시려는 그의 준비, 그의 백성의 마음속에 있는 성령의 증거─이런 것들이 그의 장막 은밀한 곳이며, 이 속에서 성도들은 그들을 편히 거하게 하는 거룩한 보호와 마음의 평정을 발견한다. 이것은 그들을 흔들리지 않는 바위에 두며, 그들은 거기서 그들의 소망에 대한 튼튼한 발판을 발견한다. 즉 그것은 그들을 “바위 위에 높이” 두며, 거기서는 폭풍우 부는 바다의 거센 파도도 그들을 건드리지 못한다. 그것은 “우리보다 높은” 바위다(61:2).

2. 그는 승리할 것이다(6절). “이제 내 머리가 내 원수 위에 들리리니, 그들의 창이 그곳에 닿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나는 그들을 지배할 정도로 높이 들리울 것이다.” 

---다윗은 여기에서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에 의해 승리 앞에서 개가를 부르고 있다. 그리고 월계수뿐만 아니라 면류관도 이미 자기 머리 위에 씌워진 것처럼 그 승리를 확신하고 있다.

Ⅲ. 얼마나 정중하고 진지한 모습으로 그는 거룩한 규례 속에서 하나님과 꾸준히 교제하기를 간구하고 있는가?(4절) 

---그가 하나님과 그의 의식을 온전히 사모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의 의무를 행하고 하나님과 더욱 친밀해질 수 있는 그의 고유의 영역 속에 있었을 때,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그의 신뢰를 크게 격려했다. 

::: 우리가 그 어느 피조물보다도 하나님을 더욱 기뻐했다는 사실을 우리 마음이 증거할 수 있을 때,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를 의지하도록 격려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자신의 것으로 여기시어 보호하시는 자들 가운데 우리가 속해 있다는 표지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것을 이렇게 받아들일 수도 있다. 즉 그는 그를 둘러싸고 있는 대적들로부터 안전하기 위해 여호와의 집에 거하기를 원했다. 

::: 그 자신이 위협적인 무리들에게 둘러싸여 있음을 발견했을 때 그는 “나의 안전을 위해, 내가 여호와께 청하였던 한 가지 일은 내가 그러한 무리들과 겨룰 수 있는 군대를 갖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고 말하거나, “그러한 성읍이나, 그러한 성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고 말하지 않고, “나로 여호와의 집에 거하고자 하는 것이며, 그것으로 나는 만족합니다” 하고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다음 사실을 관찰하라.

1. 그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여호와의 집에 거하는” 것이었다. 

---다윗은 여호와의 전 뜰에 묵었던 제사장들 가운데 속하기를 원했다. 

::: 하나님의 사역자를 매우 경시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역대의 가장 위대하고 가장 훌륭했던 왕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다윗은 기꺼이 그들과 함께 운명을 나누고자, 기거하고자 했다. 또한 오히려 그는 다른 충실한 이스라엘 사람들과 함께, 매일매일 요구되는 의무에 따라 하나님의 성전 봉사를 합당하고 꾸준하게 해나가기를 원하고 있다. 

---그는 자신이 당시에 참여하고 있던 전쟁이 끝나기를 원했다. 

::: 그것은 그 자신의 궁전에서 편히 살기 위해서가 아니었고, 하나님의 전을 일정하게 섬길 수 있는 여유와 자유를 갖기 위한 것이었다. 

---다윗의 성실한 아들, 히스기야도 보좌 위에 오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기” 위해 그의 건강이 회복되기를 원했다(사 38:2).

::: 하나님의 모든 자손은 하나님의 전에 거하기를 바란다. 그들이 거할 곳이 그외에 또 어디 있겠는가? 단지 하룻밤을 위해 잠시 체류하는 나그네처럼 그곳에 거하거나, 영원히 그 집에 살지 않는 종처럼 잠시 동안만 거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은 그들 생의 모든 날들을 그곳에 거한다. 거기에 아들(그리스도)도 영원히 거하시는 것이다. 

::: 우리는 찬미의 하나님이 우리의 영원한 축복이 되시기를 바라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그것을 우리 생전 동안의 일로 삼아야만 한다.

2. 그는 얼마나 간절히 그것을 갈망하고 있는가? “이것이 바로 내가 여호와께 청하였던 한 가지 일이며, 나는 그것을 구하리이다.” 

---만일 그가 하나님께 한 가지만 부탁하기로 되어 있었다면 그는 틀림없이 이것을 청할 것이다. 그는 무엇보다도 이것을 그의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것을 하나의 좋은 것으로서 청했다. 그는 여호와께 그의 선물로서, 그리고 그의 은총의 표징으로서 그것을 청했다. 그리고 필요한 한 가지로서 그것에 그의 열망을 고정시켰기 때문에 그는 그것을 구했다. 

::: 그는 하나님 전에 거하기 위해 계속 기도했고, 그렇게 할 자유와 기회를 얻기 위해 그의 일들을 계획했다. 진심으로 하나님과 교제하기를 원하는 자들은 온갖 힘을 기울여 그것을 구한다.

3. 그는 무엇을 원하고 있는가? 그가 하나님의 집에 거하려는 것은 제물로 잔치를 베푸는 그곳의 풍성한 즐거움이라든가 그곳에서 불려지는 음악과 좋은 노래 때문이 아니라,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그 전에서 사모하게” 되기를 바라기 때문이었다. 그가 하나님의 전을 섬기고자 함은 다음 두 가지를 위한 것이었다.

(1) 하나님을 묵상하기 위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 거룩한 존재와 완전함에 대한 무한하고도 초월적인 온아함을 그는 알고 있었다. 즉 그의 거룩함이 그의 아름다움이며(110:3), 그의 선하심이 그의 아름다움이다(슥 9:17). 그의 모든 속성의 조화가 그의 성품의 아름다움이다. 

