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칭의에 대한 바울의 강론(롬 1:16-18) 바울은 본장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 그의 주제인 칭의 문제를 광범위하게 다루며 이것을 입증하기 위해 이방 세계의 비참한 상태를 묘사하고 잇다. 그의 수사적 변화는 아주 적절한 것으로 마치 웅변가의 그것과 같다. 로마로 말하면 스스로 지혜있다는 자들에 의해서 복음이 배척을 받고 있는 곳인데도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기에 그는 그곳에 가서 복음을 전하려고 만반의 준비를 다 갖추고 있다. 바울같은 사람 정도면 복음을 부끄러워할 만도 하다. 특별히 그것이 나무에 매달린 자의 복음이요, 그 내용으로 말하면 너무 평범한 것이라서 학자들 간에 거들떠 볼 일고의 가치도 없으며 그 복음을 고백한다는 자들이 모두 천박하고 볼품없는 사람들이요 가는 곳곳마다 반대를 사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렇지만 바울은 이것을 자기의 것으로 삼는 데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다. 바울이야말로 복음을 수치스럽게 여기지 않은 신자일 뿐 아니라 복음에 수치스러운 존재가 아닌 신자라고 말할 수 있겠다. 복음의 우월성과 본질을 간파한 담대한 신앙 고백의 이유가 본 주제의 서론을 장식하고 있다. Ⅰ. 주제(16, 17절). 복음의 우월성은 그것이 우리에게 계시해 준 다는 점에 있다. 1. 복음의 목적은 믿는 자의 구원. 그것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복음이 육의 눈에는 제 아무리 천박해 보이고 추태롭게 보여도 바울이 이것을 수치스럽게 여기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의 능력이 모든 믿는 자의 구원을 이루기" 때문이다. 복음이야말로 "구원의 길"(행 16:17)을 우리에게 제시해 주며 구원이 우리에게 양도되어 우리의 것이 되도록 하는 위대한 승낙이다. 그러나 (1)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이 능력이 없이는 복음은 한갖 사문(死文)에 불과하다. 그리스도께서 병자를 치유하는 데 있어 말씀에 능력이 동반되었듯이 복음의 계시는 곧 "여호와의 팔"(사 53:1)의 계시이다. (2) 그것은 오직 믿는 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다. 믿음만이 우리를 복음의 구원과 관계를 맺게 하는 것이요 그밖에 사람들에게는 감취어진 것이다. 아무리 잘 처방된 약이다로 환자가 먹지 않으면 그만이다 -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이 맨 먼저 대접을 받는 것은 그리스도에게 있어서나 사도들의 경우에 있어서 마찬가지다. "너희에게 먼저"(행 3:26)였으나 그들의 거절로 사도들은 이방인들에게로 향하고 만다(행 13:46). 이제 유대인과 이방인은 동일한 입장에 서 있으니 곧 양자가 동일하게 구원자 없이 비참한 상태인가 하면, 양자 모두가 동일하게 구원자에게 언제고 환영받는 존재이다(골 3:11). 이러한 이론은 지금까지 선민으로 자처하면서 이방 세계를 멸시해 오던 유대인에게서는 뜻밖의 얘기였다. 그러나 대망의 메시야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일 뿐 아니라 "이방을 비추는 빛"이시다. 2. 그 방법으로 계시된 신자의 칭의(17절). "복음에는" 곧 바울이 그렇게도 자랑스럽게 여기는 이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있다. 우리의 비참과 멸망은 우리 죄악의 소득이요 결과인 만큼 우리가 구원의 길을 모색하려면 칭의의 길을 먼저 알아야하는데 복음이 바로 이 일을 해 주고 있다. 복음이 의의 길을 터 주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의롭고 거룩한 하나님이요 우리는 죄많은 죄인인 만큼 그분 앞에 나서려면 우리가 걸치고 나타날 수 있는 의가 있어야 마땅한데 이 의가 왕되신 메시야게서 드러나고(단 9:24), "복음에 나타나"있다. 곧 이 "의"는 우리의 죄악과 관계없이 주어지는 화해와 영접의 은혜로운 방편이다. 이 복음의 의를 가리켜 (1) 하나님의 의라고 부른다. 곧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것이요, 하나님의 인준을 받은 것이다. 이것을 하나님의 의라고 딱 잘라 말하는 이유는 우리 자신의 행위의 공로에서 연유하는 온갖 의에 대한 구실을 배제하기 위해서이다. 그것은 영원한 가치를 지닌 대속에서 오는 하나님되시는 그리스도의 의, 바로 그것일 뿐이다. (2) 그것은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해석은 구구하다. 곧 계시하는 하나님의 성실(faithfulness)로부터 받아들이는 인간의 믿음에 이르기까지 하는 식으로 보는 사람도 있고, 타락 이전의 아담의 경우에서처럼 하나님께 의지하는 믿음과 교통으로부터 중보자에게 의지하는 믿음과 이에 따르는 하나님과의 교통에 이르기까지 하는 식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또는 우리가 의로운 상태에 놓이게 되는 첫 번 믿음에 이르기까지 하는 식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이 경우에 우리를 의롭게 하는 믿음이란 바로 세례문답 강령에도 있듯이 우리가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받아들여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다. 또는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접붙이는 믿음으로부터 우리의 원둥치가 되는 그에게서 우리의 공로를 취하는 믿음에 이르기까지 하는 식으로도 볼 수 있다. 이 두 의미가 다음에 나타나 있다. "의인은 믿음으로"라는 말에는 우리를 의롭게 하는 믿음이 있다는 말이요 "믿음으로 살리라"라는 말에는 우리를 지탱하는 믿음이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 의는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는 의"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시작이나 과정에 있어서 믿음이 전부다. 또 반대로 "믿음에서 행위로"하는 식일 수도 없다. 마치 믿음으로 의로운 상태에 놓이고 행위로 말미암아 그 상태에 계속 머무는 것처럼 말이다. 철두철미하게 "영광으로부터 영광에 이르"듯이 믿음으로부터 믿음에 이르는 것이다(고후 3:18). 그것은 증대하는 믿음이요, 계속 나아가는 믿음이요, 인내하는 믿음이니 이 믿음은 전진하여 나아가는 가운데 불신앙의 뿌리를 잠식해 버리고 마는 믿음이다. 이것이 새롭고 신기한 이론이 아니라는 걸 보여 주기 위해서 그는 신약에 종종 인용되는 유명한 구약 성구를 인용하고 있다(합 2:4).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믿음을 통해서 의롭다함을 입은 인간은 이 믿음을 통해 은혜와 영광의 생활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뜻이다. 이 때 하박국 선지자는 조망대 위에 올라가 특별한 계시를 기다리고 있었는데(1절) 이 계시는 외관상 지연되는 것 같지만 때가 차면 약속된 메시야가 틀림 없이 나타날 것이라는 내용이 었다. 이것이 거기서는 "묵시"(환상)로 불리지만, 다른 데서는 "약속"으로 불리운다. 또한 과거와 마찬가지로 다가오는 장래에도 "의인은 믿음에 의해서 살 것이다"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는 복음의 의가 바로 이것이니 곧 오실 그리스도에 대한 구약의 믿음으로부터 이미 오신 그리스도에 대한 신약의 믿음에 이르는 의다. Ⅱ. 이 주제의 증명. 곧 유대인이나 이방인아 할 것없이 하나님앞에 나타나기 위해서는 의를 필요로 하고 있으며 어느 쪽도 떳떳이 내세울 자신들의 의가 없다는 것이다. 칭의는 믿음이 아니면 행위를 통해서라야 하는데 바울은 그것이 행위로는 불가능한 이유를 유대인과 이방인의 행위를 들어가며 설명한 뒤에 믿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3:20, 28). 사도는 유능한 외과의사가 상처를 싸매기 전에 환부를 샅샅이 뒤지듯이 먼저 죄와 진노 문제를 확신시켜 놓은 다음에 구원의 길을 제시하고 있다. 이로써 복음은 더욱 귀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먼저 저주하시는 하나님의 의를 볼 수 있어야 의롭게하시는 하나님의 의가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하다는 걸 알게 된다. 전반적으로(18절)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나"있다. 자연의 빛과 율법의 빛 모두가 죄에서부터 죄에 이르는 하나님의 진노를 들어내 보여 주고 있다. 복음이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는 하나님의 의롭게 하는 의를 들어내 보여주는 것은 우리에게 복이 아닐 수 없다. 여기에 따르는 대조법이 흥미롭다. 1. 인간의 죄악성 묘사. 그는 이것을 "경건치 않음과 불의"라는 큼직한 두 가지로 간추리고 있으니 곧 첫째 돌판의 율법에 대한 불경건과 둘째 돌판의 율법에 대한 불의다. 2. 이 죄악성의 근원은 "불의로 진리를 막는" 데 있다. 곧 하나님의 존재와 선악간의 차이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는 있으면서도 그들은 불의로 진리를 막고있었다. 곧 다 알고 있으면서도 뻔뻔스레 악행을 저질렀다는 얘기다. 이들은 진리를 포로나 죄수마냥 감금하여 이것이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막는 자들이다. 그렇게 안하면 도리어 진리가 그 영향력을 발휘하겠기 때문이다. 불의하고 사악한 마음은 좋은 진리가 묻혀 있는 쓰레기장이나 다름없다. "믿음과 사랑으로써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는 일이야말로 모든 신앙의 뿌리요(딤후 1:13) 그것을 불의로 막는 일은 모든 죄악의 뿌리가 아닐 수 없다. 3. 이에 대한 하나님의 불쾌하심. "하나님의 진노가……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이방인들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던)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어진 기록된 말씀에나 하나님의 모든 섭리에 죄인들에 대한 심판이 행사되고 있으니 이 심판은 난 데 없이 땅에서 솟아난 것도 하늘에서 떨어진 것도, 무슨 제2의 원인 때문도 아니요, 하늘에서부터 계시되어진 것이다. 또는 "하늘로부터의 분노가 계시되었다"고도 말할 수 있겠다. 이것은 우리들 인간의 분노가 아니라 "하늘로부터의 분노"인 만큼 더더욱 참혹하고 불가피한 것이다.
