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2.신들 중에 뛰어난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3.주들 중에 뛰어난 주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4.홀로 큰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는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5.지혜로 하늘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6.땅을 물 위에 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7.큰 빛들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8.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9.달과 별들로 밤을 주관하게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0.애굽의 장자를 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1.이스라엘을 그들 중에서 인도하여 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2.강한 손과 펴신 팔로 인도하여 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3.홍해를 가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4.이스라엘을 그 가운데로 통과하게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5.바로와 그의 군대를 홍해에 엎드러뜨리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6.그의 백성을 인도하여 광야를 통과하게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7.큰 왕들을 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8.유명한 왕들을 죽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9.아모리인의 왕 시혼을 죽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20.바산 왕 옥을 죽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21.그들의 땅을 기업으로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22.곧 그 종 이스라엘에게 기업으로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23.우리를 비천한 가운데에서도 기억해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24.우리를 우리의 대적에게서 건지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25.모든 육체에게 먹을 것을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26.하늘의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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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에의 권면(시 136:1-9)
우리가 여기에서 반복해서 부르심을 받은 의무는 “감사하라”는 것이며, 땅의 소출이나 가축으로써가 아니라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로 “항상 찬미의 제사를 드리는 것”(히 13:15)이다. 우리는 기도하며 참회하라고 진지하게 부르심을 받지 않고, “감사하라”고 부르심 받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신앙의 가장 즐거운 일로 풍요하게 되며, 하늘의 일로 가득 차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다음과 같은 문제들을 고찰해 보자.
Ⅰ. 우리는 누구에게 감사해야 할 것인가? 우리가 모든 선을 받은 그에게, “여호와께”,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1절). “모든 신에 뛰어나신 하나님께.” 천사들이 경배하는 하나님, 그에게서 통치자들이 저희의 권력을 받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거짓 신들이 정복되며 정복될 것이다(2절). “모든 주에 뛰어나신 주께”, 모든 통치자들 위에 뛰어난 주권자이며 모든 지지자에 뛰어난 구원자께 감사를 드려야 한다(3절). 우리는 모든 경배의 행위에서 초월자로 계신 하나님의 우수성을 보아야 하며, 대적할 수 없고 통제할 수 없이 높은 그의 권세와 지배를 보아야 한다.
Ⅱ. 우리는 무엇을 감사해야 하는가? 자기의 모든 감사를 자기 자랑으로 한정시킨 바리새인처럼 하지 말고(“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감사하나이다. 내가 이러저러하게 된 것을 감사하나이다”), 감사를 모두 하나님의 영광에로 향하게 해야 한다.
1. 우리는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선하심을 인해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1절).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가 선을 행하시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가 또한 선하시기 때문에 감사해야 한다(모든 물줄기는 그 근원에까지 올라가야 한다). 그리고 그가 우리에게 인자하실 뿐만 아니라,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 후대에 올 자들에게도 인자함으로 대하실 것이기 때문에 그에게 감사해야 한다. 우리는 세상에서 우리에게 지금 나누어준 자비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하늘의 영광과 기쁨 중에 영원할 인자하심에 대해서도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2. 우리는 그의 권능과 지혜의 기사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일반적으로(4절) 그는 “홀로 큰 기사를 행하신다.” 그 고안은 놀라우며, 계획은 무한한 지혜로 말미암아 이루어졌다. 그는 홀로 놀라운 일들을 행하신다. 그 외에는 아무도 그러한 일을 행할 수 없다. 그는 다른 어떤 것의 조력이나 충고 없이 그것들을 이루신다. 특히 하늘 등을 이루신 기사를 살펴보자.
(1) 그는 하늘을 지으시고 펼치셨다. 우리는 거기에서 그의 지혜와 권능을 볼 뿐만 아니라, 하늘의 온화한 작용에서 그의 인자하심을 맛본다. 하늘이 지속되는 한 하나님의 자비는 그 안에 존속할 것이다(5절).
(2) 그가 육지를 나타나게 하실 때 땅을 바다에서 올리시고 인간을 위한 거주지로 적합하게 만드셨다. 거기에서도 인간에 대한 그 인자하심이 영원할 것이다(6절). 왜냐하면 “인간에게 땅을 주시고”, 그 모든 선물을 주셨기 때문이다.
(3) 그는 하늘과 땅을 지으시고, 그 거리에도 불구하고 그 사이에 관계를 정하셨다. 해와 달과 별을 지으심으로써 그것을 창공에 두어 이 땅에 빛을 비추시고, 영향을 미치게 하셨다(7-9절). 이것들은 우리에게 크기 때문에 “큰 빛들”이라고 불린다. 천문학자들은 달이 많은 별들보다 작다고 우리에게 말할 것이다. 그러나 달이 지구에 더 가깝기 때문에 더 크게 보일 뿐이다. 그들이 연중 계절을 지배하며 세상에 유익을 주기 때문에 “주관한다”고 불린다. 그리고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는다”(눅 22:25). 지배권이 나누어져서 “해로 낮을 주관케 하고, 달과 별들로 밤을 주관케” 했지만, 모든 것이 하나님의 지시와 처분에 복종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방인들이 우상화한 통치자들은 세상의 종이며, 하나님의 신민이다. “해야, 너는 조용히 서 있고, 너 달아, 밤을 주관하라.”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송축함(시 136:10-22)
하나님께서 처음 이스라엘을 하나의 백성으로 형성하시고, 그들 가운데 그의 나라를 세우셨을 때, 그가 이스라엘을 위해서 행하신 큰 일들이 다른 시편에서 이스라엘을 위해서 베푸신 하나님의 권능과 특별한 친절의 기사로 언급된 것과 같이 여기에서도 언급되었다(135:8 등 참조).
Ⅰ. 그는 애굽으로부터 그들을 구출해 내셨다(10-12절). 그것은 그들에게 오래 지속된 자비였다. 그리고 그것에 의해 특징지워진 그리스도에 의한 우리의 구속은 실로 영원하다. 왜냐하면 영원한 구속이기 때문이다. 애굽에서 일어난 모든 재앙들 중에서 장자의 죽음 이외에는 아무것도 언급되지 않았다. 그것이 정복하는 재앙이었기 때문이다. 모든 재앙에서 애굽 사람들로부터 이스라엘 사람들을 구별하신 하나님은 마침내 간계에 의해서가 아니라, 멀리 펼치며 큰 일을 행하시는 강한 손과 팔로 그들 가운데서 이스라엘을 인도해 내셨다. 그들은 이스라엘에 율법을 전하라는 모세의 임무를 깨달았다. 이러한 자비의 기적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은 그 율법에 복종하는 영원한 의무를 갖게 되었다(출 20:2).
Ⅱ. 그는 그들에게 가로막힌 홍해를 건너게 하셨다. 그는 자연의 일반 과정을 통제하시는 권능에 의해서 “바다를 둘로 가르시고”, 그 사이에 길을 열어 이스라엘로 하여금 그 사이로 통과하게 하셨다. 그리하여 이제 그들은 하나님과의 언약관계에 들어가게 되었다(렘 34:18 참조). 그는 바다를 가르셨을 뿐만 아니라, 바다가 갈라졌을 때 그리로 통과해서 지나갈 용기를 그의 백성들에게 주셨다. 이것은 바다에 대한 하나님의 권능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마음에 대한 하나님의 권능의 기사였다. 그리고 그것은 자비의 기적임은 물론 정의의 기적이 되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통로가 되었던 홍해가 추적자들에게는 무덤이 되었다. 그는 거기에서 바로와 그의 군대를 엎드러지게 하셨다.
Ⅲ. 그는 그들을 쓸쓸한 광야로 통과하게 하셨다(16절). 그는 그들을 광야로 인도하셨고, 그들을 먹이셨다. 그들의 장막은 40년 동안 계속되는 기적의 연속으로 음식이 가득했으며, 강하게 되었다. 그들이 광야에서 늑장부리며 방황했다고 할지라도 결코 멸망되지 않았다. 이때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그 인자하심의 불변성은 그들이 광야에서 그를 거역하고 사막에서 그의 마음을 상하게 했기 때문에 더욱 주목할 만한 것이었다.
Ⅳ. 그는 그들에게 자리를 만들어주기 위해서 그들 앞에 있던 왕들을 멸망시켰다(17-18절). 그들을 물러가게 하거나 추방하지 않고 살육하고 죽였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났고, 이스라엘에게는 그의 자비, 변하지 않는 자비가 나타났다. 그들은 “큰 왕”과 “유명한 왕”을 찬미했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인간의 자녀 중에 가장 미천하고 가장 약하고 작은 자들처럼 쉽게 정복하셨다. 그들은 악한 왕들이었다. 그들의 위엄과 영광이 하나님의 정의를 피하지 못하게 했다. 그들이 위대하고 유명할수록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는 그러한 왕들을 이스라엘에게 넘겨주는 것으로 나타났다. 시혼과 옥이 특별하게 언급되었다. 그것은 그들이 요단강 편에서 정복당한 최초의 두 왕이었기 때문이다(19-20절). 하나님의 은총을 전체적으로 보는 것보다 구체적인 항목에 들어가 보는 것이 더 좋다. 각 기사를 관찰하고서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하고 고백하는 것이 좋다.
