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0.10.15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벧전1:1-12.관유.욥의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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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전서(서론)   .

..JC의 인격은 하나님의 어떠하심(관계적 성품)인데, 바울서신에서는 성령열매로, 복음서에서는 온유-친절(불쌍이 여기심)-겸손으로, 출34에서는 자비-은혜-노하기를 더디함-인자와 진실이 무궁함, 시편에서는 선하심-인자와 진실하심으로 표현되어 나타났음에 유의하라.!!!

...마태복음(하나님나라, 그리스도의 왕국), 마가복음(왕국에서의 섬김), 누가복음(왕국안으로, 왕국안에서 누리는 구원) 요한복음(왕국의 생명) ---> 베드로서(영원과거에서 영원미래에 걸치는 하나님의 우주적 통치, 통치적 행정 수행으로서의 심판

**은혜 : 믿는 우리가 [그리스도께 합당한 자로 여기시기에 그것을 기쁘게 감수함으로써 그리스도를 빼어 닮도록 하나님이 계획하신 바, 고난/환난, 질고, 간고, 핍박/박해, 상실 등 관계나 상황안에서 느끼는 모든 필요를 따라, 쉽사리 불평/불만-원망/남탓하기-시기/좌절의 사망에 자신을 내어줌이 아니라] 오히려 약속말씀따라 믿음을 발휘함으로써 주를 앙망하며 갈망하는 바, 우리에게 오사 당신의 참생명(하나님 생명=조에)을 부어주시는 하나님 자신으로서,  먼저 믿는 이가 누리고 충만케 됨으로써 또한 그 통로로 사용되어 그것이 필요한 모든 곳에 공급하도록 하심으로 하나님을 공급하게 하신다. .....이것은 생명의 은혜로 시작되는데, 그 생명의 특성상 더 증가되는 은혜이며, 다방면/범주에 걸쳐 확대되어 작동되는 각양 은혜(다른 방면, 다른 범주에까지 확장 적용되는 은혜)가 되며, 이윽고 하나님의 모든 은혜가 되는데, 이것이 진정한  참된 은혜임을 베드로는 말하고 있음..

베드로에 의해서 기록된 두 서신은 거룩한 정경 안에 포함되어 있다. 

주예수님 만나기전 그"네 이름은 시몬(천연적 옛사람, 진훍)이나 장차, 게바(베드로-반석, 게바-산 돌)라 하리라"고 말씀하셨었다. --교회 건축을 위한자임을 인정하신 것이었다.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장 뛰어난 사도였으며 그의 인격은 사 복음서와 사도행전에 기록된 대로 아름답게 빛나고 있다. 

그러나 가톨릭 교도들과 설화 저술가들에 의하여 묘사되어 있는 바의 베드로는 자만과 교만이 지나친 사람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시몬 베드로는 우리 주님이 제자와 추종자로 삼기를 바라신 맨 처음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었음이 성경에 명기되었으며, 이해력이 빠르고 자기의 사명으로 안 것은 무엇이든지 수행하기에 담대한 사람이었다. 

우리들의 구세주께서는 그의 사도들을 불러 그들에게 사명을 주실 때에 베드로를 첫번째로 임명하셨다. 

베드로에 대한 주님의 처사로 보아서 주님은 열두 제자 중에서 특별한 사랑으로 베드로를 구별하였던 것 같이 보인다. 

예수의 생존시와 부활 이후에 그가 베드로에게 베풀었던 애정에 관한 예증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 경건한 사람(베드로)에 대해 담대하게 증언하는 잘못된 사실들이 많이 있다. 

즉 베드로는 나머지 사도들보다 능가하는 탁월성과 초월적인 능력을 가졌다는 점과 그리고 그는 자기의 동년배 이상의 존재였고 다른 모든 사도들의 제후, 군자 그리고 국왕과 같은 존재였다는 점이다. 

그는 사도들로 이룩된 단체에 대해 재판권을 행사하였다는 점이나 더욱이 그는 기독교 세계의 유일무이한 목회자요, 지상에서 유일한 그리스도의 대리자라는 것, 그리고 그는 20년 이상을 로마의 감독으로 있었으며 로마의 교황들은 성 베드로를 계승한 것이며, 지상에서의 모든 교회와 성도들을 주관할 절대적 권위와 재판권은 베드로에게서 비롯된다고 하는 것,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우리 주님의 명령과 지시에 의한 것이었다는 것이 모두 잘못된 사실들이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이러한 종류의 어떤 탁월성을 베드로에게 주신 것이 아니며 오히려 적극적으로 그런 것을 금하셨던 것이다.

그리고 반대의 교훈을 주셨다. 

다른 사도들도 이러한 주장에 대해 동의하지 아니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11장 5절과 12장 11절에서 “내가 지극히 큰 사도들보다 부족한 것이 없다”고 자신에 대해 선포하고 있다. 

바울은 베드로의 특별한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베드로를 자유롭게 책망했으며 그를 면책하기까지 하였다. 

그리고 베드로 자신도 이러한 것들을 결코 취하지 아니했다. 오직 그는 겸손하게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로 칭하고 있다. 

또한 베드로는 교회의 장로들에게 편지할 때 겸손하게 자신을 그들과 같은 위치에 놓았다.

즉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된 자이다”(벧전 5:1)라고 말했다. 

교황의 우월권에 대해서는 바로우(Dr. Barrow) 박사가 저술한 책을 참고하기 바란다.

이 첫번째 편지서(베드로전서)의 의도는 다음과 같다.

1. 새로 개종한 유대인들(바벨론 유수로 인해 바벨론제국의 소아시아지역에 흩어지게 되어 거기에 살고 있었던  디아스포라)에게 기독교의 교리를 좀 더 충분히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2. 모든 개인적이며 상호적인 의무를 성실히 이행하는 중에 새로 개종한 유대인들에게 거룩한 교제를 가르치며 이를 추구하도록 함으로 여기에서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평안을 얻고 그들의 원수들의 비방과 조롱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게 하는 데 있다.

3. 그들로 하여금 고난에 대한 준비 태세를 갖추게 하기 위함이다.

 이것이 베드로의 기본 의도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베드로가 내포하고 있으며, 여러 가지 형태의 논쟁으로 그들에게 닥치는 핍박과 비극적인 재난이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와 복음을 저버리도록 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하여 믿음 안에서 참고 견디도록 그들을 격려하였기 때문이다.

베드로전후서 안에는 어떤 권위자의 정신과 자존심을 나타내는 말을 하나도 찾아 볼 수 없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하나님의 통치 행정적 측면은 심판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아담의 범죄이후 태어나는 자녀들의 본성이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철저히 마귀에게 속아 스스로 종노릇한 결과 세상에 죄악이 관영하게 됨으로써 통치적 심판을 내리시는데, 곧 노아홍수 사건(8명만 생존)-바벨탑 사건(언어를 나누고 민족들을 흩으심)-족장시대(개별적인 연단의 다루심<징계적 심판>)-출애굽과 광야의 심판<민족 전체를 다루심>-이스라엘 왕국 성립과 멸망<다윗, 선지자들의 빼어난 영성의 모본을 나타나게 하심> 통해 하나님의 백성에게 합당한 거룩한 성품의 백성 (곧 그리스도를 빼어닮은 백성), 자녀들로 구성된 하나님 나라(그리스도의 왕국)를 만들기 위함이었다. ..이제,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여 십자가상에서 죽으심-부활-승천 후 성령을 보내심 통해서 펼치시는 신약경륜안에서 하나님의 통치적 심판은 그리스도인들 마다에 대한 고난/환난/어려움(간고, 질고, 박해/핍박, 전쟁-기근-전염병 등 재앙)을 통해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함을 통한 그리스도 닮음 이루시려는 연단 위한 다루심의 징계(disciplanary dealing)인데, 이는 7년 대환난/아마겟돈 전쟁으로부터 이어지는 주의 공중재림(죽은 성도의 부활+참신자의 변형)/아마겟돈 전쟁 승리/예루살렘 보좌 심판(양과 염소로 나누심) 통해 신자중 합당한 자들은 주와 함께 섬기며 다스리게 되지만 준비가 안된 이들은 천년왕국기간동안 다루심을 받게 된 후(바깥 어두운데서 이를 갊이 있으리라) 구원에 이르게 되고, 불신자들은 천년왕국기간동안 계속 죽음을 통해 다루심 가운데 있을 것이며, 그 후 <곡과 마곡의 전쟁 직후>영멸을 가져오는 백보좌 심판으로 이어지게 되어 있음.

---베드로 전후서는 바로 이 연단 위한 징계적 다루심에 대해서, 즉 하나님의 통치행정적 심판 측면을 나타내고 있음에 특히 유의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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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벧전]바빌론에서 쓰여졌고, 소아시아에 "흩어진 나그네"들에게 편지를 전한다고 밝힌다. 저작연대는 주후 60년에서 68년경으로 추정


제1강. 벧전 1:1-2. 개론

1. 제목

본서는 헬라어 원문에 표기된 ‘페트루 알파'(Πέτρου A)라는 원제목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신약 성경 각권의 표제는 전체 4가지로 집약된다. 집필자명(마태복음, 야고보서, 유다서 등), 수신자명(디모데전·후서, 빌레몬서), 또는 수신지명(고린도전·후서, 갈라디아서 등), 혹은 주제를 반영한 이름(사도행전) 등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본서는 집필자명을 표제에 반영하고 있다. 또한 집필자의 이름 뒤에 있는 ‘알파'(A)를 부기하였는데 이는 이것이 그가 보낸 첫 번째 서신임을 나타내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영어 흠정역(KJV)도 헬라어 원문대로 ‘베드로의 첫 공동서신'(The First General Epistle of Peter)이라 하였고, 한글 개역 성경도 ‘베드로전서'로 표제를 삼았다.

2. 저자와 기록 연대

베드로(Peter)가 본서의 저자라는 사실은 역사 속에서 통상적으로 받아들여져 왔다. 

그러나 19세기 초반 몇몇 비평학자들이 몇 가지 이유를 들어 이에 대한 반론을 제기하였다. 그 몇 가지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본 서신의 헬라어 문체가 상당히 세련되어 있고, 또한 히브리어로 된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구약 70인역(LXX)을 자유롭게 인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무식한 갈릴리 어부 출신인 베드로의 글로 보기 어렵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베드로의 전직이 어부였다는 사실만을 너무 전제로 하여 내려진 비약된 결론이다. 

사실 어부 베드로와 저자 베드로는 시간적으로도 30년 이상의 차이가 난다. 그러므로 그 사이에 그가 어느 정도의 언어 구사력을 갖추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또한 그가 아람어를 모국어로 사용했던 사람이라 할지라도 마찬가지다. 당시는 팔레스틴 전 지역뿐만 아니라 로마 제국 전역이 헬라어를 일상 언어로 사용하는 추세에 있었다. 때문에 베드로 자신도 어느 정도 헬라어를 구사할 수 있었을 것이란 추정은 자연스럽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본서 5장 12절에는 본서가 실루아노의 대필에 의한 것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본 서신은 실루아노의 유창한 헬라어가 반영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둘째, 본서가 바울 서신과 비슷한 내용이 많다는 이유이다. 

실제 본 서신은 로마서의 축소판이라고 할 만큼 교리적으로 로마서와 유사한 부분이 많다. 

따라서 이는 바울의 사상을 모방한 것으로 베드로의 저작이 아니며, 후에 누군가가 바울파와 베드로파의 조화를 위하여 본서를 기록하였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도 본 서신의 대필자인 실루아노였다는 측면에서 보면 문제는 간단하다. 

실루아노가 바울에게 받은 신학적 영향이 본서를 대필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것은 자연스런 현상이 아니냐는 사실이다.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벧후 3:15, 16에 보면 베드로가 바울의 서신들에 대해 정통했음을 알 수 있다. 

때문에 베드로서신에서 바울의 영향이 나타나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셋째, 본서에는 당시의 박해가 상당히 조직적이고 구체적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이유이다(벧전 4:12-19). 

그런데 이렇게 조직적으로 기독교에 대한 로마 제국의 박해가 나타난 시기는 베드로가 순교한 네로(Nero, A.D.54-68)의 박해 시대(A.D. 64-68)가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그보다 한참 후 시대인 도미티아누스(Domitianus, A.D. 81-96)나 트라야누스(Trajanus, A.D. 98-117)의 박해시기로 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를 입증할 만한 자료는 거의 없다. 뿐만 아니라 본서에 나타난 박해의 내용(벧전 1:6; 2:12, 15; 4:12; 5:9)도 후대의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근거는 전혀 없다.

넷째, 본서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생애나 교훈의 내용이 수제자였던 베드로가 기록한 것으로 보기 어려울 정도로 분명치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본 서신은 그리스도의 생애나 교훈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고난 속에 있는 성도들을 격려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본서에는 그리스도에 대한 언급이 상당히 많이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베드로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와 관련하여 적절하게 표현되고 있기도 하다(벧전 2:12, 19-24; 3:14; 4:13; 5:2, 5). 따라서 이런 주장도 설득력이 없다.

한편 본서의 저자가 베드로라는 사실은 가장 먼저 본서 자체에서 밝히고 있다. 