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For I am not ashamed of the gospel of Christ: for it is the power of God unto salvation to every one that believeth; to the Jew first, and also to the Greek. 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For therein is the righteousness of God revealed from faith to faith: as it is written, The just shall live by faith. 18.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For the wrath of God is revealed from heaven against all ungodliness and unrighteousness of men, who hold the truth in unrighteousness; 19.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Because that which may be known of God is manifest in them; for God hath shewed it unto them. 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For the invisible things of him from the creation of the world are clearly seen, being understood by the things that are made, even his eternal power and Godhead; so that they are without excuse: 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교만한 마귀에게 미혹되어 하나님을 오해-착각-부인-거절-거역-불경건과 불의에 처함=마귀에게 사로잡힌 종노릇)) Because that, when they knew God, they glorified him not as God, neither were thankful; but became vain in their imaginations, and their foolish heart was darkened. 22.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Professing themselves to be wise, they became fools, 23.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And changed the glory of the uncorruptible God into an image made like to corruptible man, and to birds, and fourfooted beasts, and creeping things. 2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Wherefore God also gave them up to uncleanness through the lusts of their own hearts, to dishonour their own bodies between themselves: 25.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Who changed the truth of God into a lie, and worshipped and served the creature more than the Creator, who is blessed for ever. Amen. 26.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For this cause God gave them up unto vile affections: for even their women did change the natural use into that which is against nature: 27.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 And likewise also the men, leaving the natural use of the woman, burned in their lust one toward another; men with men working that which is unseemly, and receiving in themselves that recompence of their error which was meet. ============== 16 I am not ashamed of the gospel, for it is the power of God for salvation [from His wrath and punishment] to everyone who believes [in Christ as Savior], to the Jew first and also to the Greek. 17 For in the gospel the righteousness of God is revealed, both springing from faith and leading to faith [disclosed in a way that awakens more faith]. As it is written and forever remains written, “The just and upright shall live by faith.” Unbelief and Its Consequences 18 For [God does not overlook sin and] the wrath of God is revealed from heaven against all ungodliness and unrighteousness of men who in their wickedness suppress and stifle the truth, 19 because that which is known about God is evident within them [in their inner consciousness], for God made it evident to them. 20 For ever since the creation of the world His invisible attributes, His eternal power and divine nature, have been clearly seen, being understood through His workmanship [all His creation, the wonderful things that He has made], so that they [who fail to believe and trust in Him] are without excuse and without defense. 21 For even though [d]they knew God [as the Creator], they did not [e]honor Him as God or give thanks [for His wondrous creation]. On the contrary, they became worthless in their thinking [godless, with pointless reasonings, and silly speculations], and their foolish heart was darkened. 22 Claiming to be wise, they became fools, 23 and exchanged the glory and majesty and excellence of the immortal God for [f]an image [worthless idols] in the shape of mortal man and birds and four-footed animals and reptiles. 24 Therefore God gave them over in the lusts of their own hearts to [sexual] impurity, so that their bodies would be dishonored among them [abandoning them to the degrading power of sin], 25 because [by choice] they exchanged the truth of God for a lie, and worshiped and served the creature rather than the Creator, who is blessed forever! Amen. 26 For this reason God gave them over to degrading and vile passions; for their women exchanged the natural function for that which is unnatural [a function contrary to nature], 27 and in the same way also the men turned away from the natural function of the woman and were consumed with their desire toward one another, men with men committing shameful acts and in return receiving in their own bodies the inevitable and appropriate penalty for their wrongdoing. ===[[롬1:28-31]]======================= 28.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And just as they did not see fit to acknowledge God any longer, God gave them over to a depraved mind, to do those things which are not proper,......28 And since they did not see fit to acknowledge God or consider Him worth knowing [as their Creator], God gave them over to a depraved mind, to do things which are improper and repulsive, 29.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being filled with all unrighteousness, wickedness, greed, evil; full of envy, murder, strife, deceit, malice; they are gossips,....29 until they were filled (permeated, saturated) with every kind of unrighteousness, wickedness, greed, evil; full of envy, murder, strife, deceit, malice and mean-spiritedness. They are gossips [spreading rumors], 30.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slanderers, haters of God, insolent, arrogant, boastful, inventors of evil, disobedient to parents,....30 slanderers, haters of God, insolent, arrogant, boastful, inventors [of new forms] of evil, disobedient and disrespectful to parents, 31.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without understanding, untrustworthy, unloving, unmerciful;.....31 without understanding, untrustworthy, unloving, unmerciful [without pity]. ==================== ajdikiva(93, 아디키아) 불의, 부정한 행위.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아디키아는 아디코스(a[diko", 94)에서 유래했으며, 무엇보다도 아디키아의 개념은 법률 사상에 기초하고 있다. 이 단어는 일반적으로 (a) '불의한 행위'나 '불의'를 의미한다. (b) 이 단어는 '부정(불공정)한 행위'나 '위반, 범죄'를 의미하며, 여기서 절도, 사기, 근친상간 같은 특정 범죄에 대해서도 사용되었다. (c) 이 단어는 또한 '상해'나 '위해'를 의미한다. (d) 더 나아가 불법의 요소, 의로움에 반대되는 것, 진실, 정직함에 반대된 것으로 그 의미가 정의된다.(참조: G. Schrenk, TDNT) 2. 70인역본의 용법. (a) 명사 아디키아는 70인역본에서 약 250회 나오며, 36개의 히브리어 단어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아디키아는 아원(위반, 유죄, 징벌)의 역어로 가장 자주 사용되었으나(약 80회) 때때로 아울라(패역, 사악, 예: 호 10:13), 하마스(포악한 행동, 불의, 불공평, 예: 시 7:16[17]), 그리고 셰케르(거짓, 예: 시 119:104)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b) 아디키아는 70인역본에서 대부분 단수로 사용되었는데, 이는 주의가 개별적인 행동이 아닌 범죄 현상 전체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죄는 고대 이스라엘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공의의 신성한 질서를 어기는 것으로 생각되었다(삼상 3:13이하). 따라서 이 죄가 공동체, 곧 그 존재가 하나님의 공의의 보존과 가장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공동체에 영향을 미친다. 여기서부터 죄는 신학적, 사회적 의미의 현상, 즉 공동체를 파괴하는 어떤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한 이유 때문에 언약의 백성들은 그들 가운데서 악을 추방하라는 요구를 받는다(참조: 레 16:21이하; 17:4, 9). 아원이란 단어가 의식적이며 책임져야 할 행동 뿐 아니라 행동의 결과, 처벌까지 나타낸다는 것은 의미 있는 것이다(레 26:39). 