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Wisdom from Above]] 약3:13-18 13.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냐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 Who among you is wise and understanding? Let him show by his good behavior his deeds in the gentleness of wisdom...13 Who among you is wise and intelligent? Let him by his good conduct show his [good] deeds with the gentleness and humility of true wisdom. 14.그러나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하지 말라 But if you have bitter jealousy and selfish ambition in your heart, do not be arrogant and so lie against the truth.....14 But if you have bitter jealousy and selfish ambition in your hearts, do not be arrogant, and [as a result] be in defiance of the truth 15.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땅 위의 것이요 정욕의 것이요 귀신의 것이니 This wisdom is not that which comes down from above, but is earthly, natural, demonic.....15 This [superficial] wisdom is not that which comes down from above, but is earthly (secular), natural (unspiritual), even demonic. 16.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라 For where jealousy and selfish ambition exist, there is disorder and every evil thing. ...16 For where jealousy and selfish ambition exist, there is disorder [unrest, rebellion] and every evil thing and morally degrading practice. 17.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 But the wisdom from above is first pure, then peaceable, gentle, reasonable, full of mercy and good fruits, unwavering, without hypocrisy. ....17 But the wisdom from above is first pure [morally and spiritually undefiled], then peace-loving [courteous, considerate], gentle, reasonable [and willing to listen], full of compassion and good fruits. It is unwavering, without [self-righteous] hypocrisy [and self-serving guile]. 18.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And the seed whose fruit is righteousness is sown in peace by those who make peace..... 18 And the seed whose fruit is righteousness (spiritual maturity) is sown in peace by those who make peace [by actively encouraging goodwill between individuals]. ================ aJgnov"(53, 하그노스) 순결한 pure, 거룩한 holy.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형용사 하그노스(Homer 이래)는 동사 하조마이(ajzomai)에서 유래한 형용사로 본래 (종교적) '경외심을 불러 일으키는 것' 즉 '터부' tabu를 의미했다. 종교적인 언어로 이 말은 본래 신의 속성을 나타내었으며, 후에 와서 신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 사물을 의미하게 되었다. 따라서 '순결하다'라는 의미에서 '거룩한'(holy)을 의미하게 되었다. 여기서는 살인이나 송장을 만지는 일 따위를 피하는 것 등의 의식적 순결(ritual purity)이 고려되었다. 본래 성교도 의례상 인간을 부정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하그노스는 '정숙한'을 의미하게 되었다. 하그노스는 본래 제의적 용어였으나 후에 전이되어 도덕적으로 '결함이 없는, 결백한'을 의미하게 되었으며, 또한 완전무결한 직무수행을 치하하는 말로도 사용되었다. 2. 70인역본의 용법 하그노스는 70인역본에서 11회 나오며, 히브리어 타홀(의식적으로 순결한, 3회)와 자크(도덕적으로 순결한, 1회), 자카(순결하다, 깨끗하다)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며, 따라서 '여호와의 말씀이 순결한 것'(잠 12:6), 죄를 '깨끗케 하는 것'(잠 15:26; 잠 21:8), 마카베오 13:8에서는 의식적으로 '순결한 것'을 나타낸다. 3. 신약성경의 용법 하그노스는 신약성경에서 8회 나오며, 다음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a) 하그노스는 '정결한(chaste)'을 의미한다. 고후 11:2에서 이런 의미를 나타낸다: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딛 2:5에서 마찬가지다: "근신하며 순전하며 집안 일을 하며 선하며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게 하라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니라". (b) 하그노스는 고후 7:11에서 '결백함'이란 의미를 나타낸다.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명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저 일에 대하여 일절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 (c) 하그노스는 '도덕적인 순결, 올바름'을 의미한다. ① 요일 3:3에서 그리스도에 대하여, ② 딤전 5:22; 벧전 3:2; 빌 4:8에서 그리스도인의 행위에 대하여, ③ 약 3:17에서 위로부터 난 지혜의 속성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참조: J.H.Thayer; F.Hauck; H.Baltensweiler).
eijrhnikov"(1516, 에이레니코스) 평화로운 peacful.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형용사 에이레니코스는 에이레네(eijrhvnh, 1515: 평화)에서 유래했으며, (a) '평화에 관한 (것)' relating to peace(Xen. Oec.; Plut.) (b) '평화로운' peaceful(Isoc.), (c) 더 넓은 의미로, '불안' unrest에 반대되는 상태(Plut.; Hdt.; Thu.)를 의미한다. 2. 70인역본의 용법. 형용사 에이레니코스는 약 50회 나오며, 히브리어 샬롬을 번역하여 (a)의 의미를(신 2:26; 신 20:11; 마카베오이서 10:12; 유딧 3:1; 7:24), 샬렘을 번역하여 (b)의 의미를(대상 12:38; 창 34:21 등) 나타낸다. 3. 신약성경의 용법. 형용사 에이레니코스는 신약성경에서 2회 나온다. (a) 히 12:11,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여기서 에이레니코스는 에이레네(eijrhvnh, 1515)의 의미에 있는 '유익한, 건전한' salutary이란 의미를 나타낸다. (b) 약 3:17,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여기서 에이레니코스는 '평화할 준비가 되어 있는, 평화로운'을 의미한다. (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W. Foerster; H. Beck; C. Brown).
ejpieikhv"(1933, 에피에이케스) 온순한, 온화한, 순한, 온유한, 친절한, 참을성 있는, 관용하는. 1. 고전 헬라어 문헌 형용사 에피에이케스와 명사 에피에이케이아는 에이코스(알맞는, 어울리는, 적절한, 온당한)에서 유래하였거나 아니면 에이코(굴복하다, 양보하다)에서 유래하였을 것이며,호머 시대 이래로 '온당한 알맞는 생활방식'이라는 의미로, 투키디데스 이래로 '관용, 인내, 온유'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에피에이케스 및 그 어군의 단어들은 본래 제멋대로 방자한 태도와는 대조적으로 균형 잡히고, 지성적이며 잘 어울리는 외모를 표현하는 데에 사용되는 말이었다. 후에 그것은 법률의 적용에 있어서 어떠한 희생이 있더라도 자기 자신의 공민권을 포함한 모든 공민권이 단호히 확립되어야 한다는 태도와는 대조적으로, 정의의 엄격성을 그 법률적 표현 및 제권리와 함께 융통성 있게 할 용의가 있는, 인정 있고 사려 깊은 태도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게 되었다. 이 에피에이케스 단어군과 프라위스(prau?", 4239) 단어군의 개념, 이 개념은 모두 억제되지 않는 분노, 가혹함, 야수성 그리고 이기심과 반대된다. 이 개념은 고상한 마음을 가진 사람, 즉 모욕을 받고도 화를 내지 않는 현인, 재판에 임하여 인정 많은 재판관,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서 자비로운 왕 등이 지닌 성격의 특징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이 단어들은 이상적 통치자에 관한 묘사나 고위직에 있는 사람에 대한 찬사 속에 자주 등장한다. 헬라 및 헬라 철학에서 이 개념은 높은 가치를 지닌 사회적 미덕이자 이상을 표현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개념을 정열과 무감정의 양극단 사이에 있는 복된 중용의 덕이라고 생각하였다(F.Hauck/S.Schulz). 2. 70인역본의 용법 70인역본에서 명사 에피에이케이아는 l0회 등장하며, 에피에이케스 및 그 형용사형은 6회 등장한다. 이 단어들은 세상 통치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자비심(삼상 12:22; 시 86:5; 지혜서 12:18)과 왕의 행동(마카베오이서 9:27), 선지자(왕하 6:3) 및 경건한 자(지혜서 2:19)의 행동을 묘사하는데 사용되었다. 3. 신약성경의 용법 신약성경에서 에피에이케스는 5회 나오며, 에피에이케이아는 2회 나온다. 약 3:17에서 에피에이케스는 위로부터 난 지혜의 목록에 나타난다: 에피에이케스는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이 함께 살 때 지켜야 할 규칙을 표현한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빌 4:5), "범사에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낼 것을 기억하게 하라"(딛 3:2). 딤전 3:3에서는 특히 감독들의 자질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감독은…오직 관용하며". 벧전 2:18에서 에피에이케스는 종들의 주인에게 적용되었다: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복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고후 1O:1에서 바울은 프라위테스와 에피에이케이아를 예수님께서 지상에 계실 동안 사람에게 보여주셨던 태도의 특징으로 언급하면서, 그것을 본받아야 할 모범으로 교회에 제시한다: "너희를 대하여 대면하면 겸비하고 떠나 있으면 담대한 나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친히 너희를 권하고". 에피에이케이아는 기독교인에게 요구되는 태도를 표현하지만,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에게도 적용된다. 행 24:4에서 에피에이케이아는 총독 벨릭스 앞에서 유대인 변사 더둘로가 바울을 고소하는 연설을 할 때 사용되었다: "당신을 더 괴롭게 아니하려 하여 우리가 대강 여짜옵나니 관용하여 들으시기를 원하나이다". (참조: F.Hauck/S.Schulz; W.Bauder). → prau?", 4239 프라위스. → prau?th", 4240 프라위테스.
