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1.03.27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눅24.여인들이부활고지받음.베드로의무덤방문.두제자와담화하심_자신을 드러내심.11제자에게나타나심.승천_기쁨과찬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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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24장

1.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2.  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겨진 것을 보고

3.  들어가니 주 예수의 시체가 보이지 아니하더라

4.  이로 인하여 근심할 때에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섰는지라

5.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6.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

7.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한대

8.  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9.  무덤에서 돌아가 이 모든 것을 열한 사도와 다른 모든 이에게 알리니

10.  (이 여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라 또 그들과 함께 한 다른 여자들도 이것을 사도들에게 알리니라)

11.  사도들은 그들의 말이 허탄한 듯이 들려 믿지 아니하나

12.  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에 달려가서 구부려 들여다 보니 세마포만 보이는지라 그 된 일을 놀랍게 여기며 집으로 돌아가니라

===엠마오 길에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다

13.  ○그 날에 그들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마을로 가면서

14.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15.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16.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

18.  그 한 사람인 글로바라 하는 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당신이 예루살렘에 체류하면서도 요즘 거기서 된 일을 혼자만 알지 못하느냐

19.  이르시되 무슨 일이냐 이르되 나사렛 예수의 일이니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이거늘

20.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리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 주어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1.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 이뿐 아니라 이 일이 일어난 지가 사흘째요

22.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23.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아나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

24.  또 우리와 함께 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이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 하거늘

25.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주와 하나됨의 교통 안에 살기(차원과 영역, 상황-제한을 초월하는, 천지에 충만하신 분, 영적 참생명 호흡이신 분에 대한 살아 생동하는 발휘하는 믿음-참소망과 사랑으로 순종함으로써 반응함이 중요.. (부분적인 순종은 불순종임을 알아야 함, 주님이 주인-머리 되심이 그 무엇보다도 중요!!) 이것의 결여는 곧 영적 농맹자<귀머거리로 인한 맹자> 상태, 이는 결국 영적 불임-영적 후사 산출 불능 상태 초래하게 됨,..깨어 있어야 하며 깨어나야 함..추구하는 믿음으로!!.. 요11에서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하신 말씀 적용 필요.. [belief-->faith]-->love.abide-->witness, having testimony됨]적용해야 Q의 원하시는, 선하고 기뻐하고 온전하신  뜻 이룸의 참소망(티크와) 으로 사는  주님 증인(사43:8-10)됨에 이르게 될 것 :: 역동적 참생명 영성 단계로 보면 천로역정 영성 < 기본 바탕> 위에 요나 영성, 그 위에 <하나-일치되어계신 주님과 동거동주동행함의>길위의 영성으로 행함이 필요

......[사43:8-13...*8.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백성을 이끌어 내라   *9.  열방은 모였으며 민족들이 회집하였는데 그들 중에 누가 이 일을 알려 주며 이전 일들을 우리에게 들려 주겠느냐 그들이 그들의 증인을 세워서 자기들의 옳음을 나타내고 듣는 자들이 옳다고 말하게 하여 보라   *10.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는 나의 증인, 나의 종으로 택함을 입었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알고 믿으며 내가 그인 줄 깨닫게 하려 함이라 나의 전에 지음을 받은 신이 없었느니라 나의 후에도 없으리라   *11.  나 곧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구원자가 없느니라   *12.  내가 알려 주었으며 구원하였으며 보였고 너희 중에 다른 신이 없었나니 그러므로 너희는 나의 증인이요 나는 하나님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3.  과연 태초로부터 나는 그이니 내 손에서 건질 자가 없도다 내가 행하리니 누가 막으리요]

26.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27.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시편 등>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28.  그들이 가는 마을에 가까이 가매 예수는 더 가려 하는 것 같이 하시니(어두워진, 믿음 없는/닫힌/제한하는 마음이라 깨닫도록 미처 다 설명하지 못하셨다!!)

29.  그들이 강권하여 이르되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 때가 저물어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나이다 하니 이에 그들과 함께 유하러 들어가시니라

30.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31.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 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32.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33.  곧 그 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 및 그들과 함께 한 자들이 모여 있어

34.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보이셨다 하는지라

35.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

===열한 제자에게 나타나시다

36.  ○이 말을 할 때에 예수께서 친히 그들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니

37.  그들이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38.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39.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4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발을 보이시나

41.  그들이 너무 기쁘므로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랍게 여길 때에 이르시되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니

42.  이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니

43.  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

44.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45.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46.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47.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48.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ear-witness-->eye-witness...::: 담장 너머로 뻗어나가 땅끝까지 증인되야 함!!..40일간 보이는 임재-보이지 않는 임재 연습 시키셨음 + <승천후> 10일간 전심 기도로 성령 대망함

49.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

===하늘로 올려지시다

50.  ○예수께서 그들을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사 손을 들어 그들에게 축복하시더니

51.  축복하실 때에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려지시니]

52.  그들이 [그에게 경배하고]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가

53.  늘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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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4장 (개요)

우리 주 예수께서는 적대자들의 갖은 흉계에도 불구하고 영광 중에 돌아가셨다. 적대자들은 그의 죽음을 욕되게 하려고 갖은 노력을 다 하였다. 그러나 그는 다시 살아나셔서 더 큰 영광을 보이셨다. 이 마지막 장에선 그 부활에 대해 읽게 될 것이다. 마태복음이나 마가복음에서보다 이 복음서는 예수 부활에 대한 증거와 증명의 사실들이 더 자세히 언급되어 있다. 그 내용을 간추리면

Ⅰ. 무덤을 찾아 간 여인들에게 두 천사가 나타나 그는 자신의 말대로 죽음에서 부활하셨다고 말해 준다(1-7). 그들은 이 사실을 다시 제자들에게 알려 준다(8-11).

Ⅱ. 베드로도 무덤을 방문하고 거기서 된 일들을 보게 된다(12).

Ⅲ. 그리스도께서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와 함께 말씀을 나누셨으며 그들에게 자신을 밝히셨다(13-35).

Ⅳ. 같은 날 저녁 열 한 제자에게 나타나신다(35-49).

Ⅴ. 제자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하늘로 승천하신다. 뒤에 남겨둔 제자들의 기쁨과 찬양(5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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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2.  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겨진 것을 보고

3.  들어가니 주 예수의 시체가 보이지 아니하더라

4.  이로 인하여 근심할 때에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섰는지라

5.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6.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

7.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한대

8.  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9.  무덤에서 돌아가 이 모든 것을 열한 사도와 다른 모든 이에게 알리니

10.  (이 여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라 또 그들과 함께 한 다른 여자들도 이것을 사도들에게 알리니라)

11.  사도들은 그들의 말이 허탄한 듯이 들려 믿지 아니하나

12.  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에 달려가서 구부려 들여다 보니 세마포만 보이는지라 그 된 일을 놀랍게 여기며 집으로 돌아가니라


부활(눅 24:1-12)

어떤 식으로 그리스도의 영혼과 육체가 부활을 통하여 재결합하였는가 하는 것은 하나의 신비적인 일이다. 

허나, 우리에겐 "알려지지 않은" "우리에게 속하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그가 진실로 죽음에서 부활하셨으며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명하였다는 그 부활의 "숨길 수 없는 증거"들은 "밝혀져 우리와 우리 후손들에게 알려졌다." 지금 읽은 구절 속에는 마태복음이나 마가복음에서 읽었던 내용과 본질적으로 같은 것들이 있다.

