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역개정]마22장 ===혼인 잔치 비유 1. 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이르시되 2.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3.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4.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르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5. 그들이 돌아 보지도 않고 한 사람은 자기 밭으로, 한 사람은 자기 사업하러 가고 6.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이니 7.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8.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하지 아니하니 9. 네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라 한대 10.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잔치에 손님들이 가득한지라 11. 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12. 이르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그가 아무 말도 못하거늘 13.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하니라 14.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 15. ○이에 바리새인들이 가서 어떻게 하면 예수를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까 상의하고 16. 자기 제자들을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께 보내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진리로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 아무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심이니이다 17. 그러면 당신의 생각에는 어떠한지 우리에게 이르소서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 하니 18. 예수께서 그들의 악함을 아시고 이르시되 외식하는 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19. 세금 낼 돈을 내게 보이라 하시니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왔거늘 20.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형상과 이 글이 누구의 것이냐 21. 이르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이에 이르시되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22.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놀랍게 여겨 예수를 떠나가니라 ===부활 논쟁 23.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그 날 예수께 와서 물어 이르되 24. 선생님이여 모세가 일렀으되 사람이 만일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에게 장가 들어 형을 위하여 상속자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25. 우리 중에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장가 들었다가 죽어 상속자가 없으므로 그 아내를 그 동생에게 물려 주고 26. 그 둘째와 셋째로 일곱째까지 그렇게 하다가 27. 최후에 그 여자도 죽었나이다 28. 그런즉 그들이 다 그를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일곱 중의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 2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30.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31. 죽은 자의 부활을 논할진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 바 32.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 33. 무리가 듣고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더라 ===가장 큰 계명 34. ○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35. 그 중의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36.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그리스도와 다윗의 자손 41. ○바리새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시되 42.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누구의 자손이냐 대답하되 다윗의 자손이니이다 43. 이르시되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44.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45.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46. 한 마디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그 날부터 감히 그에게 묻는 자도 없더라 ======== 마태복음 22장 (개요) 본 장(章)은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기 이삼 일 전에 성전에서 대화하신 말씀의 계속이다. 그때의 그의 대화는 특별한 비중과 중요성을 가진 것으로써 광범위하게 기록되어 있다. 내용별로 살펴보면, Ⅰ. 유대인의 거절과 이방인들의 초청에 관하여 혼인 잔치의 비유로 가르치심(1-10). 또한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손님이 받게 될 형벌을 말씀하심으로써 거짓으로 기독교의 신앙고백을 하는 위선자들의 위험을 경고하심(11-14). Ⅱ. 그리스도를 대적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과의 논쟁. 1.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에 대하여(15-22). 2. 죽은 자의 부활과 미래의 상태에 대하여(23-33). 3. 율법의 위대한 계명에 대하여(34-40). 4. 메시야와 다윗과의 관계에 대하여(41-46). ===== 혼인 잔치의 비유(마 22:1-14) 우리는 여기에서 "혼인 잔치"에 초청함을 받은 손님들에 관한 비유를 찾아 볼 수 있다. 여기에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셨다"고 되어 있는데, 이는 그의 대적자들이 "말한 것"에 대한 대답이 아니라(왜냐하면 그들은 침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를 잡고자"(마 21:46) 기회를 노리는 그들의 "생각"에 대한 대답이었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그리스도는 사람의 생각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 것인가를 알고 계신다. 왜냐하면 그는 그들을 통찰하시는 자이기 때문이다. 그가 "대답하신 것," 즉 그가 동일한 목적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계속하신 것은 이 비유가 전자와 같이 동일하면서도 이와는 다른 유사한 내용으로 복음적 초청제언과 그 제언의 초청에 응한 자들이 얻게 될 환영과 열납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포도원의 비유는 선지자들을 박해하였던 통치자들의 죄를 나타내고 있었다. 