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19((요6:63)== [요6:63...살리는 것은[생명 주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AMP)63 It is the Spirit who gives life; the flesh conveys no benefit [it is of no account]. The words I have spoken to you are spirit and life [providing eternal life]....(NASB)"It is the Spirit who gives life; the flesh profits nothing; the words that I have spoken to you are spirit and are life".] [고전15:45...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NASB) So also it is written, "The first MAN, Adam, BECAME A LIVING SOUL " The last Adam became a life-giving spirit. (AMP)45 So it is written [in Scripture], “The first man, Adam, became a living soul (an individual);” the last Adam (Christ) became a life-giving spirit [restoring the dead to life]. ]
달고오묘한그말씀200...하나님의사랑을사모하는자.
*1.하늘이(샤마임..하늘들) 하나님의 영광을(카보드) 선포하고(샤파르,,상술하다<서기관처럼>) 궁창이(라키아..광활한 공간)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마아세..행위/행사/행동)나타내는도다(나가드...말하여 알리다/선언-선포하다) The heavens are telling of the glory of God; And their expanse is declaring the work of His hands. *2.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다아트..지식/이해.<동:야다>) 전하니(하와...보이고 말하여 알리다) Day to day pours forth speech, And night to night reveals knowledge. *3.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There is no speech, nor are there words; Their voice is not heard. *4.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오헬..천막/거처) 베푸셨도다(숨..만들다/세우다/놓다/두다/배치/지정하다-임명/설립/확립하다) Their line has gone out through all the earth, And their utterances to the end of the world In them He has placed a tent for the sun, *5.해는 그의 신방에서 나오는 신랑과(하탄..신랑/사위) 같고 그의 길을 달리기 기뻐하는(수스..<크게>기뻐하다/기뻐즐거워하다) 장사(깁보르...용사) 같아서 Which is as a bridegroom coming out of his chamber; It rejoices as a strong man to run his course. *6.하늘 이 끝에서 나와서 하늘 저 끝까지 운행함이여(테쿠파..일주/순회/회전) 그의 열기에서 피할 자가 없도다 Its rising is from one end of the heavens, And its circuit to the other end of them; And there is nothing hidden from its heat. ------------------ *7.여호와의 율법은(토라) 완전하여(타밈) 영혼을(네페쉬) 소성시키며(슈브) 여호와의 증거는(에두트) 확실하여(아만) 우둔한 자를(페티...단순/순전한, 마음열린)지혜롭게 하며(하캄..지혜롭게/현명하게 하다) The law of the LORD is perfect, restoring the soul; The testimony of the LORD is sure, making wise the simple. *8.여호와의 교훈은(픽쿠드) 정직하여(야샤르) 마음을(레브) 기쁘게 하고(사마흐) 여호와의 계명은(미츠와) 순결하여(바르) 눈을 밝게 하시도다(오르)The precepts of the LORD are right, rejoicing the heart; The commandment of the LORD is pure, enlightening the eyes. *9.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이르와) 정결하여(타호르)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법도(미슈파트) 진실하여(에메트) 다 의로우니(차다크) The fear of the LORD is clean, enduring forever; The judgments of the LORD are true; they are righteous altogether *10.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하마드)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They are more desirable than gold, yes, than much fine gold; Sweeter also than honey and the drippings of the honeycomb. *11.또 주의 종이 이것으로 경고를 받고(자하르,,경고/훈계받다, 가르치다, 비췸받다) 이것을 지킴으로(샤마르..주의/감시/준수하다, 지켜 보존하다) 상이 크니이다(라브...풍성한/많은) Moreover, by them Your servant is warned; In keeping them there is great reward. ---------------------- *12.자기 허물을(셰기아..실수/과실/잘못) 능히 깨달을(빈..식별/분별/지각/이해하다, 께닫다)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사타르..숨기다/감추다)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나카...비우다/깨끗하게 하다/무죄로 하다) Who can discern his errors? Acquit me of hidden faults. *13.또 주의 종에게 고의로(제드..교만/거만한, 주제넘은) 죄를 짓지 말게 하사(하사크,,가로막다/삼가다, 억제/저지하다,말리다) 그 죄가 나를 주장하지(마샬...지배권/주권을 가지다, 다스리다/좌지우지하다) 못하게 하소서 그리하면 내가 정직하여(타맘) 큰 죄과에서 벗어나겠나이다(나카) Also keep back Your servant from presumptuous sins; Let them not rule over me; Then I will be blameless, And I shall be acquitted of great transgression. ......[그리스도로 산다, 예수님과 동행한다 함은 그분과 결합한 하나 됨 안에서, 내주하시는 성령 따라 매 걸음 걸음 교통 안에서 행함이다] ...오직 말씀이 가라 하는 곳까지만 가고, 멈추라 하는 곳에서 멈출 의무만 거듭난 믿는이에게 주어졌고, (말씀을 도외시 한 채) 옛 자아의 습관 따라 [함부로 짐짓 추정하여] 제 멋대로 멈추거나 한 걸음이라도 더 나아가거나, 내 눈에 좋게 보이거나 내 맘 끌리는 대로 방향을 바꾸거나 하는 등, 그 모든 것이 고범죄(presumptous sin)에 해당된다...... [딤후2:5...(거듭난 자는 마땅히 말씀 안에서, 성령의 인도하심 따라 살라는 규준을 주셨다)..