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역개정]마27장
..[엘리 엘리 라마 아자브타니(עֲזַבְתָּ֑נִי לָמָ֣ה אֵלִ֣י אֵלִ֣י) ](시22:1)... #라마<라멛-멤-헤이>=(빼어닮은-생명 성숙한, 판박이) 참제자-생명가지요 말씀진리 담지자의 실존... ..#아자브<아인-자인-베이트>=(Q-사람 삶, 그 유익 이루심 위해, 순전-온전-완전-단순-정결한 일치/동심합치의 하나 이룸 위해, 삿됨을)포기하다/버리다/내려놓다 = (주님 보시기에, 유일한 자격 가진 합당한 예물이라, 대속 위한) 번제로 제단에 자신을 드리다....#타니<타브-눈-요드>..온전케 된바, 십자가 적용-부활 생명을 취하다... ..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שְׁבַקְתָּ֫נִי לְמָה אֵלִי אֵלִי) ].(마27:46)...#샤바크/쉬바크<쉰(우)-베이트-코프>=회복의 소망.. --- @에벤<알렙-베이트-눈>=Q의 아들/보배(아버지께서 친히 낳으신바-산출하신바, 유일무이한 독생자) ...@에하베<알렙_헤이트-베이트-알렙> = 친히 말씀-호흡-숨결로-산출해내신바요, 여기에서 더 나아가 [죽기를 각오하고!!] 동산 중앙의 생명나무이신 그분 자신을 먹고 [십자가 죽음 과정 거쳐서 새로이[재창조] 조성된, 거듭난 자, 곧 그분 자신의 분신으로서, 거처 삼으신바, Q의 사랑 대상 삼으심... @쉬므하<쉰(우)-멤-헤이트-헤이>= 비할바 없는 누림, 생명 그 자체, 기쁨-즐거움...@쎄굴라<싸멕-기멜-라멛-헤이> =Q의 보물(보좌의 성령께서 산출한 참제자, 그 실존 --- *아하르<알렙-헤이트-레이시>...산출해낸 생명가지가 당신자신!!인바, 너무 존귀한 자라, 스스로 결합한 하나로서 지고지선-최상의 길로 함께 행하시려 참제자-생명가지에게 그영으로 찾아와 그분자신의 참생명길로 인도-공급하고 계심...*에하드<알렙-헤이트-달렛>=(너무 귀해서/마음에 들어서_ 찰싹달라붙어 상호 붙좇는 하나된 상태..==>*에하베<알렙-헤이트-베이트> =Q(부활생명이신 분)의 거처...*(너무 귀중해서)숨겨두다. ==>*아하바<알렙-헤이-베이트-해이>::(..너무 귀해서!!..친히 산출하신바 당신 자신을 온통 쏟아 부어 넣어 ((호호 불어!!)) 전달하시는 거처 삼으신 그 말씀, 곧 호흡-숨결의 그 말씀 그대로 실제로 이루심)
===예수를 빌라도에게 넘기다 1. 새벽에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함께 의논하고 2. 결박하여 끌고 가서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 주니라 ===유다가 목매어 죽다 3. ○그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4. 이르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그들이 이르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5.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6. 대제사장들이 그 은을 거두며 이르되 이것은 핏값이라 성전고에 넣어 둠이 옳지 않다 하고 7. 의논한 후 이것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삼았으니 8. 그러므로 오늘날까지 그 밭을 피밭이라 일컫느니라 9.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나니 일렀으되 그들이 그 가격 매겨진 자 곧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가격 매긴 자의 가격 곧 은 삼십을 가지고 10. 토기장이의 밭 값으로 주었으니 이는 주께서 내게 명하신 바와 같으니라 하였더라 ===십자가에 못 박히게 예수를 넘기다 11. ○예수께서 총독 앞에 섰으매 총독이 물어 이르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이 옳도다 하시고 12.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고발을 당하되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는지라 13. 이에 빌라도가 이르되 그들이 너를 쳐서 얼마나 많은 것으로 증언하는지 듣지 못하느냐 하되 14.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총독이 크게 놀라워하더라 15. 명절이 되면 총독이 무리의 청원대로 죄수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더니 16. 그 때에 바라바라 하는 유명한 죄수가 있는데 17. 그들이 모였을 때에 빌라도가 물어 이르되 너희는 내가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바라바냐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냐 하니 18. 이는 그가 그들의 시기로 예수를 넘겨 준 줄 앎이더라 19. 총독이 재판석에 앉았을 때에 그의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으로 인하여 애를 많이 태웠나이다 하더라 20.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무리를 권하여 바라바를 달라 하게 하고 예수를 죽이자 하게 하였더니 21. 총독이 대답하여 이르되 둘 중의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이르되 바라바로소이다 22.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그들이 다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23. 빌라도가 이르되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그들이 더욱 소리 질러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하는지라 24. 빌라도가 아무 성과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이르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25. 백성이 다 대답하여 이르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하거늘 26. 이에 바라바는 그들에게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군병들이 예수를 희롱하다 27. ○이에 총독의 군병들이 예수를 데리고 관정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그에게로 모으고 28. 그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29. 가시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30. 그에게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더라 31. 희롱을 다 한 후 홍포를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혀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 ===십자가에 못 박히시다 32. ○나가다가 시몬이란 구레네 사람을 만나매 그에게 예수의 십자가를 억지로 지워 가게 하였더라 33. 골고다 즉 해골의 곳이라는 곳에 이르러 34. 쓸개 탄 포도주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려 하였더니 예수께서 맛보시고 마시고자 하지 아니하시더라 35. 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후에 그 옷을 제비 뽑아 나누고 36. 거기 앉아 지키더라 37. 그 머리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 예수라 쓴 죄패를 붙였더라 38. 이 때에 예수와 함께 강도 둘이 십자가에 못 박히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39.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40. 이르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41.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이르되 42.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43.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실지라 그의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 44.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영혼이 떠나시다 45. ○제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되더니 46.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47. 거기 섰던 자 중 어떤 이들이 듣고 이르되 이 사람이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 48. 그 중의 한 사람이 곧 달려가서 해면을 가져다가 신 포도주에 적시어 갈대에 꿰어 마시게 하거늘 49. 그 남은 사람들이 이르되 가만 두라 엘리야가 와서 그를 구원하나 보자 하더라 50.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니라 51.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52.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53. 예수의 부활 후에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54.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일어난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55. 예수를 섬기며 갈릴리에서부터 따라온 많은 여자가 거기 있어 멀리서 바라보고 있으니 56. 그 중에는 막달라 마리아와 또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도 있더라 ===요셉이 예수의 시체를 무덤에 넣어 두다 57.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의 부자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왔으니 그도 예수의 제자라 58.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에 빌라도가 내주라 명령하거늘 59. 요셉이 시체를 가져다가 깨끗한 세마포로 싸서 60. 바위 속에 판 자기 새 무덤에 넣어 두고 큰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고 가니 61. 거기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향하여 앉았더라 ===경비병이 무덤을 지키다 62. ○그 이튿날은 준비일 다음 날이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함께 빌라도에게 모여 이르되 63. 주여 저 속이던 자가 살아 있을 때에 말하되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노니 64. 그러므로 명령하여 그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하소서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도둑질하여 가고 백성에게 말하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 하면 후의 속임이 전보다 더 클까 하나이다 하니 65. 빌라도가 이르되 너희에게 경비병이 있으니 가서 힘대로 굳게 지키라 하거늘 66. 그들이 경비병과 함께 가서 돌을 인봉하고 무덤을 굳게 지키니라 ======== 마태복음 27장 (개요) 본 장(章)에는 우리 주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매우 애절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 사건 자체를 생각한다면 우리는 이보다 더 비극적인 이야기를 들을 수가 없다. 