또한 뒤이어 말씀하신, 이 "왕의 아들의 혼인잔치" 비유는 먼저 초청받은 바 지도층에 속한 자들이 미리 예고하였던 바, 왕이 "아들의 혼인잔치"에 참여하시라는 초청장을 가지고 방문한 심부름꾼들에게 밭과 사업상 겨를이 없다는 구실로 참여을 거절하고, 심지어는 그 종들을 잡아 살해하였던 바, 오기를 거절하여 왕의 명예를 실추시킨 자들의 동네를 군대를 보내 불사르며 또한 살인자를 찾아 진멸함과 동시에께, 원래 계획에서는 일단 제외되었던 바 사람의 선-불선에 관계없이 길거리의 오가는 행인들을 가리지 않고 초청하여 응하는 자마다 모두 데려오도록 하고 있는 바 , 그 참석자 중 혼인예복을 갖추지 못한 자를 바깥어두움으로 내어쫓음으로써 보편적으로 복음을 무시해버린 백성들의 죄를 어떻게 책벌할 지를 나타내 보여 주고 있다. Ⅰ. 복음적인 준비가 여기에서는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느 노임금의 잔치로 표현되고 있다. 이것은 "천국"을 말하며, 이와 같은 준비가 새로운 계약 안에서, 새로운 계약에 의해 고귀한 영혼들을 위해 마련되어 있다. 이 "임금"은 "임금들 중의 임금" 이시며 "위대한 임금"이신 하나님이시다. 1. 여기에 보면 "자기 아들을 위해 베풀어진 혼인 잔치"가 있다. 그리스도는 신랑이시며, 교회는 그 신부, 단체적 신부요(또한 그리스도는 왕이시요, 교회는 왕후이다), 성도 각인은 단독자로서 그리스도의 신부이기도 하다. 복음 시대는 "그의 혼례식 날"(아 3:11)의 시작이다. 믿음으로 "장자의 교회"를 바라보라. 그것은 "하늘에 기록되어 있고," 하나님에 의하여 어린양 그리스도에게 주어졌다. 그 가운데서 여러분은 "신부 곧 어린양의 아내"(계 21:9)를 볼 수 있다. 복음의 계약은 그리스도와 성도 사이의 혼인 계약이며 또한 그것은 하나님께서 예비하여 주신 바 지고지선의 영광스러운 혼인이다. 이 비유의 분지(分枝)는 다만 여기에 언급만 되어 있을 뿐 아직 수행-완료가 되지는 아니하였다. 2. 여기에서 보면 "이 잔치를 위해 마련된 혼인식 오찬[정오의 잔치]"(4절)이 있다. 영광스러운 교회의 교회원으로서 가지는 바, 모든 특권들, 새 계약의 모든 축복들, 사죄, 하나님의 호의, 양심의 평화, 복음의 약속들, 그것들 속에 포함된 모든 부요함들, 은혜의 보좌에로의 접근, 성령의 위로들, 영생의 굳건한 소망 등, 이 모든 것들이 이 잔치, 즉 지상에 있는 하늘과 하늘 안에 있는 하늘을 위해 마련된 혼인준비물들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잔치를 그의 의도 속에, 그의 계약 속에 미리 이미 준비하셨다. 그것은 영광 중에서 가지게 될 [최고최상의] 저녁 식사 이외의 것으로써 낮 시간에 가지는 현재적인 특권들을 나타내어 주는 오찬이다. (1) 그것은 "잔치"이다. 복음의 준비물들은 "잔치"(사 25:6), 즉 풍성함이 한량없는 "살진 것들의 잔치"로 예언되었으며 또한 의식적인 율법의 많은 명절들에 의해 예표되었다(고전 5:8). "우리가 명절을 지키자." "잔치날은 즐거운 날"(에 8:17)이며, 복음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복음의 계속적인 잔치이다. [복음은 계속적인 누림의 잔치이다.] "송아지와 살진 것들이" 이 잔치를 위해 "도살된다." 이는 맛있는 음식(niceties...기막힌, 미묘한 진찬)일뿐만이 아니라 그야말로 실속 있는(substantial...[주님과 주님의 생명능력, 그분의 어떠하심을 제대로 누림에 없어서는 안되는] 참되고 실용적인, 실재하며 필수적인) 음식이다. 잔치날은 "도살의 날" 또는 제삿날이다(약 5:5). 복음의 준비물들은 그리스도의 죽으심, 곧 그 자신의 희생 제물에 모두 기초되어 있다. 잔치는 사랑 때문에 베풀어졌으며, 그것은 화목케 하는 잔치요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선한 뜻의 표식이다. 그 잔치는 "웃는 자"(전 10:19)를 위해 배설되었으며, 그것은 즐겁게 하는 잔치이다. 그 잔치는 푸짐하게 베풀어졌다. 복음의 계획은 "모든 굶주린 영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우는 것이었다. 이 잔치는 교제를 위해 베풀어졌는데, 이는 하늘과 땅 사이의 교제를 유지하기 위함이다. 우리는 "(부족함이 전혀 없이, 넘치는 풍성의)포도주의 연회"에 보냄을 받았으며, 우리는 거기에서 "우리가 요구하고 청원하는 것이 [참된 의미에서] 무엇인지를 말할 수 있다." (2) 그 잔치는 "혼인 잔치"이다. 혼인 잔치는 대개 풍성부요하고 무료이며 즐거운 법이다.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맨 처음 기적은 혼인 잔치를 위해 풍성한 준비를 해 주신 것이었다(요 2:7). 정녕 "어린양의 혼인의 기약이 이르고 그 아내가 예비 된" 그리스도의 혼인 잔치, 즉 승리하여 개선하는 잔치에는 모든 것이 궁핍하지 않고 풍족하게 마련될 것이다(계 19:7, 17, 18). (3) 그 잔치는 "왕의 혼인 잔치"이다(삼상 25:36). 그것은 "왕의 잔치"(삼상 25:36)로써 (종이 아닌) 아들을 위한 혼인 잔치이다. 그 때에 만일 그가 잔치를 베푸셨다면, 그는 아하수에로 왕과 같이 "그 영화로운 나라의 부함"(에 1:4)을 나타내시려고 하실 것이다. 은혜의 계약 안에서 믿는 자들을 위해 마련된 음식물들은, 기다려야만 하는 (죄된 우리처럼) 무익한 벌레 같은 것이 아니라, "영광의 왕"에 어울리는 것들이다. 그는 그 자신과 같이(like himself) 아낌없이 주신다. 왜냐하면 그는 그들에게 "엘 샤다이"(충만하신 하나님)로서의 자신을 주시며, 영혼을 위한 참된 잔치를 베푸시기 때문이다. Ⅱ. 복음의 부르심과 제안은 이 잔치에로 부르신 초청에 의해 표현되고 있다. 잔치를 베푼 자들은 그 잔치를 함께 빛내기 위하여 손님들을 부르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손님들은 사람들의 자녀들이다. "주님이시여, 사람이 무엇이관대, 이와 같이 존귀함을 받게 되는 것입니까! " 처음으로 초청된 손님들"은 유대인들이었다.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러한 초청이 주어지고 있다. 사역자들은 초청하러 파송된 "종들"이다(잠 9:4, 5). 1. 손님들은 잔치에 "초청"을 받고 있다. 복음의 기쁜 소리를자기 집안에서 듣고 있는 모든 자들에게 이 초청의 말씀이 보내어지고 있다. 초청장을 가져 온 종들은 거기에 자신들의 이름을 써 넣은 것이 아니다. 그것이 왕의 초청인 이유는 종으로 보냄받은 그들을 배척하고 내어쫓아 복음소식의 초청을 거절하는 사람 이외에는 그 어느누구도 그 참여한 바 왕의 아들의 잔치석상에서 내어 쫓기게 되지 않기 때문이다. 오찬에 초대된 자들은 잔치에 초대를 받고 있다. 왜냐하면 복음의 특권에 참예하고 있는 자들은 신랑의 절친한 친구와 겸손한 종들처럼 주 예수님을 당연히 존경하며 따르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잔치에 초청되는" 것은 또한, 그들로 하여금 "신랑을 맞으러 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아들을 영화롭게 하도록 하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기 때문이다. 2. 손님들은 초청되고 있다. 왜냐하면 복음에는 은혜스러운 청혼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은혜스러운 설득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너희를 권면하며, 간구하노라"(고후 5:11, 20). 그리스도께서 가난한 영혼들의 행복을 위하여 얼마나 마음을 기울이시는가를 보라! 그는 그들의 궁핍함을 아시고 그들을 위해 준비하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연약함과 건망증을 고려하시고 그들에게 보내시는 것이다. 초청된 손님들이 오는 것을 꾸물거릴 때 그 임금은 "다른 종들을 보내었다." 구약의 예언자들이 효과를 보지 못하고, 그들에게 잔치에 대해 말한 세례 요한과 그리스도 자신이 거의 준비를 다하였을 때("하나님의 나라는 가까이 있었다."), 복음의 사도들과 사역자들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후에 파송되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그 초청을 수락할 것을 설득케 하도록 파송되었다. 어떤 사람은 사람들에게 단지 그들로 하여금 모든 것을 버리고 와서 기쁨으로 참예하도록 암시를 주는 것만으로 족하다고 생각할는지 모른다. 다시 말하자면 엄숙한 잔치가 되는 동안 임금은 집을 개방하고 있다는 암시를 주는 것만으로 족하다고 생각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본래 타고난 인간은 하나님의 영의 일들을 분별하지 못하며' 따라서 이것의 참된 의미를 모르기에 그 가치를 제대로 평가하지 못하며 따라서 마음을 다하여 그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의 매는 줄과 사랑의 족쇄를 가지고 끌어내는" 강력한 권유를 함으로써 초청 수락을 강권해야만 하게 되어 있다. 