본서 1장 1절 서두에서 저자는 자신이 베드로임을 명백히 밝혔다. 그리고 본서의 내용이 사도행전에 나타난 베드로의 설교와 비슷하다는 점(벧전 1:17, 행 10:34; 벧전 2:7, 8, 행 4:11), 또한 주님의 가르침에 대한 많은 언급 등도 본서의 저자가 베드로임을 증명해준다. 

그가 주님께로부터 직접 교훈을 들은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또한 외증으로도 폴리캅(Policarp, A.D. 69-155), 이레니우스(Irenaeus, A.D. 130-220),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 of Alexandria, A.D. 150-213), 터툴리안(Tertullian, A.D. 220-240)과 같은 초대 교부들의 증거들도 본서의 저자가 베드로임을 인정 하고 있다.

본서 저자인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사도들 중에 가장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그의 고향은 갈릴리이며 그의 직업은 어부였다. 그리고 어부로 생활하는 과정에서 주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았다(요 1:41, 42). 

그의 원래의 본명은 시몬이다. 그런데 후에 주님께서 반석이라는 뜻을 지닌 베드로라는 이름을 그에게 새롭게 지어 주셨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제자 중 수제자로서 자주 제자들의 대변자 역할을 하였다(마 19:27; 막 8:29; 10:28; 요 6:67, 68). 또 제자들 중에 최초로 그리스도가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라는 신앙 고백을 한 인물이기도 하다(마 16:13-17). 그러나 그의 성품은 급하고 충동적이었으며, 때문에 자주 실수를 범하였던 것으로 나타난다(마 16:22; 22:31,32; 요 13:6-10).

한편 그는 주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주님을 세 번 부인하는 실수를 저지르기도 하였다(마 26:69-75). 

그러나 후에 주님께서 그를 찾아가 ‘내 양을 먹이라'(요 21:15-17)고 재 소명을 해 주셨고, 그로 인해 수제자로서의 지위를 회복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과 함께 태동된 예루살렘 초대 교회의 창설자요 수장자 (首長者) 였다. 

아울러 그는 사마리아와 욥바, 가이사랴, 안디옥에까지 진출하여 복음을 전파하는 놀라운 업적을 남겼다. 

실로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 베드로는 유대인의 사도로(갈 2:8), 2000년 기독교사에 길이 빛날 업적을 남긴 인물로 기억됨이 충분하다(행 9:32-10:48; 11:1-18; 갈 2:11). 

전승에 의하면 베드로는 A.D. 68년경 네로 박해 때에 로마에서 십자가형에 의해 순교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한편 본서 기록 연대는 본서 기록 장소를 어디로 보느냐에 따라 크게 달라질 수 있다.

본서 5장 13절에는 본서의 집필 장소를 ‘바벨론'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바벨론이 어디를 가리키는지를 확정할 때 기록 연대도 어느 정도 가깝게 추정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세 가지 견해가 있다. 

첫째는,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메소포타미아 바벨론으로 보는 견해이다. 

이 견해는 바벨론 포로 이후 유대인이 바벨론에 많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베드로가 그곳에 가서 전도했을 것이라는 추측에 근거한다. 

그러나 도마가 바벨론에서 전도했다는 전설은 있으나, 베드로가 그곳에 갔다는 기록은 전혀 전해진 바 없다. 따라서 대개 학자들은 신빙성이 없는 견해로 본다.

둘째, 애굽의 한 도시로 보는 견해이다. 

이 견해에 의하면 바벨론은 카이로의 옛 이름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견해 역시 별다른 관심을 끌지는 못하였다.

셋째는 로마의 상징적 별명으로 보는 견해이다. 

이는 대부분의 학자들이 동의하는 견해이다. 아울러 베드로가 그의 말년을 로마에서 보냈다는 수많은 전설과 부합되기도 한다. 

또 베드로의 믿음의 아들이며 베드로의 영향력 아래 집필한 것으로 전해지는 마가복음의 저자 마가가 로마에 있었다는 점(골 4:10; 몬 1:24), 

그리고 1세기 유대인과 그리스도인 사회에서 로마에 대한 상징적 칭호로 바벨론이라 불렀다는 점(계 17:5; 18:2) 등 이런 다양한 근거에 대부분 성경학자들은 이를 로마로 보는 것에 지지하고 있다.

그럴 경우 본서의 기록 년대를 대략 A.D. 42년경으로 생각하는 설이 있다. 왜냐하면 이때 베드로가 로마에서 복음을 전파했다는 전승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때에는 그곳에서 오래 지체하지 않았을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이 시기에 그는 주로 팔레스틴 주변에서 활동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그 무렵에 본 서신의 수신지인 소아시아 지역에 베드로에 의해 세워진 교회들이 있었다고 보는 것도 어려움이 따른다. 

따라서 베드로가 로마에서 장기간 체류한 것은 일차적으로는 바울의 제1차 투옥 중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때 바울이 쓴 서신에서 보면 베드로 사도의 로마 행적에 대한 일체의 언급이 없다. 따라서 로마에서, 베드로전후서 집필이 가능한 시기로는 그 이후인 A.D. 62-64년경부터 A.D. 68년 순교하기 직전까지의 기간뿐이다. 이때에 본서와 베드로후서를 기록하였을 것으로 보는 것이 가장 설득력이 있고, 따라서 본서는 A.D. 64년 네로의 기독교 대 박해가 막 개시되던 시점에, 베드로후서는 베드로가 순교하기 얼마 전, 그러니까 A.D. 68년경에 기록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3. 신학적 집필 동기와 배경

본 서신은 사도 베드로가 소아시아 지역이었던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의 교회 성도들에게 보낸 공적 편지이며 회람 서신이다(1:1). 

이 지역의 교회들은 대부분 베드로가 [아마도]직접 설립한 것으로 추측된다. 

바울이 2차 전도여행때 이 지역의 전도를 생각하였지만 성령의 적극적인 역사에 의해 바울은 이곳을 가지 못하고 결국 유럽으로 발길을 돌려야 했다. 

그것은 그때 이 지역은 베드로의 영향력 아래 있었기 때문이 아니냐는 생각을 갖게 한다.

이때 이 지역 교회의 구성원은 디아스포라(Diaspora) 유대인 출신 성도들은 물론 이방인 출신 성도들도 상당수 포함하고 있었다. 

그리고 신분상으로도 여러 계층이 혼합되어 있었으며, 노예 출신 성도도 상당수가 포함되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2:1-25).

그런데 베드로가 본서를 기록할 당시는 A.D. 64년 로마 시에서 시작된 네로(Nero, A.D. 54-68)의 기독교 대박해가 점차 로마 제국 전역으로 확산되어갈 상황에 처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소아시아 지역의 교회들은 비록 산발적이고 개인적인 것이긴 하지만, 이미 상당할 정도의 박해를 이방인들로부터 받고 있었다. 

그 박해의 원인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본서에 나타난 베드로의 교훈에 비추어 볼 때 다음 두 가지가 그 이유로 추정된다.

첫째 , 급격히 변화한 성도들의 삶의 양식 (樣式) 때문이다. 

베드로는 본서에서 소아시아 지역의 성도들이 과거 저들이 섬기던 우상을 버린 문제를 언급하고 있다. 또 세상 연락과 음란, 정욕 등과 같은 삶에서의 결별을 논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와 같은 행위들을 일삼는 친구들과의 관계를 단절하였다는 언급도 있다. 그리고 이런 이유로, 그곳 이방인들에게 온갖 비방과 핍박에 직면해 있음을 본서 여러 곳에서 암시하고 있다(2:12; 3:9, 16; 4:2-4, 14-16). 따라서 일차적으로는 기독교로 개종한 성도들의 급격한 삶의 변화가 그곳 이방인들에게 핍박을 당하는 원인이었음이 추정되는 것이다.

둘째, 당시는 구약 시대에서 신약 시대로 갓 이전된 과도기였다. 

그러므로 아직 성도의 신앙생활과 관련된 많은 문제들에 대하여, 신학적 정립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때였다. 따라서 소아시아 교회 성도들이 세속 정부와도 그렇고, 신분상 상전인 이방인들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많은 갈등을 일으키게 되었다(2:13-20). 따라서 이로 인한 이방인들로부터의 박해도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에 사도 베드로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4:14) 당하는 부당한 박해를 위로하기 위해 본서를 집필한 것이다. 

또한 당시는 네로 황제의 기독교 박해가 서서히 시작되는 시점이었다. 따라서 베드로는 이러한 제국의 박해가 언제 소아시아에도 밀어닥칠지 모르는 위기적 상황을 염려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따라서 소아시아 성도들에게 이를 이겨내고 또 믿음을 지켜내야 한다는 격려와 교훈적 차원에서 본서를 집필하게 된 것이다.

이를 위하여 베드로는 본서에서 그리스도의 구속 은혜로 말미암은 구원 교리들을 다시금 상기시킴으로써 성도의 믿음을 견고히 하고자 시도하였다. 

또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십자가 고난을 상기시키면서, 이를 본받아 끝까지 고난을 인내하며 성결한 삶과 선행 및 성도간의 형제 사랑을 실행할 것을 권면하였다.

그리고 이런 경우는 비단 초대 교회 당시의 성도들뿐만의 일은 아니다. 

비록 그 양상은 다르지만 종말이 가까워올수록 성도들은 더욱 자주 여러 형태의 고난에 직면하게 될 것이 분명하다. 

때문에 하나님은 모든 시대의 성도들에게도 위로와 권면을 주고자 하는 동일한 동기 하에 베드로로 하여금 본서를 기록하도록 섭리하셨을 것임이 분명하다. 

이러한 동기로 기록된 본 서신은 ‘소망의 서신'(the Epistle of Hope)으로 불려지기도 하고, 또는 ‘격려의 서신'(the Epistle of Courage)이라 불려지기도 한다.

한편 본서와 베드로후서는 거의 유사한 시대적 배경에서 기록되었다. 

그러나 본서는 이방인들과 로마 제국의 대 박해로 성도의 생존 자체를 위협하는 성도의 고난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베드로후서는 보다 직접적으로 성도의 신앙생활은 물론 교회의 존립을 위협하는 이단의 공격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시대적으로는 동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신앙과 신학적인 측면에서의 집필 배경은 다르다.

4. 베드로전서의 내용 전개

앞에서도 신학적 집필 동기와 배경을 잠시 살펴보았듯이 본서는 직면한 박해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본서를 집필하는 당시도 이미 이방인들에 의한 산발적인 박해가 있었다고 하였다. 아울러 네로 황제가 로마 시에 거주하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박해했던 것과 같은 상황이 소아시아에도 미칠지도 모른다는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위기의 상황에 처한 소아시아 지역의 교회들에게 사도 베드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의 소망을 든든히 붙잡고 고난을 인내하며, 오히려 그 속에서 성결한 삶에 힘쓰도록 권면하고 격려하기 위해 기록한 것이다. 

따라서 본 서신의 내용은 전체적으로 고난 속에서 가져야 할 성도의 신앙 자세와, 사회, 가정, 이웃과의 관계 등에 대한 바른 태도 및 의무 등의 교훈으로 채워져 있다. 

이러한 본서를 서신서의 기본 구조를 기준으로 나누게 되면, 1장 1-12절까지의 도입부와 1장 13절-5장 11절까지의 본론부, 그리고 5장 12-14절까지의 종결부로 삼등분 된다. 그리고 그 세부 내용을 보다 상술하면 다음과 같다.

1) 도입부(1:1-12)

도입부는 전형적인 서신서의 양식에 따라 문안 인사와 본론에 대한 일종의 서론격에 해당하는 교훈과 권면을 준 부분이다. 

여기서 베드로는 1, 2절의 문안 인사를 통하여 ‘성도'(Saint)란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속 사역에 의해 이미 법적으로 구원받은 자이며 장차 천국의 영광에 이를 자라는 성도의 신분을 선언하였다. 그리고 3-12절에서는 찬송의 형식을 빌어 성도가 이 세상에서 각양의 고난을 당하지만, 그러한 고난 속에서도 인내하며 기뻐할 수 있는 이유들로서 성도가 소유한 특권들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이를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로 말미암은 구원과,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얻을 천국 영광에 대한 산 소망, 그리고 고난 속에서도 항상 곁에 계시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성도에게 있다는 것을 논증하고 있다.

2) 본론부(1:13-5:11)

도입부는 성도의 신분과 고난 중에도 성도가 기뻐할 수 있는 이유들로서 성도가 소유한 특권들에 대한 논증이었다. 

그리고 이어진 본론부는 본격적으로 고난 중에 성도가 가져야 할 신앙생활에 관한 구체적인 교훈들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본론부는 그 내용상 다시 세 부분으로 나된다.

(1) 그리스도인의 성결한 삶(1:13-2:10)

본 단락에서 베드로는 성도들을 구원으로 부르신 거룩한 하나님을 본받아 성결한 삶을 살 것을 요구한다. 

또 성도 간에 나누어야 할 형제 사랑 및 고난을 통하여 성도 개인의 성화(Sanctification)는 물론, 교회 공동체 전체의 신앙의 성숙이 있어야 함을 교훈하였다. 

