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0.04.29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누룩.사랑의 종소리.소멸근심.형통
첨부파일 :

[[삼가야 할 악한 누룩 (16 : 5 - 12)]]

  서 론 : 예수님은 누룩의 비유를 두 가지 면에서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는 하나님나라, 곧 하나님의 참생명능력이 땅끝까지 온 땅에 두루 번지게 하는 하나님의 감동인 생명과 사랑의 복음, 하나님말씀의 선한 확장력과 그 역할로서의 누룩이요 다른 하나는 부정적 측면에서 교회 안에 퍼질 수 있는 바 악한 교훈으로서의 누룩입니다. 본래, 누룩은 강력한 번식력을 가지고 순식간에 온 덩어리에 번져서 빵을 (거의 덩어리 전체 크기가 1/3 정도 더) 부풀어 지게 하기 때문에 이 두 가지 어느 경우에도 합당한 비유가 되는 것입니다.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고 하신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 누룩과 같이 확장될 것임을 가리키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감옥의 한 간수에게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한 집에 한 사람으로 말미암이 복음의 씨앗이 떨어지면 그 씨앗은 마치 누룩처럼 번져서 온 가족이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예수님이 제자들을 향하여 주의하라고 하신 누룩은 잠시 잠깐 동안에 사람의 마음속 깊이 파고 들어가는 악한 누룩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누룩은 번지는 전염력이 강력하기 때문에 악에 있어서도 굉장한 영향을 끼치는 것입니다.

  1. 제자들의 오해

  주님은 제자들에게 “바리새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경종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바리새인들과 가두개인의 교훈을 삼가라는 교훈이신데 제자들은 이 말씀을 잘못 해석했습니다. 제자들은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 이해했습니다. 누룩이란 말에 자기들이 떡을 가지고 오지 못한 일에 대한 책망인 줄로 오해한 것입니다. 그들은 아마 자기들이 떡을 가져오기를 잊었기 때문에 바리새 인들이나 사두개인들이 주는 떡을 주의하라는 말로 인식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아직도 육신에 속해 있었으므로 육에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나 그 말씀을 해석할 때 몇 가지 명심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1) 하나님의 말씀은 영적 분별력을 가지고 해석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내 말은 영이요 진리”라고 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해석해야 할 때도 있겠지만 영적으로 해석해야 할 경우도 많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2)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지혜로 해석해야 합니다. 인간의 지혜로 해석하려다간 자칫 인본주의적인 해석이 되어 버립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성령이 주십니다.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3)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반드시 짝이 있습니다. 누룩이 악한 비유에만 사용되는 것이 아닌 점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나타난 다른 비유의 말씀을 통하여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4) 하나님의 말씀은 그 말씀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때 바른 해석을 내릴 수 있습니다. 말씀의 전후에 나타난 문맥을 무시하거나 그 말씀 속에 들어가 있는 오묘하신 뜻을 저버린 채 말씀의 낱말에만 치우치면 엉뚱한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2. 믿음이 적은 자들아

  주님은 깨달음이 적은 제자들을 향하여 “믿음이 적은 자들”이라고 나무라셨습니다.

  (1) 적은 믿음이란 떡이 없으므로 염려하는 믿음입니다. 주님은 산상보훈에서도 “믿음이 적은 자”에 대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2) 적은 믿음이란 영적 깨달음이 적은 믿음입니다. 믿음이 적은 자들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깨닫는 심령만이 결실한다고 하셨습니다. “좋은 땅에 뿌리었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혹 백 배, 혹 육신 배, 혹 삼십 배가 되느니라”고 하셨습니다(마12:23).

(3) 적은 믿음이란 하나님의 은혜를 쉬 잊어버리는 믿음입니다. 고침 받은 아흡명의 문둥이는 주님의 은혜를 잊고 세상으로 돌아갔습니다. 제자들은 방금 전에 주님이 행하신 이적을 잊어버림으로 떡에 대하여 또 다시 염려하게 된 것입니다.

  3.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누룩

  예수님이 여기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은 사람의 마음을 부패하게 하는 그들의 교훈을 가리킨 것입니다.

  (1) 바리새인의 누룩은 마23장에서 주님이 그들을 책망하신 말씀 가운데 나타나 있습니다. ㉮ 그들의 누룩은 말만 하고 행함이 없는 생활입니다. 이같은 그들의 누룩에 대하여 제자들에게 경종하시기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한다”고 하셨습니다(마23:1-3). 

㉯ 그들의 누룩은 그들의 외식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행위를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겉으로 나타내 보이는 생활에 치중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과 떨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 그들의 누룩은 돈을 사랑하는 마음에 있었습니다. 돈을 사랑하는 신앙은 악한 누룩입니다. 예수님이 무리들을 향하여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고 하셨을 때,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므로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었다고 했습니다. 

㉱ 바리새인은 표적을 구하는 신앙을 가졌습니다. 예수님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한다고 하셨습니다. ㉲ 그리고 그들에게는 장로들의 유전을 지키는  누룩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에조차 없는 장로의 유전으로 부모를 공경하라는 율법의 계명을 스스로 저버리고 있다고 주님의 책망을 들었습니다.

  (2) 한편 사두개인의 누룩은 무엇입니까? 사두개인은 바리새인들과 전 반대의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성경을 합리적으로 해석하는 나머지 영의 존재도 부인하고 천사도 없다는 주장을 합니다. 그들에게는 부활의 신앙도 없었습니다. “이는 사두개인은 부활도 없고 천사도 없고 영도 없다 하고 바리새인은 다 있다 함이라”고 하는 말씀에서 알 수 있는 것입니다(행23:8).

  이런 사두개인들의 누룩은 능히 모든 사람의 신앙을 무너뜨리는 악한 누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들은 현실 생활에만 충실하여 세속화된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소망은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세적인 이 땅에서 누리는 물질적 축복에 있는 것입니다.

  결론 : 우리는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교회에 번지고 있는 이 두 가지 누룩을 주의해야 합니다. 이 같은 주님의 말씀은 보수적인 정통 신앙에도 누룩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 아니면 그것이 생명을 죽이는 누룩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를 향하여 이처럼 경종하셨습니다. “너희가 달음질을 잘 하더니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치 않게 하더냐 그 권면이 너희를 부르신 이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 번지는 누룩을 삼가야 하며 이 누룩이 우리 마음속에 들어와서 우리의 믿음을 넘어뜨릴까 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

[[살전5]]

19.성령을 소멸하지 말며 

20.예언((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공중예배시 가르침이나 설교시간에 말씀 듣거나 또는 개인묵상중 기록된 말씀으로부터 HS께서 열어 깨닫게 하시고 회개-결단-권계-인도-보게 하시는))을 멸시하지 말고 

21.범사에 헤아려((영적 분별력 발휘)) 좋은 것((생명과 사랑, 경건에 속한 것))을 취하고 

22.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모양과 형상, 그 성품과 행함이 생명-사랑-경건을 지향할 때 = 지혜-지식-순전-순결-진리의 HS 따를 때, 그리스도의 장성하신 분량의 충만에 도달하게 될 것 !!)) 

23.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Do not quench the Spirit; 

do not despise prophetic utterances. 

But examine everything carefully; 

hold fast to that which is good; 

abstain from every form of evil. 

Now may the God of peace Himself sanctify you entirely; and may your spirit and soul and body be preserved complete, without blame at the coming of our Lord Jesus Christ.