만일 반복적인 초청이 우리를 감동시킨다면 얼마나 좋을까, "보라, 성령이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또한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오라 할 것이다"(계 22:17). 만일 초청의 이유가 우리에게 역사 한다면, "보라. 오찬이 준비되어 있고, 소와 살찐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도다." 아버지는 우리를 맞아들일 준비가 다 되어 있고, 성자는 우리를 위해 간구하며 성령은 우리를 성결케 할 준비가 다 되어 있다. 죄사함이 준비되어 있고, 평화가 준비되어 있고, 위로가 준비되어 있다. 약속들이 "생수의 우물"처럼 공급할 준비가 다 되어 있다. 규례들이 운반시에 부는 황금 호각처럼 준비되어 있으며, 천사들이 우리를 시중들려고 준비하고 있으며, 피조물들이 연합할 준비를 하고 있으며, 섭리들이 우리의 선을 위해 역사 할 준비가 되어 있으며, 마지막으로 하늘이 우리를 받아들이기 위하여 준비되어 있다. 예비된 하늘 나라가 "마지막 때에 나타날" 준비를 차리고 있다. 이러한 모든 것이 준비되었는데, 우리는 준비하지 않아도 되는가? 이 모든 것은 우리를 위해 이미 다 준비되어 있다. 우리가 다만 올바른 태도로 온다면 하늘은 우리를 환영할 것임을 의심할 나위가 없다. 그러므로 오라, "오! 결혼식에 오라. 너희를 권하노니 이 모든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후 6:1) Ⅲ. 그리스도의 복음이 종종 사람의 자녀들 가운데서 받는 냉대는 이 메시지가 받는 냉대와 이 메시지를 전하는 자들이 받는 뜨거운 대우로 표현되어 있는데, 임금 자신과 왕적인 신랑은 이 둘 중에서 하나를 받게 되어 있다. 이 사실은 원래 하나님의 섭리를 거역한 유대인들을 반영하는 것이지만,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복음이 많은 각계 각층의 사람들에 의하여 멸시와 반대를 받게 될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 같다. 1. 이 메시지는 매우 업신여김을 당하였다(3절). "그들이 오기를 싫어하였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죄인들이 그리스도와 또한 그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이 "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하지 않으려고"(요 5:40)하기 때문이다. "너희가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그들이 옴으로써 행복을 얻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거절해 버린 것은 그들 자신의 행동이었으며, 이것은 죄인들의 불행을 더욱 가중시킬 것이다. "나는 하려고 했지만 너희가 하지 않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5절). "그들은 이를 업신여기었다." 그들은 여기에 오는 것이 그리 가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며 또한 심부름꾼들이 필요 이상으로 법석을 떤다고 생각하였으며, 아무리 진수성찬을 차려 놓았지만 그들은 집에서도 이러한 것을 스스로 차려서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그리스도와 또한 그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위대한 구원에 대해 경시하는 것은 세상의 저주스러운 죄악이라는 사실이다. 그들은 [초청장을 가지고 온 종을] (주의하며 초청장을 보낸이를 합당하게 존중하여 참여함으로써 명예롭게 하거나) 돌아 보지도 아니하였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자신의 영혼의 문제에 대하여 직접적인 혐오감을 가지지는 않지만 그것에 대하여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관심을 가지지 않는 자들은 단순한 부주의로 말미암아 영원히 멸망하게 된다. 그리고 그들이 "혼인 잔치를 돌아보지도 않은" 이유는 그들이 더 마음을 두는 것이 있었으며 또한 그것에 더욱 마음을 두었기 때문이었다. "하나는 자기 밭으로, 하나는 자기 상업차로 갔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세상적인 직무와 이익은 많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와 밀접하게 하는 데 있어서 큰 장해물이 된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누구도 잔치에 참예하기를 일체 사양하였으며 어떤 사람은 그럴 듯한 변명을 늘어놓았다(눅 14:18). 농촌 사람들은 그들이 돌아보아야 할 밭을 가지고 있는데, 여기에는 해야 할 일이 많이 있게 마련이다. 도시에 있는 자들은 자기들의 상점을 돌보며 계속적으로 장사해야만 한다 .그들은 "사고, 팔고, 이익을 얻어야만" 한다. 분명히 농부들과 상인들이 그들의 직무에 부지런해야만 한다는 것은 그나름대로 참되다. 그러나 이로 말미암아 그들로 하여금 종교를 최우선순위의 중차대한 일로 여기며 존귀하게 하는 일에서 벗어나게 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 이러한 합법적인 일들이 우리를 파멸시키는 것은 그것들이 부당하게 운영될 때, 우리가 "필요한 한 가지 일, 지고지선, 최우선의 일"을 무시할 만큼 "많은 일에 염려하고 근심할" 때이다. 여기에서 살펴 볼 수 있는 것..., 도시와 농촌은 자기 나름대로의 유혹물들을 가지고 있는데 하나는 상업, 하나는 밭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손에 가지고 있는 세상의 것들은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이 우리와 그리스도 사이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세심하게 마음의 배려를 해야만 한다. 2. 그 종들은 처참하게 죽임을 당하였다. " 그 남은 자들" 또는 그들 중에서 남아 있는 자들, 다시 말하면 "밭"이나 "상업차"로 가지 않은 자들은 농부나 상인이 아닌 교회 지도자들, 즉 "서기관과 바리새인들과 대제사장들"이었다. 이들은 박해자들이었으며, "종들을 잡아 능욕하고 죽였다." 비유 중에 나타난 이 사실은 도저히 상식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으로써 누구든지 그들을 잔치에 오라고 초대하러온 자를 이와 같이 처참하고 야만적으로 대우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비유의 적용에 있어서 그것은 사실이었다. 진실로, "아름다운 발"을 가진 자들이 "경건한 잔치에 대한 아름다운 소식"(나 1:15)을 전하였기 때문에 "만물의 찌끼와 같이 취급받았다"(고전 4:15). 선지자들과 세례 요한은 이미 이와 같이 죽임을 당하였으며 사도들과 그리스도의 사역자들도 동일하게 취급을 받아야만 하였다. 유대인들은 직접적이든지, 간접적이든지 처음 복음을 전파한 전파자들의 대부분을 박해한 장본인이며, "사도행전"의 역사, 즉 "사도들"의 고난을 증언하고 있다. Ⅳ. 유대 교회와 백성에게 임한 완전한 멸망은 여기에서 분노한 임금이 이 무례히 명령한 거부자들에게 행한 보복에 의해 표현되고 있다(7절). "그는 노하셨다."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았던 유대인들은 복음을 거절함으로써 그의 진노와 저주의 자식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노하심이 끝까지 저희에게 임하였느니라"(살전 2:16). 이제 여기에서 살펴 볼 수 있는 것은, 1. 어떤 죄가 파멸을 초래하게 하였는가? 그것은 그들의 "살인죄"였다. 그는 자신의 부르심을 "업신여긴 자들"을 진멸시켰다고 말씀하시지 않고, "그의 종들을 죽인 자들"을 진멸시키셨다고 말씀하셨다. 이는 마치 하나님께서 그의 복음의 때보다는 그의 사역자들의 생활에 대해 더욱 마음을 쓰시는 것 같다. "그들을 건드리는"자는 "그의 눈동자"를 건드린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그리스도의 신실한 사역자들을 박해하는 것은 어떤 것보다도 더 큰 범죄의 분량을 채우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므낫세는 "무죄한 자의 피를 흘려 예루살렘에 가득 채우는" 죄를 범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사하시려고 하지 않는 죄"이다(왕하 24:4). 2. 임박한 파멸, 그 자체는 어떤 것인가? "그는 자기 군대를 보내었다." 로마 군대는 주하나님께서 자신의 진노의 백성을 진멸시키기 위해 들어 올려 보낸 그의 군대였다. 