Ⅰ. 그리스도가 죽어 장사 지낸 후에도 그를 따르던 선한 여인들이 그에게 보여 준 사랑과 존경심을 읽을 수 있다(1절). 

그들은 안식일이 지나자마자 서둘러 "무덤에 가서" 그의 시체에 향료를 뿌리려 하였다. 

요셉이 싼 세마포를 풀어 시체를 꺼내려는 것이 아니라 머리와 얼굴에, 특히 상처난 손과 발에 기름을 바르고 그의 시체와 그 주위에 향료를 뿌리려고 하였다. 

이는 마치 우리가 평소에 친구의 시체나 무덤 주위에 꽃을 뿌려 될 수 있는 대로 무덤의 흉한 꼴을 털어 버리고 또한 그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무언가 쓸쓸한 기분을 없이해 주려는 순수한 의도를 보이는 것과 같다. 

그리스도에 대한 이 선한 여인들의 열심은 식지 않았다. 안식일 전날 저녁에 준비했을 이 향유는 값이 대단히 많이 나가는 것이었겠지만 그들은 그것을 지니고 가면서 "무슨 일로 이 비싼 것을 낭비할 것인가?" 하며 생각을 돌이키지 않았다. 

이것이 곧 자선의 법칙이다. "각각 그 마음의 정한대로 할 것이다"(고후 9:7). 그리스도를 위해 준비된 것이면 어쨌든 그를 위해 쓰도록 하자. 

그들의 사랑의 열심을 보라.. 그들은 날이 새자마자 일찍, 아주 일찍 그것을 가지고 무덤으로 달려갔다. 

그 여인들의 이름을 살펴보자. "막달라 마리아," "요안나"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였다. 

그들은 대단히 관록 있는 여인들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 또다른 목격자가 있었음을 1절과 10절을 보아 짐작할 수 있다. 

또 다른 목격자로서 그들은 향유를 마련하는 일엔 동참하지는 못했지만 그들이 무덤에 간다고 했을 때 함께 따라 나선 자들이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후 그를 아는 자들이 더 늘어나게 되리라는 그의 말씀(요 12:24, 32)과 일치한다. 

예루살렘의 여인들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여인들이 너무도 열렬히 사모하며 따르는 것을 보고 그들도 함께 그를 알고 싶어하였다. 

그래서 여기에 "다른 여인"들이 그 일행 속에 포함된 것이다. 몇몇 사람의 열심으로 다른 사람까지 열심을 내게 할 수 있는 법이다.

Ⅱ. 돌이 굴러져 있고 무덤이 텅 비어 있는 것을 본 그들은 깜짝 놀랐다(2, 3절). 

그들은 이 사실에 대하여 "근심하였다." 

그러나, 사실 그들은 기뻐해야 할 여러 가지 이유가 이 사실 속에 있었다. 

"돌이 무덤에서 굴러 옮기우고"(이것을 보면 그는 법적인 석방을 받아 밖으로 나와도 된다는 허락을 받은 것으로 여길 수도 있었다) 

그들은 "주 예수의 시체를 보지 못하였다." 

이것은 그가 자신의 능력으로 밖으로 나왔음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이처럼 선량한 그리스도인들은 때로 위로를 받고 서로 즐거워해야 할 일을 가지고 오히려 서로 근심하는 경우가 있다.

Ⅲ. 두 천사가 나타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하여 자세히 일러주었다. 

그들은 "찬란한 옷"을 입고 여인들에게 나타났다. 단지 흰옷이 아니라 여인들 주위에 광채를 뿌리는 "빛난" 옷이었다. 

그들은 먼저 무덤밖에 "한" 천사가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천사는 그제서야 "무덤 안으로 들어 가" 다른 천사와 함께 앉았다. 

"그들은 예수의 시체가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맡에 다른 하나는 발치에" 앉아 있었다. 이것에 대한 복음서 기자들의 진술은 일치한다. 

여인들은 천사를 보고 혹시 그들이 나쁜 소식을 전하지나 않을까 하여 "두려워하였다." 

그렇지만 천사들에게 캐묻는 대신 그들은 무덤 속에 있는 사랑하는 주님을 보기 위하여 "얼굴을 땅에 대었다." 

그들은 "찬란한 옷"을 입은 천사들보다는 "무덤 옷"을 입은 주님을 보게 되길 바라고 있었다. 

성도들의 눈에는 천사보다도 죽어가는 예수가 더 아름답게 보일 것이다. 

이 여인들은 파숫꾼들에게 발각되었음에도(천사들은 "파숫군"이라 불린다)그 파숫꾼들과 대화를 나눈 것이 아니라 부부처럼 "당신은 내 영혼이 사랑하는 그 분을 보셨나요?"하며 속삭였다. 이에 대하여 천사들은 그들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일러주었다.

1. 천사들은 여인들이 저지르고 있는 어리석은 수색 작업에 대해 깨우쳐 주었다.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5절) 

이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신다"는 사실에 대한 증거가 성립되었다. 그리고 그에 대하여 "그는 산 자가 되었다는 증거를 얻게 되었다"(히 7:8). 

"나는 내 구세주가 살아 계심을 압니다." 이것이야말로 모든 성도들이 받을 위로이다. 

그러나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찾는 자들-이방인들처럼 그를 죽은 영웅으로 간주하여 그 가운데서 찾는 자들-그를 형상이나 십자가상, 인간의 손으로 만든 물건 또는 성서에 기록되지 않은 전통이나 인간의 창조물 안에서 찾는 자들에겐 부활의 증거가 납득이 가질 않는다. 

진실로 피조물에서 행복과 만족을 구하며 이 세상의 불완전한 상태 속에서 완전을 구하려는 자들은 모두 "죽은 자 가운데서 산 자를 찾는 자"라고 이름 붙여야 할 것이다.

2. 그들은 그가 죽음에서 부활하셨음을 여인들에게 확인해 주었다(6절). 

"여기에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그는 자신의 권능으로 살아나가셨다. 그는 자기의 무덤을 버리셨으며 다신 이곳으로 돌아오시지 않으리라." 

이 천사들이야말로 합법적인 증인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의 부활을 위해 하늘에서 급히 보냄을 받고 내려 온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의 보고 역시 거짓이 아님을 확신할 수 있다. 그들이 구태여 거짓말을 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3. 그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그들에게 상기시켰다.

"갈릴리에 계셨을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라." 

그들이 부활에 대한 예언을 믿었거나 명심하고 있었더라면 부활이 일어났을 때 쉽게 믿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전에 그리스도께서 자주 하시던 말씀,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기우리라"는 말씀을 천사들을 통해 다시 듣게 되자 그들은 깜짝 놀랐을 것이다. 

비록 그 일은 하나님의 예정된 계획과 섭리에 의해 이루어진 일들이지만 그 일들을 처리한 자들이 죄없다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는 또 그들에게 "십자가에 못 박히라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들은 그 말씀을 듣고 깊은 관심을 가지고 그대로 이루어진 것을 다시는 잊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에 계속된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는 말씀 또한 마음에 새기게 되었을 것이다. 

