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마르타노- 죄를 짓다 sin
하마르티아- 죄 sin
하마르테마- 죄 sin, 범죄, 위반 transgression
하마르톨로스- 형용사, 죄 많은, 죄에 물든 sinful, / 명사, 죄인 a sinner
>>고전 헬라어 문헌
하마르타노(hamartano:, Homer 이후)는 원래 '놓치다' miss, '목적에서 벗어나다' miss the mark, '잃다' lose, '어떤 것을 함께 나누지 못하다' not share in something, '실수하다' be mistaken를 의미했다. 하마르타노(hamartano:)는 어떤 아그노이아(agnoia: 무지 ignorance)의 결과다. 이 단어의 동족 명사는 하마르티아(hamartia: 실수, 잘못 mistake, 목표[주로 영적인 것]를 이루지 못함 failure to reach goal, 이다.
이러한 행동의 결과가 하마르테마(hamarte:ma: 친구나 자기자신들에 대한 실패 failure, 실수, 잘못 mistake, 위반 offence)이다.
이런 단어들로부터 형용사와 명사 하마르톨로스(hamarto:los: 실패한 사물이나 사람 that thing or person that fails)가 파생되었다.
아리스토파네스(Aristophanes)의 작품에서 이 단어는 비난과 풍자적인 어조로 사용된 조야한 어투로 나타난다. '실패' fail의 의미를 지닌 어근 하마르트-(hamart-)는 널리 쓰이는 수많은 합성어, 예를 들면 하마르티누스(hamartinoos: 광인 madman)와 같은 것을 생성시켰다.
1. 헬라어 사용 세계에서는 명사 하마르테마가 동사 하마르타노보다 더 널리 사용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는 이것을 일반적인 질서에 대한 하나의 범죄이지만 나쁜 의향, 즉 카키아(kakia: 악 evil, 사악 wickedness)가 없는 범죄로써 이 단어를 아디케마(adike:ma: 부정 injustice)와 아튀케마(atyche:ma: 불운 misfortune) 사이에 두었다(Eth. Nic. 5, 8, 1135b 18). 따라서 이 단어는 고의적인 범죄에 대한 법률 용어로 사용되기도 했다.
...하마르티아(hamartia)는 '옳은 감정에 위배됨'이라는 비교적 불명확한 의미를 지닌 집합적인 용어가 되었다. 이것은 우둔한 것에서부터 법을 어기는 것, 즉 오르돈(orthon: 올바름, 공정, 정의 the right)을 어기는 것, 그리고 지배적인 윤리와 사회질서 및 도시국가에 대한 존경의 의무를 따르지 않는 것은 무엇이든 의미할 수 있다.
2. 죄에 대한 헬라인들의 관점은 고전 비극작가들이 묘사하는 바와 같이(예: Soph., Antigone 1261) 인간의 숙명적인 심취와 연관되어 가장 심오하게 나타난다.
여기서 죄는 더 이상 하나의 행동이 아니라 인간의 내적인 존재에 근거한 하나의 실재이다. 인간은 자기가 위험에 처해 있으며 심취와 운명의 파괴적인 힘으로 둘러싸여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죄는 고통의 원인이다(외디푸스의 경우에서와 같이). 죄와 운명은 복잡하게 뒤엉켜 있다.
3. 헬라니즘은 신비 종교에서의 종교의식과 영지(gnosis)에 의한 운명의 결정론을 벗어나기 위하여 죄와 운명의 관련성을 끊어버렸다.
다른 한편, 죄의 개념은 스토아 학파에서 사유되었으며 합리화 되었다(참조: Epictetus, Dissertationes I, 26, 6). 죄는 더 나은 이해와 올바른 행동을 통하여 극복될 수 있다. 두 견해는 모두 다 인간이 근본적으로 선하다는 가정하에서 나온 것이다.
>>구약성경
70인 역본에서 두 단어 하마르티아와 아디키아(adikia)는 죄를 나타내는 모든 범위의 히브리어 단어들을 거의 다 나타낸다.