또한 주하나님은 "그들에게 그 백성들을 짓밟게 하는 임무"를 부여하였다(사 10:6). 하나님은 만군의 여호와이시며, 비록 그들이 "뜻하지 않거나 그 마음에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사 10:7) 자신의 목적을 달성시키기 위하여 그들을 마음대로 사용하신다. 미가서 4장 11, 12절을 보라. "그의 군대는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살랐다." 이것은 이 일이 있은 뒤 40년 후에 로마 군대에 의하여 유대인들이 파멸되고 예루살렘이 불탈 것을 분명히 나타내어 준다. 일찍이 이 세대 중에 이보다 더 큰 파멸과 도한 불과 칼로 인한 비참한 멸망은 더 이상 찾아 볼 수 없다. 예루살렘은 "하나님께서 그 이름을 두시기 위하여 택한 거룩한 도성"이요, "아름다운 곳이요, 온 땅의 기쁨"이었지만 이제는 "창기가 되었고 공평이 거기에 없으며, 이제는 살인자들만 모여 있도다"(선지자가 말한 것처럼 사 1:21). 그러므로 심판이 이곳에 이르러 다시 고칠 수 없을 정도로 멸망하게 되었다. 또한 이것은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반대하는 모든 자들에게 한 본보기로 제시되어 있다. 그의 언약에 대해 불평을 하는 자들을 복수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었다. Ⅴ. 이방인들을 데려 옴으로써 교회를 다시 채우는 것은 여기에서 "큰길가에서" 손님들을 데려다가 잔치석을 메우는 일로 표현되고 있다(8-10절). 여기에서 보면, 1. 잔치의 주인께서는 처음에 초청되었던 자들에 관하여 불평하고 계시다(8절). "혼인 잔치는 예비 되어 있다." 즉 은혜의 계약이 조인될 준비가 되어 있다. 교회가 설립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러나 "청함 받은 자들," 즉 "언약과 약속들이 속해 있으며" 옛날에 "살찐 것들로 마련된 잔치"에 초대되었던 유대인들은 "합당치 아니하였다." 그들은 전혀 합당치 않았으며 또한 그리스도를 멸시함으로써 초청 받은 모든 특권을 완전히 상실하고 말았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죄인이 멸망하는 것은 하나님 때문이 아니라 그들 자신 때문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옛날 이스라엘이 가나안이 바라보이는 곳에 있을 때, 약속의 땅은 예비되었으며, 젖과 꿀이 이미 예비되었었다. 그러나 그들의 불신앙과 불평과 또한 그 좋은 땅에 대한 멸시는 그들을 이곳에서 내쫓아 그 시체들이 광야에 늘어지도록 하였다. "이런 일들은 그들에게 한 본보기로 일어난 것들이다"(고전 10:11; 히 3:16-4:1 참조). 2. 그가 다른 사람들을 초대하기 위해 종들에게 사명을 줌. "그 동네"(7절) 사람들은 거절하였다. 그렇다면 "사거리 길에 나가라." 즉 처음에는 사절되었던 "이방인의 길"(마 10:5)로 가라. 이와 같이 유대인이 넘어짐으로써 이방인들에게 구원이 이르게 되었다(롬 11:1, 12; 엡 3:8). 여기에서 유의할 것..., 비록 많은 사람들이 주님 은혜를 거절하고 하나님 나라의 능력에 저항한다고 할지라도 "이 세상에 그의 나라를" 가지실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스라엘이 모여지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는 영화롭게 되실 것이다." 그리스도의 구원이 이방인들에게 주어진 것은, (1) 천만 뜻밖의 일이었다. 이와 같은 놀라움은 길 가던 사람이 혼인 잔치에 초대를 받고 놀라워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유대인들은 오래 전에 복음에 관심을 가졌으며, 또한 메시야와 그 왕국을 기대하였다. 그러나 이방인들에게 이것은 그들이 전에 들어보지 못했던 전혀 새로운 것이었으며(행 17:19, 20), 따라서 그들에게 속한 것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사 65:1, 2 참조). (2) 그것은 보편적이고 차별이나 구별이 없는 것이었다. "사거리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청하여 오너라." 사거리는 공공적인 장소로써, 거기에서 "지혜가 부르짖고 있다"(잠 1:20). "길로 나가서 누구에게든지 물으라(욥 21:29). 고귀한 자나 비천한 자, 부자와 가난한 자, 속박자나 자유자, 젊은이나 늙은이,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를 막론하고 초청하라. 그들로 하여금 복음의 때에 복음의 특권을 누리기 위해 올 것을 말하도록 하라. 누구든지 오려고 하면 예외 없이 오도록 하라." 3. 이 두 번째 초청의 성공. 만일 어떤 사람이 오지 않으려고 한다면 다른 사람이 오려고 한 것이다(10절). "종들이 나가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 왔다." 그 종들은 명령에 순종하였다. 요나는 "사거리로 보냄을" 받았으나, 자기 나라의 명예를 소중히 한 나머지 그 심부름을 회피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도들은 비록 유대인이기는 하지만 자신들의 국가를 존경하기에 앞서 그리스도의 봉사를 더 먼저 하려고 하였다. 사도 바울도 유대인들을 위해 근심하기는 했지만, 이방인의 사도로서의 자신의 직무를 오히려 자랑하였다. "그들이 모두 함께 모였다." 복음의 목적은, (1) 영혼들을 함께 모으는 것이다. 유대 백성들만 아니라 "흩어져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요 11:52), 즉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요 10:16)을 함께 모으는 것이다. 그들은 한 지체로, 한 가족으로, 한 단체로 모여졌다. (2)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에게 존경을 바치고 새 계약의 특권에 참예 하도록 하기 위하여 혼인 잔치에 모으는 것이다. 의연금이 있는 곳에 가난한 자들이 모이게 될 것이다. 그런데 함께 모여진 손님들은, ① 무리들이었다. 즉 "그들이 만나는 대로 데려 온 자들"이었다. 혼인자리가 가득 찰 만큼 많은 사람들이었다. 유대인의 표를 가진 사람들은 겨우 셀 수 있는 정도였지만, 다른 나라의 표를 가진 사람들까지 포함하면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였다'(계 7:9)(사 60:4, 8 참조). ② "악한 자나 선한 자"가 섞여 있는 무리들이었다. 그 중 어떤 사람들은 경건한 헬라인들(행 17:4)이나 고넬료와 같이 회심하기 전에 착실하고 열심히 있었을 것이며, 또 어떤 사람들은 고린도 사람들(고전 6:11)처럼 매우 방탕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사람이 너희 중에 있었다." 또 어떤 사람은 그들이 회심한 후에 "진심으로 주께 돌이키지 않고" 거짓으로 행함으로써 악한 것이 증명된 경우도 있었을 것이며, 또 어떤 사람은 의롭고 성실하며 좋은 사람으로 입증된 일도 있었을 것이다. 사역자들은 복음의 그물을 던질때에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를 함께" 들어올리게 된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을 있는 그대로 아신다." Ⅵ. 위선자들, 즉 교회 "안에" 있지만 교회에 "속하지" 않고,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지고 있으나 실상은 죽은 이름을 가지고 있는 위선자들의 경우는 "예복을 입지 않은 손님"으로 표시되고 있다. 그들은 함께 모여 있던 악한 자들 중의 하나이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자들은 신앙 고백하기를 거절하는 자와 건전한 마음으로 신앙 고백을 하지 않는 자들이다. 이 위선자들에 대하여 다음의 몇 가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1. 그의 발견. 그는 어떻게 발견되어졌는가? (1) "임금이 (친히) 손님을 보러 왔다." 즉 준비하고 온 자들을 환영하고, 그렇지 않고 온 자들을 내어쫓기 위해 왔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하늘의 하나님은 신앙을 고백하며 지상 교회에 출석하여 명부에 올린 자들에 대해 특별히 유의하신다는 사실이다. 우리 주 예수님은 "금 촛대 사이로 걸어다니시며" 따라서 "그들의 행위를 아신다." 계시록 2장 1, 2절, 아가서 7장 12절을 보라. 참얼굴을 가린 모든 가면들은 곧 벗겨질 것이며 모든 사람들이 있는 그대로 나타날 것이라는 위선자에 대한 이 경고가 우리에게 대한 경고가 되도록 하자. 