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19.12.12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쿰 데오 코람 데오 5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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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람 데오 쿰 데오]] >>성경칼럼 12얼 20일 /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디모데후서 4:1)


[[코람 데오, CORAM DEO]]

우리에게 친숙한 말 중에 ‘하나님 앞에서’라는 말이 있다. 

코람 데오(Coram Deo)라는 라틴어로 더 잘 알려진 이 말은 우리의 삶은 사람 앞에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곧 신전(神前) 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기독교적 삶의 양식을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종의 경외심마저 느끼게 하는 엄숙함이 있다. 

신자의 삶의 양식을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이 말은 언제부터인가 분명치 않으나 우리에게 익숙한 단어가 되었다.

흔히 이 말은 칼빈이나 칼빈주의 세계에서 기원한 말로 생각하지만, 사실 이 말을 처음 쓴 것은 루터였다. 

1521년 보름스제국회의 석상에서 자신의 주장과 저술의 취소를 요구받았을 때 그 숱한 두려움과 위협 앞에서도 양심에 따라 자신의 입장을 천명했던 루터에게 있어서 양심이란 ‘하나님 앞에서’의 고백이었다. 인간을 두려워 하지 않았던 양심의 고백, 그것이 그에게 있어서 “하나님 앞에서”였다. 

코람(Coram)이라는 말은 '-- 앞에서' 라는 말인데, 이 말은 ‘--와 함께’ 라는 의미의 쿰(cum)과 ‘입’이란 뜻의 오르(or)의 합성어이다. 달리 말하면 ‘-- 앞에서’ 라는 말은 ‘입과 함께’ 라는 의미가 있다. 

루터에게 있어서 양심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입, 곧 신앙고백이었다. 이런 점에서 코람 데오란 하나님 앞에서 신앙고백적인 삶이다.

“하나님 앞에서”라는 말이 널리 회자되고 있지만 문제는 진실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살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인간의 본성적 한계를 고려한다 할지라도 진실로 우리가 하나님의 면전에서 살고자 하는 자기와의 고된 싸움이 없다면 우리는 감히 ‘하나님 앞에서’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사실 우리 선배들은 코람 데오라는 말 자체를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하나님 앞에서 살고자 하는 비장한 각오가 있었다. 

그러했기에 그들은 양심을 지키기 위해 감옥을 선택하였고, 하나님 면전에서 살기 위해 자기를 포기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자기를 보위하는데 관심이 없었다. 

뭐 자기가 그리 대단하다고 자기를 지키는데 안달한단 말인가? 자기 생각, 자기 의지, 자기 체면, 자기 명예, 이것은 저들의 관심밖에 있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서 그런 것들은 무의미했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는 걸핏하면 ‘하나님 앞에서’라고 말한다. 

그러나 매순간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고자 하는 결단, 자기 부정의 거룩한 고뇌가 없다면, 코람 데오는 결국 자신의 의를 드러내고자 하는 가면이 되고 말 것이다. 

주기도문이 수난 당하고 있다는 루터의 말이 옛 이야기가 아니다. 

의미없이 그저 형식적으로 암송되는 주기도, 자기 고뇌가 없는 입술놀림, 코람 데오도 똑 같은 수난을 당하고 있다. 

코람 데오는 하나님의 어떠하심, 곧 다함없는 열정과 순전, 세밀하고 부지런함(성의진선)이 내주하시는 바, 충만한 하나님 영광의 반사와 반영, 충만함인 신자 개개인에게 드러난 바된,  진실-정직-성실-거룩 등 고결한 기독교적 가치와 순전-거짓없는 삶의 방식을 의미한다. 

이런 선한 것들에 대한 순전한 열망 없는 코람 데오는 자신의 위장된 의를 드러내고자 하는 위선이며 자기 기만일 뿐이다.

루터가 당시 전 구라파를 다스리던 칼 5세 앞에서, 아니 수많은 로마교의 고위 인사들 앞에서도 자신의 운명에 연연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 앞에서” 진실을 드러내고자 자기 생명을 담보로 한 결연한 의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 없는 코람 데오는 위선이다. 

종교적 위선은 어떤 점에서 가장 사악한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말이 아니라 삶이다. 