구약성경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범죄를 초래하는 어떤 위반은 파멸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며, 만일 행위와 결과의 이 숙명적인 연관성이 파기되지 않는 한 파멸의 영향은 범죄자와 범죄자가 속해 있는 공동체에 되돌아 온다(창 4:13; 민 32:23). 첫째로 범죄는 그것이 실수로 저지른 것이었을 때 조차 객관적으로 유해한 사건으로 간주되었다(창 20:3이하; 삼상 14:24이하). 악한 행위가 미치는 이런 유해한 영향은 오로지 범죄자를 징벌하거나 또는 짐승을 대신 죽이거나 기름 부은 제물을 드리는 것으로만 저지될 수 있다. "그러므로 속죄는 형벌이 아니라 구속 사건이다"(G. von Rad, Old Testament Theology). (c) 구약성경의 후기 기록들과 후기 유대교에서 아디키아는 한편으로는 구체적인 개인의 행동에 한정되어 사용되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모든 인간에게 확대되어 적용되었다. 이런 문맥에서 70인역본이 때때로 세케르(거짓말하다)를 아디키아로 번역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예: 시 52:3[5]; 110:29, 69, 104, 163; 144:8, 11). (d) 후기 유대교의 묵시 사상은 메시야 도래 이전의 모든 시기를 메시야가 멸하실(에스드라하 4:51이하; 이디오피아어 에녹서 91:5이하; 솔로몬의 시 17:29, 36) "불의한 세계"(이디오피아 에녹서 48:7)로 간주했다. 이와 유사한 견해가 랍비 문학에 나타난다(예: San. 97a; Midr. Ps. 92:10, 참조: SB Ⅳ 977이하).(참조: W. Gunther). 3. 신약성경의 용법. 명사 아디키아는 신약성경에서 25회 중 바울 서신에 12회, 누가복음에 4회, 사도행전과 베드로후서와 요한일서에 각각 2회, 요한복음, 히브리서, 야고보서에 각각 1회 사용되었다. 아디키아는 때때로 독립적으로 사용되었으며(요 7:18; 살후 2:12), 이런 구절에서 의미는 일반적인 용법의 의미를 따르며 도덕 규범을 따르지 않는 행동을 의미한다. 인용문에서 이 단어는 구약성경 용법을 따른다(눅 13:27; 행 8:23; 행 8:12=렘 31:34). 이 개념들은 디카이오쉬네(dikaiosuvnh, 1343: 의, 정의; 롬 3:5)와 또는 알레데스(ajlhqhv", 227, 참된) 및 알레데이아(ajlhvqeia, 225, 진리; 요 7:18; 롬 1:18; 롬 2:8)와 대조되어 있는 문맥들에서 신학적으로 더욱 중요성을 띠게 된다. 아디키아의 속격은 셈어적인 어투에서 형용사 대용어로 사용되기도 한다(예: 눅 13:27; 눅 16:8; 눅 18:6). (a) 아디키아는 고후 12:13에서 내적 강조없이 사용되었다. "너희는 나의 이 [공평치 못한 것을] 용서하라"는 예외적인 것이다. 여기서 이 단어는 바울이 개인적 필요에서 고린도 교인들에게 페를 끼치지 않는 것을 실제적 불공평한 행위나 그 행위의 불공정성으로 말한 반어적 표현이다. (b) 아디키아는 디카이오쉬네(1343, 의)의 반의어이다. 롬 1:29에서 하나님의 법과 규범의 위반을 나타내는 범죄 목록에서 첫번째 나온다: "모든 [불의], 추악, 탐욕…", 목록 자체는 새로운 것이다. 롬 9:14에서("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이 단어는 '법적 부정이나 불공평', 또는 '심판에 있어서 편파적임(불공평)'이며, 그러므로 재판(관)에 요구되는 디카이오쉬네의 반대를 나타낸다. 롬 3:5("[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에서 이 단어는 또한 디카오쉬네의 반대이지만 약속의 성취에 있어서 하나님의 불변하는 신실하심인 하나님의 의에 대조하여 불신실의 요소에 특별한 강조를 둠으로 이 시대를 표현한다(롬 3:3). 불의의 기준은 인간의 불의를 드러내는(롬 3:5) 하나님의 의(Righteousness)이다(롬 3:5; 롬 3:26; 롬 9:14; 참조: 롬 3:26). 하나님의 의와 인간의 불의의 대조에 의해 벌어진 큰 간격은 의로운 분으로서 우리의 위치에 서신 그리스도에 의해 메워졌다(참조: 롬 3:24; 고후 5:21; 지금 고찰하고 있는 단어들을 사용한 바울 어감을 풍기는 구절인 벧전 3:18). 의와 불의의 새로운 구분은 진리가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롬 1:18; 롬 2:8). 롬 6:13("불의의 병기"/ "의의 병기")에서 불의는 하나님의 의의 신성한 기본 개념과 대조에서 최고점에 이른다. 아디키아와 디카이오쉬네는 사람을 콘트롤 하는 두 상대적 능력으로서 그들의 도구와 병기를 가지고 사용한다. (c) 아디키아는 알레데이아(ajlhvqeia, 225, 진리)의 반대어이다. 구약성경에서 자주 아디키아가 셰케르(거짓, 허위)의 역어로 사용된 것과 마찬가지로 바울과 요한도 아디키아를 알레데이아와 대조적으로 사용한다. 요한 7:18의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느니라"는 표현에서 아디키아(불의)는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고 우리 자신의 명성을 구할 때가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다른 한 편에 진리는 보내신 분의 영광을 구하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바울 역시 이 위대한 대조 용법을 사용하였다. 살후 2:10에서 아폴뤼메노이(멸망하는 자들)가 주제인 아파테 아디키아스(불의의 속임)는 진리의 사랑을 받음으로 말미암은 구원과 대조된다. 살후 2:12에서 대조는 진리, 즉 복음을 믿는 것과 부정한 행위인 아디키아를 즐겨 행하는 것 간의 대조이다. 이 두 경우에서 복음(알레데이아)을 받아들이는 것은 아디키아와의 단절을 의미한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결과는 하나의 힘으로써 죄를 제거하는 것 뿐 아니라 의로운 삶으로 전환하는 것이다(살후 2:9-살후 2;12). 고전 13:6("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에서, 이러한 방법으로 대조는 알레데이아와 디카이오쉬네의 관계를 보여준다. 기독교인들은 사랑에 의해 통제되며, 사랑은 아디키아의 정반대인 알레데이아(진리)에 순종하며, 따라서 아디키아에서 아무런 즐거움도 찾지 못한다. 또한 롬 2:8의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라는 표현에서 하나님의 법의 위반인 아디키아는 진리와 강조적으로 대조되어 있다. 진리와 같이(참조: 롬 6:13), 아디키아는 '지배하는 힘'이다. 그 때문에 불의에서 진리는 저지를 받는다(롬 1:18). 또한 딤후 2:19의 "불의에서 떠날찌어다"(사 26:13에서 부분적인 인용)라는 표현에서 우리는 동일한 대조를 가지는데(참조: 롬 1:18에 "진리에 관하여는 저희가 그릇되었도다"와 함께), 곧 아디키아에는 올바른 가르침(교훈)에 대한 거부도 포함된다. 여기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 자에게 불의가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공동체에 경고하고 있다. (d) 아디키아는 아세베이아(경건치 않음)와 관련되어 있다. 롬 1:18의 바울의 논제, 곧 "하나님의 진노가 …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나타난다"에서 그것은 두 부분, 롬 1:19-롬 1:23(왜곡된 예배=아세베이아)와 롬 1:24-롬 1:32(성적 오용과 사회의 타락=아디키아)을 이루고 있으며, 그들 사이를 구별하고 있다. 그러나 전체 문맥은 아디키아가 예배의 왜곡에서 생겨난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이미 "불의로 진리를 막은"이란 말에서 규범(표준)에 반대하여 하나님의 뜻에 반대되는 본질(nature)이 근본적으로 진리에 대한 저지(suppression)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분명히 진술하고 있다. 따라서 이 진술은 도덕적인 것과 종교적인 것 사이의 구별을 초월한다. (e) 아디키아는 또한 '하나님께 대적하는 죄'로 정의된다. 행 8:23의 "불의에 매임"(쉰데스몬 아디키아)에서 그것은 분명히 죄로 유혹하는 방법으로 그물을 던진다. 요일 1:9에서 아디키아는 분명히 하나님을 대적하는 불의인 하마르티아(aJmartiva, 266)와 관련된다. 이 노선을 따른 정의는 요일 5:17에 나타난다: "모든 불의가 죄로되". 따라서 요일 3:7이하에서 "죄를 짓는 것"(포이에인 텐 하마르티안)은 "의를 행하는 것"(포이에인 텐 디카이오쉬넨)의 반대이다. 히 8:12은 새 언약으로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관한 예레미야 31장의 메시지를 채택하고 있으며, 또한 이 메시지에 기독론적 해석을 부여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불의한 자에 대한 용서를 가능케 하시지만(요일 1:9) 용서의 가능성에 대한 이런 기본적인 원칙은 나중에는 사망을 초래하지 않는 죄에 국한되어진 것 같다. (f) 이 용어는 또한 묵시적으로 사용되었다. 살후 2:10에 적그리스도의 역사(operation)에 대한 묘사에서 "불의의 속임"으로 언급되어 있다. 약 3:6에서 혀는 종말론적으로 생각한 "불의의 세계"와 관련된다. 여기서 "세계"는 단순히 모임의 장소이지만 그 표현은 독특하다. 또 다른 종말론적 개념은 행 1:18에서 발견된다: "불의의 삯(상급)". 벧후 2:13의 "불의의 값으로 불의를 당하며"는 불의를 위해 지불한 값(보상)에 의해 해를 받는 것을 의미한다(참조: 계 2:11:*** ~의 해를 받지). 벧후 2:15의 "불의의 삯을 사랑하다가"(발람에 관하여)에서 이 용어는 같은 방법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g) 눅 16:8에서 "옳지 않은 청지기"는 자질상 불성실한 청지기를 의미한다. 또한 눅 18:6의 "불의한 재판관"은 '정의를 벗어난 불공정한 재판관'이다. 눅 16:9의 "불의의 재물"은 심각한 문제들을 일으킨다. 이러한 소유물이 필연적으로 도덕적 결함과 연관되어 있다는 사상은 오히려 고기(음식물)와 정결의 문제의 취급에서 예수님께서 그 자체 아무런 불결이 없다는 규칙을 세운 목적을 받아들이기 쉬운 천연 그대로의 개념이다. 이 비유는 확실히 재물을 "지극히 작은 것"으로(눅 16:10), "참된 것"의 반대로(눅 16:11), "남의 것"으로(눅 16:12), 그리고 진실한 의미에서 우리의 것("너희의 것")이 아닌 것으로 묘사한다. 그러나 그것은 실제적으로 소유물을 불의한(아디코곤)으로 간주하지 아니한다. 탈검(Targum)은 이 점에 대해 특별히 언급하고 있다. 탈검 합 2:9에 "불의의 재물", 탈검 삼상 12:3과 탈검 호세아 5:11에서 "부정한 소득"(불의의 재물)이란 표현이다. 이 때문에 우리는 불의의 재물이란 말에서 자기의 재산을 거짓과 책략으로 모은 시대의 세금 징수인들에 관한 언급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언급은 눅 16장의 문맥과 거의 적합하지 않으나 본래 세리들에 관한 말이 여기서 더 넓게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또 한편으로 70인역본에서 셰페르의 여러가지 의미의 번역은 - 아디키아가 언어상 거짓과 속임, 또는 불신실함이나 신뢰할 수 없음을 의미한 것과 같이 - 적어도 원 셈어에서 여러가지 의미의 가능성을 암시한다. 따라서 원 의미는 자기의 주인을 속인 소유물이나 막 4:19("재리의 유혹")에서와 같이 홀리는 덧없는 소유물이라고 해도 무방하다(참조: Schrenk, TONT).
ponhriva(4189, 포네리아) 악 evil, 나쁨 badness, 사악 wickedness.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포네리아(Soph., Hippocr. 이래)는 포네로스(ponhrov", 4190)에서 유래했으며, (a) 결함, 병, 불완전, 부족, (b) 도덕적으로는 '비행, 부정, 죄악', 계획적으로 행해진 '악의'를 의미하며, 포네로스의 기타 의미로도 사용된다. 2. 70인역본의 용법 명사 포네리아는 70인역본에서 약 70회 나오며, 주로 라아(악, 불행, 재난, 상해, 사악)을 번역한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명사 포네리아는 신약성경에서 7회 나오며, 도덕적 의미로서만 사용되었다. (a) 롬 1:29에서 포네리아는 탐욕의 결과로서 도덕적 비행이나 부정을 의미한다: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눅 11:39에서도 포네리아는 탐욕과 관련되어 있다: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인즉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 (b) 막 7:22에서 포네리아는 '악한 의도와 요구들'을 나타낸다: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니". (c) 행 3:26에서 포네리아는 '여러 종류의 부정한 행위'를 나타낸다: "하나님이 그 종을 세워 복 주시려고 너희에게 먼저 보내사 너희로 하여금 돌이켜 각각 그 [악함을] 버리게 하셨느니라". (d) 마 22:18에서 포네리아는 바리새인들의 '악한 의도(악의)'를 나타낸다: "예수께서 저희의 [악함을] 아시고 가라사대 외식하는 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e) 고전 5:8에서 포네리아는 '고집과 즐거움으로 악을 행함'을 나타낸다: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도 말고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도 말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 (f) 엡 6:12에서 소유격 포네니아스는 영적 세력들을 나타낸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필립스(Phillips)는 타 프뉴마티카 테스 포네리아스 '바로 그 악의 본부에서 파견된 영적 앞잡이들'이라고 하였다.(참조: J.H.Thayer; Harder; E.Achilles).