그리고 그 이유에 대해서는 성도는 이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님을 강조하였다. 

성도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라 나그네(17절)로서 불원간 성도의 본향인 천국의 하나님 보좌 앞에 나아가야 할 신분임을 강조한 것이다. 

따라서 그때를 생각하면서 항상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을 가지고 성결에 힘써야 함을 말하였다. 

또 우리 모든 성도는 이 세상에서 받는 고난을 인내로 극복함으로써, 오히려 고난을 성화를 이루는 방편으로 삼으라는 사실을 집중 강조하였다(2:3).

(2)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의무(2:11-3:7)

본 단락에서는 성도가 비록 천국 시민이지만, 아직 이세상 안에 살고 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갖게 되는 여러 형태의 대사회 관계에서의 성도의 자세에 대해 언급하였다. 

먼저 성도의 사회생활을 위한 원론적 교훈과(2:11, 12), 이어 국민으로서 국가의 위정자에 대한 성도의 순복(2:13-17)을 교훈하였다. 

또 사회 신분 제도에 의해 구분된 상전에 대한 종의 순종(2:18-25), 그리고 사회의 기본 단위인 가정의 핵심인 부부간의 올바른 도리(3:1-7)에 대해서도 교훈하였다. 

여기서 베드로는 하나님이 창조 시에 인간의 사회생활 영위를 위해 허락하신 국가, 사회, 가정과 같은 가장 기본적인 사회 제도에 순순히 따를 때, 그것은 곧 이러한 사회 제도들을 통하여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대해 복종하는 것이라는 사실(2:13, 17, 19)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 제도들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힘쓰되(2:12), 선을 행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억울하게 받는 고난에 대해서는 의인으로서 불의 한 자를 대신하여 십자가 고난까지 받으신 그리스도를 생각하고 인내할 것(2:20-25)과, 그러한 고난 속에서 더욱 하나님을 소망하며 살 것을 권면하고 있다(2:19; 3: 5).

(3) 그리스도인의 고난 극복 자세(3:8-5:11)

앞 단락까지는 고난 중에 성도가 대신(對神), 대사회 관계(對社會關係)에 있어서 가져야 할 신앙생활 자세에 대해 언급하였다. 

그러나 본 단락에서는 보다 직접적으로 고난을 극복해 나가야 할 성도의 자세에 대한 교훈을 주고 있다. 

먼저 고난 중에 성도간의 결속을 긍휼과 사랑으로 더욱 공고히 할 것을 말하였다. 

그리고 성도를 핍박하는 악한 자를 악한 방법으로 대적하지 말라는 원론적 교훈도 언급하였다(3:8-12). 

이어 핍박자를 선으로 대하고 그에게도 복음을 전하라는 것(3:13-17), 또 고난을 죄악 된 옛 생활을 청산하고 성화에로 나아가기 위한 방편으로 삼으라는 것과(4:1-6), 성도 간에 더욱 용서와 사랑으로 결속을 돈독히 하며 맡은 바 청지기적 사명 수행에 최선을 다할 것을 요구하였다(4:7-11). 

그리고 끝으로 교회의 지도자인 장로들은 목양(牧羊)의 직무에 충실해야 하며(5:1-4), 젊은이들은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겸손함으로써 교회의 질서 유지와 화합에 힘쓰고(5:5, 6), 모든 성도들은 이단의 미혹에 조심하고 천국의 영원한 소망을 바라보며 고난을 인내하라는 것(5:7-11) 등의 교훈을 주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교훈들을 주면서 베드로는 그 사이 사이에서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십자가 고난과 그로 말미암아 구속의 복음이 주어진 사실(3:18-22)을 동시에 전하고 있다.

또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받는 고난을 통하여 성도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게 됨과 동시에 장차 그와 함께 천국 영광에도 동참하게 될 것이라(4:12-19; 5:10)는 언급도 곁들이고 있다. 이는 성도들로 하여금 믿음과 천국 소망을 견고하게 다지기 위한 목적에서 본서를 기록하였음을 반증해 준다.

3) 종결부(5:12-14)

종결부에서 베드로는 먼저 본서의 대필자였던 실루아노를 소개하였다. 그리고 마지막 당부와 문안 인사로 본서를 종결지었다. 

여기서 베드로는 소아시아 지역의 교회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참된 은혜 안에 거하라(12절)는 마지막 당부를 주고 있다. 

이는 실로 고난 중에 성도가 반드시 가져야 할 구원 진리에 대한 믿음과 고난 극복을 위한 성도의 신앙 자세를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5. 베드로전서의 특징

① 교리에 대한 다양한 언급이 나타난다. 

본서는 비록 짧은 내용의 책이지만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 사역(1:2,3; 2:23), 창조론(4:19), 기독론(1:20; 2:5, 9, 17; 3:18; 5:1-9), 구원론(2:8, 24; 3:18, 19), 교회론(2: 5, 9, 17; 5:1-9), 종말론(1:13; 4:7, 13; 5:1, 10) 등 중요한 교리적 내용을 풍부하게 담고 있다.

② 소망의 서신(Epistle of Hope)이다. 

본서는 박해를 당하고 있는 소아시아 지역의 성도들에게 고난을 믿음으로 인내할 때, 그것을 근거로 주어지는 천국 영광의 상급에 대해 언급함으로써 위로와 소망을 주고 있다.

③ 구약 예언이 다른 서신서에 비해 비교적 많이 언급되어 있다. 

이는 본서의 저자가 유대인의 사도인 베드로이기 때문에 갖는 특징이다. 

베드로는 본서에서 구약 예언을 인용함에 있어서 구약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온전히 성취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자 하였던 것이다(1:10-12). 

그리고 구약 말씀을 매우 적절하게 인용하여 자신의 강조점을 보다 확실히 드러내고 있다(1:16, 25; 2:6, 7, 9; 3:6, 10; 4:8, 18; 5:5, 7). 

또한 구약의 진리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해석하는 특징을 갖고 있다(1:15, 16; 2:6, 23, 24).

④ 저자는 회화적인 표현법을 사용함으로써 전하고자 하는 교훈들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낸다. 

예를 들면 ‘살펴보기를'(1:12), ‘막으시는'(2:15), ‘가리우는데'(2:16), ‘갑옷을 삼으라'(4:1), ‘허리를 동이라'(5:5), ‘우는 사자 같이'(5:8) 등의 표현이 그러하다. 

한편 베드로전·후서 전체에 걸쳐 신약의 다른 책에서 볼 수 없는 단어가 119개나 되며, 그 중에 상당 부분은 회화적인 단어들이다(Vincent).

⑤ 다른 서신서들과 현저한 공통점들이 많다. 

혹자는 본서의 절반가량은 이미 다른 신약 서신서에서 다루어진 주제들이라고 말하기도 한다(Holtzmann). 

그 중에 특히 본서는 로마서와 에베소서 그리고 야고보서와 많은 유사점들을 지니고 있다.

⑥ 그리스도의 말씀과 교훈에 대한 언급이 자주 등장한다. 

베드로는 성도들에게 교훈함에 있어 주님 말씀을 자주 인용하였다. 그러면서도 형식적인 인용이 아니라 그 자체가 본서의 중추를 이루고 있을 만큼 핵심적인 교훈에 해당 된다. 또한 본서의 언어와 사상의 많은 부분은 주님의 교훈들과 일치한다. 이는 베드로가 3년 동안 주와 함께 지낸 예수님의 12제자 중 수제자라는 것을 생각할 때 자연스러운 현상이란 생각이 들어진다.

6. 베드로전서에 나타난 구속사적인 의의

본 서신은 일차적으로 로마 제국의 대 박해에 직면해 있던 초대 교회 시대 소아시아 지역에 있는 교회 성도들에게 쓰여진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본서를 통해 주어지는 교훈은 전 시대의 교회들에게도 해당되는 교훈이다. 당시는 기독교가 세계 종교로 공식 인정된 오늘 우리 시대와는 다른 사회적 배경에 있었다. 

따라서 오늘날 기독교는 당시 초대 교회와 같은 세상 국가들로부터의 핍박이나 단지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그 한 가지 이유만으로 세상 사람들에게서 핍박을 받는 경우는 이슬람이나 공산국가를 제외하고는 흔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세상 끝 날이 더욱 가까워질수록 사단의 공격은 더욱 교묘하여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에 대한 여러 형태의 고난은 이미 예정되어 있다. 

따라서 본서는 특히 마지막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더욱더 큰 교훈의 의미를 더해준다고 할 수 있다. 

주님 재림이 가까워오는 시대일수록 사단은 마치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을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5:8). 

그렇다는 원리에서 본서가 주고자 하는 구속사적 교훈들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1) 삶을 통한 믿음의 고백

우리는 우리 자신이 ‘성도'라는 사실을 단순히 지식적으로 알고 있는 것에서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마땅히 세상 사람들과는 구별되는 거룩한 삶의 실천을 통하여 자신이 하나님 백성 된 성도임을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 나타내 보여야만 한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한 야고보 사도의 지적에서 볼 때 살아있는 참 믿음은 반드시 그와 같은 삶의 열매로 나타나야만하기 때문이다.

2) 고난 가운데서도 잃지 말아야 할 성도의 거룩한 삶

우리가 현 세상 속에서 선을 행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억울하게 받는 각양의 고난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따라서 성도는 그런 고난에 낙망하거나 좌절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자신이 하나님 백성으로서 거룩한 삶을 살기에 고난을 받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기뻐하며 고난 속에서 더욱 선을 행하기에 힘쓰며, 성결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교훈적 의미를 깨닫는다. 어차피 믿음의 고난은 그만큼 큰 영광으로 귀결 결산될 것이기 때문이다.

3) 자기 책임에 대한 자세

우리는 간혹 신앙을 핑계로 사회생활이나 가정생활에 있어 책임과 의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않고 있는 점은 없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성도는 사회나 가정 어디에서도 반드시 모범적인 삶을 살아야 할 의무가 있다. 성도의 삶은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하는 삶이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4) 선으로 악을 이기는 삶

사회생활 중에 어떤 사람이 자신에게 이유도 없이 해를 끼치거나 괴롭힌다고 하여, 자신도 그와 동일하게 악한 방법으로 상대를 대하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보아야 한다. 

오히려 우리는 주변의 그런 사람들에게 더욱 선으로 대함으로써, 그러한 우리의 모습을 보고 오히려 그가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교훈이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의를 드러내야할 그리스도의 편지로서의 사명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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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역개정]제1장 인사...[288.예수를 나의 구주 삼고].[310.아 하나님의 은혜로] [370.주안에 있는 나에게] [407.구주와 함께 나 죽었으니] [410.내맘에 한 노래 있어] [413.내평생에 가는 길] [435.나의 갈길 다가도록].[438.내 영혼이 은총 입어] [466.나 어느곳에 있든지] .예수안에 소망 있네. [182.강물같이 흐르는 기쁨] [289.주예수 내맘에 들어와 계신 후] [354.주를 앙모하는자] 

===인사

1.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2.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 아버지의 미리아심<선택과 선발>을 따라 맨처음 오는 것은 바로 성령의 거룩케 하심(칭의를 위한 예비하심으로서)이요, 뒤이어 곧바로 순종함과 피뿌림 얻음의 역사를 통해 칭의를 이루신 다음 주관적인 거룩케 하심<산 경험>의 순서를 따름에 유의하라..

===산 소망

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4.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5.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

6.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7.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8.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9.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10.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11.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받으실 영광을 미리 증언하여 누구를 또는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12.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알린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 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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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준새번역]제1장

=== 인사

1.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나 베드로는, 본도와 갈라디아와 갑바도기아와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져서 나그네로 사는 여러분에게 문안합니다.

2.  하나님 아버지께서 당신의 미리 아심을 따라 여러분을 택하여 주시고, 성령으로 거룩하게 해주셨으므로,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께 순종하게 되었으며, 그의 피로 정결함을 얻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에게 은혜와 평화가 가득하기를 빕니다.

===산 소망

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아버지께 찬양을 드립시다. 하나님께서는 그 크신 자비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사람 가운데서 다시 살리심으로써, 우리에게 산 소망을 안겨 주셨습니다.

4.  그리고 여러분을 위하여 썩지 않고, 더러워 지지 않고, 낡아 없어지지 않는 유산을 받게 하셨습니다. 이 유산은 여러분의 몫으로 하늘에 간직되어 있습니다.

5.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마지막 때에 나타나기로 되어 있는 구원을 얻게 하시려고, 여러분의 믿음을 보시고, 그분의 능력으로 여러분을 보호하고 계십니다.

6.  그러므로 지금 잠시동안 여러분이 여러 가지 시련을 겪으면서 어쩔 수 없이 슬픔에 빠져 있더라도, 이것을 기뻐하십시오.

7.  여러분의 믿음이 연단을 받아서 순수하게 되면, 불로 연단하여도 마침내는 없어지고 마는 금보다 더 귀한 것이 됩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여러분이 칭찬과 영광과 명예를 차지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8.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본 일이 없으면서도 사랑하며, 지금 그를 볼 수 없으면서도 믿으며,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영광과 즐거움을 바라보면서 기뻐하고 있습니다.