eujpeiqhv"(2138, 유페이데스) 순종 잘하는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형용사 유페이데스(Aeschyl. X., Pla. 이래)는 유(eu\, 2095; 잘 well)와 페이도(peivqw, 3982)에서 유래했으며, '쉽게 순종하는, 순종 잘하는'을 의미한다. 2. 신약성경의 용법. 형용사 유페이데스는 신약성경에서 약 3:17에 한번 나오며, '순종 잘하는' 것을 의미한다: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e[leo"(1656, 엘레오스) 불쌍히 여김, 동정, 자비.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엘레오스(Homer 이래)는 '자비, 불쌍히 여김, 동정'을 의미한다. 헬라어에서 엘레오스는 하나의 파도스(pavqo", 3806), 곧 다른 사람들이 부당하게 당하는 고통에 의해 생겨나고 자비 뿐만 아니라 두려움의 요소를 포함하는 감정이다. 이것은 귀족들에게 아주 잘 어울리는 감정이며 재판을 행하는데에 하나의 역할을 한다. 그렇지만 스토아 학자들은 이 감정을 현자들에게 합당하지 않은 건전치 못한 것으로 간주했는데 이는 스토아 학자들이 잔인해서가 아니라, 그들은 도덕적 관계가 파도스(pavqo", 3806)에 의해 지배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2. 70인역본의 용법. 명사 엘레오스는 70인역본에서 약 400회 나오며, 주로 헤세드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a) 이 단어는 상호 관계, 예를 들면 친척들 간에, 주인과 손님 간에, 주인과 종 간에, 언약 관계에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생겨나는 태도를 나타낸다. 이것은 성벽(disposition)이라기 보다는 행동이며, 신뢰를 근거로 하고 충성을 적절한 태도로 삼는다. 따라서 예를 들어 통치자와 신하 사이에 의무의 요소는 본질적인 것이다. 우월한 자의 편에서, 헤세드에는 또한 은혜도 포함된다. 이것은 특히 하나님의 편에서 그렇다. 하나님은 임의로 자신을 자기 백성과 묶으셨으며, 따라서 의인은 그들 자신이 자비를 보일 때 하나님의 헤세드에 의존하게 된다. 하나님의 헤세드는 비록 우리가 요구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기대할 수는 있으며 또한 약속된 신실하고 자비로운 사랑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불충실하기 때문에, 이 사랑은 궁극적으로 결정적인 구원을 가져올 용서하는 은혜의 형태를 취하며, 따라서 헤세드는 종말론적인 용어가 된다. 라하밈의 경우에도 일반적으로 동정보다는 사랑의 행위나 표현이 문제가 된다. 그런데 이 단어는 본래 육체적인 의미를 지녔으며 사랑의 관심을 나타내었다. (b) 후기 유대교에서 헤세드는 사랑의 행동에 대해 사용되었지만 이 단어는 특히 하나님의 자비를 가리키는데, 종종 그 자비의 신실성에 강조점을 두며, 또한 진노와 구별되는 자비를 언급한다. 하나님의 엘레오스는 이스라엘이나 그를 사랑하고 경외하는 사람들에게 임한다. 하나님의 엘레오스는 계시되고, 기대되고, 소망되고, 탄원되는 그의 은총의 행동이다. 구원 시대는 엘레오스의 시대이다. 필로는 율법이 엘레오스를 요구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엘레오스를 하나님의 능한 행사들 중의 세번째 것으로 간주한다. 자비로우신 하나님은 구주이시다. 그렇지만 필로에게 있어 자비는 행동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감정이며, 종말론적인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명사 엘레오스는 신약성경에서 27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a) 엘레오스는 종종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태도에 대해 사용되었다. 마 9:13; 마 23:23에서 이 단어는 상호 관계에 있어서의 친절을 나타낸다. 70인역본의 "자비를 베풀다"라는 표현이 눅 10:37에서 선한 사마리아인의 행동들에 대해 사용된다. 약 2:13에서 자비에 대한 요구는 우리의 자비에 선행하는 하나님의 자비에 근거한다(참조: 마 18:33). 유대교와 비교해 볼 때, 신약성경에서의 새로운 특징은 하나님의 자비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해서 알려진다는 것이다. 약 3:17에서 엘레오스는 비록 동정을 포함하지만 일반적인 자애(lovingkindness)를 포괄한다. 이 자비는 또한 일시적인 안녕 뿐만 아니라 영원한 안녕에 대한 관심을 의미할 수도 있다(참조: 유 1:22). (b) 신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엘레오스는 종종 그의 은혜로운 신실성을 가리킨다(눅 1:58; 엡 2:4; 벧전 1:3; 롬 11:30). 바울은 의미심장하게 하나님의 엘레오스를 하나님의 구원과 관련시킨다.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종말론적 행동이다(딛 3:5). 롬 9:22-23에서, 하나님의 엘레오스에 반대되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이다. 롬 9:15 이하; 롬 15:8-9에서는 종말론적인 의식이 또한 고찰될 수 있다. 하나님을 믿는 이방인들은 이제 하나님의 자비에 사로잡힌 바된다. 심판 때에 자비가 요구된다는 사실은 딤후 1:18; 유 1:21(참조: 마 5:7)에 표현되어 있다. 갈 6:16과 같이 인사말에서 엘레오스는 그리스도를 간접적으로만 언급할 뿐이다. 딤후 1:16에 의하면 바울에게 보여졌다고 하는 자비에서 볼 수 있듯이, 일반적인 것일 수도 있고 개별적인 것일 수도 있다. 이런 경우에 항상 특별히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구원 행동을 언급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참조: H. -H. Essen; R. Bultmann).
ajgaqov"(18, 아가도스) 선한 good, 아가도스는 형용사와 실명사로 사용되며, 사물이나 인격의 탁월이나 중요성을 표현한다. 형용사로서 이 단어는 '탁월한, 우수한, 좋은, 선한, 훌륭한'을 뜻한다. 실명사로서 이 단어가 인격의 탁월성, 사물의 질, 또는 물질적인 것이나 정신적인 것의 좋은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단어는 헬라 철학에서 도덕적, 영적 고결을, 헬레니즘과 성경에서 구원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래서 이 단어는 인물, 사물, 조건, 상태, 자질, 감정, 행위, 때(time)를 묘사하는데 사용된다.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a) 헬라 철학에서의 아가도스. 선(善)의 개념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철학자의 관심은 존재에 의미를 주는 중요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예를들면, 소피스트 (Sophists)는 선을 쾌락과 동일시하였다. 플라톤은 선의 개념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가장 고상하며 탁월한 이데아라고 한다. 왜냐하면 선은 부패하게 하고 파괴하는 악과는 대조적으로 보존하고 유지하는 힘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선에 대한 훈육으로 말미암아 선하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선을 신성이나 이성, 미덕이나 중용, 필요한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는 그의 윤리학에서 모든 행위의 목적을 선의 어떤 형태에의 도달로 정의한다. (b) 헬레니즘에서의 아가도스. 헬레니즘(보다 덜 인본주의적인)에서 아가도스 곧 '선'의 개념은 종교적인 색채를 띠었으며, 한때 종교적인 의미로 널리 유행하게 되었다. 선은 구원을 의미한다. 헤르메스 문헌에 따르면 구원은 신성(Divinity), 즉 신격화에 의해서 발생한 것이며 선이다. 그러므로 선의 속성 속에는 구원을 가져다 주는 신이 보존되어 있었다(하나님은 선이다). 왜냐하면, 신만이 물질에 부속되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선은 우리 편에서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을 의미하고, 하나님 편에서는 '친절, 선함'을 의미한다. 인간은 물질적인 것들의 금욕과 신성화에 의해서 선하게 된다. 필로(헬레니즘 유대교에 관한 해설자)에게 있어서 최고의 선한 신(神)은 인격적 하나님이시다. 필로는 온건(중용), 하나님에 대한 경외, 지혜를 영혼이 하나님, 즉 최고의 선(善)에 이르는 길을 찾는데 필요한 가장 훌륭한 재산들로 지적했다. 경건, 믿음, 지혜는 선한 것들이며, 이런 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도우심과 더불어 우리는 하나님을 알고 그분을 섬길 수 있게 된다. 2. 구약성경의 용법 (a) 구약성경과 유대교에서 선(善)에 대한 접근 방식은 헬레니즘에서와 같이 종교적인 것이지만, 여기서 결정적인 것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이다. 구약성경에서 선의 개념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신앙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하나님의 개념으로부터 분리된 인간적인 것로서의 선의 개념 - 그리스와 헬레니즘 사상에 있는 개념과 비교할 때 - 은 생각할 수도 없는 것이다. 선은 항상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하나님의 은사이며, 그렇기 때문에 선은 인간의 힘의 통제권 밖에 존재한다(창 3:5).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은 단지 '선'이 아니라 선하신 성품을 가지신 분이시라는 사상이 철두철미하게 전제되어 있다. 이러한 인식이 구약성경에 있어서는 하나님과 백성의 관계, 그리고 하나님과 개인의 관계가 성숙해지는 과정에서 더욱 발전하였다. 하나님만이 오로지 선하신 분이시다라는 사실은 구약성경에서 그가 선택한 백성을 구원하신 것, 율법을 주신 것(신 30:15; 잠 28:10), 그리고 출애굽과 가나안 정복(출 18:9; 신 10:29이하)과 같은 역사적 사건들 속에서 명백해졌다. 