....우리는 믿음과 거룩한 사랑의 눈으로 즐겁게 이 아름다움을 보며, 그 속에서 사랑스럽고 경탄스러운 것을 더욱더 살펴보아야 한다. 생각을 고정시키고 열렬한 감정에서 나온 거룩한 불꽃을 갖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탁월성을 관조해 우리에 대한 그의 특유한 은총의 표지를 즐거워해야 한다. 

::: 다윗이 여기에서 열망하고 있는 것도 이런 면에서의 여호와의 아름다움이며, 그것은 그의 규례 속에서 보일 것이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규례를 통해서 그 자신을 나타내시기 때문이다.

(2) 그의 의무에 대해 가르침을 받는 만족을 위해서.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전에서” 그것을 “사모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여호와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주님을 묵상함과 마땅한 의무에 대한 가르침 받음, 이 두 가지 일을 위해 그는 한 가지, 즉 “그의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기”를 바라고 있다. 그렇게 하는 자가 복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께 이야기하고 그로부터 듣는 가운데 항상 주를 찬송할 것이다(84:4). 

::: 마리아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기 위해 그의 발밑에 앉아 있었을 때 그리스도는 그것을 “필요한 것”이며 “좋은 편”이라고 하셨다.

4. 그는 그것으로 인한 어떤 유익을 그 자신에게 약속하고 있는가?

(1) 그가 하나님의 전에 자리잡기만 한다면 그는 그곳에서 평안할 것이다. 

....거기서는 그가 은밀한 곳에 숨겨질 것이므로 환난이 그를 찾지 못할 것이다. 그가 높은 곳에 있을 것이므로 환난이 그에게 미치지 못할 것이다(5절). 

::: 다윗의 후손 가운데 한 사람인 요아스는 여호와의 전에 6년 동안 숨겨져 있어서 칼로부터 보호받았을 뿐만 아니라, 면류관을 보유할 수 있었다(왕하 11:3). 느헤미야 또한 성전을 도망하기에 안전한 장소로 생각했다(느 6:10). 

::: 그러나 한 걸음 더 나아가 실지로는, 믿는 자들의 안전은 성전의 담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전의 하나님 안에 있으며, 그들의 위로는 하나님과의 교제 안에 있다.

(2) 또한 그는 그곳에서 즐겁고 유쾌할 것이다. 

....거기에서 그는 기쁨의 제물을 바칠 것이다(6절).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업이 그 품삯이기 때문이다. 거기서 “그는 노래하여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우리 기쁨의 대상이 되는 것은 모두 찬미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거룩한 의식 가운데에서 하나님을 섬길 때 우리는 매우 기뻐하고 찬미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도를 찬송해야 하는 것은 곧 그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우리 대적들 위에 높이 드실 때마다 우리는 찬미로 그를 높여야 한다. “항상 우리를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후 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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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망과 기도(시 27:7-14)

다윗은 이 구절들 속에서 다음과 같은 것들을 표현하고 있다.

Ⅰ. 여러 가지 탄원 속에 나타난 하나님께 향한 그의 열망. 

---지금은 여호와의 집으로 올라갈 수 없을지라도, 그는 어디에 있든지간에 은혜의 보좌로 가는 길을 기도를 통해 발견할 수 있었다.

1. 그는 여호와의 "들으사 응답하심"을 겸손히 청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는 은혜로운 응답을 얻으리라는 것을 확고하게 믿고 있기 때문이다. “여호와여, 내가 마음으로뿐만 아니라, 간곡히 원하는 자로서 소리로 부르짖을 때에 들으소서.” 

---그는 또한 화평의 응답을 청하고 있다. 그런데 그가 기대하고 있는 것은 그 자신의 공로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심에서 나오는 응답이다. 즉 “나를 긍휼히 여기사 응답하소서”(7절). 

::: 우리가 기도하고 믿는다면 하나님은 은혜롭게 들어주시고 응답해 주실 것이다.

2. 그는 하나님께서 이 의무를 행하도록 그에게 보내주신 친절한 초청을 포착하고 있다(8절). 

---우리가 부름받지도 않고서 왕들의 왕이신 분께서 계신 곳으로 가는 것은 무례한 일이며, 그가 “우리에게 금홀을 드시지” 않는 한 우리는 그곳에 확신을 갖고 가까이 갈 수 없다. 그러므로 다윗은 기도를 드리려 할 때 그의 생각을 하나님께서 은혜의 보좌로 그를 부르신 것에 두고, 관례대로 그에게 내밀어진 금홀의 끝을 경건하게 만지고 있다. “내 마음이 주께 말하되” 또는 주에 “대해” 말하되 “저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였나이다.” 

::: 그는 그것에 대해 먼저 숙고한 다음 그것을 다시 자기 자신에게 가르치고 있다(그것은 가장 훌륭한 가르침이며, 하나님이 한 번 말씀하시는 것을 두 번 듣는 것이 된다). 즉 “주께서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시나이다”(그것을 이렇게 보충할 수도 있다). 주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을 묵상하고 난 뒤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하고 경건하게 결단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다음을 살펴보자.

(1) 신앙적인 경배의 참된 본질. 그것은 하나님의 얼굴을 찾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계율 속에 있다─“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그 자신을 위해 그를 찾도록 만드실 것이고, 그의 은총을 우리의 주요 선으로 삼도록 하실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곧 성도들의 목적이며 소망이 된다.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그리고 그외의 것은 아무것도 따르지 아니하리이다.” 주가 손을 펴실 때 모든 생물의 소원이 만족케 될 것이다(145:16). 그러나 살아 있는 영혼의 소원을 만족케 하는 것은 그의 얼굴에서 나오는 빛뿐이다(4:6-7).

(2) 이 의무에 대한 은혜로운 하나님의 친절하신 초청. “주께서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시나이다.” 

....이것은 허락일 뿐만 아니라 계율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찾으라는 그의 명령은 발견하게 되리라는 약속을 내포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는 매우 친절하시므로 “나를 헛되이 구하라”고 말하시지는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에게로 전향하고 그와 더불어 대화함으로써 그의 얼굴을 찾도록 권고하신다. 그는 그의 성령이 우리에게, 그리고 우리와 더불어 속삭이도록 하심으로써 우리가 그의 얼굴을 찾도록 하신다. 즉 그는 그의 말씀으로, 그를 섬기기 위한 정해진 기회로, 그리고 인자하며 동시에 쓰라린 특별한 섭리로써 우리를 부르신다. 

