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0.09.10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시72.Q의로운말씀따라,HS의지혜총명분별로다스리는,의와평강구현자/실로-샬롬-참솔로몬-메시야를바라는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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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역개정]제72장 솔로몬의 시....[마음에가득한257].놀랍다주님의큰은혜251.예수십자가에흘린피로써259


[[선택을 앞둔 자의 지혜와 총명, 서로 배우기...맹자]]....가져도 좋고 가지지 않아도 좋을때는 가지지 않음(청렴)..줘도 좋고 주지 않아도 좋을 때는 주지말라(은혜의 깊이)...죽어도 좋고 죽지 않아도 좋을 때는 죽지 말라(용기)..한아기가우리에게났고.주여호와의신이


.....영광을받으신만유의주여331......MyPeaceIgiveUntoYou.내맘속에있는 참된이평화는.


1.  하나님이여 주의 판단력을 왕에게 주시고 주의 공의를 왕에게 주소서..(참된 공의와 공법의 기준되는 바, Q의 의의 말씀따라 인도하시는 HS의 지혜/총명-분별력)(거룩하신 Q의말씀-성품 알며 Q을 사랑하여 섬기며, 참되고 진실하게 경외함/하나됨..성결과 의로 섬기는 자, 모든 상황마다 깊고 세밀히 살펴 통찰하는 Q으로부터 Q의 원하시는 바를 알고 시행하는 분별력 주심,)

2.  그가 주의 백성을 공의로 재판하며 주의 가난한 자를 정의로 재판하리니..(Q의말씀-성품따라 행하시는 Q앞에서 올바름=Q의 성의진선)

3.  의로 말미암아 산들이 백성에게 평강을 주며 작은 산들도 그리하리로다...(의의 공효는 평안과 안전! 산과 작은산은 군왕과 관원,모든 위정자/공직자)

4.  그가 가난한 백성의 억울함을 풀어 주며 궁핍한 자의 자손을 구원하며 압박하는 자를 꺾으리로다..(구주Q의 행사하심 그대로 따름),

5.  그들이 해가 있을 동안에도 주를 두려워하며 달이 있을 동안에도 대대로 그리하리로다

6.  그는 벤 풀 위에 내리는 비 같이, 땅을 적시는 소낙비 같이 내리리니...(죄벌로 인해 끊겨 죽은것 같았던 만유위에 생명과 은혜/은총의 HS 이슬/소낙비 같이 부으사 생기 공급),

7.  그의 날에 의인이 흥왕하여 평강의 풍성함이 달이 다할 때까지 이르리로다....(의-평강-참된 지고지선의 진복:: 지상의 Q나라 번성/번영)

8.  그가 바다에서부터 바다까지와 강에서부터 땅 끝까지 다스리리니

9.  광야에 사는 자는 그 앞에 굽히며 그의 원수들은 티끌을 핥을 것이며

10.  다시스와 섬의 왕들이 조공을 바치며 스바와 시바 왕들이 예물을 드리리로다

11.  모든 왕이 그의 앞에 부복하며 모든 민족이 다 그를 섬기리로다

12.  그는 궁핍한 자가 부르짖을 때에 건지며 도움이 없는 가난한 자도 건지며

13.  그는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불쌍히 여기며 궁핍한 자의 생명을 구원하며

14.  그들의 생명을 압박과 강포에서 구원하리니 그들의 피가 그의 눈 앞에서 존귀히 여김을 받으리로다

15.  그들이 생존하여 스바의 금을 그에게 드리며 사람들이 그를 위하여 항상 기도하고 종일 찬송하리로다...(고난 거쳐 합당한 회개 통해 주를 빼어닮아 이루는 거룩함의 영광과 존귀)

16.  산 꼭대기의 땅에도(황무한 곳이라도!!) 곡식이 풍성하고 그것의 열매가 레바논 같이 흔들리며 성에 있는 자가 땅의 풀 같이 왕성하리로다

17.  그의 이름이 영구함이여 그의 이름이 해와 같이 장구하리로다 사람들이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니 모든 민족이 다 그를 복되다 하리로다...(JC이름으로 누리는 지고지선의 진복Q)

18.  홀로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찬송하며

19.  그 영화로운 이름을 영원히 찬송할지어다 온 땅에 그의 영광이 충만할지어다 아멘 아멘 이새의 아들 다윗의 기도가 끝나니라...(말씀하신 그대로 친히 행하시며 이루시는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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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V]제72장

1.  Psalm 72 Of Solomon. Endow the king with your justice, O God, the royal son with your righteousness.

2.  He will judge your people in righteousness, your afflicted ones with justice.

3.  The mountains will bring prosperity to the people, the hills the fruit of righteousness.

4.  He will defend the afflicted among the people and save the children of the needy; he will crush the oppressor.

5.  He will endure as long as the sun, as long as the moon, through all generations.

6.  He will be like rain falling on a mown field, like showers watering the earth.

7.  In his days the righteous will flourish; prosperity will abound till the moon is no more.

8.  He will rule from sea to sea and from the River to the ends of the earth.

9.  The desert tribes will bow before him and his enemies will lick the dust.

10.  The kings of Tarshish and of distant shores will bring tribute to him; the kings of Sheba and Seba will present him gifts.

11.  All kings will bow down to him and all nations will serve him.

12.  For he will deliver the needy who cry out, the afflicted who have no one to help.

13.  He will take pity on the weak and the needy and save the needy from death.

14.  He will rescue them from oppression and violence, for precious is their blood in his sight.

15.  Long may he live! May gold from Sheba be given him. May people ever pray for him and bless him all day long.

16.  Let grain abound throughout the land; on the tops of the hills may it sway. Let its fruit flourish like Lebanon; let it thrive like the grass of the field.

17.  May his name endure forever; may it continue as long as the sun. All nations will be blessed through him, and they will call him blessed.

18.  Praise be to the LORD God, the God of Israel, who alone does marvelous deeds.

19.  Praise be to his glorious name forever; may the whole earth be filled with his glory. Amen and Amen.

20.  This concludes the prayers of David son of Jes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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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eign of the Righteous King.

A Psalm of Solomon.72 

1 Give the king [knowledge of] Your judgments, O God, And [the spirit of] Your righteousness to the king’s son [to guide all his ways].

2 May he judge Your people with righteousness, And Your afflicted with justice.

3 The mountains will bring peace and prosperity to the people, And the hills, in [the establishment of] righteousness.

4 May he bring justice to the poor among the people, Save the children of the needy And crush the oppressor,

5 Let them fear You [with awe-inspired reverence and worship You with obedience] while the sun endures, And as long as the moon [reflects light], throughout all generations.

6 May he come down like rain on the mown grass, Like showers that water the earth.

7 In his days may the righteous flourish, And peace abound until the moon is no more.

8 May he also rule from sea to sea And from the River [Euphrates] to the ends of the earth.

9 The nomads of the desert will bow before him, And his enemies will [a]lick the dust.

10 The kings of Tarshish and of the islands will bring offerings; The kings of Sheba and Seba will offer gifts.

11 Yes, all kings will bow down before him, All nations will serve him.

12 For he will rescue the needy when he cries for help, The afflicted and abused also, and him who has no helper.

13 He will have compassion on the poor and needy, And he will save the lives of the needy.

14 He will redeem their life from oppression and fraud and violence, And their blood will be precious in His sight.

15 So may he live, and may the gold of Sheba be given to him; And let them pray for him continually; Let them bless and praise him all day long.

16 There will be an abundance of grain in the soil on the top of the [b]mountains; Its fruit will wave like [the cedars of] Lebanon, And those of the city will flourish like grass of the earth.

17 May his name endure forever; May his name continue as long as the sun; And let men bless themselves by him; Let all nations call him blessed.

18 Blessed be the Lord God, the God of Israel, Who alone does wonderful things.

19 Blessed be His glorious name forever; And may the whole earth be filled with His glory. Amen and Amen.

20 The prayers of David son of Jesse are end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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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의 시편은 다윗이 늙었을 때에 지은 것이며, 이 역시 그런 것같이 보인다. 왜냐하면 솔로몬은 이제 왕관을 향해 당당한 모습으로 서 있기 때문이다. 

앞의 시편은 다윗 자신을 위한 그의 기도였고, 이는 그의 아들과 후계자를 위한 기도다. 

그리고 이 두 가지로써, 이새의 아들 다윗의 기도는─이 시편 끝부분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처럼─ 끝나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동안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 다음에 올 자들이─우리가 하늘에서 하나님을 찬양할 때─ 땅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리라는 훌륭한 소망을 지닐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여기에는 “솔로몬의 시”라는 표제가 붙어 있다. 

아마도 다윗은 자기가 죽기 조금 전에,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 자기 후계자를 세우고 솔로몬이 왕임을 선포하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왕상 1:30 이하), 누구에게 이 시를 불러주었던가, 아니면 성령의 지시로 그가 받아썼을 것이다. 

솔로몬의 이름이 여기에 사용되어 있을지라도, 그리스도의 나라가 솔로몬 왕국의 모형과 상징으로서 예언되어 있다. 

다윗은 그 거룩한 신탁의 내용, 즉 “육신을 따라 그의 태의 열매에서 그가 그리스도를 그 위에 앉게 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행 2:30). 

그는 여기에서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으며, 그의 나라의 영광에 대한 전망을 하면서 죽어가고 있다. 

그러나 자기의 집이 하나님께 대해 자기가 바라던 대로 그처럼 위대하고 훌륭하지는 않으리라 함을 예견했다. 

다윗은 영에 의해 다음과 같이 한다.

1. 그의 후계자를 위한 짧은 기도로써 시작하고 있다(1).

2. 그는 곧 그의 통치의 영광에 대한 긴 예언으로 들어가고 있다(2-17).

3. 그리고 그는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대한 찬양으로써 끝맺고 있다(18-20).

이 시편을 노래하는 가운데 우리는 그리스도를 주목하면서 그를 왕으로서 찬양해야 하며, 그의 신하로서 우리의 행복을 즐거워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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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을 위한 기도(시 72:1)

이 구절은 왕, 곧 왕의 아들을 위한 기도다.

Ⅰ. 우리는 이를 솔로몬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하나님이여, 주의 판단력과 주의 의를 그에게 주소서.” 즉, “그를 사람, 곧 훌륭한 왕으로 만드소서. 그를 훌륭한 사람, 훌륭한 왕으로 만드소서.”

1. 이것은 족장들이 그 자손들에게 유언으로 남긴 말과 같이, 한 아버지가 그 아들을 위해 한 기도, 죽으면서 한 축복이다. 

우리가 우리 자손을 위해 하나님께 청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그들의 의무를 알고 행할 수 있는 지혜와 은총을 주십사 하는 바람이다. 그것이 금보다 낫다. 

솔로몬은 아버지가 그를 위해 기도했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그에게 재물과 존귀가 아니라 지혜와 총명을 주십사 하고, 그 자신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배웠다.

자기 아들이 후계자가 된다는 사실, 또 그 후계자는 현명하고 의로운 자라는 사실은 다윗에게 위안을 주었다. 

다윗은 그에게 훌륭한 교훈을 주었고(잠 4:3), “훌륭한 판단력과 의”를 가르쳤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에게 판단력을 주시지 않았다면, 아무 소용도 없었을 것이다.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은혜를 줄 수 없으나, 기도로써 그들을 은혜의 하나님께 데리고 갈 수 있다. 

하나님을 찾는 것은 헛되지 않다. 그들의 기도는 응답되거나, 그들의 가슴에 위로를 가져다줄 것이기 때문이다.

2. 이것은 한 왕이 자기 후계자를 위해 드린 기도일 수도 있다. 

다윗은 그의 임기 동안 판단력과 의를 수행했다. 그리고 이제 그는 그의 아들도 또한 그렇게 행할 수 있기를 기도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 뒤에 오는 자들이 우리가 행했던 것보다 더욱 많이 그리고 더 훌륭히 하나님을 섬길 수 있기를 원하고 노력하면서, 우리의 다음 세대를 위해 이러한 관심을 가져야 한다. 

자기가 죽었을 때 세상과 교회가 어떻게 될 것인가 염려하지 않는 자들은 하나님이나 사람에 대해 거의 사랑을 갖고 있지 않으며, 매우 편협하고 이기적인 마음의 소유자들이다.

3. 이것은 왕을 위한 신하들의 기도다. 

다윗은 그 백성들이 노래하면서 솔로몬을 위해 기도하는 데에 사용할 수 있도록 이 시편을 지은 것으로 보인다. 

조용하고 평온한 삶을 살려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왕들과 모든 권세자들에게 그의 공의와 법도를 주지시키기를 기도해야 한다.

Ⅱ. 우리는 이것을 그리스도께 적용시킬 수 있다. 

그러나 우리를 위해 중재하신 그에게도 우리의 중재함이 필요하다는 것은 아니다.

1. 그것은 교회의 왕으로서, “거룩한 산 시온”의 왕으로서의 메시야를 보내달라는 구약시대 교회의 기도다. 

그에 대해 왕 중 왕께서 “너는 내 아들이라”고 말씀하셨다(2:6-7). “모든 심판을 맡으실 자를 속히 보내소서.”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재림, 즉 그가 “의로 세상을 심판”하실 때를 이처럼 재촉해야 한다.

2. 그것은 모든 신자들이 주 예수께서 그 아버지로부터 받으신 권세로 인해 얻는 속죄에 대한 표현이다. 

“그로 하여금 그의 것인 모든 사람에게 베풀어질 거룩한 은혜의 위대한 보관자가 되어 우리에게 그것을 주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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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아 왕국(시 72:2-17)

Ⅰ. 이는 솔로몬의 통치라는 그림자를 통해서 그리스도 왕국의 번영과 영존을 예언한 것이다.

1. 그것은 그 기도를 강력히 뒷받침해 주는 탄원으로서 제시되어 있다. 

“주여, 주의 판단력과 의를 저에게 주소서. 그러면 저가 주의 백성을 의로 판단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그의 존귀에 이바지할 것입니다(2절). 그에게 주의 은혜를 주소서. 그러면 그에게 맡겨진 주의 백성은 그 혜택을 얻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사랑하사 당신을 세워 저희 왕을 삼아 공과 의를 행하게 하셨도다”(대하 9:8).