이스라엘인들은 하나님의 창조 활동(창 l:1-8)에서건, 그의 말씀에서건(사 39:8), 그의 영에서건(시 l43:l0), 심지어 그가 반대자들에게 말하기 위해 나타나셨을 때 조차도(창 50:20) 그에게서 유래되는 모든 것은 선하다라는 사실을 알고부터 하나님을 오로지 선하신 분으로 찬양하는 새로운 계기로 발전하였다. 하나님은 역사를 통한 그의 사역에서 선(참조: 출 l8:9)을 행하시는 바 그 목적은 구원이며, 율법을 통해 인간에게 방향을 제시해 주는데 있다. 선은 이미 행해져 왔으며, 또한 준비되어 있다. 하나님이 그의 백성에게 약속했던 선은 메시야적, 종말론적 구원에서 실제로 성취될 것이다(레 32:39 - 42; 사 52:7). 한편 율법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통하여 선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선을 행하는 자는 선하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의 도움없이 가능할 것인가는 논쟁이 되고 있다. 전도자는 하나님의 도움없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전 7:20). (b) 랍비 유대주의는 하나님의 선함이 구원을 가져다 준다고 생각했다. 선한 것과 성취 가능한 것은 율법에 계시되어 있다. 하나님의 법을 실행할 때 비로소 인간은 선을 행할 수 있고 또 선해질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인 선은 오로지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동료 인간들 사이의 인격적 관계에서만 실행될 수 있는 것이다. 3. 신약성경의 용법 (a) 기본적인 접근방식은 역시 종교적이다. 하나님만이 참으로 선하시다. 예수님은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막 l0:17이하; 눅 l8:18이하; 마 19:17)고 하셨다. 하나님의 인격적 개념은 중성으로 표현할 수 없다. 이러한 구절에서 아가도스는 도덕적 완전을 의미하며, 선함(goodness)과 친절(kindness)로 되어 있는 하나님의 본질적 선함을 표현한다. 신약사상의 중심점인 구원,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구원 계시는 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아가도스는 이 의미로 히 9:11("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와 히 10:1("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에서 사용되었다. 미래 세계에 속하고, 또한 모형들과 그림자들의 '실체'로서, 토라를 통하여 전달된 것들과 관계된 멜론타 아가타(장차 오는 좋은 일들)는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공동체에 주어진다. 그 좋은 일들은 "영원한 속죄"(아이오니아 뤼로시스, 히 9:12)와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는" 것(라투류에인 데오 존티, 히 9:14), 즉 죄와 죽음의 세력에서 구원받아, 살아계신 하나님과 친교 및 그를 섬기는 것으로 되어있다. 하나님의 선하심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좋은 일들"을 베푸신 그 '자비'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새로운 삶의 기회를 부여 받는 것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선하심 속에서 그것을 나누어 받는 한에 있어서만 선하고, 선을 행함으로 말미암아 타인에게 그 선을 전할 수 있다. 예수님은 선한(칼로스) 목자로서 자신의 생명을 희생시켜 지금 당장 구원이라는 영원한 선을 유효하게 만들고 있다(이 구절 속에 있는 칼로스는 아가도스의 동의어로 사용됨). 롬 10:15에서 이사야의 "좋은 소식을 가져오는...자"(메밧셀 토브)에 대한 예언(사 52:7)을 채용하여 사도직에 적용한다. 그래서 사도들은 이 "좋은 소식"의 전파자들이다. 사도의 선포 내용은 메시야의 구원이다. 예수님의 무죄성에 대한 많은 논란은 마19:17과 그 병행구들과 관련되어있다. 마가와 누가에는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마태에는 다른 형식으로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로 기록되어있다. 이 기자들은 예수님이 하나님과 비교하여 자신의 무죄성이나 선함을 부인하는 것으로 보지 않는다. 그들에게 있어서 그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마가와 누가의 전언에서 예수님의 말씀은 아마도 인간은 결코 무죄할 수 없으며, 따라서 네가 나를 한 인간으로 생각하다면 나를 선하다고 할 수 없지 않는가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마태의 전언은 예수님의 의도를 정확히 전해주고 있다. 그는 자신의 무죄성에 대한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영예에 대한 문제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말하자면, 예수님의 질문자에 대한 대답은 하나님의 주권과 완전한 선함을 전하는 말에 맡겨져 있다. 문제는 질문자가 그 앞에 무릎을 꿇고 그에게 영광을 돌려야 하는, 홀로 선하신 분인 하나님께 주의를 돌리는 것이다. 요 1:46에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라는 회의적인 질문에서 "선한 것"에 해당하는 아가돈(중성)은 '구원'(참조, 시 14:7), 곧 메시야가 가져오는 구원을 의미한다. 모리스(Morris)에 의하면, 이 질문은 나사렛에 관한 어떤 알려진 견해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메시야가 별로 중요하지 않은 그런 곳에서 결코 나올 수 없다고 생각한 어떤 사람의 주장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무난하다는 것이다. (b) 세상에서는 선이라고 할 만한 아무 것도, 선하다고 할 만한 아무도 없다. 인간들이 세운 제도들 사이에 있는 옳음과 그릇됨의 구분은 하나님 앞에서 무너지고 만다. 이것은 (1) 하나님 홀로 선하시고 다른 아무 것도 선하지 않다는 것과 (2) 멜론타 아가타(장차 오는 좋은 것)는 그것들 안에서 죄와 사망이 폐하여 지기 때문에 오직 참된 아가도스이다는 사실이 알려 준다. (참조: J.H.Thayer; E.Beyreuther).
ajdiavkrito"(87, 아디아크리토스) 불확실하지 않은, 치우치지 않는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형용사 아디아크리토스는 부정접두사 a와 디아크리노(diakrivnw, 1252)에서 유래했으며, 1) '구별할 수 없는, 분간할 수 없는' 2) '의심스러움이나 모호함이 없는, 불확실함이 없는'을 의미한다. 2. 70인역본의 용법. 아디아크리토스는 70인역본에서 잠 25:1에 한번, 히브리어 해당어 없이 나타나며, "솔로몬의 잠언"이란 문구를 '솔로몬의 확실한(의심스러움이 없는) 교훈'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3. 신약성경의 용법. 아디아크리토스는 신약성경에서 한번 나타난다. 약 3:17에서 지혜 있는 자는 디아크리토스, 즉 확신하기 때문에, 그 행위가 모호하지 않은 것이다. 그는 동요함이나 모순이 없기 때문에 흔들리지 않고, 치우치지 않으며(Arnolt, 16) 편벽이 없다. (참조: B. Gartner. DNTT).
ajnupovkrito"(505, 아뉘포크리토스) 거짓 없는 unfeigned, 진정한 genuine, 성실한 sincere. 1. 고전 헬라어 문헌 형용사 아뉘포크리토스는 부정 접두사 a와 휘포크리노마이(uJpokrivnomai, 5271)에서 유래했다. 이 단어는 세속적 문헌에서는 별로 사용되지 않는 단어로서, '배우로서 경험이 적은 사람'을 가리킨다. 은유적으로는 '거짓 없는 사람 the unfeigned, 진정한 사람 the genuine, 순박한 사람 the simple'을 의미한다. 2. 70인역본의 용법 형용사 아뉘포크리토스는 외경에서 처음으로 나타나며, 2회 사용되었다. 지혜서 5:18에서 이 단어는 하나님께서 악인에 대하여 의인을 방호하는 무기의 목록에 나온다: "[진정한] 심판을 투구로 쓸 것이다". 지혜서 18:15에서는 용맹한 전사와 같이 하늘에서 부패한 세상에 뛰어 들어온 하나님의 '거짓없는(진정한)' 말씀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이 두 경우에 아뉘포크리토스는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일, 곧 종말론적인 역사(役事)에 대하여 사용되었으며, 폐지할 수 없고 가장 확실한 것이라는 거짓 없는 단순성을 의미한다. 3. 신약성경의 용법 형용사 아뉘포크리토스는 신약성경에서 서신에서만 사용된 형용사이다. 모두 6회 사용에서 3회가 사랑, 즉 아가페를 수식하는 말로서(롬 12:9; 고후 6:6) 사용되었다. 롬 12:9에서 바울은 사랑에는 거짓이 없어야 한다는 것으로 일반적인 윤리에 대한 권면들을 열거하기 시작한다. 고전 6:6 - 고전 6:7에서 아뉘포크리토스는 하나님의 가장 확실한 실재의 완전한 투명성과 거짓 없는 단순성이 기독교인들의 이웃 사랑의 성격을 묘사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 반대인 사랑은 거짓된, 가장된, 기만적인 사랑이다. 단순히 사랑처럼 보이는 이러한 모든 것은 하나님 자신의 태도와 역사(役事)에 부합하지 못하는 사악한 것이다. 따라서 이 거짓 사랑은 기독교인의 행위와 태도가 생겨나는 하나님의 진리와 투명성과 싸우고 있다. 벧전 1:22에서 아뉘포크리토스는 형제 간의 사랑, 즉 필라델피아(filadelfiva, 5360)를 수식하는 말로서 사용되었다. 거짓 없는 형제 사랑은 거듭남에서, 곧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한 깨끗한 영혼에서 생겨난다. 이러한 사랑은 저의가 없는 허심탄회하고 순수한 마음에서 생겨난다. 그러한 사랑은 억지로 보이려고 애쓰지 않는다. 아뉘포크리토스는 딤전 1:5과 딤후 1:5 두 곳에서는 믿음을 수식하는 말로서 사용되었다. 이 단어는 믿음은 편의주의적인 생각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표현하고 있다. 믿음은 그리스도인이 살아계신 그리스도와 연합할 때 저절로 성장하는 것이며, 마음에 뿌리를 내린 믿음은 솔직하고 공명한 생활에서 표출되는 것이다. 이것은 위로부터 난 지혜에 대해서도 그러하다(약 3:17). (참조: U. Wilckens; W. Giinther).