pleonexiva(4124, 플레오넥시아) 탐심, 탐욕, 탐욕스러움.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플레오넥시아는 플레오네크테스(pleonevkth", 4123: 더 많이 가지기를 원하는 사람)에서 유래했으며, (a) 더 많이 가지려는 '탐욕스러운 욕망, 탐심, 탐욕, 탐욕스러움'을 의미한다(Hdt., Thu.). (b) 플레오넥시아는 '부도덕한 권력'에 대해 사용되었으며(Hdt. 7, 149), 투키데스의 작품에서는 '야망' ambition이라는 뜻의 휠로티미아(Philotimia)와 함께 인간의 행동과 역사의 본질에 있어서의 결정적 힘을 의미했다. 2. 70인역본의 용법. 명사 플레오넥시아는 70인역본에서 8회 나오며, 히브리어 베차(1215: 폭력에 의한 취득, 불의한 취득)의 역어로 돈을 '탈취하는 것'(삿 5:19), '불의의 이득'(합 2:9; 겔 22:27), '탐욕, 탐람'(시 119:39; 렘 22:17)을 나타낸다. 마카베오이서 4:50에서 플레오넥시아는 뇌물로 얻는 소득을 탐하는 것을 언급하고 있다. 이처럼 이 단어의 강조점은 탐욕의 불경한 성격 그리고 전적으로 악한 성격에 놓여 있다. 이러한 이유로 시 119편에서 기도하고 있는 사람은 플레오넥시아로부터 지켜달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70인역본에서 36절). 3. 신약성경의 용법. 명사 플레오넥시아는 신약성경에서 10회 나오며, '탐심, 탐욕, 탐냄, 탐욕스러움'을 의미한다. (a) 악덕 목록에서 플레오넥시아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롬 1:29), 믿음과 순종(엡 5:3)이 없는 삶 및 부도덕한 삶(막 7:22)의 표시로 제시된다. 피조물과 창조주 사이의 유대가 끊어질 때 인간 사회는 와해되어 버리고 만다. 더 이상 자기의 목표와 만족을 하나님께 두고 있지 않은 사람은 자기 자신, 자신의 소유, 취득 능력에서 만족을 구한다. 결국 그는 자기 자신을, 모든 것을 자기에게 복종시키려고 애쓰는 하나의 우상으로 변모시킨다. 이러한 이유로 골 3:5은 탐욕을 우상 숭배와 동일시하고 있다. 골 3:5은 독자들에게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라고 명령하고 있다. 이것은 마 5:29 이하를 생각나게 하는데, 죄에 예속된 육적인 본능은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능력, 즉 새로운 영적 생활을 변화시키고 해방하는 능력을 통하여 이 새로운 생활의 지배 아래 들어와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b) 눅 12:15에서 모든 탐심에 대해 경고하신다: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c) 고후 9:5에서 플레오넥시아는 탐욕에서 억지로 잡아 뗀 예물(gift)이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러므로 내가 이 형제들로 먼저 너희에게 가서 너희의 전에 약속한 연보를 미리 준비케 하도록 권면하는 것이 필요한 줄 생각하였노니 이렇게 준비하여야 참 연보답고 억지가 아니니라". (d) 살전 2:5에서 '탐욕의 구실(탈)'을 묘사한다: "너희도 알거니와 우리가 아무 때에도 아첨의 말이나 탐심의 탈을 쓰지 아니한 것을 하나님이 증거하시느니라". (e) 엡 4:19에서 돈이나 성욕이나 항상 자기 몫보다 더 많이 차지 하려는 욕망을 표현한다: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f) 베드로후서에 따르면 거짓 교사들은 물질적인 이득을 탐하는 데에 그 특징이 있다(벧후 2:3; 벧후 2:14). ① 벧후 2:3, "저희가 탐심을 인하여 지은 말을 가지고 너희로 이를 삼으니 저희 심판은 옛적부터 지체하지 아니하며 저희 멸망은 자지 아니하느니라". ② 벧후 2:14, "음심이 가득한 눈을 가지고 범죄하기를 쉬지 아니하고 굳세지 못한 영혼들을 유혹하며 탐욕에 연단된 마음을 가진 자들이니 저주의 자식이라".(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F. Selter).
kakiva(2549, 카키아) 나쁨 badness.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카키아(Theognis 이래)는 카코스(kakov", 2556)에서 유래했으며, 카코스의 성질이며, 그래서 이 단어 역시 이 성질의 외적 행위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 단어는 (a) 결점이 있음, (b) 쓸모없음, 무능력, (c) 나쁜 것, 사악, 죄, (d) '악, 고통, 불행, 파멸'을 의미한다. 필로의 윤리학에서 카키아이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카키아이는 인간 생활에서 있을 수 있는 것이며,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 2. 70인역본의 용법 명사 카키아는 70인역본에서 약 150회 나오며, 주로 히브리어 라아를 번역한다. 카키아는 70인역본에서 개인의 비행을 가리키기도 한다(왕상 2:44). 모든 카키아는 하나님 앞에서 카키아이다(렘 1:16). 그렇지만 카키아는 또한 불행이나 재앙이라는 의미에서 토 카콘의 동의어일 수도 있다(삼상 20:7). 3. 신약성경의 용법 명사 카키아는 신약성경에서 11회 나오며, 다음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 마 6:34에서 카키아는 '괴로움'이나 '고생'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자연적인 욕구들을 채우는 모든 일은 짐이 된다. 그렇지만 이러한 짐은 하나님을 돌보아 주시는 아버지로 알고 있는 사람들을 압박하지는 못한다. ⒝ 카키아는 윤리적인 용법으로 사용되었다. ① 행 8:22에서 카키아는 '죄'(시몬, 마구스의 범죄)를 표현한다: "그러므로 너의 이 [악함을] 회개하고 주께 기도하라 혹 마음에 품은 것을 사하여 주시리라". ② 그러나 바울은 카키아를 죄의 벌로서 교제를 파괴하는 악(재앙)이란 뜻으로 사용했다: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롬1:29).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치 아니한 자요 속은 자요 각색 정욕과 행락에 종 노릇 한 자요 [악독]과 투기로 지낸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이었으나"(딛 3:3). ③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악을 벗어버릴 수 있다(벧전 2:1; 참조: 약 1:21; 엡 4:31). 그러나 새로운 자유가 방종의 구실이 되어서는 안된다: "자유하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우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벧전 2:16). ④ 우리는 카키아에 있어서 어린 아이가 되어야 한다: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아이가 되라 지혜에 장성한 사람이 되라"(고전 14:20). 신약성경은 주로 카키아를 친교를 파괴하는 힘으로 본다.(참조: Walter Bauer; W.Grundmann).
fqovno"(5355, 프도노스) 시기 envy.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프도노스(Pind., Hdt. 이래)는 '시기, 질투'를 의미한다. 종종 이 단어는 젤로스(2005b: 질투 jealousy)와 함께 사용되지만 여러 고전 작가들은 이 분명한 두개의 동의어를 신중하게 구별하고 있다. 예를 들어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는 젤로스를 타인이 소유하고 있는 것을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이라고 정의하는데 이것은 다른 사람이 그것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반드시 질투심을 품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며 반면 프도노스는 자기가 원하는 것을 빼앗는 것과 더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고 정의한다. '시기하는 자들은 단지 자신의 친구의 성공에 대해서만 불쾌해진다'(Xenophon). 2. 70인역본의 용법 프도노스는 70인역본에서 4회, 외경 마카베오일서와 지혜서에서 발견된다. 이곳에서는 세상에 사망이 오는 것을 악마의 프도노스 탓으로 돌린다(지혜서 2:24; 마카베오일서 8:16; 마카베오삼서 6:7). 3. 신약성경의 용법 프도노스는 신약성경에서 9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a) 서신들에서 프도노스는 구속받지 못한 생활의 특성을 묘사하는 악한 성질의 목록들에 나온다. ① 갈 5:21에서 시기는 "성령의 열매"에 반대되는 "육체의 일들" 중의 한가지이다: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참조: 갈 5:19-갈 5:24). ② 롬 1:29에서 시기는 하나님께서 "상실한 마음"대로 버려 두신 자들의 특징이다: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③ 시기는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가는 사람들이 버려야 하는 것으로(벧전 2:2) 개종 전의 생활의 특징이다(딛 3:3). 딤전 6:4에서 시기는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거짓 기독교인이 가르치는 교훈의 증상이다: "저는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훼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b) 막 15:10(병행구 마 17:18)에서 디아 프노돈(시기로, 시기 때문에)이라는 문구는 본디오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넘긴 자들의 악한 동기들을 묘사한다: "이는 저가 대제사장들이 시기로 예수를 넘겨준 줄 앎이러라". 빌 1:15에서 디아 프도논은 바울의 은사를 함께 나누기 보다는 바울의 복음적 명성을 손상시키려는 열망으로 복음을 전도하는 자들의 동기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어떤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이 표현은 에리스("분쟁")와는 같은 부류이며, 유도키아("착한 뜻")와는 대조된다. (c) 약 4:5은 프도노스가 좋은 의미로 사용된 유일한 용례를 제공해 주지만 이 구절의 번역이 매우 어렵다. 성경 본문에 따르면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이다. 경쟁자를 용납할 수 없는 질투심이 많은 연인으로 하나님을 묘사한 것은 구약성경에서 두드러진 현상이다. 그러나 이 문맥에서 히브리어 키나의 번역에 사용된 헬라어는 포도노스가 아니라 젤로스이다(참조: 슥 1:14). 따라서 예를 들면 신영어 성서(NEB)에는 약 4:5의 문장의 주어로 (인간의) 영을 채택하여 프도노스를 보다 통상적으로 사용되는 나쁜 의미인 시기로 나타낸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D. H. Field).