하마르티아와 이 단어의 동족어들을 특히 히브리어 단어 핫타트(과오 lapse, 죄 sin)와 또한 아원(옳은 길에서 의식적으로 이탈하는 것으로서의 죄 guilt, sin as a conscious deviation from the right way)와 페샤(반역 rebellion) 등의 역어로 사용된다. 아디키아는 무엇보다도 아원과 그외 다른 35개의 히브리어 단어의 역어로 사용된다.
명사 하마르테마(죄 sin, 범죄, 위반 transgression)는 하마르티아와 구별되어야 한다. 이 동사의 용법은 이 명사들의 용법과 일치한다.
하마르톨로스는 보통 라샤(행악자 evil-doer, 무법자 lawless man)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1. 구약성경은 신약성경에서처럼 죄를 나타낼 때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주요 단어를 지니고 있지 않다. 구약성경의 죄에 대한 신학적 고찰은 예를 들어 바울에서와 같이 그렇게 충분하게 발전되지 않았다. 그러나 개인의 범죄뿐만 아니라 죄는 인간과 민족을 하나님과 분리하는 하나의 실재로서 명백하게 인식되었다.
....여호와 하나님 자신은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척도이다. 백성들과 함께 세운 그의 언약 Covenant, 그의 계명 Commandments과 율법 Law, 그리고 선택 받은 사람들에게 하신 그의 말씀은 모두 그의 규범적인 뜻을 나타낸다. 개인과 민족 둘 다의 운명은 여호와에게 달려 있었다. 죄는 하나님과의 사이를 떼어 놓으며 따라서 그 자체에 손해와 벌을 유발시키기 때문에 죄(sin)와 범죄(guilt)와 벌은 흔히 서로 분리되지 않았다.
2. 죄에 관한 구약성경의 견해는 언약 Covenant에 대한 개념과 반대되는 부정적인 면이며 그래서 자주 법률적인 용어로 표현된다. 국가의 역사는 종종 배교, 형벌과, 여호와의 은혜로운 중재, 돌아옴의 역사로 묘사되곤 한다.
(a) 창 3-11장은 이에 대한 분명하고도 전형적인 실례로서, 인간의 독립적이며 자기만족적인 행동을 교묘하게 묘사해준다. 죄는 연달아 새로이 발생되어 누적되어 간다. 즉, 창 3장에 나오는 아담의 죄에 빠져듦( 타락 Fall)에서 시작하여 형제 살해(창 4장)와 라멕의 노래(창 4:23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도다)에 이르며 마침내 바벨 Babel 탑을 쌓기에(창 11장) 이른다. 이것은 죄에 대한 반성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죄에 대한 고백이다(G. von Rad, Old Testament Theology, I, 1962, 154이하).
따라서 죄는 하나님이 주신 질서를 이탈하려는 경향, 자기자신의 입장을 세우려 하는 경향, 자기의 생각대로 하려는 경향이며,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다(창 6:5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창 8:21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
창 6:11 이하에서 이것은 동일한 결론에 다다른다. 즉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패괴하여 강포가 땅에 충만한지라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패괴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패괴함이었더라”
(b) 죄는 하나님께 대한 신실성의 관계를 저버림과 또한 계명과 율법 Law에 대한 불순종 모두를 말한다.
전자는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불신실로 묘사되며(호 2장; 렘 3:10 그 패역한 자매 유다가 진심으로 내게 돌아오지 아니하고 거짓으로 할뿐이니라), 후자는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에 대한 위반(삼상 15:23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시 78)으로 묘사된다. 두 경우 모두 인간이 하나님과의 교제를 그 자신 스스로 끊고 하나님 없는 자가 되는 것이다(참조: 렘 2:29 너희가 다 내게 범과하였느니라).
(c) 개인의 죄가 백성의 죄와 분리될 수는 없다.
초기 저서들은 배반과 구원이 계속 반복되는 민족사에 관심을 집중시키지만(삿 2:6-3:6) 후기 전승들은 개인의 운명에 더욱 강조점을 두고 있다(시편; 욥기).
3. (a) 죄는 보편성을 띠고 있다.
어떤 사람도 하나님의 거룩성에 직면하여 존재할 수 없다(사 1:4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그의 규탄은 백성 전체에 대한 것이다(호 12장). 죄의 보편성은 특히 창 6:5; 창 8:21; 사 64:6 이하에 강조되어 있다. 확실히 이것은 죄가 이 세상을 장악하고 왕으로 지배하고 있음을 반증한다.