dikaiosuvnh(1343, 디카이오쉬네) 의로움, 의 명사 디카이오쉬네(Theognis. Hdt. 이래)는 디카이오스(divkaio", 1342: 의로운)에서 유래했으며, 의로운 사람의 덕, 자질, 상태를 나타낸다. 70인역본에서 히브리 체테크(올바름, 공정함, 의로움)의 역어로 자주, 헤세드(선함, 친절, 긍휼)의 역어로 드물게 사용되었다. 명사 디카이오쉬네는 신약성경에서 92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a) 넓은 의미에서, '그의 의무를 이행하는 자의 상태, 의로움,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있는 조건' ① 일반적으로: "의의 말씀", 인간이 하나님께 옳다고 인정 받는 상태에 도달할 수 있도록 하는 길(way)에 관한 교훈, 히 5:13; "의의 왕", 하나님께서 시인하신 왕, 그의 백성을 하나님께 용납되게 하는 왕, 히 7:2; ② '삶의 성실, 미덕, 순결, 정직, 생각, 느낌, 행동이 올바름': 마 3:15; 마 5:6, 마 5:10; 마 6:20; 마 6:1; 행 13:10; 행 24:25; 롬 6:13, 롬 6:16, 롬 6:18-20; 롬 8:10; 고후 6:7, 고후 6:14; 고후 11:15; 엡 5:9; 엡 6:14; 빌 1:11; 딤전 6:11; 딤후 2:22; 딤후 3:16; 딤후 4:8; 딛 3:5; 히 1:9; 히 12:11; 약 3:18; 벧전 3:14; 벧후 2:5, 벧후 2:21; 벧후 3:13, "의의 도로", 의의 길로 행하는, 즉 정직한, 의로운 사람, 마 21:32; "그의 의를 구하라",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의, 마 6:33; 약 1:20; '자선'에서 나타나는 의에 대해: 고후 9:9. "의와 성결"로 연결되어 나오는 경우, - 눅 1:75; 엡 4:24, - 전자는 인간에게 향한 옳은 행동을, 후자는 하나님께 향한 경건을 나타낸다. 의를 행하는 것, 의롭게 사는 것: 요일 2:29; 요일 3:7; 요일 3:10. 의를 행하는 것, 행 10:35; 히 11:33; 의를 위해 사는 것, 의를 위해 생명을 바치다, 벧전 2:24; 옳은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완전하게 수행하다, 마 3:15. 디카이오쉬네가 그리스도에 대해 증언할 때는, 그의 완전 무결한 도덕성, 고결성, 죄 없으심을 나타낸다: 요 16:8, 요 16:10; 하나님에게 사용될 때는 그의 '거룩성'을 나타낸다: 롬 3:5, 롬 3:25이하. ③ 바울 문헌에서 헤 디카이오쉬네는 특별한 의미를 지니며 유대인과 유대 기독교인의 견해에 대립된다. 그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 특히 다음의 사실들이 주목되어야 한다: 한 민족으로서의 유대인과 그들 가운데서 기도교도로 개종하게 된 매우 많은 유대인들은, 모세 율법의 요구사항에 부합하는 행위를 행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총을 받았다 - 마치 공로의 방식으로 - 고 생각하며, 또한 그리하여 영원한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율법은 그 가르침 모두에 완전히 복종할 것을 요구하며, 그러한 복종을 이행하지 않는 자들을 정죄한다(갈 3:10, 갈 3:12). 이런 식의 복종은 유대인도 이방인도(롬 1:24-롬11:1) 그 누구도 이행할 수가 없다(롬 3:10) - 이방인에게는 모세 율법 대신 그들의 마음에 새겨진 타고난 올바른 법이 있다(롬 2:14이하). 이러한 이유로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 즉 그의 독생자 그리스도를 인간의 죄를 속하는 희생제물로 죽게 내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인류에게 그의 은총과 선한 뜻을 입증하셨고, 그리하여 인간이 마치 죄를 짓지 않은 양 구원을 소망할 수 있게 한 그 사랑을 선포한다. 그러나 이 소망을 얻는 길은 오로지 믿음을 통하는 것 뿐이라고 가르친다. 이 믿음으로 인간은 그리스도 안에 계시되고 보증된 하나님의 그 은총을 전유할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믿음을 인간에게 디카이오쉬네로 간주하여 주는 것이다; 디카이오쉬네는 '한 죄인이 하나님께서 제공하신 은총을 받아들이는 그 믿음을 통하여 그 죄인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께 용납(열납)될 수 있는 상태'를 나타낸다. 이런 의미에서 디카이오쉬네는 롬 4:5이하, 롬 4:11; 롬 5:17, 롬 5:21; 롬 9:30이하; 롬 14:17; 고전 1:30; 갈 5:5에서 수식어구 없이 사용된다. 하나님으로 인한 의,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선언하신 것, 롬 1:17; 롬 3:21; 롬 10:3. 이 단어가 함축적으로 사용되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그에게 받아들여질 만한 상태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나타낸다, 롬 10:4; 추상적인 것으로 구체적인 것을 나타내는 용법에서는,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하신 자들을 뜻한다. 고후 5:21;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 롬 3:22; "믿음으로 된 의", 믿음으로 얻어지는, 믿음에서 나타나는 의, 롬 4:11, 롬 4:13; "하나님께로서 난 의", 즉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의, 하나님으로 인하는 의, 빌 3:9(내가 가진 의는 믿음에 기초한 의라는 것이다). "믿음에서 난 의", 롬 9:30; 롬 10:6; "내가 가진 의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 빌 3:9; "믿음을 좇는 의", 롬 9:30; 롬 10:6; "내가 가진 의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 빌 3:9; "믿음을 쫓는 의", 믿음에 따르는, 믿음에 합당한, 히 11:7(그러나 히브리서에서의 '믿음'의 개념은 바울 문헌에서보다 더 폭 넓다는 사실을 주의해야 한다). 그리스도는 그가 없이는 의가 존재할 수 없는 분으로서, 의의 창시자로서로 불리운다, 고전 1:30. "의를 이루기 위하여", 결과로서 의에 이르기 위하여, 의를 얻기 위하여, 롬 10:4, 롬 10:10. 믿음은 사람에게 의로 간주된다, 즉 의는 믿음에서 기인하고, 믿음에서 인정된다: 롬 4:3, 롬 4:6, 롬 4:9, 롬 4:22; 갈 3:6; 약 2:23. "의의 직분", 고후 3:9. 믿음에서 생겨난 "의", 즉 율법 순종의 결과로 생각되는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있는 상태와 반대된다, 롬 5:5이하; 율법에 의존하는, 즉 율법에 대한 가상적 복종에 의존하는 의, 빌 3:6; 어떤 사람이 자신의 행위로 스스로 얻었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그러한 의, 롬 10:3; 빌 3:9; (b) 더 접근된 의미에서 '공의, 정의', 혹은 '각 개인에게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주시는 미덕', 이것은 모든 기독교인에게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공평하게 부여하시는 하나님과 그리스도께 속하는 것이라고 한다. 벧후 1:1. 법률상의 정의, 롬 9:28; "공의로 심판", 행 17:31; 계 19:11. (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karpov"(2590, 칼포스) 열매 fruit.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칼포스(Homer이래)는 일반 헬라어에서, (a) 땅의 '열매'(Homer), 동물들의 '새끼'(Xenophon), (b) 산물, 이익, (c) 좋든 나쁘든 간에 착수한 일의 결과를 뜻하는 확대된 의미로, '성과', '결과'(Philo, Marcus Aurelius)를 의미한다. 2. 70인역본의 용법 명사 칼포스는 70인역본에서 약 130회 나오며, 주로 페리(과일, 열매, 자손, 결과)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칼포스는 식물의 열매(신 1:25; 말 3:11), 몸의 결실이나 후손(창 30:2; 신 7:13; 미 6:7; 시 21:11), 비유적 의미로 행동의 열매(호 10;13; 렘 6:19; 렘 17:10)이며, 후기 유대교에서 의인은 선한 열매를 맺고 악인은 나쁜 열매를 맺는다. 상업적 용어로 이익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명사 칼포스는 신약성경에서 66회 나오며, 대부분 복음서에 사용되었다. 1. 칼포스의 본래의 의미. (a) 칼포스는 식물들의 열매(마 21:19; 마 13:8; 막 11:14; 눅 12:17 등)나 땅의 소산물(약 5:17, 약 5:18; 눅 20:10)을 의미한다. 야고보서 5장 같은 구절들은 사람이 수고함으로 인하여 열매의 성장을 돕고 촉진할 수 있으나 그 열매를 단지 선물로 기대하고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씨와 수확은 사람에게 맡겨져 있다. 