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49==어두운내눈밝히사366..어려운일당할때543...
지혜의 직관력(Q을 인지), 총명의 이해/통찰력(말씀진리와 이치), 모략과 재능, 지식으로 나타나는 바, 때에 맞게 질서정연하게 분별, 실행하는 공교로운 전문적 살행능력인 명철(유익케 함), 이는 모두 HS따라 행함, 곧 하나님경외함으로 시작되고 귀결됨!!
(사11:2)..*1.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2.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 *3.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의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하지 아니하며 그의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아니하며 *4.공의로 가난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의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그의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5.공의로 그의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그의 몸의 띠를 삼으리라
신자의 진복, 그 누림은 편안(권태와 게으름으로 퇴보에 이름)이냐 평강(시공 초월한 Q임마누엘로 인한 형통..생명낳는JC 증인됨)이냐?!
*1.뭇 백성들아 이를 들으라 세상의 거민들아 모두 귀를 기울이라(=전존재 기울여 중심으로 경청하라)
*2.귀천 빈부를 막론하고 다 들을지어다
*3.내 입은 (하늘로부터 오는 지혜의 특성!!..약3:17, 18...Q말씀 풀어내시는 HS의 감동따라)지혜를 말하겠고 내 마음은 명철을(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 Q께서 일깨우시는 말씀을 궁구하여 깨달은 바 모든 지식들을 적용, 실행, 축적하여 유익케 하는 섬김의 생명능력, 잘 훈련된 재능) 작은 소리로 읊조리리로다(=선언하다)
*4.내가 비유에 내 귀를 기울이고 수금으로 나의 오묘한 말을 풀리로다(Q말씀 모든 말씀을 깊이 묵상, 통찰함으로써 얻는, 깨달은 바 참진리를 함축한 감동된 말씀....잠언, 격언, 비유...먼저 내안에서 말씀하시는 바, 그 말씀을 경청함으로써 교화되어야 하고, 그것을 Q의 연주하심따라 말하고 살아내도록 함)
*5.죄악이 나를 따라다니며 나를 에워싸는 환난의 날을 내가 어찌 두려워하랴(모든 것 미리 아시고 때에 맞게 계획/안배/예비하사 함께 돌파하시는 목자-만군의 주하나님-구주!!...영생복락-[객관적]구원-[주관적]승리는 이미 JC믿는 내것이니!!)
*6.자기의 재물을 의지하고 부유함을 자랑하는 자는
*7.아무도 자기의 형제를 구원하지 못하며 그를 위한 속전을 하나님께 바치지도 못할 것은
*8.그들의 생명을 속량하는 값이 너무 엄청나서 영원히 마련하지 못할 것임이니라(Q관점에서 볼 때 최상의 가치는 생명속량!!)
*9.그가 영원히 살아서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인가
*10.그러나 그는 지혜 있는 자도 죽고 어리석고 무지한 자도 함께 망하며 그들의 재물은 남에게 남겨 두고 떠나는 것을 보게 되리로다
*11.그러나 그들의 속 생각에 그들의 집은 영원히 있고 그들의 거처는 대대에 이르리라 하여 그들의 토지를 자기 이름으로 부르도다
*12.사람은 존귀하나 장구하지 못함이여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Q말씀을 거절, 거역, 무시하고 버린 결과 인생 허락하신 Q을 모르기에 그분의 뜻 깨닫지못하고 Q제한하기에 그분을 누리지 못하며 스스로 자기기만과 자멸의 함정에 빠지는 자들)
*13.이것이 바로 어리석은 자들의 길이며 그들의 말을 기뻐하는 자들의 종말이로다 (셀라)(사단의 속임과 자기기만에 사로잡혀 Q말씀 떠난 자신을 현명하다 여기며 뻐기는 자)
*14.그들은 양 같이 스올에 두기로 작정되었으니 사망이 그들의 목자일 것이라 정직한 자들이 아침에(부활의 아침!!) 그들을 다스리리니 그들의 아름다움은 소멸하고 스올이 그들의 거처가 되리라
*15.그러나 하나님은 나를 영접하시리니 이러므로 내 영혼을 스올의 권세에서 건져내시리로다 (셀라)(오직 오늘도 여전히Q말씀을 행위의 기준삼으리라)
*16.사람이 치부하여 그의 집의 영광이 더할 때에 너는 두려워하지 말지어다(행악자의 일시적 성공-부귀-명성, 곧 스러지리니)
*17.그가 죽으매 가져가는 것이 없고 그의 영광이 그를 따라 내려가지 못함이로다
*18.그가 비록 생시에 자기를 축하하며 스스로 좋게 함으로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을지라도
*19.그들은 그들의 역대 조상들에게로 돌아가리니 영원히 빛을(Q영광의 빛!!) 보지 못하리로다
*20.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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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민들아, 이 말을 들어라. 이 세상에 사는 만백성아 모두 귀를 기울여라.
낮은 자도 높은 자도, 부자도 가난한 자도 모두 귀를 기울여라.
내 입은 지혜를 말하고, 내 마음은 명철을 생각한다.
내가 비유에 귀를 기울이고, 수금을 타면서 내 수수께끼를 풀 것이다.
나를 비방하는 자들이 나를 에워싸는 그 재난의 날을, 내가 어찌 두려워하리오.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는 자들과 돈이 많음을 자랑하는 자들을, 내가 어찌 두려워하리오.
아무리 대단한 부자라 하여도 사람은 자기의 생명을 속량하지 못하는 법, 하나님께 속전을 지불하고 생명을 속량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생명을 속량하는 값은 값으로 매길 수 없이 비싼 것이어서, 아무리 벌어도 마련할 수 없다.
죽음을 피하고 영원히 살 생각도 하지 말아라.
누구나 볼 수 있다. 지혜 있는 사람도 죽고, 어리석은 자나 우둔한 자도 모두 다 죽는 것을! 평생 모은 재산마저 남에게 모두 주고 떠나가지 않는가!
사람들이 땅을 차지하여 제 이름으로 등기를 해 두었어도 그들의 영원한 집, 그들이 영원히 머물 곳은 오직 무덤뿐이다.
사람이 제아무리 영화를 누린다 해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으니, 미련한 짐승과 같다.
이것이 자신을 믿는 어리석은 자들과 그들의 말을 기뻐하며 따르는 자들의 운명이다.
그들은 양처럼 스올로 끌려가고, '죽음'이 그들의 목자가 될 것이다. 아침이 오면 정직한 사람은 그들을 다스릴 것이다. 그들의 아름다운 모습은 시들고, 스올이 그들의 거처가 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분명히 내 목숨을 건져 주시며, 스올의 세력에서 나를 건져 주실 것이다. (셀라)
어떤 사람이 부자가 되더라도, 그 집의 재산이 늘어나더라도, 너는 스스로 초라해지지 말아라.
그도 죽을 때에는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며, 그의 재산이 그를 따라 내려가지 못한다.
비록 사람이 이 세상에서 흡족하게 살고 성공하여 칭송을 받는다 하여도,
그도 마침내 자기 조상에게로 돌아가고 만다. 영원히 빛이 없는 세상으로 돌아가고 만다.
사람이 제아무리 위대하다 해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으니, 미련한 짐승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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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ar this, all peoples; Give ear, all inhabitants of the world,
Both low and high, Rich and poor together.
My mouth will speak wisdom, And the meditation of my heart will be understanding.
I will incline my ear to a proverb; I will express my riddle on the harp.
Why should I fear in days of adversity, When the iniquity of my foes surrounds me,
Even those who trust in their wealth And boast in the abundance of their riches?
No man can by any means redeem his brother Or give to God a ransom for him--
For the redemption of his soul is costly, And he should cease trying forever--
That he should live on eternally, That he should not undergo decay.
For he sees that even wise men die; The stupid and the senseless alike perish And leave their wealth to others.
Their inner thought is that their houses are forever And their dwelling places to all generations; They have called their lands after their own names.
But man in his pomp will not endure; He is like the beasts that perish.
This is the way of those who are foolish, And of those after them who approve their words. Selah.
As sheep they are appointed for Sheol; Death shall be their shepherd; And the upright shall rule over them in the morning, And their form shall be for Sheol to consume So that they have no habitation.
But God will redeem my soul from the power of Sheol, For He will receive me. Selah.
Do not be afraid when a man becomes rich, When the glory of his house is increased;
For when he dies he will carry nothing away; His glory will not descend after him.
Though while he lives he congratulates himself-- And though men praise you when you do well for yourself--
He shall go to the generation of his fathers; They will never see the light.
Man in his pomp, yet without understanding, Is like the beasts that peri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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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Folly of Trusting in Riches. To the Chief Musician. A Psalm of the sons of Korah.49
1 Hear this, all peoples; Listen carefully, all inhabitants of the world,
2 Both low and high, Rich and poor together:
3 My mouth will speak wisdom, And the meditation of my heart will be understanding.
4 I will incline my ear and consent to a proverb; On the lyre I will unfold my riddle.
5 Why should I fear in the days of evil, When the wickedness of those who would betray me surrounds me [on every side],
6 Even those who trust in and rely on their wealth And boast of the abundance of their riches?
7 None of them can by any means redeem [either himself or] his brother, Nor give to God a ransom for him—
8 For the ransom of his soul is too costly, And he should cease trying forever—
9 So that he should live on eternally, That he should never see the pit (grave) and undergo decay.
10 For he sees that even wise men die; The fool and the stupid alike perish And leave their wealth to others.
11 Their inward thought is that their houses will continue forever, And their dwelling places to all generations; They have named their lands after their own names [ignoring God].
12 But man, with all his [self] honor and pomp, will not endure; He is like the beasts that perish.
13 This is the fate of those who are foolishly confident, And of those after them who approve [and are influenced by] their words. Selah.
14 Like sheep they are appointed for Sheol (the nether world, the place of the dead); Death will be their shepherd; And the upright shall rule over them in the morning, And their form and beauty shall [a]be for Sheol to consume, So that they have no dwelling [on earth].
15 But God will redeem my life from the power of Sheol, For He will receive me. Selah.
16 Be not afraid when [an ungodly] man becomes rich, When the wealth and glory of his house are increased;
17 For when he dies he will carry nothing away; His glory will not descend after him.
18 Though while he lives he counts himself happy and prosperous— And though people praise you when you do well for yourself—
19 He shall go to the generation of his fathers; They shall never again see the light.
20 A man [who is held] in honor, Yet who lacks [spiritual] understanding and a teachable heart, is like the beasts that peri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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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편은 설교이며, 이 다음 시편도 설교에 속한다. 우리는 대부분의 시편들 속에서 저자가 기도하거나 찬미하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이 두 시편에서 우리는 그가 설교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시편을 노래함에 우리들 자신을, 그리고 서로를 가르치고 훈계하는 것이 우리 의무다.
이 이야기의 목적과 의도는 이 세상 사람들에게, 이 세상 것들에 마음을 두는 그들의 죄와 어리석음을 깨닫게 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더 나은 세상의 것들을 구하도록 설득시키기 위한 것이다.
또한 악인의 형통함에서 야기되는 하나님 백성들의 고통과 근심으로부터 그 백성들을 위로하기 위한 것이다.
1. 서문에서 그는
세상적인 사람들을 방심상태에서 일깨우고(1-3),
환난의 날에 그 자신과 다른 경건한 사람들을 위로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4-5).
2. 그 나머지 부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그는 이 세상 재물에 탐닉하는 죄인들에게 그들의 어리석음을 깨닫게 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① 그들은 모든 재물로도 친구들을 사망에서 구원할 수 없다(6-9).
② 그들은 사망에서 그들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10).
③ 그들은 이 세상에서의 행복을 안전케 할 수 없다(11-12).
④ 더구나 그들은 저 세상에서의 행복을 확보할 수도 없다(14).
(2) 그는 다음과 같은 것으로부터 그 자신과 다른 선한 사람들을 위로하고 있다.
① 사망의 두려움에 대해(15).
② 악한 백성들의 형통하는 권세를 두려워하는 것에 대해(16-20).
.......이 시편을 노래함에 우리는 교훈을 받아들여 지혜로워지도록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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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청을 요함(시 49:1-5)
이것은 세상의 허탄함과 그것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기에는 터무니없이 부족함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시편 저자의 서문이다.
우리는 이보다 더 엄숙한 서문은 거의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이보다 더욱 명확한 진리는 없고, 더 무게 있고 중요한 진리도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는 것은 우리에게 매우 유익할 것이다.
Ⅰ. 그는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경청해 주기를 요구하고 있다(1-2절).
--- “만민들아, 이를 들으라.” 이것을 듣고 유념하며, 이것을 듣고 생각하라. 한 번 말한 것을 두 번 들으라. “듣고 귀를 기울이라”(62:9, 11).
이것은 “너희 모든 이스라엘 만민들아, 들으라. 가나안의 거민들아, 귀를 기울이라” 하는 의미뿐만 아니라, “만민들아, 들으라. 세상의 거민들아, 귀를 기울이라”는 것을 뜻한다.
왜냐하면 이 교훈은 거룩한 계시로 축복받은 자들에게 특별히 국한된 것이 아니라, 자연의 빛으로 그것을 목격한 자들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모든 사람들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로 그들의 재물이 죽음의 날에는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생각하게 하라.
---“귀천 빈부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들이 함께 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따라서 그들로 이것을 적용시켜 듣도록 하라.
이 세상에서 귀하고 부유한 자들로 그들이 소유하고 있는 세상 재물이 얼마나 허탄한가를 듣고, 그것을 자랑하거나 그 즐거움 속에서 방심하지 않도록 하고, 그것을 선행하는 데에 내놓아 그들의 친구로 삼을 수 있도록 하라.
가난하고 천한 자들로 이것을 듣고, 그들이 적게 가진 것을 만족히 여기고 풍족히 가진 자들을 부러워하지 않게 하라.
부유한 백성들은 세상의 재물을 지나치게 탐닉하는 반면에 가난한 백성들은 재물을 지나치게 원할 위험이 매우 크기 때문이다.
---그는 왜 그의 이야기가 중하게 여겨져야 하는가에 대한 좋은 이유를 말하고 있다(3절). “내 입은 지혜를 말하리라.”
1. 그가 말해야 했던 것은 참되고 훌륭했다.
....그것은 지혜와 명철이다. 따라서 그의 말은 그것을 받아들이고 복종하는 자들을 지혜롭고 총명하게 만들 것이다.
그것은 의심스럽지 않고 명확하며, 경박하지 않고 진중하다. 그리고 그 말은 훌륭한 사색 결과로 나온 것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영생이라는 큰 목표까지 가는 길로 인도하는 데에 훌륭히 사용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2. 그것은 그 자신이 잘 소화시켰던 바로 그것이었다.
....그의 입이 말한 것은(19:14, 45:1처럼) “그의 마음의 묵상”이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에 집어넣으신 것이었고, 그 스스로가 진지하게 생각해 그 의미를 충분히 측정하고 그 진리를 깨달은 것이었다.
주님 말씀을 붙들고 전심을 다하여 그 안의 성령과 생명을 캐내어 자기의 양식으로 삼는 말씀사역자들, 바로 그 자신의 마음 중심에서 우러나온 바, 바로 그 고백의 말이야말로 대부분 깊은 감동과 함께 생명을 공급하기에, 듣는 자들의 마음을 움직일 것이다.
Ⅱ. 그는 스스로도 경청하고 있다(4절). “내가 [나의] 비유에 내 귀를 기울이리라.”
---그것을 비유라 일컫고 있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상징적이고 모호하기 때문이 아니라, 지혜롭고 매우 교훈적인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는 솔로몬의 잠언에 관해 사용된 것과 같은 말이다. 시편 저자가 그의 귀를 기울이고자 한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시사하고 있다.
1. 이것은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 가르침을 받은 것이지 그 스스로가 말한 것은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고자 하는 자들은 먼저 그 자신이 배워야 한다.
2. 그는 그 자신이 그것에 몰두해 왔다고 생각했으며,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하지 못하도록 한 일에 감히 자신의 영혼을 내던지지 않기로 결심했다.