삶이 뒷받침되지 않는 웅변은 한갓 연극일 뿐이다. 

어떤 점에서 신앙 공동체에서는 ‘하나님 앞에서’라는 말 자체가 필요 없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추구해야 할 당연한 생활양식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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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쿰 데오 CUM DEO : 개인적 느낌 : 

믿는 나는 전존재 모든 영역, 방면에서 JC로 충만함....

영의 방면에서.. 주와 하나인 합한 한 영(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고전 6:17), 

몸의 방면에서..내 몸은 세포-조직-장부 전체가 하나님 임재의 성전(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3:16),  

혼의 방면에서...JC는 실지로 내 영혼의 구주요(he's the Savior of my soul) 즉, 영과 혼의 구주이시며 [내 혼의 태양 예수여...내 혼은 또한 그분을 반사, 반영하는 거울]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시는 내 혼의 구주이시기에 그러하다.....

이제, 주님은 JC께서 이 땅에 오셔서 HS을 따라 하나님 말씀에 적셔지고-점유되고-충만케 되고-변화되고 모든 성분과 성품이 참사람으로 신진대사적 변화를 온전히 이루신 JC의 어떠함의 성장과 성숙에 이르기를 원하신다(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살전5:23)......

JC를 믿음으로써 거듭나고 주와 한영됨을 믿는 나는 .내주하시는 JC 곧 성령하나님과 하나된 존재로서 참되게 힘써 일치의 삶 이루기를, 결국 이 땅을 걸으신 JC의 어떠하심과 행하심의 삶을 살며 온전히 빼어 닮도록 예비하셨음을 말씀하시는 듯....

따라서, 삶터마다, 매순간마다 어떤 형편이나 상황에서든지 

긍휼과 자비, 겸손과 온유, 오래참음과 용서, 용납함 안에서 평강과 사랑의 띠로 그리스도의 몸과 하나됨과 조화를 이루게 하시는 생명과 평강의 HS의 생각을 일심으로 일편단심 따르리라, 

내 입은 살아계셔서 친히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성령의 감동으로 내 마음을 감동하셔서 말하게 하시는, 넣어주신 바로 그 말씀을, 일깨우시는 바 하나님의 심정 그대로 말하기를 배우리라, 

평강가운데 분명-명료하게 이끄시는 지고지선의 주님 신뢰하고 앙망하며 누리며 따라 행하기를 배우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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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의 강령 5솔라 (마틴 루터의 3 솔라 +존 칼빈의 2 솔라) : 솔라 스크립투라(오직 성경, SOLA Scriptura), 솔라 그라티아(오직 은혜 SOLA GRatia) 솔라 피데(오직 믿음, SOLA Fide)  + 솔루스 크리스투스(오직 그리스도, SOLUS Christus) 솔리 데오 글로리아(오직 하나님께 영광, SOLI Deo Gloria)

==종교개혁 통해 정립된 5대 강령(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그리스도, 오직 하나님께 영광==

사역과 삶에서 필요한 모든 것이 말씀에 있음을 믿는가

2017년은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는 해였다. 지금도 전 세계에서 종교개혁의 의미를 기리며 교회의 개혁을 외치며 부르짖고 있다. 

중세 종교개혁의 핵심적인 내용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을 알기 위해서 우리는 당시 종교개혁자들이 외쳤던 5대 강령, 즉 다섯 가지 ‘솔라(Solas)’를 주목해야 한다.

독일의 마틴 루터가 외쳤던 ‘솔라 스크립투라(오직 성경)’,‘솔라 그라티아(오직 은혜)’,‘솔라 피데(오직 믿음)’는 빠른 속도로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그리고 프랑스의 존 칼빈에 의해 ‘솔루스 크리스투스(오직 그리스도)’, ‘솔리 데오 글로리아(오직 하나님께 영광)’가 더하여져서 마침내 ‘종교개혁의 5대 강령’이 되었다. 

이러한 강령들의 내용은 무엇이며, 그것은 지금의 우리와 교회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 함께 살펴본다. 