하나님은 우리의 진실성에 대한 증인이 되신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격려가 되도록 하자. 여기에서 살펴볼 수 있는 것..., 이 위선자가 "임금이 손님을 보러 들어오기 전"까지는 "예복을 입지 않은 것"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누가 진심으로 신앙을 고백하고 있는지 않는지를 아는 것은 하나님의 특권이라는 사실에 유의하라.((사람들의 선악을 섣불리 판단하며 뿌리채 분별하려는 것을 멈추라....다만 부탁하시며 명령하신 바 복음말씀을 HS의 인도따라 선포하라!!...나머지는 주께 맡겨라)) 우리는 여러 모로 사람에게 속을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속지 않는다. 심판의 날은 큰 심문의 날로써, 그때에는 모든 손님들이 임금 앞에 나타나게 될 것이다. 그때에 "그는 고귀한 것과 사악한 것"(마 25:32)을 구별하실 것이며, "마음의 은밀한 것들이 그때에 나타나게 될 것이며," 또한 지금은 구별하기가 쉽지 않은 "의인과 악인 사이"를 확실하게 구별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손님들은 검사를 받기 위해 준비해야 하며 또한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불꽃같은 눈을 어떻게 지나갈 것인가를 생각해야만 한다. (2) 그는 들어오자 즉시 위선자를 찾아내었다.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았다." 단지 한 사람이었지만 그는 곧 그를 주시하였다. 신적인 공의로 말미암아 체포되는 것에서 피하여 군중 속에 숨으려고 하는 것은 부질없는 노릇이다. 그는 혼인 예복을 입지 않았다. 그는 결혼식의 엄숙성에 어울릴 정도로 몸치장을 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가진 최고의 옷을 입지 않았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많은 사람들이 예복을 입지 않고 혼인 잔치에 참석한다는 사실이다. 만일 복음의 혼인 잔치라면 혼인 예복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빌 1:27)하고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한"(엡 4:1) 마음의 구조이며 또한 복음에 일치되는 생활의 진로이며, 그것에 대한 우리의 신앙 고백이라고 할 수 있다.((이것은 주님바라기, 곧 주께 맡겨드려 그분의 인도하심따라 합치되는 삶을 살 때 주께서 말씀-보혈-성령으로 주님의 어떠하심을 빼어닮게 하시는 바, 그리스도로 옷입음을 이루어 주신다!!)) "성도들의 의로움," 즉 그들의 참된 거룩과 성결 그리고 "그들에게 의로움이 되신" 그리스도는 "깨끗한 세마포"(계 4:1)이다. 이 사람은 벌거벗었거나 헌 누더기를 입고 있지 않았다. 그는 옷을 입고 있었으나, 그것은 혼인 예복이 아니었다. "주 예수로 옷 입는 자," 즉 기독자의 기질을 가지고 기독자의 은혜로 몸을 단장하는자, 즉 신앙으로 그리스도 안에 살며 오직 주 예수만이 모든 것이 되는 자들만 혼인 예복을 가지고 있다. 2. 그의 시련(12절). 우리는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살펴 볼 수 있다. (1) 그는 어떻게 심문을 받았는가?(12절)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잔치석에 안전하게 자리잡아 거드름을 피우고 있는 자에게 주어진 놀라운 질문이 아닐 수 없다. "친구여!" 이것은 살을 도려내는 듯한 말이다. 외관상의 친구, 그럴 듯하게 위장한 친구, 친구라고 하는 인연과 의무 때문에 형식적으로 친구임을 고백하는 친구여! 다음을 유의하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마음은 그와 함께 있지 않은 그의 거짓된 친구들이 교회에 많이 있다. "어찌하여 여기에 들어왔느냐?" 그는 그 위선자를 들여놓은 것 때문에 종들을 꾸중하시지 않았다(혼인 예복은 내적인 일이며, 사역자들은 그들의 인식이 미치는 범위 안에서 전파해야만 한다). 그러나 임금은 군중 속에 있는 그의 뻔뻔스러움을 점검하고 있으며, 그때에 그 위선자의 마음이 정진하지 못한 것을 알아차렸다. "너는 어찌하여 복음의 규칙에 전혀 유의하지 않으면서 복음의 특권에 참예할 것을 감히 요구하였느냐? 네가 어찌 내 율례를 전하였느냐?"(시 50:16, 17) 이와 같은 자는 잔치석의 오점으로써, 신랑을 모욕하고 친구를 욕되게 하고 그들 자신을 수치스럽게 만든다. 그러므로 "어찌하여 여기 들어왔느냐?" 여기에서 유의할 것..., 위선자들이 복음의 규칙에 대해 건방지게 참견하고 또한 복음의 특권을 강탈한 것에 대해 심문을 받기 위하여 호출을 받게 되는 날이 올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누가 너희에게 [하라고] 요구하였느뇨?" 안식일을 멸시하고 성례들을 욕되게 한 것이 고려되어져야만 하며 또한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은" 모든 자들에게 그들의 헛된 낭비의 행동에 대하여 심판이 행해져야만 한다. "어찌하여 이러한 때에 거만하고 불결한 채로 주님의 상에 들어왔느냐? 네 마음이 탐심을 추구하면서도 백성들이 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선지자 앞에 앉기 위하여 무엇을 가지고 왔는가? 어찌하여 여기 들어왔느냐? 문으로 들어오지 않고 도적과 같이 다른 길로 들어왔느냐? 이것은 불성실한 입장(entry)이며, 명찰이 붙어 있지 않은 소유물(possession)임에 틀림없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교회에 출석하고 있는 자들이 종종 자신에게 "어찌하여 내가 여기 들어왔느냐? 내가 혼인 예복을 입었는가?"라고 물어보는 것은 매우 유익하다는 사실이다. 만일 우리가 이와 같이 "우리 자신을 판단할" 수 있다면, "우리는 판단을 받게 되지 않을 것이다." (2) 그는 어떻게 죄를 깨달았는가? "저가 유구무언이어늘." 그가 스스로 재갈을 물린 바 되었다(그렇게도 쓸 수 있음, 고전 9:9). 그 사람은 자신의 양심에 의해 죄를 깨닫고 정죄하였으므로 자신의 공소 사실에 대하여 아무 말을 못하고 서 있었다. 교회안에서 살다가 그리스도 없이 죽은 자들은 큰 심판날에 한 마디도 말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변명할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그들이 누가복음 13장 26절에서 한 것처럼 "우리가 당신 면전에서 먹고 마셨다"고 변명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범죄한 것에 대한 구차한 변명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들에게 부과된 죄목은 부르심을 받았으나(예정하심따라 부르심 받았는데...주님은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기를 원하셨다!!) 예복없이 그리스도 앞에 또한 그의 탁자에 슬며시 감히 들어온 것이다. 예복을 입지 않고 잔치에 참예함으로써 밝은 빛과 소중한 사랑을 거스려 범죄한 그 자신들보다는 오히려 그들의 죄가 더 변명할 나위가 없으며 그들의 정죄보다 더 참을 수 없는 것이 될 것이다. 3. 그의 선고(13절).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1) 그는 범죄 받은 악행자처럼 결박하도록, 즉 수갑을 채우고 차꼬로 채우도록 분부되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올바른 길을 걷지 않으려고 한 자들에게는 수족이 묶이는 것밖에 기대할 것이 없다. 이 세상에는 종들, 즉 사역자들에 의해 묶임받게 되는 일이 있다. 종교적으로 말썽을 일으키며 난잡하게 행동하는 자들을 제지시키는 일을 "그들을 묶는다"고 일컬어진다(마 18:18). "특별한 규칙이나 또는 교회원으로서의 특별한 특권에 참예하지 못하도록 그들을 묶으라. 그들을 묶어서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에 넘겨라." "심판 날에" 위선자들은 묶임 받아, 묶이게 될 것이다. "천사들이 이 가라지들을 거두어 내어 풀무불에 던져 넣으리라"(마 13:41). 저주받은 죄인들은 피할 수 없는 선고에 의해 수족을 결박당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거대한 만(gulf)을 봉쇄시켜 버리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형벌에 저항하거나 빠져 나올 수 없다. (2) 그는 혼인 잔치에서 내어 던지도록 분부를 받고 있다. "그를 내어 던지라." 위선자의 악행이 드러나게 될 때 그들은 신실한 자의 모임에서 내어 던지게 된다. 