Ⅴ. 그는 그들에게 좋은 땅을 소유하게 했다(21-22절).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을 소유하시고 세상과 거기에 거하는 것을 소유하신 그가 땅을 한 백성에게서 빼앗아 자기가 기뻐하시는 다른 백성에게 주셨다. “아모리 족속의 죄가 넘쳤다.” 그러므로 그 땅을 그들에게서 빼앗으셨다. “이스라엘”은 그의 “종”이었다. 그들이 광야에서 반역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들에게서 예배 받기를 원하셨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그들에게 속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애굽 사람들에게 “내 백성을 보내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이 가나안 사람들에게도 “내 백성을 들어가게 하라”, 그리하여 그들로 하여금 나를 섬기게 하라고 말씀하셨다. 이러한 점에서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그들에게 “영원하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늘의 가나안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가 영생에 이를 것이다.”
-----영원한 하나님의 자비(시 136:23-26)
하나님의 영원한 인자하심이 송축되었다.
Ⅰ. 그의 교회의 구속에서(23-24절). 우리는 유대 교회를 그 압제자의 손에서 건져내신 많은 구속에서(그들의 지위가 낮아지고 고역을 치를 때 하나님은 그들을 기억하시고 구원자와, 사사들과 다윗 왕을 보내셨다.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모든 적으로부터 보호하셨다), 그러나 특히 보편적인 교회의 큰 구속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할 많은 이유를 갖고 있다. “우리를 비천한 데서 기념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그는 우리를 죄와 사망과 지옥과 우리의 모든 영적인 적들로부터 구속하기 위해 그의 아들을 보내셨다.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그는 죄지은 천사로 보냄을 받은 것이 아니라, 우리를 구속하시기 위해서 보내심을 받았다. 왜냐하면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기 때문이다.
Ⅱ. 그가 모든 피조물을 위해 만드신 식물에서(25절). “그는 모든 육체에게 식물을 주신다.” 그가 생명을 주신 곳 어디든지 합당하고 충분한 음식을 주시는 것은 하나님 섭리의 인자하심의 일례다. 그는 거대한 가족을 부양하시는 선한 가장이시다.
Ⅲ. 그의 모든 영광과 그의 모든 은총에서(26절). “하늘의 하나님께 감사하라.” 이 구절은 그가 영광스러운 하나님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의 인자하심의 영광이 우리의 찬양에서 주목되어야 한다. 그의 “영광의 부요함”이 “긍휼의 그릇”에서 나타난다(롬 9:23). 그것은 또한 그가 위대한 은혜자임을 의미한다. “모든 선하고 온전한 은사는 위로부터”, 빛의 아버지로부터, “하늘의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든 물줄기를 그 근원에까지 찾아 올라가야 한다. 여기에 나타났고 앞에 나타난 특별한 인자하심은 어쩌면 잠깐 동안 지속될지 모르지만, 하나님 안에 있는 인자하심은 “영원하다.” 그것은 그칠 줄 모르고 솟아오르는 샘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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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d:y:(3034, 야다) 던지다, 쏘다, 감사하다, 찬양하다, 고백하다....give thanks to.....[하나님을 <야다 : 참되게 알다> 하는 자 참되게 야다<감사> 하리라]
야다(동사)는 기본어근이며, '던지다, 내던지다 throw, cast'를 의미한다. 좋은 것을 던져 줄 수도 있고, 나쁘거나 불필요한 것을 던져 버릴 수 있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144회 나오며, 칼형에서 '쏘다'(화살, 렘 50:14), 피엘형에서 '던지다'(애 3:53), 히필형에서 '감사하다, 찬양하다, 고백하다', 히트파엘형에서 '고백하다, 감사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야다의 기본적인 의미는 '죄, 하나님의 품성과 역사, 혹은 인간의 특성을 시인하다 혹은 고백하다'이다. 이 동사와 그 동의어 할랄의 기본적인 차이는 후자의 용어가 '갈채하다, 자랑하다', 혹은 어떤 대상을 '기뻐하다'를 강조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에, 야다는 좋든 나쁘든 어떤 사실에 대한 '인정'과 '선언'을 강조한다. 70인역본은 일반적으로 야다를 엑소몰로게오로 번역한다.
동사는 세 가지의 기본적인 방법으로 사용된다.
첫째, 이 단어는 개인적으로든 국가적으로든 죄의 시인 혹은 고백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었다. 기본적인 개념은 시 32:5에 묘사되어 있는 다윗의 개인적인 고백에서 분명하게 관찰되었다. 여기에서 시적인 병행구는 고백이 죄를 감추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하나님께 알리는 것이었음을 설명해 준다. 죄에 대한 고백이 하나님께 행해져야 한다는 사실을 주목하는 것은 중요하다. 국가적인 고백의 개략은 속죄일 의식에서 발견된다. 이때 대제사장은 큰 소리로 이스라엘 민족의 모든 죄를 고백하면서, 자기의 손을 염소의 머리 위에 두어 상징적으로 민족의 죄를 염소에게 전가 시켰다(레 16:21). 힛파엘형은 이 동사가 국가적인 죄의 고백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될 때 일반적으로 사용된다. 이 어간은 또한 이스라엘 죄의 대 고백이 다니엘(단 9:4, 단 9:20), 에스라(스 10:1), 느헤미야(느 1:6), 그리고 바벨론 포로기 동안과 그 이후의 이스라엘 백성(느 9:2-3)들에 의해 행해졌을 때에도 사용되었다. 국가적인 죄의 고백은 일반적으로 공적인 것이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자기 앞에서 우리의 죄를 시인하여(참조: 요일 1:9), 자기와의 본래의 관계를 유지하기를 매우 원하신다.
둘째, 야다는 하나님의 속성과 그의 일에 대한 인간의 공적인 선포나 선언(고백)을 나타내기 위해 주로 사용되었다.(고백적 찬양) 이 개념은 찬양의 의미의 핵심에 있다. 찬양은 하나님이 누구이신가 그리고 그가 무엇을 행하는가에 대한 고백이거나 선언이다. 이 용어는 영역본들에서 가장 자주 '감사하다' thank로 번역되지만, 베스터만(Westermann)에 의하면, 이 번역이 실제적으로 적당한 번역은 아니라고 한다. 즉 구약성경에서 ...아직까지 '감사하다' thank만을 의미하는 동사는 없었다. 일반적으로 '감사하다' thank로 번역되는 호다는 구약성경에서 사람들 사이의 감사에 대한 표현을 뜻하는 말로는 단 한번도 사용되지 않았다. 따라서 처음부터 이 호다는 하나님과 인간에게 똑같이 사용될 수 있는 우리의 언어 '감사하다' thank와 일치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인간들 사이에 일어나는 어떤 것으로서의 우리의 '감사하다'가 가장 분명하게 발견되는 구약성경의 구절들에서 사용된 동사는 베레크이다. 이 동사는 '찬양하다' praise의 기본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축복하다' bless를 의미한다.
이런 사실에 비춰볼 때, 구약성경은 감사하는 것에 대한 독립적인 개념을 가지고 있지 않음이 분명하다.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표시는 찬양에 포함되어 있다. 이것은 찬양의 한 방식이다(Westermann, Claus, The Praise of God in the Psalms, Richmond; John Knox Press, 1965, pp. 26-27).
이 용어의 가장 좋은 역어는 '고백' confession이다. 왜냐하면 시편(참조: 시 89:5, H6, 시 105장, 시 106장, 시 145장)과 그 외의 곳(참조: 대상 29:13)에서 충분히 볼 수 있듯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속성과 일을 고백하거나 선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야다는 '찬양하다' praise를 뜻하는 주요 단어들 중의 하나이다. 이 단어는 히브리인들의 시에서 언제나 할랄(찬양하다) ,자마르(악기로 찬양하다) 룸(높이다), 자카르(기억하다), 카밧(찬양하다), 그리고 나갓(선언하다)과 같은 찬양 용어들과 병행되어 나온다. 감사는 찬양 뒤에 온다. 왜냐하면 사람이 하나님의 속성과 일을 선언할 때, 이런 것들에 대해 감사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찬양은 대개 감사로 이어진다.
[베스터만은 한 주요 요지에 주의를 환기시켰다. 그렇지만 그의 말이 모든 세부적인 것들에 다 필요한지는 의심스러울 것이다. 만약 때로 감사가 찬양에 포함된다면, 특히 이 어근의 기본적인 의미가 BDB가 시사한 바처럼, '인정하다' acknowledge일 때, 어떤 행동이나 일에 대해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 야다가 사용되는 실례들이 감사하다라는 우리의 개념과 동일시될 수 있을 것이다(R. L. H)].