우리는 교회의 공동 유익에 속한다고 생각할 수 있는 그 은혜를 위해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과 씨름할 수 있다.

2. 그 기도에 대한 평화의 응답으로서 제시되어 있다. 

믿음의 기도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의 약속에 응답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긍휼의 약속으로써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의 기도에 응답하신다. 

이 예언이 메시야 왕국에 귀착되어야 함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 속에는 솔로몬의 통치에는 적용될 수 없는 많은 구절들이 있기 때문이다. 

사실상 초기의 솔로몬 행정에는 많은 의와 화평이 있었다. 그러나 그의 통치 말엽 즈음에는 재난과 불의가 많이 있었다.

여기에서 언급되고 있는 왕국은 해처럼 오래 지속되기로 되어 있으나, 솔로몬 왕국은 곧 꺼져버렸다. 

그러므로 유대인 해설자들도 이를 메시야 왕국으로 보고 있다. 

여기에 있는 크고 귀한 많은 약속들을 살펴보자. 그것들은 오직 그리스도의 나라 안에서만 완전히 이루어지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일부는 솔로몬의 통치 속에서 어느 정도 이루어졌다.

Ⅱ. 그것은 “의로운 통치”가 된다.

“저가 주의 백성을 의로 판단하리이다”(사 11:4와 비교). 

그리스도 나라의 모든 법은 영원한 공의의 법도와 일치한다. 

가혹하게 침해당한 법을 구제하기 위해 그것이 세운 재판소는 진정한 공의의 법정이 된다. 

그리고 그가 마지막 심판 때에 내릴 언도에는 결코 예외가 없을 것이다. 

그의 나라의 평강은 의에 의해 지탱될 것이다(3절). 

“공의가 바닷물처럼 흐를” 때만이 강물 같은 평강이 있기 때문이다. 그때에 세상은 공의로 심판될 것이다(행 17:31).

Ⅲ. 그것은 평화로운 통치가 될 것이다. 

“산들이 백성에게 평강을 주며, 작은 산들도 그리하리로다”(3절). 

즉, 하몬드 박사의 말대로 솔로몬 왕국의 최고 법원과 최하 법원이 그렇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거기에는 곧 평강이 있을 것이다(7절). 

솔로몬의 이름은 “평강”을 뜻하고 있다. 그의 통치도 그러했다. 

그때 이스라엘은 앞의 왕대에서 얻은 승리를 즐겼고, 그 왕대의 평정과 안온함을 보존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의 평강은 특별한 면에서 그리스도 나라의 영광이다. 

번영하는 한 그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그들 자신에게, 그리고 서로를 화목하게 만들며, 모든 적대감을 죽이기 때문이다. 즉, 그는 우리의 평강이시다.

Ⅳ. 가난하고 궁핍한 자들은 특별히 이 정부의 보호를 받을 것이다. 

“저가 가난한 자를 판단하리라”(2절). 

선한 양심을 지킴으로써 가난하게 된 자들은 하나님의 가난한 자들이며, 그들은 특별한 배려로써 부양될 것이다. 

그들은 심판으로써 그들의 사정을 특별히 인지받고, 그들이 해를 당함을 특별히 보상받게 됨으로써 판단받을 것이다. 

“백성의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의 자손”을 그가 틀림없이 판단하실 뿐만 아니라, 구원하실 것이다(4절). 

그리스도께서 피해를 당한 가난한 자의 편이 되시어, 틀림없이 그의 호소를 들어주시리라 함을 시사하면서, 이러한 사실이 다시 강조되어 있다(12-13절). 

“저는” 압제하는 자의 수중에 있는 “궁핍한 자”와 “가난한 자를 건지실 것이다.” 

그런 자들은 돕는 자가 없다. 그런데 그런 자들을 돕는 것은 그의 영예다. 

그리고 그들이 그에게 부르짖을 때, 그가 그들의 기도에 응답하시어 돕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기도로써 “주를 의지한다”(10:14). 

“저는” 그의 긍휼에 매달리는 “궁핍한 자를 긍휼히 여기며”, 그들에게 가혹하거나 냉정하게 대하시지는 않는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그리스도는 가난한 사람들의 왕이시다.

Ⅴ. 교만한 압제자들은 문책당할 것이다. 

“저가 그들을 꺾으리로다”(4절). 

해치는 그들의 힘을 제거하시고, 그들이 행한 죄악에 대해 그들을 벌하실 것이다. 

“패배한 자를 긍휼히 여기고, 교만한 자를 꺾는 것”─이는 훌륭한 왕의 임무다. 

마귀는 큰 압제자다. 그리스도는 그를 꺾으실 것이고, 그의 나라를 멸망시키실 것이다. 

그가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사 11:4), 그의 백성의 영혼을 “압박과 공포에서” 건지실 것이다(14절). 

그는 압박으로써 그들을 유혹하는 옛 뱀으로서의, 그리고 광포함으로써 그들을 위협하고 삼키는 성난 사자로서의 사단의 권세에서 그들을 구원하실 것이다. 

“저희 피가 그 목전에 매우 귀하므로” 한 방울의 피도 기억됨이 없이 사단의 압박이나 광포 또는 그의 도구에 의해 흘려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는 왕이시다. 비록 그가 때로 그의 신하들을 불러 그를 위해 피에 대항하도록 명하시지만, 그는 그들의 피를 낭비하시지 않는다. 

또한 그와 그들의 영광에 가치있다고 생각되지 않는 한, 그리고 그들 원수의 죄악이 가득 차도록까지 기다리시는 일이 아닌 한 결코 그들로 하여금 피를 흘리게 하시지 않는다.

Ⅵ. 신앙은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에서 번성할 것이다(5절). 

“저희가 해가 있을 동안에 주를 두려워하며, 달이 있을 동안에 그러하리로다.” 

솔로몬은 실제로 성전을 지었고, 그의 통치 아래서 얼마 동안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과 경배가 있었으나,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는, 그리스도의 나라,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고 그를 존속시키는 그 모든 신하들을 가리키는 것이라야 한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자연스런 신앙을 지지하고 발전시키는 직접적인 성향을 갖고 있고, 그에 강력한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세울 것이며, 지속시킬 것이다. 

그러므로 이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를 경배하라”(계 14:7)고 가르치는 영원한 복음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통치가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촉진시키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것은 사람들 사이에 공의와 자선을 촉진시킨다(7절). 

“저의 날에 의인이 흥왕하리라.” 

의가 실행될 것이며, 의를 행하는 자들은 발탁될 것이다. 의가 풍성해 신용을 얻을 것이고, 명령해 권세를 얻을 것이다.

마음속에 새겨진 그리스도의 법은 사람으로 하여금 정직하고 의로워지고 싶도록, 그리고 그들이 마땅히 해야 할 것을 하고 싶도록 만든다. 

그것은 또한 사람들로 하여금 사랑 속에서 살고 싶도록 만든다. 그러므로 그것은 풍성한 평강을 내며, 칼을 쳐서 보습이 되게 한다. 

거룩함과 사랑은 그리스도의 나라에서 영원하며, 결코 쇠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곳의 신하들은 “해가 있을 동안에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달이 있을 동안에 그리할” 것이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신앙고백을 통해 이 세상에 발붙이고 있기 때문에, 마지막 때까지 그 터전을 보존할 것이다. 

또 권능으로써 사람들의 심령 속에 발붙이고 있기 때문에, 죽음에 의해 해와 달과 별들이 어두워질 때까지(이것이 그 실제적 의미다) 인간의 심령 속에서 계속 있을 것이다. 세상의 모든 변화와 생명의 모든 변화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나라는 스스로 지탱해 나갈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이 해와 달만큼이나 오래 계속된다면, 풍성한 평강이 있을 것이다. 

교회의 평강, 영혼의 평강은 그 순수함과 경건함에 병행되며, 이것이 지속되는 만큼 지속될 것이다.

Ⅶ. 그리스도의 통치는 그의 충성되고 사랑하는 모든 신하들에게 매우 편한 것이다(6절). 

“저는” 그 성령의 은혜와 위로에 의해 “벤 풀에 내리는 비 같으리라.” 

완전히 잘라진 것이 아니라, 비록 베어졌을지라도 다시 돋아날 수 있도록 남겨진 풀 위에 내리는 비 같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딱딱한 땅을 부드럽게 하고, 메마른 땅을 촉촉하게 해 푸르고 기름지게 만드는 비같이(사 55:10) 방울져 떨어진다. 

우리의 마음으로 “비를 흡수하도록”(히 6:7) 하자.

Ⅷ. 그리스도의 나라는 아주 멀리까지 확장된다. 다음과 같은 것을 깊이 생각해 보자.

1. 그의 영역의 범위(3절). 

“저가 바다에서 바다까지(남해에서 북해까지, 또는 홍해에서 지중해까지)와 강에서부터 구스까지 또는 나일에서부터 땅 끝까지 다스리리라.” 

솔로몬의 지배권은 그 약속대로(창 15:18) 매우 넓었다(왕상 4:21). 

그러나 이 잘 알려진 표현에 의해 그것이 주 예수의 세계적인 주권을 시사할 수 있게 하기 위해, 바다나 강의 이름이 구체적으로 나와 있지 않다. 

그의 복음은 모든 민족에게 전파되어 왔고, 앞으로도 전파될 것이다(마 24:14). 

그리고 이방인들이 가득 들어왔을 때, “세상 나라가 그리스도의 나라가 될” 것이다(계 11:15). 그의 영역은 다음과 같은 곳에까지 미칠 것이다.

(1) 그를 모르는 자들에게까지 미칠 것이다. 

“광야에 거하는, 모든 도로에서 벗어나 거의 소식을 들을 수 없는 곳에 거하는 자도” 구속자의 기쁜 소식과 그에 의한 속량을 들을 것이며, “저의 앞에 굽히며” 믿고, 영접하며 경배하고, 그리고 그의 멍에를 멜 것이다. 

주 예수 앞에서 우리 모두 허리를 굽혀야 한다. 아니면 꺾이게 된다. 우리는 꺾이면 멸망한다─우리가 굽히면, 우리는 분명 영원하게 될 것이다.

(2) 그에게 원수 되었던, 그리고 그에 대항해 싸웠던 자들에게까지 미칠 것이다. 

“원수들은 티끌을 핥을 것이다.” 

그들은 패해 티끌 속에 묻힐 것이며, 화가 나서 땅을 물어뜯을 것이다. 

그리고 매우 배가 고파서 씹는 것이므로, 티끌, 곧 뱀의 먹이(창 3:15)를 즐길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뱀의 후손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그의 원수들이 꺾여 비천하게 될 때, 그가 그들을 지배하지 않으시겠는가?

2. 그의 속국들의 권위. 

그는 광야에 거하는 자들, 즉 농군과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궁에 거하는 자들도 다스리신다(10절).

“다시스”와 이스라엘에서 매우 멀리 떨어져 있는 “이방인들의 섬”에 있는(창 10:5) “섬의 왕들이” 자기들의 최고 군주인 그에게 “예물을 드리리로다.” 

그들은 그에 의해, 그리고 그 아래에서 자기들의 왕관과 모든 왕실 소유지를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의 은총을 구할 것이며, 그의 지혜를 들을 수 있도록 그에게 관심을 가질 것이다. 

이것은 글자 그대로 솔로몬에게서 이루어졌다(왜냐하면 “천하 열왕이 솔로몬의 지혜를 구해 각기 예물을 가지고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마도 그 나라의 제일인자에 속했던 동방박사가 그리스도께 경배하러 와서 “예물을 드렸을” 때(마 2:11), 

이 예언은 그리스도에게서도 또한 이루어졌다. 그들은 그에게 그들 자신을 예물로 드릴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께 드릴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예물이며, 그것 없이는 어떤 예물로도 그를 기쁘시게 할 수 없다(롬 12:1). 

그들은 “선물을 드릴 것이다.” 

기도와 찬미의 영적 제물을 자기들의 하나님으로서의 그리스도께, 또 모든 선물을 거룩하게 하는 그들의 제단으로서의 그리스도 위에 드릴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께로 전향하는 것은 “이방인의 봉헌물”, 곧 “제물”이라 불리고 있다(롬 15:16).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헌신은 사실이 그러하다(히 13:15-16). 

그렇다. 모든 왕들은 조만간 그에 대한 그들의 의무를 행하기 위해, 또는 그로부터 저주를 받기 위해 “그 앞에 부복할” 것이다(11절). 

그들은 그의 자발적인 신하로서, 또는 그에게 잡힌 포로로서, 그의 긍휼을 구하는 탄원자로서, 또는 그의 심판을 받을 예정자로서 그 앞에 부복할 것이다. 

그리고 왕들이 복종할 때 백성들도 물론 올 것이다. “열방이 다 그를 섬기리로다”라고 했다. 모두가 그의 봉사에 초대받을 것이다. 

그리고 모든 민족들 중에서 사람들이 거기에 올 것이며, 각처에서 “그의 이름을 위하여 분향하며 깨끗한 제물을 드릴 것이다”(말 1:11; 계 17:9).

Ⅸ. 그는 그의 모든 신하들에게 존경받고 사랑받을 것이다(15절). 

“저가 생존하리로다”라고 했다. 

그의 신하들은 그의 생명을 기원할 것이며(“왕이여, 영원히 생존하소서”), 거기에는 훌륭한 이유가 있다. 

왜냐하면, 그는 “내가 사노니, 너희도 또한 살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항상 살아서 간구하신다고 하는 증거를 얻었다”(히 7:8, 25). 그는 사실 것이다. 형통함 속에서 사실 것이다.

1. 그리고 예물이 그에게 바쳐질 것이다. 

그는 어떤 선물이나 봉사가 필요치 않기 때문에, 그것들 없이도 사실 수 있을지라도, 저희가 그에게 “스바의 금을 드릴 것이다.” 

금, 가장 훌륭한 금속, 아마도 가장 훌륭한 금이었던 스바의 금을 드릴 것이다. 왜냐하면 가장 훌륭한 그는 가장 훌륭한 것으로 섬겨져야 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재물을 풍성히 지닌 자들, 금을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자들은 그것으로써 그를 섬겨야 하며, 그것으로써 선을 행해야 한다. 