어느 정도까지 열매의 성장이 인간의 의지력과 별개의 것인지는 그 열매가 정해진 시기 곧 카이로스에 익는다는 사실로 분명히 보여준다(마 21:34). 열매의 형태는 임의적인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그 씨앗으로 결정지워지므로(참조: 고전 15:35이하), 그 열매를 보고 그 식물을 판단할 수 있다: "나무도 좋고 실과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실과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그 실과로 나무를 아느니라"(마 12:33; 마 7:16, 마 7:20). 이 사실은 종(種)에 만이 아니라 질(質)에도 적용된다. 마태복음은 선한 열매와 악한 열매(마 3:10; 마 7:17-마 7:19)나 썩은 열매(마 12:33; 눅 6:43)를 특히 대조시키고 있다. 기대에 부응하지 않는 열매는 쓸모가 없고 그러한 열매를 맺는 것('나무' 마 7:19; 눅 3:9; 마 13:6이하)은 유용성이 없는 것으로 불린다는 사실을 보여주는데 그 의도가 있다. (b) 눅 1:42에서 칼포스는 몸의 열매 즉 후손이란 의미로 나타난다: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행 2:30에서도 같은 의미를 지닌다: "그는 선지자라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고". 2. 칼포스의 비유적 의미. 칼포스는 비유적으로부터 생기거나 나오는 것, '효과, 성과, 결과'를 나타낸다. (a) 칼포스는 '일, 행동, 행위'를 나타낸다. ① 마 3:8(병행구, 눅 3:8)에서 칼포스는 '행위(선행)'를 나타낸다: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는 문자적으로 '회개에 대등한 행위'라고 번역할 수 있다. 마 21:43에서 "그 나라의 [열매]를 맺는 백성이 받으라"고 한다. 여기서 칼포스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구원의 획득에 요구되는 행위들, 곧 참회, 신앙, 신앙의 행위들을 카리킨다. ② 빌 1:11에서 선행을 의의 열매로 인정한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약 3:18에서도 같은 의미를 나타낸다: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엡 5:9에서 "빛의 열매"도 선행을 나타낸다: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갈 5:22에서 "성령의 열매"는 성령이 가져오는 여러가지 선행이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골 1:10에서 "주께 합당히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라고 언급한다. 바울은 그러한 선행을 구원을 이루려는 인간의 열심과 현저하게 구별짓고 있다. 전문 기술계와 공예계에서 나온 용어 에르곤(e[rgon, 2041, 일하다)은 사람이 자신의 노력으로 생산한 것을 암시하며 긍정적 의미로는 비교적 드물게 사용된다. 반면에 자연적인 성장의 영역에서 따온 칼포스는 당연한 일로 성장하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그 나무나 토양의 생명 공급력에 의존한 결과이다. 이러한 성장은 막 4:27이하가 지적하여 준다: "저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그 어떻게 된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그러나 생명의 증거인 이 성장은 사람의 임의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다. 이 용어를 사용함에 있어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영이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혀져서 이 살아있는 교제의 은사에 동참하는 사람들에게 있어 성취-열매-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데 이는 그 열매가 손으로 만든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자 한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은 그들의 열매를 하나님께 가져오고 하나님을 위하여 살지만 죄지으려는 욕망의 힘은 죽음을 위한 열매를 맺을 수 있을 뿐이다(참조: 롬 7:4이하). (b) 칼포스는 사역의 '결과나 성과'를 나타낸다. ① 롬 1:13; 빌 1:22에서 이 의미를 나타낸다. ② 롬 15:28에서 이러한 의미에서 예루살렘 공동체를 위한 연보는 하나의 열매이다: "그러므로 내가 이 일을 마치고 이 열매를 저희에게 확증한 후에 너희에게를 지나 서바나로 가리라". 이 열매를 저희에게 확증한 후에는 문자적으로 '이 열매를 저희에게 인친 후에'라고 번역할 수 있다.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그 연보를 가지고 가서 그곳의 교회에 그것을 넘겨 줌으로서 그 연보 위에 인을 치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는 이 연보가 이방인 중에서 자기의 사역의 열매, 곧 성과임을 보여주고자 했다. 이 경우에 칼포스는 또한 '수입이나 수익'이란 의미도 포함한다. (c) 칼포스는 '유익, 이익, 수익, 유용'을 나타낸다. ① 이 단어는 자신들의 수고로 교회를 세우고 있는 사도들과 특히 복음 전파자들이 "그들이 맺은 열매에 의하여 산다"는 의미에서까지 이해할 수 있다. 이 사람들은 교회에 의한 생계 부양의 요구를 할 수 있다: "누가 자비량하고 병정을 다니겠느냐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실과를 먹지 않겠느냐 누가 양 떼를 기르고 그 양 떼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고전 9:7). 딤후 2:6에서도 같은 의미를 나타낸다: "수고하는 농부가 곡식을 먼저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② 빌 4:17에서 바울에 대한 지원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유익이 될 것이다: "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요 오직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과실이 번성하기를 구함이라". 히 12:11에서 "의의 열매"는 의로부터 발생하는 유익이다: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③ 약 3:18에서 "의의 열매"는 의 속에 존재하는 '유익'을 가리킨다: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d) 히 13:15에서 "입술의 열매"는 하나님께 감사제물로 드리는 찬양을 가리킨다: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참조: 호 14:2; 잠 12:14; 잠 29:49). (e) 칼포스는 예수님과 관련하여 '열매 곧 수확'을 나타낸다: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요 15:2이하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주님과 갖는 친밀한 교제는 열매를 맺는 능력의 비결로 보여진다. 요 12:24에서 예수님께서 죽으심은 풍성한 열매가 거기에서 성장하는 토양인 것이다. 십자가 상에서 예수님이 죽으심은 사람들에게 구속을 가져온다. 예수님은 포도나무(즉 여기서는 생명나무)로서 그의 가지들을 통하여 믿음의 필수 조건이자 믿음의 방편인 생명을 주는 힘을 보낸다. 사람은 참으로 그의 천부적 재질을 통해서 도덕적, 전문적 업적을 달성할 수 있다. 그러나 "복음의 열매"-하나님이 사람에게 기대하시는 것-는 순종의 땅에서만 성장할 수 있으며 그 순종은 본질적으로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확립된 창조주와 피조물 간의 유대를 인정함에 있는 것이다. 인간은 더 이상 자기 자신의 업적을 고려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실패의 불안에서 해방된 인간은 최상의 노력을 경주할 수 있다("보다 많은 과실"; 요 15:2, 요 15:58). 열매를 맺는 인간 능력의 근원은 그 자신 밖에 있으므로 수확은 확실하다. 이 열매는 영생 부여의 가치가 있으며 영원토록 남아있는다(요 15:16). (f) 요 4:36에서 영생에 이르는 열매는 '구원받은 사람'을 가리킨다: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니라". (g) 칼포스는 계 22:2에서 2회 나온다: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매월 열매를 맺는 생명나무의 묘사는 새로운 세상에 하나님의 널리 임재하심의 충만함을 상징한다. 이 신세계에는 수치와 죄악이 극복되며 하나님의 영의 활동하심의 모든 장애물들은 제거되어 진다.(참조: Walter Bauer; R.Hensel; J.H.Thayer; F.Hauck).