(b) 제의에서 갖가지 희생제사 Sacrifice 들은 레 16장에 묘사된 대속죄일 의식까지도 포함하여 죄를 가리기 위해 의도된 것이었다(화해 Reconciliation, 헬라어 hilaskomai ).
그러나 죄의 용서는 범죄 Guilt의 고백과 연결되어 있다(참조: 창 50:17 그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다 하라 ; 삼하 12:13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하매 나단이 다윗에게 대답하되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 시 51).
4. 후기 유대교에 있어서 죄의 개념은 더욱 강력하게 율법으로 향하게 되었으며 사변적이며 결의론적인 사고의 영향 아래 더욱 피상적으로 되었다.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모르며 따라서 이들은 모두 죄인이다. 종교적인 유대인에게 있어서 죄의 본질은 무엇보다도 율법과 계명을 어기는 것이다. 우상숭배, 음란, 피흘림들은 용서할 수 없는 죄로 생각되었다. 비고의적으로 범한 죄들에 대한 속죄의 가능성은 희생제사, 정화의식, 선한 일, 고통, 순교로 제공되었다. 유대교는 죄의 기원에 관한 의문에 대해 아담과 하와 혹은 타락한 천사(창 6:1이하)에서 그 해답을 찾았다. 죄의 결과는 병, 죽음, 그리고 영원한 저주이다. 죄는 보편적이며 특별히 악한 경향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러나 주 강조점은 율법 Law, 개인의 책임, 그리고 죄에서부터 자신을 지키려는 노력에 있다. 경건한 사람은 자기의 눈을 죄를 짓지 않을 가능성에다 고정시킨다. 이런 사람의 예로는아브라함, 모세 Moses, 엘리야 Elijah와 에녹 Enoch이다. 죄의 완전한 제거는 메시야 왕국에서 기대되었다.
>>신약성경
70인 역본의 하마르타노와 이 단어의 동족어의 주요한 용법을 따른 신약성경은 이 단어들을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든 것을 포괄하는 표현으로 사용한다. 죄에 대한 기독교적 개념은 바울과 요한의 문서에 가장 완전하게 표현되어 있으며, 이 두 문서에서 가장 심오하게 신학적으로 발전했다.
....하마르티아는 173회 나타나며 그 중 바울서신에 64개의 예(로마서에 나오는 48개의 예를 포함하여)가 나오며 히브리서에 25회, 요한복음과 요한서신들에 각 17회씩 나온다. 하마르타노(죄를 짓다 sin)는 42회 나온다(로마서와 고린도전서에 각 7회, 요한 서신들에 10회, 요한복음에 3회 나오는 것을 포함).
....하마르티아는 신약성경에서 인간의 죄에 대하여 항상 사용된 것으로, 이는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대한 죄인 것이다. 하마르테마(죄 sin, 범죄, 위반 transgression)는 자주 나타나지 않으며(5회), 개인의 행동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예: 고전 6:18) 이것은 용서에 대한 문맥에서 사용되었으며(막 3:28; 롬 3:25), 막 3:29에서는 영원한, 즉 용서할 수 없는 죄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형용사 아나마르테토스는 오직 요 8:7(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에만 나오며 실제의 죄가 없음을 의미한다.
....하마르톨로스( 죄 있는, 죄 많은 sinful)는 일상적인 형용사이며(47회, 그 중에서도 특히 누가복음에 18회 사용됨), 이 단어는 때때로 포네로스(타락한 depraved, 악한 evil)와 동의어로 사용되었다(참조: 막 8:38; 마 12:39; 마 12:45).
1. (a) 예수님은 그를 둘러싸고 있던 세계에 더욱 익숙해 있던 구약성경과 유대적인 죄의 관념을 사용했다.