“너의 물질로 주를 영화롭게 하라.”

2. 기도가 그를 위해 올려질 것이며, 끊임없이 이어질 것이다. 

백성들은 솔로몬을 위해 기도했고, 그것은 그와 그의 통치가 자기들에게 매우 큰 축복이 되도록 만드는 것을 도왔다. 

흔히 행해지는 것처럼 왕들과 모든 권세자에게 듣기 좋은 말로써가 아니라, 공공의 번영에 관심을 가짐으로써,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중재하고 감사드리는 것은 신하의 의무다. 그러나 이것이 그리스도께 어떻게 적용되는가? 

그는 우리의 기도가 필요 없으며, 우리의 기도에 의해 어떤 이득을 얻지도 않으신다. 

그러나 구약시대의 성도들은 그의 강림을 위해 기도했다. 그것을 위해 꾸준히 기도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를 “오실 자”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 그가 오셨으니, 우리는 복음의 성공과 그의 나라의 발전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그는 이에 대해 그를 위해(다윗 자손의 호산나와 그의 다스리심의 번영을 위해) 기도하도록 요청하신다. 그리고 우리는 그의 재림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본문은 “기도가 그로 말미암아”, 또는 그를 위해 “이루어질 것이다”로 해석될 수 있다. 

우리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은 무엇이나 그의 이름에, 그리고 그의 중보에 의존해 있다.

3. 찬미가 그에 대해 나올 것이며, 그의 지혜와 의와 선하심에 대해 높은 찬사가 주어질 것이다. 

“저희가 저를 종일 찬송하리로다.” 

그의 이름으로 매일 기도함으로써 우리는 그를 영화롭게 한다. 신하들은 그들에게 축복인 그 나라를 찬미해야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그보다 더욱 예수 그리스도를 찬송해야 한다. 그를 날마다 찬송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든 것을 그에게 은혜입고 있으며, 그에게 가장 큰 의무를 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Ⅹ. 그의 통치 아래에서 양식과 입, 즉 그 나라에서 나오는 땅의 열매와 성읍에 거하는 백성들이 놀랍게 불어날 것이다(16절).

1. 그 나라는 부유해질 것이다. 

거의 수확을 기대할 수 없는 산꼭대기의 땅에 화곡 한 줌만 심어보라. 그러면 “그 열매가 레바논같이 흔들리리라.” 

그것은 나무처럼 자랄 것이며, 레바논의 백향목처럼 매우 굵고 크고 강할 것이다. 산꼭대기에서도 땅은 한 줌의 씨로 열매를 낼 것이다.

이 말은 지붕 위의 잡초가 손에 쥘 수 없을 만큼 많다고 일컬어지고 있는 것처럼 매우 풍성함에 대한 표현이다(4:7). 

이것은 메시야의 날에 복음의 후손이 놀라운 소산을 내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산과 이방나라의 불모지에 뿌려진 한 줌의 씨가 놀라운 수확, 즉 레바논처럼 흔들리는 열매를 내어 그리스도께로 거둬들여질 것이다. 

밭은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다(요 4:35; 마 9:37). 겨자씨 한 알이 큰 나무로 자랄 것이다.

2. 마을은 점점 사람 수가 불어날 것이다. 

“성에 있는 자가 땅의 풀같이”, 수효와 융성함에서 “왕성하리로다.” 

복음 교회, 곧 사람들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성읍은 모든 번영의 표적을 가질 것이며,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 모일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자들은 그 속에서 행복할 것이다.

ⅩⅠ. 그의 통치는 영존하며, 그의 영예가 되고, 그의 신하들의 행복이 될 것이다. 

주 예수는 영원히 군림하신다. 이것은 그에 관한 것으로만 해석되어야 하며, 결코 솔로몬에 관한 것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대대로”(5절), 그리고 “해와 달이 다할 때까지”(7절)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자는 오직 그리스도이시다.

1. 왕의 존귀는 불멸하며, 결코 더럽혀지지 않을 것이다(17절). 

“그 이름이” 그 광채를 가리고 그 진로를 끊어버리려는 흑암 권세의 모든 사악한 시도와 노력에도 불구하고, “영구함이여!” 보존될 것이다. 불멸할 것이다. 

널리 퍼질 것이다. 세상 왕들의 이름이 그 형통함 중에 지속되듯이, 그리스도의 이름도 그 자신 안에 지속된다. 

“그의 이름은 후손에게 전해지리라.” 

세상이 존재하는 한, 만방이 그를 축복되다 일컬을 것이며, 그로 인해 하나님을 축복할 것이고, 그에 대해 끊임없이 찬미하며, 그 안에 있는 자기 자신을 행복하게 여길 것이다. 

마지막 때까지, 그리고 영원까지 그의 이름은 찬양될 것이며, 사용될 것이다. 모든 혀가 그것을 고백하고, 모든 무릎이 그 앞에 부복할 것이다.

2. 백성들의 행복도 역시 보편적이다. 

완전하며 영원하다. “사람이 그로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진실로 그리고 영원히 복을 받으리라. 명백하게, 메시야로 인하여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받으리라”는, 열조에게 한 그 약속을 언급하고 있다(창 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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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와 기도(시 72:18-19)

메시아와 그의 나라에 의해 앞에 나왔던 이 유명한 예언이, 여기에서처럼 진실된 감사와 찬미로써 끝맺어짐은 합당하다.

Ⅰ. 시편 저자는 여기에서 예언과 약속에 대한 감사를 드리고 있다(18-19절).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우리가 신뢰하기에 확실하고, 매우 만족스러우므로, 우리는 그가 말씀하신 것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할지라도 충분히 감사드릴 만한 이유가 있다. 

우리는 그가 세상을 위해, 교회를 위해, 인생들을 위해, 섭리의 왕국 속에서 은혜의 왕국 속에서 그의 자손들을 위해, 그리고 구속자의 손에 맡겨진 모든 권세와 신용을 위해 행하신 것으로 인해 하나님이 찬미받을 만하심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과 우리 안에 있는 모든 것으로 하여금 가장 훌륭한 태도로 그를 찬양하도록 선동해야 하며,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할 수 있기를 원해야 한다. “여호와를 찬송할지어다.” “즉, 그 영화로운 이름을 찬송할지어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의 영광과 축복에 어떤 기여를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의 이름으로 인함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모든 축복과 찬미보다 뛰어나다.” 그것이 영원히 찬송되도록 하라. 그것은 영원히 찬송되며, 영원히 찬송받을 만하다. 그리고 우리는 영원히 그것을 찬송하기를 바란다.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그리스도에 의해 행하신 모든 것에 대해 그리스도의 이름을 찬송하도록, 그리스도로 인해 하나님을 찬송하도록 가르침받고 있다. 우리는 그를 어떻게 찬송해야 하는지 살펴보자.

1. 여호와 하나님으로서, 스스로 존재하며 스스로 충족하는 자, 그리고 우리 최고의 주로서 찬송해야 한다.

2. 그 백성과 언약하시고, 그들에 의해 경배되는, 그리고 야곱에게 진리를 이행하시고, 아브라함에게 긍휼을 베푸시는 가운데 이를 행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서 찬송해야 한다.

3. 창조와 섭리 속에서, 그리고 특히 모든 것보다 뛰어난 이 구속의 사업 속에서 홀로 기사를 행하시는 하나님으로서 찬송해야 한다. 

사람의 행적은 보잘것없고, 평범하고 사소한 것들이며, 이러한 일들마저도 그들은 하나님 없이는 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자신의 능력으로 모든 것을 행하신다. 그리고 그가 행하시는 것은 기사로서 성도들과 천사들의 영원한 경탄의 대상이 된다.

Ⅱ. 그는 이 예언과 약속이 이행되기를 간곡히 기도하고 있다. 

“온 땅에, 다시스와 섬의 왕들이 예물을 드릴 때” 그러한 것처럼, “그 영광이 충만할지어다.” 

하나님의 영광에 비하면 이 땅이 얼마나 공허한 것인가를, 그가 이처럼 관대하신 은인인 데 비해 그가 세상으로부터 받는 봉사와 존귀는 얼마나 보잘것없는가를 생각하면 슬프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존귀와 인류의 번영이 승하기를 바라는 자들은, 땅이 그의 영광을 충분히 깨닫게 되고, 그의 영광을 감사하게 인정하는 일이 있기를 바라지 않을 수 없다. 

모든 마음과 모든 입과 모든 집회가 하나님께 대한 높은 찬양으로 채워지게 하자.

우리는 이 기도에서 다윗이 얼마나 진지한가를, 또 그의 마음이 얼마나 그 속에 기울어 있는가를, 다음과 같은 사실을 살펴봄으로써 알 수 있다.

1. 그는 이중의 인을 침으로써 그 기도를 마감하고 있다. 

“아멘, 아멘. 거듭거듭 나는 그것을 말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모두 그렇게 될지어다 하고 말하도록 하자. 내 기도에 아멘 하라.” 

“이러한 취지─주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옵시며 나라이 임하옵소서─를 갖고 있는 모든 성도들의 기도에 아멘 하라.”

2. 그는 이 기도로써 그의 인생을 닫고 있다(19절). 

이 시가 비록 이 성경에서 맨 끝에 배치되지는 않았을지라도, 그가 생전에 지은 마지막 시편이다. 

그는 그의 임종시의 침상에 누워 이것을 지었고, 그와 함께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라. 메시야 왕국이 세상에서 세워져 지속되게 하라. 나는 그것으로 만족하며, 더이상은 원하지 않는다.” 

이것으로써 “이새의 아들 다윗의 기도가 필하게 하라. 반드시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오시옵소서.”