▶1. 오직 성경(sola Scriptura)= 

마틴 루터의 시대에 ‘솔라 스크립투라’는 중세 교회의 전통, 교회 회의, 교황의 도전에 맞서 성경을 그리스도인의 유일한 최종 권위로 삼고자 하는 생각에서 등장했다. 

성경보다 교부들의 가르침과 교리를 더 중시한 로마 가톨릭에 맞선 종교개혁자들은 오직 성경만을 교회의 진정한 권위로 확립하고자 했다.

물론 귄위의 다른 모습들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수 있다. 

장로, 정부, 자녀에 대한 부모의 권위 같이 어떤 것들은 하나님이 제정하신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모든 것의 최종적인 권위는 여전히 성경이다. 

따라서 다른 권위들이 성경의 가르침에서 벗어난다면 성경에 비추어 판단하고 거부할 수 있어야 한다.

‘솔라 스크립투라’는 다른 강령들의 맨 앞에 자리하여 다른 모든 교리들의 방향성을 제시하고 있다. 

성경은 조금의 오류도 없이 일점일획도 틀리지 않기 때문에 이 성경이면 정말 충분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 가치와 사상으로 성경을 재해석하거나, 개인적인 영적 체험과 인도하심을 강조하며 성경을 무시할 때 사람들은 이 교리를 포기한다.

오늘날 교회가 당면한 성경에 관련한 문제 중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 말씀에 대한 충분함을 인식하고 동의하는 것이다. 

우리의 교회는 사역을 진행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하나님이 성경 안에 주셨다고 정말로 믿는가? 아니면 여전히 인간적인 기술이나 도구로 성경을 보충해야만 한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불행히도, 많은 사람들은 성경이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며 삶과 행동의 유일한 흠 없는 규율이라 말하면서도, 실제적으로는 그것이 오늘날에는 더 이상 효과가 없다거나 성경이 할 수 없는 일을 이루기 위해 다른 것들을 들여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한 생각은 이 교리를 정면으로 부인하고 있는 것이다.

----이신칭의는 기독교의 실질적 원리

▶2. 오직 믿음(sola fide)= 

종교개혁자들은 ‘솔라 피데’를 주장하며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칭의를 얻는다.”라고 말했다. 

신학적으로 이 교리는 ‘이신칭의(以信稱義)’또는 이신득의(以信得義)로 표현된다. 개혁자들은 이신칭의를 기독교의 ‘실질적 원리’라고 불렀다. 

왜냐하면 이 교리야말로 바로 인간이 구원받기 위해 무엇을 이해하고 믿어야 하는지에 대해 실제적으로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칭의는 법률적 용어로 ‘기소된 사람’을 무죄로 선언하는 판사의 행위를 묘사하는 것이다. 

복음 안에서 이것은 그리스도의 사역에 근거한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선언이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흘러나오며 우리가 하는 어떤 행위가 아닌,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우리에게 온다.

마틴 루터는 “칭의 조항이 넘어지면 모든 것이 넘어진다. 이것은 다른 모든 교리들이 흘러나오는 주된 조항이다. 

이것만이 하나님의 교회를 낳고, 키우고, 세우고, 보전하고, 보호한다. 

이것 없이 하나님의 교회는 한 시간도 존재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

이러한 믿음은 개인 안에 실제가 되는 것을 의미하며, 온전히 하나님을 신뢰할 뿐만 아니라 자신을 진리의 지식에 온전히 맡기는 것까지를 포함한다. 

이것은 정확한 지식을 가진 것 이상을 뜻하며, 복음에 동의하거나 개인적으로 감동받는 것 이상을 뜻한다.

----우리의 구원, 인간의 훌륭한 결정 때문이 아니다

▶3. 오직 은혜(sola gratia)= 

‘솔라 그라티아’라는 단어는 구원과 관련해 죄된 인간이 하나님께 아무것도 요구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지은 많은 의도적 죄에 대해 정당한 심판을 행하시는 일 외에 어떤 것도 우리에게 빚지신 것이 없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의 죄에도 불구하고 구원하신다면, 이는 전적으로 그것이 하나님 자신의 기쁨을 위한 것이지 다른 이유가 없다.