야고보서 4장 [개역개정:NASB] 1.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 What is the source of quarrels and conflicts among you? Is not the source your pleasures that wage war in your members? 2. 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므로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You lust and do not have; so you commit murder. You are envious and cannot obtain; so you fight and quarrel. You do not have because you do not ask. 3.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 You ask and do not receive, because you ask with wrong motives, so that you may spend it on your pleasures. 4.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 You adulteresses, do you not know that friendship with the world is hostility toward God? Therefore whoever wishes to be a friend of the world makes himself an enemy of God. 5. 너희는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냐 Or do you think that the Scripture speaks to no purpose: "He jealously desires the Spirit which He has made to dwell in us"? 6.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But He gives a greater grace Therefore it says, "GOD IS OPPOSED TO THE PROUD, BUT GIVES GRACE TO THE HUMBLE." 7.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Submit therefore to God Resist the devil and he will flee from you. 8.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Draw near to God and He will draw near to you Cleanse your hands, you sinners; and purify your hearts, you double-minded. 9.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 Be miserable and mourn and weep; let your laughter be turned into mourning and your joy to gloom. 10.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Humble yourselves in the presence of the Lord, and He will exalt you. 11.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관이로다 Do not speak against one another, brethren He who speaks against a brother or judges his brother, speaks against the law and judges the law; but if you judge the law, you are not a doer of the law but a judge of it. 12.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 There is only one Lawgiver and Judge, the One who is able to save and to destroy; but who are you who judge your neighbor? 13.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Come now, you who say, "Today or tomorrow we will go to such and such a city, and spend a year there and engage in business and make a profit." 14.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Yet you do not know what your life will be like tomorrow. You are just a vapor that appears for a little while and then vanishes away. 15.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Instead, you ought to say, "If the Lord wills, we will live and also do this or that." 16. 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But as it is, you boast in your arrogance; all such boasting is evil. 17.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 Therefore, to one who knows the right thing to do and does not do it, to him it is sin. [[Things to Avoid]] 1 What leads to [the unending] [a]quarrels and conflicts among you? Do they not come from your [hedonistic] desires that wage war in your [bodily] members [fighting for control over you]? 2 You are jealous and covet [what others have] and [b]your lust goes unfulfilled; so you [c]murder. You are envious and cannot obtain [the object of your envy]; so you fight and battle. You do not have because you do not ask [it of God]. 3 You ask [God for something] and do not receive it, because you ask [d]with wrong motives [out of selfishness or with an unrighteous agenda], so that [when you get what you want] you may spend it on your [hedonistic] desires. 4 You adulteresses [disloyal sinners—flirting with the world and breaking your vow to God]! Do you not know that being the world’s friend [that is, loving the things of the world] is being God’s enemy? So whoever chooses to be a friend of the world makes himself an enemy of God. 5 Or do you think that the Scripture says to no purpose [e]that the [human] spirit which He has made to dwell in us lusts with envy? 6 But He gives us more and more grace [through the power of the Holy Spirit to defy sin and live an obedient life that reflects both our faith and our gratitude for our salvation]. Therefore, it says, “God is opposed to the proud and haughty, but [continually] gives [the gift of] grace to the humble [who turn away from self-righteousness].” 7 So submit to [the authority of] God. Resist the devil [stand firm against him] and he will flee from you. 8 Come close to God [with a contrite heart] and He will come close to you. Wash your hands, you sinners; and purify your [unfaithful] hearts, you double-minded [people]. 9 Be miserable and grieve and weep [over your sin]. Let your [foolish] laughter be turned to mourning and your [reckless] joy to gloom. 10 Humble yourselves [with an attitude of repentance and insignificance] in the presence of the Lord, and He will exalt you [He will lift you up, He will give you purpose]. 11 Believers, do not speak against or slander one another. He who speaks [self-righteously] against a brother or [f]judges his brother [hypocritically], speaks against the Law and judges the Law. If you judge the Law, you are not a doer of the Law but a judge of it. 12 There is only one Lawgiver and Judge, the One who is able to save and to destroy [the one God who has the absolute power of life and death]; but who are you to [hypocritically or self-righteously] pass judgment on your neighbor? 13 Come now [and pay attention to this], you who say, “Today or tomorrow we will go to such and such a city, and spend a year there and carry on our business and make a profit.” 14 [g]Yet you do not know [the least thing] [h]about what may happen in your life tomorrow. [What is secure in your life?] You are merely a vapor [like a puff of smoke or a wisp of steam from a cooking pot] that is visible for a little while and then vanishes [into thin air]. 15 Instead [i]you ought to say, “If the Lord wills, we will live and we will do this or that.” 16 But as it is, you boast [vainly] in your pretension and arrogance. All such boasting is evil. 17 So any person who knows what is right to do but does not do it, to him it is sin. ========================= [골3] 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하나님께 속한 것들))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Therefore if you have been raised up with Christ, keep seeking the things above, where Christ is, seated at the right hand of God. 2. 위의 것을 생각하고((지고지선의 하나님께 속한 생명 복에 최우선적으로 초점을 맞추고 관심두며 올인하며 추구하라))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모든 염려를 주께 맡겨버리라!!...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그분으;ㅣ 공급하심을 신뢰하고 자족함을 배우라)) Set your mind on the things above, not on the things that are on earth. 3. 이는 너희가(옛존재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For you have died and your life is hidden with Christ in God. 4.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JC안에 감추인 바 된 우리 생명이 드러나리라=발견되리라) When Christ, who is our life, is revealed, then you also will be revealed with Him in glory. 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다음의 악덕들에 대해 죽은 것으로 여기고 오직 성령 충만한 성전으로서 성령따라 행하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Therefore consider the members of your earthly body as dead to immorality, impurity, passion, evil desire, and greed, which amounts to idolatry.((땅에 있는 거듭난 존재인 바 네 몸의 구성요소들 전부를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에 대해 죽은 것으로 여기고 생명의 성령따라 행하라!!)) 6. 이것들로 말미암아 (불순종의 아들들에게)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For it is because of these things that the wrath of God will come upon the sons of disobedience, 7. 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으나 and in them you also once walked, when you were living in them. 8.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생명의 성령따라 행하는 순종의 아들들에게는 합당하지 않은 옷이니) 곧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But now you also, put them all aside: anger, wrath, malice, slander, and abusive speech from your mouth. 8.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Do not lie to one another, since you laid aside the old self with its evil practices, 10.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and have put on the new self who is being renewed to a true knowledge according to the image of the One who created him-- 11.. 