::: 우리가 어리석게도 허탄하고 거짓된 것에 아첨할 때,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우리가 그에게서 우리 자신의 긍휼을 찾도록 부르고 계신다.

(3) 이 초청에 대한 은혜로운 영혼의 기꺼운 응낙. 그 부르심은 즉시 응답된다. “내 마음이 주께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하였나이다.” 

....그 부르심은 일반적인 것이었다.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그러나 다윗처럼 우리는 그것을 우리 자신에게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하고 적용시켜야 한다. 그러나 이 말은 우리가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가시킬 때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으며, 우리는 결국 그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 된다. 

....그 요청은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는 것이었고, 그 응답은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로 표현되어 있다. 

...이와 비슷한 것으로 “보소서, 우리가 주께 왔사오니”(렘 3:22) 하는 응답이 있다. 하나님의 권능의 날을 기뻐하도록 되어 있는 은혜로운 영혼은 은혜로운 하나님의 부르심을 기꺼이 반향하는 것이다.

3. 그의 요청은 매우 독특하다.

(1) 그는 하나님의 은총을 구하고 있다. 그것은 그가 도외시당하지 않기 위해서다(9절).

.... “여호와여, 주의 계명에 순종하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그러하오니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시고, 나로 주의 은총이 소생되는 것을 느끼지 못하게 하지 마소서. 나를 사랑하시고, 주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려주소서. 주의 종을 노하여 버리지 마소서.” 

....그는 그가 하나님의 역정을 받을 만했다는 사실을 시인하고 있으나, 하나님께서 그를 징계하시는 한이 있더라도 그를 그의 존전에서 버리지 말기를 간청하고 있다. 그에게서 버림당하는 것이 곧 지옥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2) 하나님께서 계속 그와 함께하실 것을 구하고 있다. 

....“주는 이전에도 나의 도움이 되셨나이다.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그러하오니 내가 주께로 가지 않고 어디로 가겠습니까? 나를 버리지 말고 떠나지 마옵소서. 주의 능력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그렇게 되면 나는 힘이 없어질 것입니다. 주의 선하신 의지의 표적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그렇게 되면 나는 위로를 잃게 될 것입니다.”

(3) 거룩한 길잡이의 혜택을 구하고 있다(11절). 

....“여호와여, 주의 길로 나를 가르치시고, 나로 하여금 내게 대한 주의 섭리의 의미를 깨닫게 하시고 분명히 알게 하소서. 그리고 의혹에 싸여 있을 때는 언제나 나의 의무를 알게 하시어 내가 실수하지 않고 올바로 행할 수 있도록, 내가 주저함이 없이 확고하게 행할 수 있도록 해주시옵소서.” 

....우리에게 우리 의무의 길을 가르치고 그것을 지키도록 해주는 것은 수단이 아니라, 솔직함(즉 매우 정직함)이다. 그는 “그의 원수로 인하여” 또는 (난외대로) 그의 “관찰자”로 인하여 “평탄한 길로” 인도되기를 청하고 있다. 그의 대적들은 그를 칠 기회를 찾기 위해 그가 멈추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 사울은 다윗을 주목했다(삼상 18:9). 이것은 그로 하여금 이렇게 기도하도록 촉구했다. “주여, 나를 평탄한 길로 인도하소서. 그리하여 그들이 나를 책망할 만한 흠이나, 흠으로 보이는 것을 발견하지 못하게 하소서.”

(4) 거룩한 보호의 혜택을 구하고 있다(12절). 

....“내 생명을 내 대적의 뜻에 맡기지 마소서. 여호와여, 그들이 뜻한 바를 이루지 못하게 하소서. 왜냐하면 그들은 내 생명을, 아니 그보다 더한 것을 노리고 있습니다. 따라서 주의 능력이 그들의 양심을 다스리지 않는 한 나는 그들을 방어할 힘이 없습니다. 위증자가 일어나 나를 치려 함이니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나의 명성이나 재산을 빼앗는 것 이상을 노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악을 토하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갈구하는 것은 피, 귀한 피입니다.”

....여기에서 다윗은 그리스도의 모형이었다. 왜냐하면 거짓 증인들이 일어나서 그를 쳤고, 그들은 악을 토하는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악인의 손에는 넘겨졌을지라도 그들의 뜻에는 맡겨지지 않았다. 그들은 그의 높이 들리심을 막을 수 없었다.

Ⅱ. 그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하나님께 의지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1. 모든 도움과 구조가 끊어졌을 때 하나님께서 그를 도와주시고 구조해 주시리라고 믿고 있다(10절). 

---“내 부모는 나를 버렸을 때, 내가 이 세상에서 큰 도움을 기대할 수 있는 나의 가장 가깝고 귀한 친구들이 죽거나 멀리 떨어져 있어서 내가 곤경에 처한 때에 도울 능력이 없거나, 또는 내게 불친절하며 관심을 두지 않고 나를 도우려 하지 않을 때, 내가 부모 없는 불쌍한 고아처럼 어찌할 수 없을 때, 그때에 불쌍하게 유리하는 양이 보호받아 죽음에서 구해지는 것처럼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그를 의지하는 자들에게 모든 도움이 끊어졌을 때, 그것이 주로 그의 영예와 그들의 위로를 위한 것일 때 그들을 도와주신다. “아비 없는 자들도” 그에게서 “자비를 얻으리라.” 버림받은 고아들은 거룩한 섭리의 특별하신 보호 아래 있어왔고, 그것은 사람들이 예상할 수 없는 방법으로 그들을 위로해 주고 친구가 되어주었다. 하나님은 우리의 세상 부모들보다도, 그들이 될 수 있는 것보다도 더 든든하고 좋은 친구이시다.

2. 합당한 때에 하나님의 은혜를 볼 것이라고 믿고 있다(13절). 