3. 그는 그에게 가장 중요한 일로 여겼을 뿐 아니라, 그 자신이 유의하지 않았던 일에 다른 사람들이 유의할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기독자에게 “학자의 혀를 주실” 때, 먼저 “귀를 깨우치사 학자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사 50:4).
Ⅲ. 그는 될 수 있는 한 그 내용을 명료하고 감동적으로 만들 것을 약속하고 있다. “내가 수금으로 나의 오묘한 말을 풀리로다.”
....그는 자기 혼자서 안 것을 숨기려 하거나 그 자신에게 국한시키려 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나누려 했다.
1.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그것은 일종의 수수께끼였다.
....그러나 그들에게 보이는 것들의 허탄함과 보이지 않는 것들의 본체와 그 무게를 말해 주어라. 그러면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이시여! 주께서 비유로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하고 말할 것이다. 이런 자들을 위해 이 오묘한 말을 풀려 했고, 그것을 매우 분명하게 만들어서 지나가는 자들도 그것을 읽을 수 있게 했다.
2. 그것을 충분히 이해한 사람도 있었으나, 그들의 마음은 그것으로 움직여지지 않았고, 그런 자들을 결코 감동시키지 못했다.
....이런 자들을 위해 그는 수금으로 그것을 풀려 했다. 그들을 움직여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그런 시도를 했다. “일련의 시구는 설교를 피하는 자를 구할 것이다”(허버트).
Ⅳ. 그는 그것을 그 자신에게 적용시킴으로써 시작하고 있는데, 그것은 거룩한 것들을 다루는 옳은 방법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훈계하거나 가르치기 전에 먼저 우리 자신을 가르쳐야 한다. 그는 세속적인 담보의 어리석음을 제시하기 전에(6절), 거룩하고 은혜로운 담보의 유익과 위로를 그 자신의 경험에서 이끌어내고 있다. 즉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이것을 즐기며, 그들의 세상적인 재물을 즐기지 않는다. “내가 어찌 두려워하랴?” 이것은 “내가 어찌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사 8:12), 세상적인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랴?” 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1. “내가 어찌 그것을 무서워하랴? 내가 어찌 환난과 핍박의 날을 나의 발꿈치의 죄악이, 또는 내 발을 걸어 넘어뜨리려는 나의 찬탈자들의 죄악이 나를 따라 에우고, 또 그들이 해로운 일을 하고자 나를 포위할 때를 두려워하랴? 내가 어찌 능력이 재물에만 있고, 친구를 구제할 능력이 없는 자들을 두려워하랴? 나는 그들의 힘을 두려워하지 않겠다. 왜냐하면 그것은 나를 멸망시킬 능력을 그들에게 부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세상의 높은 자들도, 그들의 재물이 그들에게 거의 도움이 되지 못하리라는 점을 생각해 볼 때, 별로 위대한 존재로 대두되지는 못할 것이다. 우리는 자기 자신의 탁월함을 지킬 수 없는 이런 자들로부터 우리의 탁월함을 빼앗길 것을 염려할 필요가 없다.
2. “내가 어찌 그들처럼 두려워하랴?” 노년과 죽음의 날은 “곤고한 날”이다(전 12:1). 심판의 날에 우리 발꿈치의(또는 우리 걸음, 우리 옛 죄의) “죄악”이 우리를 에워쌀 것이며, 우리 앞에 나란히 놓일 것이다. “모든 일은 심판받을 것이며, 숨겨진 일도 심판받으리라!” 그리고 “우리 모두는 심문받을 것이다.”
....이런 날에 세상적이고, 악한 백성들은 두려워할 것이다. 세상에 마음을 두고 있는 자들에게는 그것을 떠나게 된다는 생각보다 더 두려운 것이 없다. 그들에게 죽음은 두려움의 왕이다. 왜냐하면 죽음 후에는 심판이 오며, 그때에 그들의 죄가 매우 큰 분노로써 그들을 포위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과 함께 하는 선한 자들이 어찌 죽음을 두려워하겠는가?(23:4) 그의 죄악이 그를 둘러쌀 때, 그는 그것이 모두 사함을 받고, 그의 양심은 정결케 되어 평화를 누림을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두려움으로 간담이 서늘한 심판의 날에도 그는 기쁨으로 머리를 들 수 있을 것이다(눅 21:26, 28).
....하나님의 자녀들은 아무리 가난할지라도 세상의 어떤 부유한 자녀들보다도 진정으로 더욱 행복하며, 사망과 장차 올 심판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지켜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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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재물의 허탄함(시 49:6-14)
이 구절들 속에서 우리는 다음 사항을 볼 수 있다.
Ⅰ. 이 세상에서 분깃을 받는(27:14) 세상적인 사람들의 심령과 생활 방법을 엿보자.
....그들이 재물과 풍부함을(6절), 즉 그들이 자기 것이라 부르는 상속받은 집과 땅을(11절) 소유하고 있는 것은 당연하다.
....하나님은 그를 멸시하고 그를 배반하면서 살아가는 악인들에게 흔히 이 세상의 좋은 것들을 풍부히 주신다. 이것에 의해 세상 재물이 가장 훌륭한 것이 아니며(가장 좋은 것이라면 하나님은 그의 가장 친한 친구들에게 그것들을 거의 다 주셨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이 아니라는(가장 좋은 것이라면 재물을 갖고도 멸망하는 자들이 그렇게 많은 재물을 가지려 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잠 1:32) 사실이 드러나고 있다.
....사람이 이 세상 재물을 풍성히 가졌을지라도, 그것에 의해 더 나아지고 그것에 의해 그의 마음을 사랑과 감사와 순종으로 넓힐 수 있으며, 그것으로 선을 행해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을 세상적으로 만드는 것은 사람이 가진 재물이 아니라, 그들이 그것을 가장 훌륭한 것으로 여겨 그 위에 마음을 두는 것이다. 이런 세상적인 사람들은 여기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다.
1. 그들은 그들의 재물을 신뢰한다. “그들은 자기의 재물을 의지한다”(6절).
....즉 그들은 그들의 분깃과 행복으로서 그것을 의지하고, 그것이 모든 재앙으로부터 그들을 안전케 하고 그들에게 온갖 유익한 것을 주리라 함을, 그리고 그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나님 자신조차도 필요치 않으리라 함을 예상한다.
....그들은 금으로 소망을 삼는다(욥 31:24). 따라서 그것은 그들의 하나님이 된다. 이처럼 우리 구세주께서도 부자가 구원받는 것이 어려움을 설명하고 계시다(막 10:24).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어떻게 어려운지!”(딤전 6:17 참조)
2. 그들은 그들의 재물을 자긍한다. “그들은 풍부함으로 자긍한다.”
....마치 그것이 하나님 은총의 확실한 표적이며, 그들의 재주와 근면의 분명한 증거인 것같이(“나의 힘과 내 손의 능력이 나로 이 재물을 얻게 했노라”), 마치 그것이 그들을 진정 위대하고 행복하게 만들고 그 이웃사람들보다 진실로 뛰어나게 만든 것처럼 그것으로 자긍한다.
....그들은 원하던 대로 모든 것을 가진 것과(10:3) 온 마음의 소욕과 세상을 무시할 수 있는 것(“나는 여왕으로 앉으며 영영히 주모[主母]가 되리라.” 사 47:7)을 자랑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들의 이름을 따라 그들의 땅을 명명”함으로써 그들이 영원히 기념되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그 땅이 그들이 명명한 그 이름을 지니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보잘것없는 영예에 불과하다. 그리고 흔히 그 땅의 주인이 바뀔 때 그 이름도 바뀐다.
3. 그들은 그들의 세상적인 소유물이 영원하리라는 것을 기대하며 은근히 믿고 있다(11절). “저희의 속생각에 그 집이 영영히 있으리라.” 그리고 이런 생각으로 그들은 스스로 즐거워한다.
....모든 생각은 속에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 속에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다음과 같은 것을 시사하고 있다.
(1) 이 생각은 그들의 마음속에 깊게 뿌리박고 있으며, 그곳에서 굴러다니고 그 마음의 가장 깊은 구석에 자리잡고 있다.
....경건한 자가 세상에 대한 생각을 갖고 있더라도 그것은 겉생각에 지나지 않으며, 그의 속생각은 하나님과 거룩한 것들을 위해 남겨져 있다. 그러나 세상적인 사람은 하나님의 일들에 대해 오직 피상적이고 낯선 생각만을 갖고 있는 반면에 그의 고정된 속생각은 세상에 대한 것이다. 그것이 그의 마음 가장 가까이에, 그리고 그 보좌에 자리잡고 있다.
(2) 그것은 열심히 감추어진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그들은 그들의 집이 영원히 지속될 것을 기대한다는 말은 부끄러워서 할 수 없으나,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들이 영원히 지속되리라는 생각을 확신할 수 없다 할지라도 그들은 “그 집”이, 그리고 그들이 거처하는 것은 그러하리라고 생각할 정도로 우둔하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이 더이상 그들의 것이 되지 않을 때 그들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그것은 그들에게 유익을 주지 못한다. 왜냐하면 세상과 그 유행은 사라지기 때문이다. 모든 것들은 세월의 이빨이 삼켜버리고 만다.
Ⅱ. 이 속에 나타난 그들의 어리석음에 대한 논증. 일반적으로 “저희의 이 행위는 저희의 우매함이다”(13절).
....속된 마음의 행위는 매우 우매한 행위다. 땅에 보물을 쌓아두고, 아래에 있는 것에 애착을 두는 자들은 올바른 이성과 그들의 참된 유익을 거슬러 행한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여러 해 쓸 물건을 쌓아두었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어리석은 자”며, 그것이 그들 영혼의 분깃이 되리라고 선포하셨다(눅 12:19-20). 그리고 그들의 후손은 그들의 말을 칭찬하며, 그들과 같은 심정을 갖고,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말하고, 그들이 행하는 것처럼 행하며, 그들의 속된 생활을 답습한다.
....세상을 사랑하는 것은 핏속을 흐르는 병이다. 하나님의 은총이 치료하기 전에는 사람은 본질적으로 이 병을 앓고 있다.
---세상적인 속된 마음의 어리석음을 증명하기 위해 시편 저자는 다음과 같은 것을 보여주고 있다.
1. 그들의 모든 재물로도 이 세상에 있는 그들의 가장 귀한 친구들의 생명을 구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그가 사망에 사로잡힐 때에 죽음을 유예시킬 수도 없다(7-9절). “아무도 결코 그 형제를”─그가 그 형제의 보증인이 되어야 한다면 그 자신의 재산을 담보로 내어줄 정도로 가까운 그 세상적인 형제를─“구속하지 못한다.”
....그렇게 하더라도 언젠가는 그 형제가 자기에게 똑같은 친절을 행할지도 모른다는 소망 속에서 그를 돕고자 한다. 그러나 그들의 말은 서로에게 신빙성이 없을 뿐만 아니라, 어느 사람의 재물도 다른 사람의 생명을 위한 속전이 되려 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재물을 중히 여기시지 않으며, 그것이 하나님께 중요하지도 않다. 그리고 사물의 진가는 그의 책 속에 있는 그대로의 가치다. 그의 의는 교환이나 등가의 방법으로 그것을 받으시지 않을 것이다.
....우리 형제의 생명 되시는 여호와는 우리 재산이 되시는 여호와이시며, 만일 그가 원하신다면 그는 그 자신의 어려움이나 우리에 대한 해로움 없이 그것들을 모두 취하실 수 있다. 그러므로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를 위한 속전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형제가 더 살 수 있도록, 더욱이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도록 하기 위해 죽음에다 뇌물을 줄 수 없다. 뿐만 아니라, 그로 썩음을 보지 않게 하기 위해 음부에다 뇌물을 먹일 수도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필연적으로 죽어 티끌로 돌아가야 하는 그 싸움을 피할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의 영혼과 같은 부모나 자손 또는 친구들에 대한 사형집행을 한 시간도 유예시킬 수 없는 것들을 의지하고 자긍하는 것은 얼마나 우둔한 일인가! “생명의 구속은 너무 귀하며, 영영히 끝났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즉 생명은 사라져갈 때 붙잡을 수 없으며, 그것이 이미 사라졌을 때 어떤 인간적인 기술이나 세상적인 대가로도 돌이킬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은 더 나아가 구약의 성도들이 구속자로서 주목했던 그 메시야에 의해 이루어진 영원한 구속을 가리키고 있다.
....영생은 매우 귀한 보석이므로 이 세상 재물로는 살 수 없다. 우리가 “구속되는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다”(벧전 1:18-19). 하몬드 박사는 8-9절을 특히 그리스도께 적용시키고 있다. “생명의 구속이 너무 귀하며, 소중하고 매우 값질 것이다. 그러나 일단 이루어진 그것은 영원히 중단될 것이며, 결코 반복될 필요가 없을 것이다(히 9:25-26, 10:12). 그리고 그는(즉, 구속자는) 영존하여 썩음을 보지 않게 될 것이다. 그는 썩음을 보기 전에 다시 일어나 세세토록 살아 계실 것이다”(계 1:18).
....그리스도는 세상의 모든 재물도 할 수 없는 일을 우리를 위해 행하셨다. 그러므로 그는 마땅히 세상의 어느 재물보다 우리에게 더 귀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는 형제나 친구나 가장 훌륭한 재물이나 권세가 우리를 위해 할 수 없는 일을 행하셨다. 그러므로 “아비나 어미를 그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그에게 합당치 아니하다.” 이것은 또한 결코 영혼을 사지 못할 것을 위해 영혼을 팔아버리는 세상적인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보여주고 있다.
2. 그들의 모든 재산으로도 죽음의 일격으로부터 그들 자신을 안전케 할 수 없다.
....속인은 “지혜 있는 자도 죽고, 우준하고 무지한 자도 역시 망하는” 것을 보며, 또 그에게도 그것을 보도록 자극한다(10절). 그러므로 그는 그것이 마침내 그 자신의 차례가 되리라는 것을 예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그 자신이 영원히 살리라는 소망을 가질 만한 이유가 없음을 알고서, 어리석게도 그가 그렇게 되지 못하더라도 그의 집은 그렇게 되리라는 것으로써 그 자신을 위로한다. 어떤 부유한 사람들은 지혜롭고 지략이 있으나, 온갖 기술과 방법을 써도 죽음을 초월할 수 없고, 또한 그 일격을 모면할 수 없다. 또 어떤 사람들은 우준하고 무지한 자(Fortuna favet fatuis─즉 바보들은 운명의 여신의 총아다)로서 비록 선을 행하지 못할지라도 세상에 어떤 큰 해는 끼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그들의 변명이 될 수는 없다. 따라서 그들은 자기의 꾀로 해로운 일을 행하는 지혜로운 자들과 마찬가지로 망할 것이며, 죽음에 의해 없어질 것이다.
....우리는 또한 지혜로운 자와 우준한 자를 경건한 자와 악한 자로 풀이할 수도 있다. 경건한 자도 죽는다. 그러나 그 사망은 그들의 구원이다. 반면에 악한 자는 망하며, 그 사망은 곧 그들의 멸망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재물을 다른 사람에게 남긴다.
(1) 그들은 재물을 계속 지닐 수 없으며, 재물이 그들에게 집행유예를 선고하도록 돕지도 못한다. “우리가 보화를 밭에 감추었으니 우리를 죽이지 말라”(렘 41:8)는 변명이 한 번 효과를 거두었을지라도 그것은 어리석은 탄원에 지나지 않는다.
(2) 그들은 재물을 지니고 갈 수 없고, 남기고 가야만 한다.
(3) 그들이 재물을 남기고 떠났을 때 누가 그것을 즐길지 예견할 수도 없다. 그들은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남겨놓아야 하나, 그 상속자가 우매자가 될지(전 2:19) 또는 대적이 될지 알지 못한다.
3. 그들의 재물은 죽어가는 시간에 그들에게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하는 것과 같이 그들에게 영예가 되지도 못한다(12절).