==========예수의 증거는 예언의 영이라(계19:10)..JC를 주(퀴리오스, 하나님)로 시인하고 살아계신 그분의 일러주시는 말씀(=복음)을 증언(선포 =대언)하는 것은 오직 오직 예언(기록된 말씀에 기반하여 위로-격려-권계-순종-인도-깨닫게 하시는 하나님의 모든 말씀)의 영이신 HS으로 말미암는 것...누구든지 성령으로 하지 않고는 예수를 주시라 시인할 수 없느니라(고전12:3)

@@증거(말씀으로서의)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나타내신 바, 묵상하며 경험하여 알고 사랑하고 누리며 따르기를 그토록 원하시는 하나님의 자기계시(창조주하나님의 이름, 성품, 하나님의 길..곧 영광)......계명...율법...규례..법도 

==그것을 증거하는자, 증인 :: 인생으로 오사 이 땅을 걸으신 아드님이 아버지에 대해 그리하셨듯 전심으로 하나님의 계명/말씀을 묵상하여 주께 묻고 따르며, 깨우치고 가르치시는, 내주하시는 주 성령님을 사랑하며 따를 때에 성령께서 이  하나님의 거룩함을 온전히 저절로 이루시며, JC의 장성한 분량까지 하나님의 어떠하심(성분)/거룩, 믿음소망사랑안에 순종함의 순전/완전함과 성숙함을 이루심...믿는 이는 모두 경험한 바  하나님말씀과 구주JC(인생-죽음-부활)를 성령과 증거하게 됨(증언하는 바의 참됨을 온 삶, 전존재로 증언하는) 

---십자가를 내가 지고...: 십자가에 처리된 증인의 두 손

==한쪽 손 ::: 십자가에 예수 죽인 죄인(한편 손)으로서의 십자가에서 처리된 옛사람.....기억하라.(체휼하시는 하나님의 손)

==다른 손 ::: (섬기며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권능의 손)..구주의 십자가보혈-부활을 믿어 구속받은 자/하나님의 사랑받는 자, JC를 살아내며 증언하는 JC부활의 증인으로서 구원경륜의 완성 위해 보내신 바 하나님의 구원경륜을 이루기 위해 잃어버린 영혼구원하는 전도자인 새사람...이를 가능케 하는 십자가를 사는 삶...십자가에 (상황, 환경 등에 대한 )현실적 이성적 자각, 오감과 느낌(모든 불만족, 불안, 두려움)/모든 짐을  십자가밑에 내려놓고/못박고 시공을 초월하여 말씀하신, 말씀하시는 하나님, 쉼없이 일하시며, 나를 품어 안으시며, 무등 태우시며, 날개위에 업어 날아오르시는, 내게 동행하는 인도자/목자로서 인생에 참여하며 함께 누리며 즐기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을 의뢰하고 주님을 앙망하며 따라감....내가 여호와를 의뢰하고 적군의 담을 뛰어넘나이다...

============

ponhrov"(4190, 포네로스) 나쁜 상태에 있는, 병든, 나쁜, 악한, 사악한.[[악]]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형용사 포네로스(Hes., Thu. 이래)는 포네오(수고하다)에서 유래했으며, 카코스(kakov", 2556)와 카키아(kakiva, 2549) 및 그 파생어들의 동의어로 사용된다.

포네스는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

(a)  '슬픈, 불행한, 근심으로 괴로워하는'.

(b)  '괴롭게하고 슬픔을 초래하는 것, 재난이나 재앙을 가져오는 것'(이런 불행을 가져오는 병에 대해 사용되었다)

(c)  '가련한, 무력한, 비참한, 초라한, 매력없는, 부적당한, 쓸모없는, 파멸적인, 해로운, 불리해지는(손해를 주는), 나쁜, 불행을 가져다주는, 치명적인, 불운한'.

(d)  '성공하지 못한'(정치나 군에서).

(e)  '평민의'.

(f)  '정치적으로 쓸모없는, 가치없는, 국가의 적대자'.

(g)  '도덕적으로 비난할 만한, 나쁜' 등을 의미한다.

2. 70인역본의 용법 

형용사 포네로스는 70인역본에서 약 300회 이상 나오며, 대부분 히브리어 라아(악한, 나쁜, 무가치한, 무용한)를 번역하였으며, 동물, 음식, 땅, 인격체에 대해 사용되었다.

동물들에 대해 사용될 경우에는 '위험한, 해로운'(창 37:20)을, 또 인격체의 명예에 손상을 준다는 의미로(예: 신 22:14), 인간의 심령과 관련하여 '악한'이라는 의미로(예: 삼상 16:14이하), 아 2:2에서는 슬픈 기색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포네로스가 윤리적 측면에서는 인격체이든(창 13:13; 사 9:17[16]; 집회서 25:25), 사물이든(사 3:9), '악한, 나쁜, 가치없는, 부패한, 타락한' 등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카코스처럼, 포네로스 역시 도덕적 의미 뿐만 아니라 종교적 의미까지도 함축하고 있다. 이런 경우에는 하나님과의 분리, 하나님과 그의 뜻에 반대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암 5:14이하).

신약성경과는 대조적으로, 이 단어는 악마를 뜻하는 말로서는 사용되지 않는다. "선악"이라는 표현(창 3:5, 창 3:22)에서는 포네로스가 사용되었는데, 이 선악은 가장 넓은 의미로 볼 때, '모든 것'을 의미한다.

3. 신약성경의 용법 

형용사 포네로스는 신약성경에서 78회 나오며, 다음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1. 포네로스의 '나쁜, 해로운, 쓸모없는, 무익한'이란 의미에서,

(a)  포네로스는 '나쁜, 해로운'이란 의미를 나타낸다.

계 16:2에서 포네로스는 '독'종을 묘사한다: "첫째가 가서 그 대접을 땅에 쏟으며 악하고 [독한] 헌데가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들에게 나더라".

엡 5:16에서 때가 악한 것(포네로스)은 때가 나쁘다는 것이다. 즉 시간과 기회를 잘못 사용하도록 인도하려는 압박이나 많은 장애가 있어 위험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생활에서 해이해져서는 안되며 언제나 그러한 압박이나 장애를 극복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엡 6:13에서도 유사한 표현이 나타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여기서 "악한 날"은 악한, 위험한, 위기의 날, 고통과 위난의 날이며, 따라서 치명적이며 파멸을 가져오는 날이기도 하다. 이 때는 대외적인 핍박과 기독교인의 교제 안에서 일어나는 대내적인 시험으로 말미암아 투쟁이 가장 극심해질 때, 죽음의 날, 심판의 날이며, 마귀가 특별히 세력을 발휘할 때이다.

복음서에 나타난 계시적인 구절과(참조: 막 13:4-막 13:23) 바울 서신의 몇 구절은(참조: 살후 2:3) "주님의 날"이 이르기 전에 투쟁의 속도가 빨라지고 전쟁의 극렬함이 증가하며 점차 가속화된다는 사실을 비슷하게 언급하고 있다(참조: 요일 2:18 - 요일 2:19),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악한 날"이 이르기 이전에 준비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에서 이루어져야 할 많은 일들이 있으며, 또한 봉사할 수 있는 많은 기회도 있다. 그러나 바울은 위대한 일 심지어는 사도의 직분을 감당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마지막 날에 가서는 버림받은 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참조: 9:24-9:27). 그래서 그는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즉 모든 위대한 일을 수행한 후에 "서야 한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가장 강조적인 어법으로 강조하고 있다(참조: F.Foulkes; F.Hauck; S.Schulz).

갈 1:4에서 현재의 긴 시대를 악한 시대라고 하는데, 이는 고통과 시험으로 가득찬 시대이기 때문이다.

(b)  마 7:18에서 포네로스는 구약성경에서와 같이 '쓸모없는, 무익한' 열매를 의미한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마 18:32; 마 25:26; 눅 19:22에서 "악한 종"은 비난 받아 마땅한 '무익한' 종이다.

2. 포네로스의 도덕적 의미.

(a)  포네로스의 형용사적 용법.

① 사람에 대해 사용되는 경우, 인간들은 도덕적으로 악하다(마 7:11). 인간과 대조적으로 하나님만이 홀로 선하시다(막 10:18).

바리새인들은 마음이 완악하다는 의미에서 악했다(마 12:34). 그들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말들을 낸다(마 12:35). 유대인들도 마찬가지로 악한 세대였다. 그들은 말씀과의 만남이 개방되었는데도 메시야적 표적을 구하는 악한 세대이다(마 12:39; 마 16:4; 눅 11:29). 이 두 부류는 예수님을 대적함으로써 그들의 성향을 나타내 보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반대하는 자는 누구든지 악하다.

딤후 3:13에서 악한 자들은 처음에는 예수님과 그의 메시지에 대해, 그 다음에 살후 3:2에서 악한 자들은 믿는 자들과 그들의 신앙을 반대하는 자들이다.