fovno"(5408, 포노스) 살인, 살해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포노스(Homer 이래)는 페노(fevnw: 죽이다)에서 유래했으며, '살인, 살해' murder, slaughter를 의미한다. 2. 70인역본의 용법. 명사 포노스는 70인역본에서 약 25회 나오며, 히브리어 담(1818: 피, 피흘림, 출 22:1; 신 22:8; 잠 1:18; 잠 28:17), 헤레브(2719: 칼, 출 5:3; 레 26:7; 신 28:22), 페케르(6297: 시체, 겔 43:7; 겔 43:9), 페(6310: 칼(날), 출 17:3; 민 21:24; 신 13:16; 신 20:13), 라차흐(7523: 살인하다, 호 4:2)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며, '살인이나 살해' 및 그것과 관련하여 사용되었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명사 포노스는 신약성경에서 9회 나오며, '살인'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a) 살인자 바라바에 대해 사용되었다: "민란을 꾸미고 이 민란에 살인하고 포박된 자 중에 바라바라 하는 자가 있는지라"(막 15:7; 병행구 눅 23:19; 눅 23:25). (b) 구약 성도에 대한 박해와 관련하여 사용되었다: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히 11:37). (c) 바울이 열거한 악덕 목록에 나온다: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롬 1:29). 바울은 인간의 잘못된 행위를 폭넓게 열거하면서 인간을 그의 이기심에 내버려 두신 결과가 어떠한지를 드러내 보인다. 모든 인간 관계의 온 영역이 독소로 오염되었다. (d) 무서운 재앙에도 회개하지 않은 자에 관해 사용되었다: "또 그 살인과 복술과 음행과 도적질을 회개치 아니하더라"(계 9:21). 멸망의 영들은 마귀의 세력을 풀어놓는다. 그 앞에서 어떤 자도 도망갈 수가 없다. 이것은 로마 제국에 대항하여 동방에서 진격해 오는 바데 군대(마병, 유브라데)를 암시한다. 또한 이 무서운 재앙은 회개의 촉구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계 9:20). 그러나 사람들은 여전히 하나님의 계명을 무시하고 있다(21절에 대해서는 출 20:13-15 참조. 마술, 행 19:19; 신 18:10 참조). (KRV Study Bible). (e) 마음에서 나오는 것들의 하나로 언급되었다. (f) 행 9:1에서 '살인'의 숨결(기)을 나타낸다: "사울이 주의 제자들을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e[ri"(2054, 에리스) 다툼, 분쟁, 불화.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에리스(Homer 이래)는 기본어이며, '다툼, 분쟁, 불화, 싸움'을 의미한다. 2. 신약성경의 용법. 명사 에리스는 신약성경에서 9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a) 에리스는 교회를 위태롭게 하는 논쟁에 대해 사용되었다. ① 고전 1:11이하에서 바울은 글로에의 사람들에게서 분쟁(11절), 즉 특정한 사도나 선생 또는 그리스도에 대한 개인들의 집착(12절)으로 규명되는 교회 안의 내분에 대해 듣는다: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 편으로서 너희에게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② 고전 3:3 이하에서 에리스는 젤로스(시기)와 짝을 이루고 있는데, 역시 교회의 내분을 의미한다: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③ 빌 1:15에서 착한 뜻에서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자들 뿐만 아니라 "투기와 [분쟁]으로" 하는 자들도 있다: "어떤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문맥(빌 1:16-빌 1:18)은 이 구절에서의 관심사는 교회의 화합과 평화에의 위협에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b) 에리스는 바울이 열거한 악덕의 목록에 나타난다. ① 갈 5:20에서 에리스는 "육체의 일" 가운데 언급된다: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② 롬 1:29에서 에리스는 예수님을 믿기 이전의 특성인 불의한 행위에 포함된다. 그러한 행위는 사회에서 명백한 파괴적인 영향력을 가진다. ③ 롬 13:13과 고후 12:20에서 에리스는 젤로스와 함께 수사적으로 중복되어 나온다(참조: 고전 3:3에서도). 두 경우 모두에서 교회의 일치를 위협하는 다툼과 시기에 대해 염려한다. (c) 에리스는 목회 서신에서 악덕의 목록에 나오는데, 이러한 목록은 이단자들에 대항하는 투쟁에 도움이 된다. ① 딤전 6:4, "저는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훼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투기와 언쟁을 좋아하는 것은 거짓 선생들에 의해 조장된다. 예수님의 말씀과 교회의 가르침을 소유하지 않은 채 진리를 소유했다고 주장하는 자는 오직 천한 동기에서 행하고 파괴를 일으킨다. ② 딤전 3:9에서 교회의 감독은 논쟁을 좋아하는 것과 율법에 대한 다툼을 피하여야 하는데, 이러한 것들은 무익하다. 두 번째 경계 이후에 그는 파벌주의자들을 몰아내어야만 했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EDNT).
dovlo"(1388, 돌로스) 미끼, 올가미, 기만, 계략.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돌로스(Homer. 이래)는 델로(devlw: 미끼를 잡다[, 라틴어 dolus]에서 유래했으며, (a) 본래 '미끼, 유혹물, 가짜 미끼, 덫, 올가미', (b) 따라서 '교활, 술책, 기만, 계략, 간계'를 의미한다. 2. 구약 및70인역본의 용법. 구약성경으로부터의 실제의 인용문 외에도, 구약성경 특히 금언서(예를 들면 시 10:7; 시 36:4; 시 52:4; 시 55:12; 잠 12:5; 잠 12:20; 잠 16:28; 잠 26:4; 지혜서 1:5; 지혜서 4:11; 지혜서 14:25; 집회서 1:30; 집회서 19:26; 참조, 렘 5:27; 렘 9:5; 습 1:9)에서 흔히 불경한 사람을 "기만적"이라고 묘사하는 것(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을 "의롭다" 하는 것과 대조적으로)은 분명하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명사 돌로스는 신약성경에서 11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a) 예수님을 붙잡아 죽이려는 그의 적대자들의 의도는 그것이 엔돌로로 행해질 것이라는 말과 함께 명백히 부정적으로 묘사된다(막 14:1; 마 26:4, 돌로). 주어진 이유(백성들에 대한 두려움) 외에 이 이야기는 장차의 예수님의 수난은 죄 없이 유죄 판결을 받은 의로운 사람의 수난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의 적대자들의 바람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의 불 경건한 행위로 이해된다. (b) 행 13:8에서 마법사 엘루마의 반종교적인 행위, "모든 궤계"가 한 사람의 행위로 묘사되는 것과 대조적으로, 처음에 제자로 부름 받은 자들 중에서 나다니엘의 행위는 "참 이스라엘 사람", "그 속에 간사함이 없는" 행위이다(요 1:47). 참으로 "의로운" 자를 묘사한 구약성경의 구절들(참조, 시 32:2; 습 3:13)을 통해서 이해할 수 있는 성격 묘사이다(참조, 계 14:5). (c) 신약 성경의 악덕의 목록(Vogtle 1; Wibbing 78)에서 돌로스가 막 7:22; 롬 1:29; 벧전 2:1에만 나타난다. 바울은 "경건하지 않은" 그리고 "불의한" 삶을 사는 자들의 성격을 돌로스로 묘사하여 구약성경을 따른다(참조, Vogtle 229-32). (d) 막 7:22에서 돌로스는 예수님의 말씀에 '악' 즉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사람이 개인적으로 책임이 있는 죄를 구성하는 여섯 악의 두 번째 시리즈의 첫 머리에 나온다. 이것과 대조되는 일반적인 용법이 벧전 2:1의 교회에서의 구체적인 봉사에서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을 버리라는 명령에 사용된다. 돌로스는 특히 개인들간의 관계를 흐리게 하고 "거룩한 제사장"으로서(벧전 2:5), "택하신 족속"(벧전 2:9)으로서,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함께 하는 교회 생활을 방해하는 행위의 특징의 하나이다. (e) 죄 없으신 하나님의 종의 수난(이사야의 말씀을 인용하여)은 벧전 2:22에 "강포를 행치 아니하시고" 그의 입에 "궤사도 없으신" 자의 고난으로 묘사된다. 그 인용문은 그리스도에 대한 전통적인 찬양(벧전 2:21-25)을 구성하는데 그 찬양은 가족 규례에 대한 가부장적인 문맥에 인용된다: 종들은 그들 자신을 예수님께서 "본을 보이신" 고난을 따름으로 증명해야 한다(벧전 2:21). 시 34:13-17과 함께 벧전 3:10-12은 삽입구에서 "너희가 다"(벧전 3:8) "그리스도에 대한 경험"에 기초한 삶에 목적을 둘 것을 권고함으로 끝을 맺는데, 그러한 삶은 악에 대하여 "축복"으로 응답(벧전 3:9)하지 않고 서로 보복하는 악한 무리에 의해 파괴된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그의 입술이 "궤휼을 말하는 것"을 삼가는 것을 의미한다. (f) 이미 데살로니가전서에서 바울은 그의 전도 사역을 변호한다: 그의 선포는 "궤계"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살전 2:3). 바울은 자기 자신을 특히 고린도후서에서 변호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변경하는(혼잡케 하는) 사람에 속하지 않는다(고후 4:2). 이것은 "다른 예수"와 "다른 복음"을 설교하는(살전 11:4) "거짓 사도들", "궤휼의 역군"(살전 11:13)의 특징이다. 바울이 고린도인들 앞에서, 모든 것이 그들을 위해서 한 것이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그가 궤계로 얻었다는 그의 "특권"에 대해 변명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얼마나 불합리하게 생각했는지를 알 수 있다(L. Oberlinner).(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kakohvqeia(2550, 카코에데이아) 악의, 원한, 악한 성격. 1. 고전 및 70인역본의 용법. 명사 카코에데이아는 카코스(kakov", 2556: 나쁜, 악한)와 에도스(h[qo", 2239: 관습, 풍속)에서 유래했으며, '악의, 원한' malice, malignity, '악한 성격'을 의미한다. 이 잘못된 마음의 성향은 죄의 목록에서 언급된다. 필로는 너희는 모든 어리석음의 강한 독주가 생산하는 모든 것, 즉 신랄함, 악의(malignity), 성마름, 격노, 흉포함, 무정한 빈정거림, 해롭게 하려는 욕망을 본다(Dreams 2.192). M.J. Lagrange은 '시기나 질투처럼, 카코에데이아는 잘못된 모든 것을 취한다'고 바르게 평가했다. 카코에데이아는 더 나쁘게 하기 위해 모든 것을 취하는 것을 의미한다(Aristotle, Rh. 2. 13. 1389 20ff.).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것을 특정한 악으로 간주하지만 그 단어의 대중의 이해는 더 넓다. 카코에데이아는 숨겨진 악, 잡다한 폐, 갖가지의 악행이므로(Ammpnius, p. 80 Thesaurus에서), '악행을 행하는 일반적인 경향이다.' 예를 들면 크세노폰(Xenophon)은 '어떤이들은 경멸과 악의와 탐욕을 품을 수 있지만 다른이들은 그렇지 않다'라고 말한다(Cyn. 13. 16). 그러므로 카코에데이아는 문맥에 따라서 '악의', '원한', 심지어 '나쁜 품행'으로도 번역될 수 있다; 그러나 거짓말, 음모, 사기의 의미가 함축되어 가장 많이 표명된다. 에 8:13에서 그들의 카코에데이아에 관한 그럴듯한 이론에 의해, 주권자들의 진실한 선의를 기만한 친구들에 대해 언급한다. 요세푸스(Josephus)에 의하면 거짓말하는 뱀은 악의로 여자로 하여금 지혜의 나무를 맛보도록 설득하였고(Ant. 1. 42) 아담을 향한 악의 때문에 그것의 목소리를 빼앗긴다(1.50). 유대인들의 적들은 '시기와 악의로' 그들을 비방한다(Josephus, Ag. Apion 1.222; 참조, Plutarch, Praec. ger. rei publ. 12.807 a; 32.825 e; Cic. 5.6). 커다란 부를 소유한 자들에게 작은 선물을 하므로 '사람은 악의 있고 인색하다는 평을 얻는다'(De E ap. Delph. 1). A.D. 243년 5월 16일의 한 편지는 그 편지의 수령인을 비열하게 행동하였다고 비난한다(P.Cair.Zen. 88, 16; 참조 Menander, Epit. 334). 따라서 카코에데이아는 사악한 의지, 본질적 악의(마카베오삼서 3:22; 7:3), 뿌리 뽑을 수 없는 악을 향한 성향이지만(마카베오사서 1:25), 삼가하는 마음으로 무력화할 수 있는 악의 영향(마카베오사서 2:16; 3:4)을 가리킨다. 2. 신약성경의 용법. 명사 카코에데이아는 신약성경에서 롬 1:29에 한번 나온다: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바울은 여기서 사기(돌로스)와 시기(프시뒤스타스) 사이에 카코에데이아를 위치시켜 그들과 특별히 연결시킨다. 따라서 '의도적인 사악, 악의'를 나타낸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C. SpicQ).