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승리자의 관을 얻지 못할 것이며..] [벧후2:10...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서 행하며 주관하는 이를 멸시하는 자들에게 특별히 형벌하실 줄을 아시느니라 이들은 담대하고 고집하여 떨지 않고 영광 있는 자를 훼방하거니와]. ..... 그러므로 “PRESUMPTUOUS SIN” 이란 “하나님(말씀)의 직접적인 허락이나 금지가 없음에도 불구하고...((이 때는 주께 나아가 교통 안에서 여쭈어 보아야 한다..주님은 너무도 사랑스럽고 친절하시기에 반드시 알게 하신다))., 자신의 판단에 의하여, 자신이 좋다고 생각하여 행하는 죄”를 가리켜 고범죄라 하고 있다..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잣나무로 방주를 지으라고 하셨으므로 "노아가" "잣나무로" "방주를 지어야"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소나무로는 지으면 안된다는 말씀을 하신 것은 아니기에, 소나무로 방주를 지어도 무방하다고 스스로 판단하여 소나무로 방주를 지었다면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은 “고범죄(故犯罪)” 곧 “PRESUMPTUOUS SIN” 을 짓는 것이다)) *14.나의 반석(추르)이시요 나의 구속자(가알)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힉가욘..묵상/명상/숙고, 속삭임,반향)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라촌...뜻/소원/의향..이것을, 주의 뜻을 참되게 깨닫고 행함의 순종이야말로 그분과의 일치(하나 됨)의, 극락의 생명 기쁨 가져다 줌이요, 그것이야말로 호의/은총임에 틀림없다..[주께 합한] 기뻐 받으심 "열납"이다.) 원하나이다 Let the words of my mouth and the meditation of my heart Be acceptable in Your sight, O LORD, my rock and my Redeemer. ----- @@열납, accept. 기꺼이 받아들임, (주님의) 뜻/의향, 호의, 은총, ...@/xr:(7522, 라촌) ...은혜grace는 [거듭 난 Q 자녀인 믿는 이가] Q과 사람에게서 받는 것에 대해 쓰이는 말이지만. 은총favor는 [주님 뜻 구하며 살아가려는] 거듭 난 Q 자녀인 믿는 이에게만 주시는 그분의 특별한 총애하심을 의미한다. 라촌(명남)은 라차(hx;r; , 7521)에서 유래했으며, '호의, 은총, 기꺼이 받아들임, 뜻, 의향'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56회 나온다. 라촌은 세 가지의 주요한 의미를 나타낸다. (a) 첫번째로 이 단어는 하나님의 '은총' 혹은 '호의'(신 33:16, 사 60:10, 시 5:12, 시 30:6, 시 30:8 등). 또한 왕들(잠언에만 나옴, 잠 14:35, 잠 16:13, 잠 16:15) 및 모든 사람들(잠 10:32, 잠 11:27 등)의 호의나 은총이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b) 둘째로 이 단어는 '기뻐함' 혹은 '받아들임'(출 28:38)이며, 항상 종교적 혹은 제의적 의미로 사용된다. 라촌은 선물이나 희생 제물의 '허용할 수 있음' 혹은 '받아들임(열납)'을 묘사한다(레 1:3, 레 22:20, 사 56:7 등). (c) 세번째 이 단어는 하나님 '뜻'과 같이 '뜻'이라는 특수한 의미에서의 '소원' desire, '기쁨' pleasure이다(스 10:11, 시 40:9 등). 더 많은 본문들이 사람의 '소원' desire 혹은 '뜻' will을 묘사한다(대하 15:15, 단 8:4 등). 야곱이 임종시에 한 축복에 관하여 기록하고 있는 창 49:6에서 한가지 모호하고 난해한 용법이 나온다. 역본들은 독특한 독법으로 서로 다르게 번역을 하였다. KJV는 "자기네들 뜻대로(=혈기대로, 제멋대로) 그들은 성벽을 파내려 갔다" in their selfwill they digged down a wall, ....AV는 "그들은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다" they hocked an ox, ....RSV는 "그들은 제멋대로 소들의 오금을 잘라 절름발이를 만든다" in their wantonness they hamstring oxen, ...JPS는 '그들은 그들의 뜻대로 소들의 발목 힘줄을 끊었다; in their self will they houghed oxen이라고 번역한다(한글개역, "그 혈기대로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음이로다"). KJV가 히브리 논문을 가장 정확히 따르는 것 같다.(W. White) -------- [시35:27..오직 주에게 피하는 자는 다 기뻐하며 주의 보호로 인하여 영영히 기뻐 외치며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를 즐거워하리이다] [시51:1.. 자기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기뻐하시는도다] [시147: 11.. 나의 의를 즐거워하는 자로 기꺼이부르고 즐겁게 하시며 그 종의 형통을 기뻐하시는 여호와는 광대하시다 하는 말을 저희로 항상 하게하소서] 히브리어 <라촌 וןֹרצָ<은 원함 뜻 Will Desire Intent를 의미한다 . 그 안에는 기쁨 호의 즐거움 만족 자의로의 뜻이 담겨 있다. 억지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 속에 기쁨과 즐거움이 흘러 넘쳐서 하나님의 뜻을 즐거이 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 그 마음 중심에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흘러 넘치기 때문에 그렇다 .. 온 마음으로 드리는 헌신과 사랑인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뜻할 때도 <라촌 וןֹרצָ<이 사용된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영혼을 향한 뜻도 <라촌וןֹרצָ<이 사용되고 있다.. 곧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흘러 나온다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 속에서 가지고 계신 계획과 뜻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영혼에게 무엇을 억지로 하는 것을 요구하지 않으신다 ..깊은 감동 속에서 행하는 풍성한 마음을 원하신다 ..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라촌 וןֹרצָ<이다,, 하나님을 향한 목마름도 <라촌 וןֹרצָ<이다 <라촌 וןֹרצָ<속에 하나님과의 깊은 사랑이 녹아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깊은 뜻을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먼저 사랑해야 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 뜻은 하나님을 향한 갈망에서 흘러 나오기 때문이다 <나>의 갈망<라촌 וןֹרצָ<은 여호와 하나님을 더 깊이 사랑하는 것,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더 깊이 나아가가며,.. 하나님을 더 알아 가는것,.. 여호와 하나님과의 친밀함.. 하나님의 뜻<라촌 וןֹרצָ<이 그 가운데 함께 하실 것이다. ---------- 시143편 10절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나를 가르쳐 주의 뜻을 행하게 하소서 주의 영은 선하시니 나를 공평한 땅에 인도하소서" .... 