행 17:5에서는 포네로스가 사회적 치욕인 어떤 것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저자의 어떤 [괴악한] 사람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 성을 소동케 하여 야손의 집에 달려들어 저희를 백성에게 끌어내려고 찾았으나".

② 사물에 대해 사용되는 경우, 눅 6:22에서 포네로스는 '도덕적으로 나쁜 비난 받아야 할'이란 의미를 나타낸다: "인자를 인하여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제자들의 이름은 '도덕적으로 나쁜', 또는 '비난받을만한' 것으로 멸시를 받고, 거절을 당했다. 어떤 경우에도 포네로스는 개인 제자들의 이름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막 7:22; 마 20;15에서 '흘기는' 눈은 시기로 가득찬 탐욕적인 눈을 의미한다. 그것은 역시 "사악한" 눈초리를 의미할 수도 있다.

마 6:23; 눅 11:34에서 포네로스는 '사악한'이나 '병든'을 의미할 수 있다. 왜냐하면 구약과 신약성경은 마음과 눈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생각했고, 악한 눈 혹은 탐욕스러운 눈이라는 생각은 보편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마 15:19에서 악한 생각들은 내부로부터 온다: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참조: 막 7:21).

약 2:4에서는 명성이나 돈을 사랑하는 것과 같은 기본적인 동기를 악하다고 말한다.

딤전 6:4에서 교묘하게 환심을 사는 것이나 악한 의심이라는 뜻을 나타낸다.

히 3:12에서 내적 인격은 악하다. 왜냐하면 자기 뜻대로 배교(背敎)하기 때문이다(히 10:22에서는 나쁜 양심이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었다고 한다). 말들과 행동들이 악할 수 있다(약 4:16의 오만, 골 1:21의 그리스도를 믿기 전의 행위, 또는 딤후 4:18에서 하나님의 말씀 전파자들에게 행하였던 일들 등이다.

요 3:19에서 빛과 어둠의 대립은 포네로스(참조: 요 3:20-요 3:21)의 내용을 결정한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요 7:7에서 세상의 일들은 악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런 일들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복음을 거스리는 모든 것들은 다 사악한 것이다. 이것은 잘못이며, 그 보급, 그것에 묶여 있는 전체 성향을 포함하며(요이 1:11), 싸우는 대적자들의 말들을 포함한다(요삼 1:10), 악한 일의 결과는 하나님의 구원에서 제외되는 것이다. 이 이유 때문에 가인의 일은 악한 것이다(요일 3:12).

행 18:14에서 갈리오가 이 말을 했을 때에는 법에 의해 처벌될 수 있는 법률적인 잘못이라는 보다 세속적인 의미를 갖는 것이다.

신약성경에서는 자주 악한 영이라고 표현된다(마 12:45; 눅 11:26). 예수님과 사도들은 이런 의미들을 자유스럽게 사용한다(눅 7:21; 눅 8:2; 행 19:12; 눅 19:13; 눅 19:15; 눅 19:16).

(b)  포네로스의 명사적 용법.

① '나쁜 사람'. 많은 사람들이 마 22:10의 "악한 자"를 사회적인 의미, 곧 누더기를 걸친 자로 해석하고자 했으나, 이 귀절에서도 역시 신앙적으로 악한 사람을 뜻한다. 예복을 입지 않은 그 사람의 경우와 마찬가지다(마 22:11). 사실상 그 사람(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은 복음을 거절해온 사람인 것이다.

마 5:39 상반절의 말씀도 다른 영역본(RSV와 NEB)처럼 악한 자로 해석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 구절의 하반절을 보아서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마 13:49이하에서는 마지막 심판 날 하나님께서 포네로이(복수)를 갈라내어 형벌에 처하실 것을 선언하고 있다(참조: 마 22:13이하).

교회는 악한 사람을 축출해야 한다(고전 5:13). 그러나 하나님의 선하심은 악한 자들이 지상에 사는 동안 그들에게도 임하므로 기독교인들은 그들에게 사랑을 보여 주어야 한다(눅 6:35).

② '마귀'. 마 13:19에서 호 포네로스는 절대적 의미에서 '악한 자'를 의미한다. 왜냐하면 그 병행구인 막 4:15에서는 '사탄'이라 하였고, 눅 8:12에서는 '마귀'라고 지칭하고 있기 대문이다. 요 17:15; 엡 6:16; 살후 3:3(RSVmg,NEB) 등도 마찬가지이다. 요한일서에서는 이 단어가 자주 눈에 띤다(참조: 요일 2:13, 요일 2:14; 요일 3:12; 요일 5:18, 요일 5:19). 마 13:38의 투 포네루를 남성(즉, 악한 자)으로 해석해야 될지 아니면 중성(즉, 악)으로 해석해야 될지에 대해서는 아직 토론의 여지가 있다. 하더(G.Harder)는 후자를 취하고 있다. 그러나 이 주장도 전혀 불확실한 것인데, 이는 마 13:39에서 그 악의 근원을 마귀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마 13:38의 악에 대하여 어떤 약화된 의미를 부여할 수 없게 한다. 신학사적으로 볼 때, 악의 인격화를 피하고자 하는 노력이 결국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비인격화를 초래하였다.

마 6:13에서 "다만 악에서 구원하소서"라는 문구는 번역자들과 해석자들 사이에 의견을 달리한다. 이 단어에 붙은 관사는 남성도, 중성도 될 수 있는데, 중성으로 볼 때는 '악', 남성으로 볼 때는 '악한 자'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이것은 이 시대를 지배하며 계속 그들을 위협하고 있는 마귀가 주도하는 악한 세력까지도 '악'이란 말에 포함될 수 있다. 로마이어(E.Lohmeyer)는 "악에서"라는 말을 내적·외적인 모든 결정적 위험에 대한 총괄, 즉 사탄의 그 모든 능력에 대한 묘사로서 간주하고 있다(The Lord's Prayer). 벵겔(J.A.Bengel)은 그노몬(Gnomon)에서 말하기를, 여섯번째와 일곱번째 간구는 같은 문제에 대해 적극적이면서 소극적인 양면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혹자는 하나의 내용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는 마 6:13에 관한 힐러(Hiller)의 언급을 인용하고 있는데 '악한 자는 아담을 시험에 빠뜨린 이래 아직까지 그의 목적을 변형시키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악한 자이며,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적이자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의 적이다'고 해석했다.

③ "악". 포네로스는 중성 명사형으로 사용되어 '악'을 나타낸다(토 포네론, 눅 6:45b; 롬 12:9; 살전 5:22; 마 5:11; 행 5:4; 행 28:21). 신약성경은 여러 곳에서 악을 마귀와 연결시키고 있다. 마 9:4과 마 12:35에서 예수님께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그들의 악한 생각에 대하여 책망하실 때도 역시 포네로스는 마귀와 연관되었다. 그 외에도(요 8:44)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마귀의 자식들이라고 불렀다. 하나님과 마귀 사이에는 어떠한 중간 지대도 없으므로 악을 순수한 중성적 입장에 놓을 수는 없다.

(참조: J.H.Thayer; Harder; E.Achilles). 

==============

caivrw(5463, 카이로) 기뻐하다 be glad, 즐거워 하다 rejoice.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동사 카이로(Homer이래로)는 '기뻐하다, 즐거워 하다'를 의미하며, 어떤 사람이나 사물에 대해 기뻐하는 것을 나타낸다. 현재 명령법은 인사말로 자주 나타난다. 즉 카이레(단수)와 카이레테(복수)는 "안녕하십니까?" "안녕히" Hail!라는 인사말로 사용되었다. 카이레는 무엇보다 신들에게 대한 인사말로 사용되었다. 서신의 서두에서 부정사 형태인 카이레인이 가끔 사용되기도 하는데, 이 경우에는 동사 레게이가 보충되어야 한다(참조: Funk § 480). 즉 "…문안을 [드리다]"([…says] greetings!). 똑같은 관용 어구가 축배를 들 때도 사용되며(즉, "건강을 빌면서!" good health!) 헤어질 때도 사용된다(즉 "안녕히 계십시오[가십시오]!" Farewell!).