===[보좌, 주권, 정사, 권세, 능력]====골1:15-17, 엡1:20-21
[골1:15, 16, 17]
*15.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16.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보좌] 주권들이나 [주관들] 통치자들이나[=정사]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권세==
ejxousiva(1849, 엑수시아) = [국가, 인간사회안에서의]법적 명령의 제정-집행 + 법에 따른 재판 및 처벌권을 부여받은 가진 통치권력/권세....::::  선택의 자유, 권리, 통치력, 권력자. [공직자/공무원들]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엑수시아(Soph., Thu. 이래)는 엑세스티(e[xesti, 1832: 그것은 가능한 일이다, 용인이나 허용되어 왔다)에서 유래한 단어이다.
(a)  이 단어는 기본적으로 어떤 행동을 행할 수 있는 '능력' ability을 의미한다.
(b)  그 다음 이 단어는 보다 높은 사법기관이 허락한 '권리' right, '권세' authority, '승인' permission.
① 정부가 허용해 준 가능성.
② 여러 가지 사회 관계에서의 권리를 의미한다.
(c)  엑수시아는 어떤 잠재적 힘이 타고난 육체적, 정신적, 혹은 자연적인 힘들에 의거하며, 무의식적 행동들, 강한 행위들 그리고 자연 현상들 안에서 드러나는 뒤나미스라는 말과는 대조적으로, 법률, 정치, 사회, 혹은 도덕적 사건들의 영역 안에서 발휘될 수 있는 힘을 의미한다(Plato, Definitiones 415b). 
예를 들면 이 말은 늘 특별한 지위나 명령과 함께 사용되므로, 그 말은 마음대로 처분하는 왕권이나 부권 혹은 소작권(P. Qxy. 11, 273)이나, 관리들 혹은 사자들의 권한을 의미한다(Diod. Sic. 13, 36, 2; 14, 81, 6). 
그 외에도 그 말은 사람들이 어떤 일을 받아들이거나 행하는데 필요한 도덕적 자유를 의미한다(Plato, Definitiones 412d). 
따라서 그 말은 사람에게만 적용될 뿐이지, 자연적인 힘이라는 의미로는 사용될 수 없다.
(d)  또한 이 단어는 율법에 맞서는 주제넘은 자유나 변덕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 경우 그 문맥은 대개 법적인 명령이다.
(e)  이 단어는 파생된 의미들로 '권력있는 지위', 복수로 '집권자들이나 권력자들, 공무원, 찬미의 말, 군중' crowd, 그리고 '화려한 것' pomp을 뜻한다.
2. 70인역본의 용법. 
명사 엑수시아는 70인역본에서 약 80회 나오며, 메스샬라, 살레탄 등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엑수시아는 70인역본에서 법적인 의미에서 '권리, 권력'을 나타내며, 율법에서 하나님에 대해서도 사용되었다. 다니엘과 마카베오서에서 이 단어는 왕이나 하나님의 힘을 가리킨다. 
70인역본은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 엑수시아를 사용함으로써, 이 용어를 하나님의 무제한적인 주권의 개념과 바로 하나님의 말씀 자체가 능력인 하나님의 개념을 우수하게 표현해주는 용어로 소개하고 있다(참조: 단 4:14).
3. 신약성경의 용법. 
명사 엑수시아는 신약성경에서 108회 나오며, 요한계시록, 누가복음, 고린도전서에서 자주 사용되었다.
엑수시아는 세속적인 의미에서는 '명령권' the power to give orders(마 8:9, 병행구 눅 7:8; 눅 19:17; 눅 20:20)을, 그리고 실제적인 의미에서는 '재판권' jurisdiction(눅 23:7)을, 그리고 복수로서는 '공직자' officials, '당국자' authorities(눅 12:11; 딛 3:1)를 의미한다. 롬
 13:3의 "관원들(아르콘테스[archontes])"와 마찬가지로 1절의 "위에 있는 권세들(엑수시아이스 히페레쿠사이스)"은 (누군가 언급한 것처럼) 천사의 권세들이라는 의미로 이해되어서는 안되며 오히려 국가의 공직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 외의 것은 블랙의 저술(M. Black)을 참조하라.
신약성경 기자들이 엑수시아와 뒤나미스(duvnami", 1411)를 모두 그리스도의 사역, 우주적인 힘의 구조에 따르는 새로운 질서, 그리고 신자들에게 부여된 권능이라는 의미로 사용한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눅 9:1에는 두 단어들이 함께 기록되어 있다. 엑수시아는 성령의 은사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반면에 예수님의 뒤나미스(duvnami", 1411)는 기름부음 받은 그의 본질에 기초하고 있으며 그의 엑수시아는 파송받은 그의 본질에 기초하는 것이다. 
(1) 하나님 자신에게; (2) 마지막 날의 위임자에게; (3) 종말론적인 삶을 사는 기독교인에게 속해있는 능력, 권세 그리고 행동의 자유가 바로 엑수시아이다.
(a)  하나님의 엑수시아.
① 하나님의 종말론적 권위는 세계사의 지배자이자 세계의 심판자로서의 그의 역할과 결부되어 있다. 
==그는 자신의 권위로 마지막 날과 때를 결정하며, 역사의 종말을 자신의 지배하에 두고 계신다: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바 아니요"(행 1:7). ==하나님은 인간들을 영원한 파멸로 이끌 권능을 가지고 계신다: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눅 12:5). 
우리는 하나님께서 절대적으로 자유한 분이심을 그의 예정 속에서 실존적으로 인식할 수 있다. 즉 바울은 하나님을 흙을 가지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만들 수 있는 토기장이에 비유한다(롬 9:1; 참조: 사 29:16; 사 45:9; 렘 18:6; 지혜서 15:7; 집회서 36[33]:12이하).
② 하나님은 종말론적 권세를 위임하실 수 있다. 
예를 들어 천사들에게는 심판날에 처벌할 권세가 위임될 수 있고(계 6:8); 다른 피조물들도 하나님의 권세를 위임받을 수 있다(계 9:3, 계 9:10, 계 9:19). :::   이와는 대조적으로, 천상의 권세(엑수시아이)들은 이러한 종말론적 사건에서 거의 고려되지 않고 있다. 
==일반적으로 천상의 권능들이란 말은 아르카이라는 말과 함께 언급되었고, 그 말은 뒤나메이스라는 말과 유사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엡 1:21; 엡 3:10; 골 1:16; 골 2:10). 
그리스도의 높아 지심은 그 권세들이 그에게 복종함을 의미한다(엡 1:21; 벧전 3:22). 그러나 아직 적대 세력이 완전히 파괴되지 않았다. 즉 이 말은 메시야의 통치가 당분간 계속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그 후에는 나중이니 저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고전 15:24).
쿰란 문서들에도 기록되어 있는 바와 같이 자연인은 흑암의 권세와 악마의 주권하에 있다(골 1:13; 참조: 행 16:18). 그 반대편에 빛의 영역과 성자의 왕국과 하나님 자신이 있다. 
하나님과 마찬가지로 악마도 다른 사람들, 예를 들어 적그리스도에게 세상의 통치권을 위임할 수 있다(계 13:2, 계 13:4, 계 13:12). 심지어 악마는 세상 지배권을 주겠다는 말로 예수님을 유혹하였다: "가로되 이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준 것이므로 나의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눅 4:6). 
그러나 이것을 이원론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악마의 권세도 하나님에 의해 부여된 것이며 그의 활동은 하나님의 섭리에 따른 것이며, 따라서 그의 활동 범위는 제한된다: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을 때에 내게 손을 대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두움의 권세로다 하시더라"(눅 22:53). 
악마의 권세에 관한 언급은 세상에 관한 비관적인 견해에서 부여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에 대한 기쁜 소식에서 부여된 것이다. 악마를 "이 세상의 임금"이라고 부른 바로 그 대목에서 예수님은 악마의 파멸을 선언하신다.
(b)  예수님의 엑수시아.
① 지상에서의 예수님의 사역은 악마와 귀신들이 그들이 권세를 박탈 당했다는 것을 선언한다.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그 분은 악마의 활동을 파괴하고 악마의 지배로부터 인간들을 구해낼 권세를 갖고 계신다. 따라서 귀신 축출은 예수님의 권능에 의거한 것이며(눅 4:36), 예수님의 파송을 받은 제자들도 그 권능을 행사할 수 있다(마 10:1, 병행구 막 3:15; 눅 9:1; 막 6:7; 눅 10:19). 
예수님께서 치유의 기적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죄를 사해주시고, 자신의 말씀에 권능이 있음을 확증하셨을 때에, 그는 하나님의 권위에 따라 행하신 것이다(마 9:2-8, 병행구 막 2:3-12; 눅 5:18-26; 참조: 시 103:3). 
예수님은 자신의 종말론적 사명, 즉 하나님의 자녀들을 구원하려는 목적 때문에 결국 → 바리새인들 Pharisees이 이해한 것으로서의 → 율법 Law과 충돌하게 되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구원 의지를 주장하였던 랍비 할라카(Halachah)의 주장에 의거하여 율법의 축자적인 이해를 거부하였다(참조: 마 12:10, 마 12:12; 막 3:4; 눅 14;3; 요 5:10). 예
수님의 권위는 뭇 사람들을 놀라게 했던 이 가르침에서 드러날 수 있었다(막 1:22, 막 1:27; 마 7:29; 눅 4:32). 왜냐하면 그의 가르침은 서기관들의 가르침과 달랐기 때문이다. 
서기관들의 가르침은 그들의 전통에 따른 것이었는데 반해(마 7:29), 예수님, 즉 기름 부음을 받으신 분은 모세나 예언자들처럼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으로 가르치셨을 뿐만 아니라 유일하게 → 아버지 Father를 아시고 그분을 드러내실 수 있는 아들의 유일한 권위를 가지고 말씀하셨다(마 28:18; 참조: 마 11:27; 눅 10:22; 요 3:35; 요 13:3; 요 10:15; 요 17:25). 
성전 정화에도(참조: 마 21:12이하; 막 11:11-17; 눅 19:45이하; 요 2:13-17; 출 30:13; 레 1:14; 사 56:7; 렘 7:11) 메시야적 권위에 대한 의식이 전제되어 있다.
②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의 절대적인 권위는 예수님께서 아들이시며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요 17:2). 
그는 마지막 날의 심판권도 부여받았다: "또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요 5:27). 
그러나 공관복음에서과 마찬가지로 요한의 기록에서 예수님은 인간들을 심판하고자 하는 분이라기보다는 그들을 구원하고자 하는 분으로 묘사된다. 
그의 능력은 강제적인 지배에 있지 않고 세상을 위해 종이 되신 절대적인 자유에 있다. 
예수님은 목숨을 버릴 엑수시아도 갖고 계시며 그것을 다시 취할 권세도 갖고 계신다(요 10:18). 그를 영접하고 그의 이름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엑수시아를 부여받았다(요 1:12).
③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의 권위의 표상은 부활 사건을 예시하고 있다. 왜냐하면 부활절 이후 들어 올리우심으로써 예수님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부여 받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마 28:18). 
예수님은 인자가 나라의 보좌에 오를 것이며 그에게 권능이 부여되리라는 다니엘의 환상을 성취하셨다(참조: 단 7:14). 그러나 지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성도들"과 함께 계신다. 
게다가 하나님의 권능은 강압적으로 국가들을 정복함으로써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 복음 Gospel 전파로, 즉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으로 세상을 정복함으로써 실현된다. 
외견상 지상에서의 메시야 통치로 여겨지는 것은 교회이지, → 이스라엘 Israel의 주권적인 통치가 아니다(행 1:6-8). 왜냐하면 십자가와 그리스도의 높이 올리우심은 악한 자의 멸망과 심판과 시대의 전환점에 대한 전조가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좋은 소식으로써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따라서 승귀하신 주님은 사자들을 파송하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파할 권세를 부여하신다(마 28:18-20). 
지상에서 행해진 예수님의 사역과 비슷한 임무를 띠고 있으며, 부활절 메시지의 취지에 따라 활약하는 그리스도의 사도들은 성령을 수여할 권세를 부여 받았는데(행 8:19; 행 2:38; 행 19:6; 행 10:44-48), 그 권세는 인간을 파하는 권세가 아니라 오히려 세우는 권세이다(고후 10:8; 고후 13:10). 
사도는 교회에서 종으로서의 영적인 사역을 행하기 때문에 교회로부터 육신의 양식을 구할 권리가 있다(고전 9:4-6; 살후 3:9). 이 성구들에서 엑수시아는 '권리'나 '특권'을 의미한다.
(참조: O. Betz; W. Foerster; Walter Bauer; J. H. Thayer). 
==정사==
ajrchv(746, 아르케) 태초, 시작 beginning, 원인 cause. = 머리/머릿돌, 시초/근원/근본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아르케(Homer 이래)는 호머 이래로 헬라 철학에서 중요한 용어이다.
(a)  아르케는 '시작, 출발'을 의미한다. 
시간에 있어서 아르케는 시간의 연속에서 새로운 시작의 시점(기점)을 나타낸다. 시작(아르케)에 대해 말할 때 그 종말(텔로스)도 고려되었다. 시작부터 그 일의 종말을 볼 수 있다. 시작은 무한(the infinite)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그 종말도 무한 안에 존재할 것이다.
(b)  아르케는 출발점, 원인, 모든 존재의 제일 원인, 모든 것의 기본 원리를 의미한다. 
예를 들어 탈레스(Tales)에게 있어서 이것은 물(water)이며, 아낙시만데르(Anaximander)에게 있어서는 무한대(infinity)이며, 아낙시메네스(Anaximenes)에게 있어서는 공기(air)였다. 점차적으로 아르케(arche)는 근원적인 원인으로부터 근원적 법칙들로 그 의미가 발전되었다. 이 근원적 법칙들이란 우주의 발전과 진보를 결정하는 것이다. 
스토아 학파에서는 신(데오스)과 질료(質料)(휠레)가 아르카이(archai)였다.
(c)  아르케는 지위에 있어서 ① '통치권', ② '통치 영역', ③ '권세, 통치'를 의미한다(참조: D.Muller; G.Oelling).
2. 70인역본의 용법 
(a)  아르케는 70인역본에서 약 230회 이상 나오며, 주로 히브리어 로쉬 어군의 역어로, '명령, 부대 명령'(삿 9:34; 삼상 11:11), '꼭대기'(렘 22:6), 명수(민 1:2), 근원(창 2:10), 열국 중 '우수함'(암 6:1), (달의) '시작'(왕상 21:9, 왕상 21:11)을 나타낸다.
(b)  아르케는 올람(먼 시간), 또는 케뎀(고대, 옛날의; 예를 들어 합 1:12; 시74:2; 미 5:2)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며, 이렇게 사용될 때 시간에 있어서 먼 과거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상태, 민족, 또는 세계의 시초까지도 의미한다. 
이런 의미로 사용될 때 아르케의 의미는, 원초적 상태를 넘어, 기억될 수 있는 그 이전의 상태로부터, 시간 이전의 과거에까지 이르른다(사 37:26).
(c)  아르케는 단 9:21, 단 9:23 등에서 과정의 시작(히브리어 테힐라)이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d)  아르케는 멤샬라(지배, 통치)의 역어로 사용되어 '다스림'이라는 요소가 특별히 명백하게 나타난다(창 1:16; 렘 34:1; 미 4:8).
(e)  아르케는 비교적 자주 '통치권, 권세, 권세의 위치'에 대해 사용되었다(창 40:13, 창 40:20이하; 대상 26:10; 마카베오사서 4:17; 느 9:17; 단 7장 등).
3. 신약성경의 용법 