이 천사들이 하늘로부터 어떤 "새로운 복음"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님을 유의하라. 그들은 교회의 사도들이 한 것처럼 그리스도의 말씀을 그들 마음속에 새이게 해 주었으며 어떻게 그 말씀대로 살며 지킬 것인가 가르쳐 주었다.

Ⅳ. 이 말씀을 듣고 여인들은 만족하였다(8절). 

여인들은 천사들의 말대로 믿기로 했던 것 같다. 

그들은 "그의 말씀을 기억해냈다." 그리고 그 순간 그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그가 부활하셨다면 더 이상 찾을 필요는 없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제 그들은 제 삼일에는 부활하리라던 그의 말씀을 잊고 제 삼일에 "그의 시체"에 바를 향유를 준비해 온 것이 부끄러웠다. 

적시에 그리스도 말씀을 기억함으로 그의 섭리를 올바로 이해하게 된다.

Ⅴ. 제자들에게 이 소식을 전하였다. 

"무덤에서 돌아가 이 모든 것을 열한 사도와" 그리스도를 따르던 "모든 다른 이에게 고하니"(9절) 

그들이 모두 한 곳에 모여 있었던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아마도 둘 셋씩 각기 흩어져 숙소에 머물러 있다가 한 사람이 다른 이에게 전하고 그가 또 다른 이에게 전하여 그날 아침 모두 그 소식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엔(11절) 그들이 어떻게 그 소식을 받아들였는가에 대해 언급되어 있다. "사도들은 저희의 말이 허탄한 듯이 뵈어 믿지 아니하였다." 

그들은 그것이 단지 여인들의 환상이라고 돌리며 그것은 기억상실에 의한 판단 착오일 뿐이라고 몰아버렸다. 

그들 역시 그리스도의 말씀을 잊고 있었으니, 그가 얼마 전 갈릴리에서 그들에게 하셨던 말씀 뿐 아니라 최근 그가 배반당하시던 날 밤 제자들에게 "잠시 동안 헤어져 있으면 너희는 다시 나를 볼 것이고 나도 너희를 보리라"던 말씀조차도 마음에 새겨두고 있지 못하였던 것이다. 

이 제자들의 우둔함을 볼 때 누구나 경악을 금치 못할 것이다. 

그들 자신이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며 참 메시야로 믿는다고 고백을 수차례 하였으며, 그가 죽어야 하며 다시 살아나셔서 영광으로 들어가실 것이라는 말씀도 수차례 듣고, 죽었던 자가 다시 살아나는 것도 몇 차례 목격했던 그들이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믿는 데는 이처럼 주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분명히 그후로 그들이 이와 똑같은 의문을 품은 자들을 만났을 때, 그들은 그를 자신이 그들과 똑같은 의심을 지닌 적이 있음을 기억하고 그들을 새삼스럽게 여기지는 않게 되었을 것이다. "우리가 한 말을 누가 믿으려 하겠는가?"

Ⅵ. 베드로는 이에 대해 사실을 확인하고자 찾아갔다(12절). 

기록한 대로 그들에게 이 소식을 알려 준 이는 막달라 마리아였다. 요한 복음 20장 1, 2절엔 그가 무덤으로 달려갔다는 표현이 특별히 강조되어 있다.

1. 베드로는 소식을 듣자마자 무덤으로 달려갔다. 

아마도 막달라 마리아가 자기보다 먼저 그곳에 갔었다는 사실을 생각하고 부끄러움을 느끼며 달려갔을 것이다. 

그러나 그 여인들이 그런 소식, 특히 "파숫꾼이 도망갔다"는 소식을 들려주지 않았더라면 그때에라도 달려가려고 마음먹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위험이 없을 때엔 "날아갈 듯 달려 가던 자"들의 대부분은 위험이 있을 땐 "황소걸음"이 될 수밖에 없다. 전날 "자기 주인을 버리고 도망쳤던" 베드로가 지금 "무덤으로 달려가고 있다."

2. 그가 무덤 안을 들여다보았을 때엔 그리스도의 시체를 샀던 세마포는 벗겨져 곱게 개어져 놓여 있고 시체는 어디로 간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천사들의 증언보다는 자신의 눈을 더 신뢰한다는 식으로 눈여겨 살펴보았다.

3. 그는 현명한 자처럼 생각하지 못하고 "그 된 일을 기이히 여기며"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생각나기만 했어도 그것으로 그가 살아났다는 사실을 믿기에 충분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 말씀을 잊고 있었으므로 그는 단지 그 된 일을 보고 놀라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고 돌아갔을 뿐이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올바로 이해하고 그 말씀을 따르기만 하면 우리에게 유익하고 쉽게 받아들여질 것들이 종종 까다롭고 난해한 것으로 여겨질 때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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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마오 길에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다

13.  ○그 날에 그들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마을로 가면서

14.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15.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16.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

18.  그 한 사람인 글로바라 하는 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당신이 예루살렘에 체류하면서도 요즘 거기서 된 일을 혼자만 알지 못하느냐

19.  이르시되 무슨 일이냐 이르되 나사렛 예수의 일이니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이거늘

20.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리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 주어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1.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 이뿐 아니라 이 일이 일어난 지가 사흘째요

22.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23.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아나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

24.  또 우리와 함께 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이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 하거늘

25.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26.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27.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28.  그들이 가는 마을에 가까이 가매 예수는 더 가려 하는 것 같이 하시니

29.  그들이 강권하여 이르되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 때가 저물어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나이다 하니 이에 그들과 함께 유하러 들어가시니라

30.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31.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 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32.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33.  곧 그 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 및 그들과 함께 한 자들이 모여 있어

34.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보이셨다 하는지라

35.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눅 24:13-35)

엠마오로 가고 있는 "두 제자"에게 그리스도가 현현(顯現)하셨다는 사실을 다른 복음서에선 간략하게 언급하였으나(막 16:12) 여기에선 비교적 길게 언급하고 있다. 

그날은 그리스도가 부활하신 바로 그날, 그와 함께 부활한 새 세계의 첫날이었다. 

그 둘 중의 한 사람은 "글로바" 혹은 "알패오"라 불리는 자로 고대 교부들에 의하면 그는 그리스도의 아버지로 여겨지는 요셉의 형제라 한다. 

다른 한 사람은 누구였는지 확실히 알 수가 없다.  

^^어떤 학자는 두 사람중 하나는 베드로일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그 "두 사람" 중의 하나가 베드로일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 "두 사람"이 돌아올 때 맞이한 "열한" 제자들 중에 베드로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베드로에 대해선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만약 그가 "두 사람" 중의 하나였다면 글로바가 아니라 그가 "대표적인 목격자"로 지명되었을 것이 틀림없다. 

[물론] 그리스도께서 그날 베드로에게 [따로]특별히 나타나셨다는 것만큼은 사실인 듯하다. 

그 사실에 대해선 열한 제자가 증언하고 있으며(34절) 바울도 이를 언급하고 있음(고전 15:5)을 보아 알 수 있다. 

따라서 다른 한사람, 그는 9절에 언급된 열한 사도와 함께 있던 자들 중의 한 사람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제 이 내용을 좀더 자세히 고찰해 보자.

Ⅰ. 이 두 제자들의 "여행"과 "대화". 

"그날에 저희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 오리되는 엠마오라 하는 촌으로 가면서" 

엠마오는 예루살렘에서 도보로 두 시간 남짓 걸리는 곳에 위치한 촌이었다. 여기에선 이십 오리, 약 7마일 정도라고 기록되어 있다(13절). 