---“사람은 존귀하나 장구치 못하도다.”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고 행복할 정도로 출세의 최고봉에 오른 사람, 화려한 사람, 그가 원하는 온갖 유익을 얻고 있고 거기에 둘러싸여 있어 가장 좋은 상태에 있는 사람을 상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자도 장구하지는 못하다. 그의 존귀는 계속되지 않으며, 사라지는 그림자와 같다. 그는 모든 밤을 체재하지 못한다. 즉 이 세상은 여관이며, 그는 아주 잠깐 묵으므로 거기서 하룻밤을 묵는다고도 말할 수 없을 정도다. 따라서 이런 것들 속에는 안식이 거의 없다. 그는 단지 주막에서 휴식하는 시간만을 가질 뿐이다.
---“그는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즉 그는 짐승처럼 필연적으로 죽어야 하며, 그의 죽음은 짐승들의 죽음과도 같이 이 세상에서의 그의 상태를 종결시킬 것이다. 그의 죽은 몸도 또한 짐승들의 몸처럼 썩을 것이다. 그리고(하몬드 박사의 견해처럼) 부모들이 부당하게 획득한 가장 큰 존귀와 재물은 흔히 그 후손에게(짐승들이 죽을 때 어린것들에게는 그들이 먹이를 찾을 수 있는 넓은 세상 이외에는 아무것도 남겨놓지 않는 것처럼) 상속되지 않고, 그 부모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다른 사람들의 손으로 곧장 떨어진다.
4. 이 세상 저편에서의 그들의 상태는 매우 비참할 것이다.
....그들이 지독히 애착을 갖는 이 세상은 그들을 죽음에서 구원해 주지 못할 뿐 아니라, 그들을 아주 낮은 음부로 떨어뜨릴 것이다(14절).
---“양같이 저희를 음부에 두기로 작정되었다.”
....그들의 형통함은 도살될 양처럼 그들을 키울 뿐이다(호 4:16). 그때에 죽음이 찾아와 우리에 갇힌 살찐 양처럼 그들을 음부에 가두고, 그들은 진노의 날을 맞으러 끌려나가게 된다(욥 21:30). 그들 중 다수가 어떤 병으로 죽은 양떼같이 음부로 끌려간다. 그리고 거기에서 사망, 즉 “구더기”가 그들을 먹어(욥 24:20) 그들에게 두번째 사망이 임할 것이다. 그들 자신의 죄책감은 매우 많은 독수리처럼 그들을 끊임없이 파먹어 들어가면서 “얘, 이것을 기억하라”(눅 16:25) 하고 말할 것이다. 바벨론 왕이 넘어졌을 때 “아래에 있는 음부가 소동한” 것에서 나타나 있듯이(사 14:9 이하), 사망이 그들을 공격하고는 승리를 거둔다.
....어떤 성도가 교만한 사망에게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뇨?”(고전 15:55) 하고 물을 수 있다면, 그 교만한 사망은 “네 재물과 네 화려함이 어디 있느뇨?” 하고 물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형통함이 살질수록 사망은 더욱 달게 그들을 먹을 것이다.
---그리고 부활의 아침, 티끌 가운데 누워 있는 모든 사람들이 깨어날 때(단 12:2), “정직한 자가 저희를 다스릴 것이다.”
....그들이 영원한 치욕과 경멸을 당할 때 정직한 자는 최고의 위엄과 영예를 차지하게 되고, 그들이 가장 낮은 음부로 내려갈 때에 정직한 자는 가장 높은 하늘로 올라갈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정직한 자는 그들에게 심판이 내려질 때 그리스도와 함께 입회인이 되어 그들을 멸망시키는 하나님의 의를 찬성할 것이다.
....음부에서 부자가 나사로에게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그의 혀를 서늘케 해주기를 간청했을 때(눅 16:24) 부자는 어리석은 처녀들이 지혜로운 처녀들의 지배권을 인정한 것처럼, 그리고 “너희 기름을 좀 나눠달라” 했을 때 그들이 지혜로운 처녀들의 수중에 있다고 인정한 것처럼, 그에 대한 그 정직한 자의 지배권을 인정했다.
....흔히 정직한 자들이 압제 밑에서 신음하고 사악한 자가 그들을 지배하는 것을 볼 때 우리는 이것으로 위로를 삼자. 양상이 바뀔 날이 오고 있으며(에 9:1), 그때에 정직한 자는 지배권을 갖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때에 나타나는 것으로 일들을 판단하도록 하자.
....그렇다면 악인의 모든 아름다움은 어떻게 될 것인가? 슬프게도 그것은 모두 “음부에서 소멸되어 그 거처조차 없어”질 것이다. 그들이 스스로의 가치를 두었던 모든 것들, 그리고 그것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그들을 존경하고 그들에게 아첨했던 모든 것들은 외부적이고 빌려온 것들이다. 색칠되었고 장식된 그것은 본래의 추한 모습으로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거룩함에서 우러나오는 아름다움은 다른 모든 아름다움을 소멸시키는 음부도 만지거나 손상을 끼칠 수 없는 아름다움이다. 무덤(혹은 음부)이 그들 각자의 거처이므로 그들의 아름다움은 소멸될 것이다. 영원히 암흑의 어둠만이 있는 곳에 어떻게 아름다움이 있을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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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건한 자의 특권(시 49:15-20)
여기에 선한 백성들에 관한 이야기가 언급되어 있다.
Ⅰ. 그들은 왜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가?
....다윗이 여기에서 죽음 저편에서의 행복한 상태에 대해 갖고 있는 그런 즐거운 전망을 그들도 갖고 있다면 그들은 두려워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15절). 그는 죄 안에서 죽어가는 자들이 얼마나 비참한가를 보여주었고(14절), 여기에서는 주님 가운데에서 죽어가는 자들이 얼마나 복된가를 보여주고 있다.
....사람의 외적 상태는 그것이 아무리 이 인생에서 큰 차이점을 만들지라도 죽음에 대해서는 아무 차이도 만들지 못한다. 그러나 사람의 영적 상태의 차이는 비록 이 생애에서는 조그마한 차이라서 모두가 비슷하게 보일지라도, 죽음 후에 그것은 큰 차이가 되어버린다. “이제 저는 위로를 받고 너는 고통을 받느니라”(눅 16:25).
....의인은 죽음 속에서도 소망을 갖는다. 마찬가지로 다윗도 여기에서 그의 영혼에 관해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있다. 음부에서 영혼이 구속되리라는, 그리고 영광을 보리라는 믿음의 소망은 죽어가는 순간에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큰 도움과 가쁨이 된다. 그런 그들은 다음과 같은 것을 바란다.
1. 하나님께서 음부의 권세에서 그들의 영혼을 구속하실 것이라는 사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1) 의인의 영혼은 육체와 함께 음부로 가지 않고 보호된다.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음부는 하나님의 선고에 의해서 육체를 지배하는 권세를 가지고(창 3:19), 잔혹하게 수행한다(아 8:6). 그러나 음부는 영혼에 대해서는 그런 권세를 지니고 있지 못하다. 그것은 육신을 침묵시키고 감금하고 소멸시킬 권세를 갖고 있으나, 영혼은 그때에 더 자유롭게 움직이고 행하며 대화한다(계 6:9-10). 영혼은 무형적이며 영구하다. 죽음은 희미한 초롱을 깨뜨릴 수 있을지라도 그 속에 있는 촛불을 끄지는 못한다.
(2) 부활 때에 영혼은 육체와 재결합된다.
....영혼은 종종 생명을 위해 나온다. 그것은 실상 잠시 동안 음부의 권세 아래 놓인다. 그러나 그것은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바 될”(고후 5:4) 때에 드디어 그 권세로부터 속량받을 것이다. 최초로 생명의 창조주이셨던 생명의 하나님은 결국 영혼의 구속자가 되실 수 있으며, 또 되실 것이다.
(3) 영원한 멸망으로부터 영혼이 구원된다. “하나님은 내 영혼을 음부의 권세에서(15절), 장차 올 진노에서, 악인이 던져질 그 멸망의 구덩이에서(14절) 구속하시리라.”
....죽어가는 성도들에게서 그들이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는 것은(계 2:11) 큰 위로가 된다. 그러므로 첫째 사망은 괴로움이 되지 못하며, 음부는 승리를 거두지 못하는 것이다.
2. 그는 그들을 친히 영접하실 것이라는 사실. 그는 그들을 영접할 수 있도록 그들의 영혼을 구속하신다. “내가 나의 영을 주의 손에 부탁하였나이다. 주께서 나를 구속하셨나이다”(31:5).
....그는 그들을 그의 은총 속으로 영접하실 것이며, 그의 왕국으로 그들을 위한 처소(요 14:2-3), 곧 그 영원한 처소(눅 16:9)로 들어가도록 허락하실 것이다.
Ⅱ. 그들은 왜 이 세상에서의 악한 사람들의 형통함과 권세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가? 그것이 그들의 자만과 기쁨이 되는 반면 흔히 의인들의 부러움과 슬픔과 두려움의 대상이 되어왔지만, 모든 것들을 고려해 볼 때 두려워해야 할 이유가 없다.
1. 그는 죄인들의 형통함을 부러워하는 것과, 그들의 교만한 손으로 그들 앞에 있는 모든 것을 가져가리라는 것, 그들이 재물과 권세로 신앙과 신앙적인 사람들을 쓰러뜨리리라는 것, 그리고 그들이 실상 행복한 백성이라는 사실이 발견되리라 함을 두려워하는 것이 매우 강한 시험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추측하고 있기 때문이다.
(1) 그들은 부유하게 되어 그들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복종시키고, 모든 일들을 지휘할 능력을 지니게 된다. “모든 사람과 모든 것들은 돈의 당당한 세력에 복종한다”(Pecuniae obediunt omnes et omnia).
(2) 매우 작게 시작되었던 그들 집의 영광은 크게 불어나고, 그리하여 자연히 사람들을 오만하고 무례하며 거만하게 만든다(16절). 이처럼 그들은 하늘의 총아처럼 보이고, 따라서 위대하게 보인다.
(3) 그들 자신과 그들 자신의 마음은 매우 편하며 방심상태에 있다(18절). “저가 생시의 자기를 축하한다.” 즉 그는 자기가 원하던 대로 매우 행복한 사람, 그리고 그가 마땅히 되어야 하는 것과 같은 매우 훌륭한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는 이 세상에서 형통했기 때문이다. 그는 그의 영혼을 축하하면서 그 어리석은 부자처럼 그의 영혼에게 이렇게 말한다. “영혼아, 편히 쉬자. 그리고 세상에 대한 근심 걱정으로 또는 양심의 책망이나 경고로 불안해하지 말자. 모든 것은 잘된다. 그리고 영원히 잘 될 것이다.”
① 우리가 어떤 근거에서 우리 자신을 좋게 평가하며 우리의 영혼을 축복하는가를 살펴보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믿는 자들은 “진리의 하나님을 향하여 복을 구하며”(사 65:16), 하나님이 그들의 것일 때 자신이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세상적인 사람들은 세상의 재물로 그들 자신을 축하하며 재물이 풍부할 때 그들이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② 귀중한 영혼인데, 하나님의 저주 아래 놓여 있는 자들이 많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영혼을 스스로 축하한다. 그들은 하나님이 질색하고 비난하시는 것을 성원하며, 하나님께서 그들을 대적하시어 전쟁을 선포하실 때에도 그들 자신 스스로에게는 화평을 속삭인다.
(4) 뿐만 아니라 그들은 이웃에게 좋은 평판을 얻는다. “저가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는다. 그리고 이처럼 재산과 가문을 일으켜 스스로를 좋게 했을 때 사람들이 그를 추켜올린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경외함을 거절했기에 진정 불행한 , 불행을 자초한 사람들- 원수의 고도의 사기책략에 넘어간 자들-의 감정적 실상이다. 즉 그들은 재물을 쌓아올림으로써 그들 육신을 위해 최선을 기울이나, 반면에 그들 영혼과 영생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들은 “마음의 소욕을 자랑하며 여호와를 배반한다”(10:3).
....사람들이 우리의 심판자라면 이처럼 그들에게 좋은 칭찬을 듣도록 함이 지혜로운 일일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정죄하신다면 우리가 사람들의 칭찬을 듣는 것이 무슨 소용 있겠는가?
하몬드 박사는 여기에 언급되어 있는 자가 두 번째 사람이므로 이것을 악한 자에 대한 것이 아니라 선한 자에 대한 것으로 풀이하고 있다. “저는 평생의 자기를 축하하나, 너는 스스로 좋게 행했으므로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세상적인 것들이 그를 찬미했다. 그러나 너는 그처럼 네 자신에 대해 좋게 이야기하거나 좋게 행하지도 않고, 오직 네 영원한 행복을 확고히 하는 데에 마음을 썼다. 따라서 네가 사람들의 칭찬을 듣지 않았을지라도 네 영원한 영예가 되실 하나님께로부터 칭찬받을 것이다.”
2. 그는 그 시험의 힘을 충분히 물리칠 수 있기 위해서 우리에게 형통하는 죄인들의 결국을 예상해 보라고 지시하고 있다(73:17). “그들이 저 세상에서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생각해 보라. 그러면 너는 그들이 이 세상에서 어떤 상태에 있든, 또한 무엇을 지니고 있든, 그들을 부러워할 이유가 없음을 알게 될 것이다.”
(1) 그들은 그들이 지금 매우 애착을 갖고 있는 모든 재물과 형통함으로는 결코 저 세상에서 더 나아지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보잘것없는 소득으로서 필요한만큼 오랫동안 지속되지 못할 것이다(17절). “저가 죽으매” 그가 다른 세상으로 가는 것은 당연하게 여겨진다. 그러나 그가 그처럼 오랫동안 모아두었던 것은 아무것도 “가져가는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가장 위대하고 가장 부유한 사람들도 이 세상에서의 그들의 삶이 결코 더 나을 바 없으므로, 가장 행복한 자가 될 수 없다. 그들은 빈손으로 온 것처럼 빈손으로 갈 것이다.
....그러나 비록 타락하고 죄스러우며 영적으로 벌거벗은 상태로 이 세상에 왔을지라도 은혜로 말미암아 새롭게 되고 성별케 되며, 그리스도의 의로 든든히 옷 입고 떠난다고 말할 수 있는 자들은 진실로 복되도다!!, 성령의 은혜와 위로를 풍성히 갖고 있는 자들은...이 세상에서의 그들의 삶에 대해 무엇인가 보여줄 만한 것을 저 세상에다 갖고 있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 성령의 은혜와 위로를 풍성히 갖고 있는 자들, 그들이 죽을 때 가지고 가게 될 무엇인가─죽음도 빼앗을 수 없는, 아니, 죽음이 오히려 도움이 되는 무엇인가─를 갖고 있다. 그러나 세상적인 소유물에 대해서는 우리가 “이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우리가 갖고 있는 것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얻은 것이다) 분명 우리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하고,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남겨준다"(딤전 6:7). 그들은 내려가나, 즉 그들이 자기들의 영광이라 부르고 간주하며 또 자랑하던 “저들의 영광”은 사망과 음부의 치욕을 경감해 주고 그들에게서 심판이 없어지게 하거나, 음부의 고통을 완화시키기 위해 “저를 따라 내려가지 않을 것이다.”
....은혜는 우리와 함께 올라갈 영광이지만, 세상적인 영광은 그 어느 것도 우리를 따라 내려가지 못할 것이다.
(2) 이 세상에서 그들이 즐겼던 모든 재물과 형통함을 남용했던 것으로 인해 그들은 저 세상에서 무한히 비참해질 것이다(13절). “그 영혼은 역대의 열조에게로”, 그의 세상적이고 사악했던 열조에게로 “돌아갈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열조의 말을 칭찬했고, 또 그들의 걸음을 따랐던 것이다(슥 1:4). 그는 그들이 있는, 결코 빛을 보지 못할 그곳으로 갈 것이며, 정죄되어 완전한 암흑 속에 빠졌으므로 어슴푸레한 위로와 기쁨마저도 결코 얻지 못할 것이다.
---하기에. 사악한 자들의 화려함과 권세를 두려워하지 말라. 존귀에 처한 사람도 그가 지혜롭거나 선하지 않다면 그 결국이 비참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깨닫지 못한다면 그는 부러움을 받기보다는 차라리 동정을 받아야 한다.