9.  이것은 여러분이 믿음의 결과인 영혼의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10.  ○예언자들이 이 구원을 추구하고 연구하였으며, 그들은 여러분이 받을 은혜를 예언하였습니다.

11.  그들은 누구에게, 그리고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연구하였습니다. 그들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고난과 그 뒤에 올 영광을 미리 알려 주었습니다.

12.  예언자들은, 그들이 하고 있는 일들이 자기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위한 것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일들은 이제 하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성령을 힘입어,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한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선포하였습니다. 이 일들은 천사들도 보고 싶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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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 Living Translation] 

===Greetings from Peter

1 This letter is from Peter, an apostle of Jesus Christ. I am writing to God’s chosen people who are living as foreigners in the provinces of Pontus, Galatia, Cappadocia, Asia, and Bithynia.[a] 

2 God the Father knew you and chose you long ago, and his Spirit has made you holy. As a result, you have obeyed him and have been cleansed by the blood of Jesus Christ. May God give you more and more grace and peace.

===The Hope of Eternal Life

3 All praise to God, the Father of our Lord Jesus Christ. It is by his great mercy that we have been born again, because God raised Jesus Christ from the dead. Now we live with great expectation, 

4 and we have a priceless inheritance—an inheritance that is kept in heaven for you, pure and undefiled, beyond the reach of change and decay. 

5 And through your faith, God is protecting you by his power until you receive this salvation, which is ready to be revealed on the last day for all to see.

6 So be truly glad.[b] There is wonderful joy ahead, even though you must endure many trials for a little while. 

7 These trials will show that your faith is genuine. It is being tested as fire tests and purifies gold—though your faith is far more precious than mere gold. So when your faith remains strong through many trials, it will bring you much praise and glory and honor on the day when Jesus Christ is revealed to the whole world.

8 You love him even though you have never seen him. Though you do not see him now, you trust him; and you rejoice with a glorious, inexpressible joy. 

9 The reward for trusting him will be the salvation of your souls.

10 This salvation was something even the prophets wanted to know more about when they prophesied about this gracious salvation prepared for you. 

11 They wondered what time or situation the Spirit of Christ within them was talking about when he told them in advance about Christ’s suffering and his great glory afterward. 

12 They were told that their messages were not for themselves, but for you. And now this Good News has been announced to you by those who preached in the power of the Holy Spirit sent from heaven. It is all so wonderful that even the angels are eagerly watching these things happ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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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P]A Living Hope, and a Sure Salvation

1 Peter, an apostle (special messenger, personally chosen representative) of Jesus Christ,

To those [elect—both Jewish and Gentile believers] who live as exiles, scattered throughout Pontus, Galatia, Cappadocia, Asia [Minor], and Bithynia, who are chosen 

2 according to the foreknowledge of God the Father by the sanctifying work of the Spirit to be obedient to Jesus Christ and to be sprinkled with His blood: May grace and peace [that special sense of spiritual well-being] be yours in increasing abundance [as you walk closely with God].

3 Blessed [gratefully praised and adored] be the God and Father of our Lord Jesus Christ, who according to His abundant and boundless mercy has caused us to be born again [that is, to be reborn from above—spiritually transformed, renewed, and set apart for His purpose] to an ever-living hope and confident assurance through the resurrection of Jesus Christ from the dead, 

4 [born anew] into an inheritance which is imperishable [beyond the reach of change] and undefiled and unfading, reserved in heaven for you, 

5 who are being protected and shielded by the power of God through your faith for salvation that is ready to be revealed [for you] in the last time. 

6 In this you rejoice greatly, even though now for a little while, if necessary, you have been distressed by various trials, 

7 so that the genuineness of your faith, which is much more precious than gold which is perishable, even though tested and purified by fire, may be found to result in [your] praise and glory and honor at the revelation of Jesus Christ. 

8 Though you have not seen Him, you love Him; and though you do not even see Him now, you believe and trust in Him and you greatly rejoice and delight with inexpressible and glorious joy, 

9 receiving as the result [the outcome, the consummation] of your faith, the salvation of [a]your souls.

10 Regarding this salvation, the prophets who prophesied about the grace [of God] that was intended for you, searched carefully and inquired [about this future way of salvation], 

11 seeking to find out what person or what time the Spirit of Christ within them was indicating as He foretold the sufferings of Christ and the glories [destined] to follow. 

12 It was revealed to them that their services [their prophecies regarding grace] were not [meant] for themselves and their time, but for you, in these things [the death, resurrection, and glorification of Jesus Christ] which have now been told to you by those who preached the gospel to you by the [power of the] Holy Spirit [who was] sent from heaven. Into these things even the angels long to l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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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KJV]Greeting to the Elect Pilgrims 

1 Peter, an apostle of Jesus Christ, To the [a]pilgrims of the Dispersion in Pontus, Galatia, Cappadocia, Asia, and Bithynia, 

2 elect according to the foreknowledge of God the Father, in sanctification of the Spirit, for obedience and sprinkling of the blood of Jesus Christ: Grace to you and peace be multiplied.

A Heavenly Inheritance

3 Blessed be the God and Father of our Lord Jesus Christ, who according to His abundant mercy has begotten us again to a living hope through the resurrection of Jesus Christ from the dead, 

4 to an inheritance [b]incorruptible and undefiled and that does not fade away, reserved in heaven for you, 

5 who are kept by the power of God through faith for salvation ready to be revealed in the last time.

6 In this you greatly rejoice, though now for a little while, if need be, you have been [c]grieved by various trials, 

7 that the genuineness of your faith, being much more precious than gold that perishes, though it is tested by fire, may be found to praise, honor, and glory at the revelation of Jesus Christ, 

8 whom having not [d]seen you love. Though now you do not see Him, yet believing, you rejoice with joy inexpressible and full of glory, 

9 receiving the end of your faith—the salvation of your souls.

10 Of this salvation the prophets have inquired and searched carefully, who prophesied of the grace that would come to you, 

11 searching what, or what manner of time, the Spirit of Christ who was in them was indicating when He testified beforehand the sufferings of Christ and the glories that would follow. 

12 To them it was revealed that, not to themselves, but to [e]us they were ministering the things which now have been reported to you through those who have preached the gospel to you by the Holy Spirit sent from heaven—things which angels desire to look into.

====벧전1 개요=======

사도 베드로는 그의 편지를 받을 사람에 대해서 기록하고 그들에게 인사를 하며(1,2), 

영원완전한 구원의 산 소망에 대한 그들의 확신과 기대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한다(3-5). 

그는 수신인들에게 그들이 산 소망이 있으므로 그들이 기뻐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의 믿음의 시련은 말할 수 없는 기쁨과 충만한 영광을 가져다 줄 것이기 때문이다(6-9). 

이 구원은 일찍이 선지자들에 의하여 예언되었으며 천사들이 찾기를 원하였던 바이다(10-12). 

그는 절제와 거룩함을 강권한다. 그리고 그는 인간의 구원을 위해 예수가 베푼 고귀한 대가인 그의 피를 생각할 때 그들이 그렇게 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13-21). 

또한 그는 그들의 중생과 영적 상태의 우월함을 들어 형제애를 권고한다(2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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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의 인사(벧전 1:1-2)

1절과 2절에 있는 말씀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서 생각할 수 있다.

Ⅰ. 본서의 저자 문제가 나온다.

1. 본서의 저자는 베드로로 나타나 있다. 

그의 본래의 이름은 "시몬"이었으며 그리스도는 그에게 그의 믿음을 칭찬하시며, 그가 하나님의 교리에 뛰어난 초석이 되어야 할 것을 알리는 "바위"를 의미하는 베드로란 또 다른 이름을 주셨다(갈 2:9).

2. 그의 직분으로 말하자면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였다. 

사도란 말은 보냄을 받은 자, 대사, 전령, 그리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의 일을 위해 부르심을 받은 자들을 의미하는 것이나, 더 엄격히 말해서 사도란 말은 기독교회 내에서 최고의 직임을를 의미하는 말이다. 

고린도 전서 12장28절에 나타난 대로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로 사도들을 세우셨다." 

그들의 권위와 탁월성은 이러한 점에 기인되고 있다. 즉 사도들은 그리스도 자신에 의하여 직접 택함을 받았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복음 선포의 최초의 증언자요, 전도자였다

그들의 받은 바 은사는 탁월하고 특이한 것이었으므로 그들은 [ㄷ그들이 원하는 바]아무 때가 아니라 [오직]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때면 이적을 행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과, 모든 진리로 인도되며, 예언의 영을 받았으며, 모든 다른 사람들을 능가하는 큰 능력과 지배권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사도는 누구나 모든 교회와 전도자들에게 있어서 다 같은 감독의 직임자이었다

베드로는 이처럼 겸손하게 아래와 같이 말한다.

(1) 사도로서의, 주께서 직분을 직접 맡기신 바 그 직분자 된 자신의 특이성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므로 직분을 맡은 사람마다 하나님의 은사와 은총이 자신에게 주어졌다는 사실을 정당하게 인정하고 그 직분에 합당하게 살아가야 하고, 때로는 [성령따라, 성령안에서] 솔직담대하게 주장하기를 배워야 한다. 

우리가 아무 것도 가지고 있지 않은 체하는 것은 위선이며 가지고 있음을 부정하는 것은 은혜를 망각하는 일이 된다.

(2) 베드로는 그의 사도적 기능의 근거와 위에서 언급한 사람들에게 본 서신을 기록할 소명을 받은 것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본서는 특별히 목회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일을 수행하기 위하여 하나님으로부터의 그들의 근거와 그들이 부르심을 받았음을 상기하도록 하고 있다. 이 사실이 다른 사람들 앞에 그들이 설 수 있는 이유이며 그들에게 내적인 도움을 주며 모든 위험과 실망에도 불구하고 위로를 주는 것이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들, 일반 양무리들에게 있어서도 동일하게, 너무나 중요한 영적 교훈으로서 주께서 그 어떤 직분을 주실지라도 그에 합당하게 준비된 자로 살도록 미리 준비함을 염두에 두고 있다!!))

Ⅱ. 본 서신의 수신자에 대한 기록은 아래와 같이 나타나 있다.

1. 그들의 외적인 상태를 볼 때 그들은 "본토와 갈라디아 등지에서 흩어져 사는 나그네"였다. 

그들은 시리아의 안디오커스 왕의 명에 의하여 예수가 이 땅에 오시기 200년 전에 주로 바벨론으로 옮겨와서 그 후 여러지역에 흩어져 살게 되었는데, 그 유대인들의 후손들은 소아시아 여러 곳에서 자리를 잡았다. [물론, 어떤이들은 이방인들까지 염두에 두고 있음을 말하기도 하며, 현대를 사는 그리스도인들조차도 <주께서 보시기에, 실존적 의미에서는 >또한 바로 그렇게 흩어진 나그네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프리덕스(Dr. Prideuax) 박사가 생각하고 있는 것같이 아마도 사도 베드로도 당분간 그들과 함께 있었으며 할례 받은 사도로서 그들을 회개시킨 것 같으며 그후 베드로는 유대 국민의 대다수가 흩어져 거주하고 있던 소아시아지역에 사는 성도들에게 바벨론으로부터(또는 로마에서) 편지를 써 보낸 것 같다. 당시 그들은 몹시 가난하고 괴로운 처지에 살고 있었다.

(1) 훌륭한 하나님의 종들이라도 섭리에 따라 겪게 하신 시련 때문에 분산되어 조국을 떠날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게 될 수도 있다. 

세상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훌륭했던 이러한 사람들은 산과 들과 토굴로 유리하도록 강요되었던 것이다.

(2) 우리는 박해를 받아 각 곳에 흩어져 있는 하나님의 종들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가져야 하겠다. 

이들은 사도의 특별한 배려와 동정의 대상이 되고 있다. 우리는 성도들의 탁월성과 궁핍한 생활에 대해 우리의 관심을 집중시켜야 한다.

(3) 선량한 백성의 가치는 그들의 외적 조건에 의해 평가되어서는 아니 된다. 

여기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탁월한 백성이 있었으며 그들은 아직도 세상에서 빈곤 속에 흩어져 사는 자들이었으나, 하나님의 눈길은 항상 유랑하는 그들 위에 있었으며 사도 베드로는 그들에게 방향과 위로를 제시하기 위해 친절한 붓을 조심스럽게 들었다.

2. 베드로의 서신을 받은 수신자들의 영적 지위와 현재의 상태에 대해 기록이 되었다. 

즉 그들은 "하나님의 미리 아심을 따라 택하심을 받은 자들"이었다. [[택정-부르심-구속-성화/견인-영화 :: 미리 아심/예정->선택/출생->성령의 거룩케 하심(회심 준비/순종)->구속의 피뿌림/부르심(파송)->성화/견인->영화의 영적 여정 단계를 기억하라!!]]

세상에서 눌리고 멸시당하는 이 가난한 나그네들은 하나님과 함께 최고의 영광을 누리며 이 생에서 누릴 수 있는 최대의 영광을 차지하게 된다. 

그들이 이러한 영광을 가지게 되는 이유는 이러하다.