명사 아르케는 신약성경에서 55회 나오며, 다음의 의미를 나타낸다.
(a)  아르케는 '시작, 개시'를 의미한다.
① 막 1:1에서 복음의 시작, 막 13:8에서 말세의 재난의 시작, 히 3:14에서 확신, 또는 믿음의 시작, 행 10:11에서 보자기의 시작 즉 귀퉁이를 나타낸다.
② 그리스도는 시간을 초월하여 계신다. 
따라서 시작도 끝도 없다. 그리스도는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다(히 1:10).
③ 아르케는 전치사(아프, 에스)와 함께 시간에 있어서 첫 시점을 나타내는데, 문맥으로 결정된다: 아르케는 예수님의 활동의 "처음"(눅 1:2; 요 15:27; 요 16:4)을 나타낸다; 예수님께서는 "처음부터" 믿음의 여부를 알고 계셨다(요 6:64); "
처음부터" 바울의 생활은 그 자신의 민족 중에서 영위되었다(행 26:4). 
요한은 교회가 "처음부터" 소유하였던 것, 곧 동일한 복음, 하나님의 동일한 말씀을 지적하며 그것이 새 계명이 아님을 지적한다(요일 2:7). 처음부터 들은 것을 그들 안에 거하게 하라고 했다(요일 2:24); 이것은 사랑의 메시지이며(요일 3:11; 요이 1:5) 처음부터 들은 바와 같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행함으로써 유효하게 되는 것이다(요이 1:6).
④ 일부일처제는 창조 시초부터 정해진 것이다(마 19:4, 마 19:8; 막 10:6; 참조: 창 1:27). 
막 13:19("이는 그 날들은 환난의 날이 되겠음이라 하나님의 창조하신 창조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과 벧후 3:4("가로되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에서는 세상의 시초를 뒤돌아보고 있다.
행 11:15에서 '처음'은 예루살렘에서의 교회가 시작된 초기 시대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저희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
빌 4:15에서 '시초에'는 바울의 선교 활동의 초기를 말하고 있다: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 받는 내 일에 참여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⑤ 살후 2:13의 해석은 상당히 불확실하다. 이 구절은 독자들의 선택이 그들의 탄생 순간부터였다는 의미일까? 아니면 영원부터였다는 의미일까? 
(살후 2:13 ) 마귀는 "처음부터" 살인자요 거짓말장이였으며 진리와는 관계가 없다. 따라서 마귀의 자녀는 단지 그 아비의 욕망만을 실행할 수 밖에 없다(요 8:44) 요일 3:8에 의하면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하였다.
(b)  아르케는 절대적 시초를 의미한다. 
요 1:1은 시간 이전의 어떤 것을 암시한다. 곧 시간 내에서의 시작이 아닌 절대적 시작으로서, 하나님과 결부시켜서만이 언급될 수 있는 시작이다. 
하나님에 대해서는 어떠한 시간적 범주로도 진술할 수 없는 까닭이다. 
로고스(Logos)는 엄밀한 의미에서 세상 이전에 선재하신 분이다. 따라서 세상과 함께 시작한 시간보다 먼저 존재하셨다.
요한일서에는 '태초(처음)부터 있는 것'(요일 1:1), '태초(처음)부터 계신 이'(요일 2:13 - 요일 2:14)라는 어구가 나오는데, 이는 영원토록 선재하시고 제자들이 지각할 수 있는 로고스(Logos)를 의미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여기에서 우리에게 자기 자신을 보여주시는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이다.
(c)  그리스도 자신은 그밖의 모든 것 '이전에' 나신 모든 창조물의 장자이자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아르케이다(골 1:18). 
아르케이신 그는 만물의 기준으로서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그를 위하여 지음받았다(참조: 골 1:16b). 그는 또한 죽은 자로부터 맨 먼저 부활한 아르케이다.
계 3:14은 이와 매우 비슷한 의미로 그리스도를 아르케라고 칭한다(계 21:6; 계 22:13). 역사를 상대화시키는 종말론은 철학적인 용법과 어느 정도 관계를 가진다: 보좌에 앉으신 그리스도는 시간 이전과 이후에 존재하신다.
(d)  아르케 '권세, 지배력'에 대해 사용되었다.
① 눅 12:11에서 아르케는 세속적 또는 영적인 권세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사람이 너희를 회당과 [정사 잡은 이]와 권세 있는 이 앞에 끌고 가거든 어떻게 무엇으로 대답하며 무엇으로 말할 것을 염려치 말라".
눅 20:20에서 아르케는 로마의 행정 관리에 대해 사용되었다: "이에 저희가 엿보다가 예수를 총독의 [치리]와 권세 아래 붙이려 하여 정탐들을 보내어 그들로 스스로 의인인 체하며 예수의 말을 책잡게 하니".
딛 3:1에서 아르케, 곧 세속적 능력과 일반적 권세들에 대한 순종을 요구한다: "너는 저희로 하여금 [정사]와 권세 잡은 자들에게 복종하며 순종하며 모든 선한 일 행하기를 예비하게 하며".
② 아르케는 초지상적 세력을 나타낸다. 
엡 1:21에서 이들은 하나님께 대적하고, 최고 주권자를 가지고 있으며(참조: 엡 2:2), 다른 영역들, 예를들면, 종교적(참조: 고전 8:5), 성적(참조: 고전 6:15이하), 생명(참조: 고전 15:26), 사회적인 영역(엡 6:12; 참조: 엡 6장)을 지배하고, 천사들과 관련되어 있다(롬 8:38).
골 1:16은 이 절에 있어서 중요한 구절이다. 초자연적인 하늘의 존재들과 권능들(그중 일부는 아르카이[archai]이다)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또한 그리스도를 위하여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화해의 행위는 전 우주를 포괄한다(골 1:20). 
현재에도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아르케와 엑수시아(exousia)의 머리이시다(골 2:10; 참조: 빌 2:10이하). 
그리스도께서는 자연과 역사 모두를 포함하는 세계의 통치자이시며 전 우주의 주님이시며 머리이시다. 
이 관원들과 권세들은 예수님을 깨닫지 못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다(고전 2:8). 그러나 십자가 위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이 권세들의 무장을 해제시켰고 그들에게서 힘을 뺏으셨다(골 2:14이하). 
그리스도는 부활로 말미암아 만주(萬主)와 정사들(아르카이, archai)과 권세들과, 지칭될 수 있는 모든 이름을 초월하여 하나님의 우편에 승귀하셨다.
이방인을 기독교 신앙으로 부름의 비밀이, 교회를 통하여 하늘의 정사와 권세들에게 알려진 것이라는 사실은 충격적인 사상이다(엡 3:10). 
이방인의 부름의 비밀은 영적 세계까지 뻗어나가는 우주적 의미를 갖고 있다. 이것은 교회의 선포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엡 6:12에서 아르카이(archai)는 기독교인들이 싸워야 하는, 마귀에 의해 지배되는 악령 세계의 일부이다. 
롬 8:38에서 천사와 능력과 함께 나오는 아르카이(복수; 한글 개역에 권세들)는 현재 역사하고 있으나 신자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는 하늘의 또는 초자연적인 존재들의 특별한 부류를 뜻한다. 
하나님의 나라의 확립을 가져오는 말세의 사건이 일어날 때,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아르케와 뒤나미스와 엑수시아(ejxousiva, 1849)를 멸하실 것이다(고전 15:24).
아르케는 유 1:6을 제외하고는 항상 엑수시아(ejxousiva, 1849)와 함께 사용되었다.
(참조: Walter Bauer; J.H.Thayer; G.Oelling; H.Bietenhard). 
==주관/주권==
kuvrio"(2962, 퀴리오스) 주님 Lord, 주인 lord.
1. 고전 헬라어의 용법. 
퀴리오스는 퀴로스(ku'ro": 힘, 권위)에서 유래했으며,
(a)  형용사로는
① '힘이 있는, 권세(력)을 가진, 권한을 부여 받은, 권위 있는, 유효한'을 뜻한다. 여기서 힘이란 물리적인 힘이 아니라 지배력을 뜻하며, 법의 경우에는 유효하다를 뜻하며, 사람에게 사용될 때는 권위 있거나 자격이 있다는 뜻이며, 통치자의 경우에는 강력한 영향력을 지닌다를 의미한다.
② '중요한, 결정적인, 주요한'을 의미한다.
(b)  명사로 초기에 드물게 사용되었으나 두가지 고정된 의미
① 종, 집, 시민의 주인,
② 아내나 여자 아이의 법적 보호자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 두 의미 모두 합법성과 권위라는 개념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아테네에서는 데스포테스(despovth", 1203: 주, 주인, 소유자)라는 단어가 더 흔하게 사용되었다. 
코이네 헬라어에서 퀴리오스가 법률적인 의미를 더 강하게 지니고, 소유권보다 처분권에 더 강조를 두고 있기는 하지만 두 단어는 거의 서로 교대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신약시대에 가까워질수록 법률적인 요소가 더 강조되게 되었고 데스포테스가 퀴리오스로 점점 대체되는 경향이 있었다.
(c)  처음에 공직자들은 퀴리오이(복수)라고 불리지 않았지만 점점 그 칭호를 붙이는 관습으로 발전 되었고, 나중에는 퀴리오스가 철학자, 의사, 청중들, 남편(아내가 부를 때), 아버지(자식이 부를 때)에 사용되었으며, 그리고 지위가 높은 사람은 누구든 아주 일반적으로 퀴리오스로 일컬어지고 퀴리에(여성형), 퀴리아(Kuriva, 2959)라고 불리워졌다.
(d)  초기 시대에는 퀴리오스가 왕들이나 신들의 칭호로 사용되지 않았다.
 헬라 시대에 퀴리오스라는 칭호를 왕들(통치자들)이나 신들에게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주전 1세기에 이르러서 였다(참조: W. Foerster).
퀴리오스 바실류스(주, 왕)는 주전 64년과 50년 사이에 자주 사용되었다. 주전 12년에 이집트에서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데오스 카이 퀴리오스(하나님과 주)라고 일컬어졌다(BGU, 1197, I, 15). 
상부 이집트에서 여왕 간다게(참조: 행 8:27)는 헤 퀴리아 바실릿사(여주인, 여왕)으로 불리워 졌다. 
퀴리오스라는 명칭은 헤롯 대왕(약 73 ~ 4 B.C), 아그립바 1세(약 10 B.C ~ A.D 44), 아그립바 2세(A.D 27 ~ 약 100)에게도 사용되었다. 
통치자들 외에, 고관들도 이 칭호를 받았으며, 예를 들면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총독이 이 칭호를 받았다. 시리아에서도 사정은 이집트에서와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주전 1세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동양에서도 군주를 퀴리오스라고 불렀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퀴리오스 데오스(주와 통치자)와 같은 칭호를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퀴리오스는 신들에게 사용되어 그 시대에 유행했던 사상과 언어에서도 신들을 주(lord)라고 불렀다. 이 경우에 퀴리오스는 기초가 되는 셈어의 상당어구(예: 아돈, 마라, 여성형 랍바트)를 번역한 것이다. 이런 용어들에는 항상 인칭 대명사(나의, 우리의 등)가 첨가되어 신의 이름 앞에 붙여졌다. 
퀴리오스를 신에게 사용했을 경우, 이 말을 사용한 종은 그 신에 대한 인격적인 책임 관계에 있게 되며 이때 신은 개인적인 권력을 행사했다. 예를 들어 히브리어의 아돈이 권력을 가진 주를 의미할 때,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상당어는 당연히 퀴리오스이다. 각 신들은 그들에게 제사하는 공동체의 주(lord)로써, 그리고 그 공동체에 속한 각 구성원들의 주 lord로써 숭배 받았다. 다른 주 lord(신)들을 숭배하는 것이 배제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신들 중 어느 하나도 우주적인 주로서 형성화되거나 숭배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e)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B.C. 31 ~ A.D. 14)와 티베리우스(Tiberius, A.D. 14 ~ 37)는 로마인들이 정의라고 생각하는 바에 따라 동방 형태의 군주정치를 거부했으며, 그와 더불어 퀴리오스라는 칭호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모든 것을 거부했다. 그러나 칼리굴라(Caligula, A.D 37 ~ 41)는 퀴리오스라는 칭호가 매력적인 칭호임을 인식하였다. 
네로의 비문에는 호 투 판토스 코스무 퀴리오스(세상 모든 사람들의 주, SIG 814, 31)가 묘사되어 있는데 네로(Nero, A.D 54 ~ 68) 이후에 퀴리오스라는 칭호는 더욱 더 자주 사용되었다. 가장 오래된 예문 중의 하나가 사도행전 25:26이다.
 퀴리오스라는 칭호는 도미티안(Domitian, A.D 81 ~ 96)에 의해서 다시 평판이 나빠졌는데, 이는 그가 공식적인 서한에서 자기 자신을 도미누스 엣 데우스 노스테르(우리의 주와 하나님)라고 불렀기 때문이다(Suetonius, De Vita Caesarum, 13, 2). 도미티안의 사후에 이 칭호는 그에 대한 기억(담나티오 메모리아에)과 더불어 혐오스러운 것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단어는 나중에 다시 널리 유행하게 되었다. 
본래부터 저절로 퀴리오스라는 칭호가 황제를 신이라고 부르지 아니하였다. 그가 신으로 숭배될 때 주라는 칭호도 신의 속성으로 간주된 것이다. 
기독교인들이 국가의 전체주의적 태도를 버리고 거부한 것은 곧 지나치게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하는 이런 종교적 주장에 대항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을 처음으로 퀴리오스라고 부르는 용법은 70인역본에서 나타난다(참조: H. Bietenhard).
2. 구약 및 70인역본의 용법. 
퀴리오스는 70인역본에서 약 9000회 이상 나오며, 24개의 히브리어 단어 및 어군들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a)  퀴리오스는 히브리어 아돈(주, 주인)의 역어로 190회, 바알(주 Lord)의 역어로 15회 사용되었는데, 결혼과 재산법에서 바알이 아내나 토지의 주인을 의미하는 반면(호 2:18; 삿 19:22; 삿 19:23 등), 아돈은 사회적 요인에 의하여 결정되며 한 단체에서 책임을 맡고 있는 우두머리인 명령자를 의미한다(삼상 25장).
(b)  퀴리오스는 또한 게비르(지휘관, 사령관), 아람어 마라(주 lord), 샬리트(통치자, 지배자)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c)  그러나 많은 경우에(약 6000회 이상) 퀴리오스는 하나님을 뜻하는 히브리어 고유명사, 즉 신성 4문자 YHWH를 대신한다.
여호와는 창조자이시며, 전 우주와 인류의 주, 또는 주인이시며, 생명과 사망의 주(인) Lord이시다. 무엇보다도 여호와는 이스라엘 즉, 그의 언약의 사람들의 하나님이시다. 
여호와를 뜻하는 말로 퀴리오스를 선택함으로써 70인역본 헬라어 본문도 법적인 권위에 관한 사상을 강조했다.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여 그들을 자기 소유로 선택했기 때문에,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합법적인 주 Lord이다. 세상의 창조주로서 그는 또한 세상을 무한히 통할하는 세상의 합법적인 주이기도 하다.
퀴리오스는 하나님을 부르는 호칭인 아도나이의 역어로 사용되었다(창 18:27-32).
3. 신약성경의 용법. 
퀴리오스는 신약성경에서 725회 나오며, 그 중 대부분 누가의 기록(210회)과 바울서신(275회)에 사용되었다.
(a)  퀴리오스의 통속적인 용법.
신약성경에서 퀴리오스는 포도원의 주인(막 12:9과 병행구절), 나귀(눅 19:33)와 개의 소유자(마 15:27), 청지기의 주인(눅 16:3), 종들의 주인(행 16:16; 행 16:19; 엡 6:5; 엡 6:9; 골 3:22; 골 4:1)을 의미한다.
퀴리오스는 또한 어떤 것, 예를 들면 추수(마 9:38) 또는 안식일(막 2:28)을 주관하는 사람을 가리키기도 한다.
퀴리오스의 공손한 어법은 눅 1:43에 나오고, 벧전 3:6; 막 12:36-37; 행 25:26에서는 우월성을 암시한다. 
종들이나 일군들은 퀴리에(참조: 눅 13:8)라는 칭호를 사용한다. 