---영화 속에 있는 우둔한 자, 사악한 자는 태양 아래 있는 어떤 것 못지 않게 정말 보잘것없는 하나의 동물이다. 그는 “멸망하는 짐승 같다”(20절). 자기 자신을 짐승처럼 만드는 자는 사람이 되느니보다는 짐승이 되는 편이 낫다.
---그러나 존귀에 처한 자로서 자기의 의무를 깨닫고 알아서 행하는 자들은 신들과도 같이 지고한 자의 자녀들인 것이다. 그러나 존귀에 처해 있으나 깨닫지 못하는 자들, 교만하고, 관능적이며 포악한 자들은 짐승과도 같다. 따라서 그들은 짐승같이 죽지는 않을지라도 이 세상에서는 짐승처럼 불명예스럽게 멸망할 것이며, 저 세상에서는 죄 값을 받을 것이다. 그러므로 형통하는 죄인들로 하여금 스스로 두려워하게 하고, 고난당하는 성도들은 그들을 두려워하지 않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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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m;k]j;(2451, 호크마) 지혜 wisdom [[모든 존재의 근원적에너지를 창조하시고 이끌어가시는 하나님과 그분의 의지를 알고 사랑하며 섬김과 누림]]
호크마(명여)는 하캄(!k'j; , 2449: 지혜롭다)에서 유래했으며, '지혜 wisdom'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150회 나온다.
호크마의 용법은 인간 경험의 전 영역을 망라하고 있다.
---지혜는 전쟁 전략의 실행(사 10:13) 뿐만 아니라 대제사장의 옷을 만드는 데 있어서의 전문적 작업의 기술에서(출 28:3), 금속 작업의 기술에서 보인다(출 31:3-6).
---지혜는 이스라엘과 이방의(겔 28:4-5) 정부 지도자들과 국가 관리들의 우두머리들에게 요구된다(신 34:9, 삼하 14:20).
---메시야는 그의 백성의 지도자로서의 자신의 역할에서 지혜와 통찰력을 증거할 것이다(사 11:2).
---지혜는 영민함으로 표현된다..... 드고아의 여인은 그 도시의 안전을 위한 그녀의 영특한 청원으로 그 도시의 유혈 사태를 피했다(삼하 20:22). ....영리한 사람은 자신의 재능을 자랑치 않는다(렘 9:22). ....타조가 자신의 이기적 우둔한 방법으로 행할 때 그는 영리함의 결핍의 특성을 나타낸다(욥 39:17). ...때때로, 영리함의 재능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부인하는 불경건한 방법으로 사용될 수 있다(사 47:10).
---신중함은 지혜의 일면으로서 지혜로이 말하며(시 37:30, 잠 10:31) 조심스럽게 시간을 사용하는(시 90:12) 자들에게서 나타나는 것이다. 생의 실질적인 사건에서 이와 같은 유형의 지혜는 하나님의 계시로부터 비롯된다(사 33:6).
---모든 지혜의 근원은 거룩하시고 의로우시며 공명정대하신 인격적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지혜는 그의 전능하시고 전지하신 배경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의 지혜로 하나님은 구름을 세시고(욥 38:37) 땅을 세우시며(잠 3:19) 세상을 만드셨다(렘 10:12). 하나님에게서 발견되는 지혜는 하나님의 속성으로 간주된다(욥 12:13).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만이 지혜를 알고 계신다(욥 28:20, 욥 28:23). 하나님의 지혜는 인간의 사고로 발견되지 않는다. 하나님만이 인간으로 하여금 최상의 도덕적, 윤리적 삶을 살 수 있도록 인도해 주는 이러한 지혜를 제공해 주실 수 있다(잠 2:6, 욥 11:6).
---잠언에 언급되어 있는 그런 유형의 지혜에 대하여 성경은 하나님의 지혜를 의인화하여 그 지혜를 하나님의 본질로 보며 지혜를 별개의 존재로 말하지 않는다. 이러한 지혜는 모든 만물보다 먼저 있었다(잠 8:22-31). 지혜는 집을 세우며, 지혜는 자기에게 귀를 귀울이는 자에게 줄 상을 준비한다(잠 9:1이하). 지혜는 심지어 대중이 모이는 장소에서 가르친다(잠 1:20, 잠 8:1, 잠 8:6, 잠 8:11-12). 지혜의 가르침을 배우는 자들은 하나님의 영을 받으며(잠 1:2), 자연인들은 지혜롭게 되며, 정치인들도 지혜롭게 되며, 지혜로부터 풍성함을 받는 자들은 영예와 부의 왕관을 쓴다(잠 8:1-21).
---지혜의 이와 같은 의인화는 독특한 것이다. 고대 근동에는 지혜의 재능을 소유한 것으로 생각되는 신들과 여신들이 있었으나 어떤 것도 지혜라는 명칭으로 존재한 것 같지는 않다. 구약성경은 지혜를 결코 여호와와 독립된 하나의 신으로 간주하여 묘사하지 않는다. 그러나 잠언 8장에서 몇몇 그러한 표현들이 나오기는 한다. 이와 같은 표현들은 종종 그리스도에 대한 예시로 간주되고 있다. 지혜는 이제 결코 추상적인 것이 아닌 형태를 지니게 되는 정도로까지 의인화되기에 이르렀다. 지혜는 하나님으로 간주되어서는 안된다. 지혜는 하나님에 속한 것이다. 즉 지혜는 하나님의 속성 중의 하나이다. 지혜는 신약성경의 살아있는 말씀 속에서 인격적인 존재가 된다. 그러나 지혜는 로고스(Logos) 그 자체는 아니다(Dilitzsch, proverbs, p. 183). 지혜는 잠 1-9장에서 여인으로 의인화되고 있는데 이것은 그 명사가 여성이라는 사실에 의하여 부분적으로 설명된다. 따라서 지혜있는 여인은 죄를 의인화한 어리석은 여인에 대조되고 있다. 잠 9:4-6과 잠 9:16-18의 계획된 대조를 살펴보라. 지혜에 대한 이와 같은 의인화는 이런 장들 밖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지혜는 사람을 지혜롭게 할 뿐만 아니라 사람으로하여금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모든 지혜의 시작이기 때문이다(욥 28:28). 사람에게 있어서 참된 지혜는 거룩한 자를 아는 것을 포함한다. 따라서 사람은 경청하는 귀로 하나님의 지혜에 귀기울여야만 한다(잠 2:2). 사실상 내적인 행복은 사람이 열심히 찾음으로(잠 2:4) 이러한 지혜를 얻을 때 비로소 찾아온다(잠 3:13). 그런데 지혜는 실제적으로 하나님을 찾는 것이다(잠 2:5). 회의주의자들은 이와 같은 지혜를 결코 발견할 수 없으며, 생의 온전한 의미를 알 수 없다(잠 14:6 이하). 욥 28장의 위대한 시에서 이와 같은 특별한 성경적 의미의 지혜는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신뢰하고 죄를 피하는 것으로 정의되고 있다(WBC, pp. 553-54의 R. L. Harris, "Proverbs"에서 죄의 어리석음에 대조하여 도덕적 지혜를 언급한 호크마에 대한 강조를 참고하라). (L. Goldberg)(참조: BDB; HELOT; TW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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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호크마)
표준국어대사전에 ‘지혜’란 단어는 세 가지 항목으로 정의되어 있다. 「
1」 일반적 의미 -사물의 이치를 빨리 깨닫고 사물을 정확하게 처리하는 정신적 능력. 「
2」 『불교』 제법(諸法)에 환하여 잃고 얻음과 옳고 그름을 가려내는 마음의 작용으로서, 미혹을 소멸하고 보리(菩提)를 성취함. ≒지혜바라밀. 「
3」 『기독교』 하나님의 속성 가운데 하나. 히브리 사상에서는 지혜의 특성을 근면, 정직, 절제, 순결, 좋은 평판에 대한 관심(=성결과 의, 근면-정직-절제가운데 이루는 두루유익케 하는 코람데오의 삶)과 같은 덕행이라고 본다. 한글사전에서 지혜를 ‘하나님의 속성 가운데 하나’라고 정의한 것은 잠언서 1~8장에 의거한 정의이다.
잠언서 8장에 의하면 지혜는 일인칭으로 의인화되어서 창조주 하나님과 동급으로 높임을 받고 있다. 잠언 8장 6~8절만 뽑아서 읽어 보자. "6 너희는 들어라. 나는 옳은 말만 하고, 내 입술로는 바른 말만 한다. 7 내 입은 진실을 말하며, 내 입술은 악을 싫어한다. 8 내가 하는 말은 모두 의로운 것뿐이며, 거기에는 비뚤어지거나 그릇된 것이 없다." 이 구절에서 일인칭 주어 "나"는 지혜가 의인화된 표현이다. 잠언서는 하나님을 지혜로 간주하고 있으며 지혜가 온 만물을 창조했다고 노래한다.
정경으로 인정받아 성경에 수록된 지혜문학으로서는 『잠언』, 『욥기』, 『전도서』가 있는데 외경으로 분류된 것으로는 『지혜서』와 『벤시락의 지혜서』를 꼽을 수 있다. 잠언은 지혜를 가정에서 가르치도록 작성된 신앙교육서이며, 욥기는 하나님이 과연 정의로우신지를 질문하고 대답하고 있으며, 전도서는 인생의 회의주의와 염세주의 내지는 상대주의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고 대답을 시도하고 있다.
지혜를 주제로 다루는 문학 장르를 지혜문학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성경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고대근동의 문학계 전반에 나타나는 장르였다. 성경의 지혜문학과 유사한 평행구들을 많이 보여주는 것들로서는 이집트 문학의 『아멘호테프 지혜서』를 들 수 있는데, ‘진리’를 뜻하는 ‘마아트’ 개념을 중심으로 온 천지에 내재한 질서에 집중하였다. 신들과 인간들은 제사장들이 가르치는 질서에 따라 행동한다고 본 것이다. 수메르 문학에는 『슈루파크 교훈서』란 지혜문학을 대표로 꼽을 수 있다. 수메르 지혜문학에서는 인간의 경험과 성격과 처세술을 강조한다. 죽음과 고난의 문제도 다룬다. 또한 헬라철학에서 지혜를 강조하는 문학으로는 플라톤의 『폴리테이아』를 꼽을 수 있다. 폴리스 곧 도시국가의 통치자는 무엇보다도 먼저 지혜를 습득하는 교육을 받아야만 한다고 소크라테스는 역설하였다.
학자들은 세속의 지혜문학과 성경의 지혜문학 사이의 관계에 대하여 두 가지 대립되는 입장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방나라의 지혜문학이 성경에 영향을 끼쳤다고 보는 관점이 있고, 그와는 반대로 성경의 지혜문학이 이방의 세속적 지혜문학에 영향을 끼쳤다고 보는 관점이 있다. 이 둘은 완전히 상반된 입장으로 후자는 보수적인 입장을 대변하고 전자는 진보진영의 입장을 대변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이 두 입장 모두 잘못된 관점으로 생각된다. 지혜문학뿐만 아니라 모든 쟝르에서 성경은 세속문명의 가치관과 지혜사상을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재해석하고 세속문명에 대한 대안의 가치관과 지혜를 제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영향을 주고 받은 것이 아니라 성경은 고대 제국들의 지배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저항문학으로서의 대안교과서로 작성되었다고 나는 판단한다.
"지혜"라고 번역한 히브리어는 חָכְמה (호크마)이다. 호크마는 동사 חָכַם (하캄)에서 파생한 명사인데 חָכַם (하캄)은 성경에 26회 언급된다. ‘현명하다’란 뜻의 상태동사(형용사)이다. 인간의 지성 활동을 묘사할 때 흔히 이 동사를 사용한다. 이 동사와 파생어까지 다 합하면 성경에 312회 가량 언급된다. 이 중 2/3정도가 욥기와 잠언서와 전도서에 치중되어 나온다. 하캄이란 동사의 뜻은 삶의 경험에 관련된 사유방식이나 태도를 의미한다. 여기에는 일반적인 이해관계나 도덕까지도 포함된다. 세속적인 처세술이나 공교한 기술이나 도덕적 감수성이나 여호와의 뜻을 따라 사는 경험의 세계까지도 이 동사로 표현한다.
부조리로 가득 찬 현실을 살아내는 데 있어서 믿음을 지키고 진리를 수호하는 길을 성경의 지혜문학은 보여주려고 한다. 특별히 우상숭배를 강요하는 제국의 지배종교와 그 다신론 사상에 대항하여 하나님의 유일성을 입증하려고 한다. 유일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지닌 심오한 진리를 성경의 지혜문학은 증명하고 있다. 수메르 종교들이 가르치는 이원론적 세계관에 접하여 일원론적 유일신 신앙을 "지혜"란 언어로 제시한다. 특히 헬라철학의 선과 악에 대한 가르침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선에서 이탈한 인간의 악을 제시한다. 지혜는 삶의 경험에서 축적된 지식에서 나온다.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토라를 실천하는 가운데 깨달음이 생긴다. 물질생활, 성생활, 이웃관계, 등 모든 면에서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 그러한 삶의 지혜는 세속의 지혜와는 달리 인간이 연마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하나님이 주셔야 받을 수 있다. 그러므로 지혜는 성령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혜는 은혜이다.((그 특성은...하늘로부터 오는 지혜는 성결하며, 화평하며 관용하며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열매가 가득하며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 화평케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약3:17-18))
성막을 짓는 공교한 장인과 제사장은 지혜를 받은 분들이었다(출28:3; 31:3, 6). 헬라철학과 마찬가지로 정치가는 지혜를 지녀야 하는데 성경의 지혜문학은 그 지혜를 하나님에게서 받아야 한다고 가르친다(신34:9; 삼하14:20; 겔28:5). 이스라엘이 대망하는 오실 메시야는 지혜를 충만하게 받은 지도자이다(사11:2). 지혜의 원천은 하나님 한 분뿐이시다.
오늘날 교회가 당면한 수많은 난제들을 해결할 때에도 하나님의 지혜를 구해야 한다. 세상에 대해 교회가 입장을 밝혀야 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게 발생한다. 생명을 복제하는 기술에 대한 윤리적인 입장, 타종교에 대해서 발생하는 종교다원적인 상황들, 할랄 공장 건립의 문제,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금지법에 대한 입장, 원자핵 에너지의 문제, 등등 수많은 난제들이 지혜를 요구하고 있다. 이 모든 문제에서 교회가 분열하기 않고 성경으로부터 하나의 입장을 찾아내어 일관되게 세상에 대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를 증언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일을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으로부터 지혜를 구하여야 한다. 지혜가 없이는 교회는 세상에 향하여 아무 일도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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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bT;(8394, 테분) 이해력, 지력 ((명철))...지혜를 따른 판단 + 실행 능력/재능
테분(명여)은 빈(@yBi , 995)에서 유래했으며, '이해력 understanding, 지력 intelligence'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42회 나온다.
(a) 타분은 '그 행위, 행동'이란 의미를 표현한다.
--하나님은 타분으로 하늘을 지으시고(시 136:5), 굳게 펴셨으며(잠 3:19, 렘 10:12, 렘 51:15), 라합을 파하셨다(욥 26:12). 사람은 그의 타분으로 하나님을 당하지 못한다(잠 21:30).
--사람은 타분으로 집을 견고하게 하고(잠 24:3), 재물을 얻는다(겔 28:4).
--네 식물을 먹는 자, 즉 가장 가까운 우정의 관계를 맺고 있는 자가 네 아래 함정, 또는 덫을 놓은 것은 타분이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야일이 시스라에게 행한 것처럼 매복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윗은 타분의 행위로 이스라엘을 지도했다(시 78:72). 그러나 에브라임은 타분의 솜씨로 우상을 만들었다(호 13:2).
(b) 타분은 '그 능력, 그 기능(재능)'이란 의미를 표현한다.
① 타분의 능력은 지혜로 낙을 삼으며(잠 10:23), 장수하게 하며(욥 12:12), 보호하며(잠 2:11), 바른 길로 가게 하며(잠 15:21), 깊은 물 같은 모략도 길어내며(잠 20:5), 성품을 안존하게 하며(잠 17:27), 무지한 자처럼 이웃을 멸시하지 않고 잠잠 한다(잠 11:12).
사 44:19, 욥 1:8에서는 타분이 없는 사람에 대해 언급한다.