2. 70인역본의 용법 

카이로는 70인역본에서 약 80여회 나오며, 주로 '기뻐하다, 기쁘다'를 뜻하는 길, 사마흐, 시스와 '기쁨, 즐거움'을 뜻하는 사메아흐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며, 그러한 의미를 나타낸다.

3. 신약성경의 용법 

카이로는 신약성경에 74회 나오며, 이 동사와 명사 카라(carav, 5479)는 특히, 그리스도를 통한 종말론적 완성 및 그리스도 안에 존재함과 그리스도 안의 소망을 언급한 곳에 현저히 나타난다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선포인 신약성경 메시지 전체가 기쁨의 메시지(→복음 Gospel)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a)  카이로는 인사말로 사용되었다. 부정사 카이레인을 써서 인사한 경우는 행 15:23; 행 23:26; 약 1:1의 편지의 서두에서만 나타난다. 요이 1:10에서 신자들은 이단에 속한 자들에게 카이레인을 하지 말라고 한다: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

여기서 수신자들은 이단 교리를 전하는 자들의 악한 행위에 완전히 연루되지 않도록, 그들을 영접하지도 인사하지도 말라는 경고를 받고 있다.

마 28:9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친숙한 일상적 인사말 카이레테를 사용하여 제자들에게 자신을 알리고 있다: "예수께서 저희를 만나 가라사대 평안하뇨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마 26:49에서 배반자 유다는 예수님께 인사했다: "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하고 입을 맞추니".

안녕과 행복을 소원하는 그 인사의 이면에는 무서운 음모를 감추고 있다.

마 27:29에서는 예수님께 대하여 유대인의 왕(이스라엘)이라고 조롱적 인사를 던지고 있다: "가시 면류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 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가로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그들이 이렇게 인사하지만, 그러나 그들이 전혀 알지 못하고 그 말을 하였으나, 주님이 당연히 받으셔야 할 인사였으니만큼, 그 속에는 하나의 반어적(反語的) 의미가 숨겨져 있다고 볼 수 있다.

눅 1:28에서 마리아는 카이레 그 자체보다는, 오히려 잇따른 메시지에 놀랐다. 

(b)  공관복음서에서 예수님의 오심과 사역은 기쁨을 가져왔다. 카이로는 잃어 버린 것을 찾았을 때(눅 15:5이하; 마 18:13), 자기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알았을 때(눅 10:20), 구세주의 선구자가 났을 때(눅 1:14), 그의 탄생의 별을 보았을 때(마 2:10),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에(눅 13:17; 눅 19:6), 기뻐하는 것을 표현한다.

눅 19:37이하(참조: 눅 18:43)에서 예수님께서 입성할 때의 사람들의 분위기는 예수님의 승천 후에 제자들의 분위기처럼 기쁨의 분위기였다: "이미 감람 산에서 내려가는 편까지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의 본 바 모든 능한 일을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가로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마 5:12에서 하나님의 백성은 핍박을 받을 때도 기뻐해야 한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예수님이 하나의 공격의 대상이 되고, 그를 뒤따르는 자들의 길이 고난과 핍박에 이르게 된다 할지라도, 기쁨에 찬 구원의 확신은 상실되지 않아야 한다(눅 6:23).

눅 22:5에서 유다가 당국자들과 예수님을 넘겨 주기로 합의했을 때 그들이 기뻐했다: "저희가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언약하는지라".

눅 23:8에서 수난의 때에 헤롯이 예수님을 만나보고 기뻐했다: "헤롯이 예수를 보고 심히 기뻐하니 이는 그의 소문을 들었으므로 보고자 한 지 오래였고 또한 무엇이나 이적 행하심을 볼까 바랐던 연고러라".

(c)  사도행전에서는 교회의 불가항력적, 전세계적 확장에 대한 기쁨이 반복적으로 표현된다. 먼저 그리스도를 위해 능욕과 핍박을 받음에 대한 사도 Apostle들의 기쁨이 있다(행 5:41; 마 5:11이하). 박해가 복음의 승리적 진행을 정지시킬 수 없다. 이방인을 끌어 모은데 대한 기쁨도 있다(행 11:23; 행 13:48; 행 15:3). 복음이 이방인에게 전파되고, 그들이 세례(침례)를 받았을 때, 거기에 해당된 사람들은 크게 기뻐하였다(행 8:8, 행 8:39; 행 15:31). 

(d)  요한의 기록에서 중요한 것은 충만한 기쁨이다. 요 3;29에서 세례(침례) 요한은, "신랑" 즉 약속된 하늘의 진리의 계시자로 인하여 지금 기쁨이 충만해 있다(참조: 마 9:14이하, 병행구, 막 2:18이하; 눅 5:33이하). 종말론적 시간은 이미 도래하였다. 요 4:35 전후 문맥을 보면 이 때는 계속적인 파종과 수확기가 병존하는 시기이고(요 4:35이하), 예수님께서는 자기에게 주어진 사역을 이미 성취하고 계신다(요 4:34). 요 8:56에 보면, 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아브라함도, 수확이 시작되는 이 때를 보며 즐거워 하는 일에 동참하였다. 여기에서 카이로는 기다리는 기쁨이고 아갈라오마이는 성취된 기쁨이다.

요 16:20이하에서 예수님께서는 자기의 죽음을 자기의 제자들이 기뻐해야 한다고 설명하신다. 왜냐하면 죽음은 승리요 발전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슬픔을 책망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부활이 그 슬픔을 기쁨으로 어떻게 바꾸게 될 것인지를 보여준다. 요 14:27이하에서 기쁨을 평화와 연결시키는 것은 기쁨의 종말론적인 성격을 만들어 낸다.

요 11:15에서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 때 거기 있지 않은 것을 기뻐하셨다. 그 이유를 설명하신다: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하신대".

요이 1:4; 요삼 1:3에서 사도 요한은 믿음의 형제들이 진리 안에서 행하는 것을 기뻐했다.

계 11:10에서 카이로는 악한 즐거움을 나타낸다: "이 두 선지자가 땅에 거하는 자들을 괴롭게 한 고로 땅에 거하는 자들이 저희의 죽음을 즐거워하고 기뻐하여 서로 예물을 보내리라 하더라".

계 19:7에서 성도들은 어린 양의 혼인 잔치의 때가 되었기 때문에 즐거워 한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e)  바울 서신들은 기독교인의 기쁨은 슬픔과 고통과 근심 가운데서만이 얻을 수 있다는 역설적 의미를 증거하고 있다. 진실로 이와 같은 사실은 이 기쁨의 능력을 확실히 증명해 주는 것이다.

① 이러한 기쁨의 원천은 단순한 지상적, 인간적 기쁨 너머에 있다. 그것은 주 안에 있는 기쁨이며, 따라서 우리의 외부에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바울은 그의 독자들에게 계속하여 기쁨의 존재를 상기시켜 주고, 그 기쁨을 표현하라고 권면하고 있다(빌 3:1; 빌 4:4; 빌 4:10; 롬 12:12; 고후 6:10).

빌 1:15이하; 빌 1:18에서 바울은 동기에 상관하지 않고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기뻐하였다: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그러면 무엇이뇨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바울은 놀라운 비이기적 자세를 유지했다. 그는 어떤 자들이 그들 자신의 명성을 얻기 위해 전파하고 있는 것을 알았으나 이 전도자들의 동기에 상관없이 복음이 전파되고 있는 것을 기뻐하였다. 믿음과 그것의 결과적 기쁨이 우리 자신으로부터 나오지 않기 때문에, 좋지 못한 동기에 의해 그리스도가 전파된 때 조차도, 바울은 확신과 기쁨을 지닐 수가 있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은혜로운 사역을 행해야 한다는 것이며 또한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공유해야 한다는 사실이다(빌 1:15-18).

② 고린도후서에서 바울은 기쁨을 들립시스(고통, 고난, 박해, 환난)와 직접적으로 대조시키고 있다.