---그는 “산 자의 땅에서 여호와의 은혜를 볼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그가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면, 그는 고통 속에서 “쓰러졌”을 것이다. 

---가장 훌륭한 성도들까지도 그들의 고통이 심하고 괴로울 때는 쓰러지기 쉬울 것이며, 그들의 영은 압도되고 몸과 마음은 지쳐버릴 것이다. 그러나 그런 때에는 믿음이 특효 있는 활력제가 된다. 그것은 그들이 고통 가운데에서 낙심하지 않도록 하고 위로가 끊겨 실망하는 일이 없도록 해준다. 그리고 계속 소망을 갖고 기도하고 기다리게 해주며, 하나님께 대해 선한 생각을 유지하고 스스로 편안한 즐거움을 갖도록 해준다.

---그러면 다윗이 쓰러지지 않도록 해준 것은 무엇에 대한 믿음이었는가? 그것은 지금은 멀리 있는 것같이 보이는 “여호와의 은혜를 볼 것”이라는 믿음이었다. 

::: 믿음으로 여호와의 은혜 가운데 행하는 자들은 합당한 때에 그 은혜를 보는 가운데 행하게 될 것이다. 그는 이것을 산 자의 땅에서 보기를 원하고 있다.

(1) 즉 이 세상에서 보기를 원하고 있다. 

....그렇게 되면 그는 고통을 극복하게 될 것이며, 그 속에서 파멸하지 않을 것이다. 그가 산 자의 땅을 보게 되리라는 것은 그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리라는 것 못지않게 그의 위로가 되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은혜로운 영혼에 대한 육체적 쾌락의 전부이기 때문이다.

(2) 가나안의 땅, 그리고 생명의 지성소가 있었던 예루살렘에서 보기를 원하고 있다. 

....죄 가운데 죽어 있었던 이방나라와 비교해 볼 때 이스라엘 땅이 “산 자의 땅”으로 불린다는 것은 매우 합당하다. 거기에서 하나님이 알려지셨으며, 다윗은 그곳에서 그의 은혜를 보기를 바라고 있다(삼하 15:25-26 참조).

(3) 또한 천국에서 보기를 원하고 있다. 

....이것은 진실로 산 자의 땅이라 불릴 수 있는 유일한 땅이다. 그곳에는 더이상 죽음이 없기 때문이다. 이 세상은 죽은 자의 땅이다. 우리를 이 현재의 모든 재앙에서 질식하지 않도록 지켜주는 데는 영생에 대한 믿음의 소망, 그 영광에 대한 통찰, 그리고 그 즐거움에 대한 예상 이상의 것은 없다.

3. 그동안에 그가 그의 고통을 참을 수 있을 정도로 강하게 되리라는 것을 믿고 있다(14절). 

---그가 그것을 자기 자신에게 말하든 아니면 그의 친구들에게 말하든지간에 그것은 모두 마찬가지며, 그것이 그를 격려해 주고 있다─즉 그가 네 마음을 강하게 하실 것이며, 그 영을 부축하실 것이다. 그러면 그 영은 연약함을 뒷받침해 줄 것이다.

(1) 그 힘으로 하나님과 너의 의무를 철저히 지키라. 

....믿음과 기도로, 그리고 그의 뜻을 따르려는 겸손한 마음으로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내가 말하노니,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네가 무엇을 하든, 하나님 섬기기를 게을리하지 말라.

(2) 그 힘으로 큰 환난과 곤경 가운데에서 네 영을 지키라. 

....“담대하라. 하나님을 의지해 네 마음을 견고케 하고 네 마음을 그에게 두라. 그리하여 그 어느 것도 너를 요동케 하지 못하게 하라". 하나님을 바라는 자들은 담대해질 수 있다.