(1) 그들은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택하심을 입은 자들"이기 때문이다. 

택함이란 [하나님의 영광을 공급하는 통로, 또는 그분의 영광을 반사하는 반사경 처럼 맡겨진 바 ] 직분에 관계된 말이다.

예를 들자면 즉 사울은 왕이 되기전부터 하나님이 왕으로 미리 선택한 사람이었다(삼상 10:1). 

그리고 주님은 그의 사도들에게 "내가 너희 열 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요 6:7)고 하셨다.

한편 그 택함이란 특별한 특권의 향유인 교회의 직위에 대한 택함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이와 같이 이스라엘도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성도이다 (신 7:6).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또는 이 선택이란 영원한 구원에로 택했다는 말씀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성령의 성결케 하심과 진리를 통해 믿음으로 너를 구원하셨도다." 

하여간 선택이란, 어떤 이를 구원하시고 그들을 그리스도를 통하여 합당한 방법으로 영생으로 이끄시려는 하나님의 자비하신 섭리와 그분의 결단을 허락함/풀어 놓으심을 의미한다.

① 이 선택은 "하나님의 미리 아심에 따라" 되어진 것임이 말씀되었다는 말이다. 미리 아심이란

첫째, 단순히 어떠한 사건이 이루어지기 전 그것이 앞으로 이루어질 것을 미리 아는 것, 선견지명 혹은 이해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는 마치 수학자가 월식이 나타날 때를 확실히 미리 아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러한 예지가 하나님에게 있다. 

하나님은 높은 곳에 계셔서 이미 있었던 것과 지금 있는 것이나 앞으로 있을지 모를 모든 일들을 보고 계신다. 

그러나 이러한 예지는 그 사건에서 예지한 바가 그대로 정확히 이루어졌다 하더라도 그 사건이 일어난 원인에 대한 동기는 되지 못한다. 

그것은 마치 월식을 미리 아는 수학자가 그 월식을 유발하는 동기는 되지 못하는 것과 같다.

둘째, 예지는 때때로 뜻, 약속, 그리고 승인을 의미한다. 

사도행전 2장23절에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바대로 내어준 바 되었다"고 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단순한 예지가 아니라 20절의 말씀대로 미리 정하신 바이다. 

이러한 뜻을 여기에 적용시켜 볼 때 선택이란 "하나님의 뜻과 섭리와 무조건적 은총에 따라 선택함을 입는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선택이란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이란 말로 첨가되어 있다.  

여기에서 아버지란 말로 우리는 삼위일체의 제 1위를 이해하게 된다.

삼위 안에는 하나의 질서가 있다. 거기에는 우열이 없다.

그분들은 능력과 영광에 있어서 동일하며 그들의 일은 통일된 유기적 섭리 안에서 이루어졌다. 

인간을 구원하는 일에 있어서 택하심은 아버지에게 나타난 탁월한 방법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인데 이것은 삼위 중 한 분이 다른 두 분을 배제하는 일이 없이 이루어진 바 화해는 성자에 의하여 이루어졌고, 성결은 성령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과 같다.

각기 구분되어 있는 삼위되신 하나님 밑에서 우리 개개인의 의무가 어떠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2) 베드로의 서신을 받는 사람들은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선택함을 받은 자들"이다. 

선택의 목적과 최후의 결과는 영생과 구원이지만, 이것이 성취되기 전에 선택함을 입은 자들마다 [먼저]성령에 의하여 성결함을 얻고 예수의 피로 의롭다함을 얻어야 한다. 

인간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섭리는 성령의 성결케 하심과 예수의 피 뿌림을 통하여 역사 하신다. 

여기에서 성화(Sanctification)의 의미를 이해하되 단순한 내세와 관계된 성화만이 아니라 중생함으로 이룩된 현실적 성화를 포함하여 이해해야 하겠다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음/회복의 새로운 피조물이 됨...그 바른 의미는, 매일매일의 경건함의 훈련을 쌓음 + 더욱더 우리의 정욕을 억제해 가며 모든 그리스도인의 의무를 깨달음으로 복종함...바로 이 말로  요약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모든 의무를 하나님 임재 앞에 수행해 나가며 사는 것을 의미한다. 

"성령"이란 말에 대해 혹자는 사도 베드로가 영적인 사람 혹은 성령으로 성화된 사람을 의미하고자 하였다고 보려 한다. 

율법적이며 전통적인 성화의 개념은 육체적 성화의 한도를 넘지 못한다.

그러나 기독교의 성화는 인간의 영혼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며 그의 영혼을 정결케 한다. 

반면 또 다른 이들은 보다 나은 이유를 들어 성령은 성화의 창조자이신 성령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성령은 마음을 깨끗케 하며 우리의 죄를 없이 하신다(롬 8:13). 그리고 성도의 마음에 놀라운 열매를 맺게 하신다(갈 5:22, 23).

이러한 성령의 성화는 특별한 [진리 말씀]이란 수단을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요한복음 17장 17절에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고 하신 말씀 가운데 나타나 있다. 

"순종함"이란 말을 생각해 볼 때 순종이란 말은 이미 앞서 설명에서 지적한 바대로 순종 이전에 무엇이[=성령의 하나님의 진리말씀으로 성결케 하심이 선행됨으로써 그 지고지선의 복락에 대한 감사안에서 성령을 따라 늘 새로운 , 기쁨과 즐거움의, 자원함의 순종으로 이끌려짐] 선행되어야 하는가의 문제와 또 순종함이라고 하는 말씀은 성화의 궁극적 목적을 내포하고 있다.

이 목적은 반역한 죄인들로 다시 순종케 하며 더 나아가 절대적인 복종을 하게 했다.

이에 대해 성경에 "성령을 통하여 너희가 진리를 순종하므로 너희의 영혼을 깨끗케 하였다"(22절)고 하심처럼, 죄인들이 진리와 그리스도의 복음에 순종케 됨으로 정결케 되었다.

(3) 베드로의 서신을 받는 수신자마다, 부르심을 받는 것은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받게 하려 함"에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하여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며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로 말미암아 정결케 되도록 택함을 받은 자들이다. 

((이미 그리스도는 창세전에 아버지의 뜻을 따라 자원하셔서 영원한 영원단번의 대속의 피를 흘려 백성을 위해 죽으신<죽으시고 부활하신> 어린양이시다!!.....이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모든 믿는 이마다에게 피뿌림 통해 실생활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전이하시며 나타나게 하신다!!!))

여기에는 이 유대교의 개종자들이 잘 이해하고 있는 말인, 율법 아래서의 전형적인 피흘림에 대한 명확한 암시가 있다. 

희생 제물의 피는 흘려야만 할 뿐 아니라 이제는, 뿌려져야만 한다.

이것은 이미 [화목제로 묘사된 축복, 곧 하나님께 참여함의] 예정된 축복이 제물을 드리는 자에게 또한 [누림으로]주어진다는 것을 나타낸다. 

이와 같이 율법적인 희생 제물로 형태화 되었으며 조금도 부족함이 없이 충분한 희생 제물로써의 그리스도의 피는 흘려졌을 뿐만 아니라 뿌려져야 하고 그 뿌려짐이 선택된 모든 성도들에게 전달되어져야 한다.

이는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자기들이 지은 죄의 용서함을 얻기 위해서였다"(롬 3:25). 

이러한 피의 뿌림은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것이며 (롬 5:9),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언약을 인봉하는 것이다. 

주의 만찬은 언약에 관한 하나의 표시이며(눅 22:30), 그 피는 모든 죄를 사하시며(요일 1:7), 우리를 주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또한 이땅에서조차 그분을 누림이 무엇인지 알고 맛보도록!!]하는 것이었다(히 10:19).

① 하나님은 어떤 사람은 영생으로 택하셨고 또 어떤 사람은 택하지 아니하셨다. 이들은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② 궁극적인 목적으로써의 영생을 얻도록 선택을 받는 모든 사람들은 [그 어느누구도 예외없이 진리말씀으로 성령의 거룩하게<성결하게> 하심따라]구원완성의 선제적 수단이 되는 순종/복종으로 택하심을 받았다는 것을 기억하자.

③ 인간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성화되고, 또한 그리스도의 피로 뿌림을 받지 아니하고서는 그의 생애는 진정한 복종이란 있을 수 없다.

④ 인간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 삼위 일체 되신 삼위(three persons)께는 상호간의 일체와 협력이 있다.

그리고 삼위간의 행위는 상호간의 통일이 이루어져 있다.

성부께서 누구를 택하시든지 성령께서는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는 바, 진리말씀을 듣고 그 말씀안에 거하기를 결단하고 준행함의]복종으로 말미암아 성결케 하시며 성자께서는 그의 피를 뿌려 주심으로 구속해 주신다.

⑤ 삼위일체의 교리는 모든 계시 종교의 바탕이 된다.

만약 성자와 성령의 신성을 부인한다면 성자의 구원과 성령의 놀라운 역사를 무효화하는 일이 되며 이것은 안전과 기반을 파괴하는 것을 의미한다.

Ⅲ. 베드로는 서신을 받은 이들에게 인사를 한다.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 지어다." 그들을 위해서 갈망하였던 축복은 "은혜와 평강"이다.

1. "은혜"의 의미, 은혜란 모든 은사의 효능과 용서와 치유와 도움과 구원을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은총/총애을 의미한다.

2. "평강"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여기에서는 평강은 가정적, 사회적 평강과 아울러 교회 안에서의 신앙적이며 우리의 양심 안에서 평안의 감정으로써 하나님과의 영적 평안 등, 이 모든 류의 평강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3. 이러한 축복에 연관된 요구와 간구가 여기에 나타나 있다. 

그들에게 더 많은 축복이 있기를 간구하는 것인데 이는 이미 그들이 이 축복의 일부를 소유하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며, 또한 베드로는 그들에게 이러한 축복의 연속과 증가와 완전함이 있기를 기원하고 있다. 여기에서 이러한 점을 알아두도록 하자.

(1) 자신의 영혼 안에 영적인 축복을 소유하고 있는 자들은 다른 사람들과도 같은 축복의 관계를 가지기를 진실히 갈망하며, 하나님의 은혜는 무한한 것이다. 절대로 어떤 이기적인 원리가 아니다.

(2) 우리 자신을 위해서나 서로를 위해서 갈망할 최고의 축복은 은혜와 평강이 넘치도록 기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들은 그들의 서신 처음과 마지막에서 이러한 축복을 위한 기원을 자주하고 있다.

(3)진정한 은혜가 없는 곳에는 어떠한 평안도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우선은 은혜요, 그 다음이 평강이다.

은혜없는 평강은 단순히 변변치 못한 것이나, 잠시 동안 실제적인 평강이 없는 곳에도 은혜는 진실할 수가 있다. 

헤만(Heman)이 두려움으로 혼란을 겪은 것과 같이 그리스도도 한때 고뇌 속에서 지내신 바가 있다.

(4) 첫째가 되는 은사와 더불어 은혜와 평강의 더함도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참된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곳에 그는 더 많은 은혜를 베풀어주실 것이다. 

그리고 선량한 사람마다 이러한 축복의 증강이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 안에 충만히 되기를 진실히 바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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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구원의 산 소망(벧전 1:3-5)

지금부터 우리는 본 서신의 본문에 해당하는 부분을 다루어 보기로 한다. 여기에서는 찬양하는 내용으로 시작되고 있다.

Ⅰ. 신도들의 위임과 행복한 상태에 대한 축하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다른 서신들도 이러한 방법으로 시작되고 있다(고후 1:3; 엡 1:3). 여기에서 우리는 아래와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1. 이룩되어진 신도의 임무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탁월하심과 축복하심을 정당하게 인식함으로 그를 찬양하게 된다.

2. 이러한 축복의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하나님의 관계에서 묘사되어 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란 말씀에서 그 관계를 볼 수 있다.

여기에서 삼위일체 중 한 분이신 한 위(one person)에 대해 그 사명을 나타내는 세 가지 명칭이 있다.

(1) 그는 절대 권위의 군왕 또는 군주로서의 "주"가 되신다.

(2) "예수"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 제사장 혹은 구세주를 의미한다.

(3) "그리스도"라는 이름으로 성령으로 말미암아 기름 부음 받은 하나의 예언자를 나타낸다.

그는 그의 교회의 교리와 인도와 구원에 필요한 모든 은사를 부여하신다.

축복을 받으신 이 하나님은 그의 인간성에 따라 그리스도의 하나님이 되시며 그의 아버지는 그의 신성에 의하여 하나님이 되셨다.

3. 우리에게 하나님을 찬양할 의무가 주어지는 이유는 그의 "풍성하신 자비"에 기인된다.

우리의 모든 찬양은 하나님 자신의 자비하심에 기인한 것이지 결코 인간의 공로나 특히 개심에 의한 것이 아니다.

그는 "우리를 다시 낳으셨으며" 이 사실로써 하나님은 우리의 감사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다.

특히 우리들이 그 열매를 생각해 볼 때 그 열매는 우리 안에 탁월한 소망의 은총이 되는 것이며, 이 세상적인 것이나 위선자들과 같은 허무와 죽음 그리고 멸망의 소망과 같은 것이 아니다.