주님의 (기뻐하시는) 뜻의 히브리어 '라촌'은 구약 성경에 56회 정도 나오는데 인간의 감정과 태도와 연관된 경우가 16회이고 40회 정도가 하나님의 의지와 호의, 은총과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란 의미로 사용되었다. 다윗은 현재 당하고 있는 역경에서 벗어 나기를 간절히 원하지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방법을 알려 달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 그 방법을 따라 문제가 해결되기를 기도하고 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그 방책을 해달라는 것이니,. 다윗은 현재 당하고 있는 역경에서 벗어나기를 간절히 원하지만 그 방법까지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되기를 소원하고 있다. 공평한 땅은 평평한 평지인데, 지금 그가 경험하는 이 땅은 울퉁불퉁하기에 자칫하며 넘어질 수 있었다. (그가 바라는) 공평한 땅은 위험한 상태의 땅과 대비를 이루고 있다. .... 오랫동안 잠복되어 온 [대적들의] 위협과 위험 속에 시달려 온 다윗은 이제 더 이상 위험이 없는 마치 평평한 땅 위를 밟는 것과 같은 삶을 동경하고 그 성취를 위해 간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내 소견에 좋은대로, 내 마음의 의지대로가 아니라, 내 뜻대로가 아니라] 위험에서 벗어 나는 방법조차도!!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되고 벗어남 자체로도 하나님의 기쁨이 되기를 원한다는 것이니, 실로... 하나님 뜻대로 사는 해바라기이고 하나님 기쁨의 바보이다. ==보라!! 이것은 바로 우리 구주 예수님의 기도였는데, 주 예수님은 그보다 한층 더 깊이 (지고지선하신 아버지를 완전히 신뢰함 안에서) 아버지 뜻을 기꺼이 감수하기 위해 기도하고 계셨다. ....지금 처한 바, 이 역경조차 아버지께서 아버지의 뜻 이룸 위해 특별히 안배-마련하고 허락하신 것이니, "비록 지금 이 상황을 맞이한 제 마음에 느끼기에는 너무 공포스럽고 끔찍하지만"...[마26:42...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 하나님 뜻대로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이고 그래야 하나님이 구원해 주신다는 믿음이니,.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 진정한 기쁨이 아니라는 신앙이다. ....나와 우리는 많은 경우, 하나님의 뜻과는 관계 없이 내 뜻대로 살아 왔고 내 뜻대로 되어야 은혜를 받은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경우가 많지 않았던가.....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 않고 내 뜻만 구하는 부끄러운 우리의 모습을 거울로 보고 있지는 않은가... ================= 시편 19장 (개요) 위대하신 하나님이 사람의 자손들을 가르치고 교화하기 위해 펴내신 훌륭한 책이 두 가지 있다. ...이 시편은 이 두 가지를 모두 다 이루고 있으며, 그것을 열심히 연구하도록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1. 피조물이라는 책. ...이 속에서 우리는 창조주의 능력과 신성(神性)을 쉽게 읽을 수 있다(1-6). 2. 성서라는 책. ...이것은 우리에게 우리의 의무에 관한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고 있다. 다윗은 그 책의 탁월함과 유용함을 보여주고 있으며(7-11), 그러고 나서 우리에게 그것을 이용하도록 가르치고 있다(12-14). ----------- 창조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시 19:1-6) 시편 저자는 이 구절들 속에서, 우리로 하여금 온 세상에서 매일 볼 수 있는 것들로부터 육안으로 볼 수 없는 하나님의 것들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도록 인도하고 있다. 하나님의 존재는 의심할 바 없이 분명하게 나타나 있으며, 그의 영광은 눈으로 볼 수 있는 하늘 속에서, 그것의 구조와 아름다움, 천체의 질서와 작용 속에서 탁월하게 빛나고 있다. 거룩한 전능에 대한 이 예는 하늘을 보고서도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며, 결과를 보고서도 “원인이 없다”고 말하는 무신론자의 어리석음을 보여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우상 숭배자들의 어리석음과 그들의 상상력의 헛됨을 보여주고 있다. 우상 숭배자들은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할지라도 하나님, 즉 빛의 하나님을 가리키고 있는 손가락에 지나지 않는 바로 그 하늘의 빛에다 영광을 돌리고 있다. 이제 여기에서 다음을 살펴보자. Ⅰ. 피조물들이 우리에게 알리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들은 여러 면에서 우리에게 유익하고 도움이 된다. 그러나 거기에서 하나님이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냄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다(1절). 그것들은 자신이 하나님의 손으로 지어졌음을 스스로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영원부터 존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모든 변천과 운동에는 틀림없이 시작이 있었을 것이다. 그것들은 스스로를 만들 수 없으며, 그렇게 한다는 것은 모순이다. 그것들은 원자의 우연적인 충돌에 의해 만들어질 수는 없다. 그것은 불합리한 일로서 그 이론을 따지기보다는 차라리 웃음거리로 삼기에 합당하다. 그러므로 영원한 마음, 무한히 지혜롭고 유력하며 선한 마음 이외의 것은 될 수 없는 창조주가 있어야 한다. 이처럼 그것들이 하나님이 지으신,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것들임이(8:3) 나타나 있다. 따라서 그것들은 그의 영광을 선포한다. 그가 창조하신 것의 탁월함으로써 우리는 위대하신 조물주의 무한하신 완전함을 쉽게 추론할 수 있다. 또한 하늘의 찬란함에서 우리는 창조주가 빛이라는 사실을 추정할 수 있다. 우주의 광대함은 그의 광대하심을 말해 주고 있으며, 그 높음은 그의 초월성과 주권을, 이 땅에 대한 그것의 영향력은 그의 지배와 섭리, 그리고 우주적인 은혜를 말해 주고 있다. 이와 같이 모든 것은 그의 전능하신 능력을 선포하고 있다. 그것들은 그의 능력에 의해 처음에 만들어졌고, 그때에 정해진 법령에 의해 오늘날까지 지속되어 오는 것이다. Ⅱ. 이런 사실을 알리는 것들은 무엇인가? 1. 하늘들과 창공. 이것은 대기의 광대한 공간이며, 운성과 고정된 별들의 영역이다. 사람은 몸의 구조상 짐승들보다 유리한 점을 갖고 있다. 즉 짐승들은 아래를 내려다보도록 만들어져 있고, 따라서 그들의 영혼도 밑으로 사라져야 한다. 그러나 사람은 위를 볼 수 있도록 직립적으로 만들어져 있다. 왜냐하면 위로 향한 그의 영혼은 곧 위로 가야만 하며, 그의 사상은 소생할 것이기 때문이다. 2. 꾸준히 그리고 일정하게 계속되는 낮과 밤(2절). “낮은 낮에게, 밤은 밤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말하고 있다. 즉 하나님께서는 태초에 빛과 어둠을 가르셨고, “땅에 있을 동안에는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창 8:22)는 노아와 맺은 하나님의 언약대로 변동 없이 정해진 질서를 태초부터 오늘날까지 지켜오셨다. 