평범한 사람들은 무죄하고 훌륭한 사람이 이와 같이 욕을 당한 것을 보고 마음이 녹아질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고난의 계획과 열매를 고려한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와 같이 우리의 허물을 인하여 고난 가운데로 넘겨지신 것은 복음이며, 좋은 소식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보다 더 영광스럽게 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본 장(章)에서 몇 가지로 살펴 볼 수 있는 것은, Ⅰ. 그는 어떻게 박해를 당하여나 ? 1. 그리스도를 빌라도에게 넘겨 줌(1,2). 2. 유다의 실망(3-10). 3. 그리스도께서 빌라도 앞에서 심문과 고난을 당하심(11-14). 4. 그리스도를 반대하는 백성의 외침소리(15-25). 5. 선고된 판결. 그를 십자가에 못박도록 내어 줌(26). Ⅱ. 그는 어떻게 집행되었는가 ? 1. 그는 야만적으로 희롱을 당하셨다(27-30). 2. 집행 장소로 끌려가심(31-33). 3. 그는 거기에서 갖은 모욕과 비난을 당하셨다(34-44). 4. 하늘이 그에게 험상궂은 얼굴을 지었다(45-49). 5. 그의 죽음에 수반된 여러 가지 두드러진 일들(50-56). 6. 그는 장사되었고 파숫군이 무덤을 지킴(57-66). ========= 유다가 뉘우침(마 27:1-10) 그리스도께서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붙잡히셔서 공의회에서 사형선고를 받으셨다. 그러나 그들은 단지 그들의 이빨만을 드러내 보였을 따름이다. 이 일이 있기 약 2년 전에 로마인들은 주요한 형벌집행에 대한 권한을 유대인들에게서 빼앗아 버렸다. 그들은 누구도 사형을 시킬 수 없었다. 따라서 아침 일찍이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하기 위하여 또 다른 회의가 소집되고 있다. 그들이 두 세 시간을 자면서 곰곰히 생각하고 난 다음에 그 아침 회의에서 어떤 일이 행해졌는가를 우리는 여기에서 찾아 볼 수 있다. Ⅰ. 그리스도가 빌라도에게 넘겨진 것은 빌라도로 하여금 그들이 내린 사형 언도를 수행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유다 나라는 이 일이 있기 약 100년 전에 폼페이에 의해 정복이 되었고 그 이래로 로마에 예속되어 있었으며 또한 최근에는 수리아 지방에 예속된 영토가 되어 수리아의 총독의 지배를 받았으며, 수리아의 총독 아래에는 주로 "세금" 받는 일을 관장하였던 몇몇 "집행관"들이 있었는데, 종종 특별히 빌라도와 같이 모든 일을 주관하는 전권을 가진 자도 있었다. 이것은 야곱의 예언대로 "홀이 유다에서 떠나고" 지금은 "실로가 와야만 하는" 분명한 증거였다(창 49:10). 그 당시의 로마인 저술가는 빌라도가 거칠고 교만하며 사악하고 무자비하고 또한 큰 탐욕을 가지고 있고 억압적인 사람이라고 특징을 지우고 있다. 유대인들은 그에 대하여 큰 적개심을 품고 있었으며 또한 그의 통치에 피곤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빌라도를 그리스도를 거스리는 그들의 사악함에 대한 한 도구로 사용하였다. 1. 그들은 예수님을 "결박하였다." 그는 맨 처음 붙잡히셨을 때 결박을 당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그가 공회 앞에 섰을 때 이러한 속박들을 풀어 주었었으나 지금 다시 그를 결박하였던 것이다. 그가 유죄임이 선고되었으므로 그들은 흔히 죄수들에게 하듯이 그의 손을 뒤로 묶었다. 그는 이미 사람에게 대한 사랑의 줄로 묶이었으며 또한 그 자신의 임무의 줄에 묶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곧 삼손이 했던 것처럼 이러한 속박들을 즉시 끊어버리셨을 것이다. 우리는 "불법의 차꼬"에 채워졌으며, 우리의 죄의 줄에 묶이었다(잠 5:22).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범죄의 멍에"를 주 예수님의 목에다 매셨다(애 1:14). 이는 우리로 하여금 "그의 채찍으로 말미암아 나음"을 입은 것 같이 그의 속박으로 말미암아 해방이 되도록 하기 위함이다. 2. 그들은 의기양양하게 "도살장으로 끌고 가는 양과 같이" 그를 끌고 갔다. 이와 같이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다"(사 53:7, 8). 가야바의 집에서 빌라도가 있는 곳까지는 거의 일마일 정도가 되었다. 그들은 그를 세상의 조롱거리로 삼기 위하여 아침에 사람들이 법석거리기 시작할 때 예루살렘 거리를 지나 요소 요소를 거치면서 그를 끌고 갔다. 3. 그들은 "본디오 빌라도에게 넘겨주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종종 그가 "이방인들에게 넘겨질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유대인들이나 이방인들은 다같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으며 모두 "죄 아래 놓여져 있음이 판명되었다." 그리스도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세주가 되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다같이 심판을 하시려고 오셨으며 또한 유대인과 이방인은 그의 사망과 관계를 가지고 있다. 이 타락한 교회 지도자들은 국가의 통치자를 이용하여 자신들의 불의한 법령들을 수행하도록 하며 또한 "불의한 말을 기록하도록 하였다"(사 10:1). (이와 같이 교황권에 속한 자들은 이단자로 낙인찍은 자들이 옳건 그르던간에 자신들의 편견대로 판결해 버린 다음, 지상의 왕들이 전쟁의 칼이나 공의의 칼로 그들을 제거하는 수고를 맡아 하도록 책임을 떠 넘겼다.) Ⅱ. 그들이 그리스도를 파는 대가로 지불하였던 돈은 그에 의하여 도로 그들에게로 넘겨졌으며, 또한 유다는 실망한 나머지 목매어 죽었다. 대제사장과 장로들은 그리스도를 박해하디 위해 그의 제자가 그리스도를 자기들에게 팔도록 매수하였다. 그러나 지금 박해를 진행하는 도중에 그 끄나플(유다)은 그들에게 실망을 주었고, 유다 역시 [무죄한 자를 넘겨주었다고 고백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무죄함을 나타내는 "증인"이 되었으며 또한 하나님의 공의의 기념물이 되었다. 이것은, 1. 그리스도께서 박해를 받고 있는 도중에 그를 영광스럽게 하는데 도움을 주었으며 또한 유다에게 들어갔던 사탄을 정복한 것을 나타내는 조짐이 되었다. 2. 그의 박해자들에게 경고를 주고 그들로 하여금 더욱 변명할 수 없도록 하였다. 만일 그들의 마음이 이러한 악을 행하는 데 완전히 굳어있지만 않았다면,(어떤 사람이 생각하는 것처럼) 유다가 말하고 행한 것을 보고 자신들의 박해를 마땅히 멈추었어야만 할 것이다. (2) 여기에서 유다가 어떻게 "뉘우쳤는가"를 살펴보기로 하자. 그는 뉘우치고 믿고 용서받은 베드로와 같지는 않았다. 아니 그는 뉘우치고 실망하고 멸망을 받았다. 여기에서 몇 가지로 살펴본다면, ① 무엇이 그로 하여금 뉘우치게 하였는가? 그것은 그가 "그리스도께서 정죄됨을 보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유다는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그들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최소한 그가 재판정의 정죄판단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변명하실 것이며, 그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는 명예를 얻고, 유대인들은 수치를 당하나 그는 돈을 벌게 되고, 그밖에 아무런 해됨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던 것 같다. 그러나 유다의 이러한 기대는 사실상 아무런 근거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종종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실" 것을 (직접)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미리 여러번 그리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유다는 그렇게 되리라 예상하였지만, 그 일이 자기의 상상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불가항력의 피할 수 없는 거센 물줄기가 그리스도에게 몰아쳐서 그를 휩쓸어 가버리는 것을 보았을 때 두려움과 경악 가운데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하나님의 법을 따름보다는 (육적 지레짐작과 추측으로 섣부르게) 행동한 바, 나타난 결과로 행동의 가치를 재단하려는 자들은 자신들의 추정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죄의 길은 내리막길이다. 만일 그 내리막길에서 섣불리 행동하기전에 우리가 자신들을 멈추지 못한다면, 함께 죄악된 길로 나섰던 다른 사람들조차 멈추게 할 수는 없다. 그는 "스스로 뉘우쳤다." 즉, 그는 자신이 행했던 일을 회상해 볼수록 스스로 화가 나고 슬픔과 고뇌와 분노가 차오를 수 밖에 없었다. 그가 주님을 배반하도록 유혹을 받았을 때, "포도주가 붉을 때 컵에 그러한 색깔을 띠게 하는 것과 같이" 은 삼십은 매우 훌륭하고 빛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그 일이 걷잡을 수 없게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대가로 받은 그 은(銀)은 쓰레기가 되었으며, 그것은 "뱀과 같이 그를 물었고 독사처럼 쏘았던 것이다." 이제 그의 양심은 그에게 정면으로 대들었다. "내가 무엇을 했던고 ! 이러한 사소한 일 때문에 나의 주님과 그 안에 있는 나의 모든 위로와 행복을 팔아버리다니 나는 얼마나 어리석고 나쁜 사람인가 ! 그에게 행해진 이러한 악행과 모욕을 이제 내가 받아야만 한다(나에게 책임이 있다). 그가 결박을 당하고 정죄를 받고 침뱉음을 당하고 희롱을 당하신 것은 나 때문이다. 내가 그 악한 계약을 맺었을 때 나는 이러한 일이 있으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하였다. 나는 어리석고 무지하며, 짐승과 같은 자였구나." 이제 그는 자신이 가지고 다니는 돈주머니와 그가 좋아하던 돈과 그가 상대한 제사장들과 그가 태어난 날을 저주하고 있다. 그가 그렇게도 비열하게 내버렸던 자신에게 대한 주님의 선하심과 그가 걷어차 버렸던 자비의 그릇들, 그가 업신여겼던 명확한 경고 등을 생각하면 그의 죄책감은 더욱 커져만 갔으며, 더욱 마음을 찔렀던 것이다. 이제 유다는 그의 주님의 말씀들이 진리임을 알게 되었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 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여기에서 유의할 것..., 죄는 즉시 그 맛을 변화시킬 것이라는 사실이다. 비록 그것이 "맛있는 음식물"과 같이 "혀 밑에 감춘다" 할지라도 뱃속에서는 "독사의 쓸개"가 될 것이다(욥 20:12-14). 이것은 요한 2계시록(계 10:9)에 있는 것과 같다. ② 그의 뉘우침의 표식은 어떤 것이었는가? 첫째, 그는 받은 돈을 반환하였다. 유다는 그들이 함께 모여 있을 때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에게 도로 가져다주었다." 지금 그 돈은 그의 양심에 화인 맞게 했던바, 그가 그 돈을 받았을 때 그것은 이미 병들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악하게 얻어진 것은 그것을 얻은 자에게 결코 좋은 것이 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이다(렘 13:10; 욥 20:15). 만일 그가 그리스도를 팔기 전에 뉘우치고 그 돈을 도로 가져왔더라면, 그는 즐겁게 그 일을 행하였을 것이며 따라서 "길에서 사화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도로 물리기에는 이미 너무 늦었으며, 그는 아무일 없던 것처럼 되돌릴 수는 결코 없다. 그래도 유다는 그것을 도로 가져왔다(약 5:3).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불의하게 얻어진 것을 성소에 결코 넣어둘 수는 없기에 원주인에게 반드시 반환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 범죄를 계속하는 것과 다름없으며 그것을 자백하는 것이 회개 하는 것 그 자체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가 자신이 그것을 취하였던 자에게로 도로 가져다 준 것은 그들로 하여금 자신이 계약한 것을 뉘우친다는 사실을 알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는 데 조력을 하거나 권고를 한 자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회개케 하실 때 죄에 동참했던 자들에게 회개케 하는 수단이 되도록 하기 위하여 바로 그 자신이 그것을 고백하여 권고함으로써 알게 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둘째, 그는 고백을 하였다(4절).