산 소망과 생명과 강함과 민첩함과 참는 소망을 낳게 하신다.

이러한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에서 다시 부활하신" 기초에 기반을 둔 것이다. 여기에서 아래와 같은 사실을 배우도록 하자.

(1) 선량한 그리스도인은 조건이 극히 나쁘다 할지라도 아직 그는 하나님께 감사하여야 할 크나큰 이유가 있다.

죄인이 현재의 번영에도 불구하고 슬퍼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항상 지니고 있는 것과 같이 선량한 사람들은 그들의 더함 없는 고난 속에서도 아직 기뻐하며 하나님을 찬양할 이유를 가지고 있다.

(2) 우리들의 기도와 찬양에 있어서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되신" 하나님을 언급해야만 한다.

이는 우리와 우리의 예배가 그를 통해서만 받아들여질 수 있기 때문이다.

(3) 최선의 사람은 하나님의 풍성하신 긍휼에 대해서 그들의 최선의 찬양을 드려야 할 의무를 지닌다.

세상에 있는 모든 악은 인간의 죄에 비롯된 것이나 인간 안에 있는 모든 선한 것은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기인하는 것이다.

중생함도 하나님의 무한하신 자비로써 성취되는 것이며 나머지의 모든 것이 다 이와 같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긍휼에 의존하고 있다. 중생의 본질에 대해서는 요한복음 3장 3절을 참고하기 바란다.

(4) 중생은 영원한 생명의 산 소망을 낳는다.

모든 중생하지 못한 사람들은 소망없는 피조물이다. 중생한 인간인 척하는 모든 것은 다 뻔뻔스럽고 주제넘은 일이다.

정당한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인간이 하나님의 영에 의하여 다시 낳음 받음[다시 태어난 바 됨], 바로 이것이다.

이러한 중생은 스스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거져 주시는 은혜에 의한 것이다.

새롭고 영적인 생명으로 거듭나는 사람은 새롭고 영적인 소망으로 다시 낳은 사람이다.

(5) 그리스도의 소망은 탁월성을 지니고 있는데 그 탁월성은 산 소망이라는 것이다.

진실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영생의 소망은 그로 하여금 생명력 있게 하며, 민첩하게 하고, 도와주며, 그를 하늘나라로 인도하는 것이다.

소망은 그 영혼으로 하여금 힘을 주어 움직이게 하며, 참고 힘을 내며 끝까지 견디도록 한다.

중생하지 못한 자의 환상적 소망은 헛되며 파괴적인 것이다. 위선자와 그의 소망은 죽어 모두 사라질 수밖에 없다(욥 27:8).

(6) "죽음으로부터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 하심은 그리스도인의 소망의 근거요, 초석이 된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심판자로서의 아버지의 행위이시며, 정복자로서의 아들의 행위이시다.

그의 부활은 우리의 속죄를 위해 아버지께서 아들의 죽음을 수락하신 것을 나타내는 것이며 그는 죽음과 무덤 그리고 우리의 모든 영적 원수들에 대해 승리하신 것이다.

그것은 역시 우리들 자신의 부활도 보증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그리스도와 그를 따르는 무리사이에는 뗄 수 없는 연관이 이룩되었으므로 그들은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부활의 은덕으로, 아니 심판자로서의 그의 능력에 의하여 부활하게 된다.

골로새서 3장 1절에 보면 "우리들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다시 살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해 볼 때,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영생의 소망을 이룩할 수 있는 튼튼하고 견고한 두 개의 기반을 가지고 있다.

Ⅱ. 신자의 거듭남과 영생에 참여케 되었음을 축사한 후 사도는 이들에게 가장 적합한 단어인 "기업"이란 개념으로 생명을 계속 묘사하고 있다.

이는 그들이 본래 타고 난 유업에서 쫓김을 당함으로 궁핍과 핍박 속에 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슬픔을 달래기 위해 사도 베드로는 그들이 상실한 것보다 비교할 수 없는 새로운 기업으로 그들이 거듭나게 되었음을 말해 주고 있다.

그들은 대부분 유대인들로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물려주신 기업의 땅인 가나안 땅에 대한 크나큰 애정을 품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가혹한 심판으로 간주되는 바,(삼상 26:19) 주의 기업에 머물러 살 수 없이 쫓겨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태에 있는 그들을 위로하는 길은 그들을 위하여 예비된 하늘에 고귀한 기업이 있다는 것을 상기시키는 일이다.

가나안 땅의 기업은 그들이 장차 받을 기업에 비교하면 단순한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다.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주목해 보자.

1. 하늘은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의심할 수 없는 기업이다.

거듭난 모든 자들은 기업을 받도록 되어 있다. 이것은 마치 사람이 그의 자녀를 당연한 상속자로 삼는 것과 같다.

사도 베드로도 로마서 8장 절에서 "자녀이면 또한 후사"라고 하였다.

하나님은 그의 선물을 모든 사람에게 주신다. 그러나 기업은 모두에게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의 자녀에게만 주신다.

곧 중생하고 그의 양자로 선택된 하나님의 아들과 딸들이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받는다(히 9:15).

이 기업은 우리의 노력으로 얻는 바가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선물이다.

우리들의 공로인 대가가 아니라 태초로부터 우리를 그의 자녀로 삼으시고 우리에게 불변의 언약으로써 이 기업을 주신 것이다.

2. 이 기업의 비교할 수 없는 탁월성은 네 가지를 들어 말할 수 있다.

(1) 이 기업은 썩지 아니할 것으로, 그 기업의 창시자의 속성과 동일한 것이다.

즉 로마서 1장 23절에 나타난 바 "하나님은 썩지 아니할 하나님"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모든 부패는 좋은 것을 나쁘게 변하도록 한다. 그러나 하늘은 이러한 변화가 없고 종말도 없다.

즉 하늘의 장막은 영원하며 소유주는 영원히 존재한다. 곧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고전 15:53)라고 하신 말씀과 같다.

(2) 이 기업은 거룩하며, 악이 없고, 더러움이 전혀 없다.

히브리서 7장 26절에 나타난 바 "이러한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합당하니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는", 바로 그 분이신 대제사장이 지금 가지고 계시는 기업과 같이 더럽지 아니한 것이다.

이 세상을 부패하게 하며 동시에 세상의 아름다움을 파괴하는 두 가지의 크나큰 더러움 즉 죄와 비참함은 우리들이 받는 기업에는 없다.

(3) 그 기업은 쇠하지 않는다.

언제나 생기와 아름다움을 유지하고 있으며 그것을 소유하고 있는 성도들은 항상 즐겁게 그리고 만족스러워하고 있다.

그들은 조금도 피로의 기색도 없을 뿐만 아니라 실증도 느끼지 않고 있다.

(4) 이 기업을 "너희들을 위하여 하늘에 간직해 두신 것이라"고 하는데 이 같은 말씀은 우리에게 세 가지의 교훈을 가르쳐 주고 있다.

① 그것은 하늘에 있기 때문에 영광스러운 기업이다. 하늘에 있는 것은 모두 영광된 것이다. (엡 1:18)

② 하늘에 간직되어 있는 것은 우리들이 그것을 받기까지 안전한 가운데 보존되어 있다.

③ 어떤 사람들을 위하여 이 같은 기업을 예비하셨는가 하는 것이 기술되어 있다.

그런데 그것은 그들의 이름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특성에 의해서 서술되고 있다.

하늘에 예비해 두신 기업은 "너희들"과 "우리들" 그리고 산 소망을 얻도록 "거듭난 모든자"를 위한 것이다. 이 기업은 그들을 위해 예비된 것이다. 오직 그들만을 위해 예비된 것이지, 어느 다른 이들을 위하여 예비된 것이 아니다. 모든 나머지 사람들은 영원토록 갇히게 될 것이다.

Ⅲ. 이러한 기업이 먼 미래의 것으로 서술되고 시간과 공간적으로 먼 것이다. 아직ㅇ,로서는 불확실성이 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도중에 그들이 미치지 못할지도 모르므로 사도 베드로는 아직도 그들의 마음속에 약간의 의혹과 불안을 예측하고 있다.

"비록 하늘에 안전히 보존되어 있는 기쁨이 있을지라도 우리들은 많은 시험과 불행 그리고 연약함을 피할 수 없는 이 세상에 아직 거하고 있다. 우리는 지금 그곳에 확실히 이르게 될 안전한 상태에 거하고 있는가?"

이에 대해 사도 베드로는 그들이 안전하게 그곳으로 인도되고 들리울 수 있다고 대답한다.

이는 영생에 안전한 도달을 방해하는 파괴적인 시험과 손해로부터 그들은 보존함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적인 것을 상속하는 자는 그것을 향유할 수 있는 아무런 보장도 없으나 하늘의 상속자는 그 소유를 누릴 수 있는 확실한 보장이 있다.

여기에서 약속된 축복은 보호함을 받는다. 우리는 "보호함을 받는다. " 이는 보호해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목적을 이루게 하는 수단은 우리들 자신의 "믿음"과 관심이다. 우리들이 보호함을 받는 궁극의 목적은 "구원"이다.

그리고 모든 결과를 보게 되는 것은 "마지막 때"이다. 여기에서 알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1. 그의 백성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스런 보살핌은 그들에게 은혜를 주실 뿐만 아니라, 그들을 영광으로 보존케 하신다.

그들이 보호함을 입었다고 하는 것은 위험과 구원을 동시에 암시하고 있다. 그들은 공격을 받게 되나 정복을 당하지는 않는다.

2. 영생으로 향한 갱신의 보전은 하나님의 능력의 결과이다.

일의 위대함이 원수들의 수와 우리 자신의 연약함의 힘은 될 수 없는 오직 하나님의 전능하심만이 구원으로 인간의 영혼을 보존할 수가 있다.

그러므로 성서는 인간 구원은 하나님의 능력의 결과라고 나타내고 있다. (고후 12:9; 롬 14:4)

3.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보존은 인간 스스로의 구원을 위한 어떠한 노력이나 관심으로 대처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능력과 인간의 믿음이 필요하다.

곧 인간의 구원에 대한 열망과 그리스도의 초청과 약속에 따라 그를 의지함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무엇이든지 공격적인 것을 피하며 "은혜를 갚는데 대한 관심"과 항상 기도에 힘써야 할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참고 역사하며 정복하는 믿음으로 인해 우리들은 하나님의 도우심 아래 구원에 이르게 된다.

그러므로 믿음은 은혜의 상태에서 영광의 상태로 영혼을 보존하는 주권자이다.

4. 이 구원은 "마지막 때에 나타나도록 준비되어" 있다. 여기에 성도의 구원을 위해 강조되는 세 가지 사실이 있다.

(1) 구원은 지금 준비되어 있고 그들을 위하여 하늘에 보존되어 있다.

(2) 비록 그 구원이 지금 예비되어 있다 하더라도 많은 부면이 감추어져 있고 구원을 추구하지도 않는 어두운 세상뿐만 아니라 구원의 후예들 자신들에도 나타나 있지 않다. 요한일서 3장 2절 말씀대로 "장래에 어떻게 된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했다. "

(3) 구원은 "마지막 때" 혹은 심판의 마지막 때에 "완전히 나타나게" 될 것이다.

"생명과 영생도 복음에 의하여 밝게 나타났다. "

그러나 이 생명은 임종시에 더욱 영광스럽게 나타나게 된다. 그때에 영혼은 그리스도의 현존 앞에 받아들여지며, 그의 영광을 보게 된다.

뿐만 아니라 마지막 때에 성도의 충만하고도 놀라운 행복이 최후로 완전히 나타나게 될 것이다.

그때에 그들의 육체가 부활하여 그들의 영혼과 연합하며 천사들과 인간들에게 심판이 내려질 것이요, 그리스도께서 공개적으로 당신의 종들을 영화롭게 하며 충만케 해 주실 것이다.

---결코 잊지말라, 놀라지 말라, 믿는 이에게는, [사랑하는 아버지께서 지고지선을 위해] 예비하신 것이기에, 의미없는 고난이나 어려움이란 결코 없으며, 그 때마다 전적인 신뢰와 사랑으로 주께 묻는다면  반드시 해석이 가능하며, 회개하고 인도하시는 주를 따라 한걸음씩 내딛되 동행하시는 주를 의지함으로써 항상 극복하며 넘어서게 됨을!!----

믿음의 시련(벧전 1:6-9)

"그러므로", 이 말은 앞서 말한 바 성도들의 현재 상태에서의 탁월성과 장래에 대한 그들의 크나큰 기대에 대해서 사도베드로가 말하고 있다.

6절에 있는 말씀은 아래와 같이 풀어서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상태에서 얼마간 혹은 잠시 동안 많은 시험으로 인하여 조심하지 아니할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

Ⅰ. 사도 베드로는 그 성도들이 큰 역경 가운데 있었다고 하는 것을 시인하고 있으며, 그들의 슬픔을 완화시키기 위한 일들을 제의하고 있다.

1. 훌륭한 그리스도인마다 크게 기뻐할 수 있는 바를 항상 소유하고 있다.

기쁨은 자체는 용모나 행위에서 나타나지만 특별히 찬양과 감사에서 드러난다.