② 타분의 능력은 하나님께 속해 있으며(욥 12:13), 하나님은 그것을 입으로 발하신다(잠 2:6, 사 40:14).
③ 몇몇 구절에서는 타분의 기능(재능)에 대해 사용되었다(출 31:30, 출 35:31, 출 36:1, 신 32:28).
(c) 타분은 '지식의 대상'이다.
① 타분은 구하여 얻으며(잠 2:3), 마음에 두어야 하며(잠 2:2), 그것을 묵상한다(시 49:3). 타분을 얻는 자와 그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다(잠 19:8).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크게 타분 하게 된다(잠 14:29). 미련한 자는 타분을 기뻐하지 않는다(잠 18:2).
② 하나님은 타분이 무궁하며(시 147:5), 한이 없으시다(사 40:28).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타분을 심히 많이 주셨다(왕상 4:29, 왕상 7:14).
③ 욥 32:11에서 타분은 '이론이나 판단력'을 의미한다.
(d) 타분은 잠 8:1에서 외치는 여인으로 의인화되어 있다. 여기서 타분은 교사로 간주된다.
(참조: BDB; T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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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fov"(4680, 소포스) 지혜로운 wise ((지혜...소피아))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형용사 소포스(Theogn., Pind., Aeschyl. 이래)는 기본어이며, (a) '숙련된, 능숙한, 숙달된' (b) '지혜로운, 현명한'을 의미한다.
2. 70인역본의 용법.
형용사 소포스는 70인역본에서 약 200회 가까이 사용되었으며, 주로 히브리어 하캄(지혜로운, 슬기로운)의 역어로(창 41:8; 출 28:3; 출 35:10, 출 35:25; 신 1:13, 신 1:15; 신 4:6; 사 5:29; 삼하 13:3; 왕상 2:9; 대상 22:15; 욥 5:13; 욥 9:4; 시 10:107; 잠 1:5이하; 잠 3:35; 전 2:14, 전 2:16; 호 14:10; 사 3:3; 렘 4:22; 겔 27:8이하; 단 2:12, 단 2:21, 단 2:27 등) 사용되었으며, 그리고 빈(이해하다, 삼상 16:18); 하르톰(예언[점] 하는 제사장, 단 2:10); 나코아(똑바른, 잠 24:26); 하캄(지혜롭다, 욥 32:9; 잠 6:12; 잠 13:20; 잠 20:1)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3. 신약성경의 용법.
형용사 소포스는 신약성경에서 19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a) 복음서.
마 23:34이하와 마 23:37이하의 두 위협은 유대 묵시 사상에서의 종말론적 지혜의 말씀을 반영한다. 여기서 예수님 자신이 지혜다. 그는 설교하고 있을 곳을 찾으러 오셨다. 그를 받아 들이지 않는 것은 멸망을 뜻한다. 지혜를 받아들이는 것은 또한 마 11:25이하 말씀의 기초가 된다. 지식은 특별히 어린 아이에게 나타남으로써 얻어지며 예수님께서 수고한 사람들에게 주는 안식의 선물은 대개 지혜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특히 계시자 자신이 계시의 내용이며 그는 그 자신의 사람들을 자신에게로 부른다. 두드러진 특성은 계시를 지혜있고 슬기로운 자들에게 숨긴다.
(b) 바울서신.
① 그의 십자가 신학을 전개시킨 근본적이고 광범위한 강해에서 바울은 세상의 지혜와 십자가의 메시지를 대조시킨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셨다(고전 1:20; 참조: 고전 3:19). 이것이 세상 지혜의 문장들과 기독교 지혜의 문장들을 대립시킨, 그러한 이야기나 논의에서 발생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은 행위 곧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의 죽음을 통해서였다. 왜냐하면 지혜가 본질적으로 일단의 지식 축적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일종의 존재 양식이듯이 마찬가지로 어리석음도 지식의 부족이 아니라 이 존재 양식의 결여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② 사람들은 창조물에서 하나님의 지혜를 마주치지만 하나님의 지혜에는 마음을 닫아 버리고 대신에 그들 자신의 지혜를 고안해 내려고 시도했다(참조: 고전 1:21; 고전 1:22; 롬 1:18이하).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에 관한 전도의 미련한 것을 통하여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려 하신다. 하나님의 진리에 대해 증거를 요구하는 모든 시도(참조: 고전 1:22)는 인간이 자기 자신을 자랑(고전 3:18이하)하는 모든 시도처럼 실패로 귀착될 수 밖에 없다. "고전 3:18절 이하의 의미로 볼 때 믿는 자들은 지혜로운 자들이다.
③ 고린도 교회 회중의 특성과 이 사도의 설교방법, 양자가 모두 구원의 사건에 관한 그의 설명을 명확하게 한다. 미련한 자, 약한 자, 멸시 받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택하셨다는 것은 고린도 교회의 조직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으로서, 인간의 표준에 의거하여 지혜롭다고 여기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셨음을 보여주고 있다(고전 1:26이하). 따라서 사람의 자랑을 심판하신다라고 구약성경에 선포된 하나님의 뜻이 성취된 것이다(고전 1:19; 고전 1:31).
④ 십자가의 전파(따라서 전도의 미련한 것을 통하여 지혜로 나아가는 역설적인 길도 역시, 고전 3:18)는 자기 영화와 당파에 대한 집착으로부터의 자유를 향한 부름이다. 따라서 이것은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단합 토대이며 보증이다(고전 3:18-23).
⑤ 바울이 소포스를 전문적인 의미가 아닌 일반적인 의미로 사용하기도 했다는 사실이 고전 3:10에 나타나는데, 이 구절에서 바울은 자신을 공동체의 "지혜로운 건축자"로 표현했고, 또한 고전 6:5도 그러한 용법으로 추측되는데 이 구절에서는 판단할 만큼 지혜로운 자가 그 공동체에 없는가를 질문하며 기독교 공동체는 세상 법정에서 고소해서는 안됨을 피력하고 있다. 엡 5:15에서 신자는 지혜 있는 자 같이 행해야 한다: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c) 야고보.
약 3:13에서 지혜를 친절한 일을 하는 선한 행위로 설명하고 있다. 이 서신은 명백히 반대하는 자들을 다루는 것으로 이들은(고린도에 있는 자들처럼) 그들 자신들에게 "위로부터" 온 지혜가 있다고 주장하였으나 오히려 그들은 다툼과 논쟁을 야기시키는 자들이었다(참조: 약 3:15이하). 야고보서가 이런 주장의 기초를 이루는 신념들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지혜는 화평할 수 있으며, 자비가 가득하며 위선이 없다는 것을 서술한 것이다(참조: 약 3:17). 이런 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참조: 약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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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jpisthvmwn(1990, 에피스테몬) 이해력이 있는, 유식한, 전문적인.((총명::깨달은 바를 이치에 맞고 능숙하게 잘 적용/숙달하는, 생동력 있는 분별지식))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형용사 에피스테몬(Homer 이래; Epict., POxy.)은 에피스타마이(ejpivstamai, 1987: 이해하다, 알다)에서 유래했으며, '이해력이 있는, 유식한, 숙련된, 전문적인, 전문가'를 의미한다.
2. 신약성경의 용법.
형용사 에피스테몬은 신약성경에서 약 3:13에 한번 나온다: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뇨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찌니라".
에피스테몬에 대해 JB는 '유식한(learned)', NIV, 새번역은 '이해력 있는(understanding)'이라고 번역했다.
여기에서는 전문가(전문적 지식을 가진 자)와 같이 '이해력 있는' 것을 의미한다.(J. H. Ropes).(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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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q'l;(3947, 라카흐) 취하다 take ((영접하다))
라카흐(동사)는 기본어근이며, '취하다 take'를 의미하며, '취하다, 손에 넣다, 얻다(받다), 가져오다, 붙잡다, 운반하다, 아내로 삼다, 움켜쥐다, 구입하다' 등의 의미로 사용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1,000회 나오며, 칼, 니팔, 푸알, 호팔, 히트파엘형으로 사용되었다.
---라카흐는 복수하는 것(사 47:3) 혹은 치욕을 받는 것을 묘사한다(겔 36:30). 하나님께서는 이 단어가 샤마('듣다')에 병행하여 사용되는 시 6:10에서 기도를 받아들이신다(참조: 욥 4:12). 유사한 병행 의미가 라카흐('강탈하다')와 가나브('도적질하다') 사이에 존재한다(욥 4:12, 렘 23:30-31, 삿 17:2).
수동태 어간(푸알형과 니팔형)에서 '빼앗기다, 취해가져 가지다'(삼상 4:11) 혹은 '이끌리다'(창 2:15)라는 용법은 이러한 '취함'이 빼앗긴 자의 뜻에 거스린다는 것을 암시한다.
---라카흐의 일반 의미 뿐만 아니라 많은 연장된 용법들이 있는데, 그 중에는 신학적 의미를 가진 것들이 있다. 이 단어의 '취하다'라는 의미의 측면은 어떤 문맥에서 '선택하다'와 혹은 '소환하다'라는 의미로 연장된다. 신 4:34에 의하며, 하나님께서는 열방 중에서 이스라엘을 취하셨다(선택하셨다)(참조: 신 4:30, 왕상 11:37, 수 3:12, 수 4:2). 욥 41:4에서 악어는 하나님과 결속하는 언약을 한 영구한 종으로 '취해졌다'(선택되었다).
---'소환하다'는 그와 같은 문맥 중 몇 가지에서 매우 적절하게 조화한다.
BDB(pp. 543, 546)는 민 23:11, 삿 11:5, 삼하 16:11에서 라카흐를 '소환하다'로 간주한다. '취하다' 혹은 '가져가다'가 또한 뜻이 통하기 때문에 여기에서 어의론에 유의해야 하나, 이것은 이 단어의 많은 뉘앙스에 대해서도 적용된다.
---이러한 유형에 있어서 흥미로우나 난해한 용법은 시 75:2에서 나타난다. 이 번역은 상당히 다르다. KJV는 이 성구를 '내가 그 회중을 받아들일 때', RV는 '내가 정한 때를 발견할 때', RSV는 '내가 지정하다', NASB는 '내가 선택하다'로 번역한다. 여기에서 다후드(M. Dahood)는 '소환하다'로 해석하여 '내가 회중을 소환할 것이다, 내가 공평으로 재판하리라'로 번역한다(Paslms, Ⅱ, in AB, p. 209).
---예레미야는 2회에 걸쳐 라카흐를 말의 '거론' 혹은 '사용'으로 쓴다. 렘 23:31에서 그는 주님께서 마치 자신들에게 영감을 준 것 같이 혀를 '놀리는'(RSV, NASB) 거짓 선지자들에 대하여 말한다. 렘 29:22에서 포로는 어떤 거짓 선지자들의 죽음에 근거한 저줏거리를 사용한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불덩이는 출 9:24과 겔 1:4에서 어근 라카흐의 재귀적 용법으로 묘사된다. 불덩이가 그 자체를 움켜쥐거나 안는다는 해석은 전혀 만족스럽지 못하다.
---아마 신학적으로 라카흐의 가장 흥미로운 용법은 육체로 승천하는 것을 묘사하는 두 가지의 분명한 문맥 주변에 집중되는 것 같다. 하나님께서 에녹을 '데려가실' 때 에녹의 사라짐(창 5:24)과 회오리바람 속에서 엘리야의 승천(왕하 2:3, 왕하 2:10-11)을 언급한다. 이러한 육체적 승천의 견지에서 비추어 볼 때 다른 유사한 용례가 있는지를 의문시하는 것은 불합리한 것이 아니다. 엘리야는 그 몸이 승천하였는데, 그는 적의 손에 죽는 것을 언급하는데 라카흐를 사용하였다: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왕상 19:10, 왕상 19:14, 참조: 잠 24:11).
---이 의미와 완전히 상반된 의미가, 하나님이 주체가 되며 죽음 혹은 고통으로부터의 구출이 고려되고 있는 것을 나타내는 다른 여러 구절에서 나타난다. 그러므로 시 18:16은 다음과 같이 언급된다: "저가 위에서 보내사 나를 취하심이여 많은 물에서 나를 건져 내셨도다". 그러나 단순히 인간의 생명을 구하는 것 이상의 것이 시편 기자의 마음에 있었던 것으로 나타나는 최소한 세 문맥이 있다. 시 49편은 사악한 자의 종말과 의인의 종말 사이에 완전히 대조적인 면을 나타낸다. 사악한 자는 "저로 영존하는"(시 49:9), 즉 어떤 영원한 희망도 없이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시 49:12, 시 49:20). 그러나 시편 기자는 다음과 같이 승리하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은 나를 영접하시리니(라카흐: 데려가다, 잡아 채다) 이러므로 내 영혼을 음부의 권세에서 구속하시리로다"(시 49:15). 만일 시편 기자가 자신도 역시 짐승들과 같이 죽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을 당시의 몇 년 동안에 죽음으로부터 구원받는 것에 관해 논의하였다면, 이 시편은 아무런 요점도 없을 것이다. 시 73:23-25은 또한 사악한 자들을 의인들과 대조하며, 이 생명을 초월하는 믿음은 다시 한번 라카흐라는 단어에 집중된다: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취하시리니)"(시 73:24). (W. C. Kaiser).(참조: BDB; TW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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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bK;(3519, 카보드) 풍부, 다량, 다수, 부, 영예, 영광
카보드(명남, 여)는 카바드(db'K; , 3513)에서 유래했으며, '풍부, 다량, 다수, 부, 영예, 영광'을 의미한다.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40회 나온다.
카보드는 물건의 물리적으로 큰 무게나 '양'을 언급한다. 나 2:9에는 "...그 저축한 것이 무한하고 아름다운 것이 풍부함이니라(모든 종류의 바라직한 물건이 '대량' 있음이니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사 22:24에서 엘리야김은 "그 아버지의 집의 모든 영광(모든 중한 것들)"을 건 벽에 단단하게 박힌 못에 비유한다. 이 의미는 호 9:11에도 나타나는데, 여기서 카보드는 '큰 무리' 혹은 '군중'을 의미한다: "에브라임의 영광이(군중이) 새 같이 날아가리니...". 이 단어는 단순히 '무거운'을 의미하지 않고 물건의 무거운 양을 나타낸다.
카보드는 종종 '부, 재물' wealth과 중요하고 긍정적인 '명성'(구체적인 의미로) 모두를 나타낸다. 라반의 아들들은 다음과 같이 불평한다: "야곱이 우리 아버지의 소유를 다 빼앗고 우리 아버지의 소유로 인하여 이같이 '거부'가 되었다"(창 31:1 - 최초의 성경의 용례).
두 번째 의미는 창 45:13에 나온다. 여기에서 요셉은 그의 형제들에게 "나의 애굽에서의 '영화'와 당신들이 본 모든 것을 내 아버지께 고하라"고 말한다. 이 때, 이 단어는 만약 가족들이 애굽으로 온다면 그들을 부양할 수 있다는 보증과 요셉의 지위에 대한 보고 모두를 내포하고 있다. 나무, 숲, 삼림도 위압하는 속성, 풍부함, '장려함(영광)'을 지닌다. 하나님은 앗수르왕을 벌하시어 그의 삼림의 대부분을 소멸시키실 것이다: "그 삼림과 기름진 밭의 영광이 전부 소멸되리니...그 삼림에 남은 나무의 수가 희소하여 아이라도 능히 계산할 수 있으리라"(사 10:18-19).
시 85:9에서는 부요함 또는 풍성함의 개념이 두드러진다: "진실로 그의 구원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가까우니 이에 영광(혹은 풍성함)이 우리 땅에 거하리이다". 이 의미는 시 85:12에 다시 나온다: "여호와께서 좋은 것을 주시리니 우리 땅이 그 산물을 내리로다".
카보드는 또한 '영광, 즉 당당한 인물이나 지위를 강조하는 추상적인 의미를 지닌다. 비느하스의 아내는 아들의 이름을 이가봇이라고 지었다: "이르기를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하나님의 궤가 빼앗겼고 그 시부와 남편이 죽었음을 인함이며"(대제사장들인 그들이 죽었다: 삼상 4:21).