찬양은 일반적으로 여호와나 그의 이름을 그 대상으로 취한다(시 97:12, 시 99:3, 시 136:1-3, 시 136:26). 죽은 자가 아닌, 산 자만이 하나님을 찬양하였다(사 38:18-19, 시 6:5, H6, 시 30:9, H10, 시 88:10, H11). 찬양의 수창자(首唱者)에는 의로운 개인들(시 140:13, H14), 이스라엘 백성(시 106:47), 열방들(시 45:17, H18), 지상의 모든 왕들(시 138:4), 하늘들(시 89:5, H6), 사람의 노(시 76:10, H 11)와 같은 것들이 포함된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위대한 속성과 그의 기적적인 역사들을 고백했다. 여호와에 대한 찬양은 공적인 것으로, 열방들 사이에서(삼하 22:50),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대 회합에서(시 35:18) 발견되었다. 개인이나 백성이 와서 여호와를 찬양할 때, 그들은 종종 악기를 수반하여(대하 5:13, 시 33:2, 시 43:4), 말이나 노래로써, 구두로 찬양하였다(시 109:30, 시 28:7). 이런 찬양은 일반적으로, 다윗이 엄격하게 여호와의 인격에 대한 찬양과 고백으로 경축하는 임무를 맡긴 그런 레위인들(대상 16:4)의 지시하에 성막(혹은 성전)에서 행해졌다(시 100:4, 시 122:4). 이것은 매일 아침과 저녁에 성막에서 수행되어야 했던 예배의 주요 측면이었다(대상 23:30). 이 찬양은 여호와의 옳은 길(여호와의 의)에 따라(시 7:17, H18) 올바른 마음을 가지고(시 119:7) 전심으로 행해져야 했다(시 86:12, 시 111:1). 이런 찬양은 계속적으로 - 영원히 - 행해져야 했다(시 30:12, H13).
셋째, 야다는 또한 어떤 사람에 관한 어떤 진실을 고백하는, 즉 사람에 대한 사람의 칭찬을 나타내기 위해서 사용되었다(시 49:18, H19). '찬양' praise을 의미하는 "유다"라는 이름은 이 어근에서 나온 것이다. 왜냐하면 유다의 형제들이 그를 찬양(혹은 고백)하였기 때문이다(창 29:35).(참조: R. H. Alexander; B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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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의 이유 Reason to Give Thanks ....신명기 26:1-11===
1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시는 땅으로 여러분은 들어갈 것이오. 그 땅을 점령하고 그 땅에서 살 것이오. 2 그 때가 되면 여러분은 하나님 여호와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땅에서 자라난 작물 가운데 처음으로 거둔 것을 광주리에 담아 하나님 여호와께서 예배 받으시기 위해 선택하신 곳으로 나아가시오. 3 그리고 그 당시의 제사장에게 이렇게 말하시오. ‘오늘 제가 제사장의 하나님 여호와께 선언합니다. 여호와께서 저희 조상에게 약속하신 땅으로 제가 왔습니다.’ 4 제사장이 여러분이 가져온 광주리를 받아서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의 제단 앞에 놓으면 5 여러분은 여호와 앞에서 이렇게 말씀 드리시오. ‘제 조상은 떠돌아 다니던 아람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집트로 내려갔다가 몇 안 되는 사람과 함께 그 곳에서 나그네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거기에서 강하고 번성한 큰 나라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6 그러나 이집트 사람들이 우리에게 고된 일을 시킴으로 우리를 학대하고 괴롭혔습니다. 7 그래서 저희 조상의 하나님이신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저희 기도를 들어 주셨고, 여호와께서는 저희가 고통 당하는 것과 고된 일을 하는 것과 학대 받는 것을 보셨습니다. 8 여호와께서는 크신 힘과 능력으로 저희를 이집트에서 인도해 내셨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위엄과 표적과 기적을 보여 주셨습니다. 9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저희를 이 곳으로 인도하시고 젖과 꿀이 흐르는 비옥한 땅을 주셨습니다. 10 이제 제가 여호와께서 저에게 주신 이 땅에서 거둔 첫 열매를 여호와께 가져 왔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 광주리를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 놓고, 여호와 앞에 엎드려 경배하시오. 11 여러분은 레위 사람과 여러분 가운데 사는 외국인과 함께 즐거워하시오.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여러분과 여러분의 집에 주신 온갖 좋은 것을 나누며 즐거워하시오.” (쉬운 성경)
언제부터인지 추수감사절이 하나의 절기가 되었습니다. 마치 일년 내내 감사를 잊고 살던 사람들이 이 날이 되면 잊고 있었던 감사의 마음을 되찾는 것 같은 그런 느낌입니다. “감사”는 말은 영어로 “Thanksgiving”이라고 합니다. 문자적인 의미는 “감사의 행위(the act of giving thanks)” 혹은 “감사의 표현(an expression of thanks)” 이라는 뜻입니다.
여러분은 올 한 해 동안 무슨 감사 드릴 일이 있습니까? 무슨 감사를 표현할 일이 있습니까? 어렵고 힘든 일만 있었지 감사 드릴 일은 없습니까? 한국의 세브란스 병원에 가면 심장혈관병동이 있는데, 그 병동에 누가 썼는지 모르지만 “어느 환자의 고백”이라는 시가 걸려 있다고 합니다.
주님! 때때로 병들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 이로 인해 인간의 약함을 깨닫게 해주시기 때문입니다.
가끔 고독의 수렁에 내던져 주심도 감사합니다. ... 그것은 주님과 가까워지는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일이 제대로 안되게 틀어주심도 감사합니다. ... 그래서 나의 교만이 반성될 수 있습니다.
아들, 딸이 걱정거리가 되게 하시고, 부모와 동기가 짐으로 느껴질 때도 있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 그로 인해 인간된 보람을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먹고 사는데 힘겨웁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 눈물로서 빵을 먹는 심정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불의와 허위가 득세하는 시대에 태어난 것도 감사합니다. ... 이로 인해 하나님의 의가 분명히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땀과 고생의 잔을 맛보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 그래서 주님의 사랑을 진실로 깨닫기 때문입니다.
주님! 이 모든 일로 감사할 마음을 주심을 감사합니다. ... 이 모든 일로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계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 기도문이 입원 환자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줄 뿐만 아니라 내방객들에게도 신앙적인 도전을 주고 있어 화제가 되고 있다고 합니다.
수술을 앞둔 환자가 이 시를 보는 순간 말할 수는 위로와 용기를 얻고, 또 병문안을 왔다가 이 시를 발견하고 이 시를 베껴다가 다른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의 삶이 얼마나 연약한 것입니까?
병들고, 낙심하고, 외롭고, 일이 뒤틀리고, 걱정과 근심이 떠나지 않고, 게다가 경제적으로 힘들면 저절로 세상에 대한 불평과 원망이 나올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세상을 원망해 봐야 아무 것도 바뀌는 것이 없습니다. 자기 자신만 망가지고 맙니다.
성격이 삐뚤어져서 왜곡된 시각으로 세상을 보게 되고, 자연히 인간 관계에 문제가 생기고, 삶의 의욕을 잃어 버리고, 열등의식에 빠져서 헤어나오지 못하게 됩니다.
그런데 반대로, 똑 같은 일을 겪으면서도 그 마음에 감사의 마음이 들며 그것을 견지하는 믿음의 산소망을 붙든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똑 같은 환경 속에서도 어떤 사람은 자기 자신을 망가뜨리고 파괴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감사로 자신을 변화 시키고, 자신을 더욱 성숙한 사람으로 변화 시키고, 주변을 변화 시켜 나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편에 속한 사람입니까?
성경에 “감사”라는 말이 수도 없이 많이 등장합니다.
구약성경에 127번, 신약 성경에 57번, 모두 184번이나 등장합니다. 이 말은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을 믿는 신앙생활에서 감사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신앙의 인물들이 그만큼 하나님께 감사하는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어로 감사를 “토다”라고 합니다.
이 “토다”라는 말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고백적인 언어입니다. 그래서 이 “토다”라는 말에는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뜻이 들어 있고, 하나님께 감사 제물을 드린다는 뜻이 있습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며, 우리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부르자. 우리가 감사함으로 그 앞에 나아가자(시편 95:2)”라고 했을 때, 감사라는 말이 “토다”입니다.
또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자시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 이름을 송축할지어다(시편 100:3-4)라고 했을 때, 여기 감사라는 말이 “토다”라는 말입니다.
“토다”라는 말은 “토를 단다”라는 말이 아닙니다. 누가 말하면 꼭 뒤에 뭐라고 종알종알 하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토를 단다”고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감사라는 말은 하나님과의 관계적인 말이요, 하나님께 대한 고백적인 말입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가 있습니다. 감사라는 말을 가볍게 여기지 말자는 것입니다.
금방 “Thank God” 하고 나서 돌아서서 불평하는 그런 우리 태도를 반성하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감사를 특별한 의미를 담아서 드리자는 것입니다.
피조물이 창조주에게,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 아버지에게,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에 대한 고백으로 감사를 드리자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시편 136편은 감사의 시편으로 널리 알려진 시편입니다.
우리는 이 시편에서 진정한 감사의 의미가 무엇인지 배워야 합니다. 제가 앞 부분을 읽으면 여러분은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His love endures forever)”하고 말하시면 됩니다. 단순히 기계적으로 반복하지 말고 하나님께 대한 여러분의 신앙고백이 되게 하십시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1절)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이에게 감사하라(11절)
강한 손과 펴신 팔로 인도하여 내신 이에게 감사하라(12절)
(우리 앞에 놓인) 홍해를 가르신 이에게 감사하라(13절)
자기 백성을 인도하여 광야를 통과하게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16절)
우리에게 땅을 기업으로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21절)
우리를 비천한 가운데에서도 기억해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23절)
우리를 우리의 대적에게서 건지신 이에게 감사하라(24절)
굶주린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25절)
하늘의 하나님께 감사하라(26절)
어떻습니까? 바로 이것이 성경적인 의미에서 감사, 토다입니다.