===호크마==
=====27:1
1-3절은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다윗의 강한 확신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확신이 너무도 강하여 어떠한 두려움도 그를 짓누를 수 없을 정도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 다윗은 여호와를 빛에다 비유하고 있다. 이와 비슷하게 삼하 22:29에서는 하나님이 `흑암을 밝혀주는 등불'로 묘사되어 있다. 여기서 흑암이 대적들의 위협과 그로 인한 수치를 상징한다면 `빛'(등블)은 이 모든 것을 물리쳐 주시는 하나님의 구원을 상징한다(Craigie).
나의 구원이시니 - `빛'에 대한 설명이다. 여기서 `구원'은 구체적으로 대적들에 대한 승리를 의미한다.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  다윗은 이 질문으로써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자신을 두려워하게 만들수 없다는 확신을 보여주고 있다. 그를 위협하던 대적들의 힘이 약하여서 그가 이러한 확신을 가지게 된 것은 아닐 것이다. 그 대적들의 수는 많고 그 힘은 매우 강하였다(3절). 그러나 다윗은 여호와를 신뢰하는 믿음안에서 이러한 확신을소유할 수 있었다.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 여기서 `능력'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마오즈'(* )는 `피난하다'는 의미의 동사 `우즈'(* )에서 파생된 명사형으로 일반적으로 `안전한 장소', `피난처'를 의미한다(18:2; 28:8; 31:21). 그런데 `마오즈'의 어근을 `아자즈'(* , 강하다)로 볼 때 `마오즈'는 개역 성경이나 대부분의 영역 성경처럼 `힘'으로 번역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오즈'가 본서에서 `피난처'또는 `거처'의 의미로 자주 사용되었으므로 본 구절에서도 `피난처'의 의미가 더 적합하다. 따라서 본 구절은 `내 생명의 피난처이시니'라고 번역되는 편이 좋다. 이와같이 다윗은 여호와를 자신의 생명의 피난처로 삼음으로써 강한 대적의 공격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었다(37:39; 느 8:10; 렘 16:19; 나 1:7).
=====27:2
2, 3절은 다윗의 원수에 대한 언급이다. 여기에 기록된 동사의 시제들을 그대로 인정한다면, 2절은 과거의 승리를, 3절은 미래의 승리를 기룩한 것으로 볼수 있다(Cr aigie). 그리고 과거의 승리는 다윗에게 있어서 확신의 뚜렷한 근거가 되었을 것이다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다가 실족하여 넘어졌도다 - `내 살을 먹으려고'라는 구절은 다윗이 그의 원수를 사나운 맹수에다 비유하고 있음을 보여준다(7:2; 17:12; 욥 19:22). 즉, 원수들은 사나운 맹수와 같이 그를 삼켜 버리려고 했었다는 것이다(B riggs, Kraus). 이와 달리 혹자는 이 표현을 원수의 `비방하는 말' 에 대한 비유라고 해석했으나(Craigie) 지금까지 진술 내용이 생명과 관련된 것이므로 이 해석은 타당하지 않다. 그리고 `왔다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카라브'(* )는 `접근하다'라는 뜻으로 여기에는 `전투하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지 않으며 아마도 원수들이 다윗을 포위했거나 그를 잡을수 있는 위치에까지 접근했다는 의미를 가질 것이다(Calvin , Briggs). 한편, `실족하여 넘어졌도다'라는 말은 바로 하나님의 개입으로 인해 저들이 패배했거나 또는 죽음을 당하게 되었음을 나타낸다(Briggs). 이처럼 원수들은 다윗을 죽일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를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칼 한번 휘두르지 못하였고 그들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역사가 개입되었기 때문이다.
=====27:3
군대가 나를 대적혀여 진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 `군대' 나 `진칠지라도'와 같은 단어에서 우리는 다윗을 위협하는 원수들의 많은 수와 그 세력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다윗은 과거의 놀라운 체험에 근거해 앞으로 벌어질 어떠한 원수들의 공격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27:4
내가 여호와께 청하였던 한 가지 일 - 원문에는 `한가지 일'(* , 아하트)이 맨 앞에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본 구절에서 `한가지 일'이란 단어가 강조되어 있음을뜻한다(Briggs, Rawlinson). 그리고 `청하였던'이란 말은 완료 시제로서 다윗이 이 `한 가지 일'을 과거로부터 계속해서 요구하여 왔음을 의미한다.
곧 그것을 구하리니 - 여기서 `구하리니'는 `청하였던'의 완료 시제와는 달리 미완료 시제이나, 따라서 이 두 단어를 연결시켜 해석하면, 다윗은 `한 가지 일'을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하나님께 구하여 왔으며 아울러 앞으로도 이를 계속해서 구할 것이라는 뜻이 될 것이다(Delitzsch, Rawlinson). 우리는 여기서 다윗의 끈질긴 의지를 발견하게 된다(Calvin).
내 성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 이는 다윗이 끈기있게 소원한 한 가지 일에 대한 내용이다. 여기서 `생전에'란 `평생 동안에'를 의미한다. 그는 앞으로 생존할 모든 날 동안에 여호와의 집, 곧 성소에 거하기를 소원했던 것이다. 이는 물론 제사장이나 레위인들처럼 성소에 상주(常住)할 것을 소원 했다는 것은 아니며 영적으로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하겠다는 소원을 의미한다(Delitzsch, Lange, Calvin). 한편, 성소를 사모하는 다윗의 마음에서 현재 성소에 돌아올 수 없는 그의 어려운 처지를 엿볼 수 있다.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 `아름다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노암'(* )은 `선함', `매력', `아름다운 점', `사랑스러움'등 다양하게 번역될 수 있는 용어이다. 그래서 학자에 따라 이 단어를 조금씩 달리 주석한다. (1) 혹자는 이를 영안으로 바라 본 하나님의 `계시'에다 적용했으며(Delitzsch), (2) 또 어떤 학자는 공예배시 경건한 자에게 나타나는 하나님의 `영광'에다 적용했으며(Briggs, Rawlinson)),(3) 다른 사람은 전쟁을 숭리로 이끌도록 해 주시는 하나님의 지시로 보았다(Craigie). 여 기에서 (3)의 견해는 합당하지 않다. 왜냐하면 다윗의 앙망함은 평생 동안 지속되는것으로 전쟁시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본 구절이 성전과 관련되어 있으므로 `아름다움'은 `계시'의 의미보다 성전 예배시 나타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의미할 것이다. 따라서 본 구절에서는 (2)의 견해가 가장 적절하다.
그 전에서 사모하게 하실 것이라 - 여기서 `사모하게 하실 것이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바카르'(* )는 본래 `조사하다'(investigate), `숙고하다'는 뜻으로 `여호와를 알고자 하는 열망으로 가득 차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러한 열망은 성전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날 때 충족될 수 있다.