이것은 공관복음서들에서 명사 하마르티아와 하마르테마가 거의 오로지 죄의 용서 Forgiveness에 관한 문맥에서만 발견된다는 사실로부터 명백해진다. 동사는 종종 독립적으로, 즉 이 단어의 통상적이며 친숙한 의미로 사용된다. (참조: 마 18:15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눅 17:3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계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이 명사들이 주로 복수로 사용된다는 사실은 그 주된 개념이 율법이나 자기 형제에게 범하는 개인적인 과실에 대한 개념임을 나타내 준다. 죄인, 하마르톨로스는 전통적인 유대 관점에 따르면, 율법을 지키지 않으며 죄에 대한 바리새적인 해석을 따르지 않는 사람이다. 따라서 그는 세리와 같은 수준 위에 놓여 있었고(마 9:10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막 2:15이하) 이방인 곧 에드니코스 혹은 불경건한 자, 아세베스에 비유되었다(마 26:45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우느니라; 막 14:41; 눅 6:32이하; 참조: 마 5:46이하). 막 8:38에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라는 말이 합성된 것은 죄가 [하나님과 분리되어 악의 지배를 받는 상태] 임을 말해준다. 그래서 회개와 용서가 필요한 것이다.
(b)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처럼 율법을 내면화 시키고 자기의 오심과 인격을 새로운 기준으로 제시하여 사건들의 새로운 상태를 야기시켰을 때 예수님의 가르치심은 죄에 대한 유대 개념을 능가하였다(마 7:21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 12:31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병행구 막 3:28이하; 눅 12:10). 여기서 말하고 있는 용서받을 수 없는 죄란 성령의 위격과 실재를 반대하는 모든 말이나 단지 죄인들 속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내적 사역을 저항하는 행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 않다면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겠는가?
^^성령훼방죄란?...성령과 하나님나라/ 성령훼방죄/ 성령모독죄/ 성령거역죄/ 귀신의 왕 바알세불 강탈 결박/ 성령 하나님나라 천국
@성령훼방죄...주님의 오심으로 시작된 종말과 천국의 도래, 성령의 시대의 표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사탄이 결박당함으로써, 믿는 자들이 사탄의 지배와 노예에서 해방되고, 죄와 사망에서 ...//예수님은 죄인들에게 오신 것이지 의인에게 오신 것이 아니다(마 9:13 병행구 막 2:17; 눅 5:32). 그는 가난한 자를 복되다고 선언하였으며(마 5:2이하) 짐 진 자들을 그에게로 불렀다(마 11:28). 예수님이 “죄인들의 친구 ”(마 9:10이하; 마 11:9)라고 불리워진 것은 바로 그의 이런 친교와의 관련성 속에서이다. 죄인들과 함께 나눈 그의 친교는 누가의 기사에서 특별히 눈에 뜨인다(눅 7:36 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시기를 청하니 이에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을 때에; 눅 15:1이하; 눅 18:9이하; 눅 19:1이하).
길 잃은 양의 비유는(눅15:3-7절)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죄인들과 어울려 다니는 사람이라고 비난한 것에 대하여, 예수께서 자신의 사역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해 주시려고 본장의 비유를 말씀하신다. 예수께서는 잃어버린 자들을 찾으러 오셨다. 비유를 통하여 아흔 아홉 마리의 양보다 길 잃은 한 마리 양을 소중하게 생각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가르쳐 주고자 하신다.
잃은 양 비유의 결론은 하나님께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보다 회개한 죄인 하나를 더 기뻐하신다. 여기서 회개할 것 없는 의인이란 말은 문자 그대로의 의미가 아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누구나 죄인이며 회개가 필요 없는 의인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회개할 것 없는 의인이란 스스로 교만하여 의인이라고 자처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같은 사람을 가리킨다. 예수께서는 길 잃은 양의 비유를 통하여 잃어버린 자를 찾으러 오신 자신의 메시야적 사역을 설명함과 동시에 스스로 의인인 양 생각하고 교만에 빠진 바리새인들을 신랄하게 책망하는 이중적인 효과를 얻고 있다.
눅 15:11-32에 나오는 탕자의 이야기에서 아버지는 잃어버린 아들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렸고 그 아들이 돌아온 후에는 큰 잔치를 베풀어 벅찬 기쁨을 만끽했다. 여기서 탕자의 형에 대해서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탕자의 형은 동생에 대한 아버지의 태도를 몹시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항상 아버지 늘 옆에서 보필해 왔던 자신에게는 작은 잔치라도 베풀어 준 적이 없었는데 망나니였던 둘째 아들은 집을 뛰쳐나갔다가 돌아온 것뿐인데 큰 잔치를 베풀어주는 것에 대하여 분노했다. 그리하여 자기 동생임에도 불구하고 남을 부르듯이 아버지의 돌아온 이 아들이라는 호칭을 사용하기까지 했다(30절).