여러분, 오늘 읽은 신명기 26장 말씀을 보십시오. 아마도 이 말씀은 구약 성경에 기록된 추수감사절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이 아닌가 합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농사를 지어 처음 익은 열매를 광주리에 담아 그것을 여호와의 성소로 가지고 가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제사장에게 이렇게 말하라고 합니다. “여호와께서 저희 조상에게 약속하신 땅으로 제가 들어 왔습니다.”
그러면 제사장은 그 광주리를 받아서 하나님의 제단에 앞에 놓습니다. 그 때 너는 하나님께 이렇게 말씀 드리라고 합니다. “제 조상은 떠돌아 다니던 아람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집트로 내려갔다가 몇 안 되는 사람과 함께 그 곳에서 나그네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거기에서 강하고 번성한 큰 나라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집트 사람들이 저희에게 고된 일을 시킴으로 저희를 학대하고 괴롭혔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저희 기도를 들어 주셔서, 크신 힘과 능력으로 저희를 이집트에서 인도해 내셨습니다. 이제 여호와께서는 우리를 이 곳으로 인도하시고 우리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비옥한 땅을 주셨습니다. 이제 제가 여호와께서 저에게 주신 이 땅에서 거둔 첫 열매를 여호와께 가져 왔습니다.” 여기서 “아람 사람”이라는 말은 메소포타미아의 밧단 아람(Paddan Aram)에서 20년 동안을 살았던 야곱을 의미합니다.
모세는 지금 그의 백성들에게 감사의 삶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가르치는 방법이 특이합니다. 자기들의 역사를 돌이켜 보게 합니다. “우리 조상은 떠돌아 다니던 아람 사람이었습니다. 흉년을 피해 이집트로 내려 갔지만 몇 명 안 되는 소수의 사람들이었고, 그 땅의 나그네에 불과했습니다.....그런데,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땅으로 들어왔습니다. 이것이 이 땅에서 거둔 첫 열매입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특이한 것은 막상 이 말씀에는 감사라는 말이 한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 속에 구구절절이 자기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인자하심, 하나님의 “enduring love”가 끊이지 않은 강물처럼 흐르고 있습니다.
감사는 지금 내가 가진 것이 많고 적음에 대한 우리의 반응이 아닙니다.
감사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신실하심에 대한 고백입니다.
우리의 손에 든 것이 많든지, 적든지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하나님 앞에 가지고 가서 그렇게 고백해야 하는 것입니다.
과거의 고난의 역사 속에서 나에게 인자를 베풀어 주신 하나님, 그리고, 여기까지 나를 인도하신 하나님께 “하나님, 내가 하나님의 은혜로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내가 이 땅에서 거둔 첫 열매입니다” 이렇게 고백해야 합니다.
모세가 자기 백성들에게 가르친 감사의 교훈이 하나 더 있습니다. 11절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레위 사람과 여러분 가운데 사는 외국인과 함께 즐거워하시오.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여러분과 여러분의 집에 주신 온갖 좋은 것을 나누며 즐거워하시오.”
하나님께 대한 감사는 이웃을 초청해서 함께 즐거워하는 축제로 이어집니다. 이렇게 축제를 벌여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because of all the good things the Lord your God has given to you and your household” 모세는 계속 이렇게 말합니다. “Remember to include the Levites and the foreigners living among you in the celebration.”
“추수감사 헌금을 드리는 일곱 단계”라는 아주 감동적인 글을 읽었습니다.
이 말씀은 실제로 한국의 어느 교회 주보에 실렸던 글입니다.
(1) 오늘부터 한 주간 동안 올 일년을 통하여 하나님께 감사한 것들을 열심히 찾아서 감사의 기도를 드리십시오.
(2) 마음 속으로 얼마를 헌금할 것인가를 작정하여 봉투에 넣은 다음 하나님께 감사 함으로 드린다고 기도하십시오.
(3) 여러분 주위에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을 찾아보십시오. 그 동안 연락이 되지 않았던 먼 친척도 좋습니다. 자신의 가족도 좋습니다.
(4)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에게 그 돈의 일부를, 혹은 전부를 따뜻함으로 전달하십시오. 혹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이 자신이라고 여겨지는 사람은 자신을 위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 돈을 쓰셔도 좋습니다. 사업을 하는 사람은 그 이웃들과 함께 추수감사의 기쁨을 그 돈으로 나누시기 바랍니다.
(5) 이렇게 하고도 그 봉투에 남은 돈이 있거든 교회의 헌금함에 넣으시기 바랍니다.
(6) 혹 그 봉투에 돈이 모자라거든 여러분들이 그 동안 교회에 헌금한 돈이 있으니 교회에 청구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귀하고 아름답고 가치 있는 교회입니다. 여러분이 하는 일이 곧 교회가 하는 일입니다. 내가 목회자의 양심으로 말하건대 여러분 모두가 빈 봉투를 헌금함에 넣는다면 나는 매우 기쁘겠습니다.
(7) 위의 여섯 단계를 거치면서 그 봉투에 돈을 더 넣고 싶은지 좀 뺄까 하는 생각이 드는지 자신을 잘 살펴보십시오. (1994. 11. 6. 오전예배 설교 중에서)
위의 내용은 대전시 유성구에 있는 한 교회의 주보에서 발췌한 글입니다. 여기 소개된 내용은 매년 추수감사절을 앞두고 그 교회 성도들에게 설교하는 내용이라고 합니다. 어쩌면 올해도 그 교회의 목사님은 똑 같은 꼭 같은 설교를 했을 것이고, 그 교회 교인들은 똑 같은 설교를 들었을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세상에 이상한 교회도, 별난 교회도 다 있다는 생각이 듭니까? 저도 처음에는 그랬습니다. 그러나, 찬찬히 생각해 보면 이 말씀은 감사절의 깊은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단순히 교회에다 헌금을 안 해도 된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여기서 정말 중요한 것은 과연 "교회가 무엇이냐?" 하는 근본적인 질문입니다. “누가 우리의 이웃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감사 드린다는 것은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이 이상한 교회의 주보에 실린 이 내용들을 우리 모두가 한번쯤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살전5]=======
전 장의 끝부분에서 그리스도의 부활과 재림에 관하여 언급하였던 사도는 더욱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가 오실 시기에 대하여 알려고 하는 태도의 무익함을 말한다. 그것은 사악한 자들에게는 갑작스러운 것과 두려움이 될 것이요, 성도들에게는 위로가 될 것이다(1-5). 그런 다음 그는 그들에게 근신과 절제의 의무를 권유하고 그들의 입장에 부끄러움이 없도록 믿음, 소망, 사랑을 연습할 것을 권면한다(6-10). 다음에 그는 그들이 다른 사람에게 또한 서로서로에게 지고 있는 의무를 다할 것을 권고한다(11-15). 그런 후에 그리스도인이 행한 대단히 중요한 몇몇 의무를 설명한다(16-22). 그리고 이 서신을 끝맺는다(2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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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2.주의 날이 밤에 도둑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알기 때문이라
3.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리니 결코 피하지 못하리라
4.형제들아 너희는 어둠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둑 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5.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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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날(살전 5:1-5)
본문에서 우리는 다음의 내용을 볼수 있다.
Ⅰ. 바울은 데살로니가인들에게 그리스도의 오실 정해진 시기에 관하여 묻는 것은 필요없는 일이요, 무익한 것임을 말한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그는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다(1절)고 말하였다. 그리스도가 오실 것은 확실한 일이다. 또 그가 오실 때도 정해져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이 이것에 관하여 기록해야 할 필요는 없었다. 그러므로 그에게 이에 관하여 계시가 주어지지도 아니하였다. 따라서 그들이나 우리나 아무도 이 비밀을 알려고 해서는 안 된다. "이 비밀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소관 아래 두신 것이다." 그리스도 자신조차도 지상에 계실 때 이것을 알리지 않으셨다. 그 일은 교회의 위대한 선지자로서의 그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또한 그는 사도들에게도 이 사실을 나타내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직은 우리가 일해야 할 시기이다. 이 사실을 알고 그대로 행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의무인 것이다. 우리가 언제 어느 때 우리의 생의 결산을 서로 제출해야 하는지를 우리는 알 수 없으며, 또한 그것에 대하여 알아야 할 필요조차도 없는 것이다. 우리에게 공연한 호기심에 의해 우리가 전혀 알 필요가 없는 것을 알려고 하며 또 안다해도 아무런 이익도 되지 않는 것에 대해 알려고 하는 것들이 많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Ⅱ. 바울은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오심이 급격히 임할 것과 그것이 모든 사람들에게 대단한 경악이 될 것을 말한다(2절). 이 사실이야 말로 그들이 완전히 알 수 있고 또 알아야 할 사실이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 자신이 "너희가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마 24:44)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또한 마가복음 13장 35,36절에도 이르기를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집 주인이 언제 오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 그라 홀연히 와서 너의 자는 것을 보지 않도록 하라"고 하였다. 바울이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하여 말씀하였고 또한 그가 갑작스럽게 오실 것을 분명히 말하였다. "밤중에 도적같이"라는 말씀은 그의 오심을 의미한 말씀이다(계 16:15). 도둑이 모든 사람들이 곤히 잠든 한밤중에 오듯이 주님의 날도 이같이 갑자기 이를 것이다. 그의 나타나심도 이같이 돌발적이요, 놀라운 것이 될 것이다. 따라서 그가 오실 정확한 때를 아는 것보다 그가 갑작스럽게 오신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더 유익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지식은 우리로 꺠어 경건하게 하여 그가 언제 오시든지 그를 맞이할 수 있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Ⅲ. 바울은 데살로니가인들에게 주님이 오심이 불신앙자들에게는 얼마나 큰 두려움이 될 것인지를 말한다(3절). 주님의 날에는 그들의 멸망이 있을 것이다. 의로우신 하나님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의 적대자들 위에 파멸을 내리실 것이다. 그들의 이와 같은 멸망은 모두에게 임할 것이며 변개할 수 없는 것이 될 것이다.