그런데 그것의 확고부동함을 말하기 위해 이 섭리의 언약이 은혜의 언약과 비교되고 있다(렘 33:20, 31:35). 낮과 밤이 그처럼 정확한 방법으로 교체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는 큰 일례이다. 이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자연의 왕국에서뿐만 아니라 섭리의 왕국에서도, “그가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시는” 것과(사 45:7) 한 가지를 다른 한 가지와 상반되도록 배치하신 것을 살펴보도록 이끌고 있다. 그것은 또한 인간에 대한 그의 선하심의 일례이다. 왜냐하면 그는 “아침 되는 것과 저녁 되는 것을 즐거워하게 하시기” 때문이다(65:8). 그는 꾸준한 운행에 의해 그 스스로를 영광스럽게 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흡족하게 하신다. 즉 아침의 햇빛이 그날의 일을 돕는 것과 마찬가지로 저녁의 황혼은 밤의 안식을 돕는다. 매일 낮과 매일 밤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말하며, 자기의 증거를 끝냈을 때 그것을 다음 낮과 밤에게 물려주어 그것 또한 하나님의 선을 말하게 한다. 3. 해의 빛과 영향력은 특별히 뛰어나게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한다. 해는 그 자체가 모든 천체 중에서 가장 두드러지며, 이 아래 세상에 가장 유익한 것이다. 따라서 해가 없다면 세상은 모두 동굴이 되고 사막이 될 것이다. 다윗이 해가 떠오르는 것을 보고 그 찬란함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선포됨을 보았을 때 이 시편을 지었으리라는 것은 터무니없는 추측은 아니다. 해에 관해서 다음과 같은 것을 살펴볼 수 있다. (1) 해에게 지정된 장소. 하나님께서 하늘에 “해를 위하여 장막을 베푸셨도다.” 천체는 “천군”이라 불리고 있으므로 해가 야영하는 병정들처럼, “장막에 거한다”고 일컬어지는 것은 합당하다. 해는 그 앞에 장막을 지니고 있다고 일컬어지고 있는데, 그것은 해가 끊임없이 운행되고 있으며, 또한 결코 고정적으로 거주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가 갖고 있는 큰 저택은 마지막 때에, 즉 하늘이 두루마리처럼 말아올려지고 해가 흑암으로 변할 때 장막처럼 무너질 것이기 때문이다. (2) 해에게 지정된 진로. 그 영광스런 피조물은 가만히 있도록 만들어지지 않고(적어도 우리 눈에 보이는 것처럼) “하늘 이 끝에서” 그 반대편으로(낮 동안의 주기를 완성하기 위해), 그리고 다시 똑같은 지점으로 “운행하도록” 만들어져 있다. 그리고 이처럼 불변성과 일정함에 의해 우리는 해가 언제 어디서 오는지를 언제든지 분명히 예고할 수 있다. (3) 해가 나타날 때의 찬란함. 해는 “그의 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다.” 즉 최대한으로 공을 들여 훌륭하게 차리고 꾸민 신랑과 같이 그 자신 유쾌하게 보이며, 그 주위에 있는 모든 것을 즐겁게 만든다. 왜냐하면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는 크게 기뻐”하기 때문이다(요 3:29). (4) 해의 여정의 즐거움. 해가 걸어야 하는 길은 광대한 회로이며 잠시도 쉴 수 없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창조의 법에 복종하고 사람에게 봉사하기 위해 그렇게 행할 뿐만 아니라, 매우 즐겁게, 그리고 “그 길 달리기를 기뻐하는 장사같이” 행한다. 이처럼 만족한 마음으로 의로우신 태양, 즉 그리스도는 그에게 주어진 일을 마치셨다. (5) 이 세상에 대한 그의 전반적인 영향력. “그 온기에서 피하여 숨은 자 없도다.” 땅 속에 파묻힌 금속에도 태양은 그 영향력을 미친다. Ⅲ. 누구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있는가? 그것은 세상 모든 곳에 선포되고 있다(3-4절). “언어가 없고(나라가 없다. 왜냐하면 나라는 “방언대로” 나뉘었기 때문이다. 창 10:31-32)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 줄이(즉 주야 평분선으로 추정된다)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자연의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을 선포하면서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4절).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이 자기나 또는 다른 사람들이 이방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을 막고 분노해서는 안 되는 이유로 이 사실을 들고 있다. 즉 하나님은 이미 그가 지으신 것으로써 이방사람들에게 그 자신을 알리셨고, 그들에게 증인이 결여되도록 만들지는 않으셨기 때문이다(롬 10:18). 그러므로 그들이 우상 숭배자가 된다는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일이었다(롬 1:20-21). 그리고 복음을 가르침으로써 그들을 우상숭배에서 돌아오게 하려 했던 자들은 비난당하지 않았다. 하나님이 그들의 배신을 막기 위해 이런 방법을 쓰셨고, 그것이 무효가 되었을 때, 그 사도들은 그들을 돌아오게 하기 위해 곧잘 다른 방법을 사용했다. 즉 “언어가 없을지라도(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이렇게 풀이하고 있다) 들리는 소리가 있도다.” 만백성들은 이 자연의 불멸하는 설교자가 그들에게 그 자신의 언어와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을 말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이 구절을 노래함에 우리는 하늘의 빛들에 의해 우리가 얻은 모든 위안과 유익에 대한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고, 그 하늘의 빛 위에 계신 의로우신 태양을 항상 주시해야 한다. --------------- 성서..말씀의 탁월함(시 19:7-14) 하나님의 영광(즉 사람에 대한 그의 선하심)은 창조의 역사 속에 많이 나타나 있으나, 거룩한 계시 속에, 그리고 그 계시에 의해 더욱 많이 나타나 있다. 거룩한 성경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의무와 그에 대한 우리의 기대를 알려주는 길잡이로서, 밤이나 낮보다, 우리가 숨쉬고 있는 공기나 햇빛보다 우리에게 훨씬 더 유용하며 유익하다. 만일 사람이 자기의 결백함을 지니고 있었다면, 하나님이 지으신 것에 의해 하나님을 아는 일은 더 쉬웠을 것이다. 그러나 타락한 상태에 있는 그를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또 다른 방법이 취해져야 한다. 즉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 Ⅰ. 시편 저자는 여섯 개의 문장 속에(7-9절) 하나님 말씀의 탁월한 특성과 유용성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그 각 문장에서 “여호와”라는 이름이 반복되어 있는데 그것은 필요 없는 반복이 아니다. 왜냐하면 율법이 지닌 그 권위와 탁월함은 율법을 만드신 자로부터 부여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명칭이 여섯 가지쯤 나온다. 거룩한 계시를 총괄적으로 생각해 볼 때 교훈, 약속, 특히 복음 등으로 간주된다. 