잃어버린 아들을 찾은 아버지의 기쁨을 알지 못하고 탕자의 진정한 회개의 가치를 깨닫지 못한 탕자의 형은 바로 예수를 비난했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죄인의 진정한 회개의 가치에 대하여 너무도 몰랐다.
마 23:1-36과 병행구 막 12:37-40, 눅 20:45 이하에 나오는 바리새인 Pharisee들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유대교에 관한 한, 예수님의 오심과 함께 죄인으로부터 의인을 구별하는 기준이 완전히 변경되었음을 분명하게 한다. 유대의 율법적 기준에 따라 의롭고 경건하다고 인정된 그들은 자신들의 독선과 예수님을 거부하는 태도에 비추어 특별히 하나님 앞에 죄인으로 나타난다.
(c) 수난 기사, 특히 최후만찬 Last Supper(주의 만찬 Lord's Supper) 기사에서 예수님의 전 생애와 가르침은 십자가에 대한 전망에서부터 분명해진다(마 26:28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예수님은 자기자신의 생명의 희생으로 속죄제사의 방법을 대신했다. 여기서는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가 모두 똑같이 죄인으로 간주된다. 이런 통찰은 눅 5:8에 나오는 베드로의 부르짖음(“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Depart from me, for I am sinful man, O Lord)에서 예시되며 예수님의 사역에 대한 복음서 기자들의 모든 해석에 요약된다(마 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눅 1:77 주의 백성에게 그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리니). 따라서 세례 요한에 의해 회개라는 견지에서 해석된 세례 Baptism(막 1:4 세례 요한이 이르러 광야에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병행구 마 3:2; 눅 3:3)는 새로운 의미를 띤다. 사도들은 세례와 죄 용서의 근거를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둔다(요 20:23; 행 2:38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행 5:31; 행 10:43).
2. (a) 죄에 대한 바울의 주요언명은 롬 1-8장에서 볼 수 있다. 여기서 바울은 이방인과 유대인 모두 하나님의 의와 대결하였을 때 다 불행을 당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들의 불신앙과 그로 말미암아 생기는 불의한 행동들의 결과로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 오르게 데우(분노 Anger)아래 떨어졌다. 바울은 아세베이아( 불경건 godlessness)와 아디키아(불의 unrighteousness, 롬 1:18)를 언급하고 있다.
율법 곧 노모스(nomos)는 죄를 깨달을 수 있게 한다(롬 3:20; 롬 5:20; 롬 7:7이하; 갈 3:22). 율법은 믿음에 의해서 무효화되는 것이 아니라(롬 3:31 등) 오히려 파이다고고스(감시인, 관리인 custodian)로서 사람을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이끄는데 도움이 된다(갈 3:23이하). 율법은 사람들을 지키며 그 목적을 위하여 그들을 지키지만 그 자체가 구원에 이르는 길은 아니다. 하나님의 의가 율법의 길로는 얻어질 수 없다. 율법-죄-죽음, 이것은 그리스도 없는, 믿음 없는 인간이 걸어가는 숙명적인 길이다. 롬 5:12-21은 어떻게 아담이 이것의 본보기인가를 보여준다.
아담의 죄를 통하여 세상에 죄와 사망의 폭력적인 지배와 통치가 왔으며 그때부터 인간의 죄의 노예가 되어 죄를 양산하며 사망을 갇혀 신음하게 되었다(참조: 롬 1:32; 롬 6:16; 롬 7:5이하; 롬 8:13; 고전 15:56).
죄의 권세가 완전히 드러나는 것은 인간이 그리스도를 알게 되는 때다. 하나님의 영과 투쟁하는 사람은 육체(사르크스, 죄성,죄의 욕망; 갈 5:19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에 갇혀있게 되는데, 육체는 하나님의 원수로써 죄를 산출해내며 그 마지막은 다나토스(죽음 death)이다. 성령과 육은 서로 투쟁며(롬 7:13-25; 참조: 갈 5:16-26), 속사람은 하나님의 법을, 겉사람은 죄의 법을 추구한다.