즉, 메마른 가지처럼 잘려 버려지게 된다. 이것은 저 세상에서 버림받게 될 형벌을 나타낸다. 그들은 임금에게서, 왕국에서, 혼인 잔치에서 내어 던짐을 받게 될 것이다.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네가 네 눈으로 보리라. 그러나 그것을 먹지는 못하리라"(불신하는 장관과 같이. 왕하 7:2)는 사실은 그들의 처참함을 더욱 가중시켜 줄 것이다. 다음에 유의하라.... 기독자로서 합당한 생활을 하지 않는 자는 그들이 뻔뻔스럽게 주장하지만 실상 전혀 근거 없는 기대에 불과한 모든 행복들을 상실하고 만다. (3) 그는 비참한 감옥 속으로 들어가도록 분부를 받고 있다. "그를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우리 주님은 여기에서 이 비유를 통해 그것이 의미하는 바, 저 세상에서의 위선자들이 받게 될 정죄에 대하여 은근히 언급하고 계시다. 지옥은 완전한 흑암이며 또한 하늘, 즉 빛의 땅에서 나온 흑암이다. 또한 그것은 애굽의 흑암과 같이 불빛이나 그 소망이 없는 완전한 극도의 흑암이다. "어두워서 흑암 같고 죽음의 그늘이 져서 아무 구별이 없고 광명도 흑암 같으니이다"(욥 10:22). 다음에 유의하라... 위선자들은 복음의 빛을 스쳐서 완전한 흑암 속으로 들어가 버리고 만다. 또한 지옥은 실로 이러한 자들에게 참을 수 없는 저주가 될 것이다.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이것은 우리 주님께서 지옥의 고통에 대해 묘사하실 때 종종 사용하고 있는 구절로써, 여기에서는 비참한 상황 그 자체가 아닌, 분개한 죄인들이 취하게 될 태도로써 표현되고 있다. 거기에서 가장 큰 슬픔과 고뇌의 표현인 "우는 일"이 있게 될 것이다. 일시적인 안도감을 주는 한 줄기의 눈물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고통을 주는 영구적인 흐느낌이 있게 될 것이다. "이를 간다는 것"은 가장 큰 분노와 성냄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그들은 "그물에 걸린 영양같이" 될 것이며, "여호와의 분노가 가득하게" 될 것이다(사 51:20; 8:21, 22). 그러므로 듣고 두려워하자. 마지막으로, 이 비유는 전에 하셨던(마 20:16) 인상적인 말씀으로 결론이 맺어지고 있다.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14절). 혼인 잔치에 부름 받은 많은 사람들 중에서 그것을 경시하고 오히려 다른 일을 더 좋아하는 택함 받지 못한 자들을 제쳐놓는다면, 그 다음에 신앙고백을 하였으면서도 그 영혼의 기질과 그 회심의 경향이 그것과 정반대가 되는 자들을 제쳐놓는다면, 모독하는 자들과 위선자들을 모두 제쳐놓는다면, 실제로 택함 받은 자는 매우 적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사람은 많이 있지만, 혼인 예복 즉 "성령의 거룩케 하심으로써 구원"에 이르게 된 선택받은 자들은 매우 적다. 이것이 곧 "찾는 이가 적은 좁은 문과 좁은 길"이다. ------- 세금 문제에 관하여(마 22:15-22) 음흉하고 간사하게, 휘장 뒤에서 이렇게 불법을 시행하기로 서로 모의하고 난 후 그들은 지체하지 않고 이 일을 실행하였다. 몇 가지로 살펴본다면, 1. 그들이 고용했던 사람.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숨겨진 계획이 들통나서 그리스도께서 더 공고히 자신을 방어하는 일이 생기지 않게 하기 위하여 그 자신들 대신에 겉보기에는 결코 시험하는 자나 학자로 보여지지 않는 바, 말솜씨가 번지르르하며 속에는 임기응변의 대처능력과 교활함이 가득한 자신의 제자들을 보내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사악한 음모를 수행하기 위해 고용되는 사악한 도구들에 대해 이 세상에서 찾아 탐문하는 자들은 그런 자들을 이 세상 그 어디에서나 쉽사리 찾아낼 수 있다는 사실이다. 바리새인들은 교활하고 아양을 잘 떠는 그들과 함께 헤롯 당원들을 보내었는데, 이들은 유대인 가운데 있던 정당사람들로써 로마 황제와 또한 그의 대리인인 헤롯왕에게 온전히 그리고 기꺼이 복종하였던 자들이었다. 헤롯당원들의 주요한 임무는 백성들과 정부 사이를 화해시키고 또한 모든 사람들에게 세금을 내도록 독촉하는 것이었다. (*어떤 사람은 생각하기를, 헤롯 당원들은 세리가 관세를 거두는 자인 것처럼, 그들은 토지세를 거두는 자로서, 그들은 바리새인들의 음모를 전혀 모르고서 바리새인의 제자들과 함께 그리스도에게 나아갔는데, 또한 그 당시 헤롯 당원들은 세금을 내는게 당연하다 하였고 바리새파 사람들은 납세를 거부하고 있었던 바, 이 분쟁을 결말짓기 위하여 적당한 심판자이신 그리스도에게 나아가서 그 문제를 제시하였다고도 해석 한다. ) 헤롯에게는 로마의 통치 명령에 의해 세금 징수에 관여할 책임이 주어져 있었고, 이 헤롯 당원들은 이것을 주장함으로써 그들의 위대한 상전(헤롯)으로 하여금 로마에 더욱 돋보이도록 하고 있었던 반면, 바리새인들은 오로지 유대나라의 해방에 대하여 관심이 있었기에, 그들은 할 수만 있다면 로마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일들을 행하곤 하였다. 그런데 만일 그리스도가 세금을 납세하는 것을 은근히 옹호한다면, 바리새인들은 백성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에 대해 반대할 근거를 삼아 몹시 분노와 폭력 발산을 충동질하였을 것이며, 반대로 만일 그가 세금 내는 일을 반대하거나 비난한다면 헤롯 당원들이 정부로 하여금 그를 적대시하고록 했을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서로의 입장이 반대되는 자들이 함께 하여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에 대하여 계속적으로 반대하는 일은 흔히 있다는 사실이다. 삼손이 불을 지른 여우들은 여러 갈래로 보여졌지만 실상은 한 횃불로 붙여진 것들이었다. 시편 83편 3,5,7,8절을 보라. 만일 그들이 복음의 중요성을 반대하는 데 만장일치가 되었다고 한다면 우리는 복음의 전파-확장과 유지하는 데 있어서 그렇게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2. 그들이 질문을 유도하기 위하여 그럴 듯하게 꾸며댄 서론. 그것은 우리 주님에 대한 과잉칭찬이었다(16절).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 여기에서 유의할 것..., 극도로 사악한 계획이나 음모라는 것들은, 아첨에 가까운 특별한 포장속에 감추어진 경우가 많음은 흔히 있는 일이라는 사실이다. 만일 그들이 정말로 참된의미를 알려 하는 바, 매우 정직한 의도로 진지하게 질문하려고 왔더라면, 그들 스스로가 아첨에 가까운, 과장된 표현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은 실로 "속임수로 가려진 마음"이며 "온유한 입술을 가진 악한 마음"이며 "온유한 입술을 가진 악한 마음"(잠 26:23)이다. 이는 마치 입을 맞추고 배신한 유다나 또는 입을 맞추고 죽여버린 요압과 다름없다. (1) 그리스도에 대해 그들이 말한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볼 때, 정말] 옳았으며, 그들이 그것을 알았든지 혹은 몰랐든지 간에 우리가 그것을 [깨달아] 안다는 사실은 하나님께 감사할 일이다. ① 예수 그리스도는 [진실로] 신실하신 선생이었다. "당신은 참되시고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나이다." ...왜냐하면 "그는 참되시고, 아멘이시요, 신실한 증인"이시기 때문이다. 그는 진리 그 자체이시다. 그의 교훈에 있어서 그의 가르침의 주제는 하나님의 도,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지고지선의 진복누림을 위해 기독자마다에게 행하기를 원하시는 바, 의무의 도였다. 이 도는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만큼, 한량없는 행복에로 인도하는 도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도이며, 그 도의 방법은 참이었다. 그는 백성들에게 "바른 길," 즉 "그들이 가야만 할 길"을 보여 주었다. 그는 하나님의 도를 참되게 아시는 바, 노련한 선생이었으며, 신실하신 선생으로서 우리들로 하여금 그것을 알도록 하실 것이다(잠 8:6-9 참조). 좋은 선생의 특성은 온전한 진리, 즉 진리만을 유일하게 가르치며 또한 사람들의 어떤 호의나 편견, 증오나 선의을 고려하지 않으며, 어떤 사람을 기쁘게 하려는 소원이나 그를 그릇되게 하려는 두려움에서 나온 것이든지 간에 영향을 받아서 진리를 감추거나 왜곡하거나 남용하지 않는 것이다. ② 그는 담대한 책망자였다. 전파하는 데 있어서 그는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아니하셨다." 