거기에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파나 무할례파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차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 a renewal in which there is no distinction between Greek and Jew, circumcised and uncircumcised, barbarian, Scythian, slave and freeman, but Christ is all, and in all. 12.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So, as those who have been chosen of God, holy and beloved, put on a heart of compassion, kindness, humility, gentleness and patience; 13.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bearing with one another, and forgiving each other, whoever has a complaint against anyone; just as the Lord forgave you, so also should you. 14.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Beyond all these things put on love, which is the perfect bond of unity. 15.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 Let the peace of Christ rule in your hearts, to which indeed you were called in one body; and be thankful. 16.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Let the word of Christ richly dwell within you, with all wisdom teaching and admonishing one another with psalms and hymns and spiritual songs, singing with thankfulness in your hearts to God. 17.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Whatever you do in word or deed, do all in the name of the Lord Jesus, giving thanks through Him to God the Father. ------------------------- 1. Therefore if you have been raised with Christ [to a new life, sharing in His resurrection from the dead], keep seeking the things that are above, where Christ is, seated at the right hand of God. 2 Set your mind and keep focused habitually on the things above [the heavenly things], not on things that are on the earth [which have only temporal value]. 3 For you died [to this world], and your [new, real] life is hidden with Christ in God. 4 When Christ, who is our life, [a]appears, then you also will appear with Him in glory. 5 So put to death and deprive of power the evil longings of your earthly body [with its sensual, self-centered instincts] immorality, impurity, sinful passion, evil desire, and greed, which is [a kind of] idolatry [because it replaces your devotion to God]. 6 Because of these [sinful] things the [divine] wrath of God is coming [b]on the sons of disobedience [those who fail to listen and who routinely and obstinately disregard God’s precepts], 7 and in these [sinful things] you also once walked, when you were habitually living in them [without the knowledge of Christ]. 8 But now rid yourselves [completely] of all these things: anger, rage, malice, slander, and obscene (abusive, filthy, vulgar) language from your mouth. 9 Do not lie to one another, for you have stripped off the old self with its evil practices, 10 and have put on the new [spiritual] self who is being continually renewed in true knowledge in the image of Him who created the new self— 11 a renewal in which there is no [distinction between] Greek and Jew, circumcised and uncircumcised, [nor between nations whether] [c]barbarian or [d]Scythian, [nor in status whether] slave or free, but Christ is all, and in all [so believers are equal in Christ, without distinction]. 12 So, as God’s own chosen people, who are holy [set apart, sanctified for His purpose] and well-beloved [by God Himself], put on a heart of compassion, kindness, humility, gentleness, and patience [which has the power to endure whatever injustice or unpleasantness comes, with good temper]; 13 bearing graciously with one another, and willingly forgiving each other if one has a cause for complaint against another; just as the Lord has forgiven you, so should you forgive. 14 Beyond all these things put on and wrap yourselves in [unselfish] love, which is the perfect bond of unity [for everything is bound together in agreement when each one seeks the best for others]. 15 Let the peace of Christ [the inner calm of one who walks daily with Him] be the controlling factor in your hearts [deciding and settling questions that arise]. To this peace indeed you were called as members in one body [of believers]. And be thankful [to God always]. 16 Let the [spoken] word of Christ have its home within you [dwelling in your heart and mind—permeating every aspect of your being] as you teach [spiritual things] and admonish and train one another with all wisdom, singing psalms and hymns and spiritual songs with thankfulness in your hearts to God. 17 Whatever you do [no matter what it is] in word or deed, do everything in the name of the Lord Jesus [and in dependence on Him], giving thanks to God the Father through Him. ----------------------- porneiva(4202, 포르네이아) 매음, 간음.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포르네이아(Dem. 이래)는 포르뉴오(porneuvw, 4203: 매음하다, 간음하다)에서 유래했으며, '매음, 간음, 음탕한 행위'를 의미한다(고전 헬라어 문헌에서는 드물게 사용되었다). 2. 70인역본의 용법. 명사 포르네이아는 70인역본에서 히브리어 타즈누트, 제누트, 제느님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며, '간음, 사통'을 나타낸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명사 포르네이아는 신약성경에서 25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a) 포르네이아는 일반적으로 부정한 성교에 대해 사용되었다. 행 15:20; 행 15:29; 행 21:25에서 사도 회의는 이방인 신자들이 피해야할 네가지 규정을 명하는데 그 중에 하나가 '간음'이다(고전 6:13 이하를 보면 이교도 중에서 개종한 자들이 이 악덕[간음]을 얼마나 관대히 여겼으며, 그들이 그 죄에 얼마나 가볍게 빠졌는가를 알 수 있다). 또한 롬 1:29Rec.; 고전 5:1; 고전 6:13; 고전 6:18; 고전 7:2; 고후 12:21; 엡 5:3; 골 3:5; 살전 4:3; 계 9:21; 마 15:19; 막 7:21; 갈 5:19에 이 단어가 나온다. 이 단어는 간통에 대해 사용되었다(참조: 호 2:2). 마 5:32; 마 19:9에서 포르네이아가 단순히 모이케이아(moiceiva, 3430)의 의미에서 혼외 성교로써 이해해야 하는지 혹은 간음(prostitution)으로 이해해야 하는지는 완전히 분명하지 않다. 어떤 주석가들은 이혼의 사유가 될 수 있는 것은 결혼 생활 중에 여자 생활이 매춘부였다는 것이 드러나게 되었을 때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포르네이아는 모이케이아와 동의어로서 간음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b) 여호와와 그의 백성 사이에 존재하는 밀접한 관계를 "결혼"에 비유하여 묘사하는 구약성경과 유대인의 일반적인 어법 형태에 따라 포르네이아가 은유적으로 우상 숭배에 대해 사용되었다: 계 14:8; 계 17:2; 계 17:4; 계 18:3; 계 19:2. 우리는 우상 숭배에 빠진 백성에게서 나지 않았다. "우리가 음란한데서 나지 아니하였고 아버지는 한 분 뿐이시니 곧 하나님이시리로다", 요 8:41.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음으로써 초래되는 바와 같은, 우상 숭배로 인한 더럽힘에 대해 사용되었다(계 2:21).(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H. Reisser).
ajkaqarsiva(167, 아카다르시아) 불결 uncleanness.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아카다르시아는 형용사 아카다르토스에서 유래했으며, Hippocr. 이래로 나타나며, '불결'을 의미한다. 이 두 단어는 월경에서 악한 행위로 인한 도덕적 타락에까지의 불결함의 전(全) 영역을 뜻하는 말이다(참조: Plutarch, De Placitis Philosophorum, 5, 6; Plato, Laws 4, 716e). 이 단어들은 육체적, 제의적, 도덕적 불결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고대에 이러한 불결들은 밀접히 얽혀 있다. 육체적 불결은 제의에 영향을 준다. 2. 70인역본의 용법 명사 아카다르시아는 70인역본에서 약 60회 나오며, 주로 툼마(불결함)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 ajkavqarto", 169 아카다르토스 참조. 3. 신약성경의 용법 명사 아카다르시아는 신약성경에서 10회 나오며, '부정, 불결'을 뜻하며 다음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a) 아카다르시아는 육체적인 불결을 나타낸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마 23:27). (b) 아카다르시아는 도덕적 의미에서 불순이나 부정을 의미한다. ① 음탕한 불순함, 방종스런 불순함, 방탕한 삶: 롬 1:24; 롬 6:19; 고후 12:21; 갈 5:19; 엡 4:19; 엡 5:3; 골 3:5; 살전 4:7. ② 불순한 동기, 살전 2:3.(참조: J.H.Thayer; F.Hauck; H.G.Link; J.Schattenmann).
pavqo"(3806, 파도스) 고난 sufferrng, 수난, 욕정 passion. 1. 고전 헬라어 문헌 명사 파도스는 파스코(pavscw, 3958)에서 유래했으며, 파스코의 과정을 밟아 왔기 때문에 그 의미 또한 다양하다. 파도스는 첫째로 '경험'을 의미한다(Aesch.Ag.,177). 이 명사는 추가어 없이 '불행, 재난, 실패, 패배, 병' 등에 대해 사용되었다. 또한 이 명사는 '분위기나 기분, 느낌, 감정' 등의 의미를 지니며, 매우 흔하게 좋은 의미와 나쁜 의미 두 가지로 사용된다(Aristot.Eth.) 그리고 이 명사는 '열정, 충동', 피타고라스의 영향을 받아서 '변화, 변경, 과정'(Plat. Resp, Aristot.Metaph.), 수사학에서 감정의 표현으로서 '정념'(精念)을 의미한다(Aristot.Rhet.). 파도스는 특히 스토아 철학자들 중에서 주로 부정적인 의미, 곧 '정욕'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 pavscw, 3958 파스코. 2. 70인역본의 용법 파도스는 70인역본에서 65회 나오며, 욥 30:31에서만 히브리어 에벨(슬픔, 비탄)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내 수금은 [애곡성이] 되고 내 피리는 애통성이 되었구나". 그외 구절에는 정확한 상당하는 히브리어가 없다. 잠 25:20에서는 '병이나 상함'이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마음이 상한 자에게 노래하는 것은 추운 날에 옷을 벗음 같고 소다 위에 초를 부음 같으니라". 3. 신약성경의 용법 파도스는 신약성경에서 3회 나타난다. 신약성경에서는 바울만이 파도스를 사용했는데, 골 3:5; 살전 4:5에서는 단수로, 롬 1:26에서는 복수로 나타난다. (a) 롬 1:26에서 파데 아티미아스("부끄러운 욕심")는 동성연애의 악덕을 나타낸다: "이를 인하여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 버려 두셨으니 곧 저희 여인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b) 골 3:5의 문맥에서 파도스의 의미는 '성애적 욕정'이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c) 살전 4:5에서도 요점은 '성적인 욕정'이다: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좇지 말고". (d) 사도교부들은 파도스를 '간통'이나 '나쁜 성미'등에 대해 사용되었다(Hermas Mandates 4.1.6, Similitudes 6.5.5). 그러나 또한 '고난'과 '죽음' (Barnabas and lgnatius), 즉 그리스도의 수난을 뜻하는 경우도 있다. 익나티우스의 글에서 예수의 파도스에 대한 강조는 원래의 그리스도교 전통의 일부이고, '죽다'는 의미에서의 파데인(paqei'n)의 용법에서 발전한 것이다.(참조: W.Michaelis; J.H.Thayer; B.Gartner).