거듭났다 할지라도 육의 지배 아래에 있으면 결국 사망이다. 때문에 성령의 능력으로 사르크스를 매일 매일 죽여야 영생에 이를 수 있다(롬 8: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때문에 전가교리는 바울의 사상이 아니다. 바울은 거의 항상 하마르티아를 단수로 사용했다.
아담의 불순종으로 세상에 죄와 사망이 들어왔다. 죄란 세상을 지배하는 강력한 폭력이며 그 뿌리에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다. 죄는 이 세상의 모든 인간을 노예로 만들어 지배하며 여기서 벗어날 인간은 아무도 없다. 죄는 대부분 사람 안에서, 그리고 사람을 통하여 행하는 인격적인 힘이다(롬 5:12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 롬 5:21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릇 한 것 같이; 롬 6:6; 롬 6:17; 롬 7:9이하).
이것은 단순히 원죄, 자범죄의 문제가 아니라 아담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죄가 이 세상에 뚫고 들어와 왕으로 군림하여,이 세상의 모든 사람을 죄의 노예와 포로로 만들어 죄악들을 양산하며 사망안에 갇혀 있게 만든다는 점이다. 때문에 구원은 이러한 죄와 사망의 통치와 지배에서 해방되어 의와 생명이 통치하는 그리스도의 Kingdom(바실레이아)으로 옮겨감이다.
(b) 아담에 대응되는 분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오심으로 이 죄와 사망의 굴레를 깨뜨려 부수었다. 그는 스스로 모든 인간을 대신하여 율법의 저주 Curse를 짊어졌다(갈 3:10-14). 이것은 새 길을 열어 놓은 하나님의 은혜다(롬 5:15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으리라; 고전 15:10이하). 그는 죽음을 견뎌내었으며(롬 5:8; 롬 6:3이하; 고전 15:3), 그것을 견딤으로 죄를 처리했다(롬 8:1이하). 그 자신은 하나님의 의를 세우기 위하여(카탈라게, 화해 Reconciliation; 롬 5:11 화목을 얻게 하신; 고후 5:18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죄인이 되었다(고후 5:21).
바울은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긴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를 묘사하고 있는 것으로, 믿음과 은혜를 통해 이 죄와 사망의 지배에서 의와 생명의 지배와 통치로 옮겨간다. 반면 바울 자신이 일찍이 밟았던 율법을 통해 자기 공로적 의를 추구하는 길은 생명으로 인도하지 않고 사망으로 인도한다. 바울은 그리스도와 기독교인들을 핍박한 것에서 자기의 그 죄를 깨달았다(딤전 1:15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그리스도의 화해적 죽으심은 우리에게 단 한번만 일어났다(롬 3: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롬 5:8). 평화는 믿는 자에게 주어진다(롬 5:1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세례는 믿는 자들을 십자가 죽음과 부활의 그리스도 사건 속으로 흡수시키는 것을 상징한다. 신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가 부활함으로써(부정과거시제) 사망의 권세를 찢어버리고 그리스도의 새 생명에 참여한다(롬 6:1-11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부정과거시제)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바울의 직설법은 믿음 안에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함께 죽고 살아났음을 부정과거시제로 묘사하여, 신자는 이미 죄의 지배를 받는 옛 사람에 대해 죽었고, 이미 부활의 새로운 생명으로 살고 있으며, 이미 하늘의 보좌에 앉아 있다고 묘사함으로써 과거 현재 미래와 하늘과 땅의 시공간을 초월하는 신앙의 역동성을 강조한다. 엡 2:5-6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부정과거시제)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부정과거시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부정과거시제)"
그리고 이 직설법 바로 뒤에는 기독교인에게 의의 봉사를 시작하기 위하여 이제 죄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라고 하는 명령적인 말이 나온다(롬 6:12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이러한 명령법은 성령을 따라 행하여 육체의 소욕을 죽이고 선한 삶을 추구하라는 강력한 명령이다. 안지켜도 적당히 넘어갈 수 있는 명령이 아니라, 지키지 않으면 사망에 이를 수 밖에 없는 언약적 의무이다.