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1.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그는 그의 피가 "무죄하다"는 것을 선포하고 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어떤 죄악된 행동을 범하였다면, 그의 제자인 유다는 분명히 그것을 알았을 것이며, 배반자인 그가 분명히 그것을 찾아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누가 그렇게 하라고 하지 않았지만 스스로 그리스도에게 정죄한 자들에게 그가 무죄하다는 사실을 알리고 있다. 2. "자신의 수치"를 무릅쓰고 유다는 자신이 이 무죄한 피를 팔음으로써 범죄하였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는 다른 사람을 비난하지 않고 있으며, "너희가 나를 그렇게 하라고 시킴으로써 범죄하였도다."라고 말하지 않고 있다. 그는 그 모든 죄가 자신에게 있음을 고백하고 있다. "내가 그 일을 함으로써 범죄하였도다." 이와 같이 유다는 회개에로 많이 접근하여 갔지만 그것이 "구원에 이르지는 못하였다." 그는 제사장과 장로들에게 가서 죄를 고백을 했지만 그것은 무엇보다도 하나님께 나아간 것이 아니었으며 하나님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에게 죄를 얻었습니다,"라고 고백하지 않았다. 그는 비록 무죄한 피를 팔았다고 고백을 하였지만 이러한 악행의 뿌리가 되었던 돈에 대한 사악한 사랑까지를 고백하지는 않았다. 한편, 그리스도를 배신하고도 자신이 의롭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은 유다만도 못한 자들이다. (2)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유다의 회개를 듣고 어떻게 대하였는가? 그들은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네가 당하라"고 말하였다. 그는 (어리석었다!!)그들을 자신의 참회의 대상자로 삼았으며, 바로 이 말이 그들이 그에게 "면제"를 해 준 내용인 바, [네가 당하라!!는 말을] 곰곰히 그 뜻을 되새겨본다면 그들은 [중보의 역할을 담당허는] 거룩하신 산 하나님의 제사장들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마귀의 제사장들과 흡사하다는 느낌을 나타내고 있다 할 수 있다. ① 그리스도를 배신한 것에 대하여 그들은 얼마나 경솔하게 말을 하였는가? 유다는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피가 무죄한 피였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말하였다. [실상은 그들이 마음으로부터 그리스도를 잡아죽이려느려 했었던 바 먼저] 그들이 이 피에 굶주렸기에 수소문하였던 바 유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팔도록 종용하였고 지금 그 피를 불의하게 흘리도록 정죄를 하고서도 그것이 그들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말인가? 진정 유다의 고백이 그들로 하여금 그를 더 이상 불의한 자로 몰아 죽게 하는 죄악을 멈추도록 하는 데 거리낌을 불러 일으키거나 또는 이 의로운 사람에게 이러한 악행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경고가 될 수는 없는가? 보라, 이와 같이 심중에(목전에) 하나님이 없는 어리석은 범법자들은 악행을 하고서도 마치 전혀 해악이 행해지거나 그럴 위험조차 없었던 것처럼 오히려 범죄 사실을 비웃는다. 이와 같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임재와 그 감찰하심을] 경시(소홀)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범죄케 만든다. 함정에 빠져든 유다, 그리고 묵묵히 십자가를 담당하시는 그리스도ㅡ 그가 이러한 일들을 당한 것이 그들에게 무슨 상관이 있는가? ② 유다의 범죄에 대해 그들은 얼마나 경솔하게 말하고 있는가? 유다는 "내가 죄를 범하였도다"라고 말했지만, 그들은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네가 우리들에게 말한 네 죄가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라고 말하였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죄, 특히 우리가 어느 정도 접근해 있거나 또는 관여하고 있는 그러한 죄들을 우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진실로 어리석은 일이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이 모욕을 당하시며 영혼들이 상처를 입되, 사탄이 만족하게 되고 그의 이해 관계가 충족되는 바, 우리가 그것을 거들고 선동한 사실이 우리와 아무런 상관도 없단 말인가? 만일 이스르엘의 장로들이 이세벨을 즐겁게 하기 위하여 나봇을 죽였다면 그것은 아합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가? 그렇다. 아합, 그는 "재물을 탈취하기" 위하여 "나봇, 그를 죽였다."(왕상 21:19). 죄를 범한 것은 어떤 사람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쉽게 변경시킬 수는 없다. 만일 그리스도를 죽이는 그 일이 도중에 잘못되었더라면, 그들은 분명히 유다에게 그것을 "책임지라"고 했을 것이다. 첫째, 왜냐하면 그가 그들에게 주님을 팔아 넘겼기 때문이다. 그의 죄는 실로 "큰 죄"(요 19:11)였다. 그렇다고 제사장들과 장로들, 그들의 죄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다른 사람의 죄가 더욱 커짐으로 말미암아 우리 자신의 죄가 경감된다고 하는 것은 우리 마음이 속임수로 가득차 있다는 하나의 좋은 본보기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은 진리로 행해지며, 비교에 의해 행해지는 것은 아니다.[[누구나 하나님앞에서는 단독자로 서야 한다!!] 둘째, 왜냐하면 유다는 그가 무죄하다는 것을 알고 믿었기 때문이다. "만일 그가 무죄하다고 하면 우리가 아는 것보다는 너나 그것을 알도록 하라. 우리는 그가 유죄하다고 선고하였으며, 그러므로 그를 이와 같이 박해하는 것은 당연하다." [주님보시기에 당연히] 사악한, 죄된 행위들은 [세상의] 사악한 원칙들, 즉 "죄는 그것이 죄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만 죄인 것이다" 라는 [세상] 원칙들에 의해서만 지지가 된다고 세인들은 말하고 싶어한다. 다시 말하자면 아무리 선한 사람도 [세상이] 악인으로 [설령 오해함으로써 세상이 잘못] 생각한다면 (판단한다면)그를 박해하는 것은 (결코) 죄가 아니라는 이론이다. 그러나 이와 같이 하나님을 조롱하려고 생각하는 자들은 자신을 속이고 파멸당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③ 그들은 유다가 당하고 있는 죄책과 두려움과 후회에 대해 너무도 무관심하게 말하고 있다. 그들은 죄를 짓게 하는 데는 그를 기꺼이 이용하려고 하였으며, 그 때에는 그를 매우 좋아하였다. 유다가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고 말했을 때 그는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그가 저지른 범죄에 대해 자신이 놀라고 있는 지금에 이르러 그들은 그에게 아무것도 말할 것이 없었으며, 오히려 그가 [진정] 두려워하는 것을 외면하고 말았다. 왜 그는 그의 우울한 상상을 가지고 그들을 괴롭게 하려고 찾아 왔는가? 그들은 유다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것보다 더 시급히 해야할 일들을 가지고 있었다. 왜 그들은 꽁무니를 빼려고 했는가? 첫째, 아마도 그들은 유다가 회심한 것이 하나의 불티가 되어 그들에게로 다가와 그 자신의 양심에 불을 붙이게 될까봐 두려워하였으며, 또한 그의 신음소리가 그들의 죄책감에 대한 하나의 경종이 될까봐 두려워하였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완고한 죄인들은 죄를 깨닫게 될까봐 조심을 하며 또한 완고하게 회개치 않으려는 자들은 회개한 자를 멸시한다는 사실이다. 둘째, 어쨌든 그들은 유다를 후원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들은 유다를 덫에 걸리게 했을 때 그대로 내버려두었으며, 오히려 비난과 조소로 냉대하였다. 반역하기를 좋아하는 자들이 반역자를 미워한다는 것은 흔히 있을 일이다. (3) 이로 말미암아 유다는 완전히 실망하게 되었다. 만일 대제사장들이 박해를 중단하겠다고 약속했더라면 그것은 어느 정도 그를 위로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기미가 보이지 않으므로 그는 완전히 실망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5절). ① "그는 은을 성소에 던져 넣었다." 대제사장들은 그 돈을 취하려고 하지 않았는데, 이는 그렇게 함으로서 범죄의 책임을 전적으로 그들이 지게 될까봐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 돈을 받고 그리스도를 넘겨준 책임을 유다가 지기를 원하였지만, 유다는 그것을 감당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돈조차 그에게 너무나 뜨거운 것이어서 도저히 그것을 가지고 있을 수도 없었다. 따라서 유다는 제사장들이 그것을 받듣지, 안받든지 간에 그들의 손에 떨어지도록 하기 위해 성전에 던져 놓았다. 범죄가 덧붙여지거나 그렇게 생각이 될 때 그 돈은 얼마나 큰 마약이 되고 말았는가 ! ② "그는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 첫째, 그는 "물러갔다". 그는 귀신에 의해 광야로 이끌려 갔던 귀신들린 사람(눅 8:29)처럼 한적한 곳으로 물러갔다. 실망하여 홀로 있는 자에게는 화가 미칠 것이다. 만일 유다가 그리스도나 또는 제자들 중의 어떤 사람에게로 갔더라면 아마도 그는 비록 그 처지가 좋지 못한 것이었다고 할지라도 구출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대제사장에게서 실망을 느꼈을 때 유다는 완전히 자신을 포기하고 말았다. 유다를 죄 가운데로 빠지게 하는 일에 있어서 제사장들을 조력했던 바로 그 마귀는 역시 그를 도와 절망 가운데로 빠지게 하였다. 둘째, 그는 그 자신의 집행관이 되었다. "그는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 (*그는 슬퍼서 "질식하였다"고 하몬드 박사는 말하고 있다. 그러나 휘트비 박사는 우리의 번역이 옳다고 말한다.) 유다는 죄를 "알고 느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자비를 깨닫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의 불법으로 파리해졌다." 아마도 그의 죄는 원래부터 용서함을 받지 못하는 죄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리스도를 배반하고 죽이는 데 가담한 사람들 중에도 구원받은 사람이 있다. 그러나 그는 가인처럼 자신의 불법이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이며 하나님의 자비보다는 차라리 마귀의 자비에 호소하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유다는 주님의 피를 판 것보다는 하나님의 자비에 대하여 "실망"하는 죄를 범하였다고 하였다.) 이제 전능자의 두려움은 유다를 대적하기 위하여 정렬을 하였다. 하나님의 책에 기록된 모든 저주들은 그에 관하여 미리 예언된 것처럼(시 109:18, 19). "물같이 그 내부에 들어가며 기름같이 그 뼈에 들어갔다." 그는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지옥"을 피하기 위하여 피신을 하려고 했으며 완전히 이 두려움과 실망에 둘러싸여 있어서 그 곳을 빠져나가려고 안간힘을 다 쓰려고 했다. 