사 17:3에서 카보드는 요새화된 도시, 주권(자치), 백성들을 포함하는 여러가지 사물들의 충만함이라는 보다 더 구체적인 의미를 나타낸다. 이런 속성들 중에는 '영예', 존경, 지위가 있다.
사 5:13에서 '영예'의 개념이 카보드로 표현된다: "그 '귀한' 자는 주릴 것이요 무리는 목마를 것이며". 따라서 카보드와 그 병행어('무리')는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 즉 상류 계급과 평민을 나타낸다. 많은 구절에서 이 단어는 현실보다는 미래를 나타낸다: "그 날에 여호와의 싹이 아름답고 영화로울 것이요..."(사 4:2).
이 단어가 '영예' 혹은 '중요함'이라는 의미로 사용될 때는 두 가지의 어감을 지닌다.
첫째로, 카보드는 자기가 살고 있는 영역 내에서의 개인의 지위를 강조할 수 있다(잠 11:16). 이 '영예'는 그릇된 행위나 태도로 인해 잃어버릴 수도 있으며(잠 26:1, 잠 26:8) 바른 행동으로 증명될 수도 있다(잠 20:3, 잠 25:2). 따라서 이 단어의 강조점은 개인들 사이의 관계에 주어진다.
둘째로 카보드의 많은 용례들 중에는, 왕가에 속하는 '영예'와 같은 '고귀(성)'이라는 의미를 나타내는 것도 있다(왕상 3:13). 따라서 이 단어는 귀족이 누리는 존경 받는 지위와 사회적 구별에 대해 사용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 단어가 하나님께 대하여 사용될 때는 하나님께 합당한 속성을 나타내며 그 속성으로 인하여 모든 인정을 받는다. 여호수아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곧 하나님의 중요성과 가치와 의의를 인정하라고 아간에게 명했다(수 7:19). 이 구절과 이와 유사한 구절들에서 '영광을 돌리다'라는 말은 어떤 것을 행하는 것을 가리킨다. 인간이 해야만 할 일은 진실을 말하는 것이었다. 다른 구절들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예배에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이다(시 29:1). 어떤 학자들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즉 그런 구절들은, 찬미자들이 자연에서 그의 '영광'을 보고 예배에서 그것을 고백함으로써 자연 위에 뛰어나신 하나님의 주권을 찬미한다는 것이다. 어떤 구절에서 이 단어는 역사를 지배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나타내며 특별히 장차 나타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킨다고 한다(사 40:5). 그러나 몇몇 구절들은 장차 나타날 하나님의 '영광'을 역사와 백성을 주관하신 과거의 증거들과 연관시킨다(출 16:7, 출 24:16).
(참조: NEDOT; B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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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v;m;(4912, 마샬) 속담, 격언, 비유담 ((비유))
마샬(명남)은 마샬(lv';m; , 4911)에서 유래했으며, '속담, 격언, 비유담'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38회 나온다.
마샬을 단순히 '격언'으로 번역하는 것은 이 단어의 광범위한 영역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으로, 이 단어에 대한 많은 역어에 의해 시사된다.
우리들은 격언을, 금언적인 진리의 내용을 지니는 짧고 함축적이며 풍자적인 말로 생각하곤 한다. 그러나 구약성경에서 마샬은 광범위한 비유(따라서 70인역본은 종종 파라볼레로 번역함)의 동의어가 될 수 있다. 겔 17:2과 겔 2-24, 겔 20:49과 겔 45-49, 겔 24:3과 겔 3-14). 이 단어는 광범위한 교훈적인 이야기를 언급할 수 있다(예: 잠 1:8-19). 한 개인(사물, 삼상 10:12, 욥, 욥 17:6) 혹은 사람들의 집단(이스라엘, 시 44:14)은 하나의 마샬로 기능할 수 있다.
이러한 결정적인 관계에서 삼상 10:12의 구절을 살펴보자: "
---그러므로 속담이 되어 가로되 사울도 선지자들 중에 있느냐 하더라". 여기에서 포함된 것은 공개적인 본보기의 창작인데, 이 경우에는 하나의 실례, 즉 왕의 공적인 기괴한 행동이 문제가 된다. 따라서 '속담'은 비정상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에게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마샬을 '말거리'로 번역하는 구절들을 살펴보자.
---시 44:14, 시 69:11, 렘 24:9, 겔 14:8, 신 28:37, 왕상 9:7, 대하 7:20, 욥 17:6. 이러한 각 성구에 의하면 어떤 유형의 운명이 이스라엘 민족 혹은 개인에게 임하였거나 혹은 임할 것이다. 결과는 무엇인가? ......하나님께서는 모든 민족들 중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마샬로 삼으신 것이다. 욥은 그의 위안자들과 동료들에 대하여 마샬이 되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단순한 경멸과 조롱 이상의 더 많은 것이 포함되어 있다. 요점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과 욥을 공적인 본보기, 즉 각 세대에 대한 객관적 교훈으로 삼으신다는 것이다: "보고 숙고하라, 그리고 내 심판 아래 있는 네 생명을 보라"고 주님은 말씀하신다.
---이와 유사하게 3회에 걸쳐 선지자들은 마샬을 지으라는 명령을 받는다. 이사야가 바벨론 왕에 대하여(사 14:4 이하), 미가가 자기 백성에 대하여(미 2:4), 비슷한 것으로서 하박국(합 2:6), 또한 발람의 이야기에서 그러한 구절을 추가할 수 있다: "발람이 노래(KJV는 이야기)를 지어"(민 23:7, 민 23:18, 민 24:3, 민 24:15, 민 24:20, 민 24:21, 민 24:23). 이와 같은 각 실례에서는 객관적 교훈이 있다. ....오만한 자들은 비천해진다. 저주를 받는 자들이 역전되어 축복 받는다. 먼저 된 자가 나중 된다.
---하버트(A. S. Herbert)는 구약성경에서 '속담', 즉 마샬은 "명백히 인식할 수 있는 목적을 지니고 있는데, 그것은 원하는 것에서 구별되는 것으로 실제적인 이해를 신속하게 하고...듣는 자나 읽는 자로 하여금 자기 자신, 자신의 상황 혹은 자신의 행위에 관한 판단을 내리도록 하는 목적을 가리킨다. ...이 용법은 예수님의 비유에서 가장 뛰어난 표현법이 된다"라고 적절하게 언급하였다(Herbert, p. 196).(참조: R. D. CULVER; B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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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d;yji(2420, 히다) 수수께끼, 알기 어려운 말이나 문제 ((오묘한 말, 수수께끼))
히다(명여)는 후드(dWj , 2330: 수수께끼를 내다)와 관련이 있으며, '수수께끼, 알기 어려운(난해한) 당혹케 하는 말이나 문제'를 의미하며, 그 의미가 듣는 사람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이야기를 가리켜 말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17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a) 히다는 '수수께끼 riddle'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삿 14장에서 8회, 삼손이 자신의 결혼식에서 블레셋인 축객들에게 제시한 '수수께끼' riddles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이 수수께끼를 푸는데 다른 수수께끼가 사용되었다. 핵심적인 단어는 사랑(love)이다. 이것들은 기지의 경쟁을 내포하는 수수께끼였으며 이러한 것은 오늘날 아랍인들 가운데 인기 있는 오락의 기원이 되었다(참조: I Esd 3:4-24에서 위병들의 경쟁).
(b) 히다는 '알기 어려운 문제'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왕상 10:1(대하 9:1)에 나오는 상류사회 계급에서의 히도트는 지혜에 대한 솔로몬의 평판을 시험하기 위한 시바 여왕이 낸 '어려운 문제들'이었다. 요세푸스(Antiquities 8, 5, 3)는 솔로몬에게 '교활한 문제와 수수께끼 같은 말들'을 보낸 두로의 히람을 묘사하고 있다.
(c) 히다는 '수수께끼, 은밀하거나 오묘한 말'이란 의미를 나타낸다.
---민 12:8에서 "은밀한 말"(dark speeches)은 대면하여 모세와 대화하는 양식과 대조되는, 주로 하나님에 의하여 주어진 간접적 계시를 의미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은밀한 말로 말씀하시나 모세에게는 은밀한 말로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렇지만 예언의 말도 역시 수수께끼이다(겔 17:2, Symmachus).
....시 49:4에서는 '복잡한 영적 문제', 곧 생명, 죽음, 구원의 수수께끼에 대하여 언급한다.
....시 78:2에서 '은밀한 말'은 직접 가르치는 공과(lesson)로 풀고 있다. 비밀스러운 말에는 설명적 해석이 필요하다. 잠 1:6에서도 이런 의미를 지닌다. 잠언에는 수수께끼 같은 오묘한 말이 많다. 합 2:6에서 수수께끼 같은 말과 비사들(comparisons)로서 갈대아 사람들의 운명을 선언한다.
(d) 히다는 단 8:23에서 '언행에 포리((함축된, 숨겨진 의미, 함의)가 있는 것'에 대해 사용되었다. 이러한 사람은 그가 가지고 있는 딴 마음을 알 수 없는 자이다. (참조: BDB; E. Yamauchi, TW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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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71, 아온) 불법, 부정, 죄악, 죄의 벌 ((죄악))
아온(명남)은 아와(hw:[; , 5753)에서 유래했으며, '불법, 부정, 죄악, 사악, 유죄, 죄의 벌(징계)'을 의미한다.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230회 나온다.
명사 아온은 집합명사이다. 예컨대 하나님은 아모리인의 범죄, 타락에 대해 말씀하신다: "아모리 족속의 죄악(단수)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창 15:16). 사르밧 과부는 엘리야에게 당신은 "내 죄(단수)를 생각나게"하려고 왔다고 불평한다(왕상 17:18). 따라서 이 단어는 다음과 같은 관용구에서 나타난다. '아온을 지다'(창 4:13, 출 34:7, 호 14:3, 시 85:3), '아온을 제거하다(히필형)'(슥 3:4), '아온을 갚다'(출 20:5) 등. 이러한 '전체'라는 개념은 집단의 죄뿐만 아니라 개인의 죄와 연관하여서도 나타난다. "염소가 그들의 모든 불의(복수)를 지고"(레 16:22);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단수)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6).
더욱이 위의 언급들이 가리켜주는 바와 같이 이 단어는 행위 및 행위의 결과, 범죄 및 범죄의 형벌 모두를 나타낸다. 양 개념이 모두 나타나지만 때로는 행위('죄')에 초점이 주어지고, 또 때로는 범죄의 결과('형벌')에, 때로는 행위와 그 결과 사이의 상황('죄의식' guilt)에 초점이 주어진다. 형벌을 요하는 범죄에 초점이 주어지는 실례: "이 '죄악' sin이 너희로 마치 무너지게 된 높은 담이 불쑥 나와 경각간에 홀연히 무너짐 같게 하리라"(사 30:13, 참조: 겔 18:30, 겔 44:12, 호 5:5, 욥 31:11, 욥 31:28). 형벌에 강조점이 주어지는 예: "일어나라...그렇지 않으면 네가 성읍의 '형벌' 가운데서 소멸되리라"(참조: 렘 51:7, 시 39:12, 시 106:43, 욥 13:26, 욥 19:29, 스 9:7). '죄의식'(guilt)에 강조점이 주어지는 예: "이 '죄악'을 내게로 돌리시고"(삼상 25:24). 다른 많은 실례들에 대해서는 아래를 보라.
'행위로서의 죄'라는 의미와 '형벌'이라는 의미 사이의 현저한 양면적 의미는 구약성경의 사상에서 죄와 그 형벌은 우리가 생각하는 경향과 같이 근본적으로 별개의 개념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오히려 구약성경에서 인간의 행동과 인간에게 일어나는 일은 기본적인 하나님의 질서 속에 존재하는 하나의 과정으로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것으로 전제된다. 이러한 연관성은 "삶에 대한 종합적인 견해"라고 불리워졌다(Von Rad, G).
어근 하타(죄)도 마찬가지의 기본적인 '종합적' 개념을 보여준다. 예를 들면 민 32:23을 보라: "너희가 만일 그 같이 아니하면 여호와께 범죄함이나 너희 죄가 정녕 너희를 찾아낼 줄 알라". 두 번째 나타나는 이 어근의 명사형은 행위에 대한 '형벌'을 나타낸다(참조: 민 12:11). 따라서 죄는 개인과 혹은 공동체를 멸망시키는 피할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오며 근절되어야만 한다(B. K. W.).
아온은 분명히 하나님의 성품의 특성도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행동의 특성도 아니고(출 20:5, 출 20:6, 출 34:7), 인간의 속성과 행동(그러한 행동에 수반하는 결과를 포함하여)의 저항할 수 없는 특성이다.
아온은 삼상 20:1, 삼상 20:8, 삼하 3:8, 느 4:5, 시 51:2에서 여러 종류의 시민 생활 혹은 사회적(규칙) 위반을 지칭하고, 수 22:17, 삼상 3:13-14에서는 제의적인 (규율) 위반을 가리킨다. 이 용어는 집합 명사 혹은 유사 추상명사로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과거의 범죄의 총합을 나타내는데, 이에 대한 실례는 너무 많아서 모두 열거할 수 없을 정도이다. 민 14:34, 삼상 25:24, 삼하 22:24, 왕상 17:18, 스 9:6, 욥 13-26장, 사 1:4, 렘 11:10가 그 예이다.
어떤 구절에서는 아온의 성질과 내적 근원에 강조점이 주어진다.
욥 15:4-5에서 아온은 하나님 경외하기를 폐하는 것 등과 관련되어 있다.
반면에 시 78:37-38에서 아온은 하나님을 향하여 (마음이) 확고 부동하지 않음과 결합되어 있으며 렘 14:10에서는 그들이 이렇게 방황하기를 좋아하였다 라는 진술과 관련되어 있다.
아온은 간음(민 5:31) 및 우상 숭배(호 5:5, 렘 16:10-11)와 관련된다. 이러한 은유에서는 위반하는 행동과 그 결과인 더럽힘 모두가 묘사된다.
아온의 다른 결과는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 소외(alienation, 레 26:40, 사 59:2, 사 1:4), 그리고 부정(시 51:2, H4)으로 나타난다.
죄책감(guilt)은 내적 인간에 대한 아온의 주요한 결과다. 이 요소는 과거 범죄에 대한 총합을 나타내는 아온의 기능과 쉽게 구별되지 않는다. 그러나 BDB는 죄책감의 요소가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실례를 30여회 이상 열거한다(p. 731).
아온은 그 결과가 내적 인간에게 영향을 끼치는 외에도 가문, 지파, 이스라엘 민족, 열방 및 자연에도 영향을 끼친다. 가문에 대하여, 친숙한 진술은 출 20:5, 신 5:9에서 발견된다.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벌은 가문이나 지파의 개개인들에게 보다 직접적으로 내리는 벌로 집중할 수 있다(레 5:17, 레 18:25, 민 5:31, 삼상 25:24, 삼하 14:9, 시 106:43, 렘 36:31). 아온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형벌을 면할 수 없게 한다(레 26:39, 스 9:7, 스 9:13, 시 107:17과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에 있는 많은 실례). 어떤 의미에서, 대제사장과 제사장들이 그들 임무의 거룩과 성소의 거룩으로 인하여 이스라엘을 대신하여 형벌의 위험을 떠 맡았다(출 28:38, 출 28:43, 레 22:16, 민 18;1, 민 18:23). 예루살렘의 멸망 이후 그 재난은 이스라엘 민족의 아온의 결과로 인식되었다(애 4:6, 애 4:13, 애 4:22, 겔 39:23, 단 9:13, 단 9:16).
아온에 반드시 형벌이 따르는 것은 아니었다. 형벌을 피할 수 있는 길이 있었다. 인간의 탄원 기도와 하나님의 구원 선포는 아온을 벗어날 길을 보여준다.
인간은 아온을 깨닫고 고백해야 한다(창 44:16, 레 16:21, 느 9:2, 시 32:5, 시 38:18, H19). 그리고 하나님께 죄 사함을 구해야 한다(출 34:9, 민 14:19, 욥 7:21, 시 25:11). 인간은 또한 그의 생활 방식을 변화시켜야 한다(겔 18:30, 겔 36:31). 형벌을 대신 받을 대체물이 제공된다(레 16:22, 사 53:5-6, 사 53:11, 겔 4:4-6).