2. 선량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최대의 기쁨은 영적이며 거룩한 것들에서 비롯되며 그의 하나님과 또는 하늘과의 관계에서 이루어진다.

이러한 관계에서 진실한 그리스도인은 크나큰 기쁨을 얻는다. 그의 기쁨은 훌륭한 가치가 있는 본질로 이루어진 보화로 인해 이룩된 것이며, 그 본질에 대한 명제는 확실한 것이다.

3. 크게 기뻐할 만한 이유를 가지고 있는 최선의 그리스도인들은 많은 시험으로 인해 크게 근심하게 된다.

각가지의 모든 역경은 시험과 믿음의 시련, 인내 그리고 항구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역경은 좀처럼 혼자 오지 않으며 여러 가지로 다른 모습을 지니고 찾아오게 된다.  이러한 결과는 크나큰 근심을 이루게 된다.

보통 인간과 같이 우리들은 개인적 또는 가정적인 문제로 슬픔에 싸이게 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의무가 우리를 자주 슬프게 한다.

그리고 불쌍한 자에 대한 동정, 하나님을 경외치 아니하는 것, 그의 교회의 재난과 인간 스스로의 어리석음이나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한 인류의 멸망은 슬기롭고 경건한 마음에 계속적인 슬픔을 자아내게 한다.

이러한 사실은 로마서 9장 2절에 "내게 큰 조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다"는 말씀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4. 선량한 사람들은 고뇌와 슬픔이 있으나 얼마 동안이요, 잠깐이다.

그들의 고뇌와 슬픔은 심하나 잠깐 동안이다. 인생의 삶 자체가 잠간이요, 생의 슬픔이 생 자체보다 더 오래 존속할 수 없다.

어떠한 고뇌의 단축은 그 고뇌의 근심을 약화시킨다.

5. 크나큰 근심은 때로 그리스도인의 선량함에 필요하다.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다. "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을 의도적으로 괴롭게 하시지는 않으나 우리들의 요구와 부족에 비례하여 분별력을 가지시고 행하신다.

이러한 경우에 편리함이나 적합함이라기 보다 절대로 필요한 것이 되므로 그 표현이 "꼭 있어야 한다"로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이러한 고통으로 요동해서는 아니 된다.

"누구든지 이 여러 환난 중에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살전 3:3)라고 하신 말씀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근심을 낳는 이 고통은 우리에게 필요할 때에만 오는 것이지 아무 때나 임하지 아니하며 필요 이상 오래 머무르지도 아니한다.

Ⅱ. 사도 베드로는 고통의 목적과 그 고통 배후에 있는 성도들의 기쁨의 근거를 말하고 있다(7절).

선한 사람들의 고통의 목적은 "그들의 믿음의 시련이다. "

그리고 이러한 연단의 본성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한 것이다. "

시련의 결과는 바로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함"이다. 아래의 사실을 주목해 보자.

1. 성실한 그리스도인들의 고통은 그들의 믿음의 시련을 위해 계획되어진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은 그의 백성을 단련시키려 함이지, 그들을 멸망시키려 하심이 아니며, 그들의 진보를 위함이지 파멸을 위함이 아니다.

시련은 그 말이 의미하듯이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가치와 강함을 증거하는 어떤 고통을 통하여 인간에게 이루어진 하나님 경험과 탐구이다.

이 시련은 믿음에 임하게 되는데 이는 믿음의 시련이 어떤 다른 은혜보다 결과적으로 우리 안에 모든 선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기독교는 우리들의 믿음에 근거하고 있다. 만일 우리에게 이 믿음이 없다고 하면 우리 안에 영적인 선함이란 존재하지 아니한다.

그리스도는 "사도 베드로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기도하셨다.

만일 이 믿음만이 이룩된다면 나머지 모든 것은 견고히 서게 될 것이다.

선한 사람들의 믿음이 단련받는 것은 그들 자신이 믿음의 위로를 받으려 함이며 하나님은 믿음의 영광을 또한 다른 사람들은 믿음의 축복을 얻으려 함이다.

연단된 믿음은 어떤 연단된 금보다 귀하다. 여기에 믿음과 금 곧 믿음의 연단과 금의 연단 두 가지의 비교가 있다.

금은 모든 금속 중 최고의 가치와 순수성과 실용성 그리고 지속성이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덕성 가운데 가지고 있는 믿음이 바로 이러한 것이다.

믿음이 영혼을 하늘나라에 인도하며 종국에 가서 영원히 하나님의 영광스런 열매를 맺기까지 믿음은 지속하는 것이다.

믿음의 시련은 금의 시련보다 더 귀한 것이다. 양자에는 순수함과 찌끼에서의 분리, 그리고 사물 안에 건전함과 양호함의 발견이 있다.

금은 불 속에서 연단됨으로 늘어나거나 더해지지 아니하며 오히려 믿음은 당면하는 반대와 고통으로 성취되며 증진되어지고 증가된다.

금은 종국에 가서 "없어질"이란 말씀과 같이 없어진다. 그러나 믿음은 결코 없어지지 아니한다.

누가복음 22장 32절에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셨으니"라고 하신 말씀 그대로다.

2. 믿음의 연단은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된다.

영광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과 더불어 가게 되는 존경과 가치를 의미하는 것으로 하나님과 인간은 성도들을 영화롭게 하실 것이다.

찬양이란 존경의 표현, 혹은 선포가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마지막 날에 "오라,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자들이여…"라고 하시며 그의 백성들을 명하실 것이다.

영광은 사람이 가지고 있는 광채로써 영광과 찬양을 받음으로 하늘에 찬란히 빛난다.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라"(롬 2:10).

만일 연단된 믿음이 찬양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된다면 이 사실은 그 믿음이 고난으로 인하여 공격을 당하고 시련을 겪는다고 하여도 금보다 더 귀한 것이므로 당신에게 믿음을 권유하게 된다.

만일 당신이 현세에서의 실용면에서나 마지막 날의 사건으로써 믿음과 금의 가치를 평가할 때는 아무리 세상이 그것을 믿을 수 없는 역설로 취급한다 하여도 이 사실은 진실로 남게 된다.

3.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 중 다시 나타나실 것이며 그가 그렇게 나타나실 때에 성도들도 그와 함께 나타나고 그들의 장엄함은 찬란히 드러날 것이다. 그리고 연단을 받으면 받을수록 그들은 더욱 빛날 것이다.

연단은 곧 끝날 것이다. 그러나 존귀와 영광과 찬양은 세세토록 지속될 것이다.

이 사실이 당신으로 하여금 현재의 고통을 잊게 할 것이다. 또한 "그들은 좀더 찬란하고 영원한 영광을 여러분들을 위하여 이루신다. "

Ⅲ. 사도 베드로는 이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을 두 가지 설명으로 특별히 칭찬하고 있다.

1. 믿음의 대상이 되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예수의 탁월을 들고 있다.

사도 베드로는 우리 주님이 육신으로 계실 때 보았으나, 이 흩어져 사는 유대인들은 본 적이 없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를 믿었다(8절).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마귀도 실로 그렇게 믿는다), 예수의 능력을 믿고 따른다는 것과는 별개의 것이다.

이러한 것은 복종과 의지, 그리고 예수로부터 약속된 선한 모든 것을 기대하는 것을 의미한다.

2. 성도들의 괄목할 만한 신앙의 소산물이다. 결과는 사랑과 기쁨이다.

이 기쁨은 표현할 수 없는 크나큰 기쁨이다. 즉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너희가 기뻐하느니라." 아래의 사실을 알아두자.

(1)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나타난 사실에 어느 정도 접근하는 것이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그렇지 못하다.

감각은 느낄 수 있고 실제적인 것과 소통이 원활하나, 이성은 보다 높은 차원의 안내자이며 이는 보다 확실한 추론에 의하여 원인의 작용과 사건들의 확실성을 주도할 수 있다. 그러나 믿음은 한층 멀리 올라간다.

그리고 감각과 이성이 발견해 낼 수 없는 특이한 풍요함을 우리에게 확신시킨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확증이다.

(2) 진정한 믿음은 결코 혼자 있지 아니하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강한 사랑을 낳게 한다.

진실한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에 그에 대해 성실한 사랑을 가진다.

이 사랑은 그리스도께 대한  최대의 존경에서 나타나며, 애정은 그를 갈망, 그와 같이 하기로 결심한 의지, 기쁜 생각과 즐거운 봉사와 고난 등등이 사랑의 본질을 나타냈다.

(3) 그리스도께 대한 진실한 믿음과 사랑이 있는 곳에 말할 수 없는 기쁨과 영광이 있다.

이 기쁨은 표현될 수 없는 것이며 그것은 말로 나타낼 수 없는 것이다. 최선의 발견은 기쁨을 맛봄으로 이루어진다.

곧 그 기쁨은 하늘에 충만된 영광이다. 성장한 그리스도인의 현대의 기쁨 속에는 충만한 하늘과 장래의 영광이 가득차 있다.

그러므로 그들의 믿음은 슬픔의 조건을 몰아내고 기쁨에 대해 최선의 동기를 부여한다.

선한 사람들이 때로는 어둠 속을 걷게 되나 이는 그들 자신의 실수와 무지, 혹은 두렵고 우울한 기질, 또는 약간의 죄된 행위나 얼마간 그들의 기쁨을 저하시키는 신의 슬픈 사건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 그들은 주 안에서 기뻐할 이유를 가지고 있으며, 그들의 구원으로 하나님 안에서 기뻐한다(합 3:18).

그들은 매일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았으므로 이 초대로 그리스도인들은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누릴 수 있었을 것이다. "(9절).

여기에서 아래 사실을 주목해 보자.

① 성도들이 받을 축복은 무엇인가? 그것은 "영혼의 구원이다. "

그리고 그것은 인간의 영혼(전체 인간에게 자리 잡고 있는 가장 고귀한 부분)이다. 구원은 여기에서 "믿음의 결국"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종국에 가서 믿음은 끝난다. 믿음은 영혼의 구원을 도우며 그의 사명을 이루고는 영원히 사라진다.

② 사도 베드로는 현재를 말한다. 곧 지금 여러분들은 실로 "믿음의 결국"(영혼의 구원)을 얻고 있다는 것이다.

③ 여기서 사용된 말은 시합장에서 승리자가 심판으로부터 면류관이나 상급을 받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와 같이 영혼의 구원은 이 그리스도인들이 구하는 상급이요, 이를 위해 수고하는 면류관이며 매일 매일 그들에게 더욱 더 가까워지는 목적이다. 이러한 점을 알고 넘어 가자.

첫째,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그날그날 영혼의 구원을 성취하고 있다.

곧 구원이란 이생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으로 결코 죽음으로 중단될 수 없으며, 영원으로 계속 되어지는 하나의 영구한 사건이다.

이러한 신자들은 거룩함과 경건한 마음, 그들의 사명과 하나님과의 교제, 기업의 획득, 그리고 거룩한 성령의 증거를 얻음으로 천국의 시작을 이루게 된다.

이러한 사실이 괴로운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명확히 언급되었다. 그들은 세상에서 패하는 편에 있었다.

그러나 사도 베드로는 그들에게 무엇을 얻고 있는가를 상기시키고 있다.

만일 그들이 보다 못한 행복을 상실했다면 그들은 항시 그들의 영혼의 구원을 받고 있다.

둘째, 그리스도인이 그의 영혼의 구원을 목적으로 하는 것은 당당하다.

하나님의 영광과 우리 자신의 행복은 밀접히 관계되어 있기 때문에 만약 우리가 하나를 정당하게 구한다면 다른 하나도 얻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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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자가 나타낸 구원(벧전 1:10-12)

사도는 그의 편지를 받을 수신자들이 놀라운 진보를 이룩했음을 선포한 후 계속해서 그가 구한 바 지니고 있는 근거를 그들에게 보여 주고 있다. 그들은 유대인이요, 구약에 대해 대단한 존경심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기 때문에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교리는 새로운 교리가 아니라 옛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핀 것과 같은 것임을 그들에게 확신시키기 위하여 선지자들의 권위를 드러내 보여 주고 있다.

Ⅰ. 부지런히 연구하고 살피던 "선지자들"은 그들 자신의 연구나 능력이 미치지 못하는 바 곧 앞으로 일어날 일을 예언한다든지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는 특별한 일을 행하고 증거하기 위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영감을 입은 자들이다.

Ⅱ. 선지자들의 연구의 대상은 구원과 "너희에게 임할 하나님의 은혜"이다.

곧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만백성에게 주어질 보편적인 구원과 유대인들에게 특별히 주어질 구원과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을 위하여 보내심을 받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그들에게 임할 은혜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교회에 임할 빛과 은혜와 위로의 영광스러운 때가 임할 것을 내다보았는데 이러한 것은 선지자들과 의인들이 복음의 시대에 나타날 사건 등을 보기를 원하고 듣기를 바랬던 바이다.

Ⅲ. 선지자들의 탐구하는 방법은 이러하였다.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피는 것"이다.

이 말들은 원광석에 이르기 위하여 땅을 파며, 흙뿐만이 아니라 바위를 꿰뚫는 광부들에 비교되리 만큼 강하고 두드러진 것이다.