1. 그 날은 갑작스럽게 닥칠 것이다. 그 날이 육적인 안일과 환락에 사로잡혀 있는 그들에게 덮쳐서 그들을 넘어뜨릴 것이다. 그들이 자기 마음 속에 평화와 안전이 있다고 말할 때 그들이 더없는 행복을 꿈꾸며 환상과 육감을 즐기는 일에 탐닉하고 있으면서 주님의 임재는 전혀 생각 못하고 있을 때 "잉태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같이" 정해진 시간에 그러나 누구도 기대하지 않았고 또 크게 두려워하지 않고 있는 때에 그 날이 임할 것이다.
2. 그것은 그들에게 피할 수 없는 파멸이 될 것이다. "그들은 결단코 피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뾰족한 도망의 방법을 알 수 없을 것이다. "불의를 범한 자들이 자신을 숨길 아무 장소도 없을 것이다." 그 날에는 그 폭풍우로부터 숨을 피난처가 아무데도 없을 것이며 악한 자들을 태울 불꽃으로부터 그들을 가려 줄 그늘이 없을 것이다.
Ⅳ. 바울은 데살로니가인들에게 의로운 자들에게는 그 날이 얼마나 위로가 될 것인가를 말한다(4,5절). 여기서 다음 사실을 살펴 보자.
1. 성도들이 지니는 특성과 특권. 그들은 어둠 가운데 있지 아니한다. 그들은 빛의 자녀들이다. 그것은 모든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데살로니가인들에게도 행복한 시기가 될 것이다. 그들은 이방 세계처럼 죄와 무지의 상태에 처해 있지 아니하였다. 그들은 "한때 어둠 가운데 있었으나 주님 안에서 밝은 데 거하게 되었다." 데살로니가인들은 자기들이 볼 수 없는 영원한 것들, 특별히 그리스도의 오심과 그 결과에 대한 여러 가지 거룩한 계시를 알 수 있는 은총을 받고 있었다. 그들은 "낮의 아들들이었다." 왜냐하면 낮의 빛이 그들 위에 떠 있기 때문이다. 의로우신 태양이 그들 위에 또 올라서 그의 날개 아래 그들을 품고 고쳐 주셨다. 그들은 더 이상 이교도의 어둠 가운데 있지 아니하였으며 또한 율법의 어둠 아래 거하지도 아니하였고, 오로지 복음 아래 거하였다. 그 복음은 그들에게 빛 가운데서 생명과 불멸함을 가져다 주었다(딤후 1:10).
2. 이 날에 그들이 처할 유리한 조건. 그것은 "그 날이 도적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라"(4절)는 사실이다. 그 날에 그들이 놀라게 되는 것은 오로지 그 자신의 책임이다. 그들은 이미 경고를 받았으며 그 날의 대처하도록 충분히 도움을 받았다. 또한 그들은 인자 앞에서 위로와 신뢰로써 설 수 있기를 바랄 수 있었다. 그들에게 그 날은 "주님은 앞에서 새로워지는 날이 될 것이며" 주님은 그를 바라는 자들에게 죄없이 나타나 그들의 구원을 이루실 것이고 밤에 도적과 같이가 아니라 낮에 친구와 같이 그들에게 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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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
7.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취하는 자들은 밤에 취하되
8.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
9.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심이라
10.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어 있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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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경계와 근신의 생활(살전 5:6-10)
앞서 말한 것에 근거하여 사도 바울은 몇 가지 필요한 의무에 대하여 권고한다.
Ⅰ. 경계와 근신(6절). 경계와 근신의 의무는 각각 명백한 차이를 가지고 있다. 그러면서 그것들은 또한 상호간에 유사성을 지닌다. 왜냐하면 우리가 너무나 많은 유혹에 휩싸여 무절제하고 분수에 지나친 생활을 하게 되면 우리가 경계하지 않는 한 근신할 수 없으며 또 근신하지 않는 한 깨어 있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1. 그러니 "우리는 다른 사람과 같이 잠자지 말고 깨어서 있도록 하자." 우리가 안전하다고 부주의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우리의 경계를 그만 두면 안 된다. 죄와 죄의 유혹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계속적으로 지켜야 한다. 인간은 일반적으로 자기의 의무에 큰 위험에 빠져 있으면서 "평안하다, 안전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영원히 좌우될 귀중한 순간들을 게으르게 꿈이나 꾸면서 소비해 버린다. 그리고 잠자는 사람들이 주변에서 무엇이 일어나는지 모르듯이 저 세상에 관하여 생각도 못하고 주의도 못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꿈을 꾸고 있기 때문에 그 모든 일들을 올바르게 생각해 보지도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경계하자. 그리고 깨어있는 자답게 또한 파수보는 자답게 행동하자.
2. 우리는 또한 "근신해야 한다" 또한 절제하고 삼가야 한다. 우리는 우리를 얽매려는 이 세상의 것들에 대한 욕망과 본능적인 욕구를 삼가야 한다. 절제는 지나치게 먹고 마시는 것과는 반대되는 의미를 일반적으로 지닌다. 특히 본문에서 이 말은 술취함에 상반되는 의미로 사용된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은 동시에 모든 것에 대한 절제를 뜻하는 말이다. 우리 주님께서도 제자들에게 경고하시기를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눅 21:34)고 하셨다. 절제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주께서 가까우시기 때문에 우리의 온전함을 모든 사람들에게 알게 해야 한다." 이외에도 경계와 근신은 "낮의 자녀로서"의 그리스도인의 성품과 특권에 가장 알맞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취하는 자들은 밤에 취하기 때문이다"(7절). 낮 시간을 잠으로 소비해 버리는 행위는 가장 비난되어져야 할 사실이다. 왜냐하면 낮은 일하기 위한 것이지 자기 위한 시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많은 사람들의 눈이 지켜보는 낮에 술에 취하는 것은 자기들의 부끄러움을 광고하는 자들이다. 만약 신적 계시의 혜택을 입지 못한 자들이 자신을 방임하므로 사탄에 의해 죄된 안락함 가운데 잠이 든다면 결코 이상할 것은 없다. 또한 만약 그들이 자기들의 욕망에 목이 매여서 온갖 방탕과 사치에 탐닉한다 해도 그것이 이상할 것은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밤에 속하여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위험을 깨닫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잠을 잔다. 그는 자기들의 의무를 깨닫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취하여 지낸다. 그러나 그들의 얼굴에 축복된 복음의 빛을 받는 그리스도인들이 자기들의 영혼과 새로 울 세계에 대하여 어찌 부주의할 수 있겠는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는 사람들은 특별한 몸가짐을 가지고 처신해야 한다.
Ⅱ. 경계하는 것만큼 충분히 무장을 갖추어야 한다. 즉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어야 한다. 이러한 무장은 그리스도인답게 근신하기 위하여 필요하며 또한 이러한 무장은 주님의 날을 준비하는 것도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심령의 적들은 너무 많고 힘이세며 악의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악마들은 많은 사람들을 부주의하게 하고 안심하게 하며 오만하게 하며 그들도 취하게 하므로 즉 거만과 정욕으로 취하게 하므로 그들을 자기 편으로 만들고 또 그러한 일에 붙들어 매어 놓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러한 유혹들에 대항하여 우리 자신을 충분히 무장할 필요가 있다. 즉 영적인 갑주를 둘러 가슴을 보호하고 영적인 투구로 머리를 안전하게 보호해야만 하나. 그러한 영적인 무기들은 기독교의 세 가지 큰 은혜인 믿음, 소망, 사랑으로 구성된다(8절).
1.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이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근신하고 절제하도록 지켜줄 것이다. 만약 우리가(영이신) 하나님의 눈동자가 항상 우리 위에서 지켜 보신다는 것과 우리에게는 격전을 벌려야 할 영적인 원수들이 있고, 위하여 준비해야 할 영적인 세계가 있다는 것을 믿는다면 우리가 왜 근신하고 절제해야 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믿음은 우리의 원수들의 공격에 대한 최선의 방어가 될 것이다.
2. 우리는 우리의 심령을 사랑으로 불태워야 한다. 사랑은 역시 우리를 방어해 줄 것이다. 하나님께 속한 일과 하나님께 대한 신실함과 불붙은 열정은 우리로 근신하고 경계하게 할 것이며 유혹과 고난의 때에 우리가 배교하지 않도록 우리를 지켜 줄 것이다.