여기에 그에 대한 훌륭한 특성도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그 율법의 거룩한 근원을 입증해 주고 있다. 또한 그것은 우리의 마음을 율법에 기울이도록 권하고 있으며, 어떤 다른 법들보다도 그것을 더욱 찬란하게 하고 있다. 또한 여기에는 그 율법이 인간의 마음에 미치는 여러 가지 좋은 영향이 제시되어 있다. 이것은 그 율법이 어떤 의도를 지니고 있는가,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사용할 수 있는가, 그것과 함께 행해지고 그것에 의해 역사되는 거룩한 은혜의 효능이 얼마나 놀라운가를 보여주고 있다. 1.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다.” 율법은 모든 타락에서 완전히 떠났고, 모든 선으로 완전히 채워져 있으며, 그것이 의도되는 목적에 완전히 합당하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을 온전케 할 것이다(딤후 3:17). 그것에는 아무것도 더하거나 뺄 수 없다. 그것은 “영혼을 소성케” 하는 데에, 즉 우리를 우리 자신에게, 우리 하나님께로, 우리의 의무로 돌아오게 하는 데에 유용하다. 왜냐하면 율법은 하나님을 떠난 우리의 죄악과 비참함과 아울러 우리가 그에게로 돌아가야 하는 절대적인 필요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2. “여호와의 증거는(우리에게 제시된 그에 대한 증거) 확실하다.” 우리가 그것을 신용할 수 있고 의지할 수 있으며, 그것이 우리를 속이지 않으리라는 사실은 명백하고도 침범할 수 없을 정도로 확실하다. 그것은 거룩한 진리에 대한 확실한 발견물이며, 우리 의무의 길을 확실하게 가리켜준다. 율법은 살아 있는 위안과 영원한 소망의 확고한 토대다. 그것은 우리를 지혜롭게 하는 데에, 즉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는 데에 유익하다(딤후 3:15). 그것은 우리에게 거룩함을 통찰할 수 있는 힘과 앞으로 올 일에 대한 예견력을 줄 것이다. 우리로 하여금 가장 선한 일에 몰두하도록 할 것이며, 우리의 참된 유익을 안전케 해줄 것이다. 그리고 “우둔한 자들”(현재의 세상을 위해 보잘것없는 계획을 세우는 자)까지도 그들의 영혼과 영원을 지혜롭게 만들 것이다. 우둔하나 겸손한 자들, 즉 그들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달아 가르침을 받고자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지혜롭게 될 것이다(25:9). 3. “여호와의 교훈은(그의 권위로써 제정되고 어느 곳에서나 구속력이 있는) 정직”하다. 선악의 영원한 규범의 원리에, 즉 사람의 올바른 이치와 하나님의 올바른 뜻에 정확히 일치한다. 범사에 관한 하나님의 모든 법도는 마땅히 바르며(119:128) 의롭다. 그리고 우리가 그 법도를 받아들이고 복종한다면, 우리를 바르게 인도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정직하기 때문에 “마음을 기쁘게”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손안에서 볼 수 있는 율법은 우리에게 기뻐할 이유를 주고 있다. 그리고 우리의 가슴에 새겨졌을 때 그것은 우리의 바른 마음을 회복시켜 줌으로써 영원히 기뻐할 토대를 마련해 놓는다. 4.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다.” 그것은 어둠 없이 선명하다. 그것은 찌꺼기나 더러움 없이 깨끗하다. 그것 자체는 모든 불순물로부터 정제되었으며, 그것을 받아들여 가슴에 품는 자들을 정화시킨다. 이것이 성령이 “눈을 밝게” 하기 위해 사용하는 일반적인 방법이다. 따라서 그것은 우리가 우리 죄악과 비참함을 보고 깨닫도록 해주며, 우리에게 의무의 길을 지시한다. 5.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말씀 가운데 규정되어 있는, 그리고 마음에 자리잡고 있으며 생활 속에 실행되는 참된 믿음과 경건은) 정결하다.” 그 자체가 정결하며, 우리를 깨끗하게 하고(요 15:3), 우리의 행실을 깨끗하게 할 것이다(119:9). 그리고 그것은 “영원까지 이른다.” 그것은 영원한 은혜이며, 결코 철회될 수 없다. 의식적인 율법은 사라진 지 오래나 하나님의 경외에 관한 율법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세월도 도덕적인 선과 악의 본질을 변경시킬 수는 없다. 6. “여호와의 규례는(무한하신 지혜로 이루어진 그의 모든 교훈은) 확실하다.” 그것은 가장 신성하고 명백한 진리를 근거로 하고 있다. 그것은 “다 의로우며”, 모두 자연적인 공의에 일치하고 있다. 그 속에는 불의한 것이 하나도 없으며, 모두 한가지다. Ⅱ.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큰 가치와 그가 얻었던 큰 유익, 그리고 그것에 대해 품었던 소망을 표현하고 있다(10-11절). 1. 그가 하나님의 계명을 얼마나 높이 평가하고 있는가를 보라. 모든 선한 백성들의 특성은 그들의 믿음과 하나님의 말씀을 무엇보다도 좋아하는 것이다. (1) 세상의 모든 재물보다 그것을 더 좋아한다. 말씀은 “금”, 정금, “곧 많은 정금보다 더 사모될 것이다.” 금은 땅에서 나온 세속적인 것이나 은혜는 거룩한 형상이다. 또한 금은 오직 육신과 일순간의 염려를 위한 것이나, 은혜는 영혼과 영원에 대한 관심을 위한 것이다. (2) 관능적인 모든 즐거움과 기쁨보다 말씀을 더 좋아한다. 믿음으로 받아들인 하나님의 말씀은 영혼에게 달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다.” 감각적인 즐거움은 짐승들이 누리는 기쁨이므로 인간의 위대한 영혼을 타락시킨다. 믿음의 즐거움은 천사들의 기쁨이며, 그것은 영혼을 고귀하게 한다. 관능적인 즐거움은 기만적인 것으로서 쉽게 물리게 하나 결코 만족을 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믿음의 즐거움은 본질적이고 만족감을 주며, 거기에는 과도의 위험이 없다. 2. 그가 하나님 말씀의 교훈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가를 보라. “주의 종이 이로 경계를 받는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생들에게 주는 경고의 말씀이다. 그것은 우리가 해야 할 의무와 해야 할 위험, 그리고 대피해야 할 홍수를 우리에게 경고한다(겔 3:17, 33:17). 그것은 악인에게 사악한 길을 계속 가지 않도록 경고하며, 의인에게는 선한 길을 떠나지 않도록 경고한다. 진정한 하나님의 종인 모든 사람들은 이 경고를 받아들인다. 3. 하나님의 교훈을 준행함으로써 어떤 유익을 그 자신에게 약속했는가 보라. “이를 지키므로 상이 크니이다.” 자기의 의무를 자각하는 자들은 그것으로 인해 아무것도 잃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말할 수 없는 이득을 얻는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킨 후뿐만 아니라, 지키는 가운데에도 즉각적인 복종 속에 있는 복종의 큰 상을 받는다. 믿음은 건강과 영예다. 그것은 평강과 기쁨이다. 그리고 우리 위안을 달콤하게 만들 것이며, 우리의 고난을 가볍게 만들 것이다. 즉 생을 진실로 값있게 하고, 죽음 자체를 진실로 사모하게 만들 것이다. Ⅲ. 그는 하나님 말씀의 탁월함에 대한 이 경건한 묵상으로부터 몇 가지 훌륭한 추론을 이끌어내고 있다. 이런 생각은 우리 안에 있는 경건한 마음을 고조시켜서 유용하게 한다. 1. 그는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있다. 즉 “율법으로 죄를 깨닫는다.” “계명이 이처럼 거룩하고 의롭고 선합니까? 그렇다면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어느 누가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나는 할 수 없습니다.” 