=====27:5
여호와께서 환난 날에...그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숨기시며 - 원문 서두에는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 `키'(* )가 기록되어 있다. 이로써 본절은 다윗이 한 가지 일(4절)을 청하였던 그 실제적인 이유롤 보여준다. 본구절은 물론 문자 그대로 환난 때에 다윗이 성소에 숨으리라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반면 이는 환난 날에 성소에 거하시는 하나님께서 그를 안전하게 보호해 주실 것이라는 그의 믿음을 시적으로 묘사한 것이다(Rawlinson, Calvin). 즉, 여기서 `초막' , `장막'이라는 말은 다윗과 함께하시는 여호와의 임재를 상징한다. 여기서 `초막'(草幕)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수코'(* )는 `덮다'는 의미의 동사 `사카크'(* )에서 파생한 명사형으로 이스라엘이 광야 시절에 나뭇가지로 엮어 지은 집을 말한다(레 23:42). 이는 하나님의 보호를 상징한다(Lange).
바위 위에 높이 두시리로다 - `바위'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추르'(* )는 `거대한 산'을 의미하는 말이며 이는 여호와의 별명이기도 하다. 이에 대해서 18:2 주석을 참조하라. 이 바위는 사막의 모래밭과 같이 변형되지 않으며 어떠한 환난의 폭풍우가 몰아쳐도 언제든지 견고하다. 이는 곧 하나님의 불변성과 영원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다윗은 영원 불변하신 하나님 안에서 안전히 거하게 될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27:6
내 머리가 나를 두른 내 원수 위에 들리리니 - 승리의 영광에 대한 시적 표현이다.
내가 그 장막에서 즐거운 제사를 드리겠고 - `즐거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테루아'(* )는 축제시에 부는 `나팔 소리'를 의미하는 단어로서(TWOT) 여기서는 축제의 기쁨을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Kraus). 따라서 `즐거운 제사' 란 축제의 기쁨으로 드리는 제사라는 의미로서 `감사의 제사'(107:22)보다 더 강한 의미를 지닌다(Delitzsch).
노래하여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 여기서 다윗은 대적에 대한 승리로 인한 축제의 기쁨을 노래와 찬송으로 나타낼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찬송 하리로다' 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자마르'(* )는 `악기를 연주하다'는 의미도 가진다(TWOT). 이로 보아 다윗은 악기를 연주하며 하나님께 찬양을 드렸을 것으로 여겨진다.
=====27:7
본절은 다윗의 확신이 탄식으로 바뀌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 그 이유는 대적의 위험이 크게 증가되었기 때문일 것이다(12절).
하지만 이러한 탄식 가운데서도 다윗은 끝까지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고수하고있다(13,14절) 
내가 소리로 부르짖을 때에 - 이는 다윗의 간절한 기도를 보여준다(Calvin)
=====27:8
내 얼굴을 찾으라 - 이는 `나에게 호소하라' , `나를 신뢰하라', 또는 `나를 가까이 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시적(詩的)표현이다. 아마도 다윗은 이러한 하나님의 명령을 신 4:29의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그를 구하면 만나리라' 는 말씀에서 찾았을 것이다(Rawlinson). 그리고 이 명령에 힘입어 다윗은 전심으로 간구하고자 했을 것이다.
내 마음이 주께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 환난날에 전심으로 기도하는 것은 여호와의 명령(언약)을 따르는 것이다. 바로 이와 같은 순종의 관점에서 다윗은 전심으로 기도하기로 하나님 앞에서 다짐하고 있다(Delitzsch).
=====27:9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시고 - 주의 얼굴을 숨긴다는 표현은 기도를 거절하신다는 것, 또는 진노하신다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Kraus). 여호와는 다윗이 신뢰하는 유일한 분이시다. 때문에 만일 여호와께서 거절하신다면 다윗은 더 이상 소망을 가질 수 없었다.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나이다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 이 구절은 두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첫째, 여호와는 과거에도 다윗이 의지했던 유일한 대상이시요, 현재에도 그가 의지하는 유일한 분이시라는 의미이다. 둘째, 여호와는 과거에 다윗을 구원하여 주셨다. 그리고 여호와는 불변하시는 분이시므로 과거의 구원의 하나님은 현재에도 구원의 하나님이시라는 의미이다.
=====27:10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 - 이는 문자 그대로 부모를 떠나 살았던 다윗의 개인적인 역사와 관계되는 구절은 아니다. 다윗은 여기서 다만 여호와의 사랑을 부모의 사랑에 비교하여 그 탁월함을 표현하려 했을 뿐이다. 즉, 부모의 사랑이 아무리 깊다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그의 확신을 표현한 것이다(Calvin, Lange).
=====27:11
여호와여 주의 길로 나를 가르치시고 - 다윗은 지금 위기 상황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이 상황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이 자애로운 목자와 같이 자신을 인도해 주시는 것이다. 따라서 다윗은 여호와의 인도를 받고자 간구하였던 것이다(Delitzsch). 한편, 본 구절은 목자와 양의 관계를 염두에 두고 기록한 것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본절 전체에서 `길' 이란 표현이 반복되었으며 다음 구절의동사가 목자가 양을 인도하는 모습을 연상케 하기 때문이다.
내 원수를 인하여 평탄한 길로 인도하소서 - 여기서 `평탄한 길'이란 꼬불꼬불하거나 울퉁불퉁하지 아니한 `곧은 길'을 의미하는 말이다. 여기서 이 단어는 원수들이 숨어 기다리는 꼴짜기와 반대 개념으로 원수에 대한 염려없이 갈 수 있는 길을 가리킨다. 따라서 다윗은 지금 원수들이 노리고 있는 험한 길에서 벗어나 어떠한 위협도 도사리고 있지 아니한 평탄한 길로 나아가기를 소원하고 있다(Rawlinson).
=====27:12
내 생명을 내 대적(對敵)의 뜻에 맡기지 마소서 - `뜻'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네페쉬'(* )는 `영혼'을 의미하는 단어이나 `욕구',`갈망'을 의미하기도 한다(TWOT). 여기서는 후자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대적의 욕구는 이어지는 구절에 잘 표현되어 있다.