kakov"(2556, 카코스) 나쁜 bad, 악한 evil.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형용사 카코스(Homer 이래)는 결핍하여 있는 것을 표현하며, 무능력이나 연약함을 나타낸다. 그것은 악과 같이 순수한 도덕적 의미 이상이다. 따라서, (a) 카코스는 ① '열등한, 변변찮은, 쓸모없는, 무능력한, 초라한', ② '도덕적으로 나쁜', '사악한', ③ '연약한, 약한 뼈'들에 대해 사용되었다. ④ '불행한, 좋지 않는, 파산적인, 악한'을 의미한다. 명사 토 카콘, 타 카카(복수)는 '악함, 고통, 불행(운), 파멸'을 의미한다 (b) 헬라 세계에서 카코스는 다음과 같은 두가지 견해가 발전하였다: 첫째, 악은 신의 필요에 의해 신에 의해 생겨났다. 둘째, 악은 부분적으로는 인간에 의해 생겨났다. 이러한 견해들은 죄책과 운명이라는 주제들을 통해 비극에서 중복되어 나타난다. 철학은 무지가 악의 근원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원론도 존재한다. 선은 필연적으로 악을 내포한다는 사상이나 영혼들은 형벌로서 이 지상으로 내려오게 되었으며 따라서 지상으로부터 초지상적 선의 세계로 올라가야만 한다는 이론이 그러하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은 인간이 무지를 통해 무의식적으로 악을 행한다는 사상을 발전시킨다. 그러나 플라톤은 또한 신이 세상을 창조할 때 사용한 질료와 연관된 변증법적인 필연성에서 악에 대한 정서적 차원과 심지어는 우주적 차원을 발견한다(정신과 질료의 우주론적 이원론).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자체가 비난 받을 만한 무지가 도덕적 악의 원인이라는 사상에 보다 밀접한 입장을 취한다. 스토아주의 역시 형이상학적 필연성의 사상을 거부한다. 스토아주의는 악을 선의 대응물로 상대화 시키고 악을 거짓된 세계관의 탓으로 돌리며, 전체의 완전이 곧 개인의 완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함으로 말미암아 악을 일원론적 체계 속으로 가져오려 한다. 그러나 스토아주의는 악에 대한 심리학적 이원론을 피할 수 없다. 필로에게 있어서 악은 태어날 때부터 가능한 것이다. 우리가 선을 선택할지라도 우리는 이생에서 항상 악과 싸움을 하고 있다. 악은 이 세상과 관련되어 있는 실재이다. 그러나 악은 죄와 마찬가지로 종교적 차원을 가지고 있고 따라서 하나님과의 결합으로 인해 극복된다. 플루타르크는 악을 악한 세상의 영혼에 귀속시킴으로 보다 더 형이상학적인 견해를 제시한다. 플로티누스(Plotinus)는 이 불완전이라는 것이 바로 물질의 본성 속에 내재한다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물질의 본성은 결국 모든 것을 파생시킨 최고의 선과 빛에 대립이 되는 위치에 있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여기에서도 역시 악은 빛의 결핍, 즉 지식의 결핍이 되는 것이다. 헤르메스 문헌들은 누스(nou'", 3563)를 가지고 있느냐 가지고 있지 않느냐에 근거한 절대적인 대조를 제시한다. 플로티누스는 유일자(the One)와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질료에서 악의 원리를 찾는다. 영혼은 질료 속에 침잠되어 있기는 하나, 여전히 신적인 것이며 신과의 합일을 향한 충동을 지니고 있다. 영혼의 신과의 합일은 황홀경이나 죽음에서 이루어진다. 악은 하나의 실재다. 그러나 악은 참된 존재가 없는 실재이다. 조로아스터교에서 우리는 대립되는 두 가지 원리들보다는 오히려 두 가지 대조적인 의지(즉 '신성')를 발견한다. 거짓의 영과 진리의 영이 우리 안에서 지배권을 잡기 위해 싸움을 한다. 우리가 전생에 선과 악 사이에서 행한 선택을 이생에서 행한다. 모든 악은 귀신들의 도움을 받고 있는 악령으로부터 온다. 최후의 심판은 선인과 악인을 분리할 것이며, 최후의 싸움에서 악과 악인들은 정복되고 파멸된다. 조로아스터교에는 기독교 종말론과 유사점이 많다는 데서 특별한 흥미를 끈다. 그러나 전자는 신화일 뿐이요, 기독교는 역사인 것이다(W.Grundmann). 2. 70인역본의 용법 형용사 카코스는 70인역본에서 227회 나오며, 히브리어 라아를 번역하며, 존재에 객관적 고통을 주는 '악', '재앙', 사람들이 행하는 '죄악' 등을 나타낸다. 3. 신약성경의 용법 형용사 카코스는 신약성경에서 50회 나오며, 그리 중요한 용어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구원 행위가 신정론의 문제를 대신하여 신약성경의 주요한 요지가 되었으며, 도덕적 개념으로서의 악은 하마르티아(aJmartiva, 266)와 포네로스(ponhrov", 4190)보다 훨씬 덜 중요하기 때문이다. (a) 예수님은 사람의 마음을 악의 자리로 생각한다: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막 7:21, 막 7:23와 병행구 마 15:19). 악은 사람으로부터 온다. 그렇지만 인간의 배후에 있는 포네로스(ponhrov", 4190)가 악의 궁극적인 중심지다. 약 1:13에 의하면 하나님 자신은 모든 악한 것들과 무관하다: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딤전 6:10에서 돈을 사랑하는 것은 악의 뿌리이다. 약 3:8에서 야고보는 혀가 "쉬지 아니하는 악"이다고 한다. 그러므로 벧전 3:10에서는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라고 말한다. (b) 카코스는 한정적으로 또는 인격체의 명사형으로(마 21:41; 마 24:48; 빌 3:2; 딛 1:12; 계 2:2), 그리고 사물에 대한 수식어로(막 7:21; 롬 13:3; 고전 15:33; 골 3:5; 계 16:2) 사용된다. 반면 악 또는 악한 것을 나타낼 때는 언제나 중성 명사로 쓰이는데, 이런 경우에는 '불행', '상태가 나쁜', '고통'(눅 16:25; 행 16:28; 행 28:5), 또는 '악한 행위', '죄'(참조: 마 27:23, 병행구; 행 23:9; 요삼 1:11) 등의 의미로 해석되며, 바울에게 있어서 특히 그러하다(참조: 롬 7:19, 롬 7:21; 롬 12:21; 롬 13:4; 롬 16:19). 아래서 보다 충분히 설명한다(E.Achilles). (c) 신약성경은 우리에게 임할 일시적인 파멸이나 영원한 파멸을 가리켜 타 카카(개역: "고난")를 사용한다. 나사로는 지금 타 카카를 가지고 있으며, 부자는 후에 타 카카를 갖는다(눅 16:25). 멸망과 구원의 문제를 결정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결정은 이생에서는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는다.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의 요점은 기계적인 보상(선에는 악 악에는 선)이 아니라, 신뢰와 순종에로의 하나님의 부름에 응답하는 것이며, 단지 일시적 운명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영원한 운명에 관한 문제이다. (d) 바울은 롬 13:3-롬 13:4에서 이 세상에는 악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하나님께서 국가에게 악을 제어하는 임무를 위탁하셨다는 것을 지적한다: "관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그는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네게 선을 이루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위하여 보응하는 자니라". (e) 바울은 롬 7:19, 롬 7:21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선을 요구하시지만 우리는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선을 행할 수 없다는 사실에 실제적으로 직면한다. 악은 "한 다른 법"처럼 그 안에서 그의 의지를 지배한다고 했다(롬 7:21, 롬 7:23). 그러므로 악이란 인간의 존재와 특성의 한 표현이다. 인간의 악한 성품은 행위로 나타나며,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과 분리시키고 심판 아래 있게 하는 것이다(롬 2:9). 여기서 악은 도덕적인 악 이상이다. 악에는 하나님을 인정치 않는 것과 하나님 앞에서의 자기 주장, 즉 불신앙이 포함되어 있다. 이 점에 있어서 양면성이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내면적으로는 선에 동의하나 우리는 선한 의도를 행동으로 옮길 수 없다. 따라서 인간은 자기가 원하는 선 대신 끊임없이 악을 행하기 때문에 생명이 아닌 죽음으로 나아가며, 자신의 힘으로써 악을 정복하고자 하는 온갖 희망은 좌절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는 이 문제에 대한 해결점을 발견할 수 없고, 오직 십자가와 부활 안에서, 악에 대해 거둔 그리스도의 승리로써만 가능한 것이다. (f) 우리가 이러한 방법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할 때 이전의 불가능하였던 것이 우리가 소유할 수 있는 가능한 것이 된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골 3:5).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새로운 실재는 악한 것에 대해 우리가 미련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너희 순종함이 모든 사람에게 들리는지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를 인하여 기뻐하노니 너희가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하기를 원하노라"(롬 16:19) 이제 우리는 사랑 안에서 선으로 악을 이길 수 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 12:21). 왜냐하면 사랑은 악을 생각지도 않으며(고전 13:5) 행하지도 않기 때문이다(롬 13:10). 악이 친교를 해치는 힘이라면, 그리스도에게서 나온 사랑은 참된 교제를 다시 가능하게 해 준다.(참조: J.H.Thayer; W.Grundmann; E.Achilles).
ejpiqumiva(1939, 에피뒤미아) 충동, 욕망, 갈망.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에피뒤미아(Hdt. 이래)는 에피뒤메오(ejpiqumevw, 1937)에서 유래했으며, '충동, 욕망, 갈망'을 의미한다. 이 단어는 처음에 문학에서 중립적인 의미로 사용되었으나 속에 윤리적으로 나쁜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왜냐하면 다른 세가지 격정 곧 두려움, 쾌락, 슬픔과 마찬가지로 에피뒤미아도 재물에 대한 잘못된 평가와 이생의 악에서 야기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2. 70인역본의 용법. 명사 에피뒤미아는 70인역본에서 약 80회 나오며, 주로 타아와 하마드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이 단어는 (a) 도덕적으로 평범한 욕망(예: 신 12:20 이하, 네가 원하는 만큼), (b) 칭찬할만한 욕망(예: 창 31:30, 인간의 아버지 집에 대한 사모), (c)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악한 욕망(민 11:4; 민 11:34; 신 9:22 등)을 나타낸다. 만일 열번째 계명(출 20:17)이 이런 욕망을 금지한다면, 이는 하나님이 인간에게서 단순히 행위의 순종을 요구하실 뿐 아니라 그들의 말, 생각, 모습, 노력 그리고 소망 가운데서의 순종을 요구하시기 때문이다. 그는 마음 전체에서 우러나온 사랑을 요구하신다(신 6:5). 3. 신약성경의 용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