거룩한 율법의 올바름으로부터 그는 자신의 죄를 “허물”이라 부르는 것을 배우고 있다. 계명이 진실되고 의롭다면 그 계명을 범하는 것은 과오에서 기인하는 허물이다. 모든 악한 행실은 어떤 타락한 원리에서 야기된다. 악한 행실은 우리가 준해서 행해야 할 그 규정에서, 우리가 걸어가야 할 궤도에서 탈선하는 것이다. 또한 거룩한 율법의 범위와 엄격함과 영적인 특성에서, 그는 그의 죄가 너무 많아 그 수효를 헤아릴 수 없고 매우 지나치게 사악하므로 그가 그 극악함과 악의를 측량할 수 없다는 것을 배우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태만과 편견으로 인해 우리가 깨닫지 못하는 많은 죄를 범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가 범한 많은 죄를 잊어버린다. 그러므로 우리가 죄를 낱낱이 자백할 때는 항상 그 자백 끝에 그밖에, 등등(et cetera)이라는 말을 덧붙여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 죄를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많은 일들 속에서 우리는 죄를 범한다. 우리가 얼마나 자주 죄를 범하는지를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는 것은 다행한 일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는 이미 파멸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2. 그는 여기에서 죄에 대항해 기도하고 있다. 율법에 의해 우리에게 드러난 모든 죄는 우리를 은혜의 보좌로 이끌어 여기서의 다윗처럼 기도하게 한다. (1) 즉 용서를 위한 긍휼을 간구하게 만들 것이다. 그 자신이 범죄한 모든 조목을 열거할 수 없음을 발견한 그는 “여호와여,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하고 부르짖고 있다. 하나님이 모르시는 것은 없다. 세상에는 비밀로 할 수 있을지라도 친히 감찰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숨길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가장 선한 자들까지도 그들 스스로 많은 은밀한 잘못을 범하지 않았는가를 의심하고, 또 그들을 그 범죄에서 벗어나게 해 그것으로 문책당하지 않도록 해주시기를 하나님께 간구해야 한다. 우리의 결점과 부주의로 인한 죄나 은밀한 죄들도, 하나님께서 그것에 따라 우리를 평가하신다면 우리 멸망의 원인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은밀한 과오도 우리를 더럽게 해 우리를 하나님과 교제하기에 합당치 않게 만든다. 그러나 그것이 용서받을 때 우리는 죄에서 깨끗하게 된다(요일 1:7). (2) 곤고할 때는 도와주실 은혜를 간구하게 만들 것이다. 그의 결점으로 인한 죄가 사함받도록 간구한 후에 그는 고범죄, 즉 고의적 죄를 짓지 않게 되기를 간구하고 있다(13절). 자기의 죄를 진심으로 회개하고 그것을 용서받은 자들은, 그들의 기도에 의해 나타나듯이 죄에 빠지지 않도록, 또한 다시 어리석음을 반복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인다. 여기에 나온 다윗의 기도도 그런 기도다. 여기서 다음을 살펴보자. ① 그의 기원. “나로 하여금 고집스럽고 고의적인 죄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우리는 우리의 약함으로 인한 죄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간구해야 하며, 특히 고범죄에서 떠나도록 간구해야 한다. 그것은 매우 하나님을 거스르고 양심을 상하게 해, 우리의 위안을 시들게 하고 우리의 소망이 흔들리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것도 나를 주장치 못하게 하소서. 내가 그러한 죄의 손아귀에 있게 하지 마시고, 그 노예가 되지 말게 하소서.” ② 그의 탄원. “그리하시면 내가 정직하여, 즉 정직함을 나타내고 내 정직함의 증거와 위안을 보존하여 큰 죄과에서 벗어나겠나이다.” 그는 고범죄를 이렇게 일컫고 있다. 왜냐하면 어떤 제물로도 그것을 속죄할 수 없기 때문이다(민 15:28-30). 여기에서 다음 사실에 주목하자. 첫째, 고범죄는 매우 가증스럽고 위험하다. 율법과 그 규제를 경멸하고 도전하면서 평소의 신념과 자기 양심의 실질적인 경고를 무시하고 죄를 짓는 자들은, 즉 거만하게 죄를 짓는 자들은 무례하게 죄를 범하는 것이며, 그것은 큰 범죄다. 둘째, 훌륭한 자들일지라도 그들 자신에 대해 경계해야 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지금까지 죄에서 벗어나 있었다 할지라도 주제넘은 죄를 범하게 될까 두려워해야 한다. 셋째, 우리는 매우 많은 위험을 당하고 있으므로, 우리가 고범죄를 저지르도록 압력을 받을 때 그 유혹을 막는 섭리나 그것을 이기게 하는 그의 은혜에 의해 우리가 거기에서 떠나도록 하나님께 간구해야 할 필요성이 크다. 3. 다윗은 그의 경건한 생각과 애정을 용납해 주시기를 겸손히 간구하고 있다(14절). 앞에 제시된 것과 이것과의 관계를 주시하라. 그는 하나님께 죄로부터 그를 지켜주실 것을 간구한 다음에 하나님께서 그의 일을 열납해 주실 것을 간구하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우리의 죄를 옹호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우리의 봉사를 열납하시리라는 것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66:18). 다음 사실을 생각해 보자. (1) 그의 봉사는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그의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었고, 하나님께 바친 그의 거룩한 사모함이었다. 마음의 경건한 묵상은 위축되어서는 안 되고 하나님의 영광과 다른 사람들의 교화를 위해 우리 입의 말로 표현되어야 한다. 그리고 기도와 찬미를 드리는 우리 입의 말들은 형식적인 것이 아니고, 마음의 묵상에서 넘쳐나온 것이라야 한다(45:1). (2) 이 봉사에 대한 그의 관심사는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그 봉사가 하나님께 열납되는 것이었다. 만일 우리의 봉사가 하나님께 열납되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무슨 유익이 되겠는가? 은혜로운 영혼은 그것이 하나님께 열납될 때 목표한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다. 하나님께 열납되는 것이 곧 영혼에 대한 축복이다. (3) 그는 이런 것을 기대하도록 격려받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의 반석이시며, 그의 구속자이셨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믿음의 의무에서 우리의 힘이 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도움을 구한다면, 우리가 의무를 이행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열납해 주시리라고 기대할 수 있다. 그의 힘에 의해 우리는 그와 함께 능력을 갖기 때문이다. 이것을 노래함으로써 우리는 우리 마음이 하나님 말씀의 탁월함을 매우 사모하고 그것에 전념하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죄로 인한 재앙에 대해, 그 속에 있는, 그리고 그것에 의한 위험에 대해 매우 경계해야 하며, 그것에 대항할 힘을 하늘로부터 가져와야 한다. =======참예함/참여함/동참함 = 동반자 됨 ==== ###koinwniva(2842, 코이노니아) fellowship=partnership=communion, 참여 participation,[[참예함...