그는 불꽃을 피하기 위하여 불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사람이 안락을 위해 지옥으로 가야만 하는 것은 실로 비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1. 사단이 들어간 사람, 특히 돈을 전적으로 사랑한 사람의 비참한 말로를 찾아 볼 수 있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이 파멸에 이르게 된 동기이다(딤전 6:9, 10). "귀신이 들어간" 돼지나 또는 배신자가 어떻게 되었는가를 기억하도록 하자. 그리고 "귀신(마귀)에게 거처할 곳을 주지 말도록 하자." 2. 하나님의 진노가 경건치 못한 자와 불의한 자에게 하늘로 쫓아 나타나는 것을 찾아 볼 수 있다(롬 1:18). 베드로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죄인이 회개할 때 하나님의 선하심과 또한 그리스도의 은혜의 승리를 찾아 볼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유다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죄인들이 타락할 때 하나님의 엄격함과 또한 그리스도의 능력과 공의가 승리하는 것을 찾아 볼 수 있다. 사탄이 들어간 유다가 이와 같이 "목을 매었을" 때 그리스도께서는 마귀가 "무력해 지도록 무장해제 시키시고" 정사와 권세를 십자가로 이기시고 사로잡아 구경거리로 전락시켜 버리시고(골 2:15).모든 통치자와 권세의 머리되심을 나타내셨다.(골2:10) 3. 실망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는가를 살펴 볼 수 있다. 실망은 종종 사람으로 하여금 자살하게 만든다. 죄에 대한 "근심"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대로"하지 않는다면 가장 처참한 "사망을 이루게 된다"(고후 7:10). "누가 상처받은 심령을 견딜 수 있을 것인가?" 만일 우리가 죄사함을 받지 못한다고 생각하지만 않는다면, 할 수 있는 대로 죄에 대하여 나쁘게 생각하도록 하자. 우리 스스로는 도움을 줄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도움을 주실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자신의 생명을 끊음으로써 자신의 양심을 편안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는 실제로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하여금 최악의 일을 하도록 하는 것이다. 자살하는 것은 비록 이방의 도덕주의자들 중의 어떤 사람에 의해 기술되었지만 병이 아무리 악화된 것이라 할지라도 분명히 그 병보다 더욱 나쁜 치료약이다. 공황발작의 입구인 바, 우울증이 시작되는가를 면밀히 살피도록 하자. 그리고 주여, "시험에 들게하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하도록 하자. (4) 유다가 도로 가져 온 돈을 처분함(6-10절). 그 돋은 "토기장이의 밭"이라고 불리우는 밭을 사는데 사용되었다. 그렇게 불리운 것은 어떤 토기장이가 그것을 소유했던지, 아니면 그 근처에 살았던지, 또는 토기 그릇이 그곳에 버려졌기 때문이다. 이 밭은 나그네, 즉 유대교의 개종자를 위한 매장지였었는데, 그들은 다른 나라 사람들이었지만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왔다가 죽은 자들이었다. ① 그들이 "나그네의 묘지에 대해 관심을 가진 것은 그들의 인간성의 한 실례를 보여 주는 것 같다. 그것은(사도 바울이 행 24:15 에서 말한 것과 같이)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는 사실을 그들이 인정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우리가 죽은 몸(시체)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는 것은 그것이 이성적인 영혼의 거주지가 될 뿐만 아니라 또 다시 살아 날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② 그들이 이방의 나그네들을 자신들의 매장지에 묻을 가치가 없는 것처럼 별도의 매장지에 묻으려 한 것은 그들의 인간성이 결여된 한 실례이다. 나그네들은 살았을 때나 죽었을 때나 먼 거리감을 두고 떨어져 있어야 했으며, 또한 "너는 네 자리에 섰고 내게 가까이 하지 말라. 나는 너보다 거룩함이니라"(사 65:5)라는 원칙이 무덤에까지 함께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헷 자손들은 비록 아브라함이 그들 가운데 우거하는 나그네였지만 그에 대하여 호의를 가졌으며, 그들의 최상의 묘지를 그에게 드렸다(창 23:6). 그러나 "주님과 연합한 나그네의 후손들"은 비록 별도로 묻혔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모든 자들과 더불어 함께 일어날 것이다. 이 토기장의 밭을 사는 일은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그 날에 있지는 않았다(그들은 그 때에 오직 그리스도를 넘어뜨리는 것 이외에는 마음을 쓸 겨를이 없었다). 그러나 그 일이 있은 후 오래지 않아 그 밭을 사는 일이 있었다. 왜냐하면 베드로가 그리스도께서 승천한 후 바로 즉시 그것에 대해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사실이 여기에 기록된 것은, 첫째,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의 위선을 보여 주기 위함이다. 그들은 사악하게 예수님을 핍박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1. 그들은 그들이 배신자를 고용할 때 사용하였던 돈을 성전금고 또는 "고르반"에 넣어 두기를 주저하고 있다. 아마도 그들은 공공의 유익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성전고에서부터 그 돈을 꺼내었으며, 또한 그들은 "고르반"에 대해 매우 까다로운 사람이었으며 또한 나라의 모든 재산을 그리로 끌어 모으려고 애를 썼던 자들이었지만, 그들은 피의 대가였던 그 돈을 다시 성전고에 넣어두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은 배신자의 임금이 창녀의 임금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였으며, 또한 행악자의 가격(그들은 그리스도에게 이것을 적용하였다)은 개의 가격과 맞먹는 것이며, 이상의 것들은 어느 것이나 "여호와의 전에 가져올 수"(신 23:18) 없었다. 이와 같이 그들은 성전에 대해 큰 존경심을 가지고 있다는 구실을 붙여 그것을 소유함으로써 백성들에게 큰 신망을 얻으려고 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삼키는 자들"이었다. 2. 그들은 비록 자신들이 한 일은 아니었지만 나그네를 위해 묘지를 마련해 주는 공적인 선행을 베품으로써 자신들의 한 일에 속죄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와 같이 무지의 때에는 사람들이 번쩍이는 교회건물을 세우고 수도원에 기부금을 희사하는 것이 부도덕성을 고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었다. 둘째, "나그네"와 이방의 죄인들에게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의도되었던 호의를 나타내기 위함이었다. 그리스도의 피의 대가로 죽은 후에 그들을 위한 휴식처가 마련되었다. 이와 같이 많은 고대인들이 이 뜻을 이 구절에 적용하고 있다. "무덤"은 토기장이의 밭이었는데, 여기에는 시체들이 보잘 것 없는 깨진 그릇처럼 내던져졌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피로써 자신을 더 좋은 본향을 사모하는 "나그네"로 고백하는 자들을 위하여 그것을 "매입하셨다." 그는(매입한 자들이 하는 것처럼) 그 소유권을 변경하셨으며, 따라서 그 시체나 묘지나 휴식처는 우리의 것이다. 독일 사람들은 묘지를 "하나님의 밭"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을 "한 알의 밀알"처럼 "심으시기" 때문이다(요 12:24)(호 2:23; 사 26:19 참조). 셋째, 그리스도의 피를 사고 판 자들의 파렴치한 행동을 영구히 보존시키기 위함이다. 이 밭은 흔히 "아겔다마," 즉 "피밭"이라고 불리웠다. 이렇게 불리운 것은 자신들의 죄를 다시 기억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이 묘지에다 매장하기를 원하였던 대제사장에 의한 것이 아니었고, 대제사장은 아무런 상관도 하지 않았지만 유다가 무죄한 피를 팔았던 사실을 인정하였던 사실에 관심을 가졌던 사람들에 의한 것이었다. 그들은 그 밭에 대한 이 이름을 in perpetuam rei memoriam ─ 즉 영구적인 기념으로 고정시켰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신적인 섭리는 비록 자신들의 수치를 가리려고 할지라도 "영구적인 비난을 받는" 위인들의 사악한 행위에 대해 여러 모양으로 불명예스러운 칭호를 첨가한다는 사실이다. 넷째, 우리로 하여금 성경 말씀이 어떻게 성취되었는가를 보여 주기 위함이다.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로 하신 말씀이 이루었도다." 이 인용된 말씀은 스가랴의 예언(슥 11:12)에서 발견된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들이 나를 헤아린 바 그 삯을 토기장이에게 던지라 하시기로 내가 곧 그 은 삼십 개를 여호와의 전에서 토기장이에게 던지고] ...그런데, 어찌하여 이 말씀이 여기에서 예레미야에 의해 말해진 것으로 인용된 것인지 이것은 하나의 큰 난문제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교훈에 대한 신임도는 그것에만 의존되지는 않는다. 비록 그 저자의 상황에 따라 약간의 인간적인 것이 나타날 수 있다고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모든 말씀은 그 자체가 완전히 신적인 것임을 나타내고 있다. 고대 수리아역에는 누구의 이름을 언급하지 아니하고 단지 "선지자로 하신 말씀이 이루었나니"라고 읽고 있는데, 그 점에 있어서 어떤 사람은 단어"예레미야"가 어떤 서기관에 의해 [실수로] 첨가된 것이라고 말한다. 또 어떤 사람은 선지서들이 전체적으로 한 권의 책으로 모아졌으며 그 중에 예레미야 선지자가 맨 처음에 있었으므로 "필사자"(currente calamo)가 그의 이름으로 그 모든 책의 구절들을 인용하였다는 것은 수긍이 갈 만한 견해라고 생각하고 있다. 유대인들은 종종 "예레미야의 영혼이 스가랴에게 있었으며" 따라서 그들은 한 선지자였다고 말하였다. (*어떤 사람은 생각하기를 그것은 "예레미야가 말했고" 스가랴가 이를 기록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또는 예레미야가 스가랴서 9-10장을 기록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선지서에 있는 이 구절은 유대인들 가운데서 볼 수 있는 대로 하나님에 대해 큰 멸시를 했던 것을 나타내는데, 오히려 보잘 것 없이 보였던 것이 큰 가치가 있는 것으로 [인정되고]받아들여지게 되었다. 거기에서는 상징적으로 표현된 것이 여기에서는 실제적으로 적용이 되었다. 돈의 총계가 똑 같다. 즉 "은 삼십"이다. 그들은 그에 대해 매긴 값대로 "그를 파는 대가로" 이것을 달아 주었다. 즉 적절한 가격이었다. 또한 이것은 "여호와의 집에서 토기장이에게 던져졌다." 이것은 여기에서 문자적으로 성취되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우리가 성경의 언어와 문자에 대하여 더 잘 알고 있다면 섭리의 사건들도 더 잘 알 수 있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달리는 자도 읽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그러한 것들도 때로 섭리의 뜻에 대하여 분명하게 기록되기 때문이다. 다윗이 비유적으로 말한 것(시 92:7)을 요나는 이를 문자적으로 적용하고 있다. 즉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다 내 위에 넘쳤나이다"(욘 2:3). 그에 대한 정가된 금액을 그를 위해서가 아닌 "토기장이의 밭을"사는 데 준 것은, 1. 