3. 우리는 구원을 우리의 소망으로 삼아야 한다. 그리고 구원에 대한 생동력있는 소망을 지녀야 할 것이다. 은혜에 의한 이러한 영생에 대한 희망은 투구가 머리를 보호하는 것같이 우리를 보호할 것이며 우리로 죄의 기쁨에 도취되지 않도록 막아 줄 것이다. 이러한 죄의 기쁨은 잠간에 불과한 것이다. 만약 우리가 구원의 소망을 갖고 있다면 우리의 소망을 흔들리게 하고, 우리가 소망하는 위대한 구원에 우리를 부적당하게 만들고 또 무가치한 자로 만드는 행위를 하게 되지 않도록 주의하여야 한다. 구원과 구원에 대한 소망을 이야기한 후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어떤 근거와 이유로써 이 구원에 소망을 가질 수 있는가를 보여 준다. 전에도 고찰하였던 것처럼 그는 그들에게 구원의 소망을 가질 만한 가치가 아무것도 없음을 말한다. 구원에는 우리의 공적이 필요하다는 가르침은 비성서적이고 반성서적인 교훈들이다. 그러한 것들은 아름다운 소망의 근거가 될 수는 없다, 오로지 우리의 소망은 다음의 것에만 근거되어야 한다.
(1) 하나님의 약속위에 근거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구원을 얻게 하려는 것이기 때문이다"(9절). 우리 구원의 첫쨰 원인을 추적해 본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이다. 어두움과 무지 가운데서 살다가 죽어가는 사람들 또한 밤에와 같이 술 취하고 잠자는 자들은 "하나님의 진노가 예비되어 있음"이 명백하다. 그러나 낮에 속한 자들로서 만약 그들이 깨어 근신한다면 그들은 "구원을 얻을 약속"을 받은 것이 분명한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의 확실함과 확고함은 우리 소망을 격려해 주고 지지해 주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자신의 공로나 또는 능력으로 구원을 얻는다면 우리는 구원에 대하여 아주 희망할 수 없거나 거의 희망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하심 때문에 구원을 얻을 수 있음을 알기 때문에 이 구원이 흔들리지 아니한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는 것이다(왜냐하면 선택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은 영원히 설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약속 위에 우리는 흔들리지 않는 소망을 건설하는 것이다.
(2) 그리스도의 은혜와 공로에 근거해야 한다. 그 구원은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가능해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약속과 함께 그리스도의 속죄에 힘입어서이고 우리의 구원에 대한 소망 또한 이 양자에 근거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운 계획과 목적에 관해 생각해야 하는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이 목적을 위하여 죽으시고 고난받으심에 관하여서도 생각해야 한다. 그가 그렇게 하심은 "우리로 하여금 깨든지 자든지(깨든지 자든지란 사도가 전에도 암시하였듯이 살든지 죽든지와 같은 뜻을 지닌 말이다. 왜냐하면 믿는 자들에게 죽음은 잠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와 함께 살게 하기 위해서이셨다." 즉 영원히 그와 함께 연합하여 영광 가운데 살게 하시기 위해서 고난과 죽음을 당하신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바라는 구원이 "주님과 함께 영원히 거하는 것"이듯이 또한 그들의 희망의 근거는 그들의 주님과의 연합이다. 만약 그들이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 안에 살고 그를 위하여 살면 죽음의 잠이 영적인 생명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며 또한 이후의 영광의 생명을 손상시키지 못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으므로 우리는 죽든지 살든지 주의 것이 된다. 우리가 여기서 할 때는 그를 위해 살고, 그곳에 갔을 때는 그와 더불어 살게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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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그러므로 피차 권면하고 서로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 같이 하라
12.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 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을 너희가 알고
13.그들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너희끼리 화목하라
14.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게으른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라
15.삼가 누가 누구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지 말게 하고 서로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따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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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 상호간의 의무(살전 5:11-15)
본문에서 바울은 데살로니가인들에게 몇 가지 의무를 권면하였다.
Ⅰ. 서로 긴밀한 관계를 지니고 있는 자들이 서로 져야 할 의무에 대한 권면. 이러한 관계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이 위로를 받고 권면하며 상대방의 덕성을 계발하도록 해야 할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11절).
1. 그들은 스스로에 대하여 또 상대방에 대하여 권면하고 위로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처음 주어졌을 때는 이러한 방법으로 주어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서 자신을 스스로 위로할 수 있는 사람은 또한 다른 사람들도 위로할 수 있고 또 그러한 마음을 지니게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 우리 자신을 위로하거나 또는 다른 사람을 위로하는 길은 말씀의 권면에 의거해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자신의 위로와 행복에 관하여 주의하는 것뿐 아니라 타인들의 위로와 행복을 증진시키는 것에 대하여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자. 가인과 같은 자들은 "내가 나의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고 말을 한다. "우리는 서로 짐을 나누어 져야만 한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2. 그들은 서로가 서로의 덕성을 증진시키고자 힘써야 한다. 우리는 "서로 덕을 세우기를 힘쓰라"(롬 14:19)는 말씀에 의거하여 그렇게 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서로가 함께 영적인 집을 구성하고 있는 살아있는 돌들이므로 서로 상대방의 은혜의 역사를 증진시킴으로써 전체 교회의 유익을 증진시키기 위하여 노력해야 할 것이다. 또한 우리가 어떻게 하면 내가 사귀는 사람의 덕성을 증진시킬 수 있을까를 연구하는 것은 우리 각자의 의무이다. 또한 우리는 "모든 사람들의 이익을 도모하여 그들은 기쁘게 하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서로서로 우리의 지식과 경험에 관하여 대화하여야 한다. 또한 우리는 기도하며 찬미하는 일을 함께 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 타인 앞에서 좋은 본이 되어야 한다. 이와 같이 서로서로 위로하고 덕성을 증진시키는 일은 특히 같은 이웃이나 한 가족으로 사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의무이다. 또한 그것이 최상의 인보정신(隣保精神)이며 사회의 목적에 부응하는 최선의 방법이 될 것이다. 서로 친밀한 관계 안에서 사랑을 나누는 사람들은 그러한 관계 때문에 서로에게 위와 같은 친절을 베풀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며 또한 그러기에 친절을 베푸는 것은 더욱 당연한 의무가 되는 것이다. (본문의 "너희가 하는 것같이 하라"는 말씀을 보아) 데살로니가인들은 이 일을 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일을 계속하고 더욱 진전하도록 하라고 권면을 받고 있다. 우리가 선을 행하고 있는 사람들은 그들이 그 일을 계속하도록 그리고 더욱 선을 행하도록 권면을 통하여 격려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Ⅱ. 바울은 데살로니가인들에게 사역자들에게 행하여야 할 그들의 의무를 보여 준다(12,13). 바울 자신은 비록 데살로니가인들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을 수밖에 없었지만 그들 가운데서 수고하는 다른 사역자들이 거기 있었다. 그들은 이들 사역자들에게 이 의무를 이행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 바울은 그들에게 다음의 사실을 생각해 보라고 권유한다.
1. 복음의 사역자들의 수고가 어떠한 것이었는지를 기억하라고 한다. 사역자들은 자기들이 마땅히 지녀야 할 존귀하고 명예로운 명칭에 신경을 쓰는 것보다는 그들이 소명받은 의무와 일에 대하여 더욱 마음을 써야 한다. 그들의 사업은 매우 값지고, 영예로우며 유익한 것이다.
(1) 사역자들은 자기의 성도를 가운데서 수고하되 부지런히 해야 하며 기운이 진하기까지 그리해야 한다. "그들은 말씀과 가르침을 위해 수고해야만 한다"(딤전 5:17). 그들은 수고하는 자로 인식되어야 할 것이며 무위도식하는 자로 여겨져서는 아니 될 것이다. 그들은 자기 성도들과 더불어 수고해야 하며, 그들을 위로하고 덕성을 증진시키며 가르치는 일에 부지런해야 한다.
(2) 사역자들은 자기 성도들을 다스려야 한다. 그러한 내용의 말씀이 디모데 전서 5장 17절에도 기재되고 있다. 그들은 다스리되 가혹하게 다스려서는 아니 되며 사랑으로 다스려야 한다. 그들은 잠간 있을 주인처럼 지배권을 마구 행세하여서는 안 된다. 다만 양떼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됨으로써 영적인 안내자의 입장에서 다스려야 한다. 그들은 주님 안에서 백성들을 다스려야 한다. 그들은 세상의 통치자들과는 구별되며 또한 그리스도의 아래 있는 사역자에 불과한 것으로 그에 의해 임명되었고 또 자신의 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법에 의해서 백성을 다스려야만 하는 입장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또한 그들의 직무와 그들의 모든 수고의 목적을 암시하여 준다. 즉 그들은 주께 봉사하며 주의 영광을 위하여 수고해야 하는 것이다.
(3) 그들은 백성들을 경성시켜야 한다. 공개적으로 할 뿐만 아니라 기회가 닿는 대로 개인적으로도 자기 성도들을 권계하여야 한다. 그들은 자기의 성도들을 선을 행하도록 훈계해야 하며 잘못을 저질렀을 때 다시 거기 빠지지 않도록 가르쳐야 한다. 그들은 자기 성도들에게 좋은 상담자가 될 뿐만 아니라 그들을 각성케 하고 양무리에게 그들이 처해있는 위험에 대하여 경고하고 잘못이나 또는 잘못되기 쉬운 것을 교정하고 계도하는 것이 그들의 의무이다.