성령의 뜻에 자신을 내어 맡기는 자유는 사랑 안에서 실현된다(갈 5:13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참조: 롬 8:9-17). 그 결과 모든 독선과 또한 자기 자신에 대한 모든 자랑이 부정된다(롬 10:3; 고전 1:18-31). 그에 따라 믿음, 그리고 살아계신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 나오지 않은 것은 모두 죄다(롬 14:23).
(c) 그러므로 죄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에서 우리는 두 가지 요소를 볼 수 있다. (ⅰ) 한 가지로는 모든 사람이 죄와 사망의 권세에 예속되어 있어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유일회적 화해 행동을 통해서만 인간은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구속될 수 있다-직설법. (ⅱ) 다른 하나는 모든 신자들이 믿음 안에서 이 새로운 의로 돌아와 죄의 종이 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이 되어 성령 안에서 혹은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라는 명령이 있다-명령법. 이 두 요소를 나란히 또는 섞어 놓은 것은 지배세력으로서의 죄의 심각성과 중대함,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의 행동의 위대함과 동시에 인간의 믿음과 행동에 대한 책임성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성은 인간의 책임성 있는 의지의 결단과 행동의 변화를 약화시키지 않고 더욱 강화시킨다.
3. (a) 요한복음.
요한의 문헌에서 하마르티아의 개념은 하늘과 땅이 결합한 그리스도사건(Christ-event)의 맥락에 들어 있다. 예수님은 세상에(코스모스, 요 1:1-14) 오셔서 하나님의 어린 양 Lamb으로서 세상의 죄를 지신다(요 1:29; 요일 3:5). 예수님 자신은 죄가 없으되 세상의 죄를 위하여 즉, 하나님과 불화한 상태에 갇혀있는 인간을 위해 자기 피를 흘리셨다(요일 1:7; 요일 2:2; 요일 4:10; 계 1:5). 예수님을 반대하는 의지와 권세는 죄다. 이것은 가롯 유다의 경우에서뿐만 아니라(요 6:70이하; 요 19:11)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보인 태도에서도 분명히 알 수 있다(요 8: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요한 역시 그리스도를 죄에 대한 승리자로, 특히 그의 죽음으로써 죄를 없이 하심으로 말미암아 죄를 이기신 것으로 나타낸다(요일 3:5 그가 우리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내신바 된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이 속죄 행위는 보편적인 의미를 지닌다(요일 2:2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이것은 아버지 뜻을 행하는 자로서 그리스도 자신의 죄 없으심에 기초한다(요 8:46). 여기에서 죄는 하나님의 명령에 반대하는 행동을 가리킨다(요일 3:4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이것은 불경건에서 파생하며, 보편적(우주적)인 것이며, 사단의 권세에 노예가 되어 하나님과의 분리를 초래한다(요일 3:8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그들은 예수님을 죄인이라 생각하지만, 그를 구속자로써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요 9:16-41) 죄인은 바로 그들이다. 여기서 죄는 불신앙이다. 예수님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편에 설 것인지 아니면 자기를 거역할 것인지를 결단(크리시스)케 한다(요 15:22-24 내가 와서 저희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
예수님의 사역은 크리시스 라는 용어, 즉 '분리'와 '결정'이라고 표현된 새로운 상황을 가져온다. 인간은 믿느냐 믿지 않느냐에 따라 생명의 편에 서느냐 사망의 편에 서느냐가 결정된다(요 8:24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요 9:41; 요 16:8이하). 따라서 예수님은 세상에 오심으로서 죄, 그 자체를 드러내셨으며(요 15:22-24) 그가 생명을 가져오신 한에 있어서, 그는 이 세상의 임금으로부터 그의 권능을 빼앗았다(요 12:31; 요 16:11). 성령께서 예수님을 대신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는 사역을 계속하신다(요 16:8-9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진리의 성령/ 보혜사성령 파라클레토스 /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배경요16장에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전지하신 예수께서는 자신의 사후 진행될 제자들의 고난을 비교적 소상히 밝히고 있다. ...
죄로부터의 구원은, 신자들이 하나님께로서 태어나서, 믿음과 지식을 받고, 사랑으로 새로운 상태를 이루어 나갈 때, 공동체 안에서 성취된다. 신자들은 죄를 지을 찌라도 그리스도의 변호(요일 2:1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와 형제들이 서로 중재함으로 말미암아(요일 5:16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러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저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 기본적인 무죄성을 지켜나갈 수 있다.