바울이 편지를 기록할 때, 들립시스를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고후 2:4), 엔 퀴리오, 즉 "주 안에" 있는 기쁨인(빌 3:1) 자기의 기쁨을 모두가 함께 나눠 갖도록 하기 위해(고후 2:3) 썼다고 하였다. 고린도인들의 삶은 수동적 자포자기 상태 또는 사망을 낳는 세상 근심(고후 7:9이하)에 의해서가 아니라, 순결한 믿음의 기쁨에 의해 지배를 받아야 했다. 바울은 그들을 이전에 엄히 책망했었으나, 그의 권면이 결국 유익한 효과를 가져왔기 때문에 그들에 대하여 다시 안심하게 되었다(고후 7:13).

③ 바울은 빌립보서를 쓸 때 감옥에 있었다. 당시에는 아직 자기의 재판의 결과를 알 수 없었고, 분명히 외로움을 느끼었을 것이다(빌 2:20이하). 그리고 충성스런 복음 전파도 위기에 빠져 있었을 것이다(빌 1:15이하; 빌 2:21). 또 다시 들립시스가 있었으며(골 1:24), 이것이 근심의 원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와 계속적인 기쁨의 근거 역시 있었다. 즉 그것은 빌립보인들이 복음에 참여함으로 인한 감사(빌 1:5)와 그리스도가 계속 전파됨으로 인한 기쁨이었다(빌 1:18). 그리스도와 복음에 의해 속박을 당한 바울은 그의 독자들에게, 자기와 함께 기뻐하라고(빌 2;17이하), 또 염려를 버리라고(빌 4:6), 나아가서는 성령의 교제 안에서 한 마음을 품으라고 권면하고 있다. 비록 바울에게 근심할 수 밖에 없는 까닭이 있고, 그가 곧 죽게 된다 할지라도, 그리스도가 그의 몸에서 존귀하게 되는 한(빌 1:20), 그게 무슨 상관이 있으리오!

이처럼 빌립보서의 기쁨은 계속적이고 "도전적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릎쓰는" 기쁨이다(K.Barth).(참조: 빌 2:17; 빌 4:4). 이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힘은 그 자체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모든 것을 하나님께 아뢰는, 지칠 줄 모르는 기도를 통해 생성된다(빌 4:6; 참조: 살전 5:16; 골 1:11). 그것은 복음의 세계적 확산에서(살전 3:9; 골 2:5), 그리고 복음을 전한 교회들의 왕성한 성장에게 그 힘을 얻는다(빌 4:10; 참조: 살전 2:20;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것은 주 안에서의 기쁨이다(빌 4:4).

④ 벧전 4:13에서 카이로는 고난과 영광에 관련되어 나타난다: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그리고 롬 12:15에서 관용은 우리에게, 우리 자신으로부터의 여유를 가질 수 있도록 해줌으로써 타인들을 긍휼히 여길 수 있게 해 준다. 다른 한편 고전 7:30; 고후 6:10에서 카이로는 우리에게, 현재의 기쁨과 슬픔은 이 생(生)에만 속할 뿐이며 우리의 궁극적 몫은 아니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준다. (참조: H.Conzelmann; E.Beyreuther; G.Finkenrath). 

===============

proseuvcomai(4336, 프로슈코마이) 기도하다 pray.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동사 프로슈코마이(Aeschyl., Hdt. 이래)는 프로스(prov", 4314: ~를 향하여, ~에서)와 유코마이(eu[comai, 2172: 기도하다)에서 유래했으며, '기도하다, 간청하다'를 의미한다.

2. 70인역본의 용법. 

동사 프로슈코마이는 70인역본에서 약 100회 이상 나오며, 주로 히브리어 팔랄(기도하다, 중재하다)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며(창 20:7; 창 20:17; 삼상 1:10; 삼상 1:12; 삼상 1:26 이하; 느 1:4; 느 1:6; 사 16:12; 렘 7:6 등), 그리고 테필라(기도, 시 109:4), 아타르(간청, 출 10:17; 삿 13:8), 나팔(엎어지다, 넘어지다, 단 6:11; 에스드라이서 6:10) 등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동사 프로슈코마이는 신약성경에서 84회 나오며, '기도를 드리다, 기도하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

eujcaristevw(2168, 유카리스테오) 감사하다 thank.

1. 고전 헬라어 문헌 

동사 유카리스테오는 유카리스티아에서 유래했으며,

(a)  '감사하다'(주전 4세기 Demosthenes; 384-22 주전]로 부터).

(b)  '감사를 드리다'  (주전 2세기 Polybius 로부터). 물론 이러한 단어들은 비문들 속에서 자주 발견된다.

2. 70인 역본의 용법 

동사 유카리스테오는 70 인역본의 외경에서 6 번 나온다. 마카베오이서 12:31에서 마카베오 일당에 속한 사람들은 어떤 이교도들이 스키토폴리스(Scythopolis)에 사는 유대인들에게 베풀어준 친절에 대해 감사한다. 외경 에스더서(Ad. Est.)16:4에서 어떤 관리들은 자기들에게 은혜를 베푼 페르시아 왕에게 갚아야 할 감사를 하지 않고 있다.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이유들로는 대적들에 의한 압제와 박해로부터의 구원(마카베오이서 1:11, 마카베오삼서 7:16), 승리하게 하심(마케베오이서 10:7) 때문이다. 지혜서 18:2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악용한 자들에 대하여 앙갚음을 하지 않게 하여 주심을 감사하는 거룩한 백성들의 감사가 기록되어 있다. 유딧 8:25에는 어떤 역경과 불우한 환경과 사정에서도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한다고 한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동사 유카리스테오는 신약성경에서 38회 나오며, 거의 독점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사용되었다. 단지 2회만(눅 7:l6; 롬 16:41) 사람에 대한 감사의 의미로 사용되었으나 영적 행동을 뜻하는 문맥으로 이해된다.

(a) 유카리스테오는 바울서신의 서론 부분에 매우 흔히 나온다. 아무리 그 서신에 충고와 비판을 뒤이어 기록할지라도, 사도 바울은 자주 그의 수신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하나님께 감사하는 서언적 인사말을 쓴다. 즉 그들의 믿음과 그로 인해 "온 세상에" 전파된 결과(롬 1:8), 교회에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고전 1:4), 믿음과 실천적인 사랑 사이의 조화(엡 1:15 이하; 골 1:3 이하, 살전 1:3, 몬 1:4 이하), 복음 안에서의 성도의 교제(빌 1:5), 견고한 믿음(살전 1:2 이하), 하나님께서 택하신 일(살후 2:13)  등이다. 바울이 격식을 갖추려는 것이 아니라 점차 그 서신의 주제로 이끌어 가기 위해 자신의 감사함을 삽입해 넣었다는 사실에 특히 주목해야 한다.

(b)  바울은 신학적 논증에서 자기 자신을 언급하면서 하나님께 감사를 표현하기도 한다(고전 1:14; 고전 14:18; 참조: 행 28:15). 대조적으로, 이방인들은 하나님을 알고 있을 지라도 하나님께 감사하지 아니한다(롬 1:21).

(c)  감사는 끊임없는 의무이다: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엡 5:20; 고후 1:11; 골 1:12; 골 3:17; 살전 5:18).

(d)  눅 18:11 이하(자기 만족적인 바리새인들)과 요 11:41 이하(나사로 무덤 앞에 선 예수님의)에 감사 기도가 나온다. 이 단어가 고전 14:16 이하에선 방언으로 드리는 감사기도를 나타내는데 사용되었다.

(e)  바울은 서신의 서론 이외에서도 자주 일반적이며 특별한 은사들에 대한 감사를 언급한다. 예를 들면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음에 대해 (골 1:12), 성도들이 사람에 의해 설교된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임에 대해(살전 2:13), 방언의 은사에 대해(고전 14:18) 감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전 14:18에서 바울은 독자들의 관심을 교회의 진실한 성장과 일치에 가지도록 하기 위해 그의 감사함을 말할 때 얕보는 듯한 의미의 표현을 쓰고 있다.