그는 사람의 찡그린 모습이나 또는 미소를 평가하지 않으셨으며, 또한 위대한 사람이나 많은 사람들의 환심을 사거나 두려워하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그는 "사람의 외모를 취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복음적인 심판에 있어서 사람들의 얼굴들을 고려하지 않으셨다. "유다 지파의 사자는 아무 앞에서도 물러가지 않았다"(잠 30:30) 즉, 가장 무서운 대적을 두려워하여 진리나 자신의 행위에서 발걸음을 돌리지 아니하였다. 그는 오로지 "정직"으로 판단하셨으며(사 11:4) 결코 편견으로 하시지는 않았다. (2) 그들이 말한 것은 그 내용에 있어서 참된 것이었지만 그 숨겨진 근본 의도는 아첨과 배반이었다. 그들은 그를 가장 질이 나쁜 악행자로 취급받도록 애쓰면서도 혀로는 "선생"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그에게 손해를 입히려고 계획하면서도 마치 그를 존경하는 것처럼 꾸몄다. 그들은 그의 지혜를 사람의 것으로 폄하하며 멸시하였고 또한 그들은 하나님의 전지전능성을 멸시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자신들이 이러한 거짓 위선속에 정체를 숨길 수 있으며 그에게 우쭐함과 교민을 부추길 수 있다고 생각하였으며 또한 그는 그들의 속셈을 꿰뚫어 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마음을 살피시는(계 2:23) 그리스도를 속이려고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극악무도한 무신론의 극치이며,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고 못난 짓이다. 하나님을 조롱하는 자들은 바로 그렇게 스스로 속이는 일을 할 수 밖에 없게 되어 있다(갈 6:7) 3. 이 경우의 제안. "그러면 당신의 생각에는 어떠한지" 마치 그들은, "많은 사람들이 이 일에 대하여 여러 갈래로 생각하고 있다. 이것은 실제적인 행동과 관련된 문제이며 또한 매일 일어나고 있는 문제이다.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한지 불가한지에 대하여 당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이야기 해달라"고 말한 것과 같았다. 그러나 그 이상의 질문을 내포하고 있는데, 그것은 즉 가이사는 세금을 요구할 권리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유대 나라는 이일이 있기 약 100년 전에 이미 로마의 칼에 의해 정복을 당하였으며, 따라서 다른 나라들과 같이 로마의 멍에 아래 예속되었으며, 또한 로마 제국의 한 영지가 되었었다. 그래서 그들은 점령지의 백성들에게 통행세와 일반세와 관세를 내도록 요구하였으며 때로는 인두세를 낼 것까지 강요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홀이 유다에게서 떠나간 것"(창 49:10)처럼 보였다. 그러므로 만일 그들이 때의 표적들을 알았더라면 마땅히 "오시리라고 한 실로"가 그인지 아니면 그와 더 흡사한 다른 사람을 찾아야 할 것인지를 결정지어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질문의 근저에 깔린 의도는, 작금의 상황에서 이러한 세금을 자발적으로 바치는 것이 맞는지 아니면 자기들 나라가 옛날에 자유스러웠으나 (그 어떤 연유로 인해 지금은 예속되어버렸다는 사실을 인정함 없이) 오히려 그들이 속박-강제를 받는 고통을 겪어야만 할 것인지를 묻고 있는 것이었다. 그 의심의 근거는 그들이 "아브라함의 씨"였으며 또한 그랬기에 당연하게 "어떤 사람에게도 속박을 받지" 않아야만 한다(요 8:33)는 것이었다. [물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그들로 하여금 "나그네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그러나!!] 이 의미는 그들이 그들 자신의 나라와 종교에 속하지 않은 어떤 군주나 장관이나 권력가에게 기꺼이 순종하려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묻고 있는 것으로서, 이것은 "파멸과 멸망"을 초래한 "교만과 거만한 마음"에서 나온 예로부터 잘못된 이해를 바탕으로 한 믿음의 오류(old mistake)였다. 예레미야는 그 당시에 비록 하나님의 이름으로 권하고 또 반복하여 말하며 설득했지만 그 오류를 결코 바로잡을 수 없었으며 결국, 나라를 잃어버린 유대인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원하시기에 마땅히 그렇게 했어야 할 바) 바벨론 왕에게 복종하도록 설득할 수 없었다. 이 일에 있어서 그들의 완고함은 그 당시에 그들의 처찹한 파멸의 원인이 되었다(렘 27:12, 13). 지금 또 다시, 그들은 같은 돌에 걸려 넘어지고 있다. 결국 이것은 몇 해 후에 로마인들의 침습을 불러일으켜서 마침내 유대나라의 최종적 멸망을 초래케 한 바로 그 근본적 원인이 되었다. 그들은 미혹된 마음을 따라 교훈적 다루심과 특권의 의미를 완전히 오해하고 있었으며 또한 하나님의 말씀의 일부분만 선택적으로 취하여 편리한 구실로 삼아 하나님의 영원한 뜻의 섭리에 반대하며 군박하며 더불어 논쟁하였다. 그러나, 구속사적, 영적 관점에서 볼 때 그들은 그 당시에 하나님이 예비하신 바 마땅히 그 막대기(홀)에 입맞추며 그들 자신의 불법으로 인한 형벌을 달갑게 받아들여야만 했었지만 거역했다...오호라, 슬프도다!! 어쨌든 그들은 이러한 질문을 제기함으로써 그리스도가 올무에 걸리게 되기를 내심 바랐으며 또한 어떤 방법으로 그것을 풀어내든지 간에 그를 치우친 자, 열심 있는 유대인이나 혹은 열심 있는 로마인으로 나타나도록 하려고 하였다. 그들은 바로가 [스스로 큰 체 하며] 출애굽여정을 떠나 바닷가에 도달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대해 말하고 행했던 것처럼 [멸한 다음]개선할 채비를 갖추고 있었는데, ...그들은 "광야가 그들을 가지 못하게 가두어버릴 것이며"라고 말했었다.... 그의 교훈이 결국 교회의 권리를 해치고 왕과 군주에게 해로운 것이라고 결론을 지으려고 하였다. Ⅲ. 주 예수님께서 그의 지혜의 통찰로 이 함정을 깨뜨려 버리심. 1. 그는 이것을 아셨다(18절). "예수께서 저희의 악함을 아셨다." "무릇 새가 그물 치는 것을 보면 헛일"(잠 1:17)이 되기 때문이다. 알아차린 시험은 반 정도가 이미 극복된 것이 된다. 왜냐하면 우리의 가장 큰 위험은 푸른 초장 아래에 있는 독사에게 놓여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가라사대 외식하는 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여기에서 유의할 것..., 외식하는 자들이 아무리 가면을 쓴다고 할지라도 우리 주님께서는 그것을 꿰뚫어 보신다는 사실이다. 그는 외식하는 자의 마음속에 있는 모든 사악함을 아시며, 그들로 하여금 그것을 쉽사리 깨닫도록 하시며, 그것을 그들 앞에서 차례대로 열거하신다. 아첨이나 거짓 위선으로 그는 속지 않으신다. 마음을 살피시는 자는 위선자들을 그들의 이름대로 부르실 수 있다. 이는 마치 선지자아히야가 여호보암의 처에게, "네가 어찌하여 다른 사람인 체하느냐?"(왕상 14:6)고 말했던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외식하는 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위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시험하고 있다. 그들은 그가 자신들의 속임수를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인지를 시험하고 있다. 실은 그의 거룩성과 진리를 시험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옛적에 "그리스도를 시험하였던 자들"(그때에 그리스도는 단지 어둡게 계시되었다)이 "뱀들로 말미암아 멸망되었다면", 지금 복음의 빛과 사랑 가운데서 그를 시험하는 자들이 "받게 될 심판은 얼마나 더 비참하고 쓰라린 것인가 !" 그리스도를 감히 시험하려고 하는 자는 정녕 그가 그들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운 자라는 사실과 또한 그는 자신의 의도를 깊숙이 숨기는 외식자들의 위장된 악함을 간과하시지 않는 불꽃같이 꿰뚫어 보시는 눈을 가지고 계시며 이러한 것을 미워하지 않는 깨끗한 눈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2. 그는 이것을 꿰뚫어 아시기에 올무에서 벗어나셨다. 