그러나 주의할 것은 사망에 이르는 죄와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가 있다(요일 5:16,17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모든 불의가 죄로되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도다). 여기서 사망에 이르는 죄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여러 가지 견해들이 있으나 가장 타당한 것은 하나님께 완전한 반역을 자행하는 악한 사람들, 고의적인 죄악을 일삼고 습관적인 악행을 자행하는 자들인데, 이들을 위해서는 기도하지 말 것을 권면한다. 예레미야 선지자도 이와 비슷한 선언을 한 적이 있다. '그러므로 너는 이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지 말라 그들을 위하여 부르짖거나 구하지 말라'(렘11:14). 물론 이러한 선언이 어떤 예언자적인 공식은 아니지만 우리는 본장에서도 그와 유사한 선언을 보게 된다. 우리는 치명적인 죄악을 저지르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서는 기도해야만 하지만, 의식적이고 고의적인 방법으로 치명적인 죄악을 저지르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기도할 필요가 없다. 요한일서의 저자는 죄악에 빠져 방황하는 연약한 형제들과 하나님께 완전한 반역을 자행하는 악한 사람들을 분명하게 구분하고자 한다. 고의적인 죄악을 일삼고 습관적인 악행을 자행하는 자들의 편에 서서 죄 용서를 구하는 것은 무의미 한 일일 뿐임을 강력하게 선포한다.
(b) 요한일서에서 죄는 사랑(아가페)의 반대로 나타난다(요일 3:1-10). 죄로부터의 정화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일어났다는 것(요일 1:7)과 하나님께로서 난 자는 죄를 지을 수 없다고 해서(요일 3:8이하)어느 누구도 스스로 죄 없다거나 죄의 용서를 받을 필요가 없다고 여길 수 없다(요일 1:8). 사도 요한은 당시의 이단인 영지주의의 사상 체계로부터 기독교의 참된 지식을 수호하기 원했다. 그래서 참된 지식인 교제와 영생의 문제를 심각한 주제로 다룬 것이다. 그러므로 저작 목적은 당시의 거짓 교자들의 가 르침에 미혹되지 않고 기독교의 기본 진리를 고수케 하려는 것이었다고 할 수도 있다. 더욱 본질적인 저작 목적은 역시 이미 믿은 자들에게 참된 지식을 가르치려는 교육적인 목적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들의 신앙의 특징들, 특히 사랑을 행해야 할 필요성에 대해서 촉구를 받아야 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죄된 세상에서 우리를 구원하신다(계 1:5). 그의 피는 속죄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말세에 우리의 임무는 증대하는 죄의 권세로부터 우리 자신을 지키는 것이다(계 18:4-5). 하나님께서는 최종적이고 결정적인 행동으로 말미암아 우주적인 죄의 세력을 파괴하실 것이다.
4. 히브리서는 죄를 제의적인 입장에서 고찰한다. 즉, 그리스도를 자기 자신과 백성들을 위하여 매번 반복하여 제물을 드리는 인간 대제사장에 반하여 죄에 대하여 단 한번 제물을 드리는 참되고 흠 없는 대제사장으로 나타낸다. 그리스도의 제물은 용서를 가져오고 메시야 시대를 엶으로써 제사를 종결 시킨다(히 10:17-18). 신자들은 박해의 현시대에서 죄에 대항하고(히 12:1), 특히 배교라는 중한 죄를 짓지 않도록 해야 한다(히 10:26).
5. 야고보서는 죄의 기원을 욕망에서 찾으며, 죄를 의지와 관련시키고, 죄의 종국을 사망으로 본다(약 1:14-15). 죄는 하나의 행위로서(약 2:9), 선을 행치 않은 것도 죄에 포함된다. 고백과 기도는 용서를 가져온다(약 5:15-16). 다른 사람을 죄에서 구원하는 것이 기독교인의 임무이다(약 5:19-20).
6. 베드로전서는 그리스도를 그의 자발적인 순종과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속죄하는 죽음으로 말미암아 죄를 이기신 승리자로 선포한다(벧전 2:22, 벧전 2:24; 벧전 3:18). (참조: W. Grundmann; W. Gunther).