유대인들은 마 27:63에서 빌라도에게 같은 호칭을 사용했고, 마리아는 요 20:15에서 동산지기에게, 간수장은 행 16:30에서 바울과 실라에게 같은 호칭을 사용했다(참조: 또한 마 21:29; 행 10:4).
퀴리오스의 형태는 팔레스타인 용법과 일치하며, 마 7:21-22; 마 25:11; 눅 6:46에 나타난다. 고전 2:8("영광의 주")과 살후 3:16("평강의 주")에서는 속격과 결합되어 나온다.
퀴리오스는 천사들을 칭할 때도 사용되었으며(행 10:4; 계 7:14), 다메섹 밖에서 하늘의 환상을 볼 때 (자기가) 알지 못하는 이에게도 사용되었다(행 9:5; 행 22:8; 행 22:10; 행 26:15).
(b)  퀴리오스이신 하나님.
헬라 회당에서 사용하던 용법에 따라, 하나님을 종종 퀴리오스라고 칭하였으며, 특히 여호와를 뜻하는 말로 퀴리오스를 사용하는 수많은 구약성경 인용문에서 그러했다. 
공식적으로 성경을 봉독할 때에 신성 4문자 대신 퀴리오스를 사용하는 관습과 일치한다(예: 롬 4:8 = 시 32:2;시 9:28이하. = 사 10:22이하.; 사 10:16 = 사 53:1; 사 11:3; 눅 19:10; 눅 11:34 = 사 40:13; 사 14:11 = 사 45:23; 사 15:11 = 시 117:1; 고전 3:20; 시 94:11; 시 14:21 = 사 28:11이하.).
퀴리오스는 자주 누가복음의 탄생 기사에서 하나님을 가리켜 말한다(예: 눅 1:32; 눅 2:9).
퀴리오스가 속격으로 나와 다른 단어와 함께 쓰이는 형태는 구약성경의 용법과 일치하는데 예를 들면 퀴리오스의 손(눅 1:66; 행 11:21); 퀴리오스의 천사(마 1:20; 마 2:13; 마 28:2; 눅 1:11; 눅 2:9; 행 5:19;행 8:26; 행 12:7); 퀴리오스의 이름(약 5:10; 약 5:14); 퀴리오스의 영(행 5:9; 행 8:39); 퀴리오스의 말(행 8:25; 행 12:24; 행 13:48이하.; 행 15:35이하.)등이다.
"퀴리오스가 말씀하시니라"라는 공식 문구(롬 12:19 = 신 32:35; 고후 6:17; 사 52:11; 계 1:8 참조: 출 3:14)도 역시 구약성경에서 유래한 표현이다.
요한계시록의 기자는 때때로 "주 하나님"(퀴리오스 호 데오스)이라는 구약성경의 어구에 강조적인 엄숙한 단어 판토크라토르(전능하신 이)를 첨가한다(계 1:8; 계 4:8; 계 11:17; 계 16:7; 계 19:6; 계 21:22).
우리 주 우리 하나님(호 퀴리오스 카이 호 데오스 헤몬) 이라는 공식 문구는 도미티안이 채택하여 사용했던 칭호를 생각나게 한다.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계 4:11; 참조: 요 20:28).
계 11:15; 계 22:6에 나오는 예배의식상의 공식 문구는 주목해 볼만하다.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를 "하늘과 땅의 퀴리오스"(마 11:25; 눅 10:21; 참조: 히 1:2; 집회서 51:1; 토빗 7:18)라고 했을 때 그는 유대식의 언어 형태를 채택한 것이다.
마 9:38에 보면 하나님은 (종말론적인) 추수의 퀴리오스이다. 
하나님은 유일한 통치자이시며 왕중의 왕이시며 만주의 퀴리오스이시다(참조: 단 2:47), 그는 우리의 퀴리오스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나게 하실 분이시다(딤전 6:15).
하나님은 창조자이시며 따라서 만물의 주이시다(행 17:24). 하나님을 퀴리오스라고 부르며 또한 그렇게 인정함으로서 신약성경은 특별히 하나님이 창조주이심과 역사 속에서 나타난 그의 능력, 그리고 그의 공정한 우주 지배권을 표현하고 있으며 동시에 그에 대한 믿음과 구약성경의 믿음과의 연속성을 고백하고 있다.
(c)  퀴리오스이신 예수님
① 퀴리오스이신 지상의 예수님. 지상에 계신 예수님에게 사용된 퀴리오스는 처음에는 정중한 형태의 호칭이었다(마 17:4, 퀴리에: 요 6:34; 요 13:6). 
이런 호칭의 형태도 예수님을 지도자로서 인정하며 그에게 기꺼이 순종한다는 뜻을 내포한다(마 7:21; 마 21:29 이하; 눅 6:46). 
인자(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예수님은 또한 안식일의 퀴리오스이시다. 그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거룩한 날을 다스린다(막 2:28 이하). 그의 죽음과 부활 후에도 지상의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기독교 공동체의 무한한 권위를 지닌다.
바울은 최종적으로 문제를 해결해 주는 퀴리오스의 말씀들에 호소했다(고전 7:10; 고전 12:25; 살전 4:15; 참조: 행 11:16; 행 20:35).
② 퀴리오스이신 높임 받으신 예수님. 
예배에 사용된 신앙 고백적인 외침인 퀴리오스 이에수스(예수는 주이시다)는 의심할 바 없이 바울 이전의 헬라 기독교 공동체에서 유래했다. 
이 고백이 가장 오래된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가장 오래된 기독교 신조들 중의 하나이다. 이런 고백으로 신약 공동체는 자신을 주님께 복종했지만 동시에 그를 세상의 통치자라고도 고백했다(롬 10:9; 고전 12:3; 빌 2:11). 
하나님은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며 그를 만민의 퀴리오스라는 자리로 높이 올리셨다. 더욱이 하나님은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 즉 자기 자신의 이름인 주라는 이름을 "주셨으며"(빌 2:9 이하.; 참조: 사 45:23 이하) 그와 아울러 그 이름에 적합한 지위도 주셨다(빌 2:5-11). 
높임을 받은 퀴리오스이신 그리스도는 모든 인간을 다스린다(롬 14:9). 그밖에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모든 왕들을 다스리는 통치자로, 만주의 주로, 만왕의 왕 King으로 불리운다는 사실에 암시되어 있다(계 17:14; 계 19:16). 
이런 방식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동일한 영예의 칭호를 받았다(딤전 6:15; 참조: 단 2:47). 그 당시의 유대 사상에 따르면, 자연과 역사에 있어서 세상의 다른 영역은 천사들의 힘으로 다스려졌다. 
그리스도가 이제 퀴리오스의 지위로 높여졌으므로, 모든 권세들이 그에게 예속되었으며 또한 그를 섬겨야 한다(골 2:6; 참조: 엡 1:20이하.). 
한 하나님과 한 퀴리오스이신 예수님은 이교 세계의 수많은 신들 및 주들과 반대된다(고전 8:5이하.; 엡 4:5이하).
예수님의 높이심과 주로써 취임한 것에 관한 성경적인 근거는 시편 110:1에 나와있다(참조: 마 22:44; 막 12:36; 막 16:19; 눅 20:42이하.; 행 2:34). 
시편에서 따온 이 구절의 유대적인 해석은 메시야적 미래를 기대했으나 - 메시야적인 해석은 교회를 반대하는 유대인들 가운데서 오랫동안 은폐되어 있었다 - 기독교인의 믿음 안에서 이 소망은 현재의 것으로 전이되었다. 
메시야인 예수님의 주권은 현재적인 실재이다. 그는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권세와 주권을 감추어진 방법으로 실행하고 있으며 종말론적인 미래에는 메시야의 통치가 완성될 것이다. 이 믿음은 도마의 신앙고백(요 20:28), 호 퀴리오스 무 카이 호 데오스 무(나의 주 나의 하나님)에서 분명해졌다. 
원시 기독교는 예수님을 주로 세우는 것을 일신교에 위배된다고 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일신교를 확고하게 해주는 것이라고 보았다(고전 8:6; 엡 4:5; 빌 2:11). 주 예수님을 높이셔서(행 2:36) 그를 만물의 주로 삼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다.
③ 퀴리오스와 주의 만찬.
퀴리오스는 주의 만찬과 관련된 표현에 자주 나온다. "주의 상"(고전 10:21); "주의 죽으심"(고전 11:26); "주의 잔"(고전 10:21; 고전 11:27); "주를 노여워하시게 하겠느냐"(고전 10:22),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고전 16:22); "주의 만찬"(고전 11:20),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고전 11:32),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고전 11:27). 
이런 다른 여러 가지 표현들은 주의 만찬이 기독교 공동체가 특별한 방법으로 퀴리오스의 구원의 사역을 따르며 또한 퀴리오스의 몸과 능력을 나누어 받는 장소임을 나타내고 있다.
④ 퀴리오스와 성령. 
바울은 기독교 공동체에 성령으로 말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구별하라고 훈계했다(고전 12:3). 어떤 사람이 성령으로 충만하다면, 그는 "예수는 주님이시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퀴리오스이신 예수님에 대한 충성을 고백함으로써, 새로운 언약에 속한 사람은 누구든지 또한 영의 세계에 속하여 더 이상 옛 언약과 그 문자의 세계에 속하지 않는다. 그는 자유로운 상태에 놓여 있다.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고후 3:17).
⑤ 서신의 문안에 나오는 퀴리오스. 
바울 서신의 처음 인사말(마지막 부분에는 그렇지 않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라는 글귀 옆에 자주 언급된다(롬 1:7; 고전 1:3; 고후 1:3; 갈 1:3; 빌 1:2; 살후 1:2; 딤전 1:2; 딤후 1:2; 몬 1:3). 
마지막 인사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에게[혹은 너희 심령과, 또는 너희 모든 사람에게] 함께 있을지어다"라는 말은 바울 이전의 전통을 계승한 것으로, 이 전통의 궁극적 기원은 아마도 주의 만찬에 있었던 것 같다(참조: 고전 16:23; 고후 13:13; 몬 1:25; 계 22:17-21). 
하나님을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로 묘사하는 것은 이방기독교 헬라 공동체로 소급되어야 한다(롬 15:6; 고후 1:3; 고후 11:31; 참조: 벧전 1:3; 엡 1:3; 엡 1:17; 골 1:3). 이
공식 문구가 본래의 유대 문맥(하나님에 대한 찬양) 속으로 삽입되었다. 이방 세계의 많은 퀴리오이들과 대조되고 창조의 대행자(고전 8:6)로 인정된 단 한분 퀴리오스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교에서 고백하는, 그리고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에게 전도할 때 전파하는 한 분이신 하나님과 일치하는 분이다. 따라서 기독교 선교사들은 하나님 아버지를 믿을 뿐만 아니라 퀴리오스이신 예수님도 믿으라고 촉구했다(행 5:14; 행 18:8).
(d)  퀴리오스의 주권.
① 퀴리오스이신 예수님 앞에서의 기독 공동체(교회)의 활동. 기독교 공동체의 삶에 관한 모든 표현들을 보면 기독교 공동체는 권위를 가지고 그것을 공동체에 행사하는 퀴리오스 앞에 서있다(고전 4:19; 고전 14:36; 고전 16:7). 
그는 그 공동체를 성장하게 하며(살전 3:12 이하) 사도들에게 권위를 부여하고(고후 10:8; 고후 13:10) 그의 몸의 지체들에게 서로 다른 직책을 부여한다(고전 3:5; 고전 7:17; 고전 12:5). 퀴리오스는 환상과 계시를 제시해준다(고후 12:1). 
기독교 공동체의 삶 전체가 공동체와 퀴리오스의 관계에 의하여 결정된다(롬 14:8). 몸 즉 완전히 지상적인 기독교인의 존재는 퀴리오스에게 속한 것이다(고전 6:13). 
이러한 사실이 음란한 행동들을 못하게 한다. 퀴리오스는 각 사람에게 맞는 양의 믿음을 준다(고전 3:5; 고전 7:17; 엡 4:7). 그는 평화의 퀴리오스이시므로 평강을 주시며(살후 3:16) 자비를 베푸시고(딤후 1:16) 총명을 주신다(딤후 2:7). 
퀴리오스이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기초 위에서는 심지어 주인과 종의 세속적 관계조차도 새로운 양상을 띠게 된다. 세상의 퀴리오이를 충성스럽게 섬기는 것은 곧 교회의 퀴리오스를 섬기는 것이다(골 3:22이하.; 참조: 벧전 2:13).
② '퀴리오스를 통하여, 퀴리오스 안에'라는 문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라는 공식문구는 감사(롬 7:25; 고전 15:57); 찬양(롬 5:11); 권고(롬 15:30; 살전 4:2)라는 매우 다양한 문맥에 나온다. 
이 모든 구절들에서 퀴리오스라는 단어는 교회의 생활과 개인의 생활에 대해 가지는 높임 받은 주님의 능력을 주장하기 위하여 사용되었다. "주 안에서"라는 문구는 특별히 바울서신에 자주 나온다(예: 고후 2:12; 엡 4:17; 살전 4:1; 롬 14:14; 롬 16:2; 빌 2:29; 빌 3:1; 빌 4:1; 롬 16:21; 롬 16:22; 고전 16:19).
③ 재림에 관한 구절들(고후 5:6; 고후 5:8; 살전 4:17; 고전 1:8; 고전 5:5; 고후 1:14; 살전 5:2; 살후 2:2; 고전 1:7; 살후 2:1; 딤전 6:14; 고전 4:5; 빌 4:5; 살전 6:16이하,; 약 5:7; 살후 1:9; 살후 2:8; 빌 3:20등). (참조: H. Bietenhard).
(참조: W. Foerster; H. Bietenhard; Bauer; J. H. Thayer). 
==왕권/보좌==
qrovno"(2362, 드로노스) 왕좌, 보좌.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드로노스(Homer 이래)는 사용되지 않는 형 드라오(qravw: 앉다, 놓다)에서 유래했으며, '왕좌, 보좌'를 의미한다.
이 단어는 자리 및 발판과 관계가 있으며, 등받이와 팔걸이와 발판을 갖추고 있는 높은 의자를 뜻한다. 이것은 장로들, 교사들이 앉는 자리이며, 나중에 왕이나 신들의 자리가 되었다.
왕의 보좌는 근동에서 헬라로 들어왔다. 신의 보좌는 제우스의 특권이지만 때로 제우스와 헤라를 위한 두 개의 보좌가 있다. 보좌는 죽은 신에 대한 제사에서도 나온다.
2. 70인역본의 용법. 
명사 드로노스는 구약성경에서 159회 나오며, 주로 히브리어 킷세(3678: 영광의 자리, 보좌, 왕좌, 창 41:40; 삼상 2:8; 왕상 2:4; 대상 17:12; 에 5:1; 학 2:22 등), 코르세(3764: 보좌, 왕좌, 단 7:9; 단 5:20)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70인역본에서 드로노스는 영광의 보좌(삼상 2:8), 왕의 보좌(왕상 9:5), 여호와의 보좌(대상 29:23), 악의 보좌(시 94:20)를 나타낸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명사 드로노스는 신약성경에서 62회 나오며, 사변적인 해석없이 하나님의 보좌에 대해 자유롭게 언급한다. 구약성경의 메시야적 종말론의 줄기가 마침내 신약성경의 구원의 사건을 낳고, 다음으로 궁극적인 완성으로 방향을 짓는다. 하나님의 보좌 곁에 또 다른 보좌가 존재하는 것은 새로운 구속적 상황을 표상하는 것이다.
(a)  하나님의 보좌로서의 하늘.
사 66:1 이하에 기초하여, 하늘은 예수님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보좌이다. 따라서 우리가 하늘로 맹세하는 것은 보좌에 앉으신 분이신 하나님으로 맹세하는 것이 된다(마 5:34; 마 23:22). 예수님께서 의인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제시하는 그 구약 성경 구절은 스테반의 연설에서 하나님은 사람의 손으로 지은 처소에 갇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예언적 증언으로 인용된다(행 7:49).
(b)  다윗의 보좌.
신약성경에서 세상의 보좌에 대한 유일한 실제적 언급은 눅 1:52에 있다. 눅 1:32의 다윗의 보좌는 메시야 왕의 보좌이다. 
하나님은 그것을 마리아의 아들에게 그의 조상 다윗의 보좌로서 주셨은즉, 행 2:30에서 그를 가리켜 언급된 왕하 7:12 이하의 예언에 따라, 그는 야곱의 집을 영원히 다스릴 것이었다(참조: 사 9:6). 
또 시 45:6에 마지막 날의 왕의 보좌가 언급되어 있는데, 이것은 히 1:8에서 천사들에 대한 아들의 우월성을 증명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그 의미는 하나님과 함께 보좌에 앉으신 그의 주권적 위엄이다(참조: 히 1:3). 여기서 "다윗 왕조의 사상이 완전한 실현을 이룬다".
(c)  영광의 보좌.
드로노스 독세스라는 표현은 공관복음의 주님의 말씀에서 자주 발견된다. 이 문구는 인자의 주권적 자리를 가리키며, 이 때 그는 심판하고 다스리는 메시야적 영광으로 나타난다. 
이 언급은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를 다스리는 그의 미래의 통치를 나타낸다. 이 통치에서 열 두 제자가 한 역할을 담당할 것이다. 그들은 열 두 보좌에 앉아서 심판할 것이다(마 19:28). 또 이 보좌로부터 인자가 열방에게 심판을 행할 것이라는 언급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다른 자들이 이 심판에 참예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마 25:31 이하).