위증자와 악을 토하는 자가 일어나 나를 치려함이니이다 - 여기서 `악'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마스'(* )는 `폭력', `부당행위'를 의미하며 `극도의 미움'(25:19)을 의미하기도 한다. 따라서 `악을 토하는 자'란 `잔인한 말로 폭력을 휘두르는 자', 또는 `극도의 증오심으로 저주하는 자'라는 의미이다. 혹자는 `위중자와 악을 토하는 자'를 압살롬의 일당들이 다윗에 대하여 백성들에게 거짓 증거하는 사건(삼하15:3)에다 적용시켰다(Rawlinson).
=====27:13
내가 산 자의 땅에 있음이여 - 이는 지금까지 다윗이 숱한 죽음의 위기에서 구원 받아 현재 지상에서 생명을 유지하고 있음을 강조하는 구절이다. 이러한 다윗의 강조는 하나님의 은혜와 그에 대한 믿음의 중요성을 환난의 때인 지금 되새기기 위함이다.
여호의 은혜 볼 것을 믿었도다 - 이 문장은 귀결문이 생략된 일종의 감탄문 형태의 문장이다. 이를 직역하면, `내가 여호와의 은혜 블 것을 믿지 않았다면'이다. 따라서 이 문장에는 `내가 멸망하였을뻔 했도다'라는 구절이 생략되어 있다(Calvin, Rawlinso n). 그런데 다윗은 지금 생존하고 있다. 이것은 그의 믿음에 대한 하나님의 은총의 결과였다. 그는 이 사실을 알고 있기에 현재 환난의 때에 또다시 여호와를 굳게 의지함으로 이 위기를 극복하고자 하는 것이다.
=====27:14
너는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 `바랄지어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카와'(* )는`간절한 기대감으로 고대하다', 또는 `소망중에 기다리다'는 뜻이다. 이에 대해 25:3 주석을 참조하라. 혹자는 이 구절을 타인에 대한 다윗의 권고라고 주장하나(Calvin) 오히려 이는 약해진 자아에 대해 낙망하지 않도록 권고하는 다윗 스스로의 말이다(Rawlinson).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 `강하고'는 원문상 명령형이며 `담대하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야아메츠'(* )는 히필형 단수 3인칭 동사이다. 따라서 이를 직역하면 `강하라,(그리하면) 그가 너의 마음을 강하게 하시리라'가 된다(Calvin , Rawlinson). 그렇다면 이 구절은 자신이 강해지려고 힘쓰기만 하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그대로 될 것이라는 믿음을 나타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다윗은 이와같이 강해진 마음으로 끝까지 여호와를 바라볼 것을 스스로 권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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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전쟁을 통해 체득한 구원의 확신이 생생하게 표현되고 있는 본시에는 고통스런 상황 속에서도 실망하지 않고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다윗의 신앙이 함축적으로  제시되어 있다. 
다윗은 평생을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극한의 전쟁터에서 보냈다. 이러한  정황 속에서 다윗은 어떠한 위기 상황 속에서도 완벽하게 구출해 주시는 하나님의  보호를 절실하게 체험했다. 
본시는 다윗이 겪은 다양한 전쟁 경험을 토대로 극악한 세력들의 필연적 패배와 하나님 백성들의 궁극적 승리를 노래하고 있다.  
--전반부(1-6절)에는 주로 모든 위협으로부터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의 인도에 대한 확신이 드러나고,  후반부(7-14절)에는 현재 직면한 고통에 대한 호소와 미래의 승리에 대한  간구가  나타난다. 
다윗은 본 시편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당신만을 의지하는 자를 멸시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지키신다는 사실을 분명히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 본 시편에 관하여 어떤 학자들은 원래 독립된 두 개의 시편이라고 주장한다. 이들은 (1) 앞 부분(1-6절)은 신뢰와 확신이 주도적으로 부가되는데  비해 뒷 부분(7-14절)은 탄식과 기도가 주로 드러난다는 점, (2) 앞 부분에서는 여호와께서 제삼자적 관점에서 말씀하시지만 뒷 부분에서는 직접 의사를 전달하신다는 점 등을 근거로 제시한다. 그러나 본 시편은 핵심 단어와 내용에 있어서 밀접한 내면적 통일성이 있으므로 하나의 시편으로 보는 것이 적합하다.
--또한 본 시편을 쓰게 된 다윗의 역사적 상황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제출되었다.
다윗이 아비새의 도움으로 블레셋의 거인 이스비브놉(삼하 21:15-17)으로부터 구출되었던 사건을 배경으로 한다는 견해도 있고, 압살롬의 난(亂)이 진행되는 과정  중에서 다윗이 중요한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가 다시금 전세가 악화되는 시점이라는  입장도 있다. 그러나 어떠한 견해가 정확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불투명하다. 다만 다윗이 무죄하게 박해받고 고통당하는 상황에서(2, 12절). 여호와의 보호를 확신하며 지은 시임은 분명하다. 다윗은 인간적으로 볼 때에 대단히 고통스러운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대하며 승리의 찬가를 부르고 있다.
--한편 본시는 일반적으로 '비탄시'로 알려져 있지만 '기도시'로 보는 것이 가장 적합하다. 다윗은 본시에서 자신의 고난에 대하여 한탄하기보다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  의지심을 표현하고 있다. 
그는 요지부동(搖之不動)의 신앙심을 가지고 하나님의  도움을 바라는 기도를 드리고 있다. 
--이제 환난 가운데서도 식지 않은 정열을 가지고 구원의 확신과 섭리적 인도를  노래하고 있는 본시의 내용을 크게 두 단락으로 나누어 좀더 심층적으로 고찰해 보고자 한다.
.....1. 궁극적 승리에 대한 확신(27:1-6)
악인의 군대가 생명을 위협하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여호와에 대한 구원의  확신으로 가득 차 있는 본 대목은 (1) 여호와에 대한 재발견(1절), (2) 두려움을 극복한  신앙(2, 3절), (3)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한 안전의 획득(4-6절)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본 대목은 환난을 배경으로 하여 저술되었다고 믿기 어려울 만큼 다윗의 담대한  용기와 확신이 드러나 있다. 
다윗은 초두에서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1절)라고 반복하여 강조하고 있다.
살얼음판 위를 걸어가는 듯한  환난의 시기에 이처럼 모든 두려움을 일축시켜 버리고 승리를 확신하는  다윗의  신앙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다윗은 이러한 신앙을 통하여 극도의 위기 상황을 성공적으로 극복하고 마음의 평안을 회복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이 처한 입장에 대해서 불평  대신 감사를, 의심 대신 확신을, 조급함 대신 신중함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다윗의 용기의 비결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좀더 관심을 집중하여 보자. 