그리스도에게 주어져야만 하는 높은 가격을 나타낸다. 그 가격은 그를 위하여 주어지지는 않았다. 아니 그것이 그에게 주어졌을 때 무한히 그의 가격을 낮춘 것처럼 불명예스럽게 도로 그에게로 반환되었다. 주님은 "오빌의 금으로도 비교될" 수 없으며, "돈으로 산" 이러한 말할 수 없는 선물로도 비교될 수 없다. 2. 그에게 매겨진 낮은 가격을 나타낸다. "이스라엘 자녀들"은 이상하게도 주님을 과소평가 하였으며, 그에 대한 가격은 쓸모 없는 것으로 여겨지는 토기장이의 밭을 겨우 살 수 있는 정도의 것이었다. 이것은 그가 이렇게 값어치 없이 팔릴 정도로 낮은 신분의 사람임을 나타내는 일종의 비난이기도 하였다. 스가랴에 있는 것처럼, "그것은 토기장이에게 던져라." 즉 값있는 것들을 취급하는 상인이 아닌, 보잘 것 없는 사소한 행상인에게 던지라. 이와 같이 "이스라엘의 자녀들은" 그를 값어치 없이 여겼다. 그들이야말로 누구보다도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를 더 잘 알고 있었던 그 자신의 백성들이었으며, 또한 그는 그들에게로 맨 처음 보냄을 받았으며 그들에 대하여 그는 높이 평가하여 매우 소중하게 사들인 자들이었다. 주님께서는 그들을 위해 왕의 속량물과 부요한 나라들("그는 그들을 존귀하게 여겼다." 사 43:3, 4), 즉 애굽과 구스와 스바를 주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에 대하여 노예의 속량물(출 21:32 을 보라)을 주었고 토기장이의 밭에 해당하는 가격 정도로 평가하였다. 이와 같이 우리를 위해 하나님의 나라를 사신 그 피는 발아래 짓밟혀졌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주님께서 명하신 바와 같은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고난과 같이 이 사건에 상징된 예언적인 환상은 "하나님의 정하신 섭리와 미리 아심에 의한"것이었다. ----------- 그리스도께서 빌라도의 법정에 서심(마 27:11-25) 우리는 여기에서 훌륭하신 예수님이 아침 일찍이 빌라도의 법정에 끌려오셔서 어떤 일을 당하셨는가를 살펴 볼 수 있다. 비록 재판날은 아니었지만, 빌라도는 즉각적으로 그 앞에서 사실을 심문하였다. 우리는 여기에서 몇 가지를 살펴 볼 수 있다. Ⅰ. 그리스도께서 빌라도 앞에서 심문을 받으심. 1. 그의 심문. 예수님은 재판관 앞의 죄수처럼 "총독 앞에 섰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에 죄인이 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죄 때문에 하나님 앞에 서거나 그의 면전에서 우리의 얼굴을 들 수가 없었을 것이다. 주님께서 심문을 받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죄에서 해방되도록 하기 위함이다. (*어떤 사람은 이 사실이 그의 용기와 담대성을 나타낸다고 생각한다.) 그는 그들의 분노에도 겁내지 않았으며 요동하지도 않으셨다. 그가 이와 같이 이 법정에서 심판을 받기 위해 서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심판의 앞에 설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는 나봇처럼 심문을 받으실 때 "사람들 가운데 높이 세움을 입었으며' 구경거리가 되기 위하여 세워졌다. 2. 그이 기소.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유대인들은 로마의 세력의 지배 아래에 있었을 뿐만 아니라 엄격한 감시 아래에 놓여져 있었다. 그들은 로마 세력에 대해 몹시 불만을 가지고 있었으나 지금은 그들의 목적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여기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척하였다. 그 자신이 "그리스도"라고 새삼스럽게 인정하는 것 이외에는 그에게 다른 고소할 증거를 찾을 수 없었으므로 그들은 예수님이 가이사에게 원수라고 고소하였다(눅 23:2). 그들은 생각하기를 그리스도가 누구였든지간에 그는 "유대인의 왕"이 틀림이 없었으므로 그들을 로마의 세력에서 구출해 주어야만 하며 또한 그들에게 일시적인 통치권을 회복시켜 주며 그들로 하여금 이웃들을 짓밟을 수 있도록 해 주어야만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들 자신의 이러한 망상에 의해 그들은 그를 로마의 멍에에 반대하여 유대인의 왕으로 만듬으로써 고소하였다. 한편 주님께서는 자신이 그리스도라고 말씀하셨지만 이와 같은 그리스도를 의미하지는 않았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거룩한 교회를 오해함으로써 그것을 반대한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교회에 거짓된 구실을 붙여 이를 반대하는 것이다. 그들은 그를 그리스도로 만들고 유대인의 왕으로 만든다면 그 총독은 틀림없이 그가 국가를 전복시키고 지배권을 뒤엎으려고 한다고 생각할 것으로 확신하였다. "네가 왕이냐?" 그가 실제적으로(de facto) 그렇지 않았다는 것은 명백하였다. "그렇다면 너는 어떤 지배권을 주장하거나 유대인을 다스릴 권리를 요구하는 것은 아니냐?" 여기에서 유의할 것... 마치 그리스도의 거룩한 교회가 왕이나 군주를 해하려고 하거나 또는 그둘의 특권을 취하려 하는 것처럼 오해하고 착각하여 국가의 권력들이 사리에 맞지도 않은데 부당하게 의심하려 드는 것은 기독교가 직면한 어쩔 수 없는 힘든 상황이었다는 사실이다. 3. 그의 변명.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네가 말하였도다. --나는 네가 말하는 그러한 뜻에서의 왕은 아니지만 네 말대로 분명히 유대인의 왕이다. 나는 왕이지만, 네가 추측하고 있는 바 그러한 왕은 아니다"라고 말씀하셨다. 이와 같이 그는 빌라도 앞에서 훌륭한 고백을 하셨으며, 비록 그것이 어리석은 것처럼 보였지만 그는 자신을 왕이라고 인정하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았으며 또한 이 때에 그것이 위험한 것이었지만 결코 이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4. 그 증거(12절). 그는 "대제사장에게 고소를 당하였다." 그러나, 빌라도는 "그에게서 아무런 잘못도 찾지 못하였다." 아무리 그들이 (꾸며) 말한다 해도 그것이 결정적인 (반역의) 증거가 되지는 못하였다. 따라서 그 일에 부족한 것을 그들은 소리와 난동으로 메꾸려고 했으며 앞서 제시한 고소 조건들을 계속적으로 반복하였다. 반복함으로써 그들은 총독으로 하여금 믿도록 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중상하는 것"(fortiter calumniari)을 체득하였다. 가장 훌륭한 사람들이 (오히려) 중죄를 지은 것으로 고소를 당할 때가 종종 있다. 5. 박해자들의 고소에 대해 죄수는 침묵을 지킴. "그는 한 마디도 대답하시지 않으셨다." (1) 그렇게 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에 대해 논박할 만한 어떠한 것도 결코 입증되지 아니하였다. (2) 주님께서는 지금 자신도 그렇게 의도하고 있는 하나님의 공의의 요구에 응답하기 위하여 자신을 희생제물로 바치려고 하였던 그의 아버지와 그 사이에 놓여 있는 큰 중대한 일에 마음이 끌려 있었으며, 그들이 자기를 거스려 하는 일에는 조금도 마음이 가있지 않았다. (3) 그의 때가 왔으며 그는 아버지의 뜻에 순종을 하려고 하였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그는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었으므로 조용히 의롭게 판단하시는 그에게 자신을 의탁하셨다. 그러나 우리는 구주예수님이 하셨듯이 침묵함으로써 우리의 목숨을 쉽사리 내던져버려서는 결코 안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주님처럼 우리의 생명을 주관할 수 있는 자가 아니기 때문이다며, 또한 우리는 주님이 미리 아셨던 것처럼 우리의 때가 이르렀는지를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욕을 받되 대신 욕하지 않기"를 배워야만 한다.(벧전 2:23..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그런데, ① 빌라도는 그에게 어떤 대답을 할 것을 강요하였다(13절). "저희가 너를 쳐서 얼마나 많은 것으로 증거하는지 듣지 못하느냐?" 이것이 무엇이었는지 누가복음 23장 3, 5절과 요한복음 19장 7절로부터 함께 종합하요 보면 알 수 있다. 빌라도는 주님께 대하여 아무런 원한도 가지고 있지 않았으므로 그가 결백할 것이라고 생각을 하였으며 또한 그로 하여금 그렇게 하기를 원하였고 또한 그가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듣지 못하느냐?" 그렇다. 주님께서는 들으셨다. 지금도 그는 그들이 자신의 진리와 길에 거스려 부당하게 증거 하는 모든 것을 듣고 있다. 그러나 그가 잠잠하신 것은 그것이 그의 인내의 날이기 때문이며, 또한 대답지 아니하신 것은 그가 머지 않아 잠잠치 아니하실 것이기 때문이다(시 50:3). ② 빌라도는 그리스도의 침묵을 기이히 여겼다. 이것은 법정에 대한 멸시(법정 모욕죄)라기 보다는 오히려 그리스도 자신에 대한 모욕으로 해석되었다. 그러므로 빌라도는 그것에 대해 성을 내지 않고 오히려 매우 이상한 일로 그것을 "기이히" 여겼다고 기록되어 있다. 빌라도는 그가 무죄하다는 사실을 믿었으며, 아마도 "그와 같이 말하는 자가 없다."는 소문을 들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주님께서 자신에 대해 한 말씀도 하시지 않는 것을 이상하다고 생각하였다. 몇 가지로 살펴본다면, Ⅱ. 백성들이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도록 강요하면서 격분하며 난동을 부림. 대제사장들은 백성들에게서 큰 존경을 받고 있었다. 그들은 대제사장들을 "랍비, 랍비"라고 불렀으며, 또한 그들과 그들의 말한 모든 말들을 우상시하였다. 그들은 이것을 그리스도를 대적하는데 이용하였으며 그들이 할 수 없는 일은 부량배들을 시켜서 목적을 달성하였다. 여기에는 그들이 저지른 두 가지 불법행위가 기록되어 있다. 1. 그들은 예수님보다는 바라바를 더 낫게 여겼으며, 그를 해방시키는 것보다는 바라바를 놓아주기를 원하였다. (1) 아마도 유대인의 의견에 따라 유월절에 한 사람의 죄수를 놓아주는 것이 로마 총독에게 전례가 되어 왔던 것 같다(15절). 그들은 이것이 그 절기를 더욱 영예롭게 하는 것이며 또한 그들이 구출된 날을 기념하는 것에도 합치가 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 자신이 고안해 낸 것이지 신적으로 제정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어떤 사람들은 이 관습이 그들이 로마 제국의 한 영지가 되기 이전에도 유대인의 왕에 의해 옛날부터 지켜져 내려왔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그것은 좋지 못한 습관이며, 공의에 대해 거침돌이며, 사악한 자에게는 용기를 주는 일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복음적 유월절은 "땅에서 죄를 사하시는 권세"를 가지신 자에 의해 죄수들이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2) 우리 주님과 맞서 비교된 죄수는 바라바였다. 그는 여기에서 "유명한" 죄수라고 불리워지고 있다(16절). 그는 태어날 때 특별히 어떤 유명한 신분에 속하여 있었던지 아니면 그가 어떤 두드러진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렇게 불리웠다. 그가 "유명했기" 때문에 사람들의 호의나 간원을 받게 되었는지 또는 그가 "유명했기" 때문에 그들의 격분을 사게 될 수 있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어떤 사람은 후자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빌라도는 그들이 바라바보다는 그 밖의 다른 사람을 틀림없이 원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를 언급하였던 것이다. "민란과 살인, 강도"는 공의의 칼에 의해 대개 처벌을 당하는 세 가지 큰 죄이다. 그런데 바라바는 이 세 가지를 다 범한 사람이었다(눅 23:19; 요 18:40). 바라바는 실로 "유명한 죄수"로서 그의 죄는 복잡한 것이었다. (3) 그 제안은 총독 빌라도에 의해 제시되었다(17절). "너희는 내가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주기를 원하느냐?" 