(f)  마 15:36과 병행구절 막 8:6에서 예수님께서 음식을 위하여 감사하셨다: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한 후에 않은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바울은 유대인의 습관과 예수님의 본을 따라 음식 앞에서의 감사 기도에 대하여 말한다. 이 관습은 기독교 공동체에서 일반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사도는 음식과 관련된 논증에서도 감사기도를 언급한다. 이 기도는 고전 10:30에서 깊이 생각할 문제이다. 우상들에 바친 제물을 먹는 것에 대한 논의에서 바울은 그가 감사한 것에 대해 왜 비난을 받는가에 대하여 문제를 제기한다.

(g)  유카리스테오는 또한 주의 만찬(Lord's Supper) 의식을 언급하는 말에 나온다. 예를 들면 눅 22:19에서 떡과 포도주와 함께, 고전 11:24에서 단지 떡과 함께(그러나 25 절의 "또한 이와같이"란 말 속에 포도주가 포함된 것이다), 막 14:23과 마 26:26 (그러나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란 말은 상당어구로 사용된 것이다)에서만이 포도주와 함께 언급된다. 그러므로 2세기 동안에 유카리스티아(eujcaristiva, 2169)란 말은 전체적인 성만찬 예배를 의미하는 일반적인 명칭이 되었다.

(h)  유카리스테오는 요한계시록의 찬가 가운데 감사의 찬송을 의미하기도 한다(계  11:17 이하). 감사는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는 천적 존재의 영광송에 속하는 것이다.(참조: Walter Bauer; J.H.Thayer; H.-H,Esser). 

-----------------------

질문>>: 성령님을 근심 혹은 소멸시킨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답변>>: 

먼저 성령을 소멸한다는 말을 잘 살펴 알아봅시다.

성경에서 "소멸하다"라는 단어는 불을 진압하는 것을 말할 때 사용됩니다. 신자들이 하나님의 전신 갑주의 일부인 믿음의 방패를 가질 때 (에베소서 6:16), 그들은 사탄으로부터 날아온 불 화살의 힘을 진압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지옥을 불이 ”소멸되지” 않는 곳으로 묘사하셨습니다 (마가복음 9:44, 46, 48). 

마찬가지로, 성령은 각 신자들 안에 거하시는 ((지고지선의 진복이신 주님 맛봄-누림-충만을 거스르는 모든 것을 태우며 믿는이에게 JC이름으로 허락하신 권위와 능력을 JC께서 행하신 그것 이상으로 실제로 발현하시는)) 불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행동과 태도를 통해 자신을 나타내기를 원하십니다. 

신자인 우리가 우리 행동에서 성령님이 나타나시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때, 또는 그릇된 일인 줄 알면서도 행할 때, 우리는 성령을 억제하거나 소멸시키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19). 즉, 성령께서 ((믿는 이의 지고지선의 진복을 위하여)) 그분이 원하는 방식으로 자신을 드러내시는 것을 우리가 허락하지 않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제, 더 나아가 성령을 근심하게 한다는 말을 살펴 봅시다.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려면, 우리는 먼저 성령이 인격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합니다. 오직 인격체만이 근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이러한 근심의 감정을 갖는다... 성령께서 인격을 지니신 하나님이심을 이해하면, 우리가 근심하는 것처럼 성령께서 어떻게 근심하시게 되는지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에베소서 4장 30절은 우리가 성령을 근심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방인들처럼 살면서(4:17-19), 또는 거짓으로(4:25), 분노로(4:26-27), 도둑질로(4:28), 더러운 말로(4:29), 악독으로(4:31), 용서하지 않음으로(4:32), 음행으로(5:3-5) 성령님을 근심시킬 수 있습니다. 성령을 근심시키는 것은 생각으로든, 생각과 행동 모두로든 죄된 방식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성령을 소멸시키거나 근심시키게 되면 그 결과가 비슷합니다. 둘 다 결국 경건한 신앙생활을 방해합니다. 

둘 다 믿는이가 믿는 이 안에 내주하시면서 생명말씀 일깨우시며 깨달아 알게 하시며 권계하며 인도시는 성령하나님과 일치-순종-동행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거슬러 죄를 짓고 자신의 세상적인 욕망을 좇아 스스로 주인되어 행할((=자행자제)) 때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따라야 할 올바른 길은 ((타락한 옛본성 따르는 옛자아로 스스로 주인되어 자행자제할 것 아니라.....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삶을 실천함, 즉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의 HS따라)) 오직 믿는 자를 하나님께로, 또 순결함으로 더 가까이 인도하고, 세상과 죄로부터 더욱 멀어지도록 이끄시는 분을 주로 삼아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근심을 원치 않고, 또한 선한 것이 소멸되기를 바라지 않는 것처럼,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기를 거부함으로써 성령님을 근심시키거나 소멸시켜서는 안 됩니다.

-----------------------

>>090227 “빵 이야기와 누룩”(마가복음 8:13-21)우리의 삶과 기도와 예배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펌글) 

형태발생장(形態發生場, morphpgenetic field)

주변의 꽃과 나무 그리고 동물과 사람을 보면 이들 모두가 제나름의 특정한 모양새를 갖고 있습니다. 한 송이 꽃을 들여다보거나 이파리 하나를 보아도 제각기 특정한 꼴을 갖추고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가 수정된 하나의 알, 그러니까 아무런 형태가 없던 단세포의 알에서부터 출발하여 지금의 모습으로 변해왔습니다. 하나의 수정란이 세포분열을 하면서 세로 수가 불어나고 점차 분화하면서 그 종자가 갖는 본래의 생김새(형태)를 갖추어 갑니다. 이렇게 생물체의 꼴이 차례로 형성되는 과정을 형태발생(形態發生, morphpgenese)이라고 합니다.

수정된 알에서 발생하는 생물체는 그 알을 이루는 구성요소의 물질적인 성격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알에 있는, 형상을 창출하는 일종의 장(場)에 의해 모양을 성성해 갑니다. 또한 우리 몸은 일부가 손상되고 제거되었음에도 그 원래의 형상을 다시 찾게 하는데, 그것은 생물체 전체의 모양새와 대사를 유지시키는 일종의 장(場)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장을 형태발생장(形態發生場, morphpgenetic field)이라고 합니다.

형태장의 구조는 그 형태의 장을 갖는 생물의 종 내에서 시간적으로 앞서 존재했던 유사한 개체들의 실제 형상에 따라 꼴이 만들어집니다. 한 개체의 형태장은 지금까지 존재했던 개체의 실제 형상이 모두 합해진 일종의 누적물입니다. 또한 형태장의 영향력은 유전물질인 DNA 속에 담겨 있다가 물리적인 작용과 화학적인 반응을 겪으면서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의 차원을 벗어난 원격적인 활동을 통해 작용합니다. 이는 구스타프 칼 융이 말한 집단무의식, 즉 무수한 반복이 다 합해져 누적된 인류 공통의 기억과 비유할 수 있습니다.

형태공명(形態共鳴, morphic resonance)

한 종류의 생물체에 누적되어 있는 모든 사건은 그 생물종이 공통적으로 영향을 받는 그 종의 형태장에 기억됩니다. 이미 저장된 요소들은 새로 발생하고 탄생하는 다른 개체가 꼴을 갖추는 데 다시 영향을 미칩니다. 한 종에 속하는 모든 개체의 활동은 그 생물종의 형태장에 영향을 주며, 이러한 영향을 통해 조금씩 변형되어 가는 형태장은 다시 새로 발생하고 탄생하는 미래 개체의 모양새를 정해주는 것입니다.