그곳에 사업상 가는지 아니면 친구를 만나러 가는지 밝혀져 있지 않다. 

(필자의 생각으로 그들은 더 이상 이 예수에 대해선 미련을 버리고 갈릴리를 향해 고향으로 가던 중인 것 같다. 그들은 고향으로 돌아가 쉴 작정으로 다른 제자들에게 떠나겠다는 말도 하지 않고 허락도 받지 않고 몰래 빠져 나온 것 같다. 왜냐하면 그날 아침 그들은 주님의 부활에 대한 소식을 듣게 되었을 때 그것을 "어리석은 이야기들"로 돌려 버렸기 때문이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들일 재빨리 집으로 돌아갈 길을 모색했다고 해서 이상할 것이 전혀 없다.)

그런데 그들은 여행하면서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였다"(14절). 

예루살렘에 있을 대엔 유대인들이 두려워 방금 일어났던 일들에 대해 "말할" 용기가 없었다. 

그러나 이제 유대인들의 귀에서 멀어진 지금엔 아주 자유롭게 그 일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었다. 

그들은 "이 모든 일을 이야기하였다." 그리스도의 부활의 가능성에 대해 서로 따져 보았다. 

그 결과에 따라 계속 고향으로 가든 아니면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판이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이라면 그들이 함께 있을 때 그의 죽음과 부활에 관해 이야기를 나눔이 합당한 일임을 명심하자.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서로 남의 지식을 계발시키고 남의 기억을 새롭게 하며 서로의 독실한 사랑을 증진시키게 된다.

Ⅱ.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 그들과 함께 하심으로 그들은 도중에서 선한 동료를 만나게 되었다(15절). 

"저희가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아마도 그들은 열띤 논쟁을 벌이고 있었을 것이다. 한 사람은 그들의 주님께서 부활하셨으며, 그의 나라를 세우실 것이라고 주장하고 다른 사람은 부정적으로 나왔으리라...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마치 그들과 우연히 같은 방향으로 여행하는 이방인처럼 꾸며 그들이 "기꺼이 동행으로" 받아들이도록 다가섰다. 이 사실을 주시할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안에 있는 영적 연대감을 유지하며 그에 대한 대화를 진행시켜 나갈 때 진지하게 말하는 두 사람을 돕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오셔서 제 삼자로 참여하실 것이다. 

주님을 경외하는 자들이 "서로 이야기할" 때에 그는 "귀를 기울이고 들으시며" 진리로 그들과 함께 하신다. 그리하여 신앙과 사랑으로 하나되어 꼬여진 그들은 "쉽게 끊여지지 않을 삼겹줄"이 된다(전 4:12). 

그들은 함께 이야기하고 생각하는 중에 그리스도에 대한 성서 구절들을 비교해가면서 그리스도의 말씀을 구했으며 좀 더 그리스도를 알기를 원하였다. 그런데 이제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오신 것이다. 그리스도를 찾는 자들은 그를 만날 것이다. 이 점을 명심하라. 

그는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자신을 내보이실 것이며 자기들이 지닌 지식을 위한 도구로써 그리스도의 지혜를 구하는 자들에게 그의 지혜를 주실 것이다. 

그러나 그들 곁엔 그리스도가 계셨지만 처음엔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였다(16절). 

"저희의 눈이 가리워져서 그인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대상"에 변화가 있었으며(마가복음에는 그때 "그는 다른 모습으로 보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감각기관에도 지장이 있었던 것 같다(여기엔 하나님의 권능에 의해 그들의 "눈이 가리워져"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혹은 다른 주석가가 생각하는 대로 "시야"에 혼동이 생긴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즉 공기가 너무도 탁해 그가 누구인지조차 분간할 수 없었을 것이다. 

"어떻게" 해서 그들이 못알아 보았는지는 별로 문제될 것이 없지만 "그렇게" 그들이 "그를 알아 보지" 못하게 함으로써 그들은 그리스도와 좀더 허물없이 이야기할 수 있었으며 그도 그들에게 자유롭게 말할 수 있었다. 

[새로운 차원, 열린 마음을 드높이 하여 보다 높은 차원의 영안이 열리도록 믿음을 발휘하자.]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말씀과 그 말씀의 효력은 그의 육체적인 모습에 얽매이는 것이 아님을 보여 주시려 하였으며 그의 육체에 집착했던 제자들도 이제는 그 집착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치시려 하였다. 

뿐만 아니라 [평범해 보이는] 다른 이들을 통하여 제자들을 가르치고 그들의 마음을 뜨겁게 할 수 있다는 것도 가르치셨다. 그는 그의 영적인 모습을 지니고 그들에게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그의 은혜를 계속 내려 주실 것임을 보여 주셨다.

Ⅲ. 그리스도와 그들 사이에 오고 간 대화. 

그는 그들을 알고 있었지만 그들은 그를 알지 못하고 있었다. 

서로 변장을 하거나 신분을 알지 못하게 하고 만나는 친구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와 그들은 서로 문답을 주고받았다.

1. 그들에게 던진 그리스도의 첫 번째 질문은 "그들의" 현재 "슬픔"에 대한 것이었다. 

그들의 얼굴엔 그 슬픔이 역력히 들어났다. "너희가 길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17절) 

대단히 친절하고 다정한 물음이었다. 다음 사실들을 고찰해 보자.

(1) 그들은 "슬퍼하고" 있었다. 그들이 슬퍼하고 있음은 이방인에게도 나타났다.

① 그들은 사랑하는 주인을 잃었고, 자신들의 생각에 지나지 않지만 그분에 대한 기대가 완전히 빗나갔다고 여기고 있었다. 

그들은 처음에 가지고 있던 믿음을 통한 소망과 생각을 완전히 포기하였으며 어떻게, 무슨 수로 그 손해를 만회할 것인가 걱정하고 있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로부터 그리스도가 떠나가 버릴 때 그들이 슬퍼할 충분한 이유가 있으며, "신랑"이 그들에게서 납치 당했을 때 그들이 "금식"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② 그가 죽음에서 부활하였다는 소식을 들었으나, 그들은 그 사실을 [깨달아]알지 못하였거나 알아도 [믿음을 발휘하여 진리를 깨닫는 관점의 차원의 돌파가 필요한 만큼 미치지 못하여] 믿지 못하였기 때문에 계속 슬픔 속에 갇혀 있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종종 기뻐해야 할 이유가 있을 때에도 슬퍼하거나 걱정하곤 한다. 믿음이 약함으로 인하여 그들에게 내릴 위로를 받지 못하곤 한다.

③ 슬픔 가운데 그들은 그리스도에 대하여 "서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다음 사실을 고찰해 보자.

첫째,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우리의 마음이 그로 가득 차 있거나 그의 행적이나 그가 우리를 위해 고난받은 사실에 대해 늘 염두에 두고 있다면-사실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하겠지만─하나님과 그의 섭리 뿐 아니라 그리스도와 그의 은총 및 사랑에 대해서 그 진리안에서 깨닫게 하사 채워주시는 바 "마음의 충만한 것을 입으로 말해야 할 것이다."