전심으로 전존재 기울여, 함께 있어 하나 되어 타겟을 바라보고 맛봄-누림-체득]] 유기적 생명 공동체, 한 새 사람, 유일무이한 우주적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동반자인 지체들간의 사귐/생명의 교통 >>(친교, 교제의 의미로는 약함) (그 결과) 한량 없으신 생명의 그 영, 충만한 그리스도를 공급/나눔/분배 impartation.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코이노니아(Plind. 이래)는 코이노노스(koinwnov", 2844: 동료, 참여자)에서 유래했으며, (a) '참여' participation, (b) '나누어줌' impartation., (c) '친교, 교제' fellowship. (d) '자선품이나 기부금'을 의미한다. ·이 단어는 목적 속격(나누는 것), 주격 속격(나누는 사람 또는 물건), 여격(수령자)과 함께 사용되거나 전치사 및 목적 속격(참여하고 있는 자)과 함께 사용되었다. ·인간 생활-나눔은 여러 분야에서 일어난다. 예를 들면 사업, 법률관계, 결혼 등, 또한 헬라인에게 있어서 친교의 최고의 표현이 우정이다. 시민권 또한 중요하다. 왜냐하면 사회의 보존과 실로 세계(cosmos)의 보존은 정치적, 세계적 나눔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제의적 언어-원시 사상에 의하면 먹고 마심에서 신비한 신적 능력을 내적으로 받아들인다. 이런 개념은 제의적인 축제나 심지어 성적인 결합을 통하여 신과 연합한다는 헬라 개념에도 잔존해 있다. 철학은 이 개념을 순화한다. 따라서 플라톤에게 있어서 신과의 교제는 친교의 최고 형태이다. 반면에 완전한 우주에 대한 이상을 가지고 있는 스토아 철학은 인간 사이의 친교와 신과의 모든 인류의 친교를 강조한다. 신비주의는 친교를 합일(union)로 대체한다. 2. 70인역본의 용법. 명사 코이노니아는 70인역본에서 3회 나오며, 레 6:2에서 '담보, 보증'이라는 의미로, 지혜서 8:18에서 물질적 참여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명사 코이노니아는 신약성경에서 19회 나오며, 3회를 제외하고는 모두 바울 서신에 사용되었다. 1. 코이노니아는 '함께 나누는 것'을 나타낸다. (a) ① 고전 1:9에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아들과 친교하도록 초청받았다: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더불어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이런 친교에는 이교의 신비적 합일이 아니요, 이 친교는 그들의 생명과 그리스도의 생명을 동일시 하는 믿음으로 인한 것이다. 이 친교는 현재 얻게 된다 할지라도 미래에 완성될 것이다(참조: 살전 4:17). ② 빌 1:5에 보면 이 친교에는 복음에의 참여가 수반되며,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에서 너희가 교제함을 인함이라"(참조: 고전 9:23), ③ 믿음의 교제가 수반된다: "이로써 네 믿음의 교제가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하고 그리스도께 미치도록 역사하느니라"(몬 1:6). (b) 고전 10:16 이하에서 코이노니아는 주의 만찬에서 일어나는 교제에 대한 매우 중요한 표현에 사용되었다: "우리가 축복하는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함이 아니냐". 바울은 주의 만찬에서 가지게 되는 친교에 대해 코이노니아를 매우 의미심장하게 사용하였다. 기본적으로 완전히 믿음 안에서 알게된 그리스도에게 참예하는 일은 어떠한 교리와도 연관되지 않은 채 성례전에서, 고양된 형태로 이루어지고 경험된다. 먼저 바울은 주의 만찬을 유대교와 이교의 제사 의식과 구별한다. 고대의 일반적인 신앙에 따를 때 제의적 식사에 참여하는 자들은 그 신과 함께 하는 자들이 됨은 자명한다. 따라서 유대의 희생 제물을 먹는 자들은 "제단에 참예하는 자"(고전 10:18)가 된다. "제단"은 분명 하나님을 가리켜 사용된 것이다. 제단은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고 보증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교 제사에 참여하는 자들은 "귀신과 교제하는 자"(고전 10:20)들임이 분명하다. 유추적으로 주의 만찬에 참예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동류들인 것이다. 주의 만찬에서 생기는 진정한 교제는, 그리스도인들이 이방인들의 의무 가운데 하나인 제의적 식사를 피해야만 한다는 매우 당연한 신앙적 결론을 수반한다(고전 10:21). 따라서 바울은 주의 만찬의 성격을 그리스도의 인격과의 교제의 견지에서 설명한다. 즉 그의 몸과 피에 참예하는 것(코이노니아)이라고 한다(고전 10:16). 유대의 제단이 하나님의 임재를 보증하는 것이듯이 떡과 포도주(잔)는 그리스도의 임재의 방편이다. 떡과 잔에 참예함은 하늘의 그리스도와 연합(함께함)하는 것이다. 바울에게 있어 높임받으신 그리스도는 몸과 피를 가진 지상의 역사상의 그리스도와 동일하신 분이다. 코이노니아는 내적 합일(연합)을 표현하는 것이다. 바울은 이것을 이 의식에서 중요한 것으로 생각한다. 바울에게 있어서 높임 받으신 그리스도와의 진정한 합일은 그의 사망으로 말미암아 얻으신 용서의 축복을 반드시 포함하는 것임이 자명하다. 제의적 식사에서 이러한 합일이 어떻게 일어나는지에 대해서 바울은 귀신과의 교제에서도 그리스도인의 교제에서도 우리에게 말하지 않는다. 바울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이 유사한 친교 방식의 성격이 아니라 친교의 사실 그 자체이다. 고전 10:17절에 삽입된 진술에서 바울은 희생 제사에서와 마찬가지로 주의 만찬에서도 참여자들 사이에 친교가 존재한다는 것을 선언한다. 이것은 그리스도로부터 떨어져 있지 않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한 개의 떡으로 표현되는 바와 같이 그리스도와의 공통적인 연합에서 생겨난다. (c) 빌 3: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바울에 의하면 그리스도와의 친교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삶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참조: 롬 6:8; 롬 8:17; 롬 6:6; 딤후 2:12; 고후 7:3; 골 2:12-골 2:13; 엡 2:5-엡 2:6). 여기에는 두가지 측면의 교제가 있는데, 첫째는 그리스도의 수치(굴욕)와의 친교이며, 둘째는 그의 높임 받으심과의 친교이다. 바울은 그의 생애와 사역에서 그리스도의 전체 고난에 동참한다(빌 3:10; 참조: 골 1:24). 그러나 그는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영광에도 참여하기를 소망한다(빌 3:10; 참조: 롬 8:17). (d) 성령에 참여는 그리스도인의 표시이다. ① 고후 13:1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찌어다". 성령으로 그리스도는 신자들에게 오신다. 