그가 그들로 하여금 위선자임을 깨닫게 하는 것이 답변에 도움을 주었는지 모른다(이렇게 헐뜯는 악의 적인 질문은 대답보다는 책망을 받아야 마땅하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님은 곧이어 그들의 질문에 대하여 완전하게 대답하셨으며 또한 그것을 충분히 입증할 수 있는 논법에 의해 이를 제시하였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이 일에 있어서 그의 교회를 위한 규칙을 제정하셨으며 따라서 그들로 하여금 성나지 않게 하면서 그 올무를 깨뜨리셨다. (1) 그는 그들로 하여금 미리 알아차리기 전에 그들에 대한 가이사의 권위를 어쩔 수 없이 고백하도록 만드셨다(19,20절). 헐뜯는 자들을 대할 때 진리안에서 우리의 타당한 이유를 제시하는 것은 좋다. 더 나아가 만일 가능하다면, 명백한 설득력을 가진 배경적 타당성의 이유들을 대답 전에 제시하여 수긍받는 것은 더 좋다. 이와 같이 진리의 증거는 그들이 그 진리의 이유에 대항하는 것이 아닌, 진리 그 자체에 대항하여 자신의 입장을 끝까지 주장하려고 할 때 그 반대자들로 하여금 놀라움으로 침묵케 할 수 있을 것이다. "셋돈을 내게 보이라." .... 그는 그들로 하여금 직접 보고 인정할 수 있도록, 보고 깨닫게 할 수 있는 돈을 한 푼도 지니고 계시지 않았다. 그가 한 푼의 돈도 지니지 않으신 것은 우리를 인하여 자신을 비우시고 가난해지셨기 때문인 것처럼 보여진다. 그는 이 세상의 부귀를 멸시하셨으며 또한 이로써 우리들에게 그것들을 과대평가하지 말 것을 가르치셨다. 그는 은과 금을 조금도 가지고 계시지 않았다. 그런데 우리는 왜 많은 진흙들로 자신들을 채우려고 욕심 부려야만 하는 것일까? 로마인들은 세금을 거둘 때 점령지에서조차 로마 돈으로 바칠 것을 요구하였는데, 이것은 그 당시에 바로 그렇게 유대인들 가운데서 널리 행해지고 있었으며 이러한 로마돈은 "셋돈"이라고 불리웠다. 주님께서는 그 자신이 이러한 성질의 것에는 마음이 없고 또한 그것들에 대하여 하등의 관심이 없음을 보여 주기 위해 얼마 짜리 동전이라고 하시지 않고 다만 "셋돈"이라고 하셨다. 그의 마음은 더 나은 것들, 즉 하나님의 나라와 그 부요함과 의로움에 있었으며 또한 우리의 마음도 마땅히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 그들은 즉시 "그에게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왔다." 한 데나리온은 은으로 된 로마 동전의 명칭으로써 그 당시에 가장 흔히 사용되었던 동전이었다(역주:한 데나리온은 하루 노동자의 품삯이기도 하였다). 이 돈에는 황제의 초상과 문자가 새겨져 있었는데, 이것은 돈의 가치에 대해 공적으로 신뢰할 수 있다는 보증의 표식이었다. 대개의 국가들도 보다 안심하고 돈을 유통시키도록 하기 위하여 이러한 방법들을 사용하였다. 동전은 언제나 제왕의 특권의 한 가지(branch), 즉 면류관의 꽃, 즉 통치권에 속한 왕권으로 간주되어 왔다. 또한 이 돈을 그 나라의 합법적 돈으로 사용하도록 허락하는 것은 이 힘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복종하며, 금전 문제에 있어서 그것들을 인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제도는 얼마나 아름다운 것이며, 우리는 얼마나 행복한가 ! 우리는 비록 그 인상과 글이 통치자의 것이기는 하지만 그 소유는 법의 보호를 받아 백성의 것이 되며 또한 우리가 내 소유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에게, "이 형상이 뉘 것이냐?" 고 물으셨다. 그들은 그것이 가이사의 것임을 인정하였으며, 이로써 그들이 말한 "우리는 누구에게도 속박된 일이 없었다."는 거짓말에 대해 밝히 깨닫고 인정하도록 하였으며, 또한 후에 그들이 말한 "우리에게는 가이사 이외에 왕이 없나이다"라는 사실이 옮음을 입증하셨다. 유대인의 탈무드에 보면 "그 나라에서 통용되고 있는 화폐의 주인이 곧 그 나라의 왕이다"라는 규정이 되어 있다. (*어떤 사람은 생각하기를, 이 화폐 위에 새겨진 글을 로마인이 유대를 정복한 것을 기념하는 문구로써, anno post captam judaeam-즉 이 사건이 일어난 다음 해라고 새겨져 있다고 한다. 또한 그들은 역시 이 사실도 인정하였다.) (2) 그때에 그는 가이사에게 새를 바치는 것이 합당하다는 것을 나타내셨다(21절). "그런 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돌려라"(render). "그것을 그에게 바치라(give) "(그들은 17절에서 이 표현을 썼다)가 아니라 "그것을 돌려라"(render; 역주:우리말에는 둘 다 "바치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즉 "반환하라"또는 "그것을 원래의 상태로 회복시켜라. 만일 가이사가 돈주머니를 채우려고 한다면 그로 하여금 그것을 명하도록 하라.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에 대하여 논쟁하는 것은 너무도 늦은 감이 없지 않다. 왜냐하면 너희는 황제의 한 영지가 되었으며, 한 번 조약이 맺어졌을 때 그 의무는 수행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할당된 모든 것을 바치라. 특히 주어진 세금을 바치라." 그런데 이 대답은, ① 어떠한 위법 행위도 제시하지 않았다(결코 걸림이 되지 않았다). 그가 이러한 특징을 가진 일들에 있어서 심판자나 분리자로 나서지 않고 그들로 하여금 이 일을 판단하도록 내버려두신 것은 그 자신과 그의 교훈의 명예를 위해 퍽 잘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여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 일을 통하여 거룩한 일들을 다루는 그의 사역자들에게 본을 보이셨는데, 그것은 즉 세속적인 일들에 대하여 논쟁하는 것에 쓸 데 없이 참견하거나 그것들에 대해 논쟁하는 것에 뛰어들지 말고 그것을 자신의 주임무로 삼는 사람에게 그 문제를 맡겨두라는 것이다. 진실로,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고 자신의 주인을 기쁘게 하려고 마음먹은 자들은 "이 세상일에 얽매이지 말아야만 한다." 그들은 이와 같이 자신의 길을 벗어남으로써 하나님의 영의 보호를 상실하고 말았다. 그리스도는 황제의 칭호에 대해 논쟁하시지 않고 "그 힘"에 기꺼이 순응할 것을 명령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법을 준수하며 솔선수범하여 지킴으로써 다스리는 바 정부는 그의 결정에 걸림이 될 만한 이유를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오히려 감사해야만 할 이유를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신을 선지자로 여긴 백성들에 대한 가이사의 지배력을 더욱 강화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박해자들은 매우 파렴치하였기 때문에 그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치라"고 분명히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를 고발할 때에 "그가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하였다"(눅 13:2)로 상반된 말을 하였다. 바리새인들이 그를 백성들에게 고발할 수 없었던 것은 그들 자신이 이미 그 전제들에 대하여 수긍하였으며 또한 그때 그 결론을 부정피하기에는 이미 때가 늦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진리는 부정한 은폐를 추구하지 않지만 이 진리에 대해 놓여질지 모르는 장해물을 제거하기 위하여 종종 세심한 처리가 요구된다는 사실이다. ② 그의 대적들은 책망을 받았다. 첫째, 그들 중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로 하여금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부당하다고 말하도록 하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자신들의 돈을 절약할 수 있는 구실로 삼을 수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이 일을 할 것인지 아닌지를 논의함으로써 그들이 이 일을 꼭 해야만 한다고 자신들을 변명하고 있다. 둘째, 그들은 모두 하나님께 마땅히 드려야 할 것을 드리지 않았으며, 이것 때문에 책망을 받았다. 그들이 자신들의 국가적인 권리에 대해 헛된 논쟁을 계속하고 있는 동안, 그들은 종교의 생명과 힘을 상실하고 말았으며 또한 가이사에 대한 의무와 더불어 하나님께 대한 자신들의 의무에 대하여 마음에 기억해 둘 필요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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