둘째, 참된 친구와 참된 대화는 우울증을 치료하는 효과 있는 처방이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자기들이 슬플 때 각자 각자 헤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내어보내셨던 것처럼 둘씩 둘씩 흩어졌다. 왜냐하면 한 사람 보다는 둘이 나으며 특히 슬픔의 시기엔 더욱 그러했기 때문이다. 울음을 터뜨리게 한 것이 때로 울음을 그치게도 한다. 그리고 계속 반복해 이야기하는 동안 우리와 친구들은 어느새 좀 맑은 기분을 갖게 될 것이다. 같이 울어 주는 사람은 서로 위로가 된다. 때로 그런 데서 제일 큰 위로를 얻기도 하는 것이다.

(2) 그리스도께서 그들 사이에 끼어 들어 그들 대화의 내용을 물어보고 그들이 슬퍼하는 원인을 물었다. 

"너희가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그리스도는 이제 성별된 상태에 계셨지만 제자들에 대한 사랑엔 변함이 없어 그들을 위로할 생각을 하고 계셨다. 

그는 마치 그들의 우울함을 보고 조심하는 것처럼 말씀하신다. "당신들이 오늘 어찌하여 근심 빛이 있나이까?"(창 40:7) 

우리 주 예수께선 그의 제자들의 슬픔과 걱정을 아시고 그들의 근심에 함께 참여하심을 명심하자. 여기에서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몇 가지 있다.

① "붙임성 있게" 행동하라.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이방인이었으며 그들도 그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를 선뜻 받아들일 수 없었던 형편에서는 그는 이 심각한 두 제자들과 함께 대화를 나누었다. 까다롭거나 수줍어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오히려 바람직한 단체에 소속되어 기쁨을 얻도록 하라.

② "동정심 있게" 행동하라. 

우리의 친구들이 슬픔과 걱정에 쌓여 있을 때엔, 그리스도께서 여기 보여 주신 것처럼 그들의 슬픔을 깨닫고 최선을 다해 위로와 조언을 해 주어야 한다. 

"우는 자들과 함께 울어 주라."

2. (그리스도의) 이 말씀에 대하여 그들은 그가 "전혀 모르고 있는 것"에 대해 다시 질문을 던졌다. 

"당신이 예루살렘에 우거하면서 근일 거기서 된 일을 홀로 알지 못하느뇨?" 다음 사실을 고찰해 보자.

(1) 글로바는 그에게 정중히 대답을 하였다. 

그는 "우리가 애기 하는 것에 대해 당신이 상관할 바가 뭐요?"하고 퉁명스럽게 대답하며 자기 걱정이나 하라고 돌려버리지 않았다. 

우리도 우리에게 친절한 자들에 대해서 친절히 대해 주어야 하며 말이나 행동에 있어서 어느 누구에게든지 정중히 대해야 함을 명심하자.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는 당시가 위험한 시기였다. 그렇지만 글로바는 이 이방인이 어떤 음모를 가지고 자기들에게 접근하여 해로운 짓을 하거나 곤경에 빠뜨리려고 하지나 않나 하여 그를 경계하지는 않았다. 

자비로운 행동은 "악을 도모하는 것"이 아니다. 이방인에게라도 결코 악을 행해서는 안 된다.

(2) 그(글로바)는 그리스도와 그의 죽음과 수난 등으로 머리에 가득 차 있었다. 

자기처럼 생각하지 않는 자가 있다는 것이 이상스러웠다. 

"도대체 이럴 수가 있소! 예루살렘에 있었으면서 그곳에서 우리 주님에게 일어난 일들을 모르고 있었다니 말이나 되요?" 

예루살렘에 있으면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수난에 대해 알지 못한 자들이야말로 진짜 이방인들이었음을 명심하자. 

"너희가 누구보다도 더 사랑하는 이가 누구냐?"고 물으시던 그리스도에 대해서 거의 아는 바 없이 거기에 있었던 그들이 과연 "예루살렘의 딸들"이라 하겠는가?

(3) 글로바는 이 낯선 자에게 그리스도에 대하여 알려 주려고 하였으며 이 문제를 가지고 좀 더 그와 대화를 나누고자 하였다. 

그는 그리스도를 모르고 있는 사람의 얼굴만 보면 참지 못하였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에 대해 아는 자들은 최선을 다해 그 아는 바를 퍼지고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그를 알도록 이끌어야 함을 명심하라. 

이 제자들은 낯선 이에게 가르쳐 주려고 열을 올리다보니 그들 자신의 마음이 새롭게 고양되며 열렸고 그로 말미암아 주께 가르침을 받게 되었음을 볼 수 있다. 

가진 자가 그 가진 것을 유익하게 쓸 때에 그에게 더 많은 것이 주어질 것이다. [진정 주는 자가 복이 있다!!]

(4) 글로바의 말로 미루어 보면 그리스도의 죽음은 예루살렘에서 큰 소란을 일으켰는데 그 도시에 있었으면서도 그 사실을 알지 못한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임을 알 수 있다. 

온 도시 안에 이야기가 퍼졌고 사람들은 모이면 그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와 같이 사건의 진상은 일반적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성령 강림 이후 그 사실은 [더욱 상세하게 진리의 차원에서] "설명되었다."

3. 그리스도께서는 대답 대신에 "그들의 지식"에 대하여 질문하셨다(19절). 

"가라사대 무슨 일이뇨?" 이렇게 물으심으로 더욱 자신을 낯선 자로 보이게 하셨다. 다음 사실들을 고찰해 보라.

(1)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고통의 보상인 장래에 받을 기쁨과 비교하여 자기가 받은 고난을 가볍게 여기셨다. 

이제 그는 자기의 영광으로 들어가셨는데 무슨 이유로 다시 자신의 고난을 돌이켜 보시려는 것일까? 

"무슨 일이뇨?" 

그에게 무슨 일인지 알 이유가 있었다. 그에겐 쓰라린 일이었고 무거운 짐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시 "무슨 일이뇨?"하고 묻고 계신다. 

슬픔은 사라졌다. 우리의 구원이 오게 됨으로 기쁨이 임했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를 위하여 약한 중에서도 기쁨을 얻으셨다. 우리도 그를 위하여 그렇게 하도록 가르치시기 위함이었다.

(2) 그리스도에게 가르침을 받을 자는 우선 자기가 지금까지 배운 것이 무엇인지 그에게 시험받아야 한다. 

그들은 그에게 자기들이 알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말해 보아야 한다. 그런 연후에 그는 그들에게 이 일들의 참 뜻을 말해 주며 그 신비에 이르게 할 것이다.

4. 여기에 대해 그들은 그리스도에게 일어났던 기이한 사건과 현재 상황에 대해서 말해 주었다. 그들이 말한 내용을 고찰해 보자(19절 이하).

(1) 그리스도의 "생애"와 "성품"을 요약해 주었다. 

그들이 골몰하여 생각하고 있는 "일"은 "나사렛 예수"(평소에 그렇게 불리웠다)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예언자였고" 하늘로부터 온 교사였다. 그는 진실 되고 놀라운 하나의 교훈을 가르쳤는데 그 말씀은 하늘에서 비롯된 것이며 하늘을 향하여 인도하는 말씀이었다. 

그는 여러 가지 영광스런 기적, 자비의 기적을 통하여 그 말씀을 보증하심으로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시에 능하신 분"이었다. 

즉 그는 하늘의 크신 사랑이었으며 동시에 이 땅에는 크신 축복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을 입은 자이며 그의 백성들이 존경하던 분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마음에 크게 흡족하신 분이었으며 나라 안에서 큰 명예를 입었던 자였다. 