곧 이 경건한 선지자들은 알기 위한 열심과 메시야 시대에 나타날 하나님의 은혜를 연구하는데 대단히 열심이었다.

영감을 받은 그들의 존재는 그들의 연구를 무용지물로 만들지 아니했으며,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도움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지혜와 지식을 증진시키는 일반적인 모든 방법을 활용하여야만 했다.

다니엘은 크게 사랑을 받고 영감에 충만한 사람이었으나 책과 연구를 통하여 시대의 징조를 이해하였다(단 9:2).

그들의 계시도 연구와 명상과 기도를 필요로 했다. 많은 예언들이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의 첫 의도에는 가까이 있는 어떤 인물이나 혹은 사건을 다루었으나 그들의 궁극적인 의도는 고난받는 자에 대한 혹은 그리스도의 왕국을 묘사하는 것이었다. 주목해야 할 몇 가지 사실을 기록해 보자.

1.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인간 구원의 교리는 가장 위대하고 현명한 사람들의 연구와 찬양의 대상이 되어 왔다.

자아의 고귀함과 위대하고 현명한 사람들의 이에 대한 관심은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에 의한 인간 구원의 교리를 연구하는데 가장 세심한 주의와 관심을 기울이게 하였다.

2. 선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나 또는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로 많은 감동 감화를 받는다.

예언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유대인에게나 이방인들에게 나타난 긍휼로 크게 기뻐하였다.

3. 크나큰 구원의 성취와 놀라운 은혜를 입은 자들은 그 구원을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야 한다.

이러한 것이 영감을 받은 선지자들에게 필요하였다면 우리와 같이 연약하고 무지각한 인간들에게는 더욱 더 필요한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4. 복음으로 비롯된 은혜는 복음 이전에 있었던 모든 것을 능가한다.

복음의 분배는 복음 이전에 있었던 어떤 분배보다 가장 영광스럽고, 확실하며 이해하기 쉽고, 광범위하며, 효과적인 것이다.

Ⅳ. 고대의 선지자들이 주로 연구하였던 특수한 일들은 11절에 상세하게 나타나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들의 연구의 주요한 과제였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 때문에 선지자들은 다음과 같은 것들을 보다 더 알고 싶어하였다.

1.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과 사망, 그리고 그 사망의 영광스러운 결말.

"그리스도가 받은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에 대해서 선지자들은 알기를 원하였다.

이러한 연구는 선지자들로 하여금 복음이 어떠한 것인가 하는 것을 전체적으로 보게끔 하였다.

그 복음의 개요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셨고 우리를 의롭게 하기 위하여 다시 부활하셨다"고 하는 것이다.

2. 메시야가 나타날 때와 그때의 형편을 말하고 있다.

의심할 것이 없이 이 경건한 선지자는 열심히 인자의 날을 보기를 열망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일에 다음 가는 것으로 그들의 마음속에 있는 그리스도의 영이 그 목적에 대해 어떠한 것을 지시하는 한 선지자들은 메시야의 날이 성취되는 시간에 집착되었다. 그때(time)의 본질이 조용한 어느 한 때인지, 또는 괴로운 때인지, 평강 또는 전쟁의 어느 한 때를 이름인지 그들에 의해서 엄밀히 고려되었다. 아래의 몇 가지 사실을 알아보자.

(1) 예수 그리스도는 그가 육신을 입기 전에는 하나의 본질을 소유하고 있었으므로 그의 영은 당시 선지자들에게 임하였었고 또한 영으로서의 그리스도는 인간으로서 존재하여야만 했다.

(2) 삼위 일체의 교리는 구약 성서에 있어서 성도들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은 것은 아니다.

선지자들은 그들 안에 있는 영에 의하여 감동을 받았다는 것을 알았다.

곧 이 영이 그리스도의 영임을 알았는데 이 영은 결과적으로 그리스도 자신과 구별되는 것이었다.

여기에 복수(plurality, 複數)가 나타나며 구약의 또 다른 부분으로부터 삼위 일체가 정립되어진 것으로 보인다.

(3) 여기에 묘사되어 있는 성령의 역사는 성령이 하나님이 되심을 증거하고 있다.

성령께서 선지자들에게 이미 오래 전 그들에게 임한 여러 가지 사건으로써 그리스도의 고난을 "지적하고" 나타내 증거 하셨다.

또한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확신시키기 위한" 이적을 행함과 그의 고난을 받는 성도로 하여금 믿을 수 있게 함으로 그 사건의 확실성을 "증거 하거나" 오래 전 명확성을 제시하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전지전능하심으로 이러한 사실들이 그리스도의 영이 하나님 되심을 증거한다.

(4) 여러분들이 영광에 이르기까지는 그리스도 예수의 예를 보아 봉사와 고난의 때를 예측해야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것은 사도 베드로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사도 베드로는 "그의 주님을 능가하지는 못하였다."

고난의 시기는 짧다. 그러나 영광은 영원하다. 고난의 때로 하여금 매우 날카롭고 가혹한 것으로 내버려 두라.

그것은 결코 상하게 하지 못하며, "우리에게 보다 놀랍고 영원한 영광을 이룩할 것이다."

Ⅴ. 그들의 꾸준한 연구와 노력이 성공의 열매를 얻게 되었다.

그들의 알려고 하는 경건한 노력은 헛되지 아니했다. 이는 하나님이 그들의 마음을 평온케 하며 위로하기 위하여 그들에게 만족할 만한 계시를 나타내 보여 주셨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러한 일들이 당대에 이루어지지 않을 것으로 알았다. 그러나 모든 것이 확고하며 확실한 것이다.

이는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이라"고 한 말씀과 같이 사도들의 때에 이루어질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성령의 완전한 지도 아래 온 세상에 이 사실을 알려야 한다. 이것은 "천사들도 살피기를 원하는 바이다."

여기에 세 종류의 연구가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인간 구원의 대 사실을 탐구하는 자들이 있다.

1. 인간 구원의 사실을 "열심히 연구하는" 선지자들이다.

2. 모든 예언을 탐구하는 사도들은 그 예언의 성취를 증거 하는 자들이며 복음을 선포하는 가운데 그들이 알고 있는 바를 다른 사람들에게 나타내는 자들이다.

3. 천사들은 이 사실에 대해 아주 주의 깊게 알아보려고 한다.

아래의 사실을 알아보자.

(1) 그리스도의 지식과 우리의 임무를 추구하는 부지런한 노력은 확실히 좋은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예언자들은 계시로써 응답을 받는다. 다니엘은 열심히 연구하며 해답을 얻었다. 베레안(Bereans)들은 성서를 연구하여 확신에 이르게 되었다.

(2) 가장 경건하고 선량한 사람들은 때때로 그들의 정당하고 고귀한 요청을 거부당한다.

선지자들이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를 알도록 허락 받은 이상으로 그들이 알기를 원하는 것은 합당하고 귀한 일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거부당하기가 일쑤이니, 선량한 부모들이 그들의 부도덕한 자녀들을 위하여 또는 가난한 자들이 빈곤 때문에 선량한 사람이 죽음에 대항하여 드리는 기도는 합당하며 귀한 일이다. 그러나 이런 그들의 정직한 요구가 가끔 거부를 당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필요에 응답하시기를 기뻐하신다.

(3)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많은 경우에 있어서 자기 자신에게 보다 남들에게 유용한 존재가 되는 것이 영광이요, 실재적인 것이 된다.

선지자들은 자신들을 섬긴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섬겼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롬 14:7)라고 하신 말씀과 같다. 인간이 자신의 목적만을 위하고 자신만을 위하여 사는 것보다 더 인간의 본성이나 기독교의 원리에 위배되는 일은 없다.

(4) 하나님의 계시는 비록 점차적이며 지극히 조금씩 나타나는 것일지라도 모두 완전하게 일치하는 것이다.

선지자들과 사도들의 교리가 하나님의 성령으로 온 것으로 정확히 일치한다.

(5) 복음주의 적인 전도자의 능력은 하늘로부터 내려오신 성령에 의존하고 있다.

복음은 성령의 임무다. 곧 복음 선포의 성공여부는 성령의 역사와 축복에 기인한다.

(6) 복음의 신비와 인간 구원의 방법은 매우 존귀한 것이므로 축복 받은 천사들이 열심히 그것들을 살펴보기를 원한다.

그들은 이 사실을 탐구하는데 진지하고 정확하며 근실하다. 그들은 인간 구원의 모든 계획을 깊은 주의와 흠모의 정을 가지고 숙고하고 있다.

특별히 사도들이 지적하고 하는 관점은 "아홉 천사 중 둘째 천사인 케루빔 천사가 하나님의 보좌를 계속적으로 흠모하듯이" 이것들은 천사들이 내려와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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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의 세 딸의 이름]]==

**여미마---비둘기<낮>//<어둠과 시련통해 연단된 마음의 JC얻고 그 가운데 발견된 정체성>일편단심의 굳센 믿음/견고한 심지  

**긋시아--계피향 ::: 죽음 이기고 부활하신 JC의 <부활생명능력-성령>안의 교통하는/듣는 기도 통한 범사에 이미 이긴, 거침없이 돌파하는 모든 능력/활력=관유에 포함됨> 

**게렌합북--눈을 보호하고 눈병을 예방하는 눈화장에 쓰는 검은가루 담긴 통 <사탄의 미혹 이기는, 영적 분별력인 말씀의 검>

==[[관유 바름과 기름부음]]==

"너는 상등 향품을 취하되 액체 몰약 오백 세겔과 그 반수의 향기로운 육계 이백오십 세겔과  향기로운 창포 이백오십 세겔과  계피 오백 세겔을 성소의  세겔대로 하고 감람 기름 한힌을 취하여 그것으로 거룩한 관유를 만들되 향을 제조하는 법대로 향기름을 만들지니 그것이 거룩한 관유가 될지라" (출 30:23 -25).    

You also take the finest spices: of flowing myrrh five hundred shekels,and of fragrant cinnamon half as much, two hundred fifty shekels, and of fragrant calamus two hundred fifty shekels, And of cassia five hundred shekels, according to the shekel of the sanctuary, and a hin of olive oil. And you shall make it a holy anointing oil, a fragrant ointment compounded according to the work of a compounder; it shall be a holy anointing oil.(Exo 30: 23-25)

이제 향품에 대하여 더 자세하게 생각해 보자. 출애굽기 30장23절에서는 『너는 상등 향품을 취하되 액체 몰약 오백 세겔과 그 반수의 향기로운 육계 이백 오십 세겔과 향기로운 창포 이백 오십 세겔과』라고 말하고 있다. 

첫번째 향인 몰약의 양은 오백 세겔이다. 그러나 두번째와 세번째 향인 육계와 창포의 양은 겨우 이백 오십 세겔씩이다. 둘을 합하면 육계와 창포는 하나의 완전한 단위인 오백 세겔이 된다. 몰약과 마찬가지로 네번째 향인 계피의 양도 오백 세겔이다. 이 세 가지 오백 세겔의 완전한 단위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상징하고 감람 기름 한 힌은 유일하신 하나님을 상징한다. 따라서 이 연합에서 우리는 하나 안의 셋과 셋 안의 하나를 보게 된다.

세 개의 완전한 단위인 오백 세겔의 첫째 것은 몰약이요, 오백세겔의 둘째 것은 각각 이백오십세겔의 육계와 창포로 나눠졌다. 이것은 신격(神格)의 두번째인 아들이 십자가 위에서 쪼개졌음, 곧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내포한다. 

한편, 네 가지 향료로 구성된 바, 넷이라는 숫자는 만유안에, 만유위에 계시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가리킨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시요 그 말씀은 육신이 되셨다(요 1:1, 14). 이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이 그 안에 인성을 포함하고 있음을 가리킨다. 그 말씀이 육신이 되셨을 때 삼위일체 하나님은 사람인 예수를 포함하고 있었다. 역사적 시간가운데서 삼일성(三一性...아버지-아드님-성령, 아버지안에 아드님과 성령이, 아드님안에 아버지와 성령이, 성령안에 아버지와 아드님이 계시며 어버지는 계획/의도하시며, 아드님은 행하시며, 성령은 그 효능을 나타내심)의 둘째인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달리셔서 쪼개지고 죽게 되었다. 

몰약은 그리스도의 죽음의 향기를 상징하며 육계는 그의 죽음의 효능의 향기를 상징한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향기가 있고 효능이 있다. 이 복합적인 관유에서 우리는 신성과 인성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향기로운 죽음과 그리스도의 죽음의 효능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우리가 이 관유를 얻을 때 그 안에 그리스도의 죽음의 효능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창포는 진흙땅에서부터 높이 솟아서 하늘을 찌르는 갈대의 상징이다. 그것은 분명히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가리킨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진흙 같은 죽음으로부터 하늘로 부활하셨기 때문이다. 그는 참 창포이시다. 

계피는 주님의 부활의 능력의 향기이다. 어떤 히브리어 사전에 따르면 고대에는 계피가 향으로 뿐만 아니라 곤충과 뱀들을 쫓는 방충제로 사용되었다. 뱀, 즉 사탄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두려워한다. (그 영과 몸, 제 3장을 참고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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