사실 영적으로 죽은 우리의 상태 속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를 얻거나 추구하거나 그에게 협력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중생 사역 없이는 누구도 구원받을 수 없다.

종교개혁자들은 ‘오직 은혜’를 고집함으로써 인간적 방법이나 기술, 전략 자체를 통해 믿음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강조했다. 

성령의 초자연적 역사를 통해 나타나는 은혜만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이끌며 죄의 속박으로부터 해방시키고, 죽음에서 영적인 생명으로 끌어올린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인간은 선천적으로 선하며,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구원받을 기회를 줄 책임이 있다고 여긴다. 

또 우리가 구원받는다면 이는 전적으로 우리에게 제시된 예수님을 영접하려는 훌륭한 결정을 최종적으로 우리 자신이 내렸기 때문이라고 가정한다. 

이러한 생각은 은혜의 교리를 심각하게 훼손시키고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이기적인, 인간적 필요를 해결하는 분이 아니다

▶4. 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 

중세 교회도 그리스도에 대해 말했다. 

그리스도에 대해 말하지 않는 교회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중세 교회는 그리스도의 사역에 많은 인간적 공헌을 덧붙임으로써 구원이 온전히 그리스도와 그의 속죄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노골적으로 부인했다. 

그리스도는 구원의 주요 부분이긴 하지만 성자들의 공로에 의해서도 얻어진다고 가르쳤다.

‘솔루스 크리스투스’라는 강령은 이런 오류를 거부하기 위해 생겨났다. 

이 교리는 구원이 오직 역사 가운데 실제 존재하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단번에 이루어졌음을 확증했다. 

그의 죄 없는 삶과 대속만이 우리가 의롭다 칭함을 받는 충분한 근거가 되며, 이것을 인정하지 않거나 부인하는 다른 복음은 아무도 구원할 수 없는 가짜 복음이다. 

로마 가톨릭교회가 이런 거짓 복음을 가르치고 있었기 때문에 종교개혁자들은 그들을 거짓 교회 혹은 배교의 교회로 선언했다.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말하면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모든 것의 중심에 두기를 꺼려한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인간의 이기적인 욕구와 필요를 해결해 주는 분으로 전락시킨다. 

우리 시대에 설파되고 있는 바, 복음의 내용들을 자세히 들여다 보자면 자존감이나 긍정적인 정서적 태도, 세상적인 성공과 많은 관계가 있다. 

십자가의 피, 곧 죄와 은혜, 구속 등 능력 있는 복음의 핵심내용 대신 치유 중심의 세계관이 그 자리를 대체했으며,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특정한 정치철학, 심리학, 사회학 같은 현대 우상들과 거의 동일시하고 있다.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가 더 이상 중심이 될 수 없을 정도로 현대 복음주의는 대중의 변덕과 감상주의에 의해서만 진행되는 운동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우리의 존재 이유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

▶5. 오직 하나님께 영광(Soli Deo gloria)= 

앞에서 말한 각각의 ‘솔라’들은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으로 끝나는 로마서 11장 36절의 마지막 논지인 ‘솔리 데오 글로리아’라는 마지막이자 궁극적인 솔라로 통한다. 

구원 계획은 하나님이 고안하셨고,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을 통해 성취되었으며, 그것의 궁극적인 목표는 하나님의 영광이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구원받는 것이 우리의 생각이거나, 혹 우리에게 그런 자격이 있다거나, 우리의 힘으로 이루었다거나, 우리를 영화롭게 하기 위한 것이라는 교만한 가정을 완전히 버려야 한다.

오늘날 많은 교회가 종교개혁적인 복음을 버린 데는 문화적 집착, 소비자 심리, 불신자들의 호응을 얻기 위해 세상적인 용어로 복음을 개조하는 것 등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을 잊었고, 실제로 그분의 영광을 위해 살지 않는 데 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 시대에 또 하나의 종교개혁을 바라며 기도하고 있지만 그것이 생겨날 유일한 길은 참된 신자들이 하나님을 재발견하고 그의 영광을 추구할 때뿐이다. 

우리의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우리가 그것을 알고 실제로 행할 때, 진정한 부흥과 참된 개혁이 찾아올 것이다.[GNP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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