yiquristhv"(5588, 프시뒤리스테스) 수군거리는 자, 중상자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프시뒤리스테스(Demosth.)는 프시뒤리조(yiqurivzw: 속삭이다, 수군거리다)에서 유래했으며, '속삭이는 자, 수군거리는 자, 은밀한 비방자, 중상자'를 의미한다. 2. 신약성경의 용법. 명사 프시뒤리스테스는 신약성경에서 롬 1:29에 한번 나온다: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수군수군하는 것은 남을 은밀히 비방하는 행위이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katavlalo"(2637, 카탈랄로스) 비방자, 중상자 slander, defamer, 욕하는 자 railer. 1. 일반 헬라어 문헌의 용법 형용사 카탈랄로스는 '비방자, 중상자, 욕하는 자'를 의미한다. 70인역본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2. 신약성경의 용법 카탈랄로스는 신약성경에서 로마서에 한번 나타난다. 롬 1:30에서 '중상, 비방하는 자'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중상, 비방하는 자는 이방인들의 전형적인 사고 표본으로서 열거한 죄인들 중에 끼어 있다.(참조: J.H.Thayer; W.Mundle).
qeostughv"(2319, 데오스튀게스) 하나님을 미워하는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형용사 데오스튀게스는 데오스(qeov", 2316: 신, 하나님)와 스튀게오(stugew: 미워하다)에서 유래했으며, '어떤 신(god)이 미워하는' (a) (Eur., Tro., Cycl. 등), '신이 버린', (b) '하나님을 미워하는'(ADebrunner, Griech.). 2. 신약성경의 용법. 형용사 데오스튀게스는 신약성경에서 롬 1:30에 한번 나온다: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이 악덕의 목록에서 데오스튀게스는 능동적 의미를 나타내기 때문에 '하나님께 가증한(미운)'이란 의미보다 '하나님을 미워하는'이란 의미로 보아야 한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uJbristhv"(5197, 휘브리스테스) 난폭한 사람 violent man, 오만한 사람 insolent man.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휘브리스테스는 휘브리조(uJbrivzw, 5195)에서 유래했으며, 호머 때부터 '난폭한 사람, 방종한 사람, 오만한 사람'을 의미하며, 호머 이후에는 동물에 대하여 '다루기 힘드는 동물, 반항적인 동물'을 의미하였고, 사물에 대해서는 예컨대 '새 포도주'처럼 사용되었다. 2. 70인역본의 용법. 휘브리스테스는 70인역본에서 10회 나타나며, 사 16:6에서는 게의 역어로, 욥기 40:11(6); 잠 15:25; 잠 16:19; 사 2:12에서는 게에의 역어로 사용되었는데, 이 두개의 히브리 단어는 모두 '거만한'(haughty)이라는 뜻이다. 또한 이 헬라어는 잠 6:17에서는 룸의 역어로 사용되었고, 잠 27:13; 렘 51(28):2에서는 히브리 상당어가 없이 사용되었다. 3. 신약성경의 용법. 휘브리스테스는 신약성경에서 2회 나타나며 고전 헬라어 용법과 같이 '난폭한 사람, 오만한 사람'을 의미한다. 딤전 1:13에서 휘브리스테스는 그리스도인들을 학대하고 모욕한 '난폭한 사람'을 의미한다: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롬 1:30에서 휘브리스테스는 문맥에 나타난 단어들을 살펴보면, 이 단어는 하나님에 대해 드러낸 적대 행위라기 보다는 우선 세상에서의 악행, 인간관계에서 저질러진 악행을 암시하고 있다. 롬 1:29이하에 열거되고 있는 악행의 목록은 그 자체가 우상숭배의 결과이며 하나님께서 내리신 심판이라고 바울은 암시하고 있다(참조: 롬 1:28). 따라서 여기서 휘브리스테스는 '오만, 난폭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단어가 휘브리조에서 유래한 것에 비추어 보면, 휘브리테스는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무시하게 하는 자만, 사람으로 하여금 다른 사람을 경멸하고 학대하는 '오만한 난폭자'이다.(참조: E. Guting; G. Bertram).
uJperhvfano"(5244, 휘페레파노스(a)) 거만한, 교만한, 자랑하는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형용사 휘페레파노스는 휘페르(uJpevr, 5228: ~위에, ~을 넘어서)와 파이노(faivnw, 5316: 나타내다)의 합성어이며, '남들 위로 자기 모습을 나타내는'이란 의미를 가진다. 휘페레파노스는 헤시오드(Hesiod) 이래로 사용되었는데, 통상적으로 '오만한, 교만한'이라는 뜻을, 때때로는 '방탕한'이라는 뜻을 나타내었다. 이 형용사는 '빼어난' 이나 '장엄한'이라는 긍정적인 의미로도 사용되었다(예: Plato. Plut.). 2. 70인역본의 용법. 휘페레파노스는 70인역본에서 약 40회 나오며, 휘페레파노스는 시 119(118):21, 119(118):51, 119(118):69, 119(118):78, 119(118):122에서 제드(오만한, 건방진)의 역어로, 욥 40:12(7); 시 94(93):2; 시 123(122):4; 시 140(139):5에서는 게에(거만한, 오만한)의 역어로, 시 101(100):5에서는 가보아(높은 것, 높임 받는)의 역어로, 잠 3:34; 사 29:20에서는 루츠(비웃다, 놀리다, 경멸하다)의 역어로, 사 13:11에서는 아리츠(주인)의 역어로, 시 89:11(88:10)에서는 라합(오만)의 역어로, 욥 38:15; 시 18(17):27; 사 2:12에서는 룸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이 단어는 외경에서 주로 '거만한'이란 의미로 나타난다. 지혜문학에서 휘페레파노이는 이스라엘 안팎에 있는 의인 및 겸손한 자와 대조되는 한 특징적인 집단을 이루고 있다. 휘페레파노스는 이스라엘에 대해서는 결코 사용되지 않는다. 이러한 현상의 배후에는 "하나님은 거만한 자를 비웃으시며,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라는 신념이 깔려 있다(잠 3:34). 주님에 대한 두려움이 지혜의 시작인 것과 같이 주님으로부터의 이탈은 교만의 시초이다(시락서 10:12). 그러므로 기도를 하는 사람은 교만의 의혹으로부터 자신을 깨끗케 하며(에 4:17[70인역본])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는 가운데 자신의 겸손을 나타낸다(유딧 6:19). 한편, 선지자들의 메시지는 이스라엘 자신의 교만을 질책하며(예: 암 6:8; 암 8:7; 호 5:5; 호 7:10; 렘 13:9; 겔 7:10, 겔 7:20; 겔 16:56; 습 2:10; 참조: 레 26:19), 따라서 이스라엘에 깊이 뿌리 박힌 생각과는 전혀 상반되는 입장을 취한다. 3. 신약성경의 용법. 휘페레파노스는 신약성경에서 5회 나타나며, 한글개역에 '교만한, 교만한 자'라는 의미로 번역되었다. 휘페레파노스는 눅 1:51; 롬 1:30; 딤후 3:2; 약 4:6(잠 3:34의 인용); 벧전 5:5(잠 3:34의 인용)에서 사용되었다. 눅 1:51의 문맥은 시적이다. 즉 이 단어는 눅 1:46-55에 나오는 마리아의 찬가의 다음과 같은 싯귀 속에 나온다: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휘페레파누스])을 흩으셨고". 이 싯귀는 시 89:10의 "주께서 라합을 살륙 당한 자같이 파쇄하시고 주의 원수를 주의 능력의 팔로 흩으셨나이다"라는 구절을 반영하고 있는 듯하다. 이 마리아 찬가의 영어 이름인 "the Magnificat"는 이 시의 첫머리에 나오는 라틴어 동사로부터 유래한 것으로서, 영역판 성서(EVV)는 이 단어를 "Magnifies"(찬양하다)로 번역하였다. "이 시는 구약성경(그리고 쿰란문서?)를 토대로 하여 구성된 서정시로서, 한나의 노래와 특별한 유사성을 보여주고 있다(삼상 2:1-10; 참조: 눅 1:38; P. Winter, BJRL, 37, 1954,328-47). 이 시는 자기 자신에게 내린 복(46-48절)과 하나님을 공경하는 모든 자에게 내리시는 하나님의 은혜(49-50절), 비천한 자에 대한 그의 각별한 사랑(51-53절), 그리고 이스라엘에 대한 그의 각별한 사랑(54절 이하)에 대하여 마리아가 느끼는 기쁨에 넘치는 감사를 표현하고 있다. 이 시의 후반부는 인간의 억압으로부터 한 민족을 구원하셨다는 개념으로 하나님의 승리를 묘사하고 있다. 이것은 기독교 이전의 메시야 사상을 재현하는 시이다. 신약성경 기자들은 이러한 메시야 사상을 부정하지는 않으나, 그것을 재해석하여 메시야의 파루시아(parousia)에 대한 대망으로 그것을 전이시킨다"(E. E. Ellis, The Gospel of Luke, New Century Bible, 1966, 72). 나머지 용례들은 주로 권면적 기능을 가진 문맥에서 나타난다. 즉, 이 용례들은 초대 기독교의 교리교육에서 사용되었다고 하는 이른바 '악덕 목록'과 결부되어 있다. 바울은 롬 1:30에서 휘페레파노스를 이방인들의 악덕 중에 하나로 열거한다. 여기서 휘페레파노스는 우상 숭배적인 이교의 부패를 표현한다. 초대교회에 해석에 따르면 이 거만한 자들을 그들이 가지지 않은 것을 자랑하는 자들이다. 딤후 3:2의 악덕의 목록에서 휘페레파노이는 알라조네스("자긍하며") 바로 뒤에 나타난다. 기자에 있어서 이 두 용어는 거만의 서로 다른 두 형태를 의미한다. 이 목록에 표현된 도덕적 무질서는 경건한 겉 모습으로 혐오감을 일으키며, 거짓 교훈에서 생겨나고 말세의 특징이다. 약 4:6과 벧전 5:5는 다같이 잠 3:34의 겸손을 권고하는 구절을 인용하였다. 약 4:6의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라는 말씀과, 벧전 5:5의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참조: 민 15:30 LXX)라는 말씀에서 인용되고 있다. 첫 구절은 세상과 벗하여 살아가는 것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고, 두 번째 구절은 마지막 때의 삶이라는 보다 넓은 맥락 속에 놓여 있는 교회에서 발생하는 인간관계의 문제를 언급하고 있다.(참조: E. Guting; C. Brown; G. Bertram).