가장 중요한 것은 아온을 제거하고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행동이다. 이것은 약속되고 실제로 선포된다(민 14:18, 시 65:3, H4, 시 78:38, 시 103:3, 잠 16:6, 사 6:7, 렘 32:18, 단 9:24, 미 7:18-19, 슥 3:4, 슥 3:9, 참조: 다윗의 입맞춤에 의한 용서의 행동, 삼하 14:32). 세 군데에서는 하나님의 깨끗케 하시는 행동이 강조되어 있다(시 51:4, 렘 33:8, 겔 36:33).
(참조: C. SCHULTZ; B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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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7451, 라) 나쁜, 악한, 악, 악한 것 [[환난]]
((질적으로 불량한, 궁극적으로 그 어떤 측면에서든지 존재적 재난이나 손해를 끼치는 상황-관계-사물 등 모든 것...환난, 곤고, 곤란, 어려움))
1. 라(형용사)는 라아([['r: , 7489)에서 유래했으며, '나쁜, 해로운 bad, 악한 evil'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아래서 취급하는 명사 라와 함께 약 666회 나온다.
---명사는 가치 기준에 부합하지 못하거나 유익한 역할을 할 수 없는 사물이나 사람의 자질 부족 혹은 열등한 자질을 나타낼 수 있다.
세속적인 의미에서 나쁜 품질에 대한 많은 실례가 있다. 첫째로 바로왕의 꿈에 나타난 보기 흉한 야윈 소(창 41:21, 창 41:27),마시기에 부적합한 물(왕하 2:19), 사는 자가 사기에 부적합하다고 말한 상품(잠 20:14) 등이 있다. 왕하 4:41에서는 솥의 음식물에 들어 있는 어떤 해독을 언급하고 있다. 그것은 위험한 것이었으나 선지자가 곧 제거했다.
---형용사 라([r' , 7451)는 이 형용사와 관련된 명사들을 수식하여 그 명사의 특성이나 해로운 행동을 나타내 준다.
....형용사 라([r' , 7451)는 사나운 짐승(레 26:6), 재앙을 가져오는 천사들(시 78:49), 기근(겔 5:16), 질병(신 7:15, 신 28:35, 신 28:59, 대하 21:19, 욥 2:7, 전 6:2)을 나타내기도 한다.
....형용사 라([r' , 7451)는 사자의 말(출 33:4, 느 6:13)이나 기사(사 6:22)와 같이 재난을 가져오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들을 가리키기도 한다. 사건들(전 2:17, 전 9:3)이나 시간들(날들)(창 47:9, 잠 15:15, 전 4:8)이 잘못되어 고통으로 가득찰 수도 있다. 이 형용사는 마음의 불쾌(삼상 29:7)나 마음의 슬픔(느 2:1-2, 잠 25:20)을 가리킬 수도 있다.
....형용사 라([r' , 7451)은 보다 흔히 도덕적 결함, 즉 자신이나 타인을 해하는 도덕적 특성들, 혹은 좋지 않은 상태를 가리킨다. 이러한 부정적인 특성들에 대한 평가는 하나님이 하신다(잠 15:3). 이러한 하나님의 평가는 종종 "여호와의 보시기에"(in the sight of the Lord)라는 말로 표현된다. 이 표현은 대부분 역사서에 약 55회 나온다. 이 용어는 또한 약 7회 가량 토브(선한)와 대조되는 것으로 정의된다. 따라서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은 악하다(약 11회). 특히 우상 숭배로 하나님을 진노케 할 경우 그러하다(왕하 17:11 등). 몇몇 실례에서 라는 그러한 사람들의 내적 상태를 나타내는 것 같다(창 6:5, 잠 26:23, 전 9:3, 렘 3:17, 렘 7:24). 전 9:3에서 사용된 이 단어의 보다 추상적인 어감을 주목하라. 부정적인 태도들, 즉 교만(욥 35:12), 노함(잠 15:10), 반항(느 9:35, 참조: 시 64:5, 겔 13:22)도 악한(ra') 것으로 열거된다. 다른 사람에 대한 난폭한 행위도 라를 평가한다(신 17:5, 삼상 2:23, 왕상 16:7, 겔 20:44, 겔 30:12).
---하나님의 반응은 무관심하거나 예측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적절한 이유에 근거하여 악한 특징을 지닌 사람에게 심판을 위협하시고 수행하신다(스 9:13, 욥 21:30, 잠 11:21).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 대해 보다 밝은 측면이 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에게 악으로부터 돌이키도록 권고하시며(신 13:12, 왕하 17:13, 대하 7:14, 겔 33:11, 겔 36:31, 슥 1:4) 선지자들의 주된 임무는 이러한 권고를 선언하며 백성들을 하나님에게로 되돌아오게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렘 23:22). 지혜자는 순종하는 사람은 라에서 자유할 것이라고 약속한다(전 8:5). 여기서도 역시 악한 일로부터 멀리하는 방법에 대한 충고가 제시되어 있다(시 141:4, 잠 4:14, 전 8:3).(G. H. Livingston)
2. 라(명남)는 라아([['r: , 7489)에서 유래했으며, '나쁨, 나쁜 것, 해로운 것 bad, 악, 해악, 악한 것 evil, 불행, 해, 고난, 재난, 참화 misery, injury, calamity'를 의미한다.
---명사 라([r' , 7451)는 종종 도덕적 스펙트럼의 양극으로서 토브(선)와 대조적으로 제시된다. 때로는 샬롬(평화)이 라와 반대되는 것으로 말해진다. 이 명사는 또한 그의(하나님의) 보시기에 용납될 수 없는 상태나 행동을 정의된다(렘 52:2, 말 2:17, 참조: 느 9:28).
....이 명사의 순전하게 세속적인 의미로 출발해 보건대, 라는 육체적 상해(렘 39:12), 혹은 고통의 때(암 6:3과 유명한 구절인 사 45:7 '나는 번영도 가져오고 재앙도 창조하나니', NIV;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한글개역)를 나타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에 이 명사는 말로나(시 41:3, 시 73:8, 시 109:20), 행동으로나(미 2:1, 미 7:3), 부적절한 희생 제물을 드림으로(말 1:8) 다른 사람에 대한 비윤리적 혹은 비도덕적인 행동을 나타낸다.
....명사 라([r' , 7451)는 2회 내적인 상태(시 7:9, 잠 12:21, '사악')을 나타내는 추상 명사로 사용된다. 그러나 하나님이나 인간을 향한 내적인 태도를 기술하는데 가장 많이 사용된다. 사람은 라를 궁리하거나, 바라거나, 사랑하거나, 즐거워할 수 있다(시 52:3, 잠 2:14, 잠 6:14, 잠 12:20). 혹은 사람은 라에 대해 냉담할 수도 있다(시 36:4, "악을 싫어하지', 참조: 잠 28:4).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하기를 거부하는 것도 라일 수 있다(느 9:35). 이러한 거부는 악한 행위에 완전히 복종하는 결과를 가져온다(왕하 21:9, 대하 33:9, 잠 1:16, 사 59:7).
....삶의 방식이 라([r' , 7451)로 특징 지워지는 사람은, 만일 그가 계속하여 라에 머물러 있다면 그 미래는 침울할 것이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을 적대하시며(사 31:2) 이런 사람들에게 형벌을 선언하셨다(미 1:12). 삶 그 자체도 이런 사람들에게 적대적이다(신 31:29, 욥 2:10, 욥 30:26, 시 54:5, 시 140:11-12, 잠 13:17, 잠 14:22, 전 8:9).
....악한 사람을 그대로 내버려두면 그는 소생할 기회가 없다. 그러나 악인의 심판자가 되시는 하나님은 또한 악인에게 그 길을 바꾸라고 요구하는 분이시기도 하다. 그것은 인간 편에서의 철저한 행동이어야 한다(시 34:14, 시 37:27, 잠 3:7, 암 5:14-15, 슥 1:4). 이것은 신명기에서 약 10회 악을 "제거하는 것"("purge" RSV)으로 언급된 법률적 방법보다 훨씬 더 유익한 방법이다. 하나님은 인간이 라로부터 돌이킬 때 구원하는 사건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약속한다(욥 5:19, 시 121:7, 잠 19:23). 이 약속에 이러한 구원은 삶의 실제적인 경험이라는 확신이 수반되며(시 10:6, 시 23:4), 삶의 실제적 경험은 헌신과 결합될 수 있다(시 119:101, 렘 42:6). '라'로부터 자유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조언이 있다. 사람은 '라'를 멀리하라는 말을 듣는다(잠 6:24, 사 56:2, 렘 7:6). '라'를 멀리하는 것에는 '라'를 미워한 강한 태도가 포함될 수 있다(시 97:10, 잠 8:13, 암 5:15). 무엇보다도 우상으로 하나님을 진노케 하지 말라(렘 25:7).(G. H. Livingston)(참조: BDB; Gesenius; TWOT).
====@@@은혜 Gode's Reward At Christ's excess : 그리스도와의 연합한 삶 가능케 하는 십자가 적용, 참생명 그리스도의 , 부활생명능력으로 사는 삶을 가능하게 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의 능력 [[..복음 진리 말씀으로 사려분별, 조명 받기, 깨닫고 회개-끊음-자기부인/자기죽음 선포, 살아계신 말씀과 성령(내주하시는 그리스도) 따름]]@@@====
골1장 24 [고난과 그리스도와의 연합] ...김형익 목사 05.11.2014...벧샬롬교회 [광주시 상무대로] http://www.jmcusa.org/
1 고난을 피하는 기독교인은 복음의 은혜의 진수를 경험하지 못한다.
하나님을 편리한 거리에 두고 살아갈 수 있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대답 여부와는 별개로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과 실제로 거리를 두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편리한 거리’라는 말은 참 편한 말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과도 이런 식의 관계를 맺고 살아가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좋으면 만나고 안 좋으면 안 만나고 하는 자기 편한 대로 맺는 지극히 이기적인 관계 맺음입니다.
때때로 부모와 이런 식의 관계를 맺을 수 있다면 그것은 지극한 미숙함의 표출일 것입니다.
하물며 우리가 하나님을 편리한 거리에 두고 살아갈 수 있을까요? 만일 그것이 참된 신앙이라면 그것은 심각하게 병들어있는 신앙임에 분명합니다.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독일의 신학자 본회퍼는 ‘값싼 은혜’가 만연하는 교회의 문제를 지적했습니다.
그는 값싼 은혜를 ‘회개를 요구하지 않는 죄사함, 제자도가 결여된 은혜, 그리스도를 따름이 없는 은혜, 십자가 즉 고난이 없는 은혜’라고 표현했습니다. 이런 값싼 은혜는 교회를 어떤 고난도 감당할 수 없는 무기력한 교회가 되게 합니다.
값싼 은혜는 내세보장 영생보험의 혜택만 바라보고 살아가면서 적당히 ‘착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노력하며 사는 사람들을 양산합니다.
아무리 숫자가 많아도, 그것은 오합지졸과 사상누각에 불과합니다. 고난이 오면 다 무너지고 맙니다.
주님은 당신을 따르는 자들에게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기 부인은 십자가를 지는 삶의 전제입니다.
자원하여 고난을 원하는 사람은 없는 법입니다. 하물며 십자가 처형을 당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그리스도를 얻고 따르기 위해, 반드시 십자가를 져야 한다면 [그리스도를 사랑하기에, 그분을 얻고 참되게 하나됨 원하기에 그것을 얻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를 부인해야만 합니다. 그것은 자기 본성을 거슬리는 일입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주님께서 하신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너무나 분명하게 알았습니다.
믿음으로 인한 고난은 그들에게 당연한 일상이었기 때문입니다.
신약 성경의 거의 모든 서신서가 고난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고난을 회피하는 값싼 은혜의 기독교가 가지는 정말 심각한 문제는 복음의 은혜의 진수를 경험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복음의 은혜의 진수는 무엇입니까?
세상에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들을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받고 살아가는 경험은 귀한 일이지만, 그것이 복음의 은혜의 진수는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가 교회 안에서 듣는 간증들은 사실상 복음의 은혜의 진수와는 거리가 있는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복음의 은혜의 진수를 경험하지 못하는 기독교는 수많은 거짓 신앙을 양산해내는 모판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2. 복음의 은혜의 진수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경험하는 것(빌 3:7~12)
복음의 은혜의 진수는 무엇입니까? 바울 사도가 자신의 가치와 소원을 언급한 본문을 보지요.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 3:7~12).”
사도는 여기서 복음으로 말미암아 자신에게 일어난 전적인 변화를 보여줍니다.
복음은 그의 가치관, 인생관, 세계관 전체를 완전히 바꾼 사건입니다. 이것은 단지 사도에게 국한된 일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근본적으로 비그리스도인과 모든 영역에서 전적으로 다른 관점을 가지게 된 사람입니다.
이전에 자기에게 유익하던 모든 것들을 이제는 다 해로 여긴다고 사도는 말합니다.
이제 바울 사도에게 가장 소중한 가치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하나로 연합함 통해 실지로 참되게 알아감의] 지식이 되었습니다.
이 지식을 위해서 그는 자기에게 소중한 모든 것을[심지어 목숨까지도!!] 다 잃어버리고 그것들을 다 배설물로 여길 수도 있다고 말합니다.
그만큼 그에게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바꿀 수 없는 가치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가치를 그가 그렇게 높이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에게 거저 주어진 의[=이것은 그리스도의 짝, 판박이인 신부 됨]의 가치를 알기 때문입니다.
사도가 여기서 갈망한다고 말하는 것은 주님 자신에 대한 보다 친밀한 인격적 지식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을 더 잘 알기를 원하는 사람은 분명히 그분과 같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입니다.
사도는 그리스도를 알고 경험하고 닮는데 있어 세 가지 조건을 말합니다.
첫째,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알고, 둘째 그의 고난에 참여하고 셋째로 그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입니다(빌 3:10).
사도는 단지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만을 배우겠다고 말하지 않고 그의 고난에 참여하고 그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으면 닮을수록 그리스도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 그리스도를 욕하는 사람들에 의해 핍박을 받을 가능성은 더 커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에게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했기에 이 모든 것—고난과 죽음—이 도리어 영광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의 이 본문은 골로새서 1장 24절을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3. 골로새서 1장 24절에 대한 두 가지 해석
"(골1:24)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골로새서 1장 24절에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란 말은 종종 잘못 이해되어온 구절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뭔가 부족한가 보다 하는 생각에서 우리가 이제 2~3%미만으로 남은 고난을 채움으로써 그리스도의 고난을 완성하자는 것은 터무니없는 비복음적 생각이며, 이것은 복음과 그리스도의 사역의 충분성을 완전히 오해하는 태도입니다.
이런 생각을 거부하면서 우리는 이 구절에 대하여 두 가지 정도의 타당한 해석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A. 그리스도의 복음이 각 사람에게 적용됨 통해 [그리스도를 빼어닮은] 성장성숙한 영적 아비와 어미로 자라나도록, 참된 영적 자녀를 산출하기 위한 고난
첫째는 주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으로써 택하신 백성의 구속을 완성하셨지만, 그 구속 사역이 백성들 각자에게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담당해야 할 고난이 있다는 것입니다. 즉 그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 복음으로 영혼들을 낳기 위해서는 감당할 고난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 자신은 이것을 해산하는 수고에 비하기도 하였습니다(갈 4:19).
이것은 그리스도의 구속의 공로가 사람들에게 적용되기 위해 필요한 고난입니다. 그리스도의 역사는 성취되었지만 그 복음의 메시지가 아직 완전히 [이해되고 체험적으로 각사람마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에 필요한 고난입니다. 이것은 올바른 해석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가야 합니다.
B. 그리스도의 고난을 스스로 체험하는 것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의 고난 속에서 그분의 능력을 체험하고 공유함으로써 그리스도를 알기를 원했다는 것입니다.
조금 전에 살펴본 빌립보서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표현한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빌 3:10).
고난을 통해서만 우리가 체험할 수 있는 그리스도와의 하나됨(연합)의 경지가 있습니다.