"모든 백성 앞에서 위대한" 자들은 많다. 그들은 백성들에게 사랑 받지만 보통 "하나님 앞에선" 그렇지 못하다.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이 그런 자들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나 백성들 앞에서" 그의 "가르침"에 있어서나 "행위"에 있어서 능하신 분이었다. 

예루살렘에 있으면서도 이 사실을 모른 이라면 이방인밖에 없을 것이다.

(2) 그의 죽음과 고난에 대한 겸손한 설명을 하였다(20절). 

"하나님과 백성들에게 사랑받던 이였으나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원들이 하나님과 백성에게 죄를 지으며 그를 로마 권력에 넘겨주어 사형 판결을 받게 하여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 

그들이 이 사실을 더 과장해서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게 한 자들의 죄를 더 신랄하게 공격하지 않는 것은 좀 이상한 일이지만 아마도 그 이유는 아무리 사실이 그렇다 치더라도 전혀 낯선 자에게 이야기할 땐 그들의 대제사장들과 관원들에 대해 욕을 하는 것을 삼가려는 의도였던 것 같다.

(3) 여기에 그들이 슬퍼하는 이유로써 그에 대하여 가졌던 기대가 실망으로 끝났다는 암시가 보인다.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바랐노라(21절). 우리는 그가 모세처럼 예언자이기를 기대했으며 또한 모세처럼 구원자가 되기를 바랐던 자들입니다." 

"구속을 바라던" 자들, 그리고 그 속에서 이스라엘의 위로를 바라던 자들은 그를 기대하였고 그가 큰 일을 해 줄 것을 바라고 있었다. 

그런데 "기대가 미워지면 마음이 상하는 법" 특히 이와 같은 기대가 수포로 돌아가면 상심하고 만다. 

그러나 그들이 실망하는 원인을 자세히 살펴보면 오히려 그것이 그들의 기대에 대한 가장 확실한 근거가 되며 주 예수의 죽으심이야말로 희망의 근거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들은 말하길)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바랐노라." 

그런데 이스라엘을 구할 자가 그가 아니면 누구겠는가? 그들의 구속의 값을 치루려고 그가 죽으신 것이 아닌가? 이스라엘을 그 죄에서 구하기 위하여 그가 고난을 받으셔야만 하지 않았는가? 그리하여 이제 이 가장 힘든 과업을 마치셨으니 "이 자야말로 이스라엘을 구원할 그 분이심을 믿어야" 할 충분한 이유가 된 셈이 아닌가? 그런데도 그들은 아직도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4) 그의 부활에 대해 듣고 놀란 심정을 이야기하고 있다.

① "그가 십자가에 달려 죽은 지 오늘이 사흘째요. 오늘이 바로 그가 다시 살아나셔서 영광과 화려함 속에 서셔서 사흘 전에 치욕을 당하신 그대로 이번엔 영광 중에 자신을 내보이시기로 한 날입니다. 그런데 우린 아직 그런 징조를 보지 못했지요. 우리가 기대했던 대로 그를 박해했던 자들을 깨우치고 혼란에 빠트리며 제자들에겐 위로를 가져다 줄 그런 징조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모든 게 조용합니다."

② 그가 부활했다는 얘기가 그들 사이에 퍼져 있음을 말하고는 있으나 그들은 그 얘기를 아주 피상적으로 할 뿐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암시를 나타내고 있다(22, 23절).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를 놀라게 하였으니(단지 놀랄 일뿐이다), 그들은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시체가 없어진 것을 발견하고 그가 살으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하고 전할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린 그 얘기를 그들이 환상을 본 것이지 사실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천사들이 나타난다면 제자들에게 나타날 것이지 여인들에게 나타났겠습니까? 또 여인들은 쉽게 흥분해 버리기 때문이라."

③ 그들은 몇몇 제자들이 무덤을 찾아 가 보았을 때 무덤이 비어있는 것을 발견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24절). 

"예수는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가 살아나지 않았다고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만약 다시 살아났다면 그들에게 나타나 보이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상황을 종합해 볼 때, 우리는 그가 살아났다는 확실한 증거를 찾지 못했고 따라서 이제 와서 그를 기다릴 이유도 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기대는 그의 십자가에 달려 그의 무덤 속에 묻혀버리고 말았습니다."

(5) 우리 주 예수는 얼굴로는 그들에게 나타내 보이시지는 않으셨지만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심으로 자신을 알리셨다.

① 그는 분별력 없고 구약의 예언을 믿지 못하는 그들을 꾸짖으셨다. 

"미련하고 더디 믿는 자들아"(25절).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형제들에게 "어리석은 자"라 말하지 말라고 우리에게 금하신 것은 [올바른 책망을 금하신 것이 아니라 정당하지 못한 비난을 하지 말라고 금하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어리석은 자들"이라고 부르신 것은 우리가 마음에 품어선 안 될 "악한 자들"이란 의미에서가 아니라 "연약한 자들"이란 의미에서 그렇게 부르신 것이다. 

그는 그들을 "어리석은 자들"이라 불러 마땅하였다. 그는 우리의 마음속에 뿌리박고 있는 어리석음, "우리의 어리석음을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자신의 이익을 포기하고 엉뚱한 짓을 하는 자들을 어리석은 자라 부른다. 

그러므로 자기의 주님이 살아나셨다는 증거를 보여 주었는데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을 뿐아니라 그로 말미암아 얻을 위로까지 포기하는 그들이야말로 어리석은 자들이었다. 그들의 비난받은 "어리석음'이란

첫째, "믿기를 더디하는 것"이다. 

무신론자, 불신자와 자유주의자들은 신앙인을 어리석은 자로 낙인찍으며, 가장 성스런 신앙을 경거망동한 맹신이라고 비난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마음에 더디 믿으며" 공정하게 그 신앙을 평가하지 않고 선입견을 가지고 멀리하는 자야말로 "어리석은 자"라고 우리에게 가르치신다.

둘째, "예언자의 말한 모든 것"을 더디 믿는 것. 

그리스도는 그들이 여인이나 천사의 말을 더디 믿는 것을 책망하신 것이 아니라 보다 근본적으로 "선지자의 말한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것"에 대해 책망하신다. 그들이 구약의 예언자들의 말씀을 귀하게 여기고 명심하였더라면 그날 아침(그가 죽은 후 사흘째 되는 날) "태양이 떠오르는 것"을 확신하듯 그리스도가 "죽음에서 부활하심"을 확신하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예언"에 의해 이루어진 "사건들의 연속"을 보았다면 이보다 더 확실한 "섭리"의 증거를 찾아 볼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조금만 더 성서의 말씀과 "대화를 나눈다면," 그리고 성서의 말씀을 통해 들려지는 하나님의 섭리를 알고 있다면 우리를 때때로 곤경에 빠지게 만드는 복잡한 문제에 사로잡히는 일은 없을 것이다.

② 그는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그렇게도 그들에게 걸림돌이 되었으며 그의 영광을 믿지 못하게 하였던 그의 수난이 오히려 영광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었으며 다른 길로는 그것을 이룰 수 없었다는 사실을 말해 주었다(26절).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약속된 메시야는 고난을 받아야 그후 통치하시며, 십자가를 통하여 면류관을 얻을 것이라고 선포되고 이제 그 선포가 밝히 드러나지 않았느냐?" 