사람을 비롯한 동물이나 식물의 모양새뿐만 아니라 형태나 행동양식에도 형태장은 영향을 미칩니다. 생물의 어떤 종 내에 축적된 사건, 즉 그 종의 어떤 개체가 경험한 행동이나 형질의 영향이 형태장을 통해 같은 종에 속하는 다른 개체에 작용하는 현상을 형태공명(形態共鳴, morphic resonance)이라고 합니다. 한 지역에 사는 일정한 종류의 동물에게 그들이 아직 할 줄 모르는 어떤 새로운 것을 가르치면, 지구의 어떤 곳에 살더라도 그와 같은 종에 속하는 개체는 같은 것을 배우게 될 때에 앞선 세대에 속한 개체보다 좀 더 쉽게 빨리 배우게 된다는 사실이 다양한 실험을 통해서 알려졌습니다.<라마르크가 주장한 획득형질의 유전, 맥더걸의 쥐의 미로찾기 실험>

형태공명을 통한 유전의 위력은 서로 다른 종의 개체에게도 영향을 발휘합니다. 지구의 어떤 장소에 사는 한 생물종이 아주 먼 다른 장소에 살고 있는 전혀 다른 종으로부터도 기(氣)를 받을 수 있습니다. 공간뿐만 아니라 별개의 시간대에도 형태공명은 일어납니다. 모든 생물체는 과거에 살았던 다른 생물체로부터 영향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영향력은 서로 유사한 종 사이에 작용할수록 강합니다. 또한 형태공명의 영향은 조금 전에 있었던 바로 자기 자신으로부터 오는 것이 가장 강하고 직접적입니다.

한번 있었던 일은 지금 일어나는 일에 영향을 미치며 지금 일어나는 일은 미래에 있게 될 사건에 영향을 줍니다. 그러면서 일종의 기억이라고 할 수 있는 형태발생장 자체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하게 됩니다. 형태공명에 관한 이론은 지금까지 신비라고 여겨져 온 많은 현상 - 텔레파시, 기도, 명상 등등 - 을 설명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았습니다.

부풀리는 누룩의 속성

다시 이방인의 땅으로 건너가는 배 안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바리새파 사람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합니다. 누룩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누룩은 항상 부정적인 의미(악한 성향)로 받아들여졌는데, 유월절 전날 누룩을 제거한 빵을 먹는 것은 불결한 것을 제거한다는 의미입니다. 바울로도 누룩을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했는데(고린도전서 5:6-7), 그에게 있어서 누룩은 죄를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바리새파 사람들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말했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마태 16:5ff; 마가 8:14). 예수님이 조심하라고 하신 바리새인들의 누룩이란 그들의 율법적 틀 속에 모든 민중을 가두려는 그들의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기들이 지킬 수 있는 것을 하루하루 자기의 생명을 연장시키기에 급급한 모든 민중들에게 강요하는 것은 자신의 권력을 확장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따라서 바리새인의 누룩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존재합니다.

그런데 누룩 자체로 보면 몰가치적입니다. 누룩 자체를 좋거나 나쁘다고 판단할 수 없습니다. 누룩 앞에 붙어서 한정하고 있는 것에 따라서 옳고 그름이나 선함과 악함을 판단할 수 있게 됩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의” 누룩, “헤롯의” 누룩, 그리고 “하느님 나라의” 누룩을 말할 때, 누룩 앞에서 한정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에 따라서 조심하고 경계해야 하거나 적극적으로 권해야 하게 됩니다. 단지 누룩은 곰팡이가 피기 시작하면 순식간에 전체로 퍼져 나가고, 가루반죽에 파고들어 그것을 다 부풀리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난 주에 있었던 기장 선교정책협의회에서 배태진 총무는 선교기초공동체 1,000개와 교회공동체 2,000개를 2015년까지 확장하는 것을 제안하였습니다. 2008년 말에 기장의 교회는 1,580개입니다. 매년 60개의 교회를 개척해야 합니다. 교회와 교인수의 확장은 중요하고 필요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선교를 잘 감당하고 수행할 수 있도록 하는 일이 병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단순한 양적인 성장은 누룩의 속성처럼 몰가치적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누룩처럼 어떤 공동체를 만들고 확장할 것이냐 하는 목표가 그 속에 분명히 있어야 합니다.

한 덩어리의 빵으로도 ......

제자들은 자기들이 가진 빵이 한 덩어리 밖에 없었기 때문에 서로 걱정합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제자들을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그렇게도 마음이 돌같이 굳어져 있느냐?”하고 책망한 후에, 오천 명과 사천 명을 배부르게 먹이고 남은 조각에 대하여 묻습니다. 제자들은 그 숫자를 잘도 대답합니다. 그렇게 했는데도 이해하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하고 말하면서 이 이야기는 끝납니다.

예수님과 함께 한 사건을 함께 경험한 제자들, 직접 사건의 현장에서 보고 들은 제자들이 깨닫지 못한 것은 무엇입니까? 갑자기 바리새파 사람들과 헤롯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하면서 빵을 먹인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빵을 먹인 이야기와 누룩이 어떤 관련이 있습니까? 그 둘의 연관성을 찾으려고 애를 써도 제자들은 깨닫지 못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누룩이라는 것을 따로 추출해서 보관하지 않았습니다. 반죽을 부풀리는 누룩(효모균)이 정식으로 발견된 것은 17세기 후반이었고, 1857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프랑스의 과학자 파스퇴르가 효모의 작용을 과학적으로 규명해 냈습니다. 따지고 보면 제빵의 비밀이 밝혀져서 순수 배양이 가능한 누룩(이스트)이 나온 것은 불과 150년 정도에 불과합니다.

발효 빵을 처음 발견한 이집트인들은 발효된 밀가루 반죽을 일부 떼어 두었다가 다음 번 반죽 때 사용하거나 아니면 밀가루와 포도즙을 함께 넣고 반죽한 덩어리를 햇볕에 말렸다가 갈아서 누룩으로 썼습니다.<요플레 만들기> 유대인들은 밀이나 호밀, 그리고 보리나 맥아 등을 물에 담가서 발효시켜 만든 누룩을 쓰거나 아니면 전에 조금 떼어두었던 발효된 반죽을 새 것과 섞어서 발효시키는 보다 오래된 방법을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제자들이 가지고 있는 빵 한 덩어리나 오천 명을 먹일 때에 가지고 있던 빵 다섯 개나 사천 명을 먹일 때에 가지고 있던 빵 일곱 개는 엄청나게 많은 빵을 만들 수 있는 누룩입니다. 적은 누룩으로도 오천 명이나 사천 명을 먹일 수 있었듯이, 지금 제자들이 가지고 있는 빵 한 덩어리는 많은 사람들을 먹이기에 충분한 양입니다. 빵이 없다고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바리새파의 누룩, 헤롯의 누룩 그리고 하느님 나라의 누룩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를 누룩의 행위에 비유하였습니다. 하느님 나라가 반죽에 들어간 효모가 반죽을 부풀리는 것처럼 확장되기 위해서는 하느님 나라의 씨앗을 가진 사람들이 반죽 속으로 들어가는 행위를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많은 도전이 되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접하는 오늘, 우리는 많은 고민을 하게 됩니다. ‘내가 세상에 들어가 그 세상을 변혁시킬 누룩이 될 수 있는가?’ ‘나는 오늘 세상이 원하는 것을 따라 가기에도 급급하지 않은가?’ ‘돈이 주체가 되어 최고의 엘리트, 최후의 승자를 요구하는 세상에서 나는 또 하나의 객체로 전락하는 것은 아닌지?’ 우리들에게 세상은 바리새파의 누룩과 하느님 나라의 누룩,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도록 강요하고 있습니다.

누룩은 반죽 속에 들어가서 반죽을 부풀게 합니다. 이미 부풀어 오른 반죽에서 누룩을 다시 분리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 반죽은 누룩으로 말미암아 이미 변화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어떻게 변화시킬 것이냐는 것입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처럼 사람들을 율법이나 자신들의 권력, 지금으로 말하면 돈에 종속시키게 만들 것인지, 하느님 나라처럼 모든 사람이 더 나아가서 모든 생명이 온 누리가 부드러워 져서 살맛나게 만들 것인지. 어떤 누룩이 되든지 우리 앞에는 자본주의적 세상이 있고, 이미 우리는 그러한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앞서 말한 형태발생장과 형태공명 이론은 우리가 무엇을 선택해야 하고, 어떻게 해야 하는 지를 깨닫게 합니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소나무는 옛날에 살았던 모든 소나무들로부터 영향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쌓여있는 기억을 근거로 형태공명이 울려납니다. 시간과 공간을 가로질러서. 우리는 모두 우리들의 조상으로부터 끊임없이 영향을 받습니다. 사실 우리는 과거에 살았던 모든 인간으로부터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의 행태가 집단무의식 속에 응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작은 행동이나 기도는 허공에 흩어지는 것이 아니라 형태발생장에 축적되고 형태공명을 통해서 우리 동시대의 다른 사람들에게 퍼지고, 우리의 후손들에게도 전달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과 기도와 예배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입니다.