우리가 여기서 가지는 것은 성령에 참여이다. ② 빌 2:1,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에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여기서 '성령의 교제'(코이노니아 프뉴마토스)는 '긍휼이나 자비'와 같이, 일반 사람에게 있는 어떤 것과 같이 성령 안에서 친교(교제)이며, 성령이 실행하는 친교(교제)가 아니다. (f) 요일 1:3; 요일 1:6; 요일 1:7, "3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6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 7 저가 빛 가운데 계신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여기에서 코이노니아는 그리스도 및 하나님과의 신비적 결합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 안의 교제를 언급한다. 이 사귐은 여기서 시작하여 이후에 완성될 동거함(참조: 요일 3:2; 요일 3:24; 요일 4:13)에 의하여 성부 및 성자와의 친교로 시작한다(요일 1:3; 요일 1:6). 이 사귐은 신자들의 가족적 교제를 가져온다(요일 1:3). 그 근거는 역사적 예수님에 대한 사도의 설교와 빛 안에서의 행함과 모든 죄를 씻기시는 예수님의 피에 있다. 따라서 이것은 성육신을 부정하고 죄의 특성을 잘못 전달하는 분파적인 자만심을 배격한다. 2. 코이노니아는 '어떤 것을 나누어 주는 것'을 나타낸다. (a) 행 2:42에서 코이노니아는 독립적인 의미의 예배 생활의 필수 부분으로 간주될 수 있다: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코이노니아는 '참여, 함께 나눔(나누어줌), 교제(친교)'라는 의미에서 보면 '그리스도의 피"(빌 2:1)와 복음 사역에서의 협동(빌 1:5), 가난한 자들을 위한 헌금(고후 8:4; 고후 9:13) 등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코이노니아의 정확한 의미에 관한 다양한 견해가 있다. 그것은 행 2:44에 있는 재산의 분배를, 혹은 신자들의 공동체 안에서의 한 마음을, 혹은 친교적 의미에 있어서의 주의 만찬(고전 10:16)을, 혹은 공동 식사에 참여해서 나누는 교제, 혹은 아가페(애찬)를 말할 수도 있다. 코이노니아는 새롭고 독립적인 어떤 것을 나타낸다. 곧 성령에 의해 전달된 일치와 연합을 나타낸다. 개인은 이 공동체에 의해 완전한 후원을 받았다. (b) 고후 9:13에서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져온 기부금, 곧 가난한 자들을 위한 헌금은 교회들의 교제를 나타내주는 확실한 표현이다: "이 직무로 증거를 삼아 너희의 그리스도의 복음을 진실히 믿고 복종하는 것과 저희와 모든 사람을 섬기는 너희의 후한 연보를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이 기부는 신앙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것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결합하는 하나의 복음으로부터 발생되었고 바울이 롬 15:26에서 말하는 것과 똑같은 영적이며 물질적인 주고 받음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에는 실제적인 궁핍이 있었다. 예루살렘 성도들 중에는 가난한 이들이 대다수였다. 예루살렘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영적인 은사들"의 시냇물은 "세상의 선물들"의 마주쳐 흐르는 시냇물로 응답되었다. 그러나, 지금 돌아보면..초대 교회의 이 모범은 단절된 채로 남게 되었다. 이 모범을 모방하는 것은 요구되지도 않았고 행해지지도 않았다. 사유 재산의 보전은 모든 교회들에서 당연한 일로 간주되었다. 기독교는 새로운 사고 방식을 가져온 것이지 새로운 사회 질서를 가져온 것이 아니다. 1895년의 복음 사회 협의회(Evangelical Social Conference)에서 프리드리히 나우만(Friedrich Naumann)은 '종교의 관점에서 경제 체계에 이르는 것은 가능한 일이 아니다'고 말했고, 반면에 에른스트 트뢸취(Ernst Troeltsch)는 기독교에 독립적인 혁명적 요소가 있으나 혁명을 선동할만한 뜻은 없다고 지적하였다(The Social Teaching of the Christian Churches, 1, 1931, 3969). (c) 바울도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모금과 관련하여 이 의미를 사용한다. 이 모금은 두 부류의 기독교인 간의 친교를 보여주는 분명한 형태이다(갈 2:9; 롬 15:26). 이 모금은 신실하고(고후 8:4) 마음에서 우러난 나눔(고후 9:13)으로 섬기는 교제의 의의를 지닌다. 히 13:16에서도 적극적인 나눔을 뜻한다. (참조: J. Schattenmann; F. Hauck; Walter Bauer; J. H. Thayer). ---------------- 행 2:42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롬 15:26 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동정]하였음이라 고전 1:9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더불어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고전 10:16 우리가 축복하는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함]이 아니냐 고후 6:14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고후 8:4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고후 9:13 이 직무로 증거를 삼아 너희의 그리스도의 복음을 진실히 믿고 복종하는 것과 저희와 모든 사람을 섬기는 너희의 후한 [연보]를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고후 13:1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찌어다 갈 2:9 또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기둥 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나와 바나바에게 [교제]의 악수를 하였으니 이는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저희는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 엡 3:9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빌 1:5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에서 너희가 [교제함]을 인함이라 빌 2:1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에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빌 3: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몬 1:6 이로써 네 믿음의 [교제]가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하고 그리스도께 미치도록 역사하느니라 히 13:16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 이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 요일 1:3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요일 1:6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 요일 1:7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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