우리는 먼저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1절)라는 그의 신앙 고백에서 다윗의 용기의 근원이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다윗은 결코 이성(理性)의 합리적 판단이나 열광적인 감정, 세상적 힘을 의존하지 않았고 오직 역사의  주관자이신 여호와만을 신뢰했다. 
다윗은 숱한 전쟁을 겪으면서 실제적이고  구체적으로 하나님께서 구속의 은총을 베풀어 주시는 분임을 인식했다. 
그는 과거의 은혜로운  사건의 체험으로부터 하나님에 대하여 알고 있었으므로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평안을 유지할 수 있었다. 
사실 다윗의 인생 여정을 회고해 보면 이러한 사실에 대해 더욱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는 하나님의 구원역사가 끊임없이 이어진 은허의 길을 걸어왔다. 어린 시절에는 몸집이 크고 사나운 맹수들의 숱한 공격을 모두 물리칠 수 있었으며,  왕이 된 이후에는 블레셋 대군을 비롯한 사방의 강한 대적들을 모조리 격파할 수 있었다. 이 모든 승리는 다윗의 능력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바로 그가 의지하는  하나님의 역사로 성취되었다. 
다윗은 짧지 아니한 인생 행로에 수없이 개입하신 하나님의 구원 역사들을 회상해 보면서 현재 직면하고 있는 극심한 환난을 극복하고 믿음과  평안을 유지할 수 있었다. 
우리는 여기서 다윗의 용기의 첫 번째 비결이 과거에 체험한 하나님의 은혜로운 역사들을 기억하고 미래에도 동일하게 역사하실 것을 확신하는  신뢰임을 알 수 있다. 
우리는 흔히 고난에 처할 때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로운 일들을 모두 잊어버리고 현재의 고난만을 확대하여 생각함으로 낙망에 빠질 때가 있다. 
그러나  다윗은 과거의 은혜로운 사건들을 통해 현재의 환난을 재조명해 보고 승리를 확신하게 되었다(3절).
다윗의 용기의 두 번째 비결은 순수한 신앙적 열정에서 발견될 수 있다. 
그는  성소를 사모하는 열정과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소원하는 순전한 마음의 소유자였다.  다윗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가까이에서 모시며 하나님의 영광과 놀라운 계시를  바라보기를 소망했다. 
바로 이와같이 하나님을 간절히 사모하는 열정 안에서 다윗은  어떠한 위기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담대함을 소유할 수 있었다. 
그는 거룩한 열정을  가지고 있으면서 하나님의 구원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자신이 사모하는 하나님께서 초막과 장막 등 은밀한 곳에 피난처를 만드시고 보호할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이  있었다(5절). 
더 나아가서 다윗은 하나님께서 원수들을 모두 제압할 수 있도록  만드시고 즐거운 제사와 찬송을 허락하실 것을 믿었다(6절). 
우리는 이상에서 삶의 진정한 용기는 오직 하나님을 간절히 사모하는 열정과 하나님의 성품 근거한 확신 속에서  가능함을 알 수 있다.
2. 고통 속에서 드리는 간구와 미래의 확신(27:7-14)
다윗의 확신이 탄식으로 바뀌는 장면이면서도 동시에 궁극적 승리에 대한 확신이 드러나고 있다.
본 대목은 (1) 여호와의 구원에 대한 호소(7-12절) (2) 미래에 임할 구원에 대한 소망(13, 14절)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내용을 통해 우리는 다윗의 확신이 보다 다급해진 상호아에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실제적인 노력으로 전환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장면은 앞 대목에서 고백한 다윗의 확신의 실상을 구체적으로 제시해 준다. 
다윗이 정말로 승리를  확신하지 못했다면 보다 악화된 위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실제적인  노력을  행하기보다는 하나님을 향해 원망하고 불평하는 태도를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는 상황 속에서도 자신의 확신에 근거하여 하나님을 통한 구원을 갈구하였다.
다윗은 인간적으로 볼 때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결코 실망하지 않고 여호와의  얼굴을 전심으로 간구하였다(7절). 
또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환난 날에 여호와께 간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인식하고 실천했다(8절). 
불신자들의 관점에서 보면  기도가 부질 없는 행위로 보이겠지만 사실 신자에게 있어서 기도의 행위는 환난 중에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순종의 행위이며 승리를 위한 가장 강력한 무기라고 볼 수 잇다. 
우리는 여기서 진정한 믿음은 환난의 때에 더욱 잘 드러난다는 사실을 자각할 수  있다. 
참된 믿음은 환난 속에서 더욱 간절하게 기도함으로 하늘로부터 임하는 새 힘과  위로를 받고, 자신의 어려움을 능히 이겨 나간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다윗은 세상속에서 환난과 핍박을 당하는 모든 성도들에게 진정한 신앙의 표본을 제시했다고 볼 수 있다.
이제 다윗의 기도를 분석해 보면서 참된 신앙의 본질에 대해 알아보자. 
첫째,  그의 기도는 말씀에 대한 순종으로부터 출발한다.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기도에  대한 의무를 깨닫고 간절히 부르짖었다(8절). 
우리는 여기서 환난 날에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한 가지는 전심으로 기도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배울 수 잇다. 
둘째, 그의 기도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 속에서 더욱 간절해지고 있다. 하나님의 사랑은 부모의 사랑을 능가한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안에 거한다면 결코 멸망치 않을 것이다. 다윗은 이러한 확신 속에서 더욱 간절히 기도할 수 있었다(10절).  
셋째,  다윗은 자신의 생존을 통해 기도의 정당성을 깊이 자각했다(13절). 현재 살아있다고 하는  의식은 다윗에게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생생한 감각을 제공해 주었다.  
다윗은 생명 자체가 하나님의 섭리를 통해 유지되는 신비라고 보았다. 
그러므로 다윗은 생명 자체의 경외와 감격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확신할 수 있었고, 이러한  영적인 시각하에서 강하고 담대하게 하나님께 간구할 수 있엇다. 
우리는 자신이 살아 있다는 사실에 대해 너무 무감각하다. 그러난 다윗은 생사의 우기를 극복하면서  자신의 생명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고 전심으로 기도할 수 있었다.
이상에서 우리는 다윗이 하나님의 말씀과 사랑을 통해 기도의 필요성을  절감햇음을 알 수 있다. 
다윗은 자신의 상황과는 무관하게 항상 하나님을  앙모하며  기도하였다. 그는 위기가 크면 클수록 더욱더 기도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우리도 다윗을 본받아 어렵고 힘든 상황속에서도 하나님을 바라보며 기도하기를 쉬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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