ajlazwvn(213, 알라존) 허풍선이, 사기꾼.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a) 명사 알라존(Cratinus, Aristoph.이래)는 자기 자신을 실제 이상으로 평가하여, '자기가 가진 것보다 더 많고 더 좋은 것들을, 심지어 전혀 소유하지 않은 것도 가진 것으로 여기고 자기가 수행할 수 없는 것을 약속하는 자'(O. Ribbeck; Aristot, Eth. Nic.,Ⅳ). (b) 따라서 알라존은 '떠돌이 협잡군', '떠돌이 허풍쟁이'로 관객의 사랑을 받는 희극의 등장 인물이었다(Cratinus, Eupolis, Aristophanes, Alkaios, Menander). 떠도는 사변론자에게도 역시 경멸하는 의미의 별명으로 '알라존'이라는 별명이 붙혀졌다. (c) 알라존은 헤로도투스 이래로 형용사로 나타나는데, 트리키아 지방의 민속적 이름인 알라존(Alazon)에서 유래하였거나(Bonfante, Frisk) 아니면 '유랑하다'라는 뜻의 단어 알라조마이(ajlazomai)에서 유래하였을 것이다(Boisacq, Hofmann). 후대에 이 단어의 의미는 대개 '허풍선이' braggart, '자랑꾼' show-off이라는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d) 매우 자주 웅변가(연설가), 현인이나 철인, 시인, 마술사, 의사, 요리사나 관원을 알라존으로 불렀다(참조: The Miles gloriosus of Plautus). 2. 70인역본의 용법. 명사 알라존은 70인역본에서 3회 나오며, 욥 28:8에서 샤하츠(교만)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합 2:5에서 야히르(건방진, 오만한)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여기서 알라존은 하나님을 신용하지 않는 건방진 자이다. 잠 21:24에서 히브리어는 그 뜻이 불분명한데, 알라존으로 번역했다. 여기서 알라존은 아우다데스(aujqavdh", 829: 자기 만족의)와 관계되어 있다(참조: G. Delling; C. Brown). 3. 신약성경의 용법. 명사 알라존은 신약성경에서 2회, 롬 1:30; 딤후 3:20의 목록에 나온다. 이 두 구절에서 모두 휘페레파노스(uJperhvfano", 5244: 교만한, 거만한, 자랑하는)가 함께 사용되고 있다. 알라존은 엄청난 주장을 함으로 다른 이에게 자기의 인상을 심으려고 하는 자를 의미한다. 따라서 이 단어는 허풍선이, 사기꾼, 협잡배, 사칭자 등에 대하여 사용된다. 여기에서 이 단어는, 이 단어가 의미할 수 있는 가장 넓은 범위까지를 염두에 두고 사용된 것 같다. 즉, 우리는 이 단어에서 '광적인 자만과 어리석은 말'과 같은 이교적 정신, 그리고 사 10:7-사 10:11에 반영된 그런 종류의 것, 아니 사람들이 남에게 자신의 인상을 남기고자 하거나 그리고 많은 경우에 자기 자신을 기만할 때 사용되는 모든 파렴치한 주장과 과시적 행동을 읽을 수 있다(C.E.B.Cranfield, Romans, ICC). (참조: Walter Bauer; J.H.Thayer; E.Guting; C.Brown).
kakov"(2556, 카코스) 나쁜 bad, 악한 evil.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형용사 카코스(Homer 이래)는 결핍하여 있는 것을 표현하며, 무능력이나 연약함을 나타낸다. 그것은 악과 같이 순수한 도덕적 의미 이상이다. 따라서, (a) 카코스는 ① '열등한, 변변찮은, 쓸모없는, 무능력한, 초라한', ② '도덕적으로 나쁜', '사악한', ③ '연약한, 약한 뼈'들에 대해 사용되었다. ④ '불행한, 좋지 않는, 파산적인, 악한'을 의미한다. 명사 토 카콘, 타 카카(복수)는 '악함, 고통, 불행(운), 파멸'을 의미한다 (b) 헬라 세계에서 카코스는 다음과 같은 두가지 견해가 발전하였다: 첫째, 악은 신의 필요에 의해 신에 의해 생겨났다. 둘째, 악은 부분적으로는 인간에 의해 생겨났다. 이러한 견해들은 죄책과 운명이라는 주제들을 통해 비극에서 중복되어 나타난다. 철학은 무지가 악의 근원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원론도 존재한다. 선은 필연적으로 악을 내포한다는 사상이나 영혼들은 형벌로서 이 지상으로 내려오게 되었으며 따라서 지상으로부터 초지상적 선의 세계로 올라가야만 한다는 이론이 그러하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은 인간이 무지를 통해 무의식적으로 악을 행한다는 사상을 발전시킨다. 그러나 플라톤은 또한 신이 세상을 창조할 때 사용한 질료와 연관된 변증법적인 필연성에서 악에 대한 정서적 차원과 심지어는 우주적 차원을 발견한다(정신과 질료의 우주론적 이원론).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자체가 비난 받을 만한 무지가 도덕적 악의 원인이라는 사상에 보다 밀접한 입장을 취한다. 스토아주의 역시 형이상학적 필연성의 사상을 거부한다. 스토아주의는 악을 선의 대응물로 상대화 시키고 악을 거짓된 세계관의 탓으로 돌리며, 전체의 완전이 곧 개인의 완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함으로 말미암아 악을 일원론적 체계 속으로 가져오려 한다. 그러나 스토아주의는 악에 대한 심리학적 이원론을 피할 수 없다. 필로에게 있어서 악은 태어날 때부터 가능한 것이다. 우리가 선을 선택할지라도 우리는 이생에서 항상 악과 싸움을 하고 있다. 악은 이 세상과 관련되어 있는 실재이다. 그러나 악은 죄와 마찬가지로 종교적 차원을 가지고 있고 따라서 하나님과의 결합으로 인해 극복된다. 플루타르크는 악을 악한 세상의 영혼에 귀속시킴으로 보다 더 형이상학적인 견해를 제시한다. 플로티누스(Plotinus)는 이 불완전이라는 것이 바로 물질의 본성 속에 내재한다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물질의 본성은 결국 모든 것을 파생시킨 최고의 선과 빛에 대립이 되는 위치에 있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여기에서도 역시 악은 빛의 결핍, 즉 지식의 결핍이 되는 것이다. 헤르메스 문헌들은 누스(nou'", 3563)를 가지고 있느냐 가지고 있지 않느냐에 근거한 절대적인 대조를 제시한다. 플로티누스는 유일자(the One)와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질료에서 악의 원리를 찾는다. 영혼은 질료 속에 침잠되어 있기는 하나, 여전히 신적인 것이며 신과의 합일을 향한 충동을 지니고 있다. 영혼의 신과의 합일은 황홀경이나 죽음에서 이루어진다. 악은 하나의 실재다. 그러나 악은 참된 존재가 없는 실재이다. 조로아스터교에서 우리는 대립되는 두 가지 원리들보다는 오히려 두 가지 대조적인 의지(즉 '신성')를 발견한다. 거짓의 영과 진리의 영이 우리 안에서 지배권을 잡기 위해 싸움을 한다. 우리가 전생에 선과 악 사이에서 행한 선택을 이생에서 행한다. 모든 악은 귀신들의 도움을 받고 있는 악령으로부터 온다. 최후의 심판은 선인과 악인을 분리할 것이며, 최후의 싸움에서 악과 악인들은 정복되고 파멸된다. 조로아스터교에는 기독교 종말론과 유사점이 많다는 데서 특별한 흥미를 끈다. 그러나 전자는 신화일 뿐이요, 기독교는 역사인 것이다(W.Grundmann). 2. 70인역본의 용법 형용사 카코스는 70인역본에서 227회 나오며, 히브리어 라아를 번역하며, 존재에 객관적 고통을 주는 '악', '재앙', 사람들이 행하는 '죄악' 등을 나타낸다. 3. 신약성경의 용법 형용사 카코스는 신약성경에서 50회 나오며, 그리 중요한 용어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구원 행위가 신정론의 문제를 대신하여 신약성경의 주요한 요지가 되었으며, 도덕적 개념으로서의 악은 하마르티아(aJmartiva, 266)와 포네로스(ponhrov", 4190)보다 훨씬 덜 중요하기 때문이다. (a) 예수님은 사람의 마음을 악의 자리로 생각한다: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막 7:21, 막 7:23와 병행구 마 15:19). 악은 사람으로부터 온다. 그렇지만 인간의 배후에 있는 포네로스(ponhrov", 4190)가 악의 궁극적인 중심지다. 약 1:13에 의하면 하나님 자신은 모든 악한 것들과 무관하다: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딤전 6:10에서 돈을 사랑하는 것은 악의 뿌리이다. 약 3:8에서 야고보는 혀가 "쉬지 아니하는 악"이다고 한다. 그러므로 벧전 3:10에서는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라고 말한다. (b) 카코스는 한정적으로 또는 인격체의 명사형으로(마 21:41; 마 24:48; 빌 3:2; 딛 1:12; 계 2:2), 그리고 사물에 대한 수식어로(막 7:21; 롬 13:3; 고전 15:33; 골 3:5; 계 16:2) 사용된다. 반면 악 또는 악한 것을 나타낼 때는 언제나 중성 명사로 쓰이는데, 이런 경우에는 '불행', '상태가 나쁜', '고통'(눅 16:25; 행 16:28; 행 28:5), 또는 '악한 행위', '죄'(참조: 마 27:23, 병행구; 행 23:9; 요삼 1:11) 등의 의미로 해석되며, 바울에게 있어서 특히 그러하다(참조: 롬 7:19, 롬 7:21; 롬 12:21; 롬 13:4; 롬 16:19). 아래서 보다 충분히 설명한다(E.Achilles). (c) 신약성경은 우리에게 임할 일시적인 파멸이나 영원한 파멸을 가리켜 타 카카(개역: "고난")를 사용한다. 나사로는 지금 타 카카를 가지고 있으며, 부자는 후에 타 카카를 갖는다(눅 16:25). 멸망과 구원의 문제를 결정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결정은 이생에서는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는다.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의 요점은 기계적인 보상(선에는 악 악에는 선)이 아니라, 신뢰와 순종에로의 하나님의 부름에 응답하는 것이며, 단지 일시적 운명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영원한 운명에 관한 문제이다. (d) 바울은 롬 13:3-롬 13:4에서 이 세상에는 악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하나님께서 국가에게 악을 제어하는 임무를 위탁하셨다는 것을 지적한다: "관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그는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네게 선을 이루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위하여 보응하는 자니라". (e) 바울은 롬 7:19, 롬 7:21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선을 요구하시지만 우리는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선을 행할 수 없다는 사실에 실제적으로 직면한다. 