재판장은 두 사람을 지명하였는데, 그 중 한 사람을 백성들이 "선택"하였던 것 같다. 빌라도는 그들에게 예수를 "놓아 줄" 것을 제안하였다. 그는 예수가 무죄하다는 것을 확신하였으며 또한 그 박해는 사악한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힘으로도 그를 놓아 줄 수 있었지만 그럴 용기가 없었으며, 그를 백성의 선택에 의해 놓아주려고 하였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양심"과 "백성"을 동시에 만족시키려고 하였다. 한편 그에게서 아무런 흠점도 찾지 못하였으므로, 그는 그를 "재판에 회부"하거나 "그의 생명을 위험한 지경"에로 밀어 넣으려고 하지 않았다. 기회주의적 태도를 취하거나 또는 양심과 세상을 동시에 좋게 하려고 이러한 기교나 속임수를 사용하는 것은 하나님보다는 사람을 기쁘게 하려는 자들의 공통적인 행동이다. 빌라도는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어떻게 하랴"고 말했다. 빌라도는 그가 놓아주기를 제안했던 이 "예수"가 그들 중의 어떤 사람에 의해 메시야로 여겨지며 또한 그가 메시야라는 함축성 있는 증거를 제시하였다는 사실을 그들로 하여금 생각나도록 하고 있다. "너희 민족이 이렇게 기대해 온 자를 거절치 말라." 빌라도가 이와 같이 예수님을 "놓아주려고" 한 것은 "저가 그들의 시기로 예수를 넘겨 준 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18절). 그들이 성을 낸 것은 그가 어떤 "범죄"를 저질렀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선하셨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빌라도는 그가 백성들에 의해 방면이 되며 그들이 그를 놓아주기를 "희망하였다." 다윗이 사울의 "시기를 받았을" 때 그는 "백성들의 칭송"을 들었다. 그리스도께서 며칠 전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을 때 "호산나"라고 부르는 것을 들었던 어떤 사람은 그도 그렇게 했으며 또한 그를 대적하는 유명한 무뢰한이 일어났을 때는 이 사실을 자치 단체에 말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과 다름이 입증되었다. (4) 빌라도가 그 문제에 고심하고 있을 때 그는 그의 아내가 그에게 보낸 경고의 전갈을 듣고 예수를 정죄하지 않으려는 마음을 더욱 굳혔다(19절).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대가 그 사람을 인하여 애를 많이 썼나이다." 아마도 이 전갈은 그 곳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들을 수 있는 정도로 공공연하게 빌라도에게 전해진 것 같다. 왜냐하면 그것은 빌라도 뿐만 아니라 모든 박해자들에게 경고하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몇 가지로 살펴 본다면, ① 빌라도의 아내에게 이 꿈을 현몽시킨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 빌라도의 아내는 아마도 그리스도에 대해 꿈을 꿀 만큼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그것은 즉각적으로 하나님에게서 왔다. 아마도 그녀는 "경건하고 품위가 있는 여자들" 중의 한 사람이며, 어떠한 종교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느부갓네살에게와 같이 종교심을 가지지 않은 자에게도 자신을 현몽하신다. 그녀는 이 꿈에서 "애를 많이 먹었다." 그녀가 무죄한 자에 대한 잔인한 고문에 대해 꿈을 꾸었든지 아니면 그를 죽인 자들에게 떨어진 심판에 대한 꿈을 꾸었든지 또는 이 둘을 꾸었든지간에 그것은 아마도 무서운 꿈이었거나 또는 그녀의 생각이 그녀를 "무섭게"(단 2:1; 4:5)했던 것 같이 보인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영혼들이 아버지에게서 여러 가지로 사람들의 영혼들에게 접근하시며 또한 "꿈에나 밤의 이상 중에 인치듯 교훈하실 수" 있으시다(욥 33:15, 16). 그러나 기록된 말씀을 가진 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대게 "깊은 잠이 들어 있을 때" 꿈으로 말씀하시는 것보다는 깨어 있는 침상에서 의식을 통해서 말씀을 하신다. ② 남편에게 이러한 경고를 한 빌라도의 아내의 보살핌과 배려.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첫째, 이것은 비록 예수님이 가장 악한 행악자로 박해를 받고 있을지라도 그가 옳은 사람임을 입증하는 고귀한 증거이다. 주님의 친구들이 그를 변호하러 나타나기를 두려워하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이방인이요 원수인 자들을 통하여 그에게 호의를 베푸는 말을 하도록 했다. 베드로가 그를 부인했을 때 유다가 그를 시인하였다. 대제사장들이 그가 사형에 해당되는 죄를 범하였다고 선고하였을 때 빌라도는 그에게서 "아무런 죄도 발견치 못하였노라"고 선포하였다. 그를 사랑하였던 제자들이 멀리 서 있을 때 그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였던 빌라도의 아내가 그에 대해 관심을 나타내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하나님께서는 원수들에 의해 중상 모략을 당하고 그의 친구들에 의해 망신스럽게 버림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그로 하여금 진리와 공평을 증거할 증인 없이 홀로 있게 내버려두시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둘째, 그것은 빌라도에게 당한 정당한 경고였다. "그에게 아무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하나님께서는 죄인들로 하여금 죄를 짖지 못하도록 막는 여러 가지 방법들을 가지고 계시다. 신실한 친구나 또는 우리들의 양심으로부터, 하나님의 섭리로부터 이러한 저지를 받는 것은 큰 은혜이다. 그것들을 경청하는 것은 또한 우리의 임무이다. "주께서 미워하시는 이러한 일을 행하지 말라"는 것은 우리가 자칫 잘못하여 시험 가운데 빠지게 될 때 우리가 들을 수 있는 말씀이다. 빌라도의 아내는 그를 사랑했기 때문에 이러한 경고를 그에게 하였다. 그녀는 그녀에게 속해 있지 않은 일에 간섭한다고 그에게서 책망을 들을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가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기를 바라면서 그녀는 이 경고를 하였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우리가 친구나 친척들을 참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그들로 하여금 죄에서 멀리 떨어지도록 최선을 다 하는 일이라는 사실이다. 어떤 사람이 우리에게 친근하면 할수록 우리는 그들에게 더욱 애정을 가져야 하며, 또한 더욱 그가 죄로 말미암아 고통을 당하지 않게 되기를 소원하여야 할 것이다(레 19:17). 최선의 우정은 영혼에 대한 우정이다. 빌라도는 이 말을 농담으로 여긴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그가 이 옳은 사람에 대해 심문을 계속하는 동안 그것을 유의하지 않았던 것 같다. 이와 같이 신실한 경고는 그것들이 죄에 대한 경고로 주어질 때 경시되기가 쉽다. 그러나 그것들이 죄를 더욱 악화시키는 것으로써 나중에 회상해 볼 때 쉽사리 무시될 수는 없다. (5)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이 때에 무리를 권하여 바라바를 놓아 달라고 하도록 설득하는 데 분주하였다(20절). 그들은 "바라바를 달라 하게 하고 예수를 멸하게"하려고 그들과 그들의 부하들을 무리들에게 보내어 "권하였다." 이 예수는 사탄과 연합한 사기꾼이며 그들의 교회와 성전에 대한 원수라고 말하였을 것이며 또한 만일 그를 그대로 내버려둔다면 로마 사람들이 와서 그들의 처소와 나라를 빼앗을 것임을 설득했을 것이다. 또한 바라바는 비록 나쁜 사람이기는 하지만 예수님이 가졌던 중요성을 가지고 있지 않으므로 그렇게 큰 손해를 보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설득시켰다. 이와 같이 그들은 다른 때에는 예수님에 대해 애정을 가지고 있었던 무리들을 권하였으며 또한 만일 그들이 제사장들이 시키는 대로 하지 않았다면 바라바를 예수님보다 더 앞세우는 이러한 터무니없는 일은 결코 행해지지 않았을 것이다. 여기에서, ① 우리는 이 사악한 제사장들을 불쾌하게 생각지 않을 수 없다. 율법에 의하면, "서로 피를 흘린 일로 다투는 송사에 있어서" 그들은 제사장들의 판결을 받았으며 또한 그들이 하라는 대로 행하였다(신 17:8, 9). 그들에게 위임된 이 큰 권한을 그들은 야비하게 남용하였으며 또한 백성들의 지도자들은 그들로 하여금 잘못되게 만들었다. ② 우리는 미혹된 백성들을 애석하게 여기지 않을 수 없다. 주님께서는 무리들이 이와 같이 악을 행하는 데 맹렬하며 또한 성직자에게 횡포를 당하며 "소경된 인도자"와 더불어 함께 웅덩이에 빠지는 것을 볼 때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고 말씀하셨다. (6) 이와 같이 제사장들에게 위압을 당하였으므로 그들은 마침내 선택을 하였다(21절). 빌라도는 "둘 중에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었다. 빌라도는 예수를 놓아주려는 자신의 계획이 성취되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그를 놀라게 한 것은 그들이 "바라바"를 달라고 한 것이었다. 마치 바라바의 죄가 더 적으며 따라서 그는 "사형을 받을 죄"가 없는 것처럼 그들은 바라바를 달라고 하였다. 바라바를 달라는 외침은 대다수가 한꺼번에 한 것이기 때문에 후보자 사이에 투표를 요구할 필요가 없었다. "오, 하늘이여, 이 사실에 놀랄지어다. 땅이여, 소스라치게 놀랄지어다 !" 일찍이 이성이나 종교를 가진 것처럼 행세한 사람들 중에 이렇게도 놀라울 정도로 미치고 소름끼치게 사악한 사람이 있었던가 ! 베드로는 이 사실을 들어 그들을 책망하였다. "너희는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주기를 원하였다"(행 3:14). 그들이 지도자를 인하여 하나님보다는 세상을 선택한 무리들은 이와 같이 "그들 자신들의 허망한 것을 선택하였던 것이다." 2. 그들은 열심히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를 것을 주장하였다(22, 23절). 그들이 바라바를 선택한 것에 놀란 빌라도는 그것이 예수를 시기해서 선택한 것이라기 보다는 그를 좋아한 데서 비롯된 것이기를 원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 너희 명절을 즐겁게 하기 위하여 그를 놓아주랴? 아니면 그를 나에게 그대로 놓아두겠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그들은 "다 가로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라고 하였다. 그들이 십자가에 처형되기를 원하였던 것은 그것이 가장 수치스럽고 극악한 형벌로 보여졌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렇게 함으로써 그를 따르는 자들로 하여금 그를 인정하거나 또는 그와의 관계를 시인하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기도록 하려고 하였다. 그들이 재판장에게 그가 어떤 선고를 내리도록 명령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사악과 격분은 질서와 예의의 모든 규범들을 잊어버리게 하였으며 또한 공의의 법정을 "폭동과 소란과 선동의 장소"로 바꾸어 놓았다. 이제 진리는 거리에 떨어졌으며, 공평은 관여를 할 수가 없었다. 거기에서 "심판하는 것을 보려고 한"자는 가장 사악한 "압제를 보았다"(역주:하박국서 참조). 공의를 보려고 했는데, 영광의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사악한 외침을 보았다. 아마도 전날에 "호산나"를 외치던 사람이 이와 같은 외침을 했을 것이다. 잠시 동안에 군중의 마음이 어떻게 변화하였는지를 살펴 보라. 