2. 사역자들을 향한 성도들의 의무. 사역자와 회중들 사이에는 상호의 의무가 있다. 만약 사역자들이 회중들 가운데서 마땅히 수고해야 한다면,
(1) 그들은 자기의 사역자들을 알아야만 한다. 목자가 자기 양떼들을 알아야 하는 것처럼 양떼들도 자기의 목자를 알아야만 한다. 그들은 그의 인품을 알고 그의 말을 청종하고 그를 그들의 존중하며 그의 가르침과 다스림과 권계에 대하여 존경심을 가져야 한다.
(2) 그들은 그들의 사역자들을 사랑 안에서 높이 존경해야만 한다. 그들은 목사직을 귀중히 여기고 사역자들을 존경하고, 사랑하며 적절한 방법으로 그들의 존경과 애정을 표해야 한다. 이러한 것은 그들의 수고에 대한 마땅한 일이다. 왜냐하면 목자들의 임무는 그리스도의 영광된 인간의 영혼의 행복을 증진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실한 사역자들을 경홀히 여기지 않아야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그들은 그들의 수고로 인하여 높이 존경받아야 하는 것이다. 다른 일로는 존경받을 만한 사람이 목회 때문에 모욕을 당하지 않게 해야 한다. 그들의 타인들이 자기들을 영예롭게 여기라고 주장하지 않더라도 신실하고 근면한 사역자들에게는 영예가 주어져야 한다.
Ⅲ. 그는 그리스도인 상호 간의 의무에 대하여 다른 여러 가지를 권고한다.
1. "너희끼리 화목하라"(13절)고 한다. 어떤 사람은(다른 사본의 내용을 인용하여) 이 권유를 사역자들에 대한 회중들의 의무를 말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즉 그들이 서로 평화롭게 지내야 하며, 사역자와 회중 간에 어떤 경우에 있어서든지 의견 충돌이 일어나거나 지속되어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본다. 그러한 불화는 회중들에 대한 목자의 수고와 훈계가 열매 맺는 것을 저해한다는 것이 입증될 것이다. 사역자들과 회중이 서로의 사랑을 이간시킬 수 있는 모든 일을 피하여야만 한다는 것은 틀림 없는 일이다. 그리고 회중들은 그들 상호간에 일어날 수 있고, 또 지속될 수 있는 어떠한 의견 차이라도 일어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함으로 또한 평화와 조화를 보존하기 위하여 온갖 적절한 대비책을 강구함으로 그들 가운데 평화를 지속시켜야 한다.
2. "규모없는 자들을 권계하라"(14절)고 한다. 어떤 사회에도 무질서하게 살아가는 자들이 있기 마련이다. 그들은 자기의 위치와 계층을 무시하고 행동한다. 그런 사람들을 경고하고 타이르는 것은 사역자의 의무일 뿐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의 의무이기도 하다. 그러한 사람들은 그들의 죄에 대하여 경책을 받아야 하고 그들이 직면한 위험에 대하여 경고를 받아야 하며, 또한 그들이 자신들의 영혼에 가하는 상해에 대하여 분명히 경계를 받아야 한다. 또한 그들의 행위가 다른 사람들에게 끼치는 해에 대하여서도 경계를 받아야 한다. 그들이 행해야 할 바 의무가 무엇인지들 그들에게 주지시키고 그렇게 행하지 않을 때 그들을 경책해야 한다.
3. "마음이 악한 자들을 안위하라"고 한다(14절). 이 구절은 소심하고 마음이 약한 사람들이나 낙심한 자와 슬퍼하는 심령을 지닌 자들을 위해서 쓰여진 말씀이다. 어떤 사람들을 고난과 손실과 상해를 입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낙심하여 또 비굴하게 되고 고난을 두려워한다. 그런 사람은 용기를 북돋아 주어야 한다. 우리는 그들을 멸시하여서는 안되며 그들을 위로해 주어야 한다. 그들에게 대하는 친절한 위안의 말 한마디가 얼마나 그들에게 도움이 되는지를 알아야 한다.
4. "힘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라"고 한다(14절). 어떤 사람들은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잘 수행해 나가지 못하며 자기의 짐을 잘 감당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을 붙잡아 주고, 그들의 허약함을 도와 주고 그들의 짐을 같이 들어 주어 그것을 그들로 감당할 수 있게 해 주어야 한다. 그런 사람들을 붙잡아 주고 강하게 해 주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그들에게 말해 주며 또한 그들에게 그 은혜를 애써서 베풀어야 한다.
5.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오래 참으라"고 한다(14절). 우리는 참고 용서해야 한다. 만일 분쟁이나 상해의 조짐이 야기되기 시작한다면 참아야 하며, 우리의 분노를 억눌러야 한다. 적어도 우리는 우리의 화를 결제하는데 실패해서는 안 된다. 이 의무는 모든 사람에게 비록 상대가 선하든지 악하든지, 귀하든지, 천하든지를 불구하고 행하여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요구나 기대를 너무 강조해서는 안 되며, 또한 우리의 울분을 폭발시키거나 또한 우리의 짐에 대해 불평해서도 안될 것이다. 다만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고 모든 사람을 좋게 생각하도록 애써야 한다.
6. "삼가 누구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지 말라"고 한다(15절). 이 말씀을 삼가 명심하고 주의깊게 행해야 한다. 우리는 스스로 복수하는 일을 결코 행하지 말아야 한다.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에게 해를 입혔다고 해서 상대에서 꼭같이 대하거나 다른 보복을 행한다면 정당하다고 볼 수는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를 받고 그 용서를 바라는 사람답게 우리도 용서할 수 있어야 한다.
7. "항상 선을 좇으라"고 한다(15절). 우리는 어떻게 하면 우리의 의무를 다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지 늘 연구해야 한다. 타인들이 우리에게 선으로 대하든지 악으로 대하든지 어떤 환경에서도 그렇게 하고자 연구해야 한다. 타인들이 우리에게 어떻게 대하든지 그들에게 선을 행하여야 한다. 우리는 항상 타인들의 행복을 더하여 주기 위한 도구가 되어야 하며 타인들에게 자비를 베풀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먼저 우리들 자신 가운데 이 행복이 이루어지기 위하여 힘써야 하고("먼저 믿음의 가정들에게 하고") 그다음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그렇게 해야 한다(갈 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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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항상 기뻐하라
17.쉬지 말고 기도하라
18.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19.성령을 소멸하지 말며
20.예언을 멸시하지 말고
21`.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22.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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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가지 권면(살전 5:16-22)
본문에서 우리는 기억하기 용이하게 되어 있으면서도 우리의 심령과 생활의 지침으로 대단히 유익한 짤막한 여러 가지 권면들을 대하게 된다. 왜냐하면 이 의무들은 대단히 중요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권면들이 어떻게 연결되고 있는지를 고찰하여 보고 유기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Ⅰ. "항상 기뻐하라"고 한다(16절). 이 말씀은 영적인 기쁨에 관한 말씀으로 이해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 세상적 위로에 대한 기쁨에 대해서는 기뻐하되 기뻐하지 않는 것처럼 자제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오래 살기를 기대하거나 전 생애를 세상적 기쁨으로 채우고자 기대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기뻐한다면 우리는 그 기쁨을 더욱 확대시켜야 한다. 그의 안에서 우리의 기쁨은 충만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의 안에서 계속적인 기쁨의 향연을 누리지 못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잘못이다. 만일 우리가 세상적인 일로 슬픔을 당한다 하더라도 그래도 항상 기뻐할 수 있어야 한다(고후 6:10). 신앙적인 삶은 기쁨의 생활이며 그것은 끊임없는 기쁨의 삶임을 기억하자.
1.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한다(17절). 더욱 기뻐하게 되는 방법은 쉬지 않고 기도하는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만약 우리가 더욱 더 기도에 힘쓴다면 더욱 더 기뻐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시간을 정해 놓고 기도해야 하며 끊임없이 순간적인 기도를 계속해야 한다. 우리는 항상 기도하고 실망하지 말아야 한다. 또한 기도에 싫증을 느끼지 말고 계속 기도해야 한다. 기도가 찬양에게 삼키운 바 되는 그러한 세계가 올 때까지(역주: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찬양만이 있고 기도의 필요가 없을 것이라는 뜻) 그렇게 해야 한다. 이 말씀은 기도 이외에 아무 것도 하지 말라는 뜻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다른 어떤 일을 해야 한다는 이유 때문에 기도가 방해를 받아서는 안 된다.
2. "범사에 감사하라"고 한다(18절). 만약 우리가 쉬지 않고 기도한다면 모든 일에 있어서 감사해야 할 이유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간구함으로 모든 요구하는 바를 하나님께 알려야 하듯이 또한 우리는 감사를 생략해서도 안 된다(빌 4:6).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를 드려야 한다. 우리가 번창할 때도 마찬가지로 어려운 때도 감사해야 한다. 우리는 어떠한 환경도 그것이 내게 주어진 최상의 것이려니 생각하고 감사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 대해 어떤 경우에 처해서도 불평을 삼가려고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대하여 불평할 이유를 결코 지니지 않게 될 것이며, 항상 찬송과 감사를 드릴 조건을 더욱 많이 갖게 될 것이다. 바울은 말하기를 "우리가 감사하는 것이"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였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우리와 화해하려 하심에 대하여 감사해야 한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또한 그를 통하여 그를 위하여 우리로 더욱 기뻐하게 하시며 범사에 감사하도록 명하신다. 감사는 하나님을 기뻐하게 하시며 범사에 감사하도록 명하신다. 감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일이다.