우리가 기도와 예배를 입으로 하든지 마음으로 하든지 행동으로 하든지 그 염원은 결코 허공 속으로 흩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한 마디의 기도라도 허투루 하지 않고 한 순간의 마음 씀씀이도 잊혀질 것이 없습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의 삶과 기도와 예배는 우리의 미래뿐만 아니라 우리 후손들이 살아갈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지금 내가 무엇을 원하고 어떻게 기도하느냐 하는 것이 우리의 미래를 결정합니다. 내 마음의 씀씀이나 내 몸의 움직임이이 어디를 향하느냐에 따라서 형태발생장에 좋은 기억들을 축적하고 우리와 후손들에게 형태공명을 할 수 있습니다. 악한 세력이 늘어날수록 악한 기억이 더 많이 쌓이고, 선한 세력이 늘어날수록 선한 기억이 쌓여서 미래의 시간과 공간과 생명들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올리는 기도, 함께 이루는 공동체적 삶의 모습이 미래의 세상을 만들어갈 것입니다. 지금 세상은 힘이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예수님을 믿는 일이 멀고 험한 길을 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지금까지 역사를 주관하시고 인도하신 하느님은 우리의 믿음, 바리새파 사람들과 헤롯의 누룩을 조심하고 하느님 나라의 누룩이 되려는 마음에 희망을 잃지 않게 하실 것입니다.

======아아아...부르~~..가성으로.. 옥타브이상까지...목 풀고//물 마시고..준비됐으면...주바라기..시작..===

==주께 두손모아 비나니[사랑의 종소시..김석균 작사.작곡]==

1.[공통]주께 두손 모아 비나니 크신 은총 베푸사 

밝아오는 오늘 이 아침을 환히 비춰 주소서

오 주, 우리 모든 허물을 보혈의 피로 씻기어 하나님 사랑안에서 행복을 얻게 하소서

서로 믿음안에서 서로 소망가운데 서로 사랑안에서 손잡고 가는 길

[공통]오 주, 사랑의 종소리가 사랑의 종소리가 이시간 우리 모두를 감싸게 하여 주소서

2..[공통]주께 두손 모아 비오니 크신 은총 베푸사 

주가 예비하신 동산에 항상 있게 하소서

오 주, 우리 맘에 새 빛이 어두움 밝게 하시어 진리의 말씀안에서 늘 순종하게 하소서

서로 참아주면서 서로 감싸주면서 서로 사랑하면서 주께로 가는 길 

[공통]오 주, 사랑의 종소리가 사랑의 종소리가 이시간 우리 모두를 감싸게 하여 주소서


==========
[[창39:2-4]]
*2.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successful, prosperous)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3.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4.요셉이 그의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섬기매 그가 요셉을 가정 총무로 삼고 자기의 소유를 다 그의 손에 위탁하니
*5.그가 요셉에게 자기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바라크...성공-번영-생산-장수)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
-----------------
[[시68:6]]*6.하나님이 고독한 자들은 가족과 함께 살게 하시며 갇힌 자들은 이끌어 내사 형통하게(bring into prosperity) 하시느니라 오직 거역하는 자들의 거처는 메마른 땅이로다
==[형통 :: 에셰르와 바라크의 맛봄-누림-체험/체득-하나님안으로 참여함, 즉 임마누엘 주님과 하나되어 모든 역경 이겨내고 하나님의 데스티니<이스라엘> 그대로 이룸]====
hr;v;/K(3574, 코샤라) 번영, 성공, 형통
코샤라(명여)는 카셰르(rveK; , 3787)에서 유래했으며, '번영, 성공, 형통'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시 68:6에서 한번 나온다: "하나님은 고독한 자로 가속 중에 처하게 하시며 수금된 자를 이끌어 내사 형통케 하시느니라 오직 거역하는 자의 거처는 메마른 땅이로다".(참조: Gesenius). 
jl'x;(6743, 찰라흐) 앞으로 나가다, 발전하다, 형통하다
1. 찰라흐(jl'x; , 6743) 또는 찰레아흐는 기본어근이며, '앞으로 나가다, 발전하다, 번영하다'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54회 나온다.
(a)  칼형에서, '앞으로 나아가다, 형통하다, 성공하다, 유익하다'.
① 하나님은 순종하는 자기 종의 고난을 통해 인간을 위한 구원을 성취하신다. 이사야는 말한다: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사 53:10). 시 54:4에서 왕의 승리(성공), 겔 16:13에서 왕후의 계승을 나타낸다.
진정한 형통이 오직 하나님의 축복으로부터 오지만 외적으로 종종 악인이 형통한 듯이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현상으로 인해 의인은 인간의 일에 대한 하나님의 개입을 묻게 된다(렘 12:1). 말세에 하나님을 거스리는 자들은 교활함과 속임수를 통해 잠시동안 번영할 것이다(단 8:12, 단 8:24이하).
분명히 단언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고서는 결국은 결코 성공하지 못하리라는 것이다(민 14:41).
겔 17:9-10에서 막다른 골목에서 시드기아는 제 나름대로 정책을 추진해 보려 하지만 실패할 수 밖에 없다. 모든 식물을 말라죽게 하는 뜨겁고 메마른 동풍은 여기서 바벨론왕을 상징한다.
겔 17:15에서 예루살렘이 망한 것은 시드기야가 바벨론왕을 섬기기로 맹세하고 이를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② 겔 15:4에서 비유적으로 불탄 포도나무(이스라엘)는 유용하지 못하다고 한다.
렘 13:7에서 썩은 띠의 무용성을 묘사한다. 여호와를 섬기기를 거부하는 자들은 썩은 거나 마찬가지이다(렘 13:10).
사 54:17에서 장인이나 전사나 모두 하나님의 손안에 있는 피조물이므로, 그 어떤 무기도 예루살렘을 칠 수 없다. 그 무기는 유용하지 못할 것이다.
(b)  히필형에서, '형통하게 하다, 성공적인 결과에 이르다, 성공을 이루거나 보이다'.
찰라흐는 의도했던 바를 만족스럽게 성취하는 것을 의미한다. 진정한 번영은 하나님을 전심으로 구하는 자의 생애 속에 하나님께서 역사하심으로써 도래한다(대하 13:21, 참조: 수 1:8, 시 1:3). 대하 26:5에서 말하는 바와 같다: "저[웃시야]가 여호와를 구할 동안에는 하나님이 형통케 하셨더라". 요셉은 형통한 사람이라고 불린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 그의 모든 불행을 바꾸어 야곱의 아들들을 유익하게 했기 때문이다(창 39:2-3, 창 39:23). 경건한 사람은 자기의 일에 성공을 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탄원한다(시 118:25).
하나님은 그의 말씀을 통해 자기의 뜻을 표현한다. 그러므로 그의 말씀은 헛되지 않고 그 성취에 있어서 형통할 것이다(사 55:11). 그러나 하나님을 대적하여 자기 뜻대로 행하는 왕의 성공은 일시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자기의 분노를 성취하기 위해 모든 악에 대한 심판의 때를 준비하고 계시기 때문이다(단 11:36).
2. 찰라흐(동사)는 기본어근이며 '달려들다, 몰아대다, 돌진하다'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10회 나온다.
삼하 19:18에서 그들이 요단강 안으로 달려드는 것, 암 5:6에서 저가 불같이 요셉의 집에 돌진 하는 것을 나타낸다.
삿 14:6등에서 성령이 그에게 돌진하는 것(임하는 것)을 나타낸다(삿 14:19, 삿 15:14, 삼상 10:6, 삼상 10:10, 삼상 11:6, 삼상 16:12, 삼상 18:10). (참조: BDB; TWOT). 

이전글 : 한걸음씩마다주사랑동행
다음글 : 신약시대선지자.제자추수일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