그가 예루살렘으로 "나귀를 타시고 개선"하셨을 때 "모두"가 한가지로 "칭송"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가 "대적"하는 자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가 빌라도의 법정에 "당당하게" 끌려 왔을 때 적개심에서 나온 "외침"이 "일반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가 전혀 "지지자"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천국으로 향하는 우리의 길이 놓여져 있지만, 변화하는 이 세상에는 우리 주님이 하셨던 것처럼 "영광과 욕됨,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고후 6:8)으로 말미암아 이러한 변화가 있게 되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칭찬을 받고 사랑을 받게 될 때 "별들 가운데 보금자리를 펴고 그 속에 죽게 되는 것"처럼, 영광으로 말미암아 들어올림을 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또는 우리가 멸시를 받고 짓밟힘을 당할 때 우리가 "구속이 없는" 지옥에로 짓밟힘을 당하는 것처럼 욕됨으로 말미암아 실망하거나 용기를 잃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Uides tu istos qui te lavdant; omnes aut sunt hostes, aut (quodin aequo est) esse possunt ─ 즉 너를 ~이시어 하며 칭송하는 자를 조심하라. 그들은 너의 원수들이나 또는 그와 비슷한 자들이며, 또한 그러함이 드러날 것이다(Seneca de Vita Beat). 그런데 우리는 이 요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더욱 살펴 볼 수 있다. (1) 빌라도는 그것을 어떻게 반대하였는가? "어찜이뇨,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우리가 일상 대화에서 어떤 사람을 비난하기 전에 질문하는 것은 당연하다. 더욱이 재판장이 사형 선고를 내리기 전에 질문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우리 주 예수님은 비록 악행자로 고난을 받으셨지만 그의 재판장이나 박해자들이 그가 악을 행한 사실을 찾지 못하였다는 것은 그의 영예를 한층 더 높여 준다는 사실이다. 그가 "하나님을 거스려"악을 행한 일이 있었는가? 아니다. 그는 "언제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만을 행하였다." 그가 "세상 통치자"를 거스려 악을 행한 일이 있었는가? 아니다. 그는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칠 것"을 그 자신도 몸소 행하셨으며,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가르쳤다. 그는 "공공적인 평화"를 거스려 악을 행한 일이 있는가? 아니다. 그는 "다투거나 외치지" 않으셨으며, 그의 나라가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라고도 하지 않으셨다. 그는 특별한 사람들에게 악을 행하였는가? "그가 누구의 황소를 취하였으며 누구를 속였는가?" 아니다. 그는 그러한 일과는 정반대로 "선행을 베푸시며 다니셨다." 그의 무죄함에 대한 이러한 주장들은 그가 다른 사람들이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만일 그가 이렇게 상처를 입으신 것이 우리의 범죄 때문이 아니었다고 하면, 그가 내어 줌을 당하시고 그들을 위해 대속하시기 위해 이를 자발적으로 취하신 것이 우리의 허물 때문이 아니었다면, 나는 지금까지 결코 언급되거나 행해지지 않았던 이러한 사람에 대한 지나친 고난들이 세상을 지배하며 마침내는 그렇게 하도록 이것을 "허락한" 섭리의 공의와 공평에 의해 화해될 수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2) 그들은 어떻게 그것을 "주장"하였는가? "저희가 더욱 소리 질러 가로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그들은 그가 저지른 악행을 보여 주려고 하지 않고 옳든지 그르든지 간에 그가 "십자가에 못박혀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그 전제에 대한 증거를 주장하지 않고 단지 결론만을 내기로 결정하였으며, 또한 소리를 지름으로써 부족한 증거를 채우려고 하였다. 이 불의한 재판관은 주님께서 비유로써 하신 이야기에 나온 재판관처럼 끊임없이 조르는 것에 못이겨(눅 18:4, 5) 불공평한 판결을 하였으며, 그 재판은 순전히 소란 가운데서 행하여졌다. Ⅲ. 여기에는 그리스도의 피흘린 "범죄"의 대가를 "백성들과 대제사장들"에게 지우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1. 빌라도는 자신이 이것을 면하려고 하고 있다(24절). (1) 그는 "논쟁하는 것이 소용이 없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가 말한 것은, ①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는 아무런 효험도 얻지 못하였다." 빌라도는 그가 무죄하다고 믿으며 그들이 죄지은 것을 찾지 못하는 사람을 정죄하는 것이 이치에 닿지 않은 불의한 일이라는 사실을 그들에게 이해시킬 수가 없었다. 종종 정욕과 분노의 시냇물이 얼마나 거센가를 살펴보도록 하라. 권위나 이성이 그 흐름을 저지할 수는 없을 것이다. ② 그것은 "해를 주는 것" 같이 보였다. 그는 오히려 "민란이 일어나려는 것"을 보았다. 이 거칠고 야만적인 백성들은 더욱 소리를 높였으며 만일 그가 그들에게 만족 할 일을 해 주지 않는다면 그에게 어떤 일이라도 하겠다고 위협하기 시작하였다. 제사장들, 즉 그러한 방화범들이 붙여 놓은 불길은 얼마나 큰 것이었는가 ! 빌라도가 자신의 양심을 거스려 그리스도를 정죄하기를 무서워했던 유대인들의 이러한 난폭한 소란을 피우는 기질은 머지 않아 그 나라를 파멸하는 데 큰 기여를 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의 잦은 폭동은 비록 진압은 되었지만 로마인들로 하여금 멸망케 하도록 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또한 그들 사이에서 야기되는 고질적인 분쟁들은 그들의 원수들에게 먹히는 미끼가 되었다. 이와 같이 그들의 죄는 그들을 파멸시켰다. 우리는 일반 대중들의 경향에서 얼마나 쉽사리 오해를 하게 되는가를 살펴보자. 제사장들은 "명절에" 그리스도를 "붙잡는다면" 민요가 날 것이라고 알고 있었다. 그러나 빌라도가 그를 "놓아주려고" 한 것이 그 날에 민란이 나게 하였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이와 같이 군중의 감정은 불확실한 것이다. (2) 이것은 그를 그 자신의 마음의 평안과 성읍의 평화 사이에 있는 "큰 해협"으로 그를 몰아 놓고 있다. 그는 무죄한 사람을 정죄하는 것을 싫어하고 있지만 백성들을 "거스리는 것"이나 곧 진정시킬 수 없는 소동을 일으키는 것을 싫어하고 있다. 그가 재판관이 마땅히 해야만 하는, 공의의 성스러운 법을 굳건히 그리고 단호하게 고집하였더라면 그는 당황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잘못된 것"을 찾지 못한 사람은 어떤 구실로든지 십자가에 못 박아서는 안 되며 또한 세상에 있는 어떤 사람이나 집단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불의한 일이 행해져서는 안 된다는 사실은 너무도 명백하고 의논의 여지가 없다. 그 근거는 곧 결정이 되는 것이다. 하늘과 땅이 합쳐진다고 하더라도 "공의가 행해지도록 하라" Fiat justitia, fuat caelum ─ 즉 만일 악행하는 자가 악을 계속적으로 행한다면, 그들이 비록 제사장이라고 할지라도 "내 손이 그와 함께 않으리라." (3) 빌라도는 그 일을 절충해 보려고 생각하고 있으며, 그것을 "행하면서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백성들과 자신의 양심을 함께 만족시키려고 하였다. 즉 그 일을 "행하면서" 동시에 그는 그것을 "그만 두려고" 생각한 것이다. 자신의 죄책감도 "심하지만," 자신의 타락이 "더욱 심한" 자들이 이러한 어리석고 자가당착적인 일들을 한다(사도 바울이 롬 14:22 에서 말한 것처럼). "자기의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책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또는 자기의 "책하는" 바로 자기를 "옳다 하지" 않는 자는 복이 있도다. 그런데 빌라도는 그 범죄에서부터 자신은 깨끗하기를 원하고 있다. ① "표식"으로써, 그는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었다." 그가 이렇게 한 것은 그가 이렇게 함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지은 죄를 씻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이 일에 있어서 지은 죄가 있다면 백성들 앞에서 다 버린다는 것을 나타내려고 했기 때문일 것이다. 마치 그는 "그 일이 행해진다면 그것은 내가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거해 달라"고 말하는 것과 같았다. 그는 이 예식을 살인한 자를 찾지 못하였을 때 그 범죄를 인하여 성읍을 깨끗이 하는데 사용하도록 한 율법(신 21:6, 7)에서 "차용하였다." 빌라도는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은 무죄한 피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을 더욱 그들에게 알리려고 하였다. 아마도 폭동자들의 소리가 너무도 컸기 때문에 만일 그가 그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는 이러한 표식을 하지 않았다면 그의 의도는 저들에게 전달되지 못하였을 것이다. ② "말"로써. 첫째, 그는 자신을 "깨끗이 하고 있다." "나는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무죄하다." 그를 정죄하고서도 그의 피에 무죄하다고 말하는 것은 얼마나 넌센스인가 ! 사람이 어떤 일에 반대하면서도 그것을 실행하는 것은 자신들이 양심에 대해 죄를 짓고 있다고 선포하는 것에 불과하다. 빌라도는 그의 무죄를 고백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가 범죄하였다고 말씀하신다(행 4:27).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의 "손"이 범죄하지 아니하였다고 변명함으로써 자신을 정당화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다윗은 암논의 자녀의 칼로 죽이고 있으며 아합은 이스르엘의 장로들의 칼로 죽이고 있다. 빌라도는 그의 "마음"이 행동하는 데 있지 않았다고 변명함으로써 자신을 정당화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인정받을 수 없는 증언에 불과하다. Protestatio non valet contra factum ─ 즉 그가 동시에 범한 행동에 대하여 쓸 데 없이 항거하고 있다. 둘째, 빌라도는 그것을 제사장들과 백성들에게 던지고 있다. "너희가 당하라. 만일 그 일이 행해진다고 하면 나는 그것을 할 수 없으며 너희가 하나님과 세상 앞에서 그것에 대해 응답하라." 여기에서 유의할 것... 죄는 누구도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 선머슴(brat)이라는 사실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비난할 것을 찾지 못한다면 비난을 받지 않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들어 자신들을 속이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범죄 사실을 변경(전가)시킨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질병에 감염된 사람의 상태는 다른 사람에게서 병균을 옮아 왔거나 다른 사람에게 병균을 감염시키기 때문에 덜 위험해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죄에 "유혹"을 받을 수는 있지만, "강제로" 그렇게 되지는 않는다. 제사장들은 그것을 유다에게 던졌다. "네가 당하라." 이제 빌라도는 그것을 그들에게 던지고 있다. "너희가 당하라." "너희가 헤아린 그것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당하게 될 것이다." 2. 