우리는 먼저 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게 되었을 때, 그가 주님께로부터 들은 대답을 생각해 봄으로써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먼저 사울에게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고 물으시자 사울은 “주여 누구시니이까?”라고 물었고 주님은 다시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고 대답하셨습니다(행 9:4~5).
여기서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주의 깊게 보면, 주님은 교회와 당신을 동일시하고 계신 것을 보게 됩니다.
바울이 되기 전 사울은 교회와 믿는 사람들을 박해했지만 예수님을 직접적으로 박해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네가 나를 박해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즉 교회와 주님은 연합된 몸임을 보여줄 뿐 아니라, 특별히 교회가 고난 가운데 있을 때 주님께서는 교회와 함께 고난을 받으시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사울이 교회를 공격할 때 그리스도와 교회는 하나였습니다.
그것을 깨닫고서, 본문에서 바울 사도는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 말을 할 때, 교회를 위한 고난이라면 그것은 곧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이고 그리스도 자신의 고난이라고 말하는 것이며, 그렇게 그리스도의 고난을 체험케 하심을 형언할 수 없는 기쁨과 영광으로 여기며 살아가는 자신을, 그리고 동역자들을 본받으라고 "나를 본받으라"고 [환희에 차서] 권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또 고난에 대한 말씀을 로마서에서도 이렇게 소개합니다. 로마서 8장 17절을 보십시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사도 바울에게 이런 의식은 너무나 분명했습니다. 그에게 고난은 그리스도와의 친밀감과 유대를 참으로 더 깊게 만들어주는 수단이었습니다.
이것이 바울 사도가 모든 유익하던 것들을 다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길지라도 얻기를 원했던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었습니다.
그는 머리를 만족시키는 지식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난을 통해서 그리스도와 연합된 실재를 더 깊이 경험적으로 알고 싶었습니다.
이것이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려 하여’라는 말의 의미였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감으로써 그는 부활의 권능과 기쁨을 또한 체험적으로 알 수 있었습니다. 그에게 고난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실재를 깊이 누리게 하는 영광스러운 경험이 되었던 것입니다.
4.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은 그리스도를 닮게 한다.
앞에서 저는 주님을 더 잘 알기를 원하는 사람은 분명히 그분과 같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바울 사도가 말한 것처럼 그리스도를 더 잘 알려는 마음이 여러분의 심정에 없다면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닮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닮기를 원하는 것은 우리 앞에서 믿음의 길을 지켰던 모든 선배들의 간절한 심정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더 알기를 원함으로써 그리스도를 닮아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알기를 원했던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참여하는 것을 기쁨과 영광으로 알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고난은 그들을 그리스도를 닮는 자로 만드시는 하나님의 도구였습니다.
초대 교회의 일곱 집사 중의 하나인 스데반을 보십시오.
그는 성경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밝히 아는 자였고 지혜와 성령으로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사람들이 능히 대적할 수 없던 사람이었습니다(행 6:10). 사도행전 7장에 기록되어 있는 설교는 그가 공회에 붙잡혀서 행했던 설교입니다.
그가 설교를 마치자 공회원들은 마음에 찔림을 받았고 스데반을 향하여 이를 갈았습니다(행 7:54). 그리고 그를 성 밖으로 끌고 가서 돌로 쳐서 죽였습니다. 그 때 스데반이 드린 기도가 있습니다.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행 7:59~60).”
역사상 많은 순교자들도 이런 모습으로 그들이 사랑하는 구주의 남은 고난에 참여했습니다. 그런데 그 모습은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이 아닙니까?
바로 고난이 그들을 그리스도와 가장 닮은 모습으로 빚어가는 하나님의 도구가 된 것입니다.
2차 대전 중 네덜란드에서 유대인들을 숨겨주다가 독일군에게 붙잡혀 온 가족이 수용소에 끌려간 코리 텐 붐 여사의 이야기는 널리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여사의 가정은 정말 훌륭한 믿음의 가정이었습니다. 그녀의 아버지를 비롯하여 거의 모든 식구가 다 수용소에서 죽었습니다.
극한 상황 속에서 수용소에 함께 있던 코리 여사와 언니 베티의 모습은 고난이 어떻게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깊이 경험하게 하고 그리스도를 닮게 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언니 베티는 자기를 채찍질하는 간수에게 삽을 들고 달려들려는 코리에게 말합니다. “보지 마, 코리. 예수님만 바라봐.”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시는 구주의 모습이 무자비한 행위가 주는 고통을 가져간다는 사실을 그들은 보여줍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우리를 짓누르는 모든 불행에 정면으로 맞설 수 있는 힘을 줄 뿐 아니라, 비통한 마음을 떨쳐내는 그분의 사랑을 체험하게 해줍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죽은 교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일상 속에서 경험되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고, 우리의 고난 속에서 더욱 그리스도를 닮게 하는 힘입니다.
5 고난과 기쁨: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바울 사도는 본문에서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라고 말했습니다.
그가 이 고난 즉 괴로움을 기뻐하는 이유는 단순하게는 두 가지인데, 첫째, 이것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받는 것이기 때문이고 둘째는 교회를 위한 고난이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이해한대로라면, 이것은 둘 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경험하게 하는 고난입니다.
실제로 성경에는 오늘 본문의 구절과 마찬가지로 고난과 기쁨을 짝으로 설명하는 부분이 참 많습니다.
아지스 페르난도는 신약 성경에만 고난과 기쁨이 함께 언급되는 곳이 18곳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는 말합니다.
“이 기쁨은 십자가를 가치 있게 만드는 기쁨이다. 왜냐하면 그 기쁨은 우리에게 고난을 견딜 수 있는 힘을 주기 때문이다.”
찬송가의 이 가사를 묵상해보십시오.
너희 마음에 슬픔이 가득할 때 주가 위로해 주시리라
아침 해같이 빛나는 마음으로 너 십자가 지고 가라
참 기쁨 마음으로 십자가 지고 가라
네가 기쁘게 십자가 지고 가면 슬픈 마음이 위로 받네.....
이 기쁨의 본질은 그리스도와 내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깊이 하나가 되는 것을 경험하기 때문에 주어지는 것입니다.
신자에게는 넘치는 위로가 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감옥에 구금되어 있는 상태에서 사랑하는 빌립보 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주 안에서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말했습니다(빌 4:4).
주님은 잡혀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시기 직전 제자들과 함께 있던 자리에서 적어도 6번 이상 기쁨을 언급하셨습니다(요 15:11; 16:20,21,22,24; 17:13).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요 15:11)”.
주님의 기쁨은 아버지의 계명을 지킴으로 아버지의 사랑 안에 거하시는 기쁨이었습니다(요 15:9).
이 기쁨이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신 주님에게 충만했습니다. 죽으시기까지 순종하는 기쁨은 창세전부터 본래 누리셨던 아버지와 하나 되는 기쁨을 ‘더욱’ 충만하게 누리는 기쁨이었을 것입니다.
이 말을 조심스럽게 하고 들어야 하는데, 영원 전부터 이미 완전하고 충만한 기쁨을 누리신 하나님께 ‘더욱’ 충만하게 누리셨다는 말은 모순이 되는 말이지만,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표현한 것일 뿐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우리 육체에 채울 때,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로 인하여 그리고 교회를 위하여 고난을 받을 수 있다면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놀랍게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기쁨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우리는 그리스도의 위로를 넘치게 경험할 것입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우리는 감사할 것이고 감격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 사도가 오늘 본문을 통해서 고백한 말씀이며, 빌립보서에서 모든 유익하던 것을 다 버리고 배설물로 여길지라도 포기하지 않고 갈망한다고 말한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인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이런 기쁨이 필요합니다.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와 주로 섬기는 성도들에게 이런 기쁨이 필요합니다.
오늘 하나님을 예배하는 우리에게 이런 기쁨이 필요합니다. 이런 기쁨은 우리의 심령을 소성시킬 것이고, 하나님의 교회를 새롭게 할 것입니다.
오, 주님께서 우리 인생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깊이 하나가 되는 기쁨을 충만히 주시기를 구합니다. 평생을 복음의 얕은 물가를 벗어나지 못하고 노는 어린 아이가 아니라 고난을 통해서일지라도 복음의 은혜의 진수를 경험하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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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역개정] 시49 고라 자손의 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1. 뭇 백성들아 이를 들으라 세상의 거민들아 모두 귀를 기울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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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78:1 (아삽의 마스길) 내 백성이여 내 교훈을 들으며 내 입의 말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사1:2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미1:2 백성들아 너희는 다 들을지어다 땅과 거기 있는 모든 것들아 자세히 들을지어다 주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대하여 증거하시되 곧 주께서 성전에서 그리하실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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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귀천 빈부를 막론하고 다 들을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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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62:9 진실로 천한 자도 헛되고 높은 자도 거짓되니 저울에 달면 들려 입김보다 경하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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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내 입은 지혜를 말하겠고 내 마음은 명철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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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1:20 지혜가 길거리에서 부르며 광장에서 소리를 높이며
잠9:1 지혜가 그 집을 짓고 일곱 기둥을 다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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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내가 비유에 내 귀를 기울이고 수금으로 나의 오묘한 말을 풀리로다
----시78:2 내가 입을 열고 비유를 베풀어서 옛 비밀한 말을 발표하리니
민21:27 그러므로 시인이 읊어 가로되 너희는 헤스본으로 올지어다 시혼의 성을 세워 견고히 할지어다
마13:35 이는 선지자로 말씀하신 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민12:8 그와는 내가 대면하여 명백히 말하고 은밀한 말로 아니하며 그는 또 여호와의 형상을 보겠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내 종 모세 비방하기를 두려워 아니하느냐
잠1:6 잠언과 비유와 지혜있는 자의 말과 그 오묘한 말을 깨달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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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죄악이 나를 따라다니며 나를 에워싸는 환난의 날을 내가 어찌 두려워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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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94:13 이런 사람에게는 환난의 날에 벗어나게 하사 악인을 위하여 구덩이를 팔 때까지 평안을 주시리이다
시37:1 (다윗의 시) 행악자를 인하여 부평하여 하지 말며 부의를 행하는 자를 투기하지 말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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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고 부유함을 자랑하는 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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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52:7 이 사람은 하나님으로 자기 힘을 삼지 아니하고 오직 그 재물의 풍부함을 의지하며 제 악으로 스스로 든든케 하던 자라 하리로다
잠11:28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는 자는 패망하려니와 의인은 푸른 잎사귀 같아서 번성하리라
막10:24 제자들이 그 말씀에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다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얘들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떻게 어려운지
욥31:24 내가 언제 김으로 내 소망을 삼고 정김더러 너는 내 의뢰하는 바라 하였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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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아무도 자기의 형제를 구원하지 못하며 그를 위한 속전을 하나님께 바치지도 못할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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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25:9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와 너희의 쓰기에 다 불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니
마16:2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욥33:24 하나님이 그 사람을 긍휼히 여기사 이르시기를 그를 건져서 구덩이에 내려가지 않게 하라 내가 대속물을 얻었다 하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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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그들의 생명을 속량하는 값이 너무 엄청나서 영원히 마련하지 못할 것임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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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36:18 너는 분격함을 인하여 징책을 대적하지 말라 대속함을 얻을 일이 큰즉 스스로 그릇되게 말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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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그가 영원히 살아서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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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16:10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라
시89:48 누가 살아서 죽음을 보지 아니하고 그 령혼을 음부의 권세에서 건지리이까 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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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그러나 그는 지혜 있는 자도 죽고 어리석고 무지한 자도 함께 망하며 그들의 재물은 남에게 남겨 두고 떠나는 것을 보게 되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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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2:16 지혜자나 우매자나 영원토록 기억함을 얻지 못하나니 후일에는 다 잊어버린지 오랠 것임이라 오호라, 지혜자의 죽음이 우매자의 죽음과 일반이로다
시73:22 내가 이같이 우매 무지하니 주의 앞에 짐승이오나
시92:6 우준한 자는 알지 못하며 무지한 자도 이를 깨닫지 못하나이다
시94:8 백성 중 우준한 자들아 너희는 생각하라 무지한 자들아 너희가 언제나 지혜로울꼬
잠30:2 나는 다른 사람에게 비하면 짐승이라 내게는 사람의 총명이 있지 아니하니라
시39:6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에 분요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취할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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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그러나 그들의 속 생각에 그들의 집은 영원히 있고 그들의 거처는 대대에 이르리라 하여 그들의 토지를 자기 이름으로 부르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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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5:9 저희 입에 신실함이 없고 저희 심중이 심히 악하며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같고 저희 혀로는 아첨하나이다
시64:6 저희는 죄악을 도모하며 이르기를 우리가 묘책을 찾았다 하나니 각 사람의 속 뜻과 마음이 깊도다
시10:6 그 마음에 이르기를 나는 요동치 아니하며 대대로 환난을 당치 아니하리라 하나이다
창4:17 아내와 동침하니 그가 잉태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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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사람은 존귀하나 장구하지 못함이여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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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49:20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같도다
시39:5 주께서 나의 날을 손 넓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의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마다 그 든든히 선 때도 진실로 허사뿐이니이다 셀라
시82:7 너희는 범인같이 죽으며 방백의 하나 같이 엎더지리로다
시49:20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같도다
전3:19 인생에게 임하는 일이 일반이라 다 동일한 호흡이 있어서 이의 죽음같이 저도 죽으니 사람이 짐승보다 뛰어남이 없음은 모든 것이 헛됨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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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이것이 바로 어리석은 자들의 길이며 그들의 말을 기뻐하는 자들의 종말이로다 (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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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12:20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령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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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그들은 양 같이 스올에 두기로 작정되었으니 사망이 그들의 목자일 것이라 정직한 자들이 아침에 그들을 다스리리니 그들의 아름다움은 소멸하고 스올이 그들의 거처가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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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7:22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가 와서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를 위하여 신원하셨고 때가 이르매 성도가 나라를 얻었더라
눅22:30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
고전6:2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치 못하겠느냐
계2:26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계20:4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령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년 동안 왕노릇하니
욥24:19 가뭄과 더위가 눈 녹은 물을 곧 말리나니 음부가 범죄자에게도 그와 같은 것인즉
시39:11 주께서 죄악을 견책하사 사람을 징계하실 때에 그 영화를 {좀} 먹음같이 소멸하게 하시니 참으로 각 사람은 허사 뿐이니이다 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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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그러나 하나님은 나를 영접하시리니 이러므로 내 영혼을 스올의 권세에서 건져내시리로다 (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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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16:11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시17:15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보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시73:24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창5:24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 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호13:14 내가 저희를 음부의 권세에서 속량하며 사망에서 구속하리니 사망아 네 재앙이 어디 있느냐 음부야 네 멸망이 어디 있느냐 뉘우침이 내 목전에 숨으리라
단12:2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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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사람이 치부하여 그의 집의 영광이 더할 때에 너는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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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그가 죽으매 가져가는 것이 없고 그의 영광이 그를 따라 내려가지 못함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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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27:19 부자로 누우나 그 조상에게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요 눈을 뜬즉 없어졌으리라
딤전6:7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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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그가 비록 생시에 자기를 축하하며 스스로 좋게 함으로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을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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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10:3 악인은 그 마음의 소욕을 자랑하며 탐리하는 자는 여호와를 배반하여 멸시하나이다
시36:2 저가 스스로 자긍하기를 자기 죄악이 드러나지 아니하고 미워함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함이로다
신29:19 이 저주의 말을 듣고도 심중에 스스로 위로하여 이르기를 내가 내 마음을 강퍅케 하여 젖은 것과 마른 것을 멸할지라도 평안하리라 할까 념려함이라
눅12:19 또 내가 내 령혼에게 이르되 령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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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그들은 그들의 역대 조상들에게로 돌아가리니 영원히 빛을 보지 못하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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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15:15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
시56:13 주께서 내 생명을 사망에서 건지셨음이라 주께서 나로 하나님 앞 생명의 빛에 다니게 하시려고 실족지 않게 하지 아니하셨나이까
욥33:30 그 령혼을 구덩이에서 끌어 돌이키고 생명의 빛으로 그에게 비취려 하심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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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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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49:12 사람은 존귀하나 장구치 못함이여 멸망하는 짐승같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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