요한계시록에서도 똑같은 구별이 발견된다. 지상에서 그리스도께서 천년 통치를 시작할 때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계 20:4; 참조: 단 7:9, 22, 26, 이기는 자에게는 높임 받으신 주님과 함께 보좌에 참예하리라고 약속됨, 계 3:21). 그러나 천년의 끝에는 세상 심판의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자만 보인다(계 20:11).
(d)  은혜의 보좌.
히브리서는 대제사장이신 예수님께서 육신의 날로 계신 동안 모든 시험을 견디시고 이제 하늘로 오르사(히 4:14) 위엄의 보좌(히 8:1) 곧 하나님(히 12:2)의 보좌 우편에 앉으신 사실에 의거하여 하나님의 보좌를 드로노스 테스 카리토스라고 부른다. 그것은 은혜의 보좌로 불리는데, 이는 "긍휼없는 심판 보다 오히려 용서하는 은혜가 거기서부터 이제 흘러나오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보좌가 은혜의 보좌일지라도 여전히 그의 주권적 위엄의 상징이다.
(e)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
하나님의 주권적 위엄의 상징적 표현으로서의 하나님의 보좌는 요한계시록에서 보좌에 대한 환상의 핵심에 있다(계 4장). 그것은 하늘에 있으며, 환상에서 그 위에 앉으신 분과 불가분 결합되어 있다. 
보좌 그 자체는 묘사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하늘의 보좌가 있는 그 장소의기타 모든 것들이 보좌를 중심으로 묘사되어 있다(계 4:3-7). 이상에서 살아있는 생물(계 4:8-9)과 장로들이(계 4:10-11)의 경배는 보좌의 앉으신 분께 집중된다. 이 표현은 하나님의 창조주로서의 무한한 영광에 비추어 거의 하나님을 가리키는 하나의 명칭이다(계 4:9; 계 4:10; 계 5:1; 계 5:7; 계 5:13; 계 7:15; 계 21:5; 참조: 또한 계 19:4). 따
라서 모든 피조물(계 5:13)이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양에게" 경배를 돌린다는 것은 보다 의미심장하며, 땅에 거하는 자들이 심판을 두려워하여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양의 진노에서" 숨기를 구한다는 것도 역시 그러하다(계 6:16). 
요한계시록의 기자에게 있어서 높임 받으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보좌에 참예한다. 이것은 마지막 장의 새 예루살렘에 대한 환상에서 가장 분명하게 표현된다. 
한편 계 7:15에서 흰옷을 입은 무리는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으며,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실 것이다(계 7:17). 생명수의 강이 "하나님과 및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나온다(계 22:1). 그리고 "하나님과 그 어린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을 하나님의 도성에 대해 분명히 말한다(계 22:3). 종국에 하나님의 보좌가 "땅으로 내려올" 때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라고 불리운다. 계 3:21에서 이미 예수님은 그의 아버지의 보좌에 함께 하며, 그는 이기는 자들에게 보좌에 함께 앉을 것을 약속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보좌에 이기는 자들의 무리가 함께 하는 것에 대해 요한계시록의 환상에서는 묘사하지 않는다. 
계 4:4의 24장로들의 보좌는 하늘에서 다스리는 권세들의 자리이다. 그들의 통치권은 창조주로서의 하나님의 위엄과 관련하여 아무 의미가 없음은 그들이 보좌에 앉으신 자 앞에 엎드리고 보좌 앞에 면류관을 던진다는 사실에서 압도적으로 표현된다(계 4:9; 계 4:10). 
그리고 세상 끝날에 하나님의 새로운 세계에서 하나님의 통치의 자리는 어린양의 보좌라는 사실에서 더욱 더 분명해 진다. 한 가지의 동일한 통치권을 대표하는 이 이중적 보좌에 대적하는 대응물이 있다.
(f)  사탄과 짐승의 보좌.
버가모 교회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때로 순교를 당할 수도 있는 핍박을 언급하면서 사탄이 거하는 이 도성에 사탄의 위(보좌)가 있다고 말한다(계 2:13). 
이 강한 표현은 로마 제국의 권력이나(계 2:9에도 불구하고) 유대인 회당을 가리키는 것 같지는 않다. 또 제국적 제사의 중심인 아구스투스와 로마의 신전이 사탄의 위로 불리웠을 가능성도 희박하다. 왜냐하면 소아시아에서 이 제사의 본부는 에베소에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소테르 아에스쿨라피우스에 대한 버가모 특유의 제사를 가리킨다는 견해가 더 그럴듯하다. 그의 상징은 뱀이었으며 그의 기적적인 치료는 예수님의 구원 사역에 대한 악랄한 모방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이교 사상에 스며있는 순례 여행의 그러한 장소는 사실상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의 보좌를 나타내는 지역이었던 것이다. 만약 이 적대적인 사탄의 세력이 거한 실제 구조물을 반드시 가정해보아야 한다면 버가모 성곽에 있는 거대한 제우신 제단으로 보는 것이 가장 그럴듯한 것이다. 
이 표현은 이러한 종교적 상징들을 모두 "부여한 총체"를 나타낸다고 보는 것이 개연성 있다. 계 13:2에 보면 사탄은 위를 가졌다고 전제한다. 
여기서 용은 첫번째 짐승, 즉 적그리스도에게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주었다. 또 다섯째 천사가 그 대접을 짐승의 보좌에 쏟았다(계 16:10). 여기서 보좌와 통치권이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은 뒤이어 나오는 "그 나라가 곧 어두워지며"라는 구절에서 보여진다.
(g)  천사들의 계급으로서의 보좌.
골로새서의 기독론적 주석에서 의하면, 모든 다른 피조물들과 마찬가지로 보이지 않는 세력들도 "그에게", 즉 "그의 사랑하는 아들에게" 창조되었으니,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 만이 아니라 무엇보다 "보좌들"까지도 그에게 창조되었다(골 1:16). 이 칭호는 스라이브 에녹서 20:1에서 기자가 일곱번째 하늘에서 본 천상적 세력들의 목록에서 나온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레위의 언약에서 일곱번째 하늘에서 '보좌들과 권세들'이란 표현을 발견한다. 비록 정확한 구분은 가능하지 않다하더라도 이 표현은 천사들 중 가장 높은 계급 가운데 하나를 가리키는 것 같다. 
이 명칭은 천사적 세력으로 분명 여겨지는 24장로들(계 4:4)처럼 그들도 그러한 보좌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주는 것일 것이다.(O. Schmitz).
(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O. Schmitz). 
===능력===
[엡1:20, 21, 22, 23] *20.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21. 모든 통치[=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주관자]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22.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23.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능력===
duvnami"(1411, 뒤나미스) .힘, 세력, 능력, 역량.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뒤나미스(Homer. 이래)는 뒤나마이(duvnamai, 1410)에서 유래했으며,
(a)  ① '능력, 힘, 세력'
② '가능성, 할 수 있음'
③ 신체적, 지적, 영적 '힘, 능력'을 의미한다.
(b)  호머 이래로 자주 발견되는 뒤나미스는 '성취할만한 능력, 체력'을 의미하며, '군대, 전투력', 그리고 '정치력'을 의미하기도 한다. 인간의 본성에 대해 깊이 사고하는 헬라 철학자들과 의학자들은 그 개념을 체력과 정신력에 의존하는 생존하고 활동하고자 하는 힘 혹은 능력이라는 그 말의 본래 의미로 사용하였다.
뒤나미스는 자연의 영역에서 나타난다. 예를 들면 그 말은 더위와 추위의 기세, 식물들과 자연 요소들을 치유하는 능력이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헬라 시대에 그 말은 형이상학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포시도니우스(Posidonius)는 기본적인 원소에서 생명체의 원리를 보았다.
스토아 학자들은 사방에 퍼져있는 창조적인 힘을 하나님과 동일시하였다(Alexander of Aphrodisiensis).
영지주의자들은 하나님을 전능하신 자로 찬양하였으며 인간들이 거룩한 힘과 합해짐으로써 구원을 받을 것으로 생각했다(Corp. Herm., Poimandres, I, 26).
사람들은 특히 마술을 통해서 초자연적인 능력들을 공유하고자 하였다(I amblichus, De Mysteriis 2, 1). 병든 사람들은 아스클레피우스(Asclepius) 신의 능력의 실연으로 말미암아 치료 받고자 하였다(P. Oxy).
2. 70인역본의 용법. 
명사 뒤나미스는 70인역본에서 약 600회 나오며, 주로 하일(138회)과 차바(113회)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며, 일반적으로 '군사력'을 의미한다.
뒤나미스는 또한 통치자의 힘, 천국 그리고 하나님의 힘에 대해 사용되었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명사 뒤나미스는 신약성경에서 118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a)  그리스도의 사실.
신약성경의 모든 개념들과 마찬가지로, 신약성경의 힘에 관한 개념도 그리스도의 사실에서부터 결정적인 영향을 받았다. 이 사실은 분명히 언제나 하나님의 힘과 관련되는 구약성경의 메시야관과 관련되어 있다(참조: 사 9:5; 사 11:2; 시 110:2; 마 5:5). 이 힘은 주로 왕적인 능력이지만 예언적인 힘도 포함되어 있다(참조: 미 3:8; 행 7:22[모세]; 눅 1:17[세례(침례)요한]).
신약성경에서는 예언적인 면이 매우 두드러진다(참조: 눅 24:19). 그렇지만 그리스도는 힘을 부여받은 선지자 이상의 존재이다; 그의 전 존재는 특별히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결정된 유일 무이한 것이다. 이것은 동정녀 잉태 기사에서 성령과 지존자의 능력의 병행에서 표현된다. 형식을 묘사하려는 어떤 시도도 행해지지 않았다. 성육신은 정상적인 발생 과정을 초월하는 잉태와 더불어 시작된다. 그리스도 탄생 때 독특하고 특별한 능력의 작용으로 말미암아 그에게 하나님의 아들이란 칭호가 붙여진다(눅 1:35). 이런 사실에 의거해 볼 때, 그리스도는 그의 사역에서 성령의 특별한 능력을 지닌 자이다(눅 4:14, 눅 4:36). 하나님의 본질이 힘이므로, 힘의 부여는 성령의 선물과 결부되며, 성령의 선물은 그리스도에게 그의 권세(엑수시아)를 전달해 준다. - 이 권세는 그가 귀신을 쫓아내거나 병자를 고칠 때 행사할 수 있는 능력(뒤나미스)을 지니는 권세이다(눅 5:17; 눅 6:19; 눅 8:46). 이런 이유로, 그의 제자들이 증거한 바는 하나님께서 성령과 권능으로 예수님께 기름 부으셨다는 것이다(행 10:38). 그가 행한 일들도 뒤나메이스(복수)라고 불리워질 수 있다(막 6:2; 눅 19:37; 또한 행 2:22). 이 일들은 그 당시 세계에서 행한 비슷한 능력의 행동들과 다음의 세 가지 면에서 다르다:
① 이 일들은 마술과 관련이 없다.
② 이 일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인, 말씀으로 행해지는데, 여기에서 하나님 나라가 역사 속으로 들어와서 적대 세력의 지배를 전복시킨다.
③ 이 일들은 이 일을 행하시는 분에 대한 믿음과 이 일들이 행해지는 사람들의 믿음을 전제하며, 따라서 인격적인 관계가 요구된다(마 13:58; 참조: 막 9:14이하). 믿음으로 모든 것이 가능하다. 믿음에는 능력이 있다(막 9:23). 왜냐하면 믿음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에 참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능한 일들은 놀라움과 찬양을 불러 일으키며(마 13:54; 눅 19:37), 헤롯에게서는 양심의 불안을 불러 일으킨 것 같다. "그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는 세례  요한이라 저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으니 그러므로 이런권능이 그 속에서 운동하는도다 하더라"(마 14:2).
요한복음은 뒤나메이스를 사용하지 않고, 엑수시아나 세메이온과 함께 동사 뒤나스다이를 사용함으로써, 강조점을 행동에서 능력으로 전이시킨다: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가로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줄 아나이다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요 3:2). 충만한 메시야적인 능력에서 행해진 세메이아는 독특한 행동들이다. 예수님은 오로지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계시기 때문에, 즉 그가 아버지와 교제함으로써 하나님의 권능을 지니기 때문에 그것들을 할 수 있다.
요한복음에는 뒤나미스라는 말이 없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예수님의 메시야 활동은 아들의 보내심에,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의 뜻의 통일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들은 아버지 없이 아무 일도 할 수 없다(요 5:19, 요 5:30, 뒤나타이). 그리고 그의 기적들은 예수님의 신적 권능을 드러내는 징표이다(요 3:2; 요 9:16; 요 10;21, 항상 뒤나타이라는 단어가 사용된다). 반대로 인간들이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하나님의 실재의 영역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어둠의 세계 속에 감금되어 있기 때문이다(요 3:3; 요 8:43; 요 14:17, 우 뒤나타이). 그들은 오직 선택(요 6:44)과 거듭남(요 3:5)을 통해서 해방될 수 있다.
요한에게서 볼 수 있는 특별한 특징은
① 뒤나스다이에 유일무이한 그리스도 사건이 있다는 점.
② 이 사건 속에 있는 권능은 새 시대를 여는 하나님의 권능이라는 점이다. 이 권능은 십자가 사건과 부활에서 특별하게 나타난다.
그리스도 자신의 부활은 마 22:29에 나오는 그의 말씀을 뒷바침해 준다: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게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행 2:24에서 베드로는 이 부활의 권능을 매우 인상깊게 부정적인 표현으로 나타낸다: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죽음의 권세는 깨뜨려졌다. 하나님의 권능이 예수님께서 권능의 행동을 하도록 그에게 능력을 부여해 준 것처럼 또한 예수님께서 새 생명을 가지도록 능력을 부여해 준다.