제사장들과 장로들은 그 범죄를 자신들이 떠맡을 것에 "동의하였다." 그들은 모두가 한가지로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우리는 그를 사형에 처하는 것이 죄이거나 위험한 일이 아니라고 확신하였기 때문에 우리는 기꺼이 그러한 위험을 자초하려고 한다"고 말하였다. 그들은 마치 그 범죄가 그들이 그들의 자손들에게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을 것처럼 말하였다. 그들은 죄에 대한 두려움이 빌라도를 주저하게 만들었으며 또한 그는 그것을 전가함으로써 이 어려움을 극복하려고 하였다는 사실을 알아 차렸다. 그로 하여금 주저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또한 그러한 추측에서 확신을 주기 위하여 그들은 더욱 격렬하게 소리를 높여 그들이 손아귀에 쥐고 있는 미끼를 잃는 것보다는 거기에 동의를 하였으며, "그의 피를 우리들에게 돌리소서"라고 고함을 질렀다. 그런데, (1) 그들은 이렇게 함으로써 빌라도에게 책임을 면하게 하려고 하였다. 즉 그에게 아무런 해도 입히지 않기 위하여 신적인 공의에 적절히 묶어 놓음으로써 그 자신이 스스로 죄를 면하게 되었다고 생각하도록 하게 하였다. 그러나 파산자나 거지가 된 자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담보물로 인정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보석 보증인으로 취해질 수도 없다. 그 누구도 자신이 죄를 가지지 않은 사람 이외에는 다른 사람의 죄를 자신이 떠맡을 수는 결코 없다. 어떠한 피조물이 전능하신 하나님에게 죄인으로 묶이우는 것은 대담한 행동이 아닐 수 없다. (2) 그러나 그들은 실제로 자신들과 자신들의 후손에게 진노와 보복이 임하기를 빌었다. 이것은 얼마나 비참한 말인가 ! 그들은 실로 그 말의 무서운 의미에 대하여 거의 생각하지 못하였으며 또한 얼마나 비참한 결과가 그들과 그들의 자손들에게 미치게 될 것인가를 알지 못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근래에 그들에게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지상에서 흘려진 모든 의로운 피"가 돌아가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것도 모자란 듯이 그들은 여기에서 모든 것보다도 더욱 귀중한 피흘린 범죄, 즉 더욱 무거운 범죄를 자신들에게 돌릴 것을 간구하고 있다. 오 사악한 죄인들의 대담한 주제넘음이여, 그들은 "목을 굳게 하고 하나님을 치려고 달려가며" 또한 그의 공의에 반항을 하고 있다(욥 15:25). 몇 가지로 살펴본다면, ① 그들은 얼마나 "잔인하게 저주"를 빌었는가. 그들은 이 죄에 대한 형벌을 자신들뿐만 아니라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자신들의 "자녀들"에게로 돌리 것을 간구하였는데, 하나님께서는 그 형벌을 "삼 사대"까지 제한하시기를 기뻐하시지만 그들은 이러한 제한도 두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이 이러한 형벌을 자신들에게 임하도록 끌어내린 것은 미친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을 그들의 자녀들에게까지 전가시킨 것은 극도의 잔인한 행동이 아닐 수 없다. 정녕 그들은 타조와 같았다. 그들은 마치 "어린 새끼"가 "자기의 새끼"가 아닌 것처럼 "그 새끼에 대하여 어려움을 끼쳤던" 것이다. 이러한 범죄와 진노를 그들과 그들 자손에게 영원히 전가시킨 것이나 또한 그들 자신의 "행동과 행위"인 것처럼 "만장일치로"(nemine contradicente) "동의"한 것은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 이것은 확실히 "나는 너와 네 후손에게 하나님이 될 것이라"는 옛 언약을 상실하고 반항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그들이 메사야의 피에 대한 저주를 자신들에 돌림으로써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 즉 그로 말미암아 "땅의 모든 족속들"이 축복을 받게 될 것이라는 "약속"에 의한 그 피에 대한 축복의 상속권을 "그들의" 가족으로부터 끊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사악한 사람은 그들의 자녀가 가족에게 원수가 된다는 사실에 유의하라. 자신의 영혼을 저주하는 자들은 그들과 더불어 얼마나 많은 영혼들이 지옥으로 가게 되는가를 유의하지 않는다. ② 하나님께서는 이 간구대로 보응하시는 데 있어서 얼마나 의로우셨는가? 그들은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리소서"라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저주를 사랑하였기 때문에 그것은 그들에게 그렇게 되었다. 그 버림받은 백성들의 비참한 후예들은 오늘날까지 그것을 당하고 있다. 그들이 이 피를 자기들에게 돌리라고 간구한 이후로 그들은 완전히 멸망하여 놀라움과 조롱거리가 될 때까지 계속적으로 심판을 당하게 되었다. 그들 중의 어떤 사람이나 그들의 후손들 중의 어떤 사람에게 대하여 이 피는 정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하려고 왔다. 신적인 자비는 그들의 회개와 믿음에 근거하여 이러한 저주의 상속권을 철회해 버렸으며, "그 약속"은 또 다시 "그들과 그들의 후손"에 대하여 더욱 관대한 분이시다. --------- 그리스도께서 채찍질과 조롱을 당하심(마 27:26-32) 우리는 이 구절들에서 우리 주 예수님을 못박기 위한 "예비적인 준비"를 찾아 볼 수 있다. 여기에 보면, Ⅰ. 판결이 내려지고 집행해도 좋다는 명령이 발하여짐. 이것은 "즉각적으로" 동시에 행해졌다. 1. 유명한 죄수인 바라바는 석방되었다. 아마도 바라바가 백성들의 호의를 받아 그리스도와 비교된 경쟁자가 되지 못하였다면 그는 자신의 죄 때문에 사형을 당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그 죄가 자신의 석방되는 수단이 되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정죄를 받으신 것이 죄인의 괴수라고 할지라도 "놓임을 받도록 하기"위한 것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가 "내어 줌을 당하신"것은 우리로 하여금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한편 신적인 섭리의 "보편적인 실례"는 "악인의 의인의 대속이 되고 궤사한 자는 정직한 자의 대신이 되는 것"(잠 21:18; 11:18)이다. 신적인 은혜의 "비할 데 없는 실례"는 "정직한 자"는 "궤사한 자"의 대속이 되고 의인은 악인의 대신이 되는 것이다. 2. 예수니께서는 "채찍질"을 당하셨다. 이 형벌은 특히 마흔 번 이상 때리는 것을 금한 유대인의 율법의 온건한 절제를 모르는 로마인들에 의해 가해진 것이었으므로 실로 비참하기 이를 데 없는 잔인한 형벌이었다. 이 형벌은 사형 선고를 받은 자에게 무모하게 가하여졌다. "막대기"에는 도끼가 끼워 있지 않았지만 오히려 그 이상이었다. 이로써 다음과 같은 성경 말씀이 이루어졌으니, "밭가는 자가 내 등을 갈았도다"(시 129:3). "나를 때리는 자에게 내 등을 맡겼다"(사 50:6).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 53:5). 그가 "채찍으로 맞으신 것"은 우리가 영원히 "전갈로 맞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셨다. 3. 그 때에 그는 "십자가에 못박히게 내어 줌"을 당하였다. 보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치우쳐 벗어남)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죄는 타겟에 이르지 못함+빗나감, 악은 생명-진리-말씀 없음 곧, 하나님을 대적/거역함)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상함으로 우리는 나음을 입었도다(사53:5-6)... 그가 매맞으신 것은 우리의 죄악과 허물 때문이며, 그가 죽으심은 죄로 죽은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속량하고 하나님과 화목케 하기 위함이었던 바, "그의 십자가의 피"가 아니면 결코 화평이 있을 수 없다(골 1:20). 그러므로 채찍질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더 나아가 그는 "십자가에 못 박혀져야만"한다. 십자가는 로마인들 가운데만 있었던 사형대였다. 아마도 그 방법은 가장 무섭고 비참하게 죽도록 하기 위하여 끝까지 매달아 놓는, 이른 바 기지(wit)와 잔인성이 복합되어 고안된 것처럼 보여진다. 십자가는 손과 발에 못을 박아 땅 위에 세워 놓았으며, 몸이 고통 중에서 죽을 때까지 그 못에 매달려 있게 되어 있다. 그리스도께서 정죄를 받아 이러한 죽음을 당하신 것은 그가 장대 위에 높이 매달린 구리뱀의 상징에 부합되도록 하시기 위함이었다. 그것은 피흘리는 죽음이었으며, 고통스럽고 수치스러우며 저주받은 죽음이었다. 그 죽음은 매우 비참한 것이었기 때문에 동정심이 있는 통치자들은 법에 의해 십자가형을 받도록 되어 있는 자들을 먼저 교살시킨 후 십자가에 못박도록 명령하였다. 쥴리어스 시져도 어떤 폭도들을 그렇게 처형하였다(Sueton, lib. 1). 맨 처음 기독자인 황제 콘스탄틴은 칙령을 내려 로마인들 가운데서 이 십자가의 사형 방법을 폐지시켰다(Sozomen, Hist. lib. 1. ch.8). Ne salutare signum subserriret ad perniciem ─ 즉 이는 구원의 상징이 사람을 죽이는 데 사용되지 않도록 하2기 위함이다. Ⅱ. 그리스도를 집행할 준비를 하면서 군병들이 그에게 가한 야만적인 행동. 그가 정죄를 받으셨을 때, (보통의 관례를 따르면) 형의 집행을 앞둔 그에게는 자신의 죽음을 준비할 수 있는 약간의 시간이 허용되어야만 했었을 것이었다. 이미 디베리우스 당시에 아마도 이러한 비이성적으로 무리하게 내려진 사형언도에 대한 불평, 또는 그것이 섣부르고 경솔하게 결정되었다는 불평의 여지를 없애기 위하여 판결 후 죄수의 형집행을 최소한 "열흘" 동안 연기될 수 있도록 로마 총독에 의해 제정된 법이 이미 있었다(Sueton in Tiber. cap. 25). 그러나 우리 주님에게는 한시의 여유도 주어지지 않았다. 주변상황은 숨가쁘게 돌아갔으며 그는 그 때에 숨쉴 겨를조차도 없으셨다. 그것은 하나의 "고비"였으며, 그에게는 "고요한 한 때"도 주어지지 않았다. 그야말로 "사태는 더욱 긴박하고 험악해져 갔으며," 폭풍은 그치지 않고 계속적으로 휘몰아쳤다.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도록 내어 줌을 당하셨을 때," 그 정도만으로도 족하였었다. "몸을 죽이는" 자들은 그들이 더 이상 가할 것이 없음을 인정하고 그 외의 일을 행하지 않는 법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원수들은 "더 이상 더 가하려고" 하였으며, 만일 가능하다면 천 개의 시체들을 그 위에 하나로 쌓아 놓으려고 하였던 것 같다. 빌라도는 그가 무죄하다고 선포하였지만, 그의 군병들과 호위병들은 "그에 대한" 명령권자의 증거보다는 "그를 대적하는" 백성들의 소동과 분노에 의해 영향을 받고 요동되어 그를 사정없이 모욕하였다. 유대인 "불한당"들이 로마 군병들에게 그렇게 하라고 입김을 불어넣었거나 또는 아마도 그들이 이와 같이 모욕을 준 것은 그에게 원한이 있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그를 놀리려고 했기 때문인 것 같이 보인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면류관을 쓰고 싶어하는 것"으로 이해를 하였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불행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모욕하거나 어떤 사람의 재난을 놀림감으로 삼는 것은 비열하고 야비하고 천박한 사람들임을 나타내는 증거가 된다는 사실이다. 몇 가지로 살펴본다면, 1. 이 일은 어디에서 행해졌는가? "관청"에서 행해졌다. 잘못을 범한 자와 모욕을 당한 자에게 피난처가 도어야 할 "통치자의 집"이 잔학한 행위를 자행하는 도장이 된 것이다. 그렇게 의로운 사람이 피흘림을 피하기를 원하였던 총독이 이와 같은 일을 "그의 집"에서 행해지도록 했는가는 의심스럽다. 아마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