그들은 이사야 53장이나 다니엘 9장을 읽어보지도 못했는가? 그곳에 예언자들은 "그리스도의 수난"과 "그 뒤를 따른 영광"에 대하여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벧전 1:11).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들이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제 그는 그 십자가의 비밀을 벗기는 두 가지 사실을 밝혀 주고 있다.

첫째, 메시야는 이 모든 일로 고난받으셔야만 했었다. 

그러므로 그의 수난은 그가 메시야임을 부정하는 것이 아닐 뿐 아니라 오히려 그 증거가 된다. 

이는 마치 성도들의 고통이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명하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그리고 그의 수난은 그들의 기대를 모두 파멸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희망의 진정한 근거가 되는 것이다. 

그가 "수난자"가 아니었다면 "구속자"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구원을 위해 행하신 것은 계획에 의한 것이었으나 이를 수행함에는 고난과 죽음이 필수적인 조건이었다.

둘째, 그가 이 모든 일을 끝냈을 때 "자기의 영광에 들어 갈" 수 있었다. 

그는 부활로써 그 영광에 들어가셨다. 이것이 위로 향한 그의 첫 발걸음이었다. 

"자기의" 영광이라고 기록된 것을 주의하라. 그것은 "마땅히 그에게 주어질" 영광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세상이 있기 전에 그가 지니고 있었던 영광이었다. 그는 그 영광에 "들어가야만" 하였다. 

고난을 통해서 성서의 말씀이 이루어진 것처럼 그 영광을 통해서 비로소 성서의 말씀이 완성을 이루기 때문이다. 

그는 먼저 수난을 받고 다음으로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만" 하였다. 

그리하여 십자가의 "치욕"은 이제 영원히 "사라지고" 우리도 먼저 "가시" 면류관을, 그리고 다음으로 "영광"의 면류관을 바라게 되었다.

③ 그는 메시야에 대해 말하고 있는 구약의 말씀을 그들에게 자세히 풀이해 주었다. 

그리고 이제 그 말씀들이 나사렛 예수안에서 어떻게 완성되었는가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방금 전에 그들이 그에 대해 그에게 말했던 것보다 더 자세히 그에 대해 그들에게 말해 줄 수 있었다(27절). 

구약 최초의 영적인 성서 기록자, "모세와" 차례로 "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며" 그가 받은 고난이 그에 대해 기록한 예언의 말씀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의 성취라는 사실을 설명하였다. 

그는 모세로부터 시작하였다. 모세는 메시야께서 뱀에게 "그의 발꿈치를 물리겠으나" 그로 말미암아 뱀의 머리가 산산조각날것이라는 사실을 소상히 예언한 첫 번째 약속의 말씀을 기록한 자였다. 다음 사실들을 유의하자.

첫째, "모든 성서"에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기록된 글들이 산만하게 흩어져 있다. 

그것들은 "모아" "연결"하는 것은 참으로 유익한 일이다. 아무도 성서의 어느 한 부분에 깊이 통달할 수는 없다. 

그러나 무언가 그리스도와 관련된 내용, 어떤 것은 예언으로 어떤 것은 약속의 말씀으로, 어떤 것은 기도로 혹은 다른 형식의 내용으로라도 만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야말로 구약이라는책이야말로 "광야에 숨겨진 보물"이기 때문이다. 

복음의 은혜라는 황금실이 구약이라는 피복을 가로지르고 있다. 어디를 보나 진리를 꿰뚫어 볼 수 있는 실마리가 있다.

둘째, 그리스도에 관한 기록들은 "설명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유대인이라면 학자라 할지라도 "지도하는 사람이 없으면"(행 8:31) 말씀을 깨달았다고 척해선 안 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들의 율법에 의해서 잘못 길들여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율법의 장막은 걷히고 신약은 구약을 설명하게 되었다.

셋째,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제일의 성서 주석가이다. 

특히 자신에 관한 말씀에 대해선 더욱 그렇다. 부활 후에도 그는 이런 식으로 제자들을 자신에 대한 신비의 지식으로 인도하고 있다. 

성서와 상관없는 새로운 말씀을 들려줌으로써가 아니라 어떻게 성서의 말씀이 이루어졌는가 보여 줌으로 그 말씀을 연구하도록 이끄심으로 인도하고 있다. 

요한 계시록 자체도 구약 예언서의 두 번째 변형에 지나지 않는다. 계시록도 계속 구약의 예언에 촛점을 맞추고 있다. "모세나 예언자들을 믿지 못하는 자들"은 구제 불가능한 자들이다.

넷째, 성서를 "연구함"에 있어서 그 말씀들은 질서 있게 다루는 "조직적인" 연구를 함이 바람직하다. 

왜냐하면 구약의 빛은 "조금씩" 비추다가 "완성의 날"에 절정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햇빛나는 날"에 어떻게 "다양한 방법으로"(이어지는 예언은 언제나 전에 있었던 예언을 보충하고 빛을 비춘다)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에 "대해서" 조상들에게 말씀하셨는가 살펴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들(조상들)에 의해 우린 지금 그에 대해 "듣고" 있다. 어떤 사람은 그릇된 목적을 갖고 성서를 펼친다. 그들은 계시록을 먼저 연구한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여기에 "모세로부터 시작"하라고 가르치시고 있다. 지금까지 그리스도와 제자들 사이에 이루어진 대화의 내용을 살펴보았다.

Ⅳ. 이제 비로소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셨다. 

길가는 중에 그들에게 하신 JC의 설교나 그가 인용하여 설명한 성경 말씀에 대하여 자세하게 다루는 것이 좋았을 것이나 구태여 그렇게 할 필요는 없었다.

왜냐하면 이미 다른 성경 말씀을 통해 그가 하신 말씀의 본질은 파악되기 때문이다. 

어쨌든 제자들은 그 말씀에 매표되어 그들의 여행이 의외로 빨리 끝났다고 여기에 되었다. 사실이 그러했다. 

"저희의 가는 촌에 가까이 가매"(28절) 그들은 그곳에서 그날 밤을 "지내기로" 계획했던 것 같다.

1. 그들은 그에게 함께 머물기를 바랬다. 

"예수는 더 가려는 것 같이 하시니," 

그는 더 가겠다고 "말한" 것은 아니나 행동으로 더 가겠다는 표시를 하였다. 그리고 초대받지 않은 이방인이 오면 친절히 대하지 않는 것이 보통의 예이므로 그는 그들이 머물 친구의 집에 들어가려 하지 않았다. 그는 그들이 머물기를 청하지 않았더라면 계속 갔을 것이다. 이처럼 여기엔 위선 같은 것은 없다. 

방문객이 "주저한다"면 거기엔 이유가 있다. 그것은 당신의 집이나 가족에게 "주제넘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기 때문으로 알아야 한다. 그러나 당신이 그를 당신의 손님이나 동료로 기꺼이 맞아들이겠다는 태도를 보이게 되면 그는 당신의 초대를 쾌히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바로 그리스도께서 "더 가려하는 것같이 하신" 이유가 이것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고자 하는 자는 그를 초청하고 끈질기게 졸라야 한다. 

때로 "그를 찾지 않는 자가 그를 만나게" 되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그를 "찾는" 자는 분명히 그를 "만날" 기회가 올 것이다. 