바울은 고전 6:14("하나님이 주를 다시 살리셨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과 고후 13:4("성구삽입")에서 이 점을 설명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그의 부활로 말미암아 권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언된다: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롬 1:4).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권능이라고 전파한다: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 1:24). 부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이 아니며 그에게 권능 그 자체가 부여된 것도 아니다; 부활로 말미암아 그가 소유하게 된 것은 성육신의 외적인 약함과 대조되는 완전한 능력의 아들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으셨으니 우리도 저의 안에서 약하나 너희를 향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저와 함께 살리라"(고후 13:4). 만약 그리스도가 절대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불리운다면,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능력을 의인화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안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 안에서 승리적으로 작용하며 그것을 목적지에까지 이끌어가기 때문이다.
히브리서에서 이 능력은 파괴될 수 없는 생명의 능력이라고 일컬어진다; 이 권능은 죽을 수 밖에 없는 것의 도달 범위를 넘어 선다. 이 능력으로 아들은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이 세상을 다스린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3).
요한계시록에서 이 능력은 영광과 동일시된다: "그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것 같더라"(계 1:16).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은 능력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다: "큰 음성으로 가로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계 5:12).
그리스도의 백성들은 그가 그의 일을 완성하고 다른 모든 세력들을 굴복시켜 하나님의 완전한 통치를 확립하실(*빌 3:21) 능력을 가지고 오시기를 기다린다: "또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하시니라"(막 9:1). 이 오심은 눈으로 볼 수 있을 것이며 그리스도는 그의 능력있는 천사들을 동반하신 것이다: "환난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주 예수께서 저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중에 나타나실 때에"(살후 1:7).
(b)  하나님의 능력, 악마적인 세력들, 그리고 구원의 능력.
① 그리스도 사건은 하나님의 능력에 대하여 빛을 던져준다. 그리스도의 능력은 하나님의 능력이며, 따라서 이것은 부여된 것으로 묘사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제를 나눔으로써, 이 능력을 부여받는다. 따라서 그의 능력은 구약성경에서처럼, 종말론적 사건의 역사적인 능력이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그리스도 사건에서 나타난다(마 22:29; 참조: 히 11:19). 하나님은 그의 전능하신 통치에 의해 뒤나토스가 된다(참조: 눅 1:49). 그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참조: 마 19:26). 믿음으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만물은 그의 영원한 능력과 신성을 분명하게 선언한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찌니라"(롬 1:20). 그러므로 신약성경은 마 6:13; 계 4:11 등에서처럼, 구약성경의 송영을 받아들인다. 계 11:17-18과 계 12:10의 송영은, 그리스도 사건에서 하나님 능력이 이미 나타났듯이, 하나님의 능력이 적대적 세력들을 멸망시키고 세상을 완전하게 하시리하는 고백을 암시하고 있다.
② 그리스도 사건은 또한 악마적인 세력을 이해하는데 새로운 빛을 비춰준다. 신약성경은 이 세력들을 인정한다: "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마 24:29). 이 세력들은 우주적 세력인 동시에 천사적인 세력들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더불어 그 힘을 잃어버렸으며 그의 재림 때 공개적으로 그 힘을 박탈당할 것이다. 이 두 사건들 사이에는 긴장이 있다. 신자들의 새 생명은 하나님에게서 유래한 것이며 그의 지배 아래 있기 때문에(엡 1:20-21; 롬 8:38, 롬 8:39), 이 세력들은 제거된다. 그렇지만 그들은 여전히 싸우며(계 13:2, "내가 본 짐승은 표범과 비슷하고 그 발은 곰의 발 같고 그 입은 사자의 입 같은데 용이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그에게 주었더라") 결국 복종하게 될 것이다: "그 후에는 나중이니 저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고전 15:24). 적그리스도는 능력을 가지고 나타나서 거짓을 퍼뜨릴 것이다; 그리스도의 오심만이 다시 그를 최종적으로 멸망시킬 것이다: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살후 2:9).
③ 그리스도의 사역 또한 구원의 능력에 관한 질문에 새로운 답을 준다. 제자들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에 대해 묻자, 그리스도는 구원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은 없으며, 오직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만이 구원하실 수 있다고 대답하였다(참조: 마 19:26).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인간의 무능력을 날카롭게 강조한다. 우리의 약함 때문에, 율법조차도 죄와 죽음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할 수 없다(롬 8:3).
히브리서는 제사에서 똑같은 무능력을 발견하고 있다(*히 10:1, 히 10:11).
요 3:3에서 언급되듯이, 만약 거듭나지 아니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우리 스스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도 없다: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줄 알지 못함이로다"(요 8:43).
만약 아버지께서 이끌지 않으신다면, 어느 누구도 하나님께 나아올 수가 없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요 6:44). 하나님만이 구원할 능력을 지니시며, 그는 예수님 안에 그의 권능을 나타내신다(롬 1:16; 고전 1:18). 이 능력은 신비적인 입교식을 통하여 주어지는 것도 아니고, 단순히 구원을 지시해 주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십자가의 도의 능력이다. 이것은 우리를 어둠의 권세에서부터 해방시키고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의 나라로 우리를 옮김으로써, 구원을 부여해 준다. 이것은 그리스도 사건의 구원 행동, 즉 역사 안에서 행한 하나님의 능한 행동에 근거하고 있다.
우리는 벧후 1:3-4에서만, 즉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를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고 우리에게 생명과 경건에 속한 것들을 주신다고 할 때만 역동적인 개념보다는 실질적인 개념을 엿볼 수 있다.
(c)  제자들의 능력.
전파는 하나님의 뒤나미스로서,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을 계속하며, 그리스도를 대표하는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능력을 부여 받았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보내실 때(눅 9:1), 능력으로 그들을 무장 시켰다. 이 능력은 악마의 힘을 이긴다: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눅 10:19). 제자들은 믿음으로만 이 능력을 가질 수 있다(참조: 막 9:14이하). 이것은 성령에 의한 그리스도 자신의 임재의 능력이다(눅 24:48; 눅 24:49; 행 1:8). 능력으로 설교하고 병을 고치게 하는 특별한 능력의 부여가 오순절에 일어났다(행 4:7이하, 행 4:33; 행 6:8, 행 6:10).
바울의 사역은 표적과 기사의 능력에 의해, 즉 성령의 능력에 의해 효력을 발한다: "이 일로 인하여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롬 15:19).
뒤나메이스는 사도직의 표시이다(갈 3:5; 살전 1:5). 그러나 이 능력은 그리스도의 임재 방식뿐만 아니라 신자의 존재 방식으로서의 성령의 능력이다. 사도들은 십자가의 증인들이다; 그들은 외적으로는 약하나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전파하며, 따라서 청중들의 믿음은 하나님의 능력에 의거하게 된다(참조: 고전 2;1이하). 뒤나미스는 메시지의 형식이 아닌 메시지의 내용과 관련된다. 전파의 목표는 성령으로 그리스도의 임재를 나타내는 것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구원 능력을 나타내는 것이다. 바울이 사역자가 된 것도 똑같은 능력에 의해서이다: "이 복음을 위하여 그의 능력이 역사하시는대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군이 되었노라"(엡 3:7). 고전 5:3-4에서처럼, 공동체의 유익을 위하여 그리스도의 능력은 또한 사법적인 것일 수도 있다: "3 내가 실로 몸으로는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함께 있어서 거기 있는 것 같이 이 일 행한 자를 이미 판단하였노라 4 주 예수의 이름으로 너희가 내 영과 함께 모여서 우리 주 예수의 능력으로". 여기에서는 만일 신자들이 사단에게 넘겨지지 않는다면, 사단은 신자들을 제어할 힘을 가질 수 없다는 사실과 심지어 사단에게 넘겨질 경우에도 그 목적은 여전히 구원에 있다는 사실이 주목되어야 한다. 사도 자신의 삶과 사역에서 그리스도의 능력은 끊임없이 능력을 강화하는 것을 의미한다(빌 4:13; 딤전 1;12; 딤후 4:17). 이 강화하는 것은 원조의 형태를 취하며, 따라서 마나(mana)의 견지에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그의 종 사이의 인격적인 관계의 견지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d)  공동체의 능력.
하나님의 구원 능력에 의거하는 공동체가 바울의 목표이다(참조: 고전 2:1이하). 신자들은 "주 안에" 있을 때 강할 것이다(참조: 엡 6:10). 사단의 세력에서 구출되었지만, 여전히 위험에 싸여있는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능력이 그들을 보호하고 보존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은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보호 받는다: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벧전 1:5). 이 사도의 기도는 그들이 하나님의 큰 능력을 누리게 해 달라는 것이다: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1:19), 혹은 그들이 모든 능력으로 강건하게 해달라는 것이다: "그 영광의 힘을 좇아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골 1:11). 그리스도의 부활에 근거한 이 능력은 그들의 부름과 영광스런 기업에 대한 소망을 만들어 낸다. 기독교인들이 참고 인내하려면 이 능력을 알아야 한다. 이것은 보전할 뿐만 아니라 변화시키는 힘이다. 성령의 능력으로 그들에게는 소망이 넘친다: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롬 15:13). 속 사람이 성령의 능력으로 강건하게 됨으로 그들은 포괄적으로 말해서 그리스도와 교제를 나누는 가운데서, 그리고 그리스도의 사랑 가운데서 성장한다(참조: 엡 3:14이하). 그들은 하나님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 없고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요일 3:9), 사랑할 수 있는 새로운 능력을 가진다(참조: 요일 4:7). 모든 선한 결의와 믿음의 일은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성취될 것이다: "이러므로 우리도 항상 너희를 위하여 기도함은 우리 하나님이 너희를 그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여기시고 모든 선을 기뻐함과 믿음의 역사를 능력으로 이루게 하시고"(살후 1:11). 공동체의 구성원들도 뒤나미스를 행하는 영적인 은사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어떤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이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고전 12:10). 더구나 공동체에서 역사하는 능력은 궁극적으로 부활의 능력이다: "3 이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말씀하시는 증거를 너희가 구함이니 저가 너희를 향하여 약하지 않고 도리어 너희 안에서 강하시니라 4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으셨으니 우리도 저의 안에서 약하나 너희를 향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저와 함께 살리라"(고후 13:3-4). 하나님은 주님을 일으키셨으며 그의 능력으로 우리를 일으키실 것이다: "하나님이 주를 다시 살리셨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고전 6:14). 비천한 몸이 영광의 몸으로 변하는 것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근거한다(빌 3:21). 어느 누구도 신자들을 그리스도의 손에서 잡아챌 수 없다(요 10:28-29). 바울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의 부활의 능력 - 그의 백성을 위해 새롭고 영원한 생명을 창출해내는 능하신 행동 - 을 알기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었다. 이것은 진정한 뒤나미스의 원천이다.
(e)  능력과 약함.
하나님의 능력은 인간 존재의 약하고 부패하기 쉬운 영역에서 역사한다. 따라서 이것은 믿음으로만 볼 수 있는 것이지만,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이것은 인간의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으로 알려진다. 십자가의 도는 외적인 약함 속에 감추어져 있다: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으셨으니 우리도 저의 안에서 약하나 너희를 향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저와 함께 살리라"(참조: 고후 13:4). 그러나 하나님의 약함이 인간의 강함보다 더 강하다(고전 1:25). 바울은 이런 사실을 그의 사도 직무의 모든 약함 속에서 인식하게 되었다(고후 12:9-10; 참조: 빌 4:13). 이 초월적인 능력은 비겁의 영이 아닌 능력과 사랑과 자제(딤후 1:7)의 영을 주시는 하나님께 속한다(고후 4:7). 약함은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하는데 필요한 전제 조건이다. 이 약함은 그리스도의 임재의 보증(증거) - 바울은 이 증거에서 자아로부터 해방과 하나님에 대한 의지를 발견하다. - 이다. 약함 속에서 강해진다는 법칙에 따라 하나님의 부활 능력은 복음의 사역자에게 있어서나 그리스도교 공동체 전체에게 있어서나 더욱 더 풍성하게 역사한다.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능력안에 있어")'는 사도와 모든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믿음의 실재를 표현해 준다(고후 6:7).
(참조: W. Grundma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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