악은 "한 다른 법"처럼 그 안에서 그의 의지를 지배한다고 했다(롬 7:21, 롬 7:23). 그러므로 악이란 인간의 존재와 특성의 한 표현이다. 인간의 악한 성품은 행위로 나타나며,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과 분리시키고 심판 아래 있게 하는 것이다(롬 2:9). 여기서 악은 도덕적인 악 이상이다. 악에는 하나님을 인정치 않는 것과 하나님 앞에서의 자기 주장, 즉 불신앙이 포함되어 있다. 이 점에 있어서 양면성이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내면적으로는 선에 동의하나 우리는 선한 의도를 행동으로 옮길 수 없다. 따라서 인간은 자기가 원하는 선 대신 끊임없이 악을 행하기 때문에 생명이 아닌 죽음으로 나아가며, 자신의 힘으로써 악을 정복하고자 하는 온갖 희망은 좌절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는 이 문제에 대한 해결점을 발견할 수 없고, 오직 십자가와 부활 안에서, 악에 대해 거둔 그리스도의 승리로써만 가능한 것이다. (f) 우리가 이러한 방법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할 때 이전의 불가능하였던 것이 우리가 소유할 수 있는 가능한 것이 된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골 3:5).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새로운 실재는 악한 것에 대해 우리가 미련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너희 순종함이 모든 사람에게 들리는지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를 인하여 기뻐하노니 너희가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하기를 원하노라"(롬 16:19) 이제 우리는 사랑 안에서 선으로 악을 이길 수 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 12:21). 왜냐하면 사랑은 악을 생각지도 않으며(고전 13:5) 행하지도 않기 때문이다(롬 13:10). 악이 친교를 해치는 힘이라면, 그리스도에게서 나온 사랑은 참된 교제를 다시 가능하게 해 준다.(참조: J.H.Thayer; W.Grundmann; E.Achilles).
ejfeurevth"(2182, 에퓨레테스) 발명자, 고안자.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에퓨로테스(Anacr. 41)는 에피(ejpiv, 1909)와 퓨리스코(euJrivskw, 2147: 찾다, 얻다)에서 유래했으며, '발견자, 발명자, 고안자'를 의미한다. 2. 신약성경의 용법. 명사 에퓨레테스는 신약성경에서 롬 1:30에 한번 나온다: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여기서 에퓨레테스는 악을 '궁리하거나 추구하는 자'를 가리킨다. (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EDNT).
goneuv"(1118, 고뉴스) 어버이, 부모 parent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고뉴스는 기노마이(givnomai, 1096: 존재하게 되다, 생기다)에서 유래했으며, '어버이, 부모'를 의미한다. 2. 70인역본의 용법. 명사 고뉴스는 70인역본에서 복수 고네이스(gonei'")로 약 17회 나오며, '양친'을 나타낸다(잠 29:15; 마카베오사서 2:10 등). 3. 신약성경의 용법. 명사 고뉴스는 신약성경에서 19회 나오며, '부모'를 의미한다. (a) 부모는 자녀를 위해 재물을 준비한다: "보라 이제 세번째 너희에게 가기를 예비하였으나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아니하리라 나의 구하는 것은 너희 재물이 아니요 오직 너희니라 어린 아이가 부모를 위하여 재물을 저축하는 것이 아니요 이에 부모가 어린 아이를 위하여 하느니라"(고후 12:14). (b) 부모에 대한 자녀의 의무 중 하나는 순종하는 것이다. ① 엡 6:1,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② 골 3:20,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 (c) 자녀가 부모에게 불순종하는 것을 언급한다. ① 롬 1:30,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② 딤후 3:2,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d) 자녀가 부모를 배반하는 것을 언급한다: "형제가 형제를, 아비가 자식을 죽는데 내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막 13:12; 병행구 마 10:21). (e)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부모를 버린 자에 대한 보상에 대해 언급한다: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눅 18:29). (f) 아기 예수를 데리고 그 부모가 결례를 행하러 성전에 들어갔다: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전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눅 2:27). (g) 눅 2:41; 눅 2:43에서 예수님과 그 부모가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갔다가 돌아온 일과 관련된 사건을 언급한다. (h) 요 9:2 이하에서는 소경으로 난 것과 부모와 관계에 대해 언급한다: 유대인들의 견해에 따르면 질병은 죄의 결과이다. 그러므로 소경으로 나타난 사람의 경우에는 그의 부모가 죄를 지었거나(참조: 렘 31:29-30; 겔 18:1-4) 그 사람 자신(태어나기전)이 죄를 지었거나 했을 것이라 한다(참조: 요 9:34). 예수님은 그러한 두 가지 경우를 모두 부정하시고 질병의 원인에 대한 물음을 제쳐 놓으신다. (i) 부모가 그의 딸이 예수님에 의해 소생되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 부모가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경계하사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하시니라".(눅 8:56). (j) 눅 21:16에서 박해의 시기에 부모의 고발 행위에 대해 언급한다: "심지어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벗이 너희를 넘겨주어 너희 중에 몇을 죽이게 하겠고". (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ajpeiqhv"(545, 아페이데스) 거스리는, 불순종하는 disobedient.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형용사 아페이데스(Thu.이래)는 부정접두어 a와 페이도(peivqw, 3982)에서 유래되었으며, '설득당하지 않는, 불순종하는'을 의미한다. 2. 신약성경의 용법 형용사 아페이데스는 신약성경에서 6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눅 1:17에서는 불순종하는 자들의 마음을 돌이키는 것에 관해 사용되었다: "저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 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리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 딛 1:16에서는 거짓 교사들은 불순종한 자들이다: "저희가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치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 딛 3:3에서는 신자들도 한 때 불순종하는 자들이었다: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치 아니한 자]요 속은 자요 각색 정욕과 행락에 종 노릇 한 자요 악독과 투기로 지낸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이었으나". 행 26:19에서 바울이 환상에 복종치 않는 것을 나타낸다: "아그립바 왕이여 그러므로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내가 [거스리지] 아니하고". 롬 1:30에서 부모에 불순종하는 자를 언급한다: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참조: J.H.Thayer; R.Bultmann).
ajsuvneto"(801, 아쉬네토스) 어리석은, 이해력이 없는.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형용사 아쉬네토스(Hdt. 이래; POxy.)는 '어리석은, 이해하지 못하는, 이해력이 없는'을 의미한다. 2. 70인역본의 용법. 형용사 아쉬네토스는 70인역본에서 12회 나오며, 히브리어 나발(5036: 어리석은, 분별없는)의 역어로 '우준한'(신 32:21)을, 크실(3684: 바보, 멍청이, 어리석은 자)의 역어로 '무지한 자'(시 92:6)를 나타낸다. 3. 신약성경의 용법. 형용사 아쉬네토스는 신약성경에서 5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a) 마 15:16(병행구 마 7:18)에서 '이해하지 못하는'을 나타낸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도 아직까지 깨달음이 없느냐". (b) ① 롬 10:19,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이스라엘이 알지 못하였느뇨 먼저 모세가 이르되 내가 백성 아닌 자로써 너희를 시기나게 하며 미련한 백성으로써 너희를 노엽게 하리라 하였고". 여기서 아쉬네토스는 '어리석은' 또는 '이해력이 없는'을 의미한다. 통찰력은 언제나 하나님의 선물로 간주되며, 통찰력의 부족은 단순히 지식에 대한 일시적인 부족이 아닌 것으로 간주된다(참조: 롬 15:21). ② 롬 1: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여기서 "미련한 마음", 곧 어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