3. "성령을 소멸치 말라"고 한다(19절). 왜냐하면 우리의 약함을 도우시며 기도와 감사 가운데서 우리를 도와주시는 분이 은혜와 간구의 성령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말씀되고 있다. 성령은 불과 같이 역사하여 인간의 영혼을 빛나게 하며, 소생시키고 순결케 한다. 우리는 이 거룩한 불을 소멸치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연료를 없애 버리면 불은 꺼지고 말 듯이 우리가 우리 영혼을 분발시키지 않는다면 또한 우리 안의 모든 것을 성령의 지시에 일치시키지 않는다면 우리는 성령의 소명시키게 될 것이다. 물을 붓거나 많은 양의 진흙(또는 잡동산이 오물)을 끼얹으면 불은 꺼지고 만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육적인 욕망이나 애정에 탐닉하거나 세상적인 것에 착념하므로 성령을 소멸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4. "예언을 멸시치 말라"고 한다(20절). 우리가 은혜의 방법들을 소홀히 한다면 우리는 은혜의 성령을 상실하게 된다. 예언에 의해 지금 우리는 말씀에 대한 설교를 이해하게 되며 성경을 해석하고 적용할 수 있다. 우리는 이것을 멸시하지 말고, 존중하고 귀중히 여겨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예언은 우리의 지식과 은혜, 거룩함과 위로를 더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이 정하신 그의 법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말씀의 설교가 평이하며 사람들의 지혜의 달콤한 요소를 결여하고 있다고 해도 또 우리가 알고 있었던 것 이상의 것을 듣지 못했다고 하여도 설교를 멸시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었던 것들을 들을 때 우리의 마음을 분발케 하며, 그것에 대한 우리의 애정과 결단을 촉발함으로 깨우치기 위해서 필요할 때에 많은 관심을 갖고 우리의 의무로 받아 들이는 것은 유익하고 또 도움이 된다.
5.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라"고 한다(21절). 범사에 헤아린다는 것은 필요한 경고이다. 우리가 설교를 평가해야 하지만 그 설교자에 대한 신뢰도에 의하여 평가하지 말고 오직 성경의 말씀에 비추어 평가해야 한다. 우리는 설교자들이 말한 것이 진실인지 아닌지 알기 위해 성경을 찾아 보아야 한다. 그러나 항상 시험하려는 태도를 취함으로 마음이 정해지지 않은 채로 머물러서는 안 될 것이다. 결국 우리는 그것으로 인하여 어떤 반대와 고난을 만나더라도 그것을 견고히 붙들고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교황이 절대 무오하고 절대적 신앙을 가졌고 또 그에게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는 카톨릭의 가르침은 성서에 입각한 교훈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자.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분별있는 판단력을 가져야 하며,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과 악" 참과 거짓을 "분별해야 한다"(히 5:13, 14). 모든 일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은 좋은 것을 구별하여 견고히 붙잡기 위해서인 것이다. 우리는 "여러 가지 미혹하는 교리에 의해 이리저리 밀려 다니는 어린애와 같이" 늘 찾기만 하거나 또는 마음이 흔들려서는 안 된다.
6. "악한 것은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한다(22절). 이것은 우리가 거짓 교리에 미혹되거나 믿음이 흔들리지 않게 하는 좋은 방법이다. 주님께서도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아닌지 알아야 할 것이라"(요 7:17)고 하셨다. 마음 속에 부정을 채우고 살아가는 가운데 악을 허용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결정적인 과오를 범하게 하는 준비 작업이 될 것이다. 반면에 순결한 영혼과 신실한 생활은 인간으로 하여금 그것을 사랑하는 가운데서 진리를 받아들이게 하여 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악과 악한 것의 모양과 죄와, 죄와 같이 보이는 것과 죄로 이끌어 주는 것과, 죄와 비슷한 것들을 버려야 한다. 죄의 모양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죄의 기회를 멀리하지 않으며, 죄의 유혹과 접근해 움을 피하지 않는 자는 머지 않아 실제로 죄짓는 행위를 저지르고 말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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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23.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25.형제들아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26.거룩하게 입맞춤으로 모든 형제에게 문안하라
27.내가 주를 힘입어 너희를 명하노니 모든 형제에게 이 편지를 읽어 주라
28.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23.Now may the God of peace Himself sanctify you entirely; and may your spirit and soul and body be preserved complete, without blame at the coming of our Lord Jesus Christ.
24.Faithful is He who calls you, and He also will bring it to pass.
25.Brethren, pray for us.
26.Greet all the brethren with a holy kiss.
27.I adjure you by the Lord to have this letter read to all the brethren.
28.The grace of our Lord Jesus Christ be with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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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인들을 위한 바울의 기도(살전 5:23-28)
이 서신을 끝맺는 본문의 말씀에서 다음의 내용을 살펴 볼 수 있다.
Ⅰ. 그들을 위한 바울의 기도(23절). 이 서신의 첫머리에서 바울은 데살로니가인들에게 그의 기도 가운데서 그들을 항상 기억 한다는 것을 말했다. 그리고 지금도 그는 하나님을 향하여 마음을 듣고 그들을 위해 기도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다음을 주의하여 보자.
1. 바울이 기도를 드린 대상. 그 대상은 바로 "평강의 하나님"이었다. 그분은 은혜의 하나님이시며 평강과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그는 평강을 만드시는 분인 동시에 일치 조화를 사랑하시는 분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평강과 화목을 지닌다면 그가 기도한 바 모든 것을 평강을 주재하시는 하나님께서 속히 이루어 주실 것이라고 한다.
2. 데살로니가인들을 대신하여 바울이 기도한 것은 그들의 성화 즉 "하나님이 친히 그들로 하여금 온전히 거룩하게 하여 주실것"과 그들의 보존 즉 그들을 "흠없이 보전하여 주실 것"에 대해서였다. 그는 그들이 온전히 거룩하게 되고, 전 인격이 거룩하게 되며 영과 혼과 몸 전체가 온전히 보전되기를 기도한다. 또한 그는 최상의 인물들도 이 세상에 있는 동안 부분적으로 성화되기 때문에 그들이 온전히 즉 완전하게 거룩하게 되기를 위해 기도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완전한 거룩함을 갖기 위해 기도하고, 그것을 향해 용감히 나아가야 한다. 은혜의 선한 사업이 시작된 곳에서는 기도는 끊임없이 지속되고, 보호되며 보존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함을 입은 모든 사람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위하여 온전히 보전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함을 입은 모든 사람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위하여 온전히 보전되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 하나님께서 그분의 선한 사업을 성령 안에서 베푸시지 않는다면 , 그것은 잘못되고 말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에게 그의 일을 온전케 이루시도록 기도해야 한다. 또한 결국 우리가 "말할 수 없는 기쁨으로 영광의 보좌 앞에 흠없이 드려질 때까지" 우리를 "흠없이 보존해 주시고" 모든 죄와 순결치 못한 것으로부터 자유롭게 해 주실 것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Ⅱ.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시리라는 그의 신뢰어린 확신. 그러므로 그는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24절)고 말한다.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지식에로 그들을 부르실 때, 그의 친절함과 사랑이 그들에게 증명되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그들을 끝까지 보존해 주시리라는 것을 이루실 것이며, 그가 약속하신 바를 이룩하기고, 그들을 향한 모든선을 이루심으로 기뻐하실 것을 그들에게 확언한다.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충성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의존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Ⅲ. 바울이 그들의 기도를 요구함. 그러므로 본문에서 그는 "형제들아,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25절)고 말한다. 우리는 서로를 위해서 기도해야 할 것이다. 형제들은 우애로운 사랑을 기도로 표시해야 할 것이다. 대 사도 바울은 그들을 형제라고 부르는 것과 기도를 요청하는 것을 체면을 손상시키는 일이라고 생각지 않았다. 전도자들은 그의 교우들의 기도를 필요로 한다. 더 많은 교우들이 그들의 사역자가 될 수 있을 것이며 반면 회중들은 그들의 사역에 의해 더욱 더 많은 유익을 얻을 수 있게 된다.
Ⅳ. 바울의 문안. 그는 "거룩한 입맞춤으로 모든 형제에게 문안하라"(26절)고 말한다. 바울은 자신과 실바누스와 디모데로부터 다정한 인사를 그들에게 보낸다. 그리고 그들도 서로 그들의 이름으로 문안하라고 한다. 또한 그는 그들에게 서로 사랑의 입맞춤을 문안하라고 한다. 사랑과 정을 나타내라고 한다(벧전 5:14). 이 입맞춤을 본문에서는 거룩한 입맞춤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는 입맞춤을 거룩한 입맞춤이라고 말함으로 이 입맞춤을 통하여 당시의 흔히 행해지던 불순한 동기에서의 입맞춤을 배제하려고 깊이 배려하고 있다. 유대인들의 입맞춤같이 배신의 입맞춤이 되어서는 안 되며 창녀의 입맞춤같이 음란한 입맞춤이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잠 7:13)
Ⅴ. 이 서신을 읽는 문제에 대한 바울의 엄숙한 부탁(27절). 이것은 권고일 뿐 아니라 주님에 의거한 명령이다. 이 서신은 모든 거룩한 형제들에게 읽혀져야만 했다. 성경을 읽는 것은 평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