그가 우리에게서 "멀어지는" 것 같다면 그것은 우리의 끈질긴 간구가 사라졌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여기에 "저희가 강권하여"라고 하였다. 그들은 모두 그를 붙잡고 부드럽고 간절한 폭력을 쓰면서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 하였다. 

그리스도와 함께 교제를 나누는 기쁨과 유익함을 맛본 자들은 좀 더 함께 있기를 바라고, 하루 종일이라도 "함께 갈" 뿐아니라 밤에라도 "함께 유하기를" 강권하지 않고는 못견디게 됨을 유의하자. 

"한 날이 다 지나도" "저녁이 가까우면" 우리는 우리가 쉴 곳을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그리스도에게도 눈을 돌려 그에게 우리를 위하여 나타나셔서 우리의 마음에 그를 사랑하고 선한 생각으로 가득하도록 우리를 가르쳐 달라며 "우리와 함께 유하기를" 부탁함이 마땅하다. 

그리스도는 그들의 요청을 받아들이셨다. "이에 저희와 함께 유하러 들어가시니라."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받은 바 은혜로 즐거움을 얻은 그들에게 더 많은 교훈과 위로를 주실 작정이었다. 그리스도는 "누구든지 문을 열고" 들어오기를 간구하면 "그에게로 들어가리가"고 약속하셨다(계 3:20).

2. 그는 그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셨다(30, 31절). 

아마 그는 처음 동행했을 때부터 시작된 이야기를 계속 그들과 나누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대가 길을 가든지, 집 안에 있든지" 하나님의 일을 말할 지어다. 

저녁 식사가 마련되는 동안(그 마을이 작고 초라한 곳이므로 식사 준비는 오래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그들과 "유익하고" "교훈적인" 대화를 계속 나누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음식을 먹으며 앉아 있을 때" 그의 입술은 그들을 "먹이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자기들과 함께 이야기하고 있는 이 분이 예수라는 것을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있다가 마침내 그가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었을 때에야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1) 그들이 "음식을 먹으러 앉을 때," 

그는 제자들에게 행하셨던 것처럼 음식을 나누셨으며 그것을 보고 비로소 그들은 그가 예수인 것을 알게 되었다.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매." 

그는 이 일을 평소에 하시던 것처럼 권위와 사랑을 보이시며, 옛날과 같은 태도와 몸짓으로, 떡을 떼어 축사하시고 그것을 그들에게 나누어 주시는 일도 옛날과 같은 형식으로 하셨을 것이다. 

이 떡은 보리떡 다섯 개처럼 "기적의" 떡도 아니요, 성만찬에 쓰였던 "성례적인" 떡도 아니라 그저 "평범한" 떡이었다. 그런데도 그리스도는 여기에서도 전에처럼 같은 형식을 취하셨다. 

이는 특별한 성례전 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은총 안에서도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교제하도록 우리를 가르치시기 위함이요, 매일 먹는 양식에 대해 감사하며 축복을 구하도록 가르치시기 위함이요, 잘 사는 가정 뿐아니라 우리 모든 가정에 우리 주님 주 예수께서 손수 일용할 양식을 마련해 주신다는 사실을 깨우치시기 위함이다. 

우리도 어디든 가서 "음식을 먹으러 앉게" 되면 비록 음식이 볼품없고 입에 맞지 않더라도 그리스도를 식탁 끝머리에 앉히고 음식은 그가 "우리에게 축복하신" 것으로 알고 그의 영광을 위해 "먹고 마시며" 그가 우리에게 "축사하신" 모든 것을 감사와 기쁨으로 받아야 할 것이다. 

믿음으로 그 음식이 그리스도의 손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졌으며 그의 축복이 함께 한 음식임을 알게 될 때 우린 기쁜 마음으로 먹을 수 있을 것이다.

(2) 그때 "저희 눈이 밝아져" 그가 누구인지 보게 되고 "그 인줄 알아보았다." 

지금까지 그를 몰라보게 한 것이 무엇이었든지 이제 그것이 사라져 버렸다. 

안개가 사라지고 베일이 걷히면서 그가 그들의 주님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게 되었다. 

그는 타당하고 거룩한 목적으로 다른 사람의 형상을 쓸 수도 있으나 다른 사람이 그의 형상을 쓸 수는 결코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분이 바로 주님이었다.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그의 성령과 은혜를 통해 그의 백성들 영혼에게 자신을 나타내시는가 알아보자.

① 성경 말씀을 펴 주신다. 

성경 말씀은 "그 말씀을 구하며" 그 말씀 안에서 그를 찾는 자들에게 그를 증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② 성만찬의 예식을 통해 주의 식탁에서 만나게 된다. 

일반적으로 성례를 통해 자신을 그들에게 밝히시며 "떡을 떼시는 중에 그들에게 자신을 알리신다."

③ 그러나 베드로의 회심과 같이 성도들의 마음의 눈을 열고 마음에 끼었던 때를 벗겨버리심으로 그 일은 완전히 이루어진다. 

계시를 주신 그 분께서 오성(悟性)을 주시지 않는다면 우린 계속 어둠 속에 머물게 된다.

3. 그는 그 순간 사라졌다. 

"예수는 저희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그는 자신을 감추셨고 갑자기 사라지셨으며 "보이지 않으셨다." 또는 "그들에게 보이지 않게 되었으며" 그들이 알아보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스도의 몸은 부활 후에도 그가 고난받고 죽었을 당시와 "같은 몸"이었고 그 흉기 자국까지 그대로 있는 것처럼 보였으나 사실은 이미 상당한 변화를 일으켜 그가 합당하다고 여겨질 때엔 "보일 수"도 있고 "안 보일 수"도 있게 변할 수 있는 몸이 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영광의 몸"이 되는 첫째 단계가 아니었을까 한다. 

제자들에게 잠깐 자신의 모습을 비춘 후 그는 즉시 사라지셨다. 그러한 일시적이고 순간적인 그리스도 환상은 오늘 우리들도 보게 된다. 

우리도 그를 본다. 그러나 잠시 후엔 다시 그의 모습이 사라진다. 우리가 천국에 가게 되면 그때엔 그를 영원히 뵐 수 있게 될 것이다.

Ⅴ. 이같은 사건을 통해 제자들의 마음에 느낀 생각과 이 사실은 예루살렘에 있는 자기의 형제들에게 보고한 내용이 계속된다.

1. 그리스도께서 그들과 함께 나누신 대화를 통해 느낀 감정(32절).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 하더냐?" "그래, 내 마음은 그랬어" 하고 한 제자가 말하자 "내 마음도 그랬어"라고 다른 제자도 동의하였다. 

"내가 살아오는 동안 그처럼 깊은 감명을 받기는 처음일세. 이와 같이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하신 설교 말씀에 견주어 "소리"를 비교한 것이 아니라 "마음"을 비교해 보았다. 

비록 설교자가 누구인줄 알지는 못했었지만 그 설교는 능력 있는 것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모든 일을 그들에게 간단하고 자세히 풀이해 주었다. 그리고 특히 더 귀한 것은 그들의 마음이 타오르는 불 속에 던져진 것처럼 그들의 영혼에 "거룩한 빛"과 함께 "거룩한 열정"이 생겨났으며 그들 마음속에 경건하고 간절한 사랑의 불이 붙여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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